史記 世家(사기세가) 30

第 三十. ​三王世家(삼왕세가)

史記 世家 第 三十. ​三王世家(삼왕세가) 「大司馬臣去病昧死再拜上疏皇帝陛下:陛下過聽,使臣去病待罪行閒. 宜專邊塞之思慮,暴骸中野無以報,乃敢惟他議以干用事者,誠見陛下憂勞天下, 哀憐百姓以自忘,虧膳貶樂,損郎員. 皇子賴天,能勝衣趨拜,至今無號位師傅官. 陛下恭讓不恤,群臣私望,不敢越職而言. 臣竊不勝犬馬心,昧死願陛下詔有司, 因盛夏吉時定皇子位. 唯陛下幸察. 臣去病昧死再拜以聞皇帝陛下.」 三月乙亥,御史臣光守尚書令奏未央宮. 制曰:「下御史.」 [“대사마(大司馬) 신(臣) 곽거병(霍去病)은 죽음을 무릅쓰고 재배(再拜)해 황제 폐하께 아뢰옵니다. 소인은 폐하의 과분한 은총을 받아 군에서 봉직하게 되었으니 마땅히 전심전력으로 변방 방어에 열중하고 설령 분골쇄신해 황야에서 죽어 없어진다고 해도 황상(皇上)의 은덕에 보답하지 못할 것입니다...

第 二十九. 五宗世家(오종세가)

史記 世家 ​ 第 二十九. 五宗世家(오종세가) ​ ​ ​孝景皇帝子凡十三人為王,而母五人,同母者為宗親. 栗姬子曰榮、德、閼于. 程姬子曰餘、非、端. 賈夫人子曰彭祖、勝. 唐姬子曰發. 王夫人兒姁子曰越、寄、乘、舜. [경제(景帝)의 아들 열세 명이 모두 왕으로 봉해졌는데, 그들은 각각 다섯 어머니에게서 나온 자식들이었다. 같은 어머니가 낳은 자식들을 일족(一族)으로 친다. 율희(栗姬)의 아들은 유영(劉榮), 유덕(劉德), 유알우(劉閼于)이고, ​정희(程姬)의 아들은 유여(劉餘), 유비(劉非), 유단(劉端)이다. 가부인(賈夫人)의 아들은 유팽조(劉彭祖), 유승(劉勝)이며, 당희(唐姬)의 아들은 유발(劉發)이고, 왕부인(王夫人) 아후(兒姁)의 아들은 유월(劉越), 유기(劉寄), 유승(劉乘), 유순(劉舜)이다.] 河閒獻王德..

第 二十八. 梁孝王世家(양효왕세가)

史記 世家 ​ 第 二十八. 梁孝王世家(양효왕세가) ​ ​ 梁孝王武者,孝文皇帝子也,而與孝景帝同母. 母,竇太后也. 孝文帝凡四男:長子曰太子,是為孝景帝;次子武;次子參;次子勝. [양 효왕(梁孝王) 유무(劉武)는 한 문제의 아들이며, 경제와 같은 어머니의 소생이다. 모친은 두태후이다. 한 문제에게는 모두 네 아들이 있었는데, 장자(長子)가 태자(太子), 바로 한 경제였고, 둘째 아들은 유무(劉武)였고, 셋째 아들은 유참(劉參)이었고, 넷째 아들은 유승(劉勝)이었다.] 孝文帝即位二年,以武為代王,以參為太原王,以勝為梁王. 二歲,徙代王為淮陽王. 以代盡與太原王,號曰代王. 參立十七年,孝文後二年卒,謚為孝王. 子登嗣立,是為代共王. 立二十九年,元光二年卒. [한 문제가 즉위한 지 2년, 유무를 대왕(代王)에, 유참을 태원왕(太原王)..

第 二十七.​ 絳侯周勃世家(강후주발세가)

史記 世家 ​ ​第 二十七.​ 絳侯周勃世家(강후주발세가) ​ ​ 絳侯周勃者,沛人也. 其先卷人,徙沛. 勃以織薄曲為生,常為人吹簫給喪事,材官引彊. [강후(絳侯) 주발(周勃)은 패현(沛縣) 사람이다. 그의 선조는 권현(卷縣) 사람으로 나중에 패현으로 이사왔다. 주발은 베틀을 짜고 누에치기로 생활을 유지하였으며, 항상 피리를 불고 다니면서 남의 초상을 치러 주었고 나중에는 강한 활을 당길 수 있는 재관(材官)이 되었다.] 高祖之為沛公初起,勃以中涓從攻胡陵,下方與. 方與反,與戰,卻適. 攻豐. 擊秦軍碭東. 還軍留及蕭. 復攻碭,破之. 下下邑,先登. 賜爵五大夫. 攻蒙、虞,取之. [한 고조 유방(劉邦)이 패공이 되어 막 봉기할 때, 주발은 중연(中涓)의 직위로 고조를 따라 호릉(胡陵)을 공격해 방여(方與)를 함락시켰다. 방..

第 二十六. 陳丞相世家(진승상세가)​

史記 世家 ​第 二十六. 陳丞相世家(진승상세가) ​ ​ ​陳丞相平者,陽武戶牖鄉人也. 少時家貧,好讀書,有田三十畝,獨與兄伯居. 伯常耕田,縱平使游學. [승상 진평(陳平)은 양무현(陽武縣)의 호유향(戶牖鄕) 사람이다. 그의 젊은 시절에 집은 가난했으나 책 읽기를 매우 좋아하였다. 재산은 30무(畝)의 땅이 있었는데, 그는 혼자서 형 진백(陳伯)과 함께 살았다. 진백은 늘 농사 일을 하면서도 진평에게는 마음 편히 다른 지방으로 가서 공부를 하게 하였다.] ​平為人長[大]美色. 人或謂陳平曰:「貧何食而肥若是?」 其嫂嫉平之不視家生產,曰:「亦食糠覈耳. 有叔如此,不如無有.」伯聞之,逐其婦而棄之. [진평은 기골이 장대하고 풍채가 좋았으므로 사람들 중에는 간혹 그에게 말하기를 : “집도 가난한데 무얼 먹었기에 이토록 살이 쪘는..

​第 二十五. 留侯世家(유후세가)

史記 世家 ​第 二十五. 留侯世家(유후세가) ​留侯張良者,其先韓人也. 大父開地,相韓昭侯、宣惠王、襄哀王. 父平,相釐王、悼惠王. 悼惠王二十三年,平卒. 卒二十歲,秦滅韓. [유후(留侯) 장량(張良)은 그 선조가 한(韓)나라 사람이다. 조부 희개지(姬開地)는 한나라의 소후(昭侯) 선혜왕(宣惠王), 양애왕(襄哀王) 때 재상을 지냈고, 아버지 희평(姬平)은 희왕(釐王), 도혜왕(悼惠王) 때 재상을 지냈다. 도혜왕 23년에 그 아버지 희평이 죽었고, 그 후 20년 진(秦)나라가 한나라를 멸망시켰다.] 良年少,未宦事韓. 韓破,良家僮三百人,弟死不葬,悉以家財求客刺秦王,為韓報仇,以大父、父五世相韓故. [당시 장량은 나이가 어려서 한나라에 벼슬을 하지는 않았으나, 한나라가 멸망했음에도 불구하고 그의 집에는 노복(奴僕)이 3백 명..

第 二十四. 曹相國世家(조상국세가)

史記 世家 ​第 二十四. 曹相國世家(조상국세가) ​平陽侯曹參者,沛人也. 秦時為沛獄掾,而蕭何為主吏,居縣為豪吏矣. 高祖為沛公而初起也,參以中涓從. 將擊胡陵、方與,攻秦監公軍,大破之. 東下薛,擊泗水守軍薛郭西. 復攻胡陵,取之. 徙守方與. 方與反為魏,擊之. 豐反為魏,攻之. 賜爵七大夫. [평양후(平陽侯) 조참(曹參)은 패현(沛縣) 사람이다. 조참은 진(秦)나라 때 패현의 옥연(獄掾)이 되었고, 소하(蕭何)는 주리(主吏)가 되었는데, 그들은 현(縣)에서 위세 있는 관리였다. 한고조(漢高祖)가 패공(沛公)이 되어 궐기할 때, 조참은 중연(中涓)의 신분으로 군대를 이끌고 호릉(胡陵), 방여(方與) 지방으로 진격해 진(秦)나라의 감공(監公)의 군대를 공격해 대파했다. 조참은 동쪽으로 설(薛)을 점령했고, 설의 외성 서쪽에서 ..

第 二十三. 蕭相國世家(소상국세가)

史記 世家 第 二十三. 蕭相國世家(소상국세가) 蕭相國何者,沛豐人也. 以文無害為沛主吏掾. 高祖為布衣時,何數以吏事護高祖. 高祖為亭長,常左右之. 高祖以吏繇咸陽,吏皆送奉錢三,何獨以五. 秦御史監郡者與從事,常辨之. 何乃給泗水卒史事,第一. [소상국(蕭相國) 하(何)는 패현(沛縣) 풍읍(豐邑) 사람이다. 그는 형법 율령(刑法律令)에 통달해 패현의 주리(主吏)의 하급 관리를 지냈다. 한 고조(漢高祖) 유방(劉邦)이 평민이었을 때 소하(蕭何)는 여러 차례 관리의 신분으로 유방을 돌보아 주었다. 유방이 정장(亭長)이 되었을 때에도 소하는 늘 그를 도와 주었다. 유방이 관리로서 함양(咸陽)으로 부역을 갔을 때, 다른 관리들은 그에게 3백전을 주었으나 소하만은 5백전을 주었다. 진(秦)나라의 어사(御史)가 공무를 감독하려고 지..

第 二十二. 齊悼惠王世家(제도혜왕세가)

史記 世家 ​ 第 二十二. 齊悼惠王世家(제도혜왕세가) ​ ​ ​齊悼惠王劉肥者,高祖長庶男也. 其母外婦也,曰曹氏. 高祖六年,立肥為齊王,食七十城,諸民能齊言者皆予齊王. 齊王,孝惠帝兄也. 孝惠帝二年,齊王入朝. 惠帝與齊王燕飲,亢禮如家人. 呂太后怒,且誅齊王. 齊王懼不得脫,乃用其內史勳計,獻城陽郡,以為魯元公主湯沐邑. 呂太后喜,乃得辭就國. 悼惠王即位十三年,以惠帝六年卒. 子襄立,是為哀王. [제 도혜왕(齊悼惠王) 유비(劉肥)는 고조 유방(劉邦)의 장남으로 서자이다. 그의 모친은 소실로, 조씨(曹氏)이다. 고조 6년, 유비를 제왕(齊王)으로 삼아 식읍 70여 성을 봉지(封地)로 주었으며, 백성들 중에서 제나라 말을 할 줄 아는 자들은 모두 제왕의 백성으로 귀속시켰다. ​제도혜왕은 천자인 혜제(惠帝)의 형이다. 혜제 2년, 제왕..

​第 二十一. 荊燕世家(형연세가)

史記 世家 ​第 二十一. 荊燕世家(형연세가) ​ ​ ​荊王劉賈者,諸劉,不知其何屬初起時. 漢王元年,還定三秦,劉賈為將軍,定塞地,從東擊項籍. [형왕(荊王) 유고(劉賈)는 유씨 일족이지만, 어느 유파에 속하는지 알 수 없다. 한왕(漢王) 원년, 한왕이 관중(關中)으로 돌아와 삼진(三秦)을 평정하였을 때 유고는 장군으로서 새지(塞地)를 평정한 후에, 고조 유방(劉邦)을 따라 동쪽으로 항우(項羽)를 공격하였다.] ​ 漢四年,漢王之敗成皋,北渡河,得張耳、韓信軍,軍修武,深溝高壘, 使劉賈將二萬人,騎數百, 渡白馬津入楚地,燒其積聚,以破其業,無以給項王軍食. ​已而楚兵擊劉賈,賈輒壁不肯與戰,而與彭越相保. [한왕 4년(기원전 203년), 한왕은 성고(成皐)에서 패하여 북쪽으로 황하를 건넜다. 장이(張耳)와 한신(韓信)의 군대를 얻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