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 范睢 蔡澤列傳

第十九. 范睢蔡澤列傳(범수 채택열전)

덕치/이두진 2021. 7. 31. 19:41

 

             史記 列傳

 

  第十九. 范睢蔡澤列傳(범수 채택열전) 

 

范睢者, 魏人也, 字叔.  游說諸侯, 欲事魏王, 家貧無以自資, 乃先事魏中大夫須賈.

 (범수자, 위인야, 자숙.  유세제후, 욕사위왕, 가빈무이자자, 내선사위중대부수가.) 

 

 ['범수'는 위나라 사람으로 자는 '숙'이다. 제후들에게 유세하여 위나라 왕을 섬기려고 하였으나,
 집안이 가난하여 자금을 스스로 마련할 수 없어, 먼저 위나라 중대부 '수가'를 모셨다.] 
 

  

 須賈爲魏昭王使於齊, 范睢從.  留數月, 未得報.   

 齊襄王聞睢辯口, 乃使人賜睢金十斤及牛酒, 睢辭謝不敢受. 
 (수가위진소왕사어제, 범수종.  유수월, 미득보.  
 

 제양왕문수변구, 내사인사수금십근급우주, 수사사불감수.)  


 ['수가'가 위'소왕'의 명을 받아 제나라에 사자로 갈 때 '범수'는 '수가'를 수행하였다.  
 

 '수가'의 일행이 몇 개월을 머물렀으나 제'양왕'으로부터 아무런 회답을 받지 못했다. 
 제'양왕'은 '범수'가 언변과 재능이 뛰어나다는 사실을 알고 
 

 사람을 시켜 황금 10근과 소고기와 술을 보냈으나, '범수'는 사절하며 감히 받지 않았다.

   

 須賈知之, 大怒, 以爲睢持魏國陰事告齊, 故得此饋, 令睢受其牛酒, 還其金.   

 既歸, 心怒睢, 以告魏相.  魏相, 魏之諸公子, 曰魏齊.  魏齊大怒, 使舍人笞擊睢, 折脅摺齒.
 
(수가지지, 대노, 이위수지위국음사고제, 고득차궤, 령수수기우주, 환기금.  
 

 기귀, 심노수, 이고위상.  위상, 위지제공자, 왈위제.  위제대노, 사사인태격수, 절협접치.) 

 
 ['수가'는 이를 알고 크게 노했는데 그것은 '범수'가 제나라와 몰래 내통해서 그와 같은 음식과 하사품을  

 보냈다고 생각하여, '범수'에게 명하여 술과 고기는 받아들이고, 황금은 돌려주게 하였다.   

 사자의 임무를 마치고 위나라로 돌아온 '수가'는 '범수'의 행동에 대해 매우 분노하여  

 그 사실을 재상인 위공자 '위제'에게 고하였다. 위나라의 공자 출신에 재상의 자리에 있었던 위제는 

 몹시 화를 내며 가신을 시켜 '범수'를 붙잡아 오게 하여 매질을 해 갈빗대를 꺽고 이를 부러뜨렸다.] 

   

 睢詳死, 即卷以簀, 置廁中.  賓客飲者醉, 更溺睢, 故僇辱以懲後, 令無妄言者.  

 睢從簀中謂守者曰:「 公能出我, 我必厚謝公. 」  守者乃請出棄簀中死人. 
 
(수상사, 즉권이책, 치측중.  빈객음자취, 경익수, 고륙욕이징후, 령무망언자.  
 

 수종책중위수자왈 : 「 공능출아, 아필후사공. 」  수자내청출기책중사인.)  


 ['범수'는 피투성이가 되어 사경을 헤맬 정도로 두들겨 맞고 죽은 체하자, 
 

 '위제'는 '범수'를 대자리로 둘둘 말아 변소간에 던져버리도록 하였다. 
 그리고는 술에 취한 빈객들에게 '범수'의 몸에 오줌을 갈겨,
 

 그리하여 모욕을 가하여 훗날 '범수'와 같이 망언한 자가 없도록 하기 위함이었다. 
 '범수'는 대자리에 감긴 체 자기를 지키던 간수에게 말하기를 : " 그대가 나를 나가게 해 주면,
 

 내가 틀림없이 후하게 사례하겠소. "라고 하자.
 '범수'를 지키던 간수가 '위제'에게 대자리에 감겨 있는 사람이 죽어 내다 버리겠다고 청했다.]
 

 

 魏齊醉, 曰:「 可矣. 」  范睢得出.  後魏齊悔, 復召求之.   

 魏人鄭安平聞之, 乃遂操范睢亡, 伏匿, 更名姓曰張祿.
 
(위제취, 왈 : 「 가의. 」  범수득출.  후위제회, 부소구지.  
 

 위인정안평문지, 내수조범수망, 복익, 경명성왈장록.) 

 
['위제'는 술에 취해 말하기를 : " 범수의 시신을 교외에 내다버려 짐승들이 뜯어먹게 하라. "라고 하였다.  

이로써 '범수'는 사지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나중에 '위제'가 후회하고 '범수'를 다시 찾았다.    

위나라 사람 '정안평'이 그 소식을 듣고 '범수'를 도망칠 수 있도록 도와 숨기고  

'범수'의 이름을 '장록'으로 바꾸게 하였다.]  

  

 當此時, 秦昭王使謁者王稽於魏.  鄭安平詐爲卒, 侍王稽.   

 王稽問:「 魏有賢人可與俱西游者乎 ? 」 
 
(당차시, 진소왕사알자왕계어위.  정안평사위졸, 시왕계.  
 

 왕계문 : 「 위유현인가여구서유자 ? 」)


 [이때 진'소양왕'이 알자(빈객을 왕에게 인도하는 사람) '왕계'를 위나라에 사자로 보냈다.  
 

 '정안평'은 사졸로 신분을 속여 '왕계'를 옆에서 모셨다. 
 '왕계'가 묻기를 : " 위나라에는 나와 함께 서쪽으로 가서 유세를 행할만한 현인이 있는가 ? "라고 하자.]
  
 鄭安平曰:「 臣里中有張祿先生, 欲見君, 言天下事.  其人有仇, 不敢晝見. 」 
 
(정안평왈 : 「 신리중유장록선생, 욕견군, 언천하사.  기인유구, 불감주견. 」)


 ['정안평'이 대답하기를 : " 신의 집에 '장록'이라는 선생이 계시는데 대감을 뵙고 

 천하의 일을 말씀드리고 싶어 합니다. 
 그러나 그 사람은 위나라와 원수지간이라 낮에는 감히 돌아다닐 수 없는 처지입니다. "라고 하였다.]  
 

   

 王稽曰:「 夜與俱來. 」  鄭安平夜與張祿見王稽.   

 語未究, 王稽知范睢賢, 謂曰:「 先生待我於三亭之南. 」  與私約而去.
 
(왕계왈 : 「 야여구래. 」  정안평야여장록견왕계.   
 

 어미구, 왕계지범수현, 위왈 : 「 선생대아어삼정지남. 」 여사약이거.)  


 ['왕계'가 말하기를 : " 그렇다면 밤에 함께 오도록 하라 ! "라고 하였다.  
 

 이윽고 밤이 되자, '정안평'이 '장록'을 데리고 '왕계'를 만나러 왔다. 
 '장록'이 말을 미처 다 끝내기도 전에 '왕계'는 '범수'가 현인임을 알고 말하기를 : 
 

 " 선생은 "삼정"의 남쪽에 있는 역참에서 나를 기다리도록 하시오. "라고 하며,
 '장록'은 '왕계'와 비밀리에 약속을 하고 물러갔다.]
 

   

 王稽辭魏去, 過載范睢入秦.  至湖, 望見車騎從西來.   

 范睢曰:「 彼來者爲誰 ? 」  王稽曰:「 秦相穰侯東行縣邑. 」 
 
(왕계사위거, 과재범수입진.  지호, 망견거기종서래.    
 

 범수왈 : 「 피래자위수 ? 」  왕계왈 : 「 진상양후동행현읍. 」) 


 ['왕계'는 위나라에 작별을 고하고 "삼정"에 들러 '범수'를 수레에 태워 진나라로 들어갔다.  
 

 '왕계'의 일행이 "함곡관" 서쪽을 통과하여 "호지"에 이르자,
 서쪽 편 저 멀리서 호위 기병들을 이끌고 다가오고 있던 수레를 보았다.  
 

 '범수'가 묻기를 : " 수레를 타고 오는 사람은 누구입니까 ? "라고 하자. 
 '왕계'가 대답하기를 : " 진나라의 재상 '양후'의 행렬로써 동쪽의 "현읍"을 순찰하고 있는 중입니다 " 

 ​라고 하였다.]   

   

 范睢曰:「 吾聞穰侯專秦權, 惡內諸侯客, 此恐辱我, 我寧且匿車中. 」   

 有頃, 穰侯果至, 勞王稽, 因立車而語曰:「 關東有何變 ? 」  曰:「 無有. 」 
 
(범수왈 : 「 오문양후전진권, 오내제후객, 차공욕아, 아녕차익거중. 」   
 

 유경, 양후과지, 로왕계, 인입거이어왈 : 「 관동유하변 ? 」  왈 : 「 무유. 」)


 ['범수'가 말하기를 : " 내가 듣기에 진나라의 권력을 독차지하고 있는 '양후'는 제후국에서 오는 세객들을
 

 매우 싫어한다고 하였는데, 제가 그에게 욕을 당하지나 않을까 걱정되니 그의 눈을 피해 잠시 수레 안에

 숨어있겠습니다. "라고 하였다.
 잠시후 '양후'는 과연 다가와 '왕계'의 노고를 위로하고 수레에 일어나 묻기를 : "
 

 "함곡관" 동쪽에는 무슨 변화가 있었소 ? "라고 하자.
 '왕계'가 대답하기를 :  " 별다른 일은 없었습니다. "라고 하였다.] 
 

   

 又謂王稽曰:「 謁君得無與諸侯客子俱來乎 ?  無益, 徒亂人國耳. 」   

 王稽曰:「不敢.」 即別去.  范睢曰:「 吾聞穰侯智士也, 其見事遲, 鄉者疑車中有人, 忘索之. 」
 
(우위왕계왈 : 「 알군득무여제후객자구래호 ?  무익, 도란인국이. 」 
 

 왕계왈 : 「 불감. 」  즉별거.  범수왈 : 「 오문양후지사야, 기견사지, 향자의거중유인, 망색지. 」)

 
 ['양후'가 또 '왕계'에게 말하기를 : " 알자께서는 혹시 제후국에서 오는 유세객을 같이 대동하고 

 계시지 않습니까 ? 그 자들은 나라에 아무 도움이 되지 않을 뿐만 아니라, 

 헛되이 백성들과 나라를 어지럽히는 자들이오. "라고 하자.  

 '왕계'가 대답하기를 : " 제가 어찌 감히 그 자들을 데려올 수 있겠습니까 ? "라고 하였다.   

 '양후'는 안심한 듯 그 자리를 떠났다.
 '범수'가 말하기를 : " 제가 듣기로 '양후'는 지혜를 갖춘 사람이라 하였는데, 

 일에 대한 반응을 살피는데는 느리군요, 제가 보니 수레 안에 사람이 있을 것으로 의심 해놓고 

 그저 한번 흘깃 보기만 하고 조사는 하지 않는군요."하였다.]

 
 於是范睢下車走, 曰:「 此必悔之. 」  行十餘里, 果使騎還索車中, 無客, 乃已.  
 

 王稽遂與范睢入咸陽.
 
(어시범수하거주, 왈 : 「 차필회지. 」  행십여리, 과사기환색거중, 무객, 내이. 
 

 왕계수여범수입함양.)   


 [이에 '범수'는 수레에서 내려 걸으며 말하기를 : " '양후'는 틀림없이 후회할 것입니다. "라고 하였다. 
 '범수'가 수레에서 내려 10여 리 쯤 갔을 때, 과연 '양후'는 수레 안을 수색하기 위해 기병들을 보냈으나,   

 수레 안에 사람이 없음을 확인한 기병들은 돌아갔다. 
 '왕계'는 '범수'를 수레에 다시 태워 "함양"으로 들어갔다.]
 

   

 已報使, 因言曰:「 魏有張祿先生, 天下辯士也.  曰『秦王之國危於累卵, 得臣則安.  

 然不可以書傳也』.  臣故載來. 」 秦王弗信, 使舍食草具.  待命歲餘.
 
(이보사, 인언왈 : 「 위유장록선생, 천하변사야.  왈『진왕지국위어누란, 득신즉안.  
 

 연불가이서전야』.  신고재래. 」  진왕불신, 사사식초구.  대명세여.)   


 ['왕계'는 진왕에게 위나라에 다녀온 상황을 보고한 다음 '범수'에 대해 말하기를 : 
 

 " 위나라에 '장록'이라는 선생이 있었는데 천하에 견줄 바 없는 유세가였습니다. 
 그가 말하기를  ‘ 진소양왕'의 나라는 알을 쌓아 놓은 것 같이 위태로운 처해 있음으로
 나를 신하로 기용하면

 안정을 찾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런 것들은 글로써 모두 밝힐 수 있는 일이 아닙니다.’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소신이 그를 수레에 태워 진나라로 데리고 왔습니다. "라고 하였으나. 
 '소양왕'은 평소 유세객들을 혐오하던 터라 그 말을 믿지 않고 숙사로 보내 하찮은 식사만 제공하였다.  
 

 '범수'는 그렇게 1년이 넘게 진왕의 명을 기다렸다.]   

  

 當是時, 昭王已立三十六年.  南拔楚之鄢郢, 楚懷王幽死於秦.  秦東破齊. 

 湣王嘗稱帝, 後去之.  數困三晉.  厭天下辯士, 無所信.
 
(당시시, 소왕이입삼십육년.  남발초지언영, 초회왕유사어진.  진동파제.  
 

 민왕상칭제, 후거지.  수곤삼진.  염천하변사, 무소신.)  

 
 [이때 진'소양왕'이 왕위에 오른 지 이미 36년이 지났다. 남쪽으로 초나라의 "언"과 "영"을 함락시키고. 

 초'회왕'을 유인하여 진나라에 억류시켜 죽음에 이르게 했으며, 다시 동쪽으로는 제나라를 격파했다.   

 제'민왕'은 얼마 전에 진'소왕'과 같이 제왕을 칭하다가 후에 제호를 버렸다.
 진'소양왕'은 여러 번에 걸쳐 삼진(韓・魏・趙)을 곤경에 빠뜨렸었다.  
 

 또한 천하의 변사들을 싫어하여 아무도 믿지 않았다.] 

  

 穰侯, 華陽君, 昭王母宣太后之弟也;而涇陽君· 高陵君皆昭王同母弟也.   

 穰侯相, 三人者更將, 有封邑, 以太后故, 私家富重於王室. 
 
(양후, 화양군, 소왕모선태후지제야 ; 이경양군· 고릉군개소왕동모제야.  
 

 양후상, 삼인자경장, 유봉읍, 이태후고, 사가부중어왕실.)  


 ['양후'와 '화양군'은 '소양왕'의 모친 '선태후'의 동생들이었고 ;  
 

 또한 '경양군'과 '고릉군'은 '소양왕'의 어머니에게서 태어난 동생들이었다.
 '양후'는 승상이 되고 세 사람은 모두 장군이 되어 봉읍을 갖게 되었으며
 

 또한 태후의 후원으로 그 집안의 재산은 왕실보다 더 부유했다.] 

 

 及穰侯爲秦將, 且欲越韓· 魏而伐齊綱壽, 欲以廣其陶封. 范睢乃上書曰:臣聞明主立政, 

 有功者不得不賞, 有能者不得不官, 勞大者其祿厚, 功多者其爵尊, 能治眾者其官大. 

 (급양후위진장, 차욕월한· 위이벌제강수, 욕이광기도봉.  범수내상서왈 : 신문명주입정, 

 유공자부득불상, 유능자부득불관, 노대자기록후, 공다자기작존, 능치중자기관대. 

 

 [이에 '양후'가 진나라 장군이 되어 한나라와 위나라의 경계를 넘어 제나라의 "강읍"과 "수읍"를 정벌하여 

 자기의 봉읍인 "도읍"의 관할을 넓히려고 하였다. '범수'는 이 사실을 알고 상서를 올렸다 : 

 신이 듣기에 영명한 군주가 정치를 행하는 방법은 공이 있는 자에게는 상을 주고,  

 능력이 있는 자에게는 직책을 주며, 몸을 아끼지 않고 노력을 열심히 하는 자에게는 후한 봉록을 주어야 한다고

 했으며,  또한 공을 많이 이룬 자에게는 작록을 높여 주어야 하고,

 백성들을 잘 다스리는 사람들에게 그 관직을 높여야 한다고 했습니다.   

 

 故無能者不敢當職焉, 有能者亦不得蔽隱.  使以臣之言爲可, 願行而益利其道;

 以臣之言爲不可, 久留臣無爲也. 

 語曰:『 庸主賞所愛而罰所惡;明主則不然, 賞必加於有功, 而刑必斷於有罪. 』  
 
(고무능자불감당직언, 유능자역불득폐은. 사이신지언위가, 원행이익리기도 ;

 이신지언위불가, 구류신무위야.

 어왈 : 「 용주상소애이벌소오 ; 명주즉불연, 상필가어유공, 이형필단어유죄. 」 

 

 [고로 무능한 사람은 그러한 직책을 감당할 수 없고, 유능한 사람들 역시 자기의 재능을 감출 수 없기 때문입니다.

 신의 말이 옳다고 생각하신다면 원컨대 행하시어 그 다스리는 도를 더욱 이롭게 하시기 바라며 ;
 신의 말이 옳지 않다고 생각하신다면 신을 오랫동안 잡아두시는 일은 아무런 이익이 되지 않습니다.   

 옛 말에 ‘용렬한 군주는 사랑하는 사람에게 상을 주고 싫어하는 사람에게 벌을 주나 ;  

 영명한 군주는 그렇지 않고 공을 세운 사람에게는 틀림없이 상을 주고,
 죄를 짓는 사람에게는 반드시 형벌을 내린다.’고 했습니다.
 

   

 今臣之胸不足以當椹質, 而要不足以待斧鉞, 豈敢以疑事嘗試於王哉 !   

 雖以臣爲賤人而輕辱, 獨不重任臣者之無反復於王邪 ?
 
(금신지흉부족이당침질, 이요부족이대부월, 개감이의사상시어왕재 !  
 

 수이신위천인이경욕, 독불중임신자지무반복어왕야 ? 


 [지금 신의 가슴은 과녁이 될 만한 가치도 없으며, 허리는 큰 도끼를 맞을 수 있는 자격 조차 없는 
 

 미천한 신분의 사람입니다. 그런 제가 어찌 감히 의심스러운 일로 대왕의 마음을 시험할 수 있겠습니까 !    

 비록 신은 천민의 신분으로 가볍게 욕됨을 입는 바는 참을 수 있으나,
 신을 추천한 '왕계'만은 대왕을 배신할 인물이 아니라는 사실만큼은 믿으시겠지요 ?  
 

   

 且臣聞周有砥砨, 宋有結綠, 梁有縣藜, 楚有和朴, 此四寶者, 土之所生, 良工之所失也,  

 而爲天下名器.  然則聖王之所棄者, 獨不足以厚國家乎 ?
 
(차신문주유지액, 송유결록, 량유현려, 초유화박, 차사보자, 토지소생, 량공지소실야, 
 

 이위천하명기.  연즉성왕지소기자, 독부족이후국가호 ? 


 [또한 신이 듣기로 주나라에는 '지액'이 있었고, 송나라에는 '결록'이, 위나라에는 '현려'가, 

 초나라에는 '화박'이 있었다고 했는데, 이 네 가지 보옥들은 모두 흙에서 생겨난 것으로,  

 솜씨 좋은 공인들도 처음에는 몰라보고 버려졌다가 결국 천하의 명기가 되었습니다. 
 그런 연유로 비록 성왕께서 버린 사람이라고 할지라도, 

 나라를 부강하게 할 수 없다고 말할 수는 없지 않겠습니까 ? 

  

 臣聞善厚家者取之於國, 善厚國者取之於諸侯.    

 天下有明主則諸侯不得擅厚者, 何也 ?  爲其割榮也.
 
(신문선후가자취지어국, 선후국자취지어제후.
 

 천하유명주즉제후불득천후자, 하야 ?  위기할영야. 


 [신이 듣기에 가문을 흥성하게 하는데 능한 인재는 나라 안에서 찾아야 하고,
 

 나라를 부유하게 하는 인재는 천하의 제후국들로부터 찾아야 한다고 했습니다.
 천하의 영명한 군주가 있으면 제후들이 함부로 인재들을 얻지 못해 자기 나라를 부유하게 만들지 못하는 
이유가

 무엇 때문이겠습니까 ? 그것은 영명한 군주들이 자기의 영예를 나누어 그 인재들에게 주기 때문입니다.    

  

 良醫知病人之死生, 而聖主明於成敗之事, 利則行之, 害則舍之, 疑則少嘗之,  

 雖舜禹復生, 弗能改已.  語之至者, 臣不敢載之於書, 其淺者又不足聽也. 
 
(량의지병인지사생, 이성주명어성패지사, 리즉행지, 해즉사지, 의즉소상지, 
 

 수순우부생, 불능개이, 어지지자, 신불감재지어서, 기천자우부족청야. 


 [훌륭한 의사는 병자가 죽을지 살지를 알고 있으며, 성군은 일의 성패에 밝아 이득이 되면 행하고  
 

 손해가 되면 버리며, 의심스러우면 일단 조그맣게 시험해 보며,
 비록 순임금이나 우임금이 살아 돌아온다 해도 이러한 사실만은 고칠 수 없습니다.  
 말이 지극한 곳에 이르면 신은 그것을 글로 올리지 못하며,
 말이 또한 천박하면 들으실만한 가치가 없는 것입니다.

   

 意者臣愚而不概於王心邪 ?  亡其言臣者賤而不可用乎?   

 自非然者, 臣願得少賜游觀之閒, 望見顏色.  一語無效, 請伏斧質. 」
 
(의자신우이불개어왕심야 ?   망기언신자천이불가용호 ?  
 

 자비연자, 신원득소사유관지한, 망현안색.  일어무효, 청복부질.)  


 [저의 뜻한 바가 대왕께 전달되지 않은 이유는 제가 어리석기 때문입니까 ?   
 

 아니면 신을 천거한 자의 말이 천박하여 신의 말을 쓸 수 없기 때문입니까 ? 
 그것도 아니라면 신은 원컨대 대왕께서 유람하시고 남은 시간을 소신에게 나누어 주시어
 

 대왕의 얼굴을 한 번 알현케 해 주십시오. 
 한 마디 말로 대왕의 마음을 움직이지 못한다면 부월의 형을 달게 받겠습니다. "라고 하였다.]  
 

 於是秦昭王大說, 乃謝王稽, 使以傳車召范睢.  於是范睢乃得見於離宮, 詳爲不知永巷而入其中.   

 王來而宦者怒, 逐之, 曰:「 王至 ! 」  范睢繆爲曰:「 秦安得王? 秦獨有太后· 穰侯耳. 」 

 (어시진소왕대열, 내사왕계, 사이전거소범수.  어시범수내득견어리궁, 상위불지영항이입기중.

 왕래이환자노, 축지, 왈 : 「 왕지 ! 」  범수무위왈 : 「 진안득왕 ?  진독유태후· 양후이. 」) 

  

 [진'소양왕'이 읽고 크게 기뻐하며 '왕계'에게 사과하고 수레를 보내 '범수'를 불러오게 하였다. 
 그래서 마침내 진왕을 별궁에서 접견할 수 있게 된 '범수'는 궁중으로 들어가 복도에서 길을 잃어버린 체하고

 후궁들이 거처하는 영항으로 들어섰다.

 '소양왕'이 도착하자, 화가 난 환관들이 범수를 쫓아내며 말하기를 : " 대왕께서 납시오 ! "라고 하자, 
 '범수'는 일부러 큰 소리로 말하기를 : " 진나라에 무슨 왕이 있단 말이오 ?  
 

 나는 진나라에 오로지 태후와 '양후'만 있다고 들었소 "라고 하였다.] 

 

 欲以感怒昭王.  昭王至, 聞其與宦者爭言, 遂延迎, 謝曰:「 寡人宜以身受命久矣,

 會義渠之事急, 寡人旦暮自請太后;今義渠之事已, 寡人乃得受命. 竊閔然不敏, 敬執賓主之禮.」

 (욕이감노소왕.  소왕지, 문기여환자쟁언, 수연영, 사왈 : 「 과인의이신수명구의, 회의거지사급,  

 과인단모자청태후 ; 금의거지사이, 과인내득수명.  절민연불민, 경집빈주지례. 」) 


 ['범수'는 큰소리로 외쳐 일부러 '소양왕'의 화를 돋우려는 심산이었다.
 

 도착한 '소양왕'은 '범수'가 환관들과 다투고 있는 소리를 듣고 자신이 직접 다가가 '범수'를 맞이하며  

 사과하기를 : " 과인이 마땅히 몸소 선행의 가르침을 오래 전에 받았어야 했습니다만  

 서융을 멸하는 일이 급하여 과인이 아침저녁으로 태후를 뵙고 지시를 받아야만 했었기 때문이었소 ; 
 지금 의거의 일은 모두 끝이 났으니 과인은 선생의 가르침을 받고자 하오.  
 

 과인은 어리석고 총민하지 못하니 삼가 주빈의 예로써 가르침을 청하겠소 "라고 하였다.]  

 

 范睢辭讓.  是日觀范睢之見者, 群臣莫不洒然變色易容者.  秦王屏左右, 宮中虛無人.   

 秦王跽而請曰:「 先生何以幸教寡人 ? 」
 
(범수사양.  시일관범수지견자, 군신막불선연변색역용자.  진왕병좌우, 궁중허무인.
 

 진왕기이청왈 : 「 선생하이행교과인 ? 」 )  


 ['범수'는 정중하게 예를 행하며 사양하였다.  
 

 이날 '범수'가 '소양왕'을 접견하는 모습을 본 진나라의 군신들은 모두 숙연한 얼굴을 하고 

 ​자세를 바로잡지 않는 자가 없었다.  진왕이 좌우의 사람을 물리치니 궁중에는 아무도 없게 되었다. 

 '소양왕'은 두 무릎을 바닥에 꿇고 몸을 세운 채 정중하게 범수에게 가르침을 청하며 묻기를 : 
 "선생께서 과인에게 가르칠 것이 있다고요 ? "라고 하자. ]
 

 

 范睢曰:「 唯唯. 」  有閒, 秦王復跽而請曰:「 先生何以幸教寡人 ? 」    

 范睢曰:「 唯唯. 」  若是者三.  秦王跽曰:「 先生卒不幸教寡人邪 ? 」 
 
(범수왈 : 「 유유. 」  유한, 진왕복기이청왈 : 「 선생하이행교과인 ? 」  
 

 범수왈 : 「 유유. 」  약시자삼.  진왕기왈 : 「 선생졸불행교과인야 ? 」)  


 ['범수'는 대답하기를 : " 예, 그렇습니다. " 만을 연발하였다,  
 

 진왕이 다시 무릎을 꿇고 청하기를 : " 선생께서 과인에게 가르칠 것이 있다고 하지 않았소 ? "라고 하자. 
 '범수'는 다시 대답하기를 : " 예, 그렇습니다. "라고 하였다.  
 

 진왕이 다시 무릎을 꿇고 청하기를 세 번이나 반복했다.  
 다시 진왕이 꿇고 앉아 말하기를 : " 선생께서는 결코 과인에게 가르침을 주지 않으렵니까 ? "라고 하자.] 
 

   

 范睢曰:「 非敢然也.  臣聞昔者呂尚之遇文王也, 身爲漁父而釣於渭濱耳.    

 若是者, 交疏也.  已說而立爲太師, 載與俱歸者, 其言深也.  故文王遂收功於呂尚而卒王天下. 
 
(범수왈 : 「 비감연야.  신문석자여상지우문왕야, 신위어부이조어위빈이.
 

 약시자, 교소야.  이세이입위태사, 재여구귀자, 기언심야.  고문왕수수공어여상이졸왕천하. )   


 ['범수'는 그제서야 입을 열어 대답하기를 : " 제가 어찌 감히 그럴 수 있겠습니까 ?  
 

 신은 듣기에 옛날 강태공 '여상'이 '주문왕'을 만날 당시 그는 위수의 강가에서 낚시나 하는 어부에 불과했습니다. 

 이때 두 사람 사이는 소원했습니다. 그러나 '여상'이 '문왕'에게 유세하자, '문왕'은 '여상'을 태사로 삼아,  

 수레에 같이 타고 궁궐로 돌아왔습니다.  그것은 '여상'의 말에 깊이가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러므로 '문왕'은 '여상'으로 인해 공업을 성취하여 결국 천자가 되었습니다. 

 

 鄉使文王疏呂尚而不與深言, 是周無天子之德, 而文武無與成其王業也.   

 今臣羈旅之臣也, 交疏於王, 而所願陳者皆匡君之事, 處人骨肉之閒, 願效愚忠而未知王之心也.    

 此所以王三問而不敢對者也.  臣非有畏而不敢言也. 
 
(향사문왕소여상이불여심언, 시주무천자지덕, 이문무무여성기왕업야.  

 금신기려지신야, 교소어왕, 이소원진자개광군지사, 처인골육지한, 원효우충이미지왕지심야.   

 차소이왕삼문이불감대자야.  신비유외이불감언야. 

  
 [만약 처음부터 '문왕'이 '여상'을 소원하게 대하여 마음속의 깊은 말을 하지 않았다면,
 주나라는 천자의 자리에 올라 덕을 베풀 수 없었으며 '문왕'이나 '무왕'도 왕업을 이룰 수 없었을 것입니다. 

 지금 신은 타지에서 온 떠돌이 신세로 대왕과는 관계가 소원합니다.     

 하지만 신이 드리고 싶은 말은 모두 대왕의 일을 돕거나 군왕의 인척과 관련된 큰 일들이므로
 원컨대 어리석지만 충성을 바치고자 하여 직접 말씀드리려 하였으나 대왕의 속마음을 알 수 없었습니다.  
 이 때문에 대왕께서 세 번이나 추궁하시듯 물으셨을 때 제가 감히 말씀을 드리지 못한 것은 

 신이 두려워하여 말씀드리지 않은 것이 아닙니다.  

   

 臣知今日言之於前而明日伏誅於後, 然臣不敢避也.   

 大王信行臣之言, 死不足以爲臣患, 亡不足以爲臣憂, 漆身爲厲被髮爲狂不足以爲臣恥. 
 
(신지금일언지어전이명일복주어후, 연신불감피야.  
 

 대왕신행신지언, 사부족이위신환, 망부족이위신우, 칠신위려피발위광부족이위신치.  

 
 [신은 오늘 대왕의 면전에서 말씀드리고 내일이 되어 주살당한다 할지라도 신은 감히 피하지는 않겠습니다.

 대왕께서 신의 말을 믿고 행하실 수 있다면 죽음도 걱정하지 않겠으며,  

 도망치는 처지가 된다고 해도 걱정하지 않을 것이며, 몸에 옻칠을 하여 나병환자처럼 보이고,   

 머리는 산발을 하여 미치광이처럼 보인다 하여도 신은 부끄럽게 생각하지 않을 것입니다.  

  

 且以五帝之聖焉而死, 三王之仁焉而死, 五伯之賢焉而死, 烏獲· 任鄙之力焉而死,   

 成荊· 孟賁· 王慶忌· 夏育之勇焉而死.  死者, 人之所必不免也. 
 
(차이오제지성언이사, 삼왕지인언이사, 오백지현언이사, 오획· 임비지력언이사, 
 

 성형· 맹분· 왕경기· 하육지용언이사.  사자, 인지소필불면야.    

 [또한 오제와 같은 성군들도 결국 죽었고, 삼왕과 같은 어진이들도 죽었으며, 

 ​오백(오패)과 같은 현군들도 역시 죽었고, '오획', '임비'와 같은 천하장사들도 죽었으며, 
 '성형', '맹분', '왕경기', '하육' 등과 같은 용사들도 모두 죽었습니다.   
 

 죽음은 사람에게 반드시 피할 수 없는 일입니다.  

 

 處必然之勢, 可以少有補於秦, 此臣之所大願也, 臣又何患哉 ! 

 伍子胥橐載而出昭關, 夜行晝伏, 至於陵水, 無以餬其口,  

 膝行蒲伏, 稽首肉袒, 鼓腹吹篪, 乞食於吳市, 卒興吳國, 闔閭爲伯.  
 
(처필연지세, 가이소유보어진, 차신지소대원야, 신우하환재 !   

 오자서탁재이출소관, 야행주복, 지어릉수, 무이호기구,  

 슬행포복, 계수육단, 고복취지, 걸식어오시, 졸흥오국, 합려위백.   

 [사람이 피할 수 없는 처지에 놓이게 되도, 진나라에 조금이나마 보탬이 된다면, 이것은 신이 크게 원하는 바인데,

 신이 또한 어찌 죽음을 걱정하겠습니까 ! '오자서'는 자루 속에 숨어서 소관(초나라와 오나라 사이의 관문)을

 탈출한 후에 밤에는 길을 가고 낮에는 숨으면서 "능수"에 이르렀으나 먹을 것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무릎으로 기어 다니며, 머리를 조아리고 어깨를 드러낸 채, 배를 두드리고 피리를 불며,     

 오나라 저자거리에서 걸식을 하면서, 마침내 오나라를 일으켜 '합려'를 패자로 만들었습니다.  

   

 使臣得盡謀如伍子胥, 加之以幽囚, 終身不復見, 是臣之說行也, 臣又何憂?  

 箕子· 接輿漆身爲厲, 被髮爲狂, 無益於主. 
 
(사신득진모여오자서, 가지이유수, 종신불복견, 시신지설행야, 신우하우 ?  
 

 기자· 접여칠신위려, 피발위광, 무익어주.    

 [신으로 하여금 '오자서'처럼 계책을 다하게 해주신다면, 죄수가 되어 구금당해 종신토록 대왕을

 못 본다 한들 신의 계책이 실행될 수만 있다면 어찌 신이 걱정하겠습니까 ?    

 '기자'는 몸에 옻칠을 해서 나병환자처럼 보였고 '접여'는 산발하여 미치광이처럼 행세하였으나  

 그런 행위는 모두 그들 군주를 위해 아무런 이익이 되지 않았습니다. 

  

 假使臣得同行於箕子, 可以有補於所賢之主, 是臣之大榮也, 臣有何恥?  

 臣之所恐者, 獨恐臣死之後, 天下見臣之盡忠而身死, 因以是杜口裹足, 莫肯鄉秦耳.
 
(가사신득동행어기자, 가이유보어소현지주, 시신지대영야, 신유하치 ?  
 

 신지소공자, 독공신사지후, 천하견신지진충이신사, 인이시두구과족, 막긍향진이. 

 
 [만일 신으로 하여금 '기자'와 같은 행동을 하도록 해서 그것으로 현명한 군주를 보좌토록 하게 한다면, 
 

 이는 신에게 있어 크나큰 광영일진데, 어찌 그것을 수치스럽게 여기겠습니까 ?   

 신이 두려워하는 바는 신이 죽은 후에 천하의 백성들이 제가 충성을 다하고도 죽는 것을 보게 되면,
 그로 인해 입을 봉하고 두려워서 발길을 돌려 아무도 진나라에 들어오지 않으면 어쩌나 하는 일입니다.
 

  

 足下上畏太后之嚴, 下惑於姦臣之態, 居深宮之中, 不離阿保之手, 終身迷惑, 無與昭姦.   

 大者宗廟滅覆, 小者身以孤危, 此臣之所恐耳. 若夫窮辱之事, 死亡之患, 臣不敢畏也. 

 臣死而秦治, 是臣死賢於生. 」  
 (족하상외태후지엄, 하혹어간신지태, 거심궁지중, 불리아보지수, 종신미혹, 무여소간.
 

 대자종묘멸복, 소자신이고위, 차신지소공이. 약부궁욕지사, 사망지환, 신불감외야. 

 신사이진치, 시신사현어생. 」)

   
 [대왕께서는 위로는 태후의 위엄을 두려워하시고, 아래로는 간신들의 행태에 미혹되어 
구중궁궐 깊은 곳에

 거처하시면서, 근신들의 손아귀에서 벗어나지 못한 채, 종신토록 미혹된 마음을 떨쳐버리지 못하고,

 간사한 자들을 분별할 수 있게 도움을 줄만한 사람도 없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크게는 종묘사직이 멸망하게 되고, 작게는 대왕의 신세가 외롭고 위태롭게 되니,

 이것을 신이 걱정하고 있는 바입니다. 대체로 이와같이 당하는 일이 곤궁하게 되어 욕됨을 받게 되거나, 

 혹은 죽지나 않을까 하는 걱정이라면, 신은 그것들을 전혀 두렵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신이 죽고 진나라가 잘 다스려진다면 신은 현명하게 생을 살았다는 이름을 얻게 되기 때문입니다 "라고 하였다. ]  

   

 秦王跽曰:「 先生是何言也! 夫秦國辟遠, 寡人愚不肖, 先生乃幸辱至於此,  

 是天以寡人慁先生而存先王之宗廟也.  寡人得受命於先生, 是天所以幸先王, 而不棄其孤也. 
 
(진왕기왈 : 「 선생시하언야 !  부진국벽원, 과인우불초, 선생내행욕지어차, 
 

 시천이과인흔선생이존선왕지종묘야.  과인득수명어선생, 시천소이행선왕, 이불기기고야. 

  
 [진왕이 다시 무릎을 꿇고 말하기를 : " 선생께서는 어찌하여 그런 말을 하는 것이오 !  
 

 무릇 진나라는 중원에서 멀리 떨어져 있으며 변방의 나라로, 과인은 어리석고 불초하지만  

 다행히 선생께서 이곳에 오신 것은 하늘이 과인의 걱정거리를 선생으로부터 도움을 받고  

 선왕들의 종묘를 보전시키라는 지시인것 같소.  과인이 선생을 통해 천명을 전해 받게 됨은 

 ​하늘이 선왕들을 총애하여 과인을 고립시키지 않으려고 하기 때문입니다. 

 

 秦王跽曰:「 先生是何言也! 夫秦國辟遠, 寡人愚不肖, 先生乃幸辱至於此,  

 是天以寡人慁先生而存先王之宗廟也.  寡人得受命於先生, 是天所以幸先王, 而不棄其孤也. 

 先生柰何而言若是! 事無小大, 上及太后, 下至大臣, 願先生悉以教寡人, 無疑寡人也. 」  

 (진왕기왈 : 「 선생시하언야 !  부진국벽원, 과인우불초, 선생내행욕지어차,  

 시천이과인흔선생이존선왕지종묘야.  과인득수명어선생, 시천소이행선왕, 이불기기고야. 

 선생내하이언약시 !  사무소대, 상급태후, 하지대신, 원선생실이교과인, 무의과인야. 」)  

 

 [진왕이 다시 무릎을 꿇고 말하기를 : " 선생께서는 어찌하여 그런 말을 하는 것이오 !   

 무릇 진나라는 중원에서 멀리 떨어져 있는 변방의 나라로, 과인은 어리석고 불초하지만 다행히 선생께서 이곳에

 오신 것은 하늘이 과인의 걱정거리를 선생으로부터 도움을 받고 선왕들의 종묘를 보전시키라는 지시인것 같소. 

 과인이 선생을 통해 천명을 전해 받게 됨은 하늘이 선왕들을 총애하여 과인을 고립시키지 않으려고 하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선생께서 하시는 말씀이 어찌 그와 같단 말이오 !  

 일이란 크고 작은 것에 구별이 없으며 위로는 태후에서 아래로는 대신들에게 이르기까지,
 원컨데 모두 선생의 가르침을 따르려 하니 추호도 과인을 의심하지 마십시오 "라고 하였다. ]
 

 

 范睢拜, 秦王亦拜.  范睢曰:「 大王之國, 四塞以爲固, 北有甘泉· 谷口, 南帶涇· 渭, 右隴· 蜀,  

 左關· 阪, 奮擊百萬, 戰車千乘, 利則出攻, 不利則入守, 此王者之地也. 

 民怯於私鬥而勇於公戰, 此王者之民也.  王并此二者而有之.   

 夫以秦卒之勇, 車騎之眾, 以治諸侯, 譬若施韓盧而搏蹇兔也, 霸王之業可致也, 而群臣莫當其位. 

 至今閉關十五年, 不敢窺兵於山東者, 是穰侯爲秦謀不忠, 而大王之計有所失也. 」   

 秦王跽曰:「 寡人願聞失計.」然左右多竊聽者, 范睢恐, 未敢言內, 先言外事, 以觀秦王之俯仰.  
 (범수배, 진왕역배.  범수왈 : 「 대왕지국, 사새이위고, 북유감천· 곡구, 남대경· 위, 우롱· 촉,

 좌관· 판, 분격백만, 전거천승, 리즉출공, 불리즉입수, 차왕자지지야.

 민겁어사투이용어공전, 차왕자지민야.  왕병차이자이유지.   

 부이진졸지용, 거기지중, 이치제후, 비약시한로이박건토야, 패왕지업가치야, 이군신막당기위.

 ​지금폐관십오년, 불감규병어산동자, 시양후위진모불충, 이대왕지계유소실야. 」     

 진왕기왈 : 「 과인원문실계. 」연좌우다절청자, 범수공, 미감언내, 선언외사, 이관진왕지부앙.)

 

 ['범수'가 '소양왕'에게 절을 올리자, 진왕도 따라서 같이 맞절을 하였다. 

 그러자 '범수'가 다시 말하기를 : " 대왕의 나라는 사방이 산천으로 둘러싸인 천연의 요새이며,  

 북에는 "감천", "곡구"의 험지가 있고, 남쪽으로는 "경수"와 '위수"가 띠를 두른 듯 흐르고 있으며,  

 우측으로는 "농서" "촉"이 있으며, 좌측으로는 "함곡관"과 "장판"이 자리하고 있어,
 용맹을 떨치고 있는 백만의 군사와  천승의 병거로 전세가 유리하면 나라 밖으로 나아가 공격하고 
 

 전세가 불리하면 나라 안으로 들어와 지키면 됩니다. 이는 왕업을 이룰 수 있는 지형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백성들은 사사로운 싸움에는 겁을 내지만, 국가 간에 벌어진 싸움에는 용감하니, 이로써 왕업을 이룰 수 

 있습니다. 대왕께서는 지세의 이로움과 용감한 백성이 있으므로 두가지를 다 갖고 있습니다. 

 대체로 진나라 병사들의 용감함과 많은 수의 전차와 기병들로 제후들을 다스리는 일은 마치 한로와 같은

 용감한 사냥개가 절름발이 토끼를 사냥하는 경우와 같아서 패왕의 공업을 이룰 수 있지만,

 군신들 중 아무도 그 직책을 감당할 수 있는 사람이 없기 때문입니다.   

 현재 진나라가 관문을 닫은 지 15년이 지났음에도 감히 군대를 내어 "산동"을 엿보지 못하고 있는데, 
 이것은 바로 '양후'가 진나라를 위해 계책을 내지 않고 불충하고 있기 때문이며,    

 또한 대왕의 계책에도 잘못이 있기 때문입니다 "라고 하자. 

 진왕이 다시 무릎을 꿇고 말하기를 : " 과인의 잘못된 계책에 대해 듣고 싶습니다 "라고 하였다.

 그러나 좌우에 몰래 엿듣는 자가 많을지 모른다고 생각한 '범수'는 감히 공실 내부의 일을 

 감히 입 밖에 내지 못하고 먼저 외부의 일에 대해 언급하면서, 진왕의 기색을 아래 위로 살펴 보았다.

 

 因進曰:「 夫穰侯越韓· 魏而攻齊綱壽, 非計也.  少出師則不足以傷齊, 多出師則害於秦.    

 臣意王之計, 欲少出師而悉韓· 魏之兵也, 則不義矣.  今見與國之不親也, 越人之國而攻, 可乎?

 於計疏矣.  且昔齊湣王南攻楚, 破軍殺將, 再辟地千里, 而齊尺寸之地無得焉者,   

 豈不欲得地哉, 形勢不能有也.  諸侯見齊之罷獘, 君臣之不和也, 興兵而伐齊, 大破之. 

 士辱兵頓, 皆咎其王, 曰:『 誰爲此計者乎 ? 』  王曰:『 文子爲之, 』  大臣作亂, 文子出走. 
 攻齊所以大破者, 以其伐楚而肥韓· 魏也.  此所謂借賊兵, 而齎盜糧者也.    

 王不如遠交而近攻, 得寸則王之寸也, 得尺亦王之尺也.  今釋此而遠攻, 不亦繆乎!

 ​且昔者中山之國地方五百里, 趙獨吞之, 功成名立而利附焉, 天下莫之能害也.

 夫韓· 魏, 中國之處而天下之樞也, 王其欲霸, 必親中國以爲天下樞, 以威楚· 趙.   

 楚彊則附趙, 趙彊則附楚, 楚· 趙皆附, 齊必懼矣.  

 齊懼, 必卑辭重幣以事秦.  齊附而韓· 魏因可虜也. 」

 (인진왈 : 「 부양후월한· 위이공제강수, 비계야.  소출사즉부족이상제, 다출사즉해어진. 

 신의왕지계, 욕소출사이실한· 위지병야, 즉불의의.  금견여국지불친야, 월인지국이공, 가호 ?

 기어계소의.  차석제민왕남공초, 파군살장, 재벽지천리, 이제척촌지지무득언자,  

 개불욕득지재, 형세불능유야.  제후견제지파폐, 군신지불화야, 흥병이벌제, 대파지.

 ​사욕병돈, 개구기왕, 왈 : 『 수위차계자호 ? 』   왕왈 : 『 문자위지, 』  대신작란, 문자출주. 

 공제소이대파자, 이기벌초이비한· 위야.  차소위차적병, 이재도량자야.   

 왕불여원교이근공, 득촌즉왕지촌야, 득척역왕지척야.  금석차이원공, 불역무호 !

 차석자중산지국지방오백리, 조독탄지, 공성명입이리부언, 천하막지능해야.

 금부한· 위, 중국지처이천하지추야, 왕기욕패, 필친중국이위천하추, 이위초· 조. 

 초강즉부조, 조강즉부초, 초· 조개부, 제필구의.

 ​제구, 필비사중폐이사진.  제부이한· 위인가로야. 」)

 

[그리고는 계속해서 말하기를 : " 대체로 '양후'가 한나라와 위나라의 영토를 넘어 제나라의 "강읍"과 "수읍"을

 공격하려고 하는 행위는 좋은 계책이 아닙니다. 군사를 적게 보내면 제나라를 이길 수 없고,

 많은 군사를 보내면 군비가 많이 들어 진나라에 막대한 손실을 끼칩니다. 

 대왕의 뜻을 추측해 보건대 진나라는 소규모의 군대를 보내는 대신, 한나라와 위나라로부터 협조를 구해

 군사를 얻으려는 것은 옳지 못한 방법입니다. 지금 보면 이웃하는 나라와는 친하지 않으면서,

 그 너머 멀리 떨어져 있는 나라를 공격하려고 하니, 그것이 가능하겠습니까 ? 그 계책은 모자라기 그지 없습니다. 

 옛날 제'민왕'이 남쪽의 초나라를 공격하여 적군을 격파하고 그 장수를 죽여 제나라 강토를 천여 리나 넓혔다고

 했으나, 결국 한 자의 땅도 얻지 못했으니, 어찌 그것이 제나라가 땅을 원하지 않아서 이겠습니까 ?   

 그것은 형세가 그러지 못했기 때문이었습니다. 제후들은 제나라가 국력을 낭비하여 피폐해지고 군신들 사이가

 화목하지 못한 모습을 보자, 군사들을 일으켜 제나라를 공격하여 크게 무찔렀습니다. 
 
장수들은 모욕을 당하고 병사들의 사기는 땅에 떨어지자, 모두 왕을 책망하며 말하기를 : 

 " 이러한 계책을 꾀한 자가 누구입니까 ? "라고 하자.
 제민왕이 말하기를 : ' 모든 일을 맹상군 '전문' 때문이다'라고 대답했습니다.  
 

 대신들이 듣고 난을 일으키자, '전문'은 나라 밖으로 도망치고 말았습니다.   

 제후들의 공격을 받은 제나라가 크게 패하게 된 것은 초나라를 공략하여 한나라와 위나라만 살찌게 만들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이것은 소위 적에게 군사를 빌려주는 행위이며, 또한 도적에게 양식 공급하는 격입니다.  

 그래서 대왕께 원교근공 책을 행하라고 권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대왕께서 얻는 땅이 비록 한 치가 되었건 한 자가 되었건 그것은 바로 대왕의 소유가 됩니다.  

 그런데 지금 이웃한 나라의 땅은 버려두고 먼 곳을 공격하려고 하니 그것은 잘못된 계책이 아니겠습니까 !  

 옛날 중산국의 땅은 사방 5백리에 달했는데 조나라가 단독으로 공격하여 삼키고, 공업과 명성을 높였으며 

 이익도 더불어 누렸습니다만 천하의 어느 나라도 능히 조나라에 시비를 걸지 못했습니다.    

 지금 대체로 한나라와 위나라의 위치는 천하의 중심이 되는 곳에 있습니다.   

 대왕께서 패자가 되고 싶으시다면 반드시 중원의 제후국들과 친교를 맺어 천하의 중추를 장악하신 다음 

 그 위세를 이용하여 초나라와 조나라를 제압하셔야 합니다.   

 초나라가 강하면 조나라에 붙고, 조나라가 강하면 초나라에 붙어 초나라와 제나라가 진나라에 붙게 되면

 제나라는 반드시 두려워하게 될 것입니다.     

 제나라가 진나라를 두려워하게 되면 반드시 겸손한 말과 많은 폐백을 바쳐 진나라를 섬길 것입니다.  
 제나라가 진나라에 붙으면 한나라와 위나라를 포로로 할 수 있습니다 "라고 하였다.] 
 

   

 昭王曰:「 吾欲親魏久矣, 而魏多變之國也, 寡人不能親.  請問親魏柰何?」   

 對曰:「 王卑詞重幣以事之;不可, 則割地而賂之;不可, 因舉兵而伐之. 」 
 
(소왕왈 : 「 오욕친위구의, 이위다변지국야, 과인불능친.  청문친위내하 ? 」  
 

 대왈 : 「 왕비사중폐이사지 ; 불가, 즉할지이뢰지 ; 불가, 인거병이벌지. 」)

  
 [진'소양왕'이 말하기를 : " 내가 위나라와 친교를 맺으려고한 지가 이미 오래 되었으나, 
 

 위나라에 변란을 빈번히 일어나 친교를 맺을 수가 없었습니다. 
 청컨대 위나라와 친교를 맺으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 "라고 하자.
 '범수'가 대답하기를 : " 대왕께서 겸손한 말과 많은 폐백을 보내 위나라를 섬기겠다고 하십시오.
 

 위나라가 행하지 않으면 다시 땅을 떼어 주고 뇌물을 주어 매수하십시오.
 그래도 행하지 않는다면 그때는 그것을 핑계로 군사를 보내 정벌하십시오 "라고 하였다.] 
 

   

 王曰:「 寡人敬聞命矣. 」 乃拜范睢爲客卿, 謀兵事.   

 卒聽范睢謀, 使五大夫綰伐魏, 拔懷.  後二歲, 拔邢丘.
 (왕왈 : 「 과인경문명의. 」  내배범수위객경, 모병사.  

 졸청범수모, 사오대부관벌위, 발회.  후이세, 발형구. )  

 
 [진'소양왕'이 말하기를 : " 과인은 선생의 명을 들어 따르겠습니다 "라고 하였다.  

 진'소양왕'은 이내 '범수'를 객경으로 임명하고 군사의 일을 맡겼다. 
 마침내 소양왕은 '범수'의 계책에 따라 오대부 '관'을 장수로 삼아 위나라를 공격하여 "회현"을 빼앗았다.  

 2년 후에 또 "형구"를 빼앗았다. ] 

   

 客卿范睢復說昭王曰:「 秦韓之地形, 相錯如繡.  秦之有韓也, 譬如木之有蠹也,  

 人之有心腹之病也.  天下無變則已, 天下有變, 其爲秦患者孰大於韓乎 ? 王不如韓. 」
 
(객경범수부세소왕왈 : 「 진한지지형, 상착여수.  진지유한야, 비여목지유두야, 
 

 인지유심복지병야.  천하무변즉이, 천하유변, 기위진환자숙대어한호 ?  왕불여수한. )

 
 [객경이 된 '범수'가 다시 '소양왕'에게 유세하기를 : " 진나라와 한나라의 지형을 살펴보건대 

 ​두 나라의 땅은 서로 교차하여 마치 수를 놓은 모습과 같습니다. 진나라에게 있어서 한나라를 비유하자면 

 나무에 붙어 사는 좀과 같고, 사람에게 있어서는 뱃속의 병과 같습니다.  

 천하에 아무런 변란이 없으면 별 문제가 없지만 천하에 변란이 발생하면 진나라에 있어서 한나라보다 

 큰 근심이 어디 있겠습니까 ?  대왕께서는 어떠한 일도 한나라를 거두는 것만 못합니다 "라고 하였다.] 
  
 昭王曰:「 吾固欲收韓, 韓不聽, 爲之柰何 ? 」  
 

 對曰:「韓安得無聽乎 ?  王下兵而攻滎陽, 則鞏· 成皋之道不通;北斷太行之道, 則上黨之師不下.

 ​王一興兵而攻滎陽, 則其國斷而爲三.  夫韓見必亡, 安得不聽乎 ?  若韓聽, 而霸事因可慮矣. 」   

 王曰:「 善. 」  且欲發使於韓.

 (소왕왈 : 「 오고욕수한, 한불청, 위지내하 ? 」  

  대왈 : 「 한안득무청호 ?  왕하병이공형양, 즉공· 성고지도불통 ; 북단태행지도, 즉상당지사불하. 

 왕일흥병이공형양, 즉기국단이위삼.  부한견필망, 안득불청호 ?  약한청, 이패사인가려의. 」    

 왕왈 : 「 선. 」  차욕발사어한.)


 ['소양왕'이 말하기를 : " 내가 예전부터 한나라를 거두어 들이려고 하였으나 한나라가 말을 듣지 않았소. 

 어떻게 해야 한나라를 거둘 수 있겠소 ? "라고 하자.
 '범수'가 대답하기를 : " 한나라가 어찌 진나라의 말을 듣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    

 대왕께서 군사를 일으켜 "형양"을 공격하여 "공현"과 "성고"로 통하는 길이 막고 ;
 또한 북쪽으로는 태항산맥의 길을 끊어 "상당"의 군사들은 남하하지 못하게 하십시오.  
 

 대왕께서 한 번 군사를 일으켜 "형양"을 공격한다면 한나라는 셋으로 나뉘게 됩니다.   

 그렇게 되면 한나라는 틀림없이 망하게 될 터인데, 어찌 대왕의 말을 듣지 않겠습니까 ?    

 만약 한나라가 따른다면, 진나라는 패업을 이루고 한나라는 진나라를 섬기게 될 것입니다 "라고 하였다.
 '소양왕'이 말하기를 : " 훌륭하오 "라고 하며.  이어서 '소양왕'은 사자를 선발하여 한나라에 보냈다.] 
 

   

 范睢日益親, 復說用數年矣, 因請閒說曰 : 「 臣居山東時, 聞齊之有田文, 不聞其有王也;  

 聞秦之有太后· 穰侯· 華陽· 高陵· 涇陽, 不聞其有王也. 夫擅國之謂王, 能利害之謂王,

 制殺生之威之爲王. 今太后千行不顧, 穰侯出使不報, 華陽· 涇陽等擊斷無諱, 高陵進退不請.

 四貴備而國不危者, 未之有也. 爲此四貴者下, 乃所謂無王也. 然則權安得不傾, 令安得從王出乎?

 臣聞善治國者, 乃內固其威而外重其權. 穰侯使者操王之重, 決制於諸侯, 剖符於天下, 政適伐國,

 莫敢不聽. 戰勝攻取則利歸於陶, 國獘御於諸侯;戰敗則結怨於百姓, 而禍歸於社稷. 

 詩曰 『 木實繁者披其枝, 披其枝者傷其心;大其都者危其國, 尊其臣者卑其主 』.   

 崔杼· 淖齒管齊, 射王股, 擢王筋, 縣之於廟梁, 宿昔而死. 李兌管趙, 囚主父於沙丘, 百日而餓死.

 今臣聞秦太后· 穰侯用事, 高陵· 華陽· 涇陽佐之,  卒無秦王, 此亦淖齒· 李兌之類也.

 且夫三代所以亡國者, 君專授政, 縱酒馳騁弋獵, 不聽政事.   

 其所授者, 妒賢嫉能, 御下蔽上, 以成其私, 不爲主計, 而主不覺悟, 故失其國. 

 今自有秩以上至諸大吏, 下及王左右, 無非相國之人者.     

 見王獨立於朝, 臣竊爲王恐, 萬世之後, 有秦國者非王子孫也. 」  昭王聞之大懼, 曰:「 善. 」

 (범수일익친, 복세용수년의, 인청한세왈 : 「 신거산동시, 문제지유전문, 불문기유왕야 ;  

 문진지유태후· 양후· 화양· 고릉· 경양, 불문기유왕야.

 부천국지위왕, 능리해지위왕, 제살생지위지위왕.  금태후천행불고, 양후출사불보,  

 화양· 경양등격단무휘, 고릉진퇴불청.  사귀비이국불위자, 미지유야.

 위차사귀자하, 내소위무왕야.  연즉권안득불경, 령안득종왕출호 ? 

 신문선치국자, 내내고기위이외중기권.

 양후사자조왕지중, 결제어제후, 부부어천하, 정적벌국, 막감불청.     

 전승공취즉리귀어도, 국폐어어제후 ; 전패즉결원어백성, 이화귀어사직. 

 시왈 : 『 목실번자피기지, 피기지자상기심 ; 대기도자위기국, 존기신자비기주 』.        

 최저· 뇨치관제, 사왕고, 탁왕근, 현지어묘량, 숙석이사.

 ​이태관조, 수주부어사구, 백일이아사.  금신문진태후· 양후용사, 고릉· 화양· 경양좌지,  

 졸무진왕, 차역뇨치· 이태지류야.

 ​차부삼대소이망국자, 군전수정, 종주치빙익렵, 불청정사. 

 기소수자, 투현질능, 어하폐상, 이성기사, 불위주계, 이주불각오, 고실기국. 

 금자유질이상지제대리, 하급왕좌우, 무비상국지인자.     

 견왕독입어조, 신절위왕공, 만세지후, 유진국자비왕자손야. 」  소왕문지대구, 왈 : 「 선. 」)

 

['범수'는 하루가 다르게 '소양왕'과 가까워졌고, '소양왕' 반복해서 몇 년 동안 '범수'의 유세를 수용하였으며, 

 한 번은 한가한 틈을 이용하여 '범수'가 소왕에게 유세하기를 :  

" 신이 "산동"에 살고 있을 때 제나라에 맹상군 "전문"은 있지만, 제왕이 있다는 말은 들어보지 못했습니다. 

 또한 진나라에는 태후, '양후', '화양군', '고릉군', '경양군'에 대해서만 들었지 진나라에 왕이 있었다는 말은

 들어보지 못했습니다. 대체로 나라를 다스림에 있어 전권을 행사할 수 있는 권한이 왕에게 있고,  

 나라의 이득과 손해를 따지는 것도 왕에게 있으며, 생사여탈을 결정하는 것도 왕에게 있습니다.    

 지금 태후께서 정사를 제멋대로 하시고도 왕을 쳐다보지 않으시며, '양후'는 외국에 사자의 임무를 띠고 다녀와도

 제대로 보고조차 하지 않으며, '화양군'과 '경양군' 등은 사람을 쳐서 죽이면서도 아무 거리낌조차 없으며,    

 또한 고릉군은 나아가고 물러감에 있어서 대왕께 아무런 청도 올리지 않습니다.  
 이렇게 네명이나 되는 귀인이 있는 나라치고 위태롭지 않은 나라가 있었는지, 
아직까지 신은 알지 못하고 

 있습니다. 이 네명의 귀하신 몸을 신하로 둔다는 것은 소위 말해서 왕이 없는 것과 같습니다.   

 그러한데 권세가 어찌 기울어지지 않을 수 있겠으며, 어찌 정령이 왕에게서 나올 수 있겠습니까 ?   

 신이 듣기에 나라를 잘 다스리는 군주는 안으로 그 위엄을 공고히 다지고 밖으로는 권력을 무겁게 한다고 

 했습니다. '양후'는 왕의 엄중한 권력을 장악하여 제후들을 조정하고 호령하며,  

 사자에게 부절을 주어 천하의 제후들에게 보내어 맹약을 맺을 뿐만 아니라,
 제후들을 다스리고 다른 나라를 공격하여도 감히 '양후'의 말에 거역하지 못합니다.   
 

 전투를 벌려 승리를 한 결과 얻은 이익은 모두 자기의 봉지인 "도"에 속하게 하고, 나라의 폐백으로는 제후들을

 구워 삶으며 ; 싸움에 패하면 백성들로 하여금 원한을 쌓게 하여, 그 재앙이 사직으로 돌아가게 합니다.    

 《시경》에 이르기를 : ' 나무에 열매가 너무 많이 달리면 가지가 다치게 되고,  

 가지가 상하게 되면 나무의 밑둥이 상하게 되도다 ; 나라의 도성이 너무 크면 나라가 위험에 빠지고,  

 신하의 지위가 너무 존귀하게 되면 군주는 낮아지도다 '라고 하였습니다.            
 제나라 대부 '최저'는 자기의 처와 사통한 제'장공'을 활로 쏘아 그의 넓적다리를 맞추어 죽이고, 
 초나라 장수 '요치'는 제민왕의 몸에서 뽑아낸 힘줄로 묘당의 대들보에 목을 메달아 하룻밤을 세워 죽였습니다.  

 '이태'는 조'혜문왕'이 너무 어려 정사를 대신 맡아 보면서, 선왕인 주보 '무령왕'이 지내고 있는 "사구"의

 궁을 포위하여 100일 만에 아사시켰습니다.  지금 제가 듣기로 진나라의 정사는 태후와 '양후'가 좌지우지하고,

 '고릉군', '화양군', '경양군' 등이 보좌하고 있으므로, 마침내 진나라에는 왕이 없고,

 이것 역시 '요치'나 '이태'와 같은 부류들만 있는 형세입니다.    

 또한 대체로 하, 상, 주 세 왕조가 망한 이유는 군주들이 정사를 다른 사람에게 맡겨놓고  자신들은

 ​음주가무에 빠지거나 이곳저곳 바쁘게 돌아다니면서 사냥을 즐기며 정사를 돌보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정사를 대신 맡아 보는 자들은 현인들을 시기하고 인재들을 미워했으며 아랫사람들을 조정하여 

 ​군주들의 눈과 귀를 멀게 하고, 그들의 사사로운 것만을 이루려고 하였지, 군주를 위해서는 어떠한 계획도

 세우지 않았기 때문에 군주들은 앞으로 닥칠 일을 깨닫지 못해 나라를 잃게 된 것입니다.     

 지금 진나라에는 유질(5천 호 이상의 봉읍을 가진 대부) 이상의 지위가 높은 관리부터, 

 ​아래로는 대왕의 좌우 측근에 이르기까지 상국의 사람이 아닌 자가 없습니다. 

 지금 대왕께서 홀로 조정에 임하시니 신이 대왕을 위해 마음속으로 걱정하는 바는 대왕께서 돌아가신 뒤에 

 진나라를 다스리는 사람이 대왕의 후손이 아니지나 않을까 하는 것입니다 "라고 하자. 

 '소양왕'이 듣고 매우 두려워하며 말하기를 : " 잘 알았소 "라고 하였다.]  

   

 於是幣太后, 逐穰侯· 高陵· 華陽· 涇陽君於關外.  秦王乃拜范睢爲相.       

 收穰侯之印, 使歸陶, 因使縣官給車牛以徙, 千乘有餘.  到關, 關閱其寶器, 寶器珍怪多於王室.  
 
(어시폐태후, 축양후· 고릉· 화양· 경양군어관외.  진왕내배범수위상.  
 

 수양후지인, 사귀도, 인사현관급거우이사, 천승유여.  도관, 관열기보기, 보기진괴다어왕실. )   


 ['소양왕'은 즉시 태후를 폐하고 '양후'와 '고릉군', '화양군', '경양군'을 축출하여

 "함곡관" 밖으로 옮겨 살게 하였다. 진왕은 '범수'를 진나라의 재상으로 삼았다.   

 그리고 '양후'가 갖고 있던 재상의 인을 거두고 그로 하여금 봉읍인 "도"로 가서 살게 하였으며,
 관리들을 시켜 '양후'의 이사를 돕기 위해 수레를 제공하라고 명했는데 '양후'의 재물을 싣기 위해 
 

 동원된 짐수레는 천 대가 넘었다. 이윽고 양후의 이사짐이 "함곡관"에 이르렀을 때

 관을 지키던 관리들이 그 재물들을 검열한 결과 진귀하고 기이한 보물들이 왕실보다 많았다. ] 

 

 秦封范睢以應, 號爲應侯.  當是時, 秦昭王四十一年也. 

 范睢既相秦, 秦號曰張祿, 而魏不知, 以爲范睢已死久矣.   

 魏聞秦且東伐韓· 魏, 魏使須賈於秦.  范睢聞之, 爲微行, 敝衣閒步之邸, 見須賈. 
 
(진봉범수이응, 호위응후.  당시시, 진소왕사십일년야.

 범수기상진, 진호왈장록, 이위불지, 이위범수이사구의.            

 위문진차동벌한· 위, 위사수가어진.  범수문지, 위미행, 폐의한보지저, 견수가. )

 

 [진왕은 '범수'에게 "응현"에 봉지를 하사하고 '응후'라는 봉호를 내렸다. 이때가 진'소양왕' 41년이었다.

 '범수'는 이미 진나라의 재상 되었지만, 진나라에서는 '장록'으로 불렀기에 위나라는 '장록'이 '범수'인지 모르고,

 단지 '범수'는 오래 전에 이미 죽었다고 생각했다. 위나라는 진나라가 다시 군사를 일으켜

 동쪽의 한나라와 위나라를 정벌한다는 소식을 듣고 '수가'를 진나라에 사자로 보냈다. '범수'는 이 소식을 듣자,

 자신의 신분을 감추고 남루한 옷차림으로 사람의 눈을 피해 몰래 숙사로 걸어가서 '수가'를 만났다.]    

   

 須賈見之而驚曰:「 范叔固無恙乎 ! 」  范睢曰:「 然. 」   

 須賈笑曰:「 范叔有說於秦邪 ? 」 曰:「 不也. 睢前日得過於魏相, 故亡逃至此, 安敢說乎 !」 
 
(수가견지이경왈 : 「 범숙고무양호 ! 」  범수왈 : 「 연. 」  
 

 수가소왈 : 「 범숙유세어진야 ? 」   왈 : 「 불야.  수전일득과어위상, 고망도지차, 안감열호 ! 」)  


 ['범수'를 본 '수가'는 크게 놀라며 말하기를 : " '범숙'은 그동안 탈없이 잘 지냈는가 ? "라고 하자.   
 

 '범수'가 말하기를 : " 그렇습니다 "라고 하였다. 
 '수가'가 미소를 띠우며 말하기를 : " '범숙'이 진나라에 온 목적은 유세를 하기 위해서인가 ?"라고 하자. 
 '범수'가 말하기를 : "그렇지 않습니다.  이 '수'는 옛날 위나라 재상에게 죄를 짓고 
간신히 도망쳐 왔을 뿐인데

 어찌 감히 유세할 생각을 하겠습니까 ?"라고 하였다.]  

  

 須賈曰:「 今叔何事 ? 」  范睢曰:「 臣爲人庸賃. 」   

 須賈意哀之, 留與坐飲食, 曰:「 范叔一寒如此哉 ! 」  乃取其一綈袍以思之.
 
(수가왈 : 「 금숙하사 ? 」  범수왈 : 「 신위인용임. 」  
 

 수가의애지, 유여좌음식, 왈 : 「 범숙일한여차재 ! 」  내취기일제포이사지.)


 ['수가'가 말하기를 : " '범숙'은 지금 무슨 일을 하고 있는가 ?"라고 하자.    
 

 '범수'가 말하기를 : " 남의 집에 품팔이를 하여 입에 풀칠하며 살아가고 있습니다 "라고 하였다. 
 '수가'는 '범수'를 불쌍하게 생각하여 그를 머물게 하고 같이 앉아서 식사를 하면서 말하기를 :  
 

 " 범숙의 어려움이 어찌 이와 같단 말인가 !라고 하며.
 즉시 자기가 가지고 있던 옷 중에서 솜으로 누빈 두루마기한 벌을 '범수'에게 주었다.]
 

  

 須賈因問曰:「 秦相張君, 公知之乎 ?  吾聞幸於王, 天下之事皆決於相君.   

 今吾事之去留在張君.  孺子豈有客習於相君者哉 ? 」 
 
(수가인문왈 : 「 진상장군, 공지지호 ?  오문행어왕, 천하지사개결어상군.  
 

 금오사지거류재장군.  유자개유객습어상군자재 ? 」)


 [그리고는 '수가'가 '범수'에게 묻기를 : " 진나라 재상에 장씨 성을 갖은 사람이 새로 임명되었다고 하는데
 

 그대는 혹시 들은 바가 있는가 ?  내가 듣기로는 진왕에게 총애를 받아 천하의 관한 일은 모두 장재상이  

 결정한다고 하였는데  지금 나의 일이 되고 안되고는 모두 장재상의 의중에 달려 있다네.
 자네는 혹시 재상을 잘 아는 사람에게 다리를 놓아 줄 만한 사람을 알고 있지 않은가 ?"라고 하자.]  
 

  

 范睢曰:「 主人翁習知之.  唯睢亦得謁, 睢請爲見君於張君. 」   

 須賈曰:「吾馬病, 車軸折, 非大車駟馬, 吾固不出. 」 范睢曰:「願爲君借大車駟馬於主人翁. 」
 
(범수왈 : 「 주인옹습지지.  유수역득알, 수청위견군어장군. 」    
 

 수가왈 : 「 오마병, 거축절, 비대거사마, 오고불출. 」   범수왈 : 「 원위군차대차사마어주인옹. 」) 

 
 ['범수'가 말하기를 : " 소인의 주인 되는 노인께서 장재상을 잘 알고 있습니다. 
이 사람도 장재상을 접견한 

 적 있으며, 제가 대부를 위해 장재상을 뵐 수 있도록 저의 주인께 청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라고 하였다. 

 '수가'가 말하기를 : " 내 말이 마침 병이 들었으며, 수레의 차축도 부러져 네 마리의 말이 끄는 큰 수레가 아니면

 위나라의 사자 신분에 밖으로 나갈 수가 없네 "라고 하자. 
 '범수'가 말하기를 : " 제가 대부를 위해 말 네 마리가 끄는 큰 수레를 
주인 영감에게 빌려보도록 하겠습니다 "

 라고 하였다.]  

   

 范睢歸取大車駟馬, 爲須賈御之, 入秦相府.  府中望見, 有識者皆避匿, 須賈怪之.   

 至相舍門, 謂須賈曰:「 待我, 我爲君先入通於相君. 」 
 
(범수귀취대거사마, 위수가어지, 입진상부.  부중망견, 유식자개피닉.  수가괴지.  
 

 지상사문, 위수가왈 : 「 대아, 아위군선입통어상군. 」)  


 ['범수'가 돌아가 네 마리의 말이 끄는 큰 수레를 몰고 와서 '수가'를 태우고 자신은 마부가 되어 
 

 진나라 재상의 관저로 향했다.  관저가 멀리서 보이자 '범수'를 알고 있던 사람들은 모두 수레를 피해  

 몸을 숨기는 모습을 보고 '수가'가 괴이하게 생각했다. 수레가 이윽고 관저의 정문에 당도하자  

 '범수'는 '수가'에게 말하기를 : " 여기서 기다리고 계시면 제가 대부를 위해 먼저 들어가 재상께 알리겠습니다 "

 라고 하였다.]  

   

 須賈待門下, 持車良久, 問門下曰:「 范叔不出, 何也 ? 」    

 門下曰:「 無范叔. 」  須賈曰:「 鄉者與我載而入者. 」  門下曰:「 乃吾相張君也. 」 
 
(수가대문하, 지거량구, 문문하왈 : 「 범숙불출, 하야 ? 」  
 

 문하왈 : 「 무범숙. 」  수가왈 : 「 향자여아재이입자. 」   문하왈 : 「 내오상장군야. 」)  


 ['수가'가 문 앞에서 말고삐를 쥐고 오래 동안 '범수'를 기다렸으나 소식이 없자, 
 

 문지기에게 묻기를 : " '범숙'이 나오지 않는데 어찌 된 일인지 아시오 ? "라고 하자. 
 문지기가 대답하기를 : " 이곳에 '범숙'이라는 사람은 없소 "라고 하였다.  
 '수가'가 말하기를 : " 그 사람은 나와 함께 수레를 타고 와서 관저 안으로 들어 갔다오 "라고 하자. 
 문지기가 대답하기를 : " 바로 그 사람이 '장록' 재상이십니다 "라고 하였다.]
 

 

 須賈大驚, 自知見賣, 乃肉袒膝行, 因門下人謝罪.  於是范睢盛帷帳, 待者甚眾, 見之.  

 須賈頓首言死罪, 曰:「 賈不意君能自致於青雲之上, 賈不敢復讀天下之書, 不敢復與天下之事.    

 賈有湯鑊之罪, 請自屏於胡貉之地, 唯君死生之 ! 」 
 
(수가대경, 자지견매, 내육단슬행, 인문하인사죄.  어시범수성유장, 시자심중, 견지.

 수가돈수언사죄, 왈 : 「 가불의군능자치어청운지상, 가불감부독천하지서, 불감부여천하지사.   

 가유탕확지죄, 청자병어호맥지지, 유군사생지 ! 」 ) 

 ['수가'는 대경실색하며 자기가 '범수'에게 속은 것을 알고 즉시 웃통을 벗고 무릎걸음으로 기어가 

 문지기에게 자기의 죄를 재상에게 전해주기를 청했다.
 이때 '범수'는 장막을 가린채 기다리고 있던 많은 사람들을 불러 접견을 하고 있었다.]
 

 '수가'는 머리가 땅에 닿도록 조아리며 죽을 죄를 지었다고 하면서 말하기를 :

 " 이 '수가'는 범재상께서 이토록 높은 자리에 오르리라고는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습니다.
 이 '수가'는 감히 천하의 서적을 다시는 논하지 않겠으며, 또한 천하의 일에 대해서도 다시는 
관여하지 

 않겠습니다. 이 '수가'는 가마솥의 끓은 물에 삶겨져 죽을 죄를 지었으므로, 청컨대 스스로 북쪽 오랑캐의 

 땅에서 숨어 살고자 하니, 이 '수가'의 생사는 오직 재상의 처분만을 기다릴 뿐입니다 "라고 하였다. ]  

 

 范睢曰:「 汝罪有幾 ? 」  曰:「 擢賈之髮以續賈之罪, 尙未足 」   

 范睢曰:「 汝罪有三耳.  昔者楚昭王時而申包胥爲楚卻吳軍, 楚王封之以荊五千戶,    

 包胥辭不受, 爲丘墓之寄於荊也.

 ​今睢之先人丘墓亦在魏, 公前以睢爲有外心於齊而惡睢於魏齊, 公之罪一也.     

 當魏齊辱我於廁中, 公不止, 罪二也.  更醉而溺我, 公其何忍乎 ?  罪三矣.

 然公之所以得無死者, 以綈袍戀戀, 有故人之意, 故釋公. 」 乃謝罷.  入言之昭王, 罷歸須賈.
 (범수왈 : 「 여죄유기 ? 」  왈 : 「 탁가지발이속가지죄, 상미족. 」

 범수왈 : 「 여죄유삼이.  석자초소왕시이신포서위초각오군, 초왕봉지이형오천호,

 포서사불수, 위구묘지기어형야.  

 금수지선인구묘역재위, 공전이수위유외심어제이오수어위· 제, 공지죄일야.            

 당위제욕아어측중, 공불지, 죄이야.  경취이익아, 공기하인호 ?  죄삼의. 

 ​연공지소이득무사자, 이제포연연, 유고인지의, 고석공. 」   내사파.  입언지소왕, 파귀수가. ) 

 

 ['범수'가 말하기를 : " 너의 죄상이 몇 가지나 되는지 알고 있는가 ? "라고 하자. 
 '수가'가 대답하기를 : "이 '수가'의 머리카락을 모두 뽑는다 해도 부족할 만큼 많은 죄를 지었습니다 "하였다.

 '범수'가 말하기를 : " 너의 죄는 세 가지다. 옛날 초'소왕' 때 '신포서'가 초나라를 위해 싸워 오군을 물리쳐

 ​공을 세우자, 초왕은 그를 "형(초)"땅 5천 호를 하사하였으나 '신포서'는 사양하고 받지 않았으니,

 그것은 '신포서'의 조상 묘가 "형" 땅에 있었기 때문이었다.  

 지금 이 '수'의 선인들을 모신 묘가 역시 위나라에 있음에도 그대는 옛날 이 '수'가 다른 마음을 품고 

 ​제나라와 몰래 통하려 했다고 위제에게 비방했으니 그 죄가 하나이고,     

 위제가 나를 변소간에 버려두고 욕을 보일 때에 그대는 그만두게 하지 않았으니 그 죄가 둘이다. 
 또한 내 몸에 술 취한 취객들이 소피를 보았을 때 그대 마저 내게 오줌을 싸지 않았는냐 ? 그 죄가 셋이다. 
 

 그러나 내가 그대를 죽이지 않음은 솜옷에 연연한 그 모습이 옛날 우정이나마 잊지 않은 것을 보았기 때문에

 그대를 풀어주는 것이다 "라고 하였다. '수가'는 '범수'가 목숨을 살려준 것에 대해 사례하고 물러났다.
 '범수'는 접견을 마치고 입궁하여 소왕에게 '수가'와의 그 동안에 있었던 일들을 모두 고하였으며,
 

 '수가'의 죄를 용서하고 위나라로 돌아가도록 하였다. ] 

 

 須賈辭於范睢, 范睢大供具, 盡請諸侯使, 與坐堂上, 食飲甚設.     

 而坐須賈於堂下, 置莝豆其前, 令兩黥徒夾而馬食之. 
 
(수가사어범수, 범수대공구, 진청제후사, 여좌당상, 식음심설.            
 

 이좌수가어당하, 치좌두기전, 령양경도협이마식지.)  

 ['수가'가 '범수'에게 작별을 고하자, '범수'는 크게 잔치를 벌려 제후왕들의 사자를 모두 초청하여 

 ​성대한 잔치를 베풀면서 '수가'를 당하에 앉혀놓고 콩이 섞인 말먹이 여물을 그 앞에 가져오게 한 다음 

 ​묵형을 받은 죄수들로 하여금 '수가'의 양쪽 겨드랑이를 붙잡아 말처럼 강제로 먹였다.] 

 

 曰:「 爲我告魏王, 急持魏齊頭來! 不然者, 我且屠大梁. 」      

 須賈歸, 以告魏齊.  魏齊恐, 亡走趙.  匿平原君所.
 (수왈 : 「 위아고위왕, 급지위제두래 !  불연자, 아차도대량. 」   
 

 수가귀, 이고위제.  위제공, 망주조.  익평원군소.)  


 ['수가'를 꾸짖으며 말하기를 : " 그대는 나를 위해 위왕에게 고하여, 
'위제'의 목을 지체없이 바쳐야 할것이다 !

 그렇지 않으면 내가 "대량"을 도륙할 것이다 "라고 하였다. 

 '수가'는 위나라로 돌아와 '위제'에게 '범수'의 말을 전했다.   

 '위제'는 두려워서 조나라로 도망쳐 '평원군'의 처소에 숨었다.]  

  

 范睢既相, 王稽謂范睢曰:「 事有不可知者三, 有不柰何者亦三.  

 宮車一日晏駕, 是事之不可知者一也.  君卒然捐館舍, 是事之不可知者二也.

 使臣卒然填溝壑, 是事之不可知者三也.  宮車一日晏駕, 君雖恨於臣, 無可柰何.

 ​君卒然捐館舍, 君雖恨於臣, 亦無可柰何.  使臣卒然填溝壑, 君雖恨於臣, 亦無可柰何. 」 
 (범수기상, 왕계위범수왈 : 「 사유불가지자삼, 유불가내하자역삼. 

 궁거일일안가, 시사지불가지자일야. 군졸연연관사, 시사지불가지자이야. 

 사신졸연전구학, 시사지불가지자삼야.  궁거일일안가, 군수한어신, 무가내하.

 군졸연연관사, 군수한어신, 역무가내하.  사신졸연전구학, 군수한어신, 역무가내하. 」)


 [진나라의 재상이 된 '범수'에게 '왕계'가 찾아와 말하기를 : " 일에는 알 수 없는 것이 세 가지가 있고, 
 

 알고 있다 하더라도 어찌 할 수 없는 것이 세 가지가 있습니다. 
 어느 날 갑자기 임금께서 붕어하시게 된다면, 이일은 알 수 없는 첫 번째입니다. 
 

 재상께서 갑자기 관사를 버리고 초야로 돌아가게 된다면, 이일은 알 수 없는 두 번째 일입니다. 

 제가 어느 날 갑자기 도랑에 빠져 목숨을 잃게 된다면, 이일은 알 수 없는 세 번째입니다. 

 임금께서 붕어하신 후에 재상께서 이 '왕계'를 천거하지 못했음을 후회하시더라도 그때는 어찌할 수 없습니다. 
 재상께서 갑자기 관사에서 물러 난 후에 이 '왕계'를 천거하지 못했음을 후회하시더라도 

 그때는 어찌할 수 없습니다. 이 '왕계'가 길을 가다가 도랑에 빠져 목숨을 잃은 경우에 

 재상께서 신을 왕께 천거하지 못했음을 후회하더라도 어찌할 수 없습니다."라고 하였다.] 

 

 范睢不懌, 乃入言於王曰:「 非王稽之忠, 莫能內臣於函谷關;非大王之賢聖, 莫能貴臣.      

 今臣官至於相, 爵在列侯, 王稽之官尚止於謁者, 非其內臣之意也. 」 
 
(범수불역, 내입언어왕왈 : 「 비왕계지충, 막능내신어함곡관 ; 비대왕지현성, 막능귀신.
 

 금신관지어상, 작재열후, 왕계지관상지어알자, 비기내신지의야. 」) 


 ['범수'는 유쾌하지 않았으나, 즉시 입궁하여 진왕에게 간하기를 : " '왕계'의 충성스러운 마음이 없었다면,
 

 신은 "함곡관" 안으로 들어올 수 없었을 것이며 ; 대왕의 어진 성덕이 없었다면, 신은 그 존귀한 지위에 

 ​오를 수가 없었을 것입니다.  지금 신의 관직은 재상에 이르고 작위는 열후의 대열에 섰습니다. 
 그러나 저를 천거한 '왕계'는 여전히 알자에 머물러 있으니, 
 

 그가 신을 진나라에 데려와 대왕의 신하로 만든 것에 대한 보답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라고 하였다. ]  

 

 昭王召王稽, 拜爲河東守, 三歲不上計.  又任鄭安平, 昭王以爲將軍.   

 范睢於是散家財物, 盡以報所嘗困厄者.  一飯之德必償, 睚眥之怨必報.
 
(소왕소왕계, 배위하동수, 삼세불상계.  우임정안평, 소왕이위장군.  
 

 범수어시산가재물, 진이보소상곤액자.  일반지덕필상, 애자지원필보.) 

 [진'소왕'은 '왕계'를 불러 "하동"의 태수로 임명하고 3년 동안 이곳에서 일어나는 모든 업무를 조정에 

 ​보고하지 않아도 된다고 하였다. 또한 '정안평'도 '범수'의 목숨을 구한 공을 가상히 여겨 장군으로 임명했다.   

 '범수'는 가진 재산을 모두 털어 옛날 자기가 곤궁하게 살 때 도와준 사람들에게 보답했다.
 한 끼의 밥이라도 얻어먹은 은혜는 반드시 갚고, 아무리 하찮은 원한이라도 반드시 그 원한을 갚았다. ]   
 

 

 范睢相秦二年, 秦昭王之四十二年, 東伐韓少曲· 高平, 拔之.

 秦昭王聞魏齊在平原君所, 欲爲范睢必報其仇, 乃詳爲好書遺平原君曰; 

「 寡人聞君之高義, 願與君爲布衣之友, 君幸過寡人, 寡人願與君爲十日之飮. 」 
 
(범수상진이년, 진소왕지사십이년, 동벌한소곡· 고평, 발지.

 진소왕문위제재평원군소, 욕위범수필보기구, 내상위호서유평원군왈 ;  

「 과인문군지고의, 원여군위포의지우, 군행과과인, 과인원여군위십일지음. 」)

  
 ['범수'가 진나라 재상이 된지 2년, 진'소왕' 42년, 동쪽 한나라를 공격하여 "소곡"과 "고평"을 빼앗았다. 

 진소왕은 '위제'가 조나라로 도망가 평원군 '조승'의 처소에 숨어있다는 말을 듣고,     

 '범수'를 위해 기필코 원수를 갚아주려고, 거짓으로 좋은 내용의 편지를 써서 '평원군'에게 이르기를 :  

 " 과인은 '평원군'의 높은 의기를 듣고 존경해 왔으며, 원컨데 '평원군'과 함께 포의의 친교를 맺고 싶으니,
 바라건데 '평원군'께서 과인의 나라로 왕림해 주시면, 과인은 '평원군'과 함께 열흘 동안 주연을 열어   
 

 즐거운 시간을 보내고 싶습니다 "라고 하였다.]  

 

 平原君畏秦, 且以爲然, 而入秦見昭王.  昭王與平原君飲數日, 

 昭王謂平原君曰:「 昔周文王得呂尚以爲太公, 齊桓公得管夷吾以爲仲父,    

 今范君亦寡人之叔父也.  范君之仇在君之家, 願使人歸取其頭來;不然, 吾不出君於關. 」 
 
(평원군외진, 차이위연, 이입진견소왕.  소왕여평원군음수일,

 소왕위평원군왈 : 「 석주문왕득여상이위태공, 제환공득관이오이위중부, 

 금범군역과인지숙부야.  범군지구재군지가, 원사인귀취기두래 ; 불연, 오불출군어관. 」) 


 ['평원군'은 진나라를 두려워하였으나 편지의 내용이 진왕의 본심인줄 알고 진나라에 들어가 진'소왕'을 만났다.

 진'소왕'은 '평원군'과 함께 며칠 동안 연회를 즐겼다, 진'소왕'이 '평원군'에게 말하기를 :

 " 옛날 주'문왕'은 '여상'을 얻어 태공이라 존칭하였으며, 제'환공'은 '관이오'를 얻어 중보로 삼았으며,

 지금은 '범군' 역시 과인에게 숙부와 같은 분입니다. 지금 '범군'의 원수가 '평원군'의 집에 숨어있다고 하니 

 '평원군'께서는 사람을 보내 그 자의 머리를 가져 오게 하십시오 ; 그렇지 않으면 과인은 '평원군'을

 진나라 관문 밖으로 내보내지 않을 것입니다 "라고 하였다.]  

 

 平原君曰:「 貴而爲交者, 爲賤也;富而爲交者, 爲貧也. 

 夫魏齊者, 勝之友也, 在, 固不出也, 今又不在臣所. 」

 昭王乃遺趙王書曰:「 王之弟在秦, 范君之仇魏齊在平原君之家.   

 王使人疾持其頭來;不然, 吾舉兵而伐趙, 又不出王之弟於關. 」 
 
(평원군왈 : 「 귀이위교자, 위천야 ; 부이위교자, 위빈야.   

 부위제자, 승지우야, 재, 고불출야, 금우불재신소. 」

 소왕내유조왕서왈 : 「 왕지제재진, 범군지구위제재평원군지가.   

 왕사인질지기두래 ; 불연, 오거병이벌조, 우불출왕지제어관. 」)

  
 ['평원군'이 말하기를 : " 귀한 신분일 때 친구를 사귐은 몸이 천하게 되었을 때 도움을 받기 위해서이며 ;
 부유할 때 친구를 사귀는 것은 가난하게 되었을 때 도움을 받기 위해서입니다.         

 무릇 '위제'는 이 사람의 친구로써 비록 그가 제 집에 있다한들 결코 내줄 수 없는데,

 하물며 신의 집에 있지도 않는데 어찌 그의 목을 가져올 수 있겠습니까 ? "라고 하였다.

 진'소왕'은 즉시 편지를 써서 조왕에게 전하기를 : " 대왕의 아우인 '평원군'은 진나라에 있으며,  

 진나라의 재상 '범군'의 원수인 '위제'는 '평원군'의 집에 있습니다.  
 대왕께서 사람을 시켜 그자의 목을 신속히 진나라에 보내기 바랍니다 ; 
 

 그렇지 않으면 과인이 군사를 일으켜 조나라를 칠 것이며,
 또한 대왕의 아우도 진나라의 관문 밖으로 나가지 못할 것입니다 "라고 하였다. ] 
 

 

 趙孝成王乃發卒圍平原君家, 急, 魏齊夜亡出, 見趙相虞卿.  虞卿度趙王終不可說, 乃解其相印, 

 與魏齊亡, 閒行, 念諸侯莫可以急抵者, 乃復走大梁, 欲因信陵君以走楚. 
 
(조효성왕내발졸위평원군가, 급, 위제야망출, 견조상우경.  우경도조왕종불가설, 내해기상인,
 

 여위제망, 한행, 념제후막가이급저자, 내부주대량, 욕인신릉군이주초.) 


 [조나라의 '효성왕'은 즉시 군사를 풀어 '평원군'의 집을 포위하고 '위제'를 붙잡으려고 했으나,     
 

 위급하게 된 '위제'는 한밤중에 '평원군'의 집에서 도망나와, 조나라 재상으로 있던 '우경'을 찾아가 도움을 청했다.

 '​우경'은 조왕을 결코 설득할 수 없을 것이라 생각하고 재상의 인장을 풀어놓고 '위제'와 함께 도망쳤다. 
 두 사람은 도망치는 와중에 제후들 중 아무도 급한 처지의 자기들을 도와주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하고 

 ​즉시 발길을 돌려 다시 위나라의 "대량"으로 가서, 신릉군의 도움을 받아 초나라로 달아나려 하였다.]   

 
 
信陵君聞之, 畏秦, 猶豫未肯見, 曰:「 虞卿何如人也 ? 」
 時侯嬴在旁, 曰:「 人固未易知, 知人亦未易也.  夫虞卿躡屩檐簦,
 

 一見趙王, 賜白璧一雙, 黃金百鎰;再見, 拜爲上卿;三見, 卒受相印, 封萬戶侯. 

 當此之時, 天下爭知之.  夫魏齊窮困過虞卿, 虞卿不敢重爵祿之尊, 解相印, 捐萬戶侯而閒行.   

 急士之窮而歸公子, 公子曰 『何如人』.  人固不易知, 知人亦未易也 ! 」

 (신릉군문지, 외진, 유예미긍견, 왈: 「 우경하여인야 ? 」

 시후영재방, 왈 : 「 인고미역지, 지인역미역야.  부우경섭교담등, 

 일현조왕, 사백벽일쌍, 황금백일 ; 재현, 배위상경 ; 삼현, 졸수상인, 봉만호후. 

 당차지시, 천하쟁지지.  부위제궁곤과우경, 우경불감중작록지존, 해상인, 연만호후이한행. 

 급사지궁이귀공자, 공자왈 『하여인』.  인고불역지, 지인역미이야 ! 」)


 ['신릉군'은 그 소식을 들었으나 진나라의 후환이 두려워 두 사람에 대한 접견을 주저하면서 말하기를 :     

 " '우경'은 어떤 사람인가 ? "라고 하자. 

 그때 '후영'이 곁에 있다가 말하기를 : " 사람이란 원래 다른 사람에 의해 인정을 받기가 쉽지 않으며,  

 또한 다른 사람을 제대로 아는 일도 역시 쉽지 않습니다.  
 무릇 '우경'이란 사람은 짚으로 엮은 신발을 신고 어깨에 우산을 걸치고 먼 길을 걸어 조나라에 들어와
 조왕을

 한 번 알현하자, 조왕은 그에게 백벽 한 쌍과 황금 백 일을 하사 하였으며 ; 두 번을 알현하자 그를 상경으로 삼고 ;

 세 번을 알현하자 마침내 재상의 인장과 만호의 봉지를 하사하고 제후에 봉했습니다.  

 그런 일이 있고 나서 세상 사람들은 '우경'과 사귀려고 경쟁하였습니다.   

 대저 곤경에 처한 친구 '위제'가 도움을 청하자,  '우경'은 많은 녹봉과 존귀한 작위조차 아까워하지 않고 

 망설임 없이 재상의 인장을 풀어놓고 만호의 제후 작위를 버려가며 아무도 모르게 이곳에 왔습니다. 
 곤궁한 처지에 빠진 선비를 돕는 일이 더욱 급하다고 여겨 모든 것을 버리고 공자를 찾아온 '우경'을 
공자께서

 ‘우경은 어떤 사람인가 ?’라고 물으셨습니다. 그래서 ‘사람이란 원래 다른 사람에 의해 인정을 받기도 쉽지 않고,  

 또한 다른 사람을 제대로 아는것 역시 쉽지 않다’라고 한것입니다 "라고 하였다.]  

  

 信陵君大慚, 駕如野迎之.  魏齊聞信陵君之初難見之, 怒而自剄.  趙王聞之, 卒取其頭予秦. 

 秦昭王乃出平原君歸趙.  昭王四十三年, 秦攻韓汾陘, 拔之, 因城河上廣武.
 (신릉군대참, 가여야영지.  위제문신릉군지초난견지, 노이자경.
  조왕문지, 졸취기두여진. 

 진소왕내출평원군귀조. 소왕사십삼년, 진공한분형, 발지, 인성하상광무.) 


 ['신릉군'은 매우 부끄러워하며 직접 수레를 몰고 가서 두 사람을 맞이하려고 했다.  
 

 그때 '위제'는 '신릉군'이 처음 자기를 만나는 일에 난색을 표했다는 소식을 듣고, 노하여 스스로 

 목을 찔러 죽었다. 조왕이 듣고 결국 사람을 보내 '위제'의 목을 잘라 진나라에 보냈다. 

 진왕은 즉시 '평원군'을 석방하여 조나라에 돌려보냈다. 

 진'소왕' 43년, 진나라가 한나라를 공격하여 "분"과 "형"을 점령하고 황하 강변의 "광무"에 성을 쌓았다.]  

 

 後五年, 昭王用應侯謀, 縱反閒賣趙, 趙以其故, 令馬服子代廉頗將.  秦大破趙於長平, 遂圍邯鄲.  

 已而與武安君白起有隙, 言而殺之, 任鄭安平, 使擊趙.  鄭安平爲趙所圍, 急, 以兵二萬人降趙. 

 應侯席稿請罪.  秦之法, 任人而所任不善者, 各以其罪罪之.  於是應侯罪當收三族. 
 (후오년, 소왕용응후모, 종반한매조, 조이기고, 령마복자대렴파장.  진대파조어장평, 수위한단.       
 

 이이여무안군백기유극, 언이살지, 임정안평, 사격조. 정안평위조소위, 급, 이병이만인항조. 

 응후석고청죄. 진지법, 임인이소임불선자, 각이기죄죄지.  어시응후죄당수삼족.

 
 [그로부터 5년 후, 진'소왕'이 응후 '범수'의 계책을 받아들여 첩자를 이용하여 조나라 진영을 이간시키는

 이른바 '반간계'를 활용하기 위해 황금 천 금(1금은 황금 20냥)과 함께 첩자들을 보내 조나라 사람들을 매수하여

 유언비어를 퍼뜨리게 했다. 조나라는 마복군 '조사'의 아들 '조괄'을 조나라 대장으로 삼아 '염파'를 대신하도록 

 했다. 이로써 진나라는 조나라의 대군을 "장평"에서 크게 무찌르고 그 여세를 몰아 "한단"을 포위했다. 

 그러나 얼마 후에 무안군 '백기'와 틈이 벌어진 '응후'는 그를 모함하여 죽였다.   

 그리고 '정안평'을 장군으로 임명하여 조나라를 공격하도록 했다. 그러나 '정안평'이 조나라 군사들에게 포위되어

 위급하게 되자 그가 거느린 2만의 군사들과 함께 조나라에 항복하고 말았다. 응후 '범수'는 그 일로 석고대죄 

 했다. 진나라의 법에 추천한 사람이 죄를 범하게 되었을 때는 본인도 그 사람과 똑 같은 죄를 받게 되어 있었다. 

 그래서 '응후'는 삼족이 구금을 당하는 벌를 받게 되었다.]  

  

 秦昭王恐傷應侯之意, 乃下令國中:「 有敢言鄭安平事者, 以其罪罪之. 」 

 而加賜相國應侯食物日益厚, 以順適其意. 
 
(진소왕공상응후지의, 내하령국중 : 「 유감언정안평사자, 이기죄죄지. 」      
 

 이가사상국응후식물일익후, 이순적기의.)

   
 [진'소왕'은 '응후'의 마음을 어지럽히지 않을까 걱정하여 나라 안에 포고령을 내렸다.
 

 " 감히 '정안평'의 일을 거론하는 자가 있다면 '정안평'과 같은 죄로 다스리겠다. " 
 그리고는 '응후'에게 음식 등의 물품들을 더욱 많이 하사하여 그의 마음을 편하게 하려고 했다.] 
 

 

 後二歲, 王稽爲河東守, 與諸侯通, 坐法誅.  而應侯日益以不懌.    

 昭王臨朝歎息, 應侯進曰:「 臣聞 『主憂臣辱, 主辱臣死』.  今大王中朝而憂, 臣敢請其罪. 」 
 
(후이세, 왕계위하동수, 여제후통, 좌법주.  이응후일익이불역.     
 

 소왕임조탄식, 응후진왈 : 「 신문 『주우신욕, 주욕신사』.  금대왕중조이우, 신감청기죄. 」)

  
 [2년 후에 '응후'의 천거로 하동태수로 있던 '왕계'가 제후들과 내통한 사실이 발각되어
 그 죄로 주살되었다. 

 그 일로 해서 응후는 날이 갈수록 불안하게 되었다.   

 이에 소왕이 조정에 나아가 탄식하자 응후가 진언하기를 : " 신이 듣기에 ‘ 군주의 마음에 걱정하는 바가 있으면

 신하는 욕됨을 입고, 군주가 욕됨을 입으면 신하는 죽음으로써 그 죄를 씻어야 한다’고 했습니다.
 지금 대왕께서 조정에 임하시어 근심하시니 신은 감히 죄를 청하옵니다 "라고 하였다.] 
   
 昭王曰:「 吾聞楚之鐵劍利而倡優拙, 夫鐵劍利則士勇, 倡優拙則思慮遠.  
夫以遠思慮而御勇士,

 吾恐楚之圖秦也.  夫物不素具, 不可以應卒, 今武安君既死, 而鄭安平等畔, 內無良將而外多敵國,

 吾是以憂. 」 欲以激勵應侯.  應侯懼, 不知所出.  蔡澤聞之, 往入秦也.
 (소왕왈 : 「 오문초지철검리이창우졸, 부철검리즉사용, 창우졸즉사려원. 부이원사려이어용사,

 오공초지도진야.  부물불소구, 불가이응졸, 금무안군기사, 이정안평등반, 내무량장이외다적국,

 오시이우. 」 욕이격려응후.  응후구, 불지소출.  채택문지, 왕입진야.) 

  
 ['소왕'이 말하기를 : " 내가 듣기로 초나라의 강철검은 그 칼날이 예리하다고 하나 가수와 배우들의
 재능은

 매우 졸렬하다고 했소. 대체로 강철검의 칼날이 예리하다는 것은 무사들이 용기가 있음을 말하고, 

 가수나 배우가 졸렬하다는 것은 그 사려가 원대하다는 말이오. 
 무릇 원대한 사려로 용감한 무사들을 다루니, 나는 초나라가 우리 진나라를 도모하지나 않을까 두렵소. 
 

 무릇 일이란 평상시에 준비하지 않으면 갑자기 생긴 변화에는 적절하게 대응할 수 없소.   

 지금 무안군 '백기'도 이미 죽어 없고, '정안평' 등은 나라를 배반하여 적국에 붙어 나라 안에는 

 훌륭한 장수가 없고, 밖으로는 적국이 많기 때문에 그래서 내가 걱정하는 것이오 "라고 하였다. 

 '소왕'이 좋은 말로 '응후'를 격려하였으나 '응후'는 여전히 두려워하여 어찌할 바를 몰랐다. 

 '채택'이 소문을 듣고 진나라에 들어왔다.]  


 
 蔡澤者, 燕人也.  游學干諸侯小大甚眾, 不遇.

 而從唐舉相, 曰:「 吾聞先生相李兌, 曰『百日之內持國秉』, 有之乎 ? 」
 
(채택자, 연인야.  유학간제후소대심중, 불우. 

 이종당거상, 왈 : 「 오문선생상이태, 왈『백일지내지국병』,  유지호 ? 」)

 ['채택'은 연나라 사람이다. 유세술을 배워 크고 작은 제후들을 수 없이 찾아다니며 벼슬을 구했으나

 기회를 잡지 못하였다. 그래서 위나라의 관상가 '당가'를 찾아가 말하기를 :

 " 내가 듣기에 선생이 조나라 태부 '이태'의 관상을 보고 말하기를 ‘ 100일 이내에 권력을 손에 잡을 것이오.’

 라고 했다고 하던데 그 말이 사실입니까 ? "라고 하자. ]  

 

 曰:「 有之. 」  曰:「 若臣者何如 ? 」

 唐舉孰視而笑曰:「 先生曷鼻, 巨肩, 魋顏, 蹙齃, 膝攣.  吾聞聖人不相, 殆先生乎 ? 」
 
(왈 : 「 유지. 」  왈 : 「 약신자하여 ? 」 

 당거숙시이소왈 : 「 선생갈비, 거견, 추안, 축알, 슬련.  오문성인불상, 태선생호 ? 」) 

 
 ['당거'가 대답하기를 : " 사실입니다. "라고 하였다. 

 '채택'이 묻기를 : " 그렇다면 내 관상은 어떠합니까 ? "라고 하자. 
 '당거'는 유심히 '채택'을 살펴보더니 미소를 띄우며 말하기를 : " 선생은 납작코에, 어깨는 넓고,

 이마는 짱구처럼 튀어나오고, 콧대는 함몰되어 있으며, 무릎은 휘었습니다.   

 내가 듣기로 聖人의 상은 볼 수 없다고 들었는데 아마도 선생을 두고 말한 것 같습니다 "라고 하였다. ] 
 
 蔡澤知唐舉戲之, 乃曰:「 富貴吾所自有, 吾所不知者壽也, 願聞之. 」   

 唐舉曰:「 先生之壽, 從今以往者四十三歲. 」 
 
(채택지당거희지, 내왈 : 「 부귀오소자유, 오소불지자수야, 원문지. 」   

 당거왈 : 「 선생지수, 종금이왕자사십삼세. 」)

 
 ['채택'은 '당거'가 자기를 놀리는 줄 알고 다시 묻기를 : " 부귀야 내가 하기 나름인 것이고,

 내가 모르는 것은 내 수명이오 ! 얼마나 살 수 있겠소 ? "라고 하자. 
 '당거'가 대답하기를 : " 선생의 수명은 지금부터 43년은 더 사실 수 있을것 같습니다 "라고 하였다.] 
 
 蔡澤笑謝而去, 謂其御者曰:「 吾持粱刺齒肥, 躍馬疾驅, 懷黃金之印, 結紫綬於要,

 揖讓人主之前, 食肉富貴, 四十三年足矣. 」 去之趙, 見逐.  之韓· 魏, 遇奪釜鬲於塗. 
 
(채택소사이거, 위기어자왈 : 「 오지량자치비, 약마질구, 회황금지인, 결자수어요,

 읍양인주지전, 식육부귀, 사십삼년족의. 」  거지조, 견축.  지한· 위, 우탈부격어도. )

 
 ['채택'은 웃으면서 사례를 하고 물러 나와 자기의 마부에게 말하기를 : " 내가 기름진 고기와 좋은 곡식으로 만든

 맛있는 음식을 먹고,(대부 이상) 준마를 몰고 다니면서 황금 인장을 가슴에 품고, 자색의 인수(대부 이상 착용)를

 허리에 두르고, 군주 앞에서 겸손한 태도를 보이며, 맛있는 고기를 먹으면서 부귀한 생활을 누리는데 43년이면

 충분할 것이다 "라고 하였다. '채택'은 조나라에 들어갔다가 쫓겨나서 다시 한나라와 위나라에 차례로 들어갔으나,

 도중에 도적을 만나 취사도구를 모두 빼앗기고 말았다.]    

 

 聞應侯任鄭安平· 王稽皆負重罪於秦, 應侯內慚, 蔡澤乃西入秦.

 將見昭王, 使人宣言以感怒應侯曰:「 燕客蔡澤, 天下雄俊弘辯智士也.   

 彼一見秦王, 秦王必困君而奪君之位. 」 
 
(문응후임정안평· 왕계개부중죄어진, 응후내참, 채택내서입진.

 장견소왕, 사인선언이감노응후왈 : 「 연객채택, 천하웅준홍변지사야. 

 피일현진왕, 진왕필곤군이탈군지위. 」)

  
 ['채택'은 응후 '범수'가 천거했던 '정안평'과 '왕계' 등이 모두 진나라에 중죄를 지어 '응후'가 내심으로

 매우 두려워하고 있다는 소식을 듣고, 곧바로 서쪽으로 방향을 돌려 진나라로 들어갔다.

 '채택'은 앞으로 진'소왕'을 만날 기회를 만들기 위해, 사람을 시켜 '응후'의 면전에서 자기의 말을 전하게 하여

 그를 화나게 하려고 말하기를 : " 연나라에서 유세객 '채택'이라는 사람이 왔는데 그는 천하 영웅의 자태에,

 뛰어난 변설을 지니고 있는 지혜있는 선비입니다. 그가 진왕을 한 번 뵙기만 하면 진왕은 틀림없이

 재상을 곤란에 빠뜨리고 그 자리를 빼앗아 '채택'에게 줄 것입니다. "라고 하였다.] 

 

 應侯聞, 曰:「 五帝三代之事, 百家之說, 吾既知之, 眾口之辯, 吾皆摧之,

 是惡能困我而奪我位乎 ? 」  使人召蔡澤.  蔡澤入, 則揖應侯. 

 ​侯固不快, 及見之, 又倨, 應侯因讓之曰:「 子嘗宣言欲代我相秦, 寧有之乎 ? 」對曰:「 然.」 
 (응후문, 왈 : 「 오제삼대지사, 백가지설, 오기지지, 중구지변, 오개최지,

 시오능곤아이탈아위호 ? 」  사인소채택.  채택입, 즉읍응후. 

 응후고불쾌, 급견지, 우거, 응후인양지왈 : 「 자상선언욕대아상진, 녕유지호 ? 」 대왈 : 「 연. 」)

 [응후 '범수'가 듣고 말하기를 : " 오제와 삼왕의 일이나, 백가의 학설에 대해서는 내가 이미 알고 있어

 수많은 사람들의 변설을 모두 물리친 바가 있는데, 어찌 그자가 감히 나를 곤궁하게 만들어 나의 지위를

 뺏어갈 수 있단 말인가 ? "라고 하면서, 사람을 보내 '채택'을 불러오게 하였다.

 '채택'이 들어와 '범수' 앞에 섰으나 절을 올리지 않고 읍만을 행하였다. '응후'는 이미 '채택'에 대해

 불쾌하게 생각하고 있었는데 불러와 접견해 보았으나, 거듭 불손한 태도를 취하자 그를 꾸짖으며 말하기를 :

 " 그대는 예전에 나를 대신해 진나라의 재상이 되고 싶다고 했다는데 그런 말을 한 적이 있었는가 ? "라고 하자. 
 '채택'이 대답하기를 : " 그렇습니다 "라고 하였다.]

   

 應侯曰:「 請聞其說. 」  蔡澤曰:「 吁, 君何見之晚也 !  夫四時之序, 成功者去.    

 夫人生百體堅彊, 手足便利, 耳目聰明而心聖智, 豈非士之願與 ? 」 應侯曰:「 然. 」 
 
(응후왈 : 「 청문기설. 」  채택왈 : 「 우, 군하견지만야 !  부사시지서, 성공자거. 

 부인생백체견강, 수족편리, 이목총명이심성지, 개비사지원여  ? 」)


 ['범수'가 말하기를 : " 내가 그 이유를 한 번 듣고 싶구나 "라고 하자. 
 '채택'이 대답하기를 : " 아, 승상께서는 어찌 사물을 헤아리는 눈이 그렇게 늦으신지요 ! 

 무릇 사계절도 순서에 따라 변하고, 공을 이룬 사람은 물러나게 되어 있습니다. 
 대체로 사람이 살아가면서 건강한 신체와 자유로운 수족, 밝은 눈에, 잘 들리는 귀를 갖게 되는 일을

 어찌 선비 된 자들만의 바람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까 ? "라고 하였다.

 '범수'가 말하기를 : " 그렇지 "라고 하였다.]  

 

 蔡澤曰:「 質仁秉義, 行道施德, 得志於天下, 天下懷樂敬愛而尊慕之,

 皆願以爲君王, 豈不辯智之期與 ? 」  應侯曰:「 然. 」
 
(채택왈 : 「 질인병의, 행도시덕, 득지어천하, 천하회락경애이존모지,  

 개원이위군왕, 기불변지지기여 ? 」  응후왈 : 「 연. 」)

   
 ['채택'이 말하기를 : " 仁을 근본으로 삼아 義를 지키고, 도를 행하고 은덕을 널리 베풀어, 
 천하에 자기의 뜻을 실현시킴으로써 천하 사람들이 그리워하고 좋아하며 공경하고 사랑하며 우러러 받들어

 존경하게 되어 모두가 그들의 군왕으로 삼으려고 한다면,  어찌 말로 유세술에 능하고 밝은 지혜를 갖춘

 선비들이 바라는 바가 아니라고는 말할 수 있겠습니까 ? "라고 하자. '범수'가 말하기를 : " 그렇지 "라고 하였다.] 

 

 蔡澤復曰:「 富貴顯榮, 成理萬物, 使各得其所;性命壽長, 終其天年而不夭傷;

 天下繼其統, 守其業, 傳之無窮; 名實純粹, 澤流千里, 世世稱之而無絕, 與天地終始: 

 豈道德之符而聖人所謂吉祥善事者與 ? 」  應侯曰:「 然. 」
 
(채택부왈 : 「 부귀현영, 성리만물, 사각득기소 ; 성명수장, 종기천년이불요상 ;

 천하계기통, 수기업, 전지무궁 ;  명실순수, 택류천리, 세세칭지이무절, 여천지종시 ;

 개도덕지부이성인소위길상선사자여 ? 」  응후왈 : 「 연. 」)


 ['범수'가 말하기를 : " 그렇지 "라고 하자.  '채택'이 거듭 말하기를 : " 부귀와 명성은 찬란하게 빛나고,

 세상의 만물을 잘 다스려 각기 그 본연의 자리를 찾도록 하며 ; 저마다의 수명을 오래 유지토록 하여

 끝내는 일생을 평안히 보내 요절하는 일이 없도록 하며 ;

 천하가 그 전통을 이어 받아 그 공업을 지켜 영원무궁토록 전하도록 하며 ;  

 명분과 실리가 순수하게 일치되어 그 은혜는 천년 후까지 전하게 하며,

 대대로 그를 칭송하는 소리가 끊어지지 않고, 천지와 함께 그 시작과 끝을 같이 한다면 :
 그것은 도덕의 증거이며 이런 것들이야 말로 성인들이 말하는 소위 길하고 상서로운 선행이 아니라고

 어찌 말할 수 있겠습니까 ? "라고 하자. '응후'가 대답하기를 : " 맞는 말이다 "라고 하였다.]

 

 蔡澤曰:「若夫秦之商君, 楚之吳起, 越之大夫種, 其卒然亦可願與?」應侯知蔡澤之欲困己以說. 

 復謬曰:「 何爲不可? 夫公孫鞅之事孝公也, 極身無貳慮, 盡公而不顧私;

 設刀鋸以禁姦邪, 信賞罰以致治;披腹心, 示情素, 蒙怨咎, 欺舊友, 奪魏公子卬, 安秦社稷,

 利百姓, 卒爲秦禽將破敵, 攘地千里.
 (채택왈 : 「 약부진지상군, 초지오기, 월지대부종, 기졸연역가원여 ?」   응후지채택지욕곤기이설.

 복류왈 : 「 하위불가 ?  부공손앙지사효공야, 극신무이려, 진공이불고사 ;

 설도거이금간사, 신상벌이치치 ; 피복심, 시정소, 몽원구, 기구우, 탈위공자앙, 안진사직,

 리백성, 졸위진금장파적, 양지천리.)

   
 ['채택'이 말하기를 : " 그렇다면 승상께서는 진나라의 '상군', 오나라의 '오기', 월나라의 '대부종'과

 같은 사람들처럼 비참한 최후를 맞이하고 싶으십니까 ? "라고 하자. 
 '범수'는 '채택'이 유세술로 자기를 궁지에 몰아 넣은 다음에 설득할 것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범수'는 반박하며 말하기를 : " 어찌하여 그 사람들이 한 일을  옳지 않다고만 하는가 ?  

 무릇 상군 '공손앙'은 진나라 '효공'을 온몸을 다하여 섬겼으나 결코 두 마음을 품지 않았으며,

 나라의 이익만을 위해 심력을 기울이고 결코 사사로운 것은 염두에 두지 않았으며 ; 
 또한 도거(형벌을 가할 때 쓰는 기구)를 설치하여 간사한 행위를 금지시켰고,

 신상필벌을 시행하여 백성들을 공평무사하게 다스렸으며 ; 속마음을 털어 놓아 진정한 마음을 밝혔으며,

 그 과정에서 주위의 원망과 비난받을 일을 무릅쓰고, 옛친구인 '공자앙'을 속여 사로잡아 살해하여,

 진나라의 사직을 안정시키고 백성들을 이롭게 하였으며, 

 '상군'은 마침내 위나라를 공격하여 적장을 사로잡아 진나라의 영토를 천리까지 넓혔다. 

 

 吳起之事悼王也, 使私不得害公, 讒不得蔽忠, 言不取苟合, 行不取苟容, 不爲危易行,

 行義不辟難, 然爲霸主強國, 不辭禍凶. 大夫種之事越王也, 主雖困辱, 悉忠而不解, 主雖絕亡,

 盡能而弗離, 成功而弗矜, 貴富而不驕怠.  若此三子者, 固義之至也, 忠之節也. 

 ​是故君子以義死難, 視死如歸;生而辱不如死而榮.

 士固有殺身以成名, 雖義之所在, 雖死無所恨.  何爲不可哉 ? 」

 (오기지사도왕야, 사사불득해공, 참불득폐충, 언불취구합, 행불취구용, 불위위역행,

 행의불벽난, 연위패주강국, 불사화흉. 대부종지사월왕야, 주수곤욕, 실충이불해, 주수절망,

 진능이불리, 성공이불긍, 귀부이불교태. 약차삼자자, 고의지지야, 충지절야.

 시고군자이의사난, 시사여귀 ; 생이욕불여사이영. 

 사고유살신이성명, 유의지소재, 수사무소한.  하위불가재 ? 」)

  
 [그리고 '오기'는 초나라의 '도왕'을 섬기면서 개인들이 공실을 침해하지 못하게 하고,

 참언하는 자들로 인하여 충성된 자들이 가려지지 않게 했으며, 말을 억지로 맞추지 않았고,

 행동을 또한 구차하게 꾸미지 않았으며, 위험하다고 하여 행동을 바꾸지 않았으며, 

 의를 행하는 일을 어렵다고 피하지 않아 결국 초나라를 강국으로 만들어 패자가 되도록 하면서 

 자신에게 닥치는 재앙도 마다하지 않았다.     

 '대부종'은 월왕을 섬기면서 곤란에 처하고 욕됨을 입은 주군에게 충성을 다하기를 게을리 하지 않다가

 주군이 비록 망해 사직을 지키지 못하고 나라를 잃었으나, 여전히 주군을 구하기 위해 전력을 다하며

 그 곁을 떠나지 않았으며, 공업을 성취하였음에도 자랑하며 교만하지 않았으며, 부귀한 몸이 되어서도 방종하게

 나태해지지 않았다. 이 세 사람과 같은 인물은 원래 대의의 지극함과 충성을 바쳐 절개를 지킨 사람의 표본을

 보여준 것이다. 그래서 군자는 위난을 당해서는 죽음으로 대의를 지키며, 마치 죽음을 자기 집에 돌아가듯 

 여겼으며 ; 살아서 치욕을 당하는 것이 죽어서 영광된 이름을 남기는 것보다 못하기 때문이다. 

 선비란 원래 자기 몸을 죽여 명성을 얻고자 하지만, 비록 그 대의가 존재하는 곳이라면,

 비록 죽어도 아무런 여한을 두지 않는 법이다. 어찌 이 세 사람처럼 되는 것이 불가능하다고 하는가 ? "하였다.]  

 

 蔡澤曰:「 主聖臣賢, 天下之盛福也;君明臣直, 國之福也;父慈子孝, 夫信妻貞, 家之福也.   

 故比干忠而不能存殷, 子胥智而不能完吳, 申生孝而晉國亂. 是皆有忠臣孝子, 而國家滅亂者,

 何也 ?  無明君賢父以聽之, 故天下以其君父爲僇辱而憐其臣子.  

 今商君· 吳起· 大夫種之爲人臣, 是也;其君, 非也.

 (채택왈 : 「 주성신현, 천하지성복야 ; 군명신직, 국지복야 ; 부자자효, 부신처정, 가지복야. 

 고비간충이불능존은, 자서지이불능완오, 신생효이진국란.  시개유충신효자, 이국가멸란자,

 하야 ?  무명군현부이청지, 고천하이기군부위륙욕이련기신자. 

 금상군· 오기· 대부종지위인신, 시야 ; 기군, 비야. 


 ['채택'이 말하기를 : " 군주가 성인이면 그 신하들도 어질어 그것은 천하의 복이며 ;

 군주가 명철하면 그 신하들도 정직할 수밖에 없으므로 그것은 나라의 복입니다 ;
 아버지가 자애롭고 그 아들이 효성스러우며, 지아비가 믿음이 있고 아내가 정숙하면 집안의 복입니다. 

 그러나 '비간'은 충성스러웠지만 은나라를 보존하지 못했고, 
 '오자서'도 지혜로웠지만 역시 오나라를 완전히 보존시키지 못했습니다. 

 당진의 태자 '신생'은 효성스러웠지만 진나라는 어지러웠습니다.  

 이 세사람 모두 충신에 효자였으나 나라와 집안은 변란이 일어나 멸망하였는데 이는 어째서 이겠습니까 ? 
 이는 그들의 충성과 효성을 알아주는 명철한 군주나 현명한 아버지가 없었기 때문이었으며,

 그러므로 천하 사람들로부터 그 군주와 아버지는 치욕을 당하였으며 그 신하와 아들들은 동정을 받게 되었습니다.

 지금 '상군', '오기', '대부종' 이 세 사람은 신하된 자로 훌륭한 사람들이지만 ; 그 군주들은 그렇지 못합니다.  

 

 故世稱三子致功而不見德, 豈慕不遇世死乎 ?  夫待死而後可以立忠成名, 是微子不足仁,

 孔子不足聖, 管仲不足大也. 夫人之立功, 豈不期於成全邪 ?  身與名俱全者, 上也. 

 名可法而身死者, 其次也.  名在僇辱而身全者, 下也. 」 於是應侯稱善.

 (고세칭삼자치공이불견덕, 개모불우세사호 ?  부대사이후가이입충성명, 시미자부족인,

 공자부족성, 관중부족대야. 부인지입공, 개불기어성전야 ?  신여명구전자, 상야. 

 명가법이신사자, 기차야. 명재륙욕이신전자, 하야. 」 어시응후칭선.)


 [그래서 세상 사람들은 이 세 사람이 공업을 이루었지만 보답은 받지 못했다고 하는데, 

 어찌 불우하게 죽은 것을 사모할 수 있겠습니까 ? 
 무릇 죽은 후에 비로소 충성을 다했다는 명성을 얻은 것이라면, '미자'는 어질다는 소리를 듣기에 부족하였고, 

 '공자'는 성인으로 추앙받기에 부족하였으며, '관중'은 큰일을 이루었다고 말할 수 없을 것입니다.

 대체로 사람이 공을 세우는데 있어서 완전하게 이루는 것을 어찌 바라지 않겠습니까 ? 

 몸과 이름을 같이 보존하는 자는 제일이며, 이름은 남겼으나 그 몸은 죽은 자는 그 다음이며,

 명성은 더렵혀지고 몸만 온전한 것이 제일 나쁘다고 여겨지는 일입니다 "라고 하였다. 
 이에 '범수'는 '채택'의 말이 옳다고 수긍하였다.] 

 

 蔡澤少得閒, 因曰:「 夫商君· 吳起· 大夫種, 其爲人臣盡忠致功則可願矣, 閎夭事文王,

 周公輔成王也, 豈不亦忠聖乎 ?  以君臣論之, 商君· 吳起· 大夫種其可願孰與閎夭· 周公哉 ? 」

 應侯曰:「 商君· 吳起· 大夫種弗若也. 」)
 (채택소득한, 인왈 : 「 부상군· 오기· 대부종, 기위인신진충치공즉가원의, 굉요사문왕,

 주공보성왕야, 개불역충성호 ?  이군신논지, 상군· 오기· 대부종기가원숙여굉요· 주공재 ?

 응후왈 : 「 상군· 오기· 대부종불약야. 」)

 ['채택'이 얼마간의 뜸을 들이다 말하기를 : " 대체로 '상군', '오기', '대부종' 이 세 사람은 신하된 자로써

 충성을 다하여 공을 이룬 일은 본받을 만 하다고 하겠으나, '굉요'가 주'문왕'을 받들고,

 '주공'이 주'성왕'을 보좌한 일은, 어찌 또한 충성스럽고 거룩하다 하지 아니할 수 있겠습니까 ?  

 군주를 모시는 신하로써 논한다면, '상군', '오기', '대부종'과 '굉요', '주공' 중 어느 편을 본받기를 원하십니까 ? "

라고 하자. '범수'가 말하기를 : " '상군', '오기', '대부종' 등의 공적은 '굉요'와 '주공' 두 사람의 공적에

 비할 수 있겠는가 !"라고 하였다.]

   

 蔡澤曰:「 然則君之主慈仁任忠, 惇厚舊故, 其賢智與有道之士爲膠漆, 義不倍功臣,

 孰與秦孝公· 楚悼王· 越王乎 ? 」  應侯曰:「 未知何如也. 」 
 
(채택왈 : 「 연즉군지주자인임충, 돈후구고, 기현지여유도지사위교칠, 의불배공신,

 숙여진효공· 초도왕· 월왕호 ? 」  응후왈 : 「 미지하여야. 」)

 
 ['채택'이 말하기를 : " 그렇다면 지금 승상께서 모시고 있는 지금의 군주가, 인자하고 충신을 믿으며,

 오랜 친구의 정을 잊지 못하는 돈후한 심성에, 현명하고 지혜로우며 道를 깨우친 선비와의 사귐이,

 마치 아교나 칠을 바른 것과 같이 친밀하고, 공신을 결코 저버리지 않는 의리에 있어서,

 진'효공', 초'도왕', 월왕 '구천' 등과 비교해서 누가 낫다고 말할 수 있습니까 ? "라고 하자.
 '범수'가 말하기를 : " 아직은 누가 낫다고 말할 수 없다 "라고 하였다. ]  

 

 蔡澤曰:「 今主親忠臣, 不過秦孝公· 楚悼王· 越王, 君之設智, 能爲主安危修政, 治亂彊兵,

 批患折難, 廣地殖穀, 富國足家, 彊主, 尊社稷, 顯宗廟, 天下莫敢欺犯其主, 主之威蓋震海內,  

 功彰萬里之外, 聲名光輝傳於千世, 君孰與商君· 吳起· 大夫種 ? 」 應侯曰:「 不若. 」
 
(채택왈 : 「 금주친충신, 불과진효공· 초도왕· 월왕, 군지설지, 능위주안위수정, 치란강병,

 비환절난, 광지식곡, 부국족가, 강주, 존사직, 현종묘, 천하막감기범기주, 주지위개진해내,

 공창만리지외, 성명광휘전어천세, 군숙여상군· 오기· 대부종 ? 」   응후왈 :  「 불약. 」)

 ['채택'이 말하기를 : " 지금 승상의 주군은 충신들과 친하기가 진'효공', 초'도왕', 월왕 '구천 보다 못함에도,

 승상께서는 지혜를 발휘하여, 군주의 위태로운 정국을 안정시키기 위해 정치를 개혁하였으며,

 내란을 다스리고 강병을 키워, 미래의 환란을 꺾어 예방하고, 영토를 넓히고 곡식의 생산을 늘려 나라는 부유하고

 가정은 풍족하게 만들며, 또한 군주의 위세를 강하게 하여 사직을 드높이고 진나라 종묘를 제후들 사이에

 명확히 나타나게 함으로 해서 천하에 아무도 주군을 감히 속이거나 범하지 못하게 하여 이로써 주군의 위엄은

 나라안를 진동시키고, 그 공업은 빛을 발해 만리 밖에까지 비추고, 그 이름은 천세에 걸쳐 찬란하게 전해질 것인데

 승상이 이룩한 공과 '상군', '오기', '대부종'이 행한 공을 비교했을 때 누가 더 낫다고 생각하십니까 ? "라고 하자. 
 '범수'가 말하기를 : " 내가 그들보다 못하지 "라고 하였다.]

 

 蔡澤曰:「 今主之親忠臣不忘舊故不若孝公· 悼王· 句踐, 而君之功績愛信親幸又不若商君·

 吳起· 大夫種, 然而君之祿位貴盛, 私家之富過於三子, 而身不退者, 恐患之甚於三子, 竊爲君危之.
 (채택왈 : 「 금주지친충신불망구고불약효공· 도왕· 구천, 이군지공적애신친행우불약상군·

 오기· 대부종, 연이군지록위귀성, 사가지부과어삼자, 이신불퇴자, 공환지심어삼자, 절위군위지. 

 
 ['채택'이 말하기를 : " 지금 승상의 주군이 충신들과 친하거나 옛친구를 잊지 못하는 심성에 있어서

 진'효공', 초'도왕', 월왕 '구천'보다 못하고, 또한 승상께서 이룩한 공이 '상군', '오기', '대부종'보다 못함에도,

 승상의 봉록과 작위는 지극히 높아, 승상 개인의 부는 그 세 사람을 능가하며 그럼에도 아직도 물러나지 않고

 머무르고 있으니, 닥칠 환란은 그 세 사람보다 훨씬 더 심하다고 할 수 있으며, 제가 가만히 생각해보니

 위험은 승상 가까이에 있습니다.  

 

 語曰『日中則移, 月滿則虧』 物盛則衰, 天地之常數也.  進退盈縮, 與時變化, 聖人之常道也. 

 故『國有道則仕, 國無道則隱』 聖人曰 『 飛龍在天, 利見大人 』『 不義而富且貴, 於我如浮雲 』
 (어왈『일중즉이, 월만즉휴 물성즉쇠, 천지지상수야.  진퇴영축, 여시변화, 성인지상도야. 

 고『국유도즉사, 국무도즉은』. 성인왈 『 비룡재천, 이견대인 』  『 불의이부차귀, 어아여부운 』


 [속담에 ‘해가 중천에 이르면 기울고, 달이 차면 이지러진다.’고 했습니다. 

 만물이 성하면 쇠하게 되는 일은 천지간의 변하지 않는 법칙입니다. 
 나아가고 물러서며, 채우고 덜어내기를 시세와 함께 변화하는 자세는 성인들의 변하지 않는 도입니다. 
 그러므로 ‘나라에 도가 있으면 세상에 나와서 벼슬하고, 도가 사라지면 물러나 숨는다.’라고 했습니다. 

 성인들이 말씀하시기를 ‘ 나는 용이 하늘에 있으니 대인을 만남이 이로우리라 ! ’(《周易》 乾爲天 ) 
 ‘불의로 얻은 부귀는 나에게는 마치 뜬 구름과도 같도다 ! ’라고 했습니다. (《論語》 述而篇)
   

 今君之怨已讎而德已報,  意欲至矣, 而無變計, 竊爲君不取也. 

 且夫翠· 鵠· 犀· 象, 其處勢非不遠死也, 而所以死者, 惑於餌也. 

 蘇秦· 智伯之智, 非不足以辟辱遠死也, 而所以死者, 惑於貪利不止也. 
 
(금군지원이수이덕이보, 의욕지의, 이무변계, 절위군불취야.

 차부취· 곡· 서· 상, 기처세비불원사야, 이소이사자, 혹어이야. 

 소진· 지백지지, 비부족이벽욕원사야, 이소이사자, 혹어탐리불지야.  


 [지금 승상께서 원수들에게는 이미 원한을, 은인들에게는 이미 덕을 베풀어 갚았으며,

 마음속으로 바라던 바는 모두 성취했음에도 변화에 대해 아무런 계획이 없으니, 
 제가 가만히 보건대 승상의 그와 같은 태도는 취하면 안 되는 것입니다.

 또한 대체로 물총새, 고니, 물소, 코끼리 등은 그들이 처해 있는 장소가 죽음과 멀리 있지 않다고 

 말할 수 없지만, 그들이 사냥꾼에게 잡혀 죽는 이유는 미끼에 미혹되기 때문입니다. 

 '소진'과 '지백'의 지혜는 모욕을 피하고 죽음을 멀리하기에 충분했지만, 
 그들이 결국 목숨을 잃은 이유는 탐욕에 미혹되어 그칠 줄 몰랐기 때문입니다. 

 

 是以聖人制禮節欲, 取於民有度, 使之以時, 用之有止, 故志不溢, 行不驕, 常與道俱而不失,

 故天下承而不絕. 昔者齊桓公九合諸侯, 一匡天下, 至於葵丘之會, 有驕矜之志, 畔者九國. 

 吳王夫差兵無敵於天下, 勇彊以輕諸侯, 陵齊晉, 故遂以殺身亡國. 

 (시이성인제례절욕, 취어민유도, 사지이시, 용지유지, 고지불일, 행불교, 상여도구이불실,

 고천하승이불절.  석자제환공구합제후, 일광천하, 지어규구지회, 유교긍지지, 반자구국. 

 오왕부차병무적어천하, 용강이경제후, 릉제진, 고수이살신망국.

 [이런 까닭에 성인들은 예법을 제정하여 욕망을 절제하도록 하였고, 백성들로부터 재물을 징수할 때는

 한도를 두었으며, 일을 시킬 때는 시기를 고려하였고, 인력을 사용할 때는 그치는 데가 있었으며,

 하고자 하는 뜻은 강력하지만 일정한 선을 넘지 않았고, 행동에는 교만하지 않았으며 항상 도와 함께 하여

 실수함이 없었기 때문에 천하는 그의 뜻을 승계하여 끊어지지 않게 만들었습니다. 옛날 제'환공'은 제후들을

 아홉 차례나 규합하여 천하를 크게 바로 잡았지만 결국은 "규구"의 회맹에서 교만하고 과시하려는 뜻을 품자, 

 아홉 나라가 등을 돌리게 되었습니다. 또한 오왕 '부차'가 이끌던 군대는 천하에 대적할 자가 없었지만, 
 너무 용기를 과신한 나머지 제후들을 경시하여 제나라와 진나라 같은 강국을 능멸한 결과,

 마침내 몸은 죽고 나라는 망하고 말았습니다. 

 

 夏育· 太史噭叱呼駭三軍, 然而身死於庸夫.  此皆乘至盛而不返道理, 不居卑退處儉約之患也.

 夫商君爲秦孝公明法令, 禁姦本, 尊爵必賞, 有罪必罰, 平權衡, 正度量, 調輕重, 決裂阡陌,

 以靜生民之業而一其俗, 勸民耕農利土, 一室無二事, 力田蓄積, 習戰陳之事, 是以兵動而地廣,     

 兵休而國富, 故秦無敵於天下, 立威諸侯, 成秦國之業.  功已成矣, 而遂以車裂. 
 
(하육· 태사교질호해삼군, 연이신사어용부.  차개승지성이불반도리, 불거비퇴처검약지환야. 

 부상군위진효공명법령, 금간본, 존작필상, 유죄필벌, 평권형, 정도량, 조경중, 결열천맥,

 이정생민지업이일기속, 권민경농리토, 일실무이사, 역전축적, 습전진지사, 시이병동이지광,

 병휴이국부, 고진무적어천하, 입위제후, 성진국지업.  공이성의, 이수이거열. 

 
 ['하육'(위나라), '태사교'(제나라)와 같은 장사는 고함을 한 번에 삼군을 놀라게 했으나 결국 두 사람 모두

 평범한 사람에게 살해 당하고 말았습니다. 이것은 모두 세력이 왕성할 때 그 힘에 편승 할 줄만 알았지

 본연의 도리로 돌아올 줄 몰랐고, 물러나 낮은 곳에 머물러 겸손하며 절제할 줄 몰랐기 때문에 당한 화입니다.

 대체로 보아 '상군'은 진'효공'을 위해 법령을 밝히고, 풍속을 어지럽히는 근원을 막았으며,

 공을 세우면 작위를 높이고 상을 주었으며 죄를 지으면 반드시 벌을 주었고, 저울추를 균등하게 했으며,

 길이와 부피를 재는 기구를 통일하고, 상품이나 화폐의 유통을 위해 중량을 일정하게 조절하였으며, 
 또한 농지의 동서와 남북의 경계를 허물어 정전제를 폐기하고 황무지를 개간하여, 백성들의 생활을 안정시키고

 그 풍속을 하나로 통일하여, 백성들에게 농업을 권장하여 토지의 생산력을 증대시키고,

 한 집안에는 두 가지 이상의 일을 하지 못하게 하여 일을 효율적로 행하게 했으며,

 힘껏 밭을 갈아 양식을 비축하게 한 다음 싸움과 진법 훈련에 임하게 하였고,
 이로써 군대가 한 번 움직이면 국토가 넓어지고, 싸움을 끝나 병사의 일을 쉬게 되면 나라는 부유하게 되어

 진나라는 마침내 천하에 대적할 나라가 없게 되어 제후들에게 위엄을 세워 진나라를 패주로 만들었습니다.  

 이윽고 '상군'의 공업이 이루어지자마자 그는 곧바로 거열형에 처해져 죽고 말았습니다.   

 

 楚地方數千里, 持戟百萬, 白起率數萬之師以與楚戰, 一戰舉鄢郢以燒夷陵, 再戰南并蜀漢.

 又越韓· 魏而攻彊趙, 北阬馬服, 誅屠四十餘萬之眾, 盡之于長平之下, 流血成川, 沸聲若雷,

 遂入圍邯鄲, 使秦有帝業.  楚· 趙天下之彊國而秦之仇敵也, 自是之後, 楚· 趙皆懾伏不敢攻秦者,

 白起之勢也.  身所服者七十餘城, 功已成矣, 而遂賜劍死於杜郵. 
 (초지방수천리, 지극백만, 백기솔수만지사이여초전, 일전거언영이소이릉, 재전남병촉한.

 우월한· 위이공강조, 북갱마복, 주도사십여만지중, 진지우장평지하, 류혈성천, 비성약뢰,

 수입위한단, 사진유제업.  초· 조천하지강국이진지구적야, 자시지후, 초· 조개섭복불감공진자,

 백기지세야.  신소복자칠십여성, 공이성의, 이수사검사어두우.

  
 [초나라의 땅은 사방 수천 리에 달하고, 미늘창을 가진 군사가 백만이나 되는 대국인데, 

 '백기'는 단지 수만 명의 군사만을 이끌고 싸웠습니다. 한 번 싸움에 "언", "영"을 함락시키고 "이릉"을 불태웠으며,

 남진하여 두 번 싸움에 "촉"과 "한중"을 병합했습니다. 또 한나라와 위나라의 국경을 넘어 북진하여

 강대한 조나라를 공격하여 마복군 '조괄'을 구덩이에 묻어 죽이고, 조나라의 군사 40여 만명을 베어 죽이니,

 "장평"의 성 밑으로 흐르는 피가 하천을 이루고 군사들의 울부짖는 소리는 우레와 같았으며,

 마침내 "한단"을 포위하여 진나라는 제왕의 업을 이루게 되었습니다. 초나라와 조나라는 천하에 강국이면서

 진나라와는 원수 사이였으나, 그 같은 싸움이 있은 후로는 두 나라 모두 두려움에 몸을 낮추어 

 감히 진나라를 공격하려는 마음을 품지 못하게 되었으니 그것은 '백기'의 위세 때문이었습니다.
 '백기'가 몸소 복속시킨 성은 무려 70여 개에 달해 그의 공업은 이미 이루어졌지만,

 마침내 어명에 의해 하사받은 검으로 "두우"에서 자결하였습니다.

   

 吳起爲楚悼王立法, 卑減大臣之威重, 罷無能, 廢無用, 損不急之官, 塞私門之請, 一楚國之俗, 

 禁游客之民, 精耕戰之士, 南收楊越, 北并陳· 蔡,  破橫散從,  使馳說之士無所開其口,  

 禁朋黨以勵百姓, 定楚國之政, 兵震天下, 威服諸侯.  功已成矣, 而卒枝解. 
 
(오기위초도왕입법, 비감대신지위중, 파무능, 폐무용, 손불급지관, 새사문지청, 일초국지속,

 금유객지민, 정경전지사, 남수양월, 북병진· 채, 파횡산종, 사치설지사무소개기구,

 금붕당이려백성, 정초국지정, 병진천하, 위복제후.  공이성의, 이졸지해.  

  
 ['오기'는 초'도왕'을 위해 법을 세워 대신들의 지나치게 비대한 권한을 깎고, 무능한 자들을 파직시키고,

 무용한 직제를 폐지했으며, 꼭 필요하지 않은 관원은 줄이고, 사사로운 청탁을 막았으며,

 초나라의 풍속을 통일하며 백성들이 생업을 포기하고 유랑하는 것을 금지시켰으며, 농사짓는 사람들 중에서

 정예한 군사들을 길러 남쪽으로는 "양월"을 점령하고 북으로는 "진"과 "채"를 병합하였습니다. 

 연횡책을 깨뜨리며 합종책을 파헤쳐 흐트려뜨려, 이리저리 몰려다니는 유세가들이 입을 열지 못하게 했으며,

 백성들을 권면케하고 붕당을 짓는 것을 금함으로써 초나라의 정치를 안정시키고 그 군사력으로 천하를 떨게 하고

 그 위세로써 제후들을 복종시켰지만 '오기'의 공이 이루어지자 마침내 그의 사지는 찢겨져 죽고 말았습니다.

 

 大夫種爲越王深謀遠計, 免會稽之危, 以亡爲存, 因辱爲榮, 墾草入邑, 辟地殖穀, 率四方之士, 

 專上下之力, 輔句踐之賢, 報夫差之讎, 卒擒勁吳.  令越成霸.  功已彰而信矣, 句踐終負而殺之. 

 此四子者, 功成不去, 禍至於此. 此所謂信而不能詘, 往而不能返者也. 
 
(대부종위월왕심모원계, 면회계지위, 이망위존, 인욕위영, 간초입읍, 벽지식곡, 솔사방지사,

 전상하지력, 보구천지현, 보부차지수, 졸금경오.  령월성패.  공이창이신의, 구천종부이살지. 

 차사자자, 공성불거, 화지어차.  차소위신이불능굴, 왕이불능반자야.

  
 ['대부종'은 월왕을 위해 치밀하고 원대한 계략을 써서 월왕을 위기에서 벗어나게 해서 망한 나라를 일으키고,

 치욕을 영광으로 돌렸으며, 초야를 개간하여 유민들을 모아 성읍을 채웠고, 토지를 개척하여 곡식을 생산했으며,

 사방의 용사들을 이끌고 상하의 노력을 한 곳으로 집결시켜 월왕 '구천'의 현능함을 도와 마침내 '부차'에게

 원수를 갚고 강력한 오왕을 포로로 잡아 월나라는 패업을 이루었습니다. '대부종'의 공은 이미 빛나고

 천하에 신망에 얻게 되었으나 '구천'은 결국 그를 죽이고 말았습니다. 이 네 사람은 공을 이루고도 물러나지

 않았기 때문에 화를 입어 비참한 최후를 마치게 된 것입니다. 이것은 소위 펼 줄만 알고 굽힐 줄을 몰랐고,

 나아갈 줄만 알았지 되돌아 갈 줄을 몰랐기 때문입니다.

 

 范蠡知之, 超然辟世, 長爲陶朱公.  君獨不觀夫博者乎? 或欲大投, 或欲分功, 此皆君之所明知也.

 今君相秦, 計不下席, 謀不出廊廟, 坐制諸侯, 利施三川, 以實宜陽, 決羊腸之險, 塞太行之道,

 又斬范· 中行之塗, 六國不得合從, 棧道千里, 通於蜀漢, 使天下皆畏秦, 秦之欲得矣, 君之功極矣, 

 此亦秦之分功之時也.  如是而不退, 則商君· 白公· 吳起· 大夫種是也. 
 
(범려지지, 초연벽세, 장위도주공.  군독불관부박자호 ?   혹욕대투, 혹욕분공, 차개군지소명지야. 

 금군상진, 계불하석, 모불출랑묘, 좌제제후, 리시삼천, 이실의양, 결양장지험, 새태행지도,

 우참범· 중행지도, 육국부득합종, 잔도천리, 통어촉한, 사천하개외진, 진지욕득의, 군지공극의,

 차역진지분공지시야.  여시이불퇴, 즉상군· 백공· 오기· 대부종시야.

   
 ['범려'는 그것을 알았기 때문에 초연히 세상을 버리고 물러나 '도주공'이라 불리며 몸을 길이 보전했습니다.

 승상께서는 설마 도박하는 사람을 보지 못했다고 말하지는 않겠지요 ? 어떤 사람은 크게 돈을 걸어 단판에 승부를

 내기도 하고, 어떤 사람은 조금씩 걸어 서서히 승부를 내기도 하는데 이 모든 것은 승상께서 알고 있을 것입니다.

 지금 대감께서는 진나라의 재상이 되어 계책이 자리 아래로 벗어나지 않게 하고, 

 그 계략이 조정 밖으로 새 나가지 않게 하면서, 가만히 앉아서 제후들을 제압하여 "삼천" 땅에서 얻은 이익을

 골고루 나누어 "의양"을 튼튼하게 하였으며,  "양장"의 구불구불한 험한 지형을 뚫고, '태항산'의 길을 막아

 옛날 '범씨'와 '중행씨'들의 땅이었던 삼진의 요로를 차단하여, 육국으로 하여금 합종을 막았고 천리에 걸쳐 있는

 길 가운데 낭떠러지와 낭떠러지 사이에 다리를 건설하여 "촉"과 "한중"으로 교통할 수 있게 하였으며, 

 천하가 모두 진나라를 두려워하게 만들어 진나라가 바라던 바를 이루었으니 이로써 대감의 공은 지극히 높은 곳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지금이야 말로 대감께서는 공을 나누어 가져야 할 때라고 말씀드리는 것입니다. 

 만일 사정이 이러함에서 승상의 자리에 물러나지 않는다면 즉 '상군', '백기', '오기', '대부종'이 당했던 화가

 승상의 몸에 머지않아 미칠 것입니다.   

 

 吾聞之, 『鑒於水者見面之容, 鑒於人者知吉與凶』  書曰『成功之下, 不可久處』  四子之禍,  

 君何居焉 君何不以此時歸相印, 讓賢者而授之, 退而巖居川觀, 必有伯夷之廉, 長爲應侯. 

 世世稱孤, 而有許由· 延陵季子之讓, 喬松之壽, 孰與以禍終哉? 即君何居焉?

 忍不能自離, 疑不能自決, 必有四子之禍矣. 
 
(오문지. 『감어수자견면지용, 감어인자지길여흉』  서왈『성공지하, 불가구처 사자지화,

 군하거언 ?  군하불이차시귀상인, 양현자이수지, 퇴이암거천관, 필유백이지렴, 장위응후.

 세세칭고, 이유허유· 연릉계자지양, 교송지수, 숙여이화종재 ?  즉군하거언 ? 

 인불능자리, 의불능자결, 필유사자지화의.

   
 [제가 듣기에 ‘물을 거울로 삼는 자는 자기 얼굴을 볼 수 있고,

 다른 사람을 거울로 삼는 자는 자기의 길흉을 알 수 있다.’라고 했습니다.  

 《서경》에 이르기를 ‘성공한 곳에서는 오래 머물지 말라.’라고 했습니다.’ 

 '상군', '백기', '오기', '대부종' 이 네 사람은 성공한 곳에 오래 머물다가 화를 입었는데 
 대감께서는 어찌하여 오래 머물려고 하십니까 ?  대감께서 지금 당장 재상의 인장을 돌려주어,

 어질고 총명한 자가 물려 받아 그 자리를 지키게 하고, 자신은 물러나 암굴에 거하며 산천을 벗 삼아 사신다면

 승상께서는 '백이'의 청렴한 이름을 얻게 되어 오랫동안 '응후'의 작위를 누릴 수 있습니다.

 대대로 열후의 대열에 서서 고를 칭할 수 있으며, '허유'나 연릉계자(오나라 공자 '계찰')와 같이

 겸양의 덕으로 이름을 얻어, '왕자교'와 '적송자(전설상의 신선)와 같이 장수를 누릴 수 있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행하지 않아 화를 입어 생을 마치는 일과는 어느 편이 낫다고 할 수 있겠습니까 ? 
 차마 스스로 떠나지 못하고, 의심하여 결단을 내리지 않는다면 반드시 네 사람처럼 화를 입게 될 것입니다.

 

 易曰『亢龍有悔』, 此言上而不能下, 信而不能詘, 往而不能自返者也.  願君孰計之 ! 」  

 應侯曰:「 善.  吾聞『欲而不知止足, 失其所以欲;有而不知足止, 失其所以有』

 先生幸教, 睢敬受命. 」  於是乃延入坐, 爲上客.
 
(역왈『항룡유회』,  차언상이불능하, 신이불능굴, 왕이불능자반자야.  원군숙계지 ! 」

 응후왈 : 「 선.  오문『욕이불지지족, 실기소이욕 ; 유이불지족지, 실기소이유』. 

 선생행교, 휴경수명. 」   어시내연입좌, 위상객.)


 [《주역》에 이르기를 ‘ 높이 올라 간 용, (즉 부귀 영달을 누린 인간)에게는 후회함이 있다.’라고 했는데, 

 이 말은 오르기만 하고 내려 올 줄은 모르고, 몸을 펼 줄만 알았지 굽힐 줄 모르며, 나아갈 줄만 알았지

 되돌아 올 줄 모른다는 말입니다. 원컨대 승상께서는 숙고하시기 바랍니다 ! "라고 하였다.

 '범수'가 말하기를 : " 좋은 말이오.  내가 듣기로 ‘욕심을 부리되 멎을 줄 모르면 자기가 바라던 것을 잃게 되고,

 가지고 있으면서 만족할 줄을 모르면 자기가 가지고 있는 것을 잃는다.’라고 했소. 선생께서 다행히 가르침을 

 주시니 이 '범수'가 삼가 명을 받들겠소 "라고 하며. '범수'는 즉시 '채택'을 맞이하여 상객으로 삼았다.]  

  

 後數日, 入朝, 言於秦昭王曰:「 客新有從山東來者曰蔡澤, 其人辯士, 明於三王之事,

 五伯之業, 世俗之變, 足以寄秦國之政.  臣之見人甚眾, 莫及, 臣不如也. 臣敢以聞.」 

 秦昭王召見, 與語, 大說之, 拜爲客卿.  應侯因謝病請歸相印. 

 昭王彊起應侯, 應侯遂稱病篤.  范睢免相, 昭王新說蔡澤計畫, 遂拜爲秦相, 東收周室.
 
(후수일, 입조, 언어진소왕왈 : 「 객신유종산동래자왈채택, 기인변사, 명어삼왕지사,

 오백지업, 세속지변, 족이기진국지정.  신지견인심중, 막급, 신불여야.  신감이문.」

 진소왕소견, 여어, 대열지, 배위객경.  응후인사병청귀상인. 

 소왕강기응후, 응후수칭병독, 범수면상, 소왕신열채택계화, 수배위진상, 동수주실. )

 
 [며칠 후, '범수'는 입조하여 소양왕에게 간하기를 : " "산동"에서 온 객이 있는데 이름을 '채택'이라 하며, 

 유세객으로써 삼왕의 일과 오백의 패업 및 세속의 변화에 밝아 능히 진나라의 정사를 맡길만 합니다. 

 신이 많은 사람을 만나 보았지만 그 만한 인물이 없었으며 신조차 따를 수 없습니다. 

 신이 감히 추천하는 바입니다 "라고 하자. '소양왕'이 '채택'을 불러 같이 말을 나누어 본 결과 크게 기뻐하여

 객경으로 삼았다.  '범수'는 병을 핑계로 승상의 인장을 반납할 수 있도록 허락을 청했다. 
 '소양왕'이 완강하게 범수의 청을 허락하지 않고 그로 하여금 계속 일을 보게 했다. 

 그러나 범수는 다시 칭병하고 몸이 위독하다고 했다. 마침내 소양왕은 '범수'를 재상의 자리에서 면직시키고

 '채택'의 새로운 계책을 듣고 기뻐하며 그를 재상으로 삼았으며, 진나라는 '채택'의 계책에 따라

 동쪽의 주나라 왕실의 토지를 손에 넣었다.] 

 

 蔡澤相秦數月, 人或惡之, 懼誅, 乃謝病歸相印, 號爲綱成君. 

 居秦十餘年, 事昭王· 孝文王· 莊襄王.  卒事始皇帝, 爲秦使於燕, 三年而燕使太子丹入質於秦.
 
(채택상진수월, 인혹악지, 구주, 내사병귀상인, 호위강성군. 

 거진십여년, 사소왕· 효문왕· 장양왕.   졸사시황제, 위진사어연, 삼년이연사태자단입질어진.)

 
 ['채택'이 진나라의 승상이 된지 몇 개월 후에 어떤 사람이 그를 모함하였으며,

 '채택'은 진왕으로부터 받을 형벌을 두려워하여 즉시 병을 칭하고 승상의 인장을 반납하자,
 '소양왕'은 그를 '강성군'에 봉하였다. 그는 진나라에 10여 년을 머물며 '소양왕', '효문왕', '장양왕'을 섬겼다. 

 마침내 '진시황'이 즉위하여 명을 받고 연나라에 사자로 가게 되었다. 

 3년 후에 연나라의 태자 '단'이 볼모로 진나라에 들어왔다. ]  

 

 

 太史公曰:

 韓子稱「 長袖善舞, 多錢善賈 」  信哉是言也!

 范睢· 蔡澤世所謂一切辯士, 然游說諸侯至白首無所遇者, 非計策之拙, 所爲說力少也.

 及二人羈旅入秦, 繼踵取卿相, 垂功於天下者, 固彊弱之勢異也. 

 然士亦有偶合, 賢者多如此二子, 不得盡意, 豈可勝道哉! 然二子不困厄, 惡能激乎 ?
 
(태사공왈 :

 한자칭「 장수선무, 다전선가 」 신재시언야 !  

 범수· 채택세소위일절변사, 연유세제후지백수무소우자, 비계책지졸, 소위세력소야.   

 급이인기려입진, 계종취경상, 수공어천하자, 고강약지세이야. 

 연사역유우합, 현자다여차이자, 불득진의, 개가승도재 !  연이자불곤액, 오능격호 ? ) 

 
 ['태사공'이 말하기를 :

 '한비자'의 말에 ‘ 소매가 길어야 춤을 잘 추고, 밑천이 많아야 장사를 잘할 수 있다.’라고 했다.

 그 말이 진정으로 옳음이여 ! 
 '범수'와 '채택'은 세상에 말하는 소위 권모술수와 임기응변에 능한 인물들이었지만 백발이 되도록 제후들에게

 유세를 행하고 다녀도 알아주는 사람을 만날 수 없었음은 그들의 계책이 졸렬해서가 아니라

 유세를 행한 나라의 국력이 약했기 때문이다. 두 사람의 떠돌이 유세객이 진나라에 들어와 서로 경상의 자리를

 주고받으며 공을 천하에 널리 빛낸 일은 강하고 약한 기세가 서로 달랐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선비들에게는 또한 우연한 만남이 있는 법이니 두 사람과 같은 현자들이 많음에도 모두가 뜻을 이루지 

 못한 경우를 어찌 숫자로 세어 말할 수 있겠는가 ! 그러나 두 사람이 곤궁한 처지에 빠져 고난을 겪지 않았다면,

 어찌 분발하여 성공할 수 있었겠는가 ? ]

 

【 각주 】

1) 알자(謁者) : 춘추전국시대 군주의 측근에서 명을 전달하는 근시를 말한다.

    진한(秦漢) 시대에는 랑중령(郞中令)으로 바뀌었다가 다시 광록훈(光禄勋)으로 바뀌었다.

2) 삼정(三亭) : 위나라 변경에 있었던 역참이다.

3) 호(湖) : 함곡관(函谷關) 서쪽 편에 있던 고을 이름이다.

4) 양후(穰侯) : 전국 때 진나라 대신으로 시호(諡號)는 양후(穰侯)다. 초나라 사람으로 진소양왕(秦昭襄王)의

    모후인 선태후의 이부(異父) 동생이다. 혜왕(惠王), 무왕(武王) 때부터 중책을 맡아 진나라의 정사를 돌봤다.

    무왕이 후사가 없이 죽자 그 형제들이 진왕의 자리를 놓고 서로 다투었다. 

    위염이 소양왕을 진왕의 자리에 올렸다.

    소양왕 2년 기원전 305년 무왕의 동생인 서장(庶長) 장(壯)이 반란을 일으키지 위염이 군사를 거느리고 나아가

    진압하고 장(壯)과 그를 따르던 대소 신료와 공족들을 살해하고 무왕의 부인을 위나라로 쫓아냈다.

    이후로 위염의 위세는 진나라를 진동시켰다. 소양왕 7년 기원전 300년 진나라의 재상에 임명되었으며

    15년 기원전 292년 지금의 하남성 등현(鄧縣)인 양(穰)에 봉해지고 다시 지금의 산동성 정도(定陶)를 더하고

    양후라는 봉호를 받았다. 전후로 4번에 걸쳐 진나라의 재상을 역임했으며 한 번은 조나라의 재상을 지냈다.

    일찍이 친히 군사를 이끌고 세 번이나 위(魏)나라를 공격하여 하내(河內)에 있던 크고 작은 성 60여 개를

    점령했으며 위나라에 압박을 가하여 하동(河東)의 땅 400리를 진나라에 바치게 했다. 위나라의 도성 대량성을

    포위했으며, 조(趙)와 위(魏) 두 나라 연합군을 화양(華陽 : 지금의 하남성 신정(新鄭) 북)에서 대파했다.

    다시 군사를 일으켜 제나라를 공격하여 강(剛)과 수(壽) 등의 땅을 점령하여 그의 봉지인 도읍(陶邑)의 영지를

    넓혔다. 백기(白起)를 발탁하여 대장으로 삼았다. 한 때 그의 권력이 강해지자 그를 따르던 무리들이 무수히

    많았으며 그의 사가의 부는 왕실보다도 더 컸다. 결국은 권력을 마음대로 휘두르며 발호하다가

    소양왕 41년 기원전 266년 재상의 자리에 파직되었다.

    다음 해 선태후가 죽고 그는 봉읍인 도읍(陶邑)으로 돌아가 그곳에서 죽었다.

5) 진소양왕 19년 기원전 288년 소왕이 스스로 서제(西帝)라 칭하고 위염을 제나라에 사자로 보내 제민왕을

    동제(東帝)라 칭하자고 했다. 이에 소대(蘇代)가 제민왕에게 유세하여 제호를 버리라고 권하자

    제민왕은 제호를 버렸다. 이에 진소양왕도 제후들의 반발을 두려워해서 제호를 버렸다.

6) 의거(義渠) : 고대 중국의 이민족 이름으로 서융(西戎)의 일족이다. 지금의 감숙성 서북의 경수(涇水) 일대에

    분포되어 살았다. 춘추 때 스스로 왕호를 칭하고 진나라와 매년 충돌하여 싸움을 벌렸다.

    진소양왕 37년인 기원전 270년에 비로소 진나라에 의해 병합되었다. 의거왕과 통정한 선태후가 의거왕을

    감천궁으로 유인하여 살해하고 후에 군사를 일으켜 의거를 멸한 일을 말한다.

7) 오획(烏獲) : 전국시대 진무왕(秦武王 : 재위 기원전 311-307년) 때의 대역사로 능히 구정을 들 수 있었다.

    진무왕을 대력사과 함께 힘내기를 즐겨 했기 때문에 임비(任鄙), 맹열(孟說) 등과 함께 높은 관직을 받았다.

8) 임비(任鄙) ; 태어난 해는 알 수 없고 기원전 288년에 죽은 전국시대 진나라의 무장에 대력사다.

    장사인 진무왕이 힘겨루기를 좋아했음으로 자신을 스스로 천거하여 진무왕의 총애를 받았다.

    진소양왕 때 상국 양후(穰侯)가 그를 한중태수로 천거했다.

    진나라 사람들은 저리질(樗里疾) 같이 ‘ 힘에는 임비이고 지혜는 저리’라고 칭했다.

9)  성형(成荊) : 춘추 때 위나라 용사다.

10) 맹분(孟賁) : ① 춘추때 위(衛)나라 사람으로 <사기정의>에 의하면 그가 일단 노하여 고함을 치면 그 소리에

      하늘이 움직였다고 했다. <시자(尸子)>에 「맹분은 물속에서는 교룡(蛟龍)도 피하지 않고,

      산속을 다닐 때는 흉포한 호랑이도 마다하지 않았다.」라고 했다.

      ②전국 때 진무왕의 호위 무사였던 맹열이다. 태어날 때부터 용력이 있어 평소에 산 소의 뿔을 뽑았다고

      했다. 그는 오획(烏獲)과 함께 용력으로 제후들 사이에 이름이 있었다. 진나라 왕으로 즉위한 진무왕이

      용사들을 좋아한다는 소식을 듣고 각지의 용사들을 이끌고 진나라로 들어가 높은 벼슬을 받았다.

      무왕 4년 기원전 307년 무왕이 주나라에 들어가 구정 들기 시합을 맹열과 하다가 다리가 부러져 죽었다.

      이에 그 죄를 추궁 받아 살해되고 그 종족은 멸족되었다.

11) 왕경기(王慶忌) : 오왕 료(遼)의 아들 경기(慶忌)를 말한다.

      용력이 있었으나 합려가 보낸 자객 요리(要離)에 의해 살해되었다.

12) 하육지(夏育之) : 춘추 때 위(衛)나라 출신의 력사다. 천균(千鈞), 즉 10톤의 무게를 들 수 있다고 했다.

      후에 노나라 대부 신수(申繻)에게 살해되었다.

13) 소관(昭關) : 지금의 안휘성 함산현 북의 소현산(小峴山)에 있었던 춘추시대 초나라와 오나라 사이의 관문이다.

14) 능수(陵水) : 율수(凓水)의 다른 이름으로 장강 강변도시 무호시(蕪湖市)와 태호(太湖)로 통하는 하천이다.

15) 접여(接輿) : 춘추 때 초나라의 은사(隱士). 성은 육(陸)이고 이름은 통(通)이다. 접여(接輿)는 그의 자(字)이다.

      일부러 미친 척하여 세상을 피해 다녔으며 자기가 직접 농사를 지어먹는 것을 해결했다.

      초나라의 미치광이 접여 “ 楚狂接輿(초광접여)”라는 별명으로 부르기도 했다.

      공자(孔子)가 그의 나이 62세 때인 초소왕(楚昭王)이 재위하던 기원전 488년에 초나라에 들렸을 때

      접여는 공자가 타고 지나가던 수레 옆에서 공자를 비웃으며 노래했다. 공자가 마차에서 내려 그와 이야기를

      나누어 보려 했으나 그가 급해 몸을 피해 달아났음으로 이야기를 나룰 수 없었다.

16) 한로(韓盧) : 한나라 산의 검은 색의 용감한 사냥개.

17) 오대부(五大夫) : 전국 때 진나라가 군공에 따라 수여하는 20 등급 중 아래로부터 아홉 번째에 해당하는 작위로

      세읍(稅邑) 300호를 받아 조세를 거둘 수 있고 죄를 짓게 될 경우 사면 받을 수 있는 권리를 부여했다.

18) 회(懷) : 지금의 하남성 무쳑현(縣)으로 춘추 때는 정나라 땅이었다가 전국 때 위나라 땅이 되었다.

19) 형구(邢丘) : 지금의 하남성 온현(溫縣)이다.

20) 최저(崔杼) : 태어난 해는 알 수 없고 기원전 546년에 죽었다. 강성(姜姓)으로 씨(氏)는 최(崔)이고

      이름은 저(杼)이다. 제나라 공족 출신으로 식읍이 최읍(崔邑)이었기 때문에 씨로 삼았다.

      제영공 8년 기원전 574년 대부 고약(高弱)이 로(盧)에서 반란을 일으키자 최저가 영공의 명을 받들어 군사를

      이끌고 출전하여 반란을 진압했다. 그 공으로 최저는 경(卿)에 임명되었다. 영공이 태자 광(光)을 폐하고

      공자 아(牙)를 새로운 태자로 세웠다. 이윽고 영공이 죽자 최저는 공자아를 죽이고 태자 광을 불러들여  

      제나라 군주로 앉혔다. 이가 제장공(齊庄公)이다. 이 공으로 해서 최저는 제나라의 정경(正卿)이 되었다.

      후에 장공이 자기의 처와 사통하자 시해하고 장공의 동생 저구(杵臼)를 세웠다. 이가 제경공(齊景公)이다.

      최저는 스스로 제나라의 우상(右相)이 되고 경봉은 좌상(左相)이 되어 제나라의 국정을 전단했다.

      제경공 2년 기원전 546년 최씨 집안에 난이 일어나자 그 틈을 타서 경봉이 최씨들을 멸족시켰다.

      최저는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시호는 무자(武子)이다.

21) 요치(淖齒) : 태어난 해는 알 수 없고 기원전 284년에 죽은 전국시대 초나라 장수다.

      도치(悼齒) 혹은 탁치(卓齒)라고도 한다. 기원전 284년 연나라가 삼진(三晋) 및 진(秦)나라와 연합하여

      제나라를 공격할 때 그는 초왕의 명을 받고 군사를 이끌고 제나라를 구원하기 위해 출동했다.

      제민왕은 요치를 제나라 상국에 임명했다. 제민왕이 5국 연합군에 쫓겨 거(莒)로 들어오자 요치는 제민왕의

      다리에서 힘줄을 뽑아 대들보에 메달아 죽이고 제나라 영토와 재물들을 연나라와 나누어 가지려고 했다.

      제민왕을 모시던 왕손고가 이끄는 거성의 백성들의 습격을 받고 살해되었다.

22) 이태(李兌) : 전국 때 조나라의 대신이다. 무령왕이 작은아들 공자하(公子何)에게 왕위를 물려주며

      이태를 조효성왕(趙孝成王)의 태부로 임명하였다. 무령왕이 조나라를 태자의 자리에서 쫓아낸 안양군

      장(章)이 이에 불만을 품고 반란을 일으켰으나 이태의 반격으로 성공하지 못하자 무령왕이 묵고있던

      사구궁(沙邱宮)으로 도망쳤다. 그의 뒤를 추격하여 사구궁으로 진입한 이태는 공자장을 잡아서 죽였으나

      그 후환을 두려워한 이태는 사구궁을 포위하여 무령왕을 굶겨 죽였다.

      효성왕은 이태를 사구(司寇)로 임명하여 조나라의 정사를 맡겼다.

23) 응(應) : 지금의 하남성 노산현 동쪽의 고을로 춘추 때 초, 전국 때 한에 속했다가, 후에 진나라에 할양했다.

24) 좌두(莝豆) : 꼴에 콩을 섞은 말먹이용 여물.

25) 평원군(平原君) : 조나라의 공자 조승(趙勝)을 말한다. 봉지가 평원(平原 : 지금의 산동성에 평원현 경내)에

      있어 평원군이라 했다. 무령왕(武靈王)의 아들이며 혜문왕(惠文王)의 동복동생이다.

      혜문왕과 효성왕(孝成王)때 조나라의 상국을 역임했으며 천하의 선비들을 불러 모아 그 문하에 있던 식객의

      수가 3천 명에 달했다. 조나라가 장평에서 진나라와의 싸움에서 크게 패한 후에 진나라 군사들이 한단을

      포위하자 한단성 안의 백성들과 군사들이 지쳐서 형세가 위급하게 되었다. 

       이에 평원군은 가산을 털어 백성들과 군사들을 독려하여 3년 동안 진나라 군사들의 포위공격을 막아냈다. 

       후에 위나라에는 사자를 보내 구원군을

      청하게 하고, 자신은 빈객(賓客) 모수(毛遂) 등을 대동하고 원군을 청하기 위해 초나라에 갔다.

      이윽고 위나라와 초나라가 원군을 동원하여 조나라를 구원하자 진나라는 한단성의 포위를 풀고 물러갔다.

26) 하동(河東) : 황하의 동쪽지방이라는 뜻으로 지금의 산서성 남부에 설치한 진나라의 군이름이다.

27) 상계(上計) : 지방관이 연말에 본인이나 부하관리들을 시켜서 관할 내의 인구, 재정과 양식, 도적과 옥사 등의

      정황을 조정에 보고하는 일을 말한다.

28) 소곡(少曲)과 고평(高平) : 두 고을 모두 지금의 산서성 고평현(高平縣) 일대에 있었다.

29) 분형(汾陘) : 지금의 하남성 양성현(襄城縣) 동북

30) 광무(廣武) : 지금의 하남성 형양시(滎陽市) 동묵에 있는 광무산(廣武山)을 말한다.

      동서의 두 봉에 각각 성을 쌓아 한나라가 황하로 통하는 길을 차단했다. 봉우리 사이의 계곡에는 

       광무간이라는 하천이 북쪽으로 흘러 황하로 들어갔다. 

       기원전 203년 초한 쟁패시 항우와 유방이 광무성의 동서 양쪽에 주둔하고 서로 얼굴을 마주보며 

       설전을 벌린 곳이다.

31) 조사(趙奢) : 전국 때 조나라의 장군이다. 원래 세금을 걷는 전부(田部)의 하급관리로 당시 조나라의 권세가

      평원군(平原君) 조승(趙勝)의 가노들이 징세에 불응하자 법을 엄격하게 적용하여 가노들을 처형했다.

      이에 조사의 사람됨을 알아본 평원군이 조왕에게 조사를 전부의 총책임자로 천거했다.

      그러자 조나라의 재정은 튼튼하게 되었다. 후에 장군에 임명되어 조군을 이끌고 출동하여

      기원전 270년 한나라를 공격하기 위해 출동하여 연여에 주둔하고 있던 진나라의 군사들을 물리치고

      한나라를 구원했다. 그 공으로 조사는 마복군에 봉해졌다. 장평대전을 지고 조나라를 패망으로 이끈

      조괄은 그의 아들이다.

 

 

채택(蔡澤)

1) 공자앙(公子卬) : 위혜왕(魏惠王 : 재위 369-319)의 아들이다. 기원전 340년 진나라의 상앙(商鞅)이 군사를

    일으켜 위나라를 공격하자 공자앙은 위군(魏軍) 대장이 되어 대항하였다. 그는 상앙과는 어렸을 때부터 일찍이

    교분이 있었다. 강화회담을 구실로 상앙의 초청을 받은 공자앙은 주연석상에서 진나라의 군사들에 의해

    사로잡히고 그가 이끈 위나라 군사들은 싸움에서 패하고 그 자신은 살해되었다.

2) 초도왕(楚悼王) : 전국 때 초나라 군주로 성왕(聲王)의 아들이고 이름은 웅의(熊疑)에 기원전 401년에 즉위하여 

    381년에 죽었다. 재위시 오기(吳起)를 기용하여 개혁을 추진하여 법을 밝히고 령을 세우는 것에 중점을 두어

    군사들의 전투력을 높이고자 공실 귀족들을 통제했다. 이윽고 신장된 국세와 증강된 군사력으로 남쪽으로는

    백월(百越)을 점령하고 북쪽으로 진출하여 진(陳)과 채(蔡)를 멸하여 병탄하고 서쪽으로는 진나라를 공격하여

    국세가 크게 일어났다. 재위 21년 만에 죽자 귀족들이 란을 일으켜 오기를 살해함으로 해서

    초나라의 개혁은 중단되고 말았다.

3) 비간(比干) : 상나라 왕 태정(太丁)의 아들이며 주왕(紂王)의 숙부이다. 주왕이 음락을 밝히고 정치를 포학하게

    하여 나라가 위태롭게 되자 죽음을 무릅쓰고 선행을 행하고 덕을 닦으라고 삼 일 밤 낮을 간하여 

    물러나지 않았다. 주왕이 고민하며 부끄러운 마음이 들었으나 결국은 분노하는 마음으로 바뀌어 말했다.

   「 비간은 스스로를 성인이라고 하니, 내가 듣기에 성인의 심장에는 7개의 구멍이 나 있다고 하니

     내가 직접 그것을 확인해 봐야겠다.」 주왕이 비간을 죽여 그 배를 갈라 비간의 심장을 살폈다.

4) 신생(申生) : 태어난 해는 알 수 없고 기원전 656년에 죽은 춘추 때 당진(唐晉)의 태자다.

    진헌공(晉獻公 : 재위 기원전 676-652년)의 아들로 상하 양군으로 나누어진 군사 들 하군의 대장이 되어

    진헌공을 따라 종군하여 곽(霍), 경(耿), 위(魏) 등의 나라를 쳐서 멸했다.

    헌공이 노년에 맞이한 후 부인 려희(姬)를 총애하여 그녀의 아들 해제(奚齊)를 대신 태자로 세우려고 했다.

    대부 사위(士蔿)가 그에게 외국으로 망명하라고 권했으나 따르지 않았다. 헌공 21년 기원전 656년 여희가 제사

    지낸 고기에 독약을 놓고 신생에게 누명을 씌우자 해명이나 반역을 도모하지 않고 여희의 잘못을 밝히는 것을

    원하지 않아 그의 부친이 노년의 즐거움을 잃어 버리는 것을 걱정했을 뿐만 아니라 외국으로 도망칠 경우

    악명을 얻는 것도 원하지 않았기 때문에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시호는 공태자(恭太子)다.

5) 미자(微子) : 이름은 개(開)로 즉 미자개를 말한다. 은(殷)나라 주왕(紂王)의 서형(庶兄)으로 주무왕(周武王)이

    은나라를 멸하고 그 고토에 주왕의 장자인 무경(武庚) 녹보(綠父)를 제후로 봉했으나 후에 삼감(三監)의

    부추김으로 녹보가 반란을 일으키자 은나라 유민을 고토에서 분산 소개하여 상구(商丘)로 옮기고

    주왕의 서형인 미자개(微子開)를 찾아 송에 봉했다. 즉 미자개는 춘추전국시대 때 송나라 시조이다.

6) 굉요(宏夭) : 주문왕(周文王)과 무왕(武王) 때의 명신이다. 은(殷)나라의 주왕(紂王)이 문왕을 가두었을 때

    유신씨(有莘氏)의 미녀 및 여융(驪戎) 산의 문마(文馬)와 유웅씨(有熊氏)의 사마(駟馬) 아홉 조,

    그리고 세상의 진기한 보물들을 모아 은나라의 총신 비중(費仲)을 매수하여 주왕(紂王)에게 바 바쳐 구해낸

    산의생(散宜生), 태공망(太公望) 등의 현신들 중 한 명이다.

7) 飛龍在天 利見大人(비룡재천 이견대인) : 주역 乾爲天 95의 효사(爻辭)다. 文言傳 5陽에 ‘ 무릇 동류는 동류끼리

    서로 구하는 법이다. 물은 습한 땅에서 흐르고 불은 마른 곳에 붙는다. 구름은 승천하는 용을 따라 솟아오르고,

    골짜기의 바람은 호랑이의 울부짖음에 의하여 일어난다. 이와 같이 성인이 나타나면 만백성은 그에 감응하여

    그를 우러러 찬양하게 되는 것이다. 하늘의 기를 받은 것은 하늘을 따르고 땅의 기를 받은 것은 땅을 따른다.

    이는 각기 그 동류를 구하는 모습이다.'라고 했다. 채택이 인용한 것은 명군이 재위에 있으면 현인이 보좌하여

    포부를 펼칠 수 있다는 뜻으로 말한 것이다.

8) 지백(智伯)/ 태어난 해는 알 수 없고 기원전 453년에 죽은 춘추 말 당진국의 정경(正卿)이다.

    희성(姬姓)에 원래 순씨(荀氏)였으나 후에 지(智) 혹은 지(知)로 바꾸어 지백(智伯)으로 불렀다.

    진출공(晉出公 : 재위 전475-458전) 즉위 초에 부친 지선자(智宣子)로부터 당진국의 정경이 되어

    제나라와 정나라를 정벌하고 중산국을 무찔렀다. 주정왕 11년 기원전 458년 조(趙), 한(韓), 위(魏) 삼가와

    연합하여 범씨(范氏)와 중항씨(中行氏)를 멸하고 그 봉읍들을 나누어 가졌다. 이어서 출공(出公)을 쫓아내고

    그의 손자 교(驕)를 새로 세웠다. 이가 진애공(晉哀公)이다. 교만해진 지백은 당진국의 정권을 오로지하고

    대신들을 모욕하는 것을 즐겼다. 후에 한,위,조 삼가에 봉지의 할양을 요구하여 한과 위 두 가문으로부터는

    만 호에 해당하는 성읍을 빼앗았으나 조가로부터는 거절당했다. 분노한 지백이 한위 이가를 위협하여

    삼가가 연합군을 결성하여 조가들의 근거지 진양성(晉陽城)을 공격했다. 3년을 공격했으나 성이 함락되지 않자

    진수(晉水)의 물을 막아 진양성을 물에 잠기게 했다. 조가들의 모사(謀士) 장맹담이 한위 이가를 설득하여

    반격을 가하자 지백은 잡혀 참수되고 지가는 멸족되었다. 지가를 멸한 한위조 삼가는 지가의 봉지를 포함하여

    당진의 공실의 땅까지 모두 삼분하여 나라를 세움으로써 기존의 진(秦), 초(楚), 제(齊), 연(燕) 등과 함께

    전국칠웅이 되어 전국시대를 열었다. 이를 역사상 삼가분진(三家分晉)이라 한다.

11) 하육(夏育) : 위(衛)나라 출신의 전설상의 력사다. 천균(千鈞), 즉 10톤의 무게를 들 수 있다고 했다.

      후에 노나라 대부 신수(申繻)에게 살해되었다고 했다. 전박(田搏)에게 살해 되었다고도 했다.

12) 태사교(太史噭) : 춘추 때 전설상의 용사로 색은(索隱)에서는 분육(賁育)이라 했고 회주고증(會注考證)에서는

      전국 때 제나라 출신의 력사로 진무왕을 모신 맹분(孟賁)이라고 했다.

13) 천맥(阡陌) : 논이나 밭의 두렁으로 동서로 난 것을 맥(陌) 남북으로 난 것을 천(阡)이라 한다.

14) 백기(白起) : 태어난 해는 알 수 없고 기원전 257년에 죽은 전국 말 진나라의 명장이다.

      지금의 섬서성 미현(郿縣)인 미(郿) 출신이다. 진소양왕(秦昭陽王 : 재위 기원전 306-251년) 때

      좌서장(左庶長)으로부터 시작해서 우경(右更), 국위(國尉)를 거쳐 대양조(大良造)에 이르렀다.

      용병에 대단히 능하여, 진나라를 위해 한(韓), 위(魏), 조(趙), 초(楚) 등의 나라를 공격하여 광할한 넓이의

      영토를 빼앗았다. 소양왕 29년 기원전 278년 초나라의 도성 영도(郢都)를 공격하여 점령하자,

      그 공으로 무안후에 봉해졌다. 기원전 260년 장평대전에서 조나라의 항복한 45만의 군사들을 모두 구덩이에

      파묻어 살육을 자행했다. 후에 진나라의 상국 범수와 틈이 벌어지고 다시 소양왕의 뜻을 거슬려 자살했다.

15) 언영(鄢郢) : 언(鄢)은 언읍으로 초나라의 별도(別都) 즉 부도(副都)이고 영(郢)은 도성을 칭하는 초나라의

      서울을 일컫는 일반명칭이다. 당시의 사람들은 초나라의 서울을 말할 때 언과 영을 함께 칭했다.

      일설에는 영은 원래 초나라의 서울이었는데 후에 언(鄢)으로 천도하자 일반명칭인 영을 함께 사용하여

      언영이라고 칭했다고 했다.

16) 이릉(夷陵) : 초나라 선왕들의 묘가 있는 곳으로 그 위치는 지금의 호북성 의창(宜昌) 동남이라는

      사기색은의 설과 호북성 의성(宜城) 외서산(外西山)이라는 수경(水經) 설 등 여러 설이 있다.

17) 조괄(趙括) : 태어난 해는 알 수 없고 기원전 260년에 죽은 전국시대 조나라의 장군으로 명장 마복군(馬服君)

      조사(趙奢)의 아들로 조사가 죽자 마복군이라는 봉호을 이어받아 마복자(馬服子)라고 불렀다.

      지상병담(紙上兵談) 즉 병론에만 밝아 실제적으로 군사를 부릴 재능이 없었다.

      주난왕(周赧王) 55년 기원전 260년 진(秦)나라의 반간계에 떨어진 조효성왕(趙孝成王)에 의해 잘 싸우고 있던

      염파(廉頗)를 조군의 총대장에서 파면하고 대신 조괄을 임명해 그 직을 대신하도록 명했다.

      그는 조나라의 대군을 이끌고 장평(長平)에서 무모하게 출전하여 진나라 진영으로 돌격을 감행했다가

      진나라의 명장 백기의 전략에 빠져 살해 당하고 그가 이끌던 40만에 달하는 조나라 군졸은 진나라에 

       항복했다. 진군 대장 백기는 40만의 항졸들을 구덩이에 파묻어 죽임으로써 

       조나라가 멸망에 이르게 되는 원인이 되었다.

18) 장평(長平) : 지금의 산서성 고평현(高平縣) 서북이다.

19) 양월(楊越) : 전국 때부터 위진남북조 시대까지 월족의 통칭이다. 일명 양월(揚越)이라고도 한다.

      양주(揚州)는 월족의 원주지였음으로 양월이라 한 것이다.

20) 양장(羊腸) : 양장판(羊腸坂)을 말한다. 태항산(太行山) 남북으로 나 있는 산길을 말하며 남쪽의 산서성

      진성시(晉城市)에서 시작하여 북쪽의 호관현(壺關縣) 동남쪽에서 끝난다.

      양의 창자처럼 꼬불꼬불하게 산중에 난 길이라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21) 허유(許由) : 요임금 때의 은사(隱士). 요임금이 군주의 자리를 그에게 물려주려고 하자 그는 기산(箕山)으로

      도망가서 농사를 지으며 살았다. 다시 요임금이 구주(九州)의 지방관을 다스리는 장관에 임명하자

      그는 영수(穎水)에 가서 귀를 씻고 듣지 않은 것으로 하였다.

22) 연릉계자(延陵季子) : 오나라의 공자 계찰(季札)을 말한다. 춘추 때 오왕(吳王) 수몽(壽夢)의 네 아들 중 막내다.

      연릉(延陵)에 봉해져 연릉계자(延陵季子)라고 부른다. 원래 수몽이 오왕의 자리를 계찰에게 물려주려 했으나

      형이 있기 때문에 받을 수 없다고 했다. 이에 수몽이 그 자리를 장자인 제번(諸樊)에게 물려주면서 이후로는

      오나라의 군주 자리는 부자상속 대신에 형제상속을 행하여 계찰에게 왕위가 돌아가도록 유언을 하고 죽었다.

      제번이 그 부왕의 뜻을 받들어 그 자리를 넘겨주려 했으나, 계찰은 받지 않고 시골로 내려가 농사를 지으며

      살았다. 오왕의 자리는 제번에 이어 이매(夷昧), 여제(餘祭)등으로 차례로 형제간에 이어졌다.

      여제 4년 기원전 544년 계찰은 여제의 명을 받들어 노나라에 사신으로 가서 주례(周禮)를 살펴보고

      그 뜻을 모두 알고 있어 노나라 사람들의 공대를 받았다. 다시 제(齊), 정(鄭), 당진등의 나라를 방문하여

      당시의 현인들로 이름이 난 안영(晏嬰), 자산(子産), 숙향(叔向) 등이 명현(名賢)들과 교유를 맺고 국가의 

      흥망성쇠에 대한 의견을 나누었다. 후에 중국 역사의 흐름은 대체적으로 계찰이 예견한 대로 진행되었다.

      여제가 죽자 오왕의 자리는 그의 아들 왕료(王僚)가 이었다. 기원전 512년 왕료의 명을 받들어 당진에

      사신으로 가 있던 중에, 왕료가 제번의 아들인 공자광(光)에 의해 살해되었다. 공자광이 오왕 합려(閤閭)다.

      계찰은 귀국하여 합려에게 사신으로 갔다온 일을 복명한 후에 왕료의 묘를 찾아 곡을 올렸다.

     후에 공자가 친히 계찰이 묻힌 무덤을 찾아가서 <유오연릉계자지묘(有吳延陵季子之墓)>라고 비문을 썼다.

      계찰은 공자보다 한 세대 전 사람이다.

23) 왕자교(王子喬) : 주영왕(周靈王 : 재위 기원전 571-545년)의 태자로 이름은 진(晉)이다. 생황을 즐겨 불며

      이수(伊水)와 낙수 사이를 놀러 다니다가 도사 부구공(浮丘公)을 만나 숭산으로 들어가 신선이 되었다.

      30년 후에 그를 찾아 산에 오른 환량(桓良)이라는 사람에게 「 7월 7일 구지산(緱氏山) 등성이에서 나를

      기다리라고 왕실에 알려라!」라고 말했다. 이윽고 때가 되자 과연 왕자진이 백학을 타고 날아와 

       산꼭대기에서 머물며 밑의 사람들을 향해 손을 흔들더니 며칠 후에 사라져 버렸다고 했다. 

      〈전고는 유향의 열선전이다.〉

26) 적송자(赤松子) : 적송자(赤誦子)라고도 한다.

      좌성남극남악진인(左聖南極南嶽真人) 좌선태허진인(左仙太虛真人)으로 불린다. 진한시대의 전설상의

      신선 이름이다. <태평환우기(太平寰宇記)에 ‘ 적송자는 금화산에 살다가 스스로 몸을 태워 신선이 되어 

      적송간(赤松澗)에서 하늘로 올라갔다고 했다. 후한이 유향(劉向)이 지은 열선전(列仙傳)에 적송자는 신화상의

      염제(炎帝) 신농 때 사람으로 우사(雨師)였다고 했다. 음식으로 물을 먹고 옥으로 옷을 해 입은 적송자는

      신농에게 능히 타오르는 화염속에서 견디는 방법을 일러주었다. 적송자는 항상 곤륜산 꼭대기로 날아가

      서왕모가 사는 석실에서 휴식을 취하면서 바람과 구름을 타고 자유롭게 오르내리곤 했다.

      염제에게 어린 딸이 있었는데 일찍이 그를 따라나서서 그녀 역시 선녀가 되어 하늘로 올라갔다고 했다.

27) 일체변사(一切辯士) : 어떤 경우에도 자유자재로 유세를 행하여 상대방의 마음을 움직일 수 있는 

       사람을 말한다. 


 

 

※  原 文 .    【 中國哲學書電子化計劃 .   筆寫本 】

 

                                 

 

     原 文   飜 譯 者        德庤 / 李   斗 振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