戰國策(전국책) /戰國策 秦策 2

戰國策 秦策 2

덕치/이두진 2021. 6. 26. 16:57

 

                            秦策2 

 

 

     秦策 三 .

 

 

薛公為魏謂魏冉曰:「文聞秦王欲一呂禮收齊,以濟天下,君必輕矣.

齊、秦相聚以臨三晉,禮必並相之,是君收齊以重呂禮也.  齊免於天下之兵,其讎君必深.

君不如勸秦王令弊邑卒攻齊之事. 齊破,文請以所得封君齊破晉強,秦王畏晉之強也,

必重君以取晉.  齊異晉弊邑,而不能支秦,晉必重君以事秦.  是君破齊以為功,操晉以為重也.

破齊定封,而秦、晉皆重君;若齊不破,呂禮復用,子必大窮矣」

 

[설공(薛公) 맹상군(孟嘗君)이 위나라를 위해 진나라 상국 위염(魏冉 : 穰侯)에게 말하기를 : 

“ 제가 듣건대 진왕이 여례(呂禮: 본래 진나라 장수로 후에 제나라의 상국이 됨)를 통해 제나라와 연합한 뒤

천하를 정복하려 한다고 하는데 그리되면 그대의 위치는 필시 낮아질 것입니다.

제, 진 두 나라가 뭉쳐 3진(三晋)을 압박하면 여례를 양국의 상국으로 삼을 것이 뻔하기 때문입니다.

이는 그대가 제나라를 끌어들여 오히려 여례를 높여 주는 꼴이 됩니다.

제나라가 천하의 전쟁을 면한다면 그들은 반드시 그대를 크게 미워할 것입니다.

그러니 그대는 진왕에게 권해 우리 위나라가 제나라를 치는 일을 끝내도록 하느니만 못합니다.

제나라가 무너지면 저는 빼앗은 땅을 그대에게 봉지로 내리도록 하겠습니다.

제나라가 무너지면 위나라가 강해질 것이고 진왕은 위나라가 강해지는 것을 두려워해 틀림없이 당신을 중시하며

다시 위나라를 끌어들이고자 할 것입니다. 그러나 제, 위 두 나라가 교전하여 서로 지친 나머지

진나라에 대적하지 못하게 되면 우리 위나라는 당신을 통해 진나라의 환심을 사고자 할 것입니다.

그러면 그대는 이미 제나라를 깨뜨린 공을 세우게 되고 또한 위나라를 이용해 자신의 지위를 높이게 되는 셈입니다. 제나라를 무너뜨리면 빼앗은 땅은 당신이 차지하게 되고 진, 위 두 나라 모두 당신을 중시하겠지만 만일 제나라가

무너지지 않고 여례가 다시 등용되면 당신은 틀림없이 커다란 곤경에 처하고 말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주난왕 27년(기원전 288)

 

秦客卿造謂穰侯曰:「秦封君以陶,藉嘰天下數年矣.  攻齊之事成,陶為萬乘,長小國,

率以朝天子,天下比聽,五伯之事也;攻齊不成,陶為鄰恤,而莫之據也.

故攻齊之於陶也,存亡之機也.  君於成之,哈爾濱市食謂燕相國曰:

『聖人不能為時,時至而弗失.  舜雖賢不遇堯也,不得為天子;湯、武雖賢,不當桀、紂不王.
故以舜· 湯. 武之賢, 不遭時不得帝王. 令攻齊, 此君之大時也已.

因天下之力, 伐讎國之齊, 報惠王之恥, 成昭王之功, 除萬世之害, 此燕之長利, 而君之大名也.

 

[진나라 객경 조(造)가 양후(穰侯)에게 말하기를 : “진나라는 그대를 도(陶: 산동성 정도현) 땅에 봉한 뒤 수년 동안

그대에게 집정을 맡겨 놓고 있소.  제나라를 공략하는 일이 성공하면 도 땅은 1만승의 나라가 될 것입니다.

리되면 그대는 소국의 영수가 되어 이들을 이끌고 주나라 천자를 조현하면

천하가 필시 당신의 명에 복종할 것입니다. 이는 오패(五伯)의 사업입니다.

그러나 제나라를 공격했다가 실패하면 도 땅은 이웃 제나라의 침공을 받아 견딜 수 없게 됩니다.

그래서 제나라의 공략 여부는 바로 도 땅의 존망과 직결된 일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대가 만일 성공을 바란다면

속히 연나라 상국에게 사자를 보내 이르기를, ‘성인은 때를 만드는 것이 아니고 때가 오면 놓치지 않을 뿐입니다.

순임금은 비록 현명했다고 하나 요임금을 만나지 못했으면 천자가 될 수 없었고,

탕왕과 무왕 또한 현명했다고 하나 걸주(桀紂)를 만나지 않았으면 천자가 되지 못했을 것입니다.

순(舜), 탕(湯), 무(武)와 같은 어진이도 때를 만나지 못했다면 제왕이 되지 못했을 것입니다.

지금 제나라를 친다는 것은 그대에게 때가 왔음을 의미합니다.

천하 제후들의 지원을 얻어 원수인 제나라를 공격하므로써 연혜왕(燕惠王: 연소왕의 아들)의 치욕을 씻고,

연소왕(燕昭王: 연왕 쾌의 아들)이 이루지 못한 공업을 완성하고, 만세의 해악을 제거해야 하는 것입니다.

이는 연나라의 장구한 이익으로 그대에게도 큰 영광이 될 것입니다.

 

《書》雲,樹德莫若滋,除害莫如盡.  吳不亡越,越國外亡吳;齊不亡燕,燕故亡齊.

齊亡於燕,吳亡於越,此除疾不盡也.  以非此時也,成君之功,除《建康實錄》之害,

秦卒有他事而從齊,齊、趙合,其讎君必深矣.  挾君之讎以誅於燕,後雖悔之,不可得也已.
君悉燕兵而疾僭之,天下之從君也,若報父子之仇.  誠能亡齊,封君於河南,為萬乘,

達途於中國,南與陶為鄰,世世無患.  願君之專志於攻齊,而無他慮也.』」

[「서경」에 이르기를, ' 수덕막여자(樹德莫如滋: 덕을 베푸는 것으로 스스로 잘 자라게 해주는 것보다 나은 것이

없음), 제질막여진(除疾莫如盡: 해를 제거하는 것으로 뿌리까지 뽑아내는 것보다 나은 것이 없음)이라고 했습니다.

오나라는 월나라를 멸망시키지 않았기 때문에 오히려 월나라에게 망했습니다.

지금 제나라가 연나라를 완전히 멸망시키지 않았기 때문에 연나라는 제나라를 멸망시킬 수 있는 것입니다.

제나라가 연나라에게 망한 것과 오나라가 월나라에게 망한 것은 해악의 근원을 깨끗이 제거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이 기회를 틈타 공을 세우고 그대의 해악을 제거하는 일을 완수치 못하면 일단 진나라에 변고가 생기는 즉시

돌연 제, 진 두 나라가 연합할 것이니 그대는 버거운 적을 상대하지 않을 수 없게 됩니다.

이들이 연나라를 공격해 오면 그때는 후회해도 소용이 없을 것입니다. 그대가 연나라의 전 군사를 동원해

서둘러 제나라로 쳐들어가면 천하의 제후들은 부친의 원수를 갚는 심정으로 다투어 그대를 따를 것입니다.

실로 제나라를 멸망시키기만 하면 그대는 하남(河南: 황하 이남으로 하남성 상구와 우성 일대)을 봉지로 받아

1만 승의 나라로 우뚝 설 수 있게 됩니다. 그리되면 중원과 곧바로 교통할 수 있고 남으로는 도 땅과 이웃하게 됩니다.

이로써 대대로 우환이 없을 것입니다. 원컨대 그대는 제나라를 공격하는데 전념하되 다른 일에는 신경쓰지 않도록

하십시오’라고 하지 않는 것입니까.“라고 하였다. 주난왕 44년(기원전 271)

 

魏謂魏冉曰:「公聞東方之語乎?」 曰:「弗聞也.」

曰:「辛、張陽、毋澤說魏王、薛公、公叔也,曰:『臣戰,載主契國以與王約,必無患矣.

若有敗之者,臣要求挈領.  然而臣有患也.  夫楚王之以其臣請挈領然而臣有患也.

夫楚王之以其國依冉也,而事臣之主,此臣之甚患也.』
今公東而因言楚,是令張儀之言為禹,而務敗公之事也.  公不如反公國,德楚而觀薛公之為公也.
觀三國之所求於秦而不能得者,請以號三國以自信也.  觀張儀與澤之所不能得於薛公者也,

而公請之以自重也.」

[위나라 대부 위문(魏文)이 진나라 승상 위염에게 묻기를 : “공은 산동 6국의 얘기를 들어 보았습니까.”라고 하자. 

위염이 대답하기를 : “듣지 못했소.”라고 하였다.
그러자 위문이 위염에게 말하기를 : “ 위나라 대신 신장(辛張)과 양무택(陽毋澤) 등이 위왕(魏王: 위양왕)과

설공(맹상군), 공숙(公叔: 한나라 상국) 등에게 말하기를, ‘저는 싸움에 나갈 때 전차에 조종의 위패를 싣고

제사의 예를 행하면서 나라를 대신해 군왕과 맹약하기를, " 만일 제가 맹약을 깨뜨리면 청컨대 이 자리에서

제 목을 잘라 주십시오. 그러나 걱정이 있습니다. 초왕(楚王: 초경양왕)은 나라를 모두 위염에게 맡김으로써

국가 대사가 위염에 의해 농단되지나 않을까 하는 점입니다. 이것이 저의 걱정입니다.라고 했습니다.

지금 그대가 초나라로 가 얘기하면 이 어찌 신장과 양무택의 말했듯이 그대의 대사를 속히 그르치려 한다는 것을

증명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대는 서둘러 진나라로 돌아가 초나라와의 우호관계를 유지하면서

설공이 그대에게 어떤 태도를 취하는지를 조용히 관찰하느니만 못합니다.

그리고 3국(三國: 제, 위, 한)이 진나라에게 요구했으나 성사되지 못한 것이 무엇인지를 살펴

그대가 3국을 위해 공개적으로 요청함으로써 3국이 진나라를 신뢰하도록 만드는 것이 필요합니다.

또 신장과 양무택이 설공에게 요청했으나 허락을 받지 못한 일이 무엇인지를 살펴 그대가 설공에게 부탁해 성사시켜

줌으로써 스스로의 무게를 더하는 모습을 보여주어야 할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주난왕 12년(기원전 303),

 

謂魏冉曰:「和不成,兵必出.  白起者, 且副將.  戰勝,必窮公;不勝,必事趙從公.

公又輕,公不若毋多,則疾到.」

謂穰侯曰:「為君烈封, 若於除宋罪, 重齊怒;須殘伐亂宋, 德強齊,定身封. 此亦百世之時也已.」

[어떤 사람이 위염(魏冉)에게 말하기를 : “ 만일 진나라와 조나라와 화의가 성립되지 않으면

진나라에서는 필시 군사를 동원할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그리되면 백기(白起)가 다시 장군이 될 것입니다.

백기가 이기면 강화를 주장한 그대는 필시 곤경에 처할 것입니다. 만일 지게 되면 필시 조나라가 제시하는 조건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그대가 강화를 주도한들 강화조건이 진나라에 유리할 리 없으니 그대는 또다시

경시될 것입니다. 그대는 전공(戰功)이 이뤄지기를 기다리느니 차라리 속히 강화하는 것이 낫습니다.”라고 하였다.

어떤 사람이 양후에게 말하기를 : “ 그대를 위해 봉지를 생각건대 도(陶) 땅보다 나은 곳은 없습니다.

송나라의 죄가 무거워 제나라가 대노한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이를 구실로 차제에 무도한 송나라를 멸망시키면

강한 제나라로부터 커다란 호감을 살 수 있고 동시에 그대의 봉지를 확고히 할 수 있습니다.

이는 백세일시(百世一時: 백대에 한 번 오는 기회)입니다.”라고 하였다.  주난왕 28년(기원전 287)

 

謂魏冉曰:「楚破秦,不能與齊縣衡矣.  秦三世積節於韓、魏,而齊之德新加與.

齊秦交爭,韓、魏東聽,則秦伐矣.  齊有東國之地,方千里.  楚苞九夷,又方千里,

南有符離之塞,北有甘魚之口.  權縣宋、衛,宋、衛乃桑阿、甄耳.  利有千里者二,富擅越隸,

秦烏能與齊縣衡韓、魏,支分方城膏腴之地以薄鄭?兵休復起,足以傷秦,不必待齊.」

[어떤 사람이 위염에게 말하기를 : “ 초나라가 무너지면 진나라는 더 이상 제나라와 균형을 이룰 수 없습니다.

진나라는 3대에 걸쳐 한, 위 두 나라와 끝임없이 싸움을 해 왔고, 제나라는 최근 한, 위 두 나라에게 줄곧 은덕을

베풀어 왔습니다. 제, 진 두 나라가 한, 위 두 나라를 놓고 다투다가 이들 두 나라는 동쪽 제나라로 넘어가게 되면

진나라가 이들 3국의 공격을 받게 됩니다. 제나라가 보유하고 있는 땅 중 초나라의 동쪽 변경과 인접한 땅만도

사방 1천 리나 됩니다. 초나라가 보유하고 있는 구이(九夷: 회하와 사수의 중간지대로 곧 畎夷, 于夷, 方夷, 黃夷,

白夷, 赤夷, 玄夷, 風夷, 陽夷)의 땅도 사방 1천 리나 됩니다. 남쪽으로 부리(符離: 안휘성 숙현 )의 요새와

북쪽으로 감어(甘魚: 호북성 천문현)라는 관구(關口)도 있습니다. 송나라와 위(衛)나라를 이들 나라와 비교하면

두 나라는 단지 제나라의 아성(阿城: 산동성 양곡현)이나 견성(甄城: 산동성 복현) 정도의 규모에 불과할 뿐입니다.

이렇듯 제나라는 사방 1천 리나 되는 두 곳에서 이익을 취할 수 있고 남쪽 월나라 사람을 마음대로 부릴 수 있습니다. 그러니 진나라가 어찌 제나라와 균형을 이룰 수 있겠습니까. 그리고 한, 위 두 나라가 초나라 방성의 비옥한 땅을

나눠 속지로 귀속시킨 뒤 군사들을 휴식시켰다가 다시 쳐들어 오면 그것만으로도 진나라에 커다란 손상을

입힐 수 있습니다. 굳이 제나라까지 나서 싸울 필요조차 없는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주난왕 14년(기원전 301)

 

五國罷成皋,秦王欲為成陽君求相韓、魏,韓、魏弗聽.

秦太后為魏冉謂秦王曰:「成陽君以王之故,窮而局於齊,今王見其達收之,亦能翕其心乎?」
王曰:「未也.」 太后曰:「窮而不收,達而報之,恐不為王用;且收成陽君,失韓、魏之道也.」

[5국(五國: 제, 연, 조, 위, 한)이 성고(成睾: 일명 虎牢로 하남성 형양현)의 싸움으로 지쳐 있었다.

진소양왕이 성양군(成陽君: 일찍이 한나라 상국을 지냄)을 위해 한, 위 두나라에 그를 상국으로 삼도록 요구했으나

두 나라가 이에 응하지 않았다. 이에 진나라의 선태후가 위염을 위해 진왕에게 묻기를 :
“성양군은 군왕과의 알력으로 궁지에 몰려 제나라로 도망가 살고 있소. 
지금 군왕이 그가 현달한 것을 보고

돌아오라고 하면 그가 과연 흡족해 하겠소?”라고 하자.

진왕이 대답하기를 : “흡족해 할 리가 없습니다.”라고 하였다.
그러자 선태후가 말하기를 : " 궁할 때 내쫓았다가 현달한 후 임용하면 군왕에게 쓰이지 못할까 걱정이오.

나아가 성양군을 임용하면 한, 위 두 나라가 이미 그를 임용하지 않은 까닭에

두 나라와의 국교에 손상을 입힐 수밖에 없을 것이오.”라고 하였다.  주난왕 28년(기원전 287)

 

范子因王稽入秦,獻書昭王曰:「臣聞明主蒞正,有功不得不賞,有能者不得不官;

勞大者其祿厚,功多者其爵尊,能治眾者其官大.  故不能』 者不敢當其職焉,能者亦不得蔽隱.

使以臣之言為可,則行而益利其道;若將弗行,則久留臣無謂也.

語曰:『人主賞所愛,而罰所惡. 明主則不然,賞必加於有功,刑比斷於有罪.』

今臣之胸不足以當椹質,要不足以待斧鉞,豈敢以疑事尚語於王乎?

[범자(范子)가 알자(謁者: 빈객접대를 관장하는 관원) 왕계(王稽)를 연줄로 하여 진나라에 들어가 진소양왕에게

다음과 같은 내용의 상서를 올렸다.
“신이 듣건대 ‘총명한 군주가 정사를 하면 공이 있는 자로서 상을 받지 않은 자가 없고,

재능이 있는 자로서 관직을 수여받지 않은 자가 없고, 노고가 큰 자는 봉록이 두텁고, 공이 많은 자는 작위가 높고,

백성을 잘 다스리는 자는 관직이 높다’라고 했습니다. 따라서 재능이 없는 사람은 관직에 오르려 하지 않고,

재능이 있는 사람은 또한 재능을 숨길 수 없었던 것입니다.

신의 말이 옳다고 생각하면 이를 실행하여 나라 정치에 도움이 되도록 하십시오.

만일 신의 말을 시행하지 않을 것같으면 오랫동안 신을 머물게 한들 드릴 말씀이 없습니다.

옛말에 이르기를, ‘평범한 군주는 사랑하는 사람에게 상을 주고 미워하는 사람을 벌하며,

총명한 군주는 공이 있는 사람에게만 상을 주고 죄를 지은 자에게만 벌을 내린다’라고 했습니다.

지금 신의 가슴은 침질(鍼質: ‘침’은 참살할 때 밑을 받치는 모탕, ‘질’은 참수대) 위에 얹기에 부족하고,

소신의 허리는 부월(斧鉞: 腰斬用 보통 도끼와 큰 도끼)을 감당하기에 부족합니다.

어찌 의심스러운 일을 대왕에게 시험삼아 건의하겠습니까?


雖以臣為賤而輕辱臣,獨不重任臣者後無反覆於王前耶? 臣聞周有砥厄,宋有結綠,梁有懸黎,

楚有和璞.  此四寶者,工之所失也,而為天下名器.  然則聖王之所棄者,獨不足以厚國家乎?

臣聞善厚家者,取之於國;善厚國者,取之於諸侯.  天下有明主,則諸侯不得擅厚矣.

是何故也?為其凋榮也.

[비록 신을 천하게 생각해 경멸함으로써 그 책임이 추천자에게 미칠지라도 신을 추천한 왕계가 당초

대왕을 속일 생각이 없었다면 대왕도 어찌 그를 존중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신이 듣건대 주나라에는 지액(砥厄), 송나라에는 결록(結綠), 위나라에는 현려(懸黎),

초나라에는 화박(和璞)이 있다고 합니다. 이 4보(四寶)는 당초 공장(工匠)이 감정을 잘못해 무시되었지만

훗날 진가를 인정받아 천하의 명기가 된 것들입니다. 그러니 성왕이 저버린 자들이 모두 국가에 도움을 줄 수

없을 만큼 부족하다고 섣불리 말할 수 있겠습니까? 제가 듣건대 집안을 일으키는 자는 나라 안에서 그 방법을 찾고,

나라를 일으키는 자는 제후들 사이에서 그 방법을 찾는다고 했습니다. 천하에 총명한 군주가 있으면

제후들이 그 이익을 오로지하지 못하는 법입니다. 제후들이 그 이익을 갖는 이유는 무엇이겠습니까?

이는 바로 군주가 인재를 버리기 때문입니다.


良醫知病人之死生,聖主明於成敗之事,利則行之,害則捨之,疑則少嘗之,

雖堯、舜、禹、湯復生,弗能攻已!語之至者,臣不敢載之於書;其淺者又不足聽也.

意者, 臣愚而不闔於王心耶!已其言臣者, 將賤而不足聽耶!非若是也,

則臣之志, 願少賜遊觀之間, 望見足下而入之. 」 書上, 秦王說之, 因謝王稽說, 使人持車召之.

[양의(良醫)는 병자의 생사를 미리 알고, 성주(聖主)는 일의 성패를 미리 헤아릴 수 있습니다.

이익이 있으면 행하고, 해가 있으면 그치고, 의심스러우면 시험해 보면 됩니다.

이는 요순우탕(堯舜禹湯)이 다시 태어난다 해도 바꿀 수 없는 원칙입니다. 그 밖의 것은 이 글에 다 쓸 수가 없습니다. 천한 내용은 들을 만한 것이 못됩니다. 생각건대 신이 어리석어 대왕의 마음에 들지 않는 것입니까.

그렇지 않으면 신을 천거한 사람이 비천해 들을 만한 가치가 없다고 여기는 것입니까.

그것도 아니라면 신이 원하는 바이기도 합니다만 잠시 신에게 유관(遊觀: 유람)할 시간을 허락해 바랍니다.

그러면 당면한 문제를 말씀드리도록 하겠습니다.”라고 하였다.  진소양왕이 이 글을 보고 크게 기뻐하며

곧 왕계에게 사례한 뒤 특거(特車)를 보내 범수( 范雎)를 부르게 했다.  진소양왕 36년(기원전 271)

范睢至秦,王庭迎,謂范睢曰:「寡人宜以身受令久矣. 今者義渠之事急,寡人日自請太后.

今義渠之事已,寡人乃得以身受命. 躬竊閔然不敏,敬執賓主之禮.」
是日見范睢,見者無不變色易容者.

[범수가 진소양왕의 부름을 받고 이궁(離宮: 섬서성 서안시)에 도착하자,

진소양왕이 전상(殿上)에서 내려와 앞뜰까지 마중나와서는 말하기를 : "과인은 일찍이 그대를 만나 가르침을 받고자 한지 오래되었습니다. 그런데 요즘 의거국(義渠國: 선태후가 의거국의 戎王을 甘泉宮으로 유인해 죽인 사건)과의

전투가 급하게 되어 매일 태후(太后: 선태후)께 문안을 드리느라 전혀 틈이 나지 않았습니다.

이제 의거국과의 전투도 끝나 비로소 그대의 가르침을 받을 수 있게 되었습니다.

과인은 스스로 생각건대 매우 우매하고 불민하기 그지없는 인물입니다.”라고 하였다.
이에 삼가 국빈에 대한 예의를 갖춰 가르침을 청했다. 그러나 범수는 이를 사양했다.

이날 범수가 진소양왕을 알현하는 광경을 본 사람들은 모두 놀라 안색을 바꾸며

숙연한 모습으로 옷깃을 여미지 않는 자가 없었다. 주난왕 44년(기원전 271),

 

秦王屏左右,宮中虛無人,秦王跪而請曰:「先生何以幸教寡人?」 范睢曰:「唯唯.」

有間,秦王復請,范睢曰:「唯唯.」 若是者三.  秦王跽曰:「先生不幸教寡人乎?」

[진소양왕이 좌우를 모두 물리치자, 이궁 안에는 사람의 그림자 하나 없었다.

그러자 진소양왕이 무릎을 꿇고 간청하며 묻기를 : “선생은 과인에게 무엇을 가르쳐 주시렵니까?”라고 하자.
범수는 대답하기를 : “ 유유(唯唯: ‘네, 네’라는 뜻으로 공순하면서도 응답을 하지 않는 모습).”라고 하였다.
이에 진왕이 세 차례에 걸쳐 거듭 물었는데도 범수는 오직 ‘유유’라고 응답할 뿐이었다.

그러자 진왕이 다시 무릎을 꿇고 묻기를 : “선생은 과인을 가르쳐 줄 수 없다는 뜻입니까.?”라고 하자.


范睢謝曰:「非敢然也. 臣聞始時呂尚之遇文王也, 身為漁父而釣於渭陽之濱耳. 若是者,交疏也.

已一說而立為太師,載與俱歸者,其言深也.  故文王果收功於呂尚,卒擅天下而砷立為帝王.

即使文王疏呂望而弗與深言,是周無天子之德,而文、武無與成其王也. 

今臣,羈旅之臣也,交疏於王,而所願陳者,皆匡君之事,處人骨肉之間,願以陳臣之陋忠,

而未知王之心也,所以王三問而不對者是也,  臣非有所畏而不敢言也,

知今日言之於前, 而明日伏誅於後, 然臣弗敢畏也.

[범수가 황송해 하며 대답하기를 : “ 그런 뜻이 아닙니다. 제가 듣건대 여상(呂尙: 태공망)은 주문왕과 처음 만났을 때

위수의 북쪽 강가에서 낚시를 드리우고 있는 어부의 몸에 지나지 않았다고 합니다.

이는 그때까지 서로 몰랐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러나 문왕이 한 두 마디 말을 나눠 보고는 곧바로 그를 태사(太師)로

삼아 자신의 수레로 모시고는 함께 궁으로 돌아왔습니다. 이는 여상의 말이 훌륭해 문왕을 감동시켰기 때문입니다.

문왕은 여상의 계책에 힘입어 큰 공을 세우고 마침내 천하를 차지하여 제왕의 자리에 오르게 되었습니다.

만일 문왕이 여상을 소홀히 여겼거나 깊은 말을 나누지 않았더라면 주나라는 천자의 덕을 세우지 못했을 것입니다.

아무리 문왕과 무왕이 뛰어났을지라도 결코 왕업을 성취키는 어려웠을 것입니다.
지금 저는 기려지신(羈旅之臣 : 다른 나라 사람으로 임시로 와서 섬기는 신하)입니다.

게다가 대왕과 가까운 사이도 아닙니다. 그럼에도 제가 진언코자 하는 것은 모두 대왕의 정사를 바로잡기 위한 것으로

대왕의 육친과 관계된 일입니다. 저는 비록 저의 변변찮은 충정을 얘기하고 싶으나

아직 대왕의 진심을 잘 알지 못하기 때문에 대왕이 세 번이나 물을 때까지 대답을 하지 못한 것입니다.

제가 대왕을 두려워하여 말씀을 못 올린 것은 아닙니다. 저는 오늘 대왕 앞에서 말하면 내일 주살을 당하리라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저는 주살을 당할지라도 감히 조금도 두렵지 않습니다.


大王信行臣之言,死不足以為臣患,亡不足以為臣憂,漆身而為厲,被發而為狂,不足以為臣恥.

五帝之聖而死,三王之仁而死,五伯之賢而死,烏獲之力而死,奔、育之勇而死.

死者,人之所必不免也.  處必然之事,可以少有補於秦,此臣之所大願也. 臣何患乎?

伍子胥橐載而出昭關,夜行而晝伏,至於菱水,無以餌其口,坐行蒲服,乞食於吳市, 卒興吳國,

闔閭為霸.  使臣得進辯如伍子胥,加之以幽囚,重申不復見,是臣說之行也,臣何憂乎?

[대왕께서 실로 저의 진언을 실행에 옮겨 주기만 하면 저로서는 죽음도 근심거리가 되기에 부족하고,

망명하는 것 또한 우려할 바가 못되며, 몸에 옻칠을 해 문둥병자가 되고 머리를 풀어헤쳐 미치광이가 되어도

저의 치욕이 되기에는 부족합니다. 5제(五帝)와 같은 성인도 죽고, 3왕(三王)과 같은 인자도 죽고,

5패(五覇)와 같은 현자도 죽고, 오획(烏獲)과 같은 장사도 죽고, 맹육(孟育: 孟賁과 夏育)과 같은 용사도 죽었습니다. 죽음은 그 누구도 피할 길이 없는 것입니다. 어차피 죽을 바에는 다소나마 진나라를 위해 도움이 될 수 있다면

그것이 바로 제가 바라는 모든 것입니다. 그러니 제가 무엇을 근심하겠습니까?
옛날 오자서(伍子胥)는 자루 속에 몸을 숨겨 소관(昭關: 오, 초 사이의 험관으로 안휘성 함산현)을 빠져 나왔습니다.

밤에는 걷고 낮에는 몸을 숨기면서 마침내 능수(綾水)까지 왔으나 마침 먹을 것이 모두 떨어졌습니다.

겨우 슬행(膝行: 앉은뱅이 걸음)과 사행(蛇行: 포복하여 두 손으로 기어감)으로 오나라 고을로 가서 걸식을 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마침내 오나라를 부흥시켜 합려(闔廬: 또는 闔閭)를 패자로 만들었습니다.

제가 오자서처럼 계책을 진언했는데도 오히려 저를 유폐하여 종신토록 대왕을 보지 못할지라도

저의 계책이 실행만 된다면 무엇을 근심하겠습니까?

 

箕子、接輿,漆身而為厲,被發而為狂,無意於殷、楚.
使臣得同行於箕子、接輿,漆身可以補所賢之主,是臣之大榮也,臣又何恥乎?

臣之所恐者,獨恐臣死之後,天下見臣盡忠而身蹶也,是以讀口裹足,莫肯即秦耳.
足下上畏太后之嚴, 下惑奸臣之態;居深宮之中,不離保傅之手;終身闇惑,無與照奸;

大者宗廟滅覆,小者身以孤危.  此臣之所恐耳!若夫窮辱之事,死亡之患,臣弗敢畏也.

臣死而秦者,賢於生也.」

[또 옛날 기자(箕子: 殷紂의 숙부)와 접여(接輿: 초나라의 隱士)는 몸에 옻칠을 하여 문둥병자처럼 가장하고

머리를 산발하여 미치광이를 흉내냈으나 은나라와 초나라를 구하는데는 아무런 도움을 주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저는 기자나 접여와 같이 몸에 옻칠을 할지라도 현군에게 보탬이 된다면 그것이 저에게는 큰 영광이 될 터인데

제가 무엇을 부끄러워하겠습니다. 다만 우려되는 것은 제가 죽은 후에 천하의 사람들이 저의 충성을 다하고

억울하게 죽음을 당하는 모습을 보고는 이내 두구과족(杜口裹足: 입을 다물고 발길을 끊음)하여

더 이상 진나라로 오지 않으려 하지나 않을까 하는 점 뿐입니다.

대왕은 지금 위로는 태후의 위엄을 두려워하고 아래로는 간신들의 태도에 미혹되어 궁중 깊숙한 곳에 머문 채

보부(保傅: 태자의 교육을 담당한 시녀와 시종)의 손길을 떠나지 못하고 있습니다.

이에 내내 암혹(闇惑: 멍청함)에 파묻혀 어느 것이 간사한 것인지조차 분간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이같이 하다가는 크게는 종묘가 뒤집어지고, 작게는 대왕의 일신이 위험에 처하게 됩니다. 제가 염려하는 것이

바로 이것입니다. 궁지에 몰려 모욕을 당하거나, 주살을 당하거나, 망명하거나 하는 것은 조금도 두렵지 않습니다.

제가 죽어 진나라가 바로 잡힐 수만 있다면 저는 죽는 것이 살아 있는 것보다 더 나을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秦王跽曰:「先生是何言也!夫秦國僻遠,寡人愚不肖,先生乃幸至此,此天以寡人溷先生,

而存先王之廟也.  寡人得受命於先生,此天所以幸先王而不棄其孤也.  先生奈何而言若此!

事無大小,上及太后,下至大臣,願先生悉以教寡人.  無疑寡人也.」范睢再拜,秦王亦再拜.

[그러자 진소양왕이 꿇어 앉은 채 다시 묻기를 : " 선생은 무슨 말씀을 그리 과하게 하십니까.

우리 진나라는 멀리 외진 곳에 있고 과인 또한 어리석고 불초한데도 다행히 선생같은 분이 와 주셨으니

이는 하늘이 과인으로 하여금 선생을 번거롭게 하여 종묘를 보존하게 하려는 것입니다.

과인이 선생의 가르침을 받을 수 있도록 한 것은 하늘이 선왕을 좋게 여겨 과인을 버리지 않은 것입니다.

그런데 선생은 무슨 말씀을 그리 하는 것입니까. 일의 대소를 막론하고 위로는 태후에 관한 일로부터

아래로는 대신에 관한 일에 이르기까지 원컨대 선생은 과인에게 모두 가르쳐 주고

과인을 추호도 의심하지 말아 주기 바랍니다.”라고 하였다. 범수가 재배하자, 진소양왕도 재배했다.


范睢曰:「大王之國,北有甘泉、谷口,南帶涇· 渭,右隴、蜀,左關、阪;戰車千乘,

風度際百萬.  以秦卒之勇,車騎之多,以當諸侯,譬若馳韓盧而逐蹇兔也,霸王之業可致.

今反閉而不敢窺兵於山東者, 是穰侯為國謀不忠, 而大王之計有所失也.」 王曰:「願聞所失計.」

[범수가 말하기를 : " 대왕의 나라에는 북쪽으로 감천(甘泉: 섬서성 순화현)과 곡구(谷口: 섬서성 예천현)가 있고,

남쪽으로 경수(涇水)와 위수(渭水)가 둘러쳐져 있고, 오른쪽으로는 농, 촉(隴, 蜀: ‘농’은 섬서성 농현, ‘촉’은 사천성), 왼쪽으로는 함곡관(函谷關)과 판(阪: 효산)이 있습니다. 게다가 병거 1천 승에 용맹한 군사가 1백만 명이나 있습니다. 진나라 군사의 용맹과 풍부한 병거와 기마를 가지고 제후들을 대적하는 것은

마치 명견 한로(韓盧: 한나라의 명견으로 ‘로’는 검은색의 털을 의미)가 절름발이 토끼를 쫓는 것과 같습니다.

대왕은 패왕의 대업을 쉽게 실현할 수 있는 여건을 구비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지금 이와 반대로 함곡관을 굳게 닫은 채 감히 산동의 제후국들에게 무위(武威)를 드러내지 못하고 있습니다. 이는 재상 양후가 대왕을 위해 충성을 다하지 않아 대왕의 계책에 적잖은 실책이 존재한데 따른 것입니다.”라고 하자.
진소양왕이 말하기를 : “ 과인의 계책에 어떤 실책이 있는지 말해 주시오.”라고 하였다.
 

 

睢曰:「大王越韓、魏而攻強齊,非計也.  少出師則不足以傷齊;多之則害於秦.

臣意王之計,欲少出師,而悉韓、魏之兵則不義矣.  今見與國之不可親,越人之國而攻,可乎?

疏於計矣!昔者,齊人伐楚,戰勝, 破軍殺將,再闢地千里,矚寸之地無得者,豈齊之欲地哉,

形弗能有也.  諸侯見齊之罷露,君臣之不親,舉兵而伐之, 主辱軍破,為天下笑.

所以然者,以其伐楚而肥韓、魏也.

[이에 범수가 아뢰기를 : " 대왕께서 가까운 한, 위 두 나라를 넘어 멀리 강한 제나라를 치려고 하는 것이

바로 실책입니다. 동원되는 병력이 적으면 제나라에 타격을 줄 수 없고, 많으면 진나라에 큰 손상을 입히게 됩니다.

제가 생각건대 적은 병력을 동원한 가운데 한, 위 두 나라의 병력을 총동원하고자 하는 대왕의 계책은

적절한 계책이 아닙니다. 지금 두 나라는 비록 동맹국이라고는 하나 서로 친하지 않은데 그같은 동맹국을 건너뛰어

다른 나라를 치는 것이 과연 가능하겠습니까. 그 계책은 너무 허술합니다. 옛날 제나라가 초나라를 치면서

적군을 대파하고 적장을 죽여 강토를 1천 리나 넓혔으면서도 결국 한 치의 땅도 얻지 못했습니다.

이것이 어찌 제나라가 영토에 대한 욕심이 없었기 때문이겠습니까? 형세상 영유할 수 없는 땅이었기 때문입니다.

이때 제후들은 제나라가 지쳐 있고 군신이 불목한 것을 알고 거병하여 제나라로 쳐들어 왔습니다.

결국 제왕(齊王)은 욕을 당하고 군사는 여지없이 무너져 천하인의 웃음거리가 되고 말았습니다.

이는 제나라가 멀리 있는 초나라를 치면서 가까이 있는 한, 위 두 나라의 국력을 비대하게 만들어 주었기 때문입니다.

 

此所謂藉賊兵而齋盜食也.  王不如遠交而近攻,得寸則王之寸,得尺亦王之尺也.  今捨此而遠攻,

不亦繆乎?且昔者,中山之地,方五百里,趙獨擅之,功成、名立、利附,則天下莫能害.

今韓、魏,中國之處,而天下之樞也.  王若欲霸,必親中國而以為天下樞,以威楚、趙.

趙強則楚附,楚強則趙附.  楚、趙附則齊必懼,懼必卑辭重幣以事秦,齊附而韓、魏可虛也.」

王曰:「寡人欲親魏,魏所變之國也,寡人不能秦.  請問親魏奈何?」

[이를 두고 소위 ‘자적병재도식(藉賊兵齋盜食: 도적에게 무기를 빌려주고 도둑에게 식량을 줌)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대왕은 원교근공(遠交近攻: 먼 나라와는 친교를 맺고 가까운 나라를 공격)책을 쓰느니만 못합니다.

그리하면 한 치의 땅을 얻어도 대왕의 것이 되고 한 자의 땅을 얻어도 대왕의 것이 됩니다.

지금 이런 계책을 버리고 원공(遠攻)을 고집하는 것은 잘못이 아니겠습니까?

지난번에 중산(中山) 땅만 하더라도 사방 5백 리나 되는 땅을 조나라가 공격해 독차지했습니다.

이로 인해 조나라는 공을 세운 것은 물론 명성도 높이고 이익까지 얻었지만 누구하나 조나라를 비방치 않았습니다.

지금 한, 위 두 나라는 중원에 위치해 가히 천하의 중추라 이를 만합니다. 만일 대왕이 패자가 되고자 하시면

반드시 중원의 이들 나라와 친하게 지내 이를 천하의 중추로 삼고 초나라와 조나라를 제압해야 합니다.

조나라가 강해지면 초나라가 친부(親附)해 올 것이고 초나라가 강해지면 조나라가 친부해  것입니다.

이같이 초나라나 조나라가 진나라에 친부해 오면 제나라는 틀림없이 진나라를 두려워할 것입니다.

제나라가 두려워하면 반드시 비사중폐(卑辭重幣: 지극히 겸손한 언사와 두터운 예물)으로 진나라를 섬길 것입니다.

이같이 하여 제나라까지 친부해 오면 한나라와 위나라는 완전히 무력해질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진소양왕이 묻기를 : " 과인은 위나라와 친하고자 하나 위나라는 변덕이 심한 나라여서 과인으로서는 도무지

그들과 친해질 수가 없습니다. 청컨대 어떻게 하면 위나라와 친해질 수 있겠습니까?"라고 하자.

范睢曰:「卑辭重幣以事之. 不可,削地而賂之. 不可,舉兵而伐之.」

於是舉兵而攻邢丘,邢丘拔而魏請附.  曰:「秦、韓之地形,相錯如繡.

秦之有韓,若木之有蠹,人之病心腹.  天下有變,為秦害者莫大於韓. 王不如收韓.」

[범수가 대답하기를 : “ 비사중폐로 그들을 대하도록 하십시오. 그것도 안되면 땅을 떼어 선물로 주십시오.

만일 그것마저 안되면 군사를 동원해 치도록 하십시오.”라고 하였다.
이에 진나라는 군사를 일으켜 위나라의 형구(邢丘: 하남성 온현 동쪽 20리)를 공격했다.

형구가 함락되자, 위나라가 진나라에 귀속하여 따를 것을 청했다. 그러자 범수가 다시 아뢰기를 :
“ 진나라와 한나라의 지형을 보면 서로 얽혀 있는 것이 마치 비단실로 수를 이룬 듯합니다.

진나라에게 한나라는 나무에 좀이 있는 것과 같고, 사람에게 없애기 어려운 우환 있는 것과 같습니다.

천하에 변고가 생기면 진나라에 해를 끼치는 나라로 한나라보다 더 해가 될 나라도 없을 것입니다.

대왕께서 한나라를 한시라도 빨리 거두느니만 못합니다.”라고 하였다.

 

王曰:「寡人欲收韓,不聽,為之奈何?」
范睢曰:「舉兵而攻滎陽,則成皋之路不通;北斬太行之到,則上黨之兵不下;一即著而攻滎陽,

則其國斷而為三.  魏、韓見必亡,焉得不聽? 韓聽而霸事可成也.」 王曰:「善.」

[그러자 진소양왕이 묻기를 : "과인은 한나라를 거두어 들이고 싶으나 말을 안 들을 때는 어찌하면 좋겠소?”라고 하자.

범수가 대답하기를 : “ 그렇다면 군사를 동원해 정벌하도록 하십시오. 형양을 공격하면 성고로 가는 길이 끊어집니다.

또 북쪽 태행산(太行山)으로 나아가는 길을 차단하면 상당(上黨)의 군사들이 남하할 수 없습니다.

이같이 하여 일거에 형양을 공격하면 한나라는 세 지역으로 분단되고 말 것입니다.

한나라는 자국이 곧 망하게 될 것을 보고 어찌 대왕의 명을 듣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한나라가 명을 따르면 대왕의 패업은 가히 쉽게 이룰 수 있습니다.”라고 하였다.
진소양왕이 말하기를 : “ 참으로 훌륭하오.”라고 하였다.

 

范睢曰:「臣居山東, 聞齊之內有田單, 不聞其王. 聞秦之有太后、穰侯、涇陽、華陽, 不聞其有王.

擅國之謂王,能專利害之謂王制殺生之威之謂王.  今太后擅行不顧,穰侯出處不報,

涇陽、華陽擊斷無諱,四貴備而國不危者,未之有也.  為此四者,下乃所謂無王已.

然則權焉得不傾,而令焉得從王出乎? 臣聞:『善為國者,內固其威,而外重其權.』

穰侯使者操王之重,決裂諸侯,剖符於天下,征敵伐國, 莫敢不聽.

戰勝攻取,則利歸於陶;國弊,御於諸侯;戰敗,則怨結於百姓,而禍歸社稷.

[범수가 진소양왕에게 말하기를 : " 신이 산동에 있을 때 제나라에는 전단(田單)이 있다는 얘기만 들었지,

제나라 왕이 있다는 말은 못 들었습니다. 또 진나라에는 태후(太后: 선태후)와 양후(穰侯), 경양군(涇陽君),

화양군(華陽君), 고릉군(高陵君)이 있다는 말은 들었어도 진왕(秦王)이 있다는 말은 듣지 못했습니다.

무릇 나라의 정사를 좌우하는 자를 일컬어 왕이라 하고 이해(利害)를 독차지 할 수 있는 자를 왕이라 하며,

생살(生殺)의 위엄을 한 손에 쥐고 있는 자를 왕이라 합니다.
그런데 지금 태후는 대왕을 제쳐 놓고 권력을 마음대로 휘두르며 조금도 거리낌이 없고,

양후는 멋대로 사자를 내보내면서도 대왕에게 보고조차 하지 않고, 경양군과 화양군은 내키는대로

형을 집행하고도 전혀 꺼려하는 바가 없습니다. 고릉군은 관원의 승진과 파면을 멋대로 행하고 있습니다.
이같은 4명의 귀한 자들이 있는데도 나라가 위험하지 않은 경우는 없습니다. 이 4명의 귀한 자들이 있기에

왕이 존재하지 않는다고 말하는 것이니 권력이 어찌 무너지지 않고, 명령이 어찌 왕으로부터 내려질 수 있겠습니까?

신이 듣건대 ‘나라를 잘 다스리는 왕은 안으로는 그 위엄을 굳게 하고 밖으로는 그 권세를 중히 한다’라고 했습니다.
지금 양후의 사자는 대왕의 막강한 권세를 빌려 제후들의 땅을 분할하고, 멋대로 부절(符節)을 쪼개

천하의 군사를 징발해 적국을 정벌하고 있습니다. 이에 그의 말을 감히 듣지 않는 자가 없는 지경이 되었습니다.

이같이 싸워서 이기고 성을 공격해 함락시키면 그 땅과 재물을 모두 도(陶) 땅으로 옮겨놓고 있으니

진나라의 재물이 모두 4명의 귀한 자들의 손에 들어가고 있습니다.

또한 싸워 패할 때마다 백성들의 원망을 사고 있으나 그 화를 모두 사직으로 돌려 놓고 있습니다.


《詩》曰:『木實繁者披其枝,披其枝者傷其心.  大其都者危其國,尊其臣者卑其主.』

淖齒管齊之權, 縮閔王之筋,縣之廟梁,宿昔而死.  李兌用趙,滅食主父,百日而餓死.

今秦,太后、穰侯用事,高陵、涇陽佐之,卒無秦王,此亦淖齒、李兌之類已.

臣今見王獨立於廟朝矣,且臣將恐後世之有秦國者,非王之子孫也.」

[「시경」에 이르기를, ‘ 나무에 열매가 지나치게 많으면 가지가 버티지 못해 부러지고,

가지가 부러지면 수심(樹心: 나무의 정기)을 상한다. 봉토를 받은 자가 너무 커지면 나라가 위험해지고,

신하를 너무 높이면 군왕이 낮아진다’라고 했습니다. 요치(淖齒: 제나라를 침공한 연나라를 물리침으로써

제나라 상국이 된 초나라 장수)는 제나라의 권력을 장악하자, 제민왕(齊閔王)의 근골(筋骨)을 뽑아낸 뒤

종묘의 대들보에 매달아 하룻밤 사이에 죽게 만들었습니다. 조나라 대부 이태(李兌)는 주군인 주부(主父:조무령왕)의

궁을 포위한 채 주부의 음식을 줄여 1백 일만에 굶어 죽게 만들었습니다. 지금 진나라에는 태후와 양후가 집정하고

고릉군과 경양군이 이를 돕고 있습니다. 이로써 진왕은 거의 없는 것과 마찬가지가 되었습니다.

이들 또한 요치 및 이태와 같은 무리들입니다. 지금 대왕이 홀로 궁정 안에 있는 것을 보니 저는 장차 이 진나라를

소유할 사람은 대왕의 자손이 아닐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두려움이 앞섭니다.”라고 하였다. 주난왕 49년(기원전 266)

 

秦王懼,於是乃廢太后,逐穰侯,出高陵,走涇陽於關外.
昭王謂范睢曰:「昔者,齊公得管仲,時以為仲父. 今吾得子,亦以為父.」
應侯謂昭王曰:「亦聞恆思有神叢與? 恆思有悍少年,請於叢博,

曰:『吾勝叢,叢籍我神三日;不勝叢,叢困我.』乃左手為叢投,右手自為投,勝叢,叢籍其神.

三日,叢往求之,遂弗歸.  五日而叢枯,七日而叢亡.

今國者,王之叢;勢者,王之神.  籍人以此,得無危乎?

[이에 진소양왕이 크게 두려워하면서 곧 태후를 폐위하고, 양후를 쫓아내고, 고릉군을 축출하고, 경양군, 화양군 등을

함곡관 밖으로 추방했다. 그리고 범수에게 말하기를 : “옛날 제환공이 관중을 얻고는 중보(仲父)라고 불렀습니다.

이제 나도 그대를 얻었으니 숙보(叔父: 범수의 자가 叔임)라고 부르겠습니다.”라고 하였다.

응후(應侯: 범수)가 진소양왕에게 아뢰기를 : " 대왕께서는 항사(恒思)의 신총(神叢: 토지신을 모시기 위해

전야에 세운 사당으로 여기서는 신총에 모신 神像)에 관한 얘기를 들은 적이 있습니까?

항사라는 마을에 한 사나운 소년이 살고 있었습니다. 하루는 그 소년이 신총과 내기를 하면서 약속하기를,

‘내가 이기면 그대는 나에게 신통력을 3일 동안 빌려 주고, 내가 지면 나를 어떤 곤경에 처하게 해도 좋소’라고

했습니다. 그리고는 왼손의 패는 신총의 몫으로, 오른손의 주사위는 자신의 몫으로 하여 던졌더니

소년이 이기는 것으로 나왔습니다. 이에 신총은 3일 동안 신통력을 소년에게 빌려 주었습니다.

사흘이 지나 신총이 소년에게 신통력을 돌려달라고 요구했으나 소년은 끝내 돌려주지 않았습니다.

이 때문에 신총은 5일 만에 시들기 시작해 7일째에 말라 죽고 말았습니다. 나라는 신총이고,

권세는 대왕의 신통력입니다. 그런데 대왕께서는 이를 다른 사람에게 빌려주고 있으니 위험하지 않겠습니까?

 

臣未嘗聞指大於臂,臂大於股,若有此,則病必甚矣.

百人輿瓢而趨,不如一人持而走疾.  百人誠輿瓢,瓢必裂.
今秦國,華陽用之,穰侯用之,太后用之,王亦用之.  不稱瓢為器,則已;已稱瓢為器,國必裂矣.

臣聞之也:『木實繁者枝必披,枝之披者傷其心.  都大者危其國,臣強者危其主.』

[신은 손가락이 팔뚝보다 크고, 팔뚝이 넓적다리보다 굵은 사람이 있다는 말을 들은 적이 없습니다.

만일 그런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의 병은 대단히 심한 것입니다.

1백 명이 표주박 하나를 받쳐들고 뛰는 것은 혼자서 들고 뛰는 것보다 빠르지 못합니다.

1백 명이 실제로 표주박 하나를 받쳐들고 뛰면 표주박은 조각나고 말 것입니다.

지금 진나라의 권력은 화양군과 양후, 태후, 대왕이 두루 사용하고 있습니다.

나라를 표주박으로 비유하기는 어려우나 만일 표주박과 같다고 보면 진나라는 필시 조각나고 말 것입니다.
신이 듣건대 ‘나무에 열매가 지나치게 많으면 가지가 버티지 못해 부러지고, 가지가 부러지면 수심(樹心)을 상하며,

봉토를 받은 자가 너무 커지면 나라가 위험해지고, 신하를 너무 강하면 군왕이 위태로워진다’라고 했습니다.

 

其令邑中自斗食以上,至尉、內侍及王左右,有非相國之人者乎?
國無事,則已;國有事,臣必聞見王獨立於唐也. 臣竊為王恐,恐萬世之後有國者,非王之子孫也.

臣聞古之善為政也,其威內扶,其輔外布,四治政不亂不逆,使者直道而行,不敢為非.
今太后使者分裂諸侯,而符布天下, 操大國之勢,強徵兵,伐諸侯.  戰勝攻取,利盡歸於陶;

國之幣帛,竭入太后之家;竟內之利,分移華陽.  古之所謂『危主滅國之道』必從此起.

三貴竭國以自安,然則令何得從王出,權何得毋分,是我王果處三分之一也.」

[지금 진나라의 군, 현, 읍 중에서 두식(斗食: 하루 1말의 녹봉을 받은 하급관리) 이상의 관리로

위(尉)와 내사(內史: 중앙의 고위 관원)와 왕의 좌우에 이르기까지 재상 양후의 사람이 아닌 자가 없습니다.

나라가 평온하면 문제가 없으나 일단 일이 있게 되면 저는 틀림없이 대왕께서 홀로 조정에 고립되어 있는 것을

보게 될 것입니다. 저는 대왕을 위해 이를 염려하며 장차 만세(萬世) 후에 이 나라를 보유하는 자가

대왕의 후손이 아닐까 걱정됩니다. 또 제가 듣건대 옛날부터 정치를 잘 한 사람은 위권(威權)을 안에다 심고,

밖으로 훌륭한 보좌를 포진시키고, 다스리면서 반란이 일어나지 않도록 하고, 사자는 사명을 정확히 실천해

감히 비행을 저지르지 않는다고 했습니다. 지금 태후의 사자가 제후들이 영지를 분할하고,

멋대로 돌린 병부(兵符)가 천하에 널리 퍼져 있습니다. 또한 대국인 진나라의 권세를 자신의 것처럼 함부로 행사해

강제로 군사를 징집한 뒤 제후들을 징벌하고 있습니다. 양후는 전승의 공을 모두 자신이 취해 그 전리품을 모두

도(陶) 땅으로 보내며, 나라의 재물은 모두 태후의 사가로 들어가고, 국내의 이익은 화양군과 나눠 갖고 있습니다.

옛 사람이 말하는 위주멸국(危主滅國: 군왕을 위태롭게 하고 나라를 망침)의 길이 바로 여기서 시작하는 것입니다.

이상의 세 귀인은 나라를 희생시켜 자신들의 편안을 취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 어찌 명이 대왕으로부터 나올 수 있고, 권력이 어찌 분산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제가 보기에 대왕께서는 겨우 나라의 3분의 1 밖에 가지고 있지 않은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秦攻韓,圍陘.  范睢謂秦昭王曰:「有攻人者,有攻地者. 穰侯十攻魏而不得傷者,

非秦弱而魏強也,其所攻者, 地也.  地者,人主所甚愛也. 人主者,人臣之所樂為死也.

共侮辱主之所愛,與樂死者鬥,故十攻而弗能勝也.  金王將攻韓圍陘,臣願王之毋獨攻其地,

而攻其人也。王攻韓圍陘,以張儀為言.  張儀之力多,且削地而以自贖於王,幾割地而韓不盡;

張儀之力少,則王逐張儀,而更於不如張儀者市.  則王之所求於韓者,言可得也.」

[진나라가 한나라를 공격하여 형 땅을 포위하려 하였다. 범수가 진소양왕(秦昭襄王)에게 아뢰기를 : 

“무릇 적을 공격할 때 공인(攻人: 계략을 써서 사람을 승복시킴)과 공지(攻地: 힘으로 밀어붙여 성을 공략함)의

두 가지 방법이 있습니다. 양후가 위나라를 열 번이나 공격하면서도 그들을 무너뜨리지 못한 것은 진나라가 약하고

위나라가 강했기 때문이 아닙니다. 이는 계략을 쓰지 않고 오직 힘으로 성을 취하려 하였기 때문입니다.

성은 군왕이 매우 아끼는 것이고, 군왕은 신하된 자가 그를 위해 즐거이 죽을 수 있는 대상입니다.

군왕이 좋아하는 바를 공략하다가 즐거이 죽으려는 자들과 싸웠기에 열 번 싸웠으나 한번도 승리를 거두지 못한

것입니다. 지금 대왕께서는 장차 한나라를 공격해 형 땅을 포위하고자 하나 바라건대 힘으로 성을 취하려 하지 말고

계략을 써 사람들을 승복시키기 바랍니다. 대왕께서는 한나라를 공격해 형 땅을 포위하는 일에 장의(張儀)의 의견을

듣고 있습니다. 만일 장의가 한나라 내에서의 위세가 크다면 한나라는 땅을 떼어주며 대왕에게 용서를 빌 것입니다.

그러나 그리되면 한나라는 땅을 모두 떼어주더라도 모자랄 것입니다. 

만일 장의의 역량이 작다면 대왕께서는 장의를 내쫓은 뒤 그보다 못한 자를 찾아내 그를 통해 흥정토록 하십시오.

그리되면 대왕은 한나라로부터 구하고자 하는 모든 것을 쉽게 얻을 수 있을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주난왕 51년(기원전 264),

 

應侯曰:「鄭人謂玉未理者璞,周人謂鼠未臘者樸.  周懷璞過鄭賈曰:『欲賣樸乎?』

鄭賈曰:『欲之.』出其樸,視之,乃鼠也. 因謝不取.  今平原君自以賢,顯名於天下,

然降其主父沙丘而臣之. 天下之王尚猶尊之,是天下之王不如鄭賈之智也,眩於名,不知其實也.」

[응후가 말하기를 : " 정나라 사람들은 아직 연마하지 않은 옥을 박(璞)이라 하고,

주(周)나라 사람들은 아직 말리지 않은 쥐고기를 역시 박(朴)이라고 합니다.

주나라 사람이 이 박(朴)을 가지고 정나라 상인에게 가서 묻기를, ‘박을 사겠소’라고 하자,

정나라 상인이 대답키를, ‘사겠소’라고 했습니다. 이에 주나라 사람이 박을 내놓자,

그것은 ‘박(璞)’이 아니라 ‘박(朴)’이었습니다. 그래서 정나라 상인은 사양하며 거절했습니다.

지금 조나라의 평원군(平原君: 조혜문왕의 동생 趙勝)은 스스로 어질다고 여기면서 천하에 이름을 떨치고 있으나

그는 자신의 부친인 주부(主父: 조무령왕)를 사구궁(沙丘宮)에서 항복시켜 자신의 신하가 되라고 강요했던 자입니다.

그런데도 천하의 제후들은 여전히 그를 높이고 있습니다. 이는 천하의 제후들이 정나라 상인만큼도 지혜롭지 못해

현자라는 명분에 현혹된 나머지 그 실상을 모르기 때문입니다.”라고 하였다.    주난왕 49년(기원전 266),

 

天下之士, 合從相聚於趙, 而欲攻秦. 秦相應侯曰:「王勿憂也, 請令廢之. 秦於天下之士非有怨也,

相聚而攻秦者,以己欲復歸耳.  王見大王之狗,臥者臥,起者起,行者行,止者止,毋相與斗者;

投之一骨,輕起相牙者,何則?有爭意也.」

[천하의 책사들이 합종을 위해 조나라에 모여 진나라 공격의 계책을 세우고 있었다.

러자 진나라 재상 응후가 진소양왕에게 아뢰기를 : “ 대왕께서는 걱정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제가 이를 폐지토록 하겠습니다. 진나라는 천하의 책사들로부터 원한을 산 적이 없습니다.

그런데도 그들이 모여 진나라 공격을 획책하는 것은 이를 통해 부귀를 누리고자 하기 때문입니다.

지금 대왕이 기르고 있는 개들을 보십시오. 그 개들은 누워 있는 개와 일어나 있는 개, 걷고 있는개,

멈춰 서 있는 개 등 각양각색이나 서로 싸우고 있는 개는 단 한 마리도 없습니다.

그러나 이골투구(以骨投狗: 뼈다귀를 개들에게 던져준다는 뜻으로 훗날 ‘泥田鬪狗’와 유사한 뜻)해 보십시오.

모든 개들이 잡자기 서로 물어 뜯기 시작할 것입니다. 그 이유는 무엇이겠습니까?

바로 그 뼈를 차지하려고 그러는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진소양왕 51년(기원전 256),


於是唐雎載音樂,予之五千金,居武安,高會相於飲,謂:「邯鄲人謂誰來取者?」

於是其謀者固未可得予也,其可得與者,與之昆弟矣.

「公與秦計功者,不問金之所之,金盡者功多矣. 今令人復載五千金隨公.」

唐雎行,行至武安,散不能三千金,天下之士,大相與斗矣.

[이에 응후의 명을 받은 세객 당저(唐雎)는 수레에 악대(樂隊)와 5천 금을 싣고 조나라 도읍 한단의 서쪽에 있는

무안(武安)으로 가 큰 잔치를 벌이면서 책사들과 어울렸다. 이때 당저가 사인들에게 말하기를 :
" 한단 사람중에 누가 와서 이 금을 차지할까.”라고 하며.
당저는 진나라 공격을 꾀하던 책사들 중 금을 줄 만한 자와 그렇지 못한 자를 구분한 뒤

그에 맞게 금을 뿌리면서 그들과 형제처럼 사귀었다. 이때 범수가 사람을 당저에게 보내 말을 전하기를 :
“ 그대는 진나라를 위해 공만 세워 주면 되오. 금을 누구에게 주었는지에 대해서는 불문에 붙이겠소.

그 금을 다 쓰는 것이 곧 많은 공을 세우는 것이오. 지금 내가 다른 사람을 시켜 다시 5천 금을 수레에 실어 보내도록 하겠소.”라고 하였다.  당저가 무안에 이르러 아직 3천 금도 뿌리기 전에 천하의 책사들이 서로 돈을 놓고

크게 다투기 시작하였고 합종책도 결렬되었다.  주난왕 56년(기원전 259)

謂應侯曰:「君禽馬服乎?」曰:「然.」「又即圍邯鄲乎?」曰:「然.」

「 趙亡,秦王王矣,武安君為三公. 武安君所以為秦戰勝攻取者七十餘城,南亡鄢、郢、漢中,

禽馬服之軍,不亡一甲,雖周呂望之功,亦不過此矣.  趙亡,秦王王,武安君為三公,

君能為之下乎? 雖欲無為之下, 固不得之矣.  秦嘗攻韓邢,困於上黨,上黨之民皆返為趙.

天下之民,不樂為秦民之日固久矣.  今攻趙,北地入燕,東地入齊,南地入楚、魏,

則秦所得不一幾何.  故不如因而割之,因以為武安功.」

어떤 사람이 응후에게 묻기를 : “무안군 백기(白起)가 마복군(馬服君: 趙括을 지칭)을 포로로 잡았습니까.”라고 하자.
“응후가 대답하기를 : "그렇소.”라고 하였다.
그 사람이 또 묻기를 : “그렇다면 지금 무안군이 다시 한단을 포위하고 있습니까.”라고 하자.
“응후가 대답하기를 : "그렇소.”라고 하였다.

그러자 그가 일러주기를 : " 조나라가 망하면 진왕은 천하의 왕이 되고 무안군은 3공의 반열에 서게 될 것입니다.

무안군은 진나라를 위해 싸울 때마다 매번 이겨 이미 70여개 성을 빼앗는 전공을 세웠습니다.

남으로 초나라 도읍 언영(鄢郢: 호북성 의성현)과 한중(漢中) 땅을 함락시킨데 이어 조나라 마복군의 군사를 모두

포로로 잡았습니다. 그런데도 그는 병사 하나 잃지 않았습니다.

그 공은 주공(周公)이나 소공(召公), 여망(呂望: 태공망)에 비할지라도 결코 덜하지 않을 것입니다.

조나라가 망해 진왕이 천하의 왕이 되고 무안군이 3공이 되었을 때 그대는 과연 그 아래에 머물 수 있겠습니까?

비록 그 아래에 있을 생각이 없다 하더라도 이미 어쩔 수 없이 그리 되고 말 것입니다.

지난 번에 진나라가 한나라의 형(邢) 땅을 포위해 공격하다가 상당에서 곤경에 처했을 때 상당의 백성들은 모두

진나라를 배반하고 조나라 편을 들었고, 천하의 백성들은 이미 진나라의 백성이 되기를 꺼려한 지 오래되었습니다.

지금 진나라가 조나라를 공격해 멸망시키더라도 그 북쪽의 땅은 연나라, 동쪽의 땅은 제나라,

남쪽의 땅은 초나라나 위나라로 편입되고 말 것입니다. 그리 되면사실 진나라는 얼마 얻지도 못하게 됩니다.

그러니 그대는 조나라 땅의 할양을 조건으로 강화를 성사시켜 조나라 공략의 공을 무안공의 몫이 되지 않도록

하느니만 못합니다.”라고 하였다.

應侯失韓之汝南.  秦昭王謂應侯曰:「君亡國,其憂乎?」應侯曰:「臣不憂.」

王曰:「何也?」曰:「梁人有東門吳者,其子死而不憂,

其相室曰:『公之愛子也,天下無有,今子死不憂,何也?』
東門吳曰:『吾尚無子,無子之時不憂;今子死,乃即與無子易用也. 臣奚憂焉?』

臣亦嘗為子,為子時不憂;今亡汝南,乃與即為梁余子用也. 臣何為憂?」

[응후(應侯)가 자신의 봉지 중 일부인 여남(汝南: 北汝河)을 한나라에 의해 잃게 되자,

진소양왕이 응후에게 묻기를 : " 그대는 여남의 봉지를 잃어버려 걱정이 되겠소.”라고 하자.
응후가 대답하기를 : “신은 근심하지 않습니다.”라고 하였다.
진소양왕이 되묻기를 : " 어찌 그럴 수 있는 것이오?"라고 하자.
응후가 대답하기를 : " 위나라에 동문오(東門吳)라는 사람이 살고 있었습니다.

하루는 그의 아들이 죽었을 때도 태연한 모습을 보이자 집사가 의아해 하며 묻기를 '

‘ 공께서는 세상에서 보기 드물 정도로 자식을 귀여워했습니다. 지금 자식이 죽었는데도 슬퍼해 하지 않으니

이는 어찌된 일입니까?'라고 했습니다. 이에 동문오가 대답하기를, ‘ 나는 당초 아들이 없었소.

나는 아들이 없었을 때 아무런 슬픔도 없었소. 지금 아들이 죽어 전에 아들이 없었을 때와 똑같이 된 것일 뿐이오.

그러니 어찌 슬퍼할 일이 있겠소?’라고 했습니다. 저 또한 일찍이 서자(庶子)로 태어났기에 봉지가 없었습니다.

그때 아무런 근심도 없었습니다. 지금 여남을 잃은 것은 위나라 사람이 어린 아들을 잃은 것과 같습니다.

그러니 저에게 어찌 근심이 있겠습니까.”라고 하였다.  주난왕 58년(기원전 257),


秦以為不然,以告蒙傲曰:「今也,寡人一城圍,食不甘味,臥不便席,今應侯亡地而言不憂,

此其情也?」 蒙傲曰:「臣請得其情.」蒙傲乃往見應侯,曰:「傲欲死.」 應侯曰 : 「何謂也?」

[그러나 진소양왕은 이를 곧이 듣지 않고 곧 장군 몽오(蒙傲)를 불러 묻기를 :
" 지금 과인은 성 하나를 포위당한 것만으로도 밥을 먹어도 밥맛이 없고, 누워도 자리가 편치 않은데

응후는 자신의 봉지를 잃고도 태연하니 과연 그것이 진심에서 나온 것이겠소?”라고 하자.
몽오가 대답하기를 : “신이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라고 하였다.
그리고는 이내 응후를 만나 말하기를 : " 나는 죽고 싶소.”라고 하였다.
응후가 묻기를 : “ 대체 무슨 일이오?”라고 하자.


曰:「秦王師君,天下莫不聞,而況於秦國乎!今傲勢得秦為王將,將兵,臣以韓之緦也,

顯逆誅,奪君地,傲尚奚生?不若死.」 應侯拜蒙傲曰:「願委之卿.」蒙傲以報於昭王.

[이에 몽오가 대답하기를 : " 진왕이 그대를 스승으로 섬기는 것은 세상이 다 아는 바요.

그러니 진나라 사람이야 더 이상 말할 것이 있겠소. 지금 나는 다행히 진왕의 은총으로 장군이 되어

군사를 지휘하는 자리에 있소. 그런데 하찮게 여겼던 한나라 따위가 역모를 꾸며 공공연히 그대의 봉지를 빼앗았소. 그러니 내가 살아서 뭐하겠소? 죽느니만 못하오.”라고 하였다.
그러자 응후가 몽오에게 재배하면서 말하기를 : “ 원컨대 모든 걸 그대의 처분에 맡기도록 하겠소.”라고 하였다.
몽오가 이를 진소양왕에게 보고했다. 이후 진소양왕은 응후가 한나라에 대해 무슨 말을 해도 듣지 않았다.

진소양왕은 응후의 진언(進言)이 잃어 버린 여남에 대해 아직 미련이 남아 있다고 여겼기 때문이다. 

 

秦攻邯鄲,十七月不下.  莊謂王稽曰:「君何不賜軍吏乎?」王稽曰:「吾與王也,不用人言.」
莊曰:「不然.  父之於子也,令有必行者,必不行者.  曰『去貴妻,賣愛妾』,此令必行者也;

因曰『毋敢思也』,此令必不行者. 守閭嫗曰,『其夕,某懦子內某士』

貴妻已去,愛妾已賣,而心不有.  欲教之者,人心固有.

今君雖幸於王,不過父子之親;君吏雖賤,不卑於守閭嫗.  且君擅主輕下之日救矣.

聞『三人成虎,十夫楺椎.  眾抽所移,毋翼而飛』.  故曰,不如賜軍吏而禮之.」王稽不聽.

[진나라가 조나라의 도읍 한단을 공격했으나 17개월이 지나도록 함락시키지 못했다. 진소양왕 52년(기원전 255)

이때 장(莊)이라는 사람이 하동(河東: 산서성 서남부)군수로 있는 왕계(王稽)에게 묻기를 :
" 그대는 왜 군리(軍吏: 장병)들에게 상을 내리지 않는 것이오.”라고 하자.
왕계가 대답하기를 : " 나는 군왕과 남의 말을 듣지 않기로 약속했소.”라고 하였다.
그러자 장이 말하기를 : " 그렇지 않습니다. 부자 사이라도 반드시 따라야 할 것과 따라서는 안될 명령이 있습니다.

가령 부친이 ‘아무리 귀해도 음행을 한 처는 버려야 하고, 아무리 사랑스러워도 음행을 한 첩은 팔아야 한다’고 명하면

이는 반드시 따라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이를 두고 ‘더 이상 생각지도 말라’고 명하면 이는 도저히 따를 수 없는

명인 것입니다. 마을을 지키는 노파가 ‘어느 날 밤 어떤 여자와 어떤 남자가 사통했다’고 거짓을 꾸며

이로 인해 귀한 처를 내쫓고 애첩을 팔아치웠다 할지라도 그들을 그리워하지 않을 수는 없기 때문입니다.

자기가 알고 있는 일을 남에게 알리고 싶은 것은 인지상정(人之常情)입니다. 지금 그대는 비록 군왕의 총애를 받고

있다고는 하나 결코 부자지간의 정을 능가하지는 못할 것입니다. 또한 군리들이 비록 천하다고는 하나 결코 마을을

지키는 노파에 비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그대는 오랫동안 군왕의 총애만을 믿고 아랫사람들을 멸시해 왔습니다.

내가 듣건대 '세 사람이 입을 모아 저자에 호랑이가 나타났다고 떠들면 모든 사람이 믿으며,

열 사람이 어떤 자가 쇠 몽둥이를 비틀어 구부렸다고 말하면 그 말을 믿게 되며, 

여러 사람이 떠들면 진실도 바꿀 수 있으며, 많은 사람이 주장하면 날개 없는 것도 나는 것으로 믿게 된다고 합니다.

그러니 그대도 부하들에게 상을 내리고 예로 대해 주느니만 못합니다.”라고 하였으나. 
왕계는 이같은 충고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軍吏窮,果惡王稽、杜摯以反.  秦王大怒,而欲兼誅范睢.

范睢曰:「臣,東鄙之賤人也,開罪於楚、魏,遁逃來奔.  臣無諸侯之援,秦習之故,

王舉臣於羈旅之中, 使職事,天下皆聞臣之深與王之舉也.  今遇惑或與罪人同心,而王明誅之,

是王過舉顯於天下,而為諸侯所議也.  臣願請藥賜死,而恩以相葬臣,王必不失臣之罪,

而無過舉之名.」王曰:「有之.」遂弗殺而善遇之.

[결국 군리들은 더욱 궁해지자, 과연 왕계와 그 보좌관인 두지(杜摯)가 모반을 꾀하고 있다고 참소했다.

진소양왕이 대노해 왕계 등은 물론 범수(范睢)까지 함께 사형에 처하려고 했다.

범수가 아뢰기를 : " 저는 동쪽 시골에서 태어난 미천한 몸으로 위나라에서 죄를 짓고 진나라로 도망쳐 왔습니다.

당시 저는 제후들의 후원도 없었고 가까운 친구조차 없었습니다. 그런 저를 대왕께서 기려지신 중에서 발탁해

일을 맡겼습니다. 천하인은 모두 저의 미천한 배경과 대왕께서 신을 발탁한 사실을 잘 알고 있습니다.

지금 신은 우매하게도 미혹된 나머지 죄인 왕계와 합류했으니 신을 공개 처형하시기 바랍니다.

이는 대왕께서 저를 잘못 등용했다는 과실을 널리 알리는 것이 되니 제후들 사이의 논란거리가 될 것입니다.

원컨대 사약을 내려 죽게 하고 특별한 은총을 베풀어 재상의 예로 장사를 치러 주시기 바랍니다.

그러면 대왕께서 저의 잘못을 방관하지 않은 셈이 되고 사람을 잘못 등용했다는 비난도 듣지 않을 것입니다.”하였다.
그러자 진소양왕은 말하기를 : “ 잘 알아 들었소.”라고 하며. 마침내 사형을 중지하고 범수를 더욱 후대했다.

 

蔡澤見逐於趙,而入韓、魏,遇奪釜鬲於途.  聞應侯任鄭安平、王稽,皆負重罪,應侯乃慚,

乃西入秦.  將見昭王,使人宣言以感怒應侯曰:「燕客蔡澤,天下駿雄弘辯之士也. 彼一見秦王,

秦王必相之而奪君位.」應侯聞之,使人召蔡澤. 蔡澤入,則揖應侯,應侯固不快,及見之,又倨.

應侯因讓之曰:「子觴宣言代我相秦,豈有此乎?」對曰:「然.」 應侯曰:「請聞其說.」

[연나라 사람 채택(蔡澤)은 조나라에서 쫓겨나 한나라와 위나라 등지를 떠돌다가 도중에 갖고 있던 솥과 광주리까지

빼앗겼다. 이때 그는 정안평(鄭安平: 범수가 위나라에서 죽게 되었을 때 범수를 살려내 함께 진나라로 망명한 인물)과

왕계(王稽) 등이 모두 중죄를 범해 응후가 내심 크게 부끄러워하고 있다는 말을 듣게 되었다.

이에 곧 길을 서둘러 서쪽 진나라로 들어왔다.

그리고는 진소양왕을 알현할 생각으로 우선 응후의 화를 돋구기 위해 사람을 시켜 이같이 떠들고 다니게 했다.
“ 연나라 사람 채택은 천하의 재주와 지혜가 뛰어난 인재로 변론에 탁월한 재주를 지닌 사람이다. 

그가 진왕을 한 번만 알현해도 진왕은 반드시 그 사람을 상국으로 앉히기 위해 응후의 자리를 빼앗고 말 것이다.”

응후가 이 말을 듣고 곧 사람을 보내 채택을 불러들였다. 채택은 들어와 응후를 보고는 단지 읍만 했다.

이에 기분이 상한 응후는 마주 대한 후에도 채택이 여전히 거만한 모습을 보이자 화가 난 나머지 채택을 꾸짖으며

묻기를 : " 당신은 늘 나를 대신해 진나라의 상국이 될 것이라고 떠들고 다녔다는데 과연 그같은 일이 있었소?”하자.
채택이 대답하기를 : “그렇소.”라고 하였다. 응후가 묻기를 : " 그럼 어디 그 이유나 들어봅시다.”라고 하자.

 

蔡澤曰:「吁!何君見之晚也.  夫四時之序,成功者去.  夫人生手足堅強,耳目聰明聖知,

豈非士之所願與?」 應侯曰:「然.」

蔡澤套(曰):「質仁秉義,硎道施德於天下,天下懷樂敬愛,願以為君王,豈不辯智之期與?」

應侯曰:「然.」

[이에 채택이 되묻기를 : " 아, 그대는 어찌 이리 나를 늦게 만난 것입니까. 무릇 4계절의 차례를 보더라도

공을 이루면 물러날 줄 알아야 하는 것이오. 사람으로 태어나 수족이 튼튼하고 굳세며, 눈과 귀가 예민하고,

마음이 성인같은 지혜로워야 하니 이것이야말로 바로 선비가 원하는 바가 아니겠소.”라고 하자.

응후가 대답하기를 : “그야 그렇소.”라고 하였다.
이에 채택이 묻기를 : “인심(仁心)을 구비하여 정의(正義)를 바로 세우고, 인의의 도를 행하여 은혜를 베풀고,

천하인이 마음으로 기뻐하며 경애하는 마음을 품게 됨으로써 모든 사람이 바라는 사람을 군왕으로 모시는 것,

이것이야말로 바로 분별력을 지닌 선비가 바라는 바가 아니겠소.”라고 하자.  

응후가 대답하기를 : “그야 그렇소.”라고 하였다.


蔡澤復曰:「富貴顯榮,成理萬物萬物各得其所;生命壽長,終其年而不夭傷;

天下繼其統,守其業,傳之無窮,名實純粹,澤流千世,稱之而毋絕,與天下終.

豈非道之符,而聖人所謂吉祥善事與?」

應侯曰:「然.」澤曰:「若秦之商君,楚之吳起,越之大夫種,其卒亦可願矣.」

[채택이 다시 묻기를 : “부귀영달하여 만물을 이치에 따라 정연히 처리함으로써 만물이 제 자리를 찾도록 하고,

목숨이 끊어질 때까지 장수하여 요절하지 않고 천수를 누리고, 천하가 대통을 이어 그 업을 지키며 무궁토록 이를

전하고, 명실(名實)이 순수하여 그 은택이 천세(千世)에 넘쳐 흐름으로써 그 찬미가 천지와 더불어 시종(始終)하는 것,

이것이야말로 바로 성인이 언급한 바 있듯이 도덕과 부합해 이뤄지는 길상선사(吉祥善事)가 아니겠소?”라고 하자.
응후가 대답하기를 : “그야 그렇소.”라고 하였다.
채택이 다시 묻기를 : “ 그렇다면 그대는 진나라의 상군(商君: 상앙)과 초나라의 오기(吳起),

월나라 대부 문종(文種)과 같은 사람을 과연 사람들이 기대하는 바를 성취한 사람들이라고 보시오.”라고 하자.


應侯知蔡澤之欲困己以說,復曰:「何為不可?夫公孫鞅事孝公,極身毋二,盡公不還死,

信賞罰以致治, 竭智能,示請素,蒙怨咎,欺舊交,虜魏公子卬,卒為秦禽將,破敵軍,攘地千里.

吳起事悼王,使死不害公,讒不蔽忠,言不取苟合,行不取苟容,行義不圖毀譽,必有伯主強國,

不辭禍凶.  大夫種事越王,主離困辱,悉忠而不解,主雖亡絕,盡能而不離,多功而不矜,

貴富不驕怠. 若此三子者,義之至,忠之節也.
故君子殺身以成名,義之所在,身雖死,無憾悔,何為不可哉?」

[이에 응후는 채택이 자신을 궁지로 몰아가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고 반박하며 말하기를 :
“ 왜 그렇지 않다고 하는 것이오? 무릇 상앙은 진효공을 섬기면서 온 정성을 다해 일하고 두 마음을 품지 않았소.

공(公)을 바로 세우기 위해 사(私)를 돌보지 않았고, 상벌을 분명히 하여 바른 다스림을 이루었소.

또 자신의 지혜와 능력을 다해 진실된 충성심을 드러내 보였소. 불행히도 사람들의 원망과 참소를 입게 되고,

옛 친구인 위나라 공자 앙(卬)을 거짓으로 유인해 포로로 잡기는 했소. 그러나 그는 진나라를 위해 위나라와의

싸움에서 마침내 금장파군(禽將破軍: 적의 장수를 생포하고 적군을 격파함)의 공을 세워 진나라 땅을 1천 리나

확대했소. 오기 또한 초도왕(楚悼王)을 섬기면서 사사로운 일로 공적인 일을 손상시킨 일이 없고,

참언으로 남의 충절을 은폐하지 않았고, 말은 군왕에게 영합키 위해 구차스럽게 꾸미는 법이 없었고,

행동 또한 다른 사람의 행보를 염두에 두고 애매한 태도를 취한 적이 없소. 그는 의를 행하면서 비방과 칭찬을

돌아보는 일이 없었고, 군주를 패자로 만들고 나라를 강하게 만드는 일이라면 일신의 화흉(禍凶)은 개의치도 않았소.

대부 문종도 월왕 구천을 섬기면서 군주가 궁지에 몰려 곤욕을 치를 때 충성을 다하면서 조금도 게으르지 않았고,

나라가 비록 사실상 망한 상황이 되었음에도 혼신의 재능을 발휘하며 군주의 곁을 떠나지 않았고,

많은 공을 세웠음에도 교만하지 않았고, 부귀를 이루고도 교만하거나 나태하지 않았소.

이 세 사람은 의의 극치와 충성의 전범이 무엇인지를 보여준 것이오.

군자는 자신을 희생시켜 이름을 남기기 위해 의로운 것이라면 비록 몸이 죽더라도 조금도 후회하지 않는 것이오.

이로써 보면 그들이 어찌 사람들이 기대하는 바를 이루지 못했다고 할 수 있겠소?”라고 하였다.]


蔡澤曰:「主聖臣賢,天下之福也;君明臣忠,國之福也;父慈子孝,夫信婦貞,家之福也。
故比干忠,不能存殷.  子胥知,不能存吳;申生孝,而晉惑亂。是有忠臣孝子,國家滅亂, 何也?

無明君賢父以聽之.  故天下一起君父為戮辱,戀其臣子.

夫待死之後可以立忠成名,是微左不足仁,孔子不足聖,管仲不足大也.

[그러자 채택 또한 반박하기를 : " 군주에게 성덕이 있고, 신하된 자가 어질다면 이는 곧 천하의 복이오.

또 아버지는 자애롭고 아들은 효도하며, 지아비는 미덥고 아내가 정숙하면 이는 곧 가정의 복이오.

그러나 비간(比干)은 충성스러웠으면서도 은나라를 존속시키지 못했고, 오자서는 지혜롭기는 했으나

오나라를 존속시키지 못했고, 태자 신생(申生)은 효성스럽기는 했으나 진(晉)나라는 끝내 혼란에 빠지고 말았소.

충신과 효자가 있었음에도 국가가 멸망하고 혼란에 빠진 것은 무슨 연고겠소?

이는 바로 충언에 귀를 기울이는 명군(明君)과 현부(賢父)가 없었기 때문이오.

그러기에 천하의 사람들은 그 군주나 부친이 어질지 못해 죽임을 당하면 그 신하나 아들을 가엾이 여기는 것이오.

만일 죽음으로써 비로소 충성을 다하고 이름을 이루게 된다면 미자(微子)도 인인(仁人)이라 부르기에 부족하고,

공자도 성인(聖人)이라 하기에 부족하고, 관중도 큰 인물이라 하기에 부족할 수밖에 없소.”라고 하였다.]

 

於是應侯稱善. 蔡澤得少間, 因曰:「商君、吳起、大夫種,其為人臣, 盡忠致功, 則可願矣.

閎夭事文王, 周公輔成王也, 豈不亦忠乎?以君臣論之,商君、吳起、大夫種,

其可願孰與閎夭、周公哉?」 應侯曰:「商君、吳起、大夫種不若也.」
蔡澤曰:「然則君之主,慈仁任忠,不欺舊故,孰與秦孝公、楚悼王、越王乎?」

應侯曰:「未知何如也.」

[응후가 훌륭한 말이라고 칭송하자, 채택이 잠시 쉬었다가 묻기를 : " 상앙과 오기, 대부 문종이

남의 신하가 되어 충성을 다하고 공을 이루게 된 것은 실로 사람들이 기대하는 바를 이루었다고 할 수 있소.

그러나 굉요(閎夭)가 주문왕을 섬기고 주공 단(旦)이 주성왕을 보좌한 것 또한 어찌 충성이 아니라고 할 수 있겠소?

군신 관계에서 상앙과 오기, 대부 문종을 굉요와 주공 단에 비교할 때 과연 어느 쪽이 바람직하다고 보시오?”하자.

응후가 대답하기를 : “ 상앙과 오기, 대부 문종이 못하오.”라고 하였다.
채택이 다시 묻기를 : “ 그렇다면 그대의 군왕인 진왕은 인자하고 충성을 신뢰하며 
오랜 인연과 옛 정을 버리지 않는 측면에서 진효공과 초도왕, 월왕 구천 등과 비교해 어떻다고 보시오?”라고 하자.

응후가 대답하기를 : “ 아직 어떠한지 잘 모르겠소.”라고 하였다.]


蔡澤曰:「主固親忠臣,不過秦孝、越王、楚悼. 君者為主,正亂、披患、折難,廣地制谷,

痼國足家、強主,威蓋海內,功章萬里之外,不過商君、吳起、大夫種.

而君之祿位貴盛,死家之富過於三子,而身不退,竊為君危之.

語曰:『日中則移,月滿則虧.』物盛則衰,天之常數也;進退、盈縮、變化,勝任之常道也.

[채택이 말하기를 : "그대가 섬기는 진왕은 충신을 친히 여기는 면에서 진효공과 초도왕, 월왕 구천에 미치지 못하오.

그러나 그대는 군왕을 위해 혼란을 바로 잡아 주고, 우환을 제거해 주고, 어려움을 물리쳐 주고, 땅을 넓혀 주고,

수확을 늘려 주고, 나라를 부강하게 만들어 주고, 집안을 풍족하게 해 주고, 주군을 강하게 만들어 주었소.

이에 그 위세가 해내(海內)를 덮을 만하고, 그 공이 1만 리 밖까지 떨치고 있소.

그러나 그 공도 상앙과 오기, 대부 문종을 넘지는 못하고 있소. 그런데도 그대의 녹봉과 지위는 많고 높으며

집안의 부는 앞의 세 사람을 능가하고 있소. 이같은 상황에서 그대가 은퇴를 하지 않고 있어 나는 내심

그대를 위해 근심을 하지 않을 수 없소. 속담에 이르기를, ' 해가 중천에 오르면 지게 마련이고,

달 차면 기울기 마련이라고 했소. 만물은 일단 성하면 쇠하는 법이오. 이것이 천지간의 불변의 이치요.

나아감과 물러남, 남음과 모자람의 변환은 때에 따라 자연스럽게 이뤄지는 법이오. 이것이 성인의 상도(常道)입니다. 


昔者,齊桓公九合諸侯,一匡天下,至葵丘之會,有驕矜之色,畔者九國.

吳王夫差無適於天下,輕諸侯,凌齊、晉,遂以殺身亡國.

夏育、太史啟叱呼駭三軍,然而身死於庸夫.  此皆乘至盛不及道理也.

[옛날 제환공은 제후들과 아홉 번 회맹하고 천하의 제후들을 통솔해 존왕의 기강을 확립했소.

그러나 규구(葵丘: 하남성 고성현)의 회맹에서 거만한 빛을 내비치자 일거에 9 나라가 등을 돌렸소.

오왕 부차는 천하무적이었으나 제후들를 업신여기고 제나라와 진나라를 능멸한 나머지 결국 몸도 망치고

나라 또한 망하게 만들었소. 하육(夏育)과 태사계(太史啓: 전설적인 용사)는 한번 호령하면 3군을 놀라게 할 정도의

용맹을 지녔으나 결국 일개 용부(庸夫: 졸병)의 손에 죽고 말았소. 이는 모두 극성한 기세에 의지할 줄만 알았지

자신의 행동이 도리에 맞는지를 생각하며 반성하지 못한 데 따른 것이오.

 

夫商君為孝公平權衡、正度量、調輕重,決裂阡陌,教年耕戰,是以兵動而地廣,兵休而國富,

故秦武帝於天下,立魏諸侯.  功已成,遂以車裂. 楚地持戟百萬,白起率數萬之師,以與楚戰,

一戰舉鄢、郢,再戰燒夷陵,南並蜀、漢,又越韓、魏攻強趙,北坑馬服,誅屠四十餘萬之眾,

流血成川,沸聲若雷,使秦業帝.  自是之後,趙、楚懾服,不敢攻秦者,白起之勢也.

身所服者,七十餘城.  功已成矣,賜死於杜郵.

[본래 상앙은 진효공을 위해 권형(權衡: 저울)과 도량(度量: 길이와 용량), 경중(輕重: 무게)를 바로 잡고,

천맥(阡陌: 경지 사이에 난 길. 井田制)을 폐지하고, 백성들에게 경전(耕戰: 일하면서 싸우는 훈련)을 가르쳤소.

이에 군사가 일단 움직이면 땅이 넓어지고, 휴식을 취하면 나라가 부유해졌던 것이오. 그러나 그는 진나라를

천하무적의 대국으로 만들고 그 위엄을 제후들 사이에 떨치는 대공을 세웠지만 결국 거열형에 처해지고 말았소.
당시 초나라는 사방 수천 리가 되는 영토에 창을 지닌 군사가 1백 만이나 되었소.

그러나 백기는 불과 수 만명의 군사만을 이끌고 가 단 한번의 싸움에서 초나라 도읍 언영(鄢郢)을 함락시켰소.

두 번째 싸움에서는 이릉(夷陵)까지 불살랐소. 남으로는 촉(蜀)과 한중(漢中)을 병탄하고,

다시 한, 위 두 나라를 넘어 강국인 조나라를 정벌하여 마침내 마복군(馬服君: 조괄)을 구덩이에 묻어버리고

그의 휘하 군졸 40여만 명을 일거에 생매장 하였소. 그때 피가 흘러 내를 이루고 들끓는 곡성이 우레와 같았습니다. 그는 이같이 하여 진나라가 제왕의 공업을 이루도록 했던 것입니다. 이후 조나라와 초나라는 그 위세에 눌려 감히

진나라를 칠 생각을 못하게 되었소. 이는 모두 백기의 위세 때문이오. 당시 백기가 항복시킨 성 만도 70여 성에

이르오. 그러나 이같이 큰 공을 세웠지만 끝내 함양의 서쪽 두우(杜郵)에서 왕명에 의해 자진하고 말았소.

 

吳起為楚悼罷無能,廢無用,損不急之官.  塞私門之請,壹楚國之俗,南攻楊越,北並陳、蔡,

破橫散從,使馳說之士無所開其口.  功已成矣,卒支解. 

大夫種為越王墾草耕邑,必地殖谷,率四方士,上下之力,以禽近吳, 成霸功.  勾踐終棓而殺之.

此四子者,成功而不去,禍至於此.  此所謂信而不能詘,往而不能反者也.

[오기는 초도왕을 위해 무능한 자를 물리치고, 쓸데없는 자리를 폐지하고, 급하지 않은 관직을 덜어내고,

사사로운 청탁을 차단하고, 초나라의 풍속을 하나로 통일시켰소. 이어 남쪽으로 양월(揚越)을 치고

북쪽으로 진(陳), 채(蔡)의 구지(舊地)를 병탄해 연횡과 합종을 모두 깨뜨려 버렸소. 또한 말 잘한다는 자들에게

그 입을 열 기회조차 주지 않았으나 정작 자신은 공을 세우자마자 결국 거열형을 당하고 말았소.
대부 문종은 월왕 구천을 위해 풀이 무성한 들판을 개척해 성읍을 세우고, 땅을 개간해 식량을 증산하고,

사방에서 모여든 선비들과 함께 상하의 힘을 하나로 합쳐 강적 오왕 부차를 사로잡았소.

그러나 패업을 이루자마자 군주인 구천은 끝내 그를 배반하여 죽이고 말았소.
이 4 인은 공을 세운 뒤 물러날 줄 몰라 화를 입게 된 것이오. 이것이 곧 뻗을 줄만 알고 굽힐 줄 모르며,

나아가기만 하고 돌아올 줄 모른다는 것이오.

 

范蠡知之,超然避世,長為陶朱. 君獨不觀博者乎? 或欲分大投,或欲分功. 此皆君之所明制也.

今君相秦,計不下席,某不出廊廟,坐制諸侯,利施三川,以實宜陽,決羊腸之險,塞太行之口,又斬范、中行之途,棧道千里於蜀、漢使天下皆烏托邦秦.  秦之欲得矣,君之功極矣.

此亦秦之分功之時也! 如是不退,則商君、白公、吳起、大夫種是也.
君何不以此時歸相印,讓賢者授之,必有伯夷之廉;長為應侯,世世稱孤,而有喬、松之壽.

孰與以禍終哉!此則君何居焉?」 應侯曰 : 「善.」乃延入坐為上客.

[그러나 이와 달리 범려(范蠡)는 이같은 이치를 알았기 때문에 초연히 세상을 피해

도주공(陶朱公: ‘도’ 땅에서 수만금의 재산을 모으면서 갖게 된 별명)으로 살면서 천수를 누렸소.
그대는 도박하는 것을 보지 못했소. 이를 보면 크게 걸고 빨리 승부를 내려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때로는 조금씩 걸면서 차분히 모으려는 사람도 있소. 이는 그대도 잘 알 것이오.

지금 그대는 진나라의 재상이 되어 계책을 세우는데도 굳이 자리에서 일어나지 않고,

책략을 구사하는데도 굳이 조정 밖으로 나가지 않고도 편히 앉아 제후들을 제압할 정도요.

이에 그 위세가 삼천(三川)까지 미치고, 의양(宜陽)까지 튼튼히 방비하고, 양장(羊腸)의 험로를 개척해

태행산(太行山)의 입구를 막고, 나아가 3진의 교통 요도를 끊고, 1천 리 밖의 촉과 한중(漢中)으로

직통하는 잔도(棧道)를 냈소. 이로써 천하의 제후들로 하여금 모두 진나라를 두려워하게 만들었소.

이처럼 진나라가 얻고 싶어하는 것을 그대가 모두 충족시켜 주었으니 그대의 공은 절정에 이른 셈이오.

그러니 이제야말로 서서히 조금씩 걸고 차분히 모으는 승부쪽으로 나아가야만 하오.
만일 이때 은퇴하지 않으면 상앙과 백기, 오기, 대부 문종이 신세가 되고 말 것이오.

그대는 어찌하여 당장 재상의 인수를 풀어 다른 현자에게 그 자리를 양보하지 않는 것이오.

그리하면 그대는 반드시 백이(伯夷)와 같이 청렴하다고 칭송을 받고, 봉지에서 응후로 군림하면서

대대로 고(孤: 王侯의 1인칭 겸양어)를 칭할 수 있고, 왕자교(王子喬)나 적송자(赤松子) 등의 신선과 같은

장수를 누릴 수 있을 것이오. 화를 입고 그만 두는 것과 이를 비교하면 어느 쪽이 낫소.

대는 과연 어느 쪽을 선택할 생각이오?”라고 하자. 

응후가 대답하기를 : “잘 알아 들었소.”라고 하였다.  이에 응후는 채택을 안으로 안내해 상객으로 삼았다.

 

後數日,入朝,言於秦昭王曰:「客新有從山東來者蔡澤,其人辯士.  臣之見人甚眾,莫有及者,臣不如也.」 秦昭王召見,與語,大說之,拜為客卿.  應侯因謝病,請歸相印.

昭王強起應侯,應侯遂稱篤,因免相.  昭王新說蔡澤計畫,遂拜為秦相,東收周室.

蔡澤相秦王數月,人或惡之,懼誅,乃謝病歸相印,號為剛成君.

秦十餘年,昭王、孝文王、莊襄王.  卒事始皇帝. 為秦使於燕,三年而燕使太子丹入質於秦.

[며칠 후 응후가 입조하여 진소양왕에게 아뢰기를 : " 신의 빈객 중에 새로이 산동에서 온 채택이라는 자가 있습니다.

그는 뛰어난 변사(辯士)로 신이 이제까지 많은 사람을 보아왔지만 그보다 뛰어난 인물은 본 적이 없었습니다.

신 또한 미칠 바가 못됩니다.”라고 하였다.
진소양왕이 채택을 만나 보고 얘기를 나눈 뒤 크게 기뻐하며 곧바로 그를 객경으로 삼았다.

그러자 응후는 칭병하고 재상의 인수를 풀어 반납할 것을 청했다. 이에 진소양왕이 억지로 응후를 유임시키려 했으나

응후는 이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응후는 결국 병세가 위독하다는 핑계를 대고 재상의 자리를 물러나오게 되었다.
진소양왕은 채택의 새로운 계획에 흡족해 하며 마침내 그를 진나라의 재상으로 삼고, 동쪽의 서주(西周)를 거두어

들였다. 그러나 채택은 진왕을 받들고 수개월 동안 재상으로 일했으나 중도에 참언하는 자가 있자,

이내 벌을 받을까 두려운 나머지 칭병하고 재상의 인수를 내놓았다. 이에 그는 강성군(剛成君)으로 불리게 되었다.

이후 10여년간 진나라에 더 머물렀다. 그 사이 진소양왕과 진효문왕(秦孝文王), 진장양왕(秦莊襄王)을 모신데 이어

마침내는 진시황(秦始皇)까지 모시게 되었다. 이 사이 그는 진나라를 위해 연나라에 사자로 가 3년 후에

연나라 태자 단(丹)을 진나라에 인질로 오도록 만들었다. 

 

 

 

原 文 【 中國哲學書電子化計劃 .   筆寫本 】


           

 

原 文   飜 譯 者        德庤 / 李   斗 振