戰國策(전국책) /戰國策 秦策 3

戰國策 秦策 3

덕치/이두진 2021. 6. 26. 18:18

 

                  秦策 3

 

 

   秦策 四 .

 

 

秦取楚漢中,再戰於藍田,大敗楚軍.  韓、魏聞楚之困,乃南襲至鄧,楚王引歸.

[진나라가 초나라의 한중 땅을 탈취하고, 다시 남전(藍田)에서 초나라 군사를 대파했다.

그러자 한, 위 두 나라는 초나라가 곤경에 처해 있다는 얘기를 듣고 남으로 등읍(鄧邑: 하남성 등현)까지 쳐들어 갔다.

이에 초회왕은 남전에서 철수하고 말았다. 주난왕 3년(기원전 312)

 

後三國謀攻楚,恐秦之救也,或說薛公:「可發使告楚曰:『今三國之兵且去楚,

楚能應而公攻秦, 雖藍田豈難得哉! 況於楚之故地?』 楚疑於秦之未必救己也,而今三國之辭去,

則楚之應之也必勸,是楚與三國謀出秦兵矣.  秦為知之,必不救也.  

三國疾攻楚,楚必走秦以急;秦愈不敢出,則是我離秦而攻楚也,兵必有功.」 薛公曰:「善.」

遂發重使之楚,楚之應之果勸.  於是三國並力攻楚,楚果告急於秦,秦遂不敢出兵.  大臣有功.

[그 후 3국(三國: 제, 한, 위)이 모의해 초나라를 치려 했지만 진나라가 구원에 나설 것을 우려했다.

이때 어떤 사람이 제나라 재상인 설공(薛公: 맹산군)에게 유세하기를 : " 사자를 초나라로 보내 고하기를,

‘ 지금 3국의 군사가 장차 초나라에서 철수하려 하는데 만일 초나라가 호응하여 3국과 함께 진나라를 공격하면

남전을 도로 찾는 것이 어찌 어렵다 하겠습니까! 더구나 초나라의 옛 땅이야 더 이상 말할 필요가 있겠습니까?’라고

하십시오. 초나라는 진나라가 확실히 도와줄 것이라고 믿지 못하는 터에 3국의 군사가 철군한다는 말을 듣게 되면

필시 적극적으로 응해 줄 것입니다. 이는 초나라가 3국과 함께 모의하여 진나라를 공격하겠다는 것이니

진나라가 이를 알면 결코 구원에 나설 리가 없습니다. 이때 3국이 초나라를 급습하면 초나라는 필시 진나라로 달려가

위급함을 알리고 구원을 청할 것이나 진나라는 더욱 출병코자 하는 엄두를 내지 못할 것입니다.

이리되면 우리는 진나라를 이간하여 초나라를 공격하는 셈이 되니 반드시 승리를 거둘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그러자 설공이 말하기를 : " 좋소."라고 하였다. 

설공이 사자를 초나라로 보내자, 초나라가 과연 적극 응했다. 이에 3국이 합세해 초나라를 공격하자,

초나라는 과연 진나라에 위급함을 알리고 구원을 청했으나 진나라는 끝내 감히 출병치 못했다.

마침내 3국은 대승을 거두게 되었다.  주난왕 14년(기원전 301)

 

薛公入魏而出齊女.  韓春謂秦王曰:「何不取為妻,以齊、秦劫魏,則上黨,秦之有也.

齊、秦合而立負芻,負芻立,其母在秦,則魏,秦之縣也已.  呡欲以齊、秦劫魏而困薛公,

佐欲定其弟,臣請為王因呡與佐也.  魏懼而復之,負芻必以魏歿世事秦.

齊女入魏而怨薛公,終以齊奉事王矣.」

[설공(薛公)이 위나라로 가 상국이 되자, 이에 화가 난 제민왕이 위나라 공자 부추의 모친인 제나라 여인를 내쫓았다.

이에 한춘(韓春)이란 자가 진소양왕에게 아뢰기를 : " 어찌하여 제녀를 부인으로 맞아들이지 않는 것입니까?

제, 진 두 나라가 혼인관계를 맺어 위나라를 공격하면 상당(上黨)은 진나라 소유가 될 것입니다.

이때 두 나라가 합세해 부추(負芻)를 위왕으로 세우도록 하십시오.

부추가 왕이 되고 그의 어머니가 진나라 왕비가 되면 위나라는 바로 진나라의 일개 현이 되고 말 것입니다.

또 지금 한문(韓呡)이 제, 진 두 나라의 힘을 빌어 위나라를 협박해 설공을 궁지에 몰아넣으려 하고 있고,

위나라 공자 좌(佐)는 자신의 동생 부추를 보위에 앉히려 하고 있습니다.

신이 군왕을 위해 한문 및 공자 좌와 함께 가까이 지내면서 그들을 이용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그리하면 위나라는 두려운 나머지 그 제녀를 다시 받아들일 것이고, 부추는 반드시 위나라를 들어

우리 진나라를 섬길 것입니다. 제녀는 위나라로 다시 되돌아 가면 설공을 원망하여

평생 제나라를 들어 군왕을 섬기게 될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주난왕 24년(기원전 291),

 

三國攻秦,入函谷.  秦王謂樓緩,曰:「三國之兵深矣,寡人欲割河東而講.」

對曰:「割河東,大費也;免於國患,大利也. 此父兄之任也. 王何不召公子池而聞焉?」

王召公子池而問焉,對曰:「講亦悔,不講亦悔.」王曰:「何也?」

對曰:「王割河東而講, 三國雖去, 王必曰:『惜矣!三國且去, 吾特以三城從之.』此講之悔也.」

王曰:「鈞吾悔也,寧亡三城而悔,無危咸陽而悔也. 寡人決講矣.」

卒使公子池以三城講於三國之兵,乃退.

[3국(三國: 제, 한, 위)이 진나라를 공격해 함곡관까지 들어왔다.

그러자 진소양왕이 재상인 누완(樓緩)에게 말하기를 :
“3국의 공격이 긴박하고 엄중한 상황이니 과인은 하동(河東)을 떼어 주고 강화하고자 하오.”라고 하자.
누완이 대답하기를 : “ 하동을 떼어 주는 것은 그 대가가 너무 큽니다.

그러나 국난을 벗어나는 것은 큰 이익이 아닐 수 없습니다. 이는 이나라 공족대부들과 상의할 일입니다.

대왕께서는 어찌 공자 지(池)를 불러 하문하지 않는 것입니까?”라고 하였다. 진소양왕이 공자 지를 불러 하문하자.

공자 지가 대답하기를 : “강화를 해도 후회를 하고, 강화를 하지 않아도 후회할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진소양왕이 묻기를 : “그게 무슨 뜻이오?”라고 하자.
공자 지가 대답하기를 : " 대왕께서 하동(河東: 산서성)을 떼어 주고 강화를 맺어 3국이 철수한다 해도

대왕께서 틀림없이 말하기를, ‘아깝다. 3국이 이토록 철병하는 마당에 공연히 3개 성읍을 떼어주었다’고 할 것입니다.

이는 강화한 일을 후회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만일 강화하지 않다가 3국이 함곡관에 들어오면 함양까지 위태롭게

될 것이 뻔합니다. 그때에 대왕께서 말하기를, ‘아깝다. 3개 성읍을 아껴 강화치 않다가 이꼴이 되었다’ 할 것입니다.

이는 강화하지 않은 일을 후회하는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그러자 진소양왕이 말하기를 : " 어짜피 후회할 일이라면 차라리 3개 성읍을 잃고 후회할지언정

함양을 위태롭게 하며 후회하지는 않을 생각이오. 과인은 강화하기로 결정했소.”라고 하였다.

마침내 진소양왕은 공자 지를 보내 3국과 강화를 맺었고, 3국은 군대를 철수하였다. 주난왕 24년(기원전 291)

 

秦昭王謂左右曰:「今日韓、魏,孰與始強?」對曰:「弗如也.」

王曰:「今之如耳、魏齊,孰與孟嘗、芒卯之賢?」對曰:「弗如也.」

王曰:「以孟嘗、芒卯之賢,帥強韓、魏之兵以伐秦,猶無奈寡人何也!今以無能若耳、魏齊,

帥弱韓、魏以攻秦,其無奈寡人何,亦明矣!」 左右皆曰:「甚然.」

[진소양왕이 좌우를 돌아보며 묻기를 : " 요즘 한, 위 두 나라의 위세가 처음보다 강해졌소?라고 하자.

좌우의 대신들이 대답하기를 : “ 예전만 못합니다.”라고 하였다.
진소양왕이 묻기를 : “ 요즘 한나라 대부 여이(如耳)와 위나라 재상 위제(魏齊)를

이전의 맹상군(孟嘗君)과 망묘(芒卯: 위나라 장수)에 비교하면 어느쪽이 뛰어나오.”라고 하자. 

좌우의 대신들이 대답하기를 : “ 여이, 위제가 맹상군, 망묘만 못합니다.”라고 하였다.
그러자 진소양왕이 말하기를 : " 맹상군과 망묘 같은 현재(賢才)도 강력한 한나라와 위나라의 군사를 이끌고 와서

우리 진나라를 공격하였으나 과인을 어찌하지 못했소. 지금 그보다 못한 여이와 위제가 약해진

한나라와 위나라의 군사를 이끌고 진나라를 공격한들 과인을 어찌하지는 못할 것이 자명하오.”라고 하자. 

좌우의 대신들이 대답하기를 : “지당한 말씀입니다.”라고 하였다.  주난왕 49년(기원전 266)

 

中期推琴對, 曰 : 「三之料天下過矣. 昔者六晉之時,智氏最強,滅破范、中行,帥韓、

魏以圍趙襄子於晉陽.  決晉水以灌晉陽,城不沈者三版耳. 智伯出行水,韓康子御,魏桓子驂乘.

智伯曰:『始,吾不知水之可亡人之國也,乃今知之. 汾水利以灌安邑,絳水利以灌平陽.』

魏桓子肘韓康子,康子履魏桓子,躡其踵.  肘足接於車上,而智氏分矣.  身死國亡,為天下笑.
今秦之強,不能過智伯;韓、魏雖弱,尚賢在晉陽之下也.  此乃方其用肘足時也,願王之勿易也.」

[그러자 대신 중기(中期)가 거문고를 한 옆으로 밀어 놓으며 말하기를 : “ 대왕께서 천하 제후에 대한 그같은 평가는

잘못입니다. 옛날 6진(六晉: 지씨, 범씨, 중항씨, 위씨, 조씨, 한씨)시절에 지씨(智氏)가 가장 강했습니다.

지씨는 범씨와 중항씨를 멸망시킨데 이어 한씨와 위씨를 이끌고 조양자를 진양에서 포위한 뒤

진수(晉水)의 둑을 터뜨려 물을 진양성 안으로 흘려보냈습니다.

진양성이 물바다가 되어 겨우 삼판(三板: 1판은 2척)이 남았을 때, 지백(智伯)이 물바다를 순행하러 나서자

위환자(魏桓子: 위양자의 아들, 이름은 駒)가 수레를 몰고, 한강자(韓康子: 한 장자의 아들, 이름은 虎)가

배승(陪乘)하여 뒤에서 호위했습니다. 이때 지백이 말하기를, ‘처음에 나는 물을 이용해 남의 나라를 망칠 수 있다는

사실을 몰랐소. 지금에 와서야 비로소 이를 알게 되었소. 분수(汾水)를 터뜨리면 평양(平陽: 한강자의 성읍)을

물바다로 만들기 십상이고 ,강수(絳水)를 터뜨리면 안읍(安邑: 위환자의 성읍)을 물바다가 만들기 십상이겠소’라고

했습니다. 이에 위환자가 한강자의 팔꿈치를 툭 치자 한강자는 발로 위환자의 발을 밟았습니다.

이같이 팔꿈치와 발이 수레 위에서 서로 닿게 되자, 결국 지백의 땅은 3분되고 말았습니다.

지백은 자신을 망치고 나라까지 망하게 하므로 인해 천하의 웃음거리가 되고 만 것입니다.

지금 진나라가 비록 강하다고는 하나 당시의 지백을 능가치 못하고, 한, 위 두 나라가 비록 약하다고는 하나

진양성에서 곤경에 처했던 당시의 조양자보다는 강합니다. 지금이야말로 한, 위 두 나라가 주족(足: 팔꿈치와 발)

으로 신호를 보낼 때이니 원컨대 대왕께서는 사안을 가벼이 여기지 말기 바랍니다.”라고 하였다.

 

楚魏戰於陘山. 魏需秦以上洛,以絕秦於楚.  魏戰勝,楚敗於南陽.  秦責賂於魏,魏不與.
營淺謂秦王曰:「王何不謂楚王曰,魏許寡人以地,今戰勝,魏王倍寡人也.

王何不與寡人遇.  魏畏秦、楚之合,必與秦地矣.  是魏勝楚而亡地於秦也;是王以魏地德寡人,

秦之楚者多資矣.  魏弱,若不出地,則王攻其南,寡人絕其西,魏必危.」

秦王曰:「善.」以是告楚.  楚王揚言與秦遇,魏王聞之恐,效上洛於秦.

[초나라와 위나라가 형산(陘山)에서 싸웠다.주현왕 41년(기원전 328), 이때 위나라가 진나라에

상락(上洛)을 떼어 줄 의사를 밝히면서 장차 진나라가 초나라를 도와주지 않을 것을 기대했다.

이 싸움에서 위나라가 승세를 굳히자, 초나라는 결국 남양(南陽: 하남성)에서 대패하게 되었다.

이에 진나라가 위나라에게 약속했던 땅을 달라고 하자, 위나라가 이를 주지 않았다.

그러자 진나라 사람 영천(營淺)이 진혜문왕에게 말하기를 : “ 대왕께서는 어찌하여 초왕(楚王: 초회왕)에게

‘위나라는 과인에게 땅을 주기로 약속했소. 런데 막상 싸움에 이기자 위왕(魏王: 위혜왕)은 과인을 배신했소.

대왕은 어찌하여 과인과 연합하지 않는 것이오. 위나라는 진, 초 두나라가 연합하는 두려워하고 있으니

필시 진나라에게 땅을 줄 것이오. 이는 위나라가 비록 초나라와의 싸움에는 이겼으나 땅은 진나라에 잃는 꼴이 되오.

그리되면 대왕은 위나라 땅으로 과인에게 은혜를 베푸는 것이 되오. 우리 진나라는 그 보답으로 많은 재물을 초나라로

보내도록 하겠소. 위나라가 약한데도 불구하고 땅을 주지 않을 경우 대왕은 위나라의 남쪽을 공격토록 하시오.

과인은 그 서쪽을 끊겠소. 그러면 위나라는 필시 위태로워질 것이오’라고 하지 않는 것입니까.”라고 하였다.
“진혜문왕이 말하기를 : " 좋은 생각이오.”라고 하고는, 곧 초나라에 영천이 한 말을 그대로 알렸다.

초회왕이 진나라의 주문대로 사람들을 시켜 초나라가 장차 진나라와 연합할 것이라고 뱃심 좋게 말하였다.

위혜왕이 이 말을 전해 듣고는 크게 두려워한 나머지 곧바로 상락 땅을 진나라에 주고 말았다.

 

楚使者景鯉在秦,從秦王與魏王遇於境.  楚怒秦合,周最為楚王曰:「魏請無與楚遇而合於秦,

是以鯉與之遇也.  弊邑之於與遇善之,故齊不合也.」楚王因不罪景鯉而德周、秦.

[초나라의 사자 경리(景鯉)가 진나라에 있으면서 진혜문왕과 위양왕이 국경에서 회동하는 자리에 참석하게 되었다.

초나라가 이 사실을 알고 크게 노하자, 진나라가 주최(周最)를 보내 초회왕에게 말하기를 :
“ 위나라가 초나라와 관계를 끊을 터이니 우리 진나라와 연합하자고 제의해 왔습니다. 
그래서 귀국의 사자 경리를

참여하게 한 것입니다. 이는 우리 진나라가 귀국과 선린관계임을 내보이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그러자 제나라조차도 우리와 연합하지 않으려 하고 있습니다.”라고 하였다.
이에 초회왕은 경리를 벌하기는커녕 오히려 주최와 진나라에게 사의를 표했다. 주난왕 2년(기원전 313),

 

楚王使景鯉如秦.  客謂秦王曰:「景鯉,楚王使景所甚愛,王不如留之以市地.

楚王聽, 則不用兵而得地;楚王不聽,則殺景鯉,更不與不如景鯉留,是便計也.」秦王乃留景鯉. 

景鯉使人說秦王曰:「臣見王之權輕天下,而地不可得也. 臣之來使也,聞齊、魏皆且割地以事秦.  

所以然者,以秦與楚為昆弟國. 今大王留臣,是示天下無楚也,齊、魏有何重於孤國也.

楚知秦之孤,不與地,而外結交諸侯以圖,則社稷必危,不如出臣.」秦王乃出之.

[초회왕이 경리(景鯉)를 진나라에 사자로 보냈다. 그러자 어떤 세객이 진혜문왕에게 말하기를 :
" 경리는 초왕이 대단히 총애하는 인물이니, 대왕께서 그를 억류한 뒤 땅과 바꾸자고 제안하느니만 못합니다.

초왕이 이를 수락하면 군사를 쓰지 않고도 땅을 얻는 것이고, 초왕이 이를 수락치 않으면 경리를 죽여 버리면 됩니다.

그러면 경리만 못한 자를 사자로 보낼 것입니다. 이것은 훌륭한 계책입니다.”라고 하자.
이에 진혜문왕이 경리를 억류했다. 그러자 경리가 곧바로 사람을 시켜 진혜문왕에게 이같은 말을 전하게 했다.
“ 신이 보기에 대왕께서 이같이 하면 천하의 제후들 사이에서 신뢰만 잃고 땅 또한 손에 넣지 못할 것입니다.

신이 이곳에 사자로 오면서 듣건대 제, 위 두 나라가 장차 땅을 할양해 진나라를 섬기려 한다고 합니다.

두 나라가 이같이 하려는 것은 바로 진나라와 초나라가 형제지국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지금 대왕께서 신을 억류하게 되면 이는 곧 천하의 제후들에게 초나라를 안중에 두고 있지 않다는 사실을

널리 알리는 꼴이 됩니다. 그리되면 제, 위 두 나라가 어찌 고립되어 있는 진나라를 중시하겠습니까.

초나라 역시 진나라가 고립되어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면 땅을 떼어주기는 커녕 여타 제후들과 연합해 진나라를

도모하고자 할 것입니다. 그러면 귀국의 사직은 필시 위태롭게 될 것이니 신을 풀어 주어

귀국시키느니만 못합니다.”라고 하였다.  이에 진혜문왕이 경리를 풀어 주게 되었다. 주난왕 2년(기원전 313),

 

秦王欲見頓弱,頓弱曰:「臣之義不參拜,王能使臣無拜,即可矣. 不,即不見也.」秦王許之.
於是頓子曰:「天下有其實而無其名者, 有無其實而有其名者, 有無其名又無其實者. 王知之乎?」

王曰:「弗知.」

頓子曰:「有其實而無其名者, 商人是也. 無把銚推耨之勢, 而有積粟之實, 此有其實而無其名者也.

無其實而有其名者,農夫是也. 解凍而耕,暴背而耨,無積粟之實,此無其實而有其名者也.

無其名又無其實者,王乃是也. 已立為萬乘,無孝之名;以千里養,無孝之實.」

[진왕(진시황)이 처사(處士) 돈약(頓弱)을 만나려 하자, 돈약이 말하기를 : " 신의 의리로는 군왕에게 절을 하는

법이 없습니다. 대왕께서 신에게 절을 강요하지 않으면 가하나 그렇지 않으면 만날 수 없습니다.”라고 하자. 

진왕이 이를 허락하였다.  이에 돈약이 말하기를 : " 천하에는 그 실질은 있으나 명분이 없는 것이 있고,

실질은 없으면서 명분만 있는 것이 있고, 명분도, 실질도 없는 것이 있습니다.

대왕께서는 이를 알고 있습니까?”라고 하자.  진왕이 대답하기를 : " 알지 못하오."라고 하였다.

돈약이 말하기를 : “ 실질은 있으나 명분이 없는 것은 바로 상인입니다. 그들은 삽으로 흙을 파거나 호미로 김을 매는

수고도 하지 않으면서 창고에 식량이 가득합니다. 이는 실질은 있으나 그 명분이 없다는 것입니다.

실질은 없으면서 명분만 있는 것은 바로 농부입니다. 그들은 해동되면 곧 밭을 갈고 여름에는 잔등을 폭염에

드러내 놓은 채 김을 매지만 실제로 쌓아 놓은 곡식은 없습니다. 이는 실질은 없고 그 명분만 있는 것입니다.

명분과 실질이 모두 없는 것은 바로 군왕입니다. 이미 만승의 높은 자리에 있는데도 모친에게 효도한다는

명분도 없고 비록 모친에게 1천 리의 땅을 식읍으로 내렸다고는 하나 실은 다른 곳으로 보낸 것에 불과하니

모친을 봉양하는 실질도 없습니다.”라고 하였다.  진시황 10년(기원전 237),   

 

秦王悖然而怒.  頓弱曰:「山東戰國有六,威不掩於山東,而掩於母,臣竊為大王不取也.」

秦王曰:「山東之建國可兼與?」
頓子曰:「韓,天下之咽喉;魏,天下之胸腹. 王資臣萬金而游,聽之韓、魏,

入其社稷之臣於秦,即韓、魏從.  韓、魏中,而天下可圖也.」

秦王曰:「寡人之國貧,恐不能給也. 」

[이에 진왕이 발끈하고 화를 내자, 돈약이 다시 말하기를 : " 지금 산동에는 여섯 나라가 있습니다.

그러나 대왕은 산동에 위세를 떨치지도 못하면서 오히려 모친에게만 위세를 부리고 있습니다.

신이 생각건대 대왕의 이같은 행위는 결코 해서는 안될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그러자 진왕이 묻기를 : “ 산동에 있는 여섯 나라들을 우리가 겸병할 수 있겠소?”라고 하자.
돈약이 대답하기를 : " 한나라는 천하의 목구멍에 해당하고, 위나라는 천하의 가슴과 배에 해당합니다.

대왕께서 신에게 1만 금을 주어, 한, 위 두 나라의 인물들에게 유세하게 하십시오.

그러면 그들이 자진하여 진나라로 오도록 만들겠습니다. 두 나라의 장상이 될만한 인물들이 몰려오게 되면

두 나라는 곧 굴복하고 말 것입니다. 두 나라가 굴복하면 가히 천하를 도모할 수 있습니다.”라고 하였다.
진왕이 말하기를 : " 그러나 과인의 나라는 가난하여 자금을 마련하기가 어려울 듯 싶소.”라고 하자.]

 

頓子曰:「天下未嘗無事也, 非從即橫也. 橫成, 則秦帝;從成, 即楚王. 秦帝, 即以天下恭養;

楚王, 即王雖萬金, 弗得私也. 」 秦王曰:「善.」乃資萬金, 使東又放假、魏,入其將相.

碑游於燕、趙, 而殺李牧.  齊王入朝, 四國必從ㅡ 頓子之說也.

[돈자(頓子: 돈약)가 말하기를 : " 천하는 일찍이 아무일 없었던 적이 없었습니다. 합종이냐 아니면 연횡이냐 입니다.

연횡이 성사되면 진나라가 제업(帝業)을 이루게 되고 합종이 성사되면 초나라가 왕업(王業)을 이루게 됩니다.

진나라가 제업을 이루면 천하가 모두 대왕을 받들어 모실 것이고, 초나라가 왕업을 이루면 대왕께서 비록 1만 금을

갖고 있다 할지라도 적국과 대적하기 위해 사사로이 쓸 수 없을 것입니다.”라고 하자.
진왕이 말하기를 : “과연 그럴 것이오.”라고 하였다.  이에 진왕이 돈약에게 1만 금을 주어

동으로 한, 위 두 나라에 가서 유세하게 하자, 과연 두 나라의 장상이 될만한 인재들이 진나라로 속속 들어 왔다.

이어 돈약은 북으로 연, 조 두 나라에 가서 유세하면서 진나라 군사를 대파한 조나라 장수 이목을 죽게 만들었다.

그러자 제왕 건(建)이 입조하고 나머지 네 나라도 마침내 진나라에 무릅을 꿇게 되었다.

이는 모두 돈약이 유세한 덕분이었다.

 

頃襄王二十年,秦白起拔楚西陵,或拔鄢、郢、夷陵,燒先王之墓.  王徙東北,保於陳城.

楚遂削弱,為秦所輕.  於是白起又將兵來伐.  楚人有黃歇者,遊學博聞,襄王以為辯,故使於秦.

[초나라 경양왕 20년에 진나라 장수 백기가 초나라 서릉 땅을 빼앗고, 언과 영과 이릉을 점령하고는

초나라 선왕의 묘역까지 불살라 버렸다. 초왕은 할 수 없이 동북쪽으로 옮겨 진성을 지켰다.​

이처럼 초나라는 국력이 쇠약하여 국토가 깎이자, 진나라는 초나라를 가벼이 여겼다.

이에 백기는 또 다시 군대를 일으켜 초나라를 공격해 왔다. 초나라의 춘신군 황​헐은 보고 듣고 배운 것이 많아

여러 방면에서 능통하였으며, 경양왕은 그가 논쟁에 능하다는 것을 인정하여 진나라에 사신으로 보냈다.

說昭王曰:「天下莫強於秦、楚,今聞大王欲伐楚,此猶兩虎點斗而駑犬受其弊,不如善楚.
臣請言其說、臣聞之:『物至而反,冬夏是也.  致至而危,累棋是也.』

今大國之地半天下,有二垂, 此從生民以來,萬乘之地未嘗有也.

[황헐이 진나라에 도착하여 진소왕을 알현하고 유세하기를 : " 천하에 진, 초 두 나라보다 강한 나라는 없는데

지금 들리는 말에 의하면 대왕께서 초나라를 정벌하려 하신다니 이는 두 마리의 호랑이가 죽기 살기로 다투는

형국이라 이때 미련한 개가 ​그 지친 틈을 이용해 이익을 보게 될 것이니 두나라가 서로 친하게 지내느니만 못합니다.

신이 청컨대 그 말씀을 올리는 이유는 신이 듣기로 ' 사물이 극에 달하면 다시 돌아오는 법이며,

겨울과 여름이 바로 그것입니다. 극에 달하면 위태로우니 이는 마치 바둑돌을 쌓아올린 것과 같다'라고 했습니다.

지금 진나라의 영토는 천하의 절반이나 되어 천하의 서쪽과 북쪽의 땅을 옹유하고 있습니다.

사람이 존재한 이래 진나라와 같이 만승의 영토를 차지한 나라는 일찍이 없었습니다.

 

先帝文王、莊王,王之身,三世而不接地於齊,以絕從親之要. 今王三使盛橇守事於韓,

成橇以北入燕. 是王不用甲,不伸威,而出百里之地,王可謂能矣.  王又舉甲兵而攻魏,

杜大梁之門,舉河內,拔燕、酸棗、虛、桃人,楚、燕之兵雲翔不敢校,王之功亦多矣.

[선왕이신 진효문왕과 진장양왕, 그리고 대왕에 이르기까지 3대 동안 한, 위, 조나라를 굴복시켜

진나라 영토로 만든 뒤 국경을 곧바로 제나라와 맞닿게 하여 합종의 연맹을 끊는 일을 잊은 적이 없었습니다.

대왕이 그간 수차례 성교(盛橋: 진시황의 동생)를 시켜 한나라에서 벼슬하면서 기회를 틈타 진나라를 위해

이익을 취하게 했습니다. 이에 성교가 한나라로 하여금 진나라에 북연(北燕)의 땅을 할양하게 만들었습니다.

이는 대왕께서 군사를 사용하거나 위세를 떨치지 않고도 1백 리의 땅을 내놓도록 만든 것이니

참으로 능란한 솜씨라 할 만합니다. 대왕께서 또 군사를 일으켜 위나라를 칠 때 위나라 도읍인 대량의 성문을 막고

하내(河內)를 공략했습니다. 이어 연(燕)과 산조(酸棗: : 하남성 연진현), 허(虛), 도인(桃人) 등지를 함락시키면서

초, 위 두 나라의 원군을 구름처럼 궤산시켜 감히 진나라에 대적치 못하도록 만들었습니다.

그러니 대왕의 공이 역시 크다고 하겠습니다.


王申息眾二年,然後復之,又取蒲、衍、首垣,以臨仁、平兵,小黃、浚陽嬰城,而魏氏服矣.

王又割濮、磨之北屬之燕,斷齊、秦之要,絕楚、魏之脊. 天下五合、六聚而不敢救也,

王之威亦憚矣. 王若能持功守威,省攻伐之心而肥仁義之誡,使無復後患,三王不足四,

五伯不足六也. 王若負人徒之眾. 材兵甲之強,壹毀魏氏之威,而欲以力臣天下之主,臣恐有後患.

[대왕께서는 2년 동안 군사들을 쉬게 한 뒤 다시 출병하여 포(蒲), 연(衍), 수원(首垣)을 취하시고,

군대를 인(仁), 평구(平丘), 소황(小黃), 제양(濟陽)의 성을 포위하자, 위나라는 결국 항복하게 되었습니다.

또 대왕께서 복력(濮歷: 하남성 복양현)의 북쪽을 점거해 하내의 연(燕) 땅과 연접하게 하자,

제, 한 두 나라의 허리와 초, 조 두 나라의 척추를 동강낸 셈이 되었습니다.

이에 천하의 제후들이 대 여섯번씩 연합하였으나 감히 서로 구원해 줄 엄두를 내지 못했으니 대왕의 위세가

참으로 강대하기 그지없다 하겠습니다. 만일 대왕께서 기왕의 공적을 지키고 위세를 유지하려면

공벌하려는 마음을 줄이고 인의의 도리를 넓혀 후환이 없도록 해야 합니다. 그리하면 3왕(三王)에 대왕을 추가해

4왕(四王)이라 해도 부족하고 5패(五伯)에 대왕을 추가해 6패(六伯)라 해도 부족할 것입니다.

만일 대왕께서 많은 백성과 강대한 무력만을 믿고 위나라를 격파한 위세에 편승하여 천하의 제후들을

힘으로 제압하려 들 경우 신은 후환이 생기지나 않을까 우려됩니다.

 

《詩》云:『靡不有初,鮮克有終.』
《易》曰:『狐濡其尾.』此言始之易,終之難也.  何以知其然也? 智氏見伐趙之利,

而不知榆次之禍也;吳見伐齊之便,而不知干隧之敗也.  此二國者,非無大肆功也,設利於前,

而易患於後也.  吳之信越也,從而伐齊,既勝齊人於艾陵,還為越王禽於三江之浦.

智氏信韓、魏,從而伐趙,攻晉燁之城,勝有日矣,韓、魏反之,殺智伯瑤於鑿台之上.

今王妒楚之不毀也,而往毀楚之強魏也. 臣為大王慮而不取.

[《시경》〈대아, 탕(蕩)〉에 이르기를 : ‘처음에 잘하지 않는 자가 없으나 유종의 미를 거두는 자는 적다.’고 했습니다.

또 《주역》〈미제괘(未濟卦)〉의 괘사에 이르기를 : ‘ 어린 여우가 무작정 황하를 건너려 하다가 꼬리만 적시고

건너지 못하는 것과 같이 일의 형편을 미처 파악치 못한다.’라고 했습니다.

이는 처음은 쉬울지 모르나 끝이 어렵다는 것을 뜻입니다. 이를 어찌 알 수 있느냐고요? 지백은 조나라를 공벌해

얻을 이득에만 눈이 어두워 유차(楡次: 산서성 유차현)에서 패하게 되는 후환을 전혀 눈치채지 못했습니다.

또 오나라 부차는 제나라를 공벌해 얻을 이익만 생각해 간수(干遂: 강소성 소주시 만안산)에서 월나라 구천에게

패하게 되는 후환을 전혀 알지 못했습니다. 이 두나라는 대공을 세운 적이 없었던 것은 아니나 단지 눈앞의 이익에

혹해 후환을 가벼이 여겼던 것입니다. 오나라는 월나라를 믿고 마음놓고 제나라를 쳤습니다.

그리고 제나라를 애릉(艾陵: 산동성 내무현)에서 격파하고 돌아오다가 오히려 3강지포(三江之浦)에서 월왕에게

사로잡히고 말았습니다. 또 지백은 한, 위 두 나라를 믿고 함께 조나라를 진양성에서 포위해 승리를 거두기 직전에

두 나라의 배반으로 인해 오히려 착대(鑿臺: 산서성 유차현) 아래에서 살해되고 말았습니다.
지금 대왕께서 초나라를 격파하기 위해 부심하고 있으나 초나라가 패하면 위나라가 강해진다는 것을 잊고 있습니다.

신이 대왕을 위해 생각건대 이같이 하는 것은 취할 바가 못됩니다.

 

《詩》云:『大肆武遠宅不涉.』從此觀之,楚國,援也;鄰國,敵也.
《詩》:『他人有心,予忖度之. 躍躍毚兔,遇犬獲之.』

今王中道而信韓、魏之善王也,此正吳信越也.  臣聞,敵不可易,時不可失.

[《서경》〈주서〉대무(大武)편에 이르기를 : ‘ 대군은 멀리 떨어진 나라를 공격하지 않는다.'라고 했습니다.

이를 보면 초나라는 오히려 진나라의 맹방이고 이웃해 있는 나라들이야말로 진나라의 적입니다.

 《시경》〈소아, 교언(巧言)〉에 이르기를 : ‘ 다른 사람이 누구를 해할 생각을 품으면 내가 능히

이를 알아챌 수 있으니 걸음이 빠르고 교활한 토끼일지라도 사냥개를 만나면 결국 잡히고 만다.’라고 했습니다.

지금 대왕께서는 도중에 한, 위 두 나라가 진나라에 우호적이라고 믿고 있으나 이는 오나라가 월나라를 믿었던 것과

똑같은 것입니다. 신이 듣건대 ‘ 적을 가벼이 보아서도 안되고, 시기를 놓쳐서도 안된다.’라고 했습니다.

 

臣恐韓、魏之卑辭慮患,而實欺大國也.  此何也?王既無重世之德於韓、魏,而有累世之怨矣.

韓、魏父子兄弟接踵而死於秦者,百世矣.  本國殘,社稷壞,宗廟毀,刳腹折頤,首身份離,

暴骨草澤,頭顱僵仆,相望於境;父子老弱系虜,相隨於路;鬼神狐祥,無所食,百姓不聊生,

族類離散,流亡為臣妾,滿海內矣.  韓、魏之不亡,秦社稷之憂也.  今王之攻楚,不亦失乎!

[신은 한, 위 두 나라가 겸손한 말로 환난을 걱정하는 것이 사실은 진나라를 기만하려는 것이나 아닌지 우려됩니다.

왜 이같이 우려하는가? 하면 대왕은 두 나라에 대해 줄곧 은덕을 베푼 적이 없는데다 오히려 누대에 걸친 원한관계를

맺고 있기 때문입니다. 두 나라의 부자형제(父子兄弟)가 누대에 걸친 진나라와의 싸움으로 접종하며 죽어갔습니다.

이로써 두 나라는 큰 손상을 입어 사직이 파괴되고 종묘는 허물어지게 되었습니다.

시체는 배가 갈라지고 턱이 깨져 목과 몸이 각각 떨어진 채 덤불 숲과 늪가에 널려 있고

두개골은 거꾸로 엎여져 나뒹굴고 있으니 이같은 처참한 광경이 국경까지 이어져 있습니다.

부자(父子)와 노약자들은 포승에 묶인 채 포로가 되어 길을 메우며 끌려가고 있고, 귀신과 요괴는 제사 음식을

받아먹지 못하고 있습니다. 백성들은 살 길이 막막해 일족이 모두 뿔뿔이 흩어지는 아픔을 겪고 있습니다.

지금 이리저리 유랑하다가 남의 종이나 첩이 된 자들이 해내(海內)를 가득 메우고 있습니다.

그러니 한, 위 두 나라의 존속은 진나라 사직의 우환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런데도 대왕께서는 지금 초나라를 정벌하고자 하니, 이는 과실이 아니겠습니까 !

 

是王攻楚之日,則惡出兵? 王將藉路於仇讎之韓、魏乎?兵出之日而王憂其不反也,

是王以兵資於仇讎之韓、魏.  王若不藉路於仇讎之韓、魏,必攻陽、右壤.

隨陽、右壤,此皆廣川大水,山林溪谷不食之地,王雖有之,不為得地.

是王有毀楚之名,無得地之實也.

[만일 대왕께서 막상 초나라를 치려 한다면 과연 어느 길로 출병하려는 것입니까?

대왕께서 장차 원수 나라인 한, 위 두 나라의 길을 빌리려고 하는 것입니까?

그리 하면 출병하는 그날부터 대왕은 군사가 돌아오지나 못할까 걱정하지 않을 수 없을 것입니다.

이는 대왕께서 원수인 두 나라에 군사를 대준 꼴이 됩니다. 만일 대왕께서 원수 사이인 두 나라의 길을

빌리지 않으려 하면 초나라의 서부지역인 수양(隨陽: 호북성 수현 서부 일대)을 공격할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수양 땅은 넓은 강과 산림, 계곡으로 이뤄진 불모지여서 설령 이를 차지한들 땅을 얻었다고 할 수가 없습니다.

이같이 하면 대왕은 초나라를 쳤다는 악명만 얻게 될 뿐이고 땅을 얻은 실리는 없는 것입니다.

 

且王攻楚之日,四國必應悉起應王,  秦、楚之構而不離,魏氏將出兵而攻留、方與、銍、胡陵、

碭、蕭、相,故宋必盡. 齊人南面,泗北必舉.  此皆平原四達,膏腴之地也,而王使之獨攻.

王破楚於以肥韓、魏於中國而勁齊,韓、魏之強足以校於秦矣.
齊南以泗為境,東負海,北倚河,而無後患,天下之國,莫強於齊.

[뿐만 아니라 대왕이 초나라를 치는 날에는 필시 4국(四國: 제, 위, 조, 한)이 합세해 대왕에게 도전해 올 것입니다.

진, 초 두 나라 군사가 서로 뒤엉켜 싸우는 동안 위나라는 유(留: 강소성 패현)와 방여(方與), 질(銍),

호릉(胡陵: 산동성), 탕(碭: 안휘성), 소(蕭: 강소성), 상(相: 안휘성 숙현) 땅을 공격할 것입니다.

그리되면 송나라의 옛 땅은 모두 빼앗기게 됩니다. 나아가 제나라는 남쪽으로 사북(泗北: 산동성)을 빼앗을 것이니

이곳은 넓은 평원이여서 길이 사방으로 통하는 비옥한 땅입니다.

그런데 대왕께서 그들로 하여금 이곳을 마음대로 공격하게 만들어 주는 것입니다. 그리하면 대왕께서 초나라를

격파함으로써 한, 위 두 나라를 중원에서 살찌게 하고 제나라를 강하게 만들어주는 셈이 됩니다.

한, 위 두 나라가 강대해져 진나라와 맞서게 되면 제나라는 남으로 사수를 경계로 하고, 동으로 바다를 등지고,

북으로 황하에 기대어 후환이 없게 됩니다. 그리 되면 천하의 그 어떤 나라도 제나라를 당하지 못하게 됩니다.

 

齊、魏得地葆利,而詳事下吏,一年之後,為帝若未能,於以禁王之為帝有餘.

夫以王壤土之博,人徒之眾,兵革之強,一舉眾而注地於楚,詘令韓、魏,歸帝重於齊,

是王失計也.  臣為王慮,莫若善楚.  秦、楚合而為一,臨以韓,韓必授首.

王襟以山東之險,帶以河曲之利,韓必為觀眾之候.

[제, 위 두 나라가 땅을 얻어 이득을 유지하며 거짓으로 대왕을 섬기면 1년 후에는 스스로 칭제(稱帝)하기는

어려워도 대왕의 칭제를 저지할 수 있을 정도의 힘을 지니게 될 것입니다.
무릇 대왕께서는 넓은 땅과 많은 백성, 막강한 무력을 믿고 일거에 거병하면 초나라와 원한을 맺게 되고,

한, 위 두 나라로 하여금 제나라의 칭제를 돕도록 만드는 셈이 되니 이는 대왕의 실계(失計)입니다.

신이 대왕을 위해 생각건대 초나라와 우의를 맺느니만 못합니다. 진나라와 초나라가 연합해

한나라를 공격하면 한나라는 반드시 투항할 것입니다. 그리되면 대왕께서는 산동의 험준함을 방벽으로 삼고,

하곡(河曲)의 유리함을 허리띠로 삼으면 한나라는 독립하지 못하고 진나라의 관내후(關內侯)가 되고 말 것입니다.


若是,王以十成鄭,梁氏寒心,許、鄢陵嬰城,上蔡召陵不往來也. 如此,而魏以關內候矣.

王一善楚,而關內二萬乘之主注地於齊,齊之右壤可拱手而取也. 是王之地一任兩海,要絕天下也.

是燕、趙無齊、楚,無燕趙也. 然後危動燕、趙,持齊、楚,此四國者,不待痛而服矣.」

[만약 대왕께서 10만 대군을 정(鄭) 땅에 주둔시키면 위나라는 겁을 먹고 허(許)와 언릉(鄢陵: 하남성 언릉현)을

지키느라 밖으로 나오지 못함으로써 상채(上蔡: 하남성 상채현), 소릉(召陵: 하남성 언성현)과 왕래치 못할 것입니다.

이리되면 위나라도 결국 진나라의 관내후가 되고 말 것입니다.
대왕께서 한번 초나라와 가까워지는 날에는 2만 승의 군주들이 대왕의 관내후가 되고 그 다음 제나라로 몰려가면

제나라의 우변(右邊) 땅을 얻는 것은 팔짱을 끼고도 얻을 수 있을 것입니다. 이는 대왕의 영토가 서해에서 동해까지

뻗어나감으로써 제후들의 합종연맹 세력을 그 허리에서 절단하는 셈이 됩니다. 그리 되면 연, 조 두 나라는

제, 초 두 나라의 도움을 받을 수 없고, 제, 초 두 나라도 연, 조 두 나라의 도움을 받을 길이 없게 됩니다.

연후에 연, 조 두 나라를 뒤흔들면서 제, 초 두 나라를 협지(挾持: 팔짱을 끼어 억누름)하면

이 네 나라는 급히 서두르지 않더라도 저절로 머리를 숙이고 진나라의 명을 따르게 될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或為六國說秦王曰:「土廣不足以為安,人眾不足以為強.  若土廣者安,人眾者強,

則桀、紂之後將存.  昔者,趙氏亦嘗強矣.  曰趙強何若? 舉左案齊,舉右案魏,厭案萬乘之國,

二國,千乘之宋也。築剛平,衛無東野,芻牧薪采,莫敢窺東門.

[어떤 사람이 산동 6국을 위해 진왕(秦王: 진시황)에게 유세하기를 :   
" 땅이 넓은 것도 안전에는 부족하고, 사람이 많은 것도 부강에는 부족합니다. 만일 땅이 넓어 안전하고

인구가 많아 강하다면 걸, 주(桀紂)의 후손들은 지금까지 왕노릇을 하고 있었을 것입니다.

옛날 조나라도 강대했던 시절이 있었습니다. 한때 조나라가 얼마나 강했는지 왼쪽으로 제나라를 마음대로 부리며

오른쪽으로 위나라를 멋대로 할 정도였습니다. 이로써 만승의 나라를 둘이나 제압하고 천승의 나라인 송나라까지

눌렀습니다. 게다가 강평(剛平: 하남성 청풍현)의 축성으로 위(衛)나라가 동쪽의 땅을 잃게 되자

나무나 목초를 하는 사람들이 감히 동문쪽으로 나갈 수 없게 되었습니다.

 

當是時,衛危於累卵,天下之士相從謀曰:『吾將還其委質,而朝於邯鄲之君乎!』

於是天下有稱伐邯鄲者,莫不令朝行.  魏伐邯鄲,因退為逢澤之遇,乘夏車,稱夏王,朝為天子,

天下皆從.  齊太公聞之,舉兵伐魏,壤地兩分,國家大危.  梁王身抱質執璧,請為陳侯臣,

天下乃釋梁.  郢威王聞之,寢不寐,食不飽,帥天下百姓,以與申縛遇於泗水之上,而大敗申縛.

[이때 위(衛)나라는 참으로 위태로운 형세에 놓이게 되었습니다. 이에 천하지사들이 서로 모여 말하기를 : 

‘ 우리들이 위지(委質: 신하가 군주에게 예물을 봉헌하면서 헌신하여 충성할 것을 다짐함)하고

조왕에게 조배(朝拜)를 해야하는 것이 아닐까’라고 했습니다. 그러자 천하에서 조나라의 한단을 쳐야 한다고

떠들던 자들 중 누구 하나 조나라의 명을 들으러 가지 않는 자가 없었습니다.
위나라가 한단을 치고 물러나와 봉택(逢澤: 하남성 개봉시)에서 제후들과 회동했습니다.

이때 위왕이 하거(夏車: 제왕 전용 수레)를 타고 하왕(夏王: 大王)이라 칭하며 천자를 조배하러 가자

천하의 제후들이 모두 그의 뒤를 따랐습니다. 이에 제위왕(齊威王)이 이 소식을 듣고 군사를 이끌고 가 위나라를 치자,

위나라가 땅이 둘로 나뉘어 매우 위태롭게 되었습니다. 이때 양왕(梁王: 위혜왕)이 직접 예물을 가지고 가서

진후(陳侯: 齊王)의 신하로 삼아달라고 빌고 나서야 천하가 위나라를 용서해 주었습니다.

초위왕(楚威王)은 이 말을 듣고 침식(寢食)을 제대로 하지 못하다가 마침내 천하의 백성들을 이끌고 가서

서주(徐州: 산동성 등현)를 포위한 뒤 제나라 장수 신전(申縛: 「사기」의 申紀)을 대파했습니다.


趙人聞之至枝桑,燕人聞之至格道.  格道不通,平際絕.  齊戰敗不勝,謀則不得,使陳毛釋劍掫,委南聽罪,

西說趙,北說燕,內喻其百姓,而天下乃齊釋.

於是夫積薄而為厚,聚少而為多,以同言郢威王於側紂之間.

臣豈以郢威王為政衰謀亂以至於此哉? 郢為強,臨天下諸侯,故天下樂伐之也!」

[조나라가 이 얘기를 듣고 제나라의 지상(枝桑: 위치 미상)으로 군사를 보내고 연나라도 제나라의 격도(格道)까지

군사를 보냈습니다. 격도로 가는 길이 막히자, 평제(平際)로 가는 길 역시 끊어지고 말았습니다.

제나라는 싸우면 패하고 계책을 세우면 곧바로 실패로 돌아가자, 이에 진모(陳毛)를 초나라로 보내 무장을 해제하고

초왕의 명을 좇기로 약속하게 하고, 서쪽으로 조나라를 달래고, 북쪽으로 연나라를 설득하고,

안으로 백성에게 설명하자, 천하의 제후들이 그제야 비로소 제나라에 대한 진공을 멈췄습니다.
무릇 적박위후(積薄爲厚: 얇은 것이 쌓이면 두꺼워짐)하고 취소위다(聚少爲多: 적은 것이 모여 많아짐)하는 법입니다.

지금 천하인이 길거리에 모여 이구동성으로 초위왕을 공벌해야 한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를 두고 신이 어찌 초위왕의 정사가 쇠해 이 지경에 이른 것이라 여기겠습니까? 이는 초나라가 강대해져

장차 자신들을 능멸할까 두려워한 제후들이 비로소 초나라 공벌을 공모하기 시작한데 따른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秦策 五 .

 

謂秦王曰:「臣竊惑王之輕齊易楚,而卑畜韓也.  臣聞,王兵勝而不驕,伯主約而不忿.

勝而不驕,故能服世;約而不忿,故能從鄰.  今王廣德魏、趙,而輕失齊,驕也;戰勝宜陽,

不恤楚交,忿也.  驕忿非伯主之業也,臣竊為大王慮之而不取也.」

[어떤 사람이 진무왕(秦武王)에게 말하기를 : " 신은 대왕께서 왜 제나라를 업신여기고, 초나라를 무시하며,

한나라를 짐승처럼 비천하게 취급하는지 잘 알지 못하겠습니다.

신이 듣건대 ‘왕자(王者)는 싸움에 이겨도 교만하지 않고, 패자(覇者)는 맹주가 되어도 쉽게 분노하지 않는다’라고

했습니다. 이기고도 교만하지 않기에 능히 세상을 복종시킬 수 있고, 맹주가 되어도 쉽게 분노하지 않기에

이웃 나라가 복종하는 것입니다. 지금 대왕께서 위, 조 두 나라에 은덕을 널리 베풀면서 가벼이 여겨 제나라를

잃는 것은 교만입니다. 의양 싸움에서 승리한 후 초나라와의 국교를 고려치 않은 것은 쉽게 분노를 드러낸 것입니다.

교만과 분노는 패왕이 취할 바가 아닙니다. 신이 대왕을 위해 생각건대 이는 잘못이라고 여겨집니다.

 

《詩》云:『靡不有初,鮮克有終.』故先王之所重者,唯始與終.  何以知其然?

昔智伯瑤殘范、中行,圍逼晉陽,卒為三家笑.  吳王夫差棲越於會稽,勝齊於艾陵,為黃池之遇,

無禮於宋,遂與勾踐禽,死於干遂.  梁君伐楚勝齊, 制趙、韓之兵, 驅十二諸侯以朝天子於孟津,

後子死, 身布冠而拘於秦.  三者非無功也, 能始而不能終也.

[《시경》〈대아, 탕〉에 이르기를 : ‘처음에 잘하지 않는 자가 없으나, 유종의 미를 거두는 자는 적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옛 선왕들은 오직 시작과 끝을 중시했던 것입니다. 이를 어찌 알 수 있는가?하면,

옛날 지백 요(瑤)는 범씨와 중항씨를 멸한 후에 조양자를 진양성으로 몰아넣고 공격하다가 마침내 3가(한, 위, 조)의

비웃음거리가 되었습니다. 오왕 부차는 월왕 구천을 회계에 몰아넣은 뒤 제나라를 애릉(艾陵)에서 대파하고

황지(黃池)의 회맹에서 송나라에게 무례하게 굴다가 결국 구천에게 사로잡혀 간수(干隧)에서 죽고 말았습니다.

양혜왕은 초, 제 두 나라를 격파하고 조, 한 두 나라의 군사를 제압한 후 12제후(十二諸侯: 周. 魯. 齊. 晉. 秦. 楚. 宋. 衛. 陳. 蔡. 曹. 鄭. 燕. 吳.)를 이끌고 맹진(孟津: 하남성 맹진현)에서 천자를 조회했으나 태자 신(申)은 죽고

자신은 변복한 채 제나라로 끌려가 억류되고 말았습니다. 이들 3인은 공이 없는 것은 아닙니다.

시작은 잘했으나 끝을 제대로 마무리하지 못해 그같은 종말을 맞은 것입니다.

 

今王破宜陽,殘三川,而使天下之士不敢言,雍天下之國,徙兩周之疆,而世主不敢交陽侯之塞,

取黃棘,而韓、楚之兵不敢進.  王若能為此尾,則三王不足四,五伯不足六.

王若不能為此尾,而有後患,則臣恐諸侯之君,河、濟之士,以王為吳、智之事也.

[지금 대왕께서 의양을 격파하고 삼천 일대를 멸하면서 천하지사들로 하여금 감히 말을 하지 못하게 하고 있습니다.

산동 6국의 합종을 차단하고 두 주나라의 경계선을 바꿔 놓아 제후들로 하여금 대항하지 못하게 만들어 놓았습니다.

양후의 요새는 엿보지도 못하게 만들어 놓으시고, 황극(黃棘: 하남성 신야현)을 취함으로써 한, 초 두 나라의 군사들이

감히 진격치 못하게 만들어 놓았습니다. 만일 대왕께서 마무리만 잘하시면 3왕을 4왕으로 해도 부족하고,

5패를 6패로 해도 부족할 것입니다. 그러나 만일 마무리를 제대로 하지 못하면 멸망의 화를 입을 것입니다.

신은 제후들과 중원의 선비들이 장차 대왕을 오왕 부차나 지백 요의 전철을 밟은 사람으로 여기게 될까 두렵습니다.

 

《詩》云:『行百里者半於九十.』此言末路之難.  今大王皆有驕色,以臣之心觀之,天下之事,

依世主之心,非楚受兵,必秦也.  何以知其然也? 秦人援魏以拒楚,楚人援韓以拒秦,

四國之兵敵,而未能復戰也.  齊、宋在繩墨之外以為權,故曰先得齊、宋者伐秦.

秦先得齊、宋,則韓氏鑠,韓氏鑠,則楚孤而受兵也.

楚先得齊,則魏氏鑠,魏氏鑠,則秦孤而受兵矣.  若隨此計而行之,則兩國者必為天下笑矣.

《시경》에 이르기를, ‘행백리자반어구십( 1백 리의 길을 가는 자는 90리를 절반으로 친다)’라고 했습니다.

이는 마무리의 어려움을 말한 것입니다. 지금 대왕과 초왕에게서는 교만한 표정이 역력히 드러나고 있습니다.

신이 생각컨대 천하의 패업은 제후들의 선택에 따라 초나라가 아니면 진나라가 반드시 병화(兵禍)를 입는 것으로

마무리될 것입니다. 이를 어찌 알 수 있는가? 하면, 진나라가 위나라를 도와 초나라에 대항하면

초나라는 한나라를 도와 진나라에 대항할 것입니다. 이 4국의 병력은 균형을 이루고 있어 다시 싸울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방관자의 위치에 있는 제, 송 두 나라는 저울추의 역할을 하게 되어 먼저 제, 송 두 나라를 손에 넣는 쪽이

공을 세우게 될 것입니다. 진나라가 먼저 제, 송 두 나라를 손에 넣게 되면 한나라가 저절로 사그러질 것입니다.

한나라가 사그러지면 초나라가 고립되어 병화를 입을 것입니다. 초나라가 먼저 제, 송 두 나라를 손에 넣게 되면

위나라가 사그러지고, 위나라가 사그러지면 진나라가 고립되어 병화를 입게 될 것입니다. 만일 이같은 계책이

실행되면 진, 초 두 나라 중 한 나라는 패망하고 반드시 천하의 웃음거리가 되고 말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秦王與中期爭論,不勝.  秦王大怒,中期徐行而去.

或為中期說秦王曰:「悍人也,中期!適遇明君故也. 向者遇桀、紂,必殺之矣.」秦王因不罪.

[진왕이 중기와 논쟁을 벌였으나 이길 수가 없었다. 진왕이 크게 화를 내자, 중기는 슬그머니 그 자리를 나왔다.

어떤 사람이 중기에 대해 진왕에게 말하기를 : " 못된 인간입니다, 중기란 놈은 ! 그 놈이 대왕같은 명군을 만났기에

망정이지, 걸,주 같은 폭군을 만났더라면 분명히 죽임을 당하고 말았을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그러나 왕은 이 말을 듣고도 중기를 벌하지 않았다.

 

獻則謂公孫消曰:「公, 大臣之尊者也,數伐有功,所以不為相者,太后不善公也.

辛戎者,太后之所親也, 今亡於楚,在東周.  公何不以秦、楚之重,資而相之於周乎?

楚必便之矣.  是辛戎有秦、楚之重,太后必悅公,公相必矣.」

[헌칙(獻則: 전력 미상)이 대신 공손소(公孫消)에게 말하기를 : " 공은 진나라 대신들 중에 큰 존중을 받고 있습니다.

이미 수차례 외정하여 공도 세웠습니다. 그런데도 재상이 되지 못하는 것은 선태후가 공을 멀리 하기 때문입니다.

미융(羋戎: 화양군)은 태후의 친척으로 지금 초나라로 도망쳤다가 동주에 머물고 있습니다.

공은 어찌하여 진, 초 두 나라의 강력한 후원을 바탕으로 그 사람을 동주의 재상이 되도록 지원하지 않는 것입니까.

그리하면 초나라도 이를 이롭게 여길 것입니다. 미융이 진, 초 두 나라의 중시를 받게 되면 태후는 필시 공을

좋아할 것이니, 공이 재상이 되는 것은 필연지사입니다.”라고 하였다.

 

樓啎約秦、魏,魏太子為質.  紛疆欲敗之, 謂太后曰:「國與還者也, 敗秦而利魏, 魏必負之.

負秦之日,太子為糞矣.」 太后坐王而泣.  王因疑於太子,今之留於酸棗.  樓子患之.

昭衍為周之梁,樓子告之.  昭衍見梁王,梁王曰:「何聞?」曰:「聞秦且伐魏.」

王曰:「為期與我約矣.」 曰:「秦疑於王之約,以太子之留酸棗而不之秦. 

秦王之計曰:『魏不與我約,必攻我;我與其處而待之見攻,不如先伐之.』

以秦疆折節而下與國,臣恐其害於東周.」

[위나라 대신 누오(樓啎)가 진, 위 두 나라를 맹약하게 하면서 위나라 태자를 진나라에 인질로 가게 했다.

이에 위나라 대신 분강(紛彊)은 맹약을 파기하자고 주장하면서 태후에게 말하기를 : " 국가는 본래 국익을 위해

움직이기 마련입니다. 만일 진나라와의 맹약을 파기하는 것이 위나라에 유리하다면 위나라는 진나라를 배신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진나라를 배반하는 날에는 태자의 목숨은 분토(糞土)가 되고 말 것입니다.”라고 하자.

이에 태후가 태자를 인질로 보내지 못하도록 위양왕을 눈물로 저지했다.

그러자 위양왕이 태자의 앞날을 걱정해 인질로 보내지 않고 산조(酸棗)에 머물게 했다. 누오가 이를 크게 근심했다.

이때 동주의 대신 소연(昭衍)이 사신으로 위나라에 와 있다가 누오로부터 이 얘기를 전해 들었다.

마침 소연이 위양왕을 알현하자, 위양왕이 이같이 묻기를 : " 무슨 말을 들은 적이 없소?”라고 하자.
소연이 대답하기를 : “ 진나라가 장차 위나라를 정벌하려 한다는 말을 들었습니다.”라고 하였다.
위양왕이 말하기를 : “ 진나라는 장차 우리와 맹약하기로 약속했소.”라고 하였다.
그러자 소연이 말하기를 : " 지금 진나라는 대왕과의 맹약을 의심하고 있습니다.

이는 태자를 산조에 머물게 한 채 진나라로 보내지 않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진왕은 스스로 판단하기를, ‘위나라가 우리와 맹약을 맺지 않으면 틀림없이 공격해 올 것이다.

우리가 앉아서 공격당하는 것을 기다리느니 차라리 먼저 치는 것이 상책이다’라고 할 것입니다.

강한 진나라가 맹약을 깨고 우리 동주의 맹방인 위나라를 치게 되면 신은 그 화가 우리 동주까지 미치지 않을까

우려됩니다.”라고 하였다.

 

濮陽人呂不韋賈於邯鄲,見秦質子異人,歸而謂父曰:「耕田之利幾倍?」曰:「十倍.」

「珠玉之贏幾倍?」 曰:「百倍.」「立國家之主贏幾倍?」曰:「無數.」

曰:「今力田疾作,不得煖衣餘食,今建國立君,澤可以遺世,願往事之.」

[복양(濮陽: 하남성 복양현) 사람 여불위가 조나라 도성 한단(邯鄲)에서 장사를 하고 있었다.

그때 진나라에서 인질로 와 있던 이인(異人: 진효문왕의 아들인 子楚)을 보고는 집으로 돌아가 부친에게 묻기를 :
“ 농사를 지으면 남는 이익이 몇 배나 됩니까?”라고 하자. 그 부친이 대답하기를 : " 열 배정도 되지."라고 하였다.
여불위가 또 묻기를 : " 주옥의 이익은 몇 배나 남습니까?”라고 하자.
부친이 대답하기를 : " 1백 배쯤은 될 것이다.”라고 하였다.
여불위가 또 묻기를 : " 나라의 군왕을 세우면 그 이익은 몇 배나 되겠습니까?”라고 하자.
부친이 대답하기를 : “ 그것은 이루 헤아릴 수 없다.”라고 하였다.
그러자 여불위가 말하기를 : " 지금 뼈빠지게 농사를 지어서 얻는 이익이란 그저 추위에 떨지 않고

배곯지 않는 정도지만 나라를 세우고 군왕을 옹립하면 그 혜택이 대대로 남을 것입니다.

저는 가서 그 일을 하겠습니다."라고 하였다. 진장양왕 원년(기원전 249)

 

秦子異人質於趙,處於聊城. 故往說之曰:「子傒有承國之業,又有母在中.

今子無母於中,外託於不可知之國,一日倍約,身為糞土. 今子聽吾計事,求歸,可以有秦國.

吾為子使秦,必來請子.」

[당시 진왕의 서자인 이인은 조나라의 인질이 되어 요성(聊城)에 머물고 있었다.
이에 여불위가 요성으로 이인을 찾아가 설득하기를 : " 그대의 이복형인 자혜(子傒)가 태자가 된 것은

생모가 궁중에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대는 모친이 궁중에 있지도 않고 장차 국교가 어찌될지 예측할 수도 없는

외국에 인질로 맡겨져 있습니다. 하루아침에 맹약이 깨지면 그대는 분토가 되고 말 것입니다.

러나 내 계획을 받아들여 귀국하기를 원하면 장차 진나라를 차지할 수 있습니다.

내가 그대를 위해 진나라로 반드시 그대를 모셔가도록 조치해 놓겠습니다.”라고 하였다.

 

乃說秦王后弟陽泉君曰:「君之罪至死,君知之乎?

君之門下無不居高尊位,太子門下無貴者.  君之府藏珍珠寶玉,君之駿馬盈外廄,美女充後庭. 

王之春秋高,一日山陵崩,太子用事,君危於累卵, 而不壽於朝生.

說有可以一切, 而使君富貴千萬歲, 其寧於太山四維, 必無危亡之患矣.」

[그리고는 진나라로 가서 왕후인 화양부인(華陽夫人)의 남동생 양천군(陽泉君)을 설득하기를 :
“ 그대는 자신의 죄가 사형에 해당한다는 사실을 알고 있소? 그대 문하의 사람들 중에 관직과 작위가 높지 않은

자가 한 사람도 없으나 태자의 문하에는 귀하게 된 자가 단 한 명도 없소.

게다가 그대의 창고에는 진귀한 구슬과 귀한 물건들이 가득 차 있고, 마구간에는 준마(駿馬)가 넘쳐나고,

집 뒤의 정원에는 미녀(美女)들이 득실거리고 있소. 지금 진왕(秦王: 진효문왕)이 고령이어서 하루아침에 승하하면

태자가 권력을 쥐게 될 것이니 그리 되면 그대는 누란(累卵)보다 위태롭게 되어 목숨이 아침에 피었다가 저녁에 지는

꽃만도 못하게 될 것이오. 나에게는 그대를 천만년 동안 부귀하게 하고 태산과 같은 사유(四維: 국가를 유지하는데

필요 예절, 법도, 염치,부끄러움)로 그대에게 닥칠 위망(危亡)의 화를 끊어낼 수 있는 계책이 있소.”라고 하였다.

 

陽泉君避席,請聞其說.  不韋曰:「王年高矣,王后無子,子傒有承國之業,士倉又輔之.

王一日山陵崩,子傒立,士倉用事,王后之門,必生蓬蒿.  子異人賢材也,棄於在趙,無母於內,

引領西望,而願一得歸. 王后誠請而立之,是子異人無國而有國,王后無子而有子也.」

陽泉君曰:「然.」入說王后,王后乃請趙而歸之.

[이에 양천군이 급히 자리를 옮겨 앉으며 들려주기를 원하자, 여불위가 말하기를 :
" 진왕이 이미 고령이고 왕후는 아들이 없어 자혜가 대업을 잇게 되어 있소. 그리 되면 승상인 사창(社倉)이

보좌를 하게 될 것이오. 진왕이 승하하고 자혜가 승계하여 사창이 집정하게 되면 왕후 일족의 문전은 온통

쑥대밭이 되고 말 것이오. 지금 이인은 어진 인물이나 몸이 조나라에 버려져 있고 궁중에는 모친도 없소.

이에 목을 길게 빼어 서쪽을 바라보며 귀국할 날만 고대하고 있소. 이때 왕후가 진왕에게 진언하여

이인을 태자로 앉히면 이인은 없던 나라를 얻게 되고, 왕후는 없던 아들을 얻게 되오.”라고 하자. 

양천군이 말하기를 : " 그리 하도록 하겠소.”라고 하였다.
양천군이 궁중으로 들어가 왕후를 설득하자, 화양부인이 곧 조나라에 청해 이인을 귀국시키도록 하였다.

 

趙未之遣,不韋說趙曰:「子異人,秦之寵子也,無母於中,王后欲取而子之.

使秦而欲屠趙,不顧一子以留計,是抱空質也.  若使子意人歸而得立,趙厚送遣之,

是不敢倍德畔施,是自為德講. 秦王老矣,以日晏駕,雖有子異人,不足以結秦.」趙乃遣之.

[그러나 조나라가 머뭇거리며 이인을 돌려보내려 하지 않자, 여불위는 조왕을 만나 설득하기를 :
“ 이인은 진나라가 총애하는 왕자입니다. 지금 생모가 궁중에 없어 왕후가 그를 아들로 삼으려 합니다.

진나라가 조나라를 멸할 생각이라면 왕자 하나가 인질로 있다 하여 이를 유보할 리 없습니다.

그리되면 조나라는 쓸모없는 인질을 붙들고 있는 꼴이 됩니다. 그러나 만일 이인을 정중히 돌려보내 진왕이 되도록

도와 주면 이는 장차 그로 하여금 감히 배은망덕한 생각을 품지 못하게 하고 덕으로써 강화를  맺는 셈이 됩니다.

지금 진왕은 고령이니 어느날 갑자기 안가(晏駕: 군왕이 아침 일찍 조회에 나왔다가 저녁 늦게 수레를 타고 나간데서

군왕의 죽음을 상징하게 된 말)하면 오직 이인만이 진, 조 두 나라의 강화를 공고히 할 수 있습니다.”라고 하자.

이에 조나라가 이인을 진나라로 돌려보냈다.

 

異人至,不韋使楚服而見.  王后悅其狀,高其知,曰:「吾楚人也.」而自子之,乃變其名曰楚.
王使子誦,子曰:「少棄捐在外,嘗無師傅所教學,不習於誦.」王罷之,乃留止.
間曰:「陛下嘗軔車於趙矣,趙之豪桀,得知名者不少. 今大王反國,皆西面而望.

大王無一介之使以存之,臣恐其皆有怨心,使邊境早閉晚開.」

[이인이 진나라에 이르자, 여불위는 이인에게 초나라의 옷을 입힌 뒤 화양부인을 알현하게 하였다.

화양부인이 이인의 모습을 보고는 희색이 가득한 얼굴로 그의 지혜를 크게 칭송하며 이같이 말하기를 :
“ 나는 초나라 사람이다.”라고 하며.  곧 그를 아들로 삼은 뒤 이름도 초(楚)로 고쳐 주었다.

어느날 진효문왕이 자초(子楚)에게 책을 읽어보라고 하자 자초가 말하기를 : “ 저는 어려서부터 외국에 버려져

일찍이 선생을 모시고 글을 배운 일이 없습니다. 아직 책을 읽는 것이 서투릅니다.”라고 하였다.

그러자 진효문왕이 그에게 책 읽는 일을 그만두게 한 뒤 궁중에 머물게 했다.

이에 자초가 한가한 때를 보아 진혜문왕에게 말하기를 : " 폐하께서도 일찍이 조나라에 인질로 간 적이 있습니다.

그때 조나라의 호걸들로 폐하와 사귀어 이름을 알고 지낸 자가 적지 않을 것입니다.

폐하가 귀국해 보위에 오른 뒤 그들은 줄곧 서쪽을 바라보며 폐하만을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폐하께서는 한 번도 그들에게 사자를 보내 위로한 적이 없습니다.

신은 그들이 그 사이 원망하는 마음을 가졌을까 두렵습니다.

국경의 관문을 저녁에 일찍 닫고 아침에 늦게 여는 것이 안전할 것이라 생각됩니다.”라고 하였다.


王以為然,奇其計.  王后勸立之.  王乃召相,令之曰:「寡人子莫若楚.」立以為太子.

子楚立,以不韋為相,號曰文信侯,食藍田十二縣.  王后為華陽太后,諸侯皆致秦邑.

진효문왕이 이를 옳게 여기면서 그의 계책을 기이하게 생각했다.

왕후가 자초를 태자로 세우자고 권하자 진효문왕이 재상국 불러 령을 하달하기를 :
“ 과인의 아들로 자초만한 자가 없다.”라고 하며, 자초를 태자로 책봉하였다. 

얼마 후 자초가 보위에 오르자, 여불위를 승상으로 삼고 작호를 문신후라고 하였으며, 

남전(藍田)의 12개 현이 식읍으로 주어졌다. 왕후인 화양부인이 태후가 되자,

제후들이 모두 땅을 떼어 진나라에 바치며 축하하였다.

 

文信侯欲攻趙以廣河間, 使剛成君蔡澤事燕三年, 而燕太子質於秦.  文信侯因請張唐相燕,

欲與燕共伐趙, 以廣河間之地.  張唐辭曰:「燕者必徑於趙,趙人得唐者,受百里之地.」

文信侯去而不快.  少庶子甘羅曰:「君侯何不快甚也?」
文信侯曰:「吾令剛成君蔡澤事燕三年.  而燕太子已入質矣.  今吾自請張卿相燕,而不肯行.」

甘羅曰:「臣行之.」

[문신후 여불위가 조나라를 공략하여 하간(河間) 땅을 확장할 생각으로 우선 강성군(剛成君) 채택(蔡澤)을

연나라로 보내 연나라의 정무를 보게 했다. 이에 채택이 3년 만에 연나라 태자 단(丹)을 진나라에 인질로 보냈다.

문신후는 다시 대신 장당(張唐)을 연나라 재상으로 삼은 뒤 연나라와 합세해 조나라를 치고 하간을 넓힐 생각이었다.

그러자 장당이 사양하며 말하기를 : “ 연나라는 반드시 조나라 땅을 거쳐야 합니다.

그런데 조나라는 저를 체포하는 자에게 1백 리의 땅을 주겠다는 현상을 내걸고 있습니다.”라고 하였다.
문신후는 장당의 집을 나서며 매우 불쾌하게 생각했다. 그러자 소서자 감라(甘羅: 감무의 손자)가 묻기를 :

“ 군후(君侯)께서는 무슨 일로 그토록 언짢아하는 것입니까.”라고 하자.
문신후는 대답하기를 : " 나는 강성군 채택을 연나라로 보내 정무를 보게 하자,

채택이 3년 만에 연나라 태자 단을 인질로 진나라에 보내왔다.

이번에는 직접 장당에게 연나라의 재상이 되어 달라고 청했더니 그는 단번에 이를 거절하고 말았다.”라고 하였다.
감라가 말하기를 : “ 제가 그를 가도록 만들겠습니다.”라고 하자.


文信君叱去,曰:「我自行之而不肯,汝安能行之也?」

甘羅曰:「夫項櫜生七歲而為孔子師,今臣生十二歲於茲矣!君其試臣,奚以遽言叱也?」

甘羅見張唐曰:「卿之功,孰與武安君?」

唐曰:「武安君戰勝攻取,不知其數,攻城墮邑,不知其數.  臣之功不如武安君也.」

[그러자 문신후가 크게 화를 내며 말하기를 : "
“썩 물러가라. 내가 스스로 찾아갔어도 승락치 않았는데 네가 어찌 보낼 수 있단 말인가.”라고 하자.
감라가 말하기를 : “ 옛날 항탁(項橐: 項託)은 불과 7세에 공자의 스승이 되었습니다. 지금저는 12세가 되었는데

군후는 저를 시험해 보지도 않고 어찌하여 그리 급하게 꾸짖기만 하는 것입니까.”라고 하였다.
이에 감라가 장당을 만나 말하기를 : “ 경의 공을 무안군(武安君: 백기)과 비교하면 누가 큽니까.”라고 하자.
장당이 대답하기를 : “ 무안군은 전승하여 공취(攻取)한 것이 헤아릴 수 없이 많다.

또 성을 공격해 취한 것만도 헤아릴 수 없이 많으니 나는 무안군에 미치지 못한다.”라고 하였다.

 

甘羅曰:「卿明知功之不如武安君歟?」曰:「知之.」「應侯之用秦也,孰與文信侯專?」

曰:「應侯不如文信侯專.」 曰:「卿明知為不如文信侯專歟?」 曰:「知之.」

甘羅曰:「應侯欲伐趙, 武安君難之, 去咸陽七里, 絞而殺之.  今文信侯自請卿相燕, 而卿不肯行,

臣不知卿所死之處矣.」 唐曰:「請因孺子而行!」令庫具車,廄具馬,府具幣,行有日矣.

[감라가 묻기를 : “ 경은 자신의 공이 무안군만 못하다는 사실을 분명히 알고 있습니까?”라고 하자.
장당이 대답하기를 : " 잘 알고 있디.”라고 하였다.
감라가 묻기를 : “ 그렇다면 응후(應侯: 범수)가 진나라에 등용되었을 때 지녔던 권력과 문신후의 권력을

비교하면 어느 쪽이 더 위세가 있습니까.”라고 하자.
장당이 대답하기를 : “ 응후는 문신후만 못하다.”라고 하였다.
감라가 묻기를 : “ 경은 응후의 권력이 문신후만 못하다는 사실을 분명히 알고 있습니까.”라고 하자.
“장당이 대답하기를 : “ 잘 알고 있다.”라고 하였다.
감라가 말하기를 : “ 응후가 조나라를 칠 생각으로 무안군에게 군사를 이끌게 했으나 무안군이 이를 거절해

일을 어렵게 만들었습니다. 이에 응후는 결국 함양의 7 리 밖인 두우(杜郵)에서 목을 매어 죽고 말았습니다.

그런데 이번에 문신후는 직접 경을 만나 연나라의 상국 자리를 맡아달라고 청했습니다.

그런데 경은 가지 못하겠다고 버티니 저는 경이 어디서 목숨을 잃을지 모르겠습니다.”라고 하자.
장당은 말하기를 : " 내가 너의 말대로 곧 연나라로 가겠네.”라고 하였다.
그리고는 수레간에 명해 수레를, 마구간에는 말을, 국고에는 재물을 준비하게 해 놓고 출발 날짜도 정했다.

 

甘羅謂文信侯曰:「借臣車五乘,請為張唐先報趙.」見趙王,趙王郊迎.

謂趙王曰:「聞燕太子單之入秦與?」曰:「聞之.」「聞張唐之相燕與?」曰:「聞之.」

「燕太子入秦者,燕不欺秦也,張唐相燕者,秦不欺燕也.  秦、燕不相欺,則伐趙,危矣.

燕、秦所以不相欺者,無異故,欲攻趙而廣河間也.  今王齎臣五城以廣河間,請歸燕太子,

與強趙攻弱燕.」 趙王立割五城以廣河間,歸燕太子.  趙攻燕,得上谷三十六縣,與秦什一.

[이에 감라가 문신후에게 말하기를 : " 신에게 수레 5 승만 빌려 주십시오.

장당을 위해 제가 먼저 조나라에 보고하겠습니다.”라고 하였다.
감라는 조도양왕(趙悼襄王: 조효성왕의 아들)을 뵈러 조나라로 출발하자, 조도양왕이 교외까지 몸소 나와 영접하였다.

감라가 조왕에게 묻기를 : " 연나라 태자 단이 진나라에 인질로 간다는 얘기를 들었습니까?”라고 하자.
조도양왕이 대답하기를 : “ 들었네.”라고 하였다.
감라가 재차 묻기를 : “ 그러면 장당이 연나라에서 상국으로 간다는 말도 들었습니까.”라고 하자.
조도양왕이 대답하기를 : “ 들었네.”라고 하였다.
그러자 감라가 말하기를 : " 연나라가 태자 단을 진나라에 보낸 것은 연나라가 진나라를 속이지 않겠는다는 뜻이고,

장당이 연나라의 상국으로 가는 것은 진나라가 연나라를 속이지 않겠다는 뜻입니다.

진, 연 두 나라가 서로 속이지 않으면 조나라를 치게 되고 그리 되면 조나라는 매우 위험해집니다.

진, 연 두 나라가 서로 속이지 않겠다고 한 것은 다른 이유가 아니라 조나라를 공략하여 하간 땅을 넓히려는 것입니다.

지금 대왕이 저에게 5개 성읍을 주어 하간 땅을 넓히게 해 주면

연나라 태자를 돌려 보낸 뒤 강한 조나라와 합세해 약한 연나라를 치도록 청하겠습니다.”라고 하였다.
조왕이 즉시 5개 성읍을 떼어주어 진나라의 하간 땅을 넓혀주자 진나라도 곧 연나라 태자를 귀국시켰다.

이로써 조나라는 연나라를 쳐 상곡(上谷: 하북성)의 36개 현을 얻은 뒤 그 중 11개 현을 진나라에 주었다.

 

文信侯出走. 與司空馬之趙,趙以為守相.  秦下甲而攻趙.
司空馬說趙王曰:「文信侯相秦,臣事之,為尚書,習秦事. 今大王使守小官,習趙事.

請為大王設秦、趙之戰,而親觀其孰勝.  趙孰與秦大?」

曰:「不如.」「民孰與之眾?」 曰:「不如.」「金錢粟孰與之富?」

曰:「弗如.」「國孰與之治?」 曰:「不如.」「律令孰與之明?」 曰:「不如.」
司馬空曰:「然則大王之國,百舉而無及秦者,大王之國亡.」

[문신후 여불위가 진나라에서 함양으로 쫓겨날 때, 상서(尙書: 少府의 속관) 사공마(司空馬)은 조나라로 갔다.

그러자 조나라가 그를 수상(守相: 임시직 재상)에 임명했다. 이에 진나라가 군사를 보내 조나라를 공격하자,

사공마가 조유목왕(趙幽繆王: 조도양왕의 아들)에게 말하기를 : " 문신후가 진나라의 상국자리에 있을 때

신은 그를 모시며 상서로 있었기 때문에 진나라에 관해서는 익히 알고 있습니다.

지금 대왕이 신을 수상에 임명해 조나라에 관해서도 익히 알게 되었습니다.

청컨대 대왕께서 보시기에 진, 조 두 나라가 가상 전투를 벌이면 어느 쪽이 이기리라 생각하십니까.

두 나라 중 어느 쪽이 강대합니까?”라고  하자.  조왕이 대답하기를 : " 우리가 진나라만 못하오.”라고 하였다.
또 묻기를 : “ 백성은 어느 쪽이 많습니까?”라고 하자.  조왕이 대답하기를 : " 우리가 진나라만 못하오.”라고 하였다.
또 묻기를 : “돈이나 식량은 어느 쪽이 풍부합니까?”하자. 조왕이 대답하기를 : " 우리가 진나라만 못하오.”하였다.
또 묻기를 : “나라는 어느 쪽이 잘 다스려지고 있습니까?”하자.  조왕이 대답하기를 : " 우리가 못하오.”하였다.
또 묻기를 : “상국은 어느 쪽이 현명합니까?”라고 하자.  조왕이 대답하기를 : " 우리가 진나라만 못하오.”하였다.
또 묻기를 : “ 장군은 어느 쪽이 더 용맹합니까?”라고 하자.  조왕이 대답하기를 : " 우리가 진나라만 못하오.”하였다.
또 묻기를 : “율령은 어느 쪽이 더 명확합니까?”라고 하자.  조왕이 대답하기를 : " 우리가 진나라만 못하오.”하였다.
그러자 사공마가 말하기를 : " 그렇다면 대왕의 나라는 그 무엇을 비교해 보아도 진나라보다 나은 것이

단 하나도 없습니다. 그러니 대왕의 나라는 망하고 말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趙王曰:「卿不遠趙,而悉教以國事,願於因計.」
司馬空曰:「大王裂趙之半以賂秦,秦不接刃而得趙之半,秦必悅.  內惡趙之守,外恐諸侯之救

秦必受之.  秦受地而卻兵,趙守半國以自存.  秦銜賂以自強,山東必恐,亡趙自危,諸侯必懼.

懼而相救, 則從事可成. 臣請大王約從. 從事成, 則是大王名亡趙之半, 實得山東以敵秦, 秦不足亡.」

[조왕이 놀라 말하기를 : “ 경은 우리 조나라를 멀다 하지 않고 찾아와 국사에 대해 여러모로 가르쳐 주었소.

원컨대 경의 계획을 듣고자 하오.”라고 하자.

이에 사공마가 대답하기를 : “ 그렇다면 대왕은 조나라의 반을 쪼개 진나라에 뇌물로 바치십시오.

진나라는 무력을 사용치 않고도 조나라의 반을 얻게 되어 필시 크게 기뻐할 것입니다.

그들은 그간 안으로는 조나라의 수비에 속을 태우고, 밖으로는 제후들이 조나라를 도와줄까 걱정하고 있었던 터라

필시 이를 받아들일 것입니다. 진나라가 땅을 받고 군사를 철수시키면 조나라는 그 반이나마 잘 지켜 스스로

보전할 수 있을 것입니다. 진나라가 땅을 받아 강해지면 산동의 제후국들은 틀림없이 진나라를 두려워할 것입니다.

이는 조나라가 망하면 자신들이 곧바로 위험에 처하리라는 것을 알기 때문입니다. 제후들이 두려운 나머지

서로 돕게 되면 합종연합이 성사될 것입니다. 청컨대 대왕은 필히 합종맹약을 맺기 바랍니다.

합종이 성취되면 대왕은 겉으로는 나라의 절반을 잃어버렸으나 내용상 산동 제후국들이 반진연합에 나서는

실질을 얻게 됩니다. 그리되면 진나라를 멸망시키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습니다.”라고 하였다.


趙王曰:「前日秦下甲攻趙,趙賂以河間十二縣,地削兵弱,卒不免秦患.

今又割趙之半以強秦,力不能自存,因以亡矣.  願卿之更計.」
司空馬曰:「臣少為秦刀筆,以官長而守小官,未嘗為兵首,請為大王悉趙兵以遇.」趙王不能將.

司空馬曰:「臣效愚計,大王不用,是臣無以事大王,願自請.」 司空馬去趙,渡平原.

[그러자 조왕이 말하기를 : " 지난번에 진나라가 군사을 이끌고 와서 우리를 공격해 왔을 때 우리는 하간의 12개 현을

떼어 주었소. 이렇게 땅을 잃고 병력이 약해졌는데도 끝내 진나라의 환난은 면할 수가 없었소.

이번에 또 다시 절반을 떼어 진나라를 강하게 만들어 주면 우리는 더 이상 자력으로 지탱할 수 없어

이내 망하고 말 것이오. 원컨대 경은 다른 계책을 일러주기 바라오.”라고 하자.
사공마가 말하기를 : “ 신은 어려서 진나라의 도필리(刀筆吏: 당시의 상서로 훗날 書吏의 원형)가 되었다가

후에 수상까지 되었습니다만 지금까지 병수(兵首: 兵長, 兵伯으로 군사를 이끄는 장군)가 된 적은 없습니다.

그러니 청컨대 한번 대왕을 위해 조나라의 전 군사를 이끌고 가 대적할 수 있게 해 주기 바랍니다.”라고 하였다.
그러나 조대왕은 그를 장군으로 임명치 않았다. 이에 사공마가 말하기를 :
“신이 어리석은 계책이나마 모두 말씀드렸는데도 대왕께서는 이를 받아들이지 않고 있습니다.

제가 더 이상 대왕을 섬길 수 없으니 원컨대 신은 스스로 물러나고자 합니다.”라고 하며.
사공마는 조나라를 떠나 평원진(平原津: 나루터로 산동성 평원현)을 건너게 되었다.

 

平原津令郭遺勞而問曰:「秦兵下趙,上客從趙來,趙事何如?」

司空馬言其為趙王計而弗用,趙必亡.  平原令曰:「以上客料之,趙何時亡?」

司空馬曰:「趙將武安君,期年而亡,若殺武安君,不過半年.  趙王之臣有韓倉者,

以曲合於趙王,其交甚親,其為人疾賢妒功臣.  今國危亡,王必用其言,武安君必死.」

韓倉果惡之,王使人代.

[이때 평원진의 진령(津令) 곽유(郭遺)가 사공마를 위로한 뒤 묻기를 :
“ 진나라 군사가 조나라로 쳐들어 오고 있다 하는데 상객(上客)은 조나라에서 오고 있습니다.

지금 조나라의 형세가 어떻게 돌아가는지 알고는 계신지요?"
이에 사공마가 자초지종을 얘기하며 조나라가 필시 망할 것이라고 말하자 곽유가 묻기를 :
“ 상객이 볼 때 조나라는 언제쯤 망할 것 같습니까.”라고 하자.
사공마가 대답하기를 : “ 조나라가 무안군 이목을 장군으로 삼으면 1년 정도는 버틸 수 있을 것이오.

만일 무안군을 죽이면 반 년을 채 넘기기 어려울 것이오. 조왕의 신하 중에 한창(韓倉)이라는 자가 있소.

그는 아첨으로 조왕의 신임을 얻어 조왕과 매우 절친한 사이가 되었소. 그는 인간됨은 현신을 미워하고

공신을 시기하는 소인배에 불과하오. 지금 조나라가 이처럼 위기에 처해 있는데도

조왕은 한창의 말만 듣고 있으니 무안군은 필시 죽고 말 것이오.”라고 하였다.
과연 한창이 무안군을 미워하여 참소하자, 조왕은 조총(趙蔥)과 안최를 보내 이목(李牧)의 임무를 대신하게 하였다.

 

武安君至,使韓倉數之曰:「將軍戰勝,王觴將軍,將軍為壽於前而捍匕首,當死.」
武安君曰:「繓病鉤, 身大臂短, 不能及地, 起居不敬, 恐懼死罪於前, 故使工人為木材以接手.

上若不信, 繓請以出示.」出之袖中,以示韓倉,狀如振捆,纏之以布. 「願公入明知.」

[이어 무안군이 돌아오자, 조왕은 한창을 시켜 무안군을 문책하게 하였다.
한창이 말하기를 : “ 언젠가 장군이 승전하여 대왕이 그대에게 축배를 내렸을 때 장군은 앞으로 걸어 나와

축수(祝壽)를 하면서 비수를 몸에 감추고 있었소. 이는 사형에 해당하는 죄요.”라고 하자.
무안군 이목이 반박하며 말하기를 : " 나는 팔이 굽는 병을 앓은 데다가 키도 크고 팔이 짧아 예를 행할 때

손이 땅에 닿지 않소. 그래서 서거나 앉는 행동이 불경스럽게 보일 수밖에 없소.

이에 대왕 앞에서 죽을 죄를 짓지 않을까 하여 몹시 두려운 나머지 장인을 시켜 나무로 의수를 만들어 붙이고

다니고 있소. 의심스러우면 내가 꺼내 보여드리겠소.”라고 하며. 소매 속에서 의수를 꺼내 한창에게 보여 주었다.

그 모습이 마치 짧은 나무 말뚝 같았는데 천으로 칭칭 감겨져 있었다.
그리고 말하기를 : “ 원컨대 공은 입조하여 대왕께 사실대로 밝혀 주기 바라오.”라고 하였다.

 

韓倉曰:「受命於王,賜將軍死,不赦.  臣不敢言.」
武安君北面再拜賜死, 縮劍將自誅, 乃曰:「人臣不得自殺宮中.」遇司空馬門,趣甚疾, 出棘門也.

右舉劍將自誅,臂短不能及,銜劍徵之於柱以自刺.  武安君死.  五月趙亡.

平原令見諸公,必為言之曰:「嗟茲呼,司空馬!」又以為:司空馬逐於秦,非不知也.

去趙,非不肖也.  趙去司空馬而國亡.  國亡者,非無賢人,不能用也.

[그러자 한창이 말하기를 : “ 나는 왕명을 받고 장군에게 사형을 내리기 위해 왔으니 사면은 할 수 없소.

나는 대왕께 감히 말씀드릴 수가 없소.”라고 하였다.
이에 무안군이 북향하여 재배하면서 사사(賜死)를 받아들이기로 하였다. 

그리고는 검을 뽑아 자진하기에 앞서 말하기를 : “ 신하된 몸으로 궁중에서 자진할 수는 없다.”라고 하며.
말을 마치자 재빨리 달려 사마문(司馬門: 궁궐 담장 내의 문)을 지나 숙문(棘門으로 궁궐의 바깥문)을

빠져 나온 뒤 오른손으로 검을 들어 스스로 찌르려 했으나 팔이 짧아 미치지 못했다.

이에 검을 입에 문 채 기둥을 향해 달려가 곧바로 자진했다. 무안군이 죽은지 5 달만에 조나라는 망하고 말았다.

이때 평원진의 진령 곽유는 사람들을 만날 때마다 매번 탄식하듯 말하기를 : " 아, 아! 사공마여!”라고 하였다.
곽유는 또 생각하기를, ‘사공마가 진나라에서 쫓겨난 것은 그가 지혜롭지 못했기 때문도 아니고,

그가 조나라를 떠난 것 역시 그가 불초했기 때문이 아니다’라고 했다. 사실 조나라는 사공마를 내보냈기에

망한 것이다. 나라가 망하는 것은 현인이 없었기 때문이 아니라, 현인을 쓸 줄을 몰랐기 때문이다.

 

四國為一,將以攻秦. 秦王召群臣賓客六十人而問焉,

曰:「四國為一,將以圖秦,寡人屈於內,而百姓靡於外,為之奈何?」群臣莫對.
姚賈對曰:「賈願出使四國, 必絕其謀, 而安其兵.」乃資車百乘,金千斤,衣以其衣冠,舞以其劍.

姚賈辭行,絕其謀,止其兵,與之為交以報秦.  秦王大悅. 賈封千戶,以為上卿.

[4국(四國: 연, 조, 위, 초)이 하나가 되어 장차 진나라를 정벌하고자 했다. 진시황 14년(기원전 233)

이에 진왕(秦王: 진시황)이 군신들과 빈객 60여 명을 불러 놓고 묻기를 :
“ 4국이 하나가 되어 우리 진나라를 정벌하려 하고 있소. 과인은 안으로 재정이 궁핍하고

밖으로는 백성들이 전쟁으로 이해 고통을 당해야 할 것 같은데 이 일을 어찌하면 좋겠소.”라고 하자.
군신들이 아무 대답도 못하고 있을 때, 요가(姚賈)가 나서서 말하기를 :
“원컨대 신이 4국에 사자로 가 반드시 그 모의를 철회시키고 출병을 저지토록 하겠습니다.”라고 하였다.
이에 진왕이 병거 1 백 승과 동(銅) 1천 근을 내주면서 자신의 의관과 칼까지 착용하게 하였다.

요가가 하직 인사를 올리고 유세길에 올라 과연 4국의 모의를 철회시키고 출병도 저지시켰다.

그 뿐 아니라 4국과 교류관계까지 맺은 뒤 진나라로 돌아와 이같은 성과를 복명하였다.

진왕이 크게 기뻐하며 그에게 1천 호를 봉하고 상경으로 삼았다.

 

韓非知之,曰:「賈以珍珠重寶,南使荊、吳,北使燕、代之間三年,四國之交未必合也,

而珍珠重寶盡於內.  是賈以王之權、國之寶,外自交於諸侯,願王察之. 且梁監門子,嘗盜於梁,

臣於趙而逐.  取世監門子,梁之大盜,趙之逐臣,與同知社稷之計,非所以厲群臣也.」

[이때 한나라의 사신으로 진나라에 와 있던 한나라 공자인 한비자(韓非子)가 진왕에게 아뢰기를 :
“요가는 진귀한 보석들과 귀중한 보물들을 모두 풀어 3년 간에 걸쳐 남으로는 초, 오,

북으로는 연, 조에 사자로 돌아다니며 애썼으나 4국이 진정으로 진나라와 국교를 맺으려 하는 것도 아닌데

국내의 진귀한 보석들과 귀중한 보물들만 모두 바닥나고 말았습니다. 이는 요가가 대왕의 권한과 나라의 보물을

써서 밖으로 제후들과 사사로이 교분을 맺은 것이니 원컨대 대왕께서는 잘 살피시기 바랍니다.

요가는 위(양)나라 문지기의 아들로 태어나 일찍이 위나라에서 도둑질을 하고,

조나라에서 벼슬을 하다 쫓겨난 사람으로 조상 대대로 문지기를 한 집안의 아들로 위나라의 큰 도둑이고

조나라에서 쫓겨난 신하와 더불어 국가 대사를 논의하니 이는 군신들을 격려하는 계책이 아닙니다.”라고 하였다.

 

王召姚賈而問曰:「吾聞子以寡人財交於諸侯, 有諸?」對曰:「有.」

王曰:「有何面目復見寡人?」
對曰:「曾參孝其親,天下願以為子;子胥忠其君,天下願以為臣;貞女工巧,天下願以為妃.

今賈忠王而王不知也. 賈不歸四國,尚焉之? 使賈不忠於君,四國之王尚焉用賈之身?

桀聽讒而誅其良將,紂聞讒而殺其忠臣,至身死國亡.  今王聽讒,則無忠臣矣.」

[그러자 진왕이 요가를 불러 묻기를 : " 내가 듣건대 그대는 과인의 재물을 이용하여 제후들과 사사로이

교분을 맺었다고 하오. 과연 그런 일이 있었소?”라고 하자.
요가가 대답하기를 : “ 그런 일이 있습니다.”라고 하였다.
진왕이 묻기를 : “ 그렇다면 무슨 낯으로 과인을 다시 만난 것이오.”라고 하자.
요가가 대답하기를 : “ 증삼의 효성이 지극하자, 천하의 부모들이 모두 그를 자신의 아들로 삼고 싶어 했고,

오자서가 군주에게 충성을 지극히 하자 천하의 군왕들이 모두 그를 자신의 신하로 삼고 싶어 했습니다.

또 행실이 곧고 솜씨가 뛰어난 여인은 천하의 장부들이 모두 아내로 삼고 싶어 합니다.

그런데 신은 대왕에게 충성을 다했지만 대왕은 이를 모르고 있습니다. 신이 4국을 돌아다니다 돌아오지 않았다면

과연 어디로 가겠습니까? 만일 신이 불충했다면 4국의 군왕인들 어찌 저를 쓸 리 있겠습니까?

하걸(夏桀)은 참언을 듣고 자신의 훌륭한 장수들을 주살했고, 은주(殷紂)는 참언을 듣고 충신들을 죽였습니다.

이에 결국 자신의 몸을 망치고 나라까지 망하게 만들고 말았습니다.

지금 대왕께서 참언을 곧이들이면 충신들은 사라지고 말 것입니다.”라고 하자.

 

王曰:「子監門子、梁之大盜、趙之逐臣.」

姚賈曰:「太公望,齊之逐夫、朝歌之廢屠、子良之逐臣、棘津之讎不庸,文王用之王王.

管仲,其鄙人之賈人也,南陽之弊幽、魯之免囚,桓公用之而怕.

百里奚,虞之乞人,傳賣以五羊之皮,穆公相之而朝西戎.

[진왕이 말하기를 : “그대는 문지기의 아들로 위나라에서 도둑질을 한 적도 있고,

조나라에서는 신하로 있다가 쫓겨났다고 하오.”라고 하자.
요가가 변명하기를 : “ 태공망(太公望)은 제나라에 있을 때 아내에게 쫓겨난 필부로 조가(朝歌: 하남성 기현)의

도살장을 일을 하였으나 고기가 썩은 것도 분간 못할 정도로 멍청하였으며 자량(子良)에게 쫓겨난 신하로서

극진(棘津: 강태공 여상의 출생지로 대략 동해가로 추정)에서 낚시로 생계를 꾸리려 했으나 고기가 미끼를 물지 않아

결국 호구지책으로 품팔이에 나섰으나 이 또한 찾는 사람이 없는 쓸모없던 자였습니다.

그런데도 주문왕이 그를 등용해 왕자가 되었습니다.

관중은 제나라의 장사꾼 출신으로 남양(南陽)에서 가난한 처사로 지내다가 제환공을 죽이려 한 죄로 노나라에서

붙잡힌 후 간신히 석방된 죄수에 불과했습니다. 그러나 제환공은 그를 등용해 패자가 되었습니다.

백리해는 우(虞)나라의 걸인으로 양 가죽 5 장 값에 팔려 가는 신세였습니다.

그런데 진목공이 그를 구해 내 재상으로 삼음으로써 서융(西戎)의 조공을 받게 되었습니다.

 

文公用中山盜,而勝於城濮.  此四士者,皆有詬醜,大誹天下,明主用之,知其可與立功.

使若卞隨、務光、申屠狄,人主豈得其用哉!故明主不取其汙,不聽其非,察其為己用.
故可以存社稷者,雖有外誹者不聽,雖有高世之名,無咫尺之功者不賞.

是以群臣莫敢以虛願望於上.」 秦王曰:「然.」乃可復使姚賈而誅韓非.

[진문공은 중산(中山)의 도적을 이용해 성복(城濮)의 싸움에서 초군을 대파했습니다.

이 네 사람은 모두 비천한 출신으로 천하의 놀림거리였으나 총명한 임금들은 이들을 등용했습니다.

이는 이들과 함께 공을 세울 수 있다는 사실을 간파했기 때문입니다.

만일 신이 변수(卞隨)와 무광(務光: 두 사람 모두 탕왕이 하걸을 정벌할 때 동참을 거부한 처사),

신도적(申屠狄: 은대 말기의 처사)과 같이 숨어 살았으면 대왕이 어찌 저를 등용할 수 있었겠습니까!

총명한 임금은 신하의 미천을 따지지 않고, 과거의 비행을 따지지 않고,

오직 자신을 위해 쓸 만한 인물인지만을 살피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직을 보전하려는 자는 비록 밖에서 그를 비방하는 말이 있을지라도 듣지 않고,

비록 뛰어난 명성이 있을지라도 약간의 공적도 세우지 못한 자에게는 상을 내리지 않는 법입니다.

그래야만 군신들이 헛되이 군왕에게 분에 넘치는 요구를 하지 않게 되는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그러자 진왕이 말하기를 : " 옳소." 라고 하며.​ 요가의 지위를 회복시키면서 한비자를 참살했다. 

 

 

 

原 文 【 中國哲學書電子化計劃 .   筆寫本 】


           

 

原 文   飜 譯 者        德庤 / 李   斗 振