牧民心書 4 篇

牧 民 心 書 券 4. 第 4 篇 애민(愛民) 육조(六條)

덕치/이두진 2024. 2. 16. 19:34

 

                  牧 民 心 書   券 4  

 

 
  第 4 篇   애민(愛民)  육조(六條)

 

 

    제 1 장  養老(양로) 
                                  (어른을 공경하라 )

 

★ 養老之禮廢 而民不與孝 爲民牧者 不可以不擧也.
     (양노지예폐 이민불여효 위민목자 불가이불거야. )
     양로의 예를 폐지하면 백성이 효도할 줄 모르게 되니

     수령이 된 자는 이를 거행하지 않아서는 안 된다.

['효도하면서 우애가 좋지 않은 자는 있어도 우애가 좋은 자로서 효도하지 않는

자는 없다. 그러므로 선왕의 제도에, 우애는 향당(鄕黨)에서 통하고,

우애는 길에서도 통하고, 우애는 군영(軍營)에서도 통하니, 
우애의 교화는 국가의 정책인 양로(養老)에 근거하고 있는 것이다. 

유우씨(有虞氏) 1) 이래로 양로의 예를 폐한 일이 없었는데, 

사람들은 비용이 많이 든다 하여 노인 공양을 소홀히 한다. 
예법에 70. 80. 90 세에 따라 각각 그릇의 수가 따로 있으니 더 보탤 필요는 없다.

노인의 수가 너무 많아 접대가 어려우면, 가장 年老한 분만을 골라 접대해도 되며,

마을 끼리 번갈아 가며 잔치를 베풀어도 된다. 동양의 윤리의 근본은 효(孝)에 있다.

특히 중국과 우리나라는 오랜 옛날부터 부모와 노인들은 극진히 뫼시는 것을 모든

윤리 기강의 기반으로 하고 있다. 세월이 흐르면서 효에 대한 의식이 점차 흐려져

가고 있으니, 목민을 책임진 수령은 마땅히 백성들에게 <孝>의 관념을

불어넣어 주고, 솔선수범하여 경로(敬老) 활동을 폄으로써

흐트러진 윤리 기강을 바로잡아야 할 것이다.]

 

  [각주]
  1) 유우씨(有虞氏) : 중국 전설상의 인물인 虞나라 舜임금.

 


★ 力拙而擧羸 不可廣也 宜選八十以上.
     (역졸이거리 불가광야 의선팔십이상. )
     재력이 부족할 때 거행하는 것이므로 참석 범위를 넓혀서는 안 된다. 

      80세 이상을 선발하는 것이 좋다.

[남자 노인 중 80 세 이상인 분들만 연회에 참석시키되, 80 세 이상인 노인에게는

그 찬(饌)을 네 접시로 하고, 떡과 국 이외에 - 90 세 이상은 여섯 접시로 한다.
《예기(禮記)》의 [향음주의(鄕飮酒義)] 편에 보면, [60 세 노인에게는 세 접시,

70 세 노인에게는 네 접시, 80 세 노인에게는 다섯 접시,

90 세 노인에게는 여섯 접시로 한다.] 고 되어 있는데,

그것을 80 세 노인의 경우 한 접시를 감하여 네 접시로 한 것이다.
쇠약하고 병들어 연회에 나오실 수 없는 분에게는 찬을 宅으로 보내드려야 한다.

백 세 된 분이 있으면, 수령이 여덟 접시의 찬을 장만하여 수향(首鄕)을 시켜 보내어

직접 그에게 바치게 해야 한다.
동월(董越)의 조선부(朝鮮賦)에 이르기를 『나라 안에 80세 된 노인이 있으면,

남녀 모두에게 연회를 베풀어 임금의 은혜를 널리 펴게한다. 』 ]

 


★  養老之禮 必有乞言 詢瘼問疾 以當斯禮.
      (양로지예 필유걸언 순막문질 이당사례. )
      양로의 예에는 반드시 좋은 말이 있으며 괴로움 고통 질병을 묻되

      마땅히 예법으로 한다.

 

[장횡거(張橫渠)[장재(張載)]가 운암(雲巖)의 현령으로 있을 때에 매달 길일을

택하여 술과 음식을 갖추어 놓고는 그 고을의 연장자들을 현청에 모시고

친히 술을 권하며 고을 백성들로 하여금 노인과 웃 어른 섬기는 뜻을 알게 하였다. 

그러면서 백성들의 괴로운 사정을 묻기도 하고, 자제들을 훈계하는 도리를 묻기도

하였다. 생각컨데 횡거가 실행한 것은 옛날의 양로걸언(養老乞言)의 禮를

실천한 것이다.
仁祖 때의 정승 장현광(張顯光)이 보은(報恩)의 현감이 되어, 고을의 부로들과

초하루 보름으로 함께 모이기로 약속하고, 그들에게서 백성들의 괴로움과 관습의

폐단을 듣고 보완하여 바로잡았으며, 효도와 우애를 돈독히 하게 하였으며, 

청렴하여 부끄러움이 없게 하려고 애썼으며, 덕행을 존중하고 나쁜 풍속을

물리쳤다. 생각컨데, 이 또한 앞서의 장횡거가 실천한 방법과 같다.]

 


★ 依於禮法 簡其文節 行之於學宮.
     (의어예법 간기문절 행지어학궁. )
     예법에 의하되 절차를 간략하게 하고 학궁[향교나 성균관]에서 행하도록 한다.

 

[대학(大學)에 이르기를  '위에서 어른을 어른으로 섬겨야 백성들도 공경에 뜻을

둔다'고 하였으니, 수령이 이 예를 거행하려 한다면, 이 또한 학궁에서 행해야 한다. 

옛 사람들은 향음 주례(鄕飮酒禮)에 거문고와 비파를 썼으나, 오늘날의 소위

삼현(三絃 : 가야금, 당비파, 거문고의 3가지 현악)이란 것은 군악(軍樂)이니, 

학궁에서는 쓸 수가 없고, 반드시 거문고. 비파. 쇠종. 북이라야 학궁에서 사용할 수

있는 것이다. 또 길흉의 모든 예법에는 오직 한 사람의 빈(賓)과 한 사람의 주(主)가

있는데, 노인을 받드는 禮에서도 가장 나이 많으신 분을 빈으로 삼아 예를 거행해야

한다. 절하고 읍(揖)하는데 있어서 빈 한 사람만이 답배(答拜). 답읍(答揖)하고

나머지 빈객들은 답례하지 않는 것이니, 이 예법부터 익혀두어야 할 것이다.]

 


★ 前哲於此 修而行之 旣成故常 猷有遺徽.
    (전철어차 수이행지 기성고상 유유유휘.)
    전철(前哲)들이 이에서 닦아 시행하여 이미 상례를 되었으므로

    오히려 아름다운 공적이 남아있다.

 

[송대(宋代)의 학자 장전(張전)이 금당(金堂)의 현감이 되어,

성심으로 백성들을 사랑하고 노인들을 공양하고 궁한 사람들을 구휼(救恤)하였다. 

가끔 부로들을 불러 자제들을 독려하게 하고, 백성들 중 조금이라도 좋은 일을

한 사람은 장부에 기록했다가 상찬(賞讚)하였으며, 자기의 녹봉으로 술과 음식을

장만하여 노인들을 불러 위로하면서 그 자손들로 하여금 편히 모시고

효로써 받들도록 권면하니, 백성들이 그의 덕에 감화되어,

그가 가는 곳마다 옥사의 소송이 날로 줄어들었다.
팔송(八松) 윤황(尹煌)이 靈光의 郡守가 되었는데, 그 군은 원래 버거로운 곳으로

알려져 있었다. 그러나 윤공(尹公)은 부임 초부터 아침 일찍 등청했다가 밤 늦게야

퇴청하여, 일년이 지나자 번거로움은 일소되고 고을이 청정 무사하게 되었던

것이다. 또 좋은 계절과 명절에는 노인들을 많이 모아 양로의 예를 거행하였다.
자기 어머니도 그 연회에 모시고, 그의 맏형이 능성(綾城 : 전남 화순군 능주면에

해당하는 지역)으로부터 와서 술잔을 올려 오래 사시기를 빌면서 상하가 함께

즐겼다. 이 사실은 그곳 백성들 사이에 지금까지 미담(美談)으로 전해오고 있다.]

 


 ★ 以時行優老之惠 斯民知敬老矣.
      (이시행우노지혜 사민지경노의. )
      때때로 우로(優老)하는 은혜로운 정사를 행한다면

      백성들이 노인을 공경하게 될 것이다.
 
[상산록(象山錄)에 이르기를 『80 세 이상 장수한 남자 21 명과 여자 15 명을 뽑아,

전모(氈帽 : 모직으로 만든 모자) 36 개를 사되, 남자용은 자주색으로

여자용은 검정색으로 하여 입동날에 나누어 드리면, 그 비용은 불과 열량인데,

백성들은 이를 몹씨 기뻐한다.]라고 하였다. 또 계피와 생강으로 엿을 만들되,

정식 방법대로 36 근을 만들어 기름종이에 포장해 두었다가 동짓날에 노인들께

나누어 드리면, 그 비용이 불과 열량도 못 되지만,

백성들은  진심으로 기뻐한다. 엿을 고는 정식 방법은 이러하다.
먼저, 검은 엿 30여 근을 만들고, 거기에 계피. 마른 생강. 진피(陳皮) 1),

반하(半夏) 2), 과루인(瓜蔞仁) 3), 천초(川椒) 4), 오매 (烏梅) 5), 칠엽(漆葉) 6),

호초(胡椒) 7)와 남성(南星)을 각각 한 양씩 갈아서 섞고,  엿이 식기를 기다렸다가

콩을 볶아 갈아서 엿을 씌운다.  이 엿은 담 결린 것을 누그러뜨려 주며,

기침을 멎게 하며,  구충제의 효과가 있으며, 흥분을 가라앉히므로,

노인들에게는 겨울에 매우 좋다.]

 

[ 각주 ]
1) 진피(陳皮) : 오래 묵은 귤 껍질 맛은 쓰고 매우며, 건위(健胃)ㆍ

    발한(發汗)의 약효가 있음.
2) 반하(半夏) : 반하생(半夏生)의 준말. 하안거(夏安居)의 90일 동안의 중간.

    끼무릇의 뿌리. 독이 있으며 담, 구토(嘔吐), 습증, 기침 따위에 약재로 쓰인다 .
3) 과루인(瓜蔞仁 ) : 하눌타리의 씨. 성질은 달고 찬데, 대소변을 잘 나오게 하고,

    젖을 잘 나오게 하며,  해독. 해열에 효과가 있으며 종기를 가라앉히는 데 쓰인다.
4) 천초(川椒) : 산초나무 열매의 껍질. 성질은 더우며, 위한(胃寒)ㆍ심복통(心腹痛)

    ㆍ설사(泄瀉) 등에 쓰인다.
5) 오매 (烏梅) : 껍질을 벗기고 짚불 연기에 그슬리어 말린 매화나무(梅花)의 열매. 
    열을 풀고, 땀을 내며, 대침ㆍ이질(痢疾)ㆍ설사ㆍ기침ㆍ골증열 따위를 다스리는

    약으로 쓰인다.
6) 칠엽(漆葉) : 옻나무의 꽃잎.
7) 호초(胡椒) : 후추나무 열매의 껍질. 토사ㆍ곽란(癨亂)ㆍ건위제(健胃劑)ㆍ

    구풍제 등에 쓰인다.
8) 남성(南星) : 천남성과(天南星科)의 여러해살이풀.

    음지에 나는 유독 식물로 가래를 삭이고 풍기를 가라앉힌다.

 


★ 歲除前二日 以食物歸耆老.
    (세제전이일 이식물귀기노. )
    섣달그믐 이틀 전에 노인들에게 음식을 돌려야 한다.

 

[80 세 이상 된 남자 노인에게는 각각 쌀 한 말과 고기 두 근씩을 보내되,

예단(禮單 : 禮를 갖추어 공경의 뜻을 적은 單子)을 갖추어 문안하고, 

90 세 이상 된 노인에게는 진기한 음식, 고치떡. 약과. 마른 꿩고기등을 두 가지

보탠다. 생각해 보면, 아무리 큰 고을이라도 80 세 이상 된 노인은 몇 십 명에

불과할 것이요, 90 세 이상 된 노인은 불과 몇 사람뿐일 것이니, 

쌀이라고야 고작 30 말이면 되며, 고기도 60 근을 넘지 않을 것인데,

이 어찌 베풀기에 아까운 재물이라 하겠는가. 기생을 끼고 광대를 불러

하룻 밤 즐기는 데에 엄청난 돈을 가벼이 내 던지는 사람이 수두룩하다.
그러니 선비들은 이를 꾸짖을 것이요 백성들은 저주할 것인즉,

그 방탕함을 미워함이 이보다 더할 것이 없으며,

이것이 소위 재물을 베풀면서도 원망을 사는 것이다.

그 절반이라도 떼어 養老의 예를 올리는 데 쓴다면 이 아니 좋겠는가. 

英祖 임금 때에 수령이 養老의 예를 年中 행사로 정하여 거행하였는데,

40 년이 지난 지금에 와서 그런 소문조차 들어 볼 수가 없으니, 

다시 닦아 시행해야 하며, 그만 두어서는 안 된다.]

제 2 장   자유(慈幼)

                              (어린이를 사랑하라. )


 

★ 慈幼者 先王之大政也 歷代修之以爲令典.

(자유자 선왕지대정야 역대수지이위영전. )

어린이를 사랑하는 것은 선왕(先王)들의 큰 정치이니 역대로 이를 행하여

아름다운 법으로 삼았다.

 

[《주례(周禮)》의 〈대사도(大司徒)〉 편에, 보식 육정(保息六政) 1)으로써,

모든 백성을 양육하라고 하였다.

보식 육정의 첫째가 자유(慈幼)요, 둘째가 양생(養生)이요, 셋째가 진궁(振窮)이요,

넷째가 휼빈(恤貧)이요, 다섯째가 관질(寬疾)이요, 여섯째가 안부(安富)이다.

자유(慈幼)란 고아들을 구휼하는 것을 말하며,

이것을 육정(六政) 중 제 1의 정강으로 삼은 것은, 고대의 중국에서도 어린이,

특히 고아들을 사랑과 긍휼(肯恤)로써 보살펴야 함을 강조한 것이라 하겠다.

〈관자(管子)〉에 이르기를 『각 나라의 수도에는 모두 고아들을 맡아 돌보아 주는

직책이 있으니, 고아 한 명을 맡아 기르는 사람에게는 그의 아들 한 명의 병역을

면제해 준다.』 하였다.

또 〈한시 외전(韓詩外傳)〉2)에 이르기를 『백성 가운데 능히 어른을 공경하고

고아를 불쌍히 여겨 잘 보살피는 자는 임금께 아뢰어, 곱게 장식한 쌍두마차를

타게 할 것이다.』라고 하였다. 용(鏞 : 丁若鏞이 자기 자신을 지칭한 것)이 생각컨데,

이는 모두가 자유(慈幼)의 정책인 것이다. 천지의 화기(和氣)를 상하게 하며,

사람의 마음의 애절하고 측은함이 어려서 부모를 잃는 것보다 더한 것이 없으니,

어찌 慈幼의 정책을 소홀히 할 수 있겠는가.

송나라에서는 군, 현마다 자유국(慈幼局)을 세워, 가난한 집에서 자식을 기를 수

없어 버리는 경우에는 그 아이를 자유국으로 데려오게 하여, 그 아이의 생년월일을

기록하고 유모를 두어 기르되, 자식 없는 집에서 아이를 원하면 자유국에 와서

데려다 기르게 하였더니, 흉년이 들어도 길가에 아이를 내다 버리는 자가 없었다.]

 

[ 각주 ]

1)『주례(周禮)』 대사도(大司徒) 보식 육정(保息六政) : 대사도는 『주례』 6관(官)중의

지관(地官). 원래 교화(敎化)를 맡았는데, 한대(漢代)에서는 승상(丞相)을 대사도라

칭하기도 하였고. 후에 호부(戶部)(曹)로 이어져 내려왔다. 『주례』 대사도의

보식육정(保息六政)은 백성을 보호하여 편히 살게 하는 6가지 정사를 말하는데,

첫째 자유(慈幼), 둘째 양생(養生). 세째 진궁(振窮), 네째 휼빈(恤貧).

다섯째 관질(寬疾), 여섯째 안부(安富)이다. 정약용은 본문에서 이 보식육정의 뜻을

대략 옮겨 우리 나라에 알맞게 기술하고 있다.

2) 한시 외전(韓詩外傳) : 한(漢)나라 文帝 때의 박사(博士) 한영(韓瓔)이

고사를 인용하여 《詩經》을 풀이한 책.

★ 民旣因窮 生子不擧 誘之育之 保我男女.

(민기인궁 생자불거 유지육지 보아남녀. )

백성이 곤궁하면 자식을 낳아도 거두지 못하니

가르치고 길러서 내 자식처럼 보호하라.

[후한(後漢)의 종경(宗慶)이 장사(長沙) 태수가 되어, 백성들로 하여금 자식 죽이는

것을 금하니, 백성들 가운데 남의 아이를 양자로 삼아 기른 것이 3 천여 명이나

되었다. 그 아이들은 모두 <종(宗)>字로 붙여 이름지었다.

소식(蘇軾) 1)이 주악주(朱鄂州) 2)에게 다음과 같은 서신을 보냈다.

'악악(岳鄂) 지방의 농사짓는 백성들은 아들 둘과 딸 하나를 키우는 것을 상례로

삼고 있는데, 이를 넘으면 곧 죽여 없앱니다. 낳자마자 냉수에 쳐박아 죽이는데,

그 부모 역시 어쩔 수 없이 행하면서도 두 눈을 꽉 감고 고개를 돌려버리고는

아이를 손으로 물동이 속에 쳐박는데, 아이는 <으앙>하고 조금 울다가는

이내 죽어버립니다. 이 지방에 진광형(秦光亨)이란 사람이 있는데,

지금은 이미 과거에 급제까지 하였습니다만, 그가 어머니 뱃속에 있을 때의

일입니다. 그의 외삼촌 진준의 꿈에 어린 아이 하나가 그의 옷을 끌어당기면서

무엇인가 애절하게 호소하는 듯하였고, 똑 같은 모습이 이틀밤 계속 뵈는 것으로

보아 사정이 몹시 다급한 듯하였습니다. 가만히 혼자 생각해 보니,

그 누이가 임신 중인데 산일(産日)이 가까왔습니다. 얼핏 머리에 스치는 것이 있어,

급히 누이의 집으로 달려가 보니, 아이가 이미 물동이 속에 쳐박혀 있었습니다.

진준이 급히 어린 핏덩이를 건져 올려 죽음을 면하게 되었습니다.

법 조문에 의하면, 고의로 자손을 죽인 죄는 2 년 동안 勞役을 시키는 형벌에

해당하며, 이는 장리(長吏)가 집행하도록 되어 있습니다.

원컨데 공(公)께서는 법률로써 알리고 화복(禍福)으로써 깨우치시어,

법에 따라 행하시면 이런 풍습은 고쳐질 것입니다.']

[ 각주 ]

1) 소식(蘇軾) : 북송 미주(眉州) 미산 사람. 자는 자첨(子瞻) 또는 화중(和仲)이고,

호는 동파거사(東坡居士) 또는 설당(雪堂), 단명(端明), 미산적선객(眉山謫仙客),

소염경(笑髥卿), 적벽선(赤壁仙) 등을 썼으며,

애칭으로 파공(坡公) 또는 파선(坡仙)을 썼다.

소순(蘇洵)의 아들이고 소철(蘇轍)의 형으로 대소(大蘇)라고도 불렸다.

2) 주악주(朱鄂州) : 호북성(湖北省) 악주 자사(坡鄂州 刺使)인 주씨(朱氏).

 

★ 歲値荒儉 棄兒如遺 收之養之 作民父母.

(세치황검 기아여유 수지양지 작민부모. )

흉년이 들면 기아(棄兒)를 물건 버리듯 하니 거두고 길러서 그들의 부모가 되라.

[후한(後漢) 때 방삼(龐參)이 한양(漢陽)의 수령이 되었는데, 그 고을 사람 중

임당(任棠)이란 사람이 있어, 은거(隱居)하면서 후학을 가르쳤다.

방삼이 먼저 문안차 임당을 찾아갔더니, 그는 아무 말 없이 부추 한 뿌리와

물 한 사발을 병 풍 앞에 갖다 놓고는 어린애를 안고 문 밖에 엎드리는 것이었다.

방삼은 임당의 행위 하나하나를 다음과 같이 짐작해 냈다.

'물은 내가 청렴하기를 바라는 것이요, 부추는 내가 강한 무리들을 치라는 것이요,

어린애를 안고 문 밖에 엎드린 것은 문을 열어놓고 고아들을 구휼하라는 뜻이로군.'

그리하여 방삼이 그대로 실행하니, 한양은 잘 다스려 졌던 것이다.

북송(北宋)의 왕조(王詔)가 정주 지사(定州 知事)로 있을 때에 버려진 아이들을

거두어 기르니, 정치의 교화가 크게 행하여졌다.

촉생(蜀生)이라고 하는 사람이 정주를 지나다가 거액의 돈이 든 푸대를 잃어버리고는

왕조에게 와서 사정을 말하자, 왕조는 '거기에 다시 가 보면 그대의 돈을 지켜주는

자가 있을 것이다.' 하였다. 그의 말 대로 촉생이 돈푸대를 잃어버린 것으로 가 보니,

과연 자기의 돈푸대를 지키고 있는 자가 잇었다.

촉생이 그 사람에게, '당신은 왜 이 돈푸대를 가져가 버리지 않았소?' 하고 물으니,

그 사람은, '나는 사람들이 어린애 버리는 것을 지키는 사람인데, 우리 왕공께서는

사람들이 어린애 버린 것을지켜주는 사람이 없어도 눈물을 흘리시는데,

하물며 내가 이 돈을 가지고 가 버려 당신으로 하여금 우리 왕공의 경내를 찾아

헤매게 해서야 되겠소?' 하였다. 고아를 구휼하는 정사(政事)가 사람을 감동시킴이

이와 같은 것이다.]

 

 

★ 我朝立法 許其收養 爲子爲奴 條例詳密.

(아조입법 허기수양 위자위노 조례상밀. )

우리 나라에서는 법으로 그 수양을 인정하였으니 자식으로 삼거나

종을 만드는 조례가 상세하고도 치밀하다.

[현종(顯宗) 12년 4 월에, 수양유기아법(收養遺棄兒法)을 마련하였는데,

무릇 길가에 버려진 아이를 얻은 자는 한성부(漢城府)에 알려 공문을 받도록 하되,

자식으로 삼든 종으로 삼든 얻은 자의 임의대로 하게 하였다.

전에 내가 경기지방에 암행어사로 파견된 일이 있는데, 선왕(正祖大王)께서 나를

영춘헌(迎春軒)으로 부르시어, 버려진 아이들을 거두어 기르시도록 성의를 다하라고

거듭 당부하시는 모습이 너무도 측은하고 간절하셨다.

내가 각 고을을 두루 다니면서 유념하여 살펴본즉 한 사람도 임금의 뜻을 펴는 자가

없었으니, 목민을 책임진 수령들이 제 직분을 다하려 하지 않음이 이미 오래였다.

《속대전(續大典)》에 다음과 같이 규정하였다. 흉년에 유기된 어린애는 다른 사람이

살려 수양하여 제 자식으로 삼거나 종으로 삼게 하되, 어린애의 연령의 한도와

수양 날짜의 한계는 임시사목을 따르도록 하라.

유기아의 수양은 3 세 미만을 그 한도로 하되, 흉년이 계속되는 경우에는 8,9 세

혹은 15 세를 한도로 한다. 그 양쪽의 사정과 청원을 들어, 후에 그 아이가 낳는

아이들까지도 노비로 만든다거나 아니면 그 아이 當代에 한한다거나,

연한을 정하여 사역시키는 경우에는 흉년이 더하고 덜함에 따라 그 연한을

연장하거나 단축하되, 그것은 오직 임시 사목에 준해야 한다.

수양일이 60 일 미만으로서, 수양은 하였으되 끝까지 해내지 않은 자에게는

이 규정을 정경하지 아니한다. 수양 기한을 채운자는 양인(良人 : 常民) , 공노(公奴),

사노(私奴)를 불문하고 수양한 사람이 임의로 처리하며, 그 아이의 부모나 관(官),

주(主)도 그 아이를 요구할 수 없다. 그 아이의 부모나 친족으로서 석달이 되기 전에

그 아이를 찾아가려 하는 경우에는 수양에 소비된 양식 물자 등을 두 배로 변상해

주고 찾아 갈 수 있다. 석달이 지난 후에는 그것도 불가하다.

수양받아 살아난 아이가 자라서 그 주인을 싫어하고 회피하면, 주인을 배반한 죄로써

논할 것이며, 권력을 내세워 다시 데려가려 하는 자는 불법으로 논죄한다.

아이를 주워 기르게 된 자는, 그 아이의 나이와 용모를 관에 보고하여,

그 어린애의 부모와 이임(里任 : 里長)이 가까운 이웃을 자세히 조사하여 진술을 받아

관으로부터 그 증서를 받아야 한다. ]

생각컨데 이는 영조(英祖) 때에 정한 것이며, 공노나 사노라도 그 천한 신분으로

되돌리기를 허락치 않은 것은, 그 지극한 뜻이 어린 것을 재활시키자는 데에

있기 때문인 것이다.]

 

★ 若非饑歲 而有遺葉者 募民收養 官助其糧.

(약비기세 이유유엽자 모민수양 관조기량. )

기세가 아닌데도 아이를 버리는 자가 있다면 수양해 줄 사람을 골라서

그 양식을 관에서 보조하여야 한다.

[진휼을 베푸는 해에는 의당 진장(賑場)에서 양식을 보조해 주어야 하며,

평년에는 민간에서 수양(收養)할 사람을 모집해야 한다.

마침 가난한 여자가 모집에 응해 왔는데 혼자의 힘으로 그 아이를 키울 능력이 없는

경우에는 수령이 양곡을 내어 보조해 주어야 하는데, 매달 쌀 두 말씩을 지급하고

여름에는 매 달 보리 네 말씩을 지급하되 2년 동안 계속해야 한다.

흉년이 들어 아이를 내다 버리는 경우 이외에 서울에서는 개천에다가 어린애를

버리는 경우가 있는데, 이는 대개가 간음에 의한 사생아들이다.

그러나 하늘과 땅이 목숨있는 것을 만드시는 이치는, 그 부모의 죄를 그 아이에게까지

미치게 하지 않는 것이니, 이 또한 거두어 길러 자식이나 종으로 삼는 것을

허용해야 할 것이다.]

 

제 3 장 賑窮(진궁)

(가난한 사람들을 구제하라. )

 

 

★ 鰥寡孤獨 謂之四窮 窮不自振 待人以起 振者擧也.

(환과고독 위지사궁 궁불자진 대인이기 진자거야. )

홀아비 과부 고아 늙어 의지할 곳 없는 사람(獨)을 사궁(四窮)이라 하는데

이들은 궁하여 스스로 일어날 수 없고 다른 사람의 힘을 빌어야만 일어설 수 있다.

진이란 끌어올리는 것이다.

[문왕(文王)은 정치를 펴 인(仁)을 베풀되, 반드시 이 사궁을 먼저 걱정하였고,

대사도의 보식 육정에서도 세번째를 진궁이라 하였으니, 바로 이것을 이른 말이다.

《시경》에서, 『부유한 사람들이야 좋겠지만, 찌들고 외로운 사람들은 애닯도다.』 라고

한 것처럼, 가난하면서도 의탁할 곳이 없는 사람들만을 일러 사궁(四窮)이라 한다.

그러므로 재산이 넉넉한 자는 비록 육친이 없더라도 사궁에 넣을 수 없다.

수령은 사궁을 선정함에 있어 세가지를 참작해야 하거니와,

그 첫째가 나이요, 둘째가 친척의 유무요, 세째가 재산의 유무인 것이다.

그러므로 나이가 60세 미만으로서 능히 자신의 능력으로 생계를 이어갈 수 있는

사람과 이미 10세가 되어 능히 스스로 먹을 것을 구할 수 있는 사람은 돌보아 주지

않아도 무방하다. 또 육친(六親) 1)은 없다라도 종형제(從兄弟)나 종숙질(從叔姪)의

친척이 있어 그들이 도와 줄 수 있는 경우에는 관에서는 그들을 타이르거나 엄하게

경계하여 돌보아주게 하면 되며, 그런 사람들에게까지 구호의 손길을 펼 것은 없다.

또 나이가 많고 육친이 없더라도 재산이 넉넉한 사람은 관에서 생걔를 도와주지

않아도 된다. 이상의 세 가지 조건이 모두 여의치 않아 참으로 그 형편이 딱하게 된

사람은 관에서 돌보지 않으면 안 된다.

《대명률(大明律)》에 다음과 같이 규정하고 있다. 홀아비. 과부. 고아. 늙어 자식 없는

사람 및 병이 깊어 폐인이 된 사람으로서 가난하고 의지할 친척도 없어

스스로 생계를 이어갈 수 없는 사람은 그 지방 관청에서 구호해 주어야 하며,

이를 외면하는 자는 곤장 60 대의 벌로써 다스린다.

또 이들에게 응당 지급하게 되어있는 옷과 양식을 관리가 깎아 먹으면,

그는 감수자도(監守自盜) 2)의 죄목으로써 논죄한다.]

[ 각주 ]

1) 육친(六親) : 부(父), 모(母), 형(兄), 제(弟), 처(妻), 자(子).

2) 감수자도(監守自盜) : 지키고 감독해야 할 자가 오히려 스스로 도적질함.

 

★ 過歲不婚聚者 官宜成之.

(과세불혼취자 관의성지. )

나이가 꽉 차도록 혼인을 못한 사람은 관에서 성혼시키도록 서둘러 주어야만 한다.

[월왕(越王) 구천(句踐)이 영(令)을 내리기를 『 여자 17세에 시집가지 않고,

남자 20세에 장가 들지 않으면 그 부모에게 죄가 있다. 』 라고 하였다.

한(漢) 혜제(惠帝) 6년에도 영(令)을 내렸다. 『 민간의 여자로 나이 30세가 되도록

시집보내지 않으면 벌금 100전(錢)을 물린다. 』 라고 하였다.

옛날에는 30세에 아내를 갖고, 20세에 시집 간다고 하였는데 대게 그 나이를

넘어서는 안되는 큰 한계이다. 그러나 남자는 25세로 한계를 정할 것이요,

여기에 구애받을 필요는 없다.

함녕(咸寧)사람 옹태(雍泰)가 양회(兩淮)지방의 巡監御史로 있을때, 가난한

홀아비가 거의 2천 명이나 되었는데, 2년 동안에 모두 처자를 갖게 해 주었다.

그가 떠난 뒤에 사람들은 이런 노래를 읊었다.

객변검탁혼무연(客邊檢橐渾無硯) : 어사의 전대 속에는 벼루조차 없는데,

해상유민진유가(海上遺民盡有家) : 바닷가 백성에게는 처자식이 있네.

요각사천남녀원(了却四千男女願) : 4천명 남녀의 원을 풀어주고,

춘풍해채거조천(春風解綵去朝天) : 춘풍에 닻줄 풀고 조정으로 들어가네.

명(明)나라 양계종(楊繼宗)이 수주지사(秀州知事)로 있을때, 한 부자가 사윗감이

가난한 것을 걱정하여 혼인을 그만두겠다고 하자, 양계종은 부자 백성에게

금 200 근을 내게하고, 따로 다른 사위 고를 것을 허락하고는 얼마후에 그에게

말하기를 『나는 이것을 네 사위에게 주어 가업(家業)을 이루게 하였으니

네딸은 이제 시집 갈 곳을 얻게 되었다. 』 라고 하고 그날로 결혼하도록 하였다.]

 

 

★ 勸婚之政 是我列聖遺法 令長之所宜恪遵也.

(권혼지정 시아열성유법 영장지소의각준야. )

혼인을 권장하는 정사는 역대 임금님이 남긴 법도이니 (영장지소의각준야) :

수령은 마땅히 성심을 다해 따라야 한다.

[정종(正宗) 15 년(1791 년) 신해년(辛亥年) 2 월에, 왕께서는 사서인(士庶人) 중에

가난하여 남녀의 혼기를 놓치는 자가 있음을 민망히 여기시어,

서울의 5 부에 신칙하여 혼인을 권장하게 하셨으며, 정혼(定婚)을 하고서도

사정이 여의치 못해 예를 올리지 못하는 자에게는 관에서 500 푼의 자금과

두 필의 포(布)를 보조해 주어 혼례를 서두르게 하시고는 매월 보고하라 하시었다.

마침 서부(西部)의 신덕빈(申德彬)의 딸이 21 세였고,

김희집(金禧集)의 나이가 28 세였는데, 두 사람이 모두 혼기를 놓치고 있었다.

6 월 초 이튿날 왕께서 이르셨다. '짐(朕)이 5 부 안에 많은 홀아비가 있는 것을

생각하여 혼인의 권한자가 무려 백 수십 명인데, 오직 서부의 두 사람만이 아직

예를 이루지 못하고 있으니, 어찌 천지의 화기를 인도하고 만물의 본성에 따르는

것이겠는가. 일이란 시작을 잘 정제함을 중히 여기고, 정사(政事)란 끝을 잘 맺도록

힘써야 하는 것이니, 덕빈과 희집에게 권하여 좋은 일이 맺어지게 하라.

이에 덕빈의 딸과 희집의 혼약이 성사되니, 왕께서는 기뻐하시며,

'한 지아비와 한 지어미가 제 자리를 찾아감에 김(金), 신(申) 두 사람처럼 기회가

공교롭게 맞아 떨어진 일도 없었은즉, 이렇듯 기묘하고 대단한 기쁨이 또 있겠느냐.'

라고 하셨다. 백성의 목자(牧者) 된 사람이 임금의 뜻을 체득하여 이를 실행한다면,

그 직분을 다했다 할 수 있을 것이다. 천지간에 우울한 마음을 펴지 못함이

혼기를 놓친 남녀간의 일보다 더한 것은 없는 것이다.]

 

★ 每歲孟春 選過時未婚者 並於仲春成之.

(매세맹춘 선과시미혼자 병어중춘성지. )

해마다 음력 정월이면 과년하여도 혼인하지 못한 자를 가려내어

음력 2월에는 성혼시키도록 한다.

[고을 안에 25 세 이상된 남자와 20 세 이상된 여자를 골라, 그들에게 부모나 친척

재산이 있는 경우에는 성혼(成婚)토록 독려해야 하며,

혼인을 회피하는 자는 논죄해야 한다. 친척도 없고 재산도 없는 자들은,

을에서 덕망있는 사람들로 하여금 중매하게 하여 짝지어 성혼 시키되,

관에서 돈과 포목 약간을 내어 도와주고, 결혼식 예복도 관에서 빌려 주도록 한다.

양가의 빈부가 엇갈리거나 서로 궁한 두 집끼리의 결합은 수령이 한 번 권하는 것이

일반 백성들의 백 마디 말보다 더 나을 것인데, 어찌하여 그 한 마디 말을 아껴

이런 좋은 음덕(陰德)을 심으려 하지 않는 것일까.]

 

★ 合獨之政 亦可行也.

(합독지정 역가행야. )

합독(合獨)하는 정사도 또한 행하여야 할 것이다.

[《관자(管子)》 입국편(入國篇)에 이르기를 『나라 도성에 중매를 맡은 이가 있어서

홀아비와 과부를 골라 짝을 지워 결혼하게 하니 이를 합독(合獨)이라 부른다. 』라고

하였다. 합독(合獨) 또한 선정(善政)인 것이다. 매양 보면, 시골의 과부로서

그 신분은 천하지 않은데 개가(改嫁)할 뜻이 있어도 부끄럽고 겁이 나서 어찌할

바를 몰라하면, 반드시 늙고 교활한 방물장수 노파가 있어, 은밀히 간계를 꾸며,

이웃 마을의 고약한 소년들을 모아 밤을 틈타 가만히 업어내어 분쟁을 일으키고

풍속을 해칠뿐만 아니라, 길에서 누군가에게 강제로 추행당한 것처럼 꾸며

과부의 순결을 더럽히니, 그 과부는 재가를 포기해 버리게 된다.

그러므로 수령이 예로써 권하여, 각기 알맞은 상대를 찾아 홀아비와 과부가

재혼하여 살게 함만 못하게 된다. 이런 일은 법령으로 공포할 것까지 없겠지만,

백성들에게 은근히 타일러서 옛사람들의 뜻을 따르게 해야 할 것이다.]

[ 각주 ]

1) 합독(合獨) : 홀아비와 과부에게 짝을 지어주다.

제 4 장 哀喪(애상)

(상을 애도함)

 

 

★ 有喪蠲徭 古之道也, 其可自擅者 皆可蠲也.

(유상견요 고지도야 기가자천자 개가견야. )

상사(喪事)가 있으면 부역을 면해 주는 것이 옛날의 도이다.

스스로 전결(專決)할 수 있는 것은 모두 면제해 주어도 좋다.

[《예기(禮記)》의 〈예운(禮運)〉 편에 이르기를, 『공(公)에 벼슬살면 신(臣)이라 하고

가(가)에 봉직하면 복(僕)이라 하는데, 신이나 복이 삼년상(三年喪)을 당하면,

그들을 부려서는 안 된다.』라고 하였다.

《국어(국어)》 〈월어(越語)〉 편에 이르기를, 『월왕 구천이 백성들에게 맹세하기를,

가문의 상속자가 죽으면 3 년간 그 정사(政事)를 면제해 주고, 차자(차자)가 죽으면

석 달 동안 정사의 의무에서 풀어주겠다. 』라고 하였다.

《예기(禮記)》의 〈잡기(雜記〉 편과 〈왕제(王制)〉 편에도, 상을 당한 사람은 정사에

종사하지 않는다는 글이 있는데, 정현(鄭玄)은 그것에 주(註)를 달면서

'요역(搖役)을 감해준다'로 풀었으나, 나의 생각은 그렇지가 않다.

이제 그 법을 정하여, 부모의 상을 당한 자에게는 백일 동안은 일체의 잡역을

관대하게 면제해 주는 것이 옛 어른들의 뜻에 부합할 것이다.

다만 가짜와 속임수가 난무할 소지가 있으며, 그 허와 실을 구분키 어려우니,

이 점은 불가불 유념해야 할 것이다.]

 

★ 民有至窮極貧 死不能斂 委之溝壑者 官出錢葬之.

(민유지궁극빈 사불능렴 위지구학자 관출전장지. )

지극히 궁색하고 가난한 백성이 죽어 염하지 못하고 구덩이에 버리는 자가 있을

때에는 관에서 돈을 주어 장사 지내도록 해야 한다.

[《시경》에 『길 가다가 죽은 사람을 보면 묻어주라. 』라고 하였거니와,

길 가는 이도 그러한데 하물며 백성의 부모된 수령이야. 평소에 백성들에게 널리

전하여 말하기를, 그런 사실이 있거든 즉시 보고하고, 서로 도울 수 있는 이웃이나

친척이 있는 경우에는 관에 보고할 것 없이 서로 상의하여 매장토록 하되,

서로 도와 장례를 치르지도 않고 보고하지도 않으면 처벌할 것이다.

보고가 관에 들어오면, 관에서 수백 전을 내주어 죽은 이를 염하게 하고, 이웃이나

친척들로 하여금 각각 부조금을 보태어 입관(입관)하여 매장토록 해야 한다.

한나라 황패(黃覇)가 영천 태수로 있을때 홀아비, 과부, 고아, 늙어 자식이 없는 자를

위하여 직접 조처하여 주되, 어느 곳에는 큰 나무가 있으니 관을 만들면 좋을 것이며,

어느 정자의 돼지 새끼는 제사 지낼 만하다고 일러주어, 아전이 나가 보면 과연

그러하므로 모두 그의 신명함을 칭송하였다.

윤형래(윤형래)가 회인(회인 : 오늘날의 보은군에 속하던 충청도의 옛 고을)의

현감이 되었을 때에, 하루는 그가 정당(정당)에 앉아 있는데, 통곡하며 현문앞을

지나가는 사람의 울음소리를 듣고는, '어인 곡(곡)이냐?'하고 묻자.

아전이 '한 백성이 어제 죽었는데,장사지내러 가는 것 같습니다.'라고 대답했다.

윤공이 다시, '그래, 염이나 했다더냐?' 하고 묻자, '가난하여 하지 못했다 합니다.'

하니, 그는 돈을 주어 관을 사서 장사지내게 하였다.]

 

★ 其或饑饉癘疫 死亡相續 收瘞之政 與賑恤偕作.

(기혹기근려역 사망상속 수예지정 여진휼해작. )

기근과 전염병의 유행으로 사망자가 속출하면 거두어 묻는 정책과

흉년에 곤궁한 백성을 구원하여 도와주는 일을 병행하여야 한다.

[《속대전(續大典)》에, 『서울과 지방에 전염병이 만연하여 온 가족이 몰사하여,

거두어 장사지낼 사람이 없는 경우에는 관에서 휼전을 거행한다.』라고 되어 있다.

가경(嘉慶) 무오(戊午 : 正祖 22년 1798년)년 겨울에 독감이 갑자기 성했다.

그 때 나는 서읍(황해도 谷山)의 부사(府使)로 있었는데, 제일 먼저 시체들을 거두어

장사지내는 정사를 폈다. 아전이 내게, '조정으로부터 명령도 없는데,

수예(收예)를 행하심은 아무런 공적도 되지 않을 것입니다.'라고 말했다.

그래서 나는 아전에게 '가서 수예를 행하라. 조정의 영이 있을 것이다.'라고 하명했다.

그러고 닷새마다 사망자의 명단을 장부에 기록하고, 친척이 없는 자는 관에서

그 비용을 지급해 장사지내게 하였다.

그렇게 한 달이 지날 무렵 조정에서 영이 당도하니, 감사의 장부 독촉이 성화 같았다.

다른 읍에서는 모두 갑작스레 허둥지둥 장부를 꾸미느라 여러 차례 문책을 받았으나,

나는 이미 다 정리되어 있는 것을 바칠 수 있어 무사히 처리하니,

아전들은 그제서야 크게 기뻐하였다.]

★ 或有解觸目生悲 不堪悽惻 卽宜施恤.

(혹유해촉목생비 불감처측 즉의시휼. )

혹 눈에 들어와 마음을 슬프게 하여 측은함을 견딜 수 없거든

곧 마땅히 구휼할 것이며 더 이상 뒷일을 생각하지 말라.

[범문정공이 빈주의 태수가 되었는데, 한가한 날 요속(僚屬)들을 거느리고

누각에 올라 주연을 벌였다. 술잔을 막 들려 하는데, 상복을 입은 사람 몇 명이

상구(喪具)를 정리하고 있는 것을 보았다. 공이 급히 명령하여 그 사연을 물으니,

이곳에 살았던 선비가 빈 땅에서 죽었는데, 근교에 임시로 묻으려 하는 것이라

하였다. 공이 보니, 봉. 염(殮). 관(棺). 곽(槨) 등 장사 지내는데 필요한 것이

아무것도 갖추어지지 않았는지라, 공은 분연히 술자리를 거두게 하고

부조금을 후히 주어 장례를 치르게 하니, 함께 앉아있던 손님들이 모두 감탄하였고,

눈물 흘리는 사람도 있었다.]

★ 或有客宦遠方 其旅櫬過邑 其助運助費 務要忠厚.

(혹유객환원방 기여친과읍 기조운조비 무요충후. )

혹시 먼 객지에서 벼슬살이를 하던 사람 그들의 널이 고을을 자나게 되면

그 운구를 돕고 비용을 돕는 것을 충후(忠厚)하게 하도록 힘써야 한다.

[범문정공이 월주(越州)의 知事로 있을 적에, 그의 속관(屬官) 손거중(孫居中)이

임지에서 죽었다. 그의 아들은 아직 나이가 어리고 집안이 가난하였으므로,

범공은 자기의 봉록에서 돈 백 꾸러미를 내주고, 배를 마련하여 아교(牙校) 까지

파견하여 운구(運柩)를 돕게 하며 시(詩)를 지었다.

『열 식구 서로 의지하여 큰 냇물을 건넜거니,

올 때에는 즐거웠으나 가는 길은 처량하구나.

관문과 나루에선 이름일랑 묻지 마오. 떠나가는 이 배는 고아 과부의 배이로세.』

조영경(趙榮慶)이 황주의 수령으로 있을 때에, 나는 영조사(迎詔使)로서

정당(政堂)에 함께 앉아 있었는데, 상여 지나가는 소리가 나기에 물은 즉,

'변방 수령이 임지에서 죽어 고향의 장지(葬地)로 돌아가는 길입니다.'하였다.

그 말을 듣고는 조공이 아전을 불러 호송자(護送者)에게 위로의 말을 전하면서,

그 일행에게 음식을 접대하고는 부조금 30냥을 보내주었다. 그리고는 다시 나가서

조문하지 않았다. 내가 그 이유를 물으니, 조공은 이렇게 대답하는 것이었다.

『여친(旅櫬)이 고을을 지날 때에는 음식을 대접하고 부조금을 내는 것이

옛 법도입니다. 그러나 나는 본시 그 죽은 사람을 알지 못하고 또 상주(喪主)를

알지 못하니, 직접 가서 조의(弔意)를 표할 명분이 없지 않습니까.』]

[ 각주 ]

1) 객환(客宦) : 객지에서 벼슬살이를 하는 것.

2) 여친(旅櫬) : 객지에서 죽어서 집으로 옮겨지는 널(관)을 말함.

3) 아교(牙校) : 본영(本營)을 지키는 군교(軍校).

 

★ 鄕承吏校 有喪有死 宜致賻問 以存恩意.

(향승이교 유상유사 의치부문 이존은의. )

향승(鄕承)이나 이교(吏校)가 상을 당했거나 본인이 죽었을 때에는

부의를 주고 조문하여 은정(恩情)을 남기도록 하여야 한다.

[옛날에는 조정의 신하가 상을 당하면 임금이 반드시 몸소 조문 했으며,

소렴(小殮)과 대렴(大殮)도 친히 보았고, 염(殮)에는 수의(壽衣)를 보내 주었고,

장례에는 조의금을 보내 주었다. 그 뜻으로 미루어 생각컨데,

수령도 자기 수하(手下)의 관속과 아전들이 상을 입으면 마땅히 이와 같이 하여

은혜로운 뜻을 전해야 할 것이다.

또 아전과 군교가 본인이 죽거나 부모의 상을 입으면, 수령은 종이와 초를 부조하고,

미음과 죽을 권하여 먹임으로써 상관으로서 아랫 사람에 대한 은정(恩情)을

남겨야 한다. 또 좌우의 향관(鄕官)이 죽거나 상을 당해도 이와 같이 해야 한다.]

 

[ 각주 ]

1) 향승(鄕承) : 수령의 보좌역으로서 좌수(座首) 등.

2) 부문(賻問) : 부의를 하고 조문하는 것.

3) 소렴(小殮) : 시신(屍身)을 먼저 옷과 이불로 싸는 것.

4) 대렴(大殮) : 소렴(小殮) 이튿날에 시신(屍身)을 관에 넣는 의식.

제 5 장 寬疾(관질)

                            (환자를 배려하라.)

★ 廢疾篤疾者 免其征役 此之謂寬疾也.

(폐질독질자 면기정역 차지위관질야. )

불치(不治) 중병 환자에게는 부역을 면제해 주는데 이것을 관질(寬疾)이라고 한다.

[《주례》의 보식(保息)정책의 다섯 번째가 관질이다. 후한(後漢)의 정현(鄭玄)도,

『오늘날 곱추는 그 임무를 올바로 수행해 낼 수가 없기 때문에 군졸에 넣지 않는다.』

라고 했거니와, 「관(寬)」이란 불구자에게 병역과 요역을 면제해 주는 것을 말한다.

장님은 점을 치고 절름발이는 그물을 떠서 살아갈 수 있으므로 원조해 줄 것까지야

없지만, 중병과 불치병에 걸린 사람은 구휼(救恤)해 주어야 할 것이다.

무릇 장님. 벙어리. 절름발이. 고자 등은 군졸로 관입시켜서도 안 되며,

요역을 부과해서도 안된다.]

[ 각주 ]

1) 관질(寬疾) : 병자를 너그럽게 대하는 것.

2) 폐질(廢疾) : 불치의 병.

3) 독질(篤疾) : 위독한 병.

 

★ 罷癃殘疾 力不能自食者 有寄有養.

(파륭잔질 역불능자식자 유기유양. )

병신이거나 잔약해서 자력으로 생활할 수 없는 자는 의지할 곳과 살아갈 길을

마련해 주어야 한다.

[장님. 절름발이. 팔다리 불구자. 문둥병자 등은 사람들이 천하게 여기고 싫어한다.

또 육친이 없어 이리저리 떠돌아다니고 안주(安住)할 곳이 없는 사람들을 위해서도

그들의 종족을 타일러 부양하게 하거나 관에서 대책을 세워 안주할 수 있게 해

주어야 한다. 친속(親屬)도 전혀 없고 의지할 곳도 없는 사람들은 그의 고향마을에서

덕망있는 사람을 골라 의탁하되, 그에게는 잡역을 면제해 주고

세금도 감면해 주도록 해야 한다.]

[ 각주 ]

1) 파륭(罷癃) : 곱사등이(등이 굽고 큰 혹 같은 것이 불쑥 나온 사람).

2) 불능자식(不能自食) : 자신의 힘으로 먹을 수 없는 것.

 

 

★ 軍卒羸病 因於凍餒者 贍其衣飯 裨無死也.

(군졸리병 인어동뇌자 섬기의반 비무사야. )

군졸들 중에 병들고 굶주림과 추위로 배고픈 것을 이기지 못하는 자에게는

입을 것과 먹을 것을 주어서 죽지 않도록 해야 한다.

[진나라 유홍(劉弘)이 형주(荊州)를 다스릴 때의 일이다. 한 밤중에 일어나 들으니,

성 위에서 파수보는 자가 긴 탄식을 하며 몹시 괴로와했다. 가까이 불러서 보니,

한 늙은 병졸이 야위고 병들었는데, 저고리조차 입고 있지 않았다.

유홍은 급히 가죽옷과 겹모자를 주었다.

장윤(張潤)이 강회(江淮)의 발운부사(發運副使)로 있을 때 일이다.

조졸(漕卒)가운데 추위와 굶주림으로 길에 죽어 나자빠진 자가 많은 것을 보고는

탄식하여 말했다. 『이는 담당관의 잘못이니, 주상(主上)의 어지심을 본받지 못한

때문이다.』 그리고는 자신의 봉급을 털어 솜저고리 천 벌을 사서 형편이 어려운

자들에게 나누어 입혔다.]

[ 각주 ]

1) 동뇌(凍餒) : 입을 것과 먹을 것이 없어 춥고 배고픔. 헐벗고 굶주림.

 

★ 瘟疫流行 蚩俗多忌 撫之療之 裨無畏也.

(온역류행 치속다기 무지요지 비무외야. )

온역(瘟疫)이 유행하면 어리석은 풍토에 꺼리는 것이 많다.

이를 어루만지고 치료해 주어서 두려워하지 말도록 해야 한다.

[수(隨)의 문제(文帝) 때에 신공의(辛公義)가 민주(岷州)의 자사가 되었는데,

그 곳 풍속이 염병을 두려워하여, 한 사람의 환자가 생기면 온 가족이 문을 닫고

가마에 실어 관청 뜰로 옮기게 하니, 여름날 관청의 앞마당에 환자들로 가득하였다.

신공의는 평상을 설치해 놓고는 밤낮으로 그들과 더불어 거처하며 녹봉으로

의약을 공급하고 몸소 그들을 보살피니, 환자들 중 대다수가 쾌유하였다.

그러자 그 친척들을 불러서, '사람이 죽고 사는 것은 다 명(命)에 달린 것이다.

서로 전염하여 죽기로 말하면, 나는 진작 죽었을 것이 아니냐.' 하고 깨우쳐 주니,

그들은 모두 부끄러워하며 사죄하고 돌아갔다.]

[ 각주 ]

1) 치속(蚩俗) : 어리석고 추악한 풍속과 관습.

 

★ 瘟疫痲疹 及諸民病 死亡夭札 天災流行 宜自官救助.

(온역마진 급제민병 사망요찰 천재유행 의자관구조. )

온역(瘟疫) 마진(麻疹) 및 모든 백성들의 질병으로 사망(死亡) 요찰(夭札)하는

천재(天災)가 유행할 때에는 관에서 구제하여야 한다.

[송나라 가우 연간에 황주 지방에서 백성들 사이에 열병이 크게 유행하였는데,

성산자(聖散子)를 써서 완치된 사람이 헤아릴 수 없이 많았다.

이에 소동파가 글을 지어 돌에 새겨, 성산자의 약효를 널리 전파하니,

그 처방은 이러하다. 창출(蒼朮). 방풍(防風). 후박(厚朴 : 생강에 볶은 것).

저령(저笭). 택사(澤瀉) 각 두 냥과 백지(白芷). 천궁(川芎). 적작약(赤芍藥).

곽향(藿香). 시호(柴胡) 각 반 냥과 마황(麻黃). 승마(升마). 강활(羌活). 독활(獨活).

지각(枳각). 오수유(吳茱萸). 세신(細辛). 고본(藁本). 복령(茯岺) 각 7 전과

석창포(石菖蒲). 초두구(草豆寇). 양강(良薑) 각 8 전과 감초(甘草) 두 냥 반,

대부자(大附子) 한 개. 이상의 약재들을 거친 가루로 만들어 1 회에 3 전씩 복용하되,

물 두 종지에 대추 한 개를 넣어 8 부[分] 쯤 끓여, 조금 더울 때 그 물을 먹는다.

명나라 때의 명의(名醫) 장개빈(張介賓)도 성산자를 일러, '일체의 산람(山嵐)이나

장기(장氣)같은 충토병, 또는 유행성 열병이나 상한(傷寒) 풍습(風濕) 등의

질병을 치료하는 데에는 비상한 효험이 있다.' 고 했다.

또 이대조(李待詔)의 말대로 내한외열(內寒外熱)인 사람이나 상실하허(上實下虛)의

체질을 가진 사람에게는 이 처방이 신통한 효험이 있으며,

오한을 구제하여 학질을 치료하는 데에도 비상한 효과가 있다.

복암(茯菴) 이기양(李基讓)이 문의(文義 : 충북 청원군)의 현감으로 있을 때에

염병이 크게 성행하였는데, 성산자를 먹여 많은 백성들을 구하였고,

이웃 고을인 청주. 옥천에까지 보급되어 살아난 사람이 부지기 수였다.

내가 강진에 유배되어 있을 때에, 기사년(己巳年 : 1809 년)과

갑술년(甲戌年 : 1814 년)에 큰 기근이 들었고, 그 이듬해 봄에 염병이 크게 번졌다.

나는 이 처방을 보급하여 많은 사람을 건져냈다.

그런데 이 처방 가운데 부자(附子)는 포부자(泡附子)를 쓰면 효험이 없고 반드시

生附子(생부자)를 써야 신기한 효험을 볼 수 있다. 각 고을의 수령된 사람은 반드시

성산자의 처방을 적어 두었다가 염병이 만연하게 되는 해에 이 약을 많이 조제하여

아전들로 하여금 백성들에게 싸게 팔아 널리 구제해야 할 것이다.]

[ 각주 ]

1) 온역(瘟疫) : 급성(急性) 전염병(傳染病)의 하나인 염병.

2) 마진(麻疹) : 근육(筋肉)이 마비(痲痹ㆍ麻痹)되는 병. 역질(疫疾) 천연두.

3) 요찰(夭札) : 전염병에 의해 어려서 죽다.

4) 가우(嘉祐) : 송(宋)나라 인종(仁宗) 때의 연호(年號).

5) 성산자(聖散子) : 산의 기운과 장기(瘴氣)로 인한 병과 온역(瘟疫),

    풍한습(風寒濕)의 사기(邪氣)에 상(傷)한 것을 치료하는 처방임.

    온역(溫疫)을 치료하는 처방이다.

 

★ 流行之病死亡過多救療 埋葬者 宜請賞典.

(류행지병사망과다구료 매장자 의청상전. )

병의 유행으로 사망자가 아주 많을 때는 구호하고 매장해 준 사람에게

상전(賞典)을 주도록 청하여야 한다.

[무오년(戊午年 : 1798 년)) 겨울에 독감이 갑자기 성하여 죽는 자가 헤아릴 수 없이

많았다. 그러자 조정에서는 부유층 백성들에게 환자들을 구호. 치료. 매장하라는

명령을 내리고는, 이에 응하는 자에게는 삼품(三品)이나 二品의 자격을 줄 것을

허락하였다. 내가 곡산의 부사로 있을 때에 윤음(綸音)으로써 깨우쳐 일러 주니,

이에 응한 자가 다섯 명이었다. 일을 마치고 나서 상사에게 일일이 보고하니,

상사는, 『다른 고을에서는 받들어 행한 자가 한 명도 없으니, 한 고을의 백성만을

상주할 수는 없소.』하고는 불문에 붙이려 하였다.

그래서 나는 즉시 승정원에 보고하여 이렇게 아뢰었다.

'차후로는 백성들이 윤음의 승지를 믿고 따르지 않을 것입니다.

이것은 지나쳐 버릴 만큼 작은 일이 아니니 마땅히 임금께 아뢰어야 할 것입니다.

그러하지 않는 경우에는 내가 차후 상경하여 직접 상소할 것입니다.』 라고 하였더니

승정원에서 왕께 아뢰자, 왕은 크게 놀라시며 감사를 두 등급 감봉 조치하시고

내 고을의 백성 다섯 명에게 모두 품계를 내리셨다.]

[ 각주 ]

1) 의청상전(宜請賞典) : 마땅히 상을 내리는 은전(恩典)을 청해야 함.

2) 윤음(綸音) : 임금의 말씀. 윤지(綸旨).

 

★ 近所行麻脚之瘟 亦有新方自燕京來.

(근소행마각지온 역유신방자연경래. )

근래 유행되는 마각온(麻脚瘟)의 치료에는 연경(燕京)으로부터 들어온 새로운

처방이 있다.

[도광 원년 신사년(辛巳年 : 1821 년) 가을에 이 병이 유행하였는데, 열흘도 못되어

평양에서만 사망자가 수만 명이요, 서울 오부(五部 : 동부. 서부. 남부. 북부. 중부)

에서의 사망자가 13만 명이었다. 그 증상은 혹 장질부사 같기도 하고

전근괄란(轉筋霍亂) 같기도 한데, 아직 그 치료법이 없었다.

그 해 겨울 평소 나와 교분이 있던 청(淸)의 학자 엽동 경(葉東卿)이

유리창(琉璃廠)에서 약방문을 새겨 보내왔는데, 이에 기록하려 한다.

유행성 온역(일명 마각온)을 다스리는 방법 : 아조(牙早). 북세신(北細辛)

각 3 전 5 푼, 주사(주砂). 명웅황(明雄黃) 각 2 전 5 푼, 당목향(唐木香). 진피(陳皮).

곽향(藿香). 길경(桔梗). 박하(薄荷) 관중(貫仲). 백지(白芷). 방풍(防風). 반하(半夏).

감초(甘草) 각 2 전, 고번(枯樊+石) 1 전 5 푼을 함께 갈아서 고운 가루로 만든다.

이것을 잘 싸서 질그릇 병에 넣어서 몸에 차고 다니면 위급할 때에 요긴하게

쓸 수 있을 것이다.]

[ 각주 ]

1) 도광(道光) : 청(淸)나라 선종(宣宗)의 연호(年號).

2) 전근곽란(轉筋霍亂) : 쥐가 나서 근육(筋肉)이 뒤틀리어 오그라지며,

    토하고 설사(泄瀉)가 나며 고통이 심한 급성 위장병.

3) 유리창(琉璃廠) : 북경 화평문(和平門) 남쪽과 호방교(虎坊橋) 북쪽에 위치한

    문화의 거리.

4) 마각온(麻脚瘟) : 비브리오 콜레라(Vibrio cholera)균에 의한

    급성 세균성 장내감염증.〈오주연문장전산고〉

제 6 장 救災(구재)

(재난을 구제하라.)

 

 

★ 水火之災 國有恤典 行之惟謹 宜於恒典之外 牧自恤之.

(수화지재 국유휼전 행지유근 의어항전지외 목자휼지. )

수재(水災)나 화재(水災)의 재해에 대해서는 국가에서 구제하는 법이 있으니

삼가 행할 것이며 정해진 법 이외에도 목민관이 마땅히 스스로 구제해야 한다.

[〈비국요람(備局要覽)〉에 다음과 같이 규정하고 있다. 물에 떠내려가고 잠겼거나

무너져 내렸거나 불에 탄 인가가 백 가구 미만인 경우에는 전례에 따라 구휼하되,

대호(大戶)는 쌀 일곱 말, 중호는 쌀 여섯 말, 소호는 쌀 다섯 말을 지급하고,

백 호 이상일 경우에는 각각 따로 구휼하되, 대호는 쌀 아홉 말, 중호는 쌀 여덟 말,

소호는 쌀 일곱 말로 하고, 호랑이에 물려 죽었거나 물에 빠져 죽었거나 불에 타

죽은 경우에는 휼전은 각각 피잡곡 한 석으로 한다. [열 다섯 말을 한 석으로 한다.]

또 휼미(恤米)를 지급하는 외에 수령은 몸소 그 지방에 가서 부근의 사유림에서

목재를 벌목하되, 그 값을 서로 상의해 결정해서 그만큼 산주(山主)의 요역을

면제해 주고, 면제 기한을 어기지 말 것이며, 그 값에 해당하는 만큼 면제해

주었으면 그것으로 끝내야 한다. 그 산에서 베어낸 목재가 대수로운 양이 아닌

경우에는 그리할 필요가 없다. 재해를 입은 民家는 요역을 면제받는데,

1 년 동안만 면제해 주면 된다. 물에 빠져 죽거나 불에 타 죽은 사람은 그 사람의

액운인 것이다. 집도 파손되고 사람까지 죽은 경우에는 휼전을 이중으로

베풀 수 없는 것이니, 그 중 후한 쪽을 택하여 베풀어야 한다.

호랑이에 물려 죽은 사람에게는 휼전 외에 더 보태 줄 필요가 없다.

다만 그 호랑이를 잡아서 원수를 갚아주면 되는 것이다.]

[ 각주 ]

1) 목자휼지(牧自恤之) : 목민관이 스스로 빈민이나 이재민 등을 보살펴야 한다.

 

 

★ 凡有災厄 其救焚拯溺 宜如自焚自溺 不可緩也.

(범유재액 기구분증익 의여자분자익 불가완야. )

무릇 재액(災厄)이 있으면 물불에서 구해내고 한다. 마치 내가 불에 타고

물에 빠진 것 같이하여서둘러야하며 늦추어서는 안 된다.

[소식(蘇軾)이 밀주(密州)로부터 서주(徐州)로 옮겼는데, 그 때에 하수(河水)가 터져

물이 성 밑으로 밀려드니, 백성들이 다투어 나와 물을 피하려 했다.

소식이 말하기를, 『내가 여기에 있는 한 성이 무너지게 하지는 않을 것이다.』라고

하고는, 그들을 다시 성 안으로 들어오게 한 후 몸소 말채찍을 들고

무위영(武衛營)으로 들어가 졸장을 불러 말하되,

『너희가 비록 금병(禁兵)이나 나를 도와 진력토록 하라.』라고 하니,

졸장이 응답하기를, 『태수께서 강물을 피하지 않으시는데, 저희가 감히 목숨을

아끼겠나이까.』라고 하고는, 부하들을 이끌고 옷을 걷어 붙이고 맨발로 삼태기와

삽을 들고 나아가 동남(東南)으로 긴 둑을 쌓되, 희마대(戱馬臺)에서 시작하여

성에까지 닿으니, 백성들이 안심했다. [소식열전]

선조(宣祖) 때에 황진(黃進)이 동복(同福)의 현감이 되었는데, 그 고을에 마침

큰 물이 들었다. 백성들이 떠내려가고 빠져 죽게 되자,

황공(黃公)은 스스로 몸을 던져 떠내려가는 사람들을 건져냈다.

그 가운데에 한 노파를 구출해 넀는데, 그 노파는 죽음을 면하자,

『내 표주박도 좀 건져 주시오 !』 하고 외쳤다.]

[ 각주 ]

1) 무위영(武衛營) : 조선 후기 궁궐 수비를 맡은 관청.

2) 금병(禁兵) : 성을 지켜 보호하는 임무를 맡은 군사.

3) 동복(同福) : 전남 화순군 동복면 부근.

 

★ 思患而豫防 又愈於旣災而施恩.

(사환이예방 우유어기재이시은. )

환란이 있을 것을 생각하고 미리 예방하는 것은 이미 재앙을 당하여

은혜를 베푸는 것보다 낫다.

[초두난액(焦頭爛額)이 곡돌사신(曲突徙薪)만 못하니, 산골의 민가가 지대가 낮고

강이 가까운 곳에 있으면 수재를 당하기 전에 미리 이사하도록 경계해 주고,

이미 큰 마을이 형성되어 쇱게 이동할 수 없는 경우에는 여름철에는 반드시

배를 준비해 두는 것이 좋다. 또 큰 마을에서는 화재에 대비하여 저수지를 파서

물을 저장하게 하거나 독에 물을 가득 채워 놓도록 했다가 불이 나면 거적이나

멍석을 물에 훔씬 적셔 불을 끄도록 한다.

평양이나 전주 같은 대도시에는 수총(水銃)을 10 여 구(具) 준비해 두어야 한다.]

[ 각주 ]

1) 초두난액(焦頭爛額) : 화재를 미연에 방지하게 한 사람은 버림받고

불이 난 뒤에 불을 끈 사람은 상을 받는다는 뜻.

2) 곡돌사신(曲突徙薪) : 화재를 예방하기 위하여 굴뚝을 꼬불꼬불하게 만들고

아궁이 근처의 나무를 딴 곳으로 옮긴다는 뜻.

 

★ 若夫築堤設堰 以捍水災 以興水利者 兩利之術.

(약부축제설언 이한수재 이흥수리자 양이지술. )

제방을 쌓고 언덕을 만들어서 수재도 방지하고 수리(水利)도 일으키는 것은

두 가지로 이익을 얻는 방법이 된다.

[나의 집이 열수(漢江) 가에 있어, 해마다 여름 가을로 큰 물이 지곤 하는데,

떠내려오는 집들이 봄철의 얼음장 같았으며, 혹 떠내려오는 집의 지붕 위에서는

닭이 울기도 하고 문귀틀에 옷가지가 걸려 있기도 하였다.

해마다 이런 일이 되풀이되니, 이는 모두가 목민하는자들이 백성들의 안전을

생각지 않은 때문이다. 현이나 읍이 큰 강가에 인접해 있는 경우에는 수령은 마땅히

수촌(水村)을 순찰하면서 떠내려가거나 물에 쓸릴 위험이 있는 집들은 지대가

높은 곳으로 옮기도록 독려해야 하며, 큰 산기슭에 있는 집들을 위해서는

마을 뒤에 따로 긴 둑을 쌓아 폭우와 급류를 막아야 하거니와,

이는 결코 소홀히해서는 안 되는 일인 것이다.]

★ 其害旣去 撫綏安集 是又民牧之仁政也.

(기해기거 무수안집 시우민목지인정야. )

그 재해가 지난 후에 백성을 어루만져 주고 안정시켜 주어야 하니

이것 또한 민목(民牧)의 어진 정사이다.

[옛날에 교리(校理) 김희채(金熙采)가 장련현(長漣縣 : 오늘날 황해도 殷栗郡)의

지사로 일할 때에 큰 물이 져서 구월산이 무너져 내려 무려 30 리나 매몰되었다.

이로 힌한 인명 피해와 농사의 피해가 이루 헤아릴 수 없었다.

김공이 나아가 시찰하매, 백성들이 그를 맞아 통곡하였다.

그는 말에서 내려 백성들의 손을 잡고 함께 통곡하니, 백성들이 감격하여 기뻐하며,

죽어도 여한이 없다고 하였다. 울음이 멎자, 백성들에게 원하는 바를 물어서

즉시 순영(巡營)으로 달려가, 백성들의 소원을 낱낱이 중앙에 아뢸 것을 요구하면서

온종일 감사와 다투니, 감사는 이를 괴롭게 여겨,

『김공은 어질길 하나 일에 요령이 없다.』라고 말하고는,

장계(狀啓)를 올려 유능한 사람으로 교체해 줄 것을 요청하였다.

이에 전조(銓曺)에서는 안협(安峽)의 현감과 서로 자리를 맞바꿀 것을 허락하였다.

김공이 벼슬을 버리고 돌아가려 하자, 백성들이 길을 막고 막고 고삐를 잡은 채

열 겹이나 둘러쌌다. 공은 하는 수 없이 촌가에서 10여 일을 묵다가

백성들이 조금 늦추어진 틈을 타서 밤에 몰래 빠져 도망치니,

백성들은 고을의 경계에 모여 어미 잃은 아이 울듯하였다. 이로 보건대,

목민은 인(仁)으로써 해야지 정(政)으로만 해서 되는 것도 아닌 것이다.]

[ 각주 ]

1) 교리(校理) : 조선때 교서관(校書館), 승문원(承文院), 홍문관의 종5품 벼슬.

2) 장련현(長漣縣) : 오늘날의 황해도 은율군(殷栗郡) 부근.

 

★ 飛蝗蔽天 禳之捕也 之以省民災 亦可謂仁聞矣.

(비황폐천 양지포야 지이성민재 역가위인문의. )

비황(飛蝗)이 하늘을 뒤덮으면 물러가도록 빌고 잡아 없애서

백성들의 재해를 덜어 주어야 어진 목민관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후한 때에 마원(馬援)이 무릉의 태수가 되었는데, 군(郡) 내에 연달아 황충 떼가

기승을 부렸다. 백성들의 피해가 이만저만이 아니어서, 마원이 가난한 백성을

구휼하고 세금을 가볍게 하니, 황충의 떼가 바다로 날아들어가 새우가 되었다.

신라 시대에 김암(金巖)이 패강진을 다스릴 때에, 황충이 떼가 서쪽으로부터

패강의 경계에 들어와 들을 뒤덮으니, 백성들이 두려워하였다.

김암이 산 정상에 올라 분향하고 하늘에 기도하니, 홀연히 비바람이 일어 황충을

전멸시키고 말았다. 생각해 보건대 우리나라에서는 본래 황충의 재해는 없다.

내 나이 60이지만 이제껏 황충을 본 일이 없는데,

신라 때에는 그런 일이 있었던 모양이다.]

 

[ 각주 ]

1) 비황(飛蝗) : 날아다니는 메뚜기.

2) 이성민재(以省民災) : 백성들의 재앙을 덜어 주는 것.

3) 패강진(浿江鎭) : 대동강 하류 지방.

 

資 料 編 輯 者 德 庤 / 李 斗 振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