牧民心書 3 篇

牧 民 心 書 券 3

덕치/이두진 2021. 8. 18. 17:51

       牧 民 心 書   券 3  


 

第 3 篇     봉공(奉公) 육조(六條)


  1 章   선화(宣化)   

                 (덕으로 교화를 널리 펴라.)

 

 

★ 郡守縣令 本所以承流宣化 今唯監可謂有是責非也.
     (군수현령 본소이승류선화 금유감가위유시책비야. )
     군수(郡守) 현령(縣令)은 본래 승류(承流) 1)· 선화(宣化) 2)하는 것이 직분인데, 
     요즈음은 오직 감사에게만 책임이 있다고 하는 것은 잘못된 것이다.

 

[동중서(董仲舒) 3)의 「현량대책(賢良對策)」4)에서는 이렇게 말했다. 『오늘날의 군수·현령은 백성의 스승이요

통솔자이므로 승류·선화하는 일을 맡게 한 것이다. 때문에 수령이 어질지 못하면, 

임금의 덕이 선양되지 못하고 그 은택이 흐르지 못한다. 지금의 수령은 아랫사람으로서 교훈을 잊어버려, 

그중에는 임금의 법을 받들지 않고, 백성에게 포학하며 간사한 자들과 더불어 거래를 일삼는다. 

빈궁하고 외로운 사람들이 억울하고 고통스럽게 생업마저 잃으니 매우 폐하(陛下)의 뜻에 맞지 않는다.

 이 때문에 음양(陰陽)이 뒤엉키고 나쁜 기운이 꽉 차고 막히게 되어,

모든 생물이 제대로 성장하지 못하고 뭇 백성이 번성하지 못하니,

이는 모두 수령이 밝지 못하여 이 지경에 이르게 한 것이다. 』
살피건대, 선화·승류는 수령의 책임이거늘 오늘날은 오직 감사의 정청(政廳)에만 <선화당(宣化堂)>이란 현판을

써붙여 놓으니 수령들은 익히 이 현판을 보고서 마음속으로 생각하기를 선화·승류하는 것은 우리의 책임이 아니며

우리들은 우선 부세를 독촉하여 상사(上司)의 꾸지람을 면하면 그만이라고 한다. 슬프다. 어찌 답답하지 아니한가.
『서경(書經)』에 이르기를 『신하는 짐(朕)의 팔과 다리와 귀와 눈이 된다』고 하였다.

이는 임금인 내가 힘을 사방으로 펴려고 하니, 너희군수·현령 된 자들이 따라서 사방에 힘을 펴야 한다는 뜻이다.

조정의 은덕(恩德)을 펴서 백성들로 하여금 임금을 사모하고 받들게 하는 것을 가리켜 민목(民牧)이라고 하는데,

오늘날 수령 된 자는 스스로학정을 해서 원망이 조정으로 돌아오게 한다. 부세의 징수를 연기하라.

大同 정퇴(停退) 5)의 경우를 가리킨다는 조서(詔書)가 내렸으나 감추어 반포하지 않고

오로지 백성들에게 긁어내어 스스로 치부하기 위한 거래를 자행하며, 부채를 탕감하라

還上의 蕩減의 경우를 가리킨다는 조서가 내렸으나 감추어 반포하지 않고 아전들과 작당·농간하여

들의 요리(料理)에 이바지하며, 병자를 구호하고 시체를 묻어주라 건륭(乾隆) 말년에 서쪽으로부터 온

역질의 경우와 같은 것이다는 명령은 감추어 반포하지 아니하며, 결혼 못한 자의 혼인을 권하고

부모 없는 어린이를 거두어 주라는 명령정조 때에 누차 이 명령이 있었다은 감추어 반포하지 아니한다.

재상(災傷) 6)을 가로채 먹고는 『조정에서 이것을 인정하지 않고 깎아버렸다』하며,

많은 굶주린 백성을 구호대상에서 제외하고는 『조정에서 구하기가 어렵다』한다 하며, 피륭이 호소하면

『조정의 명령이 지엄하니 난들 어찌하겠나』하며, 무고한 백성을 가두어두고 속전(贖錢)의 명목으로 돈을 빼앗고자할 때에는 『조정의 금령이 본래 엄한데 네가 어찌 죄를 범했나』하여, 백성들로 하여금 조정을 원망하며 

아우성치게 한다. 아! 이래서야 되겠는가. 수령은 마땅히 이런 점을 생각하여 매양 백성을 대할 때

오직 조정의 은덕을 펴는 것으로써 제일의 직분으로 삼는 것이 옳다.
한문공(韓文公) 7)이 조주(潮州) 8)의 자사(刺史)가 되어 부임한 후에 관리와 백성들을 만나 갖추어 말하였다.

『조정이 정치를 훌륭히 하며, 천자가 신성(神聖)·위무(威武)·자인(慈仁)하여 억조(億兆) 인민들을 자식처럼 길러

친소 원근이 없으니, 비록 만리 밖 영해(嶺海) 9)의 구석에 있더라도 기전(畿甸)10)지방 연곡(輦穀)11) 밑에 있는

사람들과 한가지로 대우한다. 착한 일이 있으면 반드시 듣게 되고 악한 일이 있으면 반드시 보게 되며,

일찍 조회하고 늦게 파하여 항상 조심하고 삼가하되 오직 사해(四海) 안과 천지중에 하나라도 제자리를 얻지 못할까 두려워하기 때문에 자사(刺史)를 보내어 백성의 질고(疾苦)를 직접 묻게 하고, 만약 불편한 일이 있으면

위로 아뢰게 한 것이다. 국가의 헌장이 완벽하게 갖추어지고 다스린 지 오래 되어 수령은 조서(詔書)의 조목을 

받들어 지키고 그것을 어기어 범하는 자가 드무니 비록 먼 남쪽 변두리에 있더라도 태평스럽지 않음이 없다. 』

아전과 백성들이 임금의 덕을 칭송하는 바를 듣고 북치고 춤추며 환호하여, 정사에 특별히 마음을 쓰지 않고도

모든 일이 순조롭게 되었다.]

 

[각주]
1) 승류(承流) : (임금의 은덕 따위를) 받들어 흐르게 함.

2) 선화(宣化) : 덕화(德化)를 널리 펴냄.

3) 동중서(董仲舒) : 중국 한(漢)의 광천(廣川) 사람. 어려서 공양춘추를 공부하고 경제(景帝) 때에 박사가 되었다.

    무제(武帝) 때 현량(賢良)으로서 천인삼책(天人三策)을 봉대(奉對)하고 강도상(江都相)이 되었다.

    무제(武帝)가 유학(儒學)으로써 국교(國敎)를 삼는 것은 그에 힘입은 바 컸다.

    저서는 『춘추번로(春秋繁露)』 『동자문집(董子文集)』이 있다

4)「현량대책(賢良對策)」 : 중국 전한(前漢)의 동중서가 무제(武帝)의 책문에 대하여 답한 문장의 편명(篇名)이다.

5) 정퇴(停退) : 납부의 기한을 연기함. 흉년에 대동미(大同米)나 환곡(還穀)의 상납을 다음해로 연기해 주는데

    혹 국경(國慶)이 있으면 탕감해 주기도 하였다. 그러나 향리들은 이를 기화로 중간 착복하는 것이 예사였다.

6) 재상(災傷) : 수재(水災)나 한재(旱災)가 들 때 조정에서 부세(賦稅)를 탕감해주는 재결(災結).

7) 한문공(韓文公) : 한유(韓愈)의 시호가 문공(文公)이다.

8) 조주(潮州) : 중국 수(隋)나라 이래의 주명(州名)인데 지금의 광동성(廣東省) 조안현(潮安縣)이다.

9) 영해(嶺海) : 중국 광동(廣東)·광서(廣西)의 양광지방(兩廣地方)을 가리킨다.

    오령(五嶺)의 남쪽에 있어서 바다에 가까운 땅이다.

10) 기전(畿甸) : 왕성(王城)을 중심으로 사방 500리(里) 이내의 토지(土地)이다. 기내(畿內)라고도 한다.

11) 연곡(輦穀) : 천자(天子)의 승여(乘輿)이다. 전(轉)하여 천자(天子)가 사는 도읍을 뜻한다.

      연곡하는 연하(輦下)·곡하(穀下)와 같은데, 천자의 슬하(膝下) 또는 천자가 사는 도읍을 말한다.

 

 

★ 綸音到縣 宜聚集黎民 親口宣論 俾知德意.
    (윤음도현 의취집여민 친구선론 비지덕의. ) 
    윤음(綸音:임금의 명령)이 고을에 도착하면 마땅히 백성들을 불러 모아 놓고, 
 

    자신의 입으로 직접 설명하여 임금의 은덕을 알게 하여야 한다.  

 

[『후한서(後漢書)』의 순리전(循吏傳) 서문에 말하였다. 『광무제(光武帝)는 민간에서 자라나 자못 백성의

실정을 알았다. 손수 쓴 글을 지방관에 내린 것이 모두 한쪽에 열 줄씩 잘게 써서 작성된 문안(文案)이었다.

이로부터 부지런하고 검약한 기풍이 상하(上下)에 행하여졌다.
황패(黃覇)가 영천(潁川)의 태수가 되었을 때, 유능한 관리를 뽑아서 지역을 분담시켜 황제의 조령(朝令)을 선포하여

백성들로 하여금 모두 황제의 뜻을 알게 하였다.
윤음(綸音)이란 것은 백성의 어버이 된 임금이 백성들을 자녀에게 타이르듯 하는 것이다.

어리석은 백성은 문자를 해득하지 못하니 귀에 대고 말하거나 면대하여 가르치지 않으면 타이르지 않는 것과 같다.

윤음이 한번 내릴 때마다 수령은 마땅히 패전(牌殿)1)의 문밖에서 몸소 읽고 설명하여 조정의 은덕을 널리 알려서

백성들로 하여금 은혜를 품게 하여야 한다. 항상 윤음이 내려오면 대강대강 옮겨써서 풍헌(風憲)과 약정(約正)에게

주어버리고 만다. 만약 그중에서 조서(詔書)에 어기더라도 행하고 싶지 않는 것이 있으면 아전과 풍헌· 약정이 

숨기고 선포하지 않는다. 세곡 징수의 기한을 늦추어주는 것이나 환곡을 탕감하는 등과 같은 윤음은 열 번 내리면

감추는 것이 여덟·아홉 번이 된다. 수령의 여러 죄 중에서 이 죄가 제일 커서 죽음을 당해도 변명할 말이 없으니,

가히 범할 수 있겠는가. 내가 영남에 귀양갔을 때, 가난하고 조그마한 마을에도 모두 윤음각이 있는 것을 보았다.

한 칸의 집에 그 북쪽 벽에다 긴 판자를 가로 놓아두고 매양 윤음이 오면 판자 위에 붙여두고 부로(父老)들이

그 앞에 늘어서서 절을 한다. 나라에 경사가 있으면 늘어서서 절하고, 나라에 상고(喪故)가 있으면 늘어서서 절하고,

그 앞에서 망곡례(望哭禮) 2)도 행하며, 크게 의논할 일이 있으면 반드시 그 아래 모인다.

이것은 천하의 아름다운 풍속이니, 마땅히 이 풍속을 여러 도(道)에 통용하게 할 것이다.]

 

[각주]
1) 패전(牌殿) : 전패(殿牌)를 모션두던 전각(殿閣).

2) 망곡례(望哭禮) : 먼 곳에서 임금이나 부모의 상사(喪事)를 당할 때나 곡(哭)할 자리에 몸소 나가지 못할 때,

    그쪽을 향하여 애곡(哀哭)하던 예식(禮式)이다.

 

★ 敎文赦文到縣 亦宜撮其事實 宣諭下民 俾各知悉.
    (교문사문도현 역의촬기사실 선유하민 비각지실. )
    교문(敎文) 1)이나 사문(赦文) 2)이 고을에 도착하면 역시 그 사실을 요약하여 
    백성들에게 널리 읽고 설명하여 제각기 모두 소상히 알도록 해야 한다.

 

[나라에 큰 경사가 있으면 이에 교문을 반포한다. 임금의 건강이 회복된다든지, 세자(世子)가 태어난다든지,

임금이 특히 장수한다든지, 혹은 가례(嘉禮)가 거행된다든지 하면 이에 교문을 반포하고 인하여 사면을 선포한다.

다만 변려체(騈儷體) 3)로 수식을 일삼는 글은 어리석은 백성들이 이해하지 못하므로 수령은 마땅히 경사의 

본 의미를 쉽게 서술하여 따로 유시하는 글을 만들어 백성들에게 선포하고 모두 같이 경하하도록 해야 한다.

혹시 도적을 평정하고 반역자를 처단한 일로 경하할 경우에도 역시 마땅히 이와같이 하여야 한다.
중국의 사면을 반포하는 조서(詔書)는 그 은전의 예규(例規)가 상세하고 치밀해서 사면(赦免)의 한계 및 은택의

미치는 바가 명백하여 알기 쉬운데, 우리나라의 사면을 반포하는 글은 본래 명백하지 못하여 백성이 알기 어렵다.

수령은 마땅히 그 뜻을 잘 풀이하고 국문 우리말로 언리(諺李)를 번역하여 백성들로 하여금 

환히 알게 하여야 한다.]

 

[각주]
1) 교문(敎文) : 나라에 큰일이 있을 때 내리는 임금의 유시문(諭示文).

2) 사문(赦文) : 나라의 경사로 죄인을 놓아줄 적에 임금이 내리던 글.

3) 변려체(騈儷體) : 한문(漢文) 문체(文體)의 하나. 사(四)·육(六)으로 대구(對句)를 맞추어나가는 것이 특징이다.

    한(漢)·위(魏)·육조대(六朝代)에 유행되던 문장체(文章體)의 하나.


 ★ 凡望賀之禮 宜肅穆致敬 使百姓知朝延之尊.
     (범망하지예 의숙목치경 사백성지조연지존. )
     무릇 망하례(望賀禮)1)는 마땅히 경건하며 엄숙하고 공경을 다하며 
 

     백성들로 하여금 조정의 존엄함을 알게 하여야 한다.  

 

[『예기(禮記)』에 이르기를 『조회(朝會)는 물건의 색깔을 알아볼 수 있을 때 한다』하였으니  

물건의 색깔을 알아볼 수 없는 시각이란 매상(昧爽)먼동이 틀 무렵이다할 때이다. 동틀 때 예를 행하는 경우에는  

반드시 닭이 울 때 일어나서 세수하고 빗질하고 옷을 입어야 이에 가히 때에 맞출 수 있다.
뜰 2)에 들어가서 예 행하기를 마치거든 반드시 얼마 동안 엎드려서 지난 보름 동안에 한 일들이  

우리 임금에게 부끄러운 것이 없는가를 묵념하되 참으로 임금이 친히 임하여 위에 있는 것같이 한다.

만약 마음에 부끄러운 것이 있으면 마땅히 빨리 고쳐서 나의 타고난 본래의 마음을 기를 것이다.
오늘날 습속은 초하루와 보름에만 망하례(望賀禮)를 행한다. 그러나 임금의 탄신이나 나라에서 하례를 거행하는

정해진 날에도 모두 마땅히 망하례를 행해야 한다. 비록 다른 수령과 어긋나는 일이 있어도 행하지 않으면 안된다.]

 

[각주]
1) 망하례(望賀禮) : 경절(慶節)에 수령이 전패(殿牌)에 절하던 예식이다.

    전패(殿牌)는 지방객사에 전자를 새겨 세운 나무패로서 임금의 상징인데, 

    출장간 관리나 고을 수령이 배례하였다.

2) 뜰 : 전패(殿牌)를 모신 건물의 뜰.

 

 

★ 望慰之禮 一遵儀注 而古禮不可以不講也.
    (망위지예 일준의주 이고예불가이불강야. )
    망위례(望慰禮) 1)는 오르지 나라의 의식 절차를[의주(儀注) 2)] 따라야 하는 것이니 
 

    옛날의 예(禮)를 강구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망위례는 마땅히 더욱 정성스럽게 거행해야 한다. 만약 고례로 논한다면 국상(國喪) 소식을 처음 들을 때,

마땅히 오사모(烏紗帽) 3)·천담복(淺淡服) 4)·흑각대(黑角帶) 5)를 갖추고 패전(牌殿) 뜰 안으로 들어가 곡하고,

바깥 뜰로 물러나와서 옷을 갈아입고 들어가 우곡(又哭)을 행한다.
우곡이란 분상례(奔喪禮) 6)에 이른바 오곡(五哭)의 제2곡이다.

『예기(禮記)』에 이르기를 『우곡에서는 괄발(括髮) 7)하며, 단(袒) 8)하며, 용(踊) 9)한다』〈奔喪篇 10〉

하였으니, 다시 뜰에 들어가려고 할 때 오사모와 망건(網巾)을 벗고 상투를 풀어 괄(髮)을 만들되 

머리털을 모아쥐고 두세 번 말아두는 것이다 삼(麻)끈으로 묶는 것이니 이것을 괄발이라 한다.
임금의 상을 당하여 괄발하는 것은 고례에 지극히 엄하게 규정되어 있으므로 빙례(聘禮)11)에 이르기를

『복명(復命)하고 나와 단(袒)하며 괄발하고 자리에 나아가 용(踊)한다』고 하였다.

『춘추전(春秋傳)』에 이르기를 공손귀보(公孫歸父)12)가 진(晋)나라에 빙문(聘問)갔다가 돌아오는 길에

생(笙)13)에 이르러 단(壇)을 모으고 휘장을 두르고 복명한 다음 단(袒)하고 괄발하고 자리에 나아가 곡하고

세번 용(踊)하고 나왔다』 宣公 18년에 있다 하니 이 예는 폐지할 수 없는 것이다.

고례에는 괄발을 소렴(小斂) 후에 한다고 하였으나 상(喪)을 듣고 달려가지 못하는 자는 우곡(又哭)할 때

이미 괄발했으니 삼곡(三哭)三哭은 小斂의 哭을 의미한다을 기다릴 필요가 없다.

오늘날의 『의주(儀注)』에는 괄발의 설이 없으므로 수령이 마음대로 행할 수는 없지만 고례를 알지 않으면 안된다.
이에 좌단(左袒)하여 들어가 곡하되 슬픔을 다하고 나온다.비록 괄발하지만 이내 천담복과 흑각대를 착용한다
이에 패전(牌殿)의 바깥 뜰에다 집에 기대어 초막(草幕)俗名은 廬幕이라 한다을 짓고 거기에 거처하면서 죽을 

먹는다.임금의 상을 당하였을 때 여막에 거처하는 것은 雜記14)에 보이고 죽을 먹는 것은 檀弓15)에 보인다
이 날에 수질(首絰)16)·요질(腰絰)17)·교대(絞帶)18)를 만들어 석곡(夕哭) 때 사용한다.

해가 질 때 夕哭을 행한다 상을 늦게 들은 자는 삼곡(三哭)에 질대(絰帶)를 사용하여도 좋다.
그 이튿날 새벽에 삼곡을 행하는데 일찍 일어나 천담복에 사모각대(紗帽角帶)19)는 벗고,

포건(布巾)과 질대를 갖추고 들어가 자리에 나아가 곡한다.괄발을 그대로 두고 고치지 않는다.

한낮에 한번 곡하고無時로 곡하는 것을 의미한다 해질 때 한번 곡한다.
그 이튿날 새벽에 사곡(四哭)을 행하는데 위의 예와 같이 하며 한낮과 해질 때에 곡하는 것도 역시 마찬가지다.
그 이튿날 새벽에 오곡(五哭)을 행하는데 일찍 일어나 참최상(斬衰裳)20)·중의(中衣) 21)에 저장 (苴杖)22)을 짚고

이에 괄발을 고쳐 상투를 틀고 상관(喪冠) 23)을 쓰며 질대(絰帶)· 관구(菅屨)24)를 갖추고 

마땅히 포망건(布網巾)이 있어야 한다 들어가서 자리에 나아가 곡(哭)하고 성복(成服) 25)한다.
오늘날의 의주에는 국상의 소식을 들은 지 엿새가 되어야 이에 성복한다고 하나, 

고례에는 천자와 제후의 상에는 먼저 성복하고 후에 대렴(大斂)한다고 하니나의 禮箋 26)에 상세히 나타나 있다. 

반드시 엿새가 되어야 성복한다는 것은 후세의 잘못된 예이다. 

그러나 의주가 이미 그렇게 되어 있으니 한결같이 그것을 따르지 않을수 없는 것이다.

오늘날 풍속에 소렴(小斂)의 질(絰)은 별도로 단고(單股) 27)단고는 弔客의 질대이다를 사용하는데 예가 아니다.

마땅히 쌍규(雙糾) 28)의 질을 사용하여야 한다.
오늘날 풍속에 교대(絞帶)는 세 겹으로 꼬고 네 가닥으로 만드는데 예가 아니다.

세 겹에 네 가닥은 葛帶의 제도이다 마땅히 쌍규(雙斜)의 띠를 써야 한다.
성복을 마친 다음 이에 정당(政堂)에 돌아와서 임시로 포사모(布紗帽)29)·백포의(白布衣) 30)·교대(絞帶)를

착용하고 정사를 본다. 매 초하루와 보름에 참최상(斬衰裳)과 질대(?帶)를 갖추고 망곡하기를 예법대로 한다.
현궁(玄宮) 31)에 하관할 때와 우제(虞祭) 32)·부제(祔祭) 33)· 연제(練祭) 34)·대소상(大小喪) 때에

모두 망곡하기를 예법대로 한다. 왕비의 상에는 괄발하지 않고 포건(布巾)포건은 옛날의 ?로써 대신한다.

다섯 차례의 곡은 모두 위의 예법대로 하되 여막(廬幕)에 거처하지 않으며 죽을 먹지도 않는다.]

 

[각주]
1) 망위례(望慰禮) : 지방의 관원이 멀리서 국상(國喪)을 조위(弔慰)하는 예(禮).

2) 의주(儀注) : 국가의 전례(典禮) 절차를 주해(註解)한 것. 『경국대전(經國大典)』예전(禮典) 의주(儀註)조에는

    모든 의주(儀註)에는 오례의(五禮儀)를 쓴다 하였으니, 『국조오례의(國朝五禮儀)』가 기준이 되었다.

3) 오사모(烏紗帽) : 관복(冠服)을 입을 때 쓰는 것으로 사(紗)로 만든 벼슬아치의 모자이다.

지금 구식 혼례(婚禮) 때 신랑이 쓰는 모자이다.

4) 천담복(淺淡服) : 엷은 옥색의 제복(祭服).

5) 흑각대(黑角帶) : 서대(犀帶)이다.

6) 분상례(奔喪禮) : 분상(奔喪)의 예(禮)인데 분상(奔喪)은 『예기(禮記)』의 편명(篇名)이다.

7) 괄발(括髮) : 상의(喪儀) 때 머리털을 모아쥐고 두세 번 꾸부려 삼으로 묶는 것.

8) 단(袒) : 왼쪽 팔과 어깨가 나오도록 저고리를 반쯤 벗는 것.

9) 용(踊) : 상의(喪儀) 때 애통(哀痛)의 정(情)을 표시하기 위하여 제자리에서 뛰는 것.

10) 분상편(奔喪篇) : 『예기(禮記)』분상편(奔喪篇)의 글.

11) 빙례(聘禮) : 의례(儀禮)의 편명(篇名).

12) 공손귀보(公孫歸父) : 중국 춘추시대 노나라의 공족. 자는 자가(子家), 귀부가 그의 이름. 장공(莊公)의 손자.

13) 생(笙) : 춘추(春秋)시대 노(魯)나라 국경에 있던 땅 이름.

14) 잡기(雜記) : 『예기(禮記)』의 편명(篇名).

15) 단궁(檀弓) : 『예기(禮記)』의 편명(篇名).

16) 수질(首絰) : 상복(喪服)을 입을 때 머리에 두르는 짚과 삼으로 만든 띠.

17) 요질(麗絰) : 상복(喪服)을 입을 때 허리에 두르는 짚과 삼으로 만든 띠.

18) 교대(絞帶) : 상주가 입는 중단의 위에 두르는 띠.

19) 사모각대(紗帽角帶) : 오사모(烏紗帽)와 흑각대(黑角帶).

20) 참최상(斬衰裳) : 부친상(父親喪)에 입는 상복(喪服)의 하의(下衣).

21) 중의(中衣) : 중단의 즉 상주(喪主)가 입는 삼베로 만든 두루마기.

22) 저장(苴杖) : 상제가 상중에 쓰는 검은 빛의 대지팡이.

23) 상괄(喪冠) : 상제가 쓰는 관(冠).

24) 관구(菅屨) : 엄짚신 즉 왕골로 삼은 신이다.

25) 성복(成服) : 초상이 났을 때 상복을 처음 입는 일.

26) 예전(禮箋) : 정약용(丁若鏞)의 저서로서 『상례사전(喪禮四箋)』을 가리킨다.

27) 단고(單股) : 외가닥. 이 경우에 외가닥의 삼끈이다.

28) 쌍규(雙糾) : 두 가닥으로 마주 꼰 것.

29) 포사모(布紗帽) : 오사모(烏紗帽) 대신 베로 만든 사모(紗帽).

      국상(國喪)의 성복후(成服後)에 관원(官員)이 임시로 착용하는 모자.

30) 백포의(白布衣) : 흰 베옷.

31) 현궁(玄宮) : 광중(壙中)을 의미함.

32) 우제(虞祭) : 초우(初虞)·재우(再虞)·삼우(三虞)의 총칭인데 반혼(返魂) 후에 행하는 제사(祭祀)이다.

33) 부제(祔祭) : 아버지의 신주를 할아버지의 신주 옆에 모실 때 지내는 제사(祭祀).

      졸곡(卒哭) 후에 혹은 삼년상(三年喪) 후에 행함.

34) 연제(練祭) : 사후(死後) 13개월 만에 지내는 제사(祭祀)이니, 일주기(一週忌)의 제사(祭祀)이다.

 

 

★ 國忌廢事不用刑 不用樂 皆如法例.
    (국기폐사불용형 불용악 개여법예. )
    나라의 기일(忌日)에는 공무를 보지 않고, 형벌을 쓰지 않으며 풍악도 쓰지 않rh 모두 법례대로 하여야 한다. 

 

[나라의 기일 하루 전에 몸을 깨끗이 재계(齋戒)한 것이며 태형(笞刑)은 쓰되 장형(杖刑)은 쓰지 않는다.

오늘날 풍속에 곤장을 쓰는 것을 가리켜 用刑이라고 한다 관아의 대문을 열고 닫을 때 군악(軍樂)은 쓰지 않는다.
그 이튿날 재계를 파하고 이에 태형과 장형을 쓸 수 있다.
요즈음 수령들은 나라의 기일에 혹 연회를 베풀고 풍악을 울려서 아전과 백성들이 그 비례(非禮)를 비난하여

온 고을이 떠들썩한데도 수령은 듣지 못하니, 이것을 삼가하지 않을 수 없다.
내가 섬긴 바 있는 현 임금의 부왕(父王)과 조왕(祖王)의 기일(忌日)에도 마땅히 엄숙히 재계하고 

추모를 다하여 술과 육미를 끊는 것을 친기(親忌)와 다름없이 하여야 예법에 맞는 것이다.

정만화(鄭萬和)가 감사로 있을 때, 반드시 조복(朝服)1)을 입고 아전과 백성들을 대하면서 말하기를

『임금의 명을 받아 지방을 다스리고 교서(敎書) 2)를 받들고 있는 몸으로 자신의 편안을 위해 평복을 입는 것은  

임금을 공경하는 도리가 아니다』고 말하였다. 초하루와 보름에 요배(遙拜) 3)할 때, 반드시 목욕재계하고  

공경을 다하여 바로 임금의 뜰앞에 있는 것같이 하였다. 데리고 있는 막료(幕僚)들은 반드시  

사대부의 자지(子枝) 4)를 쓰면서 말하기를 『시정배는 이익을 중하게 여기니, 가까이해서는 안된다』고 하였다.
조극선(趙克善)이 온양(溫陽) 군수로 있을 때의 일이다. 인조대왕(仁祖大王)의 상을 당했을 때, 그는 죽을 마시고

거적자리에 자면서 아침 저녁으로 곡하였다. 내외의 주방에는 술과 육미를 치우니 부녀와 어린이들도 역시 감히

육미를 먹는 자가 없었다. 또 그 고을 안에 통첩을 보내기를 『예에 이른바 방상(方喪) 5)이라고 하는 것은

나라의 상사가 친상과 비등하다는 뜻이다. 이제 민간에서는 잔치하고 술마시거나, 혼인하고 노래부르고 춤추거나,

고기 잡고 사냥하는 등의 일을 하지 말아야 한다. 혹시라도 예율(禮律)을 범하는 일이 없도록 하라』 하니,

이에 모든 사람들이 두려워하고 각자 조심하고 힘쓰며, 저자에서는 술을 팔지 않고 들에서는 농가 소리도 없었다.]

 

[각주]
1) 조복(朝服) : 조정(朝廷)에 출사(出仕)할 때 입는 관원(官員)의 정식 의복(衣服)이다.

2) 교서(敎書) : 왕(王)의 유시(諭示).

3) 요배(遙拜) : 패전(牌殿)에 가서 멀리 임금을 향하여 절하는 것.

3) 자지(子枝) : 피붙이. 혈속(血屬). 이 경우 사대부(士大夫)의 서(庶) 얼(孼)따위를 가리킨다.

5) 방상(方喪) : 신하가 임금의 상을 당할 때, 부모의 상과 같이 행하는 것.

 

 

★ 朝令所降 民心弗悅 不可以奉 行者 宜移疾去官.
    (조령소강 민심불열 불가이봉 행자 의이질거관. )
    조정의 명령이 내려온 것을 백성들이 즐거워하지 않아 분부대로 받들어 시행할 수 없으면,    
    실행하는 자는 마땅히 병을 칭탁하여 벼슬을 그만 두고 떠나야 한다. 

 

[강잠(姜潛) 1)이 진류현(陳留縣) 2)을 맡아서 부임한 지 수개월 만에 청묘령(靑苗令) 3)이 내려왔다.

강잠이 그것을 현문(縣門)에 내걸고, 또 각 마을에 붙이게 한 지 삼일이 되어도 찾아오는 사람이 한 사람도 없었다.

그는 드디어 그 방을 떼어 아전에게 주면서 말하기를 『백성이 원하지 않는다』 하고 곧 병을 칭탁하고 떠나버렸다.

이때 산음(山陰)의 현령 진순유(陳舜兪) 4)가 글을 올려 신법(新法) 5)을 극론(極論)하다가 좌천되어

남강군(南康軍)의 염세(鹽稅)와 주세(酒稅)의 감관(監官)이 되었더니, 이에 이르러 다시 글을 올려 말하기를

『청묘법은 아주 편리한 것인데 처음에는 미혹(迷惑)하여 알지 못했다』하니 식자들이 그를 비웃었다.]

 

[각주]
1) 강잠(姜潛) : 중국 송(宋)의 봉부인(奉符人)이며, 자는 지지(至之)이다. 『춘추(春秋)』에 조예가 깊었다.

2) 진류현(陳留縣) : 중국의 현명(縣名)인데 하남성(河南省)에 있었다.

3) 청묘령(靑苗令) : 중국 송(宋)나라 신종(神宗) 때 왕안석(王安石)이 설치한 법이다.

    당대(唐代)에 이미 청묘전(靑苗錢)이라는 이름이 있으며, 송대(宋代)에 있어서도 섬서전운사 이참(李參)이

    왕안석(王安石)에 앞서 청묘전(靑苗錢)의 제도를 그의 관내에 시행하여 좋은 결과를 상주한 일이 있다.

    그러나 왕안석(王安石)의 청묘법(靑苗法)은 다소 그 취지를 달리하여 신종(神宗) 희녕(熙寧) 2년에 제정되었는데

    그 방법은 제로(諸路)의 상평창 및 광혜창(廣惠倉)의 전곡을 인민에게 대부하고 추수 후에 반납시키는 것을

    본칙으로 하였으며 만약 그해에 재해가 들면 그 기간을 연장하고 풍년을 기다려 반납하는 것을 허락하였다.

    그 목적은 창곡(倉穀)을 감소시키지 않고 빈민을 구제하며 부호의 고리대(高利貸) 폐단을 제거하는 데 있었다.

    이 법은 보갑법(保甲法)을 동반하여 만약 한 집이 반납을 게을리할 때에는 다른 아홉 집이 대납하도록 하였으며

    각노(各路)에 착거관(捉擧官)을 두어 집행하였다.

4) 진순유(陳舜兪) : 중국 송(宋)의 조정인(鳥程人)이며, 자는 영거(令擧), 호는 백우거사(白牛居士)이다.

벼슬은 둔전원외랑(屯田員外郎)· 산음지현을 지냈다. 저서는 『여출기(廬出記)』 『도관집(都官集)』이 있다.

5) 신법(新法) : 송(宋)의 신종(神宗) 때 왕안석(王安石)이 시폐(時弊)를 구하기 위하여 정치· 재정· 사회·

    병제(兵制)의 각 방면에 걸쳐 단행한 일대 개혁의 제법(諸法)이다. 즉 균수법(均輸法)· 청묘법(靑苗法)·

    보갑법(保甲法)· 모역신공거법(募役新貢擧法)· 태학생삼사법(太學生三舍法)· 시장법(市場法)· 보마법(保馬法)·

    방전균세법(方田均稅法)·면행법(免行法)·수실법(手實法) 등이라고 한다.

 

 

★ 璽書遠降牧之榮也, 責論時至 牧之懼也.
    (새서원강목지영야, 책론시지 목지구야. )
    새서(璽書) 1)가 많이 내려오는 것은 수령의 영광이요, 
 

    책망하는 유시(諭示) 2)가 가끔 내려오면 이는 수령의 두려워할 바이다.  

 

[조정이 조서(詔書)를 내려 칭찬하는 것은 나를 기리기 위함이 아니요,

조정이 유시(諭示)를 내려 절실하게 책망하는 것은 나를 미워함이 아니라, 모두 백성을 위한 것이다.

무릇 포장(褒奬)을 받든지 책망을 받든지 마땅히 모두 조정이 베푸는 뜻을 널리 알릴 것이요 숨겨서는 안된다.
송나라 태종(太宗)이 각 지방에 계비(戒碑) 歐陽修의 集古錄 2)를 세웠는데

『너의 봉록은 백성의 기름이다. 아래로 백성을 학대하기는 쉬워도 위로 하늘을 속이기는 어렵다』 하였다.]

 

[각주]
1) 새서(璽書) : 임금의 명령을 적은 글. 교서(敎書).
2) 유시(諭示) : 관청(官廳)에서 백성에게 타일러 가르침, 또는 그 문서(文書)

3)『집고록(集古錄)』 : 구양수(歐陽修)의 편저. 역사 금석문(金石文)의 탁본(拓本)을 모아 해설을 붙인 책.  

 

 

제2장 수법(守法)

 

 

★ 法者君命也. 不守法 是不遵君命者也. 爲人臣者 其敢爲是乎 ?
    (법자군명야. 불수법 시불준군명자야. 위인신자 기감위시호 ?
    법(法)이란 것은 임금의 명령이다. 법을 지키지 않음은 곧 임금의 명령을 따르지 않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신하 된 자로서 어찌 감히 그렇게 할 수 있겠는가 ?

 

[책상 위에 『대명률(大明律)』 1부와 『대전통편(大典通編)』 1부를 놓아두고, 항상 펼쳐보아서 그 조문과 사례를

갖추어 알고 있어야 한단. 이로써 법을 지키고 명령을 시행하고 소송을 판결하며 사건을 처리할 수 있을 것이다.

무릇 법의 조항에 금지된 것은 조금이라도 범해서는 아니될 것이니, 비록 전해 내려오는 고을의 관례가

오래 되었다 할지라도 진실로 국법에 현저히 위반되고 벗어난 것이면 범해서는 안될 것이다.
대전(大典)이 원편·속편 및 통편 1)은, 비록 여러 번의 증보(增補)를 거쳤으나 여전히 빠지고 소략한 것이 많으니,

사건을 당하여 상고해보면 빙거(憑據)할 수 없는 점이 많다. 

또 그 분류항목이 너무 간략하고 원래 자세하게 나누어져 있지 않아서 조목을 따라 내용을 찾아보아도 

잘 드러나지 않는다. 또한 혹 마땅히 호전(戶典)에 들어야 할 것이 병전(兵典)에 들어 있기도 하며, 

마땅히 예전(禮典)에 들어 있어야 할 것이 형전(刑典) 2)에 들어 있어서 찾아보는 자가 곤난을 느낀다. 

목민(牧民)에 뜻을 둔 자는 마땅히 위의 법전(法典)들을 취하여 그 요긴한 것을 뽑아 별도로 분류해 놓고, 

또한 『만기요람(萬機要覽)』3)·『비국등록(備局謄錄』4)·『고사신서(攷事新書)』5) 등의 책들을 취하여 

그 요긴한 것을 뽑아 모아서 한 편의 책으로 만들어 두고, 일에 임할 때마다 상고해 봄이 좋을 것이다.]

 

[각주]
1)『경국대전(經國大典)』 『속대여(續大與)』 『대전통편(大典通編)』을 이른다.

2) 위의 법전(法典)들은 모두 이(吏)·호(戶)·예(禮)·병(兵)·형(刑)·공전(工典)의 6전(典)으로 분류편찬하였는데,

    호전(戶典)은 호구(戶口)와 재정(財政), 병전(兵典)은 군사(軍事), 예전(禮典)은 외교(外交)와 문교(文敎),

    형전(刑典)은 형벌(刑罰)과 노비(奴婢) 등에 관한 규정을 실었다.

3)『만기요람(萬機要覽)』 : 조선 후기의 재용· 군정을 설명한 책. 순조 9년(1809) 침상규(沈象奎) 등이 편찬.

    재용편(財用篇)은 전세(田稅)·세법(稅法)·조운(漕運)·무역(貿易)·창고(倉庫)에 관한 사실을,

    군정편(軍政篇)은 오위(五衛)·위병(衛兵)·위법(衛法)·조연(操鍊)·봉수(烽燧)·역체(驛遞)·순라(巡邏) 및

    병조(兵曹)·비변사(備邊司)의 직제(職制)에 관한 사실을 실었다.

4)『비국등록(備局謄錄)』 : 조선시대 비변사(備邊司)에서 논의한 중요 사항을 날마다 기록한 책.

   『비변사등록(備邊司謄錄)』이라고도 하는데, 조선 후기의 군사(軍事)와 재정(財政)에 관한 중요한 자료이다.

5)『고사신서(攷事新書)』 : 영조 때 편찬한 책. 『고사촬요(攷事撮要)』를 개정증보한 것으로 천도(天道)·

    지리(地理) ·기년(紀年)·전장(典章)·의례(儀禮)·행인(行人)·문예(文藝)·무비(武備)·농포(農圃)·일월(日月)·

    의약(醫藥) 등의 부문(部門)으로 되어 있는데, 서명응(徐命膺) 등이 맡아 영조 47년(1771)에 출판하였다.

 

 

★ 確然持守 不撓不奪 便是人慾退聽 天理之流行.
    (확연지수 불요불탈 편시인욕퇴청 천리지류행. )
    법을 확실하게 지켜서 흔들리지 않고 빼앗기지도 아니하면, 
 

    사람의 사사로운 욕심이 물러나고 천리가 유행하게 될 것이다.  

 

[상국(相國) 허조(許稠)1)가 전주판관(全州判官)이 되었을 때에, 맑은 절개를 지켜서 굳세고 밝게 일을 처단하였다.

일찌기 스스로 맹세해 이르기를, 『법 아닌 것으로 일을 처단하면 하늘이 벌을 내린다(非法斷事 皇天降罰)』는

여덟 글자를 작은 현판에 써서 동헌에 걸어놓고 있었다.
고려(高麗)의 금의(琴儀) 2)는 그 모습이 매우 시원스럽고 그릇과 도량이 매우 컸었다. 청도군을 다스릴 때에

정사가 굳세고 바르며 법을 지킴에 굽히지 않으니, 온 도(道)가 그를 불러 <청도철태수(淸道鐵太守)>라 하였다.
판서(判書) 권극지(權克智) 3)가 벼슬살이를 할 때에 모든 일을 법대로만 처리하여 사람들이 감히 

사사로운 요구를 하지 못하였다. 그래서 그를 일컬어 쇠부처[鐵浮屠]라 하였다.]

 

[각주]
1) 허조(許稠) : 공민왕 18∼세종 21(1369∼1439) 자는 중통(仲通), 호는 경암(敬菴).  

    성리학적 의례의 보급에 진력하였고 세종조의 대신으로서 치적이 있었다. 상국(相國)은 정승(政丞)의 뜻.

2) 금의(琴儀) : 의종 7∼고종 17(l153∼1230) 자는 절지(節之). 최씨무인정권 때에 문신으로 등응되어 활약.

3) 권극지(權克智) : 중종 33∼선조 25(1538∼1592) 자는 택중(擇仲).

    예조판서를 지내고 임진왜란 때 비변사유사당상(備邊司有司堂上)으로서 공이 있었다.

 

 

★ 凡國法所禁 刑律所載 宜慄慄危懼 毋敢冒犯.
    (범국법소금 형율소재 의율률위구 무감모범. )  
    무릇 국법(國法)이 금지하는 바와, 형률(刑律)에 실려 있는 바는, 마땅히 소름이 끼칠만큼 두려워하여, 
    감히 함부로 범하는 일이 없어야 할 것이다.

 

[항상 한가지 일을 만날 때마다 반드시 국전(國典)을 상고하되, 만일 법률을 범하고 어기는 것은 결코 시행해서는

안될 것이다. 만약 전임자의 범법한 사실이 전해져 내려와 나에게 뒤집어씌워진 것이 있다면,

마땅히 글을 주고받아 바로잡을 길을 강구하되, 저가 그대로 굳어져 움직이지 않거든 마땅히 감영에 보고할 일이요,

그대로 용서해서는 안될 것이다. 매 한가지 일을 만날 때마다 반드시 마음속에 스스로 생각하기를 감사(監司)가

이것을 들으면 이로써 나를 폄하하지 아니할까, 어사(御史)가 이것을 들으면 이로써 나를 탄핵하지나 않을까 하여,

그러한 근심이 없을 것을 안 연후에야 이에 행하는 것이 좋을 것이다.
한결같이 곧게 법만 지키는 일이 때로는 너무 구애받는 것이 될 수도 있다. 

다소는 넘나듦이 있더라도 백성을 이롭게 할 수 있는 것은 옛사람도 또한 혹 변통하는 수가 있었다. 

요컨대 자기의 마음이 천리(天理)의 공번됨에서 나왔다면 법이라고 해서 반드시 얽매여 지킬 것은 없으며, 

자기의 마음이 인욕(人慾)의 사사로움에서 나왔다면 법이란 것을 조금이라도 범해서는 안될 일이다. 

법을 범하여 죄를 받는 날에, 하늘을 우러러 부끄러움이 없고 땅을 굽어서도 부끄러움이 없다면, 

그 범한 것이 반드시 백성을 이롭고 편하게 한 일이니, 이같은 경우는 다소 넘나듦이 있을 수 있는 것이다. 

마영경(馬永卿)이 입신(立身)하여 벼슬살이하는 도리를 유원성(劉元城)에게 물은즉,

유원성이 말하기를 『한서(漢書)에 이르기를, 관리는 법령으로써 스승을 삼아 틈이 있을 때마다

법조항을 살펴보는 것이 좋다薛宣傳에 나와 있다고 하였으니, 이것은 홀로 사람을 다스리는 데뿐만 아니라

자신을 보호하는 데에도 좋을 것이다』하였다. 유원성은 마영경이 과거를 합격하고 나온 처음 길이므로

그 처신함에 있어서 혹시 법을 범하고 또한 아전들의 속이는 바 될까 보아서 이 말을 한 것이다.]

 

 

★ 不爲利誘 不爲威屈 守之道也. 雖上司督之 有所不受.
    (불위이유 불위위굴 수지도야. 수상사독지 유소불수. )
    이익에 유혹되어서 안되며, 위세에 굴복해서도 안되는 것이 법을 지키는 도리이다. 
    비록 상사(上司)가 독촉하더라도 받아들이지 않는 것이 있어야 할 것이다.

 

[이명준(李命俊)1)이 고산(高山) 2) 찰방(察訪)이 되었을 때의 일이다. 그 역(驛)이 함경도의 요지에 놓여 있어서

역마를 타는 자들이 많이들 법의 한도를 넘어서 지나치게 요구하였으므로 역졸들이 명령을 견디어낼 수가 없었다.

그는 법률대로 집행하여 굴하지 않았다. 비록 감사가 이르러도 반드시 마패(馬牌)대로만 역마를 지급하니,

감사가 노하여 들으려고 하지 않거늘, 그가 다투어서 드디어 조정의 명령을 청하니, 조정에서는 그를 옳다고 하고

감사를 그르다고 하였다. 오래된 폐단은 곧 고쳐졌으나, 그는 마침내 벼슬을 버리고 돌아가버렸다.
송방조(宋邦祖) 3)가 금교(金郊) 4) 찰방으로 있을 때의 일이다. 그는 왕명을 띠고 지나가는 관원들에게도 

법에 따라 역마를 지급하였으며 비록 이름과 지위가 높고 혁혁한 자에게도 조금도 규정을 넘김이 없었다.

금교역은 얼마 지나지 아니하여 쇠잔함이 회복되고 폐단이 시정되어 두드러지게 효과가 있었다.

마침 한 어사가 권세를 믿고 규정을 어기는 일이 있었는데, 그가 장계(狀啓)를 올려 탄핵하니

듣는 이들이 그를 장하다고 하였다.
송이창(宋爾昌) 5)이 연원(連原) 6) 찰방이 되었을 때의 일이다. 앞서 각 도(道)의 진상(進上) 바치는 자들이

그 사사로운 물건을 함께 실어보내고, 역마를 바꿀 때에는 그것을 진상물의 초과분이라고 가탁하여

것이 이미 잘못된 관례로 되어 있었다. 그가 부임하여서는 하나하나 조사해내어서 체부(體府) 7)로 공문을 보내어

처벌하도록 하매, 이로부터 각 도가 그를 몹시 꺼려하에 감히 함부로 하지 못하였다.]

 

[각주]
1) 이명준(李命俊) : 선조 5∼인조 8(1572∼1630) 자는 창기(昌期), 호는 잠와(?窩)·진사재(進思齋).

    대사간(大司諫)·병조참판(兵曹參判)을 지냈는데, 성품이 강직하였다.

2) 고산(高山) : 함경도 안변(安邊) 소재의 역명(驛名).

3) 송방조(宋邦祖) : 미상. 금교저(金郊這) 찰방(察訪)을 지낸 이로 송방조(宋邦祚)(1567∼1618)가 있는데

    그의 자는 영숙(永叔), 호는 습정(習靜)으로서 병조좌랑(兵曹佐郎), 평안도병마평사를 지냈다.

4) 금교(金郊) : 황해도(黃海道) 금천(金川) 소재의 역명(驛名).

5) 송이창(宋爾昌) : 명종 16∼인조 5(1561∼1627) 자는 복여(福汝), 호는 정좌와(靜坐窩).

    송준길(宋浚吉)의 아버지. 감찰(監察)·현감(縣監)을 지냈다.

6) 연원(連原) : 충청도 충주(忠州) 소재의 역명(驛名).

7) 체부(體府) : 체찰부(體察府)의 준말이니, 조선시대 국가에 전란이 일어났을 때에 임금을 대신하여

    어떤 지역의 군무(軍務)를 총찰(總察)하던 관부(官府). 보통 대신(大臣)이 체찰사(體察使)가 된다.

    여기 송이창(宋爾昌)이 연원찰방(連原察訪)이 된 것은 선조 33년(1600)인 정유재란(丁酉再亂)이 일어난 직후요,

    역도(驛道)의 관리는 군정(軍政)에 속하므로 체찰부(體察府)에 보고한 것이다.

 

 

★ 法之無害者 守而無變 例之合理者 遵而勿失.
    (법지무해자 수이무변 례지합리자 준이물실. )
    법으로서 해가 없는 것은 지켜서 변경하지 말고, 
    관례로서 이치에 맞는 것은 준수하여 없어지지 않도록 해야 할 것이다.

 

[정자(程子)는 말하였다. 『지금 시대에 살면서 지금의 법령을 못마땅하게 여긴다면 옳은 일이 아니다.

정사를 논할 경우에, 모름지기 오늘날의 법도 안에서 처리하여 그 합당한 것을 얻도록 해야만 옳은 일이라 

할 것이다. 만약 반드시 고치고 난 후에야 정사를 할 수 있다면 의(義)란 것이 어디 있겠는가.』近思錄에 있다
주자(朱子)는 말하였다. 『정사를 하되 큰 이해관계가 없으면 반드시 뜯어고치기를 의논할 것은 없다. 뜯어고치기를

의논하면, 고치는 일이 아직 이루어지기도 전에 반드시 시끄럽게 소요가 일어나서 끝내 그치지 아니할 것이다. 』
조극선(趙克善)이 지방의 수령으로 나가 있을 때에 반드시 새벽에 일어나 관대(冠帶)를 차리고 정사를 보았는데,

요란스럽게 변경하고 고치는 것을 좋아하지 아니하였다. 그는 말하기를, 『무릇 어떤 일을 할 적에는 반드시 

점차로 해야 되는 것이다. 부임하자 곧 일체의 폐단을 제거해놓고 그 뒤를 잘 이어가지 못한다면,

반드시 시작은 있으되 마무리가 없게 되는 우려가 있게 되는 것이다. 마땅히 먼저 지나치게 심한 것부터 제거하여

점차로 모든 폐단이 다 없어지도록 함이 좋을 것이다』 하였다.
살피건대 옛사람들이 요란스럽게 변경하는 일을 경계한 것은 지킬만한 법이 있었기 때문이다.

오늘날 우리나라의 군현에서 쓰고 있는 것은 도무지 국법이 아니고, 모든 부역(賦役)과 징렴(徵斂)은

다 아전들의 자의(恣意)에서 나온 것이다. 마땅히 급히 개혁할 일이요 그대로 두어서는 안될 것이다.]

 

 

 ★ 邑例者 一邑之法也. 其不中理者 修而守之.
     (읍례자 일읍지법야. 기불중리자 수이수지. ) 
     읍례(邑例)란 것은 한 고을의 법이다. 그중 이치에 맞지 않는 것은 수정하여 지키켜야 할 것이다. 

 

[각 고을 여러 고(庫)에는 모두 예로부터 내려오는 관례가 있으니 이름하여 절목(節目)이라 한다.

그것이 처음 이루어질 때에도 원래 잘되지 못한 점이 많았는데, 뒤에 온 수령들이 마음대로 고쳐 혹은 더하고

혹은 줄이되 모두 사사로운 생각으로 제게만 이롭고 백성들을 착취하게 만들었으니, 

거칠고 잡되고 구차하고 고루하여 그대로 시행할 수가 없는 것이다. 

이를 핑계로 이에 그 절목을 폐지하고 임의로 새로운 영(令)을 시행하니, 

무릇 백성을 착취하는 조목은 해마다 불어나고 달마다 늘어나기 마련이다. 

백성들이 편히 살 수가 없음이 주로  여기에 말미암은 것이다. 

취임한 지 몇달이 지났거든 여러 고(庫)의 절목들을 가지고 조목조목 조사하고 물어서 그 이롭고 해로움을 알아내,

그중에서 사리에 맞는 것은 표시하여 드러내고, 사리에 어긋나는 것은 고쳐버릴 것이다. 

물건의 값이 예전에는 쌌으나 이제 와서 오른 것은 의논하여 값을 올려주고, 

예전에는 비쌌으나 이제 와서 내린 것은 그대로 후하게 해주며, 민호가 예전에는 번성했으나 

이제 와서 쇠잔해진 경우에는 의논하여 그 부담을 덜어주며,

예전에는 적었으나 이제는 많아진 경우에는 옮겨서 고르게 할 것이다.그 賦稅의 부담을 옮겨준다는 뜻이다

사리에 맞지 않으면서 수령만 이롭게 하는 것은 고쳐서 없애도록 할 일이요, 법에 없는데도 여러가지로 

거두어내는 것은 그어서 한도를 정해야 할 일이다. 정밀히 생각하고 살피며 널리 물어서 용단을 내리되,

뒷날의 폐단을 고려해서 막아버리며, 뭇사람의 뜻에 좇아 세우기를 금석지전(金石之典)1)과 같이 하고

지키기를 관화지법(關和之法) 2)과 같이 하면, 명령을 내리고 시행함에 있어서 거의 마음에 부끄러움이 

없을 것이다. 내가 떠나간 후에 뒷사람이 지키고 지키지 않음은 비록 알 수 없으되, 

내가 재임하는 동안에는 살펴서 행하는 것이 또한 옳지 않겠는가. 

 옛 절목(節目)과 옛 식례(式例)이름하여 謄錄이라 한다는 마땅히 낱낱이 거두어다가 불사르고 없애어서 

영구히 그 근본을 끊어버려야 할 것이다. 만일 한 장이라도 남아 있게 되면,

뒤에 오는 자들이 고례(古例)를 빙자하여 폐단이 원래처럼 다시 살아날 것이다.
무릇 일용(日用)의 물건에는 마땅히 식(式)은 있으되 기(記) 3)는 없어야 할 것이다.下記가 없다는 말이다

시험삼아 포진(鋪陳)골자리 등속을 鋪陳이라 한다 한가지로 말해보자. 기록하기를 전(錢) 3전(銭)엽전 30잎이

3銭이다 백석(白席) 4) 1장 값, 1전은 용수초(龍鬚草) 5) 염색 값靑·赤·黃·黑색을 다 물들인다,

1전은 기화(起花) 5色草로 수놓는 것을 起花라 한다 때의 공가(工價), 2전은 겹과 초석(草席) 수석과 초석을 합쳐서

겹자리를 만드는데 이름하여 登每라 한다, 3전은 장식용 명주 석 자 값 수를 놓아 장식하는 자리를 말한다,

2전은 장식용 베 석 자 綿布로 장식하는 草席을 말한다, 1전은 장식용 명주 붉은 물 들이는 이름하여 木紅이라 한다,

1전은 장식용 베 푸른 물 들이는 값, 5푼(分)은 장식 테두리 바느질삯, 5푼은 겹석(?席)을 꿰매는 노끈 값,

2전은 공인(工人) 양식 값, 1전은 기화(起花) 때의 등유(燈油) 값 등 자질구레한 것들을 늘어놓아 12줄이나 되는데,

이것이 겹석(?席)의 하기(下記)이다. 면석(面席)자리 두 개를 서로 이어 붙인 것을 面席이라 한다.

하기는 8·9줄이 될 것이요, 단석(單席)이어 붙이지 않은 것을 單席이라 한다의 하기도 8·9줄이며,

방석(方席)작은 자리로서 네모 반듯한 것을 方席이라 한다의 하기는 12줄이나 될 것이요, 지의(地衣) 6)의

하기는 6·7줄이며, 은낭(隱囊)俗名은 按席이라는 것이다의 하기는 8·9줄이 될 것이다. 포진 1부만 하더라도

그 하기가 5·60줄이나 될 것이다. 물가는 때에 따라 오르고 내리며 물건은 갑자기 많았다 적었다 하니

수령이 이를 어찌 다 살필 수 있으며 백성들이 어떻게 다 알 수 있을 것인가. 이제 마땅히 정밀하게 물어보고

세세히 살펴서 그 식(式)을 정하되 『겹석(?席) 1장은 본전(本錢)이 1냥(兩) 6전이요위에 열기한 것은 1兩 8?이다 7 )

면석(面席) 1장은 본전이 1냥이요, 단석(單席) 1장은 본전이 6전이요, 방석 1장은 본전이 8전이요,

지의(地衣) 4간(間)은 본전이 4냥이요, 은낭 1개는 본전이 1냥이니, 합계하면 포진(?陳) 1부가 전 9냥이다』

라고 기록할 것이다. 이에 절목(節目)에 올리기를, 『전 9냥은 감사(監司)의 봄 순행 때의 포진 1부 값이요,

돈 9냥은 동지사(冬至使) 8) 행차 때의 포진 1부 값』이라고 자질구레한 것들을 조목조목 열기(列記)하는 것을

없애버리면 수령이 이미 살피기 쉽고 아전이 농간할 여지가 없으니, 또한 좋지 아니한가.

응당 모든 물건에 다 이같은 법을 쓰는 것이 좋을 것이다.모두 먼저 式例를 案出하여 그 총수를 기록한다는 뜻이다
모든 고(庫)의 물자를 쓰는 데에는 2가지 명목이 있으니, 첫째는 응하(應下)라는 것이요,

둘째는 별하(別下)라는 것이다. 응하라는 것은 해마다 반드시 써야 되는 것이니, 더할 것도 감할 것도 없어서

항전(恒典)으로 삼을 수 있는 것이요, 별하라는 것은 해마다 같지 아니하여 때로는 있다가 때로는 없으니

항전으로 삼을 수가 없는 것이다. 가령 동지사(冬至使)의 구청(求請)과 동지사에 대한 접대,

정조(正朝) 9)의 진상(進上)과 임금 생신 때의 진상 및 경사(京司)에 대한 연례의 납부,

영문(營門)10)으로부터의 연례의 징수, 수령의 연례의 소용 같은 것은 다 응하의 물자들이다.

별사(別使)賀正使11)가 아니면 모두 別使라고 일컫는다의 구청과 별사에 대한 접대, 진하(陳賀)12) 때의 진상,

경례(慶禮) 때의 진상 및 경사로부터의 별도의 구청, 영문에서의 별도의 복정(卜定) 분징(分徵)하는 것을 이름하여

卜定이라 한다, 수령이 교체될 때의 소용 같은 것은 모두가 별하의 물자들이다. 응하의 물자들은 그 식례(式例)를

명백히 하여 절목에 올리고 그 끄트머리에 쓰기를 『이상 1년 응하의 도합이 2,345냥 6전 7푼예를 들면 그렇다는

말이다. 절목에 따라 차하(上下)13) 내어준다는 말과 같다하되 하기(下記)도 없고 회계도 없이 할 것이다.

해마다 서로 같기 때문이다 별하의 물자는 그 식례(式例)에 따라 절목에 올리고應下라는 것과 마찬가지다

쓰임을 따라 기록하되下記가 있어야 된다 그 총수를 기록하여가령 ?陳 1部를 別使 行次시에 進排하는 경우와 같다

연말에 가서 회계하면 그 실수(實數)를 알 수 있을 것이다.
전날 내가 곡산부(谷山府)에 있을 때에 민고(民庫)의 절목을 이와같이 만들었더니, 아전과 백성이 다 기뻐하기에,

이 법례를 전국에 통용시키고자 하였다. 뒤미처 병조(兵曹)의 일군색(一軍色)14)· 이군색(二軍色)15)의 절목을

상고해보니, 영성군(靈城君) 박문수(朴文秀)16)가 만들어 정한 것도 이와 같았다. 이 법이 크고 작은 일에 통용될

수 있을 것임을 더욱 믿게 되었다. 하기(下記)를 조목조목 늘어놓는다는 것은 여러가지 간계가 일어날 수 있는

구멍이며 온갖 농간질이 모여들 수 있는 소굴인 것이다. 반드시 고칠 일이요, 그대로 따라서는 안될 것이다.
모든 고(庫)에는 반드시 감(監)이 있고 서(胥)가 있으니곧 이른바 監色17)이다. 그 월료(月料)로 줄 돈이

곧 응하(應下)인데, 만약 윤달을 만나면 이는 별하(別下)가 된다. 고(庫)에 들어오는 것이 일정하여

전혀 나머지가 없으니, 윤달 있는 해에는 12절후[立春·驚蟄 등]로 나누어 그 월료를 내어주면 무방할 것이다.
무릇 절목을 만들 때에는 마땅히 튼튼하고 두터운 백추지(白硾紙)18)를 쓰고 검은 실로 꿰매며 해자(楷字)로

또박또박 써서 엄정하고 정숙하게 만들 일이요, 모든 고의 절목을 합쳐서 한 책을 만들고 가지런히 재단하여

책상 위에 두고 지키기를 국전(國典)과 같이 할 것이다. 또한 부본(副本)을 만들어 각 방(坊)에 나누어 주어

우리말에는 面이라 한다 각기 엄히 지키도록 할 것이다. 이와 같이 백성들에게 이로운 것은 뒷사람이

비록 고치고자 할지라도 백성들이 반드시 다투어서 쉽게 허물어지지 않을 것이다.]

 

[각주]
1) 금석지전(金石之典) : 금석(金石)처럼 변하지 아니하는 확고한 법전(法典).

2) 관화지법(關和之法) : 관(關)은 통동(通同)시킨다는 뜻이요, 화(和)는 화평(和平)시킨다는 뜻이니,

   『서경(書經)』 오자지가(五子之歌)에 관석화균(關石和鈞)이라 하여, 무게의 표준인 석(石)(120斤)과

    균(鈞)(30斤)을 통동(通同)·화평(和平)케 함으로써 천하(天下)의 경중(輕重)을 한결같이 하고  

    백성들에게 신의(信義)를 세울 수 있는 법도(法度)라는 말이다.

3) 기(記) : 금전 지출에 있어서의 요목을 적은 것이 식(式)이요, 그 세목을 일일이 적은 것을 하기(下記)라 한다.

4) 백석(白席) : 꾸미지 않은 자리.

5) 용수초(龍鬚草) : 골풀이라는 식물이니, 골자리 만드는 데 쓰인다. 석용추(石龍芻).

6) 지의(地衣) : 가장자리를 헝겊으로 꾸미고 폭(幅)을 이어서 바닥에 까는 돗자리 .

7) 위에 늘어놓은 것들을 합치면 1냥(兩) 8전(錢)이 된다. 원문 1냥(兩) 6전(?)이라 한 것은 오기(誤記)인 듯하다.

8) 동지사(冬至使) : 조선시대에 동지(冬至)를 전후하여 중국에 보내던 정기(定期) 사신(使臣).

    1894년의 갑오경장(甲午更張) 때까지 행하였다.

9) 정조(正朝) : 음력 정월 초하루 각읍(各邑)의 향리(鄕吏) 등이 상경하여 임금 앞에서 조하(朝賀)하는 일.

10) 영문(營門) : 감사(監司)의 감영(監營), 병사(兵使)의 병영(兵營), 수사(水使)의 수영(水營).

11) 하정사(賀正使) : 신년을 축하하기 위해 중국에 보내던 사신.

12) 진하(陳賀) : 왕실에 경사가 있을 때에 각 읍(邑)에서 사람을 보내어 축하드리는 일.

13) 차하(上下) : 「차하」라고 읽으니, 곧 내어준다는 뜻이다.

14) 일군색(一軍色) : 병조(兵曹) 속무(屬務)로서, 금군보(禁軍保)·호련대보(扈輦隊保)·내취보(內吹保) 등으로부터

      군포(軍布)를 거두어 장교(將校)·군병(軍兵)·원역(員役)의 삭료(朔料)를 지급하는 일을 맡았다.

15) 이군색(二軍色) : 병조(兵曹) 속무(屬務)로서, 기병(騎兵)과 보병(保兵)의 비번상자(非番上者)들로부터

      군포(軍布)를 거두어 각사원역(各司員役)의 삭포(朔布)를 지급하는 일을 맡았다.

      무릇 각사(各司)의 원역(員役)은 삭료(朔料)는 호조(戶曹)로부터, 삭포(朔布)는 병조(兵曹)로부터 받았으니,

      이를 호료병포(戶料兵布)라 하였다.

16) 박문수(朴文秀) : 숙종 17∼영조 32(1691∼1756) 자는 성보(成甫), 호는 기은(耆隱).

      이인좌난(李隣佐亂)을 평정하는 데 공을 세워 영성군(靈城君)에 봉해지고, 암행어사로 나가 많이 활약하였다.

17) 감색(監色) : 제고(諸庫)의 관리인. 감(監)은 향청의 임원이 맡고 색(色)은 이서(吏胥) 곧 아전(衙前)이 맡았다.

18) 백추지(白硾紙) : 회고 두꺼운 한지(韓紙)의 일종.

 

 

제 3 장  예제(禮際)   

           (예의 있게 상대하는 것을 말하는데 여기서는 수령이 상관, 동료 및 전후임자, 

           관속(官屬)들과 예의 있는 관계를 갖는 것을 다루고 있다.)

 

 

★ 禮際者 君子之所愼也. 恭近於禮 遠恥辱也.
    (예제자 군자지소신야. 공근어례 원치욕야. )
    예로 사귀는 것은 군자가 신중히 여기는 바이다. 공손함이 예의에 가까우면 치욕을 멀리할 수 있을 것이다.

 

[존비(尊卑)의 등급이 있고 상하(上下)의 표식이 있는 것이 옛날의 원칙이다. 수레와 복장이 서로 다르고

깃발의 장식에 채색을 다르게 하는 것은 그 분수를 나타내는 것이다. 하관(下官)에 있는 사람은 마땅히 본분을

삼가 지켜서 상관(上官)을 섬겨야 할 것이다. 나는 문관(文官)이고 상대가 무관(武官)이라 하여 그를 비교하여

괄시해서는 안되며, 내가 세력이 크고 상대가 세력이 약하다 하여 교만하게 대해서는 안되며,

내가 잘났고 그는 어리석다 하여 그를 우둔하다고 말해서는 안되며, 나는 나이가 많고 그는 젊다 하여

그를 딱한 듯이 대해서는 안된다. 엄숙하고 공손하고 겸손하고 온순하여 감히 예(禮)를 잃지 않게 하며,

화평하고 통달하여 서로 끼이고 막힘이 없게 하면, 거의 정과 뜻이 서로 공감하게 될 것이다. 오직 백성을 위한 일은

상대가 만약 자애롭지 않으면 그 사람의 뜻에 굽혀 쫓아서 아래 백성에게 해독을 끼치게 해서는 안된다.
황직경(黃直卿)1)이 말하기를, 『요자회(廖子晦)』2)가 수령이 되어 정참(庭參) 3)을 하지 않으니

당시의 상관(上官)의 비위를 거슬렸으나, 이 행동은 가장 잘한 것입니다』고 하니, 선생은 말하기를,

『정참(庭參)은 본래 옳지 않으나 상관을 대우하는 데 끝까지 다투는 것은 옳지 못하다』 하였다.朱子語類 4)
학봉(鶴峰) 김성일(金誠一) 5)은 본래 굳세고 바르다는 평이 나 있었지만, 수령이 되어서는 항상 상관이 경내에 

이르렀다고 들으면 반드시 관대를 착용하고 공문(公門)에서 기다렸다고 한다.]

 

[각주]
1) 황직경(黃直卿) : 중국 송(宋)나라 민현 사람인 황간인데 직경(直卿)은 그의 자이며 시호는 문숙(文肅)이다.

2) 요자회(廖子晦) : 중국 송(宋)나라 순창(順昌) 사람인 요덕명(廖德明)이며, 자회(子晦)는 그의 자이다.

    주희(朱熹)의 제자로서, 벼슬은 이부좌선노관(吏部左選努官),

    저서로는 『문공어록(文公語錄)』 『춘추회요(春秋會要)』『차계집(?溪集)』이 있다.
3) 정참(庭參) : 정전참알(庭前參謁)의 준말로서, 신임 관리가 상관의 뜰에 나아가 상관에게 배알하는 것을 말한다.

4)『주자어류(朱子語類)』 : 중국 송(宋)나라 함순(咸淳) 6년 도강(道江)의 여정덕(黎靖德)이 편찬한 책이다.

    주자문인(朱子門人)들이 주자(朱子)와의 문답한 기록들을 모아 여러 본(本)으로 간행된 것을 모두 합쳐

    35문목(門目)으로 나누어 140권으로 출간된 것이다.

5) 김성일(金誠一) : 중종 33∼선조 26(1538∼1593) 자는 사순(士純), 학봉(鶴峰)은 그의 호이며,

    본관은 의성(義城)이다. 선조 24년(1591)에 통신부사(通信副使)가 되어 일본에 다녀왔다.

    경상도 우병사로 부임 도중 임진왜란이 일어나서 초유사(招諭使)로 종군하여 서부경남 일대에서

    의병(義兵)을 일으켰으며 진주(晋州)에서 순직하였다. 저서로 『학봉집(鶴峰集)』이 있다.

 

 

★ 外官之與使臣相見 具有禮儀 見於邦典.
    (외관지여사신상견 구유예의 견어방전. )
    외관(外官 : 수령)이 왕명을 받고 온 사신과 서로 만날 때에는 예의를 갖추어야 하는데, 
 

    그 격식은 나라 법전에 나와 있다.  

 

[『경국대전(經國大典)』에 다음과 같이 규정하였다. 『외관 당상관(外官堂上官)은 당상관 사신(堂上官使臣)1)

監司· 兵使 ·水使 ·冬至使 등에 대해서는 서쪽 지게문으로 들어와서 앞에 나아가 재배(再拜)하면 사신이 답배하며,

당하관 사신(堂下官使臣) 2) 御史· 京試官· 書狀官에 대해서는 손은 동쪽에서 주인은 서쪽에서 서로 마주 재배한다.
당하관은 당상관 사신에 대해서는 현신(現身) 3)하여 뵙기를 청하고섬돌 위로 나아가 알현을 청한다,

당하관 사신에 대해서는 은신(隱身)하여 뵙기를 청하되, 이 두 경우 모두 서쪽 지게문으로 들어와서 앞에 나아가

재배하면 사신이 수령보다 차등(差等)이면 답배하고嘉善과 通政이 差等이고 通政과 通訓도 차등이다, 4)

격등(隔等)이면 답배하지 않는다. 二品과 四品이 隔等이고 三品과 五品이 격등이다
참하관(參下官) 5) (七品 이하를 말한다)은 참상관 사신(參上官使臣)에 대해서는 현신하여 뵙기를 청하고,

참하관 사신(參下官使臣)에 대해서는 은신하여 뵙기를 청하되, 두 경우 모두 앞으로 나아가 재배한다. 』
살피건대 『속대전(續大典)』과 『대전통편(大典通編)』에 이 조문은 일찌기 개정된 바 없다.

그런데도 지금의 감사(監司)는 목사수령(牧使守令)에 대하여 동등(同等)·차등(差等)을 막론하고 앉아서

읍(揖)으로 답하고, 오직 통정계(通政階)의 감사(監司)만이 가선계(嘉善階)의 수령에게 일어나서 답배(答拜)하면서

격등(隔等)이기 때문에 답배한다고 잘못 말한다. 이것은 무엇이 격등(隔等)인지 알지 못하고,

차등(差等)을 격등(隔等)으로 잘못 여기고 답배(答拜)를 부답(不答)과 혼동한 것이다. 이 법이 번져서

병마사(兵馬使)·수군사(水軍使)도 역시 모방하고, 당하관 사신인 어사(御史)·서장칸(書狀官)도 당상관 수령에게

역시 앉아서 읍을 한다. 나라에 예법의 문란함이 이보다 심한 일이 없다. 듣건대, 영종(英宗) 6) 초년에 거만하고

자존심이 강한 어떤 사람이 감사가 되어 비로소 차등(差等)과 동등(同等)의 수령에게 모두 앉아서 읍을 하는 

관례를 만들었는데, 하관이 된 자들이 그 관직을 잃을까 두려워서 고개를 숙여 이를 달게 받아들였다고 한다.

이런 풍조가 서로 전해지고 번져서 이 지경에 이르렀다. 이 관례가 행해진 지 근 백 년이 되어 마침내 하나의

움직일 수 없는 법으로 되었다. 대신이 건의하고 조정의 영(令)으로 엄하게 신칙하는 것이 없더라도 아래 있는

사람으로서 응당 마지못해 속례(俗例)에 따를 뿐이다. 잘못이 웃사람에게 있으니 내가 어찌 관여하겠는가.
고례(古禮)에 서북쪽을 높게 여기고 동남쪽을 낮게 여긴다. 손님은 서북쪽에 앉히고 주인은 동남쪽에 앉는다.

그러므로 『역례(易例)』7)에 『건(乾)은 손님이 되고 손(巽) 8)은 주인이 된다』고 하였으니,

이것은 손님을 존대하고 자기를 낮추는 것이다. 손님이 동쪽이고 주인이 서쪽인 것은 옛 뜻에 어긋나는 것이니,

당시에 예법을 제정하던 신하들이 깊이 상고하지 못한 때문이다. 

옛날 두 번 절하는 것이 오늘날 한 번 절하는 것이 되고 옛날 현신하던 것이 오늘날에는 은신이 되었으니, 

이는 옛날에 공손히 하던 것이 지금 거만하게 된 셈이다.

『경국대전(經國大典)』에 다음과 같이 규정되어 있다. 『우후(虞侯) 9)가 여러 읍을 순행할 때에

우후는 동쪽에 앉고 당상관 수령(堂上官守令)은 서쪽에 앉고모두 의자에 앉는다, 당하관 수령은 남쪽에 앉는다.
당상관 수령이 없으면, 우후가 북쪽에 앉고 당하관 수령은 서쪽에 앉는다. 도사와 평사도 마찬가지다. 』10)
살피건대, 요즘 풍속에 우후에 대해서는 평등과 같이 대하고 도사와 평사에 대해서는 사신(使臣)처럼 대하니

도사·평사는 감사를 보좌하는 관직이므로 奉命使臣은 아니다, 

우후는 무인인 까닭에 이를 대우함이 원래 규정에 미치지 못하고, 도사·평사는 문신인 까닭에 

이들에게 대한 대우는 원래 규정보다도 지나치니, 모두 잘못된 습속이다.]

 

[각주]
1) 당상관 사신(堂上官使臣) : 감사는 관찰사(觀察使)인데 문관직으로서 종2품, 병사(兵使)는 병마절도사인데

    무관직으로서 종2품, 수사(水使)는 수군절도사인데 무관직으로서 정(正)3품(品) 당상관(堂上官)이다.

    동지사(冬至使)는 명(明)나라, 후에 청(淸)나라에 동지(冬至)를 전후해서 보내던 사신인데,

    정사(正使)(3公 또는 6曹의 判書가 담당하므로 正2品 이상이다)에 부사(副使)·서장관(書狀官)이 수행하였다.

    여기서 말하는 외관(外官)은 ① 목사(牧使)와 대도호부사(大都護府使)는 정3품으로 당상관과 당하관이 있으며,

    ② 종(從)3품(品)은 당하관(堂下官)인데 도호부사(都護府使)는 종(從)3품(品), ③ 군수(郡守)는 종(從)4품(品),

    ④ 현령(縣令)은 종(從)5품(品), 현감(縣監)은 종(從)6품(品)이다.

2) 당하관 사신(堂下官使臣) : 당하관으로 어사의 자격이 집의(執義)일 경우는 종3품, 장령(掌令)일 경우는 정4품,

    지평(持平)일 경우는 정5품, 감찰(監察)일 경우는 정6품이다. 경시관(京試官)은 대과(大科)·소과(小科)의

    초시(初試)인 향시(鄕試)는 모두 각 도(道)의 도사(都事)가 주관하지만 충청좌도· 전라좌도· 경상좌도·

    평안남도에서는 서울에서 보내는 시험관인 경시관이 주재한다. 도사가 종5품이므로 경시관(京試官)도 종5품

    문관중에서 일시적으로 임명한 듯하다. 서장관(書狀官)은 중국에 보내던 연행사(燕行使) 사신 중의 기록관이다.

    일본에 보내는 통신사에도 있었다. 보통 4∼6품(品)에서 임명되고 한 품 위로 차함(借銜)되었는데,

    사행(使行) 중 매일의 기록을 맡고 귀환한 뒤에 국왕(國王)에게 개견(開見)을 보고할 의무를 진다.

3) 현신(現身) : 현신(現身)은 몸소 나아가 뵙는 것. 다음의 은신(隱身)은 다른 사람을 시켜 뵙는 것.

4) 조선시대 관계(官階)에 있어서, 가선대부(嘉善大夫)는 문· 무반(武班)의 종2품(후에 宗親과 儀賓에게도 적용함),

    통정대부(通政大夫)는 문관·종친·의빈(儀賓)의 정3품 당상관,

    통훈대부(通訓大夫)는 문관(文官)(고종 때 宗親·儀賓에게도 적용)의 정3품 당하관을 말한다.

5) 참하관(參下官) : 조선의 관품(官品)에 있어서 6품(品)∼정(正)3품(品) 당하관(堂下官)까지를 참상관(參上官),

    7품(品) 및 그 이하를 참하관(參下官)이라고 통칭하였다.

6) 영종(英宗) : 조선왕조 21대 왕인 영조(英祖).

7)『역례(易例)』 : 청대(淸代)의 혜동(惠棟)이 찬한 『주역(周易)』의 연구서. 2권(卷).

    한대(漢代) 학자들의 역전(易傳)을 연구하여 역(易)의 본례(本例)를 밝힌 바 미완(未完)의 책이다.

8) 건(乾)·손(巽) : 덕(德)과 손(巽)은 괘(卦) 이름인데 건(乾)은 서북쪽이며 손(巽)은 동남쪽.

9) 우후(虞侯) : 조선시대 각 도(道)에 배치된 병마절도사 및 수군절도사의 다음가는 무관직(武官職)이다.

    병마우후(兵馬虞侯)는 종3품, 수군우사(水軍虞俟)는 정4품이다.

10)『경국대전(經國大典)』 : 예전(禮典) 경외관회좌조(京外官會坐條).



 ★ 延命之赴營行禮 非古也.
     (연명지부영행예 비고야. )
     연명(延命)1)의 예를 감영(監營)에 나아가서 행하는 것은 예전부터 해오던 예(禮)가 아니다.

 

[연명이란 지방을 맡은 신하가 자기의 임지에 있을 때 선화(宣化)하는 신하 2)가 순행하여 자기 고을에 도착하면

패전(牌殿)의 뜰에서 교서(敎書)를 공손히 받들고 첨하(瞻賀)의 예를 행하는 것이다.

대개 조정의 조유(詔諭)는 수령이 공손히 받들어야 한다. 그러므로 감사가 순행하여 본읍에 도착하지 않으면

수령이 끝내 연명하지 않는 것이 옛날의 도리였다. 영종(英宗) 초년에도 아직 옛 법이 통용되었는데

세상 물정이 점점 속되어지고 사대부의 기풍과 절개도 점차 쇠퇴해져서, 상관을 아첨으로 섬기어 오직 미움이나

사지 않을까 걱정하여, 감사가 도임하면 열흘이 못되어 수령들이 급히 감영(監營)으로 달려가서 연명의 

예를 행하니, 이것은 연명이 아니라 곧 참알(參謁)이며, 조정을 존중하는 것이 아니라 상관에게 아첨하는 것이니,

모두 속된 폐단이다. 감사로서 예법을 모르는 자는 수령이 즉시 연명하지 않으면 그 허물을 독책하려 하니,

이것 역시 잘못이 아닌가. 오늘날 연명은 이미 습속이 되었기 때문에 옛것에 얽매일 수 없다.

그러나 분주히 감명으로 달려가서 식자(識者)의 웃음거리를 살 것까지는 없고,

이삼십 일을 기다렸다가 마지못해 가서 연명하는 것이 무방할 것이다.
또한 대체로 연명의 예는 감사가 마땅히 직접 조유(詔諭)를 펴야 할것이니, 이것은 수령을 존경하는 것이 아니고 

군명(君命)을 존경하는 뜻이다. 오늘날 감사들은 망령되이 스스로 존대해져서 반드시 비장(裨將)을 시켜 

대신 펴게 하고, 이에 대신 펴게 하는 것을 이름하여 대수(代受)라 하니 예(禮)가 아니다. 

무릇 감사가 임금의 명령을 펴는 까닭에 수령은 연명을 한다. 

본래 뜻이 이와 같은 데도 오늘날 연명(延命)을 참알로 인정하고 있기 때문에 이름하여 대수(代受)라고 하니, 

곧 받는다는 수(受) 한 글자가 본래의 뜻과는 틀린 것을 알 수 있다.

심지어 병마사(兵馬使)·수군사(水軍使)는 감사와 같은 사신(使臣)인데도, 역시 비장(裨將)을 시켜 대수(代受)케 하니

이것은 크게 예법이 아니다. 옛날 당(唐)나라 이소(李愬) 3)가 회서(淮西) 4) 지방에 출정했는데

상신 배도(裵度)가 가서 선무하게 되었다. 이때 이소가 무장으로 정장을 갖추어 길 왼편에서 배도를 영접함으로써

채(蔡) 5)땅 사람들로 하여금 조정의 존엄함을 알게 하였다. 이것은 장수 된 신하가 연명을 행한 옛이야기인 것이다.

오늘날 절도사(節度使)는 옛날의 이소이며, 오늘날 순찰사(巡察使)는 곧 옛날의 배도인데, 

만약 배도가 비장을 시켜 대수(代受)케 하였더라면 이소가 무장으로 정장하여 연명하려고 했겠는가? 

전에 내가 곡산부사(谷山府使)로 있을 때, 순찰사와 병마사가 연명 문제로 다툰 일이 있었다. 

내가 배도와 이소의 옛일로 비유하여 깨우쳐 주었더니, 이에 친히 연명의 예를 행하게 되었다. 

오늘날 대수가 이미 습속이 되었으니 수령은 또한 응당 이 습속을 따라야 할 뿐이다. 

못이 웃사람에게 있으니 내가 어떻게 관여하겠는가.

그러나 병마사·수군사와 같은 수신(帥臣)에게는 비록 파출을 당하는 한이 있더라도 굴종해서는 안될 것이다.]

 

[각주]
1) 연명(廷命) : 새로 부임한 감사를 맞아 왕명을 받드는 인사의 예(禮)이다.

    여기서는 수령이 새로 부임한 감사를 감사의 본영(本營)에 나아가 인사의 예를 드리는 것이 잘못이라는 것이다.

2) 선화(宣化)하는 신하 : 곧 감사를 말한다.

3) 이소(李愬) : 중국 당(唐)나라 사람. 자는 원직(元直), 시호는 무(武)이다. 오원제(吳元濟)를 토벌하여

    회서(淮西)를 평정하였다. 산남동도절도사(山南東道節度使)를 지내고 양국공(凉國公)에 봉해졌다.

4) 회서(淮西) 중국 회수(淮水)의 서쪽 지역인데, 안휘성(安徽省) 여봉(廬鳳) 일대 지역.

5) 채(蔡) : 회서(淮西) 지방을 말함.

 

 

★ 監司者 執法之官 雖有舊好 不可恃也.
    (감사자 집법지관 수유구호 불가시야. )
    감사는 법을 집행하는 관원이니, 수령이 비록 감사와 오랜 정분이 있다 하더라도 그것을 믿어서는 안 된다. 

 

[내가 실제로 죄를 범했으면 그가 의(義)로써 처단하더라도 본래 원한이 없는 것이다.

요즘 감사 중에는 혹 친한 수령에게 유별나게 사단을 찾아내어 자기가 공정하다는 명성을 낚으려는 사람도 있으니,

이러한 기미는 잘 살피지 않으면 안된다.
소장(蘇章)1)이 기주자사(冀州刺史)가 되었을 때 그의 친구 중에 청하 태수(淸河太守)가 된 사람이 있었다.

소장이 관할 지역을 순행하게 되어 그 친구의 부정을 다루게 되었다. 이에 먼저 주연을 베풀어 태수를 

극히 환대하니 태수가 기뻐서, 『남들은 모두 한 하늘만 이고 있는데 나는 홀로 두 하늘을 이고 있다』고 하였다.

소장은 『오늘 저녁에 소유문(蘇孺文)이 옛친구와 함께 술을 마시는 것은 사사로운 정이요, 내일 기주자사로서

일을 처리하는 것은 공법(公法)이다』라고 말하고 드디어 그의 죄를 들어 바르게 처리하니 고을 경내가 숙연하였다.
만사(晩沙) 심지원(沈之源) 2)이 홍주목사(洪州牧使)가 되었을 때 판서 임담(林墰) 3)이 충청감사가 되어 순행하여

홍주에 왔다. 그는 평소의 친구라 하여 접대를 자못 간소하게 하였더니, 임감사가 홍주 아전에게 매질을 하면서

말하기를, 『너의 수령이 나와 교분이 비록 가까우나 상관과 하관 사이의 체모는 엄하지 않아서는 안되는 것이다.

너의 수령이 실수를 하였으니 네가 대신 매를 맞아라』하였다. 심지원은 매양 자제들에게 말하기를,

『내가 먼저 체모를 잃고 아전에게 매질한 것을 다시 노여워했다면 법을 멸시한 것에 가까운 것이므로

끝내 개의치 않았다. 임판서가 나에게 옥성(玉成) 4)하게 한 점이 실로 많다』고 하였다.]

 

[각주]
1) 소장(蘇章) : 중국 후한(後漢) 때 관인(官人). 자는 유문(孺文)이며, 어릴 때부터 박학하고 능문(能文)하였다.

2) 심지원(沈之源) : 선조 26∼현종 3(1593∼1662) 자는 원지(源之), 호는 만사(晩沙), 본관은 청송(靑松)이다.

    효종(孝宗) 때 영의정이 되었다. 저서로 『만사집(晩沙集)』이 있다.

3) 임담(林墰) : 선조 29∼효종 3(1596∼1652) 자는 재숙(載叔), 호는 청구(淸?), 시호는 충익(忠翼),

    본관은 나주이다. 병자호란 후에 호남지방의 민란을 평정한 공으로 가의대부가 되고, 평안감사·예조판서 역임.

4) 옥성(玉成) : 다른 사람을 깨우치게 한다 또는 완전한 인물로 완성한다는 뜻이다.

 

 

 ★ 營下判官 於上營宜恪恭盡禮 不可忽也.
     (영하판관 어상영의각공진예 불가홀야. )
     영하판관은 상영(上營)1)에 대하여 각별히 공경하며 예를 극진하게 할 것이며 소홀함이 있어서는 안 된다.

 

[정백자(程伯子)가 진령 판관(鎭寧 2)判官)이 되었는데, 그 때에 태수가 엄하고 각박하고 시기가 많아서

통판(通判) 3) 이하는 감히 태수와 더불어 일을 논란할 수 없었다. 처음에 태수가 생각하기를 정선생은

대헌(臺憲) 4)을 지냈으니 반드시 직무에 진력하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하고 또한 자기를 업신여길 것이라고

염려하였다. 그런데 지내 보니 정선생이 그를 섬기기를 대단히 공손히 하며, 비록 여러 고(庫)를 관리하는

잔일이라도 마음 다하지 않는 것이 없고, 일이 조관이라도 타당하지 않으면 반드시 함께 변론하여

드디어 태수가 따르지 않는 것이 없었다. 드디어 두 사람 사이가 매우 좋아졌다.

여러 차례 중대한 옥사(獄事)를 바르게 심사하여 죽지 않게 된 자가 전후해서 거의 십수 명이 되었다.
진경부수(眞定府 5)帥) 왕사종(王嗣宗) 6)이 기승을 부며 부하들을 함부로 다루면서 불법을 자행한 지

오래 되어 아무도 감히 통관(通判)이 되려고 하지 않았다. 왕모(王某) 이름은 알 수 없음가 통판이 되었는데,

왕사종은 점차 그를 기세로 누르려고 하였으나 그는 담담하게 겨루지 않고 예(禮)로써 대하니

왕사종이 마침내 굴복하여 무릇 옥사를 처리하고 일을 결정하는 데 일일이 그의 말을 들었다.

그가 비록 가부(可否)를 분별하지만 모든 정사가 모두 왕사종에 의해서 나오는 것으로 하니

비록 부중(府中)의 사람이라도 그의 도움인줄을 몰랐다. 그리하여 그 고을이 잘 다스려지니,

선비들은 이로써 왕모를 훌륭한 사람이라고 칭하였다. 〈王荊公集 7)〉

왕질(王質) 8)이 소주의 통판이 되었을 때 자사 황종단(黃宗旦) 9)과 항상 일을 다투니 황종단이 좋아하지 않았다.

왕질이 말하기를, 『제가 명을 받들어 자사의 일을 돕고 있사오니 마땅히 다툼이 제 직책입니다』 하였다.
상국(相國) 오윤겸(吳允謙)10)이 옥당(玉堂)에서 전출하여 경성(鏡城)11)의 판관이 되었는데,

그 때 계림군(雞林君) 이수일(李守一)12)이 병사(兵使)로 있었다. 전임 판관이 문사(文士)라 하여 교만하고

귀한 체하고 절도사를 얕잡아보니 이병사가 매우 불쾌히 여겼다. 오윤겸이 부임하자,

몸을 굽혀 병사를 섬기기를 공손히 하니 이병사는 크게 탄복하여 진심으로 대하였으며 휘하의 막료들을 단속하여

막료들도 감히 본부(本府)에 폐를 끼치지 못하였다. 온 경내가 화평하게 다스려졌다.
조석윤(趙錫胤)13)이 진주목사(晋州牧使)가 되었을 때, 매일 새벽에 병마사에게 문안을 드리면서 말하기를

『제가 이렇게 하는 것은 군명(君命)을 공경하는 까닭입니다』 하고 끝내 그만두지 않았다.

민유중 14)이 경성판관이 되었을 때 병마사에게 문안드리기를 한결같이 조석윤이 하듯 하였다. 〈東平聞見錄 15〉
요즈음 사람들은 망령되이 스스로 교만하여 몸을 굽혀 웃사람을 섬기기를 달갑게 여기지 않아서 상영(上營)과

사단을 일으켜 이기기를 다투니 이치에 순응하는 바가 아니다. 혹시 이치에 맞지 않는 것은 다투어도 좋다.
판서 권대재(權大載)16)는 몸가짐이 검소하고 벼슬살이에 청렴하고 간소하게 하였다.  

일찌기 공주(公州)의 판관이 되었을 때, 감사(監司)가 쓰는 물품도 역시 모두 절약하여 남용하지 않게 하였다.

감영(監營)에 속한 무리들이 사단을 일으키고자 모의하여 배당해준 땔감을 빼어돌려서 감사의 방구들이 항상

냉랭하였다. 감사가 그것을 물으니, 그 무리들이 『땔감이 원래 적습니다』고 아뢰었다. 감사가 판관을 꾸짖으니,

권판관이 『감히 감독하지 않을 수 있겠읍니까?』대답하고, 그날 몸소 군불넣기를 감독하여 정해진 분량의 땔감을

모두 때니 방이 화로같이 뜨거웠다. 감사가 견디지 못하고, 급히 사람을 보내어 사과해서 말하기를,

『내 잘못이요, 내 잘못이요』 하므로 그제야 물러나왔다.]

 

[각주]
1) 상영(上營) : 감사(監司)·병사(兵使) 등이 감영(監營)·병영(兵營) 소재지 고을의 수령을 예겸(例兼)하는 경우

그 고을의 행정관으로 각관(刻官)(종5품)이 파견되어 있는데, 이가 영하각관이요, 감사·병사 등이 상영이다.

2) 진령(鎭寧) : 중국의 주명(州名)으로 광서성(廣西省) 사은현(思恩縣)의 서쪽이다.

3) 통판(通判) : 중국 송(宋)나라 때의 관명(官名)으로, 주부(州府)의 부장관(副將官).

4) 대헌(臺憲) : 어사대(御史臺)의 관직(官職). 정명도(程明道)는 감찰어사(監察御史)를 지낸 적이 있다.

5) 진정부(眞定府) : 중국의 부명(府名). 하북성(河北省) 정정현(正定縣).

6) 왕사종(王嗣宗) : 중국 송(宋)나라 분주(汾州) 사랗. 자는 희원(希阮), 호는 중릉자(中陵子), 시호는 경장(景莊),

    개보(開寶)의 진사제일(進士第一), 벼슬은 어사중승에 이르고, 저서로는 『중릉자(中陵子)』 30권이 있다.

7)『왕형공집(王荊公集)』 : 중국 송(宋)나라 왕안석(王安石)의 문집이다.

    그가 형국공(荊國公)으로 봉해졌기 때문에 왕형공(王荊公)이라 부르기도 한다.

8) 왕질(王質) : 중국 송(宋)나라 흥국(興國) 사람. 자는 경문(景文). 박학(博學)하고 시문(詩文)에 뛰어났다.

    태학정(太學正)을 지내고 저서로는 『시총문(詩總聞)』 『설산집(雪山集)』이 있다.

9) 황종단(黃宗旦) : 중국 송나라 진강(晋江) 사람. 자는 숙재(叔才). 소주를 다스렸고, 만년에 사관에 나아갔다.

10) 오윤겸(吳允謙) : 명종 14∼인조 14(1559∼1636) 자는 여익(汝益), 호는 추탄(楸灘), 본관은 해주(海州).

      평강현감(平康縣監), 경성판관 등을 거쳐 광해군 9년에 일본에 사신으로 다녀왔다. 영의정에 이르렀다.

11) 경성(鏡城) : 함경북도 경성군인데, 조선시대에 이곳에 도호부(都護府)를 설치하여

      북병사(北兵使)가 부사(府使)를 겸하게 하였다. 따라서 그곳에 판관(判官)이 있었다.

12) 이수일(李守一) : 명종 9∼인조 17(1554∼1632) 자는 계순(季純), 호는 은암(隱庵), 시호는 충무(忠武),

      본관은 경주(慶州). 임진왜란 때 경상우병사(慶尙右兵使)로 선무공신(宣武功臣)의 호가 내렸다.

      광해군 때 3번 북병사(北兵使)가 되었으며, 이괄(李适)의 난 때 공을 세워 선무(宣武)·진무(振武)의 두 공신의

      호가 내려지고 계림군(鷄林君)에 피봉되고 부원군으로 가봉(加封)되었다. 형조판서에 이르렀다.

13) 조석윤(趙錫胤) : 선조 38∼효종 5(1605∼1654) 자는 윤지(胤之), 호는 낙정(樂靜),시호는 문효(文孝),

      본관은 백천(白川). 수찬(修撰)·전랑(詮郎)·진주목사· 대사간(大司諫)· 대사헌(大司憲)·대제학을 지냈다.

14) 민유중(閔維重) 인조 8∼숙종 13(1630∼1687) 숙종의 장인(인현왕후의 아버지)으로 자는 지숙(持叔),

      호는 둔촌(屯村), 시호는 문정(文貞), 본관은 여흥(驪興). 벼슬은 영돈령부사에 이르고,

      여양부원군에 책봉되었다. 노론(老論)의 중진으로 활동하였다.

15)『동평문견록(東平聞見錄)』: 정재륜(鄭載崙)의 『공사견문록(公私見聞錄)』이다.

16) 권대재(權大載) : 광해군 12∼숙종 15(1620∼1689) 자는 중차(仲車),

      호는 소천(蘇川)·돈간재(敦艮齋)·용문(龍門), 본관은 안동(安東), 벼슬은 호조판서를 지냈다. 

       그림을 잘 그렸다.

 

 

★ 上司推治吏校 雖事係非理 有順無違焉可也.
    (상사추치리교 수사계비리 유순무위언가야. )
    상사가 아전이나 군교를 잡아다 추문(推問)하며 다스릴 때에는 
 

    비록 그 일이 사리(事理)에 어긋나더라도 수령은 순종하고 어기지 않는 것이 좋을 것이다.  

 

[잘못이 본읍(本邑)에 있어서 상사가 추문 처벌하려는 것은 본래 논할 것도 없다. 그러나 혹시 상사가 까닭없이

사단을 일으켜서 함부로 이치에 맞지 않는 것을 덮어씌우는 경우라도 내가 이미 아래 지위에 있으니

역시 순종할 뿐이다. 만약 상사의 뜻이 과오에서 나왔고 악의가 아닌 경우는 내가 기송장(起送狀)1)에다가

그 사정을 진술하여 곡진히 해명하여 관대한 용서를 빌어서 나의 아전과 군교가 억울한 형을 받지 않도록 하는 것이

충후(忠厚)하고 겸손한 도리이다. 그런데 감사의 본뜻이 서로 해치고자 하는 데 있어서 구설(口舌)로서 

다툴 수 없는 경우는 공형(公兄)의 문서로서 죄수를 기송(起送)하고 동시에 사직서를 써서 같이 제출케 할 것이다.

사직서에는 『저의 신병이 갑자기 중하여 직무를 살필 수 없읍니다』라고 쓴다. 감사가 굽혀서 사과하면

달갑지 않지만 정사를 볼 것이나 만약 계속 무례하면 사직서를 세 번 제출하여 거취를 결정할 것이다.
감사가 만일 겉으로는 용서하는 체하고 속으로는 오히려 노여움을 품고 있다가 고과(考課)의 때를 기다려서

장차 가장 낮은 평점을 주려고 하는 경우에는 즉시 인부(印符)를 끌러서 예향(禮鄕) 2)·예리(禮吏)를 시켜 감영으로

가서 바치도록 하고 관직을 버리고 집으로 돌아가야 하며, 구차스럽게 쭈그리고 앉아서 욕됨을 스스로 취해서는

안될 것이다. 병마사(兵馬使)·수군사(水軍使)· 토포사(討捕使) 3)는 명예와 지위가 감사보다는 다소 가벼우나

령인 내가 섬기는 것은 마땅히 더욱 성심으로 공경하고 예를 다하여 감사와 더불어 차별있게 해서는 안된다.

만일 내가 은대(銀臺)·옥당(玉堂)의 출신이요 혹은 내가 본래 명문세족(名門勢族)이면 성심으로 공경함을 마땅히

곱절을 더해야 할 것이며, 귀세(貴勢)를 끼고 상관에게 거만해서는 안될 것이다. 만약 쇠잔한 무관이나

미미한 음관(蔭官) 출신으로 스스로 보기도 외롭고 약한 처지인데, 상관이 나를 능멸하고 함부로 

비례(非禮)한 짓을 해온다면 마땅히 큰 용기를 분발하여 벼슬자리를 헌신짝 벗어던지듯 하여야 할 것이며,

저 귀세(貴勢)한 자와는 자기의 처신이 같지 않아야 할 것이니, 이것이 모두 치욕을 멀리하는 길인 것이다.]

 

[각주]
1) 기송장(起送狀) : 명령을 받들어 사람을 호송하는 문서. 여기서는 죄인(罪人)을 호송(護送)하는 문서(文書).

2) 예향(禮鄕) : 향임(鄕任) 중에서 예(禮)를 담당한 자(者)이니, 좌별감(左別監)이 이를 맡았다.

3) 토포사(討捕使) : 조선 후기에 각 도(道)의 요지에 신설했으며 각 진영장(鎭營將)이 겸직한 관직인데,

    도적(盜賊)의 추포(追捕)를 관장하였다. 정3품.

 

 

★ 所失在牧 而上司令牧 自治其吏校者 宜請移囚.
    (소실재목 이상사령목 자치기리교자 의청이수. )
    과실은 수령에게 있는데 상사(上司)가 그 수령에게 아전이나 군교들을 치죄하라고 하는 경우에는
    마땅히 그 죄수들을 다른 고을의 감옥으로 옮겨 다스리기를 청해야 한다.

 

[무릇 관하 아전들이 죄를 짓는 것은 수령에게 살피지 못한 잘못이 있고 단속하지 못한 잘못이 있다.

상사가 그것을 추문하여 치죄하려 할 경우 혹 이웃 고을에 죄수를 이관하여 거기서 처벌토록 하되,

그 사건을 따져보아 실수에서 나온 것이라면 수령끼리 서로 조심하기로 하고 깊이 죄목에 끌어넣을 필요는 없다.

러나 상사가 나로 하여금 직접 치죄하라고 하면 동헌(東軒)에 나아가 곤장을 치게 되니 면목이 서지 않는다.

사건이 작은 것일지라도 마땅히 이웃 고을로 이관해 줄것을 상신해야 할 것이다.
상신하는 서식은 다음과 같이 작성한다. 『본 현(縣)의 아전 이(李)아무개가 보첩(報牒)을 지체한 죄가 있어서

사건에 따라 말을 만든다 관문(關文)의 내용에 따라 형을 행함이 마땅하나 사건이 발각되던 날에 현감이 먼저

징계하여 다스렸으며, 본 사건의 원인을 따진다면 그 단속치 못한 잘못이 이 현감에게 있읍니다.

지금 만약 관문 내용에 따라 형을 행한다면, 이것은 내 대신 받는 벌을 내가 스스로 집행함이니, 자신이 보기에

무안해서 거행할 수 없읍니다. 이웃 고을로 죄수를 이관하여 거기서 다스리는 것이 사리에 합당할까합니다.』]

 

 

 ★ 唯上司所令 違於公法 害於民生 當毅然不屈 確然自守.
     (유상사소령 위어공법 해어민생 당의연불굴 확연자수. ) 
     상사가 명령하는 것이 공법(公法)에 어긋나고 민생(民生)에 해를 끼치는 것이라면 
     당연히 꿋꿋하게 굴하지 말아야 하며 확실하게 자신을 지켜야 할 것이다.

 

[오불 1)이 그 자제들을 가르치면서 말하기를, 『너희들이 벼슬살이하게 되거든 관물을 마땅히 자기 물건처럼

아껴야 할 것이며 공사(公事)도 마땅히 나의 일처럼 보아야 한다. 부득이한 경우에라도 백성에게 죄를 얻기보다는

차라리 상관에게 죄를 얻는 편이 낫다』고 하였다. 紫霞山人 2)이 말하기를 백성에게 죄를 짓는 것은

곧 하늘에 죄를 짓는 것이니 감히 그렇게 할 수 없다 하였다
한(漢)나라 임연(任延) 3)이 무위태수(武威 4)太守)가 되자 광무제(光武帝) 5)가 친히 보고 경계하기를,

상관을 잘 섬기어 명예를 잃지 않도록 하라』하니, 임연이 대답하기를, 『신이 듣자옵건대 충신은 사정에 메이지

아니하고 사정에 매이는 신하는 불충(不忠)하다 합니다. 바른 것을 이행하고 공을 받드는 것이 신하의 도리요,

상하(上下)가 뇌동(雷同)하는 것은 폐하의 복(福)이 아니오니, 상관을 잘 섬기라고 하신 말씀을 신은 감히 말씀대로

받들 수 없읍니다』고 하였다. 광무제는 탄식하며 『경의 말이 옳다』고 하였다.
장종련(張宗璉)이 좌천되어 상주(常州) 6)를 맡았을 때의 일이다. 

어사 이입(李立) 7)이 강남의 군적을 정리하고 있었는데, 장종련에게 통첩을 보내어 자기를 수행하도록 하였다. 

이입이 점군(點軍)의 문서를 받고 평민을 많이 잡아다가 군대 대오를 채우니 장종련이 이것을 여러 번 다투었다. 

이입이 노하거늘 장종련은 문득 땅 위에 누워 곤장받기를 청하면서『청컨대 백성을 대신하여 죽고자 합니다』하니

이 때문에 부당한 징발에서 면제된 사람이 대단히 많았다.

조예(趙豫) 8)가 송강부(松江府) 9)를 맡았을 때 청군어사(淸軍御史) 이입(李立)이 와서 군대의 수를 늘리는 데만

오로지 힘써서 인척과 동성(同姓)에까지 관련지어 마구 동원하였다. 이에 조금이라도 항변하면 독하게 곤장을 치니,

인심이 크게 소란해지고 억울함을 호소하는 사람이 천여 명이나 되었다. 염사(鹽司) 10)가 소금 굽는 인부도

긁어 모아 역시 그 연루된 것이 다른 민호(民戶)에까지 미치어 크게 백성들에게 해(害)가 되었다.

조예는 모두 글을 올려 극론하여, 모든 사람이 살아날 수 있게 되었다.
살피건대, 어사가 하는 일이나 상사가 하는 일의 나쁜 정사를 수령이 능히 상부에 보고하여 극론할 수 있었다.

명(明)나라의 이 법은 매우 좋은 것이다. 우리나라에서는 오로지 체통(體統)을 보아서 상사의 하는 일은

비록 함부로 불법을 저질러도 수령이 감히 한마디도 말하지 못하여 민생의 초췌함이 날로 더해가고 있다.
고려 때 정운경(鄭云敬)11)이 밀양군을 맡았었다. 충혜왕 때에 어느 밀양 사람이 재상 조영휘(趙永暉)로부터

베[布]를 빌려온 일이 있었는데 조영휘가 어향사(御香使)12) 안우(安祐)13)에게 부탁하여 통첩을 보내

그것을 징수하려 하였다. 정운경은 말하기를 『밀양 사람이 베를 빌린 것은 조영휘 자신이 받아들일 일이며

공이 관여할 일이 아니다』고 하였더니 안우가 노하여 좌우에 명령하여 정운경을 욕보이려 하였다.

정운경이 정색해서 말하기를 『이제 내가 천자의 명을 교외에 나아가 받들었으니 장차 어떻게 나를 죄줄 수 

있겠는가? 공은 임금의 덕을 펴서 멀리 있는 백성에게 혜택을 주지는 않고 감히 이럴 수가 있는가』하니,

안우가 굴복하여 그 일을 그만두었다.
박환(朴煥)14)이 금구 현령(金溝15)縣令)이 되었을 때의 일이다. 청나라에서 우리나라에 있는 중국 사람을 찾아

보내도록 요구하였는데, 조정에서 감히 거절하지 못하고 각 군읍에 지령을 내렸다. 군읍에서는 모두 떨고 놀래어

중국 사람을 샅샅이 찾아내지 못함으로써 중한 견책을 받을까 두려워 수색하느라고 어수선하였다.

그는 탄식하면서 『나는 허리에 찬 관인(官印)의 끈은 풀 수 있으나 이것만은 할수 없다』고 말하고,

드디어 우리 고을에는 찾아낼 중국 사람이 없다고 보고하였다. 이로 말미암아 그 고을에 사는 중국 사람들은

유독 무사히 지낼 수 있었다. 이 일을 보고 들은 사람들은 그 의리에 탄복하지 않는 이가 없었다.
이영휘(李永輝)16)가 안협현감(安峽縣監)이 되었을 때, 그 당시 감사(監司)가 관내에 자기의 부인을 장사지내는데,

장사에 쓰이는 물품들을 각 군읍에 요구하는 것이 많았다. 각 고을이 남에 뒤질세라 시킨 대로 따랐으나

그는 『상관으로서 하관(下官)에게 사사로이 토색하는 것은 그쪽이 이미 옳지 않은 것이요, 하관으로서 상관에게

비위를 맞추어 섬기는 것은 내가 곧 아첨함이 되는 것이다.

그러나 저쪽에서 상례를 핑계로 요구하니 거절할 수 없다』고 말하고, 물품을 간략하게 하여 보냈다.

감사는 노하여 짐짓 행전도사17)의 손을 빌려 그를 법으로 얽었다.]

 

[각주]
1) 오불 : 중국 송(宋)나라 선거(仙居) 사람. 자는 명가(明可), 호는 호산거사(湖山居士)(吳出居士),

    시호는 강숙(康肅). 벼슬은 감찰어사(監察御史)에 이르렀고 저서로는 『호출집(湖出集)』이 있다.

2) 자하산인(紫霞山人) : 중국 송(宋)나라 선춘(宣春) 사람인 하영통(何令通)인 듯하다. 자하(紫霞)는 그의 호,

    남당(南唐) 때 국사(國師)였다.

3) 임연(任廷) : 중국 후한(後漢) 때 완(宛) 사람. 자는 장손(長孫). 어릴 때 임성동(任聖童)이라 칭했다.

    벼슬은 무위(武威) 및 영천(潁川)의 태수(太守).

4) 무위(武威) : 중국 한(漢)나라가 설치한 군명(郡名). 흉노(匈奴)의 땅으로 현재 무위현(武威縣).

5) 광무제(光武帝) : 중국 후한(後漢)에 1대포인 유수(劉秀). 자는 문숙(文叔).

6) 상주(常州) : 중국 명(明)나라가 설치한 부명(府名). 지금의 강소성(江蘇省) 무진현(武進縣).

7) 이입(李立) : 중국 명(明)나라 남풍(南豊) 사람. 벼슬은 안찰사부사(按察司副使)로 치사(致仕)하였다.

    염중강정(廉重剛正)하고 이난모(李難毛)라는 별명이 있다.

8) 조예(超豫) : 중국 명(明)나라 안숙(安肅) 사람. 자는 정소(定素). 벼슬은 선종(宣宗) 때 송강지부(松江知府).

9) 송강부(松江府) : 중국의 부명(府名)으로 강소성(江蘇省) 송강부(松江府)이다.

10) 염사(鹽司) : 염정(鹽政)을 맡은 관직(官職).

11) 정운경(鄭云敬) : ?∼공민왕 15(1366) 본관은 봉화(奉化). 도전(道傳)의 아버지로 충숙황 때 문과에 급제하여

      복주판관(福州判官)·전주목사(全州牧使)·형부상서(刑部尙書)·검교밀직제학(檢校密直提學)을 지냈다.

12) 어향사(御香使) : 고려 후기에 원(元)나라에서 고려(高麗)의 명승대찰에 사신(使臣)을 보내어 축원케 하였는데,

      어향사는 그 사신을 말한다. 어향사는 원(元)나라 사람이나 고려사람이 되기도 하였다.

13) 안우(安祐) : ?∼공민왕 11(1362) 고려 공민왕 때의 장군.  

      1359년 홍두적이 침입하였을 때 이방실· 김득배와 함께 격파하고 중서참지정사가 되었다.  

      1360년의 홍두적 침입 때에도 여러 장군과 격파하였는데, 재상 김용(金鏞)의 계략에 빠져 죽었다.

14) 박환(朴煥) : 선조 17∼현종 12(1584∼1671) 자는 여술(汝述), 호는 수우(守愚), 본관은 반남(潘南)이다.

      1623년 인조반정(仁祖反正)에 참여하였고 벼슬은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에 이르렀다.

15) 금구(金溝) : 지금 전라도 김제군 금구면.

16) 이영휘(李永輝) : 안협현감(安峽縣監)을 지낸 사람인데 더 자세치 않다.

17) 행전도사(行田都事) : 조선(朝鮮) 후기 각 군현(郡縣)의 토지(土地)를 종합 점검하는 것을 행전도회(行田都會)

      혹은 검전도회(檢田都會)라 하는데, 이 경우 감사(監司)를 대리하여 입회하는 도사(都事)를 말한다.

 

 

★ 禮不可不恭 義不可不潔 禮義兩全 雍容中道 斯之謂君子也.
    (예불가불공 의불가불결 예의양전 옹용중도 사지위군자야. )
    예(禮)는 공손하지 않으면 안되고, 의(義)는 결백하지 않으면 안되니, 
    예와 의가 아울러 온전하고 온화한 태도로 도(道)에 맞는다면 이를 일러 군자(君子)라 한다.

 

[사대부의 벼슬살이하는 법은 마땅히 언제라도 벼슬을 버린다는 의미로 버릴기(棄) 한 자를 벽에 써붙이고

아침 저녁으로 눈여겨보아야 한다. 행동에 장애가 있으면 벼슬을 버리며, 마음에 거슬리는 일이 있으면

벼슬을 버리며, 상사가 무례하면 버리며, 내 뜻이 행해지지 않으면 버릴 것이다.

감사가 나를 언제든지 벼슬을 가벼이 버릴 수 있는 사람이며 항상 쉽게 건드릴 수 없는 사람인 것을 알고 난 

후에라야 비로소 수령 노릇을 할 수 있다. 그렇지 않고 부들부들 떨면서 오히려 자리를 잃을까 저어하여 황송하고

두려워하는 말씨와 표정이 얼굴에 나타나 있으면 상관이 나를 업신여겨 계속 독촉만 하게 될 것이니 

참으로 그 자리에 오래 있을 수 없는 것이다. 이것이 필연의 이치이다. 

그러나 상관과 하관의 서열이 본래 엄한 것이니, 비록 사의(辭意)를 표명하여 필경 관인을 던지고 결연히 

돌아가는 지경에 이르더라도 말씨와 태도는 마땅히 온순하고 겸손하여 털끝만큼이라도 

울분의 기색을 터뜨림이 없는 뒤에라야 바야흐로 예(禮)에 맞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변연지(卞延之)가 상우령(上虞令)이 되었을 때의 일이다. 회계태수(會稽太守) 맹기가 상관으로서 그를 제재하여

오래도록 능히 용납되지 않으므로 감투를 벗어 땅에 던지고, 『내가 당신에게 굽히는 것은 다만 이 감투 때문이다.

당신은 대대로 내려오는 공신 집안이라고 하여 이 천하의 국사(國士)에게 오만하게 구는가』하고,

옷깃을 떨치고 떠나버렸다. 유벽(柳璧)이 계관판관(桂管判官)이 되었을 때 군정이 제대로 되지 않고 있으므로

시정토록 극진히 말을 했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으므로 옷깃을 떨치고 떠나버렸다.

과연 얼마 후에 계부(桂府)에 변란이 있었다.
장구성(張九成)이 진동군(鎭東軍)의 첨판(僉判)으로 있을 때, 군민(軍民)들이 소금의 금령(禁令)을 위반하여 사건이

이웃 고을에까지 번지게 되었다. 그가 말하기를, 『당연히 처리될 사람은 몇 사람뿐이며, 나머지 사람들은 모두

양민(良民)입니다』고 하였더니 감사(監司)가 노기를 띠고 그에게 질책을 하므로,

그는 『일을 뜻대로 실행할 수 없으니 어찌 구차하게 따르리요』하고는 사령장을 던지고 돌아갔다.
장구성(張九成)이 무주의 통판(通判)으로 있을 때 절동제형(浙東提刑)인 장종신(張宗臣)1176)이

무주의 평민 수십 명을 체포하고 말하기를 『이 일은 좌상(左相)이 일부러 사람을 보내어 잡아올리라고 하였으니

그대는 아는가?』하니, 장구성이 대답하기를 『단지 황제의 명령을 받들 뿐이요 재상이 있는 줄은 모르노라』하고,

사령장을 던지고 떠나갔다. 서구사(徐九思)가 구용현(句容縣)을 맡아 다스릴 때,

당시 공부상서(工部尙書) 조문화(趙文華)가 동남도(東南道) 하상(河上)에서 군대를 사열하였다.

서구사는 직접 나가서 영접하지 않고 한 관리를 보내어 통첩을 받들고 가서 알현하게 하였더니

조문화가 오만하게 꾸짖고 가버렸다. 조문화가 서울로 돌아가서 이부상서(吏部尙書) 오붕(吳鵬)과 모의하여

그를 죄에 얽어매니 그는 드디어 죄를 입어 파직되었다. 살퍼컨대, 외관(外官)으로서 왕명을 받든 중앙의 관인이

경내에 이르면 마땅히 성심으로 공경하여 마중나가야 하는 것이니 서구사의 일은 옳지 못한 점이 있다.]

 

 

★ 隣邑上睦 接之以禮 則寡悔矣 隣官有兄弟之誼 彼雖有失 無相猶矣. 
    (인읍상목 접지이례 즉과회의 인관유형제지의 피수유실 무상유의. )
    이웃 고을과는 서로 화목하고 예(禮)로써 대하면 후회가 적을 것이다. 
    이웃 고을 수령과는 서로 형제의 우의가 있으니, 저쪽에서 비록 잘못이 있더라도 그와 같아서는 안 될 것이다.

 

[이웃 수령과 불목하게 되는 것은, 예컨대 송사에 관계된 백성을 찾아 잡으려는데 이쪽에서 그 사람을 비호하여 

보내주지 않으면 불목하게 되며, 차역(差役)1)으로 마땅히 가야 할 경우에 회피하기 위하여 서로 미루게 되면

화목을 잃게 된다. 객기(客氣)를 서로 부려 지기를 싫어하고 이기기를 좋아하여 이 지경에 이르는 것이다.

만일 저쪽에서 이치에 맞지 않게 사정(私情)까지 끼어 내 백성을 침범하면 나도 또한 수령으로서 직책상 당연히

비호해야 한다. 그러나 만일 저쪽에서 고집하는 것이 원래 공정한 데서 나오고 내 백성이 완악하고 교사스러워 

나를 의지하여 숨는 소굴로 삼을 경우에는 내가 당연히 저쪽과 더불어 같이 분개하여 추문하여 치죄케 하도록

할 것이다. 도리어 사사로움을 품어서 간악한 것을 숨겨서야 되겠는가.
또한 저쪽에서 핑계를 대어 차역(差役)을 회피하는 것이 교만한데서 나와 나로 하여금 대신하게 하는 것은 참으로

역시 밉살스러운 것이다. 그러나 그의 부모가 편찮다든지 자기 몸이 아픈 것이 본래 사실에 속하는 것이라면

내가 기꺼이 대신 가는 것이 마땅하다. 어찌 이것 때문에 화목을 잃을 수 있겠는가.
양(梁)나라 대부(大夫) 송취(宋就) 2)가 현령으로 있을 때의 일이다. 그곳은 초(楚)나라와 경계가 되어 있었다.

양쪽에서 모두 오이를 심었는데 양(梁)나라 사람은 힘써 자주 물을 주곤 하여 오이가 잘 되었는데,

초(楚)나라 사람은 게을러서 물을 자주 주지 못하여 그 오이가 잘 되지 못하였다. 그래서 초(楚)나라 수령이

양(梁)나라의 오이가 잘된 것이 싫어서 밤중에 몰래 긁어버려 양나라 오이 중에 말라버릴 것이 생겼다.

양나라 정장이 보복으로 초나라 오이를 긁어버리라고 하는데, 송취는 『이것은 재앙을 같이하는 것이라』고 하고

사람을 시켜 초나라 오이밭을 위해 몰래 밤중에 물을 주라고 하였다. 초나라 정장이 매일 아침에 밭에 나가 보면 

이에 이미 물이 주어져 있고 또한 오이가 날로 좋아지고 있었다. 살펴보니 양나라 정장이 그렇게 한 것이었다.

초나라 수령이 대단히 기뻐하여 이 일을 초나라 왕에게 보고하였더니 초나라 왕도 양나라 사람의 남모르게 

행한 일을 기뻐하여 무거운 폐백으로 사례하고 양나라 왕과 우호를 맺었다.
하우(夏禹) 3)는 바다를 물빠지는 구렁으로 삼았고 백규(白圭) 4)는 이웃 나라를 물빠지는 구렁으로 삼았는데,

도랑을 쳐 물을 빼는 데는 마땅히 물길을 좇아야 하는 것이다. 종리(鍾離)는 초나라의 변읍(邊邑)이고

비량(卑梁)은 오(吳)나라의 변읍이었는데, 뽕나무 때문에 다투어 드디어 병화(兵禍)를 일으키게 되었다. 5)

그러므로 군자는 이웃과 좋게 사귀는 것을 힘썼다. 우리 고을 백성도 사람이며 이웃 고을 백성도 사람이니 

마음으로 참되게 백성을 사랑한다면 어찌 백성의 일 때문에 이웃 고을과 싸움을 할 것인가.
진식(陳寔) 6)이 대구장(大丘 7)長)이 되어 덕을 닦고 청정(淸淨)하여 백성이 안정되었다.

이웃 고을 사람들이 그에게 와서 의탁하려 하였는데 진식은 문득 본고장으로 돌려보냈다.
당(唐)나라의 설대정(薛大鼎) 8)· 정덕본(鄭德本) 9)· 가돈이(賈敦?)10)가 모두 하북군(河北郡)을 맡아 다스렸는데, 

잘 다스린 소문이 나서 그들을 당각자사(党脚刺史)11)라 일컬었다.]

 

[각주]
1) 차역(差役) : 출장 가서 일을 보는 것.

2) 송취(宋就) : 중국 전국시대의 양(梁)나라 대부(大夫). 여기 나오는 양(梁)과 초(楚)도 전국시대의 나라들이다.

3) 하우(夏禹) : 중국 고대 하(夏)나라 개국의 임금. 사씨(?氏), 호는 우(禹), 순(舜)의 선(禪)을 받아 임금이 되었다.

4) 백규(白圭) : 중국 전국시대의 사람. 이름은 단(丹)이며 규(圭)는 그의 자. 맹자와 세법 및 치수에 관한 논의.

5) 중국 전국시대각각 초(楚)와 오(吳)의 변읍(邊邑)이다. 종리(鍾離)는 안휘성(安徽省) 봉양현(鳳陽縣)의 동쪽이다.

    이 뽕나무 싸움을 비량지흔(卑梁之釁)이라 한다.

6) 진식(陳寔) : 중국 후한의 허(許)사람. 연실(練實)이라고 되어 있다. 자는 중궁(仲弓), 시호는 문범선생(文範先生).

    태구장(太丘長)을 지냄. 자기(子紀)(字는 元方)와 심(諶)(字는 季方)과 더불어 세상에서 삼군(三君)이라 하였다.

7) 대구(大丘) : 태구(太丘)이다. 태구는 중국의 현명(縣名)으로 후한이 설치. 하남성 영부현(永府縣)의 서쪽에 있다.

8) 설대정(薛大鼎) : 중국 당(唐)나라 분음(汾陰) 사람. 자는 중신(重臣), 시호는 공(恭).

       창주자사(滄州刺史)와 행형주대독장사(行荊州大督長史)를 지냈다.

9) 정덕본(鄭德本) : 중국 당(唐)나라 사람. 벼슬은 영주자사(瀛州刺史)를 지냈다.

10) 가돈이(賈敦?) : 중국 당(唐)나라 원구(寃句) 사람. 벼슬은 영(瀛)·낙(洛) 이주자사(二州刺史)를 지냈다.

11) 당각자사(党脚刺史) : 위의 당(唐)나라 세 양리(良吏)를 말하는데, 당(党)은 삼족(三足)의 형상을 나타낸다.

      (唐書薛大鼎傳, 高祖時 薛大鼎遷湖州剌史 時鄭德本在瀛州賈敦?在冀州, 皆有治名 河北稱?脚刺史)

 

 

 ★ 交承有僚友之誼 所惡於後 無以從前 斯寡怒矣.
    (교승유요우지의 소오어후 무이종전 사과노의. ) 
    교승(交承)1)은 동료의 우의가 있으니, 후임자에게 미움받을 일은 전임자에게 하지 않아야 원망이 적을 것이다.

 

 

[여씨(呂氏) 『동몽훈(童蒙訓)』에 말하기를, 『동료간의 우의와 교승의 정분에는 형제의 의리가 있으니  

그 자손에 이르기까지 역시 대대로 일러주라.  

옛사람들은 오로지 이것을 힘썼는데 오늘날 사람들은 이것을 아는 자가 극히 적다』하였다.小學 2)에 있다
전임자와는 동료의 우의가 있기 때문에 교대할 즈음에 옛사람들은 후(厚)한 것을 좇아서, 전임자가 비록 탐람하고

불법하여 그 여독이 가시지 않았다 하더라도, 그것을 변혁하여 처리하는 데는 옹용(雍容)하고 간절하게 하여

그 형적이 폭로되지 않게 하는 데 힘썼다. 만일 급박하고 호쾌하게 하여 일일이 지난 정사를 뒤집어서 

큰 추위 뒤에 따뜻한 봄이 온 것처럼 자처하여 혁혁한 명예를 얻으려고 한다면, 

이것은 그 덕이 경박할 뿐만 아니라 그 뒤처리를 잘하는 것이 아니다. 

전임자의 가족이 아직 떠나지 못하여 읍내에 남아 있으면 떠날 채비의 여러 일을 마음을 다해 보살펴서 

마치 자기 일처럼 해야 한다. 혹시 경박한 아전들이 전임관을 배반하여 가증스런 태도를 보이면 

신신당부하여 그러지 말도록 깨우쳐주고 그래도 너무 심하게 구는 자가 있으면 엄하게 그 죄를 다스려야 한다.

만일 전임자가 이곳에서 상사(喪事)를 당하여 아직 발인하지 못하고 있으면 그 갑자기 당한 일을 돕고

그 어려움을 구해주기를 마치 친척 일처럼 보살펴주어, 조금이라도 방심하지 말고 십분 진력해야 할 것이다.]

 

[각주]
1) 교승(交承) : 서로 바꾸어 한다라는 뜻인데, 즉 전임자와 후임자가 교대하는 것을 말한다.
2)『소학(小學)』 : 중국 송(宋)나라 주희(朱熹)가 편찬한 책(6권)으로,

    아이들이 수행(修行)할 쇄소(灑掃)·응대(應對)·진퇴(進退) 등을 기록하였다.

 


★ 前官有疵 掩之勿彰 前官有罪 補之勿成.
    (전관유자 엄지물창 전관유죄 보지물성. )
    전임자에게 허물이 있으면 이를 덮어주어 나타나지 않도록 하고, 
 

    전임자에게 죄가 있다면 도와 주어 죄가 되지 않도록 해야 할 것이다. 

 

[만일 전임자가 공금을 손대고 창곡(倉穀)을 축내었거나 혹 허류(虛留)·번질(反作)한 것은 그것을 들추어내지 말고

일정한 기간을 정하여 배상하여 채워넣도록 하고, 기간을 지내도 보상하지 않으면 이에 상사와 의논하도록 한다.

혹 전임자가 본래 세력 있는 집안이나 호족(豪族)에 속해 있어서, 강한 것을 믿고 약한 자를 능멸하여 일처리가

이치에 어긋나고 뒷일을 생각하지 않는 자에게는, 내가 그것을 대응하는 데 반드시 강경하고 엄하게 하여

조금이라도 굽혀서는 안된다. 비록 이 때문에 죄를 얻어 평생토록 불우하게 지내더라도 머뭇거릴 것 없다.
기공 왕증(沂公王曾)1)이 진요자(陳堯咨) 2)와 교대하여 대명부(大名府)를 다스렸다. 

그는 집무하는 데 있어서 전임자의 것을 별로 고치지 않고 정사에 불편한 점이 있으면 자세하게 

그때그때 대처하고 진요자의 잘못을 모두 덮어주었다. 왕증이 전근을 가게 되어 다시 진요자가 후임으로 왔다. 

진요자는 『왕공은 참으로 재상이 될 만하구나. 내 국량은 도저히 미치지 못하도다』 하고 탄식하였다. 

대개 진요자는 옛날의 혐의로 인하여 왕증이 반드시 자기 잘못을 들추어낼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부요유(傅堯兪) )가 3서주(徐州)를 맡아 다스리게 되었다. 전임자가 군량미를 축을 낸 것이 있어서 

부요유가 대신 보상을 하던 중 채 끝내기 전에 파직되었다. 그런데도 부요유는 끝내 변명하지 않았다.

소강절(邵康節) 4)이 그를 두고 칭찬하였다. 『흠지(欽之) 5)여! 맑으면서도 빛나지 않고,

곧으면서도 격(激)하지 않으며, 용감하면서 능히 온공(溫恭)하구나, 이야말로 어려운 것이로구나!』
육방 6)이 악주(岳州)를 맡아 다스릴 때였다. 전날에 큰 나무가 강물에 흘러 그 고을 경내로 들어왔는데,

전임자가 황실(皇室)에 쓰일 목재인 줄을 모르고 기방(起坊) 7)으로 보낸 일이 있었다. 독목사자(督木使者)가

잘못 육방에게 논죄하였으나 육방이 변명하지 않았다. 어떤 사람이 그에게 변명하라고 종용하였더니,

육방이 말하기를 『내가 위에 알리면 전임자가 죄를 받을 것이니 내가 대신 죄를 지고 돌아가면 그만이다』

라고 하였다. 오랜 시일이 지난 후에 사실이 밝혀지게 되었다.
호문공(胡文恭) 8)이 호주를 맡아 다스릴 때의 일이다. 전임자인 등 공이 크게 학교를 세워 수천만금의 돈을 쓰고도 일을 마치지 못하고 파직되어 갔다. 여러 소인들이 등공이 돈을 지출한 것이 명백치 못하다고 비방하면서

통판 이하가 인계 장부에 서명하기를 거부하였다. 그래서 호문공이 『그대들이 등공을 보좌한 지 얼마나 되는가!

그가 착하지 못한 점이 있었다면 왜 일찍 충고하지 않고 가만히 팔짱만 끼고 보고 있다가 그가 떠남을 기다려서

이제 나쁘다고 말하니, 이것이 어찌 옛사람들의 책임을 나누어 지는 뜻이리요!』하니 모두가 매우 부끄러워하였다.
임일악(林一鶚) 9)이 진강부(鎭江府)를 맡아서, 치우친 것을 바로잡고 폐단을 고치는데, 대개 전임자의 정사 중에서

중단 또는 해이해진 일을 차례로 시행하면서 한마디도 전임자의 잘못을 들추어낸 일이 없었으며,

오직 『받드시 이렇게 하는 것이 좋다』라고 말할 뿐이었다.
대체로 신관(新官)과 전관(前官)의 관계는 전관을 곤경에 몰아넣고 그 지위를 뺏는 것이 아니다.

그러나 전처(前妻)가 후처를 미워하고 구장(舊將)이 신장(新將)을 미워하는 것이 역시 사람의 상정이다.

평소의 친구끼리 한번 자리를 교대하다가 원수가 되는 사례가 허다하다. 신임자의 명예가 갑자기 빛나면 그

것을 싫어하고 전임자의 허물이 갑자기 퍼지면 또한 싫어하니 이것은 모두 화(禍)를 취하는 길인 것이다.
상국(相國) 정지화(鄭知和)10)호는 南谷가 광주부윤(廣州府尹)이 되었을 때 전임 부윤이 뇌물을 받아먹다가

옥에 갇혀 조사를 받게 되었다. 정지화가 이 사실을 밝히는 일을 맡아서 몸소 어지러운 장부를 열람하다가

한가지 일이라도 전임자를 편들어 말할 만한 것을 발견하면 좋아서 말하기를, 

교승의 의리는 형제와 같은 것이니, 행여 이것으로 그의 명을 구할 수도 있겠다』하고, 

드디어 감사에게 극력 변명하여 그를 사형에서 감일등하게 되었다.

이태연(李泰淵)11)이 평안도 관찰사로 있을 때다. 전임자가 모리배에게 속아서 군향곡(軍餉穀)12) 포탈한 것이

수만 곡(斛)이었다. 사헌부에서 말이 있었는데 그가 방편을 강구하여 보충하였다.

그리고도 이 사실을 다른 사람에게 말하지 않았으므로 아무도 알지 못하였다.]

 

[각주]
1) 왕증(王曾) : 중국 송(宋)나라 익도(益都) 사람. 자는 효선(孝先), 시호는 문정(文正).

    벼슬은 중서시낭· 동중서문하평장사를 지냈고 기국공(沂國公)에 봉해짐. 문장(文章)이 좋다.

    저서는 『왕문정필록(王文正筆錄)』이 있다.

2) 진요자(陳堯咨) : 중국 송(宋)나라 사람. 자는 가모(嘉謨), 호는 소유기(小由基), 시호는 강숙(康肅).

    벼슬은 무신군절도사(武信軍節度使)·지천웅군(知天雄軍)을 지냈으며 예서(隸書)에 뛰어났다.

3) 부요유(傅堯兪) : 중국 송(宋)나라 수성(須城) 사람. 자는 흠지(欽之), 시호는 헌간(獻簡).

    벼슬은 중서시낭(中書侍郎). 서실을 「제원초당(濟源草堂)」이라 하였다.

4) 소강절(邵康節) : 중국 송(宋)나라 사람인 소옹(邵雍). 강절(康節)은 그의 시호. 자는 요부(堯夫).

    안락선생(安樂先生)이라고 호하였다. 그의 학파(學派)를 백원학파(百源學派)라 한다.

    공묘(孔廟)에 종사(從祀)하였고 신안백(新安伯)이라 추봉(追封)하였다.

    명(明)나라 때 선유소자(先儒邵子)라 칭했다. 저서는『관물편(觀物篇)』 『어초간답(漁樵間答)』 등 다수.

5) 흠지(欽之) : 부요유의 자(字)이다.

6) 육방 : 중국 명(明)나라 가선(嘉善) 사람. 자는 수경(秀卿), 벼슬은 우첨도어사(右僉都御史).

    저서에는 『육황재집(陸簧齋集)』 『황재잡저(簧齋雜著)』가 있다.

7) 기방(起坊) : 건축의 일을 맡은 곳.

8) 호문공(胡文恭) : 중국 후한(後漢) 때의 사람 호광(胡廣)이다. 문공(文恭)은 그의 시호이다. 자는 백시(伯始).

    환제(桓帝)가 설 때 공이 있어 육사안락향후(育賜安樂鄕侯)에 봉해지고 벼슬은 태부(太傅)에 이르렀다.

9) 임일악(林一鶚) : 중국 명(明)나라 사람인 임악(林?)이다. 일악(一鶚)은 그의 자이며,시호는 공숙(恭肅).

    벼슬은 강서안찰사(江西按察使)·형부시낭(刑部侍郎)을 지냈다.

10) 정지화(鄭知和) : 광해군 5∼숙종 14(1613∼1688) 자는 예경(禮卿), 호는 남곡(南谷)·곡(谷)ㅁ,

      본관은 동래(東萊). 전라·함경·평안관찰사를 거쳐 호조·예조의 판서(判書) 및 좌우의정을 지냈다.

11) 이태연(李泰淵) : 광해군 7∼현종 10(1615∼1669) 자는 정숙(靜叔), 호는 눌재(訥齋), 본관은 한산(韓山)이다.

      경주부윤(慶州府尹)·전라도관찰사를 거쳐 평안도관찰사로 임지에서 죽었다.

12) 군향곡(軍餉穀) : 유사시(有事時)에 사용할 군량(軍糧)으로 비축해둔 양곡(糧穀).

 

 

★ 若夫政之寬猛 令之得失 相承相變 以濟其過.
    (약부정지관맹 영지득실 상승상변 이제기과. )
    대체로 정사(政事)의 너그럽거나 가혹한 것과 정령(政令)의 득(得)과 실(失)은
    서로 계승하기도 하고 서로 변통(變通)하기도 하므로 그 잘못된 점을 해결해 나가야 할 것이다. 

 

 

[한연수(韓延壽)가 영천태수(潁川太守)가 되었을 때의 일이다. 앞서 조광한(趙廣漢)1)이 그곳 태수로 있을 때

그 풍속에 너무 붕당(朋黨)이 심한 것을 우려하여, 아전들과 백성들을 얽어 모아 일체를 서로 고발하도록 하여

민정(民政)에 밝은 것으로 자부하였다. 이 때문에 백성들은 서로 원수가 된 사람이 많았다. 

한연수는 예의와 겸양으로 가르치되 백성들이 따르지 않을까 생각하여, 이에 군내의 장로(長老)로서 

향리의 신망이 두터운 사람들 수십 명을 차례차례 불러서 술과 음식을 베풀어 친히 상대하여 예의있게 접대하였다.

그러면서 사람들에게 일일이 풍속과 백성들의 괴로움을 묻고, 화목하고 친애하며 원망과 허물을 씻어내는 방법을

이야기해주었더니 장로들이 모두 당장 시행하자고 하였다.

후한(後漢) 때 부하(傅蝦) 2)가 하남윤(河南尹)이 되었는데, 먼저 윤(尹)인 사마지(司馬芝)는 정사(政事)에 있어서

대강만을 내세워 너무 간략하였고, 그 다음 윤이었던 유정(劉靜) 3)은 세목을 망라하여 너무 치밀하였고,

그 다음 윤인 이승(李勝) 4)은 정상적인 법규를 훼손하면서 일시의 명성을 얻었다. 이에 부하는 사마씨의 대강을

세우고 유씨의 세목을 조정하여 경위(經緯)로 삼고, 이씨의 훼손했던 바를 점차 보완하여,

관속들의 분담한 직무를 차례로 고찰하여 파악하였다. 그 다스림은 도덕과 교화(敎化)를 근본으로 삼았으나,

법을 지키는 데도 항구성(恒久性)이 있게 하여 가히 범할 수 없었다.
구양수(歐陽修)가 개봉부를 맡았는데 전임자인 포증의 위엄있는 정사를 대신하여 그는 간이하게 순리를 따를 뿐

혁혁한 명성을 구하지 않았다. 포증의 정치를 그에게 권하는 사람이 있었는데,

그는 말하기를 『대개 사람의 재능과 성품은 서로 달라서 자기의 장점을 살리면 일의 성과가 나타나지 않을 것이

없으며, 자기의 단점을 억지로 하면 일이 반드시 되지 않을 것이니 나 또한 나의 능한 대로 할 뿐이오』하였다.

그가 여러 군(郡)을 거치면서 치적(治績)을 구하지 않고 관대하고 간략하며 시끄럽지 않은 것에 뜻을 두었기 때문에,

그가 벼슬살이한 곳이 큰 군(郡)이었지만 부임한 지 보름에 벌써 일이 열 중에서 대여섯 가지가 줄어들고,

한두 달 후가 되면 관청이 마치 절간과 같이 조용해졌다. 어떤 사람이 『정사는 관대하고 간략하게 하는데

일은 해이해지거나 중단되지 않은 것은 무엇 때문인가?』하고 물었다. 그는 대답하기를 『방종하는 것을 관대한

것으로 알고, 생략하는 것을 간이로 알고 있으면, 해이하고 중단되어 백성이 폐해를 받는 것이다.

내가 말하는 관대하다는 것은 가혹하게 급히 서둔다는 것이 아니며, 간이하다고 말하는 것은 번쇄(煩碎)하지

않다는 것뿐이다』고 하였다. 그가 일찌기 말하기를, 『백성을 다스리는 것은 병을 치료하는 것과 같다.

백성을 다스리는 데 있어서 관리의 재능 여부와 시책의 여하를 물을 것이고 다만 백성이 편안하다고 일컬으면

곧 그가 훌륭한 수령이다』하였다.
사방명(謝方明) 5)이 전임자에 이어서 그 정사를 바꾸지 아니하고, 반드시 바꾸어야 할 경우에는 차차 변경시켜

그 흔적을 찾아볼 수 없게 하였다. 전임자의 과실을 드러내지 않으려고 한 것이 이와 같았다.]

 

[각주]
1) 조광한(趙廣漢) : 중국 한(漢)나라 여오(?吾) 사람. 자는 자도(子都), 벼슬은 경조윤(京兆尹),

    구거(鉤鉅)의 술(術)이 뛰어났다.

2) 부하(傅蝦) : 중국 삼국(三國) 때 위(魏)나라 이양(泥陽) 사람. 자는 난석(蘭石).

    수상서복야(守尙書僕射)를 지냈으며 양향후(陽鄕侯)에 봉해졌다.

3) 유정(劉靜) : 중국 삼국(三國) 때 위(魏)나라 사람.

4) 이승(李勝) : 중국 삼국(三國) 때 위(魏)나라 남양(南陽) 사람. 자(字)는 공소(公昭).

    여러 차례 수령을 지냈으며 모두 잘 다스렸다.

5) 사방명(謝方明) : 중국 남송(南宋)의 양하(陽夏) 사람. 회계태수(會稽太守)를 지냈다.


 

제 4 장   문보(文報)    

              (공문과 보고서.)

 

  

★ 公移文牒 宜精思自撰 不可委於吏手. 
    (공이문첩 의정사자찬 불가위어리수. )
    공적으로 보내는 문첩(文牒)은 세밀하게 고려하여 자신이 직접 써야지, 아전들의 손에 맡겨서는 안 된다. 
 

 

[호태초(胡大初)는 『사람을 상대하는 것이 날로 번거롭고 심신이 날로 피곤해서 바야흐로 쉴 틈이 없는데,

다행히 이독(吏牘) 1)들이 갖추어 있다고 생각하고 아전으로 하여금 머리를 숙이고 붓가는 대로 따라 쓰게 한다면

마침내 구차한 길로 돌아가고 말 것이다』고 하였다.
관례에 따르는 형식적인 문첩(文牒)의 경우는 이속을 시켜도 무방하다. 그러나 백성을 위해서 폐단을 설명하고

시정할 것을 요구하는 경우라든지, 또는 위의 명령을 거슬리면서 받들어 행하지 않기로 작정한 경우에는

만약 이속의 손에 맡기면 반드시 사심을 끼고 간계를 품어 요긴한 말을 빼버리고 지엽적인 말만 늘어놓아서

그 일이 잘못되도록 만들 것이니 그래서 되겠는가. 만약 무인이나 오활한 선비라서 이문(吏文) 2)에 익숙지 못하면

마땅히 기실(記室) 1명을 데리고 가서 더불어 상의해야 할 것이다.
『다산필담(茶山筆談)』에 말했다. 『지금 사람들은 주자(朱子)의 저술에서 오직 서간(書簡)만을 취하여

성리설(性理說)만 보고 한 구절을 따다가 대책(對策) 3)에 써먹으려 하고, 주자 학문의 현실적인 발현(發現)이

공이제편(公移諸篇) 4)에 있는 것을 알지 못한다. 무릇 수령이 된 자는 마땅히 주자의 공이제편을 책상 위에

비치해두고 때때로 읽고 외워서 본을 떠 속된 벼슬아치가 되는 것을 면해야 할 것이다.
한위공(韓魏公)은 행정실무에 근면하여 장부나 문서를 살피고 따지는 일을 모두 몸소 하였다.

좌우에서 누구가 『공은 지위도 높고 나이도 연만하실 뿐 아니라 공명이 이러하시기에 조정에서 한 고을을 맡아

휴양하도록 한 것입니다. 조그만 일까지 몸소 하지 마십시오』라고 말하였다.

그가 답하기를 『내가 수고로움을 싫어하면 아전과 백성들이 폐를 입을 것이다. 또 녹봉이 하루 만 전(錢)인데

일을 보지 않으면 내가 어찌 편안할 것이냐?』고 하였다.
명성과 지위가 자못 높은 사람들이 고을을 맡게 된 경우 대체만 파악하기를 힘쓰고 조그만 일은 친히 하지 아니하며

오직 풍류로 즐기려고만 하니 이것이 옳겠는가?
한지(韓祉)가 군수나 감사가 되었을 때 항상 말하기를, 『천하 일은한 사람이 해낼 수 없다』 하고,

항상 문서를 만들 때 초고가 이루어지면 반드시 막료들이나 향승(鄕丞) 군관에 이르기까지 두루 보여서

모두들 좋다고 한 연후에 그것을 사용하였다.]

 

[각주]
1) 이독(吏牘) : 공문(公文)의 문틀.

2) 이문(吏文) : 일반 문서에 쓰이는 문체. 이두(吏讀)가를 섞어 썼다.

3) 대책(對策) : 한문(漢文) 문체의 일종으로, 어떤 문제에 대한 의견을 적은 글.

    원래는 임금의 물음에 답해서 썼던 것으로 한(漢)나라에서 선비를 시험 보이던 것에서 유래하였다.

4) 공이제편(公移諸篇) : 주자(朱子)의 저술 가운데 주자 자신이 관에 있으면서 쓴 공문들.

   『주자대전(朱子大全)』의 권(卷) 99,100이 공이(公移)로 되어 있다.


★ 其格例文句 異乎經史 書生始到 多以爲惑.
    (기격례문구 이호경사 서생시도 다이위혹. )
    공문서는 격식과 문구가 경서(經書)와 사기(史記)와는 다르기 때문에 
 

    서생(書生)이 처음 부임하면 당황해 하는 일이 많다.   

 

[대개 상사에 대한 보첩(報牒)은 관례상 서목(晝目)이 있다. 서목이라 하는 것은 원장(原狀)의 대개인 것이다.

감사의 결재는 서목에 있게 되고 원장은 증거로 남겨둔다.현감·현령이 직위가 높은 府尹·府使에 대해서는

또한 서목을 갖추어야 한다 원장의 끝에 화서(花署)1)를 (속칭 署名이라 한다. 화압(花押)우리말로 手例라 한다)

함께 하며, 서목에는 화서만 하고 화압은 하지 않는다. 처음 벼슬하는 사람은 마땅히 알아두어야 할 것이다.
한위공(韓魏公)이 위부(魏府)에 있을 때 밑에 관리에 노증(路拯)이란 사람이 책상 앞으로 나와서 소관사에 대한

문서를 바쳤는데 문서의 말미에 이름 쓰는 것을 잊었거늘 공이 즉시 소매로 문서를 가리고 머리를 들고 더불어 

이야기하면서 가만히 그것을 말아서 이야기가 끝나자 조용히 돌려주었다. 

노증이 물러가 그것을 보고 일편 부끄럽게 생각하고 일편 탄식하기를 『참으로 천하의 성덕(盛德)이다』하였다.

중국에서는 문서의 격식을 어기면 반드시 큰 죄책을 당한다. 그래서 한공의 일을 성덕이라고 하였던 것이다.
이두(吏讀)는 세상에서 신라 설총(薛聰) 2)이 지은 것이라고 한다. 예컨대 是白遣[이삽고]爲乎?[하오며]

그중 혹 난해한 것도 있다.예컨대 新反[새로이] 3) 更良[갱세아] 4) 수령은 경관(京官)으로 있을 때 아는 사람에게

배워서 스스로 이해하도록 할 것이다. 또한 내용을 전부 서술한 것을 <등보(謄報)>라 하고, 요점만 따서 기록한 것을

<절해(節該)>라 한다. 모름지기 평소에 상세히 익혀두어서 서툴다는 비난을 듣지 말아야 할 것이다.
『상산록(象山錄)』에 말하였다. 『서도(西道) 5)에 부임하는 경우는 마땅히 중국의 공문 서식을 보고

그 문구들을 알아두어야 한다. 건륭(乾隆) 6) 말년에 봉황성(鳳凰城) 7) 장군이 의주부윤에게 공문을 보내서

칙사(勅使)가 늦어진 까닭을 알려왔다. 그 문서가 황주(黃州)에 도착하도록 관찰사(觀察使) 이하 모두 그것을

이해하는 사람이 없어서 즉시 중앙에 보고하지를 못하여 거의 사고가 날 뻔하였다.

만약 평소에 대략 사역원(司譯院) 8)의 문자를 섭렵하고 예부자문(禮部咨文) 9)을 익혀서 그 문구들을

이해할 수 있었다면 어찌 급함에 다다라서 당황할 까닭이 있었겠는가. 그 문서는 관화(官話)10)의

어구속칭 語錄體를 쓰고 장경필첩(章京筆帖)11)에 만주어를 섞은데 불과할 따름이다.

우리나라 사대부들이 실용문자를 익히지 않아서 폐단이 이와 같았다.』]

 

[각주]
1) 화서(花署) : 문서의 끝에 이름을 쓰는 것.

2) 설총(薛聰) : 신라 경덕왕(敬德王) 때의 인물. 원효(元曉)의 아들로 유교 경전을 우리말로 풀이하였다 하며,

    이두(吏讀)를 만들었다 한다.

3) 읽기는 '세로이'라고 읽으며, 의미는 '무엇보다 이것이'이다.

4) 읽기는 '갱세아'라 하며, 의미는 '다시 거듭'이다.

5) 서도(西道) : 서울 서쪽의 도(道)라는 뜻이니 평안도(平安道)·황해도(黃海道)의 통칭. 서로(西路).

6) 건륭(乾隆) : 청(淸)나라 고종(高宗)의 연호(年號). 서기 1736∼1795.

7) 봉황성(鳳凰城) : 요동(遼東)에 있는 지명. 의주(義州)에서 북경(北京)으로 가는 길목에 있다.

8) 사역원(司譯院) : 조선시대 외교관계의 필요에서 한어(漢語)·일어·여진어(女眞語) 등의 학습을 위해 설치한 기관.

    한어가 중심이었으며, 「사역실의 문자」라 함은 중국과의 외교문서에 쓰이는 특수한 이문(吏文)을 가리킨다.

9) 예부자문(禮部咨文) : 자문(咨文)이란 동일 계통의 동급기관 사이에 주교받는 공문.

    여기서는 청(淸)나라의 예부(禮部)에서 보낸 자문이란 뜻이다.

10) 관화(官話) : 중국 공용 언어. 북경(北京)지방어가 관화로 쓰였다.

11) 장경필첩(章京筆帖) : '장경'은 청(淸)의 관명으로 대개 대병관(帶兵官)을 일컬으며,

    「필첩」은 필첩식(筆帖式)이라 하여, 만주어로 사자인(寫字人)을 뜻하는데

     청나라 때 각 부완(部脘)·위문(衛門)에 모두 필첩식을 두어 기인(旗人)으로 충임하고 번역의 직을 맡게 하였다.

 

 

★ 上納之狀 起送之狀 知會之狀 到付之狀 吏自循例 付之可也.
    (상납지장 기송지장 지회지장 도부지장 이자순예 부지가야. )
    상납(上納)의 문서, 기송(起送)의 문서, 지회(知會)의 문서, 도부(到付)의 문서 등은 
    아전들이 스스로 전례를 따라서 할 것이니, 그들에게 맡기는 것이 좋을 것이다. 

 

 

[공물(貢物)1)· 세포(稅布) 2)· 군전(軍錢)· 군포(軍布) 3) 등을 기한에 맞추어 올리는 것을 <상납>이라 한다.

장수(匠手) 4)· 번군(番軍) 5)· 수도(囚徒)· 원역(員役) 6) 등을 명을 받들어 보내는 것을 <기송>이라 한다.

조정의 조서(詔書)와 유서(諭書)를 즉시 반포하는 것을 <지회(知會)>라 한다.

상관의 비격(飛檄)(우리나라에서는 關子 7)라 한다)을 모(某)일 수령하였다고 하는 것을 <도부(到付)>라 한다.

대개 이와 같은 문서들은 모두 이속의 손에 맡겨도 무방한 것이다.
다만 상납(上納)에 있어 상사가 점퇴(點退) 8)할 우려가 있는 경우에는 본문서의 끝에다가 농간하는 폐단을 적어서

살펴주도록 바라는 것이 좋다. 내가 곡산(谷山)에 있을 때 매양 꿀을 진상하면서 다음과 같이 썼다.

『백밀(白蜜)과 황밀(黃蜜)은 품질이 다르다고 하여 언제나 담당자들이 마음대로 점퇴를 하고 백밀을 황밀로

바꾸라 합니다. 백성들이 그 폐해를 입기 때문에 이제 진상을 하면서 제가 모두 직접검사를 하고 지시한 대로

지켰으니 담당자에게 주의를 주시어 되돌리는 일이 없도록 하여주시기 바랍니다.』

감사가 이 글을 보고 칭찬한뒤에 순순히 받아들이라고 단속하였다.]

 

[각주]
1) 공물(貢物) : 대동법 실시 이후 일반 공물은 없어졌는데, 여기서는 그후에도 남아 있던 특수공물과 진상을 말함.

2) 세포(稅布) : 전세(田稅)·대동세(大同稅) 등을 세로 바치는 포(布).

3) 군포(軍布) : 조선시대 양인(良人) 16∼60세의 남정(男丁)이 군역(軍役)의 대신으로 납부하던 포(布).

    그래서 이를 양역(良役)이라고 하였으며, 이를 납부하는 남정은 군안(軍案), 또는 군적(軍籍)에 올라가 인상이

    기록되는데 이것을 파기라 하였다. 숙종때에 군안에 오른 남정 1인이 1년에 군포 2필을 납부하였고

    영조 때에는 균역법(均役法)이 실시되어 1필로 감해졌다.

4) 장수(匠手) : 장인(匠人).

5) 번군(番軍) : 군역자(軍役者)로서 번상(番上) 즉 차례에 따라 현역복무하러 가는 자.

6) 원역(員役) : 아전을 청하는 말.

7) 관자(關子) : 관문(關文).

8) 점퇴(點退) : 공물(貢物) 따위 상납물(上納物)의 품질·규격이 맞지 않는다고 퇴짜 놓는 것.


★ 說弊之狀 請求之狀 防塞之狀 辨訟之狀 必其文詞條鬯 誠意惻恒 方可以動人.
    (설폐지장 청구지장 방색지장 변송지장 필기문사조창 성의측항 방가이동인. )
    폐단을 말하는 공문과 청구하는 공문과 방색(防塞) 1) 하는 공문과 변송(辨訟)하는 공문 등은
    반드시 문장이 조리가 있어야 하고 정성스럽고 간절한 성의를 보여야만 사람의 마음을 움직일 수 있을 것이다.

 

 

[고을에 병폐가 있어서 고쳐야 할 경우에 반드시 그 정경을 그려내되 눈에 보는 듯해야 납득시킬 수 있을 것이다.

또 혹 식량을 이송해줄 것을 청한다든지 혹 재정의 원조를 청한다든지 혹 력세(賦稅)의 삭감이나 연기 내지 면제를

청한다든지 하는 경우에는 모름지기 조목조목 밝혀서 사리가 환하게 드러나야만 납득될 수 있을 것이다.
상사의 지시를 내가 막는 경우에는 반드시 언사를 공손히 해야만 노여움을 사는 것을 면할 수 있고,

상사가 문책하매 내가 그것을 변명하는 경우 반드시 그 문장을 간절하게 써야만 의혹을 풀 수 있을 것이다.
자하산인(紫霞山人)은 말했다. 『무릇 백성을 위해서 혜택을 구하고, 백성을 위해서 병폐를 없애줄 것을

요망하는 경우 모름지기 지성이 언사에 나타나면 사람을 감동시킬 수 있다. 』
천하에 가장 천해서 의지할 데 없는 것도 소민(小民)이요, 천하에 가장 높아서 산과 같은 것도 소민이다.

요순(堯舜) 이래로 성현들이 서로 경계한 바가 요컨대 소민을 보호하려는 것이라, 이것이 서책마다 실려 있고

사람들의 이목에 젖어 있다. 그러므로 상사가 비록 높다고 하되 수령이 백성을 머리에 이고 싸우면 

대개 굴하지 않는 자가 드물다. 정택경(鄭宅慶)은 해변의 무인이었지만 언양(彦陽) 현감이 되어 

백성을 머리에 이고 싸우므로 감사가 굴복하였고 재결(災結) 2)에 대한 문제였는데 稅法조에 나온다,

안명학(安鳴鶴) 3)은 의주(義州)의 토민(土民)이로되 강진(康津) 현감 되어서 백성을 머리에 이고 싸우므로

감사가 굴복하여서 명성이 이 때문에 울려서 벼슬길이 열렸던 것이다. 본래 백성의 이익을 위한 것이지만 

수령에게도 이로운 것이다. 옛날 한 승지가 서도(西道)의 수령으로 나갔는데 파직을 당할까 겁을 내 

마땅히 싸워야 할 경우에 싸우지 않았다. 감사가 그를 비루하게 보고 폄하(貶下)해서 쫓아버렸다. 

이와 같은 일을 나는 많이 보았다.

대개 백성을 위해서 건의할 경우 마땅히 이해(利害)를 상세히 진술하되, 요컨대 지성을 드려 위에 앉은 

사람의 느낌에 합하도록 해야 할 것이다. 두번 세번 해서도 성사가 안되면 결연히 거취를 정해야 할 것이요,

비록 이 때문에 파면을 당할지라도 앞길이 다시 열릴 것이다. 앉아서 백성의 곤경을 보고만 있다가

마침내 죄책에 빠지는 경우와는 크게 다를 것이다.]

 

[각주]
1) 방색(防塞) : 상사(上司)의 어떤 지시사항을 거부함을 뜻하는 말.

2) 재결(災結) : 재해를 입은 논밭.

3) 안명학(安鳴鶴) : 영조(英祖) 때의 인물로 맹산현감(孟山縣監)을 지낸 바 있다.

 

 

★ 人命之狀 宜慮其擦改 盜獄之狀 宜秘其封緘.
    (인명지장 의려기찰개 도옥지장 의비기봉함. )
    인명에 관한 문서는 글자를 지우고 고치는 것을 조심해야 하고
    도적의 옥사(獄事)에 관한 문서는 봉함(封緘)을 비밀스럽게 해야 할 것이다.

 

 

[살인 옥사에 대한 회제(回題) 1)는 서목(書目)에 쓰는데 아전들이 만약 뇌물을 받아먹고 요긴한 자구를 지우고

고쳐서 바꿔놓으면 수령들이 그것을 알 도리가 없다. 문서를 발송하는 날 형리(刑吏)를 불러서 타이르되,

『후일 내가 감영(監營)에 가면 꼭 원장(原狀)을 찾아 상세히 살펴보아서 만약 일언반구라도 달라진 곳이나

빠진 글자가 있으면 네가 죄를 받을 줄 알아라』고 할 것이다.
내가 장기 2)로 귀양을 가 있을 때 본 바, 한 아전이 살인한 사건이 있었다. 여러 아전들이 짜고서 간계를 부려

검장(檢狀) 3)을 온통 고쳐버렸다. 감영으로부터 회제(回題)가 오매 현감이 깜짝 놀라고

의심하였으나 이해할 수가 없었다. 마침내 간계를 밝히지 못하고 살인범을 석방하고 말았다.

현감이 본 바의 것은 서목인 것이다. 대개 감영의 회제가 나의 보고한 바와 상반된 경우는 매양 감영에 가게 되면

마땅히 급히 원장을 찾아서 읽어볼 것이요, 단지 의심만 품고 그칠 일이 아니다.
도적 중에 큰놈은 일당이 널리 퍼져 있으니 군교(軍校)나 형리들이 그들의 이목이 아닌지 어떻게 알겠는가.

탐문·수색하는 데 대한 문서는 응당 비밀로 하여 거듭 봉해서 밖으로 새어나가지 못하도록 해야 할 것이다.]

 

[각주]
1) 회제(回題) : 지방 수령이 감사에게 보낸 문서서 감사가 판결을 써서 되돌려보낸 것 .

2) 장기(長?) : 지금의 경상북도 연일군(延日郡)에 속한 고을.

3) 검장(檢狀) : 살인사건에서의 검시장.

 

 

★ 農形之狀 雨澤之狀 有緩有急 要皆及期 及無事也.
    (농형지장 우택지장 유완유급 요개급기 급무사야. )
    농사의 잘되고 못된 형편에 대한 보고서와 비의 은택에 대한 보고서는 급한 경우와 

    급하지 않은 경우가 있는데, 요컨데 그 때를 맞추어야만 아무 탈이 없을 것이다. 

 

[크게 가물던 끝에 비가 내렸으면 그 보고는 반드시 시각을 다툴 것이다. 5일이나 10일마다 관례적으로 농형을

보고하는 것 같은 경우는 형식적인 보고가 되기 쉬우니, 변방 고을이라서 감영으로부터 먼 곳은 이웃 고을 편에

붙여도 무방할 것이다. 감영으로부터 거리가 수백 리가 되면 여비도 적지 않으니,

인편에 붙여서 비용을 절약하려는 것이 상정일 것이니, 꼭 금할 것은 없겠다.

이와 같은 경우는 하루 전이 문서를 작성해야만 기한에 맞출 수 있을 것이다.
우리나라의 이문(吏文)에 콩을 태(太)太란 콩을 말한다라 하고, 수수를 당(唐)그 쌀을 唐米라 한다이라 하며,

메밀을 목맥(木麥)白花穀이라 하고, 귀리를 이모(耳牟)鈴?麥라 하며, 참깨를 진임(眞荏)이라 하고,

들깨를 수임(水荏)또는 野荏이라고도 한다이라 하며, 벼를 조(租)라 하고, 피를 직(稷)이라 하는 이런 따위들이

매우 많다. 수령은 보장(報狀)에서 그때마다 고쳐서 이속(俚俗)한 것을 버리고 아정(雅正)한 것을 취하는데

도움이 되게 할 것이다.]

 

★ 磨勘之狀 宜正謬例 年分之狀 宜察奸寶.
    (마감지장 의정류예 년분지장 의찰간보. ) 
    마감하는 보고서는 잘못된 관례를 바로잡아야 하고 
 

    연분(年分) 1)의 보고서는 부정의 사단을 잘 살펴야 할 것이다.  

 

[환곡(還穀) 마감의 보장은 지출하고 나머지의 숫자, 전년도 잔고와 신년도 모곡(耗穀) 1)의 숫자를 나열해서

회계한 것이니, 착잡해서 선명하지 못하면 마땅히 그 서식을 바로잡아 보는 이로 하여금 의혹을 품지 않도록

해야 할 것이다. 연분(年分)의 대개장(大狀)은 요긴한 것이 불과 모두 8·9행뿐이다. 전답의 등급을 조사하고

미두(米豆)의 세를 계산해서 한데 묶어 계산하되 평균해서 매 1결(結)에 미(米) 몇 두(斗)를 받게 되는 것이다.

수령이 눈을 밝혀서 보아야 할 바가 오로지 여기에 있으니 조금도 흐릿함이 없어야 할 것이다.]

 

[각주]
1) 年分(연분) : 조세(租稅)를 매기려고 농사의 풍흉(豐凶)을 따라 등급을 매기던 일.

2) 모곡(耗穀) : 관에서 환곡(還穀)을 징수할 때 소모를 전제로 해서 1할을 더 받아들이는 것을 말하는데,  

    곧 이식(利息)이었다.  

3) 대개장(大槩狀) : 지방수령이 각 감영에 보고하는 연례보고서.   


★ 數目多者 開列于成冊 條段少者 疏理于後錄.
    (수목다자 개열우성책 조단소자 소리우후록. )
    수목(數目) 1)이 많은 것은 성책(成冊) 2)에 나열을 하고, 조목이 적은 것은 후록(後錄) 3)에 정리한다.

  

[성책(成冊)·후록 등은 아전들이 관례를 따라서 할 것이니, 개의할 것이 없다.

오직 사단(事端)과 수목(數目)이 엇갈려 복잡한 경우는 모름지기 경위표(經緯表) 4)를 작성해야 선명해질 것이다.

만약 환곡의 장부가 어지러우면 감영으로부터 문책을 당할 것이니 마땅히 경위표를 작성해서 밝혀야 한다.]

 

[각주]
1) 수목(數目) : 낱낱의 수(數).  

2) 성책(成冊) : 마감한 장부.  

3) 후록(後錄) : 첨부한 문서.

4) 경위표(經緯表) : 상하 좌우로 정리해서 일목요연하도록 작성한 도표.

 

★ 月終之狀 其可刪者 議於上司 圖所以去之.
    (월종지장 기가산자 의어상사 도소이거지. )
    월말(月末)의 보고서 중에 삭제해도 좋은 것은 상사와 의논해서 없애도록 해야 할 것이다.

 

[월말의 보장 이른바 삭말장(朔末狀)은 모두 형식적인 것이다. 그러나 그중 명목만이라도 유지시킬 만한 것은

남겨두는 것이 좋다. 가령 황진기(黃震起) 1) 체포령 같은 것은 무슨 무실(務實)의 뜻이 있겠는가.

선전관(宣傳官) 황진기가 연조(英祖) 무신(戊申) 2)년에 망명한 이후로 이제 90년이 흘렀다. 

뼛골이 서리가 된 지 옛날인데 아직도 체포하란 말인가. 

이와 같은 일이 많으니 상사와 의논해서 모두 없애버리는 것이 옳다.

교생(校生) 3)의 강(講)은 애당초 거행하지도 않고 매월말에 거짓꾸며서 이름자를 쓰고  

<통(通)>이니 <조(粗)>니 하여 4) 상사에게 보고하니 도무지 성실치 못한 것이다.  

의당 농한기에 어느 하루를 택하여 12개월 동안의 강을 한꺼번에 고시(考試)해서 미리 문서를 작성해놓고  

매월 나누어 보고하면 그래도 실상에 가까울 것이다.]  

 

[각주]
1) 황진기(黃震起) : 영조 4년 무신란(戊申亂) 때 망명 도주해서 종적이 알 수 없이 된 인물로

   『조선왕조실록(朝鮮王朝實錄)』에는 이름자가 「진기(鎭紀)」로 되어 있다.

2) 무신(戊申) : 영조 4년(1728). 이해 충청도에서 이인좌(李麟佐), 경상도에서 정희량(鄭希亮)이

    난을 일으켰으나 실패하였다.
3) 교생(校生) : 지방 향교의 학생. 조선후기에는 공부하는 학생이 아니고 사역이었다. 공생(貢生)이라고도 한다.

4) 시험을 보이는 제도의 하나로 글을 외우게 하는 경우 그 등급을 넷으로 구분하였다.

    첫째는 「통(通)」그 다음 보통은 「약(略)」그 다음 열등을 「조(粗)」최하등의 낙제를 「불(不)」이라 하였다.


★ 諸營之狀 亞營之狀 京史之狀 竝皆循例 不足致意.
    (제영지장 아영지장 경사지장 병개순예 부족치의. )
    제영(諸營)으로 보내는 보고서나, 아영(亞營)으로 보내는 보고서나, 경사(京司)로 보내는 보고서나, 
    사관(史館)으로 보내는 보고서는 모두 관례를 따르는 것이니 특별히 유의할 것은 없다.

 

 

[제영이란 병마영(兵馬營)· 수군영(水軍營) 1)· 토포영(討捕營) 2) 곧 진영(鎭營) 등이고,

아영(亞營)이란 도사(都事)이며, 경사(京司)란 상납을 받는 아문(衙門)이고, 사관(史館)이란 도내의 수령으로서

춘추관(春秋館) 기주관(記注官) 3)을 겸한 자가 있을 경우 매양 날씨의 맑고 흐림을 적은 일기를

그 수령에게 보고하는 것이다. 이들은 모두 형식적인 것이니 길게 논할 것이 없다.]

 

[각주]
1) 병마영(兵馬營)·수군영(水軍營) : 지방의 지상 방비를 담당한 주진(主鎭)을 병마영(兵馬營)(兵營)이라 하고,

    지방의 해상방비를 담당한 군영을 수군영(水軍營)(水營)이라 한다.

2) 토포영(討捕營) : 토포사(討捕使)가 있는 진영(鎭營). 영장(營將)이 토포사를 겸하였다.

3) 기주관(記注官) : 춘추관은 역사기록을 맡은 관청이며, 기주관은 정·종5품 벼슬.


★ 隣邑移文 宜善其辭令 無俾生釁.
    (인읍이문 의선기사령 무비생흔. )
    이웃 고을에 보내는 문서는 문장을 잘 만들어서 분쟁(紛爭)이 생기지 않게 해야 할 것이다.

 

[이웃과 사이좋게 지내라는 것은 옛사람의 훈계이다. 지추덕제(地醜德齋)1)하여 서로 양보하기를 싫어하는 경우에,

항상 문제가 있으면 기운을 다투어 서로 앞서고자 해서, 이 때문에 반목하게 되고 한 도에 알려져서 웃음을 사니

예의가 아니다. 공경하면서 예의가 있으면 자연히 공감하게 될 것이다.

또한 역승(驛丞) 2)이나 목관(牧官), 3) 변방의 무장들은 비록 문벌이 낮다고 하나 같이 관장(官長)을 하고 있으니,

이치가 마땅히 서로 존경하고 언사에 조심해서 한결같이 공손하면 좋지 않겠는가.]

 

[각주]
1) 지추덕제(地醜德齊) : 문벌이나 덕망이 서로 비등함을 뜻하는 말.

2) 역승(驛丞) : 각 도(道)의 역참(驛站)을 맡아보던 관직. 종(從)9품(品).

3) 목관(牧官) : 목장(牧場)의 감독관(監督官).


★ 文牒稽滯 必遭上司督責 非所以奉公之道也.
    (문첩계체 필조상사독책 비소이봉공지도야. )
    문첩(文牒)이 지체되면 반드시 상사의 독촉과 문책을 받게되니, 
 

    이것은 나라와 사회를 위하여 이바지 하는 길이 아니다.  

 

[문첩을 담당한 아전이 먼저 여비로 책정한 쌀을 먹어버리고 여름·가을 이래로 비용이 다 떨어지면 

으례 문첩을 모아서 한꺼번에 발송한다거나, 혹은 이웃 고을에 부탁해서 딸려 붙이려고 한다거나 한다. 

이것이 지체되어 기한에 맞추지 못하는 이유이다. 사고가 생긴 연후에 간교한 말로 거짓을 꾸며서 

혹은 지자(持者 :문서 전령)가 병에 걸렸다고도 하며, 혹은 저리(邸吏)가 잊어먹었다고도 하는데 

모두 믿을 수 없는 말이다. 문제가 된 것이 중요한 일이 아니면 아전이 하는 대로 들어주어 덕을 보게 하되,

보고가 시급한 경우는 발송하는 날 마땅히 수리(首吏)에게 주의를 주어 사고가 생기는 날에는 수리도 함께 

책임을 지운다고 하면 거의 지체되는 일이 없을 것이다. 

 항상 보면 상사가 고과(考課)하는 항목에, 혹은 『보장(報狀)의 내용이 착오가 있었다. 』

혹은 『보장이 어찌 지연되었던가』하고 하로 매기고 중으로 매기는 경우가 많았다. 조심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이영휘(李永輝)가 안협(安峽) 1) 현감으로 있을 때였다. 현과 감영사이의 거리가 4·5백리여서 공문이 왕래하는 데

수고와 비용이 적지 않았다. 때문에 백성이 포(布)를 내는 것이 1년에 호당 수십 필이 내리지 않아 생업이 날로

위축되었다. 그는 백성들로 하여금 각각 봄가을로 포 몇필을 내게 해서 수장해 두고 수입과 지출을 

장부에 기재하고, 무릇 진상할 물건을 모두 미리 구입하니, 그 물건의 값이 올라도 염려할 것이 없었다.

그리고 문서가 시급한 것이 아니면 많이 이웃 고을편에 붙여서 보냈다.

1년 동안 이와 같이 시행하니 포가 남아서 백성의 부담이 열의 아홉은 감해질 수 있었다.]

 

[각주]
1) 안협(安峽) : 지금의 강원도 이천군(伊川郡)에 속한 고을.


★ 凡上下文牒 宜錄之爲冊 以備考檢 其說期限者 別爲小冊.
    (범상하문첩 의록지위책 이비고검 기설기한자 별위소책. )
    무릇 위로 올리고 밑으로 내려보내는 문첩들을 기록해서 책자를 만들어 훗날 고증과 검열에 대비하고, 
    기한이 설정되어 있는 것은 따로 작은 책자를 만들어야 할 것이다.

 

[상사에게 보고한 것들은 한 책자를 만들고, 백성들에게 전령(傳令)하는 것도 한 책자를 만들되 글자를 정하게 써서

항상 책상 위에 비치해 둘 것이다. 월례 보장(報狀) 및 긴요치 않는 문서들은 반드시 수록할 것이 없다.
상사가 공문을 발송해서 본읍(本邑)에 거행하도록 한 것은 각각 기한이 정해져 있다.

아전들이 태만하기 쉬우니 따로 한 책자를 만들어놓고, 기한을 지키는지 일일이 살펴보고 또 근무상태를 점검해서

만약 어김이 있을 때에는 용서하지 말고 죄를 주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이속들이 눈치를 보고

원님이 잊고 넘어가는 것을 요행하게 여겨 모든 일이 버그러지게 되고 감영으로부터 반드시 문책을 당할 것이다.]

 


★ 若邊門掌鑰 直達狀啓者 尤宜明習格例 兢然致愼.
    (약변문장약 직달장계자 우의명습격례 긍연치신. ) 
    변방 관문(關門) 1)의 자물쇠를 맡은 자가 직접 장계를 올릴 경우는 
 

    더욱 격식과 관례를 익혀서 정신 차려 신중을 기해야 할 것이다. 

 

]장계의 서두에 체면화두(體面話頭)가령 『재주가 졸렬한 신이 부임한 이래 주야로 삼가 두려워하오매』와 같이

상소문(上疏文)의 투식처럼 하는 것를 쓰지 말고 바로 본건으로 들어가서 곡진하게 사리를 논해야 할 것이다.

대체로 장계의 문체는 항상 육선공(陸宣公) 2)의 주의(秦議) 3)를 읽어서 표현의 명백·간절함을 본받고,

아울러 왕양명(王陽明) 4)의 소의(疏議) 5)를 취하여 문장의 정연 유창한 것을 본뜨되 두 부분의 문체는 모두 對를

맞추어서 병려문(騈儷文)과 같다, 절실하고 충실한 마음에 근본을 두어야만 거의 감동을 시킬 수 있을 것이다.]

 

[각주]
1) 관문(關門) : 국경상에서 외국과의 출입을 통제하는 곳. 동래(東萊)·의연(義淵) 등이 중요한 관문이다.

2) 육선공(陸宣公) : 이름은 지(贄)이며 선공은 그의 시호. 당(唐)의 명신(名臣).

    글을 잘하여 특히 그의 진의(秦議)가 유명하여 후세에 하나의 전범(典範)이 되었다.

    우리나라에서도 『육주략선(陸奏略選)』이라는 책이 간행되어 많이 읽혔다.

3) 주의(秦議) : 한문(漢文) 문체의 하나로 신하가 임금에게 올리는 글.

4) 왕양명(王陽明) : 이름은 수인(守仁), 양명은 그의 호이다. 명(明)나라 때의 대학자로 양명학(陽明學)이라는

    새로운 학풍을 개척하였다.

5) 소의(疏議) : 한문(漢文) 문체의 하나로 사자구(四字句)와 육자구(六字句)에 대구(對句)를 써서 지은 화려한 문장.

 

 

 

제 5 장   공납(貢納)  

             (특산물을 현물로 납부.)

 

  

★ 財出於民 受而納之者牧也. 察吏奸 則雖寬無害, 不察吏奸 則雖急無益.
    (재출어민 수이납지자목야. 찰리간 즉수관무해, 불찰리간 즉수급무익 .)
    재물은 백성으로부터 나오며 이것을 수납하여 나라에 바치는 것은 수령이다.
    아전의 부정을 잘 살피기만 하면 비록 수령이 너그러이 하더라도 폐해가 없을 것이며,
    아전의 부정을 잘 살피지 못하면 비록 수령이 엄하게 하더라도 아무런 이익이 안된다.

 

 

[이것이 옛날의 이른바 최과(催科) 1)라는 것이다. 양성(陽城) 2)은 최과의 행정이 각박하지 않았던바

이는 백성을 다스리는 수령이 마땅히 본받을 것이다. 좁쌀· 쌀· 실· 삼 등을 내어서 위를 섬기는 것을 

소민(小民)들은 본분으로 여기기 때문에 까닭없이 납부를 거부할 리는 없다. 

매양 보면 어리석고 우둔한 수령들 가운데에 백성을 어루만지고 돌본다고 하는 자는 으례 상납(上納)의 기한을 

어기고, 나라에 이바지한다고 하는 자는 으례 백성들의 뼈에 사무치도록 마구잡이로 빼앗는다. 

진실로 현명한 수령은 너그러이 하되 기한을 어기지 않아야 상하가 모두 원망이 없는 것이니 

그 이치는 쉽게 깨칠 수 있을 것이다.

정잠(政箴) 3)에서 이렇게 말하고 있다. 최과는 흔들리지 않아야 하니 이는 최과하면서도 어루만지고 

돌보는 것이며, 형벌은 착오가 없어야 하니 이는 형벌하면서도 교화하는 것이다. 

봄에 궁한 백성 구제하기는 마치 아들처럼 하고 가을에 거두어들이기는 마치 원수처럼 해야 한다. 

한 이익을 일으키는 것은 한 폐해를 제거하는 것만 같지 못하고

한 일을 만드는 것은 한 일을 감하는 것만 같지 못하다. 위엄은 청렴에서 생기고 정사는 부지런함에서 이루어진다.

정명도(程明道) 4)는 앉은 자리 옆에 『백성 보기를 상한 사람 보듯이 하라(視民如傷)』라고 써 두었고,

이문정(李文靖) 5)은 『씀씀이를 절약하여 백성을 사랑하라(節用愛民)』라는 말을 평생토록 외었다.
양성(陽城)이 도주(道州) 6)의 자사가 되었는데 부세(賦稅)를 때에 맞추지 못하여 감사(監司)가 자주 독촉하였다.

양성은 고공(考功) 7) 등급의 제출에 미쳐서 스스로 쓰기를 『어루만지고 돌보느라고 마음은 피로하나 최과의

행정은 부진하니 고과(考課) 8)는 하지하(下之下)에 해당된다』라고 하였다. 관찰사가 판관(判官)을 보내어

부세를 독촉하였다. 판관이 도주에 이르렀는데 양성이 마중하지 않음을 괴이하게 여겨 아전에게 물었더니

아전이 『자사는 죄가 있어 스스로 옥에 갇히었다』라고 말하였다.

판관이 놀라 달려들어가 뵙고는 『사또가 무슨 죄가있는가?』라고 물었으나,

양성은 온 가족과 함께 관사 밖에서 자며 명을 기다리니 판관은 문득 떠나버렸다.]


[각주]
1) 최과(催科) : 백성의 부세(賦稅)를 재촉하여 징수함.

2) 양성(陽城) : 중국 당(唐)나라 때의 북평(北平) 사람. 자는 항종(亢宗). 도주자사(道州刺史)가 되었는데

    백성 다스리기를 집안 다스리듯이 하여 부세(賦稅)가 잘 걷히지 않았다고 한다.

3) 정잠(政箴) : 정치를 함에 있어서 경계할 바를 기술한 글.

4) 정명도(程明道) : 정백자(程伯子)이다.

5) 이문정(李文靖) : 중국 송(宋)나라 때의 이동(李?). 남검(南劍) 사람, 자는 원중(愿中), 시호는 문정(文靖).

    주희(朱熹)가 일찌기 그에게 제자의 예(禮)를 취하였다. 세상에서는 정평선생(廷平先生)이라고 일컬었다.

6) 도주(道州) : 중국의 호남성(湖南省)에 있었던 주명(州名)이다.

7) 고공(考功) : 관리의 행정집무 성적의 조사.

8) 고과(考課) : 관리의 집무성적을 조사하여 등급을 매김.


★ 田租田布 國用之所急須也. 先執饒戶無爲吏攘 斯可以及期矣.
    (전조전포 국용지소급수야. 선집요호무위리양 사가이급기의. )
    전조(田租)와 전포(田布) 1)는 국가재정에 반드시 필요한 것이다. 
    넉넉한 민호(民戶)부터 먼저 징수하여 아전들이 횡령하지 못하게 해야만 상납의 기한에 맞출 수 있을 것이다.

 

[오늘날 국가재정은 날로 줄어들어 백관의 봉록과 공인(貢人) 2)에 대한 공가(貢價) 3) 지불에 있어서

항상 신구연도(新舊年度)가 이어지지 않는 어려움이 있다. 그런데도 요호(饒戶)의 기름진 토지는 모두 

아전의 전대에 돌아가고 조선(漕船) 4)에 세곡을 실어서 발송하는 것은 해마다 기한을 어겨, 체포되어 

문초당하고 파면되어 갈리는 수령이 줄줄이 뒤를 잇고 있으나 아직도 깨닫지를 못하고 있으니 애석한 일이다.
호태초(胡大初)는 말하였다. 『고을 아전들은 부강자(富强者)와 평소에 서로 표리를 이루고 있어서 

심지어 부강자는 해마다 부세를 관부에 내지 않게 하고 단지 착하고 어진 가난한 백성들만 기한에 앞서 

재촉하며 핍박하여 하여금 부세를 내도록 한다. 』 중국 역시 그러하니 이는 천하의 공통된 폐단이다.

『한암쇄화(寒巖?話)』의 세미(稅米)에 관한 조항에서 이렇게 말하였다. 『마땅히 호조에 납부해야 할 것이

4천 석이라면 본읍(本邑)에서 백성으로부터 징수하는 것은 만 석도 훨씬 넘는다.백성이 내는 것이 4라면

나라에 바치는 것은 1이다 기름진 토지, 요호(饒戶)에서 내는 윤기 있는 입쌀로 아침에 영을 내려

저녁에 거두어들일 수 있는 것은 아전이 모두 부정해서 횡령한다. 혹은 은결(隱結) 5)로서 거두고

혹은 궁결(宮結)이라 하여 수세장부(收稅帳簿)에서 빼버리고 혹은 저가(邸價) 6)로서 거두고,

혹은 거짓 재결(災結)로서 수세장부에서 빼버리고, 혹은 돈으로써 받고 혹은 쌀로써 받는다.

이미 초가을부터 구름이 몰려가듯이 냇물이 흘러가듯이 끝내버려 속여 훔쳐 먹은 액수는 모두 아전의 전대 속으로

들어간다. 이러고 나서 나머지 토지의 세미(稅米)를 모아서 나라에 내는 세액 4천 석을 채운다.

무릇 나라에 내는 세에 충당되는 것은 모두 온 집안이 몰사한 집, 유망하여 없어진 집, 홀아비· 과부· 

아버지가 죽은 아들, 아들 없는 아버지, 노인, 병자와 환자, 진전(陳田) 7)과 못쓰게 된 논, 쑥대가 우거지고 

자갈이 딩구는 땅 등으로 살을 벗기고 뼈를 긁어내려도 어쩔 도리가 없는 무리일 뿐이다. 

아전은 횡령한 쌀을 높은 돛배에 싣고 남으로는 탐라(耽羅)에 가서 장사하고 북으로는 함흥(咸興)에 가서 거래한다.

채색한 북을 둥둥거리며 저 구름과 물이 맞닿는 바다 위에 떠 있는데 수령은 바야흐로

홀아비· 과부· 병든 자 들을 잡아다가 독촉하여 매질이 뜰에 가득하고 칼을 씌워 가둔 자가 옥에 넘친다. 

이에 사람을 뽑아 검독(檢督) 8)이라고 칭하고서 사방으로 풀어 보내면 그들은 친척이나 이웃 사람들에게 징수하여

엉뚱한 해를 입히고 송아지와 돼지를 빼앗아가며 솥과 가마솥을 떼어가니 울부짖는 백성은 길에 넘어지고 쓰러져

곡성이 하늘에 사무친다. 갈백(葛伯)이 탕왕(湯王)이 주는 것을 먹기만 하고 제사조차 지내지 않은 꼴이 되면 9) 

임금의 「정퇴(停退)한다」는 영이 이에 고을에 이르게 된다.

가경(嘉慶)10) 기사(己巳)11)· 갑술(甲戌)12)년에 남쪽지방에 큰 흉년이 들었는데,

나는 바닷가의 마을에 있어서 13) 이러한 일들을 직접 내 눈으로 보았다. 이로써 보건대 백성을 다스리는 수령에게

귀중한 것은 밝을명(明)자 한 자 뿐이다. 모든 고을이 다 그러하였으나 오직 해남현감 이복수(李馥秀)는

가을 추수철에 먼저 넉넉한 민호에 대해서 징수하여 나라에 내는 부세(賦稅)의 액수를 충당하고 영을 내려

「내가 집행한 것에는 아전이 방결(防結)백성의 부세를 사사로이 집행하는 것이다할 수 없고,

백성도 방납(防納)사사로이 부세를 납부하는 것이다할 수 없다」라고 하였다.

다음해 봄에 창고니 한 달이 못되어 북을 치며 세곡 실은 배를 띄워보내게 되었다. 이에 아전들이 앙심을 먹고

공모하여 그를 중상하였던 바 드디어 어사(御史)에게 파직되었는데,14) 오호라 애석한지고!』
예관(兒寬) 15)이 좌내사(左內史) 16)가 되어 조세를 바칠 때에 형편껏 재량하여 백성들의 사정을 돌보아 주었기

때문에 조세의 미납(未納)이 많았다. 조세 미납으로 말미암아 고과(考課)에 전(殿)이 되어 파면에 해당되었는데

백성들이 그를 잃을까 두려워하여 대가(大家)는 우차(牛車)로 소가(小家)는 등짐으로 조세 나르기를

연이어 끊이지 않으니 고과가 최(最) 17)로 변경되었다.
수령이 능히 백성을 사랑하기만 하면 재촉하지 않아도 부세가 저절로 완납됨이 이와 같은 것이다.
당(唐)나라 때 하역우(何易于) 18)는 부역(賦役)을 독촉함에 차마 가난한 백성들을 핍박할 수 없어서

자기의 봉록으로써 백성의 조세를 대신 내주었다.
고승간(高承簡) 19)이 형주(邢州)의 자사(刺史)로 옮겨졌을 때에 관찰사의 부세 독촉이 매우 다급하였다.

이에 고승간은 수백이나 되는 가난한 백성들의 조세를 대신 바쳤다.
당나라 때 노탄(盧坦) 20)이 수안 현령(壽安 21)縣令)이 되었는데 하내(河內)의 부세 기한이 이미 급박하게 되었다.

고을 사람들이 『베틀에 있는 베도 아직 다 짜지 못했다』고 호소함에 노탄이 부(府)에 나아가 열흘을 연기해 

줄 것을 청원하였으나 허락되지 않았다. 노탄은 고을사람들에게 『기한은 생각하지 말고 다만 부세를 

내도록만 하라. 벌이 있어도 수령 봉록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라고 타일렀다.

조개(趙愷) 22)가 청주(靑州)를 맡게 되었는데 관하의 고을에 『부세를 함부로 재촉해서는 안된다』라고 

타일렀던바, 그해 여름에는 부세가 기한보다 한 달이나 앞서 마련되었다. 

이는 예관(兒寬)이 최(最)로 고과된 일과 비슷한 것이다.
소송(蘇頌) 23)이 항주(杭州)를 맡게 되었는데 부임길에 백여 명이 그의 길을 막고 울면서 호소하기를

『저희들은 시역민전(市易緡錢) 24)을 갚지 못함으로써 전운사(轉運使)에게 문책당하여 낮에는 관정(官庭)에

잡혀 있고 밤이면 상원(廂院) 25)에 갇혀 있는데 비록 죽더라도 갚을 수 있는 돈이 없다』라고 하였다.

이에 그는 『내가 이제 너희들을 풀어주어 너희들로 하여금 생업에 종사할 수 있게 해줄 것이니 먹고 입은 나머지

모두를 관청에 갚을 수 있겠는가?』라고 말하니 모두들 『감히 저버리지 않겠읍니다』라고 말하였다.

이에 그들을 모두 풀어주니 전운사가 대로하여 그를 탄핵하려 하였으나 빚을 갚는 백성이 모두 기일에 앞서

내게 되니 드디어 다시 말하지 못하였다.
조극선(趙克善)이 고을살이할 때에 부세를 거둠에 있어서 말질을 반드시 백성으로 하여금 스스로 하게 하니

백성들은 그의 청렴·공평에 즐거워하여 벌하지 않아도 기일에 맞추어 와서 바쳤다.
당나라 때 위오(韋澳) 26)가 경조윤(京兆尹)이 되었는데 황제의 외삼촌인 정광(鄭光) 27)의 농장 주리(主吏) 28)가 

방자하여 여러 해 동안 부세를 납부하지 않았다. 위오가 그를 구속하고 또 황제에게 아뢰어 

『폐하는 저를 발탁하여 경조윤으로 삼았는데 어찌 법을 제한하여 가난한 아래 백성들에게만 시행하게 할 수야 

있겠읍니까?』라고 말하였다. 황제가 태후(太后)에게 들어가 『위오(韋澳)는 범할 수 없다』라고 말하니 

태후는 주리(主吏)를 위하여 조세를 납부하였으며 이에 주리가 석방되었다.
고려 때 왕해(王諧) 29)가 나가서 경상도를 안찰(按察)하였는데 온 도가 두려워 복종하였다.

최이(崔怡)의 아들인 중 만종(萬宗)과 만전(萬全)이 쌀 50여만 석을 쌓아놓고 백성들에게 이식을 취하였는데

측근의 무리들을 내보내어 매우 가혹하게 징수함에 백성들이 가지고 있던 바를 모조리 바쳤기 때문에 조세를

못 바치는 일이 잦았다. 이에 왕해는 『백성들이 조세도 바치기 전에 먼저 사채를 독촉하는 자는 죄를 주겠다』라고

영을 내렸던바, 이에 만종·만전의 무리들이 감히 함부로 굴지 못하여 조세가 때에 맞추어 납부될 수 있었다.
상국(相國) 30) 이원익(李元翼)이 안주(安州)목사가 되었는데 고을의 부세는 관례적으로 변읍에 납부되고 있었다.

아전들이 배로 징수하여 남겨 먹는 것이 대대로 이어와 백성들의 무거운 고통이 되어있었다.

그는 세액을 밝혀 정하여 나머지를 감하고 몸소 부세를 받아들임으로써 부정횡령을 방지하였다.

변읍은 길이 험하고 멀었는데 그가 몸소 오는 것을 보고 크게 놀라서 다투어 술상과 기생을 베풀어 맞이하여

위로하려 하였지만 그는 일체 받지 않았다.
감사 정언황(丁彦璜) 31)이 회양(淮陽)부사가 되었을 때 그 고을의 전세(田稅)는 무명베로 상납되고 있었다.32)

그는 산골 백성들의 가난함을 걱정하여 아전과 백성을 타일러 호랑이를 잡아서 그 가죽을 호조에 바치도록 하고,

그 고을의 일년치 전세조(田稅條) 무명베를 공제케 하였다.]

 

[각주]
1) 전조(田租)·전포(田布) : 전조는 쌀로 내는 전세(田稅)이고 전포(田布)는 무명베로 대납하는 전세(田稅)이다.

2) 공인(貢人) : 대동법(大同法) 실시 이후 대동미(大同米)를 받고서 중앙관아에서 필요한 물품을 조달하던 상인.

3) 공가(貢價) : 공인(貢人)의 물품 조달에 대한 댓가로 내주던 쌀.

4) 조선(漕船) : 지방에서 거둔 세미(稅米)를 조창(漕倉)에서 서울로 운반하던 배.

5) 은결(隱結) : 토지대장인 양안(量案)에 등록되지 않은 경지(耕地). 수령·아전 등이 그 조세를 착복하기 위하여

    고의적으로 은결(隱結)로 하는 경우가 많이 있다.

6) 저가(邸價) : 고을에서 경저리(京邸吏)·영저리(營邸吏) 등에게 역(役)의 댓가로 주는 보수.

7) 진전(陳田) : 황폐화하여 휴경(休耕)하는 경지.

8) 검독(檢督) : 각 면(面)에 나가서 상납전곡(上納錢穀)의 독촉·검수(檢收)를 맡은 자.

9) 조선후기의 목민서인 『목민대방(牧民大方)』에 의하면 검독은 「중서장교(中庶將校) 중의 근간(勤幹)한 자」

    로 차견(差遣 : 사람을 시켜서 보냄)한다 하였다.

10) 가경(遣慶) : 중국 청(淸)나라 인종(仁宗)의 연호. 1796∼1820.

11) 기사(己巳) : 순조 9년(1809)

12) 갑술(甲戌) : 순조 14년(1814)

13) 이때 정호용(丁浩鏞)은 강진군(康津郡)의 해안 마을인 귤동(橘洞)에 거주하고 있었다.

14) 순조 16년(1816)에 전라도암행어사 조만영(趙萬永)에 의하여 고을을 잘 다스리지 못했다는 이유로 파직당함.

15) 예관(兒寬) : 중국 한(漢)나라 때의 천승(千乘) 사람으로 어사대부(御史大夫)를 지냈다.

16) 좌내사(左內史) : 한무제(漢武帝) 때 설치되어 수(隋)나라 때 폐지된 것으로 관중(關中)을 다스리는 장관(長官).

17) 전(殿)·최(最) : 고과(考課)에 있어서 최하등의 성적이 전(殿)이고 최상등의 성적이 최(最)이다.

18) 하역우(何易于) : 중국 당(唐)나라 때의 인물. 익창(益昌)의 영(令)을 거쳐 뒤에 나강(羅江)의 영(令)이 되었다.

19) 고승간(高承簡) : 중국 당(唐)나라 때의 발해인(渤海人). 시호는 경(敬).

20) 노탄(盧坦) : 중국 당(唐)나라 때의 낙양(洛陽) 사람. 자는 보형(保衡), 벼슬은 호부시낭에까지 이르렀다.

      이길보(李吉甫)와 다투다가 동천절도사(東川節度使)로 좌천되었다.

21) 수안(壽安) : 중국 하남성(河南省)에 있었던 현명(縣名)이다.

22) 조개(趙愷) : 중국 송(宋)나라 때의 우성(虞城) 사람. 자는 숙평(叔平), 시호는 강정(康靖),

      벼슬은 참지정사(參知政事)에까지 이르렀다.

23) 소송(蘇頌) : 중국 송(宋)나라 때 사람. 자는 자용(子容).

24) 시역민전(市易緡錢) : 송(宋)나라 왕안석(王安石)이 실시한 신법(新法) 중의 하나가 시역법(市易法)이었다.

      이는 소상인(小商人)의 물품을 사주기도 하고 또는 그들에게 저리(低利)의 자금을 융자해줌으로써

      호상(豪商)의 횡포를 막아 상품 유통을 원활하게 하려는 제도였다. 민전(緡錢)은 융자금의 이자인 듯하다.

25) 상원(廂院) : 정전(正殿)의 양쪽 옆으로 서로 마주보는 건물.

26) 위오(韋澳) : 중국 당(唐)나라 사람. 자는 자비(子斐), 시호는 정(貞). 한림학사(翰林學士)· 절도사 등을 역임.

      성격이 강직하여 호우(豪右)들이 두려워하였다.

27) 정광(鄭光) : 중국 당(唐)나라 선종(宣宗)의 모후(母后)인 효명황태후(孝明皇太后)의 제(弟).

      절도사를 지내고 호· 운양(雲陽) 2현의 양전(良田)을 크게 하사받았다. 태자태보(太子太保)에 이르렀다.

28) 주리(主吏) : 으뜸 관리(官吏). 여기서는 가신(家臣) 가운데 농장을 주관하는 자.

29) 왕해(王諧) : ?∼고종 33(1246) 경상도안무사(慶尙道按撫使), 진주부사, 동경유수(東京留守)를 지냈다.

     『고려사(高麗史)』양리열전(良吏列傳)에 입전(立傳)되어 있다.

30) 상국(栢國) : 상신(相臣). 조선왕조 때에는 영의정(領議政)· 좌의정· 우의정을 의미하였으니 정승이란 뜻이다.

31) 정언황(丁彦璜) : 선조 37∼현종 13(1597∼1672) 자는 중징(仲徵), 호는 묵공옹(默拱翁),

      본관은 나주(羅州). 강원도관찰사(江原道觀察使)를 지냈다.

32) 내륙(內陸)의 산악지방에서는 전세(田稅)를 포(布)나 전(錢)으로 대납(代納)하는 곳도 있었다.

 

 

★ 軍錢軍布 京營之所恒督也. 察其疊徵 禁其斥退 斯可以無怨矣.
    (군전군포 경영지소항독야. 찰기첩징 금기척퇴 사가이무원의. ) 
    전(軍錢)과 군포(軍布)는 경영(京營)에서 항상 독촉하는 것이다.
    중복하여 징수[첩징(疊徵) 1)]하는가를 잘 살피고 퇴짜 놓는 일을 금해야만 원망을 없앨 수 있다.

 

 

[『한암쇄화(寒巖話)』의 군포(軍布)에 관한 조항에서는 이렇게 말하였다.

『첨정(簽丁) 2)의 법이 황란(荒亂)하고 질서가 없어 군보(軍保) 3) 일근(一根) 4)이 5·6명의 군정 부담을 지게 된다.

이에 넉넉한 민호로서 재력이 있는 자는 아전이 모두 사사로이 처리하고 오직 유망(流亡)하고 빌어먹을 지경에

이른 자들만을 집행하여 상납해야 할 군포의 액수를 채우니 군포 상납이 기일을 어기는 것은 오로지 이 때문이다.』 

무릇 상납물에 있어서는 돈이 가장 폐단이 없고 쌀도 역시 살피기는 쉽지만 그러나 무명베와 삼베는 올이 굵고 가는

등급이 많고 폭이 넓은 것과 좁은 것이 다 값이 다르다. 그 길이에는 본래 소정의 척수(尺數)가 있지만

경척(京尺)· 관척(官尺)· 이척(吏尺)· 민척(民尺)이 만가지로 다르기 때문에 아전의 간교한 노릇은 쉽게 

저질러질 수 있고 백성의 고통스런 사정은 살피기 어렵다. 전일에 곡산의 아전이 군포 거두기를 함부로 하여 

포보포(砲保布) 5) 한 필 값이나 거두어 백성의 원성이 크게 일어나 하마터면 민란이 일어날 뻔하였다.

내가 이 고을에 도임하여 영을 내려 『무릇 군포 바치는 자는 관정(官庭)에서 바치도록 하라』라고 하였다.

몇달이 지나서 한 백성이 군포베를 안고 왔는데 아전이 그 자(尺)를 나에게 올리거늘 양쪽 끝을 보니

분명히 낙인(烙印)이 있었다. 내가 『이것은 어디에서 나온 것인가?』하고 물으니 아전이 『포정사(布政司) 6)에서

반포한 것이다』라고 말하였다. 내가 『허허 어찌하여 이렇게 긴가?』라고 말하고 교노(校奴 : 제사에 관한 일을

맡아보던 구실아치)를 재촉하여 불러 『오례의(五禮儀)』를 찾아오게 하였다. 『오례의』에 베와 비단을 재는 자의

표준도가 있어서 이에 표준자와 낙인이 있는 자를 대조하니 낙인자가 2촌(寸)이나 더 길었다.

이에 아전을 관정에 끊어 엎드리게 하고 『삼군문(三軍門) 7)의 놋쇠자는 곧 『오례의』의 자이다.

너의 낙인자는 어디에서 나온 것이냐?』 하고 힐책하니, 아전은 머리를 조아리며 『본읍에서 만든 것이다』라고

자백하였다. 이에 『오례의』에 준하여 자를 새로 만들고 아전들에게 다음과 같이 지시하였다.

『시노(侍奴)가 자를 잡으면 그 자질이 정밀하지 못하니 마땅히 관정(官庭)에 20척이 되도록 땅금을 그어 

양쪽 끝에 표를 해두어라. 군포베의 가운데를 접어 양쪽 끝을 가지런히 하면 40척이 될 것이다. 

옛날 관례로 나라에 바치는 베는 37척으로 1필(疋)을 삼았고 저자에서 사고 파는 베는 40척으로 1필을 삼았는데 

오늘날에는 베 40척으로 받으니 이미 남는 것이 3척이나 된다.』 이에 백성으로 하여금 군포베를 제출하게 하고 

중간을 접어서 양쪽 끝을 가지런히 해보니 7척이나 남았다. 나머지를 짤라서 돌려주고 40척으로 군리(軍吏) 8)에게

넘겨주니 군리 역시 아무 소리 없이 기일에 맞추어 상납하였다. 대저 수령은 백성에게 직접 임하는 벼슬이다.

임금은 지존(至尊)하여 몸소 아랫백성에게 임할 수 없기 때문에 나로 하여금 백성을 다스리게 하는 것이니

이치상으로는 당연히 뭇일을 몸소 집행하여 백성의 고통을 살펴야 할 것이다. 그러나 오늘날의 수령은 망령되이

스스로를 존중히 여겨 대체(大體)만을 지키기에 힘쓰고 모든 상납의 일은 전적으로 아전의 손에 내맡겨 

온갖 침학이 자행되어도 들은 척도 하지 않으니 수령의 직임이 어찌 진실로 이와 같은 것일까 ?
완평부원군(完平府院君) 이원익(李元翼)이 안주목사가 되었는데 그 고을의 방변군액(防邊軍額)에 결원이 많아서

그로 인한 침학이 이웃과 친족에게 미쳤다. 이에 그는 관곡을 내어 곡식이 귀한 봄·여름에는 싼 값으로 베를 사서

각 진(鎭)에 내어야 할 군포로 충당하고 가을 추수철에는 다른 정규적(定規的) 부세에 이미 산 군포값에 해당되는

액수를 첨가하니 백성에게는 무겁지 않은 부담이 되고 누적된 폐단이 없어졌다.
「군포설(軍布說)」9)에서는 『간사한 민(民) 10)의 폐해는 간사한 아전보다 심한 바가 있다』라고 하였고,

『시경』에서는 『남자의 탐닉은 그래도 말할 수 있지만 여자의 탐닉은 말할 수조차 없도다』11)라고 하였는데

나는 이에 『아전의 간사함은 그래도 말할 수 있지만 민(民)의 간사함은 말할 수조차 없도다』라고 잇고 싶다.

내가 오랫동안 민간에 있으면서 보니 풍헌(風憲)·약정(約正)·별유사(別有司) 12)·방주인(坊主人) 등은 문서를

뜯어고치고 붓을 함부로 놀려 부정함이 아전보다 심하였다. 무릇 상납물이 한번 그들의 손에 들어가면 태반이

녹아 없어져버리는데 밑돌을 뽑아 위로 올리고 윗돌을 뽑아 밑에 내리고 하여여름에 납부해야 할 것을 春納으로

변경하기를 당장을 쌓는 자가 밑돌을 뽑아 윗돌로 하듯이 한다 필경에는 그 횡령으로 인한 결손이 수만푼수백 냥에

이른다. 그러면 또 부세(賦稅)를 다시 풀어 매겨 징수함으로써 온 방(坊)을 부산하게 하니 이는 큰 좀이다.

무릇 촌민(村民)으로 순박한 자는 애써 풍헌·약정 등의 직임을 회피하는데 오직 부랑·간사한 자가

아전· 좌수(座首)· 별감 등과 체결하여 항상 풍헌·약정 등의 직임에 도(都)都는 居와 같다한다.

그리고는 생선을 사고 닭을 구하여 권세 있는 아전을 아첨으로 섬긴다. 그들의 횡령이 발각되기에 이르면, 

전·좌수·별감 등은 수령의 측근에 있는 자들이니 여러 방법으로 주선하되 혹은 이르기를

『이 방(坊)은 원래 궐액(闕額)이 많은 것이지 그들이 속여 훔친 것은 아니다』하고 혹은

이르기를 『그들은 본래 찢어지게 가난하여 다시 받아낼 수 없다』라고 한다. 수령은 그 말을 깊이 믿어

죄를 범한 그들에게는 장(杖) 한 대 치지 않고 죄없는 백성은 재징수를 면하지 못하니 참으로 한탄스럽다.
방주인(坊主人)이란 자리는 문졸(門卒)이 차지하는 자리이며 문졸이란 것은 소민(小民)들의 호랑이다.

비록 상납이 시급하더라도 마땅히 풍헌·약정만을 엄하게 단속하여 그들로 하여금 기한에 대도록 할 것이지

끝내 호랑이를 민간에 풀어놓아서는 안된다.]


[각주]
1) 첩징(疊徵) : 이중 삼중으로 거듭 징수함.

2) 첨정(簽丁) : 병역의무자인 군정(軍丁)으로 등록 규정하는 행정 처리이다.

3) 군보(軍保) : 군정에는 직접 군역에 종사하는 상번군(上番軍)과 군포(軍布)를 내는 군보가 있다. 보인(保人).

4) 일근(一根) : 규정된 액수내(額數內)의 일원(一員).

5) 포보포(砲保布) : 포군(砲軍) 1명에 보(保)가 3명이 있었던바,  

    그들 포보(砲保)가 군역에 종사하지 않는 대신 바치는 포(布)이다.

6) 포정사(布政司) : 관찰사가 집무하는 관청. 감영(監營)이라고도 한다.

7) 삼군문(三軍門) : 훈련도감(訓鍊都監)·금위영(禁衛營)·어영청(御營廳)으로 한성(漢城)에 있었던 군영(軍營)이다.

8) 군리(軍吏) : 병방(兵房)의 아전.

9)「군포설(軍布說)」 : 정약용(丁若鏞)이 집필한 글인 듯하다.

10) 민(民) : 여기서는 향임(鄕任)층을 가리킨다.

11)『시경(詩經)』 위풍(衛風) 망민장(亡民章).

12) 별유사(別有司) : 방(坊)의 호적(戶籍)이나 전결(田結) 등의 일을 관장하는 향직(鄕職)의 하나이다.



 ★ 貢物土物 上士之所配定也. 恪修其故 捍其新求 期可以無弊矣.
     (공물토물 상사지소배정야. 각수기고 한기신구 기가이무폐의. )
     공물(貢物)과 토물(土物) 1)은 상사(上司)에서 배정하는 것이다. 
     예전의 법식을 성심껏 이행하여 새로이 요구하는 것을 막아야만 폐단을 없앨 수 있다.

 

[정선(鄭瑄)은 말하였다. 수령이 된 자는 옳지 못한 사례를 새로 만들기를 꺼려야 한다. 

옛날에 토산물을 바침으로써 관할 지방에 한없는 폐해를 끼친 경우가 있었으니 교지의 여지가 그런 종류이다.

양성(陽城)이 도주(道州)의 자사가 되었는데 고을에서는 난장이가 많이 태어나 해마다 조정에 바치고 있었다.

양성이 그 생이별하게 되는 것을 불쌍히 여겨 임금에게 아뢰어 『고을 사람들이 다 키가 작아 바치려고 하니

누구를 바쳐야 할지 알지 못하겠다』라고 하였던바 이로부터 그것을 그만 두게 되니 고을 사람들이 감동하여

볕양(陽)자로 아들의 이름을 지었다고 한다.
상우(上虞) 사람인 곽남(郭南) 2)이 상숙현을 맡게 되었는데 우산(虞山) 3)에서 연속(軟粟)이 생산되어 백성 중에

그것을 바치는 자가 있었다. 이에 그는 연속 종자를 없애도록 급히 명령하고는 일컫기를 

『앞으로 상숙현의 폐해가 될까 두렵다』라고 하였던바, 백성을 위하여 멀리 생각함이 이와 같았다.

손백순(孫伯純) 4)이 해주(海州)를 맡게 되었는데 조정에서 군기를 징발하였던바,

노춘(弩椿) 5)· 전간(箭幹) 6) 등의 종류였다. 해주에서는 원래 이런 것들이 생산되지 않아서 백성들이 부레풀로써

대충하기를 청함에 손순효는 『노춘· 전간이 해주에서 생산되지 않는다는 것을 모두가 알고 있지만 

만일 토산물로써 그것을 대신하면 해마다 부과되어 그칠 날이 없지 않을까 두렵다』하니 

당시의 식자들은 지당한 말이라고 여겼다.

장구 7)가 통주(通州) 8) 판관(判官)이 되어 출병하여 변경을 수비하였는데 그 주(州)에 수리나 기러기 깃이 달린

화살 10만 개를 징발하였다. 이에 그 값이 뛰어올라 구할 수 없게 되매 장구가 『화살은 날아가서 없어지는 것이니

어떤 깃인들 안되겠는가?』 하고 말하니 절도사는 『마땅히 상서성(尙書省)에 보고하겠다』라고 말하였다.

장구는 말하기를 『여기는 수도에서 2천 리나 되고 백성들은 살기가 다급하니 어찌하겠는가?

만일 문책이 있으면 내가 허물을 떠맡겠다』라고 하였던바 하루 사이에 깃값이 몇 배나 떨어졌으며

상서성(尙書省)에서도 결국 청원을 들어주었다.
진인(陳麟) 9)이 민현 10)을 맡게 되었는데 중앙에서 사자(使者)가 내려와 취우(翠羽)11)를 요구하였던바

다른 고을은 명령대로 하였으나 오직 진인만은 응하지 않았다. 

사자가 노하여 『너는 무엇을 믿고 감히 그러느냐?』라고 하자, 

『오직 자신을 결백하게 하여 스스로를 지킬 따름이다』라고 대답하였다.

송택(宋澤) 12)이 액현(掖縣)을 맡게 되었는데 그때에 호부(戶部)가 제거사(提擧司) 13)를 통하여 우황(牛黃)을

부과하였던바, 재촉이 성화 같았다. 백성은 다투어 소를 잡아 우황을 마련하였지만 송택만은 유독 제거사에

장계(狀啓)14)로 아뢰어 말하기를 『소가 돌림병을 만나면 병이 들어 우황이 생기지만 지금은 오랫동안 태평성세라

화기가 온 고을에 충만하여 소도 모두 살이 쪄서 우황을 마련할 수가 없다』라고 하니 사자도 힐책하지 못하였고

온 고을이 우황 부과에서 면제되었다.
공규(孔戣) 15)가 화주(華州)16)의 자사가 되었는데 고을에서 해마다 바치는 공물을 조사해 보았던바,

해충(海蟲)· 담채(淡菜)· 합감 등 먹음직한 것들이었고 바다에서 수도에까지 수송하는 데 드는 인원이

해마다 43만 6천 명이나 되었다. 이에 그는 황제에게 건의하여 그 공물을 혁파하였다.
『다산록(茶山錄)』17)에 이르고 있다. 『제주에서는 전복이 나는데 크기가 자라만 하다. 잿속에 넣어두었다가

꺼내어 햇볕에 말리는데 대꼬챙이로 꽂은 흔적이 없기 때문에 이름하여 무혈복(無穴鰒)이라고 한다.

수년 이래로는 감사가 이를 요구하여 점차 민폐가 되었다. 또 강진· 해남 등에서는 이른바 생달자(生達子)라는 것이

있는데 그 나무는 겨울에도 푸르고 잎은 마치 산다(山茶)와 같았는데 그 기름을 짜서 등창·발찌를 치료할 수 있었다.

이에 수년 이래로 감사가 요구하여 점차 민폐가 되었다. 』 이와 같은 일을 수령이 이어받아서는 안된다.
조계원(趙啓遠) 18)이 수원부사(水原府使)가 되었는데 그 고을의 밀면(蜜?)俗名이 藥果이다은 나라 안에서도

유명하였다. 인조(仁祖)가 병이 들었는데 당시 어주(御廚)19)에는 먹을 만한 것이 없었다. 환관이 사람을 보내어 

수원부의 약과를 구하였던바 조계원은 『고을에서 사사로이 바치는 것은 신하로서 군주를 섬기는 체모가 아니다.

조정의 명령이 없으면 바칠 수 없다』라고 말하였다. 인조가 이를 듣고 웃으면서 말하기를 『비록 군신의 사이라

할지라도 어찌 인척으로 얽힌 인정마저도 없을 것인가?』라고 말하였다.우리말에서 藥이란 것은 蜜이다.

고로 蜜飯은 약밥이라고 하고 蜜酒는 약주라고 하며 蜜果는 약과 라고 한다
유정원(柳正源)이 자인현감(慈仁縣監)이 되었는데 관찰사가 갈려 돌아가게 되었다. 신구 관찰사의 영송에 고을에서

담비 가죽 300장을 바치도록 되어 있었는데 그가 거듭 구 관찰사에게 『담비 가죽 300장이면 말 300필을 잡는 데

해당되니 조그마한 고을이 감당할 수 있는 바가 아니다』라고 말하니,

구 관찰사가 그 수를 감하여 40장으로써 정액을 삼았다.
주광제(朱光霽)가 중경부(重慶府) 20) 통판(通判)이 되었는데 스스로 청렴과 검약을 존숭하였던바, 일에 당하여서도

그런 태도를 견지하였다. 하루는 감사(監司)가 은을 내어 비녀를 사들이라고 하매 주광제는 은을 가지고 

감사에게 들어가 아뢰기를 『통판은 어려서부터 단지 독서만 알았지 비녀 만드는 것은 배우지 못했다』라고 하니 

감사는 성은 났으나 한편 부끄럽기도 하여 그만두었다.]

 

[각주]
1) 토물(土物) : 토산물(土産物). 대동법(大同法) 실시 이후에도 약간의 특수한 공물(貢物)은 남아있었다.

2) 곽남(郭南) : 중국 명나라 사람으로 상숙지현으로 있다가 정통(正統) 12년(1447)에 치사(致仕)하였다.

3) 우산(虞山) : 상숙현(常熟縣)의 서북쪽에 있었던 산(山)으로 지금의 오산(吳山)이다.

4) 손백순(孫伯純) : 손순효(孫舜孝).

5) 노춘(弩椿) : 참죽나무 활.

6) 전간(箭幹) : 화살대.

7) 장구 : 금(金)나라 때 임영(臨潁) 사람. 자는 백영(伯英).

8) 통주(通州) : 중국 하북성(河北省)에 있었던 주명(州名)이다.

9) 진인(陳麟) : 원(元)나라 때 온주인(溫州人). 자는 문소(文昭).

10) 민현 : 수대(隋代)에 설치한 현(縣)이다. 복건성(福建省) 각후현(閣侯縣)이다.

11) 취우(翠羽) : 물총새의 날개.

12) 송택(宋澤) : 청(淸)나라 때의 유양인(酉陽人). 자는 이경(理卿).

13) 제거사(提擧司) : 중국 송대(宋代) 이래 상평(常平)·수리(水利) 등의 특별 관리관(管理官)으로 설치되었는데

     청대(淸代)에는 특별세의 징수기관인 염과제거사(鹽課提擧司)만 남았다.

14) 장계(狀啓) : 왕에게 올리는 보고서.

15) 공규(孔戣) : 중국 당(唐)나라 사람. 자는 군엄(君嚴), 시호는 정(貞).  

      간의대부(諫議大夫)· 화주자사 등을 거쳐 예부상서(禮部尙書)를 역임하였다.

16) 화주(華州) : 지금의 중국 섬서성(陝西省) 화주현(華州縣)이다.

17) 『다산록(茶山錄)』 : 정약용(丁若鏞)이 쓴 책.

18) 조계원(趙啓遠) : 선조 25∼현종 11(1592∼1670) 자는 자장(子長), 호는 약천(藥泉), 본관은 양주(楊州),

      시호는 충정(忠靖). 충청(忠淸)·전라(全羅)·함경도(咸鏡道)의 관찰사(觀察使)를 거쳐 형조판서를 지냈다.

19) 어주(御廚) : 관중(官中)의 주방(廚房).

20) 중경부(重慶府) : 중국 송대(宋代)에 설치한 부(府)이다. 지금의 사천성 파현(巴縣)에 있었던 부(府)이다.

 

雜稅雜物 下民之所甚苦也. 輸其易獲 辭其難辦 斯可以无二無咎矣.
    (잡세잡물 하민지소심고야. 수기이획 사기난판 사가이무이무구의. )
    잡세(雜稅)와 잡물(雜物)은 가난한 백성들이 심히 고통으로 여기는 것이다. 
    쉽게 마련할 수 있는 것만 나라에 납부하도록 하고, 마련하기 어려운 것은 거절해야 
 

    두번 다시 허물이 없을 것이다.  

 

[이사중(李師中) 1)이 낙주(洛州) 2)를 맡게 되었는데 백성이 다세(茶稅)를 바치지 못하여 잡혀오는 자가  

심히 많았다. 이사중은 그들을 관대하게 놓아주고 마을마다 궤짝 하나를 설치하게 하고 이름을 적고  

날마다 1전씩을 납부하도록 하였던바, 연말에 미납액이 다 채워졌다.
조세환(趙世煥) 3)이 동래부사(東萊府使)가 되었는데 청렴한 자세로 공무(公務)에 봉사하여 상업세로 받은 은을

호조에 바친 것이 아홉 달 동안에 무려 1만 4천여 냥쭝에 이르렀던바 전에 없던 일이었다. 더우기 자기 수입으로써

백성의 부세도 모두 덜어주매 관찰사가 왕에게 보고하니 임금이 말을 하사하여 그를 칭찬하고 장려하였다.
기공(祈公) 두연(杜衍)이 영흥부(永興府)를 맡게 되었는데 그때 하(夏)땅의 사람들이 반란을 일으켰다.

섬서(陝西)지방이 그 병란에 제일 시달렸는데 아전이 그 틈을 타서 탐학하고 징수 독촉을 박절히 하여

백성은 파산하게 되어 스스로 목매거나 강물에 투신하여 죽는 자까지 있었다.

이에 그는 물건의 비싸고 쌈과 길의 원근을 헤아려 징수기일을 연기하여 차례로 바치게 하니

이로 말미암아 물건값이 뛰어오르지 않고 아전은 손을 쓸 수가 없게 되었다.
이당(李簹) 4)이 양구현감(楊口縣監)이 되었는데 고을에는 주원(廚院) 5)에 백토(白土) 6)를 납부하는 부담이 지워져 있어 커다란 민폐를 이루고 있었다. 그가 부임하여 처음 수레에서 내리자마자 역부(役夫)가 흙에 깔려 죽는 것을 

보고 측은함을 참지 못하여 한편으로는 경사(京司)에 가서 호소하고 한편으로는 감영(監營)에 낱낱이 보고하여

드디어 백토의 부담이 면제되었다. 후에 주원(廚院)에서 왕에게 아뢰어 청하여 장차 백토의 부담이 환원되려

할 즈음에 마침 그가 차원(差員) 7)으로 명을 받들어 들어가 왕을 뵙게 되었던바, 그는 백토의 수량을 반감하고

아울러 수륙(水陸)으로 옮져 나르는 작업도 면제하여 주며 또 경관(京官)은 보내지 말고 따로이 강원도 안의

수령 한사람으로 그 일을 관리케 해주기를 청하였는데 모두 왕의 허락을 받았다.
상국(相國) 이경여(李敬輿) 8)호는 白江이다가 광해군 때에 충원현감(忠原縣 9)監)이 되었는데,

어느 여름날, 고을 백성으로 하여금 칡을 캐게 하였던바 백성들은 어디에 쓰려고 그러는지 짐작조차 못하였다.

다음해 봄에 영건도감(營建都監)10)에서 과연 칡 수천 다발을 징수하매 칡값이 삼값과 같아졌으나

그 고을 백성은 미리 마련하였기때문에 유독 편안하였으며 더우기 도감에 내고도 남는 것으로는 

다급한 이웃 고을에 대어주고 그 값을 대략 헤아려 받아서 다른 부세(賦稅)에 대충하였다. 

영건도감에서는 또 장목(長木) 수만 개를 징수하였다. 그는 고을 북쪽에 있는 산에 원래 재목이 무성함을 일찌기 

보고서는 특별히 벌목을 제한· 금지하여 두었던바 장목의 징수에 당하여 강상(江上)에 나아가 여러 상인들을 

불러놓고 『너희들 중 능히 저 나무들을 베어서 도감에 수송할 수 있는 자에게는 당연히 그 반을 주겠다』라고 

말하니 상인들은 모두 기뻐 날뛰며 호응하였다.

이웃 고을 백성들은 장목을 마련하느라고 부산하였으나 그 고을 사람들만 유독 야호(邪許)11)의 역(役)이 없었다.
이시현(李時顯)12)이 성주목사(星州牧使)가 되었는데 때마침 산릉도감(山陵都監)13)에서 고을에 철물을 

부과하였다. 부담량은 많고 기한은 촉박하여 아전들은 혹 마련하지 못하면 죄를 입지나 않을까 두려워하였으나

유독 그만은 태연하기가 마치 아무 생각 없는 자 같았다. 기일이 바짝 촉박함에 아전들은 더욱 애가 타고

위축되었는데, 드디어 그는 사형당하지 않을까 걱정하는 죄수 두 사람을 관정(官庭)에 끌어내어

『너희가 철 약간을 마련해오면 내 마땅히 너희를 용서하리라』라고 말하니 죄수들은 기꺼이 응하면서

『심히 다행입니다』라고 하였다. 그때 두 죄수의 자손과 친척이 문 밖에 빽빽히 몰려들어 

호미· 가래· 도끼· 낫 등을 다투어 바치니 잠시 동안에 일이 완료되었다.
생각컨대 이는 백성의 농기를 거두어서 윗 관청의 징수에 응하는 것이니 좋은 방편이라고는 할 수 없다.
『상산록(象山錄)』에서 말하고 있다. 『가경(嘉慶) 기미(己未)14) 봄에 칙사(勅使)15) 장승훈(張承勛)이

황주(黃州)에 이르러 관찰사에게 이야기하기를 「나의 장인이 일찌기 칙사로서 황주에 도착하였을 때

당시의 관찰사가 토산물인 주반(朱槃)우리말로 函支라고 한다 5합(合)을 기증하였던바 장인은 돌아와서

내 처에게 주었다. 세월이 오래 되어 부서지고 헐었는데 마침 내가 또 이 행차를 하게 되니 

아내가 더 구해 달라고 하여 감히 괴로움을 끼치려고 한다」라고 하였다. 

관찰사는 뒷날에 폐단이 될까 저어하여 구실을 붙여 이를 거절하였다. 

왕이 이를 듣고는 「칙사가 그런 대단찮은 물건을 구하는 데도 이를 거절하는 일이 어찌 있을 수 있는가?」라고 

말하고, 영을 내려 밤을 새워서라도 주반을 만들어서 칙사가 돌아가는 길에 기증하도록 하였다. 

이에 감사는 갑자기 곡산부(谷山府)에 영을 내려 주반 만들기를 성화같이 재촉하였으나 칙사가 귀로에

들릴 날은 3일 밖에 남지 않았고 역참(驛站)에서 곡산부의 나무 나는 곳은 300여 리나 되었다.

담당 아전은 스스로 목을 맬 것같이 애원하고 호소하였다. 나는 몰래 사람을 서울에 보내 주반을 사오게 하여

이를 바쳤더니 반송사(伴送使)16) 金思穆17)이 (관찰사曺允大18) 깜짝 놀라서 귀신 같다고 칭찬하였지만

서울에서 사온 줄은 몰랐다. 』 주반(朱槃)은 대단히 커서 물 10여 분(盆)이 담긴다.]

 

[각주]
1) 이사중(李師中) : 중국 송(宋)나라 때의 초구(楚丘) 사람. 자는 성지(誠之).

2) 낙주(洛州) : 지금의 중국 하남성(河南省) 낙양현(洛陽縣)에 있었던 주(州)이다.

3) 조세환(趙世煥) : 광해군 7∼숙종 9(1615∼1683) 자는 의망(?望), 호는 수촌(樹村),본관은 임천(林川).

    전라도관찰사(全羅道觀察使)·병조참지(兵曹參知)·승지(承旨) 등을 역임하였다.

4) 이당 : 현종 2∼숙종 38(1661∼1712) 자는 의숙(?叔), 본관은 덕수(德水).

5) 주원(廚院) : 사옹원(司饔院)의 별칭. 궁중의 공물(供物)·향연(饗宴) 등을 맡은 관아.

    조선개국초에 설치되어 1895년에 전선사(典膳司)로 개칭되었다.

6) 백토(白土): 자기(磁器)의 제조에 쓰이는 것으로 흰색의 가는 흙이다.

7) 차원(差員) : 어떤 특정의 임무를 수행하기 위하여 뽑혀진 관원.

8) 이경여(李敬輿) : 선조 18∼효종 8(1585∼1657) 자는 직부(直夫), 호는 백강(白江)·봉암(鳳巖),

    본관은 전주(全州), 시호는 문진(文眞). 벼슬이 영의정에까지 올랐다. 저서에『백강집(白江集)』이 있다.

9) 충원현(忠原縣) : 광해군 5년(1613) 충주목(忠州牧)이 충원현(忠原縣)으로 강등되었다.

    인조 1년(1623)에는 다시 충주목(忠州牧)으로 환원되었다.

10) 영건도감(營建都監) : 묘사(廟社)· 관전(官殿) 기타 건물의 창건(創建)· 중건(重建) 개수(改修) 등의

      일을 위하여 임시로 설치하는 관아(官衙).

11) 야호(邪許) : 노동의 구호이다.

12) 이시현(李時顯) : 1671, 1672년간에는 개령현감으로 있으면서 진정에 좋은 치적이 있었다 하여 표창을 받았고,

1674년에는 성주목사로서 치군(治郡)이 우이(優異)하다 하여 통정대부(通政大夫)의 계(階)를 받았으며,

1676년에는 경상도암행어사(慶尙道暗行御史) 권유(權愈)에 의하여 파직되었다.

13) 산릉도감(山陵都監) : 능(凌)을 쌓기 위하여 임시로 설치하는 관아(官衙).

14) 기미(己未) : 정조 23년(1799).

15) 칙사(勅使) : 중국황제(中國皇帝)의 칙명(勅命)으로 조선에 파견되는 중국의 사신.

16) 반송사(伴送使) : 중국의 사신이 돌아갈 때 호송의 임무를 띤 임시 관직.

17) 김사목(金思穆) : 영조 16∼순조 29(1740∼1829) 자는 백심(伯深), 호는 운소(雲巢),본관은 경주(慶州),

      시호는 경헌(敬獻). 형조· 이조· 예조의 판서를 역임하였으며 영중추부사(領中樞府事)에까지 이르렀다.

18) 조윤대(曺允大) : 영조 24∼순조 13(1748∼1813) 자는 사원(士元), 호는 동포(東浦),본관은 창녕(昌寧).

      이조(吏曹)·병조(兵曹)의 판서(判書)를 역임하였으며 지중추부사(知中樞府事)에까지 이르렀다.

 

 

★ 上司以非理之事 强配郡縣 牧宜敷陳利害 期不奉行.
    (상사이비리지사 강배군현 목의부진리해 기불봉행. ) 
    상사(上司)에서 이치에 어긋난 일을 강제로 군현에 배정한다면 
    수령은 마땅히 이해(利害)를 두루 개진하여 시키는 대로 받들어 행하지 않도록 해야 할 것이다.

 

[강제로 배정하는 영[吏文으로는 이를 卜定]은 거의 다 따르기 곤란한 것이다. 혹은 고르지 못한 요역을

징발하고 혹은 마련하기 어려운 물건을 요구하고 혹은 납부물을 퇴짜놓고는 다른 물건을 사 바치게 하면서 

싼 것을 비싸게 팔고 혹은 백성을 뽑아 잡역을 시킴에 가까운 지방은 그냥 두고 먼 지방에 배정하는 등 

가지가지로 이치에 맞지 않아 받들어 행할 수 없는 것이면 사리(事理)를 낱낱이 보고하되 

그래도 들어주지 않으면 그 때문에 파직을 당할지라도 굴해서는 안된다.

장요(蔣瑤)가 양주(楊州)를 맡게 되었는데 강빈(江彬) 1)곧 왕의 총애를 받는 신하였다이 왕령이라고 하며

양주의 대호(大戶)를 보고하라고 하였다. 이에 장요는 이렇게 보고하였다. 『대호라고는 단지 넷밖에 없다.

그 첫째는 양회염운사(兩淮鹽運司)이고 그 둘째는 양주부(楊州府)이고 그 세째는 양주초관 2)이며

그 네째는 강도현(江都縣) 3)이다. 양주 백성들은 궁하여 대호(大戶)가 따로이 없다. 』
강빈이 또 왕령이라고 하며 『조정에서 수놓는 여자를 뽑아 올리라고 한다』라고 말하니

장요는 『양주에는 수놓는 여자가 셋밖에 없다』라고 말하였다. 강빈이 『어느 곳에 있는가?』하자,

그 물음에 장요가 『민간에는 도무지 없고 나에게 다만 친딸 셋이 있을 뿐이니 조정에서 꼭 뽑으려고 한다면

언제든지 대비하고 있겠다』라고 말하니 강빈은 말이 막혀서 그 일은 드디어 취소되었다.
당간(唐侃)이 무정주(武定州) 4)를 맡게 되었을 때 마침 군적을 정리하였는데 고을에서 응당 뽑아 보내야 할 자가

1만 2천 명이나 되었다. 당간은 『무정주의 호구는 3만이니 이렇게 되면 고을의 반이 비게 된다』라고 말하고

힘써 다투어 그 일이 취소되었다. 그때 여러 환관(宦官)이 교노(校奴)에게 명령하여 주현(州縣)을 채찍질하며

『유막(帷幕) 5)을 베풀어라. 마련하지 못하는 자는 죽으리라』라고 선언하도록 하였다.

당간은 한 빈 관(棺)을 들어다가 옆방에 넣어두었다. 여러 환관이 공갈 협박하여 돈을 갈취하므로

당간과 같이 일하는 자들은 모두 도망갔으나 당간만은 홀로이 가지 않았다. 일의 형세가 급하게 되자,

당간은 환관들에게 일러 『내가 너희와 더불어 돈 있는 곳에 갈 것이니 거기서 돈을 받아라』라고 말하고

환관들을 옆방속으로 인도하여 관을 가리켜 보이며 『내가 죽을 곳을 마련해왔다. 돈은 줄 수 없다』라고 말하니

여러 환관들은 서로 쳐다만 볼뿐 그를 힐난하지는 못하였다. 그때 도망한 여러 사람들은 모두 죄를 입었으나

당간만은 표창을 받았다. 그는 고을살이하는 곳에서마다 대체로 빈 전대로 돌아왔다.
여공저(呂公著)가 고을을 다스렸는데 전운사(轉運司) 6)에서 유향(乳香) 1만 근(斤)을 운반해 와서 고을에

배당하여 팔게 하였으나백성에게 분배하여 그들로 하여금 팔아서 바치게 하였다 그는 유향을 고을 창고에 집어넣어

두고 비록 여러 차례 공문으로 독촉하고 핍박하였으나 끝끝내 백성에게 강매하지 않았다.
『상산록(象山錄)』에서 이렇게 말하였다. 『가경(嘉慶) 무오(戊午) 7)년 겨울에 조세의 현물 수납을 이미 반이나

끝냈는데 상사(上司) 8)에서 관문(關文)을 보내어 좁쌀 7천 석을 작전(作錢) 9)하라고 독촉하였다.

그것은 본래 서울의 관아10)에서 왕에게 아뢰어 허락을 얻고서 관문을 띄운 것이었지만 나는 그럴 수 없다고

고집하여 그대로 현물로 수납하고 창고를 봉하였다. 서울 관아에서는 나를 죄줄 것을 청하였으나 정조(正祖)가

감사의 장계(狀啓)를 보고는 『잘못은 서울 관아에 있고 정약용은 죄가 없다』라고 하였다.

사표를 내고 돌아가려다가 마침 저보(邸報)를 받아보고는 눌러앉았다.]

 

[각주]
1) 강빈(江彬) : 중국 명(明)나라 때의 선부(宣府) 사람. 무종(武宗)의 총신(寵臣)으로 당대에 권세가 막강하였으나

    무종(武宗)이 죽자 네 아들과 함께 복주(伏誅)당하였다.

2) 초관(抄關) : 중국 명대(明代)에 설치된 관아로서 배의 대물을 취체하고 과세하던 일종의 세관(稅關)이었다.

3) 강도현(江都縣) : 중국 한대(漢代)에 설치된 현(縣). 지금의 강소성(江蘇省) 강도현(江都縣)이다.

4) 무정주(武定州) : 지금의 중국 산동성(山東省) 혜민현(惠民縣)이다.

5) 유막(帷幕) : 사방을 둘러치는 휘장과 위를 가리는 막(幕)으로 접대용 기물이다.

6) 전운사(轉運司) : 지방의 부세(賦稅)를 수도(首都)에까지 수송하는 임무를 맡았던 관아.

7) 무오(戊午) : 정조(正祖) 22년(1798).

8) 상사(上司) : 구체적으로 선혜청이다. 더욱 구체적으로는 선혜청당상(宣惠廳堂上) 정민시(鄭民始)를 가리킨다.

9) 작전(作錢) : 현물부세(現物賦稅)를 금체화(金締化)하는 것이다.

10) 서울의 관아 : 선혜청(宣惠廳)을 가리킴.

 

★ 內司諸宮 其上納愆期 亦且生事 不可忽也.
    (내사제궁 기상납건기 역차생사 불가홀야. )
    내수사(內需司) 1)와 여러 궁방(宮房) 2)에서 쓰는 물건을 상납하는 기일에 맞추지 못하면 
    또한 사단(事端)이 생길 것이니 소홀히 해서는 안된다.

 

[옛날에는 내수사와 여러 궁방의 장토(莊土)가 여러 도에 널려 있었는데 엄인(奄人) 3)· 숙궁 4)등이 사방에서

노략질하여 백성을 괴롭힘이 극에 이르렀다. 영조(英祖)이래로 임금이 이를 걱정하여 바로잡았다.

무토면세전(無土免稅田) 5)의 전세는 해당 고을에 납부하여 작전(作錢)해서 호조에 상납하도록 하고

유토면세전(有土免稅田) 6)은 단지 도장(導掌) 7)만 파견케 하고 궁노(宮奴) 8)를 뽑아 보내지는 못하도록 하니

그 폐해가 비로소 조금 누그러졌다.
연평부원군(延平府院君) 이귀(李貴) 9)가 안산군수로 임명되었는데 고을에는 내수사(內需司)의 노비가 있어

모두 법에 어긋나게 복호(復戶) 10)되고 있었다. 이제 그가 고집하여 복호하지 않았더니 노비가 내수사에 호소하여

작은 도장을 찍은 문서를 가지고 내지(內旨)11)라 일컫고서는 여전히 복호하려고 하였다.

이에 그는 『정말 왕명이 있었다면 마땅히 승정원에서 영이 내렸을 것이다. 작은 도장을 찍은 내지(內旨)라고 하니

고을 수령이 어찌 감히 뜯어보겠는가?』라고 말하고는 내지를 거부하고 받아들이지 않았다.
이세화(李世華)12)가 경상도를 안찰(按察)할 때에 내수사에서 토지를 절수(折受) 13)한다고 경상도에 문서가

잇따라 내려왔던 바 그 결과 절수지가 여러 고을에 걸쳐 연이어져 있어서 나라에서 거두는 전세가 크게 줄어들었다.

또 내수사의 차인(差人)14)들은 소란을 피우며 사납게 굴어 그들이 한번 지나가면 마치 전쟁을 치른 것 같았다.

그는 차인들에게 죄를 따지며 장형을 가하고 장계를 올려 극론(極論)하였다. 왕의 꾸중이 엄하여 감히 그 사실을

아뢸 수 없었고 조정에서는 그 때문에 떨고 있었는데 남구만(南九萬)15)이 그를 구원하여 무사할 수 있었다.
상국(相國) 허적(許積)이 전라감사가 되었는데 후궁(後宮) 조씨가(趙氏家)의 차노(差奴)17)가 감영(監營)에

이르러 어떤 일을 부탁하였으나 그는 사리에 닿지 않는다고 꾸짖고 부탁도 들어주지 않았다.

랬더니 차노가 『사또가 내 부탁을 들어주지 않고도 능히 다른 자리로 영전할 줄 아느냐?』라고 말하자

그는 나졸(羅卒)에게 명하여 도리어 큰 장(杖)으로 쳐서 죽였다. 후궁이 이를 듣고는 가인(家人)들을 단속하여

『임금께서 차노가 내 권세를 믿고 설치다가 죽게 되었다는 것을 만일 들을 것 같으면 견책이 반드시 나에게

미칠 것이다』라고 말하고 끝내 감히 발설하지 못했다.] 〈鄭載崙의 公私聞見錄〉

 

[각주]
1) 내수사(內需司) : 조선왕조의 정5품 아문(衙門)으로 궁중에서 쓰는 미곡(米穀)· 포목(布木)· 잡화(雜貨)·

    노비(奴婢) 등에 관한 사무를 맡아보던 관아. 많은 장토(庄土)·노비(奴婢)를 소유 관리하였다.

2) 궁방(宮房) : 조선왕조 때 후궁(後宮)·대군(大君)·왕자군(王子君)·공주(公主)·옹주(翁主)의 궁가(宮家).

    많은 장토(庄土)·노비(奴婢)를 소유 관리하였다.

3) 엄인(奄人) : 환관.

4) 숙궁 : 궁방(宮房)에 소속된 사무원.

5) 무토면세전(無土免稅田) : 토지의 조세를 나라에 내지 않고 궁방(宮房)에 내도록 되어 있는 민전(民田)이다.

    토지소유권은 민전(民田)의 전주(田主)에게 있다.

6) 유토면세전(有土免稅田) : 궁방(宮房)의 직접 소유지로서 나라에 조세를 내지 않았던 토지이다.

    원문(原文)에는 유토지세전(有土之稅錢)이라고 되어 있는데 이는 오자(誤字)인것 같다.

7) 도장(導掌) : 궁방전(宮房田) 즉 사궁장토(司宮庄土)의 관리인으로서 타조(打租)

    또는 도조(賭租)의 징수를 주된 임무로 하였다. 도장권(導掌權) 자체가 많이 매매되었다.

8) 궁노(宮奴) : 궁방 소속의 노비로서 이 경우에는 타조 또는 도조 의 징수를 위하여 파견되는 노비를 뜻한다.

9) 이귀(李貴) : 명종 12∼인조 11(1557∼1633) 자는 옥여(玉汝), 호는 묵재(默齋), 본관은 연안(延安),

    시호는 충정(忠定). 인조반정에 참여, 정사공신(靖社功臣) 일등으로 연평부원군(延平府院君)에 봉함을 받았다.

    이이(李珥)·성혼(成渾)의 문인으로 서인의 거두였으며 이조·병조의 판서를 역임하였고 뒤에 영의정에 추증.

10) 복호(復戶) : 조선왕조 때 특정한 자에 대하여 전세(田稅)·요역 이외의 공물(大同米) 따위 부세(賦稅)를

      면제해 주던 것. 조선후기에 복호권(復戶權)은 많이 매매되고 있었다.

11) 내지(內旨) : 왕의 명령.

12) 이세화(李世華) : 인조 8∼숙종 27(1630∼1701) 자는 군실(君實), 호는 쌍백당(雙柏堂)·칠정(七井),

      본관은 부평(富平), 시호는 충숙(忠肅). 황해도·평안도·전라도의 관찰사를 역임하였고 호조· 공조· 형조· 

      병조 · 이조의 판서도 거쳤으며 지중추부사(知中樞府事)에까지 이르렀다. 청백리에 녹선(錄選)되었다.

13) 절수(折受) : 주로 내수사(內需司) 또는 궁방에서 무토면세전으로 소속시키거나

      무주지(無主地)를 입안(立案)(소유권을 확인받음)하여 자기의 소유지로 삼는 것을 가리킨다.

14) 차인(差人) : 뽑혀서 파견되는 사람. 내수사(內需司)를 비롯한 궁방(宮房)의 차인(差人)을 관차(官差)라 한다.

15) 남구만(南九萬) : 인조 7∼숙종 37(1629∼1711) 자는 운노(雲路), 호는 약천(藥泉)·미재(美齋),

      본관은 의령(宜寧), 시호는 문충(文忠). 영의정에 이르렀다.

16) 차노(差奴) : 뽑혀서 파견되는 노(奴).

 

 

제 6 장   왕역(往役)

            (일상의 업무 이외에 딴 일에 차출되는 것.)  

 

 

★ 上司差遣 竝宜承順. 託故稱病 以圖自便 非君子之義也.
    (상사차견 병의승순. 탁고칭병 이도자편 비군자지의야. )
    상사(上司)에서 차출해서 파견하면 순순히 받들어 행하는 것이 마땅하다. 
    일이 있다거나 병을 핑계삼아 스스로 편하기를 꾀하는 것은 군자의 도리가 아니다.

 

[상사(上司)에서 차출하여 나로 하여금 왕역(往役)하게 했을 때 내가 사양하여 면하면 

다른 사람에게 차출이 옮겨지게 된다. 그것을 가로맡게 된 사람이 원망하지 않겠는가.

자기가 하고 싶지 않는 일을 다른 사람이 하게 하지 말 것이다.

만약 실제로 사고가 없으면 순응해서 어김이 없는 것이 옳을 것이다. 차출되어 딴 일에 파견되면 

마땅히 진심으로 직분을 다하여 하루의 책임을 다할 것이지 마지못해 해서는 안될 것이다.]

 

 

★ 上司封箋 差員赴京 不可辭也.
    (상사봉전 차원부경 불가사야. )
    상사의 봉한 공문서를 가지고 서울에 가는 인원으로 차출되었을 때에는 사양하면 안된다.

 

[포곡(逋穀)1) 거두는 일, 진전(陳田)을 측량하는 일과 같은 중요한 정사(政事)가 있거나 다른 요긴한 사정이 있어서

잠시도 고을을 떠날 수 없으면 마땅히 그 실제 사정을 아뢰어 관대히 면제해줄 것을 요청할 것이다.
인삼을 공납할 때나 재목을 공납할 때도 역시 사람을 차출하여 서울로 가게 한다.]

 

[각주]
1) 포곡(逋穀) : 체납된 세곡(稅穀)이나 환상곡(還上穀).  


 

★ 宮廟之祭差爲亨官 宜齊宿以行事也.
    (궁묘지제차위형관 의제숙이행사야. )
    궁묘(宮廟)1)의 제사 때 향관으로 차출되면 마땅히 목욕· 재계하고 정성을 들여 행하여야 할 것이다.

 

[오늘날의 향관은 제단이나 사당 곁에서 기생을 끼고 즐기기도 하고 술을 싣고 다니며 행락을 하기도 하는데  

이것은 예가 아니다. 목욕·재계하고 경건하고 청결하게 하는 것을 소홀히하지 않아야 하며, 

행사시에 오르내리고 구부리고 엎드리는 일을 함부로 해서는 안되며, 제기(祭器)의 더러워진 것이나 

이지러진 것을 그대로 써서도 안되며, 희생(犧牲)이 비루먹거나 술이 신 것을 그대로 써서도 안된다.

군자의 마음가짐이 어느 곳을 간들 진정을 다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공규(孔戣)가 광주자사가 되었는데, 전부터 남해(南海)신묘(神廟)에 제사할 때에는 항상 큰바람이 불었으므로

자사는 병을 핑계하여 참가하지 않고 부관(副官)에게 맡겨온 지 오래였다.

공규가 말하기를 『책문(冊文)에 황제의 이름이 있고 그 글에 말하기를 사천자(嗣天子) 아무개는 

삼가 관리 아무개를 보내어 경건하게 제사한다 하였으니 그 공경하고 엄숙함이 이와 같거늘 

감히 받들지 않을 수 있겠는가. 내일 내가 신묘 밑에서 자고 새벽에 제사를 모시겠다』 하였다.

아전이 다음날은 비바람이 세다고 말하였지만 듣지 않았고 다음해의 제사 때도 그는 고집하여 갔다.]

 

[각주]
1) 궁묘(宮廟) : 지방관부(地方官府)의 경계 안에 있는 각 궁(宮)·전(殿)·문묘(文廟) 등을 말한다.

 

 

★ 試院同考 差官赴場 宜一心秉公 若京官行私 宜執不可.
    (시원동고 차관부장 의일심병공 약경관행사 의집불가. )
    시원(試院)에 경관(京官)과 함께 고시관으로 차출되어 과장(科場)에 나가게 되면 마땅히 한결같은 마음으로 
    공정하게 집행하여야 하고 만약 경관이 사사로운 일을 하려고 하면 마땅히 옳지 않음을 고집하여야 할 것이다.

 

[수령으로서 시험관이 되면 반드시 자기 고을 유생들과 서로 관절(關節)을 통하여 사사로운 일을 하려 도모하는데

몇 사람이 그런 은혜를 입는 반면 온 도의 사람이 원한을 품을 것이니 지혜로운 자는 그런 일을 하지 않을 것이다.

또 수령으로서 시험관이 된 사람이 팔짱끼고 입 다물고 허수아비같이 앉아 있는 것도 또한 의가 아니다.

합격자 명단을 임금에게 보고하는 날에는 나도 그 끝에 서명하게 되니 만약 경관이 사사로운 일을 하였으면

그 죄를 나도 또한 나누어 지게된다. 이미 시험관이 되었으면서 어찌 자리만 차지하고 있겠는가.

경관이 졸문(拙文)을 뽑으려 하면 다투어야 하고, 좋은 글을 버리려 하여도 다투어야 하며,

또 뇌물을 받은 흔적이 있으면 다투어야 하고, 사정(私情)을 둔 흔적이 있어도 다투어서 반드시 모든 합격자 명단이

하나라도 공도(公道)에서 나오지 않은 것이 없어야 한 도(道)의 사람이 모두 그의 명성을 찬양할 것이다.

무릇 수령이 된 사람은 그 기량(器量)이 적으면 명예가 한 고을에 그치겠지만

기량이 크면 명성이 한 도(道)에 가득차게 될 것이요, 그의 인품은 이에서 정해지는 것이다.]

 

 

★ 人命之獄 謀避檢官 國有恒律 不可犯也.
    (인명지옥 모피검관 국유항률 불가범야. )
    사람의 목숨에 관계되는 옥사(獄事)에 그 검시관(檢屍官)되기를 피하려 하는 경우, 
    국가에는 이를 다스리는 일정한 법률이 있으니 이를 범해서는 안될 것이다.

 

[『무원록(無寃錄)』의 주(註)에 『검시에는 정해진 기한이 있으니 조금이라도 늦추어서는 안된다.

혹 이웃 고을 수령이 유고(有故)할 경우 다른 고을의 수령같은 道內의 먼 고을 수령이 경내를 지나가면

사고가 난 고을의 수령이 공문을 보내어 복검(覆檢)1389)하기를 청한다』고 하였다. 

(道內의 네 이웃 고을 수령들이 有故할 때에는 他道의 가까운 고을 수령들도 가하다) 

이는 곧 우리나라의 고사(故事)지만, 지금에는 폐지되어 실시하지 않고 있다. 

그러나 마땅히 신칙하여 시행할 것이다.

살피건대 법례가 비록 이러하지만 타도의 인접한 수령을 통첩으로 청했다는 말은 들은 바가 없고 혹 청하였다 

하여도 수령의 부신(符信) 1)을 차고 도경(道境)을 넘는 것도 법으로 금지되어 있으므로 올 수가 없는 것이다.
매양 수령의 고과(考課) 때 보면 『검시를 피했으므로 마땅히 경고하여야 한다』는 것으로써 

그 성적이 중(中)으로 매겨지는 사람이 허다히 많은데 무엇이 괴로와서 이렇게 하여야 할 것인가.

조사관이나 검시관이 된 수령이 결정하기 어려운 옥사가 있으면 자제나 친지(親知)들 중에서 단정하고 결백하며

사리에 밝은 사람 하나를 골라 그 고을에 미리 몰래 보내어 사정을 조사하게 하고 난 후,

수령이 그 고을에 가서 그 사람과 밤을 타서 만나거나 혹 서신으로 서로 통한 후에 간악한 일이나 숨겨진 일을

적발하여야 잘못 판단하는 허물이 없어질 것이다. 매양 보면 조사관이나 검시관이 미행(微行)을 보내지 않고

다만 데리고 온 아전을 심복으로 인정하여 비밀히 여론을 묻지만 아전이 뇌물을 받고 청탁을 들어서

중간에서 농간을 부리니, 혹 첫번째 조사나 검시에는 잘못 판결한 일이 없다가도 두번째 조사나 검시에서

이유 없이 판결을 뒤엎고 옥사의 진상을 의심스럽고 어둡게 함으로써 억울하게 걸린 자가 벗어날 수 없게 한다.

그리하여 혹 본 고을에 또 일이 생기게 하거나 이웃 고을에서 조사하러 온 수령 자신이 허물을 당하게 되기도 하니

참으로 한탄스러운 일이다. 만약 재임한 지 오래 되어 아전이나 군교(軍校) 중에 유능하고 나를 속이지 않을 것이

분명한 사람이 있으면 그를 시켜 미행시키면 안될 것이 없다. 대개 나 자신이 진실로 굳세고 명석하면

비록 본래 간교한 사람이라 하여도 능력 있는 신하가 될 수도 있으니 아전들도 또한 부릴 수 있는 것이다.]

 

[각주]
1) 부검(覆檢) : 두번째로 검시(檢屍)하는 일.
2) 부신(符信) : 수령이 가진 병부(兵符)와 신인(信印).


 ★ 推官取便 僞飾文書 以報上司 非古也.
    (추관취편 위식문서 이보상사 비고야. )
    죄를 심문하는 관원이 자기 편리를 위하여 문서를 거짓 꾸며서 상사에게 보고하는 것은 옛날에 없었던 일이다. 

 

[옛날에는 옥사를 판결하고 형을 집행하는 것이 감히 해를 넘기지 알았다.  

그러므로 한 달에 세 번 이웃 고을의 수령과 함께 심문하여 그 실정을 속히 파악하게 하였던 것이다.  

지금에는 모든 일이 해이해져서 살인을 한 범인도 죽지 않고 해를 넘기며 세월이 흘러 옥중에서 늙어버리고  

이웃 고을 수령과 함께 심문하는 법도 따라서 폐지되었다.  

한번 모여서 심문한 후에는 한 달에 세 번씩 다만 문서만 꾸며서 상사에게 보고하며 상사도 그것을 알고도

또한 이를 용서하며 여러 해가 되어도 다시 거행하는 일이 없다. 이것이 어찌 법을 제정한 본뜻이겠는가.

『주역(周易)』에 『명확하고 신중히 형을 집행하여 옥 속에 오래 머물지 않게 해야 한다』고 하였다.

죽이든 살리든 마땅히 곧바로 판결을 내려야 할 것이다. 어찌 덮어두고 연기할 수 있겠는가.

수령이 추관이 되어 한 달에 세 번씩 법대로 심문하지는 못할지라도 한 달에 한 번씩이라도 직접 나가서

그 실정을 조사함으로써 속히 판결하도록 하는 것이 옳을 것이다.]

 

 

★ 漕運督發 差員赴倉 能蠲其雜費 禁其橫侵 頌聲其載路矣.
     (조운독발 차원부창 능견기잡비 금기횡침 송성기재로의. ) 
     수령이 조운(漕運) 1)의 출발을 감독하는 차사원(差使員)이 되어 조창(漕倉)에 가서 

      그 잡비를 덜어 주고 각종 횡침(橫侵) 2)을 금지한다면 칭송하는 소리가 길가에 가득할 것이다.

 

[조창이 있는 곳은 영남지방은 창원(昌原)에 마산창(馬山倉)이 있고, 진주(晋州)에 가산창(架山倉)이 있고,

밀양(密陽)에 삼랑창(三浪倉)이 있으며, 호남지방은 나주(羅州)에 영산창(榮山倉)이 있고,

영광(靈光)에 법성창(法聖倉)이 있고, 함열(咸悅)에 덕성창(德城倉)이 있으며, 호서지방은 아산(牙山)에

공세창(貢稅倉)이 있다. 내륙지방에서 세곡(稅穀)을 바치는 백성들이 지게로 지거나 수레에 싣고

산을 넘고 골짜기를 지나 조창에 도달하면 사나운 창노(倉奴)와 간활한 창리(倉吏)들이 뱃사공들과 짜고

말질이 이미 양에 넘치고, 저리(邸吏)의 침해는 더욱 악독하여 채찍 맞고 발에 차여 울부짖는 소리가 골목을 메워도

차원으로 나온 수령은 기생을 끼고 노래를 들으면서 이 울부짖는 소리는 못들은 척하니 그 직분을 능히 다한다고

할 수 있겠는가. 마땅히 조창에 가는 날에 먼저 지혜있는 사람을 가만히 조창에 보내어 백성들의 말을 들으면

간악한 무리를 억제하고 지친 백성들을 구제할 수 있을 것이다. 이는 마땅히 곧 실행해야 할 것이다.
강을 이용하는 조운에는 충주(忠州)에 가흥창(嘉興倉)이 있고 원주(原州)에 흥원창(興元倉)이 있다.

언제나 보면 조선(漕船)이 장차 출발할 때에는 창졸(倉卒)과 진장(津長)이 민간의 상선(商船)을 억지로 붙들어

조선을 호송하게 한다는 핑계로 키와 노를 빼앗아 며칠씩 머무르게 하므로 상선 한 척의 뇌물이 걸핏하면

수백푼에 이르게 된다. 차원(差員)은 마땅히 이런 일들을 면밀히 살펴서 엄금하여야 할 것이다.]


 [각주]
1) 조운(漕運) : 배로 물건을 실어 나르는 일.
2) 횡침(橫侵) : 가로채서 빼앗다.

 

 

★ 漕船臭載在於吾境 其拯米曬米 宜如救焚.
    (조선취재재어오경 기증미쇄미 의여구분. )
    조선(漕船)이 자기의 경내에서 침몰하면 증미(拯米)1)하는 일과 
    쇄미(碎米) 2)하는 일은 불타는 것을 구해 내듯이 급히 하여야 한다.

 

[배가 침몰한 곳에서 증미와 열미(劣米) 3)를 나누어주는 것이 백성들에게 큰 폐단이 되고 있다.

대개 증미와 열미는大典4)에 보인다 밥을 지을 수도 죽을 쑬 수도 술을 담글 수도 장을 담글 수도 없으니

천하에 억지스럽고 은혜롭지 못한 일이 이것보다 심한 것이 없다. 물에 빠졌던 쌀은 6두 7승 5홉이 불어나고

1 석이 젖어서 불어나는 양이다. 물에 빠졌던 쌀을 쪄서 말리면 5두 8승 8홉이 준다.

1석을 말렸을 때 줄어든 양이다 말려서 줄어든 쌀로써 불어난 양의 쌀을 갚게 하니 곧 쌀섬마다 남는 양이 많게 되고,

이것이 백성들을 한숨짓고 원망하게 하는 원인이다. 하물며 배가 침몰하는 곳은 언제나 파도가 험한 곳이므로

파선으로 인한 피해를 받는 곳은 해마다 받게 되고 이곳의 백성들은 영원히 이 쌀 때문에 괴로움을 당하니

어찌 딱하지 않는가. 수령으로 이와 같은 액(厄)을 만난 사람은 마땅히 백성들을 구휼하는 것으로써

그 마음을 삼아 죽을 쑬 수도 없게 된 쌀은 모두 썩어버린 쌀로 계산하고大與에 썩은 쌀을 백성들에게 나누어

주어서는 안된다고 하였다 먹을 수 있는 것만 대강 계산하여 나누어주고, 수령은 또 그 봉급을 희사하여

편의에 좇아 운용(運用)하여 백성의 부담을 절반이라도 보조하여 백성으로 하여금 원망이 없게 하여야 할 것이다.
그 배의 침몰에는 일부러 침몰시킨 것이 상당히 많다. 그러나 혐의가 확실하지 않은 것은 죄를 가볍게 다루는 것이

예부터의 도리이다. 고의로 침몰시켰음이 십분 명백하지 않는 것은, 수령이 닦달하여 억지로 옥사를 성립시켜

고의로 침몰시킨 것으로 단정해서는 안된다. 만일에 원통한 경우가 있으면 하늘의 벌이 없겠는가.
박태상(朴泰尙) 5)이 홍주목사(洪州牧使)가 되었을 때 조선이 침몰하였는데, 관가에서 때를 맞추어 건져내지 못하여

쌀이 물 속에서 여러 날 있었기 때문에 썩어서 먹지 못하게 되었고, 백성들은 원통하고 괴로움을 이길 수 없었다.

그가 홍주에 부임한 다음 해에 익산(益山)의 세곡을 싣고 가던 배가 홍주 관내에서 뒤집어졌다는 보고를 받고

100여 리를 즉시 달려갔으나 바닷가에 도착하였을 때에는 날이 이미 저물었다. 

달빛을 타서 배를 띠워 바다로 20여 리를 더 가서야 배가 침몰한 곳에 도착하였는데 

뱃사람들을 동원하여 침몰한 뱃머리를 줄로 매어 끌어내었더니 쌀이 그대로 실려 있었다. 

옮겨 싣고 바닷가로 나와서 말렸더니 쌀이 많이 상하지는 않았었다.

마침 흉년이었으므로 백성들이 뒤질세라 다투어 가져갔고 이로써 구제된 백성이 많았다.]

 

[각주]
1) 증미(拯米) : 배가 침몰하여 물에 빠진 것을 건져내는 일, 혹은 그러한 쌀.

2) 쇄미(碎米) : 물에 빠졌던 것을 건져 말리는 일, 혹은 그러한 쌀.

3) 열미(劣米) : 쇄미(碎米)를 가리킨다.

4)『속대전(續大典)』 호전(戶典) 조전조(漕轉條). 이에 의하면 『조선(漕船)의 침몰한 곳이 본관으로부터

    1일정(日程)인 경우는 증미(拯米)와 건열미(乾劣米)를 본관(本官)이 전담 개색(改色)하고,

    2일정(日程)이 넘는 경우는 증미는 당해 지방관이 개색(改色)하며 건열미(乾劣米)는 본관이 비납(備納)한다』
5) 박태상(朴泰尙) : 인조 14∼숙종 22(1636∼1696) 자는 사행(士行), 호는 만휴당(萬休堂)·존성재(存城齋),

    본관은 반남(潘南), 시호는 문효(文孝). 이조각서(吏曹刻書)를 지냈다.


 
★ 勅使送迎 差員護行 宜亦恪恭 毋俾生事.
    (칙사송영 차원호행 의역각공 무비생사. )
    칙사(勅使)를 맞이하고 보낼 때 차사원(差使員)으로 보호할 책임을 지게 되면 
    역시 각별히 공경하여 그들이 트집잡는 일이 생기지 않도록 하여야 할 것이다.

 

[영위사(迎慰使) 1)·문안사(間安使) 2)는 혹 수령을 임시로 차출하며 이 밖에도 호행차사(護行差使) 3)·

대강차사(擡杠差使) 4) 등 그 명칭이 대단히 많지만 요컨대 이 임무는 오직 유순하게 수행하여 트집잡는 일이

생기지 않게 하면 원망이 없다. 항상 보면 칙사를 맞이하는 여러 관원들이 분답한 가운데 스스로 그들이 트집잡을

일을 만들어놓고 서로 옥신각신하는데 진실로 민망한 일이다. 칙사가 나가는 길가의 여러 고을에서

아전과 군교(軍校)들이 횃불 들어 길 밝히는 일을 핑계로 백성들을 침학하는데,

내가 비록 차원으로서 한때 지나가는 일이지만 이런 일은 엄금하고 통렬하게 징계하여야 한다.
대강(擡杠)을 운반하는 데 있어서는 강을 건너기가 가장 염려스럽다. 비록 다리가 있어도 사람과 말이

서로 붐비므로 역졸(驛卒)이 개울물을 건너가다가 칙사의 옷을 적시는 경우가 있어 이것이 트집거리가 되어 견책을

당하는 사람이 많다. 이 일을 가장 엄하게 살펴야 한다.나룻배를 오르내릴 때도 역시 물에 떨어지는 경우가 있다.]

 

[각주]
1) 영위사(迎慰使) : 조선시대 중국의 사신이 올 때 이를 영접하기 위하여 파견하는 관리.

    중국사신이 압록강을 넘은 후 서울에 들어올 때까지 다섯곳에 영위사를 보내어 위문한다.

    처음에는 선위사(宣慰使)라 하였다가 정조(正祖) 때부터 영위사라 하였다.

2) 문안사(問安使) : 조선시대 중국에 문안 가던 사신.

3) 호행차사(護行差使) : 중국사신이 올 때 그 일행을 호송하기 위하여 차출되는 관리.

4) 대강차사(擡杠差使) : 중국사신을 승여(乘輿)로 호송하기 위하여 차출된 관리.

 

 

★ 漂船問情 機急而行艱 勿庸遲滯 爭時刻以赴.
    (표선문정 기급이행간 물용지체 쟁시각이부. )
    표류선(漂流船)을 문정(間情) 1)하는 일은 사정은 급하고 실행하기는 어려운 것이니 
    지체하지 말고 시각을 다투어서 그곳으로 달려가야 한다. 

 

[표류선을 문정하는 데는 스스로 힘써야 할 것이 다섯 가지가 있다.
1. 외국인과의 예의는 마땅히 서로 공경하여야 하는데, 보통 보면 우리나라 사람은 저들의 깎은 머리와

좁은 옷소매를 보면 마음속으로 그들을 업신여겨서 접대할 때의 문답에 체모를 잃게 되고 경박하다는 이름이

천하에 퍼지게 되니 이것이 첫째로 조심할 일이다.

각별히 공손하고 충실하고 신의 있게 하여 큰 손님을 대하듯이 하는 것이 옳다.
2. 우리나라 법에 표류선 안에 있는 문자는 인쇄본이거나 사본이거나를 막론하고 모두 초록하여 보고하도록

규정하고 있다. 왕년에 어느 표류선이 몇천 만권의 책을 가득 싣고 무장(茂長) 앞바다에 정박하였는데

이를 조사한 관리들이 의논하기를 『장차 이것을 모두 초록하여 보고하려면 정위조(精衛鳥) 2)가 흙을 물어다

바다를 메우는 것과 같을 것이요, 만약 그 가운데 몇가지만 골라서 초록하면 반드시 엉뚱한 화를 당하게 될 것이다』 하고 드디어 모래밭을 파고 수만 권의 책을 그 속에 묻어버리니 표류인들도 크게 원통해하였지만 

어찌 할 수 없었다. 나의 친구 이유수(李儒修) )가 3그 뒤에 무장현감이 되어 모래밭에서『삼례의소(三禮義疏)』4)

『십대가문초(十大家文?)』5)와 같은 몇질의 책을 얻었는데 아직도 물에 젖은 흔적이 있었다.

내가 강진(康津)에 도착하여 『연감유함(淵鑑類函)』6) 한 권을 얻었는데 이미 심하게 썩었기에

『이 책이 무장으로부터 온 것이 아니냐』 하고 물었더니 그것을 가지고 있던 사람이 크게 놀랐다.

대개 세상일이란 것이 본래 힘이 미치지 못하여 이루지 못하는 것은 죄가 되지 않는다.

산을 끼고 바다를 건너라 하였을 때 신하로써 『할 수 없읍니다』 하고 거절하였다고 하여 정부에서 죄를 주면

이것이 이치에 맞는 일이겠는가. 그런즉 마땅히 모든 서적을 진열하고 다만 책이름만을 기록하되

그 권수를 상세히 해두고 보고하기를 『한우충동(汗牛充棟) 7)할 정도의 책을 졸지에 초록할 가망이 전연 없으므로

다만 책이름만을 기록하였다』 하면 되지 않겠는가. 이 때문에 견책을 당하더라도 오직 웃음을 머금고 처벌을

받는 것이 마땅하겠거늘 이에 도둑의 습관으로 보물을 함부로 버린다면 그들 외국인이 우리를 무엇이라 하겠는가.

매양 무슨 일을 당한 때마다 오직 이치에 따르도록 마음을 가지고 벼슬이 떨어질까 겁을 내는 일이 없으면

이런 일이 없을 것이다.
3. 표류선을 문정하는 일은 반드시 섬에서 일어난다. 섬사람들은 본래 호소할 길 없는 사람들인데 조사하는 일에

따라간 아전들이 조사관의 접대를 빙자하고 침탈을 마음대로 하여 솥·항아리 등까지 남기지 않는다.

표류선이 한번 지나가고 나면 몇개의 섬이 모두 망하기 때문에 표류선이 도착하면 섬사람들은 반드시 

칼을 빼어들고 활을 겨누어서 그들을 죽일 기색을 보여 그들로 하여금 도망가게 한다. 

또 혹시 바람이 급하게 불고 암초가 사나와 파선 직전에 있는 자들이 구원을 청하며 애원하여도 

섬사람들은 엿보기만 하고 나오지 않으며 침몰하도록 내버려둔다. 

배가 침몰하고 사람이 죽고 나면 이웃이 비밀히 모의하여 배와 화물을 불태워서 그 흔적을 없이 한다.

10여 년 전에 나주(羅州)지방의 여러 섬에서 이런 일이 여러 번 있었는데 태워버린 염소가죽이 수만 벌이고

감초(甘草) 탄 것이 수만 곡(斛)이었다는데 혹 불에 타고 남은 것이 있어서 내 눈으로 직접 보았다.

왜 이런 짓을 하는가 하면, 본래 아둔한 수령들이 아전들을 단속하지 못하고 나쁜짓을 마음대로 하게 버려두므로

백성들은 눈물을 흘리면서도 이런 짓을 해버리는 것이다. 

해외의 여러 나라가 만약 이 일을 들으면 우리를 사람고기를 포(脯)로 뜨거나 씹어먹는 나라로 여기지 않겠는가. 

그러므로 표류선을 문정하는 관리들은 마땅히 눈을 밝게 뜨고 엄하게 살펴서 아전들의 침학을 금지시켜야 한다. 

이를테면 큰 집 한 채를 따로 빌어서 가마솥을 늘어놓고 같이 간 아전들을 한집에 같이 있게 하며 

그들이 먹는 쌀이나 소금은 관에서 돈을 주고 사들여서 날마다 배당하여야 할 것이다. 

문정관으로 나가는 날에 별도로 계획하여 한톨의 쌀이나 한줌의 소금이라도 그곳 백성에게 피해를 끼치지 않게 

한다면 출장나온 하루의 책임을 어느 정도 메울 수 있을 것이다.

필경에는 어쩔 수 없이 육지사람이나 섬사람에게서 그 비용을 조금씩 거두게 된다
4. 좋은 것을 보고 실천하는 것은 작은 일도 그래야 한다. 지금 해외 여러 나라의 선박제도가 기묘하여 운항에

편리하다. 우리나라는 3면이 바다로 둘러싸였는데도 선박제도가 소박하고 고루하다.

표류선을 만날 때마다 그 선박제도의 도설을 상세히 기술하되, 재목은 무엇을 썼고 뱃전의 판자는 몇장을 썼으며,

배의 길이와 넓이 그리고 높이는 몇 도나 되며, 배 앞머리의 구부리고 치솟은 형세는 어떠하며,

돛· 돛대· 뜸· 닻줄의 제도와 상앗대·노·돛대·키의 모양은 어떠하며 유회(油灰) 8)로서 배를 수리하는 법과

익판(翼板)이 파도를 잘 헤치게 하는 기술은 어떠한가 등의 여러가지 묘리(妙理)를 상세히 조사하고 기록하여

그것을 모방할 것을 꾀해야 할 것이다. 그런데도 표류인이 상륙하면 그 배를 큰 도끼로 쪼개고 부수어 즉시 불태워

없애버리려 하니 이것이 무슨 법인가. 뜻있는 선비가 이런 일을 맡았으면 마땅히 이 것을 명심하여야 할 것이다.
5. 외국인과 말을 할 때에는 마땅히 동정하는 빛을 보여야 하며, 음식물 등 필요한 것은 신선하고

깨끗한 것을 주어야 할 것이다. 우리의 지성과 후의가 얼굴빛에 나타나게 하면 그들이 감복하여 기뻐할 것이며

돌아가서도 좋은 말을 할 것이다.]

 

[각주]
1) 문정(問情) : 외국의 선박이 왔을 때 관리를 보내어 그 사정을 조사하는 일.

2) 정위조(精衛鳥) : 바닷가에 사는 까마귀와 비슷한 작은 새. 옛날 염제(炎帝)의 딸이 동해(東海)에 빠져  

    죽어 이 새가 되었고, 이 때문에 항상 서산(西山)의 목석(木石)을 물어다 동해를 메우려 했다는 전설이 있다.

3) 이유수(李儒修) : 영조 38∼순조 22(1758∼1822) 자는 주신(周臣), 호는 금리(錦里), 본관은 함평(咸平).

    다산(茶山)의 절친한 친구로 장령(掌令) 및 영해부사(寧海府使)를 지냈다.

4)『삼례의소(三禮義疏)』 : 『주례(周禮)』『의례(儀禮)』 『주기(周記) 』삼례(三禮)를 주해(注解)한 책.

    청(淸)나라 때 편찬됨. 총 178권.

5)『십대가문초(十大家文?)』 : 중국의 10대문장가(大文章家) 한유(韓愈)· 유종원(柳宗元)· 구양수(歐陽修)·

    소순(蘇洵)· 소식(蘇軾)· 소철(蘇轍)· 왕안석(王安石)· 증공(曾鞏)· 이고(李翶)· 손초(孫樵)의 글을 모은 책.

6)『연감유함(淵鑑類函)』 : 중국 청(淸)나라 때 장영(張英) 등이 칙명(勅命)으로 지은 책.  

    고사성어를 모아 주석(注釋)한 백과사전(百科辭典). 총 450권.

7) 한우충동(汗牛充棟) : 책이 많다는 말. 수레에 싣고 가는 소가 땀을 흘릴 만큼,  

    쌓아 올리면 마룻보에 닿을 만큼 많은 책.

8) 유회(油灰) : 나무의 구멍을 메울 때 쓰는 재료. 기름· 재· 솜을 섞어만든다.

 

 

★ 修提築城差員往督 悅以勞民 務得衆心 事功其集矣.
    (수제축성차원왕독 열이노민 무득중심 사공기집의. )
    제방(堤防)을 수리하고 성을 쌓는 일에 차사원(差使員)으로 가서 감독하게 되면 
    기쁜 마음으로 백성들을 위로하며 인심을 얻도록 힘쓴다면 그 일의 공이 이루어질 것이다.

 

[옛날에 하천을 준설하거나 성을 쌓는 일은 모두 군현의 백성을 부역시켰고, 

우리나라에 있어서도 호수를 파거나 성을 쌓는 일은 각 고을에서 백성들을 동원하여 이 일을 돕게 하였다. 

이 때 훌륭한 수령은 역시 백성들의 환심을 얻고 그들의 칭송하는 소리가 널리 퍼지게 할 수 있다. 

늙고 여윈 사람은 부역을 면하여 돌아가게 하고 굶주리고 넉넉한 사람을 구분하여 부담을 고르게 하며 

담배와 술을 주고 노래로써 일을 권하며 부지런하고 게으른 것으로써 경계한다면 백성들이 분발하여 

공사의 완성을 즐거워하지 않을 사람이 없을 것이다.

정백자(程伯子)가 현령이 되어 부역을 감독함에 있어 심한 추위와 뜨거운 햇빛 아래서도 갖옷을 입거나

일산을 바치는 일이 없었다. 때때로 공사장을 돌아보아도 그가 오는 것을 알지 못했다.

그래서 사람마다 힘껏 일하여 언제나 기한 전에 일을 끝내었다.

선생의 기상이 맑고도 공손하여 속세 밖에 있는 것 같았으며 노고를 이겨내지 못할 것 같았으나

일을 당하면 항상 미천한 사람들과 기거와 음식을 같이 하고 사람들이 감당하기 어려운 일들도

선생은 대처함에 여유가 있었다. 어느땐가는 일꾼들 가운데 밤중에 떠드는 사람이 많아서 한 사람이 놀라게 되면

여러 사람이 다투어 일어나고 간악한 사람이 그 틈을 타서 도둑질하는 일이 셀 수 없었다.

선생이 이들을 군률에 의하여 다스리니 드디어 떠드는 사람이 없게 되었다.

공사가 끝나고 일꾼들이 해산할 때도 그 대열은 평상시와 같이 정연하였다.]

 

 

 


 資 料   編 輯 者       德 庤 / 李   斗 振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