牧民心書 1 篇

牧民心書 1 篇

덕치/이두진 2020. 1. 22. 17:01

 

 

                                      牧 民 心 書     

 

 

 자서(自序)

 

 

옛날에 순임금은 요임금의 뒤를 이으면서 12목을 불러 그들로 하여금 백성을 기르게 하였으며,

문왕이 정치제도를 세울 때 사목(司牧)1)을 두어 목부(牧夫)2)라 하였으며,
맹자는 평륙(平陸)에 갔을 때3) 추목(芻牧)4)으로써 백성을 기르는 것에 비유하였으니,

이로 미루어보면 백성을 부양하는 것을 가리켜 목이라 한 것이 성현의 남긴 뜻이다.
성현의 가르침에는 원래 두 가지 길이 있다. 사도(司徒)5)는 만백성을 가르쳐 각기 수신케 하고,

태학6)에서는 국자(國子)7)를 가르쳐 각기 수신하고 치민케 하였으니, 치민하는 것이 목민하는 것이다.

 

그런즉 군자의 학(學)은 수신이 그 반이요 나머지 반은 목민인 것이다. 성인의 시대가 이미 멀어졌고 그 말씀도

없어져서 그 도가 점점 어두워졌으니, 오늘날 백성을 다스리는 자들은 오직 거두어들이는 데만 급급하고 백성을

양육하는 바를 알지 못한다. 이때문에 하민들은 여위고 시달리고, 시들고 병들어 서로 쓰러져 진구렁을 메우는데,

그들을 기른다는 자는 바야흐로 고운 옷과 맛있는 음식으로 자기만 살찌우고 있으니 어찌 슬프지 아니한가.

나의 선친께서 조정의 지우(知遇)를 받아 두 현의 현감, 한 군의 군수, 한 부의 도호부사, 한 주의 목사(牧使)를

지냈는데 모두 치적이 있었다. 비록 나의 불초로서도 좇아 배워서 다소간 들은 바가 있었고,

보아서 다소간 깨달은 바도 있었으며, 물러나 이를 시험해 봄으로써 다소간 체득한 바가 있었다.
이윽고 유락(流落)한 몸이 되어 쓰일 데가 없었다. 먼 변방 귀양살이 18년 동안에 오경(五經)· 사서(四書)를 잡고

되풀이 연구하여 수기(修己)의 학을 익혔으나, 이윽고 생각해보니 수기의 학은 학의 반에 불과하다. 

 

이에 23사(史)와 우리 나라의 여러 역사 및 자집(子集)8) 등 여러 서적에서 옛날의 사목(司牧)이 백성을 양육하는 유적을 골라

위아래로 뽑아 정리하며, 종류별로 나누고 모아 차례로 편성하였다.

그리고 남쪽 변두리 땅에서 나오는 전세(田稅)와 공부(貢賦)를 서리들이 농간하여 여러가지 폐단이 어지럽게

일어나고 있었는데, 나의 처지가 이미 낮았기 때문에 듣는 바가 자못 상세하여

이것 또한 종류별로 기록하고 나의 얕은 견해를 덧붙였다.

목민관, 즉 수령이 지켜야 할 지침(指針)을 밝히면서 관리들의 폭정을 비판한 정약용의 저서.

48권 16책. 필사본. 부임(赴任) · 율기(律己) · 봉공(奉公) · 애민(愛民) · 이전(吏典) · 호전(戶典) ·

예전(禮典) · 병전(兵典) · 형전(刑典) · 공전(工典) · 진황(賑荒) · 해관(解官)의 12편으로 나누고,
각 편은 다시 6조로 나누어 모두 72조로 편제되어 있다.

 

첫째 목민관 선임의 중요성, 둘째 청렴 · 절검(節儉)의 생활신조, 셋째 민중본위의 봉사정신 등을 들고 있다.
수령은 근민(近民)의 직으로서 다른 관직보다 그 임무가 중요하므로 반드시 덕행 · 신망 · 위신이 있는

적임자를 선택하여 임명해야 하며,
수령은 언제나 청렴과 절검을 생활신조로 명예와 재리(財利)를 탐내지 말고 뇌물을 절대로 받지 말아야 하며,
수령의 본무는 민중에 대한 봉사정신을 기본으로 하여 국가의 정령을 빠짐없이 두루 알리고

민의의 소재를 상부 관청에 잘 전달하고 상부의 부당한 압력을 배제하여 민중을 보호해야 하는데,

민중을 사랑하는 이른바 애휼정치에 더욱 힘써야 할 것은 두말할 나위도 없다.

 

제1편의 부임은 제배(除拜) · 치장(治裝) · 사조(辭朝) · 계행(啓行) · 상관(上官) · 이사(莅事)의 6조로,
제2편의 율기는 칙궁(飭躬) · 청심(淸心) · 제가(齊家) · 병객(屛客) · 절용(節用) · 낙시(樂施)의 6조로,
제3편의 봉공은 선화(宣化) · 수법(守法) · 예제(禮際) · 文報(문보) · 공납(貢納) · 왕역(往役)의 6조로,
제4편의 애민은 양로(養老) · 자유(慈幼) · 진궁(振窮) · 애상(哀喪) · 관질(寬疾) · 구재(救災)의 6조로

이루어져 있다.
이 네편은 목민관의 기본자세에 대하여 상세하게 논설하고 있는데,

 

제5편의 이전은 속리(束吏) · 어중(馭衆) · 용인(用人) · 거현(擧賢) · 찰물(察物) · 고공(考功)의 6조로,
제6편의 호전은 전정(田政) · 세법(稅法) · 곡부(穀簿) · 호적(戶籍) · 평부(平賦) · 권농(勸農)의 6조로,
제7편의 예전은 제사(祭祀) · 빈객(賓客) · 교민(敎民) · 흥학(興學) · 변등(辨等) · 과예(課藝)의 6조로,
제8편의 병전은 첨정(簽丁) · 연졸(練卒) · 수병(修兵) · 권무(勸武) · 응변(應變) · 어구(禦寇)의 6조로,
제9편의 형전은 청송(聽訟) · 단옥(斷獄) · 신형(愼刑) · 휼수(恤囚) · 금폭(禁暴) · 제해(除害)의 6조로,
제10편의 공전은 산림(山林) · 천택(川澤) · 선해(繕해) · 수성(修城) · 도로(道路) · 장작(匠作) 6조로

이루어져 있다.
위의 여섯편은 《경국대전》의 6전에 준거(準據)하여 목민관의 실천 정책을 소상하게 밝히고 있다.

 

마지막으로 진황(賑荒) · 해관의 두편은 수령의 실무에 속하는 빈민구제의 진황정책과 수령이 임기가 차서

교체되는 과정을 적은 것으로서, 벼슬길에서의 선종(善終)을 지표로 삼아야 한다는 것이다.

제11편의 진황은 비자(備資) · 권분(勸分) · 규모(規謨) · 설시(設施) · 보력(補力) · 준사(竣事)의 6조로,
제12편의 해관은 체대(遞代) · 귀장(歸裝) · 원류(願留) · 걸유(乞宥) · 은졸(隱卒) · 유애(遺愛) 6조로

이루어져 있다. 

비록 시대를 따르고, 습속에 좇았기 때문에 위로 선왕의 헌장(憲章)에

부합될 수는 없을망정, 백성을 양육하는 데는 조례가 갖추어져 있는 셈이다.
고려말에 비로소 오사(五事)10)로 수령들을 고과(考課)하였고, 우리 조선에서도 그대로 하다가

후에 칠사(七事)11)로 늘렸는데, 이른바 그 대체의 방향만을 독려한 것일 따름이다.

그러나 수령이라는 직책은 관장하지 않는 바가 없으니 여러 조목을 차례로 드러내더라도

오히려 직책을 다하지 못할까 두려운데 하물며 스스로 생각해서 스스로 행하기를

바랄 수 있겠는가. 이 책은 첫머리와 맨 끝의 두 편을 제외한 나머지 10편에 들어 있는 것만 해도 60조나 되니,

진실로 어진 수령이 있어서 자기 직분을 다할 것을 생각한다면 아마 방향을 잃지 않을 것이다.

옛날에 부염(傅琰)12)은 『이현보(理縣譜)』를, 유이(劉?)13)는 『법범(法範)』을 저작하였으며,
왕소(王素)14)에게는 『독단(獨斷)』, 장영(張詠)15)에게는 『계민집(戒民集)』이 있으며,

진덕수(眞德秀)16)는 『정경(政經)』17)을, 호태초(胡大初)18)는 『서언(緖言』을,

정한봉(鄭漢奉)19)은 『환택편(宦澤篇)』을 저작하였으니, 모두 소위 목민(牧民)의 책인 것이다.

오늘날 그런 책들은 거의 전해오지 않고, 오직 음란한 말과 기이한 구절만이 일세를 횡행(橫行)하니,

내 책인들 어찌 전해질 수 있으랴.
비록 그러나 『주역』에 이르기를 『앞사람의 말씀이나 지나간 행적들을 많이 익혀서 자기의 덕을 쌓는다』

하였으니, 이것은 진실로 내 덕을 쌓기 위한 것이요 어찌 꼭 목민에만 한정한 것이겠는가.

<심서>라 한 것은 무슨 까닭인가.

목민할 마음은 있으나 몸소 실행할 수 없다. 때문에 <심서>라 이름한 것이다.
당저(當宁)20) 21년 신사(辛巳)년 늦봄에 열수(冽水) 정약용(丁若鏞)은 기록한다.

 

각주

1) 사목(司牧) : 백성을 부양하는 사람, 즉 국군(國君), 지방장관 또는 인민을 다스리는 관리의 장을 말한다.
2) 목부(牧夫) : 가축을 사육하는 사람. 『서경(書經)』 입정(立政)편에 나오는 말이다.
3) 『맹자』 공손추(公孫丑) 하(下)에 나오는 고사(故事)이다. 평륙(平陸)은 전국시대 제(齊)의 읍(邑)이다.
4) 추목(芻牧) : 가축을 사육한다는 뜻이다.
5) 사도(司徒) : 『주례(周禮)』에 나오는 육경(六卿)의 하나로서 지관대사도(地官大司徒)라고도 하였으며,

예교(禮敎)로써 백성을 교화시키는 일을 맡아보았다.
6) 태학(大學) : 왕도(王都)에 세워 둔 대학. 소학에서는 쇄소(灑掃)· 응대· 진퇴의 절차를 가르치는 데 대하여

수기(修己)·치인(治人)을 가르치는 최고의 학부이다.
7) 국자(國子) : 왕족(王族) 및 공경대부(公卿大夫)의 자제이다.
8) 자집(子集) : 자(子)는 사상적인 저술, 집(集)은 문집(文集).
9) 육전(六典) : 이전(吏典)·호전(戶典)·예전(禮典)·병전(兵典)·형전(刑典)·공전(工典)이다.
10) 오사(五事) : 수령오사(守令五事)의 준말이다. 고려 우왕 원년(1375)에는 수령고적법오사(守令考績法五事)

즉 전야벽(田野闢)· 호구증(戶口增)· 부역균(賦役均)· 사송간(詞訟簡)· 도적식(盜賊息)을 두어 수령의 성적을

고과(考課)하였으며, 창왕(昌王)이 즉위했을 때 조준(趙浚)의 상소로 전야벽(田野闢)· 호구증(戶口增)· 사송간·

부역균(賦役均)· 학교흥(學校興) 등 오사(五事)를 두어 이를 제대로 수행하지 못하는 수치령을 내기도 하였다.
11) 칠사(七事) : 『경국대전(經國大典)』에서는 오사를 칠사로 늘렸는데 농상성(農桑盛)· 호구증· 학교흥·

군정수(軍政修)· 부역균· 사송간· 간활식(奸猾息)이다.
12) 부염(傅琰) : 중국 남제인(南齊人)이며 승우(僧祐)의 아들이다. 자는 계규(季珪).

송나라에서 벼슬하여 무강(武康)·산음(山陰) 2현의 현령이 되어 박성(博聖)이라는 이름을 얻었다.

후에 익주(益州)의 자사, 응릉왕안서(應陵王安西)의 장사(長史), 남군내사(南郡內史), 행형주사가 되었다.
13) 유이(劉葬) : 중국 송나라의 복주인(福州人)이며, 자는 집중(執中)이다. 구산(朐山)의 현령을 지냈고,

후에 처주(處洲)의 장관이 되었는데 치적이 있었다.
저서로는 『칠경중의(七經中議)』 『명선집(明善集)』 및 『거이집(居易集)』이 있다.
14) 왕소(王素) : 중국 송나라 때 사람이며 자는 중의(仲儀), 시호는 의민(懿敏)이다.

인종(仁宗) 때에 간원(諫院)에 있었으며, 후에 공부상서가 되었다.
15) 장영(張詠) : 중국 송나라의 견성인(鄄城人). 자는 복지(復之), 호는 괴애(乖崖), 시호는 충정(忠定).

벼슬은 추밀직학사, 후에 이부상서를 지냈다. 저서로는 『괴애집(乖崖集)』이 있다.
16) 진덕수(眞德秀) : 중국 송나라의 포성인(蒲城人). 자는 경원(景元)인데 후에 경희(景希)로 고쳤다.

시호는 문충(文忠)이다. 관(官)은 참지정사에 이르렀다. 학자들은 서산선생(西山先生)이라 부르는데

그의 학문은 주자(朱子)를 종주(宗主)로 삼고 있다. 저서에는 『대학연의(大學衍義)』 『당서고의(唐書考疑)』
『독서기(讀書記)』 『문장정종(文章正宗)』 『서산갑을고(西山甲乙稿)』 『서산문집(西山文集)』

『사서집편(四書集編)』등이 있다.
17) 『정경(政經)』 : 진덕수(眞德秀)가 편찬하였다고 전한다. 경전에 나타난, 정사를 논한 말을 경(經)이라 하고,
사적(事迹)을 전(傳)이라 하였으며 덕수(德秀)의 공독(公牘)과 고유(告諭)를 첨부하였다. 단권(單卷)이다.
18) 호태초(胡大初) : 중국 송(宋)의 천태인(天台人)이다. 관(官)은 순우(淳祐) 때에 처주수(處州守)에 이르렀다.

저서로는 『주렴서론(晝簾緖論)』이 있다.
19) 정한봉(鄭漢奉) : 중국 明代의 관인학자(官人學者). 이름은 선(瑄), 한봉(漢奉)은 그의 자다.

저서로 『작비암난(昨非菴難)』 『작비암일찬(昨非菴日纂)』이 있는데,
환택편(宦澤篇)은 『작비암일찬』 속의 한 편명(篇名)이다.
20) 당저(當字) : 현재의 임금. 여기서는 순조(純祖).

 

 

 

《 牧 民 心 書 券 1 》

 

 

第 1 篇     부임(赴任) 육조(六條)

 

 

제 1 장     제배(除拜) : 

               (임명받음. 제수(除授)와 같다. )

 

 

★ 他官可求 牧民之官 不可求也.
     (타관가구 목민지관 불가구야. )
      다른 벼슬은 구해도 좋으나 목민(牧民)의 벼슬은 구할 것이 못된다. 

 

웃사람을 섬기는 자를 민(民)이라 하고 목민하는 자를 사(士)라고 하니,

사는 벼슬하는 자이고 벼슬하는 자는 모두 목민하는 자이다. 

그러나 경관(京官)1)은 공봉(供奉)을 직무로 삼거나 전수(典守)2)를 임무로 하기 때문에 조심스럽게 해나가면

거의 죄 되고 뉘우칠 일은 없을 것이다.
오직 수령(守令)은 만백성을 주재하니 하루에 만기(萬機)3)를 처리함이 그 정도가 약할 뿐

본질은 다름이 없어 천하 국가를 다스리는 자와 비록 대소는 다르지만, 처지는 실로 같은 것이다.  

이런데도 어찌 목민하는 벼슬을 구할 수 있는 것이겠는가. 

옛날에 상공(上公)은 그 영역이 100리(里), 후백(侯伯)은 사방 70리, 자남(子男)4)은 사방 50리였고,

50리가 되지 못하는 것은 부용(附庸)이라고 일컬었는데, 이들 모두가 제후였다. 

지금 큰 주(州)는 그 영역이 상공에, 중읍은 후백에, 하읍은 자남에 각각 준하고,  잔소읍(殘小邑)은 부용과 같다.

벼슬 이름은 비록 다르지만 수령의 직책은 옛날의 제후이다.   

옛날의 제후에게는 상(相)5)이 있었고 삼경(三卿)6)이 있었으며 대부(大夫)와 백관(百官)이 갖추어져 있어  

각기 자기 일을 수행하였기 때문에 제후 노릇하기가 어렵지 않았다.

지금의 수령은 만백성 위에 홀로 외롭게 있으면서 간민(奸民) 3인7)으로 좌(佐)를 삼고,

교활한 아전 6· 70인으로 보(輪)를 삼고, 거칠고 거센 자 몇명으로 막빈(幕賓)을 삼고,

성격이 패악한 자 수십 인으로 복예(僕隸)를 삼고 있는데,
이들은 서로 패거리를 지어 굳게 뭉쳐서 수령 1인의 총명을 가려 기만하고 무롱(舞弄)8)하며 만백성을 괴롭힌다.
그뿐 아니라 옛날의 제후는, 아비가 전하고 아들이 계승하여, 대대로 그 자리를 세습하고 있으므로  

제후의 신하와 백성이 죄를 지으면 평생토록 등용되지 못하거나 혹은 대대로 떨치지 못하였으니,

그만큼 명분과  의리가 지극히 무거웠던 것이다.

때문에 비록 악인이 있다 하더라도 감히 두려워 복종하지 않을 수 없었다.
지금의 수령은 그 임기가 길어야 혹 2년 가고, 그렇지 않으면 몇달 만에 바뀌게 되니,

그 됨됨이가 주막에 지나가는 나그네와 같은데, 저들 좌(佐)· 보(輔)· 막빈(幕賓)· 복예(僕隸) 등은 모두 아비가 전하고

자식이 이어받아 옛날의 세습하는 경(卿)과 같다. 주인과 나그네9)란 형세가 이미 다른데다 오래고 오래지 못한 사정이

또한 다르다.  군신의 대의도, 천지의 정분도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죄를 지은 자는 도피하였다가 나그네가 떠나면  

주인이 자기 집에 돌아오는 것 같아서 그 부를 즐기기를 그대로 하니, 또 무엇을 겁내겠는가.
때문에 수령 노릇하기가 공후(公侯)보다 백 배나 더 어려운데 어찌 수령 자리를 구할 수 있는 것이겠는가.
수령의 직분은 비록 덕이 있더라도 위엄이 없으면 제대로 할 수 없고 비록 뜻이 있더라도 밝지 못하면  

제대로 할 수 없는 것이니, 제대로 할 수 없는 경을 입어 괴로움을 당하고 길바닥에 쓰러질 것이다.  

사람들이 비난하고 귀신이 책망하여 그 재앙이 후손들에게 미칠 것이니, 어찌 수령자리를 구해서야 되겠는가.
오늘날 무인(武人)이 제 발로 전관(銓官)10)을 찾아가서 수령 되기를 구걸하는 것이 습관이 되고 풍속을 이루어서  

이제 아무렇지 않게 여겨 부끄러운 줄 모른다. 그 재주와 슬기가 능한가 능하지 못한가를 구하는 자도 이미 스스로  

헤아리지 않고, 그것을 들어주는 자도 역시 알아보거나 묻지도 않으니 이것은 진실로 그릇된 것이다.
문신(文臣)으로 옥당(玉堂)11)이나 은대(銀臺)12)에 있는 자는 고을살이를 구걸하는 법이 있는데,  

밑에서는 부모를 공양하려는 효성으로써 고을살이를 구걸하고, 위에서는 그 효도의 이치로써 그것을 허락하여  

그 습관이 오래되어 풍속을 이루어서 당연하게 여기고 있으나, 우· 하· 은· 주의 시대에는 이런 일이 결코 없었다.   

대체로 집이 가난하고 양친이 늙었는데 끼니를 잇기 어려운 경우 그 사정은 진실로 딱하지만,  

그러나 천지의 공리(公理)에 벼슬자리를 위하여 사람을 택하는 법은 있으나 사람을 위하여 벼슬자리를 고르는 법은 없으니

한 집안의 봉양을 위하여 만백성을 다스리는 수령의 자리를 구하는 것이 옳은 일이겠는가.
신하 된 자가 만백성으로부터 거두어들임으로써 내 부모를 봉양하기를 구걸하는 것도 이치에 합당치 알은 일이요,
임금 된 자가 만백성으로부터 거두어들임으로써 네 부모를 봉양하라고 허락하는 것도 이치에 맞지 않다.
만약 재주를 가지고 큰 뜻을 품은 사람이 있어서 스스로 제 국량(局量)을 헤아려보아 백성을 다스릴 만하다고 여기면

스스로를 천거하는 글을 올려 한 고을 다스리기를 청하는 것은 좋으나, 한갓 집은 가난하고 양친은 늙었는데  

끼니조차 잇기 어렵다는 것을 구실로 한 고을을 구걸하는 것은 이치에 맞지 않다.
옛날에는 대개 경연(經筵)13)에 참석하는 신하로서 본래 백성의 신망을 받고 있던 자가

어쩌다가 한 고을을 구걸하는 일도 있었는데 조정은 이 사람을 보냄에 있어서 능하지 못할까를 걱정하지 않았고,  

고을의 백성들은 이 사람이 부임하는 것을 모두 좋아하고 기뻐하였다.
뒷날의 사람들은 재주도 없고 덕망도 없으면서 이것을 끌어다가 전례로 삼아,  

집이 가난하지도 부모 받드는 끼니가 없지도 않은 자가 또한 모두 염치없이 고을살이를 구걸하니 예(禮)가 아니다.  

결코 이런 예를 뒤밟아서는 안된다.
퇴계(退溪)14가 이강이(李剛而)15)에게 보내는 회신에서 이렇게 말하였다.  

『맛있는 음식이 없으면 자식 된 자로서 깊이 걱정해야 할바이지만 오늘날 사람들은 매양 부모 봉양으로써  

핑계 삼아 의롭지 못한 녹을 받고 있으니 이는 공동묘지의 제사 음식을 빌어다가 봉양에 쓰는 것과 다를 것이 없다. 』
또 말하였다. 『모의(毛義)16)가 왕의 소명을 받고서 기뻐하였는데 장봉(張奉)17)이 이를 아름답게 여겼다고 하지만

이는 별다른 이야기이다. 모공(毛公)은 본래 고결하게 물러설 뜻이 있었으나 어버이를 봉양하기 위하여 뜻을 굽힌 것이며,

그 때문에 장봉이 아름답게 여겼던 것이다. 만일 모의가 의롭지 않게 자리를 얻고서 기뻐하였다면  

장봉은 아마도 침을 뱉고 떠났을 것이다.』 살펴보건대 재주는 짧고 재산은 넉넉하면서도 어버이 봉양을 구실삼아  

고을살이를 구걸하는 것은 불의가 아니겠는가. 만일 백성을 다스릴 재주가 있다면 비록 자천하더라도 좋을 것이다.
후한 때 경순(耿純)18)이 한 고을을 힘껏 다스려 성과를 올리겠다고 청하였던바 왕은 웃으면서 말하기를  

『경이 직접 다스려 성과를 올리겠다고 하는구나』라고 하고, 마침내 동군(東郡)19)의 태수에 임명하였다.
당나라 때 이포진(李抱眞)20)은 한 주를 맡아서 스스로 시험해보기를 원하였던바 처음에는 노주(潞州)21)에  

임명되었고, 다시 회주(懷州)22)로 옮겨 8년의 재임중에 백성이 편안하였다. 

 

각주 

1) 경관(京官) : 중앙의 관청에서 복무하는 관료.
2) 공봉(供奉)·전수(典守) : 공봉은 왕에 대한 공궤봉상(供饋奉上), 전수는 각 기관의 직무를 맡아 지키고 수행함. 
3) 만기(萬機) : 정치상의 온갖 중요한 기틀. 왕의 정무(政務).
4) 자남(子男) : 공(公)· 후(侯)· 백(伯)· 자(子)· 남(男)은 제후의 등급이다.
5) 상(相) : 제후의 국정을 총관하는 직책.  재상에 준한다.
6) 삼경(三卿) : 『주례(周禮)』에 설정되어 있는 사도(司徒)· 사마(司馬)· 사공(司空) 등 세 사람의 집정대신.
7) 간민(奸民) 3인 : 좌수(座首)· 좌별감(左別監)· 우별감(右別監)으로 구성되는 향청(鄕廳)의 임원.
8) 무롱(舞弄) : 무문농필(舞文弄筆). 문서를 뜯어고치고 붓을 멋대로 놀림.
9) 주인과 나그네 : 좌(佐)로서의 향청, 보(輔)로서의 향리, 막빈(幕賓)으로서의 군교(軍校), 복예(僕隸)로서의  

    관노 등은 모두 토착의 현지인이요, 수령은 상피제에 따라 객지인이 차임되는 사실을 비유해서 말한 것이다.  

10) 전관(銓官) : 관리의 임용을 전형하는 관원. 문관의 임용에는 이조, 무관의 임용에는 병조의 관원이  

      전관이 되지만, 여기 수령의 임용은 모두 이조가 담당하였다.
11) 옥당(玉堂) : 조선시대, 경적(經籍)· 문한(文翰)· 경연(經筵)을 맡았던 홍문관(弘文館). 옥당은 그 별칭이다.
12) 은대(銀臺) : 조선시대 왕명의 출납을 맡았던 승정원(承政院). 은대는 그 별칭이다.
13) 경연(經筵) : 왕을 모시고 경사(經史)를 강론하는 자리.
14) 퇴계(退溪) : 이황(李滉)(연산군 7∼선조 3, 1501∼1570)의 호이다. 자는 경호(景浩), 본관은 진보(眞寶)이다. 

      성리학을 집대성하였고 저서에 『퇴계집(退溪集)』이 있다. 
15) 이강이(李剛而) : 이정(李楨)(중종 7∼선조 4, 1512∼1571)의 자이다. 호는구암(龜巖), 본관은 사천(泗川).
16) 모의(毛義) : 중국 후한(後漢) 때의 여강인(廬江人).  자는 소절(少節). 효행이 있었다.
17) 장봉(張奉) : 중국 후한(後漢) 때의 남양인(南陽人).
18) 경순(耿純) : 중국 후한(後漢) 때의 거록인(鉅鹿人). 자는 백산(伯山), 뒤에 동광후(東光侯)에 봉해졌다.
19) 동군(東郡) : 중국의 직예성(直隸省)에 있었던 군(郡).
20) 이포진(李抱眞) : 자는 태현(太玄), 포옥(抱玉)의 종제(從弟)로서 덕종(德宗) 때에 소의군(昭義軍)을 거느리고  

      주도(朱滔)를 격파하였다.
21) 노주(潞州) : 중국의 산서성(山西省)에 있었던 고을. 

 

 

★  除拜之初 財不可濫施也.
     (제배지초 재불가남시야. )
     임관 발령을 받아 처음에 재물을 함부로 나누어 주거나 써서는 안 된다.

 

수령의 봉록1)은 월별로 책정되지 않음이 없고, 한 달 액수를 자세히 나누어보면 일별로 책정되지 않음이 없으니,
무릇 달을 앞당기고 날을 앞당겨서 재물을 쓰는 것은 모두 쓸 재물이 아닌 것을 쓰는 것이다.  

무릇 쓸 재물이 아닌 것을 쓰는 것은 탐학(貪虐)할 조짐이다. 수령이 임지에 이르기도 전에 경질되는 경우,  

모두 그 봉록을 나눠 받지도 못하는데 몸이 아직 서울에서 떠나지도 않은 채 임지 고을의 재물을 어찌 쓸 수 있겠는가.
부득이하여 쓰는 것 이외에는 함부로 하면 안된다.
오늘날 부임하는 수령이 사조(辭朝)2)하는 날에 액예(液隸)[大殿別監]·원예(院隸)[承政院 使令]가 예전(例錢)을  

토색하는데 이름하여 궐내행하(闕內行下)라고 한다. 많을 때에는 수백 냥(兩)이고 적어도 5· 60냥이다.  

음관(蔭官)3) 무관(武官) 및 보잘것없는 시골 출신이 그들에게 주는 예전이 혹 욕심에 차지 않으면,
이들은 대놓고 욕지거리를 하며 혹은 옷소매를 끌어당기니 그 곤욕이 꼴이 아니다.
정조(正祖)가 일찌기 이를 엄금하고 승정원에서는 그 때문에 예전의 액수를 정하여 가감하지 못하게 하였다.
욕지거리하는 것이 조금 줄어들기는 하였지만 그 징색(徵索)은 공물4)의 정액과 다를 바 없으니 크게 예가 아니다.
무릇 조정에서 백성을 위하여 수령을 보낼 때에는 씀씀이를 절약하여 백성을 사랑하도록 마땅히 경계해야 할 것이거늘

먼저 액예와 원예를 풀어놓아 명분 없는 돈을 마음대로 토색하여 창기(娼妓)를 끼고 거문고 타고 피리 불면서

모여 술 마시는 비용으로 충당하게 하니 이것이 무슨 예인가.
근신(近臣)이 수령으로 나아가는 사람을 독촉하여 『너는 기름진 고을을 얻어서 장차 백성의 고혈을 먹을 것이니  

내예(內隸)5)를 대접하게』라고 하는 것은 예가 아니요,
수령으로 나아가는 사람이 이에 순응하기를 『나는 기름진 고을을 얻어서 장차 백성의 고혈을 먹을 것이니  

어찌 그 비용을 사양하겠읍니까』라고 하는 것도 예가 아니다.
하물며 읍례(邑例)6)는 만가지로 달라서 궐내행하의 돈을 혹은 민고(民庫)7)에서 취하여 쓰는 자도 있으니
이와 같은 경우는 액예와 원예를 풀어놓아 백성을 벗겨먹게 하는 것이 아니겠는가.

이러한 일은 마땅히 조정에서 금단해야 할 것이지만 수령으로 나아가는 자에게는 오직 전례(前例)를 참고한다는

두 마디 말만 있어서 관례에 따라 응하기만 하니 장차 어찌하면 좋은가.

궁한 친구, 가난한 일가, 고모, 형수나 제수, 또는 누이들이 혹 도움을 구하는 자가 있으면 응하지 않을 수 없지만

그러나 체자(帖子)8)의 끝에 『취임한 지 열흘 뒤에 청구하라』라고 

부임지까지가 열흘 정도의 거리면 열흘 뒤로 하고 닷새 정도의 거리면 닷새 뒤로 한다.
무사히 도임(到任)할 것을 헤아려서 날짜를 기입하여 저리(邸吏)9)[京主人]에게 준다. 
그 정경이 급하지 않은 자는 따뜻한 말로 약속해두되 취임한 지 한두 달 안에 그 고을로부터 보낼 것이며  

저채(邸債)10)를 많이 져서는 안된다.  이런 경우에도 역시 먼저 체자(帖子)를 써주어서 「어느 댁에 돈 얼마」라고 쓴다.

그로 하여금 안심하고 믿게 할 것이다.  

  

 각주 

1) 봉록(俸祿) : 수령에게는 중앙정부에서 지급되는 봉록이 없다. 여기서의 봉록은 대동미(大同米)의

    유치미(留置米 : 大同米 중 지방 경비로 남기는 쌀)에서 수령의 생계비로 지출되는 관수미(官需米)를 뜻한다.  

2) 사조(辭朝) : 임금에게 하직 인사를 드림.

3) 음관(蔭官) : 종(從)2품(品)(侍從臣은 正3品) 이상 관리의 자손은 과거를 통하지 않고 관직을 띨 수 있었는데,  

    이를 음사(蔭仕)라 하며, 그러한 관원을 음관이라 하였다.  

4) 공물(貢物) : 중앙정부의 수요물(需要物)을 지방에서 현물 형태로 징수한 물건이다.

5) 내예(內隸) : 액례(掖隸)와 원예(院隸).

6) 읍례(邑例) : 각 군현(郡縣)의 관례.

7) 민고(民庫) : 군아에 소속된 창고로서 관아의 임시비로 충당하기 위하여 군민이 예납한 전곡을 저장하여 두었다.

8) 체자(帖子) : 관청에서 금품을 지불하는 경우에 사용하는 문건(文件).

9) 저리(邸吏) : 고을과 감영· 병영· 중앙관아와의 사무연락을 위하여 감영· 병영· 중앙관아가 있는 지역에  

    머물고 있는 아전을 가리킨다. 저리에는 영저리(營邸吏)· 병영저리(兵營邸吏)· 경저리(京邸吏) 등이 있다.  

10) 저채(郵債) : 경저리(京邸吏)(京主人)에게서 빌어 써서 지는 빛.

 

 

★  邸報下送之初 其可省弊者 省之.
     (저보하송지초 기가성폐자 생지. )
     저보(邸報) 1)를 처음 내려보낼 때 그 폐단을 줄일 수 있는 것은 줄여야 한다.

 

신영(新迎)2)의 예절은 첫째는 지장(支裝)3)을 봉하여 바치는 것이고, 둘째는 아사(衙舍)를 수리하는 것이고,  

세째는 기치를 들고 영접하는 것이고, 네째는 풍헌(風憲)·약정(約正)4)즉 坊里의 직임을 기다려 문안하는 것이고, 

다섯째는 도중에서 문안드리는 것인데 그중에 폐단이 되는 것은 혹 생략할 수도 있다.
저리가 고을에 사람을 보낸다고 통고하면 수령은 본읍의 공형(公兄)5)[吏房·戶長] 등에게 이렇게 전령할 것이다.
『지장(支裝)의 물종(物種)은 술과 마른 안주 이외에는 봉진(封進)하지 말고 아사(衛舍) 수리는 분부를 기다려서  

거행하며, 도임하는 날 고을 경계에서의 기치(旗幟)는 단지 영기(令旗) 두 쌍만 문졸(門卒)[使令]이 받들어 잡게 하고

다른 것은 모두 줄여라. 읍내나 외촌(外村)을 막론하고 한 군졸(軍卒)에게도 결코 알리지 말아라.  

밑에서 토색하는 자는 특별히 엄금하고 외촌의 풍헌(風憲)· 약정(約正) 그리고 천총(千摠)· 파총(把摠) 초관(哨官)· 

기패관(旗牌官)6)의 무리에게도 결코 알리지 말아라.
도중의 문안(問安)은 오직 중간지점에만 한 차례 보내되 물종(物種)은 봉진(封進)하지 말아라.』
옛날에 지장하는 물건은 안장 도구, 옷감, 종이, 반찬 등 그 수량이 많았는데 이는 신영(新迎)의 예모(禮貌)였다.
수령이 이 예물을 받아서 친척에게 나누어 주는 것은 옛날의 도리였다.  이는 비록 아름다운 풍습이기는 하지만  

중세 이래로는 군읍이 시들고 피폐해서 대개의 일은 절약을 좇기에 힘쓰기 때문에 지장(支裝)은 줄이는 것이  

좋다고 하는 것이다. 아사(衙舍) 수리에는 종이가 많이 쓰여져 백성을 부리고 중을 부려 그 폐단이 많으니  

내가 취임한 뒤에 형편을 보아 수리하는 것이 좋다.  신영(新迎)의 기치(旗幟)는 으례 속오군(束伍軍)7)을 잡아서  

그들로 하여금 받들어 잡게 하는데 그들 중에 읍에 들어오는 자는 열흘 가량이나 지체하여 머물고,
읍에 들어오지 않는 자는 사사로이 징렴(徵斂)함이 있어 만약 농사철을 당하게 되면 더욱 민폐가 되니 유의하지  

않으면 안된다.  무릇 촌사람이 읍에 들어와 오래 머물면 모두 민폐가 된다. 때문에 풍헌· 약정· 장관(將官)8)의  

등속도 또한 생략하는 것이 좋다.  신영하는 처음에는 고을 아전의 문안드리는 인편(人便)이 잇따라 끊이지 않는다.  

필경 그들이 왕래하는 잡비는 모두 백성의 힘에서 나오고야 만다.
수령이 취임한 뒤 문예(門隸)즉 使令는 문안드리는 것을 빙자하여 마을에서 정색하는데 혹은 이것을 동령(動鈴) 

즉  빈손으로 구걸하는 것을 이르는 것이다.  또 조곤(鉤鯤)즉 술을 차고 구걸하는 것을 이르는 것이다.   

또 계방촌(契房材)9)에서 이러한 짓을 하고 혹은 섬과 두메마을에서 이러한 짓을 한다.
때문에 고을 아전이 문안하는 인편은 잦으면 안된다.『다산필담(茶山筆談)』10)에서는 이렇게 말하고있다.  

『신영하는 하속중에서 제일 쓸데없는 것이 이방의 아전이다. 

내가 부임함에 어머니를 모시고 처를 거느려 더불어 같이 가려고 한다면 이방의 아전은 가벼이 여길 수 없는 것이지만

만일 내가 훌쩍 홀로 간다면 이방이 어찌 무용지물이 아니겠는가.』

저보(邸報)를 내려보내는 처음에 이렇게 전령할 것이다.   

『본관(本官)은 이제 혼자 떠나니 힘써 간략히 하고 생략하라.  신영(新迎)하는 이방은 결코 올려보내지 말고  

다만 경계상에서 나와 기다리도록하라. 오직 형리 1인, 주리(廚吏)[監嘗], 관리(館吏)[行次工房],  

통인(通引)[侍童] 1명씩과 시노(侍奴)[及唱] 2명, 추종(騶從)[驅從房子] 2명, 조예[使令] 3명만은

곧 서울로 올라올 것이고 그 밖에는 감히 함부로 움직이지 말도록 하라.』   

만일 내 사정이 간략히 하고 생략할 수 없다면 모름지기 사람 수를 늘리기는 하되 적을수록 좋다. 

 

각주 

1) 저보(邸報) : 경저리(京邸吏)가 고을에 보내는 통지문.
2) 신영(新迎) : 수령을 새로이 맞이함. 
3) 지장(支裝) : 새로이 부임하는 수령을 맞기 위해 고을에서 부임하는 수령에게 바치는 물건.
4) 풍헌(風憲)·약정(約正) : 방(坊)(오늘날의 面)의 일을 맡아보던 향직자(鄕職者)이다.  

    남헌(嵐憲)·약정(約正) 이외에도 집강(執綱)·존위(尊位)·면임(面任) 등등이 있었다.
5) 공형(公兄) : 각 고을에는 이(吏)·호(戶)·예(禮)·병(兵)·형(刑)·공(工)의 육방(六房)이 있었는데  

    이방· 호방· 형방의 우두머리 아전을 삼공형(三公兄)이라 하였다.
6) 기패관(旗牌官) : 천총(千摠)·파총(把摠)·초관(哨官)은 동오군의 지휘관들이고 기패관(旗牌官)은 기수(旗手)이다.
7) 속오군(束伍軍) : 선조 25년(1592)의 임진왜란 이후 지방에서 군역이 없는 양인(良人)· 공사노(公私奴) 장정을  

    지방단위로 편제하여 평상시에는 훈련을 받고 유사시에는 동원되도록 조직한 지방군이다.  

    영장(營將)이 단위군의 최고 지휘관이고 그 밑에 천총(千摠), 그 밑에 파총(把摠), 그 밑에 초관(哨官)이 있었다.
8) 장관(將官) : 천총(千摠)· 파총(把摠)· 초관(哨官) 등을 일컫는 듯하다.
9) 계방촌(契房村) : 지방의 아전들이 임의의 한 마을을 계방촌으로 삼고서는 사사로이 부역을 징수하여 착복하고  

    대신 그 마을의 공적인 부역을 면제하여 주었다. 18세기 후반기부터 성행하였다.
10) 『다산필담(茶山筆談)』 : 정약용(丁若鏞)이 쓴 책.  

 

 

★  新迎刷馬之錢 旣受公賜 又收民賦 是匿君之惠 而掠民財 不可爲也. 
     (신영쇄마지전 기수공사 우수민부 시닉군지혜 이약민재 불가위야. ) 
     신영(新迎:부임)에 드는 쇄마(刷馬)1)의 비용은 이미 공적(公的)인 지불을 받았는데도

     또 백성에게 부과하여 거두는 것은 임금의 은혜를 감추고 백성의 재물을 노략질하는 것이니 하여서는 아니 된다. 

 

『속대전(續大典)』2)을 보면 지방관을 맞이하고 보냄에 쓰이는 쇄마(刷馬)는 도리(道里)를 헤아려서 

마릿수를 정한다고 되어 있다.  (戶典 外官供結條)
평안도와 함경도 이외에는 모두 쇄마(刷馬)가 있는데 주(州)와 부(府)에는 20필(匹)이 있고, 군과 현에는 15필이 있는바

원정(元定)3)의 액수이다.  또 상· 중· 하로 도(道)를 3등분하고 또 대·중·소로 읍(壘)을 3등분하여 

그 길이 멀고 읍이 큰 것에는 6필까지 더하고 그 길이 가깝고 읍이 작은 것에는 혹 2필을 더한다.
경기(京畿)에는 말의 필수를 줄이고 평안도의 박천(博川) 서쪽과 함경도의 홍원(洪原) 북쪽은

모두 역마(驛馬)를  지급(支給)한다. (兵典 驛馬條)
무릇 쇄마(刷馬)의 값은 처음에는 모두 쌀로 주었으나 균역법(均役法)4) 이후, 삼남(三南)의 연해읍(沿海邑)은  

돈으로써 대신 주었는데 많은 경우에는 400여 냥(兩), 적은 경우에도 300여 냥이었다. 이 법을 처음 마련할 때,  

조정에서는 수령을 맞이하고 보낼 때에 혹 쇄마(刷馬) 때문에 백성을 침학하지 않을까 걱정하여  쇄마전을 지급하여

그 비용에 충당케 한 것이다. 요즈음 신구(新舊)의 수령이 교체할 때에 그 신구 수령의 쇄마전을 또 백성으로부터  

징수하는데, 그 징수액이 혹은 공적으로 지급되는 액수보다 배나 더하기도 하고 혹은 서로 맞먹는다.  

습속이 오래되어 풍속을 이루어 태연히 부끄러운 줄을 모르니 크게 예가 아니다.
전임 수령이 갈려 감에는 공적으로 지급되는 쇄마전이 없다. 왕이 백성을 근심하여 나에게 말을 내렸거늘  

왕의 은혜를 감추고 또 백성의 재물을 약탈하니 이것은 이른바 갈백(葛伯)이 탕왕이 주는 것을 잘라먹기만 하고  

제사조차 지내지 않는 것과5) 같은 것이다. 신관(新官)6)의 쇄마전은 반드시 향청(鄕廳)7)에서 令을 발하니  

신관의 허물은 아니다. 그러나 그가 취임한 후에도 그 쇄마전을 민간에 도로 돌려주지 않으니  

이것은 신관이 먹은 것이다. 거둔 것은 내가 아니지만 먹은 것은 누구인가. 그러고도 그 허물에서 벗어날 수 있겠는가.
이미 먹어서는 안될 바에야 차라리 일찌기 한 영(令)을 내려서 나의 마음을 만백성에게 밝혀야 할 것이다.
저보(邸報)를 내러보내는 날에는 따로이 公兄에게 다음과 같이 令을 전할 것이다.  

『신영(新迎)의 부쇄가(夫刷價)8)는 영을 받기 전에 이미 거두었을 것 같다.  그러나 이미 나라에서 지급한 바가 있거늘

어찌 또 민간으로부터 징수하겠는가. 그러나 이미 거두어들인것을 백성들에게 돌려준다 한들
그 중간에서 녹아 없어질 것이 또한 염려스럽다. 여러 마을의 부역9) 중에는 군전10)이나 세전11)을 막론하고  

몇달 안으로 마땅히 바쳐야 할 것이 반드시 있을 것이니, 바친 부쇄가로써 대신 충당하도록 하고  

마땅히 바쳐야할 것에서 이 액수만큼을 제해서 다시 바치지 말게 하는 것이 참으로 사리에 맞다.
모름지기 이러한 뜻으로써 향청(鄕廳)에서 영을 내려 일일이 밝게 깨우쳐서 각각 알도록 하라.』
만일 신구 수령의 교체가 서울에서 이루어져 본읍에서 미처 알고 있지 못하면 영을 전하여 이르기를  

『신영(新迎)의 부쇄가는 이미 나라에서 지급된 바가 있으니 어찌 또 민간으로부터 거두어들이겠는가.  

삼가 거두어들이지 말도록 하라』라고 할 것이다. 한 자도 보태면 안된다.

무릇 신관이 처음 나오매 만백성이 그 풍채를 우러러볼 것이니 이러한 때에 이러한 명령이 내려가면

백성의 환호성이 우뢰와 같고 칭송하는 노래가 먼저 일어날 것이다. 위엄은 청렴에서 나오는 것이니

간악하고 교활한 무리들은 겁내어 엎드릴 것이고 令을 내리고 시행함에 백성들은 순종치 않음이 없을 것이다.
오호라 ! 버리는 것은 300냥의 돈이요, 300냥의 돈으로써 이러한 환호성을 얻게 되니 이 또한 좋지 않겠는가.
상하의 수백 년 동안, 종횡(縱橫) 4천 리에 걸쳐서 취임하기 전에 이러한 영을 내린 자가끝내 없었던 것은

사람마다 모두가 청렴하지 못했기 때문만은 아니다. 일을 겪어보지 않은 자는 그러한 사례를 애초에 알지를 못하고,  

또 취임한 뒤에는 그러한 사례를 으례 그렇게 하는 것으로 여기기 때문에 아무도 그렇게 할 수 없었던 것이다.   

나로부터 비롯하여 이러한 의로운 영을 내린다면 그 또한 통쾌한 일이 아니겠는가.  읍례는 만가지로 다르다.
아사(衙舍)를 수리한다든가 일산(日傘)12)이라든가 쌍교(雙轎)13) 등의 자질구레한 명목으로도 혹 부쇄가(夫刷價)와

함께 거두어들인 것들도 있을 것이니 저리(邸吏)에게 물어서 읍례(邑例)가 만약 그러하거든 

또한 마땅히 함께 다루어야 한다. 

 

각주

1) 쇄마(刷馬) : 지방에서 비치하여 두었다가 관용(官用)에 제공하는 말. 

    쇄마가는 지방의 저치미(儲置米) 중에서 쇄마의 댓가로서 지불하는 것이다.
2) 『속대전(續大典)』 : 영조 22년(1746)에 간행된 법전. 『경국대전』 이후에 반포된 『대전적록(大典績錄)』

   『수교집록(受敎輯錄)』『여록통고(與錄通考)』등을 비롯하여 그 뒤의 각종 수교조례를 수집하여 편찬한 것이다.
3) 원정(元定) : 법전(法典)에 규정하여 기본 제도로 운용되도록 정해져 있는 것.

    가정(加定) 혹은 별정(別定)과 같은 임시적인 규정과 대조된다.
4) 균역법(均役法) : 영조 26년(1750) 종래 양정(良丁) 1인당 2필씩 부과하였던 군포(軍布)를 1필로 줄이고

    그로 인한 부족액을 어염세(漁鹽稅)· 결전(結錢) 등으로써 보충하도록 개혁한 새로운 군역법(軍役法)이다.
5) 『갈백식지(葛伯食之) 불이제야(不以祭也)』는 『맹자』등문공장(下) 송소국야장(宋小國也章)에 나오는 말.
     탕왕(湯王)이 갈(葛)나라의 국군인 갈백에게 제사를 지내라고 소와 양을 보내주었으나

     갈백은 그것을 먹어버리고는 제사는 지내지 않았다.
6) 신관(新官) : 새로 부임하는 수령.
7) 향청(鄕廳) : 좌수· 별감 등으로 이루어지는 군아(郡衙)의 보조 행정기관으로 15세기말 무렵부터 제도화되었다. 
    향촌의 사인 중에서 연고망중(年高望重)한 자를 좌수로, 그 차석에 별감을 선거 추대하여 수령이 임명하되

    임기는 대개 2년이었다. 이충 또는 향소라고도 한다.
8) 부쇄가(夫刷價) : 신,구수령의 영송(迎送)에 동원되는 인부와 쇄마에 대하여 지방의

    저치미(大同米에서 上納米를 올려보내고 남은 것으로 지방에 둠)에서 지불하는 댓가.
9) 부역(賦役) : 대동미(大同米)· 삼수미(三手米)· 인세미(因稅米)· 군포(軍布) 등의 여러가지 부담을 가리킴.
10) 군전(軍錢) : 군포(軍布)의 대납전(代納錢)을 가리킴.
11) 세전(稅錢) : 전결(田結)에 부과되는 세미(稅米)의 대납전(代納錢)을 가리키는 듯하다.
12) 일산(日傘) : 관료들이 사용한 양산.
13) 쌍교(雙橋) : 쌍가마.  

 

 

제 2 장     치장(治裝) : 

               (부임하기 위해 행장(行裝)을 차리는 준비.)

 

 

★  治裝 其衣服鞍馬 竝因其舊 不可新也.
     (치장 기의복안마 병인기구 불가신야. )
     부임길의 행장은 그 의복이나 안장을 얹은 말(鞍馬)은 옛것을 그대로 써야 할 것이며 새로 마련해서는 안된다.   

 

 

백성을 사랑하는 근본은 절용(節用)하는 데 있고 절용하는 근본은 검소함에 있다.

검소한 후에라야 청렴할 수 있고 청렴한 후에라야 자애로울 수 있을 것이니,

검소야말로 목민하는 데 있어서 가장 먼저 힘써야 할 일이다.  

어리석은 자는 불학무식해서 산뜻한 옷에 좋은 갓을 쓰고 좋은 안장에 날랜 말을 타는 것으로 위풍을 떨치려고 한다.

그런데 신관의 태도를 살피는 노회한 아전들은 먼저 신관의 의복과 안마의 차림새를 알아보고, 만약 사치스럽고  

화려하다 하면 씽긋 웃으면서 <알 만하다> 하고, 만약 검소하고 질박하다 하면 놀라면서 <두렵다>라고 한다.
길거리의 아이들이 부러워하는 것을 식자들은 더럽게 여기는 것이니 필경 무슨 이익이 있겠는가.

 

어리석은 자는 착각하여 남들이 나를 부러워한다고 여기겠지만 부러워하지 않을 뿐만이 아니라 도리어 미워하는 것이다.
자기의 재산을 축내면서 자기의 명예마저 손상시키고 게다가 남의 미움까지 사게 되니 또한 어리석은 짓이 아닌가.  

 

무릇 사치스러운 짓은 어리석은 자나 할 일이다. 수령으로 나가는 자는 반드시 경관(京官)을 거쳤을 것이니  

의복과 안마는 대강 갖추어 있을 것이다. 그대로 행차하는 것이 또한 좋지 않겠는가.
한 가지도 새로이 만들어서는 안될 것이다. 

정선(鄭瑄)2)은 말했다. 『가난한 선비가 갑자기 벼슬을 하게 되면 타는 여마(與馬)3)며, 부리는 종복이며,

먹는 음식과 입는 의복따위를 당장 부귀한 집과 비길 만큼 성대하고 화려하게 차리려 하며

털 한 오리라도 모두 채가(債家)4)에서 빚을 낸다. 

자기를 선발해 준 부서에 인사하고 임지로 갈 때 채주(債主)가 따라가게 되니,

관고의 재물을 훔치거나 민간의 재산을 약탈하지 않고서는 무엇으로 갚겠는가.』
송나라 범공칭(範公偁)5)의 『과정록(過庭錄)』에서 말했다. 『선군께서 전에 수주(遂州)6)로 부임하실 때  

행장이라곤 겨우 석 짐밖에 되지 않았는데 벼슬을 그만두고 돌아올 때도 전과 다름없었다.  

갑작스런 사정이 생겼을 때 거취에 간편할 뿐만 아니라 추문이 외부로 퍼지는 것을 면할 수 있을 것이다』 하였다. 

무릇 양성재7)가 조정에 있으면서 한 물건도 사들이지 않은 것은 돌아올 때의 짐에 누가 될까 두려워한 것이며,
범우승(范右丞)이 부임할 때 다만 석 짐만 가지고 간 것은 행장이 간편해야 할 것을 생각한 것이다.  

거취가 이러했다면 주고받는 데 어찌 청렴하지 않았겠는가. 명나라 해서(海瑞)8)가 남총헌(南總憲)9)이 되어  

처음 부임할 때, 겨우 고리짝 두 개를 휴대하였더니, 배가 상하(上河)에 닿아도 사람들이 오히려 알아보지 못하였다.
언젠가 병이 들어 의원을 불렀는데, 그 의원이 방안에 들어가보니 깔고 덮는 이부자리가 모두 흰 베였다.  

검소하기가 가난한 선비만도 못할 지경이었다.
참판 유의(柳誼)10)가 홍주(洪州)를 다스릴 때, 찢어진 갓과 성근 도포에 찌든 색깔의 띠를 두르고 조랑말을 탔으며,

이부자리는 남루하고 요도 베개도 없었다. 이리하여 위엄을 세우게 되니 가벼운 형벌조차 쓰지 않았는데도

간사하고 교활한 무리들이 모두 숨을 죽였다. 이것은 내가 목도한 바이다.
『한암쇄화(寒巖

話)』11)에서 이렇게 말했다. 『참판 윤광안(尹光顔)12)이 나와 함께 외각(外閣)13)에서  

교서(校書)14)할 때, 그가 입은 도포는 상복처럼 성글었다. 그가 경상 감사가 되자 위엄이 온 도에 떨쳤다.  

참판 유강(柳綱)15)이 충청 감사가 되었을 때, 밀〔蠟〕로 밀화(蜜華)16)처럼 만들어 패영(貝纓)17)을 삼으니,
열읍(列邑)이 두려워하여 그 청렴하고 검소함에 복종하였다. 사서(司書)18) 김서구(金敍九)19)는 평생 검소함을  

좋아하여 거친 베도포 위에 양갖옷을 걸치고 다니므로 거리아이들이 비웃더니, 그가 해남 현감이 되자  

백성들에게 위엄과 은혜가 다같이 행해져서 학질 환자가 그로써 양법(禳法)을 삼았다 한다.
옛날의 청렴한 관리들은 모두가 이러했던 것이다. 청렴하면 손해를 보니 오히려 행하기 어렵다고 하겠지만

검소하면 비용도 들지 않는데 어찌 쉽게 행하지 못하겠는가. 근자에 한 무인(武人)이 해남 현감이 되었는데,  

비단주머니의 매듭장식을 길게 늘여뜨렸더니, 강진 아전들이 이를 보고 「그 주머니를 보아하니 정녕코 음탕하고  

탐욕스러울 것이다」 하더니 과연 그러하였다. 이것이 사람을 보는 묘한 방법이니

오직 식자만 판단할 수 있는 일이 아니고, 간사하고 교활한 아전들도 모두 알 수 있는 것이다. 어찌 두렵지 아니한가. 』 

일산[日傘]은 해를 가리는 것이다. 50년 전만 해도 당하관(堂下官)20)은 반드시 흑산(黑傘)21)을 지참했는데,  

이것이 옛날의 이른바 조개(皁蓋)22)이다.  요즈음 습속이 흰 것을 좋아하여, 위로는 대신으로부터 아래로 현감에  

이르기까지 모두 흰 일산을 사용하고 있지만 예법에 어긋나는 것이다.
검은 일산은 해를 가리지만 흰 것은 햇빛이 새어나온다. 무릇 수령이 외출할 때에는 당상관23)· 당하관을 막론하고  

모두 흑산을 쓰게 할 것이요.  오직 제유24)와 유수(紐垂)25)로써 품급을 달리하는 것이 [혹 채색으로 구별하기도 하고

혹 동철(銅鐵)로 구별하기도 한다] 오히려 마땅할 것이다. 비록 유행에 거슬린다 하더라도 흰 것은 안된다.   

유옥교(有屋轎)26)와 청익장(靑翼帳)27)은 대부만이 쓰는 물건이니 당하관이 임의로 써서는 안된다.
정조(正祖) 때에는 금령이 지극히 엄하여 범하는 자가 없더니, 근래에 와서 다시 잘못을 답습하고있으니  

이것은 크게 예에 어긋나는 일이다.  수레와 복식을 법도대로 하는 것은 임금의 대권이다.  

『주례(周禮)』28)에는 수레에 6등급이 있고 복식에도 6등급이 있어서 그들의 등급에 따라 존비를 구별하게 하였다.
유옥교와 청익장도 일정한 품계 이하로는 사용하지 못하게 한 것도 또한 『주례』와 같은 뜻이니 범해서는 안된다.
한(漢)나라 법에는 이천석(二千石)의 장리(長吏)29)만이 조개(皁蓋)와 주번30)을 쓸 수 있었다.
황패(黃覇)31)가 양주 자사(楊州 刺史)32)가 되어 치적이 뛰어나매 임금이 조칙을 내려 수레와 일산을 주되  

특히 한 발이나 더 높게 하여 그의 덕을 빛나게 하였다.
소양(蘇亮)33)이 기주 자사가 되었을 때, 특별히 노거(路車)34)와 고취(鼓吹)35)를 내려주어 치적을 권장하였다.
임금이 내리지 않았는데도 수레를 마음대로 탄다면 무엇으로써 권장하겠는가. 요즈음은 하찮은 고을 수령도  

모두 유옥교(有屋轎)를 타고 나라의 금법을 함부로 어겨가면서  제각기 자기의 부귀와 영화를 드러내려 한다.  

나라의 기강과 법제가 이에 이르러 거의 없어지다시피 되었다.
무신은 반드시 안마(鞍馬)를 타야 하는 것이 조정의 법령이니 어겨서는 안될 것이다.
백헌(白軒) 이경석(李景奭)36)이 관설(觀雪) 허후(許厚)37) 허공은 隱逸로 지평(持平)38)을 지낸 분이다. 
그의 말을 기록하자면 『감사는 교자를 타되 겨울철에는 휘장을 드리우며, 여름철에는 휘장을 떼어내고  

일산으로 햇볕을 가릴 뿐이다. 그런데 요즈음 사람들은 3면에 휘장을 둘러 걷어 올리고 있으니,  

 

 

이는 참람하게도 임금의 승여(乘輿)39)를 본뜻 것이다』고 하였으니, 그 말은 참으로 우리를 송연케 한다.
살펴보건대 우리나라 법전에 쌍마꾜(雙馬轎)40)는 관찰사(觀察使)41)와 2품 이상만이 탈 수 있다고 규정했고  

또 승지(承旨)42)를 지낸 이나 의주(義州) 부윤· 동래 부사는 탈 수 있다고 했으니 요즈음은 제주목사도 탈 수 있다.  

3품 이상이면 역시 쌍교를 탈 수 있다. 그러나 3품이라도 왕명을 받든 경우가 아니면 타서는 안된다.  

내 생각에는 쌍마교는 폐단이 있으므로 상신(相臣)43)과 정경(正卿)44)만 타고, 아경(亞卿)45)과 하대부46)는  

유옥교를 타는 것이 좋을 듯하다. 쌍마교에도 3면에 걷는 휘장이 있으니 허후의 말이 반드시 옳다고도 할 수 없겠다.
반자진(潘子眞)은 말하였다. 『예에 천자는 육마에 좌우참을 하고 3공(三公)47)· 9경(九卿)48)은 사마(駟馬)49)에

좌참을 한다.  한나라 제도에 9경은 이천석50)이니 우참을 하고, 태수는 사마뿐인데,

그 가운데 벼슬 품계를 더해 준 중(中)이천석이라야 우참을 하는 까닭에 오마(五馬)〉라는 말로 태수의 미칭을 삼은 것이다.』   

 

또 『학림(學林)』51)에는 『한나라 때 중앙의 벼슬아치들이 출사하여 태수가 되면 1마를 더해 주었으므로

오마(五馬)가 되었다』고 하였다.  범정민(范正敏)의 둔재한람(遯齋閑覽)52)에도 그렇게 말하고 있다
살펴보건대 옛날 태수들은 현· 읍을 두루 순행하였으니 이는 곧 우리나라의 감사인 셈이다.  

 

오늘날 조그마한 현의 수령이 태수라 참칭하고, 오마로써 격식을 갖추려고 하니 역시 잘못인 것이다.   

풍원상(馮元常)53)은 준의(浚儀)54)와 시평(始平)55) 두 고을을 역임했는데 모두 단기로 부임하였다.
위(魏)의 최임(崔琳)56)이 언릉령(鄢陵令)57)이 되어 도보로 부임하였다.   

『야인우담(野人迂談)』)에 『중국에서는 관원들을 영송할 때 사람과 말을 지급하지 않고 다만 관원들이

단지 문서를 쥐고 부임하면 관리· 유생(儒生)· 기로(耆老)58)· 백성 들이 성 밖에 나와 영접할 따름이다』 하였다.

 

각주 

1) 안마(鞍馬) : 안장을 얹은 안구마(鞍具馬).
2) 정선(鄭瑄) : 중국 명대(明代)의 관인학자(官人學者). 자(字)는 한봉(漢奉).
3) 여마(輿馬) : 수레와 말. 『예기(禮記)』의 구석(九錫)의 하나로서 이에 대한 제도이기도 하다.
4) 채가(債家) : 대금업자. 우리나라의 경우 수령이 부임할 때에는 대개 경저리(京邸吏)에게서 빚을 내는데,  

    이것이 저채(邸債)가 된다.
5) 범공칭(範公偁) : 중국 송나라 명신(名臣) 액순인(液純仁)의 증손(曾孫). 『과정녹(過庭錄)』은 부조(父祖)의  

    정훈(庭訓)을 기록한 글을 이름이다.  또 행장(行狀) 석 짐 운운은 범순인(范純仁)의 제(弟)인 상서우승(尙書右丞) 

    범순예(范純禮)가 공칭(公偁)의 조(祖)에게 한 말을 기록한 것이다.
6) 수주(遂州) : 중국의 현명(縣名)이며 사천성(四川省)에 있었다.
7) 양성재(場誠齋) : 중국 남송인(南宋人)으로 이름은 만리(萬里), 호는 성재(誠齋)이다.
8) 해서(海瑞) : 중국 명(明)의 경산인(瓊山人)으로 자는 여현(汝賢), 호는 초봉(剿峯), 시호는 충개(忠介)이다.  

    벼슬은 남경우부어사(南京右部御史)에까지 이르렀다.
9) 남총헌(南總憲) : 도어사(都御史)를 총헌이라 약칭하는데 남경도어사(南京都御史)이므로 남총헌이라 하였다.
10) 유의(柳誼) : 영조 10(1734)∼? 자는 의지(誼之), 본관은 전주(全州)이다. 벼슬은 대사헌을 지냈다.
11) 『한암쇄화(寒巖

話)』 : 정약용(丁若鏞)의 저술(著述)인 듯하나 전해지지 않는다.
12) 윤광안(尹光顔) : 영조 33∼순조 15(1757∼1815) 자는 복초(復初), 호는 반호(盤湖)이며,  

      본관은 파평(坡平)이다. 벼슬은 예조판서에까지 이르렀다.
13) 외각(外閣) : 이조 교서관(校書館)의 별칭이다. 정조 6년(1782) 규장각(奎章閣)에 예속되면서 규장각을  

      내각이라 부른 데 대해서 교서관을 외각이라 부르게 되었다.
14) 교서(校書) : 이본(異本)과 같고 다름을 조사하며 교정(校正)을 행하는 것.
15) 유강(柳?) : 영조 12(1736)∼? 자는 사정(士精), 본관은 전주. 경주부윤(慶州府尹), 대사간을 지낸 바 있다.
16) 밀화(蜜華) : 밀(蜜)과 비슷한 빛깔의 호박(琥珀)의 한가지.
17) 패영(貝纓) : 산호(珊瑚) 따위로 만든 갓끈의 장식.
18) 사서(司書) : 이조(李朝) 세자시강원(世子侍講院)에서 경사(經史)와 도의(道義)를 강론하던 정 6품관.
19) 김서구(金敍九) : 영조 1(1725)∼?. 자는 성주(聖疇) 본관은 풍산. 영조 37년(1761) 별시에 병과로 급제, 

      정언(正言)· 지평(持平)을 지낸 바 있다.
20) 당하관(堂下官) : 이조 때 관계 분류의 하나이다. 문관은 정 3품 통훈대부(通訓大夫)로부터 종9품 장사랑까지,
      무관(武官)은 정3품 어모장군(禦侮將軍)으로부터 종9품 전력부위(展力副尉)까지의 통칭이다.
21) 흑산(黑傘) : 검은 빛깔의 일산(日傘).
22) 조개(皁蓋) : 수레 위에 씌우는 검은 색의 덮개.
23) 당상관(堂上官) : 이조 때 관계 분류의 하나이다. 문관은 정3품 통정대부(通政大夫) 이상,  

      무관은 정3품 절충장군(折衝將軍) 이상의 통칭이다.
24) 제유(臍?) : 일산(日傘) 가장자리에 드리워진 짧은 휘장.
25) 유수(紐垂) : 일산의 가장자리에 드리워진 장식용 끈.
26) 유옥교(有屋轎) : 덮개지붕이 있는 가마.
27) 청익장(靑翼帳) : 가마에 두른 푸른 휘장.
28) 『주례(周禮)』 : 경서(經書)의 하나로서 『사관(司官)』이라고도 한다. 주공단(周公旦)이 편찬했다고 한다.  

      6편 360관(官)인데 주소가(注疏家)에 따라 다르다. 천,지,춘,하,추,동의 6상(像)에 따라 그 관제를 세우고,  

      그 직장(職掌)을 세기(細記)하였다. 유교국가의 이상적인 관제로 인식되었다.
29) 장리(長吏) : 벼슬이 높은 관리나 지방관의 우두머리.
30) 주번(朱?) : 붉은 기.
31) 황패(黃覇) : 중국 한(漢)의 양하인이다. 자는 차공(次公), 시호는 정(定)이다. 벼슬은 승상에까지 이르렀다.  

      한대에 치민의 이(吏)를 든다면 황패를 첫째로 들 수 있다.
32) 자사(剌史) : 중국의 관명인데 한무제는 부자사를 두었다. 조조(詔條)를 받들어 군국을 독찰하는 일을 맡았다.  

      위(魏)·진(晋) 때에는 요주(要州)에 있어서 도독(都督)으로서 자사(刺史)를 겸영케 하였다.  

      수나라는 군을 폐하고 주로써 현을 통솔케 함으로써 자사(刺史)는 태수와 통칭되었으며 당나라는 이를 따랐다.
      송대(宋代)에는 그 직임이 없어지고 원명(元明) 이후 그 이름이 없어졌다.
33) 소양(蘇亮) : 중국 북주(北周)의 무공인이다. 자는 경순(景順)이다. 어려서부터 통민박학했다 하며,  

      벼슬은 위(魏)의 대통중(大統中) 중서감(中書監)에까지 이르렀다.
34) 노거(路車) : 제후가 타는 수레.
35) 고취(鼓吹) : 북과 피리.
36) 이경석(李景奭) : 선조 28∼현종 12(1595∼1671) 자는 상보(尙輔), 호는 백헌쌍계(白軒雙溪),  

      시호는 문충(文忠)이며, 본관은 전주이다. 벼슬은 영의정에까지 올랐다.
37) 허후(許厚) : 선조 21∼현종 2(1588∼1661)자는 중경(重卿), 호는 관설(觀雪)· 둔계(遯溪)· 일휴(逸休)이며,  

      본관은 양천이다.  벼슬은 현감, 형조와 공조의 좌랑, 세자익위사(世子翊衛司) 좌익위(左翊衛) 등을 지내고 

      지평(持平)· 장령(掌令)·부사등에 임명되었으나 취임하지 않았다.
38) 지평(持平) : 지평은 이조 때 사헌부에 소속된 정(正) 5품이다.  

      은일지평(隱逸持平)은 나라에서 산림학자에 대하여 특별히 내려진 지평 벼슬이다.
39) 승여(乘輿) : 임금이 타는 수레.
40) 쌍마교(雙馬轎) : 쌍가마(雙駕馬)이다.
41) 관찰사(觀察使) : 이조의 각 도의 행정· 군정· 사법을 통할하던 종 2품의 관직이다. 8도 또는 23부(高宗 32년)  

     13도(道)의 장관인데 감사· 도백· 도신이라고도 한다.
42) 승지(承旨) : 이조의 관직이며, 겸정원(兼政院)에 소속되어 왕명의 출납을 맡아보았다.  

      품계는 정 3품 당상관이며 6명으로서 6방(房)의 사무를 담당케 하였다.
43) 상신(相臣) : 영의정(領議政)· 좌의정(左議政)· 우의정(右議政) 및 좌(左)·우(右)의 찬성(贊成)을 가리킨다.
44) 정경(正卿) : 정 2품 이상의 벼슬인 의정부의 참찬, 6조(曹)의 판서, 한성부윤, 홍문관의 대제학 등을 일컫는 말. 
45) 아경(亞卿) : 이조 때 종 2품의 관직으로서 6조(曹)의 참판, 한성부의 좌우윤(左右尹)을 일컫는 말.
46) 하대부(下大夫) : 당하관인 대부로서 정3품 통훈대부(通訓大夫)에서 종4품 조봉대부(朝奉大夫)까지가 해당된다.
47) 3공(三公) : 주(周)나라 때에는 태사· 태부· 태보(太保), 전한 때에는 대사도· 대사마· 대사공,  

      후한 때에는 태위· 사도· 사공이다.
48) 9경(九卿) : 9명의 대신으로 시대에 따라 그 명칭이 다르다. 구사(九司)· 구품(九品) ·구빈(九賓)과 같다.
49) 사마(駟馬) : 네 필이 끄는 수레.
50) 이천석(二千石) : 한나라 제도에 관리의 등급을 그 녹봉의 다과로써 기준을 삼았는데,  

      만석· 중이천석· 이천석· 비이천석· 천석· 비천석 이하 백석(百石)에 이르기까지 잡다하였다.  

      이천석의 실제 녹봉은 월(月) 120곡(斛), 다음에 나오는 중이천석은 월(月) 180곡(斛)이었다.
51) 『학림(學林)』 : 중국 송나라 왕관국(王觀國)이 편찬한 서명(書名)인데 『학림신편(學林新編)』의 약칭이다.  

      전10권으로 자체(字體)· 자의(字義)· 자음(字音)을 변별하며,
      경사제서(經史諸書)의 전석주소문(箋釋注疏文)의 이동(異同)을 열기(列記)하고 득실을 고구(考究)하였다.
52) 『둔재한람(遯齋閑覽)』 : 송(宋)나라 범정민(范正敏)의 수필집인데 단권(單卷).
53) 풍원상(馮元常) : 중국 당(唐) 고종(高宗) 때의 사람이다. 벼슬은 상서좌승(尙書左丞), 광주도독 등을 역임하였다.
54) 준의(浚儀) : 현명(縣名)으로서 현 안징성(安徵省)에 있었다.
55) 시평(始平) : 군명(郡名)으로서 현 합서성(陜西省)에 있었다.
56) 최임(崔琳) : 중국 당나라 사람이며 벼슬은 개원(開元) 때에 중서사인(中書舍人), 후에 태자소보에 이르렀다.
      그 아버지 신경(神慶)이 위현(魏縣)의 자작(子爵)으로 피봉되었기 때문에 위(魏)나라의 최림으로 나와 있다.
57) 언릉(鄢陵) : 현명(縣名)으로서 지금의 하남성(河南省)에 있었다.
58) 기로(耆老) : 60세 이상의 노인.

 

 

★  同行者 不可多.
     (동행자 불가다. )
     함께 가는 사람이 많아도 안 된다.   

 

자제 한 사람은 따라가야 할 것이다.  요즈음 풍속에 소위 책객(冊客)1)이란 것이 있어 회계를 맡고 있는데,  

이는 법도가 아니니 마땅히 제거해야 한다. [아래 屛客條(병객조)에 상세하다.]   

만일 자기의 글씨가 거칠고 졸렬하다면, 한 사람쯤 데리고 가서 서기의 일을 맡기는 것이 좋을 것이다.
겸인(傔人)2)은 관부(官府)의 큰 좀이니 일체 데리고 가서는 안된다. 만약 공로가 많은 겸인이 있으면  

다음날 별도로 후하게 도와준다고 약속할 것이다. 노복(奴僕)들도 데리고 가서는 안되고 단지 한 명쯤은  

내행(內行)3)때 따라오도록 할 것이다.  총괄해서 말하면, 자제 이하는 관속들과 이야기를 나누어서는 안된다.
신영리(新迎吏)4)가 오는 날에 수리(首吏)5)를 불러 다짐하되 『자제 이하는 얼굴을 대면할 수는 있지만 말을  

나누어서는 안된다. 자제들이 말을 걸면 너희들이 부득이 대답을 안한 수 없을 것이니 죄는 자제들에게 있다.  

그렇지 않고 우연히 말 한 마디라도 건다면 너에게 곧 죄가 있는 것이다.
아전과 하인들이 말을 걸 때, 네가 그것을 금지하지 못해도 너에게 곧 죄가 있다』라고 할 것이다.
이에 자기 사람을 단속하여 금하는 것을 범하지 않도록 하고 만일 범하는 자가 있거든 꼭 죄를 줄 것이요  

용서해서는 안된다.
허자6)가 가선령(嘉善令) 7)이 되었는데 청렴강직하여 부임할때 겨우 아들 하나와 종 하나를 데리고 왔다.
겨울철에 그 아들이 추위를 이기지 못하여 밖에서 숯을 구해올 것을 청하거늘 공이 창고에서 나무막대기 한 개를  

가지고 오게 하여, 아들에게 주면서 『이것을 밟아 굴리도록 하라. 발이 저절로 따뜻해질 것이다』 하였다.   

생각컨데 이는 너무 각박해서 인정에 가깝지 않으니 본받을 것이 못된다.
조청헌(趙淸獻)8)이 성도(成都)9)로 부임할 때, 한 마리 거북, 한마리 학을 가지고 갔고,  

재임 때에는 거북과 학마저 버리고 오직 한사람의 종뿐이었다.  장공유(張公裕)가 시를 지어 보내기를  

『말은 옛길을 알아 오가기 수월한데,  거북은 양자강(揚子江)에 놓아주었으니 같이 가지 못하는구나』 하였다.
양계종(楊繼宗)10)이 가흥부(嘉興府)11)를 맡았을 때 종 한 사람을 대동했을 따름이라 마치 객지의 붙임살이 같았다.

임기 만 9년에 끝내 가족을 데리고 가지 않았다. 왕서(王恕)12)가 운남(雲南)지방을 순무(巡撫)하러 갈 때,  

하인을 데리고 가지 않고 그 고시(告示)에 『하인을 데리고 가고 싶었으나, 백성들의 원망을 살까 두려워,  

이 때문에 늙은 몸을 돌보지 않고 단신으로 온 것이다』 하니, 사람들이 모두 향을 피우고 그에게 예를 드렸다.
당간(唐侃)13)이 영풍현(永豊縣)14)을 맡아서 임지에 갈 때 처자를 데리고 가지 않고  

오로지 하인 한두 명과 더불어 나물밥과 콩국으로 살아가니, 오래 되매 아전과 백성들이 믿고 복종하였다.   

사자양(謝子襄)15)이 고을살이하되 청렴하고 삼가하여 벼슬살이 30년에 가족을 데리고 가지 않았다. 

 

각주 

1) 책객(冊客) : 수령의 사사로운 사용인으로서 지방관청의 서생(書生) 역할을 담당하였다. 
    관리가 아니면서 지방관청의 업무에 관여하지 않는 일이 없었기 때문에 여러가지 폐단을 불러일으켰다.
2) 겸인(傔人) : 실내에서 수령의 잔심부름을 맡아보던 사사로운 종이다. 승차(承差) 또는 청지기라고도 한다.
3) 내행(內行) : 부인의 행차.
4) 신영리(新迎吏) : 새로운 수령을 맞이하러 오는 지방관청의 아전.
5) 수리(首吏) : 으뜸되는 아전이다. 일반적으로 이방을 가리키나,  

    때에 따라서는 출두한 이속중(吏屬中) 으뜸되는 아전을 가리키기도 한다.
6) 허자 : 중국 명(明)의 석병인(石屛人)이며 자는 국기(國器)이다.  

    성격이 강직하였으며 간관(諫官)의 정장(廷杖)에 맞아죽는 자가 있으면 시체에 엎드려 곡하였다. 
7) 가선(嘉善) : 중국 명나라 때 설치된 현명(縣名)인데, 절강성(浙江省)에 속했다.
8) 조청헌(趙淸獻) : 조변. 중국 송나라의 서안인(西安人)이며 자는 열도(閱道), 시호는 청헌이다.  

    벼슬은 참지정사, 태자소보를 역임하였다.
9) 성도(成都) : 중국(中國) 사천성(四川省)의 수도.
10) 양계종(楊繼宗) : 중국 명나라 양성인(陽城人)이며 자는 승방(承芳), 시호는 정숙(貞肅)이다.  

      벼슬은 형부주사, 가흥지부, 첨도어사, 순무운남을 역임하였다.
11) 가흥부(嘉興府) : 부명(府名)으로서 절강성(浙江省)에 속해 있었다.
12) 왕서(王恕) : 중국 명나라 삼원인(三原人)이며 자는 종관(宗貫), 시호는 단의(端毅)이다.  

      벼슬은 효종(孝宗) 때 이부상서를 지냈다. 조정에 있을 때 강직청엄하였다. 저서로는 『완역의견(玩易意見)』 

     『석거의견(石渠意見)』『왕단의주의(王端毅奏議)』『왕개암진고(王介菴秦稿)』『왕단의문집(王端毅文集)』.
13) 당간(唐侃) : 중국 명나라 단도인(丹徒人)이며 자는 정직(廷直)이다. 벼슬은 형부주사에 이르렀고 치적이 있었다.
14) 영풍현(永?縣) : 중국의 현명(縣名)이며, 지금의 강서성(江西省)에 있었다.
15) 사자양(謝子襄) : 중국 명나라 신금인이며, 이름은 연이다. 자양은 그의 자인데 자로써 행세하였다.  

      영락(永樂) 연간에 계교로써 반군을 진압했다.  

 

 

★  衾枕袍繭之外 能載書一車 淸士之裝也.
     (금침포견지외 능재서일거 청사지장야. )
     이부자리와 베게, 속옷 외에 책 한 수례를 싣고 간다면 청렴한 선비의 행장이라 할 것이다.

 

 

 

요즈음 수령으로 부임하는 사람들은 겨우 책력(冊曆) 한 권만 가지고 가고,

그 밖의 서적들은 한 권도 행장 속에 넣지 않는다. 임지에 가면 으례 많은 재물을 얻게 되어

돌아오는 행장이 반드시 무겁기 마련이니 한 권의 책일망정 부담이 된다고 여기기 때문이다. 

슬프다, 그 마음가짐의 비루함이 이와 같으니, 어찌 또 목민인들 제대로 할 수 있을 것인가.

문사(文士)가 벼슬을 살게 되면 이웃에 사는 선비들이 질문을 하기도 하고 논란도 벌일 것이며,  

이보다 한 등 아래로는 과문(科文)을 공부시키기도 할 터인데 고사를 참고하고 글제를 찾는데도 모름지기  

서적이 있어야 할 것이며, 이보다 한 등 아래로는 또 혹 이웃 고을 수령들과 한 자리에 모여 산수(山水)간에 노닐면서  

운(韻)자를 내어 시도 짓게 될 터이니 모름지기 고인의 시집도 있어야 한다.
하물며 전정(田政)· 부역(賦役)· 진휼(賑恤)· 형옥(刑獄)에 옛 책을 상고하지 않고 어찌 논의를 하겠는가.  

남북 먼 변경에 기후· 풍토가 아주 다른데, 질병에 걸리기 쉽고 의원은 구하기 힘드니,  

의서 몇 권을 어찌 가져가지 않을 수 있겠는가. 변방 요새에서는 아침 저녁으로 변란에 대처하고 있으니,  

즉 척계광(戚繼光)1)· 유대유(兪大猷)2)· 왕명학(王鳴鶴)· 모원의(茅元儀)3) 등이 편찬한 병서들은  

또 불가불 항상 펴보도록 해야 할 것이다.
책을 한 수레 싣고 오는 일은 그만둘 수 없을 것이다.  돌아가는 날에 토산물을 싣지 않고 이 책수레로 돌아간다면,  

 

 

어찌 맑은 바람이 길에 가득하지 않겠는가. 

 

각주 

 

 

1) 척계광(戚繼光) : 중국 명나라 정원. 일설에는 봉래인이라 한다. 자는 원경(元敬), 시호는 무의(武毅)이다. 
    독서를 좋아하여 경사(經史)의 대의에 통하였으며, 벼슬은 태자태보(太子太保)에까지 이르렀다. 
    저저서에는 『기효신서(紀效新書)』 『연병실기(練兵實記)』 『장자심검(長子心鈐)』 『이융요략(莅戎要略)』 

   『무비신서(武備新書)』 『지지당집(止止堂集)』이 있다.
2) 유대유(兪大猷) : 중국 명나라 진강인(晋江人). 자는 지보(志輔), 호는 허강(虛江), 시호는 무양(武襄)이다. 
    주사(舟師)를 통솔하여 왜구를 격파하고, 혜조(惠潮)의 군도(群盜)를 평정하여 위명(威名)이 원근에 떨쳤다.  

    저서는 『세해근사(洗海近事)』가 있다. 
3) 모원의(茅元儀) : 중국 명나라 사람.  자는 지생(止生), 호는 석민(石民)이다. 숭정중(崇禎中)에 손승종(孫承宗)의 

    군무를 보좌하였는데 군대가 반란을 일으켰기 때문에 장포를 지켰다. 변경의 급함을 고하자 결사대를 모집하여  

    왕사에 힘썼으나 간인(奸人)의 꺼리는 바가 되어 억울하게 죽었다.
    저서는 『가정대정류편(嘉靖大政類編)』 『평소사적고(平巢事蹟考)』 『예활갑편(藝活甲編) 』  

   『서봉담화(西峯談話)』『청유사만(靑油史漫)』『복당사패여(福堂寺貝餘)』『석민사십집(石民四十集)』이 있다.  

 

 

 

제 3 장    사조(辭朝)

              (관원(官員)으로 임명된 자가 임금에게 하직 인사를 드림.)

 

 

★ 旣署兩司 乃辭朝也.
(기서양사 내사조야. )
양사(兩司)의 서경(署經)이 끝나고 나면 임금에게 하직인사를 드린다.

 

『속대전(續大典)』에는 다음과 같이 규정하였다. 『각 도(道)의 도사(都事)3)나 수령(守令)으로서 처음 임명된 자는

모두 서경을 받아야하고, 일찌기 시종(侍從)4) 및 당상관(堂上官)을 역임한 자는 모두 서경을 받지 아니한다.

서경은 양사(兩司)가 관원(官員) 2명씩을 내어 거행한다.
兩司에서 나온 官員이 한꺼번에 모이지 앓더라도 그중 한쪽에서 관원이 다 나오면 먼저 署經(서경)한다.
임명된 후 50일이 경과하여도 서경을 완료받지 못한 자는 임금에게 아뢰어 개임(改任)한다.』
『감찰(監察)5)로 임명된 때에 이미 서경을 받았으면 수령으로 처음 임명된 자라도 다시 서경받지 아니한다. 』
살펴보건대, 서경이란 내외(內外)의 4조(祖)6)를 갖추어 기록하여 아울러 妻의 4祖까지도 살핀다.

그 흠의 있고 없음을 상고함으로써당자의 허물도 살핀다. 그 가부를 결정하는 것인데 임금의 특별한 하교가 있을

경우에만 일사(一司)의 서경을 면제할 뿐이었다. 그러나 지금은 이들 규정이 다만 형식일 뿐이다.
『경국대전(經國大典)』7)에 규정하기를, 『수령은 사서일경(四書一經)8) 『대명률(大明律)』,9)

[『경국대전』에 대한 강(講)10) 大典通編에 이르기를, 3冊을 不通한 者는 제외시키고,

세 차례 응강(應講)하지 않는 者도 마찬가지다. 또 이르기를, 1冊을 不通하고, 두 차례 應講하지 않는 者와 2冊을

不通하고 한 차례 應講하지 않는 者도 또한 除外시킨다고 하였다]

과 백성을 다스리는 방략에 대한 제술11)을 시험보인다』고 하였다.
살펴보건대, 옛 법은 수령의 임명을 가장 중히 여겨, 임명하기 전에 천거의 절차를 두었고 임명한 후에는

서경의 절차를 두었으며, 이에 또 경서와 법률로써 시험하여, 그 재주와 학식을 관찰한 것이다. 이제 이 법은

문구와 격식만 갖추었을 뿐 유명무실해져서, 용렬하고 무식한 자도 다 수령으로 나아가 거리낌이 없게 되었다.
[지금은 오직 科擧를 경유치 아니한 白徒로서 벼슬살이하게 된 자가 처음 6品으로 올라갈 때에만 講이 부과된다]
『경국대전』에 이르기를, 『해마다 맹춘(孟春)12)에 문관 3품이상과 무관 2품 이상인 관원은 각기 수령이나

만호13)가 될만한 자를 천거하되, 각자 3사람을 넘어서는 안된다』하였다.

또 이르되, 『만약 천거된 자가 장오(贓汚)14)나 패상(敗常)14)의 죄를 범하면, 천거한 자도 연좌된다』 하였다.
살펴보건대, 천거의 법은 지금도 비록 그 형식은 남아 있으나 이미 장오의 좌를 범하였을 경우라도

그 천거한 자를 연좌시키지 않으니, 무슨 도움이 있을 것인가.

 

각주

1) 양사(兩司) : 조선왕조 때의 사헌부(司憲府)· 사간원(司諫院).
2) 서경(署經) : 관원으로 임명된 자에 대하여 양사(兩司)가 자격을 심사하여 동의하는 일.
3) 도사(都事) : 조선왕조 때 중앙의 충훈부(忠勳府) 등과 지방의 각도에 두었던 종 5품직의 직관.

주로 관리의 불법을 규찰하는 임무를 띠었다.
4) 시종(侍從) : 홍문관· 사헌부· 사간원· 예문관· 승정원 소속 제관원의 통칭.

이들은 국왕을 가까이 모시고 있으므로 이렇게 칭한다.
5) 감찰(監察) : 사헌부의 정 6품의 직관· 과거· 회계출납 등의 공무에 입회한다.
6) 4조(四祖) : 부(父)· 조(祖)· 증조(曾祖)· 고조(高祖).
7) 『경국대전』 : 세조 때 편찬하여 성종 때 완성 반포한 조선왕조의 기본 법전. 기본 통치규범을 수록하고 있다.
8) 사서일경(四書一經) : 『대학(大學)』 『논어(論語)』 『맹자(孟子)』 『중용(中庸)』의 4서(書)와

『시(時)』『서(書)』『역(易)』 『춘추(春秋)』 『예기(禮記)』 중의 하나.
9) 『대명률(大明律)』 : 중국 명조(明朝)의 형법전. 조선왕조 때에는 『경국대전』등의 기본 법전에

특별한 규정이 없으면 『대명률 』을 원용하였다.
10) 강(講) : 구술(口述)시험.
11) 제술(製術) : 논문 형식의 필답(筆答)시험.
12) 맹춘(孟春) : 음력 정월(正月).
13) 만호(萬戶) : 정 4품의 지방 무관직(武官職).
14) 장오(贓汚) : 관직을 이용하여 불법의 재물을 취득한 죄.
15) 패상(敗常) : 인륜(人倫)을 어지럽힌 죄.

 

 

歷辭公卿臺諫 宜自引材器不稱 俸之厚薄不可言也.
(역사공경대간 의자인재기불칭 봉지후박불가언야. )
공경(公卿)과 대간(臺諫)에게 두루 하직 인사를 드릴 때에는, 스스로 재기(才器)의 부적함을 말할 것이며,

녹봉(祿俸)의 많고 적음을 말해서는 안 된다. 

 

한 고을의 수령으로서 봉록이 비록 박하다 할지라도 요컨대 열 식구가 굶주리게 되지는 않을 것이다.

수령으로 나가는 자나 보내는 자가 다 같이 그 고을의 폐단 되는 것, 백성들의 걱정되는 것을 논할 일이요,

그 봉록이 후하다거나 박하다거나 하는 따위는 수치스러운 말이다.
봉록의 후함을 치하하는 자에게는 마땅히,『대개가 부정한 물건이 많을 것이니 무어 기뻐할 것이 있으리요』하고,
그 박함을 근심해 주는 자에게는 마땅히 『요컨대 열 식구가 굶주리지는 않을 터인데 근심할 것이 있으리요』라고

할 것이다. 재상이나 대신(臺臣)2) 가운데에 일찌기 그 도(道)의 감사나 이웃 고을의 수령을 역임한 자가 있거든,
마땅히 그곳 풍속과 폐단 되는 일을 상세히 묻고 또한 그것을 바로잡을 방책을 청하되 지성으로 도움을 구할 일이요, 형식적으로 묻는 데 그쳐서는 안될 것이다. 양만리(楊萬里)3)가 영릉승(零陵丞)4)이 되었을 때에,

제자의 예를 갖추어 장위공(張魏公)5)을 뵙고 무릎을 꿇어 가르침을 청하자,
그가 말하기를 『원부(元符)6) 연간의 귀인으로서 허리에 금줄을 띠고 자주빛 옷을 입던 자가 그렇게 많았는데도

오직 추지완(鄒志完)7) 진영중(陣瑩中)8)의 이름만이 일월(日月)로 더불어 길이 빛을 다툴 뿐이라』하였다.

양만리가 이 말을 듣고 종신토록 청렴강직한 조행 지키기를 힘썼다.

 

각주

1) 대간(臺諫) : 사헌부(司憲府)와 사간원(司諫院)의 벼슬의 총칭.
2) 대신(臺臣) : 사헌부(司憲府)의 관원(官員).
3) 양만리(楊萬里) : 중국 송나라 때 길수인(吉水人). 자는 정수(廷秀), 호는 성재(誠齋), 시호는 문절(文節)이다.
송(宋) 효종시 보문각대제(寶文閣待制)로 치사. 저서에 『성재집(誠齋集)』 『성재역전(誠齋易傳)』등이 있다.
4) 영릉승(零陵丞) : 영릉은 중국 광서성(廣西省)에 있는 지명, 승(丞)은 현령 밑에 있는 부관.
5) 장위공(張魏公) : 송나라 면죽인(綿竹人). 이름은 능(凌), 자는 덕원(德遠), 시호는 충헌(忠獻).

효종(孝宗) 때 추밀사. 위국공에 봉해짐.
6) 원부(元符) : 중국 송나라. 철종(哲宗)의 연호, 1098∼1100.
7) 추지완(鄒志完) : 중국 북송 말기 사람. 이름은 호(浩), 지완(志完)은 그의 자(字).

직언으로 권귀(權貴)의 배척을 받았으나 굴하지 아니한 것으로 유명하였다.
8) 진영중(陳瑩中) : 중국 북송 말기 사람. 이름은 관(瓘), 호는 요옹(了翁). 형중(瑩中)은 그의 자(字).

직언으로 유명하였다.

 

 

★ 歷辭銓官 不可作感謝語.
(역사전관 불가작감사어. )
전관(銓官)에게 두루 하직 인사를 할 때에 감사하다는 말을 해서는 안된다. 

 

전관(銓官)은 국가를 위하여 사람을 뽑아 썼으니 여기에 개인적인 은혜를 끌어대어서는 안될 것이요,

수령은 자격에 따라 관직을 얻었으니 이를 개인적인 은혜로 마음 속에 품어서는 안된다. 한 자리에서 상대하더라도

말이 주의(注擬)1)에 미쳐서는 안될 것이니, 전관이 만약 스스로 그 말을 꺼내거든 다만 대답하기를, 『명공이

잘못 비재(匪材)를 천거하셨읍니다. 일을 그르쳐 훗날에 명공께 누를 끼칠까 깊이 두렵습니다』라고 할 것이다.
지금 무신으로서 수령이 되어 나가는 자는 전관의 집을 두루 돌아 하직할 때에 반드시 요구하는 바가 무엇인가를

묻고, 전관이 짐짓 하찮은 물건을 구하는 척하면 수령은 다시 후한 것으로써 바치기를 청한다.

그가 부임하게 되면 공공연히 뇌물을 실어다 바치는 것을 당연한 일로 여기니, 염치의 도가 떨어짐이 이에 이르렀다.

선배들에게는 이러한 풍습이 없었다. 참의(參議)2) 김변광(金汴光)3)이 전직 기랑(騎郎)4)으로서 물러나

고향 마을에 궁하게 살면서 벼슬을 구하지 않더니, 윤(尹) 모씨가 삼전(三銓)5)이 되자,
그를 용강 현령(龍岡縣令)으로 보내주었다. 그 후에 윤씨가 딸의 혼인이 있자 말(馬)을 보내어 도움을 청하매,
그가 답서에 쓰기를, 『가난할 때에 서로 도와주는 것은 인사의 떳떳한 일이나, 다만 혐의받을 만한 계제는

군자로서 삼가야 할 것 같습니다. 제가 공(公)과는 전에는 좇아 사귀던 사이가 아니었으나 후에는 천거 발탁해준

은혜를 입었으니, 비록 명분 있는 선물이요 결코 재물을 취하는 일이 아니겠지만,

모르는 자들이 반드시 이에 말을 삼을 것이라, 변변치 못한 이 사람이 수십 년 스스로 지켜온 바를

하루 아침에 잃게 된다면, 어찌 청덕(淸德)에 누가 되고 아름다운 명예에 손상이 되지 않겠읍니까,

심부름 온 사람을 헛되이 돌려보내니, 오히려 부끄럽고 송구하기 그지없읍니다』 하였다.

 

각주

1) 주의(注擬) : 관직의 후보자를 친거하는 일.
2) 참의(參議) : 육조(六曹)의 정3품 당상직관(堂上職官).
3) 김변광(金汴光) : 숙종 20(1694)∼? 자는 경실(景實), 공조참의(工曹參議)를 지냈다.
4) 기랑(騎郎) : 병조(兵曹)의 낭관(郎官).
5) 삼전(三銓) : 이조참의(吏曹參議). 이조(吏曹)는 인사발령(人事發令) 관계를 관장한다.

 

 

★ 新迎吏隸至 其接之也 宜莊和簡黙.
(신영이예지 기접지야 의장화간묵. )
신영하기 위해 아전들과 하인들이 오면 당연히 장중하며 또 온화하고 간결하며 과묵하게 해야 한다.

 

수령은, 신영 나온 그 고을의 아전 및 노비들을 대할 때에는, 무게 있고 위엄있게 대하되 온화한 태도를 보여야 하며,
경솔한 언행을 하여 체통을 잃거나 지나치게 권위의식에 사로잡혀 그들 위에 군림하려 해서는 안된다.

말을 삼가 과묵하는 것이 좋다.
다만 이튿날 아침에 수리(首吏)를 불러 그 고을의 큰 폐습 한두 가지를 물어 보고,

듣고 나서는 입을 꽉 다물고 대답하는 말은 하지 말아야 한다.
그 폐단이 커서 반드시 고쳐야 할 일이라면, 두루 하직 인사를 다니는 날에 그 지방의 감사를 지낸 일이 있는 사람과

더불어 그 폐단을 바로잡을 방법을 위논해야 한다.

 

 

★ 辭陛出門 慨然以酬民望 報君恩 設于乃心
(사폐출문 개연이수민망 보군은 설우내심. )
임금을 하직하고 대궐 문을 나서게 되면 개연히 백성들의 바라는 바에 부응하고,

임금의 은혜에 보답할 것을 마음속으로 다짐하여야 한다.

 

임금을 하직하는 날에는 수령칠사(守令七事)를 임금 앞에서 외거나 혹은 정원(政院)1)에서 강론하기 마련이니,

이를 소홀히 해서는 안될 것이다. 궁정에서 오르내리는 절차와 임금 앞에서 엎드리고 일어나는 태도를 마땅히

아는 자에게 익숙히 들어 두어야만 거의 실수가 없을 것이다.
『고려사(高麗史)』2)를 보면, 우왕(禑王) 원년에 교서(敎書)를 내려 수령의 고적(考績)3)을 다섯 가지 일로써 하니,

전야(田野)의 확장, 호구(戶口)의 증식, 부역(賦役)의 균평, 소송의 감소, 도적의 종식 등이었다.

[이보다 앞서 현종 9년에 州·府 등 地方官員의 봉행해야 한 6條를 정했는데 ① 백성의 疾苦를 살피는 일,

② 鄕吏의 有能 不能을 살피는일, ③ 盜賊과 奸猾의 무리를 살피는 일, ④土豪들이 禁令 犯함을 살피는 일,

⑤ 백성의 孝·悌·廉潔한 자를 살피는 일, ⑥ 鄕吏의 錢穀 放失함을 살피는 일 등이었다 ]

창왕(昌王)이 즉위하자 조준(趙浚)4)이 글을 올려 청하기를, 전야의 확장, 호구의 증식, 소송의 감소, 부역의 균평,

학교의 흥륭 등 다섯 가지 일로써 주군(州郡)을 순찰하여 지방관을 내치고 승급시키는 기본을 삼자고 하였다.

본조(本朝)의 『경국대전』에는 더하여 일곱 가지 일로써 하니, 농상(農桑)의 번성, 호구의 증식, 학교의 흥륭,

군정(軍政)5)의 정비, 부역의 균평, 소송의 감소, 간활(奸猾)의 종식 등이다.
『당서(唐書)』6) 순리전(循吏傳)7)의 서문에 이르기를 『치인(治人)의 근본이 자사(刺史)보다 중한 것이 없는

까닭에 임헌(臨軒)8)하여 사령장을 내리며, 사령장을 받는 날에 편전(便殿)에 들어가 임금을 알현하면

임금이 옷을 주어 떠나보낸다』 하였다.
서거정(徐居正)9)이 상소하기를, 『엎드려 살피건대 성상(聖上)께서 백관의 간택을 신중히 하시되

더욱 수령의 선발을 중히 여기사 그 선발에는 반드시 의정부와 전조(銓曹)10)가 함께 천거하도록 하여

문리(文理)와 이치(吏治)11)에 통하는 자를 품계와 국량(局量)을 살피어 임명하시고, 이를 파견할 때에는

반드시 내전에 들라 하여 따뜻하고 상세하게 타이르시며, 다섯 가지 일로써 힘쓰게 하고 열가지로 고적(考績)하여

다 상등(上等) 평가를 맞는 경우에는 반드시 등급을 뛰어서 중용(重用)하시니,

중앙관 가운데에 이러한 예가 없음은 수령을 중히 여기기 때문입니다』 하였다.
살펴보건대 서거정은 세조 때의 사람인데, 오히려 다섯 가지 일로써 말하였으니,

수령 7사는 대개 성종 이후에 개정된 바일 것이다.
우연릉(于延陵)12)이 건주(建州)의 자사(刺史)로 임명받고 들어가 임금께 하직하자,

임금이 『건주가 서울서 얼마나 먼가』 하고 물으매 『8천 리입니다』하고 대답하였다.

임금은 『경(卿)이 거기에 도착하여 정사를 잘하고 잘못하는 것을 짐(朕)이 모두 다 알 수 있으니,

그곳이 멀다고 생각지 말라. 이 섬돌 앞이 바로 만리 바깥과 같다』 하였다.
『자균암만필(紫筠菴漫筆)』13)에 이르기를, 『내가 곡산(谷山) 도호부사(都護府使)가 되어嘉慶 丁巳年14)

7月 하직하는 날 들어가 희정당(熙政堂)15)에서 임금을 뵈오니, 임금이 이르기를 『옛 법률에 수령이 탐람(貪婪)

불법하거나 연약하여 직임을 다하지 못하는 경우에는 전관(銓官)에게 죄를 주는 것이다.

그러므로 중비(中批)16)로써 임명된 자는 더더욱 삼가고 두려워해야 되리니, 전관에게 죄를 돌릴 수가 없기 때문이다. 내가 중비로 사람을 썼다가 여러 번 후회를 하고서도 또 경계치 아니하고 이름을 달리 써넣어 낙점(落點)17)했으니,

이때 銓曹에서 세 번이나 다른 사람을 천거했으나 임금이 스스로 내 이름을 써넣었다 이는 중비와 다름없는 것이다.

가서 잘 하여 나에게 부끄러움을 주지 않도록 하라』 하였다. 내가 황공하여 진땀이 등에 배었는데,

지금에 이르도록 감히 그 말씀을 잊을 수가 없다』 하였다.
임금을 하직하고 대궐 문 밖에 이르거든 곧 몸을 돌이켜 대궐을 향하고 마음을 세워 스스로 맹세하여 속으로

말하기를, 『임금께서 천사람 만 사람의 백성들을 오로지 나 소신에게 부치어 하여금 사랑해서 다스리게 하시니,

소신이 감히 그 뜻을 공경히 받들지 아니하면 죽어도 나머지 죄가 있으리라』 하고, 몸을 돌이켜 말을 탈 것이다.

 

각주

1) 정원(政院) : 왕의 비서(秘書)기관인 승정원(承政院)의 약칭.
2) 『고려사(高麗史)』 : 조선 초기 김종서(金宗瑞)·정인지(鄭麟趾) 등이 편찬한 고려(高麗) 시대의 정사(正史).
3) 고적(考績) : 관원(官員)의 근무성적 평가.
4) 조준(趙浚) : 충목왕 2∼태종 5(1346∼1405) 여말(麗末) 선초(鮮初)의 정치가. 본관은 평양(平壤),

자는 명중(明仲), 호는 송당(松堂). 조선왕조(朝鮮王朝)의 개국공신(開國功臣), 영의정부사(領議政府事)를 지냈다.
5) 군정(軍政) : 양민(良民)의 군역(軍役) 의무를 이행시키는 일.
6) 『당서(唐書)』: 중국 25사(史)의 하나로서 당왕조(唐王朝)의 역사서(歷史書).
7) 순리전(循吏傳) : 법을 잘 지키고 백성을 잘 다스린 양리(良吏)들의 부기(傅記).
8) 임헌(臨軒) : 임금이 정좌(正座)에 앉지 않고 평대(平臺)에 임한다는 뜻이니,

자기의 몸가짐을 겸손히 하여 상대편에게 간곡한 정(情)을 나타낸다는 말이다.
9) 서거정(徐居正) : 세종 2∼성종 19(1420∼1488) 본관은 대구(大邱), 자는 강중(剛中),호는 사가정(四佳亭).

대제학(大提學)을 지내고 『동문선(東文選)』『동국여지승람(東國輿地勝覽)』등을 편찬.
10) 전조(銓曹) : 관원(官員)의 인사발령을 관장(管掌)하는 기관이니, 문관(文官)의 인사는 이조(吏曹)가,

무관(武官)의 인사는 병조(兵曹)가 맡았다. 여기 나오는 수령(守令)의 인사는 모두 이조(吏曹)의 소관이다.
11) 이치(吏治) : 백성을 다스리는 실무.
12) 우연릉(于延陵) : 중국 사람이나 상고(詳考)치 못함.
13) 『자균암만필(紫筠菴漫筆)』 : 정약용(丁若鏞)의 자저(自著)의 하나.
14) 가경 정사년(嘉慶丁已年) : 정조 21년(1797).
15) 희정당(熙政堂) : 창덕궁(昌德宮)에 있는 전각의 하나.
16) 중비(中批) : 전관(銓官)의 천거를 거치지 않고 왕(王)의 특지(特旨)로 관직에 임명하는 일.
17) 낙점(落點) : 관직에 천거된 후보자 명단에서 적임자를 임금이 골라 점을 찍어 인준하는 것.

 

 

移官隣州 便道赴任 則無辭朝之禮.
(이관린주 편도부임 즉무사조지례. )
가까운 이웃 고을로 관직을 옮겨져서 지름길로 부임하게 되면 사조(辭朝)하는 예는 갖추지 않는다.

 

이것이 이른바 사조(辭朝)를 덜고 부임한다는 것이니, 다만 번거로운 폐단을 줄인다는 뜻에서일 뿐이요,

날마다 살피어 지방관의 직능을 부여해 준다는 옛 뜻1)은 아니다.
당(唐)의 영호도(令狐?)2)가 일찌기 옛친구를 이웃 지방의 자사(刺史)로 옮겨 발령하여 편도(便道)로 부임케 했더니,

임금이 그 진사(陳謝)하는 표문(表文)3)을 보고서 묻거늘, 영호도가 대답하기를 『그 길이 가까우므로 보내고

맞이하는 폐단을 줄이고자 그런 것입니다』 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짐은 자사가 많이들 적임자가 아니어서

백성들에게 해가 되므로 한번 만나서 그 다스릴 방책을 알아보며 그 우열(優劣)을 알아서 내치고 승급시키기를 하고자 하였더니, 이러한 명령이 이미 반포되어 있는데도[刺史는 外方에서 옮겨 앉지 못한다는 詔令]폐하고 쓰지 않으니

재상은 가히 권력이 있다고 할 만하다』고 하였다. 때가 추웠는데도 영호도는 땀이 흘러 두터운 털옷을 적셨다.

 

각주

1) 옛 뜻 : 『서경(書經)』 우서(虞書) 순전(舜典)의 순(舜)이 『이에 날마다 사악(四岳)·군목(群牧)을 보시고

군후(群后)들에게 홀(笏)을 나누어 주다』를 원용(援用)한 것이다.
2) 영호도(令狐?) : 중국 당(唐)나라 때 사람. 자는 자직(子直). 재상을 거쳐 오흥태수(吳興太守)를 지냈다.
3) 표문(表文) : 임금께 올리는 글의 한가지.

 

 

 

제 4 장     계행(啓行)

               (부임의 행차.)  

 

 

★ 啓行在路 亦唯莊和簡黙 似不能言者.
(계행재로 역유장화간묵 사불능언자. )
부임하는 길에 있어서는 또한 엄하고 온화하며 간결하고 과묵하기를 마치 말 못하는 사람처럼 하여야 할 것이다. 

 

행차는 반드시 일찍 출발하고 저녁에는 반드시 일찍 쉬도록 할 것이다.

말에 올라서 동이 트기 시작하고 말에서 내려 해가 미처 지지 않았으면 좋다.
수리(首吏)를 불러서 다짐하기를 『하인(下人)이 밥을 먹었으면 곧 진지(進支)[곧 尊者]의 밥를 올리고

말에 올라서 동이 트이기 시작하면 좋으니 알아서 거행하라』고 할 것이다.
아랫사람들의 사정에 통달하지 못한 자가 미리 아무 약속도 하지 안고 일찍 일어나 밥을 재촉하고

곧장 말에 오르면 하인(下人)이 밥상을 받아놓고도 먹지 못한 채 일어서는 경우가 많다.
말을 달리지 말 것이다. 말을 달리면 내 성질이 경박하고 조급하게 보이게 된다.
작은 길이 꾸불꾸불한 곳에서는 돌아보지 말 것이다. 돌아보면 말을 탄 아전부치들이 비록 진흙이라도

말에서 내려야 하니 또한 생각해 주어야 한다. 돌아보지 않을 뿐만 아니라 형세에 따라서는 외면하기도 하여

그들이 용신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 좋다.
노상에서는 비록 몸을 굽히지 않는 아전이 있더라도 책망하지 말 것이다. 마치 말 못하는 사람인 양 함구할 것이다.
노상에서의 매일 세 끼의 끼니에는 국 한 그릇 김치 한 그릇 장 한 종지 밖에는 네 접시를 초과하지 말 것이다.

네 접시라는 것은 옛날의 이른바 이두이변(二豆二邊)1)이다. 점주(店廚)2)에서 먹을 때에도 이 숫자보다 덜하지 말고

행주(行廚)3)곧 이른바 支應이다에서 먹을 때에도 이 숫자보다 더하지 말 것이다. 이에 쓰이는 물종(物種)은

하인들에게 맡겨 잔소리를 하지 말며 쓰는 바가 많고 적은 것도 결코 따지지 말 것이다.
만약 잔현(殘縣)4)으로 녹(祿)의 박함이 목천(木川)5)· 연기(燕岐)따위와 같은 경우에는 마땅히 두 접시로써

정식(定式)을 삼아야 한다.
우리나라 풍속에 행차에는 권마성(勸馬聲)6)이 있는데 이는 떠들썩하지 말라는 뜻에는 어긋나는 것이다.

행차가 교외(郊外)에 이르면 수리(首吏)를 불러서 이렇게 다짐할 것이다. 『나는 권마성을 매우 싫어하니 마을을

지날 때에는 권마성을 한 번만 하고 고을을 지나거나 고을에 들어가거나 고을에서 나오거나 역참(驛站)7)에

들어가거나 역참에서 나오거나 할 때에는 세 번만 하라. 만약 이것을 초과하면 너에게 죄를 주겠다. 』
『시경(詩經)』에 이르기를 『이에 그대가 먼 곳에 가는데 소문만 있었지 소리는 없구나』라고 하였는데,

군자의 행차는 그 엄숙함이 이와 같아야 한다. 우리나라 풍속은 떠들썩한 것을 좋아하여 여러 하인들이 벼슬아치를

옹위하고 잡된 소리를 어지러이 발하여 백성이 바라보기에 엄숙 장중한 기상은 없어 보인다.

무릇 근엄하고 생각이 깊은 사람은 반드시 이런 소리를 좋아하지는 않을 것이다.

수령 된 자는 비록 말 위에 있더라도 마땅히 지혜를 운용하고 정신을 가다듬어 백성에게 편의한 정사(政事)를

생각해야 한다. 그렇지 않고 만약 한결같이 부동(浮動)하기만 하면 어찌 침착하고 세밀한 생각이 나올수 있겠는가.
여혜경(呂惠卿)8)이 연주(延州)9)를 맡게 되어 길이 서도(西都)10)를 지나게 되었는데 그 무렵 정이천(程伊川)11)이

제자들에게 이르기를 『내가 여길보(呂吉甫)의 이론은 들었으나 아직 지면(知面)이 없는데 아침에 내 집 문앞을

지나면 장차 한번 엿보리라』라고 말하고 이윽고 물어보니 지나간 지 오래되었다. 이천(伊川)은 찬탄하여

『수행자 수백 인과 말 수십 필을 능히 조용히 소리없게 하였는바 이와 같이 무리를 부리는 것은 정숙(整肅)하다고

할 만하다. 조정에 있을 때에는 비록 약간의 말이 있었지만 그 재주는 또한 어찌 가릴 수 있겠는가』라고 말하였다.
행차가 교외(郊外)에 이르거든 수리(首吏)를 불러서 다짐하기를 『길에서 선비를 만났을 때 선비가 나를 위하여

말에서 내리는 데에도 너희들이 말에서 내리지 않으면 너희에게 죄를 주겠다. 비록 걸어가는 자일지라도

만일 양반임이 분명하거든 너희들은 말에서 내려라. 혹시 말썽이 있으면 너에게 죄를 주겠다』고 할 것이다.
근세(近世)에는 아전들의 습성(習性)이 날로 교만해져서 심지어는 조정의 관리나 명망 있는 선비가 수령을 만나

말에서 내리는 데에도 수령을 수행하는 아전은 방자하게 말을 달리며 돌아보지도 않는다.

수령은 이러한 아전을 비호(庇護)하고 훈계하지 않아 이로 말미암아 비방과 욕을 무더기로 듣는 일이 많으니

아전 단속은 반드시 지엄하게 할 것이다.
노상(路上)에서는 아전과 하인이 죄과가 있을 때 작은 것과 우발적인 것은 아울러 대강 처리하고 큰 잘못과 고의적인

잘못은 형리(刑吏)를 불러서 죄과로 회부하여 두었다가 취임한 지 사흘 뒤에 그를 불러서 책망하되 끝내는 모두

용서하는 것이 좋다. 천리길을 동행하는 자를 도중에서 채찍질과 종아리질을 낭자히 하고 임지에 도착한 뒤에는

처벌하여 용서치 않는다면 그것은 인정이 아니다. 다만 용서할 수 없는 죄는 이에 해당되지 않는다.
부임길의 중도에 고을에 머물러 있는 공형(公兄)의 문보(文報)12)를 받으면 마땅히 도부(到付)13)라고 하거나

혹은 <지실(知悉)>14)이라고만 제사(題辭)15)할 것이지 장황하게 사리를 논해서는 안된다. 만일 긴요한 일이 있으면

수리(首吏)로 하여금 사사로이 연락하도록 할 것이다.
부임길의 중도에 본 고을 백성의 소첩(訴牒)16)이 있을 것 같으면 단지 『취임 후에 와서 진정하라』고만

제사할 것이지 사리를 논해서는 안된다.

 

각주

1) 두·변(豆 邊) : 두(豆)와 변(邊)은 제례(祭禮)와 잔치에 쓰는 예기(禮器)이다.
2) 점주(店廚) : 음식가게.
3) 행주(行廚) : 행로(行路) 중에 임시로 차린 주방.
4) 잔현(殘縣) : 재정이 궁색한 고을을 가리킨다. 대동미(大同米)의 유치미(留置米)에서 지출되는

관수미(官需米)가 수령의 녹(祿)이 되므로 잔현(殘縣)에서는 수령의 녹(祿)이 박하다.
5) 목천(木川) : 충청도(忠淸道) 연기군(燕岐郡)에 있었던 고을.
6) 권마성(勸馬聲) : 왕(王)이나 봉명대관(奉命大官) 또는 수령이 말이나 쌍교(雙轎)를 타고 행차할 때에

위세를 높이기 위하여 그 앞에서 하인들이 가늘고 길게 부르는 소리.
7) 역참(驛站) : 고려 이래 조선왕조에 걸쳐서 실시된 교통기관인 역을 가리킨다. 중앙에서 지방에 이르는

중요 도로에 전국적으로 약 500여 개소의 역이 있었다. 역에는 말과 역졸(驛卒)을 두어 공문(公文)을 전달하고,

공무 여행자에게 마필(馬匹)을 제공하고 숙식을 알선하며 진상되는 관물(官物)도 수송하였다.

조선후기에 이르러 참(站)은 여행자의 숙식소(宿食所)인 원(院)을 지칭하는 경우도 있었다.
8) 여혜경(呂惠卿) : 중국 송(宋)나라 때의 진강인(晋江人). 자는 길보(吉甫). 왕안석(王安石)에 의해 추천되어

대소정사(大小政事)의 기획에 참여하였다.
9) 연주(延州) : 중국 섬서성(陝西省)에 있었던 주명(州名)이다.
10) 서도(西都) : 장안(長安). 지금의 중국 섬서성(陝西省) 장안현(長安縣) 서북(西北)에 고성(故城)이 있다.
11) 정이천(程伊川) : 중국 북송(北宋)의 성리학자인 정이(1033∼1107). 자는 정숙(正叔), 정호(程顥)의 동생이다.
12) 문보(文報) : 보고문.
13) 도부(到付) : 받았다라는 뜻이다.
14) 지실(知悉) : 알았다라는 뜻이다.
15) 제사(題辭) : 보고나 진정 또는 소송에 대하여 판결하고 간략히 지시함.
16) 소첩(訴牒) : 진정서 또는 고소장.

 

 

★ 道路所由 其有忌諱 舍正趨迂者 宜由正路 以破邪怪之設.
(도로소유 기유기휘 사정추우자 의유정로 이파사괴지설. )
길을 갈 때에 미신으로 기피(忌避)하고 꺼리는 곳이라 하여 아전이 바른 길을 버리고 딴 길로

돌아서 가려고 하는 경우가 있는데, 반드시 바른 길로 가서 사특하고도 괴이한 미신을 타파할 것이다.

노준(盧遵)1)이 전의현령(全義2)縣令)이 되었는데, 그 성(城)을 보니 북문을 틀어막고 다른 곳을 풇어서 나다녔다.

그가 물으니 문지기는 백 년도 넘었다고 말하고 어떤 자는 『무당(巫堂)이 현령(縣令)에게 이롭지 못하다고 말하였기

때문에 틀어막았다』라고 말하고 또 어떤 자는 『손님들이 너무나 많아서 고을의 양식이 탕진될 우려가 있었기

때문에 손님들의 길을 우회시키기 위하여 문을 틀어막았다』라고 말하였다. 노준(盧遵)은 『이는 인색한 것이며,

또 속임수가 아닌가? 현자(賢者)의 행동은 사람들에게 이로움이 되도록 생각해야 하는 것인데 이를 위반하는 것은

죄이다. 내가 그 문을 회복하리라』라고 말하고 상급 관청에 아뢰니 상급 관청에서는 이를 허락하였다.

고을 사람들이 편리하게 여겨서 마을에서 기뻐 춤추었다. 주민들은 그냥 그대로 눌러 살려고 하였으며

나그네는 즐거이 그 지방을 드나들었다.
『남사(南史)』3)에 보인다. 하후상(夏侯詳)4)이 상주(湘州)5)의 자사(刺史)가 되었는데 성(城)의 남쪽에

높은 봉우리가 있었다. 사람들의 말에 『자사(刺史)가 이 봉우리에 오르면 곧 해직당한다』고 하였다.

이때문에 그 산에 올라가 본 자사(刺史)가 아무도 없는데, 하후상이 이에 그 봉우리에 대(臺)를 세워

동료들을 맞이함으로써 벼슬을 가볍게 여기는 그의 뜻을 보였다.
손순효(孫舜孝)6)가 영남의 순찰사(巡察使)7)가 되었는데 영해(寧海)8)에 서읍령(西泣嶺)이 있었다.

속언(俗言)에 이르기를 『사신(使臣)이 만일 이 고개를 처음 넘으면 반드시 흉사(凶事)가 있을 것이다』라고 하여

사람들이 모두 그 고개를 피하였으나 그는 고개 위에 바로 이르러 고목나무 껍질을 벗기고 거기에 시를 지어 쓰기를

『너는 화산(華山)9)에 읍하여 만세(萬歲)를 부르고, 나는 왕명(王命)을 받들어 뭇백성들을 위로하네.

그 경중(輕重)을 뉘라서 꼭 이해하리요 ? 백일(白日)이 양쪽의 정(情)을 환하게 비춰 주는구나』라고 하고

이어 고개의 이름을 파괴현(破怪峴)이라고 고쳤다.

 

각주

2) 전의(全義) : 충남 연기군 전의면의 옛이름.
3)『남사(南史)』 : 중국 남북조시대의 왕조인 송(宋)·제(齊)·양(梁)·진(陳) 170여 년의 역사를 서술한 것으로

당(唐)나라 때 이연수(李延壽)가 지었다. 본기(本紀) 10권, 열전(列傳) 70권 합(合) 87권.
4) 하후상(夏侯詳) : 중국 양(梁)나라 때의 초인(?人). 자는 숙업(叔業). 무제(武帝) 때에 상주자사가 되었고

뒤에 상서좌복야(尙書左僕射)에 승진하였다.
5) 상주(湘州) : 중국 호남성(湖南省)에 있었던 주명(州名)이다.
6) 손순효(孫舜孝) : 세종 9∼연산군 3(1427∼1497) 자는 경보(敬甫), 호는 물재(勿齋), 본관은 평해(平海).

형조판서(刑曹判書)·대사헌(大司憲) 등을 역임하였다.
7) 순찰사(巡察使) : 관찰사의 별칭. 관찰사의 정식 직함이 관찰사(觀察使) 겸 순찰사(巡察使)였다.
8) 영해(寧海) : 경상도 영덕군(盈德郡)에 있었던 고을.
9) 화산(華山) : 조선왕조 때 수도(首都) 서울의 주산(主山)인 삼각산(三角山).

 

 

★ 廨有鬼怪 吏告拘忌 宜竝勿拘 以鎭煽動之俗.
(해유귀괴 이고구기 의병물구 이진선동지속. )
청사에 귀신과 요괴가 있다고 해서 아전이 기피할 것을 말하여도 조금도 구애받지 말고,

선동하는 습속을 진정시키도록 해야 한다.

 

동한(東漢)1) 때에 왕돈(王沌2)이 미현3)의 수령에 임명받고 부임길에 시정에 이르렀는데,

정장(亭長)이 『정(亭)에는 귀신이 있어 지나가는 나그네를 자주 죽이니 묵을 수가 없다』라고 말하였다.

이에 왕돈이 『인(仁)은 흉사(凶邪)를 이기고 덕(德)은 상서롭지 못한 것을 물리치는 법이니 어찌 귀신을 피하리요』라고 말하고 바로 정(亭)에 들어가 잤다. 밤중에 들으니 여자가 억울함을 호소하는데 정장(亭長)에게 죽음을 당하였다고

하였다. 왕돈이 이튿날 아침 유요4)를 불러 힐문하여 정장의 죄를 낱낱이 자백받고 이에 정장을 잡아 가두었다.
진(晉)나라 때 악광(樂廣)5)이 하남부(河南府)6)의 부윤(府尹)7)이 되었을 때 관사(官舍)에 요괴(妖怪)가 많아 전임

부윤(府尹)은 감히 거처하지를 못하였다. 악광이 뒷날 벽구멍 속에서 너구리를 잡아 죽이니 드디어 요괴가 없어졌다.
양(梁)나라 때 부소(傅昭)8)는 좌우상서(左右尙書)9)를 역임하고 안성군(安成郡)10) 내사(內史)11)가 되었다.

그 군은 송(宋)12) 이래로 병란(兵亂)이 연이어 있었고 관사(官舍)는 흉가로 일컬어져 밤중이나 새벽에 사람과 귀신이 서로 맞닥뜨려 재임자가 좋게 임기를 마치는 일이 거의 없었다. 부소가 도임함에 미쳐 어떤 사람이 밤에 보니

 무장한 군사가 떠나면서 『부공(傅公)은 선인(善人)이니 내가 침범할 수가 없다』라고 말하고 공중으로 날아갔다.

이로부터 고을에는 드디어 우환이 없어졌다.
조극선(趙克善)13)이 면천군수(沔川14)郡守)가 되어 임지로 나갈 때에 아전들이 금기로써 길을 둘러갈 것을

청하기도 하고 귀신과 요괴로써 아사(衙舍)를 옮길 것을 청하기도 하고 또 택일(擇日)하여서 취임할 것을 청하기도

하였으나 모두 들어주지 않았다.
또 당나라 이길보(李吉甫) 15)와 우리나라의 이위국(李緯國)16)은 모두 임지에서 죽은 전임자의 관직을 이었으나

옛 관사(官舍)를 꺼려하지 않았다. 뒤의 해관편(解官篇)隱卒條에 나오니, 여기서는 생략한다.

 

각주

1) 동한(東漢) : 후한(後漢).
2) 왕돈(王沌) : 중국 후한(後漢) 때의 신도인(新都人). 자(字)는 소림(小林).
3) 미현 : 중국 진서성(陳西省)에 있었던 현명(縣名)이다.
4) 유요 : 중국에서, 순찰하며 도적을 막는 임무를 띤 지방의 관리. 진(秦) 때에 설치되었고 한(漢)에서도 시행되었다.
5) 악광(樂廣) : 중국 진(晋)나라 때의 육양인(?陽人). 자는 언보(彦輔). 담론을 좋아하였고

벼슬이 상서령(尙書令)에까지 이르렀다.
6) 하남부(河南府) : 지금의 중국 낙양현(洛陽縣).
7) 부윤(府尹) : 관명이다. 한(漢)나라 때 경조윤(京兆尹)을 부윤(府尹)이라고 불렀다. 당대(唐代)에는 서도(西都)·

동도(東都)·북도(北都)에 부윤(府尹)을 두었다. 청대(淸代)에는 순천(順川)·봉천(奉天)에 부윤(府尹)을 두었다.
8) 부소(傅昭) : 중국 남조의 송(宋)·제(齊)·양(梁)에 걸쳐 사환(仕宦)한 관입으로 자는 무원(茂遠), 시호는 정(貞).
9) 좌우상서(左右尙書) : 상서(尙書)는 중국 진대(秦代) 이래 설치한 관직. 수(隋)·당대(唐代)에 이르러

육부상서제(六部尙書制)로 확립되었는데, 국정(國政)을 각 분야별로 분담 통할하던 장관(長官)이다.
10) 안성군(安成郡) : 중국 하남성(河南省)에 있었던 군명(郡名).
11) 내사(內史) : 중국의 지방관(地方官). 진대(晋代)에는 각 군(郡)의 태수(太守)를 내사(內史)라 칭하였다.
12) 송(宋) : 중국 남북조시대(南北朝時代) 남조(南朝)의 유유(劉裕)가 세운 송(宋)이다.
13) 조극선(趙克善) : 선조 28∼효종 9(1595∼1658) 자는 유제(有諸), 호는 야곡(冶谷),본관은 한양(漢陽).

호조정랑(戶曹正郎)·장령(掌令) 등을 역임하였다.
14) 면천(沔川) : 충청도 당진군(唐津郡)에 있었던 고을.
15) 이길보(李吉甫) : 중국 당(唐)나라 사람. 자는 홍헌(弘憲). 지방관을 여러 번 역임하였으며

대표적 지지(地志)인 『원화군현자(元和郡縣者)』의 편찬으로 유명하다.
16) 이위국(李緯國) : 선조 30(1597)∼? 자는 태언(台彦), 호는 운포(雲浦), 본관은 전주(全州).

청렴강직으로 유명하였으며 지방 수령을 많이 역임하였다.

 

 

★ 歷入官府 宜從先至者 熟講治理 不可諧謔竟夕.
(역입관부 의종선지자 숙강치리 불가해학경석. )
관부를 두루 찾아가 마땅히 먼저 임관된 자의 다스리는 말을 귀담아 듣고 깊이 논의할 것이며,

해학(諧謔)으로 밤을 지새워서는 안된다.

 

본도(本道)1)에 들어서면 여러 고을의 수령은 모두 동료로서의 우의가 있는 것이다. 진정 혐원(嫌怨)을 품은

집안 사이가 아니면 마땅히 바로 방문하여 볼 것이고 그대로 지나침으로써 스스로 교만하게 보여서는 안된다.

하물며 저쪽은 고을살이한 지 오래 되어 그곳 풍속과 인정 그리고 새로 생긴 폐단과 오래 된 민막(民瘼 2) 등

물어보아야 할 것이 반드시 있을 것이니, 새로 부임하는 자가 스스로 그 이목(耳目)을 넓히지 않아서야 되겠는가.

 

각주

1) 본도(本道) : 여기에서는 임지(任地) 고을이 소속되어 있는 도(道)를 가리킴.
2) 민막(民瘼): 백성의 고통.

 

 

★ 上官前一夕 宜宿隣縣.
(상관전일석 의숙린현. )
부임 하는 전날 하룻밤은 마땅히 이웃 고을에서 묵어야 한다. 

 

『치현결(治縣訣)』1)에서 말하고 있다. 『취임 전 하룻저녁은 반드시 이웃 고을에서 자야 하고

임지 고을의 경내에서 자서는 안된다. 대개 신관의 행차에는 수행하고 맞이하는 사람의 숫자가 심히 많아서

경내에서 잘 것 같으면 관하의 백성들이 피해를 입게 된다.』
혹 고을의 경계상의 정·원(亭院)2)으로서 그 요역(徭役)3)을 면제받고 오로지 이러한 일을 전담하는 자에게는

구태여 곡진히 생각해 줄것은 아니다. 그러나 그 형편을 물어서 편의에 따르도록 할 것이다.

 

각주

1) 『치현결(治縣訣)』 : 영조·정조 때에 이루어진 목민서(牧民書)로 저자는 알 수 없다.

『치군요결(治郡要訣)』이라고 많이 불려진다.
2) 정·원(亭院) : 정(亭)은 원래 중국 고대(古代)에 기찰(譏察)·휴식(休息)의 기능을 행하던 지방 행정기구.

우리나라에는 정(亭)이 없으므로 여기서는 역(驛)·원(院)을 가리키는 말로 쓰고 있다.

3) 요역(徭役) : 공적(公的)인 일에 필요한 노동력을 직접 부과 징수하는 것이다.

요역의 수취기준은 토지 8결(結)당 1정(丁)이 년(年)6일(日)씩이라고 규정되었으나,

실제로는 가호(家戶)별로 부과하는 등 일정치 않았다.

특히 조선후기에는 고립제(雇立制)가 발달함에 따라 민고(民庫)·잡요 등 각 군현별 일체의 임시지출 비용을

요역이란 명목으로 토지(土地)·가호(家戶)에 부과하고 있었다. 

 

 

 

제 5 장 상관(上官) : 취임과 같은 말.

 

 

★ 上官不須擇日 雨則侍晴可也.
(상관불수택일 우즉시청가야. )
부임할 때에 날짜를 따로 받을 필요는 없고, 우천시에는 날이 맑아지기를 기다리는 것이 좋다.

 

택일을 하지 않는 사람이 없건만, 봉고파직(封庫罷職)1)을 당하는 사람도 있고[암행어사가 탐관을 내쫓으려면

반드시 官庫를 봉한다], 폄하(貶下)2)가 되어 파직되기도 하고, 사고를 만나 떠나는 이도 있다.

앞사람들이 택일하여 아무런 효과가 없었는데 무엇 때문에 그것을 따를 것인가. 매양 보면, 신관(新官)이 이미 가까운 곳에 당도하여서 혹은 하루에 겨우 한 역참만 가기도 하고, 혹은 종일 그 자리에 지체해서 길일을 기다리기도 한다.

읍(邑)에 남아 있는 이속들은 몰래 비웃으면서 그의 슬기롭지 못함을 간파하게 될 것이요, 도임행차를 따르는

관속들은 집생각에 마음이 초조한데 앉아서 노비(路費)만 축내니, 모두들 그 수령이 재난을 당하도록 저주할 것이다.

길일(吉日)이 도리어 저주를 당해내지 못할 것이니 필경 무슨 도움이 되겠는가. 다만 취임하는 날 풍우로 일기가

흐리면 백성들의 이목을 새롭게 할 수 없을 것이니, 잠깐 청명한 날씨를 기다림이 좋을 것이다.
기치(旗幟)는 폐단이 있으므로 다만 영기(令旗) 두 쌍만 쓸 것이다.

기타 관속들이 영접하는 예(禮)는 모두 전례에 따라 허락할 것이다.
고을의 경계에 들어서면 말을 달리지 말도록 단속하고, 길가에 나와서 구경하는 사람을 금하지 말 것이다.

읍에 들어서면 더욱 말을 달리지 못하도록 해야 할 것이니 이것은 백성들에게 무게 있게 보이는 도리인 것이다.
말 위에서는 눈을 두리번거리지 말며, 몸을 비스듬히 말며, 의관을 엄숙하게 정제해야 할 것이니,

이것은 백성들에게 장중한 모습을 보이는 방법이다.
객사(客舍)3) 밖에 당도하면 의복을 갈아 입고, 뜰 안으로 들어가서 망궐례(望闕禮)4)를 거행하되,

잠시 엎드려서 마음에 스스로 말하기를『전하께서는 만리 밖을 밝히 보시므로,

천위(天威)는 나로부터 지척도 떨어지지 않았으니, 소신(小臣)이 어찌 감히 삼가 공경하지 아니하리요.

전하께서 적자(赤子) 만인의 생명을 오로지 소신에게 맡기셨으니,

소신이 어찌 감히 백성을 오직 삼가해서 다스리지 않으오리까』라 한다. 그리고 일어나서 물러나온다.

 

각주

1) 봉고파직(封庫罷職) : 어사(御史)나 감사(監司)가 지방 수령을 파직시키고 관의 창고를 봉해 잠그는 일.
2) 폄하(貶下) : 감사가 수령을 고과(考課)하는 데 있어 등급이 하(下)가 되면 탄핵을 받고 파직됨.
3) 객사(客舍) : 궐패를 모시어 두고, 왕명을 받고 내려온 벼슬아치를 대접하고 묵게 하던 집으로 각 고을마다 있었다.
4) 망궐례(望闕禮) : 지방관이 명절날이나 왕의 탄신일,

그 밖에 특별한 경우에 객사(客舍)에 나아가 궐패(闕牌)를 바라보고 절하는 예식.

 

 

★ 乃上官受官屬參謁.
(내상관수관속참알. ) : 부임하여 관속들의 인사를 받아야 한다.

 

좌수(座首)를 불러앉히고 이렇게 말한다. 『급하지 않은 공사(公事)는 출관(出官)2)까지 기다리되[上官한지

3일에 출관한다] 만일 시급한 공사가 있으면 비록 오늘이나 내일이라도 구애치 말고 아뢰어도 좋다.』
청사가 굉장하고 화려하더라도 좋다는 말을 하지 말며, 청사가 퇴락하였더라도 누추하다는 말을 하지 말고,

좌우의 온갖 기물들이 혹 아름답고 혹 추하더라도 또한 입을 열지 말고, 일체 침묵을 지킬 것이다.

눈은 마치 보이지 않고, 입은 마치 말을 못하는 것같이 해서 숙연히 떠드는 소리가 없어 부중(府中)이

물을 끼얹은 듯하게 할 것이다. 취임하면 반드시 진찬(進饌)을 한다. 의당 특생(特牲)의 품(品)을 쓰되

그 작(爵)은 1헌(獻)이요술 한잔, 그 식(食)은 2궤요[떡과 면 각 한 그릇], 그 국(羹)은 3형이요

[모두 雜菜에다 고기즙을 합해서 국을 만든다], 그 육(肉)은 3조(俎)요[삶은 고기 한 접시, 구운 고기 한 접시,

어회 한 접시], 유물(濡物)이 4두(豆)요[채소 두 접시, 어육 두 접시] 건물(乾物)이 4변(笲)이다.

과일 두 접시, 육포· 어포 한 접시, 쌀가루 음식 한 접시 여기에 더 가해서는 안된다.
자제나 혹은 친척·빈객으로 따라온 사람에 대해서는 의당 특돈(特豚) 소품(小品)을 쓰되,

그 작이 1헌이요 그 식은 1궤요, 1형 1조 2두 2변이다. 더해서는 안된다.
만일 쇠잔한 고을로 녹봉이 박하면 취임시의 찬은 마땅히 특돈 3정(特豚三鼎)을 쓰되, 국 1형에 2두 2변이요,

다른 것은 특생의 경우와 같다.
선왕(先王)의 예에 음식은 5등이 있다. 첫째 태뢰(太牢)3)요, 둘째 소뢰(少牢)4)요, 세째 특생이요,

네째 특돈 3정(三鼎)이요, 다섯째 특돈 1정이다. 그 변·두·궤·형은 각각 정해진 수가 있으니 삼례(三禮)5)와

춘추전(春秋傳)6)에 산견되는 바다. 그 예문은 나의 『제례고정(祭禮考定)』7) 제2권에 상세히 기재되어 있다.

옛날에 대부(大夫)는 제사를 소뢰로 지냈는데 그 식(食)은 특생이요, 사(士)는 제사를 특시(特豕)로 지냈는데

그 식은 특돈이니 넘을 수 없는 것이다. 대저 예라는 것은 천지의 절문(節文)이다.

제사와 연향(燕享)은 더욱 신중히 해야 하는 것이니 그 명목(名目)과 그릇수는 가감할 수 없는 것이다.

예법을 경솔히 버리는 자는 반드시 국법도 가벼이 범할 것이다. 그러므로 군자는 예법을 중히 여기는 것이다.
행차가 중도에 이르면 미리 이 절차를 적어서 수리(首吏)에게 주어 본고을에 사사로 알리게 하는 것이 좋다.
무릇 조(俎)8)에 담는 것은 높이는 두 치를 넘지 못하게 하고 변(籩) 9)에 담는 것은 높이가 세 치를 넘지 못하게 하며

혹은 두 치두(豆)10)에 담는 것은 높이가 한 치가 넘지 못하게 할 것이다.[모두 周尺11)을 말하는 것이다]
따라왔던 이속이나 하인들은 3일간 말미를 주되 수리(首吏)는 그럴 것이 없다.
수리화 수교(首校)12)를 불러 다음과 같이 다짐한다. 『조사(朝仕)13)는 동틀 무렵에 시작해서 참알례(參謁禮)가

끝나면 해가 뜰 때가 되도록 하라. 일어나는 것은 동트기 전이어야 한다 퇴청(退廳)14)은 이경(二更)에 할 것이니,

폐문한 뒤에 맥반(麥飯)이 익을 무렵이면 될것이다.[겨을 밤에는 다소 늦어도 무방하다]

매일 아침 새벽녘에 시노(侍奴)[及唱]가 조사할 시간이 되었다고 고하면 나는 곧 문을 열 것이다.

매일 이경(二更)에 시노가 퇴청할 시간이 되었다고 아뢰면 이에 드디어 물러가라는 영이 내려질 것이다.

오늘 이렇게 알리노니 모두 알아두도록 하라. 혹 시간을 어기는 일이 있으면 네게 죄를 줄 것이다.』
아침 일찍 조례(朝禮)를 행하는 것이 옛날의 예법이다.15) 군현이 비록 작더라도 조례는 마땅히 그래야 한다.

매양 보면 수령들이 기거하는 것이 절도가 없어서 해가 세 발이나 떠오르도록 깊이 잠들어 있고,

이속이나 장교 등 여러 일을 맡은 자들이 문 밖에 모여서 느릅나무·버드나무 그늘 아래 서성거리고 있으며,

송사하러 온 백성들이 무작정 머물러서 드디어 하루 품을 버리게 된다. 온갖 사무가 지체되며

만사가 엉망이 되니 매우 불가한 일이다. 혹 너무 일찍 기상을 해도 이속들이 괴롭게 여긴다.
비나 눈으로 땅이 질퍽거리면 참알(參謁)을 생략해도 좋다.

 

각주

1) 참알(參謁) : 관속들이 관원(官員)에게 나아가 배알하는 것.
2) 출관(出官) : 관인이 자리에 나와 집무를 보기 시작하는 것.
3) 태뢰(太牢) : 제사나 잔치의 음식에 소·양·돼지를 쓰는 것.
4) 소뢰(少牢) : 제사나 잔치의 음식에 양과 돼지를 쓰는 것.
5) 삼례(三禮) : 중국 고대의 예에 대하여 서술한 고전으로 『의례(儀禮)』『주례(周禮)』『예기(禮記)』를 가리킨다.
6) 춘추전(春秋傳) : 『춘추(春秋)』란 노(魯)나라의 역사를 공자(孔子)가 찬술한 것인데, 그 해석으로서

『좌전(左傳)』 『공양전(公羊傳)』 『곡량전(?梁傳)』과 『호씨전(胡氏傳)』이 있다.
7)『제례고정(祭禮考定)』 : 제례(祭禮)를 상고한 다산(茶山)의 저술.
8) 조(俎) : 나무로 만든 제기의 일종.
9) 변(籩) : 대로 엮어서 만든 제기의 일종.
10) 두(豆) : 식혜나 김치 같은 것을 담는 제기의 일종.

11)주척(周尺) : 주나라에서 제정하였다는 기본 척도. 중국과 우리나라에서 국가제도상의 기준 척도로 쓰여져 왔다.
12) 수교(首校) : 각 고을 군교의 우두머리.
13) 조사(朝仕) : 지방 관청의 관속들이 아침에 상관에게 뵙던 일.
14) 퇴청(退廳) : 근무시간을 마치고 관청에서 물러나옴. 원문은 방아(放衙)라고 되어 있는데 같은 뜻이다.
15) 원문에 『조변색자(朝辨色者) 고지예야(古之禮也)』라고 되어 있는데,

「조변색(朝辨色)」이란 새벽에 무엇을 분변할 수 있는 시각, 즉 이른 아침을 가리킨다. 

 

 

★ 參謁旣退 穆然端坐 思所以出治之方. 寬嚴簡密 豫定規模唯適時宜 確然以自守.
(참알기퇴 목연단좌 사소이출치지방 관엄간밀 예정규모유적시의 확연이자수. )
인사하고 물러가면 단정히 앉아서 백성을 다스리는 길을 생각한다. 너그럽고 엄정하고 간결하고 치밀하게

계획해서 규모를 미리 정하되, 시의(時宜)에 알맞도록 하고 이를 스스로 굳게 지켜 나가야 한다.   

 

『치현결(治縣訣)』에 이렇게 말했다. 『군자가 백성을 대하매 마땅히 먼저 나의 성품이 편벽된 곳을 찾아 바로잡아야 한다. 유약한 것은 강하게 고치고, 게으른 것은 부지런하도록 고치고, 굳센 데 치우친 것은 관대하도록 고치고,

완만한 데 치우친 것은 위맹(威猛)하도록 고쳐야 한다.』 반드시 구준(丘濬)1)의 『대학연의(大學衍義)』,

조선료2)의 『자경편(自警編)』, 설문청(薛文淸)3)의 『종정록(從政錄)』 등 책을 가지고 그중의 아름다운 말과

착한 행실로서 마음에 감복되는 내용을 항상 자주 읽고 풀이하면서 거듭거듭 본받아 실행하여

그 마음을 맑게 해야 한다. 또 『경국대전(經國大典)』『수교집록(受敎輯錄)』4)『결송유취(決訟類聚)』5)

『무원록(無寃錄)』6)『종덕편(種德篇)』7)『의옥집(疑獄集)』8) 등 책을 가지고 일이 생기기 전에

미리 연구해 두면 많은 도움을 얻을 수 있을 것이다. 고인이 사람에게 의술을 가르치매 매일 새벽이면

먼저 『논어』와 『효경(孝經)』을 읽게 한다 하였으니, 다 이러한 뜻이다.
안순암(安順菴)의 『임관정요(臨官政要)』9)에 이렇게 말했다. 『천리에 습속이 같지 않고 백 리에 기풍이 다르다.

한 도 안에서도 산간과 해안지대가 풍토가 다르고, 한 현(縣) 안에서도 읍과 촌이 숭상하는바가 다르다.

장사꾼이 모이는 곳의 민심은 간교하고, 농사꾼이 사는 곳의 민심은 질박하다. 백성을 다스리는 자는 마땅히 형세를

살펴서 대처해야 할 것이다. 옛날 유중영(柳仲?)10)이 경조윤(京兆尹)이 되었을 때 북사(北司)12)의 아전이

곡식을 납입하는 것을 어기자 곤장을 쳐 죽이니 그 나라 정사가 엄하고 명백하다고 소문이 났었다.

후에 하남부윤이 되어서는 관용과 은혜로써 정사를 행했는데, 어느 사람이 경조윤 시절과 같지 않다고 말하니,

유중영이 「수도의 백성을 다스림에 있어서는 위엄이 앞서야 하고 시골 도읍을 다스릴 때에는 은혜와 사랑을

근본으로 삼아야 한다」고 하였다. 최언(崔?)13)이 섬(陝)14) 지방은 너그럽게 다스리고 악(鄂)15) 지방은

무섭게 임하였는데 섬 지방은 토지가 메마르고 백성이 가난하므로 따뜻이 어루만져 오직 동요가 생길까 염려하였고

악 지방은 토지가 비옥하고 백성들이 사나우므로 위엄있게 다루지 않으면 안된다」고 하였다.

장영이 촉(蜀) 지방을 다스릴 때, 처음에는 엄격하게 다루었는데 두번째 부임해서는 백성들이 자기를 믿는 줄을 알고,

드디어 엄한 태도를 고쳐 너그럽게 대하였다. 이는 모두 습속에 따라 변통할 줄을 안 것이다』고 하였다.

 

각주

1) 구준(丘濬) : 중국 명(明)나라 사람으로 자는 중심(仲深), 시호는 문장(文莊). 벼슬은 문연각태학사에 이르렀다.

국가의 전고(典故)에 밝았으며 학문을 좋아했다. 『대학연의보(大學衍義補)』는 그의 대표적 저술이다.
2) 조선료(趙善?) : 중국 송(宋)나라 사람으로 자는 덕순(德純), 벼슬은 상서랑(尙書郎)에 이르렀으며

저술로 『자경편(自警編)』이 있다.
3) 설문청(薛文淸) : 중국 명(明)나라 하진(河津) 사람. 자는 덕온(德溫), 호는 경헌(敬軒),

이름은 선(瑄)이고 문청은 그의 시호이다. 벼슬은 예부우시낭(禮部右侍郎) 겸 한림학사에 이르렀다.

정주학에 근본을 두었으며 저술에 『독서록(讀書錄)』『종정명언(從政名言)』『설문청집(薛文淸集)』이 있다.
4)『수교집록(受敎輯錄)』 : 숙종 연간에 간행된 법령집. 중종 38년의 『대전후속록(大典後續錄)』

이후 내려진 법령을 모은 것으로 이(吏)·호(戶)·예(禮)·병(兵)·형(刑)·공(工)의 육전(六典)으로 나뉘어 있다.
5)『결송유취(決訟類聚)』 : 재판에 관한 편람(便覽)으로 이조 명종(明宗) 때 김백간(金伯幹)이 편집한 책.

『사송유취(詞訟類聚)』라고도 한다. 숙종(肅宗) 때 다시 『결송류취보(決訟類聚補)』가 집록(集錄)되었다.
6)『무원록(無寃錄)』 : 살해사건의 조사를 위한 법의학서. 원(元)나라 왕여(王與)가 편찬한 책으로

우리나라에서 누차 증보 번역 간행되었다.
7)『종덕편(種德篇)』 : 김육(金堉)이 지방관을 위해서 편찬한 책으로 사람을 구제한 사례와 재판에 관한

사례가 실려 있다. 본명은 『종덕신편(種德新編)』. 3권 1책.
8)『의옥집(疑獄集)』 : 판단하기 어려운 옥사의 사례를 모은 책인데, 중국오대의 화응(和凝)이란 사람이 편했다.
9)『효경(孝經)』 : 유교 경전의 하나. 공자가 제자 증자(曾子)에게 효도에 대해서 말씀한 것을 기록한 것이라 한다.
10)『임관정요(臨官政要)』 : 순암(順菴) 안정복이 26세시에 초고를 작성하고 46세(1757)시에 완성한 책이다.

상·하·속편으로 편차되어 있음. 지방 수령의 치정에 관계되는 제반 문제를 서술한 것으로

『목민심서』의 선례(先例)가 되었다.
11) 유중영(柳仲?) : 중국 당(唐)나라 사람으로 자는 유몽(諭蒙), 공작(公綽)의 아들. 명관으로 이름이 높았다.
12) 북사(北司) : 환관(宦官)이 일을 보던 관아.
13) 최언 : 중국 당나라 사람. 자는 광략(廣略). 여러 지방 관찰사를 역임하고 이부상서(吏部尙書)에 이르렀다.
14) 섬(陝) : 지금 하남성(河南省)에 속한 지명. 일명 괵(虢).
15) 악(鄂) : 지금의 하북성(河北省) 무창현(武昌縣) 지방.

 

 

★ 厥明 謁聖于鄕校 遂適社稷壇 奉審唯謹.
(궐명 알성우향교 수적사직단 봉심유근. )
이튿날 동트기 전에 향교 1)에 나아가 성인의 사당에 아뢰고 이어 사직단 2)으로 가서 봉심(奉審) 3)하되

오직 정중히 행하여야 할 것이다.

 

이 날은 동트기 전에 일어나 횃불을 들고 향교에 가서 촛불을 켜고 배례를 행한다.

배례가 끝나면 전상(殿上)에 올라가 봉심하고, 다시 동무(東廡)와 서무(西廡)4)로 가서 봉심한다.
나와서는 명륜당(蟾倫堂)5)에 알아서 배례에 참례한 유생들을 불러 상견하고 답배한다.

[비록 西北 지방일지라도 이날 답배하지 않으면 안된다] 유생들과 약속한다.

『현직 향교 임원들은 아무래도 서로 만나게 되겠지만, 사철 첫달의 분향은 내가 몸소 거행할 것이요,

봄·가을의 석채(釋菜)6)도 내가 몸소 거행할 것이니, 그 날에는 서로 만나볼 수 있을 것이다.

또 때때로 백일장을 열어 선비들을 시험할 적에 향교 임원은 의례상 압반(押班)7)할 것이니 그날은 상견할 것이요,

또 민사나 지방 내의 폐단에 대해서 여론을 듣고자 하는 경우 내가 응당 부를 것이니 그날 상견할 수 있을 것이다.

제군들은 관문에 이르러 청탁하는 일이 없도록 해야 할 것이다. 』 돌아와서 예방(禮房)8)을 불러 이렇게 경계한다.

『이와 같이 약속을 하였으니 너는 그것을 알아서 면회를 받아들이는 일이 없도록 하라.』
그리고 사직단으로 가서 조복(朝服)을 입고 봉심하고, 예감(禮監)곧 관청별감(官廳別監) 9)을 여단 10)·

성황단(城隍壇)11)으로 보내서 봉심하고 오도록 한다. 한 고을의 귀신으로는 사직(社稷)의 귀신이 가장 비중이 크다.

그런데, 근래 수령들이 전혀 정성을 들이지 않으니 매우 옳지 못한 일이다.

여단이나 성황단도 비록 몸소 갈 것까지는 없지만 수령은 모든 귀신의 주관자이니

취임한 처음에 마땅히 예를 차려 사람을 보내 봉심하는 것이 옳다.
드디어 돌아와서 참알(參謁)을 받는다.

 

각주

1) 향교(鄕校) : 고려왕조 이래 특히 조선왕조 때 각 지방 각 군현마다 설치되어 있던 관립중등학교(官立中等學校).
2) 사직단(社稷壇) : 토신(土神)인 사(社)와 곡신(穀神)인 직(稷)을 모시던 단(壇). 서울 및 각 지방 군현에 있었다.
3) 봉심(奉審) : 웃사람의 명을 받들어 사묘(社廟)를 보살피는 것.

4) 동무(東廡)·서무(西廡) : 성균관(成均館) 및 향교의 문묘(文廟)에 여러 유교의 선현들을 모신 동서의 부속건물.
5) 명륜당(明倫堂) : 성균관(成均館) 및 향교(鄕校)의 본건물.
6) 석채(釋菜) : 문묘(文廟)에서 공자(孔子)를 제사지내는 의식. 2·8월의 상정일(上丁日)에 거행함. 석전제(釋奠祭).
7) 압반(押班) : 뭇사람들의 반열(班列)을 정돈한다는 뜻이니, 여기서는 응시자들의 위치를 정돈하는 일.
8) 예방(禮房) : 육방(六房) 향리(鄕吏)의 하나로서 예전(禮典)에 관한 사무를 관장함.
9) 호전(戶典)·예전(禮典)의 일을 관장하는 자는 좌별감(左別監)이었다.
10) 여단 : 제사를 못 받아 먹는 귀신, 즉 여귀(?鬼)에게 제사를 지내주던 곳. 여제단(?祭壇).
11) 성황단(城隍壇) : 각 지역의 수호신을 받드는 곳, 사직단·여단과 함께 각 군현마다 설치되어 있는 삼단이었다.

 

 

 

제 6 장     이사( 莅事 )

               (관리가 부임하여 실무를 맡아보는 일. )

 

 

厥明開坐 乃莅官事.
(궐명개좌 내리관사. )
이튿날 새벽에 개좌(開坐)하여 정사에 임한다. 

 

상사(上司)에의 보고문서 가운데 응당 전례에 따라도 좋을 것은 곧바로 성첩(成帖)서명 날인하는 일을

성첩이라 한다하고 그 사리를 따져야 할 것은 모름지기 아전들의 초안(草案)을 바탕으로 다듬어서 글을 만들고

그들로 하여금 다시 쓰게 할 것이다.
민간에 내리는 명령은 일자반구(一字半句)라도 함부로 성첩해서는 안된다. 반드시 다음에 나오는 6전(典) 36조(條)를

참고하여 일일이 검사하고 그 안에 조금도 간계와 허위가 들어 있지 않음을 분명히 안 뒤에 성첩하는 것이 옳다.

혹시 의심스러운 것은 아랫사람에게 묻는 것을 부끄러워하지 말고 수리(首吏)와 담당 아전을 불러 자세한 사정을

조사하고 그 본말을 분명히 안 후에 성첩하는 것이 옳다. 매양보면 가장 어리석은 사람일수록 일을 잘 아는 체하고

아랫사람에게 묻기를 부끄러워하여 두리뭉실 의심스러운 것을 그냥 삼킨 채 다만 문서 끝에 서명하는 것만 착실히

하다가 아전들의 술수에 빠지는 사람이 많다. 혹 그 읍의 잘못된 전례로서 이미 오래 되었고

또 그것이 전혀 불합리한 것이면 보고할 기한이 급박하지 않은 경우 책상 속에 넣어두고 성첩하지 않은 채

개혁할 것을 도모할 것이며, 그 기한이 급박한 경우이면서 혹 일이 얽혀서 쉽게 변경시킬 수 없는 것은

일단 명령을 내려놓고 천천히 개혁할 것을 도모할 것이다.
부임하는 길에 과오를 범했던 수행원은 이날에 문초하여 훈계 방면하고 매질을 할 것까지는 없다.

혹 사면할 수 없는 사람은 가두어 두어 뒷날을 기다리게 하라. 취임한 지 10여 일 사이에는 형벌을 가하지 말아서

안팎에 소문이 나기를 한결같이 관대하고 온후하고 굳세고 사납지 않은 사람으로 알려지는 것이 좋다.

 

 

★ 是日發令於士民 詢瘼求言.
(시일발령어사민 순막구언. )
이날 선비와 백성들에게 명을 내려 병폐에 대한 것을 묻고 여론을 조사하도록 지시한다.

 

관내(管內)의 사족과 각층의 인민들에게 공문을 내려 다음과 같이 말한다. 『행현령(行縣令)1)이 알리고자

하는 일은 본관이 적재(適材)가 아님에도 과분한 나라의 은혜를 입고 이 고을에 부임하여 아침 저녁으로

근심과 두려움으로 어찌할 바를 모르고 있다. 묵은 폐단이나 새로운 병폐로 백성들의 고통이 되는 것이 있으면

한 방(坊)2) 중의 일을 잘 아는 사람 5,6명이 한 곳에 모여 조목을 들어 의논하고 문서를 갖추어 가져오게 하라.

혹 한 고을 전체에 해당되는 폐단과 1방(坊) 1촌(村)의 특수한 고통은 각각 한 장의 종이에 쓰되 방마다

하나의 문서를 갖추어서 지금부터 7일 이내로 일제히 와서 바치라. 혹 아전·군교·토호 들이 들으면 싫어할 일이어서

후환이 두려워 드러내어 말하지 않는다면 수령이 부임한 초에 폐단을 묻는 본의에 어긋나는 것이다.

각각 엷은 종이로 풀칠하여 봉하고 그 바깥에 표시를 한후 어느날 정오에 함께 읍내에 들어오고 또 함께 관아의 뜰에

와서 본관의 면전에 직접 바치도록 하라. 만약 어떤 간민(奸民)이 있어 읍내에 들어와서 오래 머물면서

위의 문서를 고치거나 삭제하는 사람이 있으면 마땅히 엄한 징계가 있을 것이다. 이 점을 익히 알라.

여론을 수집하기는 쉬우나 개혁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고칠 만한 것은 고치고 고칠 수 없는 일은 그대로 둘 수밖에

없다. 오늘에 들떠서 날뛰지 말며 다음에 실망하지도 말 것이다. 방리의 사사로운 폐단이 혹시 사심을 품고 사를 끼며

헛되이 과장되고 그 실상을 감추거나 뜬소문을 꾸미는 사람이 있으면 결국에는 죄를 받게 될 것이니 조심하라.』
신관이 부임하면 으례 소잡는 일, 술 담그는 일, 소나무 남벌하는 일 등 세 가지 금령을 엄하게 내리게 되어 있으나

이것은 하나의 형식에 지나지 않으니 하지 말아야 할 것이다.
주자(朱子)가 처음으로 남강(南康) 땅에 부임한 당초에 유시하는 방문을 써붙였다.

『본관은 오랫동안 질병으로 물러나 민간에 있다가 근래에 나라의 은혜를 입어 이 지방을 지키게 되였기에

간절히 사양하였으나 병든 몸으로 부임하게 되었다. 부임한 처음에 스스로 생각해 보건대 성스러운 천자께서

깊이 숨어 있는 사람을 찾아내어 백성 다스리는 책임을 맡긴 뜻은 진실로 장차 교화(敎化)를 펴 밝히고

민력(民力)을 배양하려 한 것이요. 한갓 부서(簿書)와 기회의 실적을 올리는 것만을 책임지운 것이 아니다.

비록 교화를 펴고 민력을 배양하는 일이 쉽게 이루어지지 않더라도 힘쓰지 않을 수야 있겠는가.

이제 순방과 권유를 행해야 할 다음과 같은 몇가지 일이 있다.
1. 부역이 번잡하고 세가 무거운 일에 대하여 그 이로움과 병폐의 근원과 경위를 능히 안다면

마땅히 어떻게 조처를 취할 것인가.
2. 전대 효자 사마씨(司馬氏)와 웅씨(熊氏)는 모두 효행으로 드러났고 또 의로운 문중인 홍씨(洪氏)는

대대로 의롭게 살았으며 과부 진씨(陳氏)는 절개를 지키고 개가하지 않았다.

바라건대 후세 사람들도 몸을 닦아서 옛사람에게 부끄럽지 않게 해야 할 것이다.
3. 청컨대 향당(鄕黨)의 부형들은 자제 중 학문에 뜻이 있는 자를 입학하게 하라. 』
살피건대 주자의 이 글은 첫째는 민생을 말한 것이요, 둘째는 교화를 말한 것이요, 세째는 학업을 말한 것이다.

군자가 백성들을 대함에 있어서 반드시 민생을 먼저 한 후에 교화를 할 것이요,

교화를 한 후에 학업을 닦게 할 것이니 이것이 그 뜻이다.
범재(泛齋) 심대부(沈大孚)3)가 성산현감(星山縣監)이 되었을 때 성문에 방을 붙여서 말하기를

『몸가짐을 맑고 근실하게 하며 정사를 공평히 하는 것은 태수(太守)의 할 일이니,

태수가 그렇게 하기를 힘쓸 것이요, 효도와 우애를 돈독히 하고 약속을 잘 지켜 법령을 어기지 않는 것은

백성의 할 일이니, 백성은 이를 힘쓰라』하였다.

 

각주

1) 행현령(行縣令) : 조선시대의 관리 임명에는 행수법(行守法)이 있었다. 품계가 높은 사람이 그 품계보다

낮은 관직에 임명되는 경우 그 관직명 위에 「행(行)」자(字)를 붙였고 반대의 경우(守)자(字)를 붙였다.

조선시대의 현령은 종5품직이었으나 조선후기에는 그보다 높은 품계의 관리가 현령이 되는 경우가 많았다.
2) 방(坊) : 조선 시대의 행정단위. 서울에는 5부(部) 밑에 각 방(坊)이 있었고 자방에는 현 밑에 방(坊)이 있었다.

지방의 경우 면(面)과 같은 단위이며 풍헌(風憲)이 이를 관장하였다.
3) 심대부(沈大孚) : 선조 19(1586)∼? 자는 신숙(信叔), 호는 가은(嘉隱)·범재(泛齋). 사간(司諫)·현감을 지냄.

문경(聞慶) 소양사(瀟陽祠)에 제향됨. 

 

 

★ 是日有民訴之狀 其題批宜簡.
(시일유민소지장 기제비의간. )
이 날에 백성들의 소장(訴狀)이 들어오면 그 판결하는 제사(題辭)를 간결하게 할 것이다.

 

『치현결(治縣訣)』에서 말했다. 『백성들의 소장에서 아뢰는 바는 엄하게 판결하지 않고,

마땅히 양편을 대질시켜야 하며 한편의 말로써 가볍게 판단해서는 안된다.

싸우고 때린 일로 와서 고소하는 자는 더욱 그 말을 믿고 가볍게 체포해서는 안될 것이다. 』
또 말하기를 『고소장을 처리하는 일은 본래 말단의 사무에 속하며 정신 쓰는 것도 한도가 있어서 모두를 상세히

다룰 수 없다. 머리와 몸을 모두 그것에만 쏟고 무슨 일을 할 수 있겠는가. 모름지기 백성들의 고소장은

그 내용에 따라 몇 가지 종류로 나누고 예제(例題)1)와 투어(套語)를 만들어서 형리(刑吏)2)에게 주라.

형리를 뽑되 큰 고을은 4명, 작은 고을은 2명으로 하여 그들로 하여금 백성들의 고소장을 받아서 종류에 따라

분류하고 이 예제와 투어를 쓰게 하고 날짜의 왼편에 스스로 이름을 써서 훗날 참고가 되게 함으로써 농간과 거짓을

방지하면 비록 하루에 1만 가지 소송을 처리하여도 어렵지 않을 것이다. 가령 전답과 노비에 관한 소송이면

예제(例題)에 『양편이 각기 문권(文券)3)을 가져와서 서로 대질하라』 하고 만약 춘분(春分)을 이미 지난 후에

전답의 소송이 있으면 예제에 『전답의 소송을 할 때가 아니니 추분(秋分)을 기다려서 다시 소송하라』하고,

농사에 흉년이 들었을 때 노비 소송이 있으면 예제에 『흉년에 노비를 추쇄(推刷)4)하는 것은 국가의 금령이 있으니

가을을 기다려서 다시 하라』하고만약 役을 지는 노비가 목전에서 도망가서 고을 안에 숨어 있는 경우는

여기에 해당되지 않는다 빚돈 때문에 소송했을 때에는 예제에 『빚진사람이 신용이 없는지 빚준 사람의 독촉이

지나친 것인지 양편이 대질하라』 하고 만약 빚진 사람이 농부이고 농사가 바쁜 철이면 예제에

『춘궁기(春窮期)에 빚돈 거두는 일은 사목(事目)5)에 어긋나는 일이니 추수철을 기다려 다시 소송하라』 하고,

만약 빚진 사람이 장사꾼이거나 뱃사람일 때에는 이에 해당되지 않는다 지주가 경작권을 빼앗아 전객(佃客)6)이 와서

소송한 경우이면 예제에 『지주가 다른 사람의 청탁을 받았는가, 전객이 농사에 게으르기 때문인가를 그 마을의

여러 상호(上戶)속칭 두민(頭民)7)이라 한들 공평하게 의논하고 결정하여 다시는 소송하는 일이 없게 하라』 하고,

만약 지주가 세력 있고 부자여서 가난한 전객이 경작권을 빼앗긴 경우면 刑吏로 하여금 이를 뽑아서 보고하게 하라.

논에 물 대는 일로 싸워서 약한 사람이 소송하면 예제에『물길을 막은 자가 유력하고 강한 사람인가,

물길을 훔친 사람이 간사한가를 그 마을의 여러 상호들이 공평하게 의논하고 결정하여 다시 소송하는 일이

없게 하라』 하고, 만약 마을의 의론이 불공평하여 다시 소송해 오면 상호를 죄주되 누락되는 사람이 없게 하라.

품팔이꾼과 고용주가 품삯 때문에 다투어서 품팔이꾼이 와서 소송한 경우면 예제에

『고용주가 신의가 없는가 품팔이꾼에게 죄가 있는가를 그 마을에서 공평하게 의논하고 결정하여 품값을 더 줌으로써

다시 소송하는 일이 없게 하라』 하고, 그 마을의 상호에게 맡겨라,

싸우다가 상처를 입어서 그 친속이 와서 소송하는 경우면

예제에 『중상이면 범인을 감금해서 고한(辜限)30일을 채우게 하였다가 구류기간이 지나면 그 마을의 공의(公議)로

압송하여 본관의 처치를 받도록 하라』 하고마을의 상호에게 맡겨라.

만약 목숨이 경각에 있으면 예제에 『상처를 조사하여 과연 위태롭고 급하면 그 마을에서 풍헌이나 영장(領將)8)을

초청하여 그 주범과 공범을 조사한 후 묶어서 압송하여 처치를 받게 하라.』그 마을의 상호에게 맡겨라
이상과 같은 소송사건을 모두 예제를 만들어서 형리에게 주고 오직 그 사정이 특수하여 예제로 처리할 수 없는 것은

형리로 하여금 뽑아서 올리게 하고 내가 상세히 심사하여 따로 특제(特題)를 사용하되 가볍게 판결하지 말고

양편을 모두 대질시켜야 한다. 생각컨대 작은 고을 한가한 관청은 반드시 이 법을 쓰지 않아도 된다.
『다산필담(茶山筆談)』에 말하기를 『전세(田稅)가 가복(加卜)9)이 되었다 하여卜은 負이다.

加卜은 몇 負 더 부가되는 것을 말한다 호주(戶主)가 와서 호소하면 예제에 이 일은 한번 대규모의 조사를 하여야

할 것이니 지금은 우선 물러가서 통지 있기를 기다리라 하고 즉시 형리로 하여금 그 성명과 호소 내용의 요점을

기록하여 한 책자 속에 열기할 것이다』고 하였다.
군액(軍額)이 이미 면제되었는데? 탈역10)의 題辭가 있었음 또 군포(軍布)를 거두어서 군역 면제자가 와서 호소하면

예제에 『이 일에 관해서는 한번 전반적인 조사가 있을 것이니 지금은 우선 물러가서 통지가 있기를 기다려라』하고,

즉시 형리에게 명령하여 그 성명과 호소 내용의 요점을 기록하여 책자 속에 열기할 것이다.
환곡(還穀)11)을 정리함에 있어서 빌려 먹지 않았는데 도 거두는 일이 있어서 억울한 사람이 와서 호소하면

예제를 위에서 든 것과 같이하고, 호소의 내용을 기록해 두는 것도 위와 같이 할 것이다.
이후 5,6일이 지나서 호소하는 사람이 더욱 많아지면 한가한 날을 타서 해당 아전들을田吏·軍吏·倉吏 등이다.

특별히 불러 호소내용의 요점을 적어둔 책자를 내보이고 바로 면전(面前)에서 그 유래를 조사하되 수향(首鄕)12)과

수리(首吏)도 함께 조사하게 하여 그 가운데 쉽게 분별이 되는 것은 곧 이를 시정하고 농간을 부린 사람이 있으면

즉시 자백하게 하되 다시 숨기거나 속이는 경우는 즉시 처벌하고군포 바치는 의무가 이미 면제되었으나

그것을 대신 바칠 사람이 정해지지 않는 경우는 軍吏와 풍헌·약정 등이 군포를 부담하게 하라 호소한 사람에게

통지하여 시정하였음을 알릴 것이다.
『치현결(治縣訣)』에서는 말하기를 『백성들이 와서 호소하는 것은 억울함이 있기 때문이다. 군포의 일로 호소하면

나의 군정(軍政)이 잘못된 것이요, 전세(田稅) 문제로 호소가 있으면 나의 전정(田政)이 잘못된 것이요,

요역(徭役)의 일로 호소가 있으면 이것은 내가 부역을 공평하게 매기지 못한 것이요,

창곡(倉穀)의 일로 고소가 있으면 내가 재무(財務)의 관리를 잘못한 것이요, 침학(侵虐)을 당하고 고소하는 일이

있으면 이것은 토호들을 통제하지 못한 것이요, 백성들이 재물을 빼앗기고 호소하는 일이 있으면 이것은 아전들을

단속하지 못하였기 때문이다. 백성들의 호소를 보면 내가 잘 다스리는지 잘못 다스리는지 알 수 있다.

정치를 하는 사람이 능히 그 큰 줄거리를 바로잡으면 백성들은 저절로 억울한 일이 없어질 것이니

어찌 소장이 분분하게 날아들겠는가』라고 하였다.
『치현결(治縣訣)』에 말하기를 『백성들의 괴로움과 즐거움, 그리고 행정의 잘하고 잘못함은 소장의 판결에

달려 있는 것이 아니다. 오직 행정의 큰 줄기를 바로할 수 있으면 소소한 판결의 잘잘못은 논할 것이 못된다.

전정(田政)· 군정(軍政)· 창정(倉政)12)· 요역(徭役)·호적(戶籍)·진휼(賑恤) 등 여섯 가지 일은 행정의 큰 줄거리이니

이 여섯 가지 일을 지혜롭게 법을 세울 수 있으면 아전들은 농간을 부릴수 업게 되고

백성들은 그 혜택을 입지 않음이 없을 것이니, 이에 소장은 저절로 적어질 것이다.

 

각주

1) 예제(例題) : 관아에서 백성들의 소장을 처리함에 있어서 그 내용에 따라 판결례(判決例)를 만든 것.
2) 형리(刑吏) : 조선시대 지방관아의 형사(刑事)를 맡아보던 아전(衙前).
3) 문권(文券) : 토지 등의 소유권을 인정하는 문서.
4) 추쇄(推刷) : 부세(賦稅)를 받아들이거나 특히 도망간 노비의 종적을 캐내어도로 잡아오는 것.

조선왕조 때의 노비는 종천법(從賤法)과 회쇄법(淮刷法)의 적용을 받았다.
5) 사목(事目) : 공사(公事)의 규칙.
6) 전객(佃客) : 남의 농토를 빌어 농사짓는 소작인(小作人)을 말한다.
7) 두민(頭民) : 각 마을의 나이 많고 식견이 높은 사람.
8) 영장(領將) : 조선왕조 때 지방 관아에 소속된 하급 장교.
9) 가복(加卜) : 전세(田稅)가 정량보다 더 부가(附加)되는 것을 말한다.
10) 탈역 : 군역이나 부역 부과(負課) 조건의 유고(有故)로 인하여 당해 역(役)에서 면제되는 경우를 말한다.
11) 환곡(還穀) : 조선시대 관부(官府)가 봄에 백성들에게 빌려주었다가 가을에 이자를 붙여 거두어들이던 곡식.

환상(還上)·환상곡(還上穀).
12) 수향(首鄕) : 군현(郡縣) 향청(鄕廳)의 우두머리, 곧 좌수(座首)를 말한다.
13) 창정(倉政) : 환곡(還穀)에 관한 행정.

 

 

★ 是日發令以數件事 興民約束 遂於門外之楔 特懸一鼓.
(시일발령이수건사 흥민약속 수어문외지설 특현일고. )
이 날 몇 가지 명을 내려 백성들과 약속하고 관아 바깥문 설주에 특별히 북을 하나 걸어둘 것이다.

 

행현령(行縣令)이 알리고자 하는 일은 관가와 백성 사이에 마땅히 약속이 있어야 하므로

다음에 기록하는 조항을 일일이 깨우치고 살펴서 이것에 따라 시행하되 어기는 일이 없게 해야 한다.

만약 어기는 사람이 있으면 엄하게 다스려서 용서하지 않을 것이니 각별히 주의하라.
다음에 조항을 기록한다.
1. 백성들의 소장은 일일이 직접 가져오지 않아도 된다. 그 가운데 긴급한 것은 본인이 와서 제출하고 긴급하지

않은 것은 서류로써 갖추어 풍헌·약정 등에게 주어서 그들이 고을에 들어오는 날 함께 제출하여 판결을 받게 하거나,

그 마을 사람 가운데 소장을 가지고 고을로 오는 사람이 있으면 그 편에 부치도록 하라.

한 사람의 백성이 10명의 소장(訴狀)을 바쳐도 관가에서는 구애받지 않는다.
2. 연명(連名)으로 된 등소(等訴)여러 사람이 함께 고소하는 것을 등소라 한다는 그것을 의논할 때에는 10명이 함께

서명하였더라도 소장을 가지고 고을에 들어올 때에는 일의 내용을 잘 아는 사람 하나를 골라서 그 사람이 혼자서

져오게 하라. 혹 중요한 일인 경우는 두 사람이나 세 사람이 함께 고을에 들어오되 아무리 중요하고 큰 사건이라도

세 사람을 넘지 않도록 하라. 고을에 드나들면서 술값이나 밥값을 함부로 써서 백성들에게 괴로움을 끼쳐서는 안된다.

이와 같은 약속이 있은 후에도 많은 사람이 함께 고을에 들어와서 모두 방주인집1)에 숨어 있고

관아에 들어오는 사람의 수만 규정을 지킨 양하여 술값이나 음식값을 지나치게 쓰면 반드시 후회가 있을 것이니

각기 조심하라. 명령을 내린 후에 한 坊에서 혹시 큰 사건으로 호소해오면 가만히 사람을 坊邸에 보내어 정탐하고

만일 그곳에 남아서 머물고 있는 사람이 있으면 붙들어다가 죄를 줄 것이다
3. 물건이나 문권을 잃었거나, 사람이나 소와 말이 없어져서 입지(立旨)2)를 얻고자 하는 사람이 있으면

반드시 그가 사는 마을 상호(上戶)의 확인서나 혹은 풍헌(風憲)의 보고서를 첨부해오도록 하라.
4. 소장을 가지고 관아에 오는 사람은 형리(刑吏)를 만나거나 문지기곧 使令에게 묻지 말고 곧바로 관아의

바깥문으로 해서 안문으로 들어와 직접 수령 앞에 바치면 형리나 문지기가 뒤따라 와서 이를 가로막는 폐단이

없을 것이다. 그래도 가로막는 일이 있으면 관아의 바깥문 설주에 특별히 북을 하나 걸어놓고 새벽이나 저녁,

혹은 언제라도 와서 이 북을 치면 관에서는 그 사람을 불러서 사정을 물을 것이니 그리 알도록 하라.
5. 소장을 판결함에 있어서 양편을 대질시키라 하였는데, 만약 그들이 스스로 사사로이 화해하면 아무 일도 없다.

만약 화해가 되지 않고, 또 피고인이 판결하는 때에 나오지 않아서 원고인으로부터 거역하였다는 고소가 있으면

관에서는 부득이 저졸(邸卒)面主人3)을 보내지 않을 수 없고, 심한 경우는 관아의 문지기를 보내거나

혹은 군교(軍校)를 보내게 된다. 이렇게 되면 마을이 대단히 소란하게 될 것이다. 거역하고 출두하지 않는 사람은

마땅히 엄하게 징계하여 마을을 조용하게 할 것이다. 소송의 내용은 비록 피고측이 옳다 하여도 출두하지 않은 죄는

다스릴 것이니 익히 알라. 만약 어떤 간민(奸民)이 있어서 처음부터 출두하라는 제사를 아예 보이지 않고

거역한 것이라 무고하였다가 양편이 대질하는 날에 농간질을 한 것이 드러나면 엄하게 처리함이 곱절이 될 것이니

이것도 익히 알아라.
6. 관에서 전하는 명령이 시급한 것은 당연히 저졸(邸卒)을 보낼 것이지만 급하지 않은 것은 혹 풍헌이나 약정에게

부쳐서 보내거나 송사(訟事)로 고을에 온 사람 편에 부쳐 보내어 마을이 소란치 않게 할 것이다.

명령으로 전달되는 일은 반드시 기한에 맞추어서 이행해야만 저졸을 보내는 폐단이 없을 것이다.

관의 명령을 거역하거나 지체하여 마을을 소란하게 하는 사람은 반드시 죄주어 용서하지 않을 것이다.
『치현결(治縣訣)』에 말하기를 『입지(立旨)에는 여러가지 종류가 있다. 문권(文券)을 잃어버리고 입지를 신청하는

사람은 그것이 불타 버렸거나 혹은 도적이 가져갔다고 말하는데, 불에 타버렸다고 말하는 사람은 반드시 이웃 사람의

확인서를 갖추게 하고, 도적이 가져갔다고 말하는 사람은 반드시 향갑(鄕甲)[面任4)]의 확인서를 증빙으로

할 것이다. 노비가 도망갔을 경우는 반드시 호적을 조사하되 그 이름이 실려 있지 않으면 준거로 할 수 없다.

관(棺)을 만들 재목을 운반하는 것은 금지사항에 관계되므로 그 출처가 확실하지 않으면 허가하여서는 안된다.

관명(冠名)으로써 그 아명을 대신하고자 하는 사람은 군적(軍籍)을 농간하려는 사람이며, 정군(正軍)5)으로서

보인(保人)으로 강등하고자 하는 사람은 번차(番次)6)를 피하려는 것이다. 이와 같은 사례가 수없이 많은데,

요즈음 수령 된 사람들은 백성들의 소장 끝에 입지(立旨) 두 글자가 있는 것을 보고는 그 허실을 가리지 않고

일률적으로 제사를 쓰니 소홀함이 심하다.
나의 생각으로는 큰 고을의 소장은 구름같이 모이고 산같이 쌓이는데 이것을 일일이 또 상세히 조사하려 하면 도리어

그것에 구애되고 얽매여서 아전과 백성이 의심 많은 사람으로 지목할 것이니 역시 좋지 못하다. 막힘없이 처리하는

가운데 때로 한 장의 소장을 집어내어 그 간사하고 거짓됨을 찾아낸다면 이것이 훌륭한 수령일 것이다.
『운곡정요(雲谷政要)』7)에 말하기를 『호소를 하러 오는 백성이 부모의 집에 들어가는 것같이 친숙하고

하정(下情)이 통달하여 막힘이 없어야 백성의 부모라 말할 수 있다. 마침 밥을 먹거나 목욕하는 때라도

문지기가 이를 금하지 않아야 할 것이며, 문지기가 이를 어기면 곤장 세네 대를 호되게 쳐야 할 것이다. 』

마침 뒷간에 가 있는 때라면 부득이 잠깐 기다리게 할 것이다.

포증(包拯)8)이 개봉부(開封府)9)를 맡아 다스릴 때의 일이다. 옛날 제도에는 소송하는 사람이 곧바로 들어오지

못하고 아전이 문앞에 앉아서 소장을 거두었는데 이것을 첩사(牒司)라 하였다. 포증이 관아의 문을 활짝 열고

사람들이 곧바로 뜰 아래까지 와서 스스로 옳고 그름을 밝히게 하였더니 아전과 백성들이 감히 속이지 못하였다.
김익경(金益炅)10)이 여러 고을을 맡아 다스림에 대체를 파악할 뿐 까다롭고 사소한 일은 일삼지 않았다.

관아의 바깥문을 활짝 열어놓고 괴로운 일을 가진 백성이 모두 뜰 아래 와서 직접 호소하게 하였더니

그 사정을 모두 털어놓고 말하지 않는 사람이 없었다.
구준(寇準)11)이 파동현(巴東縣)12)을 맡았을 때 기회(期會)와 부역(賦役)에 공문을 내지 않고

다만 그 향리와 성명을 관아의 문에 게시하였으나 백성들이 뒤늦게 오는 사람이 없었다.
충세형(?世衡)13)이 무공현(武功縣)14)을 맡았을 때 사람들이 그의 위엄과 신망에 복종하였다.

혹 사람을 부르는 일이 있어도 사람을 시켜서 문서를 가지고 마을에 들어가게 하지 않고

다만 종이쪽지에 써서 관아의 문에 방을 붙여도 모두 기일에 맞추어 왔다.
진서산(眞西山)14)이 천주(泉州)16)를 맡아 다스릴 때 소송을 심리함에 있어서 군졸(郡卒)을 보내지 않고

다만 그 설명을 게시하여도 백성들이 스스로 고을에 와서 소송 심리에 응하였다.
장횡거(張橫渠)17)가 운암(雲巖)18) 현령이 되었을 때, 교시(敎示)하는 포고를 할 때마다 그 문서가 백성들에게

철저히 도달하지 못함을 근심하여 향장들을 관아의 뜰에 불러서 거듭 깨우쳐 주고 마을로 돌아가서 알리게 한 후,

간혹 백성들이 일이 있어 관아에 오거나 또 길에서 만나면 반드시 그 때 명령한 일을 들었는지 못 들었는지 묻고,

들었다 하면 그만이지만 못 들었다 하면 그 명령을 받은 사람을 죄주었으므로 한마디 말이 나가면

비록 우매한 백성이나 어린아이까지도 미리 알고 있지 않은 사람이 없었다.

 

각주

1) 방주인집 : 조선시대 현(縣) 밑의 각 방(坊)(面)에서 현아(縣衙)와의 연락관계를 위하여 읍내(邑內)에

관계자로 정해둔 사람. 면주인(面主人)·방주인(坊主人)·방저(坊邸)라고도 한다.
2) 입지(立旨) : 토지·가옥 등의 소유권 혹은 연고권을 인정하는 관부(官府)의 증명 .
3) 면주인(面主人) : 방주인(坊主人)과 같다.
4) 면임(面任) : 면장(面長)의 직임. 풍헌(風憲)이라고 호칭되었다.
5) 정군(正軍) : 조선시대의 병역의무를 가진 양인(良人) 남정(男丁) 가운데 현역복무의 의무를 가진 사람.

정병(正兵)이라고도 하며 보인(保人)이란 보조원을 가진다.
6) 번차(番次) : 번을 드는 차례. 입번(立番).
7) 『운곡정요(雲谷政要)』: 이광좌(李光佐)(1674∼1740)가 지은 목민서(牧民書).
8) 포증(包拯) : 중국 송(宋)나라 사람. 자는 희인(希仁), 시호는 효숙(孝肅). 예부시낭을 지냄. 강직하기로 이름났다.
9) 개봉부(開封府) : 중국 하남성(河南省)에 있는 땅 이름.
10) 김익경(金益炅) : 인조 7∼숙종 1(1629∼1675) 자는 계명(季明), 본관은 광산(光山).

원양도관찰사(原襄道觀察使), 예조참판(禮曹參判)을 지냄.
11) 구준(寇準) : 중국 송(宋)나라 사람. 자는 중평(仲平), 시호는 충민(忠愍). 동중서문하평장사를 지냈으며,

내국공(萊國公)에 봉해짐. 저서로는 『파동집(巴東集)』이 있다.
12) 파동현(巴東縣) : 중국 호북성(湖北省)에 있는 고을 이름.
13) 충세형 : 중국 송나라 사람. 자는 평중(平仲). 환경로병마령할을 지냄.

변방을 지킬 때 사졸을 잘 위무하여 이름남.
14) 무공현(武功縣) : 중국 섬서성(陝西省)에 있는 고을 이름.
15) 진서산(眞西山) : 중국 송(宋)나라 사람 진덕수(眞德秀). 서산(西山)은 그의 호(號).
16) 천주(泉州) : 중국 복건성(福建省)에 있는 주명(州名).
17) 장횡거(張橫渠) : 중국 송(宋)나라 사람 장재(張載)의 별칭. 자는 우후(于厚), 시호는 명(明).

숭정원교서(崇政院校書)를 지냄. 도학(道學)에 깊었고 출신지 이름을 따서 「횡거선생(橫渠先生)」으로 불림.

저서는 『정몽(正蒙)』 『서명(西銘)』 『역설(易說)』 등이 있다.
18) 운암(雲巖) : 중국 광서성(廣西省)에 있는 땅 이름.

 

 

★ 官事有期 期之不信 民乃玩令 期不可不信也.
(관사유기 기지불신 민내완령 기불가불신야. )
관청에서 하는 일은 기한이 있는데 이 기한 내에 이행하지 않으면 백성들이 법령을 가볍게 여길 것이므로

기한은 미덥게 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무릇 뭇사람을 다스리는 방법으로는 반드시 먼저 약속을 분명히 하고 거듭거듭 알리고 다짐하여,

또 반드시 그 기한을 여유있게 하여 주선할 수 있게 한 후에야 이를 어기는 사람이 있으면 약속대로 시행하여도

탓하지 못할 것이다.
호태초(胡大初)가 말하기를 『모든 일이 신의가 없으면 성사되지 않는 것이다. 하물며 한 고을의 일이 복잡하고

한 수령의 위엄이 그다지 대단하지도 못한데, 이에 기한도 미덥지 않고 호령도 엄숙하지 못하고서야

어떻게 일을 해낼 수 있겠는가. 그러므로 요체는 기한을 확고히 세우는 일보다 앞서는 것이 없다.

그러나 사정이 각각 다르므로 두번 세번 연기해 주되 기한을 연기하는 것을 말한다.

세번까지 연기하고도 이행하지 않으면 그 벌은 마땅히 엄해야 한다』 하였다.
또 말하기를 『현의 관아에서 50리 이상 떨어진 곳은 7일로 기한하며 그 이하는 5일로 하되 먼저 그 멀고 가까움을

상고하여 미리 규칙을 세워야 한다. 또 일직하는 청리(廳吏)로 하여금 책상머리에 붙어서 즉시 기록하게 하여

뒷날의 참고가 되게 하며 이를 어긴 사람은 벌주어야 한다』 하였다.
한연수(韓延壽)1)가 영천(潁川)2) 태수가 되었을 때 조부(租賦)를 거둘 때에는 먼저 그 기일을 포고하고

그 기일에 맞추는 것을 중요한 일로 삼으니 아전과 백성들이 공경하고 두려워하여 이에 따랐다.
증공(曾鞏)3)이 주(州)의 자사로 있을 때 완급을 헤아려 기한을 정해주고 기한이 다하기 전에는 다시 독촉하는 일이

없었다. 기한이 다하고도 이행하지 않으면 그 죄를 법으로 다스렸다. 기한과 일이 서로 맞지 않으면 기한이 촉박한

것을 말한다 각 현의 의견을 들어서 따로 기한을 정해주고 그래도 어긴 사람은 벌을 주어 용서하지 않았다.

이에 감히 일을 게을리하지 않고 모두 기한 안에 이루어지게 되었다.
서구사(徐九思)4)가 구용현(句容縣)5)의 현령이 되었을 때 소송심리에 매질은 10대를 넘지 않았고

여러가지 세금의 독촉에도 미리 기한을 정해두고 기한이 넘으면 마을의 부로(父老)들로 하여금 체포하게 할 뿐

관가의 하인들이 나가지 않게 하였다.

 

각주

1) 한연수(韓廷壽) : 중국 한(漢)나라 사람. 자는 장공(長公). 간대부(諫大夫), 회양(淮陽)· 영천대수 등을 역임.

치적이 천하에 제일이라 일컬어짐.
2) 영천(穎川) : 중국 하남성(河南省)에 있던 주명(州名).
3) 증공(曾鞏) : 중국 북송(北宋) 때의 사람. 자는 자고(子固), 호는 남풍(南?), 시호는 문정(文定).

중서사인(中書舍人)을 지냄. 당송팔대가(唐宋八大家)의 한 사람.
4) 서구사(徐九思) : 중국 송(宋)나라 때 사람. 자는 공근(公謹). 강회등로발운부사(江淮等路發運副使)를 지냄.

저서로는 『신풍집(新?集)』이 있다.
5) 구용현(句容縣) : 중국 강소성(江蘇省)에 있는 고을 이름.

 

 

★ 是日作適曆小冊 開錄諸當之定限 以補遺忘.
(시일작적력소책 개록제당지정한 이보유망. )
이날 책력에 맞는 적은 책자를 만들고 모든 사무의 정해진 기한을 기록하여

잊어버림이 없도록 대비토록 하여야 할 것이다.

 

주자(朱子)가 말하기를 『관청에는 마땅히 방통력(旁通曆)1)이 있어서 날마다 공사의 진행상황을 낱낱이 기록하되

일이 완료된 것은 이를 표시하고, 완료되지 않은 것은 완료되도록 하여야 일에 차질이 없을 것이다』 하였다.
『상산록(象山錄)』2)에 말하기를 『옥에 갇힌 죄수에 관한 기록을 수도(囚徒)라 하여 형리가 이를 맡아 기록하고

예가 본래 그러하다세금을 거두어서 운반하는 데도 기한이 있어서 그것을 한기(限記)라 하는데 담당 아전이 맡아

기록하고 내가 만들어 본 것이다 백성들을 호출하는 데도 기한이 있어서 그것을 기록(期錄)이라 하는데

이것은 시동(侍童)이 맡아 기록한다. 패자(牌子)3)를 보내어 백성들을 잡아들이는 일을 상사가 독촉함에 있어서

정해진 기일이 있는데 그것을 총록(聰錄)이라 하고 수리(首吏)가 이를 맡아 기록한다. 상납과 卜定 같은 것이

이와 같은 사례는 모두 마땅히 기록해 두고 날마다 펼쳐 보아서 스스로 깨우치도록 하여야 할 것이다』라고 하였다.

 

각주

1) 방통력(旁通曆) : 관리들이 사용하던 일종의 관무일지(官務日誌)를 말한다.
2) 『상산록(象山錄)』: 상산(象山)은 황해도 곡산(谷山)의 별칭. 『상산록(象山錄)』은 정약용(丁若鏞)이

곡산부사(谷山府使)로 있을 때 쓴 행담기록(行淡記錄)인 것 같다.
3) 패자(牌子) : 상위자(上位者)가 발하는 명령서(命令書).

 

 

★ 厥明日召老吏 令募畵工 作本縣四境圖 揭之壁上.
(궐명일소노리 영모화공 작본현사경도 게지벽상. )
그 이튿날 경험이 풍부한 아전을 불러 그림 그리는 화공(畵工)을 구하여 본 현의 4경도를 그려

관아의 벽에 걸어 두도록 할 것이다.

 

『치현결(治縣諦)』에 말하기를 『지도 가운데 강줄기와 산맥은 실제와 꼭 같게 그리도록 하고,

동서남북과 네 간방(間方)의 방위를 각각 표시하여 나누고, 향명(鄕名)과 이명(里名)[우리말로는 향을 面]을

역시 각각 표시하며 4방 도로의 이수(里數)와 여러 마을의 호구의 다소와 큰길과 작은길, 다리, 나루터, 고개,

객점(客店), 절간이 있는 곳 등을 모두 밝혀놓아야 할 것이다. 이로써 인정 풍속을 살필 수 있고,

그곳 사정을 알 수 있으며, 또 아전과 백성들이 왕래하는 길을 알 수 있을 것이다』라고 하였다.
생각컨대 이 지도는 가장 긴요한 것이다. 본 현에 만약 화공이 없으면 이웃 현에서 데려오되

비록 솜씨가 졸렬하더라도 괜찮을 것이다. 반드시 노련한 향임(鄕任) 노련한 아전, 노련한 군교(軍校) 등이

관장하여 지도를 만들게 할 것이다. 우리나라의 지도는 땅의 길고 짧음을 불문하고 모두 방형(方形)으로 만들어서

쓸모가 없다. 반드시 먼저 경위선(經緯線)을 그어놓고 1칸을 10리로 하여 동쪽으로 100리 거리에 있는 것이면

지도상에는 동쪽 10칸에 있게 하고 서쪽으로 10리 거리에 있는 것이면 지도상에는 1칸이 서쪽에 있게 그려야 하며

현의 관아가 꼭 그림의 중앙에 있게 할 필요는 없다. 100호가 있는 마을은 호수를 다 그려넣을 수 없으며 집이

조밀하게 있는 모양을 그려서 큰 마을임을 알게 하면 된다. 한 집 두 집이 산골짜기에 끼여 있는 것도 빠뜨리지 말아서 사람이 살고 있음을 알게 하여야 한다. 큰 기와집도 또한 각각 표시하여 잘 사는 집임을 알게 하는 것이 좋다.

 

 

印文不可漫滅 花押不可草率.
(인문불가만멸 화압불가초율. )
도장의 글씨는 흐릿해선 안 되고 도장대신 서명하는 글은 정교하지 않으면 안 된다.

 

새긴 글자가 모호하면 아전들이 농간질하기 쉽다. 이 때문에 아전들은 말을 만들어서

『도장을 바꾸면 벼슬이 속히 바뀐다』하고, 이에 어리석고 슬기롭지 못한 수령이 이 말을 깊이 믿어서 감히 도장을

고쳐 새기지 않고 글자가 뭉그러지고 획도 없는 것으로 어지럽게 찍으니 이에 호박껍질이나 죽순 조각으로 찍어도

족히 첩(牒)이 되고 첩(帖)이 되고 계(契)가 되고 권(券)이 될 수 있다. 뒷날의 사람들이 어찌 분별할 수 있겠는가.

부임한 당초에 도장의 글이 분명하지 않음을 발견하면 즉시 예조(禮曹)에 보고하여 다시 만들 것을 도모하고

달을 넘기지 않는 것이 옳을 것이다. 화압(花押)도 또한 같다. 그 긋는 방법이 면밀하지 못하여 조잡하거나

쓸 때마다 같지 못하면 농간하는 폐단이 생긴다. 물정을 잘 살피고자 하면 유의하지 알을 수 없다.

 

각주
1) 화압(花押) : 도장 대신 쓰는 일정한 자형(字形), 수결(手決)과 같다.

 

 

★ 是日刻木印幾顆 頒于諸鄕.
(시일각목인기과 반우제향. )
이날 나무 도장을 몇 개를 새겨 여러 마을에 나누어줄 것이다.

 

나무도장의 크기는 마땅히 4방 2치로 할 것이며[周尺을 사용함]

글자는 <모산방향회소지인(某山坊鄕會所之印)>이라 새긴다.

향촌의 풍헌과 약정이 모두 도장이 없어서 관아에 올라오는 보고문건들이 혹 중간 위작(僞作)이 많다.

그 소홀함이 이와 같다. 마땅히 목각으로 도장을 만들어 먹으로 찍고 인주를 사용할 필요는 없다.

혹한 면민들의 회의의 보고서가 있어도 또한 통용할 것이다. 때문에 풍헌지인(風憲之印)이라 하지 않는다.

그러나 마땅히 풍헌으로 하여금 관리케 하여야 할 것이다.
도장이 만들어지면 나누어주면서 약속하기를 도장이 안 찍힌 것은 무효로 한다고 할 것이다.

 

 

        資 料   編 輯 者         李     斗   振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