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 仲尼弟子列傳

第七. 仲尼弟子列傳(중니제자열전)

덕치/이두진 2021. 7. 15. 19:15

           史記 列傳

 

 第七 仲尼弟子列傳(중니제자열전)

 

 

 孔子曰 : 「 受業身通者七十有七人, 皆異能之士也.  德行 顔淵·閔子騫·冉伯牛·仲弓. 

 政事 冉有·季路.   言語 宰我·子貢.  文學 子游·子夏.
 
(공자왈 : 「 수업신통자칠십유칠인, 개이능지사야.  덕행 안연· 민자건· 염백우· 중궁. 

 정사 염유· 계로.  언어 재아· 자공.  문학 자유· 자하.)


 ['공자'가 말하기를 : “ 내 제자로서 학업에 힘써 육예에 통한 자는 77명이다, 

 그들은 모두 뛰어난 재능을 지닌 선비들이다.
 덕행에는 '안연', '민자건', '염백우', '중궁'이 있다.  정치에는 '염유', '계로'가 있다. 

 언어에는 '제아', '자공'이 있다.  문학에는 '자유', '자하'가 있다.]

 

 師也辟, 參也魯, 柴也愚, 由也喭.  回也屢空, 賜不受命而貨殖焉, 億則屢中. 」
 
(사야벽, 삼야로, 시야우, 유야언.  회야루공, 사불수명이화식언, 억즉루중.)


 [사(전손사)는 잘난 체하고, 삼(증삼)은 둔하며, 사(고시)는 우직하고, 유(중유)는 거칠다. 
 회(안회)는 자주 끼니가  떨어져 배를 곯고, 사(단목사)는 내 가르침을 따르지 않고

 돈벌이에만 힘을 기울이는데 세상의 흐름을 정확히 파악하였다. ”라고 하였다.]

 

 孔子之所嚴事, 於周則老子, 於衛 蘧伯玉, 於齊 晏平仲, 於楚 老萊子, 於鄭 子産, 於魯 孟公綽. 

 數稱臧文仲·柳下惠·銅鞮伯華·介山子然, 孔子皆後之, 不並世.
 
(공자지소엄사, 어주즉노자, 어위 거백옥, 어제 안평중, 어초 노래자, 어정 자산, 어노 맹공작. 

 수칭장문중·류하혜·동제백화·개산자연, 공자개후지, 불병세.)


 [공자가 존경한 인물은 주나라의 '노자'와 위나라의 '거백옥', 제나라의 '안평중', 초나라의 '노래자',

 정나라의 '자산', 노나라의 '맹공작' 등이 있었고, 또 '장문중', '유하혜', 동제의 '백화', 개산의 '자연'(개자추)등을

 자주 칭송했으나, 이들은 모두 '공자'보다 앞사람들이어서 그들과는 세상을 함께 하지는 않았다.]

 

 顔回者, 魯人也.  字子淵, 少孔子三十歲.  顔淵問仁.   孔子曰 : 「 克己復禮, 天下歸仁焉. 」 
 
(안회자, 노인야.  자자연, 소공자삼십세.  안연문인.   공자왈 : 「 극기복례, 천하귀인언. 」)

  
 ['안회'(BC 521 ~ ? )는 노나라 사람이다.  자는 '자연'이고 '공자'보다 30세 어리다. 

 '안연'이 인에 대해 물었다.  '공자'가 대답하기를 : “ 자신의 욕심을 극복하고 예로 돌아가면,

 온 천하는 그가 어질(仁)다고 할 것이다 "라고 하였다.]

 

 孔子曰 : 「 賢哉回也, 一簞食, 一瓢飮, 在陋巷.  人不堪其憂, 回也不改其樂. 

 回也如愚, 退而省其私, 亦足以發, 用之則行, 捨之則藏, 唯我與爾有是夫. 」
 
(공자왈 : 「 현재회야, 일단식, 일표음, 재루항.  인불감기우, 회야불개기락. 

 회야여우, 퇴이성기사, 역족이발, 용지즉행, 사지즉장, 유아여이유시부. 」)


 [공자가 말하기를 : " 참으로 어질도다, 안회여 ! 밥 한 그릇에 국 한 사발로 식사를 하며 누추한 뒷골목에 살았다.

 보통 사람이라면 근심을 참지 못하는데, '안회'는 오히려 자기가 즐거워하는 일들을 바꾸지 않았다. 

 또한 '안회'는 마치 어리석은 사람 같으나 물러간 뒤에 가만히 살펴보니, 그가 배운 바를 충분히 발휘하고 있었다.

 '안회'는 역시 어리석은 사람이 아니라, 세상이 필요로 할 때면 벼슬길에 나가 도를 행하고, 벼슬길에서 물러나면

 그것들을 가슴 속에 묻어둘 수 있는 것은 오로지 나와 '안회'만이 할 수 있을 뿐이다 ! "라고 하였다.]

 

 回年二十九, 髮盡白, 蚤死.  孔子哭之慟曰 :「 自吾有回, 門人益親. 」  魯哀公問 :

「弟子孰爲好學.」 孔子對曰 :「有顔回者好學, 不遷怒, 不貳過, 不幸短命死矣, 今也則亡.」
 
(회년이십구, 발진백, 조사. 공자곡지통왈 : 「자오유회, 문인익친. 」  노애공문 :

「제자숙위호학. 」 공자대왈 : 「유안회자호학, 불천노, 불이과, 불행단명사의, 금야즉망.」)


 ['안회'는 나이 29세에 머리털이 이미 백발이 되었고 젊은 나이에 죽었다.
 '공자가 소리내어 통곡하며 말하기를 : " 내가 '안회'를 제자로 삼은 뒤부터 다른 제자들과 
더욱 친해질 수 있었다.”

 라고 하였다.  노'애공'이 '공자'에게 묻기를 : " 제자들 중 누가 가장 학문을 좋아합니까 ? "라고 하자.
 '공자'가 대답하기를 : " '안회'라는 자가 학문을 좋아했으며, 그는 자기의 노한 감정을 다른 사람에게 
옮기지 

 않았고, 같은 잘못을 두번 다시 하지 않았으나, 불행히도 그는 명이 짧아 죽어 지금은 없습니다. "라고 하였다.]

 

 閔損字子騫, 少孔子十五歲.  孔子曰 : 「 孝哉 !  閔子騫, 人不閒於其父母昆弟之言. 」 

 不仕大夫, 不食汙君之祿曰, 「 如有復我者, 必在汶上矣. 」
 
(민손자자건, 소공자십오세.  공자왈 : 「 효재 !  민자건, 인불한어기부모곤제지언. 」 

 불사대부, 불식오군지록왈, 「 여유복아자, 필재문상의. 」)


 ['민손'(BC 536 ~ ? )은 자가 '자건'으로, '공자'보다 15살 어리다.
 '공자'가 말하기를 : " 효성스럽도다 !  '민자건'이여 !  사람들은 그의 부모 형제들이 
그를 효자라고 자랑해도

 조금도 틀리다고 생각하지 않는구나. ”라고 하였다. 대부의 벼슬을 받지 않았으며,

 군주의 더러운 녹봉을 먹지 않겠다고 하면서 말하기를 :

 " 만일 다시 나를 부르러 오는 일이 있다면, 나는 반드시 노나라를 떠나 "문수"로 가서 살리라 ”라고 하였다. ]


 冉耕字伯牛.  孔子以爲有德行.  伯牛有惡疾, 孔子往問之,

 自牖執其手曰 :「 命也夫, 斯人也而有斯疾, 命也夫. 」
 (염경자백우, 공자이위유덕행.  백우유악질, 공자왕문지,

 자유집기수왈 : 「 명야부, 사인야이유사질, 명야부. 」)


 ['염경'은 자가 '백우'다.  '공자'는 그가 덕행이 뛰어났다고 생각했다. 

 '백우'가 못된 병에 걸리자, '공자'는 그의 집에 문병을 가서, 창문 너머로 손을 잡고 말하기를 :

 " 천명이로다 !  이렇게 훌륭한 사람이 이런 나쁜 병에 걸렸다니, 천명이로다 ! "라고 하였다.] 


 冉雍字仲弓.  仲弓問政.  孔子曰 : 「 出門如見大賓, 使民如承大祭, 在邦無怨, 在家無怨. 」
 (염옹자중궁.  중궁문정.  공자왈 : 「 출문여견대빈, 사민여승대제, 재방무원, 재가무원. 」)


 ['염옹'(BC 522 ~ 미상)은 자가 '중궁'이다.  '중궁'이 정치에 대해 물었다.  

 '공자'가 대답하기를 : " 내 집을 나가 사람들을 대할 때는 마치 귀한 손님을 대하듯이 해야 하고,
 백성들에게 일을 시킬 때는 마치 나라의 큰 제사를 지내는 것과 같이 엄숙하게 해야 하며, 

 나라에 벼슬살이를 할 때는 원한을 사는 일이 없어야 하고,
 집안에 있을 때는 원망을 사는 일이 없도록 해야 한다. "라고 하였다.]

 

 孔子以仲弓爲有德行曰 : 「 雍也可使南面. 」 

 仲弓父, 賤人, 孔子曰 : 「 犁牛之子騂且角, 雖欲勿用, 山川其舍諸. 」
 (공자이중궁위유덕행왈 : 「 옹야가사남면. 」  

 중궁부, 천인, 공자왈 : 「 리우지자성차각, 수욕물용, 산천기사제. 」)


 ['공자'는 '중궁'의 덕행이 뛰어나다는 것을 인정하면서 말하기를 : " '염옹'은 군주의 자리에 앉을 자격이 있다. "

 라고 하였다.  또 '중궁'의 아버지는 출신이 천인이었으므로 '공자'가 말하기를 :

 " 비록 얼룩소 새끼라 할지라도 털색이 붉고 뿔이 잘났으면 비록 제사로 쓰지 않으려고 해도,

 산천의 신령들이 그것을 마다하지 않는데 어찌 제사용으로 쓸 수 없겠는가 ? "라고 하였다.]


 冉求字子有, 少孔子二十九歲.  爲季氏宰, 季康子問孔子曰 : 「 冉求仁乎 ? 」 

 曰 : 「 千室之邑, 百乘之家, 求也可使治其賦, 仁則吾不知也. 」
 (염구자자유, 소공자이십구세.  위계씨재, 계강자문공자왈 : 「 염구인호 ? 」 

 왈 : 「 천실지읍, 백승지가, 구야가사치기부, 인즉오불지야.」 )


 ['염구'(BC 518 ~ 미상) 자는 '자유, 유자'이고, '공자'보다 29세 어리다. 
 노나라 대부 '계손씨'의 가신으로 있던 '염구'에 대해 '계강자'가 '공자'에게 묻기를 :

 " '염구'는 어진 사람입니까 ? "라고 하자.
 '공자'가 대답하기를 : "천 호의 고을과 백승의 제후국이라면 '염구'는 훌륭히 다스릴 수 있겠지만,

 그가 어진지는 제가 알지 못하겠습니다. "라고 하였다.] 
 
 復問, 「 子路仁乎 ? 」 孔子對曰 :「 如求. 」 求問曰 :「 聞斯行諸. 」  子曰 :「 行之. 」 

 子路問 :「 聞斯行諸. 」  子曰 :「 有父兄在, 如之何其聞斯行之. 」
 (부문, 「 자로인호 ? 」 공자대왈 : 「 여구. 」  구문왈 :「 문사행제. 」 자왈 :「 행지. 」 

 자로문 : 「 문사행제. 」  자왈 :「 유부형재, 여지하기문사행지. 」)


 ['계강자'가 다시 묻기를 :  " 그렇다면 "자로'는 어집니까 ? "라고 하자.  

 '공자'가 대답하기를 : " 염구와 같습니다. "라고 하였다.
 '염구'가 '공자'에게 묻기를 : " 정당한 말을 들었을 때에는 그대로 행해야 합니까 ?"라고 하자.  

 '공자'가 말하기를 : "그대로 행하라."라고 하였다.
 '자로'가 같은 것을 묻기를 : " 정당한 말을 들었을 때에는 그대로 행해야 합니까 ?"라고 하자. 
 공자가 대답하기를 : " 아버지와 형이 계신데 어떻게 상의도 없이 들은 대로 행할 수 있겠느냐 ? "하였다.]

 

 子華怪之 :「 敢問問同而答異 ? 」  孔子曰 : 「 求也退, 故進之, 由也兼人, 故退之. 」
 (자화괴지, 감문문동이답이.  공자왈 : 「 구야퇴, 고진지, 유야겸인, 고퇴지. 」)

  
 ['자화'가 이상한 생각이 들어 묻기를 : " 감히 묻습니다. 묻는 말은 똑 같은데 대답은 서로 다릅니다.

 어째서 입니까 ? "라고 하자.
 '공자'가 대답하기를 : " '염구'는 성격이 소극적이기 때문에 앞으로 나아가라고 한 것이고,

 '자로'는 용기가 많은 사람이기 때문에 물러서라고 한 것이다. "라고 하였다.]


 仲由字子路, 卞人也.  少孔子九歲.  子路性鄙, 好勇力, 志伉直.  冠雄雞, 佩豭豚, 陵暴孔子. 

 孔子設禮稍誘子路, 子路後儒服委質, 因門人請爲弟子.
 (중유자자로, 변인야.  소공자구세.  자로성비, 호용력, 지항직.  관웅계, 패가돈, 능폭공자. 

 공자설례초유자로, 자로후유복위질, 인문인청위제자.)


 ['중유'(BC 543 ~ BC 480)는 자가 '자로'이며 노나라 "변읍" 사람이다. 

 '공자' 보다 9살 어리다.  '자로'는 성격이 거칠고 용맹을 좋아했으며 의지가 강했다.
 수탉의 꼬리로 관을 만들어 쓰고 수퇘지의 가죽으로 주머니를 만들어 허리에 차고 '공자'를 찾아와 업신여기며

 폭행하려고도 했었다.  그러나 '공자'는 항상 예로서 '자로'를 대하며 차츰 바른 길로 이끌었다. 

 '자로'는 얼마 후에 유가의 복장을 입고 선생을 모시는데 바치는 예물을 드린 다음,
 '공자' 제자들의 천거를 받아 '공자'의 제자로 들어왔다.]

 

 子路問政,  孔子曰 :「 先之, 勞之. 」  請益, 曰 :「 無倦. 」  子路問 :「 君子尙勇乎 ? 」 

 孔子曰 :「 義之爲上, 君子好勇而無義則亂, 小人好勇而無義則盜. 」
 (자로문정,  공자왈 :「 선지, 로지. 」  청익, 왈 :「 무권. 」  자로문 :「 군자상용호 ? 」 

 공자왈 :「 의지위상, 군자호용이무의즉란, 소인호용이무의즉도. 」)


 ['자로'가 정사에 관해 묻자,  '공자'가 말하기를 : " 자기가 먼저 솔선수범하여 백성들에게 모범을 보이고,

 백성을 위해 수고를 아끼지 말아야 한다. "라고 하였다. '자로'가 더 가르쳐 줄 것을 청하자.

 '공자'가 다시 말하기를 : " 솔선수범하는데 게으름을 피우지 않아야 한다. "라고 하였다. 
 '자로가 다시 묻기를 : " 군자도 용맹함을 추구해야 합니까 ? "라고 하자.
 '공자'가  말하기를 : " 군자는 의를 가장 소중하게 여긴다.  군자가 용맹하기만 하고 의를 모른다면

 ​세상이 어지러워지고, 소인이 용맹하지만 의를 모른다면 남의 것을 훔치는 도적이 된다. "라고 하였다.]

 

 子路有聞, 未之能行, 唯恐有聞.
 (자로유문, 미지능행, 유공유문.)


 ['자로'가 '공자'의 가르침을 들으면 아직 실천하지 않은 상태에서, 다른 가르침을 받게 될 것을 두려워했다.]

 

 孔子曰 : 「 片言可以折獄者, 其由也與.  由也好勇過我, 無所取材.  若由也, 不得其死然. 

 衣敝縕袍與衣狐貉者立, 而不恥者, 其由也與.  由也升堂矣, 未入於室也. 」
 (공자왈 : 「 편언가이절옥자, 기유야여.  유야호용과아, 무소취재.  약유야, 불득기사연. 

 의폐온포여의호맥자입, 이불치자, 기유야여.  유야승당의, 미입어실야. 」)

 
 ['공자'가 말하기를 : " 단 한 마디의 말로 송사를 판결할 수 있는 사람은 아마도 '자로'일 것이다.
 '자로'의 용기는 나보다 낫지만 그것을 적절하게 사용할 줄 모르는 것이 흠이다. 

 그래서 '자로'와 같은 사람은 제 명대로 살지 못한다. 
 다 떨어진 솜두루마기를 입었음에도 여우나 담비 가죽으로 만든 털옷을 입은 사람과 같이 있더라도, 

 조금도 부끄러워하지 않는 사람은 아마도 '자로'일 것이다. '자로'의 학문은 마치 대청마루에 오르기는 했으나,

 아직 방안으로까지는 들어오지 못하였다고 할 수 있다. "라고 하였다.]

 

 季康子問 : 「 仲由仁乎 ? 」  孔子曰 : 「 千乘之國可使治其賦, 不知其仁. 」 
 (계강자문 : 「 중유인호 ? 」  공자왈 : 「 천승지국가사치기부, 불지기인. 」 )


 ['계강자'가 묻기를 : "'중유'는 어집니까 ? "라고 하자. 
 '공자'가 말하기를 : "'자로'는 천승의 나라를 잘 다스릴 수 있겠으나,

 ​그가 어진 사람인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라고 하였다.]

 

 子路喜從游, 遇長沮桀溺荷蓧丈人.  子路爲季氏宰, 季孫問曰 :「 子路可謂大臣與 ? 」 

 孔子曰 :「 可謂具臣矣. 」
 (자로희종유, 우장저걸익하조장인.  자로위계씨재, 계손문왈 :「 자로가위대신여 ? 」 

 공자왈 :「 가위구신의. 」)

 
 ['자로'는 '공자'가 여러 나라를 여행할 때 기꺼이 수행하게 되었는데,

 그때 '장저', '걸익', 하조장인 등의 은자들을 만나기도 했다.
 '자로'가 노나라 계씨 집안의 가신으로 있었을 때 '계손자'가 '공자'에게 묻기를 :

 " '자로'는 대신의 자질을 갖추고 있다고 말할 수 있습니까 ? "라고 하자.
 '공자'가 대답하기를 : " '자로'는 보통 신하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라고 하였다.]

 

 子路爲蒲大夫, 辭孔子.  孔子曰 : 「 蒲多壯士, 又難治.  然吾語汝 : 恭以敬, 可以執勇 ;

 寬以正, 可以比衆 ; 恭正以靜, 可以報上. 」
 (자로위포대부, 사공자.  공자왈 : 「 포다장사, 우난치.  연오어여 : 공이경, 가이집용 ;

 관이정, 가이비중 ; 공정이정, 가이보상. 」)

 
 ['자로'가 위나라의 "포"땅의 대부로 임명되어 부임하러 갈 때 '공자'에게 하직 인사를 하였다.
 '공자'가 말하기를 : "포읍"은 인품이 훌륭한 선비들이 많아 다스리기가 어렵다.

 ​그래서 내가 너에게 일러두니 명심하라. 상대방을 공경하는 마음으로 몸을 낮추면,

 그들의 마음을 잡아둘 수 있을 것이고, 정의로운 마음으로 너그러우면 백성들이 백성들이 너를 따를 것이다. 
 공손한 태도로 바른 정치를 행하여 온 고을의 인심을 안정시키면,

 ​그것이 곧 윗사람에게 보답하는 것이다 .”라고 하였다.]

 

 初衛靈公有寵姬曰南子.  靈公太子蕢聵得過南子, 懼誅出奔.  及靈公卒, 而夫人欲立公子郢,

 郢不肯曰 :「 亡人太子之子輒在. 」 於是衛立輒爲君, 是爲出公.
 (초위령공유총희왈남자.  령공태자괴외득과남자, 구주출분.  급령공졸, 이부인욕입공자영,

 영불긍왈 : 「 망인태자지자첩재. 」  어시위입첩위군, 시위출공.)


 [옛날 위'영공'이 총애했던 여인이 있었는데 부르기를 '남자'라고 했다. 

 '영공'의 태자 '괴외'가 '남자'에게 죄를 범하고 주살될 것을 두려워하여 나라 밖으로 달아났다.
 이윽고 '영공'이 죽자, 그 부인인 '남자'는 공자 '영'을 세우려고 하였으나, 공자 '영'이 수긍하지 않고 말하기를 :

 " 외국으로 달아난 태자의 아들 '첩'이 이 땅에 살고 있으니 마땅히 그를 세워야 합니다. "라고 하자.

 이에 위나라에서는 '첩'을 임금으로 세웠다. 이가 '출공'이다. ]

 

 出公立十二年, 其父蕢聵居外, 不得入.  子路爲衛大夫孔悝之邑宰. 

 蕢聵乃與孔悝作亂, 謀入孔悝家, 遂與其徒襲攻出公.  出公奔魯, 而蕢聵入立, 是爲莊公.
 (출공입십이년, 기부괴외거외, 불득입.  자로위위대부공리지읍재. 

 괴외내여공리작란, 모입공리가, 수여기도습공출공.  출공분노, 이괴외입립, 시위장공.)


 ['출공'이 즉위한 지 12년이 지났으나, 그의 부친 '괴외'는 여전히 나라 밖에서 거주하며 

 위나라에 들어오지 못했다. 이 무렵 '자로'는 위나라의 대부 '공리'의 가신으로 있었다. 

 송나라에 머물고 있던 '괴외'는 '공리'를 자기편으로 끌어들여 난을 일으킬 목적으로,

 ​몰래 '공리'의 집으로 들어가 마침내 그 무리들과 함께 '출공'을 기습했다.  

 '출공'은 노나라로 달아나고 '괴외'가 임금 자리에 오르니, 이가 위 '장공'이다.]

 

 方孔悝作亂, 子路在外, 聞之而馳往, 遇子羔出衛城門. 

 謂子路曰 :「 出公去矣, 而門已閉, 子可還矣, 毋空受其禍. 」

 子路曰 :「食其食者不避其難. 」 子羔卒去.
 (방공리작란, 자로재외, 문지이치왕, 우자고출위성문. 

 위자로왈 : 「 출공거의, 이문이폐, 자가환의, 무공수기화. 」 

 자로왈 : 「식기식자불피기난. 」  자고졸거.)

 
 ['공리'가 난을 일으켰을 때 도성 밖에 머물고 있던 '자로'가 난이 일어났다는 소식을 듣고 성을 향해 달려오다가

 그때 마침 성문을 빠져나오던 '자고'(고시)를 만났다.
 '자고'가 '자로'에게 말하기를 : " '출공'은 이미 달아나버렸고 성문은 벌써 닫혔으니,

 ​그냥 돌아가시는 편이 좋을 것입니다, 공연히 화를 입을 필요가 있겠습니까 ? "라고 하였다. 
 '자로'가 말하기를 : " 남의 녹을 받아먹는 자로써 어떻게 주인 되는 사람의 어려움을 피할 수 있겠는가 ?라고 하자.

 '자고'는 그대로 떠나 버렸다.]

 

 有使者入城, 城門開, 子路隨而入, 造蕢聵. 

 蕢聵與孔悝登臺, 子路曰 :「 君焉用孔悝, 請得而殺之. 」 
 (유사자입성, 성문개, 자로수이입, 조괴외. 

 괴외여공리등대, 자로왈 : 「 군언용공리, 청득이살지. 」)

   
 [그때 마침 당도한 사자를 들이기 위해 성문이 열리자, 

 ​'자로'는 그 사자의 뒤를 따라 안으로 들어가서 '괴외'가 있는 곳으로 갔다.
 '괴외'는 '공리'와 함께 대에 올라가 있었으므로 '자로'는 그들을 향해 말하기를 : " 군주께서는 무슨 이유로

 '공리'를 쓰려고 하십니까 ? 청컨대 '공리'를 밑으로 보내 제가 죽일 수 있도록 해주십시오. "라고 하였다.]

 

 蕢聵弗聽, 於是子路欲燔臺, 蕢聵懼, 乃下石乞壺黶攻子路.  擊斷子路之纓. 

 子路曰 :「 君子死而冠不免. 」  遂結纓而死.
 (괴외불청, 어시자로욕번대, 괴외구, 내하석걸호염공자로.  격단자로지영. 

 자로왈 :「 군자사이관불면. 」 수결영이사.)


 [그러나 '괴외'가 '자로'의 말을 듣지 않았으므로 '자로'는 대의 밑에 불을 놓아 태우려고 했다.
 겁이 난 '괴외'는 급히 '석걸'과 '호염'을 대 밑으로 내려 보내 '자로'를 공격하도록 했다.

 두 사람이 '자로'를 창으로 찌르자 '자로'의 관끈이 끊어졌다.
 '자로'가 말하기를 : " 군자는 죽어도 관을 벗지 않는다. "라고 하고는. 관끈을 이은 관을 다시 쓰고 죽었다.]

 

 孔子聞衛亂, 曰 :「 嗟乎, 由死矣 ! 」 已而果死. 

 故孔子曰 :「 自吾得由, 惡言不聞於耳. 」 是時子貢爲魯使於齊.
 (공자문위란, 왈 : 「 차호, 유사의 ! 」 이이과사. 

 고공자왈 : 「 자오득유, 오언불문어이. 」 시시자공위노사어제.)


 [이때 노나라에 돌아가 머물던 '공자'가 위나라에서 내란이 일어났다는 소식을 듣고 말하기를 :

 " 아,  슬프구나,  '자로'는 죽게 되리라 ! "라고 했는데. 그 뒤 과연 '자로'의 죽음이 전해졌다. 

 그러자 '공자'가 말하기를 : " 내가 '자로'를 제자로 얻은 뒤에는 세상 사람들이 나를 비난하는 소리를

 듣지 않게 되었다. "라고 하였다. 이때 '자공'은 노나라의 사신이 되어 제나라에 가 있었다.]


 宰予字子我, 利口辯辭.  旣受業, 問 : 「 三年之喪不已久乎 ?  君子三年不爲禮, 禮必壞 ;

 三年不爲樂, 樂必崩.  舊穀旣沒, 新穀旣升, 鑽燧改火, 期可已矣. 」
 (재여자자아, 리구변사.  기수업, 문 : 「 삼년지상불이구호 ?  군자삼년불위례, 예필괴 ;

 삼년불위악, 악필붕.  구곡기몰, 신곡기승, 찬수개화, 기가이의. 」)


 ['재여'(BC 522 ~ BC 458)의 자는 '자아'이고 말주변이 좋고 변설에 재주가 있었다.
 '공자'에게 가르침을 받은 뒤 그가 묻기를 : " 부모의 3년상을 지내기는 기간이 너무 길지 않습니까 ?

 군자는 하루도 예법와 음악을 떠나서 살 수 없는데, 3년상으로 인하여 예법를 닦지 않으면,

 예법은 반드시 무너질 것이며, 3년 동안 음악을 듣지 않게 되면 음악은 무너질 것 입니다. 

 묵은 곡식도 이윽고 바닥이나면 햇곡식이 다시 익게 되며, 나무를 비벼서 불씨를 얻는 방법도 계절에 따라

 그 수종을 바꿉니다. 그러니 부모상도 1년이면 족하지 않겠습니까 ? "라고 하였다.]

 

 子曰 :「 於汝安乎 ? 」曰 :「 安. 」「 汝安則爲之, 君子居喪, 食旨不甘, 聞樂不樂, 故弗爲也.」

 (자왈 :「 어여안호 ? 」  왈 :「 안. 」「 여안즉위지, 군자거상, 식지불감, 문락불악, 고불위야. 」)


 [공자는 반문하기를 : " 그렇게 하면 네 마음이 편하겠는가 ? "라고 하자. 

 '재여'가 대답하기를 : " 편할 것 같습니다. "라고 하였다.
 공자가 말하기를 : "네 마음이 편하다면 그렇게 하라. 군자가 상중에 있을 때는 음식을 먹어도 그 맛을 모르고,

 음악을 들어도 마음이 즐겁지 않기 때문에, 그래서 그런 것들을 하지 않는 것이다. "라고 하였다.]

 

 宰我出, 子曰 : 「 予之不仁也, 子生三年然後免於父母之懷.  夫三年之喪, 天下之通義也.」
 (재아출, 자왈 : 「 여지불인야, 자생삼년연후면어부모지회.  부삼년지상, 천하지통의야. 」)


 ['자아'가 물러가자,  '공자'가 말하기를 : " '재여'는 참으로 어질지가 못하구나, 

 자식이 태어나면 3년이 지난 후에 비로소 부모의 품에서 벗어 날 수 있다.
 그러므로 부모에 대한 삼년상은  온 천하의 공통된 대의인 것이다. "라고 하였다.]
 
 宰予晝寢, 子曰 : 「 朽木不可雕也, 糞土之牆不可圬也. 」 

 宰我問五帝之德, 子曰 :「 予非其人也. 」 宰我爲臨菑大夫, 與田常作亂, 以夷其族, 孔子恥之.
 (재여주침, 자왈 : 「 후목불가조야, 분토지장불가오야. 」 

 재아문오제지덕, 자왈 : 「 여비기인야. 」 재아위임치대부, 여전상작란, 이이기족, 공자치지.)


 [어느 날 '재여'가 낮잠을 자고 있는데 그 모습을 보고 '공자'가 말하기를 : " 썩은 나무에는 조각을 할 수 없고,

 더러운 흙으로 쌓은 담장에는 흙손질을 할 수 없다. "라고 하였다.
 '재여'가 오제의 덕에 묻자, '공자'가 말하기를 : “너는 그런 것을 물을 자격이 없는 사람이다.”하였다.

 훗날 '재여'는 제나라로 돌아가 "임치"의 대부가 되었는데 '전상'과 함께 반란을 일으켰다가 멸족의 화를 당하자, 

 '공자'는 '재여'가 제자라는 사실을 부끄럽게 여겼다.] 
 

 端沐賜, 衛人, 字子貢.  少孔子三十一歲.  子貢利口巧辭, 孔子常黜其辯. 

 問曰 :「 汝與回也孰愈 ? 」 對曰 :「 賜也何敢望回 ?  回也聞一以知十, 賜也聞一以知二. 」
 (단목사, 위인, 자자공.  소공자삼십일세.  자공리구교사, 공자상출기변. 

 문왈 :「 여여회야숙유 ? 」  대왈 :「 사야하감망회 ?  회야문일이지십, 사야문일이지이. 」)


 ['단목사'(BC 520 ? ~ BC 456 ?)는 위나라 사람으로 자는 '자공'이다. '공자'보다는 31살 어리다. 

 '자공'은 언변이 뛰어나 남의 말을 교묘하게 응대하는 재주가 있었다.

 ​그래서 '공자'는 항상 그의 변설을 논박하여 억눌렀다. 

 '공자'가 '자공'에게 묻기를 : " 너는 '안회'와 비교해서 누가 낫다고 생각하느냐 ? "라고 하자.
 '자공'이 대답하기를 : " 이 '사'(자공)가 어찌 감히 안회를 따를 수 있겠습니까 ?

 '안회'는 하나를 들으면 열을 알지만, 이 '사'는 하나를 들으면 둘만 알 뿐입니다. "라고 하였다.]

 

 子貢旣已受業, 問曰 : 「 賜何人也 ? 」  孔子曰 : 「 汝器也 ? 」  曰何器也. 「 曰瑚璉也. 」
 (자공기이수업, 문왈 : 「 사하인야 ? 」  공자왈 : 「 여기야 ? 」  왈하기야 : 「 왈호연야. 」)


 ['자공'은 '공자'의 가르침을 받은 후 '공자'에게 묻기를 : " 이 '사'를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라 하자.
 '공자'가 대답하기를 : “너는 그릇과 같은 사람이니라. ”하였다. 

 또 묻기를 : " 어떤 그릇을 말하는 것입니까 ?라고 하자.  " 귀한 제기(祭器)같은 사람이다.”라고 하였다.] 
 
 陳子禽問子貢曰 :「 仲尼焉學 ? 」 子貢曰 :「 文武之道未墜於地, 在人, 賢者識其大者,

 不賢者識其小者.  莫不有文武之道, 夫子焉不學, 而亦何常師之有. 」
 (진자금문자공왈 : 「 중니언학 ? 」  자공왈 : 「 문무지도미추어지, 재인, 현자식기대자,

 불현자식기소자.  막불유문무지도, 부자언불학, 이역하상사지유. 」)


 ['진자금'이 '자공'에게 묻기를 : " 중니는 누구에게서 배웠습니까 ? "라고 하자.
 '자공'이 대답하기를 : " 주나라의 '문왕', '무왕'의 도는 아직 땅에 떨어져 완전히 없어지지 않았으니,

 사람들중 현능한 사람들은 큰 것을 알고, 현능하지 못한 사람들은 작은 것들을 안다. 

 어느 것이든 '문왕', '무왕'의 도가 아닌 것이 없으니 선생님께서는 누구에게나 배우지 않는 것이 없으므로, 

 ​선생님(공자)께서는 일정한 스승이 있을 리가 없다. "라고 하였다.]

 

 又問曰 : 「 孔子適是國必聞其政, 求之與 ?  抑與之與 ? 」 

 子貢曰 : 「 夫子溫良恭儉讓以得之, 夫子之求之也, 其諸異乎人之求之也. 」
 (우문왈 : 「 공자적시국필문기정, 구지여 ?  억여지여 ? 」 

 자공왈 : 「 부자온량공검양이득지, 부자지구지야, 기제이호인지구지야. 」)


 ['진자금'이 또 묻기를 : " '공자'께서는 어느 나라에 계시든 반드시 정치에 관여하셨는데,

 그것은 '공자'께서 요구하셨기 때문입니까 ?  아니면 상대쪽에서 요구해 와서 입니까 ? ”라고 하자.  
 '자공'이 대답하기를 : " 선생님께서는 온화하고, 선량하고, 공손하고, 검소하며, 사양하는 마음의 다섯 가지 

 덕목을 가지셨기 때문에 자연히 그런 것이다. 또한 선생님의 뜻은 세상을 구하기 위한 것이므로,

 선생님 쪽에서 요구하고 있다고 볼 수 있지만, 그 방법은 벼슬을 찾아다니는 다른 사람들과 다르다 ”라고 하였다.]

 

 子貢問曰 :「 富而無驕, 貧而無諂, 何如 ? 」  孔子曰 :「 可也, 不如貧而樂道, 富而好禮. 」
 (자공문왈 : 「 부이무교, 빈이무첨, 하여 ? 」  공자왈 : 「 가야, 불여빈이락도, 부이호례. 」)


 ['자공'이 '공자'에게 묻기를 : " 집안이 부유해도 거만해지는 일이 없고,

 가난하여도 아부하는 일이 없으면 어떻습니까 ? "라고 하자.
 '공자'가 말하기를 : " 훌륭한 일이다.  빈부를 초월하여 가난 속에서 도를 즐기고, 부자이면서 예를 좋아한다면

 그런 사람은 이겨낼 수가 없다. “라고 하였다.]
 
 田常欲作亂於齊, 憚高國鮑晏, 故移其兵欲以伐魯. 

 孔子聞之, 謂門弟子曰 : 「 夫魯, 墳墓所處, 父母之國, 國危如此, 二三子何爲莫出 ? 」
 (전상욕작란어제, 탄고국포안, 고이기병욕이벌로. 

 공자문지, 위문제자왈 : 「 부노, 분묘소처, 부모지국, 국위여차, 이삼자하위막출 ? 」)

 
 [제나라 대부 '전상'이 난을 일으키려고 했으나 제나라의 '고', '국', '포', '안' 등 4대 권문세가의 세력을 두려워하여

 감히 행동으로 옮기지 못했다. 그래서 '전상'은 4대 권문세가의 군사들을 동원해 먼저 노나라를 정벌하려고 했다.

 위나라에 머물고 있던 '공자'가 소식을 듣고 제자들에게 말하기를 : " 무릇 노나라는 조상들의 무덤이 있는 우리의

 조국이다, 나라가 이처럼 위태로운데, 어찌하여 너희들 중에 나라를 구하겠다고 나서는 사람이 없는가 ?"하였다.]

 

 子路請出, 孔子止之.  子張子石請行, 孔子弗許.  子貢請行, 孔子許之. 
 (자로청출, 공자지지.  자장자석청행, 공자불허.  자공청행, 공자허지.)


 [이 말에 '자로'가 나서겠다고 청했으나 '공자'는 허락하지 않았다. 

 다시 '자장'과 '자석'이 나섰지만, '공자'는 역시 허락하지 않았다.
 결국 '자공'이 나가겠다고 청하자 '공자'는 비로소 허락하였다.]
 
 遂行, 至齊, 說田常曰 : 「 君之伐魯過矣, 夫魯, 難伐之國. 

 其城薄以卑, 其地狹以泄, 其君愚而不仁, 大臣僞而無用, 其士民又惡甲兵之事, 此不可與戰.

 君不如伐吳.  夫吳, 城高以厚, 地廣以深, 甲堅以新, 士選以飽, 重器精兵盡在其中,

 又使明大夫守之, 此易伐也. 」

 (수행, 지제, 세전상왈 : 「 군지벌로과의, 부로, 난벌지국. 

 기성박이비, 기지협이설, 기군우이불인, 대신위이무용, 기사민우오갑병지사, 차불가여전.

 군불여벌오.  부오, 성고이후, 지광이심, 갑견이신, 사선이포, 중기정병진재기중,

 우사명대부수지, 차이벌야. 」)

 [마침내 길을 떠나 제나라에 당도한 '자공'은 '전상'을 만나 유세하기를 : " 군께서 노나라를 정벌하려는

 생각은 잘못된 일입니다.  무릇 노나라는 정벌하기 어려운 나라입니다. 그 성벽은 얇고 낮으며,

 또한 그 해자는 좁고 깊지 않으며, 그 임금은 어리석고 어질지 못하며, 대신들은 위선적이며 무능하며,

 그 사대부나 백성들은 군사가 되어 싸우는 것을 싫어하는데, 이와 같은 노나라와 어떻게 전쟁을 하겠습니까 ?

 ​군깨서는 오나라를 치는 쪽이 유리합니다. 오나라는 성벽이 높고 두터우며, 해자는 넓고 깊으며,

 갑옷은 견고하고 새롭게 만들었으며, 병사들은 정예이고 음식은 배불리 먹으며,

 중무기와 정예로 무장된 병사들은 모두 그 성안에 있으며 현명한 대부들로 하여금 그 성을 지키게 하고 있으니,

 ​이런 나라야말로 정벌하기 쉽습니다. "라고 하였다.]

 

 田常忿然作邑曰 : 「 子之所難, 人之所易, 子之所易, 人之所難, 而以敎常, 何也 ? 」
 (전상분연작읍왈 : 「 자지소난, 인지소이, 자지소이, 인지소난, 이이교상, 하야 ? 」)


 ['전상'은 벌컥 화를 내며 상기된 채 말하기를 : " 선생이 어렵다고 말한 바는 세상 사람들은 쉽다고 하며,

 선생이 쉽다고 하는 바는 세상 사람들은 어렵다고 하는데, 그같이 상식과 반대되는 말을 이 사람에게

 가르치려고 하니 그것은 무슨 까닭입니까 ?라고 하자.]

  

 子貢曰 : 「 臣聞之, 憂在內者攻彊, 憂在外者攻弱.  今君憂在內. 

 吾聞君三封而三不成者.  大臣有不聽者也, 今君破魯以廣齊, 戰勝以驕主, 破國以尊臣.

 而君之功不與焉, 則交日疏於主.  是君上驕主心, 下恣羣臣, 求以成大事, 難矣. 

 夫上驕則恣, 臣驕則爭.  是君上與主有卻, 下與大臣交爭也.  如此, 則君之立於齊危矣.

 故曰不如伐吳.  伐吳不勝, 民人外死, 大臣內空. 

 是君上無彊臣之敵, 下無民人之過, 孤主制齊者唯君也. 」

 (자공왈 : 「 신문지, 우재내자공강, 우재외자공약.  금군우재내. 

 오문군삼봉이삼불성자.  대신유불청자야, 금군파로이광제, 전승이교주, 파국이존신.

 이군지공불여언, 즉교일소어주.  시군상교주심, 하자군신, 구이성대사, 난의. 

 부상교즉자, 신교즉쟁.  시군상여주유각, 하여대신교쟁야.  여차, 즉군지입어제위의.

 고왈불여벌오.  벌오불승, 민인외사, 대신내공. 

 시군상무강신지적, 하무민인지과, 고주제제자유군야.」)


 ['자공'이 말하기를 : " "신이 듣기로는 우환이 내부에 있는 자는 강한 나라를 치고,

 우환이 밖에 있는 자는 약한 나라를 친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군의 우환은 지금 안에 있습니다. 

 제가 듣기로 군께서는 세 번이나 봉호를 수여 받았으나 세 번 다 실패했다고 했습니다.
 그것은 제나라 내부에 반대하는 대신들이 있기 때문입니다. 지금 군께서 노나라를 정벌하여 제나라의 영토를

 늘리게 되면, 싸움에서 이긴 임금의 마음은 더욱 교만하게 될 것이며, 노나라를 격파하여 세운 업적은

 대신들의 이름만 높여 줄 뿐입니다. 군의 공적은 인정을 받지 못하고, 임금과의 사이는 날이 갈수록 

 소원해집니다. 결국 위로는 임금의 마음을 교만하게 만들고, 아래로는 뭇 신하들로 하여금 군에 대해 

 함부로 대하도록 만들어 결국 군께서 추구하는 큰일을 이루어 내기가 어렵게 될 것입니다.

 무릇 임금이 교만하면 방자한 일을 하고, 신하가 교만해지면 권력을 서로 다투게 됩니다.

 그것은 곧 위로는 군과 임금 사이에 틈이 벌어지고, 아래로는 대신들과 서로 권력을 놓고 싸우게 됩니다.

 이렇게 되면 군께서 제나라에 입지를 마련하기가 위태롭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제가 차라리 오나라를 정벌하는 것이 유리하다고 말씀드렸던 것입니다. 
 오나라를 쳐서 싸움에서 이기지 못하게 된다면, 백성들은 밖에서 싸우다가 죽고 대신들은 안에서 힘을 잃습니다. 

 ​그것은 곧 군의 입장에서 위로는 강한 정적들이 없어지고 아래로는 백성들로부터 비난을 받지 않게 됩니다. 

 ​결국 임금은 고립되어 오직 군만이 제나라를 마음대로 통제할 수 있게 됩니다. "라고 하였다.]  
 
 田常曰 :「 善.  雖然, 吾兵業已加魯矣.  去而之吳, 大臣疑我, 柰何 ? 」 

 子貢曰 :「 君按兵無伐.  臣請往使吳王, 令之救魯而伐齊.  君因以兵迎之. 」
 (전상왈 :「 선.  수연, 오병업이가로의.  거이지오, 대신의아, 내하 ? 」 

 자공왈 :「 군알병무벌.  신청왕사오왕, 령지구노이벌제.  군인이병영지. 」)


 [전상이 이르기를 : " 좋습니다. 그러나 우리 군사들이 벌써 노나라로 진격하고 있습니다.
 진로를 바꾸어 오나라로 가면 대신들이 나를 의심할 것이니 이를 어찌해야 합니까 ? "라고 하자.
 '자공'이 말하기를 : " 군께서 군사들을 막아 노나라를 공격하지 않으면, 

 그 사이에 제가 오왕에게 사절로 가서 오나라가 노나라를 도와 제나라를 공격하도록 하겠습니다.

 그때 군께서는 군사를 이끌고 오나라 군사를 맞이하여 싸우시면 됩니다. "라고 하였다.]

 

 田常許之使子貢南見吳王.  說曰 : 「 臣聞之, 王者不絶世, 霸者無彊敵, 千鈞之重加銖兩而移. 

 今以萬乘之齊, 而私千乘之魯, 與吳爭彊, 竊爲王危之. 且夫救魯, 顯名也 ; 伐齊, 大利也. 

 以撫泗上諸侯, 誅暴齊以服彊晉, 利莫大焉. 名存亡魯, 實困彊齊, 智者不疑也.」

 (전상허지사자공남견오왕.  설왈 : 「 신문지, 왕자불절세, 패자무강적, 천균지중가수양이이. 

 금이만승지제, 이사천승지노, 여오쟁강, 절위왕위지. 차부구노, 현명야 ; 벌제, 대이야. 

 이무사상제후, 주폭제이복강진, 이막대언. 명존망로, 실곤강제, 지자불의야.」)


 ['전상'이 이를 허락하고 '자공'을 사자로 삼아 남쪽으로 보내 오왕을 접견하도록 하였다. 
 '자공'이 '오왕'에게 말하기를 : " 신이 듣기로 백성을 다스리는 왕되는 사람은 다른 나라의 사직을 끊는 일이 없고,

 패자는 강한 적을 만들지 않는다고 들었습니다.
 또한 천균(1균 = 10Kg)의 무거운 것도 겨우 1수(1수 = 1/24량)나 1량(1량 = 16g)의 무게가 더해짐으로 해서

 저울눈이 움직입니다. 지금 만승의 대국 제나라는 천승의 소국 노나라를 자기 것으로 만들어

 오나라와 세력을 겨루려고 합니다. 이점 왕을 위해 걱정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또 오나라로서는 노나라를 구원하는 일이 명분을 천하에 드러내는 행위일뿐 아니라,

 또한 제나라를 정벌하는 일은 실제적인 면에서도 크게 이익이 됩니다. 더불어 "사수" 주위의 제후들을 내 편으로

 끌어들여 포악한 제나라를 무찌르고 북쪽의 강력한 진나라를 굴복시킨다면 이보다 더 큰 이익이 없습니다.

 명분은 망해 가는 노나라를 보전시키는데 있고, 실제로는 강대한 제나라를 꺾어 누른다면 지혜 있는 사람이면

 누구도 의심하지 않을 것입니다. "라고 하였다.]

 

 吳王曰 :「 善.  雖然, 吾嘗與越戰, 棲之會稽.  越王苦身養士, 有報我心.  子待我伐越而聽子. 」
 (오왕왈 : 「 선.  수연, 오상여월전, 서지회계.  월왕고신양사, 유보아심.  子待我伐越而聽子. 」)


 [오왕이 말하기를 : "훌륭한 말씀입니다. 나는 일찍이 월나라와 싸워 월왕을 "회계산"으로 몰아 넣은 적이 있었소.

 그 뒤로 월왕은 스스로 몸을 고생시켜 가며 군사를 양성하여 우리 오나라에 복수하려는 마음을 품고 있었소. 

 ​선생은 과인이 월나라를 칠 때까지 기다려 주면 그 다음 선생의 의견을 따르기로 하겠소. "라고 하였다.] 

 

 子貢曰 : 「 越之勁不過魯, 吳之彊不過齊, 王置齊而伐越, 則齊已平魯矣. 

 且王方以存亡繼絶爲名, 夫伐小越而畏彊齊, 非勇也. 夫勇者不避難, 仁者不窮約, 智者不失時,

 王者  不絶世, 以立其義.  今存越示諸侯以仁, 救魯伐齊, 威加晉國, 諸侯必相率而朝吳, 霸業成矣.

 且王必惡越, 臣請東見越王, 令出兵以從. 此實空越, 名從諸侯以伐也. 」吳王大說, 乃使子貢之越.

 (자공왈 : 「 월지경불과노, 오지강불과제, 왕치제이벌월, 즉제이평노의. 

 차왕방이존망계절위명, 부벌소월이외강제, 비용야. 부용자불피난, 인자불궁약, 지자불실시,

 왕자불절세, 이입기의.  금존월시제후이인, 구노벌제, 위가진국, 제후필상솔이조오, 패업성의.

 차왕필오월, 신청동현월왕, 령출병이종.  차실공월, 명종제후이벌야. 」 오왕대열, 내사자공지월.) 


 ['자공'이 말하기를 : " 월나라의 역량은 약소국인 노나라보다 더 낳을 것이 없습니다. 

 오나라의 강성함이 제나라보다 못함에도 불구하고, 왕께서 제나라를 그대로 둔 채 월나라를 공격하게 된다면,

 그 사이에 제나라는 노나라를 완전히 평정하고 말 것입니다.
 이에 왕께서 망하는 나라를 붙들어 보존케 하여 사직을 잇도록 하는 명분을 얻는 대신에 대체로 강성한 제나라를

 두려워하여 작은 월나라를 치는 것은, 용기있는 행동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무릇 용기있는 사람은 일이 어렵다고 피하지 않고, 어진 사람은 곤란한 처지에 놓인 사람을 궁지에 

 몰아넣지 않으며, 지혜로운 사람은 하늘이 내려주는 기회를 놓치지 않으며,

 왕이 되려는 자는 다른 나라 제후들의 사직을 끊어지지 않게 함으로 해서 그 의를 세웁니다.
 지금 월나라를 그대로 둠으로써 제후들에게 어질다는 것을 보여주고, 노나라를 구하고 제나라를 정벌하여,

 그 위세를 진나라에 가하면, 제후들은 틀림없이 서로 무리를 지어 오나라에 들어와 조현을 올리게 되어

 오나라는 이로써 패업을 이룰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왕께서 월나라를 염려하신다면

 신이 청컨대 동쪽으로 나아가 월왕를 만나 월나라 군사를 내어 오나라가 제나라를 치는 일을 돕도록 하겠습니다.
 그렇게 된다면 월나라의 국내는 텅텅비게 되는 실리를 얻게 되고 명분상으로는 제후들을 거느리고

 제나라를 치는 일이 될 것입니다. "라고 하였다. 오왕은 크게 기뻐하며 사자 '자공'을 월나라로 가도록 했다.]

 

 越王除道郊迎, 身御至舍而問曰 : 「 此蠻夷之國, 大夫何以儼然辱而臨之 ? 」
 (월왕제도교영, 신어지사이문왈 : 「 차만이지국, 대부하이엄연욕이임지 ? 」)


 ['자공'이 온다는 소식을 들은 월왕은 길을 깨끗이 청소하고 도성의 교외까지 나가 '자공'을 마중하고

 몸소 어가를 몰아 숙소로 인도한 후에 묻기를 : “ 이런 남쪽 야만의 오랑캐 나라에 대부께서는 어찌하여

 수고를 아끼지 않고 귀한 걸음을 하셨습니까 ?라고 하자.]

 

 子貢曰 :「 今者吾說吳王以救魯伐齊, 其志欲之而畏越, 曰『待我伐越乃可』 如此, 破越必矣.

 且夫無報人之志, 而令人疑之, 拙也 ;  有報人之志, 使人知之, 殆也 ; 

 事未發而先聞, 危也.  三者擧事之大患.」)

 (자공왈 :「 금자오설오왕이구로벌제, 기지욕지이외월왈, 왈『대아벌월내가』  여차, 파월필의.

 차부무보인지지, 이령인의지, 졸야 ;  유보인지지, 사인지지, 태야 ; 

 사미발이선문, 위야. 삼자거사지대환. 」)


 [자공이 대답하기를 : " 이번에 제가 오왕을 설득하여 노나라를 구하고 제나라를 치자고 권했습니다. 

 오왕은 그러고 싶지만 월나라를 두려워하여 말하기를 : ‘내가 월나라를 쳐서 없애버릴 때까지 기다리시오.’

 라고 말했습니다. 이로 보아 월나라를 격파할 것이 틀림없습니다. 

 ​또 남을 보복할 뜻도 없으면서 상대방으로 하여금 의심을 품게 하는 일은 졸렬한 짓이며 ;
 설령 남에게 복수할 뜻을 갖고 있지만 상대방으로 하여금 그 뜻을 알게 하는 것은 위태로운 일이며;
 일을 실천에 옮겨지기도 전에 계획이 먼저 새어나가는 것은 위험합니다. 

 이 세 가지의 경우는 일을 행하는데 삼가해야 할 가장 큰 근심거리입니다. "라고 하였다. ]

 

 句踐頓首再拜曰 :「 孤嘗不料力, 乃與吳戰, 困於會稽, 痛入於骨髓, 日夜焦脣乾舌,

 徒欲與吳王接踵而死, 孤之願也. 」 遂問子貢.
 (구천돈수재배왈 : 「 고상불료력, 내여오전, 곤어회계, 통입어골수, 일야초순건설,

 도욕여오왕접종이사, 고지원야. 」 수문자공.)


 [월왕 '구천'이 땅에 머리를 조아리며 절을 두 번 올린 후에 말하기를 : " 이 '구천'은 일찍이 자신의 힘도 헤아리지

 못하고 오나라와 전쟁을 벌여 "회계산"에서 욕을 당하고 말았는데 그때의 통분함이 뼛속에까지 사무쳐

 밤,낮으로 입술이 타고 혀가 마르도록 원수 갚기에만 온 정신을 쏟고 있습니다.
 나의 유일한 소망은 오왕을 죽이고 이어 나도 죽는 것이 바라는 바입니다. ”라고 하며. 

 '구천'은 '자공'에게 자기가 오왕에게 복수할 수 있는 방법에 대해 물었다.]

 

 子貢曰 : 「 吳王爲人猛暴, 羣臣不堪, 國家敝以數戰, 士卒弗忍, 百姓怨上, 大臣內變. 

 子胥以諫死, 太宰嚭用事, 順君之過以安其私, 是殘國之治也.

 今王誠發士卒佐之以徼其志, 重寶以說其心, 卑辭以尊其禮, 其伐齊必也. 

 彼戰不勝, 王之福矣.  戰勝, 必以兵臨晉, 臣請北見晉君, 令共攻之, 弱吳必矣.

 其銳兵盡於齊, 重甲困於晉, 而王制其敝, 此滅吳必矣. 」 

 越王大說, 許諾.  送子貢金百鎰, 劍一良, 矛二.  子貢不受, 遂行.

 (자공왈 : 「 오왕위인맹폭, 군신불감, 국가폐이수전, 사졸불인, 백성원상, 대신내변. 

 자서이간사, 태재비용사, 순군지과이안기사, 시잔국지치야.

 금왕성발사졸좌지이요기지, 중보이열기심, 비사이존기례, 기벌제필야.

 피전불승, 왕지복의.  필승, 필이병임진, 신청북현진군, 령공공지, 약오필의.

 기예병진어제, 중갑곤어진, 이왕제기폐, 차멸오필의. 」 

 월왕대열, 허락.  송자공금백일, 검일량, 모이.  자공불수, 수행.)


 [자공이 말하기를 : " 오왕은 사람됨이 용맹스럽고 난폭하여 신하들은 견뎌 내기가 여려울 지경이며,

 나라는 잦은 전쟁으로 인해 극도로 피폐되었고, 군사들은 더 이상 참을 수 없는 심정에 놓여있으며,

 백성들은 임금을 원망하고 대신들은 속으로 변심하고 있습니다.
 '오자서'는 충심으로 간하다가 목숨을 잃었고, 태재 '백비'는 나라의 일을 담당하고 있지만,

 임금의 잘못을 그대로 따르며 자신의 사리사욕에만 안주하고 있으니, 이는 곧 나라를 망치는 정치입니다. 

 지금 만일 왕께서 성의를 다하여 응원군을 보내 오왕의 뜻에 맞추어 주고, 귀중한 보물을 보내 환심을 사고,

 겸손한 언사로 정중히 예를 갖추면, 오왕은 마음 놓고 제나라를 칠 것입니다. 

 만약에 오왕이 제나라와의 싸움에서 이기지 못한다면 왕께서는 다행한 일이 될 것입니다.
 이길 경우에는 오왕은 틀림없이 승전의 여세를 몰아 그 군사를 몰고 진나라로 갈 것입니다. 
 그러면 저는 북쪽으로 올라가 진왕을 만나 월나라와 함께 오나라를 공격하도록 설득하여 오나라를 반드시 약하게

 만들겠습니다. 결국 오나라의 정예한 군사들은 제나라와의 싸움에서 군비가 모두 탕진되어 비록 견고한 갑옷으로

 무장하였더라도 진나라 군사들로부터 궁지에 몰리게 될 것이니, 그때 대왕께서 계속된 싸움으로 피폐해진

 오나라 군사들을 제압한다면 오나라는 이로써 반드시 멸망하고야 말 것입니다. "라고 하자.
 월왕은 크게 기뻐하며 이를 허락하였다. '자공'에게 황금 백 일과 명검 한 자루, 창 두 자루를 보냈다.

 그러나 '자공'은 받지 않고 즉시 오나라를 향해 떠났다.]

 

 報吳王曰 : 「 臣敬以大王之言告越王, 越王大恐, 曰 『孤不幸, 少失先人, 內不自量, 抵罪於吳,

 軍敗身辱, 棲于會稽, 國爲虛莽, 賴大王之賜, 使得奉俎豆而修祭祀, 死不敢忘, 何謀之敢慮 』 」 
 
(보오왕왈 : 「 신경이대왕지언고월왕, 월왕대공, 왈 『고불행, 소실선인, 내불자량, 저죄어오,

 군패신욕, 서우회계, 국위허망, 뢰대왕지사, 사득봉조두이수제사, 사불감망, 하모지감려 』 」)


 ['자공'이 오왕에게 보고하기를 : 신이 대왕의 말씀을 월왕에게 고하니, 월왕이 크게 두려워하며 말하기를,

 ‘ 저는 불행하게도 어릴 때 아버지를 잃고 자신의 분수를 헤아리지 못한 채 오나라에 죄를 범하여 

 결국 군대는 패하고 욕된 몸으로 회계산에 갇혀 살자, 나라는 폐허가 되어 잡초만 무성하게 되었습니다.

 ​다행히도 대왕의 은혜를 입어 제기를 받들어 조상님께 제사를 지내게 되었으니 죽은들 잊을 수 있겠으며,

 어찌 모반을 감히 생각하겠습니까 ? ’라고 하였습니다.”라고 하였다.]

 

 後五日, 越使大夫種頓首言於吳王曰 : 「 東海役臣孤句踐使者臣種, 敢修下吏問於左右. 

 今竊聞大王將興大義, 誅彊救弱, 困暴齊而撫周室, 請悉起境內士卒三千人, 孤請自被堅執銳,

 以先受矢石.  因越賤臣種奉先人藏器, 甲二十領, 鈇屈盧之矛, 步光之劍, 以賀軍吏. 」 

 (후오일, 월사대부종돈수언어오왕왈 : 「 동해역신고구천사자신종, 감수하리문어좌우. 

 금절문대왕장흥대의, 주강구약, 곤폭제이무주실, 청실기경내사졸삼천인, 고청자피견집예,

 이선수시석. 인월천신종봉선인장기, 갑이십령, 부굴로지모, 보광지검, 이하군리. 」)

 

 [그로부터 닷세 뒤에 월왕의 명을 받든 대부 '종'이 사신으로 와서 오왕을 뵙고 머리를 조아려 인사를 올린 후에

 월왕의 말을 전하기를 : " 동해의 역신 '구천'의 사자 '종'을 대왕의 좌우 대신들에게 예를 갖추고 

 감히 대왕의 문안을 여쭈게 합니다.  삼가 신이 듣건대 지금 대왕께서 대의의 군사를 일으켜 강한 나라를 멸하고

 약한 나라를 구하며 난폭한 제나라를 곤궁하게 하고 주나라 왕실을 편안하게 하신다 하니, 

 청컨대 우리 월나라 안에 있는 사졸 3천 명을 모조리 동원하여 이 '구천'이 직접 견고한 갑옷으로 무장시킨 후에 

 예리한 무기를 들고 앞장서서 적의 화살과 돌을 먼저 받고자 합니다. 

 그래서 월나라의 천한 신하 '종'을 보내서 선대로부터 물려받은 갑옷 20벌과 도끼, '굴로'의 창, '보광'의 칼을 바쳐

 군사들의 출전을 축하하고자 합니다.”라고 하였다.] 

 
 吳王大說, 以告子貢曰 : 「 越王欲身從寡人伐齊, 可乎 ? ” 」 

 子貢曰 : 「 不可.  夫空人之國, 悉人之衆, 又從其君, 不義.  君受其幣, 許其師, 而辭其君. 」
 (오왕대열, 이고자공왈 : 「 월왕욕신종과인벌제, 가호 ? ” 」 

 자공왈 : 「 불가.  부공인지국, 실인지중, 우종기군, 불의.  군수기폐, 허기사, 이사기군. 」)


 [오왕이 크게 기뻐하며 '자공'에게 이 보고에 대해 묻기를 : " 월왕은 몸소 과인을 따라 제나라 정벌에 

 동참하기를 바라는데, 이를 허락해도 좋겠소 ? ”라고 하자. 

 '자공'이 대답하기를 : " 안 됩니다.  무릇 남의 나라를 텅 비게 만들고 군사들을 모조리 동원하고 나서,

 또 그 군주까지 종군하게 하는 것은 의롭지 않습니다. 대왕께서는 월나라에서 바치는 폐물만 거두시고

 그 군사들에게는 종군을 허락하시되 그 임금 되는 사람의 종군은 사양하시기 바랍니다. "라고 하였다.]

 

 吳王許諾.  乃謝越王.  於是吳王乃遂發九郡兵伐齊.
 (오왕허락.  내사월왕.  어시오왕내수발구군병벌제.)


 [오왕은 '자공'의 의견을 허락하였다.  이어서 월왕의 종군 요청은 사양했다. 

 이리하여 오왕은 마침내 아홉 고을의 군대를 동원하여 제나라 정벌전에 나섰다. ]

 

 子貢因去之晉, 謂晉君曰 : 「 臣聞之, 慮不先定不可以應卒, 兵不先辨不可以勝敵. 

 今夫齊與吳將戰, 彼戰而不勝, 越亂之必矣.  與齊戰而勝, 必以其兵臨晉. 」
 (자공인거지진, 위진군왈 : 「 신문지, 려불선정불가이응졸, 병불선변불가이승적. 

 금부제여오장전, 피전이불승, 월란지필의.  여제전이승, 필이기병임진. 」)


 [이 모습을 본 '자공'은 오나라를 떠나 진나라로 가서 '진왕'에게 말하기를 : " 신이 듣기로는 생각이 미리 정해지지

 않으면 갑자기 일어난 일에 대응하기 어려우며, 군대가 미리 정비되어 있지 않으면 적을 이기기 어렵다고 합니다. 

 이제 제나라와 오나라 사이에 전쟁이 일어날 것입니다. 
 그 싸움에서 오나라가 이기지 못할 경우 월나라는 그 틈을 타서 반드시 오나라를 어지럽게 만들 것입니다. 

 ​그러나 만일 오나라가 이긴다면 여세를 몰아 그 병력을 모두 이끌고 진나라에 쳐들어 올 것입니다. "라고 하였다.]

 

 晉君大恐, 曰 :「 爲之柰何 ? 」 子貢曰 :「 修兵休卒以待之. 」 晉君許諾.  子貢去而之魯.
 (진군대공, 왈 :「 위지내하 ? 」 자공왈 :「 수병휴졸이대지. 」 진군허락.  자공거이지로. )


 [진왕이 크게 두려워하며 묻기를 : “ 그렇다면 어찌해야 합니까 ? "라고 하자. 

 '자공'이 대답하기를 : " 군대를 정비하고 병사들을 쉬게 하며 기다리십시오. ”라고 하였다.
 진왕은 그렇게 하겠다고 승낙을 하였다.  '자공'은 진나라를 떠나 노나라로 돌아갔다.]
 
 吳王果與齊人戰於艾陵, 大破齊師, 獲七將軍之兵而不歸, 果以兵臨晉. 

 與晉人相遇黃池之上, 吳晉爭彊, 晉人擊之, 大敗吳師.
 (오왕과여제인전어애릉, 대파제사, 획칠장군지병이불귀, 과이병임진. 

 여진인상우황지지상, 오진쟁강, 진인격지, 대패오사 ).


 [오왕은 과연 제나라 군대와 "애릉"에서 전투를 벌려 제나라 군대를 대파하고 일곱 장수의 병사들을 

 포로로 잡았으나, 오나라로 돌아가지 않고 예상대로 병사를 이끌고 진나라로 향했다. 

 오나라 군사들은 진나라 군사들과 "황지"에서 마주쳐 서로의 강함을 다투었으나,
 오랜 원정 길에 지친 오군은 진군의 공격을 받아 크게 패하고 말았다.]

 

 越王聞之, 涉江襲吳, 去城七里而軍.  吳王聞之, 去晉而歸, 與越戰於五湖. 

 三戰不勝, 城門不守, 越遂圍王宮, 殺夫差而戮其相.  破吳三年, 東向而霸.
 (월왕문지, 섭강습오, 거성칠리이군.  오왕문지, 거진이귀, 여월전어오호. 

 삼전불승, 성문불수, 월수위왕궁, 살부차이륙기상.  파오삼년, 동향이패.)


 [월왕은 이 소식을 듣자, 곧바로 강수를 건너 오나라를 습격하여 오나라 도성에서 7리 떨어진 곳에 진을 쳤다.

 ​오왕은 이 소식을 듣자, 진나라를 버리고 돌아와 월나라와 "오호"에서 세 번이나 싸웠으나 한번도 이기지 못하고

 결국 성문마저 지켜내지 못했다. 월왕은 마침내 오나라 왕궁을 포위한 끝에 오왕 '부차'를 죽이고

 그 재상 '백비'를 처형했다. 월왕은 오나라를 격파한지 3년 만에 동쪽 제후들의 패자로 군림하게 되었다.]

 

 故子貢一出, 存魯, 亂齊, 破吳, 彊晉而霸越.  子貢一使, 使勢相破, 十年之中, 五國各有變.
 (고자공일출, 존노, 란제, 파오, 강진이패월.  자공일사, 사세상파, 십년지중, 오국각유변. )


 [그러므로 '자공'이 한번 행차함으로써 노나라를 보존하고, 제나라에는 내란이 일어났으며, 

 오나라는 멸망했으며, 진나라를 강대하게 만들었고 월나라를 패자로 만들었다.
 '자공'이 한번 사신이 되어 나서자 각 제후국들 사이에 세력 균형이 깨지고 10년 동안에 다섯 나라에

 각기 큰 변화가 생긴 것이다.]
 
 子貢好廢擧, 與時轉貨貲.  喜揚人之美, 不能匿人之過.  常相魯衛, 家累千金, 卒終于齊.
 (자공호폐거, 여시전화자.  희양인지미, 不能匿人之過.  상상노위, 가루천금, 졸종우제.)


 ['자공'은 평소에 물가가 내려가면 사들이고 물가가 오르면 내다 파는 일를 좋아하여 많은 재산을 모았다. 

 또 남의 장점 드러내기는 좋아했으나, 단점을 숨겨주지 못했다. 한때 노나라와 위나라의 재상이 되었으며,

 집에는 수천금의 재산을 쌓아두기도 했었는데 마지막에는 제나라에서 세상 마쳤다.]

 
 言偃, 吳人, 字子游.  少孔子四十五歲.  子游旣已受業, 爲武城宰.  孔子過, 聞弦歌之聲. 

 孔子莞爾而笑曰 : 「 割雞焉用牛刀 ? 」
 (언언, 오인, 자자유.  소공자사십오세.  자유기이수업, 위무성재.  공자과, 문현가지성. 

 공자완이이소왈 : 「 할계언용우도 ? 」)

 
 ['언언'(BC 506 ~ 미상)은 오나라 사람으로 자는 '자유'이다.  '공자'보다 마흔다섯 살 어리다. 

 '공자'의 가르침을 받은 '자유'는 노나라의 "무성"의 수령이 되었다.
 어느날 '공자'가 이 고을을 지나다가 거문고 타는 소리와 노래 소리를 들었다. 

 '공자'가 빙긋이 웃으며 말하기를 : “ 닭을 잡는데 어찌 소 잡는 칼을 쓰고 있는가 ?라고 하자.]

 

 子游曰 :「 昔者偃聞諸夫子曰, 君子學道則愛人, 小人學道則易使. 」 

 孔子曰 :「 二三子, 偃之言是也.  前言戲之耳. 」  孔子以爲子游習於文學.
 (자유왈 :「 석자언문제부자왈, 군자학도즉애인, 소인학도즉이사. 」 

 공자왈 :「 이삼자, 언지언시야.  전언희지이. 」  공자이위자유습어문학.)


 ['자유'가 대답하기를 : “ 옛날에 저는 선생님께서 ‘군자가 예악의 도를 배우면 사람을 사랑하게 되고,

 소인이 도를 배우면 부리기가 쉽다.’라고 말씀하신 것을 들었습니다.”라고 하자.
 '공자'가 말하기를 : " 제자들아 !  지금 '언'이 한 말은 옳다. 내가 한 말(割雞焉用牛刀)은 단지 농담이었을 뿐이다.

 "라고 하였다.  '공자'는 '자유'가 문학에 능통하며 박학하다고 인정했다.]


 卜商, 字子夏.  少孔子四十四歲.  子夏問 :「 '巧笑倩兮, 美目盼兮, 素以爲絢兮,' 何謂也  ?」 

 子曰 :「繪事後素.」  曰 :「禮後乎 ?」  孔子曰 :「商始可與言《詩》已矣.」
 (복상, 자자하.  소공자사십사세.  자하문 :「 '교소천혜, 미목반혜, 소이위현혜,' 하위야  ?」 

 자왈 :「회사후소.」  왈 :「예후호 ?」  공자왈 :「상시가여언《시》이의.」)


 ['복상'(BC 507 ~ BC 420)은 자가 '자하'이고 공자보다 마흔 네살 어리다.  
 '자하'가 '공자'에게 묻기를 : " ‘예쁘게 웃음 짓는 보조개여, 아름다운 눈 속의 새까만 눈동자여,

 분단장하고 나니 더욱 더 예뻐라. ’이는 무엇을 말하는 것입니까 ?”라고 하니, 
 '공자'가 대답하기를 : " 그림으로 말한다면 먼저 색칠한 다음, 흰 분가루로 다듬는 일과 같다고 할 수 있다. "
 '자하'가 다시 묻기를 : “예의는 도덕이 있은 뒤에 지킨다는 뜻입니까 ? ”라고 하니,
 '공자'가 말하기를 :  " 이제야 '복상'(자하)과 더불어 《시경》을 말할 수 있겠구나. ”라고 하였다.]

 

 子貢問 :「 師與商孰賢 ? 」 子曰 :「 師也過, 商也不及. 」

「 然則師愈與 ? 」 曰 :「 過猶不及. 」
 (자공문 :「 사여상숙현 ? 」 자왈 :「 사야과, 상야불급. 」  

「 연즉사유여 ? 」  왈 :「 과유불급. 」)


 ['자공'이 묻기를 : " '사'(전손사, 자장)와 '상'(자하) 두 사람 중 누가 더 현명합니까 ? "라고 하니.
 '공자'가 대답하기를 : " '사'는 지나치고 '상'은 미치지 못한다. "라고 하였다.
 '자공'이 다시 묻기를 : " 그렇다면 '사'(자장)가 낫다는 뜻입니까 ? ”라고 하니,
 '공자'가 말하기를 : “ 지나친 것은 미치지 못한 것과 마찬가지다. ”라고 하였다.]

 

 子謂子夏曰:「 汝為君子儒, 無為小人儒. 」  

 孔子既沒, 子夏居西河教授, 為魏文侯師.  其子死, 哭之失明.
 (자위자하왈:「 여위군자유, 무위소인유. 」  

 공자기몰, 자하거서하교수, 위위문후사.  기자사, 곡지실명.)


 ['공자'가 '자하'에게 말하기를 : " 너는 군자의 품덕을 지닌 유생이 되어야지 소인배 같은 유생이 되지 말라. "라고

 하였다. '공자'가 죽은 후 '자하'는 "서하"에 살면서 사람들에게 학문을 가르쳤는데 

 위'문후'도 그를 스승으로 모셨다. 그 뒤 아들을 잃게 된 '자하'는 슬퍼한 나머지 눈이 멀고 말았다.]


 顓孫師, 陳人, 字子張.  少孔子四十八歲.  子張問干祿, 孔子曰:「多聞闕疑, 慎言其餘, 則寡尤;

 多見闕殆, 慎行其餘, 則寡悔.  言寡尤, 行寡悔, 祿在其中矣.」 
 (전손사, 진인, 자자장.  소공자사십팔세.  자장문간록, 공자왈:「다문궐의, 신언기여, 즉과우;

 다견궐태, 신행기여, 즉과회.  언과우, 행과회, 록재기중의.」)


 ['전손사'(BC 503 ~ 미상)는 진나라 사람으로 자는 '자장'이다. 공자보다 48세 어리다. 

 '자장'이 벼슬 자리를 얻는 방업에 대해 묻자,
 '공자'는 대답하기를 : " 우선 다른 사람들의 말을 많이 듣고, 그 중에서 의심나는 점은 없애버리며,

 나머지 확신이 있는 말도 신중하게 생각하여 말한다면 과실이 적을 것이다 ;
 그리고 많이 보아 그 중 위태롭게 생각되는 일은 없애고, 그 나머지 확실한 일을 신중한 자세로 행한다면 후회하는

 일이 적게 된다. 허물을 적게 말하고 후회를 적게 행하면 벼슬은 구하지 않아도 그 안에 있다. ”라고 하였다.]
 
 他日從在陳蔡閒, 困, 問行.  孔子曰:「言忠信, 行篤敬, 雖蠻貊之國行也;

 言不忠信, 行不篤敬, 雖州里行乎哉! 立則見其參於前也, 在輿則見其倚於衡, 夫然後行. 」
 (타일종재진채한, 곤, 문행.  공자왈:「언충신, 행독경, 수만맥지국행야;

 언불충신, 행불독경, 수주리행호재! 입즉견기참어전야, 재여즉견기의어형, 부연후행. 」)


 [어느날 '자장'이 '공자'를 수행하던 중에 진나라와 채나라 사이에서 곤란을 겪을때 도를 어떻게 행해야 하는지를

 '공자'에게 물었다.  '공자'가 말하기를 : “ 말에 정성과 믿음이 있고, 행동이 착실하고 조심성이 있으면,

 비록 남만이나 맥국같은 오랑캐 나라에서도 도를 행할 수 있으며, 말에 정성과 믿음이 없고,

 행동이 착실하지 못하고 조심스럽지 못하면, 비록 사는 곳이 자기 고향일지라도 도를 행할 수 있겠는가 !
 말에 정성과 믿음이 있고, 행동이 착실하고 조심성이 일어서면 눈앞에 어른거리고, 수레 안에 있을 때도

 가름대에 매달려 바람에 나부끼는 것처럼 보이면, 비로소 도를 행할 수 있는 것이다. ”라고 하였다.]

 

 子張書諸紳.  子張問:「士何如斯可謂之達矣 ? 」 

 孔子曰:「何哉, 爾所謂達者?」  子張對曰:「在國必聞, 在家必聞. 」
 (자장서제신.  자장문:「사하여사가위지달의 ? 」 

 공자왈:「하재, 이소위달자?」  자장대왈:「재국필문, 재가필문. 」)


 ['자장'은 이 말을 잊어버리지 않으려고 허리띠에 적어 두었다. 

 '자장'이 '공자'에게 묻기를 : "선비는 어찌해야 통달했다고 일컬을 수 있습니까 ? "라고 하자.
 '공자'가 대답하기를 : "무엇을 말하는 것인가,  네가 말하는 통달이란 ? "하고 되묻자.
 '자장'이 말하기를 : " 내 명성이 나라에 있어서는 반드시 들리고, 

 집에 있어서도 반드시 들리는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孔子曰:「是聞也, 非達也.  夫達者, 質直而好義, 察言而觀色, 慮以下人, 在國及家必達. 

 夫聞也者, 色取仁而行違, 居之不疑, 在國及家必聞. 」
 (공자왈:「시문야, 비달야.  부달자, 질직이호의, 찰언이관색, 려이하인, 재국급가필달. 

 부문야자, 색취인이행위, 거지불의, 재국급가필문. 」)


 ['공자'가 말하기를 : " 그것은 명성이지 통달함이 아니다. 무릇  통달이라는 것은 바탕이 곧고 의로움을 좋아하고,

 남의 말을 헤아리고 얼굴색을 관찰하여 항상 주의하여 남에게 겸손하면, 나라에서나 집에서나 막론하고

 반드시 통달하게 된다.  무릇 명성을 얻는다는 것은 마치 아름다운 여인을 얻듯이 仁을 구하여야만

 ​그 행동에 어긋남이 없게 되고, 비록 그곳에 머물지라도 의심을 받지 않고,

 나라에 있어도 집에 있어도 그 명성은 반드시 얻을 수 있는 것이다. "라고 히였다.]


 曾參, 南武城人, 字子輿.  少孔子四十六歲.  孔子以為能通孝道, 故授之業.  作孝經. 死於魯.
 (증삼, 남무성인, 자자여.  소공자사십육세.  공자이위능통효도, 고수지업.  작효경.  사어노. )


 [ '증삼'(BC 505 ~ BC 436)은 춘추 말기 노나라 "남무성" 사람이고 자는 '자여'이다. 

 '증점'의 아들이다.  '공자'보다 46세 어리다.
 '증삼'이 효의 도리에 능통한 사실을 알게 된 '공자'는 그를 가르쳐 《효경》을 짓게 했다. 

 '증삼'은 노나라에서 죽었다.]


 澹臺滅明, 武城人, 字子羽.  少孔子三十九歲.  狀貌甚惡, 欲事孔子, 孔子以為材薄. 

 既已受業, 退而修行, 行不由徑, 非公事不見卿大夫.
 (담대멸명, 무성인, 자자우.  소공자삼십구세.  장모심악, 욕사공자, 공자이위재박. 

 기이수업, 퇴이수행, 행불유경, 비공사불견경대부.)


 ['담대멸명'(BC 512 ~ 미상)은 "무성" 출신으로 자는 '자우'이고, 공자보다 39세 어리다. 

 '자우'는 얼굴이 너무 못생겨서, '공자'를 스승으로 모시기 위해 찾아온 '자우'를 보고 '공자'는 재주가 모자란

 사람으로 여겼다. 그러나 '공자'의 가르침을 받은 '자우'는 물러나왔음에도 계속 수행을 멈추지 않았고,

 길을 갈 때는 결코 지름길을 취하지 않았으며 공적인 일이 아니면 사사로이 경대부들을 만나지 않았다.]

 

 南游至江, 從弟子三百人, 設取予去就, 名施乎諸侯. 

 孔子聞之, 曰:「 吾以言取人, 失之宰予;以貌取人, 失之子羽. 」
 (남유지강, 종제자삼백인, 설취여거취, 명시호제후. 

 공자문지, 왈:「 오이언취인, 실지재여;이모취인, 실지자우. 」)


 [후에 그가 남쪽으로 내려가 "강수" 근처에 살 때는 그를 따르는 제자가 3백 명에 이르렀다.
 그는 제자들에게 물건을 주고 받는 것과, 벼슬자리에 나아가고 그만두는 것을 의리에 맞게 하라고 가르쳐

 그의 이름은 제후들 사이에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
 '공자'는 그의 평판을 듣고 말하기를 : " 내가 말을 잘하는 것으로 사람을 취했다가 '재여'로 인해 실수하였고,

 용모로써 사람을 취했다가 '자우'로 인해 실수하였다. "라고 하였다.]


 宓不齊, 字子賤.  少孔子三十歲.  孔子謂「子賤君子哉! 魯無君子, 斯焉取斯?」 

 子賤為單父宰, 反命於孔子, 曰:「 此國有賢不齊者五人, 教不齊所以治者. 」
 (복부제, 자자천.  소공자삼십세.  공자위「자천군자재! 로무군자, 사언취사?」 

 자천위단보재, 반명어공자, 왈:「 차국유현부제자오인, 교불제소이치자. 」)


 ['복부제'(BC 521 ~ 미상)는 자가 '자천'이고, '공자'보다 서른살 어리다. 
 '공자'가 '자천'을 일러 말하기를 : " 군자이로구나 !  만일 노나라에 군자가 없었다면,

 '자천'과 같은 사람이 어떻게 군자의 도리를 알 수 있었겠는가 ?라고 하였다.
 '자천'이 "단보"의 수령으로 있다가 돌아와 공자에게 복명하며 말하기를 : “이 나라에는 저보다 훌륭한 인물이

 다섯 사람이나 있어서, 저에게 다스리는 방법을 가르쳐주고 있습니다. "라고 하자.]

 

 孔子曰 : 「 惜哉不齊所治者小, 所治者大則庶幾矣. 」
 (공자왈) : 「 석재부제소치자소, 소치자대즉서기의. 」)


 [공자는 말하기를 : "참으로 애석한 일이로다  '부제'가 다스리는 곳이 너무 좁구나. 

 만일 그가 다스리는 곳이 컸다면 참으로 이상적인 정치를 펼칠 수 있었을 텐데... "라고 하였다.]


 原憲字子思.  子思問恥.   孔子曰 :「 國有道, 穀.  國無道, 穀, 恥也.」  

 子思曰 :「 克伐怨欲不行焉, 可以為仁乎?」  孔子曰 :「 可以為難矣, 仁則吾弗知也.」
 (원헌자자사.  자사문치.   공자왈:「 국유도, 곡.  국무도, 곡, 치야.」  

 자사왈:「 극벌원욕불행언, 가이위인호?」  공자왈:「 가이위난의, 인즉오불지야.」)


 ['원헌'( BC 483 ? ~ BC 402 ? , 공자의 손자)의 자는 '자사'이다.  자사가 수치에 대해 물었다.  
 '공자'가 대답하기를 : " 나라에 도가 있을 때에는 녹을 먹을 수 있으나, 나라에 도가 없을 때 녹을 먹는다면,

 이것이 바로 수치스러운 일이다. "라고 하였다.
 '자사'가 묻기를 : " 남을 이기려고 하는 것, 스스로 공을 자랑하는 것, 남을 원망하는 것,

 탐욕스러운 것 등을 행하지 않는다면 이를 仁이라고 할 수 있습니까 ? "라고 하자.
 '공자'가 말하기를 : " 그렇게 하기도 어려운 일이겠지만, 그것만으로 인이라고 할 수 있을지는 나도 모르겠다. "

 라고 하였다. ]

 

 孔子卒, 原憲遂亡在草澤中.  子貢相衛, 而結駟連騎, 排藜藿入窮閻, 過謝原憲. 

 憲攝敝衣冠見子貢.  子貢恥之, 曰:「 夫子豈病乎?」
 (공자졸, 원헌수망재초택중.  자공상위, 이결사연기, 배려곽입궁염, 과사원헌. 

 헌섭폐의관견자공.  자공치지, 왈:「 부자개병호?」)


 ['공자'가 죽자, '원헌'은 세상을 피하여 풀이 우거진 늪지대에 도망와서 살았다. 

 '자공'이 위나라 재상이 되어 사두마차를 타고 기마 호위병과 함께 명아주 잎과 콩잎이 무성한 수풀을 헤치고

 빈궁한 동네에 들어와 '원헌'의 안부를 물었다.  '원헌'는 낡은 의관이지만 단정하게 차려입고 '자공'을 맞이했다. 

 ​남루한 옷차림의 '원헌'을 본 '자공'이 부끄럽게 여기며 말하기를 : " 사제는 어찌하여 병이 들었는가 ? "하자.]

 

 原憲曰 :「 吾聞之, 無財者謂之貧, 學道而不能行者謂之病.  若憲, 貧也, 非病也.」  

 子貢慚, 不懌而去, 終身恥其言之過也.
 (원헌왈:「 오문지, 무재자위지빈, 학도이불능행자위지병.  약헌, 빈야, 비병야.」  

 자공참, 불역이거, 종신치기언지과야.)


 ['자사'가 말하기를 : " 제가 듣기에 재물이 없는 것을 가난하다 하고,

 도를 배우고도 실행하지 못하는 사람을 병들었다 했습니다.

 저 같은 사람은 비록 가난하기는 하지만 병들지는 않았습니다. "라고 하자.
 '자공'이 몹시 부끄러워 하며 즐겁지 않은 마음을 갖고 떠났다.

 후에 '자공'은 평생토록 그때의 실언을 부끄럽게 여기며 살았다.]

 
 公冶長, 齊人, 字子長.  孔子曰 :「 長可妻也, 雖在累絏之中, 非其罪也.」 以其子妻之.
 (공야장, 제인, 자자장.  공자왈:「 장가처야, 수재루설지중, 비기죄야.」 이기자처지.)


 ['공야장'은 제나라 사람으로 자는 '자장'이다. '공자'가 말하기를 : " '자장'은 사위로 삼을 만하다.

 비록 일찍이 감옥에 갇힌 일이 있었지만 그것은 그의 죄가 아니었다. "라고 하며.
 '공자'는 '공야장'을 자기의 사위로 삼았다.]


 南宮括, 字子容. 問孔子曰 :「 羿善射, 奡盪舟, 俱不得其死然;禹稷躬稼而有天下?」孔子弗答.

 (남궁괄, 자자용.   문공자왈:「 예선사, 오탕주, 구불득기사연;우직궁가이유천하?」  공자불답.)


 ['남궁괄'은 자가 '자용'이다.  '자용'이 '공자'에게 묻기를 : " 유궁국의 '예'는 활을 잘 쏘고,

 하나라의 '오'는 땅에서도 배를 움직일 수 있는 장사지만 두 사람 모두 제 수명을 다하지 못하고 죽었습니다 ;

 그러나 하나라의 우임금과 주나라의 '후직'은 몸소 밭을 갈며 고생을 했음에도 천하를 얻을 수 있었던 것은

 ​무슨 까닭입니까 ? ”라고 하였으나.  공자는 대답하지 않았다.]

 

 容出, 孔子曰:「 君子哉若人! 上德哉若人!」 「國有道, 不廢;國無道, 免於刑戮.」 

 三復「 白珪之玷 」, 以其兄之子妻之.
 (용출, 공자왈:「 군자재약인! 상덕재약인!」 「국유도, 불폐;국무도, 면어형륙.」 

 삼복「 백규지점 」, 이기형지자처지.)


 ['자용' 나가자, 비로소 '공자'가 말하기를 : " 군자로구나, 이 사람이 !  덕을 소중히 아는구나, 이 사람이 !"  

 " '자용'은 도가 지켜지는 나라에서는 버려지지 않을 것이고, 나라에 비록 도가 없더라도 

 죽음을 면할 수 있을 것이다 ”라고 하였다.

 '자용'이 《시경》〈대아․ 억〉의 「 白珪之玷, 尙可磨也, 斯言之玷, 不可爲也. 」

 (흰구슬의 흠은 갈아 없앨 수 있지만, 말의 흠은 어찌 할 도리가 없다) 」 이 구절을 세 번이나 반복해서 읽어

 말조심을 마음에 새기자 '공자'는 자기 형의 딸을 그에게 시집보냈다.]


 公皙哀, 字季次.  孔子曰:「 天下無行, 多為家臣, 仕於都;唯季次未嘗仕. 」
 (공석애, 자계차.  공자왈:「 천하무행, 다위가신, 사어도;유계차미상사. 」)


 ['공석애'의 자는 '계차'이다. '공자'가 말하기를 : " 천하 사람들이 도를 행하지 않음에도, 많은 선비들은 대부들의

 가신이 되고 도성에서 벼슬을 살고 있는데, 오직 '계차'만은 지조를 지키며 벼슬하지 않았다. "라고 하였다.]


 曾蒧字皙.  侍孔子, 孔子曰 :「 言爾志.」  蒧曰 :「 春服既成, 冠者五六人, 童子六七人,

 浴乎沂, 風乎舞雩, 詠而歸. 」 孔子喟爾歎曰 :「 吾與蒧也!」
 (증점자석.  시공자, 공자왈:「 언이지.」   점왈:「 춘복기성, 관자오륙인, 동자육칠인,

 욕호기, 풍호무우, 영이귀. 」   공자위이탄왈:「 오여점야!」)


 ['증점'의 자는 '석'이다.  시중을 들고 있던 '증점'에게 '공자'가 말하기를 :

 " 너의 사사로운 생각을 말해 보아라 ”라고 하자 .

 ​'증점'이 말하기를 : " 봄이 되면 새로 만든 옷을 입고, 관례를 올린 젊은이 오륙 명과 함께 아이들 육칠 명을

 데리고, "기수"로 가서 목욕을 하고, "무우"에서 바람을 쐬고, 시를 읊으며 돌아오고 싶습니다. "라고 하자.  

 '공자'가 감탄하며 말하기를 : " 나도 너와 같이 하고 싶구나 ! "라고 하였다.]


 顏無繇字路.  路者, 顏回父, 父子嘗各異時事孔子.  顏回死, 顏路貧, 請孔子車以葬.
 (안무요자로.  로자, 안회부, 부자상각이시사공자.  안회사, 안로빈, 청공자거이장.)


 ['안무요'의 자는 '로'이다.  '로'는 '안회'의 부친으로 부자가 각각 다른 시기에 '공자'에게 배웠다.
 '안회'가 죽었을때 '안로'는 너무 가난하였기에 '공자'의 수레를 팔아 그 비용으로 '안회'의 장례 치르기를 바랬다.]

 

 孔子曰:「 材不材, 亦各言其子也.  鯉也死. 

 有棺而無槨, 吾不徒行以為之槨, 以吾從大夫之後.  不可以徒行. 」
 (공자왈:「 재불재, 역각언기자야.  리야사. 

 유관이무곽, 오불도행이위지곽, 이오종대부지후.  불가이도행. 」)


 ['공자'가 말하기를 : " 사람은 재주가 있건 없건, 누구나 자기 자식을 위한다. 

 재주가 있건 없건 누구나 자식은 자식인 것이다.  내 아들 '리'가 죽었을 때 관은 있었으나 곽이 없었는데, 

 내가 타고 다니는 수레를 팔아 곽을 만들어주지 않았다.
 그것은 내가 말석이나마 대부의 신분으로써 수레없이 걸어 다닐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하였다.]

 商瞿, 魯人, 字子木.  少孔子二十九歲.  

 孔子傳易於瞿, 瞿傳楚人軒臂子弘, 弘傳江東人矯子庸疵, 疵傳燕人周子家豎,
 (상구, 로인, 자자목.  소공자이십구세.  

 공자전역어구, 구전초인간비자홍, 홍전강동인교자용자, 자전연인주자가수.)


 ['상구'는 노나라 사람이며 자는 '자목'이다.  공자보다 29살 어리다. 

 '공자'는 《주역》을 '상구'에게 전했고, '상구'는 그것을 초나라 사람 '헌비자홍'에게 전했다.
 '헌비자홍'은 다시 강동의 '교자용자'에게 전하고, '용자'는 연나라 사람 '주자가수'에게 전했다.]

 

 豎傳淳于人光子乘羽, 羽傳齊人田子莊何, 何傳東武人王子中同, 同傳菑川人楊何. 

 何元朔中以治易為漢中大夫.
 (수전순우인광자승우, 우전제인전자장하, 하전동무인왕자중동, 동전치천인양하. 

 하원삭중이치역위한중대부.)


 ['주자가수'는 "순우"사람 '광자승우'에게 전했고, '광자순우'는 제나라 사람 '전자장하'에게 전했고,

 '전자장하'는 "동무" 사람 '왕자중동'에게 전했고, '왕자중동'은 "치천" 사람 '양하'에게 전했다. 

 '양하'는 원삭(한무제,BC 128 ~ 123 무렵)중에 《주역》을 다루어 한나라의 대부가 되었다.]


 高柴字子羔.  少孔子三十歲.  子羔長不盈五尺.  受業孔子, 孔子以為愚. 

 子路使子羔為費郈宰,  孔子曰:「 賊夫人之子!」
 (고시자자고.  소공자삼십세.  자고장불영오척.  수업공자, 공자이위우. 

 자로사자고위비후재,  공자왈 : 「 적부인지자!」)


 ['고시'는 자가 '자고'이다.  나이는 공자보다 30살 어리다.  자고는 키가 5척이 넘지 못했다. 

 '공자'는 '자고'를 가르치면서 그를 우직하다고 여겼다. '자로'가 '자고'를 "비후"의 수령으로 천거하자, 

 공자가 말하기를 : " 학문이 아직 이루어지지 않은 그를 천거하다니 남의 자식을 망치려고 하는구나 ! "하였다.]

 

 子路曰 :「 有民人焉, 有社稷焉, 何必讀書然後為學!」 孔子曰 :「 是故惡夫佞者.」
 (자로왈:「 유민인언, 유사직언, 하필독서연후위학!」  공자왈:「 시고오부녕자.」)


 ['자로'가 말하기를 : " 백성이 있어 다스리는 법을 익힐 것이며, 사직이 있어 신을 섬기는 것도 배울 것인데,

 어찌 반드시 책만 읽은 후에 학문을 하겠습니까 ? "라고 하자 ?   

 '공자'가 말하기를 : " 이런 소리를 하는 까닭에 나는 말만 잘하는 사람을 싫어한다. "라고 하였다.]

 
 漆彫開字子開.   孔子使開仕, 對曰:「 吾斯之未能信. 」  孔子說.
 (칠조개자자개.   공자사개사, 대왈:「 오사지미능신. 」 공자열.)


 ['칠조개'의 자는 '자개'이다.  '공자'가 벼슬길에 나서라고 권하자, 

 '자개'가 대답하기를 : " “저는 아직 사람을 다스릴 만큼 학문에 자신이 없습니다. ”라고 하니.

 ​'공자'가 듣고 기뻐하였다.]


 公伯繚字子周.  周愬子路於季孫, 子服景伯以告孔子, 曰:「夫子固有惑志, 繚也,

 吾力猶能肆諸市朝.」  孔子曰:「道之將行, 命也;道之將廢, 命也.  公伯繚其如命何!」
 (공백료자자주.  주소자로어계손, 자복경백이고공자, 왈:「부자고유혹지, 료야,

 오력유능사제시조.」  공자왈:「도지장행, 명야;도지장폐, 명야.  공백료기여명하!」)


 ['공백료'는 자가 '자주'이다.  자주가 계손에게 자로를 비방하자, '자복경백'(노나라 대부)이 그것을 '공자'에게

 고하여 말하기를 : “선생님이시여 '계손'이 평소에 '공손료'의 말에 미혹되고 있습니다. 

 그러나 나의 힘으로도 능히 '공백료'를 죽여서 시체를 저자에 내걸 수 있습니다.”라고 하니,
 '공자'가 말하기를 : " 도가 장차 실현되는 것도 천명이고, 도가 장차 황폐해 지는 것도 천명이다. 

 '공백료'가 그 천명을 어찌 하겠는가 ? ”라고 하였다.]


 司馬耕字子牛.  牛多言而躁.  問仁於孔子,  孔子曰 :「 仁者其言也訒. 」 

 曰 :「 其言也訒.  斯可謂之仁乎 ? 」  子曰 :「 爲之難, 言之得無訒乎 ! 」
 (사마경자자우.  우다언이조.  문인어공자,  공자왈 :「 인자기언야인. 」 

 왈 :「 기언야인.  사가위지인호 ? 」  자왈 :「 위지난, 언지득무인호 ! 」)


 ['사마경'의 자는 '자우'이다.  자우는 말이 많고 성질이 조급한 사람이었다. 어느날 '공자'에게 仁에 대해 물었다.

 '공자'가 말하기를 : “어진 사람은 말을 할 때 말을 잘 못하는 사람처럼 어눌하게 한다. ”라고 했다.
 '자우'가 말하기를 : “그 말이 어눌하면 그것으로 가히 어질다고 할 수 있습니까 ? ”라고 하니.
 '공자'가 말하기를 : “인을 실천하기가 어렵다는 것을 알고 있다면, 

 말이 어눌해 질 수 밖에 없지 않은가 ? ”라고 하였다.]

 

 問君子, 子曰 :「 君子不憂不懼. 」  曰 :「 不憂不懼, 斯可謂之君子乎 ? 」 

 子曰 :「 內省不疚, 夫何憂何懼 ! 」
 (문군자, 자왈 :「 군자불우불구. 」  曰 :「 불우불구, 사가위지군자호 ? 」 

 자왈 :「 내성불구, 부하우하구 ! 」)


 [또 '자우'가 군자에 대해 물었을 때 '공자'가 말하기를 : “ 군자는 근심하지도 두려워하지도 않는다. ”라고 하였다.
 '자우'가 말하기를 : “ 근심하지도 않고 두려워하지도 않으면, 그것으로 가히 군자라고 할 수 있습니까 ? ”하자.

 '공자'가 말하기를 : “속으로 반성해 잘못된 점이 없다면, 도대체 무엇을 근심하고 두려워하겠는가 ?”라고 하였다.]


 樊須字子遲.  少孔子三十六歲.  樊遲請學稼, 孔子曰 :「 吾不如老農. 」  

 請學圃, 曰 :「 吾不如老圃. 」
 (번수자자지.  소공자삼십육세.  번지청학가, 공자왈 : 「 오불여노농. 」  

 청학포, 왈 : 「 오불여노포. 」)

 
 ['번수'의 자는 '자지'이다.  '공자'보다 서른여섯 살 어리다. 
 언젠가 '번수'가 농사짓는 법을 배우고 싶다고 '공자'에게 가르침을 청하자, 

 '공자'가 말하기를 : “ 나는 늙은 농부보다 농사짓는 법이 서툴다. ”라고 하였다. 
 '번수'가 다시 채소를 가꾸는 방법을 가르쳐달라고 청하자,

 '공자'가 말하기를 : “나는 오랫동안 채소를 가꾸며 살아온 사람보다 못하다. ”라고 하였다.] 

 

 樊遲出, 孔子曰 : 「 小人哉樊須也 !  上好禮, 則民莫敢不敬 ; 上好義, 則民莫敢不服 ;

 上好信, 則民莫敢不用情.  夫如是, 則四方之民襁負其子而至矣, 焉用稼 ! 」
 (번지출, 공자왈 : 「 소인재번수야 !  상호례, 즉민막감불경 ; 상호의, 즉민막감불복 ;

 상호신, 즉민막감불용정.  부여시, 즉사방지민강부기자이지의, 언용가 ! 」)

 
 [이윽고 '번수'가 물러가자,  '공자'가 말하기를 : “ 참으로 소인이로구나, 

 '번지'는 !  윗사람이 예를 좋아하면 백성들은 자연 그를 존경하지 않을 수 없으며,
 윗사람이 의를 좋아하면 백성들은 어찌 감히 복종하지 않을 수가 있으며, 

 윗사람이 신의를 좋아하면 백성이 정성을 다하지 않을 수가 없을 것이다.
 무릇 윗사람이 이와 같이 행한다면 사방의 백성들은 그 자식들을 강보에 쌓아 등에 업고 찾아올 것인데

 어찌 몸소 농사지을 생각을 한단 말인가 ! "라고 하였다.]

 

  樊遲問仁, 子曰 :「 愛人. 」  問智, 曰 :「 知人. 」
  (번지문인, 자왈 :「 애인. 」  문지, 왈 :「 지인. 」)


  [또 번지가 인을 묻자,  '공자'가 말하기를 : “ 사람을 사랑하는 것이다. ”라고 하였다. 
  또 '번지'가 지혜에 대해 묻자, '공자'가 말하기를 : “사람을 아는 것이다.”라고 하였다.]


 有若少孔子四十三歲.  有若曰 :「 禮之用, 和爲貴, 先王之道斯爲美. 

 小大由之, 有所不行 ; 知和而和, 不以禮節之, 亦不可行也. 」
 (유약소공자사십삼세.  유약왈 :「 예지용, 화위귀, 선왕지도사위미. 

 소대유지, 유소불행 ; 지화이화, 불이예절지, 역불가행야. 」)

 
 ['유약'은 '공자'보다 마흔네 살 어리다.  '유약'이 말하기를 : “ 예절을 운용함에는 조화가 귀중하다.

 옛날 선왕들의 도는 조화가 있음으로써 아름다웠다고 한 것이다.
 그러나 큰일이건 작은 일이건 조화만 가지고는 잘되지 않는 경우도 있다.

 조화의 귀중함을 알고 예로써 절제하지 않으면 일이 원만하게 이루어지지 않는다. ”라고 하였다.]

 

 「 信近於義, 言可復也 ;  恭近於禮, 遠恥辱也 ;  因不失其親, 亦可宗也. 」
 (「신근어의, 언가복야 ;  공근어례, 원치욕야 ;  인불실기친, 역가종야. 」)


 [그리고 말하기를 :  “ 신의는 정의에 가까울 때 그 약속을 이행할 수 있으며 ;

 공손함도 예절에 가까울 때 치욕에서 멀어질 수 있다 ;
 사람과 친하려면 그 친할 만한 사람을 잃지 않아야 또한 존경할 수 있다. ”라고 하였다.]

 

 孔子旣沒, 弟子思慕, 有若狀似孔子, 弟子相與共立爲師, 師之如夫子時也. 

 他日, 弟子進問曰 :「昔夫子當行, 使弟子持雨具, 已而果雨.  弟子問曰 :『夫子何以知之 ? 』

 夫子曰 : 『《詩》不云乎 ?  '月離于畢, 俾滂沱矣.'  昨暮月不宿畢乎? 』 

 他日, 月宿畢, 竟不雨.  商瞿年長無子, 其母爲取室.  孔子使之齊, 瞿母請之. 

 孔子曰 :『無憂, 瞿年四十後當有五丈夫子.』  已而果然.  敢問夫子何以知此 ? 」  

 有若黙然無以應.   弟子起曰 : 「 有子避之, 此非子之座也 ! 」

 (공자기몰, 제자사모, 유약장사공자, 제자상여공입위사, 사지여부자시야. 

 타일, 제자진문왈 : 「석부자당행, 사제자지우구, 이이과우.  제자문왈 : 『부자하이지지 ? 』

 ​부자왈 : 『《시》불운호 ?  '월리우필, 비방타의.'  작모월불숙필호? 』 

 타일, 월숙필, 경불우.  상구년장무자, 기모위취실.  공자사지제, 구모청지.

 공자왈 :『무우,구년사십후당유오장부자.』  이이과연.  감문부자하이지차 ? 」  

 유약묵연무이응.   제자기왈 :「 유자피지, 차비자지좌야 ! 」)


 ['공자'가 이윽고 세상을 떠나자,  '공자'를 사모했던 제자들은 '유약'의 얼굴이 '공자'를 많이 닮아 서로 상의하여

 그를 스승으로 추대하고 마치 '공자'를 모시듯이 대했다.
 어느 날 제자 한 사람이 '유약'에게 묻기를 : “ 옛날 돌아가신 선생님께서 밖에 나가실 때 제자에게 

 우비를 준비시키면 그 날은 과연 비가 오곤 했었습니다. 

 우리들이 ‘선생님께서는 어떻게 비가 올 줄 미리 아셨습니까 ? ’라고 물었습니다.

 선생님께서 말씀하시길, ‘《시경》에도 '달이 필성(별 이름)에 걸리면 큰비가 내린다.'라고 하지 않았느냐 ?

 엊저녁에 달이 필성에 걸려 있지 않았느냐 ?’라고 했습니다.
 다른 날에는 달이 필성에 걸려 있어도 끝내 비가 오지 않았습니다. 

 '상구'는 나이 꽤 들어서도 자식이 없자 그의 어머니가 새로 아내를 얻어 주었습니다.
 '공자'께서 그를 제나라에 사신으로 가게 하자 '상구'의 모친이 와서 사정을 말하고 다른 사람을 대신 보내달라고

 청했습니다.

 '공자'께서 말씀하시기를  ‘걱정하지 마십시오.  '상구'는 마흔 살이 넘어서면 아들을 다섯이나 두게 될 것입니다. ’

 라고 하셨는데, 후에 과연 그렇게 됐습니다.

 ​감히 묻습니다만 선생님(공자)께서는 어떻게 그런 것들을 알 수 있었습니까 ? ”라고 하자. 
 '유약'이 대답을 못하고 잠자코 있자, 제자들이 일어나 말하기를, “ '유자'여, 그 자리에서 물러나시오.

 이 자리는 당신이 앉아 있을 자리가 아닙니다. ”라고 하였다.]


 公西赤字子華.  少孔子四十二歲.  子華使於齊, 冉有爲其母請粟. 

 孔子曰 :「 與之釜. 」 請益, 曰 :「 與之庾. 」  冉子與之粟五秉.
 (공서적자자화.  소공자사십이세.  자화사어제, 염유위기모청속. 

 공자왈 : 「 여지부. 」  청익, 왈 : 「 여지유. 」  염자여지속오병.)

 
 ['공서적'의 자는 '자화'이다.  공자보다 마흔두 살 어리다. 

 '자화'가 제나라에 사신으로 갔을 때 '염유'가 '자화'의 모친을 위해 먹을 양식을 드리기를 청했다.
 '공자'가 말하기를 : “ 한 솥(1부 = 6말 4되)을 드려라. ”라고 하자,  염유는 더 드리기를 청했다. 

 '공자'가 말하기를, “한 유(1유 = 16말)를 더 드려라. ”라고 하였다.
 그런데도 '염구'는 겉 곡식 다섯 병(1병 = 16곡, 1곡 = 10말)을 '자화'의 어머니에게 더 드렸다.]

 

 孔子曰 :「 赤之適齊也, 乘肥馬, 衣輕裘.  吾聞君子周急不繼富. 」
 (공자왈 :「 적지적제야, 승비마, 의경구.  오문군자주급불계부. 」)


 ['공자'가 그 일을 듣고 말하기를 : “ '공서적'이 제나라에 갈 때 살찐 말을 타고 가벼운 갖옷을 입고 갔다.

 ​내가 듣기로는 군자는 절실한 자를 도와주지 부유한 자는 돕지 않는다고 하였다 ”라고 하였다.]


 巫馬施字子旗.  少孔子三十歲.   陳司敗問孔子曰 :「 魯昭公知禮乎 ? 」  孔子曰 :「 知禮. 」
 (무마시자자기.  소공자삼십세.   진사패문공자왈 : 「 노소공지례호 ? 」   공자왈 : 「 지예. 」)
 ['무마시'의 자는 '자기'이다. 공자보다 서른 살 어리다. 

 진나라의 사패(형벌을 맡아 보는 관리)가 '공자'에게 묻기를 : " 노나라의 '소공'은 예를 아십니까 ? ”라고 하자.

 공자가 말하기를 : “ 노나라의 '소공'은 예를 알고 있습니다. ”라고 하였다.]

 

 退而揖巫馬旗曰 : 「 吾聞君子不黨, 君子亦黨乎 ?  魯君娶吳女爲夫人, 命之爲孟子. 

 孟子姓姬, 諱稱同姓, 故謂之孟子.  魯君而知禮, 孰不知禮 ! 」
 (퇴이읍무마기왈 : 「 오문군자불당, 군자역당호 ?  로군취오여위부인, 명지위맹자. 

 맹자성희, 휘칭동성, 고위지맹자.  로군이지례, 숙불지례 ! 」)

 
 [사패가 물러 나와서 '무마시'에게 읍하고 말하기를 : “ 내가 듣기로는 군자는 무리를 지어 편들면 안 된다고 

 했는데, '공자'와 같은 군자도 역시 편을 드십니까 ? 노나라 임금은 오왕의 딸을 부인으로 삼고, 

 '맹자'라 부르고 있습니다. 

 '맹자'는 성이 '희'로 노나라 임금과 같은 성을 부르기 꺼려하여 그래서 '맹자'라고 했습니다. 

 노나라 임금이 예를 안다고 한다면 세상에 누가 예를 모른다고 할 수 있겠습니까 ? "라고 하였다.]

 

 施以告孔子, 孔子曰 : 「 丘也幸, 苟有過, 人必知之.  臣不可言君親之惡, 爲諱者, 禮也. 」
 (시이고공자, 공자왈 : 「 구야행, 구유과, 인필지지.  신불가언군친지악, 위휘자, 예야. 」)


 ['무마시'가 이 말을 '공자'에게 전하자,  '공자'가 말하기를 : “ 나는 행복하구나. 한때 잘못을 저질렀는데

 사람들이 반드시 그것을 알고 알려주니. 신하는 임금의 나쁜 점을 말해서는 안 된다. 

 그것을 숨기고 말하지 않는 것이 예이다 .”라고 하였다.]


 梁鱣字叔魚.  少孔子二十九歲.   顔幸字子柳.  少孔子四十六歲.  

 冉孺字子魯.  少孔子五十歲.   曹卹字子循.  少孔子五十歲.
 (량전자숙어.  소공자이십구세.   안행자자류.  소공자사십육세.  

 염유자자로.  소공자오십세.   조휼자자순.  소공자오십세.)


 ['양전'의 자는 '숙어'이다.  '공자'보다 스물아홉 살 어리다.   '안행'의 자는 '자유'이다. 

 '공자'보다 마흔여섯 살 어리다. '염유'의 자는 '자노'이다.  '공자'보다 쉰 살 어리다.  

 '조휼'의 자는 '자순'이다.  '공자'보다 쉰 살 어리다.]

 
 伯虔字子析.  少孔子五十歲.   公孫龍字子石.  少<孔子>五十三歲.  

 自子石已右三十五人, 顯有年名及受業聞見于書傳.
 (백건자자석.  소공자오십세.   공손룡자자석.  소공자오십삼세.  

 자자석이우삼십오인, 현유년명급수업문견우서전. )


 ['백건'의 자는 '자석'이다.  '공자'보다 쉰 살 어리다.  '공손룡'의 자는 '자석'이다. '공자'보다 쉰 세살 어리다. 

 ​'자석'보다 앞의 서른다섯 사람은 나이와 이름이 분명하고 '공자'의 가르침을 받거나 

 문답한 것이 글로 전해진다.]  


 其四十有二人, 無年及不見書傳者紀于左 : 冉季字子産.  公祖句玆字子之.   

 秦祖字子南.   漆雕哆字子斂.  顔高字子驕.  漆雕徒父.  壤駟赤字子徒.
 (기사십유이인, 무년급불견서전자기우좌 : 염계자자산.   공조구자자자지.   

 진조자자남.   칠조치자자렴.    안고자자교.    칠조도보.    양사적자자도.)


 [그 밖의 마흔두 사람은 나이도 알 수 없고 글로 전해진 것도 없어서 그 이름과 자만 기록한다. 
 '염계'는 자가 '자산'이다. '공조구자'는 자가 '자지'다. '진조'는 자가 '자남'이다.

 '칠조치'는 자가 '자렴'이다. '안고'는 자가 '자교'다. 칠조도보. '양사적'은 자가 '자도'이다.]

 

 商澤.  石作蜀字子明.   任不齊字選.   公良孺字子正.   后處字子里.   秦冉字開.  

 公夏首字乘.   奚容箴字子皙.   公肩定字子中.   顔祖字襄.   鄡單字子家.
 (상택.  석작촉자자명.   임부제자선.   공양유자자정.   후처자자리.   진염자개.  

 공하수자승.   해용잠자자석.   공견정자자중.   안조자양.   교단자자가.)

 
 [상택. '석작촉'은 자가 '자명'이다. '임부제'는 자가 '선'이다. '공양유'는 자가 '자정'이다.

 '후처'는 자가 '자리'다. '진염'은 자가 '개'다.  '공하수'는 자가 '승'이다.

 '해용잠'은 자가 '자석'이다. '공견정'은 자가 '자중'이다. 

 '안조'는 자가 '양'이다. '교단'은 자가 '자가'다.]

 

 句井疆.  罕父黑字子索.   秦商字子丕.   申黨字周.   顔之僕字叔.   榮旂字子祈.  

 縣成字子祺.   左人郢字行.   燕伋字思.   鄭國字子徒.   秦非字子之.
 (구정강.  한보흑자자색.   진상자자비.   신당자주.   안지복자숙.   영기자자기.  

 현성자자기.   좌인영자행.   연급자사.   정국자자도.   진비자자지.)


 [구정강. '한보흑'은 자가 '자색'이다. '진상'은 자가 '자비'다. '신당'은 자가 '주'다.

 '안지복'은 자가 '숙'이다. '영기'는 자가 '자기'다. '현성'은 자가 '자기'다.

 '좌인영'은 자가 '행'이다. '연급'은 자가 '사'다. '정국'은 자가 '자도'다. '진비'는 자가 '자지'다.]

 

 施之常字子恆.   顔噲字子聲.   步叔乘字子車. 

 原亢籍.  樂欬字子聲.  廉絜字庸.  叔仲會字子期. 顔何字冉. 狄黑字皙. 邦巽字子斂.

 孔忠.  公西輿如字子上.  公西葴字子上.
 (시지상자자긍.   안쾌자자성.   보숙승자자거.

 원항적.  악해자자성.   염혈자용.   숙중회자자기.    안하자염.    적흑자석.    방손자자렴. 

 공충.  공서여여자자상.   공서침자자상.)


 ['시지상'은 자가 '자긍'이다. '안쾌'는 자가 '자성'이다. '보숙승'은 자가 '자거'이다. 

 원항적.  '악해'는 자가 '자성'이다. '염혈'은 자가 '용'이다. '숙중회'는 자가 '자기'다.

 '안하'는 자가 '염'이다. '적흑'은 자가 '석'이다. '방손'은 자가 '자렴'이다.

 공충.  '공서여여'는 자가 '자상'이다. '공서침'은 자가 '자상'이다.]


 太史公曰 :

「 學者多稱七十子之徒, 譽者或過其實, 毁者或損其眞, 鈞之未覩厥容貌, 則論言.

 弟子籍, 出孔氏古文近是.  余以弟子名姓文字悉取《論語》弟子問幷次爲篇, 疑者闕焉. 」
 (태사공왈 :

「 학자다칭칠십자지도, 예자혹과기실, 훼자혹손기진, 균지미도궐용모, 즉논언.

 ​제자적, 출공씨고문근시.  여이제자명성문자실《논어》제자문병차위편, 의자궐언. 」)


 ['태사공'이 말하기를 : “ 세상의 학자들은 흔히들 '공자'의 제자중 일흔 여명을 일컫는데, 

 칭찬하는 자는 실제 이상으로 칭찬하고, 헐뜯는 자는 실제 이하로 비난한다.
 누구나 다 그들의 얼굴을 보지도 못했으면서 말하는 것이다.

 제자들의 명부는 공씨 집안의 벽 속에서 나온 고문의 기록에 따른 것이므로 대체로 정확하다.
 나는 제자들의 성명과 문장을 모두 《논어》의 공자와 제자들과의 문답에서 취하여 차례대로 늘어놓아

 한 편을 만들었고 의심스러운 것은 싣지 않았다."] 

 

【 각주 】 

1) 중유(仲由) : 자로의 자다.

2) 자공(子貢)의 이름이다.

3) 계강자(季康子) : 태어난 해는 알 수 없고 기원전 468년에 죽은 춘추 때 노나라의 정경(正卿)이다.  

    희(姬) 성에 계손씨(季孫氏)에 이름은 비(肥)다. 노환공(魯桓公)으로부터 분가하여 노나라의 국정을 전단했던  

    삼환씨 중의 하나인 계손씨의 종주로 공자와 동시대를 살면서 노나라의 정경을 지냈다.  

    노애공(魯哀公) 3년 기원전 492년 계환자(季桓子 ; 계손사)가 죽을 때 자기의 뒤를 태어난지 얼마 안 되는 

    서출에게 잇도록 유언했으나 계강자가 사람을 보내 그의 서출 동생을 죽이고 스스로 환자의 후계자가 되어  

    노나라의 정경의 자리에 올라 정권을 잡았다. 일찍이 공자의 제자 염구(冉求)와 번지(樊遲)의 도움을 받아  

    제나라 군사를 물리친 바 있으며 후에 오나라와 제나라 사이에 벌어진 애릉(艾陵)의 전투에 오나라 편으로  

    참전하여 제나라 군사들을 크게 파하고 제나라의 상국 국서(國書)를 전사시켰다. 노애공 12년 기원전 483년  

    용전부(用田賦)라는 법령을 반포하여 노나라의 세제를 개혁했다. 노애공 27년 기원전 468년에 죽었다.  

4) 장저(長沮)와 걸익(桀溺) : 공자가 섭(葉) 땅을 지나 채나라로 가다가 밭을 갈고 있던 은자 장저와 걸익을 만나  

    자로를 시켜 강을 건너는 나루터를 물어보게 했다. 두 사람은 자로에게 혼란한 세상을 바꾸고자  

    헛된 노력을 하고 있는 공자를 떠나 자기들과 같이 세상에 숨어 농사나 짓고 살자고 권유했다.  

5) 하조장인(荷蓧丈人) : 조(蓧)는 제초를 위해 대나무로 만든 농구다. 장인(丈人)은 노인에 대한 존칭이다.  

    공자의 일행과 헤어지게 된 자로가 밭에서 일하던 농부 즉 하조장인에게 공자의 행방을 물었다.  

    하조장인은 공자와 그 일파는 일하지도 않으면서 공론만 일삼고 있다고 비난했다.  

    장저와 걸익, 하조장인 등은 형식에만 얽메이고 백성들의 생산활동을 등한시한 공자의 유학을 비난했다.  

6) 포(蒲) : 지금의 하남성 장원현(長垣縣) 경내의 춘추 때 위나라의 성읍이다.

7) 위영공(衛靈公) : 태어난 해는 알 수 없고 기원전 493년에 죽은 춘추 때 위(衛)나라 군주다.  

    희(姬) 성에 이름은 원(元)이고 헌공(獻公)의 손자에 양공(襄公)의 아들로 주경왕(周景王) 11년 기원전 534년  

    군위에 올랐다. 그의 재위 기간 중 공자가 망명해 와서 그를 받들었다.  

    만년에 그의 부인 남자(南子)와 태자 괴외(蕢聵)가 서로 틈이 벌어져 이윽고 괴외가 남자의 살해를 기도했으나  

    미수에 그치고 송나라로 도망친 사건으로 위나라 공실에 내란이 발생했다. 재위 42년이다.  

8) 공자영(公子郢) : 위영공의 서자로 자는 자남(子南)이다. 영공에 의해 대부에 봉해졌고 현능하다는 이름이 

    있었다. 영공의 태자 괴외가 영공의 부인 남자에게 참소를 받아 송나라로 도망치자 

    영공은 공자영을 그 후계로 삼으려고  했으나 그는 한사코 받아들이지 않았다. 

    이윽고 영공이 죽자 남자가 다시 그를 군주로 세우려고 했다.  

    이에 공자영은 태자 괴외의 아들 첩(輒)이 있다고 말하여 결국 영공의 뒤는 위출공(衛出公)이 이었다.  

    그는 완고하게 군주의 자리를 사양했음으로 절조가 있다고 이름이 났으며 당시 사람들은 공자영을  

    수절(守節)이라고 칭했다. 후에 괴외와 출공이 부자지간임에도 서로 군주자리를 놓고 일어난 내란에서  

    그는 몸을 피해를 해를 입지 않았다. 시호는 소자(昭子)다.  

9) 자고(子羔) : 공자의 제자 고시(高柴)의 자다. 춘추시 위나라의 대부로 자로와 함께 위나라에서 벼슬 했다.  

    기원전 521년에 태어났으나 죽은 해는 알 수 없다. 공자보다 30세 연하이다. 신장은 5척에 체 못 미쳤으며  

    그 외모는 못났다. 공자는 그를 보고 사람을 겉모습만 판단해서는 안 되는 실례라고 하면서 

    우직하다고 평했다. 

10) 원문은 찬목개수(鑽木改燧)로 계절에 따라 나무를 바꿔가며 불씨를 새로 바꾸는 중국 고대의 풍속이다.  

      조위(曹魏) 때 하안이 편찬한 하안집해(何晏集解)에 후한 때의 학자 마융의 글을 다음과 같이 인용했다.  

    「 <주서(周書) 월령(月令)>에 다음과 같은 기사가 있다. ‘有更火之文:春取榆柳之火,夏取枣杏之火, 

     季夏取桑柘之火,秋取柞楢之火,冬取槐檀之火. 一年之中,钻火各异,故曰改火也.

      " 后仅于寒食后二日为之, 并成为习俗’ 

     ( 유(楡)는 느릅나무, 유(柳)는 버들나무, 조(棗)는 대추나무, 행(杏)은 은행나무, 상(桑)은 뽕나무,  

     자(柘)는 산뽕나무, 작(柞)은 자작나무, 유(楢)는 졸참나무, 괴(槐)는 홰나무, 단(檀)은 박달나무다.)  

11) 朽木不可雕也 糞土之牆不可圬也(후목불가조야, 분토지장불가오야)  

12) 임치(臨淄) : 지금의 산동성 치박시(淄博市)로 춘추전국 시대 전 기간 동안 제나라의 도성이었다.  

      재여가 치박시의 대부가 되었다는 것은 지금으로 말하면 서울시장에 임명되었다는 뜻으로  

      제나라에서 정치적으로 매우 비중있는 인물이었음을 의미한다.  

13) 전상(田常) : 춘추 때 제나라의 대신으로 원래 이름은 항(恒)이었으나 한문제(漢文帝) 유항(劉恒)을 휘(諱)하여 

      상(常)이라고 바꿔 부르게 되었다. 전걸(田乞)의 아들로 제간공(齊簡公) 밑에서 상국이 되어 감지(闞止)와  

      정권을 다투었다. 그 부친으로 하여금 백성들에게 곡식을 빌려 줄 때 큰 되를 사용하고 받을 때는 작은 되를  

      사용하도록 하여 민심을 얻었다. 마침내 기원전 481년 군사를 일으켜 제간공(齊簡公)과 감지(監止)를 죽이고        간공의 동생 평공(平公) 오(驁)를 대신 세웠다. 자신은 상국(相國)이 되어 제나라의 정권을 전횡했다.  

      전상 이후 그의 5대 손인 태공(太公) 전화(田和)가 기원전 376년에 강씨들의 제나라 국권을 빼앗아  

      전씨들의 나라를 세웠다.  

14) 전경중완세가(田敬仲完世家) 즉 전제세가(田齊世家) 간공(簡公) 조에 전상에게 대항해서 제나라의 정권을  

      다투다가 멸족되어 죽은 사람은 감지다. 

       감지의 자가 자아(子我)였기 때문에 재여의 일로 잘못 기재한 것이다.  

15) 호련(瑚璉) : 종묘에 제사를 지낼 때 기장을 담아 바치는 중요한 제기로써 품격이 높은 사람을 지칭했다.

16) 천균(千鈞) : 춘추 때 일 균은 삼십 근이고 한 근은 356그램이다.  

      즉 일균은 약 10키로에 천균은 10톤에 해당하는 중량이다.  

17)수(銖)/ 1량의 1/24로 지금의 단위로는 0.67gram 이다.

18) 량(兩)/ 춘추전국 시대의 1량은 16gram이다.

19) 且夫無報人之志而令人疑之,拙也.(차부무보인지지영인의지, 졸야); 

      有報人之志,使人知之,殆也. (유보인지지사인지지, 태야);事未發而先聞,危也.(사미발이선문, 위야).  

20) 굴로(屈盧) : 창을 잘 만들었던 전설 상의 명장(名匠)으로 검에 있어서 간장(干將)과 같은 사람이다.  

     후에 좋은 창을 부르는 일반 명칭이 되었다.  

21) 보광지검(步光之剑) : 월나라 산의 명검을 뜻한다.

22) 애릉(艾陵)의 싸움 : 춘추전국시대에 나라 사이에서 벌어진 싸움의 특징은 상대방 적군을 살해하는 것이  

      목적이 아니었다. 전쟁의 승패에 따라 사로잡힌 상대국의 장수나 군사들은 특별한 경우가 아니면 일정기간이

       지나면 방면하는 것이 일반적인 관행이었다. 귀족 계급들의 전쟁 중에 사로잡힌 포로들에 대한 교환은  

      국가 간의 중요한 외교의 현안에 속했다. 그런 관행이 오왕 부차가 이끌던 오나라에 의해 깨진 것이다.  

      그리고 100여 년 후의 상앙의 변법을 받아들인 진나라에 의해 본격적인 살육전이 전개 되고  

      그 중 가장 대표적인 싸움이 전국시대 말기 기원전 260년 진나라와 조나라에 사이에 벌어진 장평대전이다.

      진나라는 항복한 조군 40만을 구덩이에 묻어 모두 살해했다. 보유하고 있던 병력의 대부분을 장평대전에서  

      잃음으로써 조나라는 국력을 회복하지 못하고 결국은 진나라에 의해 멸망되고 말았다. 전국시대 중반기 이후        진나라가 벌린 통일 전쟁은 상대국 군사들에 대한 철저한 살육전이었다. 애릉의 싸움은 전국시대 진나라에  

      의해 주도된 섬멸전의 전초전에 해당한다. 주경왕 36년 기원전 484년 오(吳)와 노(魯) 연합군이  

      애릉(艾陵 : 산동성 래무(萊蕪) 동북)에서 제군(齊軍)을 크게 물리친 싸움이다.  

      오나라가 중원의 패자가 되기 위해 그 전해에 노(魯), 주(邾), 담(郯) 등의 제후국 군대와 제나라를 공격했다.  

      이와 함께 수군으로 하여금 바다로 나가 제나라를 협공하도록 했으나 제나라의 반격을 받아 싸움에서 

       패했다.  다음 해, 제나라가 원수를 갚기 위해 노나라를 공격했으나 다시 노군에 의해 패퇴했다. 

       5월 제나라가 노나라를  침공했다는 소식을 들은 오왕 부차는 군사를 일으켜 북상하여 노나라 군사와 함께

       제군을 공격하여 박(博 : 지금의 산동성 태안 동남)을 함락시키고 계속 진격하여 

       영(嬴 : 지금의 산동성 래무(萊蕪) 서북)에서 제나라의 주력군과 조우하여 회전에 들어갔다. 

       쌍방의 병력은 각기 10만에 대체로 비슷한 병력이었다.  

      이에 오군은 상군, 하군, 우군(右軍) 등 삼군으로 나누어 각기 대부 서문소(胥門巢), 왕자 고조(姑曹),  

      전여(展如) 등으로 대장으로 삼아 제군과 대치토록 했다. 오왕 부차는 친히 별도의 중군을 친히 지휘하여  

      오나라 삼군의 후방에 주둔하여 예비대 역할을 했다. 제나라 진영에서는 국서(國書)가 중군을 맡고  

      고무비(高無丕)가 상군을, 종루(宗樓)가 하군을 지휘했다. 전투가 시작되자 오나라의 우군이 제나라의 상군을                격파했으나 오나라의 상군은 제나라의 중군에 의해 패했다. 이때 오왕이 휘하의 중군을 전투에 투입하여  

      서문소의 상군을 구원하여 제군을 물리쳤다. 오군은 제나라의 10만에 달하는 군사를 거의 전멸시켰다.  

      제나라의 장군 공순휘는 싸움 중에 죽고, 하군 대장 종루는 어떻게 전사했는지도 알 수 없었다. 국서(國書),  

      공손하(公孫夏), 여구명(閭丘明), 진서(陳書), 동곽서(東郭書) 등의 대부가 오나라의 포로가 되고  

      제나라의 병거 800승은 오군에 의해 노획되었다. 애릉의 싸움은 춘추때 가장 큰 규모에 가장 철저하게  

      상대방 군대를 섬멸한 전투였으며 동시에 중국의 전쟁사 중 최초로 예비대를 운용하여 승리를 일궈낸  

      전투이기도 했다. 이 싸움 이후로 예비부대의 역할을 병가들이 중시하기 시작했다.  

23) 무성(武城) : 지금의 산동성 비현(費縣) 경내의 남무성(南武城)으로 노나라 계손씨(季孫氏)의 봉읍이었다.

24) 시경(詩經) 위풍(衛風) 석인(碩人) 중에 나오는 싯귀로  

      ‘ 미소 짓는 보조개는 너무 어여쁘고, 초롱초롱한 눈은 곱기도 해라!전문은 미주에 실었다.  

25) 素以爲絢兮(소이위현혜) : ‘흰 것으로써 아름다움을 이루었네‘라는 뜻으로 일실되어  

      지금은 전해지지 않은 시의 일부다.   

26) 서하(西河) : 산서성과 섬서성을 가르는 황하의 중국의 서북의 황토고원에서 발원하여 위수(渭水)에 합류하는  

      낙수(洛水)의 이동 지역에 설치한 전국 때 위(魏)나라 령이다. 전국시대 명군인 위문후(魏文侯)가  

      명장 오기(吳起)를 기용하여 진나라로부터 빼앗아 설치한 군현이다.  

27) 위문후(魏文侯) ; 태어난 해는 알 수 없고 기원전 445년에 즉위하여 396년에 죽은 위나라 군주로  

      이름은 사(斯)다. 기원전 445년에 즉위해서 49년 간 재위했다. 복자하(卜子夏), 전자방(田子方),  

      단간목(段干木) 등에게서 사사했으며 현인과 재사들을 초빙하여 기용했다.

      그의 치세 기간 중 이룩한 업적은 다음과 같다.  

  1. 오자병법으로 유명한 오기(吳起)를 기용하여 황하 이서와 낙수 이동의 땅을 점령하고 하서군을 설치  

      진나라의 서진을 막았다.  

  2. 악양(樂陽)을 기용하여 조나라 영토 너머 있던 중산국(中山國)을 정벌하여 위나라령으로 했다.

  3. 서문표(西門豹)를 업(鄴)의 태수로 임명하여 하백을 팔아 백성들의 고혈을 빨고 있던 무당과 관리들을  

      치죄하여 미신을 타파했다. 서문표가 백성들을 잘 다스려 그 땅에 대규모의 관개시설을 건설하자  

      농산물의 생산이 획기적으로 증가하여 업 땅에 치세가 오도록 했다.  

  4. 이극(李克)을 재상으로 임명하여 구습을 타파하고 개혁을 단행했다. 이극이 시행한 주요 정책으로써

  1) 진지력지교(盡地力之敎)라는 제도를 시행하여 토지생산력을 제고시켰다. 진지력지교란 토지의 이용을  

      극대화하기 위한 규정이다.  

  2) 법경(法經)을 제정하여 시행함으로 해서 백성들은 법의 보호를 받고 생업에 열중할 수 있게 되었다.

  3) 평적법(平糴法)을 시행하여 물가의 안정을 꾀해 경제를 발전시켰다.
      평적법이라는 풍년이 들 때 국가가 사들였다가 흉년이 들었을 때 백성들에게 싼 값으로 공급하는 제도다.

  4) 귀족들의 특권이 세습되는 것을 폐지하고 ‘ 식유로(食有勞), 록유공(祿有功), 상유현(賞有賢),  

      벌필당(罰必當)’ 정책을 단행했다.
      즉 ‘ 일하는 자에게만 먹을 것을 주고, 공을 세운자에게만 봉급을 주며, 능력이 있는 자에게만 상을 내리고, 
 

      죄를 지으면 반드시 벌을 준다.’라는 뜻이다.  

  5) 무졸제(武卒制)를 시행하여 상비군(常備軍)을 창설하여 여러 번에 걸쳐 진나라 군사를 격파하고  

      진나라 령의 서하를 점령하여 그 땅에 서하군(西河郡)과 상군(上郡)을 설치했다.  

28) 남무성(南武城) : 지금의 산동성 비현(費縣) 경내의 무성으로 춘추 때 노나라의 성읍으로 계손씨의 봉지였다.

29) 선보(單父) ; 지금의 산동성 선현(單縣)이다. 후에 한고조 유방의 장인 여공(呂公)이 이곳에서 태어나  

      죄를 짓고 유방의 고향 패현으로 몸을 피했다.  

30) 사서의 하나인 중용(中庸)의 저자인 자사(子思)와는 다른 사람으로 이름은 공급(孔伋)으로 공자의 아들  

      공리(孔悝)의 아들이며 공자에게는 손자가 된다.  공자가 죽었을 때는 그는 단지 4살에 불과했다.  

      기원전 515년에 태어난 본문의 자사는 공자보다 36세 연하고 자공보다 5살 젊다.  

31) 예(羿) : 중국 고대 신화에 나오는 사람 이름으로 후예(后羿)라고도 하며 유궁씨(有窮氏) 부락의 수령이었다.
      영성(嬴姓)에 전욱(顓頊)의 후예라고 전해지며 활을 잘 쏘았다. 하나라의 계(啓)가 죽자 그 다섯 아들들이 

       서로 왕위를 놓고 다투자 백성들의 뜻이라고 하면서 하나라를 대신 다스리다가 이윽고 왕의 자리에 

       스스로 올랐다.  계의 아들 태강(太康)과 중강(仲康)은 나라 밖으로 쫓겨나 유랑 중 죽었다.

      그는 자기의 활 솜씨를 믿고 정사를 신하인 한착(寒浞)에게 맡겼다가 결국은 그에게 살해되었다.  

32) 오(奡="傲") :  전설상의 하왕조 때 대역사로 육지에서도 능히 배를 저을 수 있었다고 했다.  

      후에 하나라를 부흥시킨 소강(少康)에게 살해되었다.  

33) 원문은 백규지점(白珪之玷)으로 시경 대아(大雅)․억(抑)에 나오는 싯귀로  

      白珪之玷, 尙可磨也, 斯言之玷, 不可爲也의 4귀절을 뜻한다. 전문은 미주에 실었다.  

34) 무우(舞雩) : 노나라 군주가 하늘에 기우제를 올리는 장소로 지금의 곡부시 남쪽에 있었다.

35) 순우(淳于) : 지금의 산동성 안구현(安丘縣)으로 춘추 때 제후국이었으나  

      후에 기(杞)나라가 병탄하고 도성으로 삼았다.  

36) 원삭(元朔) : 한무제가 사용한 연호 중의 하나로 기원전 128-123년 사이의 기간이다.  

      한서 유림전(儒林傳)에는 원광(元光)으로 되어있다.  원광 역시 한무제의 연호로 기원전 134-129년이다.  

37) 한나라 때 한 척의 단위는 22.5cm 임으로 자고는 1미터 좌우의 난쟁이에 가까웠다는 이야기다.

38) 月離于畢 俾滂沱矣(월리우필, 비방타의) 시경 소아都人事(도인사) 점점지석( 漸漸之石에 나오는 싯귀다.  

      전문은 미주에 실었다.  

39) 부(釜) : 용량을 재는 용기로 6말 4되에 해당했다.

40) 유(庾) : 16말의 용량이다.

41) 병(秉) : 1병은 16곡(斛)이고 1곡은 10말이다. 5병은 모두 50말에 해당하는 많은 양이다.

42) 漸漸之石(참참지석) 소아(小雅) 어조지습(魚藻之什) 모시서(毛詩序)에 제후가 주유왕(周幽王)의 학정을  

     풍자한 시로써 융적이 반했으나 형서(荊舒)의 구원군이 오지 않음으로 장수에게 명해 동정(東征)을 

      행하게 했다. 군역에 동원된 군사들이 오랜 원정으로 인해 외지에서 병이 걸려 고통이 심하자 

      이 노래를 지어 불렀다고 했다.  그러나 모시서의 관점은 다음 세 가지의 문제점을 갖고 있다. 

      첫째는 이 시의 작자가 제후라는 설이고  

     둘째는 주유왕을 풍자했다는 것이고, 셋째는 형서(荊舒)를 정벌하기 위해 오랫동안 종군했다는 것으로  

     형은 초(楚)고, 서(舒)는 초나라의 속국으로 몇 나라로 갈라져 있었다. 주유왕 때 초나라를 동정했다는 기록이  

     없기 때문에 많은 사람들은 주유왕을 풍자하고 초나라에 동정했다는 모서의 설을 취하지 않고 있으며  

     주희(朱熹)의 「 동쪽으로 출정나간 장수가 행군과 군역이 너무 힘들었기 때문에 이 노래를 지어 불었다.」 

     라는 설이 유력하다.

 

漸漸之石 維其高矣(점점지석 유기고의) 우뚝 솟은 저 바위산, 높고 험하기도 한데
山川悠遠 維其勞矣(산천유원 유기노의) 머나먼 이역 산천에서. 겪는 고생은 이루 말할 수 없네
武人東征 不皇朝矣(무인동정 불황조의) 동쪽으로 정벌나간 군사들은, 잠시 쉴 틈도 없구나!

부(賦)다. 漸漸(참참)은 높고 험한 모양이다. 무인(武人)은 장수(將帥)를 말하고 遑(황)은 겨를이니,  

휴식도 취할 겨를이 없음을 말한 것이다.
원정을 나가는 장수(將帥)가 행군하는 길이 험준하여 그 고생스러움을 견디지 못하고 이 시를 지어 노래한 것이다. 
 


漸漸之石 維其卒矣(점점지석 유기졸의) 우뚝 솟은 저 바위산, 높고 험하기도 하네
山川悠遠 曷其沒矣(산천유원 갈기몰의) 머나먼 이역 산천은, 언젠가 끝날 것인가?
武人東征 不皇出矣(무인동정 불황출의) 군사들의 원정길엔, 이 산천 벗어날 때가 없네!

부(賦)이다. 卒(졸)은 崔嵬(최외)인데 줄(崒)과 통하여 높고 험준한 산령(山巓)의 끝을 말한다.

曷(갈)은 어찌 하(何)요, 몰(沒)은 다함이니,
「 저 높고 험한 산령의 끝을 어느 날에 다다를 수 있을까?」라고 말한 것이다.

不遑出(불황출)은 단지 깊이 들어갈 줄만 알고 나올 겨를을 도모하지 못한 것을 이름이다.


有豕白蹢 烝涉波矣(유시백척 증섭파의) 발톱 흰 맷돼지가, 물살 헤치며 강 건너고
月離于畢 俾滂沱矣(월리우필 비방타의) 떠오르는 달 필성에 걸렸으니, 큰 비가 내리겠네
武人東征 不皇他矣(무인동정 불황타의) 원정 나간 군사들이여, 다른 일을 할 틈이 없네

부(賦)이다. 蹢(척)은 발굽이요, 烝(증)은 무리다. 離(리)는 달이 자는 곳이다.

28수의 하나인 畢(필)은 서방백호(西方白虎)에 속하고 구름과 비를 주관한 별자리다. 돼지가 물을 건너가며,

달이 필성(畢星)에 걸려있는 것은 장차 비가 올 징조로 여겼다.

장자(张子)가 말했다. 「돼지가 진흙을 지고 흙을 끌고 다님은 원래 그 본성이거늘,

지금 그 발이 모두 희고 무리를 지어 물을 건너가니, 수재가 많을 것임을 알 수 있다.
말하자면 오랜 군역에 시달리고 있는데 또한 설상가상으로 큰비를 만나서 심히 고통을 받게 되어

다른 일에 마음을 쓸 겨를이 없는 것이다.」

 

 

※  原 文 .    【 中國哲學書電子化計劃 .   筆寫本 】

                                 

 

 

    原 文   飜 譯 者        德庤 / 李   斗 振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