史記 表(사기 표) 11

史記 表

史記 表 하, 상, 주(夏商周) 삼대는 너무 먼 옛날의 일이라 구체적인 연대기를 고찰할 수 없어, 대체로 보첩(족보)과 옛날 문헌에 근거하여 대략적인 추측으로, 제일편 를 지었다. 주나라의 려왕(厲王)과 유왕(幽王) 이후에 주나라 왕실이 쇠미해지자 제후들이 그 정치를 스스로 행하였는데 《춘추》에도 기록되지 않은 것이 있다. 그러나 보첩에 기록된 경략을 보면 오패가 번갈아 가며 흥하고 망했다. 그래서 주나라 시대에 제후들의 흥망성쇠를 살펴보고자, 제이편 를 지었다. 춘추시대 이후로 권신들이 정권을 잡고 강국이 되어 서로 왕호를 칭했다. 이윽고 진나라에 이르러 중원의 제후국들을 모조리 병합하고 그들의 봉지를 없앤 다음 호칭을 제멋대로 했다. 이에 제삼편 를 지었다. 진나라가 이미 폭정을 행하므로 초나라 사람..

10. 漢興以來將相名臣年表

​ 史 記 表 10. 漢興以來將相名臣年表 ​ 公元前 紀年 大事紀 相位 將位 御史大夫位 206 高皇帝 元年. 春, 沛公為漢王, 之南鄭. 秋, 還定雍. 一. 丞相蕭何守漢中. 御史大夫 ​周苛守滎陽. 205 二. 春,定塞、翟、魏、河南,韓、殷國。夏,伐項籍, 至彭城. 立太子. 還據滎陽. 二. 守關中. 一. 太尉長安侯盧綰. 204 三. 魏豹反. 使韓信別定魏, 伐趙. 楚圍我滎陽. 三. 二. 203 四. ​使韓信別定齊及燕, 太公自楚歸, 與楚界洪渠. 四. 三. 周苛守滎陽, 死. 御史大夫 ​汾陰侯周昌. 202 五. 春,定塞、翟、魏、河南、韓、殷國. 夏,伐項籍, 至彭城. 立太子. 還據滎陽. 二. 守關中. 一. 太尉長安侯盧綰. 201 六. 尊太公為太上皇. 劉仲為代王.立大市。更命咸陽曰長安 六. 封為酇侯. . 張蒼為計相. 200 七..

9. 建元已來王子侯者年表

史 記 表 ​ ​ 9. 建元已來王子侯者年表 制詔御史:「諸侯王或欲推私恩分子弟邑者,令各條上,朕且臨定其號名.」 太史公曰:盛哉,天子之德!一人有慶,天下賴之. 황제가 어사(御史)에게 명했다. “제후왕이 자기가 소중히 여기는 식읍(食邑)을 자제에게 나누어주고, 그들이 각자 상주(上奏)하게 명한다면, 짐이 장차 친히 이 식읍의 봉호(封號)와 명칭을 짓겠노라.” 태사공은 말한다. “천자의 은덕은 지극히 성대하도다! 한 사람이 선을 베풀면, 천하의 백성들이 이로움을 얻는구나.” 國名 王子號 元光 元朔 元狩 元鼎 元封 太初 茲 河閒獻 王子. 二. 五年正月壬子, 侯劉明元年. 二. 三年, 侯明坐謀反殺人, 棄市,國除. 安 成 長沙定 王子. 一. 六年七月乙巳, 思侯劉蒼元年. 六. 六. 六. 元年, 今侯自當元年. 六. 四. 宜春 長..

8. 建元以來侯者年表

史 記 表 8. 建元以來侯者年表 ​ ​太史公曰:匈奴絕和親,攻當路塞;閩越擅伐,東甌請降。二夷交侵,當盛漢之隆,以此知功臣受封侔於祖考矣. 何者?自詩書稱三代「戎狄是膺,荊荼是徵」, 太史公曰:齊桓越燕伐山戎,武靈王以區區趙服單于,秦繆用百里霸西戎,吳楚之君以諸侯役百越。 況乃以中國一統,明天子在上,兼文武,席卷四海,內輯億萬之眾,豈以晏然不為邊境征伐哉! 自是後,遂出師北討彊胡,南誅勁越,將卒以次封矣. 태사공은 말한다. “흉노(匈奴)는 한(漢)나라와 화친을 단절하고, 변경지역을 자주 공략했다. 민월(閩越)은 제멋대로 동구(東甌)를 공격해, 동구는 한나라에 구원을 요청해왔다. 이 두 이민족이 번갈아 침략한 것은 한나라의 전성기에 있은 일이다. 이때 공적을 거둔 신하는 조부(祖父)들의 공로와 비견할 만한 것이라 여겼다. 무엇 때문인가? 『시(..

7. 惠景閒侯者年表

史 記 表 . ​ 7. 惠景閒侯者年表 太史公讀列封至便侯,曰:有以也夫!長沙王者,著令甲,稱其忠焉. 昔高祖定天下,功臣非同姓疆土而王者八國。至孝惠時,唯獨長江全,禪五世,禪五世, 以無嗣絕,意無過,為藩守職,信矣. 故其澤流枝庶,毋功而侯者數人. 及孝惠訖孝景閒五十載,追修高祖時遣功臣,及從代來,吳楚之勞,諸侯子弟若肺腑, 外國歸義,封者九十有餘. 咸表始終,當世仁義成功之著者也. 태사공은 역대 봉후(封侯)에 대한 기록을 읽다가 편후(便侯)에 이르러 이렇게 말한다. “그럴 만한 이유가 있다! 장사왕(長沙王) 오예(吳芮)가 봉해진 것을 영갑(令甲)을 드러내 기록해둔 것은 그의 충정(忠貞)을 칭송한 것이다. 지난날 고조(高祖)께서 천하를 평정하신 다음, 동성(同姓)이 아니면서 봉토를 받아 제후왕으로 봉해진 자는 모두 여덟 명이었다. 그러나 ..

6. 高祖功臣侯者年表

史 記 表 ​ 6. 高祖功臣侯者年表 太史公曰:古者人臣功有五品,以德立宗廟定社稷曰勳,以言曰勞,用力曰功,明其等曰伐,積日曰閱. 封爵之誓曰:「使河如帶,泰山若厲. 國以永寧,爰及苗裔.」始未嘗不欲固其根本,而枝葉稍陵夷衰微也. 태사공은 말한다. “옛날에는 신하된 자의 공훈(功勳)에 다섯 등급이 있었다. 덕행으로 종묘(宗廟)의 기틀을 다지고 사직(社稷)을 편안케 하는 것을 ‘훈(勳)’이라 일컬었고, 언론으로 나라를 굳건히 하는 것을 ‘로(勞)’라고 했으며, 무력을 사용해 공적을 세우는 것을 ‘공(功)’이라 했다. 또 나라의 법령과 제도를 만드는 것을 ‘벌(伐)’이라고 했고, 오래도록 정무(政務)를 맡아보는 것을 ‘열(閱)’이라 했다. 작위를 내릴 때에는 ‘황하(黃河)를 허리띠처럼 삼아 굳건하게 지키고, 태산(泰山)을 반석처..

5. 漢興以來諸侯王年表

史 記 表 . 5. 漢興以來諸侯王年表 ​ 太史公曰:殷以前尚矣. 周封五等:公,侯,伯,子,男. 然封伯禽、康叔於魯、衛,地各四百里,親親之義,褒有德也;太公於齊,兼五侯地,尊勤勞也. 武王、成、康所封數百,而同姓五十五,地上不過百里,下三十里,以輔衛王室. 管、蔡、康叔、曹、鄭,或過或損. 厲、幽之後,王室缺,侯伯彊國興焉,天子微,弗能正. 非德不純,形勢弱也. ​ 【태사공은 말한다. 은(殷)나라 이전의 역사는 오래되었다. 주(周)나라의 봉작(封爵)에는 공(公), 후(侯), 백(伯), 자(子), 남(男)의 다섯 등급이 있었다. 그래서 백금(伯禽)을 노(魯)나라에 봉하고, 강숙(康叔)을 위(衛)나라에 봉했는데, 그들의 봉지는 4백 리였다. 이는 친척을 가까이하는 마음을 표시한 것이며, 공덕이 있는 이를 드러낸 것이다. 태공(太公)을 제(..

4. 秦楚之際月表

史 記 表 . ​ ​4. 秦楚之際月表 ​ 太史公讀秦楚之際,曰:初作難,發於陳涉;虐戾滅秦,自項氏;撥亂誅暴,平定海內,卒踐帝祚,成於漢家. 五年之閒,號令三嬗。自生民以來,未始有受命若斯之亟也. ​ 【태사공이 진(秦), 초(楚)의 역사를 읽고서 말한다. “처음 반란을 일으킨 것은 진섭(陳涉)이고, 잔인하고 포악하게 진나라를 멸한 것은 항우(項羽)이다. 그러나 어지러운 세상을 바로잡아 포악한 자를 제거하고 해내(海內)를 평정해, 마침내 제위에 오른 것은 한가(漢家)에 의해서 완성되었다. 이 5년간 호령하는 자가 3차례나 바뀌었는데, 인류가 생긴 이래 이처럼 빨리 천명을 받은 때는 없었다. 】 昔虞、夏之興,積善累功數十年,德洽百姓,攝行政事,考之于天,然後在位. 湯、武之王,乃由契、后稷修仁行義十餘世,不期而會孟津八百諸侯,猶以為未可..

3. 六國年表

史 記 表 . ​ 3. 六國年表(육국연표) ​ 太史公讀秦記, 至犬戎敗幽王, 周東徙洛邑, 秦襄公始封為諸侯, 作西畤用事上帝, 僭端見矣. 禮曰:「天子祭天地, 諸侯祭其域內名山大川.」 今秦雜戎翟之俗, 先暴戾, 後仁義, 位在藩臣而臚於郊祀, 君子懼焉. 及文公踰隴, 攘夷狄, 尊陳寶, 營岐雍之閒, 而穆公修政, 東竟至河, 則與齊桓、晉文中國侯伯侔矣. 是後陪臣執政, 大夫世祿, 六卿擅晉權, 征伐會盟, 威重於諸侯. 及田常殺簡公而相齊國, 諸侯晏然弗討, 海內爭於戰功矣. 三國終之卒分晉, 田和亦滅齊而有之, 六國之盛自此始. 務在強兵並敵, 謀詐用而從衡短長之說起. 矯稱蜂出, 誓盟不信, 雖置質剖符猶不能約束也. 秦始小國僻遠, 諸夏賓之, 比於戎翟, 至獻公之後常雄諸侯. 論秦之德義不如魯詹之暴戾者, 量秦之兵不如三晉之強也, 然卒並天下, 非必險固便形埶利也..

2. 十二諸侯年表

史 記 表 . ​ ​ 2. 十二諸侯年表(십이제후연표) ​ 太史公讀春秋歷譜諜,至周厲王,未嘗不廢書而嘆也. 曰:鳴呼,師摯見之矣!紂為象箸而箕子唏. 周道缺,詩人本之衽席,關雎作. 仁義陵遲,鹿鳴刺焉。及至厲王,以惡聞其過,公卿懼誅而禍作,厲王遂奔于彘,亂自京師始,而共和行政焉. 是後或力政,彊乘弱,興師不請天子. 然挾王室之義,以討伐為會盟主,政由五伯,諸侯恣行,淫侈不軌,賊臣篡子滋起矣. 齊、晉、秦、楚其在成周微甚,封或百里或五十里. 晉阻三河,齊負東海,楚介江淮,秦因雍州之固,四海迭興,更為伯主,文武所褒大封,皆威而服焉. 是以孔子明王道,干七十餘君,莫能用,故西觀周室,論史記舊聞,興於魯而次春秋,上記隱,下至哀之獲麟, 約其辭文,去其煩重,以制義法,王道備,人事浹. 七十子之徒口受其傳指,為有所刺譏褒諱挹損之文辭不可以書見也. 魯君子左丘明懼弟子人人異端,各安其意,失其真..