♠ 바위 / 유치환
바위
- 유치환 -
내 죽으면 한 개 바위가 되리라.
아예 애련(愛憐)에 물들지 않고
희로(喜怒)에 움직이지 않고
비와 바람에 깎이는 대로
억 년(億年) 비정(非情)의 함묵(緘默)에
안으로 안으로만 채찍질하여
드디어 생명도 망각하고 흐르는 구름
머언 원뢰(遠雷)
꿈꾸어도 노래하지 않고
두 쪽으로 깨뜨려져도
소리하지 않는 바위가 되리라.
-<삼천리>(1941)-
♤ 이해와 감상의 길잡이
이 작품에서 화자는 애련과 희로의 감정도 거부하고, 어떠한 시련과 고난도 극복하며,
비정의 함묵을 유지하면서 자신이 이상으로 설정한 바위가 되겠다는 의지를 보여주고 있다.
즉 일체의 감정과 외부의 변화에도 움직이지 않는 초탈의 경지를 추구하고 있다.
이와 같은 주제의식과 냉엄한 태도는 시인이 그의 시세계를 통해 한결같이 유지했던 허무의식의 표현이다.
사람의 삶 어디에서나 있게 마련인 뉘우침, 외로움, 두려움, 애정, 연민, 기쁨, 슬픔 등의
번민으로부터 벗어난 어떤 절대적인 경지를 추구하고 있으며,
그 해결의 길을 일체의 생명적인 것에 대한 허무주의적 자각에서 찾고 있는 것이다.
이것은 뒤집어 생각하면 시인 자신의 삶이 그만큼 유동적이고 가변적이며,
감정의 소용돌이를 간직하고 있기에 그러한 삶의 허무함을 의지나 신념으로
극복하기 위한 것이 아닐까 여겨지기도 한다.
비정한 단절 속에서 홀로 서려는 의지의 지향점은 완전 무화(無化), 즉 허무이다.
단순한 허무 의식이 아닌 허무함마저도 부정하는 극단의 허무인데,
불교에서 말하는 적멸(寂滅 : 미망의 세계를 영원히 떠난 허허로운 경지)과 비슷하다.
그러나 불교가 해탈의 경지라는 목적지를 향해 가는 것이라면,
청마의 목적은 목적지에 도달하려는 것이 아니고 목적지를 향해 가는 열렬하고도 비정한 도정에 있다.
그러기에 한국 시사의 우뚝 선 자리에 생명파의 시가 있고 그 주봉이 청마인 셈이다.
꿈꾸더라도 그 꿈마저 버리며, 고통 속에서도 신음하지 않는 극단의 비정함으로
꿋꿋이 나아가는 지향만이 있을 뿐이다.
여기에 단순한 허무를 뛰어넘은 인간 생명의 본질이 있으며, 그것이 인간의 조건이 되는 셈이다.
이 시는 연 구분 없이 12행으로 이루어진 형태를 취하고 있으나,
1행과 12행을 제외하면 나머지 행은 바위의 속성을 열거함으로써 자신이 지향하는 삶의 모습을 구체화하고 있다.
이 시는 이러한 수미상관적 구성을 통해 시적 효과를 더욱 높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