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5.樊酈藤灌列傳

​第 三十五. 樊酈藤灌列傳(번 역 등 관열전)

덕치/이두진 2023. 9. 12. 17:35

 

                          史記 列傳 

 

 

      ​第 三十五.  樊酈藤灌列傳(번 역 등 관열전) 

舞陽侯樊噲者,沛人也.  以屠狗為事,與高祖俱隱.  初從高祖起豐,攻下沛. 

高祖為沛公,以噲為舍人.  從攻胡陵、方與,還守豐,擊泗水監豐下,破之.

復東定沛,破泗水守薛西.

​[무양후 번쾌는 패현(沛縣) 사람으로 개를 잡아 고기를 파는 일로 생활하다가 고조가 죄를 짓고 

피해 다닐 때 함께 숨어 지냈다. 처음에 고조가 풍읍(豊邑)1)에서 기병하자,

종군하여 패현을 함락시켰다. 패공(沛公)이 되 고조는 번쾌를 사인(舍人)으로 삼았다.

호릉과 방여의 싸움에 참전했다가 돌아와 풍읍을 지키고 사수(泗水)의 감(監)을 풍의 성 밑에서

격파했다.  다시 동쪽으로 돌아가 패현을 안정시키고 사수(泗水) 군수(郡守)의 군대를 

설현(薛縣)의 서쪽에서 무찔렀다.]

 

與司馬夷戰碭東, 卻敵, 斬首十五級, 賜爵國大夫.

常從, 沛公擊章邯軍濮陽, 攻城先登, 斬首二十三級, 賜爵列大夫. 

復常從, 從攻城陽, 先登.  下戶牖,破李由軍, 斬首十六級, 賜上閒爵.

[진나라 장수 사마이(司馬夷)와 탕현(碭縣)의 동쪽에서 싸워 물리치고 15개의 수급을 베어 

그 공으로 국대부(國大夫)2)의 작위를 받았다. 번쾌는 언제나 고조를 측근에서 수행했다.  

패공이 장한의 진나라 군사를 복양(濮陽)에서 공격할 때 번쾌는 가장 먼저 성루에 올라

적군의 수급 23개를 베고 열대부(列大夫)3)의 작위를 받았다.  

다시 고조를 항상 따라다니다가 성양(城陽) 공성전에 참가하여 가장 먼저 성벽에 올랐다.

호유향(戶牖鄕)로 진격하여 삼천(三川) 군수 이유(李由)의 군사를 격파했다.

적군의 수급 16개를 베어 상간작(上間爵)을 하사 받았다.]

 

從攻圍東郡守尉於成武,卻敵,斬首十四級,捕虜十一人,賜爵五大夫.

從擊秦軍,出亳南.  河閒守軍於杠里,破之.

擊破趙賁軍開封北,以卻敵先登, 斬候一人,首六十八級,捕虜二十七人,賜爵卿.

[계속해서 동군의 태수와 도위가 지키는 성무(成武)를 포위한 후 공격하여 적군을 격파하고,

적의 수급 14개를 베고 포로 11명을 사로잡아 오대부에 올랐다. 

계속해서 패공을 따라 진군의 주둔지로 진격하여 박 땅 남쪽으로 나아가,

강리()에 주둔하고 있던 하간군 군수의 군대를 격파했다.

또한 개봉 북쪽에서 조분(趙賁)의 군사를 격파하고, 성벽에 가장 먼저 올라 척후병 한 명과

적군 68명의 머리를 베고, 27명의 포로를 잡아 경()의 작위를 하사받았다.]

 

從攻破楊熊軍於曲遇.  攻宛陵,先登,斬首八級,捕虜四十四人,賜爵封號賢成君.

從攻長社、轘轅,絕河津,東攻秦軍於尸,南攻秦軍於犨.  破南陽守齮於陽城.

東攻宛城,先登.  西至酈,以卻敵,斬首二十四級,捕虜四十人,賜重封.

[양웅(楊熊)의 군사를 곡우(穀雨)에서 격파했다. 완릉을 공격할 때는 가장 먼저 성벽에 올라

8개의 수급을 얻고 44명의 포로를 잡아 후에 봉해지고 현성군(賢成君)이라는 봉호를 받았다.  

장사(長社)와 환원(轘轅)을 공격하고 하수로 나아가는 나루터를 끊었으며,

동쪽으로 나아가 시향에서 진군을 공격하고, 남쪽으로 진공하여 주(犨)의 진군을 공략하였다.

남양(南陽) 태수 여의(呂齮)를 양성(陽城)에서 격파하였다. 동쪽으로 완성을 공격할 때는

가장 먼저 성벽에 올랐다.  서쪽의 역현(酈縣)으로 진공하여 적을 격파하고

24개의 수급을 베고 40명의 포로를 잡아 추가로 녹봉을 받았다.]

 

攻武關,至霸上,斬都尉一人,首十級,捕虜百四十六人,降卒二千九百人.

項羽在戲下,欲攻沛公.  沛公從百餘騎因項伯面見項羽,謝無有閉關事.

項羽既饗軍士, 中酒, 亞父謀欲殺沛公, 令項莊拔劍舞坐中, 欲擊沛公, 項伯常(肩)[屏]蔽之.

[무관을 공격하여 패상에 이르러 위(都尉) 1명을  참하고 수급 10개와 146명의 포로와 함께

병졸 2천 9백 명을 항복시켰다. 항우가 희하(戱河)에 주둔하면서 패공을 공격하려고 하자,

패공은 백여 명의 호위기병만을 데리고 항백의 주선으로 항우를 면담하고 함곡관의 문을

닫은 일에 대해 사죄했다. 항우가 군사들을 위해 잔치를 벌려 주흥이 무르익었을 때

패공을 살해하려는 아부(亞父) 범증(范曾)이 계획에 따라 항장에게 주흥을 돋우게 한다는

핑계로 검무를 추도록 한 후에 기회를 보아 패공을 찔러 죽이도록 명했다.

이에 항백이 자기의 몸으로 패공을 엄호했다.] 

 

時獨沛公與張良得入坐,樊噌在營外,聞事急,乃持鐵盾入到營. 

營衛止噲,噲直撞入,立帳下.

項羽目之,問為誰.  張良曰:「沛公參乘樊噲.」項羽曰:「壯士.」賜之卮酒彘肩.

噲既飲酒,拔劍切肉食,盡之.

[그때 패공의 곁에는 오로지 장량만이 장막 안으로 따라 들어가고 영채 밖에 머물고 있던

번쾌는 일이 급하게 되었음을 알고 쇠방패를 들고 영채로 달려갔다.

영채를 지키는 군사가 번쾌를 막아섰으나 위병을 제치고 들어가 장하에 섰다.

항우가 보고 번쾌를 보고 누구냐고 묻자,

장량이 대답하기를 : " 패공의 참승(驂乘) 번쾌입니다."라고 하였다. 
항우가 듣고 말하기를 : " 참으로 장사로다!"라고 하면서, 

번쾌에게 술동이와 돼지다리를 주도록 명했다.  

번쾌가 술을 단 번에 마시고 칼을 뽑아 돼지다리 고기를 잘라 모두 먹었다.]  

 

項羽曰:「能復飲乎?」

噲曰:「臣死且不辭,豈特卮酒乎!且沛公先入定咸陽,暴師霸上,以待大王. 

大王今日至,聽小人之言,與沛公有隙,臣恐天下解,心疑大王也.」項羽默然.

[항우가 묻기를 : " 술을 더 마실 수 있는가? "라고 하자. 
번쾌가 대답하기를 :  " 신이 죽음도 마다하지 않는데 어찌 한 동이의 술인들 더 마시지

못하겠습니까?  더욱이 패공께서 먼저 함양에 진입하여 평정한 후에 군사들을 패상에

노숙시키며 대왕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지금 당도하신 대왕께서는

소인들의 참언을 믿으시고 패공을 적대하고 계시니 천하가 흩어지고

대왕을 의심하지나 않을까 두렵습니다."라고 하였으나, 항우는 묵묵부답이었다.]

 

沛公如廁,麾樊噲去.  既出,沛公留車騎,獨騎一馬,與樊噲等四人步從,

從閒道山下歸走霸上軍,而使張良謝項羽.  項羽亦因遂已,無誅沛公之心矣.

是日微樊噲奔入營譙讓項羽,沛公事幾殆.

明日, 項羽入屠咸陽, 立沛公為漢王.  漢王賜噲爵為列侯, 號臨武侯.  遷為郎中, 從入漢中.

[그 틈을 이용하여 패공이 변소에 간다고 하면서 번쾌를 밖으로 불렀다.

패공은 거마와 기병들을 그대로 항우의 영채 안에 두고 자신은 말 한 마리를 내어 올라 타고 

번쾌 등의 네 사람은 도보로 뒤따르게 하고 산속으로 난 지름길로 패상의 군영으로 돌아온 뒤

장량을 시켜 항우에게 사과하게 했다.

항우 역시 마음이 흡족해 패공을 죽이려는 마음을 먹지 않았다.

이날 번쾌가 병영에 달려들어 항우를 나무라지 않았다면, 패공의 과업은 거의 끝났을 것이다. 
다음 날 항우는 함양에 입성하여 모조리 파괴하여 폐허로 만들고 패공을 한왕으로 봉했다. 
 

한왕은 번쾌를 열후에 봉하고 호를 임무후(臨武侯)라고 했다.

후에 랑중(郞中)으로 자리를 옮긴 번쾌는 한왕을 따라 한중으로 들어갔다.] 

 

還定三秦,別擊西丞白水北,雍輕車騎於雍南,破之.  從攻雍、斄城,先登. 

擊章平軍好畤,攻城,先登陷陣,斬縣令丞各一人,首十一級,虜二十人,遷郎中騎將.
從擊秦車騎壤東,卻敵,遷為將軍.

[한중에서 나온 한왕이 삼진(三秦)을 평정할 때, 번쾌는 별도의 군사를 이끌고 서쪽으로 진격하여

서현(西縣)의 현승(縣丞)이 이끄는 군사를 백수(白水)의 북쪽에서 공격했다.  

옹현(雍縣)의 남쪽에서 옹왕(雍王) 장한(章邯)의 경기병과 경전차 부대를 격파했다.

옹현과 태성(斄城)으로 진격하는 한왕의 본대와 합류한 번쾌는 싸움의 선두에 서서 가장 먼저

적의 성루에 올랐다. 계속해서 옹현과 태성 두 성을 공격할 때도 종군하여

호치(好畤)에 주둔하고 있던 장평(章平)의 군사를 공격하여 가장 먼저 성루에 올라

현령과 현승 2명을 참하고 적군의 수급 11개와 포로 20명을 얻어 낭중기장으로 승진했다. 

번쾌는 한왕을 따라 진나라의 전차부대와 기마부대를 양향(壤鄕)의 동쪽에서 격파하고

장군으로 승진했다.]

 

攻趙賁,下郿、槐裏、柳中、咸陽;灌廢丘,最.  至櫟陽,賜食邑杜之樊鄉. 

從攻項籍,屠煮棗.  擊破王武、程處軍於外黃.  攻鄒、魯、瑕丘、薛.

項羽敗漢王於彭城,盡復取魯、梁地.

[다시 조나라의 조분(趙賁)), 하미(下郿), 괴리(槐里), 유중(柳中), 함양(咸陽)을 공격하였다.  

황하의 물을 끌어들여 폐구(廢丘)를 물에 잠기게 했다. 계속된 일련의 전투에서 번쾌의 공이

가장 높았다.  이윽고 한군이 삼진을 평정하고 역양(櫟陽)에 이르자,

한왕은 두릉(杜陵)의 번향(樊鄕)을 번쾌에게 식읍으로 주었다.

항우와의 싸움에 종군하여 자조를 파괴하고 외황에서 왕무와 정처의 군사들을 격파했다.

계속 진군하여 추(鄒), 노(魯), 하구(瑕丘), 설(薛) 등의 성을 공략했다.

항우는 팽성(彭城)에서 한왕을 무찌르고 번쾌가 점령했던 노(魯)와 양(梁) 땅의 성읍들을

모두 수복해 갔다.]

 

噲還至滎陽,益食平陰二千戶,以將軍守廣武.  一歲,項羽引而東.

從高祖擊項籍,下陽夏,虜楚周將軍卒四千人. 

圍項籍於陳,大破之.  屠胡陵.  項籍既死,漢王為帝,以噲堅守戰有功,益食八百戶.

[팽성의 싸움에서 패하고 다시 형양(滎陽)으로 후퇴한 한왕은 번쾌에게 평음(平陰)의 2천 호를

식읍에 더해주고  장군으로 삼아 광무(廣武)를 지키게 했다.

그리고 1년 후에 항우는 홍구를 경계로 한왕과 협정을 맺고 동쪽의 팽성으로 돌아가려고 했다.

한왕이 팽성으로 돌아가는 항우의 뒤를 추격할 때 번쾌는 양하를 함락 하고,

초나라의 장수 주장군(周將軍)과 그 군사 4천 명을 포로로 잡았다.

항우를 진현(陳縣)에서 포위하여 크게 무찌르고 호릉()에서 항우를 죽였다. 

항우가 이미 죽고 한왕이 황제의 자리에 오르자 용맹하게 싸워 공을 세웠음으로

식읍 8백 호를 더해 주었다.]

 

從高帝攻反燕王臧荼,虜荼,定燕地.  楚王韓信反,噲從至陳,取信,定楚.

更賜爵列侯,與諸侯剖符,世世勿絕,食舞陽,號為舞陽侯,除前所食.

以將軍從高祖攻反韓王信於代.  自霍人以往至雲中,與絳侯等共定之,益食千五百戶.

[연왕 장도(臧荼)가 반란을 일으켰을 때 고조를 따라 종군한 번쾌는 장도를 사로잡고

연나라 땅을 평정했다.  초왕 한신(韓信)이 반란을 획책했을 때 번쾌가 따라가

진(陳)에 이르러 한신을 사로잡고 초나라를 평정했다.  황제는 다시 번쾌를

열후의 반열에 세우고 제후들에게 내리는 부절을 주어 대대손손 끊이지 않도록 했다.  

무양현(舞陽縣)을 봉읍으로 주어 봉호를 무양후라고 부르게 하고 그 전의 식읍은 모두 폐했다.

장군의 신분으로 고조를 따라 종군하여 대(代) 땅에서 반란을 일으킨 한왕 신(信)을 공격했다.

강후 주발등과 함께 번쾌는 곽인(霍人)에서 운중에 이르는 땅을 평정하여 

그 공으로 1천 5백호의 식읍을 받았다.]

 

因擊陳豨與曼丘臣軍, 戰襄國, 破柏人, 先登,降定清河、常山凡二十七縣,

殘東垣,遷為左丞相.  破得綦毋卹、尹潘軍於無終、廣昌. 

破豨別將胡人王黃軍於代南,因擊韓信軍於參合.

[진희와 만구신의 군사를 공격하여 양국현(襄國縣)에서 싸우고 백인현(柏人縣)에서 격파할 때

번쾌는 성벽에 가장 먼저 올랐다. 이어서 청하에서 상산에 이르는 모두 27개 현으로부터

항복받아 평정했다.  끝까지 항거한 동원(東垣)을 파괴한 공으로 번쾌는 좌승상으로 올랐다.  

무종(無終)과 광창(廣昌)에서 기무앙(綦毋卬)과 윤반(尹潘)의 군사를 격파하였다.

계속 대땅의 남쪽에서 진희의 별장으로 호인(胡人) 출신 왕황(王黃)의 군사를 격파하고

삼합(參合)에서 한왕 한신의 군대를 공격했다.]

 

軍所將卒斬韓信, 破豨胡騎橫谷, 斬將軍趙既, 虜代丞相馮梁、守孫奮、大將王黃、將軍,

太仆解福等十人.  與諸將共定代鄉邑七十三.  其後燕王盧綰反,噲以相國擊盧綰,

破其丞相抵薊南, 定燕地, 凡縣十八, 鄉邑五十一.  益食邑千三百戶, 定食舞陽五千四百戶.

從,斬首百七十六級,虜二百八十八人.  別,破軍七,下城五,定郡六, 

縣五十二, 得丞相一人, 將軍十二人, 二千石已下至三百石十一人.

[번쾌의 부하 장수가 한왕 신을 참하고 진희의 호인 기병을 횡곡에서 무찌르고

대(代)의 장군 조기의 목을 베었다.

계속해서 승상 풍량(馮梁), 수장 손분(孫奮), 대장 왕황(王黃) 등의 장군들과 태복 해복(解福) 등  

10여 명을 포로로 잡았다. 여러 장군들과 함께 대(代) 땅의 73개 향을 평정했다.

그리고 얼마 후에 연왕 노관이 반란을 일으키자 그의 승상 저(抵)를 계남에서 격파하고

연나라의 18개 현 51개 향을 평정했다.  

조정은 그 공으로 식읍 1천 3백 호를 더허여 무양(舞陽)의 식읍을 모두 5천 4백호로 정했다.
그는 살아 생전에 싸움터를 누비면서 적군 176명을 참수하고, 288명을 포로로 잡았다. 
 

이와는 별도로 적군을 7번 격파하고 다섯 개의 성을 함락시켰으며, 6개의 군과 52개의 현을

평정하고, 반군의 승상 1명, 장군 12명, 2천 석 이하에서 3백 석 이상의 관리 11명을 체포하였다.]

 

噲以呂后女弟呂須為婦, 生子伉, 故其比諸將最親.

先黥布反時,高祖嘗病甚,惡見人,臥禁中,詔戶者無得入群臣.  群臣絳、灌等莫敢入.

十餘日,噲乃排闥直入,大臣隨之.  上獨枕一宦者臥.

[번쾌는 여후의 여동생 여수(呂嬃)를 부인으로 삼아 그녀와의 사이에 아들 항(伉)을 낳았다.  

그래서 번쾌는 다른 장수들에 비해 여후(呂后)와의 사이가 가장 친밀했다.  

경포가 반란을 일으켰을 때 고조는 병이 매우 심해 사람을 접견하는 것을 매우 싫어하여

하루 종일 침상에 누워 있으면서 시위(侍衛)에게 어떤 신하도 들이지 말라고 명령을 내렸다.

신하들 중 강후 주발이나 관영 등 어떤 신하들도 감히 들어가 접견을 하지 못했다.

그리고 10여 후에 번쾌가 궁문을 밀치고 궁안으로 뛰어 들어가자, 대신들이 그 뒤를 따랐다.

그때 황제는 환관 한 명의 시중을 받으며 침상에 누워 있었다.]

 

噲等見上流涕曰:「始陛下與臣等起豐沛,定天下,何其壯也!今天下已定,又何憊也!

且陛下病甚,大臣震恐,不見臣等計事,顧獨與一宦者絕乎?

且陛下獨不見趙高之事乎?」 高帝笑而起. 

[번쾌 등의 중신들이 일제히 침상 앞으로 가서 황제를 알현하고 눈물을 흘리며 말하기를 :
" 처음에 폐하께서 저희들을 이끌고 패현()의 풍읍()에서 기병하여 천하를 평정할 때는

그렇게도 강건하시더니, 천하를 이미 평정한 지금은 어찌하여 그렇게 피곤해 하십니까?

더욱이 폐하께서 병을 앓으시니 우리 신하들은 가슴이 떨려 두려운 마음뿐입니다.

또한 우리들을 하찮은 신하들이라고 여기신 폐하께서는 접견을 허락하여 국사를 의논하지

않으시고, 단지 환관 한 사람만을 곁에 두어 우리들과의 관계를 단절하고 계십니다.  

어찌하여 옛날 조고(趙高)의 일을 생각하지 않으십니까? "라고 하자, 

황제가 웃으면서 침상에서 몸을 일으켰다.] 

 

其後盧綰反,高帝使噲以相國擊燕.  是時高帝病甚,人有惡噲黨於呂氏,

即上一日宮車晏駕,則噲欲以兵盡誅滅戚氏、趙王如意之屬.  

高帝聞之大怒,乃使陳平載絳侯代將,而即軍中斬噲.

陳平畏呂后,執噲詣長安.  至則高祖已崩,呂后釋噲,使復爵邑.

​[그후 다시 연왕 노관이 반란을 일으키자 고제는 번쾌를 상국(相國)의 신분으로 대신 보내

연왕을 정벌하도록 했다.  그때 고제는 병이 매우 깊었다.

어떤 사람이 번쾌가 여씨()와 작당한다고 비방했다.  

여씨들과 결당한 번쾌는 황제가 죽으면 휘하의 군사를 동원하여

척(戚)부인과 조왕 여의(如意) 및 주변 인물들을 모조리 주살할 계획이라고 하였다.

고제가 믿고 대노하여 진평에게 명하여 강후 주발과 함께 번쾌의 군영으로 가서

강후로 하여금 그의 대장 직을 대신하도록 하고 군중에서 번쾌의 목을 베라고 했다.

여후의 보복을 두려워한 진평이 번쾌를 죽이지 않고 장안으로 압송하여 황제가 직접

처결하도록 처리했다. 번쾌를 함거에 태워 압송한 진평의 일행이 장안에 당도했을 때는

고제가 이미 죽고 난 이후였다. 여후는 번쾌를 석방하고 그의 작위와 식읍을 돌려주게 했다.]

 

孝惠六年, 樊噲卒, 謚為武侯. 子伉代侯. 而伉母呂須亦為臨光侯, 高后時用事專權,

大臣盡畏之. 伉代侯九歲,高后崩.  大臣誅諸呂、呂須婘屬,因誅伉.  舞陽侯中絕數月.

孝文帝既立,乃復封噲他庶子市人為舞陽侯,復故爵邑.  市人立二十九歲卒,謚為荒侯.

[혜제(惠帝) 6년 기원전 189년, 번쾌가 죽자, 시호를 무후(武侯)라 했다.

아들 번항(樊伉)이 그의 작위와 식읍을  물려받았고, 번항의 모친 여수(呂嬃) 역시

임광후(臨光侯)가 되었다. 고후 집권 시 임광후가 권력을 행사하여 대신들이 모두 두려워했다.

번항이 번쾌의 작위를 이어 받은지 9년 되는 해에 고후가 죽었다.  대신들이 여씨 자제들과

여수의 가솔들을 주살하고 행패가 심했던 여수로 인해 번항도 같이 살해되었다.

무양후의 후계는 이로써 몇 개월 동안 끊어졌다.

문제가 즉위하자 다시 번쾌의 서자 불인(巿人)을 무양후에 봉하고 예전의 식읍을 돌려주었다.

불인은 29세의 나이에 죽었다. 시호는 황후(荒侯)다.]

 

子他廣代侯.  六歲,侯家舍人得罪他廣,怨之, 

乃上書曰:「荒侯市人病不能為人,令其夫人與其弟亂而生他廣,他廣實非荒侯子,

不當代後.」  詔下吏.  孝景中六年,他廣奪侯為庶人,國除.

[불인의 아들 번타광(樊他廣)이 뒤를 이었다. 타광이 작위를 이은 지 6년 뒤 집안의 사인이

죄를 짓고 쫓겨나자 원한을 품고 곧바로 상서를 올리기를 : " 황후 불인은 병이 들어

사람 노릇을 하지 못하고, 그의 부인과 동생이 사통하여 타광을 낳았습니다. 

타광은 황후의 아들이 아니므로 후작의 지위를 이을 수 없습니다."라고 하자.  

황제가 조칙을 내려 관리에게 조사하라고 명했다.

효경제 6년 기원전 151년, 타광은 후의 작위를 박탈당하고 서인이 되어 그의 봉국은 해제되었다.]

 

曲周侯酈商者,高陽人.  陳勝起時,商聚少年東西略人,得數千. 

沛公略地至陳留,六月餘,商以將卒四千人屬沛公於岐.  從攻長社,先登,賜爵封信成君.

[곡주후(曲周侯) 역상(酈商)은 고양(高陽) 출신이다.

진승이 기병했을 때 역상은 소년들을 모아 동서로 보내 사람들을 불러 수천 명의 무리를 얻었다.

패공이 진나라 성읍을 공략하여 진류현(陳留縣)에 들어와 6개 월이 지났을 때 

역상은 휘하의 장졸 4천 명을 이끌고 기(岐)땅에서 패공에게 귀의했다.

고조를 따라 장사(長社)를 공략할 때 가장 먼저 성벽에 올라 신성군이라는 작위를 하사받았다.]

 

從沛公攻緱氏,絕河津,破秦軍洛陽東.  從攻下宛、穰,定十七縣.  別將攻旬關,定漢中.

項羽滅秦,立沛公為漢王.  漢王賜商爵信成君,以將軍為隴西都尉.  別將定北地、上郡.

破雍將軍焉氏,周類軍栒邑,蘇駔軍於泥陽.  賜食邑武成六千戶.

[다시 패공을 따라 구지현(緱氏縣)을 공격하고 황하의 나루터를 봉쇄했으며 진군을 낙양의

동쪽에서 격파했다. 다시 완(宛)과 양(穰) 지방을 공략하여 17개 현을 평정했다. 

별동 부대의 장수가 되어 순관(旬關)을 공격하여 한중(漢中)을 평정했다. 

항우가 진나라를 멸하고 패공을 한왕에 봉하자 한왕은 역상을 다시 신성군에 봉하고

장군의 대열에서 농서(隴西) 도위로 삼았다. 별동부대를 이끌고 북지와 상군을 평정했다.

옹왕 장한의 부장이 이끄는 군사를 언지(焉氏)에서 격파하고 주류(周類)의 군사들은

순읍현에서 무찔렀으며 이양현에서는 소저의 군사들을 패주시켰다. 

한왕은 공으로 역상에게 무양현의 6천 호를 식읍으로 하사했다.]  

 

以隴西都尉從擊項籍軍五月,出鉅野,與鐘離眛戰,疾鬬,受梁相國印,益食邑四千戶.

以梁相國將從擊項羽二歲三月,攻胡陵.  項羽既已死,漢王為帝.

[농서도위의 신분으로 항우를 공격하는 부대에 5개월을 종군하다가 거야(鉅野)로 나가 

종리매와 싸워 이기자, 그 공으로 양나라 상국의 인장을 받고 4천 호의 식읍을 더 받았다.

양나라 상국의 신분으로 항우의 군대와 싸움에서 2년 3개월 동안 종군하다가 호릉을 공략했다.
항우가 이미 죽자 한왕은 황제가 되었다.]

 

其秋,燕王臧荼反,商以將軍從擊荼,戰龍脫,先登陷陣,破荼軍易下,卻敵,

遷為右丞相,賜爵列侯,與諸侯剖符,世世勿絕,食邑涿五千戶,號曰涿侯.

以右丞相別定上谷,因攻代,受趙相國印.  以右丞相趙相國別與絳侯等定代、鴈門,

得代丞相程縱、守相郭同、將軍已下至六百石十九人.

​[그해 가을, 연왕 장도(臧荼)가 반란을 일으키자 역상이 장군으로 장도 토벌전에 종군하여

용탈(龍脫)에서 싸워 가장 먼저 성벽에 올라 연군의 진영을 함락시키고 계속해서

장도의 군사를 역성 밑에서 격파했다.

연군을 물리친 공로로 우승상에 제수하고 열후의 작위를 내리고 제후의 부절을 주어 

세세손손이 끊이지 않도록 하고 탁현(涿縣)의 5천 호를 식읍으로 주어 탁후라는 봉호를 내렸다.

우승상의 신분으로 별동부대를 이끌고 상곡을 평정하고 대(代) 땅을 공략했음으로

조나라 상국의 인을 받았다.  우승상과 조나라 상국의 신분으로 별동부대를 이끌고

강후 주발과 함께 대(代), 안문(雁門) 등을 공략하여 대의 승상 정종(程縱)과

수상(守相) 곽동(郭同)과 장군 이하 6백 석의 관리들을 19명을 사로잡았다.]

 

還,以將軍為太上皇衛一歲七月.  以右丞相擊陳豨,殘東垣.  又以右丞相從高帝擊黥布,

攻其前拒,陷兩陳,得以破布軍,更食曲周五千一百戶,除前所食, 凡別破軍三,

降定郡六, 縣七十三, 得丞相、守相、大將各一人, 小將二人, 二千石已下至六百石十九人.

商事孝惠、高后時,商病,不治.  其子寄,字況,與呂祿善.

[역상은 귀국해 장군으로서 태상황()을 1년 7개월 동안 호위했다.

역상은 우승상의 신분으로 진희를 공격하여 동원현(東垣縣)을 함락시키고 도륙하였다. 

다시 우승상의 신분으로 고제를 따라 경포  토벌전에 앞장서서 경포의 선봉부대와 교전하여

두 진영을 함락시키고 경포군을 격파했다.  

이로써 곡주현(曲周縣)의 5천 1백 호를 식읍으로 받았다. 예전의 식읍은 폐해졌다.

역상은 평생 싸움터를 전전하면서 모두 3개의 군단을 격파하고, 6개 군과 73개 현의 항복을 받아

평정했으며, 승상, 수상(守相), 대장 각 1명 씩, 소장 2명, 2천석 이사 6백 석 이상의

관리 19명의 목을 얻거나 포로로 잡았다.  

역상이 효혜제와 고후를 받들다가 병이 나서 일을 할 수가 없었다.

그의 아들 역기(酈寄)는 자는 황(況)인데 여록(呂祿)과 친분이 깊었다.]

 

及高后崩, 大臣欲誅諸呂, 呂祿為將軍, 軍於北軍, 太尉勃不得入北軍, 於是乃使人劫酈商,

令其子況紿呂祿,呂祿信之,故與出游,而太尉勃乃得入據北軍,遂誅諸呂.

是歲商卒,謚為景侯.  子寄代侯.  天下稱酈況賣交也.

[마침내 고후가 죽자, 대신들이 여씨 일족을 주살하려고 하였으나 여록이 장군이 되어

북군에 주둔하여 군권을 갖고 있었기 때문에 태위 주발이 북군의 군영 안으로 들어갈 수 없었다.

그래서 사람을 시켜 역상을 겁박하여 그의 아들 역기로 하여금 여록을 속이도록 시켰다.

여록이 역기의 말을 믿고 군영 밖으로 나왔음으로 그 사이에 태위 주발이 북군의 군영으로

재빨리 들어가 군권을 장악하여 여씨 일족을 모두 주살할 수 있었다. 그 해에 역상이 죽었다. 

역상의 시호는 경후다.  역기가 역상의 작위를 물러 받았다.

세상 사람들은 역기가 친구를 팔아 배신했다고 평했다.]  

 

孝景前三年,吳、楚、齊、趙反,上以寄為將軍,圍趙城,十月不能下. 

得俞侯欒布自平齊來,乃下趙城,滅趙,王自殺,除國.

​[효경제 3년(기원전 154년), 오(吳), 초(楚), 제(齊), 조(趙) 등이 반란을 일으키자,

황제는 역기를 장군으로 삼아 조성을 포위하도록 했으나 10개월을 공격해도 함락시키지 못했다.

제나라를 평정하고 돌아온 유후(兪侯) 난포(欒布)의 지원을 얻은 후에 비로소 조나라 도성을

함락시키고 조나라를 멸했다. 조왕은 스스로 목숨을 끊어 봉국이 해제되었다.]

 

孝景中二年,寄欲取平原君為夫人,景帝怒,下寄吏,有罪,奪侯.

景帝乃以商他子堅封為繆侯, 續酈氏後.  繆靖侯卒, 子康侯遂成立. 

遂成卒,子懷侯世宗立.

世宗卒,子侯終根立,為太常,坐法,國除.

[효경제 중원(中元) 2년(기원전 148년), 역기가 평원군(경제의 장모)을 부인으로 삼으려고 했다.  

경제가 노하여 역기를 관리에게 넘겨 죄를 논하도록 했다4).

관리들은 역기에게 죄가 있다고 판결하여 역상의 작위를 폐했다.

경제가 그 즉시 역상의 다른 아들 견(堅)을 무후에 봉해 역씨들의 제사를 받들도록 했다.

역견이 죽자, 아들 강후 수성(遂成)이 뒤를 이었다. 역견의 시호는 정후(靖侯)다.

수성이 죽자, 그의 아들 회후(懷侯) 세종(世宗)이 뒤를 잇고 세종이 죽자,

아들 종근(終根)이 작위를 이어 태상이 되었으나, 후에 종근은 법을 어겨 봉국이 해제되었다.]

 

 

汝陰侯夏侯嬰, 沛人也.  為沛廄司御.  每送使客還, 過沛泗上亭, 與高祖語, 未嘗不移日也. 

嬰已而試補縣吏,與高祖相愛.  高祖戲而傷嬰,人有告高祖. 

[여음후(汝陰侯) 하후영은 패현(沛縣) 출신으로 마방(馬房)의 일을 맡아하는 관리로 있었다.  

매일 사자를 보내고 손님을 맞이하는 일을 하면서 패현의 사상정(泗上亭)을 지나다니면서

고조와 한담을 나누기 시작했다하면 해가 저물지 않은 날이 없었다.

후에 하후영은 패현의 관리가 되기 위한 시보가 되었음으로 고조와는 서로 친한 친구가 되었다.
어느 날, 고조와 장난을 치다가 하후영이 상처를 입게 되어 어떤 사람이 고조를 고발했다.]  

 

高祖時為亭長,重坐傷人,告故不傷嬰,嬰證之.  後獄覆,嬰坐高祖系歲餘,掠笞數百,

終以是脫高祖.  高祖之初與徒屬欲攻沛也,嬰時以縣令史為高祖使.

上降沛一日,高祖為沛公,賜嬰爵七大夫,以為太仆.

[고조는 당시 정장(亭長)의 신분이었음으로 관리를 때려 부상을 입히게 되면 중죄에 저촉되었다.

래서 하후영은 고조에게 맞아 입은 부상이 아니라고 증언했다. 후에 다시 사건이 번복되어

하우영은 유방의 죄에 연루되어 1년여 동안 수감되었고, 

수백 대의 태형을 맞았으나 끝끝내 고조를 연루시키지 않았다.
고조가 처음에 무리들과 패현을 공격할 때 현령의 영사 신분이었던 하우영은 

고조에게로 달려가 전령이 되었다.  패현의 항복을 받아 그날 부로 패공이 된 고조는 

하후영을 칠대부의 작위를 내리고 태복(太僕)에 임명했다.]

 

從攻胡陵,嬰與蕭何降泗水監平,平以胡陵降,賜嬰爵五大夫.

從擊秦軍碭東,攻濟陽,下戶牖,破李由軍雍丘下,以兵車趣攻戰疾,賜爵執帛.

常以太仆奉車從擊章邯軍東阿、濮陽下,以兵車趣攻戰疾,破之,賜爵執珪.

[고조를 따라가 호릉 공략에 참가하여 소하(蕭何)와 함께 사수군(泗水郡) 군감(郡監) 평(平)에게

항복을 권유했다.  평이 호릉을 들어 항복했음으로 하후영은 오대부의 작위를 받았다.  

다시 종군하여 탕(碭)의 동쪽에 주둔하고 있던 진나라 군사를 공격하는 싸움에서

제양을 공략하고  호유(戶牖)를 함락시켰으며 삼천 군수 이유(李由)의 군사를 옹구(雍丘)에서

격파할 때하우영은 병거를 몰고 선두에서 서서 분전했음으로 집백(執帛)의 작위를 받았다.

항상 태복의 신분으로 패공의 수레를 몰았고 패공이 동아와 복양 일대에서 장한을 공격할 때

병거를 질풍처럼 휘몰아 맹공을 가하여 격파했음으로 고조는 그에게 집규의 작위를 내렸다.]

 

復常奉車從擊趙賁軍開封,楊熊軍曲遇.  嬰從捕虜六十八人,降卒八百五十人,得印一匱.

因復常奉車從擊秦軍雒陽東,以兵車趣攻戰疾,賜爵封轉為滕公.
因復奉車從攻南陽,戰於藍田、芷陽,以兵車趣攻戰疾,至霸上. 

項羽至,滅秦,立沛公為漢王.

[다시 고조의 수레를 몰아 개봉에 주둔하고 있던 조분과 곡우의 양웅의 군대를 공격하였다.

하후영은 포로 68명과 항복한 군사 850명을 얻고 한 상자에 이르는 인장(印章)을 획득했다.

다시 패공의 수레를 몰아 낙양의 동쪽에 주군하고 있던 진나라 군사들을 병거를 질풍처럼 몰아

공격하여 세운 공으로 작봉을 받아 등공(滕公)에 봉해졌다.

다시 패공의 수레를 몰아 남양을 공격하고, 계속해서 남전현과 지양현(芷陽縣)에서 싸울 때

병거를 번개같이 몰아 패상(覇上)에 이르렀다.

뒤늦게 관중으로 들어은 항우가 진나라를 멸하고 패공을 한왕에 봉했다.]

 

漢王賜嬰爵列侯, 號昭平侯, 復為太仆, 從入蜀、漢.  還定三秦, 從擊項籍.

至彭城,項羽大破漢軍.  漢王敗,不利,馳去. 見孝惠、魯元,載之.

漢王急,馬罷,虜在後,常蹶兩兒欲棄之,嬰常收,竟載之,徐行面雍樹乃馳.

​[한왕은 하우영에게 열후의 작위를 하사하여 소평후(昭平侯)라는 봉호를 내렸다.  

다시 태복이 되어 한왕을 따라 촉과 한중으로 들어갔다.  

한중에서 돌아와 삼진을 평정하고 항우를 칠 때 종군하여 팽성에 이르자 반격에 나선 항우는

한군을 대파했다. 싸움에 패한 한왕은 형세가 불리하여 병거를 타고 전속력을 다해 달아나다가 

효혜제와 노원공주가 길거리에 버려져 있는 것을 본 한왕이 두 아이를 자기의 수레에 태웠다.  

사태가 매우 위급하게 되고 더욱이 피로에 지친 상태에서 추격군에 의해 포로가 되는 것을

두려워한 한왕은  두 아이를 몇 번이나 발로 차서 수레 밖으로 떨어뜨려 버리려고 했다.

그때 한왕이 탄 수레를 몰고 있던 하후영은 그때마다 수래 아래에서 이들을 받아 겨우 싣고,

느릿느릿 달리다가 두 아이가 자기 목에 매달려 놀란 마음을 진정시키고 나서야

비로소 수레를 전속력으로 몰았다.]

 

漢王怒,行欲斬嬰者十餘,卒得脫,而致孝惠、魯元於豐.  

漢王既至滎陽, 收散兵, 復振,賜嬰食祈陽. 

復常奉車從擊項籍,追至陳,卒定楚,至魯,益食茲氏.  漢王立為帝.

其秋,燕王臧荼反,嬰以太仆從擊荼.

[한왕이 대노하여 10여 차례나 하후영을 찔러 죽이려고 했으나 결국은 위험한 상태에서

탈출하여 호혜제와 노원공주를 안전하게 풍읍(豊邑)으로 데려올 수 있었다.
한왕이 이윽고 형양에 당도하자 패잔병을 수습하여 사기를 다시 진작시킨 후에 하후영에게

기양(祁陽)5)을 식읍으로 주었다. 하후영은 다시 한왕이 타는 수레의 어자가 되어

항우위 뒤를 추격하여 진현(陳縣)에 이르러 초나라를  정하고 계속해서 노(魯)나라까지

진격했음으로 그 공으로 자씨(玆氏)의 땅을 받아 식읍에 더했다.
한왕이 이윽고 항우를 멸하고 황제가 되었다.

그해 가을 연왕 장도(臧荼)가 반란을 일으키자,

하후영은 태복(太僕)의 직위로 고조를 따라 장도를 공격하였다.]

 

明年,從至陳,取楚王信.  更食汝陰,剖符世世勿絕.  

以太仆從擊代,至武泉、雲中,益食千戶. 因從擊韓信軍胡騎晉陽旁,大破之. 

追北至平城,為胡所圍,七日不得通.  高帝使使厚遺閼氏,冒頓開圍一角. 

高帝出欲馳,嬰固徐行,弩皆持滿外向,卒得脫.  益食嬰細陽千戶.

​[다음 해, 하후영은 황제를 따라 진(陳)으로 나아가 초왕 한신(韓信)을 포로로 잡았다.  

다시 여음현(汝陰縣)을 식읍으로 받아 그 부절을 대대손손 끊이지 않고 잇도록 했다.

다시 태복의 신분으로 대(代) 땅의 반란을 진압하기 위해 토벌군을 이끌고 진격하여

무천(武泉), 운중(雲中)에 이르러 천 호의 땅을 받아 그의 식읍에 더했다.

한왕 신(信)이 반란을 일으키자 종군하여 진양부군에 주둔하고 있던 흉노의 기병군단을 크게

무찔렀다.  흉노의 기병을 추격하여 평성(平城)에 이르렀으나

오히려 흉노에게 포위 당해 7일 동안 외부와 통하지 못했다.

고조가 연지(閼氏)에게 후한 재물을 보내 모돈(冒頓)으로 하여금 포위망의 일각을 풀게 했다.  

고조는 빨리 달려 포위망을 벗어나고자 했으나 하후영은 오히려 고집스럽게 천천히 달리면서

군사들에게 쇠뇌에 화살을 힘껏 장전하여 외부로 향하게 하여 결국은 포위망을 벗어날 수

있었다. 그 공으로 하후영은 다시 세양현(細陽縣)의 천 호를 받아 식읍에 더했다.]

 

復以太仆從擊胡騎句注北,大破之.  

以太仆擊胡騎平城南,三陷陳,功為多,賜所奪邑五百戶.

以太仆擊陳豨、黥布軍,陷陳卻敵,益食千戶,定食汝陰六千九百戶,除前所食. 

嬰自上初起沛,常為太仆,竟高祖崩.  以太仆事孝惠.

孝惠帝及高后德嬰之脫孝惠、魯元於下邑之閒也,乃賜嬰縣北第第一,曰「近我」,

以尊異之.  孝惠帝崩,以太仆事高后.

​[다시 태복의 자격으로 출전하여 흉노의 기병을 구주산 북쪽에서 공격하여 크게 무찔렀다.  

태복이 계속해서 평성의 남쪽을 공격하여 세 번이나 적의 진영을 유린하여 그 공적이 매우 컸다.  

그래서 그가 빼앗은 땅 중에서 5백 호를 주어 식읍에 더하게 했다.

태복의 신분으로 진희와 경포의 군대를 공격해 진지를 함락시키고 적을 물리쳐 1천 호의 식읍을

더 받았으며 마침내 여음현의 6천 9백 호를 식읍으로 확정하고 이전의 식읍은 반납했다. 

하후영은 처음에 패현에서 기병할 때부터 고조가 죽을 때까지 항상 태복의 신분이었다.

다시 효혜제와 여후는 하후영으로 인해 호혜와 노원공주가 하읍(下邑) 지간에서 처한 위험에서

탈출할 수 있었다고 해서 하후영에게 도성의 북쪽에서 가장 좋은 저택을 하사하면서

“ 서로 친근하게 지냅시다. ”라고 말해 전례없는 존경심을 표했다. 

효혜제가 죽자 하후영은 여전히 태복의 신분으로 고후를 모셨다.]

 

高后崩,代王之來,嬰以太仆與東牟侯入清宮,廢少帝,以天子法駕迎代王代邸,

與大臣共立為孝文皇帝,復為太仆.  八歲卒,謚為文侯.  子夷侯灶立,七年卒.

子共侯賜立, 三十一年卒. 子侯頗尚平陽公主. 

立十九歲, 元鼎二年, 坐與父御婢姦罪, 自殺, 國除. 

[고후가 세상을 떠나고, 대왕이 황제가 되자 역시 하후영은 태복이 되어

동모후(東牟侯) 유흥거(劉興居)와 함께 궁궐을 청소하는 일을 맡아 소제(少帝)를 폐한 후

천자의 법가를 몰고 대왕의 저택으로 가서 영접하여 대신들과 함께

효문제를 황제로 옹립하였으며, 하후영은 계속 태복으로 효문제를 모셨다.

태복이 8년 뒤에 죽자, 그의 시호는 문후()였다. 

그의 아들 이후(夷侯) 하후조(夏侯竈)가 그의 작위를 이었다.  

하후조는 7년 만에 죽고 그의 아들 공후(共侯) 하후사(夏侯賜)가 뒤를 이어 31년 동안 후의

자리에 있다가 죽었다. 하후사의 아들 하후파(夏侯頗)는 평양공주(平陽公主)6)와 결혼했다.

19년 후인 원정 2년(한무제 26년, 기원전115년)에 하후파는 부친의 하녀와 간통하는

죄를 범하여 죄에 저촉되자 자살하고 봉국도 없어졌다.]

 

 

潁陰侯灌嬰者,睢陽販繒者也.  高祖之為沛公,略地至雍丘下,章邯敗殺項梁,

而沛公還軍於碭, 嬰初以中涓從擊破東郡尉於成武及秦軍於扛裏,疾鬬,賜爵七大夫.

[영음후(潁陰侯) 관영(灌嬰)은 수양현(睢陽縣)의 비단장사 출신이다.

고조가 패공의 신분으로 진나라 성읍을 공략하러 원정다니다가 옹구(雍丘)에 이르렀을 때 

진나라의 장수 장한이 초나라의 항량을 공격하여 죽이자, 

패공은 군대를 이끌고 탕현으로 철수했다.

그때 관영은 중연(中涓)7)의 신분으로 종군하여 동군의 군위(郡尉)8)를 성무에서 격파하고

계속해서 강리에서 진나라 군사와 치열하게 전투를 벌인 공로로 칠대부의 작위를 받았다.]

 

從攻秦軍亳南、開封、曲遇,戰疾力,賜爵執帛,號宣陵君.

從攻陽武以西至雒陽,破秦軍尸北,北絕河津,南破南陽守齮陽城東,遂定南陽郡.

西入武關,戰於藍田,疾力,至霸上,賜爵執珪,號昌文君.

[관영은 패공을 따라 박(亳)의 남쪽, 개봉(開封), 곡우(曲遇)에서 용맹스럽게 싸워 

집백(執帛)의 작위를 받고 선릉군(宣陵郡)이라는 봉호를 받았다. 

패공을 따라 양무(陽武) 이서에서 낙양(洛陽)에 이르는 땅을 공략하고

시(屍)의 북쪽에서 진군을 무찔러 북쪽의 하진(河津)으로 향하는 길을 끊었다.

계속해서 남쪽으로 나아가 남양(南陽) 군수 기(齮)의 군사를 양성의 동쪽에서 격파하여

마침내 남양군을 평정했다.  서쪽으로 진군하여 무관(武關)으로 들어가 남전(藍田)에서

진나라 군사와 싸울 때 선두에 서서 용감하게 싸워 패상(霸上)에 이르렀다. 

그 공으로 집규(執珪)의 작위와 창문군()이라는 봉호를 받았다.]

 

沛公立為漢王,拜嬰為郎中,從入漢中,

十月,拜為中謁者.  從還定三秦,下櫟陽,降塞王.

還圍章邯於廢丘,未拔.  從東出臨晉關, 擊降殷王, 定其地.

擊項羽將龍且、魏相項他軍定陶南, 疾戰, 破之. 賜嬰爵列侯, 號昌文侯, 食杜平鄉.  

復以中謁者從降下碭, 以至彭城.  項羽擊, 大破漢王.  漢王遁而西,嬰從還,軍於雍丘.

[한고조 원년(기원전 206년), 패공이 한왕이 되자 하후영은 낭중의 신분으로 한중으로 들어갔다.  

그해 10월 중알자(中謁者)9)가 되었다. 한중에서 나와 삼진을 평정할 때 한왕을 따라

역양(櫟陽)을 함락시키고 색왕(塞王) 사마흔의 항복을 받았다.

다시 옹왕(雍王) 장한의 도읍 폐구(廢丘)를 포위했으나 함락시키지 못했다.

동쪽으로 진군하는 한왕을 따라 임진관에서 은왕(殷王) 사마앙의 항복을 받고 그 땅을 평정했다.

항우의 장수 용저(龍且)를 공격하고 위나라 상국 항타(項他)의 군사와 정도의 남쪽에서 싸울 때

선두에 서서 용맹하게 싸워 무찔렀다.

그 공으로 관영은 열후의 작위와 창문후의 봉호 및 두평향(杜平鄕)을 식읍으로 받았다. 

다시 중알자의 신분으로 한왕을 따라 종군하여 탕현(碭縣)을 항복시키고 팽성에 입성했다.  

항우의 반격을 받은 한왕의 군대는 수수(睢水) 강기슭에서 대패했다.

한왕이 서쪽으로 패주할 때 관영도 함께 따라가 옹구(雍丘)에 주둔하며 진영를 정비했다.]

 

王武、魏公申徒反,從擊破之. 攻下黃,西收兵,軍於滎陽. 楚騎來眾,

漢王乃擇軍中可為(車)騎將者,皆推故秦騎士重泉人李必、駱甲習騎兵,

今為校尉,可為騎將. 

漢王欲拜之,必、甲曰:「臣故秦民,恐軍不信臣,臣願得大王左右善騎者傅之.」

[왕무와 위공(魏公) 신도(申徒) 등이 반란을 일으키자, 관영은 한왕을 따라 그들을 격파하였다.

외황(外黃)을 함락시키고 서쪽으로 진군하면서 패잔병을 수습하여 형양에 주둔했다.  

초나라의 수많은 기병이 형양을 향해 공격해오자,

한왕은 군중에서 선발하여 기마부대 대장에 임명하려고 했다.  

그때 모든 사람이 진나라 기마부대 출신이며 교위의 직급에 있는 중천(重泉) 출신

이필(李必)과 낙갑(駱甲)이 기마전에 능하여 마땅히 기병대장을 삼을만하다고 천거했다. 

한왕이 두 사람을 기병부대 대장으로 임명하려고 했다. ​이필과 낙갑이 한왕에게 말하기를 :

" 신들은 원래 진나라 백성이라 군사들이 신을 믿고 따르지 않을까 두렵습니다.  

원컨대 대왕의 측근에서 기마에 능한 사람이 선발되면 신들이 그분을

보좌하게 해주십시오.”라고 하였다.]

 

灌嬰雖少,然數力戰,乃拜灌嬰為中大夫,令李必、駱甲為左右校尉,

將郎中騎兵擊楚騎於滎陽東,大破之.  受詔別擊楚軍後,絕其餉道,起陽武至襄邑. 

擊項羽之將項冠於魯下,破之,所將卒斬右司馬、騎將各一人.

[관영은 비록 나이는 어리지만 수많은 전투에 참가하여 싸웠음을 감안한 한왕은 

관영을 중대부에 임명하고 이필과 노갑은 좌우 교위()를 맡도록 했다.

관영은 랑중(郞中) 기병을 이끌고 초나라의 기병부대와 형양의 동쪽에서 싸워 크게 격파했다. 
관영은 한왕의 조서를 받아 별동대를 이끌고 초군의 후위를 돌아 양무에서 양읍(襄邑)에 이르는

초나라의 군량 보급선을 차단하였다. 노현(魯縣)에서 항우의 장수 항관(項冠)을 공격하여

격파하고 관영의 부하 장수는 우사마(右司馬)와 기병대장 한사람씩의 머리를 베었다.]

 

擊破柘公王武,軍於燕西,所將卒斬樓煩將五人,連尹一人.

擊王武別將桓嬰白馬下,破之,所將卒斬都尉一人. 

以騎渡河南,送漢王到雒陽,使北迎相國韓信軍於邯鄲.  還至敖倉,嬰遷為御史大夫.

​[연(燕)의 서쪽에서 자공 왕무의 반란군을 공격하여 휘하의 장수가 루번의 장수 5명과

연윤 1명을 참수했다.  왕무의 별장 환영(桓嬰)을 백마(白馬)에서 무찌르고, 

부하 장수는 왕무군의 도위(都尉) 한 명의 목을 베었다.

기병대를 이끌고 하수의 남쪽으로 도하하여 한왕을 낙양(洛陽)으로 안전하게 호송한 후에

한왕의 사신이 되어 북쪽의 한단으로 가서 상국 한신의 군대를 영접했다. 

다시 오창에 이르자 한왕은 관영을 어사대부로 자리를 옮겼다.]

 

三年,以列侯食邑杜平鄉.  以御史大夫受詔將郎中騎兵東屬相國韓信,擊破齊軍於歷下, 

所將卒虜車騎將軍華毋傷及將吏四十六人.  降下臨菑,得齊守相田光.

追齊相田橫至嬴、博,破其騎, 所將卒斬騎將一人,生得騎將四人.

[한왕 3년(기원전 203년), 관영은 열후의 대열에 올라 두평향(杜平鄕)을 식읍으로 받았다.

어사대부의 신분으로 조서를 받아 낭중기병의 장수로 동쪽에 주둔한 상국 한신의 군대에

예속되어 제군(齊軍)을 역하(曆下)에서 격파했으며 

부하 장수는 거기장군 화무상과 장수 및 군리 46명을 포로로 잡았다.

계속 동쪽으로 진군하여 임치성을 함락시키고, 제나라 재상 전광(田光)을 생포하였으며

제나라 상국 전횡(田橫)을 영(嬴)과 박(博)까지 추격하여 그의 기병대를 무찌르고,

그의 부하 장수는 제나라의 기병대장 한 명을 참수하고 4명을 생포했다.]  

 

攻下嬴、博,破齊將軍田吸於千乘,所將卒斬吸.  東從韓信攻龍且、留公旋於高密,

卒斬龍且,生得右司馬、連尹各一人,樓煩將十人,身生得亞將周蘭.

齊地已定,韓信自立為齊王,使嬰別將擊楚將公杲於魯北,破之.

轉南,破薛郡長, 身虜騎將一人.

​[관영은 영(嬴)과 박(博)을 공격하여 함락시키고 제나라 장군 전흡(田吸)의 군대를

천승현(千乘縣)에서 격파하고 부하장수가 전흡의 목을 베었다.

한신의 군대가 동쪽으로 진격하여 초나라 장수 용저(龍且)와 유공(留公) 선(旋)을

고밀(高密)에서 공격할 때 휘하의 병사가 용저를 참수하고 관영은 기병대장으로 종군하여

초군의 우사마와 연윤(連尹) 한 명과 루번장수 10명을 포로로 잡고 아장 주란(周蘭)은

자신이 직접 사로잡았다.제나라 땅이 평정되어 한신이 스스로 제왕의 자리에 오르자,

하후영은 별장이 되어 초나라 장수 공고의 군대를 노(魯)의 북쪽에서 대파하고

계속해서 남하하여 설군(薛郡)의 군장이 이끄는 군대를 격파하고 

​관영 자신은 기병대장 한 사람을 포로로 잡았다.]

 

攻(博)[傅]陽,前至下相以東南僮、取慮、徐.  度淮,盡降其城邑,至廣陵.

項羽使項聲、薛公、郯公復定淮北.  嬰度淮北,擊破項聲、郯公下邳,斬薛公,

下下邳,擊破楚騎於平陽,遂降彭城,虜柱國項佗,降留、薛、沛、酂、蕭、相.

[관영은 부양(傅陽)을 공격하고 하상에서 그 동남쪽 동(僮), 취려(取慮), 서(徐)에 이르렀다.

관영은 남쪽으로 방향을 돌려 회수를 건너서 그 남안의 성읍들로부터 항복을 받아내고

광릉(光陵)에 이르렀다.

항우가 항성(項聲), 설공(薛公), 담공(郯公) 등을 시켜 회수 이북의 땅을 다시 수복했다.

이에 관영은 다시 회수를 건너 북상하여 하비(下邳)에서 항성과 담공의 군대를 무찌르고

설공의 목을 벴다.  이어서 하비성을 함락시킨 후에 초나라의 기병대를 평양(平陽)10)에서

격파하고 팽성에 입성하여 초나라의 주국 항타(項陀)를 사로잡았으며

유(留), 설(薛), 패(沛), 찬(酇), 소(蕭), 상(相)을 항복시켰다.]

 

攻苦、譙,復得亞將周蘭.  與漢王會頤鄉.

從擊項籍軍於陳下,破之,所將卒斬樓煩將二人,虜騎將八人.

賜益食邑二千五百戶. 項籍敗垓下去也, 嬰以御史大夫受詔將車騎別追項籍至東城, 破之.

所將卒五人共斬項籍,皆賜爵列侯.  降左右司馬各一人,卒萬二千人,盡得其軍將吏.

[관영은 고현(苦縣)과 초현(譙縣) 등을 공격하고 초나라의 아장(亞將) 주란을 재차 사로잡아

이향(頤鄕)11)에서 한왕의 군대에 합류하여 항우를 공격하여 진성(陳城)에서 격파하고

휘하의 장수와 군사들이 초나라의 누번장군 2명의 목을 베고 기병대장 8명을 포로로 잡았다.

그 공으로 2천 5백 호를 받아 식읍에 더했다.
항우가 해하(垓下)의 싸움에서 패하고 달아나자 한왕의 명을 받은 관영은 어사대부의 신분으로

별동대를 이끌고 그 뒤를 추격하여 동성(東城)12)에서 따라잡아 소속의 장수 5명이

항우의 몸을 베어 모두 열후의 작위를 받았다.

초나라 군대의 좌우 사마 각 한 명 씩과 1만 2천 명에 달하는 군사들과 그 장수들 및 군리들의 

항복을 받아냈다.]

 

下東城、歷陽.  渡江,破吳郡長吳下,得吳守,遂定吳、豫章、會稽郡. 

還定淮北,凡五十二縣.  漢王立為皇帝,賜益嬰邑三千戶. 

其秋,以車騎將軍從擊破燕王臧荼.

明年,從至陳,取楚王信.  還,剖符,世世勿絕,食潁陰二千五百戶,號曰潁陰侯.

[관영은 동성과 역양을 함락시키고 강수(江水)를 도하하여 오군(吳郡)의 군대를 격파하고 

그 태수는 포로로 잡아 오군(吳郡), 예장군(豫章郡), 회계군(會稽郡) 등의 땅을 평정했다. 

회북으로 다시 돌아와 모두 52개 현을 평정했다.

이윽고 황제의 자리에 오른 한왕은 관영에게 3천 호의 식읍을 더 하사했다.

그해 가을, 거기장군(車騎將軍)의 신분으로 연왕 장도(臧荼)의 군사를 공격하여 무찔렀다.

다음 해, 한왕을 수행하여 진(陳) 땅으로 출행했다가 초왕 한신(韓信)을 포로로 잡았다.

장안으로 돌아오자 황제는 관영에게 부절을 주어 대대손손 끊이지 않고 물려주도록 했다.

영음(潁陰)의 2천 5백 호를 식읍으로 주고 영음후(潁陰侯)라고 부르게 했다.]

 

以車騎將軍從擊反韓王信於代,至馬邑,受詔別降樓煩以北六縣,斬代左相,

破胡騎於武泉北.  復從擊韓信胡騎晉陽下,所將卒斬胡白題將一人.

受詔并將燕、趙、齊、梁、楚車騎,擊破胡騎於硰石.  至平城, 為胡所圍, 從還軍東垣.

[관영은 거기장군의 신분으로 대(代) 땅에서 반란을 일으킨 한왕 신(信)의 군대를 공격하여

마읍(馬邑)에 이르러 조명을 받아 루번(樓煩) 이북 6개 현의 항복을 받았다.

대나라의 좌상(左相)의 목을 베고 무천(武泉)의 북쪽에서 흉노의 기병을 격파했다.

다시 한왕 신이 거느린 흉노의 기병을 진양(晉陽)에서 공격하여 무찌르고

휘하의 장졸이 흉노족의 일파인 백제(白題)의 장군 1명을 참살했다.

황제의 명을 받들어 연, 조, 제(齊), 양(梁) 및 초(楚)의 전거와 기마를 이끌고 출격하여

사석(硰石)에서 무찔렀다. 계속 진군하여 평성(平城)에 이르러 흉노의 기병에게 포위당했다가 

고조를 따라 탈출하여 동원(東垣)으로 돌아왔다.]

 

從擊陳豨,受詔別攻豨丞相侯敞軍曲逆下,破之,卒斬敞及特將五人.

降曲逆、盧奴、上曲陽、安國、安平.  攻下東垣.  

黥布反,以車騎將軍先出,攻布別將於相,破之,斬亞將樓煩將三人.  

又進擊破布上柱國軍及大司馬軍.  又進破布別將肥誅.

[고조를 따라 진희()를 공격했고, 황제의 명을 받들어 별동대를 이끌고 출전하여

진희의 승상 후창의 군대를 곡역(曲逆)에서 격파하고 후창과 그의 장수 5명을 참수하였다.

계속 진군하여 곡역, 노노(盧奴), 상곡양(上曲陽), 안국(安國), 안평(安平) 등의 항복을 받았다.

또 동원을 공격하여 함락시켰다.  

경포가 반란을 일으키자 거기장군이 되어 먼저 출정하여 경포의 별장을 상(相)13)에서

격파하고  아장(亞將)과 루번(樓煩)14)의 장수 3인을 참수시켰다.

또 계속 진격하여 경포의 상주국(上柱國)15)과 대사마(大司馬) 군을 무찌르고

경포의 별장 비(肥)를 주살했다.]

 

嬰身生得左司馬一人,所將卒斬其小將十人,追北至淮上.  益食二千五百戶.

布已破,高帝歸,定令嬰食穎陰五千戶,除前所食邑.  凡從得二千石二人, 別破軍十六,

降城四十六, 定國一, 郡二, 縣五十二, 得將軍二人, 柱國、相國各一人, 二千石十人.

[또한 관영은 친히 경포의 좌사마 한 명을 사로잡고 휘하의 장수와 병사들은 

경포의 소장 10명을 참한 후에 계속 그의 뒤를 추격하여 북쪽의 회수에 이르렀다.  

그 공로로 관영은 식읍 2천 5백 호를 받았다.

경포의 반란을 진압하고 귀경한 고제는 관영에게 조칙을 내려 영음(潁陰)의 5천 호를

식읍으로 하사하고 그 전의 식읍은 모두 폐했다. 

그는 종군 중에 2천 석의 고위관리 2명을 사로잡았으며 별동대를 이끌고

16개의 부대를 격파했으며 46개 성을 항복시키고, 1개의 제후국, 2개의 군, 52개의 현을

평정했다.  장군 2명, 상주국과 재상 각 1 명, 2천석 관리 10명을 체포하였다.]

 

嬰自破布歸,高帝崩,嬰以列侯事孝惠帝及呂太后.

太后崩,呂祿等以趙王自置為將軍,軍長安,為亂.  齊哀王聞之,舉兵西,

且入誅不當為王者. 上將軍呂祿等聞之,乃遣嬰為大將,將軍往擊之.

嬰行至滎陽,乃與絳侯等謀,因屯兵滎陽,風齊王以誅呂氏事,齊兵止不前. 

絳侯等既誅諸呂,齊王罷兵歸,嬰亦罷兵自滎陽歸,與絳侯、陳平共立代王為孝文皇帝.

孝文皇帝於是益封嬰三千戶,賜黃金千斤,拜為太尉.

​[경포를 무찌른 관영이 돌아왔을 때는 고제가 죽었기 때문에 열후의 신분으로

혜제(惠帝)와 여후(呂后)를 모셨다. 태후가 죽자, 조왕(趙王) 여록(呂祿) 등이

스스로 장군이 되어 장안의 군사를 장악하여 반란을 일으키려고 했다.  

제애왕(齊哀王)이 듣고 군사를 일으켜 서진하여 부당하게 제후왕이 된 자들을 주살하려고 했다.

상장군 여록 등이 알고 관영을 대장으로 삼아 군사를 이끌고 출동하여 막도록 했다.

관영의 군대가 형양(滎陽)에 이르자 강후 주발 등과 모의하여 진격을 멈춰 주둔하며 제왕에게

여씨 일족을 주살할 계획임을 알렸다. 제나라 군사들이 진격을 멈추고 사태를 관망했다.

얼마 후에 주발 등이 여씨 일족을 주살했으므로 제군은 자기나라로 돌아가고 관영은 형양의

군사를 파하고 장안으로 철수해서 주발, 진평 등과 상의하여 대왕(代王)을 효문제로 옹립했다.  

효문제는 관영에게 3천 호의 식읍을 더하고 황금 천근을 하사했으며 태위(太尉)에 제수했다.]

 

三歲,絳侯勃免相就國,嬰為丞相,罷太尉官.

是歲,匈奴大入北地、上郡,令丞相嬰將騎八萬五千往擊匈奴.

匈奴去,濟北王反,詔乃罷嬰之兵.  後歲餘,嬰以丞相卒,謚曰懿侯.  子平侯阿代侯.

二十八年卒,子彊代侯.  十三年,彊有罪,絕二歲.

元光三年,天子封灌嬰孫賢為臨汝侯,續灌氏後,八歲,坐行賕有罪,國除.

[3년 후, 강후 주발이 상국의 자리에서 면직되자 관영이 대신 승상이 되고 태위의 관직을

내놓았다.  그 해에 흉노가 북지군(北地郡)과 상군(上郡)에 대거 침입해 왔다.

황제가 승상에게 명을 내려 8만 5천의 기병을 이끌고 출전하여 흉노를 막도록 했다.

관영이 출동하자 흉노는 물러갔다.

제북왕 유흥거(劉興居)16)가 반하자 황제가 조칙을 내려 군사를 이끌고 장안으로 철수토록 했다.

그리고 1년 후에 승상에 재직 중 죽었다.  시호는 의후(懿侯)다.

그의 후의 작위를 이은 아들 평후(平侯) 관아(灌阿)는 28년 후에 죽었다.  

관아의 아들 관강(灌彊) 후의 작위를 잇고 13년 만에 관강이 죄를 지어

2세 만에 관영의 대가 끊기게 되었다.  

원광 3년 (한무제 9년, 기원전 132년), 천자가 관영의 손자 관현(灌賢)을 임여후에 봉하여  

관씨들의 후사를 잇도록 했다.

그리고 8년 후에 관현은 뇌물사건에 연루되어 죄를 받아 봉국은 없어졌다.]

 

太史公曰:

吾適豐沛,問其遺老,觀故蕭、曹、樊噲、滕公之家,及其素,異哉所聞! 

方其鼓刀屠狗賣繒之時,豈自知附驥之尾,垂名漢廷,德流子孫哉? 

余與他廣通,為言高祖功臣之興時若此云.

[태사공이 말한다.
옛날 풍패(豊沛)를 들렸을 때 나는 그곳의 부로들에게 물어 소하(蕭何), 조참(曹參),

번쾌(樊噲), 등공(滕公) 등의  집을 찾아가 봤다.

과연 그들이 평소에 행했던 행적과는 완전히 다른 모습이었다.  

고기를 자르는 칼을 들고 개고기를 팔고 비단 장사를 할 때 어찌 그들이 천리마의 꼬리를 잡아 

그 이름을 한왕조에 올리고 그 덕을 자손들에게 전할 줄 알았겠는가?  

나와 교유관계가 있었던 번타광(樊他廣)은 고조의 공신들이 흥기했을 때의 모습은

이와 같았다고 말했다.]  

 

 

【 각주 】  

1)풍(豊)/ 지금의 강소성(江蘇省) 풍현(豊縣)으로 진나라 때는 패현에 속한 조그만 고을이었다.

2)국대부(國大夫)/ 진나라가 무공을 세운 사람에게 수여하기 위해 제정했던 20등작 중

    6번 째 등급으로 

   ​관대부(官大夫)라고도 한다.  

3)열대부(列大夫)/ 진한의 20등작 중 7번 째에 해당하는 작위다. 칠대부(七大夫) 혹은

   공대부(公大夫)라고도 한다.

4) 평원군은 경제의 황후 왕태후의 모친 장아의 봉호다. 즉 경제의 장모다.  

    신하의 신분으로 황제의 장모를 부인으로 삼으려고 한 행위는 불경죄에 해당한다.  

5)기양(祁阳)/ 소재 미상이다.

6)평양공주(平陽公主)

①한경제의 장녀이고 한무제의 누이다. 원래는 양신장공주(陽信長公主)라고 불렀으나  

   조참(曹參)의 증손 평양이후(平陽夷侯) 조시(曹時)에게 출가하여 평양공주라고 바꾸어

   부르게 되었다. 일찍이 무제에게 이연년(李延年)을 천거하고 다시 무제에게

   원래 자기 집에서 노래부르는 가희였던  위자부(衛子夫)를 무제에게 보여

   후에 황후가 되게 하였다. 조시가 일찍 죽어 과부가 되었다가  

   무제의 조칙으로 대장군 위청(衛靑)에게 개가했다.
②하후영의 증손 하후파(夏侯頗)에게 출가한 서한 황실의 공주다.

   한서에는 그 외가의 성이 손씨 였음으로 손공주(孫公主)라 했다.

   일설에는 평양 두 글자는 오자로 하후파에게 시집간 황녀는 평양공주가 아니라고 했다.

7)중연(中涓)/ 황제의 곁에서 수발을 드는 근신을 말한다.  

8)군위(郡尉)/ 진나라가 설치한 지방관으로써 태수를 보좌하여 군사의 일을 책임졌다.  

   한경제 때 도위(都尉)로 명칭이 바뀌었다. 봉록은 2천 석이다.  

9)중알자(中謁者)/ 황제 신변에 머물면서 군신들의 접견을 주선하거나

   황제의 명을 전달하는 근신의 장이다.

10)평양(平陽)/ 지금의 산동성 추현(鄒縣) 부근이다.

11)이향(頤鄕)/ 지금의 하남성 녹현(鹿縣) 동남이다.

12)동성(東城)/ 지금의 안휘성 정원현(定遠縣) 동남이다.

13)상(相)/ 지금의 안휘성 회북시(淮北市) 서쪽에 있었던 고을로 서한 때 상현(相縣)을 말한다.

14)루번(樓煩)
① 한초쟁패 시, 한왕 유방의 부장으로 활의 명수였다. 한초가 형양(滎陽)과 성고(成皐)에서

    대치하고 있을 때 항우가 유방을 향해 진영에서 나와 싸우자고 도전하기 위해

    세 차례라나 한나라 진영으로 보낸 장사를 모두 활로 쏘아 죽였다.

    항우가 노하여 친히 갑옷으로 무장한 후에 진영을 나와 한군 진영을 향해 소리쳐 도전했다. 

​    항우의 위용을 본 누번은 감히 활을 쏘지 못하고 한나라 진영으로 달아나고 말았다.
➁춘추전국 시대 때, 지금의 하북성 북서, 산서상 북부, 내몽고자치구 등에 거주하며

   진(晉)과 연(燕), 조(趙) 등의 국가와 국경을 접했던 이민족 국가다.

   조무령왕(王) 때, 임호(林胡)와 함께 루번을 점령하여 조나라의 영토를 크게 넓혔다.

   진나라 말, 진나라가 몽염을 시켜 흉노를 대대적으로 정벌하자

   거주지를 하남(河南 : 하투(河套) 즉 지금의 내몽고 오로도스 지역)으로 옮겼다.

   한무제 원삭(元朔) 2년, 기원전 127년 대장군 위청(衛靑)에 의해 하투지역에서 쫓겨났다.
③항우본기에 ' 한나라 진영에 활을 잘 쏘는 루번이라는 궁수들이 있다.'라는 기사가 있다.  

   고염무에 의하면 한초전쟁 때 루번인으로 조직된 별도의 부대를 한(漢), 초(楚), 경포(黥布)

   등의 진영에서 운영했다고 했다. 그들은 기사(騎射)에 능했음으로

   기사에 능한 군가를 루번이라는 일반명칭으로 사용했다.  

   루번이라고 해서 모두 루번인 출신의 군사라는 뜻은 아니었다. .  

15)상주국(上柱國)/ 전국시대 때 초나라의 관직명. 줄여서 주국(柱國)이라고 하며

     국가를 버티고 있는 기둥이라는 뜻이다. 원래 초나라의 도성을 방어하는 임무를 관장하는

     벼슬이었으나 후에 초나라 무관의 최고관직이 되어 그 지위는 영윤(令尹) 다음이었다.

     경포가 지배하고 있던 지역이 초나라 지역이었음으로 초나라의 옛날 관제를 채용한 것이다.  

16)유흥거(劉興居)/ 한고조의 서장자 유비(劉肥)의 아들이다.

     고후 6년 기원전 182년, 동모후(東牟侯)에 봉해졌다.

     고후가 죽자 여려 대신들과 함께 대왕 유항(劉恒)을 황제로 옹립했다.  

     문제 2년 기원전 178년, 제북왕에 봉해졌다. 문제 3년 문제가 북쪽의 흉노를 치기 위해  

     군사를 보낸 틈을 이용하여 반란을 일으켰으나 장군 시무와의 싸움에서 패해 자살했다.  

 

 

 

※  原 文 .    【 中國哲學書電子化計劃 .   筆寫本 】

 

                               

 

    原 文   飜 譯 者        德庤 / 李   斗 振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