史記 世家
第 二十一. 荊燕世家(형연세가)
荊王劉賈者,諸劉,不知其何屬初起時.
漢王元年,還定三秦,劉賈為將軍,定塞地,從東擊項籍.
[형왕(荊王) 유고(劉賈)는 유씨 일족이지만, 어느 유파에 속하는지 알 수 없다.
한왕(漢王) 원년, 한왕이 관중(關中)으로 돌아와 삼진(三秦)을 평정하였을 때
유고는 장군으로서 새지(塞地)를 평정한 후에, 고조 유방(劉邦)을 따라 동쪽으로 항우(項羽)를 공격하였다.]
漢四年,漢王之敗成皋,北渡河,得張耳、韓信軍,軍修武,深溝高壘,
使劉賈將二萬人,騎數百, 渡白馬津入楚地,燒其積聚,以破其業,無以給項王軍食.
已而楚兵擊劉賈,賈輒壁不肯與戰,而與彭越相保.
[한왕 4년(기원전 203년), 한왕은 성고(成皐)에서 패하여 북쪽으로 황하를 건넜다.
장이(張耳)와 한신(韓信)의 군대를 얻어, 수무(修武)에 주둔하여, 깊은 고랑을 파고 높은 성벽을 쌓았다.
한왕은 유고에게 보병 2만 명과 기병 수백명을 주어 백마진(白馬津)을 건너 초나라 땅으로 들어가게 하였다.
유고는 항우의 군량미와 군수물 등을 불태웠고, 후방의 보급로를 파괴하여, 군량미를 공급하지 못하게 하였다.
초나라의 군사가 유고를 공격하였으나, 유고는 성문을 굳게 걸어 잠그고 출전하지 않았으며,
팽월(彭越)과 서로 지원하며 보호하였다.]
漢五年,漢王追項籍至固陵,使劉賈南渡淮圍壽春. 還至,使人閒招楚大司馬周殷.
周殷反楚,佐劉賈舉九江,迎武王黥布兵,皆會垓下,共擊項籍.
漢王因使劉賈將九江兵,與太尉盧綰西南擊臨江王共尉. 共尉已死,以臨江為南郡.
[한왕 5년(기원전 202년), 한왕은 항우를 추격하여 고릉(固陵)에 이르자,
유고를 보내어 남으로 회수(淮水)를 건너 수춘(壽春)을 포위하게 하였다.
유고는 신속하게 수춘에 도달하였고, 비밀리에 사람을 보내어 초나라의 대사마(大司馬) 주은(周殷)을 초대하였다.
주은은 초나라를 배반하고 유고를 도와 구강(九江)을 공격하였다.
그가 무왕(武王) 경포(黥布)의 군대를 맞아들여 일제히 해하(垓下)에서 회합하였고, 공동으로 항우를 공격하였다.
한왕은 급히 유고를 보내어 구강의 군대를 통솔하게 하였고, 태위(太尉) 노관(盧綰)과 연합하여
서남쪽으로 임강왕(臨江王) 공위(共尉)를 공격하게 하였다.
공위가 죽은 후, 임강(臨江) 지역을 남군(南郡)으로 개편하였다.]
漢六年春, 會諸侯於陳, 廢楚王信, 囚之, 分其地為二國.
當是時也, 高祖子幼, 昆弟少, 又不賢, 欲王同姓以鎮天下,
乃詔曰:「將軍劉賈有功, 及擇子弟可以為王者. 」
群臣皆曰:「立劉賈為荊王, 王淮東五十二城;高祖弟交為楚王, 王淮西三十六城.」
因立子肥為齊王. 始王昆弟劉氏也.
[한왕 6년 봄, 한 고조는 진현(陳縣)에서 제후들을 회합시켜, 초왕 한신을 폐위시키고 그를 감금하였으며,
그의 영지를 두 나라로 나누었다.
당시 고조의 아들은 너무 어렸고, 형제는 많지 않았으며, 또한 현명하지도 못하였다.
고조는 동성(同姓)으로 천하를 안정시키고자 하였고, 마침내 조서를 내려 말하기를 :
“장군 유고는 많은 공을 세웠다. 마땅히 유씨 자제 중에서 왕이 될 만한 사람이다.”라고 하였다.
군신들은 모두 말하기를 : “유고를 형왕(荊王)으로 삼아 회동(淮東) 지역 52성을 다스리게 하시고,
아우이신 유교를 초왕(楚王)으로 삼아 회서(淮西) 지역 36성을 다스리게 하십시오.”라고 하였다.
이와 함께 아들인 유비(劉肥)를 제왕(齊王)으로 삼았다.
이로부터 비로소 유씨 형제들이 왕으로 봉해지기 시작하였다.]
高祖十一年秋, 淮南王黥布反, 東擊荊. 荊王賈與戰, 不勝, 走富陵, 為布軍所殺. 高祖自擊破布.
十二年,立沛侯劉濞為吳王,王故荊地. 燕王劉澤者,諸劉遠屬也.
高帝三年,澤為郎中.
高帝十一年,澤以將軍擊陳豨,得王黃,為營陵侯.
[고조 11년 가을, 회남왕(淮南王) 경포가 반란을 일으켜 동쪽으로 형(荊) 지역을 공격하였다.
형왕 유고는 경포와 교전하였으나 이기지 못하고 부릉(富陵) 지역으로 패주하였다가
결국 경포의 군대에 의하여 피살되었다. 고조는 친히 출정하여 경포의 군대를 무찔렀다.
고조 12년, 패후(沛侯) 유비(劉濞)를 오왕(吳王)으로 봉하여 형 지역을 다스리게 하였다.
연왕(燕王) 유택(劉澤)은 고조의 먼 친척이다.
고제 3년에 낭중(郎中)이 되었다.
고제11년, 장군으로서 고조를 따라 진희(陳豨)를 격파하였고,
진희의 장군인 왕황(王黃)을 생포하여 영릉후(營陵侯)에 봉해졌다.]
高后時,齊人田生游乏資,以畫干營陵侯澤. 澤大說之,用金二百斤為田生壽.
田生已得金,即歸齊.
二年,澤使人謂田生曰:「弗與矣.」
田生如長安,不見澤,而假大宅,令其子求事呂后所幸大謁者張子卿.
[고후(高后)가 집권하고 있을 때, 제나라 사람 전생(田生)은 유세(遊說)를 나갔다가 여비가 떨어지자,
계책을 바친다는 것을 빌미로 영릉후 유택에게 도움을 청하였다.
유택은 크게 기뻐하여 황금 200근을 전생에게 생일 선물조로 주었다.
전생은 황금을 얻자 곧바로 제나라로 돌아왔다.
이듬해, 유택은 사람을 보내어 전생에게 말하기를 : “나와 함께 하지 않을 것이냐?”라고 하였다.
전생은 장안으로 와서는 유택은 만나지 않고 큰 저택을 빌리고는, 아들로 하여금 여후를 모시며
은총을 입고 있는 대알자(大謁者) 장자경(張子卿)과의 면담을 추진하게 하였다.]
居數月,田生子請張卿臨,親修具. 張卿許往. 田生盛帷帳共具,譬如列侯. 張卿驚.
酒酣,乃屏人說張卿曰:「臣觀諸侯王邸弟百餘,皆高祖一切功臣.
今呂氏雅故本推轂高帝就天下,功至大,又親戚太后之重.
太后春秋長,諸呂弱,太后欲立呂產為[呂]王,王代. 太后又重發之,恐大臣不聽.
今卿最幸,大臣所敬,何不風大臣以聞太后,太后必喜. 諸呂已王,萬戶侯亦卿之有.
太后心欲之,而卿為內臣,不急發,恐禍及身矣.」張卿大然之,乃風大臣語太后.
[몇 개월이 지난 후, 전생의 아들은 장자경을 초대하고 전생이 친히 모신다고 하니, 장자경은 초대에 응한다고 하였다.
전생은 실내를 화려하게 장식하였고 호사스러운 집기를 갖추었는데, 그 규모가 마치 제후와 같았다.
장자경은 깜짝 놀랐다. 술자리가 무르익을 무렵, 전생은 좌우의 사람을 물리치고 장자경에게 말하기를 :
“신이 보기에 제후와 왕들의 사처(私處) 100여 군데가 모두 고조의 공신들 것입니다.
지금 여씨들은 줄곧 고조를 보좌하여 고조가 천하를 가지게 하였는데,
그들 중에는 공이 지대하고 또 태후의 존경을 받는 친척들도 있습니다.
태후는 춘추가 이미 높으시고, 여씨들의 역량은 너무나 약합니다.
태후께서는 여산(呂産)을 왕으로 봉하여 대(代) 지역을 다스리게 하고자 하십니다.
그러나 태후는 또 말을 꺼내시기가 어렵고, 아마 대신들도 듣지 않을 것입니다.
지금 경께서 가장 은총을 입고 계시고, 대신들도 경을 존경하고 있는데,
어찌 대신들에게 은근히 권하여 여씨를 왕으로 봉하게 하고
그 일이 태후에게 알려지도록 하지 않습니까? 태후께서는 틀림없이 기뻐하실 것입니다.
여씨들이 왕이 되면 만호후(萬戶侯) 또한 반드시 경의 것입니다.
태후는 반드시 하고자 하실 것입니다. 경은 신하의 몸입니다.
서두르지 않으시면 아마 화가 미칠 것입니다.”라고 하자. 장자경은 그 말이 크게 옳다고 여겼고,
곧 여씨가 왕으로 봉해지는 것을 동의하도록 대신들에게 권유하였고, 아울러 태후에게 보고하였다.]
太后朝,因問大臣. 大臣請立呂產為呂王. 太后賜張卿千斤金,張卿以其半與田生.
田生弗受,因說之曰:「呂產王也,諸大臣未大服. 今營陵侯澤,諸劉,為大將軍,獨此尚觖望.
今卿言太后,列十餘縣王之,彼得王,喜去,諸呂王益固矣.」張卿入言,太后然之.
乃以營陵侯劉澤為瑯邪王. 瑯邪王乃與田生之國.
田生勸澤急行,毋留. 出關,太后果使人追止之,已出,即還.
[태후는 조회 때에 대신들에게 물었다. 대신들은 여산을 여왕(呂王)으로 봉할 것을 주청하였다.
태후는 장자경에게 황금 1,000근을 하사하였다. 장자경은 그 반을 전생에게 주었으나 전생은 받지 않았고,
기회를 틈타 말하기를 : “여산이 왕이 되었으나, 대신들은 심복하지 않을 것입니다.
지금 영릉후 유택은 유씨의 일족으로 대장군을 맡고 있으나, 자신만이 왕이 되지 못하여 실망하고 있을 것입니다.
지금 경께서 태후에게 권하여 10여 개의 현을 쪼개어 그를 왕으로 봉하면,
그는 왕의 호칭을 받고 크게 기뻐할 것이고, 여러 여씨 왕들도 지위가 공고해질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장자경은 입궐하여 태후에게 아뢰었고, 태후도 그렇다고겨 곧 영릉후 유택을 낭야왕(琅邪王)에 봉하였다.
낭야왕은 곧 전생과 함께 봉지로 갔다. 전생은 유택에게 급히 가야 하며, 머뭇거리지 말라고 권하였다.
함곡관(函谷關)을 나서는데, 태후가 과연 사람을 보내어 그들을 추격하여 저지시키고자 하였다.
유택은 이미 함곡관을 빠져 나와서는 즉각 봉지로 돌아가버렸다.]
及太后崩,瑯邪王澤乃曰:「帝少,諸呂用事,劉氏孤弱.」乃引兵與齊王合謀西,欲誅諸呂.
至梁,聞漢遣灌將軍屯滎陽,澤還兵備西界,遂跳驅至長安. 代王亦從代至.
諸將相與瑯邪王共立代王為天子. 天子乃徙澤為燕王,乃復以瑯邪予齊,復故地.
澤王燕二年,薨,謚為敬王. 傳子嘉,為康王.
[태후가 죽자 낭야왕 유택이 말하기를 : “황제가 어려서 여씨들이 권력을 잡았고, 유씨들의 힘은 약해졌다.”하였다 .
이에 그는 군사를 이끌고 제왕(齊王)과 연합하여 서쪽으로 진격하여 여씨들을 주살할 요량이었다.
양(梁) 지역에 도달하였을 때, 그는 한 조정이 관영(灌嬰) 장군을 보내어 형양(滎陽)에 주둔시키고 있다고 들었다.
그는 곧 군사를 돌려 본국의 서쪽 경계를 수비하게 하였고, 혼자서 말을 달려 장안으로 급히 갔다.
이때 대왕(代王) 유항(劉恒) 역시 대(代)나라로부터 장안으로 왔다.
여러 장군들과 대신들은 낭야왕과 함께 대왕 유항을 천자로 옹립하였다.
천자는 낭야왕 유택을 연왕(燕王)으로 새로 봉하였고,
낭야 지역을 제나라로 돌려주어 제나라 본래의 땅을 회복하도록 하였다.
유택은 연왕이 되고 나서 2년 후에 죽었으니, 시호를 경왕(敬王)이라고 하였다.
왕위는 아들인 유가(劉嘉)에게 전해졌으니, 그가 바로 강왕(康王)이다.]
至孫定國,與父康王姬姦, 生子男一人. 奪弟妻為姬. 與子女三人姦.
定國有所欲誅殺臣肥如令郢人,郢人等告定國,定國使謁者以他法劾捕格殺郢人以滅口.
至元朔元年,郢人昆弟復上書具言定國陰事,以此發覺.
詔下公卿,皆議曰:「定國禽獸行,亂人倫, 逆天,當誅.」 上許之. 定國自殺,國除為郡.
[유택의 손자 유정국(劉定國)에 이르러, 그는 부친 강왕의 희첩과 통간(通奸)하여 아들 하나를 낳았다.
또 계수를 강탈하여 첩으로 삼았다. 또 세 딸과 통간하였다.
유정국은 천자의 신하이며 비여(肥如)의 현령인 영인(郢人)을 죽이려고 하였는데,
그 이유는 영인 등이 자신을 조정에 고해 바치고자 하였기 때문이었다.
정국은 사람을 보내어 다른 법률을 적용하여 영인을 잡아 죽임으로써 입을 막았다.
원삭(元朔) 원년에 이르러 영인의 형제가 다시 상서를 올려 유정국의 추악한 죄상을 알림으로써
정국의 죄상은 폭로되었다. 천자는 조서를 내려 대신들에게 그 일을 의론하게 하자, 모두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정국의 금수와 같은 행위는 인륜을 어지럽히고 하늘을 거역한 것이므로 당연히 그를 주살하여야 마땅합니다.”
천자는 그 건의를 받아들였다. 이에 정국은 자살하였고, 나라는 없어지고 군(郡)이 되었다.]
太史公曰:荊王王也,由漢初定,天下未集,故劉賈雖屬疏,然以策為王,填江淮之閒.
劉澤之王,權激呂氏,然劉澤卒南面稱孤者三世. 事發相重,豈不為偉乎!
[태사공은 말하였다.
“형왕 유고가 왕으로 봉해진 것은 한(漢) 왕조가 건립된지 오래되지 않았고 천하가 안정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따라서 유고는 비록 유씨의 먼 친척이었지만 계책으로써 왕이 될 수 있었고,
양자강과 회수 지역을 평정하고 안정시켰다.
유택(劉澤)이 왕이 된 까닭은 권모술수로 먼저 여씨를 격려하였기 때문이었다.
그렇지만 그는 끝내 남면(南面)하는 왕이 될 수 있었고 삼대에까지 왕위를 물려주었다.
유택은 전생(田生)을 이용하여 장자경(張子卿)으로 하여금 여후(呂后)를 고무시켜 여씨를 왕으로 봉하게 하였고,
그에 따라 자신도 신임을 받아 왕이 되었으니, 어찌 비범한 일이 아닌가!”]
※ 原 文 . 【 中國哲學書電子化計劃 . 筆寫本 】
原 文 飜 譯 者 德庤 / 李 斗 振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