戰國策(전국책) /戰國策 趙策 2

戰國策 趙策 2

덕치/이두진 2021. 6. 26. 18:58

 

                    趙策 2

 

 

    趙策 三 .

 

 

趙惠文王三十年

 

趙惠文王三十年,相都平君田單問趙奢曰:「吾非不說將軍之兵法也,所以不服者,獨將軍之用眾.

用眾者, 使民不得耕作, 糧食輓賃不可給也. 此坐而自破之道也, 非單之所為也. 單聞之, 帝王之兵,

所用者不過三萬,而天下服矣. 今將軍必負十萬、二十萬之眾乃用之,此單之所不服也.」

[주난왕 46년(기원전 269), 조혜문왕은 재위 30년이 되자, 도평군(都平君) 전단(田單)을 재상으로 삼았다.

그러자 전단이 조나라 장수 조사(趙奢)에게 말하기를 : “나는 장군의 병법을 좋아하지 않는 것은 아니오.

그러나 장군이 많은 병력을 사용하는 것은 인정할 수 없소. 많은 병력을 사용하면 경작 할 수 없고, 군량을 운송해

공급할 수도 없게 되오. 이는 앉아서 스스로 패망하는 길이오.나는 결코 이같이 하지는 않을 것이오.

제왕이 동원하는 군사는 3만 명에 불과하지만 천하가 복종한다고 들었소. 그런데 장군은 반드시 10만에서 20만 명에

이르는 막대한 병력이 있어야 비로소 용병을 한다고 하니 이것이 바로 내가 인정할 수 없는 점이오.”라고 하였다.]  

 

馬服曰:「君非徒不達於兵也,又不明其時勢. 夫吳干之劍,肉試則斷牛馬,金試則截盤匜;

薄之柱上而擊之,則折為三,質之石上而擊之,則碎為百. 今以三萬之眾而應強國之兵,

是薄柱擊石之類也. 且夫吳干之劍材,難夫毋脊之厚,而鋒不入,無脾之薄而刃不斷. 兼有是兩者,

無釣?鐔蒙須之便,操其刃而刺,則未入而手斷. 君無十餘、二十萬之眾,而為此釣?鐔蒙須之便,

而徒以三萬行於天下,君焉能乎? 且古者,四海之內,分為萬國. 城雖大無過三百丈者;

人雖眾,無過三千家者,而以集兵三萬,距此奚難哉!今取古之為萬國者,分以為戰國七,

能具數十萬之兵,曠日持久,數歲,即君之齊已. 齊以二十萬之眾攻荊,五年乃罷.

趾以二十萬之眾攻中山, 五年乃歸. 今者,齊、捍衛相方,而國圍攻焉,豈有敢曰,

我其以三萬救是者乎哉? 今千丈之城,萬家之邑相望也,而索以三萬之眾,圍千丈之城,

不存其一角,而野戰不足用也,君將以此何之?」

 

[이에 마복군(馬服君: 조사)이 말하기를 : “그대는 병법에 통달해 있지 않을 뿐만 아니라 시세에도 밝지 못하오.

무릇 오나라의 명검 간장(干將)으로 고기를 베면 우마(牛馬)를 자를 수 있고, 금속을 베면 쟁반을 벨 수 있소.

이 보검을 들고 기둥에 내리치면 3 토막으로 자를 수 있고, 돌에 내리치면 1백 조각으로 부술 수도 있소.

지금 3만 명의 군사를 이끌고 가서 강국의 군사를 대적하는 것은 마치 기둥이나 돌을 치는 것과 같소.

게다가 간장과 같은 보검은 얻기도 힘드오. 칼의 몸통 부분이 얇으면 칼끝이 쉽게 말리고, 칼날 부분이 두꺼우면

아무 것도 벨 수 없게 되오. 이 두 가지 부분이 제대로 되어 있을지라도 구(鉤: 손잡이의 둥근 테)와 겹(鋏: 손잡이),

심(鐔: 손잡이와 칼의 몸통이 접하는 부분) 등 칼의 머리부분이 없으면 칼날을 손으로 잡고 찌를 수밖에 없게 되오.

그리 되면 미처 찌르기도 전에 자신의 손이 잘리게 되오. 그대에게 10만에서 20만 명의 군사가 없으면

이는 곧 구, 겹 심 등 칼의 머리부분이 없는 칼을 쥐고 있는 것과 같소. 그런데도 그대는 어찌하여 불과 3만 명의

군사로도 천하를 횡행할 수 있다고 하는 것이오. 옛날에는 사해 안이 1만개의 나라로 나뉘어 있었고,

성이 아무리 크다 한들 3백 장(丈)을 넘는 일이 없었고, 주민 또한 아무리 많다 한들 3천 호를 넘지 않았소.

그러니 군사 3만 명을 모아 대적한들 무슨 어려움이 있었겠소. 그러나 지금은 옛날과 달리 1만개의 나라로 이뤄져

있던 땅이 전국 7국으로 나뉘어져 있소. 수십만 명의 군사를 동원해 오랫동안 지구전을 펼치며 수년을 허송하고 있소.

그대의 제나라가 연나라의 침공을 받았을 때가 바로 그러했소. 또한 제나라가 20만 명의 군사를 동원해 초나라를

정벌했을 때는 5년 후에야 겨우 그쳤소. 조나라가 20만 명의 군사를 동원해 중산국을 정벌했을 때도 5년 후에야

겨우 철군하게 되었소. 지금 제, 한 두나라는 서로 호각지세를 이루고 있는데 한쪽이 위공(圍攻)을 펼칠 경우

과연 자신만만하게 3만 명의 군사로 구해낼 수 있다고 호언할 수 있겠소. 지금 1천 장 높이의 성과 1만 호의 읍이

서로 원수지간으로 존재하고 있소. 3만 명의 군사로는 1천 장 높이에 달하는 성의 일각(一角)을 포위하기는커녕

야전(野戰)에 사용하려 해도 오히려 부족할 것이오. 그대는 3만 명의 군사로 무엇을 하겠다는 것이오?”라고 하자.

전단이 위연(喟然)히 탄식하며 말하기를 : “내 생각이 짧아 거기까지는 미처 생각지도 못했소.”라고 하였다.]

 

 

趙使機郝之秦 

 

趙使機郝之秦,請向魏冉. 宋突謂機郝曰:「秦不聽,樓緩必怨公. 公不若陰辭樓子曰:

『請無急秦王.』秦王見之相魏冉之不急也,且不聽公言也,是事而不成,魏冉固德公矣.」

[조나라가 구학(仇郝: 「사기」 仇液)을 진나라로 보내 위염(魏冉: 양후)을 진나라의 재상으로 삼을 것을 청하게 했다.

그러자 구학의 빈객 송돌(宋突)이 구학에게 말하기를 : “진나라가 들어주지 않을 경우 재상으로 있는 누완(樓緩)은

필시 그대를 원망할 것입니다. 그대는 몰래 누자(누완)를 찾아가 말하기를, ‘제가 진왕(진소양왕)에게 위염의 임용을

서두르지 말도록 청하게 해 주십시오’라고 하느니만 못합니다. 그러면 진왕은 조나라가 위염의 재상 임명을 서두르지

않는 것으로 생각하고 오히려 그대의 청을 들어주지 않을 것입니다. 설령 일이 성사되지 않을지라도 누자는 그대를

고맙게 여길 것입니다. 일이 성사되면 위염이 그대를 고맙게 여길 것은 말할 것도 없습니다.”라고 하였다.]

 

 

齊破燕趙欲存之

 

齊破燕,趙欲存之. 樂毅謂趙王曰:「今無約而攻齊,齊必讎趙. 不如請以河東易燕地於齊.

趙有河北,齊有河東,燕、趙必不爭矣.  是二國親也. 以河東之地強齊,以燕以趙輔之,

天下憎之,必皆事王以伐齊. 是因天下以破齊也.」
王曰:「善.」乃以河東易齊,楚、魏憎之,令淖滑、惠施之趙,請伐齊而存燕.

[주난왕 원년(기원전 314), 제나라가 연나라를 격파하자, 조나라는 군사를 동원해 연나라를 존속시키고자 했다.

이때 연나라 장수 출신인 악의(樂毅)가 조무령왕에게 아뢰기를 : “지금 제후들과 결맹하지 않은 상황에서

조나라 단독으로 제나라를 공격하면 제나라는 필시 조나라를 원수로 생각할 것입니다. 그러니 제나라와 가까운

하동(河東)을 제나라가 연나라로부터 빼앗은 하북(河北: 황하 북쪽 연안)과 교환할 것을 제의하느니만 못합니다.

조나라가 자국과 가까이 있는 하북을 소유하고 제나라가 하동을 소유하면 연 조 두 나라는 서로 다툴 일이 없게 되고,

제, 조 두 나라는 서로 화친할 수 있습니다. 제나라가 하동을 차지해 강해지고 연, 조 두 나라가 제나라를 돕게 되면

천하의 제후들은 필시 제나라를 미워할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모두 대왕을 섬기며 제나라를 치고자 할 것입니다.

이것이 천하 제후들의 힘을 빌어 제나라를 격파시키는 묘책입니다.”라고 하자, 

조무령왕이 대답하기를 : “과연 그 말이 옳소.”라고 하면서,  곧 하동과 하북을 교환했다.

그러자 초, 위 두 나라가 이를 꺼린 나머지 곧 요활(淖滑)과 혜시(惠施)를 각각 초, 위 두 나라에 사자로 보내

제나라 정벌과 연나라 지원을 청하게 했다.]

 

秦攻趙,藺、離石、祁拔. 趙以公子郚為質於秦,而請內焦、黎、牛狐之城,以易藺、離石祁於趙.

趙背秦,不予焦、黎、牛狐. 秦王怒,令公子繒請地.
趙王乃令鄭朱對曰:「夫藺、離石、祁之地,曠遠於趙,而近於大國. 有先王之明與先臣之力.

故能有之. 今寡人不逮,其社稷之不能恤,安能收恤藺、離石祁乎?寡人有不令之臣,實為此事也,

非寡人之所敢知.」卒倍秦. 秦王大怒,令衛胡易伐趙,攻於與. 趙奢將救之.

魏令公子咎以銳師居安邑,以挾秦. 秦敗於於與,反攻魏幾,廉救幾,大敗秦師.

[주난왕 46년(기원전 269), 진나라가 조나라의 인(藺: 산서성 이석현 서쪽), 이석(離石: 산서성 이석현 중앙),

기(祁: 산서성 기현 동남쪽)를 함락시켰다. 그러자 조나라가 공자 오(郚)를 진나라에 인질로 보내면서

초(焦: 하남성 삼문협시 서쪽), 여(黎), 우호(牛狐)의 성읍(城邑)과 이들 땅의 교환을 청하게 했다.

그러나 조나라는 이내 진나라를 배신하고는 초, 여, 우호 성읍을 주지 않았다. 이에 진소양왕이 노하여

공자 증(繒)을 조나라로 보내 땅을 요구하게 하자 조혜문왕이 종실인 정주(鄭朱)를 시켜 이같이 응답하게 했다.
“무릇 인, 이석, 기 땅은 조나라에서는 아주 멀고 귀국에서는 매우 가깝소. 그러나 우리는 선왕의 영명함과

선신(先臣)들의 보필 덕분으로 이를 보전할 수 있었소. 지금 과인은 선왕의 덕에 미치지 못하여 사직도 제대로

돌보지 못하는 지경이 되었소. 그러니 어찌 인, 이석, 기 땅까지 신경을 쓸 수 있었겠소. 이번 일은 과인의

불녕한 신하가 저지른 것으로 과인은 전혀 알지 못했던 일이오.”라고 하며,  끝내 진나라를 배신했다.

이에 진소양왕이 대노하여 위(衛)나라 장수 호이(胡易)를 시켜 조나라를 공격하게 하였다.

호이가 알여(閼與: 산서성 화순현 서쪽)를 공격하자, 조나라는 조사(趙奢)를 보내 알여를 구원하게 했다.

이때 위(魏)나라는 공자 구(咎)를 시켜 예사(銳師)를 이끌고 안읍(安邑)에 진주하며 진나라를 저지하게 했다.

그러자 진나라는 두 나라의 협공에 걸려 알여에서 대패하고 말았다. 이에 진나라가 다시 방향을 돌려

위나라의 기(幾: 하북성) 땅을 공격하자 조나라 장수 염파가 나서 기 땅을 구원하고 진나라를 또 대파하였다.]

 

 

富丁欲以趙合齊魏

 

富丁欲以趙合齊、魏,樓緩欲以趙合秦、楚. 富丁恐主父之聽樓緩而合秦、楚也.
司馬淺為富丁謂主父曰:「不如以順齊. 今我不順齊伐秦,秦、楚必合而攻韓、魏.

韓魏告急於齊,齊不欲伐秦,必以趙為辭,則伐秦者趙也,韓、魏必怨趙. 齊之并不西,韓必聽秦違齊. 違齊而秦,

兵必歸於趙矣. 今我順順而齊不西,韓、魏必絕齊,絕齊則皆事我. 且我說齊,齊無而西.
日者,樓緩坐魏三月, 不能散齊、魏之交. 今我順而齊、魏果西, 是罷齊敝秦也, 趙必為天下重國.」

[주난왕 17년(기원전 298), 조나라 사람 부정(富丁)은 조나라를 제, 위 두 나라와 연합시키려 한 데 반해

누완(樓緩)은 조나라를 진, 초 두 나라와 연합시키려고 했다. 그러자 부정은 주부(조무령왕)이 누완의 진언을

받아들여 진, 초 두 나라와 연합할까 우려했다. 이에 조나라 사람 사마천(司馬淺)이 부정을 위해 주부에게 말하기를 :
“제나라와 화친하느니만 못합니다. 지금 우리가 제나라를 좇아 진나라를 공격하지 않으면 진, 초 두 나라는 반드시

연합해 한, 위 두 나라를 공격할 것입니다. 그리되면 한, 위 두 나라는 다급한 나머지 제나라에 급히 알릴 것입니다.

그러나 제나라는 진나라에 대한 공격을 원하지 않은 나머지 틀림없이 조나라가 제나라를 좇아 진나라를 공격하지

않은 것을 구실로 삼아 사양할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진나라를 공격하지 않는 책임은 조나라에게 돌아오고

한, 위 두 나라는 필시 조나라를 원망할 것입니다. 제나라가 서쪽으로 출병하지 않으면 한나라는 필시 진나라를

좇으면서 제나라를 등질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한나라는 반드시 조나라로 쳐들어 올 것입니다. 지금 우리가 제나라를

도와 진나라를 공격하고 제나라가 서쪽으로 출병하지 않으면 한, 위 두 나라는 필시 제나라와 단교할 것입니다.

그러면 두 나라 모두 우리 조나라를 섬기게 될 것입니다. 우리가 제나라를 따르면 제나라는 불안한 나머지 서쪽으로

출병하지 않을 리 없습니다. 전에 누완은 위나라에 3달 동안 머물렀으나 제, 위 두 나라 사이를 떼어놓지 못했습니다.

지금 우리가 제나라를 좇아 제, 위 두 나라가 서쪽으로 출병하게 되면 반드시 제, 진 두 나라를 모두 피폐하게 만들 수

있습니다. 이렇게 되면 조나라는 틀림없이 천하의 제후국들 중 중심적인 위치에 서게 될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主父曰:「我於三國攻秦,是俱敝也.」 曰:「不然. 我約三國而告之秦,以未構中山也.

三國欲伐秦之果也,必聽我,欲合我. 中山聽之,是我以王因饒中山而取地也. 中山不聽,

三國必絕之,是中山孤也. 三國不能和我雖少出兵可也. 我分兵而孤樂中山,中山必亡.

我已亡中山,而以餘兵與三國攻秦,是我一距離而兩取地於秦、中山也.」

[이에 주부가 말하기를 : “우리가 3국(제, 한, 위)과 함께 진나라를 공격하면 우리 또한 피폐하게 되오.”라고 하자,
사마천이 대응하기를 : “그렇지 않습니다. 우리가 3국과 결맹한 뒤 아직 중산국과의 강화가 이뤄지지 않고 있어

곧바로 군사를 철수시켜 함께 출병할 수 없다고 말하면 그뿐입니다. 3국이 과연 진나라를 치고 싶은 마음이 있다면

반드시 우리 말을 들어주면서 중산국과의 강화를 속히 매듭지은 뒤 출병하기를 바랄 것입니다.

만일 중산국이 강화에 동의하면 우리는 3국의 힘을 빌어 간단히 중산국을 굴복시키고 할지(割地)도 얻게 됩니다.

만일 중산국이 동의하지 않으면 이들 3국 모두 중산국과 단교할 것이니 그렇게 되면 중산국은 고립되고 맙니다.

3국이 강화의 주선에 실패할 경우에는 소수의 병력만 출병시켜도 3국은 할 말이 없을 것입니다.

우리가 군사를 나눠도 고립된 중산국은 반드시 망하고 말 것입니다. 중산국을 멸한 뒤 나머지 병력으로 3국과 함께

진나라를 공격하면 일거에 진나라와 중산국에서 땅을 취하는 셈이 됩니다.”라고 하였다.]

 

 

魏因富丁且合於秦

 

魏因富丁且合於秦,趙恐,請效地於魏而聽薛公.

教子欬謂李兌曰:「趙畏橫之合也,故欲效地於魏而聽薛公. 公不如令主父以地資周最,

而請相之於魏. 周最以天下辱秦者也,今相魏,魏秦必虛矣. 齊、魏雖勁,無秦不能傷趙.

魏王聽,是輕齊也. 秦、魏雖勁,無齊不能得趙. 此利於趙而便於周最也.」

[위나라가 조나라 사람 부정(富丁)을 통해 진나라와 연합하고자 했다. 그러자 조나라는 이를 두려워한 나머지

위나라에 땅을 떼어주며 사태를 무마할 생각으로 위나라 재상 설공 전문(田文)의 의견에 따르겠다고 하였다.

이때 어떤 사람이 자해(子欬)를 시켜 조나라 재상 이태(李兌)에게 말을 전하게 하기를 : “조나라는 위, 진 두 나라의

연횡이 성사될까 두려워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땅을 위나라에 떼어 주면서 모든 것을 설공의 말에 따르겠다고

하였다고 합니다. 그러나 공은 주부(主父)를 내세워 땅을 주최(周最)에게 주고 주최가 위나라의 재상이 되도록

청하느니만 못합니다. 주최는 천하의 제후들 중 진나라를 아주 싫어하는 사람 중 한 사람입니다.

그가 위나라의 재상이 되면 위, 진 두 나라 사이에 반드시 틈이 생길 것입니다. 제, 위 두 나라가 비록 강하다 해도

진나라를 빼놓은 채 조나라를 해칠 수는 없습니다. 만일 위나라가 주최의 재상 임명을 거부하면 이는 제나라를

얕보는 셈이 됩니다. 따라서 진, 위 두 나라가 비록 강해도 제나라를 빼놓은 채 조나라를 해칠 수는 없는 것입니다.

주최의 재상 임명을 청하는 것은 조나라 뿐만 아니라 주최에게도 유리한 일입니다.”라고 하였다.]

 

 

魏使人因平原君請從於趙

 

魏使人因平原君請從於趙. 三言之,趙王不聽. 出遇虞卿曰:「為入必語從.」虞卿入,

王曰:「今者平原君為魏請從,寡人不聽. 其於子何如?」 虞卿曰:「魏過矣.」

王曰:「然,國外寡人不聽.」 虞卿曰:「王亦過矣.」 王曰:「何也?」
曰:「凡強弱之舉事, 強受其利, 弱受其害. 今魏求從, 而王不聽, 是魏求害, 而王辭利也.

臣故曰, 魏過, 王亦過矣.」

[진소양왕 53년(기원전 254), 위나라가 사람을 보내 평원군(平原君: 조승)을 통해 조나라에 합종을 청했다.

평원군이 여러 차례 설명해도 조효성왕이 들을 생각을 하지 않았다. 이에 평원군이 세객 우경(虞卿)을 찾아가

부탁하기를 : “그대가 궐내로 들어가 조왕을 만나면 반드시 합종이 성사되도록 설득해 주기 바라오.”라고 하였다.
우경이 궐내로 들어가자, 조효성왕이 묻기를  : “지금 평원군이 위나라를 위해 합종을 종용했지만 과인이 듣지 않았소.

그대의 의견은 어떻소?”라고 하자.  우경이 대답하기를 : “위나라가 잘못 생각하고 있습니다.”라고 하였다.
조효성왕이 말하기를  : “그렇소. 그래서 과인도 들어주지 않는 것이오.”라고 하자.
우경이 말하기를 : “그러나 대왕께서도 잘못 생각하고 있습니다.”라고 하였다.
조효성왕이 묻기를  : “그게 무슨 말이오?”라고 하자.
우경이 대답하기를 : “무릇 강대국과 약소국이 함께 일을 꾀하면 강대국은 이득을 보고 약소국은 손해를 보게 됩니다.

지금 위나라가 합종을 청해 왔는데도 대왕께서 들어주지 않게 되면 위나라는 물론 손해를 입지만, 대왕께서도 이득을

거절한 셈이 됩니다. 그래서 위나라도 잘못이지만 대왕께서도 잘못이라고 말한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平原君請馮忌

 

平原君請馮忌曰:「吾欲北伐上黨,出兵攻燕,何如?」
馮忌對曰:「不可. 夫以秦將武安君公孫起乘七勝之威,而與馬服之子戰於長平之下,大敗趙師,

因以其餘兵,味邯鄲之城. 趙以亡敗之餘眾,收破軍之敝守,而秦罷於邯鄲之下,趙守而不可拔者,

以攻難而守者易也. 今趙非有七克之威也,而燕非有長平之禍也.

今七敗之禍未復,而欲以罷趙攻強燕,是使弱趙為強秦之所以攻,而使強燕為弱趙之所以守.

而強秦以休兵承趙之敝,此乃強吳之所以亡, 而弱越之所以霸. 故臣未見燕之可攻也.」

[주난왕 59년(기원전 256), 평원군이 세객 풍기(馮忌)에게 묻기를 : “장차 군사를 일으켜 연나라를 치고자 하오.

그대는 이를 어찌 생각하오.”라고 하자.  풍기가 대답하기를 : “그것은 안됩니다. 무릇 진나라 장군 무안군(白起)은

7전7승의 위세로 마복자(馬服子: 마복군 조사의 아들 趙括)와 장평(長平) 아래서 싸워 조나라 군사를 대파한 뒤

여세를 몰아 한단을 포위한 바 있습니다. 조나라는 7번이나 패한 나머지 병사들을 이끌고 이리저리 긁어 모은

패잔병들까지 합세시켜 한단을 사수했습니다. 이에 진나라는 한단의 성하(城下)에서 지치게 되었습니다.

조나라가 함몰되지 않고 지킬 수 있었던 것은 바로 공격은 어렵고 수비는 쉬웠기 때문입니다.

지금 조나라는 7전7승의 위세가 있는 것도 아니고, 연나라 또한 장평과 같은 참화를 당한 것도 아닙니다.

조나라는 아직 7전7패의 피해에서 회복하지도 못했는데 그 피폐한 힘으로 강한 연나라를 공격하려 하고 있습니다.

이는 약한 조나라로 하여금 강한 진나라의 공격방식을 취하고 강한 연나라로 하여금 약한 조나라의 수비방식을

취하게 하는 것입니다. 게다가 강한 진나라로 하여금 군사들을 휴식시킨 뒤 조나라의 피폐한 틈을 타도록

만드는 것입니다. 이야말로 강한 오나라가 망하고 약한 월나라가 패업을 이루게 된 까닭입니다.

신은 연나라를 가히 공격해도 좋은지 아직 그 이유를 모르겠습니다.”라고 하였다.] 

 

 

平原君謂平陽君

 

平原君謂平陽君曰:「公子牟游於秦, 且東,而辭應侯. 應侯曰:『公子將行矣,獨無以教之乎?』

曰:『且微君之命命之也,臣固且有效於君. 夫貴不與富期,而富至,富不與梁肉期,而梁肉至;

梁肉不與驕奢期,而驕奢至;驕奢不與死亡期,而死亡至. 累世以前,坐此者多矣.』

應侯曰:『公子之所以教之者厚矣.』仆得聞此, 不忘於心. 愿君之亦勿忘也.」平陽君曰:「敬諾.」

[평원군이 아우 평양군(조표)에게 말하기를 : “ 위나라 공자 모(牟)가 진나라로 유학을 갔다가 귀국하기 위해

응후(범수)에게 작별인사를 하자, 응후가 청하기를, ‘공자는 장차 떠나려 하시는군요,

저에게 특별히 가르쳐 주실 만한 것은 없으신지요?’라고 하였다. 

그러자 대답하기를, ‘그렇지 않아도 본래 말씀드리려고 했습니다. 무릇 존귀해지면 부(富)는 찾지 않아도 저절로 오고,

부유해지면 빼어난 음식은 찾지 않아도 저절로 오고, 양육을 즐기면 교사(驕奢)는 찾지 않아도 저절로 오고,

교사하게 되면 사망(死亡: 죽거나 망명함)은 찾지 않아도 저절로 오게 됩니다. 고금에 걸쳐 이로 인해 실패한 자는

너무나 많습니다’라고 했단다. 그러자 응후가 읍답하기를, ‘공자의 가르침이 매우 두텁습니다’라고 하였다.

나는 이 얘기를 듣고 마음속 깊이 새기고 있다. 원컨대 아우 역시 잊지 않도록 하라.”라고 하자.
평양군이 대답하기를 : “깊이 새겨 두겠습니다.”라고 하였다.]

 

 

秦攻趙於長平

 

秦攻趙於長平,大破之,引兵而歸.  因食索六城於趙而講.  趙計未定.  樓緩新從秦來,

趙王與樓緩計之曰:「與秦城何如?不與何如?」樓緩辭讓曰:「此非人臣之所能知也.」

王曰:「雖然,試言公之私.」 樓緩曰:「王亦聞夫公甫文伯母乎? 公甫文伯官於魯,病死.

婦人為之自殺於福中者二八. 其母聞之,不肯哭也.」
相室曰:「焉有子死而不哭者乎?『其母曰:『孔子,賢人也,逐於魯,是人不隨. 今死,

而婦人為死者十六人. 若事是者,其於長者薄,而於婦人厚?』 故從母言之,之為賢母也;

從婦言之,必不免為妒婦也. 故其言一也,言者異,則人心變矣. 今臣新從秦來,而言勿與,

則非計也;言與之,則恐王以臣之為秦也. 故不敢對. 使臣得王計之,不如予之.」王曰:「諾.」

[주난왕 55년(기원전 260), 진나라 군대가 조나라 군대를 장평에서 대파한 후 군대를 철수시키고 돌아갔다.

이때 진나라는 사람을 조나라로 보내 조나라가 6개 성읍을 바치면 강화에 응할 뜻이 있음을 전하게 했다.

조나라가 아직 방침을 정하지 못하고 있을 때 진나라에서 누완(樓緩)이 오자. 조효성왕이 그를 불러 묻기를 :
“진나라에 성읍을 떼어주는 것과 그렇지 않은 것 중 어느 것이 유리하겠소?”라고 하자.
누완이 사양하며 대답하기를 : “이는 외신(外臣)이 알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라고 하였다.
조효성왕이 말하기를 : “비록 그렇기는 하나 한번 공의 사견을 말해 주기 바라오.”라고 하자.
누완이 대답하기를 : “대왕께서는 공보문백(노나라 계강자의 증조부인 季悼子의 손자 公父)의 어머니 경강(敬姜)에

관한 얘기를 듣지 않았습니까? 공보문백이 노나라에서 벼슬을 하다가 병사하자, 그를 따라 규중에서 자살한 부인이

16명이나 되었습니다. 이에 경강이 이 얘기를 듣고 곡을 하지 않았습니다. 그러자 시중을 드는 사람이 묻기를,

‘자식이 죽었는데도 울지 않는 사람이 어디 있습니까’라고 했습니다. 이에 경강이 대답하기를, ‘공자는 현인이었소.

공자가 노나라에서 쫓겨났을 때도 내 자식은 그를 모시지 않았소. 그런데 이번에 그가 죽자 뒤따라 죽은 부인이

16명이나 되오. 이는 그가 장자(長者)를 박대하고 부인을 후대한 것이오’라고 했습니다. 어머니 입에서 이런 말이

나오면 현모(賢母)가 되지만 아내의 입에서 이런 말이 나오면 투부(妬婦)라는 비난을 면치 못하게 됩니다.

이로써 보면 똑같은 말도 말하는 사람에 따라 상이한 생각과 느낌을 표현하게 됩니다.

지금 신이 새로 진나라에서 온 처지에 만일 주지 말라고 하면 대왕은 계모가 없는 진언으로 여길 것이며, 또 주라고

하면 대왕은 신이 진나라를 위해 그같이 진언한 것으로 여길 것입니다. 그래서 감히 대답하지 못한 것입니다.

대왕을 위해 말씀드리면 안주느니만 못합니다.”라고 하였다. 

조효성왕이 말하기를 : “그리하도록 하겠소.”라고 하였다.]

 

虞卿聞之,入見王,王以樓緩言告之.  虞卿曰:「此飾說也.  秦即解邯鄲之味,而趙王入朝,

使趙郝約事於秦,割六縣而講.」王曰 :「何謂也?」

虞卿曰:「秦之攻趙也,倦而歸乎?王以其力尚能進,愛王而不攻乎?」

王曰:「秦之攻我也,不遺餘力矣,必以倦而歸也.」
虞卿曰:「秦以其力攻其所不能取, 倦而歸. 王又以其力之所不能攻以資之, 是助秦自攻也.

來年秦復攻王, 王無以救矣.」 王又以虞卿之言告樓緩.

樓緩曰: 「虞卿能盡知秦力之所至乎?誠知秦力之不至, 此彈丸之地, 猶不予也, 令秦來年復攻王,

得無割其內而媾乎?」 王曰:「誠聽子割矣,子能必來年秦之不復攻我乎?」

樓緩對曰:「此非臣之所敢任也. 昔者三晉之交於秦, 相善也. 今秦釋韓、魏而獨攻王,

王之所以事秦必不如韓、魏也. 今臣為足下解負親之攻,啟關通敝,齊交韓、魏.

至來年而王獨不取於秦,王之所以事秦者,必在韓、魏之後也. 此非臣之所敢任也.」

[우경(虞卿)이 이 얘기를 듣고 궐내로 들어와 조효성왕을 알현하자, 조왕은 누완의 말을 우경에게 전해 주었다.

그러자 우경이 말하기를 : “그것은 가식(假飾)된 꾸며낸 말입니다. 진나라는 이미 한단의 포위를 풀고는 조왕에게

협조하라고 하며 조학을 강화사절로 보내 진나라를 섬기라 하며 6개 현을 떼어 주면 강화를 하겠다고 하고 있습니다."

라고 하였다. 그러자 조왕이 묻기를 : “그것이 어쨌다는 것이오?”라고 하자.
우경이 되묻기를 : “진나라가 조나라의 한단을 공격하다가 지쳤기 때문에 철군한 것입니까?

아니면 공격할 여력이 있는데도 대왕을 긍휼히 여겨 공격하지 않은 것입니까?”라고 하자.
조왕이 대답하기를 : “진나라는 우리를 공격하면서 더 이상 공격할 여력을 남기지 못했소.

공격하다가 지친 나머지 철군한 것이 틀림없소.”라고 하였다.
그러자 우경이 말하기를 : “진나라가 자신들의 힘으로는 취할 수 없는 것을 억지로 공격하다가 지쳐서 철군했다면

대왕 역시 자신의 힘으로는 그 어떤 것도 공격할 수 없는 취약한 무력을 국가보위의 자산으로 삼고 있는 셈입니다.

이는 진나라로 하여금 우리를 공격하도록 돕는 셈입니다. 내년에 진나라가 또 다시 공격해 오면 대왕은 구원받을

길이 없을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이에 조효성왕이 누완에게 우경의 말을 전하자,

누완이 대답하기를 : “진나라의 힘이 과연 어느 정도나 되는지 우경이 완전히 파악할 수 있겠습니까?

실로 진나라의 무력이 아직 불충분하다는 것을 알아 6개 성읍과 같은 한 치의 땅조차 주지 않으려는 것이라면

진나라가 내년에 또 공격해 왔을 때 대왕께서 어찌 6개 성읍만으로 강화할 수 있겠습니까?”라고 하자.
왕이 말하기를 : “청컨대 그대의 말을 좇아 6개 성읍을 떼어주면 그대가 틀림없이 내년에 진나라가 다시 공격해

오지 않도록 만들 수 있겠소?”라고 하자,   누완이 대답하기를 : “그것은 신이 감히 떠맡을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전에 3진은 진나라와 가까이 지냈습니다. 그런데 지금 진나라가 한, 위 두 나라를 제쳐두고 오로지 대왕만을

공격하는 것은 진나라를 섬기는 대왕의 정성이 틀림없이 두 나라보다 못했기 때문일 것입니다.

신이 대왕을 위해 조나라의 친교를 저버림으로 인한 진나라의 공격을 막고, 관문을 활짝 열고 왕래를 재개하여

한, 위 두 나라와 같이 진나라와 친교를 맺게 되었다고 칩시다. 비록 그리 되었다 할지라도 내년이 되어

대왕만이 다시 진나라와 우호적인 관계를 유지치 못하게 되면 진나라에 대한 대왕의 태도는 틀림없이

한, 위 두 나라만큼 우호적이지 못하게 됩니다. 따라서 이는 신이 감히 떠맡을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라고 하였다.]

 

王以樓緩之言告.  虞卿曰:「樓緩言不媾來年秦復攻王,得無更割其內而媾.

今媾,樓緩又不能必秦之不復攻也,雖割何益? 來年復攻,又割其力之所不能取而媾也,

此自盡之術也. 不如無媾. 秦雖善攻,不能取六城;趙雖不能守,而不至失六城. 秦倦而歸,

兵必罷. 以五城收天下以攻罷秦,是我失之於天下,而取償於秦也. 吾國尚利,孰與坐而割地,

自弱以強秦? 今樓緩曰:『秦善韓、魏而攻趙者,必王之事秦不如韓、魏也.』

是使王歲以六城事秦也,即坐而地盡矣. 來年秦復求割地,王將予之乎?不與,

則是棄前貴而挑秦禍也;與之則無地而給之.  語曰:『強者善攻,而弱者不能自守.』

今坐而聽秦,秦兵不敝而多得地,是強秦而弱趙也. 以益愈強之秦,而割愈弱之趙,其計固不止矣.

且秦,虎狼之國也,無禮義之心. 其求無已,而王之地有盡. 以有盡之地,給無已之求,

其勢必無趙矣. 故曰:此飾說也. 王必勿與.」 王曰:「諾.」

[조효성왕이 누완의 말을 다시 우경에게 전하자, 우경이 말하기를 : “누완은 말하기를, ‘만일 진나라와 강화하지 않아

내년에 진나라가 또 공격해 오면 어찌 6개 성읍만으로 강화할 수 있겠습니까’라고 했습니다. 그러면서도 누완은

또 말하기를, ‘지금 강화할지라도 내년에 진나라가 다시 공격해 오지 않는다고 장담할 수 없다’고 했습니다.

그렇다면 땅을 떼어준들 무슨 도움이 되겠습니까? 내년에 진나라가 또 공격해 와 자력으로는 지탱할 수 없는

땅을 떼어주고 강화하면 이는 스스로 멸망하는 길입니다. 차라리 강화하지 않느니만 못한 것입니다.

진나라가 비록 공격에 능하다 한들 일거에 6개 성읍을 취할 정도는 아니고, 조나라가 비록 수비에 약하다 한들

6개 성읍을 일거에 잃을 정도는 아닙니다. 진나라가 공격에 지쳐 철군하면 군사들도 틀림없이 피폐하게 됩니다.

그때 우리는 5개 성읍을 떼어주며 천하의 제후들을 끌어들인 후 이들과 함께 피폐해 있는 진나라를 공격하면 됩니다.

이는 비록 천하의 제후들에게 땅을 떼어주기는 했으나 그 보상을 진나라에서 취하는 것이니 우리에게 이득이 됩니다.

이같이 하는 방안과 앉아서 땅을 떼어주고 스스로 약화되며 진나라를 강하게 만들어주는 방안 중 어느 쪽이

이득이겠습니까? 그런데도 누완은 말하기를, ‘진나라가 한, 위 두 나라와 가까이 지내면서 유독 조나라를

공격하는 것은 진나라를 섬기는 대왕의 정성이 두 나라만 못하기 때문이다’라고 했습니다.

이는 매년 왕이 6개 성읍을 떼어내 진나라를 섬기도록 하는 것으로 앉은 채 땅을 몽땅 잃는 꼴이 됩니다.

내년에 진나라가 다시 할지를 요구해 오면 대왕은 이를 들어줄 것입니까. 들어주지 않으면 이전의 할지가 모두

허사가 되고 화난을 초래하게 됩니다. 이를 들어주면 마침내 떼어줄 땅이 모두 사라지는 지경에 이르고 말 것입니다.

흔히 말하기를, ‘강자는 공격에 능하고 약자는 자수(自守)에 능하지 못하다’고 합니다.

지금 앉아서 진나라의 요구를 받아들이면 진나라 군사는 조금도 피폐하지 않은 채 많은 땅까지 얻는 셈입니다.

이는 진나라를 강하게 하고 조나라를 약하게 하는 것입니다. 땅을 늘려주어 진나라를 더욱 강하게 만들고

땅을 떼어 주어 조나라를 더욱 약하게 만드는 이 방안은 필시 진나라의 할지 요구를 이번 한 번에 그치지 않게

만들 것입니다. 게다가 진나라는 호랑지국(虎狼之國)으로 예의지심이 없어 그 요구에 한정이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대왕의 땅은 한정되어 있습니다. 한정된 땅으로 한정 없는 요구에 응하게 되면 마침내 조나라는 없게 됩니다.

그래서 누완의 말을 가식된 말이라고 한 것입니다. 대왕은 절대로 땅을 떼어주어서는 안 됩니다.”라고 하자.
조효성왕이 대답하기를 : “그리하도록 하겠소.”라고 하였다.]

 

樓緩聞之,入見於王,王又以虞卿言告之.  樓緩曰:「不然,虞卿得其一,未知其二也.

夫秦、趙構難,而天下皆說,何也? 曰『我將因強而乘弱』. 今逵兵困於秦,天下之賀戰者,

則必盡在於秦矣. 故不若亟割地求和,以不算天下,慰秦心. 不然,天下將因秦之怒,

秦趙之敝而瓜分之. 趙且亡何秦之圖? 王以此斷之,勿復計也.」

虞卿聞之,又入見王曰:「危矣,樓子之為秦也!夫趙兵困於秦,又割地為和,是愈疑天下,

而何慰秦心哉? 是不亦大示天下弱乎? 且臣曰勿予者,非固勿予而已也. 秦索六城於王,

五以五城賂齊. 齊,秦之深讎也,得王五城,并立而西擊秦也,齊之聽王,不待辭之畢也.

是王失於秦而取償於秦,一即着結三國之親,而與秦易道也.」 趙王曰:「善.」

因發虞卿東見齊王,與之謀秦. 虞卿未反,秦之使者已在趙矣. 樓緩聞之,逃去.

[이때 누완이 이 말을 듣고 궐내로 들어가 조효성왕을 만나자, 조왕이 또 다시 우경의 말을 전했다.

그러자 누완이 말하기를 : “그렇지 않습니다. 우경은 하나만 알고 둘은 모르고 있습입니다.

무릇 진, 조 두 나라가 교전하면 천하의 제후들이 모두 기뻐하는 것은 무슨 연고입니까?

말하자면 '이는 강한 쪽에 편승해 약한 쪽으로부터 이득을 취하려는 속셈에서 나온 것입니다.'

지금 조나라 군사는 진나라로 인해 큰 곤경에 처하자, 천하의 제후들은 모두 진나라의 전승을 축하하기 위해

사자들을 진나라로 보냈을 것입니다. 따라서 서둘러 할지하여 강화를 성사시킴으로써 천하의 제후들로 하여금

진, 조 두 나라 사이를 의심하게 하고 진나라의 마음을 누그러뜨리느니만 못합니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천하의 제후들은 진나라의 강한 무력을 배경으로 조나라가 피폐한 틈을 타 마침내 조나라를

오이를 쪼개듯 나눠 가지고야 말 것입니다. 조나라가 장차 망하려고 하는데 진나라에 어찌 대처하려는 것입니까?

대왕께서는 속히 결단을 내리고 더 이상 다른 생각일랑 하지 마십시오.”라고하였다.
우경이 이 말을 듣고 또다시 궐내로 들어가 조효성왕에게 말하기를 : “이는 극히 위험합니다. 이야말로 누완이

진나라를 위해 짜낸 계책에 불과할 뿐입니다. 무릇 조나라 군사가 진나라로 인해 곤경에 처해 있는데 다시 할지하여

강화하면 이는 천하의 제후들로 하여금 더욱 진, 조 두 나라 사이를 의심하게 만들 뿐입니다. 이 어찌 진나라의 마음을

누그러뜨리는 계책이 될 수 있겠습니까? 이렇게 하면 조나라의 약점만 천하에 고스란히 드러내는 꼴이 됩니다.

신이 땅을 떼어주지 말라고 한 것은 단순히 할지 자체를 반대한 것이 아닙니다.

진나라가 6개 성읍을 요구하고 있는 이때 대왕께서는 오히려 5개 성읍을 제나라에 떼어주십시오.

제나라는 진나라의 숙적으로 5개 성읍을 얻으면 대왕과 합세해 서쪽으로 출병해 진나라를 공격할 것입니다.

제나라는 얘기가 채 끝나기도 전에 대왕의 말을 좇을 것입니다. 대왕은 비록 제나라에 땅을 떼어주었으나

그 보상을 진나라에서 취하고 일거에 3국(三國: 제, 한, 위)과 화친을 맺게 됩니다.

그렇게 되면 조나라는 완전히 새로운 입장에 서서 상황을 주도적으로 이끌어 나갈 수 있을 것입니다.”라고 하자.
조효성왕이 대답하기를 : “과연 그 말이 옳소.”라고 하였다.

그리고는 우경을 동쪽 제나라로 보내 제왕 건(建)과 함께 진나라 공벌을 위한 계책을 세우게 했다.

우경이 채 돌아오기도 전에 진나라의 사자가 벌써 조나라에 이르게 되었다. 누완이 이 소식을 듣고 곧바로 도주했다.]

 

 

秦攻趙平原君使人請救於魏

 

秦攻趙,平原君使人請救於魏. 信陵君發兵至邯鄲城下,秦兵罷. 虞卿為平原君請益地,謂趙王曰:

「夫不牐一卒,不頓一戟,而解二國患者,平原君之力也. 用人之力,而忘人之功,不可.」
趙王曰:「善.」將益之地. 公孫龍聞之,見平原君曰:「君無覆軍殺將之功,而封以東武城.

趙國豪杰之士, 多在君之右, 而君為相國者以親故. 夫君封以東武城不讓無功, 佩趙國相印不辭無能,

一解國患,欲求益地,是親戚受封,而國人計功也. 為君計者,不如勿受便.」

平原君曰:「謹受令.」乃不受封.

[주난왕 58년(기원전 257), 진나라가 조나라를 공격하자, 평원군이 사람을 위나라로 보내 구원을 청하게 했다.

이때 신릉군(信陵君)이 군사를 몰아 한단의 성 아래에 이르자, 진나라 군사가 서둘러 철군했다.

이에 우경(虞卿)이 조효성왕에게 평원군을 위한 봉지를 더해 줄 것을 청하면서 말하기를 :
“무릇 군졸 한 명 쓰지 않고, 창 하나도 손상시키지 않고 국환(國患)을 해결한 것은 평원군의 노력 덕분입니다.

남의 힘을 이용하고도 그 공을 잊는다는 것은 불가합니다.”라고 하자,   조효성왕은 : “그 말이 옳소.”라고 하였다.
그리고는 봉지를 더해 주었다. 그러자 명가(名家)의 대표적인 변사(辯士)인 공손룡(公孫龍)이 이 말을 듣고

평원군을 만나 말하기를 : “군은 복군살장(覆軍殺將)의 공을 세우지 않고도 동무성(東武城)을 봉지로 받았습니다.

조나라에는 호걸지사(豪杰之士)가 많은데도 군이 재상이 된 것은 군이 공족이기 때문입니다.

군은 동무성을 봉지로 받을 때 무공(無功)을 이유로 사양하거나, 상국의 인(印)을 받을 때 무능(無能)을 이유로

사양하지 않았습니다. 게다가 국환이 풀리자 봉지를 더 받고자 했습니다. 이는 친척의 자격으로 봉지를 받고,

일반 백성의 자격으로 공을 인정받는 꼴입니다. 군을 위해 생각건대 받지 않느니만 못합니다.”라고 하자,
평원군이 대답하기를 : “삼가 가르침을 따르도록 하겠소.”라고 하였다.  그리고는 이내 받지 않았다.]

 

 

秦趙戰於長平

 

秦趙戰於長平,趙不勝,亡一都尉. 趙王召樓昌與虞卿曰:「軍戰不勝,尉復死,

寡人使卷甲而趨之,何如?」樓昌曰:「無益也,不如發重使而為媾.」
虞卿曰:「夫言媾者,以為不媾者軍必破,而制媾者在秦. 且王之論秦也,欲破王之軍乎?

其不邪?」王曰:「秦不遺餘力矣,必且破趙軍.」
虞卿曰:「王聊聽臣,發使出重寶以附楚、魏. 楚、魏欲得王之重寶,必入吾使. 趙使入楚、魏,

秦必疑天下合從也, 且必恐. 如此,則媾乃可為也.」趙王不聽, 與平陽君為媾, 發鄭朱入秦, 秦內之.

[주난왕 55년(기원전 260), 진, 조가 두 나라가 장평에서 싸울 때 조나라가 패하면서 1 명의 도위(都尉)를 잃었다.

조효성왕이 누창(누완의 형제)과 우경을 불러 놓고 묻기를 : “싸움에 패한 데다가 도위까지 죽었소. 과인은 전 군에

하령하여 무장을 단단히 갖춘 후 은밀히 진나라 군사를 습격하게 할 생각이오. 이를 어찌 생각하오.”라고 하자.
이에 누창이 대답하기를 : “ 무익한 일입니다. 고위급 사자를 보내 강화하느니만 못합니다.”라고 하였다.
이때 우경이 조효성왕에게 묻기를 : “무릇 강화를 말하는 것은 강화를 맺지 않으면 패전이 불가피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강화를 맺을 것인지 여부는 진나라에 달려 있습니다.

지금 대왕께서는 진나라가 대왕의 군사를 격파하리라고 봅니까? 아니면 그 반대라고 봅니까?”라고 하자.
조왕이 대답하기를 : “진나라는 여력이 남아 있지 않소. 분명히 조나라 군사를 격파할 수 없을 것이오.”라고 하였다.
그러자 우경이 말하기를 : “대왕께서는 신의 말씀을 들어 보십시오. 우선 사자에게 중보(重寶)를 들고 가서

초, 위 두 나라에게 바치도록 하여 두 나라를 우리 쪽으로 끌어들이십시오. 초, 위 두 나라가 대왕의 중보를 탐내면

사자를 받아들일 것입니다. 조나라의 사자가 손쉽게 두 나라로 들어가면 진나라는 필시 천하의 제후들이

합종하는 것이 아닐까 하여 두려워할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강화도 이내 성사될 것입니다.”라고 하였으나,
조효성왕은 이를 좇지 않고 평양군과 상의한 뒤 정주(鄭朱)를 진나라로 보내 강화를 논의하게 하자,

진나라는 정주의 입국을 받아들였다.]

 

趙王召虞卿曰:「寡人使平陽君媾秦,秦已內鄭朱矣,子以為奚如?」
虞請曰:「王必不得媾,軍必破矣,天下之賀戰勝者皆在秦矣. 鄭朱,趙之貴人也,而入於秦,

秦王與應侯比顯重以示天下. 楚、魏以趙為媾,必不救王. 秦知天下不救王,則媾不可得成也.」

趙卒不得媾,軍果大敗. 王入秦,秦留趙王而後許之媾.

[조효성왕이 우경을 불러 묻기를 : “과인은 평양군을 시켜 강화를 성사시키도록 했소.

이에 진나라가 이미 정주를 받아들였소. 그대는 강화가 어찌 될 것으로 보오.”라고 하자.
이에 우경이 대답하기를 : “대왕께서는 틀림없이 강화하지도 못하고 조나라 군사는 패하게 될 것입니다.

지금 천하의 제후들이 승전을 축하하기 위해 보낸 사자들이 모두 진나라에 있습니다. 정주는 조나라의 귀인 자격으로

진나라에 들어갔습니다. 진왕(진소양왕)과 응후(범수)는 필시 정중히 후대하며 천하의 제후들에게 선전할 것입니다.

그리되면 초, 위 두 나라는 조나라가 이미 진나라와 강화한 것으로 생각해 틀림없이 대왕을 구원하지 않을 것입니다.

천하의 제후들이 대왕을 구하지 않으리라는 것을 진나라가 알게 되면 강화 또한 성사될 리 없습니다.”라고 하였다.

결국 조나라는 강화도 맺지 못하고 군대 역시 대패하고 말았다. 이에 조효성왕이 진나라에 입조하자,

진나라는 즉시 조효성왕을 억류한 뒤 강화 체결을 겨우 허락했다.]

 

 

秦圍趙之邯鄲

 

秦圍趙之邯鄲. 魏安厘王使將軍晉鄙救趙.  畏秦,止於蕩陰,不進.  魏使客將軍新垣衍間入邯鄲,

因平原君謂趙王曰:「 親所以急味趙者,前與齊閔王爭強為帝, 已而復歸帝,以齊故.

今齊閔王已益弱. 方今唯秦雄天下,此非必貪邯鄲,其意欲求為帝. 趙誠發使尊秦昭王為帝,

秦必喜,罷兵去.」平原君猶豫未能有所決.

[주난왕 58년(기원전 257), 진나라가 조나라의 한단을 포위하자, 위안희왕(魏安釐王)은 장군 진비(晉鄙)를 시켜

조나라를 구원하게 했다. 그러나 진나라를 두려워한 나머지 국경인 탕음(蕩陰: 하남성 탕음현 서남쪽)까지만

나아간 뒤 더 이상 전진하지 못하게 했다. 그리고는 곧 객장(客將) 신원연(辛垣衍)에게 명하여 한단에 잠입한 뒤

평원군을 통해 조효성왕을 배견하면서 말을 전하게 하기를 : “진나라가 급히 조나라를 포위한 것은

전에 제민왕(齊閔王)과 제위를 놓고 다툴 때 제나라가 제호(帝號)를 반납하고 다시 왕호(王號)로 복귀하자,

진나라도 할 수 없이 왕호로 복귀한데 따른 것이오. 지금 제나라는 제민왕의 재위기간 중 날이 갈수록 더욱 약해져

진나라만이 천하를 호령하는 형국이 되었소. 진나라의 속셈은 필시 한단을 취하는데 있는 것이 아니라

제(帝)가 되려는데 있소. 만일 조나라가 사자를 보내 진왕(진소양왕)을 제(帝)로 받들면 진나라는 필시 크게 기뻐하며

병력을 거둘 것이오.”라고 하였다.  그러나 평원군은 계속 주저하며 결정을 내리지 못했다.]

 

此時魯仲連適又趙,會秦圍趙.  聞魏將欲令趙尊秦為帝,乃見平原君曰:「事將奈何矣?」
平原君曰:「勝也何敢言事?百萬之眾折於外,今又內圍邯鄲而不能去.

魏王使將軍辛垣衍令趙帝秦. 今其人在是,勝也何敢言事?」
魯連曰:「始吾以君為天下之賢公子也, 吾乃今然後知君非天下之賢公子也. 梁客信心了垣衍安在?

吾請為君責而歸之.」 平原君曰:「勝請召而見之於先生.」

平原君遂見辛垣衍曰:「東國有魯了先生, 其人在此, 勝請為紹介, 而見之於將軍.」

辛垣衍曰:「吾聞魯連先生,齊國之高士也.  衍,人臣也使事有職. 吾不愿見魯連先生也.」

平原君曰:「勝已泄之矣.」 辛垣衍許諾.

[이때 노중련(魯仲連)이 마침 조나라에 와 있다가 진나라가 조나라를 포위하는 광경을 두 눈으로 직접 보게 되었다.

그러다가 위나라가 장차 조나라로 하여금 진나라를 제(帝)로 받들도록 종요하고 있다는 말을 듣고는

곧 평원군을 찾아가 묻기를 : “일이 장차 어찌 되는 것입니까?”라고 하자,
이에 평원군이 대답하기를 : “ 내가 감히 무슨 말을 할 수 있겠소. 백만 대군이 밖에서 대패하고, 지금 또 도읍인

한단마저 포위당해 진나라 군사를 물리칠 길이 없게 되었소. 위왕은 장군 신원연을 시켜 진나라를 제(帝)로 받들도록

종용하고 있소. 지금 위나라 사자가 여기에 와 있소. 그러니 내가 무슨 말을 감히 할 수 있겠소.”라고 하였다.
그러자 노중련이 말하기를 : “당초 나는 군을 천하의 어진 공자로 생각했으나, 이제 군이 천하의 어진 공자가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되었소. 지금 위나라에서 온 신원연은 어디에 있습니까? 내가 군을 위해 그를 문책해 속히 귀국하도록

만들어 드리겠습니다.”라고 하였다. 평원군이 말하기를 : “그렇다면 내가 그를 선생과 면회하도록 만들겠소.”하였다.
그리고는 곧 신원연을 만나 말하기를 : “동국(東國: 제나라)에 노중련이라는 고사(高士)가 한 분 있는데

마침 그 분이 이곳에 와 있소. 내가 그 분을 소개하여 장군과 만나도록 주선하겠소.”라고 하자,
신원연이 사양하며 말하기를 : “저도 노중련 선생이 제나라의 고사라는 말을 익히 들은 바 있습니다.

그러나 저는 신하의 신분이고 사자로서의 직분도 있기 때문에 노중련 선생을 만날 수 없습니다.”라고 하였다,
그러자 평원군이 말하기를 : “나는 이미 장군이 여기에 와 있다고 말씀드렸소.”라고 하자.

이에 신원연이 할 수 없이 면회를 허락하였다.]

 

魯連見辛垣衍而無言.  辛垣衍曰:「吾山居北圍城之中者, 皆有求於平原君者也.

今吾視先生之玉貌,非有求平原君者,曷為久居此圍城之中而不去也?」
路鰱曰:「世以鮑炬無從容而死者,皆非也. 今眾人不知,則為一身. 彼秦者,

棄力役而上首功之國也. 權使其士,虜使其民. 彼則肆然而為帝,過而遂正於天下,

則連有赴東海而死矣. 吾不忍為之民也!所為見將軍者,欲以助趙也.」

辛垣衍曰:「先生助之奈何?」 魯連曰:「吾將使梁及燕助之. 齊、楚則固助之矣.」

[노중련은 이내 신원연을 만나 아무 말도 하지 않은 채 입을 굳게 다물고 계속 침묵했다. 그러자 신원연이 묻기를 :
“내가 보건대 포위된 이 성 안에 있는 사람들은 모두 평원군에게 뭔가 바라는 바가 있는 사람들입니다.

지금 선생의 옥모(玉貌: 모습의 敬語)를 보니 평원군에게 뭔가 바라는 바가 있는 사람들과는 다릅니다.

그런데 선생은 무엇 때문에 포위된 성에 오래 머물면서 빠져 나가려 하지 않는 것입니까.”라고 하자.
노중련이 대답하기를 : “세상에는 흔히 세상에 대한 불만으로 음식을 끊고 자진한 은사가 탁한 세상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마음의 여유를 없앤 나머지 죽게 되었다고 하지만 이는 잘못이오. 지금 사람들은 그 내막도 모르고

그저 일신상의 이유로 자살한 것으로 생각하고 있소. 진나라는 예의를 버리고 전장에서 적의 수급을 많이 얻는 것을

고취하는 나라로 선비들을 권모술수로 부리고 백성은 노예처럼 부리고 있소. 만일 진나라가 기탄 없이 제(帝)가 되고

심지어는 마침내 천하를 손에 넣기라도 하면 나는 차라리 동해에 뛰어들어 목숨을 끊을지언정 진나라 백성이 되는

일만은 차마 못하겠소. 장군을 만나고자 한 것은 바로 조나라를 돕고자 하는 충정에서 비롯된 것이오.”라고 하였다.
그러자 신원연이 묻기를 : “선생은 어떤 식으로 조나라를 도울 생각입니까.”라고 하자.
노중련이 대답하기를 : “나는 위, 연 두 나라로 하여금 조나라를 돕도록 만들겠소.

제, 초 두 나라는 반드시 조나라를 도와줄 것이오.”라고 하였다.]

 

辛垣衍曰:「燕則吾請以從矣. 若乃梁,則吾乃梁人也,先生惡能使梁助之耶?」
魯連曰:「梁未睹秦稱帝之害故也,使梁睹秦稱帝之害,則必助趙矣.」

辛垣衍曰:「秦稱帝之害將奈何?」 魯仲連曰:「昔齊威王嘗為仁義矣,率天下諸侯而朝周.

周貧且微,諸侯莫朝,而齊獨朝之. 居歲餘,周烈王崩,諸侯皆吊,齊後往. 周怒,赴於齊曰:

天崩地坼,天子下席,東藩之臣田嬰齊後至,則斮之.』 威王勃然怒曰:『叱嗟,而母婢也.』

卒為天下笑.  故生則朝周, 死則叱之, 誠不忍其求也. 彼天子固然,其無足怪.」

[그러자 신원연이 묻기를 : “저도 연나라는 아마 선생의 말을 좇을 것으로 봅니다. 그러나 위나라는 다를 것입니다.

저도 위나라 사람이지만 선생은 무슨 재간으로 위나라로 하여금 조나라를 돕도록 만들겠다는 것입니까.”라고 하자.
노중련이 대답하기를 : “위나라가 돕지 않는 것은 진나라의 칭제가 가져올 해악을 아직 제대로 깨닫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오. 만일 위나라가 진나라의 칭제가 가져올 해악을 깨닫는다면 곧 조나라를 도울 것이오.”라고 하였다.
신원연이 묻기를 : “진나라의 칭제가 가져올 해악이 어떤 것입니까.”라고 하자.
노중련이 대답하기를 : “옛날 제위왕(齊威王)이 인의를 행하며 천하의 제후들을 이끌고 주나라에 입조한 일이 있었소.

주나라는 가난하고 쇠약했기 때문에 제후들 중 입조하는 자가 한 사람도 없었소. 그런데 제나라만 입조한 것이오.

그로부터 1년여 뒤 주열왕(周烈王)이 붕어하자 제후들이 모두 조상을 왔는데 제나라만이 홀로 늦게 조상을 왔소.

이에 주왕실이 노해 제위왕을 책망하기를, ‘천자가 붕어하여 뒤를 이은 천자(周顯王을 지칭)가 궁실을 떠나

짚방석 위에서 잠을 자며 빈소를 지키고 있는데 동번지신(東藩之臣) 전영제(제위왕의 이름)는 뒤늦게 왔으니

참수해야 한다’고 했소. 그러자 제위왕이 발연(勃然)히 화를 내며 말하기를, ‘흥, 네 에미는 종년이다’라고 했소.

이로 인해 제위왕은 천하의 웃음거리가 되고 말았소. 제위왕이 주위열왕의 생전에는 입조했다가 사후에 욕을 한 것은

주나라의 책망을 참을 수 없었기 때문이오. 주나라는 비록 가난하고 쇠약하기는 하나 천자의 위세를 지니고 있소.

그런데 진나라는 이미 강대하니 일단 칭제하게 되면 마음대로 위복(威福)의 권한을 행사할 것이오.

천자란 본래 이같이 임의로 위복의 권한을 행사할 수 있는 것이니 하등 이상할 것도 없는 것이오.”라고 하였다.]

 

辛垣衍曰:「先生獨未見夫仆乎?十人而從一人者,寧力不勝,智不若耶?畏之也.」
魯仲連曰:「然梁必比於秦若仆耶?」辛垣衍曰:「然.」魯仲連曰:「然吾將使秦王彭醢梁王.」
辛垣衍怏然不悅曰:「嘻,亦太甚矣,先生之言也!先生又惡能使秦烹醢梁王?」

[이에 신원연이 응답하기를 : “선생만 유독 노복(奴僕)들을 보지 못했습니까? 10 명이나 되는 노복들이

한 사람을 따르는 것은 힘이 부치고 지혜가 모자라기 때문이 아니라 두려워하기 때문입니다.”라고 하였다.
그러자 노중련이 묻기를 : “그렇다면 위나라는 진나라와 비교할 때 노복에 해당한다는 것이오?”라고 하자.

신원연이 대답하기를 : “그렇습니다.”라고 하였다. 이에 노중련이 말하기를 :
“그렇다면 나는 진왕에게 그대의 위왕을 솥에 삶아 그 고기를 잘라 육장(肉醬)을 담그라고 하겠소."라고 하였다.
그러자 신원연이 크게 언짢은 표정을 지으며 묻기를 : “허, 선생은 무슨 말을 그리 심하게 하는 것이오.

진왕을 시켜 위왕을 삶아 육장을 담그도록 만들겠다니 선생이 무슨 수로 그같이 할 수 있다는 것이오?”라고 하자.]

 

魯仲連曰:「固也, 待吾言之.  昔者, 鬼侯之鄂侯、文王, 紂之三公也. 鬼侯有子而好, 故入之於紂,

紂以為惡, 醢鬼侯. 鄂侯爭之急,辯之疾,故脯鄂侯. 文王聞之,喟然而嘆,故拘之於牖里之車,

百日而欲舍之死. 曷為與愛人俱稱帝王,卒就脯醢之地也? 齊閔王將之魯, 夷維子執策而從,

謂魯人曰:『子將合一待吾君?』 魯人曰:『吾將以十太牢待子之君.』

維子曰:『子安取禮而來待吾君?彼吾君子,天子也. 天子巡狩,諸侯辟舍,納於管鍵,攝衽抱幾,

視膳於堂下,天子已食,退而聽朝也.』魯人投其籥,不果納. 不得入於魯,將之薛,假途於鄒.

當是時,鄒君死,閔王欲入吊.

[이에 노중련이 대답하기를 :  “사실이오. 내 말을 들어보도록 하시오. 옛날 귀후(鬼侯), 악후(鄂侯), 주문왕(周文王)은

은주(殷紂)의 3공(三公)으로 있었소. 당시 귀후에게 딸이 하나 있었는데 딸의 미색이 매우 뛰어나다고 생각하여

그 딸을 은주에게 시집을 보냈으나 은주는 그녀가 추하게 생겼다고 트집을 잡고 이내 귀후를 육장으로 만들고 말았소.

이에 악후가 다시 규간하면서 극력으로 귀후를 옹호하고 나서자 그를 육포(肉脯)로 만들어 버렸소. 이때 주문왕이

이 소식을 듣고 위연히 탄식을 하자 그마저 유리(里)에 1백 일 동안 감금해 놓으면서 그곳에서 죽게 만들려 했소.

위나라는 진나라와 마찬가지로 제후왕을 칭하는 동등한 나라인데 왜 육포나 육장이 되는 위치로 나아가려는 것이오.

전에 제민왕은 6국의 공격을 받고 위(衛)나라로 도주했다가 쫓겨나 노나라로 가려고 했습니다.

이때 제민왕의 신하인 이유자(夷維子)가 채찍을 들고 수행을 하다가 노나라 사람에게 묻기를,

‘그대는 무슨 예로 우리 군주를 대접할 생각이오’라고 했소. 그러자 노나라 사람이 대답하기를,

‘나는 10태뢰(十太牢: 소와 양, 돼지를 각각 10마리씩 올리는 享禮)로 그대의 군주를 대접할 생각이오’라고 했소.

이에 이유자가 책망하기를, ‘그대는 어디서 감히 그같은 예로 우리 주군을 대접하겠다는 것이오. 우리 주군은 천자요.

천자가 순수(巡守)하면 제후는 응당 머물던 궁실을 천자에게 양보한 채 자신은 궁실 밖으로 나가면서 열쇠를 넘기고,

자리를 정돈하여 궤(几: 몸을 기대는 작은 탁자)을 받들고, 옆으로 물러나 당하에서 식사가 끝나기를 기다려야 하오.

천자가 식사를 마쳐야 비로소 물러나 정무를 볼 수 있는 것이오’라고 했소. 그러자 노나라 사람이 관문을 잠그고

제민왕을 받아들이지 않았소. 제민왕은 노나라에서 받아들이지 않자 설(薛: 산동성 등현 동남쪽) 땅으로 가기 위해

추(鄒) 땅을 통과하려 했소. 이때 마침 추군(鄒君)이 죽게 되자, 제민왕은 궁실로 들어가 조문하고자 했소.

 

夷維子謂鄒之孤曰:『天子吊,主任必將倍殯柩,設北面於南方,然後天子南面吊也.』
鄒之群臣曰:『必若此,吾將伏劍而死.』故不敢入於鄒. 鄒、魯之臣,生則不得事養,

充當則不得飯含.  然且欲行天子之禮於鄒、魯之臣,不果納. 今萬乘之國,梁亦萬乘之國.

俱據萬乘之國,交有稱王之名,賭其一戰而勝,欲從而帝之,是使三晉之大臣不如鄒、魯之仆妾也.

且秦無已而帝,則且變易諸侯之大臣. 彼將奪其所謂不肖,而予其所謂賢;奪其所憎,而與其所愛.
彼又將使其子女讒妾為諸侯妃既,處梁之宮,梁王安得晏然而已乎?而將軍又何以得故寵乎?」

[그러자 이유자가 다시 추군의 아들에게 이르기를, ‘천자가 조상할 때 상주는 반드시 영구가 북쪽을 향하도록

남쪽으로 이동시켜야 하오. 연후에 천자가 남면하여 조문하는 것이오’라고 했소. 그러자 추 땅의 군신들이 말하기를,

‘그리해야만 한다면 우리는 칼 위에 엎어져 죽을 것이오’라고 했소. 이에 추 땅으로 들어갈 기회마저 놓치고 말았소.

추, 로(鄒, 魯)의 신하들은 비록 군주가 살아 있을 때 제대로 시봉하지도 못하고, 사후에도 사자의 입에 쌀과 구슬을

물리는 장례절차 조차 못할 정도로 빈궁했지만 제나라가 천자의 예로 자신들을 받들 것을 요구하자 과감히 이를

거절한 것이오. 그런데 진, 위 두 나라는 모두 만승지국으로 칭왕하고 있는데 싸움에 한번 이기고 졌다고 하여

진나라를 제(帝)로 받들고자 하면 3진의 군신들은 추, 로의 신하들만도 못하게 되는 것이오.

게다가 진나라는 칭제에 그치지 않고 마침내 제후들의 대신들마저 모두 교체할 것이오. 그들은 자신들이 말하는

소위 불초한 자들로부터 관작을 빼앗아 자신들이 현명하다고 말하는 자들에게 나눠 줄 것이오.

이는 사실 자신들이 미워하는 자들로부터 빼앗아 좋아하는 자에게 나눠주는 것이오.

나아가 자신들의 딸과 참소를 일삼는 천첩들을 제후들의 비희(妃姬: 처첩)로 삼아 위나라의 궁중에 살게 하면

위왕이 어찌 평안히 지낼 수 있겠소? 장군 또한 어찌 지금과 같은 총신(寵信)를 받을 수 있겠소?”라고 하였다.]

 

於是, 衍起,再拜謝曰:「始以先生為庸人,吾乃近日而知先生為天下之士. 去,不敢復言帝秦.」

秦將聞之,為卻軍五十里.  適會魏公子無忌奪晉鄙軍,以救趙擊秦,秦軍引而去.

是平原君欲封魯仲連.   仲連辭讓者三,終不肯受. 乃置酒,酒酣,起前以千金為魯連壽.

連笑曰:「所貴於天下者士者,為人披患、釋難、解紛亂而無所取也. 所取者,是商賈之人也,

仲連不忍為也.」 辭平原君而去,重申不復見.

[이에 신원연이 벌떡 일어나 재배하고 사죄하며 말하기를 : “당초 저는 선생을 용인(庸人: 범부)으로 보았습니다.

그러나 이제야 선생이 천하의 고사라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제가 귀국하면 두 번 다시 감히 진나라의

칭제 문제를 꺼내지 못하도록 하겠습니다.”라고 하자. 진나라 장수가 이 얘기를 듣고 즉시 군사를 50리 뒤로 물렸다.

마침 위나라의 공자 무기(신릉군)가 위나라 장수 진비(晉鄙)를 죽이고 그 군사를 빼앗은 뒤 진나라 군대를 공격하여

조나라를 구했다. 이에 진나라 군대는 마침내 철수하고 말았다. 평원군이 노중련을 봉하려 하자 노중련은 이를 끝내

받으려 하지 않았다. 이에 평원군이 노중련을 위해 연회를 베풀었다. 주흥이 한창 무르익자 평원군이 일어나

앞으로 나와서는 노중련에게 술잔을 바치며 1천 금을 보수 차원에서 건네주었다.

그러자 노중련이 웃으면서 말하기를 : “천하지사가 귀한 것은 사람을 위해 우환을 떨쳐 주고 환난과 분쟁을 해결하면서

취하는 것이 없기 때문입니다. 만일 취하는 것이 있다면 그것은 곧 장삿꾼이 되는 것으로

나는 차마 그리 할 수는 없습니다.”라고 하였다.

그리고는 곧 평원군에게 작별인사를 하고 떠난 뒤 평생 다시는 만나지 않았다.]

 

 

說張相國

 

說張相國曰:「君安能少趙人,而令趙人多君? 君安能憎趙人,而令趙人愛君乎?

夫膠漆,至粘也,而不能合遠;鴻毛,至輕也,而不能自舉. 夫飄於清風,則橫行四海.

故事有簡而來成者,因也. 今趙萬乘之強國也,前漳、滏,右常釤,左河間,北有代,

帶甲百萬,嘗抑強齊,四十餘年而秦不能得所欲. 由是觀之,趙之於天下也不輕.

今君易萬乘之強趙,而慕思不可得之小梁,臣竊為君不取也.」
君曰:「善.」自是之後,眾人廣坐之中,未嘗不言趙人之長者也,未嘗不言趙俗之善者也.

[노중련이 조나라 재상 장상국에게 말하기를 : “그대는 어찌하여 조나라 사람에 대해 그리도 야박하게 굴면서

오히려 그들에게는 그대에게 깎듯이 예를 갖추라고 하는 것이오. 무릇 아교와 옷칠은 물건을 잘 접착하게 만들지만

물건이 서로 멀리 떨어져 있을 때에는 그리 할 수 없소. 기러기의 깃털은 지극히 가볍기는 하나 스스로 떨쳐 일어나

날아 다닐 수 있는 것은 아니오. 아무리 가벼운 기러기의 깃털 일지라도 반드시 바람의 힘에 의지해야만

사해를 횡행할 수 있소. 아무리 작은 일일지라도 성공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밖의 도움을 얻어야만 하는 법이오.

지금 조나라는 만승지국으로 앞에 장수(漳水)와 부수(滏水: ‘장수’와 함께 하북성 한단현 남쪽을 흐름)가 있고,

우측으로 상산, 좌측으로 하간, 북쪽으로 대(代) 땅이 있소. 군사는 1백만 명이나 되어 일찍이 강한 제나라를

40여 년이나 막아내자 진나라는 이로 인해 하고자 하는 바를 이룰 수가 없었소. 이로써 보건데 조나라는

천하의 제후국들 중 결코 가볍게 볼 수 있는 나라가 아니오. 지금 그대가 만승지국인 강한 조나라를 경시하며

앞날을 알 수도 없는 작은 위나라를 만들고자 하니 나는 그대를 위해 걱정하지 않을 수 없소. 나는 그대를 위해

결코 이같이 하지는 않을 것이오.”라고 하자,  장상국이 대답하기를 : “옳은 말이오.”라고 하였다.
이후 뭇사람들은 서로 앉아 있게 되면 조나라의  지도자를 칭찬하지 않은 자가 없게 되었으며,

또한 조나라 풍속의 뛰어난 점을 말하지 않은 자가 없었다.]

 

 

鄭同北見趙王

 

鄭同北見趙王.  趙王曰.「子南方之傳士也,何以教之?」

鄭同曰:「臣南方草鄙之人也, 何足問?雖然, 王致之於前, 安敢不對乎?臣少之時, 親嘗教以兵.」

趙王曰:「寡人不好兵.」 鄭同因撫手仰天而笑之曰:「兵固天下之狙喜也,臣故意大王不好也.

臣亦嘗以兵說魏昭王,昭亦曰:『寡人不喜.』 臣曰:『王之行能如許由乎?許由無天下之累,

故不受也. 今王既受先王之傳, 欲宗廟之安, 壤地不削, 社稷之血食乎?』 王曰:「然.」

今有人操隨侯之珠,持丘之環,萬今之財,時宿於野,內無孟賁之威,荊慶之斷,外無弓弩之御,

不出宿夕,人必危之矣. 今有強貪之國,臨王之境,索王之地,告以理則不可,說義義則不聽.

王非戰國守圉之具,其將何以當之?王若無兵,鄰國得志矣.  趙王曰:「寡人請奉教.」

[주난왕 38년(기원전 277), 초나라 사람 정동(鄭同)이 북쪽으로 가 조혜문왕(趙惠文王)을 조현하자, 

조왕이 묻기를 :“ 선생은 남방의 박학다식한 선비라고 하는데 과인에게 무엇을 가르쳐 줄 셈이오?”라고 하자.
정동이 대답하기를 : “저는 남방의 비루한 사람입니다. 그러니 저에게 물을 것이 무엇이 있겠습니까?

비록 그렇기는 하나 대왕께서 이미 물었으니 어찌 감히 대답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저는 어렸을 때 가친으로부터 병법을 배운 바 있습니다.”라고 하였다. 

조왕이 말하기를 :  “과인은 전쟁을 좋아하지 않소.”라고 하자.
이에 정동이 손뼉을 치고 앙천대소하며 말하기를 : “전쟁이란 무릇 천하의 교활한 자들이 좋아하는 것이지요.

저 또한 사실 대왕께서 전쟁을 싫어할 것으로 생각했습니다. 저는 전에 위소왕(魏昭王)에게 병법에 관해 말씀드린

적이 있습니다. 그때 위소왕 역시 말하기를, ‘과인은 전쟁을 좋아하지 않소’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제가 묻기를,

‘대왕께서는 옛날의 은자 허유(許由)가 취한 행동을 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까? 허유는 천하에 얽매이는 것이

싫다고 물러났기 때문에 병법을 배우지 않아도 무사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지금 대왕께서는 이미 선왕으로부터

보위를 이어받았습니다. 지금 종묘의 평안을 기원하고, 영토가 깎이지 않고, 사직의 제사를 계속 행할 수 있기를

바랍니까?라고 했습니다. 그러자 위소왕도 ‘그렇소’라고 했습니다. 지금 어떤 사람이

수후지주(隨侯가 큰 뱀을 구해 주고 얻은 야광주)와 백구지환(둥근 원형에 가운데 구멍이 뚫린 玉器),

1만 금의 재물을 지니고 노숙하게 되었을 경우를 가정해 봅시다. 이때 안으로는 맹분(孟賁)과 같은 힘도,

형경(荊慶: 전설적인 용사인 成荊과 慶忌)와 같은 과감함도 없고, 밖으로는 궁노(弓弩)의 방비도 없다면

밤이 다 새기도 전에 누군가 위해를 가해 올 것입니다. 지금 강하고 탐욕스러운 나라가 대왕의 국경에 출병해

할지를 요구해 왔을 때 도리로써 말해도 안 되고 정의로써 설명해도 납득하지 않을 경우 어찌 하겠습니까?

대왕께서 나라를 방어하고 적을 막아낼 수 있는 무비(武備)가 없다면 과연 무엇으로 대적할 것입니까?

무비가 없으면 이웃 나라들은 틀림없이 바라는 바를 이루고자 할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그러자 조혜문왕이 말하기를 : “과인은 청컨대 가르침을 받고자 하오.”라고 하였다.]

 

 

建信君貴於趙

 

建信君貴於趙. 公子魏牟過趙, 趙王迎之, 顧反至坐,前有尺帛, 且令工以為冠. 工見客來也,因辟.

趙王曰:「公子乃驅後車,幸以臨寡人,愿聞所以為天下.」

魏牟曰:「王能重王之國若此尺痹,則王之國大治矣.」 趙王不說,形於顏色,

曰:「先生不知寡人不肖,使奉社稷,豈敢輕國若此?」 魏牟曰:「王無怒,請為王說之.」

曰:「王有此尺帛,何不令前郎中以為冠?」 王曰:「郎中不知為冠.」

[진시황 3년(기원전 244), 조나라의 총신 건신군이 존경을 받고 있었다. 이때 마침 위나라 공자 위모(魏牟)가

조나라에 들르자 조효성왕이 그를 영접했다. 위모가 귀국하려 할 때 조효성왕은 앞에 있는 1척 크기의 비단이

아까운 나머지 공인(工人)을 시켜 관(冠)을 만들게 했다. 이때 위모가 찾아오자 공인이 이를 보고 자리를 피해 주었다.

이에 조효성왕이 위모에게 묻기를 : “공자는 수고스럽게도 수레를 몰고 과인을 찾아 주었소. 부디 공자로부터

나라를 다스리는 도리를 듣고자 하오.”라고 하자. 위모가 대답하기를 : “만일 대왕의 나라를 이 비단조각과 마찬가지로

아낄 수만 있다면 대왕의 나라는 크게 다스려질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조효성왕이 얼굴에 탐탁치 않은 기색을 완연히 드러내면서 반문히기를 : “선왕은 과인이 불초한 사실을 모르고

과인에게 사직을 받들게 했소. 어찌 감히 사직을 이따위 비단 천조각과 같이 가벼이 취급할 수 있겠소.”라고 하자.
이에 위모가 대답하기를 : “대왕은 노여워하지 마십시오. 대왕에게 자세히 말씀드리겠습니다.”라고 하면서,
이어 말하기를 : “대왕께서는 이 비단 조각을 어찌하여 전낭중(제왕의 신변에서 있는 집사)에게 주어 관을 만들게

하지 않는 것입니까?”라고 하자. 왕이 말하기를 : “낭중은 관을 만들 줄 모르기 때문이오.”라고 하였다.]


魏牟曰:「為冠而敗之,奚巋於王之國?而王必待工而後乃使之. 今為天下之工,或非也,

社稷為虛戾,先王不血食,而王不以予工,乃與幼艾. 且王之先帝,駕犀首而驂馬服,以與秦角逐.

秦當時,適其鋒. 今王憧憧,乃輦建信以與強秦角逐,臣恐秦折王之椅也.」

[그러자 위모가 말하기를 : “관을 만들다가 비단 조각을 훼손한들 대왕의 나라에 무슨 손해가 있겠습니까?

그런데도 왕은 반드시 공인을 불러다 이를 만들게 합니다. 지금 천하의 대신들이 혹여 실수를 하면 사직은 폐허가

되고 맙니다. 그런데도 대왕은 이를 천하의 대신들에게 맡기지 않고 나이 어린 건신군에게 맡기고 있습니다.

대왕의 선제(先帝)는 서수(犀首)와 마복군을 시켜 수레를 몰고 진나라와 각축하게 했습니다.

당시 진나라는 조나라의 힘이 비등한 호적수였습니다. 그런데 지금 대왕은 건신군과 같은 수레에 올라타 이리저리

오가며 강한 진나라와 각축하려 하고 있습니다. 신이 두려운 것은 진나라가 대왕의 수레 받침대를 꺽지 않을까

하는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衛靈公近雍疸彌子瑕

 

衛靈公近雍疸、彌子瑕. 二人者,專君之勢以蔽左右. 復途偵謂君曰:「昔日臣夢見君.」

君曰:「子何夢?」 曰:「夢見灶君.」

[위영공(衛靈公: 위양공의 아들, 이름은 元)이 환관 옹저(雍疽: 「사기」의 雍渠)와 총신 미자하(彌子瑕)를 총애했다.

두 사람은 위영공의 위세를 믿고 좌우 대신들이 위영공 가까이 접근하는 것을 막기 일쑤였다.

이때 복도정이란 자가 위영공에게 말하기를 : “지난번에 꿈을 꾸자 오늘 과연 임금님을 보게 되었습니다.”라고 하였다.
위영공이 묻기를 : “ 그대는 어떤 꿈을 꾸었소.”라고 하자, 복도정은 : “灶君(부뚜막 신)을 보았습니다.”라고 하였다.]


君忿然作色曰:「吾聞夢見入君者,夢見日. 今子曰夢見灶君而言君也,有說則可,無說則死.」
對曰:「日,并燭天下者也,一物不能蔽也. 若若灶則不然,前之人煬,則後之人無從見也.

今臣疑人有煬於君者也,是以夢見灶君.」 君曰:「善.」於是,因廢雍疸、彌子瑕,而立司空狗.

[이에 위영공이 발끈하며 말하기를 : “나는 꿈속에서 해를 본 자는 군주를 보게 된다고 들었소. 그런데 지금 그대는

꿈 속에서 부뚜막을 보았기에 군주를 보게 되었다고 했소. 이치에 맞게 설명을 하면 가하나 그렇지 않으면 살려두지

않을 것이오.”라고 하자.  복도정이 대답하기를 : “해는 대지를 두루 비추니 그 어떤 것도 이를 가릴 수 없습니다.

그러나 아궁이의 불은 그렇지 않습니다. 어떤 사람이 아궁이 앞에서 불을 때면 그가 불을 가리기 때문에 뒤에서는

그 불을 볼 수가 없습니다. 지금 신은 누군가가 군주의 앞을 막고 불을 때고 있는 것이나 아닌지 우려됩니다.

그로 인해 꿈에서 부뚜막을 보았는지 모르겠습니다.”라고 하였다.  위영공은 : “그럴 수도 있겠소.”라고 하였다.
이에 옹저와 미자하를 파면시키고 사공구(司空狗)를 임명하였다.]

 

 

或謂建信君之所以事王者

 

或謂建信:「君之所以事王者,色也. 之所以事王者,知也. 色老而衰,知老而多.

以日多之知,而逐衰惡之色,君必困矣.」 建信君曰:「奈何?」

曰:「并驥而走者,五里而罷;乘驥而御之,不倦而取道多. 君令乘獨斷之車,御獨斷之勢,

以居邯鄲;令之內治國事,外刺諸侯,則之事有不言者矣. 君因言王而重責之,之軸今折矣.」

建信君再拜受命,入言於王,厚任?以事能重責之. 未期年而葺亡走矣.

[어떤 사람이 건신군(建信君)에게 말하기를 : “그대가 대왕을 섬기는 이유는 색에 의한 것이고, 골(蓇)이 대왕을

섬기는 것은 지식에 의한 것입니다. 무릇 색은 오래 될수록 더욱 퇴색되고, 지식은 늙을수록 더욱 많아지는 법이오.

날마다 축적되는 지식이 날로 추하게 퇴색되는 색과 경쟁하면 그대는 필시 곤경에 처할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건신군이 묻기를 : “그렇다면 어찌해야 좋겠소?”라고 하자.
그가 대답하기를 : “천리마와 달리기를 하면 5 리도 못 가서 크게 지치고 말 것입니다. 그러나 천리마가 끄는 수레에

올라 타면 지치지도 않을 뿐만 아니라 훨씬 많을 길을 가게 됩니다. 그대가 골을 고립무원으로 만들어 한단에

머물게 한 뒤 대내적으로는 국정을 다루고, 대외적으로는 제후들에게 횡포를 부리도록 하면 그가 하는 일은

잘못 될 수밖에 없습니다. 그때 그대가 조왕에게 말해 그에게 중임을 맡긴 뒤 엄격히 대하도록 청하면

그는 크게 실패하고 말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건신군이 재배하며 이를 받아들였다. 그리고는 곧 궐내로 들어가

조왕에게 진언해 골에게 국정을 맡기고 엄히 다루도록 청했다. 이에 1년이 채 되기도 전에 골은 도주해 버렸다.]

 

 

苦成常謂建信君

 

苦成常謂建信君曰:「天下合從,而獨以趙惡秦,何也?魏殺呂遺,而天下交之. 今收河間,

於是與殺呂遺何以異? 君唯釋虛偽疾,文信猶且知之也. 從而有功乎,何患不得收河間?

從而無功乎,收河間何益也?」

[진시황 6년(기원전 241), 세객 고성상(苦成常)이 건신군에게 말하기를 : “천하의 제후들이 모두 합종하고 있는데

조나라만 유독 진나라로부터 미움을 받고 있는 것은 무슨 연고입니까? 위나라가 여료(여불위의 신하)를 죽이자

천하의 제후들이 이를 쾌사(快事)로 칭송하며 위나라와 교분을 맺었습니다. 지금 조나라가 하간(河間) 땅을 취하면

여료를 죽이는 것과 무엇이 다르겠습니까? 그대가 비록 진, 조 두 나라 사이의 벌어진 틈을 해소하기 위해

칭병할지라도 문신후(여불위)는 이를 알아챌 것입니다. 만일 합종만 성사되면 하간을 취하지 못한들 무슨 걱정이

있겠습니까? 또한 합종이 성사되지 못하면 하간을 취한들 무슨 도움이 되겠습니까?”라고 하였다.]

 

 

希寫見建信君

 

希寫見建信君.  建信君曰:「文信侯之於仆也,甚無禮.

秦使人來仕,仆官之丞相,爵五大夫. 文信侯之於仆也,臣矣其無禮也.」

希寫曰:「臣以為今世用事者,不如商賈.」

[세객 희사(希寫)가 건신군을 만나자, 건신군이 그에게 말하기를 : “문신후가 나에게 심히 무례한 모습을 보이고 있소.

진나라가 사람을 보내 관직을 요구했을 때 나는 그 사람을 승상으로 삼고 5대부의 작위를 주었소.

그런데도 문신후는 나에게 무례하기 짝이 없는 모습을 보이고 있소.”라고 하자.

희사가 말하기를 : " 제가 보건대 요즘의 위정자는 장사꾼 만도 못합니다.”라고 하였다.]


建信君悖然曰:「足下卑用事者而高商賈乎?」

曰 : 「不然. 夫良商不與人爭買賣之賈, 而謹司時. 時賤而買,雖貴已賤矣;時貴而賣, 雖賤已貴矣.

昔者,文王之拘於牖里,而武王羈於玉門,卒斷紂之頭而縣於天白者,是武王之功也.

今君不能與文信侯相伉以權,而責文信侯少禮,臣竊為君不取也.」

[그러자 건신군이 발끈하며 묻기를 : “그대는 위정자를 낮추고 장사꾼을 높이는 것이오?”라고 하자.
이에 희사가 대답하기를 : “그렇지는 않습니다. 무릇 양심적인 상인은 물건 값을 놓고 사람과 다투지 않습니다.

다만 신중히 매매의 시기를 정확히 파악할 뿐입니다. 시가가 낮을 때 사면 아무리 비싸게 사더라도 싸게 산 것이고,

시가가 높을 때 팔면 아무리 싸게 팔지라도 비싸게 판 셈입니다. 옛날 주문왕은 유리(羑里)에 갇히고,

주무왕은 옥문(玉門)에 얽매였습니다. 그러나 결국 은주(殷紂)의 목을 베어 태백기(太白旗)에 매달았으니

이는 무왕의 공입니다. 지금 그대는 기회를 엿보기는 커녕 오히려 문신후와 힘을 겨루면서

그의 무례를 책망하고 있습니다. 나는 그대를 위해 우려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라고 하였다.

 

 

魏尬謂建信君

 

魏尬謂建信君曰:「人有置系蹄者而得虎. 虎怒,決蹯而去. 虎之情非不愛其蹯也.

然而不以環寸之蹯,害七軾之軀者,權也. 今有國,非直七尺軀也. 而君之身於王,

非環寸之蹯也. 愿公之熟圖之也.」

[세객 위괴가 건신군에게 말하기를 : “올가미로 호랑이를 잡은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러자 호랑이는 울부짖으며

자신의 발을 끊고 도망쳐 버렸습니다. 호랑이는 그 발을 아끼지 않은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한 치밖에 안 되는

작은 발 때문에 7척이나 되는 몸을 해치지 않았으니 이는 곧 경중을 따졌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나라를 보전하는 것은

단지 7척의 몸을 보전하는 것과 같은 차원이 아닙니다. 그대의 몸은 군주의 입장에서 볼 때 한 치의 발 만큼도

아까운 것이 아닙니다. 원컨대 그대는 깊이 헤아려 주시기 바랍니다.”라고 하였다.]

 

 

秦攻趙鼓鐸之音聞於北堂

 

秦攻趙,鼓鐸之音聞於北堂.  希卑曰:「夫秦之攻趙,不宜急如此. 此召兵也. 必有大臣欲衡者耳.

王欲知其人,旦日贊群臣而訪之,先言橫者,則其人也. 」建信君果先言橫. 

[진시황 11년(기원전 236), 진나라가 조나라를 공격했다. 격탁(‘탁’은 영을 발포하거나 전쟁 때 사용하는 큰 방울)

소리가 북당(성내의 북쪽 마을)까지 들리자 세객 희비(希卑)가 조효성왕에게 말하기를 : “무릇 진나라가 조나라를

공격하면서 이같이 단숨에 공격해 올 리는 없습니다. 혹여 격탁 소리가 내응을 알리는 신호가 아닐까 생각됩니다.

필히 대신 중에 진나라와의 연횡을 주장한 자가 있을 것입니다. 대왕이 그 자를 알고 싶으면 내일 아침 군신들을

모아 놓고 물어보십시오. 제일 먼저 연횡을 내세우는 자가 바로 그 자입니다.”라고 하였다.
과연 건신군이 제일 먼저 연횡을 주장했다.]

 

 

齊人李伯見孝成王

 

齊人李伯見孝成王. 成王說之,以為代郡守. 而居無幾何,人告之反. 孝成王方饋,不墮食. 

無幾何,告者復至,孝成王不應.  已,乃使使者言:「齊舉兵擊燕,恐其以擊燕為名,

而以兵襲趙,故發兵自備.  今燕、齊已合,臣請要其敝,而地可多割.」 

自是之後,為孝成王從事於外者,無自疑於中者.

[제나라 사람 이백(李伯)이 조효성왕을 배견하자, 조효성왕이 이내 그를 좋아하게 되었다. 

이에 곧바로 그를 36개 현을 관할하는 대군(代郡)의 태수로 삼았다.

그러나 얼마 후 이백이 배반했다는 소식이 올라왔다. 그때 조효성왕은 마침 식사 중이었는데 수저를 놓지 않았다.

잠시 후 또 다른 자가 달려와 같은 소식을 전했다. 그러나 조왕은 이때도 전혀 응답하지 않았다.

이윽고 이백이 조효성왕에게 사자를 보내 이같이 전했다.
“제나라가 군사를 일으켜 연나라를 공격한다는 소식을 듣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혹여 겉으로만 연나라 공벌을

떠벌이면서 조나라를 습격하는 것이나 아닌지 걱정되어 이내 출병하여 스스로 대비하고 있습니다.

지금 연, 제 두 나라는 이미 교전하고 있습니다.

신은 청컨대 두 나라 군사가 지친 틈을 타 많을 땅을 취하고자 합니다.”라고 하였다.
이 일이 있은 이후 조효성왕을 위해 변경에서 근무하는 관원 중 조정에 의심을 품는 자는 한 사람도 없게 되었다.]

 

   趙策 四 .

 

 

為齊獻書趙王

 

為齊獻書趙王,使臣與復醜曰:「臣一見,而能令王坐而天下致名寶. 而臣竊怪王之不試見臣,

而窮臣也. 群臣必多以臣為不能者,故王重見臣也. 以臣為不能者,非他,欲用王之兵, 成其私者也.

非然,則交有所偏重者也;非然,則知不足者也;非然,則欲以天下之重恐王,而取行於王者也.

臣以齊循事王,王能亡燕,能亡韓、魏,能攻秦,能孤秦. 臣以為齊致尊名於王,

天下孰敢不致尊名於王? 臣以齊致地於王,天下孰敢不致地於王? 臣以齊為王求名於燕及韓、魏,

孰敢辭之? 臣之能也,其前可見已. 齊先重王,故天下盡重王;無齊,天下必盡輕王也.

秦之強,以無齊之故重王,燕、魏自以無齊故重王.  今王無齊獨安得無重天下? 故勸王無齊者,

非知不足也,則不忠者也.  非然,則欲用王之兵成其私者也;非然,則欲輕王以天下之重,

取行於王者也;非然,則位尊而能卑者也.  愿王之孰慮無齊之利害也.」

[어떤 사람이 제나라를 위해 조왕에게 상서를 올렸다.
“신은 단 한 번의 조현으로 대왕이 앉은 자리에서 천하의 제후들로부터 조공을 받을 수 있도록 도모할 수 있습니다.

신은 대왕께서 왜 신을 불러들여 시험해 보지 않고 대왕을 조현조차 할 수 없는 곤경에 처하게 만드는 것인지

이해할 수 없습니다. 군신들 중 여러 사람이 필시 신을 무능한 자로 몰아 붙이고 있을 것입니다.

대왕께서 신의 조현을 꺼리는 것도 이 때문일 것입니다. 그러나 신을 무능한 자로 몰아붙이는 자는 다름 아니라

대왕의 군사를 이용해 사욕을 채우려는 자들입니다. 그것이 아니라면 외교상 특정 국가를 위해 일하는 자일 것입니다.

그도 아니면 머리가 모자라는 자들일 것입니다. 만일 그것도 아니라면 천하 제후들의 힘을 빌어 대왕을 위협함으로써

대왕으로 하여금 자신들이 원하는 바대로 일을 추진하도록 획책하는 자들일 것입니다. 저는 능히 제나라로 하여금

대왕을 따르도록 만들 수 있습니다. 대왕은 능히 연나라를 멸망시키고, 한, 위 두 나라를 멸망시키고,

진나라를 공격하고, 더 나아가 진나라를 고립무원의 상태로 만들 수 있습니다. 신이 제나라로 하여금 대왕에게

제호(帝號)을 바치게 하면 천하의 제후들 중 그 누가 감히 대왕에게 목숨을 바치지 않겠습니까?

신이 제나라로 하여금 대왕에게 땅을 바치게 하면 천하의 제후들 중 그 누가 감히 대왕에게 땅을 바치지 않겠습니까?

신이 제나라로 하여금 대왕을 위해 연, 한, 위 3국에게 존명을 바치도록 요청케 하면 그 누가 감히 거절하겠습니까?

신의 능력은 일이 일어나기 전에 미리 살필 수 있을 것입니다. 제나라가 우선 대왕을 높이면 천하의 제후들도 모두

대왕을 높일 것입니다. 대왕에게 제나라가 없으면 천하의 제후들이 모두 필시 대왕을 업신여길 것입니다.

진나라도 막강한 위세로 제나라를 끌어들이지 못하면 대왕을 높일 것입니다. 연, 한, 위 3국도 제나라를 끌어들이지

못하면 스스로 대왕을 높일 것입니다. 지금 대왕에게 제나라가 없게 되면 대왕 혼자의 힘만으로 어찌 천하의

제후들로부터 존중받을 수 있겠습니까? 지금 대왕에게 제나라가 없어도 된다고 주장하는 자들은 모두 머리가

부족하거나 충성되지 못한 자들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대왕의 군사를 이용해 사욕을 채우려는 자들일 뿐입니다.

그도 아니라면 대왕을 업신여긴 나머지 천하 제후들의 힘을 빌어 대왕을 위협함으로써 대왕으로 하여금 자신들이

바라는 바를 행하도록 꾀하는 자들입니다. 만일 그마저 아니라면 지위만 존귀하고 무능하기 그지없는 자들일

뿐입니다. 원컨대 대왕께서는 제나라가 없는 상황에 따른 이해를 깊이 헤아리시기 바랍니다.”라고 하였다.]

 

 

齊欲攻宋

 

齊欲攻宋,秦令起賈禁之.  齊乃捄趙以伐宋.  秦王怒,屬怨於趙.

李兌約五國以伐秦,無功留天下之兵於成皋,而陰構於秦.  又欲與秦攻魏,以解其怨而取封焉.

[주난왕 28년(기원전 287), 제나라가 송나라를 치려고 하자 진나라가 기가(起賈: 姚賈)를 보내 이를 저지했다.

그러자 제나라가 조나라를 자기 편으로 끌어들인 후 마침내 송나라를 쳤다. 이에 진소양왕이 대노하여 마침내

그 원한을 조나라에게 돌렸다. 이때 이태(李兌)가 5국(연, 제, 위, 한, 조)의 군사를 연합해 진나라를 공격하였으나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이태는 곧 제후들의 군사를 성고(成皐)에 머물게 하고는 은밀히 진나라와 강화했다.

그리고는 진나라와 함께 위나라를 공격해 진나라의 원한을 풀어주는 대신 자신의 봉읍으로 삼을 땅을 얻고자 했다.]

 

魏王不說,之齊,謂齊王曰:「臣為足下謂魏王曰:『三晉皆有秦患,今之攻秦也,為趙也.

五國伐趙,趙必亡矣. 秦逐李兌,李兌必死. 今之伐秦也,以救李子之死也. 今趙留天下之甲於成皋,

而陰鬻之於秦, 已講,則令秦攻魏以成其私封,王之事趙也何得矣? 且王嘗濟於漳,而身朝於邯鄲,

抱陰、成,負蒿、葛、薜,以為趙蔽,而趙無為王行也. 今又以何陽、姑密封其子,而乃令秦攻王,

以便取陰. 人比然而後如賢不,若王若用所以事趙之半收齊,天下有敢謀王者乎? 王之事齊也,

無入朝之辱,無割地之費. 齊為王之國外,虛國於燕、趙之前用兵於二千里之外,故攻城野戰,

未嘗不為王便被矢石也. 得二都,割河東,盡效之於王.

[위소왕이 크게 분개하자 소진이 제나라로 가서 제민왕에게 말하기를 : “신이 족하를 위해 위왕에게 진언하기를,

‘3진은 모두 진나라로 인한 우환을 갖고 있습니다. 지금 진나라를 공격하는 것은 조나라를 위한 것입니다.

5국(五國: 秦, 趙 이외의 5국)이 조나라를 공격하면 조나라는 틀림없이 망할 것입니다. 진나라가 이태를 몰아내면

이태는 틀림없이 죽을 것입니다. 따라서 지금 진나라를 공격하는 것은 이태를 죽음에서 살려주는 것입니다.

지금 조나라는 천하 제후들의 군사를 성고에 머물게 하고는 몰래 진나라에 팔아 넘겼습니다. 강화가 이뤄지면

진나라와 합세해 위나라를 공격한 뒤 자신의 봉읍을 취하려는 것입니다. 그러니 대왕이 조나라를 섬긴들

무슨 이익이 있겠습니까. 게다가 대왕은 전에 장수(漳水)를 건너가 한단에 입조한 뒤 음성(陰成)과 갈얼(葛孼) 땅을

내놓고는 조나라의 울타리가 되었습니다. 그런데도 조나라는 대왕에게 아무런 도움도 되지 않았습니다.

지금 또 이태가 하양(何陽)과 고밀(姑密)에 자신의 아들을 봉하고 진나라와 합세해 대왕을 공격하면

도(陶) 땅까지 쉽게 취할 수 있습니다. 사람은 비교해 보아야만 비로소 현명한지 여부를 알 수 있습니다.

만일 대왕께서 조나라를 대하는 마음의 절반만이라도 갖고 제나라를 섬기면 천하의 제후들 중 그 누가 감히 대왕을

도모할 수 있겠습니까? 대왕께서 제나라를 섬기면 욕되게 입조할 필요도 없고, 땅을 떼어 줄 필요도 없습니다.

게다가 제나라는 대왕을 위해 전 군을 동원하여 연, 조 두 나라의 변경을 개척하는 등 2천 리 밖에서까지 용병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공성(攻城)과 야전에서 대왕을 위해 선봉이 되어 시석(矢石)을 뒤집어 쓰지 않은 적이 없습니다.

두 도읍을 얻은 뒤에는 하동(河東: 장하의 동쪽으로 제, 위의 접경지대)을 떼어 모두 대왕에게 보내주었습니다.

 

自是之後,秦攻魏,齊甲未嘗不歲至於王之境也. 請問王之所以報齊者可乎?

魏呡處於趙,去齊三千里,王以此疑齊,曰有秦陰. 今王又挾國外薛公以為相,善韓徐以為上交,

尊虞商以為大客,王固可以反疑齊乎?』與魏王聽此言也甚詘,其欲事王也甚循. 其怨於趙.

臣愿王之曰聞魏而無庸見惡也,臣請為王推其怨於趙,愿王之陰重趙,而無使秦之見王之重趙也.

秦見之且亦重趙. 齊、秦交重趙,臣必見燕與韓、魏亦且重趙也,皆且無敢與趙治.

五國事趙,趙從親以合於秦,必為王高矣. 臣故欲王之偏劫天下,而皆私甘之也.

王使臣以韓、魏與燕劫趙,使丹也甘之;以趙劫韓、魏,使臣也甘之;以三晉劫秦,使順也甘之;

以天下劫楚,使呡也甘之. 則天下皆偪秦以事王,而不敢相私也. 交定,然後王擇焉.」

[이 이후로 진나라가 위나라를 공격하면 제나라 군사가 구원 차 조나라 국경까지 출병하지 않은 해가 없었습니다.

대왕께 묻건대 대왕은 장차 무엇으로 제나라에 보답할 것입니까? 전에 제나라 재상을 지낸 한문(韓呡)?이

지금 초나라로 가 제나라에서 3천 리나 떨어진 곳에 있습니다. 그런데도 대왕께서는 제나라를 의심하여

한문이 제나라를 위해 진나라와 음모를 꾸미는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지금 대왕은 제나라에 있던 설공(맹상군)을

포섭하여 재상으로 삼고, 조나라 장수 한서(韓徐: 한서위)를 좋아하여 지기(知己)로 삼고, 우상(虞商)을 귀빈으로

대하고 있습니다. 그런데도 지금 대왕은 어찌하여 제나라를 의심하는 것입니까?라고 할 것입니다.
위왕이 이 말을 들으면 크게 심복한 나머지 제나라를 좇으면서 조나라를 원망할 것입니다.

원컨대 대왕께서는 속히 위왕으로 하여금 대왕이 위왕을 얼마나 중히 여기고 있는지를 알 수 있도록 만드십시오.

신은 대왕을 위해 위나라가 조나라를 원망하도록 만들겠습니다. 원컨대 대왕께서는 은밀히 조나라를 높이면서

진나라가 이를 전혀 눈치채지 못하도록 주의하십시오. 진나라가 이를 알면 똑같이 조나라를 높일 것입니다.

제, 진 두 나라가 서로 조나라를 떠받들면 신은 연, 한, 위 3국도 필시 조나라를 떠받들 것으로 봅니다.

이리되면 모두 조나라와 대적하지 않으려 할 것입니다. 연, 한, 위 3국이 조나라를 섬기면 조나라는 진나라까지

합종에 끌어들인 뒤 틀림없이 칭왕보다 더 높은 칭호를 논의하고자 할 것입니다. 그래서 신은 대왕이 천하의

제후들로 하여금 서로 충돌하게 만들면서 암암리에 호언권설(好言勸說)로 중재자의 역할을 하기 바라는 것입니다.

대왕께서는 연, 한, 위 3국이 조나라를 위협하도록 한 뒤 연나라 태자 단(丹)을 보내 중재하게 하고,

조나라가 한, 위 두 나라를 위협하도록 한 뒤 신을 보내 이를 회유하고, 3진이 진나라를 위협하도록 한 뒤

제나라 공자 순(順)을 보내 중재하게 하고, 천하의 제후들이 초나라를 위협하도록 한 뒤 한문(韓?)을 보내 중재하게

하십시오. 그러면 천하의 제후들은 모두 진나라와 맞선 채 대왕을 섬길 것입니다. 그리되면 암암리에 진나라와

결탁하는 일도 하지 않을 것입니다. 제후들과의 친교가 마무리되면 대왕에게 유리할 것입니다. 천하의 제후들이

조나라를 섬기는 것과 대왕을 섬기는 것 중 어느 쪽이 유리한지 대왕께서 선택하도록 하십시오.”라고 하였다.]

 

 

齊將攻宋而秦楚禁之

 

齊將攻宋,而秦、楚禁之.  齊因欲與趙,趙不聽. 齊乃令公孫衍說李兌以高溫宋而定封焉.
李兌乃謂齊王曰:「臣之所以堅三晉以攻秦者,非以為齊得利秦之毀也,欲以使攻宋也.

而宋置太子以為王,下親其上而守堅,臣是以於足下之速歸休士民也.
今太子走,諸善太子者,皆有死心. 若復攻之,其國必有亂,而太子在外,此亦舉宋之時也.
臣為足下使公孫衍說奉陽君曰免君之身老矣,封不可不早定也. 為君慮封,莫如予宋,他國莫可.

夫秦人貪,韓、魏危,燕、楚辟,中山之地薄,莫如於陰. 失今之時,不可復得已.

宋之罪重,齊之怒深,殘亂宋,得大齊,定身封,此百代之一時也.
『以奉陽君甚食之, 唯得大封, 齊無大異. 臣愿足下之大肆發攻宋之舉, 而無庸致兵, 姑待以耕,

以觀奉陽君之應足下也.  縣陰以甘之,循有燕以臨之,而臣待忠之風,事必達成.

臣又愿足下有地效於襄安君以資臣也.  足下果殘宋,此兩地之時也,足下何愛焉?

若足下不得志於宋,與國何敢望也. 足下以此資臣也,臣循燕觀趙,則足下擊潰而決天下矣.」

[주난왕 28년(기원전 287), 제나라가 송나라를 치려고 하자 진, 초 두 나라가 이를 말렸다.

제나라는 조나라와 합세해 송나라를 공격하고자 했으나 조나라가 이를 듣지 않았다. 제나라는 다시 소진을 이태에게

보내 속히 송나라를 공격하여 봉양군의 봉지를 확정하도록 설득하게 했다. 그러자 이태가 제민왕에게 말하기를:
“신이 3진을 굳건히 하여 진나라를 치고자 하는 것은 제나라로 하여금 조나라에게 덕을 베풀게 하려는 것이 아닙니다.

이는 진나라를 쉽게 패배시켜 여력이 없는 틈을 노려 제나라로 하여금 송나라를 치게 하려는 것입니다.

송나라가 태자를 옹립하여 백성들이 새 군주를 존경하며 굳게 보위에 나서면 신은 족하(제민왕)로 하여금

속히 철군하여 사민(士民)을 휴식하게 만들려는 것입니다. 지금 태자가 도주하자 죽음으로써 태자를 보위하고자

하는 무리들이 필시 태자를 뒤따를 것입니다. 만일 다시 한번 공격하면 송왕(宋王: 송강왕 偃)을 추종하는 무리와

태자를 추종하는 무리 사이에 필시 분쟁이 일어날 것입니다. 태자가 밖에 있는 지금이야말로 송나라를 멸할 수 있는

호기입니다. 신이 대왕을 위해 소진을 시켜 봉양군을 설득하기를, ‘공은 나이가 많으니 봉지를 시급히 확정짓지

않으면 안 되오. 공을 위해 봉지를 생각건대 송나라보다 나은 곳은 없소. 다른 나라에는 그같이 적당한 땅이 없소.

무릇 진나라 사람은 탐욕스럽고, 한, 위 두 나라는 위태롭고, 연, 초 두 나라는 벽지이고, 중산국은 척박하오.

그러니 도(陶)보다 나은 땅은 아무 곳에도 없소. 이번 기회를 놓치면 두 번 다시 이같은 기회를 얻을 수 없소.

지금 송왕이 지은 죄는 무겁고, 제나라의 노여움은 깊소. 무도한 송나라를 멸하고 강대한 제나라를 끌어들여

자신의 봉지를 확정하는 일이야말로 천재일우의 기회요’라고 하겠습니다. 그리하면 봉양군은 필시 소진의 건의를

따르고자 할 것입니다. 그가 설령 커다란 봉지를 얻는다 할지라도 제나라에는 아무런 해가 되지 않습니다.

원컨대 대왕께서는 군사를 크게 일으켜 송나라를 공격하도록 하십시오. 다른 나라의 도움을 받을 필요는 없습니다.

자신의 힘에 기대어 장차 봉양군이 대왕에게 어찌 대하는지를 지켜 보도록 하십시오. 도(陶) 땅을 미끼로 내걸고

연나라를 따르며 조나라를 제압하면 저는 충심으로 봉양군이 스스로를 위해 봉지를 확정하는 것을 축하할 것입니다.

그리하면 틀림없이 송나라를 멸하는 쾌거를 이룰 수 있습니다. 원컨대 대왕은 연나라 종실인 양안군(襄安君)에게

땅을 떼어준 후 연나라를 길들이고자 하는 신을 도와주기 바랍니다. 대왕이 과연 송나라를 멸망시킬 수만 있다면

이 두 곳의 봉지야 애석해 할 일이 무엇이 있겠습니까? 만일 대왕이 송나라를 멸하지 못하면 동맹국인 연나라야

어찌 감히 땅을 바랄 수 있겠습니까? 대왕께서는 송나라를 공격하여 신을 도와주기 바랍니다.

신은 연나라를 길들이면서 조나라의 움직임을 예의 주시하도록 하겠습니다. 그리하면 대왕께서는 손쉽게

송나라를 멸하고 제후들을 제압할 수 있을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五國伐秦無功

 

五國伐秦無功,罷於成皋.  趙欲構於秦,楚與魏、韓將應之,秦弗欲.
蘇代謂齊王曰:「臣以為足下見奉陽君矣. 臣謂奉陽君曰:『天下散而事秦,秦必據宋.

魏冉必妒君之有陰地也. 秦王貪,魏冉妒,則陰不可得已矣. 君無構,齊必攻宋. 齊攻宋,

則楚必攻宋,魏必攻宋,燕、趙助之. 五國據宋,不至一二月,陰必得矣. 得陰而構,秦雖有變,

則無患矣. 若不得已而必構, 則愿五國復堅約. 愿得趙, 足下雄飛, 與韓氏大吏東免, 齊王必無召呡也.

使臣守約, 若與有倍約者, 以四國攻之. 無倍約者, 而秦侵約, 五國復堅而賓之.今韓、魏與齊相疑也,

若復不堅約而講,臣恐與國之大亂也. 齊、秦非復合也,必有踦重者矣.  後合與踦重者,

皆非趙之利也. 且天下散而事秦,是秦制天下也. 秦制天下,將何以天下為? 臣愿君之蚤計也.

[주난왕 28년(기원전 287), 5국(제, 초, 한, 위, 조)이 진나라를 쳤으나 성과가 없자 이내 성고(成皐)로 철군했다.

조나라가 진나라와 강화하려고 하자 초, 위, 한 3국은 이에 응했으나 제나라는 이를 꺼려했다.

그러자 소대(蘇代)가 제민왕에게 말하기를 : “신이 대왕을 위해 봉양군을 만나 이르기를, ‘천하의 제후들이 합종을

해체하고 진나라를 섬기면 진나라는 틀림없이 송나라를 점거하고, 위염은 그대의 도(陶) 땅 점거를 시기할 것이오.

진왕(진소양왕)이 탐내고 위염이 시기하면 그대는 도 땅을 손에 넣을 수 없을 것이오. 그러나 그대가 진나라와 강화를

맺지 않으면 제나라는 필시 송나라를 공격할 것이오. 제나라가 송나라를 치면 초나라도 틀림없이 송나라를 칠 것이고,

위나라도 반드시 송나라 공벌에 나서고 연, 조 두 나라가 이를 돕고자 할 것이오. 5국이 송나라를 공격하면 도 땅은

채 한 두달도 안 돼 수중에 떨어질 것이오. 그대가 도 땅을 수중에 넣은 뒤 강화를 맺으면 진나라가 비록 표변한들

아무 걱정을 하지 않아도 좋을 것이오. 만일 도 땅을 수중에 넣기 전에 부득이 강화를 맺어야 할 상황이 되면

5국으로 하여금 다시 한번 합종의 맹약을 맺도록 하시오. 조나라와 친선하고자 하면 그대는 힘을 얻어 한나라와

가까이 함으로써 동쪽으로 제왕을 기쁘게 할 수 있소. 그러면 제나라는 반드시 제, 진 간의 화친을 주장하는

한문을 불러들이지 않게 될 것이오. 합종을 굳게 한 뒤 만일 배신자가 나오면 다른 4국이 합세해 이를 공벌하도록

해야 하오. 배약자가 없는데도 진나라가 동맹국을 침범할 때는 5국이 다시 굳게 결속해 이를 물리쳐야 하오.

지금 한, 위 두 나라와 제나라는 서로 의심하고 있소. 만일 합종을 다시 굳건히 하지 않는 채 진나라와 강화하면

동맹국들이 크게 어지러워지지 않을까 우려되오. 제, 진 두 나라가 대립하게 되면 나머지 나라들은 어느 한 쪽에

붙을 수밖에 없어 반드시 힘의 균형이 무너지게 될 것이오. 제, 진 두 나라가 화친하여 균형을 유지하든 대립하여

한쪽으로 균형이 기울어지든 양쪽 모두 조나라에게는 불리하오. 게다가 천하의 제후들이 합종을 해체하고 진나라를

섬기면 이는 곧 진나라가 천하를 제패하는 것을 뜻하오. 진나라가 천하를 제패하면 조나라는 장차 천하의 제후들을

이끌고 무슨 일을 할 수 있겠소. 원컨대 그대는 속히 계책을 마련하도록 하시오.

 

「『天下爭秦有六舉,皆不利趙矣. 天下爭秦,秦王受負海內之國,合負秦之交,以據中國,

而求利於三晉,是秦之一舉也. 秦行是計, 不利於趙, 而君終不得陰, 一矣. 天下爭秦,

秦王內韓珉於齊, 內成陽君於韓, 相魏懷於魏, 復合衍交兩王, 王賁、韓他之曹, 皆起而行事,

是秦之一舉也. 秦行是計也,不利於趙,而君又不得陰,二矣. 天下爭秦,秦王受齊受趙,

三強三親,以據魏而求安逸可,是秦之一舉也.  秦行是計,齊、趙應之,抱安邑而信秦,

秦得安邑之饒,魏為上交,韓必入朝秦,過趙已安邑矣,是秦之一舉也. 秦行是計, 不利於趙,

而君必不得陰, 三矣. 天下爭秦,秦堅燕、趙之交, 以伐齊收楚,與韓呡而攻魏,是秦之一舉也.

秦行是計,而燕趙應之. 燕、趙伐齊,兵始用,秦因收楚而攻魏,不至一二月,魏必破矣.

[천하의 제후들이 진나라를 섬기면 진나라가 취할 수 있는 계책은 모두 6 가지가 있소. 6 가지 계책 모두 조나라에게는 불리하오. 천하의 제후들이 진나라를 섬기면 진왕은 제나라를 받아들이고, 합종을 깨고 이산된 나라들과 손을 잡고

중국(中國: 3진을 지칭)을 제압한 뒤 그 이익을 3진에서 취하고자 할 것이오. 이는 진나라가 취할 수 있는 일책이오.

진나라가 이 계책을 취하면 조나라에 불리하고 그대는 끝내 도 땅을 얻을 수 없게 되오. 이것이 첫 번째 계책이오.

천하의 제후들이 진나라를 섬기면 진왕은 한민을 제나라, 성양군을 한나라로 끌어들인 뒤 위회(魏懷)를

위나라의 재상으로 삼을 것이오. 이어 다시 연횡으로 초, 초 두 나라 군왕과 친교하고자 하면 두 나라의 왕분(王賁) 및

한타(韓他)와 같은 신하들이 모두 앞장서 역할을 할 것이오. 이는 진나라가 취할 수 있는 일책이오. 진나라가

이 계책을 취하면 조나라에게 불리하고 그대 또한 도 땅을 손에 넣을 수 없게 되오. 이것이 두 번째 계책이오.

천하의 제후들이 진나라를 섬기면 진왕은 제나라를 받아들인 뒤 조나라까지 받아들일 것이오. 이들 3강(三强)이

서로 친교하게 되면 진나라는 위나라를 치고 안읍(安邑)을 취하고자 할 것이오. 이는 진나라가 취할 수 있는 일책이오.

진나라가 이 계책을 취하면 제, 조 두 나라가 이에 응할 것이오. 그리 되면 위나라는 공벌을 당하기 전에 안읍을

봉헌하여 진나라 땅을 넓혀줄 것이오. 진나라가 안읍을 취해 부유해지고 위나라와 친교하게 되면 한나라는 틀림없이

진나라에 입조할 것이오. 그리되면 진나라는 조나라에 대해 안읍과 같은 땅을 봉헌하도록 요구해 올 것이오.

이는 진나라가 취할 수 있는 일책이오. 진나라가 이 계책을 취하면 조나라에 불리하고 그대는 필시 도 땅을 손에

넣을 수 없을 것이오. 이것이 세 번째 계책이오. 천하의 제후들이 진나라를 섬기면 진나라는 연, 조 두 나라와

친교를 굳힌 뒤 제나라를 치고, 초, 한 두 나라와 연합해 위나라를 이오. 이는 진나라가 취할 수 있는 일책이오.

진나라가 이 계책을 취하면 연, 조 두 나라가 이에 응할 것이오. 연, 조 두 나라가 제나라를 치면서 군사를 움직이기

시작하면 진나라는 초나라와 연합해 위나라를 칠 것이오. 그리되면 한 두달도 채 안 돼 위나라는 패하고 말 것이오.


秦匯安邑而塞女戟,韓之太原絕,下軹道、南陽、好,伐魏,絕韓,包二周,即趙自消爍矣.

國燥於秦,兵分於齊,非趙之利也. 而君終身不得陰,四矣. 天下爭秦,秦堅三晉之交攻齊,

國破曹屈,而兵東分於齊,秦桉兵攻魏,取安邑,是秦之一舉也. 秦行是計也,君桉救魏,

是以攻齊之已弊,救與秦爭戰也;君不救也,韓、魏焉免西合? 國在謀之中,而君有終身不得陰,

五矣.  天下爭秦,秦安為義,存亡繼絕,固危扶弱,定無罪之君,必起中山與勝焉.

秦起中山與勝,而趙、宋同命,何暇言陰? 六矣.  故曰君必無講,則陰必得矣.』
奉陽君曰:『善.』 乃絕和於秦,而收齊、魏以成取陰.」

[진나라가 안읍을 점거하고 한나라와 가까운 태행산(太行山) 서쪽의 여극(女戟)을 봉쇄하면 한나라의 태행산으로

가는 길은 막히고 말 것이오. 다시 지도(軹道)와 남양(南陽)으로 내려와 위나라를 치며 한나라를 봉쇄하고,

양주(兩周)를 포위하면 조나라는 스스로 깎이고 쇠약해지게 될 것이오. 국가가 진나라로 인해 쇠약해고,

군사가 제나라에 분견(分遣)되어 있는 것은 조나라에게 불리한 일이오. 그대 또한 평생 음 땅을 손에 넣을 수 없을

것이오. 이것이 네 번째 계책이오. 천하의 제후들이 진나라를 섬기면 진나라는 3진과의 친교를 굳건히 한 후

제나라를 치게 될 것이오. 그렇게 되면 조나라는 피폐해져 이내 재력은 바닥이 나고 군사는 동쪽 제나라로 분견될

수밖에 없소. 이에 진나라는 위나라를 치고 안읍을 취할 것이오. 이는 진나라가 취할 수 있는 일책이오.

진나라가 이 계책을 취할 때 그대가 위나라를 구하고자 하면 제나라를 치느라고 이미 지쳐버린 군사들을 이끌고 와

진나라 군사와 싸워야만 하오. 그대가 위나라를 구하지 못하면 한, 위 두 나라가 서쪽의 진나라와 연합하는 것을

어찌 피할 수 있겠소. 국가의 명운이 진나라에 의해 좌우되고 그대 또한 평생 음 땅을 손에 넣을 수 없을 것이오.

이것이 다섯 번째 계책이오. 천하의 제후들이 진나라를 섬기면 진나라는 거짓으로 의를 내세워 존망계절을 행하고,

위기에 처한 약소국을 일으켜 세우고, 죄없는 군주를 돕고자 할 것이오. 이는 진나라가 취할 수 있는 일책이오.

진나라가 이 계책을 취하면 틀림없이 조나라에 의해 멸망한 중산국과 송나라에 의해 멸망한 등나라를 다시 일으켜

세울 것이오. 진나라가 중산국과 등나라를 다시 일으켜 세우면 조, 송 두 나라는 같은 운명에 처하고 말 것이오.

그러니 어느 여가에 음 땅을 운위할 수 있겠소. 이것이 여섯 번째 계책이오. 그래서 내가 그대에게 진나라와

강화하지만 않으면 음 땅을 손에 넣을 수 있다고 말한 것이오?’라고 했습니다. 그러자 봉양군이 응답하기를,

‘과연 그 말이 옳소’라고 했습니다. 그리고는 곧 진나라와의 강화 작업을 중지한 채 제, 위 두 나라와 연합해

음 땅을 취하려 하고 있습니다.”라고 하였다.]

 

 

樓緩將使伏事辭行

 

樓緩將使,伏事,辭行,謂趙王曰:「臣雖盡力竭知,死不復見於王矣.」

王曰:「是何言也? 固且為書而厚寄卿.」 樓子曰:「王不聞公子牟夷之於宋乎? 非肉不食.

文張善宋,惡公子牟夷,寅然. 今臣之於王非宋之於公子牟夷也,而惡臣者過文張.

故臣死不復見於王矣.」 王曰:「子勉行矣,寡人與子有誓言矣.」樓子遂行.

後以中牟反,入梁. 候者來言,而王弗聽,曰:「吾已與樓子有言矣.」

[누완(樓緩)이 밀사로 지명되어 출사(出使)의 임무를 숨길 수밖에 없게 되었다. 누완은 밀사의 사실을 모르는 자들의

참언으로 인해 득죄할까 두려워 조혜문왕에게 이같이 하직인사를 하면서 말하기를 : “신이 비록 있는 힘과 지혜를

다하겠지만 장차 생전에 대왕을 다시 만나지 못할 듯합니다.”라고 하였다.  조혜문왕이 묻기를 : “그게 무슨 말이오?

내가 틀림없이 경에게 중책을 맡긴 사연을 담은 서신을 건네주도록 하겠소.”라고 하였다.
조혜문왕이 자신의 의중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자, 누완이 말하기를 : “대왕께서는 공자 모이(牟夷)가 송나라에

있었던 얘기를 듣지 못했습니까? 공자 모이는 존귀한 신분이었으나 타국 사람인 문장(文張)이 송왕의 총애를 기화로

공자 모이를 무함하자 송나라가 그이 무함을 그대로 받아들였습니다. 지금 신과 대왕 사이는 송나라와 공자 모이의

관계도 못되는데 신을 중상하는 자들은 문장도 감히 따르지 못할 정도입니다. 신은 생전에 대왕을 재회하지 못할

듯합니다.”라고 하자,  조혜문왕이 말하기를 : “그대는 심려하지 말고 속히 떠나도록 하오. 과인은 그대에 관한 무함을

결코 받아들이지 않을 것을 맹서하겠소.”라고 하였다. 누완이 밀사로 떠났다가 중모읍(中牟邑)이 반기를 들자,

조나라를 등지고 위나라로 도주했다. 정탐꾼이 돌아와 이를 알리자 조왕은 이를 듣지 않았다.
그리고 말하기를 : “나는 누자와 맹서한 바가 있소.”라고 하였다.]

 

 

虞卿請趙王

 

虞卿請趙王曰:「人之情, 寧朝人乎?寧朝於人也?」趙王曰:「人亦寧朝人耳, 何故寧朝於人?」

虞卿曰:「夫魏為從主, 而違者范座也. 今王能以百里之地,若萬戶之都, 請殺范座於魏.

范座死, 則從事可移於趙.」 趙王曰:「善.」乃使人以百里之地,請殺范座於魏. 魏王許諾,

使司徒執范座,而未殺也.  范座獻書魏王曰:「臣文趙王以百里之地,請殺座之身. 夫殺無罪范座,

座薄故也;而得百里之地,大利也. 臣竊為大王美之. 雖然,而有一焉,百里之地不可得,

而死者不可復生也,則主必為天下笑矣!臣竊以為與其以死人市,不若以生人市使也.」

[주난왕 49년(기원전 266), 우경이 조혜문왕에게 묻기를 : “인지상정으로 볼 때 다른 사람을 조현(朝見)하는

것이 좋겠습니까? 아니면 다른 사람의 조현을 받는 것이 좋겠습니까?”라고 하자.  조혜문왕이 대답하기를 :
“누구든 다른 사람의 조현을 받는 것을 좋아할 것이오. 다른 사람을 조현하는 것이 좋을 리 있겠소?”라고 하였다.
그러자 우경이 말하기를 : “무릇 위나라로 하여금 합종의 맹주가 되도록 하면서 조나라가 맹주가 되는 것을

그르친 자는 위나라의 재상을 지낸 범좌(范座)입니다. 지금 대왕이 능히 1백 리의 땅이나 1만 호의 대현(大縣)을

위나라에 주고 범좌를 죽일 수만 있다면 그리 하도록 하십시오. 범좌가 죽으면 합종의 맹주 자리를 조나라가

맡을 수 있을 것입니다.”라고 하자. 조혜문왕이 대답하기를 : “그리 하도록 하겠소.”라고 하였다.
그리고는 곧 사람을 보내 1백 리의 땅을 떼어주는 조건으로 범좌의 제거를 제의했다.

그러자 위안희왕(魏安釐王)은 이를 승낙하고는 사도(司徒)를 시켜 범좌를 체포하게 했다.

이에 범좌는 죽임을 당하기 전에 위안희왕에게 상서를 올리기를 : “신은 조왕이 1백 리의 땅을 떼어주는 조건으로

신의 목을 요구했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무릇 죄없는 저를 죽이는 것은 작은 일이고, 1백 리의 땅을 손에 넣는 것은

큰 이득입니다. 신은 내심 대왕을 위해 경하할 일이라고 생각하나 다만 한 가지 걱정이 있습니다.

만일 1백 리의 땅이 손에 넣지도 못하고 죽은 자를 살릴 수 없는 일이라도 생기게 되면 대왕께서는 필시 천하의

웃음거리가 되지 않겠습니까? 그래서 저는 내심 죽은 사람을 갖고 거래하기보다는 차라리 살아 있는 사람을 갖고

거래하는 쪽으로 낫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라고 하였다.]

 

又遺其後相信陵君書曰:「夫趙、魏,敵戰之國也. 趙王以咫尺之書來,而魏王輕為之殺無罪左座,

座雖不肖,故魏之免相望也. 嘗以魏之故,得罪於趙. 夫國內無用臣,外雖得地,勢不能守.

然今能守魏者,莫如君矣. 王聽趙殺座之後,強秦襲趙之欲,倍趙之割,則君將何以止之?

此君之累也.」 信陵君曰:「善.」遽言之王而出之.

[그리고는 후임 재상인 신릉군에게 서신을 보내기를 : “조, 위 두 나라는 세력이 비등한 나라인데도 조왕이 특별한

내용도 없는 짧막한 서한을 보내자 대왕은 경솔하게도 죄없는 나를 죽이려 하고 있소. 나는 비록 불초하기는 하나

위나라의 전임 재상이오. 이번 일은 틀림없이 위나라에 충성한 나머지 조나라의 원한을 산 데 따른 것이오.

무릇 국내에 충신이 없으면 설령 밖에서 땅을 얻을지라도 끝내 지켜낼 수 없는 법이오. 지금 위나라를 지켜낼 수 있는

사람으로는 그대만한 사람이 없소. 대왕이 조나라의 요구대로 나를 죽인 후 강한 진나라가 조나라의 수법을 이어

같은 규모의 땅을 떼어주면서 그대의 제거를 요구해 올 경우 그대는 이를 어찌 막을 셈이오?

이야말로 그대의 큰 우환이 될 것이오.”라고 하자.  신릉군이 말하기를 : “참으로 옳은 말이오”라고 하며.
신릉군은 급히 조혜문왕에게 진언하여 범좌를 석방하게 하였다.]

 

 

燕封宋人榮為高陽君

 

燕封宋人榮分成為高陽君,使將而攻趙. 趙王因割濟東三城令廬、高唐、平原陵地城邑市五十七,

命以與齊,而以求安平君而將之. 馬服君謂平原君曰:「國奚無人甚哉!君致安平君而將之,

乃割濟東三令城市邑五十七以與齊,此夫子與敵國戰,覆軍殺將之所取、割地於敵國者也.

今君以此欲齊,而求安平君而將之,國奚無人甚也!且君奚不將奢也? 奢嘗抵罪居燕,

燕以奢為上穀守,燕之通穀要塞,奢習知之. 百日之內,天下之兵未聚,奢已即着燕矣.

然則君奚求安平君而為將乎?」

平原君曰:「將軍釋之矣,仆已言之仆主矣. 仆主幸以聽仆月. 將軍無言已.」

[주난왕 50년(기원전 265), 연나라가 망한 송나라 출신 영분(榮蚠)을 고양군으로 봉한 뒤 군사들을 이끌고 가서

조나라를 공격하게 했다. 그러자 조효성왕은 제동(濟東: 濟水)의 노(盧: 산동성 장청현), 고당(高唐: 산동성 고당현),

평원(平原: 산동성 평원현) 등 3개 성읍 내에 있는 57개 시읍(市邑)을 제나라에 떼어주면서 안평군(安平君: 田單)이

이들 지역을 지키도록 청하게 했다. 그러자 마복군(조사)이 평원군(平原君: 조승)에게 불만을 털어 놓으며 말하기를 :
“조나라에는 이토록 인물이 없는 것이오. 군주는 안평군을 불러다가 지키게 할 생각으로 제동의 3개 성읍에 있는

57개 시읍을 제나라에 떼어주려 하고 있소. 이 땅은 염파(廉頗)가 적군과 싸워 복군살장(覆軍殺將)의 공을 세우고

적국으로부터 떼어받은 것이오. 그런데 지금 군주는 이를 제나라에 주고 안평군으로 하여금 이를 지키게 하려고 하니

우리나라에는 그토록 인물이 없는 것이오. 군주는 왜 나를 시켜 지키게 하지 않는 것이오. 내가 일찍이 죄를 짓고

연나라에 머물렀을 때 연나라는 나에게 상곡(上谷)을 지키는 책임을 맡겼소. 그래서 나는 연나라의 좁은 통로와

험고한 관문에 정통하오. 1백 일 이내에 천하 제후들의 군대가 모이기 전에 나는 이미 연나라의 항복을 받아낼

것이오. 그런데도 군주는 무엇 때문에 안평군을 불러다가 지키게 하는 것이오.”라고 하자.
이에 평원군이 대답하기를 : “장군은 그것으로 됐소. 내가 이미 군주에게 말해 동의를 얻어낸 일이오.

장군은 더 이상 아무 말하지 마시오.”라고 하였다.]


馬服君曰:「君過矣!君之所以求安平君者,以齊之於燕也,茹肝涉血之仇耶. 其於奢不然.

使安平君愚,固不能當榮分成;使安平君知,又不肯與燕人戰. 此兩言者,安平跑必處一焉.

雖然,兩者有一也.  使安平君知,則奚以趙之強為? 趙強則齊不復霸矣.

今得強趙之兵,以杜燕將,曠日持久數歲,令士大夫餘子之力,盡於溝雷同,車甲羽毛裂敝,

府庫倉廩虛,兩國交以習之,乃引其兵而歸. 夫盡兩國之兵,無明此者矣.」

夏,軍也縣釜而炊. 得三城也,城大無能過百雉者. 果如馬服之言也.

[그러자 마복군이 말하기를 : “이는 그대가 잘못한 것이오. 군주가 안평군을 얻으려고 하는 것은 제나라와 연나라가

서로 간을 먹고 피바다를 이룰 정도의 원수사이 이기 때문이오. 그러나 나는 그렇지 않소. 만일 안평군이 어리석다면

실로 영분을 당하지 못할 것이오. 그러나 만일 안평군이 현명하다면 자진해서 연나라와 싸우려 하지 않을 것이오.

이 두 가지 중에서 안평군은 어느 하나에 해당할 것이오. 물론 안평군은 어느 하나를 선택할 수 있소.

만일 안평군이 현명하다면 무슨 이유로 조나라를 강하게 만들려 하겠소. 조나라가 강해지면 제나라는 두 번 다시

패권을 차지하기 어렵게 되오. 이제 안평군은 강력한 조나라의 군사를 이끌고 연나라를 방어하게 되었소.

그러나 수년 동안 시간을 끌면서 사대부와 종군하는 자들에게 도랑이나 보루를 쌓게 하여 힘을 소진하게 하고,

전차와 갑주, 화살, 군기 등을 마모시키고, 무기고와 식량창고를 텅 비게 만들고, 조, 연 두 나라 군대가 교전으로

모두 지쳐 제나라를 두려워하게 된 뒤에야 철군할 것이오. 두 나라 군사를 모두 피폐하게 만들 것이 틀림없는데도

이를 간파하는 사람이 없소.”라고 하였다. 그 해 여름, 안평군이 이끄는 군대는 솥을 걸어 밥을 지어 먹는

악전고투 끝에 간신히 3개 성읍을 얻었다. 그러나 큰 성읍이라 한들 1백 치를 넘지 못했다.

모든 것이 과연 마복군이 말한 그대로였다.]

 

 

三國攻秦趙攻中山

 

三國攻秦,趙攻中山,取扶柳,五年以擅乎沱.  齊人戎郭、宋突謂仇郝曰:

「不如盡歸中山之新地. 中山案此言於齊曰,四國將假道於衛,以過章子之路. 齊聞此,必效鼓.」

[주난왕 17년(기원전 298), 3국(제, 한, 위)이 진나라를 공격하였다. 얼마 후 조나라가 이들 3국이 여력이 없는

틈을 타 중산국을 공격했다. 이에 부류(扶柳: 하북성 기현)를 취하고 5년만에 호타(呼沲) 일대를 점령했다.

이어 고(鼓: 하북성 진현) 땅을 수비하자 송나라 출신 송돌(宋突)이 조나라 중신으로 송나라 재상을 지내고 있는

구학(仇郝)에게 말하기를 : “중산국에서 새로 얻은 땅을 모두 돌려주느니만 못합니다. 중산국은 이에 근거해

제나라에 이르기를, ‘조나라가 위(衛)나라로부터 길을 빌려 고 땅의 장수 장자의 퇴로를 끊으려 하고 있습니다’라고

하면 됩니다. 제나라가 이 말을 들으면 필시 고(鼓) 땅을 조나라에 내줄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趙使趙莊合從

 

趙使趙莊合從,欲伐齊. 齊請效地,趙因賤趙莊.
齊明為謂趙王曰:「齊畏從人之合也,故效地. 今聞趙莊賤,張懃貴,齊必不效地矣.」

趙王曰:「善.」乃召趙莊而貴之.

[주난왕 2년(기원전 313), 조나라가 장수 조장(趙莊)을 통해 합종을 성사시킨 뒤 제나라를 공격하고자 했다.

이에 제나라가 할지를 제의하자 조나라가 합종의 필요성을 느끼지 못해 조장을 등용하지 않았다.

그때 세객 제명이 조장을 위해 조왕에게 말하기를 : “제나라는 합종을 두려워하고 있기에 땅을 떼어주려는 것입니다.

지금 제나라가 조장을 버리고 패한 전력이 있는 장근(張懃)을 중용했다는 얘기를 들으면 틀림없이 땅을 떼어주지

않을 것입니다.”라고 하자.  조왕이 말하기를 : “그 말이 옳소.”라고 하며, 곧 조장을 불러 귀하게 대우하였다.]

 

 

翟章從梁來

 

翟章從梁來,甚善趙王.  趙王三延以相,翟章辭不受.
田駟謂柱國韓向曰:「臣請為卿刺之. 客若死,則王必怒而誅建信君. 建信君死,則卿必為相矣.

建信君不死,以為交,終身不敝,卿因以德建信君矣.」

[진시황 3년(기원전 244), 위나라 사람 적장(翟章)이 조나라로 와 조도양왕(趙悼襄王)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조도양왕은 그에게 여러 차례에 걸쳐 재상이 될 것을 권했지만 적장은 이를 사양하며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러자 세객 전사(田駟)가 주국(柱國)인 한향(韓向)에게 말하기를 : “청컨대 경을 위해 적장을 척살하고자 합니다.

만일 적장이 죽으면 대왕은 필시 총신인 건신군(建信君)이 적장을 죽이는 전횡을 저질렀다고 의심한 나머지

대노하여 건신군을 주살할 것입니다. 건신군이 죽으면 경이 틀림없이 재상이 될 것입니다.

건신군이 죽지 않을지라도 그는 적장을 제거한 경을 친구로 생각해 평생 가까이 지내고자 할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그대는 건신군에게 큰 은혜를 베푼 셈이 됩니다.”라고 하였다.

 

 

馮忌為廬陵君謂趙王

 

馮忌為廬陵君謂趙王曰:「王之逐廬陵君,為燕也.」 王曰:「吾所以重者,無燕、秦也.」
對曰:「秦三以虞卿為言, 而王不遂也. 今燕一以廬陵君為言, 而王逐之. 是王輕強秦而重弱燕也.」
王曰:「吾非為燕也,吾固將逐之.」

「然則王逐廬陵君又不為燕也. 行逐愛弟, 又兼無燕、秦, 臣竊為大王不取也.」

[평원군의 문객인 풍기(馮忌)가 여릉군(廬陵君: 조효성왕의 동생)을 위해 조효성왕에게 묻기를 :

“대왕께서 여릉군을 내쫓은 것은 연나라 때문입니까.”라고 하자.
조효성왕이 대답하기를 : “과인이 존중하는 나라는 연나라가 아니라 진나라요.”라고 하였다.
이에 풍기가 말하기를 : “진나라가 몇 번인가 우경으로 인해 언질을 주었으나 대왕께서는 그를 내쫓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이번에 연나라가 한번 여릉군에 대해 언질을 주었다고 하여 대왕께서 그를 내쫓게 되면

대왕께서는 강한 진나라를 경시하고 약한 연나라를 중시한 셈이 됩니다.”라고 하자.
조효성왕이 말하기를 : “과인은 연나라의 말을 듣고 한 것이 아니오. 진즉 그럴 생각을 갖고 있었소.”라고 하였다.
그러자 풍기가 말하기를 : “그 말이 사실이면 대왕께서 여릉군을 내쫓은 것은 연나라 때문이 아니라는 셈이 됩니다.

그렇다면 대왕의 처사는 애제(愛弟)를 내쫓고 연, 진 두 나라를 잃는 것이 됩니다.

신이 생각해 보건대 이는 대왕께서 취하실 행동이 아니라고 봅니다."라고 하였다.] 

 

 

馮忌請見趙王

 

馮忌請見趙王,行人見之. 馮忌接手免首,欲言而不敢.王問其故,對曰:「客有見入於服子者,

已而請其罪.  服子曰:『公之客獨有三罪:望我而笑,是狎也;談語而不稱師,是倍也;

交淺而言深,是亂也.』  客曰:『不然. 夫望人而笑,是和也;言而不稱師,是庸說也;

交淺而言深,是忠也.  昔者堯見舜於草茅之中,席隆畝而蔭庇桑,陰移而授天下傳.
伊尹負鼎俎而干湯,姓名未著而受三公. 使夫交淺者不可以深談,則天下不傳,而三公不得也.』」

趙王曰:「甚善.」 馮忌曰:「今外臣交淺而欲深談,可乎?」王曰:「請奉教.」於是馮忌乃談.

[주난왕 56년(기원전 259), 세객 풍기가 조효성왕을 배견하려 하자, 외교사절을 접대하는 관원이 이를 주선했다.

이에 이내 조왕을 배견하게 되었으나 풍기는 두 손을 모으고 고개를 숙인 채 쉽게 입을 열지는 않았다.

이에 조효성왕이 그 연고를 묻자, 풍기가 대답하기를 : “빈객으로 있는 저의 친구가 복자(공자의 제자 子賤)에게

사람을 소개한 적이 있었습니다. 얼마 후 복자에게 소식을 묻던 중 소개받은 사람에게 어떤 잘못이 있어

복자의 기분을 상하게 한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이에 곧 사과를 하자, 복자가 말하기를, ‘그대가 소개한 사람에게

대략 3가지 죄가 있소. 우선 나를 바라보면서 웃었소. 이는 사람이 가볍다는 증거요. 또 얘기를 나누면서

스승을 거론하지 않았소. 이는 장차 배신할 것이라는 증거요. 얼마 사귀지 않았는데도 깊은 말을 했소.

이는 난심(亂心)을 품고 있다는 증거요’라고 했습니다. 그러자 저의 친구가 반박하기를, ‘그렇지 않소.

무릇 사람을 바라보며 웃는 것은 화목하다는 표시이고, 얘기를 나누면서 스승을 거론하지 않은 것은 통상 하는 얘기에

굳이 언급할 필요가 없기 때문이고, 얼마 사귀지 않았는데도 깊은 말을 한 것은 사람이 충성스럽기 때문이오.

옛날 요임금은 황야 한가운데에서 땅 위에 거적을 깔고 뽕나무 그늘에 숨어 있는 순임금을 보고도 시간이 흐르자

천하를 선양한 바 있습니다. 이윤(伊尹)은 솥과 도마를 등에 지고 가 탕왕을 섬기면서 그 이름이 아직 서책(書冊)에

기록되기도 전에 이미 3공이 되었습니다. 무릇 얼마 사귀지 않은 자는 깊은 말을 해서는 안된다고 하면

곧 천하는 전해지지 않고 3공의 자리 또한 적임자를 찾지 못했을 것입니다’라고 했습니다.”라고 하자.
조효성왕이 말하기를 : “참으로 옳은 말이오.”라고 하였다.
그러자 풍기가 묻기를 : “지금 외신인 제가 처음으로 배견하는 자리에서 깊은 얘기를 해도 되겠습니까?”라고 하자,
조효성왕이 대답하기를 : “가르침을 받고자 하오.”라고 하였다.
이에 풍기가 이내 조효성왕과 깊은 얘기를 나누기 시작하였다.]

 

 

客見趙王

 

客見趙王曰:「臣聞王之使人買馬也,有之乎?」王曰:「有之.」「何故至今不遣?」

王曰:「未得相馬之工也.」對曰:「王何不遣建信君乎?」
王曰:「建信君有國事,又不知相馬.」 曰:「王何不遣紀姬乎?」

王曰:「紀既婦人也,不知相馬.」 對曰:「買馬而善,何補於國?」
王曰:「無補於國.」 「買馬而惡,何危於國?」 王曰:「無危於國.」
對曰:「然則買馬善而若惡,皆無危補於國. 然而王之買馬也,必將待工. 今治天下,舉錯非也,

國家為虛戾,而社稷不血食,然而王不待工,而與建信君,何也?」 趙王未之應也.

[진시황 3년(기원전 244), 한 세객이 조효성왕을 조현하면서 묻기를 : “신이 듣건대 대왕께서 말을 사기 위해

사람을 보낸다고 하는데 과연 그게 사실입니까?”라고 하자,  조효성왕이 대답하기를 : “사실이오.”라고 하였다.
그러자 세객이 다시 묻기를 : “그렇다면 무슨 이유로 아직까지 보내지 않았습니까?”라고 하자.
조효성왕이 대답하기를 : “아직 말의 관상을 보는데 탁월한 재주꾼을 구하지 못했기 때문이오.”라고 하였다.
세객이 다시 묻기를 : “왜 건신군을 보내지 않습니까.”라고 하자.
이에 조효성왕이 대답하기를 : “건신군은 국사를 돌봐야 하는데다가 말에 대해 모르기 때문이오.”라고 하였다.
세객이 다시 묻기를 : “그렇다면 왜 기희(紀姬: 조효성왕의 왕비)는 보내지 않습니까?”라고 하자.
조효성왕이 대답하기를 : “기희는 아녀자라서 말에 대해 아는 것이 없소.”라고 하였다.
그러자 세객이 묻기를 : “말을 샀을 때 좋은 말을 사게 되면 나라에 어떤 도움이 됩니까?”라고 하자.
조효성왕이 대답하기를 : “나라에 도움이 되지는 않소.”라고 하였다.
세객이 묻기를 : “말을 샀을 때 나쁜 말을 사게 되면 나라에 어떤 해를 끼치게 됩니까?”라고 하자.
조효성왕이 대답하기를 : “나라에 해를 끼치지는 않소.”라고 하였다.
세객이 묻기를 : “그렇다면 말을 샀을 때 좋은 말이든 나쁜 말이든 나라에는 아무런 보탬도, 해도 되지 않는 셈입니다.

그런데도 대왕께서는 말을 살 때 말의 관상을 보는데 탁월한 재주꾼이 없어서는 안된다고 합니다.

지금 천하를 다스리면서 정책을 잘못 시행하면 나라는 피폐하게 되고 사직 또한 혈식(血食)이 끊기게 됩니다.

그런데도 관상을 보는데 탁월한 재주꾼과 같이 나라를 잘 다스릴 수 있는 사람을 기다리지 않고

건신군에게 다 넘겨 주고 있으니 이는 어찌된 영문입니까?"라고 하자, 이에 조효성왕이 제대로 대답하지 못했다.]


客曰:「燕郭之法,有所謂桑雍者,王知之乎?」 王曰:「未之聞也.」

 「所謂桑雍者,便辟左右之近者,及夫人優愛孺子也. 此皆能乘王之醉昏,而求所欲於王者也.

是能得之乎內, 則大臣為之枉法於外矣. 故日月暉於外, 其賊在於內, 謹備其所憎, 而禍在於所愛.」

[그러자 세객이 다시 묻기를 : “곽연(郭燕: 춘추시대 晉나라의 점복을 관장한 郭偃)의 정요(政要)에

소위 ‘유옹(柔雍)’이라는 말이 나오는데 대왕은 이를 알고 있습니까?”라고 하자.
조효성왕이 대답하기를 : “아직 들어보지 못했소.”라고 하였다.
그러자 세객이 설명하기를 : “소위 ‘유옹’은 군주의 주변에 있는 좌우 측근과 부인, 총애하는 젊은 미희 등을

지칭하는 것입니다. 이들은 모두 군주가 취하여 혼미한 틈을 노려 자신들이 바라는 바를 훔치려는 자들입니다.

이같은 무리들이 안에서 득의하게 되면 대신들이 밖에서 사리를 도모하기 위해 법집행을 왜곡하기 마련입니다.

그래서 해가 일식 때 그 주변에 밝은 해무리를 이룰지라도 해의 중심부분은 검고 어둡듯이 그 적은 반드시 내부에

있기 마련입니다. 미워하는 자를 아무리 경계하고 방비할지라도 총애하는 자에 대해서는 인정상 방심하기 때문에 

재난은 미워하는 자가 아니라 바로 총애하는 자로부터 비롯되는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秦攻魏取寧邑

 

秦攻魏,取寧邑,諸侯皆賀.  趙王使往賀,三反不得通.  趙王憂之,謂左右曰:

「以秦之強,得寧邑,以制齊、趙. 諸侯皆賀,吾往賀而獨不得通,此必加兵我,為之奈何?」
左右曰:「使者三往不得通者,必所使者非其人也. 曰諒毅者,辯士也,大王可試使之.」

諒毅親受命而往. 至秦,獻書秦王曰:「大王廣地寧邑,諸侯皆賀,敝邑寡君亦竊嘉之,不敢寧居,

使下臣奉其幣物三至王廷,而使不得通. 使若無罪,愿大王無絕其歡;若使有罪,愿得請之.」 

秦王使使者報曰:「吾所使趙國者,小大皆聽吾言,則受書幣. 若不從吾言,則使者歸矣.」
諒毅對曰:「下臣之來, 固愿承大國之意也, 豈敢有難?大王若有以令之, 請奉而西行之, 無所敢疑.」

[진나라가 위나라를 공격하여 영읍(寧邑: 安邑)을 취하자 천하의 제후들이 모두 이를 축하하였다.

조혜문왕의 사자도 축하의 말을 전하러 진나라로 갔지만 계속 거절을 당하여 축하의 말을 전할 수가 없었다.

조혜문왕이 이를 걱정하며 좌우에게 묻기를 : “진나라가 강대한 위세로 영읍을 취한 후 약한 조나라를 위압하고 있소.

제후들이 모두 축하하고 있는데 우리만 유독 축하 하러 찾아가고도 축하의 말을 전하지 못하고 있소.

이는 틀림없이 우리를 공격하려는 것이오. 이를 어찌하면 좋겠소?”라고 하자.
좌우 대신들이 말하기를 : “사자가 수 차례 갔는데도 축하의 말을 올리지 못한 것은 반드시 사자가 무능했기

때문일 것입니다. 양의(諒毅)는 변사(辯士)이니 그를 한번 시험삼아 사자로 보내기 바랍니다.”라고 하였다.
양의가 즉각 명을 받고 떠났다. 그는 진나라에 이르자마자 진왕(秦王: 진소양왕)에게 상서를 올리기를 :
“대왕이 영읍까지 땅을 넓히자 제후들이 모두 축하의 말을 했습니다. 폐읍의 과군도 내심 크게 기뻐했습니다.

이에 감히 가만히 있을 수 없다며 하신(下臣)을 시켜 여러 차례에 걸쳐 폐물(幣物)을 봉헌하게 했으나 끝내 축하의

말을 올리지 못하고 말았습니다. 만일 사자에게 잘못이 없다면 원컨대 대왕은 친교를 끊지 말기 바랍니다.

만일 사자에게 잘못이 있다면 원컨대 그 죄값을 달게 받고자 합니다.”라고 하였다.
진왕이 사자를 보내 알려 오기를 : “과인이 조나라에 요구하는 것은 대소 관원을 막론하고 모두 과인의 말을 들으라는

것이오. 그렇게 하면 국서와 폐물을 받아들이겠소. 그러나 이를 좇지 않겠다면 사자는 되돌아 가시오.”라고 하였다.
이에 양의가 응답하기를 : “하신이 온 것은 실로 대국의 뜻을 삼가 받들기 위한 것입니다. 어찌 감히 거역하겠습니까?

대왕께서 저희 조나라에 명을 내리시면 즉시 서쪽 대왕의 진나라를 받들 것이며 감히 의심이란 있을 수 없습니다.”]

 

於是秦王乃見使者,曰:「趙豹、平原君, 數欺弄寡人. 趙能殺此二人, 則可. 若不能殺,

請今率諸侯受命邯鄲城下.」 諒毅曰:「趙豹、平原君,親,寡君之母弟也,猶大王之有葉陽、

涇陽君也. 大王以孝治聞於天下,衣服使之便處體,膳啖使之嗛於口,未嘗不分於葉陽、涇陽君.
葉陽君、涇陽君之車馬衣服,無非大王之服御者.  臣聞之:有覆巢毀卵,而鳳皇不翔;

刳胎焚夭,而騏驎不至.』 今使臣受大王之. 元以還報,敝邑之君,畏懼不敢不行,

無乃傷葉陽君、涇陽君之心乎?」

[이에 진왕의 사자가 다시 말을 전하기를 : “조표(趙豹: 평양군)와 평원군(平原君: 조승)은 종종 과인을 우롱하였소.

만일 조나라가 이 두 사람을 제거한다면 다행이나 그렇지 않다면 즉각 제후들을 이끌고 한단의 성 아래로 가서

과연 무슨 말을 하는지 들어볼 심산이오.”라고 하였다.
이에 양의가 대답하기를 :“조표와 평원군은 과군의 동복 형제입니다. 마치 대왕에게 섭양군과 경양군이 있는 것과

같습니다. 대왕께서 효성과 사랑을 다하여 나라를 다스리는 일은 천하가 다 아는 사실입니다.

몸에 편한 옷과 입에 맞는 음식을 섭양군과 경양군에게 나눠주지 않은 적이 없습니다.

섭양군과 경양군의 거마와 의복 중 대왕께서 나눠 주지 않은 것이 없습니다.

신이 듣건대 ‘복소훼란, 봉황불상(覆巢毁卵, 鳳凰不翔: 둥지를 뒤집고 알을 깨면 봉황이 날아오지 않음)하고,

고태분요, 기린부지(刳胎焚夭, 騏驎不至: 짐승의 태를 쪼개고 어린 새끼를 죽이면 기린이 이르지 않음)한다’고

했습니다. 지금 하신이 대왕의 분부를 받고 복명하면 과군은 황송하여 감히 따르지 않을 리가 없습니다.

그러나 이로 인해 어찌 섭양군과 경양군이 마음을 상하지 않을 리 있겠습니까?”라고 하였다.]

 

秦王曰:「諾勿使從政.」 梁毅曰:「敝邑之君,有母弟不能教誨,以惡大國,請黜之,

勿使與政事,以稱大國.」 秦王乃喜,受其幣而厚遇之.  

[그러자 진왕이 말하기를 : “좋소. 그럼 그 둘로 하여금 정무에 종사하지 못하도록 해주시오."라고 하자.

이에 양의가 말하기를 : " 폐읍의 과군은 동복형제를 교회(敎誨)하지 못해 그만 대국의 노여움을 샀습니다.

청컨대 이들을 파면시켜 정무에 종사하지 못하게 함으로써 대국을 기쁘게 해드리도록 하겠습니다.”라고 하였다.
진왕이 이내 크게 기뻐하며 폐물을 받아들인 뒤 양의를 후대했다.] 

 

 

趙使姚賈約韓魏

 

趙使姚賈約韓、魏,韓、魏以友之.

舉茅為姚賈謂趙王曰:「賈也,王之忠臣也. 韓、魏欲得之,故友之,將使王逐之,而己因受之.
今王逐之,是韓、魏欲得,而王之忠臣有罪也. 故王不如勿逐,以明王之賢,而折韓、魏招之.」

[조나라는 세객 요가(姚賈)를 시켜 한, 위 두 나라와 결맹하게 했다. 이때 한, 위 두 나라가 요가를 정중히 대접하자,

조나라는 두 나라와 요가 사이에 혹여 밀약이 있는 것이 아닌지 크게 의심했다. 

이에 세객 거모(擧茅)가 요가를 위해 조도양왕(趙悼襄王)에게 말하기를 : “요가는 대왕의 충신입니다. 

한, 위 두 나라는 요가가 탐이 난 나머지 그를 후대함으로써 대왕께서 그를 의심해 쫓아내도록 만든 뒤 받아들이려 

하는 것입니다. 지금 대왕께서 그를 내쫓으면 한, 위 두 나라의 소원은 이뤄지고 대왕의 충신은 득죄하게 됩니다. 

그러니 대왕께서는 그를 내쫓지 않음으로써 대왕의 현능(賢能)을 분명히 하고

그를 얻으려는 한, 위 두 나라의 음모를 와해시켜야 합니다.”라고 하였다.]

 

 

魏敗楚於陘山

 

魏敗楚於陘山,禽唐明. 楚王懼,令昭應奉太子以委和於薛公. 主父欲敗之,乃結秦連楚、宋之交,

令仇郝相宋,樓緩相秦. 楚王禽趙、宋,魏之和卒敗. 

[주난왕 14년(기원전 301), 위나라가 초나라를 형산에서 격파하고 초나라 장수 당명(唐明: 唐蔑)을 생포했다.

초회왕이 두려운 나머지 소응(昭應)을 설공(맹상군)에게 보내 태자를 인질로 보내는 강화를 주선토록 부탁하게 했다.

그러자 주부(主父, 조무령왕)는 이를 방해할 생각으로 진나라와 맹약하고 송나라와의 친교를 강화하면서

구학(仇郝)을 송나라 재상으로, 누완(樓緩)을 진나라 재상으로 삼게 했다.

이에 진왕이 조, 송 두 나라를 제압하자 초, 제 두 나라 간의 화친도 결국 깨지고 말았다.]

 

 

秦召春平侯

 

秦召春平侯,因留之. 世鈞為之謂文信侯曰:「春平侯者,趙王之所甚愛也,而郎中甚妒之,

故向與謀曰:『春平侯入秦,秦必留之.』故謀而入之秦. 今君留之,是空絕趙,而郎中之計中也.

故君不如遣春平侯而留平都侯. 春平侯者言行遇趙王,必厚割趙以事君,而贖平都侯.」

文信侯曰:「善.」因與接意而遣之.

[진나라가 조나라의 총신 춘평후(春平侯)를 부른 뒤 곧바로 억류했다.

이에 세객 세균(世鈞:泄鈞)이 춘평후를 위해 문신후에게 말하기를 : “춘평후는 조왕(조도양왕)으로부터 커다란 총애를

받고 있습니다. 이에 낭중들이 그를 시기하여 서로 모의하기를, ‘춘평후가 진나라로 가면 진나라는 틀림없이 그를

억류할 것이다’라고 했습니다. 그리고는 깜쪽같이 그를 속여 진나라로 보낸 것입니다. 지금 대왕이 춘평후를 억류하면

공연히 조나라와의 친교를 끊고 낭중들의 속셈에 말려들게 됩니다. 따라서 대왕은 춘평후를 돌려보내고

평도후(平都侯)를 억류하느니만 못합니다. 춘평후의 말은 조왕에게 그대로 통합니다.

그는 틀림없이 조나라의 땅을 크게 떼어 대왕을 섬기는 한편 평도후를 속환(贖還)하고자 할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문신후는 말하기를 : “과연 그 말이 옳소.”라고 하면서, 춘평후를 위해 크게 환송회를 베풀고 곧바로 돌려보냈다.]

 

 

趙太后新用事

 

趙太后新用事, 秦急攻之. 趙氏求救於齊. 齊曰:「必以長安君為質, 兵乃出.」太后不肯, 大臣強諫.

太后明謂左右:「有復言令長安君為質者,老婦必唾其面左師觸讋愿見太后. 太后盛氣而揖之.

入而徐趨, 至而自謝, 曰 :「老臣病足, 曾不能疾走, 不得見久矣. 竊自恕, 而恐太后玉體必有所郄也,

故愿望見太后.」 太后曰:「老婦恃輦而行.」 曰:「日食飲得無衰乎?」 曰:「恃粥耳.」

曰:「老臣今者殊不欲食,乃自強步,日三四里,少益耆食,和於身也.」太后曰:「老婦不能.」

太后之色少解.  左師公曰:「老臣賤息舒祺,最少,不肖. 而臣衰,竊愛憐之.

愿令得補黑衣之面,以衛王官,沒死以聞.」

[조태후(趙太后: 조혜문왕의 처로 조효성왕의 생모)가 새로이 집정하자 진나라가 급히 조나라로 쳐들어왔다.

이에 조나라가 제나라에 구원을 청하자 제나라에서 요청하기를, ‘장안군(조태후의 막내 아들)을 인질로 보내면

원군을 보내겠다’고 했다. 그러나 조태후가 이를 승낙하지 않았다. 이에 대신들이 강력히 간하자,

태후가 좌우 대신들에게 밝히기를 : “두 번 다시 장안군을 인질로 내놓으라는 자가 있으면 내가 그 얼굴에 침을 뱉을

것이오.”라고 하였다.  이때 좌사(左師) 촉섭(觸讋)이 배견을 청했다. 조태후가 화난 표정으로 기다리자,

촉섭이 궐내를 천천히 걸어서 조태후 곁으로 다가간 뒤 사죄하며 말하기를 : “노신(老臣)이 발병이 나 빨리 걸을 수

없는 탓에 오랫동안 뵙지 못했습니다. 내심 스스로 변명하기는 했으나 아무래도 태후의 옥체에 무리가 있을까

걱정되어 멀리서라도 태후의 모습을 뵙고자 하여 찾아온 것입니다.”라고 하자.
이에 태후가 대답하기를 : “노부(老婦)도 인력거 연(輦)에 의지해 거동하고 있는 형편이오.”라고 하였다.
촉섭이 묻기를 : “매일 드시는 식사는 줄어들지 않았습니까?”라고 하자. 태후가 대답하기를 :“죽만 먹고 있소.”하였다.

촉섭이 말하기를 : “신도 요금 특히 식욕이 없습니다. 그래서 매일 3, 4 리씩 무조건 걷자 식욕도 나고,

몸도 좋아졌습니다.”라고 하자.  태후는 말하기를 : “나같은 노부는 할 수 없는 일이오.”라고 하였다.
그 사이 조태후의 심기가 다소 풀렸다. 그러자 좌사공(左師公) 촉섭이 다시 말하기를 : “노신의 아들 놈 중에 

서기(舒祺)라는 애가 있는데 나이도 어리고 불초합니다. 그런데 신이 늙어 갈수록 더욱 귀엽기만 합니다.

청컨대 아들 놈을 궁중의 호위병로 충원해 왕궁을 지키게 해주십시오. 감히 죽음을 무릅쓰고 청합니다.”라고 하였다.]


太后:「敬諾. 年幾何矣?」對曰:「十五歲矣. 雖少,愿及未填溝壑而托之.」

太后曰:「丈夫亦愛憐其少子乎?」對曰:「甚於婦人.」 太后笑曰:「婦人異甚.」

對曰:「老臣竊以為媼之愛燕後賢於長安君.」 曰:「君過矣,不若長安君之甚.」
左師公曰:「父母之愛子, 則為之計深遠. 媼之送燕後也, 持其踵而為之泣, 念悲其遠也, 亦哀之矣.

已行,非弗思也,祭祀必祝之,祝曰:『必勿使反.』豈非計久長,有子孫相繼為王也哉?」

太后曰:「然.」左師公曰:「今三世以前,至於趙之為趙,趙主之子孫侯者,其繼有在者乎?」

曰:「無有.」 曰:「微獨趙,諸侯有在者乎?」 曰:「老婦不聞也.」

[좌사공의 간청에 태후가 묻기를 : “그리 하도록 하겠소. 그런데 자제의 나이는 지금 얼마나 됐소.”라고 하자.
촉섭이 대답하기를 : “15세입니다. 나이가 어리기에 신이 구덩이에 묻히기 전에 맡기려는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조태후가 묻기를 :  “장부도 막내둥이가 그같이 사랑스럽고 애틋한 것이오?”라고 하자. 

촉섭이 대답하기를 : “아녀자들보다 더 심합니다.”라고 하였다.
그러자 태후가 웃으며 말하기를 : “그렇지 않소. 부인들은 특별히 더 심하오.”라고 하자.
촉섭이 대답하기를 : “신은 내심 태후가 연후(燕后: 연나라 군주에게 시집간 딸)를 장안군보다 더 애틋하게

생각하는 것으로 알았습니다.”라고 하였다.
조태후가 말하기를 :“그것은 그대가 잘못 생각한 것이오. 나는 장안군이 더 애틋하오.”라고 하자.
이에 좌사공이 응답하기를 : “부모는 자식을 애틋하게 여기기 때문에 자식을 위해서라면 어떠한 계획도

깊고 멀리하는 것도 마다하지 않는 법입니다. 태후가 연후를 연나라로 시집 보낼 때 연후의 발꿈치를 잡고

이별을 아쉬워했습니다. 이어 연후가 멀리 떠나간다는 생각을 하고는 더욱 비통해 했습니다. 출가한 뒤에도

잊은 날이 없었고 제사 때만 되면 축원하기를, ‘소박을 맞고 돌아오는 일이 없도록 해주십시오’라고 했습니다.

이 어찌 자손 만대에 걸쳐 보위를 잇게 해달라는 장구한 계획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겠습니까?”라고 하자.
태후가 대답하기를 : “옳은 말이오.”라고 하였다.
그러자 좌사공이 묻기를 : “지금 3세(조효성왕, 조혜문왕, 조무령왕)부터 3진이 시작되는 조열후(趙烈侯) 때까지

거슬러 올라가 매번 당대 군주의 자손이 보위를 이은 뒤 그 후대가 계속 보위를 계승한 적이 있었습니까?”라고 하자.
태후가 대답하기를 : “없었소.”라고 하였다.  좌사공이 묻기를 : “조나라 말고 다른 나라는 어떠했습니까.”라고 하자.
태후가 대답하기를 : “노부는 아직 듣지 못했소.”라고 하였다.]


此其近者禍及身,遠者及其子孫. 豈人主之子孫則必不善哉? 位尊而無功,奉厚而無勞,

而挾重器多也. 今媼尊長安君之位,而封之以膏腴之地,多予之重器,而不及令有功於國.

一旦山陵崩,長安君何以自托於趙? 老臣以媼為長安君計短也,故以為其愛不若燕後.」
太后曰:「諾,恣君之所使之.」於是為長安君約車百乘質於齊,齊兵乃出.
子義聞之曰:「人主之子也,骨肉之親猶不能恃無功之尊,無勞之奉,而守金玉之重也,

而況人臣乎?」

[이에 좌사공이 말하기를 : “이는 화가 가깝게는 군주 자신에게 미치고 멀리는 그 자손에게 미쳤기 때문입니다.

어찌 그 자손이 반드시 훌륭하지 못했기 때문이겠습니까? 벼슬만 높고 공적이 없거나, 봉록은 두터운데

수고한 일이 없거나, 중기(重器)를 너무 많이 보유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지금 태후가 장안군의 지위를 높이고,

기름진 땅에 봉하고, 많은 재물을 하사했는데도 아직 나라에 공을 세우지 못하고 있습니다. 만일 불시에 왕릉이

무너지면 장안군은 무엇을 근거로 조나라에 의탁할 수 있겠습니까? 노신은 태후의 장안군을 위한 계책이 사려 깊지

못하다고 생각됩니다. 그래서 장안군에 대한 애틋함이 연후에 대한 것보다 못하다고 생각한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그러자 태후가 말하기를 : “좋소, 그대가 생각한 바대로 처리토록 하시오.”라고 하면서 드디어 장안군을 위해

병거 1백 승을 준비시킨 뒤 인질로 삼아 제나라로 보냈다. 그러자 제나라가 비로소 원군을 보내게 되었다.

조나라의 현사(賢士) 자의(子義)가 이 얘기를 듣고 말하기를 : “군주의 자식이나, 골육지친이라 할지라도 

만일 그가 공적도 없이 현귀한 자리에 있거나, 수고도 하지 않고 많은 봉록을 받거나, 수많은 금옥중보(金玉重寶)를

지니고 있게 되면 이를 오래 지킬 수 없는 법이다. 하물며 신하의 경우야 더 이상 말할 것이 있겠는가.”라고 하였다.]

 

 

秦使王翦攻趙

 

秦使王翦攻趙,趙使李牧、司馬尚御之. 李牧數破走秦軍,殺秦將桓齮. 王翦惡之,

乃多與趙王寵臣郭開等金,使為反間,曰:「李牧、司馬尚欲與秦反趙,以多取封於秦.」

趙王疑之,使趙蔥及顏為代將,斬李牧,廢司馬尚.
後三月,王翦因急擊,大破趙,殺趙軍,虜趙王遷及其將顏為,遂滅趙.

[진시황 18년(기원전 229), 진나라는 장군 왕전(王翦)을 시켜 조나라를 공격하게 하였다.

이에 조나라는 권신 이목(李牧)과 장군 사마상(司馬尙)에게 명하여 이를 막게 했다. 이목은 수 차례에 걸쳐

진나라 군사를 격파하고 진나라의 대장 환기(桓齮)를 죽였다. 왕전은 이를 걱정하여 마침내 조왕의 총신

곽개(郭開) 등을 매수하여 반간계(反間計)를 구사했다. 이에 왕전에게 포섭된 자들이 말하기를 : “이목이나 사마상은

진나라편을 들어 조나라를 배반하려 한다. 그들은 두터운 작록을 진나라로부터 얻으려 하고 있다.”라고 하였다.
그러자 조왕은 마침내 두 사람을 의심한 나머지 조총(趙蔥)과 안최로 그들을 대신하게 한 뒤 끝내 이목의 목을 베고

사마상을 면직시켰다. 3달 후 왕전이 기습전을 통해 조나라 군사를 대파한 뒤 조총을 죽이고

조왕 천(遷)과 장군 안최를 생포했다. 이에 드디어 조나라를 멸망시키고 말았다.]

 

 

 

原 文 【 中國哲學書電子化計劃 .   筆寫本 】


           

 

原 文   飜 譯 者        德庤 / 李   斗 振