戰國策(전국책) /戰國策 齊策 1

戰國策 齊策 1

덕치/이두진 2021. 6. 26. 17:11

 

                    齊策 1

  ​ 序文 】

제나라는 원래 강성(姜姓)의 나라이다.

주문왕이 태공망 강상(姜尙: 呂尙, 子牙)을 봉한 곳으로 춘추시대에 가장 먼저 세력을 키웠다.

제환공 때 관중을 등용해 첫 패국(覇國)이 되었다.

이때 진여공(陳厲公) 약(躍)의 아들 진완(陳完)이 제나라로 도망해 성을 전성(田姓)으로 바꾸고 제환공을 섬겼다.

주안왕(周安王) 14년(기원전 388), 제나라의 국상 전화(田和)가 군주인 제강공(齊康公)을 바닷가로 쫓아 버렸다.

주안왕 16년(기원전 386), 주왕실이 전화를 제후로 봉했다. 이는 한, 위, 조 3가(三家)가 진(晉)나라를 분할하여

제후로 봉해진 지 불과 17년 만에 일어난 일로 주왕실이 하극상을 조장하는 결과를 낳았다.

이를 계기로 전국시대가 본격화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전화가 세운 제나라를 흔히 전제(田齊)라고 하여 강성의 제나라인 강제(姜齊)와 구분한다.

《사기》〈세가〉에서 강제는 ‘제태공세가(齊太公世家)’에 전제는 ‘전경중완세가(田敬仲完世家)’로 구분해

기록한 것도 바로 이 때문이다. ‘전제’는 ‘강제’ 때와 마찬가지로 전국시대 최대의 도시인 임치(臨淄: 산동성 임치현)를

도읍으로 하여 풍부한 해변의 어염과 철 등을 이용해 1백50여 년 동안 중원의 강국으로 군림했다.
주현왕 17년(기원전 352), 제위왕(齊威王)이 처음으로 칭왕한 이후 ‘전제’는 당시 탄탄한 경제력을 바탕으로

진나라와 대등한 세력으로 부상했다. 전국시대 말기에 서제(西帝)인 진나라와 더불어 동제(東帝)를 칭한 사실이

이를 증명한다. 당시 ‘전제’의 판도는 지금의 산동성 대부분의 지역과 하북성 서남부를 모두 포함하고 있었다.

그러나 진시황 26년(기원전 221), 제왕 건(建) 때에 이르러,

마침내 진시황의 천하일통 작업의 마지막 희생물이 되고 말았다.

     ​齊策 一 .

楚威王戰勝於徐州,欲逐嬰子於齊.  嬰子恐,張丑謂楚王曰:「王戰勝於徐州也,盼子不用也.

盼子有功於國,百姓為之用.  嬰子不善,而用申縳.  申縳者,大臣與百姓弗為用,故王勝之也.

今嬰子逐,盼子必用.  復整其士卒以與王遇,必不便於王也.」 楚王因弗逐.

[초위왕(楚威王: 초회왕의 부친)이 서주(徐州: 산동성 등현)에서 승리한 뒤 영자(嬰子: 맹상군의 부친 靖郭君 전영)를

제나라에서 쫓아내려 하였다. 전영(田嬰)이 이를 두려워하자, 제나라 대신 장추(張丑)가 초위왕에게 말하기를 :
" 대왕께서 서주에서 승리할 수 있었던 것은 제나라가 반자(盼子: 전영의 동족인 田盼)을 임용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반자는 제나라를 위해 공을 세운 자로 백성들은 모두 그에게 쓰이기를 원했으나 영자가 그를 좋아하지 않았기 때문에 신전(申縳)을 등용했던 것입니다. 신전은 대신과 백성들이 모두 그에게 쓰이기를 원하지 않는 자였기 때문에

대왕께서 이길 수 있었습니다. 그러니 지금 영자를 물러나게 하면 필시 반자가 다시 등용되어 군사들을 정비한 뒤

대왕과 싸우게 될 것입니다. 그리되면 필시 대왕에게 불리할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주현왕 36년(기원전 333)
이에 초위왕이 전영을 내쫓지 않았다.


齊將封田嬰於薛.  楚王聞之,大怒,將伐齊.  齊王有輟志.

公孫閈曰:「封之成與不,非在齊也,又將在楚.  閈說楚王,令其欲封公也又甚於齊.」
嬰子曰:「願委之於子.」 公孫閈為謂楚王曰:「魯、宋事楚而齊不事者,齊大而魯、宋小.

王獨利魯、宋之小,不惡齊大何也? 夫齊削地而封田嬰,是其所以弱也.  願勿止.」

楚王曰:「善.」因不止.

[제나라가 장차 전영(田嬰)을 설 땅에 봉하려 하였다. 주현왕 48년(기원전 321),

초회왕(楚懷王)이 이 얘기를 듣고 대노해 장차 제나라를 정벌하고자 하였다.

그러자 제위왕(齊威王)이 이를 철회할 생각을 하게 되자, 전영의 문객인 공손한(公孫閈)이 전영에게 말하기를 :
“ 봉토의 성패 여부는 제나라에 달려 있는 것이 아니라 장차 초나라에 달려 있게 될 것입니다. 제가 초왕에게 말해

공을 설 땅에 봉하게 하는 것은 물론 이를 제나라보다 더욱 서두르도록 만들어 드리겠습니다.”라고 하였다.
이에 영자가 말하기를 : " 이 일을 그대에게 맡기도록 하겠소.”라고 하였다.
공손한이 초회왕을 만나 아뢰기를 : " 노, 송 두 나라가 초나라를 섬기는데도 제나라가 초나라를 섬기지 않는 것은

제나라는 크고 노, 송 두 나라는 작기 때문입니다. 대왕께서는 유독 노, 송 두 나라가 작은 것을 이롭게 여기면서

제나라가 강대한 것은 심려치 않고 있으니 이는 무슨 연고입니까?

무릇 제나라가 땅을 떼어 전영에게 봉읍으로 내리면 제나라는 그만큼 약해지는 것입니다.

그러니 그 일을 제지하지 마시기 바랍니다.”라고 하자. 

초회왕이 말하기를 : ​“그 말이 옳소.”라고 하며. 제왕의 봉지 하사(下賜)를 저지하지 않았다.

 

靖郭君將城薛,客多以諫.  靖郭君謂謁者,旡為客通.

齊人有請者曰:「臣請三言而已矣!益一言,臣請烹.」

靖郭君因見之.  客趨而進曰:「海大魚.」 因反走.
君曰:「客有於此.」 客曰:「鄙臣不敢以死為戲.」 君曰:「亡,更言之.」

對曰:「君不聞大魚乎? 網不能止,鉤不能牽,蕩而失水,則螻蟻得意焉.  今夫齊,亦君之水也.

君長有齊陰,奚以薛為? 夫齊,雖隆薛之城到於天,猶之無益也.」 君曰:「善.」乃輟城薛.

[정곽군(靖郭君) 전영(田嬰)이 설(薛) 땅에 성을 쌓으려 하자, 문객들 중에서 축성을 단념하라고 간하는 자가 많았다.

그러자 정곽군은 측근에게 문객들을 들여보내지 말도록 분부를 내렸다. 이때 제나라 출신의 한 문객이 말하기를 :

“ 저는 세 마디만 말하면 됩니다. 만일 한마디라도 더 하면 팽살(烹殺)도 감수하겠습니다.”라고 하였다.
이에 정곽군이 그의 만남을 허락하자. 그 문객이 총총걸음으로 나오며 외치기를 : “ 해대어(海大魚).”라고 하였다. 

그리고는 곧바로 도망치듯 빠져나가려 했다. 이에 정곽군이 말하기를 : "객은 잠시 거기 멈추시오.”라고 하자.
객이 말하기를 : “ 저는 비록 못난 놈이지만 감히 죽는 일을 갖고 장난을 칠 수 없습니다.”라고 하였다.
정곽군이 묻기를 : “그런 말 하지 마시오. 다시 설명해 보도록 하시오.”라고 하자.
그 문객이 대답하기를 : " 군께서는 대어(大魚)에 관해 들어보지 못했습니까?

그물로도 잡을 수 없고, 낚시로도 끌어 당길 수 없습니다.

그러나 제멋대로 놀다가 일단 물을 떠나 백사장에 올라오는 순간 누의(螻蟻: 땅강아지와 개미)의 밥이 되고 맙니다.

지금 제나라는 군에게 물과 같습니다. 군이 제나라에 길이 살고자 하면서 설에 성을 쌓은들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만일 제나라를 잃는다면 성벽이 하늘에 닿은들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을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정곽군 그의 말을 다 듣고 나서 말하기를 : “ 옳은 말이오.”라고 하면서, 이내 축성(築城) 계획을 포기하였다.


靖郭君謂齊王曰:「五官之計,不可不日聽也而數覽.」王曰:「說五而厭之.」今與靖郭君.

靖郭君善齊貌辨.  齊貌辨之為人也多疵,門人弗說.  士尉以証靖郭君,靖郭君不聽,士尉辭而去.

孟嘗君又竊以諫,靖郭君大怒曰:「剗而類,破吾家. 苟可慊齊貌辨者,吾無辭為之.」

於是舍之上舍,令長子御,旦暮進食.

[정곽군이 제위왕에게 말하기를 : " 5관(五官: 상국 밑에 소속된 5명의 집정대부)의 회계기록에 대해

매일 듣고 자주 열람해 보지 않으면 안 됩니다.”라고 하자.
제위왕이 대답하기를 : “알았소.”라고 하였으나,  5일 만에 제위왕은 싫증을 내며 이 일을 정곽군에게 넘겨주었다.

정곽군이 문객 제모변(齊貌辨)을 잘 대해 주었다. 제모변은 여러 가지로 흠이 많아 여타 문객들이 좋아하지 않았다.

또 다른 문객인 사위(士尉)가 정곽군에게 이를 간했으나 정곽군이 들어주지 않자, 곧바로 떠나버리고 말았다.

이에 아들인 맹상군(孟嘗君: 田文)이 조용히 간하자, 정곽군이 크게 화를 내며 말하기를 : " 너희들을 다 없애고

집안이 결단나는 한이 있더라도 진정 제모변을 만족시킬 수만 있다면 나는 그 어떤 일도 불사하겠다.”라고 하였다.
그리고는 제모변을 상사(上舍: 고급저택)에 머물게 하면서 큰 아들로 하여금 그를 시중들면서

아침저녁으로 식사까지 갖다 바치게 하였다. 주현왕 48년(기원전 321)


數年,威王薨,宣王立.  靖郭君之交,大不善於宣王,辭而之薛,與齊貌辨俱留.

無幾何,齊貌辨辭而行,請見宣.  靖郭君曰:「王之不說嬰甚,公往必得死焉.」

齊貌辨曰:「固不求生也,請必行.」 靖郭君不能止.  齊貌辨行至齊,宣王聞之,藏怒以待之.  
齊貌辨見宣王,王曰:「子,靖郭君之所聽愛夫!」

[몇 년 후 제위왕이 죽자, 제선왕(齊宣王)이 즉위하였다.

정곽군은 평소 제선왕과 사이가 좋지 않아 사직한 뒤 설 땅으로 물러나 제모변과 함께 지내고 있었다.

그러자 얼마 후 제모변이 제선왕을 알현하겠다며 정곽군에게 하직인사를 하였다.

이에 정곽군이 말하기를 : " 대왕이 나를 매우 미워하고 있소. 그대가 가면 필시 죽게 될 것이오.”라고 하자.
제모변이 말하기를 : “ 저는 본래 목숨을 구걸할 생각이 없습니다. 청컨대 꼭 가게 해 주십시오.”라고 하였다.
정곽군은 결국 제지하지 못했다. 제모변이 제나라 땅에 이르자, 제선왕이 이 소식을 듣고 노기를 띤 채 그를 맞이했다. 제모변이 제선왕을 배알하자, 제선왕이 묻기를 : " 그대는 정곽군이 총애하여 무엇이든 들어준다고 하던데!”라고 하자.

 

齊貌辨曰:「愛則有之,聽則無有.  王之方為太子之時,辨謂靖郭君曰:

『太子相不仁,過頤豕視,若是者信反. 不若廢太子,更立衛姬嬰兒郊師.』

靖郭君泣而曰:『不可,吾不忍也.』 若聽辨而為之,必無今日之患也.  此為一.
至於薛,昭陽請以數倍之地易薛,辨又曰:『必聽之.』  
靖郭君曰:『受薛於先王,雖惡於後王,

吾獨謂先王何乎!且先王之廟在薛,吾豈可以先王之廟與楚乎!』又不肯聽辨.  此為二.」

[그러자 제모변이 대답하기를 : " 저를 사랑하는 것은 틀림없으나 무엇이든 들어주는 것만은 아닙니다.

대왕께서 태자가 되었을 때 제가 정곽군에게 진언하기를, ‘태자의 관상이 어질지 못합니다.

뺨이 너무 크고 눈빛이 바르지 않으니 이같은 상은 신의를 저버릴 상입니다.

태자를 폐위시키고 위희(衛姬)의 어린 아들 교사(郊師)를 세우느니만 못합니다’라고 했습니다.

그러자 정곽군이 울면서 말하기를, ‘불가하오. 나는 차마 그리 할 수 없소’라고 하였습니다.

만일 제 말을 듣고 그대로 행했다면 오늘날과 같은 환난은 없었을 것입니다. 이것이 그 하나의 예입니다.

또 설 땅에 이르자, 초나라 영윤 소양(昭陽)이 설 땅보다 몇 배나 되는 땅을 주겠다며 환지(換地)를 제의해 왔습니다. 저는 그때 말하기를, ‘그 제의를 반드시 받아들여야 합니다’라고 하였습니다.

그러자 정곽군이 말하기를, ‘설 땅은 선왕으로부터 받은 것이오. 비록 후왕(後王)이 나를 미워한다 해도

그리하면 장차 선왕을 무슨 낯으로 만날 수 있겠소. 게다가 선왕의 사당이 바로 이곳 설 땅에 있소.

그러니 내 어찌 선왕의 사당을 초나라에 넘겨 줄 수 있겠소’라고 하면서 또다시 저의 건의를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이것이 그 두 번째 예입니다.”라고 하였다.

 

宣王大息, 動於顏色, 曰:「靖郭君之於寡人一至此乎!寡人少, 殊不知此. 客肯為寡人來靖郭君乎?」齊貌辨對曰:「敬諾.」 靖郭君衣威王之衣,冠舞其劍,宣王自迎靖郭君於郊,望之而泣.

靖郭君至,因請相之.  靖郭君辭,不得已而受. 七日,謝病強辭.  靖郭君辭不得,三日而聽.

當是時,靖郭君可謂能自知人矣!能自知人,故人非之不為沮. 此齊貌辨之所以外生樂患趣難者也.

[제선왕이 크게 탄식한 후 얼굴에 감동스런 표정을 나타내며 말하기를 :
“ 정곽군의 과인에 대한 태도가 이 정도까지였단 말인가! 과인은 어려서 이를 전혀 몰랐소.

그대는 과인을 위해 정곽군을 불러 올 수 있겠소?”라고 하자. 

​제모변이 대답하기를 : “ 분부대로 하겠습니다.”라고 하였다.
정곽군은 제위왕이 하사한 옷을 갖춰 입은 뒤 하사받은 검까지 패용하고 길을 나섰다.

제선왕은 친히 교외까지 나와 정곽군을 맞이하면서 멀리서 정곽군의 모습을 보고 감격에 겨워 눈물을 흘렸다.

정곽군이 이르자, 상국의 자리를 맡아 줄 것을 청했다. 정곽군이 사양했으나 제선왕의 간청을 물리치지 못하고

이내 수락하고 말았다. 그러나 7일 만에 다시 칭병하여 굳이 사직을 청했다.

이에 겨우 3일 만에 제선왕의 허락을 얻어 냈다. 당시 정곽군은 가히 사람을 볼 줄 알았다고 할 만하다!

능히 사람을 볼 줄 알았기 때문에 다른 사람의 비방에도 불구하고 제모변을 계속 아꼈던 것이다.

제모변이 외생(外生: 구차하게 삶을 도모하지 않음)의 자세로 기꺼이 환난 속으로 뛰어든 것은

지기(知己)에 보답하기 위한 것이었다.

邯鄲之難,趙求救於齊.  田侯召大臣而謀曰:「救趙孰與勿救?」鄒子曰:「不如勿救.」

段干綸曰:「弗救,則我不利.」 田侯曰:「何哉?」「夫魏氏兼邯鄲,其於齊何利哉!」

田侯曰:「善.」乃起兵,曰:「軍於邯鄲之郊.」
段干綸曰:「臣之求利且不利者,非此也.  夫救邯鄲,軍於其郊,是趙不拔而魏全也.

故不如南攻襄陵以弊魏,邯鄲拔而承魏之弊,是趙破而魏弱也.」
田侯曰:「善.」 乃起兵南攻襄陵.  七月,邯鄲拔.  齊因承魏之弊,大破之桂陵.

[한단의 싸움에서 위나라의 공격을 받은 조나라가 급히 제나라에 구원을 청했다. 주현왕 16년(기원전 353)

그러자 전후(田侯: 제위왕)가 곧 대신들을 불러 묻기를 : " 조나라를 구해 주는 것과 구해 주지 않는 것 중

어느 것이 낫겠소?”라고 하자.
이에 상국인 성후(成侯) 추자(鄒子: 鄒忌)가 대답하기를 : " 구해주지 않느니만 못합니다.”라고 하였다.
그러자 대신 단간륜(段干綸)이 반박하며 말하기를 : " 구원하지 않으면 우리에게 불리합니다.”라고 하였다.
그러자 전후가 묻기를 : “그게 무슨 말이오?”라고 하자.
단간륜이 대답하기를 : " 무릇 위나라가 한단을 겸병하게 되면, 우리 제나라에 어떤 이익이 있겠습니까!”라고 하였다.
전후가 말하기를 : “그 말이 옳소.”라고 하며, 출병을 하면서 말하기를 : "한단의 교외에 주둔토록 하라.”라고 하였다.
그러자 단간륜이 말하기를 : " 신이 조나라를 구해 주는 것이 이롭다고 한 것은 이런 것을 말한 것이 아닙니다.

무릇 한단의 포위를 풀어주겠다며 교외에 군사를 주둔시키면 조, 위 두 나라는 반드시 휴전하게 되어

조나라는 한단을 빼앗기지 않고 위나라는 무력을 온전히 보존하게 됩니다.

이리되면 우리 제나라에 무슨 도움이 되겠습니까. 우리는 남쪽으로 위나라의 양릉(襄陵: 하남성 수현)을 공격해

위나라를 지치게 만드느니만 못합니다. 위나라가 한단을 공략하게 되면 이미 크게 지쳐 있을 것이니

우리가 그 틈을 타 위나라 군사를 공격하면 조나라는 깨어지고 위나라는 약해지게 됩니다.”라고 하자. 

전후가 말하기를 : “ 그 말이 옳소.”라고 하며,  군사를 출병시켜 남쪽으로 양릉을 치게 했다.

7월, 한단이 위나라에 함락되자, 제나라는 위나라 군사가 지친 틈을 이용해 계릉(桂陵)에서 위나라 군사를 대파했다.

南梁之難,韓氏請救於齊.  田侯召大臣而謀曰:「早救之,孰與晚救之便?」

張丐對曰:「晚救之,韓且折而入於魏,不如早救之.」
田臣思曰:「不可. 夫韓、魏之兵未弊,而我救之,我代韓而受魏之兵,顧反聽命於韓也.

且夫魏有破韓之志,韓見且亡,必東愬於齊. 我因陰結韓之親,而晚承魏之弊,則國可重,

利可得, 名可尊矣.」  田侯曰:「善.」乃陰告韓使者而遣之.

韓自以專有齊國,五戰五不勝,東愬於齊,齊因起兵擊魏,大破之馬陵.

[남량(南梁: 하남성 여남현)의 싸움에서 한나라가 제나라에 구원을 청하였다. 주현왕 28년(기원전 341), 

후(田侯: 제위왕)가 대신들을 불러 놓고 묻기를 : " 한나라를 일찍 구해 주는 것과 천천히 구해 주는 것 중

어느 것이 낫겠소?”라고 하자.  이에 대신 장개(張丐)가 대답하기를 : "늦게 구해 주었다가 그 사이 한나라가 굴복하면

한나라는 곧 위나라에 편입되고 말 것입니다. 그러니 속히 구해 주느니만 못합니다.”라고 하였다.
그러자 대신 전신사(田臣思: 陳臣思)가 반박하며 말하기를 : " 안 됩니다. 대체로 한, 위 두 나라 군사가 아직

지치지도 않았는데 우리가 늦든 빠르든 구원에 나서면 우리가 한나라 대신 위나라의 병화를 입는 꼴이 됩니다.

그리 되면 우리가 오히려 한나라의 명을 받들어야 하는 처지가 되고 맙니다. 지금 위나라는 한나라를 반드시

격파하려는 뜻을 품고 있습니다. 한나라는 장차 망할 듯하면 필시 동쪽으로 우리 제나라에 구원을 청해 올 것입니다.

그때 비로소 은밀히 한나라와 결맹한 뒤 천천히 위나라가 지친 틈을 이용해 출병하면 존중도 받고, 이익도 얻고,

명분도 높일 수 있습니다.”라고 하였다.
후(田侯: 제위왕)이 말하기를 : “그 말이 옳소.”라고 하며,  이에 몰래 한나라 사자와 결호(結好)한 뒤 돌려보냈다.

과연 한나라는 제나라의 구원 약속만을 믿고 5 번 싸웠으나 5 번 모두 이기지 못하게 되자,

동쪽으로 급히 제나라에 도움을 청했다. 제나라는 그제야 비로소 군사를 일으켜 위나라에 대한 공격에 나섰는데

마침내 마릉(馬陵: 산동성 범현)에서 위나라 군사를 대파했다.

 

魏破韓弱,韓、魏之君因田嬰北面而朝田侯.  成侯鄒忌為齊相,田忌為將,不相說.

公孫閈謂鄒忌曰:「公何不為王謀伐魏? 勝則是君之謀也, 君可以有功;

戰不勝,田忌不進,戰而不死,曲撓而誅.」鄒忌以為然,乃說王而使田忌伐魏.

田忌三戰三勝,鄒忌以告公孫閈,公孫閈乃使人操十金而往卜於市,
曰:「我田忌之人也,吾三戰而三勝,聲威天下,欲為大事,亦吉否?」

卜者出,因令人捕為人卜者,亦驗其辭於王前.  田忌遂走.

[이로써 위나라는 격파되고 한나라는 약해져, 한, 위 두 나라의 군주는 전영(田嬰)을 통해 북면하여

전후(제위왕)를 받들며 조공을 바칠 것을 약속하였다.

성후(成侯) 추기(鄒忌)는 제나라의 재상이고 전기(田忌)는 제나라의 장군이었으나 서로 사이가 나빴다.

이에 공손한(公孫閈)이 추기에게 말하기를 : " 그대는 어찌하여 대왕을 위해 위나라 정벌을 주장하지 않는 것이오.

이기면 그대의 계책에 의한 것이니 그대는 가히 유공자가 될 것이오. 만일 지게 되면 전기가 진군하지 않았거나,

책임을 지고 전사하지 않았거나, 용기가 없어 패했다는 등의 구실을 대어 그를 제거할 수 있을 것이오.”라고 하자.
추기는 그럴듯하다고 여겨 이를 따랐다. 이에 마침내 제왕을 설득한 뒤 전기를 장수로 내세워 위나라를 치게 했다.

그러자 전기는 위나라와의 싸움에서 3번 싸워 3번 모두 이기는 대승을 거두었다. 추기가 이를 공손한에게 알리자

공손한이 10 금을 심부름하는 사람에게 준 뒤 저자로 나가 다음과 같이 말하면서 점을 치게 했다.
“나는 전기의 부하인데 주인이 나에게 분부하기를, ‘나는 3전3승하여 드디어 명성이 천하에 위세를 떨치고 있다.

장차 대사를 결행하고자 하니 길흉을 점쳐 보도록 하라’고 했다.”라고 하였다.
점쟁이가 밖으로 나가 사람을 시켜 첨치러 온 자를 체포하게 한 뒤 제위왕 앞에서 자신이 들은 대로 증언하였다.

이에 전기는 마침내 도망치고 말았다.


田忌為齊將,係梁太子申,禽龐涓.  孫子謂田忌曰:「將軍可以為大事乎?」田忌曰:「奈何?」
孫子曰:「將軍無解兵而入齊.  使彼罷弊於先弱守於主.  主者,循軼之途也,羮擊摩車而相過.

使彼罷弊先弱守於主,必一而當十,十而當百,百而當千.  然後背太山,左濟,右天唐,

軍重踵高宛,使輕車銳騎衝雍門.  若是,則齊君可正,而成侯可走.  不然,則將軍不得入於齊矣.」

田忌不聽,果不入齊.

[전기(田忌)가 제나라 장수가 되어 위나라 태자 신(申)을 묶고 장수 방연(龐涓)을 사로잡았다.

그러자 손자(孫子: 孫武의 후손 孫殡)가 전기에게 묻기를 : " 장군은 대사를 도모할 수 있지 않겠습니까?”라고 하자.
전기가 되묻기를 : “ 그게 무슨 말이오?”라고 하였다.
이에 손자가 말하기를 : " 장군은 병사들의 무장을 풀지 말고 곧바로 제나라로 들어가 힘없는 노약자들을 시켜 주 땅을

지키게 하십시오. 주 땅은 수레 한 대 지날 정도의 좁은 길로 이뤄져 있어 전차들이 모이면 서로 부딪치고 뒤엉켜

꼼짝할 수 없습니다. 따라서 노약자들을 시켜 주 땅을 지킬지라도 필시 일당십, 십당백, 백당천은 될 것입니다.

연후에 장군은 태산을 등진 채 왼쪽으로 제수(濟水), 오른쪽으로 천당(天唐: 高唐으로 산동성 제남부 우성현 )을

천연 요새로 삼고 무기와 군량을 가지고 고완(高宛: 산동성 고원현)까지 이동시킨 후 날랜 전차로

옹문(雍門: 임치성)을 공격하십시오. 그리하면 제나라 군왕을 장군의 손에 넣고 성후를 도망치게 할 수 있습니다.

그리 하지 않으면 장군은 제나라로 들어갈 수 없을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주현왕 29년(기원전 340),
그러나 전기는 이를 따르지 않았다. 그는 결국 제나라로 들어가지 못했다.


田忌亡齊而之楚,鄒忌代之相。齊恐田忌欲以楚權復於齊,杜赫曰:「臣請為留楚.」

謂楚王曰:「鄒忌所以不善楚者,恐田忌之以楚權復於齊也。王不如封田忌於江南,

以示田忌之不返齊也,鄒忌以齊厚事楚.  田忌亡人也,而得封,必德王.

若復於齊,必以齊事楚.  此用二忌之道也.」 楚果封之於江南.

鄒忌事宣王,仕人眾,宣王不悅.  晏首貴而仕人寡,王悅之.
鄒忌謂宣王曰:「忌聞以為有一子之孝,不如有五子之孝.  今首之所進仕者,以幾何人?」

宣王因以晏首壅塞之.

[전기가 제나라에서 망명해 초나라로 가자, 추기(鄒忌)가 그를 대신해 재상이 되었다.

추기는 혹여 전기가 초나라의 권세를 등에 업고 제나라로 다시 복귀하지나 않을까 염려했다.

이때 주나라 사람 두혁(杜赫)이 추기에게 말하기를 : " 신이 전기를 초나라에 머물도록 만들겠습니다.”라고 하였다.
그리고는 초나라로 가서 초선왕(楚宣王: 초숙왕의 동생으로 이름은 熊良夫)에게 말하기를 :
“ 추기가 초나라와 사이가 좋지 않은 것은 전기가 초나라의 권세를 이용해 제나라로 복귀할까 염려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대왕께서 전기를 강남(江南: 초나라 땅의 별칭)에 봉해 전기를 제나라로 보낼 의향이 없음을 보이십시오.

그러면 추기는 제나라를 모두 들어 초나라를 섬길 것입니다. 전기 역시 망명한 사람으로 봉지를 얻게 되면

반드시 대왕의 은덕에 감격해 할 것입니다. 이후 설령 전기가 제나라로 돌아간다 해도 필시 제나라를 들어

초나라를 섬길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2기(二忌: 전기, 추기)의 대립을 활용하는 방법입니다.”라고 하자.
초선왕은 과연 강남을 전기의 봉지로 하사 하였다.

추기가 제선왕을 섬기면서 자신의 추천으로 벼슬한 자가 매우 많자, 제선왕이 이를 불쾌하게 생각했다.

그러나 제나라의 공족 안수(晏首)는 높은 자리에 있으면서도 벼슬을 시킨 자가 많지 않아 제선왕이 그를 좋아했다.

그러자 추기가 제선왕에게 말하기를 : “ 제가 듣건대 아들 하나의 효도는 다섯 아들의 효도만 못하다고 했습니다.

지금 안수가 추천하여 벼슬하는 자가 과연 몇 명이나 됩니까?” 라고 하자. 주현왕 28년(기원전 341),
이에 제선왕은 안수가 인재의 출사를 가로막고 있다고 여기게 되었다.


鄒忌脩八尺有餘,身體昳麗.  朝服衣冠窺鏡,謂其妻曰:「我孰與城北徐公美?」

其妻曰:「君美甚,徐公何能及公也!」城北徐公,齊國之美麗者也.
忌不自信,而復問其妾曰:「吾孰與徐公美?」 妾曰:「徐公何能及君也!」

旦日客從外來,與坐談,問之客曰:「吾與徐公孰美?」
客曰:「徐公不若君之美也!」 明日,徐公來.  孰視之,自以為不如;窺鏡而自視,又弗如遠甚.

暮,寢而思之曰:「吾妻之美我者,私我也;妾之美我者,畏我也;客之美我者,欲有求於我也.」

[추기는 키가 8척이나 되는 거구로 모습 또한 수려했다. 하루는 아침 일찍 의관을 갖춰 입고 거울을 바라보면서

아내에게 묻기를 : “ 나와 성북(城北)의 서공(徐公: 徐君平) 중 누가 더 미남이오?”라고 하자.
아내가 대답하기를 : “ 당신이 훨씬 빼어납니다. 서공이 어찌 감히 당신에 미칠 수 있겠습니까.”라고 하였다.
성북의 서공은 제나라에서 정평이 나 있는 미남이었다. 추기는 아무래도 자신이 없어 이번에는 다시

첩에게 묻기를 : “ 나와 서공 중 누가 더 미남이오?”라고 하자. 

첩이 대답하기를 : ​“ 서공 따위가 어찌 당신에게 미칠 수 있겠습니까!”라고 하였다.
이튿날 한 문객이 와 추기와 좌담을 하게 되었다. 이에 추기가 그 문객에게 묻기를 :
“ 나와 서공자 중 누가 더 미남이오?”라고 하자.

문객이 대답하기를 : "서공은 공의 아름다움만 못합니다.”라고 하였다.
다음날 서공이 추기의 집에 오게 되었다. 추기는 그를 여러 모로 자세히 뜯어보면서 아무리 생각해도 자신이 없었다. 거울을 보며 마음속으로 비교해 보았지만 역시 서공과 너무 차이가 났다.

추기는 잠자리에 들어 이리저리 생각한 끝에 말하기를 : " 아내가 나를 아름답다고 한 것은 나를 사랑하기 때문이고,

측실이 나를 아름답다고 한 것은 두려워하기 때문이고,

문객이 나를 아름답다고 한 것은 내게 바라는 바가 있기 때문이다.”라고 하였다.


於是入朝見威王曰:「臣誠知不如徐公美,臣之妻私臣,臣之妾畏臣,臣之客欲有求於臣,

皆以美於徐公.  今齊地方千里,百二十城,宮婦左右,莫不私王;朝廷之臣,莫不畏王;

四境之內,莫不有求於王.  由此觀之,王之蔽甚矣!」
王曰:「善.」乃下令:「群臣吏民,能面刺寡人之過者,受上賞;上書諫寡人者,受中賞;

能謗議於市朝,聞寡人之耳者,受下賞.」令初下,群臣進諫,門庭若市.  數月之後,時時而間進.

期年之後,雖欲言,無可進者。燕、趙、韓、魏聞之,皆朝於齊.  此所謂戰勝於朝廷.

[이에 추기는 입조하여 제위왕을 알현하면서 말하기를 : " 저는 실로 서공만한 미남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도 신의 처는 신에 대한 애정에서, 첩은 신에 대한 두려움에서,

손님은 신으로부터 무엇인가 얻고자 하는 기대에서 모두 신이 서공보다 낫다고 했습니다.

지금 제나라는 사방 1천 리에 성읍이 1백 20개나 되는 대국입니다.

그러니 비빈과 근신치고 대왕을 좋아하지 않는 자가 없고, 조정의 신하치고 대왕을 두려워하지 않는 자가 없으며,

나라 안의 백성치고 대왕으로부터 이익을 얻고자 하는 기대를 품지 않은 자가 없을 것입니다.

이로써 보면 대왕의 시야는 이같은 일로 인해 심하게 가려져 있다고 하겠습니다.” 라고 하자.

제위왕이 대답하기를 : “ 옳은 말이오.”라고 하였다.
그리고는 령을 내리기를 : " 군신들과 관리와 백성 중에 과인의 잘못을 면전에서 지적하는 자는 상상(上賞)을,

글로써 간하는 자는 중상(中賞)을, 능히 시정(市井)에서 과인을 비방하여 그 소문을 과인의 귀에 들어오게 하는 자는

하상(下賞)을 내릴 것이다.”라고 하였다. 령이 떨어지자 간언하려는 군신들로 조정의 문 앞이 마치 시장과 같았다.

그러나 몇 달 뒤에는 가끔 간언하러 오는 자만이 있게 되었고, 1년 후에는 비록 간하고 싶어도 간할 것이 없게 되었다. 연, 조, 한, 위 등 다른 나라들이 이 소문을 듣고 모두 제나라에 조알(朝謁)하였다.

이것이 소위 무력을 동원하지 않고 정사를 밝게 함으로써 다른 나라를 신복하게 하는 것이다.


秦假道韓、魏以攻齊,齊威王使章子將而應之.  與秦交和而舍,使者數相往來,章子為變其徽章,

以雜秦軍.  候者言章子以齊入秦,威王不應. 頃之間,候者復言章子以齊兵降秦,威王不應.

而此者三.  有司請曰:「言章子之敗者,異人而同辭。王何不發將而擊之?」
王曰:「此不叛寡人明矣,曷為擊之!」

頃間,言齊兵大勝,秦軍大敗,於是秦王拜西藩之臣而謝於齊.

[진나라가 한, 위 두 나라의 길을 빌어 제나라를 공격해 오자,  주현왕 46년(기원전 323)  

이에 제위왕이 장자(章子: 「맹자」의 匡章)를 장수로 삼아 맞서 싸우도록 하였다.

장자와 진나라 군사가 서로 화문(和門: 군문)을 세우고 대치했다. 이때 장자는 사자가 빈번히 왕래하는 것을 이용해

자기의 부대 깃발과 복장을 진나라 것으로 바꾸고 몰래 부대를 진나라 군사 속으로 침투시켰다.

그러자 이를 오해한 척후가 제위왕에게 장자가 장차 제나라 군사를 이끌고 진나라에 투항하려 한다고 보고했다.

그러나 제위왕은 아무런 응답도 하지 않았다. 얼마 후 다시 척후가 똑같은 내용을 보고했으나

제위왕은 아무런 응답도 하지 않았다. 똑같은 보고가 3번이나 계속되자, 유사(有司)가 참다 못해 묻기를 :
“ 장자의 배신을 알리는 자는 비록 보고한 사람은 바뀌었어도 그 내용은 한결같습니다.

그런데도 대왕께서는 어찌하여 군사를 보내 그를 정벌하지 않는 것입니까?”라고 하자.
그러자 제위왕이 대답하기를 : " 장자가 과인을 배반하지 않을 것이 분명한데 어찌 그를 칠 수 있겠소.”라고 하였다.
얼마 후 ‘제나라 군대가 대승을 거두어 진나라 군대를 대패시켰다는 보고가 들어왔다.

이에 진혜문왕은 고개를 숙이고 서번지신(西藩之臣, 서쪽 속국의 신하 나라)이라 칭하며 제나라에 용서를 빌었다.


左右曰:「何以知之?」 曰:「章子之母啟得罪其父,其父殺之而埋馬棧之下.  

吾使者章子將也,勉之曰:『夫子之強,全兵而還,必更葬將軍之母.』
對曰:『臣非不能更葬先妾也.  臣之母啟得罪臣之父。臣之父未教而死.

夫不得父之教而更葬母,是欺死父也.  故不敢.』 夫為人子而不欺死父,豈為人臣欺生君哉?」

그러자 측근들이 궁금해 하며 제선왕에게 묻기를 : " 장자가 배반하지 않으리라는 것을 어찌 알았습니까?”라고 하자.
이에 제선왕이 대답하기를 : " 전에 장자의 어미 계(啓)가 장자의 아비에게 죄를 짓자,

그 아비가 계를 죽여 마구간 마루바닥 밑에 묻어 버렸소. 과인이 장자를 장군으로 삼아 보내면서 격려하기를,

‘그대가 강한 무력을 배경으로 군사들을 온전히 하여 개선하면 그대의 모친 시신을 옮겨 묻어 주겠소’라고 했소.

그러자 그가 대답하기를, ‘신이 모친의 시신을 옮겨 묻을 줄 모르는 것이 아닙니다.

신의 모친 계가 저의 부친에게 죄를 지은 후 신의 부친은 어떻게 하라는 유언도 없이 세상을 떠났습니다.

친의 유언이 없었는데도 모친의 시신을 옮기는 것은 선친을 속이는 것이 됩니다.

그래서 감히 시신을 옮기지 못하고 있는 것입니다’라고 했소. 무릇 자식된 자로서 돌아가신 아버지조차

속이지 않는 자가 어찌 남의 신하가 되어 살아 있는 임금을 속일 리 있겠소?”라고 하였다.


楚將伐齊,魯親之,齊王患之。張丐曰:「臣請令魯中立.」乃為齊見魯君.

魯君曰:「齊王懼乎?」 曰:「非臣所知也,臣來弔足下.」
魯君曰:「何弔?」 曰:「君之謀過矣.  君不與勝者而與不勝者,何故也?」

魯君曰:「子以齊、楚為孰勝哉?」 對曰:「鬼且不知也.」「然則子何以弔寡人?」
曰:「齊,楚之權敵也,不用有魯與無魯.  足下豈如令眾而合二國之後哉!

楚大勝齊,其良士選卒必殪,其餘兵足以待天下;齊為勝,其良士選卒亦殪.
而君以魯眾合戰勝後,此其為德也亦大矣,其見恩德亦其大也.」 魯君以為然,身退師.

[초나라가 장차 제나라를 치려 하자, 노나라가 초나라와 친교를 맺었다. 이에 제위왕이 크게 걱정했다.

그러자 대신 장개(張丐)가 나서서 말하기를 : " 신이 노나라로 하여금 중립을 지키도록 만들겠습니다.”라고 하였다.
그리고는 제나라를 위해 노경공(魯景公: 노강공의 아들)을 만났다.

이에 노경공이 묻기를 : " 지금 제왕이 두려워하고 있소?”라고 하자.
장개가 대답하기를 : “ 이는 제가 알 바가 아닙니다. 제가 온 것은 대왕을 조문하기 위한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그러자 노경공이 의아해 하며 묻기를 : “ 무슨 조문이오 ?”라고 하자.
장개가 되묻기를 : “ 대왕의 계책 잘못되었습니다. 대왕께서는 이길 나라의 편을 들지 않고 패할 나라와 연합했으니

도대체 어찌된 일입니까?”라고 하였다.
노경공이 묻기를 : “ 그대는 제, 초 두 나라 중 어느 쪽이 이길 것으로 보시오?”라고 하자.
장개가 대답하기를 : “그것은 귀신도 모르는 일입니다.”라고 하였다.
노경공이 묻기를 : “ 그렇다면 그대는 어찌하여 과인을 조문한다고 말한 것이오?”라고 하자.
장개가 대답하기를 : " 제, 초 두 나라의 세력은 대등하여 노나라의 도움 여부는 아무 상관이 없습니다.

그런데 대왕께서는 어찌하여 먼저 노나라 군사를 안전하게 보호하면서 두 나라가 싸우기를 기다린 후 승자 쪽을

편드는 계책을 쓰지 않는 것입니까! 초나라가 제나라에 대승을 거두면 그 양사선졸(良士選卒)은 모두 죽게 됩니다.

그리고 나머지 병사로도 천하의 제후들을 상대할 수가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제나라가 대승을 거두면

그 양사선졸은 모두 죽을 것입니다. 그러니 족하는 노나라 군사를 온전히 이끌고 있다가 이긴 나라와 연합하느니만

못합니다. 그리하면 베푸는 덕도 크고, 은덕을 입는 나라 역시 크게 감격해 할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노경공이 이를 그를 듯하게 여겨 이내 군대를 후퇴하도록 하였다.


秦伐魏,陳軫合三晉而東謂齊王曰:「古之王者之伐也,欲以正天下而立功名,以為後世也.

今齊、楚、燕、趙、韓、梁六國之遞甚也,不足以立功名,適足以強秦而自弱也,非山東之上計也.

能危山東者,強秦也.  不憂強秦,而遞相罷弱,而兩歸其國於秦,此臣之所以為山東之患.  

天下為秦相割,秦曾不出力;天下為秦相烹,秦曾不出薪.
何秦之智而山東之愚耶? 願大王之察也.

[진나라가 위나라를 정벌하자, 세객 진진(陳軫)이 3진을 연합시켜 놓은 뒤 동쪽으로 가서 제선왕을 만나 유세하기를 :

“ 옛 성왕들이 전쟁을 한 것은 천하를 바로 잡고 공명을 세워 후세를 위하고자 한 것이었습니다.

지금 제, 초, 연, 조, 한, 위 등 6국의 교체가 심하지만 그 누구도 공명을 세우기에는 부족합니다.

오히려 진나라만 강하게 해 주고 스스로 약해질 뿐이니 이는 산동 6국이 취할 상책이 아닙니다.

산동 6국을 위험하게 하는 것은 강한 진나라입니다. 그런데도 강한 진나라는 우려하지 않고 자신들끼리

서로 돌아가며 공벌을 하여 쇠약해지고 있으니 싸우는 두 나라는 승패와 상관없이 진나라에 귀속되고 말 것입니다.

이것이 제가 산동 6국을 위해 걱정하는 바입니다. 천하가 마치 진나라를 위하기라도 하듯 서로 싸울 때

진나라는 칼 한번 뽑지 않았고 천하가 서로 삶아 죽일 때 진나라는 땔감 한번 댄 일도 없었습니다.

진나라는 어찌 그리 지혜롭고 6국은 어찌 그리 어리석은 것입니까? 원컨대 대왕께서는 깊이 헤아리기 바랍니다.

 

古之五帝、三王、五伯之伐也,伐不道者.  今秦之伐天下不然,必欲反之,主必死辱,民必死虜.
今韓、梁之目未嘗乾,而齊民獨不也,非齊親而韓、梁疏也,齊遠秦而韓、梁近.
今齊將近矣!今秦欲攻梁絳、安邑,秦得絳、安邑以東下河,必表裏河而東攻齊,舉齊屬之海,

南面而孤楚、 韓、梁,北向而孤燕、趙,齊無所出其計矣.  願王熟慮之!

[옛날 5제(五帝)와 3왕(三王), 5패(五伯)의 정벌은 모두 무도한 나라를 친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지금 진나라의 천하 정벌은 그렇지 않습니다. 오히려 반드시 이에 상반되려 합니다.

이에 제후들은 욕을 당해 죽고, 백성들은 포로가 되어 죽습니다.

지금 한, 위 두 나라 백성의 눈에는 일찍이 눈물이 마른 적이 없는데 제나라 백성만 유독 그렇지 않습니다.

이는 진나라가 제나라와는 사이가 좋은데 한, 위 두 나라와는 소원하기 때문이 아닙니다.

제나라는 진나라와 멀리 떨어져 있고, 한, 위 두 나라는 가깝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곧 제나라도 진나라와 국경을

접하게 될 것입니다. 지금 진나라는 위나라의 강(絳)과 안읍(安邑)을 공격하려 하고 있습니다.

위나라는 서하(西河: 서쪽의 황하)로 진나라와 경계를 삼고, 동하(東河: 동쪽의 황하)로 제나라와 경계를 삼고 있으니

진나라가 강과 안읍을 얻은 다음에는 동쪽으로 황하를 따라 내려와 서하와 동하를 표리(表裏)로 삼은 뒤

동쪽으로 군대를 출정시켜 제나라를 공략하여 제나라의 동쪽 해변 끝까지 점령하고

남면(南面)하여 초, 한, 위 등을 고립시키고, 북쪽을 향해서는 연, 조 두 나라를 고립시키려 할 것입니다.

이리되면 제나라는 더 이상 계책을 쓸 수 없게 되니 원컨대 대왕은 깊이 헤아리기 바랍니다.

 

今三晉已合矣,復為兄弟約,而出銳師以戍梁絳、安邑,此萬世之計也.  齊非急以銳師合三晉,

必有後憂.  三晉合,秦必不敢攻梁,必南攻楚.  楚、秦構難,三晉怒齊不與己也,必東攻齊.

此臣之所謂齊必有大憂,不如急以兵合於三晉.」 齊王敬諾,果以兵合於三晉.

[지금 3진이 이미 연합해 다시 형제의 맹약을 맺었습니다.

이에 정예부대를 보내 위나라의 강과 안읍을 방어하고 있으니 이는 만세를 지키는 훌륭한 계책이라 할 만합니다.

제나라도 속히 정예부대를 보내 3진과 연합하지 않으면 필시 후환이 있을 것입니다.

지금 3진이 연합하면 진나라는 틀림없이 감히 위나라를 공격하지 못하고 반드시 남으로 초나라를 공격할 것입니다.

초, 진 두 나라가 교전하면 3진은 제나라가 자기 편을 들어주지 않은데 원한을 품고 필시 동쪽으로 제나라를

공격할 것입니다. 제가 제나라에 필시 큰 우환이 있을 것이라는 언급한 이유가 바로 이 때문입니다.

그러니 속히 군사를 보내 3진과 연합하느니만 못합니다.”라고 하자. 

제선왕은 진진의 계책을 정중히 받아들이고, 마침내 군사를 보내 3진과 연합하였다.


蘇秦為趙合從,說齊宣王曰:「齊南有太山,東有琅邪,西有清河,北有渤海,此所謂四塞之國也.

齊地方二千里,帶甲數十萬,粟如丘山.  齊車之良,五家之兵,疾如錐矢,戰如雷電,解如風雨,

即有軍役,未嘗倍太山、絕清河、涉渤海也.  臨淄之中七萬戶,臣竊度之,下戶三男子,

三七二十一萬,不待發於遠縣,而臨淄之卒,固以二十一萬矣.

[소진이 조나라와의 합종을 성사시키고자 제선왕을 만나 유세하기를 : " 제나라는 남쪽으로 태산(太山),

동쪽으로 낭야산(琅邪山: 산동성 교남현), 서쪽으로 청하(淸河: 濟水), 북쪽으로 발해(渤海)가 있습니다.

이것이 소위 사면이 험조한 지형으로 둘러 싸인 나라라는 것입니다.

게다가 제나라의 영토는 사방 2천 리이고, 병력은 수십만 명이고, 군량은 산과 같이 풍부합니다.

또한 뛰어난 3군과 5가지병(五家之兵: 도읍 임치와 사방의 변방 거점을 지키는 병사)의 병사들이 있습니다.

이들이 진군할 때는 쇠뇌에 쓰는 화살과 같이 빠르고, 싸울 때는 우레와 같고, 해산할 때는 풍우와 같이 신속합니다.

그래서 전쟁이 일어나도 지금까지 태산을 넘어오거나, 청하를 끊거나, 발해를 건너오거나 한 적이 없었던 것입니다.
또한 지금 도읍인 임치에는 7만 호가 있습니다. 신이 헤아리건대 최소한 1호 당 세 사람으로 가정해도

장정만 무려 21만 명이나 됩니다. 멀리 떨어져 있는 현에서 징병하지 않고 임치의 병사만 징병해도

거뜬히 21만 명을 동원할 수 있는 것입니다.


臨淄甚富而實,其民無不吹竽、鼓瑟、擊筑、彈琴、鬥雞、走犬、六博、蹹踘者;

臨淄之途,車猸擊,人肩摩,連衽成帷,舉袂成幕,揮汗成雨;家敦而富,志高而揚.

夫以大王之賢與齊之強,天下不能當.  今乃西面事秦,竊為大王羞之.

且夫韓、魏之所以畏秦者,以與秦接界也.  兵出而相當,不至十日,而戰勝存亡之機決矣.

韓、魏戰而勝秦,則兵半折,四境不守;戰而不勝,以亡隨其後.

是故韓、魏之所以重與秦戰而輕為之臣也.

[게다가 임치는 매우 부유하고 알찬 삶을 살고 있으며, 그 백성들 중 우(竽: 생황과 유사한 악기)를 불거나,

비파(瑟: 25현)를 타거나, 축(筑: 아쟁과 유사한 13현으로 竹尺을 쳐 소리를 냄)을 치거나, 금(琴: 7현)을 타거나,

투계(鬪鷄)를 하거나, 주견(走犬: 개달리기 경주)을 하거나, 육박(六博: 장기의 일종)을 하거나,

답국(蹋鞠: 공차기 놀이)을 즐기지 않는 사람이 없습니다. 또 거리는 번화하기 그지없어 수레가 서로 부딪치고,

길가는 사람들의 어깨가 서로 닿아 걸을 수 없고, 옷깃이 이어져 휘장을 이루고, 소매가 나란히 합쳐져 장막이 되고, 땀이 흐르면 마치 비오듯 합니다. 이같이 모두 집이 풍족해 사람들의 의기가 매우 크고 높습니다.
대왕의 총명과 제나라의 이같이 강대한 국력으로 대하면 천하의 그 어떤 나라도 당할 길이 없는데,

대왕께서는 지금 서면(西面)하여 진나라를 섬기고 있으니 신이 생각하건대 대왕의 수치가 아닌가 싶습니다. 

또한 한, 위 두 나라가 진나라를 두려워하는 것은 진나라와 국경이 접해 있기 때문입니다.

이로 인해 군사를 일으켜 대적해 본들 채 10일도 걸리지 않아 승패와 존망이 결판나고 맙니다.

설령 한, 위 두 나라가 이겼다 하더라도 병력의 절반이 소모되어 사방의 국경을 지켜 낼 길이 없고,

패하면 말할 것도 없이 곧바로 망하고 맙니다.

이것이 바로 한, 위 두 나라가 진나라와의 싸움을 어렵게 생각하고 신하가 되는 것을 쉽게 여기는 이유입니다.


今秦攻齊則不然,倍韓、魏之地,至闈陽晉之道,徑亢父之險,車不得方軌,馬不得並行,

百人守險,千人不能過也.  秦雖欲深入,則狼顧,恐韓、魏之議其後也.

是故恫疑虛猲,高躍而不敢進,則秦不能害齊,亦已明矣.  夫不深料秦之不奈我何也,

而欲西面事秦,是群臣之計過也.  今無臣事秦之名,而有強國之實,臣固願大王之少留計.」

齊王曰:「寡人不敏,今主君以趙王之教詔之,敬奉社稷以從.」

[그러나 진나라가 제나라를 공격하는 것은 그렇지 않습니다.

배후에 한, 위 두 나라가 있고, 위(衛)나라 진양(晉陽: 산동성 운성현)의 길을 통과해야 하고,

제나라 항보(亢父: 산동성 제녕시)의 험한 지형을 넘지 않으면 안됩니다.

이곳은 두 대의 수레가 나란히 지날 수 없고, 말도 두 필이 나란히 갈 수 없어 1백 명만 수비해도 1천 명의 병력이

통과할 수 없는 곳입니다. 진나라는 제나라 영토 안으로 깊숙이 들어가려 해도 자주 뒤를 돌아볼 수밖에 없으니

이는 한, 위 두 나라가 배후를 공격할까 두렵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허장성세로 위협하며 세만 과시할 뿐

감히 진격치 못하는 것입니다. 이로써 보면 진나라가 제나라를 칠 수 없다는 것은 명백한 사실입니다.

그런데도 이를 깊이 생각지도 않은 채 서면하여 진나라를 섬기려 하는 것은 무슨 연고입니까?

이는 군신들의 잘못된 계교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이제라도 진나라를 향해 비굴하게 무릎을 꿇었다는

오명을 씻고 강국의 실질을 얻을 수 있습니다.

재삼 청컨대 대왕께서 조금만 주의를 기울여 이를 자세히 헤아리시기 바랍니다.”라고 하였다.
그러자 제선왕이 말하기를 : " 과인은 비록 총명하지 못하였으나 그대가 조왕의 가르침으로써 과인에게 그같이 고하니

곧 사직을 받들어 따르도록 하겠소.”라고 하였다.  주현왕 36년(기원전 333)


張儀為秦連橫齊王曰:「天下強國無過齊者,大臣父兄殷眾富樂,無過齊者. 然而為大王計者, 

皆為一時說而不顧萬世之利.  從人說大王者,必謂齊西有強趙,南有韓、魏,負海之國也,

地廣人眾,兵強士勇,雖有百秦,將無奈我何!大王覽其說,而不察其至實.

夫從人朋黨比周,莫不以從為可.  臣聞之,齊與魯三戰而魯三勝,國以危,亡隨其後,

雖有勝名而有亡之實,是何故也? 齊大而魯小.  今趙之與秦也,猶齊之於魯也.

秦、趙戰於河漳之上,再戰而再勝秦;戰於番吾之下,再戰而再勝秦.

[장의가 진나라를 위해 연횡책을 쓰고자 제선왕에게 말하기를 : " 천하의 강국 중 제나라보다 더 강한 나라는 없고,

조정대신과 종실이 많고 부유하기로 제나라 만한 나라도 없습니다.

그러나 대왕을 위해 계책을 내는 자들 모두 오직 현실만을 염두에 둔 일시적인 유세에만 급급할 뿐,

만세의 이익을 일러 준 자는 아직 없었을 것입니다. 합종책을 주장하는 자들은 한결같이 대왕께 말하기를 

‘ 제나라는 서쪽으로 강한 조나라와 남쪽으로 한, 위 두 나라가 있는 데다가 동쪽으로는 바다를 업고 있는

안전한 나라입니다. 게다가 땅도 넓고 백성도 많으며 군사는 강하고 병사들이 한결같이 용감합니다.

비록 진나라가 1백 개 있다 한들 장차 우리 제나라를 어찌하겠습니까?’라고 할 것입니다.

대왕께서는 그같은 유세만 듣고 실체에 대해서는 제대로 살피지 못하고 있습니다.
무릇 합종책을 주장하는 자들은 붕당을 이루어 자신들의 사리만을 꾀하면서 오직 합종책만이 가히 따를만 하다고

떠들지 않는 자가 없습니다. 제가 듣건대 노나라는 제나라와 3번 싸워 3번 모두 이겼으나

오히려 위험한 경우에 처했다가 이내 망하고 말았습니다. 비록 명분상으로는 이겼으나 실제로는 망하고 만 것입니다.

이는 무슨 연고이겠습니까? 제나라는 크고 노나라는 작았기 때문입니다.

지금 조, 진 두 나라의 싸움은 제, 노 두 나라의 경우와 같습니다.

진, 조 두 나라가 하장(河漳: 황하와 장수 사이)에서 싸울 때 조나라는 2번 싸워 2번 모두 이겼습니다.

또 반아(番吾: 하북성 한단현)의 싸움에서도 2번 모두 조나라가 진나라를 이겼습니다. 

 

四戰之後,趙亡卒數十萬,邯鄲僅存。雖有勝秦之名,而國破矣!是何故也? 秦強而趙弱也.

今秦、楚嫁子取婦,為昆弟之國;韓獻宜陽,魏效河外,趙入朝黽池,割河間以事秦.
大王不事秦,秦驅韓、魏攻齊之南地,悉趙涉河關,指摶關,臨淄、即墨非王之有也. 

國一日被攻,雖欲事秦,不可得也.  是故願大王熟計之.」
齊王曰:「齊僻陋隱居,託於東海之上,未嘗聞社稷之長利.  今大客幸而教之,請奉社稷以事秦.」

獻魚鹽之地三百於秦也.

[그러나 조나라는 이같이 4번 싸운 결과 마침내 수십만 명의 병사를 잃고 겨우 한단만 남게 되었습니다.

비록 진나라를 이겼다는 명성은 얻게 되었으나 나라는 파괴되고 만 것입니다. 이는 무슨 연고이겠습니까?

진나라는 강하고 조나라는 약했기 때문입니다. 지금 진, 초 두 나라는 인척 관계를 맺어 형제의 나라가 되었습니다.

또 한나라는 의양(宜陽)을 바치고, 위나라는 하외(河外: 하남성)를 바치고, 조나라는 민지(黽池: 하남성 민지현)로

가서 입조한 후 하간(河間)을 떼어 바치며 진나라를 섬기기로 했습니다.

대왕께서 만일 진나라를 섬기지 않으면 진나라는 한, 위 두 나라를 몰아 제나라의 남쪽 땅을 정벌하게 할 것이고,

조나라 군사를 몰아 하장(河漳)을 건너 박관(博關: 산동성 박평현)을 향할 것입니다.

그리되면 임치(臨淄)와 즉묵(卽墨: 산동성 평도현)은 대왕 소유가 되지 않을 것입니다.

만일 하루아침에 공격을 받게 되어 그때야 비로소 진나라를 섬기겠다고 한들 성사될 리 없을 것입니다.

그러니 원컨대 대왕께서는 이를 깊이 헤아리기 바랍니다.”라고 하였다.
그러자 제선왕이 말하기를 : " 제나라는 한 구석에 치우쳐 있는 데다가 동해의 해안가에 의탁하고 있어

지금까지 나라를 길이 보전할 좋은 계책을 듣지 못했소. 지금 대객(大客)이 다행히 이같이 가르침을 주니

바라건대 사직을 들어 곧 진나라를 섬기도록 하겠소.”라고 하였다.  주난왕 4년(기원전 311),

그리고는 3백 리에 달하는 생선과 소금 산지를 진나라에 헌납하였다.

     齊策 二 .



韓、齊為與國.  張儀以秦、魏伐韓.  齊王曰:「韓,吾與國也. 秦伐之,吾將救之.」
田臣思曰:「王之謀過矣,不如聽之.  子噲與子之國,百姓不戴,諸侯弗與.

秦伐韓,楚、趙必救之,是天下以燕賜我也.」 王曰:「善.」乃許韓使者而遣之. 

韓自以得交於齊,遂與秦戰.  楚、趙果遽起兵而救韓,齊因起兵攻燕,三十日而舉燕國.

[한, 제 두 나라가 동맹을 맺자, 장의가 진, 위 두 나라를 동원해 한나라를 쳤다. 주난왕 원년(기원전 314)

그러자 제선왕이 군신들을 모아 놓고 말하기를 : " 한나라는 우리의 동맹국이오.

지금 진나라가 한나라를 치고 있으니 과인이 장차 구해 주어야겠소.”라고 하자.
대신 전신사(田臣思)가 반대하며 말하기를 : “ 대왕의 생각은 잘못으로 차라리 그냥 두느니만 못합니다.

지금 연나라에서는 연왕 쾌(噲: 연역왕의 아들로 연소왕의 부친)가 왕위를 재상 자지(子之)에게 물려주었으나

백성들이 그를 지지하지 않고 제후들도 그를 지원치 않고 있습니다. 그런데 지금 진나라가 한나라를 치면

초, 조 두 나라가 필시 한나라를 구하려 들 것입니다. 이는 바로 하늘이 연나라를 우리에게 주는 것입니다.”라고 하자.
제선왕이 말하기를 : “ 그 말이 옳소. 라고 하였다.” 이에 한나라 사자에게 거짓으로 응답한 뒤 돌려보냈다.

한나라는 제나라의 지원을 믿고 드디어 진나라와 교전을 벌였다.

그러자 과연 초, 조 두 나라가 급히 군사를 일으켜 한나라 구원에 나섰다.

이 틈을 타 제나라는 일거에 군사를 일으켜 연나라를 치고 불과 30여일 만에 연나라 도읍을 점령해 버렸다.


張儀事秦惠王.  惠王死,武王立.  左右惡張儀,曰:「儀事先王不忠.」言未已,齊讓又至.

張儀聞之,謂武王曰:「儀有愚計,願效之王.」 王曰:「奈何?」

曰:「為社稷計者, 東方有大變, 然後王可以多割地.  今齊王甚憎張儀, 儀之所在, 必舉兵而伐之.

故儀願乞不肖身而之梁,齊必舉兵而伐之.  齊、梁之兵連於城下,不能相去,王以其間伐韓,  

入三川,出兵函谷而無伐,以臨周,祭器必出,挾天子,案圖籍,此王業也.」
王曰:「善.」乃具革車三十乘,納之梁.  齊果舉兵伐之.  梁王大恐.

[장의가 진혜문왕을 섬기고 있던 중 진혜문왕이 죽고 진무왕이 즉위하였다. 주난왕 5년(기원전 310),

좌우에서 장의를 미워하던 대신들이 말하기를 : " 장의는 선왕이신 혜문왕께 불충했습니다.”라고 하였다.
그 말이 끝나기도 전에 제나라에서 온 사자가 장의를 임용한 일을 놓고 진나라를 책망했다.

장의가 이 말을 듣고 진무왕에게 아뢰기를 : “ 신에게 어리석은 계책이 있는데 대왕께 바치고자 합니다.”라고 하였다.

​진무왕이 묻기를 : “ 어떤 계책이오? ”라고 하자.
이에 장의가 대답하기를 : “ 사직을 위한 것입니다. 동쪽 6국에 큰 변고가 일어나면 대왕께서는 더 많은 땅을 떼어

받을 수 있습니다. 지금 제선왕은 저를 몹시 미워하여 제가 있는 곳이라면 반드시 군사를 동원해 공격해 올 것입니다.

원컨대 제가 물러나 위나라로 가도록 허락해 주기 바랍니다. 제나라는 필시 군사를 동원해 위나라를 칠 것입니다.

두 나라가 성 아래에서 대치하여 싸우게 되면 서로 떨어질 수 없게 되니 대왕은 그 틈을 타 한나라를 치고

삼천으로 들어가십시오. 이어 군사를 함곡관으로 출병시키면 주나라를 친다는 오명을 듣지 않고도

주군(周君)을 압박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리되면 주군은 틀림없이 제기(祭器)를 내놓고 항복할 것입니다.

그때 천자를 끼고 도적(圖籍)을 장악하도록 하십시오. 이것이 왕업을 이루는 길입니다.”라고 하였다.
그러자 진무왕이 말하기를 : “ 좋은 계책이오. ”라고 하였다.
그리고는 병거 30 승을 준비시켜 장의를 위나라로 보냈다. 제나라가 과연 군사를 일으켜 위나라를 공격하자,

위양왕(魏襄王)이 크게 두려워하였다.

 

張儀曰:「王勿患,請令罷齊兵.」 乃使其舍人馮喜之楚,藉使之齊.

齊、楚之事已畢,因謂齊王:「王甚憎張儀,雖然,厚矣王之託儀於秦王也.」
齊王曰:「寡人甚憎儀,儀之所在,必舉兵伐之,何以託儀也?」

[그러자 장의가 위양왕에게 아뢰기를 : " 대왕께서는 전혀 심려할 것이 없습니다.

제나라 군사가 곧 철수토록 만들겠습니다.”라고 하였다.
이에 사인(舍人) 풍희(馮喜)를 시켜 우선 초나라로 간 뒤 초나라 사자의 명의를 빌려 제나라로 가게 했다.

풍희가 제, 초 두 나라간의 외교업무를 완결한 뒤 제선왕을 만나 아뢰기를 " 대왕은 장의를 몹시 미워하고 있습니다.

그런데도 어찌하여 그를 후대하여 진왕에게 맡겨 놓고 있는 것입니까.”라고 하였다.
제선왕이 말하기를 : “ 과인은 장의를 몹시 미워하고 있소. 과인은 지금 장의가 있는 곳은 그 어느 곳일지라도

군사를 일으켜 공격하고 있는데 어찌하여 그를 진왕에게 맡겨 놓았다고 하는 것이오?”라고 하자.

 

對曰:「是乃王之託儀也. 儀之出秦, 因與秦王約曰:『為王計者, 東方有大變, 然後王可以多割地.

齊王甚憎儀,儀之所在,必舉兵伐之.  故儀願乞不肖身而之梁,齊必舉兵伐梁.

梁、齊之兵連於城下不能去,王以其間伐韓,入三川,出兵函谷而無伐,以臨周,祭器必出,

挾天子,案圖籍,是王業也.』 秦王以為然,與革車三十乘而納儀於梁.  而果伐之,

是王內自罷而伐與國,廣鄰敵以自臨,而信儀於秦王也.  此臣之所謂託儀也.」王曰:「善.」乃止.

[풍희가 대답하기를 : “ 그렇기 때문에 제가 바로 장의를 맡겨 놓았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장의는 진나라를 떠날 때

진왕에게 약속하기를, ‘대왕을 위해 꾀하건대 동쪽에 큰 변고가 있으면 대왕은 더 많은 땅을 차지하게 될 것입니다.

제왕은 저를 몹시 미워하고 있어 제가 있는 곳은 반드시 군사를 일으켜 공격할 것입니다.

그러니 저를 위나라로 보내주기 바랍니다. 제나라가 군사를 동원해 위나라를 치면 위, 제 두 나라 군사는

성 아래에서 대치하며 서로 떨어질 수 없게 될 것입니다. 대왕은 그 틈을 타 한나라를 치고 삼천에 들어간 뒤

군사를 함곡관으로 출동시키면 주나라를 친다는 오명을 듣지 않고도 주나라를 압박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리 되면 주나라는 제기를 내놓고 항복할 것이니 그때 협천자하여 도적을 장악하십시오.

이것이 왕업입니다’라고 했습니다. 진왕이 이를 옳게 여겨 병거 30승을 갖춰 장의를 위나라로 보냈습니다.

그런데 제나라는 과연 그의 말대로 위나라를 공격한 것입니다.

이는 대왕이 국내적으로 스스로 피폐해지면서 동맹국을 친 것으로 이웃을 적으로 만들어 공벌하는 꼴이 됩니다.

위나라를 공격하면 진왕으로 하여금 장의를 더욱 믿게 만드는 결과를 초래할 뿐입니다.

이것이 바로 신이 ‘장의를 후대하여 진왕에게 맡겼다’고 말한 이유입니다.”라고 하였다.
제선왕이 듣고 말하기를 : “ 옳은 말이오.”라고 하며,  이내 위나라 공격을 중지하였다.


犀首以梁為齊戰於承匡而不勝.  張儀謂梁王不用臣言以危國.  梁王因相儀, 儀以秦、梁之齊合橫親.

犀首欲敗, 謂衛君曰:「衍非有怨於儀也, 值所以為國者不同耳. 君必解衍.」衛君為告儀, 儀許諾,

因與之參坐於衛君之前.  犀首跪行,為儀千秋之祝.  明日張子行,犀首送之至於齊疆.

齊王聞之,怒於儀,曰:「衍也吾讎,而儀與之俱,是必與衍鬻吾國矣.」遂不聽.

[서수(犀首: 공손연)가 위나라 군사를 이끌고 가 제나라와 승광(承匡: 하남성 수현)에서 싸웠으나 패하게 되었다.

그러자 장의가 위양왕에게 자신의 말을 듣지 않아 나라를 위태롭게 만들었다고 지적했다.

그러자 위양왕이 크게 후회하며 장의를 재상으로 삼았다. 주난왕 5년(기원전 310),

이에 장의는 위나라가 진나라를 섬기며 연횡책에 합류한 것을 토대로 제나라마저 연횡책에 합류시키고자 하였다.

서수가 이를 저지할 생각으로 위군(衛君: 위평후의 아들 衛嗣君으로 후에서 군으로 봉호가 강등)에게 말하기를 :
“ 저는 결코 장의에게 사사로운 원한이 있는 것이 아닙니다. 다만 나라를 위하는 길이라 따를 뿐입니다.

군께서 저를 위해 중재에 나서 두 사람 간의 오해를 없애 주기 바랍니다.”라고 하자.
위군이 서수의 말을 장의에게 전하자, 장의가 이를 수락했다. 이에 두 사람이 위군 앞에 나란히 앉게 되었다.

이때 서수는 궤행(跪行: 무릎을 꿇은 채 앞으로 나아감)하여 장의의 천세(千歲)를 축수(祝壽)하였다.

다음날 장의가 제나라로 떠날 때 서수는 국경까지 나가 전송해 주었다.

제선왕이 이 말을 듣고 장의에게 화를 내며 말하기를 : “ 서수는 나의 원수요. 그런데도 그대가 그 자와 함께 있었으니 이는 그대가 우리 제나라를 팔아 먹으려는 것이 아니오.”라고 하며, 장의의 말을 들어주지 않았다.


昭陽為楚伐魏,覆軍殺將得八城,移兵而攻齊.

陳軫為齊王使,見昭陽,再拜賀戰勝,起而問:「楚之法,覆軍殺將,其官爵何也?」
昭陽曰:「官為上柱國,爵為上執珪.」 陳軫曰:「異貴於此者何也?」 曰:「唯令尹耳.」

[초나라 장수 소양(昭陽)이 초나라를 위해 위나라를 정벌하였다. 주현왕 46년(기원전 323),

복실살장(覆軍殺將 ; 적군을 뒤엎고 장수를 죽임)하고 8개 성읍을 취한 뒤 군사를 이동시켜 제나라를 공격하였다.

이때 세객 진진(陳軫)이 제민왕(齊閔王)을 위해 사자가 되어 소양을 만났다.

진진이 재배하며 전승을 축하한 뒤 일어나 묻기를 : “초나라 법은 이같이 복군살장의 대승을 거둘 경우

어떤 관작을 내립니까?”하고 하자.
소양이 대답하기를 : “ 관직은 상주국(上柱國)을 주고, 작위는 상집규(上執珪)를 내릴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진진이 묻기를 : “ 그보다 더 높은 직책은 무엇입니까?” 라고 하자.

소양이 대답하기를 : “오직 영윤(令尹)만 있을 뿐입니다.”라고 하였다.


陳軫曰:「令尹貴矣!王非置兩令尹也,臣竊為公譬可也.  楚有祠者,賜其舍人卮酒.
舍人相謂曰:『數人飲之不足,一人飲之有餘.  請畫地為蛇,先成者飲酒.』

一人蛇先成,引酒且飲之,乃左手持卮,右手畫蛇,曰:『吾能為之足.』
未成,一人之蛇成,奪其卮曰:『蛇固無足,子安能為之足.』遂飲其酒.  為蛇足者,終亡其酒.
今君相楚而攻魏,破軍殺將得八城,不弱兵,欲攻齊,齊畏公甚,公以是為名居足矣,

官之上非可重也. 戰無不勝而不知止者,身且死,爵且後歸,猶為蛇足也.」昭陽以為然,解軍而去.

[그러자 진진이 말하기를 : “ 과연 영윤은 고귀한 자리입니다. 초왕이 두 명의 영윤을 둘 리 없으니,

제가 장군을 위해 한 가지 비유를 들어 말씀드리겠습니다.

초나라에 어떤 사람이 제사를 지내면서 가까운 사인(舍人)들에게 큰 잔에 술을 따라 주었습니다.

그러자 사인들이 서로 의논하기를, ‘여럿이 마시면 부족하지만 혼자 마시면 남을 것이니

청컨대 땅 위에 뱀을 그리되 제일 먼저 그린 사람이 다 마시기로 하자’고 했습니다.

그 중 한 사람이 뱀을 먼저 그리고 술잔을 끌어 당겨 마시려다가 왼손에 술잔을 들고 오른손으로 뱀을 다시 그리면서

말하기를, ‘나는 뱀의 다리까지도 그릴 수 있다’고 했습니다.

그가 아직 다리를 다 그리지 못했을 때 다른 한 사람이 뱀을 다 그린 후 술잔을 빼앗으면서 말하기를,

‘뱀은 본래 다리가 없다. 그대는 어찌 없는 다리까지 그릴 수 있는가’라고 했습니다.

그리고는 마침내 술을 마셔 버리자, 결국 사족(蛇足)을 그린 자는 그 술을 마시지 못하고 말았습니다.

지금 장군은 초나라의 재상 신분으로 위나라를 공격해 복군살장하고 8개 성읍을 탈취했습니다.

그리고도 병력을 전혀 손상치 않았고 내친 김에 제나라까지 공격하려 하자 제나라는 크게 두려워하고 있습니다.

그것만으로도 장군은 이미 명성을 충분히 떨쳤습니다. 장군은 이것으로 만족히 생각해야 하고

사실 더 이상 올라갈 관직도 없습니다. 모든 싸움에서 이기지 못한 적이 없는 자가 중도에 그칠 줄 모르게 되면

몸도 죽고 관직도 뒷사람에게 빼앗기는 법입니다. 이는 사족을 그린 자와 같은 꼴이 되는 것입니다.”라고 하자.
소양은 이를 옳게 여겨 곧 군대를 해산시키고 철수하였다.


秦攻趙. 趙令樓緩以五城求講於秦,而與之伐齊.  齊王恐,因使人以十城求講於秦.

樓子恐,因以上黨二十四縣許秦王.
趙足之齊,謂齊王曰:「王欲秦、趙之解乎? 不如從合於趙,趙必倍秦.  倍秦則齊無患矣.」

[진나라가 조나라를 공격하였다. 조나라가 누완(樓緩)을 시켜 5개 성읍을 진나라에 주고 강화를 요청하면서

장차 함께 제나라를 정벌하자고 제의하게 하였다. 주난왕 56년(기원전 259)

제왕 건(建: 제양왕의 아들)이 두려운 나머지 사자를 보내 10개 성읍을 진나라에 떼어 주고 강화를 요청했다.

그러자 이번에는 누자(樓子: 누완)가 두려운 나머지 상당(上黨)의 24개 현을 진소양왕에게 바쳤다.

이에 조나라 사람 조족(趙足)이 제나라로 가 제왕 건에게 말하기를 :
“ 대왕께서는 진, 조의 결맹이 와해되기를 바라십니까? 그렇다면 조나라와 합종하느니만 못합니다.

그리하면 조나라는 필시 진나라를 등질 것이고, 제나라는 아무런 근심 걱정이 없게 됩니다.”라고 하였다.


權之難,齊、燕戰.  秦使魏冉之趙,出兵助燕擊齊.

薛公使魏處之趙,謂李向曰:「君助燕擊齊,齊必急.  急必以地和於燕,而身與趙戰矣.

然則是君自為燕東兵,為燕取地也.  故為君計者,不如按兵勿出.  齊必緩,緩必復與燕戰. 

戰而勝,兵罷弊,趙可取唐、曲逆;戰而不勝,命懸於趙.  

然則吾中立而割窮齊與疲燕也,兩國之權,歸於君矣.

[권(權: 하북성 완현) 땅에서 제, 연 두 나라의 전쟁이 벌어졌다. 주현왕 36년(기원전 333),

이때 진나라는 위염(魏冉)을 조나라에 사자로 보내면서 군사를 출동시켜 연나라를 도와 제나라를 공격하려 하였다.

러자 제나라의 설공(薛公) 맹상군도 식객 위처(魏處)를 조나라 대신 이향(李向)에게 보내 이같이 전하게 하였다.
“ 그대가 연나라를 도와 제나라를 공격하면 제나라는 틀림없이 위급해질 것이고,

위급해지면 필시 땅을 떼어 연나라와 화해하고 조나라와 싸움을 벌일 것이오.

그리되면 조나라는 스스로 연나라의 이익을 위해 친히 동쪽으로 출병해 제나라와 싸우면서 땅을 빼앗는 셈이 되오.

그러니 그대를 위한 계책으로는 군사를 멈춘 채 출병하지 않느니만 못하오.

그러면 제나라는 필시 위급을 면하게 되고 위급을 면하면 다시 연나라와 싸울 것이오.

제나라가 싸움에 이기더라도 군사는 지치게 될 것이니 그 틈을 노려 조나라는 당(唐: 하북성 당현)과

곡역(曲逆: 하북성 보성지)을 취할 수 있을 것이오. 싸움에 이기지 못할지라도 제나라의 명운은 조나라에 달려 있소. 조나라가 중립을 지키면 곤경에 처한 제나라와 쇠약해진 연나라로부터 땅을 떼어 받을 수 있을 것이오.

그러면 연, 제 두 나라의 승패와 명운은 모두 조나라의 손 안에 들어오는 것이 되오.”라고 하였다.


秦攻趙長平,齊、楚救之.  秦計曰:「齊、楚救趙,親,則將退兵;不親,則且遂攻之.」

趙無以食,請粟於齊,而齊不聽.

[진나라가 조나라를 장평(長平)에서 공격하자, 제, 초 두 나라가 조나라를 구하고자 했다.  주난왕 55년(기원전 260)

그러자 진나라가 이를 방해하기 위해 계책을 세운 후 말하기를 : “ 제, 초 두 나라가 조나라를 구하고자 하는데

두 나라가 조나라와 친하면 병력을 철수하고 ; 그렇지 않으면 끝까지 공격하기로 하자.”라고 하였다.
때마침 조나라가 군량이 모자라 제나라에 원조를 청했으나 제나라가 이를 들어주지 않았다.


蘇秦謂齊王曰:「不如聽之以卻秦兵,不聽則秦兵不卻,是秦之計中,而齊、燕之計過矣.
且趙之於燕、齊,隱蔽也,齒之有脣也,脣亡則齒寒.  今日亡趙,則明日及齊、楚矣.

且夫救趙之務,宜若奉漏壅,沃焦釜.  夫救趙,高義也;卻秦兵,顯名也.

義救亡趙,威卻強秦兵,不務為此,而務愛粟,則為國計者過矣.」

[이에 소진이 제왕 건(建)에게 말하기를 : " 조나라의 청을 받아들여 진나라 군사를 철병하게 하느니만 못합니다.

받아들이지 않으면 진나라 군사는 물러서지 않을 것입니다. 이는 진나라의 계책에 말려드는 것으로

제, 연의 계책은 실패하게 됩니다. 조나라는 제, 연 두 나라에게 일종의 은폐(隱蔽: 병풍)에 해당합니다.

이는 마치 이에 입술이 있는 것과 같아 입술이 없으면 이가 시리게 되는 법입니다.

오늘 조나라가 망하면 그 재난이 반드시 이튿날 제, 연 두 나라에 미치게 됩니다.

또한 조나라를 구하는 것은 마치 손으로 급히 항아리를 받쳐 들어 술이 새는 것을 막고,

벌겋게 단 솥에 물을 뿌려 솥이 깨지는 것을 막는 것 만큼이나 급합니다.

무릇 조나라를 구하는 것은 고의(高義)이고, 진나라 군사를 물리친다는 것은 현명(顯名: 명성을 드러냄)입니다.

의로써 망하려는 조나라를 구하고 위엄을 떨쳐 강한 진나라 군사를 물리쳐야 함에도, 이에 힘쓰지 않고

오로지 곡식을 아끼는데 힘쓰니 이는 나라를 위한 계획으로는 큰 잘못이 아닐 수 없습니다.”라고 하였다.


或謂齊王曰:「周、韓西有強秦,東有趙、魏.  秦伐周、韓之西,趙、魏不伐,周、韓為割,

韓卻周害也.  及韓卻周割之,趙、魏亦不免與秦為患矣.

今齊、秦伐趙、魏,則亦不果於趙、魏之應秦而伐周、韓. 

令齊入於秦而伐趙、魏,趙、魏亡之後,秦東面而伐齊,齊安得救天下乎!」

[어떤 사람이 제왕 건(建)에게 말하기를 : " 주, 한 두 나라는 서쪽으로 강한 진나라가 있고,

동쪽으로 조나라와 위나라가 있습니다. 진나라가 주, 한 두 나라의 서쪽을 공격하면

조나라와 위나라를 공격하지 않아도, 한나라는 땅을 빼앗기고 주나라는 퇴각하게 될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한나라는 물러나고 주나라는 손해를 입게 되며 이후에는 조, 위 두 나라 역시 진나라의 환난을

면할 수 없게 됩니다. 지금 제나라가 진나라와 함께 조, 위 두 나라를 공격하는 것은,

조, 위 두 나라가 진나라에 호응하여 주, 한 두 나라를 공격하는 것과 다르지 않습니다. 지금 제나라가 진나라

편을 들어 조, 위 두 나라를 공격하면 두 나라가 망하고 난 후 진나라는 필시 동쪽으로 제나라를 공격할 터인데,

그때 제나라는 천하의 그 누구에게 도움을 청할 것입니까!”라고 하였다.  진시황 17년(기원전 230),

 

 

     齊策 三 .

 

 

楚王死,太子在齊質.  蘇秦謂薛公曰:「君何不留楚太子,以市其下東國.」

薛公曰:「不可.  我留太子,郢中立王,然則是我抱空質而行不義於天下也.」
蘇秦曰:「不然.  郢中立王,君因謂其新王曰:『與我下東國,吾為王殺太子.

不然,吾將與三國共立之.』 然則下東國必可得也.」

[초회왕(楚懷王)이 진나라에서 죽었을 때, 초나라 태자 횡(橫)은 마침 제나라에 인질로 와 있었다.

이에 소진이 승상 설공(薛公: 맹상군)에게 묻기를 : " 군은 어찌하여 초나라 태자를 억류해 놓고 

하동국(제나라와 접한 초나라의 동쪽 변경) 땅과 바꾸자고 하지 않는 것입니까.”라고 하자.
설공이 대답하기를 : “ 불가하오. 내가 태자를 억류하고 있으면 초나라 도읍 영(郢)에서는 따로 왕을 세울 것이오.

그리되면 나는 쓸모없는 인질을 붙들고 있게 될 뿐만 아니라 천하에 불의를 행하는 것이 되오.”라고 하였다.
그러자 소진이 말하기를 : “ 그렇지 않습니다. 영에서 따로 군주를 세우면 군은 그 신왕에게 말하기를,

‘나에게 하동국 땅을 주면 대왕을 위해 태자를 죽여 주겠소. 그렇지 않으면 나는 3국(三國: 진, 한, 위)과 함께

태자를 즉위시키겠소’라고 하십시오. 그리하면 하동국을 틀림없이 얻을 수 있을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蘇秦之事,可以請行;可以令楚王亟入下東國;可以益割於楚;可以忠太子而使楚益入地;

可以為楚王走太子;可以忠太子使之亟去;可以惡蘇秦於薛公;可以為蘇秦請封於楚;

可以使人說薛公以善蘇子; 可以使蘇子自解於薛公.

蘇秦謂薛公曰:「臣聞謀泄者事無功,計不決者名不成.  今君留太子者,以市下東國也.

非亟得下東國者,則楚之計變,變則是君抱空質而負名於天下也.」

[소진의 계책은 우선 그 자신이 자청해 초나라로 갈 수 있었다 ; 

이어 초왕으로 하여금 서둘러 하동국 땅을 제나라에 바치게 하였다 ; 

나아가 초나라로부터 더욱 많은 땅을 할양 받을 수 있었다 ; 

태자에 대한 충성의 표시로 초나라로 하여금 더욱 많은 땅을 바치게 하였다 ;

그리고는 초왕을 위해 태자를 제나라 밖으로 내보냈다;

이때 태자에게 충성한다는 구실로 더욱 급히 그를 제나라 밖으로 내보낼 수 있었다 ; 

이어 사람을 시켜 설공에게 소진에 관한 악담을 늘어 놓게 하였다.

그리고는 소진을 위해 초나라에 봉지를 청하였다 ; 이어 사람을 설공에게 보내 소진을 칭송하게 하고 ; 

그리고는 소진으로 하여금 설공 앞에서 자신을 해명하게 하였다.
이에 소진이 설공에게 말하기를 : “ 제가 듣건대 계책이 미리 누설되면 일을 하더라도 공을 이룰 수 없고,

계책을 제 때 결정하지 않으면 이름을 이룰 수 없다고 했습니다. 지금 군이 태자를 붙들고 있는 것은

하동국의 땅을 얻어내기 위한 것입니다. 그러니 서둘러 하동국 땅을 얻어내지 못하면 초나라의 계책이 바뀔 것이고,

그렇게 되면 군은 공질만 억류한 채 천하 제후들로부터 오명만 짊어지게 됩니다.”라고 하였다.


薛公曰:「善.  為之奈何?」對曰:「臣請為君之楚,使亟入下東國之地.  楚得成,則君無敗矣.」

薛公曰:「善.」因遣之.  謂楚王曰:「齊欲奉太子而立之.  臣觀薛公之留太子者,以市下東國也.

今王不亟入下東國,則太子且倍王之割而使齊奉己.」 楚王曰:「謹受命.」因獻下東國.

故曰可以使楚亟入地也.  謂薛公曰:「楚之勢可多割也.」 薛公曰:「奈何?」

[설공이 묻기를 : “ 옳은 말이오. 그렇다면 어찌해야 좋겠소?”라고 하자.
소진이 대답하기를 : “ 제가 군을 위해 초나라로 가 그들로 하여금 서둘러 하동국 땅을 바치도록 하겠습니다.

초나라가 결정을 내리면 군은 장차 실패할 일이 없을 것입니다.” 라고 하였다. 

그러자 설공이 말하기를 : " ​“좋소.”라고 하였다.  이에 ‘그 자신이 자청해 초나라로 갈 수 있다’고 한 것이다.
소진이 초왕을 만나 말하기를 : " 제나라는 태자를 받들어 초왕으로 세우려 합니다.

제가 보기에 설공이 태자를 억류하고 있는 것은 바로 하동국 땅과 바꾸려는 것입니다.

지금 대왕이 급히 하동국 땅을 제나라에 떼어 주지 않으면 태자는 장차 대왕보다 두 배의 많은 땅을

제나라에 떼어 줄 것을 약속하면서 자신을 보호해 달라고 도움을 청할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그러자 초왕이 크게 고마워하며 말하기를 : “삼가 명을 받들도록 하겠소.”라고 하며, 하동국 땅을 헌납했다.

이에 ‘초나라로 하여금 서둘러 땅을 바치게 할 수 있다’고 한 것이다.

이어 소진이 설공에게 말하기를 : " 초나라의 형세로 보아 땅을 더 얻어 낼 수 있을 것 같습니다.”라고 하였다. 

그러자 설공이 묻기를 : “ 어찌하면 되겠소?”라고 하자.

 

「請告太子其故,使太子謁之君,以忠太子,使楚王聞之,可以益入地.」 故曰可以益割於楚.
謂太子曰:「齊奉太子而立之,楚王請割地以留太子,齊少其地.  太子何不倍楚之割地而資齊,

齊必奉太子.」 太子曰:「善.」 倍楚之割而延齊.

楚王聞之恐,益割地而獻之,尚恐事不成.  故曰可以使楚益入地也.

[소진이 대답하기를 : “ 이 사실을 태자에게 고하고 태자로 하여금 정식으로 군에게 청원하게 한 뒤

이를 받아들여 태자에 대한 충성을 드러내면 됩니다.

이후 이 사실을 초왕의 귀에 들어가게 하면 더 많은 땅을 얻을 수 있을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그래서 ‘초나라로부터 더 많은 땅을 얻을 수 있다’고 한 것이다. 이어 소진이 태자에게 말하기를 :
“ 제나라가 태자를 옹립하려 했더니 초왕이 땅을 떼어 주면서 태자를 억류해 달라고 청했습니다.

지금 제나라는 그 땅이 너무 작다고 여기고 있는데도 태자는 어찌하여 초왕이 제시한 것의

배를 제나라에 주려고 하지 않는 것입니까. 그러면 제나라는 틀림없이 태자를 받들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태자가 말하기를 : “ 좋소.”라고 하며,  초왕이 제시한 땅의 두 배를 떼어 주어 제나라 국토를 늘려 주었다.

초왕이 이 소식을 듣고 겁이 나 다시 더 큰 땅을 떼어 바치면서도 오히려 일이 잘 이뤄지지 않을까 염려했다.

이에 ‘더 많은 땅을 바치도록 할 수 있다’고 한 것이다.


謂楚王曰:「齊之所以敢多割地者, 挾太子也. 今已得地而求不止者, 以太子權王也. 故臣能去太子.

太子去,齊無辭,必不倍於王也.  因馳強齊而為交,齊辭,必聽王. 然則是王去讎而得齊交也.」 

楚王大悅,曰:「請以國因.」 故曰可以為楚王使太子亟去也.
謂太子曰:「夫剬楚者王也,以空名巿者太子也,齊未必信太子之言也,而楚功見矣. 

楚交成, 太子必危矣.  太子其圖之.」 太子曰:「謹受命.」乃約車而暮去.  故曰可以使太子急去也.

[이어 소진이 초왕에게 말하기를 : " 제나라가 감히 더 많은 땅을 요구하는 것은 태자를 끼고 있기 때문입니다.

지금 이미 땅을 그만큼 얻고도 요구를 그치지 않는 것은 태자를 미끼로 대왕을 저울질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제가 태자를 제나라로부터 떠나도록 하겠습니다. 태자가 떠나면 제나라는 더 이상 구실이 없어

대왕을 배반하지 않을 것입니다. 대왕께서 그때 서둘러 제나라로 달려가 국교를 맺으면 제나라는 반드시

대왕의 말을 들을 것입니다. 그리 되면 대왕께서는 원수를 제거하고 제나라와 국교를 맺게 됩니다.”라고 하자.
초왕이 크게 기뻐하며 당부하기를 : “ 그대가 나서 두 나라 국교를 성사시켜 주기 바라오.”라고 하였다.
이에 ‘초왕을 위해 태자를 제나라 밖으로 내보낼 수 있다’고 한 것이다.

이어 소진이 태자에게 말하기를 : " 무릇 지금 초나라의 실권을 장악한 사람은 초왕이고,

실권도 없이 말로만 땅을 떼어주겠다고 약속한 사람은 태자입니다.  제나라가 반드시 태자의 말을 믿어준다는

보장도 없는데 이같이 되면 곧 초왕이 땅을 바친 효험이 나타날 것입니다. 초, 제 두 나라의 국교가 성사되면

태자는 반드시 위험에 처하게 될 것입니다. 태자는 이를 잘 고려하시기 바랍니다.”라고 하자.
태자가 말하기를 :“ 삼가 명을 따르도록 하겠습니다.” 그리고는 곧바로 수레를 준비해 당일 저녁 훌쩍 떠나고 말았다. 이에 태자로 하여금 급히 떠나도록 할 수 있다고 한 것이다.

 
蘇秦使人請薛公曰:「夫勸留太子者蘇秦也.  蘇秦非誠以為君也,且以便楚也.

蘇秦恐君之知之,故多割楚以滅跡也.  今勸太子者又蘇秦也,而君弗知,臣竊為君疑之.」

薛公大怒於蘇秦.  故曰可使人惡蘇秦於薛公也.

[이어 소진이 사람을 시켜 설공에게 이같이 청하게 하기를 : " 무릇 태자를 억류하도록 권한 사람은 소진입니다.

소진이 그리 한 것은 참으로 설공을 위한 것이 아니라 바로 초나라 편을 들기 위한 것입니다.

소진은 군이 자신의 속셈을 알아챌까 두려워하여 초나라로 하여금 많은 땅을 떼어 주게 하여

그같은 흔적을 없애 버린 것입니다. 지금 태자에게 급히 제나라를 떠나도록 권한 것도 소진인데

설공은 이 사실을 모르고 있었을 것입니다. 저는 군을 위해 그를 의심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라고 하였다.
그러자 설공이 대노했다. 이에 ‘사람을 시켜 설공에게 소진에 관한 악담을 늘어놓게 할 수 있다’고 한 것이다.

 

又使人謂楚王曰:「夫使薛公留太子者蘇秦也, 奉王而代立楚太子者又蘇秦也, 割地固約者又

蘇秦也, 忠王而走太子者又蘇秦也. 今人惡蘇秦於薛公,以其為齊薄而為楚厚也. 願王之知之.」

楚王曰:「謹受命.」 因封蘇秦為武貞君.  故曰可以為蘇秦請封於楚也.

[이어 소진이 사람을 시켜 초왕에게 이같이 말하게 하기를 : " 설공으로 하여금 태자를 억류하도록 한 자는 소진이며,

대왕을 받들어 태자 대신 즉위하게 한 자도 소진이며, 땅을 떼어 주고 두 나라 국교를 공고히 만든 자 역시 소진이고,

대왕에게 충성을 다하려고 태자를 떠나도록 만든 자또한 소진입니다.

지금 사람들이 설공에게 소진에 관한 악담을 늘어놓고 있으니 이는 소진이 제나라에게는 박하게 대하고

초나라에게는 후하게 대했기 때문입니다. 원컨대 대왕께서는 이 사실을 알아주시기 바랍니다.”라고 하자.
초왕이 대답하기를 : “ 삼가 명을 받들도록 하겠소.”라고 하였다.  그리고는 소진을 무정군(武貞君)에 봉했다.

이에 ‘소진을 위해 초나라에 봉지를 청할 수 있다’고 한 것이다.


又使景鯉請薛公曰:「君之所以重於天下者,以能得天下之士而有齊權也. 今蘇秦天下之辯士也,

世與少有. 君因不善蘇秦,則是圍塞天下士而不利說途也. 夫不善君者且奉蘇秦,而於君之事殆矣.

今蘇秦善於楚王,而君不蚤親,則是身與楚為讎也. 故君不如因而親之,貴而重之,是君有楚也.」

薛公因善蘇秦.  故曰可以為蘇秦說薛公以善蘇秦.  齊王夫人死,有七孺子皆近.

薛公欲知王所欲立,乃獻七珥,美其一,明日視美珥所在,勸王立為夫人.

[이어 소진은 다시 초나라 상국 경리(景鯉)를 설공에게 보내 이같이 청하게 하기를 :
“ 군이 천하 제후들로부터 중시되는 이유는 천하의 선비를 모두 끌어안고 제나라의 실권까지 쥐고 있기 때문입니다.

지금 소진은 천하의 변사로 세상을 통틀어 그만한 인재는 드뭅니다.

군이 그를 잘 대우하지 않으면 이는 세객들의 입을 막아 외교수행에 큰 지장을 초래하게 됩니다.

만일 군과 관계가 좋지 못한 자들이 소진을 받들게 되면 군이 제후들과 교섭하는데 적잖은 지장을 초래할 것입니다.

지금 소진은 초왕과 가깝게 지내고 있으니 군이 그와 빨리 친하게 지내지 않으면

이는 곧 군이 초나라와 원수가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 군은 그와 친하게 지내며 그를 귀중하게 대하느니만 못합니다.

그리하면 군은 곧 초나라를 갖는 셈이 됩니다.”라고 하자.  설공이 다시 소진을 후대하게 되었다.

이에 ‘소진을 위해 사람을 설공에게 보내 소진을 칭송케 할 수 있다’고 한 것이다.

제위왕의 부인이 죽었을 때 7 명의 유자(孺子: 젊은 처첩)가 있었다. 그녀들 모두 제위왕의 총애를 받고 있었다.

설공은 제위왕이 누구를 부인으로 삼으려 하는지를 알아내기 위해 7개의 귀고리를 만들어 바치면서

그 중 한 개만을 특별히 훌륭하게 만들었다.

다음날 누가 아름다운 귀고리를 하고 있는지를 확인한 뒤 그녀를 부인으로 삼도록 제위왕에게 권했다.


孟嘗君將入秦,止者千數而弗聽.  蘇秦欲止之,孟嘗曰:「人事者,吾已盡知之矣;吾所未聞者,

獨鬼事耳.」  蘇秦曰:「臣之來也,固不敢言人事也,固且以鬼事見君.」孟嘗君見之.
謂孟嘗君曰:「今者臣來,過於淄上,有土偶人與桃梗相與語.

桃梗謂土偶人曰:『子,西岸之土也,挺子以為人,至歲八月,降雨下,淄水至,則汝殘矣.』
土偶曰:『不然.  吾西岸之土也,土則復西岸耳.  
今子,東國之桃梗也,刻削子以為人,降雨下,

淄水至,流子而去,則子漂漂者將何如耳.』

今秦四塞之國,譬若虎口,而君入之,則臣不知君所出矣.」 孟嘗君乃止.

[맹상군이 진나라로 가려고 하자 수천 명의 식객들이 이를 말렸다. 그러나 맹상군이 이를 듣지 않았다.

이때 소진이 이를 저지하려 하자, 맹상군이 말하기를 : " 인사(人事)에 대한 일은 내가 이제 모두 알고 있소.

들어보지 못한 것이라면 귀신에 관한 것일 뿐이오.”라고 하자.
소진이 말하기를 : “ 신이 온 것은 감히 인사에 관해 말하려고 하는 것이 아닙니다.

바로 귀신에 관한 얘기를 말하려고 뵙고자 한 것입니다.”라고 하자. 맹상군은 접견을 허락하였다.

소진이 맹상군에게 말하기를 : " 방금 제가 여기 오는 길에 치수(淄水:)를 건너던 중 토우(흙으로 만든 인형)과

​도경(복숭아 나무로 만든 인형)이 주고 받는 이야기를 엿듣게 되었습니다.

먼저 도경이 토우에게 이르기를, ‘너는 원래 서안(西岸)의 흙에 불과한데 사람들이 그 흙으로 너를 만든 것일 뿐이다.

8월에 비가 내려 치수의 물이 넘치면 너 따위는 곧바로 녹아버리고 말 것이다’라고 했습니다.

그러자 토우가 반박하기를, ‘그렇지 않다. 나는 본래 서안의 흙이기에 서안으로 돌아갈 뿐이다.

그러나 너는 동국(東國: 제나라)의 목우(木偶)로 나무를 깎고 다듬어 만든 것일 뿐이다.

만일 비가 와 치수가 넘치면 너를 곧바로 흘려 보낼 것이다. 그리 되면 너는 이리저리 표류할 수밖에 없을 터인데

장차 어디로 갈 것인가’라고 했습니다. 지금 진나라는 사면이 꽉 막힌 형세로 마치 호구(虎口)와 같습니다.

군이 일단 그 속으로 들어갔다가 과연 어느 길로 빠져나오려는 것인지 저는 알 길이 없습니다.”라고 하자.
맹상군이 이내 진나라로 가는 것을 단념했다.


孟嘗君在薛,荊人攻之.  淳於髡為齊使於荊,還反過薛.  而孟嘗令人體貌而親郊迎之.

謂淳於髡曰:「荊人攻薛,夫子弗憂,文無以復侍矣.」 淳於髡曰:「敬聞命.」至於齊,畢報.

王曰:「何見於荊?」 對曰:「荊甚固,而薛亦不量其力.」
王曰:「何謂也?」 對曰:「薛不量其力,而為先王立清廟.  荊固而攻之,清廟必危. 

故曰薛不量力,而荊亦甚固.」  齊王和其顏色曰:「譆!先君之廟在焉!」疾興兵救之.

顛蹶之請,望拜之謁,雖得則薄矣.  善說者,陳其勢,言其方,人之急也,若自在隘窘之中,

豈用強力哉!

[맹상군이 설 땅에 있을 때 초나라가 공격해 왔다. 주난왕 21년(기원전 294)

제나라 사람 순우곤(淳于髡)이 제나라의 사신으로 초나라에 갔다가 돌아오는 길에 설 땅을 들르게 되었다.

그러자 맹상군이 사람을 시켜 정중한 예모를 갖추게 한 뒤 친히 교외로 나가 그를 맞이하면서

순우곤에게 말하기를 : “ 형인(荊人)들이 이 설 땅을 공격하고 있는데도 선생은 걱정해 주지 않으니

설 땅을 잃게 되면 저는 두 번 다시 선생을 이곳에서 모실 수 없을 것입니다.”라고 하자.
순우곤이 말하기를 : “ 공경히 명을 따르겠습니다.”라고 하였다.  그리고는 제나라로 돌아가 그대로 복명했다.

그러자 제민왕(齊閔王)이 묻기를 : " 초나라에 가서 무엇을 보았소?”라고 하자.
순우곤이 대답하기를 : “ 초나라는 대단히 강고합니다. 그런데도 설 땅은 자신의 힘을 모르고 있습니다.”라고 하였다.
제민왕(齊閔王)이 묻기를 : “ 그게 무슨 뜻이오?”라고 하자.
순우곤이 대답하기를 : " 설 땅이 자신의 힘을 헤아리지 못한다고 한 것은 그곳에 선왕(先王: 제선왕)이 세워진

청묘(淸廟: 종묘) 때문입니다. 초나라가 기어코 그곳을 공격하면 청묘는 필시 위험해질 것입니다.

그래서 설 땅 사람들이 자신의 힘을 헤아리지 못하고, 초나라는 강고하다고 말한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이에 제민왕이 미간을 찌푸리면서 말하기를 : " 아뿔싸, 그곳에 선왕의 사당이 있지 않은가!”라고 하고는,

급히 군사를 일으켜 설 땅을 구해 주었다.

대략 인간사를 보면 엎어지며 다급히 달려가 구원을 청하고 무릎을 꿇고 애처로이 쳐다보며 호소한다 해도

겨우 약간의 도움을 얻을 수 있을 뿐이다. 그러나 유세를 잘하는 사람은 그 형세를 진술하고 방법을 잘 설명함으로써

듣는 사람이 마치 남의 곤경에 스스로 처한 듯이 느끼게 만드니 어찌 강한 힘만을 써서야 될 일이겠는가!


孟嘗君奉夏侯章以四馬百人之食,遇之甚懽.  夏侯章每言未嘗不毀孟嘗君也. 

或以告孟嘗君,孟嘗君曰:「文有以事夏侯公矣,勿言,董之.」
繁菁以問夏侯公,夏侯公曰:「孟嘗君重非諸侯也,而奉我四馬百人之食.  我無分寸之功而得此,

然吾毀之以為之也. 君所以得為長者,以吾毀之者也.  吾以身為孟嘗君,豈得持言也.」

[맹상군이 식객 하후장(夏侯章)을 크게 환대하여 사마(駟馬: 말 4 마리가 끄는 수레)는 물론

수 많은 사람이 먹을 수 있는 양식을 제공했다. 그런데도 하후장은 늘 입만 열면 맹상군을 비방했다.

어떤 사람이 이를 맹상군에게 전하자, 맹상군이 말하기를 :
“나는 하우장을 대접하는 일에는 그럴만한 이유가 있으니 더 이상 말하지 말라.”라고 하였다.
이때 식객 동지번청(董智繁菁)이 하후공(夏侯公: 하후장)에게 맹상군을 비방하는 연고를 묻자,

하후공이 대답하기를 : “ 맹상군이 비록 귀하다 하나 제후의 신분은 아니오. 그런데도 나에게 사마와 수백 명 분의

양식을 제공해 주었소. 나는 털끝 만큼의 공도 없는 주제에 이같이 혜택만 받고 있소.

내가 맹상군을 비방하는 것은 내가 받은 혜택을 갚기 위한 것이오.

주군이 장자(長者: 덕망이 높은 사람)로 일컬어지는 것은 내가 비난했기 때문이오. 내가 이처럼 온 몸을 던져

맹상군에게 ‘장자’라는 칭송을 안겨주고 있는데 어찌 몇 마디 말로 이를 대신할 수 있겠소.”라고 하였다.


孟嘗君讌坐,謂三先生曰:「願聞先生有以補之闕者.」

一人曰:「訾天下之主,有侵君者,臣請以臣之血湔其衽.」
田瞀曰:「車軼之所能至,請掩足下之短者,誦足下之長;

千乘之君與萬乘之相,其欲有君也,如使而弗及也.」
勝(上股下目)曰:「臣願以足下之府庫財物,收天下之士,能為君決疑應卒,

若魏文侯之有田子方、 段干木也。此臣之所為君取矣.」

맹상군이 연좌(讌坐: 편히 앉음)하여 3인의 빈객과 담소를 나누면서 말하기를 :
“ 원컨대 선생들께서 저의 모자란 점을 보완하는데 도움이 될 말씀을 듣고자 하오.”라고 하자.
이에 한 사람이 나서서 말하기를 : " 아, 천하의 그 어떤 제후들일지라도 군을 깔보고 침해하는 자가 있으면

저의 피를 그 자의 옷깃에 뿌릴 생각입니다.”라고 하였다.
그러자 전무(田瞀)가 말하기를 : " 군의 수레바퀴가 닿는 곳이면 어느 곳이든 족하(足下)의 단점을 숨기고

장점을 자랑하며 다니겠습니다. 그래서 천승의 군주와 만승의 재상이 서로 다투어 군과 교류하기를 원함으로써

군을 중용시키기 위해 다투면서도 제대로 협조하지 못할까 노심초사하는 모습을 보이도록 하겠습니다.”라고 하였다.
다시 승(勝)이 말하기를 : " 저는 원컨대 족하의 창고에 있는 재물로 천하지사를 모두 거두고 싶습니다.

그래서 그들이 능히 군을 위해 의심나는 것을 결단하고 갑작스런 일에 차분히 대응함으로써 마치 위문후(魏文侯)에게

전자방(田子方: 子貢의 제자로 위문후의 스승)과 단간목(段干木: 子夏의 제자로 위문후의 스승)이 있는 것과 같이

만들고자 합니다. 이것이 제가 군을 위해 하고자 하는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孟嘗君舍人有與君之夫人相愛者.  或以問孟嘗君曰:「為君舍人而內與夫人相愛,亦甚不義矣,

君其殺之.」 君曰:「睹貌而相悅者,人之情也,其錯之勿言也.」
居期年,君召愛夫人者而謂之曰:「子與文游久矣,大官未可得,小官公又弗欲.

衛君與文布衣交,請具車馬皮幣,願君以此從衛君遊.」於衛甚重.

齊、衛之交惡,衛君甚欲約天下之兵以攻齊.

[맹상군의 사인 중에 맹상군의 부인과 사통하는 자가 있었다. 어떤 사람이 맹상군에게 이 일를 알리면서

말하기를 : " 군의 사인이 되어 몰래 부인과 사통하는 자가 있다니 이는 매우 의롭지 못한 일입니다.

군은 그를 죽여버리기 바랍니다.”라고 하자.
맹상군이 말하기를 : “ 외모를 보고 서로 사모하는 것은 인지상정이다. 그대로 두고 더 이상 말하지 말라.”하였다.
1년 쯤 지난 후 맹상군이 부인과 사통하는 자를 불러 말하기를 : " 그대와 나는 교류한지 이미 오래 되었소.

대관(大官) 자리는 아직 나지 않고 소관의 자리는 그대가 원치 않고 있소.

나는 위군(衛君: 위사군)과 신분이나 지위를 떠나, 이익 따위도 바라지 않는 친구 사이요,

거마와 예물용 가죽과 비단을 준비해 두었으니 원컨대 이것을 가지고 가 위군과 교류하기 바라오.”라고 하였다.
이에 맹상군의 부인과 사통한 자는 위(衛)나라로 가 크게 중용되었다.

그러던 중 제나라와 위나라의 국교가 악화되자, 위군이 천하 제후들과 맹약을 맺고 제나라를 공격하고자 했다.

 

是人謂衛君曰:「孟嘗君不知臣不肖,以臣欺君. 且臣聞齊、衛先君,刑馬壓羊,

盟曰:『齊、衛後世無相攻伐,有相攻伐者,令其命如此.』今君約天下之兵以攻齊,

是足下倍先君盟約而欺孟嘗君也.  願君勿以齊為心.  君聽臣則可;不聽臣,若臣不肖也,

臣輒以頸血湔足下衿.」 衛君乃止.  齊人聞之曰:「孟嘗君可語善為事矣,轉禍為功.」

[이때 그 자가 나서 위군에게 말하기를 : " 맹상군은 제가 불초한 줄도 모르고 천거했으니,

결국 제가 군주를 속인 셈이 되었습니다. 제가 듣건대 제, 위 두 나라의 선군은 말과 양을 잡아 맹서하기를,

‘제, 위 두 나라는 후세에도 서로 침략하지 않을 것이다. 만일 전쟁을 도발하는 자가 있으면

이 말과 양처럼 죽일 것이다.’라고 했다 합니다.

군주가 제후들의 군사를 연합해 제나라를 공격하면 족하는 선군의 맹약을 어기고 맹상군까지 기만하는 것이 됩니다.

바라건대 군주는 제나라를 공격할 생각을 버리기 바랍니다. 저의 건의를 들어주면 좋으나 만일 들어주지 않으면

이는 제가 불초하기 때문이니 저는 당장 목을 베어 그 피를 군주의 옷깃에 뿌릴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위군이 제나라 공격을 중지하자, 제나라 사람이 이 말을 듣고 말하기를 :
“ 맹상군은 가히 일을 잘 처리한다고 이를 만하다. 그는 화를 돌려 공으로 만든 사람이다.”라고 하였다.


孟嘗君有舍人而弗悅,欲逐之.  魯連謂孟嘗君曰:「猿獮猴錯木據水,則不若魚鱉;

歷險乘危,則騏驥不如狐狸.  曹沫之奮三尺之劍,一軍不能當;使曹沫釋其三尺之劍,

而操銚鎒與農夫居壟畝之中,則不若農夫.  故物舍其所長,之其所短,堯亦有所不及矣.

今使人而不能,則謂之不肖;教人而不能,則謂之拙.  拙則罷之,不肖則棄之,使人有棄逐,

不相與處,而來害相報者,豈非世之立教首也哉!」 孟嘗君曰:「善.」乃弗逐.

[맹상군에게 싫어하는 사인(舍人)이 있어 맹상군이 이내 그를 내쫓으려 했다.

그러자 노중련이 맹상군에게 말하기를 : " 원숭이도 나무를 떠나 물 속에 있게 하면 고기나 자라만도 못합니다.

험준한 곳을 지나는 데에는 기기(騏驥: 천리마의 일종)가 오히려 여우와 살쾡이만 못합니다.

옛날 노나라의 조말(曹沫)이 세 치 밖에 안되는 검을 거머쥐자 온 군대가 당해 내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조말에게 검을 버리고 괭이나 호미를 잡고 농부와 함께 논밭에 서게 하면 농부를 당할 길이 없습니다.

따라서 사물에서 그 장점을 버리고 단점을 취하면 요임금과 같은 성인도 미치지 못하는 바가 있는 것입니다.

지금 사람을 부릴 때 능히 해내지 못하면 불초(不肖)라 하고, 가르쳐도 깨닫지 못하면 졸렬(拙劣)이라 합니다.

졸렬하다 하여 파면하고, 불초하다 하여 버림으로써 결국 사람으로 하여금 버림을 당하게 하여

더 이상 더불어 있지 않게 하면 서로를 해치는 보복이 돌아올 것입니다.

이 어찌 세상의 교화가 이루고자 하는 주요 임무가 아니겠습니까!”라고 하자.
맹상군이 대답하기를 : " 옳은 말씀이오."라고 하며. 마침내 사인을 내쫓지 않았다.


孟嘗君出行國,至楚,獻象床.  郢之登徒,直使送之,不欲行.
見孟嘗君門人公孫戍曰:「臣,郢之登徒也,直送象床.  象床之直千金,傷此若髮漂,

賣妻子不足償之.  足下能使僕無行,先人有寶劍,願得獻之.」 公孫曰:「諾.」

入見孟嘗君曰:「君豈受楚象床哉?」 孟嘗君曰:「然.」公孫戍曰:「臣願君勿受.」

孟嘗君曰:「何哉?」 公孫戍曰:「小國所以皆致相印於君者,聞君於齊能振達貧窮,

有存亡繼絕之義.  小國英桀之士,皆以國事累君,誠說君之義,慕君之廉也.

今君到楚而受象床,所未至之國,將何以待君? 臣戍願君勿受.」 孟嘗君曰:「諾.」

[맹상군이 5개국을 순방하다가 초나라에 이르자, 초나라에서 상상(象床,상아로 장식한 상)을 선물하려고 하였다.

이에 초나라 도읍의 등도(登徒: 초나라 관직)가 운반하는 책임을 맡았으나 이를 꺼려한 나머지 맹상군의 문객

손수(公孫戍)를 만나 말하기를 : " 나는 초나라 도읍의 등도입니다. 상상을 운반하는 책임을 지고 있음니다만

상상의 값이 천금이나 되어 털끝 만큼이라도 흠이 나게 되면 처자를 팔아도 이를 배상하기에 부족합니다.

족하가 만일 저의 책임을 면하게 해 주면 선인이 물려준 보검을 드리겠습니다.”라고 하자. 

공손수가 말하기를 : ​“좋소.”라고 하였다.
공손수가 안으로 들어가 맹상군에게 묻기를 :  “군은 초나라의 상상을 받을 생각입니까?”라고 하자. 

맹상군이 대답하기를 : “ 그렇소.”라고 하였다.
그러자 공손수가 말하기를 : “저는 군께서 받지 않기를 바랍니다.”라고 하였다. 

맹상군이 묻기를 : " 연고가 무엇이오?”라고 하자.
공손수가 대답하기를 : “ 소국들이 그간 재상의 인(印)을 군에게 맡긴 것은 군이 제나라에 있을 때

곤경에 처한 선비를 도와 주고, 망국을 부흥시키고 끊어진 후사를 잇게 하는 의를 행했다고 들었기 때문입니다.

5국의 뛰어난 군주들이 국사를 군에게 위탁하고자 한 것은 충심으로 군의 의행(義行)을 기뻐하고

군의 청렴함을 사모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제 군께서 초나라에 와서 상상을 받는다면

이제부터 갈 나라에서는 과연 무엇으로 군을 대접할 수 있겠습니까?

그래서 저는 원컨대 군께서 이를 받지 않았으면 합니다.”라고 하자.  맹상군이 말하기를 : “옳은 말이오.”라고 하였다.

 

公孫戍趨而去.  未出,至中閨,君召而返之,曰:「子教文無受象床,甚善.

今何舉足之高,志之揚也?」 公孫戍曰:「臣有大喜三,重之寶劍一.」 孟嘗君曰:「何謂也?」
公孫戍曰:「 門下百數,莫敢入諫,臣獨入諫,臣一喜;諫而得聽,臣二喜;諫而止君之過,

臣三喜.  輸象床,郢之登徒不欲行,許戍以先人之寶劍.」
孟嘗君曰:「善. 受之乎?」 公孫戍曰:「未敢.」 曰:「急受之.」 

因書門版曰:「有能揚文之名,止文之過,私得寶於外者,疾入諫.」

[공손수가 총총걸음으로 달려나가다가 중규(中閨: 中門)에 이르렀을 때, 맹상군이 그를 다시 불러 묻기를 :
“ 그대가 나에게 상상을 받지 말도록 충고한 것은 매우 잘한 일이오.

그런데 지금 그대는 왜 걸음걸이가 그토록 사뿐하고 의기양양해 하는 것이오.”라고 하자.
공손수가 대답하기를 : “저에게 크게 기쁜 일이 3 가지 있는데, 보검 한 자루까지 덤으로 얻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맹상군이 묻기를 : “ 그게 무슨 말이오?”라고 하자.
공손수가 대답하기를 : " 군의 문하에 식객이 수백 명이나 있지만 그 누구도 감히 들어와 간하지 못했는데

저만이 유독 들어와 간했으니 이것이 첫 번째 기쁨입니다. 간한 말을 들어주시니 이것이 두 번째 기쁨입니다.

간하여 군의 잘못을 시정하게 했으니 이것이 세 번째 기쁨입니다. 게다가 상상을 운반하기로 한 영도의 등도가

가기를 꺼려하면서 그 책임을 면하게 해주는 조건으로 저에게 전래의 보검을 주겠다고 했습니다.”라고 하였다.
맹상군이 묻기를 : “ 잘된 일이구려. 그래 그 보검을 받았소?”라고 하자.
공손수가 대답하기를 : “감히 받지 못하겠습니다.”라고 하였다.
맹상군이 말하기를 : “ 무슨 말이오. 빨리 가서 받도록 하시오.”라고 하였다.
이어 맹상군은 다음과 같은 문판(門版: 글을 써 문에 걸어 놓는 현판으로 포고문에 해당)을 써 붙였다.
“ 만일 누구든지 나의 명성을 높이고, 나의 잘못을 막아 주고, 그리고도 밖에서 사사로이 보물을 얻을 수 있는 자는 

서슴치 말고 들어와 간하도록 하라.”라고 하였다.


淳於髡一日而見七人於宣王.  王曰:「子來,寡人聞之,千里而一士,是比肩而立;

百世而一聖,若隨踵而至也.  今子一朝而見七士,則士不亦眾乎?」
淳於髡曰:「不然. 夫鳥同翼者而聚居,獸同足者而俱行.  今求柴葫、桔梗於沮澤,

則累世不得一焉.  及之睪黍、梁父之陰,則郄車而載耳。夫物各有疇,今髡賢者之疇也. 

王求士於髡,譬若挹水於河,而取火於燧也.  髡將復見之,豈特七士也.」

[순우곤(淳于髡)이 하루에 7 명의 선비를 제선왕에게 소개했다. 그러자 제선왕이 말하기를 :
“ 그대는 가까이 오시오. 과인이 듣건대 ‘1천 리에 한 명의 선비만 있어도 이는 어깨가 부딪칠 만큼 많은 선비가

존재하고, 1백 세(世)에 한 명의 성인만 나와도 발꿈치가 서로 닿을 정도로 많은 성인이 존재하는 것이다’라고 했소.

그런데 그대는 하루에 7 명의 선비를 소개하니 선비가 너무 많은 것이 아니오.”라고 하자.
순우곤이 대답하기를 : “ 그렇지 않습니다. 날짐승는 모두 날개가 있기에 날 수 있고 들짐승은 모두 발이 있기에

달릴 수 있는 것입니다. 지금 길경(桔梗: 도라지)처럼 산에서 나는 약초를 습지에서 얻으려 하면 몇 세대에 걸쳐

찾아도 결코 하나도 얻을 수 없지만, 고서산(睾黍山)과 양보산(梁父山: 산동성 태산 아래)의 북쪽으로 가면

빈 수레를 가득 채울 만큼 캘 수 있을 것입니다. 무릇 사물은 같은 무리끼리 모이는 법이니 저는 현자의 무리입니다.

그러니 대왕께서 선비를 저에게서 구하는 것은 비유하건대 강에서 물을 긷고 부싯돌로 불을 얻는 것과 같습니다.

저는 장차 더 많은 사람을 알현시킬 생각이 있는데 어찌 7 명에 그치겠습니까.”라고 하였다.


齊欲伐魏. 淳於髡謂齊王曰:「韓子盧者,天下之疾犬也.  東郭逡者,海內之狡兔也.
韓子盧逐東郭逡,環山者三,騰山者五,兔極於前,犬廢於後,犬兔俱罷,各死其處.

田父見之,無勞勌之苦,而擅其功. 今齊、魏久相持,以頓其兵,弊其眾,臣恐強秦大楚承其後,有田父之功.」  齊王懼,謝將休士也.

[제나라가 위나라를 치정벌하려 하였다. 순우곤이 제선왕에게 말하기를 :
“한로(韓盧)는 천하에 발이 빠르기로 소문난 사냥개이고, 동곽준(東郭逡)은 천하에 교활하기로 소문난 토끼입니다.

한로가 동곽준을 잡으려면 산을 3번이나 돌고, 다시 산을 5번이나 오르내려야 합니다.

토끼는 앞에서 뛰어가느라 마침내 힘이 다하고 사냥개는 뒤에서 쫓느라 피로를 이기지 못하게 됩니다.

이에 개와 토끼 모두 함께 지쳐 그 자리에서 죽고 되면 농부는 수고 한번 하지 않고 그 공을 독차지할 수 있습니다.

지금 제, 위 두 나라가 오랫 동안 대치한 결과 서로 병력이 쇠약해지고  백성 또한 지쳐 있습니다.

신이 두려워 하는 것은 강국 진나라나 대국 초나라가 제, 위 두 나라의 지쳐 있는 틈을 타 마치 그 농부와 같이

진, 초나라가 공을 얻게 되는 것이 아닐까 하는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이에 제선왕은 두려워한 나머지 곧 장병들을 해산한 뒤 휴식을 취하게 하였다. 


國子曰:「秦破馬服君之師,圍邯鄲.  齊、魏亦佐秦伐邯鄲,齊取淄鼠,魏取伊是.

公子無忌為天下循便計,殺晉鄙,率魏兵以救邯鄲之圍,使秦弗有而失天下.

是齊入於魏而救邯鄲之功也.  安邑者,魏之柱國也;晉陽者,趙之柱國也;鄢郢者,楚之柱國也.

故三國欲與秦壤界,秦伐魏取安邑,伐趙取晉陽,伐楚取鄢郢矣.

福三國之君,兼二周之地,舉韓氏取其地,且天下之半.

[제나라 대부 국자(國子)가 말하기를 : " 진나라가 마복군(馬服君: 조괄)의 군사를 깨고 한단을 포위하였습니다.

제, 위 두 나라도 진나라 편을 들어 한단을 정벌하자, 제나라는 하북의 치서(淄鼠: 「사기」의 區鼠) 땅을 취했고

위나라는 이시(伊是) 땅을 취했습니다. 그러자 위나라 공자 신릉군 무기(無忌)가 천하를 위해

편계(便計: 때와 장소에 따라 임기응변하는 계책)를 좇아 장수 진비(晉鄙)를 죽인 뒤 군사를 이끌고 가 포위당한

조나라의 한단을 풀어 주었습니다. 이에 진나라로 하여금 조나라를 차지하지 못하게 함으로써

천하를 잃게 했던 것입니다. 이는 제, 위 두 나라가 연합해 함께 한단을 구해 준 결과입니다.
안읍(安邑)은 위나라, 진양(晉陽: 조나라의 옛 도읍)은 조나라, 언영(鄢郢)은 초나라 도읍입니다.

이 3국이 직접 진나라와 경계를 맞닿게 되자 진나라는 위나라를 쳐 안읍을 취하고, 조나라를 쳐 진양을 취하며,

초나라를 쳐 언영을 취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진나라가 3국의 군왕을 협박해 2주(二周)를 겸병하고

한나라를 멸해 그 땅까지 빼앗는다면 진나라의 영토는 천하의 절반에 이르게 될 것입니다.

 

今又劫趙、魏,疏中國,封衛之東野,兼魏之河南,絕趙之東陽,則趙、魏亦危矣.
趙、魏危,則非齊之利也.  韓、魏、趙、楚之志,恐秦兼天下而臣其君,故專兵一志以逆秦.  

三國之與秦壤界而患急,齊不與秦壤界而患緩.  是以天下之勢,不得不事齊也.

故秦得齊,則權重於中國;趙、魏、楚得齊,則足以敵秦.
故秦、趙、魏得齊者重,失齊者輕.  齊有此勢,不能以重於天下者何也? 其用者過也.」 

[지금 다시 진나라가 조, 위 두 나라를 위협해 제후들을 서로 소원하게 만들고, 위(衛)나라의 동야(東野)를 봉쇄하고,

위나라의 하내(河內)를 겸병해 조나라의 동양(東陽)과 단절시키려 하고 있습니다.

이같이 되면 조, 위 두 나라 역시 위험해지는데 두 나라가 위험해지면 제나라에게도 이로울 것이 없습니다.

위, 조, 초 세 나라는 진나라가 천하를 겸병해 자신들을 굴복시킬까 두려워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오로지 군사를 하나로 합쳐 진나라에 저항하고 있는 것입니다.
3국은 진나라와 국경을 접하고 있어 그 우환이 절박하나 우리 제나라는 접경하지 않고 있어

그 우환이 그다지 절박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천하의 형세는 부득불 제나라를 섬기지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

만일 진나라가 우리 제나라와 손을 잡게 된다면 그 권세가 중원에서 더욱 무겁게 될 것입니다.

조, 위, 초 3국이 제나라와 손을 잡게 되면 족히 진나라에 대적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진, 조, 위, 초 네 나라 중 어느 나라든 제나라를 얻으면 지배적인 위치에 서게 되고,

제나라를 잃으면 지배당하는 위치에 서게 됩니다. 제나라가 이같이 유리한 형세에도 불구하고

천하를 좌우할 수 있는 그같은 위치를 차지하지 못한 것은 무슨 연고입니까?

이는 바로 일을 주관하는 자의 판단이 잘못되었기 때문입니다.”라고 하였다.  진시황 17년(기원전 230),

 

 

                                                   

原 文 【 中國哲學書電子化計劃 .   筆寫本 】

 

 

 

原 文   飜 譯 者        德庤 / 李   斗 振