戰國策(전국책) /戰國策 燕策

戰國策 燕策

덕치/이두진 2021. 6. 26. 21:20

 

                                        燕 策  

 

 

【 序文 】 

연나라는 원래 희성으로 소공(召公) 석(奭)이 주무왕을 도와 은주(殷紂)를 멸하면서 북연(北燕)에 봉해진 것이

건국의 계기가 되었다.  도읍은 계(蓟: 북경시)로 후대 왕조가 북경에 건도(建都)하는 남상이 되었다.

주현왕 46년(기원전 323), 연역왕(燕易王)이 처음으로 칭왕했다.
진시황 25년(기원전 222), 연왕 희(喜)가 진시황에게 항복함으로써 멸망하고 말았다.

영토는 지금의 하북성 북부와 요녕성 서남부, 산서성 동북쪽 일부 등에 걸쳐 있었다.

 

 

  燕策   

 

 

蘇秦將為從,北說燕文侯曰:「燕東有朝鮮、遼東,北有林胡、樓煩,西有云中、九原,

南有呼沱、易水. 地方二千餘里,帶甲數十萬,車七百乘,騎六千匹,粟支十年.

南有碣石、雁門之饒,北有棗粟之利,民雖不由田作,棗栗之實,足食與民矣. 此所謂天府也.

夫安樂無事,不見覆軍殺將之憂,無無過燕矣. 大王知其所以然乎?夫燕之所以不犯寇被兵者,

以趙之為蔽於南也. 秦、趙五戰,秦再勝而趙三勝. 秦、趙相弊,而王以全燕制其後,

此燕之所以不犯難也.

[주현왕 35년(기원전 334), 소진이 장차 합종을 성사시킬 생각으로 북쪽으로 가서 연문후(燕文侯)에게 말하기를 :
“연나라는 동쪽으로 조선, 요동, 북쪽으로 임호(林胡: 내몽골), 누번(樓煩: 산서성 영무현), 서쪽으로 운중(내몽골 ),

구원(九原: 내몽골 포두시), 남쪽으로 호타하(呼沱河: 하북성), 역수(易水: 하북성 역현 남쪽에 위치)가 있습니다.

영토는 사방 2천여 리입니다. 대갑은 수십만 명, 수레는 7백 승, 기마용 말은 6천 필입니다.

군량은 10년을 지탱할 만합니다. 남쪽으로 갈석산(碣石山: 화물운송의 해로 창구로 하북성 창려현)과

안문산(雁門山: 화물운송의 육로 창구로 산서성 대현)이 있어 풍요롭기 그지없고, 북쪽으로 조율(棗栗)이 풍성합니다.

백성들은 비록 전작(田作)을 하지 않아도 조율만으로 능히 살 수 있습니다.

이것이 소위 천부(天府: 자연산물이 풍부한 천혜의 창고)인 것입니다. 무릇 태평하여 병란이 없으며

복군살장(覆軍殺將)의 우환이 없기로는 연나라만한 나라가 없습니다. 대왕께서는 그 이유를 알고 있습니까?

무릇 연나라가 적의 침공을 받지 않는 것은 조나라가 남쪽에서 방어벽 역할을 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진, 조 두 나라가 5 번 싸워 진나라가 2 번 이기고, 조나라가 3 번 이겼습니다. 두 나라가 서로 피폐해졌을 때

대왕께서 온전한 군사를 이끌고 가 그 뒤를 제압할 수 있습니다. 이것이 연나라가 침공을 당하지 않는 이유입니다.

 

且夫秦之攻燕也,逾云中、九原,過代、上穀,彌地踵道數千里,雖得燕城,秦計固不能守也.

秦之不能害燕亦明矣.  今趙之攻燕也,發興號令,不至十日,而數十萬之中,軍於東垣矣.

度呼沱,涉易水,不至四五日,距國都矣. 故曰, 秦之攻燕也, 戰於千里之外;趙之攻燕也,

戰於百里之內.  夫不憂百里之患, 而重千里之外, 計無過於此者.  是故愿大王與趙從秦,

天下為一, 則國必無患矣. 」  燕王曰:「寡人國小,西迫強秦,南近齊、趙.  齊、趙,強國也,

今主君幸教詔之,合從以安燕, 敬以國從. 」 於是齎蘇秦車馬金帛以至趙.

[또 대저 진나라가 연나라를 침공하려 든다면 운중, 구원을 넘어야 하고, 대(代), 상곡(上谷)을 통과해야 하고,

수천 리 먼길을 행군해야만 합니다. 설령 연나라 성을 취할지라도 진나라는 이를 수비할 수 없다는 것까지

고려해야만 합니다. 이로써 보건대 진나라가 연나라에 해를 끼칠 수 없다는 사실은 명확합니다.

지금 조나라가 연나라를 공격하면서 호령을 발동하면 채 열흘도 못 되어 수십만 명의 군사가 동원(하북성 정정현)에

주둔할 수 있습니다. 호타와 역수를 건너 4, 5일만에 국도인 계성에 이를 수 있습니다. 그래서 진나라가 연나라를

공격하면 1천 리 밖에서 싸우고, 조나라가 연나라를 공격하면 1백 리 안에서 싸운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무릇 1백 리 이내에 우환이 없어야 1천 리 밖도 중시할 수 있는 것이니 계책을 세울 때 이에 대한 착오가 없어야

할 것입니다. 그러니 대왕께서는 조나라와 가까이 지내기 바랍니다. 그렇게 되면 설령 천하가 하나가 될지라도

연나라는 아무 염려가 없을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그러자 연문후가 말하기를 : “과인의 나라는 작은 데다가,

서쪽으로 강한 진나라의 압박이 있고, 남쪽으로는 제, 조 두 나라와 접경하고 있소. 제, 조 두 나라는 강국이고,

지금 그대가 조왕의 가르침을 전해주었소. 과인은 합종으로 연나라를 안정시킬 생각이오. 그대의 말을 좇아

나라를 들어 합종에 참여토록 하겠소.”라고 하며, 소진에게 거마와 금백(金帛)을 선물로 주어 조나라로 가게 했다.]

 

奉陽君李兌甚不取於蘇秦.  蘇秦在燕,李兌因為蘇秦謂奉陽君曰:

「齊、燕離則趙、重,齊燕合則趙安輕. 今君之齊,非趙之利也. 臣竊為君不取也.」

[기원전 288), 봉양군(奉陽君: 공자 成)과 이태(李兌)는 소진과 매우 사이가 좋지 않았다.

소진이 연나라의 요청을 받고 연나라에 있었는데, 조나라 신하인 이태가 소진을 위하여 봉양군에게 말하기를 :
“제, 연 두 나라가 서로 떨어져 있으면 조나라가 중시될 것이고, 연합하면 조나라는 경시될 것입니다.

지금 군이 제나라로 가 연, 제 두 나라 간의 연합을 추진하면 조나라에게 이로울 것이 없습니다.

저의 생각으로는 군께서 취하실 일이 아니라고 봅니다."라고 하였다.]

奉陽君曰:「何吾合燕於齊?」對曰:「夫制於燕者蘇子也. 而燕弱國也, 東不如齊, 西不如趙,

豈能東無齊、西無趙哉? 而君甚不善蘇秦,蘇秦能抱弱燕而孤於天下哉? 是驅燕而使合於齊也.

且燕亡國之餘也,其以權立,以重外,以事貴. 故為君計,善蘇秦則取,不善亦取之,以疑燕、齊.

燕齊疑,則趙重矣. 齊王疑蘇秦,則君多資.」奉仰望君曰:「善.」難了時使與蘇秦結交.

[그러자 봉양군이 반문하기를 : “내가 언제 연나라와 제나라 간의 연합을 추진한다고 했소?”라고 하자.
이에 이태가 대답하기를 : “무릇 연나라를 제어하고 있는 자는 소진입니다. 연나라는 약소국으로 동쪽으로는

제나라만 못하고, 서쪽으로는 조나라만 못하니 어찌 동쪽으로 제나라를 제외하거나 서쪽으로 조나라를 제외할 수

있겠습니까? 군은 소진과 사이가 좋지 않은데 소진이 어찌 약한 연나라를 감싸안고 제후들 사이에서 고립되려

하겠습니까? 이는 연나라를 제나라의 변방으로 밀어넣는 셈입니다. 또한 연나라는 제나라의 침공을 받고

간신히 멸망을 면한 상황입니다. 지금 소진은 연나라의 권력을 기반으로 삼아, 외세에 기대어 스스로를 보전하고,

합종에 의지해 부귀를 얻으려는 것입니다. 따라서 군을 위한 계책으로 말하면 소진과 사이가 좋으면 말할 것도 없이

그와 결교(結交)하고, 설령 사이가 좋지 않아도 가까이 해야만 합니다. 그래서 연, 제 두 나라가 서로를 의심하게

만들어야만 합니다. 두 나라가 서로를 의심하면 조나라는 중시될 수밖에 없습니다.

제왕(齊王: 제민왕)은 소진이 연, 조 두 나라 간의 연합을 추진하는 것이나 아닌지 의심할 것입니다.

러면 소진은 연나라로 조나라를 돕고자 할 것이니 군은 장차 많은 도움을 받게 될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봉양군이 우러러보며 말하기를 : “그 말이 옳소.”라고 하며, 이내 소진에게 사자를 보내 서로 교류하기를 청하였다.]

 

權之難,燕再戰不勝,趙弗救. 噲子謂文公曰:「不如以地請合於齊,趙必救我. 若不吾救, 

不得不事.」  文公曰:「善.」令郭任以地請講於齊.  趙聞之,遂出兵救燕. 

[제, 연 두 나라가 권(權: 하북성 완현) 땅에서 싸울 때 연나라는 두 번 싸웠으나 이기지 못했다.

이때 조나라가 연나라를 구원하지 않았다. 그러자 공자 쾌(噲: 연문공의 아들)가 연문공(燕文公)에게 말하기를 :

“ 제나라에 땅을 떼어주고 제나라와 연합한다고 하면 조나라는 반드시 우리를 구해줄 것입니다. 만일 우리를

구해주지 않으면 연, 제 두 나라가 연합하게 되니 조나라는 제나라와 싸우지 않을 수 없게 됩니다.”라고 하자.
연문공이 말하기를 : “옳은 말이다.”라고 하며, 이에 곽임(郭任)을 보내 땅을 제나라에 떼어주고 결맹하게 했다.

조나라가 이 얘기를 듣고 곧바로 출병해 연나라를 구원하였다.]

 

燕文公時,秦惠王以其女為燕太子婦. 文公卒,易王立. 齊宣王因燕喪攻之,取十城.
武安君蘇秦為燕說齊王,再拜而賀,因仰而吊. 齊王桉戈而卻,曰:「此一何慶吊相隨之速也?」

對曰:「人之飢所以不食烏喙者, 以爲雖偸充腹, 而與死同患也. 今燕雖弱小, 强秦之少婿也.

王利基十城, 而沈與强秦為仇. 今使弱燕爲雁行, 而强秦制基後, 以招天下之精兵,且食烏喙之類也.」

[기원전 334, 연문공 재위 당시 진혜문왕이 자신의 딸을 연나라 태자에게 출가시켰다. 연문공이 죽자,

태자가 뒤를 이어 연역왕(燕易王)이 되었다. 이 상사(喪事)를 틈을 타 제선왕(齊宣王)이 연나라를 공격하여

10개 성읍을 취했다. 그러자 무안군(武安君) 소진이 연나라를 위해 제왕을 만나 재배하며 축하한 뒤

즉시 하늘을 우러러 조의를 표했다. 이에 제왕이 창을 어루만지고 뒤로 물러나면서 묻기를 :
“어찌하여 축하와 조문이 이토록 빨리 이어지는 것이오.”라고 하자.
소진이 대답하기를 : “배가 고파도 오훼(烏喙: 烏頭, 附子로 곧 독약을 지칭)를 먹지 않는 것은 구차히 배를 채우느니

함께 아사해 환난을 같이 하고자 한 것입니다. 지금 연나라가 비록 약소하나 강한 진나라의 작은 사위 나라입니다.

대왕이 그 10개 성읍을 탐하면 강한 진나라와 깊은 원한을 맺게 됩니다. 만일 진나라가 약한 연나라를 선봉에 세우고

그 뒤를 제압하면 이는 천하의 정병을 초치하는 것으로 오훼를 먹는 것과 다름없습니다.”라고 하였다.]

 

齊王曰 :「然則奈何?」 對曰「聖人之制事也,轉禍而為福,因敗而為功. 故桓公負婦人而名益尊,

韓相獻開罪而交愈固, 此皆轉禍而為福,因敗而為功者也. 王能聽臣,莫如歸燕之十城, 卑辭以謝秦.

秦知王以己之故歸燕城也,秦必德王. 燕無故而得十城, 燕亦德王. 是棄強仇而立厚交也.

且夫燕、秦之僅事齊,則大王號令天下皆從. 是王以虛辭附秦,而以十城取天下也. 此霸王之業矣.所謂轉禍為福,因敗成功者也.」 齊王大悅, 乃歸燕城, 以金千斤謝基後, 頓首塗中,

願爲兄弟而請罪於秦.

[제왕이 묻기를 : “그렇다면 어찌해야 하오?”라고 하자.  소진이 대답하기를 : 어진 사람이 일을 처리할 때에는

화를 돌려 복으로 만들고 실패를 분석하여 성공으로 바꾼다고 합니다.​

그래서 제환공(齊桓公)은 부인을 쫓아 버림으로서 명성을 더욱 높였고, 한헌자(韓獻子: 韓厥)는 조나라의 정경(正卿)

조돈(趙盾: 趙衰의 아들 趙宣子)에게 득죄했으나 조돈은 오히려 그와의 교분을 더욱 돈독히 했습니다.

이들은 모두 전화위복과 인패위공에 성공한 사람들입니다. 대왕께서 저의 말을 들고자 하면 연나라의 10개 성읍을

돌려주고 비사(卑辭)로 진나라에 사죄하면 진나라는 대왕이 진나라로 인해 연나라 성읍을 돌려 주었다는 것을 알고

틀림없이 대왕에게 크게 감격해 할 것입니다. 연나라 역시 아무 이유없이 10개 성읍을 돌려받게 되면 대왕에게

크게 감격해 할 것입니다. 이는 강한 구적(仇敵)을 친분이 두터운 우방(友邦)으로 만드는 길입니다.

연, 진 두 나라가 제나라를 섬기게 되면 대왕께서 호령할 때 천하 제후들이 모두 대왕을 따를 것입니다.

이는 대왕께서 빈 말로 진나라와 친교를 맺고, 10개 성읍으로 천하를 얻는 길입니다.

이것이 바로 패왕지업(覇王之業), 전화위복, 인패위공인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제위왕이 이 말을 듣고 크게 기뻐하며 연나라 성읍을 돌려주었다. 그리고는 진나라에 금 1천 근을 주어 사죄하고,

몸을 굽혀 머리를 땅에 대고 조아려, 형제지국으로 받아들여 줄 것을 바라면서 죄를 빌었다.]

 

人有惡蘇秦於燕王者, 曰:「武安君, 天下不信人也. 王以萬乘下之, 尊之於廷, 示天下與小人群也.」

武安君從齊來,而燕王不館也.  謂燕王曰:「臣東周之鄙人也, 見足下身無咫尺之功,

而足下迎臣於郊, 顯臣於廷.  今臣為足下使, 利得十城, 功存危燕, 足下不聽臣者, 人必有言臣不信, 傷臣於王者.  

臣之不仙,是足下之福也. 使臣信如尾生,廉如伯夷,孝如曾參,三者天下之高性,而以事足下,不可乎?」

燕王曰:「可.」 曰:「有此,臣亦不事足下矣.」

[기원전 332, 어떤 사람이 연역왕(燕易王) 앞에서 소진을 헐뜯으며 말하기를 : “무안군(소진)은 천하의 믿을 수 없는

사람입니다. 대왕께서 만승의 임금이지만 스스로 낮추어 가며 소진에게는 조정에서 그의 지위를 높여 주었으니

이는 대왕께서 소인배와 함께 있다는 사실을 천하의 제후들에게 드러낸 셈입니다.”라고 하였다.
얼마 후 소진이 제나라에서 돌아왔으나 연역왕이 그를 다시 임용하지 않으려 했다.

그러자 소진이 연역왕을 찾아가 말하기를 : “신은 동주(東周) 출신의 미천한 사람입니다. 처음에 족하를 배견할 때

저는 아무런 공도 세우지 못했습니다. 그런데도 대왕은 친히 교외까지 나와 신을 맞아주고, 이어 조정의 현직에

오르게 했습니다. 지금 신은 족하를 위해 제나라에 사신으로 가 연나라에서 빼앗은 10개 성읍을 돌려주게 함으로써

위기에 처한 연나라를 구하는 공을 세우고 돌아왔습니다. 그런데도 족하가 신을 임용하지 않으려 하는 것은

틀림없이 대왕 앞에서 신을 믿을 수 없는 사람으로 중상한 자기 있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러나 신이 믿을 수 없는 사람으로 몰리는 것은 도리어 족하에게 복이 됩니다.

만일 신에게 미생(尾生)의 독신(篤信)과 백이(伯夷)의 염결(廉潔), 증삼(曾參)의 효행(孝行)을 바란다면

이들 3인은 천하의 고사(高士)인데 이들의 고행(高行)으로 족하를 섬길 수 있다고 보십니까?"라고 하자.
연왕이 대답하기를 : “ 그렇소."라고 하였다.

이에 소진이 말하기를 : “만일 신이 그렇듯 훌륭한 고사였다면 결코 족하를 섬기지 않았을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蘇秦曰:「且夫孝如曾參,義不離秦一夕宿於外,足下安得使之之齊? 廉如伯夷,不取素餐,

污武王之義而不臣焉,辭孤竹之君,餓而死於首陽之山. 廉如此者,何肯步行數千里,

而事弱燕之危主乎? 信如尾生,期而不來臨,抱梁柱而死. 信至如此,何肯楊燕、

秦之威於齊而取大功乎哉?且夫信行者,所以自為也,非所以為人也,皆自覆之術,非進取之道也.

且夫三王代興,惡霸迭盛,皆不自覆也. 君以自覆為可乎? 則齊不益於營丘,足下不逾楚境,

不窺於邊城之外. 且臣有老母於周,離老母而事足下,去自覆之術,而謀進取之道,

臣之趣固不與足下合者. 足下皆自覆之君也,仆者進取之臣也,所謂以忠信得罪於君者也.」

[그리고는 소진이 다시 말하기를 : “무릇 증삼과 같이 효성스런 자는 의리상 단 하룻밤도 어버이와 떨어져 밖에서

자지 않으려 할 것입니다. 그런 사람을 족하는 어찌 제나라에 사자로 보낼 수 있겠습니까? 또 백이처럼 청렴했다면

하는 일도 없이 밥을 축내지는 않았을 것이며 주무왕의 의거를 불의로 생각해 그의 신하가 되는 것을 마다한 채

수양산(首陽山)으로 들어가 굶어 죽었습니다. 이처럼 청렴한 사람이 무슨 이유로 굳이 수천 리 먼길을 걸어와

위험에 처한 약소한 연나라의 군주를 섬기겠습니까? 미생처럼 독신한 사람은 여인이 약속 장소인 다리 밑으로

나오지 않자 물이 불어나는데도 교각을 껴안은 채 익사하고 말았습니다. 이같이 독신한 사람이 무슨 이유로

연, 진의 위세를 제나라에 내보이며 대공을 세우려 하겠습니까? 무릇 신의를 지키는 자는 모두 자신을 위해

그런 것으로 결코 남을 위해 그러는 것이 아닙니다. 이는 자신의 명성을 보호하는 것에 불과할 뿐 적극적으로 개척해

나아가는 것이 아닙니다. 무릇 3왕(三王: 하, 은, 주 3대)가 번갈아 흥기하고 5패(五覇)가 대를 이어 흥성한 것은

모두 자신의 명성을 보호하는 것을 취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만일 자신의 명성을 보호하는 길을 택했다면

제나라는 영구(營丘: 주무왕이 태공망에게 내린 봉지) 이상으로 영토를 넓히지 못했을 것입니다.

족하께서도 경계를 넘지 못했을 것이고, 초나라 역시 변성(邊城) 밖을 엿보지 못했을 것입니다.

지금 신의 노모는 주나라에 있습니다. 그럼에도 신은 노모를 떠나 족하를 섬기면서 내 자신의 명성을 버리고

극적으로 개척해 나아가는 길을 택하고 있습니다. 신이 지향하는 바는 실로 족하와 맞지 않는 듯합니다.

족하는 자신의 명성을 보호하는 군주이고, 저는 극적으로 개척해 나아가는 신하입니다.

신은 군주에게 소위 충성을 다하고 죄를 저지른 셈이 되고 말았습니다.”라고 하였다.]

 

燕王曰:「夫忠信, 又何罪之有也?」對曰:「足下不知也. 臣鄰家有遠為吏者,其妻私人.

其夫且歸, 其私之者憂之.  其犧曰:『公勿憂也,吾已為藥酒以待之矣.』後二日,夫至.

妻使妾奉卮酒進之,妾知其藥酒也,進之則殺主父,言之則逐主母,乃陽僵棄酒. 主父大怒而笞之.

故妾一僵而其酒,上以活主父, 下以存主母也. 忠至如此,然不免於笞,此以忠信得罪者也.

臣之事,適不幸而有類妾之棄酒也. 且臣之事足下,亢義益國,今乃得罪,臣恐天下後事足下者,

莫敢自必也. 且臣之說齊,曾不欺之也. 使之說齊者,莫如臣之言也,雖堯、舜之智,不敢取也.」

[그러자 연역왕이 묻기를 : “ 대체로 충성을 다하고 믿음을 주었는데 또 어찌 죄가 된단 말이오?”라고 하자.
이에 소진이 말하기를 : “족하는 모를 것입니다. 신의 이웃 집에 멀리 외지에 임관된 자가 있었는데

그 아내가 남편이 없는 사이 사통(私通)했습니다. 남편이 돌아올 무렵 외간 남자가 걱정하자 그 아내가 말하기를,

‘그대는 걱정하지 마시오. 나는 이미 독주를 만들어 놓고 기다리고 있소’라고 했습니다. 이틀 후 남편이 돌아오자

그 아내가 첩을 시켜 남편에게 술을 가득 따라 올리게 했습니다. 그때 첩은 그 술이 독주라는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술을 권하면 주인이 죽게 되고, 이를 말하면 본부인이 쫓겨날 것이 분명해 고민하다가 이내 짐짓 넘어져

술을 엎질러 버렸습니다. 주인이 대노해 첩을 묶어놓고 태형(笞刑)을 가했습니다. 첩은 한 번 넘어짐으로써

위로는 주인을 살리고 아래로는 본부인을 지킬 수 있었습니다. 이같이 충성을 다했으면서 태형을 면치 못한 첩이

바로 ‘충신득죄’한 사람인 것입니다. 신은 불행하게도 마치 그 첩과 같이 술을 엎지르는 일을 한 셈이 되었습니다.

신은 족하를 섬기면서 족하의 의행을 높이고, 나라에 이익을 가져다 드렸습니다.

런데도 지금 득죄케 되었습니다. 신은 이후 족하를 섬기는 자들이 성심을 다하지 않을까 우려됩니다.

신이 제왕(齊王: 제위왕)으로 하여금 연나라에 성을 반환토록 설득하면서 일찍이 그를 속인 적이 있습니까.

제왕을 설득할 수 있었던 것은 그곳에 신의 유세를 따를 자가 없었기 때문입니다.

비록 요순의 지혜가 있을지라도 제나라로 하여금 성을 돌려주도록 하지는 못했을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張儀為秦破從連橫,謂燕王曰:「大王之所親,莫如趙. 昔趙王以其姊為代王妻,欲并代, 

約與代王遇於句注之塞. 乃令工人作為金斗,長其尾,令之可以擊人. 與代王飲,而陰告廚人曰:

『即酒酣樂,進熱啜,即因反鬭擊之.』 於是酒酣樂進取熱啜. 廚人進斟羹,因反鬭而擊之,

代王腦涂地. 其姊聞之,摩笄自自刺也.  故至今有摩笄之山,天下莫不聞. 夫趙王之狼戾無親,

大王之所明見知也. 且以趙王為可親邪? 趙興兵而攻燕,再圍燕都而劫大王, 大王割十城乃卻以謝.

今趙王已人朝澠池,效河間以事秦. 大王不事秦,秦下甲云中、九原,驅趙而攻燕,則易水、

長城非王之有也.  且今說趙之於秦,猶郡縣也. 不敢妄興師以征伐.  今大王事秦,秦王必喜,

而趙不敢妄動矣.  是西有強秦之援,而南無齊、趙之患,是故愿大王之熟計之也.」 

[기원전 311, 장의가 진나라를 위해 합종을 깨고 연횡을 성사시킬 생각으로 연소왕(然昭王)에게 말하기를 :
“대왕이 가까이 하는 나라로는 조나라만한 나라가 없습니다. 전에 조왕(趙襄子)은 그 누이를 대(代: 하북성 울현)나라

군주에게 출가시키면서 장차 이를 병탄하고자 했습니다. 이에 대나라 군주와 구주산(句注산: 산서성 대현)의 요새에서

만나기로 약속했습니다. 그리고는 공인(工人)을 시켜 청동으로 만든 국자를 만들되 그 자루를 길게 해 사람을 칠 수

있는 칼처럼 만들게 했습니다. 마침내 대나라 군주와 술을 마시면서 은밀히 주인(廚人: 요리사)에게 명하기를,

‘주흥이 한창 오를 때가 되면 뜨거운 탕을 올리면서 즉각 금두로 그를 치도록 하라’고 했습니다.

드디어 주석이 무르익었을 때 주인이 뜨거운 탕을 올리자 대나라 군주가 이를 받았습니다.

그러자 주인이 탕을 따르다가 대나라 군주가 방심한 틈을 타 금두로 그의 머리를 가격했습니다.

대나라 군주는 머리가 깨져 뇌수를 흘리며 그 자리에서 즉사하고 말았습니다. 이때 조왕의 누이가 이 얘기를 듣고

비녀를 뾰쪽하게 간 뒤 이 비녀로 자신의 목을 찔러 자진했습니다. 지금까지 마계산(‘마계’는 비녀를 간다는 뜻)이라는

지명이 전하게 된 것입니다. 천하인 중 이 얘기를 듣지 않은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무릇 조왕은 탐욕스럽고

이기적인 사람으로 대왕도 익히 알고 있는 바와 것입니다. 그런데도 조왕과 가히 가까이 할 수 있는 것입니까?

조나라가 다시 군사를 일으켜 연나라를 치고, 연나라 도읍을 포위해 대왕을 겁박하면 대왕은 10개 성읍을 떼어주고

사죄한 뒤 뒤로 물러나야 합니다. 지금 조왕은 이미 민지(澠池: 하남성 민지현)에서 입조하고 하간(河間)을 할양하여

진나라를 섬기고 있습니다. 대왕이 진나라를 섬기지 않으면 진나라는 운중, 구원(九原)으로 출병해 조나라를 쫓아내고

연나라를 공격할 것입니다. 그리 되면 역수(易水)와 장성(長城)은 대왕의 소유가 아니게 될 것입니다.

게다가 지금 조나라는 진나라의 일개 군현(郡縣)과 같아 경거망동하여 군사를 이끌고 정벌에 나설 수 없습니다.

지금 대왕은 진나라를 섬기면 진나라는 필시 크게 기뻐할 것입니다. 그리 되면 조나라는 감히 망동을 할 수 없습니다.

이는 서쪽으로 강한 진나라가 후원하고, 남쪽으로 제, 조 두 나라로 인한 우환이 사라지는 것을 의미합니다.

원컨대 대왕께서는 깊이 고려해 보시기 바랍니다.”라고 하였다.]

 

燕王曰:「寡人蠻夷辟處,雖大男子,裁如嬰兒,言不足以求正,謀不足以決事. 

今大客幸而教之,請奉社稷西面而事秦,獻常山之尾五城.」

[그러자 연왕이 말하기를  : " 과인은 궁벽한 오랑캐 땅에 거처해 있어 비록 대범한 남자로 태어났을지라도

하는 일은 어린아이와 같아서 말에 있어서도 정도를 구하지 못하고 계책을 세워도 제대로 결정하지 못하였소.

지금 다행히도 상객께서 오셔서 가르침을 주시니 사직을 받들어 서쪽의 진나라를 섬길 것이며

상산의 끝자락에 있는 5개의 성을 바치도록 하겠소."라고 하엿다.]

 

宮他為燕使魏,魏不聽,留之數月.  客謂魏王曰:「不聽燕使何也?」曰:「以其亂也.」
對曰:「湯之伐桀,欲其亂也. 故大亂者克得其地,小亂者可得其寶.

今燕客之言曰:『事茍可聽,雖盡寶、地,猶微之也.』王何為不見?」魏說,因見燕客而遣之.

[서주의 대부 궁타가 연나라를 위해 위나라에 사자로 갔다. 그러나 위양왕이 그를 받아들이지 않아 수개 월을

기다려야만 했다. 한 세객이 위양왕에게 묻기를 : “연나라 사자를 받아들이지 않는 이유가 무엇입니까?”라고 하자.
위왕이 대답하기를 : “연나라 상국 자지(子之)가 내란을 일으켰기 때문이오.”라고 하였다.
이에 세객이 말하기를 : “은탕(殷湯)은 하걸(夏桀)을 공격할 때 내란을 이용했습니다. 대란(大亂)이 일어나면

그 땅을 차지할 수 있고, 소란(小亂)이 일어나면 그 보물을 취할 수 있습니다.

지금 연나라 사자가 말하기를, ‘성실히 섬기면서 명을 좇을 터이니 비록 보물일지라도 모두 쓰고,

땅일지라도 아끼지 않겠습니다’라고 했습니다. 대왕은 어찌하여 이를 보지 못하는 것입니까?”라고 하였다.
위양왕이 크게 기뻐하며 이내 궁타를 만나본 뒤 귀국하게 했다.]

 

蘇秦死,其弟蘇代欲繼之,乃北見燕王噲曰:「臣東周之鄙人也,竊聞王義甚高甚順,鄙人不敏,竊釋鋤耨而干大王.  

至於邯鄲,所聞於邯鄲者,又高於所聞東周.

臣竊負其志,乃至燕廷,觀王之群臣下吏,大王天下之明主也.」

[기원전 284, 소진(蘇秦)이 죽었다. 그러자 그의 아우 소대(蘇代)가 그 뒤를 이를 생각으로 곧 북쪽으로 가서

연왕 쾌(噲)를 배견하면서 말하기를 : “신은 동주의 비천한 사람입니다. 대왕께서 의로움이 심히 높고 심히 순리에

맞음을 듣고 나서 제가 비록 불민하지만 대왕을 위해 일할 생각으로 농사일을 그만두고 여기에 왔습니다.

신이 한단에 이르러 들어보니 대왕의 의로움이 동주에서 들은 것보다 더욱 높았습니다. 이에 신은 내심 이를 믿고

연나라 조정까지 대왕을 찾아오게 된 것입니다. 이곳에 와서 대왕의 군신들과 말단 관리들까지 보니 대왕이

과연 천하의 명철한 군주라는 사실을 알겠습니다.”라고 하였다.]

 

王曰:「子之所謂天下之明主者,何如者也?」對曰:「臣聞之,明主者務聞其過,不欲聞其善.

臣請謁王之過. 夫齊、趙者,王之仇讎也;楚、魏者,王之援國也. 今王奉仇讎以伐援國,

非所以利燕也. 王自慮此則計過. 無以諫之,非忠臣也.」

王曰:「寡人之於齊、趙也,非所敢欲伐也.」 曰:「夫無謀人之心,而令人疑之,殆;

有謀人之心,而令人知之,拙;謀未發而聞於外,則危. 今臣聞王局處不安,食飲不甘,

思念報齊,身自削甲扎,曰有大數矣,妻自組甲扎,曰有大數矣,有之乎?」

[연왕이 묻기를 : “그대가 말하는 천하의 명철한 군주는 과연 어떤 사람을 말하는 것이오?”라고 하자.
소대가 대답하기를 : “신이 듣건대 ‘명철한 군주는 자신의 잘못을 듣고자 힘쓰나 자신의 선행에 대해서는 듣고

싶어 하지 않는다’고 했습니다. 이에 신은 대왕의 잘못을 말씀드리도록 하겠습니다. 무릇 제, 조 두 나라는 대왕의

원수이고, 초, 위 두 나라는 대왕의 맹방입니다. 그런데 지금 대왕이 원수를 받들어 맹방을 치려 하고 있습니다.

이는 연나라를 이롭게 하는 것이 아닙니다. 만일 대왕이 이같이 생각했다면 이는 계책이 잘못된 것이고,

군신들이 이를 간하지 않았다면 그들은 충신이 아닙니다.”라고 하였다.
이에 연왕 쾌가 말하기를 : “과인은 제, 조 두 나라에 대해 감히 공격할 생각을 갖고 있지 않소.”라고 하자.
그러자 소대가 말하기를 : “무릇 도모할 생각도 없으면서 상대방이 의혹을 갖게 하는 것은 스스로 의심을 사는 것이고, 도모할 생각이 있으면서 상대방이 이를 알게 하는 것은 졸렬하고, 도모하기도 전에 얘기가 밖으로 새나가면 위태로워

집니다. 신은 대왕이 한 곳에 평안히 머물지 못하고, 음식을 먹어도 맛을 모르며 오로지 제나라에 대한 보복만을

생각하고 있다고 들었습니다. 이에 손수 갑옷을 입어 보고 말하기를, ‘나에게 제나라를 칠 큰 계책이 있다’라고 하고,

부인도 갑옷의 띠를 얽으면서 말하기를 ‘우리에게 대수가 있다’고 하시는데 정말 있는 것입니까?"라고 하였다.]

 

王曰:「子聞之,寡人不敢隱也. 我有深怨積怒於齊,而欲報之二年矣. 齊者,我讎國也, 

故寡人之所於伐也.  直患國弊,力不足矣. 子能以燕敵齊,則寡人奉國而委之於子矣.」 

對曰:「凡天下之戰國七,而燕處弱焉;獨戰則不能,有所附則無不重. 南附楚則楚重,

西附秦則秦重,中附韓、魏則韓、魏重.  茍所附之國重,此必使王重矣.  今夫齊王,長主也,

而自用也. 南攻楚五年,畜積散.  西困於秦三年,民憔瘁,士罷弊. 北與燕戰,覆三軍,獲二將,

而又以其餘兵南面而舉五千乘之勁宋,而包十二諸侯.  此其君之欲得也,其民力竭也,安猶取哉?

且臣聞之數戰則民勞,久師則兵弊.」

[이에 연왕 쾌가 말하기를 : “그대가 그 얘기를 이미 들었다면 과인이 감히 숨기지는 않겠소. 나는 제나라에 대해 깊은

원한과 분노를 품고 있소. 이에 두 해 동안 잠시도 복수코자 하는 생각을 버린 적이 없소. 제나라는 과인의 원수요.

과인이 참으로 제나라를 치고 싶소. 다만 나라가 피폐해 역부족일 뿐이오. 만일 그대가 능히 연나라로 하여금

제나라를 대적하게 해줄 수 있다면 과인은 나라를 그대에게 맡기도록 하겠소.”라고 하자.
소대가 대답하기를 : “무릇 천하의 전국(戰國)은 모두 7국입니다. 그 중 연나라는 약소국에 속합니다.

다른 나라와 홀로 싸우면 힘이 달리지만 만일 다른 나라를 지원하면 그 나라는 그 힘이 막강해지지 않을 수 없습니다.

남쪽으로 초나라를 지원하면 초나라가 막강해지고, 서쪽 진나라를 지원하면 진나라가 막강해지고,

중앙으로 한, 위 두 나라를 지원하면 두 나라 또 막강해질 수밖에 없습니다. 연나라의 지원을 받는 나라가 막강해지면

틀림없이 대왕 또한 막강해지게 됩니다. 지금 제민왕은 현군이기는 하나 자신의 강대함을 과신하고 있습니다.

이에 남쪽으로 초나라를 치면서 5년 동안이나 아무런 성과도 거두지 못해 지금 재력은 바닥이 나 있는 상황입니다.

또 서쪽으로 한, 위 두 나라와 연합해 진나라를 치면서 3년 동안 힘을 소진시켜 지금 백성들은 굶주림으로 초췌하고

병사들 또한 크게 지쳐 있습니다. 그런데 다시 북쪽으로 군사를 이끌고 가 연나라아 싸워 연나라의 3군을 복멸시키고

장수 2 명을 사로잡았습니다. 이어 다시 오랫동안 전장에 나와 있는 병사들을 이끌고 남쪽으로 내려가 5천 승의

강한 송나라를 공략하고는 마침내 12제후의 나라를 병탄하려 하고 있습니다. 이리되면 제왕의 욕망은 실현되겠지만

백성들은 마침내 기력을 모두 소진하고 맙니다. 그러니 어찌 더 이상 다른 나라와 싸울 수 있겠습니까.

신이 듣건대 ‘자주 싸우면 백성이 지치고, 오래 싸우면 병사들이 지친다’고 했습니다.”라고 하였다.]

 

王曰:「吾聞之齊有清濟濁河,可以為固;有長城、鉅防足以為塞。誠有之乎?」

對曰:「天時不與,雖有清濟、濁河,何足以為固? 民力窮弊,雖有長城鉅防,何足以為塞?

且異日也,濟西不役,所以備趙也;河北不師,所以備燕也. 今濟西、河北,盡以下降矣,

封內弊矣.  夫驕主必不好計,而亡國之臣貪於財.  王誠毋愛寵子、母弟以為質,

寶珠玉帛以事其左右,彼且德燕而輕亡宋,則齊可亡已.」 王曰:「吾終以子受命於天矣?」

曰:「內寇不與,五敵不可距. 王自治其外,臣自報其內,此乃亡之之勢也.」

[연왕 쾌가 묻기를 : “과인이 듣건대 제나라는 맑은 제수와 탁한 황하가 있어 족히 천혜의 방어벽으로 삼을 만하고,

장성과 제방은 족히 천혜의 요새로 삼을 만하다 라고 했소. 이것이 사실이오?”라고 하자.
소대가 대답하기를 : “천시가 돕지 않으면 아무리 맑은 제수와 탁한 황하가 있다한들 무슨 방어벽이 되겠습니까?

백성의 힘이 다하고 피폐해 진다면 비록 장성과 제방이 있다한들 무슨 요새가 될 수 있겠습니까?

또 제나라는 지난 번에 제수의 서쪽에서 병사들을 조련한 것은 조나라에 침공에 대비한 것이고,

하수의 북쪽에서 병사들을 조련한 것은 연나라의 침공에 대비한 것입니다. 그러나 지금 제서와 하북의 군사들은

말할 것도 없고 국내 또한 크게 피폐해져 있는 상황입니다. 무릇 교만한 군주는 계책을 좋아하지 않고,

나라를 망칠 신하들은 재물을 탐내는 법입니다. 대왕께서 실로 공자나 동복동생을 사랑만 하지 마시고 이들을

제나라에 인질로 보내고, 보주옥백(寶珠玉帛)으로 제왕의 측근을 받들면 제나라는 연나라에 크게 감격해 할 것입니다.

그리되면 곧 피폐한 군사를 이끌고 다시 출병하여 송나라를 멸망시키고자 할 것이니 제나라의 국력은 더욱

피폐해질 것입니다. 이때를 틈 타 제나라를 공격하면 가히 멸망시킬 수 있습니다.”라고 하였다.
이에 연왕 쾌가 크게 기뻐하며 말하기를 : “과인은 그대의 가르침대로 반드시 제나라를 공격할 것이오.

천명을 좇아 그대의 가르침을 받아들이겠소.”라고 하자,
소대가 말하기를 : “안에 있는 적(내란)을 제압하지 못하면 외적을 제압할 수 없습니다.

대왕께서 병사들을 직접 이끌고 제나라를 공격함으로써 외적을 제압해 주기 바랍니다.

신은 제나라로 가 이간책을 써서 내응토록 함으로써 대왕께 보답하겠습니다.

이야말로 제나라를 멸망시킬 수 있는 확실한 기세가 아닐 수 없습니다.”라고 하였다.]

燕王噲既立,蘇秦死於齊.  蘇秦之在燕也,與其相子之為患難,而蘇代與子之交.

及蘇秦死,而齊宣王復用蘇代.

[기원전 320, 연왕 쾌가 보위에 오른 뒤 소진이 제나라에서 죽었다.

소진은 연나라에 있을 때 연나라 상국 자지(子之)와 인척관계를 맺었다. 소대도 자지와 가까이 지냈다.

소진이 죽자 제선왕(齊宣王)이 소대를 다시 기용했다.]

 

燕噲三年,與楚、三晉攻秦,不勝而還. 子之相燕,貴重主斷. 蘇代為齊使於燕,燕王問之曰:

「齊宣王何如?」 對曰:「必不霸.」燕王曰:「何也?」對曰:「不信其臣.」

蘇代欲以濟燕王以厚任子之也.  於是燕王大信子之.  子之因遣蘇代百金,聽其所使.

鹿毛壽謂燕王曰:「不如以國讓子之. 人謂堯賢者, 以其讓天下於許由,由必不受,有讓天下之名,

實不失天下. 今王以國讓相子之. 子之必不敢受, 是王與堯同行也.」 燕王因舉國屬子之,子之大重.

或曰:「禹授益而以啟為吏, 及老, 而以啟為不足任天下, 傳之益也. 啟與支黨委公益而奪之天下,

是禹名傳天下於益,其實令啟自取之. 今王言屬國子之,而吏無非太子人者,是名屬子之,

而太子用事.」 王因收印自三百石吏而效之子之. 子之南面行王事,而噲老不聽政,顧為臣,

國事皆決子之.

[연왕 쾌 3년(기원전 318), 연나라가 초나라 및 3진과 함께 진나라를 공격했으나 이기지 못하고 물러났다.

이때 연나라에서는 자지가 상국의 존귀한 위세를 과시하며 국정을 독단하고 있었다.

마침 소대가 제나라를 위해 연나라에 사신으로 오자 연왕 쾌가 묻기를 : “제선왕은 어떤 사람이오?”라고 하자.
소대가 대답하기를 : “결코 패자가 될 수 없는 사람입니다.”라고 하였다. 또 묻기를 : "어째서 그렇다는 것이오?”하자.
소대가 대답하기를 : “신하를 신용하지 않기 때문입니다.”라고 하였다.
이때 소대는 연왕 쾌를 격동시켜 자지를 중용하도록 만들고자 했다. 이에 연왕이 과연 자지를 크게 신뢰하자,

자지는 소대에게 1백 금을 보내면서 그를 돕고자 했다. 그러자 소대가 보낸 녹모수(鹿毛壽: 「한비자」의 潘壽)가

연왕 쾌에게 말하기를 : “나라를 자지에게 양도하느니만 못합니다. 사람들이 요임금을 현명하다고 말하는 것은

천하를 허유(許由)에게 양도하려 했기 때문입니다. 당시 허유는 천하를 받을 리 없었습니다.

그런데 요임금은 양보하는 모습을 보임으로써 명분상 허유에게 천하를 양도하려 했다는 칭송을 얻고,

실질상 천하를 잃지 않았던 것입니다. 지금 대왕께서 나라를 상국인 자지에게 양도하고자 하면 자지는 틀림없이

받아들이지 않을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대왕께서는 요임금과 같은 행동을 한 셈이 됩니다.”라고 하였다.
이에 연왕 쾌는 나라를 들어 자지에게 위탁하자 자지의 위세는 더욱 높아졌다. 이때 어떤 사람이 자지에게 말하기를 :
“우임금은 국정을 백익(伯益)에게 맡기고 아들 계(啓)를 그의 하리(下吏)로 삼았습니다. 노년이 되자 계에게는 천하를

맡길 수 없다고 판단해 백익에게 천하를 넘겼습니다. 계는 지지 세력을 모아 백익을 공격하고 천하를 빼아았습니다.

이는 우임금이 명분상 천하를 백익에게 전했다는 칭송을 얻고, 실질상 계로 하여금 천하를 보유하게 한 것입니다.

지금 연왕은 나라를 자지에게 위임했으나 하리 중에는 태자의 사람이 아닌 자가 없습니다.

이는 겉으로만 나라를 자지에게 맡긴 것으로 사실상 태자가 국정을 도맡은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그러자 연왕 쾌는 녹봉이 3백 석 이상 되는 관원으로부터 관인을 회수해 이를 자지에게 준 뒤 이들에 대한 임면권을

모두 자지에게 맡겼다. 이에 자지는 남면하여 군왕으로서의 업무를 보았다. 연왕 쾌는 많은 나이를 이유로 정사에

참여하지 않음으로써 오히려 자지의 신하가 되고 말았다. 이로써 국사는 모두 자지의 손에 의해 결정되었다.]

子之三年,燕國大亂,百姓恫怨,將軍市被、太子平謀,將攻子之.

儲子謂齊宣王:「因而仆之,破燕必矣.」 王因令人謂太子平曰:「寡人聞太子之義,

將廢私而立公,飭君臣之義,正父子之位,寡人之國小,不足先後. 雖然,則唯太子所以令之.」

太子因數黨聚眾,將軍市被圍公宮,攻子之,不克;將軍市被及百姓乃反攻太子平.

將軍市被死已殉,國構難數月,死者數萬眾,燕人恫怨,百姓離意.  孟軻謂齊宣王曰:

「今伐燕,此文、武之時,不可失也.」 王因令章子將五都之兵,以因北地之眾以伐燕.
士卒不戰,城門不閉,燕王噲死.  齊大勝燕,子之亡.  二年,燕人立公子平,是為燕昭王.

[기원전 315년, 자지가 국정을 장악한지 3년이 되자, 연나라가 크게 어지러워져 백성들이 애통해 하며 슬퍼하였다.

이에 장군 시피(市被)와 태자 평(平)이 모의해 자지를 공격하고자 했다. 이때 제나라 사람 저자(儲子)가 제선왕에게

건의하기를 : “이 틈을 타 자지를 제거해 버리면 틀림없이 연나라를 깨뜨릴 수 있습니다.”라고 하였다.
이에 제선왕이 사람을 연나라 태자 평에게 보내 말하게 하기를 : “과인이 듣건대 태자는 의기로운 사람으로 

사사로움을 폐하고 공을 받들며, 군신의 예를 바로 세우고 부모와 자식간의 위치를 바르게 하는데 있다고 들었소.

과인의 나라는 소국이라 연나라 사태에 적극 개입하는 것은 어렵소. 비록 그렇기는 하나 태자가 원하면

오로지 태자의 명을 따를 셈이오.”라고 하였다. 태자 평이 크게 고무되어 이내 급히 당을 만들어 무리를 모으자,

장군 시피가 무리를 이끌고 가 공궁(公宮)을 포위한 채 자지를 공격했으나 이기지 못했다. 오히려 백성들이 태자 평을

공격하는 지경에 이르게 되자, 태자 평과 장군 시피는 죽고 말았다. 내란이 여러 달 계속되자 사망자가 수만 명에

달하게 되었다. 연나라 백성들이 애통해 하며 민심이 이반되자 맹자(孟軻)가 제선왕에게 말하기를 : “지금 연나라를

공격하면 주문왕이 숭(崇)을 치고 주무왕이 은주(殷紂)를 친 것과 같습니다. 이때를 놓쳐서는 안 됩니다.”라고 하였다.
이에 제선왕은 장수 장자(章子: 「맹자」의 匡章)에게 명해 5도지병(제나라 도읍 임치와 사방의 변방거점을 지키는

소위 五家之兵으로 당시 제나라는 다른 나라와 달리 시종 郡을 두지 않았다)의 정예병과 북지(北地: 연나라 국경)의

백성들을 이끌고 가 연나라를 공격하게 했다. 그러자 연나라의 병사들은 싸울 생각이 없어 성문도 닫지 않자

결국 연왕 쾌는 죽고 말았다. 제나라가 연나라에 대승을 거두자 자지는 망명하고 말았다.

이로부터 2년 뒤 연나라 사람들이 연왕 쾌의 아들을 연소왕(燕昭王: 「사기」연세가와 「전국책」연책은

태자 平이 연소왕이라고 기록했으나 錢穆 등은 공자 職이라고 주장)으로 옹립했다.

初,蘇秦弟厲因燕自子而求見齊王. 齊王怨蘇秦,欲囚厲,燕自子為謝乃已,

遂曰:「齊王其伯也乎?」 曰:「不能.」 曰:「何也?」 曰:「不信其臣.」

於是燕王專任子之,已而讓謂燕大亂.  齊伐燕,殺王噲、子之. 燕立昭王.

而蘇代、厲遂不敢入燕,皆終歸齊,齊善待之.  蘇代過魏,魏為燕執代.

齊使人謂魏王曰:「齊請以宋封涇陽君,秦不受. 秦非不利有齊而得宋地也,不信齊王與蘇子也.

今齊、魏不和,如此其甚,則齊不欺秦. 秦信齊,齊、秦合,涇陽君有宋地,非魏之利也.

故王不如東蘇子,秦必疑而不信蘇子矣. 齊、秦不和,天下無變,伐齊之形成矣.」

於是出蘇代之宋,宋善待之.

[기원전 319, 처음에 소진의 아우 소려(蘇厲)가 제나라에 인질로 가 있는 연왕 쾌의 아들을 통해 제선왕을 만나려고

했다. 그러나 제선왕은 소진을 원망하고 있었던 까닭에 오히려 소려를 체포하고자 했다. 이에 연왕 쾌의 아들이

소려를 위해 대신 사죄함으로써 소려는 간신히 체포를 면하게 되었다. 이후 소려는 마침내 충성을 맹세하고

제나라의 신하가 되었다. 당시 연나라 상국 자지는 소진의 또 다른 아우 소대(蘇代)와 인척관계를 맺고 있었다.

그는 연나라의 권력을 장악할 속셈으로 소대를 제나라로 보내 연왕 쾌의 아들을 돕게 했다.

제나라가 소대를 연나라에 사자로 보내자 연왕 쾌가 소대에게 묻기를 : “제왕은 패자가 될 만한 인물이오?”라고 하자.
소대가 대답하기를 : “그럴만한 능력이 없습니다."라고 하였다.  연왕이 묻기를 : “왜 그렇다는 것이오.”라고 하자.
소대가 대답하기를 : “신하를 신용하지 않기 때문입니다.”라고 하였다.

이에 연왕 쾌는 국사를 모두 자지에게 맡기고 얼마 후에는 사실상 보위까지 넘겼다. 

이에 연나라가 크게 어지러워지자 제나라는 이 틈을 타 연나라를 공격하여 연왕 쾌와 자지를 죽였다.

연나라 백성들이 연소왕을 옹립하자 결국 소대와 소려는 연나라에 들어가지 못하고 제나라의 신하로 남게 되었다.

제나라에서는 두 사람을 크게 우대했다. 소대가 위나라를 지나가게 되자, 위나라가 연나라를 위해 그를 체포했다.

이에 제나라가 사람을 위소왕(魏昭王)에게 보내 말하게 하기를 : “제나라는 송(宋) 땅에 경양군을 봉하려 하나

진나라가 이를 받아들이지 않고 있습니다. 진나라는 제나라를 자기 편으로 삼고 송 땅까지 얻게 되는 것이

이롭지 못하다고 여겨서가 아니라  제왕(齊王: 제민왕)과 소진이 위나라와 친교를 맺을까 의심했기 때문입니다.

지금 제, 위 두 나라의 불화가 이처럼 심하니 제나라는 틀림없이 진나라를 속이지 않을 것입니다.

진나라가 제나라를 신뢰해 제, 진이 연합하면 경양군은 송 땅을 차지할 것이니 이는 위나라에 이롭지 못할 것입니다.

그러니 대왕께서는 다시 소자(소대)를 석방해 동쪽으로 돌려 보내십시오.그러면 진나라는 틀림없이 제, 위 두 나라가

연합할까 의심해 소자를 믿지 않으려 할 것입니다. 제, 진이 연합하지 않으면 천하 제후들 사이의 관계에는 아무런

변화가 없을 것입니다. 소대의 체포로 알 수 있듯이 제, 위 두 나라의 관계는 악화되고 말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이에 소대를 석방해 송나라로 보내자 송나라가 그를 후대했다.]

 

燕昭王收破燕後即位燕昭王收破燕後即位,卑身厚幣,以招賢者,欲將以報讎.
故往見郭隈先生曰:「齊因孤國之亂,而襲破燕. 孤極知燕小力少,不足以報. 然得賢士與共國,

以雪先王之恥,孤之愿也. 敢問以國報讎者奈何?」

郭隈先生對曰:「帝者與師處,王者與友處,霸者與臣處,亡國與役處. 詘指而事者,北面而受學,

則百己者至. 先趨而後息,先問而後嘿,則什己者至. 人趨己趨,則若己者至. 馮幾據杖,眄視指使,

則廝役之人至. 若恣睢奮擊,呴籍叱哆咄,則徒隸之人至矣. 此古服道致士之法也.

王誠博選國中之賢者,而朝其門下,天下聞王朝其賢臣,天下之士必趨於燕矣.」

[기원전 311, 연소왕(燕昭王)은 자지(子之)의 난으로 거의 망해가는 연나라를 수습한 뒤 보위에 올랐다.

그리고는 곧 몸을 낮추고 예물을 두텁게 하여 천하의 현자를 두루 불러모았다. 이는 원수인 제나라에 보복하기 위한

것이었다. 이에 우선 연나라의 처사 곽외(郭隈)선생을 찾아가 묻기를 : “제나라는 우리 연나라의 내란을 틈 타

기습해 파괴시켰소. 과인은 연나라가 소국이고 힘이 부족해 제나라에 복수할 수 없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소.

그러나 현사를 얻어 함께 나라를 다스리면서 선왕의 치욕을 씻고 싶소. 이는 과인의 소원이기도 하오.

감히 묻건대 과인이 나라를 들어 복수하고자 하려면 어찌해야 하오?”라고 하자.
곽외 선생이 대답하기를 : “제왕은 현사(賢師)와 함께 다스리고, 왕자(王者)는 현우(賢友)와 함께 다스리고,

패자(覇者)는 현빈(賢臣)과 함께 다스리고, 나라를 망하게 하는 군주는 역부(役夫)와 함께 다스리는 법입니다.

이에 굴지사지(詘指事之: 몸을 굽혀 섬김)하여 북면수학(北面受學: 스승으로 삼아 師事함)하면

백기자(百己者: 자신보다 1백 배나 뛰어난 사람)가 이르고, 선추후식(先趨後息: 남보다 먼저 일하고 나중에 쉼)하여

선문후묵(先問後嘿 :남보다 먼저 가르침을 받고 나중에도 쉼없이 가르침을 받고자 함)하면 십기자(什己者)가 이르고,

인추기추(人趨己趨: 남이 하면 쫓아서 함)하면 약기자(若己者: 자신과 같은 수준의 사람)가 이르고,

빙궤거장(馮机據杖: 지팡이에 기대어 무사태평함)하여 면시지사(眄視指使: 곁눈질과 손가락으로 사람을 부림)하면

시역지인(廝役之人: 잡역부 수준의 소인배)만 이르고, 자휴분격(恣睢奮擊: 눈을 부릅뜨고 포악한 행동을 함)하여

가책질돌(呵哆叱咄: 큰 소리로 꾸짖음)하면 도례지인(徒隷之人: 노복 수준의 천인)만 이르게 됩니다. 이것이 예로부터

정도를 행하여 현사를 불러들이는 방법입니다. 만일 대왕이 널리 현사를 구할 생각으로 현사의 문하(門下)를 예방하면

대왕께서 현신(賢臣)을 예방했다는 소문만 듣고도 천하의 현사들이 연나라로 다투어 모여들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昭王曰:「寡人將誰朝而可?」郭隈先生曰:「臣聞古之君人,有以千金求千里馬者,三年不能得.

涓人言於君曰:『請求之.』君遣之.  三月得千里馬,馬已死. 買其首五百金,反以報君.

君大怒曰:『所求者生馬,安事死馬而捐五百金?』

涓人對曰:『死馬且買之五百金,況生馬乎?天下必以王為能市馬,馬今至矣.』於是不能期年,

千里之馬至者三. 今王誠欲致士,先從隈始;隈且見事,況賢於隈者乎?豈遠千里哉?」

於是昭王為隈筑宮而師之. 樂毅自魏往,鄒衍自齊往,劇辛自趙往,士爭湊燕.

燕王吊死問生,與百姓同其甘苦. 十二八年,燕國殷富,士卒樂佚輕戰.

[이에 연소왕이 묻기를 : “그렇다면 과인은 과연 누구를 먼저 예방하는 것이 좋겠소?”라고 하자.
곽외 선생이 대답하기를 : “신은 든건대 옛날 어떤 군주가 천리마를 구하고자 했으나 3년이 넘도록 얻지 못했다고

합니다. 그러자 한 측근이 자청하고 나서자 군주가 이를 허락했습니다. 그 측근이 3 달이 걸려 과연 천리마의 소재를

알아내고 마침내 그곳에 도착해 보니 불행히도 천리마는 이미 죽어 있었습니다. 이에 할 수 없이 천리마의 머리를

5백 금으로 사가지고 돌아온 뒤 이를 군주에게 보고했습니다. 그러자 군주가 대노하여 호통치기를,

‘내가 구하는 것은 살아 있는 천리마다. 어찌하여 죽은 말에 5백 금이나 들인 것인가’라고 했습니다.

이에 그 측근이 대답하기를, ‘죽은 말도 5백 금으로 사는데 하물며 살아 있는 말이야 더 말할 것이 있겠습니까?

천하인은 모두 군주가 말을 제대로 사들일 줄 안다고 생각할 것입니다. 조만간 양마(良馬)가 올 것입니다’라고 하자,

과연 1년도 채 안돼 천리마가 세 필이나 이르렀습니다. 지금 대왕께서 현사를 불러들이고자 하면 우선 저로부터

시작하십시오. 신과 같은 자도 대왕에 의해 발탁된다면 신보다 뛰어난 사람이야 더 이상 말할 것이 있겠습니까?

이들이 어찌 천리를 마다하겠습니까?”라고 하였다.
이에 연소왕이 관사를 새로 지어 곽외를 머물게 한 뒤 스승으로 섬겼다. 그러자 악의(樂毅)가 위나라에서,

추연(鄒衍)이 제나라에서, 극신(劇辛)이 조나라에서 찾아오고 천하의 현사들이 다투어 연나라로 몰려들었다.

연소왕은 제나라와의 전쟁 당시 죽은 자들은 장사지내고 생존자들은 위문하면서 백성들과 동고동락을 같이 했다.

그 후 28년 만에 약소국 연나라가 부유해졌으며 병사들은 생활이 안정되자 전쟁을 두려워하지 않게 되었다.]

 

於是遂以樂毅為上將軍,與秦、楚、三晉合謀以伐齊.  齊兵敗,閔王出走於外. 

燕兵獨追北入至臨淄,盡取齊寶,燒其宮室宗廟.  齊城之不下者, 唯獨莒卽墨.

[이에 연소왕은 마침내 악의를 상장군으로 삼고 진, 초 및 3진 등과 더불어 제나라 공벌을 모의했다.

결국 제나라 군사가 대패하자 제민왕은 도읍인 임치(臨淄) 밖으로 도주하게 되었다.

이때 연나라 군사는 단독으로 도주하는 진나라 군사를 추격하는 동시에 제나라 도읍 임치에 입성했다.

이에 제나라 국보를 모두 취하고 궁전과 종묘를 불태웠다.

당시 제나라 성읍 중 함락되지 않은 곳은 겨우 거(莒)와 즉묵(卽墨) 뿐이었다.]

齊伐宋,宋急. 蘇代乃遺燕昭王書曰:「夫列在萬乘,而寄質於齊,名卑而權輕. 秦、齊助之伐宋,

民勞而實費.  破宋,殘楚淮北,肥大齊,讎強國,國弱也. 此三者,皆國之大敗也,而足下行之,

將欲以除害取信於齊也.  而齊未加信於足下,而忌燕也愈甚矣.  然則足下之事齊也,失所為矣.
夫民勞而實費,又無尺寸之功,破宋肥讎,而世負其禍矣. 足下以宋加淮北,強萬乘之國也,

而齊并之,是益一齊也. 北夷方七百里, 加之以魯、衛,此所謂強萬乘之國也,而齊并之,

是益二齊也.  夫一齊之強, 而燕猶不能支也, 今乃以三齊臨燕, 其禍必大矣. 

[기원전 288, 제나라가 송나라를 공격하자, 송나라가 위급하게 되었다. 이때 소진이 연소왕에게 서신으로 알리기를 :
“무릇 만승지국의 연나라가 제나라에 인질을 보냄으로써 그 명예가 낮아지고 권세 또한 가벼워지게 되었습니다.

제나라의 명을 받들어 제나라와 함께 송나라를 공격하게 되면 백성들은 노역에 지치고 많은 전쟁비용이 들게 됩니다.

송나라를 공략하고 초나라의 회북(淮北)을 점거하면 제나라는 자연 강해질 수밖에 없으니 결국 원수의 나라인

제나라는 강대해지고 연나라는 쇠약하게 됩니다. 이 3 가지 일이 일어나면 연나라는 커다란 재난을 입게 됩니다.

그런데 지금 족하는 제나라로 가서 장차 제나라의 연나라에 대한 불신을 제거하고 신뢰를 얻고자 하는 것입니까.

그러나 제나라는 족하에 대해 신뢰하지 않고 있고 연나라를 꺼리는 마음이 더욱 심해지고 있습니다.

그러니 족하가 제나라를 섬기는 것은 잘못을 저지르는 것입니다. 무릇 백성들이 노역에 지치고 많은 전쟁비용이

들게 되면 한 뼘의 공도 세우지 못할 뿐만 아니라 오히려 송나라를 깨뜨림으로써 원수의 나라를 강하게 만드는 셈이

됩니다. 그리되면 장차 누대에 걸쳐 커다란 화를 입게 될 것입니다. 무릇 5천 승의 송나라에 회북 땅을 더하면

만승지국이 될 수 있으나 오히려 제나라에게 이를 병탄하게 만들 뿐입니다. 이리되면 또 하나의 제나라를 만들어 주는

셈이 됩니다. 구이(九夷)의 땅은 사방 7백 리나 됩니다. 노(魯), 위(衛) 두 나라는 이 땅을 더하면 소위 만승지국이

될 수 있으나 오히려 제나라로 하여금 홀로 이를 병탄하게 만들 뿐입니다. 이리되면 또 다른 제나라를 하나 더 만들어

주는 셈이 됩니다. 이들 3개의 제나라 중 어느 하나만의 무력일지라도 연나라로서는 감당하기 어렵습니다.

만일 이들 3개의 제나라가 일제히 연나라를 치면 그 화는 이루 말할 수 없이 클 것입니다.

 

雖然, 臣聞知者之舉事也, 轉禍而為福, 因敗而成功者也.  齊人紫敗素也,而賈十倍.

越王勾踐棲於會稽,而後殘吳霸天下. 此皆轉禍而為福,因敗而為功者也.
今王若欲轉禍而為福,因敗而為功乎? 則莫如遙伯齊而厚尊之,使使盟於周室,盡焚天下之秦符,

約曰:『夫上計破秦,其次長賓之秦.』 秦挾賓客以待破,秦王必患之. 秦五世以結諸侯,

今為齊下;秦王之志,茍得窮齊, 不憚以一國都為功. 然而王何不使布衣之人, 以窮齊之說說秦,

謂秦王曰:『燕、趙破宋肥齊尊齊而為之下者, 燕、趙非利之也,弗利而勢為之者, 何也?

以不信秦王也. 今王何不使可以信者接收燕、趙.

[비록 그렇기는 하나, 신이 듣건대 지혜로운 자는 일을 처리할 때 화를 바탕으로 복이 되도록 바꾸고, 실패를 근거로

공을 이룬다고 하였습니다. 제나라에서는 제환공이 자색을 좋아한 이래 흰 옷감에 자색을 물들이면 10배의 가격을

받게 되었습니다. 월나라 구천은 회계산에 숨어들었으나 마침내 오나라를 멸하고 천하의 패자가 되었습니다.

이 모두 화를 바탕으로 복이 되도록 바꾸고, 실패를 근거로 공을 이룬 경우입니다. 지금 대왕께서는 화를 바탕으로

복이 되도록 바꾸고, 실패를 근거로 공을 이루고자 하는 것입니까? 그렇다면 제나라를 높여 패자로 섬기면서

깊은 존경의 뜻을 표하고, 사자를 제나라에 보내 결맹하고, 제후들이 진나라와 수교하면서 주고받은 부절(符節)을

불태우면서 맹서하기를, ‘최상책은 진나라를 깨뜨리는 것이고, 차상책은 진나라를 물리치는 것입니다’라고 하느니만

못합니다. 그리 하면 진나라는 사방으로 고립되는 위협을 받아 앉아서 무너지는 것을 기다릴 수밖에 없고

진왕(秦王: 진소양왕) 또한 필시 이를 크게 우려할 것입니다. 진나라는 5대에 걸쳐 매년 제후들을 연파함으로써

이들을 굴복시켜 왔습니다. 그러나 이제 제나라가 합종하여 진나라를 고립시키면 합종의 맹주가 될 수 있습니다.

그리되면 진왕은 제나라를 궁지에 몰아넣을 수만 있다면 결코 연나라가 진나라를 이용해 승리를 거두는 것을

꺼리지 않게 될 것입니다. 그런데도 대왕께서는 왜 세객을 진나라로 보내 제나라를 궁지에 몰아넣는 유세를

펼치게 하지 않는 것입니까? 대왕께서는 이들을 시켜 진왕에게 유세하기를, ‘연, 조 두 나라가 송나라를 깨고

제나라를 강하게 만든 뒤 제나라를 높여 합종의 맹주로 삼으면 이는 두 나라의 이익이 되지 않습니다.

그런데도 그리 하려는 것은 무슨 연고입니까. 바로 진왕을 믿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도 지금 대왕께서는 어찌하여 믿을 만한 자를 시켜 연, 조 두 나라를 연합하게 하지 않는 것입니까

今涇陽君若高陵君先於燕、趙,秦有變,因以為質,則燕、趙信秦矣. 秦為西帝,趙為中帝,

燕為北帝,立為三帝而以令諸侯. 韓、魏不聽,則秦伐之. 齊不聽,則燕、趙伐之. 天下孰敢不聽?

天下服聽,因驅韓、魏以攻齊,曰愁反宋地,而歸楚之淮北. 夫反宋地,歸楚之淮北,

燕、趙之所同利也. 并立三帝,燕、趙之所同愿也. 夫實得所利,名得所愿,則燕、趙之棄齊也,

猶釋弊躧. 今王之不收燕、趙,則齊伯必成矣. 諸侯戴齊,而王獨弗從也,是國伐也. 諸侯戴齊,

而王從之,是名卑也. 王不受燕、趙,名卑而國危;王收燕、趙,名尊而國寧. 夫去尊寧而就卑危,

知者不為也.』 秦王聞若說也,必如刺心然,則王何不務使知士以若此言說秦? 秦伐齊必矣.

夫取秦穆交也;伐齊,正利也.  尊上交,務正利,聖王之事也.」 

燕昭王善其書,曰:「先人嘗有德蘇氏,子之之亂,而蘇氏去燕. 燕欲報仇於齊,非蘇氏莫可.」

乃召蘇氏,復善待之. 與謀伐齊,竟破齊,閔王出走.

[지금 경양군(涇陽君)과 고릉군(高陵君)을 먼저 연, 조 두 나라로 보내면 장차 진나라의 정책에 변화가 있을 때

연, 조 두 나라는 이들을 억류하여 인질로 삼을 수 있습니다. 이같이 하면 연,조 두 나라는 진나라를 믿게 될 것입니다.

진나라가 서제(西帝), 조나라가 중제(中帝), 연나라가 북제(北帝)가 된 뒤 이들 3제(三帝)가 제후들을 이끌면 됩니다.

한, 위 두 나라가 명을 듣지 않으면 진나라가 공벌하고, 제나라가 듣지 않으면 연, 조 두 나라가 공벌합니다.

그리하면 천하의 그 누가 감히 3제의 명을 듣지 않겠습니까? 천하가 복종하면 이내 한, 위 두 나라를 앞세워 제나라를

공격하면서 제나라에게 송 땅을 돌려주고 초나라의 회북 땅을 반환하도록 요구합니다. 이는 연, 조 두 나라에게 모두

이익이 됩니다. 3제가 병립하는 것은 연, 조 두 나라의 소원이기도 합니다. 무릇 실리를 얻고 바라는 명분을 얻으면

연, 조 두 나라는 제나라를 마치 헌 짚신처럼 버릴 것입니다. 만일 대왕께서 연, 조 두 나라와 연합하지 않으면

제나라가 필시 합종의 맹주가 될 것입니다. 제후들이 제왕을 옹대할 때 대왕 홀로 따르지 않으면 곧 제후들의 공벌을

면하지 못하게 됩니다. 제후들이 제왕을 옹대할 때 대왕도 좇게 되면 대왕의 명성이 낮아지게 됩니다.

대왕이 연, 조 두 나라와 연합치 않으면 명성도 낮아지고 나라 또한 위험에 처하게 됩니다.

그러나 대왕이 두 나라와 연합하면 명성도 높아지고 나라 또한 평안하게 됩니다.

무릇 명예와 안녕을 버리고 비천과 위험을 취하는 것은 지혜로운 자가 행하는 바가 아닙니다’라고 하십시오.

진왕이 이 얘기를 들으면 틀림없이 크게 아파할 것입니다. 그런데도 대왕께서는 왜 열심히 세객을 진나라로 보내

이같은 얘기를 유세하게 하여 진나라로 하여금 반드시 제나라를 치도록 만들지 않는 것입니까?

연나라가 진나라와 연합하는 것은 최상의 외교이고, 제나라를 공격하는 것이 가장 이로운 것이 됩니다. 

최상의 외교를 중시하면서 최고의 이로움을 위해 애쓰는 것은 성왕(聖王)이 추구한 것이기도 합니다.” 라고 하였다.
연소왕이 이 서신을 읽고 크게 기뻐하며 말하기를 : “선왕은 일찍이 소씨(蘇氏:소진)를 크게 칭송한 바 있다.

그런데 자지의 난으로 소씨가 연나라를 떠났다. 연나라가 제나라에 복수하기 위해서는 소씨가 없어서는 안 된다.”

라고 하며,  이내 소씨를 불러 다시 우대했다. 결국 그와 함께 제나라 공벌을 모의해 마침내 제나라를 대파했다.

이에 제민왕은 황급히 도읍 임치를 빠져나와 도망치고 말았다.]

 

蘇代謂燕昭王曰:「今有人於此,孝若曾參、孝己,信如尾生高,廉如鮑焦、史鰌,

兼此三行以事王, 奚如?」 王曰:「如是足矣.」

對曰:「足下以為足, 則臣不事足下矣. 臣且處無為之事, 歸耕乎周之上地, 耕而食之, 置而衣之.」
王曰:「何故也?」 對曰:「孝如曾參、孝己,則不過養其親其. 信如尾生高,則不過不欺人耳.

廉如鮑焦、史鰌,則不過不竊人之財十. 今臣為進取者也. 臣以為廉不與身俱達,義不與生俱立.

仁義者, 自完之道也,非進取之術也.」

[기원전 286, 소대가 연소왕에게 묻기를 : “지금 여기에 그 효행이 증삼(曾參), 효기(은나라 高宗의 아들)와 같고,

독실한 믿음이 미생고(尾生高)와 같고, 청렴하기가 포초(鮑焦:세상에 대한 불만으로 곡기를 끊고 자진한 은사),

사추(史鰌: 죽을  각오로 현신을 추천하고 간신을 몰아낸 衛나라의 대부)와 같은 사람이 있다고 합시다.

이 3 가지 덕행을 가진 사람이 대왕을 섬긴다고 하면 어찌 되겠습니까?”라고 하자.
연소왕 대답하기를 : “그럴 수만 있다면 나는 매우 만족할 것이오.”라고 하였다.
그러자 소대가 말하기를  : “족하가 그리 생각한다면 신은 족하를 모실 수 없습니다. 신은 장차 아무 것도 하지 않은 채

고향인 동주의 상지(上地: 낙양)에서 농사나 지으며 가솔들의 의식(衣食)을 해결할 생각입니다.”라고 하였다.
연소왕이 묻기를 : “왜 그리 말하는 것이오?”라고 하자.  소진이 대답하기를 : “효행이 증삼, 효기와 같으면 어버이를

모시는데 불과할 뿐입니다. 독실한 믿음이 미생고와 같으면 사람을 속이지 않는 것에 불과할 뿐입니다.

청렴결백함이 포초, 사추와 같으면 다른 사람의 재물을 훔치지 않는 것에 불과할 뿐입니다.

그러나 신은 진취적인 사람입니다. 신이 생각건대 행동이 아무리 청렴결백할지라도 몸은 곤궁한 상황에 놓일

수밖에 없고, 아무리 목숨을 던져 의를 취할지라도 공명을 세울 길은 없습니다.

인의(仁義)라는 것은 스스로 완전해 지려고 노력하는 방법일 뿐이지, 진취적인 술법은 되지 못합니다.”라고 하였다.]

 

王曰:「自憂不足乎?」對曰:「以自憂為足,則秦不出崤塞,齊不出營丘,楚不出疏章.

三王代位,五伯改政,皆以不自憂故也. 若自憂而足,則亦之周負籠而且,何為煩大王之廷耶?

昔者楚取章武,諸侯北面而朝. 秦取西山,諸侯西面而朝. 曩者使燕毋去周室之上,

則諸侯不為別馬而朝矣. 臣聞之,善為事者,先量其國之大小,而揆其兵之強弱, 故功可成,

而名可立也. 不能為事者, 不先量其國之大小, 不揆其兵之強弱, 故功不可成而名不可立也.

今王有東鄉伐齊之心,而愚臣知之. 」 王曰:「子何以知之?」

對曰:「矜戟砥劍,登丘東鄉而嘆,是以愚臣知之. 今夫烏獲舉千鈞之重,行年八十,而求扶持.

故齊雖強國也,西勞於宋,南罷於楚,則齊軍可敗,而河間可取.」

[연소왕이 묻기를 : “ 그럼 스스로 근심하는 것만으로는 부족하단 것이오?”라고 하자.
소진이 대답하기를 : " 스스로 근심하는 것으로는 만족하시겠다면 진나라는 효색(효산의 관문) 밖으로 출병하지

않았을 것이고, 제나라는 영구(營丘) 밖으로 진출하지 않았을 것이며, 초나라 역시 소장(疏章) 밖으로 나가지 않았을

것입니다. 삼왕이 대를 이어 흥기하고, 오패가 서로 패자의 자리를 이은 것은 모두 자양을 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만일 자양으로 족하다면 신 역시 고향으로 내려가 등에 삼태기나 져야지 어찌 대왕의 조정을 욕되게 만들 필요가

있겠습니까? 전에 초나라가 장무(章武: 옛 滄州)를 취하자 제후들이 북면하여 조현했습니다.

또 진나라가 서산(西山: 하남성 의양현)을 취하자 제후들이 서면하여 조현했습니다.

또 전에 연나라가 주실산(周室山) 위로 올라가지 못하게 하자, 제후들이 수레바퀴를 바꾸지 않고 조현했습니다.

신이 듣건대 일을 잘 처리하는 사람은 먼저 적국의 대소와 병사들의 강약을 헤아린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공명을 이루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를 제대로 하지 않으면 공명을 이룰 수 없게 됩니다.

지금 대왕께서 내심 동쪽으로 출병해 제나라를 공격하려고 하는 심정을 어리석은 저도 알고 있습니다.”라고 하였다.
연소왕이 묻기를 : “그대는 그것을 어찌 알았소?”라고 하자.
소대가 대답하기를 : " 창을 정비하고 칼을 간 뒤 동쪽 언덕으로 올라가 소리치는 것을 보고 알았습니다.

지금 제나라는 국력이 소진되어 아무리 역사(力士) 오획(烏獲)이 1천 균의 무게를 들지라도 80세가 되면 사람들의

부축을 받아야 하듯이 쇠잔한 상황에 처해 있습니다. 제나라가 비록 강대하다 할지라도 서쪽으로 송나라를 멸하고,

남쪽으로 초나라의 회북을 취했으니 힘이 소진되었을 수밖에 없습니다. 이때 공격을 감행하면 제나라 군사를

격파하고, 하간(河間)의 땅도 취할 수 있습니다.”라고 하였다.]

 

燕王曰:「善。吾請拜子為上卿,奉子車百乘,子以此為寡人東游於齊,何如?」
對曰:「足下以愛之故與,則何不與愛子與諸舅、叔父、負床之孫,不得,而乃以與無能之臣,

何也? 王之論臣,何如人哉? 今臣之所以事足下者,忠信也,恐以忠信之故,見罪於左右.」

[이에 연소왕이 말하기를 : “옳은 말이오. 나는 그대를 상경에 임명해 수레 1백 승으로 호위하게 할 생각이오.

그대는 과인을 위해 수레를 이끌고 동쪽 제나라로 가 유세해 보면 어떻겠소?”라고 하자.
소대가 대답하기를 : “족하께서는 신을 아껴 수레 1백 승을 내리려고 하나 그렇다면 왜 자식들과 형제, 숙부,

걷지 못해 겨우 탁자에 의지해 일어서는 어린 손자에게는 내리지 않는 것입니까?

만일 그럴 수 없다면 저와 같이 무능한 신하에게 내리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대왕은 신을 어떤 사람으로 보는 것입니까? 지금 신이 족하를 섬기는 것은 충신(忠信)입니다.

신은 충신을 행하다가 좌우(左右) 대신들에게 죄만 뒤집어 쓰는 것은 아닌지 두렵습니다.”라고 하였다.]

 

王曰:「安有為人臣盡其力,竭其能,而得罪者乎?」

對曰:「臣請為王譬. 昔周之上地嘗有之. 其丈夫官三年不歸, 其妻愛人.

其所愛者曰:『子之丈夫來,則且奈何乎?』 其妻曰:『勿憂也,吾已為藥酒而待其來矣.』

已而其丈夫果來,於是因令其妾酌藥酒而進之. 其妾知之,半道而立.

慮曰:『吾以此飲吾主父,則殺吾主父;以此事告吾主父,則逐吾主母、使查吾父、逐吾主母者,寧佯躓而覆之.』 

於是因佯僵而仆之.  其妻曰:『為子遠行來之,故為美酒,今妾奉而仆之.』

其丈夫不知,縛其妾而笞之. 故妾所以笞者,忠信也. 今臣為足下使於齊,恐忠信不諭於左右也.

臣聞之曰:萬乘之主,不制於人臣. 十乘之家,不制於眾人. 匹夫徒步之士,不制於妻妾.

而又況於當世之賢主乎?臣請行矣,愿足下之無制於群臣也.」

[연소왕이 묻기를 : "어찌하여 신하가 되어서 그 힘과 능력을 다했는데도 죄를 뒤집어 쓴다고 하는 것이오.”라고 하자.
소진이 대답하기를 : “신이 대왕을 위해 비유를 하나 들겠습니다. 옛날 주나라의 상지(上地)에 한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 사람은 3년 동안 관직에 있었으나 집에 한 번도 가지 않았습니다. 이에 그 부인이 사통하게 되었습니다.

간부가 묻기를, ‘그대의 남편의 돌아오면 어찌할 생각이오’라고 하자 그 부인이 대답하기를, ‘그대는 걱정하지 마시오.

내가 이미 독주를 준비해 놓고 그가 돌아오기를 기다리고 있소’라고 했습니다. 그 남편이 과연 돌아오자

부인은 첩을 시켜 독주를 올리게 했습니다. 이때 그 첩은 이 사실을 알고 도중에 생각하기를,

‘독주를 주부(남편)에게 올리면 주부를 죽이는 것이고, 이 사실을 주부에게 알리면 주모(본처)가 쫓겨날 것이다.

주부를 죽이고 주모를 쫓겨나게 하느니 차라리 짐짓 넘어져 술잔을 뒤엎느니만 못하다’라고 했습니다.

이에 거짓으로 넘어져 술잔을 엎었습니다. 그러자 그 부인이 남편에게 고하기를, ‘그대가 먼 길을 오느라 고생했기에

이를 위로하고자 미주(美酒)를 준비해 놓았는데 지금 첩이 이를 들고 오다가 엎었습니다’라고 했습니다.

남편은 내막도 모르고 그 첩을 묶어놓고 태형을 가했습니다. 그 첩이 태형을 당한 것은 충신했기 때문입니다.

지금 신은 족하를 위해 제나라에 사자로 갔다오고도 충신했던 탓에 오히려 좌우에게 인정을 받지 못하고 있습니다.

신이 듣건대 ‘만승지주(萬乘之主)는 인신에게 제압되지 않고, 십승지가(十乘之家)는 중인들에게 제압되지 않고,

필부와 도보지사(徒步之士: 맨발로 다니는 비천한 인물)는 처첩에게 제압되지 않는다’고 했습니다.

하물며 당세의 현주야 더 이상 말할 것이 있겠습니까. 신은 떠나고자 합니다.

원컨대 족하께서는 군신들에게 제압당하는 일이 없으시기를 바랍니다.”라고 하였다.]

 

燕王謂蘇代曰:「寡人甚不喜誕者言也.」 蘇代對曰:「周地賤媒,為其兩譽也.

之男家曰『女美,之女家曰 男富.』然而周之俗,不自為取妻. 且夫處女無媒,老且不嫁;

舍媒而自,弊而不售. 順而無敗,售而不弊者,唯媒而已矣. 且事非權不立,非勢不成.

夫使人坐受成事者,唯誕者耳.」 王曰:「善矣.」

​[연소왕이 소대(蘇代)에게 말하기를 : “과인은 허풍을 떨며 거짓말을 하는 사람의 말을 심히 싫어 하오.”라고 하였다.
그러자 소대가 대답하기를 : “주나라 땅은 예로부터 중매인을 천시합니다. 이는 중매인이 양쪽을 모두 과장되게

말하기 때문입니다. 남자 쪽에 가면 ‘여인이 예쁘다’고 말하고, 여자 쪽에 가면 ‘남자가 부자이다’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주나라 풍속은 중매인 없이 스스로 아내를 취하는 것을 인정하지 않습니다.

이에 처녀는 중매인이 없으면 나이가 들어도 시집갈 수가 없습니다. 만일 중매인 없이 자신을 팔아 스스로 남자를

고르다가는 시집도 못갈 뿐만 아니라 집밖으로 나올 수 조차 없게 됩니다. 순리를 좇아 실패하지 않고,

시집을 가 집안에 묶이는 일이 없는 것은 오로지 중매인이 있기 때문입니다.

무릇 일이란 비권불립(非權不立는: 편법으로 일을 성사시키는 임시적인 편의가 아니면 일을 성사시킬 수 없음)이고,

비세불성(非勢不成: 계략을 세우지 않으면 일을 성사시킬 수 없음)인 법입니다. 무릇 사람으로 하여금 아무 일도

하지 않은 채 성공을 보장받게 하는 것은 바로 허풍과 거짓말이 존재하기 때문입니다.”라고 하자.
연소왕이 말하기를 : “과연 옳은 말이오.”라고 하였다.]

  燕策 二 

秦召燕王,燕王欲往. 蘇代約燕王曰:「楚得枳二國亡,齊得宋而國亡,齊、楚不得以有枳、

宋事秦者,何也? 是則有功者,秦之深讎也. 秦取天下,非行義也,暴也. 秦之行暴於天下,

正告楚曰:『蜀地之甲,輕舟浮於汶,乘夏水而下江,五日而至郢. 漢中之甲,乘舟出於巴,

乘夏水而下漢,四日而至五渚. 寡人積甲宛,東下隨,知者不及謀,勇者不及怒,寡人若射隼矣.

王乃待天下之攻函穀,不亦遠乎?』 楚王為是之故,十七年事秦.

[기원전 280, 진나라가 연소왕을 부르자 연왕이 곧바로 가고자 했다. 그러자 소대가 연왕에게 말리며 말하기를 :
“초나라는 지(枳: 사천성 부릉현) 땅을 얻었으나 진나라가 언(鄢), 서릉(西陵)을 점거해 도읍을 잃고 말았습니다.

제나라는 송나라를 멸했으나 6국의 공격을 받아 도읍 임치가 점령되고 군주가 도주하여 거의 망할 지경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제, 초 두 나라가 각각 송나라와 지 땅을 얻고도 진나라를 섬길 수 없었던 것은 무슨 이유겠습니까?

이는 공을 세운 나라는 진나라의 원수가 되기 때문입니다. 진나라가 천하를 취하는 것은 바른 일을 행하는 것이 

아니라 행포를 부리겠다는 것입니다. 진나라는 천하에 행포를 부리면서 초나라에게 경고하기를,

‘(蜀) 땅의 병사는 민강(泯江)에서 배를 타 하수(夏水)가 불어날 때를 틈타 장강(長江)으로 내려갈 수 있다.

그리하면 5 일만에 곧바로 영(郢)에 이르게 된다. 한중(漢中)의 병사는 파수(巴水: 섬서성 한중시 서향현)에서

배를 타 하수가 불어날 때를 틈타 한수로 내려갈 수 있다. 그리 하면 4 일만에 곧바로 오저(五都)에 이르게 된다.

과인이 완(宛: 하남성 남양시) 땅에 군사를 모은 뒤 동쪽 수(隨: 호북성 수현) 땅으로 내려가면 제아무리 똑똑한

자라도 계책을 내기에 이미 늦고, 아무리 용기있는 자라도 화를 내기에 이미 늦게 되니 내가 하는 일은 사냥할 때

풀어 놓은 매와도 같은 것이다. 대왕은 천하의 제후들이 함곡관을 공격할 때까지 무작정 기다릴 생각이라면 시간이

너무 오래 걸리지 않겠는가?’라고 했습니다. 이로 인해 초왕(초경양왕)은 17년 동안이나 진나라를 섬기고 있습니다.

 

秦正告韓曰:『我起乎少曲,一日而斷太行. 我起乎宜陽而觸平陽,二日而莫不盡繇.

我離兩周而觸鄭, 五日而國舉.』 韓氏為宜然,故事秦. 秦正告魏曰:『我舉安邑,塞女戟,

韓氏太原卷. 我下枳,道南陽、封、冀,包兩周,乘夏水,浮輕舟,強弩在前,銛戈在後,決榮口,

魏無大梁;決白馬之口,魏無濟陽;決宿胥之口,魏無虛、頓丘. 陸攻則擊河內,水攻則滅大梁.』

魏氏以為然,故事秦. 秦欲攻安邑,恐齊救之,則以宋委於齊,曰:『宋王無道,為木人以寫寡人,

射其面,寡人地絕兵遠不能攻也,王茍能破宋有之,寡人如自得之.』

已得那邑,塞女戟,因以破宋為齊罪.

[진나라는 한나라에 경고하기를, ‘나는 소곡(少曲: 하남성 제원현)에서 기병하면 하루 만에 태행산을 끊을 수 있소.

내가 의양에서 기병하여 평양(平陽: 산서성 임분현)을  공격하려고 하면 이틀 만에 한나라 백성들을 모두 요역에

동원할 수 있소. 나는 양주(兩周)를 지나 한나라 도읍 신정(新鄭: 하남성 신정현)에 육박해 5 일이면

한나라를 점령할 수 있소’라고 했습니다. 한나라는 이를 그럴 듯하게 여겨 진나라를 섬기고 있습니다.
진나라는 위나라에 경고하기를, ‘내가 안읍을 공략하고, 여극(女戟)을 봉쇄하면 태원(太原)은 연락이 끊기게 되오.

나는 지도(枳道: 하남성 제원현), 남양(南陽: 하남성 획가현), 봉릉(封陵: 산서성 예성현), 기읍(冀邑: 봉릉)으로

내려가 양주를 포위할 것이오. 이어 하수가 불어날 때를 이용해 배에 올라 강노(强弩)와 예리한 창을 앞뒤에

배치할 것이오. 백마지구(白馬之口: 白馬津의 입구)의 뚝을 터뜨리면 위나라는 제양(濟陽)을 잃게 될 것이오.

다시 숙서지구(하남성 예현)의 뚝을 터뜨리면 위나라는 허(하남성 연진현), 돈구(하남성 청풍현)를 잃게 될 것이오.

장차 육상으로 하내(河內)를 공격하고, 수공(水攻)으로 대량(大梁)을 공략할 것이오’라고 했습니다.

위나라는 이를 그럴 듯하게 여겨 진나라를 섬기고 있습니다. 진나라는 안읍을 치고자 해도 제나라가 이를 구원할까

두려워하고 있습니다. 이에 송나라를 제민왕의 처분에 맡기며 말하기를, ‘송왕(송왕 偃)이 무도하게도 나무인형에

과인을 그려 놓고 그 얼굴에 화살을 쏘아대고 있소. 만일 대왕이 능히 송나라를 멸하고 이를 취할 수 있다면

이는 과인이 얻는 것과 같은 것이오’라고 했습니다. 진나라는 이미 안읍을 얻고 여극을 봉쇄했으면서도

송나라 공격을 제나라의 죄로 몰아가고 있습니다.

秦欲攻齊, 恐天下救之, 則以齊委於天下曰 : 『齊王四與寡人約, 四欺寡人, 心率天下以攻寡人者三.

有齊無, 必伐之, 必亡之.』 已得宜陽少曲, 致藺石, 因以破齊爲天下罪.  ​秦欲攻魏重楚,

則以南陽委於楚曰:『寡人國與韓且絕矣!殘均陵,塞鄳隘,茍利於楚,寡人若自有之.』

魏棄與國而合於秦,因以塞鄳隘為楚罪.  兵困於林中,重燕、趙,以膠東委於衍,以濟西委於趙.

趙得講於魏,至公子延,因犀首屬行而攻趙. 兵傷於離石,遇敗於馬陵,而重魏則以葉、蔡委於魏.

[진나라는 제나라를 공격하고자 해도 천하의 제후들이 이를 구원할까 두려워하고 있습니다.

이에 제나라를 천하 제후들의 처분에 맡기며 말하기를, ‘제왕은 과인과 4번이나 약속하고도 과인을 속였소.

천하의 제후들을 이끌고 과인을 치자고 견결히 주장한 적이 3번이나 되오. 제나라가 있으면 진나라가 없고,

진나라가 있으면 제나라가 없게 되니 반드시 공벌하여 멸망시켜야만 하오’라고 했습니다. 이미 의양, 소곡을 취하고

인(藺), 이석(離石)을 한나라로부터 얻고도 천하 제후들에게 제나라를 공격한 죄를 물었습니다. 
진나라는 위나라를 공격하고자 해도 초나라를 이를 구원할까 꺼리고 있습니다. 이에 남양을 초왕의 처분에 맡기면서 말하기를, ‘과인은 남양 땅이 초나라 손에 들어감으로써 한나라와 두절되고 말았소. 균릉(均陵)을 토벌하고,

맹애(鄳隘)를 막으면 실로 초나라에 유리할 것이오. 과인은 이를 마치 과인이 직접 얻은 것과 같이 생각하고 있소’라고

했습니다. 이에 위나라는 동맹국을 저버리고 진나라와 연합하자, 진나라는 맹애의 봉쇄를 초나라의 죄로 몰아가고

있습니다. 진나라 병사들이 임중에서 곤경에 처하자 진나라는 연, 조 두 나라가 위나라를 구원할까 두려워했습니다.

이에 교동(膠東)을 연나라에, 제서(濟西)를 조나라의 처분에 맡겨 놓았습니다. 이어 위나라와 강화하고는

진나라 공자 연(延)을 인질로 보내 위나라 장수 서수(犀首)와 함께 합세해 조나라를 치게 했습니다.

이에 병사들이 이석에서 패한 뒤 다시 마릉(馬陵)에서 패하게 되었습니다. 그러자 위나라를 두려워한 나머지

섭(葉: 하남성 섭현), 채(蔡: 하남성 상채현) 땅을 위나라 처분에 맡겨 놓았습니다.

 

已得講於趙, 則劫魏,魏不為割. 困則使太后、穰侯為和,嬴則兼欺舅與母.適燕者曰:『以膠東. 』

適趙者曰:『以濟西. 』適魏者曰:『以葉、蔡. 』適楚者曰:『以塞鄳隘.』適齊者曰:『以宋.』

此必令其言如循環,用兵如刺蜚繡,母不能制,舅不能約. 龍賈之戰,岸門之戰,封陸之戰,

高商之戰,趙莊之戰,秦之所殺三晉之民數百萬. 今其生者,皆死秦之孤也.

西河之外、上雒之地、三川,晉國之禍,三晉之半. 秦禍如此其大,而燕、趙之秦者,

皆以爭事秦說其主,此臣之所大患.」 燕昭王不行,蘇代復重於燕. 燕反約諸侯從親,如蘇秦時,

或從或不,而天下由此宗蘇氏之從約. 代、厲皆以壽死,名顯諸侯.

[이어 조나라와 강화하고는 곧바로 위나라를 위협했으나 위나라가 땅을 할양하지는 않았습니다.

진나라는 곤경에 처하면 태후(진소양왕의 모친인 선태후)와 양후(穰侯: 진소양왕의 외숙)를 시켜 강화하게 하고,

승리하게 되면 그 외숙과 모친을 속여 제후들을 굴복시켰습니다. 진나라는 연나라를 책망할 때는 교동을,

조나라를 책망할 때는 제서를, 위나라를 책망할 때는 섭, 채를, 초나라를 책망할 때는 맹애를, 제나라를 책망할 때는

송 등을 그 이유로 내세웠습니다. 진나라는 이처럼 말을 돌려가며 사술(詐術)을 능란하게 구사하고,

용병을 마치 해충을 손쉽게 죽이듯이 하며 솜씨 좋게 수를 놓는 듯 하니 그 모친이 진나라를 통제할 수 없고,

그 외숙이 제후들과 약속을 할 수 없는 것입니다. 위나라 장수 용가(龍賈)와의 싸움과 안문(岸門)의 싸움,

봉릉(封陵)의 싸움, 고상(高商: 高唐)의 싸움, 조나라 장수 조장(趙莊)과의 싸움에서 진나라가 살해한 3진의 백성은

수백만 명에 달하고 있습니다. 지금 살아 있는 자들은 모두 진나라와의 싸움에서 전사한 자들의 고아들입니다.

서하밖의 땅과 상양과 낙수 일대 지방및 삼천(三川) 등은 모두 진나라가 3진으로부터 취한 것으로 3진 영토의 절반에

해당합니다. 진나라로 인한 화난이 이처럼 큰데도 연, 조 두 나라의 진나라와 가까운 인사들은 모두 진나라의

환심을 사기 위해 다투어 그 군주를 설득하고 있습니다. 이는 신히 가장 크게 우려하는 것이기도 합니다.”라고 하였다.
이에 연소왕이 진나라로 가지 않고 소대를 다시 크게 우대했다. 연나라가 이내 제후들과 합종의 맹약을 맺자

마치 소진이 살아 있을 때와 같은 구도가 조성되었다. 이로써 천하는 합종에 가담하기도 하고 빠지기도 하면서

소씨의 합종맹약을 근본으로 삼게 되었다. 소대와 소려는 모두 천수를 누리며 살다가 죽었다.

이들이 죽은 뒤에도 그 명성은 제후들 사이에서 드높았다.]

 

蘇代為奉陽君說燕於趙以伐齊,奉陽君不聽. 乃入齊惡趙,令齊絕於趙.  齊已絕於趙,因之燕,

謂昭王曰:「韓為謂臣曰:『人告奉陽君曰:使齊不信趙者,蘇子也;今齊王召蜀子使不伐宋,

蘇子也;與齊王謀道取秦以謀趙者, 蘇子也;令齊守趙之質子以甲者, 又蘇子也.

請告子以請齊, 果以守趙之質子以甲,吾必守子以甲.』其言惡矣. 雖然,王勿患也.

臣故知入齊之有趙累也.  出為之出成所欲,臣死而齊大惡於趙,臣猶生也令齊、趙絕, 可大紛已.

持臣非張孟談也,使臣也如張孟談也齊、趙必有為智伯者矣.

[주난왕 27년(기원전 288), 소진이 연나라를 위해 조나라에서 봉양군(奉陽君: 이태)에게 제나라 공벌을 설득했으나

봉양군이 듣지 않았다. 이에 제나라로 들어가 조나라를 헐뜯어 조나라와 단교하게 했다. 제나라가 조나라와 단교하자,

곧 연나라로 들어가 연소왕에게 말하기를 : “조나라 장수 한위(韓爲: 동주책의 徐爲, 韓徐爲)가 신에게 말하기를,

‘사람들이 봉양군에게 이르기를, 제나라로 하여금 조나라를 불신케 만든 자는 소자(蘇子: 소진)입니다.

제민왕에게 말해 촉자(蜀子: 「여씨춘추」의 觸子)를 소환함으로써 송나라를 치지 못하게 만든 자도 소자입니다.

제왕과 모의하면서 진나라와 연합해 조나라를 도모하도록 설득한 자도 소자입니다. 제나라로 하여금 무장병을 시켜

조나라의 인질을 호위하도록 한 자도 소자입니다.'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그대에게 실정을 고하는 것입니다.

제나라가 무장병을 시켜 조나라의 인질을 호위하고 있다면 나 또한 틀림없이 무장병을 시켜 그대를 호위하도록

하겠습니다’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대왕께서는 저로 인해 심려할 필요는 없습니다. 신은 제나라로 들어가는 자체가

조나라에 악영향을 끼친다는 것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신은 일신이 위험에 처하고 제, 조 두 나라의 관계가

악화될지라도 그대로 제나라로 갈 것입니다. 이는 대왕이 원하는 바를 완성키 위한 것입니다.

소기의 성과를 거두면 신은 설령 죽더라도 살아 있는 것과 다름없습니다. 지금 제, 조 두 나라의 국교가 단절돼

가히 크게 어지러운 상황이라 할 수 있습니다. 신은 장맹담(張孟談: 조양자의 모신)과 같이 뛰어난 모신은 아닙니다.

그러나 신에게 장맹담의 역할을 맡긴다면 제, 조 두 나라에도 틀림없이 지백(智伯)을 위해 일하는 자가 있을 것입니다.

 

奉陽君告朱讙與趙足曰:『齊王使共王曰令說曰,必不反韓珉,今召之矣. 必不任蘇子以事,

今封而相之. 令不合燕,今以燕為上交. 吾所恃者順也, 今其言變有甚於其父,順始與蘇子為讎.

見之知無厲, 今賢之兩之,已矣, 吾無齊矣!』 奉陽君之怒甚矣. 如齊王王之不信趙,

而小人奉陽君也,因是而倍之. 不以今時大紛之,解而復合,則後不可奈何也.
故齊、趙之合茍可循也,死不足以為臣患;逃不足以為臣恥;為諸侯不足以為臣榮;被髪自漆為厲,

不足以為臣辱.  然而臣有患也,臣死而齊、趙不循,惡交分於臣也,而後相效,是臣之患也.

若臣死而必相攻也,臣必勉之而求夕焉.

[봉양군이 조나라 사람인 주환(朱讙)과 조족(趙足)에게 고하기를, ‘제왕이 공왕단(公玉丹)을 시켜 나에게 말하기를,

' 한민(韓珉)을 결코 돌아오게 해서는 안 되오.'라고 했소. 그리고는 지금 그를 돌아가게 했소.

또 말하기를, '소자를 임용해서는 안 되오.'라고 했소. 그리고는 지금 그를 상국으로 임명했소.

이어 말하기를, '연나라와 연합해서는 안 되오.'라고 했소. 그리고는 지금 연나라와 상교(上交)를 맺고 있소.

내가 의지하고 있는 사람은 순자(제나라 공자 順)요. 그러나 그는 그의 부친인 제왕(齊王: 제민왕)보다 더 심하게

말을 바꾸고 있소. 순자는 당초 소자와 원수였소. 누가 보더라도 두 사람이 불목하고 있다는 것을 쉽게 알 수 있었소.

그런데 지금 오히려 그를 존중하고 타고 다닐 수레까지 내주며 후대하고 있소. 이제 끝났소. 나는 제나라를 버릴

것이오’라고 했습니다. 봉양군의 노기는 매우 심했는데 이는 제왕이 존엄을 내세우며 조나라를 불신하고,

자신을 업신여겼기 때문입니다. 이에 연나라는 제나라가 조나라를 불신하고 봉양군을 업신여긴 것을 이유로 마침내

제나라에 등을 돌린 것입니다. 제, 조 두 나라는 현재 분란으로 불화하니 당연히 이때를 이용해 제나라를 쳐야 합니다.

지금 제, 조 두 나라의 결맹이 해제되었으니 만일 두 나라가 다시 연합하게 되면 제나라 공벌의 호기를 잃게 됩니다.

다시는 이처럼 좋은 기회를 만날 수 없을 것입니다. 신은 제, 조 두 나라를 교전하게 할 수만 있다면 죽는 것도

신의 우환이 될 수 없고, 망명해도 신의 부끄러움이 될 수 없고, 제후가 되어도 신의 영광이 될 수 없고,

머리를 풀고 옻칠을 하여 문둥병자가 되어도 신의 치욕이 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신에게 걱정이 있습니다.

신이 죽을지라도 제, 조 두 나라의 수교를 막지 못하고, 두 나라 단교의 책임이 모두 신에게 씌워지고,

연나라도 덩달아 신에게 죄를 묻는 상황이 바로 신이 우려하는 것입니다.

만일 신이 죽고 제, 조 두 나라가 서로 공격하게 된다면, 신은 진정으로 죽음의 길을 택할 것입니다.

 

堯、舜『賢而死,禹、湯之知而死,孟賁之勇而死,烏獲之力而死,生之物固有不死者乎?

在必然之物以成所欲,王何疑焉? 臣以為不若逃而去之. 臣以韓、魏循自齊,而為之取秦,

深結趙蟀勁之. 如是則近於相攻.  臣雖為之累燕,奉陽君告朱讙曰:『蘇子怒於燕王之不以吾故,

弗予相,又不予卿也,殆無燕矣.』其疑至於此,故臣雖為之不累燕, 又不欲王. 伊尹再逃湯而之桀,

再逃桀而之湯,果與鳴條之戰,而以湯為天子. 伍子胥逃楚而之吳,果與伯舉之戰,而報其父之讎.

今臣逃而紛齊、趙,始可著於春秋.  且舉大事者,孰不逃? 桓公之難,管仲逃於魯;陽虎之難,

孔子逃於衛;張儀逃於楚,白逃於秦;望諸相中山也使趙,趙劫之求地,望諸攻關而出逃;

外孫之難,薛公釋戴逃出於關,三晉稱以為士.  故舉大事,逃不足以為辱矣.」

[요, 순(堯舜)은 천하의 현자(賢者)였으나 결국 죽었고, 우, 탕(禹湯)은 천하의 지자(智者)였으나 결국 죽었고,

맹분은(孟賁)은 천하의 용자(勇者)였으나 결국 죽었고, 오획(烏獲)은 천하의 역사(力士)였으나 결국 죽었습니다.

살아 있는 모든 것 중 죽지 않는 것이 있을 수 있겠습니까? 사람이 죽은 것은 사물의 필연입니다. 신은 연나라를

이롭게 하기 위한 계책을 완성하고자 하는데 대왕은 무엇을 의심하는 것입니까? 신은 짐짓 연나라에서 득죄하여

망명하느니만 못하다고 생각합니다. 신은 한, 위 두 나라가 제나라에 순종하여 돕게 되면 연나라와 연합하고

조나라와 결속해 한, 위 두 나라를 강하게 만들 것으로 봅니다. 이같이 해야 서로 싸우게 될 것입니다.

신이 비록 이같이 할지라도 일시적으로는 연나라에 누를 끼칠 수 있습니다. 봉양군은 주환에게 말하기를,

‘소자는 연왕이 나로 인해 자신에게 상국은 물론 경의 자리도 주지 않은 데 크게 화가 나 있다.

그가 조나라에 화가 나 있는 데 자칫 연나라와의 국교가 단절될까 두렵다’고 할 것입니다. 그가 이같이 의심하게 되면

연나라와의 관계를 유지하기 위해 틀림없이 연나라를 공격하지 않고 제나라를 공격할 것입니다.

그러면 비록 신이 이같이 할지라도 연나라에 누를 끼치지는 않을 것이고, 또한 대왕을 욕되게 만들지 않을 것입니다.
옛날 이윤(伊尹)은 여러 차례 은탕(殷湯)을 떠나 하걸(夏桀)에게 갔다가 다시 하걸을 떠나 은탕에게 갔습니다.

이로써 마침내 명조(鳴條: 산서성 하현)의 싸움에서 은탕은 하걸을 죽이고 천자가 될 수 있었습니다.

오자서는 초나라로 도망갔다가 다시 오나라로 감으로써 마침내 백거(柏擧)의 싸움에서 부친의 원수를 갚을 수 있게

되었습니다. 지금 신이 짐짓 도주하여 제, 조 두 나라의 내분을 부추기면 거의 「춘추」에 뚜렷이 기록될 것입니다.

대사를 도모하는 자로서 그 누가 도주하지 않은 적이 있습니까. 제환공의 난 때 관중(管仲)은 노나라로 도주했고,

양호(陽虎)의 난 때 공자는 위(衛)나라로 도주했고, 장의(張儀)는 초나라에 사자로 갔다가 도주했고,

백규(白珪)는 위나라로 도주했습니다. 망제(중산책의 藍諸君)는 중산국의 상국 자격으로 조나라에 사자로 갔다가

조나라가 겁박하며 땅을 요구하자 관문을 부수고 도주했습니다. 외손(外孫: 내용 미상)의 난 때 설공(薛公: 맹상군)은

진나라에 억류되어 있다가 관(冠)도 쓰지 않은 채 변성명하여 관문을 빠져나갔습니다. 그러자 3진은 이를 두고

도(道)를 행한 것이라고 칭송했습니다. 그래서 대사를 도모하는 자에게는 도주하는 것이 치욕이 되지 않는다 라고

하는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그리고는 마침내 제나라를 조나라와 단교하게 만들었다.

이에 마침내 조나라는 연나라와 연합한 뒤 제나라를 공격해 대파하게 되었다.]

 

蘇代為燕說齊,未見齊王,先說淳於髡曰:「人有賣駿馬者,比三旦立市,人莫之知.
往見伯樂曰:『臣有駿馬,欲賣之,比三旦立於市,人莫與言,愿子還而視之,去而顧之,

臣請獻一朝之賈.』 伯樂乃還而視之,去而顧之,一旦而馬價十倍. 今臣欲以駿馬見於王,

莫為臣先後者,足下有意為臣伯樂乎? 臣請獻白璧一雙,黃金萬鎰,以為馬食.」

淳於髡曰:「謹聞命矣.」入言之王而見之,齊王大說蘇子.

[기원전 319, 소대가 연나라를 위해 제나라에 유세하고자 했으나 제선왕을 만날 수 없었다.

이에 우선 순우곤(淳于髡)에게 말하기를 : “어떤 사람이 준마를 팔려고 3일 동안 이른 아침에 시장에 나갔으나

사람들이 준마를 알아보지 못했습니다. 이에 백락(伯樂)을 찾아가 이르기를, ‘저에게 준마가 한 마리 있어 이를 팔

생각으로 시장에 3일 동안이나 나갔으나 값을 묻는 자가 한 사람도 없었습니다. 원컨대 그대가 가서 단지 저의 준마를

빙 돌아가며 한 번 보고 이내 떠나면서 고개를 한 번만 돌려주기 바랍니다. 그러면 제가 발품을 판 하루치 비용을

드리도록 하겠습니다’라고 했습니다. 백락이 이내 가서 준마를 둘러본 뒤 떠나면서 다시 한 번 돌아보았다.

그러자 단 하루 사이에 준마의 값이 10배나 뛰어올랐습니다. 지금 저는 준마를 이끌고 와 대왕을 만나려고 하나

저를 위해 소개해 줄 사람이 없습니다. 족하가 저를 위해 백락이 되어 주지 않겠습니까?

그러면 백벽(白璧) 한 쌍과 황금 1천 일(鎰: 20량)을 말먹이 비용으로 드리겠습니다.”라고 하자.

순우곤이 말하기를 : “삼가 말씀대로 하겠소.”라고 하였다.  제선왕은 크게 기뻐하며 소대를 맞이하였다.]

 

蘇代自齊使人謂燕昭王曰:「臣聞離齊趙,齊、趙已孤矣,王何不出兵以攻齊?臣請王弱之.」

燕乃伐齊攻晉. 令人謂閔王曰:「燕之攻齊也, 欲以復振古地也. 燕兵在晉貳進, 則是兵弱而計疑也.

王何不令蘇子將而應燕乎? 夫以蘇子之賢,將而應弱燕,燕破必矣. 燕破則趙不敢不聽,

是王破燕而服趙也.」 閔王曰:「善.」

乃謂蘇子曰:「燕兵在晉,今寡人發兵應之,愿子為寡人為之將.」
對曰:「臣之於兵,何足以當之,王其改舉. 王使臣也,是敗王之兵,而以臣遺燕也.

戰不勝,不可振也.」 王曰:「行寡人知子矣.」

[기원전 285, 소진이 제나라에서 사람을 시켜 연소왕에게 말하게 하기를 : “신이 듣건대 제, 조 두 나라를 떨어뜨려

놓자 제나라는 이미 고립되어 버렸다고 합니다. 그런데도 대왕께서는 왜 출병하여 제나라를 공격하지 않는 것입니까?

청컨대 신은 대왕을 위해 제나라를 약화시킬 자신이 있습니다."라고 하였다.
이에 연나라가 출병해 제나라를 공격하면서 진(晉: 제나라의 지명) 땅에 주둔했다. 그러자 소진이 사람을 시켜

제민왕에게 말하기를 : “연나라가 제나라를 공격하는 것은 연왕 쾌가 잃은 고지(故地)를 수복하기 위한 것입니다.

연나라 군사가 진 땅에 머물며 진격하지 않는 것은 병력이 약한 데다가 계책이 미흡하기 때문입니다.

대왕께서는 왜 소자(蘇子: 소진)로 하여금 군사를 이끌고 가 연나라 군사를 맞이하여 싸우게 하지 않는 것입니까?

소자의 현명함으로 군사를 이끌고 가 맞서 싸우면 틀림없이 연나라 군사를 격파할 수 있을 것입니다.

연나라가 격파되면 조나라는 감히 제나라의 명을 듣지 않을 수 없을 것입니다. 이는 대왕이 연나라를 깨고

조나라를 굴복시키는 길입니다.”라고 하자.  제민왕이 말하기를 : “옳은 말이오.”라고 하였다.
제민왕이 이내 소진을 불러 말하기를 : “연나라 군사가 진 땅에 머물고 있어 지금 과인이 군사를 일으켜 맞서 싸우고자

하오. 원컨대 그대는 과인을 위해 장수가 되어 주기 바라오.”라고 하자.
소진이 대답하기를 : “제가 어찌 군사를 이끄는 중임을 맡을 수 있겠습니까. 다시 새로운 사람을 선발하도록 하십시오. 저에게 군사를 이끌게 하는 것은 대왕의 군사를 패배하게 만들고 신을 연나라에 선물로 보내는 것과 같습니다.

싸움에 이기지 못하면 제나라를 구할 수 없습니다.”라고 하였다.
제민왕이 말하기를 : “그대가 맡도록 하시오. 과인은 그대를 잘 알고 있소.”라고 하였다.]

 

蘇子遂將,而與燕人戰於晉下,齊軍敗。燕得甲首二萬人. 蘇子收其餘兵,以守陽城,

而報於閔王曰:「王過舉,令臣應燕. 今軍敗亡二萬人,臣有斧質之罪,請自歸於吏以戮.」

閔王曰:「此寡人之過也,子無以為罪.」明日又使燕攻陽城及貍.

又使人謂閔王曰:「日者齊不勝於晉下,此非兵之過,齊不幸而燕有天幸也. 今燕又攻陽城及貍,

是以天幸自為功也. 王復使蘇子應之,蘇子先敗王之兵,其後必務以勝報王矣.」王曰:「善.」

乃身使蘇子,蘇子固辭,王不聽.  遂將以與燕戰於陽城.  燕人大勝得首三萬.

齊君臣不親,百姓離心.  燕因使樂毅大起兵伐齊,破之.

[소진이 마침내 제나라 군사를 이끌고 가 진 땅에서 연나라 군사와 맞붙었다. 연나라 군사가 소진의 제나라 군사를

대파하고 2만 명의 수급을 얻었다. 그러자 소진이 제나라의 나머지 병력을 수습해 양성(陽城: 하북성)을 지키며

사람을 보내 제민왕에게 보고하기를 : “대왕께서 사람을 잘못 선발해 신으로 하여금 연나라 군사와 맞서 싸우게 

했습니다. 지금 싸움에 져 군사 2만 명을 잃었습니다. 신이 부질지죄(斧質之罪: 요참의 죄)를 지었으니

청컨대 스스로 담당 관리에게 나아가 재판을 받고 죄값을 치르고자를 합니다.”라고 하였다.
그러자 제민왕이 말하기를 : “이는 과인의 잘못이오. 그대에는 아무 죄도 없소.”라고 하였다.
다음날 소진은 다시 연나라 군사로 하여금 양성과 이(狸: 하북성 임구현) 땅을 공격하게 했다. 그리고는 사람을 보내

제민왕에게 보고하기를 : “어제 제나라 군사가 또 다시 진 땅의 싸움에서 패했습니다. 이는 병사들의 잘못이 아닙니다.

제나라는 운이 없고, 연나라는 천행을 만났기 때문입니다. 지금 연나라 군사가 다시 양성과 이 땅을 공격하고 있으니

이는 공을 세울 수 있는 절호의 기회입니다. 대왕께서는 다시 소자를 시켜 군사를 이끌고 가 맞서 싸우게 하십시오.

소자가 앞서 대왕의 병사를 잃었으니 이번에는 반드시 승리하여 대왕에게 보답할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제민왕이 대답하기를 : “그렇게 하도록 하시오.”라고 하며.  다시 소진에게 군사를 이끌게 했으나 소진이 고사했다.

그러나 제민왕이 이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결국 소진은 다시 제나라 군사를 이끌고 가 양성에서 접전하게 되었다.

이번에도 연나라 군사가 대승을 거둬 3만 명의 수급을 얻었다. 이로써 제나라의 군신이 서로 불목하고 민심이

이반하였다. 연나라는 곧 악의를 시켜 대군을 이끌고 가 제나라를 공격하게 하여 제나라 군대를 크게 무찔렀다.]

 

蘇代自齊獻書於燕王曰:「臣之行也,固知將有口事,故獻御書而行,曰:『臣貴於齊,

燕大夫將不信臣;臣賤,將輕臣;臣用,將多望於臣;齊有不善,將歸罪於臣;天下不攻齊,

將曰善為齊謀;天下攻齊,將與齊兼鄮臣. 臣之所重處重卯也.』王謂臣曰:『吾必不聽眾口與讒言, 吾信汝也, 猶剗刈者也. 上可以得用於齊,次可以得信於下,茍無死,女無不為也. 以女自信可也.』 與之言曰:『去燕之齊可也,期於成事而已.』

臣受令以任齊,及五年. 齊數出兵,未嘗謀燕.

[기원전 285, 소대는 제나라에서 연소왕에게 서신으로 알리기를 : “신이 이번에 제나라로 온 것은 본래 누군가

저를 음해할 것으로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어서(御書: 여기서는 군주에게 올리는 글)를 올리고 제나라로 오며

말하기를, ‘신이 제나라에서 중용되면 연나라 대부들은 장차 신을 불신할 것입니다. 신은 미천한 출신이니

장차 신을 경시할 것이며, 임용되면 장차 신을 원망할 것입니다. 제나라가 불선(不善)하면 장차 신에게 죄를 묻고자

할 것입니다. 천하의 제후들이 제나라를 공격하지 않으면 장차 신이 제나라를 위해 계책을 냈다고 말할 것입니다.

천하의 제후들이 제나라를 치면 장차 신을 교역물로 삼아 제나라와 거래했다고 할 것입니다. 신이 처해 있는 상황은

마치 달걀을 쌓아 놓은 것과 같은 위험에 처해 있습니다’라고 했습니다. 그러자 대왕께서 말하기를, ‘나는 중인들의

참언을 듣지 않을 것이오. 내가 그대를 믿고 있다는 사실은 매우 명쾌하오. 최상의 경우는 그대가 제나라에서

중용되는 것이고, 그 다음으로는 그대가 그들의 신임을 얻는 것이오. 최악의 경우는 그대가 살아남아 그대가 하고자

하는 바를 하는 것이오. 그러니 그대는 마음을 놓아도 좋을 것이오. 그대는 제나라에 '연나라에서 제나라로 왔소'라고

말해도 좋을 것이오. 심지어는 '나는 제나라와 함께 연나라를 도모하기 위해 왔소'라고 해도 좋을 것이오.

오직 우리들이 바라는 바를 이룰 수만 있다면 그것으로 족한 것이오’라고 했습니다. 신은 대왕의 명을 받아 제나라로

와서 임무를 수행한 지 이미 5년이 되었습니다. 제나라가 여러 번 출병했으나 일찍이 연나라를 도모한 적이 없습니다.

 

齊、趙之交,一合一離,燕王不與齊謀趙,則與趙謀齊. 齊之信燕也,至於虛北地行其兵.

今王信田伐與參、去疾之言,且攻齊,使齊犬馬犏而不言燕. 今王又使慶令臣曰:『吾欲用所善.』

王茍欲用之,則臣請為王事之. 王欲醳臣剸任所善,則臣請歸醳事. 臣苟得見,則盈愿.」

[제, 조 두 나라의 관계는 때로는 좋아하고 때로는 미워하며, 때로는 연합하고 때로는 멀리하고 있습니다.

연나라는 지금 제나라와 함께 조나라 정벌을 모의하지 않고 조나라와 함께 제나라 정벌을 모의하고 있습니다.

제나라는 연나라를 크게 신뢰한 나머지 심지어 군사를 연나라와 접한 제나라의 북부 변경에 군사를 배치하지 않고

다른 쪽으로 돌려놓고 있습니다. 지금 대왕께서 대신 전벌(田伐)과 참거질(參去疾)의 말을 듣고 제나라 정벌을

준비하면서 제나라로 하여금 크게 놀라 다시 연나라를 믿지 못하게 만들고 있습니다. 지금 대왕께서는 또 대신

성경(盛慶)을 시켜 신에게 이르기를, ‘나는 가히 쓸 만한 사람을 임용하고자 하오’라고 했습니다.

대왕께서 마음에 둔 사람이 있어 쓰고자 하면 청컨대 대왕께서는 그를 쓰도록 하십시오. 대왕께서 신의 직임을

해제하고 마음에 드는 사람에게 이를 맡기고자 하면 청컨대 신은 연나라로 돌아가 신의 직임을 내놓고자 합니다.

다만 대왕을 한 번이라도 볼 수 있다면 그것으로 신은 만족합니다.”라고 하였다.]

 

陳翠合齊燕陳翠合齊、燕,將令燕王之弟為質於齊,燕王許諾.

太后聞之大怒曰:「陳公不能為人之國,亦則已矣,焉有離人子母者,老婦欲得志焉.」
陳翠欲見太后, 王曰:「太后方怒子, 子其待之.」陳翠曰:「無害也.」遂人見太后曰:

「何臞也?」 太后曰:「賴得先王雁鶩之餘食,不宜臞. 臞者,憂公子之且為質於齊也.」
陳翠曰:「人主之愛子也,不如布衣之甚也. 非徒不愛子也,又不愛丈夫子獨甚.」

[연나라의 노신(老臣) 진취가 제, 연 두 나라의 연합을 위해 장차 연왕의 동생을 제나라에 인질로 보내고자 했다.

이에 연왕이 이를 허락했다. 이때 태후가 이 얘기를 듣고 크게 화를 내며 말하기를 : “진취는 나라를 다스릴 자격이

없으니 그것으로 됐소. 어찌 모자 사이를 끊으려는 것이오. 노부(老婦)는 그 뜻을 받아들일 수 없소.”라고 하였다.
진취가 태후를 만나려 하자 연왕이 말하기를 : “태후의 화가 아직 가라앉지 않고 있으니 잠시 기다렸다가

다시 가도록 하시오.”라고 하자.  진취가 대답하기를 : “아무 일도 없을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그리고는 들어가 태후를 만나 묻기를 : “태후께서는 어찌하여 이토록 수척하십니까.”라고 하자.
태후가 대답하기를 : “선왕께서 거위와 오리같은 맛있는 음식을 주시는데 수척할 리가 있겠소.

그런데도 내가 수척한 것은 공자가 인질이 되어 제나라에 갈까 걱정하고 있기 때문이오.”라고 하였다.
이에 진취가 말하기를 : “태후께서 자식을 아끼는 것이 일반 백성들보다 훨씬 못합니다.

자식을 사랑하지 않을 뿐더러 특히 장부자(丈夫子: 아들)를 아끼지 않는 것은 더욱 심합니다.”라고 하였다.]

 

太后曰:「何也?」 對曰:「太后嫁女諸侯,奉以千金,齎地百里,以為人之終也.

今王愿封公子,百官持職,群臣效忠,曰:『公子無功不當封.』今王之以公子為質也,

且以為公子功而封之也. 太后弗聽, 臣是以知人主之不愛丈夫子獨甚也. 且太后與王幸而在,

故公子貴,太后千秋之後王棄國家,而太子即位,公子賤於布衣. 故非及太后於王封公子,

則公子終身不封矣!」 太后曰:「老婦不知長者之計.」乃命公子束車制衣為行具.

[태후가 묻기를 : “어째서 그렇다는 것이오?”라고 하자.
진취가 대답하기를 : “태후가 딸을 제후(諸侯)에게 시집보내면서 1천 금과 땅 1백 리를 예물로 지참하게 한 것은

부모로서의 의무를 다하고자 한 것입니다. 지금 대왕이 공자를 봉하고, 백관들로 하여금 맡은 바 직책을 다하게

하려 하자 군신들이 충언하기를, ‘공자는 아무런 공도 세우지 못했으니 그를 봉하는 것은 부당합니다’라고 했습니다.

지금 대왕이 공자를 인질로 보내려는 것은 공자로 하여금 공을 세우게 한 뒤 그를 봉하려는 것입니다.

그런데도 태후가 이를 따르지 않으니 신은 태후께서 장부자를 아끼지 않는 것이 유독 심하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다행히 태후와 대왕께서 생존해 계실 때는 공자는 귀한 위치에 있지만 태후께서 천세를 누리시고  대왕께서도

승하하신 다음에 태자가 즉위하면 공자는 일반 백성보다 천한 위치에 서게 될 것입니다. 그러니 태후와 대왕께서

생존해 계실 때 공자를 봉해 놓지 않으면 공자는 종신토록 봉토를 받지 못하게 될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그러자 태후가 말하기를 : “노부가 덕망이 높은 그대의 깊은 생각을 헤아리지 못했소.”라고 하였다.
그리고는 곧 공자에게 명해 거마와 의복을 갖춰 떠날 준비를 마치도록 했다.]

 

燕昭王且與天下伐齊,而有齊人仕於燕者,昭王召而謂之曰:「寡人且與天下伐齊,旦暮出令矣.

子必爭之,爭之而不聽,子因去而之齊. 寡人有時復合和也,且以因子而事齊.」

當此之時也,燕、齊不兩立,然而常獨欲有復收之之志若此也.

[기원전 284, 연소왕이 장차 천하의 제후들과 연합해 제나라를 공격할 생각으로 연나라에서 벼슬 하고 있던

제나라 사람을 불러 말하기를 : “과인은 천하의 제후들과 함께 제나라를 공격하기 위해 빠른 시일내에 출병의 명을

내릴 생각이오. 그대는 틀림없이 이를 두고 다툴 것이니 과인이 듣지 않으면 그대는 이를 구실로 제나라로 돌아갈

수 있을 것이오. 과인이 다시 제나라와 연합하게 되면 그대가 제나라로 가 활동할 수 있도록 도와주겠소.”라고 하였다.
이때는 연, 제 두 나라는 함께 할 수 없는 원수지간 이었으나 연소왕이 늘 혼자 생각하기를

제나라와 다시 좋은 관계를 유지하고 싶었던 심경이 바로 이와 같았다.]

 

燕饑,趙將伐之.  楚使將軍之燕,過魏,見趙恢.

趙恢曰:「使除患無至,易於救患. 伍子胥、宮之奇不用,燭之武、張孟談受大賞.
是故謀這皆從事於除患之道,而先使除患無至者. 今予以百金送公也,不如以言.
公聽吾言而說趙王曰:『昔者吳伐齊,為其饑也,伐齊未必勝也,而弱越乘其弊以霸.

今王之伐燕也,亦為其饑也,伐之未必勝,而強秦將以兵承王之西,是使弱趙居強吳之處,

而使強秦處弱越之所以霸也. 愿王之熟計之也.』」

使者乃以說趙王. 趙王大悅 乃止. 燕昭王聞之, 乃封之以地. 

[기원전 283, 연나라에 기근이 들자, 조나라가 이 틈을 타 연나라를 공격하려고 했다. 이에 초나라 사자가 연나라를

돕기 위한 출병 상황 등을 알아보기 위해 연나라로 가던 중 위나라에서 조나라 사람 조회(趙恢)를 만났다.

그러자 조회가 초나라 사자에게 말하기를 : “재난이 생기지 않도록 미리 예방하는 것이 재난이 발생하였을 때

이를 구제하는 것보다 훨씬 용이하오. 그러니 먼저 조나라를 설득하느니만 못하오. 오자서와 궁지기(宮之奇)는

오나라와 우(虞)나라의 군주만 설득해 재난을 피하려 했을 뿐, 월나라와 진(晉)나라를 설득해 재난을 피하는 일을

꾀하지 못했소. 그러나 촉지무(鄭文公 때의 대부)와 장맹담(趙襄子 때 상국)은 재난을 피할 수 있어 성공해 큰 상을

받았소. 그래서 계책을 세우는 사람들은 모두 재난을 제거하는 일에 매달려 미리 재난이 발생하지 않도록 미리

 손을 쓰는 것이오. 지금 내가 1백 금을 공에게 주는 것은 내가 공에게 충고 한마디 하는 것만 못하오.

공은 내 말을 듣고 조혜문왕)에게 이르기를, ‘옛날 오나라가 제나라를 칠 때 제나라에 기근이 든 틈을 이용했습니다.

그러나 제나라에 승리를 거두기도 전에 약한 월나라가 오나라의 피폐한 틈을 타 마침내 패업을 이뤘습니다.

지금 대왕께서 연나라를 공격하려는 것 역시 연나라에 기근이 든 틈을 이용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만일

연나라에 승리를 거두기도 전에 강한 진나라가 이 틈을 타 군사를 이끌고 와 조나라의 서쪽 변경을 공격할 것입니다.

이는 약한 조나라가 강한 오나라의 전철을 밟음으로써, 강한 진나라으로 하여금 약한 월나라가 이룬 패업을 이루게

만드는 것입니다. 원컨대 대왕께서는 이 점을 깊이 헤아려 보시기 바랍니다.”라고 하였다.
이에 초나라 사자가 곧바로 조혜문왕을 만나 설득했다. 그러자 조혜문왕이 크게 기뻐하며

이내 연나라를 공격하려는 당초의 생각을 버렸다. 연소왕이 이 말을 듣고 초나라 사자에게 봉지를 내렸다.]

 

昌國君樂毅為燕昭王合五國之兵而攻齊,下七十餘城,盡郡縣之以屬燕. 三城未下,而燕昭王死.

惠王即位,用齊人反間,疑樂毅,而使騎劫代之將. 樂毅奔赴趙,趙封以為望諸君.

齊田單欺詐騎劫,卒敗燕軍,復收下七十城以復齊. 燕王悔,懼趙用樂毅承燕之弊以伐燕.

燕王乃使人讓樂毅,且謝之曰:「先生舉國而委將軍,將軍為燕破齊,報先王之讎,天下莫不振動,

寡人豈敢一日而忘將軍之功哉!會先王棄群臣, 寡人新即位, 左右誤寡人.

寡人之使騎劫代將軍者, 為將軍久暴露於外, 故召將軍且休計事.  將軍過聽,以與寡人有隙,遂捐燕而歸趙.

將軍自為計則可矣,而亦何以報先王之所以遇將軍之意乎?」

[기원전 284, 창국군 악의(樂毅)가 연소왕을 위해 5국(연, 조, 한, 위, 초)의 군사를 이끌고 가 제나라를 공격하였다.

이에 제나라의 70여 성읍을 공략해 이를 모두 연나라의 군현으로 편입시켰다.

기원전 279, 마지막 남은 거(莒)와 즉묵(卽墨) 등 3개 성읍이 항복하기 전에 연소왕이 죽었다.

뒤를 이어 연소왕의 아들이 연혜왕(燕惠王)으로 즉위했다. 그러나 연혜왕은 이내 제나라의 이간책에 넘어가 악의를

의심한 나머지 장수 기겁(騎劫)을 보내 악의를 대신하게 했다. 이에 악의가 조나라로 도망치자, 조나라는 악의를

관진(觀津)에 봉하고 망제군(望諸君)으로 삼았다. 이때 제나라 장수 전단(田單)은 기겁을 유인해

마침내 연나라 군사를 격파하고 70여 성읍을 탈환하여 제나라 영토를 수복했다.
그러자 연혜왕은 크게 후회하며 혹여 조나라가 악의를 기용해 연나라가 지친 틈을 타 공격하지 않을까 두려워했다.

이에 곧 사람을 악의에게 보내 사과의 말을 전하기를 : “선왕은 나라를 들어 장군에게 맡겼소. 이에 장군이 연나라를

위해 제나라를 격파하여 선왕의 원수를 갚자 천하에 놀라지 않는 자가 없었소. 그러니 과인이 어찌 감히 하루인들

장군의 공을 잊을 수 있겠소. 마침 선왕께서 세상을 떠나 과인이 새로 즉위하게 되었으나 좌우가 그만 과인을

그릇된 길로 인도하고 말았소. 과인이 기겁으로 하여금 장군을 대신하게 한 것은 장군이 오랫동안 밖에서

풍찬노숙의 군영생활을 힘들게 하여 일단 장군을 불러 잠시 휴식하게 한 뒤 군국대사를 함께 논의하기 위한 것이었소.

그런데 장군이 유언비어를 믿은 나머지 과인과 틈이 생겨 마침내 연나라를 버리고 조나라로 가버리고 말았소.

장군이 스스로를 위하는 것은 가하나 선왕이 장군에게 보낸 후의(厚意)를 어찌 보답할 생각이오.”라고 하였다.

 

望諸君乃使人獻書報燕王曰:「臣不佞,不能奉承先王之教,以順左右之心,恐抵斧質之罪,

以傷先王之明,而又害於足下之義,故循逃奔趙. 自負以不肖之罪,故不敢為辭說.

今王使使者數之罪,臣恐侍御者之不察先王之所以畜幸臣之理,而又不白於臣之所以事先王之心,

故敢以書對. 臣聞賢聖之君,不以祿私其親,功多者授之;不以官隨其愛,能當者處之.

故察能而授官者,成功之君也;論行而結交者,立名之士也. 臣以所學者觀之,先王之舉錯,

有高世之新,故假節於魏王,而以身得察於燕. 先王過舉,擢之乎賓客之中,而離之乎群臣之上,

不謀於父兄,而使臣為亞卿.  臣自以為奉令承教,可以幸無罪矣,故受命而不辭.

[그러자 망제군 악의가 이내 사람을 시켜 서신으로 연왕에게 알리기를 : “신은 총명하지 못하여 선왕의 가르침을

받들지 못하고, 좌우의 뜻을 따르지 못해 그들로 하여금 대왕을 그릇된 길로 인도하게 만들었습니다.

이에 신의 부질지죄(斧質之罪)로 인해 선왕의 명덕(明德)을 훼손하고, 족하의 고의(高義)를 손상시킬까 두려운 나머지

조나라로 도망친 것입니다. 모든 것이 신의 불초한 죄에서 비롯된 것이어서 이에 감히 변명하지 못한 것입니다.

지금 대왕께서는 사자를 보내 신의 죄를 책망했습니다. 그러나 신은 대왕께서 혹여 선왕이 신을 아끼고 총애한

이유와 신이 선왕을 섬기게 된 충정을 제대로 살피지 못한 것이 아닐까 우려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이에 감히 글을 올려 이를 밝히고자 합니다. 신이 듣건대 ‘어질고 거룩한 군주는 친애하는 자에게 사사로이 작록을

내리지 않고 공을 많이 세운 자 사람에게 이를 주고, 총애하는 자에게 임의로 관직을 제수하지 않고 적합한 재능이

있는 자에게 이를 준다’고 했습니다. 그렇다면 신하의 재능을 파악한 뒤 관직을 내리는 군주가 공을 이루는 군주이고,

군주의 덕행을 살핀 뒤 서로 교제하는 자가 이름을 세우는 선비일 것입니다. 신이 배운 바에 따라 살펴보건대

선왕의 행동과 조치에는 분명 두각을 나타내고자 하는 의지가 드러났습니다. 그래서 신이 위왕(魏王: 위소왕)에게

부절(符節)을 빌려 위왕의 사자 신분으로 와서 선왕과 사귀게 된 것입니다. 선왕께서는 신을 빈객 중에서 파격적으로

등용하여 군신들 위에 앉히면서 종친 대신들과 상의도 하지 않은 채 아경(亞卿)을 제수했습니다.

신은 삼가 명을 받들면 요행히 죄를 면할 수 있을 것으로 생각해 명을 받아들이며 이를 사양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先王命之曰:『我有積怨深怒於齊,不量輕弱,而欲以齊為事.』 臣對曰:『夫齊霸國之餘教也,

而驟勝之遺事也, 閑於兵甲, 習於戰攻. 王若欲攻之, 則必舉天下而圖之. 舉天下而圖之,

莫徑於結趙矣.  區又淮北、宋地,楚、魏之所同愿也.  趙若許,約楚、魏,宋盡力,四國攻之,

齊可大破也.』 先王曰:『善.』臣乃口受令,具符節,南使臣於趙. 顧反命,起兵隨而攻齊.

以天之道,先王之靈, 河北之地,隨先王舉而有之於濟上. 濟上之軍奉令擊齊,大勝之.

輕卒銳兵,長驅至國.  齊王逃遁走莒,僅以深免. 珠玉財寶,車甲珍器,盡收入燕.

大呂陳於也英,故鼎反於歷室,齊器設於寧臺. 薊丘之植,植於汶皇.

[이때 선왕께서 분부하시기를, ‘과인에게는 제나라에 대한 겹겹이 쌓인 원한과 깊은 노여움이 있소.

연나라가 약소국이기는 하나 모든 역량을 총결집해 제나라에 복수하고자 하오’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신이

대답하기를, ‘제나라는 일찍이 전국을 재패하여 군림했던 전통이 있고, 누차에 걸친 전쟁에서 승리해 아직 여력이

있습니다. 군사도 많을 뿐만 아니라 전투에도 능합니다. 만일 대왕께서 제나라를 공격하고자 하면 반드시

천하의 제후들과 연합한 뒤 이를 도모해야만 합니다. 그리하려면 조나라와 연합하는 것이 첩경입니다.

또한 지금 초, 위 두 나라는 각각 회북(淮北)과 송 땅을 되찾고자 부심하고 있습니다. 만일 조나라가 연나라의

제의를 받아들이고, 초, 위 두 나라가 힘을 다하게 되면 4국이 합세해 제나라를 공격할 수 있습니다.

그리되면 가히 제나라를 대파할 수 있습니다’라고 했습니다. 그러자 선왕이 ‘옳은 말이오’라며 흔쾌히 받아들였습니다.

이에 신이 직접 명을 받아 부절을 구비해 남쪽으로 제나라에 사자로 가게 된 것입니다. 이어 복명이 끝나자

곧 군사를 이끌고 선왕을 좇아 가 제나라를 공격하였습니다. 하늘의 도리를 따르고 선왕의 영명함에 의지해

하북에 위치한 조, 위 두 나라가 선왕의 뒤를 좇아 모두 거병해 제수(濟水)의 상류를 공격하였습니다.

제수의 상류에 있던 군사들은 명을 받들어 제나라를 공격하여 대승을 거두었습니다. 날랜 정예병이 제나라 도읍에

이르자 제민왕은 간신히 몸만 빼내 거(莒) 땅으로 급히 달아났습니다. 이로써 제나라에 있던 많은 주옥과 보물,

수레와 갑옷및 진기한 물건들은 모두 연나라의 손에 들어왔습니다. 이에 대려(大呂: 제나라의 종)는

원영전(元英殿: 연나라 궁전 이름)에 내걸리고, 전에 빼앗겼던 구정(九鼎)은 역실궁(연나라 궁전)으로 돌아오고,

제나라의 제기(祭器)는 영대(寧臺: 연나라의 누대)에 진열되었습니다. 계구(薊丘)의 정원목(庭園木)은

문수(汶水)의 대나무 밭에서 가져와 개종한 것입니다.]

 

自五伯以來,功未有及先王者也. 先王以為愜其志,以臣為不頓命,故裂地而封之,

使之得比乎小國諸侯.  臣不佞,自以為奉令承教,可以幸無罪矣,故受命而弗辭. 臣聞賢明之君,

功立以不廢, 故著於春秋, 蚤知之士, 名成以不毁, 故稱於後世. 若先王之報怨雪恥, 夷萬乘之强國,

收八百歲之蓄積, 及至棄羣臣之曰, 餘令詔後嗣之遺義. 執政任事之臣, 所以能循法令, 順庶孼者,

施及萌隶, 皆可以敎於後世.

[자고로 5패(五伯) 이래 그 공적과 업적이 선왕에 미친 자는 아직 없었습니다. 선왕은 숙원을 이루었다고 생각하여

마침내 신에게 조그만 명까지도 빠짐없이 완수하였다는 명목으로 땅을 떼어 봉하고 소국의 제후들과 어깨를 겨루게

해 주었습니다. 신은 비록 재능은 없지만 삼가 명을 받들면 요행히 죄를 면할 수 있을 것으로 생각해 이를

받아들이면서 사양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신이 듣건대 ‘현명한 군주는 공업을 세우면 이를 훼손하지 않아「춘추」에

그 이름을 남기고, 선견지명이 있는 선비는 명성을 이루면 이를 훼손하지 않아 후세의 칭송을 받는다’고 했습니다.

선왕과 같은 이는 원한을 갚고 치욕을 씻어서, 강한 만승지국을 평정하고, 8백세(태공망 이래 제민왕까지의 기간)된

제나라의 주옥보재와 거갑진기를 거두고, 세상을 떠나는 날까지 남아 있는 영이 후대에 전해내려 오는 정책법령으로

선포되고, 집정대신들이 능히 법령을 따르며 근신하여 서얼자(庶孼子: 후궁 소생의 서자)의 작란을 막고

일반 백성에게 두루 은혜를 베푼 것 등은 모두 가히 후세에 가르칠 만한 것들입니다.]

 

臣聞善作者,不必善成;善始者,不必善終.  昔者五子胥說聽乎闔閭可,故吳王遠跡至於郢.

夫差弗是也,賜之鴟夷而浮之江. 故吳王夫差不悟先論之可以立功,故沉子胥而不悔.

子胥不蚤見主之不同量,故入江而不改. 夫免身全功,以明先王之跡者,臣之上計也.
離毀辱之非,墮先王之名者,臣之所大恐也. 臨不測之罪,以幸為利者,義之所不敢出也.

臣聞古之君子, 交絶不出惡聲, 忠臣之去也, 不潔基名. 臣雖不佞, 數封敎於君子矣,

恐侍御者之親左右之說, 而不察疏遠之行也, 故敢以書報, 唯君之類意焉.」

[또 신이 듣건대 일을 잘 하는 사람이라고 해서 반드시 좋은 성과를 얻는 것도 아니고, 시작을 잘 하는 사람이

반드시 마무리를 잘 하는 것도 아니다’라고 했습니다. 옛날 오왕 합려는 오자서의 건의를 잘 받아들여 그 세력을

멀리 초나라 도읍 영까지 뻗쳤습니다. 그러나 오왕 부차는 그를 불신한 나머지 이내 죽인 뒤 그 시신을 가죽으로

만든 자루 속에 넣어 장강에 던져버렸습니다. 부차는 오자서가 생전에 제시한 계책으로 공을 세울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닫지 못했기 때문에 그를 수장지내고도 후회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오자서 또한 부차가 합려의 기량이 같지 않다는

것을 미리 간취하지 못해 장강에 수장되었는데도 죽을 때까지 이를 깨닫지 못했던 것입니다. 무릇 연나라를 떠나

큰 화를 면함으로써 이미 세운 공을 온전히 하고 선왕의 공업을 널리 밝게 드러내는 것이야말로 신이 선택할 수 있는

최상의 계책입니다. 신이 돌아가 참언과 비방을 듣게 되면 이는 선왕의 명예을 훼손하는 것이 됩니다.

이는 신이 가장 두려워하는 것이기도 합니다. 예측하지 못했던 죄 앞에서 빠져 요행히 죄를 면할 생각으로 조나라와

함께 연나라를 도모하는 것은 신이 도의상 도저히 할 수 없는 일입니다. 신이 듣건대 ‘옛날의 군자는 교분을 끊어도

비방을 하지 않고, 충신은 본국을 떠나도 군주에 대한 험담을 하여 자신을 드러내지 않는다’고 했습니다.

신이 비록 어리석고 우둔하나 누차 군자의 가르침을 받은 바 있습니다. 다만 임금곁에서 가까이 모시고 있는 

좌우의 말만 믿고 악의와 같이 군주에게 총애받지 못한 사람들의 행동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할까 걱정될 뿐입니다.

이에 감히 서신으로 답을 하오니 부디 잊지 말고 새겨 두시기 바랍니다.”라고 하였다.]

或獻書燕王:「王而不能自恃,不惡卑名以事強. 事強,可以令國安長久,萬世之善計.
以事強而不可以為萬世,則不如合弱,將奈何合弱而不能如一,此臣之所為山東苦也.

比目之魚,不相得則不能行,故古之人稱之,以其合兩而如一也.  今山東合弱而如一,

是山東之知不如魚也. 又譬如車士之引車也,三人不能行,索二人,五人而車因行矣.
今山東三國弱而不能敵秦,索二國,因能勝秦矣. 然而山東不致相索,智固不如車士矣.

胡與越人,言語不相知,志意不相通,同舟而凌波,至其相救助如一也.

今山東之相與也,如同舟而濟,秦之兵至,不能相救助如一,智又不如胡、越之人矣.

三物者,人之所能為也,山東之主遂不悟,此臣之所為山東苦也.  愿大王之熟慮之也.

[기원전 299, 어떤 사람이 연소왕에게 헌서(獻書)하기를 : “대왕께서는 자신의 역량에 기대어 스스로 보전할 생각을

하지 않고 남의 밑에 들어가는 것을 꺼리지 않은 채 강대국을 섬기고 있습니다. 강대국을 섬기면 가히 나라를

오랫동안 평안하게 할 수 있으니 만세토록 이끌어 가는 좋은 계책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러나 강대국을 섬기면서

국가의 평안을 오랫동안 고려하지 않으면 차라리 약소국과 연합하느니만 못합니다. 다만 약소국과 연합해

일치단결하지 못할 경우 장치 이를 어찌할 것입니까. 이것이 바로 신이 산동의 제후국을 위해 걱정하는 것입니다.
비목어(눈이 하나만 있는 전설상의 물고기)는 짝을 짓지 않으면 앞으로 나아갈 수 없습니다. 그래서 옛 사람들이

양쪽을 합쳐야 하나가 될 수 있다고 하여 이름을 지은 것입니다. 지금 산동의 제후국들은 미약한데도 불구하고

하나로 합치지 못하고 있습니다. 이는 산동 제후들의 지혜가 물고기만도 못하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이는 수레꾼이 수레를 끄는 것에 비유할 수 있습니다. 만일 3 명만으로 불가능할 경우 2 명을 더 구해 5 명이 되면

이들이 합세해 수레를 앞으로 나아가게 할 수 있습니다. 지금 산동의 제후국들은 미약하기 그지없어 3국만으로는

진나라를 대적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나머지 2국을 구해 힘을 합치면 능히 진나라에 이길 수 있습니다.

그럼에도 산동의 제후국들은 서로 힘을 합칠 생각을 하지 않고 있으니 그 지혜가 거사만도 못한 것입니다.

호인(胡人)과 월인(越人)은 서로 말도 통하지 않고 뜻하는 바도 다르나 같은 배를 타면 서로 한 몸처럼 돕게 됩니다.

지금 산동의 제후들은 같은 배에 올라 함께 강을 건너는 처지에 있습니다. 진나라 군사가 들이닥칠 경우 서로

한 몸처럼 돕지 못하면 그 지혜가 호인과 월인만도 못한 것입니다. 이들 비목어와 거가, 호인 및 월인의 예에 나온

3가지 경우는 사람들이 능히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산동의 재후들이 끝까지 이를 깨닫지 못하고 있을 뿐입니다.

이것이 바로 신이 산동의 제후들을 위해 걱정하는 것입니다. 원컨대 대왕께서는 깊이 헤아리시기 바랍니다.

 

山東相合,之主者不卑名,之國者可長存,之卒者出士以戍韓、梁之西邊,此燕之上計也.
不急為此,國必危矣,主必大憂.  韓、梁、趙三國以合矣,秦見三晉之堅也, 必南伐楚.

趙見秦之伐楚也, 悲北攻燕.  物固有勢異而患同者. 秦久伐韓,故中山亡;今久伐楚,燕必亡.

臣竊為王計不如以兵南合三晉, 約戍韓、梁之西邊. 山東不能堅為此,此必皆亡.」

燕果以兵南合三晉也.

[산동의 제후국들이 서로 연합하면 제후들은 굳이 남의 밑에 들어갈 필요도 없고, 국가 또한 장구히 보전할 수 있고,

병사들도 필경 출병시켜 한, 위의 서쪽 변경을 지키게 할 수 있으니 이는 연나라가 선택할 수 있는 최상의 계책입니다.

서둘러 산동의 제후들과 연합하지 않으면 나라는 필시 위기에 처하고 대왕께서도 커다란 우환을 떠안게 될 것입니다.

지금 3진이 연합하면 진나라는 3진의 견고함을 보고 필시 남쪽으로 초나라를 공격할 것입니다. 그러면 조나라는

이 틈을 타 북쪽으로 연나라를 공격할 것입니다. 각자가 처한 형세는 다르나 그 우환은 같은 것입니다.

진나라가 오랫동안 한나라를 공격하자 중산국이 멸망했습니다. 지금 진나라가 오랫동안 초나라를 공격하니

연나라는 필시 망하고 말 것입니다. 신이 대왕을 위해 계책을 일러 드린다면 남쪽으로 3진의 군사와 합세해

한, 위 두 나라의 서쪽 변경을 철저히 수비하십시오. 산동의 제후들이 이곳을 견고히 지키지 못할 경우

필시 모두 망하고 말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그러자 연나라가 과연 남쪽으로 3진의 군대와 합세했다.]

 

客謂燕王曰:「齊南破楚,西屈秦,用韓、魏之兵,燕、趙眾,猶鞭策也. 使齊北面伐燕,

即雖五燕不能當. 王何不陰出使,散游士,頓齊兵,弊其眾,使世世無患.」 

燕王曰:「假寡人五年末,寡人得其志矣.」

蘇子曰:「請假王十年.」燕王說,奉蘇子車五十乘,南使於齊.

謂齊王曰:「齊南破楚,西屈秦,用韓、魏之兵,燕、趙之眾,猶鞭策也. 臣聞當世之舉王,

必誅暴正亂,舉無道,攻不義. 今宋王射天笞地,鑄諸侯之象,使侍屏偃,展其臂,彈其鼻,

此天下之無道不義,而王不伐,王名終不成. 且夫宋, 中國膏腴之地,鄰民之所處也,

與其得百里於燕, 不如得十里於宋. 法認真,名則義,實則利,王何為弗為?」

[어떤 객이 연소왕에게 말하기를 : “제나라가 남쪽으로 초나라를 깨뜨리고, 서쪽으로 진나라를 굴복시키고,

한, 위 두 나라 군사를 동원해 초나라와 진나라를 공격하였습니다. 제나라가 연, 조 두 나라마저 이용하게 되면

제나라는 제후들에 대해 멋대로 채찍을 휘두르게 됩니다. 제나라로 하여금 북쪽으로 연나라를 공격하게 하면

비록 연나라가 5개 있을지라도 이를 감당하기 어렵습니다. 대왕께서는 왜 은밀히 사자를 보내는 일과,

유사(游士: 세객)를 사방으로 보내 제후들을 설득하는 일과, 그 군사를 곤경에 처하게 하는 일과,

그 백성을 지치게 만들어 우환이 없도록 하는 일을 하지 않는 것입니까.”라고 하였다.
연소왕이 말하기를 : “과인이 5년 가량 기다리면 소원을 이룰 수 있을 것이오.”라고 하자.
소진이 말하기를 : “청컨대 왕께10년을 드리겠습니다.”라고 하였다.  연소왕이 크게 기뻐하며 곧 소진에게

수레 50 승을 주고 제나라에 사자로 가게 했다. 이에 소진이 제나라로 가서 제민왕에게 말하기를 :
“제나라는 남쪽으로 초나라를 깨뜨리고, 서쪽으로 진나라를 굴복시키고, 한, 위 두 나라 군사를 동원해 초나라와

진나라를 공격하였습니다. 이제 연, 조 두 나라까지 동원하게 되면 천하의 제후들을 완전히 제압할 수 있습니다.

신이 듣건대 당대에 왕업을 이루기 위해서는 반드시 포학한 자를 주멸하여 난을 평정하고, 무도한 군주를 멸하고,

불의한 나라를 공격한다고 했습니다. 지금 송나라 왕은 사천태지(射天笞地: ‘사천’은 은나라의 武乙이 피를 가득

담은 푸대를 매달아 놓고 활을 쏜 데서 나온 것이고, ‘태지’는 땅의 신령을 매질하는 것을 의미)하는 무도함을

저지르고 있습니다. 그는 또 제후들의 모습을 본뜬 동상을 주조하고는 시자(侍者)처럼 길 옆에 세워 팔을 뻗어

예를 올리는 모습을 취하게 하고, 누대 위에 올라가 새총으로 동상의 코를 쏘고 있습니다. 천하의 이처럼 무도불의한

자를 대왕께서 토벌하지 않으면 대왕의 명성은 종내 이뤄지지 않을 것입니다. 게다가 송 땅은 중국의 기름진 땅이고

정도(定陶)는 천하의 가장 부유한 성시로 장사 하기 위해 사방을 오가는 백성들이 몰려 있습니다.

연나라에서 1백 리를 취하느니 송 땅에서 10 리를 취하는 것이 낫습니다. 송나라를 멸하면 명분상 의를 세우고,

실질상 이익을 취하게 되는데 대왕은 왜 이를 행하지 않는 것입니까?”라고 하였다.]

 

齊王曰:「善.」遂與兵伐宋,三覆宋,宋遂舉. 燕王聞之,絕交於齊,率天下之兵以伐齊,

大戰一,小戰再,頓齊國,成其名. 故曰:因其強而強之,乃可折也;因其廣而廣之,乃可缺也.

趙且伐燕,蘇代為燕王謂惠王曰:「今者臣來,過易水,蚌方出曝,而鷸啄其肉,蚌合而鉗其喙.
鷸曰:『今日不雨,明日不雨,即有死蚌.』蚌亦謂鷸曰:『今日不出,明日不出,即有死鷸.』

兩者不肯舍,漁者得而并禽之. 今趙且伐燕,燕、趙久相支,以弊大眾,臣恐強秦之為漁漁父也.

故愿王之熟計之也.」 惠王曰:「善.」乃止.

[제민왕은 말하기를 : “옳은 말이오.”라고 하며, 마침내 군사를 이끌고 가서 송나라를 정벌하였다.

3 번에 걸쳐 송나라를 대파함으로써 이내 송나라를 멸망시켰다. 연소왕이 이 얘기를 듣자 곧 제나라와 단교한 후

천하 제후들의 군사를 이끌고 가 제나라를 정벌하였다. 한 번의 대전(大戰)과 2 번의 소전(小戰) 끝에

드디어 제나라 군사를 격파하고 명성을 이뤘다. 그리고는 말하기를 ' 강한 것은 더욱 강하게 해 주어야

마침내 이를 꺽을 수 있고, 넓은 것은 더욱 넓게 해 주어야 마침내 이를 깎을 수 있다.'고 하였다.

조나라가 장차 연나라를 정벌하려고 하자, 소대가 연나라를 위해 조혜문왕(趙惠文王)에게 말하기를 :
“오늘 신이 오면서 역수(하북성)를 건너던 중 마침 큰 조개가 물에서 나와 햇볕을 쬐고 있는 모습을 보게 되었습니다.

그때 황새가 날아와 조개의 살을 쪼았습니다. 그러자 조개가 급히 껍질을 닫아 황새의 부리를 물어버렸습니다.

이에 황새가 위협하기를, ‘오늘도 살을 뱉지 않고, 내일도 살을 뱉지 않으면 너는 죽고 만다’고 했습니다.

그러자 조개가 대꾸하기를, ‘오늘도 부리를 놓지 않고, 내일도 부리를 놓지 않으면 너는 죽고 만다’고 했습니다.

양측이 서로 양보하지 않자 마침 그곳을 지나가던 어부가 이 광경을 보고 황새와 조개를 한꺼번에 잡아 버렸습니다.

지금 조나라는 장차 연나라를 정벌하려고 하나 연, 조 두 나라는 오랫동안 서로 싸워 백성들이 크게 지쳐 있습니다.

신은 강한 진나라가 어부처럼 두 나라를 손쉽게 수중에 넣을까 우려됩니다.

그러므로 대왕께서는 이 점을 깊이 고려하시기 바랍니다.”라고 하였다.
조혜문왕은 대답하기를 : “옳은 말이오.”라고 하며, 이내 당초의 계획을 포기했다.]

 

齊魏爭燕.  齊謂燕王曰:「吾得趙矣.」魏亦謂燕王曰:「吾得趙矣.」燕無以決之,而未有適予也.

蘇子謂燕相曰:「臣聞辭卑而幣重者,失天下者也;辭俱而幣薄者,得天下者也.

今魏之辭俱而幣薄.」 燕因合於魏,得趙,齊遂北矣.

​[주난왕 31년(기원전 284), 제, 위 두 나라가 연나라와 연합키 위해 다퉜다. 이때 제나라가 연소왕에게 말하기를 :
“우리는 이미 제나라를 얻었소.”라고 하자, 위나라 역시 연왕에게 말하기를 : “우리도 이미 제나라를 얻었소.”하였다.
그러자 연나라는 결정을 내릴 근거가 없어 어느 쪽에도 연합을 허락지 못했다. 소대가 연나라 상국에게 말하기를 :

“신이 듣건대 지나치게 겸손한 언사와 두터운 예물은 천하를 잃게 하고, 거만한 언사와 소략한 예물은 천하를 얻게

한다고 했습니다. 지금 위나라가 거만한 언사와 소략한 예물을 하고 있습니다.”라고 하였다.
이에 연나라는 위나라와 연합을 바탕으로 조나라와 연합했다. 그러자 제나라가 마침내 패하게 되었다.]

   燕策 三 

齊、韓、魏共攻燕,燕使太子請救於楚. 楚王使景陽將而救之. 暮舍,使左右司馬各營壁地,

已,植表. 景陽怒曰:「所營者,水皆至滅表. 此焉可以舍!」乃令徙. 明日大雨,山水大出,

所營者,水皆滅表. 軍吏乃服.  於是遂不救燕,而攻魏邕丘,取之以與宋. 三國懼,乃罷兵.

魏軍其西,齊軍其東,楚軍欲還不可得也.  景陽乃開西和門,晝以車騎,暮以燭見,通使於魏.

齊師怪之,以為燕、楚與魏謀之,乃引兵而去. 齊兵已去,魏失其與國,無與共擊楚,乃夜遁.

楚師乃還.

[주난왕 43년(기원전 272), 제, 한, 위 세 나라가 연합해 연나라를 공격하였다. 이에 연나라가 태자를 초나라에

사자로 보내 구원을 청하게 하자, 초경양왕이 대사마 경양(景陽)에게 명해 군사를 이끌고 가서 연나라를 돕게 했다.

이들 구원병들은 날이 어두워 숙영(宿營)하게 되자, 경양이 좌우 사마에게 명해 각기 진지를 구축하게 하였다.

그러나 경양은 진지가 완성된 것을 크게 화를 내며 말하기를 : “그대들이 쌓은 진지는 물이 쏟아져 내리면 모두

잠기게 된다. 어찌 이같은 곳에서 숙영할 수 있겠는가?”라고 하자.  이내 숙영지를 옮겼다.

다음날 큰 비가 내려 산의 물이 일시에 밀려오자 전날 쌓은 진지가 순식간에 물에 씻겨 나가고 말았다.

군리(軍吏)들은  비로소 경양에게 감탄하며 마음으로 따랐다. 그러나 경양은 연나라를 구하지 않고 위나라의

옹구(하남성 기현)를 공격해 이를 취한 뒤 송나라에 주었다. 그러자 제, 한 , 위 세 나라가 모두 두려운 나머지

이내 공격을 멈췄다. 위나라가 초나라 군사의 서쪽에 진을 치고, 제나라가 동쪽에 진을 치자 초나라 군사는

철군하고자 해도 할 수 없게 되었다. 그러자 경양이 이내 서쪽의 화문(군기를 세워 만든 군문)을 열고는

낮에는 병거와 기마를 오가게 하고, 밤에는 횃불을 올려 마치 위나라와 사자를 주고받는 듯이 가장했다.

처음에 이를 의아하게 생각하던 제나라 군사는 연, 초 두 나라가 위나라와 더불어 자신들을 도모하는 것이나 아닌지

우려한 끝에 이내 철군하고 말았다. 제나라 군사의 철군으로 동맹국을 잃은 위나라도 단독으로는 초나라를 공격할

길이 없게 되자 이내 야음을 틈 타 철군했다. 이에 초나라 군사는 무사히 귀환하였다.]

張醜為質於燕, 燕王欲殺之, 走且出境, 境吏得醜. 醜曰:「燕王所為將殺我者, 人有言我有寶珠也,

王欲得之. 今我已亡之矣,而燕王不我信. 今子且致我,我且言子之奪我珠而吞之,燕王必當殺者,刳子腹及子之腸矣.

夫欲得之君,不可說以利. 吾要且死,子腸亦且寸絕.」境吏恐而赦之.

[제나라 대신 장추(張丑)가 연나라에 인질로 가게 되었다. 이에 연왕이 죽이려 하자 은밀히 연나라 국경을 향해

도주했다. 그러나 국경을 벗어나기 직전 국경 수비대원에게 잡히고 말았다. 그러자 장추가 말하기를 :
“연왕이 나를 죽이려고 한 것은 나에게 보주(寶珠)가 있다는 한 자의 말을 믿고 이를 손에 넣으려고 했기 때문이오.

그런데 오늘 나는 그만 그것을 잃어버리고 말았소. 그런데도 연왕은 내 말을 믿지 않은 것이오.

지금 그대가 나를 잡아 연왕에게 압송하면 나는 그대가 내 구슬을 빼앗아 삼켜 버렸다고 말할 것이오.

그리하면 연왕은 틀림없이 그대를 죽인 뒤 배를 갈라 창자를 들어낼 것이오. 무릇 탐욕으로 끝이 없는 연왕을 아무리

이로움을 가지고 설득하려 해도 소용이 없소. 내가 죽고나면 그대도 창자가 마디마디 끊어지고 말 것이오.”하였다.
국경 수비대원은 두려운 나머지 이내 장추를 풀어 주었다.]

 

燕王喜使栗腹以百金為趙孝成王壽, 酒三日, 反報曰:「趙民其狀者睫死於長平, 其孤未狀, 可伐也.」

王乃召昌國君樂間而問曰:「何如?」 對曰:「趙,四達之國也,其民皆習於兵,不可與戰.」
王曰:「吾以倍攻之,可乎?」曰:「不可.」曰:「以三,可乎?」曰:「不可.」王大怒.

左右皆以為趙可伐,遽起六十萬以攻趙. 令栗腹以四十萬攻鄗,使慶秦以二十萬攻代.

趙使廉頗以八萬遇栗腹於鄗,使樂乘以五萬遇慶秦於代. 燕人大敗. 樂間入趙.

[기원전 251), 연왕 희(喜)가 상국 율복(栗腹)을 조나라에 사자로 보내 1백 금으로 조효성왕(趙孝成王)을 위해

장수를 빌며 예물을 올리고 술잔을 바치게 했다. 3 일 후 율복이 돌아와 보고하기를 : “조나라의 백성 중 장정은

모두 장평(長平)의 싸움에서 전사하고, 그 자식들은 아직 어립니다. 가히 공격할 만합니다.”라고 하였다.
이에 연왕 희가 창국군 악간(악의의 아들)을 불러 묻기를 : “조나라를 공격할만하다고 하는데 어떻소?”라고 하자.
악간이 대답하기를 : “조나라는 사방으로 길이 통해 교통이 매우 좋은 나라이며 백성들 또한 싸움에 능합니다.

그들과 싸워서는 안 됩니다.”라고 하였다. 왕이 묻기를 : “내가 병력을 2 배로 늘려 공격하면 어떻겠소?”라고 하자.
악간이 대답하기를 : “그것도 안 됩니다.”라고 하였다. 왕이 묻기를 : “3 배로 하면 어떻겠소?”라고 하자.
악간이 대답하기를 : “그것도 안 됩니다.”라고 하였다. 이에 연왕 희가 대노했다.

이때 좌우는 모두 조나라를 공격할 만하다고 생각했다. 결국 연왕 희는 급히 60만 대군을 동원해 조나라 공벌 준비를

마쳤다. 그리고는 율복에게 명해 군사 40만 명을 이끌고 가 호(鄗: 섬서성 서안시)를 공격하고, 경진(慶秦)은 군사

20만 명을 이끌고 가 대(代)를 공격하게 했다. 그러자 조나라는 장군 염파(廉頗)에게 군사 8만 명을 이끌고 가서

율복을 호에서 맞서 싸우게 하고, 악승(樂乘: 악간의 일족)에게 군사 1만 명을 이끌고 가 경진과 맞서 싸우게 하였다.

이에 연나라가 대패하자, 악간은 조나라로 도망가 버렸다.]

 

燕王以書且謝焉,曰:「寡人不佞,不能奉順君意,故君捐國而去,則寡人之不肖明矣.

敢端其愿,而君不肯聽,故使使者陳愚意, 君試論之. 語曰:『仁不輕絕,智不輕怨.』

君之於先王也, 世之所明知也. 寡人望有非則君掩蓋之,不虞君之明罪之也;望有過則君教誨之,

不虞君之明罪之也. 且寡人之罪,國人莫不知,天下莫不聞,君微出明怨以棄寡人,寡人必有罪矣.

雖然,恐君之未盡厚也.  諺曰:『厚者不毀人以自益也,仁者不危人以要名.』以故掩人之邪者,

厚任之行也;救人之過者,仁者之道也.  世有掩寡人之邪, 救寡人之過,非君心所望之?

今君厚受位於先王以成尊,輕棄寡人以快心,則掩邪救過, 難得於君矣.

[그러자 연왕 희는 악간에게 사죄의 서신을 보내기를 : “과인이 무능하여 그대의 뜻을 따르지 못했소.

이에 그대가 연나라를 버리고 가니 과인의 어리석음이 선명히 드러나게 되었소. 감히 그대를 다시 임용하고자 하는

과인의 마음을 고하고자 하나 그대가 들어주지 않을 듯해 사자를 통해 어리석으나마 이 뜻을 전하는 바이니

그대가 선택하기 바라오.

속담에 이르기를, ‘인자(仁者)는 경솔히 절교하지 않고, 지자(知者)는 경솔히 원망하지 않는다’고 했소.

그대와 선왕(先王: 연혜왕) 사이는 세상 사람들이 익히 아는 바요. 그래서 과인은 내게 잘못이 있으면 그대가 덮어줄

것으로 기대했기에 그대가 과인의 잘못을 드러내 놓고 추궁하리라고는 생각지도 못했소. 과실이 있으면 그대가

잘 가르쳐 주기를 원했는데 그대가 드러내 놓고 과인을 버릴 줄은 꿈에도 생각지 못했소.

무릇 과인의 죄는 백성들 중 모르는 자가 없고 천하의 제후들 중 듣지 않은 자가 없소. 이는 그대가 몸을 숨겨 출국한 뒤 드러내 놓고 원망을 하며 과인을 저버렸기 때문이오. 물론 이 모든 것은 과인에게 죄가 있는 것이오.

비록 그렇기는 하나 그대도 과인에게 야박하게 대한 것이 아닌가 하오. 속담에 이르기를, ‘돈후한 사람은 남에게

손상을 입혀가며 이익을 꾀하지 않고, 인자(仁者)는 남에게 해를 끼쳐가며 명성을 꾀하지 않는다’고 했소.

그렇다면 사람의 불선(不善)을 덮어주는 것이 후자의 행실이고, 사람의 과실을 구제하는 것이 인자의 길일 것이오.

세상에서 과인의 불선을 덮어주고, 과인의 과실을 구제해 줄 사람으로 그대 말고 또 누구를 기대할 수 있겠소.

지금 그대는 선왕으로부터 높은 작위를 받아 존귀하게 되었으면서도 경솔히 과인을 저버리는 것을 유쾌한 마음으로

삼는다면 그대로부터 더 이상 사악함을 숨겨가며 잘못을 용서 받기를 기대하기는 어렵게 되었소.

 

且世有薄於故厚施,行有失而故惠用. 今使寡人任不肖之罪,而君有失厚之累,於為君擇之也,

無所取之. 國之有封疆,猶家之有垣墻,所以合好掩惡也. 室不能相和,出語鄰家,未為通計也.

怨惡未見而明棄之,未盡厚也. 寡人雖不肖乎,未如殷紂之亂也;君雖不得意乎,未如商容、

箕左之累也. 然則不內蓋寡人,而明怨於外,恐其遇足以傷於高而薄於行也,非然也.

茍可以明君之義,成君之高,雖任惡名,不難受也. 本欲以為明寡人之薄,而君不得厚;

揚寡人之辱,而君不得榮,此一舉而兩失也. 義者不虧人以自益,況傷人以自損乎!

愿君無以寡人不肖,累往事之美.

[과인은 세상이 비록 박하게 대할지라도 오히려 두텁게 베풀고, 그 행실이 비록 과인의 뜻과 부합하지 않을지라도

오히려 너그러이 임용할 생각이오. 지금 과인에게는 불초한 죄를 짓도록 해 놓고, 그대는 야박하다는 비난을 받게

되었소. 그대를 위해 선택하라고 하면 취할 게 아무 것도 없소. 나라에 경계가 있는 것은 집에 담장)이 있는 것과 같소.

경계와 담장은 좋은 것을 같이 하고 나쁜 것을 덮어주기 위한 것이오. 집안이 서로 화목하지 못할 때 밖으로 나가

이웃에게 떠들고 다니는 것은 결코 옳은 방법이 아니오. 원한이나 미움이 드러나기 전에 그 대상을 미리 드러내 놓고

비난하는 것은 돈후함을 다했다고 할 수 없소. 과인은 비록 불초하기는 하나 아직 은주(殷紂)만큼 악하지는 않소.

그대가 비록 뜻을 얻지 못했다 해도 아직 상용(商容: 은나라 말기의 현자)이나 기자(箕子)만큼 화를 당하지는 않았소.

안으로 과인을 덮어주지 않고 그 원망을 밖으로 드러낸 것은 오히려 그대의 높은 의기를 손상하고 덕행(德行)을

박하게 만든 것이나 아닌지 우려되오. 그렇지 않고 만일 그대의 의로운 행동을 세상에 드러내 그대의 높은 뜻을

이루고자 하는 것이라면 과인은 비록 악명을 듣게 될지라도 이를 꺼리지 않을 것이오. 그러나 과인의 부덕을 밝히는

것으로는 그대가 돈후해질 수 있는 것도 아니오. 과인의 치욕을 드러내는 것으로는 그대가 영예를 얻을 수 있는 것도

아니오. 이것이 바로 한 번의 잘못으로 두 가지를 잃는다고 하는 것이오. 의로운 사람은 다른 사람에게 해를 끼치면서

자신의 이익을 꾀하지 않는 법이오. 하물며 사람에게 해를 끼치면서 자신까지 해를 입는 경우야 더 이상 말할 것이

있겠소? 원컨대 그대는 과인의 불초로 인해 그대의 과거의 명성까지 비난받는 일이 없기 바라오.

 

昔者,柳下惠吏於魯,三黜而不去. 或謂之曰:『可以去.』

柳下惠曰:『茍與人之異,惡往而不黜乎? 猶且黜乎,寧於國外國爾.』 柳下惠不以三黜自累,

故前業不忘;不以去為心,故遠近無議.  今寡人之罪,國人未知,而語寡人者邊天下.

語曰:『論不修心,議不累物,仁不輕絕,智不簡功. 』棄大功者,輟也;輕絕厚利者,怨也.
輟而棄之,怨而累之,宜在遠者,不望之乎君也. 今以寡人無罪,君豈怨之乎?

愿君捐怨,追惟先王,復以教寡人!意君曰,餘且慝心以成而過,不顧先王以明而惡,

使寡人進不得修功,退不得改過,君之所揣也,唯君圖之!此寡人之愚意也. 敬以書謁之.」

樂間、樂乘怨不用其計二人卒留趙,不報.

[옛날 유하혜(柳下惠)는 노나라에서 관원으로 있다가 3 번이나 축출 당하였으나 끝내 노나라를 떠나지 않았소.

어떤 사람이 떠날 것을 권하자 유하혜가 대답하기를, ‘만일 내가 일반인과 달라 축출되는 것이라면 어디를 가든

축출되지 않겠소. 기왕 축출되는 것이라면 차라리 고국에서 축출되겠소’라고 했소. 그는 자신이 축출된 사실을

전혀 개의치 않았기에 자신의 평생 사업을 잊지 않을 수 있었던 것이오. 또한 노나라를 떠날 생각이 아예 없었기에

예로부터 오늘날까지 그를 비난하는 일이 없었던 것이오. 지금 과인의 죄에 대해 백성들은 아직 제대로 모르고 있는데 과인을 비난하는 얘기가 이미 천하에 널리 퍼져버렸소. 속담에 이르기를, ‘담론을 하는 자는 말을 수식하지 않고,

의논을 하는 자는 사람을 해치지 않고, 어진 자는 경솔히 절교하지 않고, 지혜로운 자는 업적을 버리지 않는다’고

했소. 대공(大功)을 버리는 것은 인정을 끊는 것과 같소. 경솔히 절교하여 사리를 추구하면 원망을 사게 되오.

인정을 끊어 사람을 버리고, 원망을 사며 사람을 해치는 것은 소원한 대신들 사이에서만 일어나는 일이오.

이는 그대도 바라지 않을 것이오. 지금 과인은 이렇다 할 죄도 짓지 않았으니 어찌 그대가 과인을 원망할 리 있겠소.

원컨대 그대는 원망을 버리고 선왕께 입은 은혜를 생각해서라도 다시 과인을 가르쳐 주기 바라오.

혹여 그대는 생각하기를, ‘내가 장차 통쾌한 심경으로 그대의 과실을 드러내고, 선왕의 후은을 고려하지 않고

그대의 불선을 밝히겠다’고 할지 모르겠소. 만일 그리하면 이는 과인으로 하여금 전진해도 공을 이루지 못하고,

후퇴해도 잘못을 고칠 길이 없게 만드는 것이오. 이는 그대가 재단할 일이오. 원컨대 그대가 깊이 고려해 주기 바라오.

이상이 바로 과인의 어리석은 생각이라오. 삼가 서신으로 이를 알리는 바요.”라고 하였으나,  
악간은 자신들의 계책이 받아들여지지 않는 것을 크게 원망했기에 결국 조나라에 머물며 회신을 보내지 않았다.]

 

秦并趙,北向迎燕。燕王聞之,使人賀秦王. 使者過趙,趙王系之.

使者曰:「秦、趙為一,而天下服矣. 茲之所以受命於趙者,為秦也. 今臣使秦,而趙系之,

是秦、趙有隙. 秦、趙有隙,天下必不服,而燕不受命矣. 且臣之使秦,無妨趙之伐燕也.」

趙王以為然,而遣之.  使者見秦王曰:「燕王竊聞秦并趙,燕王使使者賀千金.」

秦王曰:「一夫無道,吾使趙有之,子何賀?」 使者曰:「臣聞全趙之時,南鄰為秦,

北下曲陽為燕,趙廣三百里,而與秦相距五十餘年矣,所以不能反勝秦者,國小而地無所取.

今王使趙北并燕,燕、趙同力,必不復受於秦矣. 臣切為王患之.」秦王以為然,起兵而救燕.

[기원전 236, 진나라가 조나라를 병탄한 뒤 조나라로 하여금 북상하여 연나라를 공격하게 했다.

연왕 희(喜)가 이 얘기를 듣고 진왕(진시황)에게 사자를 보내 축하의 뜻을 전하게 했다. 연나라 사자가 조나라를

지나던 중 조도양왕(趙悼襄王)이 연나라 사자를 억류했다. 그러자 연나라 사자가 말하기를 :“진, 조 두 나라가

하나가 되면 천하가 복종할 것입니다. 연나라가 조나라의 명을 듣는 것은 진나라가 조나라와 연합했기 때문입니다.

지금 신이 진나라에 축하 차 사자로 가다가 조나라에 억류되었으니 이는 진, 조 두 나라 사이에 틈을 만드는 셈입니다.

진, 조 두 나라에 틈이 생기면 천하는 반드시 복종하지 않을 것이고 연나라 역시 조나라의 명을 듣지 않을 것입니다.

신이 진나라에 사자로 갈지라도 조나라가 연나라를 공격하는 데에는 아무런 지장이 없을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조도양왕이 이 얘기를 듣고 곧 연나라 사자를 풀어주었다. 이에 연나라 사자가 진왕을 배견하면서 말하기를 :
“연왕은 진나라가 조나라와 연합했다는 얘기를 전해 듣고 사자를 보내 1천 금으로 하례하게 했습니다.”라고 하자.
진왕이 의아해하며 묻기를 : “연나라가 무도하여 내가 조나라로 하여금 이를 취하게 했소.

그런데 무엇을 하례한다는 것이오?”라고 하자.  이에 연나라 사자가 대답하기를 : “신이 듣건대 조나라는 전성기 때

남쪽으로 진나라와 접하고, 북쪽으로 하곡양(하북성 진현)에서 연나라와 접하며 영토를 3백 리나 넓혔다고 합니다.

조나라가 진나라와 서로 50여 년 동안 대적하면서도 진나라에 이기지 못한 것은 나라가 약소하고 다른 나라에서

땅을 취할 길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지금 대왕이 조나라로 하여금 북쪽으로 올라가 연나라를 병탄하게 하면

오히려 연, 조 두 나라는 합세하여 다시는 진나라의 명을 듣지 않아도 될 것입니다. 그래서 하례토록 한 것입니다.

신은 대왕을 위해 이를 걱정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라고 하였다.

진왕이 그럴 듯하게 여겨 곧 군사를 일으켜 연나라를 구원했다.]

 

燕太子丹質於秦,亡歸. 見秦且滅六國,兵以臨易水,恐其禍至.

太子丹患之,謂其太傅鞫武曰:「燕秦不兩立,愿太傅幸而圖之.」
武對曰:「秦地邊天下,威脅韓、魏、趙氏,則易水以北,為有所定也. 奈何以見陵之怨,

欲排其逆鱗哉?」 太子曰:「然則何由?」太傅曰:「請入,圖之.」

居之有間,樊將軍亡秦之燕,太子容之.

太傅鞫武諫曰:「不可. 夫秦王之暴, 而積怨於燕, 足為寒心, 又況聞樊將軍之在乎!

是以委肉當虎之蹊, 禍必不振矣! 雖有管、晏,不能為謀. 愿太子急遣樊將軍入匈奴以滅口.

請西約三晉,南連齊、楚,北講於單於,然後乃可圖也.」

[기원전 232, 연나라 태자 단(丹: 연왕 희의 아들)이 진나라에 인질로 가 있다가 도망쳐 돌아왔다.

그는 진시황이 장차 산동 6국을 멸망시켜 천하를 통일하려는 야심 하에 이미 군사를 역수(易水: 하북성) 가까이

진출시킨 것을 보고 미구에 화가 닥칠 것을 우려했다. 이에 태부(太傅: 태자의 스승)인 국무(鞠武)에게 묻기를 :
“연, 진 두 나라는 양립할 수 없으니 원컨대 태부께서 좋은 대책이 있으면 가르쳐 주시기 바랍니다."라고 하자.
국무가 대답하기를 : “진나라의 영토가 천하에 두루 걸쳐 있어 지금 3진을 크게 위협하고 있습니다.

역수 이북의 연나라 또한 결코 평안하지 못할 것입니다. 진왕에게 수모를 당한 원한으로 진나라를 거스르고자

하는 것입니까?”라고 하였다.  태자가 묻기를 : “그렇다면 어떤 방도가 있소?”라고 하자.
국무가 대답하기를 : “한 번 깊이 생각해 봐야 하겠습니다.”라고 하였다. 얼마 후 진나라 장군 번오기(樊於期)가

연나라로 망명해 오자, 태자 단이 그를 받아주었다. 그러자 태부 국무가 간언하기를 : “불가합니다. 포악한 진왕이

연나라에 원한이 쌓여 족히 두려운 상황인데 하물며 번장군마저 연나라에 있다는 얘기를 들으면 더 이상 가만히

있겠습니까! 이는 굶주린 호랑이가 다니는 길에 고기덩이를 놓아두는 것으로 장차 화난을 피할 길이 없습니다.

설령 관중(管仲), 안영과 같은 현자일지라도 연나라를 위한 계책을 낼 수 없습니다. 원컨대 태자는 서둘러 번장군을

북방의 흉노에게 보내 트집잡힐 구실을 없애기 바랍니다. 서쪽으로 3진과 결맹하고, 남쪽으로 제, 초 두 나라와

연결하고, 북쪽으로 흉노의 선우와 강화한 연후에 비로소 대책을 강구할 수 있습니다.”라고 하였다.]

 

太子丹曰:「太傅之計,曠日彌久,心昏然,恐不能須臾. 且非獨於此也. 夫樊將軍困窮於天下,

歸身於丹,丹終不迫於強秦,二棄所哀戀之交置之匈奴,是丹命固卒之時也. 愿太傅更慮之.」

鞫武曰:「燕有田光先生者,其智深,其勇沉,可與之謀也.」 太子曰:「愿因太傅交於田先生,

可乎?」 鞫武曰:「敬諾.」出見田光,道太子曰:「愿圖國事於先生.」田光曰:「敬奉教.」

乃造焉.  太子跪而逢迎,卻行為道,跪而拂席. 田先生坐定,左右無人,

太子避席而且曰:「燕、秦不兩立,愿先生留意也.」

田光曰:「臣聞騏驥盛壯之時,一日而馳千里. 至其衰也,駑馬先之. 今太子聞光壯盛之時,

不知吾精已消亡矣. 雖然,光不敢以乏國事也. 所善荊軻,可使也.」

[태자가 말하기를 : “태부의 계획은 광일미구(曠日彌久: 허송하는 시간이 장구함)합니다. 마음의 번뇌가 심해

그때까지는 기다릴 수 없을 듯합니다. 그 뿐만이 아닙니다. 번장군이 더 이상 갈 데 없는 궁박한 상황에 처해

나에게 몸을 의탁해 왔는데 끝내 강한 진나라에 몰려 가엾은 친구를 흉노 땅에 내버리는 짓은 내가 차라리

죽을지언정 차마 그리 할 수는 없습니다. 원컨대 태부는 다시 한번 생각해 주기 바랍니다.”라고 하였다.
그러자 태부 국무가 말하기를 : “연나라 도읍에 전광(田光) 선생이 살고 있습니다.

지혜가 많고 용감하며 침착하여 가히 함께 모책을 세울 만합니다.”라고 하였다.
태자가 묻기를 : “태부를 통해 전광 선생과 사귀고 싶은 데 가능하겠습니까?”라고 하자.
국무가 대답하기를 : “그리 하도록 하겠습니다.”라고 하였다.
태부 국무가 곧 전광을 찾아가 말하기를 : “태자가 국가대사를 선생과 함께 의논하고자 합니다.”라고 하자.
전광이 대답하기를 : “공경히 가르침을 받들겠습니다.”라고 하였다. 그리고는 곧 태자 단이 있는 곳으로 갔다.

태자 단이 전광을 영접하면서 각행(却行: 뒷걸음질로 공경을 표시함)하여 길을 안내한 뒤 꿇어 앉아

좌석의 먼지를 털며 자리를 권하였다. 전광 선생이 좌정하자 태자 단은 좌우를 물리친 뒤 곧 낮은 자리로 내려앉으며

말하기를 : ​“연, 진 두 나라는 양립할 수 없습니다. 원컨대 선생이 방도를 가르쳐 주기 바랍니다.”라고 하자.
전광 선생이 대답하기를 : “신이 듣건대 천리마는 힘이 한창일 때는 하루에 1천 리도 달리지만 기력이 쇠하면

노마(駑馬;걸음이 느린 말)만도 못하다’고 했습니다. 지금 태자는 제가 젊었을 때의 얘기만 듣고 저의 정력이 이미

소진했다는 사실을 모르고 있습니다. 비록 그렇기는 하나 감히 국사를 그르치게 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저의 가까운 친구 형가(荊軻)라면 가히 이번 사명(使命)을 맡길 만합니다.”라고 하였다.]

 

太子曰:「愿因先生得愿交於荊軻,可乎?」 田光曰:「敬諾.」即起趨出.

太子送之至門,曰:「丹所報,先生所言者,國大事也,愿先生勿泄也.」田光俯而笑曰:「諾.」

僂行見荊軻,曰:「光與子相善,燕國莫不知. 今太子聞光壯盛之時,不知吾形已不逮也,

幸而教之曰:『燕、秦不兩立, 愿先生留意也.』 光竊不自外, 言足下於太子, 愿足下過太子於宮.」

荊軻曰:「謹奉教.」 田光曰:「光聞長者之行,不使人疑之,今太子約光曰:

『所言者,國之大事也,愿先生勿泄也.』是太子疑光也. 夫為行使人疑之,非節俠士也.」

於自殺以激荊軻,曰:「愿足下急過太子,言光已死,明不言也.」遂自剄而死.

[태자가 묻기를 : “원컨대 선생을 통해 형가와 사귀고자 하는데 가능하겠습니까?”라고 하자.
전광이 대답하기를 : “공경히 따르겠습니다.”라고 하였다. 그리고는 곧바로 일어나 빠른 걸음으로 밖으로 나갔다.

태자 단이 궁문까지 전송하면서 당부하기를 : “내가 한 말과 선생이 내게 한 말은 모두 국가대사에 관한 얘기이니

원컨대 선생은 누설되지 않도록 해 주십시오.”라고 하자.

전광은 고개를 숙인 채 웃으면서 말하기를 : “그리하도록 하겠습니다.”라고 하였다.
전광이 이내 굽은 허리로 걸음을 재촉해 형가를 찾아가서는 말하기를 : “내가 그대와 가까운 것은 연나라 백성치고

모르는 사람이 없소. 태자는 내가 장성(壯盛)할 때의 얘기만 듣고 내 몸이 노쇠했다는 것을 모른 채 영광스럽게도

하교하기를, ‘연, 진 두 나라는 양립할 수 없으니 선생이 방도를 가르쳐 주기 바라오’라고 했소. 나는 그대를 나로

생각해 이내 그대를 태자에게 천거했소. 원컨대 그대는 궁으로 가서 태자를 만나보도록 하시오.”라고 하자.
형가가 대답하기를 : “삼가 가르침을 따르겠습니다."라고 하였다.  이에 전광이 형가에게 말하기를 :
“내가 듣건대 ‘덕망이 높은 사람은 의심받게 행동하지 않는다’고 했소.” 방금 나와 태자는 약속하기를 ‘지금까지

말한 것은 모두 국가대사에 관한 것이니 원컨대 선생은 누설치 말기 바라오’라고 했소. 태자가 나를 의심하고 있다는

증거요. 무릇 일을 하면서 사람으로 하여금 의심하도록 만드는 자는 충의의 협사가 아니오.”라고 하였다.
이어 자살로써 형가를 격동시키기 위해 말하기를 : “원컨대 그대는 급히 태자에게 가서 전광이 이미 죽었으니

더 이상 누설될 일이 없다고 말해 주시오.”라고 하며, 마침내 스스로 목을 찔러 죽었다.]

 

軻見太子,言田光已死,明不言也. 太子再拜而跪,膝下行流涕,有頃而後言曰:

「單所請田先生無言者,欲以生大事之謀,今田先生以死明不泄言,豈丹之心哉?」

[이에 형가가 서둘러 태자 단을 만나 전광의 말을 전했다. 그러자 태자 단이 재배하고 꿇어앉은 뒤 무릎걸음으로

기면서 눈물을 흘렸다. 잠시 후 태자 단이 말하기를 : “내가 전광 선생에게 누설하지 말라고 당부한 것은

국가대사의 계획을 성사시키기 위한 것이었소. 지금 전광 선생이 죽음으로 누설하지 않을 뜻을 밝혔으니

이 어찌 내 뜻과 같을 리 있겠소?”라고 하였다.]

 

荊軻坐定, 太子避席頓首曰:「田先生不致丹不肖, 使得至前, 愿有所道,此天所以哀燕不棄其孤也.

今秦有貪饕之心,而欲不可足也. 非盡天下之地,臣海內之王者,其意不饜. 今秦已虜韓王,

盡納其地,又舉兵南伐楚,北臨趙. 王翦將數十萬之眾臨漳、鄴,而李信出太原,云中.

趙不能支秦,必入臣. 入臣,則禍至燕。燕小弱,數困於兵,今計舉國不足以當秦. 諸侯服秦,

莫敢合從. 丹之私計,愚以為誠得天下之勇士,使於秦,窺以重利,秦王貪其贄,必得所愿矣.

誠得劫秦王,使悉反諸侯之侵地,若曹沫之與齊桓公,則大善矣;則不可,因而刺殺之.

彼大將擅兵與外,而內有大亂,則君臣相疑. 以其間諸侯,諸侯得合從,其償破秦必矣.

此丹之上愿,而不知所以委命,唯荊卿留意焉.」 太子前頓首,固請無讓. 然後許諾.

久之荊軻曰 : 「此國之大事, 臣駑下 恐不足任使.」 太子前頓首, 固聽無讓, 然後許諾.

[형가가 좌정하자, 태자 단이 낮은 자리로 내려 와서 앉으며 머리를 조아리며 말하기를 :
“전광 선생은 내가 불초한 것도 모르고 나를 선생 곁에 있도록 허락했으니 원컨대 나의 속마음을 털어놓을 수 있게

해 주기 바랍니다. 이는 하늘이 연나라를 불쌍히 생각해 저를 버리지 않는 것입니다. 지금 진나라는 끝없는 탐욕을

품고 있어 그 어떤 것으로도 이를 채울 길이 없습니다. 천하의 모든 땅을 차지하고 해내의 제후들을 모두 신하로

삼을 때까지 결코 만족하지 않을 것입니다. 지금 진나라는 이미 한왕(韓王: 韓桓惠王의 아들 安)을 포로로 잡고

전 영토를 병탄해 영천군(潁川郡)으로 삼았습니다. 이어 군사를 일으켜 남쪽으로 초나라를 공격하고,

북쪽으로 조나라를 향해 진공하고 있습니다. 진나라 장수 왕전은 군사 수십만 명을 이끌고 장수(漳水)와 업군(鄴郡)을

압박하고, 이신(李信)은 조나라의 서쪽 변경 요충지인 태원(太原: 산서성 태원시)과 운중(雲中: 내몽골) 쪽으로 출병해

조나라를 크게 위협하고 있습니다. 조나라는 진나라에 저항할 길이 없어 필시 입조하여 칭신할 것이니,

그리되면 그 화가 연나라에 미칠 것입니다. 연나라는 약소국인 데다가 여러 차례의 전쟁으로 크게 지쳐 있습니다.

그러니 설령 가용 병력을 총동원할지라도 진나라에 저항할 수는 없습니다. 지금 제후들은 차례로 진나라에 복종하며

감히 합종할 엄두도 내지 못하고 있습니다. 개인적으로 생각하건대 만일 천하의 용사를 얻은 후 진나라에 사자로 보내

큰 이익을 내보이면 진왕이 이를 탐내 틀림없이 취하고자 할 것입니다. 그래서 진왕을 겁박하여 제후들로부터 빼앗은

땅을 모두 돌려주게 함으로써 노나라의 조말(曹沫)이 제환공에게 한 것처럼 할 수만 있다면 그보다 좋은 일은 없을

것입니다. 만일 여의치 않으면 그 자리에서 진왕을 척살하는 것도 가할 것입니다. 왕전, 이신 등과 같은 진나라

장수들은 모두 군대를 밖에서 이끌고 있어 안에서 대란이 일어나면 밖에 있는 장수들이 자객을 보낸 것으로 생각해

군신(君臣)이 서로 의심하게 될 것입니다. 그 사이에 제후들이 합종하면 틀림없이 진나라를 물리치고 격파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는 나의 염원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이 사명을 누구에게 맡겨야 할 지 모르겠습니다.

형경(荊卿: 형가에 대한 존칭)이 방도를 생각해 주기 바랍니다.”라고 하였다. 한참 시간이 흐른 후 형가가 말하기를 :
“이는 국가대사입니다. 신은 노마와 같이 재주가 졸렬한지라 사명을 감당하지 못할 듯합니다.”라고 하였다.
이에 태자 단이 앞으로 나아가 머리를 조아리며 제발 사양하지 말 것을 간청하자 마침내 형가가 승낙하였다.]

於是尊荊軻為上卿, 舍上舍, 太子日日造問, 供太牢異物,間進車騎美女, 恣荊軻所欲, 以順適其意.

久之,荊卿未有行意. 秦將王翦破趙,虜趙王,盡收其地,進兵北略地,至燕南界.

太子丹恐懼,乃請荊卿曰:「秦兵旦暮渡易水,則雖欲長侍足下,可豈可得哉?」
荊卿曰:「微太子言,臣愿得謁之. 今行而無信,則秦未可親也. 夫今樊將軍,秦王購之金千斤,

邑萬家. 誠能得樊將軍首,與燕督之地圖獻秦王秦王必說見臣,臣乃得有以報太子.」

[그러자 형가를 높여 상경(上卿)으로 삼고 최고의 객사에 머물게 했다. 태자 단이 매일 찾아가 문안하고,

태뢰(太牢)를 권하고, 지속적으로 틈틈이 진기한 물건을 올리고, 거마와 미녀도 형가가 원하는대로 제공해

형가의 심기를 평안하게 했다. 그러나 시간이 한참 흘렀는데도 형가는 진나라로 갈 생각을 하지 않았다.

그 사이 왕전은 조나라를 격파해 조왕(趙王: 이름은 遷)을 포로로 잡고 조나라 영토를 모두 장악하는 공을 세웠다.

이어 그는 다시 군사를 이끌고 북쪽으로 진공해 마침내 연나라 남쪽 국경까지 육박해 왔다. 이에 태자 단은 크게

두려워한 나머지 형가에게 묻기를 : “진나라 군대가 조만간에 역수를 건너면 비록 그대를 오래 모시려 해도

이 어찌 가능할 수 있겠습니까?”라고 하자.  형가가 대답하기를 : “그렇지 않아도 저 또한 말씀 드리려고 했습니다.

지금 진나라로 갈지라도 진나라가 믿을 만한 물건을 갖고 가지 않으면 결코 진왕에게 접근할 수 없습니다.

지금 진왕은 번오기 장군의 목에 금 1천 근과 1만 호의 성읍을 내걸고 있습니다. 만일 번장군의 목과 연나라에서

가장 비옥한 남쪽 독항(督亢: 하북성 역수) 땅의 지도를 들고 가서 바치면 진왕도 필시 크게 기뻐하며 기꺼이

만나 줄 것입니다. 그리되면 신 또한 태자에게 보답할 수 있을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太子曰:「樊將軍以窮困來歸丹,丹不忍以己之私,而傷長者之意,愿足下更慮之.」

荊軻知太子不忍,乃遂私見樊於期曰:「秦之遇將軍,可謂深矣. 父母宗族,皆為戮沒.

今聞購將軍之首,金千斤,邑萬家,將奈何?」

 樊將軍仰天太息流涕曰:「吾每念,常痛於骨髓,顧計不知所出耳.」

軻曰:「今有一言,可以解燕國之患,而報將軍之讎者,何如?」樊於期乃前曰:「為之奈何?」

荊軻曰:「愿得將軍之首以獻秦,秦王必喜而善見臣,臣左受拔其袖,而右手揕抗其胸,

然則將軍之仇報,而燕國見陵之恥除矣. 將軍豈有意輿?」 

樊於期偏袒扼腕而進曰:「此臣日夜切齒拊心也,乃今得聞教.」遂自刎.

[이에 태자 단은 난감해 하며 말하기를 : “번오기 장군은 궁지에 몰려 나에게 몸을 맡긴 사람입니다.

나는 내 일을 성취하기 위해 덕망이 높은 번장군의 마음을 상하게 하는 일 만큼은 차마 할 수 없소.

원컨대 그대는 다른 방도를 강구하기 바랍니다.”라고 하자.  형가는 태자 단이 번장군을 어쩌지 못할 것을 알고는

마침내 사적으로 번장군을 찾아가 묻기를 : “장군에 대한 진나라의 대우는 가히 잔혹하다고 말할 수밖에 없소.

장군의 부모와 일족이 이미 모두 살육되었소. 게다가 지금 장군의 목에는 금 1천 근과 1만 호의 성읍이 현상으로

내걸려 있다고 하오. 장차 이를 어찌할 셈이오.”라고 하자. 번오기 장군은 하늘을 우러러보며 크게 탄식한 뒤

눈물을 흘리며 말하기를 : “나는 매번 그 일을 생각할 때마다 원한이 골수에 사무칠 정도로 괴롭소.

그러나 아무리 궁리해도 좋은 방안이 떠오르지 않소.”라고 하였다. 

그러자 형가가 말하기를 : “지금 내게 한 가지 계책이 있소. 가히 연나라의 우환도 해결하고,

장군의 원수도 갚을 수 있는데 장군은 어찌할 생각이오?”라고 하였다.
그러자 번오기 장군이 앞으로 다가서며 묻기를 : “내가 어찌하면 좋겠소?”라고 하자.
형가가 응답하기를 : “원컨대 장군의 목을 진왕에게 바치고자 하오. 그리하면 진왕은 필시 크게 기뻐하며

나를 기꺼이 만나 줄 것입니다. 그때 나는 왼손으로 그의 소매를 붙잡고, 오른손으로 그의 가슴을 깊이 찌를 것이오.

그리되면 장군의 원수도 갚고, 연나라도 능멸당하는 치욕을 면할 수 있소. 장군은 이에 동의해 주시겠습니까?”라고 하자.

번오기는 한쪽 옷 소매를 벗어 팔뚝을 드러내고 왼손으로 오른팔을 잡고는 앞으로 나서며 말하기를 :
“이는 내가 밤낮으로 원한에 사무쳐 이를 갈며 가슴 치던 일이오. 오늘 비로소 가르침을 듣게 되었소.”라고 하였다.
그리고는 마침내 스스로 목을 베어 죽었다.]

 

太子聞之馳往,伏尸而哭,極哀. 既已,無可奈何,乃遂收盛樊於期之首,函封之.

於是,太子預求天下之利匕首,得趙人徐夫人之匕首,取之百金,使工以藥淬之,以試人,

血汝縷,人無不立死者. 乃為裝遣荊軻. 燕國有勇士秦武陽, 年十二, 殺人, 人不敢與忤視.

乃令秦武陽為副. 荊軻有所待, 欲俱, 其人居遠未來,而為留待. 頃之未發,太子遲之,

疑其有改悔,乃復請之曰:「日以盡矣,荊卿豈無意哉?丹請先遣秦武陽.」
荊軻怒,叱太子曰:「近日往而不反者,豎子也!今提一匕首入不測之強秦,仆所以留者,

待吾客與俱. 今太子遲之,請辭決矣!」 遂發.  太子及賓客知其事者,皆白衣冠以送之.

[태자 단은 이 말을 듣자마자 급히 달려가 시체 위에 엎드려 통곡했다. 그의 애도하는 뜻이 극진했다.

그러나 이미 벌어진 일이라 더 이상 어쩔 수 없어 이내 번오기의 목을 함에 넣은 뒤 봉했다.

이때 태자 단은 미리 날카롭기 그지 없는 천하의 비수를 널리 구해 놓고 있었다. 이내 조나라 사람 서부인의 비수를

1백 금을 주고 손에 넣은 뒤 공인을 시켜 독약을 발라 담금질하게 했다. 이를 사람에게 시험하자 실오라기 정도의

피가 흐를 정도로 살짝 베었는데도 곧바로 죽지 않는 자가 없었다. 이에 곧 행장을 구비해 형가를 진나라로 보낼

준비를 마쳤다. 당시 연나라에는 용사 진무양(秦武揚)이 있었다. 그는 12세에 사람을 죽였을 정도로 거칠어

사람들이 감히 눈길조차 마주치려 하지 않았다. 태자 단은 진무양을 부사(副使)로 삼았다.
그러나 당시 형가는 함께 거사할 사람을 기다리고 있었다. 형가는 그가 멀리 떨어져 살고 있었기 때문에 출발을

늦추며 기다리고자 했다. 며칠을 기다려도 형가가 떠날 기미를 보이지 않자 태자 단은 혹여 형가가 후회하며

변심한 것이 아닌가 의심했다. 이에 다시 형가를 찾아가 재촉하기를 : “일정이 촉박한데도 형경(荊卿)은 어찌하여

떠날 생각을 하지 않는 것입니까? 나는 진무양을 먼저 출발시켰으면 합니다.”라고 하자.
형가는 화를 내며 태자에게 큰소리로 꾸짖기를 : “지금 진나라로 갔다가 거사를 성사하지 못하게 되면

이는 철부지 진무양 때문일 것입니다. 지금 비수 한 자루만 들고 교활하기 짝이 없는 진나라로 들어가야 합니다.

제가 출발을 늦추고 있는 것은 동지 한 사람을 기다렸다 같이 가려는 것입니다. 그러나 지금 태자가 시일을 늦추는

것으로 의심하고 있으니 이제 작별인사를 고하고 출발하고자 합니다.”라고 하면서, 마침내 출발했다.

태자 단과 빈객들 중 사정을 알고 있는 사람들은 모두 흰색의 의관을 갖추고 떠나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至易水上,既祖,取道.  高漸離擊筑,荊軻和而歌,為變徵之聲,士皆垂淚涕泣.
又前而為歌曰:「風蕭蕭兮易水寒, 壯士一去兮不復還!」復為慷慨羽聲, 士皆瞋目, 發盡上指冠.

於是荊軻遂就車而去,終已不顧.  既至秦,持千金之資幣物,厚遺秦王寵臣中庶子蒙嘉.

嘉為先言於秦王曰:「燕王誠振畏慕大王之威,不敢興兵以拒大王,愿舉國為內臣,比諸侯之列,給貢職如郡縣,

而得奉守先王之宗廟. 恐懼不敢自陳,謹斬樊於期頭,及獻燕之督亢之地圖,函封,燕王拜送於庭,使使以聞大王. 

唯大王命之.」秦王聞之,大喜.  乃朝服,設九賓,見燕使者咸陽宮.

[형가가 역수 가에 이르자, 조도(‘조’는 路神에게 제를 올리며 여행자의 평안을 비는 의식으로 ‘조도’는 전송행사)를

한 뒤 길을 떠났다. 이때 고점리(高漸離)가 격축(擊筑: 거문고 비슷한 ‘축’)하자 형가가 이에 맞춰 노래를 불렀다.

노래가 변치조(宮調와 달리 처량한 느낌을 주는 일종의 短調)로 나오자, 전송하는 사람들이 모두 눈물을 흘렸다.

형가가 길을 가면서 다음과 같은 노래를 만들어 불렀다.
風蕭蕭兮 易水寒 바람은 소슬하게 부는데 역수는 차갑도다. 壯士一去兮 不復還 장사한 번 떠나니 다시 오지 못하리.
이 노래가 복받쳐 슬퍼하고 한탄스러운 느낌을 주는 우조(羽調)로 흘러나오자 듣는 사람들 모두 노여움으로 눈이

이글거리고 관을 찌를 정도로 머리털이 곤두섰다. 이에 형가는 마침내 수레에 올라 뒤도 돌아보지 않은 채 곧바로

진나라를 향해 떠났다. 형가는 진나라에 도착하자, 1천 금이나 나가는 예물을 진왕의 총신인 중서자(종친 담당 관원)

몽가(蒙嘉)에게 후하게 바쳤다. 그러자 몽가는 진왕에게 먼저 형가를 만나 볼 것을 청하며 말하기를 :
“연왕은 진심으로 대왕의 위세를 두려워하며 경모한 나머지 감히 군사를 일으켜 대왕에게 저항할 엄두를 내지 못하고

있습니다. 이에 연왕은 나라를 들어 진나라에 신하로 복속한 뒤 제후가 되어, 진나라의 군현과 같이 공물과 부세,

노역을 바치고, 선왕의 종묘를 받들어 때마다 제사를 지내겠다고 합니다. 직접 진언하기가 황송해 삼가 번오기의

목을 베어 독항 땅의 지도와 함께 함에 넣어 헌상한다고 했습니다. 연왕은 사자를 궁실 마당에서 정중히 배웅하면서

자신의 뜻을 진왕에게 전달되도록 당부했습니다. 연나라 사자는 오직 대왕의 명령만을 기다리고 있습니다."라고 하자.
진왕이 이 얘기를 듣고 크게 기뻐한 나머지 곧 조복을 입은 뒤 9빈(9명의 접빈 예관이 순서대로 사자를 안내하여

어전의 앞자리로 맞아들이는 최고의 의례)을 베풀어 연나라 사자를 함양궁에서 맞이하였다.]

 

荊軻奉樊於期頭函, 而秦武陽奉地圖匣, 以次進至陛下. 秦武陽色變振恐, 群臣怪之, 荊軻顧笑武陽,

前為謝曰:「北蠻夷之鄙人,未嘗見天子,國外振懾,愿大王少假借之,使畢使於前.」
秦王謂軻曰:「取武陽所持圖.」軻既取圖奉之,發圖,圖窮而匕首見. 因左手拔秦王之袖,

右持匕首揕抗之. 未至身,秦王驚,自引而起,絕袖. 拔劍,劍長,摻其室.

時怨急,劍堅,故不可立拔. 荊軻逐秦王,秦王還柱而走.

[그러자 형가는 번오기의 머리가 든 함을 받쳐들고, 진무양은 지도가 든 문갑을 받쳐들고,

정사와 부사의 서열에 따라 전후로 늘어서 천천히 앞으로 나아갔다. 마침내 궁전의 섬돌 밑에 이르자,

갑자기 진무양은 안색이 변하고 몸을 부들부들 떨었다. 진나라의 군신들이 이를 보고 괴이하게 생각하자

형가가 진무양을 돌아보고 미소를 지은 뒤 한 걸음 앞으로 나아가 진왕에게 사죄하며 말하기를 :

“북방의 만이(蠻夷) 출신 촌놈으로 일찍이 천자를 뵌 적이 없어두려운 나머지 저토록 떨고 있는 것입니다.

원컨대 대왕께서 부디 너그러이 용서하여 그가 대왕 앞에서 사명을 완수할 수 있도록 해주기 바랍니다.”라고 하였다.

그러자 진왕이 형가에게 명하기를 : “일어나서 진무양이 들고 있는 지도를 갖고 오라.”라고 하였다.
이에 형가가 독항의 지도가 든 문갑을 들고 가 진왕에게 바치자 진왕이 지도를 펼치기 시작했다.

마침내 지도를 거의 다 펼 무렵 지도에 싸 두었던 비수의 한 끝이 얼핏 드러났다. 그러자 형가가 돌연 왼손으로

진왕의 소매를 꽉 붙잡은 뒤 오른손으로 비수를 들어 진왕을 냅다 찔렀다. 그러나 비수가 진왕의 몸에 닿기 전에

진왕이 소스라치듯 놀라 몸을 급히 일으켜 도주하는 바람에 진왕의 소매 끝만 자르게 되었다.

이때 진왕은 검을 빼려고 했으나 검이 너무 길어서 빠지지 않았다. 이에 할 수 없이 칼집 채 집어들었다.

진왕은 다급한 데다가 검 또한 너무 길어 끝내 검을 칼집에서 빼내지 못했다.

그러자 형가는 진왕을 쫓아다니며 비수를 휘둘렀다. 진왕은 오직 기둥 주위를 빙빙 돌며 도망다닐 수밖에 없었다.]

 

群臣驚愕,卒起不意,盡失其度. 而秦法,群臣侍殿上者,不得持尺兵. 諸郎中執兵,皆陳殿下,

非有詔不得上.  方急時, 不及召下兵, 以故荊軻逐秦王,而卒惶急無以擊軻,而乃以手共搏之.

是時,侍醫夏無且,以其所奉藥曩體軻.  秦王之方還柱走,卒惶急不知所為,左右乃曰:

『王負劍!王負劍!』遂拔以擊荊軻,斷其左股.  荊軻廢,乃引其匕首,提秦王,不中,中柱.

秦王復擊軻,被八創.  軻自知事不就,倚柱而笑,箕踞以罵曰:

「事所以不成者,乃欲以生劫之,必得約契以報太子也.」 左右既前斬荊軻,秦王目眩良久.

[진나라의 군신들은 갑작스런 사태에 경악한 나머지 어찌 대처해야 좋을지 몰라 갈팡지팡 하였다. 당시 진나라 법은

군신들이 어전에 시립할 때 조그마한 무기조차 몸에 지니는 것을 엄금하고 있었다. 낭중(郎中: 시위 무관)들은

무기를 지니고 어전에 줄지어 서 있었지만 조명(詔命)이 없는 한 전상에 오를 수가 없었다. 이에 바야흐로 지극히

위급한 상황인데도 불구하고 낭중들을 부르는 자가 없었다. 이 사이 어전에서는 형가는 진왕을 찌르기 위해

그의 뒤를 맹렬하게 쫓고 있었다. 그러자 군신들은 황급한 나머지 형가를 칠 마땅한 물건이 없자 저마다 맨손으로

형가에게 달려들었다. 그때 시의(侍醫) 하무저(夏無且)가 들고 있던 약낭(藥囊)을 형가를 향해 내던졌다.

진왕은 기둥 주위를 돌며 도망치느라 황급한 나머지 어찌할 바를 몰라 했다. 그러자 좌우가 이내 입을 모아 외치기를 :
“대왕께서는 어서 검을 등에 매십시오.”라고 하였다.  그제야 진왕은 겨우 검을 등에 매고 검을 빼낸 뒤 칼을 들고

형가를 향해 달려 들어 그의 왼쪽 넓적다리를 끊었다. 이에 움직일 수 없게 된 형가는 이내 비수를 세운 뒤

진왕을 향해 냅다 내던졌다. 그러나 비수는 진왕을 맞추지 못하고 기둥에 꽂히고 말았다. 그러자 진왕이 다시 형가를

가격했다. 이에 형가는 마침내 몸 전체에 걸쳐 여덟 군데나 큰 상처를 입게 되었다. 일이 실패한 것을 깨달은 형가는

기둥에 의지해 크게 웃고는 다리를 양쪽으로 벌리고 앉은 채 큰 소리로 꾸짖기를 : “거사가 성사되지 못한 것은

진왕을 살려 둔 채 겁박하여 왕이 침탈한 땅을 되돌려 주겠다는 약속을 기필코 받아 내어 연나라 태자에게 보고하려고

하였던 것인데 이것이 착오였다."라고 하였다.  이때 비로소 좌우가 달려들어 형가를 죽였으나

그 사이 진왕은 한참 동안 정신을 잃고 있었다.]

 

而論功賞群臣及當坐者,各有差.  而賜夏無且黃金二百鎰,曰:「無且愛我,乃以藥曩提軻也.」

於是,秦大怒燕,益發兵詣趙,詔王翦軍以伐燕.  十月而拔燕薊城.  燕王喜、太子丹等,

皆率其精兵東保於遼東.  秦將李信追擊燕王,王急,用代王嘉計,殺太子丹,欲獻之秦.

秦復進兵攻之.  五歲而卒滅燕國,而虜燕王喜.  秦兼天下.  基後荊軻客高漸離以擊筑見秦皇帝,

而以擊筑秦皇帝, 爲燕報仇, 不中而死. 

​[이후 진왕은 군신들에게 차등 있게 농공행상을 하면서 죄 지은 자에게도 차등 있게 법에 따라 형벌을 내렸다.

특히 하무저에게는 황금 2백 일(鎰)을 하사하면서 칭찬하기를 : “하무저는 참으로 과인을 아꼈다.

그래서 약낭을 형가에게 던진 것이다.”라고 하였다.  이 일로 인해 진왕은 연나라에 크게 노한 나머지

더욱 많은 군사를 동원해 조나라 땅으로 보낸 뒤 왕전에게 명하여 서둘러 연나라를 공격하게 했다.

이에 10 달 만에 연나라 도읍 계성(薊城)은 마침내 함락되고 말았다.

그러자 연왕 희(喜)와 태자 단(丹) 등은 모두 정병을 이끌고 동쪽으로 도망쳐 요동에서 버텼다.

이때 진나라 장군 이신이 연왕을 추격하자, 연왕 희는 다급한 나머지 대왕(代王) 가(嘉)의 계책을 채택해

태자 단을 죽인 뒤 이를 진나라에 바쳤다. 그러나 진나라는 다시 진공해 연왕을 공격하였다.

결국 5년 후 진나라는 무력으로 연나라를 멸하고 연왕 희를 사로잡았다. 이로써 진나라는 천하를 통일하게 되었다.
이후 형가의 친구 고점리도 격축(擊筑)하는 자리에서 축으로 진시황을 격살함으로써 연왕의 원수를 갚고자 했으나

축이 빗나가는 바람에 결국 맞추지 못하고 이내 피살되고 말핬다.]

 

 

      

原 文 【 中國哲學書電子化計劃 .   筆寫本 】           

 

 

 

原 文   飜 譯 者        德庤 / 李   斗 振