牧民心書 2 篇

牧 民 心 書 券 2

덕치/이두진 2021. 8. 10. 18:53

 

   牧 民 心 書  券  2 

 

 

 第 2 篇 율기(律己) 육조(六條)   


 

第 1 章    칙궁(飭躬)  

                (자기의 몸가짐을 가다듬는 일.) 

 


興居有節 冠帶整飭 莅民以莊 古之道也.
    (흥거유절 관대정칙 리민이장 고지도야. )
    일상 생활에 절도가 있으며 관대(冠帶)[복장]를 단정히 하고 백성을 대할 때에

    장중한 태도를 취하는 것은 옛날부터 내려온 수령의 도(道)이다.

 

[밝기 전에 일어나서 촛불을 밝히고 세수하며 옷을 단정히 입고 띠를 두른 후 묵연히 단정히 앉아서 

정신을 함양한다. 얼마쯤 있다가 생각을 풀어내어 오늘 응당 해야 할 일들을 놓고 먼저 선후의 차례를 정한다.

제일 먼저 무슨 공문(公文)을 처리하며 다음에는 무슨 명령을 내릴 것인가를 마음속에 역력히 해야 한다.

그리고서는 제일 먼저 할 일을 놓고 그 잘 처리할 방법을 생각하며, 다음 할 일을 놓고 잘 처리할 방법을 생각하되,

사욕(私欲)을 끊어버리고 하나같이 천리(天理)를 따르도록 힘쓸 것이다.
동이 트면 촛불을 끄고 그대로 단정히 앉아 있다가, 하늘이 이미 밝아 시노(侍奴)가 시간이 되었다고 아뢰거든

이미 앞에 나와 있다이에 창문을 열고 관속들의 참알(參謁)을 받는다.
흑포립(黑布笠)이란 것은 원래 길 가면서 빛을 가리는 물건이니, 이미 평상시 착용하는 것이 아니요,

더우기 공복(公服)에 속하는 것도 아니다. 백성에게 임하는 자는 항상 검은 사모(紗帽)1)와 푸른 창의(敞衣)2)를

착용해야 한다. 지금 경관(京官)으로서 입직(入直)하는 자는다 그러한데 외관(外官)은 어찌 홀로 그러하지 아니한가.
대좌기(大坐起)3) 같은 경우에는 마땅히 단령포(團領袍)4)와 정대(?帶)5)·흑화(黑靴)를 착용하고 의자에 앉아

참알을 받아야 한다. 군사(軍事)로 대좌기가 있을 경우에는 마땅히 융복(戎服)6) 범의 수염으로 장식한 군모(軍帽)와

비단으로 만든 철릭(天翼:무관이 입던 공복)을 갖추고 칼을 차야 한다.
간혹 보면 소탈함을 좋아하고 구속됨을 싫어하는 자는 종건 7)만 쓰고 협수의(夾袖衣)8)를 걸치며

혹은 망건도 안 쓰고 버선도 신지 않은 채 아전과 백성을 대하는데, 이는 크게 잘못된 짓이다.

『시경(詩經)』에 이르기를 『점잖은 위의(威儀)를 갖춘 자는 덕(德)의 표현이다』9)라고 하였고,

또 이르기를 『공경하고 삼가는 위의는 백성의 본보기이다』10) 하였으니, 이는 옛 도(道)이다.

위의가 이미 잃어지면 백성들이 본받을 바가 없으니, 무슨 일이 되겠는가.
저녁 때 관아에서 퇴근하는 것은 가을과 겨울에는 마땅히 조금 늦추고, 봄·여름에는 조금 이르게 해야 할 것이다.

호태초(胡大初)가 말하기를 『하루의 일은 새벽에 달렸으니, 오늘 무슨 일은 결재해야 하고 무슨 공문은 띄워야 

하며 무슨 부세(賦稅), 어떤 물종(物種)은 처리해야 하고, 구금된 누구는 석방해야 할 것인가 등을 시시로 살펴서

급급히 행하여야 한다』 하였다.
여공저(呂公著)11)가 고을살이를 할 때에 한결같이 오경(五更)이 되면 일어나서 촛불을 밝히고 공문서를 살피며

여명이 되면 청사에 나아가 백성들의 송사를 처리하고 물러나 편안한 자리에 들어 한가히 있을 때에도

재계(齋戒)하듯 하여, 빈객이나 요속(僚屬)으로서 만나러오는 자가 때에 구애됨이 없었다.

그래서 군(郡)에도 밀린 일이 없고 하청(下情)이 위로 통하였다. 무릇 여섯 고을을 다스림에 항상 이같이 하였다.
당(唐)의 배요경(裵耀卿)12)이 정사(政事)에 부지런했다. 관아 앞에 한 큰 오동나무가 있어 새벽이 되면

뭇 새가 날아들어 모이니, 이로써 관아에 나아가는 시각으로 삼아 <새벽을 알리는 새>라고 불렀다.

그때 사람들이 이를 아름답게 여겼다.
한지(韓社)13)가 감사(監司)가 되어서는 날이 밝기 전에 세수하고 관(冠) 쓰고 도포 입고 나아가 앉되,

앉는 자리 곁에는 베개나 안석(案席)을 두지 않으며, 몸을 바로 세우고 무릎을 꿇어 손을 꽂고 앉아 종일토록

몸이 기울거나 비틀리는 일이 없으며, 비록 창가 난간에라도 일찌기 기대는 적이 없었다.

그와 더불어 3년을 거처한 자도 일찌기 그가 피로하여 하품하고 기지개켜는 모습을 본 적이 없었다.

저녁밥이 끝나면 언제나 뒤뜰로 거닐되, 그 걸음을 돌이키는 곳이 곡척(曲尺)처럼 그어놓은 듯하여 

시종 한결같았다.
송(宋) 태조가 어떤 현령에게 일러 말하기를, 『부디 누런 빛 비단이불 속에서 하루의 공무를 끝내지 말라』하였다.
문로공(文潞公)14)이 유차현(楡次縣)15)에 있을 때에, 관아의 북(鼓)에다 글을 지어 적기를,

『이제 다행히 누런 빛 비단이불이 있지만, 힘써 거기서 벗어나와 하루의 공무를 마칠 것이다』 하였다.

蘇軾의 詩에 이르기를, 『그대가 누런 빛 비단을 끌어안고 높이 누워 늦게 퇴청시킴을 보노라』하였다
범문정공(范文正公)16)이 이르기를, 『내가 매양 잠자리에 들면 곧 하루 동안 봉양받은 비용과 행한 일을 헤아려서

과연 서로 맞먹을 만하면 깊은 잠이 들지만, 그렇지 않으면 밤새 편한 잠을 이루지 못하고,

다음날에 기어코 맞먹을 수 있는 일을 하고야 만다』하였다.
『시경(詩經)』에 이르기를, 『저 군자(君子)여, 일하지 않고 먹는 일이 없도다』17) 하였으니, 이를 두고 한 말이다.
조변(趙抃) 18)이 성도를 맡아 다스릴 때에, 매일 한 일을 밤이면 반드시 의관을 갖추어 향을 피우고 하늘에 고하며,

고할 수 없는 일은 감히 하지 아니하였다. 이는 군자가 경계해 삼가며 두려워하는 공부의 진정한 길이다.]

 

[각주]
1) 사모(紗帽) : 관복과 함께 착용하던 관원의 모자. 사(紗)로써 탕건 모양으로 만들었다.
2) 창의(敞衣) : 관원의 평상 웃옷. 소매가 넓고 됫솔기가 갈라져 있다. 창의(?衣).
3) 대좌기(大坐起) : 좌기(坐起)는 관원이 사진(仕進)하여 공무를 집행한다는 뜻이요,

의식일(儀式日)에는 대좌기(大坐起)라 하여 더 위의(威儀)를 크게 갖춘다.
4) 단령포(團領袍) : 옷깃을 둥글게 만든 공복(公服).
5) 정대 : 가죽으로 만들어 공복(公服) 위에 두르는 띠.
6) 융복(戎服) : 철릭과 주립으로 된 옛날 군복(軍服).
7) 종건 : 말 꼬리털로 만든 간편한 모자.
8) 협수의(夾袖衣) : 동달이라는 지금의 두루마기와 같은 옷의 한가지.
9) 『시경(詩經)』대아(大雅) 탕지십(湯之什)에 나온 구절.
10) 『시경(詩經)』대아(大雅) 탕지십(湯之什)에 나온 구절.
11) 여공저(呂公著) : 중국 송(宋)의 문신. 자는 회숙(晦叔). 사마광과 함께 선정을 하였고, 신국공에 봉하였다.
12) 배요경(裵耀卿) : 중국 당(唐)의 문신. 자는 환지(煥之). 선정을 베풀고 상서좌복야를 지냄 . 시호는 문헌(文獻).
13) 한지(韓祉) : 숙종 1∼숙종 46(1675∼1720) 자는 석보(錫甫), 호는 월악(月嶽), 본관은 청주(淸州),

태동(泰東)의 아들. 충청(忠淸)·전라도(全羅道)의 감사를 지냈다. 저서에는 『월악서소(月嶽書蔬)』가 있다.
14) 문로공(文路公) : 중국 송(宋)의 명신(名臣). 이름은 언박(彦博), 자는 관부(寬夫),

인(仁)· 영(英)· 신(神)· 철종(哲宗)의 4대에 걸쳐 50년간 장상으로서 치적이 많았다.

노국공(潞國公)에 봉해졌고 시호는 충렬(忠烈). 노공집(潞公集)』이 있다.
15) 유차현(楡次縣) : 중국 산서성(山西省)에 있는 현명(縣名).
16) 범문정공(范文正公) : 중국 송(宋)의 명신(名臣). 이름은 중엄(仲淹), 자는 희문(希文),

참지정사(參知政事)를 지냈다. 문정(文正)은 시호.
17)『시경(詩經)』 국풍(國風) 위풍(魏風)에서 인용한 것이다.
18) 조변(趙抃): 중국 송(宋)의 서안인(西安人). 자는 열도(閱道), 시호는 청헌(淸獻).

 


★ 公事有暇 必凝神靜慮 思量安民之策 至誠求善
    (공사유가 필응신정려 사량안민지책 지성구선. )
    공사에 틈이 나면 정신을 집중하여 생각을 안정시켜 백성을 편안하게 할 방책을 헤아려

    지성으로 잘 되기를 강구해야 할 것이다.

 

[주자(朱子)가 말하기를, 『오제공(吳濟公)1)은 날마다 사물을 응접하는 가운데서라도 모름지기 한때의 시간을 내어

고요히 정신을 함양하고 보존해야 한다고 하였는데, 요컨대 일이 번잡할수록 마음을 더욱 느긋하게 가지도록 해서

일이 딸리고 나는 여유있게 되도록 해야할 것이다』하였다.그 말이 비록 異說에서 나왔으나,

그러나 시험해 보매 대략 徵驗이 있으니, 혹 周子의 이른바 主神이라는 것이 아니겠는가
정백자(程伯子)2)가 현령이 되었을 때에 일찌기 자리 옆에<시민여상(視民如傷)>3) 넉 자를 써놓고 말하기를,

『나는 날마다 이 문구에 부끄러움이 있다』하였다.

楊龜山이 이르기를, 『그 마음 쓰는 것을 보면 응당 잘못된 판결로 사람을 매질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하였다
장구성(張九成) 4) 字는 子韶이다. 진동(鎭東) 5)의 판관(判官) 6)이 되자,

정사에 열성껏 마음을 다하니 다른 사람이 속일 수가 없었다. 일찌기 벽에다 크게 써 붙이기를,

『내 한몸이 구차히 하루라도 한가하면, 백성은 끝없는 괴로움을 당한다』 하였다.
『치현결(治縣訣)』에 이르기를, 『벼슬살이의 요체는 두려워할 외(畏)한 자뿐이다. 의를 두려워하고

법을 두려워하며 상관을 두려워하고 백성을 두려워하여 마음에 언제나 두려움을 간직하면,

혹시라도 방자하게 되지는 않을 것이니, 이로써 가히 허물을 적게 할 수 있을 것이다』하였다.
『정요(政要』7)에 이르기를, 『벼슬살이함에는 석 자의 오묘한 비결이 있으니, 첫째는 맑음〔淸]이요,

둘째는 삼가함〔愼]이요, 세째는 부지런함〔勤]이다』라고 하였다.
여씨(呂氏)의 『동몽훈(童蒙訓)』8)에 말하기를, 『임금 섬기기를 나의 어버이 섬기듯 하고, 아전 대하기를

나의 노복처럼 하며, 백성 사랑하기를 나의 처자처럼 하며, 공무를 처리하기를 집안일처럼 돌보야만 능히

내 마음을 다한 것이다. 만약 조금이라도 미진한 일이 있다면 이는 다 내 마음을 다하지 않은 바가 있었기 때문이라』

하였다. 매양 한가지 일을 접할 때마다 선례만 좇아서 시행할 것이 아니요, 반드시 법도의 범위 안에서

편의 변통할 것을 생각하여 백성을 편안히 하고 이롭게 하기를 도모해야 할 것이다.

만약 그 법도가 국가의 기본 법전이 아니며 현저히 불합리한 것은 불가불 고쳐 바로잡아야할 것이다.
한위공(韓魏公) 9)이 개부(開府) 10)의 추관(推官) 11)이 되자, 일을 처리함에 게으르지 아니하여 더운 달에는 땀이 흘러 등을 적시니, 부윤(府尹) 왕박문(王博文)12)이 중히 여겨 말하기를, 『이 사람은 청요(淸要)한 벼슬길이 

앞으로 보장되어 있는데도 백성 다스리기를 이같이 하니, 참으로 재상(宰相)의 그릇이다』 하였다.

요즘 사람으로서 홍문관이나 승정원을 거쳐 수령으로 나간 자는 망녕되이 스스로 교만해저서 몸소 세세한 일은

돌보지 아니하고 말하기를, 『문신(文臣)의 다스리는 체통이 음관(蔭官)과는 다르다』 하여,

오직 바둑이나 시(詩)로써 스스로 즐기며, 정사는 보좌하는 사람들에게 맡김으로써 생민들을 괴롭히니,

무릇 이 같은 자는 마땅히 한위공의 사례를 읽어보아야 할 것이다.
진서산(眞西山)이 장사(長沙)13)지방을 다스릴 때에 12고을의 수령을 모아 상강정(湘江亭)에서 잔치를 베풀고

시(詩)를 지어 말하기를, 『종래 관리와 백성들은 본래 한몸 같은 동포였는데, 백성은 이미 기름을 짜내서 녹봉에

이바지하니, 모름지기 내 몸처럼 절실히 그들의 아픔을 알라. 이 나라는 원래 당조(唐朝)부터의 옛 나라라고 이르는데,

우리들은 마땅히 한(漢)나라 관원들처럼 양리(良吏)가 되어야 할 것이다.

오늘 상정(湘亭)에서의 한잔술로 다시 무르녹은 봄기운을 사방으로 번지게 하라』 하였다.
정선(鄭瑄)이 이르기를, 『하늘은 한 사람을 사사로이 부유하게 하려는 것이 아니니, 대개 뭇 가난한 자들을 그에게

부탁하려 함이요, 하늘은 한 사람을 사사로이 귀하게 하려는 것이 아니니, 대개 뭇 천한 자들을 부탁하려 함이다.

빈천한 사람은 제 힘으로 먹고 살면서 제일을 경영하고 제 피땀으로 얻은 것을 제가 받아 쓰니 하늘이 살펴보더라도

오히려 너그럽게 볼 것이요, 부귀한 사람은 벼슬을 띠고 녹을 먹되 만민의 피땀을 한 사람이 받아 쓰니

하늘이 그 허물을 신칙함이 더욱 엄중할 것이다』 하였다.
한지(韓祉)가 감사(監司)가 되어, 매양 막빈(幕賓)들이 아침인사를 오면, 부반(副盤)을 밀어 내려주고 술을 돌린

다음에는 『내가 어제한 일 가운데 무슨 허물이 있었는가』 하고 물었다. 막료들이 『없읍니다』고 대답하면,

그가 정색해서 말하기를, 『세 사람이 길을 함께 가는 데도 반드시 내 스승이 있다14)고 하였거늘,

십여 명의 의견이 어찌 반드시 내 의견과 똑같을 것인가. 제군은 어서 말하라. 말해서 옳다면 좋을 것이요,

그르다면 서로 논난을 다시 하여 깨우치는 바가 없지 않을 것이다』 하였다. 이와 같이 날마다 묻기를 항상 하니,

여러 막료들이 미리 의논해가지고서 들어가 고하였다. 그 말이 과연 옳다면,

비록 대단히 중요하여 고치기 어려운 일일지라도 번연히 자기를 버리고 그에 따랐다.

언제나 말하기를, 『천하의 일은 한 사람이 가히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라고 하였다.]


[각주]

1) 오제공(吳濟公) : 혹시 오공제(吳公濟)의 착오인 듯도 한데, 그의 이름은 즙(楫), 자는 공제(公濟).

    송(宋)의 숭안인(崇安人). 주자(朱子)와 성리학(性理學) 및 유(儒)·불(佛)의 변(辨)을 강론(講論)하였고,

    주자(朱子)가 그의 서실(書室)을 열재(悅齋)라 제(題)하고 자기의 아들을 보내어 사사(師事)시켰다는 학자이다.
2) 정백자(程伯子) : 송(宋)의 학자. 자는 백순(伯淳), 호는 명도(明道), 이름은 호(顥). 그 아우 이와 함께 성리학을

    크게 확립하였다. 백자(伯子)란 그가 백형이기 때문에 경칭으로 쓴 것이다. 보통 정자(程子)라고도 일컫는다.
3) 시민여상(視民如傷) : 백성 보살피기를 마치 상(傷)한 데가 있듯 한다는 뜻이다.
4) 장구성(張九成) : 중국 송(宋)의 문신·학자. 자는 자소(子韶). 예부시낭을 지냈으며 경학(經學)에 밝았다.
5) 진동(鎭東) : 중국 광동성(廣東省)에 있는 군진명(軍鎭名).
6) 판관(判官) : 절도(節度)·관찰(觀察)·방어등사(防禦等使)의 부관(副官). 당해 지역의 민정(民政)을 관리하였다.
7)『정요(政要)』 : 조선 후기에는 안정복(安鼎福)의 『순암정요(順菴政要)』등

    정요라는 이름의 목민서(牧民書)가 다수 편찬되었는데, 여기 『정요(政要)』는 어느 것을 가리키는지 미상.
8)『동몽훈(童蒙訓)』 : 송(宋)의 여본중(呂本中)이 지은 책. 가숙(家塾)에서 어린이들에게 가르치기 위한 것으로

    정론(正論)·격언(格言)이 많다.
9) 한위공(韓魏公) : 중국 송(宋)의 명신(名臣). 이름은 기(琦), 자는 치규(稚圭).

    범중엄(范仲淹)과 함께 일시에 이름이 높았다. 사도(司徒)·시중(侍中)을 지내고 위국공(魏國公)에 봉해졌다.

10) 개부(開府) : 개봉부(開封府)의 약칭.
11) 추관(推官) : 절도(節度)·감찰사(監察使)의 속관(屬官)으로서 주로 형명(刑名)관계의 일을 맡았다.
12) 왕박문(王博文) : 중국 송(宋)의 제음인(濟陰人). 자는 중명(仲明). 진종(眞宗) 때 동지추밀원사를 지냈다.
13) 장사(長沙) : 중국 호남성(湖南省)에 있는 군명(郡名).
14)『논어(論語)』『삼인행(三人行) 필유아사언(必有我師焉)』을 원용한 것이다.

 


  母多言母暴怒

     (모다언모폭노.)  

     말을 많이 하지 말고 갑자기 성내지도 말라.

 

[백성의 웃사람 된 자는 그 한번 움직이고 한번 정지하며 한마디 말하고 한번 침묵하는 것을 아랫사람이 모두 

살피어 의심쩍게 탐색하는 법이니, 방에서 문으로, 문에서 고을로, 고을로부터는 사방으로 새어나가서 

한 도(道)에 다 퍼지게 된다. 군자는 집안에 거처할 때에도 응당 말을 삼가야 하거늘, 하물며 벼슬살이할 때이랴.

시동(侍童)이 비록 어리고 시노(侍奴)가 비록 어리석다 하여도, 여러 해를 관청에 있으면 백번 단련된 쇠와 같아서,

모두가 기민하고 영리하여 엿보아 살피는 것이 귀신과 같다. 관아의 문을 나서기만 하면 세세한 것도 모두 전하여

누설시킨다. 내가 십여 년 동안 읍내 바닥에서 귀양살이해보매1) 그 실정을 알게 되었다. 『주역(周易)』에

이르기를, 『군자가 집안에 살면서 그 말이 선(善)하면 천리 밖에서도 이에 응하는데, 하물며 가까이 있는 자이랴.

집안에 살아도 그 말이 불선하면 천리 밖에서도 이를 어기는데 하물며 가까이 있는 자이랴』2) 하였고,

『시경(詩經)』에 이르기를, 『예측할 수 없는 일을 경계하고 너의 말을 삼가라』3) 하였으니,

백성의 웃사람 된 자는 불가불 조심해야 할 것이다.
정선(鄭瑄)이 말하기를, 『자신이 백성의 수령이 되면 몸이 곧 화살의 표적이 되는 고로 한마디 말과 한가지 행동도

삼가하지 않으면 안될 것이다』라고 하였다.
또 이르기를, 『한마디 말로 천지의 화평을 상하게 하는 수가 있고, 한가지 일로 평생의 복을 끊어버리는 수가 

있으니, 모름지기 절실하게 점검해야 한다』고 하였다. 포증(包拯)이 수도(首都)의 장관으로 있을 때에

말과 웃음이 적었다. 사람들이 그의 웃음을 황하(黃河)가 맑아지는 것에 비유하였다.4)
수령이 되어 나온 자들은 원래 항상 『이곳 인심이 극히 악하다』고 말한다. 

서쪽 지방으로 나아간 자도 이 말을 하고 남쪽 지방으로 나아간 자도 이 말을 하며, 

동쪽으로 나아간 자나 북쪽으로 나아간 자가 역시 모두 이 말을 한다.

하늘의 이치가 원래 선(善)한 것이거늘 어찌 8도 백성의 마음은 다 극히 악하고 나만 홀로 선하겠는가.

맹자(孟子)가 말하기를, 『사람을 사랑해도 친하게 되지 않거든 자기의 인(仁)을 반성하고, 사람을 예(禮)로써

대접해도 응답이 없거든 자기의 공경심을 반성하라』 하였으니, 어찌 역시 스스로 반성해보는 것이 지혜롭지

않겠는가. 육상산(陸象山)5)이 말하기를, 『서해나 동해나 마음도 같고 이치도 같다』고 하였는데,

이 땅의 인심은 어찌 반드시 편벽되이 악할 것인가. 하물며 나라는 사람은 객(客)이요, 저 백성들은 주인인데,

외로운 내 한몸으로 뭇 초(楚)나라 사람6) 가운데에 뛰어들어 꾸짖기를 『인심이 극히 악하다』하니,

이는 스스로를 고립시키는 길이 아닌가. 사방의 풍속이 혹 각기 다르니, 나에게 친숙하지 않은 것은

마음에 거슬리지 않을 수 없을 터이지만, 이로써 꾸짖고 화를 낸다면 역시 견문이 좁고 괴퍅한 것이다.

수령이 어떤 악인을 만나 꾸짖기를, 『이곳의 인심이 순박한데도, 네가 그것을 어지럽히니 죄가 더욱 중하다』하면

사람들이 다 기뻐할 것이요, 수령이 악인을 만나 꾸짖기를, 『이곳 인심이 극악하여 이에 이러한 일이 일어났구나』

라고 하면, 사람들이 다 노여워할 것이다. 내가 스스로 실언하여 뭇사람의 노여움을 불러일으킨다면,

역시 어리석은 짓이 아닌가. 하물며 그 이른바 극악하다는 것은 모두가 쌀이나 소금 따위 작은 일과 

오이나 채소 같은 미물로 인한 것이고, 백성을 침학하고 법을 범하는 자는 노여움의 대상이 되지도 않으니, 

또 어찌 뭇사람의 마음을 복종시킬 것인가. 옛사람은 제(齊)나라 노(魯)나라처럼 촉인(蜀人)을 대우해 주었는데,7)

하물며 원래 촉인이 아닌 사람들에 있어서랴.
여본중(呂本中)8)의 『동몽훈(童蒙訓)』에 말하기를, 『벼슬살이에 임하는 자는 먼저 조급히 성내는 것을 경계해야 한다.

진실로 수령이 형벌의 권능을 잡고 있으니, 무릇 그 명령에는 좌우가 순종하여 거역함이 없을 것이거늘,

그 조급한 노여움을 따라 문득 형벌을 시행하면 온당치 못한 경우가 많을 것이다』 하였다.
무릇 조급히 성내는 병통이 있는 자는 마땅히 평일에 마음속에 맹세하여 <노즉수(怒則囚)> 9) 석 자를

폐간(肺肝)에 새겨두어야 할 것이다. 이에 성나는 때를 당하거든 깊이 깨우쳐 힘써 억제하고,

곧 범인(犯人)을 붙잡아 옥에 내려 가두어라. 혹 하룻밤을 생각하고 혹 사흘을 두고 생각하면, 기꺼이 이치에 따라서

처리하여 온당하게 되지 않는 일이란 없다. 또한 조급히 성내는 사람은 그 성냄이 이미 조급했기에 그 풀어짐도

반드시 빠르다. 이른바 회오리바람은 아침 내내 불지는 않고 소낙비는 종일토록 내리지는 않는 것이다.

얼마 지나지 않아 그 본래대로 돌아올 것이니, 그것을 기다리기가 어렵지 않으며,

이로써 다른 사람은 화(禍)를 면하고 나는 허물이 없게 되니, 역시 좋지 아니하겠는가.
정선(鄭瑄)이 말하기를, 『성났을 때의 언어는 도무지 체면을 잃어버린 것이니, 성내고 난 후에 생각해보면

자기의 더럽고 잗다란 속을 온통 다른 사람에게 내어보이고 만 것이 된다』 하였다.
한지(韓祉)가 감사가 되었을 때에 일찌기 성급한 말씨나 성난 기색을 가진 일이 없고, 하루에 사람을 매질하는 것도

두셋에 지나지 않았으되 관아의 안팎이 숙연했으며, 단지 그의 신발 끄는 소리만 듣고서도 사람마다 벌벌 떨었다.

그가 순력(巡歷)해서 이르는 곳마다 시끄러움을 금하지 않아도 조용하기가 마치 사람이 없는 듯하였으되,

명령은 이행되고 금하는 일은 그쳐졌으니, 사람들이 그렇게 되는 까닭을 알 수가 없었다.]


[각주]
1) 정약용(丁若鏞)은 1801년 강진으로 유배된 후 오랫동안 강진읍저에 있다가 나중 귤동(橘洞)으로 옮겨갔다.
2)『주역(周易)』의 계사전(繫辭傳) 상(上)에서 인용한 것이다.
3) 시경(詩經)』대아(大雅) 탕지십(湯之什)에서 인용한 것이다.
4) 황하(黃河)는 항상 흐려져 있고 천년에나 한번씩 맑아진다는 것이니,

    무릇 극히 희귀하거나 일어나기 어려운 일을 비유하여 황하청(黃河淸)이라 한다.
5) 육상산(陸象山) : 중국 송(宋)의 학자. 이름은 구연(九淵), 자는 자정(子靜), 상산(象山)은 그의 호.

    주희(朱熹)와 대립되는 이학(理學)의 다른 유파(流派)를 이룩하였다.
6)『맹자(孟子)』등문공(藤文公)편에, 초인(楚人)이 제인(齊人) 교사(敎師)를 초빙해 와서 제어(齊語)를 배우는데,

    일제인(一齊人)이 가르치는데 중초인이 지껄이면 비록 날마다 매를 때리면서 가르쳐도 소용없다고 하였다.

    여기서는 수령은 하나요 그와 이질적인 백성은 많다는 비유로 쓰고 있다.
7) 촉인(蜀人)은 워낙 성질이 사납고 제(齊)·노(魯)는 문화와 도덕이 순후하여 인심이 너그럽다고 하는 것이나,

    송(宋) 인종(仁宗) 때의 장방평(張方平)이 촉지방(蜀地方)의 반란을 평정하러 가서

    촉인(蜀人)을 제(齊)·노(魯)처럼 대우해 줌으로써 마침내 촉인(蜀人)을 심복케 하였다는 고사(故事)가 있다.
8) 여본중(呂本中) : 중국 송대(宋代)의 학자. 자는 거인(居仁), 시호는 문청(文淸). 동래선생이라 일컬었다.

    저서에 『동몽훈(童蒙訓)』 『춘추해(春秋解)』등이 있다.
9) 노즉수(怒則囚) : 『성나거든 가두어라』의 뜻.


★ 御下以寬 民罔不順 故公子曰 『居上不寬 爲禮不敬 吾何以觀之.』 又曰 『寬則得衆.』
    (어하이관 민망불순 고공자왈 『거상불관 위례불경 오하이관지.』 우왈 『관즉득중.』
    아랫 사람을 너그럽게 대하면 따르지 않을 백성이 없을 것이다.
    그러므로 공자는 「윗 사람이 되어 너그럽지 아니하고 예를 행할 때에 공경함이 없으면 볼 것이

    무엇 있겠는가 ?」하였으며, 또한 「너그러우면 많은 사람을 얻는다.」1) 라고 하였다.

 

[사람들이 항용 말하기를, 『벼슬살이에는 위맹(威猛)함을 숭상하는 것이 제일이다』 하는데, 이는 속된 말이다.

먼저 맹(猛)이라는 한 글자를 가슴 속에 품고 있으면, 그 심중에 간직한 것이 이미 스스로도 좋지 않을 터이니

어찌 되겠는가. 죄가 있으면 죄를 주는 것이니, 내가 형(刑)을 쓰는 것은 각기 그 죄에 합당한 것뿐인데

하필 용맹함을 숭상할 것인가. 『시경(詩經)』에 이르기를 『그대의 위의(威儀)를 공경히 하여

유가(柔嘉)2)하지 않음이 없기를』이라고 하였으니, 유가(柔嘉) 두 자의 기상이 가장 좋은 것이다.

전에 내가 조정에 있을 때에 매양 보매 공경(公卿) 대신들은 그 말씨와 안색이 유가한 듯하였다.

후세 사람들이 옛사람들만 못할지라도, 역시 유가한 자는 반드시 높이 오르고 많은 사람을 얻되,

그 울울불락하고 사나운 자는 많이들 중도에서 넘어지니 나는 이로써 유가한 것이 좋은 기상인 줄로 안다.

『시경』에 이르기를, 『유가함을 본받음이여, 훌륭한 태도와 훌륭한 모습은 중산보(仲山甫)의 덕이다』3) 하였다.

그러나 『시경』에서는 또한 『중산보는 부드럽다고 해서 삼키지 않고 강하다고 해서 뱉어버리지 않으며,

홀아비·과부도 업신여기지 않고 강포한 자도 두려워 않는다』하였으니, 중산보가 어찌 유약한 자인가.

오직 그 평일의 말씨나 기색이 유가하고 온공(溫恭)한 후에야 능히 강해도 뱉지 않고

강포해도 두려워하지 않을 수 있는 법이니, 이 이치는 또한 심히 분명한 것이다.
양귀산(楊龜山)4)이 이르기를, 『지금 사람들은 다만 일마다 뜻대로 되기를 바라기 때문에 정사를 너그러이 하면

괴로움을 당한다고 생각하고, 권병(權柄)이 손에 있다고 하여 자기 성격대로 휘두르라는 것이 

아닌 줄을 모르고 있다. 어찌하여 일찌기 백성들이 관리를 두려워하지 않는 것은 보면서도, 

관리가 백성을 많이들 침학하는 것은 볼 줄을 모른단 말인가』 하였다.

장영(張詠)이 재차 익주(益州)를 맡아 다스리게 되자, 백성들이 자기를 믿고 있음을 알고, 엄격히 대하던 태도를

너그러움으로 바꾸었는데도 한번 명령을 내리면 사람들이 기꺼이 받아들이지 않는 일이 없었다.

영(詠)이 이전 5)에게 『백성이 나를 믿고 있는가』 하고 물으니, 대답하기를 『시랑(侍郎) 6)의 위엄과 은혜가

백성에게 미치고있으니, 백성들이 다 믿고 복종합니다』 하였다. 영(詠)이 말하기를,『지난번 임기 동안에는

그렇지 않더니, 이번 임기에는 다소 나아졌구나. 오직 이 한개의 믿음이 5년 만에 바야흐로 성취되었다』 하였다.
범충선공(范忠宣公) 7)이 제주(齊州) 8)를 다스릴 적에 어떤 이가 그를 격려해 말하기를,

『공(公)의 정사(政事)가 원래 너그럽지마는, 제주의 백성들은 흉하고 사나와서 성질이 노략질과 겁탈을 좋아하니,

마땅히 엄하게 다스려야 합니다』 하였다. 그는 『너그러움은 성품에서 나온 것인데,

만약 억지로 사납게 다스리고자 할지라도 그 사나움을 오래 지속하지는 못할 것이요,

사나우면서도 그것으로써 흉한 백성들을 오래 다스리지는 못한다면, 놀림받는 길이 될 것이다』 하였다.]

 

[각주]
1) 각기 『논어(論語)』 팔일(八佾)편 및 양화(陽貨)편에서의 인용이다.
2) 유가(柔嘉) : 『시경(詩經)』 대아(大雅) 탕지십에 실린 것으로서 유(柔)는 안(安)의 뜻, 가(嘉)는 선(善)의 뜻이다.
3)『시경(詩經)』 탕지십(湯之什)에서 인용한 것임. 중산보(仲山甫)는 주(周) 선왕(宣王) 때의 사람.
4) 양귀산(場龜山) : 중국 송(宋)의 학자. 이름은 시(時), 자는 중립(中立), 구산(龜山)은 그의 호.

정자(程子) 형제에게서 성리학(性理學)을 배웠다. 『구산집(龜山集)』이 있다.
5) 이전 : 중국 송(宋)의 화양인(華陽人). 호는 곡자(谷子). 처음에 향사로 있다가 장영(張詠)의 권유로 등제하였다.

영주(榮州)의 지사(知事)를 지냈다. 『장영어록(張詠語錄)』이 있다.
6) 시랑(侍郎) : 중앙(中央) 6부(部)의 장관인 상서(尙書) 다음의 차관. 여기서는 장영(張詠)이 시랑으로 있다가

외직(外職)으로 나왔으므로 그냥 중앙관직을 부른 것이다.
7) 범충선공(范忠宣公) : 송(宋)의 문신. 중엄(仲淹)의 아들. 이름은 순인(純仁), 자는 요부(堯夫).

충선(忠宣)은 시호. 관문전대학사(觀文殿大學士)를 지냈다.
8) 제주(齊州) : 중국 광서성(廣西省)에 있는 주명(州名).


★ 官府體貌 務在嚴肅 坐側不可有他人.
    (관부체모 무재엄숙 좌측불가유타인. )
    관부의 체통를 지키기 위해 엄숙함에 힘써야 하고 수령의 곁에는 다른 사람이 있어서는 안 된다.

 

[수령의 지위는 존엄한 것이므로, 뭇 아전들이 엎드리며 백성들은 뜰 아래에 있게 되는 법인데, 감히 다른 사람이

그 곁에서 간여할 수 있겠는가. 비록 자제나 친척 빈객이라 할지라도 마땅히 모두 물리치고 홀로 앉아 있는 것이

예(禮)에 알맞다. 혹 한가한 낮에 공청에서 물러나서거나 고요한 밤에 일 없을 때에야 불러서 만나보는 것도 괜찮다.
어버이를 모시고 있는 수령은 새벽에 일어나 어버이 처소에 나아가 문안드리고, 이에 나와서 참알을 받을 것이다.

혹 부형·존장(尊長)이 내사(內舍)에서 밥을 들 때에는, 공무를 마치고 잠깐 들어가 인사를 드리되,

부형이나 존장이 정당(政堂)에 둘러앉아 있도록 해서는 안된다.
채번옹(蒙樊翁)1)이 화성의 유수(留守)2)로 있을 때에, 가까운 집 소년이 상복을 입고 관아의 문으로 들어오거늘,

공(公)이 그 문지기를 죄주고 소년을 급히 문 밖으로 내보내어 사처를 정하도록 하였다.
위솔(衛率) 이술원(李述源) 3)이 성천(成川) 도호(都護) 4)가 되었을 때 그의 아들이 상복 차림으로 대문 밖에 와서

기다리면서 아전을 불러 들어가기를 청하였다. 이술원이 말하기를 『상복을 입은 자는 공문(公門) 들어올 수도 없고

정당(政堂)에 올라와서도 안된다』 하고, 아전에게 명하여 담장을 헐고 들어오게 하여 내사(內舍)에 들어 있게 하고,

자신이 몸소 들어가서 만나보았다. 내가 곡산(谷山)에 있으면서 이를 듣고는 훌륭하다고 생각하였다.
정당(政堂)은 체모가 존엄한 것이니, 무릇 상복을 입은 사람이거나 승려 차림을 한 사람이나 야복(野服) 5) 차림을

한 사람蔽凉子·夾袖衣등을 착용한 사람을 정당(政堂)에서 인접해서는 안된다. 옛사람들은 다 그러하였다.
여씨(呂氏)의 『동몽훈(童蒙訓)』에 말하기를, 『관직(官職)에 있는 자는 무릇 색다른 사람을 상접하지 말아야

할 것이다. 무당이나 여승 따위는 더욱 멀리해야 한다』 하였다.
비록 시승(詩僧)으로서 가히 친하게 지낼 만한 자라도 마땅히 절에 놀러가서 산간에서나 만나볼 것이요,

불러서 관아에 들어오게 해서는 안된다. 비록 주지(住持)를 지내는 자라도 그 참알(參謁)의 경우를 제외하고는

동헌(東軒)에 오르게 해서는 안된다. 만약 이뢰어야만 할 폐막(弊?)이 있으면 문서로써 보고케 할 것이다.
『상산록(象山錄)』에 이르기를 『관아의 뜰에서는 푸닥거리를 하고 내사(內舍)에서는 굿을 하며,

중과 무당이 한데 섞여 징과 북을 울리고 지껄여대는 것은 크게 관부(官府)의 체면이 아니다.

만약 수령이 나간 틈을 타서 이 괴이한 일을 벌인다면, 이는 처자가 명령을 따르지 않는 때문이니,

더욱 그 집안의 법도가 없어졌음을 보이는 것이다』하였다.]

 

[각주]
1) 채번옹(蔡樊翁) : 숙종 46∼정조 23(1720∼1799)본관은 평강(平康), 이름은 제공(濟恭), 자는 백규(伯規),

   호는 번암(樊巖). 10년간 의정을 지내면서 많은 치적이 있었다. 번옹이란 그의 호에 대한 경칭으로 쓴 것이다.
2) 유수(留守) : 수도 이외의 별도에 두었던 지방장관, 조선왕조에는 개성· 강화· 수원· 광주(廣州)에 있었다.
   위솔(衛率) 이술원(李述源) : 위솔(衛率)은 세자익위사(世子翊衛司)의 종6품 무관직(武官職).

3) 이술원(李述源) : 정조(正祖)·순조(純祖) 때의 관인(官人). 관(官)이 승지(承旨)에 이르렀다.
4) 도호(都護) : 도호부사(都護府使)의 약칭.
5) 야복(野服) : 벼슬하지 않은 촌야인의 복장이란 뜻이며, 폐량자는 패랭이, 

   협수의는 소매가 좁은 군복의 일종이다.


★ 君子不重則不威 爲民上者 不可不持重.
    (군자불중즉불위 위민상자 불가부지중. )
    군자가 무게가 없으면 위엄이 없으니 백성의 윗사람이 된 자는 몸가짐을 신중히 하지 않으면 안될 것이다.

 

[사안(謝安)1)은 바둑 두는 것을 그치지 않았고, 유관(劉寬) 2)은 국이 엎질러져도 놀라지 않았으니,

다 평상시에 익히 생각하고 헤아려둔 바가 있었기 때문에 일을 당하여도 황망하지 않을 수가 있은 것이다.

관아(官衙) 안에 혹시 호랑이나 도적, 수재나 화재가 나고 담장이 무너지거나 지붕이 떨어지며,

혹 지네나 뱀이 요 위에 떨어지거나 혹은 시동(侍童)이 잘못하여 물을 엎지르고 술잔을 뒤엎는 일이 있더라도,

다 모름지기 고요히 앉아서 천천히 그 까닭을 살필 것이요, 혹시 어사(御史) 3)가 출도(出道)하여

暗行御史가 일에 착수함을 일러서 出道라 한다하거나 폄보(貶報) 4)가 졸지에 이르더라도 더욱 말씨나 안색을

달리함으로써 남의 기롱과 업신여김을 받지 않도록 해야 할 것인다. 배도(裵度) 5)가 중서(中書) 6)에 있을 때,

좌우가 갑자기 도장이 없어졌다고 아뢰었으나 그는 여전히 술마시기를 계속하였다.

얼마 후에 다시 제자리에서 도장을 찾아내었다고 아뢰었으나 는 역시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았다.

누가 그 까닭을 물으니, 그는 『이는 필시 아전이 도장을 훔쳐 문서에 찍은 것인데, 급하게 되면 물이나 불 속에

던져버릴 것이요, 늦추어주면 도로 제자리에 갖다 놓는 것이다』하였다. 사람들이 그의 도량에 탄복하였다.
유공권(柳公權) 7)이 일찌기 술잔과 그릇들을 한 상자에 넣어두었는데, 그 동여매고 봉해 놓은것은 전과 같은데도

넣어둔 물건은 모두 없어졌으며, 종은 망녕되이 모르노라고 하였다.

공권은 웃으면서 『은잔이 날개가 돌쳐 날아간 게지』 하고는 다시 따지지 않았다.
한위공(韓魏公)이 대명부(大名府) 8)에 있을 때에 백금(百金)을 주고 옥잔(玉盞) 1쌍을 샀는데,

밭갈이하던 자가 옛 무덤에서 얻은 것으로서 안팎에 흠이라고는 없는 큰 보물이었다.

하루는 조사(漕使) 9)를 불러 술을 대접하였는데, 한 아전이 잘못 부딪쳐 옥잔이 모두 부서졌다.

공은 신색이 조금도 달라지지 않고 앉아 있는 손님들에게 『물건의 만들어지고 부서짐은 역시 때가 있는 것이다』

하고, 그 아전을 돌아보면서 『너는 실수를 했을 뿐이요 고의로 한 것이 아니니 무슨 죄가 있으랴』 하였다.
문로공(文潞公)이 네 개의 옥술잔을 내어 손님을 대접하는데 관노(官奴)가 잘못하여 그 하나를 깨뜨렸다.

문로공이 장차 그 죄를 다스리려 하자 사마온공(司馬溫公) 10)이 붓을 청하여 문서의 끄트머리에 쓰기를,

『옥술잔을 휘두르지 말라는 예법은 비록 옛 기록에 있으나, 아름다운 구름은 쉬이 흩어져 가버리는 것이니,

이 사람의 허물을 가히 용서해줄 만하다』 하였다. 문로공이 웃으면서 그 관노를 풀어주었다.官奴는 즉 女妓였다
왕문정(王文正) 11)은 평생토록 노여움을 나타내 보인 일이 없었다. 음식에 불결한 것이 있으면 다만 먹지 않을

따름이었다. 집안 사람들이 그의 도량을 시험해보고자 하여 티끌을 국 속에 집어 넣었더니, 그는 밥만을 먹었다.

왜 국을 먹지 않느냐고 물으니, 『어쩐지 고기가 먹기 싫어서 그렇다』고 하였다.

하루는 또 그의 밥에 검정을 얹어놓았더니, 그는 그것을 보고 『어쩐지 밥이 싫으니 죽을 가져오라』 하였다.
여조겸(呂祖謙)12)이 젊었을 적에 성격이 거칠고 사나와서 음식이 마음에 안 들면 문득 집기를 부수기도 하였다.

후에 오랜 병으로 인하여 단지 『논어(論語)』한 책만 가지고 가서 아침 저녁으로 한가로이 읽더니,

홀연히 깨달음을 얻어 마음이 평정(平靜)해졌다. 마침내 종신토록 크게 노하는 일이 없었으니,

이는 가히 기질(氣質)을 변화시키는 방법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진호(陳鎬) 13)가 산동(山東) 지방의 학정(學政)을 감독할 때에 밤에 제양(濟陽) 14)의 공관(公館)에 이르르니,

음식 만드는 사람이 밥상을 올리면서 수저 놓는 것을 잊어버렸다. 제양의 수령이 그가 화내어 꾸짖을 것을 

두려워하여 문 밖에 나가서 가져오기를 청하자, 그가 허락하지 아니하고 말하기를,

『예(禮)와 식(食)이 어느 것이 더 중한가』15)하고, 마침내 밤참을 들지 않고 과일 몇 개를 먹었다.
한위공(韓魏公)이 정무(定武) 16) 지방을 맡아 지킬 때에, 밤에 공문을 작성하면서 한 시병(侍兵)으로 하여금

곁에서 촛불을 들게 하였다. 시병이 다른 데를 돌아보다가 촛불로 공(公)의 수염을 태웠으되,

공은 급히 옷소매로 문지르고서는 글 쓰기를 여전히 하였다. 얼마 후에 돌아다보니 이미 그 시병은 바꾸어져

있었다. 공은 주리(主吏)가 그 자를 매 때릴 것을 걱정하여 급히 불러 말하기를 『그자를 바꾸지 말라.

이제는 이미 촛불을 잡을 줄 알 것이다』 하였다.
하원길(夏原吉) 17)이 겨울에 명령을 받들어 지방으로 나갔다가, 어떤 공관에 이르러 그 공관 사람에게

버선을 말리도록 하였다. 관 사람이 한 짝을 불에 태우고는 두려워 감히 아뢰지를 못하였다.

공이 매우 급하게 버선을 찾자, 좌우가 죄를 청하였다. 공은 웃으면서 『어찌 일찌기 말하지 않았는가』 하였다.
장요(蔣瑤) 18)는 성품이 너그러웠다. 양주(楊州) 지방을 맡아 다스릴 때에 거리에 나갔는데,

어떤 아이가 띄운 연이 그의 모자에 떨어졌다. 좌우가 그 아이를 붙잡아오려고 하자,

그가 말하기를 『아이가 어리니 놀라게 하지 말라』 하였다. 어떤 부인이 다락 창문으로 물을 버리다가

잘못하여 그의 옷을 적시었다. 그 남편을 묶어 오거늘, 그가 좌우를 꾸짖어 돌려보내게 하였다.

어떤 사람이 그의 지나칠 정도로 관대한 것을 의아하게 여기자, 그가 말하기를 『내가 이름내기를 좋아해서가 

아니다. 이 부인도 또한 실수한 것뿐인데, 하물며 그 남편이 무슨 죄가 있으랴』하였다.
장형(張鎣) 19)이 산동성(山東省)을 순무(巡撫) 20)할 때에 맨처음에 임청(臨淸) 21)에 이르렀는데,

우연히 어떤 술집의 깃대에 그의 사모(紗帽)가 걸리어 떨어졌다. 좌우가 실색하였다. 

이튿날 아침에 수령이 그 사람을 묶어서 죄주기를 기다렸다. 

그는 말하기를, 『금후로는 모름지기 깃대를 높이 걸어라』 하고는 곧 내보내 주었다.
장형이 벼슬살 때에 급히 보고해야 할 옥사(獄事)가 있어서 밤에 촛불을 잡고 앉아 아전을 재촉하여 문서를 꾸몄다.

밤중에 문서가 다 되었는데, 아전의 옷소매가 촛불을 건드려 촛대가 문서 위에 너머지니,

문서는 상주(上秦) 22)할 수 없게 되었다. 아전이 머리를 조아려 죽음을 청하자, 그는 『실수한 것이다』 하고,

재촉해 다시 쓰게 하고 화평한 얼굴로 앉아 기다리면서 새벽이 되도록 잠자리에 들지 아니하였다.]

 

[각주]
1) 사안(謝安) : 중국 동진(東晋)의 정승. 자는 안석(安石). 당시 북방에서 전진왕 하견(荷堅)의 군대가 남침하자

    정토대도독에 임명되었는데, 그의 조카 현(玄)의 승전보고를 받고도 태연히 바둑두기를 계속하다가,

    끝내고 안으로 들어갈 때에는 기뻐하여 나막신의 굽이 떨어지는 것도 몰랐다고 한다. 시호는 문정(文靖).
2) 유관(劉寬) : 중국 후한(後漢) 때 사람. 자는 문요(文饒). 너그럽기로 이름났다. 시험해보기 위해,

    새로 각복(刻服)을 입고 입궐하는데 누가 그 위에 국을 엎질렀는데도 놀라거나 성내지 않았다 한다.

3) 어사(御史) : 임금이 특별한 소임을 맡겨 파견한 관원.
4) 폄보(貶報) : 좌천·파면·형벌 등에 관한 공적 통지.
5) 배도(裵度) : 중국 당(唐)의 재상, 자는 중립(中立). 헌종 때 오원제(吳元濟)의 반란을 평정하고 중서령을 지냈다.
6) 중서(中書) : 중서성의 약칭. 문하성· 상서성으로 더불어 당(唐)의 최고 정치기관인 3성(省)을 이루었다.
7) 유공권(柳公權) : 중국 당(唐)나라 때 사람으로 유공작(柳公綽)의 아우. 자는 성현(誠懸).

    태자태보(太子太保)를 지내고 하동군공(河東郡公)에 봉해졌다. 글씨를 잘 썼다.
8) 대명부(大名府) : 중국 하북성(河北省)에 있는 부명(府名).
9) 조사(漕使) : 중국 송대(宋代) 전운사(轉運使)의 이칭. 징부(徵賦)의 최과(催科), 금곡의 출납 등을 맡은 관원.
10) 사마온공(司馬溫公) : 중국 송(宋)의 명신(名臣). 이름은 광(光), 자는 군실(君實). 왕안석의 신법에 반대하였고,

      상서좌복야(尙書左僕射)를 지냈으며, 온국공(溫國公)에 봉하였다. 『자치통감(資治通鑑)』을 지었다.
11) 왕문정(王文正) : 중국 송(宋)의 문신. 이름은 단(旦), 자는 자명(子明), 문정은 그의 시호. 위국공에 봉하였다.
12) 여조겸(呂祖謙) : 중국 송(宋)의 학자. 자는 백공(伯恭). 동래선생(東萊先生)이라 불리었다.

      저서에 『동래좌씨박의(東萊左氏博議)』 등이 있다.
13) 진호(陳鎬) : 중국 명(明)나라 때 회덕인(會德人). 우부도어사· 호광순무를 지내고『궐리지(闕里志)』를 지었다.
14) 제양(濟陽) : 중국 산동성(山東省)에 있는 도시명.
15)『맹자(孟子)』에 있는 말로서 『예의와 먹는 것의 어느 편이 더 중요한가』의 뜻.
16) 정무(定武) : 중국 하북성(河北省)에 있는 주명(州名).
17) 하원길(夏原吉) : 중국 명(明)의 문신. 자는 유철(惟喆). 호부상서(戶部尙書)를 지낸 치수(治水) 담당 대신.
18) 장요(蔣瑤) : 중국 명(明)의 귀안인(歸安人). 자는 수경(粹卿), 시호는 공정(恭靖). 공부상서(工部尙書)를 지냈다.
19) 장형(張鎣) : 중국 명(明)의 문신. 자는 정기(廷器), 시호는 장의(莊懿). 우부도어사· 남경병부상서를 지냈다.
20) 순무(巡撫) : 각 지방을 유력(遊歷)하면서 민막을 순찰함. 명대(明代)의 순무는 지방의 군사권을 장악하고

      경관(京官)을 겸직하는 대관(大官)이었다.
21) 임청(臨淸) : 중국 산동성(山東省)에 있는 현명(縣名).
22) 상주(上秦) : 임금께 공문을 바쳐 아룀.


★ 斷酒絶色 屛去聲樂 齊速端嚴 如承大祭 罔敢遊豫 以荒以逸.
    (단주절색 병거성락 제속단엄 여승대제 망감유예 이황이일. )
    술을 끊고 여색(女色)을 멀리하며 소리와 풍류를 물리치고 공손하고 단정하며 엄숙하기를

    큰 제사를 받들 듯 하며 유흥에 빠져 정사를 어지럽히며 시간을 헛되이 보내는 일이 있어서는 안될 것이다.

 

[정선(鄭瑄)이 말하기를 『사람의 총명에는 한도가 있고 일의 기틀은 무궁한데, 한 사람의 정신을 다하여 뭇사람의

농간을 막는 것이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즐겨 술에 떨어지고 색정(色情)에 빠지며 시 짓고 바둑 두어서

드디어 옥중의 송사(訟事)가 해를 넘기고 옳고 그른 것이 뒤바꿔지면 소송거리는 더욱 많아지고 일의 기틀은

더욱 얽혀질 것이니 어찌 한탄스럽지 아니한가. 닭이 울면 일어나 정사를 보되, 집안일은 다 물리쳐버릴 것이요,

주색(酒色) 때문에 스스로 고단해지지 말고, 함부로 즐기다가 스스로를 해치지도 말 것이다. 무슨 일은 결재하고

무슨 공문은 띄우며 무슨 부세는 처리하고 잡아 가둔 누구는 풀어줄 것인가를 시시로 살펴서 급급히 행할 것이요,

우선 내일까지 기다려보자고만 하지 않는다면 일이 다스려지지 않는 것이 없고 제 마음도 역시 편안해질 것이다』

부승우(傅僧祐) 1) 및 그 아들 염(琰), 염의 아들 홰는 수령이 되어 모두 뛰어난 치적(治績)을 나타내었다.

그때 사람들이 이르기를 『부씨(傅氏) 집에는 치현보(治縣譜) 2)가 있어 서로 전해내려오면서 다른 사람에게는

보여주지 않는다』 하였다. 유현명(劉玄明) 3)은 크게 행정의 능력이 있었는데, 건강(建康) 4)과

산음(山陰) 5)의 수령을 역임하면서 치적이 천하에 제일이었다. 부홰가 후임으로 산음의 현령이 되어

유현명에게 묻기를 『원컨대 구정(舊政)을 새 영윤(令尹)에게 말해주소서』 6) 하니 유현명이 대답하기를

『나에게는 기이한 방법이 있는데, 그대의 가보(家譜)에는 실려 있지 않을 것이오.

오직 매일 한 되 밥만 먹고 술은 마시지 않을 것, 이것이 제일가는 방법이오』하였다.
매지(梅摯) 7)가 소주(韶州)를 맡아 다스릴 때에 장설 8)을 지어 말하였다.

『벼슬살이에는 다섯 가지 병통이 있다. 급히 재촉하고 함부로 거두어들여 아랫사람에게서 긁여다가 위에 갖다

바치는 것은 조부(租賦)의 병통이요, 엄한 법조문을 함부로 둘러대어 선악을 명백히 가리지 못하는 것은

형옥(刑獄)의 병통이요, 밤낮 술잔치에 빠져 나라일을 등한히하는 것은 음식의 병통이요, 백성의 이익을 침해하여

사사로운 주머니만 채우는 것은 재물의 병통이며, 많은 계집을 골라 노래와 여색을 즐기는 것은 유박(?薄) 9)의

병통이다. 이 가운데 하나만 있어도 백성이 원망하고 신(神)이 노할 것이니, 편안하던 자도 반드시 병들고 병든 자는

반드시 죽을 것이다. 벼슬살이하는 자가 이를 알지 못하고 풍토의 병을 탓하니 또한 잘못된 일이 아닌가.』
『상산록(象山錄)』에 이르기를, 『술을 좋아하는 것은 다 객기(客氣)이다. 세상 사람들은 잘못 이를 맑은 취미로

생각하지만, 결국은 객기를 일으키기 마련이다. 술마시는 버릇이 오래 가면 게걸스러운 미치광이가 되어 끊으려 

해도 되지 않으니 참으로 애석한 일이다. 마시던 주정부리는 자가 있고 마시면 말 많은 자가 있으며 

마시면 잠자는 자도 있는데, 주정만 부리지 않으면 스스로 폐단이 없는 줄로 여긴다. 

그러나 잔말·군소리 들은 아전이 괴로이 여길 것이요, 깊이 잠들어 오래 누워 있으면 백성이 원망할 것이다. 

어찌 미친 듯 소리지르고 어지러이 떠들며 넘치는 형벌과 지나친 곤장질만이 정사에 해가 된다고 하겠는가, 

수령이 된 자는 술을 끊지 않으면 안될 것이다』라고 하였다.

『다산필담(茶山筆談)』에 말하였다. 『해마다 12월과 6월에 시행되는 8도 관원들의 포폄(褒貶) 10)의 조목을 보면,

「과도한 징수는 비록 공평하게 되었으나 마땅히 주도(酒道)를 경계하라」,

잘 다스리기를 원하지 않는 것은 아니나, 어찌 이다지도 술을 좋아하는가」와 같은 조목이 앞뒤로 

잇달아 있는데도 또다시 오히려 술에 젖어 빠져서 반성하지 않으니, 대체 무슨 심사인가.』 

 옛날에 한 현령이 술에 빠져 정사를 다스리지 못하자 감사(監司)가 치적을 고과하여 쓰기를 

『술이 깬 날에도 역시 취해있다』 하였다. 한때 세상에 전해가면서 웃었다.

창기(娼妓)들과 방탕하게 노는 것은 삼대(三代)의 선왕(先王) 11)의 풍속이 아니다. 후세에 이르러 오랑캐의 풍속이

점차 중국으로 물들어가서 드디어 우리나라에까지 미친 것이다. 백성의 수령 된 자는 결코 창기와 가까이 친해서는

안되는 법이니, 한번 가까이하게 되면 정사 한 가지, 명령 하나가 다 의심과 헐뜯음을 받아 비록 지극히 공번되고 

크게 바른 일이라 할지라도 모두가 계집의 청알(請謁)에서 나왔다고 의심받을 것이니, 또한 딱하지 아니한가. 

매양 보매, 물정에 어둡고 소박하며 바깥 출입이 없던 선비가 기생이란 것을 처음 친하게 되면, 

그 빠져서 매혹됨이 더욱 심하여 이부자리 속에서 몰래 소곤거린 말을 금석같이 믿으며, 

기생이란 것이 사람마다에 정을 주어서 인간의 본성이란 이미 없어지고 또 따로 이 정부(情夫)가 있어 

누설치 않는 말이란 없다는 사실을 모른다.

밤중에 소곤거린 말이 아침이면 이미 온 성(城) 안에 퍼지고, 저녁에는 온 고을에 자자하게 되는 것이다.

평생토록 단정하던 선비가 하루 아침에 드디어 어리석은 사람이 되니 어찌 애석하지 아니한가.
무릇 기생이란 것은 요염한 것이니 마땅히 눈짓도 주고받지 말 일이요, 초하루·보름의 점고(點考)12)할 때

외에는 문 안에 들어오게 해서는 안될 것이다.
자제나 친척·빈객 들이 기생과 가까이하는 것은 더욱 엄히 막아야할 일이니, 만일에 워낙 금계를 엄하게 해 놓는다면

설사 범하는 자가 있더라도 난만(爛漫)하게 되지는 않을 것이다. 

또 이미 발각이 되거든 반드시 여러 사람 앞에서 꾸짖을 일이 아니라, 단지 밀실에서 그 금계 범한 것을 책망하여,

그 다음날 말을 내어주고 행장을 꾸려서 곧 돌려보냄으로써, 내 정사를 어지럽히지 않도록 하고 

내 법령을 무너뜨림이 없게 하는 것이 최상의 방편이 될 것이다.

조청헌공(趙淸獻公)이 촉(蜀) 지방을 맡아 다스릴 때에, 한 기생이 머리에 살구꽃을 꽂고 있었다.

공이 우연히 희롱하기를, 『머리 위의 살구꽃이 참으로 예쁘구나』하자, 기생이 즉시 응하기를

『가지 끝의 매실(梅實)은 어찌 중매 서주는 사람이 없을까』하였다. 저녁 때가 가까와지자 공이 한 노병(老兵)으로 하여금 그 기생을 불러오게 하였는데, 거의 이고(二鼓) 13)가 되어도 이르르지 아니하였다.

사람을 시켜 재촉을 하고는 그가 방안을 거닐고 있다가 문득 소리를 높여 『조변아, 이와 같이 무례해서는 안된다』 하고 부르짖고는 문득 그만두도록 하였다. 노병이 장막 뒤에서 나오면서 말하기를,

『저는 상공(相公)께서 몇 시각 안되어 그러한 생각이 식을 줄 알고 실상 부르러가지도 않았읍니다』 하였다.
조청헌(趙淸獻)이 매양 색욕을 끊음에 있어서 부모의 화상(晝像)을 침상에 걸어놓고 스스로를 감계(監戒)하였다.
유봉서(柳鳳瑞)14)가 북평사(北評事) 15)가 되어서는 한 요사스러운 기생을 만나 헤어나지 못하매,

그 아버지인 정승 유상운(柳尙運) 16)의 화상을 걸어놓고 밤낮 쳐다보면서 울었으나유정승이 그가 여색에 빠져

혹할 것을 미리 알고, 임지로 가던 날 화상을 그에게 주었다, 끝내 그만두지 못하고 마침내 임지에서 죽었으니,

아아 슬픈 일이다.
장괴애(張乖崖) 17)가 촉(蜀)지방을 맡아 다스릴 때에 빨래하고 바느질하는 두 계집이 있었는데, 

괴애가 그 한 여자를 좋아하였다. 밤중에 욕심이 움직이자 일어나 방 안을 두루 돌아다니면서, 

다만 『장영(張詠)은 소인이다, 소인이다』하고는 드디어 그만두었다.
정선(鄭瑄)이 이르기를, 『욕심의 싹이 돋아날 때 그것을 채우고 나면 반드시 후회하고 참고 지나면 반드시 즐겁다.

분노도 역시 마찬가지다』 하였다.
장괴애(張乖崖)가 촉(蜀)지방을 진무할 적에, 놀이 잔치하는 때를 당하면 남녀가 그의 좌우를 에워싸게 되었지만,

3년을 마치도록 일찌기 돌아다보지도 아니하였다.
『상산록(象山錄)』에 이르기를 『수령이 성(城)안의 관아(官衙)를 출입하거나 여염집들을 지나갈 때에,

담 너머로나 길거리 위에 부인들이 있음을 알더라도 마땅히 눈길을 흘려 보내서는 안된다』 하였다.
장영(張詠)이 익주(益州) 18)를 맡아 다스릴 적에 속관(屬官)들이 그 엄격함을 두려워하여 감히 아무도 비첩(婢妾)을

두는 자가 없었다. 그가 사람들의 인정을 끊게 하고 싶지 않아서 드디어 한 계집종을 사들여 시중을 들게 하니 .

이로부터 그의 속관들도 자못 비첩을 두게 되었다. 촉(蜀) 19)땅에 있기 4년에 부름을 받아 조정으로 돌아가면서,

시중 들던 여자의 부모를 불러 재물을 내어주어 시집보내게 하였는데, 아직 도 처녀 그대로였다.
정언빈(程彦寶) 20)이 나성(羅城) 21)에 사자(使者)로 갔을 때에, 좌우에서 세 사람의 처녀를 바쳤는데 다 자색이

있었다. 그가 처녀들에게 말하기를 『너희는 내 딸과 같다. 어찌 감히 서로 범할 수가 있겠느냐』하고는

손수 문을 걸어 잠그고 한 방에 두었다가 그 이튿날 아침에 부모를 찾아서 돌려보내니 모두 울면서 감사하였다.
한지(韓祉)가 감사(監司)로 있을 때에, 시중드는 기생 수십 명을 항상 한 방에 두고서 종래 범하지 아니하니,

여러 비장(裨將)들 또한 감히 가까이하는 자가 없었다. 어느 날 조용히 비장들에게 묻기를 『오랜 나그네 생활 22)을 하면서 더러 가까이해 본 적이 있는가』 하니 모두 사실대로 대답하였다. 그가 웃으면서 말하였다.

『어찌 내 스스로에게 금하고 있는 것으로써 다른 사람까지 막겠느냐. 다만 난잡하게만 놀지 말라는 것뿐이다.

그러나 색정을 참기 어려움이 이같을 수야 있겠느냐. 내가 일찌기 호서의 아사(亞使) 23)로서 검전도회(檢田都會)의

일 24)로 보름 동안 청주(淸州)에 머물고 있었는데, 재색이 뛰어난 강매(絳梅)라는 기생이 항상 곁에 와있었다.

사흘째 되던 날 밤 잠결에 발을 뻗으니 문득 사람의 살결이 닿음을 느꼈다. 물으니, 강매였다. 강매가 말하기를,

「주관(主官) 25)이 명령하기를, 돌보아주심을 입지 못하면 장차 죄를 주겠다 하기에, 부끄러움을 무릅쓰고

몰래 들어왔읍니다」 하였다. 나는 「그거야 쉬운 일이다」하고는 곧 이불 속으로 들어오게 하였다.

무릇 13일 동안이나 동침하였으되 끝내 어지러워지지 아니하였다. 일이 끝나고 돌아오게 되니 강매(絳梅)가

음을 울거늘, 내가 「아직도 정이 남아 있느냐」 하고 물으니, 대답하기를 『무슨 정이 있겠읍니까.

단지 무료하였기 때문에 울 뿐입니다」 하였다. 주관(主官)이 놀려서 말하기를 「강매는 좋지 못한 소문을 만년에

남겼고, 사군(使君) 26)은 꽃다운 이름을 백세(百世)에 끼쳤구나」하였다. 』
조운흘(趙云仡) 27)호는 石澗이다이 강릉부사(江陵府使)로 있으면서, 손님 접대하기를 좋아하지 아니하고 백성들을

번거로이 괴롭히지 않아서 오늘에 이르도록 청백하다고 일컫는다. 어느날 부(府)의 기생들이 자리에 앉아서

서로 희롱하면서 웃고 있으므로 공이 그 까닭을 물으니, 한 기생이 대답하기를 『제가 주관을 모시고 동침하는 

꿈을 꾸었는데, 지금 여러 동료들과 해몽을 하고 있는 중입니다』하였다. 공이 곧 붓을 찾아 글을 지었다.

『마음은 영서(靈犀) 28)와 같아서 뜻이 이미 통했는데, 비단이불을 함께 하기란 모름지기 쉽지가 않구나.

태수(太守)의 풍류 인정이 박하다고만 말하지 말라. 아름다운 여인의 좋은 꿈 속에 먼저 들어갔거니.』
박신(朴信) 29)이 젊어서 명성이 있었는데, 강원도 안찰사(按察使) 30)가 되어서는 강릉의 기생 홍장을 사랑하여

정이 자못 두터이 들었다. 임기가 차서 돌아가게 되었는데, 부사 조운흘이 거짓으로 『홍장은 이미 죽었읍니다 』

고 하니, 그 애도함이란 어쩔줄을 몰랐다. 강릉부에 경포대가 있는데, 부사가 안찰사를 맞이하여 나아가 놀면서,

몰래 홍장으로 하여금 예쁘게 꾸미고 고운옷으로 단장케 하며, 따로이 놀잇배를 마련하고 늙은 관인 한 사람을 골라

눈썹과 수염을 하얗게 하고 의관을 크고 훌륭히 차리게 한 후, 홍장을 배에 태우게 하였다. 또 채색 액자를 배에 

걸고 그 위에 시(詩)를 지어 붙이기를, 『신라(新羅) 성대의 늙은 안상(安詳) 31)이 천년 풍류를 아직 잊지 못하여,

경포대에 임금의 사신이 놀이한다는 말을 듣고는 아름다운 배에 다시금 홍장을 실었네』 하였다.

천천히 노를 저어 포구(浦口)로 들어오면서 물가로 배회하는데 맑고 둥근 음악소리가 공중에 떠오는 것 같았다.

부사가, 『이곳에는 신선들이 있어 왕래하는데, 단지 바라다만 볼 것이요, 가까이 가서는 안됩니다』 하니

박신은 눈물이 눈에 가득하였다. 갑자기 배가 순풍을 타고 순식간에 바로 앞에 다다르니, 박신이 놀라 말하기를

『신선의 무리임이 분명하구나』 하고는 익히 살펴보니 곧 홍장이었다. 한 자리에 있던 사람들이 손뼉을 치면서

크게 웃었다. 생간컨대 박안찰사는 물론 허황하고 혼미한 사람이요, 조공(趙公)도 꾸며서 상관을 놀려준 것은

역시 잘못이다. 내가 서읍(西邑) 32)에 있을 때에 이와 같은 일을 만났는데, 기생으로 하여금 앓아 누운 체하여

모시고 놀지 못하게 하고, 놀이가 파하자 사실대로 말하니, 감사도 역시 사과할 뿐 나에게 노여워하지는 않았다.
정한강(鄭寒岡) 33)이 안동부사가 되었는데 관아에 이전부터 전해오는 기녀(妓女)라는 이름의 꽃나무가 있었다.

그가 명해서 베어버리게 하였다. 회곡(晦谷) 권춘란(權春蘭) 34)이 그 까닭을 물으니 대답하기를 『사람이 쉽게

혹하기가 여색(女色)만한 것이 없으므로 그 이름을 미워해서 잘라버린 것이다』 하였다.
노래와 음악은 백성의 원망을 재촉하는 풀무이다. 내 마음은 즐겁지만 좌우의 마음이 반드시 다 즐거울 수는 없고,

좌우의 마음이 다 즐겁더라도 온 성(城) 안 남녀의 마음이 반드시 다 즐거울 수는 없으며, 성 안의 마음이 반드시

다 즐거울지라도 온 고을 만민의 마음이 반드시 다 즐거울 수는 없다. 그중에 하나라도 춥고 배고파 고달프거나

혹은 형옥에 걸리어 울부짖고 넘어져서, 하늘을 보아도 빛이 없고 참담하여 세상 살아갈 즐거움이 없는 자가 있다면,

한번 풍악을 울리는 소리를 들으매 반드시 이맛살을 찌푸리고 눈을 부릅떠서 길바닥에다 욕을 퍼붓고 하늘에다

저주할 것이다. 배고픈 자가 들으매 그 배고픔을 더욱 한탄할 것이요, 갇혀 있는 자가 들으매 그 갇혀있음을

더욱 슬퍼할 것이니, 『맹자(孟子)』의 금왕고악지장(今王鼓樂之章) 35)을 깊이 음미해보지 않으면 안될 일이다.

《시경》에 이르기를 『종(鐘)을 궁중에서 두들기니 소리가 바깥에까지 들린다』36)하였고,

《주역》에는 『즐거움을 입 밖으로 소리내면 흉하다』37) 하였다.
매양 보매 수령으로서 부모를 모신 자가 혹 생신(生辰)날에는 풍악을 베푸는데, 자기는 이를 효도라 생각하지만

백성들은 이를 저주하기 마련이다. 백성으로 하여금 부모를 저주하게 한다면 이는 불효가 아닌가.

만약 생신날에 양로(養老)의 잔치를 겸행한다면 백성들이 저주하지는 않을 것이다.
백일장(白日場)을 베풀어 선비들을 시험보이는 날에도, 바야흐로 음식상을 올릴 때에 잠시 풍악을 베풀되,

반드시 자리를 파할 때까지 계속할 것은 없다.
당(唐)의 설평(薛平) 38)이 3진(鎭)을 역임했으되 집에서 풍악소리가 들리지 아니하였다.

헌종(憲宗)이 그의 다스리는 행적을 보고 어사대부(御史大夫) 39)로 천발(薦拔)하였다.
유관현(柳觀鉉) 40)은 성품이 검약(儉約)하였다. 그가 벼슬살이를 할때에 한 발이나 되는 큰 밥상을 받고서는

『고향의 미꾸라지 조림만도 못하다』하였다. 기생의 노랫소리를 듣고서는 『밭두렁의 농가 듣는 것만도 못하다』

하였다.]

 

[각주]
1) 부승우(傅僧祐) : 중국 남북조(南北朝) 때의 송(宋)나라 관인(官人). 산음령(山陰令)을 지냈다.
2) 치현보(治縣譜) : 고을 다스리는 비결(秘訣)을 기록한 문서.
3) 유현명(劉玄明) : 중국 남북조(南北朝) 때의 제(齊)나라 관인(官人). 산음령(山陰令)을 지냈다.
4) 건강(建康) : 중국 감숙성(甘肅省)에 있는 군명(郡名).
5) 산음(山陰) : 중국 절강성(浙江省)에 있는 현명(縣名).
6) 이는 『논어(論語)』 공야장편에 있는 말을 인용한 것으로 전임관의 정사를 후임관에게 말해 달라는 뜻이다.

    영윤(令尹)은 원래는 초(楚)의 상경(上卿) 집정자(執政者)의 이름이었다.
7) 매지(海摯) : 중국 송(宋)의 문신. 자는 공의(公儀). 우간의대부(右諫議大夫)를 지냈다.
8) 장설 : 풍토병에 대한 설(說)이란 뜻인데 여기서는 벼슬살이의 공통되는 병통이 마치 향토병처럼

    고질화하여 있음을 말한 것이다.
9) 유박(?薄) : 휘장과 발이란 뜻이니, 곧 여자의 거처를 말한다.
10) 포폄(褒貶) : 올려주거나 깎아내린다는 뜻인데, 고려 및 조선왕조에서는 매 해 6월 12일 두 차례씩

      관원의 치적을 직속상관이 고과(考課)하여 중앙으로 보고하면 중앙에서는 모두를 종합하여

      출척과 이동의 자료로 삼았으니,이를 도목정(都目政)이라 하였다.
11) 선왕(先王) : 중국 고대의 성군(聖君)이라는 하(夏)의 우(禹), 은(殷)의 탕(湯), 주(周)의 문왕· 무왕을 가리킨다.
12) 점고(點考) : 어떤 기관에 소속된 사람을 명단에 점을 찍어가면서 일일이 대조 확인하는 일.
13) 이고(二鼓) : 밤을 5등분하여 각기 북을 쳐서 시각을 알리는데, 이고(二鼓)는 그 두번째 북치는 때,

      즉 저녁 10시. 이경(二更)과 같음.
14) 유봉서(柳鳳瑞) : 효종 5(1654)∼? 자는 계휴(季休), 본관은 문화(文化). 영의정 상운(尙運)의 아들, 봉휘의 형.
15) 북평사(北評事) : 평사(評事)란 병사(兵使) 밑에서 군기(軍機)에 참획(參劃)하는 유일한 문관계통의 속관으로서

      정6품직. 조선 전기에는 여러 도에 평사를 두었으나, 후기에는 함경북도병마절도사의 평사(評事)만이 남았다.

16) 유상운(柳尙運) : 인조 14∼숙종 33(1636∼1707) 본관은 문화, 자는 유구, 호는 현재(絢齋). 영의정을 지냄.

17) 장괴애(張乖崖) : 장영(張詠)의 호가 괴애(乖崖)이다.

18) 익주(益州) : 중국 요천성(瞭川省)에 있는 주명(州名).
19) 촉(蜀) : 사천성(四川省)의 약칭.
20) 정언빈(程彦賓) : 미상.
21) 나성(羅城) : 중국 절강성(浙江省)에 있는 군진(軍鎭).
22) 나그네 생활 : 감사가 거느리는 속관인 비장(裨將)들은 감사가 자선하여 대동하므로, 나그네 생활인 것이다.
23) 아사(亞使) : 충청도 도사(都事). 각도의 도사는 감사의 부관이므로 아사(亞使)라고도 하는데,

      주로 관내 수령의 불법을 규찰(糾察)하고 향시(鄕試)를 관장하는 종5품이었다.
24) 검전도회(檢田都會)의 일 : 조선 후기 각 군현의 토지를 관찰사 혹 그 부관인 도사의 입회하에 점검하던 일이다.

25) 주관(主官) : 본지(本地)의 관장(官長)을 이름이니, 여기서는 곧 청주목사(淸州牧使)를 가리킨다.
26) 사군(使君) : 왕명을 받들어 지방으로 나가는 관원에 대한 존칭. 여기서는 청주(淸州)에 출장나와 있는

      도사(都事) 한지(韓祉)를 가리킨다.
27) 조운흘(趙云仡) : 충숙왕 복위 1∼태종 4(1332∼1404) 호는 석간(石磵), 본관은 풍양(?壤).

      첨서밀직사사(簽書密直司事)·검교정당문학(檢校政堂文學)을 지냈다.
28) 영서(靈犀) : 신령스러운 물소. 그 뿔은 가운데에 구멍이 나 있어 양쪽이 통하게 되어 있으므로,

      두 사람의 의사가 모르는 사이에 소통 투합(投合)한다는 비유로 쓰인다.
29) 박신(朴信) : 공민왕 11∼세종 26(1362∼1444) 본관은 운봉(雲峰), 조선왕조 개국공신(開國功臣).

      자는 경부(敬夫). 이조판서(吏曹判書)를 지냈다.
30) 안찰사(按察使) : 고려 때 각도(各道)의 장관(長官)으로서 경관직(京官職)을 띤 채 파견되었다.

      조선왕조의 관찰사((監司)보다 품계도 낮고 권력도 적었다. 안사(按使) 혹은 안렴사(按廉使)라고도 한다.
31) 안상(安詳) : 잘 알 수 없다. 『삼국유사(三國遺事)』권3 백률사조(栢栗寺條)에 나오는바

      신라 효소왕대(孝昭王代)의 국선(國仙) 부예랑(夫禮郎)과 가장 친했으며 함께 강원도 지방으로 종유(從遊)한

      일화를 남겼다는 안상(安常)을 가리키는 듯도 하다.
32) 서읍(西邑) : 황해도(西道)의 고을이란 뜻. 다산(茶山)은 곡산도호부사(谷山都護府使)를 지낸일이 있다.
33) 정한강(鄭寒岡) : 중종 38∼광해군 12(1543∼1620) 학자. 이름은 구(逑), 자는 저가(這可), 한강은 그의 호.

      조식(曺植)·이황(李滉)의 문인(門人)으로서 경학(經學)과 예학(禮學)에 뛰어난 명현(名賢)이었다.
34) 권춘란(權春蘭) : 중종 34∼광해군 9(1539∼1617) 자는 언회(彦晦), 호는 회곡(晦谷). 청송부사를 지냈다.
35) 금왕고악지장(今王鼓樂之章) : 『맹자(孟子)』 양혜왕 하편에 나오는 글로서, 임금이 백성과 함께 즐기면

      백성이 임금의 풍악을 좋아하고, 함께 즐기지 않으면 백성이 오히려 싫어하여

      부여(父予)가 서로 쳐다보지도 않으며 형제처자(兄弟妻子)가 이산(離散)한다는 내용이다.
36)『시경(詩經)』소아(小雅) 도인사지집(都人士之什)에서 인용한 것이다.
37)『주역(周易)』 예괘(豫卦)의 말이다.
38) 설평(薛平) : 중국 당(唐)의 장군. 자는 탄도(坦塗). 평로군절도사를 지내고 위국공(魏國公)에 봉하였다.
39) 어사대부(御史大夫) : 관명(官名). 백관의 비행을 규찰하는 직무를 맡은바, 당대(唐代)에는 종3 품직(品職).
40) 유관현(柳觀鉉) : 숙종 31∼영조 29(1692∼1753) 자는 용빈(用賓), 호는 양파(陽坡), 본관은 전주(全州),

      양사(兩司)· 춘방(春坊)· 참의(參議)를 지냄.


★ 燕遊般樂 匪民攸悅, 莫如端居而不動也.
    (연유반락 비민유열 막여단거이불동야. )
    한가하게 놀이를 즐기며 풍류로 새월을 보내는 것은 백성들이 기뻐하는 바가 아니다.

    몸가짐을 단정하고 움직이지 않는 것만 못하다.

 

[주박(朱博) 1)이 전후 세 번이나 현령(縣令)이 되었는데 청렴 검소하여 주색과 놀이를 좋아하지 않았다.

미천하던 때에나 부귀해진 뒤에나 식사에는 두 가지 고기를 차리지 않았고,

상 위에는 음식이 세 그릇을 넘지 않았으며 세 접시를 벗어나지 않았다는 말이다.

밤 늦게 자고 아침 일찍 일어나니, 부인이 그의 얼굴 대하는 때가 드물었다.
이급(李及) 2)이 항주(杭州) 3)를 맡아 다스릴 때이다. 성품이 맑고 곧았으므로 전당(錢塘) 4) 풍속의

사치스러움을 싫어하여 놀이잔치를 일삼지 않았다.
당(唐)의 전휘(錢徽) 5)가 강주 6)의 자사가 되었을 때이다. 강주에는 우전전(牛田錢) 7)이 백만(百萬)이나

있었는데 자사가 이를 연회의 비용으로 써오고 있는 것이 관례였다. 

전휘는 말하기를 『이것은 농사짓는 데 대비하는 돈이니 다른 곳에 써서야 되겠는가』하고 명하여 

가난한 사람들의 부세(賦稅)에 충당하도록 하였다.
판서 정상순(鄭尙淳) 8)이 평안도 감사로 있었을 때에 2년 만에 갈렸으되 끝내 연광정(練光亭) 9)에는

올라가 보지도 아니하고 돌아왔다. 평일에 집에 있을 때에도 그의 도움을 받고서야 끼니를 지을 수 있는 자가

40여 호나 되었다. 그 아우가 나력 10)이란 병이 들어 의원의 지시에 따라 뱀의 회를 먹게 되었는데,

그가 스스로 먼저 먹어보고서 『그 맛이 아주 좋다. 너도 먹어보아라』 하였다.]

 

[각주]
1) 주박(朱博) : 중국 한(漢)의 두릉인(杜陵人). 자는 자원(子元). 승상(丞相)을 지내고 양향후(陽鄕侯)에 봉했다.
2) 이급(李及) : 중국 송(宋)의 정주인(鄭州人). 자는 유기(幼幾). 어사중승(御史中丞)을 지냈다.
3) 항주(杭州) : 중국 절강성(浙江省)에 있는 주명(州名).
4) 전당(錢塘) : 중국 절강성(浙江省)에 있는 지방명. 전당지방은 항주에 속한다. 유명한 경승지(景勝地)이다.
5) 전휘(錢徵) : 중국 당(唐)의 문신. 자는 울장(蔚章). 문종(文宗) 때 이부상서(吏部尙書)를 지냈다.
6) 강주(江州) : 중국 강서성(江西省)에 있는 주명(州名).
7) 우전전(牛田錢) : 우전(牛田)은 『이예(履禮)』지관(地官) 재사(載師)조에 보이는바,

    공가의 목축자에게 지급하는 전토(田土)라 했으니, 대개 경우(耕牛)의 사육(飼育)에 관계되는 돈인 듯하다.
8) 정상순(鄭尙淳) : 경종 3(1723)∼? 자는 돈부(敦夫), 본만은 동래(東萊). 영조 29년(1753) 알성문과에 급제,

    병조판서(兵曹判書)·수어사(守禦使)를 지냈다.
9) 연광정(練光亭) : 평양 대동강(大同江) 가의 정자명(亭子名). 조선 중종 때 감사(監司) 허굉(許硡)이 세웠는데,

    경치 좋기로 이름난 곳이다.
10) 나력(瘰癧) : 경부(頸部)의 임온선(淋溫腺)에 일어난 만성(慢性) 종창(腫脹).


★ 治理旣成 衆心旣樂 風流賁飾 與民偕樂 亦前輩之盛事也.
    (치리기성 중심기락 풍류분식 여민해락 역전배지성사야. )
    다스리는 일도 이루어지고 사람들의 마음도 이미 즐겁다면 풍류를 마련해서 백성들과 함께 즐기는 것도

    또한 선배들의 훌륭한 일이었다.

 

[소동파(蘇東坡) 1)가 여항(餘杭) 2)을 맡아 다스리매, 서호(西湖)에서 놀이를 하는 때에는 흔히 속관(屬官)들로

하여금 여러 깃발을 앞세우고 전당문(錢塘門)으로 나오게 하고, 자신은 용금문(湧金門)으로부터 한둘의 노병(老兵)을

따라 배를 타고 호수를 가로질러 와서 보안원 3)에서 밥을 먹고 영은(靈隱)·천축(天竺) 4) 사이에서 노닐었다.

공문서가 있으면 뒤따르게 하여 냉천정(冷泉亭) 5)에 이르러서는 책상에 의지하여 명쾌하게 처리하되 

붓을 휘두르는 것이 마치비바람처럼 빨랐고, 싸움과 소송을 갈라 해결하되 말하고 웃어가면서 처리하였다. 

그리고는 속관들과 더불어 실컷 마시고, 저녁 으스름에 말을 타고 돌아오는데, 

길 양쪽으로는 사람들이 등불을 밝혀 들고 태수를 마음놓고 구경하게 하였다. 

소흥(紹興) 6) 말년에 90여세나 되는 늙은 중이 있었는데, 이가 어릴 적에 보안원의 노복으로 있으면서 

본 일을 말한 것이다. 당시 소동파의 호협한 기상과 뛰어난 운치를 가히 상상해볼 수 있을 것이다.

황간(黃?) 7)이 안경부(安慶府) 8)를 맡아 다스릴 때에, 치적이 이미 이루어졌는데 마침 상원일(上元日) 9)에

등불놀이를 벌이니, 백성들이 늙은이는 부축하고 어린애는 이끌고 왕래하는 자가 끊이지 않았다.

한 노파가 있었는데 나이 100세였다. 두 아들이 가마로 모시고 여러 손자가 뒤를 따라 관아로 와서 감사를 드리었다.

황간이 예(禮)로 대하며 명해서 술과 안주를 차리게 하고 또 돈과 비단으로 위로하니,

노파가 『이 늙은 것이 온 것은 온 고을의 생령(生靈)을 위해 감사드리려 함이요, 

태수의 내려주시는 것을 바라서가 아닙니다』 하고는 받지 아니하고 돌아갔다.

채경(蔡京) 10)이 영흥(永興) 11)의 수령으로 있을 때에, 상원일에 궂은비가 사흘을 계속하여 나가 놀지를 못하였다.

17일에 비가 그치거늘 다시 이틀 동안 등불놀이를 하고자 한대, 아전이 말하기를 『여느 해에 등불놀이에 소용되는

기름이 대단히 많이 들므로, 임박하여 마련해내기가 결코 불가능합니다』하였다. 그래서 채경은 비성고(備城庫)12)에

저장해둔 기름을 갖다 쓰게 하였는데, 이 때문에 전운사(轉運使)의 탄핵을 받게 되었다.
생각컨대 이와 같은 일은 마땅히 거울삼아 경계해야 될 것이다.
채군모(蔡君謨) 13)가 복주 14)의 수령으로 있을 때에 상원일에 백성들로 하여금 등잔 7개씩을 불켜게 하였는데,

진열(陳烈) 15)이 큰 등을 만들고 그 위에 시를 지어 써붙이었다. 『부자집의 한 등잔은 큰 창고의 한톨 좁쌀이지만,

가난한 집 등잔 하나는 심장의 살을 도려낸 것이다. 풍류 태수(太守)는 아는가 모르는가.

그래도 오히려 생황(笙簧)을 울리면서 묘곡(妙曲) 없음을 서운해하데.』
강진(康津)의 수령이 사랑하는 기생이 있었다. 기생이 등불놀이를 보고 싶어하자, 그가 4월 초파일에 성중(城中)에

영을 내려 등불을 달도록 하고, 그 막대기 길이가 높은 자를 상주기로 하였다. 이에 아전과 군교들이 포구로 나가서

배 안의 돛대를 모조리 빼앗았다. 먼 섬 백성들이 장차 어장에 나가려면 잠시도 지체할 수가 없으므로 돈으로써

돛대를 물려받아 가게 되었는데, 한 배가 돈 2백 문(文)씩을 모두 내어놓아 원성(怨聲)이 바다에 가득하였다.

그러니 수령의 한번 움직임이란 어려운 것이다.
정한봉(鄭漢奉)이 이런 이야기를 하였다. 『몇 사람 관인(官人)이 휴가를 얻어 노래하고 춤추는 자들을 데리고

승방(僧房)에 가서 놀았는데, 술이 얼근해지자 선배들의 시(詩)를 외우기를 「죽원(竹院) 16)을 지나다가

중을 만나 이야기하니, 다시 또 떠도는 생애 가운데의 반나절 한가로움을 얻었네」 하였다.

중이 듣고 웃어 말하기를 「존관은 반나절의 한가로움을 얻었지만, 노승은 도리어 사홀 동안 바쁘게 되었읍니다.

하루는 장막을 치고, 하루는 잔치를 차리고, 하루는 소제를 해야 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
고을의 수령이 한번 절에서 놀면 중들이 접대하는 비용은 거의 반년 동안의 생활비를 써버리게 된다.

같이 간 사람들이 술· 밥· 담배· 신발을 으례 토색하게 마련이요, 또 만약 기생을 데리고 가서 풍악을 잡히고 광대를

시켜서 잡회를 벌이게 되면, 뭇 남녀가 와서 구경하면서 다 중에게 밥을 토색하게 되니 중들이 감당할 수 있겠는가.

혹시 돈과 쌀을 주어서 그 비용을 갚기도 하지만, 비록 면전에서 친히 준다고 하더라도 수령이 문 밖을 나서면

아전과 관노들이 곧 빼앗아 가버린다. 혹 세미자문(稅米尺文) 17)쌀을 받았다는 내용을 기재한 작은 文券을 주어야만

바야흐로 겨우 받을 수가 있을 것이다.
『다산필담(茶山筆談)』에 일렀다. 『지난해 봄에 내가 작은 배를 타고 가우도(駕牛島) 18) 어촌에 놀러갔더니,

현감이 역시 배를 타고 만덕사(萬德寺) 19)에 이르러 놀이를 벌이고 있었다. 내가 어촌에 이르러 어부들의 이야기를

들으니, 바다에 있던 배가 항구에 들어오면 아전과 군교들이 배 한 척마다 돈 200문씩을 토색해 가고,

고기잡이 통발이 바다 가운데에 수십 곳이 있지만, 밀물 썰물에 잡히는 것을 모조리 빼앗아가되,

모두가 수령의 놀음을 핑계삼는다고 하였다. 아아, 수령이 어찌 알 것인가. 내가 바야흐로 석양에 작은 노를 저어

먼 갈대와 버들 사이를 따라가면서 산 허리에 있는 절간을 바라다보니, 붉은 옷 푸른 옷이 어울려 있고

피리 소리 장고 소리가 한창 울렸으며, 그들은 어촌 여러 백성들이 눈흘겨 저주하며 욕하는 줄을 모르고 있었다.

아아, 백성의 웃사람 노릇하기 또한 어렵지 아니한가.』]

 

[각주]
1) 소동파(蘇東坡) : 중국 북송(北宋)의 문인(文人). 이름은 식(軾), 동파(東坡)는 그의 호. 그 아버지 순(洵),

    아우 철(轍)과 더불어 삼소(三蘇)라 일컬음. 당송팔대가(唐宋八大家)의 한 사람.
2) 여항(餘杭) : 중국 절강성에 있는 현명(縣名).
3) 보안원(普安院) : 중국 항주(杭州)에 있는 절 이름.
4) 영은(靈隱)·천축(天竺) : 둘 다 중국 항주(杭州)에 있는 절 이름이다.
5) 냉천정(冷泉亭) : 중국 신강성(新江省) 항현(杭縣)의 비래봉(飛來峯) 아래에 있는 정자명(亭子名).
6) 소흥(紹興) : 중국 보송(甫宋) 고종(高宗)의 연호(1131∼1162).
7) 황간(黃幹) : 중국 송(宋)나라 민현(?縣)사람. 자는 직경(直卿), 호는 면재선생(勉齋先生), 시호는 문숙(文肅).

    주희(朱熹)의 제자이며 사위였다. 한양군(漢陽郡), 안경부(安慶府)를 잘 다스려 안경사람들이

    그를 황부(黃父)라 일컬었다. 저서로는 『시해(詩解)』『면재문업(勉齋文業)』이 있다.
8) 안경부(安慶府) : 중국 안징성(安徵省)에 있는 부명(府名).
9) 상원일(上元日) : 음력 정월 보름날. 명절(名節)로 지내왔다.
10) 채경(蔡京) : 중국 북송(北宋) 말기의 정치가. 당시의 신법당으로서 소위 6적의 우두머리. 소인의 평을 들었다.
11) 영흥(永輿) : 중국 호남성(湖南省)에 있는 현명(縣名).
12) 비성고(備城庫) : 군사적인 쓰임새에 대비하여 평소 저장해 두는 공창(公倉)인듯하다.
13) 채군모(蔡君謨) : 중국 송대(宋代)의 학자· 정치가· 서예가. 이름은 양(襄), 군모(君謨)는 그의 자.
14) 복주(福州) : 중국 복건성(福建省)에 있는 주명(州名).
15) 진열(陳烈) : 중국 송(宋)의 후관인(侯官人). 자는 계자(季慈). 성품이 개벽하고 효우하며 학행이 있었다.

16) 죽원(竹院) : 대숲 속에 있는 집.
17) 세미자문(稅米尺文) : 세미는 조세로 내는 쌀. 자문은 관부가 부세 따위를 수납하고 써주는 수령 증명서.
18) 가우도(駕牛島) : 전남 강진(康津) 앞바다의 작은 섬 이름.
19) 만덕사(萬德寺) : 강진(康津)에 있는 절 이름.


★ 簡其騶率 溫其顔色 以詢以訪 則民無不悅矣.
    (간기추솔 온기안색 이순이방 즉민무불열의, )
    수행(隨行)을 줄이고 그 얼굴빛을 부드럽게 해서 백성들의 사정을 묻는 다면 기뻐하지 않을 백성이 없을 것이다.

 

[고려 서침(徐琛) 1)이 울진 현령이 되어 선정이 많았는데 일찌기 소를 타고 다니면서 농사를 권하기도 하였다.
박세량(朴世樑) 2)이 신창(新昌) 3) 현감으로 있으면서, 모든 일이 간약(簡約)하였다. 관아에서 일을 보면서도

북이나 나팔 소리를 내지 않았고, 문을 나설 때에도 하인을 거느리지 않았으며, 병이 나지 않고는 여러가지 반찬을

들지 않았고, 큰 더위가 아니면 일산(日傘)을 펴지도 않았다. 매 농사철을 당하면 아전들이 농사일 보러 가는 것을

모두 들어주어 관아를 지키는 자가 겨우 몇 사람뿐이요, 소용되는 땔나무는 동복(童僕)을 시켜서 장만해오게 하였다.

여가가 나면 단건(短巾) 편복으로 지팡이를 짚고 소요하였는데, 당시 사람들이 그를 알아차리지도 못하였다.
유의(柳誼)가 홍주(洪州) 4) 목사(牧使)로 있을 때에, 조랑말 하나를 타고 아이종 둘을 데리고서 야외로 순행하다가

들밥을 이고 가는 아낙네를 만나면 그 밥보자기를 풀어보게 하여 나물 반찬이 빈약하면 그 게으름을 경계하고,

반찬이 너무 많으면 그 지나치게 낭비함을 책망하니 백성들이 크게 기뻐하였다.]

 

[각주]
1) 서침(徐琛) : 고려말 정몽주(鄭夢周)의 문인(門人). 혜정(惠政)으로 유명하였다.
2) 박세량(朴世樑) : 인조 6∼숙종 19(1628∼1693) 자는 하경(廈卿), 본관은 반남(潘南).

영천군수등을 역임했는데 선정(善政)이 많았으며 생불(生佛)이라 칭도되었다.
3) 신창(新昌) : 충남 아산(牙山)에 있는 현명(縣名).
4) 홍주(洪州) : 충남 홍성(洪城)의 주명(州名).

 


★ 政堂有讀書聲 斯可謂之淸士也.
    (정당유독서성 사가위지청사야. )
    정당(政堂)에 글 읽는 소리가 나면, 이는 곧 청렴한 선비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임금은 만가지 정무(政務)가 지극히 번거롭되 오히려 날마다 경연(經筵)에 나오고자 하니,

진실로 성현의 격언을 가슴 속에 스며들게 하여 이를 정치에 편다면 자연 그 유익함이 넓고도 크게 된다.

수령도 공무에 틈이 나거든 마땅히 『상서(尙書)』『노론(魯論)』1)『중용(中庸)』『대학(大學)』 및

『송명신록(宋名臣錄)』2) 『자경편(自警編)』3) 등의 책을 항상 읽고 외우도록 할 것이다.
유중영(柳仲?)이 예(禮)로써 자신을 바르게 하여 단정히 앉아 손을 꽂고 있더니, 세 번이나 큰 진(鎭) 4)을 맡아

거느리면서도 마굿간에는 좋은 말이 없고 옷에서는 좋은 향내가 나지 않았다.

공무에서 물러나면 반드시 책을 읽었으며, 손에서 책을 놓는 법이 없었다.
완평부원군(完平府院君) 이원익(李元翼) 5) 정승이 이르기를 『내가 평일에는 역시 책보기를 좋아하지만,

벼슬살이할 경우에는 책을 묶어서 책장에 넣어버리고 마음을 공사(公事)에 오로지할 뿐이다.

요새사람들은 고을을 맡아 다스리면서도 글을 읽는다지만, 이는 내 재주로서는 능히 미치지 못하는 바다』하였다.

그의 諡狀에서 나왔다
이의전(李義傳) 6)完平의 孫子이다은 매양 고을을 다스리면서도 일이 없을 때면 손에서 책을 놓는 법이 없었다.

말하기를 『일이 생기기 전에 백성을 다스리면 번거롭게 굴지 않아도 일은 저절로 간략하게 된다.

옛일에 해박하게 되면 논의가 많이 남들을 깨우치게 될 것이다』하였다.
무신(武臣) 원영주(元永胄) 7)가 장흥부사(長興府使)가 되었을 때에 판서(判書) 권엄 8)이 당시의 감사로 있으면서

그의 치적을 상고(上考)로 매겨 올리기를 『관아에서 글을 읽는다』하였더니, 선왕(先王) 9)이 하고(下考) 10)에

두도록 명하였다. 글만 읽고 일을 보살피지 아니하는 자는 진실로 폄하되어야 할 것이다. 

내가 말하는 바는 때때로 성현의 글 한두 장씩을 읽어서 가슴 깊이 젖어들게 함으로써, 

착한 마음이 느껴 일어나게 하고자 하는 것일 뿐이다.]

 

[각주]
1) 『노론(魯論)』 : 소위 진(秦)의 분서 이후 한대(漢代)에 3종의 『논어』, 즉 재론(齋論)·고론(古論)·노론(魯論)이

    있었는데, 노론(魯論)은 노인(魯人)이 전했다는 것으로, 오늘날 유포(流布)하는 『논어(論語)』
2) 『송명신록(宋名臣錄)』 : 『명신언행록(名臣言行錄)』의 다른 이름. 전집· 후집은 주희(朱熹)의 편(編),

    속(續)·별(別)·외집(外集)은 이유무(李幼武)의 보집(補輯). 송대(宋代) 명신(名臣)의 언행을 집록(集錄)한 책.
3) 『자경편(自警編)』 : 책 이름. 송대(宋代) 조선료(趙善?) 찬(撰). 송대 현인의 사적을 학문(學問)· 조행(操行)·

    제가(齊家)·접물(接物)·출처(出處)·사군(事君)·정사(政事)·습유(拾遺)의 8문(門)으로 나누어 기록한 것이다.

4) 진(鎭) : 전략상의 요지에 설치했던 군진(軍鎭).
5) 이원익(李元翼) : 명종 2∼인조 12(1547∼1634) 자는 공려(公勵), 호는 오리(梧里) 본관은 전주(全州).

    영의정을 지내고 완평부원군(完平府院君)에 봉했다. 상공(相公)은 의정(議政)에 대한 이칭(異稱)이다.
6) 이의전(李義傳) : 선조 1∼인조 25(1568∼1647) 이원익(李元翼)의 아들. 자는 의중(宜仲).

    4현(縣)·5군(郡)·2부(府)를 다스리면서 치적이 많았다. 원주(原註)에 완평(完平)의 손자라고 한 것은 잘못이다.
7) 원영주(元永胄) : 정조 때의 무신. 함경(咸鏡) 북병사(北兵使)를 지냈다.
8) 권엄 : 영조 5∼순조 1(1729∼1801) 자는 공저(公著), 호는 엽서(葉西). 병조판서(兵曹判書)를 지냈다.
9) 선왕(先王) : 돌아가신 임금이란 뜻이니, 여기서는 정조를 가리킨다.
10) 하고(下考) : 관원의 치적 평가를 직속상관이 상(上)·중(中)·하(下)로 평가하여 중앙에 보고하는바,

      상고(上考)는 상등(上等), 하고(下考)는 하등(下等)이다.


★ 若夫哦詩賭棋 委政下吏者 大不可也.
    (약부아시도기 위정하리자 대불가야. )
    만약 시(詩)나 읊조리고 바둑이나 두면서 정사(政事)를 아래 아전들에게 맡겨두는 것은 크게 그릇된 것이다.

 

[성종(成宗) 때에 뇌계(뇌溪) 유호인(兪好仁) 1)이 부모 봉양하기를 청하여 산음(山陰) 2) 현감이 되었다.

영남(嶺南) 방백(方伯) 3)이 임금께 하직을 고하니, 임금이 불러보고서 『내 친구 유호인이 지금 산음 고을을 맡아

있으니, 경(卿)은 가서 두둔(斗頓)곧 보호해 준다는 뜻이다해 주도록 하라』하였다.

방백은 마침내 그가 백성의 아픔을 돌보지 아니하고 시(詩)만 읊조려 그치지 않는다 하여 파직시켰다.
남창(南?) 김현성(金玄成) 4)이 여러 번이나 주군(州郡)을 맡아 다스렸는데, 손을 씻은 듯 깨끗하게 직책에 봉사하여

청렴한 소문이 세상에 드러났다. 그러나 성품이 심히 소방(疎放)하여 실무에는 익숙하지 못하였고 매질하는 것을

일삼지 않았으며, 담담하게 영재(鈴齋) 5)에 앉아 종일 시(詩)를 읊조리고 있었다. 말하기 좋아하는 자들이

『남창이 백성 사랑하기를 자식처럼 하지만 온 고을이 원망하며 탄식하고, 티끌만한 것도 사사로이 범하지 않으나

관청 창고는 바닥이 났다』고 하여, 이 말이 한때의 웃음거리가 되었다.
도간(陶侃) 6)이 광주(廣州) 7) 자사로 있을 때에 종일토록 무릎을 모으고 단정히 앉아 군사에 관한 여러가지 일을

남김없이 검토 관리하여 조금도 한가히 놀지 않았다. 여러 참모·속관 들이 혹 이야기나 장난을 하면서 일을 폐하는

자가 있으면, 명해서 그 술그릇이나 놀음기구들을 모조리 강물에 던져 넣어버리고, 군교(軍校)·아전 들에게는

매를 때리면서 『저포(樗蒲) 8)놀음은 돼지 치는 종놈들이나 하는 놀음이다』 하였다.
영호도(令狐?)가 이원(李遠) 9)을 항주(杭州)의 자사(刺史)로 천거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내가 들으니 원(遠)의

시에 「온종일을 오직 한판의 바둑으로 소일하노라」고 하였다니, 어찌 능히 백성을 다스릴 수 있겠는가』하였다.

영호도가 말하기를 『시인(詩人)이 흥에 부쳐서 그러한 것이요, 사실이 반드시 그러하지는 않을 것입니다』라고 

한즉, 임금이 『우선 보내어 시험해보도록 하오』 하였다. 바둑은 그래도 아취가 있는 것이다. 근래의 수령들은

정당(政堂)에서 저리(邸吏)나 읍자(邑子) 10)·하인의 무리들과 더불어 마조강패(馬弔江牌) 11) 놀음으로 날을 다하고

밤을 새우니, 체모의 손상이 이에 이르러 더할 수가 없이 되었다. 아아, 장차 어찌할 것인가.]

 

[각주]
1) 유호인(兪好仁) : 세종 27∼성종 25(1445∼1494) 자는 극이(克已), 호는 반계(潘溪). 김종직의 문인.
2) 산음(山陰) : 경남 산청(山淸)에 있는 현명(縣名).
3) 방백(方伯) : 한 지방 제후의 우두머리란 뜻으로서 조선왕조 때에는 각도의 관찰사를 가리키는 아칭으로 쓰였다.
4) 김현성(金玄成) : 중종 37∼광해군 13(1542∼1621) 자는 여경(餘慶), 남창은 그의 호. 동지돈녕부사를 지냈다.
5) 영재(鈴齋) : 장수 혹은 수령의 거처. 일반적으로 동헌(東軒)이라 일컫는다.
6) 도간(陶侃) : 중국 진(晋)나라 사람. 자는 토행(土行), 시호는 항(恒). 효렴과(孝廉科) 출신으로 대장군을 지냈다.
7) 광주(廣州) : 중국 광동(廣東)·광서성(廣西省)에 걸쳐 있는 고주명(古州名).
8) 저포(樗蒲) : 윷놀이와 비슷한 놀음의 한가지.
9) 이원(李遠) : 중국 당(唐) 선종(宣宗) 때 사람. 태화(太和) 연간의 진사(進士). 항주자사(杭州刺史)를 지냈다.
10) 읍자(邑子) : 읍인(邑人)의 자제들. 읍내(邑內)의 건달스러운 자들.
11) 마조강패(馬弔江牌) : 투전 놀음.


★ 循例省事務 持大體 亦或一道 唯時淸俗淳 位高名重者 乃可爲也.
    (순례성사무 지대체 역혹일도 유시청속순 위고명중자 내가위야. )
    관례에 따라 일을 살피고 대체(大體)를 잡도록 하는 것도 한 가지 방법이기는 하지만,
    오직 시대의 풍속이 맑고 순후하며 자기의 지위가 높고 명망이 두터운 사람만이 그럴 수가 있는 것이다.

 

[육가(陸賈) 1)가 말하였다. 『군자가 다스림에는 흔연히 일이 없고 적연히 소리가 없다. 

관아에 사람이 없는 듯하고 정(亭)마을에는 아전이 없는 것 같다. 역(驛)에는 급한 일로 밤길을 달리는 역졸이 없고,

향촌에도 밤중에 군사를 불러 모으는 일이 없다. 노인들은 집에서 맛있는 음식을 먹고, 

장정들은 들에서 밭갈이를 하게 된다. 』
한(漢)나라 초기는 진(秦)나라의 가혹한 정치를 뒤이었으므로 백성들과 더불어 휴식을 취하고자 하여 그 말이

대개 이와 같았던 것이다. 평범한 사람이 이를 흉내내어 손을 꽂고 묵묵히만 있으면 만사가 다 잘못되고 말 것이다.
급암(汲黯) 2)이 동해(東海) 3)의 태수가 되었을 때에, 백성을 다스리되 맑고 깨끗한 것을 좋아하여,

자기의 속관(屬官)을 골라서 일을 맡기고 그 다스림에는 대체(大體)만을 살필 뿐이요 조금도 가혹하지 않았다.

급암이 병이 많아서 안방에 누워 한 해를 넘기도록 밖으로 나가 보지 않았으나 동해 지방이 잘 다스려졌다.
생각컨대 급암은 평소 위엄과 명망이 두터웠으며 또 사람을 알아보아서 맡겼으므로 이와 같을 수가 있었던 것이다.

평범한 사람이 이 방법을 본뜨다가는 집집마다에서 근심하고 한탄하는 소리가 나게 될 것이다.
당(唐)의 육상선(陸象先) 4)이 포주(蒲州) 5)를 다스리게 되었는데, 

일찌기 말하기를 『천하에는 원래 일이 없는데, 용렬한 사람들이 흔들어 일으키는 것이다. 

진실로 그 근원을 맑게 한다면 간략하게 되지 않을 것을 어찌 근심하리요』
남송(南宋)의 사비 6)가 의흥(義興) 7)을 지킬 때에, 잡다한 일은 돌보지 아니하고 모두 강기(綱紀) 8)에게 

맡기면서 말하기를 『나는 다만 태수(太守) 노릇만 하면 되는 것이다』 하였다.
생각컨대 이것이 이른바 대체를 잡는다는 것이다. 위엄과 명망이 평소에 드러나야만 이와 같이 할 수 있을 것이요,

못난 사람이 이를 흉내내다가는 모든 일이 그릇되고 말 것이다.]

 

[각주]
1) 육가(陸賈) : 중국 한(漢) 초기 사람. 고조를 도와 통일에 힘쓰고 왕실을 부호(扶護).

대중대부(大中大夫)를 지냈으며 저서에 『신어(新語)』가 있다.
2) 급암(汲黯) : 중국 경제(景帝)∼무제(武帝) 때 사람. 자는 장유. 동해·회양태수를 지냈으며 황노학에 심취하였다.
3) 동해(東海) : 중국 산동(山東)·강소성(江蘇省)에 걸쳐 있던 고군명(古郡名).
4) 육상선(陸象先) : 중국 당나라 사람. 자는 숭현(崇賢), 본명은 경초(景初). 동중서문하평장사·태자소보를 지냈다.
5) 포주(蒲州) : 중국 산서성(山西省)에 있는 주명(州名).
6) 사비 : 중국 남북조(南北朝) 시대의 송인(宋人). 자는 경충(敬沖).

제(齊)·양조(梁朝)에 걸쳐 시중(侍中)·사도(司徒)·상서령(尙書令)을 지냈다.
7) 의홍(義興) : 중국 강소성(江蘇省)에 있는 군명(郡名).
8) 강기(綱紀) : 수령의 속관(屬官)인 주부(主簿)의 별칭.


 

 

제 2 장 청심(淸心) :

           (맑은 마음가짐. 여기서는 수령이 청렴해야 하는 것을 말하고 있다.)


★ 廉者 牧之本務 萬善之源 諸德之根 不廉而能牧者 未之有也.
    (염자 목지본무 만선지원 제덕지근, 불렴이능목자 미지유야. )
    청렴이란 수령의 기본 임무이며 모든 선(善)의 원천이며 모든 덕(德)의 근본이다.

    청렴하지 않고 수령 노릇을 할 수 있었던 자는 일찍이 아무도 없었다.

 

[우리 조선조에 청백리(淸白吏) 1)로 뽑힌 자가 통틀어 110명인데, 태조(太祖) 이후에 45명, 

중종(中宗) 이후에 37명, 인조(仁祖) 이후에 28명이었다. 경종(景宗) 이후로는 드디어 이렇게 뽑는 것조차 끊어지고,

나라는 더욱 가난해지고 백성은 더욱 곤궁하게 되었으니, 이 어찌 한심하지 않은가! 

400여 년 동안에 속대입조자(東帶立朝者) 2)가 거의 천 명이나 만 명인데 그중에서 청백리로 뽑힌 자가 

겨우 이 수에 그쳤으니 역시 사대부의 수치가 아니겠는가.

『상산록(象山錄)』에서는 이렇게 말했다. 『청렴에는 세 등급이 있다. 최상의 것은 봉급 외에는 아무것도 먹지

않으며, 먹고 남는 것은 역시 가지고 집에 돌아가지 않으며, 벼슬을 그만두고 집으로 돌아가는 날에 한 필의 말로

조촐하게 가는 것이니, 이것이 옛날의 이른바 염리(廉吏) 3)라는 것이다. 그 다음은 봉급 외에 명분이 바른 것은 

먹고 바르지 않은 것은 먹지 않으며, 먹고 남은 것은 집으로 보내는 것이니, 이것이 중고(中古)의 이른바

염리라는 것이다. 최하의 것은 무릇 이미 규례(規例)로 되어 있는 것이라면 비록 명분이 바르지 않더라도 먹지만,

규례로 되어 있지 않은 것은 죄를 먼저 짓지 않으며, 향임(鄕任)의 자리를 팔지 않으며, 재감(災減) 4)을 훔쳐먹거나

곡식을 번롱하지 않으며, 송사· 옥사를 팔아먹지 않으며, 조세를 더 부과하여 나머지를 착복하지 않는 것이니,

이것이 오늘날의 이른바 염리라는 것이다. 모든 악(惡)을 갖추어 있는 자가 오늘날 도도한 대세를 이루고 있다.

능히 최상을 하는 것이 진실로 좋지만 능히 그렇게 할 수 없다면 오히려 그 다음 것을 해도 좋다.

소위 최하에 해당하는 경우에는 옛날에 있어서는 반드시 팽형(烹刑) 5)을 당했을 것이다.

대개 선을 좋아하고 악을 부끄럽게 여기는 자는 결코 그렇게 하지는 않을 것이다.』
양병(楊秉) 6)은 청렴하고 검소하고 우아하고 소박하였다. 그는 예주(豫州)· 형주(荊州)· 서주(徐州) 및 연주의 

네 곳 자사를 역임하였는데, 날짜를 계산하여 봉록을 받되 봉록 중에 남는 것을 제 집으로 들여보내지 않았다. 

집안이 가난하여 하루 끼니를 이틀로 나누어 먹었는데도 일찌기 말하기를 『내게는 세 가지 불혹(不惑)이 있으니,

곧 술과 계집과 재물이다』고 하였다.後漢 楊震의 아들이다
충의공(忠毅公) 산운(山雲) 7)은 청렴하고 정직하기가 짝이 없었다. 광서수부(廣西帥府) 8)에 정뇌(鄭牢)란 자가

있었는데 늙은 하인이었다. 그는 성품이 강직하고 바른말을 잘하였다. 산운이 그에게 묻기를『세상에서 말하기를

장군이 되면 탐욕하여도 탓하지 않는다고 하는데, 나도 역시 탐해도 되지 않겠는가?』하니,

정뇌가 대답하기를 『공이 처음 도임하심에 마치 새롭고도 깨끗한 흰 도포 같사온데 한점 먹물에 더러워지면

끝내 씻을 수가 없을 것입니다』하였다. 또 묻기를『사람들의 말에 토착 미개인들이 보내오는 선물을 받아주지

않으면 저들이 반드시 의심하고 성낼 것이라고 하는데, 어찌하면 좋을까?』하니,

정뇌가 대답하기를 『벼슬자리에 있으면서 뇌물을 받아 먹으면 조정에서 중한 벌이 있을 것입니다.

조정을 두려워하지 않고 도리어 미개인을 두려워하겠읍니까?』하였더니, 산운이 웃으면서 그 말을 받아들이었다.

광서지방을 진무한 지 10년 동안에 청렴한 지조는 끝내 변하지 않았다.]

 

[각주]
1) 청백리(淸白吏) : 청렴결백한 관리. 조선에서는 의정부, 6조(曹), 경조(京兆)의 2품 이상의 당상관(堂上官)과

사헌부(司憲府)·사간원(司諫院)의 우두머리가 천거하여 청렴결백한 관리를 선정하여 청백리라 하였다.
2) 속대입조자(束帶立朝者) : 예복을 입고 조정에서 벼슬하는 자.
3) 염리(廉吏) : 청렴한 관리.
4) 재감(災減) : 재결(災結) 즉 자연적인 재해를 입은 논밭에 부과되는 세(稅)를 면세(免稅)해 주는 것.
5) 팽형(烹刑) : 삶아 죽이는 형벌.
6) 양병(揚秉) : 중국 후한(後漢) 환제(桓帝) 때에 벼슬이 태복(太僕)·태상(太常)에 이르렀다.

홍농화음(弘農華陰) 사람. 자는 숙절(叔節). 양진(楊震)의 둘째아들.
7) 산운(山雲) : 중국 명(明)나라 사람. 시호는 충의(忠毅)이다. 관직은 정만장군, 우도독 동지(同知)를 역임.

본문 「양의(襄毅)」는 시호가 잘못 기록된 것으로 보인다.
8) 광서수부(廣西帥府) : 중국 동남부 지역으로 남쪽이 월남에 접경하고 있는 곳이다. 명(明)나라 홍무(洪武) 9년에

승선포정사사(承宣布政使司)를 두었는데 이것이 곧 광서포정사사(廣西布政使司)로 되었다.

광서수부(廣西帥府)는 이 포정사사(布政使司)를 지칭한 것 같다.


 廉者 天下之大賈也, 故大貪必廉 人之所以不廉者 其智短也.
    (염자 천하지대가야, 고대탐필렴 인지소이불렴자 기지단야. )
    청렴은 천하의 큰 장사와 같기 때문에 크게 탐하려는 자는 반드시 청렴하려 할 것이며,

    사람이 청렴하지 못한 것은 그 지혜가 부족하기 때문이다.

 

[공자(孔子)가 말하기를, 『인자(仁者)는 인(仁)을 편안히 여기고 지자(知者)는 인을 이롭게 여긴다』1)하였는데,

내가 생각하기에 『청렴한 자는 청렴함을 편안히 여기고 지자는 청렴함을 이롭게 여긴다』하겠다. 

무엇 때문인가? 재물이란 우리 사람들이 크게 욕심내는 바이다. 

그러나 욕심내는 것에 재물보다 더욱 큰 것이 있으므로 재물을 버리고 취하지 않기도 한다. 

비록 재물을 얻는 데 뜻을 둔다 하더라도 당연히 염리(廉吏)가 되어야 하니 무엇 때문인가?

매양 보면, 지벌(地閥)이 화려하게 드러나고 재망(才望)이 가득한 사람이 돈 수백꾸러미에 빠진 바 되어

관직을 박탈당하고 귀양가서 10년이 지나도록 등용되지 않는 경우가 허다하다. 비록 세력이 높고 때를 잘 만나서

형벌을 면할지라도 여론은 그 비루함을 침뱉게 되어 깨끗한 명망이 떨어질 것이다.

문신이 이렇게 되면 관각(館閣) 2)벼슬을 얻지 못하게 되고, 무신(武臣)이 이렇게 되면 장수가 되지 못할 자들이

또한 얼마나 많겠는가? 지혜가 높고 사려가 깊은 사람은 그 욕심이 크므로 염리가 되고, 지혜가 짧고 사려가 얕은

사람은 그 욕심이 작으므로 탐리(貪吏)가 되는 것이니 진실로 생각이 능히 여기에 미친다면 청렴하지 않을 사람이

거의 없을 것이다, 송(宋)나라 농부가 밭갈이를 하다가 옥을 주웠는데 이 옥을 사성(司城)인 자한(子罕) 3)에게

바쳤으나 자한이 받지 않았다. 농부가 청하기를 『이것은 농부들의 보배입니다. 바라옵건대 상공(相公)께서는

받아주시옵소서』하였더니, 자한이 말하기를 『그대는 옥을 보배로 삼고, 나는 받지 않는 것을 보배로 삼으니,

만일 내가 그것을 받는다면 그대와 내가 모두 보배를 잃는 셈이네』하였다.
공의휴(公儀休) 4)가 노(魯)나라 재상이 되었는데, 어떤 사람이 물고기를 보내왔으나 받지 않았다.

그 사람이 말하기를, 『재상께서는 물고기를 좋아하신다고 들었사온데 재상께 보내온 물고기를 어찌하여 받지

않으십니까?』하니, 공의휴가 『물고기를 좋아하기 때문에 받지 않는 것이오. 이제 재상이 되었으니 스스로 

물고기를 마련할 수 있게되었소. 이제 물고기를 받아서 도리어 면직이 되면 다시 누가 나에게 물고기를 주겠소.

내가 그 때문에 받지 않는 것이오』라고 대답하였다.
양진(楊震)이 탁군(涿郡) 5) 태수가 되었는데 성품이 청렴하였다. 누가 그에게 가산을 장만하도록 권하였더니,

양진은 응하지 않고 말하기를, 『후세 사람들로 하여금 청백리(淸白吏) 자손이라고 일컫게 하여,

이것을 물려주게 되면 역시 후한 것이 아니겠는가』하였다.]

 

[각주]
1) 『논어(論語)』이인(里仁)편에 나온다.
2) 관각(館閣) : 홍문관(弘文館)과 예문관(藝文館)을 말하는데,

이 두 곳의 관직은 학문과 인품이 탁월한 사람만이 참여할 수 있다고 하여 가장 명예로운 관직으로 여겼다.
3) 자한(子罕) : 사성(司城)은 중국 춘추시대(春秋時代) 송(宋)나라의 한 벼슬.

자한은 어진 대부(大夫)로서 성은 악(樂)이며 이름은 희(喜)이다. 청렴하기로 유명하였다.
4) 공의휴(公儀休) : 공의(公儀)는 성(姓)이며 휴(休)는 이름. 중국 춘추(春秋) 노(魯)나라 목공(穆公)의 재상.
5) 탁군(涿郡) : 중국 한(漢)나라가 설치한 군명(郡名). 부북성(溥北省)에 있다.


★ 故自古以來 凡智深之士 無不以廉爲訓以貪爲戒.
    (고자고이래 범지심지사 무불이렴위훈이탐위계. )
    그러므로 옛로부터 지혜가 깊은 선비는 청렴을 교훈으로 삼고 탐욕을 경계하지 않은 사람이 없었다.

 

[배협(裵俠) 1)은 『청렴은 벼슬살이의 근본이며 검약은 몸가짐의 바탕이다』라고 말하였다.
『율기잠(律己箴)』2)에 이르기를, 『오직 선비의 청렴은 여자의 순결과 같도다.

실로 한 오라기의 오점도 평생토록 흠이 되나니, 어두운 방이라 말하지 말라. 환하게 넷이 알고 있도다. 3)

너 스스로를 아끼지 않더라도 너의 마음의 신명(神明)까지 속일 수 있겠는가.

황금 대여섯 바리와 후추 팔백 곡(斛)이라도 4) 살아서는 영화가 되지 않을 것이요, 천 년이 지나도 욕을 당하게

될 것이라. 저 아름다운 군자여, 학 한 마리 거문고 하나, 바라보매 늠연하여 만고(萬古)의 청풍(淸風)이로다.』
포효숙공(包孝肅公) 5)이 가훈(家訓)으로 말하기를 『후세 자손에 벼슬살이하다가 부정을 범한 자는 집에 돌아오게 해서도 안되며, 죽은 후에 선영(先塋)에 묻힐 수도 없다. 내 뜻을 따르지 않으면 내 자손이 아니다』하고,

그 글 밑에 압자앙공(押字仰珙)하여 이것을 집 동쪽 벽에 돌로 새겨 후손에게 교훈으로 남겼다.
나경륜(羅景綸) 6)이 말하기를, 『사대부가 돈 한푼을 좋아하면 그의 값어치는 한푼어치도 못된다』고 하였다.
진간재(陳簡齋) 7)의 시(詩)에 『종래 이름있는 선비는 이름없는 돈은 쓰지 않는구나』하였다.
양백자(楊伯子) 8)가 말하기를 『사대부가 청렴하면 그것으로 칠푼은 이미 성취된 인간이다』고 하였다.
풍유룡(馮猶龍) 9)은 『천하의 한없는 못난 짓은 모두 돈을 버리지 못하는 데 따라 일어나고,

천하의 끝없는 좋은 일은 모두 돈을 버리는데 따라 이루어진다』고 하였다.
정선(鄭瑄)이 말하기를 『얻기를 탐내는 자가 만족을 모르는 것은 모두가 사치를 좋아하는 일념 때문인 것이다.

만일 마음이 편안하고 담담하여 족한 것을 알면 세상의 재물을 구해서 어디에 쓰리요! 청풍명월(淸風明月)은 돈이

드는 것이 아니며, 대울타리 띠집은 돈쓸 일이 없으며, 책을 읽고 도(道)를 이야기하는 데 돈이 요구되지 않으며,

몸을 깨끗이 하고 백성을 사랑하는 데 돈이 필요하지 않으며 사람을 구제하고 만물을 이롭게 하는 데는

돈이 남을 수 없는 것이다. 이렇게 자기를 성찰(省察)하면 세상 맛에서 초탈하게 될 것이니

탐욕스러운 마음이 또한 어디로부터 나오겠는가』라고 하였다.
정선은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시골거리에 야단스럽게 서적을 싣고 다니면서 공부를 많이 한 것처럼 뽐내고,

바다 굽이마다 나는 토산뭍을 물어 벼슬살이 돈자루를 채우려 하면서, 간혹 탐천(貪泉)을 마셔도 탐욕하지

않거나, 10) 보잘것없는 허름한 수레와 여윈 말을 타는 벼슬아치가 있으면 비웃어 말하기를

「어찌 이런 못난 벼슬아치가 되겠느냐! 좋은 벼슬이라는 것은 돈이 많이 생기는 데 불과하다」고 한다.

슬프다! 나도 돈을 많이 챙긴 자들을 보았지만, 그들이 죽은 지 몇년이 못가서 자손들이 서로 차지하려고 다투다가

망하기도 하고, 또 2대도 못가서 자손들이 음탕해서 폐인이 되기도 한다. 그 중에도 더우기 이상한 자는 등 따습고

배부른 데 뜻을 두고 훔치고 빼앗는데 재주가 능하면서도 남들이 그를 십승(十乘)의 부(富)가 있다고 칭찬하면

성을 빨끈 내며, 독 하나 채우지도 못할 만큼 모아둔 것이 없다고 추켜주면 듣고 흔연히 좋아한다.

그 자손이 자기의 할아버지나 아버지의 행장(行狀)을 부탁하여, 그 행장에서 할아버지나 아버지를 계손(季孫)이나

도주(陶朱) 11)와 같은 무리라고 흉보면 또한 발끈 성내고, 공의(公儀)와 백기(伯起) 12)와 같은 반열에 올려주면

역시 흠연히 기뻐하니, 이것은 돈 많은 것이 가히 추한 것이고, 순박하고 청렴한 것이 귀한 것이라는 것을 분명히

알고있다는 것이다. 그런데도 뜻 둔 바는 귀한 것이 아니고, 귀하게 여기는 바는 추한 것에 많으니,

이것이 어찌된 것이냐!』
정선이 말하기를, 『근래 사대부가 밖으로는 공명(功名)을 낚고 안으로는 재산을 경영하며,

천 간이나 되는 넓은 집채에 기름진 밭이 만 경(頃)이나 되고, 남자종은 개미떼 같고 비첩(婢妾)은 구름과 같은데,

입을 열면 성명(性命)13 )을 고상하게 담론하고 청허(淸虛)함을 자부하니, 비록 혀끝에 오색보련(五色寶蓮) 14)을

토한다 하더라도 나는 믿지 않을 것이다』고 하였다.
정선이 또한 말하기를, 『진신(搢紳) 15)이 한번 벼슬길에 올라서 잠깐 사이에 재산이 많아지고 이익도 두터워지고

관직이 높아지면, 이들을 유능한 사람이라 하고, 청빈하고 검소하되 관직을 지니고 있으면 이들은 그래도 비웃음을

면할 정도가 되며, 공정하고 청렴하고 꿋꿋하여 벼슬과 이득을 모두 잃으면 크게 졸렬한 사람이라고 일컬어져서

이를 처자들이 허물하고 친구들이 비웃으니 향리에 의탁할 수도 없다.

하늘이 낳아준 높은 인품이 아니면 바람 부는 데로 쏠리지 않는 사람이 드물 것이다』고 하였다.
송(宋)나라 합거원(蓋巨源) 16)이 현령이 되어 공청(公廳) 위에서 비단을 사들여 손수 자로 재니,

시비(侍婢)들이 병풍 사이로 엿보고 미워해서, 『뜻밖에 오늘 우리가 일개 비단장사 17)를 섬기게 되었구나』

말하고, 따라서 떠나가기를 청하니 만류할 수 없었다.
근래 한 현령이 정당(政堂)에서 손수 베를 자로 재는 자가 있었다. 어느 시대인들 합거원이 없겠는가?
석박(石璞)18)이 관직을 역임한 지 40여 년 동안에 청렴하고 개결함이 한결같았다. 고향 사람 중에 전사(典史)19)가

되었다가 돌아온 자가 있어서 예방을 하였다. 그 집 책상 위에 은그릇과 금술잔 십여 개가 진열되어 있었다.

석박이 물었다. 『네가 벼슬한 지 몇넌이나 되었나?』 대답하기를 『임기를 채우지 못하였읍니다.』

『어찌하여 돌아왔느냐?』 『고약한 백성이 제 탐욕을 고발하여 직위를 빼앗겼읍니다.』 석박이 『슬픈 일이구나!

내가 네 죄를 다스렸다면 네가 어찌 집으로 돌아올 수 있었겠느냐!』하고 옷을 떨치고 나와버렸다.
복건염사(福建廉使) 20) 도후중 21)이 방백(方伯) 설대방(薛大方) 22)의 탐욕과 횡포를 탄핵하였더니,

설대방이 도후중을 무고하였다. 도후중이 서울에 와서 일이 밝혀져서 설대방은 죄를 얻고 도후중은 복직하게 

되었다. 민 땅 사람들이 환영하여 말하기를 『도(陶) 염사가 다시 오시니 하늘에는 눈이 있고, 

설(薛)방백이 떠나가지 않았더라면 땅에는 껍데기도 남지 않았으리라』하였다.

송나라 절도사(節度使) 미신(米信) 23)이 인색하고 백성의 재물을 긁어모아 돈 백만 꾸러미나 쌓았다.

그 아들은 호탕하고 사치스럽고 낭비하고 방탕하였는데 아버지 때문에 마음대로 쓰지 못하였다.

다만 부자집에 가서 비싼 이자돈을 빌려 쓰면서 노도환(老倒還)이라고 말하였다. 이 말은 곧 아버지가 죽어서

장례식이 끝나자마자 본전과 이자를 몽땅 갚아주겠다는 것이다. 그리고는 사사로이 하인들을 모아 안마와 복장을

호사롭게 꾸며 집문 좌우 양쪽에 두었다가 문안에서 나오면 즉시 옹위하고 부축하게 하여 나갔으니,

이들은 서울에서 입술과 혀를 놀려 먹이를 낚는 무리들이었다. 미신이 겨우 죽자마자 그는 방탕하여

재산을 거의 없애어서 옥졸과 방울 흔드는 야경꾼의 도움을 받아서 전우 입에 풀칠하는 지경이 되었다.]

 

[각주]
1) 배협(裵俠) : 중국 북주(北周) 해(解)의 사람. 본명은 협(協), 자(字)는 숭화(嵩和), 시호는 정(貞).

    관직은 공부중대부(工部中大夫)에 올랐다.

2) 『율기잠(律己箴)』 : 미상.
3) 하늘이 알고 신이 알고 내가 알고 네가 안다는 말.

4) 중국 당(唐)나라의 간신 원재(元載)의 고사(古事)에서 나온 말.
5) 포효숙공(包孝肅公) : 효숙(孝肅)은 포증(包拯)의 시호. '앙공(仰珙)'이라는 것은 무슨 뜻인지 미상.

   『송사(宋史)』본전(本傳)에도 「앙공(仰珙)」운운은 없다.
6) 나경륜(羅景綸) : 경륜(景綸)은 중국 송(宋)나라 여릉(廬陵) 사람인 나대경(羅大經)의 자(字).

    관직은 용주법조연을 지냈으며 저서에 『학림옥하(鶴林玉霞)』가 있다.각주나경륜(羅景綸) : 경륜(景綸)은 중국

7) 진간재(陳簡齋) : 중국 송(宋)나라 낙양인(洛陽人) 진여의(陳與義). 자는 거비(去非), 호는 간재(簡齋),

    관직은 참지정사. 시(詩)가 능하여 진간재체가 있다. 저서로는 『간재집(簡齋集)』『무주사(無住詞)』가 있다.

8) 양백자(楊伯子) : 양진(楊震)(자는 伯起)을 지칭한 듯하나 자세하지 않다.
9) 풍유룡(馮猶龍) : 중국 명(明)나라 때 오현(吳縣) 사람인 풍몽룡(馮夢龍)이다. 자가 유룡(猶龍) 또는 유자룡,

    호는 고소사노(姑蘇詞奴), 묵감재(墨?齋), 용자유(龍子猶), 시호는 상무(狀武). 관직은 지수녕현(知壽寧縣).

    저서에 『춘추형고(春秋衡庫)』 『별본춘추대전(』『지낭』 『지낭보(智囊補)』 『담개(譚?)』 등이 있다.
11) 계손(季孫)·도주(陶朱) : 계손은 중국 춘추시대 노(魯)나라의 권신이며,

     도주는 중국 춘추시대 월(越)나라 범여(范?)인데 자는 소백(少伯)으로 화식(貨殖)에 능하였다고 한다.
12) 공의(公儀)·백기(伯起) : 공의(公儀)는 공의휴(公儀休)이며 백기(伯起)는 양진(楊震)의 자(字)이다.

13) 성명(性命) : 인성(人性)과 천리(天理).
14) 오색보련(五色寶蓮) : 석가여래가 설법할 때 그의 말이 장중 화려한 것이 마치 오색 연꽃을 토해내는 것 같다고

      예찬하였다.
15) 진신(搢紳) : 홀을 끝띠에 꽂는 것인데, 벼슬아치를 총칭하거나, 지위가 높고 행동이 점잖은 신사를 지칭한다.
16) 합거원(蓋巨源) : 중국 송(宋)나라 사람이나 더 자세치 않다.
17) 비단장사 : 원문의 아낭(牙郎)은 장사치, 거간꾼.
18) 석박(石璞) : 중국 명(明)나라 임장(臨?) 사람. 자는 중옥(仲玉). 영락(永樂) 연간에 급제,

      어사(御史)· 강서부사를 지내면서 치적이 있었고, 병부상서· 남경좌도어사(南京左都御使)를 지냈다.
19) 전사(典史) : 중국의 관명(官名). 원(元)나라 이래 지현(知縣)의 속관(屬官),

      청(淸)나라에서는 현옥(縣獄)과 포도(捕盜)의 일을 맡은 관리.

20) 복건염사(福建廉使) : 복건(福建)은 중국의 성명(省名). 옛날 민(?)의 땅. 간단히 불러서 민성(?省)이라 한다.

      중국의 동해에 임하여 대만을 상대하고 있는 곳. 염사(廉使)는 중국의 관명인데, 안찰사(按察使)의 다른 이름.
21) 도후중(陶?仲) : 중국 명(明)나라 은(?)의 사람. 이름은 주(鑄). 자(字)로써 행세하였으며 감찰어사로 발탁되었고,

       복건안찰사사(福建按察司使)로 가서는 장리(贓吏)를 좇아내고 학교를 세우고 군민을 무휼하였다.

22) 설대방(薛大方) : 미상.

23) 미신(米信) : 중국 송(宋)나라 사람. 활을 짤 쏘기로 유명하였다. 태종(太宗) 때 양단(梁丹)을 격파.

      관직은 창무군절도사(彰武軍節度使).


★ 牧之不淸 民指爲盜 閭里所過 醜罵以騰 亦足羞也.
    (목지불청 민지위도 여리소과 추매이등 역족수야. )
    수령이 청결하지 못하면 백성들은 그를 도둑으로 지목하여,

    마을을 지나갈 때에 더럽다고 욕하는 소리가 드높을 것이니, 이것 역시 수치스러운 일이다.

 

[정선이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관리가 한 도적을 심문하는데, 「네가 도적질하던 일을 말해보라」하니

도적이 짐짓 모르는 척하면서 「무엇을 도적이라 합니까?」한다. 

관리가 말하기를 「네가 도적인데 그것을 모르느냐! 궤짝을 열어 재물을 훔치는 것이 도적이 된다」고 하니, 

도적이 웃으면서 말하기를 「당신 말대로면 제가 어찌 도적일 수 있겠읍니까! 당신 같은 관리가 진짜 도적입니다.

유생(儒生)이 첩괄(帖括) 1)을 낭랑히 읽으면서 일찌기 고금(古今)을 상고하거나 천인(天人)의 이치를 연구하여 

국토를 경영하고 백성들에게 혜택을 베풀 것은 생각지도 않고, 밤낮으로 정치권력을 손잡아 

일확천금할 것을 바랍니다. 아비와 스승이 가르치는 것과 친구들에게 배우는 것들도 도둑질을 익히는 것뿐입니다.

관복을 입고 홀을 잡고 높이 당당히 않으면 아전들이 옆에 늘어서고

하인들이 아래에서 옹위하여 존엄이 마치 천제(天帝)와 같습니다. 벼슬은 이(利)를 따라 나오고 인사(人事)는

뇌물로써 이루어집니다. 원섭(原涉)과 곽해(郭解) 2) 같은 거호(巨豪)가 한낮에 살인을 하여도 뇌물꾸러미가

한번 들어가면 법이 어찌 있으며, 황금에 권력이 있으니 백일(白日)도 빛을 잃어, 다시 나와서 의기양양하게 거리를

나다니는 세상입니다. 마을의 천한 백성들은 벌을 돈으로 속죄하여 더욱 가난의 고초를 겪어서 머리는 흩어지고

살갖은 깎여서 집칸도 유지하지 못하고 처자를 팔 지경에 이르러 바다에 빠지고 구렁에 묻혀도,

살피고 근심할 줄 모르니 신(神)이 노하고 사람이 원망하여도 돈의 신령스러움이 하늘에 통하여 그 벼슬의 명예가

크게 일어나고 큰 저택은 구름처럼 이어 있고 노래와 풍악 소리는 땅을 울리고 종들은 벌떼 같고 계집들은 방에

가득하니, 이것이 참으로 천하의 큰 도둑입니다. 땅을 파고 지붕을 뚫어 남의 돈 한푼을 훔치면 곧 도둑으로 

논죄하고, 관리들은 팔짱을 끼고 높이 앉아서도 수만의 돈을 긁어 모으면서도 오히려 벼슬의 명예는 잃지 않으니,

큰 도적은 불문하고 민간의 거지들과 좀도둑만 문죄하시는 것입니까?」하니 

이에 그 관리가 즉시 이 도둑을 놓아주었다.』

고려시대 나득황(羅得璜) 3)이 백성들의 살을 깎아내듯 세금을 긁어모으면서 최항(崔沆) 4)에게 아첨하여

제주부사(濟州副使) 5 )가 되었다. 그 전에 송소 6)가 제주 수령을 지내다가 횡령죄로 면직되고 나득황이 부임하게

되었는데, 사람들이 말하기를 『제주가 전에는 작은 도적을 겪었는데 이제 큰 도적을 만났구나』하였다. 7)
이기의 『송와잡설(松窩雜說)』8)에 이르기를 『국초(國初)에 함경도는 야인(野人)과 접해 있기 때문에 크고 작은

수령을 모두 무관(武官)에서 뽑아 보내는 것이 관례였으며, 게다가 조정으로부터 멀리 떨어져 있어서 꺼릴 것 없이

오로지 혹형(酷刑)하고 세금을 가혹하게 받아내는 것을 일로 삼았다. 간혹 문관(文官)을 보내지만 수령으로서 

물망에 부응되는 자가 역시 극히 드물었으므로, 백성들은 그들을 낮도적이라고 지목하였다. 

어떤 함경도 사람이 처음으로 서울에 왔는데 성균관(成均館) 앞길에 이르자 동행에게 「이곳은 어떤 관청인가」 

하고 물었더니, 그 동행이 「이곳은 조정에서 낮도둑들을 모아서 기르는 모판(못자리)이다」고 대답하였다.

이 말은 비록 분격에 넘친 지나친 말이지만, 이 말을 들은 자는 역시 부끄러워해야 할 것이다』하였다.
『한암쇄화(寒巖?話)』에 이르기를, 『백련사(白蓮寺) 9) 중으로 해학을 잘하는 자가 있었는데, 항상 시 한귀를 

외우기를 「일산(日傘) 그늘 밑에는 큰 도적이 많고 목탁소리 뒤에는 참 중이 적다」고 하였다』한다.

首座가 욕심이 많다는 말이다.]

 

[각주]
1) 첩괄(帖括) : 과거문제(科擧問題).
2) 원섭(原涉)·곽해(郭解) : 원문의 원곽(原郭)은 원섭(原涉)과 곽해(郭解) 두 사람의 성(性)을 따서 줄인 말.

    중국 한(漢)나라 사람들인데, 원섭(原涉)은 무릉(武陵) 사람이며 자는 거선(巨先), 곽해(郭解)는 지(?)사람이며

    자는 옹백(翁伯)인데 유명한 협유(俠遊)였다.
3) 나득황(蘿得璜) : 고려 원종(元宗) 때 사람. 판예빈성사·제주부사·추밀원부사를 지냈다.
4) 최항(崔沆) : ?∼고종 45(1258) 초명은 만전(萬全), 진양공(晋陽公) 최이(崔怡)의 아들.

    아버지 사망 후에 정권을 인수받은 고려 고종 때의 권거(權巨). 병부상서를 지내고 몽고의 침입에 항쟁하였다.
5) 제주부사(濟州副使) : 고려 때 제주에 수령(守令)인 목사(牧使)(3品 이상)의 부관으로 부사(副使)를 두었다.

    품계(品階)는 4품(品).
6) 송소 : 고려 원종(元宗) 때의 사람.
7)『고려사절요(高麗史節要)』제18권 원종순효대왕(元宗順孝大王) 경신년조(庚申年條)에 나온다.
8)『송와잡설(松窩雜說)』 : 본문에서 인용한 글은 이기(李?)가 쓴 『송와잡설(松窩雜說)』에 나온다.

    원문의 『동각잡기(東閣雜記)』는 이정형(李廷馨)이 쓴 것이다. 이기(李?)(중종 17∼선조 33, 1522∼1600)의

    자는 가의(可依), 호는 송와옹(松窩翁)이며 시호는 장정(莊貞)이다. 부제학· 대사간· 이조판서를 지내고

    청백리로 녹선(錄選)되었다. 『송와잡설(松窩雜說)』은 조선초부터 그가 생존했던 시기까지 여러 일들을

    수필식으로 엮은 것인데 『대동야승(大東野乘)』에 권(卷)56으로 들어 있다.
9) 백련사(白蓮寺) : 전라남도 강진에 있는 만덕사(萬德寺)이다.


★ 貨賂之行 誰不秘密 中夜所行 朝已昌矣.
    (화뢰지행 수불비밀 중야소행 조이창의. )
    뇌물을 주고받는 일을 누가 비밀로 하지 않겠는가만 한밤중에 한 일이라도 아침이면 드러난다.

 

[아전들은 매우 경박하여 들어와서 말하기를 』이 일은 비밀이라 사람들이 아무도 모릅니다.

퍼뜨리면 제게 해로울 뿐이오니 누가 감히 퍼뜨리겠읍니까!』하므로 수령은 그 말을 깊이 믿어 뇌물을 흔연히 

받지만 문밖에만 나서면 말을 떠벌려 꺼리지 않고 자기의 경쟁자를 억누르고자 하니,삽시간에 사방으로 퍼지건만

수령은 깊이 들어앉아 고립되어 있어서 막연히 듣지 못하고 있으니 참으로 슬픈 일이다.

양진(楊震)이 말하는 넷이 알고 있다는 것 외에 남이 안다는 것도 막아낼 수 없다.
양진이 형주자사(荊州刺史)가 되었을 때 무재(茂才) 1) 왕밀(王密)이 창읍(昌邑) 2) 원을 제수받고서

밤에 금 열 근을 품고 와서 내어놓으면서 말하기를, 『어두운 밤이라 아무도 모릅니다』하니,

양진이 『하늘이 알고 신이 알고 내가 알고 그대가 아는데, 어찌 아무도 모른다고 하오』말하니,

왕밀이 부끄럽게 여기고 물러갔다. 3) 後漢書 4)
손신(孫薪)과 황보 5)는 태학(太學)에서 같이 공부하던 사이였다. 뒤에 황보가 어사(御史)가 되어 처주(處州) 6)에

나갔을 때에 한 아전이 황보에게 뇌물을 쓰고자 손신을 통해서 바치려고 하니,

손신이 말하기를 『삼가 말하지 말라, 나로 하여금 듣게 하면 이것은 귀로 들어온 장물 7)이다』 하였다.]

 

[각주]
1) 무재(茂才) : 중국 한(漢)나라 때 인재(人材) 등용시험(登用試驗)의 과목(科目) 이름.
2) 창읍(昌邑) : 중국의 산동성(山東省)에 있는 현(縣)의 이름.
3) 이 고사(古事)는 『후한서(後漢書)』권(卷)54 양진열전(楊震列傳)에 나온다.
4)『후한서(後漢書)』『후한서(後漢書)』는 중국 남조(南朝)의 송(宋) 순양(順陽) 사람인 범엽(范曄)이 편찬한

    사서(史書)이다. 후한(後漢) 광무제부터 효헌제까지 본기(本紀) 10권, 열전(列傳) 80권으로 구성되어 있다.

    현재에 전하는 『후한서(後漢書)』에 들어 있는 팔지(八志)(律曆·禮儀·祭祀·天文·五行·郡國·百官·輿服)는

    후인(後人)들이 사마표(司馬彪)의 『속한서(續漢書)』 중에서 보충하여 삽입한 것이다.

    범엽(范曄)은 진(晋)의 안제(安帝) 융안(隆安) 2년(398)에 태어나서 관(官)은 좌위장군, 

    태자첨사(太子詹事)에 이르렀는데, 송(宋) 원가(元嘉) 22년(445)에 모반죄로 사형 당하였다.

5) 손신(孫薪)· 황보 : 둘 다 자세치 않다.
6) 처주(處州) : 중국의 주명(州名), 절강성(浙江省) 여수현(麗水縣)의 동남(東南).
7) 귀로 들어온 장물 : 원문은 이장(耳贓)이다.


★ 饋遺之物 雖若微小 思情旣結 私已行矣.
    (궤유지물 수약미소 사정기결 사이행의. )
    선물로 보낸 물건이 비록 아주 작은 것이라 하더라도 은정이 이미 맺어졌으니 사사로운 정이 행해진 것이다.

 

[격(湨) 1)고을의 수령 원의(袁毅) 2)가 조신(朝臣)에게 뇌물을 보내어 명예를 사려고 하여,

일찌기 산도(山濤) 3)에게 실 백 근을 보냈다. 산도가 남달리 하고 싶지 않아서 실을 받아 들보 위에 얹어두었다.

뒤에 원의의 일이 탄로되었는데, 산도가 들보 위에서 실을 가져다가 아전에게 내어주었다.

실이 이미 몇해가 지났기 때문에 먼지가 끼고 누렇고 검게 되었는데 봉인(封印)한 것은 처음 그대로였다.
양속(羊績)이 여강 태수(廬江) 4太守)가 되었을 때, 부승(府丞) 5)이 물고기를 선사하므로 받아서 먹지 않고 꿰어

달아두었다. 그 뒤에 다시 선사하므로 양속이 전에 받은 고기를 내어다 보여주었더니 부승이 부끄러워 그만두었다.
웅태간공(熊泰間公) 6)이 평생에 맑은 절조로 한 지푸라기도 받지 않았다. 그가 운남(雲南)지방을 순무(巡撫)하고

오랑캐를 평정하고 연회를 베풀던 날에 금화채단(金花綵段)을 받으므로 어떤 사람들은 의아하게 여겼다.

그 다음 해에 그가 서울로 돌아갈 때 유사(有司)를 불러서 금화채단을 창고에 갖다 두도록 하니,

비로소 그가 청렴한 것으로써 다른 사람을 아프게 하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게되었다.

렇지 않고 그날 바로 그가 받지 않으면 그 부하들 어느 누가 받았을 것인가! 이것은 장괴애(張乖崖)의 시녀를

받아들인 일과 자못 비슷한 일이다.
조극명(曹克明) 7)이 호광행성(湖廣行省) 8)에 있을 때에 한 주부(主簿)가 진사(辰砂) 한 함을 올렸는데

미처 끌러보지 않고 별 생각없이 상자 속에 넣어두었다가 그 뒤에 내어보니 곧 사금(砂金) 세 냥이 그 속에 있었다.

그가 탄식해서 말하기를, 『저 사람이 나를 다른 어떤 사람으로 여겼단 말인가!』하였으나,

이때 그 주부가 이미 죽고 없었으므로 그 아들을 불러 돌려주었다.
섭종행(葉宗行) 9)이 전당(錢塘)의 수령이 되었을 때 안찰사 주신(周新) 10)은 풍채가 엄중한데 섭종행을 더욱

중하게 여겼다. 한번은 주신이 섭종행이 외출한 것을 기다려서 슬그머니 그 집에 가서 방안을 살펴보니

좋은 물건은 없고 오직 입택(笠澤)11)의 은어 말린 것 한묶음이 있을 뿐이었다. 주신이 탄식하고 

마른 은어를 조금 집어 가져왔다. 다음 날 그를 불러 식사를 하며 그 은어를 먹게 하면서 말하기를 

『이것은 그대 집 물건이라』 하였다. 그때 사람들이 그를 전당일엽청(錢塘一葉淸)이라고 하였다.

북제(北齋)의 소경(蘇瓊) 12)이 남청하 태수(南淸河) 13 太守)가 되었다. 성정이 청렴하고 신중하여 오이와 과일도

받지 않았다. 그 고을 사람 조영(趙榮) 14)이 새로 나온 오이 두 개를 바쳤더니 그가 들보 위에 얹어두고 끝내

쪼개어 먹지 않았다. 가욱(賈郁)15)이 선유현(仙游縣) 16)으로 옮겼더니 읍 사람이 과일을 주었는데 받지 않았다.
송(宋)나라 사도(査道) 17)가 일찌기 나아가 관내를 순시할 때, 길 옆에 좋은 대추나무가 있었다.

수행원이 대추를 따다가 바치니 그는 그 값을 곧 계산하여 돈을 나무에 걸어두고 갔다.]


[각주]
1) 격(湨) : 중국의 현명(縣名). 평원(平原)에 있음.
2) 원의(袁毅) : 미상.
3) 산도(山濤) : 중국 진(晋)나라 하내(河內) 회(懷) 사람. 자는 거원(巨源), 시호는 강(康).

    노자(老子)와 장자(莊子)를 좋아하였다. 죽림칠현(竹林七賢)의 한 사람이다.

    벼슬은 무제(武帝) 때 이부상서(吏部尙書), 그리고 우복야(右僕射), 시중(侍中)이었다.

4) 여강(廬江) : 중국의 군명(郡名)인데 후한말(後漢末)에는 안휘성(安徽省) 잠산현 지역이다.
5)부승(府丞) : 태수부(太守府)의 부관(副官).
6) 웅태간공(熊泰簡公) : 미상.
7) 조극명(曹克明) : 중국 송(宋)나라 사람. 자는 요경(堯卿), 벼슬은 의융십주안무사, 후에 정주를 맡아 다스렸다.
8) 호광행성(湖廣行省) : 호광(湖廣)은 중국의 호북(湖北)·호남(湖南)의 옛날 지명(地名)이다.

    행성(行省)은 그곳의 포정사(布政司)를 말한다.
9) 섭종행(葉宗行) : 종행(宗行)은 자이며 이름은 종인(宗人)이다. 중국 명(明)나라 송화정(松華亭) 사람.

    벼슬은 전당지현(錢塘知縣). 청렴한 선비였다.
10) 주신(周新) : 중국 명(明)나라 남해(南海) 사람. 벼슬은 절강안찰사(浙江按察使).
11) 입택(笠澤) : 중국 소주부(蘇州府) 서남(西南) 30리에 있는 호수 태호(太湖)의 고명(古名)이다.
12) 소경(蘇瓊) : 중국 북제(北齊)(서기 534∼577) 무강(武强) 사람이다. 자는 진지(珍之), 남청하수수를 거쳐 

       대리경이 되고, 북제가 망한 후에 주나라에서 박릉태수가 되었다. 순리(循吏)로 유명하였다.

13) 남청하(南淸河) : 중국의 군명(郡名).
14) 조영(越榮) : 소경(蘇瓊)이 남청하태수로 있을 때 일찌기 낙릉태수를 지내고 나이 80이 되어 벼슬을 그만두고

      그곳에 살던 사람이다. 원문의 영(榮)은『북제서(北齊書)』에 영(潁)으로 되어 있다.
15) 가욱(賈郁) : 중국 오대(五代) 민(?)의 후관(侯官)의 사람. 자는 정문(正文), 선유주부(仙游主簿)를 지냄.
16) 선유현(仙游縣) : 중국의 현명(縣名). 지금 복건성(福建省) 보전현(?田縣)의 서쪽에 있다.
17)사도(査道) : 중국 송(宋)나라 사람. 자는 담연(湛然). 벼슬은 용도각대제(龍圖閣待制).



★ 所貴乎廉吏者 其所過山林泉石 悉被淸光.
    (소귀호렴리자 기소과산림천석 실피청광. )
   청렴한 벼슬아치를 귀하게 여기는 까닭은 그가 지나가는 곳의 산림이나 천석도 모두 맑은 빛이 미치기 때문이다.

 

[오은지(吳隱之) 1)가 광주(廣州) 자사가 되었는데, 산해군(山海郡) 2) 20리 떨어진 곳에 샘이 있었는데 이름하여

탐천(貪泉)이라 하니, 말하자면 마시는 자는 반드시 탐욕하게 된다는 것이다. 그는 바로 가서 떠마셨다.

그리고는 맑은 절조를 더욱 힘써서 그곳에서 돌아올 때에는 가진 재물이 전혀 없었다. 상서(尙書) 3)가 되고

태복(太僕) 4)으로 옮겨 앉았으나 대와 쑥으로 바람막이를 하고 집안식구가 끼니를 걸러도 태연하였다.
당(唐)나라 이백(李白) 5)이 우성(虞城) 6) 현령이 되었는데, 관사의 옛 우물이 물은 맑으나 맛이 썼다.

수레에서 내려 맛을 보고 빙그레 웃으면서 말하기를 『내가 쓰고도 맑은 사람이니 족히 내 뜻과 맞는구나』 하고,

드디어 퍼서 쓰고 고치지 아니하였는데, 쓴 우물이 변하여 단 샘이 되었다.
방준(方峻) 7)이 거처하는 동북쪽에 샘 하나를 파서 완성되니 공복(公服)을 입고 향을 피우고 기도하였다.

『바라옵나니, 자손이 벼슬을 하게 되면 청백함이 우물과 같게 하여 주시옵소서.』
원위(元魏) 8)의 방표(房豹) 9)가 낙릉군 10)의 수령이 되었는데, 그곳에는 좋은 식수가 없고 모두 바닷가에 있어서

맛이 짰다. 그가 샘 하나를 파도록 하였더니 마침내 단물을 얻게 되었다. 그가 돌아가자 맛이 다시 짜게 되었다.
송(宋)나라 우원(虞愿) 11)이 진안 태수(晋安) 12 太守)가 되었다. 해변에 월왕석(越王石)이 있는데

항상 구름과 안개가 끼어 있었다. 서로 전해오는 말에 청렴한 태수라야 볼 수 있다 하므로,

그가 가서 보니 맑고도 깨끗하여 가리는 것이 없었다.
양성재(楊誠齋)가 여릉 태수(廬陵) 13 太守)에게 지어준 시(詩)에 다음과 같은 것이 있다.

『태수여, 빙벽(氷檗)의 생활이 대단히 맑구나. 14) 여릉 쌀 한낟도 씹지 않는도다.

한 나물 싹을 다만 맑은 샘물에 테치니, 옥황상제(玉皇上帝)가 아시리라, 이 양리(良吏)를.』]

 

[각주]
1) 오은지(吳隱之) : 중국 진(晋)나라 견성사람. 자는 처묵(處默). 어머니에게 효성이 지극하였다. 벼슬은 중령군.
2) 산해군(山海郡) : 중국의 군명(郡名).
3) 상서(尙書) : 중국의 벼슬 이름. 역대 최고 행정기관인 육부(六部)의 장관(長官).
4) 태복(太僕) : 중국의 벼슬 이름. 진한(秦漢) 이래 구경(九卿)의 하나로서 여마(輿馬)를 총찰하던 관직.
5) 이백(李白) : 중국 당(唐)나라 사천(四川) 사람. 자는 태백(太白), 호는 청련(靑蓮)이며 시인이다.

    당(唐) 현종(玄宗)의 부름을 받아 벼슬에 나아갔으나 뒤에 추방되어 방랑생활을 하며 시작 활동을 하였다.

    두보(杜甫)와 더불어 시종(詩宗)이라 한다. 『이태백시집(李太白詩集)』30권이 있다.
6)우성(虞城) : 중국의 현명(縣名). 수(隋)나라 때 설치. 하남성(河南省) 남구(南丘)의 동북(東北).
7) 방준(方峻) : 중국 송(宋)나라 보전(?田) 사람. 자는 경통(景通).
8) 원위(元魏) : 중국 북위(北魏)의 별칭. 북위의 성은 척발(拓跋)인데 후에 원으로 고쳤기 때문에 그렇게도 부른다.
9) 방표(房豹) : 중국 남북조(南北朝) 때 북위(北魏)(後魏)에서 북제(北齊)에 걸쳐 사환(仕宦)한 관인(官人).

    자는 중한(仲翰), 벼슬은 낙릉태수(樂陵太守)였다. 북제(北齊)가 망하자 은거해 버렸다.
10) 낙릉군(樂陵郡) : 중국의 군명(郡名). 산동성(山東省)에 있다.
11) 우원(虞愿) : 중국 남조(南朝)의 송(宋)에서 제(齊)나라에 걸쳐 벼슬한 관인. 자는 사공(士恭).

      송(宋)의 원가(元嘉) 말엽에 상동왕국상시(湘東王國常侍), 명제(明帝) 때 통직산기시낭(通直散騎侍郎),

      진안태수가 되고 후에 정위(廷尉)에 이름. 저서는 『오경논문(五經論問)』 『회계기(會稽記)』 등이 있다.
12) 진안(晋安) : 중국의 현명(縣名). 사천성(四川省) 소화현(昭化縣)의 남쪽에 있다.
13) 여릉(廬陵) : 중국의 군명(郡名). 지금 강서성(江西省) 길안현(吉安縣) 서고창(西高昌) 고성(故城).
14) 얼음을 마시고 황벽나무를 먹는다는 뜻으로 대단히 가난함을 말함.


★ 凡珍物産本邑者 必爲邑弊 不以一杖歸 斯可曰廉者也.
    (범진물산본읍자 필위읍폐 불이일장귀 사가왈염자야. )
    무릇 본읍(本邑)에서 생산되는 진기한 물건이라도 반드시 그 고을에 폐가 될 수 있이니,
    지팡이 하나라도 가지고 돌아가지 않아야만 이것을 가히 청렴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예컨대 강계(江界)의 인삼과 초피, 경북(鏡北) 1)의 다리와 삼베, 남평(南平) 2)의 부채, 순창(淳昌)의 종이,

담양(潭陽)의 채색상자, 동래(東萊)의 담배 기구〔煙具〕, 경주(慶州)의 수정, 해주(海州)의 먹과 남포(藍浦) 3)의

벼루 같은 것은 돌아오는 날에 행장 속에 하나라도 넣어오지 않아야 맑은 선비의 행차라 할 것이다.
진귀한 물건을 휴대하여 돌아오는 자가 그 진귀한 물건을 좌우에 늘어놓은 것을 볼 때마다 

탐욕하고 더러운 빛이 안으로부터 밖으로 뻗쳐나와서 남이 대신 부끄럽도록 하는 것이다.
백향산(白香山) 4)이 스스로 말하기를 『오래도록 소주(蘇州)에서 벼슬살이를 하였으나 태호(太湖) 5)의

한 조각 돌도 갖다 놓지 않았다』고 하였다.
운남대리부(雲南大理府)는 석병(石屛)이 나온다. 이곳에 벼슬을 사는 자는 매양 백성을 괴롭히고 재산을 축내어

그 석병을 실어다가 남들에게 선사한다. 이방백(李邦伯) 6)이란 사람이 홀로 이 점에 뜻을 붙여 송행시를 지었다.

『서로 그립다고 석병을 보내지 말라, 오히려 남쪽에 덕정비(德政碑)를 새겨 두고자.』
하남(河南)은 표고와 선향(線香)이 나는 곳이다. 이곳에 벼슬하는 사람은 매양 그것을 취해서 요로에 선사하였다.

우숙민공(于肅愍公) 7)이 그곳을 순무(巡撫)할 때, 그것에는 조금도 손을 대지 않고 시(詩)를 지었다.

『싸보내는 8) 표고와 선향은 본래 백성이 쓰는 자산(資産)이었는데, 도리어 재앙이 되는구나.

맑은 바람에 양소매를 나부끼며 서울로 돌아가네. 거리의 긴소리 짜른소리 험구가 없으리.』
정선이 말한 바 있다. 『슬프다, 대체 지방의 토산물은 그 지방의 재앙이구나. 휘徽州 땅은 메마른 고을인데

정규(廷珪) 먹과 용미연(龍尾硯)은 지금까지도 누(累)를 끼치는 일이 많다.

덕정비(德政碑)를 새겨 남기고 맑은 바람 두 소매 가득히 돌아가는 것이 수령에게 바람직한 일이다. 』
포증(包拯)이 단주(端州) 9)를 다스렸는데, 그곳에서는 해마다 벼루를 공물(貢物)로 보내고 있었다.

전에 수령들이 번번이 수십배를 거둬들여서 권력있고 귀한 자들에게 선물로 보냈었다.

그는 먹·벼루 만드는 자에게 공물의 숫자만 맞추어 만들게 하였다. 

그가 임기가 다하매 벼루 하나도 가져가지 않았다.
구양문충공(歐陽文忠公) 10)이 조카 통리에게 편지를 보냈다.『어제 편지에 네가 주사(朱砂)를 사러 오겠다라고 

하니 나는 그 물건하고는 상관없다. 네가 나의 관내에서 마땅히 청렴함을 지켜야 할 텐데

어찌 나의 관내의 물건을 살 수 있겠느냐. 내가 벼슬살이하면서 마시는 물 외에는 일찌기 한 물건도 사지 않았다. 

이것을 보고 마땅히 경계할 것이다.

당개(唐介) 11)가 담주(潭州) 12)의 부관(副官)이 되었을 때, 한 큰 장사치가 진주를 사사로이 가지고 있다가

관리(關吏) 13)의 수색을 받게 되었다. 태수(太守) 이하 관속들이 제값보다 낮추어 모두 스스로 사들였다.

그 뒤에 진주를 나누어 가진 옥사가 일어났는데 인종(仁宗) 14)이 근시(近侍)더러 말하기를

『당개는 반드시 사지 않았을 것이다』하였는데, 다시 조사해보니 과연 그러하였다.
당(唐)나라 계주도독(桂州都督) 15) 이홍절(李弘節) 16)이 죽으니 그 집에서 진주를 팔았다.

태종(太奈) 17)이 듣고 말하기를 『그 사람은 재상이 청렴함을 말했던 사람인데 오늘 와서 진주를 팔고 있으니

그를 천거한 사람이 어찌 죄가 없으리요』 하였는데, 위징(魏徵) 18)이 구해 풀어주었다.
토산물을 두려워할 것이 이와 같다.
합포(合浦) 19)는 보배로운 진주가 나는 곳이다. 수령이 탐악하여 사람들을 독촉하여 채취하니 진주가 드디어 

점차 교지군 20)계에 옮아가 버렸다. 이리하여 상인도 오지 않고 하여 사람과 물산(物産)이 힘입을 바가 없었다. 

맹상(孟嘗) 21)이 합포태수가 되자 전날의 폐단을 없애니, 일 년이 못되어 없어졌던 옮겨간 진주가 다시 모이고

상인(商人)이 서로 오가게 되었다. 사람들은 그를 신명(神明)이라고 칭승하였다.
유자후(柳子厚) 22)의 「영릉복유혈기(零陵復乳穴記)」에서 이르기를 『연주는 석종유(石鍾乳)가 나는 곳이다.

연주 사람들이 이미 종유가 다 없어져버렸다고 고(告)한 지가 5년이 되었다. 그래서 공물로 바치려면 다른 곳에서

사야 하였다. 자사 최공(崔公)이 부임하여 한 달이 지나니 채취하는 사람이 와서 석종유가 되살아났다고 아뢰었다.

전의 자사들은 탐욕하여 한껏 노역만 시키고 값은 주지 않아서 그것이 괴로와서 속였던 것이다. 

이번 자사는 법령이 밝고 뜻이 깨끗하며, 웃사람의 미더움과 아랫사람의 순함이 넉넉히 젖어들었기 때문에 

진실로 아뢴 것이다』 하였다.
여정(余靖) 23)이 이광(二廣)을 통솔할 때, 법을 바로잡고 관리를 신칙하여 남방의 약(藥)을 사지 못하도록 하였다.

그가 북쪽으로 돌아갈 때에도 남해(南海) 24)의 물건은 하나도 싣고 가지 않았다.
왕승유(王僧孺) 25)가 남해태수(南海太守)가 되었다. 그는 외국배로 온 물건은 도무지 가지는 일이 없었으며,

말하기를 『옛사람이 촉(蜀)의 장사(長史)가 되어 종신토록 촉땅의 물건을 갖지 않았다.

나는 자손들이 감히 남방의 물건을 취하지 않도록 바라노라』고 하였다.
당(唐)나라 주경칙(朱敬則) 26)이 부주 자사로 좌천되었다가 돌아올 때 회남(淮南) 물건은 하나도 없었다.

타는 것은 말 한마리뿐이었으므로 아들들도 걸어서 따라 돌아왔다.
동사의(董士毅)가 촉주(蜀州)를 다스리게 되어 부임하러 갈 때 여러 아들이 청하기를 『아버님의 지절(志節)은

저희들이 잘 알고 있으므로 일체 생계(生計)는 조금도 넘보지 않습니다. 다만 생각하옵건대 아버님께서 연세가

많으시고 촉(蜀)땅에는 좋은 재목이 많다 하오니 뒷일을 생각해 주시길 바라옵니다』고 아뢰었더니

그는 『그렇게 하지』하였다. 그가 벼슬살고 돌아올 때 아들들이 마중하러 강가에 나아가서 뒷일에 관하여

여쭈어보니, 그가 말하기를 『내가 듣건대 삼나무가 잣나무보다 못하다고 하더라』 하니,

아들들이 『아버님께서 준비하신 것이 잣나무입니까?』 하고 여쭈었더니 그가 웃으면서 말했다.

『내가 여기 잣나무씨를 갖고 왔으니 심어야 하겠지.』]

 

[각주]
1) 경북(鏡北) : 함경북도의 경성(鏡城) 북쪽.

2) 남평(南平) : 전라남도 나주군 남평면.

3) 남포(藍浦) : 충청남도 보령군.

4) 백향산(白香山) : 중국 당(唐)나라 태원(太原) 사람인 백거이(白居易)이다. 자는 악천(樂天),

    호는 취음선생(醉吟先生), 섭유옹(??翁)이며, 시호는 문(文). 형부상서(刑部尙書)를 지냈다.

    만년에는 시주(詩酒)로 지내며, 자칭 취음선생 또는 향출(香出)의 승(僧) 여만(如滿)과 향화사(香火社)를 맺어

    향산거사(香山居士)라 하였다. 저서는 『백씨경집(白氏慶集)』 『백씨륙첩사류집(白氏六帖事類集)』등이 있다.

5) 태호(太湖) : 중국 소주부(蘇州府) 서남쪽 30리에 있는 호수의 이름이다. 종광(縱廣)이 383리(里),

    주회(周回)는 36,000경(頃)이다. 옛이름으로는 진택(震澤), 패구(貝區), 입택(笠澤), 오호(五湖)라고 한다.

    호수 가운데 작은 산들이 많고 경치가 좋아서 동천복지(洞天福地)라고 한다.

    이 호수에서 나는 돌을 태호석(太湖石)이라 하여 분경(盆景)과 정석(庭石)에 좋다고 하였다.

6) 이방백(李邦伯) : 미상.

7) 우숙민공(于肅愍公) : 중국 명(明)나라 전당(錢塘) 사람. 이름은 겸(謙), 자는정익(廷益), 숙민(肅愍)은 그의 시호.

    하남(河南)·산서(山西)의 순무사(巡撫使)로 19년간이나 있으면서 혜정(惠政)을 베풀었고 병부상서를 지냈다.

    뒤에 충숙(忠肅)이라 개시(改諡)하였다.

8) 원문의 수파(手?)은 수건. 중국 명대(明代) 관계(官界)에서 서로 궤유하는 데 사용하던 것.

9) 단주(端州) : 중국의 주명(州名). 광동성(廣東省) 고요현(高要縣). 그곳의 단계가 단계연(端溪硯)의 산지이다.

10) 구양문충공(歐陽文忠公) : 중국 송(宋)나라 구양수(歐陽脩). 문충(文忠)은 그의 시호.

11) 당개(唐介) : 중국 송(宋)나라 강릉(江陵) 사람. 자는 자방(子方), 시호는 질숙(質肅), 참지정사를 지냈다.

12) 담주(潭州) : 중국의 주명(州名).

13) 관리(關吏) : 관문(關門)을 지키는 관리 또는 관세(關稅) 등의 사무를 맡아보는 관리.

14) 인종(仁宗) : 중국 송(宋)나라 4대 임금인 조정(趙禎). 재위(在位) 41년(l022∼1063).

15) 계주도독(桂州都督) : 중국의 주명(州名). 광서성(廣西省) 계림현. 도독은 주의 군무를 맡아보던 무장(武將).

16) 이홍절(李弘節) : 미상.

17) 태종(太宗) : 중국 당(唐)나라 2대 황제(皇帝)인 이세민(李世民). 재위 23년(626∼649).

18) 위징(魏徵) : 중국 당(唐)나라 곡성(曲城) 사람. 자는 현성(玄成), 시호는 문정(文貞). 좌광록대부(左光祿大夫),

      태자태사를 지내고 정국공(鄭國公)에 봉함. 저서는 『유례(類禮)』 『군서치요(郡書治要)』 등이 있다.

19) 합포(合浦) : 중국의 군명(郡名). 지금의 광동성 해강현(海康縣) 지방. 진주가 많이 나는 곳으로 유명하다.

20) 교지군(交趾郡) : 지금의 베트남 북부 통킹·하노이 지방의 옛 명칭. 한나라 때의 군명인데 뒤에 교주라 하였다.

21) 맹상(孟嘗) : 중국 후한(後漢) 때 상우(上虞) 사람. 자는 백주(伯周). 후에 궁택(窮澤)에 은거하였다.

      맹상의 이 고사(古事)를 합포주환(合浦珠還)이라 한다.

22) 유자후(柳子厚) : 중국 당(唐)나라 사람인 유종원(柳宗元)이며 자후(子厚)는 그의 자. 벼슬은 감찰어사.

      그 문(文)이 탁위정치(卓偉精緻)하여 한유(韓愈)와 짝하여 한류(韓柳)라 칭한다. 당송팔대가의 한 사람.

      저서로는 『유선생문집(柳先生文集)』 『외집(外集)』 『용성록(龍城錄)』 등이 있다.

     「영릉복유혈기」는 유자후(柳子厚)가 영주에 있을 때, 연주자사였던 최군민(崔君敏)을 위하여 지은 것이다.

『고문진보(古文眞寶)』에 「연주군복유혈기(連州郡復乳穴記)」로 실려 있다.

23) 여정(余靖) : 중국 송(宋)나라 곡강(曲江) 사람. 자는 안도(安道), 호는 무계(武溪), 시호는 양(襄).

      벼슬은 우정언이었다. 구양수(歐陽脩), 채양(蔡襄), 왕소(王素)와 더불어 세상에서 사간(四諫)이라 칭한다.

      저서는 『무계집(武溪集)』

24) 남해(南海) : 중국의 군명(郡名)인데 지금의 광동성(廣東省).

25) 왕승유(王僧孺) : 중국 양(梁)나라 사람. 처음 제(齊)나라에서 어사중승(御史中丞)을 하였다.

      저서는 『십팔집보(十八集譜)』 『동남보집초(東南譜集抄)』 및 문집(文集)이 있다.

26) 주경칙(朱敬則) : 중국 당(唐)나라 사람. 자는 소련(少連), 시호는 원(元). 국사(國史)의 편수(編修)에 참여.

      성균관좨주(成均館祭酒), 동관시랑(冬官侍郎), 정주자사(鄭州刺史)를 역임하고 후에 부주(?州)에 좌천되었다.

 

 

★ 若夫矯激之行 刻迫之政 不近人情 君子所黜 非所取也.
    (약부교격지행 각박지정 불근인정 군자소출 비소취야. )
    과격한 행동이나 각박한 정사는 인정에 맞지 않으므로, 군자가 내몰아야 할 것이지 취할 바가 못 된다.

 

[양계종(楊繼宗)이 돼지머리를 받은 일 때문에 아내를 쫓아내고, 허자가 나무막대기를 굴려 아들의 발을 따뜻하게

하라고 한 일과, 공기 1)가 비단을 불속에 던져 넣고 이견공이 무소뿔과 상아를 물 속에 던졌으니 교격한 행동이

아닌가! 이런 행동은 모두 군자가 취할 것이 아니다. 정선(鄭瑄)은 『사대부들이 덕(德)을 손상하게 되는 것은

이름을 내려는 마음이 너무 급한 데서 오는 일이 많은 것이다』라고 말하였다.
고제(高齋) 2)나라 고적간(庫狄干) 3)의 아들인 고적사문(庫狄土文) 4)은 성질이 청고(淸苦)하여 국가봉급도

받지 않았다. 그 아들이 관청주방의 음식을 먹었다고 해서 칼을 씌워 옥에 여러 날 가두고 곤장을 이백 대나 때린 후에 걸어서 서울로 돌려보냈다. 그는 간사와 아첨을 적발하여 베 한자 곡식 한 말의 부정도 너그럽게 용서하지 않고

위에 아뢰어서 천 명이나 영남(嶺南)으로 귀양을 보내게 되어 모두가 풍토병으로 죽으니 그 친척들이 울부짖었다.

고적사문은 그들을 잡아 채찍으로 치니 채찍이 그 앞에 가득 쌓이나 울부짖는 것이 더해갈 뿐이었다.

임금이 이것을 듣고 『사문의 포악함이 독(獨)짐승 5)보다 더하다』하고 파면시켰다.
정선이 말하기를 『전에 어른들의 말씀을 들으니, 상관이 탐욕스러우면 백성은 그래도 살 길이 있으나 청렴하면서

각박하면 곧 살길이 막힌다 하였다. 고금을 통하여 청리(淸吏)의 자손이 많이 떨치지 못하는 것은

바로 그 각박함에 연유하는 것이다』 하였다.]

 

[각주]
1) 공기 : 중국 남조(南朝) 송(宋)나라 산음(山陰) 사람. 자는 사달(思達). 성질이 권귀(權貴)를 미워했다.

벼슬은 태자첨사(太子詹事)였고 후에 반역으로 주살되었다.
2) 고제(高齊) : 중국에서 고환(高歡)이 세운 북제(北齊)를 말한다.
3) 고적간(庫狄干) : 선무(善無)의 사람. 시호는 경렬(景烈). 위(魏)의 정주자사(定州刺史),

북제(北齊) 천보(天保)의 초에 장무군왕(章武郡王)으로 봉함.
4) 고적사문(庫狄士文) : 중국 수(隋)나라 때 대(代)사람. 고적간(庫狄干)의 손(孫). 패주자사(貝州刺史)를 지냈으며,

엄혹하다는 어사(御史)의 탄핵을 받아 감옥에서 죽었다.
5) 독(獨)짐승 : 독수(獨獸)는 원숭이와 닮았지만 더 크고 원숭이를 잡아먹는다.


★ 淸而不密 損而無實 亦不足稱也.
    (청이불밀 손이무실 역부족칭야. )
    청렴하면서도 치밀하지 못하거나, 재물을 내어 쓰면서도 실효가 없으면, 이 역시 칭찬할 일이 못 된다.

 

[『상산록(象山錄)』에 이르기를 『수령의 청렴함이 청렴하면서도 치밀치 못하고, 단지 재물을 쓰는 데만 힘쓰고

그 쓸 바를 몰라서, 혹은 기생과 악공에게 뿌리고 혹은 절간에나 시주하니 이것은 본래 잘못인 것이다.

그러나 스스로 생각하여 실지에 힘쓰는 자는 또한 혹은 소를 사서 백성에게 나눠주거나 혹은 빚을 주어서

부역에 보충하도록 하지만, 돌아가는 행차가 문밖에만 나가면 약조(約條)가 뒤따라 무너지고 소와 돈은

모두 토호들에게 돌아가서 아전과 토호가 이익을 나누어 먹고 갚아야 할 돈은 억지로 가난뱅이들에 배당하니

백성들은 이 때문에 파산을 하게 된다는 것을 모른다. 신관(新官)은 이 일을 듣고 매가 고기를 만난 듯,

범이 땅을 허비듯 이미 없어진 물건을 더 거두어들이어 그칠 줄 모르는 욕심을 채우니 그 약조가 아예 없어져서

마치 학정을 제거한 것처럼 한다. 천하에 의리도 없고 지혜도 없음이 이와 같은 것이 없다. 그러면 어떻게 할 것인가?

큰 재물이 있다면 전장(田莊)을 설치하여 요역을 덜게 하고즉 民庫 만일 그렇게 할 수 없으면 노인을 공양하고

어린애를 키우며 관혼상제와 불구불치 등 병자의 보살핌을 마땅히 목전에서 실행하여 내 마음이라도 흡족하게

할 것이다. 내 지위가 확고하지 않으니 어찌 후일을 위하여 계획을 세울 수 있으리요!』 하였다.]


★ 凡買民物 其官式 1)太輕者 宜以時直取之.
    (범매민물 기관식태경자 의이시치취지. )
    무릇 민간의 물건을 사들일 때에는 관청에서 정한 가격이 너무 헐한 것은 마땅히 싯가대로 사들여야 한다.

 

[호태초(胡大初)는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벼슬살이의 요점은 청렴과 근면이니, 

한 오리만큼이라도 혹 이지러지면 그 정사(政事)에 미치는 해독은 매우 심하다. 또한 사람들이 청렴은 

내 분수 안의 일인 것을 누가 모르리요마는 일이 얽히고 형세가 급박하여 점차 어쩔 수 없게 된다. 

본래 빈천한 사람은 처자의 울부짖는 소리에 흔들리는 경우가 있고, 본래 부귀한 사람은 잘 먹고 

호사롭게 입어야 하는 비용이 드는 것이며, 명예를 좋아하면 음식치레로 손님을 즐겁게 하고 요로에 결탁하기를 

힘쓰며 선물 꾸러미를 후하게 하여 호의를 사며, 더 심한 경우는 자녀 혼사에 비단과 금을 짐꾸려 보내니, 

비록 청렴하고자 한들 어찌 되겠는가. 탐욕에 어두워 부끄러움을 잊은 사람은 본래 동정할 여지도 없지만, 

맑은 공론을 두려워하는 사람이 더러 있더라도 역시 「나는 위로는 공금을 절취하지 않았고

아래로는 백성들의 재물을 함부로 취하지 아니한 것으로 족하다. 수령이 음식물을 사는데는 원래 관에서 정한 값이

있으니 내가 이를 시행하면 무엇이 부끄러우며, 빈객을 접대하는 것은 이첩(吏貼)에 열거되어 있으니

내가 그대로 따르면 무엇이 부끄러우리요」 하고 말하는 데 불과하리니, 어찌 부끄러운 말이 아니겠는가?』
상고하건대, 본래 관가(官價)가 있다는 것은 오늘날 말하는 관정식(官定式)이다. 관에서 정한 가격은 대개 헐하고

박한 것을 따르게 마련이고, 혹 그 중에 후한 가격을 따른 것이 있어도 관에서는 쓰지 않으니 아전들이 감당해낼

수 있겠는가! 물건값의 높고 낮음은 시기에 따라 변하는데 관식(官式)은 한번 정하여 백 년이 되도록 고치지 않으니

그 시세에 알맞게 맞추지 못하는 것은 당연하다. 값이 박하면 아전들이 괴롭고, 아전이 괴로우면 백성이 침해되어

마침내 아래 백성들에게 해(害)가 돌아가니 아전이야 무슨 상관이리요. 대개 아전의 됨됨이는 즐거우면 나아가고

괴로우면 물러서는 것인데, 그 물러서지 않는 것을 보면 거기에 좋아할 것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백성이란 것은 즐거워도 머물러 있고 괴로와도 떠나지 못하여 몸이 토지에 박히어 마치 밧줄로 묶이어 

매를 맞는 것과 같으니 비록 그곳을 떠나지 않더라도 고통이 없다고 말할 수 없는 것이다. 

수십년 이래로 소위 계방(契房)이라 하여 부역(賦役)을 면제받는 마을이 날로 증가하여 

부역의 공평치 못한 괴로움 때문에 백성이 삶을 누리지 못한다.

수령이 이 폐단을 없애려 하면, 아전들은 「나는 도망하겠읍니다」고 말한다. 내가 그 이유를 살펴보니,

하나는 열읍(列邑)에서 감사에게 아첨하여 섬기는 것이 가면 갈수록 더욱 심해지는 데 있으며,

다른 하나는 관식(官式)의 억지로 정한 물건값이 공평하지 못한 데 있다. 아전들이 해를 입으면 사세(事勢)가 반드시

물러난다고 말할 것이고 수령이 그들을 만류하려면 반드시 그 욕심을 충족시켜 주어야 하는데,

위로는 그 자기 이익을 차마 떼어 내놓을 수 없고 아래로는 세금을 더 부가할 수 없으니 한 촌을 아전에게 

떼어주어 계방(契房)을 삼게 하니, 천하에 교사스럽고 비루하고 인색한 것이 이보다 심한 것이 없다. 

그러므로 새로 부임하는 수령은 계방을 타파하려고 하지 않는 이가 없으나 일단 그 묘리를 알게 되면 

또한 잠자코 마음속으로 포기하지 않는 자가 없으니, 그 근본이 자기로 말미암은 것을 알았기 때문이다.

무릇 관용 물건은 마땅히 춘분과 추분에 싯가(時價)를 개정하고, 반년 동안 시행하여 그대로 둘 만한 것은 

그대로 두고, 고쳐야 할 것은 고쳐서 오로지 싯가에 따르고 값이 너무 깎인 것이나 너무 높게 된 것이 없도록

하는 것이 또한 좋을 것이다. 『예기(禮記)』에 이르기를, 『밤낮이 같아 춘분과 추분이 되면 도량(度量)을 같게

하고 형석(衡石)을 고르게 하며, 두용(斗甬)을 비교하고 권개(權槪)를 바르게 한다』2)고 하니 역시 이러한 뜻이다.
무릇 이노(吏奴)들이 바치는 물건이 만약 그 구입 과정에서 원통하다는 말을 듣지 않게 되면 대개 계방과 같이

백성에게 해를 끼치는 일은 비로소 개혁을 뜻대로 할 수 있을 것이다.]

 

[각주]
1) 관식(官式) : 관가에서 정한 가격기준.
2) 도량(度量)은 자(尺)와 말(斗), 형석(衡石)은 저울, 두용(斗甬)은 말과 섬, 권개(權槪)는 저울의 추와 말의 평미레.

   『예기(禮記)』월령(月令) 제육(第六)에 나온다.


★ 凡謬例之沿襲者 刻意矯革 或其難革者 我則勿犯.
    (범류례지연습자 각의교혁 혹기난혁자 아즉물범. )
    무릇 그릇된 관례로 내려오는 것은 굳은 결의로 이를 고치도록 하고,

    혹 고치기 어려운 것은, 나 자신이 범하지 말아야 할 것이다.

 

[서로(西路)의 방번전(防番錢), 1) 산간 고을의 화속전(火粟錢), 2) 기타 장세전(場稅錢), 3) 무녀포(巫女布) 4) 등은

비록 잘못된 관례에 속하지만 모두 조정에서 아는 바이니 혹 그대로 둘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서로(西路)의 와환채(臥還債) 5) 요상(遼上)조에 자세히 나와 있다,

남방의 은결채(隱結債) 6)田政조에 자세히 나와 있다는 비록 오랜 관례지만 단연코 착복해서는 안될 것이다.
신관(新官)의 부쇄가(夫刷價)는 절대로 두 번 거두어서는 안된다. 추관(推官) 7)의 고마전(雇馬錢) 8)도

결코 부당하게 헛되이 지출되어서는 안된다. 여러 읍에 고마고(雇馬庫)라는 것이 있는데,

매양 추관(推官0이 행차할 때 고마고에서 수십 냥의 돈을 지불하는 것이 통례로 되어 있다.

이에 한 달에 세 번 추심을 하는데, 단 문서로만 본영에 보고하고, 실제는 몸소 행차하지 아니하면서 고마전은 

의연히 받아 쓰고 있는 것이다. 궁결(宮結) 9)의 잉여전(剩餘錢)도 절대로 훔쳐 먹어서는 안된다.

모든 宮房의 無土免稅田은 1結에 대하여 戶曹에서 돈을 받는 것은 일곱 냥이 못 되는데 흉년에 쌀이 귀하게 되면

매결에서 수십 냥을 거두어서 거기서 남는 것은 그 고을이 먹는다 민고의 자질구레한 명목의 돈은 결코 관례에 따라

받아들여서는 안된다. 이런 종류의 예는 일일이 들수 없으니, 요는 수령 된 자가 의리(義理)를 헤아려서

그것이 천리(天理)에 어긋나며 왕법(王法)에 거슬리는 것은 절대로 자신이 범해서는 안된다. 혹 여러모로 구애되어

혁파하기 어려운 것은 비록 고칠 수는 없더라도 나만은 하지 말아야 한다.
무릇 방번전(防番錢)과 화속전(火粟錢)은 비록 전부 혁파하지는 못하더라도 폐잔한 마을의 군액(軍額)은 충당하기가

어렵고 지적하여 징수할 곳이 없는 것들은 모두 마땅히 감면하는 데 인색해서는 안된다.
고려 김지석(金之錫) 10)이 고종(高宗)말에 제주부사(濟州副使)가 되었다. 제주도의 풍속에 남자 15세 이상 된 자는

해마다 콩 1곡(斛)씩을 바치고 아전 수백 명이 해마다 각자 말 한 마리씩 바치면 부사와 판관이 나누어 받았기 

때문에 수재(守宰)가 비록 가난한자라도 모두 치부하게 되었다. 

정기(井奇)와 이저(李著) 두 사람이 이곳의 수령을 하다가 모두 뇌물죄로 파면되었다. 

김지석이 제주에 도임하자 곧 콩과 말을 바치는 관례를 없애고, 청렴한 아전 10명을 뽑아서 

아문(衙門)의 아전으로 삼으니, 정사가 물처럼 맑아졌고 백성과 아전들이 사모하고 복종하였다. 

이보다 먼저 경세봉(慶世封) 이란 사람이 제주의 수령으로서 역시 청백하다고 소문이 났었다.

그래서 이 고을 사람들이 말하기를, 『전에 세봉이 있었고 뒤에 지석이 있다』고 하였다.
고려 권단 11)이 경주유수(慶州留守) 12)가 되었다. 전부터 한 창고가 있는데 백성들로부터 능라(綾羅)를 거둬들여

저장하는 곳이었는데, 이름을 갑함(甲坊)이라 하였다. 이 능라를 공물로 바치는 데 충당하고도 나머지가 대단히

많아서 모두 유수가 사사로이 차지하는 것이었다. 권단은 갑방을 철폐하고,

일 년에 거둬들인 것으로 삼 년간의 공물(貢物)에 충당하였다.
가황중(賈黃中) 13)이 승주(昇州) 14)의 자사가 되었을 때, 하루는 부고를 돌아보다가 자물쇠가 단단히 채워진 것을 보고 열어보니 보화 수천 궤짝이 나왔다. 이것은 모두 이씨궁중의 물건으로서 장부에 기록되지도 않은 것들이었다.

가황중이 목록을 작성하여 임금에게 바치니 임금이 감탄하여 말하기를, 

『부고(府庫)의 물건은 장부에 올려 있더라도 오히려 탐욕스럽고 속 검은 자는 법을 무릅쓰고 차지하려고 하는데 

하물며 이런 물건이야 말할 것이 있느냐!』하고 그에게 돈 200만전을 내려 그의 고결함을 표창하였다.]

 

[각주]
1) 방번전(防番錢) : 방번수포전(放番收布錢)인 듯하다. 번상을 풀어주고 댓가로 받는 포(布)의 대납전인 듯하다.
2) 화속전(火粟錢) : 화전세(火田稅)(大豆·木綿·粟)를 금납화(金納化)한 것.
3) 장세전(場稅錢) : 향시 또는 읍시에서 상업활동을 하는 자에게 시장의 자릿세로 받아들인 것을 말하는 듯하다.
4) 무녀포(巫女布) : 무포(巫布)라고도 하는데, 무여(巫女)에게 징수하는 세포(稅布).
5) 와환채(臥還債) : 환곡(還穀)을 연말에 거두어들이지 않고 거두어들였다고 상부에 보고하고

    또 봄에 환곡 중에서 실제로 대여하지 않고 대여해준 것처럼 하여 1석(石)에 대하여 돈 1냥(兩)을

    거두어들인 것을 말하는데 이것을 아전이나 수령, 심지어 절도사까지도 착복하였다고 한다.
6) 은결채(隱結債) : 은결(隱結)은 조선왕조시대 경작지로서 불법적으로 수세(收稅) 대상에서 누락되어 있는

    토지(土地)(隱田 또는 隱漏라고도 한다)이며, 이 은결에 대하여 아전이나 수령이 실제로는 수세(收稅)하면서

    중앙에 보고치 않고 부정으로 착복하는 것이 은결채이다.
7) 추관(推官) : 살인과 같은 큰 옥사는 한 달에 3번씩 이웃 고을 수령으로 하여금 죄인을 추고하게 되어 있는데,

이 추고를 맡아 파견되는 관원이 곧 추관(推官)이다.

8) 고마전(雇馬錢) : 조선후기에 공용의 말로서 역마(驛馬) 이외 민간의 말을 세(貰)내어 쓰는 고마(雇馬)의 관행이

    발달하였는데, 이 고마(雇馬)의 비용으로 지출하는 돈이 곧 고마전(雇馬錢)이다. 고마전의 재원으로서

    각 군현마다 고마고(雇馬庫)가 설치되어 있었는데, 수령의 신영(新迎)· 체귀(遞歸)· 출장등에 활용하였다.
9) 궁결(宮結) : 궁방전(宮房田)· 궁사전(宮司田)· 사궁장토(司宮莊土)라고도 하며 내수사(內需司)· 후궁(後宮) 및

    왕자(王子)·왕녀(王女) 들에게 조(粗)가 귀속되는 전토(田土). 유토궁방전(有土宮房田)은 그 토지의 소유권이

    당해 관방(官房)에 속해 있었고, 무토궁방전(無土宮房田)은 민전(民田) 위에 설정되고 호조가 수조(收租)하여

    당해 궁방(宮房)에 바치는 유형이었다. 양자 모두 직전제(職田制)의 붕괴 후 특히 임진왜란 후에 발달한 것인데,

    국가에 대해서는(無稅)로 규정되어 있었다.
10) 김지석(金之錫) : 『고려사(高麗史)』 권(卷)121 양리(良吏)편에 본문에 인용된 고사(古事)가 실려있고

      그에 대해서는 더 자세치 않다.
11) 권단 : 고종 15∼충선왕 3(1228∼1311) 자는 회지(晦之), 호는 몽암(夢巖), 시호는 문청(文淸), 본관은 안동.

      문하녹사로 문과에 급제하고 충렬왕 때 전리총랑(典理摠郎)을 지내고 지첨의부사로 치사(致仕)하였다.

      청렴결백하였으며, 만년에 선흥사(禪興寺)에 들어가 중이 되었다.
12) 유수(留守) : 수도 이외의 별도(別都) 또는 행궁(行宮)의 소재지에 두었던 특수한 지방장관의 하나이다.

      고려 성종 14년(995)에 서경(西京)(평양)에 지서경유수사(知西京留守事)(3품 이상)·부유수(副留守)(4품 이상)

      각 1명씩을 두고 동경(東京)(경주)에 유수사(留守使)(3품 이상), 부유수사(4품 이상) 각 1명을 처음 두었다.

      문종 21년(1067)에는 양주(楊州)를 남경(南京)으로 삼아 유수(3품 이상), 부유수(4품 이상) 1명씩을 두었다.
13) 가황중(賈黃中) : 중국 송(宋)나라 사람. 자는 왜민(?民). 6세에 동자과(童子科), 15세에 진사(進士)에 오름.

      벼슬은 참지정사(參知政事)에 이르렀다.
14) 승주(昇州) : 중국의 주명(州名)으로 강소성(江蘇省) 남경시(南京市).


★ 凡布帛貿入者 宜有印帖.
    (범포백무입자 의유인첩. )
     무릇 포목과 비단을 사들일 경우에는 마땅히 인첩(印帖) 1)이 있어야 한다.

 

[읍마다 읍시(邑市) 1)가 있는데, 이노(吏奴)로서 구매를 담당한 자가 관에서 사들인다고 빙자하여 포백 따위를 

억지로 헐값으로 사거나, 또는 내사(內舍)나 책방(冊房)이 사사로이 사들이면서 몰래 그가 격을 깎거나 하면,

이노가 그 차액을 물어넣기도 하거나 혹은 장사꾼이 앉아서 값을 잃기도 한다. 이것은 모두 원한을 사게 되는

길이지만 수령은 알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부임하는 초기에 마땅히 장시(場市)를 관장하는 아전戶房이 담당하거나

다른 아전이 담당하기도 한다에게 명령하여 포백상들에게 다음과 같이 널리 알리도록 할 것이다. 즉 『이제부터 

관에서 포백을 사들일 때에는 반드시 인첩이 있으니 帖文에 도장을 찍은 것인데, 그 크기가 손바닥만 하다,

이 인첩이 없으면 곧 관에서 구입하는 것이 아니다. 인첩의 하단에 받은 값을 네 손으로 기입하여 아전으로 하여금

도로 바치게 하여 후일에 증거가 되도록 할 것이다. 』
인첩의 형식은 다음과 같다. 첫머리에 갑자년 2월 초6일. 관무첩(官貿帖), 둘쨋줄에 여덟새 무명베 2필,

세쨋줄에 아홉새 모시 1필, 네쨋줄에 열새 명주 1필, 다섯쨋줄에 수노(首奴) 득손이라 쓰고 가운데에 도장을 찍는다.
매매가 끝나면 판 사람 이명담(李命聃)이라고 자필로 이름을 쓰고 각 줄마다 가격을 적어 도로 바치도록 한다.
이와같이 하면 사들인 포백을 혹시 바꿔치기하는 폐단이 있더라도 장사꾼에게는 원망이 없을 것이다. 

팔도의 풍속이 각각 다르니, 만일 아전들의 습속이 순후하여 본래 간사한 폐습이 없으면 

반드시 이런 방법을 쓸 것은 없다.]

 

[각주]
1) 읍시(邑市) : 장시(場市)(지방의 鄕市를 포함)는 서울의 어용상(御用商)인 시전(市廛)과 구별하여

    민간인을 상대로 판매활동을 하던 시장이다. 조정에서는 장시를 금했으나 16세기경부터 서울과 지방에 장시가

    확대되었다. 조선후기에는 각 지방의 장시가 크게 발달하여 18세기 말에는 전국적으로 1천 곳 이상의 장시가

    개설되었다. 이 중에서 각 고을의 읍내(邑內)에 개설되는 장시(場市)를 읍시(邑市)라 하였다.


 

★ 凡日用之簿 不宜注目 署尾如流.
    (범일용지부 불의주목 서미여류. )
    무릇 날마다 쓰는 장부는 자세히 볼 것이 아니니, 끝에 서명을 빨리하는 것이 좋다.

 

[학궁(學害) 및 여러 고(庫) 1)의 하기(下記) 2)는 마땅히 자세히 살펴보아야 하지만, 주리와 현사의 하기(下記)는

일체 자세히 보지 말고 속히 화압(花押)방언으로는 手例라 한다음 누르는 것이 좋다.

비록 지나친 지출이라도 일체 깎지 말아야 한다.
『상산록(象山錄)』에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요즘 풍속에 책객(冊客)에게 명하여 대조하고 검토케 하니,

책객이 사사로운 감정을 가지고 샅샅이 뒤지면 비방하는 소리가 물끊듯 일어나서, 객하간정(客何干政) 3)이라는

문구가 반드시 감사의 고과표에 폄(貶)하는 조목으로 오를 것이며, 책객이 사정(私情)을 돌보고 작당하여 농간하면

조소가 쏟아져 나와서 아전들과 이익을 나누어 먹는 폐단을 막을 길이 없다.아래 屛客조에 보인다 .

또 혹은 토서(土書)속말로 謠文이라 한다로 번역하여 내사(內舍)에 바쳐서 먹도장을 받아서 서로 대조하게 되면,

규문(閨門)이 엄하지 못하여 사리(事理)와 체면이 뒤틀리니, 모두 할 짓이 아니다. 무릇 내사(內舍)에 제공하는 

물건은 모두 그 예규를 정하여 그 달 초하루에 납부토록 하고아래 節用조에 보인다날마다 공급하는 특용물은 

한 두 가지 종류에 한정시켜 놓으면, 전혀 사단이 없을 것이다. 이것은 더할 수 없는 묘한 방법이다.]

 

[각주]
1) 고(庫) : 민고(民庫)·진휼고(賑恤庫) 등 각 군현에 설치되어 있는 제고(諸庫). 자세한 것은 제5장 절용(節用) 참조.
2) 하기(下記) : 일상용(日常用) 전곡(錢穀)의 지출장부.
3) 객하간정(客河干政) : 객이 어찌 정사(政事)에 간여하느냐 하는 말인데, 이 객(客)은 책객(冊客)을 지칭한다.


★ 牧之生朝 吏校諸廳 或進殷饌 不可受也.
    (목지생조 이교제청 혹진은찬 불가수야. )
    수령의 생일날에 아전과 군교 등 여러 부서에서 성찬을 올리더라도 받아서는 안 된다.

 

[아전과 군교 들의 제청(諸廳)에서 바치는 성찬은 모두 백성의 힘에서 나온 것이니, 혹은 계방(契房)의 돈을 거두고

혹은 보솔(保率) 1)의 돈을 거두기도 한다. 이것을 빙자하여 가혹하게 거둬들이는 것이 미치지 않는 곳이 없다.

어민들의 고기를 빼앗으며, 촌락의 개를 때려잡기도 하고, 모밀과 기름을 절에서 뺏어오기도 하고,

주발과 접시는 질그릇집에서 가져오기도 하니, 이것은 원한을 거둬들인 물건인 것이다.

어찌 그런 것을 받아들이겠는가. 혹 유기 한 벌과 세포 몇 끗으로 헌수하는 경우일지라도 더욱 받아서는 안된다.
수령의 부모의 생신에 바치는 물건은 더구나 받아서는 안된다.
호태초(胡大初)가 말하기를, 『생일날의 헌수(獻壽)는 일체 물리칠 것이다. 내가 이미 구하지 않았으니,

아전들이 알아서 고칠 줄 모르면 그들을 책망하더라도 부끄러움이 없을 것이다』하였다.]

 

[각주]
1) 보솔(保率) : 보인(保人)으로 책정된 육정(率丁). 조선후기에는 고립제(雇立制)가 발달하면서 

     국가기구의 운용과 관련된 여러 기관 혹은 역인(役人)들에게 보률(保率)이 지급되었다.


★ 凡有所捨 毋聲言毋德色 毋以語人 毋說前人過失.
    (범유소사 무성언무덕색 무이어인 무설전인과실. )
    무릇 받은 것 없이 내놓는 것이 있더라도, 큰 소리 치지 말고 덕을 주었다는 생색도 내지 말며,
    다른 사람에게 이야기도 하지 말며, 또한 전임자의 허물도 말하지 말라.

 

[항상 보면, 청렴하되 똑똑한 체하는 사람은 잘못된 전례에서 생긴 재물을 내놓고 공리(公理)에 따라 사용하거나,

자기의 봉록을 떼어내어 백성에게 혜택을 끼치기도 하는데, 그 일이 비록 잘하는 일이기는 하지만 그것을 베풀 때에는 반드시 뽐내면서, 『사대부가 어찌 이런 물건을 쓸 수 있느냐!』고 큰소리친다. 아전이 혹 전례를 들어 설명하면

반드시 꾸짖고 곤장을 쳐서 자기의 청렴함을 드러낸다. 또한『봉록의 남는 것으로 내 어찌 돌아가서 전답을 살 수

있겠는가!』하면서 큰소리로 과장하여, 얼굴에 덕을 베풀었다는 표정을 짓기에 애쓰며,

백성을 대하고 손님을 대할 때 항상 과시하여 그 마음에 수백냥 돈을 큰 물건이나 되는 듯이 여기니,

식자(識者)들이 곁에서 보면 어찌 속으로 웃지 않으리요. 무릇 재물을 희사하고 봉록을 떼어내어 쓰더라도

마땅히 지나가는 말로 몇마디 해당 아전에게 분부할 뿐이고 다시는 들추어 말하지 말 것이다.

혹시 묻는 사람이 있으면 『이번에는 그 정도 내어놓았지만 다음에는 그렇지도 못할까 두렵다』고 말하고,

말머리를 돌려 다른 일이나 이야기하여 다시는 장황하게 늘어놓지 않는 것이 좋다.
전임자가 관례를 따랐다는 것이 본래 나쁜 것은 아니다. 지금 내가 재산을 내어 베푸는 것이 혹은 명예를 구하는 데서

나오기도 한 것이니, 나의 작은 은혜 베풂을 가지고 다른 사람의 보통 하는 일을 비방하는 것은 예(禮)가 아니다.

일체 모름지기 그것을 경계할 것이다.
두연(杜衍) 1)이 말하기를 『벼슬살이의 제일 요건은 청렴이다. 그러나 다른 사람이 알아주기를 구하지 말라.

진실로 남이 알아주기를 바란다면, 동료 중에서 신중치 못한 자들이 많아서 반드시 자기를 참소하고,

웃사람이 또한 잘 살피지 못하여 화를 당하기 안성마춤일 뿐이다.

오직 묵묵히 실행하고 마음에 부끄러움이 없게 하는 것이 좋다』하였다.
정선이 말하기를 『벼슬살이를 청렴하게 하는 것은 사대부의 분수 안의 일이다. 청렴하기가 어려운 것이 아니라,

그 청렴을 나타내지 않는 것이 어려운 것이며, 자기의 청렴함을 믿고 남을 얕보고 억누르지 않는 것이 더욱 어렵다』
정선이 또 말하기를 『청렴은 곧 벼슬살이의 본분이지만, 도리어 자기의 청렴을 자랑하고 탁한 자에게 오만해서는

안된다. 근신하는 것은 벼슬살이에서 세심하게 해야 할 것이지만, 도리어 큰 것만 삼가하고 작은 것은 소홀히 해도

안된다. 근면은 정무에 종사하는 바탕이지만 도리어 처음에는 부지런하고 끝에 가서 게으르면 안된다』고 하였다.
호위(胡威) 2)의 아버지 호질(胡質) 3)이 형주자사(荊州刺史)가 되였는데, 호위가 서울로부터 와서 문안을 드리고

돌아가려 하니, 비단 한 필을 주어 치장하도록 하였다. 

무제(武帝) 4)가 호위에게 말하기를 『경의 청렴이 경의 부친과 어떠한가?』하고 물으니, 

호위가 대답하기를, 『신의 아버지는 청렴하되 남이 알까 두려워하고, 신은 청렴하되 남이 모를까 두려워하니 

신이 아버지에게 미치지 못함이 멀다고 생각합니다』하였다.

동악 이안눌(李安訥) 5)이 청백리로 뽑혔다. 일찌기 어느 사람에게 말하기를,『내가 수령이나 절도사를 지낼 때,

어찌 흠이 없을 수 있겠소? 단지 부인이 집안 살림을 잘 못하여 내 의복과 음식과 거처에 쓰이는 물건이

다른 사람에게 아름답게 보이게 하지 못하였기 때문에, 보는 사람들이 나를 청백하다고 생각했으니,

참으로 부끄러운 일이오』하였으니, 선배들이 실제를 따르며 이름을 좋아하지 않는 것이 이와 같다.]

 

[각주]
1) 두연(杜衍) : 중국 송(宋)나라 산음(山陰) 사람. 자는 세창(世昌), 시호는 정헌(正獻). 기국공(祁國公)에 봉해졌다.
2) 호위(胡威) : 중국 진(晋)나라 사람. 자는 백무(伯武), 시호는 열(烈). 부자(父子)가 모두 청신(淸愼)하였다.

    전장군(前將軍)으로 청주(靑州)의 군사(軍事)를 감독하였다. 평춘후(平春侯)에 봉하였다.
3) 호질(胡質) : 중국 삼국시대(三國時代)의 위(魏)나라 수춘(壽春) 사람이다. 자는 문덕(文德), 시호는 정(貞),

    진위장군, 정동장군을 지냈다. 관내후(關內侯)에 봉함. 본문의 고사(古事)는『삼국지(三國志)』 권27에 나온다.
4) 무제(武帝) : 중국의 삼국(三國)을 통일한 진(晋)나라 사마염(司馬炎)이다.
5) 이안눌(李安訥) : 선조 4∼인조 15(1571∼1637) 자는 자민(子敏), 동악(東岳)은 그의 호, 본관은 덕수(德水),

    시호는 문혜(文惠)이다. 벼슬은 예조판서, 예문관제학(藝文館提學) 등을 지냈다. 시(詩)·서(書)에 뛰어났다.

 


★ 廉者寡恩 人則病之, 躬自厚而薄責於人 斯可矣, 干囑不行焉 可謂廉矣.
    (염자과은 인즉병지 궁자후이박책어인 사가의 간촉불행언 가위염의. )
    청렴한 자는 은혜 베푸는 일이 적으므로 사람들이 이를 병통으로 여긴다.
    자기 자신은 잘하려고 애쓰면서 남에게 책임지우려는 일이 적으면 그것으로 되는 것이다.
    청탁이 행해지지 않으면 가히 청렴하다 말할 수 있다.

 

[이노(吏奴)의 무리는 배우지 못하고 아는 것이 없어 오직 인욕(人欲)이 있고 천리(天理)를 모른다.

내가 바야흐로 힘써야 하는데 어찌 남을 책하리요. 나를 예로써 규율하고 남을 보통 사람으로 기대하는 것이

원망을 사지 않는 길이다. 규정 외에 백성을 침학하는 것은 법이 마땅히 엄금하는 것이며, 잘못된 것을 도습하여

그대로 정상적 수입으로 생각하고 있는 것은 많이 줄이는 것이 좋을 것이다.色落米 1)· 付標債 2)와 같은 것.
조극선(趙克善)이 수령으로 있을 때, 소리(小吏)가 관청의 매 한 마리를 잃어버리고 다른 매 한 마리를 사서 바치니,

그가 말하기를, 『매가 스스로 날아갔을 뿐인데, 네게 무슨 죄가 있느냐』하고 그것을 물리치고 불문에 붙였다.
『상산록(象山錄)』에 이르기를, 『매양 보면, 속된 수령이 궁한 친구와 가난한 친척을 만나면 자기의 봉록을

떼어다가 도와주려 하지 않고, 별도로 그 사람더러 일거리 하나를 장만하게 하여 그 청탁을 들어주니,

이것은 백성의 재물을 약탈하여 자기 족속을 구하는 것이다. 비록 그 족속이 돌아갈 때 전대가 적지 않아서

자기보고 칭송을 한다고 하더라도 그렇게 해서는 안된다』고 하였다.]

 

[각주]
1) 색락미(色落米) : 간색미(看色米)와 낙정미(落庭米). 세곡(稅穀)이나 환곡(還穀)을 징수할 때 견본(見本)이나

    낙미(落米)로 약간 더 받는 것을 말한다.
2) 부표채(付標債) : 군역자의 사망 신고서를 받아 군적(軍籍)에 표시하는 댓가로 부당하게 징수하는 돈.


★ 淸聲四達 令聞日彰 亦人世之至榮也.
    (청성사달 영문일창 역인세지지영야. )
    청렴하다는 명성이 사방에 퍼져서 좋은 소문이 날로 드러나면, 이것 역시 인생의 지극한 영광인 것이다.

 

[고려의 윤선좌(尹宣佐) 1)는 충숙왕(忠肅王) 때 한양윤(漢陽尹) 2)이 되었다. 때마침 왕과 공주가 용산(龍山) 3)에

이르러 좌우를 돌아보고 말하기를, 『윤윤(尹尹)은 청렴하고 검소하므로 수령을 시켰으니, 너희들은 조심하여

그를 괴롭히거나 번거롭게 하지 말라』하였다. 그 뒤에 친히 수령들을 임명 기록하다가 계림윤(鷄林尹) 4)을 뽑는데

이르러 붓을 거두고 생각하면서 말하기를, 『신하가 뜰에 가득하지만 윤윤(尹尹) 같은 사람이 없다』고 하고

곧 그를 임명하였다. 고려 때 전녹생(田祿生) 5)이 경주의 판관(判官)이 되었는데 정사를 청백하게 하였다.

이제현(李齋賢) 6)이 이를 두고 시(詩)를 지었다.『전(田)랑이 우리 계림의 판관이 되니 부로(父老)들이

지금도 그의 맑은 덕을 사모하네.』
완선군(完善君) 이의전(李義傳)이 양근군수 7)가 되었는데, 창석(蒼石) 이준(李埈) 8)이 이 고을을 지나다가

감탄하여 말하기를 『맑은 기운이 사람에게 스며든다』하였다.
이목 9)호는 松郊이 서천군수(舒川郡守)가 되었는데, 감사 이안눌(李安訥)이 그의 성적을 평가하여 말하기를,

『맑기는 옥항아리와 같고 은혜롭기는 봄바람과 같다』하였다.
채번옹(蔡樊翁)이 이천부사(伊川府使)가 되어 정사가 청렴하고 간결함을 위주로 하니, 

감사가 그의 성적을 평가하여, 『어떤 덕정(德政)을 행하였기에 이천(伊川) 물이 맑게 되었다』고 하였다.
이규령(李奎齡) 10)이 수원부사(水原府使)가 되어 정사를 청렴하고 자애롭게 하니 송우암(宋尤菴) 11)이

편지를 보내어 치하해 말하기를,『큰물이 산을 둘러싸면 지척에서도 남의 말을 듣지 못하지만,

오직 어진 소리만은 귓전에 쟁쟁하다』고 하였다. 이천(利川)에 옛날 비(碑)가 있는데 거기에

이후 규령 통만고 제일 청덕 선정비(李侯奎齡通萬古第一淸德善政碑)라 새겨져 있다.]


[각주]
1) 윤선좌(尹宣佐) : 원종 6∼충혜왕 복위 4(1265∼1343) 자는 순수(淳?), 본관은 파평(坡平). 전라도도관찰사·

    성균관좨주· 한양윤(漢陽尹)·계림윤(鷄林尹)·예문관대제학 등을 지내고 감춘추관사(監春秋館事)로 치사하였다.

    경학(經學)에 밝고 노자(老子)·장자(莊子)·형명(刑名)의 학(學)도 연구하였으며 문장이 뛰어났다.
2) 한양윤(漢陽尹) : 충렬왕 34년(1308) 지금 서울을 남경(南京)에서 한양부(漢陽府)라 개칭하고 부윤을 두었다.
3) 용산(龍山) : 지금 서울의 용산이다. 고려 충숙왕은 1325년 8월에 그의 비 금동공주(金童公主)를 지칭하는데,

    원(元)나라 위왕아목가(魏王阿木哥)의 딸로서 충숙왕비가 되어 조국장공주(曺國長公主)로 봉해졌다.
4) 계림윤(鷄林尹) : 경주부윤(慶州府尹).
5) 전녹생(田祿生) : 충숙왕 5∼우왕 1(1318∼1375) 자는 맹경(孟?), 호는 형은(瑩隱),본관은 담양(潭陽).

    전중시어사를 거쳐 전라안찰사로 있을 때 홍건적의 난으로 대가(大駕)의 남행에 호종하여 공 2등에 책록되었다.

    문하평리에 이르러 추충찬화보리공신(推忠贊化輔理功臣)의 호를 받았다. 저서로 『변은집(變隱集)』이 있다.
6) 이제현(李齊賢) : 충렬왕 13∼공민왕 16(1287∼1367) 시인·성리학자로 자는 중사(仲思), 초명은 지공(之公),

    호는 익제(益齊), 시호는 문충(文忠), 본관은 경주(慶州)이다. 충선왕이 서번(西蕃)으로 귀양갈 때 따라갔다.

    충목왕이 즉위하자 계림부원군에 봉하였다. 공민왕 때 우정승을 두 번 지내고 문하시중으로 있다가

    공민왕 5년에 치사하였다. 저서로 『익제난고(益齊亂藁)』『역옹패설(?翁稗說)』 『익제집(益齊集)』이 있다.
7) 양근군(楊根郡) : 경기도 양평군(楊平郡)에 있던 지명으로, 조선왕조 때는 현(縣)과 군(郡)으로 강등· 복구를

    거듭하다가 1914에 이르러 지평군과 합하여 양평군으로 되었다.
8) 이준(李埈) : 명종 15∼인조 13(1560∼1635) 자는 숙평(叔平), 호는 창석(蒼石)·유계(酉溪), 본관의 흥양(興陽),

    시호는 문간(文簡)이다. 선조 24년(1591)에 별시문과(別試文科)에 병과(丙科)로 급제하였고

    이듬해 임진왜란이 나자 의병을 모집하였다. 『중흥구감(中興龜鑑)』을 편술하여 왕에게 바쳤다.

    저서로 『창석문집(蒼石文集)』, 편저로 『형제급난지도(兄弟急難之圖)』가 있다.
9) 이목(李?) : 선조 5∼인조 24(1572∼1646) 자는 문백(文伯), 호는 송교(松郊), 본관은 전주(全州),

    시호는 충정(忠正)이다. 벼슬은 대사헌· 도승지· 부제학 등을 지냈다. 좌찬성(左贊成)에 추증되었다.
10) 이규령(李奎齡) : 인조 3∼숙종 20(1625-1694) 자는 문서(文瑞), 본관은 한산(韓山), 시호는 진혜(眞惠)이다.

      경기도 관찰사로 나가 치적을 올렸으며, 벼슬은 승지, 경상도 관찰사, 한성우윤, 대사헌, 형조판서가 되어

      도총관(都摠管)을 겸임하였고, 기노소(耆老所)에 들어가 치사(致仕)하였다.
11) 송우암(宋尤菴) : 선조 40∼숙종 15(1607∼1689) 이름은 시열(時烈), 우암(尤菴)은 그의 호이며,

      자는 영보(英甫), 시호는 문정(文正), 본관은 은진(恩津)이며 노론의 영수였다. 효종의 장례 때 대왕대비

      복상(服喪)문제로 남인과 예론(禮論) 시비가 계속되어 당쟁사에 큰 영향촐 미쳤다. 현종 때에 우· 좌의정,

      숙종 때에는 여러 곳으로 귀양다녔으나 영중추부사(領中樞府事)를 지냈고, 사약(賜藥)이 내려져 죽었다.

      주여학(朱予學)의 대학자인데, 저서로는 『주자대전차의(朱子大全箚疑)』 『이정서분류(二程書分類)』

     『어류소분(語類小分)』 『논맹문의통고(論孟問議通攷)』 『심경석의(心經釋義)』 『문집(文集)』 등이 있다.



제 3 장 제가(齊家) :

          (가정을 바로 다스리는 것을 뜻하는 말로,

          여기서는 지방수령으로서 주의해야 할 가정에 관계된 제반 문제를 서술하였다.)

 


★ 修身而後齊家 齊家而後治國 天下之通義也. 欲治其邑者 先齊其家.
    (수신이후제가 제가이후치국 천하지통의야. 욕치기읍자 선제기가. )
    자신을 닦은 뒤에야 집안을 다스리고 집안을 다스린 뒤에 나라를 다스린다는 것은 천하의 공통된 이치이다.
    그 고을을 다스리려 하는 자는 먼저 자기 집안을 잘 다스려야 할 것이다.

 

[한 고을을 다스리는 것은 한 나라를 다스리는 것과 같다. 자기 집을 잘 다스리지 못하고 어떻게 한 고을인들 

다스릴 수 있을 것인가. 집안을 잘 다스리는 데는 몇가지 요점이 있다. 

첫째 데리고 가는 사람의 수는 반드시 법대로 해야 하고, 둘째 치장은 반드시 검소하게 해야 하고, 

세째 음식은 반드시 절약해야 하며, 네째 규문은 반드시 근엄해야 하고,

다섯째 청탁은 반드시 끊어버리지 않으면 안되고, 여섯째 물건을 사들이는 데는 반드시 청렴해야 하는 것이다.

이 여섯 가지 조목에 법도를 세우지 못하면 수령으로서의 정사를 가히 알 만한 것이다.
『속대전』에 『수령 중에 가족을 지나치게 많이 데리고 간자와 관비를 몰래 간통한 자는 모두 적발해서 파면한다』고

규정되어 있다. 상고하건대 국전에 가족을 많이 거느리는 것을 금하는 것으로 되어 있으나, 명문이 없다.

마땅히 일정한 규정이 있어야 할 것이다. 부모와 처 외에는 아들 1명만 허용하되, 미혼 자녀들은 계산에 넣지 말고

허용하도록 할 것이다. 노(奴) 1명, 비(婢) 2명 외에는 데리고 가지 못하게 함이 좋을 것이다.
부모·처자·형제를 육친(六親)이라 한다. 위로 조상의 신주(神主)를 모시고 아래로 빈종(賓從)을 거느리고

또 노비까지 데리고서 온 집안이 이사해 간다면, 모든 일이 얽히고 꼬여 사사로운 일 때문에 공무가 가려지고

정사가 문란해질 것이다. 옛날의 어진 수령들이 가족을 따라오지 못하게 하였던 것은 참으로 이유가 있는 것이다.

오직 부모가 연로하셨으면 잘 봉양하는 데에 힘쓸 것이나 그 밖의 일들은 간략함을 좇아야 할 것이다.]


★ 國法母之就養 則有公賜 父之就養 不會其費 意有在也.
    (국법모지취양 즉유공사 부지취양 불회기비 의유재야. )
    국법에 어머니를 모셔다가 봉양하면 나라에서 그 비용을 지급하지만,
    아버지를 모셔다가 봉양하는 경우에는 그 비용을 회계해 주지 않는다 하였으니 나름대로 까닭이 있는 것이다.

 

[부친이 아들의 임지에 가 있으면 친구들은 그 부친을 춘부(春府)라 부르고, 이속 하인배들은 대감(大監)이라 

부른다. 대감이 나이 60을 넘어 봉양을 받아야 할 처지이면 마지 못해 따라가야겠지만,

그렇지 않을 경우에는 비록 아들이 간청하더라도 가볍게 따라나서는 것은 옳지 않다.
만일 부득이 임지에 따라가야 할 처지라면, 마땅히 내사(內舍)속칭 內衛라 이른다에 따뜻한 방 한 간을 택하여

조용히 지내면서 조리하도록 하고, 외인과의 접촉을 피하는 것이 예(禮)에 맞는 일이다. 매양 보면,

춘부(春府)가 많이 예절을 몰라서 외사(外舍)에 나가 앉아 아전들을 꾸짖고 관노들을 질책하며 기생들을 희롱하고,

손님들을 끌어들이며, 심하면 송사와 옥사를 파는 등 정사를 어지럽게 하므로 저주하는 사람이 읍내에 가득차고,

비망하는 사람이 고을에 그득하게 된다. 이와같이 되면 자정(慈情)과 효도를 다 잃고

공과사가 함께 병들게 되는 것이니 알아두어야 할 일이다.
필종경(畢終敬) 1)의 부자가 서로 대를 이어 연주 태수가 되어 당세에서 그것을 영광으로 여겼다.

아들 원빈(元賓)이 매양 정무를 볼 때에는 종경(終敬)은 판여(板與)를 타고 원빈의 처소에 가서 측근자를 보내어

그 아들에게 알은 체도 일어나지도 말게 하고 판결하는 것을 보고서 기뻐하는 기색이 안색에 나타났다.
생각컨대 이런 경우는 부친이 아들의 관부에 갔더라도 더욱 빛이 날것이다.

한억(韓億) 2)의 부친도 또한 따라간 일이 있었다.다음 조에 나타나 있다
종손(宗孫)으로 제사를 받드는 자는 마땅히 신주를 모셔야겠지만 지차로 제사를 맡지 않는 자는 그래서는 안된다.

관으로부터 제수(祭需)의 도움을 받는다면 이것은 관에서 제향을 드리는 것이다. 하필 가묘(家廟)를 비워놓고,

신주를 임지에 모시고 가겠는가. 종손(宗孫)이라도 부친이 있어 제주가 아닌 경우는 지차와 마찬가지다.

『예기(禮記)』에 『적자(適子)가 있는 경우 적손(適孫)에게는 관계되지 않는다』고 하였다.]

 

[각주]
1) 필종경(畢終敬) : 중국 남북조(南北朝) 시대의 후위(後魏) 사람. 일명 중경(衆敬),

    벼슬은 산기상시(散騎常侍)·연주자사를 하고 동평공(東平公)의 작위를 받음.
2) 한억(韓億) : 중국 북송(北宋) 사람. 자는 종위(宗魏), 시호는 충헌(忠獻). 지방관으로 치적이 있었으며,

    인종(仁宗) 때 상서좌승이 되었다. 그의 가법이 엄하여 세상에서 그 가문을 「동수한가(桐樹韓家)」라 불렀다.

 

 

★ 淸士赴官 不以家累自隨 妻子之謂也.
    (청사부관 불이가루자수 처자지위야. )
    청렴한 선비가 관직에 나갈 때에 가루(家累)를 데리고 가지 않는다 하였으니, 가루는 처자를 두고 하는 말이다.

 

[명(明)나라 순리(循吏)인 양계중(楊繼衆)· 사자양(謝子襄)· 왕서(王恕)· 당간(唐侃) 등은 주와 현에 부임할 때

모두 처자를 데리고 가지 않았다. 이는 근고의 맑은 행적이거니와, 하물며 한나라와 당나라에 있어서는

말할 것이 있겠는가.
양속(羊續) 1)이 남양(南陽) 2) 태수로 있을 때 그의 처와 아들 비(秘)가 함께 군아(郡衙)로 찾아왔는데

그는 문을 닫고 들이지 않았다. 처가 아들 비를 데리고 돌아가는데 그 행장이 오직 베 이불, 허름한 홑옷에

소금과 보리 몇 말뿐이었다 한다. 이는 과격한 행동이요 인정이 아니니 본받을 것이 없다.
자녀가 어려서 따라오고자 하는 경우는 인정에 금하기 어려운 것이다. 나이가 이미 장성해서 결혼한 자녀들은

의당 차례로 와서 뵙게 할 것이요, 일시에 함께 따라가는 것은 불가하다.
옛사람이 말하기를 『고을살이를 나가는 사람은 세 가지를 버리게 된다.

첫째, 가옥을 버린다. 대개 집을 비워두면 허물어지기 마련인 것이다.

둘째는 노복을 버린다. 대개 노복들은 놀려두면 방자하게 되기 마련인 것이다.

세째는 아이들을 버린다. 대개 자제들이 호사한 분위기에 젖으면 방탕해지기 마련인 것이다』라고 했다.

참으로 옳은 말이라 하겠다.]

 

[각주]
1) 양속(羊續) : 중국 후한의 평양 사람. 자는 흥조(興祖). 여강(廬江)· 남양 태수를 지냈는데 청렴한 행적을 남겼다.
2) 남양(南陽) : 중국 하남성(河南省)에 속한 고을. 제갈량(諸葛亮)이 살던 곳으로 유명하다.


★ 昆弟相憶 以時往來 不可以久居也.
    (곤제상억 이시왕래 불가이구거야. )
    형제간에 서로 그리우면 가끔 내왕할 것이로되 오래 머물러서는 안된다.

 

[형제간에 우애가 돈독하더라도 얼마 동안은 헤어져 있어야 할 것이다. 아우는 그래도 낫지만 형은 더욱 곤란하다.

내가 본 바, 수령의 형이 아우를 따라 관부에 와 있는 경우 이속이나 관노들이 그를 관백(官伯)이라 부른다.

일본의 왕은 자리만 지키고 관백(關白) 1)이 집정을 하고 있는 것이 마치 현령이 자리만 지키고

관백이 일을 보는 것과 같다고 해서 이와같이 기롱한 것이다. 

아우가 비록 눈물을 흘리며 함께 지내자고 만류하더라도 형 된 사람은 마땅히 머리를 흔들고 떠나야 할 것이다. 

만약 발을 들여놓게 되면 관백의 칭호를 면하기 어렵게 된다.
고모나 형수·제수·누이 들 중 가난하거나 과부가 되어 따라가기를 원하는 경우 어찌 딱하지 않으리요.

그러나 국법이 이미 엄금하고 있으니 데리고 가서는 안된다.]

 

[각주]
1) 관백(關白) : 옛날 일본의 천황(天皇) 아래서 실권을 가지고 국정을 총괄하던 벼슬.


 貧從雖多 溫言留別 臧獲雖多 良順是選 不可以牽纏也.
    (빈종수다 온언유별 장획수다 량순시선 불가이견전야. )
    따라오려는 빈객들이 많더라도 따뜻한 말로 대접하고 작별할 것이요,
    노복들이 비록 많더라도 양순한 자만 뽑을 것이며, 사사로운 정에 이끌려서는 안된다.

 

[종족과 의당 화목하게 지내야겠지만 거느리고 가서는 안되고 빈객들에게 의당 후하게 대접해야겠지만 

불러들여서는 안되고, 겸종(慊從) 1)이 고생을 하였더라도 따라오게 해서는 안된다.

모든 이와 같은 경우에는 후일 선물을 보낼 것을 약속하고 따뜻한 말로 만류해야 한다.

관부에 친지들이 들끊으면 안된다는 점을 인식시켜야 원망이 없을 것이다.
좌상(左相) 정홍순(鄭弘淳) 2)이 평양감사가 되었을 때의 일이었다. 오랫동안 고생하였던 겸인이 마땅히 자기를

데리고 가리라 생각하여 사적으로 치장을 갖추고 기다렸는데 공은 거절하고 허락하지 않았다.

겸인은 울분한 나머지 병이 되었다. 그후 반 년이 지나서 겸인이 체면을 불고하고 내려왔다.

그는 3일 동안 묵게 한 후 즉시 돌려보냈는데 다만 말 한 필을 줄 뿐이요, 다른 아무것도 주지 않았다.

겸인은 다시 크게 분히 여겼다. 그가 임기를 마치고 돌아오매 겸인은 드디어 발길을 끊었다.

달포쯤 지나서 공이 겸인을 불러 책망하고 낡은 종이 한 두루마리를 내주는 것이었다.

겸인은 더욱 원한을 품고 자기 집으로 돌아가서 그 종이를 어미 앞으로 던져버렸다.

어미가 그것을 펴보니 기인공물(其人貢物) 3) 2인의 교권이었다. 其人이란 시탄(柴炭)과 횃불을 조달하는 자이다
노복들이 허다히 과실을 잘 범하므로, 선량하고 솔직한 노(奴) 1명과 비(婢) 2명만 뽑아가는 외에 더 데려가는 것은

불가하다. 혹 딸린 식구가 많지 않을 경우는 비 1명이라도 좋다. 제오륜(第五倫) 4)은 처가 몸소 부엌일을 하였으며,

왕서(王恕)는 노복을 데리고 가지 않았으니 어찌 까닭이 없겠는가?
범문정공(范文正公)이 수령으로 나갔을 때 여종 셋이 있었는데 두 부(府)를 역임하여 별세하기에 이르도록

한 명도 늘리지 않았고 또 한명도 바꾸지 않았다.]

 

[각주]
1) 겸종 : 양반가나 부호의 집의 잡무를 맡아보던 사람. 

     청지기·겸인·청직(廳直)·수청(守廳)·장반(長班)이라고도 한다.
2) 정홍순(鄭弘淳) : 숙종 46∼정조 8(1720∼1784) 자는 의중(毅仲), 호는 호동(瓠東). 벼슬은 좌의정에 이르렀다.
3) 기인공물(其人貢物) : 「기인」이란 지방 향리의 자제로서 서울로 뽑혀 올라와 일정한 역(役)을 지는 동시에

    자기 지방일에 대한 자문이 되던 것을 가리킨다. 이는 중앙정부의 지방에 대한 통치책의 하나였는데,

    이 제도는 고려초부터 있었으나 차차 기인의 본래 성격이 변하여 조선 시대로 와서는 시탄을 중앙에 납입하는

    수취체제의 중간 역할을 담당하는 임무를 띠게 되었다. 그래서 이들 「기인공인」혹은 공물인(貢物人)·

    공물주인(貢物主人)이라는 이름으로 불리어졌다. 교권(交券)은 공인(貢人) 영업 허가장(許可狀)이다.
4) 제오륜(第五倫) : 중국 후한(後漢)의 장릉 사람. 자는 백어(伯魚), 효렴과(孝廉科)에 뽑혀 회계태수를 역임,

    사공(司空)에 올랐다. 청절(淸節)로 이름이 높았다.

 

 

★ 內行下來之日 其治裝 宜十分儉約.

    (내행하래지일 기치장 의십분검약. )
    내행(內行)이 내려오는 날에는 치장을 아주 검소 간략하게 해야 할 것이다.

[쌍마교(雙馬轎)는 아름다운 제도가 아니다. 태평거(太平車) 1)보다 못하다. 그러나 여자가 출생하면 쌍마교 탈 것을

축원하니 어머니를 모시는 사람은 사용하지 않을 수 없겠지만 처에 대해서는 반드시 그럴 것이 있겠는가.

무식한 부녀자들이 마음에 꼭 소원한다면 마땅히 남의 쌍마교를 빌어서 혹은 한 역참(驛站)만 가거나

남쪽 길은 果川 2)까지, 서쪽 길은 高陽까지, 동쪽 길은 平丘 3)까지면 된다. 혹은 하룻길을 가서 곧 두 역참에

재우면 될 것이다. 독마교(獨馬轎) 4) 청익장(靑翼帳)에 주렴을 드리우고 고을에 당도하면 또한 영화롭지 않으리요.

하루만 쌍마교를 타더라도 출생시의 축원을 달성해준 셈인데 하필 10일을 탄 다음에야 마음에 쾌할 것인가.
어머니가 타는 가마와 처가 타는 가마 외에 일행의 인마는 관노와 관마를 써서는 옳지 않고,

집의 하인과 집의 말을 쓰거나 사람을 사고 세마를 얻는 것이 예에 맞는 일이다.
『야인우담(野人迂談)』에 이르기를 『두황상(杜黃裳) 5)이 상부(相府) 6)에 있을 적에 그의 부인이 오로지

죽두자(竹兜子) 7)를 탔다고 하였다. 하필 쌍마교로 행차를 해야만 혐의를 멀리 한다고 하겠는가.

우리 나라가 중고 이전에는 비록 재상의 부인이라도 말을 타고 너울을 쓰고 다녔는데 

요즈음은 풍속이 날로 사치만 늘어서 인마를 동원하는 것이 한도가 없어졌다. 쌍마교 하나가 행차하는 데 

좌우에 옹위하는 사람만 해도 부지기수요, 심지어는 인부를 많이 징발해서 천리길을 메고 가게 하는 자도 있다. 

대개 쌍마교는 임금이 타는 것으로, 어깨에 메는 쌍마교는 임금도 타지 않는 것이다. 

참람한 것이 이만저만이 아니다. 옛날은 감사 부인도 독마교를 탔는데 지금은 시정의 천한 여자도 

그 남편이 원님만 되면 쌍마교를 타니 참람함이 말할 수 없다. 』

생각컨대 수령으로 뜻이 있는 사람이 중국을 본받아 태평거(太平車)를 한 대 만들어서 그 어머니를 모시고 가면

영화롭기도 하려니와 원성도 없을 것이다.
한억(韓億)이 하북전운사(河北轉運使) 8)가 되었을 때 어머니는 태평거에 앉히고 갈대 자리를 드리웠으며,

헌숙공(獻肅公)그 부친은 나귀를 타고 수레 뒤를 따랐다. 검소함이 이와 같았던 것이다.
한억(韓億)과 이약곡(李若谷) 9)은 아직 급제하기 전에 모두 빈곤하였다. 함께 서울에 가서 시험을 치르매

매양 나아가 배알할 적에 서로 바꿔서 하인 노릇을 하였다. 이약곡이 먼저 급제를 해서 장사현 주부(主簿) 10)를

제수받고 부임할 때 손수 처가 탄 나귀의 고삐를 잡았으며, 한억이 그 친구를 위해서 상자 한 개를 짊어졌다.

현으로부터 30리 거리에 도착하자 이약곡이 한억에게 『고을 사람들이 나올까 두렵네』라고 말하면서,

상자 속에 겨우 돈 600전(錢)이 있었는데 절반을 한억에게 나눠주고 서로 손을 잡고 울음을 터뜨리며 작별하였다.

다음번 과거에 한억도 급제하여 다같이 벼슬이 참정(參政) 11)에 이르렀다.
윤석보(尹碩輔) 12)연산조 때 인물가 일찌기 풍기군수가 되어 내려갈 때 다만 노(奴) 1명과 비(婢) 1명만 데리고

갔으며 처자를 거느리고 가지 않았다 후에 성주(星州) 목사가 되었을 때 처 박씨가 임신한 지 8개월인데도

말을 타고 가고 가마는 엄두도 내지 못했다. 박씨부인의 남동생 박중간(朴仲幹)이 상주 목사가 되어서 찾아와 보니

관에서 공급하는 것이 매우 빈약하므로 소금 말이나 보내주었다. 윤공은 즉시 그것을 되돌려보내어,

마치 더러움을 당하는 듯이 하였다. 상고하건대 국초의 사족 부녀자들은 너울을 쓰고 말을 탔었음이 분명한 것이다.
효헌공(孝憲公) 송흠(宋欽) 13)이 매양 지방 수령으로 부임할 적에 신영마(新迎馬) 14)가 겨우 세 필이었다.

대개 공이 타는 말이 한 필, 어머니와 처가 타는 말이 각각 한 필이었던 것이다. 

당시 사람들이 삼마태수라고 불렀다.
자제들은 반드시 초교(草轎)덮개가 없는 가마를 타되 관노로 하여금 좌우에서 옹위하는 것은 예가 아니다.

젊은이들은 마땅히 안장마를 타는 것을 배울 것이요, 그렇지 않으면 언치 우리말로 吉馬에 짐싣는 행구

우리말로 負擔를 놓고 타면 못탈 것이 없을 것이다.
안식구가 떠나기 하루 전에 의당 술이나 떡과 같은 음식으로 수행하는 아전이나 관노를 대접해야 할 것이다.
수령 본인이 떠날 때에는 음식을 대접할 필요가 없다. 

수령은 엄해야 하고 또 공적인 행차이기 때문에 그럴 필요가 없는 것이다. 

내행(內行)은 자애로와야 하고 또 사적인 행차에 속하기 때문에 대접할 필요가 있는 것이다.

내행이 고을에 당도한 지 3일이 되면 또 마땅히 대접해서 수행한 수고를 위로해야 할 것이다.]

 

[각주]
1) 태평거(太平車) : 관인들이 타던 수레로 박제가(朴齊家)는 이것을 교통수단으로 이용할 것을 주장한 바 있다.
2) 과천(果川) : 지금의 경기도 과천시(果川市).
3) 평구(平丘) : 지금의 양주군(楊州郡)에 속한 지명.
4) 독마교(獨馬轎) 말 한 마리가 끄는 가마.
5) 두황상(杜黃裳) : 중국 당(唐)나라 만년(萬年) 사람. 자는 준소(遵素).

    벼슬은 문하시랑동중서문하평장사(門下侍郎同中書門下平章事)에 이르렀으며 강직한 인물이었다.
6) 상부(相府) : 상주(相洲)는 지금의 하남성(河南省) 안양현(安陽縣)에 해당하는 곳. 상부는 그곳의 관부.
7) 죽두자(竹兜子) :「두자」는 메는 가마로 일명 과산교(過山轎)라고 칭하는 것이다. 죽두자는 대나무로 만든 것임.
8) 하북전운사(河北轉運使) : 중국 당송(唐宋) 이후의 관제. 원래는 한 지방의 수륙의 운수를 담당한 관직이었으나

    뒤에 행정 전반을 관장하게 되어 일로(一路)의 감사(監司)가 되었다.
9) 이약곡(李若谷) : 중국 북송(北宋) 때의 사람. 자는 여연(予淵), 벼슬은 자정전태학사(資政殿太學士)에 이르렀다.

10) 주부(主簿) : 문서 장부를 맡은 관직인데 송나라 이후 군현의 주부는 승이나 위(尉)와 함께 보좌하는 직임이다.
11) 참정(參政) : 참지정사(參知政事)의 준말. 송(宋)나라는 동평장사가 재상이고 참지정사는 그 다음이었다.
12) 윤석보(尹碩輔) : ?∼연산군 11(1505) 자는 자임(子任), 성종 때 문과(文科) 급제,

      갑자사화(甲子士禍)에 유배를 갔다가 그곳에서 죽었다.

13) 송흠(宋欽) : 세조 5∼명종 2(1459∼1547) 자는 흠지(欽之), 호는 지지당(知止堂)·관수정(觀水亭),

      시호는 효헌(孝憲). 청백리(淸白吏)에 뽑힌 관리로, 벼슬은 우참찬(右參贊)에 이르렀다.
14) 신영마(新迎馬) : 지방 수령이 새로 부임할 적에 타고 가는 말.


★ 衣服之奢 衆之所忌 鬼之所嫉 折福之道也.
    (의복지사 중지소기 귀지소질 절복지도야. )
    의복의 사치스러움은 많은 사람들이 꺼리는 바이며, 귀신이 시기하는 바이니 복을 꺽는 일이다.

 

[부인으로 도리를 아는 사람은 극히 적다. 대부분 소견이 천박해서 남편이 고을살이 나간다는 말을 듣기만 해도

금방 한 보따리 부귀가 하늘로부터 내려오는 줄로 생각한다. 그 장식· 패물을 곱게 하고자 하기만 힘써서

함부로 경저(京邸)의 돈을 토색해서 아파(牙婆)속칭 방물장수를 널리 불러들여 진기한 비단, 가는 모시베, 

운 삼베, 용을 아로새긴 비녀, 나비 모양의 노리개 등속으로 아이들을 요물처럼 꾸미고 

여종들을 창기처럼 만들어서, 그 어느 집보다도 뛰어나게 하여 한 지방에 빛내고자 한다. 

식자들은 그것을 보면 그 남편이 바르지 못함을 알 것이다. 

재물을 낭비하고 복록을 해치면서 남편의 얼굴을 깎아내니 무슨 즐거움이 있을 것인가.

주신(周新)이 절강안찰사(浙江按察使)가 되었을 적에 부하 직원이 하루는 구운 거위를 선사하였다.

그는 그것을 집에 걸어 두고 후에 또 선물하는 사람이 있으면 그것을 가리키곤 하였다. 함께 있는 관속의 부녀들의

연회에 부인들이 모두들 성장을 하고 나타났다. 오직 주신의 부인만 나무비녀에 베치마로 참석하니

마치 촌부인 같았다. 도리어 성장한 부인들이 서로 부끄럽게 여기고 그 후부터 담박한 의복으로 갈아 입었다 한다.
형악(衡岳) 1)이 경양(慶陽) 2)을 맡아 다스릴 때에 동료의 여러 부인들이 모여 연회한 적이 있었다.

자리에 앉은 부인들이 모두 금붙이와 비단이 찬란하였는데 오직 공의 부인만 나무비녀에 베옷을 입었을 뿐이었다.

잔치가 파한 후 부인이 불쾌한 기색을 보이자 공이『부인이 어디에 앉았오?』라고 물으니,

부인이 상좌에 앉았다고 대답했다. 공이 말하기를 『이미 상좌에 앉았으면서 또 의복까지 화려하게 꾸미기를 

바란단 말이요 ? 부귀를 겸할 수야 있겠오』 하였다. 지금까지 미담으로 전한다.

周易에 그 君의 소매는 그 누이의 옷깃보다 못하다. 3) 하였으니 바로 이 뜻이다
서정충(徐廷忠) 4)이 오정 현승(烏程 縣丞) 5)으로 있을 때 티끌만큼의 더러움도 없었다.

출입할 적에 해어진 옷에 허름한 일산을 사용하였다. 어느날 우연히 집안 사람들이 잔소리들을 하자.

그는 문득 웃으며 말하기를 『내일 아침에는 반드시 선물이 뜰에 이를 것이니 너희들은 서서히 기다려라』 하였다.

때가 되자 귀안(歸安) 6)의 한 위관(尉官) 7)이, 탐욕 때문에 법에 걸려 어사대(御史臺) 8)로 올라갔는데 

그가 청렴하고 밝은 줄 알고 특별히 공문을 보내어 심문하도록 해서 뜰 아래 엎드린 것이다. 

서로 전하여 미담을 삼았다.]

 

[각주]
1) 형악(衡岳) : 중국 인물이나 어떤 사람인지 미상임.
2) 경양(慶陽) : 중국 감숙성(甘肅省)에 있는 고을 이름.
3) 본문은 『기군지몌(其君之袂), 불여기제지몌(不如其?之袂)』라고 되어 있다.
4) 서정충(徐廷忠) : 중국 인물이나 어떤 사람인지 미상.
5) 현승(縣丞) : 중국의 관직명. 승(丞)이란 보좌의 임무를 맡는 관직을 가리키는 말이며 현승은 현에 소속된 것임.
6) 귀안(歸安) : 오정현(烏程縣)의 동남 경계상에 있는 고을로 오흥현(烏興縣)으로 합해짐.
7) 위관(尉官) : 고을의 치안 임무를 맡는 무관직으로 도위(都尉)·기위(騎尉) 등의 명칭이 있다.
8) 어사대(御史臺) : 한(漢)나라 이후 백관(百官)의 규찰(糾察)을 맡던 관청.


★ 飮食之侈 財之所靡 物之所殄 招災之術也.
    (음식지치 재지소미 물지소진 초재지술야. )
    음식을 사치스럽게 차려 먹는 것은 재물을 소모시키는 것이며 물자를 탕진하는 것이니

    재앙을 불러 들이는 길이다.

 

[후한(後漢) 공분(孔奮) 1)이 고장(姑臧)의 원이 되었을 때 오직 노모만은 진찬으로 잘 봉양하고 처자들은 반찬이

파와 겨자뿐이었다. 어떤 사람이 공분을 조롱해서 말하기를 『기름진 자리에 앉아 있으면서도 

스스로 윤기를 내지 못한다』고 하였다. 

조어(趙峿) 2)가 합천(陝川) 군수가 되어서 청렴함이 비할 바가 없었다.

군수로 있을 때 아들·사위·노복 들이 오고가는 경우 모두 자기 양식을 가져가게 하였다.

그리고 그 고을에 은어(銀魚)가 잡히는데 여름철에 고기가 썩게 되더라도 처자들에게 그것을 맛보게 하지 않았다.
후당(後唐) 유찬 3)의 부친 비(玭)가 현령이 되었다. 그때 유찬이 비로소 입학을 하였는데,

청포 저고리와 바지를 입혔으며, 식사 때마다 자기는 고기 반찬을 먹으면서 따로 나물 반찬을 차려 상 아래서

먹게 하고는 『육식은 임금이 주는 녹이다. 너도 육식을 하고 싶으면 부지런히 글을 읽어 녹을 받도록 하여라.

나의 먹는 것은 네가 먹을 바가 아니니라』고 하였다. 이 때문에 유찬이 힘써 글을 읽어 진사에 급제하였다 한다.
호수안(胡壽安) 4)이 영락(永樂) 5) 연간에 신번(新繁) 6)을 맡아 벼슬살이를 할 때 고기를 전혀 먹지 않았다.

그 아들 자휘(自徽)가 문안을 드리러 와서 한 달 묵는 동안에 닭 2마리를 삶아 먹었다.

호수안이 성내어 말하기를 『음식을 밝히는 사람은 남들이 친하게 여긴다. 내가 20여 년 벼슬을 하도록

항상 사치를 경계로 삼고 있으나 오히려 끝을 잘 맺지 못할까 조심하고 있다.

너는 이처럼 먹기를 좋아하니 나에게 누가 되지 않겠느냐?』하였다.]

 

[각주]
1) 공분(孔奮)·고장(姑臧) : 공분(孔奮)은 후한(後漢) 때 무릉(茂陵) 사람으로 자는 군어(君魚).

소시에 유흠(劉歆)을 좇아 『좌전(左傳)』을 배웠으며, 벼슬살이에 청평(淸平)하였다.

2) 조어(趙峿) : 세종 때 사람으로 본관은 횡성, 온보(溫寶)의 아들. 문과에 급제하여 예문관제학에 이르렀다.

3) 유찬(劉贊) : 중국 후당(後唐) 때의 위주인(魏州人). 벼슬은 형부시낭(刑部侍郎)에 이르렀다.
4) 호수안(胡壽安) : 중국 명(明)나라 사람으로 신번(新繁)의 지현(知縣)이 되었을 때 평소 직접 채소를 심어 먹어서

채지현(菜知縣)이라는 칭호를 얻었다.
5) 영락(永樂) : 중국 명나라 제3대 성조(成祖)의 연호. 1403∼1424.
6) 신번(新繁) : 중국 사천성(四川省) 성도(成都) 북쪽에 있는 고을.


★ 閨門不嚴 家道亂矣 在家猶然 況於官署乎 立法申禁 宜如雷如霜.
    (규문불엄 가도난의 재가유연 황어관서호 입법신금 의여뇌여상. )
    규문(閨門) 1)이 엄하지 않으면 집안의 법도가 문란해진다. 한 가정에 있어서도 그와 같거든

    하물며 관서에 있어서 어떠하겠는가 ? 법을 세워서 거듭 금하기를 마치 우뢰와 같고 서리와 같아야 할 것이다.

 

[옛날에는 내아(內衙)의 문을 염석문(簾席門)이라 하였다. 옛날에는 발로써 격리시키고 자리로 가리어

가노(家奴)들과 관노들이 서로 대면하지 못하도록 하였으니 이것은 내외의 구분을 엄하게 하려는 것이었다.

근래에는 이 법이 어지러워져서 가노들이 제멋대로 이 문을 나가고 관비들이 어지러이 이 문을 들어오니,

발이 걷히고 자리가 치워져서 서로 귀에 입을 대고 무릎을 붙이고 명령이 여러 곳에서 나오게 되니,

이로 말미암아 온갖 폐단이 생겨났다. 어찌 한심하지 않는가.
염석문 밖에 어석 섬돌로 금하는 모양을 만든 것을 놓고 영(令)을 내려 이렇게 말한다.

『매일 아침 주노(廚奴) 2)관청 庫直, 원노(園奴)圍頭漢는 바칠 물건을 어석 위에 놓고 방울을 당겨 알리고,

곧 내아의 방울 30보 밖에 서 있으면땅에 금을 그어 설 곳을 표시한다 가노는 방울 소리를 듣고 문에 이르러

자리를 걷고 물건들을 가져다 드린 다음 빈 그릇을 도로 어석 위에 갖다 놓는다. 가노가 들어가고 나서 한참 후에

관노는 빈 그릇을 가지고 나간다. 감히 서로 얼굴을 마주 대하고 말하는 자가 있으면 내외 노속 모두 중하게

매를 칠 것이다. 들여온 물품이 정말 좋지 못해서 먹을 수가 없으면, 수령이 몸소 들여온 당일에 살펴보고

용서해 줄 만한 것은 용서해 주며 정 용서할 수 없는 경우는 적당한 틈에 수리(首吏)에게 말하여 밖에서 살펴 주의를

주도록 할 것이며, 결코 가노들은 한 마디도 말하지 못하게 하고, 또한 안식구들이 사사로이 이래라 저래라 해서도

안되고, 또한 책객(冊客)곧 子弟· 親賓이 옳으니 그르니 조금이라도 간섭하게 해서는 안될 것이다.
만약 쓰일 곳이 시급한데 납품하는 것이 아주 늦어질 때에는 응당 책방으로 쪽지를 보내어 동헌(東軒)政堂에

전하도록 할 것이다. 동헌에서는 수리를 불러 그로 하여금 독촉하게 할 것이요, 

결코 사인들이 관속에게 직접 말하지 못하도록 할 것이다. 

비록 아무리 하찮은 일이나마 만에 하나라도 명령이 여러 곳에서 나오게 해서는 안될 것이다.
법을 이와같이 세워놓으면 수리가 매우 어렵게 여겨 독촉하고 주의를 주는 것을 반드시 엄하게 할 터라,

며칠 내로 일들이 시원스럽게 진행될 것이다.
권일(權佾) 3)이 지방 원으로 나갈 때 어머니 안(安)씨 부인이 경계하기를 『백성을 대하매 반드시 너그럽게 다루어,

늙은 어미로 하여금 봉양을 받기에 부끄러움이 없도록 하여라. 내외를 엄하게 하지 않는 것은 뇌물이 들랑거리는

길이 될 것이니 각별 조심하여라』 하였다. 관기(官妓)나 관비(官婢)가 내정에 출입해서는 안된다.

자질구레한 잡된 말들이 모두 이런 무리들의 입으로부터 흘러나오는 것이다.
침비(針婢) 4)에게 시킬 일이 있으면 응당 동헌에서 수노를 시켜서 바느질감을 내보내도록 할 것이다.
급수비(汲水婢) 5)는 마땅히 염석문 옆에 담을 뚫고 홈통을 설치하고 안으로 물을 붓도록 할 것이다.
수리의 처를 내아에 출입하도록 해서는 안된다. 이런 무리들은 공관 수령이 나가 자리를 빌 때를 공관이라 한다

틈을 타서 음식을 잘 차려 오거나 또는 포백(布帛), 기물 등속의 좋은 물건들을 내실에 선사해서 사사로운 안면을

두터이한다. 수령이 이 때문에 구애가 되어 수리를 사인(私人)과 같이 여기게 되니, 정사를 해침이 많은 것이다.
언제나 성대한 제사를 지내면 제사 음식을 골고루 나누어 주어야한다.

옛날 예법에는 훈포(煇胞) 6)나 적혼(翟閽) 7) 같은 무리들에게도 은혜를 반드시 고루 베풀었다.

까닭에 『예기(禮記)』에 이르기를 『은혜가 골고루 베풀어지면 정치가 잘 된다』라고 하였다.

육방아전이나 가까이 부리는 시노· 시동들, 수고를 끼친 사람들에게 모두 골고루 돌아가게 하지 않으면 안된다.
호태초(胡大初)가 말하기를 『자제나 문객들은 이속배와 서로 사귀지 못하게 하며, 아전이나 민간의 부녀자들이

드나들며 물건을 사고 파는 일이 없도록 해야 한다. 오고 가는 사이에 서로 결탁하여 은밀한 약속을 교환하면

재앙이 집안으로부터 생겨날 것이니 어떻게 구제할 것인가. 일이 규문에 관계되면 분변하기도 쉽지 않은 것이다』

『오성가계(烏城家誡)』8)에 말하였다. 『자제나 친척 빈객들은 책방에 조용히 있을 것이요, 이속· 향임(鄕任)·

관노 들과 대면해서 말을 붙여서는 안된다.전에 나의 先人께서도 군현을 다스릴 때에 이같이 경계하셨다.

자제들은 마땅히 새벽에 일어나서 세수를 하고 머리를 빗고 아버지 침소에 나아가 문안을 드리되즉 신성(晨省),

참알(參謁)할 때가 되면 곧 자기 방으로 물러나올 것이요, 부친의 곁에 서서 참알하는 것을 보아서는 안된다.

간혹 이속들이 물러가고 관정이 비어 있을 때에 동헌으로 올라가서 모시고 담소하는 것은 좋다.

그러나 송사하러 백성이 들어오거나 죄인에게 매를 친다거나 할 때에는 곧 자기 방으로 물러나와야 할 것이요,

부친의 곁에 서서 판결을 하고 죄인을 다스리는 것을 보아서는 안된다. 』
자제들이 혹 상경해서 집에 갈 때라든가, 혹 근읍에 놀러 나갈 때에는 마땅히 자기 종과 자기 말을 이용해야 한다.

흔히 자제들이 나들이할 적에 관의 말을 타고 좌우로 관노들의 옹위를 받아 마치 관인행차 모양을 차려 보는 사람을

민망케 하고 있다. 자제들이 책방에 있을 때에 반드시 모시는 아이가 있게 된다. 즉 책방통인이다.

만약 이 아이가 없으면 손님들이 수족을 꼼짝할 수 없으므로 금지할 수는 없다.

그러나 의당 입에서 젖내가 나는 아직 지각 안난 아이를 시키되, 항상 자제들에게 주의를 주어서 

그 아이를 사랑하고 쓰다듬으면서 글자도 가르치며, 비록 잘못이 있더라도 큰소리로 꾸짖지 말도록 할 것이다.

자제들이 혹 산사(山寺)로 놀러나갈 때에는 책방통인을 데리고 조용히 걸어서 가는 것이 좋다.

절에서 먹는 음식에 대해서는 값을 후하게 주어야 한다. 폐막(弊?)을 알아보아서 돌아와 아뢰도록 하되,

비록 시(詩)를 아는 중이나 경서를 아는 중이 있다 하더라도 관부로 불러들여서는 안된다.
만약 읍내 청년들이 서로 만나볼 것을 청하더라도 사양하여 만나지 말고, 졸지에 찾아와서 말을 붙이는 경우는

온화한 얼굴로 사양해서 『가훈(家訓)이 엄해서 감히 환대하지 못하니 너그러이 용서하기 바라오』하고

곧 일어나서 자리를 피하도루 한 것이다.]

 

[각주]
1) 규문(閨門) 여성이 거처하는 곳을 뜻하며, 규중(閨中)·규방(閨房)과 같은 말이다.
2) 주노(廚奴) : 음식을 맡은 관노.
3) 권일(權佾) : 숙종 초년에 청도군수(淸道郡守)를 지낸 사람.
4) 침비(針婢) : 바느질을 맡은 관비(官婢) 내지 관기(官妓).
5) 급수비(汲水婢) : 관청에 소속되어 주로 물을 긷는 잡역에 종사하던 관비. 수급비(水汲婢)라고도 한다.
6) 훈포(煇胞) : '휘(煇)'은 가죽을 다루어 갖옷을 만드는 사람, '포(胞)'는 가축을 잡는 일을 맡은 사람.

7) 적혼(翟閽) : '적(翟)'은 악리(樂吏)의 천한 자이며, '혼(閽)'은 문지기로 하천한 사람들이 말았음.
8)『오성가계(烏城家誡)』 : 연일(延日) 정씨(鄭氏) 가문에서 후손을 경계하기 위해서 지은 것이 아닌가 추측된다.


★ 干謁不行 苞苴不入 斯可謂正家矣.
    (간알불행 포저불입 사가위정가의. )
    청탁이 행해지지 않고 뇌물이 들어오지 못하게 한다면, 이로써 집안을 바로잡은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나의 지위가 높아지면 나의 처자부터도 모두 나를 가리어 속이고 저버리는 사람이 되는 것이다.

남편을 공경하지 않는 처가 없으며, 아버지를 사랑하지 않는 아들이 없는데, 어찌 가리어 속이고 저버릴 마음이

있겠는가 ? 그러나 도리를 아는 사람이 적기 때문에 혹은 안면에 끌리기도 하고, 혹은 재물에 유혹되기도 해서

청탁이 이에 행해지는 것이다. 이것은 이른바 아녀자의 인(仁)이다.

혹은 부수(膚受)의 참소 1)로 어떤 아전을 제거하라 하기도 하고 혹은 반목지용(蟠木之容) 2)으로

어떤 사람을 천거하기도 하여, 혹은 <갑>에 대한 판결은 여론이 원통하다고 하고, 혹은 <을>의 옥사(獄事)는

원님의 판결이 잘못되었다고도 한다. 아래에 있는 간사한 것들이 온갖 계교로 뚫어서 이간질을 하니,

어진 아내 순진한 아이들이 그들의 술수에 빠져서 스스로는 공정하게 아뢰는 것이라 생각하지만 자기도 모르게

고자질이 되는 것이다. 내가 본 바 이와 같은 경우가 많았다. 남의 말을 들을 때 금방 신임하지 말고

오직 천천히 사리를 따져서 만약에 그의 말이 과연 충직한 데서 나온 것이면 외모에 표정을 짓지 말고 잠자코

그 일을 선처할 것이다. 만약에 그의 말이 간사한 것들의 꾀에서 나온 것이라면 경위를 캐내고 내막을 들추어내되,

본 사건 외에 청탁한 죄까지 부과해서 반드시 법에 붙인다는 것을 명백히 보이어 크게 징계하는 것을 그만두지

말 것이다. 만약 처자(妻予)는 나를 사랑하는 사람이라고 그 말을 충직하다고 생각하면 사실에 크게 어긋날 것이다.

처자도 그렇거든 하물며 그 나머지야 말할 수 있겠는가.
양계종(楊繼宗)이 가흥군(嘉興郡) 3)을 다스릴 때에 어느 마부가 돼지 머리를 선사하매 부인이 그것을 받았다.

양계종이 돌아와서 그것을 먹은 다음 어디서 온 것인가를 물었다. 부인이 사실대로 말하자 그는 크게 후회하고

북을 두들겨 소속 아전들을 불러 고했다. 『계종이 집을 잘 다스리지 못해서 처로 하여금 뇌물을 받아들여 몸을

불의에 빠지도록 하였다』하고 이어 조협환(皂莢丸) 4)을 삼켜 먹은 것을 토해내고 그날로 처자를 돌려보냈다.
생각컨대 그 일은 그렇게까지 할 것은 없다. 후히 돼지값을 치러주고 집안 사람들을 조용히 경계해서 다시 뇌물을

받아들이지 말도록 할 것이고, 만약 그래도 개전하지 못하면 남모르게 서서히 돌려보내는 것이 옳다.

겸손은 지극한 덕이지만 겸손을 밖으로 노출하면 덕을 잃게 되며, 청렴은 높은 행실이지만 청렴을 밖으로 떠벌리면

거짓된 행실이 되고 만다. 매양 청렴한 선비들의 행적을 보건대 인정에 가깝지 않은 행동은 도리어

이름을 좋아하는 것 같으니 군자가 본받을 바가 아닌 것이다.
고려 유응규(庾應圭) 5)는 조행이 곧고 견실했다. 일찌기 남경(南京) 지금의 楊州의 쉬로 있을 때 정사에

청렴 개결함을 숭상했다. 그의 처가 해산을 하고 유종이 심했는데 단지 나물국만 먹을뿐이었다.

한 아전이 남몰래 꿩 한 마리를 가져왔다. 그의 처는 『주인이 평소에 남의 선물을 받지 않았는데,

어찌 나의 구복(ㅁ腹)을 위해서 주인의 맑은 덕에 누를 끼칠소냐』고 말하니 아전도 부끄러워서 물러갔다.

청음(淸陰) 김상헌(金尙憲) 6)이 벼슬살이에 청백하였다. 어느 관인이 자기 부인이 뇌물을 받아 비방을 듣고 있음을

걱정하자, 김공이『부인의 소청을 하나도 들어주지 않으면 비방이 그칠 것이다』고 일러주었다.

그 관인이 크게 깨닫고 그 말대로 하였다. 그 부인이 항상 김공을 욕하기를, 『저 늙은이가 저만 청백리가 되었으면

그만이지 왜남까지 본받게 해서 나를 이렇게 고생하게 하는가』라고 하였다. 鄭載崙의 因繼錄
이공 안눌(李安訥)호는 東岳이 충청도 관찰사로 있을 때였다. 선산(先山)이 면천(沔川)에 있었는데 공의 아들 유가

면천서 죽었다. 그의 어머니가 장차 분곡(奔哭) 7)한다는 것을 듣고 공이 사람을 중로에 내보내서 돌아가도록 하고

『내가 지금 한 도를 맡아 다스리고 있으니 나의 부녀자들이 이 도의 경계 안으로 들어와서는 안된다』고 하였다.

준엄해서 사정을 두지 않음이 이와 같았다.]

 

[각주]
1) 부수(膚受)의 참소 : 살을 찌르는 듯 통절한 참소.
2) 반목지용(蟠木之容) : '반목(蟠木)'이란 큰 나무가 꾸불텅하게 서린 것으로, 쓰임이 될 수 없는 자인데

좌우에서 잘 추천해서 쓰임을 얻는다는 의미.
3) 가흥군(嘉興郡) : 지금 중국의 절강성(浙江省)에 있던 고을.
4) 조협환(皂莢丸) : 쥐엄나무에서 뽑아 만든 알약으로 토하게 하는 약.
5) 유응규(庾應圭) : 인종 9∼명종 5(1131∼1175) 자는 빈옥(賓玉). 문하시랑평장사 유필(庾弼)의 아들.

6) 김상헌(金尙憲) : 선조 3∼효종 3(1570∼1652) 자는 숙도(叔度), 본관은 안동(安東). 시호는 문정(文正).

명관으로 청요(淸要)의 직을 역임하였으며, 청나라에 대해서 강력하게 척화(斥和)를 주장하였다.

7) 분곡(奔哭) : 친속(親屬)의 부고를 듣고 달려가는 것.

★ 貿販不問其價 役使不以其威 則閨門尊矣.
    (무판불문기가 역사불이기위 즉규문존의. )
    물건을 살 때 그 값을 따지지 않고, 사람을 부릴 적에 위압으로 하지 않으면, 그 규문이 존경을 받게 될 것이다. 

 

[『상산록(象山錄)』에 이르기를 『매양 보면 법도가 없는 가정은 수리(首吏)나 주리(廚吏),

수노(首奴)나 공노(工奴) 1) 공고직(工庫直) 들이 항상 염석문(簾席門) 밖에 서서 무명· 삼베· 명주· 생모시 등속의

잇단 보따리와 가득한 짐을 내아(內衙)로 들여보내어 고르도록 한다. 그러면 사나운 노비들이 서로 분부를 전갈하되

거칠다느니, 성글다느니, 값이 높아 비싸다느니 하며, 가장 좋은 물건을 골라서 헐값으로 강요한다.

싼 값으로 좋은 물건을 사려고 한다. 시끄러운 소리가 바람결에 흘러나가고 얄은 속셈이 여러 사람의 눈에

들여다보이게 된다. 그래서 장수가 베를 안고 나가서 악담을 사방으로 퍼뜨리게 되니 이것은 천하에 큰 수치이다.

마땅히 약속을 정하여 포백(布帛)을 사들이는 권리는 수노에게 맡긴다.首吏도 또한 큰 아전이기 때문에 이런 하찮은 일을 맡게 함은 불가하다 수노는 자신이 묵인을 찍어서 책방에 바치고, 책방은 펴보지도 말고 내아로 들여보낸다.

내아에서는 비록 승수(升數) 2)가 반으로 줄고 값이 곱절이 들었더라도 되돌리지 않고 이러쿵저러쿵 한 말도 없이

그냥 받아들이면 가정의 법도가 어긋남이 없을 것이며 나쁜 소리가 밖으로 퍼지지 않게 될 것이다』 하였다.
『상산록』에 이르기를 『식견 없는 부녀자들이 관비를 부리는 것을 집의 종 부리듯이 해서 매를 때리기도 하고

위세로 누르기도 한다. 기한을 촉박하게 주고 매질을 혹독하게 해서 원한이 한몸에 돌아오고 비방이 사방에

번지게 하니 어찌 이래서 될 것인가. 일언반구(一言半句)도 말이 안으로부터 나가게 해서는 안된다』고 하였다.
안팎 의복은 관비(官婢)·관기(官妓)를 시켜서 바느질을 해서는 안된다. 만약 부득이 남의 손을 빌어야 할 경우는

마땅히 침비(針婢)이른바 針匠이라 한다를 불러서 바느질집(針家)읍마다 바느질 잘하는 바느질집이 있다로 보내어

삯전을 주고 짓는 것이 좋다. 매양 보면 안사람들이 온필 가는 누비감속칭으로는 필루비(疋縷飛)을 억지로 침기에게

맡기면 침기는 자기의 비녀· 팔찌나 솥단지 등을 팔아서 바느질집의 삯전을 갚는다. 원성이 하늘로 치솟을 뿐 아니라,

비녀· 팔찌· 솥단지 등속은 몸을 팔아 얻은 것들이다. 이런 따위로 옷을 지어 조복(朝服)·제복(祭服)을 만들고,

부모가 낳아준 몸을 가리니 임금을 공경한다고 할 수 있으며, 선조를 공경한다고 할 수 있으며,

부모가 낳아준 몸을 잘 지킨다고 할 수 있겠는가. 말하기도 더러운 것이다. 다만 부중(府中)의 가난한 손님에게

주는 옷은 바느질이 거칠더라도 반드시 남의 손을 빌릴 것이 없고 침기에게 시킬 것이다.]

 

[각주]
1) 공노(工奴) : 공방(工房) 소속의 관노로서 고직(庫直) 일을 맡은 자.
2) 승수 : '승'은 우리말로 '새'인데, 피륙의 날을 세는 단위. '승'의 등급 등수에 의해서 피륙의 호부가 결정된다.


★ 房之有嬖 閨則嫉之 擧措一誤 聲聞四達 早絶邪慾 毋裨有悔.
    (방지유폐 규즉질지 거조일오 성문사달 조절사욕 무비유회. )
    집안에 애첩을 두게 되면 부인이 질투하기 마련이고, 행동을 한번 잘못하면 소문이 사방으로 퍼져 나간다.
    일찌기 음란한 욕망을 끊어서 후회함이 없도록 해야 할 것이다.

 

[질투 없는 부인은 아주 드물다. 수령이 근신하지 않고 혹 기생을 좋아하다가는 하동에서 사자후(獅子吼)가 

일어나고, 강좌(江左)에서 주미(塵尾)를 들고 달리기를 재촉하며,1) 창갱(鶬羹)으로도 치료되지 않고

눈썹이 먼저 깎여질 것이다. 2) 작게는 집안이 시끄러워지고 크게는 관부의 바깥까지 떠들썩해져서, 불행히도 

감사에게 소문이 들리면 고적(考績)에 쓰이기를, 『뜻은 선정을 원했으나 사실인즉 해괴한 소문이 들린다』고 

할 것이다. 천하에 수치가 이보다 더 큰 것이 있겠는가. 수령은 마땅히 이 점을 생각해서 스스로 더럽힘이 없도록 

해야 할 것이다. 국법으로 금하는 일이라 비단 가정의 재난으로만 두려워할 것이 아니다.

진(晋)의 사막(謝邈) 3)이 오흥(吳興) 4) 태수로 있을 때, 그의 처 극씨의 성질이 질투가 심해서 사막이 첩을 얻으매

원망한 나머지 절연하는 글을 보내왔다. 사막은 문하생 구현달(仇玄達)이 자기 처를 위해서 그 글을 지어준 것으로

의심하고 구현달을 배척하였다. 구현달은 손은(孫恩) 5)에게 달아나서 마침내 사막을 해쳤다.]

 

[각주]
1) 송(宋)나라 진조의 고사이다. 그의 처 유(柳)씨가 투기가 심하였는데 그가 손을 청하여 잔치하는 자리에

    기생이 옆에 있었다. 이에 유씨가 문득 막대로 벽을 치며 소리를 쳐서 손들이 모두 돌아가버렸다.

    소식(蘇軾)이 이를 기롱해서 『홀문하동사자후(忽聞河東獅子吼), 주장낙수심망연(?杖落手心茫然)』이라고

    시를 지었다. 하동은 그 부인의 성이 유(柳)임을 빗댄 것이고 「사자후」는 진조가 부처에 대하여 말하기를

    좋아하였기 때문에 비가(沸家)의 문자를 쓴 것이다. 강좌는 지금의 강소성지방으로 육조(六朝)시대의 서울이며,

    진미는 먼지떨이니 옛날 말할 때 손에 가지던 물건이다. 육조 때 왕도가 처첩 간의 싸움이 나서 수레를 타고

    주미를 휘두르며 달려갔다 한다.
2) 양무제(梁武帝)가 시녀(侍女)를 사랑하였는데, 부인 치씨가 이에 질투하다가 병이 났다.

    신하 한 사람이 창경 고기를 먹으면 그 병이 나을 수 있다고 하므로 그것을 먹였더니 치씨의 질투병이 반쯤

    나았다 한다. 당(唐)의 방유복(房孺復)의 부인 최씨(崔氏)가 질투가 심하여 여비(女婢)가 화장하는 것을

    못마땅하게 여겨 여비(女婢)의 눈썹을 깎아버리고 푸른색을 칠해 주었다 한다. (淵鑑類函)
3) 사막(謝邈) : 중국 진(晋)나라 사람으로 자는 무도(茂度). 성질이 강경하고 자못 견식이 있는 사람이었다.

    오흥태수(吳興太守)로 있다가 반군 손은(孫恩)에게 붙잡혀 살해 당했다.
4) 오흥(吳興) : 지금의 중국 절강성(浙江省)에 속한 지명.
5) 손은(孫恩) : 중국 진(晋)나라 때 낭사인(琅邪人). 오두미도(五斗米道)를 신봉하였는데 반란을 일으켜

    자호를 정동장군(征東將軍)이라 하고 그의 무리들을 장생인(長生人)이라 칭하였다. 뒤에 패하여 죽었다.

 

 

★ 慈母有敎 妻子守戒, 斯之謂法家 而民法之矣.
    (자모유교 처자수계 사지위법가 이민법지의. )
    어머니의 사랑스러운 가르침이 있고, 처자들이 계율을 지키면

    이러한 집안을 법도가 있는 집이라 말할 수 있고 백성들도 이를 본받을 것이다.

 

[조찬(曹璨) 1)은 빈(彬)의 아들이다. 절도사(節度使)가 되었을 때 그 모친이 어느날 집의 창고에 돈 수천 꿰미가

쌓인 것을 보았다. 찬을 불러 그것을 가리키고 말하기를, 『 너의 선친께서는 내외로 벼슬을 역임하였지만

일찌기 이렇듯 재물이 쌓인 것을 못 보았다. 네가 너의 아버지보다 훨씬 못함을 알겠구나』 하였다.
양동산(楊東山) 2)이 오(吳)의 태수로 있을 적에 그의 모친 나대부인(羅大夫人)은 일찌기 밭에 모시를 심고

몸소 길쌈을 해서 옷을 해 입었다. 동산이 월급을 떼어서 모친을 봉양하였는데 모친이 갑자기 병이 났다.

병이 나은 다음 모아둔 봉급을 내놓으면서 『내가 이것을 쌓아두고부터 마음이 즐겁지 않아서 병이 났었다.

이제 이 돈을 모두의원에게 사례로 보내면 나는 무사하게 될 것이다』라고 말하였다. 아들 넷과 딸 셋을 낳아서

모두 자기 젖으로 키웠는데, 『남의 자식을 굶겨가며 나의 자식을 먹이는 것은 참으로 무슨 마음인가』라고 하였다.
정선과(鄭善果) 3)가 경주(景州) 4)를 다스릴 때였다. 모친 최씨가정사에 밝았는데, 매양 선과가 나가서

송사(訟事)를 들을 때면 문득 장막 뒤에 호상(胡床) 5)을 갖다 놓고 앉아서 엿보는 것이었다.

만약 그 판결이 이치에 합당하면 앞에 앉히고 대해서 담소를 하고 만약 처결한 일이 옳지 못하거나 부당하게

꾸짖고 성을 내면 방으로 돌아가서 소매로 얼굴을 가리고 눈물을 흘리며 종일토록 음식도 들지 않았다.

이 때문에 아들 정선과가 이르는 곳마다 청백리로 명성을 얻었다 한다.

다른 책에는 唐 정선과가 기주(沂州)를 다스릴 때라고 하였다. 생각컨대 이것은 참으로 훌륭한 일이다.

그러나 바깥에 관여하지 않는 것이 부인의 도리이다. 만약 아전이나 관노들이 죄가 있어 장차 중장(重杖)을 받게 될

경우 혹 대부인이 쪽지를 보내서 너그러이 보아주도록 하고, 수령이 이에 따라 감동을 해서 형을 가볍게 해주면

정사에 방해가 안되고 은혜가 모친에게 돌아갈 것이니 좋은 일이다. 처이하의 가족이 쪽지를 보내는 것은 불가하다.
선배에 윤팔송(尹八松) 6) 같은 분들은 매양 양로연(養老宴)을 배설할 적에 70 이상의 부인에 대해서는

자기 어머니로 하여금 연회를 주관하도록 하였는데 예법에 어긋나지 않을 것 같다.
윤석보(尹碩輔)가 풍기 군수로 있을 때 처자는 풍덕(豊德)7) 시골집에 남아 있었는데 주림과 추위로 생계가 

어려웠다. 처 박씨가 집에 전하던 비단옷을 팔아서 1묘(畝)의 밭을 샀다. 그가 듣고 편지를 달려보내 

그 밭을 곧 돌려주라 하고, 『고인은 한 자 한 치의 땅도 넓히지 않고 오직 임금에게 충성을 다하였다오. 

이제 내가 대부(大夫)의 말석에 있으면서 남의 녹(祿)을 받아먹으면서 전택(田宅)을 사들이는 것이 옳겠오. 

백성과 매매를 해서 나의 죄를 무겁게 하지 마오』,라고 하였다. 이에 박씨는 부득이 그 밭을 돌려주었다고 한다.
유공작(柳公綽) 8)이 절도사(節度使)로 있을 때에 그의 아들이 매양 경내에 들어와도 군읍에서조차 알지 못했다.

관부(官府)에 당도해서 출입시에는 언제나 극문(戟門) 9) 밖에서 말을 내렸다.
생각컨대, 극문은 지금의 이른바 외삼문(外三門) 10)을 말한다. 몇걸음도 안되는 거리여서 그 수고로움이

대단치 않지만 족히 가정의 법도를 볼 수 있는 것이다. 어찌 본받지 않을 것인가.
자제들이 내려오면 으례 정문을 여는데 그것은 예가 아니다. 마땅히 동협문(東夾門)으로 출입해야 할 것이다.

『예기(禮記)』에 이르기를, 『자식 된 자는 문 가운데 서지 않고 길 가운데로 걷지 않는다』고 하였다.]

 

[각주]
1) 조찬(曹璨) : 중국 송(宋)나라 사람. 자는 도광(韜光). 활을 잘 쏘며 『육도삼략(六韜三略)』에 익숙했고

   『좌씨춘추(左氏春秋)』를 좋아하였다. 계단(契丹)과의 싸움에 전공이 있었다.
2) 양동산(楊東山) : 중국 송(宋)나라 사람. 만리(萬里)의 아들로 자는 백대(伯大), 호는 동산(東山),

    이름은 장유(長孺), 시호는 문혜(文惠). 복건안무사(福建按撫使)를 지냈다.
3) 정선과(鄭善果) : 중국 당(唐)의 형택(滎澤) 사람. 청리로 이름이 있었으며, 형부상서를 거쳐 기주자사를 하였다.
4) 경주(景州) : 지금의 중국 하북성(河北省)에 속한 지명.
5) 호상(胡床) : 교의(交椅) 즉 의자.
6) 윤팔송(尹八松) : 선조 5∼인조 17(1572∼1639) 이름은 황(煌)이요, 팔송은 그의 호이다. 자는 덕요(德耀),

    시호는 문정(文正). 영광(靈光) 군수를 지낸 바 있으며, 승지(承旨)·이조참의(吏曹參議) 등을 역임했다.
7) 풍덕(豊德) : 지금 개풍군(開豊郡)에 있는 지명.
8) 유공작(柳公綽) : 중국 당(唐)나라 화원(華原) 사람. 자는 관(寬). 성격이 엄중하였으며 절도사를 역임하고

    병부상서(兵部尙書)에 이르렀다. 시호는 원(元).
9) 극문(戟門) : 귀족의 집 및 관가(官家)의 문을 칭하는 말. 극(戟)이란 무기로 수문(守門)한 데서 유래했다.
10) 외삼문(外三門) : 출입구를 중앙과 좌우 셋으로 한 큰 문. 관청의 정문.

 

 

 

제 4 장 병객(屛客) :

           (지방관청에 있는 책객 및 겸인 등 객인과 외부로부터의 청탁을 물리친다는 뜻이다.)

 

 

★ 凡官府 不宜有客 唯書記一人 兼察內事.
    (범관부 불의유객 유서기일인 겸찰내사. )
    무릇 관아에 책객(冊客)을 두는 것은 옳지 못하다.

    오직 서기 한 사람이 겸임하여 내아(內衙)의 일을 보살피도록 해야 한다.

 

[요즈음 습속에 소위 책객(冊客) 한 사람이 있어서 회계를 맡아 하기(下記)즉 날마다 쓰는 쌀·소금 등의 장부를

살피는데 이는 법이 아니다. 관부의 회계에는 대체로 공용(公用)과 사용(私用)이 기입되지 않는 것이 없고,

뭇 이속(吏屬)들과 하인들이 관계되지 않는 것이 없다. 그런데 지위도 없고 명분도 없는 사람으로 하여금

이 권한을 총람(總攬)케 하여 날마다 재정 맡은 아전 및 관노들과 <많다> <적다> <거짓이다> <사실이다> 하니

어찌 사리에 맞는 것이겠는가. 이 책객이 아전과 관노들의 속이고 숨기는 짓을 잘 적발하면, 그 원망은

내게 돌아올 것이고, 더럽고 잘못된 짓을 덮어주기를 잘하면 해가 내게 돌아올 것이니 무슨 도움이 되겠는가.

하기의 세세한 지출은 지나치게 살필 것이 못된다. 진실로 수령이 밝으면 아전들은 저절로 속이지 못하는 것이다.

비록 좀도둑질이 있다 하더라도, 1년 손실은 만전(萬錢)즉 백 냥을 넘지 못할 것인데,

회계를 보는 책객을 1년간 먹이는 비용은 적어도 3·4만전을 내려오지 않을 것이니,

얻는 것이 잃는 것을 보충하지 못하고 한갓 내게 누만 더할 뿐이다. 책객은 마땅히 제거해야 할 혹인 것이다.

매양 보매 인색한 사람은 책객에게 거듭 타일러서 하기(下記)를 꼼꼼히 빗질하게 하는데,

책객은 아전과 약속하여 말하기를 『수령의 성품이 깎기를 좋아하니 나 역시 괴롭다. 무릇 소요되는 비용을

너는 마땅히 실제보다 많이 기록하라. 나는 그것을 깎겠다. 기름 5홉을 쓴다면 너는 불려서 7홉으로 기록하라.

나는 깎아서 5홉으로 하겠다. 너에게 손해가 없고 수령에게도 잃는 것이 없으며,

나는 그 사이에서 허물과 책망을 면할 수 있으니 좋지 않는가』하면 아전들은 기꺼워하여 결국 그와 한마음이 되어

몰래 책객에게 토산물을 뇌물로 보내면 책객은 그의 남용(濫用)을 덮어주어 그 이익을 서로 나누어 먹는다.

수령이 그만두고 돌아간 뒤에는 뭇 아전들이 서로 모여 이런 일들을 이야기하면서 손뼉을 치며 웃을 것이니

수령은 어리석은 자로 되고 책객은 간사한 자로 되어 두 이름이 모두 추악하게 될 것이다. 

이것을 알지 않으면 안된다.
무릇 관에서 쓰는 여러가지 물건에는 마땅히 월례(月例) 1)가 있을 것이다. 오직 서기 한 사람은 없앨 수 없다.

무릇 수령의 가사에는 모름지기 가재(家宰) 2)古禮에 家臣으로서 일을 주관하는 자를 宰라 하였다한 사람을 두어

아래와 위를 이어주고 안팎을 통하게 해야 할 것이다. 무릇 잔일들을 수령이 스스로 관장하면 체모에 손상되는

일이 있고 자제들이 관장하면 비루하게 되기 때문에 가재는 없앨 수 없는 것이다. 제사에 쓰이는 물건과 선사하는

물건을 싸서 봉하고 표시하는 일은 마땅히 이 사람에게 맡기고, 내아(內衙)에서 쓰는 여러가지 물건에 대해 출납하고

조절하는 일도 마땅히 이 사람에게 맡기되, 다만 이 사람으로 하여금 한 마디의 명령이나 한 마디의 말도 내놓게 해서는 안되고 다만 틈을 타서 동헌(東軒) 3)에 아뢰어 명령받도록 한다. 또 무릇 편지를 주고받는 일은

만일 내 자제들 중에서 이런 수고를 대신할 사람이 없다면 마땅히 이 사람에게 맡길 것이니,

이래서 기실(記室) 4)이라 하는 것이다. 수령의 편지에 더러 모쉬(某伜 5)라 칭하는데 이것은 잘못이다.

군쉬(郡伜)를 가리켜 반자(半刺) 6)라고 하는데 쉬는 부(副)요, 둘째(貳)인 것이니, 감영(監營) 7)의 판관이 자칭하여

쉬라 하면 옳으나 공주· 전주 등 군수와 현령은 쉬가 아니다. 또 쉬의 음(音)은 취(取)와 내(內)의 반절(反切)음이

蔡와 비슷하다, 요즈음 이를수(粹)라고 읽는 것도 역시 잘못이다.
월례(月例) 외에 따로 지출된 것은 마땅히 이 사람으로 하여금 사사로이 장부를 만들게 하고, 

월말의 회계가 끝나거든 회계문서를 모아 이 사람에게 주어 월례의 소용과 따로 지출된 소용을 사사로이 

조사시켜 만일 착오가 생기면 마땅히 적발하여 동헌에 보고하도록 한다. 

동헌은 수리(首吏)를 불러 이를 바로잡도록 할 뿐이요, 어디까지나 이 사람으로 하여금 아전이나 노복들을 불러 

함께 앉아 타산하면서 붉은 점을 치거나 먹으로 지우거나 하게 해서는 안된다.]

 

[각주]
1) 월례(月例) : 매월(每月)의 정례(定例).
2)가재(家宰) : 가신(家臣)의 장(長). 내관령(內管領)·가상(家相) 혹은 가노(家老)라고도 한다.
3) 동헌(東軒) : 수령이 집무하는 정당(政堂). 여기서는 수령(守令)을 가리킴.
4) 기실(記室) : 원래 중국에서는 후한(後漢) 이래 태위(太尉)·태수(太守)의 속관으로서 비서와 서기를 겸한 관직.

    우리나라의 경우 그런 직제가 없었고, 여기서는 기록에 관한 사무를 맡아보는 사람.
5) 모쉬(某伜) : 졸(倅)은 원래 부관을 뜻하는 말인데, 우리나라에서는 흔히 수령을 가리키는 말로 오용되었다.
6) 반자(半剌): 원래 중국의 군(郡) 또는 현(縣)의 보좌관인데 장사(長史)·별가(別駕)·통판(通判) 따위를 일컫는다.
7) 감영(監營) : 감사의 정청(政廳). 현재의 저청(這廳)과 같음.


★ 凡邑人及隣邑之人 不可引接 大凡官府之中 宜肅肅淸淸.
    (범읍인급린읍지인 불가인접 대범관부지중 의숙숙청청. )
    수령은 무릇 본 고을 사람 및 이웃 고을 사람을 관아에 끌어들여 접견해서는 안된다.
    대체로 관부(官府) 안은 마땅히 엄숙하고 맑아야 한다.

 

[요즈음 풍속에 소위 존문(存問) 1)하는 법이 있다. 토호(土豪)와 간민(奸民)이 조정의 고관들과 결탁하고 있어서

수령이 부임인사를 드리는 날에 조정의 고관들이 존문을 부탁하고 일마다 두호(斗護)즉 비호가 다해 주도록 한다.

옛날 참판 유의(柳誼)가 홍주(洪州)의 목사가 되었을 때 존문의 촉탁은 하나도 시행하지 아니하였다.

내가 그의 지나치게 융통성 없음을 말한즉 유공이 말하기를 『주상께서 이미 홍주 백성을 나 같은 목신(牧臣)에게

맡겨서 그들을 구휼하고 비호해주도록 하셨으니, 조정에 있는 고관의 부탁이 비록 중하기는 하지마는 어찌하여

이를 넘어설 수야 있겠소. 만일 내가 편벽되이 한사람만을 잡아 존문하고 두호하면 이는 군왕의 명령을 어기고

한 사람의 사사로운 명령을 받드는 것이니 내가 어찌 감히 그런 짓을 하겠소』 하였다.

나는 그 말에 깊이 감복하여 다시 더 논난(論難)하지 못했다. 대저 존문은 경솔히 할 수 없는 것이다.
만일 하는 수 없이 들어서 시행해야 할 경우에는 모름지기 부임 후3개월이 지난 후에 서서히 그 사람의 행동을 

살펴서 힘으로 백성을 강압하거나 간사한 행적이 없는 사람이라면 이에 존문할 수 있을 것이다.

다만 그 예단(禮單) 2)의 끝에 쓰기를 『모름지기 와서 회사(回謝)하지 말라』고 할 것이다.
문리(門吏)禮房의 承發 3) 등 들을 엄중히 타일러 단속하기를 『무릇 읍내 유생중 향교의 현 재임(齋任)이거나

새로 존문을 받은 자라 하더라도 통자(通刺) 4)하께 해서는 안된다. 만약 어김이 있으면 네게 죄를 줄 것이다』하라.
조정에서 벼슬을 살다가 퇴관한 자는 비록 쇠잔해진 음관과 무관이라 하더라도 불가불 먼저 존문해야 할 것이니,

이것은 존귀한 자를 존귀하게 여기는 뜻인 것이다. 그들 중에 혹 찾아오는 자가 있으면 마땅히 거절해서는 안된다.

서로 만나는 날 약속하기를 『뜻이 두텁지 않은 바는 아니나 예에는 한계가 있어야겠읍니다.

나는 공과 약속하고자 합니다. 의논할 일이 있으면 내가 가서 서로 만날 수 있을 것이요, 모일 일이 있으면

내가 초청하여 서로 만날 수 있을 것입니다. 만일 그렇지 않다면 담대멸명(澹臺滅明) 5)이 일찌기 언(偃) 6)의

사실(私室)을 방문하지 않았고, 방공(龐公) 7)이 일찌기 성부(城府)에 들어온 일이 없었다고 합니다.

다소 섭섭하시더라도 길이 좋은 관계를 가지자는 것입니다』

그리고 문리에게 신칙하면서 이 약속을 알려주어야 한다.
고을 안에는 반드시 일컬어 문사(文士)라는 자들이 있어서 과시(科詩)와 과부(科賦) 8)로 수령과 교분을 맺고

그것을 인연으로 하여 농간을 부리는 자가 있을 것이니 그런 사람을 끌어들여 접견(接見)해서는 안된다.

또 풍수(風水) 9)·두수(斗數) 10)·간상(看相) 11)·추명(推命) 12)· 복서(卜筮) 13)· 파자(破字) 14) 등 가지가지

요괴(妖怪)하고 허탄한 술수를 가진 자가 수령과 인연을 맺어 작으면 정사를 문란케 하고 크면 화를 입게 할 것이니

마땅히 천리 밖으로 물리칠 것이요 그림자조차 가까이해서는 안될 것이다.
오직 의원만은 물리치기가 어렵다. 내가 의술을 모르고 그 사람이 정통하면 부득불 때때로 부르지 않을 수 없다.

그러나 마땅히 십분 조심하여 삼가할 것이요, 보수는 후하게 주되 입을 열어 청탁할 것을 허용해서는 안된다.
윤옹귀(尹翁歸) 15)가 동양(東陽) 16)의 태수가 되었을 때, 우정국(于定國) 17)이 고을 유생 두 사람을 부탁하고자

하여 그들을 후당(後堂)에 기다리게 하였다. 우정국이 윤옹귀와 함께 종일토록 이야기를 나누었지만

그 고을 유생들을 불러내 보이지 아니하였다.

이미 돌아간 뒤에 우정국이 그들에게 말하기를 『이 어진 태수는 사정(私情)으로 부탁할 수 없다』 하였다.
『남사(南史)』에 『사남(謝覽) 18)이 오흥(吳興) 태수가 되었을 때, 중서사인(中書舍人) 19) 황목지(黃睦之)의

집이 오정(烏程)에 있었다. 그의 자제들이 횡포를 부리더니 사남이 아직 고을에 도착하기도 전에 황목지의

아우가 맞이하여 알현하려 하였는데 사남이 이를 쫓아내 버렸다.
설문청(薛文淸)의 『독서록』에 이르기를 『선비들은 본래 예로써 접해야 하지만 혹 글귀나 글씨를 빙자하여 

그것을 매개로 수령 앞에 나아가니, 한번 간곡하고 흡족하게 대해주면 그들의 농간에 빠지는 수가 있다. 

이런 부류들을 잘 살펴서 멀리 끊어버릴 수 있다면, 

또한 마음을 맑게 하고 일을 줄이는 데 도움이 될 것이다』 하였다.

정한봉(鄭漢奉)은 말하였다. 『벼슬살이할 때에는 이색적인 사람과는 서로 접촉하지 않는 것이 제일 좋다.

무축(巫祝)이나 니온 20) 같은 부류들뿐만이 아니라 공예(工藝)를 다루는 사람들도 필요할 때만 쓰고,

오래 머물러 있도록 해서는 안된다. 그들과 너무 친해지면 사실을 잘못 알게 하거나 시비를 농간하기도 한다.

방관(房琯) 21)이 재상이 되었을 때 일개 금공(琴工) 황정란(黃庭蘭)이 그 문하를 출입하면서 등을 대고

잘못을 저질렀기 때문에 재상 업적에 흠이 되었으니, 이와 같은 것들을 깊이 살피지 않을 수 있겠는가.』]

 

[각주]
1) 존문(存問) 수령이 그 지방에 거주하는 인사에게 경의를 표하고 안부를 묻는 것.
2) 예단(禮單) : 예물(禮物)을 기재한 목록.
3) 승발(承發) : 지방관청의 이서(吏胥) 밑에서 잡무에 종사하던 사람.
4) 통자(通刺) : 명위(名衛)을 들여보내어 웃사람에게 인사를 청하는 일. 여기서는 수령에게 교제를 요청하는 일.
5) 담대멸명(澹臺滅明) : 춘추(春秋)시대 노(魯)나라 무성인(武城人). 자는 자우(子羽), 공자(孔子)의 제자.

   『논어(論語)』 옹야(雍也)편에 보면, 이가 무성(武城)의 관리로 있으면서 길을 갈 때에도 지름길로 가지 않고,

    공사(公事)가 아니고서는 수령인 언(偃)의 사실(私室)에 가본 적이 없었다 한다.
6) 언(偃) : 춘추시대(春秋時代) 오인(吳人)이다. 성(姓)은 언(言)이요, 이름이 언(偃)이며 자는 자유(子游)이다.

    노(魯)나라에 벼슬하여 무성재가 되었다. 공자의 제자가 되어 특히 예를 익혔으며 오중문학의 비조(鼻祖)이다.
7) 방공(龐公) : 방덕공(龐德公)이다. 방덕공은 후한(後漢)의 양양인(襄陽人)이다. 현천(峴川)의 남쪽에 살았으며

    일찌기 성시(城市)에 들어가지 않았다. 유표(劉表)가 누누이 초청하였는데도 끝까지 응하지 않았다.

    제갈량(諸葛亮)이 매양 그에게 나아가 홀로 상(床) 밑에서 절하였다.

    그후 그는 처자를 데리고 녹문산(鹿門山)에 들어가 약(藥)을 캐먹으면서 나오지 않았다.
8) 과시(科詩) 과부(科賦) : 과거(科擧) 때 짓는 시(詩)와 부(賦)의 한 형태.
9) 풍수(風水) : 집·무덤 등의 지상(地相)을 점치는 법. 이러한 일에 종사하는 사람을 풍수 또는 지사(地師)라 한다.
10) 두수(斗數) : 사주(四柱)를 가지고 사람의 운명을 추정하는 것.

11) 간상(看相) : 사람의 상을 보고 운명을 판단하는 것.
12) 추명(推命) : 사주(四柱)를 가지고 사람의 운명을 추정하는 것.
13) 복서(卜筮) : 점(占). 점바치.
14) 파자(破字) : 한자(漢字)를 집게 하여 자획(字劃)을 풀어 길흉(吉凶)을 점치는 것.
15) 윤옹귀(尹翁歸) : 중국 한(漢)의 평양인(平陽人)이며, 자는 자황(子況)이다.

      선제(宣帝) 때 동해태수(東海太守)가 되었다. 청렴하다고 일컬어진다.
16) 동양(東陽) : 동해(東海)는 한(漢)나라 때 설치된 군명인데 산동성 구(舊) 연주부의 동남해로부터

      또 강소성(江蘇省) 비현(?縣) 이동(以東)으부터 바다에 이르기까지의 땅이다.
17) 우정국(于定國) : 중국 한(漢)의 담인이며 자는 만청(曼淸), 시호는 안(安)이다.

      사법관이 되어 공평하다는 이름이 났다. 벼슬은 승상(丞相)에 이르렀으며 서평후(西平侯)에 봉해졌다.
18) 사남(謝覽) : 중국 남북조(南北朝) 때의 양(梁)나라 사람이며 자는 경척(景滌)이다.

      제나라 전당공주(錢唐公主)의 부마(駙馬)가 되었다. 천감초(天監初)에 중서시낭, 이부상서, 오흥태수를 역임.

19) 중서사인(中書舍人) : 조고제칙(詔誥制勅)을 관장하는 중서성(中書省)에 속한 벼슬이다.

      처음에 통사(通事)· 통사사인 또는 사인통사라고 불리어졌으나 후에 중서사인(中書舍人)으로 불리었다.
20) 니온 : 중· 무당 따위의 여자들.
21) 방관(房琯) : 중국 당(唐)의 하남(河南) 사람이며 자는 차률(次律)이다.

      벼슬은 현종(玄宗) 때 이부상서· 동평장사(同平章事)를 역임하고 형부상서로 끝냈다.


★ 親戚故舊 多居部內 宜申嚴約束 以絶疑謗 以保情好.
    (친척고구 다거부내 의신엄약속 이절의방 이보정호. )
    친척이나 친구들이 관내에 많이 살면 거듭 엄중하게 약속하여 남이 의심하거나 비방하는 일이 없게 함으로써
    서로 좋은 우정을 보존하도록 해야 할 것이다.

 

[친척이나 친구가 본 고을이나 이웃 고을에 살면 한번은 초청하여보고 한번은 가서 보며, 때때로 선물을 보내되

약속하기를 『비록 날마다 보고 싶지만 예에는 한계가 있으니, 초청하기 전에는 절대로 오지 말기 바란다.

편지 왕래도 역시 의심과 비방을 살 것이니, 만일 질병이나 우환이 있어서 서로 알려야만 할 경우에는

몇 자의 편지를 풀로 봉하지 말고 직접 예리(禮吏)에게 주어서 공개리에 받아들이도록 할 것이다』 하라.
매양 보매 친척들이 때를 틈타 청탁을 하여 인심을 잃는 일이 거듭 쌓이면, 수령이 떠난 후 강은 흐르되 돌은

그대로 남아 1) 뭇 사람들의 분노가 여기저기서 일어나서 잘 보존되지 못하는 자가 많다. 어찌 두려워하지 않을 것인가.
당나라의 장진주(張鎭周) 2)가 서주 도독(舒州 都督)이 되었는데 서주는 본래 그의 고향이었다. 서주에 도착하여

자기 옛집에 가서 많은 술과 안주를 사다 놓고 친척들을 초대하여 10일 동안 이들과 더불어 연회를 즐겼는데,

머리는 흐트러지고 두 다리는 쭉 뻗어 앉은 품이 마치 포의(布衣) 시절 같았다. 이윽고 돈과 비단을 나누어 주고

눈물지어 작별하면서 말하기를 『오늘의 장진주는 오히려 친척들과 기꺼이 마실 수가 있었지만,

내일부터는 서주 도독으로 백성을 다스릴 따름이다. 관민은 그 예가 서로 달라서 다시 교유할 수가 없다』하였다.

이로부터는 친척이나 친구가 법을 어기면 일체 용서하는 바가 없으니, 경내가 숙연하였다.
이는 소유문(蘇孺文) 3)의 법을 써서 친구를 대접한 것이다.
포증(包拯)은 합비(合肥) 4) 사람이었다. 고향 고을을 맡아 다스림에 법을 굽혀 고향 사람들에게 영합하지 아니하니

고향 사람들이 이때문에 말하기를 『곧은 잣나무는 동량이 되고 강한 저울대는 갈쿠리가 되지 아니한다』하였다.

포증이 廬州 5)를 맡았는데, 여주는 자기 고향이었다. 친척들이 많이 그 세를 업고 官府를 시끄럽게 하였다.

종구(從舅) 6)가 법을 범한 자가 있어 希仁 7)이 매를 때려 처단하자 이로부터 친척과 친구들이 숨을 죽였다
이현보(李賢輔) 8)호는 농암(聾巖). 그는 안동부사가 되었는데 안동 온 고을이 모두 친척과 세교 집안들이었다. 

모두 예로써 접하니 정사에 많은 방해가 되기는 하였으나 공은 이를 무난히 처리하고 한 오라기의 치우친

사정(私情)도 용납하지 않으니 사람들도 역시 감히 원망하지 못하였다.
호태초(胡大初)는 말했다. 『손과 친구들이 같이 놀기도 하고 와서 만나기도 하면 고을 사람들이 서로 말하기를

「어느 사람은 왕래가 매우 잦고, 어느 사람은 정다운 이야기가 매우 오래 가는 것을 보면 정분이 두터운가 보다」

하고 이에 그 사람의 문전으로 사람들이 몰려가서 청탁의 길이 열리는 것이다. 심한 자는 이미 갑의 돈을 받고

또 을의 돈에도 약속한 후 현재(縣齋)로 나아가 한참 동안 이야기하다가 급히 물러나와 갑과 을에게 이르기를

「이미 샅샅이 다 이야기했다」 한다. 실상인즉 아직 입도 열지 않았다가 뒷날에 수령이 그 일을 판결할 때

반드시 한편이 이기게 될 것이므로 약속대로 돈을 받고 말하기를 「이 돈을 금당(琴堂) 9)에 바칠 것이다」하니

수령은 무슨 허물이 있다고 이런 누명을 쓸 것인가.』
또 말하기를 『배알을 받을 때에는 마땅히 공청에서만 서로 볼 것이다. 아전과 백성이 함께 지켜 보니 저절로 

의심을 받지 않게 될 것이다. 다만 예모를 더욱 갖추기만 한다면 그는 나를 거만하다고 하지는 못할 것이다.』
인정(人情)과 세태(世態)가 옛날과 지금이 다르지 않고 동쪽과 서쪽이 다르지 않음이 이와 같다.]

 

[각주]
1)『강류석존(江流石存)』인데 강(江)을 수령에 석(石)을 아전에 비유한 것이다. 즉 수령은 교체되지만

    아전은 그 땅에 뿌리를 박고 있다는 뜻이다.
2) 장진주(張鎭周) : 중국 당(唐)나라 때 서주인(舒州人). 처음에는 수주도독이 되었다가 서주(舒州)로 옮겼다.
3) 소유문(蘇孺文) : 후한(後漢)의 관인(官人). 이름은 장(章), 유문(孺文)은 그의 자(字). 순제(順帝) 때

    기주자사로 있으면서 그 관하의 청하태수로 있는 친구를 불러 술을 대접하고 우정을 나누자 

    그 친구가 기뻐하면서 「다른 사람은 다 하늘이 하나지만 나는 하늘이 둘이다」라고 하였다. 

    소유문은 「오늘 저녁 소유문이 친구와 술마시는 것은 사은(私恩)이요, 내일 기주자사가 일을 처리하는 것은 

    공법(公法)이다」하였다. 그리고 마침내 그 친구의 죄를 바로잡아 다스렸다.

4) 합비(合肥) : 한(漢)나라 때 설치된 현명(縣名)이다. 지금 중국 안휘성(安徽省) 육안현(六安縣)의 동쪽에 있다.
5) 여주(廬州) : 중국 안휘성(安徽省)에 있다.
6) 종구(從舅) : 외(外) 5촌(寸).
7) 희인(希仁) : 포증(包拯)의 자(字).

8) 이현보(李賢輔) : 세조 13∼명종 10(1467∼1555) 자는 비중(?仲), 호는 농암(聾巖) 혹은 설빈옹(雪?翁)이며

    본관은 영천이다. 연산군 4년(1498) 식년문과에 급제,밀양·안동·충주·성주 등의 수령으로서 선정을 베풀었고

    지중추부사(知中樞府事)에 이르렀다. 「어부가(漁夫歌)」의 작자이며 저서로 『농암문집(聾巖文集)』이 있다.
9) 금당(琴堂) : 동헌(東軒)이다. 공자(孔子)의 제자 복자천(宓子賤)이 단부(單父)의 수령으로 있으면서

    정당(政堂)에서 거문고를 타고 있었는데도 고을이 잘 다스려졌다는 고사(故事)에서 나왔다.


★ 凡朝貴私書 以關節相託者 不可聽施.
    (범조귀사서 이관절상탁자 불가청시. )
    무릇 조정의 권세 있는 고관들이 사사로이 청탁을 간절하게 하더라도 이를 들어주어서는 안 된다.

 

[질도(郅都) 2)가 제남(濟南)의 수령이 되었다. 사람 됨이 공평하고 청렴하여 사서(私書)를 띄우지 아니하고,

문안의 선물을 받지 않으며 청탁도 들어주지 않았다. 항상 일컬어 말하기를, 『이미 부모를 등지고 벼슬길에

나섰으니, 진실로 마땅히 직분을 받들고 죽음으로써 절개를 지켜야 한다』 하고 끝내 처자들을 돌보지 않았다.
위(魏)나라 사마지(司馬芝) 3)가 하남윤(河南尹)이 되었을 때, 강한자를 누르고 약한 자를 북돋아서 사정(私情)이

감히 행해지지 않았다. 어떤 내관(內官)이 사마지에게 일을 청탁하고 싶었으나 감히 말하지 못하고 사마지의

처백부 동소(董昭) 4)를 통해 뜻을 전달하려고 하였지만 동소 역시 사마지를 두려워하여 전달하지 못하였다.
진태(陳泰) 5)가 병주(幷州)의 태수가 되었을 때, 중앙의 귀인(貴人)들이 많이 편지를 보내왔으나,

진태는 그 편지들을 모두 벽에 달아놓고 뜯어보지도 않았다. 임금의 부름을 받아 상서(尙書)가 되었을 때,

이에 그 편지들을 모두 돌려 보냈다.
조염(趙琰) 6)이 청주(靑州) 7)의 자사가 되었을 때 높은 지위와 요직에 있는 사람의 서신 청탁이 있었는데,

이를 모두 물 속에 던져버리고 이름도 알아보지 알았다.
공익(孔翊) 8)이 낙양(洛陽)의 수령이 되었을 때 청탁서를 받으면 전부 물 속에 던져버렸다.
포증(包拯)자는 希仁이다이 개봉부(開封府)를 맡았을 때, 사람 됨이 굳세고 엄하여 사정을 청탁할 수가 없었다.

수도 사람들이 말하기를 『관절(關節)이 통하지 않는 데는 염라대왕과 포노야(包老爺)가 있다』 하였다.
왕한(王閑) 9)이 기주(冀州)를 다스릴 때, 사사로운 편지를 띄우지도 않고 호족을 용납하지도 않으니

별호를 <왕독좌(王獨坐)>라 하였다.
마준(馬遵) 10)이 개봉(開封)을 맡았을 때 항상 권세가와 호족들의 청탁 때문에 다스릴 수가 없었다.

손님이 와서 청탁을 하면, 잘 대우하면서 거절함이 없다가 손님이 물러간 후 그 일을 처리하되 

한결같이 법대로 결단하였다. 오래 되자 사람들은 그에게는 사사로이 청탁할 수 없음을 알게 되고 

현에는 드디어 아무 일이 없게 되었다.
질도(郅都)나 진태(陳泰)에게는 오히려 원망이 있을 것 같으니, 마땅히 마준(馬遵)을 본보기로 삼아야 할 것이다.
진양(陳襄) 11)이 포성현(蒲城縣) 12)의 주부(主簿)가 되었을 때, 읍에는 세족(世族)들이 많아서 전후의 수령들이

능히 제어할 수 있는 이가 드물었다. 사실을 은폐하고 청탁하는 것이 습관이 되어 예사로 알았다.

그는 밤에 늦게 자고 아침에 일찍 일어나면서 힘써 그 폐단을 궁구하였는데 청탁하는 자가 있으면

그들이 사류(士類)임을 고려하여 곧바로 법으로 재단하려 하지 않고 매양 송사를 들을 때에는 반드시 자기 앞에

몇 사람을 둘러앉게 하였더니 사사로이 만나려는 사람들이 말을 꺼내지 못하였다. 이로 말미암아 고을 사람들이

청탁할 수 없음을 알고 노회한 간인(奸人)과 묵은 장리(贓吏)들은 손을 움츠리고 기운을 잃었다.
참판 유의(柳誼)가 홍주(洪州) 목사로 있을 때, 나는 금정역(金井驛) 13) 찰방(察訪) 14)으로 있었다.

편지를 띄워 공사를 의논하였으나 답하지 아니하였다. 

후에 홍주에 가서 서로 만나 말하기를 왜 답서를 주지 않았소』 하니, 

그는 답하기를 『나는 수령으로 있을 때에는 본래 편지를 뜯어보지 아니하오』하고 시동에게 명하여 

서롱(書籠)을 쏟아내리니 한 농의 편지가 하나도 뜯기지 않았는데, 이는 모두 조정의 귀인들의 편지였다. 

내가 말하기를 『그건 본래 그럴 것이지만 내가 말한 것은 공사였는데 어찌 뜯어보지 않았소』 하니,

그는 말하기를 『만일 공사에 속하는 것이라면 왜 공문으로 보내지 않았소』하였다.

내가 『마침 그것이 비밀에 속한 일이었소』 하니, 그는 『만일 비밀에 속한다면 왜 비밀히 공문으로 보내지 

않았소』 하기에 나는 거기에 대답할 말이 없었다. 그가 사사로운 청탁을 끊어버리는 것이 이와 같았다.]

 

[각주]
1) 관절(關節) : 요로(要路)에 있는 자에게 청탁하는 비밀거래의 방식. 또는 사사로이 교섭을 가지는 일.
2) 질도(?都) : 중국 한(漢)나라 때의 태양(太陽) 사람이며, 중랑장(中郎將), 제남태수(濟南太守)를 지냈다.

    성품이 강직하여 직간하였으며, 법을 실시함에 있어서 귀척을 피하지 않았다. 열후종실을 곁눈으로 보았으며

    창안이라 호했다. 후에 태후에게 미움을 사고, 안문태수를 제수받았는데, 흉노의 꺼림을 받아 참살당하였다.
3) 사마지(司馬芝) : 중국 위(魏)나라의 온인(溫人)이며 자는 자화(子華)이다. 관내후(關內侯)에 봉해졌으며,

    벼슬은 대사농(大司農)이었다.
4) 동소(董昭) : 중국 위(魏)나라 정도인(定陶人)이며, 자는 공인(公仁), 시호는 정(定)이다.

    벼슬은 명제(明帝) 때 사도(司徒)를 지냈으며 악평후(樂平侯)에 봉해졌다.
5) 진태(陳泰) : 중국 위(魏)나라 사람이며, 자는 현백(玄伯), 시호는 목(穆)이다. 벼슬은 상서우복야에 이르렀다.
6) 조염(趙琰) : 중국 후위(後魏) 사람이며, 자는 숙기(叔起)이다. 벼슬은 회남왕장사(淮南王長史)를 지냈다.
7) 청주(靑州) : 중국의 주명(州名)인데, 지금의 산동성(山東省) 임치현(臨淄縣)이다.
8) 공익(孔翊) : 중국 진(晉)나라 때 사람. 자는 원성(元性). '공익절서(孔翊絶書)'란 말이 있다.
9) 왕한(王閑) : 미상.
10) 마준(馬遵) : 중국 송(宋)의 악평(樂平) 사람이며, 자는 중도(仲塗)이다. 벼슬은 인종(仁宗) 때에 이부를 지냈다.

      성격이 쾌활하고 너그러워 논의(論議)를 잘하여 두연(杜衍)·범충엄(范沖淹) 등에 의하여 칭도(稱道)되었다.
11) 진양(陳襄) : 송(宋)의 후관(侯官) 사람이며, 자는 술고(述古), 호는 고령선생(古靈先生)이다.

      벼슬은 신종(神宗) 때 시어사를 지냈다. 청묘법(靑苗法)의 불편을 논하고 왕안석(王安石)·여혜경(呂惠卿)을

      폄적(貶謫)하여 천하에 사죄하도록 청하여 왕안석(王安石)의 꺼리는 바 되어 진주(陳州)의 자사,

      후에 항주의 자사가 되었다. 후에 시독(侍讀)· 판상서도성(判尙書都省)을 역임하였다.

      언행 모두 고인을 법으로 하였으며, 부임하는 곳마다 학교를 일으키고 민간의 이병(利病)을 강구하였다.

      경연(經筵)에 있을 때 신종에게 후대되었으며 사마광(司馬光)· 한유(韓維)· 소식(蘇軾) 등 33인을 천거하였다.

      저서는 『역의(易義)』 『중용의(中庸義)』 『고령집(古靈集)』이 있다.
12) 포성현(蒲城縣) : 서위(西魏)가 설치한 현명(縣名)인데 섬서성(陝西省) 대려현(大?縣)의 서쪽에 있었다.
13) 금정역(金井驛) : 충남 홍성군(洪城郡)에 있던 역명(驛名).
14) 찰방(察訪) : 조선왕조 때 각도(道)의 역로(驛路)를 수개의 역도로 나누고 각 역도마다 책임 관원으로서

      찰방(종6품)을 두었다. 각 역도에는 다시 수개씩의 역을 배속시키고 각 역에는 책임관원으로서

      역승(驛丞)(종9품)을 두었다. 다산(茶山)은 정조(正祖) 19년(1775) 서교(西敎)사건에 연루되어

      일시 금정도(金井道) 찰방으로 좌천된 일이 있었다.


★ 貧交窮族 自遠方來者 宜卽延接 厚遇以遣之.
    (빈교궁족 자원방래자 의즉연접 후우이견지. )
    가난한 친구나 곤궁하게 사는 친척이 먼 데서 찾아 오면 마땅히 영접하여 후히 대접하여 돌려 보내야 할 것이다.

 

[선인(先人)께서 일찌기 말씀하셨다. 『가난한 친구와 궁한 친척은 잘 대접하기가 가장 어렵다.

진실로 청렴한 선비와 고상한 벗은 비록 지극히 가난하고 궁할지라도 친구나 친척을 찾아 관부에 이르기를

기꺼워하지 않을 것이다. 나를 방문해오는 자는 대개 조심성도 없고 어리석거나 구차하고 비루한 사람들이니,

혹 그 얼굴이 밉살스럽고 말조차 흥미도 없으며, 혹은 무리한 일을 청탁하고 요구하는 것이 끝이 없으며,

혹은 남루한 옷, 닳아빠진 신발에다 이가 득실거리며, 혹은 내가 일찌기 액운을 만나 궁했을 때에는 전혀 돌보거나

불쌍하게 생각지도 않던 자들이다. 형세가 좋아지니까 아첨하여 붙는 그 정상이 밉살스러워서 내가 대접하는데

온화하고 흡족하게 하기가 극히 어려운 것이다. 』
대개 사람을 접대한다는 것은 글을 짓는 것 같아서 좋은 제목을 가지고 잘 짓는 것은 잘한다고 일컬을 게 없으며,

반드시 어려운 제목으로 묵묵히 생각하여 별달리 문장의 기복(起伏)을 일으키고, 번쩍거리는 빛이 나게 하며

쨍그렁거리는 소리가 나게 하는 것이 고수(高手)인 것이다. 이런 사람을 만나게 되면 

마땅히 측은히 여겨 사랑해주며, 반가이 영접하며, 얼굴빛도 유쾌하게 하며, 웃음과 말씨도 화락하게 하고, 

따뜻한 방에 재우며 풍성하게 음식을 먹이고 새 옷을 주되 돌아갈 때에는 그의 전대 속도 후히 채워주어 

낭패보지 않도록 하는 것이 좋다.

옛날에 참판 이기양(李基讓) 1)이 의주(義州)의 부윤이 되었을 때 이런 등속의 사람들을 잘 대우하여 달포도 못되어

칭찬하는 소리가 온 세상에 가득하였다. 그가 화를 입자 눈물 짓는 자가 유독 많았으니 이런 일도 소홀히 할 수가

없는 것이다. 다만 영접하는 날 참알(參謁)이 아직 끝나지 않았거나, 혹은 아전과 백성이 아직 뜰에 있을 때에는

마땅히 곧장 책방(冊房)으로 가게하고 뜰에 사람이 없어지기를 기다려서, 그가 존장(尊長)일 경우에는 몸소 가서

뵙도록 하고, 평교(平交) 이하의 사람은 동헌에서 접견하되 약속하기를 『오늘부터 떠나는 날까지 깊이 책방에서

거처하되, 정당에는 나오지 말도록 하라』 할 것이다. 혹 밤이 깊어 관아가 다 파했을 때에는 이에 정당(政堂)에

오게 하여 술을 데우고 고기를 구워 서로 즐겨도 좋을 것이다. 만일 청렴한 선비와 고상한 벗이 우연히 관부를

찾아올 경우에는 대개의 수령들이 잘 대접하게 되어 있으니 여기서 특별히 강조할 것이 없다.
범문정공(范文正公)이 일찌기 그의 자제들에게 말하기를 『우리 오중(吳中) 2)에 종족(宗族)들이 매우 많은데,

우리 조상의 입장에서 보면 다 같은 자손들이다. 만약 혼자 부귀를 누리면서 종족들을 돌보지 않는다면 다른 날

지하에서 어찌 조상을 대할 수 있을 것이며, 이제라도 또 무슨 낯으로 가묘 3)에 들어갈 수 있을 것인가』 하였다.
정선(鄭瑄)이 말했다. 『부귀한 집안에도 항상 가난한 친척이 있게 마련이니 서로 오고 감으로써

진실하고 두터운 정을 보일 것이다. 』]

 

[각주]
1) 이기양(李基讓) : 영조 20∼순조 2(1744∼1802) 자는 사흥(士興), 호는 복암(茯菴), 본관은 광주(廣州).

    벼슬은 참판에 이르렀다. 다산의 선배로서, 신유사옥에 연루되어 단천으로 유배되었다가 거기서 죽었다.
2) 오중(吳中) : 춘추시대(春秋時代)의 오(吳)의 서울이며 지금의 강소성(江蘇省) 오현(吳縣)이다.
3) 포흠(逋欠) : 횡령으로 인한 결손액. 쇠고기 바치는 것을 창곡(倉穀)으로 벌충하려니까 횡령하게 된다.


★ 閽禁 不得不嚴.
    (혼금 불득불엄. )
    관청에서 잡인의 출입을 금하는 것을 엄하게 하지 않으면 안된다.

 

[요즘 사람들은 흔히 중문(重門) 2)을 활짝 열어놓는 것을 덕으로 여기지만 이는 덕스러울지언정

정사를 할 줄 모르는 것이다. 내 직책은 목민하는 것이지 손님을 접대하는 것이 아니다.

생전에 한번도 보지 못한 사람들을 어찌 다 만나볼 수 있겠는가. 문지기에 다짐하기를 『무릇 손님이 문밖에 이르면

우선 따뜻한 말로 기다리게 하고, 이에 가만히 보고하여 처분을 듣도록 하라』 하면 실수가 없을 것이다.
『경국대전(經國大典)』에는 『사사로이 관부에 출입하는 자는 곤장(棍杖)이 100이다.

오직 아버지· 아들· 사위· 형· 아우만은 예외로 한다』라고 규정하였다. 禁除條
생각하건대 국가의 금령이 이같으니 무릇 몸을 닦고 행실을 돈독히 하는 선비는 반드시 이 법을 범해서는 안된다.]

 

[각주]
1) 혼금(閽禁) : 관청에서 잡인의 출입을 금하는 것.
2) 중문(重門) : 대문 안에 다시 세운 문.

 5 章   절용(節用)  

             (씀씀이를 절약함.)

 

 

★ 善爲牧者 必慈, 欲慈者 必廉, 欲廉者 必約, 節用者 牧之首務也.
    (선위목자 필자, 욕자자 필염, 욕염자 필약, 절용자 목지수무야. )
    수령 노릇을 잘 하려는 자는 반드시 인자해야 하고, 인자하게 하려는 자는 반드시 청렴해야 하며,
    청렴하려는 자는 반드시 절약해야 하는데, 절약해서 사용함은 수령이 가장 먼저 힘써야 할 일이다. 

 

[배우지 못하고 무식한 자는 겨우 한 고을을 얻기만 하면 방자하고 교만·사치해져서 절제하는 바가 없어 

손 닿는 대로 함부로 써버린다. 부채가 많아지게 되면 따라서 반드시 탐욕스럽게 된다. 

탐욕하려면 아전과 함께 일을 꾸미게 되고, 아전과 더불어 일을 꾸미게 되면 그 이득을 나누어야 되며, 

그 이득을 나누게 되면 백성의 고혈이 마르게 된다. 

그러므로 절용하는 것은 백성을 사랑하는 데에 있어서 먼저 힘써야 할 것이다.
안순암(安順菴) 1)은 말하였다. 『재물을 낭비하는 근본은 항상 처첩을 데리고 부임하고 자제를 왕래하게 한다든가,

권문귀척(權門貴戚)의 사람들을 보내고 맞이하여 결탁한다든가, 기구를 제작한다든가,

진귀한 보물들을 수집한다든가 하는 일들에 말미암는 것이다.』 수령이 능히 처첩(妻妾)을 대동하지 않고,

자제를 임지에 왕래하지 못하게 하며, 권문귀척(權門貴戚)을 섬기지 않고, 금공· 목공을 불러들이지 않으며,

금주보패를 취하지 않을 수 있으면 비록 연기(燕岐)·진잠(鎭岑) 2)에서라도 재정이 부족함을 걱정하지 않을 것이다.]

 

[각주]
1) 안순암(安順菴) : 안정복(安鼎福)(숙종38∼정조15, 1712∼1791) 자는 백순(百順), 본관은 광주(廣州), 

    순암은 그의 호이다. 이익(李瀷)의 제자이며 저서에 『순암집(順菴集)』 『동사강목(東史綱目)』

   『열조통기(列朝通紀)』 『임관정요(臨官政要)』등이 있다.
2) 연기(燕岐)·진잠(鎭岑) : 충청도에 있었던 고을. 연기(燕岐)·진잠(鎭岑)은 재정사정이 궁핍하던 잔읍(殘邑)이었다.

 

 

★ 節者限制也. 限以制之 必有式焉 式也者 節用之本也.
    (절자한제야. 한이제지 필유식언 식야자 절용지본야. )  
    절(節)이란 말은 한정을 두어 절제한다는 것이다. 한정을 두어 절제하는 데에는 반드시 법식이 있어야 하니
    법식이라는 것은 절약해서 사용하는 근본인 것이다.

 

[『주례(周禮)』의 천관총재(天官冢宰) 1)편에 의하면 아홉 가지 법식(法式)으로 재용(財用)을 절제하였다.

祭祀· 賓客 등 저 천자(天子)의 부(富)를 가지고서도 반드시 먼저 그 법식을 정함으로써 그 씀씀이를 절약하였거늘

하물며 작은 고을의 수령에게 있어서랴! 법식은 정하지 않으면 안된다. 

고을의 대소와 봉록(俸祿)의 후박(厚薄)을 헤아려서 약정(約定)하여 항식(恒式) 2)으로 삼아야 한다.

유원성(劉元城) 3)은 마영경(馬永卿) 4)에게 이르기를 『그대는 봉록(俸祿)이 박하니 마땅히 수입을 헤아려서

지출하도록 하라』라고 하였다.]

 

[각주]
1) 천관총재(天官冢宰) : 『주례(周禮)』의 한 편으로, 오늘날의 총리대신부에 해당하는 관직을 설명한 것이다.
2 ) 항식(恒式) : 항상적(恒常的)인 정규(定規).
3) 유원성(劉元城) : 중국 송대(宋代)의 사람 자는 기지(器之), 이름은 안세(安世), 사마광(司馬光)의 제자이다.
4) 마영경(馬永卿) : 중국 송(宋)나라 때의 양주(楊州) 사람. 자는 대년(大年), 유안세(劉安世)의 제자이다. 

 

 

★ 衣服飮食 以儉爲式 輕逾其式 斯用無節矣
    (의복음식 이검위식 경유기식 사용무절의. ) 
    의복과 음식은 검소함을 법식으로 삼아야 하니 조금이라도 법식을 넘으면 

    그 씀씀이에 절제가 없게 되는 것이다. 

 

[의복은 성글고 검소한 것을 입도록 힘쓸 것이다.
아침 저녁의 식사는 밥 한 그릇, 국 한 그릇, 김치 한 접시, 장 한종지 밖에는 沈菜 1)요 [장(醬)이란 ?淸이다] 

네 접시를 넘지 않도록 해야 한다. 네 접시란 옛날의 이른바 2두2변(二豆二邊)이다.

즉 구운 고기 한 접시, 마른 고기 한 접시, 절인 나물 한 접시, 젓갈 한접시이니 이보다 더해서는 안된다.
요즈음 수령들은 온갖 일에 다 체모(體貌)를 잃으면서도 오직 음식에 있어서만은 망령되이 스스로 존대(尊大)하여

옛법을 따른다고 일컬으면서 크고 작은 두 반(盤)에 홍백의 밥을 함께 차려놓고赤豆 2)를 섞으면 [紅飯이 된다]

내외(內外)의 두 군데 반찬에는 내사(內舍) 3)와 외주(外廚) 4)에 각각 성찬(盛饌)을 내놓는다.

수륙(水陸)의 진미(珍味)를 갖추어놓고 수령의 체모란 본래 마땅히 이래야만 하는 것이라고 스스로 생각한다.

먹고 남는 것이 있으면 노(奴)와 기(妓)의 차지가 된다. 내 직분을 이미 다 못하면 나쁜 음식일지라도 한갓 자리만

차지하고 녹만 받는 것이라는 것을 알지 못하고, 일에는 힘쓰지 않고 단지 음식만 탐을 내니 어찌 가소롭지 않은가.

함부로 낭비하면 재정이 딸리게 되고 재정이 딸리면 백성을 깎아먹게 된다. 눈에 우선 보이는 것이라고는

노(奴)와 기(妓)뿐이라, 소만 보고 양은 잊은 셈이다. 5) 백성을 깎아 기생을 살찌우니 또한 무슨 보탬이 되리요.

또 처음 도임(到任)했을 때에는 어리석은 기개(氣槪)를 마음껏 부리다가 몇달이 지나지 않아 처음과 같지 못하여

음식을 박소(薄小)하게 줄이는 자가 많다. 그러면 이민(吏民) 6)들이 서로 전해 웃으며 수령이 한결같지 않음을

비꼴 것이다. 수령인들 창피한 기색이 없을 수 있겠는가.
진서산(眞西山)은 채(菜)를 논하여 『백성은 하루라도 채색(菜色)을 띠어서는 안되고,

사대부는 하루라도 채미(菜味)를 몰라서는 안된다』7)라고 하였다.
정선(鄭瑄)은 말하였다. 『백성이 채색을 띠게 되는 것은 바로 사대부가 채미를 모르기 때문인 것이다.

만일 말단직으로부터 공경(公卿)에 이르기까지의 벼슬아치들이 모두 나물 뿌리를 씹을 줄 아는 사람이라면

직분(職分)의 소재(所在)를 반드시 알 것이니, 백성들이 무엇때문에 채색을 근심하겠는가』라고 말하였다.
후한(後漢) 때 유우(劉虞) 8)는 유주(幽州)의 자사(刺史)가 되었는데 떨어진 옷에 짚신을 신었고

밥상에는 두 가지 고기가 오르는 일이 없었다.
후한(後漢) 때의 범단(范丹) 9)은 자(字)가 사운(史雲)이었는데 내무(萊蕪) 10)의 장(長)이 되었다.

고을 사람들이 노래를 지어서 『시루속에서 티끌이 나는 범사운(范史雲)이요,

가마 속에서 물고기가 사는 범내무(范萊蕪)로다』라고 불렀다.
송(宋)나라 때 하수(何須)는 안한령이 되었다. 고을살이를 그만두고 떠날 때에 파(巴)지방에 기근이 들었는데

하수는 아전을 보내어 백성들의 토란을 캐어 먹고 그 자리에다 실로써 돈을 매어달아 값을 치르고 갔다.
제나라 때 유회위(劉懷慰) 11)가 제군(齋郡) 12)의 태수가 되었는데 어떤 사람이 그에게 햅쌀 10말(斗)을 보내었다.

그는 보낸 자에게 보리밥을 꺼내어 보이며 『먹고도 남음이 있어서 다행히 폐를 끼치지 않아도 좋을 형편이다』

말하였다.
후주(後周) 13) 때 배협(裵俠)이 하북 군수(河北郡守) 14)가 되었는데 몸소 검소하게 지내어 먹는 것이라고는

오직 콩· 보리· 소금· 나물뿐이었다. 배협이 일찌기 여러 수령들과 함께 문제(文帝)를 알현하였는데,

문제는 배협에게 따로이 서도록 명하고는 여러 수령들에게 일러서 『배협은 청렴하고 곧기가 천하에서 제일이다.

여러 사람 중에 배협과 같은 자가 있다면 그와 더불어 같이 서도록 하라』 하고 말하였던바,

여러 사람은 모두 아무 말도 못하였고 배협을 가리켜<독립 사또>라고 일컬었다.
당(唐)나라 때 풍원숙(馮元叔) 15)은 시평현령(始平縣令)을 역임했는데 타는 말에게 오후에는 꼴과 콩을 주지 않고

재계하는 말 16)처럼 하도록 하였다.
동사의(董士毅)는 촉주(蜀州) 태수가 된 지 십수 년에 겨우 베도포 한 벌과 가죽신 한 켤레로 지내었다.
서창령(瑞昌 17)令) 유공인(劉公仁) 18)은 고안령(高安 19)令) 엄모와 함께 대궐에 같이 들어가 황제를 알현하였다.

당시에 양부(楊溥) 20)가 국정(國政)을 담당하고 있었는데 한 사람을 보내어 그들의 행적을 엿보게 하였던 바

돌아와서 이르기를 『엄(嚴)은 그 부귀가 본래 그 관직(官職)에 상당하고 유(劉)는 짚자리, 무명이불, 옹기그릇,

검은 부엌 등이 그대로 가난뱅이였읍니다』라고 보고하였다. 양부는 마음속에 유공인을 새겨두었다.

엄(嚴)이 양부에게 먼저 나타나서 금과 비단을 바쳤으나 양부는 그것을 거절하였다.

유공인이 그 뒤를 이어 양부를 만났는데 차 한 푸대와 꿀 한 단지를 갖추었을 뿐이었지만 양부는 기꺼이 받아들이고

얼마 뒤에 그를 발탁하여 어사대부(御史大夫)로 삼았다.
헌예 21)가 절강안찰사(浙江按察使)가 되었는데 봉급 이외에는 털끝만큼도 취하지 않았다.

네 철을 한 벌의 푸른 무명도포로만 지내면서 찢어지면 기워 입었고 나물밥도 싫어하지 않았다.

동료와 더불어 약속하기를 사흘마다 쌀로써 고기 한 근을 바꾸어 먹기로 하였는데 그는 한 근의 고기가 너무 많아서

감당하지 못하였다. 갑자기 친상(親喪)을 당하여 그 이튿날 떠났지만 부하 관료들도 미처 알지를 못하였다.

처음에 어염운사(魚鹽運使)가 되었는데 청렴하다는 명성이 자자하였다. 그가 일찌기 물가에 앉아 있었더니

한 아이가 『물의 맑음도 사또의 맑음에 미치지는 못합니다』라고 말하였다.
첨사(僉事) 22) 왕기(王奇) 23)는 벼슬살이하면서 청백하였던바 옷이 해어지면 종이로써 틈을 기워 입었다.
왕서(王恕)가 운남(雲南) 지방을 안무(按撫)할 때 심부름하는 아이를 데려가지 않았고 오직 취사도구 하나,

대나무 도시락 하나, 매일 한 모씩의 유두(乳豆)乳豆라는 것은 豆腐이다, 채소 다발, 장, 초만 가지고 갔으며 

물만은 머무는 집에서 얻어 썼다.
방극근(方克勤) 24)은 착한 관리였다. 스스로의 생활을 간소히 하여 한 벌의 무명 도포를 10년 동안이나

바꾸지 않았고 하루에 고기를 두 번 먹지 않았다.
요희득(姚希得) 25)이 정강(靜江) 26)을 맡아 다스리게 되었는데 관사에는 원래 비단으로 장막을 만들어 둔 것이 

있었던바 이를 보고 요희득은 『나는 서생(書生)의 집에서 자라났으니 어찌 이런 비단을 쓸 수 있으리요』라고

말하고 비단을 무명으로 바꾸도록 명하였으며 매일 오직 나물만 먹었을 뿐이다.
고려(高麗) 때 기건(奇虔) 27)이 제주 안무사(濟州按撫使) 28)가 되었는데 성격이 확고하고 청렴하고 신중하였다.

제주에서는 전복이 생산되었던바, 백성들은 전복 채취를 심히 괴로와하였다. 기건은 『백성이 이와같이 괴로움을

당하는데 내가 차마 이것을 먹으리요』라고 말하고, 전복을 먹지 않으니 사람들이 모두 그 청렴함에 감복하였다.
정충정공(丁忠靖公)이름은 應斗 29)이 7도(道)를 안절(按節) 30)하고서 다시 평안감사(平安監司)가 되었는데

관내를 순행(巡行)할 적에 일찌기 화문석에 앉은 일이 없었으니 그가 복(福)을 아끼고 검소를 좋아함이 이와 같았다.
감사(監司) 정옥(鄭玉) 31)은 약포(藥圃) 32)의 손자이다. 황해도 관찰사가 되었는데 몸가짐이 맑았다.

관내의 여러 고을을 순행함에 반찬은 두 접시뿐이었으며 이를 어기는 자가 있으면 죄주었다.
내가 곡산부사(谷山府使)로 있을 때 33)에 보니 한 고을의 수령이 아침 저녁으로 반드시 내외(內外) 34)의 두 상을

차리게 하더니 그가 떠남에 미쳐서는 초과지출한 돈이 4천 냥이나 되어 수리(首吏)가 파산하였다.
유정원(柳正源) 35)은 여러 고을의 수령을 역임하였는데 그만두고 고향에 돌아갈 때에는 매번 채찍 하나로 길에

나섰고, 의복이나 기구는 조금도 더 불어나지 않았다. 자인(慈仁) 36)에서 해유(解由) 37)하여 집에 돌아와 있는데

현아(縣衙)에 있던 그의 자제(子弟)가 헌 농짝을 집으로 돌려보내면서 속이 비면 쉽게 찌그러지지 않을까 염려하여

짚으로써 농짝 속에 채웠다. 고을살이를 그만두고 왔기 때문에 마을아낙네들이 몰려와 다투어 농짝 속을 보려고

하였는데 짚단임을 알고는 모두 한바탕 크게 웃고 해어졌다. 大山集 38)에 있다.]

 

[각주]
1) 침채(沈菜) : 김치.
2) 적두(赤豆) : 팥.
3) 내사(內舍) : 안채. 즉 수령의 부인이 거처하는 곳으로 부인을 가리키기도 한다. 내아(內衙)라고도 한다.
4) 외주(外廚) : 바깥사랑.
5)『맹자(孟子)』 양혜왕장구(梁惠王章句) 상(上)에 견우이미견양(見牛而未見羊)이란 말이 있는데, 

    즉 눈앞에 보이는 것만 알고 보이지 않는 것에 대한 생각은 잊어버린다는 뜻이다.
6) 이민(吏民) : 아전과 백성, 좁게는 아전과 향청(鄕廳).
7) 백성에게는 하루라도 굶주린 기색이 있어서는 안되고 사대부는 하루라도 나물맛을 몰라서는 안된다는 말.
8) 유우(劉虞) : 중국 후한(後漢) 말기의 관인(官人). 자는 백안(伯安). 벼슬은 대사마(大司馬)에 이르렀다.
9) 범단(范丹) : 후한(後漢) 말기(末期)의 관인(官人). 일명 염(?)이라고도 한다. 자는 사운(史雲).
10) 내무(萊蕪) : 중국 산동성(山東省)에 있었던 현명(縣名)이다.
11) 유회위(劉懷慰) : 중국 남제(南齊)의 사람. 본명은 문위(聞慰), 자는 언태(彦泰).
12) 제군(齊郡) : 중국 산동성의 동북부 지방에 있던 군명. 낙치(駱治)가 임치에 있었기 때문에 제군이라 했다.
13) 후주(後周) : 당(唐)이 망한 후, 오대(五代)의 끝 왕조(王朝)로서 951년에서 959년까지 존속함.
14) 하북(河北) : 중국 산서성(山西省)에 있었던 군명(郡名)이다.
15) 풍원숙(馮元叔) : 중국 당(唐)나라 관리. 청장(淸章)·준의(浚儀)·시평(始平)의 현령을 지냈고 청백한 양리였다.
16) 재계하는 말(齊馬) : 조용하게 서 있는 말. 제계(齊戒)하는 말이란 뜻.
17) 서창(瑞昌) : 중국 오대(五代)의 남당(南唐) 때에 설치한 현(縣)이다. 강서성(江西省)에 있었다.
18) 유공인(劉公仁) : 중국 명(明)나라 때 사람.
19) 고안(高安) : 중국 강서성(江西省)에 있었던 현명(縣名)이다.
20) 양부(楊溥) : 중국 명(明)나라 때 석수(石首) 사람. 자는 홍제(弘濟), 시호는 문정(文定).

      영종 때에는 내각에 들어가 기무를 장악하여 양사기(楊士奇)·양영(楊榮)과 더불어 삼양으로 일컬어졌다.
21) 헌예 : 중국 명(明)나라 때 녹읍(鹿邑) 사람. 자는 유행(惟行).
22) 첨사(僉事) : 중국 명대(明代)에 도지휘사사· 제형안찰사 등의 지방행정관의 관직명. 검찰 사무를 맡았다.
23) 왕기(王奇) : 중국 명(明)나라 때의 천태(天台) 사람. 자는 세영(世英).
24) 방극근(方克勤) : 중국 명(明)나라 때의 영해(寧海) 사람. 자는 거긍(去矜). 제령지부(濟寧知府)를 지냈으며,

      저서에 『한만집(汗漫集)』이 있다.
25) 요희득(姚希得) : 중국 송(宋)나라 때의 동천(潼川) 사람. 자는 봉원(逢源). 충직과 청검(淸儉)으로 유명하였다.
26) 정강(靜江) : 중국 광서성(廣西省)에 있었던 고을이다.
27) 기건(奇虔) : ?∼세조 6(1460) 호는 복재(服齋), 벼슬은 대사헌(大司憲)에 이르렀다.

28) 안무사(按撫使) : 지방에 변란이나 재난이 있을 때에 왕명(王命)으로 파견되어 백성을 안무하던 임시직이다.
29) 정응두(丁應斗) : 중종 3∼선조 5(1508∼1572) 자는 추경(樞卿), 본관은 나주(羅州), 시호는 충시(忠猜).

      벼슬이 좌찬성(左贊成), 판중추부사(判中樞府事)에까지 이르렀다.
30) 안절(按節) : 관찰사로 재임함을 가리킨다.
31) 정옥(鄭玉) : 숙종 27∼영조 36(1694∼1760) 자는 자성(子成), 호는 우천, 본관은 청주. 정탁(鄭琢)의 5대손.
32) 약포(藥圃) : 정탁(鄭琢)(중종 21∼선조 38, 1526∼1605)의 호. 자는 자정(子精), 또 다른 호는 백곡(栢谷),

      이황(李滉)의 문인(門人)으로 좌의정(左議政)까지 지냈다.
33) 정약용(丁若鏞)은 1797년 윤6월부터 1799년 4월까지 곡산부사(谷山府使)로 있었다.
34) 내외(內外) : 내사(內舍)(안채)와 외주(外廚)(衙舍의 廚房).
35) 유정원(柳正源) : 숙종 27∼영조 37(1703∼1761)자는 순백(淳伯), 호는 삼산(三山), 본관은 전주(全州).

      벼슬은 대사간(大司諫)에까지 이르렀다.
36) 자인(慈仁) : 경상도 경산군(慶山郡)에 있었던 고을.
37) 해유(解由) : 수령의 교체에 있어서 전임자가 고을 재정(財政)을 후임자에게 인계하고

      그 재정적 책임에서 벗어나는 것이다.
38)『대산집(大山集)』 : 이상정(李象靖)(1710∼1781, 號는 大山)의 문집(文集).

 

 

★ 祭祀賓客 雖係私事 宜有恒式. 殘小之邑 視式宜減.
    (제사빈객 수계사사 의유항식. 잔소지읍 시식의감. ) 
    제사나 빈객 접대는 비록 사사로운 일에 속하지만 마땅히 일정한 법식이 있어야 한다.
    가난하고 작은 고을에서는 법식을 보다 더 줄여야 한다.

 

[공적인 제사에는 공적인 법식이 있다.[五禮儀 1)에 있다] 수령의 사가의 제사는 마땅히 고례(古禮)에 준해야 한다.

대부(大夫)이상은 마땅히 소뢰의 찬(少牢之饌)을 써야 하고[通政大夫 이상이다]

당하관(堂下官)은 마땅히 특생의 찬(特牲之饌)을 써야 한다.[通訓大夫] 2)  

두(豆)를 더하고 변(籩)을 더하는 것은 형편에 따르는 것이 좋다.
소뢰(少牢)라는 것은 그 작(爵) 3)은 세번 바치고 그 식(食)은 4궤(簋) 4), 飯 하나, 면(麵) 5) 하나 , 餠 6) 둘

3형(鉶) 7) 5조(俎) 8) 6두(豆) 6변(籩)이다. 저(菹) 9) 해(醢) 10) 등 물기 있는 것은 豆로 하고 포속(脯粟) 등

마른 것은 ?으로 한다 거기에 두(豆)를 더하더라도 두 가지를 초과하지 못하니 이어 어전(魚煎)이라고 한다 .

삼육 俗名으로 肝南 11)이라고 한다. 변(籩)을 더 하더라도 두가지를 초과하지 못하니

연이(蓮飴)[俗名으로 正果라고 한다]

율고(栗糕)[俗名으로 ?食이라고 한다] 같은 것이 그것이다. 

군현에서의 수령의 봉록은 경관(京官)보다는 두터우므로 두(豆)를 더하고 변(籩)을 더함직하다.

위에서 논한 것들은 시제(時祭) 12)·기제(忌祭) 13) 때의 찬(饌)이다.

춘분(春分)·추분(秋分)에는 시제를 행하고 동지·하지에는 천신(薦新) 14)의 예를 행한다.

통정대부(通政大夫)는 특돈(特豚) 3정(鼎)이고1獻 2? 1? 3俎 2豆 2?

당하관(堂下官)은 특돈 1정이니1獻 1俎 2豆 2籤 초과해서는 안된다.
초하루의 제사에는 대부(大夫)는 특돈 일정이고 당하관(堂下官)은 포(脯)와 해(?)뿐이다.1獻 1豆 1?
청명(淸明) 15)·한로(寒露) 16)에는 묘제(墓祭) 17)가 있는데 대부와 사(士) 18)는 모두 특돈 3정이다.
생각컨대 이상과 같은 제례(祭禮)의 법식은 곧 내가 한번 안(案)을 만들어본 것이다. 집집마다 각기 예(禮)가

있는 것이지 국가에서 정한 제도가 있는 것은 아니니, 마땅히 각각 그 가문의 법식을 따라야 할 것이다.
공적인 손님에게는 공적인 법식이 있다. 五禮儀에 있다
사적인 손님에게 드리는 음식은 모름지기 두 등급으로 나누어야 한다. 나이가 많은 웃어른에게는 네 접시이고

나이가 어린 아랫사람에게는 두 접시이다. 그 음식의 후박(厚薄)은 고을의 형편에 따라서 할 일이다.
관주(官廚) 19)로부터 대접하는 음식은 그 한 차례의 대접하는 것을 가지고 거기에 쓰인 여러 물종 

쌀· 고기· 소금· 장 등을 조목조목 열기(列記)하여 그것을 원식(原式)으로 정하고[여러 邑마다 法式이 있다]

그 여러 물종의 본값을 알아서 값이 얼마라고 정한다.

이에 주리(廚吏) 20)는 하기(下記)에 <어느날 손님께 드린 것이 네 상,어느날 손님께 드린 것이 다섯 상>이라고

기록하고, 회계하는 날에 이르러서는 그 몇 상인가를 헤아려 돈으로 회계한다. 그 쌀·고기·젓·장 등의 물명(物名)은

애초에 조목조목 나열하지 않도록 하면 장부 기록이 간결하고 깨끗하여 착오가 저절로 없어진다.

옛날에는 돈을 사용하지 않았기[肅宗 때에 돈을 쓰기 시작하였다] 때문에 하기(下記)가 번잡하고 자질구레하였으나

이제는 마땅히 간결하게 해야 한다.
만일 돈으로 회계하는 것이 예모(禮貌)에 흠이 된다고 한다면 한 상 올리는 데 드는 물건들은 모름지기 항식대로

하고서 회계하는 날에 이르면 그 동안 쓰여진 여러 물건의 총수를 조사하여 정한다.

무릇 한 상을 차리는 데에 있어서는, 즉 궤(饋)의 법식에서 쌀이 한 되라면 10궤의 회계는 쌀이 한 말이다.

1궤(饋)의 법식에 그 고기가 2냥쭝 21)이면 8궤의 합은 그 고기가 한 근이다.고기는 항시 있을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없으면 고기값 2文으로 생선을 사서 올리고 회계에서는 고기 2兩重으로 계산한다]

향유(香油) 22)가 1작(勺)이면 10궤에는 1홉(合)이고 석어(石魚) 23)가 1마리면 10궤에는 1속(束)이 된다.

비록 하기(下記)에서 조목조목 나열하지 않더라도 회계할 때에는 실수를 얻을 수 있으니 무엇 때문에 조목조목

나열할 필요가 있겠는가? 비록 돈으로 치지는 않는다 하더라도 조목조목 나열하는 방법은 단연코 페지할 것이다.

[이미 恒式을 정했으면 아랫사람들이 변통하기를 혹은 지진 것으로써 구운 것을 대신하거나

혹은 새우로써 조개를 대신하더라도 금하지는 말 것이며 모두 원래의 법식으로 회계할 것이다]
사마온공(司馬溫公)은 말하기를 『선친(先親)께서는 여러 고을 판관을 역임하였는데 손님이 오면

술을 대접하지 않은 일이 없었다. 혹은 세 순배, 혹은 다섯 순배를 하되 일곱 순배를 넘는 일은 없었다.

술은 저자에서 사왔고 과일은 배· 밤· 대추· 감뿐이었고 안주는 건포·젓·나물국뿐이었으며

그릇은 자기(磁器)와 칠기(漆器)를 사용하였다.

당시의 사대부(士大夫)는 모두 그러하였기 때문에 사람들은 그르다고 여기지 않았다.

모임은 잦았으되 예는 은근하였고 물건은 박하였으나 정 은 두터웠다』라고 하였다.]

 

[각주]
1)『오례의(五禮儀)』 : 『국조오례의(國朝五禮儀)』, 세종(世宗)의 명에 의하여 허조(許稠) 등이 오례(五禮)의

    편찬에 착수하였던바 세조(世祖) 때의 강희맹(姜希孟) 등의 손을 거쳐 성종 5년(1474)에

    신숙주(申叔舟)·정척(鄭陟) 등이 완성하였다. 8권 8책. 

2) 통훈대부(通訓大夫) : 문신(文臣) 정삼품(正三品)에는 통정대부(通政大夫)와 통훈대부의 두 계(階)가 있었던바

    통정대부(通政大夫) 이상의 품관(品官)은 당상관(堂上官)이고 통훈대부 이하의 품관은 당하관(堂下官)이다.

3) 작(爵) : 잔. 이하의 여러 제물(祭物)·식물(食物)은 제3권 예전(禮典)와 제사(祭祀)·빈객장(賓客章)에 자세하다.

4) 궤(簋) : 제기(祭器).

5) 면(麵) : 부침개.

6) 병(餠) : 떡.

7) 형(鉶) : 제기(祭器).

8) 조(俎) : 제기(祭器).

9) 저(菹) : 김치.

10) 해(醢) : 식해(食醢).

11) 간남(肝南) : 제사에 쓰는 소의 간이나 처녑. 남(南)은 납(納)이라고도 한다.

12) 시제(時祭) : 철 따라 지내는 제사.

13) 기계(忌祭) : 해마다 죽은 날에 지내는 제사.

14) 천신(薦新) : 새로 나온 물건을 먼저 조상(祖上)의 신위(神位)에 올리는 일.

15) 청명(淸明) : 24절개의 하나로 춘분(春分)과 곡우(?雨) 사이에 있으며 양력 4월 5·6일께이다.

16) 한로(寒露) : 24절기의 17번째로 추분(秋分)의 뒤에 있으며 양력 10월 8일께이다.

17) 묘제(墓祭) : 무덤에서 지내는 제사.

18) 대부(大夫)·사(士) : 대부(大夫)는 4품(品) 이상을 사(士)는 5품(品) 이하를 가리킨다.

19) 관주(官廚) : 고을 관아(官衙)의 주방(廚房), 즉 수령의 음식을 만드는 곳이다.

20) 주리(廚吏) : 주방(廚房) 담당의 아전.

21) 냥쭝 : 무게의 단위. 16냥이 1근이고 100냥이 1관이다. 따라서 6. 25근이 1관이 된다.

22) 향유(香油) : 참기름.

23) 석어(石魚) : 석수어(石首魚) 즉 조기.

 

 

★ 凡內饋之物 咸定闕式 一月之用 咸以朔納.
    (범내궤지물 함정궐식 일월지용 함이삭납. )
    무릇 내사(內舍)에 보내는 물건은 모두 그 법식을 정하고 한 달 동안에 쓰이는 것은 

    모두 초하루에 바치도록 한다.

 

[안식구들이 도착하면 관주(官廚)에서는 그들이 쓰는 바를 매일 제공하되 열흘이 지난 후에는 그 동안에 

쓰인 물건을 합계한다. 이에 그 총수를 가지고 3으로 곱하여[한 달은 3旬이기 때문에 그것을 3곱한다]

그 3으로 곱한 수를 초하루에 모두 들이게 한다.
가령 열흘 동안에 쓰인 바 쌀이 10말, 찹쌀이 3되, 팥이 4되, 밀가루[즉 眞末이다]가 2되, 녹두가루가 1되,

깨[俗名은 진임(眞荏)]가 1되, 民魚가 2마리, 추어(鰍魚)곧 石魚가 2두름, 알젓이 1되, 새우젓이 3되, 달걀이 40개,

꿀이 1되, 참기름이 1되, 간장이 5되, 진한 초가 6흡, 대추가 1되, 생강이 1냥쭝, 

미역[俗名은 甘藿이라 한다]이 2묶음, 김 곧 자채(紫菜)가 5묶음, 다시마가 1묶음, 소금이 5되, 

누룩이 2장이라면 그 총수를 가지고 3으로 곱하여 초하루에 드리는 법식으로 정한다.

관부의 정령(政令)은 맑고 간결해야 좋다. 소소한 쌀이나 소금을 안채에서는 하루에도 열 번씩 찾는데

내노(內奴) 1)는 시노(侍奴)를 부르고 시노는 문졸(門卒)을 부르고 문졸은 주노(廚奴)를 부르고

주노는 주리(廚吏)에게 고한다. <늦다>느니 <안 가져온다>느니 <있다>느니 <없다>느니 <많다>느니 <적다>느니

하면서 야단스럽게 떠들어대어 온 성 안이 요란하다. 이튿날 아침 장부[곧 下記이다]를 조사함에 책객(冊客)이 

자리를 벌이고 앉아 노(奴)를 부르고 아전을 대질하여 허위가 없는가 또는 진실인가를 조사하고

 빠진 것은 보충하고 남용한 것은 깎아낸다.

한 작(勺)밖에 안되는 미세한 것을 먹으로 그어 원한을 사기도 하고 반수(半銖) 2)밖에 안되는 가벼운 것을 붉게 

그어 쓰느라고 정력을 낭비한다. 회계하는 날에는[다음달의 초하루에 한다] 또 거듭 타산(打算)하느라 

하나는 부르고 또 하나는 대답하여 그 소리는 떠들썩하지만 의심과 비방은 무더기로 일어난다.

생각들이 어수선하여 혹은 책객이 아전과 끼고 착복하지 않았나 의심하고 혹은 주리(廚吏)가 책객과 더불어 속여

편취하지 않았나 의심하여 마구 성내고 꾸짖고 하여 조소와 비난을 무더기로 얻게 되니

천하에 이보다 더 지혜롭지 못한 것이 일찌기 없었다. 아내가 집에 있었을 때에는 병과 항아리가 비고 

상자와 농짝도 휑하니 비어 비녀를 팔고 옷을 잡혀 구루(溝樓)의 마른 고기를서울에서는 아파(牙婆) 3)가 

지저분한 저자에 앉아 있는데 이를 구루(溝樓)라 한다. 마른고기를 사먹으면서도 오히려 즐겁게 살았거늘 

이제 깊고 넓은 집에 살면서 매달 초하루에 포인 4)· 늠인 5)이 일용의 백물(百物)을 굽신거리며 바치니 

하루 아침에 얻은 부귀가 어디에 불만이 있어서 꼭 시시각각으로 영을 내려 주노(廚奴)를 불러서 요구할 것인가. 

이러한 법은 고치지 않으면 안된다. 오직 포인이 바치는 고기는 초하루에 모두 들일 수는 없다. 

마땅히 먼저 하루의 제공량을 정하고 하여금 소 잡는 날에 날수를 헤아려서 들이도록 한다. 

가령 하루에 고기 2근을 항식(恒式)으로 삼았다면 소잡는 날에 20근을 들이고

열흘 뒤에 또 소를 잡아 고기를 들이게 하여 항식의 수량을 채우는 경우와 같은 것이다.
생선도 모두 초하루에 들일 수는 없다. 매번 장날이 되면고을의 장날은 모두 한 달에 여섯 번이다.

생선 몇 근(斤)을 들이는 것으로써 항식으로 삼는다. 무릇 초하루에 들이는 항식의 것 이외에 특별히 쓴것은

일부(日簿)에 적어 둔다.

기록이 이미 간결하니 속임수가 용납되지 않는다. 몇달을 이렇게 행하여 보면 혹 남는 것도 있을 것이다. 

그것은 초하루에 들일 때에 빼어서 제한다.하여금 들이지 말게 한다 매양 부족할까 염려되는 것은 

항식의 양을 늘리되 형편에 알맞게 해야 한다. 이렇게 하면 하기는 볼 것도 없고, 회계도 따질 것이 없다.

정사(政事)는 맑아지고 사무는 간소해져 상하(上下)가 모두 편리하니 이는 바꿀 수 없는 좋은 법이다.
현사(縣司)에 들여야 할 땔나무·숯·꼴·짚 등도 이상에 비추어 관례를 만들고 혹 빈객을 접대하는데[接客이라 한다]

쓰인 땔나무·숯·꼴·짚 등도 마땅히 항식에 비추어서 따로이 한 장부를 만들 것이다.
다산(茶山) 목대흠(睦大欽) 6)은 총명하고 기억력이 뛰어났다. 연안부사(廷安府使)가 되었는데 날마다 쓰는

모든 물종을 장부에 기록하지 않고서도 하나도 잊어버리지 않아서 아전들이 감히 속이지를 못하였다.

일찌기 게 수백 마리를 큰 단지 속에다 젓담아 두고서 그것을 조석으로 바치게 하였다.

하루는 주리(廚吏)가 게가 떨어졌다고 아뢰니 그는 『아직도 두 마리가 있을 것이다』라고 말하였다.

주리(廚吏)가 황공히 물려나 단지 속을 뒤져보니 과연 두 마리의 작은 게가 젓국 속에 들어 있었다.

이로부터 공사간(公私間)의 장부에는 털끝만큼도 숨겨진 것이 없어졌다.
이모(李某)가 강진(康津)을 다스리다가 무슨 일로 인하여 잡혀 서울로 압송되었다가 보방(保放) 7) 되었다. 

출옥 후 아흐레 동안 식사 후에는 꼭 복숭아를 먹었는데 아전이 1전(錢) 8)으로 복숭아 두 개를 사서 그에게 바치니

한 개는 크고 한 개는 작았다. 수령은 큰 것을 취하여 먹고 작은 것은 남겼던바 그것을 시동[즉 通引]이 먹었다.

강진현(康津縣)으로 돌아와서 아전이 장부에다가 9전을 기재하니 수령은 『어찌된 것인가? 나는 그 반만 먹었고

나머지는 내가 알 바 아니니 깎아서 5전으로 하라』고 말하였다.

아전이 시동에게 일러서 『네가 그 나머지를 먹었으니 나머지 4전은 책임져라』고 하니,

시동은 『제기랄 이럴 줄 알았으면 누가 그것을 먹었겠는가?』라고 말하였다. 

아전이 『원망하지 말아라. 법은 마땅히 고르게 펴야 한다. 원님이 5전을 내어서 네가 내어야 할 5푼(文, 分)을

봐주었으니 너한테 이익이 되는 것이다』라고 말하니 시동은 『억울하다. 나는 그중 작은 것만 먹었으니

그 차이 9)를 다 보태면 어찌 5푼(文,分)만 되리요』라고 말하고, 주머니에서 4전을 꺼내어 침을 뱉으면서 

던져버렸다. 생각컨대 이와 같은 절용(節用)은 차라리 낭비보다도 못한 것이다.]

 

[각주]
1) 내노(內奴) : 내사(內舍)의 노(奴). 

2) 반수(半銖) : 무게의 단위. 24수(銖)가 1냥이다.

3) 아파(牙婆) : 방물(方物)장수.

4) 포인 : 고기를 맡아서 바치는 사람.

5) 늠인 : 쌀과 채소를 맡아서 바치는 사람.

6) 목대흠(睦大欽) : 선조 8∼인조 16(1575∼1638) 자는 탕경(湯卿), 호는 다산(茶山)·죽오(竹塢),

    본관은 사천(泗川). 벼슬은 예조참의에까지 올랐고 시문(詩文)에 능했다. 저서에 『다출집(茶出集)』이 있다.

7) 보방(保放) : 보석(保釋)으로 풀려남.

8) 전(錢) : 돈의 단위. 10푼(文·分)이 1전(錢)이고 10전(錢)이 1냥이다. 따라서 한닢은 1푼이고 100닢이 1냥이다.

9) 큰 복숭아와 작은 복숭아의 크기의 차이.

 

★ 公賓之餼 亦先定厥式 先期瓣物 以授禮吏 雖有贏餘 勿還追也.
    (공빈지회 역선정궐식 선기판물 이수예리 수유영여 물환추야. ) 
    공적인 빈객(賓客)에 대한 대접도 또한 먼저 그 법식(法式)을 정하고 기일 전에 물건을 마련하여  
    예리(禮吏)에게 보내주며 비록 남는 것이 생기더라도 도로 찾지 말아야 한다. 

 

[빈객을 접대하는 품급(品級)은 예전(禮典) 1)에 있다. [賓客條]
관찰사를 대접하는 음식은 마땅히 고례(古禮)를 따를 것이다. 혹 불편하면 반드시 고을의 관례를 따를 것이로되 

모름지기 최근 10년 동안의 관례예란 謄錄한 것이다를 기준으로 하여 너무 사치한 것이나 너무 검소한 것은 버리고

그 중간사치하지도 않고 검소하지도 않은 것을 취하여 항식으로 정해 둘 것이다.

주리로 하여금 여러 물건을 마련토록 하여 해당 아전에게 주되 남거나 부족하더라도 굳이 다시 말하지 말고 기일에

앞서 장부를 살피고 회계를 기다릴 것이다.

설사 찌꺼기 술과 식은 고기가 남음이 있더라도 수고한 자의 몫이니 넘보아서는 안된다.
이렇게 하면 아전은 받은 물건들을 마치 자기 것처럼 여겨 절약하고 잘 관리하여 함부로 쓰지 않을 것이다. 

빈객을 보낸 뒤에는 다시 장부를 살피지 말고 전대 속의 남은 물건은 모두 아전의 집에 돌아가게 하면 관(官)에는

낭비가 없고 아전에게는 혜택이 되니 이것이야말로 양법(良法)이다. 혹 항식 이외에 빈객이 따로이 요구하여

아전이 응한 경우에는 따로 작은 장부를 만들게 하고 빈객이 떠난 뒤에 그 장부를 살필 것이다.
평안도 황해도의 연행사신(燕行使臣) 2) 그리고 8도의 어사(御史), 경시관(京試官) 3)· 반사관(頒赦官) 4) 등

일체의 공적인 빈객은 모두 이에 비추어 관례를 삼을 것이다.]

 

[각주]
1) 예전(禮典) : 『목민심서(牧民心書)』 속의 예전육조(禮典六條)를 가리킴. 

2) 연행사신(燕行使臣) : 국가의 사절(使節)로서 중국의 북경(北京)(燕京)에 가는 사신.

3) 경시관(京試官) : 3년마다 각도(各道)에서 과거를 보일 때에 서울에서 파견되는 시험관.

4) 반사관(頒赦官) : 죄를 용서해주기 위하여 서울에서 파견되는 반포관(頒布官).

 

 

★ 凡吏奴所供 其無會計者 尤宜節用.
    (범리노소공 기무회계자 우의절용. ) 
    무릇 아전이나 관노들이 바치는 물건으로서 회계가 없는 것은 마땅히 더욱 아껴 써야 한다.

 

[관청에서 쓰는 모든 물건은 전부 백성의 힘에서 나오는 것인니 희계하지 않는 것은[俗稱 無下記라고 한다] 

잘못하면  백성을 해침이 대단히 크다. 하늘에서 비오듯이 내리거나 땅에서 샘솟듯이 솟아나는 것이 아니니

씀씀이를 절약하고 폐해를 살펴서 백성의 힘이 조금이나마 피어나게 하는 것이 또한 좋지 않겠는가.
채소·오이·박은 원노(園奴)속칭 園頭漢이다가 바친다. 그 댓가로서 으례 창노(倉奴)[倉庫直이다]가 되는데

곡식을 함부로 거두어서 그 바치는 것을 벌충하니[이를 色落米라고 한다] 그들이 함부로 거두는 것을 

금하지 않으면 백성이 피해를 입는다. 그러나 갑자기 엄금하면 창노(倉奴)가 파산할 것이니 

우선 원천(源泉)을 맑게 함으로써 말단의 폐단을 막는 것이 바람직하다.

무릇 채소는 마땅히 엄격하게 법식(法式)을 정하여 매일 몇 근을 바치게 하되 초과해서는 안된다.

한 줌, 두 줌 하는 것과 한 다발 두 다발 하는 것은 본래 우리나라의 부정확한 계산법이다. 주먹에는 대소가 있고

다발에는 경중(輕重)이 있어 가지런할 수 없다. 마땅히 저울을 써서 <매일 무슨 채(菜) 한 근>

<매일 무슨 소(蔬) 1) 한 근>으로 항식을 삼는다. 항식 외에 혹 더 쓰는 경우에는 모두 본값을 줄 것이로되

<무슨 채 한 근은 본전 1푼(文)> <무슨 소 한 근은 본전 2푼>으로 역시 각각 법식(法式)이 있으면 좋다.
매양 보면 그 집안 법도가 엄하지 못한 수령의 경우, 원노가 채소를 중문(中門)에 들이면 내사(內舍)의 노비들이

쓰다느니 나쁘다느니 하며 성을 내고 박하다느니 작다느니 하며 성내어 광주리를 뒤집고 둥구미를 엎으며

만가지로 으르렁거리는데 그런데도 수령은 못들은척하니 또한 수치스럽지 않은가. 

심한 경우에는 내사의 노가 채소를 함부로 거두어들여 그 나머지로써 관비(官婢)에게 사사로이 베풂으로써 

간통을 도모하니 살피지 않으면 안된다.[石法을 엄하게 하면 이러한 폐단은 저절로 없어진다. 위의 조항에 있다]

양(梁)나라 때 채준(蔡遵) 2)이 오홍(吳興) 태수(太守)가 되었다. 벼슬살이하면서 오직 군아(郡衙)의 우물물만 마시고

거소(居所) 앞에 흰비름과 가지를 몸소 심어서 평소의 음식으로 하였다. 황제가 조칙을 내려 그 청렴을 표창하였다.
최윤덕(崔潤德) 3)이 안주목사(安州牧使)가 되었는데 공무의 여가에 청사 뒤의 빈터를 가꾸어 오이를 심고

손수 호미질하였다. 소송을 제기한 어떤 사람이 목사인 줄은 모르고 그에게 『사또는 지금 어디에 있오』하고

물었던바, 그는 거짓으로 꾸며 『아무 곳에 있오』라고 말하고 들어가 옷을 갈아 입고 판결하였다.
절도사(節度使) 4) 이득준(李得駿) 5)이 강진현감(巖津縣監)이 되었는데, 내사(內舍) 앞뒤에 채소밭을 크게 가꾸어

내사의 노비들을 시켜 거름 주고 김매게 하였다. 그 채소가 기름지고 무성해져 네 철을 끊이지 않아 원노가 바쳐야

할 것은 모두 덜어주고 먹고도 남아서 측근인들에게 주었다. 지금까지 은혜를 칭송함이 전하여져 미담이 되었다.
쥐참외는 매일 열 개. 참외는 매일 두 개, 수박은 매일 한 개를 수령에게 바치는 것으로써 항식(恒式)을 삼게 하고

이보다 초과하는 것은 모두 본값을 주는 것이 또한 마땅한 바이다. 자손을 많이 거느린 수령의 경우에는 아무것도

모르는 어린아이가 끝없이 외·수박을 달라고 할 것이니 원노의 원망이 끝날 날이 있겠는가.

비록 한 개라도 허용해서는 안된다.
박·호박도 또한 매일 바치는 수량을 정하고 무릇 초과 수량에 대하여서는 모두 본값을 줘야 한다.
무릇 외와 박 등속을 징수하는 법식에 있어서 그 징수는 반드시 늦게 시작하고[잘 익은 뒤를 기다린다]

빨리 끝내는 것덩굴을 걷기 전에이 또한 혜택을 베푸는 행정의 하나이다. 매양 보면 수령의 자제가 외·박 등속을

너무 일찍 찾기 시작하여 원노(園奴)가 사방으로 분주하게 그것을 구하지만 혹 늦어지면

『이 지방 인심이 고약하구나』라고 말하니 이것은 모두 부끄러운 일이다.
방촉(肪燭)[俗名은 肉燭 6)이다]은 포노 [즉 肉直 7)이다]가 바치는 것인데 으례 회계를 하지 않기 때문에

계속 대기가 어려운 것이다. 오직 정당(政堂)에 만은 매일 2자루를 바칠 것이나 밤이 길면 세 자루 내사(內舍)와

책방은 마땅히 향유(香油)로써 등을 켜야 한다. 매양 보면 불초한 자제가 방촉을 마구 징수하여 나머지를 가지며,

또 정당에서 나머지 토막을 주워서 이것을 내사에 모아 두고는 돌아갈 날을 기다리니 이런 일은 다른 사람조차

민망스럽게 한다.
후한(後漢) 때 파지(巴祗) 8)는 양주자사(楊州刺史)가 되어 고을살이하면서 처자를 데려오지 않았고 

밤에 객과 더불어 앉아 있을 때에는 어두움 속에서도 관용(官用)의 초는 태우지 않았다.

다른 판본에는 손님과 술내기를 하면서 관가의 초는 쓰지 않았다고 되어 있다
임효택(林孝澤) 9)은 벼슬살이하는 곳에서마다 청렴과 공평으로써 칭송되었다. 청장 10)에 있을 때

어느날 저녁 집무를 마침에 촛불을 들고 배웅하여 내아에 이르른 자가 있었는데

이에 임효택은 『이것은 관용의 초이니 어찌 사실(私室)에서 쓸 수 있겠는가』라고 말하고 빨리 가져가게 하였다.
정선(鄭瑄)은 말하였다. 『옛날에 어떤 현령이 있었는데 매우 청렴하고 개결하였다. 수도에서 인편이 이르렀는데

공적인 일 때문이었다 관용(官用)의 촛불을 켜고 봉한 편지를 뜯어서 보다가 속에 가신(家信)이 있으니까

곧 그 촛불을 끄게 하고 사용의 초를 꺼내어 켜고서 편지를 읽었다. 읽기를 마친 후에야 다시 관용의 촛불을 켰다.

비록 잘못을 고침이 지나치게 심하기는 하지만 취하여 풍속을 바로잡을 만하다. 』
무릇 타다 남은 촛도막을 거두어서 돌아갈 날을 기다리는 자도 이것을 보면 부끄러워할 줄 알 것이다.
장종련(張宗璉) 11)은 명(明)나라 때의 순리(循吏) 12)로서 고을에 부임함에 처자를 대동하지 않았다.

병이 위급하여 의원을 불렀는데 방에는 등잔도 촛불도 없었던 바 동자(童子)가 바깥에서 기름 한 사발을 찾아

들어오니 장종련은 즉시 동자를 물리쳤다. 그 청렴하고 준엄함이 이와 같았다.
생각컨대 이는 너무 각박한 것이니 반드시 그렇게 할 것은 못된다.
읍례(邑例)에 따라서는 사용하는 쇠고기를 전혀 회계하지 않는 곳도 있다.

이런 고을에 임명된 수령은 매우 기뻐하여 즐거이 듣고서는 아름다운 관례라고 생각한다.

이는 그런 물건들이 모두 나오는 곳이 있는 것이지 하늘에서 비오듯이 내리거나 땅에서 샘솟듯이 솟아날 이치가

없다는 것을 알지 못하는 것이다. 이미 회계가 없는 것은 반드시 민폐에 속하게 된다.

혹은 방(坊)과 이(里)를 쪼개어 취하여 계방[사사로이 賦役을 취하는 것을 이름]을 삼거나 혹은 창곡(倉穀)을

번롱하여 그 나머지로써 이익을 배나 두터이하면 이에 수령이 그 이익을 나누어 먹기 때문에 회계가 없는 것이다.

혹 그 이익 13)이 전에는 두터웠으나 지금은 박한 경우에는 1년 동안 쇠고기를 바침에  창곡의 포흠(逋欠) 14)이

산더미같이 쌓여 포노 15)가 도망가버리면 그 친척과 백성에게 징수하니 

해독이 번지는 바가 미치지 않은 곳이 없다. 도적질을 행한 자는 포노(龐奴)이고 장물을 먹은 자는 수령이다. 

장물은 내가 먹고도 포노에게 도적의 죄를 덮어씌우니 어찌 이치에 맞겠는가. 내가 그 장물로써 부모를 봉양하고

조상에게 제사지내면 효도가 어디에 있을 것이며 복이 또한 어디에서 내려오겠는가.

무릇 이런 고을에 임명된 수령은 마땅히 빨리 그 법을 고치고 본값을 정하여 회계를 분명히 해야 한다.

그리고 계방을 혁파하여 백성의 부담을 고르게 하고 창고의 자물쇠를 엄중히 하여 백성의 고통을 제거해야 한다.

이러한 개혁은 그만둘 수 없는 일이다.
명행자 16)는 그 행정에 있어서 일찌기 백성으로부터 명주한자도 받은 일이 없었고 백성의 닭 한 마리도 먹은 일이

없었다. 돈을 주고 죽순(竹筍)을 샀는데 백 전이면 죽순 열 근에 해당되거늘 문지기가 열한 근을 취하였던바,

명행자는 죽순 판 사람을 불러서 한근을 돌려주고 문지기를 곤장쳤다.]

 

[각주]
1) 채(菜)·소(蔬) : 채(菜)는 줄기 또는 뿌리를 식용(食用)하는 야채(野菜). 다음의 소(蔬)는 잎을 식용하는 야채. 

2) 채준(蔡遵) : 중국 양(梁)나라 사람. 자는 경절(景節), 시호는 강(康), 약(約)의 동생이다.

    벼슬은 중서령(中書令)에 이르렀다.

3) 최윤덕(崔潤德) : 우왕 2∼세종 27(1376∼1445) 자는 백수(伯脩)·여화(汝和), 호는 임곡(霖谷),

    본관은 통천(通川), 시호는 진렬(眞烈). 야인(野人)과 대마도를 정벌하였으며 벼슬은 좌의정에까지 올랐다.

4) 절도사(都度使) : 종2품의 무관(武官)인 병마절도사 또는 정3품의 무관(武官)인 수군절도사를 가리킨다.

5) 이득준(李得駿) : 정조(正祖) 때의 관리(官吏)로 함양부사(咸陽府使)로도 있었다.

6) 육촉(肉燭) : 육류(肉類)의 기름을 굳혀서 만든 초.

7) 육직(肉直) : 관아에 어육(魚肉)을 바치는 자.

8) 파지(巴祗) : 중국 후한(後漢) 때의 관인(官人). 자는 경조(敬祖). 청렴하기로 유명하였다.

9) 임효택(林孝澤) : 중국 송(宋)나라 때 사람. 효연(孝淵)의 동생.

10) 청장(淸?) : 강(江)이름. 중국 산서성(山西省) 평정현(平定縣)에서 시작된다.

11) 장종련(張宗璉) : 중국 명(明)나라 때의 길수(吉水) 사람. 자는 중기(重器).

      벼슬은 남경대리승(南京大理丞)에까지 이르렀으며 모범관리로 일컬어졌다.

12)순리(循吏) : 법(法)을 잘 지키며 봉직(奉職)에 열성을 다하는 관리. 『사기(史記)』에 순리열전이 있다.

13) 그 이익 : 창곡(倉穀)을 유롱(劉弄)하는 이익.

14) 포흠(逋欠) : 횡령으로 인한 결손액. 쇠고기 바치는 것을 창곡(倉穀)으로 벌충하려니까 횡령하게 된다.

15) 포노 : 쇠고기를 바치는 관노(官奴)로서 으례 창노(倉奴)(즉 倉庫直)가 된다고 한다.

16) 명행자 : 중국 송(宋)나라 때의 남성(南城) 사람. 성명은 요응회(廖應淮), 자는 학해(學海), 호는 명행생·명행자.

     무신(武臣)이면서 천문학자(天文學者)였다.

     저서는 『역수(曆髓)』『성야지남(星野指南)』『상자설회보(象滋說會補)』『주전묘지(晝前妙旨)』등이 있다.

 

 

★ 私用之節 夫人能之 公庫之節 民鮮能之, 視公如私 斯賢牧也.
    (사용지절 부인능지 공고지절 민선능지 시공여사 사현목야. ) 
    사용을 절약하는 것은 대체로 사람마다 능히 할 수 있으나 

    공고를 절약하는 것은 능히 할 수 있는 사람이 드물다. 

    공물(公物) 보기를 사물(私物)처럼 아껴야 어진 수령이라 할 수 있다.

 

[고을마다 반드시 공용의 재정이 있어 여러 고(庫)가 설립되어 있다. 처음에는 이름하여 공용이라고 하였으나 

설립한 지 오래 되면 점차 사용으로 지출되어 그릇된 관례가 겹겹이 생기고 절제없이 낭비하게 된다.

본래 공용의 고였기 때문에 수령은 끝내 살피지 못하고 감독하는 아전과 고노(庫奴)는 갖가지로 속여서 오로지

몰래 훔쳐 먹으려고만 한다. 재물이 이미 떨어지면 또 거듭 이를 거두어들이는바, 이는 여러 도의 공통된 폐단이다.

여러 고의 이름은 혹은 보민고(補民庫)라고 하고 혹은 보역고(補役庫)라고 하고 혹은 보향고(補餉庫)라고 하고

혹은 보폐고(補弊庫)라고 하고 혹은 해현고(解懸庫)라고 하고 혹은 식견고(息肩庫)라고 하고

혹은 고마고(雇馬庫)라고 하고 혹은 수성고(修城庫)라고 하고 혹은 양사고(養士庫)라고 하고

혹은 장빙고(藏氷庫)라고 하고 혹은 군기고(軍器庫)라고 하고 혹은 군수고(軍需庫)라고 하고

혹은 진휼고(賑恤庫)라고 하고 혹은 전관고(傳關庫)라고 하여934) 그 이름은 한결같지 않고

지출에는 법식이 없으니 이것은 바로잡지 않으면 안된다.
수령은 한 고을을 주재하는 사람이니 한 고을의 일은 관장하지 않는 바가 없으며 책임은 원수(元帥)에게 있으니

어찌 핑계가 있을 수 있겠는가. 날마다 지출하는 바의 하기(下記)는 마땅히 조목조목 밝혀서 살펴야 할 것이고

일수반치(一銖半?) 1)라도 방심하여 지나쳐서는 안된다. 관주하기(官廚下記) 2)와 현사하기(縣司下記) 3)는

세밀하게 살피면 욕을 먹게 되고 제고하기(諸庫下記) 4)와 학궁하기(學宮下記) 5)는 세밀하게 살피면

위엄이 서게 되는바, 이는 그 공용과 사용이 각기 다르기 때문이다. 제정한 법식이 본래 치밀하지 못한 것은

절목을 고치거나 그릇된 관례를 폐지하거나 허점을 보완하여 하여금 영구히 폐단을 없게 해야 할 것이다.

수법조(守法條)· 흥학조(興學條)· 부역조(賦役條)民庫節目· 군기조(軍器條)에 있다. 여기서는 생략한다.
정만화(鄭萬和) 6)는 여러 번 감사를 지냈는데 이르는 곳마다 비축이 충만하고 넘쳤다. 처음에는 약간 남았으나

나중에는 헤아릴 수 없을 만큼 남게 되자 이에 탄식하여 말하였다. 『내가 빼돌리고 사기하는 것을 틀어막은지

일 년에 나머지가 이와 같으니 절약하는 것이 어찌 백성을 사랑하는 근본이 아니겠는가.』]

 

[각주]
1) 여기 보민고(補民庫) 이하 전관고(傳關庫)까지는 각 군현마다 다 설치된 것이 아니며 그중 한둘 혹은 몇개씩이 

    설치되어 있었는데, 이들은 모두 민고(民庫)에 속하는 것이었다. 보민·보역고는 요역(?役)의 재원(財源)으로,

    보향고는 군역(軍役)을 대비하여, 보폐·해현·식견고는 급한 잡역(雜役)에 대비하여,

    수성고는 읍성(邑城)·산성(山城)의 수리를 위해, 양사고는 군대의 양성에, 장빙고는 얼음의 저장을 위하여,

    군기·군수고는 군물(軍物)의 마련을 위해, 진휼고는 흉년의 구휼을 위해, 전관고는 상급기관과의 연락을 위한

    재원(財源)으로 설치된 민고(民庫)인데, 그 모두는 민인(民人)의 전곡(錢穀)을 거두어 운영하였다.

2) 일수반치(一銖半?) : 극소한 양을 의미함. 6수(銖)가 1치(?)이며 4치(?)가 1냥이다.

3) 관주하기(官廚下記) : 관아주방(官衙廚房)의 지출기(支出記).

4) 현사하기(縣司下記) : 현사(縣司)는 수령· 향청· 육방관속(六房官屬)들로 구성되는 각 군현의 행정기구.

그 하기(下記)는 관속들의 일용잡비 지출기.

5) 제고하기(諸庫下記) : 보민고(補民庫)·보역고(補役庫) 등 여러 고(庫)의 지출기(支出記).

6) 학궁하기(學宮下記) : 향교(鄕校)의 지출기(支出記).

7) 정만화(鄭萬和) : 광해군 6∼현종 10(1614∼1669) 자는 일운(一運), 호는 익암(益菴), 본관은 동래(東萊).

    황해도· 경상도· 전라도· 평안도의 관찰사를 역임하였으며 대사간을 지냈다. 정태화(鄭太和)의 동생이다.

 

 

★ 遞歸之日 必有記付 記付之數 宜豫備也.
    (체귀지일 필유기부 기부지수 의예비야. ) 
    교체되어 돌아가는 날에는 반드시 장부에 기록하여야 하니 장부에 기록할 액수를 마땅히 미리 준비해야 한다.

 

[관부(官府)에 전해 내려오는 돈과 곡식 등 여러 재물은 통틀어 장부에 기록되는바 그것을 중기(重記)라고 한다. 

갈려 돌아갈 때에는 쓰고 남은 것을 대략 중기에 기재하는바, 이를 일러서 기부(記付)라고 한다.

평상시에 유의하지 않으면 급함에 이르러 어떻게 창졸간에 마련하겠는가. 초하루 보름의 회계일에 당할 때마다

관부에서 쓰는 여러 물품을 약간 남겨두었다가 갑작스러운 교체에 대비하는 것이 좋다.
『치현결(治縣訣)』에 말하고 있다. 『관주(官廚)에서 쓰이는 것은 이미 모두 달로 쪼개어 배당하였으니

단지 당겨 쓰지만 않아도 걱정할 것은 없다. 기타의 돈과 곡식은 항상 뒷날을 염려하여 삼가 낭비하지 않아야 

끝에 가서 걱정이 없게 된다.』『치현결』에 또 말하고 있다. 

『한 작은 수첩을 만들어 가운데에 가로로 한 칸을 만든다. 위에는 전임 수령의 기부에 적힌 여러 물종 수량을 

나열하고 아래에는 회계한 후 현재 남아 있는 각종 물종 수량을 적는다. 현재 남아 있는 수량은 다달이 달라서 

고정시킬 수 없으니 모름지기 종이쪽지로써 낱낱이 붙여서 항상 살펴볼 것이로되 

만일 현재 남아 있는 수량이 전임 수령의 기부 수량보다 훨씬 초과하면 마음놓고 쓰고, 

전임 수령의 기부에 미치지 못하면 보충하고 채워야 급함에 이르러서도 거의 걱정이 없게 될 것이다. 』]

 

 

★ 天地生物 令人亨用 能使一物 無棄 斯可曰善用財也.
    (천지생물 령인형용 능사일물 무기 사가왈선용재야. ) 
    천지가 만물을 낳음은 사람으로 하여금 누리고 쓰게 한 것이니,
    한 물건이라도 능히 버림이 없게 한다면 이에 재물을 옳게 쓴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도간(陶侃)이 형주(荊州)에 벼슬살이할 때에 선관(船官)을 신칙하여 톱밥은 모두 장부에 기재하여 두었다가 

눈이 녹은 진창을 덮게 하였고 대나무의 두터운 밑동은 산처럼 쌓아두었다가 뒷날 환공(桓公) 1)이

촉(蜀)을 정벌할 때에 배의 수리에 못으로 쓰게 하였다.
패항(貝恒) 2)은 동아(東阿) 3) 영(令)이 되어 벼슬살이할 때에 비록 작은 물건일지라도 반드시 생각이 백성에게까지

미쳤다. 건축과 수리를 하고 나머지가 있으면 쇳조각, 못 쓰는 가죽, 헌 새끼, 헌 종이 등속을 모두 보존하여 

두었다. 공장(工匠)이 한가하면 가죽은 삶아서 아교풀을 만들고 쇠는 녹여서 공이를 만들고 종이와 새끼는 빻아서

짚옷(穰)을 만들어 창고에 저장하게 하였다. 마침 황제의 북경 순행할 때를 당하여 칙사(勅使)가 황제의 임석할

건물을 세우기를 독촉함에 저장하여 두었던 것을 모두 급한 용도에 사용하였다. 따라서 민력은 소모된 바 없었다.
윤현(尹鉉) 4)이 호조판서가 되었는데 무릇 못 쓰게 된 자리, 땅 위에 까는 자리, 청연포(靑緣布) 5)를 모두 창고 속에

저장하니 뭇 사람들이 다 그를 비웃었다. 그 후 못쓰게 된 자리는 조지서(造紙署) 6)에 보내어 맷돌에 갈아서

종이를 만들었던바, 그 품질이 가장 좋았으며 청연포는 예조에 보내어 야인(野人) 7)의 옷띠를 만들었다.
고을 백성이 나무로 송덕비를 만들어 세우거든 마땅히 즉시 뽑아서 공고(工庫)에 저장하여 두었다가 큰 것은 

상사(喪事)를 당하고도 관이 없는 백성에게 주고 작은 것은 초통이나 먹이통 등 자그마한 기구들을 만들도록 

함으로써 백성의 동산에서 다시는 재목을 색출치 않도록 하는 것이 좋다.]

 

[각주]
1) 환공(桓公) : 중국 진(晋)나라 때 사람인 환온(桓溫). 자는 원자(元子). 

    명제(明帝) 때 형주자사로 촉(蜀)을 정벌했다. 남군공(南郡公)에 봉해졌다.

2) 패항(貝恒) : 중국 명(明)나라 때의 상우(上虞) 사람. 자는 병순(秉舜). 자(字)로써 알려졌다.

3) 동아(東阿) : 중국 산동성(山東省)에 있었던 현명(縣名)이다.

4) 윤현(尹鉉) : 중종 9∼선조 11(1514∼1578) 자는 자용(子用), 호는 국간(菊磵), 본관은 파평(坡平),

    시호는 충간(忠簡), 벼슬은 지돈녕부사에 이르렀다. 

    윤필상의 증손종으로 명종 때에 청백리에 녹선(錄選)되었다.

5) 청연포(靑緣布) : 푸른 선을 두른 포(布).

6) 조지서(造紙署) : 조선왕조 때 종이 뜨는 일을 맡은 관아(官衙). 태종 15년(1415)에 설치된 조지소(造紙所)를

    세조 12년(1467)에 조지서(造紙署)로 개칭하였으며 이는 고종 19년(1882)에 폐지되었다.

7) 야인(野人) : 여진인(女眞人).

 

 

제 6 장 낙시(樂施)  

          (덕(德) 베풀기를 기꺼이하는 일.)

 

 

★ 節而不散 親戚畔之 樂施者 樹德之本也.
    (절이불산 친척반지 낙시자 수덕지본야. )
    절약만 하고 쓰지 않으면 친척도 멀어지게 되니, 기꺼이 베풀기를 좋아하는 것이 덕을 심는 근본이다.

 

[못에 물이 괴어 있는 것은 장차 흘러내려서 만물을 적셔주기 위함이다. 그러므로 능히 절약하는 사람은 능히

베풀 수 있게 마련이요, 능히 절약하지 못하는 사람은 베풀진 못하게 마련이다. 

창기를 불러 거문고 타고 피리 불고 비단옷 입고 높은 말에 좋은 안장을 타며, 게다가 상관에게 아첨하고 

권귀(權貴)들에게 뇌물 바쳐 비용이 하루에 수만전을 넘고 1년에 소비하는 돈이 억만전이나 되고서야 

어찌 친척들에게 베풀 수 있겠는가. 아껴 쓰는 일은 기꺼이 베푸는 근본이다. 

내가 귀양살이하면서 매양 수령들을 보면 나를 동정하고 도움을 주는 자는 그 의복을 보면 반드시 검소한 것을 

입었고, 화려한 옷을 입고 얼굴에 기름기가 돌며 음탕한 것을 즐기는 수령은 나를 돌보지 않았다.]


★ 貧交窮族 量力以周之.
    (빈교궁족 량력이주지. )
    가난한 친구와 궁색한 친척은 힘이 닿는 대로 돌봐 주어야 한다.

 

[형제· 숙질(叔姪) 등 한집안 사람들은 비록 임지에 데리고 오지 못하더라도 가난하여 끼니를 이을 수 없는 

사람이 있으면 그 식구의 수를 헤아려서 달마다 생활비용을 보내주지 않을 수 없다.

소공친(小功親) 1)으로 가난하여 끼니를 잇지 못하는 사람이 있으면 마땅히 달마다 생활비용의 절반 정도를 보내줄

것이며 그 밖의 사람들은 급한 때만 도와주면 될 것이다. 가난함이 심하지 않은 사람은 간혹 물건을 보내줄 것이다.
가난한 친구가 와서 도움을 청하면 후하게 대접하고 도와주되 돌아가는 노자도 헤아려서 집에 돌아가서도

조금 남음이 있을 만큼 주는 것이 좋다.
유송(劉宋) 2)의 강병지(江秉之) 3)가 신안 태수가 되었을 때, 받은 녹봉을 모두 친척과 친구들에게 나누어주었다.

재임중에 책한 권을 지었는데 그것도 관고(官庫)에 넣어 남겨두었다.
방언겸(房彦謙) 4)이 경양령 5)이 되었을 때 옛날부터의 가업(家業)이 있었으므로 받는 봉급은 모두 친척이나

친구들을 도와주는데 쓰고 비록 양식이 떨어져도 화평한 마음으로 지내었다.

일찌기 그 아들 현령(玄齡)에게 말하기를 『사람들이 모두 녹봉으로써 부자가 되지만 나만은 벼슬살이 때문에

가난하게 되었다. 자손에게 남겨줄 것은 청백(淸白)뿐이다』라고 하였다.
나유덕(羅維德) 6)이 영국(寧國) 7)을 맡아 다스릴 때, 하루는 유인(瀏寅) 8)을 만나 얼굴에 기쁜 빛을 띠며

『오늘 대단히 유쾌한 일이 있었다』 하거늘 유인(劉寅)이 무슨 일인가 물었더니 『요사이 가난한 일가 10여 명이

굶주리다가 멀리까지 와서 도움을 청하기에 그 동안 모아두었던 녹봉 나머지를 모두 내어 나누어주었으나

아버님을 비롯한 모든 가족이 아무도 내가 한 일을 막지 않았으니 이 때문에 기뻐한다』하였다.
팔송(八松) 윤황(尹煌)은 부임한 고을에서 일가들을 만나면 반드시 정성을 다하여 간곡히 대접하였다.

스스로의 의식(衣食)을 줄여서도 요구하는 사람이 있으면 반드시 응하면서 말하기를 『우리 일가들이 쇠잔하여

녹을 먹는 사람이 나뿐인데 내가 만약 도와주지 않으면 비록 청렴하고 검약하다는 이름을 얻을지라도

조상들의 마음을 체현하였다고 할 수 없을 것이다. 또 벼슬살이하는 도리가 진실로 제 몸을 살찌우지만 않는다면

부끄러움이 없는 것이다』라고 하였다.
창고에 남은 재물이 있어서 그것을 모두 다른 사람들에게 베풀어주면 지극한 덕(德)이 되기는 하지만 재물을 함부로

써서 관가에 결손지게 하면 도리가 아니다. 근세의 이복함(李茯菴) 19) 어른이 만윤(灣尹) 10)이 되었을 때

지나치게 베풀다가 공채(公債)를 8천 냥이나 지게하였다. 비록 그 과실을 보고 어진 마음을 알 수 있지만

벼슬자리에 있는 사람으로서 본받을 바는 아니다.
감사(監司) 한지(韓祉)가 임지에 있을 때 매양 시제(時祭) 때를 당하면 여러 비장(裨將) 11)으로 하여금 제단(祭單)을 쓰게 하였는데 종일 걸려서야 끝낼 수 있었다. 어떤 사람이 묻기를 『제사드리는 조상이 너무 많지 않는가』하면

『이것은 모두 우리 선영(先塋) 안에 있는 일가들의 묘이다. 우리 조상의 입장에서 보면 모두 가까운 친척으로 함께

같은 산에 묻힌 것이다. 한쪽 후손은 부귀와 영화를 누려 관청에서 제공하는 성대한 제물을 받고 한쪽은 후손이

적막하여 보리밥조차 차릴 수 없다면 신도가 어찌 편안하겠으며 또한 동족의 영달에 힘입는다고 할 수 있겠는가』

하였다. 일찌기 그가 전의(全義) 고을의 원이 되었는데 고을의 재력(財力)이 대단히 빈약하였으나

여러 곳의 제단(祭單)을 한결같이 하였다.제단은 祭需의 물목을 말한다
감사(監司) 이창정(李昌庭) 12)이 순천부사(順天府使)로 있을 때 그와 성명이 같은 사람이 있었는데 관품(官品)도

또한 그와 같았다. 이름이 같은 그 사람의 가난한 선비 친구 한 사람이 있어서 딸의 혼수(婚需)를 도움받으러 왔으나

이창정을 보니 딴 사람이라 실망하여 머뭇거리고 있었다. 이창정이 자리를 권하고 천천히 그 까닭을 물었더니

그 사람이 실토하였다. 이창정은 웃으면서 『그럴 수도 있는 일이다』 하고 더욱 후하게 대접하고 

혼수를 준비해주되 한가지도 빠지는 것이 없게 하였다. 

그 사람이 감사하여 말하기를 『비록 내 친구가 마련해준다 하더라도 이와같이는 하지 못할 것이다』 하였다.]

 

[각주]
1) 소공친(小功親) : 죽었을 때 복(服)을 5개월 동안 입는 친척. 종조부모, 재종형제, 종질, 종손 등.

2) 유송(劉宋) : 중국 남북조시대(南北朝時代) 남조(南朝)의 송(宋).

3) 강병지(江秉之) : 중국 남북조시대 남조(南朝) 송(宋) 사람. 자는 현숙(玄叔). 신안·임해태수를 지냈다.

4) 방언겸(房彦謙) : 중국 수(隋)나라 때 사람. 자는 효충(孝沖), 방현령(房玄齡)의 아버지. 제주주부, 자사를 지냄 .

5) 경양(涇陽) : 중국 감숙성(甘肅省)에 있는 땅.

6) 나유덕(羅維德) : 중국 명(明)나라 때 사람 나여방(羅汝芳). 자가 유덕(維德), 호는 근계(近溪).

    포정사참정(布政使參政)을 지냈으며 저서에는 『효경종지(孝經宗旨)』 『명통보의(明通寶義)』등이 있다.

7) 영국(寧國) : 중국 안휘성(安徽省)에 있는 땅.

8) 유인(劉寅) : 중국 명(明)나라 때 사람. 자는 경보(敬甫). 산동도어사(山東道御史)를 지냈다.

9) 이복암(李茯菴) : 이기양(李基讓)의 호. 제2부 제4장 병객(屛客) 주(註) 58 참조.

10) 만윤(灣尹) : 의주부윤(義州府尹).

11) 비장(裨將) : 각 도의 관찰사(觀察使)·병수사(兵水使) 및 제주목사(濟州牧使) 등에 속해 있던 막료.

      품관이 아니며 감사(監司) 등이 자선(自選)하여 대동하는데, 육방(六房)을 이루어 행정실무를 보좌하였다.

12) 이창정(李昌庭) : 선조 6∼인조 3(1573∼1625) 자는 중번(仲蕃), 호는 화음(華陰)·무구옹(無求翁),

      본관은 연안(延安). 함경감사(咸鏡監司)를 지냈다.

 

我廩有餘 方可施人 竊公貨 以賙私人 非禮也.
    (아름유여 방가시인 절공화 이주사인 비예야. )
    내 곳집에 여유가 있다면 남들에게 베풀어도 좋으나 관가의 재물을 빼내어

    사사로이 아는 사람을 보태주는 것은 예가 아니다.

 

[만약 공채(公債)가 많으면 마땅히 그 실정을 친척과 친구들에게 두루 알려서, 그들로 하여금 여력이 생길 때까지

기다렸다가 와서 요구하게 할 것이다. 객기(客氣)를 함부로 부려서 관고(官庫)를 탕진하게되어 아전들은 목을 매고

관노(官奴)가 도망치고 그 해독이 고을 전체에 미치게 되면 베푸는 것만으로 덕을 삼으려 해서는 안될 것이다.
나의 친구 윤외심(尹畏心) 1)은 그 아우가 해남현감이 되었을 때 공채(公債)가 아직 많은데도 제수를 보내왔으므로

이를 물리치고서 말하기를 『아래로 백성들의 재물을 빼앗아 조상의 제사를 받드는 일은 차마 할 수 없는 일이다』

하였으니 이것은 격언(格言)이다. 제사도 이러하거늘 하물며 다른 경우일까.
유구(劉球) 2)는 형을 극진히 공경하며 함께 숙식하였다. 종제(從弟)인 비(玭)가 보전 영(甫田 3)令)이 되어

여름 옷감 1필을 보내왔었다. 그날로 돌려보내고 편지로써 경계하기를 『마땅히 맑고 깨끗함을 지켜

조상들을 빛나게 하라. 이것은 현명한 아우에게 바라는 바가 아니다』라고 하였다.
광야 4)는 성품이 지극히 효성스러웠는데 섬서얼사부사(陝西?司副使) 5)가 되어 명성이 있었다.

그 아버지의 가르침이 대단히 엄하였다. 일찌기 녹봉으로써 붉은 모포 한 장을 사서 보내었더니 그 아버지가 크게

노하여 말하기를 『네가 한 지방의 형정(刑政)을 관장하면서 원통한 일을 씻어주고 남에게 혜택이 미치게 하지는

못하고 이와 같은 의롭지 못한 물건으로 나를 더럽히느냐』 하고 즉시 돌려보내며 편지로써 책망하였다.
정선(鄭瑄)은 말하였다. 『여유가 생기기를 기다린 후에 남을 구제하려 하면 반드시 남을 구제할 수 있는 날이

없을 것이요, 여가가 있을 때를 기다려 글을 읽으려 하면 반드시 글을 읽을 수 있는 때가 없을 것이다. 』
절용하는 것이 본래 원칙이지만 눈앞에 슬픈 일이 닥쳐 급히 구원해주어야 할 사람이 있으면 여유가 있고 없음을

헤아릴 수 없는 일이다. 근래 한가지 폐단이 당쟁하는 습속에서 나온 것이 있다. 색목(色目)을 같이 하는 사람이면

지면(知面)이 있고 없음을, 도움을 구하고 구하지 않음을 불문하고 다같이 호수를 계산하여 물건을 보내고있다. 

옛날에는 못 듣던 일이요, 오직 남촌(南村) 6)에만 있었는데 지금에는 일반적인 습속이 되었다.

마땅히 나의 녹봉에 여유가 있는 것을 헤아려서 힘에 맞도록 하여야 할 것이다.]

 

[각주]
1) 윤외심(尹畏心) : 영조 37(1761)∼? 이름은 영희(永僖), 외심(畏心)은 그의 자. 정조(正祖) 때 문과(文科).

    다출(茶出)의 친구로서 경학(經學)에 조예가 깊었다.

2) 유구(劉球) : 중국 명(明)나라 때 안복(安福) 사람. 자는 구악(求樂), 시호는 충민(忠愍).

    한림시강(翰林侍講)을 지냈으며 저서로는 『양계문집(兩溪文集)』이 있다.

3) 보전(甫田) : 중국 하남성(河南省)에 있는 지명.

4) 광야 : 중국 명(明)나라 때 사람. 자는 맹질(孟質), 시호는 충숙(忠肅). 병부우시랑(兵部右侍郎)을 지내고

    야선(也先) 입구(入寇) 때 출정(出征)하여 전사했다.

5) 섬서얼사부사(陜西?司副使) : 명(明)나라 때의 얼사는 안찰사와 같다. 섬서지방의 안찰부사를 가리킨다.

6) 남촌(南村) : 서울의 남부방(南部坊)을 가리키지만 여기서는 당색(黨色)의 소론(少論)을 말한다.

 

★ 節其官俸 以還土民, 散其家穡 以贍親戚 則無怨矣.
     (절기관봉 이환토민 산기가색 이섬친척 즉무원의. )
     관에서 받은 녹봉(祿俸)을 절약하며 그곳 지방 백성들에게 돌려주고,
     자기 농토에서 수확한 것을 나누어 친척들을 도와 준다면 원망하는 사람이 없을 것이다.

 

 

[사람들이 항상 말하기를 『벼슬살이의 즐거움이 무엇인가. 남는 것은 내 몫이다』라고 하는데, 벼슬 사는 동안은

농토에서의 수확을 집에 가져다 쓰지 않고 저축하거나 팔아서 늘리어 그것으로 농토를 더욱 넓히는 것을 말한다.

병법(兵法)에 『군량을 적에게서 마련하고 나의 식량을 소비하지 않는다』라고 하였는데 

그 마음이 백성을 적으로 삼기 때문에 계획을 세우는 것이 이와 같다. 

일가들에게 골고루 나누어 주되 관가의 재물을 낭비하지 않는 것이 더욱 이치에 맞는 일이 아니겠는가.

이집 1)은 栗谷의 從孫으로 여러 번 군현을 맡았는데, 벼슬에 있을 때 그 서동생인 구에게 대신 집안일을 맡게 

하였다. 흉년이 드는 해마다 이집이 동생에게 편지를 보내어 『집안의 저축을 먼저 여러 친족에게 나누어주고 

남는 것이 있으면 하인들과 이웃에게 나누어주라』 하였다. 

흉년 든 틈을 타서 전장(田莊)을 더 늘리라고 권하는 사람이 있으면 그는 『스스로 제 몸을 도모하기 위하여 

차마 저들을 굶주리게 할 수 있겠는가』하였고, 하양(河陽) 2)으로부터 돌아와서는 그 동안 하인이 장리(長利) 놓은

문서를 불살라버리고 그 하인에게 곤장을 때렸다.

이관(李慣) 3)이 군읍을 맡을 때마다 말하기를 『전 가족이 녹봉을 먹고 사는 것만도 충분하다』하고

녹봉으로 아침 저녁의 끼니를 마련하고 그 밖에 의복 등은 모두 자기 집에서 마련하게 하였다.

친척과 친구가 가난하여 도움을 청하면 『밥을 관가에서 먹어서 집에 곡식이 남았으니,

이것 역시 벼슬살이로 인해서 얻은 것이다』하고 필요한 만큼 가져가게 하였다.
고려 이무방(李茂芳) 4)은 공민왕조의 초기에 순창(淳昌)을 맡아 다스렸는데 그 지방의 토산물을 구하는 사람이

있으면 그는 차고 있던 붓집이나 띠를 아전에게 주면서 『친구가 사사로이 청하는데 공물(公物)을 줄 수가 없으니

이것으로 그 구하는 물건과 바꾸어주라』하였다. 이에 청한 사람이 부끄러워 가버렸다.
유관현(柳觀鉉) 5)이 경성판관(鏡城判官)이 되어 을해년(乙亥年) 6)의 기근 때 지성으로 백성들을 구호하였으므로

온 고을이 모두 이에 힘입어서 살아나게 되었다. 하루는 진휼(賑恤)을 감독하는 사람이 청하여 말하기를

 남쪽지방의 기근도 함경도와 다를 바가 없다. 성주(城主)는 이미 녹봉으로 백성들의 목숨을 살렸으니

또 마땅히 친족들에게도 구제가 미쳐야 할 것이다. 이미 진휼청(賑恤廳)에 따로 모아둔 곡식이 약간 있으니

청컨대 급히 보내도록 하시오』 하였다. 이에 유관현은 『녹봉도 역시 백성에게서 나오는 것인데

어찌 사사로운 재물같이 여겨 먼저 가족을 구휼할 수 있겠는가』하고 마침내 허가하지 않았다.]

 

[각주]
1) 이집(李楫) : 본관은 덕수(德水). 경절(景節)의 자(子). 벼슬은 평창군수(平昌郡守) 등을 지냈다.

2) 하양(河陽) : 경상북도 경산군(慶山郡)에 있었던 고현(古縣).

3) 이관(李慣) : 성종 20∼명종 7(1489∼1552) 자는 공숙(公肅), 시호는 장평(章平). 이성군(利城君)에 봉해짐.

4) 이무방(李茂芳) : 충숙왕 6∼태조 7(1319∼1398) 본관은 광양(光陽), 자는 석지(釋之), 시호는 문간(文簡).

    여말(麗末)부터 관직에 올라 선초(鮮初)에 검교문하시중(檢校門下侍中)을 지냄. 광양부원군(光陽府院君)이 됨.

5) 유관현(柳觀鉉) : 숙종 31∼영조 29(1692∼1764) 자는 용빈(用賓), 호는 양파(陽坡), 본관은 전주(全州).

    양사(兩司)· 춘방(春坊)· 참의(參議)를 지냄.

6) 을해년(乙亥年) : 영조 31년(1755).

 

★ 謫徒之人 旅瑣困窮 憐而贍之 亦仁人之務也.
    (적도지인 여쇄곤궁 연이섬지 역인인지무야. )
    귀양살이하는 사람의 객지 살림이 곤궁하다면 불쌍히 생각해서 돌보아 주는 것이 

    또한 어진 사람이 힘쓸 일이다.

 

[방극근(方克勤)이 제녕부(濟寧府) 1)를 맡아 다스릴 때 명나라 태조가 법을 엄하게 적용하여

사대부들이 많이 귀양을 갔다. 귀양가는 사람이 제녕을 지나가면 방극근은 그들을 번번이 도와주었다.

사람들이 혹시 위험하게 여겨도 도와주기를 그치지 않았다.
김영구(金永耉)가 전주판관(全州判官)이 되었는데 이때 부처(付處) 2) 이하의 형을 받은 모든 죄수에게 돈으로

속죄할 수 있게 하는 명령이 내렸다. 판중추부사(判中樞府事) 3) 김수(金睟) 4)가 만경(萬頃)에서 귀양살이하고

있었으나 가난하여 속전(贖錢)을 마련할 수 없었다. 김영구는 김수의 집안과 본래 좋게 지내던 사이였으므로

노비 7명과 한강변에 있는 석섬지기 논으로 속전을 물어주고 고을 사람들에게는 누를 끼치지 않았다.
박대하(朴大夏) 5)가 나주목사(羅州牧使)가 되었을 때 동계(桐溪) 정온(鄭蘊) 6)이 곧은 말을 하다가

제주도에 귀양가면서 나주를 지나가게 되었다. 박대하는 정온과 하루의 사귐도 없었으나 

손을 잡고 눈물을 흘리며 노자를 후하게 주니 정온이 감탄하고 갔다.]

 

[각주]
1) 제녕부(濟寧府) : 중국 산동성(山東省)에 있는 땅.

2) 부처(付處) : 중도부처(中途付處). 형벌의 하나로서 일정한 장소에 거주제한을 함.

3) 판중추부사(判中樞府事) : 조선시대 중추부(中樞府)의 벼슬. 일정한 소임(所任)은 없고,

    문무(文武)의 당상관(堂上官)을 대우하기 위한 자리로 종(從)1품(品).

4) 김수(金睟) : 중종 32∼광해군 7(1537∼1615) 자는 자앙(子昻), 호는 몽촌(夢村), 본관은 안동(安東).

    호조판서· 영중추부사를 지냈다. 손자 김비의 옥사에 연루되어 삭직됨. 저서로는 『몽촌집(夢村集)』이 있다.

5) 박대하(朴大夏) : 선조 10∼인조 1(1577∼1623) 자는 무업(茂業), 호는 송곡(松谷), 본관은 반남(潘南).

    군자감정(軍資監正)·나주목사(羅州牧使)를 지냈다. 광해군 때 폐모론(廢母論)이 일어나자 사직하였다.

6) 정온(鄭蘊) : 선조 2∼인조 19(1569∼1641) 자는 휘원(輝遠), 호는 동계(桐溪) 혹은 고고자(鼓鼓子),

    본관은 초계(草溪). 이조참판을 지냈다. 호란 때의 척화론자. 남계서원(藍溪書院)에 제향(祭享).

    저서로는 『동계집(桐溪集)』이 있다. 시호는 문간(文簡).

 

★ 干戈搶攘 流離寄萬 撫而存之 斯義人之行也.
    (간과창양 유리기만 무이존지 사의인지행야. )
    전란(戰亂)을 당하여 몹시 어수선할 때 떠돌아다니며 붙임살이하는 사람을 불쌍이 여겨
    구제하고 보호해 주는 것이 의로운 사람의 행실인 것이다.

 

[강수곤(姜秀崑) 1)이 고창현감(高敞縣監)이 되었는데 마침 전란중이었고 크게 흉년이 들어서 

사람들이 서로 잡아먹을 정도였다. 그는 계획을 잘 세우고 또 준비를 잘하여 굶주린 사람들을 구제하였다. 

충청도·전라도 지방의 유랑민이 천여 명이 되었고,

북방에서 온 친척과 친구로써 굶주려 식객이 되는 사람이 하루 천 명에 이르렀다.

그는 몸소 생활을 간소하게 함으로써 그들에게 도움을 주어 살려낸 사람이천여 명이 되었다.
홍이일(洪履一) 2)이 대구판관(大丘判官)이 되었을 때 마침 병자호란을 당하였다. 

대령(大嶺) 3) 이남은 전란이 미치지 않았으므로 사대부로서 피난온 사람이 많았다. 

그는 이들을 구제하는 데 최선을 다하였으므로 모두 과분한 대우에 기뻐하였다. 

그는 말하기를 『이런 때를 당하여 한 고을의 풍요를 독차지하여 어찌 제 혼자만 넉넉하게 살면서 

남의 춥고 굶주림을 그냥 볼 수 있겠는가. 하물며 사대부들이 살곳을 잃고 유랑함에 있어서랴』라고 하였다. 

어느날 관찰사가 농담으로 『벼슬자리에 있으면서 정사를 맑게 하는 것도 좋지만 자손들은 어찌할 것인가』라고 

말하였더니 그는 웃으면서 『처신함에 있어서 이 마음을 저버리지 않는다면 그것으로 족하다.

이로써 자손들에게 남겨준다면 넉넉하지 않겠는가』 하였다.]

 

[각주]
1) 강수곤(姜秀崑) : 조선 선조·광해군 때 사람. 자는 여진(汝鎭), 본관은 진주(晋州).

    공조좌랑(工曹佐郎)·고창현감(高敞縣監)·돈녕도정(敦寧都正)을 지냈다.

2) 홍이일(洪履一) : 선조 16∼현종 7(1583∼1666) 자는 형오(亨五), 본관은 남양(南陽).

    호조정랑(戶曹正郎)을 거쳐 여러 고을의 수령을 지냈다.

3) 대령(大嶺) : 조령(鳥嶺).

 

★ 權門勢家 不可以厚事也.
    (권문세가 불가이후사야. )
    권세 있는 집안을 두텁게 섬겨서는 안 된다.

 

[권문에 선물 보내기를 후하게 해서는 안된다. 내가 은혜를 받았거나 혹은 의뢰하여 서로 잘 지내는 사람에게는

때에 따라서 선물을 보내되 먹는 것 몇가지를 넘어서는 안되며, 그 밖에 초피(貂皮)·인삼·비단과 같은 값진 물건은

결단코 바쳐서는 안된다. 왜냐하면 재상(宰相)으로서 청렴 명석하고 식견이 있는 사람은 받지 않을 뿐만 아니라

또한 나를 비루하고 간사한 사람으로 여길 것이며, 혹 임금 앞에 가서 그 사실을 아뢰어 벌주기를 청할 것이다.

이것은 재물을 잃고 망신까지 하는 것이니 위험한 일이다. 만약 그 재상이 뇌물을 즐거이 받고 이로 말미암아

벼슬자리를 끌어올려주는 사람이라면 그는 오래지 않아 패망할 것이요, 공론이 나를 그의 사인(私人)으로 지목하여

크게는 연루자가 될 것이고, 작게는 앞길이 막히게 될 것이 필연의 이치이다. 이렇든 저렇든 해만 있고

이익이 없을 것이니 어찌 구태여 이런 일을 하겠는가.
선조(宣祖) 임진년에 찬성(贊成) 이직언(李直彦) 1)이 헌납(獻納) 2)으로서 왕의 피난길을 모시고 가서

의주(義州)에 있었는데 호남지방의 한 수령이 부채를 보내왔었다. 그는 이 사실을 들어 탄핵하여 말하기를

『이 때가 어느 때인데 물건을 보내어 문안하는가』 하니 동료들도 두려워하였다.
인조(仁祖) 때 북쪽 변두리 고을의 한 무관출신 수령이 초피(貂皮)를 재상 최명길(崔鳴吉) 3)에게 바쳤다.

최명길이 가져온 사람을 불러 돌려주면서 꾸짖어 말하기를 『돌아가서 너의 원에게 말하라.

이와 같은 일은 혼조(昏朝) 4)의 남은 풍습이라 내가 임금께 보고하여 벌주기를 청하고 싶지만

이번은 관대히 용서하니 다음에는 이런 일이 없게하라』 하였다.
현종(顯宗) 갑인년(甲寅年) 5)에 우의정 김수항(金壽恒) 6)이 왕께 말하기를 『사대부의 대소상기(大小喪紀)에

친척이나 친구가 부의하는 규정이 있지만 10세 이전 아이의 죽음에 어찌 부의하는 일이 있겠읍니까,

신이 지난 겨울에 어린 아들의 죽음을 당하였는데 이때 충청병사 박진한(朴振翰)이 무명 1동50필을 부조했읍니다.

신이 대신의 자리를 더럽히고 있으므로 아첨하는 것이 아니면 필시 시험하려 하는 것입니다.

비록 물건을 즉시 되돌려보내기는 하였지만 결단코 그냥둘 수 없는 일입니다.

해당 관청으로 하여금 법에 따라 벌주게 하는 것이 어떻겠읍니까』 하였더니 왕이 『그대로 실시하라』하였다.
이와 같은 일은 어찌 두렵지 않겠는가. 하지 않음만 같지 못하다.
숙종(肅宗) 병자년(丙子年) 7) 겨울에 한 늙은 아전이 대궐에서 돌아와서 그의 처자에게 말하기를

『요즈음 이름 있는 관리들이 모여서 하루 종일 말을 하여도 나랏일의 계획이나 백성을 위한 걱정은 전혀 하지 않고

각 고을에서 보내오는 뇌물의 많고 적음과 좋고 나쁨만을 말하는데, 어느 고을의 수령이 보낸 물건은 극히 정묘하고

또 어느 수령이 보낸 물건은 매우 넉넉하다 하니 이름 있는 관리들의 품평(品評)이 이러하다면 

지방에서 거두어들이는 것이 반드시 늘어날 것이다. 나라가 어찌 망하지 않겠는가』

하고 눈물을 흘려 마지않았다.〈鄭載崙의 閒居漫錄 〉
정선(鄭瑄)이 말했다. 『의롭지 못한 재물을 취하여 처자들이 낭비하는 데 제공하거나 권귀(權貴)에게 주는 뇌물에

충당하거나 재(齋)를 올려서 복을 비는 것은 모두 그 마음을 잘못 쓰는 사람들이다. 』
이경문(李敬文) 8)이 고양내사(高陽內史) 9)가 되었는데곧 李繪이며 北齋 때 사람이다.

하간(河間) 10)의 수령 최심(崔諶) 11)이 그 아우섬(暹) 12)의 권세를 믿고 이경문에게 고라니뿔(기角)과

할미새 깃[翎羽]을 요구하였다. 이경문이 대답하여 『할미새는 여섯 개의 깃촉이 있어 날면 하늘 높이 오르고

고라니는 발이 네 개라 달리면 곧 바닷속으로 들어간다. 소관(小官)은 몸이 게으르고 손발이 둔해서

나는 놈을 쫓을 수도 없고 달리는 놈을 따를 수도 없다』라고 하여 소인(小人) 섬기기를 멀리하였다.
신당(新堂) 정붕(鄭鵬) 13)이 청송부사(靑松府使)가 되었을 때, 재상 성희안(成希顔) 14)이 잣(松子)과 벌꿀을

요구하자, 『잣나무(松)는 높은 산꼭대기에 있고 벌꿀은 민가의 벌통 속에 있는데, 수령 된 사람이

어떻게 이를 얻을 수 있겠읍니까』 하고 대답하였다. 성희안이 부끄러이 여기고 사과하였다.松은 잣이 여는 松이다
고려 유석(庾碩) 15)이 동북면병마사(東北面兵馬使) 16)가 되었는데,

앞서 어느 병마사가 처음으로 강요주(江瑤柱) 17)를 최이(崔怡)18)에게 바침으로써 이것이 상례(常例)가 되었었다.

강요주는 해산물로 용진현(龍津縣)에서 나는데 잡기가 대단히 어려웠다. 고을의 50여 호 민가가 이 때문에 실업하고

거의 도망하여 흩어졌으므로 유석이 강요주 바치는 것을 일체 금지시켰더니 유망(流亡)했던 백성들이 

모두 돌아왔다. 이때 수령들이 다투어 백성들을 침탈하여 권귀(權貴)에게 아첨하기를 일삼았다. 

유석이 수령들에게 공문을 보내어 이를 금지시켰더니 그를 시기하는 사람이 이 공문을 최이에게 보였다. 

최이가 말하기를 『유석이 나에게 바치지 않으면 그만이지 왜 구태여 도내 수령에게 금하기까지 하느냐』하였다. 동북면 사람들이 모두 유석의 맑은 덕에 감복하여 어버이라 불렀고 임기가 차서 돌아오매 3년을 더 있기를 

청하였지만 중앙으로 불리어 예빈경19)이 되었다.

창강(滄江) 조속(趙涑) 20)이 임피 현령(臨陂 21)縣令)이 되었을 때 대껍질로 방석을 만들어 탁단이라 이름짓고

호주(湖洲) 채유후(蔡裕後) 21)에게 보내어 그의 초당(草堂)에서 쓰게 하려 하였다. 그러나 마침 채유후의 집이

초당에서 기와지붕으로 바뀌었다는 말을 듣고 탄식하여 말하기를 『기와집에는 이 방석이 맞지 않다』하고

마침내 보내지 않았다. 채유후가 이 말을 듣고 부끄럽게 여기고 감탄하였다.]

 

[각주]
1) 이직언(李直彦) : 인종 1∼인조 6(1545∼1628) 일명 시언(時彦). 자는 군미(君美), 호는 추천(秋泉),

    시호는 정간(貞簡), 본관은 전주. 개성부유수·찬성을 지냈다. 정묘호란 때의 척화파이며 청백리에 녹선되었다.

2) 헌납(獻納) : 조선 시대 사간원(司諫院)의 정(正)5품(品) 벼슬.

3) 최명길(崔嗚吉) : 선조 19∼인조 25(1586∼1647) 자는 자겸(子謙), 호는 지천(遲川),시호는 문충(文忠),

    본관은 전주(全州). 대제학·이조판서·호조판서·영의정을 지냈다. 병자호난때의 대표적인 주화론자(主和論者).

4) 혼조(昏朝) : 광해군(光海君) 때를 가리킨다.

5) 갑인년(甲寅年) : 현종 15년(1674).

6) 김수항(金壽恒) : 인조 7∼숙종 15(1629∼1689) 자는 구지(久之), 호는 문곡(文谷),시호는 문충(文忠),

    본관은 안동(安東). 영의정을 지냈다. 당색이 서인으로 남인 윤휴 등과의 당쟁으로 사사(賜死)되었다.

    저서로는 『문곡집(文谷集)』이 있다.
7)병자년(丙子年) : 숙종 22년(1696).

8) 이경문(李敬文) : 중국 북제(北齊) 때의 사람 이회(李繪)의 자(字). 시호는 경(景). 사도우장사를 지냈다.

9) 고양내사(高陽內史) : 고양(高陽)은 중국 산동성에 있는 지명이며 내사(內史)는 군수와 같은 지방행정관.

10) 하간(河間) : 중국 하북성(河北省)에 있는 지명.

11) 최심(崔諶) : 중국 북제(北齊) 때 사람.

12) 최섬(崔暹) : 중국 북제(北齊) 때 사람. 자는 계륜(季倫), 탁지상서(度支尙書)·우복야(右僕射)를 지냈다.

13) 정붕(鄭鵬) : 예종 l∼중종 8(1469∼1512) 자는 운정(雲程), 호가 신당(新堂), 본관은 해주(海州),

      김굉필(金宏弼)의 문인. 교리(校理)·청송부사를 지냈다. 금오서원(金烏書院)·덕림서원 등에 제향(祭享)됨 .

14) 성희안(成希顔) : 세조 7∼중종 8(1461∼1513) 자는 우옹(愚翁), 호는 인재(仁齋), 본관은 창녕(昌寧),

      시호는 충정(忠定). 중종반정(中宗反正)의 주역으로 정국공신(靖國功臣)이 되고 영의정을 지냈다.

15) 유석(庾碩) : ?∼고종 37(1250) 본관은 무송(茂松). 벼슬은 동북면병마사·지형부사(知刑部事) 등을 지냈다.

16) 동북면병마사(東北面兵馬使) : 고려시대 함경도 지방의 민정(民政)과군정(軍政)을 아울러 다스린 지방장관.

      남부 5도(道)의 장관은 안찰사였고, 동북면(東北面)(東界)·서북면(西北面)(西界)에는 병마사를 두었다.

17) 강요주(江瑤柱) : 강요주(江瑤珠)가 원명(原名)이며 살조개이다.

18) 최이(崔怡) : ?∼고종 36(1249) 최우(崔瑀). 본관은 우봉(牛峰). 고려 최씨무인정권의 제2대 집권자.

19) 예빈경(禮賓卿) : 고려시대 빈객(賓客)·연향(宴享)을 맡아보던 예빈시(禮賓寺)의 종(縱)3품관(品官).

20) 조속(趙涑) : 선조 28∼현종 9(1595∼1668) 자는 희온(希溫), 호는 창강(滄江)·창추(滄醜)·취추(醉醜),

      본관은 풍양(?壤). 인조반정(仁祖反正)에 참여했다. 장령(掌令)·진선(進善)을 지냈으며,

      서화가로도 유명하다. 저서로는 『창강일기(倉江日記)』가 있다.

21) 임피(臨陂) : 전라북도 옥구군(沃溝郡)에 있는 지명.

22) 채유후(蔡裕後) : 선조 32∼현종 1(1599∼1660) 자는 백창(伯昌), 호는 호주(湖洲),시호는 문혜(文惠),

      본관은 평강(平康). 예조참의·대제학을 지냈다. 병자호란때의 주화론자. 

       저서로는 『호주집(湖洲集)』이 있다.

 

 

 

 
       資 料   編 輯 者       德 庤 / 李   斗 振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