春秋戰國 時代 年譜

春秋戰國 時代 年譜

덕치/이두진 2020. 1. 8. 18:28



                                    春 秋 戰 國 時 代   年 譜


               

 ※  中國 年譜(기원전 1050 - 221)

     기원전 6000 : 신석기(新石器) 시대
     기원전 1700 : 은대(殷代)
     기원전 1050 : 서주(西周) 시대
     기원전 770 : 춘추(春秋) 시대
     기원전 475 : 전국(戰國) 시대
     기원전 221 : 진대(秦代)
     기원전 206 : 전한(前漢) 시대
     기원전 25 : 후한(後漢) 시대

 

 

 

기원전 841

주나라의 10대 천자인 주여왕(周厲王)이 도읍 호경에서 발생한 백성들의 폭동으로 쫓겨났으며

이후 14년 간 제후인 공백(共伯) 화(和)의 집정이 이어졌으며

공백화가 제후의 천거를 받아 천자(天子)의 일을 대행하면서

공화원년(共和元年)이라 불렀다. 공화 4년 정권을 주선왕에게 넘겼다.

 

 

기원전 827~782

827년에 주의 태자 '희정'(姬靜)이 11대 천자 주'선왕'(周宣王, B.C.827~782 재위)으로 즉위하였다. 
'선왕' 치세 말년에 서주 왕실의 몰락을 예언한 참요(징후를 암시하고 있는 것으로 해석되는 민요)가

전국 각지에서 유행하였다.

 

 

기원전 771

서북방 이민족 견융(犬戎)과 '신후'가 야합하여 수도 "호경"을 함락하고 주'유왕'(幽王, B.C.781~771 재위)을

살해한 뒤 '포사'를 사로잡아갔다. 이로써 서주는 망했다.

 

 

기원전 770

왕실의 유력 가신이었던 진·  위·  정·  진(晉)나라 등 4국 제후가 '신후'(申后) 소생의 태자 '의구'(宜臼)를

13대 천자 주'평왕'(周平王, B.C.770~720 재위)으로 옹립한 후 동도(東都) "낙읍"으로 수도를 옮겨

왕실을 재건하고 이후부터의 주 왕실을 동주(東周)로 부르게 되었다.  춘추(春秋) 시대의 시작이다.

 

 

기원전 722

노'은공'(魯隱公) 1년,  노나라 14대 군주 '은공'(B.C.722~712 재위) 즉위하였고

『춘추』 기술이 이해부터 시작되었다. 
정 '장공' (B.C.743~701 재위)의 동복 아우 '공숙단'(共叔段)이 난을 일으켰다가 실패하여 자살하였다. 
정'장공'은 이를 사주한 어머니 강씨를 "영(潁)읍"에 가두고는 "황천에 갈 때까지 보지 않으리라!" 맹서했다.

 

 

기원전 720

정나라와 동주 왕실이 인질을 교환하였다.  정나라 군사들이 동주의 기내(천자의 왕성에서 500리 이내의 지역)인

"온읍"과 "낙읍"에 침범해 보리와 벼를 무단으로 베어갔으나 주 왕실은 아무 대응도 하지 못하였다. 
왕실에 대한 실권을 놓고 정나라와, 괵(虢)나라 사이에 알력이 발생하기 시작하자,

정'장공'은 괵나라를 견제하고 힘을 강화하기 위해 제'희공'과 "석문"에서 맹약하였다.

 

 

기원전 719

주의 14대 천자 주'환왕'(B.C.719~697 재위) 즉위하였다.  위(衛) 공자 '주우'(州吁)가

형 위'환공'(衛桓公, 위의 12대 군주. B.C.734~719 재위)을 시해하여 군위를 찬탈한 후

국내의 비난 여론을 잠재우기 위해 노(魯)· 진(陳)· 채(蔡)· 송(宋)과 연합해

정나라· 제나라를 공격했으나 당시 전성기를 구가하던 정나라의 병력이 워낙 강해 도중에 회군하였다. 

현신 '석작'(石吁)이 묘책을 내어 진(陳)의 원조를 얻어 '주우'와 간신 '석후'(石厚)를 처형한 후 

14대 군주 진'선공'(陳宣公, B.C.718~700 재위)을 옹립하였다. 

송나라 공자 '여이'(與夷)가 숙부 송'목공'(宋穆公, B.C.719~711 재위)을 이어 

15대 군주 송'상공'(B.C.719~711 재위)으로 즉위하였다.  목공 아들 '빙'(馮)은 정나라로 도망쳤다.

 

 

기원전 718

송'상공'이 자신과 적대 관계인 사촌 형제 '빙'을 치기 위해 그가 피난 가 있는 정나라의 "장갈읍(長葛邑)"을

포위 공격하자, 대노한 정'장공'은 송나라를 정벌하기로 결심하였다.

 

 

기원전 716

정'장공'은 송나라를 정벌할 유리한 조건을 마련하기 위해 책사 '제족'(祭足)의 계책을 따라

송나라의 오랜 우방 진(陳)나라와 새롭게 맹약을 체결하였다.

 

 

기원전 715

제나라가 송· 위· 정 3국의 화평을 성립시키기 위해 애썼으나 정나라의 거부로 성과를 거두지 못하였다. 
대신 제· 위· 송 3국이 "와옥"(瓦屋)에서 화의의 맹약을 체결하였다.

 

 

기원전 713

정'장공'은 천자의 명이라 속이고서 제· 노 양국과 함께 송나라를 정벌하였다. 
이에 저항한 송· 위· 채 3국 연합군을 대파하고 소국 대(戴)나라까지 점령하는 혁혁한 전공을 세웠다.

 

 

기원전 712

정'장공'의 부름에 응하지 않은 소국 "성"(郕)과 "허"(許)를 정벌하였다.  정'장공'의 오른팔 '영고숙'은

허나라 정벌시 평소 그를 미워하던 '공손알'(公孫閼)이 몰래 쏜 화살에 맞아 비명 횡사하였다. 

개선 직후 정장공은 강신(降神) 의식을 통해 '영고숙'을 죽인 범인이 '공손알'(公孫閼)임을 밝혀냈다. 
'공손알'은 원혼의 급살을 맞고 즉사하였다.  노나라의 간교한 공자 '휘'(翬)가 노'은공'(魯隱公)의 총애를 받던

공자 '궤'(軌)를 부추겨 노'은공'을 시해하였다.

 

 

기원전 711

노'환공'(魯桓公) 1년,  노나라에서 공자 '궤'가 15대 군주 노'환공'(B.C.711~694 재위)으로 즉위하였다. 
노'환공'은 정나라에 사신을 보내 노'은공' 시해 사건을 감춘 채 전대의 맹약을 갱신할 것을 청하였다. 
정'장공'은 노나라가 무도하다고 생각하면서도 세력 판도를 고려해 이를 수락하였다.

 

 

기원전 710

송나라 태재(太宰) '화독'(華督)이 주군 송'상공'을 시해한 뒤, 정나라에 있는 공자 '빙'을 영입해

16대 군주 송'장공'(宋莊公, B.C.710~692 재위)으로 옹립하고 자신은 재상(宰相)이 되었다.

 

 

기원전 707

주'환왕'이 천자의 명을 사칭해 송나라를 정벌한 정'장공'의 무례를 징계하려고 채·'위·'진(陳) 3국 군대를 이끌고

정나라를 공격했으나 도리어 대패하고 망신만 당하였다.

 

 

기원전 706

북융(北戎)이 제나라를 급습하자 제'희공'은 정'장공'에게 구원 요청하자,  정나라 세자 '홀'(忽)이 출전해

북융을 대파하자 제'희공'은 그에게 청혼하였다. 

'홀'은 제나라는 대국이고 정나라는 소국이라 짝이 안 맞는다는 이유로 거절하였다. 

대신 '홀'은 진'환공'(陳桓公, B.C.744~707 재위)의 딸 '규씨'(嬀氏)와 혼인하였다.
제희공은 딸 문강(文姜)을 노환공에게 시집보냄. 진환공이 서거하자 아우 타(佗)가 세자 면(免)을 죽이고

제후위를 찬탈. 채환후(蔡桓侯, B.C.714~695 재위)는 이 소식을 듣고 아우 채계(蔡季)를 파견해 타를 처형하고,
채나라 공녀 소생이자 생질(甥姪)인 진'환공'의 서자 '약'(躍)을 진'여공'(陳厲公, 진나라의 14대 군주. B.C.706~700 재위)으로 옹립하였다.

 

 

기원전 704

초(楚) 군주 '웅통'(熊通) 이 인근 한수(漢水)의 동쪽 일대 소국들을 차례로 정벌해 부용(附庸)으로 삼고

그들의 맹주가 된 후 부용국 중 하나이자,
주 왕실과 동성(同姓)인 수(隨)나라 군주를 겁박해 왕실에 왕의 칭호를 요청하는 사절로 보냈다. 
주 왕실이 이를 거절하자 '웅통'은 분을 참지 못하고 왕실을 무시한채 독단으로 사상 최초로 왕의 호칭을 사용하였다.

(초무왕(楚武王). B.C.740~690 재위).

 

 

기원전 701

일세를 풍미하던 유력 제후 정'장공' 사망하였다.  세자 '홀'이 제후위를 계승해

4대 군주 정'소공'(鄭昭公, B.C.700, 696~695 재위)으로 즉위하자, 공자 '돌'(突)은 송나라로 피신하였다. 

이로부터 정나라 공실(公室)은 내부 정쟁이 빈발해져 혼란해졌다.

 

 

기원전 700

송'장공'이 사신으로 온 정나라의 제족에게 공자 '돌'을 옹립하도록 겁박하였다.  
그 간계가 성공하여 '돌'이 정나라의 5대 군주 정'여공'(B.C.700~697, 679~673 재위)으로 즉위하였다.
송'장공'은 그 대가로 정'여공'에게 과도한 공물을 요구해 양국 관계가 다시 악화되자,

노'환공'이 중재하려 했으나 실패하였다. 
대신 연· 송· 노 3국 맹약을 체결하였으며, 제'희공'은 '홀'을 쫓아낸 데 대해 정나라를 미워하여

제나라와 정나라의 관계도 악화되었다.

 

 

기원전 699

제나라와 불공대천(不共戴天)의 원수 관계에 있던 기(杞)나라가 제의 급습을 받고 노나라와 정나라에

구원을 요청하였다. 이로 인해 노· 정· 기 3국과 제· 위· 연· 송 4국이 격돌하여 전자가 후자를 격파하자, 

망신을 당한 제'희공'은 울화병을 얻어 이듬해 사망하였다.

 

 

기원전 697

정'여공'이 대부 '제중'의 사위인 '옹규'(雍糾)와 함께 권신 '제중'을 살해할 계획을 세우다 탄로나 실패하였다. 
'제중'은 정'여공'을 물리치고 정'소공'을 6대 군주로 옹립시키자, 

정'여공'은 "역읍(櫟邑)"으로 도주하였으며, 주'환왕'은 세상을 떠났다.

 

 

기원전 696

주나라의 15대 천자 주'장왕'(B.C.696~682 재위) 즉위하였다. 

정여공(鄭厲公, B.C.700~697, 679~673 재위)의 사주를 받은 송(宋)· 노(魯)· 채(蔡)· 위(衛) 4국이 

정나라를 공격했으나 정'장공'의 뛰어난 책사 '제족'(祭足)의 지연 작전으로 패배하였다.  
위나라는 이 와중에 국외에 있는 위'혜공'을 폐하고 '급자'의 동복 동생 '금모'(黔牟, B.C.696~688 재위)를

16대 군주로 옹립하자, 위'혜공'은 제나라로 도망쳤다.

 

 

기원전 695

정나라의 권신 '제족'이 제나라와의 화친을 도모하기 위해 출사한 틈을 타 간신 '고거미'(高渠彌)가

정'소공'(鄭昭公)을 시해하고 공자 '미'(亹, B.C.694 재위)를 옹립하였다.

 

 

기원전 694

제의 13대 군주 제'양공'(齊襄公, B.C.697~686 재위)이 노'환공'(B.C.711~694 재위)의 부인이 되어 친정을

방문한 이복누이 '문강'과 불륜 행각을 벌이자, 이를 눈치채고 대노하는 노'환공'을 제'양공'이 살해하였다. 

제'양공'은 세상의 비난을 무마하기 위해 주군을 시해한 정나라 공자 '미'와 역신 '고거미'를 

"수지"(首止) 땅으로 불러내어 참하였다.  

제'양공'이 원수 기(杞)나라를 침범하자 '기후'(杞侯)는 도주하고 그 동생 '영계'(嬴季)가 항복하였다.

 

 

기원전 693

노'환공' 부인 '문강'은 제나라와 노나라 국경 지대에 머물면서 제'양공'과 계속 사통하였다.

 

 

기원전 690

초'무왕'(楚武王, B.C.740~690 재위)이 자신이 주도한 한수 이동 지대 국가들의 회합에 불참한 수(隨)나라를

정벌하러 가던 도중 사망. 아들 '웅자'(熊貲)가 18대 군주 초'문왕'(楚文王, B.C.689~677 재위)으로 즉위하였다.


 

 기원전 689

제'양공'이 위혜공 '삭'의 요청을 받아들여 송'민공'(宋閔公)· 진'선공'(陳宣公)· 채'애공'(蔡哀公)·

노'장공'(魯莊公) 등과 연합해 위나라를 정벌하였다.

 

 

기원전 688

위'혜공'이 복위되어 17대 군주가 되었다(B.C.687~669 재위).  초'무왕'이 소국 등(鄧)나라를 멸망시켰다.

 

 

기원전 686

제나라 대부인 '연칭'(連稱)과 '관지보'(管至父)가 제'양공'을 시해하고

'공손무지'(公孫無知, B.C.687~685 재위)를  14대 군주로 옹립하였다. 
제'양공'의 두 서자 '규'(糾)와 '소백'(小白)은 각각 외가인 노나라와 거(莒)나라로 도망쳤다.  
이때 '관중'과 '소홀'(召忽)은 '규'를 보필하였고 '포숙아'는 '소백'을 보필하였다.

 

 

기원전 685

제나라 대부 '옹름'(雍廩)이 '공손무지'를 시해하고 '연칭'과 '관지보'도 처형하였다.  
공자 '소백'이 귀국해 제나라의 15대 군주 제'환공'(齊桓公, B.C.685~643 재위)으로 즉위하였다.
공자 '규'는 노나라에서 처형되었고 '포숙아'는 '관중'을 제'환공'에게 추천하자, 제'환공'은 '관중'을 재상으로 삼았다.

 

 

기원전 684

제나라가 공자 '규'를 보호한 책임을 물어 노나라를 공격하자,

노나라는 '조귀'(曹劌)의 활약으로 "장작"(長勺)에서 제나라를 대패시켰다. 
제나라는 송나라와 연합해 노나라를 재공격했으나 노나라 공자 '언'(偃)의 활약으로 패배하였다. 
송나라 장수 '남궁장만'(南宮長萬)이 "승구"(乘丘)에서 노나라에게 포획되었다가 요행히 석방되었다.  
채(蔡)의 12대 군주인 애후(哀侯) '헌무'(獻舞, B.C.694~675 재위)가 식(息)나라 제후의 부인 규씨(嬀氏)를

예로 대하지 않고 희롱하였다. 이에 격분한 식나라 제후가 초'문왕'에게 채를 정벌해줄 것을 요청하자,

초나라는 채나라를 격파하고 '애후'를 포로로 잡고, 초나라에 9년 동안 억류되어 있다가 죽었다.

 

 

기원전 682

주'장왕'이 세상을 떠났다.  송나라 '남궁장만'이 자신을 능멸한 송'민공'(宋湣公, B.C.691~682 재위)을 시해하고

공자 '유'(游)를 옹립하였다. 
또 다른 공자 '어열'(御說)이 '대숙피'(戴叔皮)의 책략과 "소"(蕭)읍 수령 '숙대심'(叔大心)의 원조로 "박"(亳) 땅에서

장만의 아들 '남궁우'(南宮牛)가 이끈 송군을 격파하고 18대 군주 송'환공'(宋桓公, B.C.681~651 재위)으로

즉위하였다.  '남궁장만'은 진(陳)나라로 도망했다가 계략에 의해 송으로 끌려와 처형되었다.
송'환공'은 소읍을 부용국(附庸國)으로 승격시켜 '숙대심'을 제후로 삼았다.

 

 

기원전 681

주나라의 16대 천자 주'희왕'이 즉위(B.C.681~677 재위)하였다.  제'환공', 송'환공', 진(陳)선공 '저구'(杵臼),

채애후 '헌무', 주자(邾子) '극'(克) 등 5국 군주가 "북행"(北杏)에서 회맹하여

제나라를 상국(上國)으로 추대(제'환공'이 주도한 9차 회맹 중 1차)하였다.  
제나라는 회맹에 불참한 노나라를 "가"(柯) 땅에서 문책하려 했는데 도리어 노나라 장수 "조말"(曹沫)이

제'환공'을 위협해 소국들을 보호하고 중원(中原)의 평화를 지킬 것을 약조하게 만들었다. 

제'환공'은 현신 '영척'(寧戚)의 보필을 받고 그를 사신으로 보내 송나라의 내분을 진정시켰다.

 

 

기원전 680

제'환공'의 원조를 받은 정나라 구군(舊君) 정여공 '돌'(突)이 대부 '부하'(傅瑕)의 도움을 얻어

'자의'(子儀)를 죽이고 복위한 후 배은망덕하게도 '부하'를 처형하였다. 
제'환공'·  송'환공'·  위'혜공'·  정'여공' 4국 군주가 "견" 땅에서 회맹(제'환공'의 2차 회맹)하였다. 
초'문왕'이 식나라에 복수하려는 채'애후'의 농간에 넘어가 식나라를 멸망시키고

천하절색인 식후 부인 규씨를 취하였다.

 

 

기원전 678

제'환공'이 송· 노· 진(陳)· 위· 정· 허(許)나라 등을 소집해 "유"(幽) 땅에서 회맹(제'환공'의 3차 회맹)하였으며,

이때 춘추 오패의 선봉이 되었다. 정'여공'이 반대파를 숙청하고 내치를 정돈하였으며, 

진(晉)나라에서 대대로 경(卿)의 지위를 계승한 가문인 곡옥백 '칭'(稱, 곡옥 땅의 영주, B.C.715~679 재위)이 
진 제후의 직할지인 "익"(翼)을 병합해 한동안 내분 상태였던 진을 재통일하고 18대 군주 '무공'(武公)으로 즉위하자,

주'희왕'은 '곡옥백'을 제후로 인정하였다.

 

 

기원전 677

주'희왕' 세상을 떠났다.

 

 

기원전 676

주나라의 17대 천자 주'혜왕' 즉위하였다.(B.C.676~652 재위). 

초'문왕'이 파(巴)나라와 연합해 신(申)나라를 정벌하였다.

 

 

기원전 675

주'장왕'(周莊王)의 아들이자 주'혜왕'의 숙부인 왕자 '퇴'(頹)가 반란을 일으키자, 

'혜왕'은 "역"(櫟)읍으로 몽진(蒙塵)을 떠났다.
초'문왕'을 증오하던 염씨(閻氏) 일족이 파나라와 내통해 반란을 일으키자,  초'문왕'이 도성으로 피했으나

'육권'(鬻拳)이 성문을 열어주지 않고 황(黃)나라를 정벌해 부끄러움을 씻을 것을 종용하였다. 

초'문왕'은 황나라를 "적릉"(踖陵)에서 격파하고 귀환 도중 "추"(湫)에서 사망하였다.

 

 

기원전 673

정'여공'이 "괵"(서괵(西虢))의 제후와 함께 수도 낙읍을 공격하여, '퇴'를 죽이고 주'혜왕'을 복위시키자, 
주'혜왕'이 공로에 보답하기 위해 정'여공'에게 "호뢰"(虎牢) 동쪽의 땅을 하사하였다.

 

 

기원전 672

진'선공'(陳宣公, B.C.692~648 재위)은 총희가 '자관'(子款)을 낳자,

그를 세우려고 태자인 '어구'(御寇)를 살해하였다
이 와중에 공자 경중(敬仲) '완'(完)이 제나라로 피신해 "전"(田) 땅을 하사받고 번성하자 제나라 전씨의 시조가

되었다. 후에 전씨는 제나라 강씨(姜氏) 공실을 찬탈하여 강제(姜齊) 대신 전제(田齊)를 세웠다. 
초나라 왕자 '웅운'(熊惲)이 형왕(兄王) '도오'(堵敖)를 시해하고

20대 군주 초'성왕'(楚成王, B.C.671~626 재위)으로 즉위하였다.

 

 

기원전 671

진'무공'(晉武公)의 뒤를 이은 19대 군주 진'헌공'(晉獻公, B.C.676~651 재위)이 대부인 '사위'(士蔿)의

계책을 빌려 자신과 한 핏줄이지만 경계의 대상이었던 '곡옥백'(曲沃伯)의 후손들을 숙청하였다.

 

 

기원전 670

노'장공'과 제'양공' 딸 '애강'이 혼인해 양국의 우호가 돈독해졌으며 이때 양국은 똑같은 폐백(幣帛)을 교환하였다. 
'어손'(禦孫)은 이것이 예의가 아님을 충간하였으며, 정'문공'은 제나라에 동맹 요청하였다.

 

 

기원전 666

제'환공'이 위나라를 공격하였다.  초나라 영윤(令尹) '자원'(子元)이 초'문왕'의 미망인 '식규'(息嬀)에 흑심을

품었다가 무안을 당한 후 체면을 세우려고 정나라를 공격하였으나 성과 없이 귀국하였다. 

진(晉)'헌공'의 총첩(寵妾) '여희'(驪姬)가 계책을 써 태자 '신생'(申生)과 공자 '중이'(重耳), '이오'(夷吾) 등을

각각 변방인 "곡옥"(曲沃)· "포"(浦)· "굴"(屈) 땅으로 쫓아버려 그 세력을 크게 꺾었다.

 

 

기원전 664

초나라 투씨(鬪氏) 일파가 오만무도한 영윤 '자원'을 살해하였다.

현명한 투곡오도(鬪穀於菟, 자문(子文))가 영윤이 되어 가재(家財)를 염출해 재정난을 해소시켰다. 
제나라가 천신만고 끝에 인근 야만족 산융을 정벌해 연나라를 구원하고 산융의 두 나라인 "영지"(令支)와

"고죽"(孤竹)의 영토 500여 리를 빼앗아 연나라에게 주었다. 
연나라는 "산융" 땅 500리와 함께 제나라 내 "연류"(燕留) 땅 50리를 별도로 얻어 신흥 북방 대국이 되었다. 

이는 제'환공'의 대표적인 존왕양이(尊王攘夷) 업적이다.

 

 

기원전 662

노'장공' 사망하였다.  공자 '경보'(慶父)가 노'장공' 미망인이자 형수인 '애강'(哀姜)과 사통(私通)한 후

그와 공모하여 '맹임'(孟任) 소생의 세자 '반'(般)을 죽이고 공자 '계'(啓, 일명 개(開))를

17대 군주 노'민공'(魯閔公, B.C.661~660 재위)으로 옹립하였다.

 

 

기원전 661

주'혜왕'(周惠王) 16년, 노'민공'(魯閔公) 1년, 노'민공'이 제'환공'을 만나 고립무원인 자신의 처지를 호소하였다. 
진(晉)나라가 이군(二軍)을 양성하고 경(耿)나라와 곽(瀖)나라를 정벌하였다.

 

 

기원전 659

노의 공자 '신'(申)이 숙부 '계우'(季友)의 도움과 제'환공'의 원조하에 노나라의 내분을 수습하고

18대 군주 '노공'(B.C.659~627 재위)으로 즉위하였다.
즉위 후 노'희공'은 내란 평정의 일등 공신인 '계우'에게 "비읍"과 "문양" 땅을 하사하였다. 
또 '경보' 아들 '오'(敖)에게 성읍을, '숙아' 아들 '자'(玆)에게 후(郈)읍을 각각 하사해 위로하였다. 
후에 '계우'는 계손씨(季孫氏), '오'는 맹손씨(孟孫氏), '자'는 숙손씨(叔孫氏)의 개조가 되어

삼환씨(三桓氏) 정립(鼎立) 형세가 시작되었다. 위나라 공자 '훼'(燬)가 제나라에 망명해 있다가

제'환공'의 원조 아래 본국으로 돌아가 20대 군주 위'문공'(衛文公, B.C.659~635 재위)으로 즉위하였다. 

북쪽의 오랑캐가 "형"(邢)나라를 유린하자, 

제'환공'은 "이의"(夷儀)에 성을 쌓아 형나라 사람들을 이주시켜 은혜를 베풀고 형나라를 복국시켰다. 
초나라가 오랜 우호 관계를 배반하고 제나라에 의지하고 따르려 한 정나라를 정벌하였다.

 

 

기원전 658

제'환공'이 제후들을 이끌고 "초구"에 성을 쌓아 위나라 사람들을 안심시킨 후 은혜를 베풀어 위나라를 복국시켰다. 
노· 위· 형(邢)을 구원한 것은 계절존망의 대표 사례이다.  진(晉)나라의 '순식'(荀息)이 변경을 위협하는

우(虞), 괵 양국을 멸하기 위한 계책을 수립하였다, 
곧 진나라의 둘도 없는 국보(國寶)인 "굴"(屈)의 명마와 "수극"(垂棘)의 벽옥을 우(虞)나라 군주에게 뇌물로 주고

우나라의 원조를 받아 괵의 수도 "하양"을 점령하였다.

 

 

기원전 657

제· 노· 송· 강(江)· 황(黃)나라가 "양곡"(陽穀)에서 회맹하였다. (제환공의 4차 회맹).  
정'문공'(B.C.672~628 재위)이 초나라와 다시 강화하려 하자, '공숙'(公叔)이 제나라의 은덕을 저버려서는 안 된다고 반대하였다. 
제'환공' 부인 '채희'(채목후(蔡穆侯)의 누이)가 제'환공'을 노엽게 해 친정으로 쫓겨가자,

분노한 '채목후'는 그녀를 곧바로 초'성왕'에게 재가시켰다. 제'환공'은 이를 원망하였다.

 

 

기원전 656

제환공· 노희공· 송환공· 진선공· 위문공· 정문공· 허목공(許穆公)· 조소공(曹昭公)이 이끄는 8국 연합군이

초의 우방 채나라를 정벌하고 이어 초나라를 총공격하였다. 
초나라의 '굴완'(屈完)이 외교 수완을 발휘해 유혈전 없이 화평하게 위기를 넘겼다.  
중원 8국과 초나라는 "소릉"(召陵)에서 맹약해 상호 불가침 조약을 체결하였다. (제환공의 5차 회맹). 

이후 당분간 초나라는 중원을 도모하지 못하였다. 
정나라 대부 '신후'(申侯)가 진(陳)의 대부 '원도도'(轅濤塗)의 말을(8국 연합군의 귀환로인

정(鄭), 진(陳) 양 나라의 부담을 덜기 위해 군사들을 동해(東海) 지역으로 우회시키자고 제안했음)

제'환공'에게 고자질해 "호뢰"(虎牢) 땅을 얻었다.   제'환공'은 불충을 응징하려고 진(陳)나라를 공격하였다. 
진'헌공'(晉獻公, B.C.676~651 재위)의 총첩 '여희'가 계교를 써서 태자 '신생'(申生)을 자결하게 하고,

공자 '중이', '이오'도 추방한 후 아들 '해제'를 세자로 옹립하였다.

 

 

기원전 655

제환공· 송환공· 노희공· 진선공· 위문공· 정문공· 조소공· 허희공 등 8국 제후들이 "수지"(首止)에서

주나라 태자 '정'(주양왕)을 섬길 것을 맹세하였다.(제환공 6차 회맹). 
정'문공'은 주'혜왕'의 사주를 받아 회맹에 불참하고 중도 귀국하였다. 
진'환공'(晉桓公)이 재차 우나라와 협력해 괵나라를 전멸시킨 후 든든한 우방이 없어진 우나라도 손쉽게 멸하였다. 

진'헌공'이 후궁의 일을 맡아 보던 '발제'(勃鞮)를 "포"(蒲) 땅으로 보내 '중이'를 없애려 하자,

'중이'는 책(翟)나라로 도망갔다. 
이후 '중이'의 기나긴 19년의 주유천하(周遊天下) 시작하였고 '호언', '호모', '조쇠', '위주', '호사고', '전힐',

'·개자추', '선진', '호숙' 등이 '중이'를 따랐다.

 

 

기원전 654

7국 군주들이 회맹에 불참한 정나라를 공격하였다. 

정나라는 두려워서 제나라를 버리고 초나라를 섬기려던 계책을 포기하였다. 
진(秦)의 14대 군주 진'목공'(秦穆公, B.C.651~621 재위)이 현신 중의 현신 '백리해'를 중용하였다. 
이후 진'목공'은 '백리해', '건숙', '서걸술', '건병(건숙의 아들), '요여' 등의 보필 아래

인근 서융 부락들을 차례로 정벌하여 서융 패주(覇主)가 되는 한편 착실히 중원 패업의 기초를 닦게 되었다.

 

 

기원전 653

제'환공' 주도로 8국이 "영모"(寧母)에 모여 재차 회맹하였다. (7차 회맹).  

정'문공'의 세자 '화'(華)가 부친 대신 회맹에 참석하여 제'환공' 앞에서 평소 미워하던 정나라의 어진 신하

'숙첨'(叔詹), '공숙'(公叔), '사숙'(師叔)을 모함했다가 귀국 후 정'문공'의 노여움을 사 감금됨되었다.  

주'혜왕이 세상을 떠났다.

 

 

기원전 652

주나라 태자 '정'은 주'혜왕'의 붕어를 숨긴 채 제'환공'에게 비밀리에 원조를 요청하자,

이에 8국 군주들이 재차 조나라 땅에서 태자를 섬길 것을 맹서하였다. (8차 회맹). 
진(晉)나라 '이극'(里克), '양유미', '괵석'(虢射) 등이 북쪽의 오랑캐를 "채상"(采桑)에서 격파하였다. 
송나라의 공자 '어'(魚)가 군주의 지위를 이복 동생이자 적자(嫡子)인 '자보'(玆父)에게 양보하니, 

'자보'가 19대 주양공(周襄公, B.C.650~637 재위)으로 즉위하였다.

 

 

기원전 651

주나라 태자 '정'이 8국 제후의 보필 아래 18대 천자인 주'양왕'(B.C.651~619 재위)으로 즉위하여

종묘 제사를 지낸 후 제사 고기를 제'환공'에게 하사해 왕위 옹립의 공로를 표창하였다. 

제'환공'은 "규구"(葵丘) 회맹을 소집하였다. (9차 회맹). 
진(晉)나라는 '이극'(里克)과 '비정보'(丕鄭父)가 공모해 '순식'(荀息), '양오'(梁五), '동관오'(東關五),

'해제'(奚齊), '탁자'(卓子) 등 '여희' 일파들을 모두 살해하자 '여희'는 연못에 몸을 던져 자살하였다.

 

 

기원전 650

진(晉)나라 '극예'(郤芮)의 추대를 받은 '이오'(夷吾)가 진(秦)나라 원조하에 귀국해

20대 군주 진'혜공'(晉惠公, B.C.650~638 재위)으로 즉위하였다. 
즉위 후 진'혜공'은 자신의 옹립을 반대한 '이극'에게 자결을 명했고 진(秦)나라에 약조한 "하서"(河西) 지역의

5성(城)도 주지 않았다.  충신 '호돌'(狐突)이 공태자(恭太子) '신생'(申生)의 혼령을 만났다. 

'신생'은 '이오'를 벌할 것을 약속하였다. 
진'혜공'은 '여이생'(呂飴甥), '극예', '도안이'(屠岸夷) 등의 간악한 흉계를 믿고 비정보, '기거', '공화', '가화', '

숙견', '추천', '누호', '특궁', '전기' 등 대신 9인을 참살하였다.

 

 

기원전 649

주'양왕'의 이복 동생인 '태숙대'(太叔帶)가 "이"(伊), "낙"(雒), "양"(揚), "거"(莒), "천"(泉), "고"(皐) 땅의

이민족을 부추겨 왕성을 침범하게 하였다.  진'혜공'(晉惠公), 진'목공'(秦穆公), 제'환공'이 왕성을 구원하였다.

 

 

기원전 648

융적의 침입이 '태숙대'(太叔帶)의 소행임을 알게 되자 주'양왕'은 '태숙대'(太叔帶)를 추방하자,

'태숙대'(太叔帶)는 제나라로 도망갔다.

 

 

기원전 647

회이(淮夷)가 기(杞)나라를 침범하자 제'환공'은 송· 노· 진· 위· 정· 허(許)· 조(曹)의 8국과 "함"(鹹)에서 회합한 후

회이를 격파하여 기나라를 구원하였다. (존왕양이)
진(秦) 목공이 수만 석의 곡식을 보내 진(晉)나라의 기근을 구함 (범주지역(汎舟之役)).

 

 

기원전 646

진(秦)나라에 흉년이 들어 진(晉)에 구원을 청했으나 응하지 않자, 진'목공'은 크게 분노하였다.

 

 

기원전 645

진'목공'(秦穆公)이 진(晉)을 징벌하고 진'혜공'을 사로잡았다. 

'백리해' 등의 충간과 부인 '목희'(穆姬, 진목공의 정부인인 진(晉) 공녀)의 탄원으로 진'혜공'을 석방하는 대신

"하서"(河西) 5성(城)을 바칠 것과 세자 '어'(御)를 볼모로 보낼 것을 요구하였다. 

제나라 '관중' 사망하자, '포숙아'가 국정 담당하였다.

 

 

기원전 644

제'환공'이 주유천하(周遊天下) 중인 진(晉) 공자 '중이'(重耳)를 맞이해 극진히 예를 다해 대접하고

자신의 딸 '제강'(齊姜)을 시집보내 제나라에 정착하게 하였다.

 

 

기원전 643

주'양왕'(周襄王) 9년, 노'희공'(魯僖公) 17년) 진(晉)나라 세자 '어'(圉)가 진(秦)나라에 볼모로 왔다. 
제(齊, 음력 12월 을해(乙亥)일에) 춘추 최초의 패업(覇業)을 이룬 일세의 웅군(雄君) 제'환공' 세상을 떠났다. 
그 사후 간신 '역아'(易牙)와 내시 '초'(貂)가 전권을 잡고 '

장위희'(長衛姬) 소생의 서장자(庶長子) '무휴'(無虧)를 옹립하였다. 
이에 '환공' 생존시 어진 인품에 의해 세자로 책봉되었던 '소'(昭)는 송나라로 도주하였고

'무휴'와 나머지 세 아들들이 군위를 놓고 분쟁을 벌여 '환공'의 시체는 두 달이나 방치되었다.

 

 

기원전 642

송나라 19대 군주 '양공'(襄公, B.C.650~637 재위)이 세자 '소'를 지켜주기로 한 제'환공'과의 약속을 지키기 위해

조(曹)· 주(邾)· 위(衛) 3국 군대를 이끌고 제나라를 공격.
'무휴'를 죽이고 '소'를 제나라 16대 군주 '효공'(孝公, B.C.642~633 재위)으로 옹립하였다.

 

 

기원전 641

송'양공'이 제'환공' 패업(覇業)을 계승하려는 야심으로 주변 소국인 등· 조(曹)· 주· 증나라를 회맹에 소집하였다. 
회맹에 늦은 증나라 군주를 처형해 수신(水神) 제사의 희생으로 삼는 만행을 저지르는 한편, 
도중에 귀국해버린 조나라를 응징하기 위해 조나라를 공격했으나 형세가 불리하여 곧 강화를 맺었다. 

초· 정· 노· 제· 진(陳)· 채의 6국이 제나라에서 회맹하였다.

 

 

기원전 639

송'양공'· 초'성왕'· 제'효공' 3국 군주가 "녹상"(鹿上)에서 회합하였다.  
송'양공'은 중원 제후들의 대회맹을 개최하고 자신이 맹주가 되겠다는 뜻을 알리고 협조를 요청하였다. 
가을에 송'양공'· 초'성왕'· 진(陳)'목공'· 채'장후'(蔡莊侯)· 정'문공'· 허'희공'· 조'공공'(曹共公) 등

7국 군주가 "우"(盂)에서 회맹하였으나, 제'효공'은 불참하였다. 
초나라 '성왕'(成王, B.C.671~626 재위)은 맹주로 추대되려는 송'양공'의 계책을 저지하고 매복시킨 군사를 풀어

송'양공'을 감금한 후 "박"에서 진· 채· 정· 허· 조· 노 6국을 재소집해 맹주로 추대되었다. 

그후 송'양공'을 석방하여 실리와 인의(仁義)의 공명을 모두 얻었다.

 

 

기원전 638

송'양공'이 위· 허· 등(滕)나라를 이끌고 초'성왕'을 맹주로 추대하는 데 앞장선 정나라를 공격하였다. 
그를 구원하러 온 초나라 군대와 "홍양"(泓陽, 홍수(泓水)의 북쪽)에서 접전을 벌였다.  

이때 기습 공격을 하자는 주위 권고를 뿌리치고 인의를 그릇되게 앞세워 
초군이 홍수를 건너와 군진(軍陣)을 치고 대오(隊伍)를 모두 정비할 때까지 기다렸다가 비로소 공격해 대패하였다. 
송나라 사람 모두가 이 어리석은 '송양지인(宋襄之仁)'을 비웃었다.

 

 

기원전 637

진(晉)'혜공' 세상을 떠나자, 진(秦)나라에 볼모로 가 있던 세자 '어'(圉)가 몰래 돌아와 21대 군주 '회공'(懷公, B.C.637 재위)으로 즉위하였다. 
'회공'은 국외의 '중이'를 압박하기 위해 '중이'의 주유천하를 보필한 신하들의 친족을 위협하고 본보기로

충직한 노대신 '호돌'(狐突)을 처형하는 등 부친 '혜공'처럼 무도하고 신의 없는 정치를 하여 인심을 잃었다. 
초나라의 영윤 "자문"(子文, B.C.664~637 재직)이 은퇴하고 '성득신'(成得臣, B.C.637~632)이 영윤이 되었다.

 

 

기원전 636

진(晉)나라 공자 '중이'가 진(秦)나라 '목공'의 원조하에 19년 간의 주유천하를 마치고 귀국해 '회공'을 쫓아내고

22대 군주 '문공'(文公, B.C.636~628 재위)으로 즉위하였다. 
즉위 직후 모반을 꾀한 간신 '여이생'(呂飴甥)과 '극예'(郤芮)를 처형한 외에는 과거를 일체 불문에 부친다고 선포하고

공정하게 논공행상을 실시함으로 '헌공'(獻公, B.C.676~651 재위) 이래 사분오열된 진(晉)나라를 크게 안정시켰다.

'개자추'는 논공행상을 구차하다고 피한 후 산속으로 들어가 끝까지 절개를 지키다 죽었다. 

정'문공'(B.C.672~628 재위)이 속국 활나라의 일에 간섭하려는 주'양왕'의 사신을 감금하였다. 
대노한 '양왕'은 책(翟)나라에 명해 정나라를 정벌한 후 책나라 공녀 '숙외'를 왕후로 삼았다. 
주'양왕'의 이복 동생 '태숙대'가 외후(隗后)와 사통한 사실이 밝혀지자,

외후 친정인 책나라의 원조를 얻어 '양왕'을 공격하자, '양왕'은 정나라로 몽진하였다.

 

 

기원전 635

진'문공'이 '양왕'을 왕성으로 모셨다.  '태숙대'을 잡아 참한 후 '양왕'은 진'문공'에게 내란 평정의 공을 치하하면서 
왕성(王城) 근처의 "온"(溫), "원"(原), "양번"(陽樊), "찬모" 4읍을 하사하였다.

이에 '조쇠'(趙釗)를 원대부(原大夫)로, '극진'(郤溱)을 온대부(溫大夫)로 삼았다.

 

 

기원전 633

초나라 영윤 '성득신'이 초· 진(陳)· 채· 정· 허 5나라 군사를 규합해 송나라를 정벌하자, 

송나라는 진(晉)나라에 구원군을 요청하였다. 진(晉)나라는 초나라에 붙은 조(曹)· 위(衛)나라를 공격한 후

초나라를 제압하고자, 조· 위나라 땅을 송나라에게 하사하고 제· 진(秦)나라와 결탁하였다. 

제'효공'(齊孝公)이 세상을 떠났다.

 

 

기원전 632

진'문공'은 초나라에 빌붙었음에도 내정이 특히 어지러운 조(曹)나라를 재차 정벌한 후 간신배를 대숙청하였다. 
지난날 조나라에서 유일하게 자신을 후대한 '희부기'(僖負羈)에게는 후한 포상을 하자,
'위주'(魏犨)와 '전힐'(顚頡)이 이를 시기하여 '희부기'의 저택을 방화해 그를 죽게 하였다. 

이 와중에 그들도 화상을 입어 '전힐'은 죽고 '위주'도 중상을 입었다. 
4월 기사(己巳)일에 "성복" 전투에서 초나라가 진(晉)· 진(秦)· 제· 송의 4국 연합군에게 대패하였다. 
이때 진'문공'은 초나라 군대 앞에서 3사(舍 : 90리를 후퇴해 신의를 지키라고 충간한 '호언'(狐偃)이 일등 공신으로, 
기묘한 전술로 초군을 격파한 '선진'(先軫)이 이등 공신으로 표창되었다. 

반면 군명을 어긴 '전힐', '기만', '주지교' 등을 참하여 신상필벌의 엄정함을 보였다. 
초나라 원수(元帥) '성득신'(成得臣)은 귀환 도중 "연곡"(連穀)에서 자살하였다,

이때부터 초나라 내에서 대세족(大勢族) 성씨의 입지가 크게 약화되었다. 
진(晉)'문공', 5월 계축(癸丑)일에 "천토"(踐土)의 회맹을 개최하자, 제'소공', 송'성공', 정'문공', 노'희공',

진(陳)'목공', 채'장후(蔡莊侯)· 주· 거 등 8국이 참석하였다.  위(衛)나라는 진'문공'의 노여움을 사 초청되지 못했고,

허(許)나라는 초나라에 빌붙었기 때문에 불참하였으며, 진(秦)'목공'도 거리가 멀어 불참하였다. 
위'성공'(B.C.634~600 재위)은 동생 '숙무'(叔武)와 현신 '원훤'(元咺)을 보내 진'문공'에게 사죄하고

동맹에 들 수 있도록 요청하게 하였다.
주'양왕' 21년, 노희공(魯僖公) 28년, 위'성공'이 간신 '천견'(歂犬)의 이간질로 '숙무'(叔武)와 '원훤'(元咺)의

충정을 오해해 '원훤'의 아들 '원각'(原角)을 처형하였다.  

'숙무'와 '원훤'은 진'문공'(晉文公)에게 위'성공'의 복위를 호소해 허락을 받았다. 

이에 위'성공'은 "양우"(襄牛) 땅에서 귀국하였다. 
'천견'(歂犬)은 이간 음모가 탄로날까 두려워 귀국하자마자 '숙무'를 살해하였으나, 자초지종을 알게 된 위'성공'은

'천견'을 처형했으나 '원훤'은 진(晉)나라으로 달아나 위'성공'과 '천견'의 죄상을 고발해 소송(訴訟)을 제기하였다. 

진'문공'은 귀국 후 논공행상을 철저히 실시하였다. 
음력 10월 초하루에 진(晉)문공 주도로 제'소공', 송'성공', 정'문공', 노'희공', 진(秦)'목공', 채'장후'(蔡莊侯),

진'공공'(陳共公)· 주· 거 등 10국 제후가 "온"(溫) 땅에서 회합하고 주'양왕'(B.C.651~619 재위)에게

조례(朝禮)를 올렸다. 이와 함께 위'성공'에 대한 재판을 개최해 유죄 판결을 내렸다.

'원훤'은 위나라로 돌아가 공자 '하'(瑕)를 옹립하였다. 
진'문공' 발병, 이에 조(曹)나라 내관 '후누'(侯獳)가 복관(卜官)을 매수해 조나라를 복국시키도록 공작하였다.

진(晉)나라가 삼행(三行) 부대를 새로 육성하였다 
'순림보'(荀林父)가 중행(中行) 대장, '도격'(屠擊)이 우행(右行) 대장, '선멸'(先蔑)이 좌행(左行) 대장이 되었다.

 

 

기원전 630

진(晉)'문공'은 의원 '연'(衍)에게 위'성공'을 독살하라고 명했으나 '영유'가 그를 매수해 독살극만 벌였다. 

노'희공'의 중재로 위'성공'은 석방되었다. 
위'성공'은 '주천'(周歂)· '야근'(冶廑) 등과 공모하여 밀입국해 '원훤'을 살해한 뒤 공자 '하'(瑕)를 자살케 하고

공자 '의'(儀)를 죽였다.  진(晉)나라와 진(秦)나라가 두 마음을 품고 초나라와 내통한 정나라를 공격하자,

정나라는 일촉즉발의 위기를 '촉무'(燭武)의 언변으로 극복하였고, '촉무'는 진(秦)목공을 교묘한 말로 설득해

철군하게 하였다.  '숙첨'(叔詹)은 진'문공'을 당당한 기개로 감복시켜 정에 대한 포위를 풀게 하는 대신 

진'문공'과의 약조하에 진나라에 망명해 있던 서공자(庶公子) '난'(蘭)을 세자로 모셔갔다. 
진'문공'과 주유천하를 함께한 '위주'(魏犨)· '호모'(狐毛)· '호언'(狐偃) 등이 사망하였다. 

대신 진'문공'은 '극예'(郤芮)의 아들로 성품이 어진 '극결'(郤缺)을 등용하였다.

 

 

기원전 629

진(晉)나라가 새롭게 5군(軍)을 양성하였다.

 

 

기원전 628

초나라는 진(晉)나라의 강성에 불안을 느껴 강화를 요청하였다. 

진나라가 그를 수락하여 "성복"(城濮) 전투 이후 최초로 양국이 서로 교의를 통하였다.

춘추 오패의 2대 패자 진'문공'이 죽었다.

진(秦)'목공'(B.C.659~621 재위)은 정나라가 진(秦), 진(晉) 양국과 이중 타협한 사실을 알고 크게 분노하였다. 
이에 정나라를 응징하고 진(晉)나라에게서 중원(中原) 패권을 빼앗기 위해 대병력을 출정시켰다.

 

 

기원전 627

진(晉)'문공'의 두번째 부인 '핍길'(偪姞) 소생의 세자 '환'(驩)이 23대 군주 '양공'(襄公, B.C.627~621 재위)이

즉위하였다. 
정나라의 11대 군주 목공(穆公) '난'(蘭, B.C.627~606 재위)이 즉위하였다. 
2월에 진군(秦軍)이 정나라 국경에 도착했으나 정나라 소장수 '현고'(弦高)의 지혜로 정나라는 위기를 벗어나고

대신 인근 소국 활(滑)나라가 멸망하였다.
진(秦), 진(晉)나라가 험난한 "효산"에서 전투를 벌여 진(秦)나라가 대패하였다. 
진(秦)나라의 세 장수 '맹명'(孟明)· '백을병'(百乙丙)· '서걸술'(西乞術)은 진(晉)나라에 포획되었다가 
진공녀(秦公女)이자 진'문공' 부인 '문영'(文嬴)의 도움으로 요행히 석방되어 귀국하였다. 
진(晉)'양공'이 석방해준 것에 분노한 나머지 중군 원수(中軍元帥) '선진'(先軫)은 진'양공'의 얼굴에 침을 뱉는

무례를 범하였다.

진(秦)'목공'은 소복을 입고 세 장수를 영접하였으며, 패배를 위로하고 자책하였다. 

책(翟)나라 군주 '백부호'(白部胡)가 진(晉)나라에 침입하였다. 
'선진'은 책나라를 격파한 뒤 지난날 주군에게 침을 뱉은 자신의 죄를 갚기 위해 책군(翟軍) 속에서 옥쇄(玉碎)하였다.
허, 채나라가 진'문공' 사후 다시 초나라에 복속되었다.

이에 진군(晉軍)과 초군(楚軍)이 치수에서 대치했다가 결전 없이 서로 물러났다.  노'희공'이 죽었다.

 

 

기원전 626

노나라의 19대 군주 '문공'이 즉위(B.C.626~609 재위)하였다. 
초나라 세자 '상신'(商臣)이 '투발'을 참소한 사건으로 인해 자신을 미워하던 부왕 '성왕'(成王)을 시해하고,

21대 군주 '목왕'(穆王, B.C.625~614 재위)으로 즉위하였다.  진(晉)나라가 위나라를 정벌하였다.

 

 

기원전 624

진(秦), 진(晉)나라가 "팽아"(彭衙) 땅에서 격돌하여 두번째 싸움에서 진(秦)나라가 승리해

"효산"(崤山) 전투의 수모를 갚고 "효산"에 묻힌 백골들을 거둬 장사지냈다. 
적반(赤班)을 비롯한 서융 20여 개 부락 군장들이 진(秦)'목공'에게 귀복(歸服)하여 진목공을 백주(伯主)라

높여 부르고 자신들을 신하라 칭하였다.  이에 진'목공'(秦穆公)은 서융의 패자(覇者)가 되었다.

 

 

기원전 623

초나라 '목왕'(穆王)이 "회수"(淮水) 유역의 소국 강(江)나라를 멸망시켰다.

 

 

기원전 622

초나라 '목왕'이 "회수" 유역의 소국 요(蓼)나라를 멸망시켰다.

 

 

기원전 621

진'목공'이 세상을 떠났다. (서거하기 얼마 전에 목공의 딸 '농옥'(弄玉)과 그 부군인 '소사'(蕭史)가

각각 봉황과 용을 타고 승천했는데, 이로 인해 진목공도 신선 사상에 심취했다는 전설이 전해짐). 
'목공' 장례시에 서융의 순장(殉葬) 풍습을 따라 '삼량(三良)'이라고 칭송되던 자차씨(子車氏), 허사(虛辭))의

세 아들 '엄식'(奄息)· '중행'(仲行)· '침호'(鍼虎)를 비롯해 177인을 순사(殉死)시켰으며

진나라 사람들이 그를 애도해 황조시(黃鳥詩)를 지어 불렀다. 
진'양공'(晉襄公)이 세상을 떠났다.  '조쇠'(趙衰)의 아들 '조돈'(趙盾)이 정권 장악하였다.  
'조돈'의 정적 '호사고'는 진(陳)나라에 머물러 있는 '양공'의 동생 공자 '낙'을 옹립하려다 계획이 탄로나자

동생 '호국거'를 시켜 조돈의 조력자 '양처보'를 살해하였다.  '호국거'가 체포되자 '호사고'는 책(翟)나라로 도망갔다.

 

 

기원전 620

진(秦)'목공'의 세자 '앵'(罌)이 15대 군주 '강공'(康公, B.C.620~609 재위)으로 즉위하였다. 
'조돈'은 조야의 반대로 진(秦)나라에 가 있는 장성한 공자 '옹'(雍)을 군주로 옹립하려던 뜻을 번복하고

어린 세자 '이고'(夷皐)를 24대 군주 영공(靈公)으로 옹립하였다. 
이 때문에 진(晉)과 진(秦)나라의 군대가 "영호"(令狐)에서 격돌해 진(秦)나라가 패배하였다. 

노나라의 '맹손오'(孟孫敖)가 거(莒)나라에 후처를 구하려다가 거절당하자 
동생 '중수'(仲遂)의 부인으로 삼겠다는 핑계를 대고 영접하러 가서는 그 미색에 혹해 자신이 취하였다. 
이에 '중수'(仲遂)가 '공손오'를 치려 하자 '숙중혜백'(叔仲惠伯)이 그를 중개해 화해하게 하고

'맹손오'의 새 부인을 거나라로 돌려보내게 하였다.

 

 

기원전 619

진(晉)나라 '조돈'(趙盾)의 전횡에 불만을 품고 작당해 반란을 일으키려던 '선도'(先都)· '기정보'(箕鄭父)·

'양익이'(梁益耳)· '괴득'(蒯得)· '사곡'(士穀) 5인의 음모를 사전에 발각해 체포하여 처형하였다. 

주'양왕' 세상을 떠났다.  송나라 21대 군주 '소공'(B.C.619~611 재위) 즉위하였다.

 

 

기원전 618

주나라의 19대 천자 '경왕'(敬王, B.C.618~613 재위)이 즉위하였다.  
초나라가 정나라를 공격, 위가(蔿賈)의 계책으로 정나라 군대를 크게 격파하고 정나라의 항복을 받았다.  
이어 초나라를 배반하고 진(晉)나라에 신하의 나라로 예속한 진(陳)나라도 정벌하였다.

 

 

기원전 617

초'목왕'은 정'목공', 진'공공'(陳共公), 채'장후'(蔡莊侯)와 함께 "궐맥" 땅에서 회맹하였다. 

송나라는 초나라의 위세를 두려워해 뒤늦게 와서 화평을 청하였다. 
송'소공'(宋昭公, B.C.619~611 재위)은 초'목왕'을 초청해 "맹제"(孟諸, 정나라 변경에 있는 대삼림 지대)에서

사냥하던 중 큰 수모를 겪었다.

 

 

기원전 616

책(翟)나라가 천하장사 '교여'(僑如)를 보내 노나라를 침략하자,

노대부 '종생'(終甥)의 책략으로 노나라는 '숙손'(叔孫)을 시켜 추격하게 하여 "함"(鹹)에서 격파하고, 

'교여'(僑如)를 살해했다.  노나라는 제, 위나라와 연합해 책나라를 멸망시켰다.

 

 

기원전 615

진(秦), 진(晉)나라가 "하곡"(河曲)에서 대치했으나 별 접전 없이 철수하였다.

 

 

기원전 614

진(晉)나라의 '유병'(臾騈)과 '조돈'(趙盾)이 '수여'(壽餘)의 계책을 이용하여 진(秦)나라에 3년간이나 억류된

모신 '사회'(士會, 일명 범부자(范武子))를 은밀히 빼내 귀국하게 하였다.   초'목왕'이 죽었다. 

 

 

기원전 613

주'경왕'이 세상을 떠났다.   혜성이 북두 사이에 출현, 사관(史官)이 이를 보고 송· 제· 진(晉) 3국 군주가 7년 안에

모두 변사(變死)할 것이라고 예언하였다,  이 예언은 B.C.611년 송'소공'(宋昭公) 시해,

609년 제'의공'(齊懿公) 시해,

607년 진'영공'(晉靈公) 시해 등 세 사건을 통해 증명되었다.
초나라 22대 군주 '장왕'(莊王, B.C.613~591 재위)이 즉위하였다. 

진(晉)나라의 '조돈'(趙盾)이 초나라 국상(國喪)을 기회로 진나라의 맹주 지위를 확고히 하기 위해 "신성"(新城)에서

중원 제후들을 소집하였다.  송'소공'· 노'문공'· 진(陳)'영공'· 위'성공'· 정'목공'· 허'소공' 등 6국 군주 참석하였다. 
이 6국은 불참한 채나라를 공격했으나 채나라가 강화를 청하였다. 
노나라의 최대 세경가(世卿家)인 삼환씨(三桓氏, 15대 군주 환공(桓公)의 후손 세 가문)의 하나인 '맹손오'(孟孫敖)가

제나라에서 객사하였다. 제'소공'이 죽었다.  소공의 이복 동생 '상인'(商人)이 세자 '사'(舍)를 시해하고

18대 군주 '의공'(懿公, B.C.612~609 재위)으로 즉위하였다. 

즉위 후 세자 생모인 노나라 공녀 '소희'(昭姬)를 유폐시키자,

'소희'는 은밀히 노'문공'에게 자신의 처지를 알렸으며 노'문공'은 주'광왕'(周匡王)에게 호소하였다. 
주'광왕'은 왕실의 경사(卿士)인 '선백'(單伯)을 보내 '의공'의 잘못을 꾸짖자 '의공'은 '선백'과 '소희'를 감금하였다.

 

 

기원전 612

주나라의 20대 천자 '광왕'(匡王, B.C.612~607 재위)이 즉위하였다. 

제'의공'이 '소희' 문제로 노나라를 침공하였다. 
노나라는 진(晉)나라에 구원 요청하자, 진나라의 권신 '조돈'(趙盾)은 송· 책· 위· 진(陳)· 정· 조(曹)· 허나라와 함께

제나라 정벌을 계획하였다.  이에 놀란 제'의공'은 화의를 청하고 '선백', '소희'를 석방하였다.

 

 

기원전 611

송 공자 '포'(鮑)가 '소공' 조모인 '왕희'(王姬, 주'양왕' 누이이자 송'양공' 부인)의 도움 아래 형인 '소공'을 시해하고

군위를 찬탈하였다.  송· 제· 진(晉) 3국 군주가 변사(變死)할 것이라는 예언 중 하나가 증명되었다. 

22대 군주 송'문공'(文公, B.C.610~589 재위)으로 즉위하였다.

 

 

기원전 610

진(晉)나라는 송나라의 내분을 징계하기 위해 위· 진(陳)· 정 3국 군대를 이끌고 출정했으나 송의 뇌물을 받고

그냥 돌아갔다. 진(晉)나라의 신의가 없음을 본 정'목공'은 다시 초나라에 의탁하였다. 

초'장왕'은 '신무외'(申無畏)와 '소종'(蘇從)의 충간에 감동하여 3년 간의 주색잡기를 끊고 정사에 힘쓰며

영윤 '투월초'(鬪越椒)와 '위가'(蔿賈)· '반왕'(潘尫)· '굴탕'(屈蕩) 등을 중용하고 군사를 정비하여

중원의 패업을 도모하기 시작하였다.

 

 

기원전 609

제'의공'은 개인적으로 원한이 있는 대부 '병원'(邴原)의 무덤을 파 발을 끊고 병씨(邴氏) 가문과 이전에 '병원'을

옹호했던 '관중'(管仲)의 후손들을 탄압하였다.  제'의공'은 대부 '염직'(閻職)의 아내를 빼앗아 후궁으로 삼자,

이에 원한을 품은 '염직'과 '병원'의 아들 '병촉'(邴歜)은 공모하여 제'의공'을 시해한 후 초나라로 도주하였다.
의공의 이복형인 공자 원(元)이 19대 군주 혜공(惠公, B.C.608~599 재위)으로 즉위.

노나라 문공 서거. 정실인 제강(齊姜, 제소공의 딸) 소생의 세자 악(惡)이 군위를 계승.    

그러나 '문공'의 애첩 '경영'(敬嬴)이 '중수'(仲遂), '숙손득신'(叔孫得臣) 등과 공모해 '악'과 동복 동생 '시'(視),

'숙중혜백'(叔仲惠伯)을 죽이고, 자신의 아들 '퇴'(俀)를 노의 20대 군주 선공(宣公, B.C.608~591 재위)으로

옹립하였다. 두 아들을 잃은 '제강'은 제나라로 돌아가는 도중 노나라 국내를 지나면서 대성통곡, 

백성들이 함께 슬퍼하면서 이후부터 그를 '애강'(哀姜) 혹은 '출강'이라 부르게 되었다.

 

 

기원전 608

노'선공'(宣公, B.C.608~591 재위)이 즉위하였다. 

자신의 지위를 안정시키기 위해 제나라와 "평주"(平州)에서 회견하였다.

 

 

기원전 607

진'영공'이 장성한 후 주색과 음란한 놀이에만 몰두하면서 갖은 무도와 패륜을 저지르자,

'조돈'이 죽음을 무릅쓰고 충간했으나 '영공'은 도리어 그를 살해하려 하였다. 
차우(전차의 좌우 옆에서 호위하는 직책) '제미명'(提彌明)의 희생으로 위험을 벗어난 '조돈'은

국경 부근으로 도망가 사세를 관망하였다.  '조돈'의 조카 '조천'(趙穿)이 '영공'을 시해하였다.

'조돈' 일파는 진'문공' 서자 '흑둔'(黑臀)을 25대 군주 '성공'(成公, B.C.606~600 재위)으로 옹립하였다. 
 강직한 사관(史官) '동호'(董狐)는 '조돈'이 국정 책임자면서도 몸을 피해 국경으로 도망친 점과

국내에 있으면서도 국난을 구하지 않은 점 등의 과오를 필주(筆誅, 글로써 벌을 줌)하는 의미에서

'조돈이 군주를 시해했다'고 사간(史簡, 역사를 기록한 죽간)에 기록하였다.

 

 

기원전 606

주나라의 21대 천자 '정왕'(定王,  B.C.606~586 재위)이 즉위하였다. 

초'장왕'이 "육혼"(陸渾) 땅의 융족을 정벌한 후 그 위세를 몰아 "낙수"(雒水) 유역의 주 왕성 부근에서

대규모 열병식을 거행해 초나라의 군사력과 위엄을 만방에 드날렸다. 
이때 '장왕'은 사신으로 참석한 왕손(王孫) '만'(滿, 양왕의 손자)에게 왕실이 보유하고 있는 보기(寶器)인

구정(九鼎)의 크기를 물었다. 그것은 구정을 차지하고 천하를 지배하겠다는 야심을 표현한 것이다. 
'만'은 이 무례한 질문에 대해 왕조의 운명은 덕업에 있지 한낱 정의 크기에 있지 않다는 옹골찬 말로 응수하였다. 

정'목공'이 죽었다.

 

 

기원전 605

초나라의 영윤 '투월초'(鬪越椒)가 '장왕'과 위가(蔿賈) 일파의 세력 확대에 불안을 느껴

'장왕'의 원정(遠征)을 기회로 삼아 난을 일으켰다. 

'장왕' 군사와 반란군이 "고호"(皐滸)에서 격돌하여 반란군이 대패하고 '투월초'는 전투 중 사망하였다. 
이 반란으로 인해 초나라의 최대 세경가(世卿家)인 투씨(鬪氏) 일가는 당시 제, 진나라에 사신으로 가 있던

'투극황'(鬪克黃)을 제외하고 모두 멸족당하였다. 
'투월초'의 아들 '투분황'(鬪賁皇)은 진(晉)나라로 도망가서 "묘"(苗) 땅을 분봉받았다.

(이로 인해 묘분황(苗賁皇)이라고도 한다). 
반란 진압 후 '장왕'은 죽은 위가(蔿賈)의 아들 '위오'(蔿敖, 일명 손숙오(孫叔敖))를 중용하여 내정 개혁,

군제(軍制) 개편, 수리(水利) 개발 등을 추진하였다. 

이로써 초나라는 외정(外征)뿐 아니라 내치(內治)에서도 큰 발전을 이룩하였다.
주'정왕'(周定王) 2년, 노선공(魯宣公) 4년,  정나라 7대 군주 '영공'(靈公)이 즉위(B.C.605 재위)하였다.
즉위 얼마 후 정나라의 집권자 공자 '귀생'(歸生)이 공자 '송'(宋)의 협박에 못 이겨 주군 '영공' 시해를 방관하였다. 
이에 사관은 '귀생'을 필주(筆誅)하기 위해 '송' 대신 '귀생'이 '영공'을 시해했다고 기록하였다.

 

 

기원전 604

초장왕은 공자 '영제'(嬰齊)로 하여금 정나라를 징벌하게 하였다. 

정나라는 진(晉)나라에에 구원을 요청해 위기를 극복하였으며 초나라는 진(陳)나라를 공격하였다.  

진(晉)나라의 정경(正卿) 겸 중군 원수(中軍元帥) '조돈'(趙盾)이 사망하였다.

 

 

기원전 602

정나라와 진(晉)나라가 "흑양"(黑壤)에서 동맹을 맺었다.

 

 

기원전 600

진(晉) '성공' 사망하였다. 진(陳)나라의 19대 군주인 '영공'(靈公, B.C.613~599 재위)이

간신 '공영'(孔寧)· '의행보'(儀行父)와 함께 음녀 하희(夏姬)와 동시에 육체적인 관계를 맺었다. 

이를 엄격하게 충간한 충신 '설야'(泄冶)를 '공영', '의행보'가 살해하였다.

 

 

기원전 599

진(晉)나라의 26대 군주 '경공'(景公, B.C.599~581 재위)이 즉위하였다.  

초나라의 강성에 주목한 정나라는 공자 '거질'(去疾)의 책략에 따라 지난날 '영공'을 시해한 공자 '송'(宋)을 처형하고

초나라에 화평을 요청하였다. 진(陳)나라 대부 '하징서'(夏徵舒, 하희의 아들)가 주군 '영공'을 시해하였다.
'공영'과 '의행보'는 초나라로 달아나 초'장왕'에게 자신들의 음란은 전부 숨긴 채 '하징서'를 처벌할 것을 주청하였다.

 

 

기원전 598

초'장왕'은 대군을 이끌고 진(陳)나라를 공격해 '하징서'를 능지처참한 후 진(陳)나라를 완전히 멸국시켜

초나라의 일개 현으로 삼고 '영제'를 현령으로 삼았다. 
'신숙시'(申叔時)가 '하징서' 한 사람 때문에 진나라를 멸국시키고 현으로 다스리는 것은 부당하다고 충간하자. 

이에 '장왕'은 진(陳)나라를 즉시 복국(復國)시켰다.

 

 

기원전 597

초'장왕'이 '굴무'(屈巫)를 신현(申縣)의 현령으로 임명해 신(申), 여(呂) 2현을 동시에 다스리게 하였다.
'굴무'로 인해 내심 원하던 신, 여현 현공 지위를 빼앗긴 공자 '영제'는 '굴무'를 미워하게 되었다. 
초나라가 진(晉), 초(楚)나라 사이에서 배반을 일삼던 정나라를 미워하여 그를 재차 정벌하였다. 
진(晉)나라는 정나라를 구원하러 왔다가 "필" 땅에서 초군에게 대패하였다.
필전의 대승으로 초나라는 중원에서 지리적으로 먼 남방 국가이면서도 제와 진나라에 이어

춘추 오패의 세번째 패업을 달성하게 되었다.

 

 

기원전 596

진(晉)나라는 작년의 패배를 설욕하기 위해 다시 정나라를 침입하자,

이에 초나라는 진나라에 빌붙은 송(宋)나라를 공격하였다. 송나라는 처음에는 완강히 저항하다

사태가 점점 악화되자 대부 '화원'(華元)의 기지로 초나라와 강화하고 맹약하였다. 

'화원'은 자청하여 초나라에 볼모로 갔다.

 

 

기원전 595

9월 초나라의 사자 '신무외'(申無畏, 일명 '신주')가 제(齊)나라로 출사해 가는 도중 송나라를 경유했는데

송나라가 그를 처형하자 이에 초나라가 송나라를 포위하였다.

 

 

기원전 594

송나라는 진(晉)나라에 구원 요청하였으나, 진(晉)나라는 초나라의 강성을 두려워 해

송나라에 대한 직접 원조를 포기하고 대신 '해양'(解揚)을 보내 절대 항복하지 말도록 독려하게 하였다. 
'해양'은 도중에 초나라에 붙잡혀 송나라에게 투항하도록 설득하라는 압력을 받았으나

이에 굴하지 않고 끝까지 충절을 지켰다. 
초'장왕'은 그 충절을 가상히 여겨 석방하였다. 

초나라 공자 '측'(側)과 송나라 '화원'(華元)의 중개로 양국은 다툼이 없이 잘 지내게 되었다. 
적적(赤狄)의 일파인 노(潞)나라 군주 '상아'(孀兒)가 대신 '풍서'(酆舒)의 무도와 전횡에 견디다 못해

진(晉)나라에 원조 요청하였다.  진(晉)나라는 '풍서'를 처형한 후 '상아'도 크게 꾸짖고 노(潞)나라를 멸망시켰다. 

진(秦)나라는 노(潞)나라 문제로 진(晉)나라를 공격하였다.
이 전투에서 진(晉)나라 장수 '위과'(魏顆)는 이전에 자신이 좋은 데로 개가(改嫁)시킨 서모(庶母)의 부친의 혼령이

나타나 결초보은한 덕에 진(秦)나라의 용장(勇將) '두회'(杜回)를 사로잡고 승리를 거두자,

진'경공'(晉景公)은 '위과'에게 "영호"(令狐) 땅을 하사하였다.

 

 

기원전 593

진(晉)나라는 적적족(赤狄族)의 다른 일파인 갑씨(甲氏)· 유우(留吁)· 탁진(鐸辰)을 함께 정벌하였다.
진(晉)나라가 '사회'를 경(卿)으로 삼아 어진 교화를 베풀자 도적이 줄어들고 기강이 잡혔다.

 

 

기원전 592

진(晉)나라가 '극극'을 사신으로 보내 제나라에 화평을 요청하였다.  이때 위(衛)나라도 '손양부'(孫良夫)를,

노나라도 '계손행보'를, 조(曹)나라도 공자 '수'(首)를 제나라에 사절로 보내 3국 사신이 도중에 만나 동행했는데,

모두 불구였다(애꾸·대머리·절름발이·꼽추). 
제나라 '경공'(B.C.598~582 재위)은 모친 소태부인(蘇太夫人)을 즐겁게 해주기 위해 4국 사신들의 신체 불구를

웃음거리로 만들자, 수치를 당한 4국 사신은 함께 군사를 일으켜 제나라를 치기로 맹세하였다.

 

 

기원전 591

춘추의 세번째 패업을 달성한 웅군(雄君) 초'장왕' 사망하였다.  노'선공'도 사망하였다. 

계손행보가 진(晉)나라 '극극'과 모의해 제나라 정벌을 계획하는 한편 이전에 삼환씨를 제거하려고 모의한

'공손귀보'(公孫歸父, 공자 중수(仲遂)의 아들) 및 그 일족들을 추방하자, '귀보'는 제나라로 도망갔다.

 

 

기원전 590

노나라의 21대 군주 성공(成公, B.C.590~573 재위)이 즉위하였으나, 

계손행보(季孫行父)가 섭정하며 제(齊)나라의 침입을 막으려고 구갑(丘甲)을 만들었다.
초나라의 23대 군주 '공왕'(共王, B.C.590~560 재위)이 즉위하였다.

공자 '영제'(자중(子重))가 영윤(令尹, B.C.590~570 재직)이 되어 국정 장악하였다.

 

 

기원전 589

(晉)· 위· 조· 노나라가 연합해 (이전 4국 사신들에 대한 무례를 보복하기 위해) 제나라를 침공하여,

제나라 군사 크게 물리쳤다. 차우(車右) '봉축보'(逢丑父)가 제'경공'을 대신해 연합군 포로가 되었으며,

제나라의 요청으로 연합군과 제나라는 평화조약을 체결하고, 충신 '봉축보'를 석방하였다. 
초나라의 '굴무'(屈巫)는 이전부터 흑심을 품었던 '하희'(夏姬)를 계책을 써서 고향인 정나라로 먼저 돌려보낸 후

제나라로 사신 가는 틈을 타 정나라에 들러 그녀와 혼인한 후 진(晉)나라로 도망쳤다. 

진(晉)나라은 그에게 "형"(邢)읍을 주고 대부로 삼았다. 

대노한 '공왕'과 영윤 '영제'(嬰齊)는 '굴무'의 일족을 모두 처형하고 재산을 몰수하였다.

 

 

기원전 588

송(宋)나라의 23대 군주 '공공'(共公, B.C.588~576 재위)이 즉위하였다.  
12월에 진(晉)나라가 기존 3군(軍)에다 3군을 증설해 규정상 천자만이 거느리는 6군(軍)을 보유하게 되었다. 
'한궐'(韓厥)이 신중군원수(新中軍元帥), '공삭'(鞏朔)이 신상군원수(新上軍元帥),

'순추'(荀騅)가 신하군원수(新下軍元帥)로 임명되었다.

 

 

기원전 586

정(鄭)나라의 9대 군주 '도공'(悼公,  B.C.586~585 재위)이 즉위하였다. 

진(晉)과 노(魯)나라가 연합하여 초나라에 신하의 나라가 된 정나라를 치려 했으나

때마침 정'도공'이 허(許)나라와의 국경 문제로 초나라와 의가 상해 다시 진(晉)나라를 섬겼기 때문에

공격을 중지하였다.  주'정왕'이 세상을 떠났다. 

 

 

기원전 585

주나라의 22대 천자 '간왕'(簡王, B.C.585~572 재위)이 즉위하였다. 

진(晉)나라가 도읍을 "강"(絳)에서 "신전"(新田)으로 천도하였다.

 

 

기원전 584

복수를 결심한 '무신'(武臣)이 신흥국 오(吳)나라에 출사(出使)하여 전거(戰車)· 진법(陣法)· 전술(戰術) 등을

전수하면서 반초(反楚) 관념을 부추겼다.  이에 오나라가 처음 초나라를 공격하였다. 

진(晉)나라의 중군 원수(中軍元帥) '극극'(郤克)이 사망하고 '난서'(欒書)가 중군 원수가 되었다. 
간신 '도안가'(屠岸賈)의 참소를 그대로 믿은 진'경공'이 조씨 일족을 몰살하였으나,

"한단"에 가 있던 '조승'(조전의 아들)과 '조삭'(趙朔)의 처 '장희'(莊姬)가 임신하고 있던

유복자 '조무'(趙武)만이 간신히 살아남았다.  조씨 멸문(滅門) 후 난씨(欒氏), 극씨(郤氏) 등이 득세하였다.

 

 

기원전 582

초나라가 소국 거나라를 멸망시켰다.  정'성공'(鄭成公) '곤'(㫻, B.C.584~571 재위)이 진나라에 예물을 가지고 조정을 방문하자,
진나라는 정나라가 진나라와 초나라 사이에서 두 마음을 품은 것을 문책해 '성공'을 감금하고 정나라를 공격하였다, 
초나라가 진(晉)나라의 비교적 충실한 신하 나라인 진(陳)나라을 공격해 정나라를 구원하였다.

 

 

기원전 581

진 조씨(趙氏)의 원령(怨靈)이 '경공'(景公)을 저주해서 '경공'이 사망하였다. 

정나라는 '공손신'(公孫申)의 계책을 수용해 공자 '곤완'(髡頑)을 군주로 옹립하였다. 

그러나 석방되어 귀국한 정'성공'은 신군주를 옹립한 이들을 처형하였다.

 

 

기원전 580

진(晉)나라의 27대 군주 여공(厲公) '수만'(壽曼)이 즉위(B.C.580~574 재위)하였다.

 

 

기원전 579

송나라 대부 '화원'(華元)의 중개로 진(晉)나라와 초나라가 "필전"(邲戰) 이래의 오랜 불화를 풀고

화친을 체결하였다. '공왕' 대신 영윤 '영제'가 화목하게 지내자는 약속을 주도하였다. 

'영제'가 화약 체결을 독점한 일을 두고 공자 '측'(側)과 '영제' 사이에 갈등이 생겼다.

 

 

기원전 577

위나라의 21대 군주 '정공'(定公, B.C.588~577 재위)이 사망하였다.

 

 

기원전 576

진(晉)나라로 달아났던 '굴무'(일명 무신)의 주재하에 노· 제· 송· 위· 정나라와 양자강 하류의 신흥 강국

오나라가 "종리"(鍾離) 땅에서 회동하여 초나라를 고립시킬 계책을 논의하자, 

이에 초나라는 정나라를 공격했고 정나라는 다시 초나라에 귀속하여 빌붙었다.
진(晉)나라의 실권자인 '극기', '극주', '극지' 등 삼극(三郤)이 '여공'(厲公)에게 극씨 세력을 경계하라고 충간하는

충신 '백종'(伯宗)을 참소하여 죽게 만들었다.  '백종'의 아들 '백주리'(伯州犁)는 초나라로 도주하였다.

 

 

기원전 575

진(晉)나라가 삼극(三郤) 주도하에 정나라를 정벌하자.

이에 초나라가 정나라를 구원하러 와서 양국 군대가 함께 "언릉"에서 진(晉)나라와 싸워 패배하였다. 

이때 초나라에서 진나라로 도망간 '묘분황'(苗賁黃, 투월초의 아들인 투분황)이 진군(晉軍)의 참모를, 

반대로 진나라에서 초나라로 도망온 '백주리'(백종의 아들)가 초군(楚軍)의 참모로 활약하였다. 
진나라의 '여기'(呂錡)가 초'공왕'의 한쪽 눈을 쏘아 맞히자,

'공왕'은 신궁 '양유기'(養由基)에게 명해 '여기'(呂錡)를 화살로 쏘아 죽였다.

 

 

기원전 574

진(晉)나라의 간신 '서동'(胥童), '이양오'(夷陽五)가 삼극(三郤)을 참소해 처형하고 경(卿)이 되었다.

 

 

기원전 573

진'여공'은 술과 계집에 빠져 정사를 제대로 돌보지 아니하였으며, '서동'의 전횡에 불만을 품은

'난서'(欒書)와 '순언'(荀偃)이 태음산"(太陰山)에서 '서동'을 죽이고, 진'여공'을 시해한 후

'양공'(23대 군주, B.C.627~621 재위)의 증손자이자 '여공'의 칠촌 조카인 '공손주'(公孫周)를 

진(晉)나라의 28대 군주 '도공'(悼公, B.C.573~558 재위)으로 옹립하였다. 
'도공'은 즉위 직후 간신 '이양오', '청불퇴'(淸沸魋), '정활'(程滑)을 처형하였다.

이어서 공정한 백관을 임명하고 관청의 규율을 바르게 정리하며, 

부세를 경감하여 빈민들을 구휼하였으며 부채를 탕감해 주었다.

또 재난으로부터 구제하였으며, 과도한 환락을 금지하고, 형벌을 경감해 주고, 농사철을 준수하며,

법률을 정비하는 등 대대적인 내정 쇄신을 추진하였다. 

이로써 진나라의 내치(內治)가 '문공' 이래 오랜만에 공명해졌다. 

진나라의 부흥을 우려한 초'공왕'은 송나라를 쳐서 진나라에 혼란을 주기 위해 초나라에 피신한

송나라의 5대부('어석'(魚石)· '상위인'(尙爲人)· '인주'(鱗朱)· '상대'(尙帶)· '어부'(魚府))를 앞세워

송나라의 교통 요지인 "팽성"(彭城)을 폐허로 만들었다.   노'성공'이 사망하였다.

 

 

기원전 572

노나라의 22대 군주 '양공'(襄公, B.C.572~542 재위)이 즉위하였다. 
이에 진(晉)나라는 송· 노· 위(衛)· 조(曹)· 거· 주· 등· 설(薛)나라 등 8국 군대를 이끌고 팽성을 탈환하고

송의 5대부를 잡아 처형한 뒤 귀국하였다. 주'간왕'이 세상을 떠났다.

 

 

기원전 571

주나라의 23대 천자 '영왕'(靈王) '설심'(泄心), B.C.571~545 재위)이 즉위하였다.  정'성공'이 사망하였다. 
진(晉) 순앵(荀罃), 제 최저(崔杼), 노 중손멸(仲孫蔑), 송 화원(華元), 위 손임보(孫林父), 조(曹)·주·등·설(薛)·

소주 등이 "척"(戚)에서 회맹한 후 정나라를 굴복시키기 위해 정나라의 험지(險地)인 "호뢰"(虎牢)에 성을 쌓았다.

 

 

기원전 570

정나라는 곧 진나라에 굴복하고 화평을 요청하였고, 초나라 영윤 '영제'가 오(吳)나라를 공격해 "구자"(鳩玆) 땅을

취하였다. 그러나 승승장구하다가 오나라의 복병에 패해 명장 '등요'(鄧廖)와 '가읍'(駕邑)을 잃었다. 

백성들이 이를 비난하자 '영제'는 화병으로 사망하였다. 
진(晉)나라 장수 '기해'(祁奚)가 은퇴하였으며,  진· 송· 노· 위· 정· 거· 주· 세자 '광'(光) 등이 "계택"에서 회맹하였다.
진'도공'의 동생 '양간'(楊干)이 군명(軍命)을 어기자, '위강'(魏絳)이 그 종복(從僕)을 처형해 군기(軍紀)의 엄정함을 보였다. '도공'은 '위강'을 오해했다가 그의 강직함을 알고 크게 치하한 후 신군부장(新軍副將)으로 삼았다.

 

 

기원전 569

융적(戎狄)이 진나라에 귀속되어 복종할 것을 청하였다. 

진'도공'은 수락하지 않으려다가 '위강'의 충간을 받아들여 허락하였다.

'위강'은 융적과 화친할 경우의 5가지 이익(和我有五利)을 역설하였다.

 

 

기원전 568

진(晉)· 송· 노· 진(陳)· 위(衛)· 정· 조(曹)· 거· 주· 등· 설(薛)· 제· 오(吳)· 증나라가 "척"(戚)에서 회맹하였다.

(진'도공'의 2차 회합). 
정나라의 6경(卿)=6목(穆)(목공 후예인 6대 세경가)인 3공자(정'희공'(鄭僖公)의 숙조부들),

'비'(騑, 자(字)는 자사(子駟)), '발'(發, 자국(子國)), '가'(嘉, 자공(子孔))와 3공손(정'희공'의 숙부들)

'첩'(輒, 자이(子耳), 공자 거질(去疾) 아들), '채'(蠆, 자교(子蟜), 공자 언(偃) 아들),

'사지'(舍之, 자전(子展), 공자 희(喜) 아들)의 전횡으로 '희공'의 통치력이 제대로 발휘되지 못하였다.

 

 

기원전 566

진나라의 '한궐'(韓厥)이 은퇴하고 아들 '한기'(韓起)가 직위를 계승하였다.  
12월, 진(晉)· 송· 노· 진(陳)· 위· 조(曹)· 거· 주나라가 "위"(鄬)에서 회맹하였다. (진'도공'의 3차 회합).  
진나라가 제후를 정나라에 모으고 '자사'(子駟)가 재상(相)이 되었는데,

'자사'가 사람을 시켜 정'희공'을 죽이고 제후들에게는 갑작스럽게 발병해 죽었다고 말했다.

 

 

기원전 565

진(晉)· 노· 정· 제· 송· 위· 주나라가 "사구"(邢丘)에서 회맹하였다. (진'도공'의 4차 회합).

 

 

기원전 564

진(晉)· 송· 노· 위· 제· 조· 거· 주· 등· 설· 기(杞)· 소주의 12국 연합군이 정나라를 공격해 굴복시켜 평화조약을 맺었다.

(진'도공'의 5차 회합). 
정나라가 초, 진(晉)나라에 신의 없이 신하의 나라가 되기를 번복한 데 대해 진나라가 근본 대책을 마련하였다. 
초나라의 위세를 꺾어 다시는 정나라가 두 마음을 품지 못하게 하기 위해 12국가들로 3군(軍)을 편성해

그들을 교대로 출동시겨 초나라를 피로하게 하고자 하였다. 
초나라는 정나라가 진나라와 평화조약을 맺은 것을 꾸짖기 위해 정나라을 벌(伐)하고 다시 평화조약을 체결하였다.

 

3군 편성

1군 : 노(魯)· 조(曹)· 주(邾)             2군 : 제(齊)· 등(滕)· 설(薛)        3군 : 송(宋)· 위(衛)· 예(郳)
장(將) : 진(晉), 순언(荀偃)             장(將) : 진(晉), 난염(欒黶)        장(將) : 진(晉), 조무(趙武)
부장(副將) : 진(晉), 한기(韓起)      부장(副將) : 사방(士魴)             부장(副將) : 위상(魏相)

 

 

기원전 563

진· 송· 노· 위· 제· 조· 거· 주· 등· 설· 기· 소주와 오(吳)나라가 "사"(査)에서 회맹하였다. (진'도공'의 6차 회합). 
마침 핍양국(偪陽國)이 초나라, 정나라의 송나라 정벌을 원조했기에 연합군은 견고한 "핍양성"을 고전 끝에 함락해

그 영토를 송나라의 속지(屬地)로 삼게 하였다. 
핍양 군주를 서민(庶民)으로 폐하고 그 공족(公族)들을 "곽"(霍)으로 강제 이주시켰다.

(춘추 중기 이후의 속국(屬國) 지배 강화).
정나라에 내란 발생하였다, '위지'(尉止)와 '사신'(司臣) 등이 난을 일으켜

6경(卿)(6목(穆)) 중 '자사'(子駟)· '자국'(子國)· '자이'(子耳)를 살해하였다. 
이에 '자서'(子西, 자사(子駟)의 아들), '자산'(子産, 자국(子國)의 아들), '자교'(子, 자이(子耳)의 아들) 등이

힘을 합해 난을 진압하고 '위지', '사신'을 처형하였다. 

'위편'(尉翩, 위지의 아들), '사재'(司齊, 사신의 아들) 등과 잔당들은 송나라로 도주하였다. 

살아 남은 6목 중 가장 연장자인 '자공'(子孔)이 실권을 장악하였다. 
진(晉)· 송· 노· 위· 제· 조· 거· 주· 등· 설· 기· 소주가 회합해 정나라를 정벌하였다. (진도공의 7차 회합). 

정나라는 연합군과 평화협정을 체결하였다.

 

 

기원전 562

진(晉)나라가 정나라를 재침공해 복종을 확인하였다.

이에 초나라도 정나라를 침공하여 초나라와 정나라는 송나라를 공격하였다. 
그러자 진(晉)· 송· 노· 위· 제· 조· 거· 주· 등· 설· 기· 소주의 12국 연합군이 4월, 7월에 2차 회합해

정나라를 2차 총공격 하였다. (진'도공'의 8, 9차 회합), 
지친 초나라는 이를 대적하지 못하고 정나라를 잠시 포기하였다.  이에 정(鄭)나라와 진(晉)나라는 맹약하였다. 
이로써 정나라는 오랜만에 진(晉)나라에 완전 귀속되었으며, 이로써 진'도공'은 '문공', '양공'의 패업을 부흥시켰다.

 

 

기원전 561

오(吳)나라 군주 '수몽'(壽夢) 사망하자.  장자 '제번'(諸樊)이 군주의 지위를 계승하였다.

 

 

기원전 559

오왕 '제번'이 말제(末弟)이자 가장 현명한 '계찰'(季札)에게 양위하려 했으나 '계찰'이 고사해 포기하였다. 
진(晉)· 송· 노· 위· 제· 조· 거· 진(陳)· 주· 등· 설· 기· 소주가 진(秦)나라를 공격하였다. 
진'경공'(秦景公, B.C.576~537 재위)의 신뢰를 얻게 되어 '범앙'(范鞅)의 귀국을 계기로 양국은 평화협정을

체결하였다.  진(晉)나라가 신삼군(新三軍)을 폐지하였다. 
위'헌공'(衛獻公, B.C.576~544 재위)이 두 대신 '손임보'(孫林父), '영식'(甯殖)을 모욕하자,

'손임보'와 '영식'은 공모해 척(戚)"에서 반란을 일으켰다.  이에 '헌공'은 제나라로 도주하였다.
주'영왕'(周靈王) 13년, 노'양공'14년, '손임보'와 '영식'이 위'헌공'의 숙부인 '공손표'(公孫剽)를

위나라의 25대 군주 '상공'(殤公, B.C.558~547 재위)으로 옹립하였다.

 

 

기원전 558

진(晉)나라의 패업을 부활시킨 영명한 군주 '도공'(悼公)이 사망하였다. 


기원전 557

진(晉)나라의 29대 군주 '평공'(平公, B.C.557~532 재위)이 즉위하였다.  
제'영공'(齊靈公, B.C.581~554 재위)이 노(魯)나라 출신 '종희'(鬷姬) 소생의 세자 '광'(光)을 폐하고

'중자'(仲子) 소생의 공자 '아'(牙)를 세자로 책립하였다. 이 문제로 노나라와 의가 상해 노나라를 공격하였다.

 

 

기원전 555

진(晉)· 송· 노· 위· 제· 조· 거· 진(陳)· 주· 등· 설(薛)· 기(杞)· 소주의 12국 연합군이 제나라를 공격하여

"평음"(平陰)에서 연합군이 제나라 군대를 크게 물리쳤다. 
12연합군이 제나라 정벌을 틈타 정(鄭)나라를 친 초(楚)나라를 응징하기 위해 제나라에서 정나라로 이동하였다. 
초나라는 성과가 없자 조기 철수하였고 12연합군도 각기 자기 나라로 귀국하였다.

 

 

기원전 554

진(晉)나라의 노신 '순언'(荀偃)이 사망하였다. 

제'영공'이 병든 틈을 타 '최저'(崔杼)가 폐세자 '광'(光)을 옹립하였다. 
제'영공'이 사망하였다.   진(晉)나라의 '사개'가 제나라를 공격했다가 제'영공' 사망 소식을 듣고 회군하였다.

 

 

기원전 553

세자 '광'이 제나라의 22대 군주 '장공'(莊公, B.C.553~548 재위)으로 즉위하였다.  
진(晉)· 노· 제· 송· 위· 정· 조· 거· 주· 등· 설· 기· 소주 등 13국이 "전연"(澶淵)에서 회맹하였다. 
위나라 '손임보'를 따라 '헌공'을 내쫓고 상공(殤公)을 옹립했던 '영식'이 임종하면서

아들 '영희'(甯喜)에게 '헌공'을 다시 옹립하여 죄를 씻으라고 유언을 남겼다.

 

 

기원전 552

진(晉)나라에서 범씨(范氏)가 난씨(欒氏) 일문을 참소해 멸족시킨 참화 발생하자,

곧 '범개'(范匃)의 딸이자 '난염'(欒黶)의 처인 '난기'(欒祁)는 남편이 죽은뒤 가신 '주빈'(州賓)과 수시로 밀통했는데,

아들 '난영'(欒盈)이 이를 눈치채고 단속하자,

'난기'는 부친 '범개'에게 '난영'이 범씨를 멸문시킬 의도라고 참소하였다. 
이에 '범개'와 아들 '범앙'은 난씨를 멸족시키고 그 일파를 모두 체포하여 처형하였다. 

'난영'은 가신 '형괴'(邢蒯), '주작'(州綽)과 함께 제나라로 도주하였다. 
이때 은퇴한 노신 '기해'(祁奚)는 난씨 사건에 억울하게 연루된 현신(賢臣) '양설힐'(羊舌肹, 숙향(叔向)),

'양설적'(羊舌赤) 형제를 구명하였다.

 

 

기원전 550

진(晉)나라의 '난영'이 제'장공'의 원조하에 비밀리에 자신의 영읍(領邑)이었던 "곡옥"(曲沃)으로 돌아왔다. 
돌아온 직후 '서오'(胥午)와 '위서'(魏舒, 위헌자(魏獻子))의 원조하에 군사를 모아 진 도읍을 공격했으나, 
원래 난씨의 반대파가 많은데다 '위서'가 도중에 배반하여 '난영' 측이 대패하고

'난방'(欒魴)만이 송나라로 도주하였다
제'장공'은 진나라에서 별 소득을 올리지 못한 채 귀국하다가 거나라를 침공하였다. 
이때 '기량'(杞梁)· '화주'(華周)· '습후중'(隰侯重) 3인의 용맹과 희생으로 거나라를 함락하고 평화조약을 체결하였다.

 

 

기원전 549

진'평공'은 자국 내정에 간섭하고 난씨를 음으로 도운 제나라를 정벌하기 위해

진· 노· 송· 위· 정· 조· 거· 주· 등· 설· 기· 소주 등 12개국을 소집해 "이의"에서 회합하고 제나라 정벌을 상의하였다.

그러나 때마침 대홍수가 나서 황하가 범람하는 바람에 제나라 정벌 계획을 포기하고 각국 군대를 귀환시켰다.

 

 

기원전 548

제나라의 권신 '최저'는 '장공'이 자신의 후처 '당강'과 계속 통정하는 데 대해 원한을 품고 '장공'을 시해한 후

전권(專權)을 장악하였다. 이 와중에 '가거'(賈擧)· '주작'(州綽)· '병사'(邴師)· '공손오'(公孫敖)· '탁보'(鐸父)·

'양이'(襄伊)· '누인'(僂堙) 등 '장공'의 절친한 가신들이 대거 처형되거나 자살하였다. 
'안평중'(晏平仲, 안영(晏嬰), 안자(晏子))만은 군주가 사직을 위해 죽거나 도망가면 신료된 자로서

마땅히 그를 따라야 하지만,이처럼 사사로운 일로 죽거나 도망갈 경우 신료는 사직 보존을 위해

그를 따르지 않고 국내에 남아 난리를 수습해야 한다고 하면서 근신하였다. 
'최저'는 공자 '저구'(杵臼)를 제나라의 23대 군주 '경공'(景公, B.C.547~490)으로 옹립한 후 우상(右相)이 되고

그를 도운 '경봉'(慶封)은 좌상(左相)이 되었다. 
제나라의 태사(太史) '백'(伯, 태사 가문의 장남)이 '5월 을해(乙亥)일에 '최저'가 주군 '광'(光, 장공)을 시해했다'고 기록하자 
'최저'는 그를 살해하고 그 동생인 '중'(仲), '숙'(叔)도 형의 뒤를 이어 직필(直筆)하자 두 형제도 죽였다. 
 러나 말자 '계'(季)마저 죽음도 불사하면서 직필하자, 사관들의 필봉(筆鋒)을 한탄하면서 살려주었다.  
오왕(吳王) '제번'(諸樊)이 초나라 정벌 도중 "소"(巢)에서 전사하였다. 
제나라에 망명해 있는 위'헌공'이 국내의 '영희'(甯喜, 영식(甯殖)의 아들)와 내응해

'손임보'(孫林父) 일파를 타도할 계획을 수립하였다. 

오나라의 획책으로 장강(長江)과 회수(淮水) 지역의 서구(舒鳩)가 초나라에 대해 반란을 일으키자,

영윤 '굴건'(屈建)이 출정해 서구를 제압하였다.
오왕 '제번'이 서거하면서 말제(末弟) '계찰'(季札)에게 왕위를 계승시키려 했으나,

'계찰'이 고사하여 첫째 동생 '여제'(餘祭, B.C.547~544 재위)가 계승하였다.

 

 

기원전 547

위나라 '영희' 일파가 거사하여 '손양'(孫襄)을 죽이고 위'상공'(衛殤公)을 시해한 후 '헌공'을 영접해 복위시켰다. 
'헌공'은 24대(B.C.576~559 재위)를 이어 26대(B.C.546~544) 군주가 되었다.   
태숙(太淑) '의'(儀)는 국난을 막지 못했음을 한탄하며 고국을 떠나려 했으나 '헌공'이 만류하였다. 
"척"(戚) 땅의 '손임보'는 진(晉)나라에 구원을 청해 300명의 지원병을 받았으나

'영희'가 손씨를 공격해 진군(晉軍) 300명을 몰살하였다. 

이에 격노한 진'평공'은 제후들과 "전연"에서 회맹하면서 위나라 정벌을 상의하는 한편

참석한 위'헌공'과 '영희'를 체포하였다.   
초, 진(秦)나라가 함께 정(鄭)나라를 침입하여 "성균"(城麇)에 도달하여 여기서 정나라의 '황힐'(皇頡)을 생포하자, 
초나라의 '천봉술'(穿封戌)과 공자 '위'(圍, 후의 영왕(靈王))가 서로 자신의 공이라고 다투었다. 

이에 '백주리'(伯州犁)가 '황힐'에게 손을 위로 들어 공자 '위'를 가리키고 손을 아래로 들어 '천봉술'을 가리키면서

어느 쪽임을 묻자, '황힐'은 공자 '위'가 자신을 잡았다고 대답하였다.(상하기수(上下箕手)의 고사). 
제나라의 '안영'은 군신의 질서를 세우려는 의미에서 위'헌공'의 석방을 요구하였고 '영희'도 뇌물을 주어 석방되었다.

 

 

기원전 546

'영희'의 전제정치가 갈수록 심해지자 '공손면여'(公孫免餘)는 '헌공'의 방조 아래 '공손무지'(公孫無知),

'공손신'(公孫臣)과 공모하여 '영희' 일문을 몰살하였다. 
'헌공' 아우 공자 '전'(鱄)은 진나라로 망명해 일생 초야에서 은둔생활을 하였으며

'공손면여'는 30읍을 상사(賞賜)받고 위나라의 경(卿)이 되었다. 

송(宋)나라 좌사(左師) '향술'(向戌)의 주선으로 진(晉)과 초(楚)나라가 평화조약을 체결하였다.

이때 초나라는 오(吳)나라의 서진(西進)을 막기 위해, 진나라는 정나라 문제를 가라앉히려는 목적에서

평화조약 체결을 수락하였다. 

제(齊)나라 '최저'(崔杼)의 전처 아들들인 '성'(成)과 '강'(彊)이 후처 '당강'(棠姜) 소생의 '명'(明)에게

종주(宗主) 지위를 뺏긴 데 이어 영읍(領邑)인 "최읍"(崔邑)마저 '당강' 동생 '동곽언'(東郭偃)과

'당강'의 전남편 소생 '당무구'(棠無咎)의 반대로 물려받지 못하게 되자, 간신 '경봉'(慶封)에게 불만을 토로하였다.

이를 틈타 '경봉'은 계략을 써서 '최저' 가문을 멸망시키고 전권(專權)을 장악한 후 

망명한 '진수무'(陳須無)의 아들 '진무우'를 불러들여 등용하였다.

 

 

기원전 545

주'영왕'(周靈王)이 세상을 떠나자, ('영왕'의 요절한 태자 '진'(晉)이 신선이 되어 '영왕'을 영접하러 왔다는

고사가 전해지고 있다.) 
제나라 간신 '경봉' 일파의 전횡에 불만을 품은 대부 '고채'(高蠆)와 '난조'(欒竈)가 '노포별'(盧蒲嫳)·

'노포계'(盧蒲癸) 형제 및

'왕하'(王何)가 공모해 경씨(慶氏)를 멸하고 재산을 몰수하였다. 

'경봉'은 노나라로 도주하였다가 다시 오나라로 도주하였다. 
오나라 군주 '구여'(句餘)로부터 "주방"(朱方) 땅을 분봉받아 '경봉'은 더 부유해졌다. 

이후 '고채'와 '난시'(欒施)가 국정을 장악하였다.

 

 

기원전 544

주'영왕'의 아들 '귀'(貴)가 주나라의 24대 '경왕'(景王, B.C.544~520)으로 즉위하였다. 

오(吳)나라가 인근 신흥 강국 월(越)나라를 경계하여 정벌하였다. 
이에 월(越)나라의 포로가 오나라의 군주 '여제'(餘祭)를 시해하였다. 

이에 오나라 사람들은 현명한 공자 '계찰'(季札)을 새 왕으로 삼고자 했으나
'계찰'이 이번에도 사양하여 그 형 '이매'(夷眛, B.C.543~527)가 즉위하였다. 

'계찰'은 새 왕의 즉위를 알리기 위해 각국을 순방하면서 그 현명함을 만방에 떨쳤다.

 

 

기원전 543

정나라의 '공손흑'(公孫黑)이 자신에게 제나라로 사신 가도록 강요하는 대부 '양소'(良霄)에게

사적인 원한을 갖게 되어 '사대'(駟帶), '공손단'(公孫段)의 협조하에 '양소'를 살해하였다.  

이 내란을 수습한 '공손교'(公孫僑, 자산(子産))가 정의 국정을 담당하여 내정 쇄신, 형법(刑法) 정비,

도덕 교화 증진 등을 추진하였다. 
이로 인해 정나라 백성들 사이에 '공손교'를 칭송하는 노래가 유행하였다.

채(蔡)나라의 16대 군주 '경공'(景公, B.C.591~543 재위)이 며느리 '미씨'(羋氏)를 취하자,   
이에 세자 '반'(般)이 부친을 시해하고 17대 군주 채'영공'(靈公, B.C.542~530)으로 즉위하였다. 

송나라 궁성에 화재가 발생하였다. 
이 불로 송'평공'(宋平公, B.C.575~532 재위)의 부인 '백희'(伯姬)는 위엄과 법도를 지키다 불 속에서 타 죽었다.

 

 

기원전 542

노'양공'이 사망하였다.

 

 

기원전 541

공자 '주'(裯)가 23대 군주 노'소공'(昭公, B.C.541~510 재위)으로 즉위하였다. 

초나라 영윤 공자 '위'(圍)가 전권을 장악한 이래 교만무도함이 점점 증가하였다. 
정나라에서 초, 진(晉)나라 간에 평화협정이 체결되었을 때 공자 '위'는 무례하게도 초왕인 '겹오'(郟敖)대신

참석하면서 경(卿)이 아닌 제후의 태도로 거만스레 회합을 주도하면서 왕후(王侯)의 행차, 의복, 기구를

참용(僭用)해 천하 제후국들의 비난을 샀다. 
진(晉)나라 '조무'는 공자 '위'의 평판을 더 악화시키려는 속셈에서 일부러 회맹의 주도권을 위나라에게 넘겨주었다. 
초나라 공자 '위'(圍)가 회맹에서 귀국한 후 조카인 초왕 '겹오'와 그 소생인 공자 '막'(莫), '평하'(平夏)까지

죽인 후 초나라의 26대 군주 영왕(靈王, B.C.540~529 재위)으로 즉위하였다. 

즉위 후 '건'(虔)으로 개명하였다.  진(晉)나라의 실권자 '조무'가 사망하였다.

 

 

기원전 538

3월에 초'영왕'이 "신"(申)에서 진(晉)· 채· 진(陳)· 서(徐)· 등· 돈(頓)· 호(胡)· 침(沈)· 소주 등과 회맹하였다. 
패업을 성취하려는 일환으로 '굴신'을 파견해 오에 도망해 있는 제나라의 역신 '경봉'(慶封) 일족을 몰살하였다. 
그에 대한 보복으로 겨울에 오나라 군사들이 초나라의 "극"(棘)읍· "역"(櫟)읍· "마"(麻)읍 등을 침략하였다.

 

 

기원전 537

초'영왕'(楚靈王)이 전년에 오나라 정벌에 큰 공을 세운 '굴신'을 오나라와 내통하지 않았나 의심하여 처형하였다. 
초'영왕'이 전년 겨울에 오나라 군사가 침입해 온 것을 보복하기 위해 채· 진(陳)· 호· 돈(頓)· 심(沈)· 서(徐)·

월(越)나라 군사들을이끌고 오나라를 벌하고, "저기산"에서 관병식을 가졌으나 그다지 큰 전공은 거두지 못하였다.

 

 

기원전 536

정나라의 '자산'(子産)이 중국 최초의 성문법인 형정(刑鼎, 형법과 법률 조문들을 새겨 넣은 철로 만든

대정(大鼎))을 주조(鑄造)하였다.  초나라의 '영왕'이 장화궁(章華宮)을 축조하였다.

(정확한 축조 연대는 불분명하나 이 해의 공식 역사 기록에 장화궁에 얽힌 일화가 등장하는 것을 보면

적어도 이 무렵에는 이미장화궁이 완성되어 있었던 듯하다).

허리 가는 여자들을 이 궁전에 모아놓았기 때문에 세칭 '세요궁(細腰宮)'이라고도 했는데, 

이처럼 '영왕'이 허리 가는 여자들을 좋아하자 초나라 도성 안에는 허리를 가늘게 하려다 굶어 죽는 여자들이

속출하였다. 이 장화궁에 "우현"(芋縣)의 현윤(縣尹) '신무우'(申無宇)의 문지기가 숨어버리자

'신무우'는 그를 잡으려다 체포되었다. 
'무우'는 '영왕' 앞에서 인유십등(人有十等 : 천하 인간 세상에는 왕(王)-공(公)-대부(大夫)-사(士)-조(皁)-여(輿)

-예(隸)-료(僚)-복(僕)-대(臺)의 10등급이 있어 귀천과 존비의 차별이 엄존한다는 것)을 논하면서

예외 없이 도둑을 인도해줄 것을 요청하자 '영왕'은 수락하였다. 
'영왕'은 장화궁의 낙성식을 성대하게 거행해 초나라의 위신을 만방에 드날리고자 각국 제후를 초청코자 하였다. 
이에 태재(太宰) '위계강'(蔿啓彊)이 노나라의 '소공'을 겁박하여 드디어 3월에 '소공'이 초나라를 방문하였다. 
초'영왕'은 노'소공'을 여러모로 후대하면서 보궁(寶弓)인 대굴(大屈)까지 선물했으나 곧 후회하며

이에 '위계강'(蔿啓彊)이 교묘한 말로 대굴을 도로 뺏어왔다. 
초'영왕'의 책사 '오거'(伍擧)가 이를 듣고 '영왕'의 좁은 소견과 신의 없음을 한탄하였다.  
8년 전(B.C.543)에 억울하게 죽은 '양소'의 귀신이 나타나 정나라 전체가 불안해 하였다. 
이에 '공손교'가 '양소' 아들 '양지'(良止)를 대부로 삼고 조상 제사를 받들게 하자 귀신이 사라졌다.

 

 

기원전 534

진'평공'(晉平公)이 초나라의 장화궁을 시기하여 사기궁(虒祁宮)을 짓자, 백성들의 원성이 자자하였다. 
진(陳)나라의 공자 '초'(招)와 '과'(過)가 애공(哀公) '익'(溺, B.C.568~530)이 병든 틈을 타

제1부인 소생의 도태자(悼太子) '언사'(偃師)를 죽이고,

총희(寵姬)인 제2부인 소생 공자 '유'(留)를 후계자로 옹립하였다. 
충격을 받은 '애공'은 목을 매어 죽고 이를 알리러 초나라에 간 간징사(干徵師)를 초'영왕'이 처형하자,

공자 '유'는 정나라로 도주하였다. 

초나라의 위협을 두려워한 공자 '초'(招)는 모든 죄를 공자 '과'(過)에게 전가해 그를 처형당하게 하였다. 
초'영왕'은 공자 '기질'(棄疾)을 파견해 진(陳)을 완전히 멸국(滅國)시킨 후

B.C.598년에 이어 두번째로 초현(楚縣)으로 삼고 '천봉술'(穿封戌)을 "진현"(陳縣) 현공(縣公)으로 임명하였다. 

'공손오'(公孫吳, 도태자의 아들)의 호소로 공자 '초'를 귀양보냈다.

 

 

기원전 533

초나라 공자 '기질'(棄疾)이 "허"(이미 B.C.576=초'공왕' 15년에 "엽"으로 1차 천도했음)를

"이"(夷=성부(城父)로 옮기고 회수(淮水) 유역 소국 "주래"(州來)의 논과 밭을 일부 더해 주었다. 

대부 '연단'(然丹)은 "성부"(城父) 사람들을 진(陳)나라로 옮기고 "이"(夷)의 박수(濮水) 서쪽 논과 밭

일부 떼어주었다. (춘추 시대 멸국치현(滅國置縣)과 사민(徙民) 정책의 중요 사례).

 

 

기원전 532

제나라 내에 파벌 발생하여 신흥 문벌인 진씨(陳氏)와 포씨(鮑氏) 대 전통 명문들인 혜씨(惠氏)· 고씨(高氏)·

난씨(欒氏)의 양 진영으로 나뉘어 대립하였다.  진씨-포씨 측이 승리를 거두어 고씨 - 난씨를 노나라로 추방하였다. 

이 와중에 '진무우'(陳無宇)가 득세하게 되었다.

 

 

기원전 531

초'영왕'이 채'영공'(蔡靈公)을 초나라 내의 "신현"(申縣)으로 유인하여 처형하고

그를 봉행한 70인의 군사도 몰살시켰다. 
이에 채나라는 진(晉)나라에 구원 요청을 하자,  진나라는 송· 제· 노· 위· 정· 조 6국을 "궐은"(厥憖) 땅에 소집하였으나

모든 나라들이 원조를 회피하였다. 초'영왕'은 채나라를 멸국시켜 진(陳)나라 처럼 "초현"(楚縣)으로 삼고

동생인 공자 '기질'(棄疾)을 "채현"(蔡縣)의 현공(縣公)으로 임명하였다. 

이 과정에서 채나라 대부 '조오'(朝吳)가 '기질'의 심복이 되었다. 
'영왕'은 세자 '유'(有)를 죽여 "구강산"(九岡山) 제사의 인간 희생(犧牲)으로 삼는 극단의 조처를 취하였다. 
또한 진(陳)· 채(蔡)· 동불갱(東不羹)· 서불갱(西不羹)에 성(城)을 높게 쌓아 북방 방어를 철저히 하는 한편

허(許)· 호(胡)· 심(沈)· 도(道)· 방(房)· 신(申) 등 6개 소국을 "형지"(荊地, 초성(楚城) 내부)로 이동시켰다. 

진(晉)나라의 30대 군주 '소공'(昭公, B.C.531~526 재위)이 즉위하였다.

 

 

기원전 529

초'영왕'은 패업을 부활시키려는 야심에서 동진(東進)하여 강회(江淮) 간의 "군서"(群舒) 지대로 진출하여

먼저 서(徐)를 정벌하기 위해 "건계"(乾谿)에 주둔하였다. 
이 틈을 타 채나라 대부 '조오'(朝吳)와 '채유'(蔡洧), 진(陳)나라의 '하설'(夏齧, 하징서(夏徵舒)의 현손),

허나라 대부 '위'(圍), 초나라의 '투성연'(鬪成然), '위엄'(蔿掩), '위거'(蔿居) 등과

진(陳)· 채(蔡)· 불갱(不羹)· 허(許)· 엽(葉)의 군대들이 
초나라의 3공자 '비'(比)와 '흑굉'(黑肱), '기질'(棄疾) 등을 내세워 난을 일으켰다. 

반란 소식을 들은 '영왕'은 고립무원을 절감하고 자결하였다. 
난 성공 후 공자 '비'(比)가 일시 즉위했으나 '기질' 책사들의 계책으로 공자 '비', '흑굉'이 모두 자결하자,
공자 '기질'이 초의 27대 군주 '평왕'(平王, B.C.528~516 재위)으로 즉위하였다. 
'평왕'은 즉위 직후, 진나라, 채나라와 기타 '영왕' 시기에 멸망한 나라의 다수 도읍(都邑)들을 복국시킴으로써

흉흉한 민심을 안정시켰다. 
또한 진(陳)의 도태자(悼太子) '언사'(偃師) 아들인 '공손오'를 진의 22대 군주 '혜공'(惠公, B.C.529~506 재위)으로 옹립하고, 채나라 세자 '유'(有)의 아들 '여'(廬)를 채나라의 18대 군주 '평공'(平公, B.C.529~522 재위)으로

옹립하였다.

 

 

 

 

기원전 528

초'평왕'(平王)이 국내에 대대적으로 은혜를 베풀고 너그럽게 정사를 펼치며  대외적으로도 우호 정책을 시행하였다. 
영윤 '투성연'(鬪成然, 자기(子旗))이 '평왕' 옹립의 공을 믿고 방자해져 양씨(養氏)와 함께 온갖 횡포를 부렸으며

간신 '비무극'(費無極)이 '투성연'을 참소하자, '평왕'은 '투성연'을 처형하고 양씨를 멸문시켰다. 

그러나 '투성연'의 아들 '투신'(鬪辛)은 벌하지 않고 운공(鄖公)으로 삼았다.

 

 

기원전 527

초나라의 간신 '비무극'이 채나라 대부 '조오'(朝吳)를 참소하여 정(鄭)나라로 추방하였다.

 

 

기원전 526

진'소공'(晉昭公, B.C.531~526 재위)이 사망하였다.   제나라의 현신 '안영'(晏嬰)이 '경공'(景公)의 총애만을 믿고

전횡을 일삼던 '제삼걸(齊三傑) (전개강(田開疆)· 고야자(古冶子)· 공손첩(公孫輒))을 묘한 계책을 써서 제거하고

대신 '전양저'(田穰苴, 사마양저(司馬穰苴))를 천거하였다. 
'전양저'는 세도만을 믿고 군법을 준수하지 않은 '경공'의 총신 '장가'(莊賈)를 참함으로써

해이해진 군기를 대폭 바로잡았다. 
이후 제나라의 국정은 '안영'과 '전양저'의 두 기둥이 담당하였다.

 

 

기원전 525

진(晉)나라의 31대 군주 경공(頃公) '거질'(去疾, B.C.525~512 재위)이 즉위하였다.

 

 

기원전 523

초나라의 간신 '비무극'(費無極)이 평소에 세자 '건'(建)을 미워하여 제거하고자 하였다. 

초'평왕'은 '비무극'의 간계에 넘어가 세자 '건'의 비로 맞이한 진'애공'(秦哀公)의 누이 '맹영'(孟嬴)을

몰래 자신의 부인으로 취하고 세자 '건'(建)에게는 잉첩(媵妾)으로 따라온 제나라 여자를 '맹영'인 것처럼 속여

혼인시킨 뒤 "성보"(城父) 땅을 방어하도록 쫓아 보냈다.  '맹영'은 왕자 '진'(珍)을 낳았다.

 

 

기원전 522

초나라 세자 '건'에게 봉변을 당할까 봐 두려워한 '비무극'은 세자 '건'이 태사(太師) '오사'(伍奢)와 함께

반역을 꾀한다고 참소하여 '건'을 죽이게 하였다.  이에 '평왕'은 "성보"(城父) 사마(司馬)인 '분양'(奮揚)에게

밀지를 내려 건을 죽이라고 명령했으나 세자의 충복인 '분양'은 세자를 달아나게 한 뒤 '평왕'에게 자수하였다. 
'평왕'은 그 충정을 높이 평가해 '분양'을 용서하였다.  세자 '건'(建)은 송나라로 도주하였고

'비무극'은 충신 '오사'(伍奢), '오상'(伍尙) 부자를 참소해 처형당하게 하였다. 
'오상'의 동생 '오자서'(伍子胥)는 초나라에 대한 복수를 결심하고 우선 송나라로 피신하여 세자 '건'과 합류한 뒤

다시 정나라로 도주하였다. 정 '정공'(定公, B.C.529~514 재위)은 '오자서' 일행을 우대하였고,

세자 '건'은 왕위를 되찾겠다는 일념하에 진(晉)나라와 내통하여 정나라를 치고 이어 초나라를 공격하려다

음모가 발각되어 정'정공'(鄭定公)에게 처형당하였다. 

'오자서'는 세자 '건'의 아들 '승'(勝)을 데리고 정나라를 탈출하여 오나라로 도주하였다,
천신만고 끝에 천하의 요새이자 철통 같은 방비를 갖춘 소관(昭關)을 통과하여 오나라에 도착하였다. 
송나라의 '원공'(元公, B.C.531~517 재위)이 화씨(華氏), 향씨(向氏)를 압박하자,

'화정'(華定)· '화해'(華亥)· '향영'(向寧) 등이 난을 일으켜 공자 '인'(寅), 공자 '어융'(御戎), 공자 '주'(朱),

공자 '고'(固), '공손원'(公孫援), '공손정'(公孫丁) 등을 죽이고, 
'향승'(向勝)· '향행'(向行)을 감금한 후 '원공'(元公)을 협박하였다. 

'화해'(華亥) 측은 태자 '난'(欒)과 '원공'(元公)의 동복 동생 '진'(辰), 공자 '지'(止) 등을 인질로 삼고 

'원공'(元公)은 '화해'의 아들 '무척'(無慼), '향영'의 아들 '나'(羅), '화정'의 아들 '계'(啓)를 인질로 삼고

양편이 서로 화목하게 지내기를 원하였다. 정나라 '공손교'(公孫僑, 자산(子産))가 사망하였다. 

 

 

기원전 520

주'도왕'(周悼王) 1년, 송나라 화씨(華氏)의 난이 초, 진나라 등의 개입으로 겨우 진압되었다.
화씨 일족인 '화해'(華亥)· '화정'(華定)· '화추'(華貙)· '화등'(華登)과 '향영'(向寧)· '황엄'(皇奄)·

'상성'(傷省)· '장사평'(臧士平) 등은 초나라로 달아나 귀의하였다.
주'경왕'(周景王)이 세상을 떠나자,

태자 '맹'(猛)이 주나라의 25대 천자 '도왕'(悼王, B.C.520 재위)으로 즉위하였다.
'도왕'의 이복 동생 '조'(朝)가 '윤고'(尹固)· '감추'(甘鰌)· '소환'(召奐) 등의 보좌를 받아

'도왕'을 "황"(皇) 땅으로 추방하고 왕으로 즉위하였다. (서왕(西王)).

 

 

기원전 519

주'도왕'이 즉위 얼마 후에 세상을 떠나자,

아우 '면'이 26대 천자 '경왕'(敬王, B.C.519~476 재위)으로 즉위한 후 "책천"(翟泉)으로 옮겨갔다.
이후 '경왕'을 동왕(東王), '조'(朝)를 서왕이라 칭하게 되었다. 오나라가 "주래"(州來)를 공격하였다.
이에 초나라의 '위월'(蔿越)이 초· 호(胡)· 심(沈)· 돈(頓)· 채· 진(陳)· 허나라 등 7국 군대를 이끌고

"주래"를 구원하러 출동하였으나, "계부"(鷄父)에서 오나라가 초나라의 연합군이 진(陣)을 치기도 전에

선제 공격을 하여 무찔렀다. 초나라의 폐세자 '건'(建)의 모친인 채(蔡) '맹희'(孟姬)가

초나라의 암살 위협 때문에 오나라에 구원을 요청하였다,
이에 공자 '광'(光)이 '맹희'를 구출하러 채나라로 갔다. '위월'(蔿越)이 이를 저지하려 했으나 막지 못해

'맹희'는 공자 '광'과 함께 무사히 오나라로 도주하였다. 이 소식을 들은 '위월'은 목매어 자살하였다.

'낭와'(囊瓦)가 새 영윤이 되어 "맥성"(麥城)을 쌓고 오나라에 대한 경계를 강화하였다.
마침내 초나라는 주사(舟師, 곧 수군(水軍))를 편성하여 오나라 변경을 공략하자,

이 틈을 타 오나라 공자 '광'(光)은 초나라 인근의 "소"(巢), "종리"(鍾離)를 멸하였다.

 

 

기원전 517

노'소공(魯昭公)이 실권자인 '계손의여'(季孫意如)를 미워하는 '계공약'(季公若)· '후손백'(郈昭伯)·

'공위'(公爲)· '공과'(公果)· '공분'(公賁) 등의 부추김을 받아 계손씨(季孫氏) 일족을 공격하여

'계손공지'(季孫公之)를 죽이고 '계손의여'를 겁박하였다. 그러나 숙손씨(叔孫氏)가 계손씨를 도와

전세가 역전된 결과 '소공'은 계손씨 타도에 실패하여 제나라로 망명하였다.
초'평왕'이 '위사'(蔿射)에게 명하여 "주굴"(州屈)에 성을 쌓아 가인(茄人)들을 옮기게 하고

"구황"(丘皇)에 성을 쌓아 자인(訾人)들을 옮기게 하였다.

또 "소"(巢)에 외곽성(外郭城)을 쌓고, "권"(卷)에 외곽성을 쌓아 변방 방어를 강화하였다.

 

 

기원전 516

초'평왕'이 사망하자, 영윤 '자상'(子常)이 진(秦) 공녀 '맹영'(孟嬴) 소생의 세자 '진' 대신

장성한 공자 '자서'(子西)를 옹립하려 하자, '자서'가 대노하면서 고사(固辭)하였다.

이에 '진'(珍)이 공자 '신'(申)과 '자서'의 보좌를 받아 28대 군주 '소왕'(昭王, B.C515~489 재위)으로 즉위하였다.
10월 진'경공'(晉頃公)은 여러 제후들을 소집해 서왕 '조'(朝)를 공격하였다.
서왕 '조'는 '윤고'(尹固)· '소환'(召奐)· '모득'(毛得)· '남궁은'(南宮嚚)의 보필 아래 초나라로 달아났다.
제후들은 '경왕'(敬王)을 왕성으로 복귀시켜 6년 간의 내란을 진정시켰다.

 

 

기원전 515

오나라에 머물러 있는 '오자서'(伍子胥)는 초'평왕'이 편안하게 생을 마감한 것을 원통해 하면서

공자 '광'(光)에게 거사를 단행할 것을 촉구하였다.
이에 공자 '광'은 '오자서'의 계책대로 오왕 '요'(僚)의 3충신(忠臣) 중 공자 '엄여'(掩餘),

공자 '촉용'(燭庸)을 초나라 정벌에 출전시키고, 공자 '경기'를 정, 위나라로 보내 원군을 요청하게 하며

'계찰'(季札)을 진(晉)나라에 보내 우호를 강화하게 함으로써 '요'의 최정예 측근을 모두 없애버린 후

장사 '전제'(專諸)를 시켜 '요'를 시해하고 오나라의 20대 군주 '합려'(闔廬, B.C.514~496 재위)로 즉위하였다.

'계찰'(季札)은 피비린내 나는 정쟁(政爭)을 혐오하여 "연릉"(延陵)에 은둔하였다.

'엄여'와 '촉용'은 군사를 버리고 각각 "서"(徐), "종오"(鍾吾)로 망명하였다.
초나라의 '백극완'(伯郤宛)은 이 틈을 타 오군을 "잠성"(潛城)에서 대파하고 그 공로로 실권을 장악하였다.
'비무극'은 '백극완'을 시기해 영윤 '낭와'(囊瓦, 자상(子常))에게 참소하자,

'비무극'의 간악한 음모로 '백극완'이 모반을 꾀한다고 오해한 영윤 '낭와'는 극씨 일가 및 그와 절친한 양씨(陽氏),

진씨(晉氏)를 도륙하였다. '백극완'의 아들 '백비'(伯嚭)는 오나라로 도망가 '오자서'에게 의탁하였다.
'백극완'의 무고함과 '비무극'의 간계를 뒤늦게 깨달은 영윤 '낭와'는 '비무극'과

그 일파인 '언장사'(鄢將師)를 처형하였다.

오왕 '합려'는 즉위 직후부터 '오자서'의 계책과 건의를 적극 수용하여 "고소성"(姑蘇城)을 축조하고

"우수산"(牛首山)에 뛰어난 장인들을 모아 철(鐵)을 전문적으로 정련하게 하는 한편,

칼 제작의 명공 '간장'(干將)과 '막야'(莫邪) 부부를 초빙해 천하 명검을 제작하게 하였다.
'오자서'는 천재 병법가 '손무'(孫武)를 추천해 초나라 정벌을 총지휘하게 하였다.
'손무'는 '합려'의 두 총희(寵姬)를 즉결 참할 정도로 엄격하게 군법과 군기를 바로잡아

오군을 최고 정예 부대로 만들었다.

 

 

기원전 514

진(晉)나라 '순역'(荀躒)의 참소로 기씨(祁氏), 양설씨(羊舌氏) 양 가문이 몰살되었다.

'한기'(韓起, 한선자(韓宣子)), '양설힐'(羊舌肹)이 사망하였다. '위서'(魏舒)가 재상이 되었다. 
기씨의 영읍을 나눠 7현(오(鄔)· 기(祁)· 평릉(平陵)· 경양(梗陽)· 도수(塗水)· 마수(馬首)· 우(盂)으로,

양설씨 영읍을 나눠 3현(동제(銅鞮)· 평양(平陽)· 양씨(楊氏))으로 한 후 현대부(縣大夫)들을 공정하게 등용하였다.

 

 

기원전 513

진(晉)나라가 '조앙'(조간자(趙簡子)), '순인'(荀寅, 중행문자(中行文子))의 주도로 형정(刑鼎, 형법(刑法)을

새겨 넣은 동정(銅鼎))을 주조하였다.
'공자'는 이를 보고 선왕이 제정한 존비귀천 질서와 법도가 무너지고 형정에만 의존하려 하는 세태를 한탄하였다.

 

 

기원전 512

 오나라가 서(徐)나라에게 '엄여'(掩餘)를, "종오"(鍾吾)에게 '촉용'(燭庸)의 체포와 인도를 명하자

'엄여'와 '촉용'은 초나라로 달아났다. 이에 대노한 오왕 '합려'가 "종오"와 "서"를 공격하여 멸하였다.

 

 

기원전 510

여러 나라를 전전하던 노'소공'이 진(晉)나라의 "건후"(乾侯)에서 8년을 살다 죽었다.
노나라의 실권자 '계손의여'(季孫意如)가 '소공'의 이복 동생인 공자 '송'(宋)을

노나라의 24대 군주 '정공'(定公, B.C. 509~495 재위)으로 옹립하였다.

 

 

기원전 507

초나라의 영윤 '낭와'의 지나친 탐욕과 과도한 뇌물 요구로 초나라를 섬기는 제후국들의 원망이 갈수록 심해졌다.

특히 '숙상(驌驦)'이라는 천하 명마(名馬) 두 마리를 빼앗긴 '당성공'(唐成公)과, 천하 보배인 은초서구,

양지백옥패를 빼앗긴 채'소후'(蔡昭侯)가 깊은 원한을 지녔다.

 마침내 채'소후'는 진(晉)나라에 초나라 정벌을 요청하였다.

 

 

기원전 506

진'정공'(晉定公)이 채'소후'의 요청을 받아들여 노· 유(劉)· 제· 송· 채· 위· 진(陳)· 정· 허(許)· 조(曹)· 거· 주· 돈(頓)·

호(胡)· 등· 설(薛)· 기(杞)· 소주 등 18제후국을 이끌고 초나라 정벌을 시도하였으나,

채'소후'에게 뇌물을 요구했다가 거절당한 진(晉)나라의 '순인'(荀寅)이 '사앙'(士鞅, 범헌자(范獻子))에게
초나라 정벌의 무용함을 강력히 주장하는 바람에 진나라는 채 소후'의 요청을 거절하고 회군하였다.

동상이몽인 17개국도 도중 해산하였다. 분노한 채'소후'는 귀국 도중 소국 심(沈)나라를 멸망시켰다.

진(晉)나라에 실망한 채'소후'는 오(吳)나라에 구원 요청하였다,
오왕 '합려'는 6만 대군을 이끌고 초나라를 침공하였다. (오군의 1차 침공).
초나라는 좌사마(左司馬) '심윤술'(沈尹戌)이 고군분투했으나 영윤 '낭와'의 탐욕과 실책으로 초군이 대패하자,

'낭와'는 정나라로 달아나고 '심윤술'은 전사하였다.
오군은 초나라의 수도 "영"을 공격해 "맥성"(麥城)을 점령하고 강장(長江) 물을 끌어들여 "기남성"(紀南城)마저

함락한 후 초나라의 역대 왕릉인 "이릉"(夷陵)을 파괴하고 종묘사직을 불사르는 등 갖은 만행을 자행하였다.

'오자서'는 초'평왕'의 시신에 매질을 해 부형(父兄)의 원수를 갚았다.
초'소왕'은 "운몽"(雲夢)을 거쳐 수(隨)나라로 몽진하였다. 수나라 군주는 '소왕'을 숨겨주면서

오나라에 '소왕'이 달아났다고 허위 보고하였다,
이에 '오자서'는 '소왕'이 정나라로 갔으리라 추측하고 정나라를 포위하자,
이전에 '오자서'를 구해준 "악저"(卾渚) 땅의 어부 노인의 아들이 '오자서'를 찾아와 철군을 요청하였으며

'오자서'는 은혜를 갚기 위해 그를 수락하였다.

어부 노인의 아들은 정나라에서 사방 100리 땅을 분봉받아 어대부(漁大夫)가 되었다.
망국 위기를 절감한 '신포서'(申包胥)는 서로 혼인 관계를 맺은 진(秦)나라에 원군을 요청하였다.

 

 

기원전 505

진'애공'(秦哀公)이 '신포서'의 요청을 수락해 진(秦)의 대군이 초나라로 들어왔다.
오왕 '합려'의 아우 '부개'는 진군의 가세로 오군이 당황하는 틈에 비밀리에 귀국해 왕위를 찬탈하였다.
'합려'는 황급히 귀국해 반란을 진압하였으며 '부개' 부자는 송나라로 도주하였다.
월나라 대부 '범려'(范蠡)도 "절강"(浙江)에 고릉성(固陵城)을 축성해 오군의 침략에 대해 방비하였다.
노나라 '계손의여'(季孫意如)가 사망하자, 아들 '계손사'(季孫斯, 계환자)가 부친의 지위를 계승하였다.
이때부터 계손(季孫)· 맹손(孟孫)· 숙손(叔孫)의 삼가(三家) 정립(鼎立) 형세와 전횡이 점점 더 심해졌다.
삼가(三家)와 함께 삼가 가신들의 세력도 계속 강해져 공실과 삼환씨도 제어 하지 못할 지경이 되었다.
이로써 노나라의 내정 불안과 분권화 경향은 더욱 심해졌다.

초'소왕'이 수(隨)나라로부터 귀국하고 수(隨)나라와 영구 평화조약을 체결하였다.
국가 대란을 극복한 데 대한 논공행상을 실시하여 공자 '신'(申)은 영윤, 공자 '결'(結)은 좌윤이 되었다.
'신포서'는 우윤(右尹) 벼슬을 사양하고 초야에 은둔하였다.

난리 통에 오왕 '합려'에게 능욕당했던 소왕 부인은 자결하였다.
'소왕'은 월왕 '윤상'(允常)의 딸 '월희'(越姬)를 계비로 맞이하여 이후 내정 쇄신에 힘써 형벌과 세금을 경감하고

학자를 양성하며 군사를 조련, 변경 방어를 강화하였다.
폐세자 '건'(建)의 아들 '공손승'(公孫勝)을 백공(白公)으로 봉하여 예전 허나라 땅을 하사하였다.
오나라 공자 '부개'가 초'소왕'에게 귀화하여 "당계"(堂谿) 땅을 분봉받고 당계씨의 선조가 되었다.

 

 

기원전 504

오나라 태자 '종류'가 초나라의 주사(舟師, 곧 수군(水軍))를 크게 무찔렀다. (오군의 2차 침입).
초나라의 사마(司馬) '자기'(子期)가 "번양"(繁陽)에서 오군을 대패시키고,

영윤 '자서'(子西)는 수도를 "영"에서 "약"으로 임시 천도해 2차의 국란을 극복하였다.

 

 

기원전 502

노나라 계손씨(季孫氏)의 강력한 가신 '양호'(陽虎)가 자신의 일당들인 '계오'(계손사=계환자의 아우),

'공서극'(公鉏極, 계손씨 일족), '공산불뉴'(公山不狃, 계손씨 가신), '숙손첩'(叔孫輒, 숙손씨 일족),

'숙중지'(叔仲志, 숙손씨 일족) 등을 선동하여 계손씨를 처치하고 삼환가(三桓家)를 차지하려고 반란을 일으켰다.

이에 삼환씨(三桓氏)가 모두 힘을 합쳐 '양호'의 반란군을 격파하였다.

 

 

기원전 501

'양호'는 "환양관"(讙陽關)을 거쳐 제나라로 도주한 후 제'경공'에게 삼환씨를 정벌해줄 것을 요청하였다.
대부 '포국'(鮑國)은 이를 거절하고 노나라와 의를 상하지 않기 위해 '양호'를 잡아 노나라에 인도할 것을 청하자,

'양호'는 제나라를 탈출해 송나라로 도주했다가 인심을 잃어 다시 진(晉)나라로 도주해 조앙(趙鞅)의 가신이 되었다.

 

 

기원전 500

제, 노나라는 '양호' 사건을 마무리하고 오해를 풀기 위해 "협곡"(夾谷)에서 회맹하였다.
제나라의 '여미'(黎彌)가 간계를 써서 노'정공'과 그를 수행한 '공자'를 겁박하려 했으나

'공자'는 법도에 따라 제나라의 잘못을 크게 꾸짖고 '여미'의 간계를 무위로 만들었다.
'안영'(晏嬰)은 무례를 사죄하기 위해 지난날 제나라가 노나라로 부터 불의로 빼앗은 문양(汶陽) 소속의

"환"(讙)· "운"(鄆)· "구음"(龜陰) 등 세 곳의 논과 밭을 돌려주었다.
제나라에서 '안영'(晏嬰) 사망하였다. 숙손씨 영읍 "후"(郈)에서 숙손씨의 가신 '약묘'(若藐)가 신하 '후범'(侯犯)에게 피살되자,

'후범'은 "후읍"을 근거지로 반란을 일으켰다.

맹손, 숙손씨가 그를 진압하려 하자 '후범'은 '사적'(駟赤)의 간계에 넘어가 후읍을 제나라에 바치고 귀의하려 했으나

이 사실을 안 후읍민들이 '후범'을 쫓아냈다. 이 틈에 이전부터 모반을 계획하던 계손씨 가신 '불뉴'(不狃)는

숙손씨의 서자 '숙손첩'과 함께 노나라의 도성 "곡부"(曲阜)를 공격하였다.

노'정공'은 화급하여 계손사의 사택으로 피난하였다.
공자의 활약으로 '불뉴'의 반란군은 진압되고 '불뉴', '숙손첩'은 오나라로 도주하였다.
난을 진압한 후 공자는 간신 '소정묘'를 처형하고 이후 공자는 잠깐 노나라의 국정을 장악하면서 내정 쇄신에 힘쓰고

예절과 의리와 청렴한 마음과 부끄러워하는 태도를 떨쳐서 일으켰다.

이에 노나라는 크게 다스려지면서 부강한 나라의 기초를 닦게 되었다.

 

 

기원전 498

노나라의 안정과 부강을 염려하고 시기한 제'경공'이 많은 미희(美姬), 가희(歌姬)들을 선물하자,

노'정공'과 '계손사'는 다시 음란한 생활에 빠졌다.
'공자'는 이를 한탄하면서 어지러워진 노나라를 떠나 천하 열국을 주유(周遊)하였다.

(B.C. 484년까지. 위→ 송→ 정→ 진(晉)→ 위→ 진(陳)→ 채(蔡)).

 

 

기원전 497

진양조씨의 종주(宗主)인 '조앙'(조간자(趙簡子))이 위(衛)나라가 이전에 사죄의 뜻으로 바쳤던

"한단"(邯鄲) 땅 500호(戶)를 "진양"으로 합병시키려고 하자,

한단조씨의 종주 '조오'(趙午, 일명 한단오(邯鄲午))와 한단인(邯鄲人)들이 반대하였다. 

격노한 '조앙'은 '조오'를 "진양"으로 유인해 죽이고 한단조씨를 멸문하였다. 
'조오'의 외숙 '중행인'(中行寅, 중행문자), '순인'(荀寅))은 '조오'의 아들 '조직'(趙稷), '범길사'(范吉射) 등과 공모해

조카의 원수를 갚고자 '조앙'을 공격하였다. 
조앙은 일단 진양으로 도피했으나 지역(순역(荀躒))· 한불신(韓不信)· 위만다(魏曼多) 등이 조앙을 원조하여

함께 중행인, 범길사 일파를 격파. 이에 중행, 범씨 일파는 조가(朝歌)로 달아났으며 오왕 '합려'는 자신의 공적에

도취하여 교만해지고 사치, 환락에 빠져 장락궁(長樂宮), 고소대(姑蘇臺)를 축조하였다.
제'경공'이 딸 '소강'(少姜)을 오세자 '파'(波)에게 출가시키자,  '소강'은 고향을 그리워하다 타향에서 요절하였다. 
세자 '파'도 그 뒤를 따라 사망하자 '합려'는 아들 '부차'를 후계자로 지정하였다.

 

 

기원전 496

진(晉)나라를 경계하는 제· 노· 위나라 등이 맹약을 맺고 조가(朝歌)의 중행인, 범길사 일파를 몰래 원조하여

그로 인해 조가 토벌은 계속 지연되었다. 월왕 '구천'이 "취리"에서 오나라 군사를 크게 무찔렀다. 

이때 '구천'은 사형수 300여 명을 뽑아 오나라 군영(軍營)으로 행진해간 뒤 오나라 군사가 보는 앞에서 차례로

목을 찔러 자결하는 전대미문의 계책을 써서 오나라 군사들을 질리게 만든 뒤 그 틈에 기습 공격해 대승을 거두었다.
'합려'는 이 전투에서 크게 부상을 당한 후 충격과 상심을 못 이겨 사망하였다. 

세자 '부차'(B.C.495~477 재위)가 왕위를 계승하였다. 
위'영공'의 세자 '괴외'(蒯聵)가 모친 '남자'(南子)의 추문을 부끄럽게 여겨 모친 암살을 꾀하다 발각되어

송나라로 도주하였다. 
초나라가 10년 전의 오군 침입의 대란에서 오나라 군사에 협력했던 죄목으로 돈(頓)나라를 멸국시켰다.

 

 

기원전 495

초나라가 10년 전, 오군 침입을 틈타 초나라 사람들을 많이 포획하고 전후에도 초를 섬기려고 하지 않은 죄목으로

호(胡)나라를 멸하고 호나라 군주 '표'(豹)를 체포하였다.

 

 

기원전 494

노나라 공자 '장'(蔣)이 25대 군주 '애공'(哀公, B.C.494~467 재위)으로 즉위하였다. 

오왕 '부차'는 부친의 삼년상을 마친 후 원수를 갚기 위해 월나라를 공격하였다. 
파죽지세로 월나라 군사를 몰아 "고성"(固城) 땅에서 포위해 궤멸시켰다. 

월왕 '구천'은 대부 '문종'(文種)의 충고에 따라 오나라에 많은 보물을 바치고 항복하였다. 
오나라는 월나라의 진정한 항복을 확인하기 위해 월왕 '구천' 부부를 오나라로 압송해 와서 비복(婢僕)으로 삼았다. 
초나라가 10년 전, 오군 침입 대란에서 오나라 군사를 인도했던 죄목으로 채(蔡)나라를 멸국시켰다.

 

 

기원전 493

제나라와 정나라가 조가(朝歌)에 조쌀을 원조하려 하자 '조앙'은 이를 저지하기 위해

제, 정나라 군사와 "척"(戚)에서 교전하여 승리를 거두고 조쌀도 빼앗았다. 
초나라가 속국 채(蔡)나라를 "주래"(州來)로 옮겼다.  위'영공'이 사망하였다.  
쫓겨난 세자 '괴외'의 아들 '공손첩'(公孫輒)이 위나라의 25대 군주 '출공'(出公, B.C.492~480 재위)으로

즉위하였다.

 

 

기원전 492

진'조앙'이 조가를 포위해 총공격하자.  '순인'(荀寅)과 '범길사'(范吉射)는 "한단"(邯鄲)으로 달아났다.

 

 

기원전 491

'조앙'· '한불신'(韓不信)· '위만다'(魏曼多)· '지역'(순역) 등 4가(家)의 군대가 총출동하여

'중행인'(中行寅, 순인(荀寅)), '범길사'(范吉射) 일파의 근거지인 "한단"(邯鄲)과 "백인"(柏人)을 함락하고

중행씨와 범씨 가문을 멸문하였다.

이로써 진(晉)의 6경(卿)(한(韓)· 위(魏)· 조(趙)· 범(范)· 중행(中行)· 지(知)) 중 중행씨, 범씨의 2경(卿)이 몰락하고

한(韓)· 위(魏)· 조(趙)· 지(知)의 4경(卿)만이 남아 경쟁하게 되었다. 
'순인'(荀寅)은 "선우"(鮮虞)로, '조오'(趙午) 아들 '조직'(趙稷)은 "임"(臨)으로 도망갔다. 

월왕 '구천' 부부가 3년 간의 억류 생활을 슬기롭게 마치고 월나라로 귀국하였다.
귀국 직후 지난날의 치욕을 설욕하기 위해 도읍을 "제기"(諸曁)에서 "회계"(會稽)로 옮겼다.

안으로 부국강병에 힘쓰면서 밖으로는 계속 오나라에 충성하는 척 하였다.
이에 오왕 '부차'는 많은 땅을 하사해 월나라는 동으로 "구용"(句勇), 서로 "취리"(欈李), 남으로 "고멸"(姑蔑),

북으로 "평원"(平原)에 이르는 사방 800리 영토를 얻었다. 
제'경공'(齊景公)이 사망하였다.  채나라 군주 '소공'(昭公, B.C.518~419 재위)이 시해당하였다.

 

 

기원전 489

오왕 '부차'가 막대한 인력, 물력을 들여 고소대(姑蘇臺)를 증축하였다.

월왕 '구천'은 오왕 '부차'를 여색에 빠지게 하려는 범려의 계책에 따라 

월나라의 최고 미인 '서시'(西施)와 '정단'(鄭旦)을 바쳤다. 

제 공자 '도'(荼)가 24대 군주(안유자(安孺子) : B.C.489년 재위)로 즉위하였다. 
초'소왕'(楚昭王, B.C.515~489 재위)이 사망하였다. 
제'경공'의 서장자(庶長子) '양생'(陽生)이 주군인 '도'를 시해하고

25대 군주 '도공'(悼公, B.C.488~485 재위)으로 즉위하였다. 
즉위를 반대한 '포목'(鮑牧)을 처형하고 '포식'(鮑息)을 후계자로 삼았다.

 

 

기원전 488

노나라가 제'도공'(齊悼公)의 매제(妹弟)인 주(邾)나라 군주 '익'(益)을 "부하"(負瑕)에 감금하였다.

 

 

기원전 487

제'도공'은 매제를 가둔 노나라를 정벌하기 위해 오나라에게 원군을 요청하였다. 
이 소식을 들은 노'애공'은 주나라 군주를 석방하고 화의를 청하였고 제, 노나라는 평화협정을 체결하였다.

 

 

기원전 486

제나라는 오나라에 원군 요청을 취소하자, 이를 불쾌하게 여긴 오왕 '부차'는 노나라에게 함께 군사를 내어

제나라를 치자고 건의하였다.

 

 

기원전 485

노· 오· 주· 담나라 등 4국이 제나라의 남쪽 "비읍"을 침범해 "식"에 주둔하였다. 
제나라의 '진항'(진성자), '전상'이 '도공'을 시해하고 오나라에 사죄하면서 화평을 청했기 때문에

오군은 일단 철수하였다. 
월왕 '구천'이 책사 '문종'(文種)의 계책에 따라 거짓으로 흉년이 들었다고 보고하여

오나라에서 1만 석의 곡식을 빌려 와 오나라 창고를 텅텅 비게 하였다.

 

 

기원전 484

제'도공' 아들 '임'(壬)이 26대 군주 '간공'(簡公, B.C.484~481 재위)으로 즉위하였다.

'진항'(陳恒)은 좌상(左相)이 되어 국정권을 장악하였다. 
제나라 '진항'은 군위를 찬탈하려는 야심을 품고 반대파를 제거하기 위해, 
또 전년에 노나라가 오나라와 연합해 제나라를 침입한 것을 보복하기 위해 노나라 정벌을 계획하였다. 
이를 안 '공자'(孔子)는 노나라의 환난을 막기 위해 제자 '자공'(子貢)을 보내 '진항'에게 노나라 대신

오나라를 공격하라고 설득하였다. '자공'은 또한 오왕 '부차'를 설득해 제나라를 공격하라고 유세하였다.

이에 오나라와 제나라의 양군이 교전하여 제나라 군사가 수적인 우세에도 불구하고 

오나라의 막강한 정예 군대에 밀려 대패하였다.  이에 제나라는 오나라에 화평을 요청하였다. 
승리감에 도취한 오왕 '부차'는 계속 월나라를 경계해야 한다고 직간하는 '오자서'에게 자결을 명한 뒤,

그 시체를 치이(말가죽 부대)에 담아 전당강에 버렸다. 
월왕 '구천'이 '문종'의 의견을 따라 오나라에 작년에 꾼 곡식을 갚되 낱알을 살짝 쪄서 보냈다.

 

 

기원전 483

오왕 '부차'는 중원의 패업을 도모하기 위해 북으로 진출하여 노, 위나라 등과 교섭해 제후 회맹을 개최하려고

시도하였다. 
노· 위· 송나라가 "운"(鄖)에서 회합할 때 오나라도 참석했는데 위나라가 오나라와 맹약하려고 하지 않자

오나라는 위나라의 '출공'(出公)을 감금하였다. 
그러나 '공자'의 제자 '자공'이 오나라의 태재(太宰) '백비'(伯嚭)를 설득해 '출공'을 석방시켰다.

 

 

기원전 482

노· 선(單)· 진(晉)· 오나라가 "황지"(黃池)에서 회맹하였다. 오왕 '부차'가 중원에 체재한 틈을 타

월왕 '구천'은 대대적으로 오나라를 침공하였다.
오왕 '부차'는 진(晉)· 노· 위나라 군주들과 함께 동맹을 맺고 왕호를 버리는 조건으로 (억지로)

중원 맹주 지위에 오른 후 급히 귀국하였으나 오나라가 대패하여 월나라에 항복을 선언하였다.

 

 

기원전 481

노'애공'이 "대야"(大野)에서 수렵을 하다 기린(麒麟, 성인의 출현을 예언한다는 상상 속의 신령한 동물)을

획득하였다. 
전설상으로는 이해부터 '공자'(孔子)가 노나라 역사 저술에 착수하여 노'은공'(魯隱公) 1년인 B.C.722년부터

획린(獲麟)한 B.C.481년까지 242년 간의 편년체(연대순으로 역사 사실을 기록하는 방식) 통사 『춘추(春秋)』를

지었다고 한다. 
오늘날 '공자'의 『춘추』 저작설은 후대의 유학자들이 『춘추』의 권위를 높이기 위해 지어낸 윤색일 뿐이며, 
실제로는 노나라의 역대 사관들이 오랜 기간을 거쳐 합동 저술한 역사서로 보고 있다. 
제나라 좌상이자 실권자인 '진항'이 평소 사이가 나빴던 우상 '감지'(闞止)를 암살하고 감씨 일족을 몰살한 후

'감지'를 총애한 제'간공'을 서주(舒州)에 유폐시켰다. 
후에 '간공'을 시해한 후 '간공'의 동생 공자 '오'를 27대 군주 '평공'(平公, B.C.480~456 재위)으로 옹립하였다.  
'진항'은 노· 위· 진(晉)· 오· 월나라 등 사방의 강한 나라들과 친선을 유지하면서 민심을 수습하고

민생 안정을 도모하는 한편, '포씨'· '안씨'· '고씨'· '국씨' 등을 비롯한 제나라의 유력 경대부와 공족 가문들을

제거하고 제나라 영토의 반 이상을 차지해 제나라의 국정을 농단하였다.
후에 전국에서 100여 명의 건강한 여자들을 뽑아 후방(後房)에 거주시킨 뒤 일가친척 남자들에게

후방을 개방하였다. 
그렇게 해서 태어난 70여 명의 아들들에게 진씨 성을 하사하고 이들을 중앙, 지방의 모든 관직에 충당하였다. 
이로써 강씨(姜氏)의 제나라는 진씨(陳氏)=전씨(田氏)의 제나라가 되었다. 

'공자'가 노'애공'에게 '진항'(陳恒)을 징벌할 것을 청했으나 거절당하였다.

 

 

기원전 480

위나라 '출공'(出公, B.C.492~480 1차 재위)의 부친인 공자 '괴외'(蒯聵)가 누이 '공희'(孔姬)의 도움으로

비밀리에 본국으로 잠입해 아들인 '출공'을 내쫓고 위나라의 26대 군주 '장공'(莊公, B.C.479~478 재위)으로

즉위하였다.  '출공'은 노나라로 도주하였다.

 

 

기원전 479

주나라 천자 '경왕'(敬王, B.C.519~476 재위)이 위'장공'의 즉위를 정식 승인하였다. 

대성현 '공자'(孔子) 세상을 떠났다. 
초나라의 공손인 백공(白公) '승'(勝, 세자 건(建)의 아들)이 정나라에서 억울하게 살해된 부친의 원수를 갚기 위해

정나라를 정벌하고자 했으나 영윤 '자서'(子西)와 사마 '자기'(子期)가 응하지 않았다. 

때마침 진(晉)나라 '조앙'(趙鞅)이 정나라를 공격하자 '자서'는 정나라를 구원하고 동맹을 맺었다. 
이에 격분한 '승'은 '석걸'(石乞), '웅의료'(熊宜僚)와 함께 내란을 일으켜 '자서', '자기'를 '엽공'(葉公) '심제량'이

난을 진압한 후 '자서'의 아들 '영'(寧)을 영윤으로, 자기의 아들 '관'(寬)을 사마로 삼고 나라를 안정시킨 뒤 은퇴하여 "엽읍"으로 낙향하였다. 
위'장공'이 재물이 적음을 불평하자, '혼양부'(渾良夫)가 세자 '질'(疾) 대신 '출공'(出公)의 첩(輒)을 불러들여

후계자로 삼고 대신 그 재물을 뺏으라고 건의하자, 

이 말을 엿들은 세자 '질'은 '장공'을 겁박해 세자를 바꾸지 않겠다는 약조를 받아냈다.

 

 

기원전 478

진(晉)나라는 조공(朝貢)을 바치지 않는다는 이유로 위나라를 공격하자,

이 틈에 위나라 백성들은 무도한 '장공'을 몰아냈다. 
위'장공'은 융(戎)으로 달아났으나 융인(戎人)들에게 무례하게 굴어 피살되었다. 

진(晉)나라는 위'장공'의 이복 동생인 공자 '반사'(般師)를 옹립하였다. 
진(陳)나라가 전년에 백공 '승'의 내란을 틈타 초나라를 공격했는데,

이를 응징하기 위해 초 영윤 '자서'(子西)의 아들이자 "무성현"의 현윤인 '공손조'(公孫朝)가 

진나라의 마지막 군주 '민공'(閔公)을 죽이고 진(陳)나라를 완전히 멸국시켰다. 
제나라 '진항'(陳恒)이 위나라를 침입해 '반사'를 몰아내고 공자 '기'(起)를 새로운 군주로 옹립하였다.

(B.C.477년 2차 재위).

 

 

기원전 477

위나라 대부 '석포'(石圃)가 군주 '기'(起)를 쫓아내고 노나라로 피난 가 있던 '출공'을 복위시켰다.

(B.C.476~470 재위).

 

 

기원전 476

주'경왕'(周敬王)이 세상을 떠났다.  월나라가 초나라를 침략하였다.

 

 

기원전 475

주나라 태자 '인'(仁)이 27대 천자 '원왕'(元王, B.C.475~469 재위)으로 즉위하였다. 

진(晉)나라 진양조씨(晉陽趙氏)의 종주(宗主) '조앙' 사망하였다.
서자 '무휼'(無恤)이 적자가 되어 종주 지위를 계승하였다. (조양자(趙襄子)).

 

 

기원전 473

월왕 '구천'(句踐)이 오나라를 대대적으로 침공하여 멸망시키자 오왕 '부차'는 자살하였다.

서주(舒州) 땅에서 월· 제· 진· 송· 노나라 5개국이 회합하였다. 
이에 주'원왕'은 '구천'을 백주(伯主, 패자(覇者))로 만천하에 공표함으로 방백(方伯)의 명을 받아 패주가 되었다.

 

 

기원전 472

진(晉)나라 지씨(知氏)의 종주(宗主) '지요'(知瑤, 순요(荀瑤)=지양자(知襄子)=지백(知伯))가 제나라를 침공하여

"이구"(犁丘)에서 크게 이겼다.   노나라의 '숙청'(叔靑)이 월나라에 최초로 사신으로 방문하였다.

 

 

기원전 470

위'출공'이 배은망덕하게 '석포'를 추방하자, 이에 위나라의 대부들이 '출공'을 몰아낸 후 공자 '겸'(黚, 일명 묵(默))을

'도공'(悼公)으로 옹립하였다.(B.C.469~465). 
'출공'은 월나라로 도주하였고 군위 계승을 둘러싸고 10여 년 동안 일대 혼란이 지속된 결과

위나라는 진(晉)나라의 속국처럼 되었다.  월나라의 '범려'는 은퇴한 뒤 처자를 데리고 제나라로 가서

치이자피(鴟夷子皮, 말가죽 부대에 싸여 전당강에 버려진 오자서를 추모하여 지은 이름)라고 개명한 후 
"도산"(陶山)에서 목축업을 하여 거부가 되었다.

이로부터 이재가(理財家)로 명성을 날리면서 도'주공'(陶朱公)이라 불렸다.

 

 

기원전 469

월왕 '구천'이 대부 '문종'(文種)에게 자결을 명하였다.

 

 

기원전 468

주나라의 28대 천자 정정왕(貞定王) '개'(介, B.C.468~441 재위)가 즉위하였다.  
노'애공'이 월나라에 가서 삼환씨(三桓氏)를 제거해달라고 청했으나 월나라는 응하지 않았다. 
노'애공'은 삼환씨의 보복이 두려워 귀국하지 못하고 월나라 유산지(有山氏)에서 죽었다. 

월나라가 "낭야"(瑯邪)로 천도하였다

 

 

기원전 467

노나라의 26대 군주 도공(悼公) '영'(寧, B.C.467~431) 즉위하였다. 

삼환(三桓)의 세력이 노나라 공실을 능가하게 되었다.

 

 

기원전 464

진(晉)나라의 '지요'(지백, 지양자)가 주장(主將)이 되어 정나라를 포위 공격했을 때

조씨 가문의 종주 '조맹'(조무휼, 조양자)을 심하게 모욕하였다. 이때부터 '조맹'은 '지요'를 미워하였으며,

'지요'는 본래 탐욕하고 괴팍스러워 '한강자', '위환자'도 그를 미워하게 되어 '조맹'과 함께 '지요'를 죽였다. 
월왕 '구천'이 사망하였다.  '녹영'(鹿郢)이 그를 계승하여 월나라의 새로운 군주로 즉위하였다.

 

 

기원전 458

진(晉)나라의 한(韓)· 위(魏)· 조(趙)· 지(知)씨 등 4경(卿)이 멸문된 범씨(范氏)와 중행씨(中行氏)의 영읍들을

모두 나눠 가졌다.

 

 

기원전 457

진'출공'이 제, 노나라에 밀사를 보내 4경(卿)(한(韓)· 위(魏)· 조(趙)· 지(知)씨)을 처치해줄 것을 요청하였다. 
제나라 전씨(田氏)와 노나라의 삼환(三桓)은 진나라의 실권자인 지백(知伯, 지씨(知氏)의 종주(宗主)인 영주)

'요'(瑤)에게

이 사실을 알렸다. 대노한 '지백'은 '출공'을 제나라로 쫓아내고 '공손교'(公孫驕)를

34대 군주 '애공'(哀公, B.C.456~439 재위)으로 옹립하고 이로부터 '지백'이 국정을 농단하였다.

 

 

기원전 455

진(晉)나라의 국정을 장악한 지백 '요'는 한· 위· 조 3가를 멸하고 진(晉)나라 공실을 차지할 요량으로 

우선 월나라를 정벌한다는 명목하에 한씨, 위씨의 땅 100리를 빼앗았다. 

'조양자'만이 이에 불복하고 근거지인 "진양"(晉陽)으로 달아나자,

지백은 한씨, 위씨와 함께 "진양성"(晉陽城)에 칩거한 조씨를 총공격하였다.

 

 

기원전 453

'조양자'는 "진양"의 백성들과 힘을 합쳐 1년 이상 진양성을 방어하자,

'지요'는 수공(水攻)으로 "진양성"을 수몰시키고자 하였다. 
'조양자'는 가신 '장맹담'(張孟談)의 계책대로 한씨, 위씨를 설득해 그들과 연합하여 지백 '요'를 죽이고

지씨 일족을 멸문시킨 뒤 지씨 영읍을 삼분하였다. 

이로써 한· 위· 조 3가(家)는 사실상 진(晉)나라를 삼분하고 단일 국가로 독립하였다.

(진(晉)의 삼분, 삼진(三晉)의 성립), 이때부터를 전국 시대로 구분하였다. 
'조양자'의 재상(宰相) '장맹담'은 토지 제도 개혁을 실시하였다.  '조양자'는 '지백'의 두개골을 변기로 사용하자,
이 소문을 들은 '지백'의 가신 '예양'(豫讓)은 분기충천하여 갖은 고초 끝에 조양자를 두 차례나 암살하려 했지만

실패하고 자결하였다.  제나라의 재상 '전반'(田盤, 진항(陳恒)=전상(田常)의 아들)은 삼진(三晉)의 독립에 고무되어

제나라의 모든 영토와 관직들을 동족인 전씨(田氏)에게 나누어 주었다.

 

 

기원전 452

진'출공'(晉出公)이 초나라로 도주하였다.

 

 

기원전 449

월왕 '불수'(不壽) 피살되어 '주구'(朱句)가 즉위하였다.

 

 

기원전 447

초나라가 채(蔡)나라(당시 하채(下蔡)에 소재)를 완전 멸국시켰다.

 

 

기원전 446

위문후(魏文侯) '사'(斯, B.C.445~396)가 즉위하였다. 

즉위 이후 줄곧 내치에 힘쓰고 선정을 베풀어 위나라를 삼진(三晉) 중 가장 먼저 부강해지도록 만들었다. 
특히 '자하'(子夏, 공자의 제자)· '전자방'(田子方)· '단간목'(段干木) 등 당대 석학(碩學)들을 우대하고 신의를 지켰다.
'이극'(李克)· '책황'(翟璜)· '전문'(田文)· '임좌'(任座) 등 천하의 모사들이 그를 보필하였다.

 

 

기원전 445

초나라가 소국 기(杞)를 멸하고 동쪽으로 영토를 계속 확장하여 "사수"(泗水) 유역에 도달하였다.
춘추 시대의 계절존망(繼絶存亡 : 대가 끊이게 된 집안에 양자를 들이어 대를 이음 ),

존왕양이(尊王攘夷 : 왕을 숭상하고 외부의 오랑캐를 배척함)의 원리는 사라지고 

강국들의 약소국 합병이 본격화되었다.

 

 

기원전 444

진(秦)나라가 "의거"(義渠)를 정벌하고 그 군장(君長)을 사로잡았다.

 

 

기원전 441

남정(南鄭)이 진(秦)나라를 배반하였다.

 

 

기원전 440

주'고왕'(周考王)이 아우 '게'(揭)를 "하남"(河南)의 영주로 봉하였다. (서주'환공'). 
이때부터 서주'환공'의 자손들은 주 왕실과는 별도의 영지를 보유하면서 자립하는 경향을 보였다.
그리하여 주나라 왕실의 권한과 직할 영지는 더욱 축소되었다.

 

 

기원전 433

이 무렵부터 한· 위· 조나라 삼진(三晉)이 크게 융성하였으며 진(晉)나라 공실은 "강"(絳)과 "곡옥"(曲沃)의

2읍만 가까스로 보유한 채 도리어 삼진에 조회(朝會)드리는 처지로 전락하였다.

 

 

기원전 431

초나라가 거(莒)나라를 멸하였다.

 

 

기원전 414

월(越)나라가 담(郯)나라를 멸하였다.

 

 

기원전 412

위문후(魏文侯)가 법가(法家) '이회'를 등용하여 내정 개혁을 실시하고 법전(法典)을 정비하게 하는 한편, 
평적법(나라에서 해마다 추수 직후에 곡식을 시가보다 약간 비싸게 사들여 비축해두었다가

춘궁기나 흉년에 곡가가 오르면 시가보다 싸게 방출하는 제도. 곡가 조절 및 빈민 구휼 정책)을 최초로 실시. 

이해부터 『죽서기년(竹書紀年)』의 기술이 시작되었다.

 

 

기원전 408

위(魏)나라가 '악양'(樂羊)을 원수(元帥)로 삼아 중산국을 공격해 "추산"(楸山)에서 멸망시켰다. 
위문후는 대승을 거둔 공으로 '악양'을 영수군(靈壽君)에 봉하고 병권을 회수하였다. 
세자 '격'(擊)을 중산군에 봉하여 통치하게 하고 '서문표'(西門豹)가 "업"(鄴)의 태수로 부임하여

하백취처(河伯聚妻 : 장하(漳河)의 물귀신이 노하지 않도록 해마다 유역 고을들의 쳐녀를 그 부인으로 삼아

수장시키던 풍습)의 악습을 타파하고 장수 12거(渠)(저수지)를 건설하여 수만 경(頃)의 농토를 개간해 

"업" 땅을 살기 좋은 곳으로 바꿔놓았다.

이에 "업" 땅 백성들의 칭송이 자자해졌자.

 

 

기원전 404

강성(姜姓) 제(齊)나라의 마지막 군주 '강공'(康公, B.C.404~379)이 즉위하였다. 

'전화'(田和)가 재상(宰相)이 되어 국정을 농단하였다.

 

 

기원전 403

주'위열왕'(周威烈王) 23년, '한건'(韓虔)· '위사'(魏斯)· '조적'(趙籍)이 많은 뇌물을 '위열왕'에게 바치고

제후 지위를 승인받았다.

이에 '한경후'(韓景侯, B.C.408~400)는 "평양"(平陽)에, '위문후'(魏文侯, B.C.445~396)는 "안읍(安邑")에, 
'조열후'(趙烈侯, B.C.408~387)는 "중모"(中牟)에 도읍을 정하고 각각 완전한 삼국으로 자립하였다. 
이해부터 '사마광'(司馬光)의 『자치통감(資治通鑑)』(주위열왕 23년~오대(五代)의 약 1360년 간의

역사를 기술한 편년체 통사) 기술이 시작되었다.    
위문후가 '이회'의 진지력법(盡地力法, 국토를 최대한 이용하고 단위 면적당 토지 생산력을 극대화하는 방법)을

채택하여 농업 생산력을 제고시켰다. 
또한 '이회'가 제안한 법치주의(法治主義)를 바탕으로 관료 임용에서의 세습제를 폐지하고 능력에 따라

인재를 선발하도록 하며, 각국에서 새로 제정된 법률을 참고하여 『법경(法經)』 6편(현존하지 않음)을 제정해

그에 입각해 통치하였다.  이로써 위나라는 삼진 중 가장 먼저 부강해졌다.
위문후(魏文侯)가 '오기'(吳起)를 "서하"(西河) 태수로 임명하여 서쪽 변경 방어를 전담하게 하자,

'오기'는 서하의 군사를 조련하여 방어 체제를 대폭 강화하였다.

 

 

기원전 402

초나라 '성왕'(聲王, B.C.407~402 재위)이 적도(賊盜)에게 피살당하였다.

 

 

기원전 401

진'간공'(蓁簡公, B.C.414~400 재위)이 위(魏)나라를 공격해 "양호"(陽狐)까지 진격하였다.

 

 

기원전 400

한(韓)·위(魏)·조(趙) 3진(晉)이 초나라를 공격하여 "상구"(桑丘)까지 진격했다가 회군하였다.

정나라가 한나라의 "양책"(陽翟)을 포위 공격하였다.

 

 

기원전 398

정나라 사람들이 상국 '자양'(子陽)을 죽이자, '자양'의 측근 일파들이 반란을 일으켰다.

이 내란을 틈타 초나라가 정나라를 포위 공격하였다.

 

 

기원전 397

한(韓)나라의 재상 '협누'(俠累, 한괴(韓傀))가 이전에 많은 신세를 진 경(卿)인 '엄수'(嚴遂)를 배은망덕하게

푸대접하였다. 
앙심을 품은 '엄수'는 제나라에서 천하장사 '섭정'(聶政)을 알게 되어 그를 후대해 심복으로 만든 뒤

원수를 갚도록 명령하자,'섭정'은 어머니를 모셔야 한다는 이유로 거절함.

그 뒤에 어머니가 돌아가시자, 혼자 가서 한괴를 척살하고 자살하였다.
정나라의 자양 일파들이 '수공'(繻公, B.C.422~396 재위)을 시해하였다.

 

 

기원전 396

위문후 위독하자, 중산군(中山君)인 세자 '격'(擊)을 급히 소환하였다. 이 틈에 조나라는 중산 땅을 차지,

이로 인해 위, 조 양국 관계 악화되었다. 
위나라 3대 군주 '무후'(武侯, B.C.395~370)가 즉위하였다,  '전문'(田文)을 재상(宰相)으로 임명하자,

'오기'는 '전문'을 재상으로 삼은 데 대해 불만을 품었다. 이를 눈치챈 위무후(魏武侯)는 '오기'를 미워하게 되었다.

 

 

기원전 394

정나라가 점유하고 있던 "부서"(負黍)가 정나라를 배반하고 다시 한나라에 귀속하여 빌붙었다. 
제나라가 노나라를 정벌하여 "최읍"(最邑)을 취하자,  이에 한나라가 노나라를 구원하였다.

 

 

기원전 393

초나라가 한나라 공격하여 "부서" 땅을 점령하였고, 위나라가 정나라를 공격하여 "산조"(酸棗)에 성을 건축하였다. 
위나라가 진(蓁)나라를 "왕"(汪) 땅에서 승리하였다.

 

 

기원전 392

제나라의 재상 '전화'(田和)가 주군 '강공'(康公)을 해상으로 쫓아버리고 1개 성읍(城邑)만을 보유하도록 하였다.

 

 

기원전 391

한(韓)·위(魏)·조(趙) 3진(晉) 군사가 초나라를 정벌해 "대량", "유관"에서 초군을 크게 무찔렀다. 
진(蓁)나라가 한(韓)나라의 "의양"(宜陽)을 정벌하여 6개 읍을 탈취하였다.

 

 

기원전 390 

'오기'가 초나라로 도주하였다.  초'도왕'(楚悼王, B.C.401~381)은 '오기'를 영윤(令尹)으로 삼아 전권을 주어

개혁 정책을 실시하도록 하였다.  이에 '오기'는 공족(公族)· 세족(世族)들의 권리와 지위를 대폭 축소할 것과,

불필요한 관직과 작록(爵祿)을 과감하게 삭감하고 정리할 것과, 관료· 세족· 봉군(封君)들의 작록 세습을

3대까지로 제한할 것과, 군대를 강화할 것과, 건축술을 비롯한 각종 신기술들을 외국으로부터 개방적으로

도입할 것 등 각종 혁신적인 변법(變法)을 추진하였다(오기변법(吳起變法)). 
공족· 세족· 봉군들의 격렬한 반대에도 불구하고 변법은 강행되어 초나라는 재차 부국강병을 달성하게 되었다.
진(秦)나라와 위(魏)나라가 "무성"(武城)에서 교전을 벌였으며, 제나라가 위나라를 "양릉"(襄陵) 전투에서 승리하였다.

 

 

기원전 389

진(秦)나라가 위(魏)나라의 "음진"(陰晉) 땅을 공격하였다.

제(齊)나라의 '전화'가 '위무후'와 "탁택"(濁澤)에서 만나 제후 지위를 구하였다. 
'위무후'는 주 천자에게 '전화'의 제후 지위를 요청해볼 것을 약속하였다.

 

 

기원전 387

진나라가 촉(蜀)나라를 공격하여 "남정"(南鄭) 땅을 점령하였다.

 

 

기원전 386

제나라의 '전화'가 주'안왕'(周安王, B.C.401~376 재위)의 승인을 받아

제'강공'(齊康公, B.C. 404~379 재위)을 대신해 제나라의 제후가 되었다. 
이로써 강성(姜姓)의 제(齊)나라(강태공(姜太公) '여상'(呂尙)이 세운 나라)는 무너지고

전씨의 제나라(전제田齊)가 수립되었다. 
조(趙)나라는 "한단"(邯鄲)으로 천도하였다.

 

 

기원전 385

진'회공'(秦懷公)의 증손이자 요절한 세자 '소'(昭)의 손자인 공자 '연'이 적통임을 주장하며

'균개'(菌改)의 원조 아래 헌공(獻公, B.C.384~362 재위)으로 즉위하였다. 
즉위 후 춘추 중기에 서융(西戎)에서 도입한 진(秦)나라의 오랜 관습인 순장(殉葬)을 폐지하는 칙령을 내렸다. 
한(韓)나라가 정나라를 공격하여 "양성"(陽城)을 탈취하고 송나라를 공격하여 "팽성"(彭城)을 함락한 후

춘추 중기에 송'휴공'(宋休公, B.C.395~373)을 체포하였다.

 

 

기원전 384

제나라가 위나라를 침략하여 "늠구"에서 양군이 전투를 벌였다.

조(趙)나라가 위나라를 구원하러 와 조, 위 양군이 제나라 군사를 크게 무찔렀다.

 

 

기원전 383

진(秦)나라가 "역양"(櫟陽)으로 천도하였다.  조나라가 "강평성"(剛平城)을 축성하고 위(衛)나라를 침공하자, 

위(衛)나라는 위(魏)나라에게 원군을 요청하였다.  위(魏)나라 군사가 조군을 토대(兔臺)에서 격파하였다.

 

 

기원전 382

제, 위(魏)나라가 위(衛)나라를 도와 조나라를 공격하여 이에 위(衛)나라는 조나라의 "강평성"을 빼앗고 "

중모"(中牟) 땅까지 공격해 들어갔다.

 

 

기원전 381

조나라는 초나라에 원군 요청하자, 이에 초나라는 조나라를 도와 위(魏)나라를 공격해

"주서"(州西)에서 양측이 교전하고 "양문"(梁門)을 지나 황하(黃河)까지 이르렀다.
이에 힘입은 조나라 군대는 반격을 개시해 위(魏)나라의 "극포"(棘蒲)와 "황성"(黃城) 땅을 탈취하였다. 
초나라가 서쪽의 백월(百越)을 공격하여 "동정"(洞庭), "창오"(蒼梧) 일대를 장악하였다. 
초'도왕'이 사망하자,  국상(國喪)을 틈타 '오기'를 미워하던 초나라의 공족· 세족· 관료들이 대거 궁중으로 몰려와

'오기'를 암살하려 하였다. '오기'는 '도왕'의 시신 뒤에 숨어 위기를 모면하려 했으나

세족들이 '도왕' 시신에 화살을 쏘아 결국 '오기'는 사망하였다.

 

 

기원전 380

제나라가 연(燕)나라를 공격하여 "상구"(桑丘)를 탈취하였다. 

이에 한(韓)· 위(魏)· 조(趙) 3진(晉)이 연나라를 구원하였다. 중산국(中山國)이 복국(復國)되었다. 

초'도왕'의 아들 '장'(臧)이 초나라의 33대 군주 '숙왕'(粛王, B.C.380~370)으로 즉위하였다. 
'숙왕'은 즉위 직후 부왕인 '도왕' 시신에 활을 쏜 죄를 물어 70여 가의 세족· 귀족들을 모두 처형하였다.

(이에 '오기'의 세족 탄압 정책이 간접적으로나마 실현되었다).

 

 

기원전 379

제'강공'(齊康公)이 사망하자, 이로써 '강제'(姜齊) 혹 '여제'(呂齊)는 완전히 국통(國統)이 끊어졌다. 
진(秦)나라가 "포"(蒲)· "남전"(藍田)· "선"(善)· "명지"(明氏) 등을 현(縣)으로 개편하였다.

 

 

기원전 378

책(翟)나라가 위(魏)나라를 "회"(澮) 땅에서 격파하였다. 

한(韓)· 위(魏)· 조(趙) 3진(晉)이 제나라를 공격해 "영구"(靈丘)까지 이르렀다. 
월나라가 오나라 땅으로 천도하였다.  진(秦)나라가 시제(市制, 시장 상거래에 관한 행정 법제)를 대폭 정비하였다.

 

 

기원전 377

촉(蜀)나라가 초나라를 정벌하여 "자방"(玆方) 땅을 탈취하였다. 
이에 충격을 받은 초나라는 서쪽을 방어하기 위해 한관을 증축하여 서방 국가인 촉(蜀)나라, 진(秦)나라를 경하였다. 
초나라가 복국된 중산(中山)을 공격해 "방자"(房子)에서 교전을 벌였다.

 

 

기원전 376

초나라가 중산(中山)을 재차 정벌하여 중인(中人) 땅에서 전투를 벌였다. 
한· 위· 조나라, 삼진(三晉)이 진'정공'(晉靖公, B.C.377~376 재위)을 폐위하여 서민으로 강등시켰다.

 

 

기원전 375

진(秦)나라는 대대적인 호적 조사를 실시해 행정 편제를 강화하였고,

위(魏)나라가 초나라의 "유관"(楡關)을 탈취하였다. 
한(韓)나라가 정나라를 멸국시킨 후 도읍을 "신정"(新鄭)으로 옮겼다. 
제나라의 '전오'(田午)가 주군인 '전섬'(田剡)과 그 소생인 '유자희'(孺子喜)를 시해하고 자립하여

전제의 3대 군주 '환공'(桓公, B.C.374~357 재위)으로 즉위하였다. 
한(韓)나라의 대부 '한산견'(한엄)이 한나라의 6대 군주 '애후'(哀侯, B.C.376~375 재위)를 시해하였다. 
'한약산'(韓若山)이 군위를 계승하여 7대 군주 '의후'(懿侯, B.C.374~363 재위)로 즉위하였다.

 

 

기원전 373

연(燕)나라가 제나라를 "임고"(林孤)에서 물리쳤다.  위나라가 제나라를 정벌하여 "박릉"(博陵)까지 도달하였으며,

노나라가 제나라를 "양관"(陽關)에서 격파하였다.

 

 

기원전 372

위(衛)나라가 제나라를 공격하여 "설릉"(薛陵) 땅을 탈취하자, 이 틈을 타 조나라가 위(衛)나라에 침입하여

73개 향읍(鄕邑)을 점령하였다. 위(魏)나라가 조나라를 "인"(藺) 땅에서 격파하였다.

 

 

기원전 371

위(魏)나라가 초나라를 공격해 "노양"(魯陽) 땅을 점령하였다.

 

 

기원전 370

조나라가 제나라의 "견"(甄) 땅을 공격하였다.  위무후(魏武侯, B.C.395~370 재위)가 사망하였다. 
위나라는 '공중완'(公仲緩)과 공자 '앵'(罃, 일명 영(瑩))이 군주의 지위를 놓고 다투었다.

 

 

기원전 369

한나라와 조나라가 '공중완'을 도와 위나라의 계승 분쟁에 관여해 공자 '앵'을 "탁택"(濁澤)에서 포위하였다. 
그후 한나라와 조나라 군사 간에 불화가 생겨 한나라가 군대를 철수시켰다. 
이 틈을 타 공자 '앵'은 홀로 남은 조나라 군사와 '공중완'을 물리치고 자립하여

'혜왕'(惠王, B.C.369~319)으로 즉위하였다. 
중산이 조나라와 북방 이민족의 침입을 방어하기 위해 장성(長成)을 축조하였다. (오늘날 만리장성(萬里長城)의 일부)

 

 

기원전 368

조나라가 제나라를 침공하여 제나라 장성까지 진격하였다.  조나라와 한나라가 주나라 왕실을 협동하여 공격하였다. 
제나라가 위나라를 공격하여 "관"(觀) 땅을 점령하였다.

 

 

기원전 367

동주(東周) 왕실이 하남 땅에 분봉해준 분국 서주(B.C.440)에 내란 발생하였다. 
곧 서주 '위공'(威公) 서거 후 공자 '근'(根)이 그 동부에서 군주의 지위를 요구하면서 자립하였다.
조나라와 한나라가 그를 지원하여 주 왕실의 분국 서주는 다시 서주와 동주의 2개 소국으로 재분열되었다.

 

 

기원전 366

위나라와 한나라 군주가 "택양"(宅陽)에서 회담하였다. 

위나라가 "무도"(武都)에 축성했으나 곧 진(秦)나라에게 점령당하였다. 
진나라는 한나라와 위나라 군대를 "낙양"(洛陽)에서 공격하여 무찔렀다기원전 365

위나라가 송나라의 "의대"(儀臺) 땅을 점령하였다.  조나라는 위(衛)나라의 "견"(甄) 땅을 점령하였다.

 

 

기원전 364

진나라는 위(魏)나라와 "석문"(石門)에서 전투를 벌여 대승을 거두고 6만의 군사를 참수(斬首)하였다. 

조나라가 위나라를 가까스로 구원하였다.

 

 

기원전 363

진나라가 위(魏)나라의 "소량"(少梁)을 공격하자, 조나라가 위나라를 다시 구원해 주었다.

 

 

기원전 362

위나라가 조나라와 한나라의 연합군을 "회북"(澮北)에서 격파하여 조나라 장수 '악조'(樂祚)를 사로잡고

"피뢰"(皮牢)· "열인"(列人)· "비"(肥) 등지를 점령하였다. 
조나라의 '성후'(成侯, B.C.374~350 재위)와 한나라의 '소후'(昭侯, B.C.362~333 재위)가

한나라의 "상당"(上黨) 땅에서 회합하고 평화조약을 체결하였다. 

진'효공'(秦孝公, B.C.361~338 재위)이 즉위하여 천하의 패권을 잡고자 널리 인재를 모집하였다.

 

 

기원전 361

위나라가 "대량"(大梁)으로 천도하였다.  위'혜왕'과 한'소후'가 "무사"(巫沙)에서 회합하였다. 

진나라는 소국 원(獂)나라를 멸하고 원왕(獂王)을 처형하였다.

 

 

기원전 360

위(魏)나라가 황하의 물을 끌어들여 수도 "대량" 인근의 포전(圃田, 과수원과 전답)에 관개공사를 하였다.
위나라의 "하양"(瑕陽) 땅 사람들이 "민산"으로부터 청의수(靑衣水)를 끌어들여 동쪽의 말수(沫水)와 합류시켰다.

 

 

기원전 359

'위앙' (위(衛)나라의 공손(公孫) 출신) 이 진'효공'(秦孝公)에게 변법(變法)과 극단적인 법치주의를 통해

부국강병과 패업을 달성할 것을 유세하였다.

 

 

기원전 358

위나라 장수 '용가'(龍賈)가 서쪽 변경에 장성(長城, 위장성(魏長城))을 축조하였고,

진나라는 한나라를 "서산"(西山)에서 크게 무찔렀다. 

초나라가 황하의 물을 끌어들여 한에서 빼앗은 장원(長垣)을 관개함.

 

 

기원전 357

송나라가 한나라의 "황지"(黃池)를 점령하였고, 위나라가 한나라의 "주"(朱) 땅을 점령하고

"택양"(宅陽)을 포위하여 공격하였다.

이에 한'소후'는 위'혜왕'에게 화의를 청해 양국이 "무사"(武沙)에서 만나 맹약을 맺고

위나라는 "택양"의 포위를 풀었다.

 

 

기원전 356

위나라의 계속된 승리와 영토 확장의 위세에 눌린 노'공후'(魯恭侯)· 송'환후'(宋桓侯)· 위'성후'(衛成侯)· 한'소후'는

위'혜왕'에게 조현(朝見)의 예를 올렸다.  송'환후'(宋桓侯)· 조'성후'(趙成侯)· 제'위왕'(齊威王)은 "평륙"(平陸)에서 회담을 갖고 위나라의 세력 확장에 대응하여 상호 협력하기로 하였다. 

3군 군주와 연'문공'은 "아"(阿)에서 재차 회합을 가졌다.  
진'효공'이 '위앙'을 좌서장(左庶長)으로 삼아 1차 변법을 시행하게 하였다.

(1차 변법은 B.C.359년에 시행되었다는 설도 있다).

 

 

기원전 355

전제(田齊)의 4대 군주 위왕(威王) '인제'(因齊, B.C.356~320 재위)가 즉위하였으나 정사를 돌보지 않고

향락만을 즐기자, '추기'(鄒忌)가 거문고에 비유해 국사를 돌볼 것을 충간하자 이를 깨닫고

'추기'를 재상으로 삼아 국사에 힘쓰게 되었다. 
우선 관료를 다스리는 법도를 보이기 위해 백성들을 잘 다스리는 데 힘쓴 "아읍"(阿邑) 대부를 문무백관이 보는 앞에서 포상하고, 백성들을 다스리는 것을 등한히 하면서도 뇌물을 많이 써서 거짓 칭송을 퍼뜨렸던

"즉묵읍"(卽墨邑) 대부를 팽살하여 지방관의 경종이 되게 하였다. 

이와 함께 어진 인재를 공정하게 뽑고 나태한 지방관들을 대폭 경질하였다. 
이로부터 중앙, 지방의 모든 관료들이 뇌물을 끊고 맡은 바 직무에 충실하게 되어 (전)제나라는 크게 다스려졌다. 
'신불해'(申不害)가 한(韓)나라의 재상이 되어 관료 통제술을 강조하고 '신불해'의 주도하에 한나라가

"해곡"(亥谷) 이남에 장성(長城)을 축조하였다.  위'혜왕'과 진'효공'이 "두평"(杜平)에서 회합하였다. 

송나라의 육경(六卿) 사성(司城) '자한'(子罕)이 주군 '환공'(桓公)을 시해한 후 정권을 장악하였다.

 

 

기원전 354

조나라가 위(衛)나라를 정벌하여 "칠"(漆)과 "부구"(富丘)를 점령하였다.  위(魏)나라가 위(衛)를 구원한 후

여세를 몰아 조나라의 수도 "한단"(邯鄲)을 포위하였다. 이 틈에 진(秦)나라가 위(魏)나라의 "소량"(少梁)을 취하였다.

 

 

기원전 353

제나라가 조나라를 구원하기 위해 위나라를 공격하자, 군사(軍師) '손빈'(孫臏)의 전도팔문진(顚倒八門陣) 계책을

이용해 '방연'(龐涓)이 이끈 위나라 군사를 "계릉"(桂陵)에서 크게 무찔렀고,

이어 송나라, 위(衛)나라와 연합하여 "양릉"(襄陵)을 포위하였다. 
한나라가 '동주(東周)'(동주 왕실이 분열되어 2개의 소국으로 된 것 중의 하나인 동주를 의미)를 공격하였다.

 

 

기원전 352

진나라는 위(魏)나라의 수도 "안읍"(安邑)을 공격하여 함락시켰다.  위나라는 한나라와 연합하여

"양릉"(襄陵)에서 제· 송· 위(衛)나라 연합군을 격파하였다. 

제나라는 초나라 대부 '경사'(景舍)를 내세워 위나라에게 강화 요청하자,

위'혜왕'은 "양릉"의 승리로 인해 "계릉"에서의 패배를 용서하였다.

 

 

기원전 351

진나라가 "상"(商)에 요새를 쌓고 그를 토대로 위(魏)나라를 공격해 "고양"(固陽)을 함락시켰다. 
위나라는 조나라의 수도 "한단"의 포위를 풀고 "장수"에서 조나라와 맹약을 맺었다.

 

 

기원전 350

'상앙'의 2차 변법(變法)을 실시하였다.

 

 

기원전 348

위'혜왕'과 조'숙후'(趙肅侯, B.C.349~326 재위)가 "음진"(陰晉)에서 회합을 가졌다.

 

 

기원전 344

위'혜왕'이 강력한 국세를 바탕으로 칭왕(稱王)하고 "봉택"(逢澤)에서 회맹을 소집한 후 제후들을 이끌고

주'현왕'(周顯王, B.C.368~321 재위)을 조현(朝見)하였다.

 

 

기원전 343

조나라가 위(魏)나라의 "수원"(首垣)을 공격하였다.

 

 

기원전 342

위나라가 한나라를 공격해 "양"(梁), "혁"(赫) 등지에서 승리하자, 제나라가 한나라를 도와 위나라를 공격하였다.

 

 

기원전 341

제나라가 대장군 '전기'(田忌)와 군사 '손빈'(孫臏)의 활약으로 위나라 군사를 '마릉"(馬陵)전투에서 대패시켰다. 
위나라 장군 '방연'(龐涓)은 '손빈'의 계책에 넘어가 무수한 화살을 맞고 즉사하였다. 

위 태자 '신'(申)은 포로가 되었다가 이송 중에 자결하였다. 
이에 한· 위· 조 3국이 제나라에 조공을 바치고 복종하였으며 이 전투로 위나라의 전성기가 끝나고

제나라의 패권 시대가 열렸다.

 

 

기원전 340

위(魏)나라가 제나라에게 대패당해 군사력이 매우 약화되자, 이 틈을 타 진(秦)나라가 '위앙'의 계책을 이용하여

서쪽 관문인 "오성"(吳城)에 무혈 입성한 뒤 내지로 진격하여 위나라의 수도 "안읍"(安邑)을 포위하여 공격하자, 

위(魏)나라는 "서하"(西河) 일대를 진(秦)나라에게 바치고 화평을 청하였다. 
위나라는 진(秦)나라의 위협을 피해 "안읍"에서 "대량"(大梁)으로 천도하였다. 
이 공로로 진'효공'(秦孝公)은 '위앙'에게 "상어"(商於) 등 15읍을 식읍(食邑)으로 내리고 '상군'(商君)으로 봉하였다.

 

 

기원전 339

위나라가 "대량"으로 천도한 후 "대량"의 외곽성에 수도 시설을 마련하여 포전(圃田)에 소용되는 용수를 공급하도록

하였다.

 

 

기원전 338

진'효공' 사망하자, 태자 '사'(駟)가 진(秦)나라의 31대 군주 '혜문왕'(惠文王, B.C.337~311 재위)으로 즉위하였다. 
'상앙'은 반대파들의 역모의 모함에 걸려 사지가 찢기고 가족이 참살당하는 비참한 최후를 맞았다.
진(秦)나라가 "안문"(岸門)에서 위(魏)나라를 격파하고 위나라 장수 '위착'(魏錯)을 포로로 잡았다.

 

 

기원전 337

초· 한· 조(趙)· 촉(蜀)의 4개국이 진나라의 위세에 눌려 조공(朝貢)의 예를 올렸다.  
'맹자'(孟子)는 제나라의 직하학궁(稷下學宮)으로 가서 각국 출신의 학사들과 교류하였다.

 

 

기원전 336

위(魏), 한(韓)나라 2국이 제나라 위왕(威王)에게 "동아"(東阿) 땅에서 조공을 올렸다. 

진(秦)나라가 국가 주도하에 최초로 동전(초행전(初行錢))을 유통시켰다.

 

 

기원전 335

위, 한나라 2국 군주가 "견"(甄)에서 제'위왕'(齊威王)에게 조현(朝見)의 예를 올렸다.
진(秦)나라가 한나라를 공격하여 "의양"(宜陽, 낙양으로 직통하는 중원 교통 요지)을 점령하였다.

 

 

기원전 334

위'혜왕'(魏惠王)이 궤변과 변설로 유명한 "혜시'의 계책을 사용하여 "서주"(徐州)에서 제'위왕'과 회담하여

'위왕'을 왕으로 존대하였다.  이에 제'위왕'도 위나라의 칭왕(稱王)을 승인하였다.(소위 '회서주상왕(會徐州相王)'). 
전국 시대를 대표하는 유세가(遊說家) '소진'(蘇秦)이 연'문공'에게 합종책(合縱策)에 대해 유세하였다. 
곧 '한· 위· 조· 제· 초· 연의 6국이 상호 연합해 공수동맹(攻守同盟)을 맺음으로써

군사 대국 진(秦)나라를 공벌(攻伐)할 것을 건의하였다.

 

 

기원전 333

연'문공'(燕文公)이 '소진'의 합종책을 적극 후원하자, 

이에 '소진'은 6국을 개별 방문해 화려한 언변으로 군주들을 설득하여 마침내 합종(合縱)을 성사시켰다.
조나라가 위(魏)나라의 "황"(黃) 땅을 포위, 점령한 후 북방 이민족의 침입을 방어하기 위해

"장수"(漳水)와 "부수"(滏水) 유역에 장성(長成)을 축조하였다.

초나라가 제나라의 "서주"(徐州)를 공격해 제나라 군대를 대파하고 제나라 장군 '신박'(申縛)을 포로로 잡았다.

 

 

기원전 332

위(魏)나라가 "음진"(陰晉) 땅을 진(秦)나라에 바쳤다.  진나라 영진(寧秦)이라 개명하였다. 
제, 위나라가 연합하여 조나라를 공격하자 조나라는 수공법(水攻法)을 써 황하의 제방을 무너뜨려

제, 위나라 연합군을 대패시켰다. 

연'역왕'(燕易王, B.C.322~321 재위)이 즉위하여 왕호(王號)를 사용하기 시작하였다.

 

 

기원전 331

"의거"(義渠)에 내란 발생하자 진(秦)나라는 서장(庶長) '조전'(操前)을 파견해 난을 평정하였다.

 

 

기원전 330

진(秦)나라는 "조음"(雕陰)에서 위나라를 대패시키고 위나라 장수 '용가'(龍賈)를 사로잡았다.

이에 위나라는 진나라에 "하서"(河西) 땅을 되돌려주고 화평을 청하였다.

 

 

기원전 329

진나라가 위나라의 "하동"(河東)에 소속된 "분양"(汾陽)· "피지"(皮氏)· "초"(焦) 등지를 점령하였다. 

위나라는 초나라의 "형산"(陘山)을 점령하였다.

 

 

기원전 328

'소진'(蘇秦)이 한· 위· 조· 제· 초· 연의 6국 군주에게 유세하고 다니면서 이들 동, 남방의 6국이 연합해

상호 공수동맹을 맺어야만 서방의 대국이자 신흥 군사 강국인 진(秦)나라에 대적할 수 있다고 설득하였다. 

이에 6국 군주가 '소진'의 주선으로 "원수"(洹水)에서 회합해 상호 동맹하였다.
'장의'(張儀)가 진(秦)나라의 상방(相邦)이 되었다. 

위나라가 "소량"(少梁)을 포함한 "상군"(上郡) 소속 15현(縣)을 진나라에 헌납하였다.

 

 

기원전 327

진나라는 "소량"을 "하양"(夏陽)이라 개명하고 위나라에게 보답으로 "초"(焦), "곡옥"(曲沃) 등지를 반환하였다.

 

 

기원전 326

조'숙후'(趙肅侯, B.C.349~326 재위)가 사망하였다.  진· 초· 연· 제· 위가 모두 장례에 참석하였다. 

진나라가 "용문"(龍門)에서 수렵 대회를 개최하였다.

 

 

기원전 325

4월 임오(壬午)일에 진(秦)나라의 '혜문군'(惠文君)이 왕을 칭하였다. 

위'혜왕'과 한'선혜왕'(韓宣惠王)이 "무사"(巫沙)에서 만나 서로의 왕호를 인정하였다. 
제나라가 조나라를 "평읍"(平邑)에서 무찌르고 조나라 장군 '한거'(韓擧)를 사로잡았다.

 

 

기원전 324

진나라의 '장의'(張儀)가 위나라의 "협"(陜) 땅을 차지하여 요새를 건설하였다. 

위'혜왕'과 제'위왕'이 "동아"(東阿)에서 회합하였다.

 

 

기원전 323

초나라의 대사마(大司馬) '소양'(昭陽)이 위나라를 공격하여 "양릉"(襄陵)을 비롯한 8개 성읍을 획득하는

큰 공을 이루었다.  
진(秦)나라의 상방 '장의'가 제, 초 양국을 "설상"(齧桑) 회맹에서 화해시켰다. 
'공손연'이 연· 조· 중산· 위· 한나라 5국이 모두 칭왕(稱王)하고 서로의 왕호를 인정하도록 주선하였다.

 

 

기원전 322

위나라가 '장의'의 책략을 수용하여 그를 재상으로 삼았으며 '혜시'(惠施)는 추방되었다. 
이로써 '장의'는 진, 위의 재상을 겸임하였다.  진나라는 위나라의 "곡옥"(曲沃), "평주"(平周)를 점령하였다.

 

 

기원전 320

진나라가 한, 위나라를 경유하여 제나라를 공격하자,

제나라의 장수 '광장'(匡章)이 응전하여 진나라의 공격을 물리쳤다.

 

 

기원전 319

진나라는 한나라의 "언"(鄢)을 점령하였다.

 

 

기원전 318

위· 조· 한· 초· 연 등 5개국이 '소진'(蘇秦)의 계책대로 합종하여 진나라를 총공격했으나

도리어 "함곡관"(函谷關)에서 대패하고 뿔뿔이 흩어져 귀국하였다. 

연(燕)나라 왕 '쾌'(噲)가 재상 '자지'(子之)의 책략에 넘어가 그에게 국가 정사를 모두 맡겼다.

연나라 백성들은 교묘하게 국정 전권을 차지한 '자지'를 미워하였다.

 

 

기원전 317

진나라는 5국 연합에 대한 보복으로 우선 한· 위· 조 3진(晉) 연합군을 "수어"(修魚)에서 격파하였다. 
이 틈에 제나라가 송나라와 연합해 위나라를 "관택"(觀澤)에서 격파하였다. 
제나라가 합종의 신의 없음과 무용함을 들어 '소진'을 처형하자, '장의'가 다시 진나라의 승상(丞相)이 되었다.

 

 

기원전 316

진나라의 '사마조'(司馬錯)가 촉(蜀)나라를 멸망시켰다.  진나라는 조나라의 "중도"(中都), "서양"(西陽)을 점령하였다.

 

 

기원전 315

진나라가 한나라를 침공해 "탁택"(濁澤)에서 전투를 벌였다. 

연나라에서 '자지'에 반대한 장군 '시피'(市被)와 태자 '평'(平)이 난을 일으켜 자지를 공격하였다.

 

 

기원전 314

연나라 '자지'가 반란군을 공격해 궤멸시키고 장군 '시피'를 처형하자 태자 '평'은 도주하였다. 
제나라가 연나라의 내란을 틈타 장군 '광장'(匡章)을 파견해 연나라를 대대적으로 공격하여 50일 만에

연나라 영토의 반 이상을 차지했으나 연나라 백성들의 저항이 하도 거세어 멸국(滅國)시키지 못하였다. 

제'민왕'(齊湣王)은 난신적자 '자지'를 능지처참하였다. 연왕(燕王) '쾌'(噲)도 국란의 와중에 사망하였다. 

이후 한동안 연나라는 제나라에 유린당하면서 내란 상태가 계속되었다. 
진(秦)나라가 한나라를 "안문"(岸門)에서 크게 물리쳤다.  진나라는 "의거"(義渠)를 공격하여 25개 성(城)을 취하였다.

 

 

기원전 313

'장의'(張儀)가 초'회왕'(楚懷王)을 설득하여 진나라와 화친을 맺게 하였다. 
진나라는 '저리질'(樗里疾)을 파견해 조나라를 공격하여 조나라 장수 '조장'(趙莊)을 잡고 "인"(藺) 땅을 점령하였다.

 

 

기원전 312

초나라의 '경취'(景翠)가 한나라의 '옹씨'(雍氏) 땅을 공격하자, 진나라는 한나라를 도와 '경취'를 반격하였다. 
진나라 장수 '위장'이 초나라를 "단양"에서 격파하고 "한중" 땅을 점령하고 '굴면'(屈丐)를 포로로 잡았다. 
제, 송나라가 위(魏)나라 군사를 "자조"(煮棗)에서 포위 공격하였다. 

그 보복으로 진· 위· 한나라가 제나라를 "복수"(濮水)에서 공격하였다. 
진나라가 "남전"(藍田)에서 초나라를 격파하였다.  한, 위나라가 초나라를 "등"(鄧)에서 격파하였다. 
내란을 수습한 연나라가 태자 '평'을 '소왕'(昭王, B.C.311~279 재위)으로 즉위시켰다.

 

 

기원전 311

연'소왕'이 스스로 몸을 낮추고 후한 예물을 갖춰 현자들을 초빙하자,

이에 '악의'(樂毅)가 위(魏)나라로부터, '추연'(鄒衍)이 제(齊)나라로부터, 
'극신'(劇辛)이 조(趙)나라로부터 연나라로 이주하는 등 충신열사들이 앞다투어 연나라로 모여들었다. 
이로써 연나라는 '소왕' 시기에 점차 부유하고 안정되었다.  진나라는 초나라를 공격해 "소릉"(召陵)을 점령하였다.

 

 

기원전 310

진나라가 "의거"(義渠), "단리"(丹犁)를 공격하였다.

 

 

기원전 309

진(秦)나라가 6국과의 차별을 두기 위해 재상(宰相)· 집정(執政)· 정승(政丞) 등의 호칭을 사용하지 않고

최초로 '승상(丞相)'이라는 칭호를 사용하였다. 
'감무'(甘茂)를 좌승상(左丞相)에, 저리질(樗里疾)을 우승상(右丞相)에 임명하였다.  장의(張儀)는 사망하였다.

 

 

기원전 308

진'무왕'(秦武王)이 중원을 도모하고자 좌승상 '감무'(甘茂)로 하여금 한(韓)나라의 "의양"을 공격하게 하였다.

 

 

기원전 307

"의양"을 함락한 뒤 진'무왕'은 "낙양"으로 가서 주 왕실의 보기인 구정(일명 구룡신정(九龍神鼎)) 중

'옹정(雍鼎)'(진(秦)나라가 소재한 옹주지역을 상징하는 정(鼎))을 들어 올리다가 발목이 절단되는

큰 부상을 얻어 사망하였다. 

'무왕'(武王)의 이복 동생 '직'(稷)이 진나라의 33대 군주 '소양왕'(昭襄王, B.C.306~251 재위)으로 즉위하였다. 
이 와중에 우승상 '저리질'(樗里疾)이 '맹분'(孟賁)과 그 일족을 처형하자,

좌승상 '감무'(甘茂)는 위나라로 망명하였다. 
조(趙)나라 '무령왕'(武靈王)이 군사력을 강화하기 위해 모든 군사, 장정들에게 북방 이민족이 입는 호복(胡服)을

착용하게 하고 기마술, 궁술을 집중 연마하게 하였다. 
이어 강화된 군사력을 바탕으로 "중산"(中山)을 공격하여 "방자"(房子) 지역까지 이르렀다.
진나라는 예전에 서장(庶長) 등 고유한 관작(官爵)을 장군직으로 처음 실시하였다. 

그리고 '위염'(魏冉)을 장군으로 임명하였다.

 

 

기원전 306

조(趙)나라가 중산의 "영가"(寧葭), "유중"(楡中) 땅을 공격하였다. 

초나라가 월(越)나라를 멸하여 강동군(江東郡)으로 설치하였다.

 

 

기원전 305

조나라가 파죽지세로 중산의 "단구"(丹邱)· "화양"(華陽)· "치"(鴟)· "호"(鄗)· "석읍"(石邑)· "봉룡"(封龍)· "동원"(東垣) 등지를 공격하였다. 이에 중산은 4읍(邑)을 바치고 화평을 청하였다.

 

 

기원전 304

진나라와 초나라가 "황극"(黃棘)에서 회맹하였다.  진(秦)나라는 초나라의 "상용"(上庸) 땅을 취하였다.

 

 

기원전 303

진나라는 한나라의 "무수"(武遂)를 점령하고, 위나라의 "포판"(蒲阪)· "진양"(晉陽)· "봉릉"(封陵) 등지를 점령하자. 

제· 위(魏)· 한나라가 초나라를 연합하여 공격하였다. 
초나라는 태자 '횡'(橫, 훗날의 '경양왕'(頃襄王))을 볼모로 보내고 진나라의 원군을 얻어 연합군의 공격을 물리쳤다.

 

 

기원전 302

조나라가 하종씨(河宗氏)와 휴혼제맥(休溷諸貉)의 땅을 빼앗고 "구원"(九原), "운중"(雲中)의 2군(郡)을 설치하였다. 
위'양왕'(魏襄王, B.C.318~296 재위)과 한나라 태자 '영'(嬰)이 진나라로 들어가 조현(朝見)하였다.

 

 

기원전 301

  진나라가 한나라의 "양"(穰)을 공격해 점령하였다.  제나라의 '광장'(匡章), 위(魏)나라의 '공손희'(公孫喜),

한나라의 '폭연'(暴鳶)이 초나라 "방성"(方城, 초나라가 북방 방어를 위해 건설한 견고하고 규모가 큰 장성)을

공격하여 "완"(宛), "엽"(葉) 등의 초나라 북방 영토를 빼앗았다.

 

 

기원전 300

진나라는 초나라를 공격하여 "신성"(新城)을 함락하고 초나라 장군 '경결'(景缺)을 처형하였다.

 

 

기원전 299

초나라 '회왕'(懷王)이 진나라의 속임수에 넘어가 납치되다시피 진나라 도성 "함양"(咸陽)으로 끌려가

"검중"(黔中) 땅을 내놓으라는 협박을 당하였다. 
초나라는 이 위기 속에 급히 제나라에 볼모로 가 있는 세자 '횡'(橫)을 영접하여 즉위시키고(경양왕(頃襄王) : B.C.298~263 재위),

진나라의 영토 요구를 거절하였다.  '회왕'은 "함양"을 탈출하여 초나라 국경으로 도주하였다.  
조나라의 '무령왕'(武靈王)이 '오왜'(吳娃) 소생의 왕자 '하'(何)에게 (혜문왕(惠文王) : B.C.298~266 재위)

양위하고 스스로를 '주부(主父)'라 칭하고 섭정을 하였다.

 

 

기원전 298

진(秦)나라가 초나라를 공격해 "석"(析)을 비롯한 10여 개 성읍(城邑)을 점령하였다. 
조나라가 '누완'(樓緩)을 진나라에 파견해 승상이 되게 하고, '구학'(仇郝)을 송나라에 파견해 재상이 되게 하였다.
제나라의 '맹상군'(孟嘗君)이 진'소양왕'의 초청으로 진나라로 갔다가 우승상 저리질(樗里疾)의 참소로

처형당할 위기에 몰렸다. 제나라에서 '맹상군'의 신세를 크게 진'소양왕'의 동생 '경양군'(涇陽君)이

미리 그 일을 알려 준데다, 맹상군의 휘하 빈객인 선비들의 다양한 계책(계명구도(鷄鳴狗盜) 덕분에

'맹상군'은 무사히 진나라를 벗어나 제나라로 돌아왔다.

 

 

기원전 297

조나라의 주부(主父) '무령왕'(武靈王)이 서하(西河)에서 '누번왕'(樓煩王)과 회견하였디. 
제· 한· 위나라가 계속하여 진나라 국경 지대를 합동 공격하였다.

 

 

기원전 296

제· 한· 위나라 연합군이 진나라의 "함곡관"을 공격하자, 진나라는 화평을 요청하고 한나라에게 "무수"(武遂)를,

위나라에게 "봉릉"(封陵)을 각각 돌려주었다. 
초'회왕'이 조나라를 거쳐 위나라로 도망하던 중 진(秦)나라 군사에게 붙잡혀 도로 "함양"으로 압송된 뒤

진나라에서 죽었다.
이에 진(秦)나라는 '회왕'(懷王)의 시신을 초나라로 보냈다. 조나라가 중산국(中山國)을 완전히 멸한 뒤

중산국왕을 "부시"(膚施)로 강제 이주시켰다.

 

 

기원전 295

조나라 공자 '장'(章)이 주부(主父, 무령왕 B.C.325~299 재위)와 '혜문왕'(惠文王, B.C.298~266 재위)이

"사구"(沙邱) 땅의 이궁(離宮)으로 휴양 간 틈을 타 군위를 쟁탈하려고 난을 일으켰다가,

정승 비의(肥義)의 의심을 사 실패하게 되자 주부가 거처하는 이궁으로 피신하였다. 
공자 '성'(成)과 '이태'(李兌)가 주부궁(主父宮)을 수색해 임의로 공자 '장'(章)을 죽인 후 주부궁을 포위,

주부는 그 안에서 아사(餓死)하였다. 
진(秦)나라의 승상(丞相) '누완'이 파직되고 '위염'(魏冉)이 새로운 승상이 되었다.

 

 

기원전 294

제나라의 '맹상군'이 점점 교만해지는 '민왕'(湣王)에게 충간하다가 미움을 받아 위나라로 도주하였다. 
위나라에서 어진 공자 '무기'(無忌, 후의 신릉군(信陵君))와 극진한 교분을 맺게 되었다.

 

 

기원전 293

진나라의 좌갱(左更) '백기'(白起)가 한, 위나라 연합군과 "이궐"(伊厥)에서 싸워 대승을 거두고

24만 명의 군졸을 참수한 뒤 위나라 장수 '공손희'(公孫喜)를 생포하였다.

 

 

기원전 292

진나라의 명장 '백기'가 위나라를 공격해 "원"(垣) 땅을 점령하였다.

 

 

기원전 291

진나라의 '백기'가 한나라를 공격해 "완"(宛) 땅을 점령하였다.
진나라의 좌갱 '사마조'(司馬錯)가 위나라를 공격해 "지"(軹) 땅을 점령하고 한나라를 공격해 "등"(鄧) 땅을 취하였다.

 

 

기원전 290

위나라와 한나라가 진나라에게 각각 "하동"(河東) 땅 400리와 "무수"(武遂) 땅 200리를 헌납하였다.

 

 

기원전 289

진나라가 위(魏)나라의 61개 성읍(城邑)을 점령하였다.

 

 

기원전 288

위'소왕'(魏昭王)이 조나라에 들어가 조현(朝見)을 드리고 "음성"(陰城), "갈얼"(葛孽) 등지를 헌납하였다. 
또한 "하양"(河陽)· "고밀"(姑密) 등을 '이태'(李兌)의 아들에게 분봉해주었다.
10월에 진'소왕'(秦昭王)과 제'민왕'이 서로 '제(帝)'를 칭하기로 약속해 제민왕이 동제(東帝),

진소왕이 서제(西帝)가 되기로 하였다.(진, 제의 칭제(稱帝)). 
그러나 국제 여론을 고려하여 양국 모두 두 달 만에 제호(帝號)를 취소하였다.

 

 

기원전 286

진나라가 위나라의 "하내"(河內)를 공격하자 위나라는 옛 도읍인 "안읍"(安邑)을 진에게 헌납하였다. 
조나라 장수 '한서위'(韓徐爲)가 제나라를 공격하고, 진나라는 한나라를 "하산"(夏山)에서 패배시켰다. 
송나라의 '강왕'(康王, B.C.328~286 재위)이 천하 패권을 잡겠다는 무리한 욕심으로 폭정을 실시하여

인심을 잃은 나머지 걸송(桀宋, 하나라 걸왕처럼 포악무도한 송나라 임금이란 뜻)이라는 별명을 얻게 되었다,

이에 제'민왕'이 제· 초· 위 3국 연합군을 이끌고 송나라를 공격해 멸망시켰다. 
이로 인해 한· 위· 조· 진· 연 등이 모두 제나라를 경계하게 되고, 송'강왕'은 연합군에게 생포되어

위나라의 "온"(溫) 땅에서 사망하였다.

 

 

기원전 285

진'소양왕'(秦昭襄王)과 초'경양왕'(楚頃襄王)이 "완"(宛)에서 회합하고,

2국 군주와 조'혜문왕'(趙惠文王)이 "중양"(中陽)에서 회담하였다. 

여기에서 진나라는 3국이 합종(合縱)하여 제나라를 공격할 것을 모의하였다. 

진나라 장수 '몽오'(蒙驁)가 제나라를 공격해 9개 성읍(城邑)을 점령하였다.

 

 

기원전 284

진'소양왕'이 위'소왕'(魏昭王)과 "의양"(宜陽)에서, 한'이왕'(韓釐王)과 "신성"(新城)에서 각각 회담하였다. 

연'소왕'이 조'혜문왕'을 조현(朝見)하였다.
진· 위· 한· 연· 조의 5국 연합군이 연나라의 명장 '악의'(樂毅)의 지휘 아래 제나라를 공격해 대패시켰다. 

제나라의 70여 성읍을 함락시키고 수도 "임치"(臨淄)까지 점령하였다. 

제나라는 "거주"(莒州)와 "즉묵"(卽墨)을 제외한 모든 지역이 점령당해 거의 망국이나 다름없는 상황이 되었다. 

위(魏)나라가 송나라의 "고지"(故地)를 점령하였고,  초나라는 "회북" 지역을 수복하였다.

 

 

 기원전 283

"거주"로 피난간 제 태자 '법장'(法章)이 "즉묵"(卽墨) 태수이자 왕족인 '전단'(田單)과 왕손  "가'(賈) 등의

원조를 받아 "거주"에서 '양왕'(襄王, B.C.283~265 재위)으로 즉위하였다. 

조'혜문왕'과 연'소왕'이 회담하였다. 

조나라가 제나라의 "양진"(陽晉) 땅을 점령하였다. 
진'소양왕'과 초'경양왕'(楚頃襄王)이 "언"(鄢), "양"(穰)에서 회담하였다.  
진나라가 위나라를 공격해 수도 "대량"(大梁)을 위협하자,  연나라와 조나라가 위나라를 구원하였다.

 

 

기원전 282

진'(秦)소양왕'과 한'이왕'(韓釐王)이 "신성"(新城)에서 회담하였다. 

진나라가 조나라를 공격해 "인"(藺), "기"(祁)의 2개 성(城)을 탈취하였다. 
조나라가 위나라의 "백양"(伯陽) 땅을 공격해 점령하였다.

 

 

기원전 281

진(秦)나라는 제나라로부터 탈취한 "정도"(定陶)를 '위염'(魏冉)에게 분봉하였다. 

조나라가 황하의 제방을 터뜨리는 수공법(水攻法)으로 위나라를 공격하였다.

 

 

기원전 280

진(秦)나라의 명장 '백기'(白起)가 조나라를 공격해 "광랑"(光狼) 땅을 점령하였다.

진나라는 사마조(司馬錯)를 파견하여 촉(蜀) 지역으로부터,
초나라의 "검중" 일대에 이르는 넓은 영토를 탈취하였다. 
초나라는 한수(漢水, 양자강의 대지류) 이북 지역과 "상용"(上庸) 지역을 진나라에 헌납하였다.

조나라가 제나라의 "맥구"(麥邱) 땅을 공격해 점령하였다.

 

 

기원전 279

연'소왕'(燕昭王) 사망하였다.  '혜왕'(惠王, B.C.278~272 재위)이 즉위한 후 주위의 참소하는 말과

유언비어만을 믿고 제나라에 주둔하고 있는 '악의'(樂毅)를 소환하고 대신 '기겁'(騎劫)을 제나라로 보냈다.

'악의'는 소환 도중 조나라로 도주하였다.

제나라의 "즉묵"(卽墨) 태수 '전단'(田單)은 그간 계속 군사를 모아 치밀하게 국토 수복 준비를 해오다가

이 틈을 타 즉묵에 주둔한 연나라 군사를 궤멸시키고, 이어 전국의 호응을 얻어 70여 개 성읍을 해방시켰다. 

진'소양왕'과 조'혜문왕'이 "민지"(澠池)에서 회담하여 수호(修好)를 체결하였다.  
진나라가 '백기'(白起)를 파견하여 초나라의 "언"(鄢)· "등"(鄧)· "서릉"(西陵) 등지를 공격해 점령하였다. 
초나라 장군 '장교'(莊蹻)가 "검중군"(黔中郡)으로부터 서남진하여 "전지"(滇池, 현 운남성 곤명(昆明) 부근)까지

진출해 전초 정권을 수립하였다. 그러나 너무 궁벽한 지역이라 열국들의 영향력이 미치지 못하였다.

 

 

기원전 278

진나라 '백기'가 초나라의 수도 "영"을 함락해 "이릉"(夷陵, 초나라 역대 왕들의 능묘(陵墓))을 불태우고

종묘사직을 파괴한 뒤 "경릉"(竟陵), "안륙"(安陸)까지 함락하여 남군(南郡)을 설치하였다.

이어 남진하여 "동정호"(洞庭湖) 부근의 "오저"(五渚), 강남(江南)까지 정벌하였다. 

이에 초나라는 "진현"(陳縣, 진(陳)나라를 멸하고 설치한 현)으로 천도하였다.

 

 

기원전 277

진나라가 촉군(蜀郡) 태수 '장약'(張若)을 파견하여 초나라 땅에 "무군"(巫郡), "검중군"(黔中郡) 

수도 "영"(郢)을 설치하였다. 
이에 초나라는 세자 '원'(元, 훗날의 고열왕(考烈王))을 진나라에 볼모로 보내고 화평을 요청하였다.

 

 

기원전 276

초나라가 "검중군" 소속 15개 성읍을 수복하여 방어 체제를 재정비하고 진나라에 대항하고자 하였다. 
조나라의 백전노장 '염파'(廉頗)가 위나라의 "기"(幾) 땅을 점령하였다.  진나라가 위나라의 2개 성읍을 점령하였다. 
위나라의 '안리왕'(安釐王)이 아우인 공자 '무기'(無忌)를 신릉군(信陵君)으로 봉(封)하였다.

 

 

기원전 275

조나라 장군 '염파'가 위나라의 "방릉"(防陵), "안양"(安陽) 지역을 점령하고,

진나라가 위나라를 공격해 수도 "대량"(大梁)을 포위 공격하였다.
한나라의 '폭연'(暴鳶)이 구원하러 왔으나 도리어 진에게 대패당하고 "계봉"(啓封)까지 퇴각하자, 

위나라는 할 수 없이 "온"(溫) 땅을 헌납하고 강화를 요청하였다.

 

 

기원전 274

조나라가 장수 '연주'(燕周)를 파견하여 제나라의 "창성"(昌城), "고당"(高唐)을 점령하였고,

진나라는 위나라의 "채"(蔡), "중양"(中陽) 등 4개 성읍을 점령하였다.

 

 

기원전 273

조, 위나라가 연합하여 한나라를 공격해 "화양"(華陽)까지 이르자, 이에 진나라는 장수 '백기'(白起), '호양'(胡陽)

등을 파견해 한나라 구원하여 "화양"에서 대승을 거두고 그 대가로 "권"(卷), "채양"(蔡陽) 등 여러 성을 취하였다. 

위나라 장수 '맹묘'(孟卯), 조나라 장수 '가언'(賈偃) 등이 모두 패배하였다. 
여세를 몰아 진나라 재차 위나라의 수도 "대량"을 포위하자,

위나라는 "남양" 지역을 진나라에 헌납하고 강화를 요청하였다.

 

 

기원전 272

연나라의 재상 '공손조'(公孫操)가 '혜왕'( B.C.278~272 재위)을 시해하고

'무성왕'(武成王, B.C.271~258 재위)으로 즉위하였다. 
진(秦)나라는 "의거"(義渠)를 멸하고 그를 군현(郡縣)으로 편입하여 후환을 완전 제거하였다. 

진나라와, 초나라가 한, 위나라를 도와 연나라를 공격하였다.

 

 

기원전 271

조나라가 '인상여'(藺相如)를 파견하여 제나라를 공격해 "평읍"(平邑)까지 진격하였다.

 

 

기원전 270

진나라의 객경(客卿) '조'(竈)가 제나라의 "강"(剛), "수"(壽)를 점령하였다.

 

 

기원전 269

진나라는 장수 '호양'(胡陽) 을 파견해 한나라의 "상당"(上黨)을 지나 "알여"(閼與)를 공격하였다. 
한나라는 조나라에게 급히 구원을 요청하자, 조나라는 장군 '조사'(趙奢)를 파견하여 치밀한 군사 작전으로

진나라 군사를 대패시켰다.  조나라는 그 공로로 '조사'를 '마복군'(馬服君)에 봉하고 최고 직위를 내렸다.

 

 

기원전 268

진나라는 위나라를 재차 공격해 "회"(懷) 땅을 점령하였다.

 

 

기원전 266

진나라는 위나라의 "형구"(邢丘)를 점령하고 위나라에서 무고한 누명을 쓰고 모진 형벌을 받은 뒤

구사일생으로 살아 도망쳐 온 '범수'(范雎)를 승상으로 삼았다.
'범수'는 원교근공(遠交近攻, 먼 나라와 친선을 맺어 후환을 없앤 뒤 가까운 나라부터 차례로 공격)의

외교, 군사 정책을 설파하여 '소양왕'의 신임을 얻었다.

이후 진나라의 군사, 외교 작전은 기본적으로 '범수'의 원교근공 원칙에 입각해 수립되고 진행되었다. 
곧 지리적으로 멀어 공격하기 곤란한 제· 초· 연나라와는 우선 임시적인 우호 관계를 맺고,

가까운 한· 위· 조나라를 먼저 공격하여 점진적으로 천하를 석권해가기로 방향을 정하였다.

(이는 결과적으로 합리적이고 성공적인 외교 정책이었음이 훗날에 판명되었다.)

 

 

기원전 265

진나라는 조나라의 3개 성읍을 탈취하고, 한나라의 "소곡"(少曲), "고평"(高平)을 점령하였다.

 

 

기원전 264

진나라의 '백기'가 "분수" 유역에 위치한 한나라의 "형성"을 점령하였다.

 

 

기원전 263

진나라에 볼모로 잡혀 있던 초나라 태자 '웅원'(熊元)이 태자태부(太子太傅)인 '황헐'(黃歇, 春申君)의 도움으로

진나라를 빠져나가 38대 군주 '고열왕'(考烈王, B.C.262~238 재위)으로 즉위하였다. 

진'소양왕'(秦昭襄王)은 '황헐'의 충성을 가상히 여겨 그도 초나라에 돌아가도록 선처하였다. 
'고열왕'은 '황헐'을 영윤으로 삼고 "회북"(淮北) 12현(縣)을 봉한 후 '춘신군'(春申君)이라는 봉호(封號)를 내렸다. 
'춘신군'은 회북 12현 대신 옛 오나라 땅이었던 "강동"(江東)을 요청해 하사받은 후 그 지역을 개발하였다. 
또한 조나라의 '평원군', 위나라의 '신릉군'에 뒤지지 않기 위해 3,000여 명의 선비를 양성하는 한편,

노(魯)나라와 그 인근 소국 추(鄒)나라를 합병하고 국가 법전과 제도를 대폭 정비하였다.  

이로써 초나라는 다시 부강해졌다.  진나라의 '백기'가 한나라의 "남양" 땅을 점령하였다.

 

 

기원전 262

진나라는 한나라의 "야왕"(野王) 땅을 점령한 후 "상당"(上黨)에서 한나라의 수도 "신정"(新鄭)으로 통하는

도로를 절단해 "야왕"과 "상당"을 고립시켰다.  "상당" 군수 '풍정'(馮亭)은 궁여지책으로 조나라로 귀순하였다.

 

 

기원전 261

진나라는 장군 '왕흘'(王齕)을 보내 "상당" 땅을 점령하엿다. 이에 조나라 장군 '염파'(廉頗)는

"상당"을 구원하러 가 그 부근인 "장평"(長平)에 주둔하고 진나라와의 지구전을 준비하였다. 

진나라는 "장평"이 당장 함락되지 않자 우회하여 한나라의 "구지"(緱氏)와 "윤"(綸) 지역을 점령하였다. 
중원의 전란을 틈타 초나라가 노나라 부근의 "서주"(徐州) 지역을 점령하였다.

 

 

기원전 260

조나라의 백전노장이자 지장(智將)인 '염파'의 노회한 지구전을 당해내기 힘들겠다고 판단한

진나라의 승상 '범수'는 이간책을 써서 '염파'를 참소하는 유언비어를 조나라에 널리 유포시켰다. 

이를 그대로 믿은 '효성왕'(孝成王, B.C.265~245 재위)은 당장 '염파'를 소환하고 '조사'(趙奢)의 아들 '조괄'을

파견하였으며 '조괄'은 '염파'의 지구전을 한꺼번에 부정하고 성급하게 속전속결을 시도하였다. 
이 틈에 진나라는 백전노장 '백기'를 급히 파견하여 마침내 양군이 "장평"에서 교전을 벌여

진나라가 대승을 거두었다. 조나라 군사는 완전 궤멸되고 용렬한 장수 '조괄'도 전사하였다. 

백기는 조나라 포로 40만 명을 하룻밤 사이에 학살하는 만행을 저질러 조나라 '조야'의 혼을 빼놓았다. 
이어 내친 김에 공포 상태에 빠진 조나라 수도 "한단"으로 진격해 조나라를 완전히 멸망시키려고 했으나,

'백기'의 공적을 내심 시기한데다 '소대'(蘇代)의 이간계에 말려든 승상 '범저'가 '백기'를 도중에 소환하는 바람에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

 

 

기원전 259

진나라는 '왕흘'(王齕)을 파견해 조나라의 "무안"(武安)을 점령하고 사마(司馬) '경'(梗)을 파견해

조나라의 "태원"(太原)을 령하였다.  진나라가 '왕릉'(王陵)을 파견해 조나라 수도 "한단"(邯鄲)을 공격하였다.

 

 

기원전 258

진나라는 '왕릉'의 뒤를 이어 '왕흘'을 파견해 조나라 수도 "한단"을 공격했으나 배수진을 친 한단인들의 굳은 방어로

쉽게 함락시키지 못하였다.  진나라의 승상 '범수'는 개인적인 친분을 지닌 '왕계'(王稽)를 "하동군"(河東郡) 태수로,

'정안평'(鄭安平)을 장군으로 각각 임명하였다.

 

 

기원전 257

진'소양왕'이 승상 '범수'의 참소를 곧이 듣고 무안군(武安君) '백기'에게 자결을 명하였다. 
계속되는 진나라의 "한단" 포위 공격으로 망국 일보 직전까지 간 조나라는 위나라와 초나라에 구원을 요청하였다. 
위나라의 '신릉군'은 자신의 자형(姊兄)이자 절친한 친우 사이이던 조나라의 '평원군'(平原君)을 위해 조나라를 돕고자 했으나 '안리왕'(安釐王)이 반대하였다. 
이에 '신릉군'은 문객인 '후생'(侯生)의 계책에 따라 '안리왕'의 애첩 '여희'(如姬)의 도움을 받아 병부를 훔쳐내어

위나라 군사를 동원, 마침내 조나라를 구하였다. 이로 인해 '신릉군'의 위세와 명성이 천하에 진동하였다. 

진의 '정안평'(鄭安平)은 패배 후 조나라의 회유를 받아 투항하였다. 진나라는 이어 "하동"에서도 대패를 당하였다. 
"한단"(邯鄲) 포위 공격 당시 조나라에 볼모로 와 있던 진나라의 왕손 '이인'(異人)은 후원자인 '여불위'의

교묘한 책략 덕분에 무사히 진나라로 도주하였다. 조나라 "양책"(陽翟)의 무역상인 '여불위'는 이전부터

왕손 '이인'을 보고 투자 가치가 매우 높은 인물임을 간파해 그를 적극 후원하면서 

'이인'을 진나라 왕으로 세우기 위한 주도면밀한 작전을 추진하였다. 

곧 많은 뇌물과 황금을 써서 진나라 세자 '안국군'(安國君, 이인의 부친)과 그가 특히 총애하나 
슬하에 소생이 없는 정실 '화양'부인(華陽夫人)의 환심을 사서 '이인'을 화양부인의 적자로 삼게 하였다.
또한 '이인'에게 자신의 애첩 '조희'(훗날에 진시황을 낳음)를 선사하여 더욱 긴밀한 관계를 유지하였다.

 

 

기원전 256

초나라가 노(魯)나라를 멸국시킨 후 노'경공'(魯傾公, B.C.272~249 재위)을 "거"(莒) 땅으로 이주시켰다. 
진나라는 서주(西周)를 멸하고 서주군(西周君)을 "단호"로 이주시키고 서주군(西周君)에 몸을 의탁하던 
주 왕실의 마지막 천자 '난왕'(赧王, B.C.314~256 재위)은 진나라에 투항하여 그 신하가 되었다.

이로써 천년 왕국 주(周)나라의 역사는 막을 내렸다. 
진나라 또하나의 소국 동주의 군주도 동주군(東周君)으로 격하시켰으며,

이어 진나라는 한나라의 "양성"(陽城)과 "부서"(負黍)를 점령하였다.

 

 

기원전 255

진나라의 "하동군"(河東郡) 태수 '왕계'(王稽)가 조나라에 패배당한 죄로 처형당하자,
'범수'가 추천한 '왕계'와 '정안평'이 각각 패전으로 인해 처형되고 적에 투항한 것으로 인해

'범수'의 입지가 매우 난처해졌다. 
이에 '범수'는 유세가(遊說家) '노중련'(魯仲連)의 충고를 받아들여 승상의 인을 내놓고 은퇴하여

안온한 여생을 보냈으며 그 뒤를 이어 '채택'(蔡澤)이 승상이 되었다.

 

 

기원전 254

진나라는 "하동"(河東)에 대한 반격을 개시해 옛 오나라의 고지(故地)를 탈취하였다.

 

 

기원전 253

초나라가 "진"(陳)에서 "거양"(巨陽)으로 임시 천도하였다.

 

 

기원전 251

연나라왕 '희'(喜, B.C.254~222 재위)가 진나라에 대적하기 위해 조나라와 동맹을 맺고자 했으나

사신으로 간 정승 '율복'(栗腹)의 농간으로 조나라를 오해하게 되었다. 
이에 '율복'과 '경진'(慶秦)에게 60만 대군을 통솔시켜 조나라를 공격하게 했으나,

조나라의 두 명장 '염파'(廉頗, 신평군)와 '악승'(樂乘)에게 대패하였다. 
조나라는 보복으로 연나라 수도를 포위해 향후 2년간 계속 공격하자,

이로 인해 연나라와 조나라는 서로 깊이 증오하게 되었다.

 

 

기원전 250

진'소양왕'이 사망하였다.  태자 '안국군'이 그 뒤를 이어 '효문왕'(孝文王, B.C.250 재위)으로 즉위했다가

불과 몇 달도 못 되어 급사하였다. 이를 두고 '여불위'가 독살한 것이라는 소문이 전국에 퍼졌다. 
'여불위'의 활약 덕분으로 '안국군'에게 적자로 인정받은 '이인'이 화양부인(華陽夫人)의 후원 아래

'장양왕'(莊襄王, B.C.249~247 재위)으로 즉위하였다.

 

 

기원전 249

'여불위'는 승상이 되어 정권을 농단하게 되었을 뿐 아니라 주나라의 고도(古都) "낙양"(洛陽) 지역의

10만 호 식읍을 하사받고, 문신후(文信侯)에 책봉되어 명실공히 진나라 최고의 권신(權臣) 겸 거부(巨富)가 되었다. 

진나라가 동주마저 멸망시켰다. 

이어 한나라를 정벌해 "성고"(成皐), "형양"(滎陽) 땅을 탈취한 후 "삼천군"(三川郡)을 설치하였다.

 

 

기원전 247

진나라가 조나라의 "유차"(楡次)· "신성"(新城)· "낭맹"(狼孟) 등 37개 성읍을 점령하고 "태원군"(太原郡)을 설치하는

혁혁한 전공을 거두었다. 이어 위나라의 "고도"(高都)와 "파"(波) 지역을 공격하자,

다급해진 위나라의 '안리왕'은 주위의 이간하는 말 때문에 멀리 했던 동생 '신릉군'에게 다시 도움을 요청하였다. 
신릉군은 처음에는 거절하다가 평소 두터운 친분을 유지하면서 존경해왔던 설공(薛公), 모공(毛公) 양 현인의

충언을 듣고 출정하기로 결심.  이에 '신릉군'은 한· 위· 조· 연· 초의 5개국 연합군을 이끌고 진나라를 공격하여

진나라 장수 '몽오'(蒙驁)와 '왕흘'(王齕)을 각각 "겹주"와 "화주"(華州)에서 대파하고,

"함곡관"까지 진군하였으나 함곡관의 방비가 워낙 견고해서 그대로 회군하여 개선하였다. 

'안리왕'은 '신릉군'을 높여 상상으로 삼고 한동안 극진히 공대했으나 '신릉군'의 활약으로 위나라가 안정되고

강성해질 것을 우려한 진나라가 다시 이간계를 쓰고 세자 '증'(增)도 참소하는 내용의 글을 올리자

신릉군을 의심하게 되었다. 
이때부터 '신릉군'은 울분을 참지 못해 정사를 돌보지 않고 주색에 빠졌다.  진'장양왕'(秦莊襄王)이 세상을 떠났다. 

왕자 '정'(政, 훗날의 시황제, B.C.246~210 재위)이 즉위하여 '여불위'를 높여서 상부(尙父)라고 불렀다. 
이 무렵부터 '여불위'는 자신의 옛 애첩이었던 진왕 정(政)의 모후 '조희'와 비밀히 통정하였다.

 

 

기원전 246

위나라가 '신릉군'을 견제하여 다시 약화되자, 진나라는 안심하고 한나라를 공격해 "상당"(上黨) 지역을 점령하고

군(郡)을 설치하였다. 또한 '몽오'(蒙驁)를 다시 파견해 "진양"(晉陽)을 평정하고 "태원군"(太原郡)을 재건하였다.

 

 

기원전 245

조나라가 '신릉군'이 무력해진 기회를 틈타 위나라를 공격해 "번양"(繁陽)을 점령하였고, 
진나라도 '신릉군'이 없는 틈을 타 위나라의 "권"(卷) 땅을 재공격해 점령하였다.

 

 

기원전 244

진나라는 '몽오'를 파견해 한나라의 13개 성읍을 점령하고 이어 위나라의 "역"과 "유궤"(有詭) 지역도 점령하였다.

 

 

기원전 243

조나라가 '이목'(李牧)을 파견하여 연나라의 "무수"(武遂), "방성"(方城)을 함락시켰다. 

위나라에서는 '신릉군'이 사망하였다.

 

 

기원전 242

연나라가 '극신'(劇辛)을 파견해 조나라를 공격함으로써 B.C.251년의 패배를 설욕하고자 하였다. 
이에 조나라는 '방난'(龐煖)을 장수로 삼아 반격을 가해 승리를 거두고 '극신'을 주살하였다. 
연나라는 이 패배로 큰 타격을 받고 국력이 약화되었다. 

위나라에서는 '안리왕'이 사망하여 세자 '증'(增)이 '경민왕'(景湣王, B.C.242~228 재위)으로 즉위하였다.

 

 

기원전 241

초나라가 계속되는 진나라의 위협을 피해 도읍을 "거양"(巨陽)에서 "수춘"(壽春)으로 천도하였다.
진나라가 위나라의 "조가"(朝歌, 이전 한단조씨의 본거지이기도 했던 위나라의 중요 성읍)를 함락시켰다. 
진나라는 위(衛)나라의 군주 '각'(角)을 "야왕"(野王) 땅으로 옮겨 부용(附庸)으로 삼았다. 

조나라가 연나라에 연속 승전을 거둔 기세를 살려 합종(合縱)을 시도하였다.
이에 초나라의 '춘신군'(春申君)을 맹주로 삼아 조· 초· 위· 연· 한의 5국 합종이 성립되어었다. 
그 직후 조나라의 장군 '방난'(龐煖)이 총사령관이 되어 5국 연합군을 이끌고

진나라를 총공격해 "최" 땅까지 진격하였다. 
그러나 합종의 맹주인 초나라의 '춘신군'이 상황 판단을 잘못해 먼저 몰래 퇴각하는 바람에

5국 연합군의 공격은 유야무야가 되어 진나라는 큰 위기를 넘겼다.

 

 

기원전 240

진나라의 승상 '여불위'가 오국 연합군의 공격에 보복하기 위해 우선 조나라를 공격해

"용"(龍)· "고"(孤)· "경"도(慶都) 땅을 점령하고, 위나라의 "급"(汲) 땅을 점령하였다.

 

 

기원전 239

진나라가 진왕 '정'의 동생인 장안군(長安君) '성교'를 파견해 조나라의 요충지 "상당"(上黨) 땅을 공격하게 하였다. 
평소 '여불위'를 미워하던 휘하 장수 '번오기'(樊於期)는 '장안군'을 설득해 "둔류"(屯留)에서

진왕 '정'과 '여불위'에 대해 반란을 일으켰다. 반란군은 '여불위' 소생인 진왕 '정'에게는 복종할 수 없으며

진정한 영씨(嬴氏) 군주를 세워 왕통(王統)을 바로잡아야 한다는 명분을 내세웠으나 곧 진압되어

'장안군'은 처형되고 '번오기'는 연나라로 도주하였다.

 

 

기원전 238

진나라가 '양단'(楊端)을 파견해 위나라의 "수원"(首垣)· "포"(蒲)· "연지"(衍氏) 등지를 점령하였다. 
진왕 '정'(政)의 모후가 가짜 환관 '노애'와 계속 정을 통해오면서 사생자를 둘씩이나 두고

모반을 계획한 사실이 마침내 진왕에게 발각되자 '노애'는 반란을 시도하였으나 실패하여

3족(族)이 멸족되고 태후도 역양궁에 유폐되었으며 태후를 유폐한 것은 불효라고 충간한 신료 27인도 처형당하였다. 
'여불위'도 '노애'를 천거한 책임을 물어 승상 지위와 식읍(食邑), 작록(爵祿)을 모두 박탈당하였다. 
초'고열왕'이 사망하였다.  국상을 틈타 '이릉'(李陵)이 난을 일으켜 영윤 '춘신군'을 살해하고

왕자 '한'(悍)을 초나라의 39대 군주 '유왕'으로 옹립한 후 전권을 장악하였다.
제나라 출신 '모초'(茅焦)가 진왕 '정'에게 군주가 천륜과 천도를 저버리고 불효불충하면 천명과 민심을 얻지 못해

나라를 지키지 못한다는 논리를 피력함으로써 마침내 진왕을 감복시켜 모후와 화해하게 하였고,

이에 진왕 '정'은 '모초'를 승상으로 삼았다.

 

 

기원전 237

'여불위'는 촉 땅으로 귀양을 가던중에 점점 압박해오는 진왕 '정'의 중압감을 못이겨 마침내 자살하였다.
'여불위'가 생전에 양성한 3,000여 빈객들이 계속 '여불위'를 추모하자

진왕 '정'은 그들에게 추방하는 축객령(逐客令)을 내렸다. 
그러나 '이사'(李斯)의 충언(모두를 포용해야 천하를 가질 수 있다)을 수용하여 추방 명령을 해제하였다.

 

 

기원전 236

진나라가 '방난'(龐煖)을 파견해 연나라의 "리"(狸)· "양성"(陽城)을 점령하였다. 
또한 '왕전'(王翦)· '환기'(桓齮)· '양단'(楊端)을 파견해 조나라를 침공하여

"알여"(閼與)· "요양"(橑陽)· "업"(鄴)· "안양"(安陽) 등 9개 성읍을 함락시켰다.

 

 

기원전 235

진나라가 위나라와 함께 초나라를 공격하였다.

 

 

기원전 234

진나라 장군 '환기'(桓齮)가 조나라의 "평양"· "무성"(武城)을 점령하고 조나라 장군 호첩(扈輒)을 포로로 잡았다.

 

 

기원전 233

진나라 장군 '환기'(桓齮)는 여세를 몰아 계속해서 조나라의 "적여"(赤麗)· "의안"(宜安)을 공격했으나

조나라 장군 '이목'(李牧)에게 대패하였고 '환기'는 도주하였다.
한나라가 공자 '한비'(韓非)를 진나라의 사신으로 보내 한나라에 대한 공격을 늦추고

조, 위나라부터 정벌토록 설득하고자 하였다.

그러나 '한비자'의 재능을 시기한 '이사'가 '한비자'를 참소하여 투옥시킨 뒤 계속 겁박을 가해 자결하도록 하였다.

 

 

기원전 232

진나라가 대대적으로 조나라를 공격하여 1군은 "업"(鄴)으로 진격하고, 다른 1군은 "태원"(太原)에서 "번오"(番吾)로 진격하는 양면 작전을 구사하였으나 역시 조나라 장군 '이목'에게 대패하였다.

 

 

기원전 231

한나라 "남양군"(南陽郡) 태수 '등'(騰)이 진나라에 투항하자 진나라는 그를 내사(內史)로 삼았다.

 

 

기원전 230

진나라의 내사 등이 10만 대군을 이끌고 한나라를 공격해 한왕 '안'(安, B.C.238~230 재위)을 포로로 잡고

한나라를 멸국시킨 뒤 "영천군"(潁川郡)을 설치하였다.

 

 

기원전 229

진나라가 노장 '왕전'(王翦)이 이끄는 "상당군"(上黨郡) 군사와 '양단'(楊端)이 이끄는 "하간군"(河間郡) 군사들을

이끌고 조나라의 수도 "한단"으로 총출동하였다. 
그러나 조나라의 '이목'(李牧)· '조총'(趙葱)· '안취'(顔聚) 등이 응전하여 진나라 군사를 크게 무찔렀다. 
이에 진나라는 조나라의 간신 '곽개'(郭開)를 매수하여 명장 '이목'(李牧)에 대한 이간계를 써

'이목'이 위나라로 도주하게 만들었다.

 

 

기원전 228

진나라는 명장 '이목'이 망명한 것을 기회로 삼아 조나라 군대를 대파하고 조왕(趙王) '천'(遷)을 사로잡았다. 
조왕 '천'의 동생인 공자 '가'(嘉)는 조나라 인근의 대(代) 땅으로 도망가

대왕(代王, B.C.227~222 재위)으로 자립하였다.
이로써 조(趙)나라는 사실상 멸국되었다.  초나라의 공자 '부추'(負芻)가 '애왕'(哀王)을 시해하고

초왕으로 즉위(B.C.227~223 재위)하였다.

 

 

기원전 227

진나라의 대장군 '왕전'(王翦)과 '신승'(辛勝)이 역수(易水) 유역에서 연나라, 대(代)나라 연합군을 격파하였다. 
망국이 눈앞에 닥친 연나라는 조나라에 원군을 요청했으나 거절당하였고 사태가 더욱 급박해지자 
연의 세자 '단'(丹)은 진왕 '정'을 암살하기로 하는 극단적인 계획을 세우고

자객 '형가'(제나라 경봉(慶封)의 후손)를 고용해 거사를 청탁하였다. 

'형가'는 연나라에 도망와 있는 진나라의 장수 '번오기'(樊於期)의 목과 "독항" 땅의 지도를 들고

진왕 '정'을 알현하는 조정에서 암살하려 했으나 실패하여 처형되었다.

 

 

기원전 226

진왕 '정'이 전년의 암살 미수 사건에 대한 보복으로 연나라의 수도 "계"를 공격하였다. 
연왕 희(喜, B.C.254~222 재위)는 사건의 주모자인 세자 '단'(丹)과 함께 "요동"(遼東)으로 도주하였다. 
진나라의 장군 '왕분'(王賁)이 초나라를 공격해 10여 성읍을 점령하였다.  한나라왕 '안'(安)이 사망하였다.

 

 

기원전 225

진나라 장군 '왕분'(王賁)이 위나라 수도 "대량"(大梁)을 포위 공격하여, 때마침 닥친 장마를 십분 활용해

대량성 주위에 저수지를 파 물을 대량 저장한 뒤 그를 한꺼번에 터뜨리는 수공법을 써서 대량성을 수몰시켰다.  
위나라왕 '가'(假, B.C.227~225 재위)가 진에 항복함으로써 위(魏)나라도 멸국되었다. 
진나라 장군 '이신'(李信)과 '몽무'(蒙武)가 20만 대군을 이끌고 초나라를 공격했으나

초나라 대장 '항연'(項燕)에게 대패하였다. 
진나라는 점령지에 "우북평군"(右北平郡)· "어양군"(漁陽郡)· "요서군"(遼西郡) 등을 설치하였다.

 

 

기원전 224

진나라의 노장 '왕전'과 '몽무'(蒙武)가 60만 대군을 이끌고 초나라를 침공하여 1년 이상이나 군영만을 지키며

공격하지 않는 지구전을 써서 초나라 군사를 안심시킨 후 기습 공격하여 대승을 거두고

"상곡군"(上谷郡), "광양군"(廣陽郡)을 설치하였다.

 

 

기원전 223

진나라는 초나라 수도 "수춘"(壽春)을 함락한 후 초왕 '부추'(負芻)를 포로로 잡고 초(楚)나라를 멸망시켰다. 
초나라 장수 '항연'은 '부추'의 동생 '창평군'(昌平君)을 수호하여 옛 오나라 땅이었던 "난릉성"(蘭陵城)으로 들어가

끝까지 진에 저항했으나 '창평군'이 사망하고 결국 성이 함락되어 자살하자 진나라는 "초군"(楚郡)을 설치하였다.

 

 

기원전 222

진나라는 초나라의 남방 영토였던 "강남"(江南)· "백월"(百越) 지역들까지를 평정한 후 회계군을 설치하였다. 
진나라 장군 '왕분'(王賁, 왕전의 아들)이 요동으로 진격하여 연왕 '희'(喜)를 사로잡고 연(燕)나라를 멸망시켰다. 
회군하는 도중 대(代)를 멸망시키고 대왕(代王) '가'(嘉)도 사로잡았다.

 

 

기원전 221

진나라 장군 '왕분'이 여세를 몰아 제나라를 침공하여 "임치성"(臨淄城)에 무혈 입성한 뒤 제왕 '건'(建)을 포로로 잡고

제(齊)나라를 멸망시켰다. 
이로써 마침내 진나라가 6국을 모두 병탄(倂呑)하고 천하를 통일하여 중국 최초의 통일제국(B.C.221~206)을

수립하였다. 
진왕 '정'은 천하를 통일한 자신의 공적을 영원히 기리기 위해 왕(王), 제(帝) 등의 호칭을 거부하고

전설상의 성군(聖君)들인 삼황오제(三皇五帝)에서 한 글자씩을 따와 황제(皇帝)라는 호칭을 창안하였다. 

이어 일국의 군주가 서거한 후 신료들이 생전의 업적을 평가하여 합당한 시호를 붙여주는 시법(諡法)을

불경하다고 폐지한 후 자신의 후계자들을 차례로 2세· 3세· 4세 황제라고 칭하게 해

진제국이 만세(萬世)로 이어지기를 간절히 염원하였다. 
승상 '이사'(李斯)의 건의를 받아들여 전국을 36군(郡)으로 편성해 중앙 집권적 전제 군주제를 확립하였다. 
그를 위해 화폐· 도량형· 도로 등을 통일.

10월을 세수(歲首)로 정하고 각국의 대부호 12만 호를 "함양"(咸陽)으로 강제 이주시켜 철저히 감시하였다.
천하의 모든 무기를 거둬들여 녹여서 12개의 거대한 철인상(鐵人像)을 제조하고 북방 이민족을 방어하기 위해

만리장성을 대대적으로 축조하는 한편, 다수의 이궁(離宮)과 아방궁(阿房宮)을 건축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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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資  料     編  輯  者            德庤 / 李   斗 振