戰國策(전국책)

戰 國 策

덕치/이두진 2021. 6. 26. 22:28

 

                                 戰 國 策

 


   【 序文 】

 

《전국책(戰國策)》은 주(周) 정정왕(貞定王) 57년(기원전 454)으로부터 진시황 37년(기원전 210)에 이르기까지
약 240년 동안의 정치, 사회와 책사언행(策士言行)을 기록한 역사책이다.  그 작자는 알 수 없으나,
서주(西周), 동주(東周)를 비롯하여 진(秦), 초(楚), 제(齊), 위(魏), 연(燕), 한(韓), 송(宋), 위(衛), 중산(中山)등의
12국책(十二國策)으로 나누어 모두 33권이다.
책명을 『국책(國策)』, 『국사(國事)』, 『단장(短長)』, 『사어(事語)』, 『장서(長書)』라고 하기도 한다.
중국 전한 시대의 유향(劉向)이 전국시대(기원전 475 ~ 222)의 수많은 제후국 전략가들의 정치, 군사, 외교 등
책략을 모아 집록한 자료를 《전국책》이라 한다. 그러나 초기의 자료는 아주 미흡한 상태여서
북송의 증공(曾鞏)이 분실된 자료를 사대부가(士大夫家)에서 찾아 보정(補訂)하여
동주(東周), 서주(西周), 진(秦), 제(齊), 초(楚), 연(燕), 조(趙), 위(魏), 한(韓), 송(宋), 위(衛), 중산(中山)의
12개국 486장으로 정리하였다.


사마천(史馬遷)의 《사기(史記)》나 《열전(列傳)》 은 《전국책》의 자료를 많이 이용하였기 때문에
전국책의 내용과 동일한 것이 많다.

그러나 초기 《전국책》의 내용이나 문장이 매우 난해하고 거칠고 누락된 부분이 많아
후에 여러 사람이 주를 달아 교주본(校注本)이 나왔다.
동한(東漢)의 고유(高誘), 남송의 요굉(姚宏)이 추가 주를 달아 《고씨주전국책(高氏注戰國策)》이 나왔다.
한편, 같은 시기 포표(鮑彪)가 고유(高誘)의 주를 없애고 스스로 주를 달아 《전국책주(戰國策注)》를 내놓았다.
후에 원대(元代) 오사도(吳師道)가 요굉(姚宏)본과 포표(鮑彪)본을 근거로 《전국책교주(戰國策校注)》를 내놓았다.
그러나 큰 주류는 요굉의 교주본(남송대, 33권, 원본에 가장 가까움)과
포표의 교주본(남송대, 10권, 1147년 완성)이 중심이다.

 

전국책의 저자 논쟁이 있는데, 무명씨설, 유향을 중심으로 여러 사람의 참여설, 종횡가를 배운 사람의 저작 설,
유향(劉向) 일가의 학문설 등으로 아직도 일부 논쟁이 있다.  원작에 주석을 달아 교주본을 낸 사람도 많다.
증공(曾鞏), 요굉(姚宏), 포표(鮑彪), 오사도(吳師道), 홍매(洪邁), 오래(吳萊), 김정위(金正煒) 등 10명에 이른다.

《전국책》의 내용은 왕 중심 이야기가 아니라, 책사(策士), 모사(謀士), 설객(說客)들이
온갖 꾀를 다 부린 이야기가 중심으로 언론(言論)과 사술(詐術)이다.
그리하여 영어로는 Intrigues(음모, 술책)으로 번역되어 있다. 그러나 그 내용은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가 크다.


전국시대에는 이른바 칠웅(七雄)인 진(秦), 초(楚), 연(燕), 제(齊), 조(趙), 위(魏), 한(韓)을 중심으로
그 외에 작은 소제후국들이 많았다. 이들 국가들이 효율적으로 통치하고 군사, 외교를 능률적으로 수행하여
상대국에 승리하고 그리하여 천하를 얻을 심오한 이념과 책략들이 이 책에 다 들어 있다.
또한 섭정(聶政), 손빈(孫臏), 상앙(喪鞅), 소진(蘇秦), 맹상군(孟嘗君), 맹자(孟子), 여불위(呂不韋), 형가(荊軻),
묵자(墨子), 자순(子順) 등 수많은 사상가가 등장하고,
당시에 유행한 존왕양이(尊王攘夷), 유가(儒家), 도가(道家), 묵가(墨家), 법가(法家), 병가(兵家),
합종연횡(合從連橫 - 縱橫家, 合從家), 원교근공(遠交近攻) 등 각종 사상과 전략이 등장한다.

 

춘추전국시대를 관통하는 최고의 통치이념은 ‘존왕양이(尊王攘夷)’였다.
존왕양이의 궁극적인 목표는 ‘국태민안(國泰民安)’으로 요약되는 대업(大業)의 완성이었다.
대업은 그 성취코자 하는 목표의 규모 및 성취 수단의 차이에 따라 크게
‘제업(帝業)’과 ‘왕업(王業)’, ‘패업(霸業)’으로 3분할 수 있다.
춘추시대 전반기는 ‘왕업에 가까운 봉건적 패업’이 각광을 받았다.
그러나 후반기에는 ‘왕업과 동떨어진 봉건적 패업’만이 제후들의 관심을 끌었다.
전국시대 전반기에는 ‘봉건질서를 거부하는 현실적 패업’이 주목을 받았다.
후반기에는 ‘천하통일을 염두에 둔 중앙집권적 제업’이 새로운 목표로 부상했다.
이를 최종적으로 실현한 인물이 바로 진시황이었다.
그러나 진시황이 이룩한 제업은 진제국(秦帝國)의 속망(速亡)으로 인해 크게 왜곡되었다.

이같은 왜곡은 춘추시대와 전국시대를 엄분(嚴分)하여 전국시대를 강포(强暴)와 궤계(詭計)가 난무하는
암흑기로 간주코자 한 시대적 흐름과 무관치 않았다.
진제국에 뒤이어 나타난 한제국(漢帝國)이 의도적으로 진제국의 존재를 지워버리고자 한 시도가 바로 그 실례이다.


송대(宋代)에 들어와 성리학의 정통론(正統論)이 극성함에 따라 진제국의 존재가 과도기적인 공백기간으로
치부되면서 이같은 흐름은 하나의 대세로 굳어졌다.
조선조의 경우는 중국보다 더욱 부정적인 입장에서 전국시대를 바라보았다.
이 때문인지는 몰라도 아직도 많은 사람들이 전국시대를 오직 약육강식이 횡행한 무법의 시대로만 이해하고 있다.
이는 나름대로 일리가 있다. 약 2백년 동안 2백여 차례의 전쟁이 끊임 없이 전개되었다는 사실이 이를 뒷받침한다.
그러나 이는 치세(治世)를 기준으로 한 이해일 뿐이다.
전국시대는 통치사상 및 통치제도가 일변하는 격동의 시기였다.
이 시기는 오히려 신분세습을 토대로 한 지방분권적 봉건질서가 붕괴되고 능력 본위의 관료체제에 기초한
중앙집권적 제국질서가 형성되는 매우 역동적이면서도 창조적인 시기였다.

 

전국시대는 경제적으로도 전례없는 풍요를 구가한 시기였다.
전국시대의 도래는 본래 철기(鐵器)사용의 급속한 확산과 밀접한 관련이 있었다.
철제농구의 보급은 비약적인 증산을 가능케 했고, 잉여생산물의 활발한 교역은 거대한 상업도시를 탄생시켰다.
막대한 세원 확보는 강력한 상비군과 중앙집권적 관료체제의 유지를 가능케 했다.
이는 주현왕(周顯王) 36년(기원전 333)에 당대의 종횡가(縱橫家)인 소진(蘇秦)이 제선왕(齊宣王) 앞에서 펼친
다음과 같은 유세를 통해 쉽게 확인할 수 있다.
“지금 제나라 도읍 임치(臨淄)는 7만 호입니다. 최소한 1호 당 3 명이 있다고 가정할 경우 장정만 해도
무려 21만 명이나 됩니다. 멀리 떨어져 있는 현에서 징병치 않고 임치의 병사만 징병해도 거뜬히 21만 명을
동원할 수 있는 것입니다. 거리는 번화하기 그지없어 수레의 차축이 서로 부딪치고,
길가는 사람들의 어깨가 서로 닿고, 옷깃이 이어져 휘장을 이루고, 소매가 나란히 합쳐져 장막을 이루고 있습니다.”

이를 통해 짐작할 수 있듯이 전국시대는 열국간의 치열한 각축 속에서도 임치와 같은 거대한 도시를 중심으로
활발한 교역활동이 이뤄진 시기였다. 당시의 교역에 열국의 국경은 아무런 장애가 되지 않았다.


한나라 출신의 부상(富商) 여불위(呂不韋)가 각 국의 교역도시를 거점으로 막대한 부를 축적한 뒤 마침내
당시 최대 강국인 진나라의 재상으로 활약할 수 있었던 것도 바로 이같은 시대상황에 기인한 것이었다.
그럼에도 수천 년 간에 걸쳐 이같은 사실이 제대로 평가되지 못했다.
이는 한무제(漢武帝)가 유가사상을 유일한 통치사상으로 내세운 일련의 조치와 불가분의 관계를 맺고 있다.
소위 ‘유가독패(儒家獨覇)’로 불리는 한무제의 조치는 공맹(孔孟)을 추종하는 유가들로 하여금
주나라의 봉건질서를 구축한 주공(周公) 단(旦)의 통치를 가장 이상적인 통치로 간주케 만들었다.
그러나 치세를 전제로 한 유가사상은 단속적(斷續的)으로 찾아오는 난세를 이해하는데 적잖은 문제점을 안고 있었다.
유가사상이 난세의 통치사상으로 무기력할 수밖에 없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었다.
치세와 난세는 늘 순환하기 마련이다. 난세의 이치를 모르면 시변(時變)을 좇아 대응키가 어렵게 된다.
오늘날 우리가 처해 있는 시기도 일응 난세로 간주할 수 있을 것이다.
우리는 전국시대에 등장하는 수많은 인물들의 활약을 통해 현재의 난국을 타개할 수 있는
무궁무진한 지혜를 얼마든지 얻을 수 있다. 필자가 「전국책」을 국내 최초로 완역한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전국책」은 중국사상 최대의 난세라고 할 수 있는 전국시대에 활약한 영웅호걸들의 일화를 묶어 놓은 책이다.
흔히 춘추시대와 전국시대를 하나로 묶어 ‘춘추전국시대(春秋戰國時代)’, ‘동주시대(東周時代)’,
‘열국시대(列國時代)’, ‘선진시대(先秦時代)’ 등으로 통칭하고 있다. 이같은 통칭은 춘추시대와 전국시대라는
시대 구분 자체가 후세의 사가들의 편의상 구분에 불과하다는 점을 감안할 때 일응 바람직하다.
통치사상사적 관점에서 볼 때 춘추시대와 전국시대는 반드시 하나의 시기로 묶어 총체적으로 조망할 필요가 있다.

중국의 주대(周代: 기원전 1027‐256)는 크게 두 시기로 양분할 수 있다.
주유왕(周幽王)이 견융(犬戎)의 침공으로 살해되기 전까지 호경(鎬京)에 도읍을 정하고
약 2백50년 동안 계속된 서주(西周: 기원전 1027‐771)시대와
동쪽 낙읍(雒邑: 낙양)으로 천도한 이후 약 5백년 동안 지속된 동주(東周: 기원전 770‐256)시대가 그것이다.
서주시대와 동주시대를 구분하는 것은 낙읍으로의 천도를 기점으로 주대의 통치문화가 큰 차이를 보이고 있다는
점에서 일응 의미 있는 구분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동주시대의 전반기에 해당하는 춘추시대를 그 이후의 전국시대와 엄격히 구분코자 하는 자세는
그다지 바람직스럽지 못하다.

원래 춘추시대는 공자가 편수한 것으로 알려진 「춘추」가 다루고 있는 시기에 착안하여 만들어낸 것이다.
그러나 통치사상사적 관점에서 볼 때 이 시기를 전국시대와 구분해야 할 하등의 이유가 없다.
동주시대를 두 시기로 엄격히 나누는 것은 춘추전국시대 전 시기를 관통하고 있는 ‘존왕양이’의 전개과정을
일목요연하게 파악하는데 오히려 장애가 될 수 있다.

 

대략 전국시대는 주위열왕(周威烈王) 23년(기원전 403)부터 진시황 26년(기원전 221)까지를 말한다.
이는 사마광(司馬光)이 「자치통감(資治通鑑)」에서 주장한 기준에 따른 것이다.
사마광이 전국시대의 시점(始點)을 주위열왕 23년으로 잡은 것은 이때 주위열왕이 진(晉)나라를 3분한
한(韓)․위(魏)․조(趙) 3가(三家)를 봉후(封侯)한 사실에 착안한 것이다.
사실 이때부터 본격적인 ‘전국7웅(戰國七雄)’의 시대가 열리게 되었다.
전국시대라는 용어는 후세인이 「문선(文選)」에 실린 장형(張衡)의 「동경부(東京賦)」에 나오는
‘7웅병쟁(七雄竝爭)’이라는 구절에서 따온 것이다.
‘전국7웅’은 패업을 달성한 5 명의 패자를 지칭하는 ‘춘추5패’와 달리 천하통일을 놓고 상호 치열하게 각축한
전국시대의 7 나라를 지칭한다. ‘전국7웅’은 약 2백년 간에 걸쳐 천하를 거머쥐기 위해 치열한 공방전을 전개했다.
전국시대 내내 자웅을 겨뤘던 나라는 제․ 진․ 초 3국이었다.
전국시대 초반기만 하더라도 한때 위, 조 두 나라가 위세를 떨쳤다.
그러나 두 나라는 영토도 작고 인민의 수도 많지 않아 일정한 한계가 있었다.
뒤이어 등장한 제․ 진․ 초 3국은 이합집산을 거듭하며 천하의 주도권을 놓고 치열한 각축을 벌였다.
당시의 대립구도는 제․ 초 양국이 서로 협력하여 진나라에 저항하는 구도로 전개되었다.
진나라는 시종 제․초 양국의 연맹구도를 와해시키는데 모든 노력을 경주했다.

이때 진나라가 내세운 것이 바로 장의(張儀)가 주장한 연횡(連衡)이었다.
이는 진나라와 대등한 외교관계를 맺어 국가유지를 도모하는 계책으로 실은 진나라의 6국병탄 야심을 교묘히
포장한 것에 지나지 않았다. 그러자 나머지 6국은 소진의 합종(合從)으로 이에 맞섰다.


합종은 제․초 양국의 연맹체제를 기축으로 하여 나머지 한․위․조․연 4국이 이에 가담해 공동전선을 펼침으로써
진나라의 중원 진출을 저지하는 것이 기본 책략이었다.
소진의 활약으로 나머지 6국이 합종하게 되자 과연 진나라는 중원으로 진출하기는 커녕
오히려 6국의 서진(西進)을 두려워해야만 하는 상황이 연출되었다.
한동안 소진과 장의는 동시대 인물로 소진이 먼저 죽은 것으로 알려져 왔다.
일찍이 사마천은 「사기」에서 이에 대해 강한 의문을 제기한 바 있었다.
1973년 호남성 장사의 마왕퇴(馬王堆)에서 발굴된 「백서전국책(帛書戰國策)」에 의해 장의가 소진보다
대략 반세기 가량 앞선 인물이라는 사실이 처음으로 밝혀지게 되었다.

전국시대는 가히 ‘종횡가의 시대’라고 할 만큼 뛰어난 세객(說客)들이 종횡무진으로 활약한 시기이기였다.
종횡가는 합종과 연횡을 주장하는 자들을 총칭하는 말이다. 이들은 원래 유가와 법가, 도가, 병가, 법가 등과 달리
뚜렷한 사상적 기반을 갖고 있는 사상가들이 아니었다. 이들은 변화무쌍한 시변(時變)에 재빨리 적응해
주어진 상황 속에서 가장 유리한 선택지를 찾아내는 데 탁월한 재능을 발휘했다.


종횡가의 횡행은 ‘전국7웅’이 다투어 ‘양사(養士)’에 나선 사실과 밀접한 관련이 있었다.
봉건질서가 사실상 와해된 전국시대에는 세습귀족을 대신할 새로운 세력이 무섭게 성장하고 있었다.
이들이 바로 ‘사(士)’였다. 이들 대부분은 경제적 능력은 취약했으나 자신들이 습득한 학문을 자산으로 삼아
말 한마디로 일약 재상의 반열에 오를 수 있는 시대적 조류에 적극 편승했다.
이같은 시류 편승에 성공한 인물이 바로 소진과 장의, 진진(陳軫), 범수(范睢), 채택(蔡澤) 등이었다.
이들 종횡가들은 능란한 변설로 제후들을 설득할 경우 일거에 입신할 수도 있었다.
그러나 자칫 말 한마디라도 실수할 경우 목숨을 내놓아야만 하는 위험부담을 안고 있었다.
따라서 이들의 변설에는 난세에 살아남기 위한 정교하고도 뛰어난 지략이 담겨져 있었다.
이들은 크게는 임기응변에 능한 외교론자였고 작게는 시류에 민감한 처세론자였다.
그러나 당시 아무리 뛰어난 지략을 지녔다 할지라도 군주를 직접 만나 유세키가 그리 쉬운 일은 아니었다.
이로 인해 이들은 중개인 역할을 해 줄 세가(勢家)에 기식하며 기회를 엿보는 도정을 선택했다.
이는 이들 세객들을 이용해 권력을 탈취 내지 유지코자 하는 세가의 이해와 맞아 떨어졌다.
이것이 바로 세가의 ‘양사(養士)’가 횡행케 된 근본 이유였다.

 

전국시대에 ‘양사’를 통해 숱한 일화를 남긴 인물로는 소위 ‘전국4공자(戰國四公子)’를 들 수 있다.
이들은 왕족의 서얼(庶孼)들로 비록 왕위를 차지 하지는 못했으나 세객들을 식객으로 거느리며
이들의 지략을 이용해 작게는 자신들의 세력을 공고히 하고, 크게는 국난 타개의 선봉을 자처했다.
맹상군(孟嘗君) 전문(田文)은 제위왕(齊威王)의 후손으로 3천 식객을 거느리며
계명구도(鷄鳴狗盜)와 같은 숱한 일화를 남겼다.
평원군(平原君) 조승(趙勝)은 조혜문왕(趙惠文王)의 동생으로 상국이 된 후
모수자천(毛遂自薦) 등의 많은 고사를 남겼다.
신릉군(信陵君) 무기(無忌)는 위소왕(魏昭王)의 아들로 조나라의 한단(邯鄲)이 진나라에 포위되었을 때
이를 구해줌으로써 절부구조(竊符救趙)의 고사를 남겼다.
박학다식했던 춘신군(春申君) 황헐(黃歇)은 초경양왕(楚頃襄王)을 섬기며 능란한 외교술로
초나라를 합종의 맹주로 끌어올리면서 25년 동안이나 초나라의 재상직을 역임했다.
그러나 그는 초고열왕(楚考烈王)이 죽자 자신의 휘하에 있던 이원(李園)의 암수에 걸려 멸족의 화를 입었다.

 

세객과 세가의 결합은 여불위와 진시황의 부친인 자초(子楚)의 만남에서 절정을 이뤘다.
여불위는 비록 세객은 아니었으나 신분상의 한계를 뛰어넘기 위해 세객과 똑같은 심경을 지니고 있었다.
자초 또한 비록 세가는 아니었으나 유사시 보위를 거머쥐고자 하는 야심을 품고 있었다.
두 사람의 절묘한 만남은 진시황의 탄생을 가능케 했고 마침내는 진나라의 천하통일로 귀결되었다.
진시황의 천하통일은 오직 재능만 있으면 과감히 발탁하는 소위 유재시거(惟才是擧)의 정책을 일관되게

추진한 데서 그 원인을 찾을 수 있다. 이는 난세의 방략이기도 했다.
치세에는 품덕이 있는 자를 기용하는 소위 유덕시보(惟德是輔)의 원칙이 필요하다.
그러나 난세에는 이를 채택키가 어렵다. 진시황은 전국시대라는 난세의 와중에서 난세를 타개하는 기본 방략이
무엇인지를 정확히 통찰하고 있었던 것이다.
진시황은 강력한 무력을 배경으로 세객들의 종횡무진하는 활약에 힘입어 10년 만에 천하통일의 위업을 이뤘다.
이에 약 2백년 간에 걸친 전국시대도 마침내 종언을 고하게 되었다.


그렇다면 서쪽 변방에 치우친 진나라가 천하통일을 이룩하게 된 근본 배경은 과연 어디에 있었던 것일까.
이와 관련해 사마천은 일찍이 「사기」「육국연표」에서 다음과 같이 자문자답한 바 있다.
“원래 진나라의 덕의(德義)를 논하면 노나라와 위(衛)나라의 포악한 자보다도 못했다.
병력 또한 3진(三晋)보다 강대한 것도 아니었다. 그럼에도 마침내 진나라가 천하를 병합했다.
이는 반드시 지세가 험고하고 형세가 이롭게 작용했기 때문만은 아니었을 것이다.

아마도 천조(天助)가 있었던 듯하다.
누군가 말하기를, ‘동방은 만물이 처음 나는 곳이고 서방은 만물이 성숙하는 곳이다’라고 했다.
무릇 먼저 일을 시작하는 사람은 동남(東南)에서 일어나고, 실제적인 효과를 거두는 곳은 언제나 서북(西北)이다.
진나라는 서쪽 옹주(雍州)에서 일어났고, 한(漢)나라도 서쪽의 촉한(蜀漢)에서 일어났다.”

사마천은 결국 지리적 요건에서 진나라가 이룩한 천하통일의 배경을 찾은 셈이다.
사실 진나라의 천하통일은 옹주와 한중을 기반으로 하여 서쪽으로 파촉(巴蜀)을 손에 넣은 사실과 무관치 않았다.
파촉은 진나라의 국부(國富)와 강병(强兵)을 지속적으로 유지시켜 준 결정적인 배후지로 작용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중원의 제후국들로부터 만이(蠻夷) 취급을 받았던 진나라가 천하통일을 이루게 된 일차적인 계기는
진효공(秦孝公)이 상앙(商鞅)의 변법(變法)을 과감히 도입한 데서 찾아야 한다.
진나라는 2 차례에 걸쳐 상앙의 변법를 전면적으로 실시했다. 이에 상벌제도를 바로 세우고, 토지를 대량 개간하고,
병력을 강화하고, 군현제를 도입하는 등 강력한 중앙집권체제를 구축할 수 있었다.
진시황은 바로 이같은 ‘부강(富强)’을 토대로 ‘유재시거’의 방략 등을 구사해 천하통일의 위업을 이룬 것이다.
진시황의 천하통일 과정에는 장의와 같은 종횡가는 물론 이사(李斯)와 같은 법가와 왕전(王翦)과 같은 병가들이
종횡무진으로 활약했다는 사실을 간과해서는 안된다.


춘추전국시대를 총체적으로 파악할 때 이 시기를 관통한 ‘존왕양이의 대업’은 내용상 몇 단계의 변전과정을 겪었다.
‘양이’는 전기간에 걸쳐 대동소이했으나 ‘존왕’과 ‘대업’의 내용 만큼은 시기별로 커다란 차이를 보였던 것이다.
그렇다면 ‘존왕’과 ‘대업’의 내용은 과연 각 시기별로 어떤 차이를 보였던 것일까. 크게 4 시기로 나눌 수 있다.
제1기는 춘추시대 전반기에 해당하는 시기이다.
대략 주왕실이 낙읍으로 동천하는 기원전 8세기 후반부터 제환공(齊桓公) 및 진문공(晉文公)이 활약하는
기원전 7세기 초반까지의 약 1백50년 간이 이에 해당한다.
동주시대에 들어와서도 주공 단(旦)은 왕자(王者)의 표상이었다. 제환공과 진문공이 패업을 추구하면서
이상형으로 상정한 인물이 바로 주공 단이었다. 이들은 결국 왕업에 가까운 패업을 이룩했다.
이들이 이룬 패업은 도덕적인 측면에서 볼 때 왕업과 그다지 큰 차이가 없었다. 오직 정도의 차이만 있었을 뿐이다.
이 시기의 존왕과 대업은 ‘적극적인 존왕’과 ‘도덕적인 패업(霸業)’으로 규정할 수 있다.

 

제2기는 춘추시대 후반기에 해당하는 시기이다.
대략 진목공(秦穆公)이 진군(晉軍)을 격파하고 새로운 패자로 등장하는 기원전 7세기 초반부터 월왕 구천(句踐)이
오왕 부차(夫差)를 몰락시키고 패자로 부상하는 기원전 5세기 초반까지의 약 2백년 간이 이에 해당한다.
이 시기는 월왕 구천이 온갖 굴욕을 참고 궤계(詭計)를 구사해 마침내 오왕 부차를 몰락시키고
천하를 호령한 사실을 통해 짐작할 수 있듯이 도덕성이 담보되지 않는 패업이 횡행한 시기였다.
오왕 부차의 죽음은 왕자에 가까운 패자의 시대가 끝났음을 상징했다.
이 시기의 특징은 ‘소극적인 존왕’과 ‘비도덕적인 패업’으로 요약할 수 있다.

 

제3기는 전국시대 전반기에 해당하는 시기이다.
대략 진(晉)나라가 3분되는 기원전 5세기 초반부터 상앙(商鞅)이 피살되는 4세기 초반까지의
약 1백년 간이 이에 해당한다. 이 시기의 초반에는 전국시대 최고의 명군으로 칭송받는 위문후(魏文侯)와
위무후(魏武侯)가 천하를 주도했다. 위문후는 이극(李克)을 등용해 법치를 확립하고,
오기를 기용해 강병의 기틀을 마련했다. 뒤를 이어 위무후가 사방으로 영토을 확장하며 최강의 무위를 과시했다.
그러나 얼마 후 제위왕(齊威王)이 뛰어난 병가인 손빈(孫臏)을 기용해 위나라를 격파하고,
진효공(秦孝公)이 상앙의 변법을 채택해 법치국가의 기틀을 확립하면서 천하는 제․진 두 나라가 쟁패하는
국면으로 전환되었다. 이 와중에 병가와 법가사상가들이 부국강병의 강력한 지지세력으로 등장하면서
통치사상의 백화제방(百花齊放)이 나타나게 되었다. 이 시기에는 백성들의 혐전(嫌戰) 의식을 바탕으로
‘고수(固守)’를 강조하는 묵가와 제후들의 호전(好戰) 의지를 바탕으로 ‘강병(强兵)’을 강조하는 병가,
부국강병을 내세우며 ‘엄법(嚴法)’을 강조하는 법가가 서로 우위를 다투었다.
이 다툼에서 일차적으로 주도권을 잡은 쪽은 법가였다.
법가는 나라를 보전하고 백성의 안위를 지키기 위해서는 국가 역량을 총동원해야 하고,
그러기 위해서는 반드시 엄법에 의한 기강확립이 절실히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법가의 이같은 주장은 제후들에게 아무런 이의없이 수용되었다.
당시 묵적(墨翟)은 뛰어난 수비로 상징되는 소위 ‘묵수(墨守)’를 통해 병가의 공전(攻戰)을 무력화시키려 했다.
이에 대해 병가는 뛰어난 심리전으로 평가되는 소위 ‘공심(攻心)’을 통해 묵수를 격파코자 했다.
결국 ‘공심’으로 얼마든지 ‘묵수’를 깨뜨릴 수 있다는 것이 확임됨에 따라 묵가의 세력은 급속히 약화되고 말았다.
이 시기에 공자를 비조로 한 유가 세력은 내내 미미하기만 했다.

 
이는「전국책」에 나오는 5백 개의 예화 중 맹자에 관한 예화가 단 하나밖에 없다는 사실을 통해 확인할 수 있다.
이를 통해 짐작할 수 있듯이 이 시기는 바로 병가의 무략(武略)과 법가의 치법(治法)이 강조되던 시기였다.
이들 병가와 법가는 도가의 무위(無爲)사상을 끌어들여 자신들의 사상을 매우 정치(精緻)하게 다듬었다.
이로써 이 시기에 들어와서는 춘추시대의 상징인 ‘패자’가 사라지고
병가와 법가의 통치사상에 입각한 ‘강자(强者)’가 군림케 되었다.
‘강자’의 출현은 대업의 내용이 질적으로 바뀌고 있음을 의미했다.
전국시대 중기까지만 하더라도 그 구체적인 모습이 확연히 드러나지 않았던 ‘제업’이 서서히 부각되기 시작했다.
제업의 가장 큰 특징은 강력한 제왕권(帝王權)을 기초로 한 중앙집권체제의 구축에 있었다.
이는 필연적으로 천하통일로 나아갈 수밖에 없었다.
당시 이를 의식하고 천하통일의 길로 나아간 나라는 비단 진나라 뿐만이 아니었다.
제․ 초와 같은 강대국 역시 같은 길을 걸었다.
그러나 두 나라는 막연히 자신들이 주도하는 천하통일만 생각했을 뿐 구체적인 복안을 갖고 있지 못했다.
이는 훗날 한고조 유방(劉邦)과 건곤일척의 승부를 겨뤘던 초패왕 항우(項羽)가 천하를 먼저 손에 놓고도
제업의 길을 버린 채 춘추시대의 봉건적 패업을 추구하다가 자궤(自潰)한 사실을 통해 쉽게 확인할 수 있다.
법가 및 병가 사상에 기초한 부국강병 사조는 필연적으로 봉건질서를 전제로 한 전래의 왕패 개념에 대한
새로운 해석을 요구하고 있었다. 이는 시대적 요청이기도 했다.

진나라는 바로 이같은 시류에 가장 슬기롭게 편승한 나라였다. 진시황이 바로 그 대미를 장식했던 것이다.
그럼에도 수천 년 동안 이같은 사실을 애써 축소하거나 무시해 왔던 것이다.
한대(漢代) 이후에 나타나는 전국시대에 관한 왜곡된 인식은 진제국의 속망과 성리학의 정통론 등이
주요 배경으로 작용했다.
그러나 기본적으로는 전국시대의 역사적 상황에 대한 이해부족이 더 큰 원인으로 작용했다고 보아야 한다.
이를 통해 짐작할 수 있듯이 전국시대는 결코 암흑기가 아니었다.
춘추시대 3백50년 간에 걸친 사상적 고뇌의 집적이 이 시기에 폭발적으로 터져나왔다.

제3기는 바로 백가쟁명(百家爭鳴)의 시기였던 것이다. 이 시기는 지방분권적 봉건질서가 붕괴하고
그에 대한 대안으로 중앙집권적 제국질서가 서서히 부각되는 시대적 추세에 발맞춰
‘존제(尊帝)’와 ‘제업(帝業)’의 의미가 새로이 강조된 데서 그 특징을 찾을 수 있다.

 

제4기는 전국시대 후반기에 해당하는 시기이다.
대략 소진과 장의로 상징되는 종횡가들이 천하를 주유하며 제후들에게 유세하는 기원전 4세기 초반부터
진시황이 천하를 통일하는 기원전 3세기 초반까지의 약 1백년 간이 이에 해당한다.
이 시기에 진나라는 최강의 무력을 보유하고 있었다.
진나라는 이를 바탕으로 장의를 내세워 나머지 6국을 자국의 통제 하에 두고자 했다.
그러나 장의의 연횡은 무력을 동원해서라도 천하통일을 실현코자 하는 진나라의 속셈을 포장한 것에 지나지 않았다.
당시 연횡의 속셈을 정확히 파악한 인물이 바로 소진이었다.
그는 나머지 6국을 종으로 묶어 진나라를 포위하는 합종을 추진했다. 그러나 6국은 작은 이익에 서로 집착한 나머지
시종 느슨한 합종으로 일관하다가 마침내 연횡에 발을 들여놓음으로써 자멸하고 말았다.
결국 진시황은 범수(范睢)의 원교근공 계책을 이용해 6국을 차례로 복멸시켜 천하통일의 대업을 완수케 되었다.
제4기의 가장 큰 특징은 종횡가의 활약에서 찾을 수 있다.
제4기에 들어와 법가와 병가는 종횡가의 보조적인 역할을 한 측면이 강하다.
그만큼 제4기는 외교책략의 전성기라고 할 수 있다.


「전국책」에 나오는 예화의 절반 이상이 종횡가들의 활약에 관한 이야기이다.
난세의 성격이 강해지면 강해질수록 외교책략의 중요성 또한 커질 수밖에 없다.
종횡가들은 바로 이같은 시기에 대거 등장해 자신들의 기량을 유감없이 발휘했던 것이다.
진나라의 천하통일은 흔히 알고 있는 것과 같이 단순히 무력을 동원해 이뤄진 것이 아니었다.
진나라의 무력 동원은 연횡에 저항하는 나라에 대해 개별적이면서도 지속적으로 이뤄졌다.
진나라가 무력을 동원키에 앞서 추진한 것은 영토의 할양이었다.
진나라는 6국으로부터 수시로 영토를 할양받아 자국의 군현으로 흡수함으로써 천하통일 작업의 연착륙을 시도했다.
이때 결정적인 역할을 수행한 자들이 바로 외교책략가인 종횡가들이었던 것이다.
이 시기는 명목 뿐인 주왕실이 8백년 만에 역사의 무대에서 완전히 사라진 사실이 보여주듯이
봉건질서가 완전히 붕괴되고 새로운 통치질서가 절실히 요구된 시기이기도 했다.
그 대안이 바로 제국질서(帝國秩序)였던 것이다.
제국질서의 특징은 강력한 제왕권을 바탕으로 효율적인 통치권력의 발동을 보장하는 중앙집권체제에 있었다.
진나라는 천하통일에 앞서 바로 이같은 정지작업을 차질없이 진행시켜 나갔던 것이다.
당시 광대한 영토와 많은 병력을 보유했던 초․제와 같은 강대국은 5백여 년에 걸친 난세를 끝내기 위해서는
‘존왕’과 ‘대업’에 대한 새로운 해석이 절실히 필요하다는 사실을 제대로 인식치 못했다.
6국의 패망은 바로 여기에 기인한 것이었다.
당시 종횡가의 대표주자인 소진조차도 비록 입으로는 ‘진취지도(進取之道)’를 얘기했으나 시류를 정확히 읽지 못했다.
그가 시류를 정확히 읽었다면 굳이 장의가 이미 죽은 상황에서 합종을 주장하고 다니다가
제나라에서 자객에게 척살당하는 최후를 맞이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만일 진제국이 속망하지 않았다면 진나라의 천하통일은 제대로 된 평가를 받았을 것이다.

 
그러나 진제국은 불과 15년 만에 속망하고 말았다. 이로 인해 진시황이 이룩한 ‘존제’와 ‘제업’은
전래의 ‘존왕’과 ‘왕패업(王覇業)’을 결정적으로 훼손한 ‘적왕(賊王)’과 ‘망업(亡業)’으로 폄하되고 말았다.
당연한 결과로 진나라의 치밀하고도 과감한 천하통일 행보 역시 나라를 망치고 백성을 도탄에 빠뜨리는
‘망국지도(亡國之道)’로 폄하되었다.
이같은 왜곡이 무려 2천년 넘게 지속되면서 전국시대를 암흑기로 간주하는 인식이 확고히 자리잡게 된 것이다.
그 결과 이적(夷狄)의 침래가 눈 앞에 다가온 절체절명의 상황 속에서도 공허한 명분론에 휩싸여
나라를 멸망으로 이끄는 해괴한 일이 반복되었다.
북송(北宋) 말기와 남송대(南宋代), 명대(明代) 말기의 중국이 그 대표적인 실례였다.
조선조가 왜란과 호란을 잇달아 맞이하고도 자성키는커녕 더욱 극심한 명분론에 함몰되었다가
끝내 일제에 의해 패망한 것 또한 이와 무관치 않았다.
조선조의 행보는 당시 일본의 조야가 이미 17세 중엽에 공허하기 그지없는 성리학의 명분론을 버리고
실사구시(實事求是)의 양명학(陽明學)을 적극 도입한 사실과 극히 대조적이다.
19세기 초기에 중국의 역대 주석서를 압도하는 요코다 고레다까(橫田惟孝)의 「전국책정해(戰國策正解)」가
출현한 것 자체가 결코 우연이 아니었던 것이다.
난세일수록 상대방의 의중을 정확히 통찰해 최선의 대응책을 마련해야만 한다.
전국시대에 활약한 종횡가의 지략을 배워야 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사안이 국가 안녕과 국민들의 생존과 직결된 것이라면 더 이상 말할 것이 없다.


우리나라에 언제 「전국책」이 들어왔는지는 확실히 알 길이 없다.
대략 성종조 때 부사과(副司果) 김흔(金欣)이 오사도가 교정한 「전국책」 1질을 성종에게 바쳤다는 기록에 비추어
대략 15세기 중엽에 유입된 것으로 짐작된다.
실록을 보면 전국시대에 관한 조선조 사대부들의 부정적인 시각을 쉽게 확인할 수 있다.
조선조 5백년 동안 「전국책」에 관한 주석서 한 권 나온 적이 없는 것도 이같은 풍조와 무관치 않았을 것이다.
성종조 때의 한 경연에서 「전국책」과 관련해 군신이 나눈 다음과 같은 대화를 보면
이를 보다 쉽게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성종이 경연(經筵)에 나아갔다. 강(講)이 끝나자 시강관(侍講官) 이세우(李世佑)가 아뢰기를,
“이제 주강(晝講)에서 장차 「전국책」을 강하려고 하나 4 차례의 경연에 모두 제사(諸史)로써 하는 것은
옳지 못할 듯합니다. 청컨대 경학(經學)을 강(講)하도록 하소서”라고 했다.
성종이 이를 좌우에 묻자 영사(領事) 홍응(洪應)이 아뢰기를, “치도(治道)는 실로 경학(經學)에 근원하고 있으니
경서를 근본으로 삼고 제자서(諸子書)와 사서(史書)는 참고로 삼는 것이 옳습니다.
옛사람이 이르기를, ‘학문으로 나의 지식을 넓게 하고 예로써 나의 행실을 단속한다’고 했습니다.
신의 생각으로는 비록 제사(諸史)로써 지식을 넓힐지라도 성리학으로써 단속해야만 수신․ 제가․ 치국․ 평천하에
보탬이 될 수 있을 듯합니다”라고 했다.
성종이 말하기를, “그렇다면 마땅히 「상서」를 읽어야 할 것이오”라고 했다.(성종 14년, 12월 8일)〉

이를 통해 알 수 있듯이 조선조의 사대부들은 전국시대 자체를 극히 부정적으로 보고 있었다.
이같은 태도가 바로 숭문천무(崇文賤武)의 왜곡된 풍조를 확산시켰다고 보아야 한다.
조선조의 사대부들에게는 난세의 지략(智略)을 통해 유사시를 대비코자 하는 자세가 결여되어 있었던 것이다.
이에 반해 일본에서는 이미 19세기 초엽에 중국인들조차 놀랄 만한 탁월한 주석서가 등장했다.
요코다 고레다까의 「전국책정해」가 바로 그것이다. 그는 기존의 모든 주석을 검토한 위에 독자적인 주석을 가했다.
이는 당시 조선의 선비에 해당하는 일본의 사무라이[侍]가 난세의 지략을 담은 「전국책」을 얼마나 깊이 천착하고
있었는지를 반증하는 것이다. 일본이 명치유신에 성공할 수 있었던 된 것도 바로 이같은 지적 풍조와 무관치 않았다.
21세기 동북아시대를 능동적으로 열어나가기 위해서라도 전국시대에 대한 새로운 인식이 절실히 필요하다.


「전국책」은 바로 이같은 요구에 부응하는 필독서가 아닐 수 없다.
일찍이 동진(東晋)의 공연(孔衍)은 이미 3세기 말에 「사기」를 토대로 「전국책」을 고증하여
「춘추후국어(春秋後國語)」라는 제목으로 주석서 10권을 펴낸 바 있다.
이는 그가 이미 「전국책」을 ‘전국시대의 「국어」’로 간주했음을 보여준다. 이를 통해 알 수 있듯이
「전국책」은 반드시 ‘춘추시대의 「전국책」’이라고 할 수 있는 「국어(國語)」와 함께 읽어야만 한다.
「국어」와 「전국책」은 각각 다루고 있는 시기만 다를 뿐 내용과 체제 면에서 완전히 일치하고 있다.
두 책을 동시에 읽어야만 춘추전국시대 전 시기를 관통하는 ‘존왕양이’의 흐름이 어떻게 전개되었는지를
총체적으로 파악할 수 있는 것이다. 「전국책」은 주로 전국시대를 주름잡은 세객들의 활약상을 싣고 있다.
이는 주로 춘추시대에 등장하는 여러 군신(君臣)의 활약상을 싣고 있는 「국어」와 대비된다.
그러나 이는 시대의 흐름에 따른 자연스런 변화상에 불과할 뿐이다.
두 책 모두 다루고 있는 시기만 다를 뿐 구국을 위해 매진한 영웅호걸들의 활약상을 담아 놓았다는 면에서는
하등의 차이가 없다. 편제면에서도 똑같이 ‘기사본말체(紀事本末體)를 가미한 국별체(國別體)’의 형식을 띠고 있다.
두 책은 마치 하나의 책을 시대별로 나눠 2 권으로 펴낸 것에 비유할 수 있다.
「국어」와 「전국책」을 동시에 읽어야만 춘추전국시대에 활약한 인물들을 총체적으로 파악할 수 있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전국책」이라는 서명은 전한 말 유향(劉向)이 이 책을 편집하면서 처음으로 붙인 것이다.
유향은 원래 「국책(國策)」, 「국사(國事)」, 「단장(短長)」, 「사어(事語)」, 「장서(長書)」, 「수서(修書)」

등으로 불리던 전국시대 세객들의 책략을 하나로 묶어 이같이 명명했던 것이다.

 

「전국책」은 전국시대를 횡행한 수많은 세객들의 영지(英智)를 담은 까닭에 유향 이래 현재에 이르기까지

근 2천년 동안 수많은 주석서가 등장했다.

원래 「전국책」은 5대(五代)를 거치는 동안 총33편 중 11편이 사라졌다.
북송대(北宋代)에 들어와 당송8대가(唐宋八大家)의 한 사람인 증공(曾鞏)이 사대부가를 뒤져 빠진 부분을
채워넣으면서 「전국책」의 편제를 완전히 새롭게 꾸몄다. 이것이 소위 ‘증공본’이다.
증공본은 동주와 서주, 진(秦), 제(齊), 초(楚), 조(趙), 위(魏), 한(韓), 연(燕), 송(宋), 위(衛), 중산(中山) 등
총 12개국, 486장으로 편제되었다. 이는 현재의 「전국책」과 편제상 하등 차이가 없다.
「전국책」에 최초로 주석을 단 사람은 후한의 고유(高誘)였다. 그러나 북송대에 이르러 총 33편 중
겨우 10편이 남게 되자 남송의 요굉(姚宏)이 증공본 등을 바탕으로 완전히 새롭게 교정한 주석서를 내놓았다.
그것이 바로 현재까지 전해지는 「고씨주전국책(高氏注戰國策)」이다.
그러나 동시대의 포표(鮑彪)는 요굉과 달리 고유의 각주를 없애고 별도의 「전국책주(戰國策注)」를 펴냈다.
이는 요굉본보다 상세하기는 하나 편제와 문자를 마구 고쳐 넣어 세인들로부터 혹평을 받았다.

원대에 이르러 오사도(吳師道)는 포표본과 요굉본을 참작해 다시 「전국책교주(戰國策校注)」를 내놓아
포표본의 오류를 바로 잡아 놓았다.


이후 청대의 김정위(金正煒)는 「전국책보석(戰國策補釋)」이라는 뛰어난 주석서를 펴냈다.
김정위본은 고증이 철저해 역대 주석서 중 가장 탁월하다는 평을 받고 있다.
그러나 「전국책」 연구에 획기적인 전환점을 이루게 된 것은 지난 1973년 호남성 장사의 마왕퇴 한묘(漢墓)에서
소위 「백서․전국책(帛書戰國策)」이 출토되면서부터였다. 당시 한묘에서는 대량의 죽간과 백서가 나왔다.
그 중에는 「백서․전국책」을 비롯해 「백서․손자병법」과 「백서․손빈병법」, 「백서․경법(經法)」, 「백서․노자」 등이 포함되어 있었다. 3호묘에서 출토된 「백서․전국책」은 모두 27장, 1만1천여 자로 구성되어 있었다.
이는 아무런 표제도 없이 소진과 장의 등 종횡가의 행적이 시대별로 편제되어 있어
흔히 「전국종횡가서(戰國縱橫家書)」로 불리고 있다.
「전국종횡가서」의 27장 중 11장은 지금의 「전국책」이나 「사기」의 내용과 같다.
그러나 나머지 16장에는 「전국책」이나 「사기」에 전혀 나오지 않는 완전히 새로운 내용이 실려 있다.
「전국종횡가서」의 가장 큰 의미는 그간 「전국책」과 「사기」 만으로는 확인할 수 없었던 소진의 일대기를
분명히 정리할 수 있게 되었다는 점에서 찾을 수 있다.
제민왕(齊閔王)의 기년(紀年)과 진․위의 화양지전(華陽之戰), 춘신군의 뒤를 이은 이원(李園)의 집정,
진나라가 초나라의 언(鄢) 땅을 취하게 된 사건 등을 소상히 밝힐 수 있게 된 점 등도 적잖은 수확이라고 할 수 있다.

그간 대표적인 국내 번역본으로는 임동석의 「전국책」(1986)과 이상옥의 「신역전국책」(2000) 등을

꼽을 수 있다. 그러나 이들 역서는 한결같이 발췌역에 불과해 우리나라에서는 아직까지 완역본이 전무했다.

최근 임동석은 상․하 2권으로 준비 중인 번역본 중 「역주전국책」(전통문화연구회, 2002) 상권을 펴낸 바 있다.
그러나 그의 「역주전국책」은 「고씨주전국책(高氏注戰國策)」을 저본으로 삼은 까닭에 지나치게 포표와 요굉의
주석에 치우쳐 있어 이후에 나온 주석을 모두 참고하지 못한 아쉬움을 남기고 있다.
이로 인해 사실(史實)과 연표(年表), 역사지리(歷史地理) 등의 고증에 적잖은 문제가 있다.
「전국책」은 고유가 주석서를 처음으로 펴낸 이후 근 1천년 동안 단 한 권의 주석서도 나오지 못한 데서 알 수

있듯이 해독이 매우 어려운 고전으로 유명하다. 이는 「전국책」이 오자(誤字)와 탈자(脫字), 연자(衍字),

괴자(怪字), 속자(俗字), 연문(衍文), 도문(倒文), 궐문(闕文)이 가장 많은 고전이라는 점과 무관치 않을 것이다.


「전국책」은 다른 고전과 달리 철저한 고증작업을 거치지 않고는 제대로 번역할 수 없는 가장 난해한 고전에 속한다.
따라서 「전국책」를 제대로 번역키 위해서는 역대 주석서는 물론 「전국종횡가서」까지 총망라해 놓은 주석서를
저본으로 삼지 않으면 안된다. 자칫 무모하게 번역을 시도할 경우 오역으로 흐를 공산이 매우 크기 때문이다.

필자가 저본으로 삼은 것은 중국의 하건장(何建章)이 주석한 3권의 「전국책주석」(중화서국, 2002)이다.
하씨의 「전국책주석」은 고유와 증공, 포표, 요굉, 오사도는 말할 것도 없고
황비열(黃丕烈)의 「전국책찰기(戰國策札記)」와 우창(于鬯)의 「전국책주(戰國策注)」,
관수령(關修齡)의 「전국책고주보정(戰國策高注補正)」, 유종영(劉鍾英)의 「전국책변와(戰國策辨訛)」,
왕염손(王念孫)의 「독서잡지․전국책(讀書雜志․戰國策)」의 주석을 모두 망라해 놓았다.
하씨는 이들 주석서는 물론 그간 중국의「역사연구」에 실린 서중서(徐中舒)의 전국책 관련 논문과「전국종횡가서」,

요코다 고레다까의 「전국책정해」까지 모두 세밀히 검토한 뒤 나름대로 새로운 주석을 가해 놓았다.
하씨의 주석은「전국책」의 주석에 관한 한 역대 모든 주석을 총정리한 20세기 최후의 주석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하씨의 「전국책주석」은 사실(史實) 뿐만 아니라 연표 및 역사지리에 관한 고증에서도 탁월하다.
그는 임춘부(林春溥)의 「전국기년(戰國紀年)」과 고관광(顧觀光)의 「전국책편년(戰國策編年)」,
당란소(唐蘭蘇)의 「소진사적간표(蘇秦事迹簡表)」, 황식삼(黃式三)의 「주계편략(周季編略)」,
양옥승(梁玉繩)의 「사기지의(史記志疑)」 등을 총망라해 정확한 연대를 추정해냈다.
그는 역사지리에 관해서도 정은결(程恩決)의 「국책지명고(國策地名考)」와 양관(楊寬)의 「전국사(戰國史)」

등을 모두 검토한 뒤 세심한 주석을 가하고 있다.
역자는 하씨의「전국책주석」에 수록돼 있는 주석을 검토한 뒤 대체로 하씨가 취사선택한 주석을 많이 따랐다.
그러나 하씨의 주석이 역대 주석과 상당한 이견을 보인 경우는 대체로 고증이 뛰어난 김정위의 주석을 많이 채택했다.
이 과정에서 역자는 기왕에 나온 주석을 모두 검토한 위에 가장 적합한 주석을 선택했다고 자부한다.

기존의 번역서들은 번역문과 원문 이외에 방대한 지면을 할애해 해제(解題)와 각주(脚註)를 따로 실어 놓았다.
그러나 이같은 해제와 각주는 앞서 언급한 하씨의 주석과는 달리 전문가를 위한 깊은 수준의 것도 아닌 데다가
내용 또한 난삽하기 그지없다. 자칫 독자들로 하여금 고전은 이해하기 어려운 것이라는 느낌을 주기 십상이다.
역자는 이와 달리 본문의 괄호 속에 가장 정확한 주석을 요약해 싣는 소위 협주(夾註) 방식을 채택했다.
이는 전적으로 독자들의 편의를 고려한 데 따른 것이다.


「전국책」에는 「사기」「열전」에 나오는 모든 인물들의 행적이 망라되어 있다.
「사기」「열전」은 바로 「전국책」에서 그 사료를 취한 것이다.
원래 「사기」「열전」에 나오는 모든 인물들은 사마천(司馬遷)이 엄선한 인물들이다.
「전국책」이 단순히 외교책략을 지득(知得)하는데 그치는 것이 아니라
치국의 방략을 터득(攄得)하는 데 빼놓을 수 없는 매우 귀중한 고전이라는 사실을 이를 통해 쉽게 확인할 수 있다.
사실 전국시대를 풍미한 종횡가의 사상은 병가(兵家) 사상과 매우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다.
이는 현대 국제정치에서 외교를 배제한 국방과 국방을 배제한 외교를 생각할 수 없는 것과 같은 맥락이다.
그간 국방분야에서는 손자를 비롯한 병가사상가들에 대한 연구가 나름대로 활발히 진행되고 있다.
그러나 유독 외교분야에서는 아직까지도 종횡가에 대한 본격적인 탐사작업이 진행되지 않고 있다.
외교책략에 관한 연구를 소홀히 할 경우 자칫 ‘21세기 동북아시대의 주도’라는 국가목표를
한낱 구호로 그치게 만들 공산이 크다. 일선 장령(將領)들이 병서를 숙독하듯이 국익확보의 최전선에서 활약하는
외교관들 역시 반드시 종횡가의 책략을 숙지하지 않으면 안 된다.

동양 3국 중 유독 우리만이 조선조 성리학의 영향인지는 몰라도 난세에 대한 부정적인 시각이 엄존하고 있다.
오늘날 우리가 추구하고 있는 ‘21세기 동북아시대의 주도’는 난세에 대한 정확한 이해 없이는 불가능한 일이다.
본서는 난세를 정확히 해독할 수 있는 안내서의 성격으로 출간된 것이다.
역자는 본서가 21세기 동북아시대의 개막을 위해 동양문화의 뿌리를 깊이 천착코자 하는 각 분야의
선구자들에게 적잖은 도움이 될 것으로 믿는다. 본서는 여러 사람들의 도움으로 빛을 보게 되었다.
은사인 서울대 정치학과 최명(崔明) 교수의 지도편달이 없었으면 기필(起筆) 자체가 무리였다.
맹파강원(孟坡講院)에서 ‘난세학’의 탐구에 매진하고 있는 송산(松山) 김홍기 문도(門徒)의 성원도
역자의 집필에 큰 도움이 되었다. 본서의 간행은 인간사랑 여국동(呂國東) 사장의 동양고전에 관한 깊은 애정과
홍성례(洪性禮) 편집장을 비롯한 편집진의 열성이 없었다면 불가능했을 것이다.

 

 

                           

 

 資 料    編 輯 者       李    斗  振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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