戰國策(전국책) /戰國策 魏策

戰國策 魏策

덕치/이두진 2021. 6. 26. 22:20

 

                             魏 策    

  【 序文 】

 

위나라는 원래 희성(姬姓)으로 주문왕의 아들 필공(畢公) 고(高)의 후예가 세운 나라이다.

진헌공 16년(기원전 661)에 필만(畢萬)을 위(魏) 땅에 봉하자 이후 줄곧 진(晉)나라의 경대부가 되었다.

위환자(魏桓子)의 손자 위사(魏斯)가 재위한지 44년이 되던 주위열왕 23년(기원전 403)에 주위열왕이

그를 위문후(魏文侯)로 봉후(封侯)했다. 위나라는 위문후와 그의 뒤를 이은 위무후(魏武侯) 때

뛰어난 통치술을 발휘해 그 위세를 떨쳤으나 이후 줄곧 약소국을 면치 못했다.
위나라의 영토는 지금의 섬서성 일부 지역과 하남성 북부, 하북성 일부, 산동성 관현 일대 등 여러 곳으로

넓게 흩어져 있었다. 주요한 지역으로는 산서성 서남부의 하동(河東)과 하남성 북부의 하내(河內),

산서성 동남부의 상당(上黨) 등이었다. 도읍은 원래 안읍(安邑: 산서성 하현)이었으나

위혜왕 6년(기원전 364)에 대량(大梁: 하남성 개봉시)로 천도하면서 국호도 양(梁)으로 바꿨다.

진시황 22년(기원전 225), 양왕 가(假)가 진시황에게 항복해 마침내 멸망하고 말았다. 

 

 

      魏策 一 .

 

知伯索地於魏桓子

知伯索地於魏桓子,魏桓子弗予. 任章曰:「何故弗予?」 桓子曰:「無故索地,故弗予.」

任章曰:「無故索地,鄰國必恐;重欲無厭,天下必懼君予之地, 知伯必驕. 驕而輕敵,

鄰國懼而相親. 以相親之兵,待輕敵之國,知氏之命不長矣!《周書》曰:『將欲敗之, 必姑輔之;

將欲取之,必姑與之.』君不如與之,以驕知伯. 君何釋以天下圖知氏而獨以吾國為知氏質乎?」

君曰:「善.」乃與之萬家之邑一. 知伯大說. 因索蔡、皋梁於趙,趙弗與,因圍晉陽.

韓、魏反於外,趙氏應之於內,知氏遂亡. 韓趙相難. 韓索兵於魏曰:「愿得借師以伐趙.」

魏文侯曰:「寡人與趙兄弟,不敢從.」 趙又索兵以攻韓, 文侯曰:「寡人與韓兄弟, 不敢從. 」

二國不得兵, 怒而反. 已乃知文侯以講於己也, 皆朝魏.

 

[주정정왕 16년(기원전 453), 지백이 위환자에게 땅을 떼어 줄 것을 요구하자 위환자가 이를 거절했다.

그러자 위환자의 가신 임장(任章)이 묻기를 : “어찌 땅을 떼어 주지 않는 것입니까?”라고 하자.
위환자가 대답하기를 : “아무 이유없이 땅을 떼어 달라고 요구해 주지 않은 것이오.”라고 하였다.
임장이 묻기를 : “이유없이 땅을 떼어 달라고 요구하면 이웃 나라들은 필시 두려워할 것입니다.

탐욕이 그칠 줄 모르면 천하가 모두 두려워할 것입니다. 군이 땅을 떼어주면 그는 틀림없이 교만해질 것입니다.

교만하면 적을 가볍게 보고 이웃 나라는 두려운 나머지 마지 못해 친교를 맺을 것입니다. 이웃의 군사로 가벼이

여기는 나라를 대하게 되면 지씨의 명운은 길 수 없습니다. 「주서」에 이르기를, ‘장차 적을 깨뜨리고자 하면

반드시 잠시 적을 도와주고, 장차 그것을 취하고자 하면 반드시 잠시 그것에게 주라’고 했습니다.

그러니 군은 지백에게 땅을 떼어 주어 그를 교만하게 만드느니만 못합니다. 군은 어찌하여 천하로써 지씨를

도모하는 일을 포기하고 유독 우리나라만 지씨의 공격을 받게 만들려는 것입니까?”라고 하자.
위환자가 대답하기를 : “그 말이 옳소.”라고 하며, 이에 1만 호의 성읍 하나를 바치자 지백이 크게 기뻐했다.

지백은 이어 조나라에 인(藺)과 고량(皐梁) 땅을 요구했다. 조나라가 이에 응하지 않자 곧 진양을 포위했다.

한강자와 위환자가 밖에서 반기를 들고 조양자가 안에서 내응하자 지씨는 드디어 망하고 말았다.]

 

 

韓趙相難

韓趙相難. 韓索兵於魏曰:「愿得借師以伐趙.」魏文侯曰:「寡人與趙兄弟,不敢從.」

趙又索兵以攻韓, 文侯曰:「寡人與韓兄弟, 不敢從. 」

二國不得兵, 怒而反. 已乃知文侯以講於己也, 皆朝魏.

 

[한나라와 조나라는 서로 맹비난을 하고 있었다. 한나라는 위나라에게 군대를 파병해 줄 것을 요구하며 말하기를 :

" 원컨대 그대의 군대를 빌려 조나라를 징벌하고자 합니다."라고 하자.

위문후가 말하기를 : " 과인의 위나라와 조나라는 형제지국이므로 감히 그 요구를 따를 수 없소."라고 하였다. 

조나라는 또 한나라를 공격할 터이니 군대 병력을 빌려 달라고 요구하였다.

위문후가 대답하기를 : " 과인의 위나라와 한나라는 형제지국이므로 감히 그 요구를 따를 수 없소."라고 하였다. 

한나라와 조나라는 위나라로 부터 군대 협조를 얻지 못하자, 분노하며 철군해 버렸다. 얼마후 두 나라는 위문후가

자기들을 위하여 중간에서 화해시키기 위한 것임을 알고 그 고마움을 표하기 위해 모두 위문후에게 조견하였다.]

 

 

樂羊為魏將而攻中山

樂羊為魏將而攻中山.  其子在中山,中山之君烹其子而遺之羹,樂羊坐於幕下而啜之,盡一杯.
文侯謂睹師贊曰:「樂羊以我之國外,食其子之肉.」 贊對曰:「其子之肉尚食之,其誰不食!」

樂羊既罷中山,文侯賞其功而疑其心.  


[주위열왕 18년(기원전 408), 위문후의 장수 악양(樂羊)이 군사를 이끌고 가 중산국을 공격했다.

당시 악양의 아들이 중산국에서 벼슬을 하고 있었다. 중산국의 군주가 악양의 아들을 팽살(烹殺)하여 만든 국물을

악양에게 보냈다. 그러자 악양은 막하(幕下)에 앉아 마시면서 한 그릇을 모두 비워버렸다.

이 말을 들은 위문후가 도사찬(직책명)에게 말하기를 :“악양은 나를 위해 그 자식의 고기까지 먹었소.”라고 하자.
도사찬이 악양을 비난하며 말하기를 : “자식의 고기까지 먹을 정도라면 무엇인들 먹지 못하겠습니까!”라고 하였다.
악양이 중산국을 멸한 뒤 돌아오자 위문후는 약양의 공을 칭송하면서도 그의 심중을 의심했다.

 

 

西門豹為鄴令

 

西門豹為鄴令,而辭乎魏文侯.

文侯曰:「子往矣,必就子之功,而成子之名.」 西門豹曰:「敢問就功成名,亦有術乎?」
文侯曰:「有之. 夫鄉邑老者而先受坐之士,子入而問其賢良之士而師事之,

求其好掩人之美而揚人之醜者,而參驗之, 夫物多相類而非也, 幽莠之幼也似禾, 驪牛之黃也似虎,

白骨疑象, 武夫類玉, 此皆似之而非者也.」

 

[서문표(西門豹)가 업(鄴: 하북성 임장현) 땅의 장관에 임명된 후 위문후에게 하직인사를 하자,

위문후가 당부하기를 : “가서 반드시 큰 공을 세워 이름을 떨치도록 하시오.”라고 하였다.
그러자 서문표는 : “감히 묻건대 공을 세우고 이름을 떨칠 수 있는 비술이 있습니까?”라고 하자.
이에 위문후가 대답하기를 : “있소. 먼저 향읍(鄕邑)의 장로를 찾아가 그들에게 소송 등에 관해 자문토록 하시오.

나라 안에 선비가 들어오면 현량(賢良)을 예를 갖추어서 찾아 보고 그들을 스승으로 삼고 섬기도록 하시오.

사람을 구하면서 남의 장점은 가리고 결점만 드러내기 좋아하는 사람을 점검토록 하시오.

무릇 사물은 비슷하면서도 그렇지 않은 것이 매우 많소. 유유(幽莠:강아지풀)의 어린 것은 벼와 유사하고

여우(驪牛: 황색과 흑색이 뒤섞인 얼룩소)는 호랑이를 닮았소. 백골은 상아와 유사하고 옥돌은 구슬과 닮았소.

이는 모두가 비슷하게 닮았지만 진짜가 아니라오."라고 하였다.] 

 

 

文侯與虞人期獵

文侯與虞人期獵. 是日,飲酒樂,天雨. 文侯將出,左右曰:「今日飲酒樂,天又雨,公將焉之?」

文侯曰:「吾與虞人期獵,雖樂,豈可不一會期哉!」乃往,身自罷之.  魏於是乎始強.

魏文侯與田子方飲酒而稱樂.  文侯曰:「鍾聲不比乎,左高.」田子方笑.  文侯曰:「奚笑?」

子方曰:「臣聞之,君明則樂官不明則樂音. 今君申於聲,臣恐君之聾於官也.」

文侯曰:「善,敬聞命.」

 

[위문후가 우인(虞人: 산택을 관장하는 관원)들과 사냥할 기일을 잡았다. 당일 위문후가 마침 주연을 즐기고 있는데

갑자기 비가 오기 시작했다. 위문후가 약속을 지키기 위해 그 빗속을 뚫고 가려고 하자, 측근들이 만류하며 묻기를 :
“오늘은 주연을 즐기고 있는 데다가 비까지 오는데 공께서는 그래도 나가시려는 하는 것입니까?”라고 하자.
위문후가 대답하기를 : “ 나는 우인과 사냥 약속을 했소. 이제 약속한 시각이 되었소. 아무리 주연이 즐거운들

어찌 약속을 조금이라도 어길 수 있 있겠소.”라고 하며, 이내 우인을 찾아감으로써 스스로를 피곤하게 만들었다.

그러나 위나라는 이로써 비로소 강성해지기 시작했다. 위문후가 전자방(田子方: 子貢의 제자로 위문후의 스승)과

주연을 즐기면서 풍악을 울리게 했다. 이때 위문후가 전자방에게 말하기를 : “종소리가 화음을 이루지 못하고 있소.

왼쪽 종소리가 너무 높소.”라고 하였다. 이에 전자방이 웃자, 위문후가 묻기를 : “어째서 웃는 것이오?” 라고 하자.

전자방이 대답하기를 : “제가 듣건대 ‘군주가 총명하면 정사를 좋아하고, 총명치 못하면 음악을 좋아한다’고 했습니다.

지금 군주께서는 음률에 밝으시니 나는 군주가 국사에 아는 게 없는 것이나 아닌지 우려하고 있습니다.”라고 하였다.
위문후가 말하기를 : “옳은 말이오. 삼가 가르침을 따르도록 하겠소.”라고 하였다.]

 

 

魏武侯與諸大夫浮於西河

 

魏武侯與諸大夫浮於西河,稱曰:「河山之險,豈不亦信固哉!」

王鍾侍王,曰:「此晉國之所以強也. 若善修之,則霸王之業具矣.」
吳起對曰:「吾君之言,危國之道也;而子又附之,是危也.」武侯忿然曰:「子之言有說乎?」

 

[위무후가 여러 대부들과 함께 서하(西河: 섬서성과 산서성을 흐르는 황하)에서 선유(船遊)하면서 말하기를 :
“산천의 지세가 이처럼 험하고 단단하니 어찌 견고하다고 하지 않을 수 있겠소?”라고 하였다.
그러자 대부 왕착(王錯)이 시좌(侍坐)하고 있다가 말하기를 : “이것이 바로 진국(晉國: 위나라는 晉의 古都를 차지한

까닭에 스스로를 ‘진국’으로 자칭했음)이 강할 수 있는 연고입니다. 만일 이 천험(天險)을 잘 활용하면

가히 패왕의 대업을 이룰 수 있을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이에 오기(吳起)가 반대하며 말하기를 : “지금 주군의 말씀은 나라를 위태롭게 하는 길입니다.

왕착의 말은 부화뇌동(附和雷同)하는 말로 매우 위험합니다.”라고 하였다.
그러자 위무후가 노기를 띤 어조로 묻기를 : “그대는 그 이유를 설명할 수 있겠소.”라고 하자.]

吳起對曰:「河山之險,信不足保也;是伯王之業,不從此也. 昔者,三苗之居,左彭蠡之波,

右有洞庭之水,文山在其南,而衡山在其北. 恃此險也,為政不善,而禹放逐之. 夫夏桀之國,

左天門之陰, 而右天溪之陽,廬、睪在其北,伊、洛出其南. 有此險也,然為政不善,而湯伐之.

殷紂之國,左孟門而右漳、釜,前帶河,後被山. 有此險也,然為政不善,而武王伐之.

且君親從臣而勝降城,城非不高也,人民非不眾也,然而可得并者,政惡故也. 從是觀之,

地形險阻,奚足以霸王矣!」 武侯曰:「善. 吾乃今日聞聖人之言也!西河之政,專委之子矣.」

 

[이에 오기가 대답하기를 : “산천이 험하고 견고하다는 것만으로는 나라를 지키기에 부족합니다.

패왕의 대업은 험하고 견고한 것에 따른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옛날 삼묘(三苗)는 좌측으로 팽려호(파양호),

우측으로 동정호(洞庭湖), 남쪽으로 문산(汶山), 북쪽으로 형산(衡山)이 병풍처럼 둘러 있는 천험의 땅에 살았습니다.

그러나 이들은 이같은 험하고 견고함 만을 믿고 정사를 제대로 돌보지 않아 결국 우임금에게 추방당하고 말았습니다.

하걸(夏桀)의 나라는 좌측으로 천문산(天門山: 산서성 진성현 天井關), 우측으로 천계(天谿: 안읍의 서남쪽),

북쪽으로 여고산(廬睾山), 남쪽으로 이수(二水: 하남성 내의 伊水와 洛水)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같이 험고한 지형을 갖고도 정사를 제대로 돌보지 않아 결국 은나라의 탕왕에게 정복당하고 말았습니다.

은주(殷紂)의 나라는 좌측으로 맹문(孟門: 태행산의 좁은 통로), 우측으로 장,부(漳,滏: 장수와 부수), 전방으로 황하,

후방으로 태행산이 있었으나 이같은 지형을 갖고도 정사를 제대로 돌보지 않아 주무왕에게 정복당하고 말았습니다.

그런데 군주는 친히 저와 함께 적들과 싸워 승리를 거두고 적성(敵城)을 공략했습니다. 적성이 높지 않은 것도 아니고,

적의 백성들이 많지 않은 것도 아니었습니다. 그런데도 군주가 이를 취할 수 있었던 것은 적국의 정사가 나빴기

때문입니다. 이로써 보면 지형의 험조(險阻) 따위가 패왕의 대업을 이루는데 무슨 도움이 되겠습니까?”라고 하였다.
그러자 위무후가 칭찬하며 말하기를 : “그 말이 참으로 옳소. 오늘에야 나는 성인의 말을 듣게 되었소.

앞으로 서하의 정사는 오로지 그대에게 맡기도록 하겠소.”라고 하였다.]

 

 

魏公叔痤為魏將

魏公叔痤為魏將,而與韓、趙戰澮北,禽樂祚. 魏王說,迎郊,以上不田百萬祿之.
共叔痤反走,再拜辭曰:「夫使士卒不崩,直而不倚,撓揀而不辟者,此吳起餘教也,臣不能為也.

前脈形地之險阻,決利害之備,使三軍之士不迷惑者,巴寧、爨襄之力也. 縣賞罰於前,

使民昭然信之於後者, 王之明法也. 見敵之可也鼓之, 不敢待倦者,臣也. 王特為臣之右手不倦賞臣,

何也?臣何力之有乎?」 王曰:「善.」於是索吳起之後,賜之田二十萬. 巴寧、爨襄田各十萬.

王曰:「公叔豈非長者哉!既為寡人勝強敵矣, 又不遺賢者之後, 不掩能士之跡, 公叔何可無益乎?」

故又與田四十萬,加之百萬之上,使百四十萬.
故《老子》曰:「聖人無積,盡以為人,己愈有;既以與人,己愈多.」公叔當之矣.

 

 

[위나라의 재상 공숙좌(公叔 )가 군대를 이끌고 가서 한, 조 두 나라와 회수(澮水)의 북쪽에서 교전하면서

조나라 장수 악조(樂祚)를 생포했다. 위혜왕이 크게 기뻐하며 친히 교영(郊迎)을 나와 공숙좌에게 1백만 전(田)을

상으로 내렸다. 그러자 공숙좌가 재배하고 사양하며 말하기를 : “무릇 병사들로 하여금 흐트러지지 않고,

굳세기 그지없어 무릎꿇지 않고, 모든 어려움을 극복하는 자세로 싸움에 임하게 한 것은 오기의 가르침 덕분으로

신이 능히 할 수 있는 일이 아닙니다. 사전에 복잡하고 험조한 지형을 살펴 숙지하고, 은밀히 득실이해를 따져

치밀하게 대비하고, 3군의 병사들로 하여금 미혹되지 않게 만든 것은 모범이 될 만큼 뛰어난 병사인 파녕(巴寧)과

흔양(襄)의 공입니다. 상벌제도를 앞에서 정립하여 백성들로 하여금 뒤에서 성실히 이를 믿고 따르게 만든 것은

대왕의 명법(明法) 덕분입니다. 적을 보고 가히 공격할 만할 때 진공의 북을 울리면서 감히 이를 게을리 하지 않은

것은 신이 한 것입니다. 대왕께서는 오직 저의 두 손이 쉬지 않은 것을 평가해 상을 내리는 것은 가합니다.

러나 만일 신이 공을 세웠다고 한다면 이는 잘못입니다. 신이 무슨 공을 세웠겠습니까?”라고 하자.
위혜왕이 말하기를 : “옳은 말이오.”라고 하며, 곧 오기의 후손을 찾아 20만 전을 상으로 내리고,

파녕과 흔양에게는 각각 10만 전을 내렸다.

이때 위혜왕이 말하기를 : “공숙좌야말로 어찌 훌륭하다 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그가 어찌 과인을 위해 강적을

격파한 것이 아니겠는가. 또한 현자(賢者: 오기)의 후손을 잊지 않고, 능력있는 용사들의 공적을 가리지 않았으니

공숙좌에게 상를 더 보태지 않을 수 있겠는가?”라고 하고는,  또 그에게 40만 전을 더해주어 모두 1백40만 전을

상으로 내렸다. 그래서 「노자」에 이르기를, ‘성인은 스스로를 위해 쌓아두지 않고 전심전력으로 다른 사람을

위해 일한다. 그가 얻는 것이 많으면 많을수록 사람들에게 베푸는 것이 많아지니 결국 스스로 더욱 부유하게

되는 것이다’라고 한 것이다. 공숙좌가 바로 그같은 사람이라 할 수 있다.]

 

 

魏公叔痤病

 

魏公叔痤病,惠王往問之. 曰:「共叔病,即不可諱,將奈社稷何?」

公叔痤對曰:「痤有御庶子公孫鞅,愿王以國事聽之也. 為弗能聽,勿使出竟.」
王弗應,出而謂左右曰:「豈不悲哉!以公叔之賢,而謂寡人必以國事聽鞅,不亦悖乎!」
公孫痤死,公孫鞅聞之,已葬,西之秦,孝公受而用之. 秦果日以強,魏日以削.

此非公叔之悖也,惠王之悖也. 悖者之患,固以不悖者為悖.

 

[주현왕 8년(기원전 361), 위나라 상국 공숙좌(公叔痤)가 병이 나 자리에 눕자, 위혜왕이 문병을 가서 묻기를 : 

“공숙이 병이 났으니 만일 그대가 죽음을 맞이한다면 장차 사직을 어찌해야 좋겠소?”라고 하자.
공숙좌가 대답하기를 : “저에게 어서자(가신보다 약간 귀한 신분) 공손앙(상앙)이 있습니다. 원컨대 대왕께서는

그에게 국사를 묻기 바랍니다. 만일 그가 응하지 않으면 결코 그를 국경 밖으로 내보내서는 안됩니다.”라고 하였다.
이에 위혜왕이 응답을 하지 않은 채 밖으로 나와 측근에게 말하기를 : “어찌 슬픈 일이 아닌가. 공숙과 같은 현인이

과인에게 장차 국사를 공손앙에게 물으라고 하니 어찌 이리 어리석을 수 있단 말인가!”라고 하였다.
공숙좌가 죽자, 공손앙은 이 말을 전해 들은 즉시 서쪽으로 달아나 이내 진나라로 망명했다.

진효공은 그를 맞아들여 곧바로 임용했다. 이후 진나라는 날로 강해지고 위나라는 날로 영토가 줄어들게 되었다.

이는 공숙좌가 어리석은 것이 아니라 위혜왕이 어리석었기 때문이다. 어리석은 자의 가장 큰 우환은 실로

어리석지 않은 자를 어리석은 자로 여기는데 있다.]

 

 

蘇子為趙合從說魏王

 

蘇子為趙合從,說魏王曰:「大王之地,南有鴻溝、陳、汝南,有許、鄢、昆陽、兆陵,舞陽、

新郪;東有淮、潁、沂、黃、燭棗、海楊、無杧;稀有長城之界;北有河外、卷、衍、燕、酸棗,

地方千里.  地名雖小,然而廬田廡舍,曾無所芻牧牛馬之地. 人民之眾,車馬之多,

日夜行不休已,無以異於三軍之眾.  臣竊料之,大王之國,不下於楚. 然橫人謀王,

外交強虎狼之秦,以侵天下,卒有國患,不被其禍.  夫挾強秦之勢,以內劫其主,罪無過此者.

且魏,天下之強國也;大王,天下之賢主.  今乃有意西面而事秦,稱東藩,筑帝宮,受冠帶,

祠春秋,臣竊為大王愧之.  臣聞越王勾踐以散卒三千,禽夫差於干遂;武王卒三千人,

革車三百乘,斬紂於牧之野.  豈其士卒眾哉? 誠能振基威也.

 

[주현왕 36년(기원전 333), 소진이 조나라를 위해 합종을 성사시킬 생각으로 위양왕(魏襄王)에게 유세하기를 :

“ 대왕의 영토는 남으로 홍구, 진, 여남, 허(許), 언, 곤양,소릉, 무양, 신처가 있고 ; 동으로 회, 영, 기, 황, 자조,

해염,무소가 있습니다. 또 서쪽으로는 1만 리의 장성을 사이에 두고 진나라와 접경하고 있고,

북쪽으로는 하외, 권, 연, 남연, 산조가 있습니다. 이는 사방 1천 리에 달하는 것입니다. 지명은 비록 작고 도처에

띠와 풀로 만든 집 뿐이고 우마를 방목할 초지가 적지만, 백성들이 많고 거마의 수도 많으며 사람들이 밤낮으로

활동하며 쉬지 않고 있습니다. 이에 그 떠들썩함은 가히 3군의 떠들썩함과 다를 바가 없습니다.

신은 내심 생각건대 대왕의 나라는 그 국력이 결코 초나라보다 못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연횡을 주장하는 자들이

대왕을 속여 호랑지국인 진나라와 결호하게 한 뒤 대왕으로 하여금 외국을 침략하게 하려고 획책하고 있습니다.

이들은 갑자기 국환이 생겨도 자신들은 그 화를 입지 않으려 할 뿐입니다. 이들은 강한 진나라의 위세를 끼고

대내적으로 그 군주를 위협하고 있으니 이보다 더한 죄는 없습니다. 위나라는 천하의 강국이고

대왕은 천하의 현군입니다. 그런데도 지금 서면하여 진나라를 섬기고, 스스로 동번(東藩)을 칭하고,

진제(秦帝)를 위한 이궁을 쌓고, 진나라의 관대(冠帶)를 받고, 진나라의 춘추 제사를 받들려 하고 있습니다.

신은 내심 대왕을 위해 생각건대 매우 수치스런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신은 일찍이 월왕 구천은 패잔병 3천 명으로

오왕 부차를 간수(干隧)에서 사로잡고 주무왕은 병사 3천 명과 병거 3백 승으로 은주를 목야(牧野)에서

멸망시켰다고 들었습니다. 이것이 어찌 단순히 병사들이 많았기 때문에 가능했던 일이겠습니까?

실로 자신들의 위세를 유감없이 떨쳤기 때문입니다.]

今竊聞大王之卒,武力二十餘萬,蒼頭二千萬,奮擊二十萬,廝徒十萬,車六百乘,騎五千匹.
此其過越王勾踐、武王遠矣!今乃竭於辟臣之說,而欲臣事秦. 夫事秦必割地效質,

故兵為用而國已巋矣.  凡群臣之言事秦者,皆奸臣,非忠臣也. 夫為人臣,割其主之地以求外交,

偷取一旦之功而不顧其後,破公家而成私門,外挾強秦之勢以內劫其主義求割地,

愿大王之熟察之也.《周書》曰:『綿綿不絕,縵縵奈何;毫毛不拔,將成斧柯.』

前慮不定,後有大患,將奈之何? 大王誠能聽臣. 六國從親,專新并力,則必無強秦之患.
故敝邑趙王使使臣獻愚計,奉明約,在大王詔之.」

魏王曰:「寡人不肖,未嘗得聞明教. 今主君以趙王之詔詔之,敬以國從.」

 

[지금 신이 듣건대 대왕의 군사로는 정예병이 20여만 명, 창두(머리에 푸른 띠를 두른 잡병)가 20만 명,

결사대가 20만 명, 잡역부가 10만 명, 병거 6백 승, 군마 6천 필을 거느리고 있다고 했습니다.

이는 구천이나 주무왕의 병력보다 뛰어난 것입니다. 그런데도 지금 대왕께서는 군신들의 협박에 제어되어

진나라를 섬기려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진나라를 섬기면 반드시 땅을 떼어주면서 지도와 인장을 내놓아야 합니다.

이에 공격을 받기도 전에 나라는 큰 손상을 입게 됩니다. 군신들 중 진나라를 섬겨야 한다고 주장하는 자들은

모두 간신들로 결코 충신이 아닙니다. 무릇 간신배는 외교를 위해서는 주군의 토지 할양을 사양하지 않고,

일시적인 성공을 탐하고, 후일을 생각지 않고, 국가 영토를 잃으면서 사문(私門)의 이익을 꾀하는 자들입니다.

밖으로 강한 진나라의 위세를 끼고 안으로 그 군주를 겁박해 할지를 구하는 자들인 것입니다.

원컨대 대왕께서는 이를 깊이 살펴 보시기 바랍니다. 「서경」주서(周書)에 이르기를, ‘미약할 때 제거하지 않으면

커진 뒤 어찌할 것인가. 어릴 때 뿌리 뽑지 않으면 큰 뒤에는 도끼를 사용해야 한다’고 했습니다.

미리 득실성패를 살펴 결정하지 않으면 훗날 대환(大患)을 낳기 마련입니다. 그리 되면 이를 어찌 감당할 것입니까?

만일 대왕께서 신의 말을 좇아 6국의 합종을 성사시켜 전심전력으로 합세하면 진나라로 인한 재난을 면할 수 있을

것입니다. 폐읍의 조왕은 신을 사자로 보내면서 우계(愚計)를 바친 후 맹약을 준수토록 명했습니다.

합종의 성사 여부는 오직 대왕의 명에 달려 있습니다.”라고 하였다.
그러자 위양왕이 대답하기를 : “과인은 비록 불초하나 아직 이같은 명교(明敎)를 들은 적이 없었소.

지금 그대는 조왕의 명을 나에게 전해주었소. 과인은 삼가 나라를 들어 합종에 가담하도록 하겠소.”라고 하였다.]

 

 

張儀為秦連橫說魏王

張儀為秦了橫,說魏王曰:「魏地方不至千里,卒不過三十萬. 地四平,諸侯四通,條達輔湊,

無有名山大川之阻. 從鄭至梁,不過百里;從陳至梁,二百餘里. 馬馳人趨,不待倦而至梁.

南與楚境,西與韓境,北與趙境,東與恰境,卒戍四方,守亭障者參列. 粟糧漕庾,不下十萬.

魏之地勢,國外戰場也. 魏南與楚而不與齊,則齊攻其東;東與齊而不與趙,則趙攻其北;

不合於韓,則韓攻其西;不親於楚,則楚攻其南. 此所謂四分五裂之道也.  且夫諸侯之為從者,

以安社稷、尊主、強兵、顯名也. 合從者,一天下、約為兄弟、刑白馬以盟於洹水之上以相堅也.
夫親昆弟,同父母,尚郵政的錢財. 而欲恃詐偽反覆蘇秦之餘謀,其不可以成亦明矣.

 

[주신정왕 4년(기원전 317), 장의가 진나라를 위해 연횡을 성사시킬 생각으로 위양왕에게 이같이 유세했다.
“위나라의 영토는 사방 1천 리에 불과하고 군사 또한 30만 명에 지나지 않습니다. 지형 또한 사방이 평탄하여 

제후들이 사방에서 내습하기 쉽고, 길이 사방으로 뚫려 있어 명산대천의 험조(險阻)는 찾을 길이 없습니다.

한나라 도읍 정(鄭: 하남성 신정현)에서 위나라 도읍 대량(大梁)까지는 겨우 1백 리에 불과하고,

초나라 도읍 진(陳)에서 대량까지도 겨우 2백여 리에 불과합니다. 말을 몰거나 뛰어와도 조금도 피로하지 않고

달할 수 있는 거리에 있습니다. 위나라는 또 남쪽으로 초나라, 서쪽으로 한나라, 북쪽으로 조나라,

동쪽으로 제나라와 접하고 있습니다. 이에 사방의 정(亭: 흙을 쌓아 올린 곳에 세운 변경의 망루),

장(障: 규모가 비교적 큰 성루)를 지키려면 많은 병력이 필요할 것입니다. 군량을 수송하는 사람만 따져도

10만 명을 밑돌지는 않을 것입니다. 이처럼 위나라의 지세는 실로 전장(戰場) 그 자체입니다.

지금 위나라는 남쪽의 초나라를 끌어들인 후 제나라와 결맹치 않으면 제나라는 동쪽을 칠 것입니다.

또한 동쪽의 제나라를 끌어들인 후 조나라와 결맹치 않으면 조나라는 북쪽을 칠 것입니다.

한나라와 연합하지 않으면 한나라는 서쪽을 칠 것입니다. 초나라와 결친하지 않으면 초나라는 남쪽을

칠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위나라가 소위 사분오열(四分五裂)로 나아가는 길입니다.

무릇 천하의 제후들이 합종하는 것은 장차 사직을 안정시키고, 군주를 높이고, 병력을 강화하고,

국위를 빛내는데 그 목적이 있습니다. 지금 합종을 주장하는 자들은 천하의 제후들을 하나로 묶어 서로

형제지국이 될 것을 약속하고, 백마를 희생으로 삼아 원수(洹水) 가에서 삽혈하며 서로 굳건히 결맹했습니다.

그러나 무릇 가까운 친형제일지라도 금전문제를 놓고 다투는 법입니다.

지금 거짓과 반복을 일삼는 소진(蘇秦)의 얕은 계책에 의지하려 하니 합종이 성사되지 않을 것은 분명합니다.


大王不事秦,秦下兵攻河外,拔卷、衍、燕、酸棗,劫衛取晉陽,則趙不南;趙不南,則魏不北;

魏不北,則從道絕;從道絕,則大王之國欲求無危不可得也. 秦挾韓而攻魏,韓劫於秦,不敢不聽.

秦、韓為一國,魏之亡可立須也,此臣之所以為大王患也.  為大王計,莫如事秦,事秦則楚、

韓必不敢動;無楚、韓之患,則大王高枕而臥,國必無憂矣.  且夫秦之所欲弱莫如楚,

而能弱楚者莫如魏.  楚雖有富大之名,其實空虛;其卒雖眾,多言而輕走,易北,不敢堅戰.

魏之兵南面而伐,勝楚必矣.

 

[만일 대왕께서 진나라를 섬기지 않으면 진나라는 군사를 일으켜 하외를 공격하고, 권, 연, 남연, 산조를 공략하고,

위(衛)나라를 위협해 양진(陽晉)을 취할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조나라가 남하하여 위나라를 구할 길이 없게 됩니다.

조나라가 위나라를 구하지 못하면 위나라도 북쪽 조나라를 구할 이유가 없게 되니 이로써 합종의 길은 끊어지게

될 것입니다. 그러면 위나라는 평안하고자 해도 평안할 길이 없게 됩니다. 진나라가 한나라를 끼고 위나라를

공격하려고 할 경우 한나라는 진나라에 겁박되어 말을 듣지 않을 수 없습니다. 진나라가 한나라를 합병하면

위나라의 멸망은 곧바로 현실로 드러날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신이 대왕을 위해 염려하는 것입니다.

대왕을 위한 계책으로는 진나라를 섬기는 것보다 나은 방안은 없습니다. 위나라가 진나라를 섬기면 초, 한 두 나라도

틀림없이 감히 움직이지 못할 것입니다. 초, 한 두 나라의 공격 위협이 사라지면 대왕께서는 베개를 높이 하여 편히

쉴 수 있고, 위나라 또한 큰 우환을 덜게 됩니다. 게다가 진나라가 가장 신경을 써 약화시키려는 나라는 초나라입니다.

그런데 초나라를 약화시킬 수 있는 나라로는 위나라만한 나라가 없습니다.

초나라는 비록 겉으로는 부강한 나라라고는 하나 실상은 공허(空虛)합니다. 군사도 비록 수적으로는 많다고 하나

사실은 말(言)만 많고 쉽게 쉽게 도망가고 쉽게 패하는 군대에 불과합니다. 결코 사력을 다해 싸우는 군대가

아닌 것입니다. 위나라의 전군이 남면하여 싸우면 틀림없이 초나라를 이길 수 있습니다.

 

夫巋楚而益魏,攻楚而適秦,內嫁禍安國,此善事也. 大王不聽臣,秦甲出而東,

雖於事秦而不可得也. 且夫從人多奮辭而寡可信,說一諸侯之王,出而乘其車;約一國而反,

成而封侯之基. 是故天下之游士,莫不日夜搤腕瞋目切齒以言從之便,以說人主. 人主覽其辭,

牽其說,惡得無眩哉? 臣聞積羽沉舟,群輕折軸,眾口鑠金,故愿大王之熟計之也.」
魏王曰:「寡人蠢愚,前計失之. 請稱東藩,筑帝宮,受冠代,祠春秋,效河外.」

 

[초나라의 영토를 떼어 위나라의 영토를 늘리고, 초나라를 공격해 진나라를 기쁘게 만들면 화를 초나라에 전가해

위나라를 평안하게 할 수 있습니다. 이는 위나라가 취할 수 있는 상책입니다. 대왕께서 신의 말을 좇지 않으면

진나라 병사들이 출병하여 동쪽으로 향할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비록 진나라를 섬기려 해도 이미 때가 늦게 됩니다.
무릇 합종을 주장하는 자들은 호언장담하는 경우가 많으나 믿을 만한 게 거의 없습니다.

이들은 천하의 제후들 중 한 사람만 설득해도 그곳을 빠져나올 때에는 군주의 수레를 탈 수 있고,

한 나라만 합종에 가담시켜 진나라에 대항하게 만들면 곧바로 봉후(封侯)의 기반을 닦을 수 있습니다.

그래서 천하의 유사(세객)들 중 밤낮으로 왼손으로 오른팔을 꽉 잡은 채 눈을 부릅뜨고 이를 악물며 제후들에게

합종의 이득을 유세하지 않는 자가 없는 것입니다. 따라서 제후들은 그들의 호언장담을 제지하고 견제해야 하는데도

불구하고 어찌 현혹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신이 듣건대 ‘깃털이 비록 가벼우나 많이 쌓이면 배도 가라앉힐 수 

있고, 가벼운 물건도 많이 실으면 차축을 꺾을 수 있고, 여러 사람이 입을 모으면 쇠붙이도 녹일 수 있다’고 했습니다.

원컨대 대왕께서는 이를 깊이 살피고 훌륭한 계책을 세우시기 바랍니다.”라고 하였다.
그러자 위양왕이 말하기를 : “과인이 어리석고 민첩하지 못하여 지금까지 합종을 좇는 잘못을 저질렀소.

이후 그대의 말을 좇아 진나라의 동번(東藩)을 칭하고, 진제(秦帝)를 위한 이궁을 쌓고, 진나라의 관대(冠帶)를 받고,

진나라의 춘추 제사를 받들고, 하외(河外)의 땅을 바치도록 하겠소.”라고 하였다.]

 

 

齊魏約而伐楚

 

齊魏約而伐楚,魏以董慶為質於齊. 楚攻齊,大敗之,而魏弗救. 田嬰怒,將殺董慶.
旰夷為董慶謂田嬰曰:「楚攻齊,大敗之,而不敢深入者,以魏為將內之於齊,而疑之其後.

今殺董慶,是示楚無魏也. 魏怒合於楚,齊必危矣. 不如貴董慶以善魏,而疑之於楚也.」

 

[제, 위 두 나라가 연합해 초나라를 공격할 때 위나라가 종실인 동경(董慶)을 인질로 삼아 제나라로 보냈다.

초나라가 제나라를 공격해 대파하는데도 위나라가 이를 구하지 못했다. 이에 제나라의 정곽군(靖郭君) 전영이 

분노하며 동경을 죽이려 했다. 그러자 대신 간이(夷)가 동경을 위해 전영에게 말하기를 :
“초나라가 제나라를 공격하여 대파하고도 감히 깊이 쳐들어오지 못한 것은 위나라가 고의로 초나라의 군대가 

깊이 들어오기를 노렸다가 퇴로를 끊으려는 것이 아닌가 하는 초나라의 두려움 때문이었습니다.

지금 동경을 죽이면 이는 제, 위 두 나라의 관계가 단절되었음을 초나라에게 공개적으로 알려주는 것에 불과합니다.

위나라가 노한 나머지 제나라와 연합하면 제나라는 반드시 위태로워질 것입니다. 동경을 우대하여 위나라와 가깝게

지내고 있음을 공개적으로 드러냄으로써 초나라를 어리둥절하게 만드느니만 못합니다.”라고 하였다.]

 

 

蘇秦拘於魏 

 

蘇秦拘於魏,欲走而之韓,魏氏閉關而不通. 齊使蘇厲為之謂魏王曰:「齊請以宋地封涇陽君,

而秦不必也. 夫秦非不利有齊而得宋地也,然其所以不受者,不信齊王與蘇秦也.

今秦見齊、魏之不合也如此其甚也,則齊必不欺秦,而秦信齊矣.

齊、秦合而涇陽君有宋地,則非魏之利也. 故王不如復東蘇秦,秦必疑齊而不聽也.

夫齊、秦不合,天下無憂,伐齊成,則地廣矣.」

 

[소진이 위나라에서 억류되자 도주하여 한나라로 가려고 하였다. 이에 위나라가 관문을 모두 닫고 길을 막아버렸다.

그러자 제나라가 소려(蘇)를 시켜 위소왕에게 이같이 말하게 하기를 : “제나라는 송(宋) 땅에 경양군(涇陽君)을

봉하려 했으나 진나라가 이를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진나라는 이를 통해 제나라와 결호하고 송 땅까지 얻는 이익을

간과한 것입니다. 진나라가 제나라의 청을 받아들이지 않은 것은 제왕(제민왕)과 소진이 위나라와 친교를 맺을까

의심했기 때문입니다. 지금 제, 위 두 나라가 이처럼 심하게 불화한 모습을 진나라가 알게 되면 제나라는 틀림없이

진나라를 속이지 않을 것이고 진나라는 제나라를 믿을 것입니다. 제, 진이 연합하면 경양군은 송 땅을 차지할 것이니

이는 결코 위나라에 이롭지 못할 것입니다. 그러니 대왕께서는 다시 소진을 석방해 동쪽 제나라로 가게 하십시오.

그러면 진나라는 틀림없이 제, 위 두 나라가 연합할까 의심해 제나라를 믿지 않으려 할 것입니다.

제, 진이 연합하지 않으면 제후들 사이의 관계에는 아무런 변화가 없을 것이고, 제나라 공벌이 이루어지는 날에는

위나라의 영토가 크게 늘어날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陳軫為秦使於齊

 

陳軫為秦使於齊,過魏,求見犀首. 犀首謝陳軫.

陳軫曰:「軫之所以東者,事也. 公不見軫,軫且行,不得待異日矣.」 犀首乃見之.
陳軫曰:「公惡事乎? 何為飲食而無事? 無事必來.」

犀首曰:「衍不肖,不能得事焉,何敢惡事?」
陳軫曰:「請移天下之事於公.」 犀首曰:「奈何?」

陳軫曰:「魏使李從以車百乘使於楚,公可以居其中而疑之.
公謂魏王曰:臣與燕、趙故矣,數令人召臣也,曰無事必來. 今臣無事,請謁而往. 無久,

旬、五之期. 王必無辭以止公. 公得行,明年自言於廷曰:『臣急使燕、趙,急約車為行具.』」

犀首曰:「諾.」謁魏王,王許之,即明言使燕、趙.

 

[진진이 진나라 사자가 되어 제나라로 가면서 위나라를 통과할 때 서수(犀首)를 배견하려 하자 서수가 이를 사절했다.

그러자 진진이 말하기를 : “내가 온 것은 공무 때문입니다. 공이 나를 주지 않으면 나는 가면 그만이나,

훗날 다시 만나지 못할 듯합니다.”라고 하자. 이에 서수는 이 말을 듣고 이내 진진을 만났다.

진진이 묻기를 : “공은 일을 싫어합니까? 어찌하여 밥만 먹고 아무 일도 하지 않는 것입니까?”

일이 없으면 틀림없이 저를 찾아 오셨을 텐데요."라고 하자.
서수가 대답하기를 : “나는 불초하여 일을 할 수 없을 뿐이지 어찌 감히 일을 싫어할 리 있겠소.”라고 하였다.
그러자 진진이 말하기를 : “청컨대 제후국들에 관한 외교를 공에게 넘기고자 합니다.”라고 하였다.
서수가 묻기를 : “내가 어찌 감당할 수 있겠소?”라고 하자.
진진이 말하기를 : “위왕(위혜왕)이 이종(李從)에게 수레 1백 승을 이끌고 초나라에 사자로 가게 했습니다.

공은 제후들 사이에 머물며 그들로 하여금 위나라에 대해 의혹을 갖도록 만들 수 있습니다.

공은 위왕에게 ‘신이 연, 조 두 나라와 오랜 친교가 있는데 두 나라가 여러 차례 사람을 보내 아무 일도 없으면

반드시 와 달라며 신을 불렀습니다. 지금 신에게 특별한 일이 없어 한번 갔다올까 합니다. 시간은 오래 걸리지

않을 것입니다. 15일이면 충분할 듯합니다’라고 말하십시오. 그러면 위왕은 틀림없이 아무런 핑계도 대지 못하고

그대를 보낼 것입니다. 공이 떠나게 되면 조정의 많은 사람들 앞에서 말하기를, ‘내가 급히 연, 조 두 나라에 사자로

가게 되었으니 속히 거마 등 사행(使行)에 필요한 준비를 갖추도록 하오’라고 하십시오.”라고 하였다.  

서수가 대답하기를 : “좋은 생각이오.”라고 하며, 위왕에게 그대로 말하자 위왕이 곧바로 허락했다.

이에 서수는 공개적으로 조, 연 두 나라에 사자로 가게 되었음을 널리 알렸다.]

諸侯客聞之,皆使人告其王曰:「李從以成百乘使楚,犀首又以車三十乘使燕、趙.」

齊王聞之,恐後天下得魏,以事屬犀首,犀首受齊事. 魏王窒其行使. 燕、趙聞之,亦以事屬犀首.

楚王聞之,曰李從約寡人,今燕、齊、趙皆以事因犀首,犀首必欲寡人,寡人欲之. 乃倍李從,

而以事因犀首. 魏王曰:「所以不使犀首者,以為不可. 令四國屬以事,寡人亦以事因焉.」

犀首遂主天下之事,復相魏.  

 

[각 국에서 활약하는 세객들이 이 얘기를 듣고는 모두 사람을 시켜 각 제후국의 군왕에게 고하기를 : 

" 이종이 수레 1백 승을 이끌고 초나라에 사자로 간 데 이어 서수가 수레 30 승을 이끌고 연, 조 두 나라에 사자로

가게 되었습니다."라고 하였다.  제왕이 이 얘기를 듣고 다른 나라보다 뒤늦게 위나라와 수교할 것을 두려워한 나머지

모든 국사를 서수에게 맡겼다. 이에 서수가 제나라 국사를 다루게 되었다. 이러한 사실을 알고 위왕은  서수의 출행을

막고 위나라에 머물게 하였다. 연, 조 두 나라도 이 소식을 듣자, 곧 서수에게 그들의 국사를 위촉하였다.

이때 초왕이 이 얘기를 듣고는 말하기를 : “이종은 과인과 맹약을 맺었는데 지금 연, 제, 조 3국이 모두 서수에게

그들의 국사를 맡겼다. 그러니 서수는 틀림없이 과인 역시 자신에게 위탁하기를 바랄 것이다.

과인 또한 그리 할 것이다.”라고 하며, 이내 이종을 물리치고 서수에게 국사를 맡겼다. 그러자 위왕이 말하기를 :
“ 서수를 사자로 보내지 않으려 했던 것은 그가 제대로 임무를 수행치 못할 것으로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지금 4국이 모두 그에게 그들의 국사를 맡겼으니 과인 역시 그에게 맡기지 않을 수 없다.”라고 하였다.
이에 서수는 드디어 5국의 합종에 관한 국사를 주관하게 된 것은 물론 위나라 재상의 자리를 다시 차지하게 되었다.

 

 

張儀惡陳軫於魏王

 

張儀惡陳軫於魏王曰:「軫善事楚,為求壤地也,甚出之.」 

左華謂陳軫曰:「儀善於魏王,魏王甚愛之. 公雖百說之,猶不聽也.

公不如儀之言為資而反於楚王.」 陳軫曰:「善.」因使人先言於楚王.

[장의가 위왕(위혜왕) 앞에서 진진을 비방하며 말하기를 : “진진은 초나라를 성심으로 섬기면서 땅을 할양받기 위해

전력을 기울이고 있습니다.”라고 하자, 대신 좌화(左華: 초책의 左爽)가 진진에게 충고하기를 : “장의는 위왕에게 

 보인 까닭에 위왕이 그를 크게 총애하고 있소. 그러니 공이 비록 온갖 수단을 동원해 설득할지라도 

위왕은 이를  듣지 않을 것이오. 공은 장의의 험담을 핑계 삼아 초나라로 돌아가느니만 못하오.”라고 하였다. 

진진이 대꾸하기를 : “그 말이 옳소.”라고 하며. 이에 곧 사람을 초회왕에게 보내 미리 장의의 말을 전하게 했다.]

 

 

 張儀欲窮陳軫

 

張儀欲窮陳軫,令魏召而相之,來將悟之.  將行,其子陳應止其公之行,

曰:「物之湛者,不可不察也.」 鄭強出秦曰,應為知. 魏欲絕楚、齊,必重迎公.

郢中不善公者,欲公之去也,必勸王多公之車. 公至宋,道稱疾而毋行,

使人謂齊王曰:「魏之所以迎我者,欲以絕齊;楚也.」
齊王曰:「子果無之魏而見寡人也,請封子.」因以魯侯之車迎之.  

[주난왕 6년(기원전 309), 장의가 진진을 궁지에 몰아넣을 생각을 품고 위왕으로 하여금 그를 불러 재상에

임명하게 한 뒤 가두려고 하였다. 진진이 위왕의 부름을 받고 가려고 하자 그의 아들 진응(陳應)이 이를 만류하며

말하기를 : “매사에 그 이면을 세심히 관찰하지 않으면 안됩니다.”라고 하였다.
이때 정강(鄭强)이 진나라를 빠져 나와 초나라에 있다가 제나라를 위해 진진을 제나라로 보낼 생각으로

진응에게 전언(傳言)을 당부하며 진진을 위한 다음과 같은 계책을 제시했다.
“무릇 위나라는 초, 제 두 나라와 단교하고자 하고 있기에 필시 공을 크게 환대할 것이오.

영도(都)에서 공을 못마땅하게 생각하는 자들은 공이 떠나기를 바라기 때문에 필시 공에게 많은 수레를 건네도록

초왕에게 권할 것이오. 공은 송(宋)나라에 이르렀을 때 칭병하고 떠나지 않은 채 사람을 시켜 제왕에게 이르기를,

‘위나라가 저를 맞이하려 하는 것은 제, 초 두 나라와 단교하기 위한 것입니다’라고 하시오.”라고 하자. 

제위왕이 응답하기를 : “진진이 과연 위나라로 가지 않고 과인을 찾아 오면 장차 그를 중용할 것이오.”라고 하였다.
그리고는 노후(魯侯)가 사용하던 수레를 보내 진진을 영접하게 하였다.] 

 

 

張儀走之魏

 

張儀走之魏,魏將迎之.  張醜諫於王,欲勿內,不得於王.  張醜退,復諫於王曰:

「王亦聞老妾事其主婦者乎?子長色衰,重家而已.  今臣之事王,若老妾之事其主婦者.」魏因不納張儀.

 

[장의가 위나라로 도주하자, 위나라가 그를 영접하고자 했다. 이에 일찍이 제나라 대신으로 있던 장추(張丑)가 

위왕에게 그를 받아들이지 말 것을 간했으나 위왕이 이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러자 장추가 물러났다가 다시 위왕에게 재차 간하기를 :“대왕께서 노첩(老妾)이 주부(남편)를 섬긴 얘기를 

들었습니까? 자식이 나이를 먹으면 미색은 쇠하기 마련이니 오직 집안을 위하는 길밖에 없습니다. 

지금 신이 대왕을 섬기는 것은 마치 노첩이 주부를 섬기는 것과 같습니다.”라고 하였으나,

위왕은 이 말을 듣고도 장의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張儀欲以魏合於秦韓

 

張儀欲以魏合於秦、韓而攻齊、楚. 惠施欲以魏合於齊、楚以案兵. 人多為張子於王所.
惠子謂王葉:「小事也,謂可者謂不可者正半,況大事乎?以魏合於秦、韓而攻齊、楚,大事也,

而王之群臣皆以為可. 不知是其可也,如是其明耶? 而群臣之知術也,如是其同耶? 是其可也,

未若是其明也,而群臣之知術也,又非皆同也,是有其半塞也. 所謂劫主者,失其半者也.」

 

[주현왕 47년(기원전 322), 장의가 위나라를 진, 한 두 나라에 연합시켜 제, 초 두 나라를 공격하려고 하였다.

그러나 혜시는 위나라를 제, 초 두 나라와 합종시켜 군사 동원을 저지하고자 했다.

대신들은 모두 위양왕 앞에서 장의를 편들었다. 그러자 혜시가 위양왕에게 말하기를 : “ 이처럼 작은 일조차

찬성과 반대가 갈리는데, 하물며 국가대사야 더 이상 말할 나위가 있겠습니까? 위나라를 진, 한 두 나라와 연횡시켜

제, 초 두 나라를 공격하는 계책은 국가대사에 해당합니다. 그런데 대왕의 신하들은 한결같이 이 계책에 찬동하는

견해만 있습니다. 그러나 저는 과연 이 계책이 명명백백히 가능한 것인지, 나아가 군신들의 지모가 왜 이처럼

하나로 일치된 것인지 도무지 알 길이 없습니다. 이는 그 계책이 명명백백히 가능한 것이 아닐 수도 있고,

군신들의 지모가 궁극적으로는 완전히 상반될 수도 있다는 것을 뜻하는 것입니다. 지금과 같이 절반의 견해가

전혀 용납될 여지가 없게 되면 이는 한쪽 견해만이 받아들여집니다. 이는 소위 군주의 대권을 위협받고 있는 것으로

그 반을 잃었기 생기는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張子儀以秦相魏

 

張子儀以秦相魏,齊、楚怒而欲攻魏.  雍沮謂張子曰:「魏之所以相公者,以公相則國家安,

而百姓無患. 今公相而魏受兵,是魏計過也. 齊、楚攻魏,公必危矣.」
張子曰:「然則奈何?」雍沮曰:「請令齊、楚解攻.」

雍沮謂齊、楚之君曰:「王亦聞張儀之約秦王乎? 曰:『王若相儀於魏,齊、楚惡儀,必攻魏.
魏戰而勝,是齊、楚之兵折,而儀固得魏矣;若不勝魏,魏必事秦以持其國,必割地以賂王.

若欲復攻,其敝不足以應秦.』此儀之所以與秦王陰相結也. 今儀相魏而攻之,

是使儀之計當於秦也,非所以窮儀之道也.」 齊、楚之王曰:「善.」乃遽解攻於魏.

 

[장의가 진나라를 배경으로 위나라의 재상이 되자, 제, 초 두 나라가 분노하며 위나라를 공격하고자 했다.

이에 위나라 사람 옹저(雍沮)가 장의에게 말하기를 : “위나라가 공을 재상으로 삼은 것은 공이 재상이 되면

국가가 안정되고 백성들이 평안할 것으로 생각했기 때문이오. 그런데 지금 공이 재상이 되자마자 위나라가

적의 침공을 받게 되었으니 이는 위나라의 계책이 잘못 된 데 따른 것이오. 제, 초 두 나라가 위나라를 공격하게 되면

공은 반드시 위태로워질 것이오.”라고 하였다.  장의가 묻기를 : “그렇다면 어찌 하는 것이 좋겠소?”라고 하자.
옹저가 대답하기를 : “청컨대 제가 제, 초 두 나라로 하여금 공격을 포기하도록 하겠습니다.”라고 하였다.
이어 옹저는 제위왕과 초회왕을 만나 말하기를 : “대왕께서도 장의가 진왕(진혜문왕)과 밀약한 사실을 알고 있습니까?

장의가 말하기를, ‘대왕이 만일 저를 위나라의 재상으로 삼으면 제, 초 두 나라가 저를 싫어하고 있기 때문에 반드시 위나라를 공격할 것입니다. 위나라가 승리하면 초나라 군사에게 손상을 입히고, 저는 위나라를 위해 공을 세운 셈이

됩니다. 만일 이기지 못하면 위나라는 진나라의 명을 들을 수밖에 없고, 나라를 보전하기 위해서라도 반드시

땅을 떼어 줄 것입니다. 만일 진나라가 다시 제나라를 공격하게 되면 제나라는 이미 위나라와의 싸움으로 피폐해진

나머지 진나라에 대항할 수조차 없을 것입니다’라고 했습니다. 이것이 바로 장의가 진왕과 밀약하게 된 이유입니다.

지금 장의가 위나라의 재상이 되었다고 하여 공격하게 되면 이는 장의의 계책이 주효하도록 만들어주는 셈이 됩니다.

이는 장의를 궁지로 몰아넣는 방안이 아닙니다.”라고 하자.  제위왕과 초회왕은 : “옳은 말이오.”라고 하며,

이에 제위왕과 초회왕은 급히 위나라에 대한 공격을 거두고 말았다.]

 

 

張儀欲并相秦魏

 

張儀欲并相秦、魏.  故謂魏王曰:「儀請以秦攻三傳,王以其間約南陽,韓氏亡.」
史厭謂趙獻曰:「公何不以楚佐儀求相之於魏,韓恐亡,必南走楚. 儀兼相秦、魏,

則公亦必并相楚、韓也.」 

[주현왕 47년(기원전 322), 장의가 진, 위 두 나라의 재상을 겸임할 생각으로 위혜왕에게 말하기를 :
“제가 진나라로 하여금 삼천(하남성 의양현)을 치도록 청하면 대왕은 그 틈을 이용해 남양을 제압하도록 하십시오.

그렇게 하면 한나라는 반드시 망하고야 말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그러자 사염(史厭)이 초나라 대부 조헌(趙獻)에게 말하기를 : “공은 어찌하여 초나라로 하여금 위나라에 장의를

재상으로 삼도록 요청하지 않는 것이오. 그리하면 한나라는 망할까 두려운 나머지 반드시 초나라에 귀복할 것이오.

장의가 진, 위 두 나라의 재상을 겸하게 되면 공 역시 반드시 초, 한 두 나라의 재상을 겸하게 될 것이오.”라 하였다.]

 

 

魏王將相張儀

 

魏王將相張儀,犀受弗利,故令人謂韓公叔曰:「張儀以合秦、魏矣. 其言曰:

『魏攻南陽,秦攻三川,韓氏必亡.』且魏所以貴張子者,欲得地.

則韓之南陽舉矣. 子盍少委啞劇,以為衍功,則秦、魏之交可廢矣.

如此,則魏必圖秦而棄儀,收韓而相衍.」 公叔以為信,因而委之,犀首以為功,果相魏.

 

[위혜왕이 장차 장의를 재상으로 삼으려 하자, 서수(犀首)는 자신에게 이익이 되지 않을 것으로 생각했다.

이에 곧 사람을 한나라 재상 한공숙(韓公叔)에게 보내 말을 전하게 하기를 : “장의는 진, 위 두 나라를 연합시켰소.

그는 위왕에게 ‘위나라가 남양을 공격하고, 진나라가 삼천을 공격하면 한나라는 반드시 망하고야 말 것입니다’라고

말했소. 이에 위왕이 그를 존중하면서 땅을 넓히려 하고 있소. 그리 되면 한나라의 남양은 점거되고 말 것이오.

그대는 어찌하여 위나라에 땅을 떼어주어 서수로 하여금 공을 세우게 만들지 않는 것이오.

그러면 진, 위의 친교는 가히 끊어지게 될 것이오. 이같이 하면 위나라는 필시 진나라를 도모하기 위해 장의를 버리고,

한나라와 연합하기 위해 서수를 재상으로 삼을 것이오.”라고 하자.  

한공숙이 이를 좇아 서수가 공을 세울 수 있도록 도와주었다. 이에 과연 서수가 위나라의 재상이 되었다.]

 

 

楚許魏六城

 

楚許魏六城與之伐齊而存燕.  張儀欲敗之,謂魏王曰:「齊畏三國之合也,必反燕地以下楚,

楚、趙必聽之,而不與魏流程他.  是王失謀於楚、趙,而樹怨而而於齊、秦也.

齊遂伐趙,區乘丘,收侵地,虛、頓丘危.  楚破南陽九夷,內沛,許、鄢陵危.

王之所得者,親觀也.  而道途宋、衛為制,事敗為趙驅,事成功縣宋、衛.」魏王弗聽也.  

 

[초나라가 위나라에게 6개 성읍을 떼어주고 함께 제나라를 공격하므로써 연나라를 구원하고자 했다.

이에 장의가 이를 훼방할 생각으로 위왕(위애왕)에게 말하기를 : “제나라는 3국(초, 위, 조)의 연합을 두려워하고

있습니다. 이에 틀림없이 연나라 땅을 돌려준 뒤 초, 조 두 나라에 공손하게 굴며 달래고자 할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초, 조 두 나라도 이를 받아들일 것이 확실하여 초나라는 위나라에 6개 성읍을 떼어주지 않을 것입니다.

이는 초, 조 두 나라와의 연합이 실패로 돌아가고 제, 진 두 나라에게는 원한만 심어 놓는 셈이 됩니다.

제나라가 마침내 조나라를 공격하여 승구(乘丘)를 취하고 점령지를 거둬들일 경우 위나라의 허(虛)와 돈구(頓丘)가

위태롭게 됩니다. 진나라가 초나라를 깨뜨리고 남양(南陽)과 구이(九夷)를 취한 뒤 패(沛: 강소성 패현)로 쳐들어오면

위나라의 허(許)와 언릉(陵)이 위태롭게 됩니다. 그리되면 대왕이 얻는 것은 겨우 신관(新觀)에 불과하고

이 또한 송(宋), 위(衛) 두 나라를 지나야만 닿을 수 있게 됩니다. 만일 제나라 공벌이 실패로 끝나면 조나라에 의해

부림을 당하게 되고, 성공할지라도 송, 위 두 나라에 의해 제한을 당하게 됩니다.”라고 하였다.

그러나 ​위왕이 이를 듣지 않았다.] 

 

 

張儀告公仲 

 

張儀告公仲,令以饑故,賞韓王以近河外.  魏王懼,聞張子.

張子曰:「秦欲救齊,韓欲攻南陽,秦、韓合而欲攻南陽,無異也. 且以遇卜王, 王不遇秦,

韓之亳也決矣.」 魏王遂尚遇秦,信韓、廣魏、救趙,尺楚人,遽於革下.  伐齊之事遂敗.

 

[이에 장의가 한나라 재상 공중붕(公仲朋)에게 이를 고하고 공중붕을 시켜 위왕에게

한나라의 기민(饑民)들이 하외(河外) 부근으로 가 기근을 면할 수 있도록 허락해 달라고 청하게 했다.

위왕이 이를 두려워한 나머지 장의에게 대책을 묻자, 장의가 대답하기를 : “진나라는 제나라를 구하려 하고,

한나라는 남양을 공격하려고 하니 만일 진, 한 두 나라가 연합해 남양을 공격한다 한들 그리 이상한 일도 아닙니다.

게다가 두 나라는 대왕의 회동참여 여부로 대왕의 태도를 추측하고자 할 것이니 만일 대왕께서 회동에 참여하지

않으면 진, 한 두 나라는 대왕의 속셈에 대해 나름대로 결정을 내려 버릴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위왕이 마침내 회동에 참여했다. 이에 진, 한 두 나라는 더욱 신뢰를 쌓으면서, 위나라의 심려를 풀어주고,

제나라의 조나라에 대한 침공을 막아주고, 화하(華下)까지 온 초나라의 사자를 꾸짖어 쫓아냈다.

이로써 제나라 공벌에 관한 계획은 실패로 돌아갔다.]

 

 

徐州之役

 

徐州之役,犀首謂梁王曰:「何不陽與齊而陰結於楚? 二國恃王,齊、楚必戰.

齊戰勝楚,而與乘之,必取方城之外;楚掌聲齊敗,而與乘之,是太子之讎報矣.」


[주현왕 36년(기원전 333), 서주(徐州)의 싸움 당시 서수(공손연)가 위혜왕에게 말하기를 : 

“왜 공개적으로 제나라와 연합한 뒤 은밀히 초나라와 결속하지 않는 것입니까? 

그리하면 제, 초 두 나라 모두 대왕의 지원을 믿고 있어 반드시 싸우게 될 것입니다. 

제나라가 이기면 이에 편승해 방성(方城) 이북의 변경을 취하면 되고,

초나라가 이기면 이에 편승해 태자(太子: 전사한 위혜왕의 아들 申)의 원수를 갚으면 됩니다.”라고 

하였다.

 

 

秦敗東周

 

秦敗東周,與魏戰於伊闕,殺犀武. 魏令公孫衍乘勝而留於境,請卑辭割地,以講於秦. 

為竇屢謂魏王曰:「臣不知衍之所以聽於秦之少多,然而臣能半衍之割,而令秦講於王.」

王曰:「奈何?」 對曰:「王不若與竇屢關內侯,而令趙. 王重其行而厚奉之.

因揚言曰:『聞周、魏令竇屢以哥魏於奉陽君,而聽秦矣.』夫周君、竇屢、奉陽君之與穰侯,

貿首之仇也.  今行和者,竇屢也;制割者,奉陽君也. 太后恐其不因穰侯也,而欲敗之,

必以少割請合於王,而和於東周與魏也.」

 

[진나라가 동주를 깨뜨린 후 위나라와 이궐(伊闕)에서 교전하면서 위나라 장수 서무(犀武)를 죽였다.

​그러자 위나라가 공손연(公孫衍: 서수)을 시켜 싸움에 이기는 틈을 이용하여 군대를 국경에 포진시켜 놓고

땅을 떼어 주는 조건으로 진나라에 강화를 요청하게 하였다. 이에 동주 출신 두루(竇屢)가 위소왕에게 말하기를 :
“신은 공손연이 진나라에 얼마나 많은 땅을 떼어주려는 것인지 자세히 모릅니다.

그러나 신은 공손연이 바치는 땅의 절반만 가지고도 충분히 강화를 맺을 수 있습니다.”라고 하였다.
위소왕이 묻기를 : “어찌하면 그리 할 수 있소?”라고 하자,  두루가 대답하기를 : “대왕께서는 저를 관내후(關內侯)에

봉한 뒤 조왕으로 하여금 저를 성황리에 진나라로 환송하게 하는 것이 최상의 방안입니다. 그리고는 떠들기를,

‘동주와 위(魏) 두 나라가 이미 두루를 시켜 위나라 땅을 떼어 봉양군에게 바치고 진나라에 귀복했다’고 하십시오.

저와 동주군(東周君), 봉양군은 모두 양후(穰侯)와 철천지 원수입니다. 지금 강화를 진행하는 자는 저 두루이고,

땅을 받을 사람은 봉양군입니다. 태후(선태후)는 이 일이 혹여 양후로 인해 성사되지 못할까 염려하여 중간에

끼어들어 이를 무산시키려 할 것입니다. 이에 틀림없이 진왕에게 약간의 땅만 받고 곧 동주 및 위나라와 강화하도록

요구할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주현왕 36년(기원전 333), 서주(徐州)의 싸움 당시 서수(공손연)가 위혜왕에게 말하기를 : “왜 공개적으로 제나라와

연합한 뒤 은밀히 초나라와 결속하지 않는 것입니까? 그리하면 제, 초 두 나라 모두 대왕의 지원을 믿고 있어

반드시 싸우게 될 것입니다. 제나라가 이기면 이에 편승해 방성(方城) 이북의 변경을 취하면 되고,

초나라가 이기면 이에 편승해 태자(太子: 전사한 위혜왕의 아들 申)의 원수를 갚으면 됩니다.”라고 하였다.

 

 

齊王將見燕趙楚之相於衛

 

齊王將見燕、趙、楚之相於衛,約外魏.  魏王懼,恐其謀伐魏也,告公孫衍.

公孫衍曰:「王與臣百金,臣請敗之.」王為約車,載百金. 犀首期齊齊王至之曰,

先以車五十乘而至衛間齊,行以百金,以請锨么齊王,乃得見. 因久坐安,從容談三國之相怨.
謂齊王曰:「王與三國約外圍剛,魏使公孫衍來,今久與之談,是王謀三國也已.」
齊王曰:「魏王聞寡人來, 使公孫子開寡人, 寡人無與之語也.」三國之不相信齊王之遇,遇事遂敗.

 

[제위왕이 장차 연, 조, 초 3국의 재상과 위(衛)나라에서 만나면서 위(魏)나라를 제외시키려 했다.

이에 위혜왕(魏惠王)은 이들 3국이 혹여 위나라 공벌을 공모할까 두려운 나머지 곧 공손연을 불러 이를 상의하자,

공손연이 대답하기를 : “대왕은 신에게 1백 금을 주십시오. 청컨대 신이 그같은 모략을 깨버리도록 하겠습니다.”하자.
이에 위혜왕이 수레를 준비하여 1백 금을 실어 주었다. 그러자 공손연은 제위왕이 위(衛)나라에 도착하는 날짜를

헤아린 뒤 우선 수레 50 승을 이끌고 제나라 행인(외교사절)에게 은밀히 1백 금을 건네며 제위왕을 먼저 만날 수

있게 해달라고 청했다. 그리고는 이내 제위왕을 만나게 되자 오랫동안 대좌한 가운데 조용히 얘기를 나눴다.

그러자 연, 조, 초 3국의 재상들이 모두 불만을 품게 되었다. 이때 어떤 사람이 제위왕에게 말하기를 :
“대왕이 3국과 약속할 때 위나라를 제외시키기로 해 놓고도 지금 위나라가 공손연을 보내자, 오래도록 함께 얘기를

나누고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대왕이 3국과 함께 도모하고자 한 내용입니까?”라고 하자.
제위왕이 대답하기를 : “위왕은 과인이 이곳에 왔다는 얘기를 듣고 공손연을 보내 위문하게 한 것일 뿐이오.

과인은 그와 별다른 얘기를 나누지 않았소.”라고 하였다. 그러나 3국의 재상들은 제위왕이 발의한 4국 회동을

신뢰하지 않았다. 이에 이 회동은 마침내 실패로 끝나고 말았다.]

 

 

魏令公孫衍請和於秦

 

魏令公孫衍請和於秦,綺母恢教之語曰:「無多割. 曰,和成,國有固有秦重和,以與王遇;

和不成,則後必莫能以魏合與秦者矣.」 

 

[주난왕 22년(기원전 293), 위나라가 공손연을 시켜 진나라와 강화하게 했다.

이에 기모회(母恢)가 충고하기를 : “진나라에게 땅을 너무 크게 떼어주지 마시오. 다시 말하건대, 강화가 성사되면

진나라는 위나라의 강화 요구를 존중해 우리 군왕과 회동할 것이오. 그러나 강화가 성사되지 못하면 이후

그 누구일지라도 위나라로 하여금 진나라와 연합하게 할 수 없을 것이오.”라고 하였다.

 

 

公孫衍為魏將

 

公孫衍為魏將,與其相田繻不善.

季子為衍謂梁王曰:「王獨不見夫服牛驂驥乎? 不可以行百步. 今王以衍為可使將,故用之也;

而聽相之計,是服牛驂驥也. 牛馬俱死,而不能成其功,王之國必傷矣!愿王察之.」

 

[공손연이 위나라 장수가 되었으나, 재상 전수(田繻: 田需)와 사이가 좋지 않았다. 이에 위나라 대신 계자(季梁)가

공손연을 위해 위혜왕에게 말하기를 : “대왕께서는 어찌하여 복우참기(服牛驂驥: 쟁기 끄는 소에게 수레를 끌게 하고, 천리마에게 네 필이 끄는 수레에서 바깥쪽 말의 역할을 맡게 함)의 폐단을 보지 못하는 것입니까?

그리해서는 1백 보 조차 나아갈 수 없습니다. 지금 대왕께서는 공손연이 가히 장수의 역할을 맡을 수 있다고 생각해 기용했습니다. 그리고는 그에게 재상의 계책을 따르라고 하니 이는 ‘복우참기’에 해당합니다.

우마가 모두 지쳐 죽게 되면 공을 이룰 수 없으니 대왕의 나라는 필시 크게 손상을 입을 것입니다.

원컨대 대왕께서는 신중히 살펴 보시기 바랍니다. "라고 하였다.]

 

 

 

     魏策 二 .

 

 

犀首田盼欲得齊魏之兵以伐趙

 

犀首、田盼欲得齊、魏之兵以伐趙, 梁君與田侯不欲. 犀首曰:「請國出五萬人, 不過五月而趙破.」

田盼曰:「夫請用其兵者,其國易未;易用其計者,其身易窮. 公今言破趙大易,恐有後咎.」
許昌首曰:「公之不慧也. 夫二君者,國已不欲矣. 今公又言有難以懼懼之,是趙不伐,

而二士之謀困也. 且公直言易,而事已去矣. 夫難構而兵結,田侯、梁君見其危、

又安敢釋卒不我予乎?」 田盼曰:「善.」 遂權兩君聽系數犀首. 犀首、田盼遂得齊、魏之兵.

兵未出境, 梁君、田侯恐其至而戰敗也,悉起兵從之,大敗趙氏.

 

[기원전 332, 서수(犀首)와 전반(田盼: 盼子)이 제, 위 두 나라의 군사를 이끌고 가서 조나라를 공격하고자 했다.

그러나 위혜왕과 제위왕은 이를 원하지 않았다. 이에 서수가 전반에게 말하기를 :
“ 군사 5만 명만 출병시켜 주면 불과 5개월 이내에 조나라를 격파할 수 있을 것이오.”라고 하자.
전반이 말하기를 : “무릇 용병을 가벼이 하는 자는 나라를 쉽게 위기로 몰아넣고, 계책을 쉽게 쓰는 자는 스스로를

궁지로 몰아넣는 법이오. 공은 지금 조나라 공벌을 쉽게 장담하니 이후 재난이 뒤따를까 염려스럽소.”라고 하였다. 

이에 서수가 반박하기를 : “그리 말하는 것은 공이 총명하지 못한 탓이오. 위혜왕과 제위왕이 이미 원하지 않고 있는데

지금 공마저 이를 꺼려하며 두려워하면 조나라를 치지 말자는 것이니 그렇게 되면 서수와 전반의 계책이 매우 궁하게

되오. 계책이 궁하게 된 상황에서 직언을 하여 사태를 바꾸려 할 때는 이미 전쟁이 터진 뒤가 되오. 싸움이 일어나

서로 무기를 부딪치게 되면 전후(田侯: 제위왕)와 양군(梁君: 위혜왕)일지라도 어찌 그같은 위기 상황을 보고 감히

군사들을 옆에 놓아둔 채 지원병을 보내지 않겠소?”라고 하자. 전반이 대답하기를 : “옳은 얘기요.”라고 하였다.
그리고는 두 군주에게 서수의 건의를 받아들이도록 권했다. 이에 서수와 전반은 마침내 제, 위 두 나라 군사를 이끌게

되었다. 군사들이 아직 국경을 넘지 못했을 때 위혜왕과 제위왕은 혹여 조나라로 들어가 패할까 두려워한 나머지

전 군을 이끌고 그 뒤를 따랐다. 이에 조나라 군사를 대파하게 되었다.]

 

 

犀首見梁君

 

犀首見梁君曰:「臣盡力竭知,欲以為王廣土取尊名,田需從中敗君,王又聽之,是臣終無成功也.

需亡,臣將侍;需侍,臣請亡.」 王曰 「 需,寡人之股掌之臣也. 為子之不便也,殺之亡之,

毋謂天下何,內之無若群臣何也!今吾為子外之,令毋敢入子之事. 子之事者,吾為子殺之亡之,

胡如?」 犀首許諾. 使用東見田嬰,與之約結;召文子而相之魏,身相於韓.

 

[기원전 324, 서수(犀首)가 위혜왕을 만나 말하기를 : “신은 대왕을 위해 영토를 넓히고 명성을 드높이고자 합니다.

그런데도 전수(田需)라는 자가 중간에 끼어들어 저를 모함하자 대왕 또한 이를 받아들였습니다.

이 때문에 신은 끝내 성공할 수 없었습니다. 전수가 망명하면 신이 대왕을 섬기겠지만 전수가 대왕을 섬기면

청컨대 신은 망명하고자 합니다.”라고 하였다.   위혜왕이 말하기를 : “전수는 과인이 아끼고 총애하는 신하요. 

그대와 사이가 나쁘다고 하여 그를 죽이거나 내쫓게 되면 밖으로는 천하의 제후들에게 할 말이 없게 되오.

또 안으로는 군신들에게 어찌 말해야 하오. 이제 과인은 그대를 위해 그가 그대의 일에 개입치 못하도록 조치하겠소.

그럼에도 계속 그대의 일에 개입하면 그때 그대를 위해 그를 죽이거나 내쫓도록 하겠소. 어찌 생각하오.”라고 하자.

서수가 동의했다. 이에 서수는 동쪽으로 가 정곽군 전영(田嬰)과 만나 맹약을 맺었다.

이어 문자(文子: 맹상군)를 위나라의 재상으로 삼은 뒤, 자신은 한나라의 재상이 되고자 하였다.]

 

 

蘇代為田需說魏王

 

蘇代為田需說魏王,曰:「臣請問文之為魏,孰與其為齊也?」

王曰:「不如其為齊也.」「衍之為魏,孰與其為韓也?」王曰:「不如其為韓也.」

而蘇代曰:「衍將右韓而左魏,文將右齊而左魏. 二人者,將用王之國,舉事欲世,中道而不可,

王且無所聞之矣. 王之國雖滲樂而從之可也. 王不如舍需於側,以稽二人者之所為.

人者曰:『需非吾人也,吾舉事而不利於魏,需必挫我於王.』 二人者必不敢有外心矣.

二人者之所為之,利於魏與不利於魏,王厝於側以稽之, 臣以為身利而便於事.」

王曰:「善.」果厝需於側.

 

[기원전 324, 소대(蘇代)가 전수(田需)를 위해 위혜왕에게 묻기를 : “신이 여쭙건대 전문은 위나라와 제나라 중

어느 쪽을 도와줄 것으로 봅니까?”라고 하자.  위혜왕이 대답하기를 : “제나라를 돕는 만 못하겠지요.”라고 하였다.
소대가 다시 묻기를 : “공손연(公孫衍)은 위나라와 한나라 중 어느 쪽을 도와줄 것으로 봅니까?”라고 하자.
위혜왕이 대답하기를 : “한나라를 돕는 것에는 미치지 못할 것이오.”라고 하였다 

그러자 소대가 말하기를 : “공손연은 장차 우한좌위(한나라와 가까이 지내고, 위나라와 멀리 지낸다.)하고

전문은 우제좌위(右齊左魏)하려고 합니다. 두 사람이 지금 대왕의 나라를 이용해 일을 꾀하려 하고 있습니다.

이로 인해 중도(中道: 중립)는 성립되지 않고 있으니 대왕도 이에 관해서는 듣지 못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대왕의 나라는 바로 그같은 길로 나아가 쇠약할 수밖에 없는데 능히 이같은 길을 좇을 수 있겠습니까.

대왕께서는 전수(田需)를 곁에 두고 두 사람의 행동을 비교해 보느니만 못합니다.

그러면 두 사람은 말하기를, ‘전수는 내 편이 아니다. 만일 내가 거사하여 위나라에 불리한 일이 생기면 전수는 반드시

나를 군주 앞에서 탄핵할 것이다’라며 딴 마음을 품지 않을 것입니다. 두 사람의 소행이 위나라에 이로운지 여부는

대왕께서 전수를 곁에 두고 살펴보도록 하십시오. 이 계책이 본인에게 유리할 뿐만 아니라 일을 하는 데에도

편할 것입니다.”라고 하자,  위혜왕이 대답하기를 : “그 말이 옳소.”라고 하고는, 과연 전수를 곁에 두었다.]

 

 

史舉非犀首於王

 

史舉非犀首於王.  犀首欲窮之,謂張儀曰:「請令王讓先生以國,王為堯、舜矣;而先生弗受,

亦許由也.  衍請因令王致萬戶邑於先生.」 張儀說,因令史舉數見犀首,王聞之而弗任也, 史舉不辭而去.

 

[기원전 322, 사거(史擧)가 위혜왕 앞에게 서수(犀首)를 헐뜯었다. 그러자 서수가 사거를 궁지에 몰아넣을 생각으로

위나라 재상으로 있는 장의에게 말하기를 : “대왕이 선생에게 나라를 물려주겠다고 말하도록 만드시오.

그리되면 대왕은 요순과 같은 성군이 될 것입니다. 만일 선생이 이를 받아들이지 않으면 선생은 허유(許由)와 같은

은자가 될 것입니다. 그러면 저는 1만 호의 성읍을 선생에게 하사하도록 청하겠습니다.”라고 하였다.
장의가 기뻐하며 곧 사거에게 명하여 자주 서수를 찾게 했다. 위혜왕은 사거가 자신의 면전에서 서수를 헐뜯고는

자주 서수를 찾아가는 것을 보고는 이내 사거를 신임하지 않게 되었다.

국 사거는 하직인사도 하지 못한 채 말없이 떠나버렸다.]

 

楚王攻梁南,韓氏因圍薔.  成恢為犀首謂韓王曰:「疾攻薔,楚師必進矣. 魏不能支,

交臂而聽楚, 韓氏必危,故王不如釋薔. 魏無韓患,必與楚戰,戰而不勝,大梁不能守,

而又況存薔乎? 若戰而勝,兵罷敝,大王之攻薔易矣.

 

[기원전 323, 초회왕이 위나라의 남쪽을 공격하자 한나라가 이를 틈타 위나라의 장(薔) 땅을 포위했다.

이에 성회(成恢)가 서수를 위해 한선혜왕(韓宣惠王)에게 말하기를 : “장 땅을 급공하면 초나라 군사가 틀림없이

진공할 것입니다. 위나라는 버티지 못하고 양손을 가슴 앞에 포개면서 복종을 표시하며 초나라의 명을 좇을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한나라는 필시 위태로워질 것입니다. 그러니 대왕은 장 땅의 포위를 풀어주느니만 못합니다.

위나라가 한나라로 인한 우환을 덜게 되면 반드시 초나라와 싸울 것입니다. 위나라가 싸움에 지면 위나라 도읍

대량(大梁)도 지킬 수 없게 될 것이니 하물며 장 땅이야 더 말할 필요가 있겠습니까? 설령 위나라가 싸움에

이길지라도 군사들이 크게 지쳐 있을 것이니 대왕께서는 손쉽게 장 땅을 공략할 수 있을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魏惠王死

 

魏惠王死,葬有日矣. 天大雨雪,至於牛目,壞城郭,且為棧道而葬.

群臣多諫太子者,曰:「雪甚如此而喪行,民必甚病之. 官費又恐不給,請弛期更日.」
太子曰:「為人子,而以民勞與官費用之故,而不行先生之桑,不義也. 子勿復言.」
群臣皆不敢言,而以告犀首.  犀首曰:「吾未有以言之也,是其唯惠公乎!請告惠公.」

惠公曰:「諾.」 駕而見太子曰:「葬有日矣.」太子曰:「然.」

 

[(기원전 319, 위혜왕이 죽자, 곧이어 장례 일정이 확정되었다. 마침 장사를 치르는 날 눈, 비가 크게 내렸다.

이에 우목(牛目: 지상에서 소의 눈 높이까지로 대략 4척을 의미)까지 눈 비가 내려 성곽이 무너질 지경이 되었다.

할 수 없이 잔도(棧道)를 설치해 장사를 치르려고 하자, 여러 신하들이 태자에게 말하기를 : “눈이 이처럼 심하게

내렸는데 장례를 강행하면 백성들이 필시 크게 괴로워할 것입니다. 장례 비용 또한 크게 늘어나 관비(官費)로

이를 충당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청컨대 장례일을 늦춰 날짜를 새로이 잡도록 하십시오.”하고 하자. 

태자가 말하기를 : “자식이 되어 백성들의 노고와 과다한 비용을 이유로 선왕의 장례를 거행하지 않는 것은

도리가 아니오. 그대는 두 번 다시 말하지 마시오.”라고 하며,  군신들의 간언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이에 군신들은 더 이상 간하지 못하고 곧 그 일을 서수에게 알렸다. 그러자 서수가 말하기를 :
“나도 달리 간할 도리가 없소. 오직 혜시(惠施)만이 가능할 것이니 그에게 한번 말해 보도록 합시다.”라고 하였다.
이에 혜시가 쾌히 승낙한 뒤 수레에 올라 태자를 찾아가 말하기를 : " 오늘이 장례일입니다."라고 하자.
태자가 말하기를 :  “그렇습니다.”라고 하였다.] 

 

惠公曰:「昔王季歷葬於楚山之尾,灓水嚙其墓,見棺之前和.

文王曰:『嘻!先君必欲一見群臣百姓也夫,故使灓水見之.』於是出而為之張於朝,百姓皆見之,

三日而後更葬. 此文王之義也. 今葬有日矣,而雪甚,及牛目,難以行,太子為及日之故,

得毋嫌於欲亟葬乎? 愿太子更日. 先王必欲少留而扶社稷、安黔首也, 故使雪甚. 因弛期而更為日,

此文王之義也. 若此而弗為,意者羞法文王乎?」太子曰:「甚善. 敬弛期,更擇日.」
惠子非徒行其說也, 又令魏太子未葬其先王而因又說文王之義. 說文王之義以示天下, 豈小功也哉!

 

[그러자 혜시가 말하기를 : “옛날 계력(주문왕의 부친)을 초산(楚山: 渦山)의 끝자락에 묻었는데 묘에 물이 넘쳐

결국 관이 노출되고 말았습니다. 이에 주문왕이 탄식하기를, ‘아, 선군은 틀림없이 군신들과 백성들을 꼭 한번

보고 싶어한 나머지 묘 안으로 물이 스며들게 한 것이다’라고 했습니다. 그리고는 관을 꺼내 조정에 갖다 놓고

백성들에게 이를 보여주고는 3일이 지난 뒤 개장했습니다. 이것이 주문왕이 보여준 자식의 도리였습니다. 

비록 장례일을 확정하기는 했으나 지금 폭설로 장례를 거행하기가 어려운데도 태자가 굳이 기일을 지켜야 한다며

이를 강행하면 선왕을 속히 매장하기 위해 무리하게 기일을 고집했다는 의심을 받지 않겠습니까?

원컨대 태자는 날짜를 새로 잡기 바랍니다. 선왕은 잠시라도 더 머물며 사직을 돕고 백성들을 평안하게 하고자

폭설이 내리도록 한 것입니다. 그러니 장례일을 늦춰 날짜를 새로이 잡으면 주문왕이 보여준 자식의 도리를

몸소 실천하는 셈이 됩니다. 이같이 말씀드렸는데도 신의 말을 좇지 않으면 혹자는 태자가 주문왕을 모범으로 

삼는 것을 부끄러워한다고 생각지 않겠습니까.”   “참으로 옳은 말이오. 말씀대로 시일을 늦춰 다른 날짜를 

잡도록 하겠소.” 혜시는 단지 자신의 주장을 관철시켰을 뿐만 아니라 위나라 태자에게 선왕의 장례일을 늦추게

함으로써 주문왕이 행한 자식의 도리를 설득했다. 주문왕이 실천한 도의를 천하에 널리 드러냈으니

이 어찌 작은 지혜라 하겠는가.

 

 

五國伐秦 

 

五國伐秦,無功而還.  其後,齊欲伐宋,而秦禁之.  齊令宋郭之秦,請合而以伐宋.  秦王許之.

魏王畏齊、秦之合也,欲講於秦.  謂魏曰:「秦王謂宋郭曰:『分宋之城,服宋之強者,六國也.

乘宋之敝,而與王爭得者,楚、魏也. 請為王毋禁楚之伐魏也,而王獨舉宋.

王之伐宋也請剛柔而皆用之. 如宋者,欺之不為逆者, 殺之不為讎者也. 王無與之講以取地,

既已得地矣,又以力攻之,期於啖宋而已矣.』臣聞此言,而竊為王悲,秦必且用此於王矣.

又必且曰王以求地,既已得地,又且以力攻王. 又必謂王曰使王輕齊,齊、魏之交已醜,

又且收齊以更索於王. 秦嘗用此於楚矣,又嘗用此於韓矣,愿王之深計之也.

 

[기원전 287, 5국(五國: 조, 위, 한, 초, 제)이 합세해 진나라를 쳤으나 아무 소득도 얻지 못하고 이내 철군했다.

이후 제나라가 송나라를 공격하려고 하자 진나라가 이를 저지했다. 이에 제나라가 송곽(宋郭)을 진나라로 보내

제, 진 두 나라가 연합해 함께 송나라를 공격할 것을 청하자 진소양왕이 이를 승낙했다. 그러자 위소왕은

제, 진 두 나라가연합할 것을 두려워한 나머지 이내 진나라와 강화하고자 했다. 이때 소진이 위소왕에게 말하기를 :
“진왕이 송곽에게 말하기를, ‘송나라의 성읍을 가르고 송나라를 굴복시키는 나라는 제나라요. 송나라가 피폐한

틈을 타 제왕과 이득을 다투는 나라는 초, 위 두 나라요. 제왕을 위해 초나라가 위나라를 치는 것을 그대로 놓아 두어,

두 나라가 송나라를 돌아볼 여가가 없는 틈을 타 제왕이 홀로 송나라를 취하는 것이 좋을 듯하오. 송나라를 공격할 때

강유(剛柔)의 수단을 모두 동원토록 하시오. 송나라 따위를 기만했다고 하여 도리에 어긋나는 것도 아니고,

도륙했다고 하여 원한을 맺는 것도 아니오. 제왕은 강화할 생각을 버리고 곧바로 영토를 점거해야만 하오.

일부 땅을 점거하면 다시 전력을 기울여 송나라를 공격함으로써 완전히 병탄토록 꾀해야 하오’라고 했습니다.

신은 이 말을 듣고 대왕을 위해 우려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진나라는 필시 같은 수법을 대왕에게도 사용할 것입니다.

진나라는 필히 대왕을 겁박하며 할지를 요구할 것입니다. 땅을 얻게 되면 다시 전력을 다해 대왕을 공격할 것입니다.

이어 대왕과 강화한 뒤 이를 구실로 대왕으로 하여금 제나라를 경시하도록 만들 것입니다.

제, 위 두 나라의 국교가 악화되면 또 다시 제나라를 끌어들여 다시 대왕에게 할지를 요구할 것입니다.

진나라는 과거에도 이같은 수법을 초, 한 두 나라에 사용한 바 있습니다. 원컨대 대왕께서는 깊이 헤아리기 바랍니다.

 

秦善魏不可知也已.  故為王計,太上伐秦,其次賓秦,其次堅約而詳講,與國無相離也.

秦、期望二,國不可為也已. 王其聽臣也, 必無與講.  秦權重魏,魏再明熟,是故又為足下傷秦者, 不敢顯也.

天下可令伐秦則陰權而弗敢圖也. 見天下之傷秦也,則先鬻與國而以自解也.

天下可令賓秦, 則為劫於與國而不得已者. 天下不可,則先去而以秦為上交以自重也. 如是入者,

鬻王以為資者也,而焉能免國於患? 免國於患者,必窮三節,而行其上. 上不可,則行其中,

中不可,則行其下;下不可,則明不與秦. 而生以殘秦,使秦皆無百怨百利,唯已之曾安.

令足下鬻之以合於秦,是免國於患者之計也. 臣何足以當之? 雖然,愿足下之論臣之計也.

 

[진나라가 위나라를 가까이 하는 것은 그 저의를 의심치 않을 수 없습니다. 대왕을 위한 계책으로는 진나라를

공격하는 것이 상책이고, 진나라를 배척하는 것이 중책이고, 합종의 맹약을 다진 가운데 표면상 진나라와 강화하면서

동맹국들과 굳게 결속하는 것이 하책(下策)입니다. 진, 제 두 나라가 연합하면 위나라는 어찌 할 도리가 없습니다.

대왕께서는 부디 신의 건의를 받아들이시기 바랍니다. 결코 진나라와 강화해서는 안 됩니다. 신은 진나라의 권세가

막강한 것을 모르는 것이 아닙니다. 또한 위염(魏)은 위나라의 속사정을 훤히 알고 있습니다.

이에 대왕을 위해 진나라에 대항하라는 말을 하고 싶어도 혹여 누설될까 두려워 감히 꺼내지 못하고 있습니다.

지금 연횡을 주장하는 자들은 천하의 제후들로 하여금 가히 진나라를 공격하게 만들 수 있을지라도 은밀히 군사를

동원하는 방법을 구사해야지 감히 공개적인 방법을 택할 수는 없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은밀한 방법으로는 설령

진나라에 손상을 가할 수 있을지라도 이내 동맹국을 팔고 자신은 빠져나오므로 결국 상책을 구사할 수 없게 됩니다.

또한 천하의 제후들로 하여금 진나라를 배척케 할 수 있을지라도 동맹국의 협박을 받아 마지못해 나온 듯한 모습을

가장해야 하므로 결국 중책도 구사할 수 없게 됩니다. 나아가 천하의 제후들이 상책과 중책을 구사할 수 없게 되면

동맹국을 배신한 뒤 진나라와 긴밀한 관계를 맺고 스스로를 보존해야 하므로 결국 하책도 구사할 수 없게 됩니다.

이같은 계책을 권하는 자들은 모두 대왕을 팔아 사리를 꾀하는 자들입니다. 그러니 어찌 나라를 재난에서 벗어나게

할 수 있겠습니까? 나라를 재난에서 벗어나게 하는 방략은 반드시 앞서 말한 상책과 중책, 하책을 세심히 따진 뒤

상책을 구사하는데 있습니다. 상책이 어려우면 중책을 구사하고, 중책도 어려우면 하책을 행해야 합니다.

만일 하책도 어려우면 진나라와는 타협할 수도 없고 살아남기 위해서는 반드시 진나라를 멸망시켜야 한다는 사실을

분명히 천명해야 합니다. 이에 진나라의 일을 방해하면서 진나라로 하여금 어떠한 원한도 품지 않게 하고,

아무런 이익도 주지 않는 가운데 진나라를 멸망시키는 것만이 유일하게 살아남을 수 있는 길임을 분명히 해야 합니다.

지금 대왕이 이같은 계책을 버리고 진나라와 연합하려는 것은 나라를 재난에서 면하게 해 줄 수 있다고 떠드는 자들의

계책입니다. 신이 어찌 이를 감당할 수 있겠습니까? 원컨대 대왕은 부디 신의 계책을 정확히 이해해 주기 바랍니다.

 

燕,齊讎國也;秦, 兄弟之交也. 合讎國以伐婚姻, 臣為之苦矣. 黃帝戰於涿鹿之岳,

而西戎之兵不至;禹攻三苗, 而東夷之民不起. 以燕伐秦, 黃帝之所難也, 而臣以致燕甲而起齊兵矣.

臣又便事三晉之吏,奉陽君、孟嘗君、韓呡、周最、周、韓餘徒從而下之,恐其伐秦之疑也.

又身自醜於秦,扮之請焚天下之秦符者,臣也;次傳焚符之約者,臣也;欲使五國約閉秦關者,臣也.  

奉陽君、韓餘為既和矣,蘇修、朱嬰既皆陰在邯鄲,臣又說齊王而往敗之.

天下共講,因使蘇修游天下之語,而以齊為上交,兵請伐魏,臣又爭之以死. 而果西因蘇修重報.

臣非不知秦權之重也,然而所以為之者,為足下也.」

 

[연, 제 두 나라는 서로 원수지간입니다. 연나라는 진나라와 형제지국의 교분을 맺고 있습니다. 원수지국과 연합해

형제지국을 치는 문제로 신은 적잖이 고심했습니다. 황제(黃帝)가 탁록의 들판에서 치우(蚩尤)와 싸울 때

서융(西戎)의 군사는 황제를 돕지 않았고, 우임금이 삼묘(三苗)를 칠 때 동이(東夷: 동쪽의 이민족)의 백성들은

우임금을 돕지 않았습니다. 지금 만일 황제로 하여금 연나라를 이끌고 진나라를 치게 하면 이는 황제로서도 하기

어려운 일일 것입니다. 그런데도 신은 이미 연나라로 하여금 출병하게 하고, 제나라로 하여금 군사를 동원하게 해

놓았습니다. 신은 또 3진(三晋)의 관원들과 두루 교분을 쌓아 놓았습니다. 봉양군(奉陽君: 이태)과 맹상군(孟嘗君),

한문(韓呡: 한민), 주최(周最), 한여위(韓餘爲: 조책의 한서) 등은 특히 겸공(謙恭)합니다. 다만 신은 이들이

진나라 공벌 계획을 의심하지나 않을까 염려한 나머지 진나라와 저의 관계가 악화되는 것을 피하지 않았습니다.

처음부터 천하의 제후들에게 진나라와의 외교를 단절토록 권유한 사람이 바로 신이었습니다. 제후들을 서로 연결시켜

진나라와 외교를 단절하게 만든 사람도 신이었습니다. 5국으로 하여금 진나라와의 모든 왕래를 끊게 한 사람도

신이었습니다. 봉양군과 한여위는 이미 진나라 공벌에 동의했고, 연횡을 주장하는 3진의 관원 소수(蘇脩)와

주영(朱嬰)는 모두 한단에 숨어버렸습니다. 신이 다시 제왕을 설득해 소수와 주영의 연횡을 깨뜨려 버리겠습니다.

천하의 제후들이 모두 결속해 진나라 공벌의 맹약을 맺으면 진나라는 소수를 시켜 천하를 주유하며 제후들에게

진나라 공벌 계책을 받아들이지 말 것을 유세하게 할 것입니다. 이때 진나라가 제나라와 친교를 맺고 군사를 동원해

위나라를 공격하도록 청하면 신은 목숨을 걸고 제나라를 설득해 이를 저지토록 하겠습니다.

그래서 마침내 제나라가 위나라를 치지 않는다는 사실을 소수로 하여금 진왕에게 다시 보고하도록 만들겠습니다.

신은 진나라의 권세가 막강한 것을 모르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굳이 이렇게 말하는 것은 오직 대왕을 위하기 때문입니다.”라고 하였다.]

 

 

魏文子田需周宵相善

 

魏文子、田需、周宵相善,欲罪犀首.  犀首患之,謂魏王曰:「今所患者,齊也.

嬰子言行於齊王,王欲得齊,則是不召文子而相之? 彼必務以齊事王.」 王曰:「善.」

因召文子而相者. 犀首以倍田需、周宵.  

 

[기원전 324, 위나라 대신 전수와 주소(周宵)는 사이가 매우 좋았다. 이들은 서수에게 죄를 뒤집어 씌우려 했다.

이에 서수가 걱정이 되어 위혜왕에게 말하기를 : “지금 우려되는 것은 제나라입니다. 지금 제위왕은 영자(전영)의

계책을 그대로 좇고 있습니다. 대왕은 제나라를 끌어들이고 싶어 하면서 왜 문자(맹상군 전문)를 불러다가

재상으로 삼지 않는 것입니까? 그리하면 영자는 필시 제나라를 들어 대왕을 섬길 것입니다.”라고 하자.
위혜왕이 말하기를 : “옳은 말이오.”라고 하며,  이내 문자를 불러다가 재상으로 삼았다.

이에 서수는 자신의 조처에 크게 고마워하고 있는 문자를 시켜 전수와 주소를 반대하게 했다.]

 

 

魏王令惠施之楚

 

魏王令惠施之楚,令犀首之齊. 鈞二子者,乘數鈞,將測交也. 楚王聞之,施因令人先之楚,

言曰:「魏令犀受之齊,惠施之楚,鈞二子者,將測交也.」 楚王聞之,因郊迎惠施.

 

[기원전 333, 위혜왕이 혜시를 초나라에 사자로 보낸데 이어 서수를 제나라에 사자로 보냈다.

이때 같은 수의 수레를 이끌게 해 두 사람의 비중을 똑같이 한 뒤 각각 위나라와의 친교 가능성 정도를 탐색하게 했다.

이때 혜시는 초위왕(楚威王)이 이 얘기를 전해 들었다는 소식을 듣고는 곧 사람을 초나라로 보내 말하게 하기를 : 

“위왕이 서수에게 제나라로 가고, 혜시에게 초나라로 가게 했습니다. 두 사람의 비중을 같게 하여 장차 친교 가능성을

탐색하게 했습니다.”라고 하자. 초위왕이 이 얘기를 듣자 친히 교외로 영접을 나가서 혜시를 맞이 하였다.]

 

 

魏惠王起境內眾

 

魏惠王起境內眾,將太子申而攻齊.  客謂公子理之傳曰:「何不令公子泣王太后,止太子之行?

事成則樹德, 不成則為王矣. 太子年少, 不習於兵. 田盼宿將也, 而孫子善用兵, 戰必不過, 不勝必禽.

公子爭之於王,王聽公子,公子不封;不聽公子,太子必敗;敗,公子必立;立必為王也.」

 

[기원전 341, 위혜왕이 군사를 동원한 뒤 태자 신(申)을 시켜 군사를 이끌고 가서 제나라를 공격하게 했다.

그러자 한 세객이 공자 이(理)의 사부에게 말하기를 : “왜 공자로 하여금 왕태후에게 읍소하게 하여 태자의 출정을

멈추게 하지 않는 것입니까? 성사되면 은혜를 베푸는 것이 되고 그렇지 못하면 보위에 오르게 됩니다.

태자는 나이도 어리고 병법에 어둡습니다. 제나라의 전반(田盼)은 백전노장이고, 손자(孫子)는 용병에 뛰어납니다.

싸우게 되면 필시 패할 수밖에 없는데 그리되면 틀림없이 사로잡히고 말 것입니다. 그러니 공자로 하여금 즉시

태자의 출정을 만류토록 하십시오. 만일 대왕이 받아들이면 공자는 상을 받게 될 것이고, 받아들이지 않으면

태자는 틀림없이 패할 것입니다. 그가 패하면 공자가 태자가 되어 장차 보위에 오를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齊魏戰於馬陵

 

齊、魏戰於馬陵,齊大勝魏,殺太子申,覆十萬之軍.  魏王召惠施而告之曰:

「夫齊,寡人之讎也,怨之至死不忘. 國雖小,吾常欲悉騎兵而攻之,何如?」
對曰:「不可. 臣聞之,王者得度,而霸者知計. 今王所以告臣者,疏於度而遠於計.

王固先屬怨於趙,而後與齊戰. 今戰不勝,國無守戰之備王又欲血起而攻齊,此非臣之所謂也.

王若欲報齊乎,則不如因變服折節而朝齊,楚王必怒矣. 王游人而合其鬭,則楚必伐齊.

以休楚而伐罷齊,則必為楚禽矣. 是王以楚毀齊也.」魏王曰:「善.」乃使人報於齊,愿臣畜而朝.

 

[기원전 341, 제, 위 두 나라가 마릉(馬陵)에서 교전했다. 이 싸움에서 제나라는 위나라 태자 신(申)을 죽이고

제나라 군사 10만 명을 대파하는 대승을 거뒀다. 이에 위혜왕이 혜시(惠施)를 불러 이 사실을 알리면서 묻기를 : 
“제나라는 과인의 원수요. 이 원한은 죽을 때까지 잊지 않을 것이오. 나라가 비록 작기는 하나 과인은 전 군을 동원해

공격하고자 하는데 이를 어찌 생각하오?”라고 하자.  혜시가 대답하기를 : “불가합니다. 신이 듣건대 ‘왕자는 법도를

우는데 능해야 하고, 패자(覇者)는 계책을 세우는데 능해야 한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지금 대왕이 신에게 말한 것은

법도에도 안 맞고 계책과도 거리가 멉니다. 대왕은 조나라를 원망하면서도 제나라와 싸운 것이 틀림없습니다.

지금 싸움에 패해 나라에는 수비 대책도 제대로 서 있지 않은데 대왕은 다시 전 군을 동원해 제나라를 공격하고자

하니 이는 법도 및 계책과 거리가 먼 것입니다. 만일 대왕께서 제나라에 보복하고자 하신다면 군왕의 옷을 벗고

절의를 꺾고 제나라에 입조하는 것이 상책입니다. 그러면 초왕은 필시 대노할 것입니다. 이때 대왕께서는 사자를 보내

두 나라를 교전하게 만들면 초나라는 틀림없이 제나라를 칠 것입니다. 이는 휴식을 취한 초나라 군사로 피로에 지친

제나라 군사를 공격하는 것입니다. 그리되면 제왕은 필시 초나라의 포로가 될 것입니다.

이는 초나라를 이용해 제나라를 깨뜨리는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위왕이 말하기를 : “과연 그 말이 옳소.” 라고 하며, 

곧 사람을 제나라로 보내 신하로서 조공하겠노라고 전하게 하였다.]

 

田嬰許諾. 張醜曰:「不可. 戰不勝魏,而得朝禮,與魏和而下楚,此可以大勝也.

今戰勝魏,覆十萬之軍, 而禽太子申;臣萬乘之魏,而卑秦、楚,此其暴於戾定矣.

且楚王之為人也,好用兵而甚務名,終為齊患者,比楚也.」

田嬰不聽,遂內魏王,而與之并朝齊侯再三. 

 

[이에 전영(田嬰)이 이를 승낙하려 하자, 장추(張)가 말하기를 : “불가합니다. 이는 위나라에 이기지도 못하고

조례를 받는 셈입니다. 위나라와 강화한 뒤 초나라로 출병하면 이는 가히 대승이라 할 만합니다. 지금 비록 위나라에

승리를 거둬 10만 명의 군사를 깨뜨리고 태자 신(申)을 생포하기는 했으나 만승지국인 위나라를 굴복시켜

진, 초 두 나라를 아래에 두면 흉포하고 패악하다는 오명을 듣게 됩니다. 초왕이란 위인은 용병을 좋아하고

명성에 집착하는 자입니다. 장차 제나라의 우환이 되는 것은 틀림없이 초나라일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그러나 전영은 이를 듣지 않고 위혜왕의 청을 받아들인 뒤 위혜왕과 함께 재삼 제위왕을 조현했다.] 

 

 

惠施為韓魏交

 

惠施為韓、魏交,令太子鳴為質於齊.  王欲見之,

朱倉謂王曰:「何不稱病? 臣請說嬰子曰:『魏王之年長矣,今有疾,公不如歸太子以德之.
不然,公子高在楚,楚將內而立之,是齊抱空質行不義也.』」

 

[이에 조숙후(趙肅侯)는 이를 수치스럽게 생각하고, 초위왕은 성이 나서 친히 군사를 이끌고 가서 제나라를 공격하자

조나라가 호응했다. 초, 조 두 나라 군사가 서주(徐州)에서 제나라 군사를 대파했다.

혜시가 한, 위 두 나라의 친교를 위해 태자 명(鳴)을 제나라에 인질로 보냈다. 위혜왕이 태자 명을 보고 싶어하자

세객 주창(朱倉)이 위혜왕에게 말하기를 : “대왕께서는 왜 칭병하지 않는 것입니까? 신이 영자(田嬰)에게 말하기를,

‘위왕은 고령으로 지금 병석에 누워 있습니다. 공은 태자를 돌려보내 은혜를 베푸는 것이 상책입니다.

그리하지 않으면 초나라는 자국에 있는 공자 고(高)를 돌려보내 대를 잇게 할 것입니다.

그러면 제나라는 공질(空質)을 붙잡고 불의를 저지르는 꼴이 됩니다’라고 하겠습니다.”라고 하였다.

 

 

田需貴於魏王

 

田需貴於魏王,惠子曰:「子必善左右. 今夫楊,橫樹之則生,倒樹之則生,折而樹之也生.

然使十人樹楊,一人拔之,則無生楊矣. 故以十人之眾,樹易生之物,然而不勝一人者,何也?

樹之難而去之易也. 今子雖自樹於王,而欲去子者眾,則子必危矣.」

 

[전수(田需)가 위혜왕의 총애를 받고 있을 때 혜자(惠子)가 전수에게 충고하기를 : “그대는 군주의 측근들과 

가까이 지내야만 합니다. 무릇 버드나무는 옆으로 심거나, 거꾸로 심거나, 꺾어서 심어도 반드시 살아납니다.

그러나 10 명에게 이를 심게 한 뒤 한 사람을 시켜 이를 뽑게 하면 단 한 그루도 살아남지 못합니다.

10 명이 그토록 생명력이 강한 버드나무를 심으면서도 한 사람을 이기지 못하는 것은 무슨 연고입니까?

이것은 심기는 어렵지만 뽑기는 쉽기 때문입니다. 지금 그대는 비록 자신을 군주에게 심으려고 하지만

그대를 군주로부터 뽑아 내려는 사람은 아주 많습니다. 그대는 크게 위태로워질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田需死 

 

田需死.  昭魚謂蘇代曰:「田需死,吾恐張儀、薛公、犀首之有一人相魏者.」

代曰:「然則相者以誰而君便之也?」 昭魚曰:「吾欲太子之自相也.」

代曰:「請為君北見梁王,必相之矣.」昭魚曰:「奈何?」代曰:「君其為梁王,代請說君.」
昭魚曰:「奈何?」對曰:「代也從楚來,昭魚甚憂.  代曰:『君何憂?』

曰:「田需死,吾恐張儀薛公、犀首有一人相魏者.『代曰:『勿憂也. 梁王長主也,必不相張儀.

張儀相魏, 必右秦而左魏. 薛公相魏, 必右齊而左魏. 犀首相魏, 必右韓而左魏.

梁王, 長主也, 必不使相也.』 代曰:『莫如太子之自相. 是三人皆以太子為非固相也,

皆將務以其國事魏,而欲丞相之璽. 以魏之強,而持三萬乘之國輔之,魏必安矣.

故曰,不如太子之自相也.』」 遂北見梁王,以此語告之,太子果自相.

 

[기원전 310, 전수(田需)가 사망하자, 소어가 소대에게 말하기를 : “전수가 죽었으니 장의(張儀)와 설공(田文),

서수(犀首) 중 한 사람이 재상이 되지 않을까 걱정이오.”라고 하였다.
소대가 묻기를 : “ 그렇다면 그대는 누가 재상이 되는 것이 좋다고 생각하는 것입니까?”라고 하자.
소어가 대답하기를 : “나는 태자(太子: 훗날의 위소왕)가 몸소 재상이 되었으면 좋겠소.”라고 하였다.
그러자 소대가 말하기를 : “내가 그대를 위해 한번 북쪽으로 가 위왕을 만나 반드시 태자가 재상이 되도록

만들겠습니다.”라고 하였다.  소어가 묻기를 : “어떻게 그리 할 수 있다는 것이오?”라고 하자.
소대가 대답하기를 : “그대가 잠시 위왕의 역할을 맡아 주십시오. 시험삼아 그대를 설득해 보겠습니다.”라고 하였다.
소어가 묻기를 : “내가 어찌 하면 되겠소.”라고 하자. 소대는 소어에게 위왕처럼 응답해 주기를 부탁한 뒤 유세하기를  “ 제가 초나라에서 오자, 소어가 걱정스런 표정을 짓고 있어 신이 묻기를, ‘무엇을 걱정하는 것입니까’라고 했습니다.

그러자 그가 대답하기를, ‘전수가 죽었소. 나로서는 장의와 설공, 서수 중에서 한 사람이 재상이 되지 않을까 걱정이오’

라고 했습니다. 이에 신이 말하기를, ‘걱정하지 마십시오. 위왕은 재덕이 뛰어난 현주이니 장의를 재상으로

삼을 리 없습니다. 장의가 재상이 되면 진나라와 친하고 위나라를 소홀히 할 것입니다. 설공이 재상이 되면

제나라와 친하고 위나라를 소홀히 할 것입니다. 서수가 재상이 되면 한나라와 친하고 위나라를 소홀히 할 것입니다.

위왕은 장주이니 필시 이들을 재상으로 삼을 리 없습니다’라고 했습니다. 그리고는 또 말하기를, ‘태자를 임시

재상으로 삼느니만 못합니다. 이들 3인 모두 태자가 재상이 되지 못할 것으로 간주하고 급히 자신과 가까운 나라를

이용해 위나라의 환심을 산 뒤 재상이 되려는 것입니다. 위나라의 무력으로 3만승지국(진, 제, 초의 총칭)의 도움을

얻게 되면 위나라는 반드시 평안할 것입니다. 그래서 태자가 스스로 상국이 되느니만 못하다고 말한 것입니다’라고

했습니다.”아고 하면서, 이내 북쪽으로 가 위왕을 배견하면서 이같이 설득하자 태자가 과연 재상이 되었다.]

 

 

秦召魏相信安君 

 

秦召魏相信安君,信安君不欲往.  蘇代為說秦王曰:「臣聞之, 忠不必當, 當必不忠.

今臣愿大王陳臣之愚意,恐其不忠於下吏,自使有要領之罪. 愿大王察之. 今大王令人執事於魏,

以完其交,臣恐魏交之益疑也. 將以塞趙也,臣又恐趙之益勁也. 夫魏王之愛習魏信也,甚矣.
其智能而任用之也, 厚矣;其畏惡嚴尊秦也,明矣. 今王之使人入魏而不用, 則王之使人入魏無益也.

若用,魏必舍所愛習而用所畏惡,此魏之所以不安也. 夫舍萬乘之事而退,此魏信之所難行也.

夫令人之君處所不安,令人之相行所不能,以此為親,則難久矣. 臣故恐魏交之益疑也.

 

[기원전 259, 진나라가 위나라 재상 신안군(魏信)을 부르자 신안군이 가기 않으려 했다. 이에 소대(蘇代)가 신안군을 위해 진소양왕을 설득하기를 : “신이 듣건대 ‘충자(忠者)는 반드시 모두 현명할 필요는 없고, 지자(智者)는 반드시

모두 충성스러울 필요는 없다’고 했습니다. 지금 신은 대왕을 위해 우견을 말씀드리고자 합니다. 그러나 군왕께

불충하여 자칫 허리나 목이 잘리는 참형을 범하지나 않을까 두렵습니다. 원컨대 대왕께서는 이를 널리 살펴주기

바랍니다. 지금 대왕은 사람을 위나라로 보내 정사를 돌보게 하고 위나라와의 관계를 더욱 강화하려 합니다.

그러나 신은 오히려 이로 인해 위나라로 하여금 위, 진 두 나라간의 국교에 대한 의구심을 부추겨 장차

위, 조 두 나라간의 국교까지 가로막는게 아닌지 우려됩니다. 또 이로 인해 조나라를 더욱 강경하게 만들지나

않을지 우려됩니다. 지금 위안희왕의 신안군에 대한 총신이 매우 크고, 위신을 현사로 여겨 임용하는 대우가

매우 두텁고, 진나라를 두려워하고 존경하는 자세가 매우 분명합니다. 지금 대왕께서 사람을 위나라로 보낼지라도

중용되지 않는다면 사람을 위나라로 보낸 일이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습니다. 설령 중용될지라도 위왕의 입장에서는

총애하는 인물을 버리고 두렵고 꺼리는 인물을 기용한 셈이 되니 위왕의 마음이 편치 않을 것입니다.

무릇 만승지국의 국사를 다른 사람에게 맡기고 물러나는 일이 신안군으로서는 쉽지 않을 것입니다.

타국 군주의 마음을 편치 못하게 만들고 그 상국에게 하기 어려운 일을 강요하면서까지 우의를 돈독히 하려 하면

그 우의는 결코 오래가지 못할 것입니다. 이에 신은 위나라가 위, 진 두 나라의 국교에 대해 더욱 의구심을

갖지 않을까 걱정하는 것입니다.

且魏信舍事,則趙之謀者必曰:『舍於秦,秦必令其所愛信者用趙.』是趙存而我亡也,

是趙安而我危也.則上有野戰之氣,下有堅守之心,臣故恐趙之益勁也. 大王欲完魏之交,

而使趙小心乎? 不如用魏信而尊之以名. 魏信事王,國安而名尊;離王,國危而權輕. 

然則魏信之事主也,上所以為其主者忠矣,下所以自為者厚矣,彼其事王必完矣.
趙之用事者必曰:『魏氏名族不高於我, 土地之實不厚於我. 魏信以韓、魏事秦, 秦甚善之,

國得安焉, 身取尊焉. 今我講難於秦兵為招質,國處削危之形,非得計也. 結怨於外, 主患於中,

身處死亡之地,非完事也.』彼將傷其前事,而悔其過行,冀其利,必多割地以深下王.

則是大王垂拱者割地以為利重,堯、舜之所求而不能得也. 臣愿大王察之.」

 

[또한 신안군이 정무를 내놓게 되면 필시 조나라의 모신들이 말하기를, ‘진나라와 연합하면 진나라는 틀림없이

자신들이 좋아하는 사람에게 조나라의 정무를 맡길 것이다. 그리되면 설령 조나라는 존재해도 우리는 망하는 것이고,

조나라는 평안해도 우리는 위태로워지는 것이다’라고 할 것입니다. 이는 곧 위로는 야전(野戰)을 불사하고, 

아래로는 단단히 지키고자 하는 마음을 부추길 것입니다. 그래서 신이 조나라를 더욱 강경하게 만들지 않을까 걱정하는

것입니다. 대왕은 위나라와의 친교가 더욱 굳건해지고, 조나라가 진나라를 더욱 공경히 섬기기를 바라는 것입니까.

그렇다면 위신을 위나라의 재상으로 임용하느니만 못합니다. 위신이 대왕을 섬기면 위나라도 평안하고

진나라의 명예도 지킬 수 있지만 대왕을 떠나면 위나라도 위태로워지고 진나라의 위세도 가벼워지게 됩니다.

그렇다면 위신이 대왕을 섬기는 것이 위로는 위왕에게 충성을 다하고, 아래로는 자신을 위하는 셈이 되니

그는 필시 정성을 다해 대왕을 섬길 것입니다. 그러면 조나라의 집정자들도 말하기를, ‘위나라의 지위가 조나라보다

높은 것도 아니고, 토지의 산물이 더 많은 것도 아니다. 그런데도 위신이 위나라를 보좌하며 진나라를 섬긴 덕분에

위나라는 진나라와 화친하여 나라도 평안하고 위신 자신도 높은 지위를 얻었다. 지금 우리는 진나라와 교전함으로써

우리 군사는 과녁이 되어 있고, 나라는 깎이고 위급한 상황에 처해 있다. 이는 좋은 계책이 아니다.

밖에서 결원(結怨)하고, 안에서 우환을 낳고, 몸은 사지에 처해 있으니 이는 만전지책(萬全之策)이 못된다’고 할

것입니다. 그리되면 그들은 장차 진나라와 연합치 못한 것을 걱정하고, 지난 과오를 후회하면서 국가의 평안과

일신의 안녕을 위해 필시 땅을 크게 할양하면서 충심으로 귀복할 것입니다.

이는 대왕이 팔짱을 낀 채 땅을 떼어 받아 그 이익이 막대하게 되는 것입니다. 요순조차 이같이 얻지는 못할 것입니다.

원컨대 대왕은 자세히 살피시기 바랍니다.”라고 하였다.] 

 

 

秦楚攻魏圍皮氏

秦、楚攻魏圍皮氏. 為魏謂楚王曰:「秦、楚勝魏,魏王之恐也見亡飴,必舍於秦,

王何不倍秦而與魏王? 魏王喜,必內太子. 秦恐失楚,避邪此外城地於王,王雖復與之攻魏可也.」

楚王曰:「善.」乃倍秦而與魏.  魏內太子於楚.  秦恐,許楚城地,欲與之復攻魏. 

樗里疾怒,欲與魏攻楚,恐魏之以太子在楚不肯也,為疾謂楚王曰:「外臣疾使臣謁之,

曰:『敝邑之王欲效城地,而為魏太子之尚在楚也,是以未敢. 王出魏質,臣請效之,

而復固秦、楚之交,以疾攻魏.』」 楚王曰:「諾.」乃出魏太子. 秦因合魏以攻楚.

 

[기원전 306, 진, 초 두 나라가 위나라를 공격해 피씨(皮氏: 산서성 하진현)를 포위하자 어떤 사람이 위나라를 위해

초회왕에게 묻기를 : “진, 초 두 나라가 위나라에 이기면 위왕(위양왕)은 자칫 망하지나 않을까 두려워하여

필시 진나라와 연합하고자 할 것입니다. 그런데도 대왕은 어찌하여 진나라를 등지고 위왕과 손을 잡지 않는 것입니까?

그리하면 위왕이 기뻐하며 태자를 인질로 보낼 것입니다. 진나라도 초나라를 잃을까 걱정하여 반드시 성읍과 땅을

대왕에게 떼어 줄 것입니다. 그리되면 다시 한번 진나라와 함께 위나라를 공격해도 가합니다.”라고 하자.
초회왕이 대답하기를 : “그 말이 옳소.”라고 하며, 곧 진나라를 등지고 위나라와 손을 잡았다. 이에 위나라가 태자를

초나라에 인질로 보냈다. 진나라도 고민 끝에 초나라에 성읍과 땅을 떼어 준 뒤 다시 한번 함께 위나라를 치고자 했다.

이때 저리질(樗里疾)은 초나라의 배신에 분개한 나머지 오히려 위나라와 손잡고 초나라를 공격할 생각을 품었으나

위나라 태자가 초나라에 있어 위나라가 이를 받아들이지 않을까 우려했다.

그러자 어떤 사람이 저리질을 위해 초회왕에게 말하기를 : “외신(外臣) 저리질이 저를 시켜 전하게 하기를,

‘폐읍의 군왕은 성읍과 땅을 할양할 생각이나 위나라 태자가 아직도 초나라에 있어 보내드리지 못하고 있습니다.

대왕이 위나라 태자를 돌려보내면 신이 성읍과 땅을 드리겠습니다. 이어 진, 초 두 나라간의 친교를 더욱 굳건히 하여

함께 위나라를 공격하도록 하겠습니다’라고 했습니다.”라고 하자. 초왕은 : “그리 하도록 하겠소.”라고 하였다
초회왕이 위나라 태자를 돌려보내자 진나라가 곧바로 위나라와 손을 잡고 초나라를 공격했다.]

 

 

龐蔥與太子質於邯鄲

 

龐蔥與太子質於邯鄲,謂魏王曰:「今一人言市有虎,王信之乎?」 王曰:「否.」

「二人言市有虎, 王信之乎?」王曰:「寡人疑之矣.」「三人言市有虎, 王信之乎?」
王曰:「寡人信之矣.」龐蔥曰:「夫市之無虎明矣,然而三人言而成虎.

今邯鄲去大梁也遠於市, 而議臣者過於三人矣. 愿王察之矣.」

王曰:「寡人自為知.」於是辭行,而讒言先至. 後太子罷質,果不得見.

 

[기원전 336, 방총이 위나라 태자와 함께 한단에 인질로 가게 되자, 위혜왕에게 묻기를 : “지금 어떤 사람이

대량(大梁)의 거리에 호랑이가 나왔다고 보고하면 이를 믿겠습니까?”라고 하자. 

위혜왕이 대답하기를 : “믿지 않을 것이오.”라고 하였다.  

​방총이 또 묻기를 : “두 사람이 와서 말하면 이를 믿겠습니까?”라고 하자. 

위혜왕은 : “한번 의심해 볼 것이오.”라고 하였다.  

​방총이 또 묻기를 : “세 사람이 와서 말하면 이를 믿겠습니까?”  위혜왕은 : “믿을 것이오.”라고 하였다.
그러자 방총이 말하기를 : “무릇 거리 한복판에 호랑이가 있을 리 없다는 것은 뻔한 사실입니다. 

그런데도 세 사람이 말하면 대량의 거리에 호랑이가 나타나게 됩니다. 지금 한단은 대량에서 멀리 떨어져 있어 

대량의 왕궁과 저자와의 거리에 비할 바가 아닙니다. 그러니 신을 헐뜯는 사람이 세 사람을 초과할 것입니다.

원컨대 대왕께서는 세심히 살피시기 바랍니다.”라고 하자.  위혜왕은 : “과인도 나름대로 생각이 있소.”라고 하였다.
방총이 하직인사를 하고 한단으로 출발했으나 그가 조나라에 도착하기도 전에 벌써 그에 대한 참언이 위혜왕의

귀에 들어갔다. 훗날 태자는 인질이 풀려 귀환했으나 방총은 끝내 위혜왕을 만나 볼 수 없게 되었다.]

 

 

梁王魏嬰觴諸侯於范臺

 

梁王魏嬰觴諸侯於范臺. 酒酣,請魯君舉觴. 魯君興,必席擇言曰:「昔者帝女令儀狄作酒而美,

進之禹,禹飲而甘之,遂疏儀狄,絕旨酒,曰:『後世必有以酒亡其國者.』齊桓公夜半不嗛,

易牙乃肩敖燔炙, 和調五味而進之, 桓公食之而飽, 至旦不覺,曰:『後世必有以味亡其國者.』

晉文公得南之威,三日不聽朝,遂推南之威而遠之,曰:「後世必有以色亡完成國者.

『楚王登強臺而望崩樣,左江而右湖,以彷徨,其樂忘死, 遂盟強臺而弗登,
曰:『後世必有以高臺陂池亡其國者.』今主君之尊,儀狄之酒也;主君之味, 易牙之調也;

左白臺而右閭須,南威之美也;前夾林而後蘭臺,強臺之樂也.
有一於此,足以亡其國. 今主君兼此四者,可無戒與!」梁王稱善相屬.     

 

[기원전 356, 양왕(梁王) 영(嬰)이 제후들을 범대(范臺: 지명임)에 모아놓고 주연을 베풀었다. 주연이 무르익었을 때

위혜왕이 노군(노목공의 아들 魯共侯)에게 술잔을 올리도록 하자 노공후가 자리를 피한 뒤 언변이 뛰어난 자를 시켜

말하게 하기를 : ​“옛날 제녀(帝女: 요 또는 순임금의 딸) 의적(儀狄)이 술을 빚자 그 맛이 매우 좋았습니다.

이에 우임금이 마셔보고는 그 맛이 매우 좋자 이내 의적을 멀리하며 지주(旨酒: 美酒)를 끊었습니다.

그리고는 경계하기를, ‘후세에 반드시 술에 빠져 나라를 망치는 자가 있을 것이다’라고 했습니다.

제환공이 밤중에 공복을 느끼자 총신 역아(易牙)가 이내 전오번자(煎熬燔炙: 지지고, 볶고, 태우고, 구움)를 통해

5미(五味)를 갖춘 음식을 권했습니다. 제환공이 배불리 먹은 뒤 잠자리에 들어 다음날 아침까지 일어나지 못했습니다.

그리고는 경계하기를, ‘후세에 반드시 희귀한 맛을 찾다가 나라를 망치는 자가 있을 것이다’라고 했습니다.

또 진문공은 남지위(南之威: 미녀)를 얻은 뒤 오랫동안 정무를 보지 못하다가 이내 남지위를 멀리 했습니다.

그리고는 경계하기를, ‘후세에 반드시 미색에 빠져 나라를 망치는 자가 있을 것이다’라고 했습니다.

초왕(楚王: 초영왕)은 강대(强臺: 운몽택 내의 荊臺 즉 章華臺)에 올라 멀리 붕산(崩山)을 바라보고,

좌편의 동정호와 우편의 팽려호 사이에 있는 운몽택 내의 방황(方皇)에서 노닐다가 늙어죽는 것까지도 잊을

정도였습니다. 그러나 드디어 다시는 강대에 오르지 않을 것을 맹서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경계하기를, ‘후세에 반드시 높은 누대와 소택지에서 노닐다가 나라를 망치는 자가 있을 것이다’고 했습니다.

지금 대왕은 의적의 지주를 마시고, 역아의 요리를 먹고 있습니다. 또 좌편에 미녀 백대(白臺), 우편에 미녀 여수를

끼고 있으니 이는 ‘남지위’의 미색을 얻은 것과 같습니다. 앞에 협립(夾林), 뒤에 난대(蘭臺)가 있으니

이는 ‘강대’의 즐거움을 얻은 것과 같습니다. 이들 중 하나만으로도 나라를 망치기에 족한데

지금 대왕께서는 이 4 가지를 모두 구비하고 있으니 어찌 경계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라고 하였다. 
이에 양혜왕이 노공후를 크게 칭송하면서 좌중의 제후들에게 이를 경계로 삼게 했다.]  

    魏策 三 .

 

 

秦趙約而伐魏

秦、趙約而伐魏,魏王患之. 芒卯曰:「勿憂也. 臣請發張倚使謂趙王曰,夫鄴,寡人固刑弗有也.

今大王收秦而攻魏,寡人請以鄴事大王.」 趙王喜,召相國而命之曰:

「魏王請以鄴事寡人, 使寡人絕秦.」 相國曰:「收秦攻魏,利不過鄴. 今不用兵而得鄴,請許魏.」
張倚因謂趙王曰:「敝邑之吏效城者,已在鄴矣. 大王且何以報魏?」趙王因令閉關絕秦.

秦、趙大惡. 芒卯應趙使葉:「敝邑所以事大王者, 為完鄴也. 今郊鄴者,使者之罪也,卯不知也.」

趙王恐魏承秦之怒遽割五城以合於魏而支秦.

 

[기원전 290, 진, 조 두 나라가 맹약하여 위나라를 공격하려고 하자, 위소왕이 이를 크게 우려했다.

이에 위나라 장수 망묘(芒卯: 孟卯)가 위소왕에게 말하기를 : “대왕께서는 걱정하지 마십시오.

청컨대 신이 대왕을 대신해 장의(張倚: 위나라 사람)를 조나라에 사자로 보내 조왕(趙王: 조혜문왕)에게 제의하기를,

‘무릇 업 땅은 형세상 과인이 보유하기 어렵습니다. 지금 대왕께서 진나라와 함께 위나라를 공격하려고 하나

이를 멈추면 업 땅을 바치고 대왕을 섬기도록 하겠습니다’라고 하면 조왕이 이를 받아들일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조혜문왕이 과연 기뻐하며 상국을 불러들인 뒤 알리기를 : “위왕이 업 땅을 바치고 과인을 섬기겠다고 했소.

그러면서 진나라와의 친교를 끊어달라고 청해 왔소.”라고 하자.  조나라 상국이 말하기를 : “진나라를 끌어들여

위나라를 공격해도 그 이익은 겨우 업 땅에 불과할 뿐입니다. 그런데 이제 군사를 쓰지 않고도 업 땅을 얻을 수 있게

되었으니 속히 받아들이도록 하십시오.”라고 하였다. 장의가 이 사실을 알고는 곧 조혜문왕에게 말하기를 :
“폐읍의 관원이 이미 성읍을 바치기 위해 업 땅에 가 있습니다. 그런데 대왕께서는 장차 무엇으로 위나라에

보답할 것입니까?”라고 하자.  이에 조혜문왕이 곧 관문을 닫고 진나라와 국교를 끊었다.

이로 인해 진, 조 두 나라 사이가 매우 악화되었다. 이때 망묘는 업 땅을 인수하러 온 조나라 사자에게 말하기를 :
“페읍이 조왕을 섬기려는 것은 업 땅을 보존하기 위한 것이오. 업 땅을 바치겠다고 한 것은 사자의 죄요.

나는 전혀 알지 못하는 일이오.”라고 하였다. 조혜문왕은 혹여 위나라가 진나라의 노여움에 편승할까 두려워하여

급히 5개 성읍을 위나라에게 떼어주고 진나라의 침공에 대비했다.]

 

 

芒卯謂秦王

 

芒卯謂秦王曰:「王之士未有為之中者也. 臣聞明王不背中而行. 王之所欲於魏者長羊、王福、洛林之地也. 

王能使臣為魏之司徒,則臣能使魏獻之.」 秦王曰:「善.」因任之以為魏司徒.

謂魏王曰:「王所患者上地也. 秦之所欲於魏者,長羊、王屋、洛林之地也.

王獻之秦,則上地無憂患. 因請以下兵動機額齊,攘地必遠矣.」魏王曰:「善.」因獻之秦.

地入數月,而秦兵不下.  魏王謂芒卯曰:「地已入數月,而秦兵不下,何也?」

芒卯曰:「臣有死罪. 雖然,臣死,則契折於秦,王無以責秦. 王因赦其罪,臣為王責約於秦.」
乃之秦,謂秦王曰:「魏之所以獻長羊、王屋、洛林之地者,有意欲與下大王之兵東擊齊也.

今地已入,而秦兵不可下,臣則死人也. 雖然,後山東之士,無以利事王者矣.」

秦王懼然曰:「國有事, 為澹下又也, 今以兵從.」後十日, 秦兵下.

芒卯并將秦、魏之兵, 以動機額齊, 啟地二十二縣.

 

[기원전 290, 망묘가 진소양왕을 찾아가 말하기를 : “대왕의 신하들 중에는 제후국에 들어가 정무를 보면서 내응할

사람이 아직 없습니다. 신이 듣건대 명주는 내응 없이 행동한 적이 없다고 했습니다. 대왕이 위나라에 바라는 것은

장양, 왕옥,낙림의 땅입니다. 대왕께서 신을 위나라의 사도로 삼을 수 있다면 신은 위나라가 이 땅들을 바치도록

하겠습니다.”라고 하자.  진왕이 대답하기를 : “그리 하도록 하겠소.”라고 하였다.

이에 진소양왕이 망묘를 위나라의 사도로 삼자, 망묘가 위소왕에게 말하기를 : “대왕께서 걱정하고 있는 것은

상지(진나라와 접경한 지역)입니다. 그러나 진나라가 바라는 것은 장양, 왕옥, 낙림입니다. 이 세 곳을 진나라에

떼어주면 상지의 우환이 사라질 것입니다. 이후 진나라에게 출병을 청해 함께 동쪽 제나라를 공격하면

오히려 더 많은 땅을 취할 수 있습니다.”라고 하자.  위소왕이 대답하기를 : “옳은 말이오.”라고 하였다.
그리고는 장양 등의 땅을 진나라에 바쳤다. 얼마 후 위소왕이 망묘에게 묻기를 :
“땅을 바친지 벌써 여러 달이 지났는데도 진나라가 아직 출병하지 않고 있으니 이는 무슨 연고요?”라고 하자.
망묘가 대답하기를 : “신이 죽을 죄를 지었습니다. 그러나 신을 죽이면 이는 진나라와의 약정을 일거에 파기하는

셈이니 대왕께서는 진나라에 대해 무엇이든 요구할 수 있는 근거를 잃게 됩니다. 신의 죄를 용서해 주면

신이 원래 약정대로 진나라에 약속 이행을 요청하도록 하겠습니다.”라고 하며,
진나라로 가서 진소양왕에게 말하기를 : “위나라가 장양, 왕옥, 낙림을 바친 것은 진나라 군대의 출병에 편승해

동쪽 제나라를 공격하기 위한 것입니다. 지금 땅을 손에 넣고도 출병시키지 않으면 신은 죽음을 면하지 못합니다.

그러나 그보다도 이후 산동의 군주들 중 땅을 할양하여 대왕을 섬길 사람이 없게 될까 걱정입니다.”라고 하였다.
이에 진소양왕이 확연히 놀라 말하기를 : “나라에 여러 일이 있어 출병시키지 못한 것이오.

이제라도 출병시키도록 하겠소.”라고 하며, 이로부터 10일 후 진나라의 군대가 도착하였다. 

망묘는 진, 위 두 나라 군대을 이끌고 가 동쪽 제나라를 공격하고 22개 현을 개척하였다.]

 

 

秦敗魏於華走芒卯而圍大梁

 

秦敗魏於華,走芒卯而圍大梁.  須賈為魏謂穰侯曰:「臣聞魏氏大臣父兄皆謂魏王曰:

『初時惠王伐趙,戰勝輿三梁,十萬之軍拔邯鄲,趙氏不割,而邯鄲復歸. 齊人攻燕,殺子之,

破故國,燕不割, 而燕國復歸. 燕、趙之所以喲全兵勁,而地不并乎諸侯者, 以其能忍難而重出地也.

宋、中山數伐數割,而隨以亡. 臣以為燕、趙可法, 而宋、中山可無為也.

夫秦貪戾之國而無親,蠶食魏,盡晉國,戰勝睾子,割八縣,地未畢入而兵復出矣.

夫秦何厭之有哉! 今又走薈萃卯,入北地,此非但攻梁也,且劫王以多割也,王必勿聽也.

今王循楚、趙而講楚、趙怒而與王爭事秦, 秦必受之. 秦挾楚、趙之兵以復攻, 則國救亡不可得也已.

愿王之必無講也.  王若欲講,必割而有質,不然必欺.』是臣之所聞於魏也,愿君之以是慮事也. 

 

[기원전 273, 진나라가 위나라를 화양(華陽: 하남성 신정현 동남쪽)에서 격파했다.

이에 위나라 장수 망묘(芒卯)가 도주하자 이내 위나라 도읍 대량을 포위했다.

그러자 위나라 대부 수가(須賈)가 위나라를 위해 양후에게 말하기를 : “신이 듣건대 위나라 대신과 부형들이 모두

위안희왕에게 이르기를, ‘당초 위혜왕이 조나라를 칠 때 삼량에서 대승을 거두고 10만의 군사가 한단을 함락시키는

공을 세웠습니다. 그러나 조나라는 땅의 할양을 거부한 채 어려움을 이겨내고는 마침내 한단을 수복했습니다.

제나라 군사가 연나라를 공격하면서 상국 자지(子之)를 죽이고 도읍 계를 공략했을 때 연나라는 할양에 합의치 않고

굳게 견디다가 이내 계를 탈환했습니다. 연, 조 두 나라가 병력을 온전히 하고 땅을 제후들에게 병합되지 않은 것은

간난을 능히 참고 땅의 할양에 신중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송, 중산 두 나라는 공벌당할 때마다 땅을 떼어 주다가

마침내 멸망해 버렸습니다. 신은 연, 조 두 나라야말로 본받을 만하고, 송, 중산 두 나라는 결코 본받아서는 안된다고

생각합니다. 무릇 진나라는 탐욕스러워서 가까이 할 수 없는 나라입니다. 이들은 지금 위나라를 잠식해 진(晉)나라의

옛 땅을 모두 빼앗을 생각을 품고 있습니다. 이에 한나라 장수 폭자(暴鳶)와 싸워 이기고는 8개 현을 할양받으면서

이를 모두 인수하기도 전에 또 다시 출병했습니다. 무릇 진나라가 만족할 때가 과연 있을 수 있겠습니까?

지금 또 망묘를 패주시키고 북지(北宅)로 쳐들어 왔습니다. 이는 비단 대량(大梁)을 공격하는데 그치는 것이 아니라

대왕을 겁박해 크게 할양받으려는 속셈에서 나온 것으로 이들의 제의를 결코 받아들여서는 안 됩니다.

이제 대왕이 초, 조 두 나라를 등지고 진나라와 강화하면 초, 조 두 나라는 크게 노해 대왕과 싸우면서 진나라를

섬길 것입니다. 그리되면 진나라는 틀림없이 이를 받아들일 것입니다.

진나라가 초, 조 두 나라의 군사를 이끌고 또 다시 공격해 오면 위나라는 구하려 해도 구할 길이 없게 됩니다.

원컨대 대왕은 반드시 강화치 말기 바랍니다. 만일 굳이 강화하려면 반드시 약간의 땅만 할양하고 인질을 잡아

두십시오. 그리하지 않으면 필시 기만당하고 말 것입니다’라고 했습니다. 이상은 신이 위나라에서 들은 내용입니다.

원컨대 군은 이 점을 깊이 고려하시기 바랍니다.]

 

《周書》曰:『維命不於常.』此言幸之不可數也.  夫戰勝睾子, 而割八縣, 此非兵力之精,

非計之工也, 天幸為多矣.  今又走芒卯,入北地,以攻大梁,是以天幸自為常也. 知者不然. 

臣聞魏氏悉其百縣勝兵, 以止戍大梁, 琛以為不下三十萬. 以三十萬之眾, 守十仞之城,

臣以為雖湯、武復生, 弗易攻也.  夫輕信楚、趙之兵,陵十仞之城,戴三十萬之眾,而志必舉之,

臣以為自天下之始分以至於今,未嘗有之也. 攻而不能拔,秦兵必罷,陰必亡,則前功必棄矣.

今魏方疑,可以少割收也.  愿之及楚、趙之兵未任於大梁也,亟以少割收. 魏方疑,

而得以少割為和,必欲之,則君得所欲矣.

 

[《서경》〈주서(周書) 강고〉 에 이르기를, 유명불상(維命不常: 천명은 영구불변한 것이 아님)이라고 했습니다.

이는 행운은 늘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님을 말한 것입니다. 무릇 폭자에게 이겨 8개 현을 할양받았으나

이는 병력이 정강(精强)했기 때문도 아니고, 계책이 뛰어났기 때문도 아니고, 오직 천행(天幸)이 많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지금 또 망묘를 도주하게 한 뒤 북택(北宅: 북지)으로 쳐들어가 대량을 공격하고 있습니다.

이는 천행이 늘 있는 것으로 믿은데 따른 것입니다. 그러나 지자(知者)는 천명에 기대지 않습니다.
신은 위나라가 전국의 정예병을 총 동원해 대량(大梁)에 주둔시켰다고 들었습니다. 그리되면 최소한 30만 명은

넘을 것으로 짐작됩니다. 30만의 대군으로 7인(仞: 7,8척) 높이의 성을 지키면 탕무(湯武)가 다시 환생할지라도

공격하기 어려울 것입니다. 그런데 경솔하게도 초, 조 두 나라의 군사를 염두에 두지 않고 7인의 성을 기어 올라

30만 대군을 격파한 뒤 대량을 점거하려 하고 있습니다. 신이 생각건대 천지가 나뉜 이래 오늘에 이르기까지

아직 이같은 예는 없었을 것입니다. 공격하여 함락시키지 못하면 진나라 군사는 반드시 지치고 도(陶) 땅

또한 빼앗길 수밖에 없습니다. 그리되면 전공(前功)은 모두 수포로 돌아갈 수밖에 없습니다.

지금 위나라는 망설이며 진나라와 연합해야 할 것인지 결정을 내리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러니 군은 약간의 땅만 할양하게 하고 위나라와 연합할 수 있습니다. 원컨대 군은 초, 조 두 나라의 군사가

대량으로 오기 전에 약간의 땅만 할양하게 하고 속히 위나라와 연합하기 바랍니다.

위나라는 망설이고 있는 터에 약간의 땅만 할양하고 강화할 수가 있다면 틀림없이 이를 바랄 것입니다.

그리되면 군은 바라던 땅을 얻을 수 있을 것입니다.]

 

楚、趙怒於魏之先己講也,必爭事秦. 從是以散,而君後擇焉. 且君之嘗割晉國取地也,

何必以兵哉? 夫兵不用,而魏效絳、安邑,又為陰啟兩機,盡故宋,衛效尤憚. 秦兵已令,

而君制之,何求而不得?何為而不成? 臣愿君之熟計而無行危也.」 穰侯曰:「善.」乃罷梁圍.

 

[초, 조 두 나라는 위나라가 한 발 앞서 강화한 사실을 알면 크게 노하겠지만 사세상 반드시 위나라와 앞을 다투며

진나라를 섬길 것입니다. 합종이 와해된 이후에는 군이 소신대로 제압토록 하십시오.

군이 진(晉)나라 땅을 취하는데 굳이 무력을 동원할 필요가 있겠습니까? 무력을 동원하지 않아도 위나라는

강(絳)과 안읍(安邑) 땅을 바칠 것입니다. 또한 위나라가 도(陶) 땅으로의 통로를 위해 양쪽 길을 열어 주게 되면

옛 송나라 땅은 거의 다 차지한 것이나 다름없습니다. 그리되면 위(衛)나라는 탄부(憚父)를 내놓을 것입니다.

진나라 군사는 출병을 하지 않아 힘을 고스란히 보존하고 있는 데다가 군이 지휘권을 장악하고 있으니 얻고자 하면

무엇을 얻지 못하고 하고자 하면 무엇을 성사시키지 못하겠습니까? 원컨대 군께서는 깊게 헤아려 위험한 행동을 

하지 않기 바랍니다.”라고 하자.  양후가 대답하기를 : “그대의 말이 옳소.”라고 하며. 이내 대량에 대한 포위를 풀었다.]

 

 

秦敗魏於華魏王且入朝於秦

 

秦敗魏於華,魏王且入朝於秦.  周訢謂王曰:「宋人有學者,三年反而名其母.

其母曰:『子學三年,反而名我者,何也?』
其子曰:『吾所賢者,無過堯、舜,堯舜名. 吾所大者,無大天地,天地名.

今母賢不過堯、舜,母大不過天地,是以名利母也.』
其母曰:「子之於學者,將盡行之乎? 愿子之有以易名母也. 子之於學也,將有所不行乎?

愿子之且以名母為後也. 『今王之事秦,尚有可以易入朝者乎? 愿王之有以易之,而以入朝為後.」

 

[기원전 273, 진나라가 위나라를 화양에서 격파했다. 이에 위안희왕이 강화를 청하기 위해 진나라에 입조하려 하자

대신 주흔(周訢)이 말하기를 : “옛날 송나라에 타국으로 유학을 떠났던 자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3년 만에 돌아와서는

모친의 이름을 함부로 불렀습니다. 이에 그 모친이 꾸짖기를, ‘3년이나 공부하고 와서 내 이름을 함부로 부르는 것은

어찌 된 일이냐’라고 하자, 그 아들이 대답하기를, ‘제가 현자로 존경하는 사람은 오직 요임금과 순임금 뿐입니다.

그런데 세상 사람들은 모두 두 사람의 이름을 함부로 부르고 있습니다. 세상에서 제가 가장 위대하게 여기는 것으로는

천지보다 더한 것은 없습니다. 그러나 이 또한 우리는 함부로 부르고 있습니다. 지금 어머니의 현명함은 요순에

미치지 못하고, 그 위대함은 천지에 미치지 못합니다. 그래서 이름을 부른 것입니다’라고 했습니다.

이에 그 모친이 당부하기를, ‘네가 배운 것을 모두 그대로 실천할 생각이냐. 그렇다면 다른 칭호로 어미의 이름을

대신해 불렀으면 좋겠다. 네가 배운 것을 취사하여 실천할 생각이냐. 그렇다면 어미의 이름을 부르는 일은

뒤로 미뤄주기 바란다’고 했습니다. 지금 대왕은 진나라를 섬기는 문제와 관련해 먼저 입조에 대신할 방법이 있는지

생각해 보고 입조하는 일은 그 뒤로 미뤄주기 바랍니다.”라고 하였다.]

 

魏王曰:「子患寡人入而不出邪? 許綰為我祝曰:『入而不出,請存檔寡人以頭.』」
周訢對曰:「若臣之賤也,今人有謂臣曰,入不測之淵而愁出,不出,請以一鼠首為女存檔者,臣必不為也.  

今秦不可照之國也,猶不測之淵也;而許綰之首,猶鼠首也. 內王於不可知之秦,而存檔王以鼠首,臣竊為王不取也. 

且無梁孰與無河內急?」 王曰 : 「梁急.」「無梁 孰與無急?」
王曰:「身急.」曰:「以三者,身,上也;河內,其我也. 秦未索其下,而效其上,可乎?」

王尚未聽也.  支期曰:「王視楚王. 楚王入秦,王以三乘先之;楚王不入,楚、魏為一,尚足以捍秦.」 王乃止.

 

[이에 위안희왕이 말하기를 : “그대는 과인이 진나라에 입조하면 귀국하지 못할까 염려하는 것이오?

진나라 대신 허관은 과인을 위해 발원하면서 '입조한 뒤 귀국하지 못하는 일이 생기면 청컨대 제 머리를 잘라 순장해

주십시오.'라고 장담하였소."라고 하자. 주흔이 반박하며 묻기를 : “지금 만일 신과 같이 천한 자가 신에게 맹서하기를,

깊이를 알 수 없는 연못에 들어가도 틀림없이 빠져 나올 수 있소. 만일 빠져 나오지 못하면 목숨을 내던지고

순사하겠소’라고 하면 신은 결코 그같은 모험을 하지 않을 것입니다. 지금 진나라는 그 속을 알 수 없는 나라입니다.

이는 깊이를 알 수 없는 연못과도 같은 것입니다. 게다가 허관의 목은 쥐의 대가리 정도에 불과할 뿐입니다.

지금 대왕을 속여 예측할 수 없는 진나라에 들여보내고, 유사시 겨우 쥐 대가리 정도로 순사시키는 것은 대왕을 위해

취할 수 없는 방안입니다. 대왕은 대량을 잃는 것과 하내를 잃는 것 중 어느 쪽이 더 급하다고 생각합니까?”라고 하자.
위왕이 대답하기를 : “대량이 더 급하지 않겠소?”라고 하였다.
주흔이 묻기를 : “그렇다면 대량을 잃는 것과 대왕 자신을 잃는 것 중 어느 쪽이 더 급합니까?”라고 하자.
위왕이 대답하기를 :“ 당연히 내 몸이 더 급하오.”라고 하였다.

그러자 주흔이 말하기를 : “이 3 가지 중에서 일신이 가장 중요하고, 하내가 가장 못합니다. 지금 진나라는 하내조차

요구하고 있지 않습니다. 그런데도 대왕께서는 한사코 가장 중요한 것을 바치려 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과연 될 말입니까?”라고 하였으나,  위안희왕은 이를 들으려 하지 않았다.]

 

支期曰:「王視楚王. 楚王入秦,王以三乘先之;楚王不入,楚、魏為一,尚足以捍秦.」王乃止.

王謂支期曰:「吾始已諾於應侯矣, 今不行者欺之矣.」支期曰:「王勿憂也. 臣使長信侯請無內王, 王待臣也.」 

支期說於長信侯曰:「王命召相國. 」長信侯曰:「王何以臣為?」

支期曰:「臣不知也,王急召君.」  長信侯曰:「吾內王於秦者,寧以為秦邪?吾以為魏也.」

支期曰:「君無為魏計,君其自為計. 且安死乎? 安生乎? 安窮乎? 安貴乎? 君基先自為計,後為魏計.」 

長信侯曰:「樓公將入矣,臣今從.」 支期曰:「王急召君,君不行,血濺君襟矣!」

 

[이에 위안희왕의 근신인 지기(支期)가 말하기를 : “대왕은 초왕의 동정을 지켜보다가 만일 초왕이 진나라에 입조하면

수레 3 승만 이끌고 초왕에 앞서 먼저 진나라로 들어가십시오. 만일 초왕이 입조하지 않으면 초, 위 두 나라는

일치단결할 수 있습니다. 그리되면 진나라의 침공도 능히 막아낼 수 있습니다.”라고 하자. 위안희왕이 입조할 생각을

버렸다. 그러나 위안희왕은 다시 지기에게 말하기를 : “과인은 전에 이미 응후에게 입조할 뜻을 밝혔소.

지금 가지 않으면 그를 기만하는 것이 되오.”라고 하자. 지기(支期)가 대답하기를 : “대왕께서는 심려하지 마십이오.

신이 응후와 가까운 상국 장신후(長信侯)를 통해 대왕이 입조하지 않아도 되도록 처리하겠습니다. 며칠 동안만

기다리십시오.”라고 하며.그리고는 곧 장신후를 찾아가 말하기를 : “대왕이 상국을 부르도록 명했소.”라고 하였다.
장신후가 묻기를 : “대왕께서 나에게 무엇을 시키려는 것이오?”라고 하자.
지기(支期)가 대답하기를 : “저는 잘 모르겠습니다. 다만 급히 상국을 부르도록 했소.”라고 하였다.
그러자 장신후가 말하기를 : “내가 대왕에게 입조를 권한 것이 어찌 진나라를 위한 것이겠소. 모두 위나라를 위해서

그런 것이오.”라고 하자.  이에 지기가 말하기를 : “그대는 위나라를 위한 계책을 내기 전에 먼저 자신을 위한

계책부터 내도록 하시오. 그대는 생사귀천(生死貴賤)에 대한 계책을 생각해 본 적이 있소? 그

대는 우선 자신을 위한 계책을 낸 후에 위나라를 위한 계책을 내는 것이 옳소.”라고 하였다.
그러자 장신후가 말하기를 : “마침 누공(樓公: 누완)이 왔으니 그와 함께 위왕을 배견하도록 하겠소.”라고 하자.
지기가 말하기를 : “대왕께서 그대를 급히 불렀소. 서둘러 가지 않으면 그대 옷깃이 피로 물들을 것이오.”하였다.]

 

長信侯行,支期隨其後.  且見王,支期先入謂王曰:「偽不必者乎而見之,臣已恐之矣.」 

長信侯入見王,王曰:「病甚奈何!吾始已諾於應侯矣,意雖道死,行乎?」
長信侯曰:「五毋行矣!臣能得之於應侯,愿王無憂.」 

 

[장신후가 크게 놀라 급히 가자 지기가 그 뒤를 따라갔다. 장신후가 위안희왕을 배견하기 전에 지기가 먼저 들어가

위안희왕에게 말하기를 : “거짓으로 아픈 척 하며 그를 만나십시오. 제가 이미 충분히 겁을 주었습니다.”라고 하였다.
장신후가 들어가 배견하자 위안희왕이 신음소리를 내며 말하기를 : “과인의 병이 심하니 어찌하겠소. 과인은 이미

응후에게 입조를 약속했는데 이를 어찌하면 좋겠소. 비록 도중에 죽는 한이 있어도 가야만 하지 않겠소?”라고 하자.
장신후가 만류하며 말하기를 : “대왕께서는 행차를 중지하십시오. 신이 응후의 양해를 얻어내도록 하겠습니다.

원컨대 조금도 염려하지 마시기 바랍니다.”라고 하였다.] 

 

 

華軍之戰

 

華軍之戰、魏不勝秦.  明年,將使段干崇割地而講.  孫臣謂魏王曰:

「魏不以敗之上割可謂善用不勝矣;而秦不以勝之上割,可謂不能用勝矣.
今處期年乃欲割,是群臣之私而王不知也. 且夫欲璽者,段干子也,王因使之割地;欲地者, 秦也,
而王因使之受璽. 

夫欲璽者制地,而欲地者制璽,其勢必無魏矣.  且夫奸臣固皆欲以地事秦.

以地事秦,譬猶抱薪而救火也. 薪不盡,則火不止. 今王不地有盡, 而秦之求無窮,是薪火之說也.」
魏王曰:「善;. 雖然,吾已許秦矣,不可以革也.」

對曰:「王獨不見夫博者之用梟邪? 欲食則食,欲握則握. 今君劫於群臣而許秦,因曰不可革,何用智之不若梟也?」  

魏王曰:「善.」乃案其行.

 

[기원전 272, 화양(華陽)의 싸움에서 위나라가 진나라에게 대패했다. 이듬해에 위나라는 단간숭(段干崇)을 시켜

땅을 할양하고 진나라와 강화하고자 했다. 이에 손신(孫臣: 「사기」는 소대)이 위안희왕에게 말하기를 :
“위나라가 패하고도 땅을 할양하지 않은 것은 전패한 열세의 상황에서 선방(善防)한 셈이고, 진나라가 이기고도

할양을 요구하지 못한 것은 승리를 거둔 우세한 상황을 활용하지 못한 셈입니다.

지금 1년이 지난 상황에서 할양하고자 하는 것은 군신들이 사리를 위해 나온 것으로 대왕과는 상관없는 일입니다.

지금 땅을 떼어주고 진나라의 상인(相印: 재상의 인장)을 탐내고 있는 자는 단간숭입니다.

그런데도 대왕께서는 그를 사자로 보내 땅을 떼어 주려 하고 있습니다. 땅을 탐내고 있는 것은 진나라입니다.

그런데도 대왕은 땅을 떼어주어 그가 진나라의 상인을 취하는 것을 도와주려 하고 있습니다.

무릇 진나라의 상인을 탐하는 자가 땅을 장악하고, 땅을 탐하는 자가 상인을 장악하면 이는 필시 위나라가 없게 되는

상황으로 진행될 수밖에 없습니다. 게다가 간신들은 모두 애초부터 땅을 할양하고 진나라를 섬기려 하고 있습니다.

땅을 할양하고 진나라를 섬기려는 짓은 비유하건대 장작을 안고 불을 끄려고 시도하는 것과 같은 짓입니다.

장작이 다 타지 않으면 불길은 멎지 않는 법입니다. 지금 대왕의 땅은 한도가 있으나 진나라의 요구는 끝이 없습니다.

이는 장작을 안고 불을 끄려고 시도하는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위왕은 묻기를 : “과연 옳은 말이오. 그러나 과인이 이미 진나라에 승낙했으니 바꿀 수는 없지 않겠소.”라고 하자.
그러자 손신이 대답하기를 : “대왕께서는 어찌하여 도박에서 효기(梟棋)를 잘 쓰는 자를 보지 못하는 것입니까?

효기를 잘 쓰는 자는 행마하고 싶을 때 행마하고, 멈추고 싶을 때 멈춥니다. 지금 대왕은 군신들에게 겁박당해

진나라에 승낙하고는 ‘바꿀 수 없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어찌하여 대왕의 지혜는 도박에서 효기를 운용하는 것만도

못한 것입니까?”라고 하였다.  이에 위안희왕은 두 번 다시 단간숭에게 할지하여 강화하는 일을 시키지 않았다.]

 

 

齊欲伐魏

 

齊欲伐魏,魏使人謂淳於髡曰:「齊欲伐魏,能解魏患,唯先生也. 敝邑有寶璧我雙,文馬二駟可, 請稱之為之先生.」 

淳於髡曰:「諾.」

入說齊王曰:「楚,齊之仇敵也;魏,齊之與國也. 夫伐與國,使仇敵制其餘敝,名醜而實危,為王弗取也.」

齊王曰:「善.」乃不伐魏.  客謂齊王曰:「淳於髡言不伐魏者,受魏之璧、馬也.」

王以謂淳於髡曰:「聞先生受魏之璧、馬, 有諸?」曰:「有之.」「然則先生之為寡人計之何如?」
淳於髡曰:「伐魏之事不便,魏雖刺髡,於王何益? 若誠不便,魏雖封髡,於王何損?
且夫王無伐與國之誹,魏無見亡之危,百姓無被兵之患,髡有璧、馬之寶,於王何傷乎?」

 

[기원전 333, 제나라가 위나라를 정벌하려고 하자, 위나라가 사람을 시켜 순우곤에게 이같이 말하게 하기를 :
“제나라가 위나라를 정벌하려고 하니 재난을 풀 수 있는 사람은 오직 선생 한 분 뿐입니다. 폐읍에 보배로

간직한 구슬 2 쌍과 화려하게 장식한 말 8 필이 있습니다. 이를 선생에게 드리도록 하겠습니다.”라고 하자.
순우곤이 대답하기를 : “그리 하도록 하겠소.”라고 하였다.
순우곤이 이내 제위왕을 만나 유세하기를 : “초나라는 제나라의 원수이나, 위나라는 제나라의 맹방입니다.

무릇 맹방을 공격하면서 원수에게 우리가 지친 틈을 노리게 만들어주는 것은 명분상 추하고 실리면에서도

위험합니다. 대왕을 위해서라도 이같이 해서는 안 됩니다.”하고 하자. 제왕이 대답하기를 : “옳은 말이오.”라고 하며,
이에 위나라를 공격하지 않았다. 그러자 한 세객이 제위왕에게 말하기를 :
“순우곤이 위나라를 공격하지 말도록 한 것은 위나라에서 구슬과 말을 받았기 때문입니다.”라고 하였다.
제왕이 순우곤에게 묻기를 : “선생이 위나라에서 구슬과 말을 받았다는 얘기가 있는데 그런 적이 있소.”라고 하자.
순우곤이 대답하기를 : “있습니다.”라고 하였다. 

제왕이 묻기를 : “그렇다면 선생이 과인을 위해 세운 계책은 어떤 것이오?”라고 하자.
이에 순우곤이 대답하기를 : “위나라 공벌이 제나라에 유리하다면 설령 위나라가 저를 죽인들 대왕에게 무슨 이익이

있겠습니까? 만일 실로 위나라 공벌이 불리하다면 설령 위나라가 저를 봉한들 대왕에게 무슨 손해가 있겠습니까?

또한 처음부터 대왕은 맹방을 쳤다는 비난을 받지 않고, 위나라는 멸망하는 위험을 겪지 않고, 백성들은 병화(兵禍)를

당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니 제가 구슬과 말을 얻은들 대왕에게 무슨 손해가 있겠습니까?”라고 하였다.]

 

 

秦將伐魏

 

秦將伐魏.  魏王聞之,夜見孟嘗君,告之曰:「秦且攻魏,子為寡人謀,奈何?」

孟嘗君曰:「有諸侯之救,則國可存也.」王曰:「寡人愿子之行也.」重為之約車百乘.
孟嘗君之趙,謂趙王曰:「文愿借兵以救魏.」 趙王曰:「寡人不能.」

孟嘗君曰:「夫敢借兵者,以忠王也.」 王曰:「可得聞乎?」
孟嘗君曰:「夫趙之兵,非能強於魏之兵;魏之兵非能弱於趙也. 然而趙之地不歲危,
而民不歲死;

而魏之地歲危,而民歲死者,何也? 以其西為趙蔽也. 今趙不救魏,魏歃盟於秦,是與強秦為界也,

地亦且歲危,民亦且歲死矣. 此文之所以忠於大王也.」 趙王許諾,為起兵十萬,車三百乘.

 

[기원전 283, 진나라가 장차 위나라를 공격하려고 하자, 위소왕이 이 말을 듣고 한밤에 맹상군을 불러 사정을 알리며

묻기를 : “진나라가 위나라를 공격하려고 하는데 그대가 과인을 위해 계책을 낸다면 어떤 계책이 있겠소?”라고 하자.
맹상군이 대답하기를 : “제후들이 구원하면 가히 보전할 수 있습니다.”라고 하였다.
위소왕이 말하기를 : “원컨대 그대가 가서 부탁해 주기 바라오.”라고 하며, 맹상군에게 병거 1백 승을 후하게 갖춰

주었다. 이에 맹상군이 조나라로 가 조혜문왕에게 말하기를 : “원컨대 대왕의 군사를 빌려 위나라를 구원하고자

합니다.”라고 하자.  조혜문왕은 대답하기를 : “과인은 그리 할 수 없소.”라고 하였다.
그러자 맹상군이 말하기를 : “감히 군대를 빌리려는 것은 대왕에게 충성하기 위한 것입니다.”라고 하자.
조혜문왕이 묻기를 : “그렇다면 그 이유를 들려 줄 수 있겠소?”라고 하자.
이에 맹상군이 말하기를 : “무릇 조나라 군사가 위나라 군사보다 강한 것도 아니고, 위나라 군사가 조나라 군사보다

약한 것도 아닙니다. 그러나 조나라의 땅은 세월이 갈수록 위험에서 벗어나고 백성들은 평안해지고 있습니다.

그런데 위나라의 땅은 세월이 갈수록 위태로워지고 백성들은 더욱 많이 죽어나가고 있습니다. 이는 무슨 연고입니까?

이는 위나라가 서쪽에 위치해 조나라의 방어벽 역할을 수행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지금 조나라가 위나라를 구하지

않으면 위나라는 진나라와 삽맹(삽혈을 하고 결맹함)하게 될 것입니다. 이는 곧 조나라가 강한 진나라와 직접 국경을

맞닿게 되는 것을 뜻합니다. 그렇게 되면 조나라 땅은 해마다 위험에 처하게 될 것이고, 백성들도 해마다 더 많이

죽어나갈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신이 대왕에게 충성하고자 하는 이유입니다.”라고 하였다.
조혜문왕이 이를 받아들여 마침내 위나라를 위해 군사 10만 명과 병거 3백 승을 동원했다.]

 

又北見燕王曰:「先人日公子常約兩王之交矣. 今秦且攻魏,愿大王之救之.」

燕王曰:「吾歲不熟二年矣,今又行數千里而以助魏,且奈何?」田文曰:「夫行數千里而救入者, 此國之利也.

今魏王出國門而望見軍, 雖欲行數千里而助人可得乎?」燕王尚未許也. 

田文曰:「臣效便計於王,王不用臣之忠計,文請行矣. 恐天下之將有大變也.」

王曰:「大變可得聞乎?」曰:「秦攻魏未能克之也, 而臺已燔, 游已奪矣.

而燕不救魏, 魏王折節割地,以國之半與秦,秦必去矣.  秦已去魏,魏王悉韓、魏之兵,又西借秦兵,

以因趙之眾, 以四國攻燕, 王且何利?利行數千里而助人乎?利出燕南孟而望見軍乎?

則道里近而輸又易矣, 何利?」
燕王曰:「子行矣,寡人聽子.」乃為之起兵八萬,車二百乘,以從田文.  

魏王大說,曰:「君得燕、趙之兵臣眾且亟矣.」 秦王大恐,割地請誑於魏.  因歸燕、趙之兵,而封田文.

 

[맹상군 전문은 다시 북쪽으로 가서 연소왕에게 말하기를 : “전에 공자 상(常)은 연, 위 두나라 군주간의 교분을

얘기한 바 있습니다. 지금 진나라가 위나라를 공격하려고 하니 원컨대 대왕은 구해 주기 바랍니다.”라고 하였다.
“연소왕 말하기를 : 우리나라는 벌써 2년째나 계속 흉년이 들었소. 그러니 지금 수천 리나 가 위나라를 구하는 일을

어찌 할 수 있겠소?”라고 하자. 전문이 말하기를 : “수천 리를 마다하지 않고 가 사람을 구하면 이는 나라의 이익이

됩니다. 지금 위왕은 도읍문을 나서면 곧바로 진나라 군사를 쳐다봐야 하는 처지에 놓여 있습니다.

그러니 시기를 놓치면 비록 수천 리를 가 사람을 구하려 해도 이것이 어찌 가능하겠습니까.”라고 하였으나, 

연소왕은 이를 승낙하지 않았다.  이에 맹상군이 다시 유세하기를 : “신은 대왕에게 이익이 되는 계책을 올렸는데도

대왕은 신의 충성된 계책을 받아들이지않고 있습니다. 저는 물러가고자 합니다. 그러나 장차 천하의 대변(大變)이 

일어나지나 않을까 걱정입니다.”라고 하였다.
연소왕이 묻기를 : “대변이 과연 무엇을 뜻하는지 말해 줄 수 있겠소?”라고 하자.
이에 맹상군이 대답하기를 : “지금 진나라는 위나라를 공격하고 있으나 아직 승리를 거두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미 높이 쌓은 누각이 불타고 군주의 사냥터가 적의 손으로 넘어갔습니다. 지금 연나라가 위나라를 구하지

않으면위왕은 절의를 꺾고 땅을 할양하여 영토의 절반을 진나라에 넘겨주어야 비로소 진나라는 철수할 것입니다.

진나라가 위나라에서 철수하면 위왕은 한, 위 두 나라의 전 병력을 동원하고, 서쪽 진나라 군사를 빌리고,

조나라의 대군에 의지해 4국의 군사로 연나라를 공격할 것입니다. 그러면 대왕에게 어느 것이 더 이익이 되겠습니까?

수천 리를 가 남을 구하는 것이 이익이 되겠습니까? 아니면 연나라 도읍의 남문을 나서자마자 4국의 군사를 쳐다봐야

하는 것이 이익이 되겠습니까? 4국의 군사가 연나라 도읍 아래에 이르면 연나라와 4국 간의 거리는 매우 가깝고

군량 수송 또한 쉽습니다. 이렇게 되면 대왕에게 무슨 이익이 있겠습니까?”라고 하였다.
그러자 연소왕이 말하기를 : “그대는 가도 좋소. 과인은 그대의 계책을 받아들이도록 하겠소.”라고 하며.
군사 8만 명과 병거 2백 승을 동원해 맹상군을 따라가게 했다. 이에 위소왕이 기뻐하며 말하기를 :
“그대는 연, 조 두 나라로부터 참으로 많은 병력을 신속하게도 얻어 왔소.”라고 하였다.
이에 진소양왕은 크게 두려워한 나머지 땅을 떼어주며 위나라에 강화를 청했다.

위왕이 곧 연, 조 두 나라의 군사들을 돌려보낸 뒤 맹상군을 봉했다.]

 

 

魏將與秦攻韓

 

魏將與秦攻韓,朱己謂魏王曰:「秦與戎翟同俗,有虎狼之新,貪戾好利而無信,不識禮義德行.

茍有利焉,不顧親戚兄弟, 若禽獸耳. 此天下之所同知也, 非所施厚積德也. 故太后母也, 而以憂死;

穰侯舅也, 功莫大焉, 而竟逐之;兩弟無罪, 而再奪之國. 此於其親戚兄弟若此, 而又況於仇讎之敵國也. 

今大王與秦伐韓而益近秦,臣甚或之,而王弗識也,則不明矣. 群臣知之,而莫以此諫,則不忠矣.  

今夫韓氏以一女子承一弱主,內有大亂. 外安能支強秦、魏之兵,王以為不破乎? 

韓亡,秦盡有鄭地,與大梁鄰,王以為安乎?王欲得故地,而今負強秦之禍也,王以為利乎? 

秦非無事之國也,韓亡之後,必且便事;便事,必就易與利;就易與利,必不伐楚與趙矣. 是何也? 

夫越山逾河,絕韓之上黨而攻強趙,則是復於與之事也,秦必不為也.

 

[기원전 262, 위나라가 장차 진나라와 함께 한나라를 공격하려 하자, 공자 주기(史記의 無忌)가 위안희왕에게

말하기를 : “진나라는 융적(戎狄)과 풍속이 같고, 호랑지심(虎狼之心)을 지니고 있고, 포학하고 이익을 좋아하며

믿음이 없고, 예의덕행을 모르는 자들입니다. 이익만 나면 친척형제도 돌보지 않는 금수와 같은 나라입니다.

이는 천하가 모두 아는 사실로 사람에게 은덕을 베풀고 자신에게 덕을 쌓는 길이 아닙니다. 그래서 선태후는 폐위되어

심려 끝에 죽고, 양후(穰侯: 위염)는 진왕(秦王: 진소양왕)의 숙부이며 공을 누구보다 많이 세웠는데 결국 쫓겨 났고, 

경양군과 고릉군은 죄가 없는데도 모두 봉지를 빼앗겼습니다. 친척형제 사이에도 이와 같으니 하물며 원수인

적국이야 더 이상 말할 나위가 있겠습니까? 지금 대왕께서는 진나라와 함께 한나라를 공격함으로써 진나라로 인한

우환을 더욱 가까이 부르고 있습니다. 신은 심히 미혹되고 있는데도 대왕이 이를 전혀 의식하지 못한다면

이는 곧 명석하지 못한 것입니다. 군신들이 이같은 사실을 알고도 간하지 않는 것은 불충입니다.

지금 한나라는 군주가 유약하고 모후가 집정하고 있는 까닭에 대내적으로 커다란 혼란이 있습니다. 어찌 대외적으로

강한 진나라와 위나라의 군사를 막아낼 수 있겠습니까? 대왕께서는 한나라가 패망하지 않을 것으로 봅니까?

한나라가 망하면 진나라는 한나라 땅을 모두 차지하고 곧바로 대량(大梁)과 이웃할 것입니다.

대왕은 그리 되어도 안전하다고 생각할 것입니까? 대왕은 옛 땅을 취하려다가 오히려

강한 진나라로 인한 재난을 떠안게 되는 것이니 대왕은 그래도 이익이 된다고 생각할 것입니까?
진나라는 무력을 동원하지 않은 적이 없는 나라입니다. 한나라가 망한 뒤에는 필시 다시 무력을 동원할 것입니다.

용이하고 이익이 되는 것을 취하면 틀림없이 초, 조 두 나라는 공격하지 않을 것입니다.

왜 그런가 하면 태행산(太行山)을 넘고 황하를 건넌 뒤 한나라의 상당을 지나 조나라를 공격하면

이는 지난 날 알여 전투의 전철을 밟게 되기 때문입니다. 진나라는 필시 강한 조나라를 공격하지 않을 것입니다.

 

若道河內,倍鄴、朝歌,絕漳、滏之水,而以與趙兵決勝於邯鄲之郊,是受智伯之禍也.
秦又不敢. 伐楚,道涉而穀行但是里,而攻危隘之塞,所行者甚遠,而所攻者甚難,秦又弗為也.
若道河外,背大梁, 而右上蔡、召陵,以與楚兵決於陳郊,秦又不敢也.  故曰, 秦必不伐楚與趙矣, 又不攻衛與齊矣.  

韓亡之後,兵出之日, 非魏無攻矣. 秦故有懷地刑丘、之城、垝津, 而以之臨河內, 河內之共、汲莫不危矣.  

秦有鄭地,得垣雍,決熒澤,而水大梁,大梁必亡矣.王之使者大過矣,乃惡安陵氏與秦,秦之欲許之久矣.  

然而秦之葉陽、昆陽與舞陽、高陵鄰,聽使者之惡也,隨安陵氏而欲亡之.

 

[만일 하내(河內)를 지나 업(鄴)과 조가(朝歌)를 등진 채 장수와 부수를 건넌 뒤 한단의 교외에서 조나라 군사와

결전을 치르면 이는 지백이 입은 재난을 답습하게 됩니다. 진나라는 감히 이를 반복하려 하지 않을 것입니다.

또 초나라를 공격하려면 사곡(斜谷: 섬서성)을 지나 3천 리나 더 나아가 민애지색(하남성과 호북성에 있는 요새)을

공격해야 합니다. 이는 길도 매우 멀고 공격하는 것도 쉽지 않습니다. 진나라는 결코 이같이 하지 않을 것입니다.

진나라가 초나라와 결전을 치르려면 하외를 지난 뒤 대량을 등진 채 우편에 있는 상채(上蔡)와 소릉(召陵)을 끼고

진(陳)의 교외에서 싸워야 하는데 진나라는 이같이 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래서 진나라는 반드시 초, 조 두 나라를

공격하지 않을 것이라고 말씀드린 것입니다. 진나라는 나아가 위(衛)나라와 제나라도 공격하지 않을 것입니다.

한나라가 망한 뒤 진나라 군사가 출병하면 위나라를 빼놓고는 공격할 대상이 없는 것입니다.
진나라는 회(懷: 하남성 무척현)와 모(茅: 하남성 획가현), 형구(邢丘: 하남성 온현)를 보유하고 있는 데다가

궤진(백마진)에 성을 쌓았습니다. 이로써 하내로 임하면 하내의 공(共: 하남성 휘현)과 급(汲: 하남성 급현) 땅은

위태로워지지 않을 수 없습니다. 진나라는 옛 정나라 땅을 보유하고 있어 만일 원옹(垣雍: 하남성 원양현 서쪽)을

얻고, 형택(熒澤: 滎澤으로 하남성 형양현)을 끊은 뒤 대량에 수공을 가하면 대량은 필시 함락되고 말 것입니다.

대왕의 사자가 진나라에서 위나라의 속국인 안릉(하남성 언성현)의 군주를 제대로 대우하지 못한 것은 큰 잘못입니다.

진나라가 허(許: 하남성 허창) 땅을 탐한지는 이미 오래 되었습니다. 게다가 진나라의 섭양(葉陽: 하남성 섭현)과

곤양(昆陽)은 무양(舞陽: 하남성 무양현)과 서로 이웃하고 있습니다. 진나라가 만일 위나라의 사자가

안릉군(安陵君)에 대해 나쁘게 말하는 것을 들으면 안릉을 무너뜨린 뒤 허도 취하려 할 것입니다.


秦繞舞陽之北,以東臨許,則南國必危矣. 南國雖無危,則魏國豈得安哉?

且夫憎韓不受安陵氏可也,夫不患秦之不愛南國非也. 異日者,秦乃在河西,晉國之去梁也,

千里有餘,河山以蘭之,有周、韓而間之. 從林軍以至於今,秦十攻魏,五入國中,邊城盡拔.

文臺墮,垂都焚,林木伐,麋鹿盡,而國繼以圍. 又長驅梁北,東至陶、衛之郊,北至乎闞,

所亡乎秦者,山北、河外、河內,大縣數百,名都數十.  秦乃在河西,晉國之去大梁也尚千里,而禍若是矣.

又況於使秦無韓而有鄭地,無河山以蘭之,無周、韓以間之,去大梁百里,禍必百此矣. 

異日者,從之不成矣,楚、魏疑而韓不可得而約也. 今韓受兵三年矣,秦撓之以講,韓知亡,猶弗聽,

投質遇趙,而請為天下雁行頓刃.

 

[진나라가 무양의 북쪽을 돌아서 동쪽의 허 땅에 임하면 남국(南國: 南都로 곧 대량)이 반드시 위태로워질 것입니다.

비록 남국이 위태롭지 않을지라도 위나라가 어찌 평안할 수 있겠습니까? 한나라를 미워한 나머지 안릉군을

받아들이지 않는 것은 가할지라도 진나라의 남국 위협 가능성을 우려하지 않는 것은 옳지 않습니다.
전에 진나라는 겨우 하서(河西: 섬서성 동북부)에 있었고 진국(晉國: 안읍)은 대량에서 1천 리나 떨어져 있었습니다.

대량은 산하에 둘러싸여 있고, 주(周)나라와 한나라가 그 사이에 위치해 있었습니다. 그러나 임중(林中)의 싸움에서

지금까지 진나라는 모두 7번이나 위나라를 공격하고, 5번이나 원유에 쳐들어오고, 변경의 성읍을 모두 공략하고,

문대(文臺)를 무너뜨리고, 수도(垂都)를 불태우고,재목을 모두 베어버리고, 고라니와 사슴을 모두 사라지게 만들고,

마침내는 국도를 포위한 것입니다. 다시 진나라 군사는 승승장구하여 대량의 북쪽으로 진출하여 동쪽으로는 도(陶)와

위(衛)나라 도읍 복양의 교외에 이르고, 북쪽으로는 감( 산동성 문상현 서남쪽)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진나라 군사에게 공략된 곳으로는 산남(崇山의 남쪽)과 산북(山北), 하외(河外), 하내(河內)의 대현만도 수백 개이고,

명도(名都)도 수십 개나 됩니다. 진나라가 하서에 있고 진국(晉國)이 대량에서 1천 리나 떨어져 있었는데도

진나라로 인한 화가 바로 이와 같았습니다. 하물며 진나라로 하여금 한나라를 멸망하게 하고

정나라의 옛 땅을 취하게 한다면 산하의 장벽이 사라지고, 주나라와 한나라의 완충지가 사라지고,

대량으로부터의 거리도 1백 리로 좁혀지게 되니 필시 그 화가 1백 배나 더할 것입니다. 
지난날 합종이 성사되지 못한 것은 초, 조 두 나라가 위나라를 의심하고 진나라와 가까운 한나라를 믿지 못해

맹약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지금 한나라는 진나라에게 침공당한지 이미 3년이나 됩니다.

진나라는 지금 한나라를 굴복시켜 강화하고자 하나 한나라는 멸망을 각오하고 이를 거절한 채 조나라에 인질을

보내고 천하를 위해 선봉에 설 각오로 무기를 정비하고 있습니다.]


以臣之觀之,則楚、趙必與之攻矣. 此何也?則皆知秦之無窮也,非盡亡天下之兵,而臣海內之民, 必不休矣. 

是故臣愿以從事乎王,王速受楚、趙之約,而挾韓、魏之質,以存韓為務,因求故地於韓,韓必效之. 

如此則士民不勞而故地得,其功多於與秦共伐韓,然而無與強秦鄰之禍.

 

[신이 보건대 초, 조 두 나라는 장차 한나라와 더불어 진나라를 공격할 것입니다. 이는 이들 나라 모두 진나라가

끝없이 욕심을 부리면서 천하 제후국의 군사를 남김없이 섬멸하고 해내의 백성을 모두 신하로 삼기까지는

결코 싸움을 멈추려 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신은 합종으로 대왕을 섬기려 하는 것입니다.

대왕은 속히 초, 조 두 나라의 맹약을 받아들이고, 한나라의 인질을 옆에 낀 채 한나라의 존속을 위해 노력해야

합니다. 그러면서 위나라 고지(故地)의 반환을 한나라에 요구하면 한나라는 필시 이를 돌려줄 것입니다.

이같이 하면 사민(士民)이 수고를 하지 않고도 옛 땅을 찾을 수 있고 그 성과는 진나라와 함께 한나라를 치는 것보다

많을 것입니다. 나아가 강한 진나라와 접경하는 재난도 사라지게 됩니다. 지금 대왕은 한나라를 존속시키고,

위나라를 평안케 하고, 천하의 제후들에게 이로움을 안겨주기에 가장 좋은 기회를 맞이했습니다.

공(共)과 영(寧: 하남성 획가현)에서 한나라의 상당으로 통하는 길을 만들고, 길이 뚫리면 관문을 설치한 후

출입하는 자들에게 과세하도록 하십시오. 이는 위나라가 한나라의 인질을 얻은 데다가 한나라의 상당마저

저당잡는 셈이 됩니다. 위, 한 두 나라가 함께 관세(關稅)를 얻게 되면 나라를 부유하게 만드는데 족합니다.

그리되면 한나라는 필시 위나라를 고맙게 여기고, 사랑하고, 존중하고, 두려워할 것입니다.

이로써 한나라는 필시 위나라를 배반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리되면 한나라는 위나라의 현이 되는 셈입니다.

위나라가 한나라를 얻어 현으로 삼게 되면 대량을 보호할 수 있고, 하외 또한 필시 평안해질 것입니다.

그러나 지금 한나라가 멸망하면 양주(兩周)는 위험에 처하게 되고, 안릉은 진나라 차지가 되고,

초, 조 두 나라는 대파(大破: 여기의 ‘파’는 패한다는 뜻임)하고, 위(衛), 제 두 나라는 몹시 두려워하고,

천하의 제후들은 서쪽 진나라로 달려가 입조하며 칭신할 날이 조만간 닥칠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葉陽君約魏

 

葉陽君約魏, 魏王將封其子, 謂魏王曰:「王嘗身濟漳, 朝邯鄲, 抱葛薜· 陰· 成以為趙養邑, 而趙無為王有也.  

王能又封其子問陽姑衣乎? 臣為王不取也. 」魏王乃止.

 

[기원전 288, 섭양군(陽君: 괴)이 위나라와 결맹하자, 위소왕이 장차 섭양군의 아들을 봉하려고 했다.

그러자 어떤 사람이 위소왕에게 말하기를 : “대왕은 앞서 몸소 장수를 건너 한단에 입조하면서 갈얼과 음성 땅을 바쳐

조나라의 양읍(養邑)으로 삼게 했지만 조왕은 대왕에게 아무런 땅도 주지 않았습니다. 그런데도 대왕은 또 섭양군의 아들을 하양(何陽: 하남성 맹현 서쪽)과 고밀(姑密: 하남성 맹현 서북쪽)에 봉하려는 것입니까?

신은 대왕을 위해 이같이 하지는 않을 것입니다.”라고 하자. 이에 위소왕이 당초의 생각을 거두었다.]

 

 

 

秦使趙攻魏

 

秦使趙攻魏,魏謂趙王曰:「攻魏者,亡趙之始也. 昔者,晉人欲亡虞而伐虢,伐虢者,亡虞之始也.  

故荀息以馬與璧假道於虞,宮之奇諫而不聽,卒假晉道. 晉人伐虢,反而取虞.

故《春秋》書之, 以罪虞公. 今國莫強於趙, 而并請勿、秦, 王賢而有聲者相之, 所以為腹心之疾者, 趙也. 

魏者,趙之虢也;趙者,魏之虞也. 聽秦而攻魏者,虞之為也. 愿王之熟計之也.」

 

[기원전 290, 진나라가 조나라를 시켜 위나라를 공격하게 하자, 위나라가 사람을 조혜문왕에게 보내 말하게 하기를

“위나라를 공격하는 것은 조나라 멸망의 시작이 됩니다. 옛날에 진(晉)나라가 우(虞)나라를 멸망시키기 위해 먼저

괵(虢)나라를 공격하였습니다. 괵나라에 대한 공격은 우나라를 멸망시키기 위한 시작이었습니다.

그때 진나라 대부 순식(荀息)은 말과 구슬을 주어 우나라로부터 길을 빌렸습니다.

우나라 대부 궁지기(宮之奇)가 이를 간했지만 우공(虞公)은 이를 듣지 않고 결국 진(晉)나라에 길을 빌려 주었습니다.

이에 진나라는 괵나라를 멸하고 돌아오는 길에 우나라를 취했습니다. 이에 「춘추」는 이를 기록하고

우공의 죄를 물은 것입니다. 지금 여러 제후국들 중 조나라보다 강한 나라는 없어 조나라는 제, 진 두 나라와

어깨를 나란히 하고 있습니다. 또한 조왕은 현명하고 성망(聲望)이 높은 사람을 재상으로 삼고 있습니다.

진나라에게 복심지질(腹心之疾)은 바로 조나라인 것입니다. 위나라는 조나라에게 괵나라에 해당하고,

조나라는 위나라에게 우나라에 해당됩니다. 진나라의 말을 듣고 위나라를 치는 것은 우나라의 잘못을 답습하는

것입니다. 원컨대 대왕께서는 깊이 헤아려보시기 바랍니다.”라고 하였다.]

 

 

魏太子在楚

 

魏太子在楚.  謂樓子於鄢陵曰:「公必且待齊、楚之合也,以救皮氏. 今齊、楚之理,必不合矣.

彼翟子之所惡於國者,無公矣. 其人皆欲合齊、秦握楚以輕公,公必謂齊王曰:

『魏之受兵,非秦實首伐之也,楚惡魏之事王也,故勸秦攻魏.』
齊王故欲伐處,而又怒其不己善也,必令魏以地聽秦而委. 以張子之強,有秦、韓之重,齊王惡之,而魏王不敢據也. 

今以齊秦之重,外楚以輕公,臣為公患之. 鈞之出地,以為和於秦也, 豈若由楚乎?

秦疾攻楚,楚還兵,魏王必懼,公因寄汾北以予秦而為和, 合親以孤齊,秦、楚重公,公必為相矣. 

臣意秦王與樗里疾之欲之也,臣請為公說之.」

 

[기원전 306, 위양왕의 태자가 초나라에 인질로 가 있었다. 이때 어떤 사람이 언릉에서 위나라 대신 누자(樓鼻)에게 

말하기를 : “공은 반드시 제, 초 두 나라가 연합하는 것을 기다렸다가 피씨(皮氏: 산서성 하진현)를 구하려 하지만 

지금 형세상 두 나라의 생각은 반드시 서로 다를 것이오. 위나라 상국 적자(翟子: 翟强)가 위나라에서 가장

미워하는 사람으로 공보다 더한 사람은 없소. 적자의 일당은 모두 제, 진 두 나라와 결탁해 초나라를 따돌리고

공을 약화시키려 하고 있소. 이들은 필시 제왕(제선왕)에게 말하기를, ‘진나라가 위나라를 치고 피씨를 포위한 것은

본래 진나라가 위나라를 칠 의도로 그러는 것이 아닙니다. 초나라는 위나라가 대왕을 섬기는 것을 싫어한 나머지

진나라를 부추겨 위나라를 공격하게 한 것입니다’라고 할 것이오. 무릇 제왕은 본래 초나라를 공격하고자 했는데

이번에 초나라가 제대로 대해 주지 않는데 화를 내게 되면 필시 위나라를 강요해 땅을 진나라에 떼어주고

진나라의 제의대로 강화토록 만들 것이오. 전에 장자(張子: 장의)가 막강한 위세를 지니고 있고 진, 한 두 나라가

장자를 지지했으나 제왕이 싫어하자 위왕은 장자를 받아들이지 않았소.

그러나 지금 적자의 무리는 제, 진 두 나라의 지지를 받고 있고, 그대가 기대고 있는 초나라는 위나라와 소원하오.

이는 곧 공의 지위를 낮추게 만들고 말 것이오. 나는 공을 위해 이를 걱정하는 것이오. 땅을 할양하여 진나라와

강화하는 것이라면 제나라를 통하든, 초나라를 통하든 마찬가지이니 초나라를 통하는 것이 어떻겠소.

진나라가 갑자기 초나라를 공격하고 초나라가 철군하면 위왕은 필시 크게 두려워할 것이오.

이때 공이 분북(汾北: 피씨)을 초나라를 통해 진나라에 주고 강화하면 초, 위 두 나라의 우의를 돈독히 하고

제나라를 고립시킬 수 있소. 그러면 공은 진, 초 두 나라에 중용되어 필시 위나라 상국이 될 수 있을 것이오.

내가 보건대 진왕(秦王: 진무왕)과 저리질도 공이 위나라 상국이 되는 것을 바라고 있소.

내가 한번 공을 위해 저리질을 설득해 보도록 하겠소.”라고 하였다.]

 

乃請樗里子曰:「攻皮氏,此王之首事也,而不能拔,天下且以此輕秦.

且有皮氏,於以攻韓、魏,利也.」 樗里子曰:「吾已合魏矣,無所用之.」
對曰:「臣愿以鄙心意公,公無以為罪. 有皮氏,國之大利也,而以與魏,公終自以為不能守也,
故以與魏.  

今公之力有餘守之,何故而弗有也?」 樗里子曰:「奈何?」

 

[그리고는 곧 저리질을 만나 설득하기를 : “피씨를 공격한 것은 대왕이 중시하는 일입니다. 따라서 이를 함락하지

못하면 천하의 제후들이 진나라를 경시하게 될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피씨를 얻게 되면 한, 위 두 나라를 공격하는 데

더 없이 편할 것입니다.”라고 하자.  저리질이 말하기를 : “나는 위나라와 손을 잡아 피씨를 공격하지 않을 것이오.

피씨를 공격하는 것은 아무 소용이 없소.”라고 하였다.
이에 그 사람이 묻기를 : “원컨대 저의 생각으로 공의 속셈을 헤아려 보고자 하니 공은 이로 인해 오해하지 

말기 바랍니다. 피씨를 얻게 되면 진나라서는 큰 이익입니다. 그런데도 이를 공격치 않고 위나라에 주어 버리는 것은

결국 끝내 이를 지킬 수 없다고 판단하고 위나라에 주어 버린 셈이 됩니다.

지금 공의 역량은 피씨를 지키고도 남습니다. 그런데도 왜 이를 취하지 않는 것입니까?”라고 하자.
저리자가 되묻기를 : “어떻게 그럴 수 있다는 것이오?”라고 하였다.]

 

曰:「魏王之所恃者,齊、楚也;所用者,樓?、翟強也.

今齊王謂魏王曰:『欲誕攻於齊王兵之辭也,是弗救矣.』楚王怒於魏之不用樓子,而使翟強為和也,怨顏已絕之矣. 

魏王之懼也見亡,翟強欲合齊、秦外楚,以輕樓?;樓?欲合秦、楚外齊,以輕翟強.  

公不如按魏之和,使人謂樓子也:『子能以汾北與我乎?請合於楚外齊,以重共也,此吾事也.』樓子與楚王必疾矣.
又謂翟子:『子能以汾北與我乎? 必為合於齊外於楚,以重公也.』翟強與齊王必疾矣.

是公外得齊、楚以為用,內得樓?、翟強以為佐,何故不能有地於河東乎?」

 

[그러자 그 사람이 설명하기를 : “위왕이 믿고 있는 것은 제, 초 두 나라입니다. 이로 인해 위왕이 발탁한 신하는

누비(樓鼻)와 적강(翟强)입니다. 지금 제왕은 위왕에게 말하기를, ‘진나라와 강화하든, 진나라를 공격하든

이 모든 것이 나에게 달려 있소’라고 했습니다. 이는 군사권을 쥐고 있는 자의 외교적 언사로 실은 위나라를 구원하지

않겠다는 뜻과 같습니다. 초왕(楚王: 초회왕)은 위나라가 누자 대신 적강을 시켜 진나라와 강화한 것을 보고

위나라에 원망을 품고 단교하려 하고 있습니다. 제나라는 구원에 나서지 않고 초나라는 원망을 품게 되자,

망국의 조짐이 나타나게 되었습니다. 이에 위왕은 이를 두려워하고 있습니다. 적강은 제, 진 두 나라와 연합해

초나라를 따돌리고 누비를 약화시키려 하는데 반해 누비는 진, 초 두 나라와 연합해 제나라를 따돌리고

적강을 약화시키려 하고 있습니다. 그러니 공은 위나라의 강화 움직임를 저지한 뒤 사람을 보내 누자에게 말하기를,

‘분북을 나에게 떼어 주면 초나라와 연합해 제나라를 따돌리고 공을 중용토록 도와주겠소. 이는 내가 능히 할 수 있는

일이오’라고 하느니만 못합니다. 그리하면 틀림없이 누자가 초왕과 함께 급히 반응하고 나설 것입니다.

또 적자에게 말하기를, ‘분북을 나에게 떼어 주면 제나라와 연합해 초나라를 따돌이고 공을 중용토록 도와주겠소’

라고 하십시오. 적강이 틀림없이 제왕과 함께 급히 반응하고 나설 것입니다. 이는 곧 공이 밖으로는 제, 초 두 나라를

끌어들여 수족으로 삼고 안으로는 누비와 적강을 손에 넣어 공을 보좌하게 만드는 셈이 됩니다.

그렇게 되면 어찌 하동의 피씨를 차지하지 못할 리 있겠습니까?”라고 하였다.]

 

 

 

   魏策 四

 

 

獻書秦王

獻書秦王曰:「昔竊聞大王之謀出事於梁,謀恐不出於計矣,愿大王之熟計之也. 梁者,山東之要也. 

有蛇於此,擊其尾,其受救;擊其首. 其尾救;擊其中身首尾皆救.

今梁王,天下之中身也. 秦攻梁者,是示天下要斷山東之脊也,是山東首尾皆救中身之時也.
山東見亡必恐,恐必大合,山東尚強,臣見秦之必大憂可立而待也. 臣竊為大王計,不如南出.
事於南方,其兵弱,天下必能救,地可廣大,國可富,兵可強,主可尊. 王不聞湯之伐桀乎?

試之弱密須氏以為武教,得密須氏而湯之服桀矣. 今秦國與山東為讎,不先以弱為武教,兵必大挫,國必大憂.」

秦果南攻藍田、鄢、郢.

 

[기원전 278, 어떤 사람이 진소왕에게 글을 올리기를 : “지난번 신이 듣기로 대왕께서 장차 위나라로 출병하는

계책을 세우셨다는데 그 계책이 잘못 되지 않을까 우려됩니다. 원컨대 대왕께서는 깊이 헤아려 보시기 바랍니다 

위나라는 산동의 허리에 해당합니다. 여기에 뱀이 있을 경우 그 꼬리를 치면 머리를 구할 수 있고, 그 머리를 치면

꼬리를 구할 수 있고, 그 몸통을 치면 머리와 꼬리를 모두 구할 수 있습니다. 지금 위왕은 천하의 몸통에 해당합니다.

위나라를 치는 것은 천하의 제후들에게 산동의 허리를 끊는 것을 명시적으로 보여주는 것입니다.

이는 산동의 머리와 꼬리가 모두 그 몸통을 구하도록 만드는 것입니다. 산동의 제후들은 위나라가 망할 조짐을 보이면

모두 두려워한 나머지 반드시 크게 연합할 것입니다. 신이 보건대 산동이 강해지면 진나라의 우환은 곧바로 닥칠

것입니다. 대왕을 위한 계책으로는 초나라로 출병하느니만 못합니다. 초나라 군사는 약해 천하의 제후들이 이를

구할 수 없을 것입니다. 그리 되면 가히 땅을 넓히고, 나라를 부유케 하고, 병력을 강하게 하고, 대왕의 위세를

높일 수 있습니다. 대왕께서는 상탕(商湯)이 하걸(夏桀)을 친 얘기를 듣지 못했습니까? 상탕은 하걸을 치기 전에

약한 밀수씨(密須氏: 감숙성 영대현)을 대상으로 미리 시험 삼아 용병함으로써 무력을 정비한 적이 있습니다.

밀수씨를 멸망시킨 후에 비로소 하걸을 정복했던 것입니다. 지금 진나라는 산동의 제후국들과 원수가 되어 있습니다.

우선 약한 초나라를 대상으로 미리 시험 삼아 용병하여 무력을 정비치 않으면 크게 낭패를 보아

나라에 큰 우환을 초래할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진나라가 과연 남쪽으로 초나라의 남전, 언, 영을 공격하였다.]

 

 

八年謂魏王

 

八年,謂魏王曰:「昔曹恃齊而輕晉, 齊伐厘、莒而晉人亡曹. 繒恃齊以悍越, 齊和子亂而越人亡繒.

鄭恃魏以輕韓,伐榆關而韓氏亡鄭. 原恃秦、翟以輕晉,秦、翟年穀大凶而晉人亡原.

中山恃齊、魏以輕趙,齊、魏伐楚而趙亡中山.  此五國所以亡者, 皆其所恃也.

非獨此五國為然而已也,天下之亡國皆然矣. 夫國之所以不可恃者多, 其變不可勝數也.

​或以政教不修,上下不輯,而不可恃者;或有諸侯鄰國之虞,而不可恃者;或以年穀不奉,

畜積竭盡,而不可恃者;或化於利,比於患. 臣以此知國之不可必恃也. 今王恃楚之強,

而信春申君之言,以是質秦,而久不可知. 即春申君有變,是王獨受秦患也.

即王有萬乘之國,而以一人之心為元也. 臣以此為不完,愿王之熟計之也.」

 

[기원전 241, 8년, 어떤 사람이 위경민왕에게 말하기를 : “옛날 조(曹)나라는 제나라를 믿고 진(晉)나라를 경시했다가

제나라가 이(釐: 萊), 거를 공격하는 틈을 탄 진(晉)나라에 의해 멸망했습니다. 증(繒: 산동성)나라는 제나라를 믿고

월나라를 경시했다가 제나라에 화자(和子: 田和)의 난이 일어난 틈을 탄 월나라에 의해 멸망했습니다.

정나라는 위나라를 믿고 한나라를 경시했다가 위나라가 유관(楡關)을 치는 틈을 탄 한나라에 의해 멸망했습니다.

원(原)나라는 진(秦)나라와 적인을 믿고 진(晉)나라를 경시했다가 대흉년이 든 틈을 탄 진나라에 의해 멸망했습니다.

중산국은 제, 위 두 나라를 믿고 조나라를 경시했다가 제, 위 두 나라가 초나라를 치는 틈을 탄 조나라에 의해

멸망했습니다. 이들 5국이 망한 것은 모두 남에게 의지했기 때문입니다. 비단 이들 5국 뿐만 아니라 천하의 모든

망국(亡國)이 한결같이 그러했습니다. 국가가 남에게 의지해서는 안 될 이유는 매우 많아 그 종류를 일일이 셀 수 없을

정도입니다. 정교(政敎)가 정비되지 않았거나, 상하가 화목치 않은 것이 이에 해당합니다. 이웃 제후국의 우환도

이에 해당합니다. 혹은 흉년으로 양식이 부족하거나, 비축한 곡식이 바닥 나거나 하는 것도 이에 해당합니다.

혹은 이익이 되거나 화난으로 다가오는 것도 이에 해당합니다. 이에 신은 남에게 결코 의지해서는 안된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지금 대왕은 초나라의 강대함에 기대고 있습니다. 그러나 춘신군(春申君: 황헐)의 말을 믿은 나머지

진나라의 공격 표적이 되고 있습니다. 시간이 많이 흐르면 그 변화를 예측하기 어렵습니다.

만일 춘신군의 마음이 변하게 되면 대왕만 홀로 진나라로 인한 화난을 뒤집어쓰게 됩니다. 대왕은 만승지국을

보유했음에도 춘신군 한 사람의 마음만 좇고 있는 것입니다. 신이 생각하건대 이는 만전지계가 아닙니다.

원컨대 대왕께서는 이점을 깊이 살펴보시기 바랍니다.”라고 하였다.]

 

 

魏王問張旄

 

魏王問張旄曰:「吾欲與秦攻韓,何如?」張旄對曰:「韓且坐而胥亡乎?且割而從天下乎?」

王曰:「韓且割而從天下.」張旄曰:「韓怨魏乎?怨秦乎?」王曰:「怨魏.」

張旄曰:「韓強秦乎?強魏乎?」王曰:「強秦.」

張旄曰:「韓且割而從其所強,與所不怨乎?且割而從其所不強,與其所怨乎?」
王曰:「韓將割而從其所強,與其所不怨.」張旄曰:「攻韓之事,王自知矣.」

 

[기원전 262, 위안희왕이 대신 장모(張旄)에게 묻기를 : “과인은 진나라와 연합해 한나라를 치고자 하는데

그대는 어찌 생각하오?”라고 하자.  장모가 대답하기를 : “한나라는 과연 나라가 망하는 것을 좌시하겠습니까?

아니면 땅을 할양해서라도 천하의 제후들과 결맹하겠습니까?”라고 되물었다.
위안희왕이 대답하기를 : “땅을 할양해서라도 천하의 제후들과 결맹할 것이오.”라고 하였다.
장모가 묻기를 : “한나라는 위나라를 원망하겠습니까? 아니면 진나라를 원망하겠습니까?”라고 하자.
위안희왕이 대답하기를 : “위나라를 원망할 것이오.”라고 하였다.
장모가 묻기를 : “한나라는 진나라를 강하다고 생각하겠습니까? 위나라를 강하다고 생각하겠습니까?”라고 하자.
위안희왕이 대답하기를 : “진나라를 강하다고 생각할 것이오.”라고 하였다.
이에 장모가 다시 묻기를 : “한나라는 강하다고 생각되고 원망하지 않는 나라와 결맹하겠습니까? 아니면 약하다고

생각되고 원망하는 나라와 결맹하겠습니까?”라고 하자.  

위안희왕이 대답하기를 : “강하다고 생각되고 원망하지 않는 나라와 결맹할 것이오.”라고 하였다.
그러자 장모가 말하기를 : “이로써 한나라 공벌의 당부(當否)에 관해 대왕 스스로 판단했을 줄 압니다.”라고 하였다.]

 

 

客謂司馬食其

 

客謂司馬食其曰:「慮久以天下為可一者,是不知天下者也. 欲獨以魏支秦者,是又不知魏者也.
謂茲公不知此兩這, 又不知茲公者也. 然而茲共為從, 其說何也?從則茲公重, 不從則茲公輕,

茲公之處重也, 不實為期. 子何不疾及三國方堅也,自賣於秦,秦必受子.

不然,構者將圖子以合於秦,是取子之資,而以資子之讎也.」

 

[한 세객이 위나라 대신 사마이기(司馬食其)에게 말하기를 : “무릇 제후들이 가히 하나로 연합될 수 있다고 생각하는

자는 제후들을 제대로 파악할 줄 모르는 자요. 위나라 단독으로 진나라에 대항케 하려는 자는 위나라를 제대로

알지 못하는 자요. 그대가 두 가지를 모른다고 말하는 자는 그대를 제대로 모르는 자요. 그대가 합종을 주장하는 것은

무슨 까닭이겠소. 합종을 하면 그대가 존중받고 그렇지 못하면 그대가 경시되오. 그러나 그대가 합종을 성사시키려

해도 반드시 성공하는 것도 아니오. 그대는 왜 서둘러 3국(조, 위, 초)과 친교하여 함께 진나라를 공격하려고 하지

않는 것이오. 3국과 친교한 뒤 그대는 은밀히 진나라와 관계를 맺도록 하시오. 그러면 진나라는 필시 그대를 받아들일

것이오. 그렇지 않으면 연횡을 주장하는 자들은 오히려 그대가 믿고 의지하는 것을 이용해 진나라와 연합할 것이오.

이는 연횡을 주장하는 자들을 돕는 꼴이 되오.”라고 하였다.]

 

 

魏秦伐楚

 

魏、秦伐楚,魏王不欲. 樓緩謂魏王曰:「王不與秦攻楚,楚且與秦攻王. 王不如令秦、楚戰,王交制之也.」 

[기원전 306, 위, 진 두 나라가 초나라를 공격하고자 했다. 그러나 위양왕이 내심 이를 꺼리자 누완(樓緩)이

말하기를 : “대왕이 진나라와 함께 초나라를 치지 않으면 오히려 초나라는 진나라와 더불어 대왕을 공격할 것입니다.

대왕은 진, 초 두 나라가 서로 싸우도록 만든 뒤 일거에 양쪽을 제압하느니만 못합니다.”라고 하였다.]

 

 

穰侯攻大梁

 

侯攻大梁,乘北郢,魏且從. 謂穰侯曰:「君攻楚得宛穰以廣陶,攻齊得剛、博以廣陶,得許、鄢陵以廣陶,

秦王不問者,何也?以大梁之未亡也. 今日大梁往,許、鄢陵必議,議則君必窮. 為君計者,勿攻便.」  

 

[기원전 275, 양후가 대량을 공격하고 북영(北地)으로 올라가려 하자 위왕이 이를 순순히 받아들였다.

이때 어떤 사람이 양후에게 말하기를 : “군은 초나라를 공격하여 완(宛), 양(穰)을 얻어 도(陶) 땅을 넓혔고,

제나라를 공격하여 강(剛: 剛壽), 박(博)을 얻어 도 땅을 넓혔고, 다시 허(許), 언릉을 얻어 도 땅을 넓혔습니다.

진왕이 이를 묻지 않는 것은 무슨 까닭이겠습니까? 대량이 아직 함락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지금이라도 대량이

함락되면 군이 허, 언릉을 취해서는 안된다는 얘기가 반드시 나올 것입니다. 이같은 얘기가 나오면 군은 필시

궁지에 몰리게 될 것입니다. 군을 위한 계책을 말하면 공격하지 않는 것이 이익이 될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白謂新城君 

 

白謂新城君曰:「夜行者能無為奸, 不能禁狗使無吠己也. 故臣能無議君於王, 不能禁人議臣於君也.」

 

[위나라 사람 백규(白珪: 白丹)가 신성군(新城君)에게 말하기를 : “야행하는 사람은 능히 사악한 짓을 하지 않을 수

있으나, 개가 자신을 보고 짖는 것을 금할 수는 없습니다. 그래서 신은 능히 대왕 앞에서 군을 이러쿵 저러쿵 논의하지 않을 수 있으나, 사람들이 군 앞에서 저를 이러쿵 저러쿵 논의하는 것을 금할 수는 없습니다.”라고 하였다.]

 

 

秦攻韓之管

 

秦攻韓之管,魏王發兵救之. 昭忌曰:「夫秦強國也,而韓、魏壤梁,不出攻則已,若出攻,非於韓也必魏也. 

今幸而遇韓,此魏之福也. 王若救之,夫解攻者,必韓之管也;致攻者,必魏之梁也.」

魏王不聽,曰:「若不因救韓,韓怨魏,西合於黔,秦、韓為宜,則魏危.」

遂救之.  秦果釋管而攻魏. 魏王大恐,謂昭忌曰:「不用子之計禍至,為之奈何?」
昭忌乃為之見秦王曰:「臣聞明主之聽也,不以挾私為政,是參行也. 愿大王無攻魏,聽臣也.」

秦王曰:「何也?」 昭忌曰:「山東之從,時合時離,何也哉?」秦王曰:「不識也.」

 

[기원전 283, 진나라가 한나라의 관(管: 하남성) 땅을 공격하자 위소왕이 군사를 일으켜 한나라를 구원하고자 했다.

그러자 위나라 대신 소기(昭忌)가 말하기를 : “무릇 진나라는 강국이고 한, 위 두 나라는 서로 접경하고 있습니다.

진나라가 공격하지 않으면 그만이지만 만일 공격해 오면 그 대상은 한나라가 아니면 반드시 위나라일 것입니다.

지금 다행히도 한나라를 공격하고 있으니 이는 위나라의 복입니다. 만일 대왕께서 이를 구하게 되면 

공격을 면하는 것은 한나라의 관 땅이나 공격을 초래하는 것은 위나라의 대량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라고 하였다.

그러나 위소왕은 이를 듣지 않고 말하기를 : “만일 한나라를 구하지 않으면 한나라는 위나라를 원망하며

서쪽 진나라와 연합할 것이오. 진, 한 두 나라가 하나가 되면 위나라는 위험해질 수밖에 없소.”라고 하며.
마침내 한나라를 구원했다. 그러자 진나라는 과연 관 땅을 포기하고 위나라의 대량을 공격했다.

이에 위소왕이 크게 두려워한 나머지 소기에게 묻기를 : “그대의 계책을 쓰지 않아 화를 입게 되었소.

이를 어찌하면 좋겠소?”라고 하자.  소기가 위나라를 위해 진소양왕(秦昭襄王)을 만나 말하기를 :
“신이 듣기에 총명한 임금은 정사를 처리함에 있어 사사로움에 의거해 정사를 처리하지 않는다고 들었습니다.

이는 여러 사람의 얘기를 두루 들은 뒤 결정을 내린다는 뜻입니다. 원컨대 대왕께서는 위나라 공격을 멈추고

신의 건의를 받아주기 바랍니다.”라고 하자.  진소양왕이 말하기를 : “어떤 내용이오?”라고 하였다.
이에 소기가 묻기를 : “산동의 제후들이 합종하면서 때로는 연합하고 때로는 떨어지는 것은 무슨 까닭이겠습니까.”

라고 하자.  진소양왕 대답하기를 : “잘 모르겠소.”라고 하였다.]

 

曰:「天下之合也,以王之不必也;其離也,以王之必也. 今攻韓之管,國危矣,未卒而移兵於梁,

合天下之從,無精於此者矣. 以為秦之求索,必不可支也. 故為王計者,不如齊、趙. 秦已制趙,

則燕不敢不事秦,荊、齊不能獨從. 天下爭敵於秦,則弱矣.」 秦王乃止. 

 

[그러자 소기가 말하기를 : “천하의 제후들이 연합하는 것은 대왕의 진나라가 하나의 나라만 공격하지 않을 때

이루어지고 분리될 때는 진나라가 그 중 어느 한 나라만 공격할 때 나타납니다. 지금 한나라의 관 땅을 공격하자

한나라가 매우 위태롭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관 땅에 대한 공략이 마무리되지도 않았는데 중도에 군사를 대량으로

옮겼습니다. 이에 천하의 제후들이 대왕의 움직임을 보고 합종을 촉구하기에 이보다 더 좋은 계기는 없다고

생각하게 된 것입니다. 이들은 진나라의 할양 요구를 결코 견딜 수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습니다.

지금 대왕을 위한 계책으로는 조나라를 제어하느니만 못합니다. 진나라가 조나라를 제어하면 연나라는 감히

진나라를 섬기지 않을 수 없고, 초, 제 두 나라도 단독으로는 합종을 이뤄 진나라에 대적할 수 없게 됩니다.

천하의 제후들이 연합하지 못하면 그 세력이 고단해지고 말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이에 진소양왕이 위나라에 대한 공격을 중지했다.]

 

 

秦趙構難而戰

 

 

秦、趙構難而戰.  謂魏王曰:「不如齊、趙而構之秦. 王不構趙,趙不以毀構矣;而構之秦,趙必復鬭,必重魏;

是并制秦、趙之事也.  王欲焉而收齊、趙攻荊,欲焉而收荊、趙攻齊,欲王之東長之待之也.」

 

[진, 조 두 나라가 교전할 때 어떤 사람이 위왕에게 말하기를 : “조나라를 도와 강화를 맺느니만 못합니다. 

진왕이 조나라와 강화하지 않으려 들면 조나라는 오직 싸우는 길밖에 없습니다. 그

러면 조나라는 배수진을 치고 싸울 수밖에 없어 틀림없이 패잔병으로 강화하려 들지는 않을 것입니다.

그러면 반드시 진, 조 두 나라는 다시 싸울 수밖에 없으니 이미 강화를 주선코자 노력한 위나라를 중시할 수밖에

없습니다. 이는 진, 조 두 나라를 동시에 제어하는 셈이 됩니다. 대왕이 그리 하고 싶으면 제나라와 연합하십시오.

그러면 조나라는 제나라를 잃고 고립된 초나라를 공격할 것입니다. 만일 천하의 제후들을 제어하고 싶으면

초나라와 연합하십시오. 그러면 조나라는 초나라를 잃고 고립된 제나라를 공격할 것입니다.

바라건대 대왕께서는 동방의 맹주가 되십시오. 그날을 기다리도록 하겠습니다.”라고 하였다.]

 

 

長平之役

 

長平之役,平都君說魏曰:「王胡不為從?」 魏王曰:「秦許吾以垣雍.」

平都君曰:「臣以垣雍為空割也.」 魏王曰:「何謂也?」
平都君曰:「秦、趙久相持於長平之下而無決. 天下合於秦,則無趙;合於趙,則無秦.

秦恐王之變也,國外以垣雍餌王也. 秦戰勝趙,王敢責垣雍之割乎.」王曰:「不敢.」

「秦戰不勝趙,王能令韓出垣雍之割乎?」王曰:「不能.」「臣故曰,垣雍空割也.」魏王曰:「善.」

 

[기원전 260, 진, 조 두 나라가 장평에서 싸울 때 조나라 대신 평도군(조책의 平都侯)이 위안희왕에게 묻기를 :

“대왕께서는 어찌하여 합종하지 않는 것입니까?”라고 하자.  위안희왕이 대답하기를 : “진나라가 한나라로 하여금

우리에게 원옹(垣雍: 하남성 원양현 서쪽)을 반환토록 하겠다고 약속했기 때문이오.”라고 하였다.
그러자 평도군이 말하기를 : “제가 보건대 원옹의 땅을 할양한다는 말은 빈 말에 불과합니다.”라고 하였다.
위안희왕이 묻기를 : “어찌하여 그같이 말하는 것이오?”라고 하자.
평도군이 설명하기를 : “진, 조 두 나라는 오랫동안 장평의 성 아래에서 대치하고 있으나 아직 승부를 가르지 못하고

있습니다. 이때 천하의 제후들이 진나라 편을 들면 조나라는 망할 것이고, 조나라 편을 들면 진나라는 망할 것입니다.

진나라는 대왕의 변심을 두려워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원옹을 미끼로 대왕의 환심을 사려는 것입니다.

진나라가 이길 경우 대왕께서 감히 진나라에게 원옹의 할양을 재촉할 수 있겠습니까? 이에 대왕께서는 감히

그럴 수 없다고 대답했습니다. 또 진나라가 패할 경우 대왕께서는 한나라에게 원옹의 할양을 명할 수 있겠습니까?

이에 대왕은 불가능하다고 대답했습니다. 그래서 제가 원옹의 일은 빈 말이라고 말한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이에 위안희왕이 말하기를 : “과연 그 말이 옳소.”라고 하였다.]

 

 

樓梧約秦魏

 

樓梧約秦魏,將令秦王遇於境.  謂魏王曰:「遇而無相,秦必置相. 不聽之,則交惡於秦;聽之,

則後王之臣,將皆務事諸侯之能令於王之上者. 且遇於秦而相秦者,是無齊也,秦必輕王之強矣.

有齊者,不若相之,齊必喜,是以有雍者與秦遇,秦必重王矣.」 

 

 

[기원전 266, 위나라 대신 누오(樓梧)가 진, 위 두 나라 사이를 주선하기 위해 진소양왕과 위안희왕의 국경 회동을

추진했다. 이에 위안희왕에게 말하기를 : “지금 위나라에 재상이 없는 상황에서 재상을 배석시키지 않은 채 회동하면

진나라는 반드시 재상을 천거하고자 할 것입니다. 이를 받아들이지 않으면 두 나라 간의 관계가 악화할 것이고,

받아들이면 대왕을 밑에서 보좌해야 할 재상이 대왕을 좌지우지할 수 있는 진왕을 섬기고자 힘쓸 것입니다.

게다가 진왕이 추천하는 사람을 재국으로 임명하면 필시 진나라와 가까이 지낼 것이니 위나라는 제나라와 소원하게

될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위나라는 고립되고 진나라는 틀림없이 위나라를 경시할 것입니다.

제나라와 가까운 적강(翟强)의 무리 중에 제나라와 친한 자가 있다면 그를 발탁해 재상으로 삼느니만 못합니다.

그러면 제나라는 필시 기뻐할 것입니다. 이같이 하여 위, 제 두 나라간의 우호 관계를 바탕으로 진왕과 회동하면

진왕은 반드시 대왕을 중시하게 될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芮宋欲絕秦趙之交

 

芮宋欲絕秦、趙之交,故令魏氏收秦太后之養地秦王於秦.  

芮宋謂秦王曰:「魏委國於王,而王不受,故委國於趙也. 

李郝謂臣曰:『子言無秦,而養秦太后以地,是欺我也,故敝邑收之.』」秦王怒,遂絕趙也.

 

[위나라 사람 예송(芮宋)이 진, 조 두 나라간의 국교를 단절시키고자 했다. 이에 위나라로 하여금 진태후(선태후)에게

바친 양지(養地)를 거둬들이게 했다. 그리고는 진소양왕에게 말하기를 : “위나라는 대왕에게 나라를 들어 명을

받든다고 했으나 대왕이 이를 받아 들이지 않아 조나라에 의지하려 하였는데 조나라 사람 이학(李郝)이 신을

책망하기를, ‘그대의 말로는 진나라와 아무런 관계도 없으면서 진태후에게 양지를 바쳤소. 이는 나를 속인 것이오’

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폐읍은 부득이 양지를 거둬들이지 않을 수 없게 되었습니다.”라고 하였다.
그러자 진소양왕이 노해 이내 조나라와 단교했다.]

 

 

為魏謂楚王

 

為魏謂楚王,曰:「索攻魏於秦,秦必不聽王矣,是智困於秦,而交疏於魏也.

楚、魏有怨,則秦重矣. 故王不如順天下,遂伐齊,與魏便地,兵不傷,交不變,所欲必得矣.」

 

[기원전 284, 어떤 사람이 위나라를 위해 초경양왕(楚頃襄王)에게 말하기를 : “진나라에게 위나라 공벌을 권해도

진나라는 필시 대왕의 말을 듣지 않을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진나라에 대한 계책도 궁하게 되고, 위나라와도

소원하게 됩니다. 초, 위 두 나라가 서로를 원망하게 되면 진나라가 제후들 사이에서 크게 존중받게 될 것입니다.

따라서 대왕은 천하 제후들의 기대에 부응해 제나라를 정벌한 뒤 제나라에서 얻은 땅을 대왕이 바라는 위나라 땅과

바꾸느니만 못합니다. 그렇게 하면 병사들을 상하게 하지도 않고, 위나라와의 친교도 손상시키지 않은 채

원하는 바를 이룰 수 있습니다.”라고 하였다.

 

 

管鼻之令翟強與秦事

 

管鼻之令翟強與秦事, 謂魏王曰:「鼻之與強,猶晉人之與楚人也. 晉人見楚人之急,帶劍而緩之;楚人惡其緩而急之. 

令鼻之入秦之傳舍,舍不足以舍之. 強之入,無蔽於秦者. 強,王貴臣也,而秦若此其甚,安可?」

 

[기원전 306, 위나라 대신 관비(管鼻: 樓鼻)와 적강(翟强)이 함께 진나라에 사자로 가게 되었다.

이때 관비를 추종하는 어떤 사람이 위양왕에게 말하기를 : “관비와 적강의 관계는 마치 진인(晉人)과 초인(楚人)

사이와 같습니다. 진인은 초인의 성정이 매우 조급한 것을 보고는 오히려 칼을 찬 채 느긋한 표정을 짓고,

초인은 그 느긋함을 싫어해 급히 재촉하는 것입니다. 지금 누비가 진나라의 전사(傳舍: 객관)로 들어가려 하자

호위하는 사람이 너무 많아 객관에 모두 수용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러나 적강의 경우는 몸 둘 곳조차 없었습니다.

적강은 위나라의 재상으로 대왕께서 중이 여기는 신하입니다. 진나라에서 이처럼 허술하게 대접해도 되는

것입니까?"라고 하였다.] 

 

 

成陽君欲以韓魏聽秦

 

成陽君欲以韓、魏聽秦, 魏王弗利.  白圭謂魏王曰:「王不如陰侯人說成陽君曰:君入秦, 秦必留君, 而以多割於韓矣. 

韓不聽,秦必留君,而伐韓矣. 故君不如安行求質於秦. 『成陽君必不入秦,秦、韓不敢合,則王重矣.』」

 

[기원전 290, 일찍이 한나라 재상을 지내다가 위나라 재상이 된 성양군(成陽君)이 한, 위 두 나라로 하여금 

진나라에 복종하게 만들려고 했다. 그러나 위소왕은 그의 계책이 위나라에 불리하다고 생각했다.

이때 백규(白圭: 白珪)가 위소왕에게 말하기를 : “대왕께서는 빈객의 송영(送迎)을 담당하는 관원을 시켜 성양군에게

이르기를, ‘그대가 진나라로 가면 진나라는 틀림없이 그대를 억류한 채 한나라에 많은 땅을 구할 것이오.

한나라가 이를 따르지 않으면 진나라는 틀림없이 그대를 억류하고 한나라를 칠 것이오. 그러니 그대는 진나라로

가려는 생각을 버리고 오히려 진나라에 인질을 요구하는 게 상책이오’라고 말하느니만 못합니다.

그러면 진나라는 필시 인질을 보내지 않을 것이니 성양군은 도저히 진나라로 갈 수 없게 됩니다.

진, 한 두 나라가 연합할 수 없으면 곧 대왕을 중히 여길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秦拔寧邑

 

秦拔寧邑,魏王令之謂秦王曰:王歸寧邑,吾請先天下構.」  

謂魏王曰:「王無聽. 魏王見天下之不足恃也,故欲先構.

夫亡寧者,宜割二寧以求構;夫得寧者,安能歸寧乎?」

 

[기원전 257, 진나라가 위나라의 영읍(하남성 수무현)을 함락시키자 위안희왕이 사람을 시켜 진소양왕에게 

말하게 하기를 : “대왕께서 영읍을 돌려주시면 천하 제후들에 앞서 결맹하도록 하겠습니다.”라고 하였다.

그러자 영읍을 함락시킨 위염이 진왕에게 말하기를 : “대왕께서는 위왕의 건의를 받아들이지 마십시오.

위왕은 천하의 제후들에게 의지할 수 없다고 생각해 앞서 결맹하려는 것입니다.

무릇 영읍을 잃은 위나라가 영읍 규모의 성읍을 하나 더 할양하면서 강화를 청하는 것이 마땅합니다.

그런데 영읍을 취한 진나라가 왜 영읍을 돌려주어야 하는 것입니까?”라고 하였다.]

 

 

秦罷邯鄲

 

秦罷邯鄲,攻魏,區寧邑. 吳慶恐魏王之構於秦也,謂魏王曰:「秦之攻王也,王知其故乎?

天下皆曰王近也. 王不近秦,秦之所去. 皆曰王弱也. 王不弱二周,秦人去邯鄲,過二周而攻王者, 以王為易制也.

王亦知弱之召攻乎?」

 

[기원전 257, 진나라가 한단의 포위를 푼 뒤 위나라를 공격해 영읍(寧邑)을 취했다.

이에 오경(吳慶)은 위안희왕이 진나라에 강화를 청할까 우려해 위왕에게 말하기를 : “대왕께서는 진나라가 대왕의

나라를 공격하는 이유를 알고 있습니까? 천하의 현사들은 모두 위나라가 진나라와 가깝기 때문이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위나라는 결코 진나라와 가깝지 않습니다. 진나라가 위나라를 공격하는 것은 이 때문이 아닙니다.

천하의 현사들은 또 모두 위나라가 약하기 때문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대왕의 나라는 양주(兩周)보다 약하지 않습니다. 진나라가 위나라를 치는 것은 이 때문도 아닙니다.

그런데도 진나라가 한단의 포위를 풀고 양주를 지나 대왕의 나라를 치는 것은 대왕을 제압하기가 용이하다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대왕은 연약해 보이면 적의 진공을 불러들인다는 사실을 알고 있습니까?”라고 하였다.]

 

 

魏王欲攻邯鄲

 

魏王欲攻邯鄲,季梁聞之,中道而反,衣焦不申,頭塵不去,往見王曰:

「今者臣來,見人於大行,方北面而持其駕,告臣曰:『無欲之楚.』

臣曰:『君之楚,將奚為北面?』 曰:『吾馬良.』 臣曰:『馬雖良,此非楚之路也.』

曰:『吾用多.』 臣曰:『用雖多,此非楚之路也.』 曰:『吾御者善.』

『此是者愈善,而離楚愈遠耳.』 今王動欲成霸王,舉欲信於天下. 恃王國之大,兵之精銳,

而攻邯鄲,以廣地尊名,王之動愈數,而離王愈遠耳. 猶至楚而北行也.」

 

[기원전 354, 위혜왕이 한단을 공격하려고 하자, 위나라 대신 계량(季梁)이 사신으로 가던 도중 이 말을 전해 듣고

급히 귀국했다. 이때 그의 의복은 심하게 오그라들어 펴지지 않았고 머리는 먼지가 덕지덕지 붙어 떨어지지 않았다.

그러나 곧바로 위혜왕을 배견하면서 말하기를 : “방금 신이 돌아오던 도중 태행산 부근에서 한 사람을 만났습니다.

그는 수레를 북쪽으로 몰면서 신을 보고 말하기를, ‘나는 초나라에 가려고 합니다’라고 했습니다.

이에 신이 묻기를, ‘초나라로 간다고 하면서 어찌하여 북쪽을 향하는 것이오’라고 했습니다. 그러자 그가 대답하기를,

‘내 말이 좋기 때문입니다’라고 했습니다. 이에 신이 다시 묻기를, ‘아무리 말이 좋다 해도 이는 초나라로 가는 길이

아니오’라고 하자, 그는 대답하기를, ‘여비도 충분히 있어 그러는 것입니다’라고 했습니다.

신이 재차 묻기를, ‘아무리 여비가 풍부하다 한들 이 길은 초나라로 가는 길이 아니오’라고 하자,

그는 대답하기를, ‘마부도 훌륭하고 해서 그러는 것입니다’라고 했습니다. 이 사람 말대로 하면 말과 마부가 좋으면

좋을수록 초나라로부터 더욱 멀리 떠나는 꼴이 됩니다. 지금 대왕은 출병하여 패왕의 대업을 이루고

천하의 제후들로부터 신임을 얻으려 합니다. 그러나 영토의 광대함과 병력의 정예함만 믿고 한단을 쳐 땅을 넓히고

명성을 높이는 것은 그같은 움직임을 재촉하면 할수록 패왕이 되는 길과 더욱 멀어질 뿐입니다. 이는 마치 말과

마부의 뛰어남만 믿고 남쪽 초나라에 가려고 하면서 오히려 북쪽으로 수레를 몰고 가는 것과 같습니다.”라고 하였다.]

 

 

周肖謂宮他

 

周肖謂宮他曰:「子為肖謂齊王曰,肖愿為外臣. 令齊資我於魏.」

宮他曰:「不可,是示齊輕也. 夫齊不以無魏者以害有魏者,故公不如示有魏.
共曰:『王之所求於魏者,臣請以魏聽.』齊必資公矣,是公有齊,以齊有魏也.」

 

[기원전 324, 위나라의 대신 주초(周肖: 周宵)가 서주의 대부 궁타(宮他)에게 부탁하기를 :

“원컨대 그대는 나를 위해 내가 제왕(齊王: 제위왕)의 외신(外臣)이 되고 싶어한다는 말을 제왕에게 전해주고

제나라가 나를 도와주도록 주선해 주기 바라오.”라고 하였다.
그러자 궁타가 말하기를 : “불가합니다. 이는 자신의 위나라에서의 위치가 매우 가볍다는 사실을 제나라에 보여주는

셈이 됩니다. 그렇게 되면 경시당하게 됩니다. 제왕이 위나라에서의 위치가 가벼운 사람을 도와 위나라를 장악하고

있는 사람을 해치는 일을 하겠습니까? 그러니 공은 위나라에서의 위치가 높다는 것을 보여주느니만 못합니다.

공은 제왕에게 말하기를, ‘대왕께서 위나라에 바라는 것은 제가 위나라로 하여금 모두 받아들이도록 만들겠습니다’

라고 하십시오. 그러면 제나라는 필시 공을 도울 것입니다. 제나라의 지원이 있게 되면

공은 제나라에 의해 중시되는 것을 이용해 위나라에서 중시될 수 있습니다.”라고 하였다.

 

 

周為善齊

 

周為善齊,翟強善楚. 二子者,欲傷張儀欲魏. 張子聞之,因使其人為見者嗇夫聞見者,因無敢傷張子.

 

[주최는 제나라, 적강은 초나라와 가까웠다.

그러나 두 사람은 함께 위나라의 재상을 맡고 있는 장의를 쫓아 내려고 벼르고 있었다. 장의가 이 얘기를 듣고

자기 사람을 군주의 명을 출납하는 실무 담당 관원에게 보내 군신들의 배견을 청하게 한 뒤 배견하는 자리에서

이들을 은밀히 지켜 보았다. 그러자 이들은 감히 장의를 해칠 생각을 하지 못했다.]

 

 

 周為入齊

 

周為入齊,秦王怒,令姚賈讓魏王. 魏王為之謂秦王曰:「魏之所以為王通天下者,以周為也.

今周屋迅寡人入齊,齊無通於天下矣. 敝邑之事王,亦無齊累矣. 大國欲急兵,則趣趙而已.」

 

[기원전 286, 주최가 제나라로 망명하자 진소양왕은 주최가 위, 제 두 나라의 결맹을 주선하는 것으로 생각해

크게 노했다. 이에 곧 요가(姚賈: 조책의 起賈)를 시켜 위소왕을 질책하게 했다.

그러자 위소왕은 자신이 주최를 제나라로 보낸 사실을 숨긴 채 주최를 위해 진소양왕에게 말하기를 :
“위나라가 대왕을 위해 천하의 제후들을 진나라와 연결시킨 것은 주최가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던 것입니다.

지금 주최는 과인을 버리고 제나라로 달아났습니다. 이에 천하의 제후들은 위, 제 두 나라가 단교한 것으로

생각할 것이니 제후들과 제나라와의 관계는 자연 끊어지게 될 것입니다. 폐읍이 진나라를 섬기는 데에는

아무 이상이 없으니 제나라로 인해 문제가 생길 일은 없습니다. 만일 진나라가 제나라로 출병할 생각이면

위나라는 아무 염려 없으니 오직 조나라만 독촉하면 될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秦魏為與國 

 

秦、魏為與國. 齊、楚約而欲攻魏,魏使人求救於秦,冠蓋相望,秦救不出. 魏人有唐且者,

年九十餘,謂魏王曰:「勞臣請出西說秦,令兵先臣出可乎?」魏王曰:「敬諾.」遂約車而遣之.

唐且見秦王,秦王曰:「丈人芒然乃遠至此,甚苦矣. 魏來求救數矣,寡人知魏之急矣.」
唐且對曰:「大王已知魏之急而救不至者,是大王籌策之臣無任矣. 且夫魏一萬乘之國,稱東藩,

受冠帶,祠春秋者,以為秦之強足以為與也. 今齊、楚之兵已在魏郊矣. 大王之救不至,

魏急則且割地而約齊、楚,王雖欲救之,豈有及哉?是亡一萬乘之魏,而強二敵之齊、楚也.

竊以為大王籌策之臣無任矣.」 秦王喟然愁悟, 遽發兵, 日夜赴魏.

齊、楚聞之, 乃引兵而去, 魏氏復全 唐且之說也.

 

[기원전 266), 진, 위 두 나라가 동맹을 맺자 제, 초 두 나라가 결맹하여 위나라를 공격하려고 했다.

이에 위나라는 사람을 진나라로 보내 구원을 청하게 했다. 사신들의 관(갓)과 수레의 덮게가 이어질 정도로 계속하여

구원을 재촉했으나 진나라는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이에 위나라 사람 당저(唐且)가 90여 세의 노구를

이끌고 와 위안희왕에게 간청하기를 :  “청컨대 노신이 서쪽으로 가 진나라를 설득하겠습니다.

신이 진나라를 떠나기 전에 진나라 군사가 먼저 출병하도록 하겠습니다.”라고 하자.
위안희왕이 대답하기를 : “그리 해주기만 하며 더 바랄 나위가 있겠소.”라고 하였다.
그리고는 수레를 갖춰 곧바로 떠나게 했다. 당저가 진소양왕을 조현하자 진왕이 말하기를 : "노인장께서 먼 길을

오느라 수고가 많았소. 위나라가 여러 차례 구원을 청해 과인도 위나라가 절박한 상황에 있다는 것을 알고 있소.”

당저가 말하기를 : “대왕께서 위나라의 절박한 상황을 알고도 구원하지 않는 것은 대왕을 모시는 좌우 대신들이

무능하기 때문입니다. 무릇 위나라가 만승지국임에도 진나라의 동번(東藩)을 자칭하고, 진나라의 관대(冠帶)를 받고,

진나라의 종묘 제사를 받드는 것은 진나라가 강대하여 동맹국으로 삼기에 족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지금 제, 초 두 나라의 군사가 이미 위나라 도읍의 교외까지 와 있습니다. 대왕의 구원군이 제 때에 이르지 않으면

위나라는 다급한 나머지 땅을 할양하고 제, 초 두 나라와 결맹치 않을 수 없습니다. 그때가 되어 대왕께서 설령

구원하고자 한들 어찌 제 때에 이를 수 있겠습니까? 만승지국인 위나라를 잃고 진나라의 적국인 제, 초 두 나라를

강하게 만드는 꼴이 됩니다. 이에 신은 대왕의 참모들이 무능하다고 생각지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진왕은 근심스런 표정으로 위연히 탄식한 뒤 새삼 깨달은 듯 급히 거병하여 밤낮 쉬지 않고 위나라로 달려가게 했다.

제, 초 두 나라는 이 얘기를 전해 듣자마자 곧바로 철군했다.

위나라가 다시 영토를 보전할 수 있었던 것은 전적으로 당저의 유세 덕분이었다.]

 

 

信陵君殺晉鄙

 

信陵君殺晉鄙,救邯鄲,破秦人,存趙國,趙王自郊迎.

唐且謂信陵君曰:「臣聞之曰,事有不可知者,有不可不知者;有不可忘者,有不可不忘者.」
信陵君曰:「何謂也?」對曰:「人之憎我也,不可不知也;吾憎人也,不可得而知也.

人之有德於我也,不可忘也;吾有德於人也,不可不忘也. 今君殺晉鄙,救邯鄲,破秦人,

存趙國,此大德也. 今趙王自郊迎,卒然見趙王,臣愿君之忘之也.」信陵君曰:「無忌謹受教.」

 

[기원전 257, 위나라 공자 신릉군이 장군 진비(晉鄙)를 죽인 뒤 8만 명의 군사를 이끌고 조나라의 한단을 구하면서

진나라 군대를 대파하고 조나라를 위기에서 구해냈다. 조효성왕이 신릉군의 구원에 감격한 나머지 친히 교외에 까지

나가서 이들을 마중하였다. 이때 당저(唐且)가 신릉군에게 말하기를 :“제가 듣건대 ‘일에는 불가지와 불가부지,

불가망, 불가불망이 있다’고 들었습니다.”라고 하자. 신릉군이 묻기를 : “그게 무슨 뜻이오?”라고 하였다. 

그러자 당저가 대답하기를 : “남이 자신을 미워하면 그 이유를 알아야 하니 이는 ‘불가지’입니다.

자신이 남을 미워하는 것은 끝까지 알 필요가 없으니 이는 ‘불가부지’입니다. 남이 자신에게 은혜를 베풀면 그 호의를 잊어서 안되니 이는 ‘불가망’입니다. 자신이 남에게 덕을 베풀면 이는 속히 잊지 않으면 안되니 이는 ‘불가불망’입니다.

지금 그대는 진비를 죽인 뒤 군사를 이끌고 한단을 구하면서 진나라 군사를 대파하고 조나라를 위기에서 구했습니다.

이는 대덕(大德)입니다. 지금 조왕이 친히 교영에 나서려 하니 그대는 졸연히 조왕을 만나게 되었습니다.

원컨대 그대의 대덕은 ‘불가불망’임을 잊지 말기 바랍니다.”라고 하자.
신릉군이 말하기를 : “무기(無忌: 신릉군의 이름)는 삼가 가르침을 따르도록 하겠소.”라고 하였다.]

 

 

魏攻管而不下

 

魏攻管而不下.  安陵人縮高, 其子為管守. 

信陵君使人謂安陵君曰:「君其遣縮高,吾將仕之以五大夫,使為持節尉.」

​安陵君曰:「安陵, 小國也, 不能必使其民. 使者自往,請使道使者,至縞高之所,復信陵君之命.」

縮高曰:「君之幸高也,將使高攻管也. 夫以父攻子守,人大笑也. 是臣而下,是倍主也.

父教子倍,亦非君之所喜也. 敢再拜辭.」 使者以報信陵君, 信陵君大怒,

遣大使之安陵曰:「安陵之地,亦猶魏也. 今吾攻管而不下,則秦兵及我,社稷必危矣.

​愿君之生束縮高而致之. 若弗致也,無忌但發十萬之師,以造安陵之城.」

 

[기원전 247, 위나라가 관(管) 땅을 공격했으나 함락시키지 못했다. 이때 안릉(安陵) 사람 축고(縮高)의 아들이

관 땅의 장관으로 있었다. 신릉군이 사람을 초양왕의 총신인 안릉군(安陵君)에게 보내 말하게 하기를 :
“그대는 축고를 시켜 아들이 관 땅을 지키지 못하도록 하시오. 그러면 나는 축고를 5대부(五大夫)로 임명하고

지절지위(持節之尉: 사람을 죽일 수 있는 권리를 지닌 장군)가 되게 만들어 주겠소.”라고 하였다.
이에 안릉군이 사신에게 말하기를 : “안릉은 소국입니다. 백성을 반드시 명대로 부릴 수가 없습니다. 사자가 직접

가도록 하십시오. 그러면 사람을 시켜 사자를 축고가 있는 곳으로 안내해 명을 전달토록 하겠습니다.”라고 하였다.
이에 신릉군의 사자가 축고를 찾아가 신릉군의 명을 전하자 축고가 말하기를 : “신릉군이 나를 5대부로 임명하려는

것은 나를 시켜 관 땅을 공격하기 위한 것이오. 무릇 아비를 내세워 그 아들을 공격하게 하면 필시 사람들의

웃음거리가 될 것이오. 내 자식이 나를 보고 항복하면 이는 한왕을 배신하는 것이 되오. 또한 아비가 되어 자식에게

배신을 가르치는 것 또한 그대가 좋아하는 바가 아닐 것이오. 감히 재배하며 사양하겠소.”라고 하였다.
사자가 돌아가 이를 복명하자 신릉군이 대노한 나머지 곧 특사를 안릉군에게 보내 말하게 하기를 :
“안릉의 땅 또한 위나라 땅이나 마찬가지요. 지금 내가 관 땅을 함락시키하지 못하면 진나라 군사가 위나라에

이르게 될 것이고, 그렇게 되면 국가 또한 반드시 위기에 처할 것이오. 원컨대 축고를 생포해 보내주기 바라오.

만일 보내주지 않으면 나는 군사 10만 명을 이끌고 안릉의 성 아래로 갈 것이오.”라고 하였다.]

 

安陵君曰:「吾先君成侯,受詔襄王,以守此地也,手受大府之憲.」
憲之上篇曰:「子弒父,臣弒君,有常不赦. 國雖大赦,降城亡子不得與焉.『今縮高謹解大位,以全父子之義,』 

而君曰『必生致之.』 是使我負襄王詔而廢大府之憲也,雖死終不敢行.」
縮高聞之曰:「信陵君為人,悍而自用也. 此辭反,必為國禍. 吾已全己,無為人臣之義矣,
豈可使吾君有魏患也.」

乃之使者之舍,刎頸而死.  信陵君聞縮高死,素服縞素辟舍,

使使者謝安陵君曰:「無忌,小人也,困於思慮,失言於君,敢再拜釋罪.」

 

[그러자 안릉군이 회답하기를 : “우리 선군 성후(成侯)는 위양왕으로부터 조명(詔命)을 받고 이곳을 지키면서

직접 중앙의 문서고에 보관해 둔 헌법대전을 받았소. 그 첫머리에 이르기를, ‘자식이 아비를 시해하고

신하가 군주를 시해하면 상형(常刑)이 있으니 결코 사면하지 않는다. 나라에 비록 대사면이 있을지라도

성을 내놓고 항복한 자와 도망친 자는 대사면의 대상에서 제외된다’고 했소. 지금 축고는 삼가 5대부의 높은 자리를

사양하고 부자 간의 의를 온전히 하고자 하오. 그런데도 그대는 반드시 생포하여 보내라고 하니 이는 나에게 위양왕의

조명을 어기고 헌법대전을 폐기하게 만드는 것이오. 비록 죽는 한이 있을지라도 목숨이 붙어있는 한 감히 그 명을

따를 수가 없소.”라고 하였다.  축고가 이 말을 전해 듣고 말하기를 : “신릉군이란 위인은 흉포하고 고집이 세다.

사자가 안릉군의 말을 그대로 전하면 필시 화난을 초래할 것이다. 나는 이미 신하로서의 대의를 보전했다.

그러니 어찌 군주로 하여금 위나라로 인한 화난을 입게 만들 수 있겠는가!”라고 하며.
사자의 숙사로 가 스스로 목을 찌르고 자진했다. 신릉군은 축고가 자진했다는 말을 듣자 곧 흰 상복를 입고

거주 장소를 옮겨 근신하면서 사자를 안릉군에게 보내 사과하기를 : “나 무기는 소인이오. 생각이 짧아 군에게

실언을 했소. 감히 재배드리며 용서해 주시기를 빕니다.”라고 하였다.]

 

 

魏與龍陽君共船而釣

魏王與龍陽君共船而釣,龍陽君得十餘魚而涕下.  王曰:「有所不安乎?如是,何不相告也?」

對曰:「臣無敢不安也.」王曰:「然則何為涕出?」曰:「臣為王之所得魚也.」

王曰:「何謂也?」 對曰:「臣之始得魚也,臣甚喜,後得又益大,今臣直欲棄臣前之所得魚也.

今以臣凶惡,而得為王拂枕席. 今臣爵至人君,走人於庭,辟人於途. 四海之內,美人亦甚多矣,

聞臣之得幸於王也,必褰裳而趨王. 臣亦猶曩臣之前所得魚也,臣亦將棄矣,臣安能無涕出乎?」

魏王曰:「誤!有是心也,何不相告也?」於是布令於四境之內曰:「有敢言美人者族.」
由是觀之,近習之人,其摯讒也固矣,其自篡繁也完矣. 今由千里之外,欲進美人,所效者庸必得幸乎? 

假之得幸,庸必為我用乎? 而近習之人相與怨,我見有禍,未見有福;見有怨未見有德,非用知之術也.

 

[위왕이 총신 용양군(龍陽君)과 함께 배를 타고 낚시를 할 때 용양군이 10여 마리의 고기를 낚고는 울기 시작했다.

이에 위왕이 묻기를 : “무슨 걱정이라도 있는가. 만일 그렇다면 왜 나에게 말하지 않은 것인가?”라고 하자.
용양군이 대답하기를 : “신이 감히 무슨 걱정거리가 있겠습니까 ”라고 하였다.

위왕이 묻기를 : “그렇다면 왜 우는 것인가?”라고 하자.
용양군이 대답하기를 : “신의 처지가 바로 제가 낚은 물고기와 똑같아 보였기 때문입니다.”라고 하였다.
위왕이 묻기를 : “그게 무슨 말이오?”라고 하자.  용양군이 대답하기를 : “신은 처음에 고기를 낚았을 때 매우

기뻤습니다. 그러나 점차 큰 것을 낚으면서 앞서 낚은 것은 거들떠 보지도 않았습니다. 이제까지 신은 추한 용모로

대왕의 잠자리를 정리하며 가까이에서 모셔 왔습니다. 지금 신은 작위가 봉군(封君)의 수준에 이르러 조정에 가면

대신들이 모두 허리를 굽히고, 거리에 나서면 사람들이 길을 비켜주고 있습니다. 그러나 천하에는 미인이 많습니다.

이들이 저 같이 못난 것이 대왕의 총애를 입고 있다는 사실을 듣게 되면 치맛자락을 치켜올리고 앞을 다투어

대왕에게 몰려올 것입니다. 그리되면 신은 방금 제가 잡은 물고기처럼 버림받는 신세가 될 것입니다.

그러니 신이 어찌 울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라고 하였다.
위왕이 말하기를 :“허, 바로 그런 걱정을 했는가? 그런 걱정이라면 왜 일찍이 말하지 않은 것인가?”라고 하며.
곧 전국에 영을 내려 감히 미인이 있다고 떠드는 자는 일족을 멸하겠다고 포고했다.
이로써 보면 군왕의 곁에서 총애를 받는 무리가 아첨하는 것은 실로 당연한 것이나 이들이 자신을 엄호하는 수단은

참으로 완벽하기 그지없다고 할 만하다. 지금 1천 리 밖까지 나가 미인을 찾아내 추천한들 그 미인이 어찌 반드시

총애를 받을 수 있다고 장담할 수 있겠는가? 설령 총애를 받게 된다 한들 미인을 추천하는 자에게 무슨 도움이

되겠는가? 도리어 군왕의 총신에게 원한을 사 화를 입을지언정 복을 받는 경우는 없다. 지금까지 원망을 듣는 것만

보았지 은덕을 입었다는 사람을 본 적이 없다. 이는 지혜를 이용하는 술책이 아닌 것이다.]

 

 

秦攻魏急 

 

秦攻魏急.  或謂魏王曰:「棄之不如用之之易也,死之不如棄之之易也. 能棄之弗能用之,

能死之弗能棄之,此人之大過也. 今王亡地數百里,亡城數十,而國患不解,是王棄之,非用之也.

今秦之強也,天下無敵,而魏之弱也甚,而王以是質秦,王又能死而弗能棄之,此重過也.

今王能用臣之計,虧地不足以傷國,卑體不足以苦身,解患而怨報. 秦自四境之內,

執法以下至於長輓者,故畢曰:『與嫪氏乎?與呂氏乎?』 雖至於門閭之下,廊廟之上,猶之如是也.

今王割地以賂秦,以為嫪毐功;卑體以尊秦,以因嫪毐. 王以國贊嫪毐,以嫪毐勝矣.

王以國贊嫪氏,太后之德王也,深於骨髓,王之交最為天下上矣. 秦、魏百相交也,百相欺也.
今由嫪氏善秦而交為天下上,天下孰不棄呂氏而從嫪氏?天下必合呂氏而從嫪氏,則王之怨報矣.」

 

[진시황 7년(기원전 240), 진나라가 위나라를 거세게 공격하자, 어떤 사람이 위경민왕에게 말하기를 :
“할지(割地)하여 보전을 꾀하는 것은 땅을 이용해 지키는 것보다 어렵고, 땅을 지키다 죽는 것은 할지하여 보전을

꾀하는 것보다 어렵습니다. 능히 할지하여 보전을 꾀할 수 있으면서도 땅을 이용해 지키려 하지 않고,

능히 땅을 지키다 죽을 수 있으면서도 할지하여 보전을 꾀하려 하지 않는 것은 사람의 커다란 잘못입니다.

지금 대왕께서는 수백 리의 땅과 수십 개의 성읍을 잃었는데도 나라의 화난은 풀리지 않고 있습니다.

이는 대왕이 할지하여 보전을 꾀하는 것이지 땅을 이용해 지키는 것이 아닙니다. 지금 진나라의 무력은 천하무적이고,

위나라의 쇠약함은 이루 말할 수 없습니다. 그런데도 대왕께서는 이를 진나라 군사의 표적으로 만들고 있습니다.

이는 땅을 지키다 죽을 수 있으면서도 할지하여 보전을 꾀하려 하지 않는 것으로 거듭 잘못을 범하는 것입니다.

지금 대왕께서 능히 신의 계책을 채택하면 할지는 하되 국체를 손상하는 지경에 이르지는 않고,

몸을 굽히기는 하되 일신을 고통스럽게 만드는 지경에 이르지는 않을 것입니다.

나아가 당면한 재난을 푸는 것은 물론 위나라를 공격한 여불위에 대한 원한도 갚을 수 있습니다.
지금 진나라는 집정대신에서 천역 종사자에 이르기까지 한결같이 노씨(노애)와 여씨(여불위) 중 어디에 붙어야

좋을지를 놓고 서로 묻고 있는 상황입니다. 아래로는 평민에서 부터 위로는 고관에 이르기까지 똑같은 상황입니다.

그러니 지금 대왕은 땅을 떼어 진나라에 바치면서 이를 노애(嫪毐)의 공으로 삼고, 몸을 굽혀 진나라를 받들면서

노애의 진나라에서의 위치를 공고히 만드는데 도움을 주십시오. 대왕이 나라를 들어 노애를 도우면 노애가

이길 것입니다. 대왕이 나라를 들어 노애를 도우면 태후가 대왕을 고마워하며 그 덕을 골수에 새길 것입니다.

그리되면 위, 진 두 나라 간의 친교는 천하의 제후들 중 으뜸이 될 것입니다. 위, 진 두 나라 간의 친교는 지금까지

모두 서로 속이는 것으로 일관해 왔습니다. 그런데 지금 노씨를 통해 진나라와 가까워지고 그 교분이 천하의

제후들 중 으뜸이 되면 천하의 제후들 중 그 누가 여씨를 버리고 노씨를 따르지 않겠습니까?

천하의 제후들이 여씨를 버리고 노씨를 따르면 대왕의 원한도 갚게 되는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秦王使人謂安陵君

 

秦王使人謂安陵君曰:「寡人欲以五百里之地易安陵,安陵君其許寡人?」

安陵君曰:「大王加惠,以大易小,甚善. 雖然,受地於王,愿終受之,弗敢易.」秦王不說.

安陵君因使唐且使於秦.  秦王謂唐且曰:「寡人以五百里之地易安陵,安陵君不聽寡人,何也?

且秦滅亡魏,而君以五十里之地存者,以君為長者,故不錯意也. 今吾以十倍之地,請廣於君,

而君逆寡人者,輕寡人與?」
唐且對曰:「否,非若是也. 安陵君受地於先王而守之,雖千里不敢易也,豈直五百里哉?」

 

[진시황 22년(기원전 225), 진왕(진시황)이 사자를 안릉군에게 보내 말하게 하기를 : “과인은 사방 5백 리의 땅과

안릉을 맞바꾸고자 하오. 안릉군은 대략 이를 과인에게 허락해 주기 바라오.”라고 하자.
안릉군이 회답하기를 : “대왕께서 저에게 은혜를 베풀어 5백 리의 큰 땅을 작은 안릉과 바꿔주려 하니 고맙기

그지없습니다. 그러나 이 땅은 선왕 때부터 물려받은 것입니다. 원컨대 이를 영구히 지키고 싶기에

감히 바꿀 수 없습니다.”라고 하였다.  이에 진왕이 몹시 언짢아했다.

그러자 안릉군이 당저(唐且)를 진나라에 사자로 보내 이를 해명하고자 했다.

진왕이 당저를 보자 묻기를 : “과인은 5백 리나 되는 넓은 땅으로 작은 안릉 땅과 바꾸겠다는 것인데 안릉군이

과인의 제의를 듣지 않는 것은 무슨 까닭이오? 한, 위 두 나라가 이미 멸망했는데도 안릉군만이 불과 50 리밖에

안 되는 작은 땅이지만 계속 살아남게 된 것은 안릉군을 장자(長者)로 생각해 마음에 두지 않았기 때문이오.

지금 과인이 안릉의 10배나 되는 땅으로 안릉군의 영지를 넓혀 주려 하는데도 안릉군이 과인의 제의를 거역하는 것은

과인을 업신여기기 때문이 아니오?”라고 하자. 당저가 대답하기를 : “아닙니다. 그 때문이 아닙니다.

안릉군은 단지 선군으로부터 물려 받은 땅을 지키고 싶어 하는 것입니다.

비록 1천 리의 땅일지라도 감히 바꾸려 하지 않을 터인데 어찌 5백 리의 땅으로 될 일이겠습니까.”라고 하였다.

 

秦王怫然怒,謂唐且曰:「公亦嘗聞天子之怒乎?」
唐且對曰:「臣未嘗聞也.」秦王曰:「天子之怒,伏尸百萬,流血千里.」

唐且曰:「大王嘗聞布衣之怒乎?」秦王曰:「布衣之怒,亦免冠徒跣,以頭搶地爾.」
唐且曰:「此庸夫之怒也,非士之怒也夫專諸之刺王僚也,彗星襲月;聶政之刺韓傀也,

白虹貫日;要離之刺慶忌也,倉鷹擊於殿上. 此三子者,皆布衣之士也,懷怒未發,休祲降於天,與臣而將四矣. 

若士必怒,伏尸二人,流血五步,天下縞素,今日是也.」
挺劍而起,秦王色撓,長跪而謝之曰:「先生坐何至於此,寡人諭矣. 夫韓、魏滅亡,

而安陵以五十里之地存者,徒以有先生也.」 

 

[진왕은 발끈 화를 내며 당저에게 묻기를 : “공은 일찍이 천자의 노여움이 어떤 것인지 들어 본 적이 있소.”라고 하자.
당저가 대답하기를 : “아직 들어 본 적이 없습니다.”라고 하였다.
진왕이 말하기를 : “천자가 화를 내면 엎어져 나뒹구는 시신이 1백만, 유혈이 1천 리나 되오.”라고 하였다.
당저가 묻기를 : “대왕께서는 일찍이 벼슬없는 선비의 노여움이 어떤 것인지 들어 본 적이 있습니까.”라고 하자.
진왕이 대답기를 : “선비가 노해 봐야 기껏 갓을 벗고, 맨발이 되어, 머리를 땅에 조아리며 용서를 빌면 그만이지."
이에 당저가 말하기를 : “그것은 용렬한 자의 노여움일 뿐 결코 선비의 노여움이 아닙니다.

전제(專諸)가 오나라 공자 광(光)을 위해 오왕 요(僚)를 척살할 때 하늘이 감응해 혜성이 달을 비껴 지나가는 일이

일어 났으며, 또 섭정이 한나라 대부 엄중자(嚴仲子)의 부탁을 받고 한나라 상국 한괴(韓傀: 俠累)를 척살할 때

하늘이 감응해 흰 기운이 태양을 꿰뚫고 지나가는 일이 일어났습니다.

요리(要離)가 오왕 합려를 위해 왕자 경기(慶忌: 오왕 요의 아들)를 척살할 때 하늘이 감응해 독수리가 궁전에

충돌하는 일이 일어났습니다. 이들 3인은 모두 벼슬없는 선비로 노여움을 가슴에 품고 아직 밖으로 드러내지도

않았는데 하늘이 감응해 상서로운 정기를 내려보낸 것입니다. 지금 이들 3인에 신까지 보태면 포의지사는

모두 4인이 됩니다. 포의지사가 노하면 복시는 둘, 유혈은 5보에 불과하나 천하의 백성들이 모두 상복을 입게 됩니다.

오늘이 바로 그 날입니다.”라고 하며. 검을 뽑아 들고 일어섰다.

그러자 진왕이 두려운 기색을 보이면서 허리를 곧게 펴며 당저에게 사과하며 말하기를 : “선생은 부디 앉도록 하시오.

무슨 일로 이처럼 노여워하는 것이오. 선생의 말은 잘 알아 들었소. 한, 위 두 나라가 멸망했는데도

안릉이 사방 50 리밖에 안되지만 능히 존재하게 된 것은 바로 선생과 같은 분이 있었기 때문이오.”라고 하였다.]

 

 

   

原 文 【 中國哲學書電子化計劃 .   筆寫本 】


           

 

原 文   飜 譯 者        德庤 / 李   斗 振