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 魏公子列傳

第十七. 魏公子列傳(위공자열전)

덕치/이두진 2021. 7. 30. 19:31

                 史記 列傳

 

      第十七. 魏公子列傳(위공자열전)  

 

 

 魏公子無忌者, 魏昭王子少子而魏安釐王異母弟也.  昭王薨, 安釐王即位, 封公子爲信陵君. 

 是時范睢亡魏相秦, 以怨魏齊故, 秦兵圍大梁, 破魏華陽下軍, 走芒卯. 魏王及公子患之. 

 (위공자무기자, 위소왕소자이위안희왕이모제야.  소왕훙, 안희왕즉위, 봉공자위신릉군.

 시시범수망위상진, 이원위제고, 진병위대량, 파위화양하군, 주망묘.  위왕급공자환지.)

  

 [위나라의 공자 '무기'는 위'소왕'의 작은아들이며 '안희왕'(위어(魏圉)의 이복동생이다.  
 '소왕'이 죽고 '안희왕'이 왕위를 계승하자 '무기'를 "신릉"에 봉읍을 내려 '신릉군'이라 하였다.

 이때 위나라에서 중대부 '수고'의 모함에 간신히 목숨을 구해 달아나 진나라로 도망친 '범수'가  진나라에 들어가

 승상이 되어, 위나라의 재상 '위제'에게 원수를 갚기 위해 진군을 출병시켜 "대량성"을 포위했다. 

 진'소왕'은 장수 '백기'를 보내 위를 공격하도록 하였고,
 위나라 재상 '맹상군'은 '망묘'를 대장으로 삼아 군대를 이끌고 진나라에 맞서 싸웠으나  

 '백기'가 "화양"에서 위군을 대패시키며 위군 13만 명이 죽거나 포로가 되고 '망묘'는 도주하였다.   

 위왕과 위공자 '위제'는 이런 사태를 매우 걱정하였다. 이일로 인해 '맹상군'은 재상직에서 물러나며 

 ​세력이 약화되었고, 그를 따랐던 수많은 문객들이 '위무기'의 문하로 들어오며 

 ​'위무기'는 점차 '맹상군'의 지위를 차지하게 되었다.] 

 

 公子爲人仁而下士, 士無賢不肖皆謙而禮交之, 不敢以其富貴驕士. 

 士以此方數千里爭往歸之, 致食客三千人.  當是時, 諸侯以公子賢, 多客, 不敢加兵謀魏十餘年.
 
(공자위인인이하사, 사무현불초개겸이례교지, 불감이기부귀교사. 

 사이차방수천리쟁왕귀지, 치식객삼천인.  당시시, 제후이공자현, 다객, 불감가병모위십여년.)

  
 [위공자 '무기'는 어질고 마음 씀씀이가 두텁고 후덕하였으며 선비들에게 스스로 몸을 낮추었다. 
 선비들이 어질지 않거나 불초하거나를 개의치 않고 모두에게 몸을 낮추어 예의로써 사귀며

 자기가 부귀한 신분이라고 해서 감히 교만한 태도로 대하지 않았다.
 이로써 선비들은 사방 천리에서 서로 다투어 달려와, 몸을 의탁하러온 선비들의 수효가 3천 명에 
달하게 되었다. 

 그래서 당시 여러 제후국은 '위무기'가 어질 뿐 아니라 수많은 식객들을 거느리고 있었기 때문에 

 감히 군사를 동원하여 10여 년 동안 위나라를 침범할 생각을 하지 못했다.] 

 

 公子與魏王博, 而北境傳舉烽, 言「 趙寇至, 且入界 」.  魏王釋博, 欲召大臣謀.   

 公子止王曰:「 趙王田獵耳, 非爲寇也. 」 復博如故.  王恐, 心不在博. 
 (공자여위왕박, 이북경전거봉, 언「 조구지, 차입계 」.  위왕석박, 욕소대신모. 

 공자지왕왈 : 「 조왕전렵이, 비위구야. 」  부박여고.  왕공, 심불재박.)

  
 [어느 날, 공자 '무기'와 위왕이 마주 앉아 박(장기의 일종)을 두고 있는데, 북쪽의 변경에서 봉화가 
올랐다는

 급보를 전해왔다. " 조나라 군대가 쳐들어와 조만간에 우리나라 국경을 넘어 올 것입니다."라고 하자. 

 위왕은 박 판을 치우고 대신들을 불러 대책을 의논하려고 하였다.  
 '무기'가 위왕을 말리면서 말하기를 : " 조왕은 단지 사냥을 하러 출병했을 뿐입니다. 

 우리나라 국경을 침범하기 위해서가 아닙니다. "라고 하였다. 
 '무기'는 여전히 박판을 치우지 않고 계속 두었다.  위왕은 걱정이 되어 박에 정신을 집중할 수 없었다.]
 

 

 居頃, 復從北方來傳言曰:「 趙王獵耳, 非爲寇也. 」 魏王大驚, 曰:「 公子何以知之 ? 」

 公子曰:「 臣之客有能深得趙王陰事者, 趙王所爲, 客輒以報臣, 臣以此知之. 」   

 是後魏王畏公子之賢能, 不敢任公子以國政.
 
(거경, 복종북방래전언왈 :  「조왕렵이, 비위구야.」  위왕대경, 왈 : 「 공자하이지지 ? 」

 공자왈 : 「신지객유능심득조왕음사자, 조왕소위, 객첩이보신, 신이차지지. 」 

 시후위왕외공자지현능, 불감임공자이국정.)

  
 [이윽고 얼마간의 시간이 지나자 다시 북방에서 소식을 전해오기를 :

 " 조왕은 단지 사냥을 위해 출병했지 우리나라를 쳐들어오기 위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라고 하였다. 
 위왕이 크게 놀라며 말하기를 : " 공자는 어찌 그것을 알 수 있었는가 ? "라고 하자.

 '무기'가 말하기를 : " 신의 문객 중에 조왕의 비밀스러운 일까지 깊이 알고 있는 사람이 있어 조왕이 하려는 일을

 그 문객이 재빨리 저에게 알려주고 있습니다. 신은 그래서 이 일을 미리 알고 있었습니다. "라고 하였다. 

 이때부터 위왕은 '무기'의 지혜와 능력을 두려워하여, 감히 '무기'에게 위나라의 국정을 맡기려고 하지 않았다.] 

 

 魏有隱士曰侯嬴, 年七十, 家貧, 爲大梁夷門監者.  公子聞之, 往請, 欲厚遺之.   

 不肯受, 曰:「 臣脩身絜行數十年, 終不以監門困故而受公子財. 」 
 
(위유은사왈후영, 년칠십, 가빈, 위대량이문감자.  공자문지, 왕청, 욕후유지. 

 불긍수, 왈 : 「 신수신혈행수십년, 종불이감문곤고이수공자재. 」)


 [위나라에는 '후영'이라는 선비가 운둔 생활을 하고 있었다. 

 나이가 70이 되었으나 집안이 가난하여 "대량성"의 이문(東門)을 지키는 문지기로 있었다. 
 공자가 전해 듣고 빈객으로 모시기 위해 많은 예물을 보냈다.  그러나 '후영' 한사코 받지 않고 말하기를 :

 " 신은 몸을 정결히 닦으며 수행하기를 수 십 년이 되었으나, 결국은 이문의 문지기가 되었습니다. 

 제가 비록 곤궁하게 산다 하여 어찌 공자님이 보낸 재물을 받을 수 있겠습니까 ? "라고 하였다.] 

  

 公子於是乃置酒大會賓客.  坐定, 公子從車騎, 虛左, 自迎夷門侯生.   

 侯生攝敝衣冠, 直上載公子上坐, 不讓, 欲以觀公子.  公子執轡愈恭. 
 
(공자어시내치주대회빈객.  좌정, 공자종거기, 허좌, 자영이문후생. 

 후생섭폐의관, 직상재공자상좌, 불양, 욕이관공자.  공자집비유공.)

   
 [그러자 공자는 술자리를 마련하여 많은 빈객들을 모이게 하였다. 

 빈객들의 자리가 모두 정해하자, 공자는 수레를 타고 기사들을 뒤따르게 했다. 
 공자는 수레의 왼쪽 자리를 비운 채 직접 동문으로 '후영'을 맞이하러 갔다. 

 '후영'은 다 해진 옷과 갓을 쓴 차림으로 곧바로 공자가 모는 수레에 올라 상석에 앉으면서,
 조금도 사양하는 기색이 없이 공자의 반응을 살펴 보고자 하였다. 

 그러나 공자는 말고삐를 잡은 채 더욱 공손한 태도로 대했다.] 

 

 侯生又謂公子曰:「 臣有客在市屠中, 願枉車騎過之. 」   

 公子引車入巿, 侯生下見其客朱亥, 俾倪故久立, 與其客語, 微察公子.  公子顏色愈和. 
 
(후생우위공자왈 : 「 신유객재시도중, 원왕거기과지. 」 

 공자인거입시, 후생하견기객주해, 비예고구입, 여기객어, 미찰공자.  공자안색유화.)

  
 ['후영'은 또 공자에게 말하기를 : " 저에게 시장에서 백정 일을 하는 친구가 한 명 있습니다. 

 원컨대 수레를 돌려 그곳에 들러 주었으면 합니다. "라고 하자.
 공자가 수레의 방향을 바꿔 시장으로 들어가 푸줏간 앞에 당도하자 '후영'은 수레에서 내려

 그의 친구 '주해'와 만나 오랫동안 서서 대화를 나누면서 곁눈질로 가만히 공자의 행동을 살펴 보았다. 

 그러나 공자의 안색은 시간이 갈수록 더욱 부드러웠다.] 

  

 當是時, 魏將相宗室賓客滿堂, 待公子舉酒.  巿人皆觀公子執轡.  從騎皆竊罵侯生.   

 侯生視公子色終不變, 乃謝客就車.  至家, 公子引侯生坐上坐, 遍贊賓客, 賓客皆驚. 

 酒酣, 公子起, 爲壽侯生前. 
 (당시시, 위장상종실빈객만당, 대공자거주. 시인개관공자집비.  종기개절매후생. 

 후생시공자색종불변, 내사객취거. 지가, 공자인후생좌상좌, 편찬빈객, 빈객개경. 

 주감, 공자기, 위수후생전.) 

 
 [이때 공자의 집에는 위나라의 문무대신과 종친들이 대청을 가득 메우며,

 공자가 돌아와 술잔을 들어 연회를 시작하기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시장 사람들은 모두 공자가 수레의 고삐를 잡고 '후영'을 기다리는 모습을 보았다.  
 공자를 수행했던 기사들은 모두 마음속으로 '후영'의 행동에 욕을 하였다. 
 '후영'은 자기의 행동에 전혀 화를 내지 않는 공자의 태도를 보고, 
친구와 작별인사를 하고 수레에 다시 올랐다.

 ​마침내 수레가 집에 당도하자, 공자는 '후영'을 인도하여 연회석의 상좌에 앉히고,

 빈객들에게 '후영'을 널리 칭찬하자 빈객들은 모두 놀랐다. 술자리가 어느 정도 무르익자,

 공자가 자리에서 일어나 '후영' 앞으로 다가가서 장수를 기원하는 술잔을 올렸다.]

  

 侯生因謂公子曰:「 今日嬴之爲公子亦足矣. 嬴乃夷門抱關者也, 而公子親枉車騎,  

 自迎嬴於眾人廣坐之中, 不宜有所過, 今公子故過之. 然嬴欲就公子之名, 故久立公子車騎巿中,

 過客以觀公子, 公子愈恭.  巿人皆以嬴爲小人, 而以公子爲長者能下士也.」
 (후생인위공자왈 : 「 금일영지위공자역족의, 이공자친왕거기,

 자영영어중인광좌지중, 불의유소과, 금공자고과지. 연영욕취공자지명, 고구입공자거기시중,

 과객이관공자, 공자유공. 시인개이영위소인, 이이공자위장자능하사야. 」  
 ['후영'이 공자에게 답하며 말하기를 : " 오늘 이 '후영'은 공자님을 위해 해야 할 일을 다 했습니다.  
 저는 동문을 지키는 일개 문지기로 성문에 빗장을 지르는 일을 하고 있는 사람입니다. 
 그런 사람을 만나기 위해 공자께서는 친히 수레의 고삐를 잡고 저를 찾아 왕림하여 저잣거리의

 여러 사람이 보는 앞에서 맞이하셨음에도, 원래는 방문하지 않아도 될 친구의 집을 제가 찾아가려고 하자,  

 공자께서는 말머리를 돌려 특별히 그곳을 들려 저로 하여금 친구를 만나도록 허락해 주셨습니다. 

 그것은 이 '후영'이 공자님의 이름을 높여 드리기 위해 일부러 오랫동안 공자님의 수레와 기사들을

 시장 가운데 세워 두고 지나가는 사람들이 볼 수 있도록 했습니다.     
 그러나 공자께서는 아랑곳하지 않고 더욱 태도를 공손히 하셨습니다.  
 

 이로써 시중 사람들은 모두 이 '후영'은 소인배고,  

 공자님은 선비들에게 몸을 낮출 줄 아는 덕망이 높은 분이라고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라고 하였다.] 

 

 於是罷酒, 侯生遂爲上客. 侯生謂公子曰:「 臣所過屠者朱亥, 此子賢者, 世莫能知, 故隱屠閒耳.」

 ​公子往數請之, 朱亥故不復謝, 公子怪之.

 (어시파주, 후생수위상객. 후생위공자왈 : 「 신소과도자주해, 차자현자, 세막능지, 고은도한이.」

 공자왕수청지, 주해고불복사, 공자괴지.) 

 [이윽고 주연이 파하고 공자는 '후영'을 상객으로 모셨다. '후영'이 공자를 위해 말하기를 :

 " 지난번에 제가 방문했던 푸줏간에 일하던 '주해'라는 친구는 어질고 지혜로운 사람이나,

 세상 사람들이 알아주지 않아 저자거리에 몸을 숨기고 백정 일을 하며 살아가고 있습니다. "라고 하였다.]

 ​공자는 몇 번이나 찾아가서 빈객으로 와 주기를 청했으나 '주해'는 그때마다 사양했으므로 

 공자는 '주해'를 이상하게 생각하였다.]

  

 魏安釐王二十年, 秦昭王已破趙長平軍, 又進兵圍邯鄲.   

 公子姊爲趙惠文王弟平原君夫人, 數遺魏王及公子書, 請救於魏.  魏王使將軍晉鄙將十萬眾救趙. 
 
(위안희왕이십년, 진소왕이파조장평군, 우진병위한단. 

 공자자위조혜문왕제평원군부인, 수유위왕급공자서, 청구어위.  위왕사장군진비장십만중구조.)

  
 [위'안희왕' 20년( BC 257 ),  진'소왕'은 이미 장평지전에서 조나라 군대를 대파하고 그 군사들을 
계속 진격시켜

 조나라의 도성 "한단"을 포위했다. '무기'의 누이는 조'혜문왕'의 동생이며 재상인 '평원군'에게 시집을 가서

 그의 부인이 되었기 때문에, 조나라를 구하기 위해 여러 차례에 걸쳐 '안희왕'과 '무기'에게 편지를 써서

 구원군을 보내 "한단"을 구해 줄 것을 요청하였다. 

 그러자 '안희왕'은 장군 '진비'에게 10만의 군사를 주어 조나라를 구원하도록 하였다. ] 

 

 秦王使使者告魏王曰:「 吾攻趙旦暮且下, 而諸侯敢救者, 已拔趙, 必移兵先擊之. 」  

 魏王恐, 使人止晉鄙, 留軍壁鄴, 名爲救趙, 實持兩端以觀望. 
 
(진왕사사자고위왕왈 : 「 오공조단모차하, 이제후감구자, 이발조, 필이병선격지. 」 

 위왕공, 사인지진비, 류군벽업, 명위구조, 실지양단이관망.) 

 
 [진'소왕'은 이 사실을 알고 사자를 위왕에게 보내 자기의 말을 전하기를 : " 내가 조나라의 도성
 "한단"을 

 포위하여 이제 조석지간에 함락을 시킬 수 있게 되었소, 지금 감히 조나라를 구하려고 하는 제후들이 있다면,

 내가 "한단"을 함락시킨 다음 필히 군사를 움직여 그 제후부터 먼저 공격할 것이오. "라고 하였다. 

 위나라 '안희왕'은 진나라'소왕'의 보복을 두려워하여 사자를 '진비'에게 보내 진군을 멈추고 "업성"에 주둔하며

 방어하도록 지시하여 명목상으로는 조나라를 구원하는 것처럼 하였으나 실제로는 진나라와 조나라의 눈치를 보며

 형세를 관망하자는 것이었다. ]  

  

 平原君使者冠蓋相屬於魏, 讓魏公子曰:「 勝所以自附爲婚姻者, 以公子之高義, 爲能急人之困.  

 今邯鄲旦暮降秦而魏救不至, 安在公子能急人之困也!且公子縱輕勝, 棄之降秦,

 獨不憐公子姊邪 ?」公子患之, 數請魏王, 及賓客辯士說王萬端.  魏王畏秦, 終不聽公子.  

  (평원군사자관개상속어위, 양위공자왈 : 「 승소이자부위혼인자, 이공자지고의, 위능급인지곤.   

 금한단단모강진이위구불지, 안재공자능급인지곤야 ! 차공자종경승, 기지강진, 독불련공자자야 ? 」 

 공자환지, 수청위왕, 급빈객변사설왕만단.  위왕외진, 종불청공자.)


 ['평원군'은 사자를 끊임없이 위나라에 계속해서 보내 '신릉군'을 꾸짖으며 말하기를 :

 " 이 '조승'이 스스로 공자의 집안과 혼인을 한 까닭은 공자가 의를 중하게 여겨 다른 사람이 곤궁한 처지에 

 빠졌을 때 그 위급함을 보면 망설이지 않고 구해줄 수 있으리라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지금 우리 "한단"이 조석지간에 진나라에 항복하려 하고 있음에도 위나라의 구원군은 오지 않고 있습니다. 
 이러고도 어찌 공자가 다른 사람의 어려움을 구할 수 있는 의기 있는 사람이라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 

 ​이것은 또한 공자께서 이 '승'을 가볍게 봄으로 해서 이 사람을 버려 진왕에게 항복하게 하는데,

 그렇게 된다면 군의 누이가 너무 불쌍하지 않겠습니까 ? "라고 하였다. 
 '신릉군'은 이것을 걱정하여 여러 차례에 걸쳐 위왕에게 청원하였으며,

 다시 빈객들 중 변설에 능한 사람을 시켜 온갖 방법을 다 동원해서 설득하려고 하였다.
 그러나 위왕은 진나라의 세력을 두려워하여, 끝내 공자의 말에 귀를 기울이지 않았다.]
 

 

 公子自度終不能得之於王, 計不獨生而令趙亡, 乃請賓客, 約車騎百餘乘,

 欲以客往赴秦軍, 與趙俱死. 行過夷門, 見侯生, 具告所以欲死秦軍狀. 

 辭決而行, 侯生曰:「 公子勉之矣, 老臣不能從. 」 
 (공자자도종불능득지어왕, 계불독생이령조망, 내청빈객, 
약거기백여승,

 욕이객왕부진군, 여조구사. 행과이문, 견후생, 구고소이욕사진군장. 

 사결이행, 후생왈 : 「 공자면지의, 노신불능종.」) 

 
 [신릉군은 결국은 자기가 위왕의 마음을 돌릴 수 없다고 헤아린 끝에 조나라가 망하면 
자기도 홀로 살 수 없다고

 생각하여, 즉시 빈객들과 의논하여 수레와 기마 100여 승을 준비한 다음 빈객들을 이끌고 진나라 군대와 부딪혀

 조나라를 위해 죽겠다고 결심했다. '신릉군'과 그 빈객들 일행이 동문을 나설 때 성문을 지키고 있던

 '후영'을 보게 되었고, 그에게 진나라 군대와 싸워 죽으려고 한다는 결심을 자세하게 설명하였다. 
 이윽고 공자가 작별인사를 하고 성문을 나서는데 '후영'이 그를 향해 말하기를 :

 " 공자께서는 힘껏 싸우시기 바랍니다. 저는 늙어 따라 갈 수가 없습니다. "라고 하였다.]

 

 公子行數里, 心不快, 曰:「 吾所以待侯生者備矣, 天下莫不聞, 今吾且死而侯生曾無一言

 半辭送我, 我豈有所失哉 ? 」復引車還, 問侯生.  侯生笑曰:「 臣固知公子之還也. 」 
 (공자행수리, 심불쾌, 왈 : 「 오소이대후생자비의, 천하막소문, 
금오차사이후생증무일언반사송아,

 아개유소실재 ? 」  복인거환, 문후생. 후생소왈 : 「 신고지공자지환야.」) 

 
 [공자는 몇 리를 가는 동안 속으로 불쾌한 마음이 들어 말하기를 : " 내가 '후영'을 지금까지 그렇게 후하게 

 대한 일을 세상사람들 중 모르는 사람이 없는데, 지금 내가 죽음을 각오하고 출전한다 말했음에도

 ​'후영'은 헤어지기 아쉽다는 말 한마디 없으니 도대체 내가 그에게 무슨 실례를 저질렀단 말인가 ? "라고 하며, 
 수레의 방향을 돌려 '후영'에게 찾아가서 물었다.

 ​'후영'이 웃으면서 대답하기를 : " 신은 공자께서 다시 돌아오실 줄 알았습니다. "라고 하였다.]

 

 曰:「 公子喜士, 名聞天下.  今有難, 無他端而欲赴秦軍, 譬若以肉投餒虎, 何功之有哉 ?  

 尚安事客 ?  然公子遇臣厚, 公子往而臣不送, 以是知公子恨之復返也. 」 
 
(왈 : 「 공자희사, 명문천하. 금유난, 무타단이욕부진군, 비약이육투뇌호, 하공지유재 ? 

 상안사객 ?  연공자우신후, 공자왕이신불송, 이시지공자한지부반야.」)


 [또 말하기를 : "공자께서 선비 사귀기를 즐겨하신다는 사실은 천하가 다 알고 있습니다.  
 지금 어려운 처지에 놓이시게 되어, 아무런 준비도 없이 진나라 군사들과 싸우러 출정하겠다는 것은

 마치 굶주린 호랑이에게 고기를 던져주는 것과 같은 일인데, 어찌 공을 세울 수 있겠습니까 ? 

 만약에 그리 행동하신다면 지금까지 양성한 문객들을 어디다 써먹겠습니까 ? 공자께서는 평소에 신을 후하게

 대우하셨지만, 지금 죽음을 무릅쓰고 출전한다고 찾아온 공자를 전송하지도 않았으니,

 공자께서는 가슴에 한을 품으시게 되어 이로 인하여 다시 돌아오실 줄 알고 있었습니다."라고 하였다.] 

  

 公子再拜, 因問.  侯生乃屏人閒語, 曰:「 嬴聞晉鄙之兵符常在王臥內, 而如姬最幸,  

 出入王臥內, 力能竊之.  嬴聞如姬父爲人所殺, 如姬資之三年, 自王以下欲求報其父仇, 莫能得.

 如姬爲公子泣, 公子使客斬其仇頭, 敬進如姬.  如姬之欲爲公子死, 無所辭, 顧未有路耳. 

 公子誠一開口請如姬, 如姬必許諾, 則得虎符奪晉鄙軍, 北救趙而西卻秦, 此五霸之伐也. 」     
 (공자재배, 인문.  후생내병인한어, 왈 : 「 영문진비지병부상재왕와내, 이여희최행,

 출입왕와내, 력능절지.  영문여희부위인소살, 여희자지삼년, 자왕이하욕구보기부구, 막능득.

 여희위공자읍, 공자사객참기구두, 경진여희.  여희지욕위공자사, 무소사, 고미유로이.공

 자성일개구청여희, 여희필허락, 즉득호부탈진비군, 북구조이서각진, 차오패지벌야. 」) 

 
 ['무기'가 재배하며 그 이유를 물었다.  '후영'이 주위 사람을 물리치고 '무기'에게 말하기를 :

 " 제가 듣기에 '진비'가 이끌고 있는 군사들의 지휘권인 병부 한쪽이 위왕의 침실에 있다고 합니다. 

 지금 '안희왕'에게 가장 총애를 받고 있는 여인은 '여희'입니다.

 그녀만이 왕의 침소를 드나들 수 있어 병부를 몰래 훔쳐낼 수 있습니다.  

  제가 듣기로 옛날 '여희'의 부친이 어떤 사람에게 살해되었을 때 '여희'는 3년 동안이나 자신과 왕을 비롯한

 그 이하의 사람들이 그녀 부친의 원수를 갚으려고 하였으나, 그 원수를 갚을 수 없었습니다. 

 '여희'가 공자에게 눈물로 호소를 하자, 공자는 문객을 시켜 그 원수의 머리를 베어 그녀에게 주었습니다. 
 그 일로 '여희'는 공자를 위해서라면 죽음도 마다하지 않는 마음을 갖게 되었으나 아직껏 그 은혜를 갚지 못하고

 있습니다. 공자께서는 만약 입을 한 번 열어 절실한 마음으로 여희에게 청하시면 그녀는 반드시 허락할 것입니다.

 그 병부를 이용하여 '진비'가 거느린 군사들을 빼앗으십시오.
 이어서 그 군사를 거느리고 북진하여 진군을 물리쳐 조나라를 구원한다면, 

 이는 오패( '제환공', '진문공', '송양공', '초장왕', '진목공')와 견줄 만한 일입니다. "라고 하였다.] 

 

 公子從其計, 請如姬. 如姬果盜晉鄙兵符與公子.

 公子行, 侯生曰:「 將在外, 主令有所不受, 以便國家.  公子即合符, 而晉鄙不授公子兵而復請之, 

 事必危矣.  臣客屠者朱亥可與俱, 此人力士.  晉鄙聽, 大善;不聽, 可使擊之.」 
 
(공자종기계, 청여희.  여희과도진비병부여공자.

 공자행, 후생왈 : 「 장재외, 주령유소불수, 이편국가.  공자즉합부, 이진비불수공자병이부청지,

 사필위의.  신객도자주해가여구, 차인력사.  진비청, 대선 ; 불청, 가사격지.」)

 
 ['무기'는 '후영'의 계책대로 '여희'에게 요청하자,

 ​그녀는 과연 '진비'의 군대를 지휘할 수 있는 병부를 훔쳐 공자에게 주었다.

 공자가 떠나려고 하자 '후영'이 말하기를 : " 장수는 전장에 나와 있을 경우 왕의 명도 받들지 않을 수 있는데,

 이것은 정당하지 않지만 나라의 위해서는 어쩔 수 없습니다. 
 공자께서 '진비'의 병부와 맞추어 보았음에도 '진비'가 군사를 넘겨주지 않고 왕에게 다시 확인한다면,  
  

 공자께서는 틀림없이 위험에 처하게 될 것입니다.  일을 확실히 하기 위해서 저의 친구인 '주해'를 데려가십시오, 

 그는 힘이 아주 센 장사입니다. '진비'가 공자의 명을 받든다면 좋은 일이지만,  

 듣지 않는다면 '주해'를 시켜 죽이도록 하십시오. "라고 하였다. ]
 

 於是公子泣.  侯生曰:「 公子畏死邪 ? 何泣也 ? 」 

 公子曰:「 晉鄙嚄唶宿將, 往恐不聽, 必當殺之, 是以泣耳, 豈畏死哉 ? 」  
 
(어시공자읍.  후생왈 : 「 공자외사야 ?  하읍야 ? 」

 공자왈 : 「 진비획차숙장, 왕공불청, 필당살지, 시이읍이, 개외사재 ? 」)


 [후영'의 말을 들은 공자가 눈물을 흘리며 울었다. 

 '후영'이 묻기를 : " 공자께서는 죽음이 두려우십니까 ?   어찌하여 우는 것입니까 ? "라고 하자.

 '무기'가 대답하기를 : " '진비'는 용맹하고 기개 높으며 전쟁 경험과 군사지식이 풍부한 장수입니다. 

 내가 병부를 제시했음에도 명을 듣지 않는다면, 그를 죽여야 하는데 죄없는 사람이 무고하게 죽게 되니

 이를 슬퍼하는 것입니다.  어찌 내가 죽음을 두려워서 이겠습니까 ? "라고 하였다.]
  
 
於是公子請朱亥.  朱亥笑曰:「 臣迺市井鼓刀屠者, 而公子親數存之, 所以不報謝者,  

 以爲小禮無所用.  今公子有急, 此乃臣效命之秋也. 」遂與公子俱.  公子過謝侯生.     
 (어시공자청주해.  주해소왈 : 「 신내시정고도도자, 이공자친수존지, 소이불보사자,

 이위소례무소용.  금공자유급, 차내신효명지추야. 」수여공자구.  공자과사후생.)


 [말을 마친 공자가 즉시 주해를 찾아가 자기와 같이 갈 것을 청하였다. 

 '주해'가 웃으면서 말하기를 : " 저는 시장 한가운데서 칼을 휘두르며 짐승을 잡는 백정입니다.
 저와 같은 비천한 사람을 공자께서는 여러 번에 걸쳐 찾아 주셨습니다. 

 그러나 제가 그때마다 답례를 하지 않은 이유는 그런 것들이 작은 예의에 불과하여 

 아무 소용이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습니다.  이제 공자께서 급한 일이 생겼으니

 이때가 바로 제가 목숨을 바쳐 그 은혜에 보답할 때가 아닌가 합니다. "라고 하였다.

 드디어 '주해'는 '무기'와 함께 가기로 하였다. '무기'는 지나는 길에 '후영'을 만나 감사의 말을 하였다.]  

 

 侯生曰:「 臣宜從, 老不能.  請數公子行日, 以至晉鄙軍之日, 北鄉自剄, 以送公子. 」 公子遂行.

 至鄴, 矯魏王令代晉鄙. 晉鄙合符, 疑之, 舉手視公子曰:「今吾擁十萬之眾, 屯於境上, 國之重任, 

 今單車來代之, 何如哉?」 欲無聽.  朱亥袖四十斤鐵椎, 椎殺晉鄙, 公子遂將晉鄙軍.   
 (후생왈 : 「 신의종, 노불능.  청수공자행일, 이지진비군지일, 북향자경, 이송공자. 」공자수행.

 지업, 교위왕령대진비.  진비합부, 의지, 거수시공자왈 : 「 금오옹십만지중, 둔어경상, 국지중임,

 금단거래대지, 하여재 ? 」 욕무청.  주해수사십근철추, 추살진비, 공자수장진비군.)

   
 ['후영'이 말하기를 : " 저도 마땅히 따라야 하지만, 너무 늙어 같이 갈 수가 없습니다. 

 청컨대 공자의 일행이 '진비'의 군영에 당도하는 날짜를 계산하여 그 날이 되면 북향을 하고 스스로 목을 찔러

 자결함으로 해서 공자의 환송을 대신하려고 합니다. "라고 하였다. '무기'는 마침내 '진비'의 진영으로 떠났다.

 "업성"에 당도한 공자가 '진비'를 만나 그 직무를 대신한다는 위왕의 명을 거짓으로 전했다.

 '진비'는 병부를 맞춰봤으나 마음속으로 의심쩍은 생각이 들어 손을 세차게 흔들며 공자를 노려보며 말하기를 :

 " 지금 내가 10만의 군사를 이끌고 나라의 국경에 주둔하고 있으며, 이는 실로 나라의 막중한 임무인데,

 지금 공자께서는 겨우 수레 한대만 몰고 와서 저를 대신하려고 하니 이는 어찌 된 일인지 모르겠습니다."하며,

 '진비'는 '무기'의 말을 들으려 하지 않았다. '주해'가 소매 속에서 40근 나가는 철퇴를 꺼내 '진비'를 쳐서 죽이자,

 '무기'는 '진비'의 군대를 장악하였다.] 

 

 勒兵下令軍中曰:「 父子俱在軍中, 父歸; 兄弟俱在軍中, 兄歸; 獨子無兄弟, 歸養. 」 

 得選兵八萬人, 進兵擊秦軍.  秦軍解去, 遂救邯鄲, 存趙.  趙王及平原君自迎公子於界,

 平原君負韊矢爲公子先引.  趙王再拜曰:「 自古賢人未有及公子者也. 」   
 (륵병하령군중왈 : 「 부자구재군중, 부귀 ;  형제구재군중, 형귀 ;  독자무형제, 귀양. 」

 득선병팔만인, 진병격진군.  진군해거, 수구한단, 존조. 조왕급평원군자영공자어계,

 평원군부란시위공자선인. 조왕재배왈 : 「 자고현인미유급공자자야.」) 

 
 ['무기'는 군사들을 점검한 다음 군령을 내리기를 : " 군대에 부자가 같이 있으면 아버지는 집으로 돌아가고 ;

 형제가 같이 있으면 형이 집으로 돌아가고 ; 형제가 없는 외아들은 돌아가서 부모를 모시도록 하라."라고 하였다. 

 '무기'는 엄선하고 남은 군사 8만을 이끌고 진나라 진영으로 진격하였다, 초나라에서는 춘신군 '황헐'을 파견하여

 초, 위, 조 3국의 연합하에 "한단"의 진군을 포위하여 진나라 장수 '정안평'이 지휘하던 2만명의 군대를 투항시켜

 "한단"의 포위를 풀었으며, '무기'는 마침내 "한단"을 구하고 조나라를 지켰다. 

 조나라의 '효성왕'과 '평원군'이 몸소 국경 밖으로 나와 '무기'를 맞이하였고, 

 '평원군'은 직접 동개(화살통)를 어깨에 메고 '무기'를 위하여 앞장서서 길을 안내하였다.

 조왕이 '무기'에게 재배하며 말하기를 : " 옛날부터 지혜로운 사람이 많이 있었지만,

 아직까지 공자에 미치는 사람은 없었습니다. "라고 하였다.]

 

 當此之時, 平原君不敢自比於人.  公子與侯生決, 至軍, 侯生果北鄉自剄. 魏王怒公子之盜其兵符,

 矯殺晉鄙, 公子亦自知也.  已卻秦存趙, 使將將其軍歸魏, 而公子獨與客留趙. 
 
(당차지시, 평원군불감자비어인.  공자여후생결, 지군, 후생과북향자경.  
위왕노공자지도기병부,

 교살진비, 공자역자지야.  이각진존조, 사장장기군귀위, 이공자독여객류조.)  

 

 [이때부터 '평원군'은 감히 자기 자신을 '무기'와 비교하려 하지 않았다. 

 본국에 남아있던 '후영'은 '무기'가 '진비'의 진영에 당도했다는 소식을 듣고, 과연 북쪽으로 머리를 향한 다음

 스스로 목을 찔러 죽었다.  '무기'는 자기가 병부를 훔쳐 임금의 명령이라고 속여 '진비'를 죽인 것에 대해

 위왕이 분노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진나라 군사를 물리치고 조나라를 구한 목적을 달성한 '무기'는

 군사들을 휘하의 장수에게 주어 위나라에 돌려보내고 자신은 혼자 조나라에 손님으로 남았다.] 

 

 趙孝成王德公子之矯奪晉鄙兵而存趙, 乃與平原君計, 以五城封公子.  

 公子聞之, 意驕矜而有自功之色. 
 
(조효성왕덕공자지교탈진비병이존조, 내여평원군계, 이오성봉공자. 

 공자문지, 의교긍이유자공지색.)

  
 [조나라 '효성왕'은 '진비'에게 임금의 명령이라고 속여 조나라를 구원해 준 '무기'의 은혜에 보답하기 위해

 '평원군'과 의논한 끝에 '무기'에게 조나라의 다섯 개 성을 봉읍으로 하사하려 하였다. 

 '무기'는 이 소식을 듣고 마음에 교만함이 생겨 스스로 큰 공을 세웠다고 자랑하는 빛이 역력히 나타났다.] 

 

 客有說公子曰:「 物有不可忘, 或有不可不忘.  夫人有德於公子, 公子不可忘也; 

 公子有德於人, 願公子忘之也.  且矯魏王令, 奪晉鄙兵以救趙, 於趙則有功矣, 於魏則未爲忠臣也.  

 公子乃自驕而功之, 竊爲公子不取也. 」 
 
(객유설공자왈 : 「 물유불가망, 혹유불가불망.  부인유덕어공자, 공자불가망야 ;

 공자유덕어인, 원공자망지야.  차교위왕령, 탈진비병이구조, 어조즉유공의, 어위즉미위충신야. 

 공자내자교이공지, 절위공자불취야.」) 


 [그의 빈객 한 사람이 '무기'에게 말하기를 : " 일에는 잊어야하는 하는 있고, 또한 잊으면 안 되는 일이 
있습니다. 

 '여희'부인이 공자에게 베푼 덕은, 공자께서는 절대 잊으면 안 되는 일이고 ;

 공자께서 남에게 베푼 덕은 원컨대 공자께서는 잊어야만 합니다.  

 또한 위왕의 명령이라고 속여 '진비'의 군사를 빼앗아 조나라를 구원함으로 해서 공을 세웠으니

 위나라의 입장에서는 충신이 아닙니다. 그런데 공자께서는 스스로 자만하여 공이 있다고 하십니다. 

 이는 공자께서 취할 태도가 아님을 감히 말씀드립니다. "라고 하였다.]

 

 於是公子立自責, 似若無所容者.  趙王埽除自迎, 執主人之禮, 引公子就西階.   

 公子側行辭讓, 從東階上.  自言罪過, 以負於魏, 無功於趙. 
 
(어시공자입자책, 사약무소용자.  조왕소제자영, 집주인주례, 인공자취서계. 

 공자측행사양, 종동계상.  자언죄과, 이부어위, 무공어조.)

  
 [이제야 '무기'는 스스로를 책하며 마치 부끄러워 몸 둘 바를 모르는 듯이 행동했다. 

 조'효성왕'은 궁궐 주위를 깨끗이 청소시키고 직접 나와 '무기'를 맞이하여,
 주인의 예로 '무기'를 대하며 서쪽 계단을 이용하여 전당에 오르게 하였다. 

 '무기'는 사양하며 동쪽 계단을 이용하여 조왕의 뒤에 비켜서서 올랐다. 

 '무기'는 자책하기를 자기는 위나라를 저버리고, 조나라에는 공을 세우지 못하고 죄를 지었다고 생각하였다.] 

 

 趙王侍酒至暮, 口不忍獻五城, 以公子退讓也.  公子竟留趙.   

 趙王以鄗爲公子湯沐邑, 魏亦復以信陵奉公子.  公子留趙.
 
(조왕시주지모, 구불인헌오성, 이공자퇴양야.  공자경류조. 

 조왕이호위공자탕목읍, 위역부이신릉봉공자.  공자류조.)

  
 [조왕이 '무기'를 접대하며 저녁때까지 술을 마셨으나, 조나라의 다섯 개의 성을 봉읍으로 하사하겠다는

 말을 하지 못한것은 '무기'의 사양하는 태도가 너무 완강했기 때문이었다. 

 '무기'는 결국은 위나라에 돌아가지 못하고 조나라에 머무르게 되었다. 
 조왕은 "호읍"을 '무기'의 탕목읍으로 하사했으며,  위나라 또한 신릉군의 봉작을 다시 돌려줬다. 

 그러나 '무기'는 계속 조나라에 머물렀다.] 

 

 公子聞趙有處士毛公藏於博徒, 薛公藏於賣漿家, 公子欲見兩人, 兩人自匿不肯見公子.   

 公子聞所在, 乃閒步往從此兩人游, 甚歡. 
 
(공자문조유처사모공장어박도, 설공장어매장가, 공자욕견양인, 양인자익불긍견공자. 

 공자문소재, 내한보왕종차양인유, 심환.) 

 
 ['무기'는 듣기로 조나라에 시정에 도박꾼 가운데 숨어 지내고 있던 '모공'과 술을 파는 사람 집에 

 숨어 지내고 있던 '설공'이라는 처사가 있다는 것을 알고, 그 두 사람을 만나보려고 하였으나, 

 두 사람은 스스로 몸을 숨겨 '무기'를 만나려고 하지 않았다. 
 이에 '무기'는 다시 그들의 소재지를 확인한 다음 그들이 있는 곳에 아무도 몰래 접근하여

 그 두 사람과 자리를 같이하며 매우 기뻐하였다. ] 

 

 平原君聞之, 謂其夫人曰:「 始吾聞夫人弟公子天下無雙,  

 今吾聞之, 乃妄從博徒賣漿者游, 公子妄人耳. 」 夫人以告公子. 
 
(평원군문지, 위기부인왈 : 「 시오문부인제공자천하무쌍,

 금오문지, 내망종박도매장자유, 공자망인이. 」 부인이고공자.) 

 
 ['평원군'이 그 소식을 듣고 '평원군'의 누이인 그의 부인에게 말하기를 : 

 " 나는 부인의 동생 '신릉군'이 천하에 견줄 수 없는 지혜로운 사람이라고 알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지금 들리는 소문에 의하면 '신릉군'은 도박꾼과 술을 파는 자들과 함께 어울려 사귄다고 하니 

 '신릉군'이 망녕이 난 것이 아닌지 모르겠소 ! "라고 하였다.

 '평원군'의 부인은 그 말을 '신릉군'에게 전하였다.] 

  

 公子乃謝夫人去, 曰:「 始吾聞平原君賢, 故負魏王而救趙, 以稱平原君.   

 平原君之游, 徒豪舉耳, 不求士也.  無忌自在大梁時, 常聞此兩人賢, 至趙, 恐不得見. 

 以無忌從之游, 尚恐其不我欲也, 今平原君乃以爲羞, 其不足從游. 」 乃裝爲去. 
 (공자내사부인거, 왈 : 「 시오문평원군현, 고부위왕이구조, 이칭평원군. 

 평원군지유, 도호거이, 불구사야.  무기자재대량시, 상문차양인현, 지조, 공불득견. 

 이무기종지유, 상공기불아욕야, 금평원군내이위수, 기불족종유. 」 내장위거. )

    
 [신릉군이 즉시 누이에게 작별을 고하며 말하기를 : " 나는 옛날부터 '평원군'이 지혜로운 사람이라고 
알고 

 있었으며, 때문에 위왕에게 죄를 지으면서까지 조나라를 구원하여 '평원군'의 저에 대한 기대에 부응했습니다. 

 그러나 '평원군'은 친구 사귀는 방법에 있어서 단지 호방스러운 행동만 있었을 뿐 진정한 선비들을 구하려는 

 마음이 없는 것 같습니다.  이 '무기'는 옛날 위나라 도성인 "대량"에 있을 때부터 항상 이 두 사람이 

 지혜롭다는 소문을 듣고 알고 있었으며,  이에 제가 조나라에 들어와 살게 되었으나, 

 나는 단지 그 두 사람을 만나보지 못할까 걱정하고 있었습니다. 이 '무기'가 그들에게 다가가서 사귀고 싶었지만,

 나를 좋아하지 않으면 어쩌나 하는 걱정뿐이었는데, 지금 '평원군'께서 그들과 사귀는 일을 수치로 여긴다하니 

 내가 '평원군'을 사귀기에 부족한 사람인 것 같습니다."라고 하였다. 

 '무기'는 자기의 숙사로 돌아와서 행장을 꾸려 조나라를 떠나려고 하였다.]

 

 夫人具以語平原君.  平原君乃免冠謝, 固留公子.   

 平原君門下聞之, 半去平原君歸公子, 天下士復往歸公子, 公子傾平原君客.
 
(부인구이어평원군.  평원군내면관사, 고류공자. 

 평원군문하문지, 반거평원군귀공자, 천하사부왕귀공자, 공자경평원군객.)

  
 ['무기'의 누이는 '평원군'에게 '무기'의 말을 자세하게 전했다. 

 '평원군'은 즉시 자기의 관을 벗고 '무기'를 찾아가 사죄하며 조나라에 계속 머물러 주기를 애원했다. 
 '평원군'의 빈객들이 이 소문을 듣고, 그들 중 반이나 되는 사람들이 '무기'에게로 옮겼으며,

 천하의 선비들도 다시 '무기'에게 돌아와 몸을 의탁하자, '무기'의 빈객이 '평원군'의 빈객보다 많아지게 되었다.] 

 

 公子留趙十年不歸.  秦聞公子在趙, 日夜出兵東伐魏.  魏王患之, 使使往請公子.   

 公子恐其怒之, 乃誡門下:「 有敢爲魏王使通者, 死. 」 賓客皆背魏之趙, 莫敢勸公子歸. 
 
(공자류조십년불귀.  진문공자재조, 일야출병동벌위.  위왕환지, 사사왕청공자. 

 공자공기노지, 내계문하 : 「 유감위위왕사통자, 사. 」 빈객개배위지조, 막감권공자귀.) 

 
 [신릉군 조나라에 머문 지 10년이 되도록 위나라로 돌아가지 못했다. 

 진나라는 '무기'가 조나라에 머물고 있음을 알고 밤낮으로 군사를 일으켜 동쪽의 위나라를 공격했다.    

 위왕이 두려워하여 사자를 조나라에 보내 '무기'를 불렀다. 

 '무기'는 위왕이 지난 일로 인해 노여워할까 두려워 그 대문에다 경계의 말을 써서 붙였다.
  " 감히 위왕의 사신을 나에게 데리고 오는 자가 있으면 죽여 버릴 것이다 ! "
 

 빈객들은 모두 위나라를 등지고 조나라에 머물고 있던 사람들이라,

 감히 '무기'에게 위나라에 돌아가라고 권하지 못하였다.]

 

 毛公· 薛公兩人往見公子曰:「 公子所以重於趙, 名聞諸侯者, 徒以有魏也. 

 今秦攻魏, 魏急而公子不恤, 使秦破大梁而夷先王之宗廟, 公子當何面目立天下乎 ? 」
 
(
모공· 설공양인왕견공자왈 : 「 공자소이중어조, 명문제후자, 도이유위야. 

 금진공위, 위급이공자불휼, 사진파대량이이선왕지종묘, 공자당하면목입천하호 ? 」)

  
 [
'모공'과 '설공' 두 사람이 찾아와서 '무기'를 만나 말하기를 :

  " 공자님이 조나라에서 존중을 받고, 천하 제후들에게 이름을 떨치게 된 것은 위나라가 있기 때문입니다. 

 지금 진나라의 공격을 받고 있는 위나라가 그 위급한 상황에 처해 공자를 부르고 있는데 공자께서는

 오히려 남의 일처럼 걱정하지 않고 있습니다. 진나라가 "대량"을 파괴하고 선왕을 모신 종묘를 

 무너뜨리려 하는데, 공자는 장차 무슨 면목으로 세상에 얼굴을 들고 다니려 하십니까 ? "라고 하였다.] 

 

 語未及卒, 公子立變色, 告車趣駕歸救魏.  魏王見公子, 相與泣, 而以上將軍印授公子, 公子遂將.

 魏安釐王三十年, 公子使使遍告諸侯.  諸侯聞公子將, 各遣將將兵救魏. 
 
(어미급졸, 공자입변색, 고거취가귀구위. 위왕견공자, 상여읍, 이이상장군인수공자, 공자수장.

 안리왕삼십년, 공자사사편고제후.  제후문공자장, 각견장장병구위.) 

 
 [두 사람의 말이 미처 끝나기도 전에 '무기'의 안색이 변하더니 벌떡 일어나 빈객들에게 명하여

 수레를 준비하도록 하여 그 즉시 귀국하여 위나라를 구원하려고 했다.

 위'안희왕'은 조나라의 구원군을 이끌고 돌아온 '무기'를 보자 서로 껴안고 눈물을 흘렸고,

 이어서 상장군의 인을 '무기'에게 주어 위나라 군사들을 이끌도록 했다.

 '안희왕' 30년, '무기'는 제후들에게 사자를 보내 장군이 되었음을 두루 알리자, 
 제후들은 '무기'가 장군이 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각각 군사를 보내 위나라를 구하게 하였다. ]

 

 公子率五國之兵破秦軍於河外, 走蒙驁.  遂乘勝逐秦軍至函谷關, 抑秦兵, 秦兵不敢出.   

 當是時, 公子威振天下, 諸侯之客進兵法, 公子皆名之, 故世俗稱魏公子兵法.
 
(공자솔오국지병파진군어하외, 주몽오.  수승승축진군지함곡관, 억진병, 진병불감출. 

 당시시, 공자위진천하, 제후지객진병법, 공자개명지, 고세속칭위공자병법.)

  
 ['무기'는 다섯 나라(한, 조, 위, 초, 연)의 연합군을 이끌고 진나라 군사들을 "하외"에서 무찌르자,

 진나라 장수 '몽오'는 달아났다.  드디어 승세를 탄 오국 연합군은 진군의 뒤를 추격하여 

 "함곡관"에 이르러 진나라 군대를 압박하니 진군은 감히 "함곡관" 밖으로 나오지 못했다. 

 이때 '무기'의 이름은 천하를 진동시키고 제후들의 그 빈객들로 하여금 '무기'에게 병법을 올리게 하자,

 '무기'는 그 병법들 모두에 이름을 지었으며, 그리하여 세상에서는 이것을 《위공자병법》이라 칭했다.] 

  

 秦王患之, 乃行金萬斤於魏, 求晉鄙客, 令毀公子於魏王曰:「 公子亡在外十年矣, 今爲魏將,  

 諸侯將皆屬, 諸侯徒聞魏公子, 不聞魏王.  公子亦欲因此時定南面而王, 諸侯畏公子之威, 方欲共立之. 」
 
(진왕환지, 내행금만근어위, 구진비객, 령훼공자어위왕왈 : 「 공자망재외십년의, 금위위장, 제후장개속,

 제후도문위공자, 불문위왕.  공자역욕인차시정남면이왕, 제후외공자지위, 방욕공입지.」)

 
 [진나라 '장양왕'은 '위무기'가 진나라의 심각한 위협이라는 것을 걱정하여 황금 만 근을 위나라에 
뇌물을 보내

 옛날 '진비'의 빈객들 찾아내 그들로 하여금 '안희왕'에게 '무기'를 헐뜯도록 하였다. 

 " '위무기' 도망쳐 외국에서 10년만에 돌아와 위나라의 장군이 되었고 제후들이 보낸 장군들도

 모두 공자의 휘하에 속해 있습니다. 제후들은 위나라에 '무기'만 있었지, 위왕이 있음을 알지 못합니다. 

 공자 역시 이 일로 인해 남면하여 왕이 되려고 하며, 제후들은 또한 공자의 위세에 눌려 다같이

 왕으로 올리려 하고 있습니다. "라고 하였다.]

 

 數使反閒, 偽賀公子得立爲魏王未也.  魏王日聞其毀, 不能不信, 後果使人代公子將. 

 公子自知再以毀廢, 乃謝病不朝, 與賓客爲長夜飲, 飲醇酒, 多近婦女.   

 日夜爲樂飲者四歲, 竟病酒而卒.  其歲, 魏安釐王亦薨.
 
(진수사반간, 위하공자득입위위왕미야.  위왕일문기훼, 불능불신, 후과사인대공자장.

 공자자지재이훼폐, 내사병불조, 여빈객위장야음, 음순주, 다근부녀. 

 일야위락음자사세, 경병주이졸.  기세, 위안희왕역훙.)

  
 [진나라가 여러 차례에 걸쳐 반간계를 써서 '무기'가 즉위하여 위왕이 되었는지를 안 되었는지를 묻는 

 축하의 편지를 거짓으로 보냈다. 위왕은 매일 신릉군을 모함하는 소문을 듣자, 믿지 않을 수 없게 되었고,

 이윽고 '안희왕'은 '무기'를 대신하여 다른 사람을 상장군의 자리에 앉혔다.

 '무기' 자신도 남의 모함을 받아 다시 쫓겨나자, 이에 병을 핑계로 조정에 나가지 않고 빈객들과 함께 밤새도록

 독한 술을 마시면서 여인들을 가까이 했다. 
 매일 밤낮으로 여자와 술을 가까이 한지 4년 만에 이윽고 술중독으로 인해 병이 들어 죽고 말았다.

 그 해에 '안희왕'도 역시 죽었다. (기원전 243년) ] 

 

 秦聞公子死, 使蒙驁攻魏, 拔二十城, 初置東郡.  其後秦稍蠶食魏, 十八歲而虜魏王, 屠大梁.

 高祖始微少時, 數聞公子賢.  及即天子位, 每過大梁, 常祠公子.   

 高祖十二年, 從擊黥布還, 爲公子置守冢五家, 世世歲以四時奉祠公子.
 
(진문공자사, 사몽오공위, 발이십성, 초치동군.  기후진초잠식위, 십팔세이로위왕, 도대량.

 고조시미소시, 수문공자현.  급즉천자위, 매과대량, 상사공자. 

 고조십이년, 종격경포환, 위공자치수총오가, 세세세이사시봉사공자.)

  
 ['무기'가 죽었다는 소식을 들은 진나라는 장군 '몽오'를 시켜 위나라를 공격하여 20개의 성을 함락시키고

 그 자리에 "동군"을 설치하였다. 그 후로 진나라는 위나라를 서서히 잠식하여 '무기'가 죽은지 18년 후에

 위왕을 포로로 잡고 도성 "대량"에서 대규모의 살육을 감행하였다.

 '고조'가 어릴적 미천한 신분일 때, 여러 차례에 걸쳐 '무기'의 지혜로움을 들었다.

 마침내 천자의 지위에 올라 "대량"을 지날 때마다 항상 '무기'를 위해 제사를 올렸다. 
 고조 12년(기원전 195년), 군사를 이끌고 종군하여 '경포'를 무찌르고 돌아올 때 '무기'의 묘를 지키기 
위해

 집 다섯 채를 지어, 매년 계절이 바뀔 때마다 '무기'를 위해 제사를 지내게 하였다.]
 
 

 

 太史公曰:

 吾過大梁之墟, 求問其所謂夷門.  夷門者, 城之東門也.  天下諸公子亦有喜士者矣,  

 然信陵君之接巖 穴隱者, 不恥下交, 有以也.  名冠諸侯, 不虛耳.  高祖每過之而令民奉祠不絕也.
 
(태사공왈 :

 오과대량지허, 구문기소위이문.  이문자, 성지동문야.  천하제공자역유희사자의,

 연신릉군지접암혈은자, 불치하교, 유이야.  명관제후, 불허이.  고조매과지이령민봉사불절야.) 

 
 [태사공이 말한다 :

 내가 "대량"의 폐허를 지날 때 이문이 있는 곳을 물어 찾아보았다.  
 이문은 "대량"의 동쪽 문이다.  천하의 다른 공자들도 역시 선비들을 좋아한다고 했지만, 
 '신릉군'처럼 산 속의 깊은 굴 안에 은둔해 있는 사람을 찾아 교류를 맺는 것을 수치로 여기지 
않았으니

 그것은 다 이유가 있다. 그의 명성이 제후들보다 훨씬 더 높았다는 사실은 결코 헛소문만은 아니었다.
 이런 이유로 '고조'가 매번 "대량"을 지날 때마다 백성들에게 명하여 '신릉군'의 제사를 받들도록 하여

 그의 제사를 끊이지 않게 하였다.]  

 

 【 각주 】

1) 위소왕(魏昭王) : 기원전 295년 재위에 올라 277년에 죽은 위나라의 왕이다. 즉위 초인 기원전 293년 진나라의 

    백기가 이끄는 진군과 이궐(伊闕)에서 싸워 대패하고 10여 만의 군사를 잃었다. 이어서 계속 진나라의 공격에  

    시달린 결과 하내(河內)의 60여 성과 하동(河東)의 땅 400여 리 및 안읍(安邑)의 땅을 진나라에 바쳐야 했다.

2) 안리왕(安釐王) : 기원전 276년에 재위에 올라 기원전 243년에 죽은 전국 때 위나라 왕이다.  

    재위 중인 기원전 273년 진장 백기(白起)와 화양(華陽)에서 싸워 대패하고 그 군사 13만 명을 잃었다.  

    안리왕은 남양(南陽)의 땅을 진나라에 바치고 강화를 맺었다. 후에 진나라가 조나라의 한단성을 포위 공격하자     

    진비(晉鄙)에게 10만의 군사를 주어 구원하도록 했다. 그러나 진나라가 위나라에 사신을 보내 위협을 가하자  

    진비에게 진군을 멈추고 전쟁의 상황을 살펴 본 후에 행동을 하도록 명했다. 후에 병부를 훔친 신릉군이 진비를   

    참살하고 위나라의 군권을 장악한 다음 진격하여 진군을 대파했다. 진장양왕이 다시 대군을 발하여 위나라를  

    공격하자 안리왕은 조나라에 망명하고 있던 신릉군에게 구원을 청했다. 신릉군은 조나라에서 군사를 얻어  

    위나라로 진격하고 이어서 제나라를 제외한 다섯 나라의 군사들과 힘을 합쳐 진나라를 공격하여 하외에서  

    진나라 군사들을 크게 물리쳤다. 진나라는 이간책에 빠진 안리왕은 신릉군의 병권을 빼앗았다.  

    신릉군은 실의에 빠져 음주와 여색에 탐닉한 결과 병이 들어 죽었다.

 3) 범수(范睢) : 태어난 해는 미상이고 기원전 255년에 죽었다. 전국 때 진나라의 대신을 지냈으나  

    원래는 위(魏)나라 출신이다. 이론과 변설에 능했다. 남의 모함을 받아 위나라의 재상 위제(魏齊)에게 잡혀  

    곤장을 맞은 치욕을 당하여 중상을 입었다가 주검을 가장하여 목숨을 구해 이름을 장록(張祿)으로 바꾸고  

    진나라로 들어갔다. 진나라의 소양왕에게 여러 번에 걸쳐 중앙정부의 권력을 강화하여 군주의 절대적인 

    통치권을 확립해야 한다고 주장하여 당시의 실권자인 양후(穰侯) 위염(魏冉)의 전횡과 발호를 억제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소양왕은 위염으로부터 승상의 인장을 회수하여 범수에게 주고 

    지금의 하남성 보풍현(寶豊縣) 서남쪽의 응(應)을 식읍으로 내리고 응후에 봉했다. 

    그가 진나라의 재상으로 있던 기간 중 진나라를 제외한 육국에 대한 외교를 원교근공 정책에 입각하여 

    각개격파 전술을 사용했다. 진(秦)과 조(趙) 두 나라 사이에 있었던 전국시대 때 제일 큰 싸움이었던 

    장평대전 후 명장 백기를 모함하여 죽음에 이르게 하고 그를 대신하여 친구 정안평(鄭安平)을 천거하여 

    싸움에 임하게 했으나 그는 출전할 때마다 싸움에서 패했다.  

    이를 두려워한 범수는 스스로 진나라의 재상 직에서 물러났다. 

    일설에 의하면 소양왕이 그의 죄를 추궁하여 사형에 처했다고도 한다.

 4) 위제(魏齊) : 전국 때 위나라의 대신. 위나라 공족 출신으로 소왕(昭王)과 안리왕(安釐王) 때 재상을 지냈다.  

    남의 무고하는 말을 믿고 범수(范睢)를 잡아 태형을 때리고 혼절시킨 다음 문객들에게 명하여 그의 몸에 

    오줌을 누게 하였다. 범수는 간신히 몸을 빼내 진나라로 가서 소양왕 밑에서 승상이 되었다. 

    범수가 옛날의 원한을 갚기 위해 군사를 동원하여 위제를 잡으려고 하자, 그는 조나라로 도망쳐 평원군에 

    몸을 의탁했다.  진나라가 다시 조나라를 위협하자 다시 조나라의 재상 우경(虞卿)의 도움으로 조나라에서 

    도망쳐 위나라로 돌아와 신릉군(信陵君)의 도움을 청했다. 신릉군이 위제를 의심하여 주저하자 

    그는 자살하고 말았다. 위나라는 죽은 위제의 목을 잘라 진나라에 보냈다. 

    범수는 위제의 해골을 요강으로 사용하여 그의 원한을 갚았다. 

5)  망묘(芒卯) : 전국 때 위나라의 대신이다. 지모와 사술로 위나라에 사도(司徒)에 중용되었다.  

    위안리왕(魏安釐王) 4년 기원전 273년에 위나라 군사를 이끌고 출전하여 지금의 하남성 정주시 부근의  

    화양(華陽)에서 진나라 장군 백기(白起)가 이끌던 진군과의 싸움에서 패배하고 그가 이끌던 15만의 대군은  

    참수되고 그는 달아났다. 일설에 의하면 진군에 의해 포로가 되었다고 했다.

6)  박(博) : 12갈래의 길이 있는 말판에 올빼미(梟 : 효), 사냥개(盧 : 노), 꿩(雉 : 치), 송아지(犢 : 두),  

    주사위(塞 : 색) 등의 여섯 가지 모양을 나무로 깎아 장기와 흡사하게 행마를 하는 놀이로 상고 때  

    오조(烏曹)가 발명했다고 했다. 자세한 행마법은 실전 되어 알 수가 없으나,  

    여섯 가지 말 중 효(梟)가 가장 강한 것으로 장기로 말하면 차(車)에 해당한다고 추정된다.

7)  장평대전(長平大戰) : 기원전 260년 진장(秦將) 백기(白起)가 이끌던 진군이 장평에서 조괄(趙括)이 이끌던  

    40여 만의 조군(趙軍)과 싸워 조괄은 전사키고 항복한 조나라 군사들을 40여 만 명을 모두 구덩이 파묻어  

    살해한 것을 말한다. 

8)  원문은 ‘引公子就西階’다. 고대에 손님을 전당으로 맞이할 때 취하는 규정으로 주인은 동쪽 계단을 이용하고  

    손님은 서쪽 계단을 이용하게 함으로써 손님에 대해 존경심을 표하는 방법의 하나다.  

    손님이 만약 스스로 낮은 신분이라고 생각할 경우에는 주인의 뒤에서 동쪽 계단을 이용하여 올라야 한다.

9)  탕목읍(湯沐邑)/ 춘추시대 이전에는 천자가 제후들에게 하사한 봉읍이다.  

    제후가 입조할 때 몸을 깨끗이 하라는 뜻에 하사하여 그 비용으로 사용하라는 뜻에서 하사한 땅이다.  

    전국 시대에 접어들어서 제후가 그 대신들에게 하사한 땅도 같은 명칭으로 불리게 되었다.  

 

 

 

※  原 文 .    【 中國哲學書電子化計劃 .   筆寫本 】

 

                                 

 

     原 文   飜 譯 者        德庤 / 李   斗 振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