魏 策
【 序文 】
위나라는 원래 희성(姬姓)으로 주문왕의 아들 필공(畢公) 고(高)의 후예가 세운 나라이다.
진헌공 16년(기원전 661)에 필만(畢萬)을 위(魏) 땅에 봉하자 이후 줄곧 진(晉)나라의 경대부가 되었다.
위환자(魏桓子)의 손자 위사(魏斯)가 재위한지 44년이 되던 주위열왕 23년(기원전 403)에 주위열왕이
그를 위문후(魏文侯)로 봉후(封侯)했다. 위나라는 위문후와 그의 뒤를 이은 위무후(魏武侯) 때
뛰어난 통치술을 발휘해 그 위세를 떨쳤으나 이후 줄곧 약소국을 면치 못했다.
위나라의 영토는 지금의 섬서성 일부 지역과 하남성 북부, 하북성 일부, 산동성 관현 일대 등 여러 곳으로
넓게 흩어져 있었다. 주요한 지역으로는 산서성 서남부의 하동(河東)과 하남성 북부의 하내(河內),
산서성 동남부의 상당(上黨) 등이었다. 도읍은 원래 안읍(安邑: 산서성 하현)이었으나
위혜왕 6년(기원전 364)에 대량(大梁: 하남성 개봉시)로 천도하면서 국호도 양(梁)으로 바꿨다.
진시황 22년(기원전 225), 양왕 가(假)가 진시황에게 항복해 마침내 멸망하고 말았다.
魏策 一 .
《知伯索地於魏桓子》
知伯索地於魏桓子,魏桓子弗予. 任章曰:「何故弗予?」 桓子曰:「無故索地,故弗予.」
任章曰:「無故索地,鄰國必恐;重欲無厭,天下必懼君予之地, 知伯必驕. 驕而輕敵,
鄰國懼而相親. 以相親之兵,待輕敵之國,知氏之命不長矣!《周書》曰:『將欲敗之, 必姑輔之;
將欲取之,必姑與之.』君不如與之,以驕知伯. 君何釋以天下圖知氏而獨以吾國為知氏質乎?」
君曰:「善.」乃與之萬家之邑一. 知伯大說. 因索蔡、皋梁於趙,趙弗與,因圍晉陽.
韓、魏反於外,趙氏應之於內,知氏遂亡. 韓趙相難. 韓索兵於魏曰:「愿得借師以伐趙.」
魏文侯曰:「寡人與趙兄弟,不敢從.」 趙又索兵以攻韓, 文侯曰:「寡人與韓兄弟, 不敢從. 」
二國不得兵, 怒而反. 已乃知文侯以講於己也, 皆朝魏.
[주정정왕 16년(기원전 453), 지백이 위환자에게 땅을 떼어 줄 것을 요구하자 위환자가 이를 거절했다.
그러자 위환자의 가신 임장(任章)이 묻기를 : “어찌 땅을 떼어 주지 않는 것입니까?”라고 하자.
위환자가 대답하기를 : “아무 이유없이 땅을 떼어 달라고 요구해 주지 않은 것이오.”라고 하였다.
임장이 묻기를 : “이유없이 땅을 떼어 달라고 요구하면 이웃 나라들은 필시 두려워할 것입니다.
탐욕이 그칠 줄 모르면 천하가 모두 두려워할 것입니다. 군이 땅을 떼어주면 그는 틀림없이 교만해질 것입니다.
교만하면 적을 가볍게 보고 이웃 나라는 두려운 나머지 마지 못해 친교를 맺을 것입니다. 이웃의 군사로 가벼이
여기는 나라를 대하게 되면 지씨의 명운은 길 수 없습니다. 「주서」에 이르기를, ‘장차 적을 깨뜨리고자 하면
반드시 잠시 적을 도와주고, 장차 그것을 취하고자 하면 반드시 잠시 그것에게 주라’고 했습니다.
그러니 군은 지백에게 땅을 떼어 주어 그를 교만하게 만드느니만 못합니다. 군은 어찌하여 천하로써 지씨를
도모하는 일을 포기하고 유독 우리나라만 지씨의 공격을 받게 만들려는 것입니까?”라고 하자.
위환자가 대답하기를 : “그 말이 옳소.”라고 하며, 이에 1만 호의 성읍 하나를 바치자 지백이 크게 기뻐했다.
지백은 이어 조나라에 인(藺)과 고량(皐梁) 땅을 요구했다. 조나라가 이에 응하지 않자 곧 진양을 포위했다.
한강자와 위환자가 밖에서 반기를 들고 조양자가 안에서 내응하자 지씨는 드디어 망하고 말았다.]
《韓趙相難》
韓趙相難. 韓索兵於魏曰:「愿得借師以伐趙.」魏文侯曰:「寡人與趙兄弟,不敢從.」
趙又索兵以攻韓, 文侯曰:「寡人與韓兄弟, 不敢從. 」
二國不得兵, 怒而反. 已乃知文侯以講於己也, 皆朝魏.
[한나라와 조나라는 서로 맹비난을 하고 있었다. 한나라는 위나라에게 군대를 파병해 줄 것을 요구하며 말하기를 :
" 원컨대 그대의 군대를 빌려 조나라를 징벌하고자 합니다."라고 하자.
위문후가 말하기를 : " 과인의 위나라와 조나라는 형제지국이므로 감히 그 요구를 따를 수 없소."라고 하였다.
조나라는 또 한나라를 공격할 터이니 군대 병력을 빌려 달라고 요구하였다.
위문후가 대답하기를 : " 과인의 위나라와 한나라는 형제지국이므로 감히 그 요구를 따를 수 없소."라고 하였다.
한나라와 조나라는 위나라로 부터 군대 협조를 얻지 못하자, 분노하며 철군해 버렸다. 얼마후 두 나라는 위문후가
자기들을 위하여 중간에서 화해시키기 위한 것임을 알고 그 고마움을 표하기 위해 모두 위문후에게 조견하였다.]
樂羊為魏將而攻中山. 其子在中山,中山之君烹其子而遺之羹,樂羊坐於幕下而啜之,盡一杯.
文侯謂睹師贊曰:「樂羊以我之國外,食其子之肉.」 贊對曰:「其子之肉尚食之,其誰不食!」
樂羊既罷中山,文侯賞其功而疑其心.
[주위열왕 18년(기원전 408), 위문후의 장수 악양(樂羊)이 군사를 이끌고 가 중산국을 공격했다.
당시 악양의 아들이 중산국에서 벼슬을 하고 있었다. 중산국의 군주가 악양의 아들을 팽살(烹殺)하여 만든 국물을
악양에게 보냈다. 그러자 악양은 막하(幕下)에 앉아 마시면서 한 그릇을 모두 비워버렸다.
이 말을 들은 위문후가 도사찬(직책명)에게 말하기를 :“악양은 나를 위해 그 자식의 고기까지 먹었소.”라고 하자.
도사찬이 악양을 비난하며 말하기를 : “자식의 고기까지 먹을 정도라면 무엇인들 먹지 못하겠습니까!”라고 하였다.
악양이 중산국을 멸한 뒤 돌아오자 위문후는 약양의 공을 칭송하면서도 그의 심중을 의심했다.
《西門豹為鄴令》
西門豹為鄴令,而辭乎魏文侯.
文侯曰:「子往矣,必就子之功,而成子之名.」 西門豹曰:「敢問就功成名,亦有術乎?」
文侯曰:「有之. 夫鄉邑老者而先受坐之士,子入而問其賢良之士而師事之,
求其好掩人之美而揚人之醜者,而參驗之, 夫物多相類而非也, 幽莠之幼也似禾, 驪牛之黃也似虎,
白骨疑象, 武夫類玉, 此皆似之而非者也.」
[서문표(西門豹)가 업(鄴: 하북성 임장현) 땅의 장관에 임명된 후 위문후에게 하직인사를 하자,
위문후가 당부하기를 : “가서 반드시 큰 공을 세워 이름을 떨치도록 하시오.”라고 하였다.
그러자 서문표는 : “감히 묻건대 공을 세우고 이름을 떨칠 수 있는 비술이 있습니까?”라고 하자.
이에 위문후가 대답하기를 : “있소. 먼저 향읍(鄕邑)의 장로를 찾아가 그들에게 소송 등에 관해 자문토록 하시오.
나라 안에 선비가 들어오면 현량(賢良)을 예를 갖추어서 찾아 보고 그들을 스승으로 삼고 섬기도록 하시오.
사람을 구하면서 남의 장점은 가리고 결점만 드러내기 좋아하는 사람을 점검토록 하시오.
무릇 사물은 비슷하면서도 그렇지 않은 것이 매우 많소. 유유(幽莠:강아지풀)의 어린 것은 벼와 유사하고
여우(驪牛: 황색과 흑색이 뒤섞인 얼룩소)는 호랑이를 닮았소. 백골은 상아와 유사하고 옥돌은 구슬과 닮았소.
이는 모두가 비슷하게 닮았지만 진짜가 아니라오."라고 하였다.]
《文侯與虞人期獵》
文侯與虞人期獵. 是日,飲酒樂,天雨. 文侯將出,左右曰:「今日飲酒樂,天又雨,公將焉之?」
文侯曰:「吾與虞人期獵,雖樂,豈可不一會期哉!」乃往,身自罷之. 魏於是乎始強.
魏文侯與田子方飲酒而稱樂. 文侯曰:「鍾聲不比乎,左高.」田子方笑. 文侯曰:「奚笑?」
子方曰:「臣聞之,君明則樂官不明則樂音. 今君申於聲,臣恐君之聾於官也.」
文侯曰:「善,敬聞命.」
[위문후가 우인(虞人: 산택을 관장하는 관원)들과 사냥할 기일을 잡았다. 당일 위문후가 마침 주연을 즐기고 있는데
갑자기 비가 오기 시작했다. 위문후가 약속을 지키기 위해 그 빗속을 뚫고 가려고 하자, 측근들이 만류하며 묻기를 :
“오늘은 주연을 즐기고 있는 데다가 비까지 오는데 공께서는 그래도 나가시려는 하는 것입니까?”라고 하자.
위문후가 대답하기를 : “ 나는 우인과 사냥 약속을 했소. 이제 약속한 시각이 되었소. 아무리 주연이 즐거운들
어찌 약속을 조금이라도 어길 수 있 있겠소.”라고 하며, 이내 우인을 찾아감으로써 스스로를 피곤하게 만들었다.
그러나 위나라는 이로써 비로소 강성해지기 시작했다. 위문후가 전자방(田子方: 子貢의 제자로 위문후의 스승)과
주연을 즐기면서 풍악을 울리게 했다. 이때 위문후가 전자방에게 말하기를 : “종소리가 화음을 이루지 못하고 있소.
왼쪽 종소리가 너무 높소.”라고 하였다. 이에 전자방이 웃자, 위문후가 묻기를 : “어째서 웃는 것이오?” 라고 하자.
전자방이 대답하기를 : “제가 듣건대 ‘군주가 총명하면 정사를 좋아하고, 총명치 못하면 음악을 좋아한다’고 했습니다.
지금 군주께서는 음률에 밝으시니 나는 군주가 국사에 아는 게 없는 것이나 아닌지 우려하고 있습니다.”라고 하였다.
위문후가 말하기를 : “옳은 말이오. 삼가 가르침을 따르도록 하겠소.”라고 하였다.]
魏武侯與諸大夫浮於西河,稱曰:「河山之險,豈不亦信固哉!」
王鍾侍王,曰:「此晉國之所以強也. 若善修之,則霸王之業具矣.」
吳起對曰:「吾君之言,危國之道也;而子又附之,是危也.」武侯忿然曰:「子之言有說乎?」
[위무후가 여러 대부들과 함께 서하(西河: 섬서성과 산서성을 흐르는 황하)에서 선유(船遊)하면서 말하기를 :
“산천의 지세가 이처럼 험하고 단단하니 어찌 견고하다고 하지 않을 수 있겠소?”라고 하였다.
그러자 대부 왕착(王錯)이 시좌(侍坐)하고 있다가 말하기를 : “이것이 바로 진국(晉國: 위나라는 晉의 古都를 차지한
까닭에 스스로를 ‘진국’으로 자칭했음)이 강할 수 있는 연고입니다. 만일 이 천험(天險)을 잘 활용하면
가히 패왕의 대업을 이룰 수 있을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이에 오기(吳起)가 반대하며 말하기를 : “지금 주군의 말씀은 나라를 위태롭게 하는 길입니다.
왕착의 말은 부화뇌동(附和雷同)하는 말로 매우 위험합니다.”라고 하였다.
그러자 위무후가 노기를 띤 어조로 묻기를 : “그대는 그 이유를 설명할 수 있겠소.”라고 하자.]
吳起對曰:「河山之險,信不足保也;是伯王之業,不從此也. 昔者,三苗之居,左彭蠡之波,
右有洞庭之水,文山在其南,而衡山在其北. 恃此險也,為政不善,而禹放逐之. 夫夏桀之國,
左天門之陰, 而右天溪之陽,廬、睪在其北,伊、洛出其南. 有此險也,然為政不善,而湯伐之.
殷紂之國,左孟門而右漳、釜,前帶河,後被山. 有此險也,然為政不善,而武王伐之.
且君親從臣而勝降城,城非不高也,人民非不眾也,然而可得并者,政惡故也. 從是觀之,
地形險阻,奚足以霸王矣!」 武侯曰:「善. 吾乃今日聞聖人之言也!西河之政,專委之子矣.」
[이에 오기가 대답하기를 : “산천이 험하고 견고하다는 것만으로는 나라를 지키기에 부족합니다.
패왕의 대업은 험하고 견고한 것에 따른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옛날 삼묘(三苗)는 좌측으로 팽려호(파양호),
우측으로 동정호(洞庭湖), 남쪽으로 문산(汶山), 북쪽으로 형산(衡山)이 병풍처럼 둘러 있는 천험의 땅에 살았습니다.
그러나 이들은 이같은 험하고 견고함 만을 믿고 정사를 제대로 돌보지 않아 결국 우임금에게 추방당하고 말았습니다.
하걸(夏桀)의 나라는 좌측으로 천문산(天門山: 산서성 진성현 天井關), 우측으로 천계(天谿: 안읍의 서남쪽),
북쪽으로 여고산(廬睾山), 남쪽으로 이수(二水: 하남성 내의 伊水와 洛水)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같이 험고한 지형을 갖고도 정사를 제대로 돌보지 않아 결국 은나라의 탕왕에게 정복당하고 말았습니다.
은주(殷紂)의 나라는 좌측으로 맹문(孟門: 태행산의 좁은 통로), 우측으로 장,부(漳,滏: 장수와 부수), 전방으로 황하,
후방으로 태행산이 있었으나 이같은 지형을 갖고도 정사를 제대로 돌보지 않아 주무왕에게 정복당하고 말았습니다.
그런데 군주는 친히 저와 함께 적들과 싸워 승리를 거두고 적성(敵城)을 공략했습니다. 적성이 높지 않은 것도 아니고,
적의 백성들이 많지 않은 것도 아니었습니다. 그런데도 군주가 이를 취할 수 있었던 것은 적국의 정사가 나빴기
때문입니다. 이로써 보면 지형의 험조(險阻) 따위가 패왕의 대업을 이루는데 무슨 도움이 되겠습니까?”라고 하였다.
그러자 위무후가 칭찬하며 말하기를 : “그 말이 참으로 옳소. 오늘에야 나는 성인의 말을 듣게 되었소.
앞으로 서하의 정사는 오로지 그대에게 맡기도록 하겠소.”라고 하였다.]
《魏公叔痤為魏將》
魏公叔痤為魏將,而與韓、趙戰澮北,禽樂祚. 魏王說,迎郊,以上不田百萬祿之.
共叔痤反走,再拜辭曰:「夫使士卒不崩,直而不倚,撓揀而不辟者,此吳起餘教也,臣不能為也.
前脈形地之險阻,決利害之備,使三軍之士不迷惑者,巴寧、爨襄之力也. 縣賞罰於前,
使民昭然信之於後者, 王之明法也. 見敵之可也鼓之, 不敢待倦者,臣也. 王特為臣之右手不倦賞臣,
何也?臣何力之有乎?」 王曰:「善.」於是索吳起之後,賜之田二十萬. 巴寧、爨襄田各十萬.
王曰:「公叔豈非長者哉!既為寡人勝強敵矣, 又不遺賢者之後, 不掩能士之跡, 公叔何可無益乎?」
故又與田四十萬,加之百萬之上,使百四十萬.
故《老子》曰:「聖人無積,盡以為人,己愈有;既以與人,己愈多.」公叔當之矣.
[위나라의 재상 공숙좌(公叔痤 )가 군대를 이끌고 가서 한, 조 두 나라와 회수(澮水)의 북쪽에서 교전하면서
조나라 장수 악조(樂祚)를 생포했다. 위혜왕이 크게 기뻐하며 친히 교영(郊迎)을 나와 공숙좌에게 1백만 전(田)을
상으로 내렸다. 그러자 공숙좌가 재배하고 사양하며 말하기를 : “무릇 병사들로 하여금 흐트러지지 않고,
굳세기 그지없어 무릎꿇지 않고, 모든 어려움을 극복하는 자세로 싸움에 임하게 한 것은 오기의 가르침 덕분으로
신이 능히 할 수 있는 일이 아닙니다. 사전에 복잡하고 험조한 지형을 살펴 숙지하고, 은밀히 득실이해를 따져
치밀하게 대비하고, 3군의 병사들로 하여금 미혹되지 않게 만든 것은 모범이 될 만큼 뛰어난 병사인 파녕(巴寧)과
흔양(爨襄)의 공입니다. 상벌제도를 앞에서 정립하여 백성들로 하여금 뒤에서 성실히 이를 믿고 따르게 만든 것은
대왕의 명법(明法) 덕분입니다. 적을 보고 가히 공격할 만할 때 진공의 북을 울리면서 감히 이를 게을리 하지 않은
것은 신이 한 것입니다. 대왕께서는 오직 저의 두 손이 쉬지 않은 것을 평가해 상을 내리는 것은 가합니다.
그러나 만일 신이 공을 세웠다고 한다면 이는 잘못입니다. 신이 무슨 공을 세웠겠습니까?”라고 하자.
위혜왕이 말하기를 : “옳은 말이오.”라고 하며, 곧 오기의 후손을 찾아 20만 전을 상으로 내리고,
파녕과 흔양에게는 각각 10만 전을 내렸다.
이때 위혜왕이 말하기를 : “공숙좌야말로 어찌 훌륭하다 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그가 어찌 과인을 위해 강적을
격파한 것이 아니겠는가. 또한 현자(賢者: 오기)의 후손을 잊지 않고, 능력있는 용사들의 공적을 가리지 않았으니
공숙좌에게 상를 더 보태지 않을 수 있겠는가?”라고 하고는, 또 그에게 40만 전을 더해주어 모두 1백40만 전을
상으로 내렸다. 그래서 「노자」에 이르기를, ‘성인은 스스로를 위해 쌓아두지 않고 전심전력으로 다른 사람을
위해 일한다. 그가 얻는 것이 많으면 많을수록 사람들에게 베푸는 것이 많아지니 결국 스스로 더욱 부유하게
되는 것이다’라고 한 것이다. 공숙좌가 바로 그같은 사람이라 할 수 있다.]
《魏公叔痤病》
魏公叔痤病,惠王往問之. 曰:「共叔病,即不可諱,將奈社稷何?」
公叔痤對曰:「痤有御庶子公孫鞅,愿王以國事聽之也. 為弗能聽,勿使出竟.」
王弗應,出而謂左右曰:「豈不悲哉!以公叔之賢,而謂寡人必以國事聽鞅,不亦悖乎!」
公孫痤死,公孫鞅聞之,已葬,西之秦,孝公受而用之. 秦果日以強,魏日以削.
此非公叔之悖也,惠王之悖也. 悖者之患,固以不悖者為悖.
[주현왕 8년(기원전 361), 위나라 상국 공숙좌(公叔痤)가 병이 나 자리에 눕자, 위혜왕이 문병을 가서 묻기를 :
“공숙이 병이 났으니 만일 그대가 죽음을 맞이한다면 장차 사직을 어찌해야 좋겠소?”라고 하자.
공숙좌가 대답하기를 : “저에게 어서자(가신보다 약간 귀한 신분) 공손앙(상앙)이 있습니다. 원컨대 대왕께서는
그에게 국사를 묻기 바랍니다. 만일 그가 응하지 않으면 결코 그를 국경 밖으로 내보내서는 안됩니다.”라고 하였다.
이에 위혜왕이 응답을 하지 않은 채 밖으로 나와 측근에게 말하기를 : “어찌 슬픈 일이 아닌가. 공숙과 같은 현인이
과인에게 장차 국사를 공손앙에게 물으라고 하니 어찌 이리 어리석을 수 있단 말인가!”라고 하였다.
공숙좌가 죽자, 공손앙은 이 말을 전해 들은 즉시 서쪽으로 달아나 이내 진나라로 망명했다.
진효공은 그를 맞아들여 곧바로 임용했다. 이후 진나라는 날로 강해지고 위나라는 날로 영토가 줄어들게 되었다.
이는 공숙좌가 어리석은 것이 아니라 위혜왕이 어리석었기 때문이다. 어리석은 자의 가장 큰 우환은 실로
어리석지 않은 자를 어리석은 자로 여기는데 있다.]
蘇子為趙合從,說魏王曰:「大王之地,南有鴻溝、陳、汝南,有許、鄢、昆陽、兆陵,舞陽、
新郪;東有淮、潁、沂、黃、燭棗、海楊、無杧;稀有長城之界;北有河外、卷、衍、燕、酸棗,
地方千里. 地名雖小,然而廬田廡舍,曾無所芻牧牛馬之地. 人民之眾,車馬之多,
日夜行不休已,無以異於三軍之眾. 臣竊料之,大王之國,不下於楚. 然橫人謀王,
外交強虎狼之秦,以侵天下,卒有國患,不被其禍. 夫挾強秦之勢,以內劫其主,罪無過此者.
且魏,天下之強國也;大王,天下之賢主. 今乃有意西面而事秦,稱東藩,筑帝宮,受冠帶,
祠春秋,臣竊為大王愧之. 臣聞越王勾踐以散卒三千,禽夫差於干遂;武王卒三千人,
革車三百乘,斬紂於牧之野. 豈其士卒眾哉? 誠能振基威也.
[주현왕 36년(기원전 333), 소진이 조나라를 위해 합종을 성사시킬 생각으로 위양왕(魏襄王)에게 유세하기를 :
“ 대왕의 영토는 남으로 홍구, 진, 여남, 허(許), 언, 곤양,소릉, 무양, 신처가 있고 ; 동으로 회, 영, 기, 황, 자조,
해염,무소가 있습니다. 또 서쪽으로는 1만 리의 장성을 사이에 두고 진나라와 접경하고 있고,
북쪽으로는 하외, 권, 연, 남연, 산조가 있습니다. 이는 사방 1천 리에 달하는 것입니다. 지명은 비록 작고 도처에
띠와 풀로 만든 집 뿐이고 우마를 방목할 초지가 적지만, 백성들이 많고 거마의 수도 많으며 사람들이 밤낮으로
활동하며 쉬지 않고 있습니다. 이에 그 떠들썩함은 가히 3군의 떠들썩함과 다를 바가 없습니다.
신은 내심 생각건대 대왕의 나라는 그 국력이 결코 초나라보다 못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연횡을 주장하는 자들이
대왕을 속여 호랑지국인 진나라와 결호하게 한 뒤 대왕으로 하여금 외국을 침략하게 하려고 획책하고 있습니다.
이들은 갑자기 국환이 생겨도 자신들은 그 화를 입지 않으려 할 뿐입니다. 이들은 강한 진나라의 위세를 끼고
대내적으로 그 군주를 위협하고 있으니 이보다 더한 죄는 없습니다. 위나라는 천하의 강국이고
대왕은 천하의 현군입니다. 그런데도 지금 서면하여 진나라를 섬기고, 스스로 동번(東藩)을 칭하고,
진제(秦帝)를 위한 이궁을 쌓고, 진나라의 관대(冠帶)를 받고, 진나라의 춘추 제사를 받들려 하고 있습니다.
신은 내심 대왕을 위해 생각건대 매우 수치스런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신은 일찍이 월왕 구천은 패잔병 3천 명으로
오왕 부차를 간수(干隧)에서 사로잡고 주무왕은 병사 3천 명과 병거 3백 승으로 은주를 목야(牧野)에서
멸망시켰다고 들었습니다. 이것이 어찌 단순히 병사들이 많았기 때문에 가능했던 일이겠습니까?
실로 자신들의 위세를 유감없이 떨쳤기 때문입니다.]
今竊聞大王之卒,武力二十餘萬,蒼頭二千萬,奮擊二十萬,廝徒十萬,車六百乘,騎五千匹.
此其過越王勾踐、武王遠矣!今乃竭於辟臣之說,而欲臣事秦. 夫事秦必割地效質,
故兵為用而國已巋矣. 凡群臣之言事秦者,皆奸臣,非忠臣也. 夫為人臣,割其主之地以求外交,
偷取一旦之功而不顧其後,破公家而成私門,外挾強秦之勢以內劫其主義求割地,
愿大王之熟察之也.《周書》曰:『綿綿不絕,縵縵奈何;毫毛不拔,將成斧柯.』
前慮不定,