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8.韓長孺列傳

​第 四十八. 韓長孺列傳(한장유열전) ​

덕치/이두진 2023. 12. 10. 10:01

 

       ​第 四十八.   韓長孺列傳(한장유열전) 

御史大夫韓安國者,梁成安人也,後徙睢陽. 

嘗受韓子、雜家說於騶田生所.  事梁孝王為中大夫.

​[어사대부 한안국은 양(梁)나라의 성안(成安)1) 사람으로 후에 수양(睢陽)으로 옮겨 살았다. 

일찍이 추현(鄒縣)의 전생(田生)에게서 한비자와 잡가(雜家)의 학설을 배워 양효왕2)을 섬겨 

중대부가 되었다.]

 

吳楚反時,孝王使安國及張羽為將,捍吳兵於東界. 

張羽力戰,安國持重,以故吳不能過梁.  吳楚已破,安國、張羽名由此顯.

梁孝王, 景帝母弟, 竇太后愛之, 令得自請置相、二千石, 出入游戲, 僭於天子.  

天子聞之,心弗善也.  太后知帝不善,乃怒梁使者,弗見,案責王所為.

[오,초가 반란을 일으키자 양효왕은 한안국과 장우(張羽)를 장수로 삼아 오나라 군사를 

동쪽 변경에서 막도록 했다.  그때 장우는 힘껏 싸웠고 한안국은 굳게 지켰음으로 

오나라 군사는 양나라 땅을 통과할 수 없었다. 

오,초의 반군이 격파되자, 한안국과 장우의 이름은 그 일로 인해 세상에 드러나게 되었다.  

양효왕은 한경제(漢景帝)의 동모제로 두태후(竇太后)가 매우 사랑했다.

이에 효왕은 스스로 청하여 이천석의 상국을 양나라에 둘 수 있는 령을 얻었다.3)

그리고 효왕이 출입하거나 놀러 다닐 때의 참란한 행렬은 마치 천자의 행렬과 같았다.

천자가 듣고 불쾌한 마음을 갖게 되었다. 태후가 알고 양나라에서 온 사자에게 화를 내며

접견하지 않았다.  조정의 관리들도 상소를 올려 양왕을 견책해야 한다고 했다.]

 

韓安國為梁使,見大長公主而泣曰:「何梁王為人子之孝,為人臣之忠,

太后曾弗省也? 夫前日吳、楚、齊、趙七國反時,自關以東皆合從西鄉,

惟梁最親為艱難.  梁王念太后、帝在中,而諸侯擾亂,一言泣數行下,

跪送臣等六人, 將兵擊卻吳楚, 吳楚以故兵不敢西, 而卒破亡, 梁王之力也.  

今太后以小睗苛禮責望梁王.  梁王父兄皆帝王,所見者大,故出稱蹕,

入言警,車旗皆帝所賜也,即欲以侘鄙縣,驅馳國中,以夸諸侯,

令天下盡知太后、帝愛之也.  今梁使來, 輒案責之.  梁王恐,

日夜涕泣思慕, 不知所為.  何梁王之為子孝,為臣忠,而太后弗恤也?」 

[한안국이 양나라의 사자가 되어 대장공주4)를 접견하고 눈물을 흘리며 하소연하기를 : 

“ 양왕은 효성이 지극한 태후의 아들이고 황제에게는 충성스러운 신하이신데 태후께서는 

그 점을 깨닫지 못하고 계십니다. 지난날 오, 초, 제, 조나라 등의 7국이 반란을 일으켰을 때 

함곡관 동쪽의 제후국들이 모두 합종하여 서쪽을 향해 진군했으나 오로지 양나라만이

황실과 가장 친하여 곤궁한 처지에 빠지게 되었습니다.

태후와 황제가 관중에 거주하고 있음을 생각한 양왕은 제후들이 난을 일으켜 천하를

어지럽게 하자 그 일에 관해 한 마디라도 말을 하게 되면 눈물을 수없이 흘리며 소신을 포함한

6명의 장수로 하여금 군사를 이끌고 나아가 오,초(吳,楚)의 반군을 물리치게 하셨습니다.

그래서 오,초의 반군은 감히 서진하여 황도를 범하지 못하고 결국 패망하게 되었습니다.

그것은 모두 양왕의 공로입니다.  지금 태후께서 조그맣고 까다로운 예절에 얽매여 양왕을

책망하고 계시는데 양왕의 부친과 형은 황제이시라 원래 보이는 것이 규모가 컸기 때문에

출궁할 때는 도로를 청소하여 길을 열고 회궁할 때는 사람들에게 경종을 울린 것입니다.

또한 거마와 깃발 역시 모두 황제의 하사품이라 변방의 작은 고을이지만 봉국 안에서

몰고 달려 제후들에게 과시함으로써 천하가 모두 태후와 황제의 사랑을 알게 했습니다.

그런데 지금 양나라의 사자가 올 때마다 묻고 힐책하시니 양왕께서는 매우 두려워하시고 

밤낮으로 눈물을 흘리며 사모하기만 할뿐 어찌할 바를 모르고 계십니다.

어찌하여 효성스러운 아들에 충성스러운 신하인 양왕을 태후께서는 가엽게 여기지

않으십니까?”라고 하였다.]  

 

大長公主具以告太后,太后喜曰:「為言之帝.」 

言之,帝心乃解,而免冠謝太后曰:「兄弟不能相教,乃為太后遺憂.」

悉見梁使,厚賜之.  其後梁王益親驩.  太后、長公主更賜安國可直千餘金. 

名由此顯,結於漢. 

[대장공주가 궁궐로 들어가 태후에게 한안국의 말을 자세하게 고하자,

태후가 기뻐하며 말하기를 : “ 이 말을 황제에게도 아뢰어라.”라고 하였다. 

이에 황제가 듣고 마음이 이내 풀렸음으로 면류관을 벗고 태후에게 사죄하며 말하기를 : 

“ 형제가 서로 잘 일깨워주지 못하여 태후의 마음을 어지럽게 했습니다.”하소 하였다. 

이어서 양나라에서 온 사자들을 모두 불러들여 접견하고 많은 상을 하사하였다.

그 후로 양왕은 더욱 한안국에 대해 친밀하게 대하며 기뻐했다.  

또한 태후와 장공주도 한안국에게 천여 금()의 상금을 직접 하사했다.

그래서 한안국의 이름은 세상에 드러나게 되고 한나라 조정과 친밀한 관계를 맺게 되었다.]

 

其後安國坐法抵罪,蒙獄吏田甲辱安國.  安國曰:「死灰獨不復然乎?」

田甲曰:「然即溺之.」 居無何, 梁內史缺,漢使使者拜安國為梁內史,

起徒中為二千石.  田甲亡走.  安國曰:「甲不就官,我滅而宗.」甲因肉袒謝.

安國笑曰:「可溺矣!公等足與治乎?」卒善遇之.

[그 후에 한안국은 법에 저촉되어 옥에 갇히게 되었다.

옥리 전갑(田甲)이란 자가 한안국을 심히 괴롭혔다.

한안국이 말하기를 : “ 큰 불은 꺼졌지만 다시 불씨가 살아날 수도 있지 않겠는가?”라고 하자. 

전갑이 대답하기를 : “ 그렇다면 내가 오줌을 싸서 그 불씨를 꺼버리겠다.”라고 하였다. 

그리고 얼마 되지 않아 양나라에 내사(內史)5) 자리가 공석이 되자,

이에 한나라 조정에서 사자를 파견하여 한안국을 양나라의 내사로 임명하니, 

한안국은 죄수의 몸에서 벗어나 녹봉 2천 석의 고관이 되었다.

이 소식을 듣고 놀란 전갑은 도망갔다.

한안국은 말하기를 : " 관직에 돌아오지 않으면 장차 그의 종족들을 멸족시키겠다.”라고 하자. 

전갑이 전해 듣고 육단으로 안국을 찾아와 사죄했다.

안국이 웃으며 말하기를 : “ 네가 아직도 오줌을 싸서 불을 꺼버릴 수 있겠느냐?

너와 같은 하찮은 자를 치죄할 만한 가치가 있을까?”라고 하며, 

선처하여 전갑을 잘 대우해 주었다.]

 

梁內史之缺也,孝王新得齊人公孫詭,說之,欲請以為內史.  

竇太后聞, 乃詔王以安國為內史.  公孫詭、羊勝說孝王求為帝太子及益地事,

恐漢大臣不聽,乃陰使人刺漢用事謀臣.

及殺故吳相袁盎,景帝遂聞詭、勝等計畫,乃遣使捕詭、勝,必得.

[양나라의 내사 자리가 공석이었을 때 양효왕은 제나라 사람 공손궤를 얻어 기뻐하며

그를 내사로 삼고자 조정에 요청하였다. 소식을 들은 두태후는 조칙을 내려 한안국을 내사로

삼도록 하였다.  공손궤와 양승은 양효왕을 설득하여 양효왕을 황제의 후계자로 삼고

그 봉지를 더 넓혀 줄 것을 요청하게 하였다.  그러나 조정의 대신들이 반대할 것이라고

생각한 그들은 비밀리에 자객을 보내켜 권신과 모신들을 찔러 죽이게 했다.

마팀내 오나라의 승상을 지냈던 원앙(袁盎)까지 살해하고 말았다. 

경제는 이 모든 일이 공손궤와 양승 등이 배후에서 획책했다는 소문을 듣고

사자를 파견하여 반드시 이 두 사람을 체포하여 호송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漢使十輩至梁,相以下舉國大索,月餘不得.  內史安國聞詭、勝匿孝王所,

安國入見王而泣曰:「主辱臣死.  大王無良臣,故事紛紛至此. 

今詭、勝不得,請辭賜死.」

王曰:「何至此?」安國泣數行下,曰:「大王自度於皇帝,

孰與太上皇之與高皇帝及皇帝之與臨江王親?」 孝王曰:「弗如也.」

​[한나라 조정은 일단의 조사단을 10여 차례나 양나로로 계속해서 보냈다.

양나라에 차례로 당도한 사자들은 승상이하 관리들과 함께 양나라 전국을 대거 수색하도록

했으나 한 달이 넘도록 찾아내지 못했다. 내사 한안국은 공손궤와 악승이 양왕의 처소에

숨어있다는 사실을 알고 양왕을 찾아가 눈물을 흘리며 호소하기를 : “ 군주가 욕됨을 입으면 

그 신하는 죽음으로써 그 죄를 갚아야 합니다. 대왕 밑에는 어진 신하가 없었기 때문에

일이 이 지경같이 문란하게 되었습니다. 지금 공손궤와 양승을 잡지 못해 그 책임을 묻지

못하고 있으니, 청컨대 저에게 죽음을 내려 그 책임을 지게 해 주십시오.”라고 하자.

양왕이 묻기를 : “ 어찌 그렇게까지 할 필요가 있겠소?”라고 하였다.  

한안국이 무릎을 꿇고 눈물을 흘리며 말하기를 : " 대왕께서는 자신을 한 번 헤아려보십시오.

황제와 대왕의 관계는 옛날 태상황과 고황제(高皇帝)6) 그리고 황제와 임강왕7)과 비교해

어느 사이가 더 친밀하다고 생각하시고 계십니까? ”라고 하자. 

양왕이 대답하기를 : “ 과인은 그 분들과 비교할 바가 못 되오.”라고 하였다.] 

  

安國曰:「夫太上、臨江親父子之閒, 然而高帝曰『提三尺劍取天下者朕也』,

故太上皇終不得制事, 居于櫟陽.  臨江王, 適長太子也, 以一言過, 廢王臨江;

用宮垣事,卒自殺中尉府.  何者? 治天下終不以私亂公. 

語曰:『雖有親父,安知其不為虎?雖有親兄,安知其不為狼?』

今大王列在諸侯,悅一邪臣浮說,犯上禁,橈明法. 

天子以太后故, 不忍致法於王.  太后日夜涕泣, 幸大王自改, 而大王終不覺寤. 

有如太后宮車即晏駕, 大王尚誰攀乎? 」

[한안국이 묻기를 : " 무릇 태상황이나 임강왕 등은 부자지간의 친함을 갖고 있음에도 고조께서

말씀하시기를 ‘ 세 자 길이의 칼을 차고 천하를 얻은 사람이 짐이니라!’라고 하셨습니다.

이 때문에 태상황은 끝까지 국정을 관여하지 못하시고 역양에서 생을 마감하셨던 것입니다.

또한 임강왕은 금상폐하의 적장자로 태자의 자리에 올랐지만 단지 모친을 위한 말 한마디

잘못하여 폐위되어 임강왕으로 내려갔다가 다시 태묘의 땅을 침범하여 궁궐을 지었다가

결국은 중위부에서 스스로 목숨을 끊었습니다. 어째서 이겠습니까?

사적인 일로 인해 공적인 일을 문란하게 하고는 천하를 다스릴 수 없기 때문입니다.

옛말에 ‘비록 친부이지만 어찌 그가 호랑이로 변하지 않을 것이라고 알 수 있으며,  

비록 형제이지만 어찌 그가 승냥이로 변하지 않을 것을 알 수 있겠는가?’라고 했습니다.

지금 대왕께서는 제후의 반열에 계시면서 한낱 사악한 신하의 허황한 말에 현혹되어

황제의 금령()을 범하고 공명한 법을 어지럽히셨습니다.

황제께서는 태후 때문에 차마 대왕을 법으로 처벌하지 못하시는 것입니다.

태후께서는 밤낮으로 울며 대왕께서 스스로 잘못을 고치시길 기원하고 계신데,

대왕께서는 아직까지 자각하지 못하고 계십니다. 만약에 태후께서 돌연히 세상을 떠나신다면

대왕께서는 누구에게 의지하실 겁니까?”라고 하자.]

 

語未卒,孝王泣數行下,謝安國曰:「吾今出詭、勝.」詭、勝自殺. 

漢使還報,梁事皆得釋,安國之力也.  於是景帝、太后益重安國.

孝王卒,共王即位,安國坐法失官,居家.

建元中,武安侯田蚡為漢太尉,親貴用事,安國以五百金物遺蚡.

蚡言安國太后,天子亦素聞其賢,即召以為北地都尉,遷為大司農. 

閩越、東越相攻,安國及大行王恢將.  未至越,越殺其王降,漢兵亦罷.

[한안국이 말을 미처 끝내기도 전에 양왕이 눈물을 흘리고 통곡하며 한안국에게 감사를

표한 뒤에 말하기를 : “ 제가 지금 당장 공손궤와 양승을 내 놓도록 하겠소.”라고 하였다. 

이에 공손궤와 악승은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조정의 사자들이 돌아와 보고하기를

양나라에서의 문제가 모두 무사히 해결될 수 있었던 것은 한안국이 애쓴 덕분이라고 했다.

그래서 황제와 태후는 한안국을 더욱 중하게 여기게 되었다.  양나라에서는 효왕이 죽고 

아들 공왕이 뒤를 잇자 한안국은 죄에 연좌되어 관직을 잃고 집에 칩거했다.  

건원(建元)8) 연간에 무안후 전분(田蚡)이 태위가 되어 황제의 귀척으로써 정사를 오로지했다.  

한안국이 5백금의 뇌물을 전분에게 바치자 전분은 안국을 태후에게 천거했다.  

천자 역시 한안국이 현능한 사람이라는 사실을 이미 소문으로 들었기 때문에 즉시 그를 불러 

북지군9)의 도위10)로 임명했다가 얼마 후에 대사농(大司農)11)으로 승진시켰다. 

민월과 동월이 전쟁을 일으키자, 한안국과 대행령(大行令)12) 왕회가 장군이 되어 출전했으나

그들의 군대가 미처 현지에 당도하기 전에 월인들이 그들의 왕을 죽이고 항복을 해왔음으로

한나라 군사들도 되돌아왔다.]  

 

建元六年,武安侯為丞相,安國為御史大夫.  匈奴來請和親,天子下議. 

大行王恢,燕人也,數為邊吏,習知胡事.  

議曰:「漢與匈奴和親,率不過數歲即復倍約.  不如勿許,興兵擊之.」

[건원 6년(기원전 135년), 무안후 전분이 승상이 되고 한안국은 어사대부(御史大夫)가 되었다.  

흉노가 사자를 보내 화친을 청해오자 황제가 신하들에게 의논하도록 했다.

대행 왕회는 연나라 사람으로 여러 번에 걸쳐 변경을 지키는 관리를 지내 오랑캐(胡人)들의

일에 익숙했다.  왕회가 의논 중에 말하기를 : “ 우리 한나라와 흉노는 화친을 여러 번 맺었으나 

그때마다 흉노는 몇 년 지나지 않아 맹약을 배반했습니다.

화친을 받아 들이지 말고 군대를 파견하여 그들을 공격해야 합니다.” 라고 하자.]

安國曰:「千里而戰, 兵不獲利.  今匈奴負戎馬之足, 懷禽獸之心, 遷徙鳥舉,

難得而制也.得其地不足以為廣, 有其眾不足以為彊, 自上古不屬為人.

漢數千里爭利, 則人馬罷, 虜以全制其敝.且彊弩之極, 矢不能穿魯縞;

沖風之末, 力不能漂鴻毛. 非初不勁, 末力衰也. 擊之不便, 不如和親.」

群臣議者多附安國,於是上許和親.

​[한안국이 듣고 말하기를 : “ 천리 밖에서 전쟁을 해야 하므로 군사들은 싸움에서 이기지 못할

것입니다.  현재 흉노는 군마가 넉넉하다고 믿고 금수와 같은 생각을 품으며 마치 새 떼가

무리를 지어 옮겨 다니듯 하여 그들을 제압하기 어렵습니다. 그들의 영토를 얻는다 해도

국토를 개척했다고 하기에 부족하고,그들의 백성을 받아들여도 국력이 강해지기에는

부족합니다. 그들은 상고시대부터 중국의 백성에 속하지 않았습니다.

한나라가 수천 리에 걸쳐 그들과 이를 다투게 되면 우리의 군사와 말은 지치게 되겠지만

그들은 온전한 힘을 가지고 우리의 피로함을 노려 대항할 것입니다. 

이것이야말로 강노지극(彊弩之極) 즉 강력한 쇠뇌에서 발사된 화살일지라도

그 끝에 가서는 노(魯)나라에서 생산된 얇은 비단조차 뚫을 수 없는 이치와 같습니다.  

세찬 돌풍도 그 끝에 가서는 가벼운 기러기 털도 흔들만한 힘조차 없어집니다.

처음부터 힘이 약했던 것이 아니라 끝에 가서 힘이 약해 지는 것입니다. 

흉노를 공격하는 것은 옳지 않으니 화친하는 것이 좋을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군신들도 모두 한안국의 의견을 동조했음으로 황제는 흉노와의 화친을 허락했다.]

  

其明年,則元光元年,雁門馬邑豪聶翁壹因大行王恢言上曰:

「匈奴初和親,親信邊,可誘以利.」 陰使聶翁壹為閒, 亡入匈奴,

謂單于曰:「吾能斬馬邑令丞吏, 以城降, 財物可盡得.」 單于愛信之, 以為然,

許聶翁壹.  聶翁壹乃還, 詐斬死罪囚, 縣其頭馬邑城, 示單于使者為信.

曰:「馬邑長吏已死,可急來.」於是單于穿塞將十餘萬騎,入武州塞.

[그 다음 해인 원광 원년, 안문군 마읍의 호족 섭옹일이 대행 왕회를 통해 황제에게 상소를

올렸다. “ 흉노와 화친을 시작한 이래 그들의 신임을 얻게 되었습니다. 그들을 유인하면

싸움에서 이길 수 있습니다.” 황제가 비밀리에 섭옹일을 간첩으로 만들어 한나라에서

죄를 짓고 흉노로 도망치는 것처럼 만들었다. 섭옹일이 흉노의 선우에게 말하기를 :

제가 마읍을 지키는 현령(縣令), 현승(縣丞)과 그 관리들을 참하고 성을 차지할 수 있습니다.

그러면 성내의 재물은 모두 대왕의 차지가 될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선우가 섭옹일을 믿고 그 계획을 따르기로 했다. 섭옹일이 마읍에 돌아와 죄수를 참하여

그 머리를 성루에 걸었다.  ​선우의 사자에게 증거로 보여주어 믿게 하였다. 

사자들이 돌아가서 보고하기를 : “ 마읍의 수령과 관리들이 모두 죽었으니 서둘러 오시기

바랍니다.”라고 하였다.  그래서 선우는 10만여 명의 기병들을 이끌고 변방의 요새를 뚫고,

무주(武州)13)의 요새로 침입하였다.]

 

當是時, 漢伏兵車騎材官二十餘萬, 匿馬邑旁谷中.  衛尉李廣為驍騎將軍,

太仆公孫賀為輕車將軍, 大行王恢為將屯將軍, 太中大夫李息為材官將軍.  

史大夫韓安國為護軍將軍,諸將皆屬護軍.  約單于入馬邑而漢兵縱發. 

王恢、李息、李廣別從代主擊其輜重.

[그때 한나라의 전차, 기병, 보졸로 구성된 20여 만의 군대는 마읍 주변의 계곡에 숨어

매복하고 있었다.  그때 효기장군(驍騎將軍)은 위위(衛尉) 이광(李廣), 경거장군(輕車將軍)은

태복(太僕) 공손하(公孫賀),  장둔장군(將屯將軍)은 대행(大行) 왕회(王恢),

재관장군(材官將軍)은 태중대부(太中大夫) 이식(李息) 등이 맡았고,  

어사대부 한안국은 호군장군(護軍將軍)이 되어 모든 장군들을 밑에 두었다.

선우가 마읍의 경내에 진입하면 한나라 복병이 곧바로 요격하기로 약속했다.

왕회, 이식, 이광은 별동부대를 이끌고 대군(代郡)에서 흉노의 군수물자를 공급하는

후방부대를 공격하기로 했다.]

 

於是單于入漢長城武州塞.  未至馬邑百餘里,行掠鹵,徒見畜牧於野,

不見一人.  單于怪之,攻烽燧,得武州尉史.  欲刺問尉史.  

尉史曰:「漢兵數十萬伏馬邑下.」  單于顧謂左右曰:「幾為漢所賣!」

乃引兵還.  出塞,曰:「吾得尉史,乃天也.」 

命尉史為「天王」 塞下傳言單于已引去.  漢兵追至塞,度弗及,即罷.

[이윽고 선우가 한나라의 장성을 넘어 무주의 요새로 들어섰다. 흉노가 마읍에서 백여 리 

떨어진 곳까지 진군하면서 주변의 마을들을 노략질하다가 단지 들판에서 풀을 뜯어먹고 있는

가축만 보일 뿐  사람은 한 명도 보이지 않은 것을 깨닫은 선우는 괴이하게 여겼다.

그래서 한나라의 봉화대를 습격하여 무주의 위사(尉史) 한 명을 포로로 잡았다.

흉노가 그를 칼로 찔러 죽이겠다고 위협하며 심문했다.  

위사가 말하기를 : “ 한나라 병사 수십 만이 마읍의 성밖에서 매복하고 있습니다.”라고 하자.  

선우가 좌우를 둘러보며 말하기를 : “ 내가 하마터면 한나라의 간계에 속을 뻔 했구나!”하였다. 

선우는 그 즉시 군사를 물리쳐 되돌아가고 말았다. 관새를 벗어난 선우가 말하기를 : 

“ 하늘이 도와 내가 무주의 위사를 얻을 수 있었다.”라고 하며, 명을 내려 위사를 천왕이라고

부르게 했다. 관새의 관리가 사람을 보내 선우는 이미 군사를 이끌고 자기 본거지로

돌아갔다고 보고했다.  한나라 군사들이 그 뒤를 추격하여 변방의 요새까지 이르렀으나

결코 잡을 수 없다는 사실을 알고 추격을 중지했다.]  

 

王恢等兵三萬, 聞單于不與漢合, 度往擊輜重, 必與單于精兵戰, 漢兵勢必敗,

則以便宜罷兵,皆無功.  天子怒王恢不出擊單于輜重,擅引兵罷也.

恢曰:「始約虜入馬邑城,兵與單于接,而臣擊其輜重,可得利.

今單于聞,不至而還,臣以三萬人眾不敵,禔取辱耳. 

臣固知還而斬,然得完陛下士三萬人.」 於是下恢廷尉.  廷尉當恢逗橈,當斬.

[왕회 등의 부대 3만 명은 선우가 한나라 군대와 교전하지 않았다는 소식을 전해 듣고,

만약에 작전대로 자신들이 선우의 후방부대를 공격하면 반드시 선우의 정예 병사들과

교전을 할 것이고, 그러면 자신들이 반드시 패할 것이라고 여겨서 임의로 부대를 철수시켰다.

그래서 한나라 군사들은 모두 공을 세우지 못하고 돌아왔다. 천자는 왕회가 출격하여

선우의 후방부대를 공격하지 않고 자기 멋대로 군대를 철수한 행위에 대해 분노했다.  

왕회가 말하기를 : “ 처음에 작전계획은 흉노가 마읍의 성내로 진입해서 우리 군사들이

선우와 교전에 들어가면 신이 그들의 치중을 공격해서 싸움을 승리로 이끌려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선우가 그 계획을 알고 마읍으로 들어오지 않고 돌아갔으므로 신이 거느린

3만의 군사들만으로는 대적할 수 없어 패전의 치욕을 당할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신이 돌아가게 된다면 참수형에 처해질 것이라고 신은 분명히 알고 있었으나  

폐하의 3만에 달하는 군사는 온전히 보전했습니다.”라고 하였다. 

천자는 왕회를 정위(廷尉)에게 넘겨 하옥시켜 그 죄를 다스리라고 했다.

정위는 왕회를 두요(逗橈)14) 죄로 적용하여 참수형에 처해야 한다고 보고했다.]

 

恢私行千金丞相蚡.  蚡不敢言上,而言於太后曰:「王恢首造馬邑事,

今不成而誅恢,是為匈奴報仇也.」 上朝太后,太后以丞相言告上.

上曰:「首為馬邑事者,恢也,故發天下兵數十萬,從其言,為此.  

且縱單于不可得,恢所部擊其輜重,猶頗可得,以慰士大夫心. 

今不誅恢,無以謝天下.」於是恢聞之,乃自殺.

[왕회는 비밀리에 천금을 승상 전분에게 바쳤다. 전분은 감히 황제에게 직접 고하지 못하고

태후에게 부탁하기를 : “ 왕회는 앞장서서 마읍의 일을 계획했습니다. 

그러나 지금 일이 성사되지 않아 황제께서 왕회를 주살하려고 합니다.

왕회를 죽이는 일은 흉노를 위해 대신 원수를 갚아주는 것과 같습니다.”라고 하였다. 

황제가 아침인사를 드리러 왔을 때 태후는 승상 전분이 전한 말을 황제에게 말했다.  

황제가 말하기를 : “ 마읍의 일을 앞장서서 계획한 자는 왕회입니다. 그래서 천하에서

수십 만의 군사를 일으켜  그의 말에 따랐으나 일이 이렇게 허사가 되었습니다.

비록 선우를 도망가서 잡지 못했으나 왕회가 그의 군사를 이끌고 흉노의 군수품을

공격했다면 얼마간의 공을 이루어 이 나라의 사대부들의 마음을 위로할 수 있었습니다.  

지금 그런 왕회를 죽이지 않고 어떤 다른 방법으로 천하에 사죄할 수 있겠습니까 ? "라고 하자.  

황제의 말은 전해들은 왕회는 즉시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安國為人多大略,智足以當世取合,而出於忠厚焉.  貪嗜於財. 

所推舉皆廉士,賢於己者也.  於梁舉壺遂、臧固、郅他,皆天下名士,

士亦以此稱慕之,唯天子以為國器.

安國為御史大夫四歲餘,丞相田蚡死,安國行丞相事,奉引墮車蹇.

天子議置相,欲用安國,使使視之,蹇甚,乃更以平棘侯薛澤為丞相.

[한안국은 책략이 원대하고 지혜는 세상 사람들이 마음에 부합할 정도로 출중했으며

모두가 충후한 마음에서 나왔다.  비록 재물을 탐하고 좋아했으나  

가 천거한 사람들은 모두가 청렴하고 자기보다 현능했다.

양나라에 있을 때는 호수(壺遂), 장고, 질타를 천거했는데 모두가 천하의 명사들이었다.

천하의 선비들 역시 한안국의 이러한 행위를 모두 칭찬하고 사모하게 되었으며 천자까지도

그를 국가의 큰그릇이라고 존대했다. 한안국은 어사대부로 4년 넘게 재직하였을 때 

승상 전분이 죽자, 한안국이 승상의 업무를 대행하던 중에 천자를 영접하다가 수레에 떨어져

다리를 절게 되었다. 황제는 차기 승상으로 한안국을 임용하고자 사자를 보내

그를 상태를 보게 했더니, 절름거리는 정도가 매우 심했다.

이에 다시 평극후() 설택()을 승상으로 삼았다.]

 

安國病免數月,蹇愈,上復以安國為中尉.  歲餘,徙為衛尉.  

車騎將軍衛青擊匈奴,出上谷,破胡蘢城.  

將軍李廣為匈奴所得,復失之;公孫敖大亡卒:皆當斬,贖為庶人. 

明年,匈奴大入邊,殺遼西太守,及入鴈門,所殺略數千人. 

車騎將軍衛青擊之,出鴈門.  衛尉安國為材官將軍,屯於漁陽.

[한안국은 관직을 그만두고 집에서 치료한지 몇 개월 만에 그의 병은 나아 다리를 절지 않게

되었다.  황제는 한안국을 정위로 임명했다. 일 년이 지나자 위위(衛尉)로 자리를 옮겼다.  

거기장군 위청(衛靑)이 흉노를 치기 위해 상곡에서 나아가 흉노의 용성(蘢城)을 함락시켰다.

그때 장군 이광은 흉노에 의해 포로가 되었으나 도중에 탈출했다.  

또한 공손오는 군졸을 크게 잃었음으로 두 사람 모두 마땅히 참수형에 해당했으나

속죄금을 내고 서인이 되었다.  다음 해 흉노가 대거 변경을 침략하여 요서태수(遼西太守)를

살해한 후에 계속 남하하여 안문까지 이르러 주민 수천 명을 살해했다.

거기장군이 요격하기 위해 안문으로 진격했다.

당시 위위의 직에 있었던 한안국은 병을 이끄는 재관장군(材官長君)으로 어양에 주둔했다.]

 

安國捕生虜,言匈奴遠去.  即上書言方田作時,請且罷軍屯. 

罷軍屯月餘,匈奴大入上谷、漁陽.

安國壁乃有七百餘人, 出與戰, 不勝, 復入壁.  匈奴虜略千餘人及畜產而去.

天子聞之, 怒, 使使責讓安國. 徒安國益東, 屯右北平. 是時匈奴虜言當入東方.

[이때 한안국은 흉노의 병사를 포로로 잡았는데 그가 흉노군이 멀리 퇴각했다고 말하였다.

한안국은 황제에게 서장을 올려 계절이 마침 농사철이이니 잠시 군역을 면해 농사를 지을 수

있게 해달라고 청했다. 군사들을 집으로 돌려보내고 한 달여 만에 흉노가 대거

상곡과 어양을 침입했다.  한안국은 7백여 명의 군사들을 이끌고 출전하여 흉노와 싸웠으나

이기지 못하고 진지로 퇴각했다.  흉노는 천여 명의 백성들과 가축을 노략질한 후에 돌아갔다.

천자가 듣고 노하여 사자를 시켜 한안국을 책망했다. 

천자는 한안국을 동쪽의 우북평으로 옮겨 주둔시켰다. 그 까닭은 당시의 흉노의 포로가

장차 흉노의 군대가동쪽으로 침입할 것이고 말했기 때문이었다.]

 

安國始為御史大夫及護軍, 後稍斥疏, 下遷;而新幸壯將軍衛青等有功, 益貴.

安國既疏遠,默默也;將屯又為匈奴所欺,失亡多,甚自愧.

幸得罷歸, 乃益東徙屯, 意忽忽不樂.  數月, 病歐血死.  安國以元朔二年中卒. 

[한안국은 원래 어사대부와 호군장군(護軍將軍)으로 한나라의 전군을 통솔하는 대장이었으나  

후에 점점 천자와 소원해져 결국은 변방으로 좌천되었다.  그러나 젊은 장군 위청 등은

흉노를 정벌하여 공을 세움으로써 황제의 총애를 받아 귀한 신분이 되었다.

이미 황제와 소원하게 된 한안국은 실의에 빠져 침묵으로 울분을 달래며 지냈다.

변방의 주둔군 장수가 된 한안국은 흉노의 속임수에 빠져 많은 인명손실을 입고 스스로 

이것을 부끄럽게 여겼다. 그래서 황제에게 관직을 면하여 집으로 돌아가기를 희망했으나

황제는 오히려 한안국을  더욱 동쪽의 변방으로 임지를 옮기도록 했다.

그래서 한안국은 실의에 빠져 답답한 마음으로 지내다가 몇 달 후에 피를 토하더니

결국 죽고 말았다. 한안국은 원삭 2년(기원전 127년) 연간에 죽었다.]  

 

 

太史公曰:

余與壺遂定律歷, 觀韓長孺之義, 壺遂之深中隱厚.  世之言梁多長者, 不虛哉!

壺遂官至詹事,天子方倚以為漢相,會遂卒. 

不然,壺遂之內廉行修,斯鞠躬君子也. 

[태사공이 말한다.  

나는 호수(壺遂)와 함께 율력을 정할 때 한안국의 의기와 호수의 마음속 깊은 곳에 있는

순후함을 볼 수 있었다. 세상 사람들은 양나라에 장자가 많이 살고 있다고 말하고 있는데,

이는 과연 헛된 소문이 아니도다!  

호수의 관직이 첨사였을 때 황제가 비로소 한나라 상국으로 삼으려고 하는 순간 죽고 말았다.  

그렇지 않았다면 호수는 승상이 되어 청렴하고 행실이 바른 군자로 존경 받았을 것이다.]  


史記索隱述贊

 

安國忠厚 初為梁將(안국충후 초위양장)
충성스럽고 후덕한 한안국이 양나라의 장군이 되었으나

因事坐法 免徒起相(인사좌법 면도기상)
사건에 연루된 죄수의 몸에서 일으켜 양나라의 상국이 되었다.

死灰更然 生虏失防(사회경연 생로실방)
꺼진 불씨를 다시 일으켜 장군이 되었으나 포로로 잡히고 성을 지키지 못했다.

推賢見重 賄金貽謗(추현견중 회금이방)
현능한 사람을 천거하여 중임을 맡았다가 뇌물을 받고 비방을 받았다지만

雪泣悟主 臣節可亮(설읍오주 신잘가량)
눈물을 쏟으며 그 주인을 깨닫게 했으니 그의 신하로써의 절개는 가히 훌륭하다 하겠다.


  

【 각주 】  

1) 성안(成安)/ 지금의 하남성(허난성) 민권현(民權縣) 동북으로 한나라 때 진류군에 속했다.

2) 양효왕(梁孝王)/ 한경제의 동모제 유무(劉武)다.

3) 한나라의 법에 2천석 이상의 관리는 황제만이 임명할 수 있었다.

4) 대장공주(大長公主)/ 경제의 누나 관도공주(館陶公主)로 이름은 유표(劉嫖)다.

5) 내사(內史)/ ①서주(西周) 때 시작된 관직의 이름으로 궁중내의 간책(簡冊)을 관리하고

    제후와 경대부들의 임명에 관한 왕명의 출납을 관장했다.

   ②고대의 행정구역. 진한(秦漢)때 경기(京畿) 지방에 설치하여 군을 대신한 행정구역의 이름.

    진나라에서 처음 시작하여 함양을 관할 구역으로 하였다. 여기서는 ①의 뜻이다.  

    또한 봉국이나 제후국의 2천 석 이상 되는 고관의 경우는 황제가 직접 임명했다.  

6) 태상황(太上皇)/ 한고조 유방의 부친으로 태공(太公)을 말한다.

7) 임강왕(臨江王)/ 기원전 150년 그의 모후 율비가 경제의 총애를 잃자 태자에서 폐위되어

    임강왕이 되고 얼마 후에 태자의 자리에는 왕부인의 소생 유철 즉 한무제가 대신 섰다.  

    기원전 147년 종묘의 땅을 범한 죄명으로 하옥되어 중위(中尉)로 있던 질도(侄到)의

    심문을 받다 자살했다.

8) 건원(建元)/ 한무제가 사용한 연호로 기원전 140년부터 135년까지의 연호다.

    중국 최초로 사용한 연호다.

9) 진나라가 전국시대인 기원전 271년 진소왕이 이민족 국가인 의거(義渠)를 멸하고

    그 땅에 농서(隴西) 및 상군과 함께 설치한 설치한 군명으로 한나라가 그대로 따랐다.

    관할은 녕하성(寧夏省)청동협(靑銅峽) 이동과 간쑤성 동북부 마련하(馬蓮河) 유역을

    포괄하고 치소는 의거(義渠)다.  

10) 전국 때 처음으로 시작되어 진과 한나라가 따라서 설치한 관직으로 고위 무장 밑의

      중급 무관이다.  그 직위는 교위 보다 낮았으며 관명은 하는 일의 성격에 따라 예를 들면

      호군도위, 부마도위, 강노도위 등으로 호칭되었다. 한나라 때의 봉록은 2천 석이었다.  

11) 대사농/ 진한(秦漢) 대 구경(九卿) 중의 하나인 관직명으로 국가의 재정과 경제를 주관했다.  

      진나라 때는 치속내사였다. 한경제 후원년 기원전 143년 대사농으로 명칭을 바꾸었다.  

      봉록은 2천 석이며 산하에 태창령(太倉令), 평준령(平準令), 도관령(導官令) 등을 두고

      조세(租稅)와 화폐(貨幣), 양식 및 염철(鹽鐵) 등의 사무를 관장했다.  

12) 대행령(大行令)/ 제후들과 이민족들과 사무를 관장했던 관명으로 원래 대홍려(大鴻臚)다.  

      진나라와 한나라 초기에는 전객(典客)이라는 명칭으로 9경에 들었다.

      한경제 때 대행령(大行令)으로 개칭했다가 무제(武帝) 때 대홍려로 다시 변경했다.  

13) 무주(武州)/ 지금의 산서성 북쪽 좌운현(左雲縣)이다.

14) 두요(逗橈)/ 적을 두려워하여 싸움터에서 도망치는 행위

15) 첨사(詹事)/ 진한 때 태자나 황후에 속했던 관명으로 녹봉은 연 2천 석에 태자나 황후가

      필요한 물자나 행정업무를 관장했다. 태자궁에 속한 첨사는 태자첨사,

      장신궁에 거하는 황후에 속하는 첨사는 장신첨사로 칭하다가 경제 때 소부로 개칭했다가

      소제(昭帝) 때 소부는 없어지고 태자첨사만 별도로 두었다.
  

 

※  原 文 .    【 中國哲學書電子化計劃 .   筆寫本 】

 

                                   

     原 文   飜 譯 者        德庤 / 李   斗 振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