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 樗裏子 甘茂 列傳

第十一. 樗里子甘茂列傳(저리자 감무열전)

덕치/이두진 2021. 7. 20. 19:21

              史記 列傳

 

​  第十一.  樗里子甘茂列傳(저리자 감무열전)

 ​樗里子者, 名疾, 秦惠王之弟也.  與惠王異母, 母韓女也.  樗里子滑稽多智, 秦人號曰智囊.    

 秦惠王八年, 爵樗里子右更, 使將而伐曲沃.  盡出其人, 取其城 地入秦.
 (저리자자, 명질, 진혜왕지제야.  여혜왕이모, 모한녀야.  저리자활계다지, 진인호왈지낭.   

 진혜왕팔년, 작저리자우갱, 사장이벌곡옥.  진출기인, 취기성, 지입진.)


 ['저리자'는 이름이 '질'로 진혜왕의 아우이다. 진혜왕과는 이복형제이며 '저리자'의 모친은 한나라 여인이다. 
 '저리자'는 유머스럽고 기지가 뛰어나고 지혜가 있었기 때문에 진나라 사람들은 그를 지혜주머니  

 즉 '지낭'이라고 불렀다.  진'혜왕' 8년(기원전 317) '저리자'에게 우경의 작위를 내리고 대장으로 삼아  

 위나라의 "곡옥"을 공격하도록 했다.
 '저리자'는 그땅에 살던 위나라 사람들을 모두 쫓아낸 후에 성을 차지하여 진나라에 속하게 했다.] 

 

 秦惠王二十五年, 使樗里子爲將伐趙, 虜趙將軍莊豹, 拔藺.   

 明年, 助魏章攻楚, 敗楚將屈丐, 取漢中地, 秦封樗里子, 號爲嚴君.
 (진혜왕이십오년, 사저리자위장벌조, 로조장군장표, 발린.   

 명년, 조위장공초, 패초장굴개, 취한중지, 진봉저리자, 호위엄군.)


 [진혜왕 25년 '저리자'는 장수가 되어 조나라를 정벌하여 조군 장수 '표'를 포로로 잡고 "인"을 함락시켰다.
 다음해 위나라의 '위장'을 도와 초나라를 공격하여 '굴개'가 이끄는 초군을 무찔러 "한중"의 땅을 점령했다.
 진나라는 '저리자'를 제후로 봉하고 '엄군'이라는 봉호를 내렸다.] 

 

 秦惠王卒, 太子武王立.  逐張儀魏章, 而以樗里子甘茂爲左右丞相.  秦使甘茂攻韓, 拔宜陽.   

 使樗里子以車百乘入周, 周以卒迎之, 意甚敬.
 (진혜왕졸, 태자무왕입.  축장의위장, 이이저리자감무위좌우승상.  진사감무공한, 발의양.   

 사저리자이거백승입주, 주이졸영지, 의심경.)


 [진'혜왕'이 죽고 태자 '무왕'이 즉위하였다.  '무왕'은 승상 '장의'와 '위장'을 쫓아내고  '저리자'와 '감무'를

 좌승상과 우승상에 각각 임명했다. 진나라는 '감무'를 시켜 한나라를 공격하게 하여 "의양성"을 함락시켰다.   

 진왕은 '저리자'로 하여금 병거 100승을 이끌고 주나라에 들어가게 하였고,
 주나라는 '저리자'의 병사들을 환영하며 매우 정중하게 맞이하였다.] 

 

 楚王怒, 讓周, 以其重秦客.  游騰爲周說楚王曰 : 「 知伯之伐仇猶, 遺之廣車.   

 因隨之以兵, 仇猶遂亡, 何則 ?  無備故也. 齊桓公伐蔡, 號曰誅楚, 其實襲蔡. 

 今秦, 虎狼之國, 使樗里子以車百乘入周.  周以仇猶蔡觀焉, 故使長戟居前, 彊弩在後, 名曰衛疾,

 而實囚之. 且夫周豈能無憂其社稷哉 ?  恐一旦亡國以憂大王. 」  楚王乃悅.  

 (초왕노, 양주, 이기중진객.  유등위주세초왕왈 : 「 지백지벌구유, 유지광거.   

 인수지이병, 구유수망, 하즉 ?  무비고야. 제환공벌채, 호왈주초, 기실습채. 

 금진, 호랑지국, 사저리자이차백승입주. 주이구유채관언, 고사장극거전, 강노재후, 명왈위질,

 이실수지.  차부주개능무우기사직재 ?  공일단망국이우대왕. 」초왕내열.) 


 [초왕이 듣고 노하여 주나라가 진나라에서 온 손님을 너무 정중하게 모신다고 꾸짖었다.   

 '유등'으로 하여금  주나라를 위해 초나라에 들어가 초왕에게 유세하며 말하기를 : "예전에 진나라 '지백'이

 오랑캐의 나라인 '구유'의 나라를 정벌하기 위해, 선물로 먼저 큰 종을 만들어 폭이 넓은 수레에 실어 보내자

 '구유'는 그 수레를 위해 길을 넓히고 '지백'은 군사를 이끌고 그 길을 이용하여 '구유'의 나라로 진격했습니다.

 '구유'는 결국 망하고 말았습니다. 어째서이겠습니까 ?  

 '구유'가 진나라의 침략에 대해 대비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제'환공'이 채나라를 정벌할 때 겉으로는 초나라를 정벌한다고 군사를 일으켰으나 사실은 채나라를 기습하기

 위해서였습니다. 지금 호랑이나 승냥이 같은 진나라가 '저리자'를 시켜 병거 백승으로 주나라에 들어왔습니다. 
 주나라는 '구유'나 채나라의 일을 교훈삼아 긴 창을 든 군사들을 앞에 서게 하고, 강한 쇠뇌를 가진 군사들을

 뒤에 배치하여 겉으로는 '저리자'를 호위한다고 했으나 실은 '저리자'를 포로로 잡은 것입니다.

 ​주나라도 어찌 자기 나라의 사직을 걱정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  주나라가 하루아침에 망하기라도 해서

 대왕에게 누를 끼치지 않을까 걱정하고 있습니다 "라고 하였다.  초왕은 이말을 듣고 매우 기뻐하였다.] 

 
 秦武王卒, 昭王立, 樗里子又益尊重.  昭王元年, 樗里子將伐蒲, 蒲守恐, 請胡衍,
 

 胡衍爲蒲謂樗里子曰 : 「 公之攻蒲 爲秦乎 ?  爲魏乎 ? 爲魏則善矣, 爲秦則不爲賴矣. 

 夫衛之所以爲衛者, 以蒲也.  今伐蒲入於魏, 衛必折而從之.  魏亡西河之外, 而無以取者, 兵弱也.

 今并衛於魏 魏必彊. 魏彊之日, 西河之外必危矣. 且秦王將觀公之事, 害秦而利魏, 王必罪公.」  

 樗里子曰:「柰何?」

 (진무왕졸 소왕입.  저리자우익존중.  소왕원년, 저리자장벌포, 포수공, 청호연,  

 호연위포위저리자왈 : 「 공지공포 위진호 ?  위위호 ?  위위즉선의, 위진즉불위뢰의. 부위지소이위위자,

 이포야.  금벌포입어위, 위필절이종지. 위망서하지외, 이무이취자, 병약야.

 금병위어위, 위필강.  위강지일, 서하지외필위의.  차진왕장관공지사, 해진이리위, 왕필죄공. 」 

 저리자왈 : 「 내하?」)

 [진'무왕'이 죽고 '소왕'이 왕위에 오르자,  '소왕'은 '저리자'를 더욱 존중하게 되었다.   

 '소왕' 원년, '저리자'가 위나라의 "포읍"를 정벌하려 하자, "포읍"의 태수는 겁에 질려 '호연'에게 중재를 부탁했다.

 '호연'은 "포읍"의 태수를 위해 '저리자'에게 유세하며 말하기를 : " 공께서 "포읍"을 공격하시려는 이유는 

 진나라를 위해서입니까 ?  아니면 위나라를 위해서입니까 ?  위나라를 위해서라면 옳은 일이나 

 진나라를 위해서라면 옳지 않으니 중지하십시오. 무릇 위나라가 능히 위나라일 수 있는 것은 

 바로 "포읍"에 의지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지금 공께서 "포읍"을 정벌하여 위나라 땅으로 만들려한다면 위(衛)나라는 반드시 위(魏)나라와 타협하여

 그들을 따를 것입니다. 위(魏)나라는 "서하" 밖의 땅을 잃었으나 다른 곳에서 대신 취할 수 없을 정도로

 매우 허약해 있습니다. 지금 위(衛)나라가 위(魏)나라에 합병된다면 위(魏)나라는 틀림없이 강해질 것입니다.   

 위나라의 국력이 강해지면 "서하" 밖의 진나라가 차지한 땅이 위태롭게 됩니다.
 그래서 공이 행한 일을 진왕이 보게 된다면 그것은 바로 진나라를 해롭게 하고, 

 위나라를 이롭게 한다는 사실을 알게 되어 진왕은 필시 공에게 죄를 물을 것입니다."하였다.
 '저리자'가 '호연'에게 묻기를 : " 그렇다면 어떻게 하면 좋습니까 ? "라고 하자.) 

 

 胡衍曰:「 公釋蒲勿攻, 臣試爲公入言之, 以德衛君. 」  樗里子曰:「 善. 」  

 胡衍入蒲, 謂其守曰:「 樗里子知蒲之病矣, 其言曰必拔蒲, 衍能令釋蒲勿攻. 」
 (호연왈:「 공석포물공, 신시위공입언지, 이덕위군. 」  저리자왈:「선. 」   

 호연입포, 위기수왈:「 저리자지포지병의, 기언왈필발포, 연능령석포물공.」}

 
 ['호연'이 대답하기를 : " 공께서는 "포읍"을 공격하지 마십시오.  신이 공을 위하여 "포읍"에 들어가 설득하여

 위나라 군주에게 공이 베푼 덕을 알게 하겠습니다. "하였다. 
 '저리자'가 허락하자 '호연'이 "포읍"으로 들어가 그 태수에게 말하기를 : " "포읍"의 약점을 알고 있는 '저리자'가 

 "포읍"을 반드시 함락시키겠다고 말했습니다. "라고 하자. 

 

 蒲守恐, 因再拜曰:「願以請.」 因效金三百斤 曰:「秦兵苟退, 請必言子於衛君, 使子爲南面.」

 故胡衍受金於蒲以自貴於衛,  於是遂解蒲而去.  還擊皮氏, 皮氏未降, 又去. 
 (포수공, 인재배왈:「 원이청. 」   인효금삼백근 왈:「 진병구퇴, 청필언자어위군, 사자위남면. 」

 고호연수금어포이자귀어위. 어시수해포이거.  환격피씨, 피씨미강, 우거.)

 
 ["포읍"의 태수는 두려움에 떨며 '호연'에게 재배하며 말하기를 : " 원컨대 저를 위해 '저리자'에게 청해 

 ​우리를 위기로부터 구해주시기 바랍니다. "라고 하였다.
 이어서 '호연'에게 황금 3백근을 내어주며 말하기를 : " 진나라가 군사들이 물러가면 제가 선생을 위해 

 위나라 군주에게 말해 남면하여 극진히 모시도록 말씀드리겠습니다. "라고 하였다.

 ​그래서 "포읍"의 태수로부터 황금을 받든 '호연'은 위나라에 들어가 스스로 귀한 몸이 되었으며,   

 진나라 군사는  "포읍" 포위를 풀고 물러가던 중에 "피지"를 공격했다. "피지"가 항복하지 않고 저항하자

 '저리자'는 다시 군사를 이끌고 물러갔다. ] 

 

 昭王七年, 樗里子卒, 葬于渭南章臺之東曰:「 後百歲, 是當有天子之宮夾我墓. 」   

 樗里子疾室在於昭王廟, 西渭南陰鄉樗里, 故俗謂之樗里子. 至漢興, 長樂宮在其東,

 未央宮在其西, 武庫正直其墓.  秦人諺曰:「 力則任鄙, 智則樗里.」)
 (소왕칠년, 저리자졸, 장우위남장대지동왈:「 후백세, 시당유천자지궁협아묘. 」   

 저리자질실재어소왕묘, 서위남음향저리. 고속위지저리자. 지한흥, 장락궁재기동,

 미앙궁재기서, 무고정직기묘.  진인언왈:「 역즉임비, 지즉저리.」)


 [소왕 7년, 저리자가 죽으면서 "위남"의 장대에 장사 지내라고 하면서 말하기를 : " 내가 죽고 백년 후에는 

 마땅히 내 묘를 끼고 천자가 거하는 황궁이 서리라 ! "라고 하자. '저리자'의 묘실은 소왕의 묘 서쪽과

 "위남"의 남쪽에 있던 고을이었던 "저리"였기 때문에 그래서 사람들은 그를 '저리자'라고 불렀다.

 ​이윽고 한나라가 부흥하여 장락궁이 그의 묘 동쪽에 지어졌고, 미앙궁은 그 서쪽에 지어졌으며, 

 무기 보관 창고는 바로 묘 정중앙에 자리잡았다. 당시 진나라 사람들 사이에는 다음과 같은 말이 유행했었다.   

 "힘으로는 '임비'이고, 지혜로는 "저리자'다."라고 하였다.]
  

 

甘茂者, 下蔡人也.  事下蔡史舉先生, 學百家之術.  因張儀、樗里子而求見秦惠王.   

 王見而說之, 使將, 而佐魏章略定漢中地. 惠王卒, 武王立.  張儀、魏章去, 東之魏. 

 蜀侯煇、相壯反, 秦使甘茂定蜀.  還而以甘茂爲左丞相, 以樗里子爲右丞相. 

 (감무자, 하채인야.  사하채사거선생, 학백가지술.  인장의、저리자이구현진혜왕.    

 왕견이열지, 사장, 이좌위장략정한중지. 혜왕졸, 무왕입.  장의、위장거, 동지위. 

 촉후휘、상장반, 진사감무정촉. 환이이감무위좌승상, 이저리자위우승상.)


 [ '감무'는 초나라의 "하채" 사람이다.  하채의 '사거' 선생의 문하에서 백가의 학설을 공부했다.   

 '장의'와 '저리자'를 통하여 진'혜왕'을 알현하였다. 진혜왕은 그를 보고 기뻐하여 장수로 삼고 '위장'을 도와

 "한중"을 정벌하도록 하였다. 진혜왕이 죽고 '무왕'이 즉위하였다. 

 '장의'와 '위장'은 진나라를 떠나 동쪽의 위나라로 갔다. 촉나라의 제후 '휘'와  재상 '진장'이 반란을 일으키자,

 ​진나라는 '감무'를 시켜 평정하도록 하였다. 

 진왕은 촉에서 돌아온 '감무'를 좌승상, '저리자'를 우승상으로 삼았다.]

 

 秦武王三年, 謂甘茂曰:「 寡人欲容車通三川 ,以窺周室, 而寡人死不朽矣. 」   

 甘茂曰:「 請之魏 約以伐韓, 而令向壽輔行.」

 ​甘茂至, 謂向壽曰:「 子歸, 言之於王曰 『魏聽臣矣, 然願王勿伐』  事成, 盡以爲子功.」   

 向壽歸, 以告王, 王迎甘茂於息壤.  甘茂至, 王問其故.

 (진무왕삼년, 위감무왈:「 과인욕용거통삼천, 이규주실, 이과인사불후의. 」     

 감무왈:「 청지위 약이벌한, 이령상수보행. 」

 감무지, 위상수왈:「 자귀, 언지어왕왈 『위청신의, 연원왕물벌』  사성, 진이위자공. 」    

 상수귀, 이고왕, 왕영감무어식양.  감무지, 왕문기고.)


 [진무왕 3년, 무왕이 '감무'에게 말하기를 : " 과인은 용거를 타고 "삼천"(이수, 낙수, 황하)을 통과하여 

 ​주나라 왕실을 살펴보고 싶소.  과인이 죽더라도 이름을 후세에 남을 수 있기 때문이오. " 라고 하자.
 '감무'가 말하기를 : " 청컨대 제가 위나라로 들어가 같이 한나라를 치기로 조약을 맺도록 하겠습니다.

 '상수'에게 명하여 저를 보좌하도록 하시기 바랍니다. "라고 하였다. '감무'가 위나라에 이르자 동행했던

 '상수'를 향해 말하기를 : " 그대는 돌아가 왕에게 ‘위나라가 신의 청을 허락하고 같이 한나라를 치기로 했습니다.
 그러나 원컨대 왕께서는 한나라를 공격하지 말기 바랍니다.’라고 내 말을 전하기 바라오.   

 일이 성사되면 모든 공은 그대에게 돌리겠소. "라고 하였다. '상수'가 돌아가 '감무'의 말을 무왕에게 전했다. 

 무왕은 '감무'를 "식양"으로 불렀다. 이윽고 '감무'가 도착하자 무왕이 그 이유를 물었다.] 

 

 對曰:「 宜陽, 大縣也, 上黨、南陽積之久矣.  名曰縣, 其實郡也.  今王倍數險, 行千里攻之難. 

 昔曾參之處費, 魯人有與曾參同姓名者殺人.  人告其母曰 『 曾參殺人 』   

 其母織自若也.  頃之, 一人又告之曰 『曾參殺人』 其母尚織自若也. 頃又一人告之曰

『 曾參殺人 』  其母投杼下機, 踰牆而走. 夫以曾參之賢與其母信之也, 三人疑之, 其母懼焉.  

 (대왈:「 의양, 대현야, 상당、남양적지구의.  명왈현, 기실군야.  금왕배수험, 행천리공지난. 

 석증삼지처비, 로인유여증삼동성명자살인.  인고기모왈 『 증삼살인 』     

 기모직자약야.  경지, 일인우고지왈 『 증삼살인 』 기모상직자약야. 경우일인고지왈

『 증삼살인 』  기모투저하기 유장이주. 부이증삼지현여기모신지야 삼인의지 기모구언.

 

 ['감무'가 대답하기를 : " 한나라의 "의양"은 큰 현이고 "상당"과 "남양"에도 재물과 양곡을 비축해서 

 ​굳게 지키기 시작한지 오래 되었습니다. 그리고 두 고을은 이름은 현이지만 실은 군에 해당합니다.   

 지금 대왕께서 "함곡"이나 "오곡"등 여러 곳의 험지를 배후에 두고, 천리의 먼 길을 달려가 공격하는 경우라

 많은 난관이 놓여 있을 것입니다.  옛날 '공자'의 제자 '증삼'이 "비"땅에 살고 있을 때 노나라 사람중에 '증삼'과

 동성동명을 갖고 있는 자가 살인을 저질렀습니다. 사람들이 그 모친에게 달려와 ‘증삼이 살인을 했습니다 ’라고

 고했으나,  '증삼'의 모친은 태연하게 베를 짰습니다.
 그리고 잠시 후에 다시 다른 사람이 와서  ‘증삼이 살인을 했습니다 ’라고 고했으나, '증삼'의 모는 여전히 태연한

 자세로 베를 짜기를 계속했습니다.  그러나 조금 뒤에 또 한 사람이 달려와  ‘증삼'이 살인을 했습니다 ’하자.   

 '증삼'의 모친은 북을 내던지고 베틀에 내려와 담을 넘어 달아났습니다. 대체로 '증삼'의 현능함과 그 모친의

 믿음으로도 세 사람이 그를 의심하자 '증삼'의 모친도 두려워하게 된 것입니다. 

  

 今臣之賢不若曾參, 王之信臣又不如曾參之母信曾參也,  疑臣者非特三人, 臣恐大王之投杼也.

 始張儀西并巴蜀之地, 北開西河之外, 南取上庸.  天下不以多張子而以賢先王.     

 魏文侯令樂羊將而攻中山, 三年而拔之.  樂羊返而論功, 文侯示之謗書一篋.

 ​樂羊再拜稽首曰:『 此非臣之功也, 主君之力也. 』  今臣, 羈旅之臣也.   

 樗里子、公孫奭二人者, 挾韓而議之, 王必聽之. 是王欺魏王, 而臣受公仲侈之怨也. 」

 (금신지현불약증삼, 왕지신신우불여증삼지모신증삼야,  의신자비특삼인, 신공대왕지투저야.

 시장의서병파촉지지, 북개서하지외, 남취상용.  천하불이다장자이이현선왕.   

 위문후령락양장이공중산, 삼년이발지.  악양반이논공, 문후시지방서일협.

 악양재배계수왈:『 차비신지공야, 주군지력야. 』  금신, 기려지신야.   

 저리자、공손석이인자, 협한이의지 왕필청지. 시왕기위왕, 이신수공중치지원야.」)

 

 [지금 신은 그 현능함에 있어서 '증삼'보다 못하고 신에 대한 믿음은 '증삼'의 모친보다 못합니다.  

 그러나 신을 의심하는 자는 유독 세 사람 뿐이 아니고, 신은 오로지 대왕께서 그들의 말을 듣고 의심하여

 북을 내던지지나 않을까 두렵습니다. 선왕을 모시던 '장의'는 서쪽으로 "파촉"의 지역을 점령했고,

 북쪽으로는 "서하"의 땅을 개척했으며 남쪽으로는 "상용"의 땅을 초나라로부터 빼앗았습니다.

 그러나 천하의 사람들은 '장의'의 공이 크다고 말하지 않고 선왕인 '혜문왕'을 현명하다고 합니다. 
 위문후는 '악양'으로 하여금 "중산"을 공격하게 하여 3년 만에 점령했습니다. 
 악양이 개선하여 논공행상을 할 때, 문후는 그에게 그를 비방하는 한 상자나 되는 표문을 보여주었습니다.  

 '악양'이 보고 머리를 조아리며 위문후에게 말하기를 ‘"중산"을 점령할 수 있었음은 신의 공이 아니라, 

 군주가 애쓰신 덕분입니다.’ 지금 신은 타국 출신으로 진나라에 들어와 객경의 신분입니다.   

 때문에 '저리자'나 '공손석' 두 사람이 한나라와의 싸움에 대해 시비한다면 왕께서는 필시 그들의 말에

 귀를 기울이게 될 것입니다. 이로써 대왕께서는 위나라를 속이게 되고, 신은 위나라의 재상 '공중치'로부터

 원망을 사게 됩니다. "라고 하였다.] 

 王曰:「 寡人不聽也, 請與子盟.」 卒使丞相甘茂將兵伐宜陽. 五月而不拔, 樗里子,公孫果爭之.

 武王召甘茂, 欲罷兵. 甘茂曰:「息壤在彼.」  王曰:「 有之.」  因大悉起兵, 使甘茂擊之.   

 斬首六萬, 遂拔宜陽.  韓襄王使公仲侈入謝, 與秦平.

 (왕왈:「 과인불청야, 청여자맹. 」  졸사승상감무장병벌의양. 오월이불발, 저리자、공손석과쟁지. 

 무왕소감무, 욕파병. 감무왈:「식양재피.」  왕왈:「 유지 」 인대실기병 사감무격지.     

 참수육만, 수발의양.  한양왕사공중치입사 여진평.)

 

 ['무왕'이 말하기를 : " 과인은 결코 그들의 말에 귀를 기우리지 않겠소, 경과 맹세하리라 ! "라고 하였다.
 마침내 '무왕'은 승상 '감무'로 하여금 군사를 주어 한나라의 "의양"을 치게 했다.  

 '감무'가 출전한지 5개월이 지나도 "의양성"을 함락시키지 못하자, '저리자'와 '공손연'이 문제를 들고 나왔다. 

 무왕이 듣고 '감무'를 불러들여 군사행동을 중지시키려고 하였다.

 ​'감무'가 말하기를 : " 대왕과 신이 맹세한 식양"이 아직도 저기에 있습니다 "라고 하자.  

 '무왕'이 말하기를 : "아 ! 그래, 맹세한 적이 있지 "라고 하며, 국내의 군사를 대거 징발하여 '감무'에게 더하여 

 주고 "의양성"을 공격하도록 했다. '감무'는 이윽고 한나라 군사 6만의 목을 베고 "의양성"을 점령했다. 

 한'양왕'은 '공중치'를 사자로 보내 사죄함과 동시에 진나라와 평화조약을 맺도록 하였다.] 

 

 武王竟至周, 而卒於周.  其弟立, 爲昭王.  王母宣太后, 楚女也.  楚懷王怨前秦敗楚於丹陽,

 而韓不救, 乃以兵圍韓雍氏.  韓使公仲侈告急於秦. 秦昭王新立, 太后楚人, 不肯救.
 (무왕경지주, 이졸어주.  기제입, 위소왕.  왕모선태후, 초녀야.  초회왕원전진패초어단양,

 이한불구, 내이병위한옹지.  한사공중치고급어진. 진소왕신입, 태후초인, 불긍구.)

 ['무왕'이 마침내 주나라에 도착했으나 그곳에서 사고를 당해 죽었다. 그 동생이 왕위에 올랐으니

​ 이가 진'소왕'이다.  '소왕'의 모친은 '선태후'로 초나라 출신이다. 옛날 초나라가 "단양"에서 진나라와 싸워 

 패할 때 한나라가 원군을 보내지 않았던 일에 대해 원한을 품고 군사를 보내 한나라의 "옹지"를 포위했다. 

 이에 한나라는 재상 '공중치'를 사자로 보내 위급한 사정을 진나라에 고하게 했다. 이때 진나라는 진소왕이

 새로 즉위했고 실권을 쥐고 있던 태후는 초나라 출신이었던 관계로 한나라에 구원군을 보내려고 하지 않았다.]

 

 公仲因甘茂, 茂爲韓言於秦昭王曰:「公仲方有得秦救,  故敢扞楚也.  今雍氏圍, 秦師不下殽,

 公仲且仰首而不朝, 公叔且以國南合於楚. 楚、韓爲一 魏氏不敢不聽, 然則伐秦之形成矣. 

 不識坐而待伐孰與伐人之利 ?」  秦王曰:「善.」 乃下師於殽以救韓.  楚兵去.
 
(공중인감무, 무위한언어진소왕왈:「 공중방유득진구, 고감한초야.  금옹지위, 진사불하효,

 공중차앙수이불조, 공숙차이국남합어초. 초、한위일 위씨불감불청 연즉벌진지형성의. 

 불식좌이대벌숙여벌인지리 ?」  진왕왈:「선.」 내하사어효이구한. 초병거.) 


 ['공중치'가 '감무'에게 매달려 사정하자, '감무'는 한나라를 위해 진'소왕'에게 간언하기를 :

 " '공중치'는 진나라의 구원을 얻을 수 있다고 믿기 때문에 감히 초나라에 항거하는 것입니다. 

 지금 한나라의 "옹지"가 초군에 의해 포위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진나라의 군대를 "효산"으로 내보지 않는다면,

 ​'공중치'는 장차 고개를 치켜들며 진나라에 입조하지 않고  또한 '공숙'은 이 나라의 남쪽에 있는 초나라와

 합치려 할 것입니다. 초와 한이 하나로 합쳐지면 위나라도 감히 그들의 말을 듣지 않을 수 없게 되어, 

 자연히 세 나라는 하나가 되어 진나라에 대한 공동전선이 형성될 것입니다. 남의 공격을 앉아서 기다리는 것과

 우리가 먼저 남을 공격하는 것 중 어느 편이 유리한지 신은 잘 알지 못하겠습니다 "라고 하자. 
 진왕이 말하기를 : " 경의 말씀이 옳소 ! "라고 하면서. 즉시 군사를 내어주며 "효산"으로 나가서 

 한나라를 구원하라고 하였다.  진군이 출병하자 초나라 군사는 퇴각했다.] 

 

 秦使向壽平宜陽, 而使樗里子、甘茂伐魏皮氏.  向壽者, 宣太后外族也, 而與昭王少相長, 故任用.  

 向壽如楚, 楚聞秦之貴向壽.  而厚事向壽, 向壽爲秦守宜陽, 將以伐韓.
 (진사상수평의양, 이사저리자、감무벌위피지.  상수자, 선태후외족야, 이여소왕소상장, 고임용.   

 향수여초, 초문진지귀상수.  이후사상수, 상수위진수의양, 장이벌한.)


 [진나라가 '상수'를 시켜 "의양"을 평정하게 하고 '저리자'와 '감무'를 시켜 위나라의 땅 "피지"를 격하도록 

 하였다. '상수'는 '선태후'의 외척으로 '소왕'과는 어렸을 때부터 서로 친하게 자랐기 때문에 진나라에서 중용된 

 상태였다. 옛날 '상수'가 초나라에 갔었을 때 초나라는 그가 진나라의 귀한 신분이라는 사실을 알고 

 매우 후하게 대접했었다. "의양"을 지키던 '상수'는 진나라를 위해 장차 한나라를 공격하려고 하였다.] 

 

 韓公仲使蘇代謂向壽曰 : 「 禽困覆車, 公破韓, 辱公仲, 公仲收國復事秦, 自以爲必可以封.   

 今公與楚解口地, 封小令尹以杜陽. 秦楚合, 復攻韓, 韓必亡.  韓亡, 公仲且躬率其私徒以閼於秦,

 願公孰慮之也.」  向壽曰 : 「 吾合秦楚非以當韓也.  子爲壽謁之公仲曰, 秦韓之交可合也.」 

 (한공중사소대위상수왈 : 「 금곤복거, 공파한, 욕공중, 공중수국복사진, 자이위필가이봉.    

 금공여초해구지, 봉소령윤이두양. 진초합, 부공한 한필망.  한망, 공중차궁솔기사도이알어진,

 원공숙려지야. 」 상수왈 : 「 오합진초비이당한야.  자위수알지공중왈, 진한지교가합야. 」)
 

 [한나라의 '공중치'가 '소대'를 시켜 '상수'에게 유세하기를 : " 하찮은 짐승도 궁지에 몰리면 수레를 엎으려고

 달려든다고 합니다. 공께서 한나라를 파하고 '공중치'에게 욕됨을 입히려고 하는데 '공중치'는 지금 나라를 받들어

 진나라를 다시 섬기려 하고 있습니다. 그는 필시 봉읍을 얻게 될 것이라고 스스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지금 공께서는 초나라에 진나라 "해구"의 땅을 할양하고 초의 소영윤을 "두양"에 봉했습니다.  

  만일 진나라와 초나라가 힘을 합하여 한나라를 다시 공격한다면 한나라는 필시 망하게 됩니다.
 한나라가 망하면 '공중치'는 그의 일족들과 사병들을 이끌고 진나라에 대항할 것입니다.    

 원컨대 공께서는 이 점을 심사숙고하시기 바랍니다. "라고 하자. 
 이에 '상수'가 대답하기를 : " 내가 초나라와 합작을 하려는 목적은 한나라를 치기 위해서가 아닙니다. 
 그대는 이 사람을 위해 '공중치'에게 진나라와 한나라는 서로 우호관계를 유지할 수 있을 것이라는 말을   

 전해 주시기 바랍니다. "라고 하였다.]  

 

 蘇代對曰 : 「 願有謁於公.  人曰『貴其所以貴者貴. 』王之愛習公也, 不如公孫奭, 其智能公也, 

 不如甘茂.  今二人者皆不得親於秦事, 而公獨與王主斷於國者何 ? 彼有以失之也. 

 公孫奭黨於韓, 而甘茂黨於魏, 故王不信也.  今秦·楚爭彊而公黨於楚, 是與公孫奭甘茂同道也.

 (소대대왈 : 「 원유알어공.  인왈『귀기소이귀자귀. 』  왕지애습공야, 불여공손석, 기지능공야,  

 불여감무.  금이인자개불득친어진사, 이공독여왕주단어국자하 ? 피유이실지야. 

 공손석당어한, 이감무당어위, 고왕불신야.  금진·초쟁강이공당어초, 시여공손석감무동도야.


 ['소대'가 다시 묻기를 : " 원컨대 저도 공께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사람들이 말하기를 ' 다른 사람이 귀하게

 여기는 것을 같이 귀하게 생각하는 사람은 다른 사람으로부터 귀함을 받게 된다. ’라고 합니다.      

 진왕께서 공을 대하는 친근함은 '공손석'만 못하고 지혜와 재능에 있어서는 '감무'만 못합니다.
 그런데 지금 두 사람은 모두 진나라의 정사에 참여할 만큼 진왕과 가까이 지내지 못하고 있음에도,

 ​유독 공 혼자만이 진나라의 정사를 주관하고 있는 이유가 무엇 때문인지 아십니까 ?  

 ​그것은 바로 두 사람이 진왕의 총애를 잃었기 때문입니다. '공손석'은 한나라와 친하고 '감무'는 위나라와 친했기

 때문에 왕의 신임을 잃었습니다. 지금 진과 초 두 나라가 패권을 다투는데 공께서는 초나라와 친하게 지내려고

 하는 것은 국 '공손석'이나 '감무'와 같은 길을 가려는 것과 같습니다. 

 

 公何以異之, 人皆言楚之善變也.  而公必亡之, 是自爲責也. 公不如與王謀其變也, 善韓以備楚,

 如此則無患矣.  韓氏必先以國從公孫奭, 而後委國於甘茂,  韓公之讎也. 

 今公言善韓以備楚,  是外擧不僻讎也. 」

 (공하이이지, 인개언초지선변야.  이공필망지, 시자위책야. 공불여여왕모기변야, 선한이비초,

 여차즉무환의.  한씨필선이국종공손석, 이후위국어감무, 한공지수야. 

 금공언선한이비초, 시외거불벽수야.」)


 [공께서는 그들과 무엇이 다르다고 하시겠습니까 ? 사람들은 모두가 초나라는 약속을 잘 지키지 않는다고 

 합니다. 그러나 공께서는 한사코 그렇지 않다고 하시니 이것은 공께서 스스로 초나라의 태도에 대한 책임지는 

 일을 자초하는 일입니다. 그러니 공께서는 진왕과 함께 초나라의 변심에 대응하는 대책을 세우고 

 한나라와 친선을 도모하여 초나라에 대비해야만 우환이 없어질 것입니다. 한나라가 진나라와 우호관계를 

 수립한다면 한나라는 필시 국정을 '공손석'에게 맡기고 그의 의견에 따라 모든 일을 처리할 것입니다.

 그리고 후에는 '감무'에게 맡길 것입니다. 한나라는 결국 공과 원수입니다. 그러나 지금 공께서 한나라와 

 우호관계를 수립하여 초나라에 대비한다고 하신다면 이는 곧 원수라도 필요에 따라서 동맹을 맺기 위해 

 원수도 피하지 않는 공정한 태도를 나타내는 것이 됩니다 "라고 하였다.] 

 

 向壽曰 : 「 然, 吾甚欲韓合. 」 對曰 : 「 甘茂許公仲以武遂, 反宜陽之民. 今公徒收之, 深難.」 

 向壽曰 : 「 然則柰何 ?  武遂終不可得也. 」
 (상수왈 : 「 연, 오심욕한합. 」  대왈 : 「 감무허공중이무수, 반의양지민.  금공도수지 심난. 」   

 상수왈 : 「 연즉내하 ?  무수종불가득야. 」 )


 ['상수'가 말하기를 : " 좋소,  나는 한나라와 친선을 도모하고 싶소 ! "라고 하자.
 '소대'가 대답하기를 : " '감무'는 이미 '공중치'에게 "무수"의 땅을 돌려주기로 약속을 하고, 

 다시 쫓아냈던 "의양"의 한나라 백성들을 돌아와 살도록 허락했습니다. 그런데 공께서는 한낱 말만으로  

 한나라의 마음을 사려고 하니 그것은 매우 어려운 일이라 하겠습니다 "라고 하였다.
 '상수'가 말하기를 : "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  "무수"는 결국 얻을 수 없다는 말입니까 ? " 하자.] 

 

 對曰 :「公奚不以秦爲韓求潁川於楚 ? 此韓之寄地也. 公求而得之, 是令行於楚, 而以其地德韓也.

  公求而不得, 是韓楚之怨不解, 而交走秦也.  秦楚爭彊, 而公徐過楚以收韓, 此利於秦. 」

 (대왈 : 「 공해불이진위한구영천어초 ?  차한지기지야. 공구이득지, 시령행어초, 이이기지덕한야.    

 공구이불득, 시한초지원불해, 이교주진야.  진초쟁강, 이공서과초이수한, 차리어진.」)


 ['소대'가 대답하기를 : " 공께서는 어찌 진나라의 힘을 이용하여 한나라를 위해 "영천"의 땅을 초나라에 

 요청하지 않습니까 ?  원래 한나라 땅이었던 "영천"은 초나라가 빼앗아간 땅입니다. 

 공께서 "영천"의 땅을 요청해서 얻게 되면

 그것은 바로 진나라의 령이 초나라에 행해짐과 동시에 한나라에는 덕을 베풀게 되는 일입니다. 

 그리고 만약 공께서 요청해서 "영천"의 땅을 얻지 못했을 경우에는 한과 초 두 나라 사이의 원한 관계가 해소되지

 않아 두 나라는 서로 다투어 진나라로 달려오게 됩니다.  진과 초가 패권을 다투는 와중에 공께서 초나라를 

 완곡하게 그 잘못을 책망한다면 한나라의 마음을 얻게 되고 결국은 진나라에 유익한 일이 됩니다 "라고 하였다.] 

 

 向壽曰 : 「 柰何 ? 」  對曰 : 「 此善事也, 甘茂欲以魏取齊, 公孫奭欲以韓取齊.   

 今公取宜陽以爲功, 收楚韓以安之, 而誅齊魏之罪, 是以公孫奭甘茂無事也.」
 (상수왈 : 「 내하 ? 」  대왈 : 「 차선사야, 감무욕이위취제, 공손석욕이한취제. 

 금공취의양이위공, 수초한이안지, 이주제위지죄, 시이공손석감무무사야.)


 ['상수'가 묻기를 : " 그렇다면 어찌해야 합니까 ? "라고 하자. 
 '소대'가 대답하기를 : " 이렇게 하십시오.  '감무'는 위나라의 힘을 빌려 제나라를 공격하려 하고,  

 '공손석'은 한나라의 힘을 빌려 제나라를 취하려 합니다. 그러나 공께서는 지금 이미 "의양"을 취하여 공을 

 세우셨고 또한 초나라와 한나라의 마음을 수습하여 안정시키며 제나라와 위나라의 잘못을 짖으신다면,

 ​그것으로써 '공손석'과 '감무'는 각기 한나라와 위나라의 힘을 빌려 제나라를 공격하려는 계획을 더 이상

 추진할 수 없게 됩니다. "라고 하였다.]  

 

 甘茂竟言秦昭王 以武遂復歸之韓.  向壽·公孫奭爭之 不能得.   

 向壽·公孫奭由此怨 讒甘茂 茂懼 輟伐魏蒲阪 亡去.  樗里子與魏講 罷兵. 甘茂之亡秦奔齊, 逢蘇代.
 (감무경언진소왕 이무수복귀지한.  상수·공손석쟁지 불능득.   

 상수·공손석유차원 참감무 무구 철벌위포판 망거.  저리자여위강 파병. 감무지망진분제, 봉소대.)


 ['감무'는 결국은 진'소왕'에게 말하여 "무수"의 땅을 한나라에 돌려주었다.   

 '상수'와 '공손석'은 반대했지만 뜻을 이룰 수 없었다. 이에 '상수'와 '공손석'은 '감무'를 원망한 나머지 참소하자,   

 '감무'는 두려워하여 위나라의 "포판" 공격을 중단하고 도망쳐 버렸다. '저리자'는 위나라와 화친을 맺고

 군사를 이끌고 회군하였다. '감무'는 진나라에서 도망쳐 제나라로 갔는데 우연히 '소대'를 만났다.] 

 

 代爲齊使於秦, 甘茂曰 : 「 臣得罪於秦, 懼而遯逃, 無所容跡. 臣聞貧人女與富人女會績,

 貧人女曰 『 我無以買燭, 而子之燭光幸有餘, 子可分我餘光, 無損子明而得一斯便焉. 』 

 今臣困而君方使秦而當路矣.  茂之妻子在焉, 願君以餘光振之.」

 (대위제사어진, 감무왈 : 「 신득죄어진, 구이둔도, 무소용적. 신문빈인녀여부인여회적, 빈인녀왈
『 아무이매촉, 이자지촉광행유여, 자가분아여광, 무손자명이득일사변언. 』    

 금신곤이군방사진이당로의.  무지처자재언, 원군이여광진지.」) 


 ['소대'는 제나라의 사신이 되어 진나라로 가려던 중이었다. '감무'가 말하기를 : " 신은 진나라에 죄를 지어

 처벌이 두려운 나머지 도망쳐 달아났지만 몸을 안전하게 의탁할 만한 곳이 없습니다. 신이 듣기에 가난한 여인과

 부유한 여인이 함께 길쌈을 하고 있습니다. 가난한 여인이 말하기를 ‘나에게는 초를 살만한 돈이 없습니다. 
 그런데 다행히 여러분들에게는 남은 촛불이 있으니, 그것을 나에게 나누어 준다면 여러분들의 밝음을 

 ​어둡게 하지 않고도 나에게 이로움을 줄 수 있습니다.’ 라고 했답니다. 지금 저는 매우 곤궁한 처지에 놓여 

 있습니다. 그런데 군께서는 제나라를 위해 진나라에 사신으로 가려고 하십니다. 이 '감무'의 처자가 

 아직 진나라에 있으니 원컨대 군께서는 남은 밝음으로 그들을 구해주시기 바랍니다."라고 하였다.]  

 

 蘇代許諾.  遂致使於秦已, 因說秦王曰 : 「 甘茂 非常士也.  其居於秦, 累世重矣.   

 自殽塞及至鬼谷, 其地形險易皆明知之.  彼以齊約韓魏反以圖秦, 非秦之利也.」
 (소대허락.  수치사어진, 인세진왕왈 : 「 감무 비상사야.  기거어진, 루세중의.    

 자효새급지귀곡, 기지형험역개명지지.  피이제약한위반이도진, 비진지리야.」)


 ['소대'는 '감무'의 청을 허락하였다.  '소대'가 마침내 사신으로 진나라에 들어가 진왕을 알현하고 유세하기를 :

 " '감무'는 뛰어난 사람입니다.  그는 진나라에 살면서 몇 대에 걸쳐 중용되었습니다.     

 그는 "효산"의 요새부터 "귀곡"에 이르기까지 그 지형의 험하고 평탄함에 대해 훤히 꿰뚫고 있습니다.
 그가 만일 제나라에 있으면서 한과 위 두 나라와 동맹을 맺은 후에 진나라를 공격할 대책과 방법을 세운다면 

 그것은 결코 진나라에 이롭지 않은 일입니다. "라고 하였다.]  

 

 秦王曰 :「然則柰何 ?」蘇代曰 :「王不若重其贄, 厚其祿以迎之, 使彼來則置之鬼谷, 終身勿出.」 

 秦王曰 : 「 善.」  卽賜之上卿, 以相印迎之於齊, 甘茂不往.
 (진왕왈 : 「 연즉내하 ? 」   소대왈 : 「 왕불약중기지, 후기록이영지, 사피래즉치지귀곡, 종신물출. 」 

 진왕왈 : 「 선. 」  즉사지상경, 이상인영지어제, 감무불왕.)


 [진왕이 묻기를 : " 그렇다면 어떻게 하면 좋겠소 ? "라고 하자. 
 '소대'가 대답하기를 : " 대왕께서는 많은 예물을 보내고 봉록을 후하게 하여 '감무'를 맞아들여 그가 돌아오면

 "귀곡"에 머물게 하고 죽을 때까지 나오지 못하게 하십시오. "라고 하였다. 
 진왕이 말하기를 : " 좋소. "라고 하고는 즉시 '감무'에게  상경 벼슬을 주고 재상 인장을 보내어  제나라로부터

 맞이하려고 하였으나 '감무'는 진왕의 부름에 응하지 않았다.] 

 

 蘇代謂齊湣王曰 : 「 夫甘茂, 賢人也.  今秦賜之上卿, 以相印迎之. 甘茂德王之賜, 好爲王臣. 

 故辭而不往, 今王何以禮之 ? 」齊王曰 : 「 善.」  卽位之上卿而處之.  秦因復甘茂之家以市於齊.
 (소대위제혼왕왈 : 「 부감무 현인야.  금진사지상경, 이상인영지. 감무덕왕지사, 호위왕신. 

 고사이불왕, 금왕하이례지 ? 」 제왕왈 : 「 선. 」  즉위지상경이처지.  진인복감무지가이시어제.)


 ['소대'가 다시 제'민왕'에게 말하기를 : " 무릇 '감무'는 현인입니다. 지금 진나라가 '감무'에게 상경 벼슬을 주고

 재상 인장을 보내어 맞이해 가려고 합니다. 그러나 '감무'는 대왕께서 베풀어 주신 은혜로 인해 기꺼이

 대왕의 신하가 되려고 합니다. 그래서 그는 진왕의 부름에 응하지 않고 가지 않았습니다.
 지금 대왕께서는 어찌하여 '감무'를 예우하지 않으십니까 ? "라고 하였다.

 ​제왕이 말하기를 : " 좋소. "라고 하고.  즉시 그에게 상경의 벼슬을 주고 제나라에 머물게 했다.
 이에 진나라도 감무의 가족들을 복권시켜 줌으로 해서 '감무'의 환심을 사기 위해 제나라와 경쟁하였다.] 

 

 齊使甘茂於楚.  楚懷王新與秦合婚而驩 而秦聞甘茂在楚 使人謂楚王曰 : 「 願送甘茂於秦. 」   

 楚王問於范蜎曰 : 「 寡人欲置相於秦 孰可 ? 」 對曰 : 「 臣不足以識之.」  
 (제사감무어초.  초회왕신여진합혼이환 이진문감무재초 사인위초왕왈 : 「 원송감무어진. 」  

 초왕문어범연왈 : 「 과인욕치상어진 숙가 ? 」 대왈 : 「 신부족이식지.」)

  
 [제나라는 '감무'를 초나라에 사신으로 보냈다. 초'회왕'은 이때 진나라와 혼인관계를 맺어 새로이 친선을 행하고

 있었다. 이에 '감무'가 초나라에 있다는 소식을 들은 진왕이 사람을 보내 초왕에게 전하기를 :

 " '감무'를 진나라로 보내주십시요. "라고 하였다.
 초왕이 '범연'에게 묻기를 : " 과인이 진나라에 재상을 천거하려고 하는데 누가 좋겠는가 ? "라고 하자.

 '범연'이 대답하기를 : " 신은 식견이 부족하여 그런 사람을 알고 있지 못합니다. "라고 하였다.] 

 

 楚王曰 : 「 寡人欲相甘茂, 可乎 ? 」 對曰 : 「 不可.  夫史擧, 下蔡之監門也, 大不爲事君,

 少不爲家室.  以苟賤不廉聞於世 甘茂事之順焉.  故惠王之明, 武王之察, 張儀之辯 而甘茂事之. 

 取十官而無罪 茂誠賢者也.  然不可相於秦, 夫秦之有賢相 非楚國之利也.
 
 (초왕왈 : 「 과인욕상감무 가호 ? 」  대왈 : 「 불가.  부사거 하채지감문야.  대불위사군,

 소불위가실.  이구천불렴문어세, 감무사지순언. 고혜왕지명, 무왕지찰, 장의지변, 이감무사지.    

 취십관이무죄, 무성현자야.  연불가상어진, 부진지유현상, 비초국지리야.


 [초왕이 말하기를 : " 과인은 '감무'를 진나라에 그 재상으로 천거하고 싶은데 어떠한가 ? "라고 하자.
 '범연'이 대답하기를 : " 불가합니다.  '감무'의 스승 '사거'는 "하채"의 문지기로 크게는 임금을 섬기지 못하고,

 작게는 제 가정 하나도 제대로 챙기지 못했습니다. 그는 구차하게 되는대로 사는 미천한 신분이면서

 청렴하지 않은 것으로 세상에 알려져 있습니다. '감무'는그런 사람을 묵묵히 스승으로 섬기고 따랐습니다.

  러면서도 지혜로운 진'혜왕',  명철한 진'무왕', 변설에 능한 '장의' 까지도 모두 잘 섬겼습니다. 

 그는 10가지의 관직을 맡으면서도 아무런 잘못을 저지르지 않은 현명한 사람입니다.     

 그러한 '감무'를 진나라의 재상으로 천거하면 안 됩니다.
 왜냐하면 진나라에 현명한 재상이 있으면 결코 초나라에 이로운 일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且王前嘗用召滑於越.  而內行章義之難, 越國亂 故楚南塞厲門而郡江東. 

 ​計王之功所以能如此者, 越國亂而楚治也.  今王知用諸越而忘用諸秦, 臣以王爲鉅過矣.

 然則王若欲置相於秦, 則莫若向壽者可. 夫向壽之於秦王, 親也, 少與之同衣, 長與之同車, 以聽事.

 王必相向壽於秦, 則楚國之利也. 」

 (차왕전상용소활어월.  이내행장의지난, 월국란, 고초남새려문이군강동.   

 계왕지공소이능여차자, 월국란이초치야.  금왕지용제월이망용제진, 신이왕위거과의.

 연즉왕약욕치상어진, 즉막약향수자가.  부상수지어진왕, 친야, 소여지동의, 장여지동거, 이청사.    

 왕필상상수어진 즉초국지리야.」


 [예전에 대왕께서는 '소활'을 천거하여 월나라에 보내셨습니다.  그러나 내심으로는 간사한 마음을 품고  

 겉으로는 의를 내세운 '소활'이 마음속으로는 월나라가 초나라에 병탄되기를 바라고 있으면서도 

 겉으로는 정의를 내세워 두 나라 사이를 이간시켜 서로 싸우게 했습니다. 그 결과 월나라에는 내란이 일어나

 초나라는 남쪽 관문인 "여문"을 장악하게 되어 "강동군"을 설치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대왕께서 그런 큰 공을 세울 수 있었던 원인을 생각해 보면 월나라는 어지러웠고, 초나라는 잘 다스려졌기

 때문이었습니다.  지금 대왕께서는 이런 계책을 월나라에서 쓴 줄 아시면서 

 진나라에 대해서는 망각하고 계십니다. 신은 대왕을 위해 말씀드린다면 이것은 크게 잘못된 일입니다. 

 대왕께서 만일 진나라에 재상을 천거하신다면 '상수'만한 사람이 없다고 생각합니다. 

 무릇 '상수'는 진왕의 총애를 받고 어렸을 때는 옷을 서로 나눠 입고 

 ​장성해서는 함께 수레를 타고 다니면서 나라의 일을 의논해왔습니다.

 대왕께서 반드시 '상수'를 진나라에 천거하신다면 초나라의 이익이 되는 일입니다. "라고 하였다.] 

 

 於是使使請秦相向壽於秦 秦卒相向壽.  而甘茂竟不得復入秦 卒於魏. 

 甘茂有孫曰甘羅 甘羅者 甘茂孫也.  茂旣死後 甘羅年十二 事秦相文信侯呂不韋.

 秦始皇帝使剛成君蔡澤於燕, 三年而, 燕王喜使太子丹入質於秦.  

 秦使張唐往相燕, 欲與燕共伐趙以廣河閒之地. 

 (어시사사청진상상수어진 진졸상상수.  이감무경불득복입진 졸어위. 

 감무유손왈감라 감라자 감무손야.  무기사후 감라년십이 사진상문신후여불위.

 진시황제사강성군채택어연, 삼년이, 연왕희사태자단입질어진. 

 진사장당왕상연, 욕여연공벌조이광하한지지.)


 [이에 초'회왕'은 사신을 진나라에 보내 '상수'를 재상으로 삼게 하였다. 

 진나라는 결국은 '상수'를 재상으로 삼았다. 그리고 '감무'는 죽을 때까지 진나라에 들어가지 못하고 

 위나라에서 죽었다. '감무'에게는 '감라'라는 손자가 있었다.

 즉 '감라'는 '감무'의 손자다. '감무'가 죽었을 때는 '감라'는 12살의 나이로 진나라 상국 문신후 '여불위'를 모셨다. 

 진시황제는 연나라를 회유하려고 강성군 '채택'을 연나라에 사신으로 보내 3년 만에 연왕 '희'를 설득하여  

 태자 '단'을 화친에 대한 보장으로 진나라에 볼모로 보내왔다.  진나라는 대신 '장당'을 연나라의 재상으로 보내 

 연나라와 공수동맹을 맺어 조나라를 공격하여 진나라의 "하간" 땅을 넓히려고 했다.] 

 

 張唐謂文信侯曰 : 「 臣嘗爲秦昭王伐趙, 趙怨臣曰 『 得唐者與百里之地 』         

 今之燕必經趙, 臣不可以行.」 文信侯不快 未有以彊也.  甘羅曰 : 「 君侯何不快之甚也 ? 」

 文信侯曰 : 「 吾令剛成君蔡澤事燕三年, 燕太子丹已入質矣, 吾自請張卿相燕而不肯行. 」
 (장당위문신후왈 : 「 신상위진소왕벌조, 조원신왈 『 득당자여백리지지 』         

 금지연필경조 신불가이행.  문신후불쾌 미유이강야.  감라왈 : 「 군후하불쾌지심야 ?」

 문신후왈 : 「 오령강성군채택사연삼년, 연태자단이입질의, 오자청장경상연이불긍행.」)


 ['장당'이 '문신후'에게 말하기를 : " 제가 옛날 돌아가신 '소왕'의 명을 받들어 조나라를 공격하였는데, 

 조나라 사람들은 저를 매우 두려워하며 말하기를  ‘장당'을 잡아오는 자에게는 백리의 땅을 주겠노라 ! ’ 

 라는 말을 퍼뜨리고 있습니다.  지금 제가 연나라에 가기 위해서는 반드시 조나라 땅을 지나가야 하는데  

 저는 도저히 갈 수 없습니다."라고 하였다. '문신후'는 마음이 매우 불쾌했으나 강제로 보낼 수는 없었다.

 그때 '감라'가 보고 말하기를 : " 대감께서는 어찌 그리 불쾌한 표정을 짓고 계십니까 ? "라고 하자.

 '문신후'가 대답하기를 : " 내가 강성군 '채택'을 연나라에 들여보낸 지 3년 만에 연나라는 태자 '단'을 볼모로

 보내왔다.  그래서 그 답례로 '장당'을 연나라에 보내 경상의 자리를 맡기려고 했으나  

 '장당'이 한사코 연나라에 들어가지 않으려 하고 있기 때문이다. "라고 하였다.]
 
 甘羅曰 : 「 臣請行之. 」  文信侯叱曰 : 「 去, 我身自請之而不肯, 女焉能行之 ? 」  
 

 甘羅曰 : 「 大項橐生七歲爲孔子師, 今臣生十二歲於玆矣.  君其試臣 何遽叱乎 ? 」
 (감라왈 : 「 臣請行之. 」  문신후질왈 : 「 거, 아신자청지이불긍, 여언능행지 ? 」   

 감라왈 : 「 대항탁생칠세위공자사, 금신생십이세어자의.  군기시신 하거질호 ? 」)


 ['감라 가 듣고 말하기를 : " 제가 가서 '장당' 장군을 가도록 해 보겠습니다. "라고 하자.
 '문신후'가 꾸짖으며 말하기를 : " 물러가지 못할 까 ?  내가 친히 방문하여 가도록 간청했음에도  

 가지 않겠다고 했는데, 내가 어떻게 가도록 한단 말이냐 ? "라고 하였다. 
 '감라'가 말하기를 : " 저 '항탁'은 나이 7살 만에 '공자'의 선생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저는 지금 그 보다 5살이나 더 많은 12살입니다.
 대감께서는 저를 시험해 보지도 않으시고 어찌 꾸짖기만 하십니까 ? "라고 하였다.] 

 

 於是甘羅見張卿曰 : 「 卿之功孰與武安君 ? 」   

 卿曰 : 「 武安君南挫彊楚, 北威燕趙, 戰勝攻取, 破城墮邑, 不知其數.  臣之功不如也. 」
 (어시감라견장경왈 : 「 경지공숙여무안군 ? 」   

 경왈 : 「 무안군남좌강초, 북위연조 전승공취, 파성타읍 부지기수.  신지공불여야. 」)


 [이리하여 '감라'는 상경인 '장당'을 만나서 말하기를 : "경께서는 무안군 '백기'와 비교하여 

 누구의 공이 더 크다고 생각하십니까 ? "라고 하자.

 '장당'이 말하기를 : " 무안군의 공이야 남쪽으로 강대한 초나라를 굴복시키고, 북쪽으로는 연나라와 조나라와 

 싸워 위엄을 떨치고 공격하여 취하거나, 함락시키거나 무너뜨린 성읍의 수는 셀 수 없이 많다. 

 내가 어찌 무안후와 공을 비교할 수 있겠느냐 ? "라고 하였다.]  

  

 甘羅曰 : 「 應侯之用於秦也, 孰與文信侯專. 」  張卿曰 : 「 應侯不如文信侯專. 」   

 甘羅曰 : 「 卿明知其不如文信侯專與曰. 」  張卿曰 : 「 知之. 」
 (감라왈 : 「 응후지용어진야, 숙여문신후전. 」  장경왈 : 「 응후불여문신후전. 」     

 감라왈 : 「 경명지기불여문신후전여왈. 」  장경왈 : 「 지지. 」)


 ['감라'가 묻기를 : " 그렇다면 옛날 응후 '범수'가 진나라에 중용되어 얻은 권력과,  

 지금 '문신후'가 제멋대로 하고 있는 권력 중 어느 것이 더 중합니까 ? "라고 하자.
 '장당'이 대답하기를 : " '응후'의 권력은 지금 '문신후'의 권력보다 중하지 못하다. "라고 하였다.
 '감라'가 묻기를 : " 경께서는 진정으로 '문신후'의 권력이 '응후'의 것보다 중하다는 것을 알고  

 계시다는 말씀입니까 ? "라고 하자.  '장당'이 대답하기를 : " 알고 있다. "라고 하였다.] 

 

 甘羅曰 : 「 應侯欲攻趙, 武安君難之.  去咸陽七里而立死於杜郵.   

 今文信侯自請卿相燕, 而不肯行, 臣不知卿所死處矣.」  張唐曰 : 「 請因孺子行. 」
 (감라왈 : 「 응후욕공조, 무안군난지.  거함양칠리이입사어두우.   

 금문신후자청경상연, 이불긍행, 신불지경소사처의.  장당왈 : 「 청인유자행.」)


 ['감라'가 말하기를 : " '응후'가 조나라를 공격하려고 했으나 '무안군'은 어렵다며 말을 듣지 않았습니다.
 그 결과 '무안군'은 "함양"에서 추방되어 미처 7리도 못가서 "두우"라는 곳에서 죽고 말았습니다.
 지금 '문신후'께서 친히 상경께 연나라의 상국에 취임하라고 종용했음에도 장군께서 거절하셨으니  

 저는 상경께서 죽을 곳이 어디인줄 짐작도 못하겠습니다. "라고 하자.
 '장당'이 말하기를 : " 어린 너의 말을 따라 내가 곧 연나라로 길을 떠나도록 하겠다. "라고 하였다.]  

  

 令裝治行.  行有日, 甘羅謂文信侯曰 : 「 借臣車五乘, 請爲張唐先報趙. 」 

 文信侯乃入言之於始皇曰 : 「 昔甘茂之孫甘羅, 年少耳, 然名家之子孫, 諸侯皆聞之.   

 今者張唐欲稱疾不肯行, 甘羅說而行之.  今願先報趙, 請許遣之. 」
 (령장치행.  행유일, 감라위문신후왈 : 「 차신차오승, 청위장당선보조. 」

 문신후내입언지어시황왈 : 「 석감무지손감라.  년소이, 연명가지자손, 제후개문지.    

 금자장당욕칭질불긍행, 감라설이행지.  금원선보조, 청허견지.」)

 

 ['장당'은 곧바로 령을 내려 연나라로 떠날 채비를 시켰다. 며칠 후, '감라'가 '문신후'에게 말하기를 :
 " 저에게 다섯승의 수레를 빌려주시면 제가 '장당' 장군의 행차를 조나라에 미리 통고하여, 

 그가 무사히 연나라로 들어가도록 일러 두겠습니다. "라고 하였다.

 '문신후'가 그 즉시 입궐하여 시황에게 '감라'와 '장당' 사이에 있었던 일에 대해 고하며 말하기를 : 
 " 옛날 선왕이신 '무왕' 재위 때 우승상을 지낸 '감무'의 손자에 '감라'라고 있습니다.   

 어린 나이임에도 명가의 자손으로 제후들은 그 이름을 들어서 다 알고 있습니다.
 얼마 전에 병을 핑계로 연나라로 들어가지 않으려고 했던 '장당'을 '감라'가 설득하여 가도록 한 일이 있었습니다. 

 ​지금 다시 그가 먼저 출발하여 '장당'이 연나라에 무사히 당도할 수 있도록  조나라를 설득하겠다고 합니다. 

 그를 보내도록 허락해 주십시요 "라고 하였다. ]  

 

 始皇召見, 使甘羅於趙.  趙襄王郊迎甘羅, 甘羅說趙王曰 : 「 王聞燕太子丹入質秦歟曰 ? 」  

「聞之曰. 」  「 聞張唐相燕歟曰. 」  「 聞之. 」
 (시황소견, 사감라어조.  조양왕교영감라, 감라설조왕왈 : 「 왕문연태자단입질진여왈 ? 」 

「문지왈. 」  「 문장당상연여왈. 」  「 문지. 」)

 
 [시황은 '감라'를 불러 접견하고 '감라'를 사자로 조나라에 보냈다. 조'양왕'이 교외까지 나와 '감라'를 영접했다.

 ​'감라'가 조왕에게 묻기를 : " 왕께서는 연나라 태자 '단" 진나라에 인질로 가 있는 일을 들으셨습니까 ? "하자.

 조왕이 대답하기를 : " 들었소."라고 하였다. 
 감라가 묻기를 : "'장당'이 연나라에 들어가 상국이 된다는 사실도 들으셨습니까 ? "라고 하자, 

 조왕이 대답하기를 : " 들었소."라고 하였다.]

  

 燕太子丹入秦者, 燕不欺秦也, 張唐相燕者, 秦不欺燕也.  燕·秦不相欺者, 伐趙, 危矣 ?   

 燕·秦不相欺無異故, 欲攻趙而廣河閒.  王不如齎臣五城以廣河閒, 請歸燕太子, 與彊趙攻弱燕.」 
 (연태자단입진자, 연불기진야, 장당상연자, 진불기연야.  연·진불상기자, 벌조, 위의 ?    

 연·진불상기무이고, 욕공조이광하간.  왕불여재신오성이광하한, 청귀연태자, 여강조공약연. 」)


 [연나라 태자 '단'이 진나라에 가 있음은 연나라가 진나라를 속이지 않겠다는 뜻이고,  

 '장당'이 연나라의 상국이 되는 일은 진나라가 연나라를 속이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연과 진 두 나라가 서로 속이지 않고 있음은 서로 힘을 합쳐 조나라를 협공하기 위해서입니다.  

 조나라는 장차 위태롭게 되지 않겠습니까 ?  연과 진 두 나라가 서로 속이지 않기 위해 서로 인질을 교환하고 

 있음은 다른 이유에서가 아니라 조나라를 공격하여 "하간"의 땅을 넓히려고 하기 때문입니다. 

 왕께서는 차라리 진나라에 5개의 성을 떼어 그들이 원하는 대로 "하간"의 땅을 넓히도록 해주며 

 연나라 태자를 귀국시키도록 한 후에 강한 조나라의 군사로 약한 연나라를 공격하여 

 진나라에 바친 땅을 대신 얻도록 하십시오. "라고 하였다.]   

 

 趙王立自割五城以廣河閒 秦歸燕太子, 趙攻燕 得上谷三十城 令秦有十一.   

 甘羅還報秦, 乃封甘羅以爲上卿, 復以始甘茂田宅賜之.
 (조왕입자할오성이광하한 진귀연태자, 조공연 득상곡삼십성 령진유십일.   

 감라환보진, 내봉감라이위상경, 부이시감무전택사지.)


 [조왕은 '감라'의 말대로 조나라의 다섯 개의 성과 "하간"을 떼어 진나라에 바친 후에 연나라 태자를 귀국시키고, 

 ​조나라는 연나라를 공격하여 "상곡"의 30여 개의 성을 점령하고, 조나라는 새로 빼앗은 연나라의 성 중 11개를

 진나라에 바쳤다.  '감라'가 진나라에 돌아와 보고하자, 진왕은 '감라'를 상경의 직에 임명하고

 다시 옛날 '감무'가 소유했던 전답과 저택을 하사하였다.] 


  

 太史公曰 : 

 樗里子以骨肉重 固其理 而秦人稱其智 故頗采焉.      

 甘茂起下蔡閭閻 顯名諸侯 重彊齊楚.  甘羅年少 然出一奇計 聲稱後世.

 ​雖非篤行之君子 然亦戰國之策士也.  方秦之彊時 天下尤趨謀詐哉.
 (태사공왈 : 

 저리자이골육중 고기리 이진인칭기지 고파채언.   

 감무기하채여염 현명제후 중강제초.  감라년소 연출일기계 성칭후세.

​ 수비독행지군자 연역전국지책사야.  방진지강시 천하우추모사재.)


 [태사공이 말하기를 : " '저리자'는 진나라 혜왕의 종친으로 중용되어 하는 일이 모두 이치에 맞아 

 ​진나라 사람들은 그를 지낭이라고 불러 세상에 이름이 찬란하게 빛났다.
 '감무'는 "하채"의 시골마을에서 미천하게 태어났지만 몸을 일으켜 그 이름을 제후들에게 드높이고  

 다시 나라를 옮겨 제와 초 두 나라를 강하게 만들었다.
 '감라'는 나이가 어렸음에도 기묘한 계책를 생각해 내어 후세에 이름을 남겼다.  

  비록 모두 행실이 돈독한 군자들이라고 볼 수는 없었으나 그들은 전국시대 이름이 높았던 책사들이였다.
 바야흐로 진나라가 강성해졌을 때 천하는 더욱 권모술수를 추구하려 했던 것이다.] 

 

 【 각주 】 

1) 하채(下蔡) : 지금의 안휘성 봉대현(鳳臺縣)에 있었던 고을이다. 

2) 위장(魏章) : 전국 때 위(魏)나라 출신으로 진(秦)나라 장군. 처음에는 위나라 장수가 되었다가 장의(張儀)와  

    함께 진나라로 들어가 서장(庶長)에 임명되어 진혜왕(秦惠王)을 섬겼다. 주난왕(周赧王) 3년 기원전 312년  

    군사를 이끌고 나아가 초나라를 공격했다. 저리질(樗里疾)과 감무(甘茂)의 도움을 받아 초나라의 군사들을  

    지금의 하남성 단수(丹水)의 북쪽인 단양(丹陽)에서 크게 무찌르고 초장(楚將) 굴개(屈匃)를 사로잡았다.  

    단양의 싸움에서 승리한 위장은 당시 초나라 령이었던 사방 600리에 달하는 한중(漢中)의 땅을 점령하여  

    진나라 땅으로 만들고 그 곳에다 한중군(漢中郡)을 설치했다. 같은 해에 다시 란전에서 초나라의 대군을  

    궤멸시켜 초나라의 전력에 심대한 타격을 입혔다. 초나라는 이 두 싸움에서의 패배로 인하여 오랫동안 

    국세를 회복하지 못했다. 진무왕이 새로 즉위하자 장의와 함께 진나라에서 쫓겨나 위나라로 돌아가 

    그 곳에서 죽었다.  

3) 촉후(蜀侯) 휘(輝) : 사마조(司馬錯)의 진언으로 점령한 촉 땅에 제후로 임명된 진(秦)나라의 공자 휘를 말한다. 

4) 용거(容車) : 휘장을 둘러친 수레로 군주가 타고 다니던 융거를 말함. 

5) 삼천(三川) :지금의 하남성 낙양시 일대를 지칭하는 말로 낙양시 부근에 흐르던 하수(河水), 낙수(洛水),  

    이수(伊水) 등의 세 하천 사이의 땅이라는 데서 유래한 지명임.  

6) 상수(向壽) : 진소왕(秦昭王)의 모친인 선태후(宣太后)의 외족으로 진무왕의 총애를 받았다. 

7) 식양(息壤) : 전국 때 진나라 령으로 지금의 섬서성 함양시 부근의 고을이다. 

8) 의양(宜陽) : 전국 때 한나라 령으로 지금의 하남성 남양시 부근의 성읍이다.  

    한나라의 서남부를 지키는 전략상 중요한 기지다.  

9) 비(費) : 지금의 산동성 비현(費縣) 서로 춘추전국 시대 노나라 령이다. 

10) 파(巴)는 지금의 중경(重慶)을, 촉(蜀)은 성도(成都)를 말한다. 

11) 서하(西河) : 지금의 섬서성 서쪽의 땅으로 황하와 낙수 사이의 땅을 말한다.  

      전국 때 진(秦)과 위(魏) 두 나라가 이 땅을 두고 오랫동안 다투었다.  

12) 상용(上庸) : 지금의 호북성 죽산(竹山) 서북의 땅으로 초나라 령이다. 

13) 공중치(公仲侈) : 전국 때 한나라 선왕(宣王) 때 재상으로 한군이 진군에 의해 수어(修魚)에서 패하자  

      그는 진나라와의 강화를 주장했다. 그러나 초나라가 한나라에 원군을 보내줄 것이라고 믿고 있던 한왕이  

      공중치의 말에 따르지 않고 안문(岸門)에서 진군과 싸워 대패하자 공중치는 태자를 인질로 진나라에 보냈다.        기원전 312년 초나라가 한나라의 옹지(雍氏)를 포위하자 그는 진나라에 구원을 청하려고 했으나  

      진나라 사자 공손매(公孫眛)를 통해 지나라가 한나라를 돕는 체 하면서 실은 한나라를 도모하기 

       위해서라는 것을 간파하고 마음을 바꿔 제(齊)와 초(楚) 두 나라와 연합하여 진나라에 대항하려고 했다. 

       선왕의 뒤를 이은 양왕은  그를 계속해서 재상으로 등용했다. 후에 진나라가 의양(宜陽)을 점령하자 

       그는 명을 받고 진나라에 들어가사죄를 하고 강화를 맺었다. 

       이때 공중치와 교유를 맺은 진나라의 재상 감무는 후에 진나라가 점령한 무수(武遂)를 돌려주었다.  

14) 진소왕(秦昭王)  : 소양왕(昭襄王)이라고 한다. 재위 기원전 324년에 태어나서 기원전 306년에 진왕의 자리에  

      올라 기원전 251년에 죽었다. 진시황의 증조부다. 이름은 직(稷), 혹은 측(側) 또한 즉(則)이라 했으며  

      성은 영씨(嬴氏)다. 진무왕(秦武王)의 이복동생으로 무왕이 재위시 연나라에 인질로 가 있었다.  

       그때까지 자식을 두지 못한 무왕이 주나라에 가서 정을 들어 힘내기를 하다가 다리가 부러져 죽게 되자  

      연나라에서 귀국하여 진왕의 자리에 올랐다. 18살의 어린 나이로 재위에 오르자 그 모친 선태후(宣太后)가  

      섭정을 행하고 그녀의 동생 위염(魏冉)을 장군으로 삼아 함양(咸陽)을 지키게 했다. 그리고 얼마 있지 않아  

      무왕의 동생 서장(庶長) 영장(嬴壯)이 반란을 일으키자 위염은 장(壯)을 포함한 진나라의 수많은 대신과  

      귀족들을 살해했다. 이후로 진나라의 정권은 선태후가 장악하고 저리질(樗里疾)과 위염(魏冉)을 앞뒤로 

       번갈아  가며 진나라의 승상으로 삼아 진나라의 정권은 공실의 귀족과 외척이 전단하게 되었다.  

      진소왕 11년 기원전 266년 소왕은 위나라 출신의 범수(范睢)의 계책을 받아들여 선태후로부터 권력을 빼앗고        위염(魏炎) 등의 귀척들을 쫓아냈다. 위염의 후임으로는 범수(范睢)를 승상으로 임명했다. 그는 재위 기간 중  

      백기(白起)와 사마착(司馬錯) 등을 장군으로 삼아 동진정책을 추진하여 군사상 획기적인 성과를 거두었다.  

  1. 기원전 290년 위나라를 공격하여 그 하동(河東)의 땅을 점령했다. 

  2. 기원전 284년 도위(都尉) 사리(斯離)가 한(韓), 위(魏), 연(燕), 조(趙) 등의 4국과 연합하여 제나라를 정벌하여 

      그 국세에 심대한 타격을 가했다.  

  3. 기원전 278년 다시 백기로 하여금 남쪽으로 진격하게 하여 초나라의 영도를 점령함으로써 초나라의 근거지인  

      동정호 일대에 남군(南郡)을 설치했다. 초나라는 이로써 그 나라를 지금의 하남성 진현으로 옮겨야만 했다.  

  4. 기원전 260년 다시 조나라의 45만 대군과 장평에서 싸워 이겨 항복한 그 군사들을 구덩에 파묻어 모두  

      살해하고 그 땅에 상당군을 설치하여 진나라 영토로 삼았다.  

  5. 기원전 255년 주(周)나라를 멸했다. 이로써 800년 이상 존속했던 주나라의 명맥을 끊어졌다. 

      진소왕은 그의 재위시 진나라의 국력을 관동의 6국에 비해 압도적으로 우세하게 만듬으로써 후에  

      진시황의 중국을 통일하는데 기초를 마련했다고 볼 수 있다.  

   진소양왕 재위시 새로 설치한 군현 현황 

   ①검중군(黔中郡) : 기원전 280년에 진소왕 27년 초나라로부터 취득한 땅으로 지금의 호남성 동정호 이서와  

      원수(沅水)와 풍수(灃水) 유역. 호북 청강(淸江) 유역. 사천 검강(黔江) 유역이다.  

   ②무군(巫郡) : 검중군과 함께 초나라부터 취득한 후에 검중군과 통합했다. 지금의 사천성 무산(巫山) 일대 

   ③남양군(南陽郡) : 기원전 273년 진소왕 34년 위나라부터 할양받았다. 원래 한과 초 두 나라 사이의 경계를  

      이루었던 위나라 령이이었으나 진나라가 위나라에 압력을 가해 빼앗고 다시 5국이 연합하여 

       제나라를 파한 후에 한과 위의 남양 땅에 초의 상용의 땅을 합해 설치한 군이다. 치소는 완성(宛城)이다.  

   ④북지군(北地郡) : 기원전 271년 진소왕 36년 융족의 의거(義渠)를 멸하고 세운 군이다.  

      관할지역은 영하성 청동협(靑銅峽) 이동, 감숙성 동북부의 마련하(馬蓮河) 유역. 치소는 의거(義渠)다.  

   ⑤상당군(上黨郡) : 기원전 259년 소양왕 48년 장평대전 직후 한과 조 두 나라의 상당군을 합해 설치했다.  

      관할구역은 지금의 산서성 태항산 이서, 이북과 화순(和順), 유사(楡社) 이남, 심원(沁源), 심수 이동이다.  

15) 옹지(雍氏)/ 전국 때 한나라 령으로 지금의 하남성 우현(禹縣) 경내 동북에 있었다.

16) 공숙(公叔) : 한양왕(韓襄王 : 재위 기원전 311-296년) 때 공중치(公仲侈)와 함께 한나라의 국정을 이끌었던

      한나라 귀족 출신의 중신이다. 양왕(襄王) 12년 기원전 300년 태자 백영(伯嬰)이 죽자 공자 구(咎)와

      공자 기슬(虮蝨)이 왕의 후계자 자리를 놓고 다투었다. 이윽고 양왕이 죽자 위(魏)의 지원을 받은 구(咎)가

      제(齊)의 지원을 받은 기슬을 물리치고 양왕의 후계자가 되었다. 이가 한리왕(韓釐王)이다.

17) 해구(解口) : 전국 때 진나라 령으로 지금의 하남성 낙양시(洛陽市) 동남이다.

18) 소영윤(小令尹) : 춘추전국 때 초나라의 지방장관을 말한다. 춘추 때 강대국들이 주변의 여러 중소 제후국들을

      겸병하여 읍(邑)이나 현(縣)으로 삼을 때 그 수령을 장(長), 윤(尹), 공(公), 혹은 대부(大夫) 등으로 칭했다.

      소영윤이라는 칭호는 초나라만 사용했다. 전국시대와는 달리 춘추시대에는 현(縣)의 군의 상급기관이었다.

19) 두양(杜陽) : 전국 때 진나라 령으로 지금의 섬서성 인유현(鱗遊縣) 서북쪽에 있었다.

20) 제민왕(齊湣王) : 기원전 300년부터 284년까지 재위한 전국 때 제나라의 군주다.

      전(田) 성에 이름은 지(地)이고 제선왕의 아들이다. 재위 기간 중, 진소왕과 함께 제(帝)를 칭하다가 후에

      제호(帝號)를 버리고 왕호를 다시 사용했다. 제나라의 강한 군사력에 의지하여 빈빈히 주위의 제후국들을

      침략하여 남쪽으로는 초나라의 회수(淮水) 이북의 땅을 빼앗고, 서쪽으로는 삼진(三晋)을 공격하여 다시

      주나라의 영토를 병합하여 천자가 되려고 시도했다. 다시 군사를 대거 일으켜 송나라를 멸하여 

       병탄함으로 해서 진소왕의 분노를 샀다. 이에 진소왕은 연(燕), 초(楚) 및 삼진과 연합하여 

       제나라를 공격하기 위해 군사를 일으켜 연나라 장수 악의(樂毅)를 5국 연합군의 대장으로 삼았다. 

       임치(臨淄)에서 악의의 연군에게 참패한 제민왕은 도주하여 거성(莒城)으로 달아났으나 

       초나라 장수 요치(淖齒)에게 살해되었다.

21) 초회왕(楚懷王) : 기원전 328년에 즉위하여 296년까지 재위한 초나라 군주다.

      미(羋) 성에 이름은 웅괴(熊槐)이며 초위왕(楚威王)의 아들이다. 집정기간 중, 제나라와 합종을 맺어 진나라의

      동진을 막았다. 이에 진혜왕(秦惠王)이 장의(張儀)를 보내 제나라와 절교를 하면 그 댓가로 상오(商於)의 땅

      6백리를 할양하겠다고 했다. 상오의 땅을 탐낸 회왕이 제나라와 절교를 하고 사람을 보내 

       상오의 땅을 받아오게 했다. 그러나 장의는 당시 주기로 한 땅은 6리라고 발뺌을 했다. 

       분노한 회왕이 군사를 일으켜 진나라를 공격했으나 계속된 싸움에서 많은 군사를 잃고 영토를 빼앗겼다. 

       진혜왕의 뒤를 이어 즉위한 소왕(昭王)이 회담을 제의하자 무관(武關) 들어간 들어간 회왕은 

       진나라에 의해 억류되고 말았다. 진나라는 회왕을 협박하여 초나라 땅의 할양을 요구했으나 응하지 않았다.

       이에 구금된 상태로 있다가 감시가 소흘한 틈을 타서 탈출에 성공했으나 진나라의 추격군에게 사로잡혀

       결국은 환국하지 못하고 진나라에서 병들어 죽었다.

22) 소활(召滑) : 소활(昭滑)이라고도 한다. 전국 때 초회왕의 신하로 왕명을 받고 월나라에 갔다.

      겉으로는 덕과 의를 가장하고 내심으로는 간사한 마음의 소유자였다. 월나라에 내란을 조장하여

      이로써 초나라는 여문을 장악하여 강동군을 설치하고 영남으로 통할 수 있는 요충지를 확보할 수 있었다.

23) 여문(厲門) : 지금의 광서성 평락현(平樂縣) 서남으로 전국 때 초나라의 남쪽 변경의 중요한 관문이다.

24) 강동군(江東郡) : 초회왕이 월나라를 멸하고 설치한 군이다. 관할구역은 지금의 안휘성 동남부,

      강소성 남부 및 절강성 북부지역을 포함했다.

 

 

 

※  原 文 . 【 中國哲學書電子化計劃 .   筆寫本 】

 

                                 

 

     原 文   飜 譯 者        德庤 / 李   斗 振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