戰國策(전국책) /戰國策 楚策

戰國策 楚策

덕치/이두진 2021. 6. 26. 17:29

 

                                        

 

 

     [序文]

 

초나라는 춘추전국시대 전 기간에 걸쳐 흔히 비하적인 의미를 담고 있는 형(荊)나라로 별칭되었다.

이는 초나라가 비록 열국 중 가장 넓은 영토를 지니고 있었으나 작위가 겨우 자작(子爵)에 불과한데도

멋대로 칭왕한데 따른 멸시의 의미를 담고 있는 것이었다. 초나라의 성씨는 미성(芈姓)이다.

전욱의 후손 중려(重黎)가 제곡(帝嚳) 때 화정관(火正官)이 되어 축융(祝融)으로 불렸다.

중려가 죽은 뒤 그의 동생 오회(吳回)가 계속해 축융을 지냈고, 그 후손 육종(陸終), 육(六), 계련(季蓮)을 거쳐

육웅(鬻熊) 때 주문왕에게 귀의해 주무왕을 도와 묘족(苗族)을 격파했다.

이에 웅(熊)을 성으로 삼은 뒤 주성왕 때 육웅의 증손인 웅역(熊繹)이 자작에 봉해져 단양(丹陽: 호북성 자귀현)에

도읍하게 되었다.  웅통(熊通)이 처음으로 칭왕하여 초무왕(楚武王: 기원전 740 ~ 690)이 되었다.

뒤를 이은 초문왕(楚文王: 기원전 689 ~ 677) 웅자(熊貲)는 도읍을 영(郢: 호북성 강릉현)으로 옮겼다.

이때 영역이 사방 1천리에 달했다. 이후 주변의 45개 국을 병탄해 춘추시대 이래 전국시대 말기까지 그 영토가

열국 중 가장 넓었다. 초나라는 중원과 멀리 떨어져 있어 만이(蠻夷) 취급을 받았으나

초장왕(楚莊王: 기원전 613 ~ 591) 때에 이르러 패국이 되어 위세를 떨쳤다.
그러나 초나라의 천도과정은 매우 복잡했다.

초소왕(楚昭王) 12년(기원전 504), 도읍을 다시 약(鄀: 호북성 의성현)으로 옮긴 뒤

언영(鄢郢)으로 그 이름을 바꿨다.

초혜왕(楚惠王) 56년(기원전 433), 서양(西陽: 호북성 황강현)으로 천도했다가 얼마 후 다시 언영으로 돌아왔다.

초경양왕(楚頃襄王) 21년(기원전 278), 언영에서 진(陳: 하남성 회양현)으로 천도했다가

초고열왕(楚考烈王) 22년(기원전 241), 수춘(壽春: 안휘성 수현)으로 다시 옮겼다.

이같은 잦은 천도는 춘추전국시대를 통틀어 다른 제후국에서는 볼 수 없는 것으로 외부의 공격을 피하기 위한

목적과 넓은 판도를 효율적으로 관리코자 하는 의도가 복합적으로 작용한 것으로 짐작된다.

초나라는 결국 초왕 부추(負芻) 5년(기원전 223)에 진나라의 60만 대군의 공격을 막아내지 못해 망하고 말았다.

원래 초나라는 ‘7웅’ 중 진나라 및 연나라와 함께 하극상을 겪지 않고 춘추시대에서 전국시대로 넘어온 나라였다.

이들 3국은 중원에서 멀리 떨어진 이점을 최대한 활용해 하극상의 풍조가 몰려오기 전에 서둘러 왕권을 강화하고

넓은 토지와 탄탄한 경제력을 바탕으로 위기를 넘겼던 것이다.

 특히 남쪽의 초나라는 중원의 열국이 모두 황하를 중심으로 각축전을 벌일 때 홀로 장강을 끼고 풍요를 구가했다.

초나라가 시종 광대한 영역을 보유한 채 중원의 강국들과 자웅을 벌일 수 있었던 것도 바로 이 때문이었다.

 

  楚 一 . 

 

 

齊、楚構難,宋請中立.齊急宋,宋許之. 子象為楚謂宋王曰:「楚以緩失宋,將法齊之急也.

齊以急得宋,後將常急矣. 是從齊而攻楚,未必利也. 齊戰勝楚,勢必危宋;不勝,

是以弱宋干強楚也. 而令兩萬乘之國,常以急求所欲,國必危矣.」

[주난왕 3년(기원전 312), 제, 초 두 나라가 교전 상태에 돌입하자 송나라는 중립을 선포했다.
그러나 제나라가 이내 송나라를 협박하자 송나라는 곧 제나라 편에 설 것을 약속했다.
그러자 초나라 대신 자상(子象)이 초나라를 위해 송왕(宋王: 偃)에게 말하기를 :
“초나라가 이제껏 너무 관대히 대했기 때문에 송나라의 지원을 잃은 것입니다.

앞으로는 초나라도 제나라가 구사한 수법을 쓸 것입니다.
제나라는 협박으로 송나라를 자기 편으로 만든 만큼 이후에도 줄곧 협박을 가해 올 것입니다.
이리 되면 송나라가 제나라를 도와 초나라를 친다 한들 아무런 이득이 없습니다.
제나라가 싸워 초나라를 이기면 내친 걸음에 필시 송나라를 위태롭게 만들 것입니다.
만일 이기지 못하면 약한 송나라가 강한 초나라에 도전한 꼴이 됩니다.
두 만승지국으로 하여금 항상 협박을 통해 자신들이 바라는 바를 얻도록 만들어 주면

송나라는 반드시 위태로워질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五國約以伐齊. 昭陽謂楚王曰:「五國以破齊秦,必南圖楚.」王曰:「然則奈何?」

對曰:「韓氏輔國也,好利而惡難. 好利,可營也;惡難,可懼也. 我厚賂之以利,其心必營.

我悉兵以臨之,其心必懼我. 彼懼吾兵而營我利,五國之事必可敗也. 約絕之後,雖勿與地可.」
楚王曰:「善.」

[5국(五國: 조, 위, 한, 진, 연)이 맹약하여 제나라를 쳤다. 초나라 영윤 소양(召陽)이 초경양왕에게 말하기를 :
“다섯 나라가 제나라를 격파하고 나면 진나라는 필시 남쪽으로 우리 초나라를 도모할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초왕이 말하기를 : “그렇다면 어찌해야 하오.”라고 하자.
이에 소양이 대답하기를 :  “한나라 상국 한민(韓珉: 公仲朋)이 국내에서 독단으로 전횡하고 있습니다.
그는 이익을 좋아하고 위난이 닥칠까 두려워하고 있습니다. 이익을 좋아하는 자는 이익으로 유인할 수 있고

위난을 두려워하는 자는 협박으로 제압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땅을 떼어주는 등의 두터운 이익을 제시하면

그의 마음이 반드시 현혹될 것이고, 우리가 전 병력으로 위협하면 그의 마음이 반드시 두려움에 떨 것입니다.
그가 우리 군사를 두려워하여 사리를 도모케 되면 5국의 맹약은 반드시 깰 수 있을 것입니다.

맹약이 깨어진 후에는 땅을 떼어주지 않을지라도 아무 문제가 없습니다.”라고 하자, 

초왕이 말하기를 : “옳은 말이오.”라고 하였다.]

 

乃命大公事之韓,見公仲曰:「夫牛闌之事,馬陵之難,親王之所見也. 王苟無以五國用兵,

請效列城五,請悉楚國之眾也,以廧於齊.」齊之反趙、魏之後,而楚果弗與地,則五國之事困也.

荊宣王問群臣曰:「吾聞北方之畏昭奚恤也,果誠何如?」群臣莫對.

江一對曰:「虎求百獸而食之,得狐. 狐曰:『子無敢食我也. 天帝使我長百獸,今子食我,

是逆天帝命也. 子以我為不信,吾為子先行,子隨我後,觀百獸之見我而敢不走乎?』

虎以為然,故遂與之行.  獸見之皆走.  虎不知獸畏己而走也,以為畏狐也. 今王之地方五千里,

帶甲百萬,而專屬之昭奚恤;故北方之畏奚恤也,其實畏王之甲兵也,猶百獸之畏虎也.」

[초경양왕이 곧 대공사(大公事: 관명)를 시켜 한나라로 가 상국 공중붕(公仲朋: 韓珉)을 만나 말하게 하기를 :
“무릇 지난번 우란(牛闌)의 전쟁과 마릉(馬陵)의 전투에서 그대가 친히 본 바와 같습니다.
만일 귀국의 군왕이 5국의 거병에 가담치 않으면 5개 성읍을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는 전 병력을 동원해 제나라와 함께 공동으로 대적할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한나라가 조, 위 두 나라를 배반하자 초나라는 과연 땅을 주지 않았다. 그러나 5국의 맹약은 이미 허사가 되고 말았다.
초선왕(楚宣王)이 군신들에게 묻기를 : “내가 듣건대 북방의 제후국들이 우리의 영윤 소해휼을 두려워하고 있다고

하는데 과연 그것이 사실이오.”라고 하였다, 군신들 중 아무도 대답하지 못하자,

잠시 후 강일(江一 : 江乞)이 나서서 말하기를 : “호랑이가 백수(百獸)를 찾아 잡아먹으려고 하다가 마침 여우를

만나게 되었습니다. 그러자 여우가 호랑이에게 이르기를, ‘그대는 감히 나를 잡아 먹어서는 안된다.
천제(天帝)가 나를 백수의 우두머리로 삼았는데 지금 나를 잡아먹으면 천제의 명을 어기는 셈이 된다.
내 말을 믿지 못하겠거든 내가 앞서 갈 터이니 그대는 내 뒤를 따라오도록 하라.
그러면 나를 보고 감히 도망치지 않는 백수가 과연 있는지를 눈으로 확인할 수 있을 것이다’라고 했습니다.
호랑이가 옳게 여겨 함께 가자 여우를 본 짐승들이 모두 도망쳐 버리고 말았습니다.
호랑이는 짐승들이 자신을 두려워하여 달아난 줄도 모르고 여우를 두려워해 그런 줄로만 알았습니다.
지금 대왕의 영토는 사방 5천 리이고 군사는 1백만 명이나 됩니다. 그런데 이를 모두 소해휼에게 맡겨놓고 있습니다.
이로 인해 북방의 제후국들이 소해휼을 두려워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실제로는 대왕의 갑병(甲兵)을 두려워하는

것으로 이는 마치 백수가 호랑이를 두려워한 것과 같습니다.”라고 하였다.]

 

昭奚恤與彭城君議於王前,王召江乙而問焉. 江乙曰:「二人之言皆善也,臣不敢言其後.

此謂慮賢也.」 邯鄲之難,昭奚恤謂楚王曰:「王不如無救趙,而以強魏. 魏強,其割趙必深矣.

趙不能聽,則必堅守,是兩弊也.」景舍曰:「不然. 昭奚恤不知也. 夫魏之攻趙也, 恐楚之攻其後.

今不救趙, 趙有亡形,而魏無楚憂,是楚、魏共趙也, 害必深矣!何以兩弊也? 且魏令兵以深割趙,

趙見亡形,而有楚之不救己也,必與魏合而以謀楚.  故王不如少出兵,以為趙援.

趙恃楚勁,必與魏戰. 魏怒於趙之勁,而見楚救之不足畏也,必不釋趙.

趙、魏相弊,而齊、秦應楚,則魏可破也.」楚因使景舍起兵救趙. 邯鄲拔,楚取睢、濊之間.

[소해휼(昭奚恤)과 팽성군(彭城君: 제나라의 정곽군 전영)이 초선왕(楚宣王) 앞에서 쟁론을 벌였다.
초선왕이 강을을 불러 물어보자 강을이 대답하기를 : “두 사람 말이 모두 맞습니다. 저는 감히 그들의 논의에 대해

무어라고 말할 수가 없습니다. 제가 잘못 말하였다가 어진 이를 다치게 할까 염려되기 때문입니다."라고 하였다. 
한단의 싸움 당시 소해휼이 초선왕에게 말하기를 : “대왕께서는 조나라를 구원하지 않음으로써 위나라를 강하게

만들어주느니만 못합니다. 위나라가 강해지면 조나라의 땅을 더욱 많이 잠식해 들어갈 것입니다. 조나라가 위나라의

청을 거절하고자 하면 굳게 수비해야 하는데 그리되면 두 나라 모두 끝내 피폐해지고 말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이에 장수 경사(景舍)가 반박하며 말하기를 : “그렇지 않습니다. 이는 소해휼이 제대로 알지 못해 하는 말입니다.
무릇 위나라는 조나라를 공격하고 싶어도 우리 초나라가 그들의 뒤를 칠까 겁내고 있습니다. 지금 조나라를 구하지

않으면 조나라는 장차 망할 형편에 놓일 수밖에 없고, 그리 되면 위나라는 초나라에 대한 근심이 사라지게 됩니다.
이는 초, 위 두 나라가 공동으로 조나라를 친 셈이 됩니다. 조나라가 입는 피해만 더욱 막심하게 되는데
어찌하여 조, 위 두 나라가 모두 피폐해진다고 말하는 것입니까. 위나라가 조나라 영토 깊숙이 병력을 투입해

조나라가 망해 가는 상황이 빚어질 때 우리 초나라가 구원하지 않을 것임을 조나라가 알게 되면 오히려 위나라와

연합해 우리 초나라를 치고자 할 것입니다. 그러니 대왕은 우선 약간의 군사를 출동시켜 조나라를 돕느니만 못합니다.

그리 하면 조나라는 우리 초나라의 강한 힘을 믿고 필시 위나라와 싸울 것이고, 위나라는 조나라가 강하게 반발하는데

대노한 나머지 초나라의 구원도 크게 두려워할 것이 없다고 생각해 끝내 조나라에 대한 침공을 포기치 않을 것입니다.

이같이 하여 조, 위 두 나라가 피폐해지고 제, 진 두 나라가 우리 초나라가 위나라를 치는 틈을 타 함께 위나라를

공격하게 되면 위나라는 가히 손쉽게 깨뜨릴 수 있을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초나라가 곧 경사를 시켜 군사를 이끌고 가 조나라를 구원케 했다. 위나라가 한단을 함락시키자,
초나라는 위나라의 수수(睢水)와 예수(濊水)사이의 일대를 점령해 버렸다.]

 

江尹欲惡昭奚恤於楚王,而力不能,故為梁山陽君請封於楚. 楚王曰:「諾.」

昭奚恤曰:「山陽君無功於楚國,不當封.」江尹因得山陽君與之共惡昭奚恤.

魏氏惡昭奚恤於楚王,楚王告昭子.  昭子曰:「臣朝夕以事聽命,而魏入吾君臣之間,臣大懼.

臣非畏魏也!夫泄吾君臣之交,而天下信之,是其為人也近苦矣. 夫苟不難為之外,豈忘為之內乎?

臣之得罪無日矣.」 王曰:「寡人知之,大夫何患?」

[강윤(江尹: 강을)이 소해휼을 초선왕 앞에서 험담을 늘어 놓고자 했으나 역부족이었다.
이에 당시 초나라에 머물고 있는 위나라의 산양군(山陽君)을 초나라에서 봉해줄 것을 청했다.

초선왕이 이를 받아들이자, 소해휼이 말하기를 : “산양군은 초나라를 위해 아무런 공도 세운 바가 없는데

그를 봉하는 것은 부당합니다.”라고 하자, 이에 산양군을 자기 편으로 끌어들인 강윤은 그와 합세해 소해휼을

험담하였다. 위나라가 사람을 보내 소해휼을 초선왕 앞에서 험담을 늘어 놓자

초선왕이 이 사실을 당사자인 소자(昭子: 소해휼)에게 일러 주었다. 그러자 소자가 말하기를 :

“신(臣)은 조석으로 군명을 받들어 행하고 있는데도 위나라가 신과 대왕 사이를 이간하려 하니 저는 크게 염려됩니다.

이는 신이 위나라를 두려워하기 때문이 아닙니다. 무릇 신과 대왕 사이의 일을 누설하여 천하 제후들로 하여금

신과 군왕 사이를 이간한 말을 믿게 만드는 자는 필시 군주의 주변 인물일 것입니다. 참으로 밖으로 누설하기를

어려워하지 않는 자가 어찌 안에서 무함하는 것을 어려워하겠습니까. 신이 득죄할 날이 멀지 않았습니다.”라고 하자,
초선왕이 말하기를 : “과인이 알고 있는데 대부는 무엇을 근심하는 것이오.”라고 하였다.]

 

江乙惡昭奚恤,謂楚王曰:「人有以其狗為有執而愛之. 其狗嘗溺井. 其鄰人見狗之溺井也,

欲入言之.  狗惡之,當門而噬之. 鄰人憚之,遂不得入言. 邯鄲之難,楚進兵大梁,取矣.

昭奚恤取魏之寶器,以居魏知之,故昭奚恤常惡臣之見王.」

江乙欲惡昭奚恤於楚,謂楚王曰:「下比周,則上危;下分爭,則上安. 王亦知之乎?願王勿忘也.

且人有好揚人之善者,於王何如?」 王曰:「此君子也,近之.」

江乙曰:「有人好揚人之惡者,於王何如?」王曰:「此小人也,遠之.」
江乙曰:「然則且有子殺其父,臣弒其主者,而王終已不知者,何也?

以王好聞人之美而惡聞人之惡也.」 王曰:「善. 寡人願兩聞之.」

[강을(江乙)이 초선왕 앞에서 소해휼을 험담하기를 : “어떤 사람이 자기 집 개가 집을 잘 지킨다는 이유로

그 개를 무척이나 귀여워했습니다. 그런데 그 개가 한번은 우물에 오줌을 쌌습니다. 이를 목격한 이웃 사람이

이 일을 개 주인에게 알리려 하자, 개가 이를 미워하여 문에 지키고 있다가 그 이웃 사람을 물어 버렸습니다.
이에 이웃 사람은 그 개가 무서운 나머지 끝내 알릴 수가 없었습니다. 한단의 싸움 당시 초나라 군사가 위나라 도읍

대량(大梁)으로 들어갔으면 능히 이를 취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그때 소해휼은 위나라의 보물을 뇌물로 받고

군사를 더 이상 진군시키는 것을 반대했던 것입니다. 당시 신은 위나라에 있었기 때문에 이를 소상히 알고 있습니다.

그러기에 소해휼은 항시 신이 대왕을 만나는 것을 증오하는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강을(江乙)이 초나라에서 소해휼을 험담할 생각으로 초선왕에게 말하기를 : “군신들이 작당하면 군왕이 위험해지고,

군신들이 다투면 군왕이 편안하다고 했습니다. 이를 대왕도 알고 있지 않습니까. 원컨대 대왕께서는

이를 잊지마시기 바랍니다. 만일 남의 선행을 즐겨 선양하는 자가 있다면 대왕은 어찌 생각하겠습니까.”라고 하자.

초선왕이 대답하기를 : “그런 사람은 군자이니 가까이 지내야 할 것이오.”라고 하였다.

강을이 묻기를 : “그렇다면 남의 악행을 즐겨 들춰내는 자가 있다면 대왕은 어찌 생각하겠습니까.”라고 하자,

초선왕이 대답하기를 : “그런 사람은 소인이니 멀리 지내야 할 것이이오.”라고 하였다.

강을이 묻기를 : “그렇다면 만일 여기에 아들이 그 아비를 죽이고, 신하가 그 군주를 죽일지라도

대왕은 끝내모를 수밖에 없으니 그 이유가 무엇이겠습니까? 대왕께서는 남의 미담을 듣기 좋아하고

남의 악담을 듣기 싫어하기때문입니다.”라고 하자,

초선왕이 말하기를 : “옳소. 과인도 이제부터는 양쪽 얘기를 모두 듣도록 하겠소.”하였다.] 

 

江乙說於安陵君曰:「君無咫尺之地, 骨肉之親, 處尊位, 受厚祿, 一國之眾, 見君莫不斂衽而拜,

撫委而服,何以也?」 曰:「王過舉而已. 不然,無以至此.」
江乙曰:「以財交者,財盡而交絕;以色交者,華落而愛渝. 是以嬖女不敝席,寵臣不避軒.

今君擅楚國之勢,而無以深自結於王,竊為君危之.」 安陵君曰:「然則奈何?」

「願君必請從死,以身為殉,如是必長得重於楚國.」曰:「謹受令.」三年而弗言.
江乙復見曰:「臣所為君道,至今未效. 君不用臣之計,臣請不敢復見矣.」

安陵君曰:「不敢忘先生之言,未得間也.」

[강을이 봉군(封君)되기 이전의 안릉군에게 이같이 말한 적이 있었다. “그대는 털끝만한 작은 공적도 없고

골육지친(骨肉之親)도 없으면서 높은 자리와 후한 녹봉을 받고 있소. 온 나라 사람들이 그대를 보면 옷깃을 여미고

절을 하고, 관(冠)을 바로잡으며 공순한 태도를 취하니 무슨 까닭이오?”라고 하자. 안릉군이 대답하기를 :

“대왕이 나를 과분하게 등용했기 때문이오. 그렇지 않았으면 이 지경에 이르지는 않았을 것이오.”라고 하였다.
그러자 강을이 말하기를 : “ 재물로 교분을 맺은 자는 재물이 다하면 끊기고, 미색으로 교분을 맺은 자는 미색이

시들해지면 사랑도 변하기 마련이오. 이에 애첩은 침대의 요가 다 헤지기도 전에 버림받고,

총신은 수레가 다 닳기도 전에 쫓겨나가 마련이오. 지금 그대는 초나라의 권세를 주무르면서

초왕(楚王: 초선왕)과깊이 결맹하지 않고 있으니 나는 그대를 위해 위태롭게 생각하오."라고 하였다.  

안릉군이 묻기를 : “그렇다면 어찌해야 좋겠소?”라고 하자,

강을이 대답하기를 : “그대는 대왕에게 반드시 함께 따라 죽어 순장(旬葬)되길 바란다고 청하시오.

그리하며 필시 오랫동안 초나라에서 중용될 것이오.”라고 하였다. 안릉군은 : “삼가 가르침을 따르도록 하겠소.”

그러나 안릉군은 3년이 지나도록 그같은 청을 하지 않았다.

이에 강을이 안릉군을 다시 만나 말하기를 :“내가 그대를 위해 한 말이 아직 효과가 드러나지 않고 있소.

그대가 나의 계책을 쓰지 않으니,나는 청컨대 감히 두 번 다시 그대를 만나지 않을 것이오.”라고 하자,

안릉군이 말하기를 : “선생의 말씀을 잊은 적이 없소. 단지 아직 적당한 시기를 찾지 못했을 뿐이오.”라고 하였다.] 

 

於是,楚王游於雲夢,結駟千乘,旌旗蔽日,野火之起也若雲蜺,

兕虎嗥之聲若雷霆,有狂兕浲車依輪而至,王親引弓而射,壹發而殪.
王抽旃旄而抑兕首,仰天而笑曰:「樂矣,今日之游也. 寡人萬歲千秋之後,誰與樂此矣?」
安陵君泣數行而進曰 :「臣入則編席, 出則陪乘. 大王萬歲千秋之後, 願得以身試黃泉, 蓐螻蟻,

又何如得此樂而樂之.」 王大說,乃封壇為安陵君.

[이때 마침 초왕이 운몽택(雲夢澤: 호북성내 장강의 남북 일대에 펼쳐진 두 개의 연못)으로 사냥을 나가게 되었다.
대규모 결사(結駟: 4필의 말이 이끄는 수레가 줄지어 늘어섬)가 1천 승에 달했고, 정기는 해를 가리고,
짐승을 쫓기 위해 피운 야화(野火)는 마치 무지개와 같았고, 울부짖는 코뿔소와 호랑이의 포효는 우레소리와 같았다.
그때 성난 코뿔소가 미친 듯이 수레를 향해 달려 들었다. 그러자 초왕이 손수 활을 당겨 화살을 날리자

코뿔소가 단 한 발에 맞아 죽고 말았다. 초왕이 깃발을 뽑아 코뿔소의 머리를 짓누른 채 하늘을 우러러 보며 호탕하게

웃으며 말하기를 : “ 오늘 사냥이야말로 즐겁기 그지 없도다. 과인은 만세천추(萬世千秋: 아주 오랜 세월) 후

누구와 더불어 이 즐거움을 함께 할 수 있겠는가.”라고 하자, 안릉군이 눈물을 흘리며 앞으로 나아가 말하기를 :

“ 신은 궁내에서는 대왕 곁에 앉고, 대왕께서 출행할 때는 배승(陪乘)하고 있습니다. 대왕의 천추만세 후에는

신 또한 순사(殉死)하여 대왕의 좋은 돗자리가 되고자 합니다. 그래서 개미나 땅강아지가 대왕의 시신을 훼손하는

것을 막을 것입니다. 그러니 어찌 오늘같은 날만 즐겁다 할 수 있겠습니까.”라고 하였다.
초왕은 크게 기뻐하며 단(壇)에게 안릉군을 봉했다.]

 

君子聞之曰:「江乙可謂善謀,安陵君可謂知時矣.」江乙為魏使於楚,

謂楚王曰:「臣入竟,聞楚之俗,不蔽人之善,不言人之惡,誠有之乎?」王曰:「誠有之.」

江乙曰:「然則白公之亂,得無遂乎?誠如是,臣等之罪免矣.」楚王曰:「何也?」

江乙曰:「州侯相楚,貴甚矣而主斷,左右俱曰『無有』,如出一口矣.」

郢人有獄三年不決者,故令請其宅,以卜其罪.

[군자가 이 말을 듣고 말하기를 : “강을은 가히 선모(善謀: 계책을 잘 세움)라 이를 만하고,

안릉군은 지시(知時: 시기를 잘 헤아림)라 이를 만하다.”라고 하였다.
강을이 위나라를 위해 초나라에 사자로 가서 초선왕에게 묻기를 : “ 제가 국경을 넘어오면서 초나라의 풍속에 관해

듣건대 ‘남의 선행은 숨기지 않고 남의 악행은 말하지 않는다’고 했습니다. 과연 이것이 사실입니까?”라고 하자,   

초선왕이 대답하기를 : “정말 그렇소.”라고 하였다.
그러자 강을이 말하기를 : “그렇다면 백공지란(白公之亂: 초나라 종실 백공이 초혜왕을 몰아내고 보위에 오른 사건)은
어찌하여 성공하지 못한 것입니까? 실로 그렇다면 지금 남의 악행을 말하지 않는 신하들의 죄는 면해 주어야 할 듯

싶습니다.”라고 하자,   초선왕이 되묻기를 : “그게 무슨 뜻이오.”라고 하였다.

이에 강을이 대답하기를 : “ 주후(州侯: 소해휼)는 초나라의 상국이 되어 존귀한 신분으로 정사를 독단하는데도

좌우에서 모두 ‘그런 일이 없다’고 말하는 것이 여출일구(如出一口: 마치 한 입에서 나온 듯함)입니다.”라고 하였다.

초나라의 구도(舊都) 영(郢) 땅에 사는 어떤 사람의 송사가 3년이 되도록 판결이 나지 않았다.

이에 그는 소해휼의 문객을 시켜 자신의 집에 대한 매수를 청하게 했다.

이로써 자신의 유죄(有罪) 여부를 미리 짐작하고자 했던 것이다. ] 

 

客因為之謂昭奚恤曰:「郢人某氏之宅,臣願之.」
昭奚恤曰:「郢人某氏,不當服罪,故其宅不得.」 客辭而去.

昭奚恤已而悔之,因謂客曰:「奚恤得事公,公何為以故與奚恤?」客曰:「非用故也.」

曰:「謂而不得,有說色,非故如何也?」城渾出周,三人偶行,南游於楚,至於新城.

[그러자 소해휼의 문객이 소해휼에게 말하기를 : “ 영 땅에 사는 모씨의 집을 제가 원합니다.”라고 하였다.
소해휼이 말하기를 : “모씨는 복죄(服罪)할 일이 없어 그 사람의 집은 몰수되지 않소. 그러니 그 집을 살 수는

없을 것이오.”라고 하였다. 문객이 인사를 하고 나가려 하자 소해휼이 그때서야 눈치를 채고 묻기를 :
“ 나는 지금까지 그대를 잘 대해 주었는데 그대는 어찌하여 사술로 나를 상대하는 것이오.”라고 하자,
문객이 대답하기를 : “사술을 쓰지는 않았습니다.”라고 하였다.
이에 소해휼이 힐문하기를 : “집을 사려 했다가 뜻대로 되지 않았는데도 오히려 즐거워하는 표정을 지으니

사술을 쓴 것이 아니고 무엇이오?”라고 하였다. 주나라 사람 성혼(城渾)이 우연히 세 사람과 만나 함께

남쪽의 초나라로 유세하러 가다가 초, 한 두 나라의 경계 지역에 있는 신성(新城: 하남성 낙양)에 이르게 되었다.]

 

城渾說其令曰:「鄭、魏者,楚之耎國;而秦,楚之強敵也. 鄭、魏之弱,而楚以上梁應之;

宜陽之大也,楚以弱新城圍之. 蒲反、平陽相去百里,秦人一夜而襲之,安邑不知;

新城、上梁相去五百里,秦人一夜而襲之,上梁亦不知也. 今邊邑之所恃者,非江南泗上也.

故楚王何不以新城為主郡也,邊邑甚利之.」新城公大說,乃為具駟馬乘車五百金之楚.

城渾得之,遂南交於楚,楚王果以新城為主郡.

[이에 성혼이 신성의 영(令)에게 말하기를 : “초나라에게 정, 위 두 나라는 약한 상대이지만 진나라는 강적입니다. 

정, 위 두 나라는 약하기 때문에 초나라는 두 나라를 상량(上梁) 땅 정도로 대응해도 가합니다.
그러나 진나라의 의양(宜陽: 하남성 의양현)처럼 큰 땅에 대해 초나라는 겨우 이 신성 정도로 방어하고 있을 뿐입니다.
포판(蒲坂: 산서성 영제현)과 평양(平陽: 산서성 임분현)은 거리가 1백 리가량 떨어져 있습니다.
만일 진나라가 하룻밤 사이에 이들 지역을 습격하면 위나라 도읍 안읍은 거리도 떨어져 있는데다 서로 아무런 관련도

없어 이를 알 길이 없습니다. 더구나 신성과 상량은 5백 리나 떨어져 있어 진나라가 하룻밤 사이에 신성을 습격하면

상량에서도 역시 모르게 됩니다. 지금 변경으로 믿을 만한 곳은 강남(江南)이나 사상(泗上)이 아닙니다.
그러니 초왕이 어찌 이 신성을 주군(主郡: 주요 군)으로 승격시키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이는 신성이 변읍(邊邑)을 지키는데 아주 유리한 곳이기 때문입니다.”라고 하였다.
신성의 영(令)이 크게 기뻐하며 성혼에게 말 네 필이 이끄는 수레를 갖춰 5백 금과 함께 초나라로 가게 했다.
이에 성혼이 남으로 초나라에 이르러 교유를 시작하자 초왕은 과연 신성을 주군으로 승격시켰다.]

 

韓公叔有齊、魏,而太子有楚、秦以爭國. 鄭申為楚使於韓,矯以新城、陽人予太子.

楚王怒,將罪之.  對曰:「臣矯予之,以為國也. 臣為太子得新城、陽人,以與公叔爭國而得之.

齊、魏必伐韓. 韓氏急, 必懸命於楚, 又何新城、陽人之敢求?太子不勝, 然而不死, 今將倒冠而至,

又安敢言地?」 楚王曰:「善.」乃不罪也. 楚杜赫說楚王以取趙. 王且予之五大夫,而令私行.

[주난왕 15년(기원전 300), 제, 위 두 나라의 지원을 얻은 한나라의 권신 한공숙(韓公叔)과 초, 진 두 나라의지원을

얻은 태자(太子: 공자 幾瑟)가 서로 태자의 자리를 놓고 다툼을 벌였다.

이때 초나라 대신 정신(鄭申: 한책에서는 鄭强)이 초나라를 위해 한나라에 사자로 갔다가 초왕의 명령이라 속이고

신성(新城)과 양인(陽人: 하남성 여양현) 땅을 태자에게 주겠다고 약속했다. 초회왕이 노해 장차 죄를 주려고 하자,

정신이 변명하기를 : “신이 왕명을 속이고 그 땅을 태자에게 준다고한 것은 초나라를 위한 것입니다. 

신이 태자에게 신성과 양인 땅을 얻게 하여 공숙과의 정권 다툼에서 승리하게 만들면 제, 위 두 나라는 필시

한나라를 공격할 것입니다. 한나라가 급박해지면 완전히 초나라에 매달려 구원을 청해야 하는데

어찌 감히 신성과 양인 땅을 달라고 하겠습니까?  또 만일 태자가 진다면 죽지 않고 살아남은 것을 다행으로 여겨

당장 관을 거꾸로 쓴 채 급히 우리 초나라로 도망쳐 올 판인데 어찌 감히 땅을 달라고 하겠습니까.”라고 하자.

초왕이 말하기를 : “옳은 말이오.”라고 하며, 그리고는 죄를 주지 않았다.초나라 대신 두혁(杜赫)이 초회왕에게

조나라를 끌어 들일 수 있다고 말하자, 초회왕이 그에게 5대부(五大夫: 대부의 최고급 벼슬)에 임명할 것을 약속하며

은밀히 조나라로 갔다 오게 했다.]

 

陳軫謂楚王曰:「赫不能得趙,五大夫不可收也,得賞無功也. 得趙而王無加焉,是無善也.
王不如以十乘行之,事成,予之五大夫.」

王曰:「善.」乃以十乘行之.  杜赫怒而不行.  陳軫謂王曰:「是不能得趙也.」

[이에 세객 진진(陳軫)이 초회왕에게 말하기를 : “두혁이 조나라를 설득시키지 못할지라도 5대부의 벼슬을 거둬들

수는 없습니다. 그렇다면 이는 공로가 없는 자를 포상하는 것이 됩니다. 또 그가 조나라를 설득시키고 돌아왔을 때

다른 상을 더해주지 않는다면 그의 공로를 포상하지 않는 셈이 됩니다.  그러니 대왕은 지금 수레 10 승 정도만

주어 보냈다가 그가 성공하고 돌아왔을 때 5대부의 벼슬을 내리느니만 못합니다.”라고 하자,
초회왕으 말하기를 : “그 말이 옳소.”  그리고는 곧 수레 10 승만으로 다녀오라고 하자 두혁이 화를 내며 가지 않았다.
그러자 진진이 초회왕에게 말하기를 : “ 이는 두혁이 조나라를 설득시킬 자신이 없기 때문입니다.”라고 하였다.]

 

楚王問於范環曰:「寡人欲置相於秦,孰可?」對曰:「臣不足以知之.」

王曰:「吾相甘茂可乎?」范環對曰:「不可.」王曰:「何也?」
曰:「夫史舉,上蔡之監門也. 大不如事君,小不如處室,以苛廉聞於世,甘茂事之順焉.
故惠王之明,武王之察,張儀之好譖,甘茂事之,取十官而無罪,茂誠賢者也,然而不可相秦.

秦之有賢相也,非楚國之利也. 且王嘗用滑於越而納句章,昧之難,越亂,故楚南察瀨胡而野江東.

計王之功所以能如此者,越亂而楚治也. 今王以用之於越矣,而忘之於秦,臣以為王鉅速忘矣.

王若欲置相於秦乎?若公孫郝者可. 夫公孫郝之於秦王, 親也. 少與之同衣, 長與之同車,

被王衣以聽事, 真大王之相已. 王相之,楚國之大利也.」

[주난왕 10년(기원전 305), 초회왕이 대신 범환(范環)에게 묻기를 : “과인은 진나라에 사람을 보내고 싶은데 누구를

재상으로 하여 보내는 것이 좋겠소.”라고 하자, 범환이 대답하기를 : “신이 부족하여 잘 모르겠습니다.”라고 하였다.
초회왕이 또 묻기를 : “감무(甘茂)를 상국으로 삼고자 하는데 어찌 생각하오.”라고 하자, 

범환이 대답하기를 : “그것은 안 됩니다.”라고 하였다.  초회왕이 묻기를 : “왜 안 된다는 것이오.”라고 하자.
범환이 대답하기를 : “ 감무의 스승 사거(史擧)는 본래 상채(上蔡)의 문지기였는데 크게는 군주를 섬길 줄 몰랐고,

작게는 집안을 다스릴 줄 몰랐습니다. 그는 가렴(苛廉: 강직하고 엄함)하기 그지 없어 상대하기 어려운 인물로

세상에 널리 알려져 있었습니다. 그런데도 감무는 그를 섬기면서 거역하는 일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영명한

초혜문왕(楚惠文王)과 명찰(明察)한 초무왕(楚武王), 중상을 잘하는 장의를 섬기며 수십 가지의 관직을 역임했는데도

아무 죄도 짓지 않았던 것입니다. 감무는 실로 현인이기 때문에 그를 진나라의 재상으로 삼아서는 안됩니다.
진나라에 어진 재상이 있는 것은 초나라에 이로울 것이 없습니다. 또 대왕께서 지난번에 소활(召滑)을 월나라로

보내 구장(句章)을 손에 넣고, 매(昧)의 싸움에서는 월나라를 어지럽게 만들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초나라는 남쪽으로 뇌호(瀨湖: 강소성 율양현)를 다스리고 강동(江東)을 제압할 수 있었떤 것입니다.
생각해 보건대 대왕이 이같이 공적을 세울 수 있었던 것은 월나라는 어지럽고 초나라는 잘 다스려졌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지금 대왕은 월나라에는 이같은 방법을 써 성공을 거뒀으면서도 진나라에 대해서는 잊고 있는 것입니다.
저는 대왕께서 정말 너무 빨리 잊는다고 생각지 않을 수 없습니다. 만일 대왕이 진나라에 재상을 두고자 한다면
공손학(公孫郝: 公孫衍으로 「사기」에는 向壽)이 적당할 듯합니다. 공손학은 진왕(秦王: 진소양왕)과 가까운 사이로

어려서는 옷을 같이 입고, 커서는 수레를 같이 타면서 진왕과 같은 옷을 입고 공사를 보고 있으니 실로 대왕께서

재상으로 삼을 만 합니다. 대왕이 그를 진나라의 재상으로 삼으면 초나라에 큰 이익이 될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蘇秦為趙合從,說楚威王曰:「楚,天下之強國也。大王,天下之賢王也. 楚地西有黔中、巫郡,

東有夏州、海陽,南有洞庭、蒼梧,北有汾陘之塞、郇陽. 地方五千里,帶甲百萬,車千乘,

騎萬匹,粟支十年,此霸王之資也.  夫以楚之強與大王之賢,天下莫能當也. 今乃欲西面而事秦,

則諸侯莫不南面而朝於章臺之下矣.  秦之所害於天下莫如楚,楚強則秦弱,楚弱則秦強,

此其勢不兩立. 故為王室計,莫如從親以孤秦.  大王不從親,秦必起兩軍:一軍出武關;

一軍下黔中.  若此,則鄢、郢動矣.  臣聞治之其未亂,為之其未有也;患至而後憂之,則無及已.

故願大王之早計之.

[주현왕 30년(기원전 333), 소진이 조나라를 위해 합종을 이룰 생각으로 초위왕을 만나 유세하기를 :
“초나라는 천하의 강국이고, 대왕은 천하의 어진 군주입니다. 게다가 서쪽에 검중(黔中)과 무군(巫郡),
동쪽에 하주(夏州)와 해양(海陽: 초나라의 동쪽 경계), 남쪽에 동정(洞庭)과 창오(蒼梧: 광서성 창오현),
북쪽에 분구(汾丘: 하남성 양성현)와 형산(陘山) 사이의 요해처와 순양(郇陽: 섬서성 순양현) 등이 있습니다.
또 영토는 사방 5천 리이고, 대갑(帶甲)이 1백만 명, 병거가 1천 승, 군마가 1만 필이고,

군량은 10년을 지탱할 수 있을 정도로 풍부합니다. 이는 천하의 패왕이 될 밑천입니다.

무릇 초나라의 강대함과 대왕의 총명은 천하의 그 누구도 당할 길이 없습니다.
그런데도 초나라가 지금 서쪽을 향해 진나라를 섬기게 되면 제후들 모두 남면(南面)하여 초나라를 따르기보다는
장대궁(章臺宮) 밑에서 진나라를 조현하는 쪽으로 방향을 정하게 될 것입니다.

지금 진나라를 위협할 수 있는 나라로는 천하에 초나라만한 나라가 없습니다.
초나라가 강해지면 진나라가 약해지고, 초나라가 약해지면 진나라가 강해지게 마련이어서 초, 진 두 나라는

양립할 수 없습니다. 대왕을 위한 계책으로는 산동 6국이 합종하여 진나라를 고립시키는 것보다 나은 것은 없습니다.
대왕께서 합종하지 않으시면 진나라는 반드시 군사를 둘로 나눠 일군은 무관(武關)을 넘어오고,

일군은 검중으로 쳐내려 올 것입니다.  그리되면 초나라 도읍 언영(鄢、郢)이 동요하게 됩니다.
제가 듣건대 「노자」에 이르기를, ‘난은 일어나기 전에 다스리고, 일은 드러나기 전에 처리해야 한다’고 했습니다.
우환이 이른 후에는 아무리 이를 처리하고자 부심한들 이미 미치지 못하게 됩니다.

원컨대 대왕께서는 서둘러 계책을 세우시기 바랍니다. 


大王誠能聽臣,臣請令山東之國,奉四時之獻,以承大王之明制,委社稷宗廟,練士厲兵,

在大王之所用之.  大王誠能聽臣之愚計,則韓、魏、齊、燕、趙、衛之妙音美人,必充後宮矣.

趙、代良馬橐他,必實於外廄.  故從合則楚王,橫成則秦帝.  今釋霸王之業,而有事人之名,

臣竊為大王不取也.  夫秦,虎狼之國也,有吞天下之心.  秦,天下之仇讎也,

橫人皆欲割諸侯之地以事秦,此所謂養仇而奉讎者也.  夫為人臣而割其主之地,以外交強虎狼之秦,

以侵天下,卒有秦患,不顧其禍. 夫外挾強秦之威,以內劫其主,以求割地,大逆不忠,無過此者.

故從親,則諸侯割地以事楚;橫合,則楚割地以事秦.  此兩策者,相去遠矣,有億兆之數.

兩者大王何居焉? 故弊邑趙王,使臣效愚計,奉明約,在大王命之.」

[만일 대왕께서 참으로 신의 말을 들어주시면 산동의 나라들로 하여금 사시(四時)로 공물을 헌납하고,
대왕의 밝은 법도를 듣고, 종묘사직을 대왕께 일임하고, 병기를 수리하고 병사들을 훈련시켜 대왕의 쓰임에

충당토록 하겠습니다. 대왕께서 참으로 신의 어리석은 계책이나마 들어 주신다면 한, 위, 제, 연, 위(衛) 등 각 국의

뛰어난 음악과 미인들이 후궁에 가득 차고, 조, 대(代)의 양마(良馬)와 낙타가 바깥 마구간에 가득 차게 될 것입니다.
합종이 이뤄지면 초나라는 왕(王)이 되고, 연횡이 성사되면 진나라가 제(帝)가 될 것입니다.
지금 패왕의 대업을 포기하고 남을 섬기려는 것은 대왕께서 취할 일이 아니라고 사료됩니다.
무릇 진나라는 호랑지국(虎狼之國)으로 천하를 병탄하려는 야심을 갖고 있어 천하 제후들의 원수입니다.
연횡을 주장하는 자들은 모두 제후들의 땅을 떼어 진나라를 섬기자고 하니,

이는 소위 양구봉수(養仇奉讎: 원수를 길러주고 섬김)하는 격입니다. 무릇 남의 신하된 자들이 군주의 땅을 떼어다가

호랑(虎狼)과 같은 진나라와 수교해 천하를 침해하고 있으니 이는 창졸간에 닥칠 진나라의 재난을 전혀 고려하지 

못한 것입니다. 밖으로 강대한 진나라의 위세를 끼고 안으로 군주를 위협해 땅을 할양하게 하는 것보다

더 큰 대역불충은 없습니다. 6국이 합종하여 친목하면 제후들은 땅을 떼어주며 초나라를 섬길 것이고,
6국이 연횡하면 초나라도 땅을 떼어주고 진나라를 섬기지 않을 수 없습니다. 합종책과 연횡책 사이에는

억조(億兆)의 숫자 만큼이나 큰 차이가 있습니다. 대왕은 과연 어느 쪽을 택하겠습니까? 폐읍의 조왕(趙王)은

저를 시켜 어리석은 계책으로 진언한 뒤 맹약을 받들며 대왕의 명을 따르도록 했습니다.”라고 하였다.]

 

楚王曰:「寡人之國,西與秦接境,秦有舉巴蜀、并漢中之心. 秦,虎狼之國,不可親也.

而韓、魏迫於秦患,不可與深謀,恐反人以入於秦,故謀未發而國已危矣.

寡人自料,以楚當秦,未見勝焉.  內與群臣謀,不足恃也. 寡人臥不安席,食不甘味,

心搖搖如懸旌,而無所終薄.  今君欲一天下,安諸侯,存危國,寡人謹奉社稷以從.」

[그러자 초위왕이 대답하기를 : “과인의 나라는 서쪽으로 진나라와 접경하고 있소. 진나라는 파촉(巴蜀)을 탈취한 뒤

한중(漢中)을 병합하려는 속셈을 갖고 있소. 진나라는 호랑지국으로 도저히 가까이 할 수 없소.
그러나 한, 위 두 나라가 이미 진나라의 박해를 받고 있어 심도 깊은 모의를 할 수도 없는 상황이오.
만일 모의를 하다가 배신자가 생겨 진나라로 들어가 이를 누설하게 되면 계책이 실행되기도 전에

우리 나라가 더 위태로워질까 염려하지 않을 수 없소. 과인이 생각해 보건대 우리 초나라가 홀로

진나라와 상대하면 이길 승산이 학실하지 않소. 안으로 군신들과 계책을 세운들 믿을 게 못되오.

이에 과인은 침식도 제대로 하지 못하고 마치 마음이 깃대에 걸린 깃발처럼 흔들려 끝내 안정을 찾지 못하고 있소.

지금 주군(主君)이 천하를 하나로 묶어 제후국들을 편안하게 하고 위태로운 나라를 보존시킬 계책을 일러주니,

과인은 삼가 사직을 받들어 가르침을 따르고자 하오.”하고 하였다.]

 

張儀為秦破從連橫,說楚王曰:「秦地半天下,兵敵四國,被山帶河,四塞以為固.

虎賁之士百餘萬,車千乘,騎萬疋,粟如丘山. 法令既明,士卒安難樂死. 主嚴以明,將知以武.

雖無出兵甲,席卷常山之險,折天下之脊,天下後服者先亡. 且夫為從者,

無以異於驅群羊而攻猛虎也. 夫虎之與羊, 不格明矣. 今大王不與猛虎而與群羊,

竊以為大王之計過矣. 凡天下強國, 非秦而楚, 非楚而秦. 兩國敵侔交爭, 其勢不兩立. 而大王不與秦,

秦下甲兵, 據宜陽,韓之上地不通;下河東,取成皋,韓必入臣於秦. 韓入臣,魏則從風而動.

[장의가 진나라를 위해 합종책을 깨고 연횡책을 성사시킬 생각으로 초회왕을 만나 유세하기를 :

“ 진나라는 그 영토가 천하의 절반에 달하고, 병력은 여타 제후국들을 일거에 대적할 만합니다.
또 산이 자연 요새를 이루고, 황하가 띠처럼 둘러 있어 사방이 견고하고 지리적으로 중요한 위치에 있습니다.
게다가 용맹무쌍한 군사 1백만, 병거는 1천승, 기마용 말은 1만 필이고, 식량이 산처럼 쌓여 있고, 법령이 밝아

병사들은 전쟁을 겁내지 않고 기꺼이 사지에 임하려고 합니다. 군주는 엄명(嚴明)하고, 장군은 총명하고 용맹합니다.

비록 출병을 하지 않더라도 상산(常山)의 험요를 석권하여 천하의 등뼈를 꺾을 수 있습니다.
이에 나중에 귀복하는 제후들부터 먼저 멸망시킬 수 있습니다. 무릇 합종책이란 약한 양떼를 몰아

맹호를 공격하게 하는 것과 같습니다. 호랑이에게 양이 상대가 되지 않는 것은 명백합니다.

그런데 지금 대왕은 맹호편이 되지 않고오히려 양의 편을 들고 있으니 제가 보건대 대왕의 계책은 잘못이라고

여겨집니다. 무릇 천하의 강국을 들라면진나라 아니면 곧 초나라이고, 초나라가 아니면 곧 진나라입니다.

두 나라의 세력은 서로 비슷해 서로 싸우면형세상 끝내 양립할 수 없습니다.

대왕이 진나라와 연횡하지 않으면 진나라는 곧 군사를 일으켜의양(宜陽)을 점거할 것입니다.

그리되면 한나라의 상당(上黨)으로 가는 길이 막히게 됩니다.이어 하동(河東)으로 내려와 성고(成皐)를 취하면

한나라는 필시 진나라에 신하로써 머리를 숙이고 입조할 것입니다.

한나라가 머리를 숙이고 들어 오면 위나라도 바람을 따르듯 동요할 수밖에 없습니다. 

 

秦攻楚之西,韓、魏攻其北,社稷豈得無危哉?且夫約從者,聚群弱而攻至強也. 夫以弱攻強,

不料敵而輕戰, 國貧而驟舉兵, 此危亡之術也. 臣聞之, 兵不如者, 勿與挑戰;粟不如者, 勿與持久.
夫從人者,飾辯虛辭,高主之節行,言其利而不言其害,卒有楚禍,無及為已,

是故願大王之熟計之也. 秦西有巴蜀,方船積粟,起於汶山,循江而下,至郢三千餘里.

舫船載卒,一舫載五十人,與三月之糧,下水而浮,一日行三百餘里;里數雖多,不費馬汗之勞,

不至十日而距扞關;扞關驚,則從竟陵已東,盡城守矣,黔中、巫郡非王之有已.

[그래서 진나라가 초나라의 서쪽을 치고 한, 위 두 나라는 초나라의 북쪽을 공격하면 어찌 초나라의 사직이

위험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무릇 합종이란 약한 무리들이 모여 강한 상대를 공격하는 것을 뜻합니다.
약소국이 강대국을 공격하면서 적의 전력도 헤아리지 않은 채 경솔히 개전하고,

나라의 재정이 어려운데도 갑자기 군사를 일으키는 것은 그야말로 나라를 위험에 빠뜨리는 계책입니다.
제가 듣건대 ‘병력이 상대보다 못하면 도전하지 말고, 군량이 상대보다 못하면 지구전을 펴지 말라’고 했습니다.
합종을 주장하는 자들은 그럴듯하게 꾸며낸 거짓말로 대왕의 절조와 품행을 찬양하면서 합종의 이익만 말할 뿐
그 폐해에 대해서는 일절 언급하지 않고 있습니다. 그러다가 돌연 진나라로부터의 재난이 떨어지면 손쓸 길이

없을 것입니다. 원컨대 대왕은 숙고하여 계획을 세우시기 바랍니다. 진나라는 서쪽에 파촉(巴蜀)의 옥야가 있습니다.

방선(舫船: 쌍배)에 곡식을 싣고 문산(汶山)을 출발해 장강을 따라 내려오면 영(郢)까지의 거리는 3천여 리입니다.

방선에 군사를 실으면 한 배에 50명과 3개월 분의 식량을 싣고 물을 따라 내려와 하루에 3백 리를 갈 수 있습니다.

거리는 멀지만 말이 땀을 흘리는 수고를 덜 수 있고 채 열흘도 안돼 초나라의 관문을 끌어당길 수 있을 것입니다.

관문을 끌어당기면 모두 크게 놀랄 것이니 이후 경릉(竟陵)의 모든 성읍은 사력을 다해 수비에 나서야 할 것입니다.

그 사이에 검중(黔中)과 무군(巫郡)은 이미 대왕의 땅이 아니게 됩니다. 

 

秦舉甲出之武關,南面而攻,則北地絕. 秦兵之攻楚也,危難在三月之內.  而楚恃諸侯之救,

在半歲之外,此其勢不相及也.  夫恃弱國之救,而忘強秦之禍,此臣之所以為大王之患也.
且大王嘗與吳人五戰三勝而亡之,陳卒盡矣;有偏守新城而居民苦矣.  臣聞之,攻大者易危,

而民弊者怨於上.  夫守易危之功, 而逆強秦之心, 臣竊為大王危之.

且夫秦之所以不出甲於函谷關十五年以攻諸侯者, 陰謀有吞天下之心也. 楚嘗與秦構難,戰於漢中.

楚人不勝,通侯、執珪死者七十餘人,遂亡漢中. 楚王大怒,興師襲秦,戰於藍田,又郤.

此所謂兩虎相搏者也. 夫秦、楚相弊,而韓、魏以全制其後, 計無過於此者矣, 是故願大王熟計之也.

[또 진나라가 군사를 동원해 무관(武關)을 넘어 남쪽으로 공격의 방향을 잡으면 초나라의 북부는 두절되고 맙니다.
진나라 군사가 초나라를 공격하면 위난이 3개월 이내에 닥쳐올 것입니다. 초나라는 제후들의 구원을 바라겠으나

구원군의 도착하려면 6개월 이상 소요됩니다. 형세로 보아 도저히 때를 맞출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대왕은 지금 약소국의 구원을 믿고 강대국에 의한 재난을 망각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제가 대왕을 위해

걱정하지 않을 수 없는 이유입니다. 대왕께서는 일찍이 월나라와 싸우면서 5전3승하여 월나라를 멸망시키기는 했으나

결국 진중의 병사들을 모두 잃고 말았으며, 또 멀리 떨어져 있는 새로 얻은 성을 지키느라 그곳 백성들에게

 고통을 안겨주었습니다. 신이 듣건대 ‘강대국을 공격하면 쉽게 위험에 빠지고, 백성이 피폐해지면

윗사람을 원망한다.’라고 했습니다. 쉽게 무너질 공을 추구하기 위해 강대국 진나라의 마음을 거스르고 있으니

저는 대왕을 위해 위험한 일로 생각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하물며 진나라가 15년 동안이나 함곡관 너머로

군사를 출동시켜 제후들을 공격하는일을 하지 않은 것은 은밀히 계책을 세워 천하를 병탄하려는 야심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초나라는 일찍이 진나라와 접전하게 되어 한중(漢中)에서 일전을 겨룬 바 있습니다.

결국 초나라는 패하여 통후(하위 등급)와 집규(초나라 무관의 최고 등급) 등 70여 명의 관원이 전사하고 

한중까지도 잃고 말았습니다. 초왕(楚王)이 격노하여 다시 군사를 동원해 진나라를 습격하면서

남전(藍田)에서 또 다시 일전을 벌였습니다만 끝내 이기지 못하고 퇴각하게 되었습니다.

이것이 소위 ‘양호상박’이라는 것입니다. 진, 초 두 나라가 서로 피폐해지면 한, 위 두 나라가 군사를 온전히 하여

초나라의 후방을 제압하고자 할 것이니 초나라의 계책으로 이보다 더 큰 잘못은 없습니다.

그러니 원컨대 대왕은 숙계하시기 바랍니다.

 

秦下兵攻衛、陽晉, 必開扃天下之匈, 大王悉起兵以攻宋,不至數月而宋可, 舉宋而東指,

則泗上十二諸侯,盡王之有已. 凡天下所信約從親堅者蘇秦, 封為武安君而相燕,

即陰與燕王謀破齊共分其地. 乃佯有罪,出走入齊, 齊王因受而相之. 居二年而覺,齊王大怒,

車裂蘇秦於市.  夫以一詐偽反覆之蘇秦,而欲經營天下,混一諸侯,其不可成也亦明矣.
今秦之與楚也, 接境壤界,固形親之國也. 大王誠能聽臣,臣請秦太子入質於楚,楚太子入質於秦,

請以秦女為大王箕帚之妾,效萬家之都,以為湯沐之邑,長為昆弟之國,終身無相攻擊.

臣以為計無便於此者. 故敝邑秦王,使使臣獻書大王之從車下風,須以決事.」

[진나라가 군사를 동원해 위(衛)나라의 양진(陽晉)을 공격하면 천하의 가슴을 봉쇄하는 셈이 됩니다.
이때를 이용해 대왕은 전 병력을 동원해 송나라를 치면 몇 달도 채 안돼 송나라를 수중에 넣을 수 있을 것입니다.
이어 송나라를 몰아 동쪽으로 향하면 사상(泗上) 에 있는 12제후의 나라는 모두 대왕의 차지가 될 것입니다.
무릇 천하가 믿고 있는 합종을 견고히 한 자는 소진입니다. 그는 무안군(武安君)에 봉해져 연나라의 재상이 되었으며,

그리고는 연왕과 음모해 제나라를 삼킨 후 그 영토를 나눠 갖기로 했습니다. 이에 죄를 지은 것처럼 속이고 제

나라로 망명하자 제민왕이 곧 그를 재상으로 삼았습니다. 그러나 2년이 지난 후 거짓이 탄로나자 제민왕이

대노한 나머지 소진을 잡아 시중에서 거열형에 처하고 말았습니다. 무릇 이처럼 사술과 거짓을 동원해 배신한

진의 계책을 이용해 천하를 경영하고 제후들을 통일하려는 시도 자체가 성사될 수 없다는 것은 자명합니다.
지금 진, 초 두 나라는 서로 국경을 접하고 있어 본래 형세상 친밀해야만 하는 사이입니다.
대왕이 정말 신의 말을 들어주면 신은 진나라 태자를 초나라에 인질로 보내고 초나라 태자 역시 진나라에 인질로

보내도록 하겠습니다.  또한 진나라의 공녀(公女)로 하여금 대왕의 기추지첩(箕箒之妾: 빗자루를 든 첩)으로 들이면서

1만 호 정도의 대도(大都)를 공녀의 탕목읍으로 하사하게 하고, 장차 영구히 형제지국이 되어 절대로 공격하는 일이

없도록 하겠습니다. 저는 이보다 더 나은 계책은 없다고 생각합니다. 폐읍의 진왕(秦王: 진혜문왕)이 저를 사자로 삼아

대왕의 수레를 따라 다니며 찬바람을 쐬 가면서 회답을 기다려 일을 결정하려는 것도 이 때문입니다.”라고 하였다.]

 

楚王曰:「楚國僻陋,託東海之上. 寡人年幼,不習國家之長計.  今上客幸教以明制,寡人聞之,

敬以國從.」乃遣使車百乘,獻雞駭之犀、夜光之璧於秦王.

張儀相秦,謂昭雎曰:「楚無鄢、郢、漢中,有所更得乎?」曰:「無有.」

曰:「無昭雎、陳軫,有所更得乎?」曰:「無所更得.」
張儀曰:「為儀謂楚王逐昭雎、陳軫,請復鄢、郢、漢中.」昭雎歸報楚王,楚王說之.

[이에 초회왕이 응답하기를 : “초나라는 외지고 누추하기 그지없어 동해(淮河 입구에서 浙江 입구까지를 지칭) 가에

의지하고 있는 나라에 지나지 않소. 또 과인은 나이도 어리고 나라를 위한 장구한 계책도 익히지 못하고 있소.

그런데 지금 상객이 다행히 진왕의 명을 가르쳐 주었소. 과인이 이를 들었으니 장차 공경히 나라를 들어

상객의 가르침대로 따르도록 하겠소.”라고 하였다. 이에 초회왕이 사자에게 수레 1백 승을 딸려보내면서

해계지서(붉은색의 실 무늬가 들어가 있는 무소의 뿔)와 야광벽(밤에 빛을 내는 보옥)을 진왕에게 진헌하게 했다.
장의(張儀)가 진나라 재상이 된 뒤 초나라의 모신 소수(昭睢)에게 묻기를 : “초나라는 언,영(鄢,郢), 한중을 잃었는데

되찾을 수 있겠소?" 라고 하자,  소수가 대답하기를 : “없소.”라고 하였다.
장의가 묻기를 : “초나라가 소과(昭過)와 진진을 잃는다면 이들을 대신할 만한 사람을 얻을 수 있겠소.” 라고 하자, 

소수가 대답하기를 : “다시 얻을 수 없소.”라고 하였다.
이에 장의가 말하기를 : “ 나를 위해 초왕에게 소과와 진진을 축출해 주면 청컨대 언영과 한중을 수복시켜 주겠다고

전해 주기 바라오.”라고 하였다. 소수가 귀국해 초회왕에게 이를 보고하자 초회왕이 크게 기뻐했다.]

有人謂昭雎曰:「甚矣,楚王不察於爭名者也. 韓求相工陳籍而周不聽;魏求相綦母恢而周不聽,

何以也? 周是列縣畜我也. 今楚,萬乘之強國也;大王,天下之賢主也.

今儀曰逐君與陳軫而王聽之, 是楚自行不如周,而儀重於韓、魏之王也. 且儀之所行,

有功名者秦也,所欲貴富者魏也.  欲為攻於魏,必南伐楚.

故攻有道,外絕其交,內逐其謀臣. 陳軫,夏人也,習於三晉之事,故逐之,則楚無謀臣矣.

今君能用楚之眾,故亦逐之,則楚眾不用矣. 此所謂內攻之者也,而王不知察. 今君何不見臣於王,請為王使齊交不絕.

齊交不絕, 儀聞之, 其效鄢、郢、漢中必緩矣. 是昭雎之言不信也,王必薄之.」

[그러자 어떤 사람이 소과에게 말하기를 : “ 초나라가 진나라의 말을 들으려 하니 초왕이 쟁명(爭名)하는 자를

살피지 않는 것이 매우 심합니다. 한나라가 공사적(工師籍)을 상국으로 삼으려 하자 주나라가 허락지 않았습니다.

또 위나라가 기무회(綦毋恢)를 상국으로 삼으려 할 때도 주나라가 이를 허락지 않았는데 이는 무슨 연고이겠습니까.

이는 한나라와 위나라가 주나라를 자신들의 현(縣) 정도로 대우했기 때문입니다.지금 초나라는 만승의 강국이며

대왕은 천하의 어진 군주입니다.그런데 지금 장의가 그대와 진진을 쫓아달라고 하자 대왕이 이를 허락했습니다.

이는 초나라가 스스로 주나라만 못하다고 여기면서 장의를 한, 위 두 나라 군주보다 높이는 셈입니다.

또 장의의 소행을 보면 공명은 진나라에서 얻고, 부귀는 위나라로부터 얻고자 하는 것입니다.

그는 위나라에서 대공을 세울 생각으로 틀림없이 남쪽으로 초나라를 칠 것입니다.

다른 나라를 공격하는 데에는 기본 전제가 있습니다. 밖으로는 공격대상국의 외교를 단절시키고,

안으로는 유력한 모신을 축출하는 것이 그것입니다. 진진은 중원 사람으로 3진의 사정에 밝습니다.

그를 쫓아내면 초나라에는 모신이 없어지게 됩니다. 그대 또한 지금 초나라 백성을 잘 다스리고 있는데

그대를 내쫓아버리면 초나라는 백성을 능히 부리지 못하게 됩니다.

이것이 소위 내공(內攻: 안에서 공격함)이라고 하는 것입니다.그런데도 대왕은 이를 살피지 못하고 있습니다.

지금 그대는 어찌하여 저를 대왕에게 알현시키지 않는 것입니까.

청컨대 대왕을 위해 제가 제나라로 가 외교가 끊어지는 일이 없도록 작업하게 해주기 바랍니다.

제나라와 외교가 단절되지 않았다는 소식을 장의가 듣게 되면 그는 언영과 한중을 회복시키는 일을 늦출 것입니다.

그리되면 대왕은 소수의 말을 믿지 못하게 되어 필시 그를 무시하게 될 것입니다.” 라고 하였다.] 

 

威王問於莫敖子華曰:「自從先君文王以至不穀之身, 亦有不為爵勸, 不為祿勉, 以憂社稷者乎?」

莫敖子華對曰:「如華不足知之矣.」 王曰:「不於大夫,無所聞之?」

莫敖子華對曰:「君王將何問者也?彼有廉其爵, 貧其身, 以憂社稷者;有崇其爵,豐其祿,

以憂社稷者;有斷脰決腹,壹瞑而萬世不視, 不知所益,以憂社稷者;有勞其身,愁其志,

以憂社稷者;亦有不為爵勸,不為祿勉,以憂社稷者. 」 王曰:「大夫此言,將何謂也?」

[초위왕이 막오(영윤 바로 다음의 고관) 자화(子華)에게 묻기를 : “선군 초문왕(楚文王: 초무왕의 아들 熊貲)으로부터

불곡(不穀)의 대에 이르기까지 작위나 봉록을 위해 힘쓰지 않고 사직을 위해 걱정한 자가 있소.”라고 하자.
막오 자화가 대답하기를 : “저는 잘 알지 못합니다.”라고 하였다. 왕이 말하기를 : “그대가 아니면 들을 데가 없소?”
그러자 자화가 대답하기를 : “대왕께서 무엇을 물으려고 하는 것인지 잘 모르겠습니다.
그들 중에는 작위를 탐내지 않고 자신은 가난하게 지내면서도 사직을 걱정한 자도 있고,
높은 작위와 두터운 봉록을 누리면서도 사직을 걱정한 자도 있고, 목을 베고 배를 가르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고
죽는 일을 집으로 돌아가는 일처럼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며 사리를 전혀 돌보지 않은 채 사직을 걱정하는 자도 있고,

몸을 수고스럽게 하고 마음을 조려가며 사직을 걱정하는 자도 있고, 작위와 봉록을 위해 권면(勸勉)하는 것도

아니면서 사직을 걱정하는 자도 있습니다.”라고 하였다.  초위왕이 묻기를 : “대부의 그 말은 무슨 뜻이오.”라고 하자.]

 

莫敖子華對曰:「昔令尹子文,緇帛之衣以朝,鹿裘以處;未明而立於朝,日晦而歸食;

朝不謀夕,無一月之積.  故彼廉其爵, 貧其身, 以憂社稷者, 令尹子文是也.  昔者葉公子高,

身獲於表薄, 而財於柱國;定白公之禍, 寧楚國之事;恢先君以揜方城之外, 四封不侵,

名不挫於諸侯.  當此之時也,天下莫敢以兵南鄉. 葉公子高,食田六百畛,故彼崇其爵,豐其祿,

以憂社稷者,葉公子高是也.  昔者吳與楚戰於柏舉,兩御之間夫卒交.  莫敖大心撫其御之手,

顧而大息曰:『嗟乎子乎, 楚國亡之月至矣!吾將深入吳軍, 若扑一人,若捽一人, 以與大心者也,社稷其為庶幾乎?』故斷脰決腹,壹瞑而萬世不視,不知所益,以憂社稷者,莫敖大心是也.

[이에 자화가 대답하기를 : “옛날 영윤 자문(子文)은 치백지의(검은 비단으로 만든 거친 옷)로 조회에 나갔고,
평생을 녹구(鹿裘: 가죽 옷 중 가장 싼 사슴가죽 옷)로 살면서, 날이 밝기 전 새벽에 조정에 나오고 날이 저문 뒤에야

돌아가 저녁을 먹고, 아침에는 저녁거리가 없음을 걱정하지 않고, 하루 분의 양식을 쌓아두고 먹은 적이 없었습니다.
따라서 직위에 청렴하고 자신이 가난하면서 사직을 염려한 자는 바로 영윤 자문이었습니다.
옛날 섭공(葉公) 자고(子高: 초소왕 때 沈尹戌의 아들 沈諸梁)는 외관상 몸이 작고 쇠약해 볼품이 없었으나

주국(柱國)의 자질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백공(白公)의 난을 평정하고 초나라 국사를 안정시켰습니다.
선왕의 유덕(遺德)을 발양해 방성(方城)의 밖까지 미치게 하고, 사방의 국경이 침범당하는 일이 없게 하고,
초나라의 위명(威名)이 제후들 사이에 꺾이는 일이 없게 하였습니다. 당시 천하에 그 누구도 감히 남쪽으로 군사를

돌리지 못했습니다. 섭공 자고는 식읍이 6백 진(畛: 밭 사이의 길)에 달해 먹고 입는 것이 매우 넉넉했습니다.
따라서 작위도 높고 봉록 또한 풍족하면서 나라를 걱정한 자는 바로 섭공 자고이었습니다.
옛나라 오, 초 두 나라가 백거(栢擧: 호북성 마성현)에서 싸울 때 두 나라 전차 사이에서 병사들이 한데 뒤엉켜

교전하게 되었습니다. 이때 막오 성대심(成大心: 성득신의 아들)은 자신의 전차를 부리는 어자(御者)의 손을

어루만지며 크게 한숨을 쉬며 말하기를, ‘아, 초나라가 망할 날이 다가왔다. 내가 이제 오나라의 군진 깊숙히

들어갈 터이니 그대들은 적군 한 명이라도 거꾸러뜨리고 끄집어 내려 나를 돕도록 하라.
그래야만 행여 사직을 보존할 희망이라도 있는 것이 아니겠는가’라고 했습니다.
따라서 목을 베고 배를 가르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고, 죽는 일을 집으로 돌아가는 일처럼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고,
사리(私利)를 전혀 돌보지 않은 채 사직을 걱정한 자는 막오 성대심이었습니다.

 

昔吳與楚戰於柏舉,三戰入郢.  寡君身出,大夫悉屬,百姓離散.  棼冒勃蘇曰:『吾被堅執銳,

赴強敵而死,此猶一卒也,不若奔諸侯.』於是贏糧潛行,上崢山,踰深谿,蹠穿膝暴,

七日而薄秦王之朝.  雀立不轉,晝吟宵哭.  七日不得告. 水漿無入口,瘨而殫悶,旄不知人.

秦王聞而走之,冠帶不相及,左奉其首,右濡其口,勃蘇乃蘇.  秦王身問之:『子孰誰也?』

棼冒勃蘇對曰:『臣非異,楚使新造礆棼冒勃蘇.  吳與楚人戰於柏舉,三戰入郢,寡君身出,

大夫悉屬,百姓離散.  使下臣來告亡,且求救.』 秦王顧令不起:『寡人聞之,萬乘之君,

得罪一士,社稷其危,今此之謂也.』 遂出革車千乘,卒萬人, 屬之子滿與子虎, 下塞以東,

與吳人戰於濁水而大敗之, 亦聞於遂浦.  故勞其身,愁其思,以憂社稷者,棼冒勃蘇是也.

[옛날 오, 초 두 나라가 백거에서 싸울 때 3번의 싸움만에 초나라가 패해 오나라 군사가 영에 입성하게 되었습니다.
초소왕이 도망가자 대부들이 모두 그 뒤를 따라가고 백성들 또한 사방으로 흩어지게 되었습니다.
이때 대부 분모발소(申包胥)가 말하기를, ‘나는 단단한 갑옷을 입고 예리한 칼을 들고 강적들 사이로 뚫고 들어가

죽을 수 있다. 그러나 이는 일개 병졸이 하는 일에 지나지 않는다. 차라리 제후들에게 달려가 구원을 청하느니만

하다’고 했습니다. 그리고는 양식을 짊어지고 잠행하여, 험준한 산을 오르고, 깊은 골짜기를 건너,
신발이 닳고 무릎도 드러나도록 고생한 끝에 7일 만에 진나라 조정에 이르렀습니다.
그는 선 채로 잠을 자며 몸을 움직이지 않은 채 낮에는 신음하고 밤에는 소리 내어 통곡했으나 7일이 지나도록

고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는 물 한 모금, 국물 한 숟가락 입에 대지 않다가 혼절하여 의식을 잃고서는 사람을 알아보지

못할 지경이 되었습니다. 진왕이 이 얘기를 듣고 달려나갔습니다. 관도 쓰지 않고 띠도 매지 않은 채 달려가

왼손으로 그의 목을 안아 일으키고 오른손으로 그의 입을 벌리고는 따뜻한 물을 먹였습니다.

이에 발소가 겨우 소생하게 되었습니다. 이에 진왕이 친히 묻기를, ‘그대는 누구요’라고 하자,

분모발소가 대답하기를, ‘신은 초나라가 보낸 신조려(新造盭) 분모발소입니다. 지금 오나라 군사가 초나라 군사와

백거에서 싸우다가 3번의 싸움만에 영(郢)으로 들어오게 되었습니다. 과군(寡君)이 도망치자 대부들 모두 그 뒤를

따라가고 백성들은 사방으로 이산했습니다. 이에 신을 보내 나라가 곧 망하게 된 사정을 고하고 구원을 청하게

한 것입니다’라고 했습니다. 이에 진왕이 재차 일으켜 세우려 했으나 분모발소는 완강히 일어나려 하지 않았습니다.
그러자 진왕이 말하기를, ‘과인이 듣건대 만승의 군주도 한 선비에게 죄를 지어 그 사직을 위태롭게 하는 일이

있다고 했소. 이는 바로 이를 두고 한 말인 듯하오’라고 했습니다. 그리고는 마침내 공자 자만(子滿)과 자호(子虎)에게

병거 1천 승에 군사 1만 명을 이끌고 무관(武關)을 빠져나가 동쪽으로 향하게 했습니다.
이들이 탁수(濁水)에서 오나라 군사를 대파하고 수포(遂浦)에서도 싸운 소식이 전해지자 오나라 군사가 마침내

물러났습니다. 따라서 몸을 수고스럽게 하고 마음을 조려가며 사직을 걱정한자는 분모발소였습니다.

 

吳與楚戰於柏舉,三戰入郢. 君王身出,大夫悉屬,百姓離散. 蒙穀給鬥於宮唐之上,舍鬥奔郢曰:

『若有孤,楚國社稷其庶幾乎?』遂入大宮,負雞次之典以浮於江, 逃於雲夢之中.

昭王反郢, 五官失法, 百姓昏亂;蒙穀獻典, 五官得法,而百姓大治. 此蒙穀之功, 多與存國相若,

封之執圭,田六百畛.  蒙穀怒曰:『穀非人臣,社稷之臣,苟社稷血食,餘豈悉無君乎?』

遂自棄於磨山之中,至今無冒.  故不為爵勸,不為祿勉,以憂社稷者,蒙穀是也.」

[또 오, 초 두 나라가 백거에서 싸울 때 3번의 싸움만에 영(郢)이 함락되자 초왕은 도망치고,
대부들도 모두 그 뒤를 좇아 달아나고, 백성들도 사방으로 흩어지게 되었습니다.
이때 대신 몽곡(蒙穀)은 궁당(宮唐) 부근에서 싸우다가 이내 싸움을 포기하고 영으로 도망쳤습니다.
그러면서 말하기를, ‘만일 어린 왕자라도 살아 있다면 사직을 보존할 수 있지 않겠는가’라고 했습니다.
드디어 궁 안으로 들어가 어지러이 흩어진 전적(典籍)을 모아 등에 짊어지고는 이내 장강에 배를 띄워

운몽택(雲夢澤) 속으로 몸을 숨겼습니다. 이윽고 초소왕(楚昭王)이 영으로 돌아왔으나

오관(五官)은 법전을 잃어버려 법을 집행할 길이 없자 백성들이 혼란에 빠지게 되었습니다.

이때 몽곡이 전적을 바치자 오관이 비로소 법을 제대로 집행할 수 있게 되었고 이에 크게 다스려지게 되었습니다.

비교하건대 몽곡이 세운 대공은 초나라를 보전한 공로에 필적합니다.
당시 그의 공을 높이 사 집규(執圭) 벼슬과 땅 6백 진(畛)을 내렸지만 몽곡은 화를 내며 말하기를,
‘나는 작록을 탐하는 대신이 아니라 국가의 안위를 염려하는 대신이다. 나라가 능히 보전된다면 내 어찌 관직이

없음을 염려하겠는가’라고 했습니다. 그리고는 마침내 몸을 마산(磨山: 호남성 풍주 안복현) 산중으로 숨겼습니다.
오늘에 이르기까지 그 후예로서 작위를 받은 자가 한 사람도 없습니다.
 따라서 작위와 봉록을 위해 권면(勸勉)하는 것도 아니면서 사직을 걱정한 자는 몽곡이었습니다".라고 하였다.]

 

王乃大息曰:「此古之人也. 今之人,焉能有之耶?」

莫敖子華對曰:「昔者先君靈王好小要,楚士約食,馮而能立,式而能起. 食之可欲,忍而不入;

死之可惡,然而不避. 章聞之,其君好發者,其臣抉拾. 君王直不好,若君王誠好賢,此五臣者,

皆可得而致之.」

[이에 초위왕이 크게 한숨을 쉬며 말하기를 : “이는 모두 옛 사람들의 일로 지금 사람들이 어찌 그리 할 수 있겠소.”

라고 하자, 막오 자화가 대답하기를 : “옛날 선군 초영왕(초공왕의 아들로 이름은 圍)은 세요(細腰)를 좋아했습니다.

그러자 초나라의 모든 선비들이 절식(節食)하여 세요를 만들고자 했습니다.
이에 절식으로 인해 몸이 쇠약해진 나머지 서려고 해도 물건에 의지해야만 가능하고,
수레에 앉아 있다가 인사를 할 때에도 간신히 횡목에 몸을 기대어 경례를 했던 것입니다.
먹고 싶은 것이 있어도 세요를 만들기 위해 꾹 참고, 굶어 죽는 것이 두려웠음에도 이를 피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제가 듣건대 군주가 활쏘기를 좋아하면 그 신하들은 활을 쏘는데 관련된 하찮은 골무나 띠 조차도 좋아하게 된다고

하였습니다. 대왕은 단지 현신을 좋아하지 않을 뿐입니다. 만일 대왕께서 진실로 어진 이를 좋아 하신다면

앞서 예로 든 5명의 현신을 모두 불러들일 수 있을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楚策 二 . 

 

 

魏相翟強死. 為甘茂謂楚王曰:「魏之幾相者,公子勁也. 勁也相魏,魏、秦之交必善.

秦、魏之交完,則楚輕矣. 故王不如與齊約,相甘茂於魏. 齊王好高人以名,今為其行人請魏之相,

齊必喜. 魏氏不聽,交惡於齊;齊、魏之交惡,必爭事楚.  魏氏聽,甘茂與樗里疾,貿首之讎也;

而魏、秦之交必惡,又交重楚也.」

[주난왕 10년(기원전 305), 위나라 재상 적강이 죽었다. 이때 어떤 사람이 감무(甘茂)를 위해 초회왕에게 말하기를 :
“ 위나라는 공자 경(勁)을 재상으로 삼으려는 듯합니다. 공자 경이 위나라의 재상이 되면 위, 진 두 나라의 외교는

필시 좋아질 것입니다. 그러나 위, 진 두 나라 사이가 좋아지면 초나라의 위세는 가벼워지게 됩니다.
그러니 대왕은 제나라와 서로 약속하여 감무를 위나라의 재상으로 삼느니만 못합니다.
제왕(齊王: 제선왕)은 고인(高人: 남보다 위에 섬)으로 생색내는 것을 좋아하는 인물입니다.
지금 제왕에게 행인(行人: 외교관)을 대신해 위나라 재상을 정하는 일을 맡아달라고 청하면 제왕은 틀림없이

기뻐할 것입니다. 만일 위나라가 들어주지 않으면 두 나라 관계가 악화할 것이고, 그리 되면 두 나라 모두 다투어

우리 초나라를 섬기게 될 것입니다. 만일 위나라가 그 요구를 들어주게 되면 감무와 진나라 재상 저리질(樗里疾)은

자기 머리를 베어 상대방의 머리와 바꾸려 들 정도의 원수지간이므로 위, 진 두 나라의 외교는 필시 악화될 것입니다.

그러면 두 나라 역시 초나라와의 외교를 중시하게 될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齊、秦約攻楚,楚令景翠以六城賂齊,太子為質.  昭雎謂景翠曰:「秦恐且因景鯉、蘇厲而效地於楚.

公出地以取齊,鯉與厲且以收地取秦,公事必敗. 公不如令王重賂景鯉、蘇厲,使入秦,秦恐,必不求地而合於楚.

若齊不求,是公與約也.」

[주난왕 14년(기원전 301), 제, 진 두 나라가 맹약해 초나라를 공격하였다. 이에 초나라가 장수 경취(景翠)를 시켜

6개 성읍을 제나라에 주고 태자를 인질로 보냈다. 이때 초나라의 모신 소수(昭睢)가 경취에게 말하기를 :
“ 진나라는 장차 경리(景鯉: 초회왕의 총신)와 소려(蘇厲: 소진의 동생)를 통해 초나라에 땅을 바치게 되지나 않을까

두려워하고 있습니다. 공이 제나라에 땅을 주어 제나라를 우리 편으로 만들면 경리와 소려는 진나라에게 땅을 떼어

달라고 할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공은 필시 원한을 사게 될 것입니다. 그러니 공은 경리와 소려가 예물을 후하게 갖춰

진나라에 사자로 가도록 대왕에게 권하느니만 못합니다.

그러면 제나라는 이에 두려움을 느껴 필시 땅을 요구하지도 않고 초나라와 화합하자고 할 것입니다.

만일 제나라가 땅을 요구하지 않게 되면 그때 공은 맹약을 맺어도 될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術視伐楚,楚令昭鼠以十萬軍漢中. 昭雎勝秦於重丘,蘇厲謂宛公昭鼠曰:「王欲昭雎之乘秦也,

必分公之兵以益之.  秦知公兵之分也,必出漢中. 請為公令辛戎謂王曰:『秦兵且出漢中.』

則公之兵全矣.」 四國伐楚,楚令昭雎將以距秦.  楚王欲擊秦,昭侯不欲.

桓臧為昭雎謂楚王曰:「雎戰勝,三國惡楚之強也,恐秦之變而聽楚也,必深攻楚以勁秦.

秦王怒於戰不勝,必悉起而擊楚,是王與秦相罷,而以利三國也. 戰不勝秦,秦進兵而攻.

不如益昭雎之兵,令之示秦必戰. 秦王惡與楚相弊而令天下,秦可以少割而收害也.

秦、楚之合,而燕、趙、魏不敢不聽,三國可定也.」

[주난왕 9년(기원전 306), 진나라 장수 술시(術視)가 초나라로 쳐들어 오자, 초나라가 장군 소서(昭鼠)를 시켜

군사 10만 명을 이끌고 가 한중에서 응전하게 했다. 그때 소수(昭睢)는 이미 중구(重丘: 하남성 필양현)에서

진나라 군사를 격파하고 있었다. 그러자 소려(蘇厲)가 완공(宛公) 소서(昭鼠)에게 말하기를 : “초왕(楚王: 초회왕)은

소수가 진나라를 계속 이기기를 바란 나머지 필시 공의 군사를 나눠 그쪽에 보태주려 할 것입니다.
진나라는 당신의 군사가 나뉘어졌다는 것을 알면 필시 한중으로 진출할 것입니다.

나는 그대를 위해 미융(羋戎: 선태후의 동생 화양군)을 시켜 초왕(楚王: 초회왕)에게 ‘진나라 군사가 장차 한중으로

진출하려 합니다’라고 보고하게 하겠습니다. 그러면 공의 군사는 온전할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4국(四國: 진, 연, 조, 위)이 초나라를 공격해 왔다. 이에 초나라가 소수(昭睢)를 시켜 진나라를 막게 했다.

초회왕은 계속 진나라를 공격하고자 했으나 소수는 이에 반대했다. 그러자 소수의 부장 환장(桓臧)이 소수를 위해

초회왕에게 말하기를 : “소수가 진나라를 이기자 나머지 3국은 초나라가 강대해질까 꺼리고 있습니다.

더구나 진나라가 마음을 바꿔 초나라의 말을 좇을까 두려워하고 있습니다.

이들 3국은 필시 초나라를 깊숙이 공격해진나라를 강하게 만들고자 할 것입니다.

진왕(秦王: 진소양왕)은 전승을 거두지 못한 것에 노해 틀림없이 군사를모두 일으켜 초나라를 치려 할 것입니다.

그리되면 초, 진 두 나라 모두 피폐해져 나머지 3국만 이롭게 됩니다.

초나라가 진나라와 싸워 이기지 못하면 진나라는 계속 진공할 것입니다.

그러니 지금 소수의 병력을 증강시켜진나라와 결전할 의지를 보여주느니만 못합니다.

그러면 진왕은 초나라와 함께 피폐하게 되어 다른 제후들만유리하게 만들어줄까 염려해

초나라에게 약간의 땅을 떼어주고 휴식을 취하고자 할 것입니다. 진, 초 두 나라가 이같이 연합하면

나머지 연, 조, 위 3국은 감히 말을 듣지 않을 수 없게 됩니다. 그러면 3국을 가히 평정할 수 있습니다.”라고 하였다.]

楚懷王拘張儀, 將欲殺之. 靳尚為儀謂楚王曰 :「拘張儀, 秦王必怒. 天下見楚之無秦也, 楚必輕矣.」

又謂王之幸夫人鄭袖曰:「子亦自知且賤於王乎?」 鄭袖曰:「何也?」

尚曰:「張儀者,秦王之忠信有功臣也. 今楚拘之,秦王欲出之. 秦王有愛女而美,又簡擇宮中佳翫

麗好翫習音者,以懽從之;資之金玉寶器,奉以上庸六縣為湯沐邑,欲因張儀內之楚王.

楚王必愛,秦女依強秦以為重,挾寶地以為資,勢為王妻以臨於楚. 王惑於虞樂,

必厚尊敬親愛之而忘子,子益賤而日疏矣.」

[주난왕 4년(기원전 311), 초회왕이 장의를 잡아가둔 뒤 장차 죽이려 하자, 장의와 가까운 초회왕의 총신

근상(靳尙)이 나서 장의를 위해 초회왕에게 말하기를 : “장의를 가둬 놓으면 진왕이 노할 것입니다. 천하의 제후들은

초나라가 진나라의 지원을 받지 못한다는 사실을 알게 되면 필시 초나라를 경시할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그리고는 다시 초회왕의 행부인(幸夫人: 총희) 정수(鄭袖)에게 말하기를 :
“그대 또한 장차 대왕에게 천시당할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알고 있습니까.”라고 하자,  

정수가 놀라 묻기를 :  “그게 무슨 말이오.?”라고 하였다.
그러자 근상이 말하기를 : “장의는 진왕이 총애하는 공신입니다. 지금 초나라가 그를 가둬놓고 있으니 진왕은 필시

그를 구해내려고 할 것입니다. 진왕은 미색이 출중한 사랑하는 딸을 즐겁게 하기 위해 유희를 잘하고 음악을 익힌

궁중의 미인을 선발해 놓고 장차 딸이 출가할 때 딸려보내려 하고 있습니다. 진왕은 지금 딸에게 금옥보기(金玉寶器)

를 지참하고, 상용의 6개 현을 탕목읍(湯沐邑)으로 지니게 한 뒤 장의를 통해 우리 대왕에게 출가시키려는 것입니다.

초왕은 틀림없이 그녀를 사랑하게 될 것이며 진왕의 딸은 강대한 진나라를 배경으로 존중받게 될 것입니다.
게다가 지참한 재물과 탕목읍을 밑천으로 삼아 초왕의 부인이라는 신분을 활용할 경우 그 세력은 초나라에서

막강하게 될 것입니다. 초왕이 오락에 빠지면 그녀를 크게 존경하고 친애한 나머지 그대를 잊어버리고 말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그대는 날로 천해지고 마침내 잊혀지고 말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鄭袖曰:「願委之於公,為之奈何?」曰:「子何不急言王,出張子.  張子得出,德子無已時,

秦女必不來,而秦必重子. 子內擅楚之貴,外結秦之交,畜張子以為用,子之子孫必為楚太子矣,

此非布衣之利也.」 鄭袖遽說楚王出張子.  楚王將出張子,恐其敗己也,

靳尚謂楚王曰:「臣請隨之. 儀事王不善,臣請殺之.」

[정수가 말하기를 : “원컨대 모든 일을 그대에게 맡기고자 하니 어찌하면 좋을지 가르쳐 주시겠습니까?”라고 하자.
근상이 대답하기를 : “그대는 어찌하여 급히 왕에게 장의를 풀어 주라고 말하지 않는 것입니까.
장의가 풀려나면 그는 그대의 은덕에 감격해 마지 않을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진왕의 딸도 필시 오지 못할 것이고

진나라 또한 장의가 석방된 것으로 인해 그대를 중히 여길 것입니다. 그대는 안으로 초나라를 마음대로 흔들 수 있는

존귀한 위치에 서게 되고, 밖으로 진나라와 교분을 맺어 장의를 유용하게 이용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대 자손은 필시 초나라의 태자가 될 것입니다. 이는 평민들의 통상적인 이익과는 비교할 수조차 없는 엄청난

이익입니다.”라고 하였다. 그러자 정수가 급히 초회왕을 설득해 장의를 석방하게 하였다.
초회왕이 장차 장의를 석방시키려 했으나 그가 다시 자신을 속일까 염려했다. 그러자 근상이 초회왕에게 말하기를 :
“ 청컨대 신이 장의를 수행하도록 허락해 주십시오. 만일 장의가 대왕을 잘 섬기지 않으면 

신이 그를 죽여 버리겠습니다.”라고 하였다.]

 

楚小臣,靳尚之仇也,謂張旄曰:「以張儀之知,而有秦、楚之用,君必窮矣.君不如使人微要靳尚而刺之,

楚王必大怒儀也.  彼儀窮,則子重矣.  楚、秦相難,則魏無患矣.」張旄果令人要靳尚刺之. 

楚王大怒,秦構兵而戰.  秦、楚爭事魏,張旄果大重.

[이때 초회왕의 근신 중에 근상과 원수지간인 사람이 있었다. 그가 위나라 대신 장모(張旄)에게 말하기를 :
“ 장의가 장차 그 뛰어난 지혜를 활용해 진, 초 두 나라에서 중용되면 그대는 필시 궁지에 몰리고 맙니다.
그대는 사람을 시켜 은밀히 근상을 척살하도록 하십시오. 그러면 초왕은 장의의 짓으로 알고 크게 노할 것입니다.
이로 인해 장의가 궁지에 몰리면 그대가 중용될 것입니다. 만일 이 문제로 초, 진 두 나라 사이에 싸움이 벌어지게

되면 위나라는 아무런 근심도 없게 됩니다.”라고 하였다. 장모는 과연 사람을 시켜 근상을 척살하게 했다.

초왕이 대노하자, 진, 초 두 나라가 군사를 일으켜 싸우게 되었다.
이로써 두 나라가 서로 다투어 위나라를 섬기게 되자, 장모는 과연 크게 중용되었다.]

 

秦敗楚漢中. 楚王入秦,秦王留之. 游騰為楚謂秦王曰:「王挾楚王,而與天下攻楚,則傷行矣.

不與天下共攻之,則失利矣. 王不如與之盟而歸之. 楚王畏,必不敢倍盟. 王因與三國攻之, 義也.」

[주난왕 16년(기원전 299), 진나라가 초나라를 한중에서 깨뜨렸다. 초회왕이 진나라로 잡혀오자,

진소양왕(秦昭襄王)이 그를 억류했다. 이때 일찍이 주나라의 대신이었던 유등(游騰)이 초나라를 위해

진소양왕에게 말하기를 : “대왕께서 초왕을 붙들어 둔 채 천하 제후들과 함께 초나라를 치면 대왕의 덕행에

손상이 가 불의를 행했다는 오명을 쓰게 됩니다. 그렇다고 초나라를 공격하지 않으면 이익을 놓치게 됩니다.

그러니 대왕은 초왕과 맹약을 맺고 그를 돌려보내느니만 못합니다. 그리하면 초왕은 두려운 나머지 감히 맹약을

어기지 못할 것입니다. 만일 초왕이 맹약을 배반하면 그때 비로소 대왕은 3국(三國: 제, 위, 한)과 함께

초나라를 공격하도록 하십시오. 그러면 의에 합당할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楚襄王為太子之時,質於齊. 懷王薨,太子辭於齊王而歸.

齊王隘之:「予我東地五百里,乃歸子. 子不予我,不得歸.」太子曰:「臣有傅,請追而問傅.」

傅慎子曰:「獻之地,所以為身也. 愛地不送死父,不義. 臣故曰,獻之便.」
太子入,致命齊王曰:「敬獻地五百里.」 齊王歸楚太子.  太子歸,即位為王.

齊使車五十乘,來取東地於楚.  楚王告慎子曰:「齊使來求東地,為之奈何?」
慎子曰:「王明日朝群臣,皆令獻其計.」上柱國子良入見.

王曰:「寡人之得求反,王墳墓、復群臣、歸社稷也,以東地五百里許齊. 齊令使來求地,

為之奈何?」 子良曰:「王不可不與也. 王身出玉聲,許強萬乘之齊而不與,則不信,

後不可以約結諸侯. 請與而復攻之.  與之信,攻之武. 臣故曰與之.」

[주난왕 15년(기원전 300), 초경양왕(楚頃襄王)이 태자의 신분이었을 때 제나라에 인질로 가 있었다.
초회왕이 죽자 태자가 제민왕에게 작별인사를 하고 귀국하려 했다. 그러자 제민왕이 이같이 가로막고 나섰다.
“과인에게 초나라의 동쪽 변경 5백 리를 넘겨주면 귀군을 돌려보내겠소. 그렇지 않으면 그대는 돌아갈 수 없소.”
태자가 대답하기를 : “저의 사부가 있으니 물러가 의논해 보겠습니다.”라고 하였다.
이어 사부 신자(愼子)가 말하기를 : “땅을 바치도록 하십시오. 땅은 일신을 위한 것입니다.
땅을 아껴 세상을 떠난 부왕의 장례에 참석하지 못하는 것은 불의입니다. 그래서 땅을 바치는 낫다고 한 것입니다.”
태자가 들어가 제왕에게 말하기를 : “삼가 땅 5백 리를 바치도록 하겠습니다.”라고 하자, 태자를 귀국시켰다.

태자가 귀국해 초경양왕으로 즉위하자 제나라가 사자에게 수레 50 승을 이끌고 가 땅을 받아오게 했다.
그러자 초경양왕이 신자에게 묻기를 : “ 제나라의 사자가 땅을 받으러 왔는데 어찌 하면 좋겠소.”라고 하자.
그러자 신자가 대답하기를 : “ 대왕께서는 내일 군신들을 모아놓고 모두에게 각자 계책을 내도록 명하십시오.”
이때 상주국(上柱國) 자량(子良: 昭陽)이 배견하자 초경양왕이 묻기를 : “과인이 귀국하여 선왕의 장례를 주관하고,

다시 군신들을 대면하고, 나라를 다시 회복하게 된 것은 동지(東地) 5백 리를 제나라에 주기로 약속했기 때문이오.
제나라 사자가 땅을 받으러 왔는데 이를 어찌하면 좋겠소.”라고 하자,
자량이 대답하기를 : “대왕은 땅을 주지 않으면 안 됩니다. 대왕 직접 옥성(玉聲)으로 만승의 강한 제나라에

약속하고도 이를 주지 않으면 이는 불신이고, 이후 다른 제후들과 맹약할 수 없을 것입니다.

일단 주고 난 뒤 공격해 도로 취하면 됩니다. 주는 것은 신(信)이고, 공격하는 것은 무(武)입니다.

그래서 땅을 주라고 말한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子良出,昭常入見.  王曰:「齊使來求東地五百里,為之奈何?」

昭常曰:「不可與也. 萬乘者,以地大為萬乘. 今去東地五百里,是去戰國之半也,

有萬乘之號而無千乘之用也,不可. 臣故曰勿與. 常請守之」.  昭常出,景鯉入見.

王曰:「齊使來求東地五百里,為之奈何?」

景鯉曰:「不可與也. 雖然,楚不能獨守. 王身出玉聲,許萬乘之強齊也而不與,負不義於天下.
楚亦不能獨守. 臣請西索救於秦. 」 景鯉出,慎子入,王以三大夫計告慎子曰:

「子良見寡人曰:『不可不與也,與而復攻之.』常見寡人曰:『不可與也,常請守之.』

鯉見寡人曰:『不可與也,雖然楚不能獨守也,臣請索救於秦.』寡人誰用於三子之計?」

慎子對曰:「王皆用之.」王怫然作色曰:「何謂也?」

[자량이 물러간 뒤 대신 소상(昭常)이 배견하자, 초경양왕이 묻기를 : “ 제나라 사자가 동지 5백 리를 받으러 왔는데

어찌하면 좋겠소?”라고 하자,  이에 소상이 대답하기를 : “ 주면 안됩니다. 만승의 국가는 땅이 넓기 때문에

가능한 것입니다. 지금 동지 5백 리를 떼어 주면 우리 초나라의 반을 주는 것이 됩니다. 만승지국이라는 허명만

남게 될 뿐 천승지국만큼의 실력도 없게 됩니 불가합니다. 그래서 주지 말라고 말한 것입니다.

신이 동지를 지키도록 하겠습니다.”라고 하였다.  소상이 물러간 뒤 경리(景鯉)가 배견하자 초경양왕이 묻기를 : 

 “ 제나라 사자가 5백 리를 받으러 왔는데 어찌하면 좋겠소.”라고 하자,
경리가 대답하기를 : “ 주면 안됩니다. 비록 그렇기는 하나 장차 초나라 단독으로 지켜낼 수도 없습니다.
대왕이 직접 옥성으로 만승의 강한 제나라에 승낙하고 이를 주지 않으면 천하의 제후들 사이에 불의의 오명을

쓰게 됩니다. 그렇다고 초나라 역시 독력으로는 지킬 수는 없습니다. 신이 서쪽 진나라로 가 구원을 청하도록

하겠습니다.”라고 하였다.  경리가 물러간 뒤 신자가 다시 배견하자, 초경양왕이 3 대부의 계책을 알려주면서

묻기를 : “자량은 과인에게 말하기를, ‘주지 않으면 안됩니다. 주고 나서 공격해 되찾도록 하십시오’라고 했소.
소상은 말하기를, ‘주어서는 안됩니다. 소신에게 지키도록 해주십시오’라고 했소.
경리는 말하기를, ‘주어서는 안됩니다. 그렇다고 초나라 혼자 힘으로는 지킬 수 없으니 진나라에 구원을 청하기

바랍니다’라고 했소. 3 대부의 계책 중 어느 것을 택하는 것이 좋겠소.”라고 하자,
그러자 신자가 대답하기를 : “모두 채택하도록 하십시오.”라고 하였다.
이에 초경양왕이 얼굴을 붉히며 묻기를 : “ 그게 도대체 무슨 말이오?”라고 하자.]

 

慎子曰:「臣請效其說,而王且見其誠然也. 王發上柱國子良車五十乘,而北獻地五百里於齊.

發子良之明日,遣昭常為大司馬,令往守東地. 遣昭常之明日,遣景鯉車五十乘,西索救於秦.」
王曰:「善.」乃遣子良北獻地於齊. 遣子良之明日,立昭常為大司馬,使守東地.

又遣景鯉西索救於秦. 子良至齊,齊使人以甲受東地.

昭常應齊使曰:「我典主東地,且與死生. 悉五尺至六十,三十餘萬弊甲鈍兵,願承下塵.」
齊王謂子良曰:「大夫來獻地,今常守之何如?」

子良曰:「臣身受命弊邑之王,是常矯也. 王攻之.」

[신자가 설명하기를 : “ 청컨대 그 설명을 올리도록 해주기 바랍니다. 제가 말하면 대왕도 참으로 그럴 수밖에 없다는

것을 알게 될 것입니다. 우선 대왕은 상주국 자량에게 병거 50 승을 이끌고 가 땅 5백 리를 북쪽 제나라에 바치게

하십시오. 이어 자량이 떠난 다음날 소상을 대사마로 임명해 그 땅을 수비하게 하십시오.

마지막으로 경리에게 병거 50 승을 이끌고 서쪽 진나라로 가 구원을 청하게 하십시오.”라고 하였다.
왕이 말하기를 : “그 계책이 참으로 옳소.”라고 하였다.  초경양왕이 곧 자량을 시켜 땅을 제나라에 바치게 한 뒤

자량이 떠난 다음날 소상을 대사마에 임명하여 동지를 지키게 했다. 이어 다시 경리를 진나라로 보내 구원을

청하게 했다. 자량이 제나라에 도착하자 제나라는 사람을 시켜 군사를 이끌고 가 땅을 받게 했다.

그러자 소상이 제나라의 사자에게 말하기를 : “ 내가 바로 동지를 관장하는 대사마로 나는 이 땅과 더불어 생사를

같이 할 것이오. 5척의 어린 동자로부터 나이 60의 노인에 이르기까지 모두 30여만 명의 백성이 비록 낡은 갑옷과

녹슨 무기밖에 없지만 귀국과의 전쟁에서 죽어 먼지가 될 각오까지 하고 있소. ”라고 하였다.
이에 제민왕이 자량에게 묻기를 : “ 대부가 땅을 바치러 왔는데도 지금 소상이 그 땅을 수비하고 있는 것은

무슨 까닭이오.”라고 하자, 자량이 대답하기를 : “ 신은 폐읍의 군왕으로부터 직접 명령을 받았습니다.
그런즉 소상이 군명을 사칭하고 있는 것입니다. 대왕께서는 지체없이 공격하도록 하십시오.”라고 하였다.

 

齊王大興兵,攻東地,伐昭常.  未涉疆,秦以五十萬臨齊右壤.
曰:「夫隘楚太子弗出,不仁;又欲奪之東地五百里,不義.  其縮甲則可,不然,則願待戰.」

齊王恐焉.  乃請子良南道楚,西使秦,解齊患.  士卒不用,東地復全.

女阿謂蘇子曰:「秦栖楚王,危太子者,公也. 今楚王歸,太子南,公必危.

公不如令人謂太子曰:『蘇子知太子之怨己也,必且務不利太子.
太子不如善蘇子,蘇子必且為太子入矣.』」蘇子乃令人謂太子.  太子復請善於蘇子.

[제민왕이 크게 군사를 일으켜 동지로 쳐들어가 소상을 공격하게 하였다.아직 국경을 넘기도 전에 진나라의 50만 대군이

제나라의 오른쪽 국경으로 접근하면서 제나라에게 경고하기를 : “무릇 초나라 태자를 가로막고 돌려보내려 하지

않는 것은 불인(不仁)이다. 또 초나라의 동지 5백 리를 빼앗으려한 것은 불의이다. 이제 군사를 거두어 철군하면

그냥 두겠으나 그렇지 않으면 부디 전쟁을 기다리겠다”라고 하자,제민왕이 두려운 나머지 자량을 시켜 초나라를

치지 않겠다는 뜻을 전하게 한 뒤 서쪽 진나라에도 사자를 보냈다.이로써 제나라는 간신히 우환을 해결케 되었다.

반면 초나라는 병사 하나 동원하지 않고 동지를 보전하게 되었다.

여아(女阿)가 소자(소진)에게 말하기를 : “ 진나라로 하여금 초회왕을 억류하게 하고 태자를 제나라에 인질로 들여 보내

위태롭게 만든 사람은 그대입니다. 지금 초왕이 돌아오고 태자가 귀국하면 그대는 위태롭게 될 것입니다.

그러니 사람을 태자에게 보내 전하기를, ‘태자가 나를 원망하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소.

나는 장차 반드시 태자에게 불리하도록 힘쓸 것이오. 그러니 태자는 오히려 나를 잘 대해 주느니만 못하오.

그러면 나 또한 태자를 위해 입국이 성사되도록 노력하겠소’라고 하느니만 못합니다.”라고 하였다.

이에 소자가 곧 사람을 태자에게 보내 그대로 말을 전하게 했다. 태자도 다시 소자와의 친교를 청하게 되었다.]

 

 

 

  楚 策 三 . 

 

 

蘇子謂楚王曰:「仁人之於民也,愛之以心,事之以善言. 孝子之於親也,愛之以心,事之以財.

忠臣之於君也,必進賢人以輔之. 今王之大臣父兄,好傷賢以為資,厚賦斂諸臣百姓,

使王見疾於民,非忠臣也. 大臣播王之過於百姓,多賂諸侯以王之地,是故退王之所愛,

亦非忠臣也,是以國危.  臣願無聽群臣之相惡也,慎大臣父兄;用民之所善,節身之嗜欲,以百姓.

人臣莫難於無妒而進賢. 為主死易,垂沙之事,死者以千數. 為主辱易,自令尹以下, 事王者以千數.

至於無妒而進賢,未見一人也. 故明主之察其臣也,必知其無妒而進賢也.
賢之事其主也,亦必無妒而進賢. 夫進賢之難者,賢者用且使己廢,貴且使己賤,故人難之.」

[주난왕 14년(기원전 301), 소자(소진)가 초회왕에게 말하기를 : “어진 사람은 백성을 대하면서 마음으로 사랑하고,

선한 말로 교화합니다. 효자(孝子)는 어버이를 대하면서 마음으로 사랑하고, 재물로써 섬깁니다.

충신(忠臣)은 군주를 대하면서 현인을 천거하는 것으로 보좌합니다. 지금 대왕의 종실은 즐겨 현인을 헐뜯고,

군신들과 백성들에게 너무 많은 세금을 부과하여 대왕으로 하여금 백성들의 미움을 사게 하니 이는 충신이 아닙니다.

대신들은 대왕의 잘못을 백성들에게 널리 알리고, 제후들에게는 대왕의 땅을 멋대로 떼어 뇌물로 바치고 있습니다.
이로써 대왕의 총애를 배반하니 이 또한 충신이 아닙니다. 이같이 해서는 나라가 위태롭습니다.
신은 원컨대 대왕이 군신들의 상호 비방을 듣지 말고, 대신과 종실을 가려 쓰고, 백성들이 칭송하는 자를 등용하고,
대왕께서도 자신의 욕심을버리고 절제하여 백성들에게 널리 은혜를 베푸시기 바랍니다.
남의 신하가 되어 무투진현(無妬進賢: 시기하지 않고 현인을 천거함)하는 것 이상으로 어려운 일은 없습니다.
차라리 군왕을 위해 죽는 것은 이보다 쉬운 일입니다. 수사의 일(垂沙: 맹상군이 제, 위, 한의 연합군을 이끌고

초나라를 공격한 사건)에 관련되어 당시 죽은 자가 수천명이나 되었습니다.
또한 영윤 이하 군왕을 섬기는 자가 수천명이나 됩니다. 그러나 ‘무투진현’한 자는 단 한 명도 보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명석한 군주는 신하들을 잘 살펴 반드시 누가 투기심 없이 어진 사람을 천거하는지 알아야 하고,
현신(賢臣)은 군왕을 섬기면서 반드시 투기심 없이 어진 사람을 천거해야만 합니다.
그러나 투기심 없이 어진 사람을 천거하기란 매우 어려운일 일 수 밖에 없습니다.
이는 천거한 현인이 등용되면 자신을 폐기하는 셈이 되고 천거한 현인이 존귀해지면 자신을 비천하게 만드는

셈이 되기 때문입니다. 이로 인해 사람들은 이를 매우 어렵게 생각하는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蘇秦之楚,三日乃得見乎王. 談卒,辭而行.

楚王曰:「寡人聞先生,若聞古人. 今先生乃不遠千里而臨寡人,曾不肯留,願聞其說.」
對曰:「楚國之食貴於玉,薪貴於桂,謁者難得見如鬼,王難得見如天帝. 今令臣食玉炊桂,

因鬼見帝.」 王曰:「先生就舍,寡人聞命矣.」

[주현왕 36년(기원전 333), 소진이 초나라로 간지 3일 만에 초위왕(楚威王)을 알현하게 되었다.
소진이 얘기를 끝내고 물러나오려 하자, 초위왕이 소진에게 묻기를 : “과인은 선생의 고명(高名)을 마치 옛 현인의

이름처럼 들었소. 이번에 선생이 불원천리하여 과인에게 와 주었는데 더 머물지 않고 곧 간다고 하니원컨대 그 이유를

들려주기 바라오.”라고 하자,  소진이 대답하기를 : “초나라는 음식이 옥보다 귀하고, 땔감이 계수나무보다도 귀한

나라입니다. 또 알자(謁者)를 만나기가 귀신을 만나기보다 어렵고, 대왕을 알현하는 것은 천제(天帝)를 만나기보다

어렵습니다. 대왕의 말은 저로 하여금 이곳에 남아 옥을 음식으로 먹고, 계수나무를 땔감으로 쓰고,

귀신을 통해 천제를 만나라고 하는 말과 같습니다.”라고 하였다.
그러자 초위왕이 말하기를 : “선생은 객사로 가 계시오. 과인이 선생의 가르침을 따르도록 하겠소.”라고 하였다.]

 

楚王逐張儀於魏. 陳軫曰:「王何逐張子?」曰:「為臣不忠不信.」

曰:「不忠,王無以為臣;不信,王勿與為約. 且魏臣不忠不信,於王何傷? 忠且信,於王何益?

逐而聽則可,若不聽,是王令困也. 且使萬乘之國免其相,是城下之事也.」

[주현왕 47년(기원전 322), 초회왕이 장의를 위나라에서 쫓아내려 하자, 진진(陳軫)이 초회왕에게 묻기를 :
“ 대왕께서는 어찌하여 장의를 내쫓으려 하는 것입니까?”라고 하자.
초회왕이 대답하기를 : “신하로서 불충(不忠), 불신(不信)하기 때문이오.”라고 하였다.
그러자 진진이 말하기를 : “불충하면 대왕께서 그를 신하로 삼지 않으면 그뿐이고, 불신하면 그와 어떤 맹약도 맺지

않으면 그뿐입니다. 또 위나라의 신하가 불충, 불신한 것이 대왕께 무슨 해가 있겠습니까. 그가 충신(忠信)하다고 하여

대왕에게 무슨 이익이 있겠습니까. 쫓아내라고 요구했다가 위나라가 들어주면 가하지만, 만일 들어주지 않으면

왕령(王令)이 곤란하게 됩니다. 더구나 만승의 나라에게 재상을 파면토록 하는 것은 싸움에 패하여

성 아래에서 굴복하는 것과 똑같은 치욕입니다.”라고 하였다.]

 

張儀之楚,貧.  舍人怒而歸.  張儀曰:「子必以衣冠之敝,故欲歸. 子待我為子見楚王.」

當是之時,南后、鄭袖貴於楚.  張子見楚王,楚王不說. 

張子曰:「王無所用臣,臣請北見晉君.」楚王曰:「諾.」張子曰:「王無求於晉國乎?」

王曰:「黃金珠璣犀象出於楚, 寡人無求於晉國.」 張子曰:「王徒不好色耳?」

王曰:「何也?」 張子曰:「彼鄭、周之女,粉白墨黑,立於衢閭,非知而見之者,以為神.」

楚王曰:「楚,僻陋之國也,未嘗見中國之女如此其美也. 寡人之獨何為不好色也?」

乃資之以珠玉. 南后、鄭袖聞之大恐.

[주난왕 4년(기원전 311), 장의가 초나라에 처음 왔을 때 매우 궁했다. 이에 사인들이 화를 내며 돌아가겠다고 하자,

장의가 다독이며 말하기를 : “그대들은 의관이 다 낡은 이유로 돌아가려 하는데 잠시만 기다리도록 하오.

내가 그대들을 위해 초왕을 만나겠소.”라고 하였다. 당시 초나라에서는 남후(南后)와 정수(靖袖)가 초회왕의

총애를 받고 있었다. 장의가 초왕을 만났으나 환대를 받지 못했다.

이에 장의가 말하기를 : “대왕께서 저를 써 주지 않으시면 저는 북쪽으로 진군(晉君: 여기서는 韓王을 지칭)을

만나러 가겠습니다.”라고 하자,
초왕이 말하기를 : “그리 하도록 하시오.”라고 하였다.
그러자 장의가 묻기를 : “ 대왕께서는 진(晉)나라에서 구하고 싶은 것이 없습니까?”라고 하자.
초왕이 말하기를 : “황금과 주(珠: 큰 구슬), 기(璣: 작은 구슬), 서(犀: 물소 뿔), 상(象: 상아) 등이

모두 우리 초나라에서 산출되기 때문에 과인은 달리 구하고 싶은 물건이 없소.”라고 하였다.
장의가 묻기를 : “대왕께서는 미색도 좋아하지 않습니까?”라고 하자.  

초왕이 되묻기를 : “그게 무슨 말이오?”하였다.
이에 장의가 말하기를 : " 정, 주 두 나라의 여인이 희게 분을 바르고 검게 눈썹을 그린 후

거리로 나와 서 있으면 처음 보는 사람들은 정말 선녀가 내려온 것으로 착각하곤 합니다.”라고 하였다.
그러자 초회왕이 말하기를 : “초나라는 벽루한 곳이라 아직까지 그같은 미인을 본 적이 없소.

과인만이 어찌 미색을 좋아하지 않을 리 있겠소.”라고 하고는, 곧 장의에게 주옥을 밑천으로 주었다.

남후와 정수는 이 말을 전해 듣고 크게 두려워했다.]

令人謂張子曰:「妾聞將軍之晉國,偶有金千斤,進之左右,以供芻秣.」鄭袖亦以金五百斤.
張子辭楚王曰:「天下關閉不通,未知見日也,願王賜之觴.」 王曰:「諾.」乃觴之.

張子中飲,再拜而請曰:「非有他人於此也,願王召所便習而觴之.」王曰:「諾.」

乃召南后、鄭袖而觴之.  張子再拜而請曰:「儀有死罪於大王.」王曰:「何也?」

曰:「儀行天下遍矣,未嘗見人如此其美也. 而儀言得美人,是欺王也.」

王曰:「子釋之. 吾固以為天下莫若是兩人也.」

[이에 남후가 곧 사람을 장의에게 보내 소식을 전하기를 : “첩이 듣건대 장군이 장차 진(晉)나라로 간다고 하여

섭섭해 하던 차에 마침 금 1천 근이 있어 좌우에게 보내니 추말(芻秣 : 말 먹이)에나 보태기 바라오.”라고 하였다.
정수도 곧 금 5백 근을 장의에게 보냈다. 그러자 장의가 초회왕에게 작별인사를 하며 말하기를 :
“천하의 관문들이 굳게 닫혀 있어 통과하기 어려우니 다시 배견할 날이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원컨대 대왕께서 술이나 한 잔 내려주기 바랍니다.”라고 하자. 초회왕이 말하기를 : “좋소.”라고 하였다.
초회왕이 주안상을 차려주자, 장의는 연회가 반쯤 지났을 때 초회왕에게 재배하며 부탁하기를 :
“여기에 다른 사람이 없으니 원컨대 대왕께 가장 총애하는 측근을 불러 함께 마셨으면 합니다.”라고 하자,
초회왕이 대답하기를 : “좋은 생각이오.”라고 하며, 그리고는 남후와 정수를 불러 서로 술잔을 나누었다.

그러자 장의가 다시 재배하며 말하기를 : “제가 대왕께 죽을 죄를 지었습니다.”라고 하였다.  

초회왕이 놀라 묻기를 : “그게 무슨 말이오?”라고 하자,
장의가 사죄하기를 : “제가 천하를 두루 돌아다녔지만 아직 두 분과 같은 미인을 본 적이 없습니다.
그런데 제가 미인을 얻어드리겠다고 했으니 이는 대왕을 기만한 꼴이 되었습니다.”라고 하였다.
이에 초회왕이 말하기를 : “그대는 염려하지 마오. 과인은 전부터 천하에 이 두 사람만한 미인은 또 없을 것으로

생각하고 있었소.”라고 하였다.]

 

楚王令昭雎之秦重張儀.  未至,惠王死.  武王逐張儀.  楚王因收昭雎以取齊.

桓臧為雎謂楚王曰:「橫親之不合也,儀貴惠王而善雎也. 今惠王死,武王立,儀走,

公孫郝、甘茂貴. 甘茂善魏,公孫郝善韓. 二人固不善雎也,必以秦合韓、魏.

韓、魏之重儀,儀有秦而雎以楚重之. 今儀困秦而雎收楚,韓、魏欲得秦,必善二人者.

將收韓、魏輕儀而伐楚,方城必危. 王不如復雎,而重儀於韓、魏.

儀據楚勢,挾魏重,以與秦爭. 魏不合秦,韓亦不從,則方城無患.」

[주난왕 5년(기원전 310), 초회왕이 소수(昭睢)를 진나라로 보내 장의의 중용에 힘을 보태게 했다.
그러나 소수가 진나라에 이르기도 전에 진나라에서는 진혜문왕이 죽고, 진무왕이 즉위해 장의를 축출해 버렸다.
이에 초회왕은 소수를 잡아 가둔 뒤 제나라와 결호하고자 했다. 그러자 소수의 가신 환장(桓臧)이 소수를 위해

초회왕에게 말하기를 : “연횡이 깨어진 것은 장의가 진혜문왕에게 중용되고 소수에게 잘 해주었기 때문입니다.
지금 진혜문왕이 죽고 새로  무왕이 즉위하자 장의는 도주하고 공손학(公孫郝)과 감무(甘茂)가 중용되었습니다.
감무는 위나라와 친하고, 공손학은 한나라와 친하나 두 사람 모두 소수와는 사이가 좋지 않습니다.
그러니 두 사람은 틀림없이 진나라로 하여금 한, 위 두 나라와 연횡하게 만들 것입니다.
한, 위 두 나라가 당초 장의를 중시한 것은 장의에게 진나라의 지원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소수 역시 초나라의 위세를 배경으로 진나라로 가 장의의 중용을 돕고자 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지금 장의는 진나라에서 곤경에 처해 있고, 소수는 초나라에 갇혀 있으니 한, 위 두 나라는 진나라의 지지를

얻기 위해 필시 공손학 및 감무와 더욱 친하고자 할 것입니다. 공손학과 감무는 한, 위 두 나라와의 연합이 성사되면

필시 장의를 가벼이 여기고 초나라를 치려 할 것입니다. 그리되면 방성(方城)이 위태로워질 수밖에 없습니다.

대왕께서는 소수를 복귀시켜 한, 위 두 나라가 장의를 중시하도록 만드느니만 못합니다. 그렇게 하면 장의는 초나라의

위세에 기대고, 위나라가 자신을 중용한 것을 배경으로 진나라와 다투고자 할 것입니다. 이에 위나라는 진나라와

연합하지 않고, 한나라 역시 진나라를 따르지 않을 것입니다. 그리되면 방성은 근심이 없을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張儀逐惠施於魏.  惠子之楚,楚王受之.  馮郝謂楚王曰:「逐惠子者,張儀也。而王親與約,

是欺儀也,臣為王弗取也. 惠子為儀者來,而惡王之交於張儀,惠子必弗行也. 且宋王之賢惠子也,

天下莫不聞也. 今之不善張儀也,天下莫不知也. 今為事之故,棄所貴於讎人,臣以為大王輕矣.

且為事耶? 王不如舉惠子而納之於宋,而謂張儀曰:『請為子勿納也.』儀必德王.
而惠子窮人,而王奉之,又必德王. 此不失為儀之實,而可以德惠子.」

楚王曰:「善.」乃奉惠子而納之宋.

[주난왕 5년(기원전 310), 장의가 혜시(惠施: 위혜왕 때 재상을 지냄)를 위나라에서 축출했다.
혜시가 초나라로 오자, 초회왕이 그를 받아들였다. 그러자 초나라 대신 풍학(馮郝)이 초회왕에게 말하기를 :
“혜시를 내쫓은 것은 장의입니다. 그런데 대왕께서 혜시를 친하게 여겨 교분을 맺은 것은 장의를 속이는 것으로

신은 대왕을 위해 이같이 하지 않기를 바랍니다. 혜시가 장의의 배척을 받아 초나라에 왔지만 만일 대왕과 장의의

교분이 두텁다는 사실을 알았다면 틀림없이 오지 않았을 것입니다. 또 송왕(宋王: 偃)이 혜시를 어질게 여기고

있다는 사실을 천하에 듣지 않은 사람이 없습니다. 지금 혜시와 장의의 관계가 좋지 않다는 것 또한 천하가 다 알고

있는 사실입니다. 그런데 지금 대왕이 헤시를 받아들이는 것은 장의의 원수인 혜시를 위해 장의를 포기하는 것입니다.
제가 대왕의 행동을 경솔하다고 생각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혹여 국가대사를 이유로 그와 약속이라도 한 것입니까?
대왕께서 차라리 혜시를 천거해 송나라로 들여보낸 뒤 장의에게 말하기를, ‘그대를 위해 혜시를 받아들이지 않았소’

라고 하느니만 못합니다. 그리하면 장의는 반드시 대왕을 고맙게 여길 것이고, 혜시 또한 궁한 처지에 있기 때문에

대왕이 자신을 천거해 준 것에 감격해 할 것입니다. 이는 장의를 위하는 동시에 혜시에게도 덕을 베푸는 셈이 됩니다.”
라고 하자, 초회왕이 말하기를 : “그 말이 옳소.”라고 하며,  혜시를 천거해 송나라로 들여보냈다.]

 

五國伐秦.  魏欲和,使惠施之楚.  楚將入之秦而使行和.

杜赫謂昭陽曰:「凡為伐秦者楚也.  今施以魏來,而公入之秦,是明楚之伐而信魏之和也.

公不如無聽惠施,而陰使人以請聽秦.」 昭子曰:「善.」

因謂惠施曰:「凡為攻秦者魏也, 今子從楚為和, 楚得其利,魏受其怨. 子歸,吾將使人因魏而和.」

惠子反,魏王不說.  杜赫謂昭陽曰:「魏為子先戰,折兵之半,謁病不聽,請和不得,

魏折而入齊、秦,子何以救之? 東有越纍,北無晉,而交未定於齊、秦,是楚孤也. 不如速和.」

昭子曰:「善.」因令人謁和於魏.

[주신정왕 3년(기원전 318), 5국(五國: 위, 한, 조, 초, 연)이 합세해 진나라를 공격하였다.
이때 위나라는 내심 진나라와 강화하고 싶어 했다. 이에 위나라가 혜시를 초나라로 보내자, 초나라는 혜시를 다시

진나라로 보내 강화를 주선하게 했다. 그러자 초나라 대신 두혁(杜赫)이 장수 소양(昭陽)에게 말하기를 :
“무릇 5국을 통솔해 진나라를 공격하는 나라는 초나라입니다. 지금 혜시가 위왕의 명을 받들고 초나라에 오자,

공은 그를 진나라로 보내려고 합니다. 이는 초나라가 진나라 공벌을 주도하고 있음을 명백히 드러내고,

진나라로 하여금 위나라의 강화 의사를 믿게끔 만드는 것입니다. 그러니 공은 혜시의 말을 듣지 말고 몰래 사람을

진나라에 보내 강화를 청하면서 진나라의 덕을 칭송하느니만 못합니다.”라고 하자,
소양이 말하기를 : “그 말이 옳소.”라고 하였다.  이에 소양이 혜시에게 말하기를 : “ 무릇 진나라를 공격하는 나라는

위나라입니다. 지금 그대가 우리 초나라를 통해 진나라와 강화하게 되면 장차 진나라에 유리한 조건이 제시됨으로써

초나라는 그 이득을 보게 되지만 위나라는 진나라 공벌에 앞장섰다는 원망을 듣게 됩니다.

그러니 그대는 돌아가도록 하시오. 내가 장차 사람을 시켜 위나라를 통해 강화하도록 하겠소.”라고 하였다.
혜시가 귀국하자, 위양왕(魏襄王)이 기뻐하지 않았다. 그러자 두혁이 소양에게 말하기를 : “ 위나라가 그대를 위해

먼저 싸움을 시작한 것입니다. 지금 위나라가 군사를 절반이나 잃고 초나라에 지원을 청했는데도 초나라가 들어주지

않고, 강화를 청해도 들어주지 않고 있습니다. 이때 만일 위나라가 갑자기 입장을 바꿔 제, 진 두 나라와 연합하면

그대는 이같은 난국을 어찌 구하려는 것입니까. 우리는 아직 동쪽으로 월나라의 우환이 있고,

북쪽으로는 3진의 원조도 없고, 제, 진 두 나라와의 관계도 공고치 못합니다. 지금 우리 초나라만 고립되어 있는

상황입니다. 그러니 서둘러 화해하느니만 못합니다.”라고 하자, 소양이 대답하기를 : “그 말이 옳소.”라고 하였다. 

이에 소양이 즉시 사람을 위나라로 보내 장차 진나라와 강화할 것임을 고하게 했다.]

 

陳軫告楚之魏.  張儀惡之於魏王曰:「軫猶善楚,為求地甚力.」

左爽謂陳軫曰:「儀善於魏王,魏王甚信之,公雖百說之,猶不聽也. 公不如以儀之言為資,

而得復楚.」 陳軫曰:「善.」 因使人以儀之言聞於楚.  楚王喜,欲復之.

[주현왕 47년(기원전 322), 진진이 위나라로 갈 뜻을 초나라에 고했다. 장의가 이를 미워해 위혜왕에게 진진을

모함하며 말하기를 : “진진은 아무래도 초나라 편입니다. 땅을 할양받으려 애 쓰는 것도 이 때문입니다.”라고 하였다.
그러자 대신 좌상(左爽)이 진진에게 말하기를 : “ 장의는 위왕에게 잘 보인 까닭에 위왕이 깊이 신임하고 있소.
그러니 공이 비록 온갖 수단을 동원해 설득할지라도 위왕은 이를 듣지 않을 것이오. 공은 장의의 험담을 핑계 삼아

초나라로 돌아가느니만 못하오.”라고 하자. 진진이 대답하기를 : “그 말이 옳소.”라고 하였다.
진진이 곧 사람을 보내 장의의 말을 초회왕에게 들려주자, 초회왕이 기뻐하며 진진을 다시 초나라로 부르고자 했다.]

 

秦伐宜陽. 楚王謂陳軫曰:「寡人聞韓侈巧士也,習諸侯事,殆能自免也. 為其必免,

吾欲先據之以加德焉.」 陳軫對曰:「舍之,王勿據也. 以韓侈之知,於此困矣. 今山澤之獸,

無黠於麋. 麋知獵者張罔,前而驅己也,因還走而冒人,至數. 獵者知其詐,偽舉罔而進之,

麋因得矣. 今諸侯明知此多詐,偽舉罔而進者必眾矣. 舍之,王勿據也. 韓侈之知,於此困矣.」

楚王聽之,宜陽果拔. 陳軫先知之也.

[주난왕 7년(기원전 309), 진나라가 의양을 공격하자 초회왕이 진진에게 말하기를 : “과인이 듣건대 한붕(공중붕)은

지혜가 뛰어난 선비로 제후들의 일을 속속들이 알고 있다고 하니 이번 싸움에서 반드시 위기를 면할 것이오.

그가 위기를 면하면 나는 먼저 그를 정확히 파악한 뒤 큰 도움을 주고자 하오.”라고 하자.
진진이 만류하며 말하기를 : “ 그만 두십시오. 대왕께서는 그를 파악할 필요도 없습니다. 이번 싸움에서는 설령

한붕의 지혜라 할지라도 위기를 면하기는 어려울 것입니다. 지금 산택(山澤)의 짐승 중 미록(麋鹿)만큼 교활한 놈이

없습니다. 미록은 몰이꾼이 그물을 쳐 놓고 자신을 그물 쪽으로 몰아 넣으면 매번 즉시 이를 알아채고 돌아서서

몰이꾼 쪽으로 뛰쳐 나옵니다. 이에 몰이꾼이 거짓으로 그물을 들고 앞으로 다가가면 결국 미록도 잡히고 맙니다.
지금 제후들은 한붕이 사술(詐術)에 능하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이에 반드시 거짓으로 그물을 들고

그에게 다가가는 제후들이 많을 것입니다. 그러니 그만 두십시오. 대왕은 그를 파악할 필요가 없습니다.

한붕의 지혜로도 이번 싸움에서는 위기를 면하기 어려울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초회왕이 이를 좇았다. 의양은 과연 함락되고 말았다. 진진은 미리 이를 예견하였던 것이다.]

 

唐且見春申君曰:「齊人飾身修行得為益,然臣羞而不學也. 不避絕江河,行千餘里來,

竊慕大君之義,而善君之業.  臣聞之,賁、諸懷錐刃而天下為勇,西施衣褐而天下稱美.

今君相萬乘之楚,禦中國之難,所欲者不成,所求者不得,臣等少也. 夫梟棋之所以能為者,

以散棋佐之也. 夫一梟之不如不勝五散, 亦明矣. 今君何不為天下梟, 而令臣等為散乎?」

[주난왕 53년(기원전 262), 세객 당저(唐且)가 춘신군(春申君: 황헐)을 만나 말하기를 : “제나라 사람들은 몸을 닦고

수양해야 작록을 얻을 수 있다고 합니다. 그러나 저는 이를 부끄럽게 여겨 흉내 내지 않았습니다.

제가 강하(江河)의 위험을 피하지 않고 1천여 리의 길을 달려 이곳까지 온 것은 대군의 절의를 사모하고 그 업적을

훌륭히 여겼기 때문입니다. 제가 듣건대 ‘맹분(孟賁)과 전제(專諸: 오왕 僚를 살해한 자객)는 비수만 지니고 있어도

천하인이 용자(勇者)로 여기고, 서시(西施)는 갈의(葛衣)만 걸치고 있어도 천하인은 미인이라 칭송한다’고 했습니다.

지금 군은 만승의 초나라 재상으로서 중원으로부터의 병난을 막고 있습니다. 그런데도 성취하고자 하는 바를

아직이루지 못하고 구하고자 하는 바를 얻지 못하고 있습니다. 이는 저와 같은 인물이 없기 때문입니다.

육박(六博)을 둘 때 효자(梟子: 장기의 王將)가 능히 이길 수 있는 것은 산자(散子)의 도움이 있기 때문입니다.

무릇 1개의 효자가 단독으로 싸우면 5개의 산자를 이기지 못할 것은 분명합니다.

그런데도 지금 군은 어찌하여 저희들을 산자로 삼는 천하의 효자가 되려고 하지 않는 것입니까.”라고 하였다.] 

  

 

 

  楚 策 四 . 

 

 

或謂楚王曰:「臣聞從者欲合天下以朝大王,臣願大王聽之也. 夫因詘為信,舊患有成,勇者義之.

攝禍為福,裁少為多,知者官之. 夫報報之反,墨墨之化,唯大君能之. 禍與福相貫,生與亡為鄰,

不偏於死, 不偏於生, 不足以載大名. 無所寇艾,不足以橫世. 夫秦捐德絕命之日久矣,而天下不知.

今夫橫人嚂口利機,上干主心,下牟百姓,公舉而私取利,是以國權輕於鴻毛,而積禍重於丘山.」

[진시황 6년(기원전 241), 어떤 사람이 초고열왕(楚考烈王)에게 말하기를 : “제가 듣건대 합종을 주장하는 자들이

천하 제후들을 합하여 대왕을 섬기려 한다고 합니다. 저는 원컨대 대왕이 이를 들어주기 바랍니다.

무릇 굽힘으로써 펼 수 있고, 환난을 극복함으로써 성공할 수 있으니 용자(勇者)는 이를 당연한 일로 여깁니다.
무릇 재난이 있기에 재난을 피하지 않고 이를 거둬들여 복으로 바꿀 수 있고, 지닌 것이 적기에 적은 것을 꺼리지 않고

이를 토대로 하여 더욱 많은 것으로 바꿀 수 있으니 지자(知者)는 이를 중요한 일로 여깁니다.
굴신(屈伸)과 환성(患成), 화복(禍福), 소다(少多)는 무한히 반복하고 서로 상반되이 생성변화하니 이 모든 것이

일정한 규칙도 없이 무형(無形)의 변화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오직 대군(大君: 초왕을 지칭)만이 능히 이같은 변화를

만들 수 있습니다. 화복은 서로 꿰어져 통하며 생사는 서로 이웃하여 가깝습니다. 정의를 위해 죽음을 거부하며

기어이 살아남고, 정의를 위해 삶을 거부하며 의연히 목숨을 버리지 않으면 패왕의 대업을 이룰 수 없습니다.
전쟁과 재난을 겪으며 연마하지 않으면 세상을 횡행할 수 없습니다. 무릇 진나라는 덕행을 버리고 천명을 두려워하지

않은지 이미 오래입니다. 그런데도 천하 제후들은 이를 모르고 있습니다. 지금 연횡을 주장하는 자들은 오직

교언이설(巧言利說)로 위로는 군주의 마음을 혹하게 하고, 아래로는 백성의 이익을 뿌리채 갉아 먹고 있습니다.

이들 연횡을 주장하는 자들의 말을 좇아 나라가 한 번 움직일 때마다 이들은 이 틈을 타 사리를 도모합니다.

이에 나라의 권력은 홍모(鴻毛)보다 가벼워지고, 그 재난은 산보다 무겁게 쌓이고 있습니다.”라고 하였다.]

 

魏王遺楚王美人,楚王說之. 夫人鄭袖知王之說新人也,甚愛新人. 衣服玩好,擇其所喜而為之;

宮室臥具,擇其所善而為之. 愛之甚於王.  王曰:「婦人所以事夫者,色也;而妒者,其情也.

今鄭袖知寡人之說新人也,其愛之甚於寡人,此孝子之所以事親,忠臣之所以事君也.」
鄭袖知王以己為不妒也, 因謂新人曰:「王愛子美矣. 雖然, 惡子之鼻.  子為見王, 則必掩子鼻.」

新人見王, 因掩其鼻. 王謂鄭袖曰:「夫新人見寡人,則掩其鼻,何也?」鄭袖曰:「妾知也.」

王曰:「雖惡必言之.」鄭袖曰:「其似惡聞君王之臭也.」王曰:「悍哉!」令劓之,無使逆命.

楚王后死, 未立后也. 謂昭魚曰:「公何以不請立后也?」昭魚曰:「王不聽, 是知困而交絕於后也.」

「然則不買五雙珥,令其一善而獻之王,明日視善珥所在,因請立之.」

[위혜왕이 초회왕에게 미인을 보냈다. 이에 초회왕이 크게 기뻐했다. 초회왕의 총희 정수(鄭袖)는 초회왕이

새 여인을 좋아하는 것을 알고 자신도 새 여인을 몹시 예뻐했다. 이에 의복과 완호물(玩好物) 등은 물론

기거하는 거실과 침구에 이르기까지 새 여인의 취미에 맞춰 그녀가 좋아하는 것을 모두 골라 주었다.
정수는 초회왕이 사랑하는 이상으로 새 여인을 예뻐하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그러자 초회왕이 크게 감격해하며

말하기를 : “부인이 지아비를 섬기는 것은 미색 때문이고, 질투하는 것은 정 때문이오.
그런데도 지금 정수는 과인이 새 여인을 사랑하는 것을 알고 과인 이상으로 새 여인을 아끼고 있으니
이는 효자가 어버이를 섬기고, 충신이 군주를 섬기는 것에 비유할 수 있소.”라고 하였다.
정수는 초회왕이 자신을 질투심이 없는 여인으로 믿게 된 사실을 알고는 이내 새 여인게 말하기를 :
“ 대왕께서 그대의 미색을 사랑하고 있으나 그대의 코만은 싫어하고 있소. 그러니 대왕을 만날 때에는 반드시

코를 손으로 가리도록 하시오.”라고 하자, 이에 새 여인은 초회왕을 볼 때마다 손으로 코를 가렸다.

초회왕이 정수에게 묻기를 : “새 여인이 과인을 만날 때마다 코를 가리니 이는 무슨 까닭이오.”라고 하자,  

정수가 대답하기를 : “소첩은 그 이유를 알고 있습니다.”라고 하였다.
초회왕이 말하기를 : “비록 듣기 거북한 말일지라도 서슴치 말고 말하시오.”라고 하자,  

정수가 대답하기를 : “그녀는 대왕의 몸에서 나는 냄새를 싫어해서 그러는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그러자 초왕이 격노하여 말하기를 : “참으로 무례하기 그지없구나.”라고 하며,

당장 어명으로 새 여인의 코를 베는 의형(劓刑)에 처하자, 그 누구도 이에 대해 이의를 제기하지 못하였다.

초회왕은 왕후가 죽자, 다시 왕후를 책립하지 않았다. 이에 어떤 사람이 초나라 대부 소어(昭魚)에게 말하기를 :

“공은 어찌하여 왕후 책립을 청하지 않는 것이오."라고 하자,

이에 소어가 대답하기를 : “만일 대왕이 들어주지 않으면이는 자신을 곤경에 처하게 만들 뿐만 아니라

새 왕후와의 사이도 틀러질 수밖에 없기 때문이오.”라고 하였다.

그가 말하기를 : “그렇다면 5쌍의 귀고리를 사되 그 중 하나를 제일 좋은 것으로 사서 대왕에게 바치도록 하십시오.

다음날 어느 여인이 그 중 제일 좋은 귀고리를 하고 있는지를 확인한 후 그녀를 책립하자고 청하면

아무런 문제가 없을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莊辛謂楚襄王曰:「君王左州侯,右夏侯,輦從鄢陵君與壽陵君,專淫逸侈靡,不顧國政,

郢都必危矣.」 襄王曰:「先生老悖乎?將以為楚國祅祥乎?」

莊辛曰:「臣誠見其必然者也,非敢以為國祅祥也. 君王卒幸四子者不衰,楚國必亡矣.

臣請辟於趙,淹留以觀之.」 莊辛去之趙,留五月,秦果舉鄢、郢、巫、上蔡、陳之地,

襄王流揜於城陽.  於是使人發騶,徵莊辛於趙.
莊辛曰:「諾.」 莊辛至,襄王曰:「寡人不能用先生之言,今事至於此,為之奈何?」

[주난왕 38년(기원전 277), 초나라 대부 장신이 초경양왕에게 이같이 간하기를 :“대왕께서 총신 주후(州侯)와

하후(夏侯)로 하여금 각각 좌우에서 시봉하게 하고, 언릉군(鄢陵君)과 수릉군(壽陵君)으로 하여금

연(輦: 제왕의 전용 수레)을 뒤따르게 하고, 음란과 사치를 일삼으며 국정을 돌보지 않고 있습니다.

영도(초나라)는 필시 위태롭게 될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이에 초경양왕이 반문하기를 : “선생은 노망한 것이오.

그도 아니면 요언(妖言)으로 초나라 백성을 혹란(惑亂)하게 만들려는 것이오?”라고 하자.
장신이 대답하기를 : “ 신은 진심으로 그렇게 될 것으로 생각하기 때문이지 요언으로 백성들을 혹란하게 만들

생각은 추호도 없습니다. 대왕이 4 인에 대한 총애를 거두지 않으면 초나라는 필시 망하고야 말 것입니다.
신은 조나라로 몸을 피해 그곳에 머물며 구경이나 할 생각입니다.”라고 하였다. 장신은 초나라를 떠나 조나라로 갔다.

장신이 5개월 동안 머물고 있을 때 과연 진나라가 초나라의 언영과 무(사천성 무산 동쪽), 상용(上庸) 땅을 빼앗았다.

초경양왕은 성양(城陽: 옛날 陳나라)으로 망명했다. 이에 초경양왕이 사람을 조나라로 보내 장신을 불렀다.
그러자 장신이 말하기를 : “ 좋소, 내가 가도록 하겠소.”라고 하였다. 장신이 초나라에 도착하자 초경양왕이 묻기를 :

“과인은 선생의 충고를 듣지 않았다가 이 지경에 이르고 말았소. 장차 어찌하면 좋겠소?”라고 하자.]

 

莊辛對曰:「臣聞鄙語曰:『見兔而顧犬,未為晚也;亡羊而補牢,未為遲也.』

臣聞昔湯、武以百里昌,桀、紂以天下亡. 今楚國雖小,絕長續短,猶以數千里,豈特百里哉?

王獨不見夫蜻蛉乎? 六足四翼,飛翔乎天地之間,俛啄蚊虻而食之,仰承甘露而飲之,自以為無患,與人無爭也. 

不知夫五尺童子,方將調鈆膠絲,加己乎四仞之上,而下為螻蟻食也.蜻蛉其小者也,黃雀因是以.  

俯噣白粒,仰棲茂樹,鼓翅奮翼,自以為無患,與人無爭也.​

不知夫公子王孫,左挾彈,右攝丸,將加己乎十仞之上, 以其類為招.

晝游乎茂樹,夕調乎酸鹹,倏忽之間,墜於公子之手. 夫雀其小者也,黃鵠因是以.

[이에 장신이 대답하기를 : “ 신이 듣건대 속담에 이르기를, ‘견토고견(見兎顧犬: 토끼를 보고 사냥개를 돌아다 봄)

정도면 아직 늦었다고 할 수 없고, 양을 잃고 외양간을 고치는 것 또한 결코 늦은 것이 아니다’라고 했습니다.
옛날 탕무(은탕왕과 주무왕)는 불과 1백 리의 땅을 가지고도 번영했고, 걸주(桀紂)는 천하를 손에 넣고도 망했습니다.

지금 초나라는 작기는 하나 절장속단(絶長續短: 긴 쪽을 끊고 짧은 쪽에 이음)하면 아직도 사방 수천 리에 이릅니다.
어찌 1백 리에 견주겠습니까? 대왕은 청령(蜻蛉: 잠자리)을 보지 못했습니까.
청령은 6개의 발에 4개의 날개로 천지 사이를 날라다니며 모기와 같은 작은 벌레를 잡아먹고 감로를 받아 마시며

스스로 태평하게 지낼 뿐 사람과 다투는 일이 없습니다. 그러나 저 5척 동자가 실 끝에 단물을 바른 미끼로

4 인(仞: 8척) 높이의 상공에서 잡아 끌어내리면 마침내 아래쪽의 땅강아지나 개미의 먹이가 되고 만다는 사실을

모르고 있습니다. 청령은 작은 벌레의 경우이나 황작(黃雀: 참새)도 같은 운명에 처하기는 마찬가지입니다.
황작은 고개를 숙이고는 흰 쌀알을 쪼아 먹고 고개를 쳐들고는 무성한 숲에 깃들어 활개 치고 날아다니면서

태평하게 지낼 뿐 사람과 다투는 일이 없습니다. 그러나 공자와 왕손이 왼손에 새총, 오른손에 총알을 쥐고

10 인의 상공에 있는 자신들의 목을 살아 있는 표적으로 삼고 있다는 사실을 모릅니다.

그래서 낮에는 우거진 숲 속에서 노닐다가 저녁에는 시고 짠 양념에 조리되어 식탁에 오르는 것입니다.

이에 눈 깜짝할 사이에 귀공자의 수중으로 떨어지고 맙니다.

대체로 황작은 작은 새의 경우이나 황곡(黃鵠: 황학)도 같은 운명에 처하기는 마찬가지입니다.

游於江海,淹乎大沼,府噣鱔鯉,仰嚙蔆衡,奮其六翮,而凌清風,飄搖乎高翔,自以為無患,

與人無爭也.  不知夫射者,方將脩其碆盧,治其繒繳,將加己乎百仞之上. 彼礛磻,引微繳,

折清風而抎矣.  故晝游乎江河,夕調乎鼎鼐.夫黃鵠其小者也,蔡聖侯之事因是以.
南游乎高陂,北陵乎巫山,飲茹谿流,食湘波之魚,左抱幼妾,右擁嬖女,與之馳騁乎高蔡之中,

而不以國家為事.  不知夫子發方受命乎宣王,繫己以朱絲而見之也.   蔡聖侯之事其小者也,

君王之事因是以.  左州侯,右夏侯,輩從鄢陵君與壽陵君,飯封祿之粟,而戴方府之金,與之馳騁乎雲夢之中,

而不以天下國家為事. 不知夫穰侯方受命乎秦王,填黽塞之內,而投己乎黽塞外.」

襄王聞之,顏色變作,身體戰慄. 於是乃以執珪而授之為陽陵君,與淮北之地也. 

[강해(江海)에 떠돌아다니며 큰 못에서 휴식을 취할 때 고개를 숙이고는 메기와 잉어로 배를 채우고 고개를 쳐들고는

능형(菱衡: 세뿔마름과 수초)를 씹습니다. 그러다가 6핵(六翮: 6개의 깃촉)을 떨쳐 청풍을 타고 바람이 부는대로

하늘을 날며 태평하게 지낼 뿐 사람과 다투는 일이 없습니다. 그러나 사수가 파로(화살촉과 흑색의 활)를 수리하고

증교(실이 매달린 화살인 주살)를 갖추고 1백 인의 상공에 있는 자신들을 쏘아 맞추려는 것을 모릅니다.
이에 날카로운 화살촉에 맞아 보이지 않는 가는 실에 이끌여 청풍을 가르며 아래로 떨어지고 맙니다.
그래서 낮에는 강하(江河)에서 노닐다가 저녁에는 큰 솥에서 통째로 삶아져 식탁에 오르는 것입니다.
황곡은 새의 경우이나 채성후(蔡聖侯: 고채의 군주)도 같은 운명에 처하기는 마찬가지였습니다.
그는 남쪽의 높은 언덕에서 노닐고, 북쪽의 무산(巫山)을 오르고, 여계(茹谿: 사천성 무산현)의 물을 마시고,
상수(湘水)의 고기를 먹고, 왼쪽에 어린 첩을 끼고 오른쪽에 총희를 품은 채 고채(高蔡)의 땅을 내달리며

국사를 전혀 돌보지 않았습니다. 이에 영윤 자발(子發)이 바야흐로 초선왕의 명을 좇아 자신을 붉은 실로 묶은 뒤

초선왕에게 바치리라는 것을 전혀 알지 못했습니다. 채성후는 작은 얘기이나 군왕의 경우 또한 장차 같은 운명에

처하기는 마찬가지입니다. 주후(州侯)와 하후(夏侯)로 하여금 좌우에서 시봉케 하고, 언릉군과 수릉군로 하여금

연(輦)을 뒤따르게 하고, 채읍에서 나오는 봉록을 먹고, 국고의 재화를 싣고, 운몽택 속으로 내달리며 천하사와 국사를

전혀 돌보지 않고 있습니다. 이에 진나라의 양후(穰侯)가 진왕의 명을 받아 민색(平靖關으로 불리는 관문)에 진주해

자신을 민색의 북쪽으로 내던지려 하고 있는 것을 전혀 모르고 있습니다.”라고 하였다.]

 

齊明說卓滑以伐秦,滑不聽也.  齊明謂卓滑曰:「明之來也,為樗里疾卜交也.

明說楚大夫以伐秦,皆受明之說也,唯公弗受也,臣有辭以報樗里子矣.」卓滑因重之.

或謂黃齊曰:「人皆以謂公不善於富摯. 公不聞老萊子之教孔子事君乎?示之其齒之堅也,

六十而盡相靡也. 今富摯能,而公重不相善也,是兩盡也.

諺曰:『見君之乘,下之;見杖,起之.』今也,王愛富摯,而公不善也,是不臣也.」

[세객 제명(齊明)이 초나라의 모신 탁활(卓滑)에게 진나라 공벌토록 권했으나 탁활이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러자 제명이 탁활에게 말하기를 : “제가 온 것은 저리질(樗里疾)의 부탁에 의한 것으로 친교 가능성을

타진하기 위한 것입니다. 제가 초나라 대부들에게 진나라 공벌을 유세하자 모두 저의 의견을 받아들였는데

오직 공만이 이를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이에 저도 저리질에게 보고할 말이 있게 되었습니다.”라고 하였다. 

이에 탁활은 제명을 중시하게 되었다. 어떤 사람이 초나라 사람 황제(黃齊)에게 말하기를 : “ 세간에서는 모두 공이

부지(富摯)를 잘 대우하지 않는다고 보고 있소. 공은 노래자(老萊子: 노자)가 공자에게 군주를 섬기는 방법을

가르쳐 준 얘기를 듣지 못했소? 노래자가 공자에게 자신의 치아를 보여주며 말하기를, ‘이가 이처럼 단단한 것은

60세에 이르기까지 윗니와 아랫니가 서로 부딪치며 마손되는 일이 끝났기 때문이오’라고 했소.
지금 부지에게는 뛰어난 재주가 있는데도 공은 매우 좋지 않게 대하니 이는 두 사람 모두 패하는 길이오.
속담에 이르기를, ‘군주의 수레만 보아도 곧바로 수레에서 내려서고, 군주의 지팡이만 보아도

곧바로 앉은 자리에서 일어선다’고 했소. 지금 대왕이 부지를 총애하고 있는데도 공이 사이 좋게 지내지 않는다면

곧 불신(不臣)이 되는 것이오.”라고 하였다.]

 

長沙之難,楚太子橫為質於齊. 楚王死,薛公歸太子橫,因與韓、魏之兵,隨而攻東國. 太子懼.
昭蓋曰:「不若令屈署以新東國為和於齊以動秦. 秦恐齊之敗東國,而令行於天下也,必將救我.」

太子曰:「善.」遽令屈署以東國為和於齊.  秦王聞之懼,令辛戎告楚曰:

「毋與齊東國,吾與子出兵矣.」 有獻不死之藥於荊王者, 謁者操以入.

中射之士問曰:「可食乎?」曰:「可.」因奪而食之.  王怒,使人殺中射之士.

中射之士使人說王曰:「臣問謁者,謁者曰可食,臣故食之.  是臣無罪,而罪在謁者也.

且客獻不死之藥,臣食之而王殺臣,是死藥也.  王殺無罪之臣,而明人之欺王.」王乃不殺.

[주난왕 14년(기원전 301), 장사(長沙)의 싸움으로 초나라 태자 횡(橫: 초경양왕)이 제나라에 인질로 가 있었다.
초회왕이 죽자 제나라의 설공(맹상군)은 태자 횡을 귀국시킨 후 한, 위 두 나라 군사와 연합해 초나라 동국(東國) 땅을

공격했다. 태자 횡이 이를 두려워하자, 초나라 대신 소개(昭蓋)가 말하기를 : “굴서(屈署)에게 명하여 동국 땅을

제나라에 떼어 주고 화친하게 하여 진나라를 자극하느니만 못합니다. 진나라는 제나라가 동국 땅을 차지해

천하를 호령할까 두려워하고 있으니 틀림없이 우리를 구해 줄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태자가 말하기를 : “그 말이 옳소.”라고 하며, 급히 굴서를 시켜 동국 땅을 제나라에 떼어주고 강화를 청하게 했다.
진소양왕이 이 소식을 듣고 두려워한 나머지 곧 미융(羋戎: 화양군)을 초나라로 보내 이같이 전하게 했다.
“동국 땅을 제나라에 주어서는 안 되오. 내가 그대와 함께 출병하겠소.”
어떤 사람이 불사약을 초왕에게 바치자 알자가 이를 받아 가지고 안으로 들어갔다.
도중에 중야지사(좌우 시종관)가 알자를 보고 묻기를 : “ 먹어도 되는 것이오.”라고 하자,

알자가 : “물론이오.”라고 하였다. 그러자 중야지사가 이를 빼앗듯이 하여 단숨에 먹어 버렸다.
초왕이 대노하여 곧 사람을 보내 죽이려 하자, 중야지사도 사람을 보내 초왕을 설득하기를 :
“신이 알자에게 물었더니 먹어도 좋다고 하여 먹은 것입니다. 그러니 신은 죄가 없고 알자에게 죄가 있는 것입니다.
게다가 객인(客人)이 헌상한 불사약을 신이 먹었다는 이유로 대왕께서 신을 죽이면 이는 사약이지 불사약이 아닙니다.
대왕께서 죄도 없는 신을 죽이는 것은 그 객인이 대왕을 속이려 한 것을 증명하는 셈이 됩니다.”라고 하자,
이에 초왕은 그를 죽이지 않았다.]

 

客說春申君曰:「湯以亳, 武王以鄗, 皆不過百里以有天下. 今孫子, 天下賢人也, 君籍之以百里勢,

臣竊以為不便於君.  何如?」   春申君曰:「善.」於是使人謝孫子.  孫子去之趙,趙以為上卿.
客又說春申君曰:「昔伊尹去夏入殷,殷王而夏亡.  管仲去魯入齊,魯弱而齊強.

夫賢者之所在, 其君未嘗不尊,國未嘗不榮也. 今孫子,天下賢人也. 君何辭之?」

春申君又曰:「善.」於是使人請孫子於趙.

[진소양왕 52년(기원전 255), 어떤 세객이 춘신군 황헐(黃歇)에게 말하기를 :“은나라의 탕왕은 박(하남성 상구현),

주무왕은 호(鄗: 섬서성 서안시)를 도읍으로 삼아 나라를 다스렸습니다. 두 나라 모두 사방 1백 리도 채 안되는

소국이었으나 마침내 천하를 차지하기에 이르렀습니다. 지금 손경(孫卿: 순자)은 천하의 현인으로 장차 큰 일을

도모할 만한 인물입니다. 만일 그대가 그에게 1백 리의 땅을 내려 밑천으로 삼게 하면 나는 장차 그대에게 불리하게

작용할 것으로 보는데 그대는 어찌 생각합니까.”라고 하자, 춘신군이 대답하기를 : “옳은 말이오.”라고 하였다.
이에 사람을 보내 손경과의 절교를 통고했다. 손경이 초나라를 떠나 조나라로 가자 그를 상경으로 맞아들였다.
그러자 다른 세객이 춘신군에게 묻기를 : “옛날 이윤(伊尹)이 하나라를 떠나 은나라로 가자 은나라는 천하를 차지하고

하나라는 망했습니다. 관중이 노나라를 떠나 제나라로 가자 노나라는 약해지고 제나라는 강해졌습니다.
무릇 현자가 머무는 곳에서 그 군주가 존귀해지지 않거나 나라가 번영하지 않은 적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손경은 천하의 현인입니다. 군께서는 어찌하여 그를 놓치고 만 것입니까 ?”라고 하자.  

춘신군이 대답하기를 : “옳은 말이오.”라고 하며, 이에 곧 조나라로 사람을 보내 손경의 귀환을 청하게 했다.]

 

孫子為書謝曰:「癘人憐王,此不恭之語也. 雖然,不可不審察也. 此為劫弒死亡之主言也.
夫人主年少而矜材,無法術以知奸,則大臣主斷國私以禁誅於己也,故弒賢長而立幼弱,

廢正適而立不義.  春秋戒之曰:『楚王子圍聘於鄭, 未出竟, 聞王病, 反問疾, 遂以冠纓絞王, 殺之,

因自立也. 齊崔杼之妻美, 莊公通之.  崔杼帥其君黨而攻. 莊公請與分國,崔杼不許;欲自刃於廟,

崔杼不許. 莊公走出,踰於外牆,射中其股,遂殺之,而立其弟景公.』

[그러자 손자 다음과 같은 글을 써 사절했다. “흔히 말하는 문둥병자가 군왕을 동정하는 것은 공손하지 못한

말이기는 하나 그 뜻을 자세히 살피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이는 신하의 협박에 의해 시해당한 군주를 두고 한 말입니다.

무릇 군왕이 어리면서 자기 재주만 믿고 간신을 가려낼 법술을 알지 못하면, 대신들이 독단적으로 사리를 꾀하며

모든 권력을 자신에게 집중시키기 마련입니다. 그래서 어질고 나이 많은 군주를 시해하고 어리고 약한 군주를

세우거나, 정적(正嫡: 적장자인 후계자)을 폐하고 불의(不義: 계승권이 없는 후계자)를 세우는 것입니다.
《춘추》는 이를 경계하여 기록하기를, ‘초나라 왕자 위(圍)는 정나라에 빙문(聘問)을 가다가 국경을 넘지 않았을 때

군왕이 위독하다는 소식을 듣고 곧바로 돌아와 문안을 하면서 결국 갓끈으로 군왕을 교살하고 자립했다’고 했습니다.

또 기록하기를, ‘제나라의 최저(崔杼)는 아내가 미인이었는데 제장공(齊莊公)이 아내와 사통하자,

무리를 이끌고 가 제장공을 공격하였다. 최저는 나라를 절반 나눠주겠다고 제장공의 제의를 거절하고,

선군의 사당에서 자진하겠다는 제의 마저 받아들이지 않았다. 제장공이 마침내 도망치기 위해 담을 넘자

활로 넓적다리를 쏘아 죽인 후 제장공의 아우 제경공(齊景公)을 세웠다’고 했습니다.

 

近代所見:李兌用趙, 餓主父於沙丘, 百日而殺之;淖齒用齊,擢閔王之筋,縣於其廟梁,

宿夕而死.  夫厲雖腫胞疾,上比前世,未至絞纓射股;下比近代,未至擢筋而餓死也.

夫劫弒死亡之主也,心之憂勞,形之困苦,必甚於癘矣. 由此觀之,癘雖憐王可也.」
因為賦曰:「寶珍隋珠,不知佩兮. 褘布與絲,不知異兮. 閭姝子奢,莫知媒兮.

嫫母求之,又甚喜之兮. 以瞽為明,以聾為聰,以是為非,以吉為凶. 嗚呼上天,曷惟其同!」

詩曰:「上天甚神,無自瘵也.」

[가까운 과거를 보더라도 이태(李兌)는 조나라에서 집정하면서 주부(主父)인 조무령왕을 사구(沙丘)로 옮겨

1백 일만에 아사시키고, 요치(淖齒)는 제나라에서 집정하면서 제민왕을 힘줄을 뽑은 뒤 사당 대들보에 매달아

하룻밤 사이에 죽게 만들었습니다. 무릇 문둥병자는 선천성 질환에 따른 종양으로 고통을 받기 마련입니다.
비록 그러하기는 하나 위로 전세(前世)와 비교하면 갓끈에 목이 졸리거나 넓적다리에 화살을 맞고 죽는

참혹한 지경에 이르지는 않았습니다. 또한 아래로 근대와 비교하면 힘줄이 뽑혀 대들보에 매달려 죽거나

굶어 죽는 참혹한 지경에 이르지는 않았습니다. 무릇 신하의 협박에 의해 시해되는 군주는 심적 고뇌와

육체적 고통이 필시 문둥병자보다 더 심했을 것입니다. 이로써 보면 문둥병자가 군왕을 동정했다 하더라도

이는 전혀 근거 없는 말이 아님을 알 수 있습니다.”라고 하였다.
그리고는 다음과 같은 시를 덧붙여 보냈다.
진보(珍寶), 수주(隨珠: 隨侯가 큰 뱀을 구해주고 얻은 야광주)를 찰 줄 모르네
위포(褘布: 아름다운 베)와 백(帛: 비단)이 어떻게 다른지 알지 못하네
여주(閭姝: 전설상의 미녀)와 자도(子奢: 전설상의 미남)는 찾는 이 없네
모모(嫫母: 전설상의 추녀)와 역보(力父: 전설상의 추남)는 사랑을 받네
맹자(盲者)는 천리안, 농자(聾者)는 이순(耳順)이라 하네. 시(是)를 비(非), 길(吉)을 흉(凶)이라 하네
아, 하늘이여, 왜 인간은 이처럼 흑백을 뒤집고, 시비를 뒤섞는 것인가
《시경》〈소아, 원류(苑柳)〉에 이르기를, ‘상천심신(上天甚神: 하늘은 심히 신명하다)하니,

상천을 어기면 스스로 재해를 입게 된다’라고 했다.]

 

天下合從. 趙使魏加見楚春申君曰:「君有將乎?」曰:「有矣,僕欲將臨武君.」

魏加曰:「臣少之時好射,臣願以射譬之,可乎?」春申君曰:「可.」
加曰:「異日者,更羸與魏王處京臺之下,仰見飛鳥. 更羸謂魏王曰:『臣為王引弓虛發而下鳥.』

魏王曰:『然則射可至此乎?』 更羸曰:『可.』有間,雁從東方來,更羸以虛發而下之.

魏王曰:『然則射可至此乎?』 更羸曰:『此孽也.』王曰:『先生何以知之?』
對曰:『其飛徐而鳴悲.  飛徐者, 故瘡痛也;鳴悲者, 久失群也, 故瘡未息, 而驚心未至也. 

聞弦音, 引而高飛, 故瘡隕也. 』 今臨武君, 嘗為秦孽, 不可為拒秦之將也. 」

[진시황 6년(기원전 241), 제후들 간에 합종이 성립되자, 조나라가 대신 위가를 춘신군에게 보내 말을 전하기를 :
“ 군에게 장수로서의 적임자가 있습니까.”라고 하자,  춘신군 : “있소. 나는 임무군(臨武君)을 임명할 생각이오.”
이에 위가가 묻기를 : “저는 어렸을 때 활쏘기를 좋아했습니다. 제가 활쏘기에 비유해 얘기해도 좋겠습니까”라고 하자,
춘신군이 대답하기를 : “좋도록 하시오.”라고 하였다.
그러자 위가가 비유를 들어 말하기를 : “옛날에 경영(위나라의 명사수)이 위왕과 함께 경대(京臺) 아래에 서 있다가

하늘을 나는 새를 보게 되었습니다. 이때 경영이 위왕에게 말하기를, ‘신은 대왕을 위해 활을 가지고 활시위를 당기는

시늉만으로 나는 새를 떨어 뜨리겠습니다’라고 했습니다. 이에 위왕이 묻기를, ‘활쏘기 기술이 그런 경지에까지

이를 수 있는 것이오’라고 하자, 경영이 대답하기를, ‘가능합니다’라고 했습니다. 마침 동쪽에서 기러기 한 마리가

날아오자 경영이 빈 활시위를 당겨 그 기러기를 떨어뜨렸습니다.
이를 본 위왕이 감탄하며 말하기를, ‘활쏘기 기술이 과연 이같은 경지까지 이르렀소’라고 하자,
경영이 대답하기를, ‘저 기러기는 상처를 입은 기러기일 뿐입니다’라고 했습니다.
이에 위왕이 묻기를, ‘선생은 어떻게 그것을 알았소’라고 하자,

경영이 대답하기를, ‘그 기러기가 날아올 때 나는 모습이 느리고 우는 소리가 처량했습니다. 나는 모습이 느린 것은

전에 입은 상처가 아프기 때문이고, 우는 소리가 처량한 것은 무리에서 낙오된 지 오래 되었기 때문입니다.
옛 상처가 아물지 않고 놀란 마음을 떨치지 못하고 있는데 활시위 소리를 듣고 더욱 높이 날아 올라 화살을 피하려다

옛 상처가 터져 그만 떨어지고 만 것입니다’라고 했습니다.
지금 임무군은 일찍이 진나라와의 싸움에서 패한 일로 인해 두려움을 품고 있는 사람입니다.
그를 진나라의 공격을 방어하는 장수로 삼는 것은 불가합니다.”라고 하였다.]

 

汗明見春申君,候問三月,而後得見. 談卒,春申君大說之.

汗明欲復談,春申君曰:「僕已知先生,先生大息矣.」

汗明憱焉曰:「明願有問君而恐固. 不審君之聖,孰與堯也?」

春申君曰:「先生過矣,臣何足以當堯?」

汗明曰:「然則君料臣孰與舜?」春申君曰:「先生即舜也.」
汗明曰:「不然,臣請為君終言之. 君之賢實不如堯,臣之能不及舜. 夫以賢舜事聖堯,

三年而後乃相知也. 今君一時而知臣,是君聖於堯而臣賢於舜也.」
春申君曰:「善.」召門吏為汗先生著客籍,五日一見.

[주난왕 53년(기원전 262), 세객 한명(汗明)이 춘신군을 만나고자 했으나 3달이 지난 후에야 겨우 만나볼 수 있었다.

한명의 유세가 끝나자 춘신군이 크게 기뻐했다. 한명이 얘기를 더 하려고 하자, 춘신군이 손을 내저으며 말하기를 :
“나는 이미 선생의 뜻을 알았으니 오늘은 편히 쉬도록 하시오.”라고 하였다.
그러자 한명이 침울한 표정을 지으며 : “제가 한 가지 묻고 싶은 게 있는데 혹여 고집불통이라 여길까 두렵습니다.

군과 요임금 중 누가 더 성(聖)스럽다고 생각합니까.”라고 하자,
춘신군이 대답하기를 : “선생의 그 말은 지나치오. 내가 어찌 요임금과 비교될 수 있겠소.”라고 하였다.
한명이 또 묻기를 : “그렇다면 군께서는 저와 순임금 중 누가 더 성(聖)스럽다고 생각합니까.”라고 하자.
춘신군이 대답하기를 : “선생은 순임금에 비길 만하오.”라고 비웃자,

한명이 즉각 반박하기를 : “그렇지 않습니다. 제가 청컨대 군을 위해 마지막으로 한 마디 드리겠습니다.

군의 현명함은 사실 요임금을 따를 수 없고, 저의 재능 또한 순임금에 미칠 수 없습니다.

무릇 요순 모두 성인이었음에도 순임금이 요임금을 섬긴 지 3년이 지나서야 비로소 서로 이해하게 되었습니다.
지금 군이 저를 잠깐 만나 보고 다 알았다고 하니 이는 군이 요임금보다 성(聖)스럽고, 저 또한 순임금보다

성(聖)스럽다는 말이 되는 셈입니다.”라고 하자, 춘신군이 대답하기를 : “과연 옳은 말이오.”라고 하였다.
그리고는 곧 문하의 이원(吏員)을 불러 한명을 빈객의 명부에 올리게 한 후 닷새에 한 번 면담을 허락했다.]

 

汗明曰:「君亦聞驥乎?夫驥之齒至矣,服鹽車而上太行. 蹄申膝折,尾湛胕潰,漉汁灑地,

白汗交流,中阪遷延,負轅不能上.  伯樂遭之,下車攀而哭之,解紵衣以冪之.

驥於是俛而噴,仰而鳴,聲達於天,若出金石聲者,何也?彼見伯樂之知己也. 今僕之不肖,

阨於州部,堀穴窮巷,沈洿鄙俗之日久矣,君獨無意湔拔僕也,使得為君高鳴屈於梁乎?」

[그러자 한명이 말하기를 : “ 군 또한 이미 기(驥: 천리마)에 관한 얘기를 들어보지 않았습니까?
무릇 기가 수레를 끌 나이가 되어 소금 수레를 끌고 태행산(太行山)을 오르게 되었습니다. 이에 힘을 주기 위해

발굽을 내리뻗으며 무릎을 굽히고, 꼬리를 뒷다리 사이에 집어넣고 힘을 쓰느라 꼬리와 몸이 온통 땀에 젖고,
땀이 비오듯 쏟아져 땅을 적시고, 소금기가 가득한 흰 거품을 내뿜게 되었습니다.
결국 산 중턱에서 수레채를 더 이상 끌고 나가지 못하는 상황에 처하게 되었습니다.
이때 마침 백락(伯樂: 천리마를 식별할 줄 아는 인물)이 이곳을 지나다가 이 광경을 보고 수레에서 내려 통곡하면서

비단옷을 벗어 기에게 덮어 주었습니다. 그러자 기가 고개를 숙여 가쁜 숨을 내뿜다가 이내 고개를 들어 크게

울부짖었습니다. 이때 그 울부짖는 소리가 하늘에 닿았는데 마치 금석(金石)에서 나는 소리와 같았습니다.
이는 왜 그랬겠습니까? 바로 백락지기(伯樂知驥: 백락이 천리마를 알아 봄)에 감동했기 때문입니다.
지금 저는 불초하여 궁벽한 시골 구석에서 곤액을 당하고, 반지하의 혈거 생활을 하며, 비루한 삶 속에 침잠한지

이미 오래되었습니다. 그런데도 군은 어찌하여 저를 천거하여 저로 하여금 그대를 위해 마음껏 포부를 펼침으로써

돌연 위나라에서 두각을 나타낼 수 있도록 도와주지 않는 것입니까.”라고 하였다.]

 

楚考烈王無子, 春申君患之, 求婦人宜子者進之, 甚眾, 卒無子. 趙人李園,持其女弟,欲進之楚王,

聞其不宜子,恐又無寵. 李園求事春申君為舍人. 已而謁歸,故失期. 還謁,春申君問狀.

對曰:「齊王遣使求臣女弟,與其使者飲,故失期.」春申君曰:「聘入乎?」對曰:「未也.」
春申君曰:「可得見乎?」曰:「可.」於是園乃進其女弟,即幸於春申君.

知其有身,園乃與其女弟謀.

[초효열왕에게 아들이 없었다. 춘신군이 이를 걱정하여 아이를 낳을 만한 부인을 구해 초왕에게 적잖이 바쳤지만

끝내 아이가 생기지 않았다. 이때 조나라 사람 이원(李園)이 자신의 누이동생을 데리고 와 초왕에게 바치려 하다가

만일 초왕이 아이를 낳지 못한다는 얘기를 듣고 누이동생 역시 자식을 낳지 못해 총애를 입지 못할까 두려워했다.
이에 춘신군을 찾아가 사인(舍人)으로 거둬줄 것을 청해 마침내 춘신군의 사인이 되었다.
얼마 후 이원은 휴가를 얻어 고향 집으로 돌아간 뒤 고의로 귀환할 날짜를 어기고 늦게 돌아왔다.

이에 춘신군이 그 연고를 묻자, 대답하기를 : “제왕(齊王: 제왕 建)이 사자를 보내 신의 누이동생을 요구하기에

제왕의 사자와 술을 마시느라 늦었습니다.”라고 하였다.
춘신군이 묻기를 : “ 혼례는 치렀소 ?”라고 하자  이원이 대답하기를 : “아직 치르지 않았습니다.”라고 하였다.
춘신군이 묻기를 :“내가 그대의 누이동생을 만나 볼 수 있겠소?”하자,  이원은 : “그렇게 하십시오.”라고 하였다.
이에 이원은 누이동생을 춘신군에게 바쳤다. 그녀는 하루 아침에 춘신군의 총애를 입게 되었다.
이원은 누이동생이 임신했다는 사실을 알게 되자, 누이동생과 계략을 꾸몄다.]

園女弟承間說春申君曰:「楚王之貴幸君,雖兄弟不如. 今君相楚王二十餘年,而王無子,

即百歲後將更立兄弟. 即楚王更立,彼亦各貴其故所親,君又安得長有寵乎?  非徒然也?

君用事久,多失禮於王兄弟,兄弟誠立,禍且及身,奈何以保相印、江東之封乎?

今妾自知有身矣,而人莫知. 妾之幸君未久,誠以君之重而進妾於楚王,王必幸妾.

妾賴天而有男,則是君之子為王也,楚國封盡可得,孰與其臨不測之罪乎?」

春申君大然之.  乃出園女弟謹舍,而言之楚王.

[이에 이원의 누이동생은 한가한 틈을 타 춘신군에게 말하기를 : “초왕이 군을 존중해 주고 총애하는 것이

비록 친형제라 할지라도 이보다 더하지는 못할 것입니다. 지금 군은 20년 넘게 상국으로 있었읍니다만

초왕에게 후사가 없으니 초왕이 세상을 떠나면 다른 형제가 보위에 오르게 될 것입니다.
그리되면 그 역시 자신과 친하게 지내온 사람을 귀히 여길 것이니 군이 어찌 길이 초왕의 총애를 받을 수 있겠습니까?
어찌 그것 뿐이겠습니까? 군이 집정한 지 오래 되었으니 초왕의 형제들에게 실례한 일이 많았을 터이니
참으로 그 형제 중에서 보위에 오르는 사람이 나오면 그 화가 군에게 미칠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어떻게 상국의 인(印)과 강동(江東)의 봉지를 보전할 수 있겠습니까?

지금 소첩이 임신한 사실을 소첩만 알 뿐 아무도 눈치채지 못하고 있습니다. 또 군의 총애를 받은지

얼아 안되니 초왕의 신임을 받고 있는 군이 소첩을 초왕에게 바치면 초왕은 소첩을 총애할 것입니다.
만일 하늘의 도움으로 아들을 낳게 되면 군의 자식이 보위에 올라 초나라의 땅을 모두 손에 넣게 됩니다.
이를 불측의 죄가 닥치는 것과 비교하면 어느쪽이 낫겠습니까?”라고 하자, 춘신군이 이를 크게 옳게 여겼다.
이에 이원의 누이동생을 다른 처소로 옮기도록 한 뒤 엄히 경계를 세우고는 초왕에게 이를 진언했다.]

楚王召入,幸之. 遂生子男,立為太子,以李園女弟立為王后. 楚王貴李園,李園用事.

李園既入其女弟為王后,子為太子,恐春申君語泄而益驕,陰養死士,欲殺春申君以滅口,

而國人頗有知之者.  春申君相楚二十五年,考烈王病.  朱英謂春申君曰:「世有無妄之福,

又有無妄之禍. 今君處無妄之世,以事無妄之主,安不有無妄之人乎?」

[초왕이 이내 그녀를 불러들여 총애하자 마침내 사내 아이를 낳게 되었다. 이에 곧 그 아이를 태자에 봉하고

이원의 누이동생을 왕후로 삼았다. 이때 초왕은 이원의 공을 높이 사 초나라의 정사를 도맡게 했다.
그러자 이원은 이미 누이동생을 바쳐 왕후로 만들고 그 자식이 태자가 되었지만 혹여 춘신군이 비밀을 누설해

더욱 교만해질까 두려워했다. 이에 결사대를 은밀히 양성해 춘신군을 죽여 입을 봉하고자 했다.

그러나 당시 초나라 내에서는 이같은 비밀을 알고 있는 사람들이 매우 많았다.
춘신군이 초나라의 상국으로 있은지 25년이 되던 해에 초고열왕이 병석에 눕게 되었다.
그러자 조나라 출신으로 춘신군의 문객으로 있는 주영(朱英)이 춘신군에게 말하기를 :
“세상에는 무망지복(无妄之福: 뜻하지 않은 복)도 있고, 무망지화(无妄之禍: 뜻하지 않은 화)도 있습니다.
지금 군은 무망지세(无妄之世: 뜻하지 않은 세상)에 살면서 무망지주(无妄之主: 뜻하지 않은 군주)을

섬기고 있습니다. 그러니 어찌 무망지인(无妄之人: 뜻하지 않은 사람)이 없을 수 있겠습니까?”라고 하자,] 

春申君曰:「何謂無妄之福?」曰:「君相楚二十餘年矣,雖名為相國,實楚王也. 五子皆相諸侯.

今王疾甚,旦暮且崩,太子衰弱,疾而不起,而君相少主,因而代立當國,如伊尹、周公.

王長而反政, 不, 即遂南面稱孤, 因而有楚國. 此所謂無妄之福也.」春申君曰:「何謂無妄之禍?」

曰:「李園不治國,王之舅也. 不為兵將,而陰養死士之日久矣.  楚王崩,李園必先入,

據本議制斷君命,秉權而殺君以滅口. 此所謂無妄之禍也.」春申君曰:「何謂無妄之人?」
曰:「君先仕臣為郎中,君王崩,李園先入,臣請為君?其胸殺之. 此所謂無妄之人也.」

[춘신군이 묻기를 : “무망지복은 어떤 것이오.”라고 하자.
주영이 대답하기를 : “군은 지금 초나라의 재상으로 있은지 20여 년이 되었습니다. 명목은 재상이나 실제는

초왕이나 다름없고 아들 다섯은 모두 제후들의 재상이 되어 있습니다. 지금 초왕의 병이 무거워 단모(旦暮)에

붕(崩)하게 되었고, 태자 또한 쇠약하고 병이 들어 자리에서 일어나지 못하고 있습니다. 군은 소주의 상국이 되어

이윤과 주공처럼 섭정을 하다가 소주가 성인이 될 때 정사를 돌려주거나 아니면 스스로 남면하여

‘고(孤)’를 칭하며 초나라를 차지할 수도 있습니다. 이것이 소위 무망지복입니다.”라고 하였다.
춘신군이 묻기를 : “무망지화는 어떤 것이오.”라고 하자. 

주영이 대답하기를 : “이원은 비록 정권을 잡고 있지는 않으나 초왕의 처남입니다.
그는 군사를 통솔하는 장수가 아닌데도 벌써 오래 전부터 암암리에 사사(死士)를 양성하고 있습니다.
초왕이 붕하면 이원은 반드시 제일 먼저 궁내로 들어가 원래의 계획대로 어린 왕의 군명(君命)을 전단하여
정권을 잡고 군을 죽여 입을 막고자 할 것입니다. 이것이 소위 무망지화입니다.”라고 하였다.
춘신군이 묻기를 : “무망지인은 어떤 것이오.”라고 하자.
주영이 대답하기를 :“군은 먼저 저를 낭중(郎中: 궁내의 시종 무관)으로 천거해 주기 바랍니다.
초왕이 세상을 떠난 후 만일 이원이 궁궐로 먼저 들어오면 제가 그의 가슴을 찔러 죽여버리겠습니다.

이것이 소위 무망지인입니다.”라고 하였다.]

春申君曰:「先生置之,勿復言已. 李園,軟弱人也,僕又善之,又何至此?」朱英恐,乃亡去.

後十七日,楚考烈王崩,李園果先入,置死士,止於棘門之內.
春申君後入,止棘門.  園死士夾刺春申君,斬其頭,投之棘門外. 於是使吏盡滅春申君之家.

而李園女弟,初幸春申君有身,而入之王所生子者,遂立為楚幽王也.
是歲,秦始皇立九年矣.  嫪毐亦為亂於秦.  覺,夷三族,而呂不韋廢.

[그러자 춘신군이 사절하며 말하기를 : “선생은 그 같은 생각일랑 치워버리고 더는 말하지 마시오.

이원은 연약한 사람이고, 게다가 나하고는 아주 가까운 사이요. 그런데 어찌 그 지경까지야 이를 수 있겠소.”라고 하였다.

이에 주영은 겁이 나 이내 도망쳐 버렸다. 이로부터 17일 후에 초고열왕이 죽자, 과연 이원이 제일 먼저 궁궐로

들어가 사사를 극문(棘門) 안쪽에 매복시켰다. 춘신군이 뒤늦게 궁 안으로 들어가려고 극문에 이르자,

좌우에 매복해 있던 사사들이 일제히 뛰쳐나와 춘신군을 죽인 뒤 그 수급을 들어올려 극문 밖으로 내던져 버렸다.

이원은 곧 관원들을 시켜 춘신군의 일족을 주살했다. 이원의 누이동생이 처음에 춘신군의 총애를 받아 임신한 뒤

초고열왕에게 바쳐져 태어난 자식이 마침내 보위에 오르게 되었다. 그가 바로 초유왕(楚幽王)이다.

이 해는 진시황이 들어선 지 9년이 되던 해로 노애(嫪毐)가 진나라에서 난을 일으켰다가 발각되어

3족이 주살을 당한 해이기도 했다. 이때 여불위도 폐출되었다.]

 

虞卿謂春申君曰:「臣聞之春秋,於安思危,危則慮安. 今楚王之春秋高矣,而君之封地,

不可不早定也. 為主君慮封者,莫如遠楚. 秦孝公封商君,孝公死,而後不免殺之.

秦惠王封冉子,惠王死,而後王奪之. 公孫鞅,功臣也;冉子,親姻也.

然而不免奪死者,封近故也. 太公望封於齊,邵公奭封於燕,為其遠王室矣.

今燕之罪大而趙怒深,故君不如北兵以德趙,踐亂燕,以定身封,此百代之一時也.」
君曰:「所道攻燕,非齊則魏. 魏、齊新怨楚,楚君雖欲攻燕,將道何哉?」

對曰:「請令魏王可.」君曰:「何如?」對曰:「臣請到魏,而使所以信之.」

[진장양왕 2년(기원전 248), 세객 우경(虞卿: 「우씨춘추」를 지은 학자)이 춘신군에게 건의하기를 :
“ 제가 듣건대, ‘편안할 때 위태로움을 생각하고, 위태로울 때 편안해질 방안을 강구한다’고 했습니다.
지금 초왕(楚王: 초고열왕)의 연세가 많습니다. 그러니 군의 봉지를 빨리 결정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군을 위해 봉지를 생각해 보건대 봉지는 초나라로부터 멀리 떨어져 있어야만 합니다.
옛날 진효공이 상앙(商鞅)을 상군(商君)으로 봉했지만 진효공이 죽자 상군은 죽음을 면치 못했습니다.
또 진혜문왕은 위염(魏冉)을 양후(穰侯)로 봉했으나 진혜문왕이 죽자 새 왕은 그의 봉지를 빼앗아 버렸습니다.
공손앙(상앙)은 공신이고, 위염은 인척이었지만 봉지를 빼앗기고 죽임 당함을 면치 못한 것은 그 봉지가

너무 가까웠기 때문입니다. 주나라 창건 당시 태공망(太公望)은 멀리 제(齊) 땅에 봉해지고,

소공(召公) 석(奭)은 연(燕) 땅에 봉해져 그 거리가 왕실로부터 매우 멀었습니다.

지금 연나라는 조나라에 큰 죄를 지고 있는데다 조나라의 연나라에 대한 원한 또한 매우 깊습니다.
그러니 군은 지금 북쪽으로 군사를 일으켜 조나라에게 덕을 베풀면서 사악한 연나라를 멸하느니만 못합니다.
그리 하여 그 땅을 자신의 봉지로 삼으십시오. 이는 백대(百代)에 한 번 올까말까 하는 기회입니다.”라고 하였다.
그러자 춘신군이 묻기를 : “ 연나라를 공략하려면 반드시 제나라 아니면 위나라를 거쳐야 하오.

그런데 위, 제 두 나라는 우리 초나라와 새로운 원한을 가지고 있으니 초왕이 비록 연나라를 공격하려 한들

장차 어느 길로 가야 한단 말이오.”라고 하자,
이에 우경이 대답하기를 : “위왕의 허락을 받도록 하겠습니다.”라고 하였다.  

춘신군이 묻기를 : “어떻게 말이오?”라고 하자.
우경이 대답하기를 : “청컨대 제가 위나라로 가서 저를 믿도록 만들겠습니다.”라고 하였다.]

 

​迺謂魏王曰:「夫楚亦強大矣,天下無敵,乃且攻燕.」

魏王曰:「鄉也,子云天下無敵;今也,子云乃且攻燕者,何也?」
對曰:「今為馬多力則有矣,若曰勝千鈞則不然者,何也? 夫千鈞非馬之任也.

今謂楚強大則有矣,若越趙、魏而鬥兵於燕,則豈楚之任也我?非楚之任而楚為之,是敝楚也.

敝楚見強魏也,其於王孰便也?」 

[우경이 위나라로 가서 위안희왕(魏安釐王)에게 말하기를 : “무릇 초나라 역시 강대하여 천하무적입니다.

그들은 이내 연나라를 공격할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그러자 위안희왕이 말하기를 : “방금 그대는 초나라가 ‘천하무적’이라 하면서 바로 또 ‘이내 연나라를 공격할것입니다.’

라고 하니 이는 무슨 말이오.”라고 하자.

이에 우경이 대답하기를 : “만일 ‘지금 그 말은 힘이 세다’고 말하면 일리가 있지만 ‘1천 균(鈞: 30근)을 실을 수 있다’

라고 하면 사리에 어긋납니다. 대저 1천 균은 말이 감당할 수 있는 무게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마찬가지로 지금 ‘초나라가 강대하다’고 말하면 일리가 있지만

‘조, 위 두 나라를 뛰어 넘어 연나라와 싸울 수 있다’라고 하면 이 어찌 초나라가 감당할 수 있는 일이겠습니까.

초나라가 스스로 감당할 수 없는 일을 하려 들면 이는 바로 자신을 피폐하게 만드는 길입니다.

초나라를 피폐하게 만드는 길과 강하게 만드는 길 중 어느 쪽이 대왕에게 유리하겠습까?”라고 하였다.]

 

 

 

原 文 【 中國哲學書電子化計劃 .   筆寫本 】


           

 

原 文   飜 譯 者        德庤 / 李   斗 振