戰國策(전국책) /戰國策 齊策 2

戰國策 齊策 2

덕치/이두진 2021. 6. 26. 17:15

 

                             齊策 2

 

 

齊策 四 .

齊人有馮諼者,貧乏不能自存,使人屬孟嘗君,願寄食門下.

孟嘗君曰:「客何好?」 曰:「客無好也.」 曰:「客何能?」 曰:「客無能也.」
孟嘗君笑而受之曰:「諾.」 左右以君賤之也,食以草具.

居有頃,倚柱彈其劍,歌曰:「長鋏歸來乎!食無魚.」 左右以告.

孟嘗君曰:「食之,比門下之客.」 居有頃,復彈其鋏,歌曰:「長鋏歸來乎!出無車.」

左右皆笑之,以告.  孟嘗君曰:「為之駕,比門下之車客.」

於是乘其車,揭其劍,過其友曰:「孟嘗君客我.」

[제나라에 풍훤(馮諼)이라는 사람이 있었다.

그는 워낙 가난하여 자립할 수가 없어서 사람을 맹상군에게 보내 자신을 식객으로 받아줄 것을 부탁하게 하였다.

그러자 맹상군이 그 자에게 묻기를 : “그 객은 무엇을 좋아하오.”라고 하자.
그 자가 대답하기를 : “ 좋아하는 것이 없는 듯합니다.”라고 하였다.
맹상군이 묻기를 : “ 그 객인은 무엇을 잘하오.”라고 하자.
그 자가 대답하기를 : “ 잘하는 것이 없는 듯합니다.”라고 하였다.
이에 맹상군이 웃으면서 말하기를 : “받아들이도록 하겠소.”라고 하였다.
맹상군의 좌우 식객들은 맹상군이 풍훤을 낮춰 본다고 여겨 풍훤에게 험한 음식물만 주었다.

얼마 후 풍훤은 기둥에 기대어 칼을 두드리며 읊조리기를 :
“장협(長鋏: 여러 설이 있으나 칼의 이름이 유력)아, 돌아가자꾸나. 식사 때 생선 하나 없구나.”라고 하자.
그 노래를 들은 식색들이 이를 맹상군에게 고하자 맹상군이 말하기를 :
“ 생선을 내어주라. 그리고 어객(魚客: 생선을 먹는 중급 문객)의 예로 대우토록 하라.”라고 하였다.
얼마 후 풍훤이 다시 칼을 두드리며 또 읊조리기를 :
“ 장협아, 돌아가자꾸나. 외출하려 해도 타고 갈 수레가 없구나.”라고 하자.
그 노래를 들은 식색들이 이를 비웃으며 고하자 맹상군이 다시 말하기를 :
“ 수레를 내어 주어라. 그리고 거객(車客: 수레를 타는 상급문객)의 예로 대우하도록 하라.”라고 하였다.
이에 풍훤은 그 수레를 타고 장검을 쳐들고는 친구들 옆을 지나면서 뽐내며 말하기를 :
“맹상군이 나를 상객으로 대우해 주고 있네.”라고 하였다.

 

後有頃,復彈其劍鋏,歌曰:「長鋏歸來乎!無以為家.」 左右皆惡之,以為貪而不知足.

孟嘗君問:「馮公有親乎?」 對曰:「有老母.」 孟嘗君使人給其食用,無使乏.  於是馮諼不復歌.

後孟嘗君出記,問門下諸客:「誰習計會,能為文收責於薛者乎?」 馮諼署曰:「能.」

孟嘗君怪之,曰:「此誰也?」 左右曰:「乃歌夫長鋏歸來者也.」
孟嘗君笑曰:「客果有能也, 吾負之, 未嘗見也. 」 請而見之, 
謝曰:「文倦於事, 憒於憂,

而性懧愚, 沉於國家之事, 開罪於先生.  先生不羞,乃有意欲為收責於薛乎?」 馮諼曰:「願之.」

[얼마 후 그는 다시 칼을 두드리며 읊조리기를 : " 장협아, 돌아가자꾸나. 가족을 부양할 돈이 없구나.”라고 하자.
식객들이 모두 그를 미워하며 만족할 줄 모르는 탐욕스런 자로 생각했다.

그러자 맹상군이 측근에게 묻기를 : “ 풍공은 양친이 계시오?”라고 하자. 

측근이 대답하기를 : “ 노모가 계신다고 합니다.”라고 하였다.
이에 맹상군이 사람을 시켜 그의 노모에게 먹을 것과 일용품을 지급해 궁핍하지 않게 해 주었다.

그제야 풍훤은 더 이상 읊조리는 일을 하지 않았다. 그 후 맹상군이 장부를 내놓고 많은 문객들에게 묻기를 : 

“ 누가 회계를 잘 하오. 나를 위해 누가 설(薛) 땅에 가 빚을 받아 오겠소?”라고 하자.
풍훤이 자원하고 나섰다. 맹상군이 이상히 여겨 묻기를 : " 이 사람이 누구요?”라고 하자. 

측근에서 대답하기를 : “이 사람이 바로 ‘장협아, 돌아가자꾸나’를 읊조린 사람입니다.”라고 하였다.
맹상군이 웃으며 말하기를 : " 객이 과연 유능한데 내가 잊고 너무 오래 만나지 못했소.”라고 하며.
맹상군은 풍훤을 청해 만나서 사과하며 말하기를 : " 나는 사무가 번잡해 심신이 지치고 근심이 많아 마음이 어지럽소.

게다가 성격도 나약하고 어리석은데 국사에 몰두하느라 선생에게 죄를 지었소.

선생은 수치스럽게 여기지 말고 나를 위해 설 땅에 가 빚을 회수해 줄 수 있겠소?”라고 하자.
풍훤이 대답하기를 : “ 원컨대 맡겨 주시기 바랍니다.”라고 하였다.

 

於是約車治裝,載券契而行,辭曰:「責畢收,以何市而反?」
孟嘗君曰:「視吾家所寡有者.」 驅而之薛,使吏召諸民當償者,悉來合券. 

券遍合,起矯命以責賜諸民,因燒其券,民稱萬歲.

[이에 곧 수레를 준비하고 여장을 꾸려 빚문서를 싣고 떠났다. 이때 풍훤이 하직 인사를 하며 이같이 묻기를 :
“ 빚을 다 받으면 무엇을 사가지고 돌아오면 좋겠습니까?”라고 하자.
맹상군이 대답하기를 : “ 그대가 보기에 우리 집에서 부족하다고 여기는 것으로 사오시오.”라고 하였다.
풍훤이 수레를 몰아 설 땅으로 간 뒤 곧 관원을 시켜 백성 중에 빚이 있는 자들을 불러 놓고

빚의 내용이 맞는지를  확인하게 하였다. 대조를 마치자 곧 맹상군의 명을 칭해 빚을 모두 탕감하고는

빚문서를 전부 불살라 버렸다. 그러자 백성들이 모두 만세를 불렀다.


長驅到齊,晨而求見.  孟嘗君怪其疾也,衣冠而見之,曰:「責畢收乎?來何疾也!」

曰:「收畢矣.」「以何市而反?」
馮諼曰:「君云『視吾家所寡有者』. 臣竊計,君宮中積珍寶,狗馬實外廄,美人充下陳. 

君家所寡有者以義耳!竊以為君市義.」 孟嘗君曰:「市義柰何?」

曰:「今君有區區之薛,不拊愛子其民,因而賈利之.  臣竊矯君命,以責賜諸民,因燒其券,

民稱萬歲.  乃臣所以為君巿義也。」 孟嘗君不說,曰:「諾,先生休矣!」

[풍훤이 말을 달려 제나라에 도착하자마자, 새벽에 맹상군에게 만나 뵙기를 청했다.

맹상군은 그가 너무 빨리 돌아온 것을 의아하게 생각하면서도 의관을 정제하고 그를 만나서 묻기를 :

“ 빚은 모두 받았소? 어떻게 이같이 빨리 돌아왔소.”라고 하자.

풍원이 대답하기를 : “모두 받아 왔습니다.”라고 하였다. 

맹상군이 묻기를 :   “ 그래 무엇을 사가지고 왔소?”라고 하자.
풍훤이 대답하기를 : “ 군께서 말씀하시기를, ‘우리 집에 부족해 보이는 것으로 사 오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제가 생각해 보니 군의 집안에는 진보(珍寶)가 가득 쌓여 있고, 구마(狗馬)는 바깥 축사까지 넘치고 있고,

후궁에는 미인들로 하진(下陳: 당하의 통로길)에 가득 차 있는데 부족한 것은 오직 의(義) 뿐이었습니다.

그래서 생각한 끝에 군을 위해 그 의를 사가지고 왔습니다.”라고 하였다.
맹상군이 묻기를 : “의를 사가지고 오다니, 도대체 그게 무슨 말이오?”라고 하자.
풍훤이 대답하기를 : “ 지금 군은 하찮은 봉지인 설 땅에서 그곳 백성을 자식처럼 사랑해 주지도 못하면서

도리어 장사꾼 같이 돈을 꾸어 주고 이익을 취했습니다. 그래서 제가 군의 명을 가탁해 그 빚을 모두 탕감하고

빚문서를 불살라 버렸습니다. 그랬더니 백성들이 모두 크게 기뻐하며 만세를 외쳤습니다.

이것이 바로 제가 군을 위해 사온 의라는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그러자 맹상군은 달갑지 않는 표정을 지으며 말하기를 : “ 좋소. 선생은 가서 쉬도록 하시오.”라고 하였다.

 

後期年,齊王謂孟嘗君曰:「寡人不敢以先王之臣為臣.」

孟嘗君就國於薛,未至百里,民扶老攜幼,迎君道中.
孟嘗君顧謂馮諼:「先生所為文市義者,乃今日見之.」

馮諼曰;「狡兔有三窟,僅得免其死耳.  今君有一窟,未得高枕而臥也.  請為君復鑿二窟.」
孟嘗君予車五十乘,金五百斤,西遊於梁,

謂惠王曰:「齊放其大臣孟嘗君於諸侯,諸侯先迎之者,富而兵強.」

[이후 1년 쯤 지나 제민왕(齊閔王)이 맹상군에게 말하기를 :
“ 과인은 선왕(先王: 제선왕)의 신하였던 그대를 과인의 신하로 삼고 싶지 않소.”라고 하였다.
이에 맹상군이 할 수 없이 영지인 설 땅으로 돌아가게 되었다. 맹상군이 아직 설 땅에 이르지도 않았는데

1백 리나 떨어진 곳까지 설 땅 백성들이 노약자를 부축하고 나와 길을 메운 채로 맹상군을 영접했다.

그러자 맹상군이 풍훤을 돌아보며 말하기를 : " 선생이 나를 위해 사온 ‘의’를 오늘에야 보는구려.”라고 하자.
풍훤이 말하기를 : " 교활한 토끼는 3개의 굴을 만들어 놓는다고 했으니 사람도 굴이 3개는 있어야 
간신히 죽음을

면할 수 있습니다. 지금 군은 오직 하나의 굴만 있을 뿐이므로 아직 베개를 높이 하고 편히 누울 수 없습니다.

군을 위해 두 개의 굴을 더 파 드리겠습니다.”라고 하였다.
이에 맹상군이 풍훤에게 수레 50 승과 금(金: 黃銅) 5백 근을 건네주자 풍훤은 이를 갖고 
서쪽 위나라로 가서

위왕(魏昭王)에게 유세하기를 : “ 제나라가 대신(大臣) 맹상군을 제후들에게 내쫓았습니다.

그를 제일 먼저 맞이하는 나라가 부국강병을 이룰 수 있을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於是,梁王虛上位,以故相為上將軍,遣使者,黃金千斤,車百乘,往聘孟嘗君. 

馮諼先驅誡孟嘗君曰:「千金,重幣也;百乘,顯使也.  齊其聞之矣.」

梁使三反,孟嘗君固辭不往也.  齊王聞之,君臣恐懼,遣太傅齎黃金千斤,文車二駟,服劍一,

封書謝孟嘗君曰:「寡人不祥,被於宗廟之祟,沉於諂諛之臣,開罪於君,寡人不足為也. 

願君顧先王之宗廟,姑反國統萬人乎?」 馮諼誡孟嘗君曰:「願請先王之祭器,立宗廟於薛.」

廟成,還報孟嘗君曰:「三窟已就,君姑高枕為樂矣.」

孟嘗君為相數十年,無纖介之禍者,馮諼之計也.

[이에 위왕이 재상의 자리를 비워 놓기 위해 원래의 재상을 상장군으로 삼은 후 사자에게 황금 1천 근과

수레 1백 승을 주어 맹상군을 모셔오게 했다. 그러자 풍훤이 사자보다 먼저 달려와 맹상군에게 말하기를 :
“1천 금을 선사한다는 것은 대단한 예의를 표하는 일이며, 수레 1백 승은 대단히 훌륭한 사자를 의미합니다.

제나라가 이미 이 소문을 들었을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이로써 위나라 사자가 3번이나 왕복했지만 맹상군은 굳이 사양하고 가지 않았다.

제민왕과 군신들이 이 소식을 듣고 크게 두려워했다. 이에 곧 태부(太傅)에게 황금 1천 근과 화려한 무늬로 치장한

수레 2승, 푸른옥으로 장식된 패검 한 자루와 맹상군에게 미안하다는 봉서(封書)를 전하며 말하기를 :
“ 과인이 선하지 못해 종묘에서 내린 화를 입고 아첨하는 신하들에게 빠져 군에게 죄를 지었소.

과인은 부족한 점이 많으니 원컨대 군이 선왕의 종묘를 생각해 돌아와 백성들을 다스려주기 바라오.”라고 하였다.

그러자 풍훤이 맹상군에게 경계할 말들을 일러주기를 : "
“ 원컨대 먼저 선왕의 제기(祭器)를 옮겨 설 땅에다가 종묘를 세우겠다고 청하기 바랍니다.”라고 하였다.
종묘가 완성되자, 풍훤이 돌아와 맹상군에게 보고하며 말하기를 : " 이제야 3개의 굴이 완성되었습니다.

군께서는 어느 정도 베개를 높이 베고 즐겁게 지낼 수 있게 되었습니다.”라고 하였다.
맹상군이 수십년간 재상으로 있으면서 미미한 재난도 당하지 않은 것은 
모두 풍훤의 계책 덕분이었다. 


孟嘗君為從.  公孫弘謂孟嘗君曰:「君不以使人先觀秦王? 意者秦王帝王之主也,

君恐不得為臣,奚暇從以難之? 意者秦王不肖之主也,君從以難之,未晚.」
孟嘗君曰:「善,願因請公往矣.」公孫弘敬諾,以車十乘之秦.  昭王聞之,而欲媿之以辭. 

公孫弘見,昭王曰:「薛公之地,大小幾何?」 公孫弘對曰:「百里.」  昭王笑而曰:

「寡人地數千里,猶未敢以有難也.  今孟嘗君之地方百里,而因欲難寡人,猶可乎?」

[맹상군이 합종을 성사시키려 하였다. 이를 눈치챈 빈객 공손홍(公孫弘)이 맹상군에게 말하기를 :
“군은 어찌하여 먼저 사람을 시켜 진소양왕을 살피도록 하지 않는 것입니까? 만일 진왕이 정말 영명한 
제왕이라면

군이 신하가 되고자 해도 이를 기약할 수 없을 판인데 어느 겨를에 합종하여 대항하겠다는 것입니까?

만일 진왕이 한낱 불초한 군왕이라면 그때 가서 합종하여 대항해도 늦지 않을 것입니다.”라고 하자.
맹상군이 말하기를 : “ 옳은 말이오. 원컨대 그대가 진왕을 만나러 갔다와 주기 바라오.”라고 하였다.
공손홍이 명을 받들어 곧 병거 10 승을 이끌고 진나라로 갔다.

진소양왕이 이 소문을 듣고 공손홍을 말로써 한번 창피를 주려고 생각했다.

이에 공손홍을 만나자 대뜸 묻기를 : “ 설공의 영지는 크기가 얼마나 되오.”라고 하자. 

공손홍이 대답하기를 : " 사방 1백 리입니다.”라고 하였다.
진소양왕이 웃으며 말하기를 : " 과인의 땅은 수천 리나 되지만 아직도 감히 누구를 적으로 삼고자 한 적이 없소.

그런데 지금 맹상군은 겨우 1백 리밖에 안되는 땅으로 과인에게 대적한다고 하니, 과연 가능하겠소?”라고 하자.


公孫弘對曰:「孟嘗君好人,大王不好人.」 昭王曰:「孟嘗君之好人也,奚如?」
公孫弘曰:「義不臣乎天子,不友乎諸侯,得志不慚為人主,不得志不肯為人臣,如此者三人;

而治可為管、商之師,說義聽行, 能致其如此者五人;萬乘之嚴主也;

辱其使者,退而自刎,必以其血洿其衣,如臣者十人.」

[공손홍이 대답하기를 : “ 맹상군은 현사(賢士)를 좋아하나 대왕은 그렇지 못합니다.”라고 하였다. 

진소양왕이 묻기를 : “ 맹상군이 과연 현사를 어떻게 존중하오?”라고 하자.
공손홍이 대답하기를 : “ 정의에 합당하기만 하면 천자의 신하나 제후들의 친구가 되지 않을지라도 괘념치 않고,

뜻을 얻으므로써 군주가 되어도 이를 부끄럽게 생각지 않고,

뜻을 얻지 못하였다고 해서 뜻을 굽혀가면서 남의 신하가 되지 않으려는 인물이 그의 휘하에 3명이나 있습니다.

또한 나라를 다스리게 하면 관중 및 상앙과 같은 스승이 되어 주인으로 하여금 그 의리에 기뻐하고

올바른 행의을 신뢰하게 하여 능히 그 주인을 패왕으로 만들 수 있는 인물이 5명이나 있습니다.

또 만승의 엄주(嚴主: 경외심을 자아내는 군왕)일지라도 사자로 온 자신을 욕되게 하면 이내 물러나

스스로 목을 찔러 그 피를 엄주의 옷깃에 뿌릴 만한 신과 같은 자가 열 명이나 있습니다.”라고 하였다.


昭王笑而謝之,曰:「客胡為若此,寡人直與客論耳!寡人善孟嘗君,欲客之必諭寡人之志也!」
公孫弘曰:「敬諾.」 公孫弘可謂不侵矣.  昭王,大國也.  孟嘗,千乘也.

立千乘之義而不可陵,可謂足使矣.

[이에 진소양왕이 웃으며 사과하고 나서 말하기를 : " 그대는 어찌 이같이 심하게 하는 것이오.

과인은 다만 그대를 손님으로 여겨 얘기를 나눠 보았을 뿐이오.

과인은 맹상군과 가깝게 지내고자 하니 그대가 가서 과인의 뜻을 잘 말해주기 바라오!”라고 하자.
공손홍이 대답하기를 : “공경히 받들겠습니다.”라고 하였다.

공손홍은 가히 사명(使命)을 욕되게 하지 않았다고 이를 만하다.

진소양왕은 대국의 군왕이고, 맹상군은 1천 승의 영주에 불과한데도 1천 승의 의를 세워 능멸을 받지 않았다.

그는 가히 재능 있는 사신이라 이를 만하다.


魯仲連謂孟嘗:「君好士也!雍門養椒亦,陽得子養,飲食、衣裘與之同之,皆得其死.

今君之家富於二公,而士未有為君盡游者也.」
君曰:「文不得是二人故也.  使文得二人者,豈獨不得盡?」
對曰:「君之廄馬百乘,無不被繡衣而食菽粟者,豈有騏麟騄耳哉?後宮十妃,皆衣縞紵,

食梁肉,豈有毛廧、西施哉? 色與馬取於今之世,士何必待古哉?故曰君之好士未也.」

[노중련이 맹상군에게 말하기를 : “ 군(君)은 선비를 좋아한다고 할 수가 없습니다! 

옛날 옹문자(雍門子: 제나라의 은사)가 초역(椒亦: 옹문자의 문객)을 양성하고 양득자(陽得子)가 양성할 때

음식과 의구(衣裘: 의복과 갖옷)를 모두 그들과 똑같이 했습니다. 이에 이들 모두 주인을 위해 목숨을 바쳤습니다.

그런데 지금 군의 집은 그 두 사람보다 더 부유하건만 군과 끝까지 생사를 함께 하겠다는 선비가 없는 것같습니다.”
맹상군이 말하기를 : “ 내가 아직 양성할 만한 선비를 얻지 못했기 때문이지 만일 얻기만 했다면

어찌 모든 정성을 기울이지 않았겠소?”라고 하자.
노중련이 반박하며 말하기를 : “ 군의 마구간에는 말이 1백 승이나 있습니다. 그 말들은 모두 비단옷에 
사람이

먹어야 할 콩과 조를 먹고 있습니다. 어찌 기린(騏驎)이나 녹이(騄耳)와 같은 명마가 있어 그리 하는 것이겠습니까?

또 후궁에는 10여 명의 비(妃)가 있는데 이들 모두 비단옷에 쌀밥과 고기를 먹고 있습니다.

어찌 모장(毛廧: 전설상의 미인)이나 서시(西施: 월왕 구천이 부차에게 바친 미인)와 같은 미인이 있어

그리 하는 것이겠습니까? 미녀와 말은 지금의 것을 취하면서 선비만 하필 옛 사람과 같은 자들을 기다리는 것입니까?

그래서 제가 군은 선비를 좋아하지 않는다고 말한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孟嘗君逐於齊而復反.  譚拾子迎之於境,謂孟嘗君曰:「君得無有所怨齊士大夫?」

孟嘗君曰:「有.」 「君滿意殺之乎?」 孟嘗君曰:「然.」

譚拾子曰:「事有必至,理有固然,君知之乎?」 孟嘗君曰:「不知.」
譚拾子曰:「事之必至者, 死也;理之固然者, 富貴則就之, 貧賤則去之.  此事之必至, 理之固然者.

請以市諭。市,朝則滿,夕則虛,非朝愛市而夕憎之也,求存故往,亡故去. 願君勿怨.」 

孟嘗君乃取所怨五百牒削去之,不敢以為言.

[맹상군이 제나라에서 쫓겨났다가 다시 돌아왔다. 제나라 사람 담습자(譚拾子)가 국경에서 그를 맞이하며 묻기를

“ 군께서는 제나라의 사대부를 원망하는 마음이 없습니까?”라고 하자. 맹상군이 대답하기를 : “있소.”라고 하였다.
담습자가 묻기를 : “ 군은 그들을 죽여 분풀이를 하려는 것입니까?" 하자.  맹상군이 대답하기를 :  “그렇소.”하였다.
담습자가 묻기를 : “ 일에는 필지(반드시 그렇게 되는 것)가 있고, 이치에는 고연(진실로 맞는 것)이 있는데

군께서는 이를 알고 있습니까?”라고 하자.   맹상군이 대답하기를 : “모르오.”라고 하였다.
그러자 담습자가 말하기를 : " 일의 필지는 곧 죽음을 말합니다. 이치의 고연은 부귀하면 사람이 따르고

빈천하면 사람이 떠나는 것을 말합니다. 이것이 바로 필지와 고연의 내용입니다. 이를 시장에 비유해 보겠습니다.

시장은 아침에는 사람이 들끓지만 저녁이 되면 텅 비게 됩니다. 이는 아침 시장을 좋아하고 저녁 시장을 싫어하기

때문이 아닙니다. 구하는 것이 있기에 모이고, 구하는 것이 없기에 떠나는 것입니다.

원컨대 군께서는 원망하지 말기 바랍니다.”라고 하였다. 이에 맹상군은 원망의 대상자 5백 명을 기록한

명단 첩(牒)을 깎아 없애버린 뒤 다시는 감히 말하지 않았다. (기원전 294) 


齊宣王見顏斶,曰:「斶前!」 斶亦曰:「王前!」 宣王不悅.

左右曰:「王,人君也.  斶,人臣也.  王曰『斶前』,亦曰『王前』,可乎?」
斶對曰:「夫斶前為慕勢,王前為趨士.  與使斶為趨勢,不如使王為趨士.」

王忿然作色曰:「王者貴乎? 士貴乎?」 對曰:「士貴耳,王者不貴.」 王曰:「有說乎?」

斶曰:「有. 昔者秦攻齊, 令曰:『有敢去柳下季壟五十步而樵采者, 死不赦. 』

令曰:『有能得齊王頭者, 封萬戶侯, 賜金千鎰.』由是觀之, 生王之頭, 曾不若死士之壟也. 」

[제선왕이 제나라 사람 안촉(顔斶)을 인견하면서 말하기를 : “ 안촉은 앞으로 나오도록 하오!”라고 하자.
이에 안촉 또한 제선왕에게 말하기를 : “대왕이 앞으로 나오십시오.”라고 하였다. 제선왕은 몹시 불쾌하였다.
좌우 대신들이 안촉에게 말하기를 : " 대왕은 백성의 임금이고, 그대는 임금의 신하요. 
지금 대왕이 그대에게

앞으로 나오라고 하자, 그대는 오히려 대왕보고 앞으로 나오라고 대꾸했소. 도대체 이것이 가한 일이오.”라고 하자.
안촉이 말하기를 : “ 내가 앞으로 나아가면 권세에 아부하는 사람이 되지만 
대왕께서 앞으로 나오시면

예현하사(禮賢下士: 선비를 예우하고 자신을 낮춰 인재와 교제함)하는 것이 됩니다. 나를 권세에 아부하는 사람으로

만들기보다는 차라리 대왕께서 예현하사 하는 분으로 만드는 편이 나을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이에 제선왕이 벌컥 화를 내며 얼굴빛이 변하며 묻기를 : “군왕이 귀하오? 선비가 귀하오?”라고 하자.
안촉이 대답하기를 : “ 당연히 선비가 귀합니다. 군왕은 귀하지 않습니다.”라고 하였다.

제선왕이 묻기를 : “그 이유를 설명해 보시오?”라고 하자.
안촉이 대답하기를 : “ 물론입니다. 옛날 진나라가 제나라를 공격했을 때 하명하기를, 
‘유하계(柳下季: 展禽)의

무덤 50보 이내에서 나무를 하는 자는 사형에 처하고 결코 용서하지 않을 것이다’라고 했습니다.

또 하명하기를, ‘제왕(齊王)의 수급을 얻는 자에게는 1만 호의 식읍과 금 1천 일(鎰: 2만량)을 내리겠다’고 했습니다.

이로써 보건대 제왕의 머리는 유하계의 무덤만도 못하다는 것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라고 하였다.  

 

宣王默然不悅.  左右皆曰:「斶來,斶來!大王據千乘之地,而建千石鐘,萬石簴.  天下之士,

仁義皆來役處;辯知並進,莫不來語;東西南北,莫敢不服.  求萬物不備具,而百無不親附.

今夫士之高者,乃稱匹夫,徒步而處農畝,下則鄙野、監門、閭里,士之賤也,亦甚矣!」

[제선왕이 묵연히 불쾌한 표정을 지었다. 좌우 대신들이 안촉에게 말하기를 : " 촉은 어서 빨리 이리 나오도록 하시오.

대왕은 만승지국을 보유하고 있고, 1천 석(石: 1석은 120근)의 종(鍾)과 1만 석의 거(簴: 종틀)을 세우고 있소.

이에 천하지사 중에 인의(仁義)의 현사가 모두 달려와 대왕을 위해 일하고 있소.

변사(辯士)와 지사(知士)가 함께 와 진언하지 않은 적이 없고, 동서남북 사방의 사람들 중 감히 불복하는 자가 없소.

또 만물을 구하여 갖춰 놓지 않은 것이 없고, 백성들 중에 친하게 따르며 섬기지 않는 자가 없소.

그러나 지금 선비라는 자들 중에 가장 뛰어난 고사(高士)일지라도 겨우 필부나 칭찬해 줄 뿐이며,

맨발로 다니는 천한 인물로 불리며 비천한 자리에 있고, 더 낮은 선비의 경우는 외진 곳에 처박혀 있거나

동네 문지기를 지내고 있소. 선비의 비천함은 참으로 이같이 심한 것이오!”라고 하자.


斶對曰:「不然.  斶聞古大禹之時,諸侯萬國.  何則? 德厚之道,得貴士之力也.

故舜起農畝,出於野鄙,而為天子.  及湯之時,諸侯三千.  當今之世,南面稱寡者,乃二十四.

由此觀之,非得失之策與? 稍稍誅滅,滅亡無族之時,欲為監門、閭里,安可得而有乎哉?
是故易傳不云乎:『居上位,未得其實,以喜其為名者,必以驕奢為行.  据慢驕奢,則凶從之.
是故無其實而喜其名者削,無德而望其福者約,無功而受其祿者辱,禍必握.』

[이에 안촉이 반박하기를 : “ 그렇지 않소. 내가 듣건대 옛날 대우(大禹) 때에 제후들이 1만 명이나 되었다고 하는데,

그 많은 제후들을 어찌 다스렸겠소? 이는 후덕한 치도를 행하고 현사의 힘을 존중했기 때문에 가능했던 것이오.

이에 순임금은 농무(農畝: 농부를 상징)에서 몸을 일으켜 천자가 될 수 있었던 것이오. 은탕(殷湯)에 이르러서는

제후들이 3천 명으로 줄었으나 현세에 이르러서는 남면하여 과인을 칭하는 자가 불과 24명 밖에 되지 않소.

이로써 보면 이는 현사를 얻었는지 여부에 따른 차이가 아니겠소. 제후들이 살해되거나 하여 점점 줄어들게 되면,

그때는 설령 동네 문지기가 되고자 한들 어찌 그것이 가능할 수 있겠소?

이에 「역전(易傳)」에 이르기를, ‘높은 자리에 있으면서 선비를 귀하게 여기지 않고 허명만 좋아하게 되면

반드시 그 행위가 교만하며 사치를 하게 되는데, 거만과 교사는 반드시 흉화(凶禍)가 따르는 법이다’라고 한 것이

아니겠소? 따라서 내용도 없이 허명만 좋아하는 자는 그 땅이 날로 깎이게 되고, 덕행도 없이 복을 바라는 자는

곤궁해지고, 공적도 없이 어울리지 않는 녹을 받는 자는 치욕을 당하고 큰 재앙을 입게 되는 것입니다.  

 

故曰:『矜功不立,虛願不至.』 此皆幸樂其名,華而無其實德者也.
是以堯有九佐,舜有七友,禹有五丞,湯有三輔,自古及今而能虛成名於天下者,無有.
是以君王無羞亟問,不媿下學;是故成其道德而揚功名於後世者,堯、舜、禹、湯、周文王是也.

[그래서 말하기를, ‘공을 자랑하면 공을 세우지 못하고, 바라기만 하고 행동을 하지 않으면

소원을 이룰 수 없는 법이다’라고 하는 것입니다. 이는 모두 명분만 즐기는 것을 지적한 것으로

겉모습만 화려할 뿐 내실의 덕행이 없는 것을 말한 것입니다.
요임금에게는 9명의 보좌가 있었고, 순임금에는 7우가, 
우임금에는 5승, 탕임금에게는 3보의 보좌가 있었습니다.

예로부터 지금까지 허명으로 천하를 차지한 자는 없었습니다. 이에 군왕은 자주 묻는 것을 부끄러워하지 않고,

아랫 사람에게서 배우는 것을 수치스럽게 여기지 않아야 합니다.

이에 덕을 완성하고 후세에 공명을 떨친 인물로는 요, 순, 우, 탕, 주문왕을 들 수 있습니다.


故曰:『無形者,形之君也.  無端者,事之本也.』夫上見其原,下通其流,至聖人明學,

何不吉之有哉! 老子曰:『雖貴,必以賤為本;雖高,必以下為基.』是以侯王稱孤寡不穀.

是其賤之本與? 非夫孤寡者,人之困賤下位也,而侯王以自謂,豈非下人而尊貴士與?
夫堯傳舜,舜傅禹,周成王任周公旦,而世世稱曰明主,是以明乎士之貴也.」

[그래서 이르기를, ‘무형(無形) 유형을 주재하는 본체이고, 무단(無端)은 사물의 근본이다’라고 한 것입니다.

무릇 위로는 사물의 근원을 이해하고, 아래로는 사물의 변화를 꿰뚫어 성인의 밝은 학문에 이르게 되면

어찌 불길한 일이 있을 수 있겠습니까!
노자는 말하기를, ‘비록 귀하더라도 반드시 천한 것을 근본으로 삼고, 비록 높더라도 반드시 낮은 것을 
기본으로

삼는다.'라고 하였습니다. 이에 후왕이 자신을 칭할 때 고(孤), 과(寡), 불곡(不穀: 不善)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이는 천한 것을 근본으로 삼은 것이 아니겠습니까? 무릇 ‘고’와 ‘과’라고 하는 것은

바로 곤(困)과 천(賤)과 하위(下位)의 사람을 뜻합니다. 후왕이 자신을 이같이 일컫는 것은 어찌 자신을 낮추고

선비를 높이라는 뜻이 아니겠습니까? 요임금은 순임금에게, 순임금은 우임금에게 양위하고,

주성왕(周成王)은 주공 단(旦)을 임용했기에 세세토록 그들을 명주로 부르는 것입니다.

이로써 선비가 군왕보다 귀하다는 것을 분명히 알 수 있습니다.”라고 하였다.


宣王曰:「嗟乎!君子焉可侮哉,寡人自取病耳!及今聞君子之言,乃今聞細人之行,

願請受為弟子.  且顏先生與寡人游,食必太牢,出必乘車,妻子衣服麗都.」
顏斶辭去曰:「夫玉生於山,制則破焉,非弗寶貴矣,然夫璞不完. 士生乎鄙野,推選則祿焉,

非不得尊遂也, 然而形神不全.  斶願得歸,晚食以當肉,安步以當車,無罪以當貴,

清靜貞正以自虞.  制言者王也,盡忠直言者斶也.  言要道已備矣,願得賜歸,安行而反臣之邑屋.」

則再拜而辭去也.  斶知足矣,歸反撲,則終身不辱也.

[이에 제선왕이 감탄하며 말하기를 : “ 아, 어찌 군자를 모욕할 수 있겠는가! 과인이 스스로 잘못을 저질렀소.

지금 군자의 말을 듣고 소인의 행실이 어떤 것인지를 분명히 알게 되었소. 부디 과인을 제자로 받아 주기 바라오.

그렇게 해주면 선생과 과인은 함께 교유하며, 음식은 반드시 태뢰로 하고, 외출할 때도 반드시 수레를 갖춰드리고,

선생의 처자도 화려한 의복을 입게 해 드리겠소.”라고 하였다.
그러자 안촉이 사양하며 말하기를 : “ 무릇 옥은 산에서 나는 것으로 이를 다듬으려면 깨뜨려야 합니다.

다듬어 만든 보옥(寶玉)이 귀하지 않은 것은 아니나 다듬기 전의 옥덩이만큼 온전하지는 못합니다.

선비는 외딴 촌구석에서 태어나 천거되어 임용되면 녹을 받게 됩니다. 그 경우 그가 존귀하지 않은 것은 아니나

이미 선비의 몸과 마음은 온전하지 못하게 됩니다. 저는 돌아가 때늦은 저녁식사의 허기를 고기반찬으로 삼고,

편히 걷는 것을 수레로 삼고, 죄를 짓지 않는 것을 고귀하게 여기며, 속세를 초탈한 맑고 순수한 절조를

내 자신의 즐거움으로 삼겠습니다. 저에게 명령하는 자는 대왕이지만 충성을 다하여 직간하는 자는 저입니다.

중요한 얘기는 이미 모두 말씀드렸습니다. 원컨대 저를 돌아가게 해주십시오.

저는 편히 고향집으로 돌아가고 싶을 뿐입니다.”라고 하였다.  그리고는 재배한 뒤 하직인사를 하고 떠났다.

안촉은 만족이 무엇인지 아는 사람이라 할 만하다. 진솔한 곳으로 돌아가면 종신토록 욕을 당하지 않는 법이다.  

 

先生王斗造門而欲見齊宣王,宣王使謁者延入.

王斗曰:「斗趨見王為好勢,王趨見斗為好士,於王何如?」

使者復還報.  王曰:「先生徐之,寡人請從.」

宣王因趨而迎之於門,與入,曰:「寡人奉先君之宗廟,守社稷,聞先生直言正諫不諱.」
王斗對曰:「王聞之過.  斗生於亂世,事亂君,焉敢直言正諫.」宣王忿然作色,不說.  有間,

王斗曰:「昔先君桓公所好者,九合諸侯,一匡天下,天子受籍,立為大伯.  今王有四焉.」

[제나라 사람 왕두(王斗)가 궁문에 이르러 배알을 청하자 제선왕이 알자를 시켜 맞아들이게 하였다.

그러자 왕두가 알자에게 말하기를 : “ 내가 급히 달려가 대왕을 알현하면 나는 권세에 아첨하는 자가 되고,

대왕이 달려나와 나를 만나면 대왕은 현사를 좋아하는 명주가 될 것이다. 대왕에게 어느 쪽이 낫겠는가.”라고 하자.
알자가 돌아와 이를 보고하였다. 제선왕이 말하기를 : “선생을 천천히 들어오시도록 하라.

과인이 나가 모시도록 하겠다.”라고 하였다. 이에 제선왕이 급히 궁문까지 달려나가 영접한 뒤

함께 안으로 들어와 말하기를 : “ 과인은 선군의 종묘를 잘 받들고 사직을 지켜 왔습니다.

듣건대 선생은 직언으로 바르게 간언하기를 두려워 하지 않는다고 하니 기탄없이 지도해 주기 바랍니다.”라고 하자.
왕두가 대답하기를 : " 그것은 대왕께서 잘못 들으신 것입니다. 저는 난세에 태어나 난군을 섬기는 있는데

어찌 감히 바르게 간언할 수 있겠습니까.”라고 하였다.

제선왕이 성을 벌컥 내며 분해하는 기색이과 언짢은 표정을 지었다.

잠시 후 왕두가 말하기를 : " 옛날 선군 제환공이 좋아했던 것은 모두 5 가지였습니다.

그러기에 구합제후(九合諸侯)하여 일광천하(一匡天下)를 할 수 있었고, 천자도 법령을 내려 태백(패자)으로

삼았던 것입니다. 그런데 지금 대왕께서는 제환공이 좋아한 5 가지 중 4 가지를 갖고 있습니다.”라고 하였다.

 

宣王說,曰:「寡人愚陋,守齊國,唯恐失抎之,焉能有四焉?」
王斗曰:「否.  先君好馬,王亦好馬.  先君好狗,王亦好狗.  先君好酒,王亦好酒.

先君好色,王亦好色.  先君好士,是王不好士」. 宣王曰:「當今之世無士,寡人何好?」  

王斗曰:「世無騏驎騄耳,王駟已備矣.  世無東郭俊、盧氏之狗,王之走狗已具矣.

世無毛嬙、西施,王宮已充矣.  王亦不好士也,何患無士?」

王曰:「寡人憂國愛民,固願得士以治之.」

[제선왕은 기뻐하며 묻기를 : " 과인은 어리석고 고루하여 제나라를 지키며 오직 잃지 않으려고 애쓰고 있을 뿐이오.

그런데 어찌 네 가지나 더 가지고 있을 수 있겠소?”라고 하자.
왕두가 대답하기를 : “ 아닙니다. 첫째 선군께서는 말을 좋아하셨는데 대왕께서도 말을 좋아하십니다.

둘째 선군께서는 개를 좋아하셨는데 대왕께서도 개를 좋아하십니다.

셋째 선군께서는 술을 좋아하셨는데 대왕께서도 술을 좋아하십니다.

넷째 선군께서는 색을 좋아하셨는데 대왕께서도 색을 좋아하십니다. 

다만 선군께서는 선비를 좋아하셨는데 대왕께서는 그렇지 못합니다.”라고 하였다.
그러자 제선왕이 묻기를 : " 지금 세상에는 선비다운 선비가 없소. 그러니 과인이 누구를 좋아할 수 있겠소?”라고 하자

왕두가 대답하기를 : “ 지금은 기린(騏驎)과 녹이(騄耳)와 같은 명마가 없는데도 대왕께서는 네 필의 준마가 이끄는

좋은 거마를 이미 갖춰 놓고 있습니다. 지금은 동곽준(東郭逡)을 쫓을 수 있는 한로(韓盧)와 같은 명견이 없는데도

대왕께서는 좋은 사냥개를 갖고 있습니다. 지금은 모장(毛嬙)이나 서시(西施)와 같은 미인이 없는데도

왕궁에는 미녀들이 넘쳐 납니다. 그런데 대왕께서는 선비를 좋아하지 않으시면서 어찌하여 현사가 없다고

한탄하시는 것입니까?”라고 하였다.
제선왕이 말하기를 : “ 과인은 나라를 걱정하고 백성을 사랑하고 있소. 그래서 실로 현사를 얻어

나라를 잘 다스리고자 하는 것이 과인의 바람이오.”라고 하였다. 

 

王斗曰:「王之憂國愛民,不若王愛尺縠也.」王曰:「何謂也?」

王斗曰:「王使人為冠,不使左右便辟而使工者何也? 為能之也.  今王治齊,非左右便辟無使也,

臣故曰不如愛尺縠也.」 宣王謝曰:「寡人有罪國家.」 於是舉士五人任官,齊國大治.

[왕두가 말하기를 : “ 그러나 대왕께서는 나라를 걱정하고 백성을 사랑하는 것이

대왕께서 아끼는 한 자 길이의 비단만도 못합니다.”라고 하였다..
제선왕이 묻기를 : “ 왜 그렇다는 것이오?”라고 하자.
이에 왕두가 대답하기를 : " 대왕께서는 사람을 시켜 얇은 비단으로 관(冠)을 만들고자 할 때 
이를 좌우의 총애하는

근신에게 맡기지 않고 공인(工人)에게 맡기는 것은 무슨 연고입니까? 이는 공인이 더 잘 만들기 때문일 것입니다.

지금 제나라를 다스리면서 대왕은 좌우의 총애하는 근신이 아니면 아예 국사를 맡길 생각을 하지 않고 있습니다.

그래서 ‘대왕이 아끼는 한 자 길이의 비단만도 못하다’고 말씀드린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그러자 제선왕이 사과하며 말하기를 : “ 과인이 나라에 큰 죄를 짓고 있었소.”라고 하면서,
이에 5명의 선비를 발탁하여 관직을 맡겼더니 제나라가 크게 다스려졌다.


齊王使使者問趙威后.  書未發,威后問使者曰:「歲亦無恙耶?民亦無恙耶?王亦無恙耶?」
使者不說,曰:「臣奉使使威后,今不問王,而先問歲與民,豈先賤而後尊貴者乎?」

威后曰:「不然. 苟無歲,何以有民?苟無民,何以有君?故有問舍本而問末者耶?」

[제왕 건(建)이 사자를 보내 조나라의 위후(조혜문왕의 부인)에게 문안서신을 올렸다. 주난왕 51년(기원전 264)

위후는 서신을 뜯어보지도 않은 채 사자에게 이같이 묻기를 : " 금년 농사는 별 탈이 없었소 ?

백성들 또한 무별 탈이 없었소 ? 대왕도 또한 안녕하시오 ?”라고 하자.
제왕의 사자는 불쾌한 얼굴로 대답하기를 : “신이 사명을 받들고 왔는데도 우리 왕의 안부를 먼저 묻지 않고

농사와 백성부터 물으시니어찌 천한 것을 앞에 놓고 존귀한 것을 뒤로 미뤄 놓는 것입니까?”라고 하였다.

위후가 말하기를 : “그렇지 않소. 실로 농사가 잘 되지 않으면 어찌 백성이 있고, 백성이 없으면 어찌 군왕이

있을 수 있겠소. 그러니 어찌 근본(根本)을 버리고 지말(支末)부터 물을 수 있겠소?”라고 하며,


乃進而問之曰:「齊有處士曰鍾離子,無恙耶?是其為人也,有糧者亦食,無糧者亦食;

有衣者亦衣,無衣者亦衣.  是助王養其民也,何以至今不業也?葉陽子無恙乎?

是其為人,哀鰥寡,卹孤獨,振困窮,補不足.  是助王息其民者也,何以至今不業也?

北宮之女嬰兒子無恙耶 ? 徹其環瑱,至老不嫁,以養父母.  是皆率民而出於孝情者也,

胡為至今不朝也? 此二士弗業,一女不朝,何以王齊國,子萬民乎?於陵子仲尚存乎?
是其為人也, 上不臣於王, 下不治其家,中不索交諸侯.  此率民而出於無用者, 何為至今不殺乎?」

[그리고는 나아가 다시 묻기를 : “제나라에 벼슬을 거부하는 종리자(鍾離子)가 있다고 하는데 그는 무양(無恙)하오?

그는 양식이 있는 사람이나 없는 사람이나 모두 거두어 먹이고, 의복이 있는 사람이나 없는 사람이나 입혀 준다고

들었소. 이는 군왕을 도와 백성을 기르는 것인데 어찌하여 지금까지 자리를 주지 않는 것이오.

또 처사 섭양자(葉陽子)는 무양(無恙)하오. 그는 환과(鰥寡: 홀아비와 과부)를 불쌍히 여기고

고독(孤獨: 고아와 무의탁 노인)을 긍휼히 여기며, 곤궁한 자를 구해주고, 부족한 자에게는 모자란 것을

보태준다고 들었소. 이는 왕을 도와 백성을 살리는 것인데 어찌하여 지금까지 자리를 주지 않는 것이오.

북궁씨(北宮氏) 집안의 영아자(嬰兒子: 여인에 대한 호칭)도 무양하오. 그녀는 귀고리 등 장신구도 하지 않고

늙도록 시집도 가지 않은 채 부모를 봉양하고 있다고 들었소. 이는 백성들에게 효행을 하도록 인도하는 것인데

어찌하여 명부(命婦: 봉호를 받은 여인)로 삼지 않는 것이오. 두 선비가 자리를 얻지 못하고

한 효녀가 명부가 되지 못하니 어찌 제나라를 올바로 다스리며 백성을 자식처럼 사랑한다고 할 수 있겠소.

또 오릉(於陵: 산동성 장산)의 중자(仲子: 田仲)는 아직 살아 있습니까.

그는 위로는 군왕에게 신하의 도리를 다하지 않고, 아래로는 집안도 제대로 다스리지 못하고,

중간으로는 제후들과 교제도 하지 않고 있다 하오. 이는 백성들을 무용(無用)한 곳으로 인도하는 것인데

어찌하여 아직도 죽이지 않은 채 살려 두고 있다는 것이오?”라고 하였다. 


齊人見田駢,曰:「聞先生高議,設為不宦,而願為役.」

田駢曰:「子何聞之?」 對曰:「臣聞之鄰人之女.」 田駢曰:「何謂也?」
對曰:「臣鄰人之女,設為不嫁,行年三十而有七子,不嫁則不嫁,然嫁過畢矣. 

今先生設為不宦,訾養千鍾,徒百人,不宦則然矣,而富過畢也.」 田子辭.

[제나라의 어떤 사람이 전변(田騈: 제나라의 稷下 학사로 황로학에 밝았음)을 만나 말하기를 : “저는 선생이 의론이

높은 선비로 관직에 나가지 않는다고 하면서도 다른 사람을 위해 자신이 쓰여지기를 바란다고 들었습니다.”라고 하자,

전변이 묻기를 : “그대는 그것을 어찌 알았소?”라고 하자, 

그 사람이 대답하기를 : “이웃집 여인을 통해 알았습니다.” 라고 하였다.

전변이 묻기를 : “그게 무슨 말이오?”라고 하자.
그 사람이 대답하기를 : “저의 이웃집에 사는 여인은 시집을 가지 않겠다고 하더니 나이 30에 자식이 7명이나

두었습니다. 시집을 가지 않은 것은 사실이나 오히려 시집간 여자보다 더한 감이 있습니다.

지금 선생도 벼슬을 하지 않겠다고 하면서도 천종(千鍾: 1천3백석)의 봉록을 받고 문도(門徒)가 1백 명이나 됩니다.

선생이 벼슬을 하지 않겠다면 그것에 맞아야 하는데 그 부귀함은 벼슬한 사람보다 더한 감이 있습니다.”라고 하였다. 

전자(田子: 전변)가 그의 충언을 크게 고마워했다.


管燕得罪齊王,謂其左右曰:「子孰而與我赴諸侯乎?」左右嘿然莫對. 

管燕連然流涕曰:「悲夫!士何其易得而難用也!」
田需對曰:「士三食不得饜,而君鵝鶩有餘食;下宮糅羅紈,曳綺縠,而士不得以為緣.
且財者君之所輕,死者士之所重,君不肯以所輕與士,而責士以所重事君,非士易得而難用也.」

[관연(管燕)이 제왕(齊王)에게 죄를 얻어 추방당하게 되자, 좌우에게 식객들에게 묻기를 :

“그대들 중 누가 나를 위해 먼저 제후들을 찾아봐 줄 수 있겠소.”라고 하자.
좌우의 식객들은 침묵만 지킬뿐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관연이 눈물을 흘리며 말하기를 : 
“ 아 슬프도다! 선비란 어찌 이리 얻기는 쉽고 쓰기는 어렵단 말인가!”라고 하였다.
그러자 전수(田需)가 나서 말하기를 : “그대의 문객으로 있는 선비들은 하루 세 끼도 배불리 먹지 못하는데

그대의 집에 있는 거위나 오리는 오히려 음식이 남아 돌고 있습니다. 또 그대의 하궁(下宮: 처첩)들은

각종 비단옷을 입고는 치마자락을 질질 끌고 다니는데 선비들은 옷깃 하나 제대로 꾸밀 수 없는 형편입니다.

게다가 재물은 그대가 가볍게 여기는 바이지만 죽음은 선비들이 중히 여기는 것입니다. 그런데도 그대는 자신이

가벼이 여기는 것조차 선비들에게 줄 생각도 하지 않은 채 오히려 선비들이 중히 여기는 것으로 그대를 섬기지

않는다고 책망하고 있습니다. 선비는 결코 얻기는 쉽고 쓰기는 어려운 존재가 아닙니다.”라고 하였다.


蘇秦自燕之齊,見於華章南門.  齊王曰:「嘻!子之來也.  秦使魏冉致帝,子以為何如?」
對曰:「王之問臣也卒,而患之所從生者微.  今不聽,是恨秦也;聽之,是恨天下也. 

不如聽之以卒秦,勿庸稱也以為天下.  秦稱之,天下聽之,王亦稱之,先後之事,帝名為無傷也. 

秦稱之,而天下不聽,王因勿稱,其於以收天下,此大資也.」

[소진이 연나라에서 제나라로 가 장화궁(章華宮)의 남문(南門)에서 제민왕을 만나자, 주난왕 27년(기원전 288)

제민왕이 소진에게 묻기를 : “ 아, 마침 잘 왔소. 지금 진나라에서 위염(魏冉)을 사자로 보내 제호(帝號) 사용을 권하고

있는데 그대는 어찌 생각하오.”라고 하자.   소진이 대답하기를 : “ 대왕께서 저에게 묻는 것이 너무 급작스럽습니다.

모든 근심은 작은 일에서 시작되는 것이니 신중히 고려치 않을 수 없습니다. 지금 진나라의 요구를 들어주지 않으면 진나라에게 원한을 사게 되고, 들어주면 제후들에게 원한을 사게 됩니다. 그러니 우선 진나라의 요구를 받아들여

진나라가 일을 마무리짓도록 유인하느니만 못합니다. 우리는 칭제치 않음으로써 천하의 인심을 얻고 있다가

진나라가 칭제하고도 천하 제후들이 이를 받아들이면 그때 비로소 대왕 역시 칭제하면 됩니다.

이는 시간의 선후 문제일 뿐 제(帝)라는 칭호에는 아무런 손상이 없는 것입니다.

만일 진나라가 칭제했는데도 천하의 제후들이 따르지 않는다면 대왕은 원래대로 칭제하지 않으면 되는 것입니다.

그리하면 오히려 천하의 마음을 얻는 큰 밑천이 될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蘇秦謂齊王曰:「齊、秦立為兩帝,王以天下為尊秦乎? 且尊齊乎?」王曰:「尊秦.」

「釋帝則天下愛齊乎?且愛秦乎?」 王曰:「愛齊而憎秦.」

「兩帝立,約伐趙,孰與伐宋之利也?」 王曰 : 「不如伐宋.

[소진이 제민왕에게 묻기를 : " 제, 진 두 나라가 서로 동제(東帝)와 서제(西帝)를 칭하면 대왕이 생각하기에

천하가 진나라를 높이겠습니까? 아니면 제나라를 높이겠습니까?”라고 하자, 

제왕이 대답하기를 : “ 진나라를 높일 듯하오.”라고 하였다.
소진이 묻기를 : “칭제를 하지 않으면 천하가 제나라를 좋아하겠습니까? 아니면 진나라를 좋아하겠습니까?”라고 하자

제왕이 대답하기를 : “ 제나라를 좋아하고 진나라를 미워하겠지요 .”
소진이 묻기를 : “ 동제와 서제가 병립해 맹약대로 조나라를 치는 것과 제나라 단독으로 송나라를 치는 것 중 어느

쪽이 유리하겠습니까?”라고 하자,  제왕이 대답하기를 : “제나라 단독으로 송나라를 치느니만 못하오.”라고 하였다.


對曰:「夫約然與秦為帝, 而天下獨尊秦而輕齊;齊釋帝, 則天下愛齊而憎秦;伐趙不如伐宋之利.

故臣願王明釋帝, 以就天下;倍約儐秦, 勿使爭重;而王以其間舉宋.
夫有宋則衛之陽城危;有淮北則楚之東國危;有濟西則趙之河東危;有陰、平陸則梁門不啟.
故釋帝而貳之以伐宋之事,則國重而名尊,燕、楚以形服,天下不敢不聽,此湯、武之舉也. 

敬秦以為名,而後使天下憎之,此所謂以卑易尊者也!願王之熟慮之也!」

​[이에 소진이 대답하기를 : " 무릇 이와 같으니 만일 제나라가 진나라와 함께 칭제하면 천하는 진나라를 높이고

제나라를 낮추게 됩니다. 그러나 제나라가 칭제하지 않으면 제나라를 좋아하고 진나라를 증오하게 됩니다.

또 조나라를 치는 것은 송나라를 치느니만 못합니다. 그래서 저는 원컨대 대왕이 분명히 칭제치 않은 채

천하 제후들과 가까이 지내기를 바랍니다. 진나라와의 약속을 파기하고 칭제의 경중을 다투지 말라는 것입니다.

대왕은 그 사이에 송나라를 치도록 하십시오. 무릇 송나라를 손에 넣게 되면 위(衛)나라의 양성(陽城)이 위태해지고,

회북(淮北)을 점거하면 초나라의 동국(東國) 땅이 위태로워지고, 제서(濟西: 제하의 이서 지역)를 차지하게 되면

조나라의 하동(河東)이 위태로워질 것입니다. 또 도(陶)와 평륙(平陸) 땅을 차지하면 위나라의 문이 열리지 않을

것입니다. 그래서 칭제치 말고 행동을 바꿔 송나라를 치면 제나라는 천하 형세에 중심 역할을 할 수 있고

대왕의 명성 또한 크게 떨치게 될 것입니다. 그리 되면 연, 초 두 나라가 그 형세에 굴복하게 되니 천하의 제후들이

감히 제나라의 명을 듣지 않을 수 없을 것입니다. 이야말로 탕무(湯武: 탕왕과 주무왕)의 거사가 이뤄지는 것입니다. 진나라를 공경한다는 구실로 칭제를 거부해 진나라의 칭제를 돋보이게 함으로써 천하 제후들로 하여금

진나라를 증오토록 만든 뒤 탕무의 거사를 이루는 것이 바로 소위 비(卑)로써 존(尊)을 바꾸는 계책입니다.

원컨대 대왕께서는 고려해 보시기 바랍니다.”라고 하였다.]

 齊策 五 .

蘇秦說齊閔王曰:「臣聞用兵而喜先天下者憂,約結而喜主怨者孤. 夫後起者藉也,而遠怨者時也.

是以聖人從事,必藉於權而務興於時. 夫權藉者,萬物之率也;而時勢者,百事之長也.

故無權籍,倍時勢,而能事成者寡矣.  今雖干將、莫邪,非得人力,則不能割劌矣.  

堅箭利金,不得弦機之利,則不能遠殺矣. 矢非不銛,而劍非不利也,何則?權藉不在焉.
何以知其然也?昔者趙氏襲衛,車舍人不休傅,衛國城割平,衛八門土而二門墮矣,此亡國之形也.

[소진이 제민왕에게 유세하기를 : “ 신이 듣건대 ‘전쟁에서 먼저 치기를 좋아하는 자는 근심하게 되고,

연맹을 조직해 원한 사기를 좋아하는 자는 스스로 고립된다’고 했습니다.

무릇 권변(權變: 임기응변)에 기대어 행동함으로써 남을 제압하는 자는 후발자이고 능히 남과 원한을 맺지 않는 자는

시기(時機)에 순응하는 자입니다. 그래서 성인은 일을 하면서 반드시 권변에 기대어 시기를 좇아 행동하는 것입니다. 무릇 구체적인 권변에 근거해 행동하는 것은 만사를 처리할 때 반드시 좇아야 하는 원칙이고,

시기에 순응하는 것은 만사를 처리할 때 반드시 지켜야 하는 법칙입니다.

권변에 기대지 않고 시기를 거역하면서 능히 일을 성사시킨 자는 드물기 마련입니다.
지금 비록 간장(干將), 막야(莫邪)와 같은 보검일지라도 사람의 힘에 의지하지 않으면 아무 것도 벨 수 
없습니다.

아무리 견고한 화살과 예리한 살촉일지라도 활시위의 힘에 의지하지 않으면 멀리 있는 것을 쏘아 죽일 수 없습니다.

화살이 켤코 날카로운 것도 아니고 칼 또한 예리하지 않는 것도 아니건만 어찌하여 그렇겠습니까?

이는 바로 권변에 의지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이를 어찌 알 수 있는가 하면 옛날 조나라가 위(衛)나라를 습격했을 때

전차가 멈추지 않고 병사들도 쉬지 못한 채 위나라 도읍에 접근했습니다. 조나라가 강평(剛平)에 성을 쌓자,

위나라는 8개의 성문을 흙으로 막았지만 2개가 허물어져 금방이라도 망할 처지에 놓이게 되었습니다.

 

衛君跣行,告溯於魏. 魏王身被甲底劍,挑趙索戰. 邯鄲之中騖,河、山之間亂.

衛得是藉也,亦收餘甲而北面,殘剛平,墮中牟之郭. 衛非強於趙也,譬之衛矢而魏弦機也,

藉力魏而有河東之地. 趙氏懼,楚人救趙而伐魏,戰於州西,出梁門,軍舍林中,馬飲於大河.
趙得是藉也, 亦襲魏之河北燒棘溝, 墜黃城. 故剛平之殘也, 中牟之墮也, 黃城之墜也, 棘溝之燒也,

此皆非趙、魏之欲也.  然二國勸行之者,何也? 衛明於時權之藉也. 今世之為國者不然矣.
兵弱而好敵強,國罷而好眾怨,事敗而好鞠之,兵弱而憎下人也,地狹而好敵大,事敗而好長詐. 

行此六者而求伯,則遠矣.

[이에 위군(衛君: 위회공의 아들 衛愼公)이 맨발로 위(魏)나라에 가 도움을 호소하자,

위왕(魏王: 위문후의 아들 魏武侯)이 몸소 갑옷을 입고 칼을 갈아 옆에 찬 뒤 조나라에 싸움을 걸었습니다.

그러자 조나라의 한단 사람들이 크게 놀라 혼란에 빠지고 하산(河山) 사이는 몹시 소란스럽게 되었습니다.

위(衛)나라는 이치럼 의지할 곳을 찾게 되자 곧바로 여갑(餘甲: 패잔병)을 수습해 북쪽으로 조나라를 쳐 강평을

탈취하고 중모(中牟)의 외성까지 함몰시켰습니다. 이는 위(衛)나라가 조나라보다도 강했기 때문이 아닙니다.

위(衛)나라를 화살에 비유하면 활시위의 역할을 한 위(魏)나라의 힘을 빌어 하동의 땅을 확보한 것입니다.

조나라가 두려워하자 이번에는 초나라가 조나라의 구원에 나서 위(魏)나라와 주성의 서쪽에서 싸우게 되었습니다.

초군은 양문(梁門)을 나와 임중(林中)에 주둔하면서 말에게 대하(大河: 황하)의 물을 먹였습니다.

조나라는 초나라의 지원에 기대어 위(魏)나라의 하북(河北)을 습격해 극포(棘蒲: 하북성 조현)를 불사르고

다시 황성(黃城)을 함락시켰습니다. 따라서 강평이 함락되고, 중모가 무너지고, 황성이 함몰되고,

극포가 불탄 것은 모두 조, 위 두 나라가 하고자 했던 바가 아닙니다. 그런데도 이 두 나라가 굳이 이같이 한 것은

무슨 연고이겠습니까. 위(衛)나라가 권변에 기대고 시기를 좇는데 밝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지금 나라를 다스리고 있는 자들은 그렇지 못합니다. 오히려 군사가 약한데도 강한 적을 대적하기를 좋아하고, 나라가 피폐한데도 백성의 원한을 초래하는 것도 마다않고, 일이 틀어졌는데도 끝까지 밀어붙이기를 좋아하고,

군사가 미약한데도 남에게 굴복키를 꺼리고, 땅이 좁은데도 대국과 싸우기를 좋아하고, 일이 실패했는데도 더욱 많은 사술(詐術)을 구사하기를 좋아합니다. 이 6가지 일을 행하면서 패자가 되려는 것은 차이가 너무 크다고 하겠습니다.


蘇秦說齊閔王曰:「臣聞善為國者,順民之意,而料兵之能,然後從於天下. 故約不為人主怨,

伐不為人挫強. 如此,則兵不費,權不輕,地可廣,欲可成也. 昔者,齊之與韓、魏伐秦、楚也,

戰非甚疾也,分地又非多韓、魏也,然而天下獨歸咎於齊者,何也?以其為韓、魏主怨也.
且天下遍用兵矣,齊、燕戰,而趙氏兼中山,秦、楚戰韓、魏不休,而宋、越專用其兵.

此十國者,皆以相敵為意,而獨舉心於齊者,何也? 約而好主怨,伐而好挫強也. 

且夫強大之禍,常以王人為意也;夫弱小之殃,常以謀人為利也. 是以大國危,小國滅也.

[신이 듣건대 ‘나라를 잘 다스리는 자는 백성이 바라는 바를 좇아 일을 처리하고, 병력의 강약을 잘 헤아린 후

나서지 않고 천하의 형세를 좇는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맹약을 맺더라도 남을 위해 원망을 사거나,

출병을 하더라도 남을 위해 강적과 대적하는 일을 하지 않는 것입니다.

이리 하면 병력을 손상시키지 않고, 국권도 경시당하지 않은 채 땅을 넓히고 바라는 바를 성취할 수 있습니다.

옛날 제나라가 한, 위 두 나라와 더불어 진, 초 두 나라를 정벌할 때 싸움을 그리 격렬하게 한 것도 아니고,

땅을 한, 위 두 나라보다 더 차지하지도 않았습니다. 그런데도 천하의 제후들이 제나라만을 비난한 것은

무슨 연고이겠습니까. 이는 제나라가 한,위 두 나라를 대신해 제후들의 원한을 자신에게 집중시켰기 때문입니다.

더구나 천하의 제후국들이 널리 서로 공벌전을 펼 때 조나라는 제, 연 두 나라가 싸우는 틈을 타 중산을 병탄했고,

진나라가 한, 위 두 나라와 합세해 초나라와 쉬지 않고 싸울 때 송, 월 두 나라는 일심으로 용병에 힘썼습니다.

이들 10개국은 모두 서로를 적대시했음에도 유독 제나라에 원망을 집중시킨 것은 무슨 까닭입니까.

그것은 바로 맹약을 맺으면서 남을 위해 원망을 자신에게 집중시키고, 출병하면서 남을 위해 강적과 대적하기를

좋아했기 때문입니다. 대체로 강대국이 화를 입는 것은 항상 윗자리에 앉으려고 한데 있고,

약소국이 재앙을 입는 것은 항상 남을 모해하는 것을 자신의 이익으로 삼기 때문입니다.

이로 인해 대국은 위태로워지고 소국은 망하는 것입니다.


大國之計,莫若後起而重伐不義. 夫後起之籍與多而兵勁,則事以眾強適罷寡也,兵必立也.  

事不塞天下之心,則利必附矣. 大國行此,則名號不攘而至,伯王不為而立矣. 

小國之情,莫如僅靜而寡信諸侯. 僅靜,則四鄰不反;寡信諸侯,則天下不賣.
外不賣, 內不反, 則檳禍朽腐而不用, 幣帛矯蠹而不服矣. 小國道此, 則不祠而福矣, 不貸而見足矣.

故曰:祖仁者王, 立義者伯, 用兵窮者亡. 何以知其然也?昔吳王夫差以強大為天下先,

強襲郢而棲越, 身從諸侯之君,而卒身死國亡,為天下戮者,何也?此夫差平居而謀王,

強大而喜先天下之禍也. 昔者萊、莒好謀,陳、蔡好詐,莒恃越而滅,蔡恃晉而亡,此皆內長詐,

外信諸侯之殃也.  由此觀之,則強弱大小之禍,可見於前事矣.

[따라서 대국의 계책으로 말하면 나중에 일어나 불의를 충분히 드러낸 뒤 치는 것보다 나은 것이 없습니다.

무릇 나중에 일어나 남의 힘을 빌리게 되면 동맹국이 많아지고 힘이 강하게 됩니다.

이는 강한 다수로 지친 소수를 대적하는 것이 되므로 싸우면 반드시 승리할 수밖에 없습니다.

일을 도모하면서 천하 제후들의 뜻을 거스르지 않으면 반드시 이익이 뒤따를 것입니다.

대국이 이를 실행하기만 하면 명성은 구하지 않아도 저절로 얻어질 것이고 패왕은 하고자 하지 않아도 저절로

이루어질 것입니다. 소국의 경우로 말하면 매사에 삼가며 제후들과 함부로 맹약치 않는 것보다 나은 것이 없습니다.

매사에 삼가면 이웃 나라가 배반하지 않을 것이고, 제후들과 맹약하지 않으면 천하에 이용당하지 않게 될 것입니다. 밖으로 이용당하지 않고, 안으로 배반을 당하지 않으면 쌓아둔 재화가 쓸 곳이 없어 썪을 정도로 부유해지고,

쌓인 옷감이 좀이 슬도록 다 입을 수 없을 정도가 될 것입니다. 소국이 이를 행하면 제사를 지내며

복을 빌지 않아도 복을 받게 되고, 남에게서 빌리지 않아도 자족하게 될 것입니다.

그래서 이르기를, ‘인(仁)을 숭상하는 자는 왕자(王者)가 되고, 의(義)를 세우는 자는 패자(覇者)가 되고,

용병(用兵)하여 궁하게 되는 자는 망자(亡者)가 된다’고 한 것입니다.
이를 어찌 알 수 있는가 하면 옛날 오왕 부차는 강대하기로 천하 제일이었습니다.

초나라 도읍 영(郢)을 습격한 뒤 월왕 구천을 회계산 속으로 몰아넣고, 스스로 제후들을 통솔하는 패자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결국 몸은 죽고, 나라는 망해 천하의 도륙을 당하는 신세가 되었으니 이는 무슨 연고이겠습니까.

이는 부차가 평소 왕이 될 생각으로 강대함을 믿고 천하의 화난을 일으키는데 앞장서기를 좋아했기 때문입니다.

또 옛날 내(萊)와 거(莒) 등 소국은 책략을 좋아하고, 진(陳)과 채(蔡)는 사술을 좋아했습니다.

이에 거나라는 진(晉)나라에 기대다가 망하고, 채나라는 월(越)나라에 기대다가 망했습니다.

이는 모두 안으로 사술을 능사로 삼고, 밖으로 제후들을 지나치게 믿은데 따른 재앙인 것입니다.

이로써 보건대 강약대소(强弱大小)에 따른 재난은 지난날의 일을 통해 명백히 알 수 있는 것입니다.


蘇秦說齊閔王曰:「語曰:『麒驥之衰也,駑馬先之;孟賁之倦也,女子勝之.』

夫駑馬、女子,筋骨力勁,非賢於騏驥、孟賁也. 何則?後起之藉也. 今天下之相與也不並滅,

有而案兵而後起,寄怨而誅不直,微用兵而寄於義,則亡天下可跼足而須也. 明於諸侯之故,

察於地形之理者,不約親,不相質而固,不趨而疾,眾事而不反,交割而不相憎,俱彊而加以親.

何則?形同憂而兵趨利也. 何以知其然也?昔者齊、燕戰於桓之曲,燕不勝,十萬之眾盡. 

胡人襲燕樓煩數縣,取其牛馬. 夫胡之與齊非素親也,而用兵又非約質而謀燕也, 然而甚於相趨者,

何也?何則形同憂而兵趨利也. 由此觀之,約於同形則利長,後起則諸侯可趨役也.

[속담에 이르기를, ‘기기(騏驥)와 같은 준마도 노쇠하면 노마(駑馬)만도 못하고, 맹분도 지치면 여자만도 못하다’

라고 했습니다. 본래 노마와 여자는 근골의 힘이 준마나 맹분에 미치지 못하건만 기기와 맹분을 이길 수 있는 것은

무슨 연고입니까? 이는 나중에 일어나 권변에 의지했기 때문입니다. 지금 천하의 제후들이 서로 대적하면서

상대방을 멸망시켜 병탄치 못하고 있습니다. 이들이 군사를 끌어안은 채 때를 기다려 뒤늦게 일어나고,

원한 살 일을 전가하며 불의한 자를 주벌하고, 용병하는 진의를 숨긴 채 정의의 명분을 내걸면 왕천하(王天下)는

발꿈치를 든 채 기다려도 가할 정도로 속히 이뤄질 것입니다. 제후들의 동정에 밝고 각국의 지리와 형세에 밝으면

맹약을 맺어 인질을 교환치 않아도 교분이 공고해지고, 독촉하지 않아도 빨리 진행되고, 여러 일을 도모해도

배신하지 않고, 적의 땅을 분할해도 미움을 사지 않고, 서로 강해지면서 친교 또한 더욱 두터워지는 법입니다.

이는 무슨 연고이겠습니까. 바로 형세상 서로 근심을 공유하고 용병의 이익이 일치하기 때문입니다.
어떻게 그것을 알 수 있는가 하면 옛날 제, 연 두 나라가 환곡(桓曲: )에서 싸웠을 때 연나라가 패해 10만 명의 병사가

전멸하자, 호인(胡人)이 연나라 누번(樓煩)의 여러 현을 습격해 우마를 노략질했습니다. 본래 호인과 제나라는

평소 무슨 친교가 있었던 것도 아니고, 용병할 때 서로 맹약하거나 인질을 교환하며 연나라를 치자고 약속한 것도

아니었습니다. 그런데도 이같이 서로 약속이나 한 듯이 함께 공격한 것은 무슨 연고이겠습니까?

이는 형세상 근심을 공유하고 용병이 이익이 일치했기 때문입니다. 이로써 보면 형세를 같이 하는 나라와 맹약하면

그 이익이 장구하고, 뒤에 일어나면 제후들을 귀부시켜 능히 부릴 수 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蘇秦說齊閔王曰:「故明主察相,誠欲以伯王也為志,則戰攻非所先. 戰者,國之殘也,

而都縣之費也.  殘費已先,而能從諸侯者寡矣.  彼戰者之為殘也,士聞戰則輸私財而富軍巿,

輸飲食而待死士, 令折轅而炊之, 殺牛而觴士, 則是路君之道也. 中人禱祝, 君翳釀, 通都小縣置社,

有巿之邑莫不止事而奉王, 則此虛中之計也. 夫戰之明日,尸死扶傷,雖若有功也,軍出費,

中哭泣,則傷主心矣.  死者破家而葬,夷傷者空財而共藥,完者內酺而華樂,故其費與死傷者鈞.

故民之所費也,十年之田而不償也.  軍之所出,矛戟折,鐶弦絕,傷弩,破車,罷馬,亡失之大半.

甲兵之具,官之所私出也,士大夫之所匿,廝養士之所竊,十年之田而不償也.

[그래서 명석한 군주와 멀리 내다볼 수 있는 식견을 지닌 재상으로서 실로 패왕의 대업을 이루고자 하는 뜻이 있으면

반듯시 전쟁을 첫 번째로 놓아서는 안됩니다. 전쟁이란 나라의 재해로 커다란 비용을 소모케 만듭니다.

이같이 피폐해지고 비용을 소모하면서도 제후들을 복종시킨 자는 적습니다. 전쟁으로 인한 재난은 쉽게 드러나니

우선 사람들은 전쟁 소식을 들으면 사재를 털어 군시(軍市: 군대 전용 시장)를 충실케 해야 하고,

음식을 보내 결사를 대접해야 하고, 수레의 끌채를 땔깜으로 만들어 병사들의 밥을 지어야 하고,

소를 잡아 병사들에게 주연을 베풀어야 합니다. 이 모든 것이 백성들을 궁핍하게 만드는 길입니다.

게다가 죽음을 무릅쓴 병사들의 가속들은 그들의 안전을 위해 기도하고, 사자(死者)의 가속들은 사자의 시신을

잘 묻어준 뒤 제사를 올려야 하고, 통도(通都: 사통팔달의 대도시)와 소현(小縣),

사(社: 1백 호 이상의 마을만 ‘사’를 설치함)를 설치할 수 있는 성읍, 시장이 있는 작은 성읍을 막론하고

모두 영업을 정지하고 대왕을 위해 봉사해야 합니다. 이 모든 것이 나라의 창고를 비게 만드는 길입니다.
무릇 전쟁 다음날에는 시체를 묻어주고 부상자를 부축해야 하니 비록 전공을 세웠다 할지라도

군비의 소모와 사상자 가속의 울부짖는 소리가 군왕의 마음을 상하게 할 뿐입니다.

죽은 자의 가속은 가산을 기울여 장사를 지내고, 부상자의 가속은 재산을 털어 약값을 대어야 하고,

비록 상처를 입지 않고 귀환했을지라도 전공 기념 잔치를 벌여 시끄럽게 떠들고 마시기 때문에

그 비용이 사상자와 맞먹습니다. 이에 백성들이 쓴 비용은 10년 농사로도 다 갚을 수 없게 됩니다.
군사가 출동하면 모극(矛戟: ‘모’는 直槍, ‘극’은 橫擊도 가능함)은 부러지고, 환현(鐶弦: 刀環과 활시위)은 끊어지고,

노(弩: 쇠뇌)는 망가지고, 병거는 부서지고, 말은 지치고, 화살은 태반이 없어지고 맙니다.

갑옷과 투구는 모두 관이 사가에서 염출하는 것인데 관원들이 이를 빼돌리고 잡역부들이 이를 훔쳐가니

이 또한 10년 농사로도 다 갚을 수 없게 됩니다.

 

天下有此再費者,而能從諸侯寡矣. 攻城之費,百姓理襜蔽,

舉衝櫓,家雜總,身窟穴,中罷於刀金. 而士困於土功,將不釋甲,期數而能拔城者為亟耳.
上倦於教,士斷於兵,故三下城而能勝敵者寡矣. 故曰:彼戰攻者,非所先也。何以知其然也?

昔智伯瑤攻范、中行氏,殺其君,滅其國,又西圍晉陽,吞兼二國,而憂一主,此用兵之盛也.
然而智伯卒身死國亡,為天下笑者,何謂也?兵先戰攻,而滅二子患也.
日者,中山悉起而迎燕、趙,南戰於長子,敗趙氏;北戰於中山,克燕軍,殺其將. 

夫中山千乘之國也,而敵萬乘之國二,再戰北勝,此用兵之上節也.
然而國遂亡,君臣於齊者,何也?不嗇於戰攻之患也. 由此觀之,則戰攻之敗,可見於前事.

[천하에 이러한 이중의 비용을 쓰고도 능히 제후들을 거느린 자는 드물었습니다.

성을 공격하는 비용을 말하면 백성들은 첨폐(襜蔽: 화살 차단용 휘장)를 수리하고,

충로(衝櫓: 성을 공격하거나 수비할 때 사용하는 큰 방패)를 만들고, 병마를 거두기 위한 잡역을 해야 하고,

굴혈(窟穴: 성벽 밑까지 땅굴을 파고 들어가 버팀목을 세운 뒤 불을 질러 성벽을 무너뜨림)을 파야 하고,

공성 비용을 조달하기 위해 도금(刀金: 刀幣와 같은 화폐)을 바쳐야 합니다. 또한 사졸을 땅굴을 파느라 지치고

장군은 갑옷을 벗지 못하니, 1년 내에 성을 함락시키기만 하면 매우 빨랐다고 하는 것입니다.

이에 관장(官長)은 지루한 전쟁으로 인해 백성들을 교화할 수 없게 되고, 사졸은 멋대로 교횡(驕橫)하는 기운을

키우게 됩니다. 그러니 3 채의 성을 함락시키고도 능히 적을 이겨낸 자가 매우 드물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르기를, ‘공격은 먼저 서둘러 행하는 것이 아니다’라고 하는 것입니다.
이를 어떻게 알 수 있는가 하면 옛날 지백 요(瑤)는 범씨와 중항씨를 공격해 죽이고 그 땅을 병탄한 후

다시 서쪽으로 진격해 진양을 포위해 조양자를 크게 심려하게 만들었습니다. 이는 성대한 용병이었습니다.

그러나 지백은 마침내 몸은 죽고 나라까지 망하여 천하의 웃음거리가 되었으니 왜 이같은 일이 일어난 것입니까?

이는 먼저 공격을 서둘러 범씨와 중항씨를 죽인데 따른 화난이었습니다.
옛날 중산국은 전 군사를 동원해 연, 조 두 나라를 맞아 싸웠습니다. 이에 남쪽 방자(房子: 하북성 임성현) 땅에서

조나라 군사를 깨뜨린데 이어 북쪽 중산(中山)에서 연나라 군사를 격파하고 그 장군을 죽였습니다.

무릇 중산국은 천승의 나라이면서 만승의 나라를 둘이나 상대해 모두 승리했으니 이는 용병 면에서 최상이었습니다. 그런데도 결국 나라는 망하고 군주는 제나라의 신하가 되었으니 이는 무슨 까닭이겠습니까?

그것은 전쟁에 따른 화난을 고려치 않았기 때문입니다. 이로써 보건대 싸움에 이기고 망한 사례를 과거사를 통해

쉽게 확인할 수 있습니다.


蘇秦說齊閔王曰: 「今世之所謂善用兵者,終戰比勝,而守不可拔,天下稱為善,一國得而保之, 

則非國之利也.  臣聞戰大勝者,其士多死而兵益弱;守而不可拔者,其百姓罷而城郭露.  

夫士死於外,民殘於內,而城郭露於境,則非王之樂也. 今夫鵠的非咎罪於人也,便弓引弩而射之,

中者則善,不中則愧,少長貴賤,則同心於貫之者,何也?惡其示人以難也.
今窮戰比勝,而守必不拔,則是非徒示人以難也,又且害人者也,然則天下仇之必矣. 

夫罷士露國,而多與天下為仇,則明君不居也;素用強兵而弱之,則察相不事.   

彼明君察相者,則五兵不動而諸侯從,辭讓而重賂至矣.

故明君之攻戰也,甲兵不出於軍而敵國勝,衝櫓不施而邊城降,士民不知而王業至矣.
彼明君之從事也,用財少,曠日遠而為利長者. 故曰:兵後起則諸侯可趨役也.

[지금 세상에서 소위 용병에 능하다는 것은 곧 끝까지 싸워 잇달아 이기고, 끝까지 성을 지켜 함락당하지 않는 것을

말합니다. 천하가 이를 두고 용병을 잘한다고 칭송하나 설령 이를 통해 나라를 보전할 수 있을지라도 이는 결코

나라에 이로운 것이 아닙니다. 신이 듣건대 ‘대승을 거두는 자는 오히려 군사가 많이 죽어 병력이 더욱 약해지고,

악전고투하며 성을 지켜낸 자는 백성이 지쳐 끝내 성곽이 허물어지고 만다’고 들었습니다.

무릇 군사가 밖에서 죽고, 백성이 안에서 잔폐(殘廢)해지고, 변경의 성곽이 허물어지는 것은 군왕의 즐거움이

아닐 것입니다. 지금 과녁이 사람에게 죄를 진 것도 아닌데 사람들이 모두 과녁을 향해 화살을 쏘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 죄를 이들 화살 쏘는 사람들에게 돌릴 수는 없습니다. 사람들은 활과 쇠뇌를 교묘히 사용해

화살을 쏘고는 적중한 자는 좋아하고 그렇지 못한 자는 부끄러워합니다. 노소귀천을 막론하고 한결같이

과녁을 쏘아 적중시키려는 것은 무슨 까닭이겠습니까. 이는 과녁이 자신을 적중시키는 것이

얼마나 어렵다는 것을 드러냄으로써 이를 극복코자 하는 사람들의 분발심을 자극했기 때문입니다.
지금 끝까지 싸워 잇달아 이기기만 하고, 악전고투하며 끝까지 성을 지켜내는 것은 비단 남에게 이같은 일이

얼마나 어렵다는 것을 드러냄으로써 남들의 분발심을 자극할 뿐만 아니라 사람을 크게 상하게 만듭니다.

그러니 천하의 제후들이 서로를 적으로 삼는 것 또한 당연한 일이라 할 것입니다. 무릇 군사를 지치게 만들고

나라를 허물어뜨리며 천하의 많은 제후들과 적대관계를 맺는 것은 명군이 취하는 바가 아니며,

늘 전쟁을 일으켜 병력을 약화시키는 것은 현상(賢相)이 취하는 바가 아닙니다.
명군과 현상은 5병(五兵: 刀, 劍, 矛, 戟, 矢)을 쓰지 않고도 제후가 자진해 따르게 하고, 사양(辭讓)하는데도

중뢰(重賂: 정중한 예물)가 답지토록 만듭니다. 그렇기 때문에 명군의 공전(攻戰: 공격)은 군사가 출전하지 않고도

적국을 이기고, 충로를 사용하지 않고도 변경의 성을 함락시키고, 사민(士民)이 깨닫지 못하는 사이에 왕업을

이루는 것입니다. 명군은 일을 처리하면서 재물을 적게 들여 시간이 매우 오래 걸리기는 하나 그 이익이 장구합니다.

그래서 이르기를, ‘군사를 나중에 일으키면 제후들을 자진해 귀부시켜 부릴 수 있다’고 한 것입니다.


蘇秦說齊閔王曰:「臣之所聞,攻戰之道非師者,雖有百萬之軍,比之堂上;

雖有闔閭、吳起之將,禽之戶內 ; 千丈之城,拔之尊俎之間;百尺之衝,折之衽席之上.
故鍾鼓竽瑟之音不絕,地可廣而欲可成;和樂倡優侏儒之笑不之,諸侯可同日而致也.
故名配天地不為尊,利制海內不為厚. 故夫善為王業者,在勞天下而自佚,亂天下而自安,

諸侯無成謀,則其國無宿憂也.  何以知其然?佚治在我,勞亂在天下,則王之道也. 

銳兵來則拒之,患至則趨之,使諸侯無成謀,則其國無宿憂矣. 何以知其然矣?

昔者魏王擁土千里,帶甲三十六萬,其強而拔邯鄲,西圍定陽,又從十二諸侯朝天子,以西謀秦.
秦王恐之,寢不安席,食不甘味,令於境內,盡堞中為戰具,竟為守備,為死士置將,以待魏氏.

[신이 듣건대 ‘공전(攻戰)의 요체는 용병에 있지 않다’라고 했습니다. 비록 1백 만의 적군일지라도 당상(堂上)에서

격파하고, 합려(闔廬)와 오기(吳起)와 같은 장수가 있을지라도 실내에서 계책을 세워 사로잡고,

1천 장(丈) 높이의 성일지라도 주연을 베풀기 전에 계책을 세워 함락시키고,

1백 척 높이의 충거(衝車)라도 실내의 앉은 자리에서 계책을 세워 깨뜨릴 수 있습니다.

그래서 종고(鐘鼓)와 우슬(竽瑟) 소리가 끊임없이 이어지는 가운데서도 땅을 넓히며 바라는 바를 성취시킬 수 있고,

아름다운 음악 속에서 창우(배우)와 주유(侏儒: 원래는 난장이 어릿광대로 여기서는 연주자)의 웃음이 끊어지지 않는

가운데 제후들를 한꺼번에 불러 귀복시킬 수 있습니다. 그러니 천지와 짝할 만한 명성도 존귀한 것이 아니고,

해내를 제압할 만한 이익이라 할지라도 후하다고 할 수 없습니다. 이에 왕업을 훌륭히 성취하는 자는 천하의 제후들을 수고롭게 하되 자신은 안락하게 만들고, 천하인은 어지럽게 하되 자신은 편하게 만드는 것입니다.

편안한 가운데 잘 다스리는 것이 나의 몫이고, 수고로운 가운데 어지러운 것이 천하 제후들의 몫이 될 때

바로 왕도(王道)를 이루게 됩니다. 날랜 적군이 오면 막고, 화난이 닥치면 이를 남에게 전가해 제후들의 계책이

성공하지 못하게 하면 나라에 장구한 근심이 없게 됩니다. 어떻게 그것을 알 수 있는가 하면

옛날 위왕(魏王: 위혜왕)은 땅이 사방 1천 리에 대갑(帶甲: 전사)이 36만 명이나 되었습니다.

이에 그 강력한 무력에 기대어 한단을 공략하고, 서쪽으로 정양(定陽)을 포위하고,

다시 12제후를 이끌고 가 천자를 조현하고, 마침내 서쪽으로 진나라를 칠 계책을 세웠습니다.

진왕(진효공)은 두려운 나머지 침식을 제대로 하지 못하다가 곧 영을 내려 모든 성가퀴에 무기를 설치하고,

국경의 수비를 더욱 굳게 하고, 결사대를 조직하고, 장수를 적소에 배치해 위나라 침공에 대비하게 했습니다.


衛鞅謀於秦王曰:『夫魏氏其功大,而令行於天下,有十二諸侯而朝天子,其與必眾. 

故以一秦而敵大魏,恐不如.王何不使臣見魏王,則臣請必北魏矣.』秦王許諾. 

衛鞅見魏王曰:『大王之功大矣,令行於天下矣. 今大王之所從十二諸侯,非宋、衛也,

則鄒、魯、陳、蔡,此固大王之所以鞭箠使也,不足以王天下. 大王不若北取燕,東伐齊,

則趙必從矣;西取秦,南伐楚,則韓必從矣。大王有伐齊、楚心,而從天下之志,則王業見矣.

大王不如先行王服,然後圖齊、楚.』魏王說於衛鞅之言也,故身廣公宮,制丹衣柱,建九斿,

從七星之旟. 此天子之位也,而魏王處之.  於是齊、楚怒,諸侯奔齊,齊人伐魏,殺其太子,

覆其十萬之軍.  魏王大恐,跣行按兵於國,而東次於齊,然後天下乃舍之.

當是時,秦王垂拱受西河之外,而不以德魏王. 故曰衛鞅之始與秦王計也,謀約不下席,

言於尊俎之間,謀成於堂上,而魏將以禽於齊矣;衝櫓未施,而西河之外入於秦矣.

此臣之所謂比之堂上,禽將戶內,拔城於尊俎之間,折衝席上者也.」

[이때 위앙(衛鞅: 상앙)이 진왕에게 건의하기를, ‘무릇 위나라는 큰 공을 세워 그 위령(威令)이 천하에 행해지고

12제후를 이끌고 가 천자까지 조현했습니다. 위나라는 동맹국이 많아 우리 진나라만으로는 큰 위나라를 대적하기는

어렵지 않을까 염려됩니다. 군왕은 어찌하여 저를 위왕에게 사자로 보내지 않는 것입니까.

제가 가면 반드시 위나라가 실패토록 만들겠습니다’라고 했습니다. 진왕이 이를 승낙하자 위앙이 곧 위나라로 가서

위왕에게 유세하기를, ‘대왕의 공은 참으로 커 그 위령이 천하에 행해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지금 대왕을 따르는

12제후는 송(宋), 위(衛)를 위시해 추(鄒), 노(魯), 진(陳), 채(蔡) 등 소국들 뿐입니다.

이들은 본래 대왕이 편추(鞭箠 : 채찍)를 들고 부리는 수준에 불과하여 이들만 갖고 왕천하하기는 어렵습니다.

대왕이 북쪽으로 연나라를 취하고 동쪽으로 제나라를 치면 조나라가 반드시 복종해 오고, 서쪽으로 진나라를 취하고,

남쪽으로 초나라를 치면 한나라가 반드시 복종해 올 것입니다. 대왕으로서는 이리 하는 것이 상책입니다.

대왕이 제, 초 두 나라를 치고 천하 제후들을 복종시킬 뜻만 갖고 있다면 왕업은 저절로 이뤄질 것입니다.

그러니 대왕은 먼저 제왕의 의용(儀容)과 제도를 갖추느니만 못합니다. 연후에 제, 초 두 나라를 도모하십시오’라고

했습니다. 위왕이 이 말을 듣고 크게 기뻐하며 몸소 나서 제왕의 의용을 갖추기 위해 궁궐을 넓히고,

단의(丹衣: 왕이 입는 붉은 색 옷)를 만들고, 구유지정(九斿之旌: 9가지 술이 달린 제왕의 깃발)를 세우고,

칠성지여(七星之旟: 붉은 바탕에 칠성을 그려넣은 제왕의 깃발)를 사용했습니다. 이는 천자만이 할 수 있는 것인데

위왕은 감히 이같이 했던 것입니다. 제나라와 초나라가 노하자 제후들이 모두 제나라로 달려가 지원에 나섰습니다.

제나라가 마침내 위나라를 쳐 그 태자를 죽이고 위나라 군사 10만 명을 전멸시켰습니다.

그러자 위왕이 크게 두려워한 나머지 맨발로 뛰쳐 나가 전국에 하령하여 출병을 멈추게 한 뒤 동쪽 제나라로 가서

항복하고 강화를 애걸했습니다. 이에 천하의 제후들이 비로소 위나라 공벌을 그쳤습니다.
당시 진왕은 팔짱을 낀 채 아무런 수고도 하지 않고 서하(西河) 밖의 땅을 손에 넣었습니다.

그러고도 위왕에게는 한마디도 고맙다는 말을 하지 않았습니다. 이로써 위앙은 당초 진왕과 계책을 세우면서

앉은 자리에서 언약하고, 연회를 베풀기 전에 계책을 정하고, 당상에서 세운 계책으로 제나라로 하여금

위나라 장수 방연을 생포하게 만들었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그는 충로를 사용치도 않고 서하 밖의 땅을 진나라의

판도로 들어오게 한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앞서 말한 ‘적을 당상에서 격파하고, 적장을 실내에서 사로잡고,

성을 연회를 베풀기 전에 함락시키고, 충거를 앉은 자리에서 부서뜨릴 수 있다’는 내용의 구체적인 사례입니다.”

라고 하였다.]

 

 齊策 六 .

齊負郭之民有孤狐咺者, 正議閔王, 斮之檀衢, 百姓不附. 齊孫室子陳舉直言, 殺之東閭, 宗族離心.

司馬穰苴為政者也,殺之,大臣不親. 以故燕舉兵,使昌國君將而擊之. 齊使向子將而應之.

齊軍破,向子以輿一乘亡. 達子收餘卒,復振,與燕戰,求所以償者,閔王不肯與,軍破走.
王奔莒,淖齒數之曰:「夫千乘、博昌之間,方數百里,雨血沾衣,王知之乎?」

王曰:「不知.」「嬴、博之間,地坼至泉,王知之乎?」
王曰:「不知.」「人有當闕而哭者,求之則不得,去之則聞其聲,王知之乎?」
王曰:「不知.」淖齒曰:「天雨血沾衣者,天以告也;地坼至泉者,地以告也;

人有當闕而哭者,人以告也.  天地人皆以告矣,而王不知戒焉,何得無誅乎?」於是殺閔王於鼓里.

[주난왕 30년(기원전 285), 제나라 도읍 임치에서 성곽을 등지고 외롭게 살아가는 호훤(狐咺)이라는 자가 있었다.

그가 바른 말로 제민왕을 비난하자 제민왕이 그를 단구(檀衢: 東閭와 함께 형을 집행하던 장소)에서 참수했다.

그러자 백성들이 제민왕을 따르지 않게 되었다. 또한 제나라의 종실 중 진거(陳擧)라는 자가 직언하자

그 또한 동려(東閭)에서 죽여버렸다. 이에 종실들의 마음도 멀어지게 되었다.

집정자인 사마양저(司馬穰苴)도 죽여버리자, 중신들도 제민왕을 가까이 하지 않았다.
그러자 연나라가 군사를 일으켜 창국군(昌國君: 위나라의 명장 樂羊의 후손인 악의)으로 하여금 군사를 이끌고 가서

제나라를 치게 했다. 이에 제나라가 촉자(觸子)를 시켜 응전케 했으나 촉자는 이 싸움에서 대패하여 수레 1 대를

타고 단신으로 도주했다. 그러나 제나라 장수 달자(達子)가 패잔병을 모아 다시 떨쳐 일어나 연나라와 교전하면서

병사들에게 포상을 내려달라고 청했다. 그러나 제민왕이 이를 듣지 않자 결국 제나라 군사는 다시 대패하고 말았다.
제민왕이 마침내 거(莒) 땅으로 달아나자 구원차 왔던 초나라 장군 요치(淖齒)가 제민왕의 죄를 이같이 추궁했다.
“천승(千乘)과 박창(博昌) 사이에 있는 사방 수백 리 땅에 온통 피가 비처럼 떨어져 내려 옷을 적시고 있다고 하는데,

왕께서는 이를 알고 있습니까 ?” 라고 하자. 왕이 말하기를 : “ 알지 못하오. ”라고 하였다.
요치가 묻기를 : “영(嬴)과 박(博) 사이에 있는 땅에서는 대지가 갈라져 지하수가 솟는 깊은 곳까지 이르렀다고 하는데

왕께서는 이를 알고 있습니까 ?” 라고 하자. 왕이 말하기를 : “ 알지 못하오. ”라고 하였다.
요치가 묻기를 : “ 궁궐 앞에서 사람의 곡성이 들려 찾아보면 그 모습이 보이지 않고 그곳을 떠나면

또 곡성이 들린다고 하는데 왕은 이를 알고 있소.”라고 하자. 왕이 말하기를 : “ 알지 못하오. ”라고 하였다.
요치가 말하기를 : “ 하늘에서 비가 비처럼 내려 옷을 젖게 하는 것은 하늘이 경고하는 것이고, 땅이 지하수가 있는

깊은 곳까지 갈라진 것은 땅이 경고하는 것이고, 궁궐 앞에서 사람의 곡성이 들리는 것은 백성이 경고하는 것이오.

천, 지, 인(天地人)이 모두 경고하고 있는데 왕은 스스로 경계할 줄 모르니 어찌 주벌을 면할 수 있겠소?”라고 하였다.
이에 요치는 제민왕을 고리(鼓里: 산동성 거현)에서 죽여버렸다.]


太子乃解衣免服,逃太史之家為溉園. 君王后,太史氏女,知其貴人,善事之.
田單以即墨之城,破亡餘卒,破燕兵,紿騎劫,遂以復齊,遽迎太子於莒,立之以為王.

襄王即位,君王后以為后,生齊王建.

[그러자 태자 법장(法章: 훗날의 제양왕)은 옷을 바꿔 입고 거(莒) 땅의 태사 교의 집으로 숨어들어

꽃밭에 물을 주는 일을 하였다. 훗날 군왕후(君王后)가 된 태사 교의 딸은 법장이 귀인임을 알고 정성껏 돌봐 주었다.

이때 전단(田單)이 즉묵(卽墨)의 성에 농성하며 패잔병을 이끌고 연나라와 싸웠다.

그는 마침내 연나라 군사를 격파하고 연나라 장수 기겁(騎劫)을 죽이고는 제나라의 국토를 회복했다.

이어 거 땅에서 태자를 맞아 왕위에 오르게 했다. 제양왕이 즉위하자 군왕후가 왕후가 되어 제왕 건(建)을 낳았다.]

 

王孫賈年十五,事閔王. 王出走,失王之處. 其母曰:「女朝出而晚來,則吾倚門而望;

女暮出而不還,則吾倚閭而望. 女今事王,王出走,女不知其處,女尚何歸?王孫賈乃入市中,

曰:「淖齒亂齊國,殺閔王,欲與我誅者,袒右!」市人從者四百人,與之誅淖齒,刺而殺之.

[주난왕 32년(기원전 283), 왕손가(王孫賈)는 나이 15세에 제민왕을 섬겼다.

제민왕이 거 땅으로 떠나 버리자, 일시 제민왕의 행방을 놓쳤다. 그러자 그의 모친이 이같이 꾸짖엇다.
“네가 아침 일찍 나가 저녁 늦게 돌아오면 나는 집 대문에 기대어 너를 기다린다.

네가 저녁 늦게 나가 돌아오지 않으면 나는 동구 밖 어귀까지 나가 기다린다.

지금 너는 왕을 섬기는 몸으로 왕이 피신했는데도 간 곳조차 모르고도 어찌 집으로 돌아올 수 있느냐.”
그러자 왕손가가 시장 안으로 들어가 이같이 외쳤다.
“요치가 제나라에 난을 일으켜 왕을 죽였다. 나와 함께 그를 주벌할 자는 오른쪽 어깨를 벗어라.”
시중에 있던 사람 중 그를 따르는 사람이 4백 명이나 되었다. 이에 이들과 함께 요치를 척살했다.]


燕攻齊, 取七十餘城, 唯莒、即墨不下. 齊田單以即墨破燕, 殺騎劫. 初, 燕將攻下聊城, 人或讒之.

燕將懼誅,遂保守聊城,不敢歸. 田單攻之歲餘,士卒多死,而聊城不下. 

魯連乃書,約之矢以射城中,遺燕將曰:「吾聞之,智者不倍時而棄利,勇士不怯死而滅名,

忠臣不先身而後君. 今公行一朝之忿,不顧燕王之無臣,非忠也;殺身亡聊城,而威不信於齊,

非勇也; 功廢名滅,後世無稱,非知也. 故知者不再計,勇士不怯死.
今死生榮辱,尊卑貴賤,此其一時也. 願公之詳計而無與俗同也.

[주난왕 31년(기원전 284), 연나라가 제나라를 공격해 70여개 성을 취했다. 이때 오직 거(莒)와 즉묵(卽墨)만이

함락되지 않았다. 제나라 장수 전단(田單)이 즉묵을 기반으로 연나라 군사를 격파하고 기겁(騎劫)을 유인해 죽였다.

당초 연나라 장수가 요성(산동성 요성)을 공격해 항복을 받자 어떤 사람이 연왕(연혜왕)에게 연나라 장수가 반심을

품고 있다고 참소했다. 연나라 장수는 주살당할까 두려워 요성을 고수하면서 감히 돌아가지 못했다.

이에 전단이 1년 남짓 공격했으나 요성을 함락시키지도 못하고 병사들만 대거 잃게 되었다.

그러자 노중련(魯仲連)이 다음과 같은 글을 써 화살 끝에 맨 뒤 성안에 있는 연나라 장수에게 쏘아 보냈다.
“내가 듣건대 ‘ 지혜로운 자는 때를 어겨 이익을 놓치는 일이 없고, 용사(勇士)는 죽음을 두려워하여

명예를 훼손하는 일이 없고, 충신(忠臣)은 자신을 앞세워 군왕을 뒤로 미루는 일이 없다’고 했소.

지금 공은 일시적인 분을 못이겨 연왕이 신하를 잃는 것을 생각지 않고 있는 것은 비충(非忠)이오.

몸을 죽여가며 요성을 공략해 놓고도 위세가 제나라에서 미치지 못하는 것은 비용(非勇)이오.

공적은 사라지고 명예는 무너져 후세에 칭송받지 못하는 것은 비지(非知)요.

그래서 지혜로운 자는 계획을 다시 짜지 않고, 용사는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 법이오.

지금 공의 죽음과 삶, 영화와 치욕, 높음과 낮음, 귀함과 천함은 한순간에 불과한 것이니,

원컨대 공은 잘 생각해 속인과 같은 선택을 하지 않기 바라오.

 

且楚攻南陽,魏攻平陸,齊無南面之心,以為亡南陽之害,不若得濟北之利,故定計而堅守之.
今秦人下兵,魏不敢東面,橫秦之勢合,則楚國之形危. 且棄南陽,斷右壤,存濟北,計必為之.
今楚、魏交退,燕救不至,齊無天下之規,與聊城共據期年之弊,即臣見公之不能得也.

齊必決之於聊城,公無再計. 彼燕國大亂,君臣過計,上下迷惑,栗腹以百萬之眾,五折於外,

萬乘之國,被圍於趙,壤削主困,為天下戮,公聞之乎?

[지금 초나라가 남양을 공격하고 위나라가 평륙(平陸)을 공격하고 있지만 우리 제나라는 남쪽을 돌아볼 생각이 없소.

이는 남양을 잃는 손해는 제북(濟北: ‘요성’)을 얻는 이익에 미치지 못한다고 보기 때문이오.

그래서 제북을 취한다는 계책을 정해 놓고 굳건히 제북을 지키며 초, 위 두 나라와 싸우지 않는 것이오.

지금 진나라가 우리를 돕기 위해 원군을 보내려 하자 위나라는 감히 동쪽으로 향하지 못하고 있소.

진, 제 두 나라가 연횡하여 합세하면 초나라의 형세가 위태롭게 될 것이오. 제나라는 남양과 평륙을 포기하고

요성을 지키는데 전념할 생각으로 반드시 이를 실행할 것이오. 지금 진나라가 제나라를 돕자 초, 위 두 나라가

차례로 물러나고, 연나라에서는 구원병을 보내지 않고 있으니 천하에 제나라를 도모할 나라는 없소.

이같은 상황에서 요성을 놓고 양측이 1년이 넘도록 공수(攻守)하느라 크게 지쳐 있으나

내가 보기에 공은 끝내 제나라를 이기지 못할 것이오. 제나라는 반드시 요성에서 승부를 내려고 하고 있으니

공은 더 이상 결단을 미뤄서는 안될 것이오. 연나라는 지금 대란이 일어나 군신의 실책으로 상하가 모두

미혹되어 있소. 승상 율복(栗腹)이 십만 대군을 이끌고 가 국외에서 싸웠으나 5번이나 패했소.

만승지국(萬乘之國)이 조나라에게 포위되어 국토는 깎이고 군주는 곤경에 처하게 되자

이로써 천하 제후들로부터 모욕을 당하고 있는 것이오. 공도 이 얘기를 듣지 않았소?

 

今燕王方寒心獨立, 大臣不足恃, 國弊禍多, 民心無所歸.  今公又以弊聊之民, 距全齊之兵,

期年不解, 是墨翟之守也;食人炊骨, 士無反北之心, 是孫臏、吳起之兵也.
能以見於天下矣!故為公計者,不如罷兵休士,全車甲,歸報燕王,燕王必喜.    

士民見公,如見父母,交游攘臂而議於世,功業可明矣. 上輔孤主,以制群臣;

下養百姓,以資說士.  矯國革俗於天下,功名可立也。意者,亦捐燕棄世,東游於齊乎?
請裂地定封,富比陶、衛,世世稱孤寡,與齊久存,此亦一計也.

二者顯名厚實也,願公熟計而審處一也.

[지금의 연왕(燕王: 연효왕의 아들 喜)은 두려움 속에 고립되어 있소. 대신들조차 믿을 수 없고,

나라는 피폐해 화란이 그치지 않고, 민심은 갈피를 잡지 못하고 있소. 그런데 공은 또 요성의 피폐한 백성들을

제나라를 막는 군사로 이용해 1년이 넘도록 대치를 풀지 않고 있으니 이는 실로 묵적(墨翟: 묵자)의 수비 방책이오.

사람이 사람을 잡아먹고 인골을 땔감으로 쓰고 있는데도 병사들이 배반할 생각을 하지 못하고 있으니

이는 실로 손빈(孫臏)과 오기(吳起)의 병법이오. 이로써 공의 재능을 이미 천하에 분명히 드러냈소.

공을 위한 계책으로는 이제 지친 군사를 쉬게 하고 병거와 갑옷을 온전히 정비하여 연왕에게 돌아가 복명하느니만

못하오. 그리 하면 연왕은 필시 크게 기뻐할 것이고, 선비와 백성들은 그대를 마치 부모를 보듯 우러러볼 것이고,

친구들은 소매를 걷어올린 채 당신의 공을 세상에 자랑하고 다닐 것이오. 이로써 공의 공적이 뚜렷이 드러날 것이오. 위로는 외로운 군주를 보좌해 군신들을 견제하고, 아래로는 백성을 어루만지고 세객을 돕도록 하시오.

연후에 국정을 바로잡아 풍속을 혁신하면, 천하에 그 공명을 세우게 될 것이오.
혹자는 그대에게 연나라를 버리고 세상의 비난을 아랑곳하지 말고 동으로 제나라에 빌붙으라고 권하지 않았소?

나는 장차 당신을 위해 땅을 떼어 봉하도록 제왕에게 청할 생각이오. 그리 되면 그대의 부는 도(陶)와 위(衛)에

비할 만하고, 대대로 ‘고(孤)’를 칭하며 제나라와 더불어 장구히 복락을 누릴 것이오.

이것도 하나의 계책이 될 것이오.이 두 가지 방안은 모두 이름을 드러내고 실리가 많은 것이니

원컨대 공은 잘 생각하여 두 가지 방안 중 하나를 택하기 바라오.


且吾聞,傚小節者不能行大威,惡小恥者不能立榮名. 昔管仲射桓公中鉤,篡也;

遺公子糾而不能死,怯也; 束縛桎桔,辱身也. 此三行者,鄉里不通也,世主不臣也. 

使管仲終窮抑,幽囚而不出,慚恥而不見,窮年沒壽,不免為辱人賤行矣.
然而管子并三行之過,據齊國之政,一匡天下,九合諸侯,為五伯首,名高天下,光照鄰國.

曹沫為魯君將,三戰三北,而喪地千里. 使曹子之足不離陳,計不顧後,出必死而不生,

則不免為敗軍禽將.  曹子以敗軍禽將,非勇也;功廢名滅,後世無稱,非知也.

故去三北之恥,退而與魯君計也,曹子以為遭.

[또 내가 듣건대 ‘소절(小節)을 본받는 자는 대위(大威)를 행할 수 없고, 소치(小恥)를 미워하는 자는 영명(榮名)을

세울 수 없다’고 했소. 옛날 관중이 제환공의 허리띠 고리를 쏜 것은 찬탈이고, 모시던 공자 규(糾)를 남겨두고

함께 죽지 않은 것은 비겁이고, 사로잡혀 질곡(桎梏)에 묶인 것은 일신의 치욕이었소.

이 3가지 행실은 시골 사람에게도 통하지 않을 행실로 세상의 그 어떤 군주도 이같은 자를 신하로 삼고 싶어 하지

않을 것이오. 만일 관중을 평생 곤궁한 처지의 수금(囚禁) 상태에서 빠져나오지 못하게 하고, 수치스런 행동을 이유로

사람도 만나지 못하게 했다면 그는 목숨이 다하도록 사람들의 멸시를 받을 만한 비천한 행동을 했다는 비난을 면치

못했을 것이오. 그러나 관중은 비록 3가지 잘못을 저질렀지만 제나라의 정권을 장악하자, 환공을 도와서 천하를

하나로 바로잡으며 제후를 아홉 번이나 합하여 제환공으로 하여금 오패(五伯)의 우두머리가 되게 만들었소.

이에 그 이름을 천하에 떨치고 이웃 나라에 그 공업을 이룬 휘황한 빛을 비추었던 것이오.

조말(曹沫)은 노군(魯君: 노장공)의 장수가 되어 제나라와 3번 싸워 3번 모두 패해 결국 땅 1천 리를 잃게 되었소.

만일 조말로 하여금 전장에서 발을 빼지 못하고, 훗날의 계책도 세우지 못한 채 죽기를 각오하고 싸우게만 했다면

끝내 패배하여 포로가 된 장수라는 이름을 면할 길이 없었을 것이오. 그러나 조말은 패배하여 포로가 되는 것은

용기가 아니고, 공적이 헛되이 되고 명성이 소멸돼 후세에 칭송을 받지 못하는 것은 지혜가 아니라고 여겼소.

이에 연패의 수치를 떨치고 한발 물러나 노군과 대책을 강구했던 것이오. 그는 이때 시기가 중요하다고 생각했소.

 

 

齊桓公有天下,朝諸侯. 曹子以一劍之任,劫桓公於壇位之上,顏色不變,而辭氣不悖.
三戰之所喪,一朝而反之,天下震動驚駭,威信吳、楚,傳名後世. 若此二公者,非不能行小節,

死小恥也,以為殺身絕世,功名不立,非知也. 故去忿恚之心,而成終身之名;除感忿之恥,

而立累世之功.  故業與三王爭流,名與天壤相敝也. 公其圖之!」
燕將曰:「敬聞命矣!」因罷兵到讀而去. 故解齊國之圍,救百姓之死,仲連之說也.

[마침 제환공이 이미 천하를 제압하고 제후들의 조회를 받고 있었는데 조말은 보검 한 자루에 의지해

단숨에 단상으로 뛰어 올라가 제환공을 위협했소. 이때 그는 안색 하나 변치 않고 말 한마디 흐트러지지 않았소.

이에 그가 3패하여 잃은 땅을 하루 아침에 되찾자 천하가 진동하고 제후들이 경악했소.

그의 위신(威信)이 멀리 오나라 및 초나라까지 뻗치고 그 명성이 후세까지 전해진 것은 바로 이 때문이었소.
관중과 조말 두 사람은 소절이나 소치에 죽고 싶은 생각이 없었던 것은 아니나

살신절세(殺身絶世: 몸을 죽여 세상을 하직함)하여 공명을 세우지 못하는 것은 지혜롭지 못하다고 여겼던 것이오.

이에 두 사람은 분에지심(忿恚之心: 원통한 마음)을 버리고 종신지명(終身之名: 평생에 남을 만한 명성)을 성취하고, 감홀지치(感忽之恥: 순간의 수치)를 잊고 누세지공(累世之功: 대대로 칭송받을 공적)을 세운 것이오.

이로써 두 사람의 공업은 3왕(三王)과 고하를 다투며 유전(流傳)되고 그 명성은 천지와 더불어 공존케 된 것이오.

원컨대 공은 깊이 고려키 바라오.”라고 하였다.
이에 연나라 장수가 말하기를 : “공경히 명을 따르도록 하겠습니다.”라고 하고는, 군사를 파한 뒤 철군하였다.

그러므로 제나라가 포위를 풀고 백성을 죽음에서 구한 것은 바로 노중련(魯仲連)의 유세 덕분이었다.]


燕攻齊,齊破. 閔王奔莒,淖齒殺閔王. 田單守即墨之城,破燕兵,復齊墟. 襄王為太子徵. 

齊以破燕,田單之立疑,齊國之眾,皆以田單為自立也. 襄王立,田單相之. 

過菑水,有老人涉菑而寒,出不能行,坐於沙中. 田單見其寒,欲使後車分衣,無可以分者,

單解裘而衣之.  襄王惡之,曰:「田單之施,將欲以取我國乎?不早圖,恐後之.」

左右顧無人,巖下有貫珠者,襄王呼而問之曰:「女聞吾言乎?」對曰:「聞之.」

王曰:「女以為何若?」 對曰:「王不如因以為己善。王嘉單之善,下令曰:『寡人憂民之饑也,單收而食之;寡人憂民之寒也,單解裘而衣之; 寡人憂勞百姓,而單亦憂之,稱寡人之意.』

單有是善而王嘉之,善單之善,亦王之善已」王曰:「善!」乃賜單牛酒,嘉其行.

後數日,貫珠者復見王曰:「王至朝日,宜召田單而揖之於庭,口勞之.

乃布令求百姓之「饑寒者,收穀之.」
乃使人聽於閭里,聞丈夫之相□與語,擧曰:「田單之愛人!嗟,乃王之教澤也!」

[주난왕 31년(기원전 284), 연나라가 제나라를 공격해 일거에 제나라를 깨뜨리자 제민왕이 거(莒)로 달아났다가

구원 차 온 초나라 장수 요치(淖齒)에게 죽임을 당했다. 이때 전단(田單)이 즉묵의 성을 굳게 지킨 뒤 연나라 군사를

연이어 격파하고 마침내 도읍 임치를 수복했다. 당시 제양왕은 태자로 있었는데 신분을 감추고 숨어 있었다.

제나라 사람들은 전단이 이끄는 제나라 군사가 연나라 군사를 격파하자, 전단이 자립해 보위에 오르는 것이 아닌가

의심했다. 그러나 결국 제양왕이 서고 전단이 상국이 되었다. 어느날 전단이 치수(菑水: 淄水)를 지나면서

한 노인이 물을 건너고는 추위를 이기지 못해 벌벌 떨며 걷지 못하고 백사장 위에 앉아 있는 것을 보게 되었다.

전단은 그가 추워하는 모습을 보고는 뒤따르는 수레에서 옷을 나눠 주려 했으나 나눠 줄 것이 없어 자신의 갖옷을

벗어 입혀 주었다. 이 얘기를 들은 제양왕이 이를 시기하여 말하기를 : “전단이 인심을 베푸는 것은 과인의 나라를

취하려는 것이 아니겠는가. 속히 도모치 않으면 그에게 선수를 빼앗길까 염려된다.”라고 하였다.
제양왕이 말을 마치고 좌우를 둘러보았지만 들은 사람이 없는 듯했다.

그런데 암하(巖下: 제왕의 전당 아래에 있는 小屋의 위를 巖廊, 아래를 巖下로 칭했음)에서 구슬을 꿰는 자가 있었다.

이에 제양왕이 그를 불러 묻기를 : “그대는 과인의 말을 들었소 ?”라고 하자,  그는 “들었습니다.”라고 하였다.
제양왕이 묻기를 : “그대는 어찌 생각하오?”라고 하자,  “대왕은 그의 선행을 자신의 것으로 만드느니만 못합니다.”   제양왕이 묻기를 : “어찌해야 그리 될 수 있소?”라고 하자,

그 자가 말하기를 : “대왕은 전단의 선행을 칭찬하며 하명하기를, ‘과인이 일찍이 백성들이 굶주릴까 걱정하자

전단이 굶는 백성을 거두어 먹여주고, 과인이 일찍이 백성들이 추워할까 걱정하자 전단이 갖옷을 벗어 입혀 주었다.

과인이 백성들의 노고를 근심하면 전단 또한 근심하니, 이는 과인의 뜻에 부합한다’고 하십시오.

전단이 선행을 하면 대왕은 이를 칭찬하는 것입니다. 그리 하면 전단의 선행을 칭찬하는 것이 곧 대왕이 선행을

하는 셈이 됩니다.”라고 하였다.  제양왕이 말하기를 : “옳은 말이오.”라고 하였다.
이에 전단에게 소를 잡고 술을 내려 그 선행을 칭찬해 주었다. 며칠 후 구슬을 꿰는 자가 다시 제양왕을 배견하며

말하기를 : “대왕께서는 조회하는 날에 전단을 불러 뜰에서 읍하여 맞이하면서 노고를 치하토록 하십시오.”하였다.

제양왕이 곧 기한(飢寒)으로 고생하는 백성들을 찾는다는 영을 내려 이들을 거두어 부양한 뒤 사람을 풀어

항간의 소문을 탐지하게 했다. 그러자 장부(丈夫: 원래는 20세 이상의 남자를 뜻하나 여기서는 군중을 의미)들이

서로 모여 이구동성으로 이같이 하는 말이 들렸다.
“허, 전단이 사람들에게 덕을 베푼 것이 모두 대왕이 교도(敎導)한 결과라지 않소!”라고 하였다.]


貂勃常惡田單,曰:「安平君,小人也.」安平君聞之,故為酒而召貂勃,

曰:「單何以得罪於先生,故常見譽於朝?」
貂勃曰:「跖之狗吠堯,非貴跖而賤堯也,狗固吠非其主也. 且今使公孫子賢,而徐子不肖. 

然而使公孫子與徐子鬥,徐子之狗,猶時攫公孫子之腓而噬之也.
若乃得去不肖者, 而為賢者狗, 豈特攫其腓而噬之耳哉?」安平君曰:「敬聞命.」明日,任之於王.

王有所幸臣九人之屬,欲傷安平君,相與語於王曰:「燕之伐齊之時,楚王使將軍將萬人而佐齊. 

今國已定,而社稷已安矣,何不使使者謝於楚王?」
王曰:「左右孰可?」九人之屬曰:「貂勃可.」貂勃使楚.

[제나라 사람 초발(貂勃)이 늘 전단(田單)을 미워하여 말하기를 : “안평군(安平君: 전단)은 소인배다.”라고 하였다.
안평군이 이 말을 듣고 특별히 연석을 마련한 뒤 초발을 초청해 놓고는 묻기를 :
“제가 선생에게 무슨 죄를 지었기에 왜 항상 조정에서 그대의 칭찬을 듣는지요.”라고 하자,
초발이 대답하기를 : “도척(盜跖)이 기르는 개가 요임금을 보고 짖는 것은 도척을 귀히 여기고 요임금을 천하게

여겨 그런 것이 아닙니다. 개는 본래 주인이 아니면 짖기 마련입니다. 지금 여기에 와 있는 공손자(公孫子)는 어질고

서자(徐子)는 불초하다고 가정해 봅시다. 두 사람이 싸움을 하게 되면 서자가 기르는 개는 때를 보아 공손자의

장딴지를 물어 뜯을 것입니다. 만일 개가 나쁜 주인을 버리고 어진 주인을 찾아 섬길 줄 안다면

어찌 공손자의 장딴지를 물어 뜯겠습니까.”라고 하였다.
안평군이 말하기를 : “ 공경히 잘 들었습니다.”라고 하였다.
이튿날 전단이 즉시 초발을 제왕(齊王: 제양왕)에게 천거해 관직을 맡게 했다.

당시 제양왕에게는 9명의 총신이 있었는데 이들은 전단을 중상할 생각으로 입을 모아 이같이 참소했다.
“연나라가 우리 제나라에 쳐들어왔을 때 초왕이 장군 요치(淖齒)를 시켜 군사 1만명을 이끌고 가서 우리 제나라를

돕게 했습니다. 지금 나라가 이미 안정되고 사직 또한 편안한데 어찌하여 사자를 초왕에게 보내 감사를 표하지

않는 것입니까?”라고 하자. 왕이 말하기를 : “ 근신들 중 누가 가는게 좋겠소.”라고 하였다.
그러자 9명의 총신이 이구동성으로 말하기를 : “초발이 적임자입니다.” 이에 초발이 초나라에 사자로 가게 되었다.]

 

楚王受而觴之, 數日不反. 九人之屬相與語於王曰:「夫一人身, 而牽留萬乘者,豈不以據勢也哉?

且安平君之與王也,君臣無禮,而上下無別. 且其志欲為不善. 內牧百姓,循撫其心,振窮補不足,

布德於民;外懷戎翟、天下之賢士,陰結諸侯之雄俊豪英. 其志欲有為也. 願王之察之.」
異日,而王曰:「召相單來.」田單免冠徒跣肉袒而進,退而請死罪.

五日,而王曰:「子無罪於寡人,子為子之臣禮,吾為吾之王禮而已矣.」

[그러자 초왕(경양왕)이 제나라의 사의(謝意)를 받아들인 뒤 주연을 베풀어 초발을 환대했다.

이에 초발이 여러 날이 지나도록 돌아오지 않았다. 이를 구실로 9명의 총신이 제양왕에게 고하기를 :
“무릇 일 개인에 불과한 초발이 만승(萬乘: 초경양왕을 지칭)의 환대를 받아 오랫동안 머물고 있으니 이 어찌 그가

안평군의 위세를 믿고 그런 것이 아니겠습니까. 안평군은 군신간의 예를 지키지 않아 상하의 분별이 없는 자입니다.

그는 장차 모반을 행하려 하고 있습니다. 안으로 백성들을 끌어 모아 위무하기 위해 빈궁한 백성들을 구제하는 은덕을 베풀고, 밖으로 융적 및 천하의 현사들에게 회유책을 쓰면서 은밀히 제후들 중 영웅호걸들과 친교를 맺고 있습니다. 이는 뜻하는 바가 있어 속셈을 숨기고 있는 것이니 원컨대 대왕은 잘 살피기 바랍니다.”라고 하였다.
어느날 제양왕이 하명하기를 : “ 상국 단(單)을 불러오도록 하라.”라고 하였다. 이에 전단이 관도 쓰지 못한 채

도선육단(徒跣肉袒: 맨발에 옷을 입지 못하고 맨몸을 드러냄)하여 등대(等待)한 뒤 물러나면서 사죄를 자청했다.

이같이 하기를 5일 동안 계속하자, 제양왕이 말하기를 : “그대는 과인에게 아무런 죄가 없소. 그대는 신례(臣禮)를

다하면 되고, 나는 나대로 왕례(王禮)를 다하면 그뿐이오.”라고 하였다.]


貂勃從楚來,王賜諸前,酒酣,王曰:「召相田單而來.」

貂勃避席稽首曰:「王惡得此亡國之言乎?王上者孰與周文王?」王曰:「吾不若也.」

貂勃曰;「然,臣固知王不若也. 下者孰與齊桓公?」王曰:「吾不若也.」

[초발이 초나라에서 돌아오자 제양왕이 그를 위해 주연을 베풀었다. 주흥이 한창 오를 때 제양왕이 이같이 소리쳤다.
“당장 상국 전단(田單)을 불러오도록 하라.”라고 하자.
그러자 초발이 즉시 자리를 피한 뒤 계수(稽首: 무릎을 꿇고 머리를 땅에 대어 절을 함)하며 묻기를 : “대왕은 어찌

이처럼 나라를 망칠 말씀을 하십니까? 대왕은 옛날의 주문왕과 비교해 스스로 어떻다고 생각합니까.”라고 하자,
왕이 대답하기를 : " 내가 그만 못하오.”라고 하였다.
초발이 또 묻기를 : “ 그렇습니다. 저 역시 대왕이 본래 그만 못한 줄 알고 있습니다.

그러면 가까운 옛날의 제환공과 비교해 스스로 어떻다고 생각합니까.”라고 하자,
왕이 대답하기를 : " 내가 그만 못하오.”라고 하였다.]

 

貂勃曰:「然,臣固知王不若也. 然則周文王得呂尚以為太公,齊桓公得管夷吾以為仲父,

今王得安平君而獨曰『單』. 且自天地之闢,民人之治,為人臣之功者,誰有厚於安平君者哉?

而王曰『單,單』. 惡得此亡國之言乎? 且王不能守先王之社稷, 燕人興師而襲齊墟,

王走而之城陽之山中. 安平君以惴惴之即墨, 三里之城, 五里之郭, 敝卒七千, 禽其司馬,

而反千里之齊, 安平君之功也. 當是時也,闔城陽而王,城陽、天下莫之能止. 然而計之於道,

歸之於義,以為不可,故為棧道木閣,而迎王與后於城陽山中,王乃得反,子臨百姓.

今國已定,民已安矣,王乃曰『單』. 且嬰兒之計不為此. 

王不亟殺此九子者以謝安平君,不然,國危矣!」王乃殺九子而逐其家,益封安平君以夜邑萬戶.

[그러자 초발이 말하기를 : “그렇습니다. 저 또한 대왕이 본래 그만 못한 줄 알고 있습니다. 주문왕은 여상(呂尙)을

만나자 그를 높여 태공(太公)으로 삼았고, 제환공은 관중(管仲)을 만나자 그를 높여 중보(仲父)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지금 대왕께서는 안평군을 얻고서도 어찌하여 그를 단(單)이라 부르는 것입니까.

천지가 개벽하여 사람이 생겨난 이래 그 누가 인신(人臣)으로서 안평군보다 큰 공을 세운 적이 있습니까.

그런데도 대왕께서는 그를 단(單)이라고 부르니 어찌하여 이같이 망국의 말을 마구 하는 것입니까.

게다가 대왕께서는 선왕의 사직을 지켜내지 못하고 연나라가 군사를 일으켜 지금은 폐허가 된 제나라의 도읍으로

쳐들어 오자 성양(城陽: 산동성 거현)의 산 속으로 도망치고 말았습니다. 그때 안평군은 노심초사하며 즉묵에서

겨우 사방 3리의 내성(內城)과 5리의 외곽를 거점으로 삼아 패잔병 7천 명을 모은 뒤 연나라의 사마 기겁(騎劫)을

사로잡고 1천 리 강토를 되찾았습니다. 이 모두가 안평군의 공로입니다. 당시 안평군이 만일 대왕께서 머물던

성양을 포위하고 스스로 왕이 되려 했다면 천하의 그 누구도 이를 막지 못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는 도리에 맞게 계책을 세우면서 의리에 입각해 그와 같은 일은 옳지 않다고 여겼던 것입니다.

그러기에 산 속 험준한 곳에 잔도(棧道)와 목각(木閣)을 놓아 통행로를 만든 뒤 성양의 산 속으로 들어가

대왕과 왕후를 맞이했던 것입니다. 이에 대왕이 도읍으로 돌아와 백성들을 친애하며 다스릴 수 있게 된 것입니다.

지금 나라가 이미 안정되고 백성들이 평안을 얻자 대왕은 이내 그를 단(單)이라고 부르니 사실 어린애조차도

이같이 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대왕은 속히 9명의 총신을 죽여 이로써 안평군에게 사죄토록 하십시오. 그렇지 않으면

나라가 위태로워질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제양왕이 이내 9명의 총신을 죽이고 그 일족을 내쫓아 버렸다.

그리고는 안평군에게 액읍(夜邑: 산동성 액현) 1만 호(戶)를 봉지로 더해주었다.]

 

田單將攻狄,往見魯仲子. 仲子曰:「將軍攻狄,不能下也.」

田單曰:「臣以五里之城,七里之郭,破亡餘卒,破萬乘之燕,復齊墟. 攻狄而不下,何也?」
上車弗謝而去. 遂攻狄,三月而不克之也. 齊嬰兒謠曰:「大冠若箕,脩劍拄頤,攻狄不能,

下壘枯丘.」 田單乃懼,問魯仲子曰:「先生謂單不能下狄,請聞其說.」
魯仲子曰:「將軍之在即墨,坐而織蕢,立則丈插,為士卒倡曰:『可往矣!宗廟亡矣!

云曰尚矣! 歸於何黨矣!』當此之時,將軍有死之心,而士卒無生之氣,聞若言,

莫不揮泣奮臂而欲戰,此所以破燕也.  當今將軍東有夜邑之奉,西有菑上之虞,黃金橫帶,

而馳乎淄·澠之間,有生之樂,無死之心,所以不勝者也.」

田單曰:「單有心,先生志之矣.」明日,乃厲氣循城,立於矢石之所,乃援枹鼓之,狄人乃下.

[전단(田單)이 장차 적인(狄人)을 치기 위해 먼저 노중자(魯仲子: 노중련)를 찾아가 만났다.

이에 노중자가 말하기를 : “ 장군은 적인을 공격해도 이기지 못할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그러자 전단이 묻기를 : “나는 5 리의 내성과 7 리의 외곽을 기반으로 패잔병을 수습해 끝내 만승의 연나라를

격파하고 폐허가 된 도읍을 수복했소. 그런데도 적인을 공략할 수 없다고 하니 이는 무슨 연고요?”라고 하며,
수레에 올라 작별인사도 없이 떠났다. 그러나 과연 적인을 공격했지만 3달이 지나도록 공략치 못했다.

그러자 이때 제나라 어린아이들이 이같은 동요를 불렀다." 큰 모자는 마치 키(箕) 같고 긴 칼로 턱만 받치고 있네,

적인(狄人)을 공격해 이기지도 못하고 보루에 쌓인 해골은 언덕을 이루었네. "
이에 전단이 두려움을 느낀 나머지 노중자를 찾아가 묻기를 :
“선생이 지난번에 내가 적인을 공략치 못할 것이라고 했는데 청컨대 그 이유를 들려주기 바라오.”라고 하자,
노중자가 대답하기를 : “ 장군이 즉묵에 있을 때만 하더라도 앉으면 삼태기를 만들고 서면 삽을 지팡이로 삼았습니다.

그리고는 병사들에게 외치기를, ‘장차 어디로 갈 것인가. 나라가 장차 망하려 하자 혼백도 몸에서 떠나버리고

돌아갈 집조차 사라졌다’라고 했습니다. 이때 장군은 죽을 각오가 되어 있었고, 병사들 역시 살아 남겠다는 생각을

하지 않았고, 이 말을 들은 사람치고 눈물을 흘리고 팔을 휘두르며 싸우려 하지 않은 자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연나라를 공파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지금 장군은 동쪽으로 액읍(夜邑)의 공봉(供奉)이 있고,

바로 서쪽으로 치수(菑水)를 굽어보는 즐거움이 있고, 허리에 보검을 차고 치수와 민수(澠水) 사이를 쏜살같이

달릴 수 있고, 그저 살아 있는 즐거움만 있을 뿐 죽을 마음이 없습니다. 그래서 이기지 못한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그러자 전단이 말하기를 : “나는 오늘 죽을 결심을 하게 되었소. 선생은 한번 지켜보도록 하시오.”라고 하였다.
이튿날 전단이 장병들의 사기를 고무시키고 성곽을 순시한 뒤 곧바로 화살과 돌이 날아오는 위험하기

짝이 없는 곳에 우뚝 서서 친히 북채를 잡고 북을 치며 진공을 독려했다. 이에 적인을 대파하게 되었다.]


濮上之事,贅子死,章子走,盼子謂齊王曰:「不如易餘糧於宋,宋王必說,梁氏不敢過宋伐齊. 

齊固弱,是以餘糧收宋也.  齊國復強,雖復責之宋,可;不償,因以為辭而攻之,亦可.」

齊閔王之遇殺,其子法章變姓名,為莒太史家庸夫. 太史敫女,奇法章之狀貌,以為非常人,

憐而常竊衣食之,與私焉。莒中及齊亡臣相聚,求閔王子,欲立之. 法章乃自言於莒. 

共立法章為襄王. 襄王立,以太史氏女為王后,生子建.

[주난왕 3년(기원전 312), 제나라가 위나라와 복상(濮上: 복수의 위쪽)에서 싸움을 벌였다.

이때 제나라의 췌자(贅子: 「사기」의 聲子)가 죽고 장자(章子: 匡章)는 도망치고 말았다.

이에 반자(盼子: 田盼)가 제선왕에게 말하기를 : “남은 군량을 송나라에 옮겨 놓느니만 못합니다.

송왕(偃)은 이를 보고 기뻐할 것이고 위나라는 감히 송나라 땅을 건너 뛰어 우리 제나라를 치지는 못할 것입니다.

지금 제나라가 실로 약하기 때문에 나머지 군량으로 잠시 송나라의 비위를 맞추는 것이니 제나라가 다시 강해지면

그때 송나라로부터 다시 찾아와도 무방할 것입니다. 만일 송나라가 이를 되돌려 주지 않으면 이를 구실로

송나라를 치는 것 또한 가할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제민왕이 살해되자 그의 아들 법장이 변성명을 하고 거 땅에 사는 태사 교의 용부(庸夫:머슴)가 되었다.

태사 교의 딸은 법장의 상모(狀貌)를 보고 범상치 않은 인물로 여겨 불쌍히 여기면서 늘 몰래 음식과 의복 등을

챙겨주다가 마침내 사통하게 되었다. 얼마 후 거 땅의 여러 사람들과 제나라의 망명한 신하들이 서로 모여

제민왕의 아들을 찾아 옹립하고자 했다. 이때 법장이 거 땅에 있음을 밝히자, 모두 그를 옹립해 제양왕으로 삼았다.

제양왕은 보위에 오르자 태사교의 딸을 왕후로 맞아들여 아들 건(建)을 낳았다.]


太史敫曰:「女無謀而嫁者,非吾種也,汙吾世矣.」終身不睹. 君王后賢,不以不睹之故,

失人子之禮也.  襄王卒,子建立為齊王. 君王后事秦謹,與諸侯信,以故建立四十有餘年不受兵.

秦始皇嘗使使者遺君王后玉連環,曰:「齊多知,而解此環不?」君王后以示群臣,群臣不知解.
君王后引椎椎破之,謝秦使曰:「謹以解矣.」及君王后病且卒,誡建曰:「群臣之可用者某」

建曰:「請書之.」君王后曰:「善.」取筆牘受言.  君王后曰:「老婦已亡矣!」 

君王后死,後后勝相齊,多受秦間金玉,使賓客入秦,皆為變辭,勸王朝秦,不脩攻戰之備.

[그러자 태사교가 말하기를 : “여인이 중매도 없이 시집갔으니 우리 가문 출신이 아니다.

나의 체면을 손상시키고 말았다.”라고 하며, 종신토록 보지 않았다. 그러나 군왕후(태사교의 딸)는 어진 인물이어서

부친이 자신을 보지 않는다는 이유로 자식으로서의 예를 잃는 일을 하지 않았다. 제양왕이 죽자,

아들 건이 제왕이 되었다. 그러자 군왕후는 정성스럽게 진나라를 섬기며 다른 제후들에게도 성심을 다했다.

이에 제왕 건은 보위에 오른지 40여년이 지나도록 병화(兵禍)를 전혀 입지 않았다.
하루는 진소양왕이 사자를 시켜 군왕후에게 옥련환(玉連環: 오직 한가지 방법만으로 풀 수 있게 얽혀 있는 고리)을

증정하면서 말하게 하기를 : “제나라에는 총명한 사람이 많다고 하니 이 지혜의 고리를 풀 수 있는지 모르겠소.”
군왕후가 옥련환을 군신들에게 보여주었지만 군신들 중 그 누구도 이를 풀지 못했다.

그러자 군왕후가 망치로 이를 부수고는 진나라의 사자에게 말하기를 : “삼가 풀어냈소.”라고 하였다.
군왕후는 임종에 즈음해 제왕 건에게 말하기를 : “군신들 중 신임해도 좋은 사람은 누구 누구이다.”라고 하자,
이에 제왕 건이 황급히 대답하기를 : “청컨대 그 이름을 글로 적어 놓겠습니다.”라고 하였다.
군왕후가 말하기를 : “좋도록 하라.”라고 하였다. 제왕 건이 붓과 목간(木簡)을 들고 받아 적으려 하자,

군왕후가 다시 말하기를 : “이 늙은이가 이미 다 잊어버렸다.”라고 하며, 누구 누구의 이름을 다시 말하지 않았다.

군왕후가 죽자 후승(后勝)이 제나라의 상국이 되었다. 그러나 후승은 진나라의 첩자로부터 많은 금옥을 뇌물로 받고

빈객들을 진나라로 들여보냈다. 이들 빈객들이 돌아와 모두 진나라에 유리하도록 제왕 건에게

진나라에 조현(朝見)할 것을 권했다. 이에 제나라는 전비(戰備)를 소홀히 하게 되었다.]


齊王建入朝於秦,雍門司馬前曰:「所為立王者,為社稷耶?為王立王耶?」王曰:「為社稷.」
司馬曰:「為社稷主王,王何以去社稷而入秦?」齊王還車而反.

即墨大夫與雍門司馬諫而聽之,則以為可可為謀,即入見齊王曰:「齊地方數千里,帶甲數百萬.

夫三晉大夫,皆不便秦,而在阿、鄄之間者百數,王收而與之百萬之眾,使收三晉之故地,

即臨晉之關可以入矣;鄢、郢大夫,不欲為秦,而在城南下者百數,王收而與之百萬之師,

使收楚故地,即武關可以入矣.  如此,則齊威可立,秦國可亡. 夫舍南面之稱制,乃西面而事秦,

為大王不取也.」齊王不聽.

[진시황 26년(기원전 221), 제왕 건(建)이 진나라에 입조하려 하자, 옹문(雍門: 임치성의 서문)을 지키는

사마가 창을 옆에 끼고 말을 탄 채 앞으로 나서며 묻기를 : “나라에 왕을 세우는 것은 사직을 위한 것입니까,

아니면 왕을 위한 것입니까.”라고 하자,  제왕 건이 말하기를 : “사직을 위한 것이오.”라고 하였다.
사마가 묻기를 : “사직을 위해 왕을 세웠는데 대왕은 어찌하여 사직을 버리고 진나라로 들어가려는 것입니까.”
이에 제왕 건이 수레를 돌려 돌아오고 말았다. 이때 즉묵의 대부는 제왕 건이 옹문 사마의 간언을 들어주었다는

말을 듣고 제왕 건과 함께 계책을 세울 만하다고 생각해 이내 궁궐로 들어가 제왕 건을 배견하며 말하기를 :
“제나라는 영토가 사방 수천 리나 되고 무장한 군사도 수백 만 명이나 됩니다.

무릇 지금 3진의 대부들 모두 진나라를 위해 이익을 도모하기를 원하지 않습니다.

이에 우리의 아(阿), 견(鄄) 땅에서 수백 명의 대부들이 우리의 태도를 지켜보며 기다리고 있습니다.

대왕이 이들을 수습해 백만 대군과 결합하면 3진의 옛 영토를 수복하게 할 수 있는 것은 물론

진나라의 임진관(臨晉關)까지 거둬들이게 할 수 있습니다. 또 언영(鄢ㆍ郢)의 대부들 중 진나라 사람이 되기 싫다며

남성(南城) 아래로 망명해 온 자가 수백 명이나 됩니다. 대왕이 이들을 수습해 백만 대군과 결합하면

초나라로 하여금 고토를 수복하게 하고 우리 또한 무관(武關: 섬서성 상남현 동남쪽)을 차지할 수 있습니다.

이같이 하면 제나라는 강대한 위세를 떨칠 수 있고 진나라는 망하게 됩니다. 그런데도 대왕은 남면하여

칭제할 수 있는 길을 버리고 도리어 서면(西面)하여 진나라를 섬기겠다고 하니 이는 대왕이 취할 길이 아닙니다.”
라고 하였으나, 제왕 건은 이를 따르지 않았다.]

 

秦使陳馳誘齊王內之,約與五百里之地. 齊王不聽即墨大夫而聽陳馳,遂入秦.

處之共松柏之間,餓而死.  先是齊為之歌曰:「松邪!柏邪!住建共者,客耶!」

齊以淖君之亂秦. 其後秦欲取齊,故使蘇涓之楚,令任固之齊.
齊明謂楚王曰:「秦王欲楚,不若其欲齊之甚也. 其使涓來,以示齊之有楚,以資固於齊.

齊見楚,必受固.  是王之聽涓也,適為固驅以合齊、秦也. 齊、秦合,非楚之利也.

且夫涓來之辭,必非固之所以之齊之辭也.  王不如令人以涓來之辭謾固於齊,齊、秦必不合.

齊、秦不合,則王重矣. 王欲收齊以攻秦,漢中可得也。王即欲以秦攻齊,淮、泗之間亦可得也.」

[이때 진나라가 진치(陳馳)를 사자로 보내 5백 리의 땅을 주겠다는 구실로 제왕 건의 입조를 유인하게 했다.

제왕 건은 끝내 즉묵 대부의 간언을 받아들이지 않고 진치의 말만 믿고 진나라로 들어갔다.

그러자 진나라가 그를 변경인 공성(共城)의 송백나무 숲 속에 연금시켜 이내 아사하게 만들었다.

제왕 건이 아사하기 직전에 제나라에는 다음과 같은 노래가 흘러다니고 있었다.
“소나무야, 잣나무야, 제왕 건을 공성으로 가게 한 사람은 변사(變詐)에 능한 저들 빈객이란다.”

제나라는 요군(淖君: 요치)의 난으로 진나라를 원수처럼 여겼다. 이후 진나라가 제나라와 연합할 생각으로

소연(蘇涓)을 초나라, 임고(任固)를 제나라로 보냈다. 그러자 세객 제명(齊明)이 초경양왕에게 말하기를 :
“ 진왕이 초나라와 연합하고자 하는 것은, 제나라와 연합하고자 하는 것만큼 절박하지 않습니다.

소연을 초나라에 사자로 보낸 것은 제나라에게 진, 초 간의 친선을 드러내 제나라로 간 임고를 돕기 위한 것입니다.

제나라는 초나라가 소연을 받아들이는 것을 보고 필시 임고의 말을 들어줄 것입니다.

대왕이 소연의 말을 들어주면 이는 임고가 제, 진 두 나라의 연합을 조속히 성사시키도록 도와주는 꼴이 됩니다.

제, 진 두 나라가 연합하면 초나라에 하등 이로울 것이 없습니다. 소연이 초나라에 와서 하는 말은 틀림없이

임고가 제나라에서 하는 말과 정반대일 것입니다. 그러니 대왕은 제나라에 사람을 보내 소연이 한 말을 전해 줌으로써

제나라로 하여금 임고의 말을 액면 그대로 받아들이지 못하게 하느니만 못합니다.

그리 되면 제나라는 진나라와 연합하지 않을 것이고, 제, 진 두 나라가 연합하지 않으면 초왕은 중시될 것입니다.

이때 대왕이 제나라를 거두어 진나라를 치면 가히 한중 땅을 얻을 수 있습니다.

만일 대왕이 다시 진나라로 하여금 제나라를 치게 하면 회수와 사수 사이의 땅 까지 얻을 수 있습니다.”라고 하였다.]

 

 

 

 原 文 【 中國哲學書電子化計劃 .   筆寫本 】


           

 

 原 文   飜 譯 者        德庤 / 李   斗 振