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 白起 王翦列傳

第十三. 白起王翦列傳(백기왕전열전)

덕치/이두진 2021. 7. 21. 19:23

              史記 列傳

 

  第十三.  白起王翦列傳(백기왕전열전)

 ​白起者, 郿人也.  善用兵, 事秦昭王.  昭王十三年, 而白起爲左庶長, 將而擊韓之新城.   

 是歲, 穰侯相秦, 擧任鄙以爲漢中守.
 (백기자, 미인야.  선용병, 사진소왕.  소왕십삼년, 이백기위좌서장, 장이격한지신성.   

 시세, 양후상진, 거임비이위한중수.)


 ['백기'는 "미"지역 출신이다.  용병에 능해 진'소왕'을 모셨다.   

 진소왕 13년,  진나라의 좌서장이 된 '백기'는 군사를 이끌고 한나라의 "신성"을 공격했다.
 그 해에 '양후'가 진나라의 재상이 되어 '임비'를 선발하여 "한중"의 태수로 삼았다.]  

 

 其明年, 白起爲左更, 攻韓·魏於伊闕, 斬首二十四萬.   

 又虜其將公孫喜, 拔五城, 起遷爲國尉, 涉河取韓安邑以東, 到乾河.
 (기명년, 백기위좌경, 공한·위어이궐, 참수이십사만.  

 우로기장공손희, 발오성, 기천위국위, 섭하취한안읍이동, 도건하.)


 [그 이듬해, '백기'는 좌경에 올라, 한나라와 위나라 연합군을 "이궐"에서 격파하여 그 군사 24만의 목을 베었다. 

 다시 위나라 장수 '공손희'를 사로잡고, 다섯 개의 성을 함락시켰다. '백기'는 그 공으로 작위가 국위로 올라,

 황하를 건너 한나라의 "안읍"에서 동쪽으로 "건하"에 이르는 땅을 점령하였다.] 

  

 明年, 白起爲大良造, 攻魏, 拔之, 取城小大六十一.  明年, 起與客卿錯攻垣城, 拔之.   

 後五年, 白起攻趙, 拔光狼城.  後七年, 白起攻楚, 拔鄢鄧五城.

 其明年, 攻楚, 拔郢, 燒夷陵.  遂東至竟陵, 楚王亡去郢, 東走徙陳.    

 秦以郢爲南郡, 白起遷爲武安君.  武安君因取楚, 定巫黔中郡. 

 (명년, 백기위대량조, 공위, 발지, 취성소대육십일.  명년, 기여객경착공원성, 발지.   

 후오년, 백기공조, 발광랑성.  후칠년, 백기공초, 발언등오성.

 기명년, 공초, 발영, 소이릉.  수동지경릉, 초왕망거영, 동주사진.   

 진이영위남군, 백기천위무안군.  무안군인취초, 정무검중군.)

 

 [이듬해, 다시 대양조로 오른 '백기'는 위나라를 공격하여 크고 작은 61개 성을 함락시켰다.   

 다음 해 객경 '사마조'와 함께 위나라의 "원성"을 공격하여 함락했다.
 다시 5년 후에 조나라를 공격하여 "광랑성"을 함락시켰다.   

 7년 뒤에 '백기'는 초나라를 공격하여 "언"과 "등"의 다섯개 성을 점령하였다.

 그 이듬해 초나라를 공격해 도읍 "영"을 함락시키고 초나라 역대왕들의 분묘가 있는 "이릉"을 불태웠다.
 다시 초나라의 동쪽으로 진격하여 "경릉"에 이르자, 초왕은 "영"을 버리고 도망쳐 동쪽의 "진"으로 

 도읍을 옮겼다. 진나라는 이로써 초나라의 도읍지였던 "영"에 "남군"을 설치했다.  

 진나라는 '백기'를 무안군에 봉했다. '무안군'은 초나라를 점령하고 "무군"과 "검중군"도 평정하였다.] 

 

  昭王三十四年, 白起攻魏, 拔華陽, 走芒卯.  而虜三晉將, 斬首十三萬.  

 與趙將賈偃戰, 沈其卒二萬人於河中.

 昭王四十三年, 白起攻韓陘城, 拔五城, 斬首五萬.  四十四年, 白起攻南陽太行道, 絶之. 

 (소왕삼십사년, 백기공위, 발화양, 주망묘.  이로삼진장, 참수십삼만.  

 여조장가언전, 심기졸이만인어하중.

 소왕사십삼년, 백기공한형성, 발오성, 참수오만.  사십사년, 백기공남양태행도, 절지.)

 

 [진소왕 34년,  '백기'가 위나라를 공격하여 "화양"을 함락시키자, 위나라 장수 '망묘'는 달아나 버렸다.
 '백기'는 삼진(조, 한, 위)의 장수들을 사로잡고 병사 13만 명의 목을 베었다.  

 조나라 장수 '가언'과 싸워 그 군사 2만 명을 황하에 빠뜨려 익사시켰다.

 진'소왕' 43년,  '백기'는 한나라의 "형성"을 공격하여 주위의 다섯개 성을 함락시키고 군사 5만 명의 목을 베었다.

 진'소왕' 44년,  '백기'는 "남양"을 공격하여 "태항산"으로 통하는 길을 끊어 버렸다.]   

 

 四十五年, 伐韓之野王, 野王降秦, 上黨道絶.  其守馮亭與民謀曰 :

「 鄭道已絶, 韓必不可得爲民.  兵日進, 韓不能應.  不如以上黨歸趙.  趙若受我, 秦怒, 必攻趙. 

 趙被兵, 必親韓, 韓·趙爲一, 則可以當秦. 」 因使人報趙.  趙孝成王與平陽君平原君計之.

 (사십오년, 벌한지야왕, 야왕항진, 상당도절.  기수풍정여민모왈 :

「 정도이절, 한필불가득위민.  진병일진, 한불능응.  불여이상당귀조. 조약수아, 진노, 필공조. 

 조피병, 필친한, 한·조위일,즉가이당진. 」 인사인보조.  조효성왕여평양군평원군계지.)


 [진소왕 45년,  한나라의 "야왕성"을 공격하자 "야왕"의 태수는 진나라에 항복하였다.   

 이에 한나라는 "상당군"으로 통하는 길이 끊겼다.
 "상당"의 태수 '풍정'이 백성들과 계책을 의논하며 말하기를 : "한나라의 도읍인 "신정"으로 통하는 길이 끊겼으니,

 한나라는 틀림없이 우리를 그들의 백성들로 여기지 않을 것이오. 진나라 군사가 며칠이면 이곳으로 진군해 오는데

 그때 한나라는 구원군을 보낼 수 없을 것이오. 따라서 이곳 "상당"의 땅을 조나라에 바치지 않을 수 없을 것이오. 

 조나라가 만약 이곳 "상당"의 땅을 받아들인다면, 진나라는 화가 나서 틀림없이 조나라를 공격할 것이오.
 진나라의 공격을 받게 되는 조나라는 반드시 한나라와 친선을 맺어 같이 대항하려고 할 것이며,   

 한나라와 조나라가 한 마음이 되어 진나라에 대항한다면, 진나라의 군사를 막아낼 수 있을 것이오. "라고 하였다. 

 그리고 나서 '풍정'은 사신을 조나라에 보내 "상당군"의 사정을 알리고 그 땅을 바치겠다고 하였다.
 조나라 '효성왕'은 '평양군'과 '평원군'을 불러 계책을 의논하였다.] 

 

 平陽君曰 : 「 不如勿受, 受之, 禍大於所得. 」 

 平原君曰 : 「 無故得一郡, 受之便, 趙受之. 」  因封馮亭爲華陽君.
 (평양군왈 : 「 불여물수, 수지, 화대어소득. 」    

 평원군왈 : 「 무고득일군, 수지편, 조수지. 」  인봉풍정위화양군.)


 ['평양군'이 말하기를 : " 받지 말아야 합니다. 만일 우리가 "상당군"의 땅을 받게 되면 얻는 이익보다 

 더 큰 화를 입게 될 것입니다. "라고 하자.

 '평원군'이 말하기를 : " 아무런 수고를 하지 않고도 한 개의 군에 해당하는 땅을 얻게 되었으니 

 받아 들이는 편이 좋습니다. "라고 하였다. 

 그래서 조왕은 '평원군'의 말을 받아들여 한나라의 "상당군"을 접수하고 '풍정'을 '화양군'에 봉하고 

 "상당군"을 계속 다스리도록 하였다.] 

  

 四十六年, 秦攻韓緱氏藺, 拔之.  四十七年, 秦使左庶長王齕攻韓, 取上黨, 上黨民走趙.     

 趙軍長平, 以按據上黨民. 四月, 齕因攻趙, 趙使廉頗將.  趙軍士卒犯秦斥兵, 秦斥兵斬趙裨將茄. 

 六月, 陷趙軍, 取二鄣四尉.  七月, 趙軍築壘壁而守之.  秦又攻其壘, 取二尉, 敗其陣, 奪西壘壁.   

 廉頗堅壁以待秦, 秦數挑戰, 趙兵不出.  趙王數以爲讓.

 (사십육년, 진공한구지린, 발지.  사십칠년, 진사좌서장왕흘공한, 취상당, 상당민주조.   

 조군장평, 이안거상당민. 사월, 흘인공조, 조사염파장.  조군사졸범진척병, 진척병참조비장가. 

 유월, 함조군, 취이장사위.  칠월, 조군축루벽이수지.  진우공기루, 취이위, 패기진, 탈서루벽.   

 염파견벽이대진, 진수도전, 조병불출.  조왕수이위양.)


 [진'소왕' 46년,  진나라는 한나라의 "구지"와 "인읍"을 공격하여 함락시켰다. 
 진'소왕' 47년,  진나라는 좌서장 '왕흘'을 시켜 한나라를 공격하여 "상당"을 점령하도록 하자, 

 "상당"의 백성들이 조나라로 달아났다. 
 조나라는 군사를 "장평"에 주둔시켜 "상당"의 백성들이 의지할 수 있게 보살펴 주었다. 

 4월 '왕흘'이 조나라 군대를 공격하자 조나라는 '염파'를 대장으로 삼아 "장평"으로 보냈다.   

 조나라 병사들이 진나라의 척후병을 공격하자, 진군의 척후병들이 반격하여 조군의 부장 "가"를 베었다.
 6월, 진군이 조군의 보루를 공격하여 두 곳의 보루를 점령하고 도위 4명을 사로 잡았다. 

 7월, 조군이 높은 보루를 쌓아 굳게 지켰다. 진나라가 다시 조군의 보루를 공격하여 도위 두명을 사로잡고 

 그들이 지키던 보루의 서쪽 진지를 점령했다.
 '염파'가 여전히 보루에 의지해서 굳게 지키자 진나라가 수차에 걸쳐 도전했으나 조군은 응전하지 않았다. 
 조왕이 듣고 여러 번 사자를 보내 진군과 싸움을 피한 '염파'를 비난하였다.]

 

 又使人行千金於趙爲反閒曰 : 「 秦之所惡, 獨畏馬服子趙括將耳.  廉頗易與, 且降矣. 」

 趙王旣怒廉頗軍多失亡, 軍數敗, 又反堅壁不敢戰, 而又聞秦反閒之言, 因使趙括代廉頗將以擊秦.
 (우사인행천금어조위반한왈 : 「 진지소오, 독외마복자조괄장이.  염파이여, 차항의. 」

 조왕기노염파군다실망, 군수패, 우반견벽불감전, 이우문진반한지언, 인사조괄대렴파장이격진.)

  

 [또 진나라 재상 응후 '범수'는 사람을 조나라에 보내 천금의 돈으로 반간계를 펼치며 말하기를 : 

 " 진나라가 두려워하는 일은 오로지 마복군(조사) 장군의 아들 '조괄'을 조군의 대장으로 임명하는 것이다. 

 '염파'는 싸우기 쉬운 상대라 조만간에 그는 싸움에 지고 우리 진나라에 항복할 것이다. "라고 하였다. 

 '염파'의 작전에 분노한 조'효성왕'은 진나라의 반간계에 현혹되어 '염파'가 진군과의 싸움에서 여러 번에 걸쳐 

 지고 많은 군사를 잃었을뿐만 아니라, 반격을 하지 않고 보루에만 굳게 의지한 채 싸움에 응하지 않는다고

 '염파'를 파면하고 '조괄'을 대장으로 임명하여 진군을 공격하도록 했다.] 
 

 秦聞馬服子將, 乃陰使武安君白起爲上將軍, 而王齕爲尉裨將, 令軍中有敢泄武安君將者斬.

 趙括至, 則出兵擊秦軍.  秦軍詳敗而走, 張二奇兵以劫之.  趙軍逐勝, 追造秦壁, 壁堅拒不得入.   

 而秦奇兵二萬五千人絶趙軍後, 又一軍五千騎絶趙壁閒.
 (진문마복자장, 내음사무안군백기위상장군, 이왕흘위위비장, 령군중유감설무안군장자참.

 조괄지, 즉출병격진군.  진군상패이주, 장이기병이겁지.  조군축승, 추조진벽, 벽견거불득입.   

 이진기병이만오천인절조군후, 우일군오천기절조벽한.)

 

 [진나라는 '마복군'의 아들이 조군의 대장이 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비밀리에 무안군 '백기'를 상장군에 임명하고,

 '왕흘'을 그의 부장으로 삼은 후에 만일 군중에 무안군이 대장이 된 사실을 발설하는 자가 있으면 참수형에

 처하겠다는 군령을 내렸다. '조괄'이 조나라 군영에 당도하자 즉시 군사를 이끌고 보루를 나가 진군을 공격하였다.

 '조괄'이 조나라 군영에 당도하자 그 즉시 군사를 이끌고 보루를 나가 진군을 공격하였다. 
 진나라 군사들은 거짓으로 싸움에 패하는 척하며 달아나면서 별도의 기병 두 부대를 매복시켜 조나라 진영을

 기습하기로 작전을 세웠다. 조군은 승세를 타고 진군을 추격하여 진군이 건설한 보루에 당도하였으나

 진군의 보루도 역시 견고해서 도저히 무너뜨리고 들어 갈 수가 없었다.
 그때 진나라가 매복시킨 2만 5천에 달하는 두 부대의 기병이 일어나 조나라 군사의 퇴로를 차단하고,
 다시 5천의 기마병으로 구성된 부대는 조군의 본진영과 후속 부대 사이에 있는 통로를 봉쇄하였다.] 

 

 趙軍分而爲二, 糧道絶, 而秦出輕兵擊之.  趙戰不利, 因築壁堅守, 以待救至.   

 秦王聞趙食道絶, 王自之河內, 賜民爵各一級, 發年十五以上悉詣長平, 遮絶趙救及糧食.

 至九月, 趙卒不得食四十六日, 皆內陰相殺食.  來攻秦壘, 欲出, 爲四隊, 四五復之, 不能出.   

 其將軍趙括出銳卒自搏戰, 秦軍射殺趙括, 括軍敗, 卒四十萬人降武安君.  

 (조군분이위이, 량도절, 이진출경병격지.  조전불리, 인축벽견수, 이대구지.   

 진왕문조식도절, 왕자지하내, 사민작각일급, 발년십오이상실예장평, 저절조구급량식.

 지구월, 조졸불득식사십육일, 개내음상살식.  래공진루, 욕출, 위사대, 사오복지, 불능출.    

 기장군조괄출예졸자박전, 진군사살조괄, 괄군패, 졸사십만인항무안군.)

 

 [조나라 군대는 두개의 부대로 분리되어 양도가 끊기게 되었고, 

 기회를 이용한 진군의 경보병 부대는 조나라 진지를 공격하였다. 

 조군은 싸움에 불리하게 되자 보루를 쌓아 굳게 지키며 본영으로부터 지원군이 오기를 기다렸다.   

 진왕은 조군의 양도를 끊었다는 소식을 듣자,  진왕 자신이 직접 "하내"의 백성들에게 각기 한 급씩 작위를 올리고

 15세 이상의 장정들을 모두 징발하여 "장평"으로 보내, 조나라가 조군에게 보내는 식량의 보급을 끊어 버렸다.

 9월이 되자,  조나라 군사들은 식량을 보급 받지 못한지가 이미 46일이 지나 군영 내의 병사들은 서로 죽여 

 잡아먹는 지경에 이르게 되었다. 이윽고 진나라의 보루를 공격하여 포위망에서 벗어나려고 했다. 

 조군을 모두 네개의 부대로 나주어 네번 다섯번 반복해서 시도했으나 결코 포위망을 벗어나지 못했다.
 그러자 조군 대장 '조괄'이 다시 정예병을 차출하여 스스로 선두에 서서 싸움을 독려했다.   

 진군이 선두에 선 '조괄'을 활을 쏘아 사살하자, '조괄'의 부대는 싸움에서 패하여,  

 이미 사기를 잃은 40만에 달하는 군사들은 싸우지도 못하고 모두 '무안군'에게 항복하고 말았다. ] 

 

 武安君計曰 : 「前秦已拔上黨, 上黨民不樂爲秦而歸趙.  趙卒反覆, 非盡殺之, 恐爲亂. 」  

 及挾詐而盡阬殺之, 遺其小者二百四十人歸趙.  前後斬首虜四十五萬人, 趙人大震.
 (무안군계왈 : 「전진이발상당, 상당민불락위진이귀조.  조졸반복, 비진살지, 공위란. 」  

 급협사이진갱살지, 유기소자이백사십인귀조.  전후참수로사십오만인, 조인대진.)


 ['무안군'은 항복한 조나라 군사들의 처리에 대해 말하기를 : " 예전에 진나라가 "상당군"을 함락시켰을때 

 "상당"의 백성들은 진나라를 싫어하여 조나라로 돌아갔다. 그들을 살려 돌려보내주게 되면 다시 조나라의 

 군사가 될 것이고, 모두 죽이지 않는다면 후에 난을 일으켜 우리를 위협할 것이다. "라고 하면서.

 '백기'는 조나라의 항복한 군사들을 무사히 돌려 보내 주는것 처럼 속여 모두 구덩이에 파묻어 죽이고,  

 어린 아이 240명 만을 살려서 조나라에 돌려보냈다. 참수를 당하거나 포로로 사로잡힌 자가 이때를 전후로

 45만에 달하였다.  이 소식을 듣게 된 조나라의 백성들은 모두 두려워 벌벌 떨었다.] 

 

 四十八年十月, 秦復定上黨郡, 秦分軍爲二 王齕攻皮牢, 拔之, 司馬梗定太原.    

 韓·趙恐, 使蘇代厚幣說秦相 應侯曰 : 「 武安君禽馬服子乎 ? 」  曰 : 「 然. 」

 又曰 : 「 卽圍邯鄲乎 ? 」  曰 : 「 然. 」  「 趙亡則秦王王矣, 武安君爲三公. 

 武安君所爲秦戰勝攻取者, 七十餘城, 南定鄢郢漢中, 北禽趙括之軍. 

 (사십팔년시월, 진부정상당군, 진분군위이.  왕흘공피뢰, 발지, 사마경정태원.   

 한·조공, 사소대후폐세진상응후왈 : 「 무안군금마복자호 ? 」  왈 : 「 연. 」

 우왈 : 「 즉위한단호 ? 」  왈 : 「 연. 」 「 조망즉진왕왕의, 무안군위삼공.   

 무안군소위진전승공취자, 칠십여성, 남정언영한중, 북금조괄지군.

 

 [진소왕 48년 시월, 진나라는 다시 "상당군"을 평정하고, 진군은 부대를 둘로 나누어 조나라로 진군시켰다. 

 '왕흘'의 부대는 "피뢰"를 공격하여 점령했으며, '사마경'의 부대는 "태원"을 평정하였다. 진나라의 공격을 

 두려워한 한나라와 조나라는 '소대'에게 후한 폐물을 주어 진나라 재상 응후 '범수'에게 유세하도록 하였다.

 '범수'를 찾아간 '소대'가 말하기를 : " 무안군 '백기'가 조나라의 대장으로 임명된 '마복군'의 아들을 싸움에서

 죽인 사실을 아시고 계십니까 ? "라고 하자.  '범수'가 말하기를 : " 알고 있소. "라고 하였다.

 또 묻기를 : " 조나라의 도읍 "한단"을 포위할 것입니까 ? "라고 하자.   

 '범수'가 말하기를 : " 그렇소. "라고 하였다.
 '소대'가 말하기를 : " 조나라가 망하면 진왕은 다른 왕들 위에 군림하는 천자가 될 것이고   

 '무안군'은 삼공(태사, 태부, 태보) 중의 한 자리를 차지할 것입니다.
 '무안군'은 진나라를 위한 싸움에서 승리하여 70여 개의 성을 점령했으며 남쪽으로는 또한 "언", "영" 및 "한중"의

 땅을 평정했으며, 북쪽으로는 '조괄'이 이끌던 조나라 군사 45만 명을 잡아 죽였습니다.  

 

 雖周召呂望之功不益於此矣.  今趙亡, 秦王王, 則武安君必爲三公, 君能爲之下乎 ?   

 雖無欲爲之下, 固不得已矣 ?  秦嘗攻韓, 圍邢丘, 困上黨, 上黨之民皆反爲趙.

 天下不樂爲秦民之日久矣.  北地入燕, 東地入齊, 南地入韓·魏, 則君之所得民亡幾何人 ?   

 故不如因而割之, 無以爲武安君功也. 」 

 (수주소여망지공불익어차의.  금조망, 진왕왕, 즉무안군필위삼공, 군능위지하호 ?   

 수무욕위지하, 고불득이의 ?  진상공한, 위형구, 곤상당, 상당지민개반위조.

 천하불락위진민지일구의.  북지입연, 동지입제, 남지입한·위, 즉군지소득민망기하인 ?    

 고불여인이할지, 무이위무안군공야. 」)

 

 [비록 주나라를 창업하여 삼공에 임명된 주공'단', 소공'석' 및 태공망'여상'의 공도 여기에 미치지 못할 것입니다.

 지금 조나라가 망하면 진왕은 천하의 왕이 되고 '무안군'은 삼공에 임명될 것인데 대감께서는 그 보다 낮은 자리를

 받아들일 수 있겠습니까 ? 비록 재상께서 '무안군'의 밑으로 들어가고 싶은 생각이 없다고 해도 

 그렇게 되겠습니까? 옛날 진나라가 한나라를 공격하여 "형구"를 포위했을때 "상당"이 위태롭게 되자 

 "상당"의 백성들은 모두 진나라를 배반하고 조나라로 귀의했습니다. 

 천하의 백성들은 진나라의 백성이 되는 것을 싫어하게 된지가 오래되었습니다. 

 지금 조나라가 망하면 북쪽의 땅은 연나라가, 동쪽의 땅은 제나라가, 남쪽의 땅은 한나라, 위나라가 차지하게 되니

 재상께서 얻을 수 있는 백성의 수효는 몇 명이나 되겠습니까 ? 그리하여 지금의 기회를 이용하여 조나라로부터

 그들의 땅을 할양받아 강화를 맺고, '무안군'이 공을 세우지 못하도록 하십시오. "라고 하였다.]  

 

 於是應侯言於秦王曰 : 「 秦兵勞, 請許韓·趙之割地以和, 且休士卒. 」   

 王聽之, 割韓垣雍趙六城以和.  正月, 皆罷兵.  武安君聞之, 由是與應侯有隙.

 其九月, 秦復發兵, 使五大夫王陵攻趙邯鄲.  是時武安君病, 不任行.  

 (어시응후언어진왕왈 :  진병로, 청허한·조지할지이화, 차휴사졸.    

 왕청지, 할한원옹조육성이화.  정월, 개파병.  무안군문지, 유시여응후유극.

 기구월, 진복발병, 사오대부왕릉공조한단.  시시무안군병, 불임행.)

 

 [이에 응후 '범수'는 그 말을 듣고 진'소왕'에게 말하기를 :"우리 진나라 군사들은 오랜 시간에 걸친 전쟁으로 인해

 지쳐있음으로 차라리 한나라와 조나라에게 땅을 요청하고 강화를 맺어 군사들을 쉬게 하심이 좋을 것 같습니다. "

 라고 하였다.  진'소왕'은 '범수'의 말에 따라 한나라에게는 "원옹"의 땅을, 조나라부터는 6개의 성을 할양받고

 강화를 맺었다.   

 다음 해 정월, 진나라는 군사를 철수시켰다. '백기'는 조나라를 멸할 수 있는 기회를 버리고 강화를 맺은 것은

 '범수'의 계략 때문이었다는 사실을 듣고 나서 그때부터 두 사람 사이가 벌어졌다.

 그해 9월, 진나라가 다시 군사를 일으켜 오대부 '왕릉'을 대장으로 삼아 조나라의 한단을 공격하도록 했다.

 그때 무안군 백기는 몸에 병이 들었음으로 출전할 수 없었다.] 

 

 四十九年正月, 陵攻邯鄲, 少利. 秦益發兵佐陵, 陵兵亡五校. 武安君病愈, 秦王欲使武安君代陵將.

 武安君言曰 : 「 邯鄲實未易攻也, 且諸侯救日至, 彼諸侯怨秦之日久矣. 今秦雖破長平軍,

 而秦卒死者過半, 國內空.  遠絶河山而爭人國都, 趙應其內, 諸侯攻其外, 破秦軍必矣.  不可. 」
 (사십구년정월, 릉공한단, 소리.  진익발병좌릉, 릉병망오교.  무안군병유, 진왕욕사무안군대릉장.

 무안군언왈 : 「 한단실미이공야, 차제후구일지, 피제후원진지일구의.  금진수파장평군,
 이진졸사자과반, 국내공.  원절하산이쟁인국도, 조응기내, 제후공기외, 파진군필의.  불가. 」)

 

 [진'소왕' 49년 정월,  '왕릉'이 "한단성"을 공격했으나 성과는 별로 없었다.    

 진나라가 지원군을 더 보내 '왕릉'을 돕도록 했으나, '왕릉'은 오히려 많은 군사와 교위 5명을 잃었다.   

 그때 '무안군'의 병이 완쾌되자, 진'소왕'은 '왕릉' 대신 '무안군'을 대장으로 삼으려고 하였다.

 '무안군'이 진'소왕'에게 말하기를 : " 한단성은 사실 공략하기 쉽지 않습니다.  

 또한 진나라에 오랫동안 원한을 품어온 제후들이 한단성을 구하기 위해 원군을 보낼 것입니다. 
 지금 진나라가 비록 "장평"에서 조군을 격파했지만 진나라의 군사들도 절반에 가까울 정도로 잃어 지금 진나라

 국내도 텅텅 빈 상태입니다.  진나라는 하천과 산으로 끊긴 먼 길을 행군하여 다른 나라를 빼앗으려고 한 반면에,

 조나라는 안에서 내응하고, 제후들은 밖에서 우리 진군을 공격하니 진나라 군사는 싸움에서 

 패할 수밖에 없습니다. 지금 조나라를 공격하는 일은 절대 불가합니다. "라고 하였다.]

 

 秦王自命, 不行.  乃使應侯請之, 武安君終辭不肯行, 遂稱病.  秦王使王齕代陵將,  

 八九月圍邯鄲, 不能拔.  楚使春申君及, 魏公子將兵數十萬攻秦軍, 秦軍多失亡.

 武安君言曰 : 「 秦不聽臣計, 今如何矣. 」  秦王聞之怒, 彊起武安君, 武安君遂稱病篤.  

 應侯請之, 不起.  於是免武安君爲士伍, 遷之陰密, 武安君病, 未能行. 

 (진왕자명, 불행.  내사응후청지, 무안군종사불긍행, 수칭병.  진왕사왕흘대릉장,  

 팔구월위한단, 불능발.  초사춘신군급, 위공자장병수십만공진군, 진군다실망.

 무안군언왈 : 「 진불청신계, 금여하의. 」  진왕문지노, 강기무안군, 무안군수칭병독.  

 응후청지, 불기.  어시면무안군위사오, 천지음밀, 무안군병, 미능행.)

 

 [그러나 진왕이 듣지 않고 왕명으로 '백기'의 출전을 명했으나 '백기'는 받들지 않았다. 

 다시 진'소왕'은 재상의 신분인 응후 '범수'에게 출전을 부탁하였으나 '무안군'은 병을 핑계로 끝까지 사양하며

 명을 받들지 않았다.  진'소왕'은 할 수 없이 '왕릉'을 파면하고 대신하여 '왕흘'을 대장으로 삼았다.

 ​왕흘은 팔월, 구월 두달에 걸쳐 "한단"을 포위하고 공격을 감행하였으나 결코 함락시킬 수 없었다. 
 초나라의 춘신군 '황헐'과 위나라 공자 신릉군 '무기'가 수십만 명의 군사를 이끌고 진군의 배후를 공격하자,

 진나라는 많은 군사를 잃었다.

 '무안군'이 듣고 말하기를 : " 진왕이 나의 계책을 듣지 않은 결과,  지금 어찌 되었는가 ! "라고 하였다. 
 진'소왕'이 듣고 대노하여 강제로 '무안군'으로 하여금 왕명을 받들도록 했으나 '무안군'은 계속 병세가 심하다고

 하며 자리에서 일어나려고 하지 않았다. 응후 '범수'가 몸소 찾아가 청했지만 역시 일어나지 않았다.  

 그러자 진'소왕'은 '무안군'의 작호를 박탈하고 병졸로 강등시킨 후에 "음밀"로 옮겨가 살도록 하였다.
 그러나 '무안군'은 병으로 인해 그 명령 조차도 따를 수가 없었다.] 

 

 居三月, 諸侯攻秦軍急, 秦軍數卻, 使者日至.  秦王乃使人遣白起, 不得留咸陽中.  武安君旣行,

 出咸陽西門十里, 至杜郵.  秦昭王與應侯羣臣議曰 : 「 白起之遷, 其意尙怏怏不服, 有餘言. 」   

 秦王乃使使者賜之劍, 自裁.  武安君引劍將自剄曰 : 「 我何罪于天而至此哉 ! 」

 (거삼월, 제후공진군급, 진군수각, 사자일지.  진왕내사인견백기, 불득류함양중.  무안군기행,

 출함양서문십리, 지두우. 진소왕여응후군신의왈 :  백기지천, 기의상앙앙불복, 유여언.    

 진왕내사사자사지검, 자재.  무안군인검장자경왈 : 「 아하죄우천이지차재 ! 」)


 [3개월쯤 머물렀을때 제후들의 군사들이 진군을 매우 세차게 공격하자 진나라 군사들은 여러 차례 퇴각을 

 거듭하며 사자를 매일 보내왔다. 왕이 다시 사람을 보내 '백기'를 "음밀"로 떠나라고 재촉하자, 

 '백기'는 결국 "함양"에 더 이상 머물 수가 없었다.  '백기'는 아픈 몸을 이끌고 유배지로 떠나기 위해 

 "함양"의 서문을 나와 십리 거리에 있는 "두우"라는 곳에 이르렀다. 

 진'소왕'은 응후 '범수'와 다른 신하들과 의논한 끝에 말하기를 :

 " '백기'는 유배지로 가면서 명령에 복종하지 않고 원망과 불만을 토로하고 있소. "라고 하면서.
 진'소왕'은 사자에게 검을 주면서 '백기'로 하여금 스스로 목숨을 끊으라고 명했다. '무안군'은 그 검을 받아들어

 목에 대고 말하기를 : " 내가 하늘에 무슨 죄를 지어 이 지경이 되었단   말인가 ! "라고 하였다.] 

 

 良久曰 : 「 我固當死, 長平之戰, 趙卒降者數十萬人, 我詐而盡阬之, 是足以死. 」 遂自殺.   

 武安君之死也, 以秦昭王五十年十一月.  死而非其罪, 秦人憐之, 鄕邑皆祭祀焉.
 (량구왈 : 「 아고당사, 장평지전, 조졸항자수십만인, 아사이진갱지, 시족이사. 」 수자살.   

 무안군지사야, 이진소왕오십년십일월.  사이비기죄, 진인련지, 향읍개제사언. )


 [오랫동안 생각에 잠기더니 다시 말하기를 : " 나는 마땅히 죽어야 하는 몸이다.   

 "장평"의 싸움에서 조나라의 항복한 군사 40여 만 명을 속여 모두 구덩이에 파묻어 죽였으니 
 이것만으로도 족히 죽어 마땅하지 않겠는가 ! "라고 하면서. 스스로 칼로 목을 찔러 죽었다. 

 '무안군'이 세상을 떠난것이 진'소왕' 오십년십일월의 일이었다.
 '백기'가 억울하게 죽었다고 불쌍하게 여긴 진나라 사람들이 그의 고향에 사당을 짓고 제사를 지냈다. ]

  

 

 王翦者, 頻陽東鄕人也.  少而好兵, 事秦始皇.  始皇十一年, 翦將攻趙閼與, 破之, 拔九城. 

 十八年, 翦將攻趙, 歲餘, 遂拔趙, 趙王降.  盡定趙地爲郡.

 (왕전자, 빈양동향인야.  소이호병, 사진시황.  시황십일년, 전장공조알여, 파지, 발구성. 

 십팔년, 전장공조, 세여, 수발조, 조왕항.  진정조지위군.)

 

 ['왕전'은 "빈양"의  "동향" 사람이다. 젊어서부터 전쟁놀이를 좋아한 '왕전'은 커서 '진시황'을 모셨다. 
 시황 11년,  '왕전'은 진군의 장수가 되어 조나라의 "알여"를 공격하여 쳐부수고 아홉 개 성을 빼앗았다.
 진시황 18년,  '왕전'은 조나라를 공격하여 1년여 만에 조나라 도읍 "한단"을 함락시키고 조왕의 항복을 받았다. 

 ​조나라의 모든 영토를 평정한 '왕전'은 그 땅을 진나라의 군현으로 만들었다.] 

  

 明年, 燕使荊軻爲賊於秦.  秦王使王翦攻燕.  燕王喜走遼東, 翦遂定燕薊而還. 

 秦使翦子王賁擊荊, 荊兵敗, 還擊魏, 魏王降, 遂定魏地.  秦始皇旣滅三晉, 走燕王, 而數破荊師.

 ​秦將李信者, 年少壯勇.  嘗以兵數千逐燕太子丹至於衍水中, 卒破得丹, 始皇以爲賢勇.
 (명년, 연사형가위적어진.  진왕사왕전공연.  연왕희주료동, 전수정연계이환.  

 진사전자왕분격형, 형병패, 환격위, 위왕항, 수정위지. 진시황기멸삼진, 주연왕, 이수파형사

 진장이신자, 년소장용상이병수천축연태자단지어연수중, 졸파득단, 시황이위현용.)


 [다음 해(BC 227),  연나라 태자 '단'이  '형가'를 시켜 진왕을 암살하려고 하였다.    

 이에 진왕은 '왕전'을 시켜 연나라를 공격하여 그 원수를 갚고자 하였다.
 연왕 '희'는 견디지 못하고 "요동"으로 달아나고 '왕전'은 연나라의 도성 "계성"(북경)을 평정하고 귀환했다.
 진왕은 '왕전'의 아들 '왕분'을 장군으로 삼아 "형"을 정벌하게 하였고, '왕분'은 "형"의 군사를 격파하자, 

 진왕은 이 지역에 "어양군", "북평군", "요서군" 등을 설치했다.
 "계성"을 평정하고 귀환 중에 위나라를 공격하여 위왕의 항복을 받고 위나라의 전 영토를 평정하였다.

 ​진시황은 삼진을 멸하고 연왕을 "요동"으로 몰아냈으며, 수차에 걸쳐 형(초)나라의 군사를 격파하였다.   

 진나라 장수 '이신'은 젊고 용기가 있었다.과거에 수천의 군사를 이끌고 연나라의 태자 '단'을 "연수"까지 추격하여

 연군을 격파하고 '단'을 사로잡은 바가 있었다. 이에 진시황은 '이신'을 용감하며 어질다고 여기고 있었다.]
 
 於是始皇問李信 : 「 吾欲攻取荊, 於將軍度用幾何人而足. 」   
 

 李信曰 : 「 不過用二十萬人. 」  始皇問王翦.  王翦曰 : 「 非六十萬人不可. 」
 (어시시황문이신 : 「 오욕공취형, 어장군도용기하인이족. 」   

 이신왈 : 「 불과용이십만인. 」  시황문왕전.  왕전왈 : 「 비육십만인불가. 」)


 [이에 진시황이 '이신'에게 묻기를 : " 내가 초나라를 공략하여 빼앗으려 하는데 장군의 생각에 

 군사가 몇 명 정도 있으면 되겠는가 ? "라고 하자.

 '이신'이 대답하기를 : " 20만 명 정도면 충분하다고 생각합니다. "라고 하였다.
 진시황이 다시 '왕전'에게 물었다. '왕전'이 대답하기를 : " 60만 명이 되지 않고서는 불가능합니다."라고 하였다.] 

 

 始皇曰 : 「 王將軍老矣 !  何怯也.  李將軍果勢壯勇, 其言是也. 」   

 遂使李信及蒙恬將二十萬南伐荊.  王翦言不用, 因謝病,  歸老於頻陽.
 (시황왈 : 「 왕장군노의 !  하겁야.  이장군과세장용, 기언시야. 」   

 수사이신급몽념장이십만남벌형.  왕전언불용, 인사병,  귀노어빈양.)


 [시황이 '왕전'에게 말하기를 : " 왕장군은 이제 늙었구려 ! 어찌 이리 겁이 많아졌소 ?   

 이장군은 기세가 용맹하다더니 과연 그말이 사실이었구먼. "이라고 하면서.  진시황은 '이신'을 대장군으로 하고

 '몽염'을 부장으로 하여 20만의 군사를 주어 남쪽으로 내려가 초나라를 정벌하도록 하였다. 

 ​'왕전'은 자기의 말이 받아 들여지지 않자, 병을 핑계 삼아 고향 "빈양"으로 돌아가 노년을 보내려고 하였다.] 

 

 李信攻平與, 蒙恬攻寢, 大破荊軍.  信又攻鄢郢, 破之, 於是引兵而西, 與蒙恬會城父.    

 荊人因隨之, 三日三夜不頓舍, 大破李信軍, 入兩壁, 殺七都尉, 秦軍走.
 (이신공평여, 몽념공침, 대파형군.  신우공언영, 파지, 어시인병이서, 여몽념회성보. 

 형인인수지, 삼일삼야불돈사, 대파이신군, 입양벽, 살칠도위, 진군주.)


 [진나라의 대장군이 된 '이신'은 "평여"를 공격하고, '몽염'은 "침현"을 공격하여 초군을 크게 이겼다.  

 '이신'이 또 "언"과 "영"을 공격하여 함락시키고, 계속해서 병사들을 이끌고 서쪽으로 진군하여 '몽염'의 군사들과

 "성보"에서 만나기로 하였다.  초나라 군대는 사흘 밤낮을 쉬지 않고 '이신'의 뒤를 추격하여, '이신'의 군대를 

 크게 무찌르고 진군의 양쪽 진지를 점령하여  도위 7명을 살해하자, 결국 진군은 모두 달아나고 말았다.] 

 

 始皇聞之, 大怒, 自馳如頻陽, 見謝王翦曰 : 「 寡人以不用將軍計, 李信果辱秦軍. 

 今聞荊兵日進而西,  將軍雖病, 獨忍弃寡人乎 ! 」
 (시황문지, 대노, 자치여빈양, 견사왕전왈 : 「 과인이불용장군계, 이신과욕진군.   

 금문형병일진이서,  장군수병, 독인기과인호 ! 」)


 [시황은 이 소식을 듣고 크게 화를 내며 몸소 수레를 몰고 "빈양"으로 달려가서 '왕전'을 만나 사과하며 말하기를 :

 " 과인이 장군의 계책을 쓰지 않아, 결국 '이신'이 우리 진군을 욕보였소.   

 지금 들리는 말로는 초나라 군사들이 진나라를 공격하기 위해 매일 서쪽으로 진군하고 있다 하니,
 장군께서 비록 병중이기는 하지만 어려움을 당한 과인을 외면하지 말기 바라오. "라고 하자.] 

 

 王翦謝曰 : 「 老臣罷病悖亂, 唯大王更擇賢將. 」  始皇謝曰 : 「 已矣, 將軍勿復言. 」 

 王翦曰 : 「 大王必不得已用臣, 非六十萬人不可. 」  始皇曰 : 「 爲聽將軍計耳. 」
 (왕전사왈 : 「 노신파병패란, 유대왕갱택현장. 」  시황사왈 : 「 이의, 장군물부언. 」   

 왕전왈 : 「 대왕필불득이용신, 비육십만인불가. 」  시황왈 : 「 위청장군계이. 」)


 ['왕전'이 사양하며 말하기를 : " 신은 이미 몸이 늙고 병들어 정신이 혼미합니다. 

 대왕께서는 부디 어질고 현명한 장군을 택하여 중임을 맡기시길 바랍니다. "라고 하였다. 
 진시황이 사과하며 말하기를 : " 나는 이미 마음을 굳혔으니 장군은 더 이상 못하겠다는 말을 하지 마시오."하자. 

 ​'왕전'이 말하기를 : " 대왕께서 어쩔 수 없이 신을 꼭 쓰려고 하신다면, 60만 명의 군사가 아니면 안될 것입니다."

 라고 하였다. 진시황이 말하기를 : " 장군의 계책을 따르겠소. "라고 하였다.]   

 

 於是王翦將兵六十萬人, 始皇自送至灞上 王翦行, 請美田宅園池甚衆  

 始皇曰: 「 將軍行矣, 何憂貧乎 ? 」

 王翦曰 : 「 爲大王將, 有功終不得封侯, 故及大王之嚮臣.  臣亦及時以請園池爲子孫業耳. 」     

 始皇大笑.  王翦旣至關, 使使還請善田者五輩. 

 (어시왕전장병육십만인, 시황자송지파상.  왕전행, 청미전택원지심중.  

 시황왈: 「 장군행의, 하우빈호 ? 」

 왕전왈 : 「 위대왕장, 유공종불득봉후, 고급대왕지향신.  신역급시이청원지위자손업이. 」   

 시황대소.  왕전기지관, 사사환청선전자오배.)

 

 [이리하여 '왕전'은 60만 명의 군사를 얻어 초나라 원정길에 올랐다.  

 진시황은 몸소 "파상"까지 나와 '왕전'을 환송하였다.
 '왕전'은 출전하면서 진시황에게 좋은 전답과 저택, 저수지가 딸린 정원을 무리할 정도로 크게 요청하였다.
 시황이 듣고 말하기를 : " 장군은 원정을 나가면서 어찌 가난을 근심하시는 것이오 ? "라고 하자.

 '왕전'이 말하기를 : " 대왕을 위해 장수가 되어 공을 이루었음에도 끝까지 제후의 작위를 받지 못하게 되면

 신은 단지 시골에서 사는 이름 없는 신하에 불과할 뿐입니다. 그래서 신은 지금 대왕의 신임을 받은 기회를 

 이용하여 연못이 딸린 정원을 청하여 자손들에 물려주려고 해서입니다. "라고 하였다.  

 진시황이 듣고 크게 웃었다. 

 '왕전'이 행군을 시작하여 "함곡관"에 도착할때까지 사자를 진시황에게 보내 좋은 논밭을 달라고 

 요청하기를 5번이나 하였다.] 

 

 或曰 : 「 將軍之乞貸, 亦已甚矣 ? 」  王翦曰 : 「 不然.  夫秦王怚而不信人,  

 今空秦國甲士而專委於我.  我不多請田宅爲子孫業以自堅, 顧令秦王坐而疑我邪 ! 」
 (혹왈 : 「 장군지걸대, 역이심의 ? 」  왕전왈 : 「 불연.  부진왕저이불신인,     

 금공진국갑사이전위어아.  아불다청전택위자손업이자견, 고령진왕좌이의아야 ! 」)


 [옆에 있던 부관이 말하기를 : " 장군께서는 요청하는 정도가 너무 심하시지 않으십니까 ? "라고 하자.
 '왕전'이 대답하기를 : " 그렇지 않다.  무릇 진왕은 의심이 많은 사람이라 남을 믿지 않는다.   

 지금 진나라의 무장한 모든 군사들을 모두 나에게 맡겼다. 내가 많은 전답과 저택을 스스로 청해 자손들에게

 물려주겠다고 하지 않는다면, 진왕이 어찌 나를 의심하지 않고 가만히 앉아만 있겠는가 ? "라고 하였다.] 

 

 王翦果代李信擊荊, 荊聞王翦益軍而來, 乃悉國中兵以拒秦.  王翦至, 堅壁而守之, 不肯戰.    

 荊兵數出挑戰, 終不出.  王翦日休士洗沐, 而善飮食撫循之, 親與士卒同食.
 (왕전과대이신격형, 형문왕전익군이래, 내실국중병이거진.  왕전지, 견벽이수지, 불긍전.  

 형병수출도전, 종불출.  왕전일휴사세목, 이선음식무순지, 친여사졸동식.)


 ['왕전'은 '이신'을 대신해 마침내 초나라를 공격하였다. 초나라는 '왕전'이 더 많은 군사로 쳐들어왔다는 

 소식을 듣고 국내의 모든 군사들을 동원하여 진군을 막으려고 했다. 

 이윽고 '왕전'이 초나라 진영에 이르렀으나 보루를 높이 쌓고 굳게 지키기만 할 뿐 싸우려고 하지 않았다.  

 초나라 군사들이 출병하여 계속해서 도전했으나 '왕전'은 결코 군사를 내보내 응전하지 않았다. 

 '왕전'은   매일 군사들을 휴식과 목욕을 시키고 좋은 음식으로 위로하며 병사들과 더불어   

 숙식을 같이하며 친해졌다.] 

 

 久之, 王翦使人問軍中戲乎.  對曰 : 「 方投石超距. 」  於是王翦曰 : 「 士卒可用矣. 」   

 荊數挑戰而秦不出, 乃引而東.  翦因擧兵追之, 令壯士擊.
 (구지, 왕전사인문군중희호.  대왈 : 「 방투석초거. 」  어시왕전왈 : 「 사졸가용의. 」  

 형수도전이진불출, 내인이동.  전인거병추지, 령장사격. )
 [오랜 시간이 흐른 뒤 '왕전'은 사람을 시켜 군중에서 사졸들이 무엇을 하며 놀고 있는지 알아보게 하였다.  

 그 사람이 와서 대답하기를 : " 투석놀이와 높이뛰기 놀이를 하며 시간을 보내고 있습니다. "라고 하자.
 '왕전'이 듣고 말하기를 :  " 이제 병사들을 필요로 할 때가 되었다. "라고 하였다.
 초나라 군사들이 여러 차례에 걸쳐 도전을 했으나 진나라 군사들이 응전을 하지 않았음으로  

 이내 군사를 물리쳐 동쪽으로 돌아갔다.
 이에 '왕전'은 즉시 군사를 일으켜 그 뒤를 추격하여 장사들로 편성된 별동대를 시켜 공격하였다.] 

 

 大破荊軍, 至蘄南, 殺其將軍項燕, 荊兵遂敗走.  秦因乘勝略定荊地城邑,  

 歲餘, 虜荊王負芻, 竟平荊地爲郡縣.  因南征百越之君.  而王翦子王賁, 與李信破定燕· 齊地.
 (대파형군, 지기남, 살기장군항연, 형병수패주.  진인승승략정형지성읍,  

 세여, 로형왕부추, 경평형지위군현.  인남정백월지군.  이왕전자왕분, 여이신파정연· 제지.)


 [초나라 군사들을 대파한 '왕전'의 진나라 군사들은 "기수" 남쪽에 이르러 초나라 대장 '항연'을 살해하자 

 초군은 마침내 패하여 모두 달아났다.  진군은 승세를 계기로 초나라의 성읍 "수춘"을 공략하기 시작하여  

 일 년여 만에 초왕 '부추'를 사로잡고 마침내 초나라의 모든 땅을 진나라의 군현으로 삼았다.
 '왕전'은 여세를 몰아 장강을 건너 남진하여 "백월" 지방의 군장들이 지배하고 있던 땅을 점령하였다.
 한편 '왕전'의 아들 '왕분'은 '이신'과 함께 연나라와 제나라를 무찌르고 그 땅을 평정하였다.] 

 

 秦始皇二十六年, 盡幷天下.  王氏蒙氏功爲多, 名施於後世.  秦二世之時, 王翦及其子賁皆已死,   

 而又滅蒙氏, 陳勝之反秦, 秦使王翦之孫王離擊趙, 圍趙王及張耳鉅鹿城.

 或曰 : 「 王離, 秦之名將也.  今將彊秦之兵, 攻新造之趙, 擧之必矣. 」   

 (진시황이십육년, 진병천하.  왕씨몽씨공위다, 명시어후세.  진이세지시, 왕전급기자분개이사,  

 이우멸몽씨, 진승지반진, 진사왕전지손왕리격조, 위조왕급장이거록성.

 혹왈 : 「 왕리, 진지명장야.  금장강진지병, 공신조지조, 거지필의. 」)

   

 [마침내 진시황 26년(BC : 221) 진나라는 천하를 모두 병합하였다.   

 그 과정에서 왕씨와 몽씨가 많은 공을 세워 그 이름이 후세에 전해지게 되었다.
 진시황이 죽고 이세황제(영호해) 때는 '왕전'과 그 아들 '왕분'은 죽고 없었고 몽씨 또한 멸족되었으며 

 '진승'이 진나라에 반기를 들자,진나라는 '왕전'의 손자 '왕리'를 장수로 삼아 조나라를 공격하게 하였다. 

 '왕리'는 "거록성"의 조왕과 '장이'를 포위하고 세차게 공격하였다.

 어떤 사람이 말하기를 : " '왕리'는 진나라의 명장 집안 출신이다.   

 지금 강한 진나라 군사들의 장수가 되어 새로 생긴 조나라를 공격하고 있으니,
 필시 '왕리'는 큰 공을 세울 수 있을 것이다. "라고 하자.]  

 

 客曰 : 「 不然.  夫爲將三世者必敗, 必敗者何也.  必其所殺伐多矣, 其後受其不祥, 

 今王離已三世將矣. 」  居無何, 項羽救趙, 擊秦軍, 果虜王離, 王離軍遂降諸侯. 
 (객왈 : 「 불연.  부위장삼세자필패, 필패자하야.  필기소살벌다의, 기후수기불상, 

 금왕리이삼세장의. 」   거무하,  항우구조, 격진군, 과로왕리, 왕리군수항제후.)


 [그 사람의 객이 말하기를 : " 그렇지 않습니다.  무릇 아무리 명장 집안이라 할지라도 삼대에 이르게 되면 

 반드시 실패하게 되어있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이 싸움을 하면서 많은 상대방 군사들을 죽여 

 그 후대들은 상서롭지 못한 업을 물려받기 때문입니다. 

 지금 '왕리'는 '왕전'으로부터 3대에 이르는 장군이기 때문입니다. "라고 하였다.   

 그리고 얼마 후에 '항우'가 조나라를 구하기 위해 진군을 공격할 때 '왕리'는 싸움에서 패하여 포로가 되고

 '왕리'가 이끌던 진군도 따라서 제후군에게 항복하고 말았다.] 

  

 太史公曰 :

 鄙語云尺有所短, 寸有所長.  白起料敵合變, 出奇無窮, 聲震天下. 

 然不能救患於應侯.  王翦爲秦將, 夷六國, 當是時, 翦爲宿將, 始皇師之.

 然不能輔秦建德, 固其根本, 偸合取容, 以至歿身.  及孫王離爲項羽所虜, 不亦宜乎 ? 

 彼各有所短也.  

 (태사공왈 : 

 비어운척유소단, 촌유소장.  백기료적합변, 출기무궁, 성진천하.   

 연불능구환어응후.  왕전위진장, 이육국, 당시시, 전위숙, 시황사지.

 연불능보진건덕, 고기근본, 투합취용, 이지몰신.  급손왕리위항우소로, 불역의호 ?  피각유소단야.)

 

 [태사공이 말한다.

 옛말에 이르기를 한 척의 긴 것도 짧을 때가 있고, 한 촌의 짧은 것도 길 때가 있는 법이라고 했다.

 ​'백기'는 적군을 대할 때는 그 변화가 능수능란하고 기묘한 전략은 무궁무진해서 그의 명성은 천하를 진동시켰다. 
 하지만 그의 그러한 지혜도 '응후'의 화로부터 자신을 구할 수 없었다.    

 '왕전'은 진나라의 장군이 되어 육국을 멸해 숙장으로써 진시황에 의해 스승으로 존대받았다. 

 그러나 진시황을 보좌하여 덕을 쌓아 나라의 근본을 공고하게 하지 못하고 그저 기회에 투합하여 

 몸을 지키는 데만 급급하다가 결국 몸은 헛되이 죽고 말았다.

 이에 그의 손자 '왕리'는 '항우'의 포로가 되었으니 어찌 사리가 마땅하지 않겠다고 하겠는가 ? 

 그 두 사람은 각기 부족한 점이 있었다. ] 

 

 

【 각주 】 

1) 임비(任鄙) : 태어난 해는 알 수 없고 기원전 288년에 죽은 전국시대 진나라의 대력사 출신의 무장이다.  

    장사였던 진무왕(秦武王)이 힘겨루기를 좋아했음으로 자신을 스스로 천거하여 진무왕의 총애를 받았다.  

    진소양왕 때 상국 양후(穰侯)가 그를 한중태수로 천거했다. 진나라 사람들은 저리질(樗里疾) 같이  

    ' 힘에는 임비이고 지혜는 저리'라고 칭했다.  

2) 백기가 받든 작위 등급 : 10등급 좌서장(左庶長), 12등급 좌경(左更), 13등급 중경(中更), 14등급 우경(右更), 

    16등급 대양조(大良造), 20위 해당하는 최고의 작위는 철후(徹侯)다.  

3) 평여(平與) : 지금의 하남성 평여(平與) 북이다. 평여(平輿)라는 설도 있다.

4) 침(寢) : 지금의 안휘성 임천현(臨泉縣)이다.

5) 열국지 진시황과 왕전의 60만 대군이 필요한지에 대해 이어지는 대화다.

    진왕이 말했다.  " 내가 알기로는 옛날 대국은 삼군을 두었고 그 다음에 큰 나라는 이군, 그리고 소국은 일군을    

    두었으나 싸움이 일어나면 전군을 동원하지 않았음에도  그 수가 부족하지 않았다고 했소.  

    후에 오패가 일어나 제후들을 위협했을 때도 그 군세는 불과 천승을 넘지 않았으니, 일승을 75인으로 계산해도     

    그 군사들의 수효는 결코 10만을 넘지 못했소. 그러나 오늘 장군께서 60만의 군사를 동원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 하니 그렇게 많은 군사들을 동원했다는 전례를 들어보지 못했소. "  

    왕전이 대답했다. " 옛날에는 싸움을 할 때, 서로 시간을 약속하고 진(陣)을 세우고, 진이 모두 세워지면  

    싸움으로 돌입했습니다.  또한 행군을 하거나 싸움을 할 때도 모두 일정한 규칙에 따라 행했으며,  

    중상을 당한 군사들에게는 다시 공격하지도 않았습니다. 상대방의 죄를 성토만 했지 그 영토를 

    빼앗지 않았으며, 비록 접전을 하던 중이라도 예절을 지키며 양보하는 마음을 갖고 있었습니다.

    그런 연유로 해서 제왕(帝王)이 군사를 일으킬 때도 그렇게 많은 군사들을 필요로 하지 않았습니다.
    제환공이 내정을 일으켜 모은 군사들은 불과 3만 명에 불과했으며 그것도 번을 바꾸어 가며 동원했습니다.
    그러나 오늘 날 열국들이 군사들을 동원하여 서로 다투는 방법은 강대국들은 약소국들을 업신여기며 
 

    압도적인 군사력으로 쳐들어가 싸움을 했다하면 적군을 죽이고 땅이 있으면 점령합니다.  

    한 번 싸움에 몇 만 명의 수급을 베고 큰 성의 포위에는 몇 년이 걸리게 되는 때도 있어 그때가 되면 농민들도  

    모두 무기를 들고 나오게 되고, 어린아이들까지도 군적에 올려 싸움에 임하게 되어,  

    적은 수의 군사들을 동원하게 된다면 결코 싸움에서 이길 수가 없게 됩니다. 더욱이 초나라는 그 영토가  

    동남으로 광활하게 펼쳐져 있어 일단 한번 동원령을 내리기만 하면 백만의 군사를 모을 수 있습니다.
    신은 60만의 군사로도 혹시 당해내지 못할까 걱정하고 있는데 어찌 다시 거기에서 줄일 수 있겠습니까?」
 


 

 

※  原 文 .    【 中國哲學書電子化計劃 .   筆寫本 】

 

                                

 

    原 文   飜 譯 者        德庤 / 李   斗 振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