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 穰侯列傳

第十二. 穰侯列傳(양후열전)

덕치/이두진 2021. 7. 21. 19:08

              史記 列傳

 

       第十二.  穰侯列傳(양후열전) 

 ​穰侯魏冉者, 秦昭王母宣太后弟也.  其先楚人, 姓羋氏. 秦武王卒, 無子, 立其弟爲昭王.   

 昭王母故號爲羋八子, 及昭王卽位, 羋八子號爲宣太后.
 (양후위염자, 진소왕모선태후제야.  기선초인, 성미씨.  진무왕졸, 무자, 입기제위소왕.   

 소왕모고호위미팔자, 급소왕즉위, 미팔자호위선태후.)


 [양후 '위염'은 진'소왕'의 모친인 '선태후'의 동생이다.  '양후'의 조상은 초나라 사람으로 성은 미씨다. 
 진'무왕'이 죽었을때 아들이 없어 그 동생이 뒤를 이어 왕위에 오르니 이가 '소왕'이다.  
 예전에 소왕의 모친을 '미팔자'라고 불렀으나 마침내 '소왕'이 즉위하자 '미팔자'를 '선태후'로 부르게 되었다.] 

 

 宣太后非武王母, 武王母號曰惠文后, 先武王死.  

 宣太后二弟, 其異父長弟曰穰侯, 姓魏氏, 名冉. 同父弟曰羋戎, 爲華陽君.  

 而昭王同母弟曰高陵君涇陽君. 而魏冉最賢, 自惠王武王時任職用事. 

 武王卒, 諸弟爭立, 唯魏冉力爲能立昭王.  昭王卽位, 以冉爲將軍, 衛咸陽. 

 (선태후비무왕모  무왕모호왈혜문후  선무왕사.  

 선태후이제, 기이부장제왈양후  성위씨  명염.  동부제왈미융  위화양군.  

 이소왕동모제왈고릉군경양군. 이위염최현, 자혜왕무왕시임직용사. 

 무왕졸, 제제쟁입, 유위염력위능입소왕. 소왕즉위, 이염위장군, 위함양.)


 ['선태후'는 '무왕'의 모친이 아니고, '무왕'의 모친은 '혜문후'로 '무왕'보다 먼저 죽었다.   

 '선태후'에게는 두명의 동생이 있었는데, 큰 동생은 아버지가 다른 '양후'인데 성은 위씨이고, 이름은 '염'이다.

 작은 동생은 아버지가 같은 미융으로 '화양군'이 있었다.
 그리고 '소왕'에게는 어머니가 같은 동생으로 '고양군'과 '경양군'이 있었다. 그 중 '양후'가 가장 현명했기 때문에

 '혜왕' 때부터 '무왕'에 이르기까지 진나라 조정에서 중요한 관직에 임명되어 나랏일을 도맡아 하였다.
 '무왕'이 죽은 후에 형제들이 임금의 자리를 놓고 다툴 때, 오직 '위염'만이 '소왕'을 왕위에 앉힐 힘을 갖고 있었다.

 ​'소왕'이 즉위하자 '위염'은 장군이 되어 "함양"을 지켰다.] 

 

 誅季君之亂, 而逐武王后出之魏.  昭王諸兄弟不善者皆滅之, 威振秦國.  

 昭王少, 宣太后自治, 任魏冉爲政.  昭王七年, 樗里子死, 而使涇陽君質於齊.

 趙人樓緩來相秦, 趙不利, 乃使仇液之秦 請以魏冉爲秦相. 

 (주계군지란, 이축무왕후출지위.  소왕제형제불선자개멸지, 위진진국.     

 소왕소, 선태후자치, 임위염위정.  소왕7년, 저리자사 이사경양군질어제.

 조인루완래상진 조불리, 내사구액지진 청이위염위진상.)

 

 ['계군의 반란'을 진압하고 '무왕'의 비 '혜문후'를 친정인 위나라로 쫓아냈다.   

 '소왕'은 여러 형제들 중 반감을 갖은 자들은 모두 없애 그 위엄이 진나라를 진동시켰다.
 '소왕'이 어렸기 때문에 몸소 조정에 나가 국정을 돌보왔던 '선태후'는 모든 정사를 '위염'에게 맡겼다.

 소왕 7년,  '저리자'가 죽고 '경양군'을 제나라에 볼모로 보냈다.   

 조나라 사람 '루완'이 와서 진나라의 재상이 되었으나,  조나라는 '루완'이 진나라 재상이 된 것이 

 ​자국에 이롭지 않다고 여겨 '구액'이라는 사람을 시켜 '위염'을 진나라의 재상으로 삼으라는 

 요청을 하려 하였다.]  

  

 仇液將行, 其客宋公謂液曰 : 「 秦不聽公, 樓緩必怨公.  公不若謂樓緩曰 『 請爲公毋急秦. 』

 秦王見趙請相魏冉之不急, 且不聽公, 公言而事不成, 以德樓子, 事成, 魏冉故德公矣. 」   

 於是仇液從之, 而秦果免樓緩而魏冉相秦. 欲誅呂禮, 禮出奔齊. 
 (구액장행, 기객송공위액왈 : 「 진불청공, 루완필원공.  공불약위누완왈 『 청위공무급진. 』 

 진왕현조청상위염지불급, 차불청공, 공언이사불성, 이덕누자, 사성, 위염고덕공의. 」   

 어시구액종지, 이진과면누완이위염상진. 욕주여례, 례출분제.)

 

 [길을 떠나려고 하던 '구액'에게 그의 문객 '송공'이라는 사람이 만류하며 말하기를 : " 진나라가 공의 말을 듣지

 않게 되면 '루완'은 틀림없이 공을 원망할 것입니다.  그러니 공께서는 먼저 '루완'에게 '청컨대 저는 공을 위하여

 진나라 왕에게 서둘러 부탁하지 않겠습니다.'라고 말하십시오.

 조나라 사자가 '위염'을 재상에 임명하는 일이 급하지 않다고 청하면 진왕은 공의 말을 듣지 않게 되고, 
 그렇게 되면 공의 말이 이루어지지 않아도 루완에게는 덕을 베푸는 일이 되며, 반대로 일이 성사된다면   

 '위염'이 공에게 감사하다고 할 것입니다. "라고 하였다. 이에 '구액'은 그 말대로 따랐으며,

 ​진나라는 '루완'을 면직시키고 '위염'을 진나라 상국으로 삼았다.

 ​'위염'이 '여례'를 죽이려고 하자 여례가 제나라로 달아났다.] 

 

 昭王十四年, 魏冉擧白起, 使代向壽將而攻韓·魏.  敗之伊闕, 斬首二十四萬, 虜魏將公孫喜. 

 明年, 又取楚之宛葉.  魏冉謝病免相, 以客卿壽燭爲相.
 (소왕십사년, 위염거백기, 사대상수장이공한·위.   

 패지이궐, 참수이십사만, 로위장공손희.  명년, 우취초지완섭.  위염사병면상, 이객경수촉위상.)


 [진소왕 14년, '위염'이 '백기'를 천거하여 '상수' 대신 대장으로 삼아 한·위 두 나라 연합군을 공격하도록 했다.
 '백기'는 한·위 연합군을 패주시켜 그 군사 24만의 목을 베고 위장 '공손희'를 사로잡았다.   

 다음 해에 '백기'는 다시 초나라의 "완"과 "섭" 지역을 공격하여 점령했다.
 이 해에 '위염'은 병이 들어 사직을 청하여 상국의 자리에서 면직되면서 객경 '수촉'이 재상이 되었다.] 

 

 其明年, 燭免, 復相冉.  乃封魏冉於穰, 復益封陶, 號曰穰侯.  穰侯封四歲, 爲秦將攻魏.  

 魏獻河東方四百里, 拔魏之河內, 取城大小六十餘.
 (기명년, 촉면, 부상염.  내봉위염어양, 부익봉도, 호왈양후.  양후봉사세, 위진장공위.   

 위헌하동방사백리, 발위지하내, 취성대소육십여.)


 [그 다음 해에 '수촉'이 면직되고 '위염'이 다시 재상에 복직되었다. 

 이에 '위염'은 양에 봉해지고  다시 "도읍"의 땅을 봉지에 더했다.  이로써 '위염'은 양후로 불려졌다.   

 '위염'이 양후에 봉해진 지 4년 째 되는 해, '위염'은 진나라 장수가 되어 위나라를 공격했다.
 위나라는 "하동"의 사방 4백리에 이르는 땅을 진나라에 바쳤다.   

 '위염'이 빼앗은 땅은 위나라 "하내"의 땅으로써 크고 작은 성 60여개를 포함하고 있었다.] 

 

 昭王十九年, 秦稱西帝, 齊稱東帝.  月餘, 呂禮來, 而齊·秦各復歸帝爲王.    

 魏冉復相秦, 六歲而免, 免二歲 復相秦.  四歲, 而使白起拔楚之郢, 秦置南郡.
 (소왕십구년, 진칭서제, 제칭동제.  월여, 여례래, 이제·진각복귀제위왕.     

 위염부상진, 육세이면, 면이세, 부상진.  사세, 이사백기발초지영, 진치남군.)


 ['진'소왕' 19년, 진나라는 서제라 칭하고 제나라는 동제라고 칭하였다.  

 그리고 한 달이 조금 지나 '여례'가 제나라의 사자로 진나라에 들어와 제나라와 진나라는 각기 제호를 버리고

 왕호를 사용해야 한다고 유세했다.  진나라와 제나라는 그 말에 따라 왕호로 돌아갔다.
 '위염'이 다시 진나라의 재상이 되었다가 6년 후에 면직되었다. 면직 2년 후에 다시 재상에 임명되었다.
 '위염'이 재상에 임명된지 4년 째 되는 해에 '백기'를 대장으로 삼아 초나라의 도성 "영"을 함락시키고, 

 그 땅에 "남군"을 설치하였다.] 

 

 乃封白起爲武安君.  白起者, 穰侯之所任擧也, 相善.  於是穰侯之富, 當於王室.   

 昭王三十二年, 穰侯爲相國, 將兵攻魏, 走芒卯, 入北宅, 遂圍大梁.
 (내봉백기위무안군.  백기자, 양후지소임거야, 상선.  어시양후지부, 당어왕실.   

 소왕삼십이, 양후위상국, 장병공위, 주망묘, 입북택, 수위대량.)


 [그 공으로 '백기'는 무안군에 봉해졌다. '백기'는 '양후'가 천거하여 임용된 장군으로써

 '양후'와는 서로 사이가 좋았다.  그래서 '양후'의 재산이 왕실보다 더 많게 된 것은 '백기'의 힘이 컸다. 
 진'소왕' 32년 기원전, '양후'는 진나라의 상국이 되어 군대를 이끌고 위나라를 공격하여, 

 ​위나라 장수 '망묘'가 도망가자 "북택"으로 들어가 "대량"을 포위하였다. ] 

 

 梁大夫須賈說穰侯曰 : 「 臣聞魏之長吏謂魏王曰 『 昔梁惠王伐趙 戰勝三梁 拔邯鄲 趙氏不割.   

 而邯鄲復歸 齊人攻衛 拔故國 殺子良 衛人不割.  而故地復反.  衛·趙之所以國全兵勁,

 而地不幷於諸侯者, 以其能忍難而重出地也.  宋中山數伐割地, 而國隨以亡. 
 (량대부수가설양후왈 : 「 신문위지장리위위왕왈 『 석양혜왕벌조 전승삼량 발한단 조씨불할.   

 이한단복귀 제인공위 발고국 살자량 위인불할.  이고지부반.  위·지소이국전병경,

 이지불병어제후자, 이기능인난이중출지야.  송중산수벌할지, 이국수이망. 』 


 [양나라 대부 '수가'가 '양후'를 찾아와 유세하기를 : " 제가 위나라의 높은 관리들이 위왕에게 하는 말을 들었는데

 ​그 사람이 위왕에게 말하기를 '옛날 양'혜왕'이 조나라를 정벌할 때 "삼량"에서 조군을 무찌르고 "한단"을

 함락시켰음에도 조나라는 나라를 쪼개어 위나라에 바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얼마 후에 "한단"은 조나라에 돌아가고 말았습니다.  제나라가 위나라를 공격하여 그 옛 땅을 모두 빼앗고

 위나라의 대장 '자량'을 죽였지만 위나라 역시 나라를 나누어 제나라에 바치지 않았습니다. 

 위나라 역시 그 옛땅을 다시 찾을 수 있었습니다. 위나라와 조나라가 강한 군사력을 갖고 있던 다른 제후들에게

 병합 당하지 않고 나라를 지킬 수 있었던 이유는 난관에 부딪쳤다고 영토를 반복해서 내어주지 않고 

 어려움을 참고 견뎠기 때문이었습니다. 그와 반대로 정벌을 당할 때마다 영토를 떼어 준 송나라와 중산국은

 나라가 이내 망하고 말았습니다. 

 

 臣以爲衛·趙可法, 而宋中山,可爲戒也.  秦貪戾之國也.  而毋親蠶食魏氏, 又盡晉國.    

 戰勝暴子, 割八縣 ,地未畢入, 兵復出矣.  夫秦何厭之有哉.  今又走芒卯, 入北宅, 此非敢攻梁也. 

 且劫王以求多割地, 王必勿聽也.  今王背楚·趙而講秦, 楚·趙怒而去王, 與王爭事秦.

 (신이위위조가법, 이송중산가위계야.  진탐려지국야.  이무친잠식위씨, 우진진국.   

 전승폭자, 할팔현, 지미필입, 병부출의.  부진하염지유재.  금우주망묘, 입북택, 차비감공량야. 

 차겁왕이구다할지, 왕필물청야.  금왕배초·조이강진, 초·조노이거왕, 여왕쟁사진.


 [신은 위나라, 조나라의 정책을 본받고 송나라와 중산국이 망한 경우를 교훈 삼아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진나라는 탐욕스러운 나라라 결코 친하게 지내면 안 됩니다. 이는 마치 누에가 뽕잎을 갉아먹듯이

 위나라를 잠식하여 결국 옛날 진(晉)나라의 영토였던 "하동"의 땅을 모두 빼앗아 갔습니다. 

 ​또한 얼마 전에는 '포연'을 격파하고 위나라의 8개 현에 달하는 땅을 할양받기로 했으나

 위나라가 땅을 내어주지 않자 군사를 다시 일으켜 쳐들어왔습니다. 
 대체로 보아 진나라는 원하는 땅을 얻기 전에는 결코 쉽게 포기하고 물러가지 않을 것입니다. 

 지금 또 진나라가 위나라 장수 '망묘'의 군대를 무찌르고 "북택"에 주둔하고 있으면서 곧바로 진격하여   

 "대량성"을 포위하지 않고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대왕을 위협하여 많은 땅을 빼앗으려고 하기 때문이니   

 대왕께서는 결코 진나라의 말을 듣지 마십시오. 만일 지금 대왕께서 진나라의 위협에 굴복하여 

 초나라와 조나라와의 합종을 배반하고 진나라와 강화를 맺는다면, 

 초와 조 두 나라는 노하여 위나라에 등을 돌리고 진나라를 받들기 위해 위나라와 다투게 될 것입니다. 

 

 秦必受之, 秦挾楚·趙之兵以復攻梁.  則國求無亡不可得也 ?  願王之必無講也.   

 王若欲講, 少割而有質, 不然, 必見欺. 』 此臣之所聞於魏也, 願君之以是慮事也. 

 周書曰 『 惟命不于常. 』  此言幸之不可數也. 夫戰勝暴子, 割八縣. 

 此非兵力之精也, 又非計之工也, 天幸爲多矣.  今又走芒卯, 入北宅, 以攻大梁. 

 (진필수지, 진협초·조지병이복공량.  즉국구무망불가득야 ?  원왕지필무강야.   

 왕약욕강, 소할이유질, 불연, 필견기. 』 차신지소문어위야, 원군지이시려사야. 

 주서왈 『 유명불우상. 』  차언행지불가수야.  부전승폭자, 할팔현. 

 차비병력지정야, 우비계지공야, 천행위다의.  금우주망묘, 입북택, 이공대량. 


 [그렇게 되면 진나라는 필시 조나라, 초나라와 연횡을 맺어 조나라, 초나라, 진나라의 군사를 합하여 

 ​다시 대량성을 공격할 것입니다.  그럼에도 위나라가 망하지 않는다면 이상한 일이 되지 않겠습니까 ?   

 원하옵건데 대왕께서는 결코 진나라와 강화를 맺지 마십시오. 사정이 그러함에도 불구하고 대왕께서 

 ​은 땅을 떼어 할양하면서 진나라와 강화를 맺고 진나라에 인질을 요구할 것입니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반드시 속임을 당할 것이라고 대왕은 생각하고 있기 때문입니다.'라고 하였습니다.  

 이것이 바로 제가 들은 바 있는 위나라가 처한 정황입니다.  

 ​원컨대 군후께서는 이 점을 심사숙고하여 일을 행하시기 바랍니다.
《주서》에 이르기를 '천명은 항상 고정되어 불변하는 것이 아니다.'라고 했습니다.   

 이 말은 행운은 반복하여 찾아오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군후께서 '포연'과의 싸움에서 이겨

 위나라의 8개 현을 할양받았습니다. 이것은 군후께서 거느린 군사들이 강하고 정예한 군사들 때문도 아니고, 

 계책을 꾸며 이룩한 공이 아니라, 단지 하늘이 내려준 행운에 의한 것입니다. 

 지금 다시 위나라 장수 '망묘'의 군대를 무찌르고 "북택"으로 진격하여 "대량"을 공격하려고 하십니다.

  

 是以天幸自爲常也, 智者不然.  臣聞魏氏悉其百縣勝甲以上戍大梁, 臣以爲不下三十萬. 

 以三十萬之衆守梁七仞之城, 臣以爲湯武復生, 不易攻也.   夫輕背楚·趙之兵, 陵七仞之城, 

 戰三十萬之衆, 而志必擧之,  臣以爲自天地始分以至于今, 未嘗有者也.
 (시이천행자위상야, 지자불연. 신문위씨실기백현승갑이상수대량, 신이위불하삼십만.

 이삼십만지중수량칠인지성, 신이위탕무부생, 불역공야.  부경배초·조지병, 능칠인지성,  

 전삼십만지중, 이지필거지,  신이위자천지시분이지우금, 미상유자야.

 

 [이것은 행운이 항상 자기와 같이 할 것이라는 착각일뿐 지혜로운 사람은 그렇게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제가 듣기에 위나라는 "대량성"을 지키기 위해 국내 백개 현의 정예 무장병력을 모두 불렀는데 그 군사 수가 

 30만이 넘는다고 했습니다.  30만의 군사로 7인(약 15m) 높이의 대량성 성벽에 의지해서 지키게 되면

 ​은'탕왕'이나 주'무왕'이 다시 살아난다 할지라도 쉽게 공략할 수 없습니다.

 무릇 배후의 초와 조 두 나라 원병을 무시하고 7인 높이의 높은 성벽을 올라 30만에 달하는 

 위나라 군사들과 싸워 그런 성을 함락시켰다는 사례는 천지가 개벽한 이래로 아직 없었을 것입니다. 

 

 攻而不拔, 秦兵必罷, 陶邑必亡, 則前功必棄矣.  今魏氏方疑, 可以少割收也.   

 原君逮楚· 趙之兵未至於梁, 亟以少割收魏. 魏方疑而得以少割為利, 必欲之, 則君得所欲矣. 

 楚·趙怒於魏之先己也, 必爭事秦, 從以此散, 而君後擇焉.  且君之得地豈必以兵哉!

 割晉國, 秦兵不攻, 而魏必效絳安邑. 又為陶開兩道, 幾盡故宋, 衛必效單父.  秦兵可全, 而君制之,

 何索而不得, 何為而不成! 原君熟慮之而無行危. 」 穰侯曰:「 善. 」乃罷梁圍. 

 (공이불발, 진병필파, 도읍필망, 즉전공필기의.  금위씨방의, 가이소할수야.    

 원군체초조지병미지어량, 극이소할수위. 위방의이득이소할위리, 필욕지, 즉군득소욕의. 

 초·조노어위지선기야, 필쟁사진, 종이차산, 이군후택언.  차군지득지개필이병재!

 할진국, 진병불수, 이위필효강안읍.  우위도개양도, 기진고송, 위필효단보.  진병가전, 이군제지,

 하색이불득, 하위이불성! 원군숙려지이무행위. 」 양후왈:「 선. 」 내파량위.)


 [만약 공격하여 함락시키지 못하게 되면 진나라는 군사를 물리쳐야 되고, 그렇게 되면 군께서는 필시 봉읍인

 "도읍"를 잃게 될 것입니다. 그것은 바로 군께서 옛날에 세운 공로를 모두 잃게 되었음을 의미합니다.   

 지금 위나라가 의심하며 주저하고 있을 때 군께서는 그들의 작은 땅을 요청하시면 바로 취할 수 있습니다. 

 원컨대 조와 초 두 나라의 구원병이 위나라에 당도하기 전에 위나라에 재빨리 작은 땅만을 요청하시어  

 위나라를 복종시키십시오. 위나라는 작은 땅을 바쳐서 강화를 맺는 일이 이익이 된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틀림없이

 군의 요청을 받아들일 것입니다. 그래서 군후께서는 바로 원하시는 바를 취하실 수 있다고 말씀드리는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초와 조 두 나라 역시 위나라가 먼저 다투어 진나라와 강화를 한 배신행위에 노하여, 

 그들도 역시 다투어 진나라를 받들려고 할 것이고, 결국 삼국 사이의 합종은 와해되니,  

 군후께서는 단지 그들 중 누구를 택하기만 하면 됩니다. 더욱이 군후께서 남의 나라 땅을 얻는데 반드시

 군사를 이용해야만 한다고 생각하시고 계시는 것 같습니다. 옛날 당진의 땅을 얻을 때 진나라는 군사를 동원하여

 공격하지 않았음에도 위나라는 "강성"과 "안읍"의 땅을 취할 수 있었습니다. 

 다시 "도읍"에서 하서와 하동으로 통하는 두 개의 길을 뚫기 위해 옛날 송나라의 영토를 점령한다면 

 위협을 느낀 위나라는 필시 "단보"의 땅을 진나라에 바칠 것입니다. 이로써 진나라는 싸우지 않고도 

 원하는 땅을 얻게 되고 군후께서는 위나라를 통제하고 "도읍"을 다스릴 수 있는데, 

 어찌 구하여 얻지 못할 것이며 시도함에도 어찌 이루지 못하겠습니까 ?   

 원컨대 군후께서는 이 점을 깊이 생각하시어 위태로운 일을 행하지 마십시오. "라고 하였다.
 '양후'는 다 듣고 나서 말하기를 : " 그말이 옳다. "라고 하며,   곧바로 "대량"의 포위를 풀고 물러갔다.] 

  

 明年, 魏背秦, 與齊從親.  秦使穰侯伐魏, 斬首四萬, 走魏將暴鳶, 得魏三縣.  穰侯益封.

 明年, 穰侯與白起客卿胡陽複攻趙·韓·魏, 破芒卯於華陽下, 斬首十萬, 取魏之卷·蔡陽·長社,  

 趙氏觀津.  且與趙觀津, 益趙以兵, 伐齊.
 (명년, 위배진, 여제종친.  진사양후벌위, 참수사만, 주위장포연, 득위삼현.  양후익봉.

 명년, 양후여백기객경호양복공조·한·위, 파망묘어화양하, 참수십만, 취위지권·채양·장사,  

 조씨관진.  차여조관진, 익조이병, 벌제.)

 

 [다음 해, 위나라가 진나라를 배반하고 제나라와 합종을 맺었다.  진나라가 '양후'를 시켜 

 위나라를 공격하도록 하여 위나라 군사 4만 명의 목을 베고, 위나라 장수 "포연"을 도망가게 하였다.   

 '양후'는 이로써 위나라의 3개 현을 얻어 자기의 봉지인 "도읍"의 영지를 더욱 넓혔다.

 다음 해, '양후'는 '백기'와 객경 '호양'에게 군사를 이끌고 "화양"에서 한, 위, 조 삼국의 군대와 싸워 

 ​그 대장 '망묘'를 격파하고 군사 10만 명의 목을 베게 하였다.
 '양후'는 계속 진군하여 위나라의 "권읍", "채양", "장사" 지역과 조나라의 "관진"을 점령하였다.
 다시 "관진"을 조나라에 돌려주는 댓가로 조나라로부터 원병을 얻어 제나라를 공격하였다.] 

 

 ​齊襄王懼, 使蘇代為齊陰遺穰侯書曰:「 臣聞往來者言曰 『 秦將益趙甲四萬以伐齊. 』

 臣竊必之敝邑之王曰 『 秦王明而熟於計, 穰侯智而習於事, 必不益趙甲四萬以伐齊 』  是何也?
 (제양왕구, 사소대위제음유양후서왈:「 신문왕래자언왈 『 진장익조갑사만이벌제. 』

 신절필지폐읍지왕왈 『 진왕명이숙어계, 양후지이습어사, 필불익조갑사만이벌제 』  시하야?

 

 [제'양왕'은 두려워서 '소대'를 사신으로 보내 제나라를 위해 '양후'에게 은밀히 자기의 서신을 전하도록 시키고,

 '양후'를 접견한 '소대'가 말하기를 : "제가 이곳에 오는 도중에 사람들이 하는 말이 '진나라가 장차 조나라의

 중무장한 병사 4만 명을 지원군으로 받아 제나라를 정벌하려고 하는 중이다.'라고 했습니다.

 신은 아무도 몰래 제왕에게 단언하기를 '진나라 왕은 현명하여 계책을 세우는데 심사숙고하고, 

 지혜로운 '양후'는 일을 행하는데 능숙하기 때문에 반드시 조나라의 중무장한 병사 4만 명을 지원받아 

 제나라를 공격하지는 않을 것이다.'라고 하는데,  이는 어째서이겠습니까 ?  

 

 夫三晉之相與也, 秦之深讎也.  百相背也, 百相欺也, 不為不信, 不為無行.  今破齊以肥趙. 

 趙·秦之深讎, 不利於秦.  此一也.  秦之謀者, 必曰 『破齊,弊晉·楚,而後制晉·楚之勝』 

 夫齊, 罷國也.  以天下攻齊, 如以千鈞之弩決潰筴也, 必死, 安能弊晉·楚 ? 此二也.

 (부삼진지상여야, 진지심수야.  백상배야, 백상기야, 불위불신, 불위무행.  금파제이비조. 

 조·진지심수, 불리어진.  차일야. 진지모자, 필왈 『파제,폐진·초,이후제진·초지승』 

 부제, 파국야. 이천하공제, 여이천균지노결궤옹야, 필사, 안능폐진·초? 차이야.


 [대체로 그것은 삼진(한· 위· 조)이 서로 친하게 되어 단결하면 바로 진나라에게 깊은 원한을 품고 있는 

 ​가장 큰 적이 나타나기 때문입니다.  그들이 백 번 배반하면 백 번 속이면 되지만, 그들이 신의를 깨지 않으면

 도의를 지키지 않을 이유가 없기 때문입니다. 지금 제나라를 공격하게 되면 조나라를 살찌게 만드는 일이 됩니다. 

 ​조· 진 두 나라는 원한이 깊은 나라이기 때문에 조나라에 이익이 되는 일은 진나라에게는 해로운 일이 됩니다. 

 이것이 첫 번째 이유입니다. 

 진나라의 책략가들은 틀림없이 말하기를 ‘삼진과 초나라가 제나라를 깨뜨리면 제나라는 격파될 것이고,  

 삼진과 초나라 역시 지칠것이다. 그 후에 우리는 삼진과 초나라를 제압하여 승리할 것이다. ’라는 생각을 품고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제나라는 이미 망해가는 나라입니다.  그런 제나라를 천하의 여러 나라들이 마치 천균의

 힘을 가진 강력한 쇠뇌로 쏴서 종기를 터뜨리는 행위와  같은 이치이니 제나라는 틀림없이 망하고 말 것입니다.
 어찌 삼진과 초나라를 지치게 만들 수 있겠습니까 ?  이것이 두 번째 이유입니다.  

  

 秦少出兵, 則晉·楚不信也; 多出兵, 則晉·楚為制於秦.  齊恐, 不走秦, 必走晉·楚.  此三也.   

 秦割齊以啖晉·楚, 晉·楚案之以兵, 秦反受敵.  此四也.

 是晉·楚以秦謀齊, 以齊謀秦也.  何晉·楚之智而秦·齊之愚 ? 此五也.  
 (진소출병, 즉진·초불신야; 다출병, 즉진·초위제어진.  제공, 불주진, 필주진·초.  차삼야.   

 진할제이담진·초, 진·초안지이병, 진반수적.  차사야. 

 시진·초이진모제, 이제모진야.  하진·초지지이진·제지우 ? 차오야. 

  
 [진나라가 군사를 적게 출동시키면 삼진과 초나라는 진나라를 믿지 않게 되고, 반대로 많은 수의 군사를 

 출동시키면 삼진과 초나라는 진나라에 의해 제압을 당하지 않을까 두려워하게 됩니다. 

 또한 진나라의 대군을 두려워한 제나라는 진나라에 붙지 않고 삼진과 초나라에 붙을 것입니다.  

 이것이 세 번째 이유입니다. 진나라가 점령한 제나라의 땅으로 삼진과 초나라를 회유하게 되면, 

 삼진과 초나라는 그곳에 병사들을 배치해 지키게 될테니 진나라는 오히려 강대해진 적을 맞게 됩니다.  

 이것이 네 번째 이유입니다. 

 ​진나라가 삼진과 초나라를 도와서 제나라를 치는 것은, 삼진과 초나라가 진나라를 이용해서 제나라의 땅을 빼앗고

 제나라를 빌미로 진나라 땅을 빼앗는 결과가 됩니다. 어찌하여 삼진과 초나라는 지혜롭고,

 진과 제는 어리석단 말입니까 ? 이것이 다섯 번째 이유입니다.

 

 故得安邑以善事之, 亦必無患矣.  秦有安邑, 韓氏必無上黨矣. 取天下之腸胃, 與出兵而懼其不反也,

 孰利? 臣故曰秦王明而熟於計, 穰侯智而習於事, 必不益趙甲四萬以代齊矣. 」 

 於是穰侯不行, 引兵而歸. 
 
(고득안읍이선사지, 역필무환의.  진유안읍, 한씨필무상당의. 취천하지장위, 여출병이구기불반야,

 숙리?  신고왈진왕명이숙어계, 양후지이습어사, 필불익조갑사만이벌제의. 」 

 어시양후불행, 인병이귀.)

 

 [그러므로 이치를 따져 "안읍"을 얻는다면 또한 틀림없이 후환이 없게 될 것입니다.   

 진나라가 "안읍"을 얻게 되면, 그 결과 한나라는 필시 "상당군"을 지키지 못할 것입니다. 

 "상당군"을 얻는것은 천하로 비교하면 창자와 위처럼 중요하기 때문에 조나라로부터 군사를 지원받아 

 출병한다면, 두려워한 나머지 조나라는 돌려주지 않을 것입니다. 그 중 어떤 것이 진나라에 이익이 되겠습니까 ? 

 그래서 저는 '진왕'은 총명하여 계책을 세우는데 능하고 '양후'는 지혜로워 일을 성사시키는데 능숙하기 때문에,

 ​틀림없이 조나라의 중무장한 4만 명의 병사를 물리치고 제나라를 정벌하지 않으리라고 말씀드리는 것입니다."

 라고 하였다. '양후'는 조나라에 군사를 돌려보낸 후 제나라에 대한 공격을 중지하고 군사를 이끌고 돌아왔다.] 

 

 昭王三十六年, 相國穰侯言客卿灶, 欲伐齊取剛·壽, 以廣其陶邑.  

 於是魏人范睢自謂張祿先生, 譏穰侯之伐齊, 乃越三晉以攻齊也, 以此時奸說秦昭王. 
 (소왕삼십육년, 상국양후언객경조, 욕벌제취강·수, 이광기도읍.  

 어시위인범수자위장록선생, 기양후지벌제, 내월삼진이공제야, 이차시간설진소왕.)


 [소양왕 36년, 상국 '양후'가 객경 '조'에게 명하여 제나라의 "강", "수"을 점령하여 자신의 봉읍인 "도읍"의 영지를

 넓히도록 했다.  이때 위나라 사람 '범수'는 자신을 '장록' 선생이라고 칭하면서 진소왕에게 유세하기를

 삼진의 경계를 넘어 제나라를 정벌하려는 '양후'를 비난하는 내용이었지만 실제 목적은 이런 기회에 

 자신의 주장을 설득시키고 자신의 재능을 진소왕에게 보여 주는 것에 있었다.   

 

 昭王於是用范睢.  范睢言宣太后專制, 穰侯擅權於諸侯, 涇陽君·高陵君之屬太侈, 富於王室.   

 於是秦昭王悟, 乃免相國, 令涇陽之屬皆出關, 就封邑.  穰侯出關, 輜車千乘有餘.  

 穰侯卒於陶, 而因葬焉.  秦複收陶為郡. 
 (소왕어시용범수.  범수언선태후전제, 양후천권어제후, 경양군·고릉군지속태치, 부어왕실.  

 어시진소왕오, 내면상국, 령경양지속개출관, 취봉읍.  양후출관, 치거천승유여.  

 양후졸어도, 이인장언.  진복수도위군.)


 [이로써 진'소왕'은 '범수'를 등용했다.  '범수'는 '선태후'가 왕 대신 제멋대로 권력을 휘두르며, 

 '양후'는 제후들 사이에서 권세를 떨치며, '경양군'과 '고릉군'의 무리들이 왕실보다 더욱 부유하고 사치스러운

 생활을 하고 있는 부당함을 토로 하였다. 이에 진'소왕'도 깨닫는 바가 있었던지 '양후'를 상국의 자리에서

 면직시키고, '경양군' 등의 무리들을 "함곡관" 밖으로 내몰아 자기의 봉지에 가서 살도록 하였다.

 '양후'도 "함곡관"을 나가는데 그의 재물을 싫은 짐수레가 천여 대를 넘었다.
 '양후'는 결국 "도읍"에서 죽고 그 곳에 장사지냈다.  진나라는 "도읍"의 땅을 환수하여 군으로 삼았다.]
 

 


 太史公曰:

 穰侯, 昭王親舅也.  而秦所以東益地, 弱諸侯, 嘗稱帝於天下, 天下皆西鄉稽首者,  穰侯之功也. 

 及其貴極富溢, 一夫開說, 身折勢奪而以憂死, 況於羈旅之臣乎! 
 (태사공왈 :

 양후, 소왕친구야.  이진소이동익지, 약제후, 상칭제어천하, 천하개서향계수자, 양후지공야. 

 급기귀극부일, 일부개세, 신절세탈이이우사, 황어기려지신호!)


 [태사공은 말한다 :

 '양후'는 진'소왕'의 친외삼촌이다.  진나라가 동쪽으로 그 영토를 더욱 넓혀가고 제후들을 약화시키며,

 ​일찍이 천하에 제왕을 칭하자 천하는 모두 서쪽을 향해 머리를 조아려 받들었다.    

 그것은 모두 '양후'의 공이다.  그의 신분은 극도에 달하고 부는 더욱 넘쳐났으나,  

 선비 한 사람이(범수) 진나라에 들어와 유세를 행하자, 

 몸은 꺾이고 세력은 박탈되어 근심과 번민속에 살다가 죽었다.

 ​하물며 왕족의 일원인 그도 그리하였는데, 타국 출신으로 벼슬살이하는 신하는 어떠하였겠는가 !] 

 

 [索隱讚述(색은찬술)

 穰侯智識 應變無方(양후지식 응변무방) : 양후의 지혜와 지식은 변화무쌍하여 그 끝이 없었다.
 內倚太后 外輔昭王(내의태후 외보소왕) : 안으로는 태후의 동생이고, 밖으로는 소양왕을 보좌했다.
 四登相位 再列封疆(사등상위 재열봉강) : 네 번 상국의 자리에 오르고 두 번 열후의 봉해져 봉지를 얻었다.
 摧齊撓楚 破魏圍梁(최제요초 파위위량) : 제나라를 압박하고 초나를 어지럽혔으며 위나라를 파하고 

                                               대량성을 포위했다. 

 一夫開說 憂憤而亡(일부개설 우분이망) : 그러나 선비 한 사람이 진나라에 들어와 한 번 유세하자 

                                               마음속에 울분을 품고 죽고 말았다. 】 

 

 

【 각주 】 

1) 계군(季君) : 태어난 해는 알 수 없고 기원전 305년에 죽은 진혜왕(秦惠王)의 아들이다.  

    영(贏) 성에 이름은 장(壯)으로 공자장(公子壯)이라고 부르고 계군은 그의 자이다.  

    무왕이 그를 서장(庶長)에 임명했다. 무왕이 죽었으나 아들이 없었기 때문에 여러 형제들이 왕위를 다투었다.  

    그는 혜문왕후의 지지를 얻었으나 위염이 소왕을 세웠기 때문에 마음 속으로 불만을 품었다.  

    후에 다른 공자들과 귀척 및 많은 대신들과 모의하여 소왕 2년에 반란을 일으켰으나 위염에 의해 살해되었다.  

2) 여례(呂禮) : 작위가 오대부(五大夫)였던 전국 때 진나라의 장군이다. 진소왕 13년 기원전 294년 위나라로  

    망명했다가 19년 진나라에 귀국했다. 후에 다시 진소왕이 죽이려고 하자 또다시 제나라로 달아나  

    제나라의 상국이 되어 맹상군을 모함했다. 여례 때문에 제나라에서 쫓겨난 맹상군이 위염에게 제나라를  

    정벌하라고 요청하자 여례는 제나라에서 도망쳤다.  

3) 양(穰) : 지금의 하남성 등현(鄧縣)으로 원래 초나라 땅이었으나 한나라에 속했다가 다시 진나라 령이 되었다.  

    기원전 301년, 한양왕(韓襄王) 11년, 진소왕(秦昭王) 6년 진나라가 한나라를 공격하여 빼앗았다.  

4) 북택(北宅) : 지금의 하남성 정주 북쪽의 고을로 택양(宅陽)이라고도 한다.

5) 삼량(三梁) : 여러 가지 설이 있다.  

    ① 사기색은 : 남량(南梁)으로 하남(河南), 하양夏陽), 대량(大梁)을 삼량이라고 했다.  

    ②戰國)策釋地 : 조나라 땅으로 지금의 하북성 영년현(永年縣) 동남인 광평부(廣平府) 동남에 있는  

       곡량(曲梁)을 말한다. 三은 曲의 와전이다.  

    ③水經·浣水注 : 지금의 하북성 唐縣 동북에 三梁亭이라고 있는데 바로 이곳이다.  

6) 인(仞) : 고대 중국에서의 길이 단위. 일인은 약 7-8자에 해당 함.  

    참고로 춘추전국시대 때 한 자의 길이는 22-23cm 였음.  

    성벽의 높이가 7인이라 함은 즉 15미터 이상이라는 의미로 대량성이 견고하다는 의미다.
 

 

 

※  原 文 .    【 中國哲學書電子化計劃 .   筆寫本 】

 

                                

 

    原 文   飜 譯 者        德庤 / 李   斗 振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