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0.季布 欒布列傳

​第 四十. 季布欒布列傳(계포 난포열전) ​

덕치/이두진 2023. 11. 27. 16:59

 

    第 四十.  季布欒布列傳(계포 난포열전) 

季布者,楚人也.  為氣任俠,有名於楚.  項籍使將兵,數窘漢王.

及項羽滅,高祖購求布千金,敢有舍匿,罪及三族.

​[계포(季布)는 초(楚)나라 출신이다. 의기와 협객으로 초나라에서 이름이 높았다. 

항우에 의해 장수가 된 그는 한왕을 여러 번 곤경에 빠뜨렸다. 

이윽고 항우를 멸한 고조는 천금의 상금을 현상금으로 계포의 몸에 걸고

감히 그를 숨겨준 사람이 있다면 그 죄가 삼족에 미칠 것이라고 했다.]

 

季布匿濮陽周氏.  周氏曰:「漢購將軍急, 跡且至臣家, 將軍能聽臣, 臣敢獻計;

即不能,願先自剄.」 季布許之.  乃髡鉗季布,衣褐衣,置廣柳車中,

并與其家僮數十人,之魯朱家所賣之.  朱家心知是季布,乃買而置之田.

[계포는 복양(濮陽)의 주씨(周氏) 집에 숨어 지냈다.

주씨가 말하기를 : " 한나라가 장군의 몸에 현상금을 걸고 급히 찾고 있어 조만간

저의 집에까지 추적해 올 것입니다. 장군께서 제 말을 들으신다면 제가 감히 계책을

말씀드리겠지만 들을 수 없으시다면 원컨대 스스로 목을 찔러 자결하시기 바랍니다.”하자. 

계포가 주씨의 말을 따르겠다고 허락했다. 주씨는 계포의 머리를 깎은 후에 목에 칼을 채우고

갈포옷을 입혀 광류거에 태워 그의 가동 수십 명과 함께 노나라의 주가(朱家)에게 팔았다.

주가는 가노로 팔려온 사람 중에 계포가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으나

모른 체 하고 계포를 사서 밭일을 보게 했다.]

 

誡其子曰:「田事聽此奴,必與同食.」

朱家乃乘軺車之洛陽,見汝陰侯滕公. 滕公留朱家飲數日.

因謂滕公曰:「季布何大罪,而上求之急也?」

滕公曰:「布數為項羽窘上,上怨之,故必欲得之.」 

朱家曰:「君視季布何如人也?」 曰:「賢者也.」

[주가는 그의 아들에게 일러두기를 : " 밭일은 모두 그 가노에게 물어서 하고

식사도 항상 함께 하라."라고 하였다. 그리고 자신은 초거(軺車)를 타고 낙양으로 달려가 

여음후(汝陰侯) 등공(縢公)을 찾아갔다.  

등공은 주가를 자기 집에 머무르게 하면서 며칠 동안 같이 음식을 먹으며 접대했다.  

주가가 기회를 얻어 등공에게 묻기를 : " 계포가 무슨 큰 죄를 지었기에 황제께서

많은 상금을 걸고 급히 찾고 계십니까? ”라고 하자. 
등공이 대답하기를 : “ 계포는 어려 번 항우의 명을 받들어 황제 폐하를 곤궁하게 만들었소.  

그 일을 원통하게 생각한 황제께서 반드시 그를 찾아서 원한을 풀려고 하기 때문이오.”하였다.  

주가가 묻기를 : “ 계포는 어떤 사람입니까? ”라고 하자.  

등공이 대답하기를 : “ 현능한 사람이오.”라고 하였다.] 

 

朱家曰:「臣各為其主用,季布為項籍用,職耳. 

項氏臣可盡誅邪?今上始得天下, 獨以己之私怨求一人, 何示天下之不廣也! 

且以季布之賢而漢求之急如此, 此不北走胡即南走越耳.

夫忌壯士以資敵國, 此伍子胥所以鞭荊平王之墓也.  君何不從容為上言邪?」

​[주가가 말하기를 : “ 제가 듣기에 모든 사람은 각기 그 주인에 위해 애써야 한다고 했는데

계포가 항적을 위해 애썼던 일은 그가 마땅히 해야 할 일이 아니었겠습니까?

그런데 항적을 받들었던 사람들을 모조리 죽여야만 한다는 말입니까?  

지금 황제폐하께서는 천하를 얻으신 지가 얼마 되지 않았는데 유독 자기의 사사로운 원한이

맺힌 한 사람만을 찾으시니 어찌하여 폐하의 도량이 좁다는 사실을 천하에 보이시는

것입니까? 또한 계포는 현능한 사람이라 한나라가 이와 같이 그를 급하게 찾는다면

그가 만일 북쪽의 흉노에게 달아나거나 아니면 남쪽의 월나라로 달아날 텐데,

무릇 장사를 버리는 일은 적국을 이롭게 하는 행위로, 옛날 초나라에서 버림 받은 오자서가

오나라로 망명한 뒤에 다시 돌아와 초평왕(楚平王)의 묘를 파서 

그의 시신을 채찍으로 쳐 원수를 갚은 일이 될 것입니다. 

공께서는 어찌하여 황제께 이 일을 말씀드리지 않으시는 것입니까?”라고 하였다.]

  

汝陰侯滕公心知朱家大俠, 意季布匿其所, 乃許曰:「諾.」待閒, 果言如朱家指.

上乃赦季布. 當是時, 諸公皆多季布能摧剛為柔, 朱家亦以此名聞當世.

季布召見, 謝, 上拜為郎中.

孝惠時,為中郎將.  單于嘗為書嫚呂后,不遜,呂后大怒,召諸將議之. 

上將軍樊噲曰:「臣願得十萬眾,橫行匈奴中.」 諸將皆阿呂后意,曰「然」.

[여음후 등공은 주가가 대협()임을 알고 있었으므로 계포가 그의 집에 숨어 있을 것으로

짐작했다. 이에 등공은 주가의 말에 수긍하고 : " 황제께 말씀드려보겠습니다."라고 하였다. 
그리고 황제가 한가한 틈을 타서 주가가 한 이야기를 전했다. 황제가 마침내 계포를 사면했다.
그 당시 여러 공경들은 계포가 강직한 성격을 누르고 유연한 처세를 했다고 칭송하고,

주가 또한 이로 인해 당시에 이름을 날렸다. 계포가 황제를 알현하여 감사의 말을 전하자

황제는 계포를 낭중(郎中)1)에 임명했다.
효혜제 때 계포는 중랑장(中郞將)2)이 되었다.

흉노의 선우가 서신을 보내 여후를 희롱하며 매우 불손했다.  

이에 여태후는 크게 노하여 여러 장수들을 불러 대책을 상의했다. 

상장군 번쾌(樊噲)가 말하기를 : “ 신에게 10만의 군사를 내어 주시면 흉노의 땅으로 쳐들어가

그들의 땅을 맘껏 유린하겠습니다."라고 하자. 

​여러 장수들은 모두 그 뜻이 좋다며 여후에게 아부하며 말하기를 :

" 번쾌의 말에 동의합니다."라고 하였다.]

 

季布曰:「樊噲可斬也!夫高帝將兵四十餘萬眾, 困於平城,

今噲柰何以十萬眾橫行匈奴中, 面欺!且秦以事於胡, 陳勝等起. 

于今創痍未瘳, 噲又面諛, 欲搖動天下.」 

是時殿上皆恐,太后罷朝,遂不復議擊匈奴事.  

季布為河東守,孝文時,人有言其賢者,孝文召,欲以為御史大夫. 

復有言其勇,使酒難近.  至,留邸一月,見罷.

[이때 계포가 말하기를 : “ 번쾌를 참수형에 처해야 합니다.

일찍이 40만의 장병을 이끌고 계셨던 고제께서도 평성(平城)에서 곤경에 처하셨는데 

지금 번쾌는 십만의 병사만으로 어떻게 흉노 땅을 유린하겠다는 것입니까?  

이는 면전에서 태후를 기만하는 행위입니다. 더욱이 진나라는 흉노 정벌에 지나치게 

국력을 낭비해서 진승 등이 반기를 드는 빌미를 제공했습니다. 지금까지 그 상처가 아물지

않았음에도 번쾌는 태후의 면전에서 아첨하여 천하를 동요시키려고 합니다. ”라고 하자.  

그때 전당에 있던 모든 사람들은 계포의 말에 두려움에 떨었다.  

태후가 조회를 파하고 다시는 흉노를 공격하는 일에 대해서 말하지 않았다. 

계포는 하동태수(河東太守)가 되었다.  효문제 때 어떤 사람이 계포가 현능하다고 천거하자

문제가 불러 그를 어사대부에 임명하려고 했다.

다시 어떤 사람이 그가 용기는 있지만 술 때문에 가까이 두기에는 어렵다고 했다.

그래서 사저에 한 달 동안이나 머물렀으나 알현도 못하고 돌아가게 되었다.]

 

季布因進曰:「臣無功竊寵, 待罪河東.  陛下無故召臣, 此人必有以臣欺陛下者;

今臣至,無所受事,罷去,此人必有以毀臣者.  夫陛下以一人之譽而召臣,

一人之毀而去臣,臣恐天下有識聞之有以闚陛下也.」

上默然慚, 良久曰:「河東吾股肱郡,故特召君耳.」布辭之官.

[이에 계포는 대전으로 나아가 진언하기를 : “ 신은 공이 없음에도 폐하의 은총을 훔쳐

하동의 태수를 하고 있습니다. 폐하께서 아무런 까닭 없이 신을 부르신 이유는

필시 어떤 사람이 신에 대해서 폐하를 속였을 것입니다. 지금 신이 폐하를 알현하기 위해

경사에 당도했으나 아무런 임무도 받지 못하고 다시 돌아가라 하시니 이것은 필시

어떤 사람이 신을 헐뜯었기 때문일 것입니다. 릇 폐하께서는 한 사람이 저를 칭찬하자

부르시고, 다시 한 사람이 신을 헐뜯자 신을 버리셨습니다. 천하에 식견을 갖고 있는

사람들이 이 일을 듣고 폐하의 마음을 들여다보지 않을까 신은 두렵습니다.”라고 하였다. 
황제는 이 말을 묵묵히 듣고 부끄러워 하더니 한참 지나 말하기를 :

 “ 하동은 우리 한나라의 수족과 같은 군이오. 그래서 특별히 그대를 부른 것이오.”라고 하자.  

계포는 감사의 말을 올리고 원래의 하동태수 직에 부임했다.]

 

楚人曹丘生,辯士,數招權顧金錢.  事貴人趙同等,與竇長君善.

季布聞之,寄書諫竇長君曰:「吾聞曹丘生非長者,勿與通.」

及曹丘生歸,欲得書請季布.  竇長君曰:「季將軍不說足下,足下無往.」 

固請書,遂行.  使人先發書,季布果大怒,待曹丘.

[초나라 사람 조구생(曹丘生)은 변술에 능했다.

여러 번 권세가와 귀족들에게 아부하여 돈을 벌었다.  

조구생은 일찍이 권세가 조동(趙同) 등을 받든 적이 있었고 또한 두장군(竇長君)3)과도

교분이 깊었다. 계포가 듣고 편지를 써서 두장군에게 간했다. 편지의 내용은 이러했다.
“ 제가 듣기에 조구생은 덕망이 있는 사람이 아닙니다. 그와 왕래를 하지 마십시오.”하였다. 
이윽고 조구생이 고향인 초나라로 돌아가려고 할 때 두장군을 찾아가 편지를 얻어 계포를

만나려고 했다.  두장군이 말하기를 : “ 계장군은 그대를 좋아하지 않습니다.

그를 만나지 않은 편이 좋을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그래도 조구생은 고집하여 두장군의 편지를 얻어 계포를 만나기 위해 길을 떠났다.

조구생은 먼저 사람을 시켜 계포에게 소개장을 보냈다. 

역시나 계포는 크게 노하여 조구생을 기다리고 있었다.

 

曹丘至, 即揖季布曰:「楚人諺曰『得黃金百(斤), 不如得季布一諾』

足下何以得此聲於梁楚閒哉?且仆楚人,足下亦楚人也. 

仆游揚足下之名於天下,顧不重邪?何足下距仆之深也!」

季布乃大說, 引入, 留數月, 為上客, 厚送之.  季布名所以益聞者, 曹丘揚之也.

[조구생은 도착하자 계포에게 읍을 하고 말하기를 :“ 초나라 사람들 사이에'황금 백일(百鎰)을

얻는 것보다 계포의 승낙 한 번 받는 것이 더 낫다.'라는 말이 돌아다니고 있습니다.

장군께서는 어떻게 하여 그와 같은 명성을 양나라나 초나라 땅에서 얻게 되었을까요?  

하물며 저 또한 초나라 사람이고 장군 역시 초나라 사람입니다. 제가 천하를 돌아다니면서

장군의 이름을 선양한다면 장군의 명성은 천하에 떨치고 몸은 중하게 되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어찌하여 장군께서는 저를 그렇게 심하게 박대하십니까?”라고 하자. 

계포가 크게 기뻐하며 조구생을 안으로 안내하여 수 개 월 머물게 하고 상객으로 모신 다음

떠날 때는 후한 선물을 주어 보냈다. 계포의 명성이 더욱 사람들 사이에 높아지게 된 것은

조구생이 그의 이름을 널리 알렸기 때문이다.]

 

季布弟季心,氣蓋關中,遇人恭謹,為任俠,方數千里,士皆爭為之死.

嘗殺人,亡之吳,從袁絲匿.  長事袁絲,弟畜灌夫、籍福之屬. 

嘗為中司馬,中尉郅都不敢不加禮.  少年多時時竊籍其名以行.  

當是時,季心以勇,布以諾,著聞關中. 

[계포의 동생 계심(季心)은 의기가 관중을 덮을 만큼 높았다.

그는 만나는 사람마다 공손하게 대하며 협객으로 소문이 나서 사방 수천 리의 선비들이

달려와 다투어 그를 위해 죽음을 다투었다. 그가 일찍이 사람을 죽이고 오나라로 도망치자

그때 오나라의 상국으로 있던 원사(袁絲,원앙)가 숨겨 주었다.

그는 원앙을 형님으로 모시고 관부(灌夫)와 적복(籍福) 등을 동생처럼 감싸주었다.

그는 얼마 후에 중사마(中司馬)4)가 되었는데 중위(中尉) 질도(郅都)조차도 감히 예를 갖추어

대해야만 했다. 젊은 사람들이 여러 번 계심의 이름을 도적질하여 행세하곤 했다.  

당시 계심은 용맹함으로, 계포는 일단 부탁을 받으면 거절하지 못하는 것으로

각각 관중에 명성이 높았다.]

 

季布母弟丁公,為楚將.  丁公為項羽逐窘高祖彭城西,短兵接,高祖急,

顧丁公曰:「兩賢豈相戹哉!」於是丁公引兵而還,漢王遂解去.  

及項王滅,丁公謁見高祖.

高祖以丁公徇軍中,曰:「丁公為項王臣不忠,使項王失天下者,乃丁公也.」

遂斬丁公,曰:「使後世為人臣者無效丁公!」

[계포의 외삼촌 정공(丁公)은 초나라 장수였다. 정공은 항우를 위해 팽성() 서쪽에서

고조를 추적하여 창과 칼로 접전을 벌였다. 다급하게 된 고조가 정공을 향해 말하기를 : 

“ 우리 두 사람은 모두 현능한 사람인데 어찌 서로 해칠 수 있습니까?”라고 하자. 

이에 정공은 군사를 거두어 돌아가니, 한왕은 포위망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그리고 마침내 한왕이 돌아와 항왕을 멸하자, 정공이 고조를 알현했다.
고조는 정공을 붙잡아 군중을 순시하며 말하기를 : 

“ 정공은 항왕의 신하로써 나를 풀어 주어 항왕에게 충성을 다하지 않았다. 

항왕으로 하여금 천하를 잃게 만든 자는 바로 정공이다.”라고 하며. 

​마침내 고조는 정공을 베고 말하기를 : “후세에 신하된 자들에게 정공을 본받지 않게 하기

위함이다”라고 하였다.]

 

 

欒布者, 梁人也.  始梁王彭越為家人時, 嘗與布游.  窮困, 賃傭於齊, 為酒人保.

數歲,彭越去之巨野中為盜,而布為人所略賣,為奴於燕.  

為其家主報仇,燕將臧荼舉以為都尉.  臧荼後為燕王,以布為將.

[난포(欒布)는 양나라 사람이다. 처음에 양왕 팽월(彭越)이 평민이었을 때 서로 교유를 맺었다.  

생활이 곤궁하여 제나라에서 남의 집 고용살이를 하다가 다시 주막에서 심부름하며 살았다.

몇 년 후에 팽월은 거야택으로 가서 도적이 되었고, 난포는 다른 사람에게 붙잡혀 

연나라에 팔려가 노예생활을 했다. 난포가 그 집 주인을 위해 원수를 갚아주자,

연나라 장수인 장도()가 알고 그를 추천하여 도위(都尉)로 임명했다. 

후에 장도는 연왕()이 되자, 난포를 장군으로 삼았다.]

 

及臧荼反,漢擊燕,虜布.  梁王彭越聞之,乃言上,請贖布以為梁大夫. 

使於齊,未還,漢召彭越,責以謀反,夷三族.  已而梟彭越頭於雒陽下,

詔曰:「有敢收視者, 輒捕之.」 布從齊還, 奏事彭越頭下, 祠而哭之.  吏捕布以聞.

​[장도가 한나라에 반란을 일으키자,  한나라의 토벌군이 연나라를 공격하여 난포는

포로가 되었다.  양왕 팽월이 소식을 듣고 황제에게 부탁하여 난포를 위해 속죄금을 내고

양나라의 대부로 삼기를 청했다.  난포가 제나라에 사자로 갔다가 미처 돌아오기 전에

고조는 팽월이 모반했다는 죄명을 씌어 팽월을 죽이고 그의 삼족을 멸했다.

고조는 팽월의 머리를 낙양 성 밑에 걸어두고 조서를 내리기를:

“ 감히 팽월의 시신을 거두는 자가 있다면 즉시 체포하여 옥에 가두라!”라고 하였다. 
제나라에서 돌아온 난포는 낙양으로 달려와 팽월의 시신을 거두어 제나라에 사자로 다녀온

일을 보고하고 그 앞에서 제사를 지내며 통곡을 하였다.

관리가 난포를 체포하고 그 사실을 고조에게 보고하자.]

  

上召布,罵曰:「若與彭越反邪?吾禁人勿收,若獨祠而哭之,

與越反明矣.  趣亨之.」 方提趣湯,布顧曰:「願一言而死.」 上曰:「何言?」

​[황제가 난포를 소환하여 꾸짖으며 말하기를 : “ 너도 팽월과 함께 모반한 것이냐 ?  

내가 그 누구도 팽월의 시신을 거두지 말라고 명을 내렸는데 너 혼자 시신을 거두어

제사를 지내고 통곡을 했으니 너는 팽월과 더불어 모반을 획책했음이 분명하다.

너를 끓은 물에 삶아 죽여야 하겠다.”라고 하였다. 
이윽고 관리들이 물이 끓고 있는 가마솥에 던지려고 하는 순간에 난포가 고개를 돌려

황제를 향해 말하기를 :  “ 원컨대 한 마디만 올리고 죽게 해주십시오.”라고 하자,   

황제가 묻기를 : “ 무슨 말이냐? ”라고 하였다.]  

 

布曰:「方上之困於彭城,敗滎陽、成皋閒,項王所以(遂)不能[遂]西,

徒以彭王居梁地,與漢合從苦楚也.  當是之時,彭王一顧,與楚則漢破,

與漢而楚破.  且垓下之會,微彭王,項氏不亡.  天下已定,彭王剖符受封,

亦欲傳之萬世.  今陛下一徵兵於梁,彭王病不行,而陛下疑以為反,

反形未見,以苛小案誅滅之, 臣恐功臣人人自危也. 

今彭王已死,臣生不如死,請就亨.」  於是上乃釋布罪,拜為都尉.

[난포가 말하기를 : “ 폐하께서 팽성에서 항우와 싸워 곤경에 처하고 형양과 성고 사이에서

패했음에도 항왕이 서쪽으로 계속 진격하지 못했던 이유는 팽왕이 양나라 땅을 지키면서

한나라와 합종을 맺어 항왕을 괴롭혔기 때문이었습니다. 당시 팽왕이 한 번 시선을 돌려

초나라를 쳐다봤다면 한나라가 지고, 한나라를 쳐다봤다면 초나라가 지게 되어 있었습니다.

또한 해하의 회전(會戰)에서 팽왕이 참전하지 않았다면 항왕은 망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이제  천하가 이미 평정되어 팽왕에게 부절과 함께 양왕으로 봉해 그 역시 만세에 

그의 작위를 전하라고 했습니다. 지금 폐하께서 양나라에 징병을 명하자, 

팽왕은 몸이 아파 종군하지 못했는데 그것을 빌미로 폐하께서는 팽왕이 반역을 꾀한다고

의심하셨으나 아직까지 아무런 흔적도 나타나지 않고 있습니다.

그런데도 폐하께서는 작은 문제를 트집 잡아 가혹한 형벌을 가해 팽왕을 죽이고 그 종족들을

멸족시켰습니다. 신은 공신들마다 스스로 위태롭다고 느끼지 않을까 하는 것이 걱정됩니다.

이제 팽왕이 죽었으니, 신은 사는 것이 죽는만 못한 것 같아, 

청컨대 삶아 죽여주십시오.”라고 하였다.이에 황제는 난포를 석방하고 도위에 임명했다.]

孝文時,為燕相,至將軍. 

布乃稱曰:「窮困不能辱身下志,非人也;富貴不能快意,非賢也.」

於是嘗有德者厚報之,有怨者必以法滅之. 

吳(軍)[楚]反時,以軍功封俞侯,復為燕相. 

燕齊之閒皆為欒布立社,號曰欒公社. 

景帝中五年薨. 子賁嗣,為太常,犧牲不如令,國除.

 

[효문제 때 난포는 연나라 상국이 되었다가 장군에까지 이르렀다. 난포가 큰소리로 말하기를 : 
“ 곤궁할 때 몸을 굽히고 뜻을 낮출 수 없는 사람은 사내대장부라고 할 수가 없고, 

부귀를 누릴 때 만족감을 느끼지 못하면 현명한 사람이 아니다.”라고 하였다.
그래서 일찍이 은혜를 입었던 사람들에게는 후하게 보답을 하고, 

원한을 가졌던 사람들은 반드시 법으로 파멸시켰다.

오, 초나라가 반란을 일으켰을 때 그는 종군하여 공을 세워 유후()에 봉해졌고

연나라의 재상이 되었다. 연과 제나라 사이에 살던 모든 사람들은 난포를 위해

사당을 세우고 난공사(欒公社)라고 불렀다.
경제() 중원() 5년(기원전 145년), 난포가 죽었다.

그 뒤를 이은 아들 난분(欒賁)은 태상(太常)이 되었다가 제사를 지낼 때

희생(犧牲)이 법령에 맞지 않았다는 이유로 죄를 얻어 봉국이 해제되었다.] 

   

太史公曰:

以項羽之氣,而季布以勇顯於楚,身屨(典)軍搴旗者數矣,可謂壯士. 

然至被刑戮,為人奴而不死,何其下也! 彼必自負其材,故受辱而不羞,

欲有所用其未足也,故終為漢名將.  賢者誠重其死.  

夫婢妾賤人感慨而自殺者,非能勇也,其計畫無復之耳.

欒布哭彭越, 趣湯如歸者, 彼誠知所處, 不自重其死.  雖往古烈士, 何以加哉!  

[태사공이 말한다.
항우의 기개로도 덮을 수 없을 만큼 계포는 용맹함으로 초나라에서 이름을 드날렸다.

그는 친히 적군을 소멸시키고 적군의 군기를 빼앗기를 여러 번 했으니

계포야 말로 장사라고 말할 수 있다. 그러나 그가 형벌을 받고 다른 사람의 노복이 되는 

불우한 신세가 처했음에도 스스로 목숨을 끊지 않았으니 얼마나 비겁한 짓인가?

그러나 그것은 필시 자기의 재능에 대해 자부심을 갖고 있었기 때문에 그런 욕됨을 입고도

결코 부끄럽다고 생각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미처 발휘하지 못한 자신의 재능을 펼쳐보려는 욕망 때문에 참고 견디어

마침내 한나라의 명장이 되었다.  현능한 사람은 진실로 그의 죽음을 중히 여긴다. 

저 천한 비첩이나 천인들이 비분강개하여 스스로 목숨을 끊는 것은 진정한 용기가 아니다. 

그것은 단지 계획을 다시 고쳐 실행할 용기가 없기 때문일 뿐이다.  

난포가 팽월을 위해 통곡을 하고 가마솥에 던져져 삶겨 죽는 일을 마치 고향으로 돌아가듯이 

한 행위야 말로 그가 진실로 곤궁한 처지애 놓여있을 때 어디에 몸을 두어야 할 지를

알았기 때문이지 자기의 죽음을 중하게 생각하지 않았기 때문이 아니다.

비록 옛날의 열사라 할지라도 어찌 이보다 더 할 수 있겠는가?]  

 

【 각주 】 

1) 랑중(郞中)/ 진나라가 설치하고 한나라가 답습한 관제로 궁정의 숙위 및 성문의 출입 감시,  

    궁내의 제반사에 대한 관리 및 왕명의 출납을 관장하는 관리들을 랑(郞)이라고 했으며

    그 맡은 바 임무에 따라 황제와 비빈들이 묶고 있는 곳을 드나들며 시위하도록 했던

    직위를 중랑(中朗), 궁중에 거하며 황제를 시위했던 직위를 낭중(郎中),

    궁중 밖에서 황제를 시위했던 직위를 외랑(外朗)이라 하고

    9경 중의 한 명인 그 우두머리는 랑중령이라고 했다가 한무제 때 광록훈으로 개명했다.  

2) 중랑장(中郞將)/ 중랑의 우두머리로 녹봉은 2천석이다.

3) 두장군(竇長君)/ 서한의 외척으로 이름은 건(建)이고 장군(長君)은 자(字)다.

    지금의 하북성 무읍(武邑)인 청하(淸河) 관진(觀津) 출신이다.

    두태후(竇太后)의 오빠로 그의 여동생이 문제(文帝)의 황후가 되자 주발 등의 대신들은

    외척이 발호하여 여씨의 재판이 될 것을 걱정하여 두장군을 위해 예의가 바르고

    절의가 있는 사람을 사부와 빈객으로 뽑아 곁에 두도록 했다.

    장군 역시 그것으로 인해 겸양(謙讓)의 미덕을 갖춘 군자의 기풍을 갖추게 되어

    감히 귀척의 신분이면서도 교만에 빠지지 않았다.

    문제 때 죽었으나 미처 후에 봉해지지 못해 두태후가 이를 심히 한스럽게 생각했다.

    경제가 서자 그의 아들 두팽조(竇彭祖)를 남피후(南皮侯)에 봉했다.  

4) 중사마(中司馬)/ 중위사마(中尉司馬)의 속관이다. 구경의 일원으로 수도의 치안을

    담당하는 중위밑에서는두 명의 승(丞), 후(候), 사마(司馬), 천인(千人) 등

    주로 경호와 경비 임무를 담당하는 무관들을 속관으로 두었다.

 

  

※  原 文 .    【 中國哲學書電子化計劃 .   筆寫本 】

                                   

 

    原 文   飜 譯 者        德庤 / 李   斗 振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