戰國策(전국책) /戰國策 韓策

戰國策 韓策

덕치/이두진 2021. 6. 26. 21:41

 

                                   韓 策   

【 序文 】

한나라는 원래 희성으로 진(晉)나라를 섬기다가 한원(韓原)에 봉해지면서 성씨를 한성(韓姓)으로 바꾸게 되었다.

진경공(晉景公) 때 한궐(韓厥)이 한헌자(韓獻子)가 되어 육경(六卿)의 일원이 되었다.

이후 그의 후예들이 줄곧 진나라의 경대부로 세습케 되었다.

주위열왕 23년(기원전 403), 한건(韓虔)이 공식으로 한경후(韓景侯)에 봉해졌다.
한나라의 강역은 지금의 산서성 동남부와 하남성 중부에 걸쳐 있었다.

서쪽으로는 진, 위 두 나라와 접경하고 남쪽으로는 초나라와 접경해 늘 강대국의 위협에 시달렸다.

도읍은 원래 평양(平陽: 산서성 임분현 서북쪽)이었다. 그러나 주위열왕 10년(기원전 416)에 한무자(韓武子)가

의양(宜陽: 하남성 의양현 서쪽)으로 천도했다가 다시 한경후(韓景侯) 때 양척(陽翟: 하남성 우현)으로 천도했다.

이후 주열왕(周烈王) 원년(기원전 375), 한애후(韓哀侯)가 정나라를 멸하고 도읍을 정(鄭: 하남성)으로 옮겼다.

진시황 17년(기원전 230), 한왕 안(安)이 진시황에게 항복함으로써 멸망하고 말았다.

 

  韓策 一 . 

 

三晉已破智氏

三晉已破智氏,將分其地.  段貴謂韓王曰:「分地必取成皋.」

韓王曰:「成皋,石溜之地也,寡人無所用之.」
段貴曰:「不然, 臣聞一里之厚, 而動千里之權者, 地利也. 文人之眾, 而破三軍者, 不意也.

王用臣言, 則韓必取鄭矣.」王曰:「善. 」果取成皋. 至韓之取鄭也,果從成皋始.  

 

[주정정왕 16년(기원전 453), 3진(三晋)이 지백을 격파하고 그 영토를 나눌 때 한강자(韓康子)의 가신 단규(段規)가

주군에게 건의하기를 : “지씨의 땅을 나눌 때 반드시 성고(成皐)를 취하기 바랍니다.”라고 하자.
한왕이 말하기를 : “성고는 돌만 많은 땅이라서 과인에게는 아무 쓸모가 없소.”라고 하였다.
그러자 단규가 말하기를 : “그렇지 않습니다. 신이 듣건대 ‘1 리 밖에 안되는 좁은 땅으로 1천 리를 다스릴 수 있는

것은 지리(地利) 때문이고, 1천의 군사로 3군(三軍: 1군은 약 1만2천5백 명)을 격파할 수 있는 것은 적의 의표를

찌를 수 있기 때문이다’라고 했습니다. 대왕은 신의 말을 채용하면 한나라는 훗날 반드시 정나라를 취할 수 

있을 것입니다.”라고 하자.  한왕은 : “그리하도록 하겠소.”라고 하며. 과연 성고를 배당받았다.

이후 한나라가 정나라를 취할 때 성고를 근거지로 삼았다.]

 

 

大成午從趙來

 

大成午從趙來, 謂申不害於韓曰:「子以韓重我於趙,請以趙重子於韓,是子有兩韓,而我有兩趙也.」

 

[대성오(大成午)가 조나라에서 한나라로 와 신불해(申不害)에게 말하기를 : “그대는 한나라의 세력을 이용해 

내가 조나라에서 중용될 수 있도록 도와주기 바라오.

나는 조나라의 세력을 이용해 그대가 한나라에서 중용되도록 도와주겠소.

리되면 그대는 두 개의 한나라를 갖고 있는 셈이고 나 또한 두 개의 조나라를 갖고 있는 셈이 되오.”라고 하였다.]

 

 

魏之圍邯鄲

 

魏之圍邯鄲也,申不害始合於韓王,然未知王之所欲也,恐言而未必中於王也.

王聞申子曰:「吾誰與而可?」 對曰:「此安危之要,國家之大事也. 臣請深惟而苦思之.」

乃微謂趙卓、韓鼂曰:「子皆國之辯士也,夫為人臣者,言可必用,盡忠而已矣.」

二人各進議於王以事.  申子微視王之所說以言於王,王大說之.

 

[기원전 353, 위나라가 한단을 포위했을 때 신불해는 처음으로 한소후(韓昭侯: 이름은 武)를 만나게 되었다.

그러나 한소후가 무엇을 바라는지 알 수 없어 한소후의 의중에 맞지 않는 말을 할까 조심했다.

한소후가 신자(신불해)에게 묻기를 :“과인은 조, 위 두 나라 중 어느 나라와 결호(結好)하는 것이 좋겠소.”라고 하자.
신불해가 대답하기를 : “이는 국가 안위에 관한 국가대사입니다. 청컨대 심사숙고한 뒤 말씀드리도록 하겠습니다.”
그리고는 은밀히 한나라 대신 조탁(趙卓: 「한비자」의 趙紹)과 한조(韓晁: 한비자의 韓沓)을 만나 말하기를 :
“공들은 나라의 변사(辯士)이나 신하가 되어 굳이 자신의 말이 다른 사람에게 꼭 채택될 필요가 있겠소. 

단지 충심을 다하면 될 것이오 .”라고 하였다. 이에 두 사람은 각자 한소후 앞에서 국사에 관한 자신의 의견을 개진했다.

신자는 은밀히 한소후가 좋아하는 대목을 눈여겨 보아 두었다가 한소후가 좋아하는 말만 골라 진언했다.

그러자 한소후가 크게 기뻐했다.]

 

 

申子請仕其從兄官

 

申子請仕其從兄官,昭侯不許也.  申子有怨色.

昭侯葉:「非所謂學於子者也. 聽者之謁,而廢子之道乎?又亡其行子之術,而廢左之謁乎?
子尚教寡人循功勞,視次弟. 今有所求,此我將奚聽乎?」申子乃辟舍請罪,曰:「君真其人也!」

 

[기원전 351, 신불해가 자신의 종형(從兄)을 출사(出仕)시키고자 했으나 한소후가 이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신불해가 원망스러운 표정을 짓자 한소후가 말하기를 : “과인이 승낙하지 않은 것은 그대에게 배운 것을 실행한

것이 아니겠소. 지금 그대의 청을 받아들여 그대가 가르침을 폐하는 것이 옳겠소? 아니면 그대의 가르침대로

행해 그대의 청을 물리치는 것이 옳겠소? 그대는 일찍이 과인에게 공적의 대소에 따라 상을 차등 있게 내리라고

말했소. 지금 그대가 청을 넣고 있으니 과인은 장차 어느 쪽을 따르는 것이 좋겠소.?라고 하자.
이에 신불해는 한소후에게 거소를 옮겨가며 빌면서 말하기를 : “군주야 말로 이상적인 군주입니다.”라고 하였다.]

 

 

蘇秦為楚合從說韓王

 

蘇秦為楚合從說韓王曰:「韓北有鞏、洛、成皋之固,西有宜陽之常阪之塞,東有宛、穰、洧水,

南有陘山,地方千里,帶甲數十萬.  天下之強弓勁弩,皆自韓出.  奚子、少府時力、距來,

皆射六百步之外. 韓卒超足而射,百發不暇止,遠者達胸,近者掩心.  韓卒之劍戟,皆出於冥山、

棠溪、墨陽、合伯膊.  鄧師、宛馮、龍淵、大阿,皆陸斷馬牛,水擊鵠鴈,當敵即斬堅.

甲、盾、鞮、鍪、鐵幕,革抉、㕭芮,無不畢具.  以韓卒之勇,被堅甲,跖勁弩,呆利劍,

一人桑百,不足言也.  夫以韓之勁,與大王之賢,乃欲西面事秦,稱東藩,筑帝宮,受冠帶,

祠春秋,交臂而服焉.  夫羞社稷而為天下笑,無過此者矣. 是故愿大王之熟計之也.

 

[기원전 333, 소진이 조나라를 위해 합종을 이룰 생각으로 한소후에게 유세하기를 : “한나라는 북쪽으로

공(鞏: 하남성 공현), 낙수(洛水), 성고의 험고함이 있고, 서쪽으로 의양(宜陽), 상판(常阪: 商阪)의 요새가 있고,

동쪽으로 완(宛: 하남성 남양시), 양(穰: 하남성 등현 동남쪽), 유수(洧水)가 있고, 남쪽으로 형산(陘山)이 있습니다.

영토는 사방 1천 리이고, 정예병은 수십만 명이나 됩니다. 천하의 강궁(强弓)과 경노(勁弩: 강한 쇠뇌)는

모두 한나라에서 나옵니다. 계자(谿子), 소부(少府: ‘계자’와 함께 산출지 이름에서 유래한 쇠뇌), 시래(時來),

거서(距黍: ‘시래’와 함께 산출지 이름에서 유래한 名弓)는 모두 6백 보 밖에서도 쏠 수 있습니다.

한나라 병사는 초거(超距: 물건을 뽑는 식으로 어깨힘을 기르는 훈련)하여 활쏘기 연습을 하는데

끊임 없이 연습하느라 잠시 쉴 여가조차 없습니다. 멀리서 쏘면 가슴 부위를 맞추고, 가까이서 쏘면 심장을 맞춥니다.

한나라 병사의 칼은 모두 명산(冥山)에서 나옵니다. 당계(棠谿: 명검), 묵양(墨陽: 美劍), 합백(合伯: 한나라에 명검),

등사(鄧師: 등나라 공인이 만든 명검), 완풍(宛馮: 馮池에서 만든 명검),용연(龍淵), 태아(大阿: 초나라 명검)는

모두 시험 삼아 뭍에서는 우마를 베고, 물 위에서는 기러기를 베고, 전장에서는 적을 만나면 목을 베고,

갑순(甲盾: 갑옷과 방패), 제무(鞮鍪:투구), 철막(鐵幕: 옷 위에 걸친 철갑)을 끊었습니다.

혁결(革抉: 활을 쏠 때 오른손 엄지에 끼우는 가죽으로 만든 깍지)과 벌예(㕭芮: 방패에 연결된 끈)도 갖추지

않은 것이 없습니다. 한나라 병사의 용맹으로 단단한 갑옷을 걸치고, 쇠뇌를 쏘기 위해 경노(勁弩)를 발로 밟고,

날카로운 칼을 차면 일당백(一當百)이라고 해도 오히려 제대로 설명하지 못한 것입니다. 무릇 한나라의 견고함과

대왕의 현명함을 갖고도 서면하여 진나라를 섬기고, 동번(東藩)을 칭하고, 진제(秦帝)를 위한 이궁을 쌓고,

진나라의 관대(冠帶)를 받고, 진나라의 춘추 제사를 받들고, 공손한 태도를 보이며 복종하면 나라를 욕되게 하여

천하의 웃음거리가 될 것이니 이보다 더한 잘못은 없습니다. 이런 까닭에 원컨대 대왕께서는 깊이 살피시기 바랍니다.

 

大王事秦,秦必求宜陽、成皋. 今茲效之,明年又益求割地. 與之,即無地以給之; 

不與,則棄前功而後更受其禍.  且夫大王之地有盡,而秦之求無已. 夫以有盡之地,

而逆無已之求,此所謂市怨而買禍者也,不戰而地已削矣.

臣聞鄙語曰:『寧為雞口,無為牛後.』今大王西面交臂而臣事秦,何以異於牛後乎?

夫大王之賢,挾強韓之兵,而有牛後之名,臣竊為大王羞之.」 韓王忿然作色,

攘臂按劍,仰天太息曰:「寡人雖死,必不能事秦. 今主君以楚王之教詔之,敬奉社稷以從.」

 

[대왕께서 진나라를 섬기면 진나라는 필시 의양과 성고를 요구할 것입니다. 지금 바치면 명년에는 더 많은 땅을

요구할 것입니다. 이를 들어주면 끝내는 더 이상 줄 땅이 없게 됩니다. 그러나 주지 않으면 앞서 세운 공을 모두

버리고 그 화를 입게 됩니다. 무릇 대왕의 땅은 한정되어 있는데 진나라의 요구는 끝이 없는 것입니다. 한정된 땅으로

끝없는 요구를 받아주면 이는 소위 원성을 사고 화를 불러들이는 꼴이 됩니다. 그리되면 싸워 보지도 못하고 땅만

빼앗기게 됩니다. 속담에 이르기를, ‘계구우후(鷄口牛後: 닭의 머리는 될지언정 쇠꼬리는 되지 않음)’라고 했습니다.

지금 대왕께서 서면한 채 공손히 두 손 모아 신하로서 진나라를 섬기고자 한다면 이는 쇠꼬리가 되는 것과

무엇이 다르겠습니까? 무릇 대왕이 그 현명함과 강한 무력을 지니고도 쇠꼬리라는 이름을 얻고자 하면

신이 생각하기에 대왕께 수치스러운 일입니다.”라고 하였다. 이에 한소후가 분연히 안색을 바꾸고,

소매를 거둬 팔뚝을 드러낸 채 검을 어루만진 채 하늘을 쳐다보며 크게 탄식하며 말하기를 :

“과인이 비록 죽는 한이 있을지라도 결코 진나라를 섬기지 않을 것이오. 지금 그대가 조왕의 가르침을

나에게 일러 주었소. 경건히 사직을 받들어 그 가르침을 따를 것이오.”라고 하였다.]

 

 

張儀為秦連橫說韓王

 

張儀為秦連橫說韓王曰:「韓地險惡,山居,五穀所生,非麥而豆;民之所食,大抵豆飯藿羹;

一歲不收,民不厭糟糠;不滿九百里,無二歲之所食. 料大王之卒,悉之不過三十萬,而廝徒負養,

在其中矣,為除守徼亭障塞,見卒不過二十萬而已矣. 秦帶甲百餘萬,車千乘,騎萬匹,虎摯之士,

跿跔科頭,貫頤奮戟者,至不可勝計也.  秦馬之良,戎兵之眾,探前趹後,踢間三尋者,

不可稱數也.  山東之卒,被甲冒胄以會戰,秦人捐甲徒裎以趨敵,左挈人頭,右挾生虜.

 

[기원전 311, 장의가 진나라를 위해 연횡을 이룰 생각으로 한양왕(韓襄王)에게 이같이 유세하기를 :
“한나라는 땅이 험조하고, 산에 의지하고 있습니다. 이에 곡식으로는 보리 아니면 콩밖에 자라지 않아 백성들은 대개

콩밥과 곽갱(藿羹: 콩잎으로 만든 국)을 먹고 있습니다. 한 해만 흉년이 들어도 백성들은 지게미와 쌀겨 조차

배불리 먹지 못합니다. 영토는 사방으로 9백 리에 미치지 못해 두 해의 양식을 비축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대왕의 병사들을 보면 모두 합쳐 30만 명을 넘지 못하고 있습니다. 더구나 그 속에는 잡역부와 말을 기르는 자,

음식을 만드는 자들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이들과 나무와 돌로 만든 경계, 흙을 쌓아 올린 곳에 세운 변경의 망루,

큰 성루, 성곽의 담과 참호를 지키는 자들을 제외하면 적과 싸울 수 있는 군사는 불과 20만 명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러나 진나라의 대갑(帶甲)은 1백여만 명이고, 수레는 1천 승, 기마용 말은 1만 필에 이르며, 호분지사(虎賁之士)는

맨발에 투구를 쓰지 않은 채로 활을 당기고 창을 휘두르니 이들을 당할 길이 없습니다.

또 진나라의 양마(良馬)와 많은 융병(戎兵)들이 전후로 마구 내달리면 빠르기가 질풍과 같고, 말은 한 번 도약하면

3심(尋: ‘1심’은 8척)이나 되니 그 전술을 헤아릴 수 없습니다. 그러나 산동의 병사들은 무거운 갑주를 입고 싸움에

임하고 있습니다. 진나라 병사들은 갑옷을 입지 않은 채 어깨들 드러내고 싸우면서 왼손으로 적의 수급을 들어올리고,

오른쪽 옆구리에 생포한 적을 낍니다.

 

夫秦卒之與山東之卒也,猶孟賁之與怯夫也,以重力相蚜,猶烏獲之與嬰兒也.

夫戰孟賁、烏獲之士,以攻不服之弱國,無以異於墮千鈞之重,集於鳥卵之上,必無幸用處.  
諸侯不料兵之弱, 食之寡, 而聽從人之甘言好辭, 比周以相飾也, 皆言曰:『聽吾計則可以強霸天下.』

夫不顧社稷之長利, 而聽須臾之說, 詿誤人主者, 無過於此者矣.  大王不事秦, 秦下甲據宜陽,

斷絕韓之上地;東取成皋宜· 陽, 則鴻臺之宮, 桑林之苑, 非王之有已.  夫塞成皋,絕上地,

則王之國分矣.  先事秦則安矣,不事秦則危矣. 夫造禍而求福,計淺而愿深,逆秦而順楚,

雖欲無亡,不可得也.  故為大王計,莫如事秦. 秦之所欲,莫如弱楚. 而能弱楚者莫如韓.

非以韓能強於楚也,其地勢然也. 僅王西面而事秦以攻楚,為敝邑,秦王必喜.

夫攻楚而私其地,轉禍而說秦,計無便於此者也. 是故秦王使使臣獻書大王御史,須以決事.」

韓曰:「客幸而教之,請比郡縣,筑帝宮,祠春秋,稱東藩,效宜陽.」

 

[진나라 병사와 산동의 병사는 마치 맹분(孟賁: 전설상의 용사)과 겁에 질린 필부에 비유할 수 있습니다.

진나라가 무서운 힘으로 산동 6국을 누르는 것은 마치 오획(烏獲: 전설상의 용사)이 영아를 누르는 것과 같습니다.

무릇 맹분, 오획과 같은 용사를 이끌고 저항하는 약소국을 공격하는 것은 1천 균의 무게가 새 알 위에 가해지는 것과

같습니다. 그리되면 틀림없이 적들을 산산조각 낼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제후들은 자신의 군사가 약하고,

식량이 부족한 것을 생각지 않고 사람들의 감언이설에 혹해 있습니다. 이들은 서로 결탁해 스스로 과장하기를,

‘나의 계책을 채택하면 천하를 제패할 수 있다’고 떠들고 있습니다. 무릇 나라의 먼 앞날을 고려치하지않고

일시적인 유세로 군주를 기만하는 행각으로는 이들보다 더한 자들은 없습니다. 대왕께서 진나라를 섬기지 않으면

진나라는 군사를 동원해 의양을 취해 한나라의 상지(上地: 상당)로 통하는 길을 끊고, 동쪽으로 성고(成皐)와

형양(滎陽)을 취할 것입니다. 그리되면 홍대지궁과 상림지원(‘홍대지궁’과 함께 한나라 도읍 내에 있는 궁원)은

대왕의 소유가 아니게 됩니다. 무릇 성고가 봉쇄되고 상지로 가는 길이 끊기면 대왕의 나라는 둘로 갈라지게 됩니다.

진나라를 섬기면 안정을 취할 수 있으나 그렇지 않으면 위기에 처하게 됩니다. 무릇 화를 불러들이면서 복을 찾고,

계책의 수준이 낮아 오히려 원한을 깊게 하고, 진나라를 거스른 채 초나라를 좇으면 설령 망하지 않으려 해도

망하지 않을 수가 없게 됩니다. 그러니 대왕을 위한 계책으로는 진나라를 섬기는 것보다 나은 계책은 없습니다.

진나라가 바라는 것으로는 초나라를 약하게 만드는 것보다 더한 것이 없고, 초나라를 능히 약하게 만들 수 있는

나라로는 한나라만한 나라는 없습니다. 그러나 한나라 만으로는 초나라보다 강하게 될 수 없으니 이는 지세(地勢)가

그리 만든 것입니다. 지금 대왕께서 서면하여 진나라를 받들면서 초나라를 치면 폐읍의 진왕(秦王: 진혜문왕)은

필시 크게 기뻘할 것입니다. 무릇 초나라를 공격하여 그 땅을 독차지하고 당면한 화난을 전환시켜 오히려 진나라를

기쁘게 만들면 한나라에 유리한 계책으로 이보다 더한 것은 없습니다. 그래서 진왕이 저를 대왕에게 보내

헌서(獻書)토록 한 것입니다. 대왕의 조속한 결단이 내려지기를 기다리겠습니다.”라고 하였다.

그러자 한양왕이 말하기를 : “그대의 가르침을 잘 받았소. 원하건대 진나라의 한 군현(郡縣)이 되어, 진제(秦帝)의

이궁을 쌓고, 진나라의 춘추 제사를 받들고, 진나라의 동번을 칭하고, 의양을 바치도록 하겠소.”라고 하였다.]

 

 

宣王謂摎留

 

宣王謂摎留曰:「吾欲兩用公仲、公叔,其可乎?」

對曰:「不可. 晉用六卿而國分,簡公用田成、監止而簡公弒,魏兩用犀受、張儀而西河之外亡.

今王兩用之,其多力者內樹其黨,其寡力者籍外權. 群臣或內樹其黨以擅其主,或外為交以裂其地,

則王之國必危矣.」

 

[한선혜왕(韓宣惠王: 한소후의 아들)이 대신 규류(摎留)에게 묻기를 : “나는 공중(공중붕)과 공숙(公叔)을

함께 기용하고자 하오. 이것이 가능하겠소.”라고 하자.  구류가 대답하기를 : “불가합니다.

진(晉)나라는 6경(六卿: 번씨, 중항씨, 지씨, 조씨, 위씨, 한씨)을 등용해 나라가 나뉘고 말았습니다.

제간공(齊簡公: 제도공의 아들)은 전성(田成)과 감지(監止)을 함께 등용했다가 시해당했습니다.

위나라는 서수(犀首)와 장의(張儀)를 함께 등용했다가 서하(西河) 밖의 땅을 잃고 말았습니다.

지금 대왕께서 두 사람을 함께 등용하면 힘이 센 자는 안에 자신의 무리를 심고, 힘이 약한 자는 밖의 힘에

기대려 할 것입니다. 군신들이 안으로 자신의 무리를 심고 전횡하면서 밖으로 다른 나라와 친교를 도모하면서

땅을 떼어주면 대왕의 나라는 필시 위기에 처하고 말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張儀謂齊王

 

張儀謂齊王曰:「王不如資韓朋,與之逐張儀於魏. 魏因相犀首,因以齊、魏廢韓朋,

而相公叔以伐秦. 公仲聞之,必不入於齊. 據公於魏,是公無患.」

 

[기원전 322, 어떤 사람이 장의에게 말하기를 : “제가 제왕(제위왕)에게 말하기를, ‘대왕은 한붕(공중붕)을 도와

장의를 위나라에서 쫓아내느니만 못합니다. 그러면 위나라는 서수(犀首)를 재상으로 삼을 것이고, 제,위 두 나라는

이어 한붕을 폐기한 뒤 공숙을 재상으로 삼고 진나라를 공격할 것입니다’라고 했습니다. 한붕이 이 얘기를 들으면

결코 제나라로 들어가지 않을 것입니다. 한붕은 자신이 쫓겨나지 않기 위해서라도 제왕과 함께 그대를 위나라에서

쫓아내는 일을 결코 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공은 걱정을 하지 않아도 될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楚昭獻相韓

 

楚昭獻相韓. 秦且攻韓,韓廢昭獻.  昭獻令人謂公叔曰:「不如貴昭獻以固楚,秦必曰楚、韓合矣.」

 

[초나라 대부 소어(昭漁)가 한나라를 돕게 되자, 진나라가 한나라를 공격하려고 했다.

이에 한나라가 소어를 면직시킬 움직임을 보이자 소어가 사람을 재상 공숙(公叔)에게 보내 말하게 하기를 :
“나를 높여 초, 한 두 나라 간의 관계를 돈독히 하느니만 못하오. 

그러면 진나라는 필시 두 나라가 연합한 것으로 생각해 한나라를 공격하지 않을 것이오.”라고 하였다.] 

 

 

秦攻陘

 

秦攻陘,韓使人馳南陽之地.  秦已馳,又攻陘,韓因割南陽之地.  秦受地,又攻陘.
陳軫謂秦王曰:「國形不便故馳,交不親故割. 今割矣交不親,馳矣而兵不止,

臣恐山東之無以馳割事王者矣. 且王求百金於三川而不可得,求千金於韓,一旦而具.

今王攻寒庶,是絕上交而固私府也,竊為王弗取也.」

 

[진나라가 형(陘) 땅을 공격하자, 한나라가 형 땅을 남양(南陽) 땅과 바꾸고자 했다. 그러나 진나라는 환지(換地) 

협상이 끝났는데도 다시 형 땅을 공격했다. 이에 한나라는 할 수 없이 남양 땅을 할양하게 되었다.

그런데 진나라는 남양 땅을 받고도 또 다시 형 땅을 공격했다. 그러자 세객 진진(陳軫)이 한나라를 위해

진소양왕에게 말하기를 : “한나라는 지형이 불리해 환지하고, 교분이 두텁지 못해 할지한 것입니다.

지금 할지에도 불구하고 교분이 소원하고, 환지에도 불구하고 철군하지 않는다면 장차 산동의 제후들 중 할지와 환지를

하여 대왕을 섬기는 자가 없을까 렵습니다. 게다가 대왕은 삼천으로부터는 단 1백 금일지라도 이를 얻을 수 없으나

한나라로부터는 1천 금일지라도 단번에 얻을 수 있습니다. 한나라를 공격하는 것은 최고의 선린관계를 스스로 끊고 

대왕의 개인 재산 1천 금을 포기하는 것과 같습니다. 신은 대왕을 위해 이같이 하지는 않을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五國約而攻秦

 

五國約而攻秦,楚王為從長,不能傷秦,兵不算而留於成皋.
魏順謂市丘君曰:「五國罷,必攻市丘,以償兵費. 君資臣,臣要求為君止天下之攻市丘.」

市丘君曰:「善.」因遣之. 

 

[5국(五國: 제,초,조,위,한으로 파악)이 결맹해 진나라를 공격할 때 초경양왕은 합종의 맹주가 되었다.

그러나 진나라를 제대로 공격하지도 못한 채 군사를 뒤로 물려 성고에 주둔시켰다.

그러자 위순(魏順: 공자의 8세손인 子順)이 ‘시구’의 군주에게 말하기를 : “5국의 군사를 뒤로 물리면 반드시

시구를 공격해 전비(戰費)를 보상받고자 할 것이오. 군은 나를 도와주도록 하시오. 그러면 내가 그대를 위해

제후들의 시구 공격을 저지토록 하겠소.”라고 하자. 시구’의 군주가 대답하기를 : “그리하도록 하겠소.”라고 하였다.
이에 곧 위순을 초나라에 사자로 보냈다.]

 

魏順南見楚王曰 : 「王約五國而西伐秦, 不能傷秦. 天下且以是輕王而重秦, 故王胡不卜交乎?」  

楚王曰 : 「奈何?」魏順曰 :「天下罷, 必攻市丘以償兵費, 王令之勿攻市丘, 五國重王, 且聽王之言, 而不攻市丘. 

不重王, 且反王之言, 而攻市丘. 然則王之輕重必明矣.」 故楚王卜交, 而市丘存. 

 

[위순이 남쪽으로 가서 초경양왕을 만나 말하기를 : “대왕이 5국과 결맹해 서쪽으로 진나라 공벌에 나서고도 

진나라에 공격을 가하지 못하면 천하의 제후들은 대왕을 업신여기고 진나라를 중히 여길 것입니다. 

런데도 대왕은 왜 제후들이 대왕을 존중하고 있는지 여부를 알아보지 않는 것입니까.”라고 하자.  

초왕이 묻기를 : “그리하려면 어찌해야 되겠소?”라고 하자.
위순이 대답하기를 : “천하의 제후들이 군사를 거두면 반드시 시구를 공격해 전비를 보상받으려 할 것입니다.

이때 대왕께서는 시구를 공격하지 못하도록 명하십시오. 만일 5국이 대왕을 존중하면 대왕의 명을 따라

시구를 공격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대왕을 존중하지 않으면 명을 어기고 시구를 공격할 것입니다.

이같은 방법을 통해 대왕을 존중하는지 여부를 분명히 확인할 수 있을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초경양왕은 네 나라의 국교를 점쳐 보게 되었고, 시구는 병화를 피해 그대로 존속할 수 있었다.]

 

 

鄭強載八百金入秦

 

鄭強載八百金入秦,請以伐韓. 泠向謂鄭強曰:「公以八百金請伐人之與國,秦必不聽公.

公不如令秦王疑公叔.」 鄭強曰:「何如?」曰:「公叔之攻楚也,以幾瑟之存焉,故言先楚也.

今已令楚王奉幾瑟以車百乘居陽翟,令昭獻轉而與之處,旬有餘,彼已決. 而幾瑟,公叔之讎也;

而昭獻,公叔之人也. 秦王聞之,必疑公叔為楚也.」

 

[기원전 300, 한나라 사람 정강(鄭彊)이 8백 금을 수레에 싣고 진나라로 들어가 한나라 정벌을 청하려 했다.

그러자 진나라 대신 영향(泠向)이 정강에게 말하기를 : “공은 8백 금으로 진나라의 동맹국을 정벌해 달라고

청하려 하지만 진나라는 필시 받아들이지 않을 것이오. 공은 진왕(진혜문왕)으로 하여금 한나라 재상 공숙(公叔)을

의심하게 만드느니만 못하오.”라고 하자.  정강이 묻기를 : “어찌하면 그리 할 수 있겠소?”라고 하자.
영향이 대답하기를 : “공숙이 초나라를 공격하고자 하는 것은 한양왕 때 태자가 죽자 초나라에 인질로 있으면서

공자 咎와 태자 자리를 놓고 다툼이 있기 때문이오. 초나라를 공격해 초나라로 하여금 그를 죽이게 만들려는 것이오.

그래서 공숙이 다른 나라에 앞서 초나라를 공격하자고 말한 것이오. 지금 초회왕으로 하여금 병거 1백 승으로

기슬을 받들어 한나라의 양척(陽翟: 하남성 우현)에 살게 하고 소어(昭漁)를 기슬과 함께 머물게 하시오.

그러면 얼마 안 돼 기슬은 자신을 모살(謀殺)하려는 소어의 의도를 눈치챌 것이고, 소어 또한 기슬과 함께 향후 

서로무사히 지내는 방안을 모색할 것이오. 원래 기슬은 공숙의 원수이고, 소어는 공숙의 사람이오. 그러니 진왕은

이 말을 들으면 필시 공숙이 초나라를 위해 일하는 것으로 의심해 이내 한나라를 공격할 것이오.”라고 하였다.]

 

 

鄭強之走張儀於秦

 

鄭強之走張儀於秦,曰儀之使者,必之楚矣.  故謂大宰曰:「公留儀之使者,強請西圖儀於秦.」
故因而請秦王曰:「張儀使人致上庸之地,故使使臣再拜謁秦王.」秦王怒,張儀走.

 

[기원전 310, 정강은 장의가 진나라에서 축출당하는 모습을 볼 생각으로 장의의 사자가 틀림없이 초나라로

갈 것이라는 소문을 냈다. 이어 초나라 태재(大宰)에게 말하기를 : “공은 장의의 사자를 머물러 있게 하십시오.

나는 서쪽 진나라로 가서 장의를 도모하겠습니다.”라고 하였다.
그리고는 진무왕에게 말하기를 : “장의가 사람을 초나라로 보내 상용(上庸)의 땅을 바치게 했습니다.

그러자 초왕이 저를 사자로 보내면서 대왕에게 재배하고 이 사실을 고하게 했습니다.”라고 하였다.
진무왕이 대노하자, 장의가 도망쳐 버렸다.]

 

 

宜陽之役

 

宜陽之役,楊達謂公孫顯曰:「請為公以五萬攻西周,得之,是以九鼎印甘茂也.

不然,秦攻西周,天下惡之,其救韓必疾,則茂事敗矣.」

 

[의양의 싸움 때 진나라 사람 양달(楊達)이 공손현(公孫顯: 공손연)에게 말하기를 : “공을 위해 5만 명의 군사를

이끌고 가서서주를 정벌하고자 합니다. 만일 서주를 취하면 이는 구정(九鼎)을 얻어 감무를 누를 수 있게 됩니다.

만일 취하지 못하면 서주를 공격하여 주왕(周王)을 겁박했다는 오명을 듣게 되어 제후들이 군사를 일으켜 

한나라의 의양을 지나 서주를 속히 구하게 될 것입니다. 이 계책은 어떤 결과를 빚든 의양을 공격하려는 

감무의 계획을 무산시킬 수 있습니다.”라고 하였다.]

 

秦圍宜陽, 游騰謂公仲曰:「公何不與趙藺、離石、祁,以質許地, 則樓緩必敗矣.

收韓、趙之兵以臨魏, 樓鼻必敗矣. 韓為一,魏必倍秦,甘茂必敗矣. 以成陽資翟強於齊,楚必敗之. 

須秦必敗,秦失魏,宜陽必不拔矣.」

 

[진나라가 의양을 포위하자, 원래 서주의 대신이었던 유등(游騰)이 공중붕(公仲朋)에게 말하기를 :
“공은 왜 인(藺: 산서성 이석현 서쪽), 이석(離石: 산서성 이석현), 기(祁: 산서성 기현) 땅을 조나라에게 주고,

인질을 조나라로 보내 친교를 맺은 뒤 두 나라가 합세하여 허(許) 땅을 취하지 않는 것입니까?

그리하면 진, 조 두 나라의 연합을 추진하려는 누완(樓緩)의 계책은 무산될 것입니다. 한, 조 두 나라 군사를 이끌고

위나라에 임하면 진, 위 두 나라의 연합을 추진하려는 누비(樓鼻)의 계책도 무산되고 말 것입니다.

한, 조 두 나라가 하나가 되면 위나라는 필시 진나라를 배반할 것이니 감무는 고립되고 말 것입니다.

이때 성양(成陽: 산동성 하택현) 땅을 들어 진, 제 두 나라 간의 연합을 추진하는 적강(翟强)을 도우면

초나라는 반드시 불리하게 될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얼마 안돼 진나라마저 반드시 위나라를 잃게 될 것입니다.

진나라가 위나라를 잃게 되면 의양을 공격할 길이 없게 되니 결국 의양은 필시 안전하게 될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公仲以宜陽之故仇甘茂

 

公仲以宜陽之故仇甘茂. 其後,秦歸武遂於韓,已而,秦王固疑甘茂之以武遂解於公仲也.
杜赫為公仲謂秦王曰:「明也愿因茂以事王.」秦王大怒於甘茂,故樗里疾大說杜聊.

 

[진소양왕 원년(기원전 306),공중붕(公仲朋)이 의양(宜陽)의 일로 인해 진나라의 승상인 감무(甘茂)를 적대시했다. 

그후 진나라가 의양과 강을 사이에 두고 마주 보고 있는 무수를 한나라에 돌려주었다. 그러자 진소양왕은 무수의 

반환을 주장했던 감무가 이를 이용해 공중붕과 화해하려는 것으로 보고 의심하게 되었다.

이에 한나라 사람 두혁(杜赫: 杜聊)이 공중붕을 위해 감무를 무함할 생각으로 진소양왕에게 말하기를 :

“공중이 감무를 통해 대왕을 섬기고 싶어합니다.”라고 하자.  이로 인해 진소양왕은 감무를 더욱 미워하였다.

그러자 감무와 함께 승상으로 있는 저리질(樗里疾)이 두료(杜聊: 두혁)를 크게 좋아하게 되었다.]

 

 

秦韓戰於濁澤

 

秦· 韓戰於濁澤,韓氏急. 公仲明謂韓王曰:「與國不可恃. 今秦之心欲伐楚,

王不如因張儀為和於秦,賂之以一名都,與之伐楚. 此以一易二之計也.」
韓王曰:「善.」乃儆公仲之行,將西講於秦.  

 

[기원전 314, 진, 한 두 나라가 탁택(濁澤: 하남성 장갈현)에서 싸우자 한나라가 위기에 처하게 되었다.

이때 공중붕이 한선혜왕(韓宣惠王)에게 말하기를 : “동맹국도 믿을 수 없습니다. 지금 진나라는 내심 초나라를

공격하고 싶어하니 대왕께서 장의를 통해 진나라와 강화하면서 명도(名都) 하나를 떼어주고 합세하여 초나라를

공격하느니만 못합니다. 이는 하나를 주고 둘을 얻는 계책입니다.”라고 하자.  한왕은 : “좋은 생각이오.”라고 하였다.
그리고는 곧 공중붕에게 신중히 일을 처리할 것을 당부했다. 공중붕이 서쪽 진나라로 가서 강화하려 하였다.

楚王聞之大恐, 召陳軫而告之. 陳軫曰:「秦欲伐我久矣, 今又得韓之名都一而具甲, 秦· 韓并兵南鄉,

此秦所以廟祠而求也. 今已得之矣,楚國必伐用處. 王聽臣,為之儆四境之內選師,言救韓,

令戰車滿道路;發信臣,多其車,重其幣,使信王之救己也.  縱韓為不能聽我,韓必德王也,

必不為雁行以來. 是秦· 韓不和, 兵雖至, 楚國不大病矣.  為能聽我絕和於秦, 秦必大怒,

以厚怨於韓.  韓得楚救, 必輕秦.  輕秦, 其應秦必不敬.  是我困秦· 韓之兵, 而免楚國之患也. 」
楚王大說,乃儆四境之內選十,言救韓,發信臣,多其車,重其幣.

 

[초회왕이 이 말을 듣고 크게 두려워했다. 이에 진진을 불러 이를 상의하자, 진진이 말하기를 : “진나라가 우리를

공격하려고 한 것은 이미 오래 되었습니다. 지금 또 한나라의 명도를 하나 얻어 더 많은 자금을 확보하게 되자

무력을 더욱 증강시키고 있습니다. 진, 한 두 나라가 합세해 남쪽으로 내려오는 것은 진나라가 종묘에서 기도하며

염원하던 일입니다. 이제 그 염원이 이뤄진 이상 초나라는 반드시 정벌되고 말 것입니다.

그러니 대왕께서는 신의 말을 명심하시기 바랍니다. 우선 침공에 대비해 전국에 경계령을 내리고, 군사를 일으켜

한나라 구원을 공개적으로 선포하고, 병거로 도로를 채우고, 좌우를 사자로 보내면서 많은 수레에 예물을 가득 실어

보내십시오. 그래서 한나라로 하여금 대왕께서 정말 한나라를 구원해 줄 것으로 믿게 만드십시오.

설령 한나라가 우리의 제의를 받아들이지 않을지라도 한나라는 필시 대왕을 고맙게 여기고 초나라 공벌에 선봉이

되지는 않을 것입니다. 이는 진, 한 두 나라가 불화하면 설령 진나라 군사가 쳐들어올지라도 크게 우려하지 않아도

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만일 한나라가 우리의 제의를 받아들여 진나라와 단교하면 진나라는 틀림없이 격노해

한나라를 크게 원망할 것입니다. 한나라는 초나라의 구원을 얻으면 필시 진나라를 경시할 것입니다.

한나라가 진나라를 경시하게 되면 필시 진나라에 대한 태도가 불경스러워질 것입니다. 이는 진, 한 두 나라의

군사를 상호 교전으로 인해 피폐하게 만들고 초나라의 환난을 해결하는 길이 될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이에 초회왕은 크게 기뻐하며 곧 전국에 경계령을 내리고, 군사를 일으켜 한나라 구원을 공개적으로 선포하고,

좌우를 사자로 보내면서 많은 수레에 예물을 가득히 실어 보냈다.]

 

謂韓王曰:「弊邑雖小,已悉起之矣. 愿大國遂肆意於秦,弊邑將以楚殉韓.」韓王大說,乃止公仲.

公仲曰:「不可,夫以實告我者,秦也;以虛名救我者,楚也. 恃適之虛名,輕絕強秦之敵,

必為天下笑義務. 且楚、韓非兄弟之國也, 又非素約而謀伐秦矣. 秦欲伐楚, 楚因以起師言救韓,

此必陳軫之謀也. 且王以使人報於秦矣,今弗行,是欺秦也. 夫輕強秦之禍,而信誰之謀臣,

王必悔之矣.」韓王弗聽,遂絕和於秦. 秦果大怒,興師與韓氏戰於那門,楚救不至,韓氏大敗.

韓氏之兵非削弱也,民非蒙愚也,兵為秦禽,智為楚笑,過聽於陳軫,失計於韓明也.

 

[사자를 통해 한선혜왕에게 말하기를 ​ : “폐읍은 비록 작지만 이미 전 군을 총동원해 귀국의 구원에 나섰습니다.

원컨대 귀국은 마음 놓고 진나라에 대항하기 바랍니다. 폐읍은 장차 거국적으로 귀국을 위해 희생할 준비가 되어

있습니다.”라고 하자.  한선혜왕이 크게 기뻐하며 공중붕으로 하여금 다시는 진나라와 교통하지 못하게 했다.

이에 공중붕이 간언하기를 : “그것은 불가합니다. 진정 우리나라를 곤경에 처하게 만들 수 있는 나라는 진나라입니다.

초나라는 빈 말로 우리나라를 구원하겠다는 것입니다. 초나라의 빈 말을 믿고 경솔하게 강적인 진나라와 단교하면

필시 천하의 웃음거리가 되고 말 것입니다. 초, 한 두 나라는 형제지국이 아닙니다. 게다가 사전에 결맹하여 진나라를

공격하기로 한 것도 아닙니다. 지금 진나라는 내심 초나라를 공격할 생각을 품고 있습니다. 이같은 때에 초나라가

군사를 일으켜 한나라를 구원하자고 선포한 것은 틀림없이 진진의 계책일 것입니다. 또한 대왕은 이미 사람을

진나라로 보내 강화할 뜻을 전했습니다. 그런데 이제 와서 신이 가지 않으면 진나라를 기만한 것이 됩니다. 무릇 강한

진나라로 인한 화난을 가벼이 보고 초나라의 모신(謀臣)을 믿게 되면 대왕은 반드시 후회할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그러나 한선혜왕은 이를 듣지 않고 결국 진나라와 단교했다. 그러자 진나라가 과연 대노하여 군사를 일으켜 한나라와

안문(岸門: 하남성 장갈현)에서 싸웠다. 그러나 초나라의 구원군은 결국 오지 않았다. 이에 한나라는 대패하게 되었다.

한나라의 대패는 한나라의 군대가 약했기 때문도 아니고, 백성이 우매했기 때문도 아니었다. 병사들이 진나라의

포로가 되고, 지모가 초나라의 비웃음을 산 것은 진진의 계교를 과신하여, 공중붕의 계책을 쓰지 않았기 때문이다.]

 

 

 顏率見公仲

 

顏率見公仲,公仲不見.  顏率謂共仲之謁者曰:「公仲必以率為陽也,故不見率也.

公仲好內,率曰好士;仲嗇於財公仲無行,率曰好義. 自今以來,率且正言之而已矣.」

公仲之謁者以告公仲,公仲遽起而見之.

 

[동주의 대신 안솔(顔率)이 공중붕에게 면회를 청했으나 공중붕이 만나주지 않았다.

이에 안솔이 공중붕의 알자에게 말하기를 : “공중붕은 필시 내가 바른말을 하지 않는 것으로 생각해 나를 만나주지

않으려는 듯하오. 그간 공중붕은 호색했지만 나는 그가 선비를 좋아한다고 말하고, 그는 인색했지만 나는 그가 재산을

풀어 덕을 베푼다고 말하고, 그는 불의했지만 나는 그가 정의를 좋아한다고 말했소. 그러나 오늘부터 나는 바른 말을

하도록 할 것이오.”라고 하였다. 알자가 이 말을 전하자 공중붕이 급히 일어나 안솔을 만나 보았다.]

 

 

韓公仲謂向壽

韓公仲謂向壽曰:「禽困覆車. 公破韓,辱共仲, 公仲收國復事秦,自以為必可以封. 今公與楚解,

中封小令尹以桂陽. 秦、楚合,復攻韓,韓必亡. 公仲躬率其私徒以鬭於秦,愿公之熟計之也.」

向壽曰:「吾合秦、楚,非以當韓也,子為我謁之.」 公仲曰:「秦、韓之交可合也.」 

 

[기원전 306, 소대가 공중붕을 위해 진나라 대신 상수(向壽)에게 말하기를 : "궁지에 몰린 맹수는 수렵하는 수레를

뒤엎어 버리는 법이오. 공은 의양을 취함으로써 공중(公仲)을 욕되게 했소. 그러나 공중은 무너진 한나라를 수습해

진나라를 섬기려 하고 있소. 이에 진나라가 틀림없이 자신을 봉해 줄 것으로 생각하고 있소. 지금 공은 초나라에

해중(解中: 낙양 남쪽의 大解와 小解)을 주고 초나라의 소영윤(小令尹)을 계양(桂陽: 「사기」의 杜陽)에 봉했소.

진, 초 두 나라가 연합해 다시 한나라를 치면, 한나라는 필시 망할 것이오. 그러나 공중은 직접 사도(私徒)를

이끌고 나와 사력을 다해 진나라에 대항할 것이오. 원컨대 공은 깊이 헤아려 보시기 바랍니다.”라고 하자.
상수가 대답하기를 : “내가 진, 초 두 나라를 연합하게 하려는 것은 한나라를 적으로 삼고자 하는 것이 아니오.

그대는 나를 위해 공중에게 진, 한 두 나라는 가히 연합할 수 있다고 말해주기 바라오.”라고 하였다.]

 

對曰:「愿有復於公.  諺曰:『貴其所以貴者貴.』今王之愛習公也,不如公孫郝;其知能公也, 

不如甘茂.  今二人者,皆不得親於事矣,而公獨與王主斷於國者,彼有以失之也. 公孫郝黨於韓,

而甘茂黨於魏,故王不信也. 今秦、楚爭強,而公黨於楚,是與公孫郝、甘茂同道也. 公何以異之?

人皆言楚之多變也,而公必之,是自為貴也.  公不如與王謀其變也,善韓以備之,若此,則無禍矣.

韓氏先以國從公孫郝,而後委國於甘茂,是韓,公之讎也. 今公言善韓以備楚,是外舉不辟讎也.」
向壽曰:「吾臣欲韓合.」

 

[이에 소대가 말하기를 : “그대로 전하도록 하겠소. 속담에 이르기를, ‘다른 사람이 존중하는 것을 존중하면

자신이 다른 사람으로부터 존중을 받는다’고 했소. 지금 대왕은 총애하고 가까이 하는 사람은 공이나

공손학(공손연)에 대한 총애에는 미치지 못하오. 지혜가 뛰어난 사람은 공이나 감무의 지혜에는 미치지 못하오.

지금 두 사람은 모두 국정을 장악할 수 없어 그대가 홀로 대왕과 함께 국사를 전단하고 있소. 지금 국내에서 실권한

공손학은 한나라에서 무리를 만들고, 감무는 위나라에서 그리하고 있소. 그래서 대왕은 이들을 불신하고 있소.

진, 초 두 나라가 다투고 있는 이때 공이 초나라에 무리를 만들면 이는 공손학과 감무가 행한 것으로 공이 이들과

다를 바가 무엇이 있겠소? 사람들은 모두 초나라가 반복무상하다고 말하고 있소. 그런데 공만 홀로 그렇지 않다고

주장하고 있소. 이는 스스로 대왕의 책망을 초래하는 길이오. 공은 대왕과 함께 초나라의 변화에 대한 계책을

마련하고, 한나라와 가까이 하며 대비하느니만 못하오. 그리하면 아무런 화가 없을 것이오. 한나라는 전에 나라를

들어 공손학을 따랐다가, 후에 국사를 감무에게 부탁했소.그러니 한나라는 공의 원수인 셈이오. 지금 공이 한나라와

가까이 하며 초나라에 대비하자고 말하면 이는 일족 이외의 사람을 천거하면서 원수일지라도 배제하는 않는 덕을

행하는 것이 되오.”라고 하자.  상수가 말하기를 : “나는 사실 한나라와 연합하고 싶소.”라고 하였다.]

 

對曰:「甘茂許公仲以武遂,反宜陽之民,今公徒令收之,甚難.」

向子曰:「然則奈何?武遂終不可得已.」 對曰:「公何不以秦為韓求潁川於楚,此乃韓之寄地也.

公求而得之,是令行於楚而以其地德韓也.  公求而弗得,是韓、楚之怨不解,而交走秦也.

秦、楚爭強,而公過楚以攻韓,此利於秦.」 向子曰:「奈何?」
對曰:「此善事也. 甘茂欲以魏取齊,公孫郝於以韓取齊,今公取宜陽以為功,收楚、韓以安之,

而誅齊、魏之罪,是以公孫郝、甘茂之無事也.」

 

[그러자 소대가 대답하기를 : “감무는 이미 공중과 화해하는 조건으로 무수(武遂)를 돌려주고, 의양의 주민들을

풀어주기로 약속했소. 지금 공은 헛되이 공중과 화해하려 하고 있으니 이는 심히 어려운 일이오.”라고하였다.
상수가 묻기를 : “그러면 어찌해야 좋겠소. 무수는 이미 감무가 허락했으니 이를 화해하는 조건으로 내세울 수는

없지 않겠소?”라고 하자.  소대가 대답하기를 : “공은 왜 진나라의 위세를 빌어 한나라를 위해 초나라의 영천을

달라고 하지 않는 것이오? 이는 본래 한나라 땅이었소. 만일 공이 이를 얻게 되면 이는 초나라에 진나라의 영을

행하고, 나아가 얻은 땅으로 한나라에 덕을 베풀 수 있게 되오. 만일 얻지 못하게 되면 한, 초 두 나라는 원한을

풀 길이 없게 돼 결국 진나라를 향해 각각 서둘러 친교하고자 할 것이오. 진, 초 두 나라가 쟁강하는 이때

공이 초나라를 책망하면서 한나라를 거두면 이는 진나라에 큰 이익이 될 것이오.”라고 하였다.
상수가 묻기를 : “어찌해야 그리할 수 있겠소.”라고 하자.
소대가 대답하기를 : “이는 단지 진나라에 이익이 될 뿐만 아니라 그대에게도 도움이 될 것이오.

감무는 위나라를 내세워 제나라와 연합하고, 공손학은 한나라를 내세워 제나라와 연합하려 하고 있소.

지금 공은 의양을 공략한 뒤 초, 한 두 나라와 연합해 의양을 안정시키고, 제, 위 두 나라를 책망하면

공손학과 감무는 권력을 잃을 수밖에 없을 것이오.”라고 하였다.]

 

 

 或謂公仲曰聽者聽國

 

或謂公仲曰:「聽者聽國,非必聽首也. 故先生聽諺言於市,愿公之聽臣言也. 公求中立於秦,

而弗能得也,善公孫郝以難甘茂,勸齊兵以勸止魏,楚、趙皆公之讎也. 臣恐國之以此為患也,

愿公之復求中立於秦也.」 公仲曰:「奈何?」

 

[기원전 306, 어떤 사람이 공중붕에게 말하기를 : “얘기를 듣는 사람은 널리 여러 사람들로부터 의견을 듣습니다.

그러나 반드시 귀한 얘기를 들을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그래서 선왕은 저자거리에 나가 얘기를 듣고자 했습니다.

원컨대 공은 저의 얘기를 경청하기 바랍니다. 공은 제, 위 두 나라 사이에서 중립을 취하고자 하나 진나라로 인해

견제받고 있습니다. 공은 공손학(공손연)과는 가까이 지내면서 감무(甘茂)와는 적대적인 입장에 있습니다.

그러니 제나라 군사를 도와 위나라 군사를 저지하십시오. 또한 초, 조 두 나라는 모두 공의 원수입니다.

이로 인해 장차 우환이 닥칠까 우려되니 원컨대 공은 다시 진나라에 청해 중립을 허락받도록 하십시오.”라고 하였다.
공중붕 묻기를 : “어찌해야 그리 할 수 있겠소.”라고 하자.]

 

對曰:「秦王以公孫郝為黨於公而弗之聽,甘茂不善於公而弗為公言,公何不因行愿以與秦王語?
行愿之為秦王臣也公,臣請為公謂秦王曰:『齊、魏合與離,於秦孰利? 齊、魏別與合,

於秦孰強?』秦王必曰:『齊、魏離,則秦重;合,則秦輕. 齊、魏別,則秦強;合,則秦弱.』
臣即曰:『今王聽公孫郝以韓、秦之兵一齊而攻魏,魏不敢戰,歸地而合於齊,是秦輕也,

臣以公孫郝為不忠.  今王聽甘茂,以韓、秦之兵據魏而攻齊,齊不敢戰,不求割地而合於魏,

是秦請也,臣以甘茂為不忠.  故王不如令韓中立以攻齊,齊王言救魏以勁之,齊、魏不能相聽,

久必兵交. 王欲,則信公孫郝於齊,為韓取南陽,易穀川以歸, 此惠王之愿也. 

王欲, 則信甘茂於魏, 以韓、秦之兵據魏以隙齊, 此武王之愿也. 臣以為令韓以中立以勁齊,最秦之大急也.

公孫郝黨於齊而不肯言,甘茂薄而不敢謁也,此二人,王之大患也. 愿王之熟計之也.』」

 

[그러자 그 사람이 대답하기를 : “진소양왕은 공손학이 공과 어울려 무리를 만들었다고 생각해 그를 신뢰하지 않고

있습니다. 감무는 공과 사이가 좋지 않아 공의 말을 믿지 않고 있습니다. 그런데도 공은 왜 행원(行願)을 시켜

진왕에게 말을 전하도록 하지 않는 것입니까. 행원이 진왕을 위해 일할 수 있도록 만들 수 있는 사람은 공입니다.

신이 공을 위해 진왕에게 ‘제, 위 두 나라가 연합하는 것과 분리되는 것 중 어느 쪽이 진나라에게 유리합니까?

두나라가 분리되는 것과 연합하는 것 중 어느 쪽이 진나라를 강하게 만들 수 있습니까?’라고 물을 것입니다.

그러면 진왕은 틀림없이 대답하기를, ‘두 나라가 분리되면 진나라가 중시되고, 합쳐지면 진나라가 경시되오.

두 나라가 분리되면 진나라가 강해질 수 있고, 합쳐지면 진나라가 약해지오’라고 할 것입니다.

이때 신이 말하기를, ‘만일 대왕이 공손학의 말을 듣고 진, 한 두 나라의 군사로 제나라를 도와 위나라를 공격하면

위나라는 감히 싸울 생각을 하지 못한 채 땅을 돌려주고 제나라와 연합할 것입니다.

이리되면 진나라는 경시되고 맙니다. 그래서 신은 공손학이 불충하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만일 대왕께서 감무의 말을 듣고 진, 한 두 나라의 군사로 위나라에 기대어 제나라를 공격하면 제나라는 감히 싸울

생각을 하지 못한 채 할지를 요구하지도 않고 위나라와 연합할 것입니다. 이리 되면 진나라는 경시되고 맙니다.

그래서 신은 감무가 불충하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대왕께서는 한나라로 하여금 중립에 서서 제, 위 두 나라가

서로 싸우도록 만드느니만 못합니다. 대왕께서는 위나라 구원을 공언하면서 위나라의 무력을 강화시켜 줌으로써

제, 위 두 나라가 서로 양보하지 않으면서 오랫동안 교전케 만들어야 합니다. 대왕은 공손학을 제나라로 파견해

한나라를 위해 남양(南陽: 원래 한나라 땅이었으나 위나라에게 빼앗김)을 취한 뒤 한나라의 곡천(穀川)과 바꿔야

합니다. 이는 진혜문왕의 소원이기도 했습니다. 또 대왕은 감무를 위나라로 파견해 진, 한의 군사로 위나라에 기대어

제나라를 공격해야 합니다. 이는 진무왕의 소원이기도 했습니다. 신은 한나라로 하여금 중립을 취해 제나라를 강하게

해 주는 것이 진나라의 가장 시급한 과제라고 생각합니다. 공손학은 제나라에서 무리를 만들어 한나라로 하여금

제나라를 도와 위나라를 공격하게 할 생각으로 한나라의 중립을 말하려 하지 않고 있습니다. 감무는 위나라에서

무리를 만들고 있는 까닭에 이를 감히 말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이 두 사람은 대왕의 대환(大患)입니다.

원컨대 대왕께서는 깊이 살펴보시기 바랍니다’라고 하겠습니다.”라고 하였다.]

 

 

韓公仲相

 

韓公仲相. 齊、楚之交善秦. 秦、魏遇,且以善齊而絕齊乎楚. 王使景鯉之秦,鯉與於秦、魏之遇. 

楚王怒景鯉,恐齊以楚遇為有陰於秦、魏也,且罪景鯉.
為謂楚王曰:「臣賀鯉之與於遇也. 秦、魏之遇也,將以合齊、秦而絕齊於楚也. 今鯉與於遇,

齊無以信魏之合己於秦而攻於楚也,齊又畏楚之有陰於秦、魏也,必重楚. 故鯉之與於遇,

王之大資也. 今鯉不與於遇,魏之絕齊於楚明矣. 齊、楚信之,必輕王,故王不如無罪景鯉,

以視齊於有秦、魏,齊必重楚,而且疑秦、魏於齊.」 王曰:「諾.」 因不罪而益其列.

 

[기원전 313, 한나라 공중붕이 제나라의 재상으로 있을 때 제, 초 두 나라가 친교를 맺고 있었다.

당시 진, 위 두 나라는 서로 회동한 뒤 장차 제나라와 친교를 맺어 제나라를 초나라에서 분리시키고자 했다.

이에 초회왕은 이를 저지시키기 위해 경리(景鯉)를 진나라로 보냈다. 그러나 경리가 진, 위 두 나라의 회동에

배석하는 일이 있게 되자 초회왕이 경리에게 크게 화를 냈다. 초회왕은 제나라가 경리의 배석으로 인해

초나라가 진, 위 두 나라와 은밀히 친교를 맺는 것으로 의심할까 두려워했던 것이다.

이에 경리를 벌하려고 하자 어떤 사람이 경리를 위해 초회왕에게 말하기를 : “경리가 회동에 배석한 것은 오히려

축하해야 합니다. 진, 위 두 나라의 회동은 장차 제나라와 친교를 맺어 제나라를 초나라로부터 분리시키려는

속셈에서 나온 것입니다. 그러나 경리가 배석함으로써 진나라는 위나라를 시켜 제나라로 하여금 진나라와 연합한 뒤

초나라와 대립하도록 만드는 것이 어렵다는 것을 알게 되었을 것입니다. 제나라 역시 초나라가 은밀히

진, 위 두 나라와 친교를 맺는 것이 아닐까 의심한 나머지 필시 초나라를 중시할 것입니다. 따라서 경리의 배석은

대왕의 입장에 볼 때 오히려 커다란 이익입니다. 경리가 배석하지 않았을지라도 위나라가 제나라를 부추겨

초나라로부터의 분리를 획책했을 것은 명약관화합니다. 제나라가 위나라를 믿으면 대왕은 필시 경시당할 것입니다.

그러니 대왕께서는 경리를 벌해서는 안 되고 제나라에게 초나라가 은밀히 진, 위 두 나라와 결호를 추진하는 듯한

모습을 보여주느니만 못합니다. 그러면 제나라는 필시 초나라를 중시할 것이고, 제나라는 진, 위 두 나라를 의심의

눈초리로 바라볼 것입니다.”라고 하자.  초회왕이 말하기를 : “그 말이 과연 옳소.”라고 하고는,  

경리를 벌하기는커녕 오히려 그의 관위를 높여주었다.]

 

 

王曰向也子曰天下無道

 

王曰:「向也子曰『天下無道.』 今也子曰『乃且攻奄』者,何也?」

對曰:「今謂馬多力則有矣,若曰勝千鈞則不然者,何也?夫千鈞,非馬之任也.

今謂楚強大則有矣,若夫越趙、魏而鬭於燕,則豈楚之任也哉? 且非楚之任,而楚為之,是弊楚也. 

強楚、弊楚,其於王孰便也?」

 

[초왕이 한 신하(우경)에게 묻기를 : “방금 전에 그대는 초나라가 ‘천하무도’라고 하면서 바로

또 ‘이내 연나라를 공격할 것입니다’라고 하니 이는 무슨 말이오.”라고 하자.

이에 그 신하가 대답하기를 : “만일 ‘지금 그 말은 힘이 세다’고 말하면 일리가 있지만 ‘1천 균(鈞: 30근)을 실을 수

있다’고 하면 사리에 어긋나니 그 이유는 무엇입니까. 대저 1천 균은 말이 감당할 수 있는 무게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만일 ‘초나라가 강대하다’고 말하면 일리가 있지만 ‘조, 위 두 나라를 뛰어 넘어 연나라와 싸울 수 있다’고 하면

이 어찌 초나라가 감당할 수 있는 일이겠습니까? 초나라가 감당할 수 없는 일을 하려 들면 이는 초나라를 피폐하게

만드는 길인데, 피폐하게 만드는 것과 강하게 만드는 것 중 어느 쪽이 대왕에게 유리하겠습니까?”라고 하였다.]

 

 

或謂魏王王儆四疆之內

 

或謂魏王:「王儆四疆之內,其從於王者,十一日之內,陂不具者死. 王因取其游之舟上擊之.

臣為王之楚,王胥臣反,乃行.」
春申君聞之,謂使者曰:「子為我反,無見王矣. 十日之內,數萬之眾,今涉魏境.」

秦使聞之,以告秦王. 秦王謂魏王曰:「大國有意,必來以是而足矣.」

 

[기원전 241, 어떤 사람이 위경민왕(魏景王)에게 건의하기를 : “대왕께서는 전국에 경계령을 내리고 10일 이내에

출병준비를 끝내지 못한 자는 사형에 처한다고 포고하십시오. 이어 깃발을 수레의 끌채에 일제히 달게 하여

군세(軍勢)를 성하게 드러내십시오. 그간 신은 대왕을 위해 초나라로 가겠습니다. 대왕께서 제가 돌아올 때까지

기다려 주시면 신이 이내 다녀 오겠습니다.”라고 하자.

춘신군이 이 얘기를 듣고 위왕의 사자에게 말하기를 : “그대는 곧 위나라로 돌아가도록 하오. 초왕(楚王: 초고열왕)을

만나 볼 필요는 없소. 10일 이내에 수만 명의 군사가 위나라 국경 안으로 들어갈 것이오.”라고 하였다.
진나라 사자가 이 얘기를 듣고 곧 진왕(秦王: 진시황)에게 고하였다. 

이에 진왕은 초, 위 두 나라가 연합할 것을 두려워한 나머지 곧 사자를 위경민왕에게 보내 이같이 전하게 했다.
“위나라에서 큰 일을 도모하는 모양인데 그 일을 반드시 이루고자 한다면 위나라의 병력만으로도 충분할 것이오."]  

 

 

觀鞅謂春申

 

觀鞅謂春申曰:「人皆以楚為強,而君用之弱,其於鞅也不然. 先君者,二十餘年未嘗見攻.

今秦欲逾兵於澠隘之塞,不使;假道兩周倍韓以攻楚,不可.  今則不然,魏且旦暮亡矣,

不能愛其許、鄢陵與梧,割以予秦去百六十里. 臣之所見者,秦、楚鬭之日也已.」

 

[진시황 6년(기원전 241), 관진(觀津) 출신 주영(朱英)이 춘신군에게 말하기를 : “사람들은 모두 초나라는 본래

강했으나 군이 집정한 이후 약해졌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저는 그리 생각지 않습니다. 선군이 재위하는

20여년 동안 초나라는 진나라의 침공을 받지 않았습니다. 만일 진나라 군사가 민애의 요새를 넘고자 하면

매우 불편할 것입니다. 그렇다고 양주(兩周)에서 길을 빌려 한나라를 등지고 초나라를 공격하는 것도 불가합니다.

그렇다면 위나라가 단시일에 망할 수밖에 없는데 위나라는 화난을 피하기 위해 허(許), 언릉, 오(梧) 등을 진나라에

떼어 줄 것입니다. 그리되면 진나라 군대는 초나라 도읍 진(陳)으로부터 1백60 리밖에 떨어져 있지 않게 됩니다.

신이 보건대 진, 초 두 나라의 싸움은 조만간 개시될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公仲數不信於諸侯

 

公仲數不信於諸侯,諸侯錮之. 南委國於楚,楚王弗聽. 

蘇代為楚王曰:「不若聽而備於其反也. 明之反也,常仗趙而畔楚,仗齊而畔秦.

今四國錮之,而無所入矣,亦臣患之. 此方其為尾生之時也.」

 

​[한나라의 재상 공중붕은 여러 차례에 걸쳐 제후들로부터 불신을 당했다. 이에 제후들은 마침내 그를 따돌리게 

되었다. 공중붕은 할 수 없이 남쪽 초나라에 국사를 맡기려 했으나 초왕이 이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이때 소대(蘇代)가 공중붕을 위해 초왕에게 말하기를 : “먼저 공중(公仲)의 말을 들어본 후 그의 배신에 대비하느니만

못합니다. 공중은 배신을 잘하는 자로 늘 조나라에 기대어 초나라에 반기를 들고, 제나라에 기대어 진나라에 반기를

드는 방식으로 배신을 해 왔습니다. 그러나 그는 지금 4국으로부터 따돌림을 당한 나머지 기댈 곳이 없어 크게

걱정하고 있을 것입니다. 이제 그도 미생(尾生)을 본받지 않으면 안 될 때가 되었습니다.”라고 하였다.] 

​(尾生 : 여인과 다리 밑에서 만나기로 한 약속을 지키기 위해 물이 불어나는데도 다리 기둥을 붙들고 있다가 

익사한 노나라 사람으로 성은 미생, 이름은 高)

  ​韓策  . 

 

楚圍雍氏五月

​楚圍雍氏五月.  韓令使者求救於秦,冠蓋相望也,秦師不下崤.  韓又令尚靳使秦,

謂秦王曰:「韓之於秦也,居為金筆,出為雁行. 今韓已病矣,秦師不下崤. 臣聞之,

唇揭者其齒寒,愿大王之熟計之.」 宣太后曰:「使者來者眾矣,獨尚之之言是.」召尚子入.

宣太后謂尚子曰:「妾事先王也,先王以其髀加妾之身,妾困不疲也;盡置其身妾之上,

而妾弗重也,何也? 以其少有利焉.  今佐韓,兵不眾,糧不多,則不足以救韓.  夫救韓之危,

日費千金,獨不可使妾少有利焉.」 

 

[초나라가 옹씨(雍氏)를 5개월 째 포위하자 한나라가 진나라에 사자를 보내 구원을 청했다.

한나라 사자의 관(冠)과 수레 덮게가 보일 정도로 빈번히 구원을 요청했으나 진나라는 효산 동쪽으로 출병치 않았다.

한나라가 다시 상근(尙靳)을 진나라에 사자로 보내 진소왕(秦昭王)에게 말하게 하기를 : “한나라는 진나라에게

평시에는 방어벽의 역할을 하고 전시에는 선봉의 역할을 담당해 왔습니다. 지금 한나라는 이미 큰 재난을 입고

있는데도 진나라는 효산 동쪽으로 출병하지 않고 있습니다. 신은 듣기로 입술이 터서 벌어지면 이가 시린 법이라고

하였습니다. 원컨대 대왕께서는 깊이 헤아려 보시기 바랍니다.”라고 하였다.
선태후가 이 얘기를 듣고 말하기를 : “한나라에서 찾아온 사자들은 많았지만 오직 상자(尙子: 상근)의 얘기만이

옳은 말을 한 듯하다.”라고 하며.  그리고는 상근을 궐내로 불러들였다.
선태후가 상근에게 말하기를 : “내가 선왕을 섬길 때 선왕이 허벅지를 내 몸 위에 얹으면 무거워 견딜 수 없었소.

그러나 그 몸을 모두 얹으면 오히려 무게를 느끼지 못했으니 이는 무슨 연고요. 거기에는 다소 좋은 점이 있었기

때문이오. 지금 한나라를 돕고자 해도 군사가 충분하지 않고, 식량도 많지 않아 제대로 구해낼 수 없소.

무릇 한나라를 위기상황에서 구해주기 위해서는 하루에 1천 금이 들어갈 수밖에 없소.

그러니 어찌 나에게 다소 유리한 일이 없어서야 되겠소”라고 히였다.

 

尚靳歸書報韓王,韓王遣張翠. 張翠稱病,日行一縣.

張翠至,甘茂曰:「韓急矣,先生病而來.」 張翠曰:「韓未急也,且急矣.」

甘茂曰:「秦重國知王也,韓之急緩莫不知. 今先生言不急,可乎?」

張翠曰:「韓急則折而入於楚矣,臣安敢來?」甘茂曰:「先生毋復言也.」

 

[상근이 돌아온 뒤 한양왕(韓襄王)에게 이를 글로 써 보고하자 한양왕이 대신 장취(張翠)를 다시 사자로 보냈다.

그러자 사행길에 나선 장취는 병을 핑계로 하루에 1현(縣: ‘1현’은 1백 리의 거리)만 가면서 결코 서두르지 않았다. 

장취가 도착하자, 감무가 묻기를 : “한나라가 참으로 급한 듯하오. 선생이 병이 났는데도 온 것을 보니." 라고 하자. 

장취가 말하기를 : “한나라는 아직 그다지 위급하지 않은데 어찌 서두를 필요가 있겠습니까.”라고 하였다. 

장취의 이 말에 감무가 의아해하며 묻기를 : “진나라는 대국으로 현명한 대왕이 있기에 한나라가 위급한지 여부에

대해 모르는 바가 없소. 그런데 지금 선생이 위급하지 않다고 하니 그것이 될 말이요?”라고 하자.
장취가 대답하기를 : “한나라가 위급했다면 벌써 방향을 바꿔 초나라에 입조했을 것입니다. 만일 그리되었다면

제가 어찌 감히 올 수 있겠습니까?”라고 하자.  감무가 말하기를 : “선생은 더이상 말하지 마시오.”라고 하였다.] 


甘茂入言秦王曰:「公仲柄得秦師,故敢捍楚. 今雍氏圍,而秦師不下崤,是無韓也.

公仲且抑首而不朝,公叔且以國南合於楚. 楚、韓為一,魏氏不敢不聽,是楚以三國謀秦也.

如此則伐秦之形成矣. 不識坐而待伐,孰與伐人之利?」 秦王曰:「善.」果下師於崤之救韓.

 

[감무는 곧 안으로 들어가 진소왕에게 아뢰기를 : “공중은 권력을 잡은 뒤 진나라 군사가 지원할 것으로 믿고 

감히 초나라에 대항하는 것입니다. 지금 옹씨가 포위된 상황에서 진나라 군사가 동쪽으로 출병하지 않으면 

한나라를 잃고 말 것입니다. 지금 진나라를 의지하고 있는 공중이 면목이 없어 조회에 나가지 않고 있으니

장차 재상 공숙이 다시 나라를 들어 남쪽으로 초나라와 연합하고 말 것입니다. 초, 한 두 나라가 하나가 되면

위나라는 감히 초나라의 말을 듣지 않을 수 없을 것입니다. 이는 초나라가 3국의 맹주가 되어 진나라를 도모하는 것을

뜻하는 것으로 장차 진나라를 토벌하는 형국이 조성될 것입니다. 앉아서 침공을 당한다는 사실조차 모르는 것과

자진해서 다른 나라를 치는 것 중 어느 것이 유리하겠습니까.”라고 하였다.
그러자 진소왕이 말하기를 : “그 말이 옳소.”라고 하며.  과연 효산 동쪽으로 출병하여 한나라를 구해주었다.]

 

 

楚圍雍氏韓令冷向借救於秦

 

楚圍雍氏,韓令冷向借救於秦,秦為發使公孫昧入韓. 公仲曰:「子以秦為將救韓乎?其不乎?」
對曰:「秦王之言曰,請道於南鄭、藍田以入攻楚,出兵於三川以待公,殆不合,軍於南鄭矣.」

公仲曰:「奈何?」

 

[기원전 300, 초나라가 옹씨를 포위하자 한나라가 영향(冷向)을 진나라로 보내 구원을 요청하게 했다.

진나라가 미처 군사를 보내지 않았을 때 진나라 대신 공손매가 한나라로 왔다. 그러자 재상 공중치가 묻기를 :

“그대는 진나라가 장차 출병하여 한나라를 구원할 것으로 보시오? 아니면 출병하지 않을 것으로 보시오?”라고 하자.
이에 공손매가 대답하기를 : “진왕(秦王: 진혜문왕)은 군사를 둘로 나눠 각각 한나라 도읍 남정(南鄭)과 남전(藍田)을

경유해 초나라로 진공시킬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삼천에서 출병해 공을 맞이하면 필시 남정에서 초나라와 싸울 일은

없을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그러자 공중치가 묻기를 : “어찌 그럴 수 있단 말이오?”라고 하자.]


對曰:「秦王必祖張儀之故謀. 楚威王攻梁,張儀謂秦王曰:『與楚攻梁,魏折而入於楚.

韓固其與國也,是秦孤也.  故不如出兵以勁魏.』於是攻皮氏. 魏氏勁, 威王怒,楚與魏大戰,

秦取西河之外以歸. 今也其將揚言救韓, 而陰善楚,公恃秦而勁,必輕與楚戰. 楚陰得秦之不用也,

必易與公相支也. 公戰勝楚,遂與公乘楚,易三川而歸. 公戰不勝楚,塞三川而受之,公不能救也.

臣惡其事. 司馬康三反之郢矣,甘茂與昭獻遇於境,其言曰收璽. 時期猶有約也. 」

 

[공손매가 대답하기를 : “진왕은 반드시 장의가 이전에 구사한 계책을 따를 것입니다. 예전에 초위왕이

위나라 대량을 공격하였을 때 장의가 진왕에게 말하기를, ‘초나라와 더불어 위나라를 공격하면 위나라는 방향을

바꿔 초나라와 연합할 것입니다. 한나라는 본래 위나라의 동맹국이니 그리 되면 진나라는 필시 고립되고 말 것입니다.

따라서 출병하여 표면상 위나라를 도와주느니만 못합니다’라고 했습니다. 이에 피씨를 공격했습니다.

위나라가 진나라의 도움을 받자 초위왕이 대노해 결국 초, 위 두 나라가 큰 싸움을 벌이게 되었습니다.

진나라는 그 틈에 서하(西河)의 밖을 취하고 철군했습니다. 지금 진나라가 겉으로만 한나라 구원을 떠들면서

은밀히 초나라와 친교를 맺으려 하는데도 공은 진나라만 믿고 필시 경솔하게도 초나라와 싸울 것입니다.

초나라는 암암리에 진나라가 한나라를 위해 용병하지 않을 것을 알고 곧바로 한나라와 교전에 들어갈 것입니다.

공이 승리하면 마침내 공과 더불어 초나라의 피폐한 상황을 틈 타 초나라 땅을 취하고, 한나라의 삼천을 차지한 후 

철군할 것입니다. 공이 이기지 못하면 삼천을 막고 지킬 것이니 공은 이를 구할 길이 없을 것입니다.

저는 매우 우려하고 있습니다. 사마강(司馬康: 진나라 대신,「사기」의 司馬庚)이 초나라 도읍 언영에 3번이나 가고,

감무가 소어(昭漁)와 상어(진, 초 두 나라의 경계)에서 회동하면서 말로는 한나라 공벌을 멈춘다고 떠들었습니다.

그러나 사실은 여전히 한나라 공벌을 계속하기로 밀약했습니다.”라고 하였다.]

 

 

公仲為韓魏易地

 

公仲恐曰:「然則奈何?」對曰:「公必先韓而後秦, 先身而後張儀. 以公不如亟以國合於齊、楚, 

秦必魏國於公以解伐. 是公之所以外者儀而已,其實猶之不失秦也.」公仲為韓、魏易地,

公叔爭之而不聽,且亡.  史惕謂公叔曰:「公亡,則易必可成矣. 公無辭以後反,且示天下輕共,

公不若順之. 夫韓地易於上,則害於趙;魏地易於下,則害於楚. 公不如告楚、趙. 楚、趙惡之.

趙聞之,起兵臨羊腸,楚聞之,發兵臨方城,而易必敗矣.」

 

[이에 공중치는 크게 두려워하면서 묻기를 : “그렇다면 어찌해야 좋소?”라고 하자.
공손매가 대답하기를 : “ 공은 급히 한나라의 위기를 수습하도록 하십시오. 진나라의 구원을 믿어서는 안됩니다.

자신의 계책을 세워 대비해야지 장의와 같은 사람들의 계책에 속아서는 안 됩니다. 공은 급히 제, 초 두 나라와

연합하십시오. 그리되면 진나라는 고립될 수밖에 없어 필시 한나라와 타협해 한나라 공벌 계획을 포기할 것입니다.

이같이 하면 공은 단지 장의와 소원해질 뿐이고 진나라와의 친교는 그다지 손상받지 않을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한나라 재상 공중치는 한, 위 두 나라 간의 땅을 교환하려고 하자 공숙이 이를 맹렬히 반대하다가 이내 한나라를

떠나려고 했다. 그러자 세객 사척(史惕)이 말리며 공숙에게 말하기를 : “공이 망명하면 환지(換地)가 성사될 것입니다.

그리되면 공은 돌아올 구실이 없게 되고 제후들로부터 경시당하고 말 것입니다. 그러니 이를 따르느니만 못합니다.

한나라가 북쪽에서 위나라의 상당(上黨)을 얻게 되면 조나라에 손상을 입히고, 위나라가 남쪽에서 한나라의

남양(南陽)과 정지(鄭地), 삼천(三川)을 얻게 되면 초나라에 손상을 입히게 됩니다. 그러니 공은 초, 조 두 나라에

이를 고하느니만 못합니다. 그리하면 초, 조 두 나라는 크게 우려치 않을 수 없습니다. 

조나라가 이 얘기를 듣고 군사를 일으켜 양장(羊腸)으로 출병하고, 초나라가 군사를 일으켜 방성(方城)으로

출병하면 환지는 필시 실패하고 말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錡宣之教韓王取秦

錡宣之教韓取秦, 曰:「為公叔具車百乘, 言之楚, 易三川. 因令公仲謂秦王曰 : 『三川之言曰, 秦王必

取我.  韓王之心不可解矣. 王何不試以襄子為質於韓, 令韓王知王之不取三川也.』因以出襄子而德太子.」

 

[세객 기선이 한왕에게 진나라를 끌어들이는 방법에 대해 가르쳐 주기를 : “공숙(公叔)에게 수레 1백 승을 이끌고

초나라로 가서 한나라의 삼천을 초나라 땅과 바꾸도록 하십시오. 그리고는 공중(公仲)을 시켜 진왕에게 고하기를,

‘삼천의 주민들이 지금 진왕이 필시 삼천을 취할 것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에 한왕은 불안해 하고 있습니다.

대왕께서는 어찌하여 양자(襄子: 진나라 공자)를 한나라에 인질로 보내 한왕으로 하여금 대왕이 삼천을 취할 생각이

없음을 알도록 하지 않는 것입니까’라고 하십시오. 그리하면 진나라 태자와 사이가 나쁜 양자를 한나라의 인질로

삼아 진나라 태자에게 덕을 베푸는 셈이 됩니다.”라고 하였다.]

 

 

襄陵之役

襄陵之役,畢長謂公叔曰:「請毋用兵,而楚、魏皆德公之國矣. 夫楚欲置公子高,必以兵臨魏.

公何不令人說昭子曰:『戰未必勝,請為子起兵以之魏.』

子有辭以毋戰,於是以太子扁、朝揚、梁王皆德公矣.」

 

[기원전 323, 초나라가 위나라 군사를 대파한 양릉(襄陵)의 싸움 당시 세객 필장(畢長)이 한나라 재상 공숙에게

말하기를 : “만일 용병하지 않으면 초, 위 두 나라 모두 공의 은덕에 크게 감격해 할 것입니다. 무릇 초나라는

자국에 망명한 위나라 공자 고(高)를 위나라 태자로 세우기 위해 무장병을 시켜 공자 고를 호송하고자 할 것입니다.

공은 왜 사람을 시켜 소자(초나라 柱國인 昭揚)에게 이르기를, ‘교전이 일어나면 반드시 이긴다고 장담할 수 없으니

그대를 위해 군사를 일으켜 위나라에 임하고자 합니다’라고 하지 않는 것입니까. 그리 한 뒤 위나라에게는 용병하지

않겠다고 말하십시오. 그리하면 공은 위나라 태자 고(高)와 초나라 주국 소양(昭揚), 위왕(魏王: 위혜왕) 등에게

모두 덕을 베푸는 셈이 됩니다.”라고 하였다.]

 

 

公叔使馮君於秦

 

公叔使馮君於秦, 恐留, 教陽向說秦王曰:「留馮君以善韓臣, 非上知也. 主君不如善馮君, 而資之以秦.  

馮君廣王而不聽公叔, 一與太子爭, 則王澤布, 而害於韓矣. 」

[주난왕 15년(기원전 300), 한나라 재상 공숙이 풍군(馮君)을 진나라에 사자로 보내면서 진나라가 자신과 사이가

나쁜 것을 이유로 사자를 억류하지나 않을까 염려했다. 이에 세객 양향(陽向)을 시켜 진소양왕에게 말하게 하기를 :
“풍군을 억류하여 한진(韓辰: 공중치 후임 재상)을 돕고자 하는 것은 결코 좋은 계책이 아닙니다. 대왕께서는 풍군을

대하여 장차 그를 도와주느니만 못합니다. 그리하면 풍군은 대왕에게 접근해 공숙의 말을 듣지 않고 태자를 도와

그와 다툴 것입니다. 한나라에 대해 어느 것이 유리한지 대왕께서 결단을 내리셔야 할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謂公叔曰公欲得武遂於秦

 

謂公叔曰 :「公欲得武遂於秦, 而不患楚之能揚河外也. 公不如令人恐楚王,

而令人為公求武遂於秦.」  謂楚王曰:「發重使為韓求武遂於秦. 秦王聽,是令得行於萬乘之主也.

韓得武遂以恨秦,毋秦患而得楚.  韓,楚之縣而已.  秦不聽,是秦、韓之怨深,而交楚也.」

 

[기원전 306, 어떤 사람이 공숙에게 말하기를 : “공이 진나라로부터 무수(武遂)를 반환받게 되면

초나라가 하외(河外)를 취할까 염려하지 않아도 될 것입니다. 그러니 공은 사람을 시켜 초회왕을 부추기면서,

진나라에 무수의 땅을 반환해 달라고 하십시오. 공은 초왕에게 이르기를, ‘우리 한나라에서는 특사를 진나라에 보내

무수 땅을 되돌려 받으려 합니다. 진소양왕이 이를 받아들이면 이는 초나라의 영(令)이 만승지국의 군주에게 널리

행해지는 것이 됩니다. 한나라가 무수를 얻어 진나라를 억제하면 진나라로 인한 우환을 제거하게 되니 초나라에게도

도움이 될 것입니다. 한나라는 초나라의 한 현에 불과할 뿐입니다. 만일 진나라가 받아들이지 않으면 진, 한 두 나라 간의 원한이 더욱 깊어지게 되니 두 나라는 초나라로 달려와 친교하고자 할 것입니다’라고 하십시오.”라고 하였다.]

 

 

謂公叔曰乘舟

 

謂公叔曰:「乘舟,舟漏而弗塞,則舟沉矣. 塞漏舟,而輕陽侯之波,則舟覆矣.

今公自以辯於薛公而輕秦,是塞漏舟而輕陽侯之波也,愿公之察也.」

 

[어떤 사람이 공숙에게 말하기를 : “배를 탔을 때 배에 물이 새는데도 이를 막지 못하면 배는 이내 가라앉고 맙니다.

그러나 새는 곳을 틀어막을지라도 양후지파(‘양후’는 강에 투신해 거친 파도가 된 전설상의 군주)를 가벼이 보면 결국

전복되고 맙니다. 지금 공은 온 힘을 기울여 제나라와 친교를 맺으려 노력하면서 진나라를 소홀히 하고 있습니다.

이는 배의 새는 곳을 막으면서도 양후지파를 가벼이 보는 것으로, 원컨대 공께서는 깊이 헤아리기 바랍니다.”하였다.]

 

 

齊令周最使鄭 

 

齊令周最使鄭, 立韓擾而廢公叔. 周最患之,曰:「公叔之與周君交也, 令我使鄭, 立韓擾而廢公叔.

語曰:『怒於室者色於市.』 今公叔怨齊,無奈何也,必周君而深怨我矣.」

史舍曰:「公行矣,請令公叔必重公.」 

 

[제나라가 주최를 정왕(鄭王: 한나라가 정나라를 멸하고 도읍을 新鄭으로 옮긴데서 나온 말로 곧 한왕을 지칭)에게

사자로 보내면서 한요(韓擾)를 재상으로 세우고 재상인 공숙을 파면시키려고 하였다.

이에 주최가 이를 근심하며 말하기를 : “공숙은 주군(周君)과 가깝다. 지금 제나라가 나를 사자로 보내 한요를 세우고

공숙을 파면시키려 하니, 속담에 이르기를 '집에서 화를 내는 자는 밖에서도 얼굴에 그 모습이 나타난다.'고 하였는데

공숙의 파면은 제, 한 두 나라 간의 원환을 한, 주(周) 두 나라 간의 원한으로 전가시키려는 것이다.

설령 공숙이 제나라를 원망할지라도 제나라는 강하고 한나라는 약하니 어찌할 도리가 없을 것이다.

그러니 결국 필시 주군(周君)과 절교한 뒤 나를 크게 원망할 것이다.”라고 하였다.
그러자 주최의 문객인 사사(史舍)가 말하기를 : “공은 가도록 하십시오. 공숙이 반드시 공을 크게 존중하도록

만들어 드리겠습니다.”라고 하였다. 

 

周最行至鄭, 公叔大怒.

史舍入見曰:「周最固不欲來使, 臣竊強之. 周最不欲來, 以為公也;臣之強之也, 亦以為公也.」

公叔曰:「請聞其說.」 對曰:「齊大夫諸子有犬,犬猛不可叱,叱之必噬人. 客有請叱之者,

寄視而徐叱之,犬不動;復叱之,犬遂無噬人之心. 僅周最固得事足下,而以不得已必故來使,

彼將處陳其辭而緩其言,鄭王必以齊王為不急,必不許也. 今周最不來,他人必來臨.

來使者無交於公,而欲德於韓擾,其使之必疾,言之必急,則鄭王必許之矣.」

公叔曰:「善.」 遂重周最.  王果不許韓擾.

 

[주최가 정왕(한나라)에게 가자, 과연 공숙이 대노했다.

그러자 사사가 공숙을 만나 말하기를 : “주최는 사실 사자로 오고 싶어 하지 않았으나 제가 억지로 오게 하였습니다.

주최가 오지 않으려 한 것은 바로 공 때문이었으며, 제가 강제로 오게 한 것 역시 공을 위한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공숙이 묻기를 : “그 이유를 나에게 설명해 보시오."라고 하자. 

이에 사사가 대답하기를 : “제나라 대부의 제자(諸子: 庶子)에게 개가 한 마리 있었습니다. 이 개는 매우 사나워

아무도 꾸짖을 수가 없었습니다. 만일 꾸짖게 되면 반드시 꾸짖는 사람을 물었기 때문입니다.

하루는 빈객이 개의 버릇을 고쳐주겠다고 자청했습니다. 그리고는 개를 뚫어지게 바라보면서 서서히 꾸짖자,

개가 움직이지 못했습니다. 이어 다시 꾸짖자 개가 드디어 사람을 물고자 하는 마음을 버리게 되었습니다.

지금 주최는 실로 족하(足下)를 섬기고자 하는 마음 뿐으로 부득이하여 사자로 온 것입니다.

그가 장차 예를 갖춰 서서히 부드럽게 말을 하면 정왕은 필시 제왕(齊王: 제민왕)의 요구가 급한 것이 아니라고

생각해 한요를 재상으로 세우지 않을 것입니다. 만일 주최가 오지 않고 다른 사람이 왔으면 그는 공과 아무런

교분이 없는 데다가 한요를 세우기 위해 조급히 서두른 나머지 필시 일을 매우 급하게 몰아갈 것입니다.

그리되면 정왕은 필시 제나라의 요구를 받아들이고 말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공숙이 말하기를 : ​“참으로 옳은 말이오.”라고 하며. 주최를 융숭하게 대접하였다.

한왕도 과연 한요를 재상으로 앉히는데 동의하지 않았다.]

 

 

韓公率與幾瑟爭國鄭強為楚王使於韓

 

韓公叔與幾瑟爭國.  鄭強為楚王使於韓,矯以新城、陽人合世子,以與公叔爭國. 楚怒,將罪之.
鄭強曰:「臣之矯與之, 以為國也. 臣曰, 世子得新城、陽人, 以與公叔爭國, 而得全, 魏必急韓氏;

韓氏急,必縣命於楚,又何新城、陽人敢索? 若戰而不勝,走而不死,今且以至,又安敢言地?」

楚王曰:「善.」乃弗罪.  

 

[주난왕 15년(기원전 300), 한나라 재상 공숙이 공자 기슬(幾瑟: 한양왕의 아들)과 태자의 자리를 놓고 다퉜다.

이때 정강(鄭强: 초,책의 鄭申)이 초회왕을 위해 한나라에 사자로 와서는 초왕의 명을 거짓으로 꾸며

신성(新城)과 양인(陽人)의 땅을 기슬에게 준다고 하여 공숙과 태자에게 그 자리를 놓고 다투게 하였다.

초회왕이 대노하자 정강이 말하기를 : “제가 왕명을 거짓으로 꾸며 땅을 떼어 준다고 한 것은 초나라를 위한 것입니다.

제가 기슬에게 신성과 양인 땅을 주면 그는 공숙과의 싸움에서 이길 수 있습니다. 그러면 제, 위 두 나라는 필시

한나라를 급하게 압박할 것입니다. 한나라가 급박해지면 초나라에 매달려 구원을 청해야 하는데 어찌 감히 신성과

양인 땅을 달라고 하겠습니까? 또 만일 기슬이 진다면 도주하여 목숨을 구해야 하는데 이 상황에서어찌 감히 땅을

달라고 하겠습니까?”라고 하자.  초왕이 말하기를 : “옳은 말이오.”라고 하며,  정강을 처벌하지 않았다.]

 

 

韓公叔與幾瑟爭國中庶子強謂太子

 

韓公叔與幾瑟爭國. 中庶子強謂太子曰:「不若及齊師未入,急擊公叔.」

太子曰:「不可. 戰之於國中必分.」 對曰:「事不成,身必危,尚何足以圖國之全為?」

太子弗聽,齊師果入,太子出走.

 

[한나라 재상 공숙이 기술과 국사문제로 언쟁을 벌이자, 중서자(中庶子) 강(强)이 태자 기슬에게 말하기를 : 

“제나라 군사가 아직 들어오지 않았을 때 서둘러 공숙을 제거하십시오.”라고 하자.
태자가 말하기를 : “안되오. 싸움이 도읍 안에서 일어나면 필시 나라가 쪼개지고 말 것이오.”라고 하였다.
중서자가 말하기를 : “일이 성공하지 못하면 자신을 보호하기도 어렵게 됩니다. 그런데도 어찌 나라의 안전을 생각할

겨를이 있습니까?”라고 하였으나, 기슬은 이를 듣지 않았다. 제나라 군사가 들어오자 과연 기슬이 달아나고 말았다.]

 

 

齊明謂公叔

 

齊明謂公叔曰:「齊遂幾瑟,楚善之. 今楚欲善齊甚,公何不令齊王謂楚王:

『王為我逐幾瑟以窮之.』楚聽,是齊、楚合,而幾瑟走也;楚王不聽,是有陰於韓也.」

 

[세객 제명(齊明)이 공숙에게 말하기를 : “제나라가 기슬을 쫓아내자 초나라에서는 그를 후대하고 있습니다.

지금 초나라는 제나라와 좋은 의를 맺고자 애쓰고 있습니다. 공은 제민왕을 부추겨 초회왕에게

‘대왕은 저를 위해 기슬을 내쫓아 주기 바랍니다’라고 청하도록 만드십시오. 초나라가 들어주면 이는

제, 초 두 나라가연합하는 것이니 그 순간 기슬은 달아날 수밖에 없습니다. 만일 초왕이 기슬을 쫓아내지

않으면 이는 초나라가 은밀히 한나라와 내통하고 있음을 보여주는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公叔將殺幾瑟》

 

公叔將殺幾瑟也.  謂公叔曰:「太子之重公也,畏幾瑟也. 今幾瑟死,太子無患,必輕共.

韓大夫見王勞,冀太子之用事也,固欲事之. 太子外無幾瑟之患,而內收諸大夫以自輔也,

公必輕矣. 不如無殺幾瑟,以恐太子,太子必終身重公矣.」

 

[공숙이 장차 기슬을 죽이려 했다. 그러자 어떤 사람이 공숙에게 말하기를 : “태자(太子: 공자 咎)는 공을 크게 

존중하고 있습니다. 그러면서 기슬을 두려워하고 있습니다. 지금 기슬이 죽으면 태자는 아무런 걱정이 없게 됩니다.

그러면 태자는 필시 공을 경시할 것입니다. 한나라 대부들은 대왕이 연로한 것을 보고 태자가 집정할 것을 바라고 

있습니다. 태자에게 밖으로 기슬로 인한 우환이 없으면 안으로 대부들을 거둬 자신을 돕게 할 것입니다. 

그러면 태자는 필시 공을 경시할 것입니다. 그러니 기슬을 죽이지 않은 채 태자의 우환으로 남겨 둔다면 

태자는 그러한 사실을 모른 채 종신토록 공을 크게 존중할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公叔且殺幾瑟

 

公叔且殺幾瑟也,宋赫為謂公叔曰:「幾瑟之能為亂也,內得父兄,而外得秦· 楚也.

今公殺之,太子無患,必輕公. 韓大夫知王之老而太子定,必陰事之. 秦· 楚若無韓,必陰事伯嬰.

伯嬰亦幾瑟也. 公不如勿殺. 伯嬰恐,必保於公. 韓大夫不能必其不入也,必不敢輔伯嬰以為亂.
秦· 楚挾幾瑟以塞伯嬰,伯嬰外無秦、楚之權,內無父兄之眾,必不能為亂矣. 此便於公.」

 

[그래도 공숙이 기술을 죽이려 하자, 송혁이 공숙에게 말하기를 :  “기슬은 능히 난을 일을킬 수 있습니다. 

안으로 부형이 있고 밖으로 진, 초 두 나라의 지원을 받고 있기 때문입니다.

만일 공이 그를 죽이면 태자는 우환이 없어지게 되어 필시 공을 경시할 것입니다. 한나라는 대부는 대왕이 연로한

것을 보고 필시 태자의 환심을 사기 위해 암암리에 애를 쓸 것입니다. 진, 초, 두 나라는 기슬을 끼고 한나라를

제어하고 있기 때문에 만일 기슬이 죽게 되면 한나라를 잃지 않기 위해 은밀히 공자 구(咎)과 결탁할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공자 구(咎)는 또다시 기슬과 같은 입장에 놓이게 될 것입니다. 그러니 그대는 기슬을 죽여야 합니다.

그러면 공자 구도 두려운 나머지 필시 그대와 은밀히 결탁해 스스로를 보호하고자 할 것입니다. 한나라 대부들은

기슬이 귀국하지 않으리라는 보장이 없기 때문에 감히 공자 구를 도와 난을 일으키지는 못할 것입니다.

진, 초 두 나라가 기슬을 끼고 공자 구를 제어하면 공자 구는 밖으로는 두 나라의 지원이 없고,

안으로는 부형 등의 무리가 없으니 결코 난을 일으킬 수는 없습니다. 이는 공에게 유리한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謂新城君曰

 

謂新城君曰 :「公叔、伯嬰恐秦、楚之那幾瑟也,共何不為韓求質子於楚?
楚王聽而入質子於韓,則公叔、伯嬰必知秦、楚之不以幾瑟為事也,必以韓合於秦、楚矣.

秦、楚挾韓以窘魏,魏失不敢東,是齊孤也. 公又令秦求質子於楚,楚不聽,則怨結於韓.

韓挾齊、魏以眄楚,楚必重公矣. 公挾秦、楚之重,以積德於韓,則公叔、伯嬰必以國事公矣.」

 

[기원전 300, 어떤 사람이 신성군(新城君: 선태후의 동복동생)에게 말하기를 : “공자 구는 진, 초 두 나라가 기슬을

대하는 것을 매우 우려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공은 왜 한나라를 위해 초나라에 인질을 요구하지 않는 것입니까?

초회왕이 이를 받아들여 인질을 한나라에 보내면 공자 구는 진, 초 두 나라가 기슬을 세울 뜻이 없다는 것을 알고

필시 두 나라와 연합하고자 할 것입니다. 두 나라가 한나라를 끼고 위나라를 압박하면 위나라는 감히 동쪽으로

진출하지 못할 것입니다. 그리되면 제나라는 고립되고 맙니다. 이때 공은 또 진나라로 하여금 초나라에 인질을

요구하도록 하십시오. 초나라가 듣지 않으면 한나라와 원수 사이가 됩니다. 한나라가 제, 위 두 나라와 연합해

초나라를 포위하는 형국을 조성하게 되면 초왕은 공을 통해 진나라의 도움을 요청할 수밖에 없어 반드시 공을

중시할 것입니다. 공이 진, 초 두 나라의 존중을 받으면서 한나라에 덕을 베풀면 공자 구는 반드시 나라를 들어

공을 섬길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胡衍之出幾瑟於楚

 

胡衍之出幾瑟於楚也,教公仲謂魏王曰:「太子在楚,韓不敢離楚也. 公何不試奉公子咎,而為之請太子. 

因令人謂楚王曰:『韓立公子咎而棄幾瑟, 是王包虛質也. 王不如亟歸幾瑟.幾瑟入, 必以韓權報讎於魏,

而德王矣.』」

 

[세객 호연(胡衍)이 기슬을 초나라에서 귀국시킬 생각으로 공중붕에게 초왕(초회왕)을 위해 말하게 하기를,

" 태자(기슬)가 초나라에 있어 한나라는 감히 초나라를 떠날 수 없습니다.

그런데 공은 왜 공자 구(咎)를 받들면서 위나라로 하여금 태자를 청하도록 시도하지 않는 것입니까?

공자 구를 세운 뒤 사람을 시켜 초왕에게 이르기를, ‘한나라가 공자 구를 세워 기슬을 버렸으니 대왕은 공질(空質)을

안고 있는 셈입니다. 대왕은 급히 기슬을 귀국시키느니만 못합니다. 기슬이 귀국하면 틀림없이 권력을 장악한 후

위나라에 보복하고 초왕의 은혜에 감격해 할 것입니다’라고 하십시오.”라고 하였다.]

 

 

幾瑟亡之楚

 

幾瑟亡之楚,楚將收秦而復之.  謂羋戎曰:「廢公叔而相幾瑟者楚也, 今幾瑟亡之楚,

楚又收秦而復之,幾瑟入鄭之日,韓,楚之縣邑.  公不如令秦王賀伯嬰之立也.

韓絕於楚,其事秦必疾,秦挾韓親魏,齊、楚後至者先亡. 此王業也.」

 

[기슬이 초나라로 망명하자 초나라는 장차 진나라와 연합한 뒤 태자 기슬을 한나라로 돌려보내고자 했다.

이때 어떤 사람이 미융(신성군)에게 말하기를 : “공숙을 폐하고 기슬을 도와준 나라는 초나라입니다.

지금 기슬이 초나라로 망명하자 초나라는 진나라와 연합해 그를 귀국시키려 하고 있습니다. 기슬이 한나라로

들어오는 날에는 한나라는 초나라의 작은 읍과 같이 될 것입니다. 그러니 공은 진왕으로 하여금 공자 구를

속히 옹립하도록 해야 합니다. 한나라가 초나라와 단교하면 필시 서둘러 진나라를 섬길 것입니다.

진나라가 한나라를 끼고 위, 제 두 나라와 친교하면 초나라는 결국 나중에 귀복하는 나라가 먼저 망하는 

화를 입을 것입니다. 이는 왕업을 이루는 길입니다.”라고 하였다.]

 

 

冷向謂韓咎

 

冷向謂韓咎曰:「幾瑟亡在楚,楚王欲復之甚,令楚兵十餘萬在方城之外.

臣請令楚筑萬家之都於雍氏之旁,韓必起兵以禁之,公必將矣. 公因以楚、韓之兵奉幾瑟而內之鄭,

幾瑟得入而得公,必以韓、楚奉公矣.」 

 

[진나라 대신 영향이 한나라 장수 한구에게 말하기를 : “기슬이 초나라에 망명하자 초왕이 그를 다시 귀국시키기 위해

노심초사한 나머지 군사 10만여 명을 방성(方城) 밖에 주둔시키고 있습니다. 제가 곧 초나라로 하여금 옹씨(雍氏)의

옆에 1만 호의 성읍을 세우도록 할 것입니다. 한나라는 틀림없이 군사를 일으켜 이를 저지하려 할 것입니다.

그리되면 공은 군사를 이끌게 될 것입니다. 이는 결국 공이 초, 한 두 나라의 군사를 이끌고 기슬을 호위하여

한나라로 입국시키는 셈이 됩니다. 기슬이 입성하게 되면 공의 은덕에 감격할 것이고 한, 초 두 나라도 틀림없이

그대를 중시할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楚令景鯉入韓

 

楚令景鯉入韓,韓且內伯嬰於秦,景鯉患之.

冷向謂伯嬰曰:「太子入秦,秦必留太子而合楚,以復幾瑟也,是太子反棄之.」

 

[초회왕이 총신 경리(景鯉)를 한나라에 사자로 보내자 한나라가 공숙백영(공자 咎)을 진나라로 보낼 준비를 했다.

경리가 이를 크게 우려하자 영향이 공자 구에게 말하기를 : “태자가 진나라로 들어가면 진나라는 필시 태자를

억류한 뒤 초나라와 연합해 기슬을 한나라로 귀국시키고자 할 것입니다.

그러면 반대로 태자께서 버림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韓咎立為君而未定

 

韓咎立為君而未定也,其弟在周,周欲以車百乘而送之,恐韓咎入韓之不立也.

綦母恢曰:「不如以百金從之,韓咎立,因也以為戒;不立,則曰來效賊也.」

 

[기원전 299, 한구(공자 구)가 태자가 되었으나 아직 확정되지는 못했다. 당시 그의 동생이 주(周)나라에 있었다.

주나라는 수레 1백 승을 내주어 그를 융숭히 환송하고자 했으나 한구가 태자로 확정되지 못할까 우려해 주저했다.

그러자 기모회(母恢)가 말하기를 : “백금을 주어 뒤따르게 하느니만 못합니다. 

한구가 태자로 확정되면 그의 동생을 수레 1백 승으로 호송한 것이라고 말하면 되고, 

만일 확정이 안되면 범죄자를 압송한 것이라고 말하면 될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史疾為韓使楚

 

史疾為韓使楚,楚王問曰:「客何方所循?」曰:「治列子圉寇之言.」曰:「何貴?」

曰:「貴正.」 王曰:「正亦可為國乎?」曰:「可.」王曰:「楚國多盜,正可以圉盜乎?」

曰:「可.」 曰:「以正圉盜,奈何?」頃間有鵲止於屋上者,曰:「請問楚人謂此鳥何?」

王曰:「謂之鵲.」曰:「謂之烏,可乎?」曰:「不可.」

曰:「今王之國有柱國、令尹、司馬、典令,其任官置吏,必曰廉潔勝任.

今盜賊公行,而弗能禁也,此烏不為烏,鵲不為鵲也.」

 

[사질(史疾)이 한나라를 위해 초나라에 사자로 오자 초왕이 묻기를 : “객은 어떤 법술을 연마했소?”라고 하자.

사질이 대답하기를 : “열자어구(列子圉寇)의 말씀을 배웠습니다.”라고 하였다.
초왕이 묻기를 : “열자는 무엇을 주장하오?”라고 하자.  사질이 대답하기를 : “정의(正義)를 강조합니다.”라고 하였다.
초왕이 묻기를 : “정의가 치국에 도움이 되오?”라고 하자.  사질이 대답하기를 : “도움이 됩니다.”라고 하였다.
초왕이 묻기를 : “초나라에는 도적이 많은데 정의를 내세워 도적을 금할 수 있겠소?”라고 하자.
사질이 대답하기를 : “가능합니다.”라고 하였다.  초왕이 묻기를 : “어찌해야 그리 할 수 있겠소?”라고 하자.
이때 마침 까치가 옥상에 앉자, 사질이 묻기를 : “대왕께 청하여 묻건대 초나라 사람들은 이 새를 무엇이라고

부릅니까?”라고 하자.  초왕이 대답하기를 : “까치라고 하오.”라고 하였다.
사질이 묻기를 : “까마귀라고 부르면 안됩니까?”라고 하자.  초왕이 대답하기를 : “안되오.”라고 하였다.
그러자 사질이 말하기를 : “지금 대왕의 나라에는 주국(柱國), 영윤(令尹), 사마(司馬), 전령(典令) 등의 관직이

있습니다. 관원을 둘 때는 반드시 청렴결백한 자세로 직무를 충실히 수행하라고 당부합니다. 그런데도 지금

도적의 횡포를 막지 못하고 있습니다. 이는 오불위오(烏不爲烏: 까마귀를 까마귀라고 부르지 않음)하고,

작불위작(鵲不爲鵲: 까치를 까치라고 부르지 않음)하는 데서 비롯된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韓傀相韓

 

韓傀相韓,嚴遂重於君,二人相害也.  嚴遂政議直指,舉韓傀之過. 韓傀以之叱之於朝.

嚴遂拔劍趨之,以救解. 於是嚴遂懼誅,亡去,游求人可以報韓傀者.

 

[기원전 397, 한괴(韓傀: 俠累)가 한나라 재상으로 있을 때 엄수(호는 仲子)도 한열후(韓烈侯: 한경후의 아들 取)에게

중용되었다. 그러나 두 사람은 늘 서로 대립했다. 엄수는 공정무사한 입장에서 직언을 잘했다.

한번은 그가 한괴의 잘못을 거침없이 지적하자 한괴가 조회 때 엄수를 힐책했다. 엄수가 대노하여 대검을 빼어들고

한괴의 뒤를 쫓았으나 사람들의 만류로 불상사는 일어나지 않았다. 이후 엄수는 주살될까 두려운 나머지 국외로

망명한 뒤 한괴에게 복수해줄 사람을 찾아 이곳 저곳을 돌아다녔다.

 

至齊,齊人或言:「軹深井里聶政,勇敢士也,避仇隱於屠者之間.」嚴遂陰交於聶政,以意厚之.

聶政問曰:「子欲安用我乎?」 嚴遂曰:「吾得為役之日淺,事今薄,奚敢有請?」

於是嚴遂乃具酒,觴聶政母前. 仲子奉黃金百鎰,前為聶政母壽. 聶政驚,愈怪其厚,固謝嚴仲子.
仲子固進,而聶政謝曰:「臣有老母,家貧,客游以為狗屠,可旦夕得甘脆以養親.

親供養備,義不敢當仲子之賜.」

 

[그는 제나라에 이르자, 어떤 제나라 사람이 말하기를 : " 지(軹) 땅의 심정리에 사는 섭정(聶政)이 살인한 뒤 

보복을 피해 백정의 무리 속에 숨어 살고 있는 용사가 있습니다.'라고 하였다.

이에 엄수는 은밀히 섭정과 사귀면서 정성껏 그를 돌보았다. 그러자 하루는 섭정이 엄수에게 묻기를 :
“그대는 장차 나를 어디에 쓰려는 것이오.”라고 하자.  엄수가 대답하기를 :
“나는 그대와 사귄지 얼마 안 되니 비록 일이 급박하기는 하나 어찌 감히 부탁할 수 있겠소.”라고 하였다.
그리고는 이내 술을 준비해 가지고 가 직접 섭정의 모친에게 한 잔 권한 뒤 황금 1백 일(鎰)을 바치며 장수를 빌었다.

섭정이 놀라면서 그의 행동을 기이하게 여겨 이를 사양했다. 엄수가 굳이 권하자 말하기를 :“내가 비록 노모를 모시고

가난으로 인해 외국을 떠돌며 개백정을 하고는 있으나 조석으로 달고 부드러운 음식을 얻어 노모를 봉양하고 있소.

모친을 봉양하기 위한 모든 것이 구비되어 있으니 감히 중자(仲子: 엄수)가 주는 것을 감당할 수 없소.”라고 하였다.]

 

嚴仲子辟人, 因為聶政語曰:「臣有讎, 而行游諸侯眾矣,然至齊,聞足下義甚高.

故進百金者,特以為夫人粗糲之費,以交足下之歡,豈敢有求邪?」
聶政曰:「臣所以降志辱身,居市井者,徒幸而養老母. 老母在,政身未敢以許人也.」

嚴仲子固讓,聶政竟不肯受. 然仲子卒備賓主之禮而去. 久之,聶政母死,既葬,除服.

聶政曰:「嗟乎!政乃市井之人,鼓刀以屠,而嚴仲子乃諸侯之卿相也,不遠千里,

枉車騎而交臣,臣之所以待之至淺鮮矣, 未有大功可以稱者,而嚴仲子舉百金為親壽,我雖不受,然是深知政也.  

夫賢者以感忿睚眥之意,而親信窮僻之人,而政獨安可嘿然而止乎?

且前日要政,政徒以老母. 老母今以天年終,政將為知己者用.」  

 

[그러자 엄수가 사람의 눈을 피해 섭정에게 말하기를 : “나에게는 원수가 한 사람 있소. 그래서 나를 대신해

원수를 갚아 줄 사람을 찾기 위해 여러 나라를 돌아다니며 많은 사람을 만났소. 그런데 제나라에서 이르러 그대의

높은 기개를 듣게 되었소. 내가 1백 금을 그대의 노모에게 드린 것은 노모의 거친 음식값에 보태기 위한 것이오.

나는 다만 그대와 교분을 두터이 쌓고 싶어 그런 것으로 어찌 감히 그 이상을 구하겠소?”라고 하자.
이에 섭정이 말하기를 : “내가 뜻을 굽히고 몸을 낮춰 시정(市井)에 사는 것은 오로지 노모를 봉양하기 위한 것이오.

노모가 살아 계시는 한 내 몸을 감히 남에게 허락할 수 없소.”라고 하였다.엄중자가 간절히 부탁했으나

섭정은 끝내 받으려 하지 않았다. 그러자 엄수는 빈객과 주인의 예를 갖추어 인사를 하고 섭정의 집을 나왔다.

이후 세월이 흘러 섭정의 모친이 죽어 장사를 치르고 복상(服喪)의 기한도 지나게 되었다.

그러자 섭정이 홀로 이같이 탄식했다. “아, 나는 일개 시정인으로 칼을 다루는 백정에 불과하다.

그런데 엄중자는 제후의 경상(卿相)으로 불원천리하여 신분을 낮추고 나와 교분을 맺었다.

그런데도 나는 그를 지극히 미박(微薄)하게 대하고 지우(知遇)에 상응할 만한 이렇다 할 공도 세워드리지 못했다.

게다가 엄중자는 1백 금을 바치며 노모의 장수를 축원해 주었다. 나는 비록 받지는 않았으나 그가 이같이 한 것은

나를 깊이 이해하고 평가했기 때문이다. 무릇 현자(賢者: 엄수)가 자기를 괴롭힌 원수의 일로 인해서 친히 궁벽한

곳에 사는 나를 가까이 하고 믿어 주었다. 그러니 내 어찌 묵연히 모른 체 하며 이에 보답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그가 전에 나를 찾았을 때 나는 노모로 인해 응답하지 못했다. 그러나 이제 노모도 천수를 누리고 돌아가셨으니

나는 장차 나를 알아주는 자를 위해 힘을 다할 때가 되었다.”라고 하였다.]

遂西之濮陽, 見嚴仲子曰 : 「前所以不許仲子者, 徒以親在, 今親不幸, 仲子所欲報仇者爲誰?」

嚴仲子具告曰 : 「臣之仇韓相傀, 傀又韓君之季父也. 宗族盛 兵衛設, 臣使人刺之, 終莫能就.

今足下不幸而不棄, 請益具車騎壯士, 以爲羽翼.」 政曰 : 「韓與衛中閒不遠. 今殺人之相,

相又國君之親此基勢不可以多人, 多人不能無生得失. 生得失則語泄,

語泄則韓擧國而與仲子爲讎也, 豈不殆哉?」 遂謝車騎人徒, 辭獨行 仗劒至韓.

 

[그리고는 서쪽으로 위(衛)나라의 복양(濮陽)에 이르러 엄중자를 만나 말하기를 : “전에 중자(仲子)에게 나를

허락지 않은 것은 오직 노모가 살아 계셨기 때문이오. 지금 노모가 불행히 돌아가셨으니 중자가 복수하고자

하는 자가 누구인지 알려주기 바라오.라고 하였다. 이에 엄수는 모든 사실을 자세히 알리면서 말하기를 :
“나의 원수는 한나라의 상국 한괴요. 한괴는 한군(韓君: 한열후)의 숙부로 종족이 성하고 호위병까지 두고 있소.

나는 사람을 시켜 그를 척살하고자 했으나 실패하고 말았소. 지금 그대가 다행히 나를 저버리지 않고 돕고자 하니

거기(車騎)와 장사(壯士)를 더 보태어 그대를 도울 날개로 삼아 주시오.”라고 하자.
섭정이 말하기를 : “한나라와 위(衛)나라는 그다지 멀리 떨어져 있지 않소. 지금 한나라의 재상을 죽이려고 하는데

그는 국군(國君)의 육친이기도 하오. 이같은 상황에서는 여러 사람을 써서는 안 되오.

사람이 많으면 다른 마음을 품게 되는 사람이 나오고 그리 되면 비밀이 누설될 수밖에 없소.

비밀이 누설되면 한나라는 거국적으로 중자를 원수로 삼을 것이오. 이 어찌 위험한 일이 아니겠소?”라고 하며
마침내 기수와 장사를 모두 거절한 채 홀로 한 자루의 검에 의지해 한나라로 들어갔다.]

 

韓適有東孟之會,韓王及相皆在焉,持兵戟而衛者甚眾. 聶政直入,上階刺韓傀.
韓傀走而抱哀侯,聶政刺之,兼中哀侯,左右大亂. 聶政大呼,所殺者數十人. 因自皮面抉眼,

自屠出腸,遂以死.  韓取聶政尸於市,縣購之千金. 久之莫知誰子.

政姊聞之,曰:「弟至賢不可愛妾之軀,滅吾弟之名,非弟意也.」乃之韓.

視之曰:「勇哉!『氣矜之隆. 是其軼賁、易而高成荊矣. 今死而無名,父母既歿矣,兄弟無有,

此為我故也. 夫愛身不揚弟之名,吾不忍也. 」 乃抱尸而哭之曰:「此吾弟,軹深井里聶政也.」

亦自殺於尸下.  晉、楚、齊、衛聞之曰:「非獨政之能,乃其姊者,以列女也.」

聶政之所以名施於後世者,其姊不避菹醢之誅,以揚其名也.

 

[이때 한나라의 군신이 마침 동맹(東孟: 하남성)에서 모임을 갖게 되었다. 한왕과 대부들이 모두 모이게 되자,

무기를 지닌 호위병이 이루 헤아릴 수 없을 만큼 많았다. 그러나 섭정은 곧바로 계단 위로 뛰어 올라 한괴를 찌렀다.

이 순간 한괴가 놀라 도망치며 한열후(韓烈侯)의 품안에 안겼다. 이에 섭정은 그를 척살하는 와중에 한열후까지도

찌르게 되었다. 뜻밖의 사건에 좌우가 대혼란을 일으켰다. 이때 섭정은 큰 소리로 부르짖으며 수십 명을 척살한 뒤

스스로 얼굴가죽을 벗겨내고 눈알을 도려낸 후 내장을 손으로 끄집어 내고는 이내 죽었다.
이에 한나라 조정에서 섭정의 시체를 시중에 전시하면서 1천 금의 현상금을 내걸고 섭정의 신원을 알고자 했다.

그러나 오랜 시간이 지나도록 섭정의 신원을 아는 사람이 나타나지 않았다. 이때 섭정의 누나가 이 얘기를 듣고

말하기를 : “내 동생은 지극히 용감한 자이다. 결코 내 몸을 아껴 동생의 의기로운 이름을 손상시켜서는 안된다.

그리하는 것은 동생의 뜻을 기리는 길이 아니다.”라고 하며, 이내 한나라로 가 섭정의 시체를 살펴본 뒤 울부짖기를 :
“참으로 용감하다. 그 호기가 위대하고도 숭고하니 참으로 맹분(孟賁), 하육(夏育), 성형(成荊: 成庚)보다 더하구나.

지금 죽어서도 이름을 남기지 못하게 되었구나. 양친도 없고 달리 형제도 없는데 이는 나 때문에 그런 것이다.

어찌 내 몸을 아껴 동생의 이름을 드날리지 않을 수 있겠는가. 나는 차마 그리 할 수 없다.”라고 하였다.
이같이 말하고는 이내 시체를 부둥켜 안고 통곡하면서 외치기를 : “이 사람은 내 동생으로 지(軹) 땅의 심정리에 사는

섭정이라는 자요.”라고 하며, 이내 그 시체 옆에서 자진했다. 조, 초, 제, 위(衛) 등의 나라에서는 이 얘기를 전해 듣고

모두 칭송하기를 : “섭정도 훌륭하지만 그 누나도 열녀이다.”라고 하였다.
섭정의 이름이 후세까지 널리 전해진 것은 실로 그 누나도 시체가 소금에 절여지는 육장의 형벌도 두려워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로 인해 그 동생의 이름이 널리 알려지게 된 것이다.]

 

 

 

  韓策 三 .  

 

 

或謂韓公仲 

 

或謂韓公仲曰:「夫孿子之相似者,唯其母知之而已;利害之相似者,唯智者知之而已.

今公國,其利害之相似,正如孿子之相似也. 得以其道為之,則主尊而身安;不得其道,

則主卑而身危. 今秦、魏之和成,而非公適束之,則韓必謀矣. 若韓隨魏以善秦,是為魏從也,

則韓輕一度,主卑矣. 秦已善韓,必將欲置其所愛信者,令用事於韓以完之,是公危矣.

今公與安成君為秦、魏之和,成固為福,不成亦為福. 秦、魏之和成,而公適束之,

是韓為秦、魏之門戶也, 是韓重而主尊矣. 安成君東重於魏,而西貴於秦,操右契而為公責德於秦、

魏之主,裂地而為諸侯,公之事也. 若夫安韓、魏而終身相,公之下服,此主尊而身安矣.
秦、魏不終相聽者也. 齊怒於不得魏, 必欲善韓以塞魏;魏不聽秦, 比務善韓以備秦是公擇布而割也.

秦、魏和,則兩國德公;不和,則兩國爭事公. 所謂成為福,不成亦為福者也. 愿公之無疑也.」

 

[기원전 293, 어떤 사람이 한나라 상국 공중치에게 말하기를 : “무릇 연자(孿子: 쌍둥이)는 서로 비슷하게 생겨

오직 그 어미만이 구분할 수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이해득실이 서로 닮아 있을 때는 오직 현자만이 이를 헤아릴 수

있습니다. 지금 공과 한나라는 이해득실이 서로 닮아 있어 마치 쌍둥이와 같습니다. 만일 정도로 가면 군주의 위치는

높아지고 공의 일신 또한 안정되겠지만 그렇지 못하면 군주의 위치는 낮아지고 공의 일신 또한 위태로워집니다.

만일 진, 위 두 나라의 연합이 성사될 때 공이 촉성(促成)한 것이 아니라면 한나라는 필시 두 나라의 도모 대상이

될 것입니다. 만일 한나라가 위나라를 좇아 진나라와 친교하면 한나라는 곧 위나라의 꼬리가 됩니다.

그리되면 한나라는 경시되고 군주의 위치 또한 낮아집니다. 진나라는 이미 한나라와 가까이 지내고 있어

필시 자신들이 좋아하는 사람을 앉힌 뒤 그를 통해 한나라를 제어하면서 진나라의 이익을 지키려 할 것입니다.

그리되면 공 또한 위태로워집니다. 그러나 만일 공이 안성군과 함께 진, 위 두 나라의 연합을 도와 주어

성공하면 복이 되고, 실패해도 복이 됩니다. 진, 위 두 나라의 연합이 성립되면 공이 재촉한 셈이 되니

진, 위 두 나라는 반드시 한나라를 통해야 하기 때문에 한나라는 두 나라의 문호(門戶)가 됩니다. 

그리되면 한나라는 중시되고 주군의 위치 또한 올라가게 됩니다. 안성군이 동쪽으로 위나라에서 존중받고, 서쪽으로

진나라에서 귀하게 되면 공을 위해 계약서를  내밀며 진, 위 두 나라 군주에게 덕을 베풀 것을 요구할 수 있습니다.

그러면 두 나라 군주는 공에게 땅을 떼어주며 봉후(封侯)하고 국사를 분장(分掌)하게 해야 할 것입니다.

또한 공이 한, 위 두 나라의 상국을 겸하게 될 경우 역시 공의 봉지는 두 나라의 부용국이 되니 군주의 위치가 

올라가고 공의 일신 또한 안전하게 됩니다. 만일 진, 위 두 나라가 끝내 친교하지 못하면 진나라는 위나라와 

연합하지 못한 사실에 대노해 필시 한나라를 끌어들여 위나라를 봉쇄코자 할 것입니다. 그러면 위나라는 진나라의 

명을 듣지 않고 한나라와 수교해 진나라에 대비하고자 할 것입니다. 이때 공은 결단을 내려 선택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진, 위 두 나라는 연합에 성공하면 공의 은덕에 감격해 할 것이고 설령 실패할지라도 다투어 공을 섬기려 

할 것입니다. 그래서 성공해도 복이 되고, 실패해도 복이 된다고 한 것입니다. 

원컨대 공은 의심하지 말기 바랍니다.”라고 하였다.]

 

 

或謂公仲

 

或謂公仲曰:「今有一舉可以忠於主,便於國,利於身, 愿公之行之也. 今天下散而事秦, 

則韓最輕矣;天下合而離秦, 則韓最弱矣;合離之相續,則韓最先危矣. 此君國長民之大患也.

今公以韓先合於秦, 天下隨之,是韓以天下事秦,秦之德韓也厚矣. 韓與天下朝秦,而獨厚取德焉,

公行之計,是其於主也至忠矣. 天下不合秦,秦令而不聽,秦必起兵以誅不服. 秦久天下結怨構難,

而兵不決,函息士民以待其舋,公行之計,是其於國也,大便也. 昔者,周佼以西周善於秦,

而封於梗陽;周啟以東周善於秦,而封於平原. 今公以韓善秦,韓之重於兩周也無計,而秦之爭機也,

萬於周之時. 今公以韓為天下先合於秦,秦必以公為諸侯,以明示天下,公行之計,是其於身大利也. 

愿公之加務也.」

 

[어떤 사람이 공중에게 묻기를 : “만일 단 한 번의 움직임으로 가히 군주에게 충성하고, 나라에 이익을 주며,

자신을 이롭게 할 수 있는 3 가지를 동시에 이룰 수 있다면 공은 이를 행하기 바랍니다.

지금 천하의 제후들은 합종이 와해 되자 진나라를 섬기고 있습니다. 제후국들 중 한나라가 가장 국세가 약합니다.

천하의 제후들이 진나라와 단교하고 합종을 이뤘을 때도 한나라는 가장 약했습니다.

합종이든 연횡이든 어느 쪽을 막론하고 한나라는 가장 먼저 위태로워질 수밖에 없는 상황에 놓여 있는 것입니다.

이는 나라와 백성을 다스리는 데 가장 큰 우환으로 작용하고 있습니다. 지금 공이 앞장 서 진나라와 연합하면

천하의 제후들이 그 뒤를 따를 것입니다. 이는 한나라가 천하의 제후들을 이끌고 진나라를 섬기는 셈이 되니

진나라는 한나라의 후은에 크게 감격해 할 것입니다. 한나라가 천하의 제후들과 더불어 진나라를 조현하면

진나라는 한나라에 대해 크게 기뻐할 것이고 그 감격은 나머지 5국이 조현한 감격보다 훨씬 더할 것입니다.

공이 이 계책을 행하면 군주에게 지극한 충성을 행하는 셈이 됩니다. 천하의 제후들이 진나라와 연횡하지 않고

진나라의 영을 듣지 않을 경우 진나라는 필시 군사를 일으켜 불복하는 나라를 토벌할 것입니다.

진나라는 오랫동안 천하의 제후들과 결원(結怨)하여 싸워왔으나 아직 결판이 나지 않았습니다. 한나라는 그 틈을

이용해 백성들을 쉬게 하면 됩니다. 공이 이 계책을 행하면 나라에 커다란 이익을 안기는 셈이 됩니다.

전에 서주(西周)의 대신 주교는 서주와 진나라 간의 수교를 성사시켜 경양(梗陽)에 봉해졌습니다.

이때 동주(東周)의 대신 주계(周啓)도 동주와 진나라간의 수교를 성사시켜 평원(平原)에 봉해졌습니다.

지금 공은 한, 진 두 나라 간의 친교를 성사시킨 것은 물론 한나라의 비중이 양주(兩周)와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높은데도 진나라가 한나라를 얻을 기회는 주나라를 얻는 것보다 1만 배나 높습니다. 만일 공이 천하의 제후들에 앞서

한, 진 두 나라 간의 연합을 성사시키면 진나라는 틀림없이 공을 제후로 삼아 천하에 널리 알릴 것입니다. 공이

 계책을 행하면 일신에 커다란 이익을 안겨줄 것입니다. 원컨대 이 일에 더욱 전념해 주기 바랍니다.”라고 하였다.]

 

 

韓人攻宋

 

韓人攻宋,秦王大怒曰:「吾愛宋,與新城、陽晉同也. 韓珉與我交,而攻我臣所愛,何也?」
蘇秦為韓說秦王曰:「韓珉之攻宋, 所以為王也.  以韓之強, 輔之以宋, 楚· 魏必恐. 

恐, 必西面事秦.  王不折一兵, 不殺一人, 無事而割安邑, 此韓珉之所以禱於秦也. 」

秦王曰:「吾固患韓之難知,一從一橫,此其說何也?」

對曰:「天下國令韓可知也. 韓故已攻宋矣, 其西面事秦, 以完成、自輔;不西事秦, 則宋地不安矣. 

中國白頭游敖之士,皆積智欲離秦、韓之交. 伏軾結靷西馳者,未有一人言善韓者也;

伏軾結靷東馳者,未有一人言善秦者也.  皆不欲韓、秦之合者何也『則晉、楚智而韓、秦愚也.

晉、楚合,必伺韓、秦;韓、秦合,必圖晉、楚. 請以決事.」 秦王曰:「善.」

 

[기원전 286, 한나라 재상 한민(韓珉: 공중붕)이 제나라를 위해 송(宋)나라를 공격하자 진소양왕이 대노하며

말하기를 : “나는 송나라를 신성(新城), 양진(陽晉)과 마찬가지로 아낀다. 내가 한민과 친하게 지내고 있는데도

는 내가 심히 아끼는 곳을 침공했다. 이는 무슨 연고인가?”라고 하자.
소대(蘇代)가 제나라를 위해 진소양왕에게 유세하기를 : “한민이 송나라를 공격한 것은 대왕을 위한 것입니다.

제나라의 강대함으로 송나라를 도우면 초, 위 두 나라가 틀림없이 두려워할 것이고, 그렇게 되면 반드시 서면하여

대왕을 섬길 것입니다. 대왕께서는 병사 한 명 동원하지 않고, 단 한 사람도 죽이지 않고, 전쟁 한 번 치르지 않은 채

안읍(安邑)을 할양받게 됩니다. 이것이 바로 한민이 진나라를 위해 복을 구한 이유이기도 합니다.”라고 하였다.
이에 진소양왕이 묻기를 : “나는 실로 제나라의 예측하기 어려운 행동을 우려하고 있소. 

제나라는 시종 연횡과 합종을 오가고 있소. 그대는 무슨 이유로 제나라를 위해 유세하는 것이오?”라고 하자.

소대가 대답하기를 : “이는 천하의 제후들이 모두 알고 있는 것입니다. 제나라가 실로 송나라를 공격하였을지라도

만일 서면(西面)하여 진나라를 섬기면 만승지국으로 안녕을 도모할 수 있으나 그렇지 않으면 설령 송나라 땅을

얻을지라도 안녕할 수 없습니다. 중원의 유세를 직업으로 삼는 사람들은 지금 자신의 모든 지혜를 동원해

진, 제 두 나라 사이를 이간하기 위해 혈안이 되어 있습니다. 거마를 준비하여 서쪽으로 달리는 자들 중에는

제나라에 관해 좋게 말하는 자가 단 한 명도 없습니다. 거마를 준비하여 동쪽으로 달리는 자들 중에는

진나라에 관해 좋게 말하는 자가 단 한 명도 없습니다. 이들 모두 제, 진 두 나라의 연합을 원하지 않으니

그 이유는 무엇이겠습니까. 3진과 초나라는 지혜롭고, 제, 진 두 나라는 어리석기 때문입니다.

3진과 초나라가 연합하면 필시 제, 진 두 나라를 도모할 수밖에 없고 제, 진 두 나라가 연합하면 3진과 초나라를

도모할 수밖에 없습니다. 청컨대 결단을 내리기 바랍니다.”라고 하였다.  진소양왕은 : “옳은 말이오.”라고 하였다.]

 

 

或謂韓王

 

或謂韓王曰:「秦王欲出事於梁,而於攻絳、安邑,韓計將安出矣? 秦之欲伐韓,以東窺周室,

甚唯寐忘之. 今韓不察,因欲與秦,必為山東大禍矣. 秦之欲攻梁也,於得梁以臨韓, 恐梁之不聽也, 

故欲病之以國交也. 王不察,因欲中立,梁必怒於韓之不與己,必折為秦用,韓必舉矣.

愿王熟慮之也. 不如急發重使之趙、梁,約復為兄弟,使山東皆以銳師戍韓、梁之西邊,非為此也,

山東無以救亡, 此萬世之計也. 秦之欲并天下而王之也,不與古同. 事之雖如子之事父,猶將亡之也.

行雖如伯夷,欲將亡之也. 行雖如桀、紂,猶將亡之也. 雖善事之無益也. 不可以為存,適足以自令亟亡也.

然則山東非能從親,合而相堅如一者,必皆亡矣.」

 

[기원전 299, 어떤 사람이 한양왕(韓襄王)에게 말하기를 : “진왕(秦王: 진소양왕)이 출병하여 위나라를 공격하여,

강(絳), 안읍(安邑)을 정복하려 하고 있습니다. 한나라는 장차 어찌 대처하려는 것입니까? 진나라는 한나라를

공격하고 동쪽으로 주왕실을 엿보려는 생각을 품은 지 이미 오래 되어 잠잘 때만 잊고 있습니다.

지금 한나라가 이를 통찰하지 못하고 진나라와 연합하는 날에는 반드시 산동에 커다란 화근이 될 것입니다.

진나라가 위나라를 공격하려는 것은 위나라를 얻어 한나라를 위협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위나라가 말을 듣지 않을 경우 한나라가 피곤해 하면 진, 위 두 나라의 연합을 공고하게 만들어줄까 우려됩니다.

대왕이 이를 헤아리지 않고 중립을 취하면 양나라는 한나라가 돕지 않는 것에 대노해 틀림없이 방향을 바꿔

진나라와 연합해 한나라를 공격할 것입니다. 그리되면 한나라는 패망하고 말 것입니다. 원컨대 대왕께서는 이를

깊이 살펴 보셔야 할 것입니다. 그러니 급히 고위급 사자를 조, 위 두 나라에 보내 형제의 결맹을 하고,

산동 6국으로 하여금 정예 병사들을 보내 한, 위 두 나라의 서쪽 변경을 방어하게 하십시오. 이같이 하지 않으면

산동 6국도 패망을 면할 길이 없습니다. 이는 만세를 이어갈 계책입니다. 진나라가 천하을 병탄해 통치하고자

하는 방식은 옛날의 3왕 5패가 무도한 나라를 공격하여 천하를 통치했던 것과는 다릅니다.

진나라를 설령 자식이 부모를 시봉하듯 섬기고자 해도 장차 패망을 면할 길이 없습니다.

비록 백이(伯夷)와 같이 행동하고자 해도 장차 패망을 면할 길이 없습니다. 비록 걸주(桀紂)와 같이 행동하고자 해도

장차 패망을 면할 길이 없습니다. 비록 성심껏 모실지라도 아무런 소용이 없어 살아남을 길이 막연하니 스스로 멸망만

재촉할 뿐입니다. 그러니 산동 6국이 합종으로 일치단결하지 않으면 필시 모두 패망하고 말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謂鄭王 

 

謂鄭王曰:「昭厘侯,一世之明君也;申不害,一世之賢士也. 韓與魏敵侔之國也,

申不害與昭厘侯執, 而見梁君,非好卑而惡尊也,非慮過而議失也. 申不害之計事,

曰:『我執於魏,魏君必得志於韓,必外靡於天下矣,是魏弊矣. 諸侯惡魏必事韓,

是我免於人一之下,而信於萬人之上也. 夫弱魏之兵,而重韓之權,莫如朝魏.』昭厘侯聽而行之,

明君也;申不害事而言之,忠臣也. 今之韓弱於始之韓,而今之秦強於始之秦. 今秦有梁君之心矣,

而王與諸臣不事為尊秦以定韓者,臣竊以為王之明為不如昭厘侯,而王之諸臣忠莫如申不害也.

 

[기원전 254, 어떤 사람이 정왕(鄭王: 한왕)에게 말하기를 : “한소리후(昭釐侯: 한소후)는 일세의 명군입니다.

신불해(申不害)는 일세의 현사입니다. 한, 위 두 나라는 세력이 균등했으나 신불해는 한소리후로 하여금

양군(梁君: 위혜왕)을 조현하게 했습니다. 이는 스스로 낮추는 것을 좋아하며 높이는 것을 싫어했기 때문이 아닙니다.

혹여 잘못이 있을까 깊이 검토한데 따른 것입니다. 신불해는 계책을 세우면서 말하기를, ‘우리가 조현하면 위혜왕은

필시 한나라에 자신의 소망을 실현하게 되었다고 생각할 것이다. 그리되면 위나라는 틀림없이 천하 제후들에게

패해 피폐해지고 말 것이다. 제후들이 위나라를 미워하면 필시 한나라를 받들 것이다.

이는 내가 일인지하(一人之下: 여기서는 다른 군주에게 몸을 굽히는 것을 의미)에 있는 것을 면하게 하고,

만인지상(萬人之上: 백성들의 존경을 받는 것을 의미)에 서도록 해 줄 것이다. 무릇 위나라 군사를 약하게 만들고,

한나라의 위세를 높이는 방안으로는 위나라를 조현하는 것보다 나은 것이 없다’고 했습니다. 소리후는 그의 말대로

행하였으니 훌륭한 군주요 ; 신불해는 국사를 생각해서 이렇게 말하였으니 충성스런 신하인 것입니다.

지금의 한나라는 옛날의 한나라보다 약해졌으며 지금의 진나라는 예전의 진나라보다 강해 졌습니다.

더구나 지금의 진나라는 양왕의 마음까지 얻고 있는데 대왕과 여러 나라의 신하들은 결코 진나라를 믿고서는

한나라를 안정시킬 수 없다고 여기고 있으니, 신이 보기에 대왕께서는 현명하지도 못하며, 

결코 한소후 만도 못한 것 같고, 대왕의 여러 신하들 또한 아무리 봐도 신불해만 못한 것 같습니다.

 

昔者,穆公一勝於韓原而霸西州,晉文公一勝於城濮而定天下,此以一勝立尊令,成功名於天下.

今秦數世強矣,大勝以千數,次勝以百數,大之不王,小之不霸,名尊無所立,制令無所行,

然而《春秋》用兵者,非以求主尊成名於天下也. 昔先王之攻,有為名者,有為實者.

為名者攻其心,為實者攻其形.

 

[옛날 진목공(秦穆公)은 한원(韓原: 섬서성 한성현)에서 진(晉)나라 군사에게 한 번의 승리를 거두고 서융(西戎)을

제압하게 되었습니다. 진문공(晉文公)은 성복(城濮;산동성 복현)에서 초나라 군사에게 한 번의 승리를 거두고

천하를 평정하게 되었습니다. 이 모든 것이 단 한 번의 승리로 영을 세우고, 천하에 공명을 이룬 것입니다.

지금 진나라는 여러 대에 걸쳐 강력한 무력을 바탕으로 10여 차례 대승을 거두고, 백여 차례 소승을 거뒀습니다.

그러나 진나라가 대승을 거두고도 천하를 통치하지 못하고, 소승을 거두고도 패천하(覇天下)를 못한 것은

명성과 존엄이 설 곳이 없고 영이 행해질 길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춘추대의(春秋大義)에 입각해 용병한 자는

이를 구하지 않고도 천하에 명성과 존엄이 설 수 있습니다. 옛날 선왕의 정사는 명실을 구비했습니다.

명분을 세우고자 하는 자는 내부의 마음을 공략하고, 실질은 찾고자 하는 자는 외부에 존재하는 땅과 백성을

공략하는 법입니다.

 

昔者,吳與廷戰,越人大敗,保於會稽之上. 吳人入越而戶撫之. 越王使大夫種行乘於吳,

請男為臣,女為妾,身執禽而隨訃御. 吳人果聽其辭,與成而不盟,此攻其心者也. 

其後越與吳戰, 吳人大敗, 亦請男為臣, 女為妾, 反以越事吳之禮事越. 越人不聽也, 遂殘吳國而禽夫差,

此攻其形者也. 今將攻其心乎, 宜使如吳;攻其形乎, 宜使如越.  夫攻形不如越, 而攻心不如吳,

而君臣·上下· 少長· 貴賤, 畢呼霸王, 臣竊以為猶之井中而謂曰:『我將為爾求火也.』 

 

[옛날 오, 월 두 나라가 교전하자 월왕 구천(句踐)은 대패한 후 패잔병 5천 명을 이끌고 회계산으로 들어갔습니다.

이에 오나라 군사가 월나라로 들어가 백성들을 안무했습니다. 그러자 구천은 대부 문종을 시켜 오나라와 강화하면서

월나라 백성 모두 오나라 군신의 신첩(臣妾: 남녀 노비를 지칭)이 될 것을 약속하게 했습니다.

그리고는 직접 집금(執禽: 禮를 행할 때 군주는 皮帛, 경은 羔, 대부는 雁, 선비는 雉, 평민은 鶩, 상공인은 鷄을

사용하는데 구천은 羔, 雁, 雉, 鶩, 鷄 등의 금수로써 신하의 예를 표함)한 뒤 오왕의 시중을 들고자 했습니다.

오나라가 과연 이를 받아들여 강화하면서 맹약을 맺지는 않았습니다. 이것은 오나라가 월나라의 마음을 공격한  

좋은 사례입니다. 이후 두 나라가 다시 싸우게 되어 오나라가 대패하자 오나라 역시 똑같은 조건으로 강화를 청하면서

월나라가 오나라를 섬긴 방식대로 월나라를 섬길 것을 다짐했습니다. 그러나 월나라는 이를 받아들이지 않고

마침내 오나라를 멸망시킨 후 부차를 포로로 잡았습니다. 이것은 월나라가 오나라의 형체를 공격한 사례입니다. 

만일 장차 마음을 공격하고자 하면 마땅히 오나라를 본받아야 하고, 형체를 공격하고자 하면 마땅히 월나라를

본받아야 합니다. 무릇 형체를 공격하면서 월나라를 본받지 않고, 마음을 공격하면서 오나라를 본받지 않고,

군신(君臣), 상하(上下), 소장(少長), 귀천(貴賤)이 패왕의 대업을 이룰 수 있다고 말하면

신이 보건대 이는 마치 우물가로 가서 ‘내가 장차 너를 화재에서 구해 주겠다’고 말하는 것과 같습니다.

 

東孟之會,聶政、陽堅刺相兼君. 許異蹴哀侯而殪之,立以為鄭君. 韓氏之眾無不聽令者,

則許異為之先也. 是故哀侯為君,而許異終身相焉. 而韓氏之尊許異也,欲其尊哀侯也.

今日鄭君不可得而為也,雖重申相之焉,然而吾弗為云者,豈不為過謀哉!昔齊桓公九合諸侯,

未嘗不以周襄王之命. 然則雖尊襄王,桓公亦定霸矣. 九合之尊桓公也,猶其尊襄王也.

今日天子不可得而為也,雖為桓公吾弗為云者,豈不為過辯而不知尊哉!韓氏之士數十萬,

皆戴哀侯以為君, 而許異獨取相焉者,無他;諸侯之君,無不任事於周室也,而桓公獨取霸者,

亦無他也. 今強國將有帝王之舋,而以國先者,此桓公、許異之類也. 豈可不謂善謀哉?

夫先與強國之利, 強國能王, 則我必為之霸;強國不能王, 則利用辟其兵, 使之無伐我.

然則強國事成,則我立帝而霸;強國之事不成,猶之厚德我也. 今與強國,強國之事成則有福,

不成則無患,然則先與強國者,聖人之計也.」

 

[동맹의 회동 때 섭정과 그의 부하 양견은 한나라 재상 한괴를 척살하고 한열후까지 결국 죽음에 이르게 했습니다.

당시 대신 허이(許異)는 한열후를 발로 밟아 한열후로 하여금 죽은 시늉을 하도록 하여 목숨을 구해냈습니다.

한나라의 백성들이 영을 따르게 된 것은 바로 허이가 종묘를 안정시킨 덕분입니다.

그래서 이후 한열후가 10년 간을 더 재위하는 동안 허이는 종신토록 재상의 자리에 있게 되었습니다.

한나라가 허이를 존중한 것은 바로 한열후를 존중한 것과 같았습니다. 그러나 지금 군왕은 한열후와 같이 존중을

받을 수 없습니다. 만일 한열후와 같이 했다면 종신토록 재상을 맡는 자가 나타났을 것입니다.

그랬다면 제가 이같이 말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이 어찌 잘못된 계책을 범한 것이 아니겠습니까!

옛날 제환공(齊桓公)은 구합제후(九合諸侯)하면서 주양왕(周襄王)의 명을 내세우지 않은 적이 없었습니다.

그는 오직 존왕(尊王)으로 패업을 이뤘던 것입니다. 제후들이 9합을 거치면서 제환공을 존중한 것은 주양왕을 존중한

것과 같았습니다. 지금 천자는 주양왕과 같은 존중을 받을 수 없습니다. 만일 제환공과 같은 사람이 나타났다면

제가 이같이 말하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이 어찌 과모를 범하고 존왕의 이치를 모른 것이 아니겠습니까!

한나라 군사 수십만 명이 모두 한열후를 군주로 섬기며 받들었으나 허이 한 사람만이 홀로 줄곧 재상의 자리에 있게 된 것은 바로 제후들이 존왕을 중시했기 때문입니다. 제환공이 홀로 패자가 된 것도 역시 다른 이유에서가 아닙니다. 

지금 진나라가 장차 제왕이 되고자 하는 조짐이 있습니다. 나라를 들어 먼저 진나라와 연합하는 자는 바로 제환공과

허이와 같은 사람입니다. 이 어찌 선모(善謀: 뛰어난 계책)라 이르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강대국과 먼저 연합하는

이익을 말하면 강대국이 능히 왕업을 이루게 될 때 먼저 연합한 나라는 반드시 패업을 이루게 됩니다.

설령 강대국이 왕업을 이루지 못할지라도 병화를 피하기 위해 강대국으로 하여금 침공치 못하게 할 수 있습니다.

그러니 강대국의 뜻이 이뤄지면 우리는 제위(帝位)에 의탁해 패업을 이룰 수 있습니다.

설령 강대국의 뜻이 이뤄지지 못할지라도 우리에게 크게 고마워할 것입니다. 지금 한, 진 두 나라의 친교에 비춰 볼 때

진나라가 뜻을 이루면 우리는 복을 받게 되고 그렇지 못할지라도 진나라로 인한 우환은 없게 됩니다.

그러니 진나라와 먼저 연합하는 계책은 가히 성인지계(聖人之計)라 할 수 있습니다.”라고 하였다.]

 

 

韓陽役於三川而欲歸

 

韓陽役於三川而欲歸,足強為之說韓王曰:「三川服矣,王亦知之乎?役且共貴公子.」

王於是召諸公子役於三川者而歸之. 

 

[기원전 249, 한나라 공자 한양(韓陽)이 삼천을 정벌하던 중 귀국하고자 했다. 이에 족강(足强)이 한양을 위해

한환혜왕(韓桓惠王)에게 말하기를 : “삼천이 정복된 사실을 대왕 역시 알고 있습니까? 한양의 무리들이

그를 군주로 세우려 하고 있습니다.”라고 하자.  한환혜왕이 삼천 정벌에 나선 공자들을 모두 돌아오게 했다. 

 

 

秦大國

 

秦,大國也. 韓, 小國也. 韓甚疏秦. 然而見親秦,計之,

非金無以也,故賣美人. 美人之賈貴,諸侯不能買,故秦買之三千金. 韓因以其金事秦,

秦反得其金與韓之美人. 韓之美人因言於秦曰「韓甚疏秦.」從是觀之,韓亡美人與金,

其疏秦乃始益明.  故客有說韓者曰:「不如止淫用,以是為金以事秦,是金必行,

而韓之疏秦不明. 美人知內行者也,生物善為計者,不見內行.」

 

[진나라는 강대국이고 한나라는 약소국이었다. 한나라는 내심 진나라를 꺼리면서도 겉으로는 가깝게 지냈다.

그러나 이 계책은 재물을 이용하지 않고는 성사될 수 없는 것이었다. 이에 한나라는 한왕의 첩을 팔아 재원을

마련하고자 했으나 미인의 값이 워낙 비싸 미인을 사려는 제후가 한 사람도 나서지 않았다. 그러자 마침내 진나라가

3천 금을 내고 미인을 사들였다. 한나라가 그 돈으로 진나라를 섬기자, 진나라는 돈과 미인을 모두 취하게 되었다.

이때 한나라에서 팔려 온 미인이 진나라에 ‘한나라는 내심 진나라를 매우 꺼려하고 있다’고 말했다. 이로써 보건대

한나라는 미인과 재물을 잃은 것은 물론 내심 진나라를 꺼려하고 있다는 사실이 더욱 분명히 드러나게 된 셈이다.

당시 한 세객이 한나라에 대해 말하기를 : 사치와 낭비를 줄이는 것으로 재원을 마련해 진나라를 섬겼더라면

재물은 필시 필요한 곳에 적절히 사용될 것이고 한나라의 진나라에 대한 거리낌도 불투명해질 것입니다.

미인은 한나라 출신이니 한나라 사정을 잘 알고 있을 것입니다. 따라서 계획을 잘 세우는 자는 절대로 속사정을

잘 아는 자를 밖으로 내세우지 않는 법입니다.”라고 하였다.]

 

 

張丑之合齊楚講於魏

 

張丑之合齊· 楚講於魏也, 謂韓公仲曰:「今公疾攻魏之運, 魏急, 則必以地和於齊· 楚,

故公不如勿攻也.  魏緩則必戰. 戰勝, 攻運而取之易矣.  戰不勝, 則魏且內之.」 公仲曰:「諾.」

張丑因謂齊、楚曰:「韓已與魏矣. 以為不然,則蓋觀公仲之攻也.」

公仲不攻,齊、楚恐,因講於魏,而不告韓.

 

[제나라 대신 장추는 제, 초 두 나라가 위나라와 강화하도록 만들고자 했다. 이에 한나라 재상 공중에게 말하기를 :

“지금 공은 속히 위나라의 서운(산동성 운성현)을 공격하도록 하십시오. 위나라가 급하면 필시 땅을 떼어주고

제, 초 두 나라와 연합하려 들 것이오. 이때 공은 위나라를 공격하지 않느니만 못할 것입니다. 한나라가 공격하지

않으면 위나라는 틀림없이 제, 초 두 나라와 싸우려 들 것이기 때문입니다. 위나라가 싸움에 이기면 군사들이

지쳐 있을 터이니 이때 서운을 공격해 이를 취한 뒤 환지하면 됩니다. 만일 위나라가 이기지 못하면 위나라 스스로

서운을 한나라에 바칠 것입니다.”라고 하자. 공중이 대답하기를 : “그리 하도록 하겠소.”라고 하였다.
이에 장추는 곧 제, 초 두 나라에게 말하기를 : “한나라는 이미 위나라와 연합했습니다. 그렇지 않다고 생각하면

왜 공중(公仲)이 위나라를 공격하는지 여부를 지켜본 뒤 판단하려 하지 않는 것입니까.”라고 하였다.
공중붕이 과연 공격하지 않자 제, 초 두 나라는 한, 위 두 나라의 연합을 두려워한 나머지 곧 위나라와 강화한 뒤

한나라에 이를 알리지 않았다.]

 

 

或謂韓相國

 

或謂韓相國曰:「人之所以善扁鵲者,為有臃腫也;使善扁鵲而無臃腫也,則人莫之為之也.
今君以所事善平原君者,為惡於秦也;而善平原君乃所以惡於秦也. 愿君之熟計之也.」

 

[어떤 사람이 한나라 상국에게 말하기를 :“사람들이 편작(扁鵲)을 높이 평가하는 것은

부스럼과 종기가 있기 때문입니다. 부스럼과 종기가 없으면 편작을 높이려 해도 세상 사람들은 그를 높이 평가하지

않을 것입니다. 지금 공이 조나라의 권신 평원군(조승)과 가까이 하려 애쓰는 것은 한나라가 진나라의 미움을 받고

있기 때문입니다. 만일 그대가 평원군과 가까이 지내게 되면 진나라로부터 더 큰 미움을 받게 될 것입니다.

원컨대 군께서는 깊이 헤아려 보시기 바랍니다.”라고 하였다.]

 

 

公仲使韓珉之秦求武隧

 

公仲使韓珉之秦求武隧,而恐楚之怒也. 唐客謂公仲曰:「韓之事秦也,且以求武隧也,

非弊邑之所憎也. 韓已得武隧,其形乃可以善楚. 臣愿有言, 而不敢為楚計.

今韓之父兄得眾者毋相,韓不能獨立,勢必不善楚. 

王曰:『吾欲以國輔韓珉而相之可乎? 父兄惡珉,珉必以國保楚.』」

公仲說,士唐客於諸公,而使之主韓、楚之事. 

 

[공중이 한민으로 하여금 진나라로 보내 무수(武遂)의 땅을 되찾아오게 했다. 이때 진나라는 의양(宜陽)을 취하고,

초나라는 옹씨(雍氏)를 포위하고 있던 까닭에 혹여 초나라의 노여움을 살까 두려워했다.

그러자 초나라 사람 당객(唐客)이 공중에게 말하기를 : “한나라가 진나라를 섬기는 것은 장차 무수를 되찾기 위한

것으로 진심으로 진나라를 섬기고자 하는 것이 아니니 진나라에 대해 증오심을 가질 이유가 없습입니다.

지금 한나라가 이미 무수를 손에 넣었으니 이제 그대는 재상이 되어 초나라와 가까이 지낼 수 있게 되었습니다.

내가 초나라 사람인 것을 이유로 혹여 내가 초나라를 위한 계책을 낸 것으로 오해할까 두려워 미리 이같이

말씀드리는 것입니다. 신은 이미 초왕에게 말하기를, ‘지금 한나라의 부형(公族을 지칭)들은 중인들의 지지를 얻고도

상국이 되지 못해 조정을 장악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형세로 보아 틀림없이 초나라와 관계가 좋지 못할 것입니다’라고

했습니다. 그러자 초왕이 말하기를, ‘내가 한민을 도와 한나라 상국을 시킬 수 있겠소? 그리하면 지금 부형들이

한민을 미워하고 있으니 한민은 틀림없이 나라를 들어 초나라를 섬길 것이오’라고 했습니다.”라고 하였다.
공중이 크게 기뻐하며 당객에게 한나라의 관직을 내렸다. 그리고 한, 초 두 나라 간에 관한 업무를 전담하게 하였다.] 

 

 

韓相公仲珉使韓侈之秦

 

韓相公仲珉使韓侈之秦,請攻魏,秦王說之. 韓侈在唐,公仲珉死. 

韓侈謂秦王曰:「魏之使者謂後相韓辰曰:『公必為魏罪韓侈.』

韓辰曰:『不可. 秦王仕之,又與約事.』 使者曰:『秦之仕韓侈也,以重公仲也. 今公仲死,

韓侈之秦,秦必弗入. 入,又奚為挾之以恨魏王乎?』 韓辰患之,將聽之矣.

今王不召韓侈,韓侈且伏於山中矣.」 秦王曰:「何意寡人如是之權也!令安伏?」召韓侈而仕之.

 

[한나라 상국 공중민(公仲珉)은 한치(韓侈)를 진나라로 보내 위나라 공격을 청하게 하자 진혜문왕이 크게 기뻐하였다.

한치가 돌아가던 도중 공중민이 죽었다. 이에 한치가 사람을 보내 진혜문왕에게 말을 전하기를 :
“위나라 사자가 후임 상국 한진(韓辰)에게 이르기를, ‘공은 위나라를 위해 반드시 한치에게 죄를 물어야 하오’라고

했습니다. 이에 한진이 응답하기를, ‘안되오. 진왕은 그에게 관직을 맡기고 위나라를 칠 것을 약속했소’라고 했습니다.

그러자 위나라 사자가 반박하기를, ‘진나라가 한치에게 관직을 맡기려는 것은 공중민을 존중하기 때문이오.

지금 공중민이 죽은 상황에서 한치가 진나라로 가면 진나라는 필시 그를 받아들이지 않을 것이오.

그러니 어찌 진나라에 기대어 위왕에게 대항할 수 있겠소’라고 했습니다. 이로 인해 한진은 진나라가 위나라를

공격하지 않으면 위나라가 그 원망을 한나라로 돌릴까 크게 우려하며 장차 이를 따르려 하고 있습니다.

지금 대왕께서 한치를 부르지 않으면 한치는 산 속으로 들어가 숨어 있어야만 합니다.”라고 하였다.
그러자 진혜문왕이 말하기를 : “내가 어찌 사람들로 하여금 나를 반복무상한 사람으로 의심하게 만들 수 있겠소.

지금 어디에 숨어 있는 것이오?”라고 하며,  한치를 불러 관직을 맡게 하였다.]

 

 

客卿為韓謂秦王

 

客卿為韓謂秦王曰:「韓珉之議,知其君不知異君,知其國不致可異國. 辟公仲者,秦勢能詘之.

秦之強, 首之者, 珉為疾矣. 進齊、宋之兵至首坦,遠薄梁郭,所以不及魏者, 以為成而過南陽之道,

欲以四國西首也. 所以不者,皆曰以燕亡於齊,魏亡於秦,陳、蔡亡楚楚,此皆絕地形,

群臣比周以蔽其上,大臣為諸侯輕國也. 今王位正,張儀之貴,不得議公孫郝,是從臣不事大臣也 ;

公孫郝之貴,不得議甘戊,則大臣不得事近臣矣. 貴賤不相事,各得其位,輻湊以事其上,

則群臣之賢不肖,可得而知也. 王之明一也. 公孫郝嘗疾齊、韓而不加貴,則為大臣不敢為諸侯輕國矣.

 

[한나라의 객경(客卿: 타국 출신 재상으로 상국 바로 밑의 관직)이 한나라를 위해 진무왕(秦武王)에게 말하기를 :
“한민(韓珉)의 계책은 자국의 군주만 알고 타국의 군주는 모르며, 자국의 실정만 알고 타국의 실정은 잘 모른 데서

나온 것입니다. 그는 지금 진나라의 무력에 두려워하며 복종하고 있는 것입니다. 진나라의 강군이 한나라로 향하면

그는 크게 두려워할 것입니다. 지금 제, 송 두 나라의 군사가 진공을 개시해 수원(하남성 장원현)에 이르렀습니다.

위나라 도읍 대량이 얼마 남지 않았습니다. 이들 중 위나라를 공격하지 말자고 말하는 자들은 위나라와 강화한 뒤

위나라의 남양을 통과하려는 것입니다. 이들은 4국(한, 송, 제, 위)의 군사를 이끌고 서쪽 진나라를 치려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들 중 서쪽 진공을 언급하지 않는 자들는 모두 연나라가 내란으로 인해 제나라에게 멸망 직전에 이르고,

위나라가 진나라에게 안읍(安邑)을 빼앗기고, 진, 채 두 나라가 초나라에게 망한 사실을 지적하고 있습니다.

이같이 된 것은 모두 지형이 끊겨 서로 통하지 않은 데 따른 것이었습니다. 군신들이 당파를 이뤄 사리를 꾀하면

군왕은 군신들의 현명함과 어리석음을 가릴 수 없게 되고, 대신들은 제후들의 실정을 모르게 됩니다.
대왕께서는 집정하는 동안 장의가 귀총(貴寵)을 받을지라도 중간에서 공손학(공손연)을 방해하지 못하게 했습니다.

이는 장의가 공손학을 방해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또한 공손학이 귀총을 받을지라도 중간에서 감무를 방해하지

못하게 했습니다. 이는 대신이 근신(近臣: 군주의 측근으로 감무)을 방해해서는 안되기 때문입니다.

귀천(貴賤)이 서로 방해하지 않고, 각각 그 자리를 지키고, 군신들이 한마음이 되어 군주를 위해 일하면

대왕은 군신들의 현우를 가히 쉽게 알 수 있습니다. 이것이 대왕이 현명한 첫 번째 이유입니다.

공손학은 일찍이 제, 한 두 나라를 끼고 돌다가 더 이상 귀총을 입지 못하게 되었습니다.

이에 대신들은 감히 사적으로 제후들과 사귀며 나라를 기울게 만들 수 없었습니다.

 

齊、韓嘗因公孫郝而不受,則諸侯不敢因群臣以為能矣. 外內不相為,則諸侯之情偽可得而知也.

王之明二也. 公孫郝、樗里疾請無攻韓,陳四辟去,王猶攻之也. 甘茂約楚、趙而反敬魏,是其講我,

茂且攻宜陽,王猶校之也. 群臣之知,無幾於王之明者,臣故愿公仲之國以侍於王,而無自左右也.」

 

[제, 한 두 나라는 일찍이 공손학을 통해 진나라와 화친하고자 했으나 의심을 사 받아들여지지 않았습니다.

이에 제후들은 감히 군신들을 통해 진나라와 친교를 맺을 수 없게 되었습니다. 이로써 안팎이 서로 도와줄 수

없게 되자 제후들의 실정과 거짓이 소상히 드러나게 되었습니다. 이것이 대왕이 현명한 두 번째 이유입니다.
공손학과 저리질(樗里疾)은 한나라를 치지 말 것을 청하면서 4가지 이유를 들고 있습니다. 그러나 대왕은 오히려

공격하는 쪽을 택하려 하고 있습니다. 지금 감무는 초, 조 두 나라와 연합하고 오히려 위나라를 경계해야 한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는 한나라를 통해 3국이 강화하는 것을 뜻합니다. 감무가 장차 의양을 치려고 하니

대왕께서는 속히 공격과 강화 중 어느 쪽이 유리한지 스스로 판단하시기 바랍니다. 군신들의 지혜는 대왕의 현명함에

비교할 수 없습니다. 원컨대 대왕께서는 한나라가 대왕을 섬길 수 있게 해주기 바랍니다.

지금 공중(公仲)은 마음을 다해 대왕을 따를 생각으로 좌우를 모두 물리치고 있습니다.”라고 하였다.]

 

 

韓珉相齊

 

韓珉相齊,令吏逐公疇豎,大怒於周之留成陽君也. 

謂韓珉曰:「公以二人者為賢人也,所入之國, 因用之乎? 則不如其處小國. 何也? 

​成陽君為秦去韓, 公疇豎, 楚王善之.  今公因逐之, 二人者必入秦· 楚, 必為公患. 

且明公之不善於天下. 天下之不善公者, 與欲有求於齊者, 且收之, 以臨齊而市公.」

 

[기원전 286, 한민이 제나라의 상국이 되자 관원을 시켜 공주수(公疇竪)를 축출했다. 이때 한나라 상국으로 있던

성양군(成陽君)도 쫓겨나 주나라로 가자 한민이 크게 노했다. 그러자 어떤 사람이 한민에게 말하기를 :
“공이 과연 2인자로서 현명한 사람이라고 할 수 있소. 과연 두 사람을 불러 들여 쓸 수는 없는 것이오.

그러지 못할 바에는 차라리 그들이 소국에 머물도록 놓아두느니만 못하오. 성양군은 진나라와 잘 지내기 위해

한나라를 떠난 것이고, 공주수는 초왕과 가깝게 지내고 있소. 지금 공이 두 사람을 쫓아내면 두 사람은 틀림없이

각각 진, 초 두 나라로 들어갈 것이오. 그리되면 공에게 커다란 우환이 될 것이오. 이는 공이 잘 하지 못함을

천하에 널리 알리는 셈이 되오. 천하의 제후들이 공을 잘 하지 못한다고 생각해 제나라의 상국을 찾게 되면

장차 두 사람을 거두어 공의 상국 자리를 빼앗은 뒤 이들로 하여금 대신하게 할 것이오.”라고 하였다.]

 

 

或謂山陽君

 

或謂山陽君曰:「秦封君以山陽,齊封君以莒. 齊、秦非重韓則賢君之行也.

今楚攻齊取莒,上及不交齊,次弗納於君,是棘齊、秦之威而輕韓也.」 山陽君因使之楚.

 

[기원전 276, 어떤 사람이 한나라 대신 산양군(山陽君)에게 말하기를 : “진나라가 군을 산양에 봉하고,

제나라는 군을 거(莒) 땅에 봉했소. 제, 진 두 나라는 한나라를 존중하지 않고 있으나군의 품행만큼은 크게

존중하고 있는 것이오. 지금 초나라가 제나라를 쳐 거 땅을 취함으로써 위로는 국교를 손상케 하고 다음으로는

거 땅의 귀속을 어렵게 만들었소. 이는 제, 진 두 나라의 위엄을 해치고 한나라를 경시케 만드는 일이오.”라고 하자.
이에 산양군이 곧 초나라로 갔다.]

 

 

趙魏攻華陽

 

趙、魏攻華陽, 韓謁急於秦. 冠蓋相望, 秦不救. 韓相國謂田苓曰:「事急, 愿公雖疾, 為一宿之行.」

田苓見穰侯,穰侯曰:「韓急乎? 何國外使公來?」田苓對曰:「未急也.」

穰侯怒曰:「是何以為公之王使乎? 冠蓋相望,告弊邑甚急,公曰未急,何也?」

田苓曰:「辟韓急,則將變矣.」穰侯曰:「公無見王矣,臣請令發兵救韓.」

八日中,大敗趙、魏於華陽之下.

 

[기원전 273, 조, 위 두 나라가 화양(華陽)을 공격하자, 한나라는 진나라에 위급함을 알렸다. 

한나라 사자의 관(冠)과 수레 덮게가 서로 닿을 정도로 빈번히 구원을 요청했으나 진나라가 구원에 나서지 않았다.

그러자 한나라 상국이 전령(田苓: 「사기」의 陳筮)에게 이같이 부탁하기를 : “일이 급하게 되었으니 공이 비록 병이

든 것은 아나 반드시 하루 밤 사이에 다녀와야 되겠소.”라고 하였다. 이에 전령이 양후를 만나자 양후가 묻기를 :
“한나라가 몹시 급한 모양이오. 어찌 하여 병이 든 공까지 사자로 보낸 것이오?”라고 하자.
전령이 대답하기를 : “아직까지는 급하지 않습니다.”라고 하였다.
그러자 양후가 크게 화를내며 말하기를 : “그렇다면 어찌하여 공을 사자로 보낸 것이오. 사자의 관(冠)과 수레 덮게가

서로 닿을 정도로 빈번히 구원을 요청했는데 공이 ‘미급’이라고 말하는 것은 도대체 무슨 연고요?”라고 하자.

전령이 대답하기를 : “한나라가 급했다면 다른 나라에 붙어 버렸을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이에 양후가 놀라 말하기를 :  “공은 대왕을 만날 필요도 없소. 내가 군사를 일으켜 한나라를 구원하도록 하겠소.”

라고 하며, ​과연 8일 만에 진나라 군대가 출병해 조, 위 두 나라 군대를 화양에서 대파했다.]

 

 

秦招楚而伐齊

 

秦招楚而伐齊, 冷向謂陳軫曰:「秦王必外向. 楚之齊者知西不合於秦, 必且務以楚合於齊.

齊、楚合,燕、趙不敢不聽. 齊以四國敵秦,是齊不窮也.」
向曰:「秦王誠必欲伐齊乎? 不如先收互楚之齊者,楚之齊者先務以楚合於齊,則楚必即秦矣.

以強秦而有晉、楚,則燕、趙不敢不聽,是齊孤矣. 向請為公說秦王.」

 

[기원전 313, 진나라가 초나라를 끌어들여 제나라를 공격하려 하자, 영향(冷向)이 진나라로 도망쳐 와 있는

진진(陳軫)에게 말하기를 : “진혜문왕은 틀림없이 겉으로는 제나라와 가까운 초나라 인사를 제거하려 들 것이오.

그러면 이들은 곧 서쪽으로 진나라와 연합할 수 없다는 것을 알고 필시 초, 제 두 나라의 연합을 성사시키기 위해

전력을 기울일 것이오. 제, 초 두 나라가 연합하면 연, 조 두 나라는 감히 이들의 말을 듣지 않을 수 없게 되오.

이때 제나라가 이들 4국의 맹주가 되어 진나라와 대적하면 제나라는 결코 불리하지 않을 것이오.”라고 하였다.
그리고는 영향이 다시 말하기를 : “진왕이 정말로 제나라를 공격하려 한다고 보십니까? 그렇게 하려면 진나라는 

먼저 제나라와 가까운 초나라 세력들을 이용할 것입니다. 제나라와 가까운 초나라 세력들을 제나라와의 연합에 

전력을 투구하지 않으면 초나라는 틀림없이 진나라에 투항하고 말 것이오. 강한 진나라가 초나라를 얻게 되면

연, 조 두 나라는 감히 이들의 말을 듣지 않을 수 없소. 그리 되면 제나라는 고립될 수밖에 없소.

내가 공을 위해 진왕에게 한 번 말해 보도록 하겠소.”라고 하였다.] 

 

 

韓氏逐向晉於周

 

韓氏逐向晉於周,周成恢為之謂魏王曰:「周必寬而反之,王何不為之先言,是王有向晉於周也.」 

魏曰:「諾.」成恢因為謂韓王曰:「逐向晉者韓也,而還之者魏也,豈如道韓反之哉!

是魏有向晉於周,而韓王失之也.」 韓王曰:「善.」 亦因請復之.

 

[한나라가 주나라에 사자로 간 향진(向晉)을 축출하자, 주나라의 성회(成恢)가 향진을 위해 위왕에게 말하기를 :

“주나라는 반드시 향진을 너그러이 용서한 뒤 한나라로 송환할 것입니다. 그런데 대왕께서는 왜 먼저 주나라에

향진의 송환을 청하지 않는 것입니까? 이같이 하면 대왕은 곧 향진과 교분을 맺어 주나라에 있는 그를 크게

활용할 수 있을 것입니다.”라고 하자.  위왕이 말하기를 : “그리 하도록 하겠소.”라고 하였다.
성회는 이어 한왕을 만나 말하기를 : “향진을 축출한 당사자는 한나라이나 그를 송환하게 만든 나라는 위나라입니다.

어찌하여 한나라가 직접 그의 송환을 요구하지 않는 것입니까! 이는 위나라로 하여금 향진을 주나라에 두고

이용하게 만드는 것으로 한나라는 장차 그를 잃고 말 것입니다.”라고 하자.
한왕이 말하기를 : “옳은 말이오.”라고 하며,  곧 주나라에 청해 향진을 송환하게 했다.]

 

 

張登請費紲

 

張登請費紲, 曰:「請令公子年謂韓王曰:『費紲,西周讎之, 東周寶之. 此其家萬金,王何不召之,

以為三川之守. 是紲以三川與西周戒也,必盡其家以事王. 西周惡之,必效先王之器以止王.』

韓王必為之. 西周聞之,必解子之罪,以解子之事.」 

 

[기원전 323, 중산국 사람 장등(張登)이 한나라 사람 비설(費紲)에게 말하기를 : “청컨대 공자 연(年)을 시켜

한선혜왕에게 말하기를, ‘비설은 서주에게는 원수이나 동주에서는 크게 중시되고 있습니다. 그의 집은 1만 금의

부호입니다. 대왕은 왜 그를 불러 삼천의 군수로 삼지 않는 것입니까? 그리하면 비설은 삼천에서 서주를 경계하고자

할 것입니다. 그는 틀림없이 가산을 기울여 대왕을 섬길 것입니다. 서주는 이를 두려워한 나머지 틀림없이

선왕의 귀중한 보물을 바치면서 비설의 군수 임명을 철회해 달라고 부탁할 것입니다’라고 하십시오.

그러면 한왕은 틀림없이 이를 들어줄 것입니다. 서주가 이 얘기를 들으면 반드시 그대에 대한 구원(仇怨)을 풀고

그대를 삼천 군수로 삼는 일은 없던 일로 하려 할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安邑之御史死

 

安邑之御史死,其次恐不得也.

輸人我之謂安令曰:「公孫綦為人請御史於王,王曰:『彼固有次乎?吾難敗其法.』」因遽置之.

 

[안읍(安邑)의 어사가 죽자, 부어사(副御史)가 그 후임이 되지 못할까 초조해 했다.

그러자 어떤 사람이 그를 위해 안읍령에게 말하기를 : “공손기(公孫綦)가 어떤 사람을 위해 대왕에게 어사 제수를

청하자 대왕이 말하기를, ‘그 사람이 실로 부어사의 자리에 있소. 어사가 죽으면 부어사가 반드시 그 후임이 되어야

하는 법이오. 나는 이를 함부로 바꿀 수 없소’라고 했습니다.”라고 하자, 안읍령이 즉각 부어사를 후임으로 임명했다.]

 

 

魏為九里之盟

 

魏王為九里之盟,且復天子. 房喜謂韓王曰:「勿聽之也,大國惡有天子,而小國利之.

王與大國弗聽,魏安能與小國立之.」

 

[기원전 342, 위혜왕이 구리(하남성 등봉현)의 회맹 당시 장차 주나라 왕에게 천자의 존호를 회복시켜 주고자 했다.

그러자 방희(房喜: 「한비자」의 彭喜)가 한소후(韓昭侯)에게 말하기를 : “위왕의 말을 듣지 마십시오.

대국은 천자가 있는 것을 원하지 않습니다. 천자를 높이는 것은 소국에게 유리할 뿐입니다. 대왕이 대국과 함께

그의 말을 좇지 않으면 위나라가 어찌 소국들을 믿고 주나라 천자의 지위를 회복시킬 수 있겠습니까?"라고 하였다.]

 

 

建信君輕韓熙 

 

​建信君輕韓熙, 趙敖為謂建信侯曰:「國形有之而存,無之而亡者,魏也. 不可無而從者,韓也.
今君之輕韓熙者,交善楚、魏也. 秦見君之交反善於楚、魏也,其收韓必重矣.

從則韓輕,橫則韓重,則無從輕矣.  秦出兵於三川,則南圍鄢,蔡、邵之道不通矣.

魏急,其救趙必緩矣. 秦舉兵破邯鄲,趙必亡矣. 故君收韓,可以無舋.」

 

[진시황 3년(기원전 244), 조나라의 권신 건신군(建信君)이 한나라 대신 한희(韓熙)를 업신여기자,

한희의 가신 조오(趙敖)가 건신군에게 말하기를 : “조나라와 위나라는 서로 이웃하고 있습니다. 조나라가 존립하려면

반드시 이웃해 있어야만 하는 나라가 위나라입니다. 또한 합종을 성사시키려면 빼놓을 수 없는 나라가 바로

한나라입니다. 지금 군이 한희를 업신여기는 것은 초, 위 두 나라와 가까이 지내고자 하는 것입니다. 진나라가 만일

군이 초, 위 두 나라와 오히려 가까이 지내는 것을 알게 되면 틀림없이 한나라와 긴밀히 연합할 것입니다.

합종이 성사되면 한나라는 경시되고 연횡이 성사되면 한나라는 중시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한나라는 이렇듯 자신의 위치를 스스로 선택할 수 있는 입장에 서 있지 않습니다. 진나라가 삼천으로 출병하여

남쪽으로 위나라의 언릉을 포위하면 상채(上蔡), 소릉(邵陵)으로 통하는 길이 끊기고 맙니다.

위나라는 위급한 상황에 놓이게 되어 조나라에 대한 구원을 적극적으로 전개할 수가 없게 됩니다.

이때 진나라 군사가 조나라 도읍 한단을 함락시키면 조나라는 필시 망하고 말 것입니다.

그러니 군은 한나라와 연합함으로써 진나라가 침공할 틈을 만들어 주지 말아야 합니다.”라고 하였다.]

 

 

段產謂新城君

 

段產謂新城君曰:「夫宵行者能無為奸,而不能令狗無吠己. 今臣處郎中,能無議君於王,

而不能令人毋議臣於君. 愿君察之也.」

 

[단산(段産: 위책의 白珪)이 신성군에게 말하기를 : “무릇 밤길을 걷는 사람은 능히 나쁜 일을 하지 않을 수 있으나

개가 자신을 보고 짖지 않도록 제어할 수는 없습니다. 지금 신이 낭중(궁중의 侍衛)으로 있으면서

대왕 앞에서 군을 헐뜯지 않을 수 있으나 다른 사람들이 군주 앞에서 신을 헐뜯는 것을 막을 수는 없습니다.

군은 이를 잘 헤아리기 바랍니다.”라고 하였다.]

 

 

段干越人謂新城君

 

段干越人謂新城君曰:「王良之弟子駕,云取千里馬,遇造父之弟子. 造父之弟子曰:

『馬不千里.』 王良弟子曰:『馬千里之馬也;服,千里之服也. 而不能取千里,何也?』
曰:「子纆牽長. 故屋牽於事,萬分之一也,而難行千里之行.

『今臣雖不肖,於秦亦萬分之一也,而相國見臣,不釋塞者,是纆牽長也.」

 

​[단간월(段干越)이 신성군(新城君)에게 말하기를 : “왕량(王良: 趙簡子의 수레를 몬 뛰어난 御者)의 제자가 말을 몰며

1천 리를 갈 수 있다고 장담하다가 조보(造父: 周穆王의 수레를 몬 뛰어난 어자)의 제자와 만나게 되었습니다.

이에 조보의 제자가 말하기를, ‘이 말은 1천 리를 갈 수 없다’고 했습니다.

이에 왕량의 제자가 묻기를, ‘이 말은 틀림없는 천리마이다. 수레를 비롯한 모든 물건도 천리마용으로 준비된 것이다.

그런데도 1천 리를 가지 못한다고 하니 그게 무슨 말인가’라고 했습니다. 그러자 조보의 제자가 대답하기를,

‘그 말고삐가 길기 때문이다’라고 했습니다. 무릇 말고삐는 말을 몰 때 만분지일(萬分之一)의 중요성 밖에 지니지 못한

사소한 것일 뿐입니다. 그러나 1천 리를 갈 때에는 큰 장애요인이 될 수 있습니다. 지금 신이 비록 불초하기는 하나

진나라에 최소한 ‘만분지일’의 작용을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도 상국은 신을 만나면 오히려 언짢아 하고 있습니다.

이는 말고삐가 길어 1천 리를 갈 수 없는 것과 같습니다.”라고 하였다.]

 

 

 

原 文 【 中國哲學書電子化計劃 .   筆寫本 】           

 

 

 

原 文   飜 譯 者        德庤 / 李   斗 振