史記 世家(사기세가)/25. 留侯世家

​第 二十五. 留侯世家(유후세가)

덕치/이두진 2021. 7. 12. 19:21

 

            史記 世家

 

    ​第 二十五.  留侯世家(유후세가)

 


留侯張良者,其先韓人也.  大父開地,相韓昭侯、宣惠王、襄哀王.

父平,相釐王、悼惠王.  悼惠王二十三年,平卒.  卒二十歲,秦滅韓.

[유후(留侯) 장량(張良)은 그 선조가 한(韓)나라 사람이다.

조부 희개지(姬開地)는 한나라의 소후(昭侯) 선혜왕(宣惠王), 양애왕(襄哀王) 때 재상을 지냈고,
아버지 희평(姬平)은 희왕(釐王), 도혜왕(悼惠王) 때 재상을 지냈다.
도혜왕 23년에 그 아버지 희평이 죽었고, 그 후 20년 진(秦)나라가 한나라를 멸망시켰다.]

 

良年少,未宦事韓.

韓破,良家僮三百人,弟死不葬,悉以家財求客刺秦王,為韓報仇,以大父、父五世相韓故.

[당시 장량은 나이가 어려서 한나라에 벼슬을 하지는 않았으나, 한나라가 멸망했음에도 불구하고

그의 집에는 노복(奴僕)이 3백 명이나 있었다. 이 무렵 그는 동생이 죽었는데도 크게 장례를 치르기는 커녕

오히려 모든 가산을 다 털어 진시황제(秦始皇帝)를 죽일 자객을 구해서 한나라의 원수를 갚고자 했는데,

그것은 곧 조부와 부친이 한나라의 5대 왕에 걸쳐서 재상을 지냈기 때문이었다.]

 

良嘗學禮淮陽.  東見倉海君.  得力士,為鐵椎重百二十斤.

秦皇帝東游 良與客狙擊秦皇帝博浪沙中, 誤中副車.

秦皇帝大怒,大索天下,求賊甚急,為張良故也.  良乃更名姓,亡匿下邳.

[장량은 일찍이 회양(淮陽)에서 예(禮)를 배웠고, 동방으로 가서 창해군(倉海君)을 찾아뵙고

힘센 대력사(大力士) 한 사람을 찾아내어 120근의 철퇴 하나를 만들었다. 그리고 진시황이 동방을 순시할 때,

장량과 대력사는 박랑사에 매복했다가 진시황을 저격했으나 잘못해 뒤따르는 시종의 수레를 맞추고 말았다.
이에 진시황은 크게 노하여 전국 각지를 대거 수색해 긴급히 자객들을 붙잡아 들였는데,

이는 완전히 장량 때문이었다. 장량은 이에 이름을 바꾸고 하비(下邳)로 달아나 숨었다.]

 

良嘗閒從容步游下邳圯上, 有一老父, 衣褐, 至良所, 直墮其履圯下,

顧謂良曰:「孺子, 下取履!」良鄂然, 欲毆之. 為其老,彊忍,下取履.

父曰:「履我!」良業為取履,因長跪履之.  父以足受,笑而去.  良殊大驚,隨目之.

[장량이 한번은 한가한 틈을 타 하비의 다리 위를 천천히 산책했는데, 한 노인이 거친 삼베옷을 걸치고
그에게 다가와 일부러 신을 다리 밑으로 떨어뜨리고는 장량을 돌아보며 말하기를 : 

“얘야, 내려가서 내 신을 주워 오너라!”라고 하자, 장량은 당황해하며 한 대 때려 주고 싶었으나

그 사람이 노인이었으므로 억지로 참고 다리 아래로 내려가서 주워 왔다. 

그러자 노인이 이번에는 또 명령하기를 : “나에게 신겨라!”라고 하였다.

장량은 기왕에 노인을 위해서 신을 주워 왔기에 윗몸을 곧게 세우고 꿇어앉아 신을 신겨 주었다.
노인은 발을 뻗어 신을 신기게 하고는 웃으며 가버렸다. 장량은 몹시 놀라 노인이 가는 대로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父去里所,復還,曰:「孺子可教矣。後五日平明,與我會此.」良因怪之,跪曰:「諾.」

五日平明,良往.  父已先在,怒曰:「與老人期,後,何也?」去,曰:「後五日早會.」

[노인은 1리쯤 가다가 다시 돌아와서 말하기를 : “너 이놈, 참으로 가르칠 만하구나!

닷새 뒤 새벽에 여기서 나와 만나자꾸나.”라고 하였다.
그러자 장량은 더욱 괴이하게 여기며 꿇어앉아 : “예” 하고 대답하였다.

그리고 닷새째 되는 날 새벽에 장량이 그곳으로 가보니 노인은 벌써 나와 있었다.
노인은 화를 내며 “늙은이와 약속을 하고서 뒤늦게 오다니 어찌 된 노릇이냐?”라고 하고는 되돌아가면서

“닷새 뒤에 좀 더 일찍 다시 오너라.”라고 하였다.] 

 

五日雞鳴,良往.  父又先在,復怒曰:「後,何也?」去,曰:「後五日復早來.」

五日,良夜未半往.  有頃,父亦來,喜曰:「當如是.」

出一編書,曰:「讀此則為王者師矣.  後十年興.  十三年孺子見我濟北,穀城山下黃石即我矣.」

遂去, 無他言, 不復見.

[닷새가 지나 새벽닭이 울 때 장량은 다시 그곳으로 갔다.

노인은 또 먼저 그곳에 와 있었으며, 다시 화를 내며 말하기를 : “또 늦게 오다니, 어찌 된 거냐?”라고 하고,
그곳을 떠나가면서 : “닷새 뒤에 좀 더 일찍 오너라.”라고 했다. 다시 닷새 뒤 장량은 밤이 반도 지나지 않아서

그곳으로 갔다. 그랬더니 조금 뒤 노인도 그곳으로 와서는 기뻐하며 “마땅히 이렇게 해야지”라고 했고,
책 한 권을 내놓으며 말하기를 : “이 책을 읽으면 제왕의 스승이 될 수 있으며, 10년 후에는 그 뜻을 이룰 것이다.
그리고 13년 뒤에 너는 또 제수(濟水) 북쪽에서 나를 만날 수 있을 것인데,

곡성산(穀城山) 아래의 누런 돌[黃石]이 바로 나이니라”라고 하고는,
그곳을 떠나가며 더 이상 다른 말을 하지 않았으며, 그러고 나서 다시는 그를 볼 수가 없었다.]

 

旦日視其書, 乃太公兵法也.  良因異之, 常習誦讀之.  居下邳, 為任俠.  項伯常殺人, 從良匿.

後十年,陳涉等起兵,良亦聚少年百餘人.  景駒自立為楚假王,在留.  良欲往從之,道還沛公.

沛公將數千人,略地下邳西,遂屬焉.  沛公拜良為廄將.

良數以太公兵法說沛公,沛公善之,常用其策.  良為他人者,皆不省.

[날이 밝아 그 책을 보았더니 바로 『태공병법(太公兵法)』이었다. 이리하여 장량은 그 책을 기이하게 여겨

늘 익히고 외워가며 읽었다.  장량이 하비에 있을 때 협객이 되었는데, 항백(項伯)이 일찍이 사람을 죽인 일이 있어

장량을 따라다니며 숨어 지냈다. 10년 뒤 진섭(陳涉) 등이 봉기하자 장량도 청년 1백여 명을 모았다.

경구(景駒)는 자립해 초나라의 대리왕(代理王)이 되어 유현(留縣)에 있었다.
그래서 장량은 그곳으로 가서 그를 따르려고 했는데, 도중에 패공을 만났다.
이때 패공은 수하에 수천 명을 거느리고 하비 서쪽의 땅을 공격해 점령하고 있었으므로

장량은 마침내 패공을 따라갔다. 이에 패공은 장량을 구장(廐將)으로 임명했다.

장량이 자주 『태공병법』으로 패공에게 유세하자 패공이 그를 좋게 여겨 항상 그의 계책을 취하곤 했다.
장량은 또 다른 사람에게도 『태공병법』을 말했으나 그들은 모두 이해하지 못했다.]

 

良曰:「沛公殆天授.」故遂從之,不去見景駒.  及沛公之薛,見項梁.  項梁立楚懷王.

良乃說項梁曰:「君已立楚後,而韓諸公子橫陽君成賢,可立為王,益樹黨.」

項梁使良求韓成,立以為韓王.

[장량은 말하기를 : “패공은 아마도 하늘이 낸 인물일 것이다.”라고 하며, 패공을 따랐고 경구를 보러 가지 않았다. 

패공이 설읍(薛邑)으로 가서 항량(項梁)을 만났다. 항량은 초회왕(楚懷王)을 옹립했다.
장량은 이에 항량에게 말하기를 : “군께서 이미 초나라 후예를 세웠는데, 한나라의 여러 공자 가운데

횡양군(橫陽君) 한성이 가장 현명하니 그를 왕으로 세워 함께 할 세력을 늘리시는 것이 좋겠습니다.”라고 하니,

항량이 장량에게 한성을 찾아 가게 하여 한성을 한왕(韓王)으로 세웠다.]

以良為韓申徒,與韓王將千餘人西略韓地,得數城,秦輒復取之,往來為游兵潁川.

沛公之從雒陽南出轘轅,良引兵從沛公,下韓十餘城,擊破楊熊軍.

沛公乃令韓王成留守陽翟,與良俱南,攻下宛,西入武關.

[그리고 장량을 한나라 사도로 삼아 한왕을 따르게 했다. 또 1천여 명의 군사를 거느리고 서쪽으로 나아가
한나라 원래의 땅을 공략하게 하여 몇 개의 성을 빼앗았지만, 번번이 진(秦)나라가 그 성을 다시 탈환해 갔다.
이리하여 한나라 군대는 영천(潁川) 땅에서 왔다갔다 옮겨 다니며 싸움을 하는 처지가 되었다.
패공이 낙양(雒陽)에서 남으로 환원산(轘轅山)으로 나아갔을 때,

장량은 군대를 거느리고 패공을 따라 한나라 땅 10여 성을 무너뜨리고 양웅(楊熊)의 군대를 격파했다.
패공은 이에 한왕(韓王) 한성으로 하여금 남아서 양책(陽翟)을 지키게 하고,

자신은 장량과 함께 남하해 원(宛)을 격파하고 서쪽 무관(武關)으로 들어갔다.]

 

沛公欲以兵二萬人擊秦嶢下軍,良說曰:「秦兵尚彊,未可輕. 臣聞其將屠者子,賈豎易動以利.

願沛公且留壁,使人先行,為五萬人具食,益為張旗幟諸山上,為疑兵,令酈食其持重寶啗秦將.」

[패공이 병사 2만 명으로 요관(嶢關)을 지키는 진(秦)나라 군대를 치려고 하자, 장량이 말하기를 :
" 진나라 군대가 아직은 강성하니 가볍게 볼 수가 없습니다. 제가 듣건대 그들의 장수는 백정의 자식이라고 하니,

장사꾼은 돈이나 재물로 쉽게 움직일 수 있습니다. 원컨대 패공께서는 잠시 진영 내에 머물러 계시고,
사람을 시켜 먼저 가서 5만 명의 식량을 준비하고, 또 모든 산 위에 많은 깃발을 세워 의병(疑兵)으로 삼게 하시고,

역이기(酈食其)로 하여금 많은 보물을 가져다가 진나라 장수를 매수하게 하소서. "라고 하였다.]

 

秦將果畔,欲連和俱西襲咸陽,沛公欲聽之.

良曰:「此獨其將欲叛耳,恐士卒不從. 不從必危,不如因其解擊之.」

沛公乃引兵擊秦軍,大破之. (遂)[逐]北至藍田,再戰,秦兵竟敗. 遂至咸陽,秦王子嬰降沛公.

[진나라 장수가 과연 진나라를 배반하고 패공과 연합해 서쪽으로 함양(咸陽)을 공격하려고 했다.
이에 패공이 곧 진나라 장수의 요구를 들어주려고 하자, 장량이 말하기를 :

다만 저 장수는 진나라를 배반하려고 합니다만, 신은 그 병졸들이 따르지 않을까 두렵습니다.

만약 따르지 않는다면 위험하오니 그들이 태만해진 틈을 타서 공격하는 것만 못합니다.”라고 하였다.
패공이 이에 군사를 이끌고 진나라 군대를 공격해 대파하고, 패잔병을 쫓아 남전(藍田)에 이르러 다시 싸우니

진나라 군대는 마침내 붕괴되고 말았다. 그리고 드디어 함양에 다다르니 진나라 왕 자영이 패공에게 항복했다.]

 

沛公入秦宮,宮室帷帳狗馬重寶婦女以千數,意欲留居之.  樊噲諫沛公出舍,沛公不聽.

良曰:「夫秦為無道,故沛公得至此.  夫為天下除殘賊,宜縞素為資.

今始入秦,即安其樂,此所謂『助桀為虐』

且『忠言逆耳利於行,毒藥苦口利於病』,願沛公聽樊噲言.」 沛公乃還軍霸上.

[패공은 진나라 궁궐로 들어가서 궁실, 휘장, 개와 말, 값진 보배, 부녀자 등이

수천을 헤아릴 정도로 많은 것을 보고 내심 그곳에 머물고 싶어 했다.
번쾌(樊噲)가 패공에게 궁궐 밖으로 나가기를 충간했으나 패공이 듣지 않았다.

이에 장량이 말하기를 : " 무릇 진나라가 무도했기 때문에 패공께서 여기에 오실 수가 있었습니다.
모름지기 천하 사람을 위해 잔적(殘賊)을 제거하시려면 마땅히 검소함을 바탕으로 삼아야 합니다.
그런데 비로소 진나라에 들어온 지금 바로 그 즐거움을 편안히 누리신다면

이는 곧 이른바 '걸(桀)을 도와 포악한 짓을 저지른다’라고 하는 것입니다.
또 '충성스러운 말은 귀에 거슬리지만 행실에 이롭고, 독한 약은 입에 쓰지만 병에 이롭다'라고 했습니다.
원컨대 패공께서는 번쾌의 말을 들으소서. "라고 하였다.  이에 패공은 곧 패상(霸上)으로 환군했다.]

 

項羽至鴻門下,欲擊沛公,項伯乃夜馳入沛公軍,私見張良,欲與俱去.

良曰:「臣為韓王送沛公,今事有急,亡去不義.」乃具以語沛公.

沛公大驚,曰:「為將奈何?」良曰:「沛公誠欲倍項羽邪?」

沛公曰:「鯫生教我距關無內諸侯,秦地可盡王,故聽之.」

良曰:「沛公自度能卻項羽乎?」沛公默然良久,曰:「固不能也. 今為奈何?」

良乃固要項伯.  項伯見沛公.  沛公與飲為壽,結賓婚.

令項伯具言沛公不敢倍項羽,所以距關者,備他盜也.  及見項羽後解,語在項羽事中.

[항우가 홍문(鴻門) 아래에 이르러 패공을 공격하려고 하자,

항백이 밤중에 패공의 군영으로 달려 들어와 사사로이 장량을 만나 함께 달아나자고 했다.
그러자 장량이 말하기를 : “ 저는 한왕(韓王)을 대신해 패공을 호송하고 있는데,

지금 일이 위급하다고 해 도망을 가는 것은 의롭지 못합니다.”라고 하며. 그리고 모든 사정을 패공에게 아뢰었다.

패공이 크게 놀라며 말하기를 : “ 장차 이 일을 어떻게 해야겠소?”라고 하자.
장량이 말하기를 : “ 패공께서는 진실로 항우를 배반하려고 하십니까?”라고 하였다,
패공이 말하기를 : “ 소인배들이 나더러 함곡관(函谷關)을 막고 다른 제후의 군대를 받아들이지 않으면
진나라 땅 전부를 차지해 왕이 될 수 있다고 하기에 내가 그 말을 따른 것이오.”라고 하자.
장량이 말하기를 : “ 패공께서 스스로 헤아리시기에 항우를 물리칠 수 있겠습니까?”라고 하였다,
패공은 한참 동안 묵묵히 있다가 말하기를 : “ 물론 물리칠 수 없소. 지금 당장 어떻게 하면 되겠소? ”라고 하였다.
장량은 이에 굳이 항백을 청해 패공과 만나게 하였다.

그리하여 항백이 와서 패공을 만나자 패공은 그와 함께 술을 마시며 축수(祝壽)하고 서로 친구가 됨과,
아울러 인척의 관계를 맺었다. 그리고는 항백에게 패공은 항우를 감히 배반하지 않았으며,
함곡관을 지킨 것은 다른 도적들을 막기 위한 것이었음을 자세히 이야기하게 했다.
나중에 패공이 항우를 만난 후 두 사람은 화해를 했는데, 그 이야기는 「항우본기(項羽本紀)」에 기록되어 있다.]

 

漢元年正月,沛公為漢王,王巴蜀.  漢王賜良金百鎰,珠二斗,良具以獻項伯.

漢王亦因令良厚遺項伯, 使請漢中地.

項王乃許之,遂得漢中地.  漢王之國,良送至襃中,遣良歸韓.

良因說漢王曰:「王何不燒絕所過棧道,示天下無還心,以固項王意.」

乃使良還.  行,燒絕棧道.

[한(漢)나라 원년(元年) 정월, 패공은 한왕(漢王)이 되어 파(巴), 촉(蜀)을 통치했다.
한왕은 장량에게 황금 1백 일(溢)과 진주 2말을 상으로 내렸는데, 장량은 그것을 모두 항백에게 바쳤다.
그러자 한왕 역시 장량을 시켜 많은 재물을 항백에게 주면서, 한중(漢中) 땅을 달라고 항우에게 부탁하게 했다.
그리고 항왕(項王)이 이를 허락함으로써 마침내 한중 땅을 얻게 되었다.

한왕이 자신의 봉국(封國)으로 갈 때, 장량이 배웅해 포중(褒中)에 이르자 장량을 한(韓)나라로 돌아가게 했다.
장량이 이에 한왕에게 권해 말하기를 : “ 대왕께서는 어찌해 지나가는 곳의 잔도(棧道)를 불태워 끊어서

천하 사람들에게 동쪽으로 돌아올 뜻이 없음을 보여줌으로써 항왕의 마음을 안정시키지 않으십니까?”라고 하자,
한왕은 장량을 한(韓)나라로 돌아가게 하고 자신은 앞으로 나아가면서 지나온 잔도를 모두 불태워 끊어버렸다.]

 

良至韓,韓王成以良從漢王故,項王不遣成之國,從與俱東.

良說項王曰:「漢王燒絕棧道,無還心矣.」乃以齊王田榮反,書告項王.

項王以此無西憂漢心,而發兵北擊齊.

項王竟不肯遣韓王,乃以為侯,又殺之彭城.  良亡,間行歸漢王,漢王亦已還定三秦矣.

[장량이 한(韓)나라에 이르렀을 때, 일찍이 장량이 한왕(漢王)을 따라간 것 때문에

항왕은 한왕(韓王) 한성을 그 봉국(封國)으로 돌려보내지 않고 자신을 따라 함께 동진하게 했다.

이에 장량이 항왕에게 말하기를 : “한왕(漢王)은 잔도를 태워 끊어버렸으니 돌아올 마음이 없습니다.”라고 하였다.
그리고 장량은 또 제왕(齊王) 전영(田榮)이 모반했다는 사실을 편지로 항왕에게 아뢰었다.
이리하여 항왕은 서쪽의 한왕(漢王)을 걱정하는 마음이 없어졌으며, 곧 군대를 내어 북쪽으로 제나라를 공격했다. 

항왕은 끝내 한왕(韓王)을 돌려보내려고 하지 않았고, 그를 다시 후(侯)에 봉했다가 팽성(彭城)에서 살해했다. 

장량은 달아나서 샛길을 택해 한왕(漢王)에게로 돌아갔다. 이때 한왕도 역시 이미 회군해 삼진(三秦)을 평정했다.]

 

復以良為成信侯,從東擊楚.  至彭城,漢敗而還.

至下邑,漢王下馬踞鞍而問曰:「吾欲捐關以東等棄之,誰可與共功者?」

良進曰:「九江王黥布,楚梟將,與項王有郄;彭越與齊王田榮反梁地:此兩人可急使.

而漢王之將獨韓信可屬大事,當一面. 即欲捐之,捐之此三人,則楚可破也.」

[한왕은 다시 장량을 성신후(成信侯)로 봉했고 동쪽으로 초나라를 공격하는 데 따르게 했다.
그러나 팽성에 이르러 한나라 군대는 패해 돌아왔다. 하읍(下邑)에 이르자,

한왕이 말에서 내려 말안장에 기대어 묻기를 : “내가 함곡관 동쪽을 떼어서 상으로 주고자 하는데,

누가 나와 통일 천하 건립의 대공(大功)을 함께 할 수 있겠는가?”라고 하자,
장량이 말하기를 : “구강왕(九江王) 경포(黥布)는 초나라의 맹장이나 항왕과 사이가 좋지 않고,
팽월은 제왕 전영과 더불어 양(梁) 땅에서 반란을 일으켰으니 이 두 사람을 급히 써야 합니다.
그리고 대왕의 장수들 중에는 한신(韓信)만이 큰일을 맡기면 한 방면을 담당할 수가 있습니다. 
혹시 그 지역을 떼어 내 상으로 주고자 하신다면 이 세 사람에게 주면 

초나라를 격파할 수가 있습니다”라고 하였다.]

 

漢王乃遣隨何說九江王布,而使人連彭越.

及魏王豹反,使韓信將兵擊之,因舉燕、代、齊、趙.  然卒破楚者,此三人力也.

張良多病,未嘗特將也,常為畫策,時時從漢王.

[한왕이 이에 수하(隧何)를 보내어 구강왕 경포를 설득하게 했고, 또 팽월에게도 사람을 보내어 연락하게 하였다.

그리고 위왕(魏王) 표(豹)가 반란을 일으키자 한왕은 곧 한신을 시켜 군사를 이끌고 가서 그를 치게 했고,
그 기세를 몰아 연나라, 대(代)나라, 제나라, 조나라 땅을 모두 점령하게 하였다.

그리하여 마침내 초나라를 격파한 것은 바로 이 세 사람의 힘 때문이었다.

장량은 병이 많았기 때문에 일찍이 독자적으로 군대를 통솔한 적은 없었고,

늘 계책을 내는 신하가 되었으며 때때로 한왕을 수행하였다.]

 

漢三年,項羽急圍漢王滎陽,漢王恐憂,與酈食其謀橈楚權.

食其曰:「昔湯伐桀,封其後於杞. 武王伐紂,封其後於宋.

今秦失德棄義,侵伐諸侯社稷,滅六國之後,使無立錐之地.

陛下誠能復立六國後世,畢已受印,此其君臣百姓必皆戴陛下之德,莫不鄉風慕義,願為臣妾.

德義已行,陛下南鄉稱霸,楚必斂衽而朝.」 漢王曰:「善. 趣刻印,先生因行佩之矣.」

[한나라 3년, 항우가 급히 형양(滎陽)에서 한왕을 포위하자,

한왕이 두려워하고 걱정하며 역이기와 함께 초나라의 권세를 약화시키려고 했다.
역이기가 말하기를 : “ 옛날 은(殷)나라 탕왕(湯王)은 하(夏)나라 걸왕(桀王)을 토벌하고

그 후손을 기(杞)나라에 봉해 주었고, 주(周)나라 무왕(武王)은 은나라 주왕(紂王)을 토벌하고

그 후손을 송나라에 봉해 주었습니다.  지금 진(秦)나라가 덕을 잃고 도의를 저버리고

각 제후국을 침입해 토벌하고 6국의 후대를 끊어버려 그들에게 송곳 하나 세울 곳이 없게 했습니다.
대왕께서 진실로 6국의 후손을 복위시켜 그들 모두에게 대왕의 관인(官印)을 받게 하면,
그 나라의 군신과 백성이 반드시 대왕의 은덕을 우러러 받들게 될 것이고, 대왕의 덕의(德義)를 흠모해

마지않을 것이며, 대왕의 신하와 백성이 되기를 원할 것입니다. 덕의가 행해지면 대왕께서는 남면(南面)해

패왕(覇王)이라 불릴 것이고, 초나라는 반드시 옷깃을 여미고 조회하러 올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그러자 한왕이 말하기를 : “좋소. 급히 관인을 새길 것이니 선생이 직접 6국에 가지고 가시오.”라고 하였다.]

 

食其未行,張良從外來謁.  漢王方食,曰:「子房前!客有為我計橈楚權者.」

其以酈生語告,曰:「於子房何如?」良曰:「誰為陛下畫此計者?陛下事去矣.」

漢王曰:「何哉?」張良對曰:「臣請藉前箸為大王籌之.」

曰:「昔者湯伐桀而封其後於杞者,度能制桀之死命也.  今陛下能制項籍之死命乎?」

曰:「未能也.」

[역이기가 떠나기 전에 장량이 마침 외지에서 돌아와 한왕을 뵈었다.
한왕이 마침 식사를 하면서 장량에게 말하기를 : “자방(子房)은 어서 들어오시오!

손님 가운데 나를 위해 초나라 권세를 약하게 할 계책을 낸 사람이 있었소”라고 하고는,
역이기의 말을 다 장량에게 이르고 말하기를 : “자방은 어떻게 생각하오?”라고 하자.
장량이 대답하기를 : “누가 대왕을 위해 이런 계획을 세웠습니까? 이 계획대로 하면 가망이 없습니다.”라고 하였다,

한왕이 묻기를 : “무엇 때문이오?” 라고 하자.
장량이 대답하기를 : “ 청컨대 앞에 있는 젓가락을 빌려주시면 대왕을 위해 당면한 형세를 하나하나 

따져보겠습니다”  이어서 말하기를 : “ 옛날 은나라 탕왕이 하나라 걸왕을 토벌하고서 그 후손들을 기나라에 

봉해 준 것은 걸왕을 사지(死地)에 몰아넣을 수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지금 대왕께서는 항우를 사지에 몰아넣으실 수 있습니까?”라고 하자, 

한왕이 대답하기를 : “할 수 없소”라고 하였다.]

 

「其不可一也.  武王伐紂封其後於宋者,度能得紂之頭也. 今陛下能得項籍之頭乎?」

曰:「未能也.」

[장량이 말하기를 : “이것이 6국의 후손을 봉하는 것이 불가(不可)한 첫 번째 이유입니다.
주무왕이 은나라 주왕을 토벌하고 그 후손을 송나라에 봉해 준 것은 은나라 주왕의 머리를 얻을 수 있다고

생각해서입니다. 지금 대왕께서는 항우의 머리를 얻으실 수 있습니까?”라고 하자,
한왕은 대답하기를 : “얻을 수 없소”라고 하였다.]

 

「其不可二也.  武王入殷,表商容之閭,釋箕子之拘,封比干之墓.

今陛下能封聖人之墓,表賢者之閭,式智者之門乎?」

曰:「未能也.」

[이에 장량이 말하기를 : “ 이것이 그 불가한 두 번째 이유입니다.
무왕이 은나라로 쳐들어갈 때 상용(商容)의 마을 문에 그의 덕행을 표창했고,
감옥 속에 구금되어 있는 기자(箕子)를 석방했으며, 비간(比干)의 무덤에 흙을 북돋워 주었습니다.
지금 대왕께서는 성인의 무덤에 흙을 북돋우거나 현자의 마을 문에 그 덕행을 표창하거나

지자(智者)의 문 앞을 지나며 경의를 표시하실 수 있습니까?”라고 하자,
한왕은 대답하기를 : “할 수 없소”라고 하였다.]

 

「其不可三也.  發鉅橋之粟,散鹿臺之錢,以賜貧窮. 今陛下能散府庫以賜貧窮乎?」

曰:「未能也.」

[장량이 말하기를 : “이것이 불가한 세 번째 이유입니다. 주무왕은 일찍이 거교(鉅橋)의 곡식을 풀었고,

녹대(鹿臺) 창고의 돈을 꺼내어 빈궁한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었습니다.

지금 대왕께서는 창고를 열어 돈과 식량을 빈궁한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실 수 있습니까?”라고 하자,

한왕은 대답하기를 : “할 수 없소”라고 하였다.]

 

「其不可四矣.  殷事已畢,偃革為軒,倒置干戈,覆以虎皮,以示天下不復用兵.

今陛下能偃武行文,不復用兵乎 ?」

曰:「未能也.」

[장량이 말하기를 : “이것이 불가한 네 번째 이유입니다. 은나라를 치는 일이 이미 끝나자, 

주무왕은 병거(兵車)를 고쳐서 일반 수레로 만들고 병기를 거꾸로 해 창고 속에 넣고 호랑이 가죽으로 덮어씌워,

천하에 더 이상 병기를 사용하지 않을 것을 보였습니다. 지금 대왕께서는 무력을 버리고

문교(文敎)를 행해 다시는 병기를 사용하지 않으실 수 있습니까?”라고 하자,
한왕은 대답하기를 : “할 수 없소”라고 하였다.]

 

「其不可五矣.  休馬華山之陽,示以無所為. 今陛下能休馬無所用乎?」

曰:「未能也.」

[장랑이 말하기를 “이것이 불가한 다섯 번째 이유입니다.
주무왕은 전쟁에 쓰던 말을 화산(華山) 남쪽에 풀어놓고 사용하지 않을 것임을 나타내었습니다.
지금 대왕께서도 말을 풀어놓고 사용하지 않으실 수 있습니까?”라고 하자,

한왕은 대답하기를 : “할 수 없소”라고 하였다.]

「其不可六矣.  放牛桃林之陰,以示不復輸積. 今陛下能放牛不復輸積乎?」

曰:「未能也.」

[장량이 말하기를 “이것이 불가한 여섯 번째 이유입니다.

주무왕은 군대 수송용으로 쓰는 소를 도림(桃林) 북쪽에 풀어놓고 다시는 군수품을 운반하거나

식량이나 마초(馬草)를 한곳에 모으는 데 쓰지 않을 것임을 보였습니다.

지금 대왕께서는 소를 풀어놓고 다시는 군 수송용으로 쓰지 않으실 수 있으십니까?”라고 하자,

한왕은 대답하기를 : “할 수 없소”라고 하였다.]

 

「其不可七矣.  且天下游士離其親戚,棄墳墓,去故舊,從陛下游者,徒欲日夜望咫尺之地.

今復六國,立韓、魏、燕、趙、齊、楚之後,天下游士各歸事其主,從其親戚,反其故舊墳墓,

陛下與誰取天下乎? 其不可八矣.

且夫楚唯無彊,六國立者復橈而從之,陛下焉得而臣之?誠用客之謀,陛下事去矣.」

漢王輟食吐哺,罵曰:「豎儒,幾敗而公事!」令趣銷印.

[장량이 말하기를 : “이것이 그 불가한 일곱 번째 이유입니다. 게다가 천하의 유사(游士)들이 친척과 헤어지고

조상의 분묘를 버려두고 친구를 떠나 대왕을 따라 분주히 다니는 것은 단지 밤낮으로 작은 땅 덩어리라도

떼어주기를 바라서입니다. 그런데 지금 6국을 회복해 한, 위(魏), 연, 조, 제, 초나라의 후대를 세우면

천하의 유사들이 각자 돌아가 그의 주인을 섬길 것이고, 그 친척을 따라 그의 친구와 조상의 분묘가 있는 곳으로

돌아갈 것이니, 대왕께서는 누구와 더불어 천하를 차지하시겠습니까?
이것이 그 불가한 여덟 번째 이유입니다. 뿐만 아니라 지금은 오직 초나라로 하여금 강성할 도리가 없게만

하시지만, 만약 초나라가 강성해진다면 대왕께서 세운 6국의 후손들이 다시 굽히고 초나라를 따르게 될 것이니,
대왕께서는 어떻게 그들을 신하로 삼으실 수 있겠습니까?

그러므로 진정 그 객(客)의 꾀를 쓰신다면 대왕의 일은 다 그르치고 말 것입니다”라고 하자,
한왕이 입 안의 음식을 뱉고 꾸짖기를 : “이런 유생놈이 하마터면 대사를 그르치게 할 뻔했구나!”라고 하고는

황급히 관인을 녹여버리게 하였다.]

 

漢四年,韓信破齊而欲自立為齊王,漢王怒.  張良說漢王,漢王使良授齊王信印,語在淮陰事中.

其秋,漢王追楚至陽夏南,戰不利而壁固陵,諸侯期不至.

良說漢王,漢王用其計,諸侯皆至.  語在項籍事中.

[한(漢)나라 4년, 한신이 제나라를 격파하고 스스로 제왕(齊王)이 되려고 하자 한왕이 노했다.
장량이 한왕을 진정시키자 한왕이 장량을 보내어 한신에게 제왕의 관인을 주게 했는데,

이 이야기는 「회음후열전(淮陰侯列傳)」에 기록되어 있다.
그해 가을, 한왕은 초나라 군대를 추격해 양하(陽夏) 남쪽에 이르렀으나 전세가 불리해지자

고릉의 보루를 굳게 지키고 있었는데, 제후들이 약속한 기일이 되어도 통 오지를 않았다.

장량이 한왕을 설득하매 한왕이 그의 계책을 쓰자 제후들이 모두 도착하였다.

이 이야기는 「항우본기」에 기록되어 있다.]

 

漢六年正月,封功臣.

良未嘗有戰鬬功,高帝曰:「運籌策帷帳中,決勝千里外,子房功也。自擇齊三萬戶.」
良曰:「始臣起下邳,與上會留,此天以臣授陛下.

陛下用臣計,幸而時中,臣願封留足矣,不敢當三萬戶.」

乃封張良為留侯,與蕭何等俱封.  [六年]上已封大功臣二十餘人,其餘日夜爭功不決,未得行封.

[한나라 6년 정월, 공신들을 봉했다. 장량은 일찍이 별다른 전공이 없었는데도 고제(高帝)는 오히려 말하기를 : 
“영중의 장막 안에서 계책을 운용해 천리 밖에서 승리를 결정지었으니, 이것은 모두 자방의 공로이다.
자방은 스스로 제(齊) 땅에서 3만 호(戶)를 고르라”라고 하자,
장량이 말하기를 : " 신이 처음 하비(下邳)에서 일어나 폐하와 유(留) 땅에서 만났는데, 이는 하늘이 

신을 폐하께 주신 것입니다. 폐하께서는 신의 계책을 쓰셨고, 다행스럽게도 예상은 우연히 적중했습니다.

신은 원컨대 유후(留侯)에 봉해지는 것으로 족하겠으며, 3만 호는 도저히 감당하지 못하겠습니다."라고 하였다.
이에 장량을 유후로 삼았는데, 장량은 소하(蕭何) 등과 함께 봉읍을 하사받은 것이었다.
황제가 이미 주요 공신 20여 명을 봉했으나, 그 나머지 사람들은 밤낮으로 공을 다투어 결정을 하지 못해

봉할 수가 없었다.]

 

上在雒陽南宮,從複道望見諸將往往相與坐沙中語.

上曰:「此何語?」 留侯曰:「陛下不知乎?此謀反耳.」上曰:「天下屬安定,何故反乎?」

留侯曰:「陛下起布衣,以此屬取天下,今陛下為天子,而所封皆蕭、曹故人所親愛,

而所誅者皆生平所仇怨. 今軍吏計功,以天下不足遍封,此屬畏陛下不能盡封,

恐又見疑平生過失及誅,故即相聚謀反耳.」

[황제가 낙양의 남궁(南宮)에 있으면서 구름다리 위에서, 여러 장수들이 무리를 지어 모래밭에 모여 앉아

대화하는 것을 바라보았다. 황제가 묻기를 : “저기서 무슨 말들을 하는가?”라고 하자,

유후가 아뢰기를 : “폐하께서는 모르고 계십니까? 저것은 모반을 도모하고 있는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황제가 묻기를 : “천하가 막 안정되었는데 무슨 까닭으로 모반을 하려는가?”라고 하자,
유후가 아뢰기를 : “폐하께서는 평민의 신분으로 봉기하여 저 무리들을 의지해 천하를 차지하셨습니다.
그런데 이제 폐하께서 천자가 되셔서 봉한 자들은 모두 폐하께서 친애하는 소하나 조참(曹參) 같은 옛 친구들이고,
죽인 자들은 모두 평소에 원한이 있었던 이들이었습니다. 지금 군(軍) 인사관이 공로를 따져보고는
천하의 땅을 다 가지고도 모든 사람들을 전부 상으로 봉해 주기에는 부족하다고 했으니,
저들은 폐하께서 자신들을 봉해 주지 않으실까 두렵고 또 평소의 과실을 의심받아 죽게 될까 두렵기 때문에

서로 모여서 반란을 일으키려는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上乃憂曰:「為之奈何?」 留侯曰:「上平生所憎,群臣所共知,誰最甚者?」

上曰:「雍齒與我故,數嘗窘辱我. 我欲殺之,為其功多,故不忍.」

留侯曰:「今急先封雍齒以示群臣,群臣見雍齒封,則人人自堅矣.」

於是上乃置酒,封雍齒為什方侯,而急趣丞相、御史定功行封.

群臣罷酒,皆喜曰:「雍齒尚為侯,我屬無患矣.」

[황제가 이를 걱정하며 묻기를 : “ 그럼 어떻게 하면 되겠는가?”라고 하자,
유후가 되묻기를 : “폐하께서 평소에 미워하는 사람으로서 여러 신하들이 다 아는 자 가운데

가장 심한 자가 누구입니까?” 하고 하자,
황제가 대답하기를 : “옹치(雍齒)와 짐은 묵은 원한이 있는데, 자주 짐을 곤욕스럽게 해 짐이 그를 죽이려고 했으나,

그의 공이 많기 때문에 참고 있소.”라고 하였다.
유후가 아뢰기를 : “지금 급히 옹치를 봉해 여러 신하들에게 보이십시오. 옹치가 봉해지는 것을

여러 신하들이 보게 되면 그들은 자신들도 봉해질 것을 스스로 굳게 믿게 될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이에 황제는 곧 술자리를 베풀고 옹치를 십방후(什方侯)에 봉하고, 급히 승상과 어사를 재촉해 공로를 정하고

논공행상을  진행하도록 하였다.
여러 신하들이 술자리가 끝나자 모두 기뻐하면서 말하기를 : “옹치조차도 후(侯)에 봉해졌으니,

우리들은 걱정할 것이 없다.”라고 하였다.]

 

劉敬說高帝曰:「都關中.」上疑之.

左右大臣皆山東人,多勸上都雒陽:「雒陽東有成皋,西有殽黽,倍河,向伊雒,其固亦足恃.」

[유경(劉敬)이 고제를 설득해 아뢰기를 : “관중에 도읍하십시오.”라고 하자, 황제가 머뭇거리며 결정을 하지 못했다.

당시 좌우 대신들이 모두 산동 사람들이었다. 이에 대다수가 황제에게 낙양에 도읍을 정하게 권하면서 말하기를 : 
“낙양 동쪽에는 성고(成皐)가 있고, 서쪽에는 효산(崤山), 민지(澠池)가 있으며,

황하를 등지고 이수(伊水)와 낙수(雒水)를 마주하고 있어 그 견고함이 족히 안심할 만합니다.”라고 하였다.]

留侯曰:「雒陽雖有此固,其中小,不過數百里,田地薄,四面受敵,此非用武之國也.

夫關中左殽函, 右隴蜀, 沃野千里, 南有巴蜀之饒, 北有胡苑之利, 阻三面而守, 獨以一面東制諸侯.

諸侯安定,河渭漕輓天下,西給京師;諸侯有變,順流而下,足以委輸.

此所謂金城千里,天府之國也,劉敬說是也.」 於是高帝即日駕,西都關中. 留侯從入關.

[유후가 아뢰기를 : “ 낙양이 비록 그토록 견고하기는 하나, 그 중심지역이 좁아 수백 리에 불과하며 땅은 척박하고,
사방에서 적의 공격을 받을 수 있는 곳이어서 싸움과 방어를 할 수 있는 곳이 아닙니다.
반면 저 관중 지역은 동쪽으로는 효산과 함곡관이 있고, 서쪽으로는 농산(隴山)과 촉산(蜀山)이 있으며,
중심지에는 비옥한 들이 천리에 뻗어 있고, 남쪽으로는 파촉(巴蜀)의 풍부한 자원이 있으며,

북쪽으로는 소와 말을 목축할 수 있는 이점이 있습니다.
그리고 삼면은 험준한 지형에 의지해 굳게 지켜질 수 있으므로, 단지 동쪽 한 방면만 제후를 통제하면 됩니다.
제후가 안정되면 황하, 위수(渭水)를 통해 천하의 식량을 운반해 서쪽으로 도성에 공급할 수 있고,
제후가 반란을 일으키면 물길을 따라 내려가 충분히 군대와 군수 물자를 수송할 수 있습니다.
이는 곧 이른바 천리의 철옹성이며 천부(天府)의 지역이니 유경의 말이 옳습니다.”라고 하였다.
이에 고제는 즉시 그날로 수레를 타고 서쪽에 있는 관중에 도읍하였다.
유후도 고제를 따라 관중으로 들어갔다.]

 

留侯性多病,即道引不食穀,杜門不出歲餘.  上欲廢太子,立戚夫人子趙王如意.

大臣多諫爭,未能得堅決者也.  呂后恐,不知所為.

人或謂呂后曰:「留侯善畫計筴,上信用之.」

呂后乃使建成侯呂澤劫留侯,曰:「君常為上謀臣,今上欲易太子,君安得高枕而臥乎?」 

留侯曰:「始上數在困急之中,幸用臣筴.  今天下安定,以愛欲易太子,骨肉之間,

雖臣等百餘人何益.」

[유후는 천성적으로 병이 많았기 때문에 도인술(道引術)을 하면서 곡식을 먹지 않고 1년여 동안을 두문불출하였다.
황제가 태자를 폐하고 척부인(戚夫人)의 아들 조왕(趙王) 유여의(劉如意)를 세우고자 하였다.
대신들 대부분이 다투어 충간을 했으나 명확한 결정을 내릴 수가 없었다. 여후가 두려워해 어찌할 바를 몰랐다.
이때 어떤 사람이 여후(呂后)에게 말하기를 : “유후는 대책을 잘 세워서, 황제께서 그를 신임하십니다.”라고 하자,
여후는 곧 건성후(建成侯) 여택(呂澤)을 시켜 유후를 위협하듯 말하기를 : “그대는 일찍이 황제의 모신(謀臣)이

되었으면서 지금 황제께서 태자를 바꾸려고 하시는데도 어찌 베개를 높이 하고 누워만 있을 수 있소?”라고 하자.
유후가 대답하기를 “이전에 황제께서는 여러 차례 곤경하고 위급한 상황에 처하셨을 때, 다행스럽게도 

저의 계책을 써주셨습니다. 그런데 지금 천하가 안정되어 편애하는 자식으로 태자를 바꾸려고 하시니,

이는 곧 골육간의 일이므로 저와 같은 사람이 1백여 명이 있다고 한들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라고 하였다.]

 

呂澤彊要曰:「為我畫計.」

留侯曰:「此難以口舌爭也. 顧上有不能致者,天下有四人.

四人者年老矣,皆以為上慢侮人,故逃匿山中,義不為漢臣. 然上高此四人.

今公誠能無愛金玉璧帛,令太子為書,卑辭安車,因使辯士固請,宜來.

來,以為客,時時從入朝,令上見之,則必異而問之. 問之,上知此四人賢,則一助也.」

於是呂后令呂澤使人奉太子書,卑辭厚禮,迎此四人.  四人至,客建成侯所.

[여택이 강압적으로 요구하며 말하기를 : “ 나를 위해서 계책을 세워주시오.”라고 하자.
유후가 말하기를 : “ 이는 말로써 다투어내기가 어렵습니다.

돌이켜 생각해 보니 황제께서 마음대로 불러올 수 없었던 사람으로 천하에 네 명이 있습니다.
이 네 명은 연로한데, 그들은 모두 황제께서 사람을 무시하고 업신여긴다고 생각한 까닭에

상산(商山)으로 피해 은거해 절조를 지키며 한나라의 신하가 되지 아니했습니다.
그러나 황제께서는 이 네 사람을 존경합니다. 지금 공께서 진실로 금옥과 비단을 아끼지 않고

태자께 편지를 쓰시게 해 말을 공손하게 하고 안거(安車)를 준비해 말 잘하는 변사를 시켜 간곡히 청한다면

그들은 틀림없이 올 것입니다.
그렇게 해 그들이 오거든 귀한 손님으로 대우하고 때때로 태자를 따라 조정으로 들어가 조회하게 하여
황제로 하여금 그들을 보시게 하면 반드시 기이하게 여기셔서 그들에 대해서 물으실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황제께서는 이 네 사람이 현자임을 알게 되실 것이고,

그러면 그것은 곧 태자께 큰 도움이 될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이에 여후는 여택에게 사람을 시켜 태자의 편지를 받들어 겸손한 말과 후한 예물로 이 네 사람을 맞아오게 했다.
그리하여 네 사람이 도착했고, 그들은 귀한 손님 대접을 받으며 건성후의 집에 묵게 되었다.]

 

漢十一年,黥布反,上病,欲使太子將,往擊之.

四人相謂曰:「凡來者,將以存太子. 太子將兵,事危矣.」

乃說建成侯曰:「太子將兵,有功則位不益太子;無功還,則從此受禍矣.

且太子所與俱諸將,皆嘗與上定天下梟將也,今使太子將之,此無異使羊將狼也,

皆不肯為盡力,其無功必矣.  臣聞『母愛者子抱』今戚夫人日夜待御,趙王如意常抱居前,

上曰『終不使不肖子居愛子之上』明乎其代太子位必矣. 君何不急請呂后承間為上泣言:

『黥布,天下猛將也,善用兵,今諸將皆陛下故等夷,乃令太子將此屬,無異使羊將狼,

莫肯為用,且使布聞之,則鼓行而西耳. 上雖病,彊載輜車,臥而護之,諸將不敢不盡力.

上雖苦,為妻子自彊.』」

[한나라 11년, 경포가 모반했는데, 황제는 마침 병이 나서 태자를 대장으로 삼아 출병해 그를 토벌케 하려고 했다.

네 노인은 서로 의논해 말하기를 : “우리들이 온 것은 장차 태자를 보위하기 위해서입니다.

태자가 군대를 거느리고 싸운다면 일이 위험해질 것입니다.”라고 하고는 곧 건성후를 설득해 말하기를
'태자께서 군대를 거느리고 출정해 공을 세우더라도 태자의 권위에는 더 이상의 보탬이 없을 것이지만,
만약에 공을 세우지 못하고 돌아오신다면 바로 그 때문에 화를 입게 될 것이오.
또 태자와 함께 출정할 여러 장수들은 모두가 일찍이 황제와 더불어 천하를 평정한 맹장들이오.
지금 태자께 그들을 거느리게 한다면 이는 양에게 이리를 거느리게 하는 것과 다름없어서

그들은 모두 태자를 위해서 힘을 다하려고 하지 않을 것이니, 태자께서 공을 세우지 못할 것은 틀림이 없소이다.

저희들이 듣기로 '어미가 총애를 받으면 그 자식도 귀여움을 받는다.'라고 했는데,
지금 척부인이 밤낮으로 황제를 받들어 모시니 조왕(趙王) 유여의는 늘 황제 앞에 안기어 있고,
황제 또한 '아무래도 불초한 자식으로 하여금 사랑스러운 자식 위에 있게 할 수는 없다.'라고 하시니,

분명 그가 태자의 지위를 대신할 것은 틀림이 없소.
그런데 그대는 어찌해 급히 여후에게 기회를 봐서 황제께 눈물을 흘리며 이렇게 말하게 청하지 않소이까?
“경포는 천하의 맹장이고 군사를 쓰는 것이 뛰어납니다. 지금 여러 장군들은 모두 폐하의 옛 동료들인데,
바로 태자에게 그들을 거느리게 하시면 양에게 이리를 거느리게 하는 것과 다름없어서

그들이 힘을 쓰려고 하지 않을 것입니다.
게다가 만약 경포가 이 사실을 알게 되면 분명 북을 치며 서쪽(장안)으로 진군해 올 것입니다.
폐하께서 비록 병환 중이시기는 하지만 억지로라도 큰 수레를 준비하시어 누워서라도

여러 장수들을 통솔하시면 여러 장수들이 감히 힘을 다하지 않을 수 없을 것입니다.

폐하께서 힘드시더라도 처자식을 위해 직접 힘을 쓰십시오’라고 말씀드리게 하지 않는 것이오.”라고 하였다.]

 

於是呂澤立夜見呂后,呂后承間為上泣涕而言,如四人意.

上曰:「吾惟豎子固不足遣,而公自行耳.」於是上自將兵而東,群臣居守,皆送至灞上.

留侯病,自彊起,至曲郵,見上曰:「臣宜從,病甚. 楚人剽疾,願上無與楚人爭鋒.」

因說上曰:「令太子為將軍,監關中兵.」

上曰:「子房雖病,彊臥而傅太子.」是時叔孫通為太傅,留侯行少傅事.

[이에 여택은 그날 밤 즉시 여후를 만났고, 여후는 틈을 보아 황제께 눈물을 흘리며 네 사람의 의도대로 말했다.
그러자 황제가 말하기를 : “짐도 본디 어린애를 보낼 만하지 않다고 생각했으니, 짐이 직접 가겠소.”라고 하였다.
그리하여 황제가 직접 군대를 이끌고 동쪽으로 가니 뭇 신하들과 유수(留守)들이 모두 파상(灞上)까지 전송했다.
유후는 병상에 있었으나 억지로 일어나 전송하며 곡우(曲郵)에 이르러 황제를 알현하고 아뢰기를 :

“ 신이 마땅히 따라가야 하나 병이 심합니다. 초나라 사람은 용맹하고 민첩하오니,

원컨대 폐하께서는 초나라 사람과 정면으로 칼날을 다투지 마십시오.”라고 하고,
다시 황제를 설득해 아뢰기를 : “태자를 장군으로 삼아 관중의 군대를 감독하게 하십시오.”라고 하였다.
이에 황제가 말하기를 : “ 자방은 병중이기는 하지만 누워서라도 애써 태자를 보좌하시오.”라고 하였다.
이때 숙손통(叔孫通)은 태자태부(太子太傅)였고, 유후는 태자소부(太子少傅)의 직책을 맡고 있었다.]

 

漢十二年,上從擊破布軍歸,疾益甚,愈欲易太子.  留侯諫,不聽,因疾不視事.

叔孫太傅稱說引古今,以死爭太子. 上詳許之,猶欲易之. 及燕,置酒,太子侍.

四人從太子,年皆八十有餘,鬚眉皓白,衣冠甚偉.

上怪之,問曰:「彼何為者?」四人前對,各言名姓,曰東園公,角里先生,綺里季,夏黃公.

[한나라 12년, 황제가 경포의 군사를 격파하고 돌아와서 병이 더욱 심해지자 더더욱 태자를 바꾸고자 하였다.
이에 유후가 그만두기를 간했으나 황제가 듣지 않자, 병을 핑계삼아 공무를 돌보지 않았다.
태자태부 숙손통이 고금의 일을 인용해 설득하며 죽을 각오로 태자를 보위하기 위해서 애썼다.
황제는 거짓으로 그의 말을 들어주는 것처럼 했으나, 실제로는 여전히 바꾸려고 했다.
그러다가 연회에 술자리가 마련되었을 때 태자가 황제를 모시게 되었는데, 네 사람의 은자가 태자를 따르고 있었다.
그들은 모두 나이가 80이 넘었고 수염과 눈썹이 희었으며 의관은 매우 위엄이 있었다.
황제가 괴이하게 여겨 묻기를 : “저들은 무엇을 하는 사람들인가?”라고 하자,
네 사람이 앞으로 나아가 대답하며 각자 이름을 말하기를 동원공(東園公), 녹리선생(甪里先生),

기리계(綺里季), 하황공(夏黃公)이라 하였다.]

 

上乃大驚,曰:「吾求公數歲,公辟逃我,今公何自從吾兒游乎?」

四人皆曰:「陛下輕士善罵,臣等義不受辱,故恐而亡匿. 竊聞太子為人仁孝,恭敬愛士,

天下莫不延頸欲為太子死者,故臣等來耳.」上曰:「煩公幸卒調護太子.」四人為壽已畢,趨去.

上目送之, 召戚夫人指示四人者曰:「我欲易之, 彼四人輔之, 羽翼已成, 難動矣. 呂后真而主矣.」

[이에 황제는 크게 놀라며 말하기를 : “ 짐이 공들을 가까이 하고자 찾은 것이 몇 년이나 되었는데,
공들은 끝내 짐을 피해 도망가더니, 지금은 공들이 어찌하여 태자를 따라 노닐고 있는가?”라고 하자.
네 사람이 모두 아뢰기를 : “폐하께서는 선비들을 가볍게 여기시고 잘 꾸짖으시므로

신들이 의(義)에 욕되지나 않을까 하여 두려운 나머지 도망해 숨었습니다.
그런데 삼가 듣건대, 태자께서는 사람됨이 어질고 효성스러우시며 사람을 공경하고 선비를 사랑하시어
천하에 목을 빼고 태자를 위해서 죽고자 하지 않는 이가 없다고 하므로 신들이 온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황제는 이에 이르기를 :  “번거로우시겠지만 공들께서 끝까지 태자를 잘 돌보아주기를 바라오.”라고 하였다.
네 사람이 축수를 마치고 급히 떠나가자, 황제는 눈길로 그들을 전송해 보내면서 척부인을 불러

그 네 사람을 가리켜 보이며 말하기를  “짐이 태자를 바꾸고자 했으나, 저 네 사람이 보좌해 태자의 날개가

이미 만들어졌으니 그 지위를 어떻게 할 수가 없소. 여후(呂后)는 진정으로 주인이오.”라고 하였다. ]

 

戚夫人泣,上曰:「為我楚舞,吾為若楚歌.」

歌曰:「鴻鴈高飛, 一舉千里. 羽翮已就, 橫絕四海. 橫絕四海, 當可奈何!雖有矰繳, 尚安所施!」

歌數闋,戚夫人噓唏流涕,上起去,罷酒.  竟不易太子者,留侯本招此四人之力也.

留侯從上擊代, 出奇計馬邑下, 及立蕭何相國, 所與上從容言天下事甚眾, 非天下所以存亡, 故不著.

[척부인이 흐느끼자, 황제는 말하기를 : “ 짐을 위해서 초나라 춤을 춰 보여주오.
짐도 부인을 위해서 초나라 노래를 부르리다.”라고 하였다, 노래는 이러하였다.
" 큰 고니 높디 높이 날아, 한 번에 천리를 날거니, 날개가 어느덧 다 자라나매, 온 천하를 마음껏 날아다니도다.
온 천하를 마음껏 날아다니니, 마땅히 또 어떻게 하겠는가!

설령 주살이 있다고 한들, 오히려 그 무슨 소용 있으리요!" 몇 번 연달아 노래를 부르매 

척부인은 한숨을 내쉬며 눈물을 흘렸다. 황제가 일어나 자리를 뜨자, 술자리는 끝이 났다.
결국 태자를 바꾸지 못한 것은 근본적으로 유후가 이 네 사람을 불러오게 했기 때문이었다.
유후가 황제를 따라 대(代) 땅을 공격하며 마읍 성 아래에서 기이한 계책을 내었고

소하를 상국에 임명하게 건의하는 등 황제와 함께 조용히 천하 대사를 논의한 것이 매우 많았지만,

그것들은 천하존망(天下存亡)에 관계된 바가 아니므로 여기에 일일이 기록하지는 않는다.]

 

留侯乃稱曰:「家世相韓, 及韓滅, 不愛萬金之資, 為韓報讐彊秦, 天下振動.

今以三寸舌為帝者師, 封萬戶, 位列侯,此布衣之極,於良足矣. 人間事,欲從赤松子游耳.」

乃學辟穀,道引輕身.

[유후는 늘 드러내 놓고 말하기를 : " 우리 집안은 대대로 한(韓)나라 재상을 지냈는데, 한나라가 멸망하자 

만금의 가산을 아끼지 않고, 한나라를 위해서 강대한 진나라에 복수를 해 천하를 떠들썩하게 했다.

그리고 지금은 세 치의 혀로 황제의 군사(軍師)가 되어 식읍이 만 호에 이르고 지위가 제후의 반열에 올랐으니,
이는 평민으로서는 최고의 지위로 나 장량으로서는 매우 만족스럽다.

원컨대 세속의 인간사는 모두 떨쳐버리고 적송자(赤松子)를 따라 노닐고 싶을 뿐이다. "라고 하였다.

​그리하여 곡식은 안 먹고 솔잎ㆍ대추ㆍ밤 등을 날로 조금씩 먹는 방법을 배웠으며,  
도가(道家)에서 행하는 치료방법을 배워 몸을 가벼이 했다.]

 

會高帝崩,呂后德留侯,乃彊食之,曰:「人生一世間,如白駒過隙,何至自苦如此乎!」

留侯不得已,彊聽而食.

[이때 마침 고제가 붕어하니, 여후가 유후의 은덕에 감격해 억지로 음식을 먹게 하면서 말하기를 :
사람이 한세상을 살아감은 마치 흰 망아지가 틈바구니를 지나는 것과 같은데,

굳이 스스로 그토록 고통스럽게까지 할 필요가 있습니까?”라고 하자,
유후는 하는 수 없이 태후의 말을 듣고 음식을 먹었다.]

 

後八年卒,謚為文成侯.  子不疑代侯.

子房始所見下邳圯上老父與太公書者,後十三年從高帝過濟北,果見穀城山下黃石,取而葆祠之.

留侯死,并葬黃石(冢).  每上 冢伏臘,祠黃石.  留侯不疑,孝文帝五年坐不敬,國除.

[8년 뒤, 유후가 세상을 떠나니, 시호를 문성후(文成侯)라 했다.

그리고 그 아들 장불의(張不疑)가 아버지의 후작을 이어받았다.
자방(子房) 장량이 처음 하비(下邳)의 다리 위에서 자신에게 『태공병법』을 준 노인을 만난 지 13년 후,
고제를 따라 제북(濟北)을 지나갔는데 과연 곡성산(穀成山) 아래에서 누런 돌을 보게 되었다.
이에 장량은 그것을 가지고 돌아와 보물처럼 받들며 제사까지 지냈다. 유후가 죽자 누런 돌을 그와 함께 안장했다.
그 후 사람들은 성묘하는 날이나 복일(伏日), 납일(臘日)이면 으레 장량뿐만 아니라 누런 돌에게도 제사를 지냈다.
유후 장불의가 효문제(孝文帝) 5년에 불경죄를 범함으로써 그의 후국(侯國)은 폐지되고 말았다.]

 


太史公曰:學者多言無鬼神,然言有物.  至如留侯所見老父予書,亦可怪矣.

高祖離困者數矣,而留侯常有功力焉,豈可謂非天乎?

上曰:「夫運籌筴帷帳之中,決勝千里外,吾不如子房.」

余以為其人計魁梧奇偉,至見其圖,狀貌如婦人好女.

蓋孔子曰:「以貌取人,失之子羽.」  留侯亦云.

[태사공은 말한다.
학자들은 대부분 귀신은 없다고 말하면서도 또 괴이한 일이 있다고들 한다.
즉 유후(留侯)가 만난 노인이 그에게 책을 준 것과 같은 일은 괴이하다고 할 것이다.
한 고제(漢高帝)가 곤궁에 처한 것이 여러 차례였는데, 유후는 그때마다 늘 공로를 세웠으니,

이 어찌 하늘의 뜻이 아니라고 할 수 있겠는가!
고제가 일찍이 말하기를 ‘군정(軍情)을 분석해 군영 안에서 계책을 세워 천리 밖의 승부를 결정짓는 데에

나는 자방(子房)만 못하다.’라고 했다.
나는 본디 자방은 아마 체격이 몹시 클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나중에 그의 화상(畵像)을 보았더니

얼굴 생김새가 여자처럼 예뻤다.
공자(孔子)도 ‘용모로써 사람을 평가한다면 나는 자우(子羽)에 대해서는 실수를 했다’라고 말했듯이,

유후에 대해서도 또한 그러할 것이다.]

 

 

 

※  原 文 .    【 中國哲學書電子化計劃 .   筆寫本 】

 

                                 

 

    原 文   飜 譯 者        德庤 / 李   斗 振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