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 春申君列傳

第十八. 春申君列傳(춘신군열전)

덕치/이두진 2021. 7. 30. 19:50

 

                  史記 列傳

 

     第十八.   春申君列傳(춘신군열전)  

 

 

 春申君者, 楚人也, 名歇, 姓黃氏.  游學博聞, 事楚頃襄王.  頃襄王以歇爲辯, 使於秦.   

 秦昭王使白起攻韓· 魏, 敗之於華陽, 禽魏將芒卯, 韓· 魏服而事秦.  

 (춘신군자, 초인야, 명헐, 성황씨.  유학박문, 사초경양왕.  경양왕이헐위변, 사어진.   

 진소왕사백기공한· 위, 패지어화양, 금위장망묘, 한· 위복이사진.) 

 

 ['춘신군'은 초나라 사람으로 이름은 '헐'이고 성은 황씨다.   

 여러 나라를 두루 돌아다니며 배워 견문이 넓고 박학다식했으며, 초나라의 '경양왕'을 모셨다. 
 '경왕양'은 변설과 문장에 능한 '춘신군'을 진나라에 사신으로 보냈다.  
 

 그때 진'소왕'의 명을 받은 '백기'가 한나라와 위나라의 연합군을 "화양"에서 격파하고,

 위나라 장수 '망묘'를 사로잡자, 한나라와 위나라는 항복하고 진나라를 받들기로 하였다.]   

 

 秦昭王方令白起與韓· 魏共伐楚, 未行, 而楚使黃歇適至於秦, 聞秦之計.  

 當是之時, 秦已前使白起攻楚, 取巫· 黔中之郡, 拔鄢· 郢, 東至竟陵, 楚頃襄王東徙治於陳縣.
 
(진소왕방령백기여한· 위공벌초, 미행, 이초사황헐적지어진, 문진지계.  
 

 당시지시, 진이전사백기공초, 취무· 검중지군, 발언· 영, 동지경릉, 초경양왕동사치어진현.)

   
 [진'소왕'은 다시 '백기'에게 명하여 한나라와 위나라 군사들과 공동으로 초나라를 정벌하려고 하였으나  
 아직 행동으로 옮기지 못하고 있을때 '황헐'이 초나라에서 사신의 임무를 띠고 진나라에 당도하여 
 

 초나라를 정벌하려는 진나라의 계책을 들었다. 이때 진나라는 '백기'를 출병시켜 초나라를 공격하여  

 "무"와 "검중"의 땅을 점령한 다음 "언"과 "영"을 함락시키고 동쪽으로 진격하여 "경릉"에 이르자, 
 초'경양왕'은 도읍을 동쪽의 "진현"으로 옮겨 다스렸다.]
 

  

 黃歇見楚懷王之爲秦所誘而入朝, 遂見欺, 留死於秦.  頃襄王, 其子也, 秦輕之, 恐壹舉兵而滅楚. 

 歇乃上書說秦昭王曰:「 天下莫彊於秦· 楚.  今聞大王欲伐楚, 此猶兩虎相與鬥.   

 兩虎相與鬥而駑犬受其獘, 不如善楚.  臣請言其說:臣聞物至則反, 冬夏是也;

 致至則危, 累棋是也.  今大國之地, 遍天下有其二垂, 此從生民已來, 萬乘之地未嘗有也.  

 (황헐견초회왕지위진소유이입조, 수견기, 류사어진.  경양왕, 기자야, 진경지, 공일거병이멸초.

 헐내상서설진소왕왈 :  천하막강어진· 초.  금문대왕욕벌초, 차유양호상여투.   

 양호상여투이노견수기폐, 불여선초.  신청언기설 :  신문물지즉반, 동하시야 ;

 치지즉위, 누기시야.  금대국지지, 편천하유기이수, 차종생민이래, 만승지지미상유야

   

 [그때 '황헐'은 진'소왕'의 속임수에 걸려 진나라에 들어갔다가 억류된 초'회왕'이 환국하지 못하고  

 그곳에서 죽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초나라는 '회왕'의 태자를 왕으로 세웠는데 그가 '경양왕'이다.   

 진나라는 초나라를 가볍게 보고 진나라를 배신했다는 이유를 들어 초나라를 일거에 멸하려고 하였다.

 이에 '황헐'은 진나라로부터 초나라를 구하기 위해 진'소왕'에게 글을 올렸다. 
 " 천하에는 진나라와 초나라보다 강한 나라는 없습니다.  지금 대왕께서 초나라를 정벌하려고 하신다는 
 

 소식을 들었는데, 이는 마치 두 호랑이가 서로 싸우는 일과 같습니다.   

 두 호랑이가 서로 싸우는 기회를 이용하여 힘이 약한 개가 이익을 보게 될 것이니,
 이것은 초나라와 친선을 유지하는 것만 못합니다. 
 신은 청컨대 그 이유를 설명해보도록 하겠습니다 :

 신이 듣기에 사물의 이치가 극에 달하면 처음으로 다시 돌아가며, 겨울과 여름이 번갈아 가며 찾아드는 이유도

 그와 같은 이치 때문이며 ; 이처럼 사물의 이치가 극에 달하면 위험에 빠지게 되고, 

 바둑알을 겹쳐 높이 쌓게 되면 무너지게 됩니다.  지금 진나라의 영토는 천하에 두루 퍼져 서쪽과 북쪽의 

 두 변방 지역까지 널리 차지하고 있는데, 이는 사람이 태어난 이래로 진나라처럼 일만 대의 병거를 

 동원할 수 있을 만큼 넓은 땅을 차지했던 나라는 일찍이 없었습니다. 

 

 先帝文王· 莊王之身, 三世不妄接地於齊, 以絕從親之要. 今王使盛橋守事於韓, 盛橋以其地入秦,

 是王不用甲, 不信威, 而得百里之地.  王可謂能矣. 王又舉甲而攻魏, 杜大梁之門, 舉河內,

 拔燕·  酸棗·  虛·  桃, 入邢, 魏之兵雲翔而不敢捄.  王之功亦多矣.   

 (선제문왕· 장왕지신, 삼세불망접지어제, 이절종친지요. 금왕사성교수사어한, 성교이기지입진,

 시왕불용갑, 불신위, 이득백리지지.  왕가위능의.  왕우거갑이공위, 두대량지문, 거하내,

 발연· 산조· 허· 도, 입병, 위지병운상이불감구. 왕지공역다의. 

 

 [선왕이신 '효문왕',  '장양왕', 그리고 대왕에 이르는 3대에 걸쳐 진나라는 제나라와 국경을 접함으로써  

 제후들이 합종의 친선을 맺으려고 시도하여 진, 제나라와의 연횡을 끊으려 하지 않은 적이 없었습니다.  

 지금 대왕께서 한나라에 살게 한 '성교'가 한나라로 하여금 그 땅을 떼어 진나라에 바치게 했습니다.       

 이것은 한 명의 군사도 동원하지 않고, 또한 신의나 위엄도 필요 없이 한나라의 100리에 달하는 땅을 

 얻었습니다. 대왕께서는 유능하신 군주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대왕께서는 또 군사들을 일으켜 

 위나라를 공격하여 위나라 도성 "대량"의 성문을 막고, "하내"를 공격하여 점령하고 

 "연", "산조", "허", "도"를 차례로 함락시키고,"형"땅으로 들어가자, 

 위나라 군사들은 마치 흰구름이 바람에 날리듯이 흩어지며 감히 구원할 생각도 하지 못하였습니다. 

 이것은 대왕의 공적이 실로 크다고 하겠습니다. 

 

 王休甲息眾, 二年而後復之;又并蒲· 衍· 首· 垣, 以臨仁· 平丘, 黃· 濟陽嬰城而魏氏服;

 王又割濮磿之北, 注齊· 秦之要, 絕楚· 趙之脊, 天下五合六聚而不敢救.  王之威亦單矣. 

 王若能持功守威, 絀攻取之心而肥仁義之地, 使無後患, 三王不足四, 五伯不足六也.
 
(왕휴갑식중, 이년이후복지 ; 우병포· 연· 수· 원, 이임인· 평구, 황· 제양영성이위씨복;

 왕우할복역지북,주제·진지요 : 절초조지척,천하오합육취이불감구.왕지위역단의.

 왕약능지공수위, 출공취지심이비인의지지, 사무후환, 삼왕불족사, 오백불족육야.

 

 [또한 대왕께서는 용병을 중지하고 백성들을 쉬게 한 지 2년이 지나자 ; 

 다시 군사를 일으켜 "포읍", "연읍", "수읍", "원읍"을 병합하고, 이어서 "인읍"과 "평구"를 다스리고

 황읍"과 "제양"을 에워싸자 위나라는 진나라에 항복을 했습니다 ;

 대왕께서는 또 "복수", "역수"의 북쪽을 빼앗아 진나라와 제나라가 왕래하는 지역을 요충지로 삼자, 

 초나라와 조나라는 척추같은 중요한 통로가 끊겼으므로, 천하의 여섯 나라 제후들은 다섯 번이나

 ​한 곳에 집결하였으나 감히 어려움에 빠진 제후국을 구하지는 못했습니다.  

 이에 대왕의 위엄은 실로 극에 이르렀습니다.  대왕께서 만약 이미 이룩한 공적과 위엄을 유지하시며,

 이웃나라를 공격하려는 마음을 버리시고, 仁義의 道를 널리 행하시어 장래의 환난을 미연에 방지하신다면,
 삼왕(하 '우왕', 은 '탕왕', 주 '문왕')과 견줄 수 있는 사왕 중의 한 사람이 되실 수 있을 것이며, 
 

 오패(제환공'ㆍ진문왕'ㆍ초장왕'ㆍ송양공'ㆍ진목왕')와 견줄 수 있는 육패로 이름을 올릴 수 있을 것입니다. 

 王若負人徒之眾, 仗兵革之彊, 乘毀魏之威, 而欲以力臣天下之主, 臣恐其有後患也. 

 詩曰 「 靡不有初, 鮮克有終 」.  易曰「 狐涉水, 濡其尾 」.  此言始之易, 終之難也.   

 何以知其然也 ?  昔智氏見伐趙之利而不知榆次之禍, 吳見伐齊之便而不知干隧之敗.
 
(왕약부인도지중, 장병혁지강, 승훼위지위, 이욕이력신천하지주, 신공기유후환야. 

 시왈 : 「 미불유초, 선극유종」.  역왈 : 「 호섭수, 유기미」.  차언시지역, 종지난야.   

 하이지기연야 ?  석지씨견벌조지리이불지유차지화, 오견벌제지변이불지간수지패.

 
 [그러나 만약 대왕께서 백성이 많음을 믿고, 강한 군사력에 의지하여 위나라를 멸망시킨 위세를 더하여,
 힘으로써 천하의 주인이 되려고 하신다면, 신은 후환이 생기지 않을까 두렵습니다. 

 《시경》에 이르기를 : " 시작하는 것을 어렵지 않으나, 유종의 미를 거두기는 어렵다. "라고 했으며,
 《역경》에 이르기를 : " 여우가 물을 건너가려면, 꼬리를 적시게 마련이다. "라고 했습니다.  
 

 이 말은 시작은 쉽지만 끝맺음은 어렵다는 것입니다. 그러한 일들을 어떻게 알 수 있겠습니까 ?   

 옛날 '지백'은 조나라를 정벌하는 이로움만을 보고, 후에 "유차"에서 화를 당할 운명을 알지  못했으며,

 또한 오나라는 제나라를 정벌하는 이로움만 알았지, 

 나중에 "간수"에서 싸워 패배할 줄은 짐작도 하지 못했습니다. 

 

 此二國者, 非無大功也, 沒利於前而易患於後也. 吳之信越也, 從而伐齊, 既勝齊人於艾陵,

 還爲越王禽三渚之浦.  智氏之信韓· 魏也, 從而伐趙, 攻晉陽城, 勝有日矣, 韓· 魏叛之,

 殺智伯瑤於鑿臺之下. 今王妒楚之不毀也, 而忘毀楚之彊韓· 魏也, 臣爲王慮而不取也.

 (차이국자, 비무대공야, 몰리어전이이환어후야. 오지신월야, 종이벌제, 기승제인어애릉,

 환위월왕금삼저지포. 지씨지신한· 위야, 종이벌조, 공진양성, 승유일의, 한· 위반지,

 살지백요어착대지하. 금왕투초지불훼야, 이망훼초지강한· 위야, 신위왕려이불취야. 

 

 [지씨와 오나라는 큰 공적을 세우지 못했다고 말할 수 없지만 눈앞의 이익에 급급한 나머지 나중에 닥칠 

 재난을 경시하였습니다. 오왕는 월나라를 믿고 나라 안의 모든 군사를 이끌고 제나라를 공격하여

 ​ "애릉"에서 제나라 대군을 대파하고 돌아오다 "삼저"의 포구에서 월왕에게 사로잡혔습니다.

 ​'지백요'는 '한강자'와 '위환자'를 믿고 그들의 군사들과 함께 '조양자'를 공격하여 "진양성"의 함락이 

 ​눈앞에 다가왔을때,  '한강자'와 '위환자'가 반기를 들어 '지백요'는 "진양성"의 착대 밑에서 죽었습니다.    

 지금 대왕께서는 초나라가 무너지지 않는 것만을 강샘할 뿐이지, 초나라가 무너지면 한나라와 위나라가

 강해진다는 사실은 잊고 계십니다. 신이 대왕을 위해 걱정하는 것은 그것을 취해서는 안된다는 것입니다.  

  

 詩曰 「 大武遠宅而不涉 」.  從此觀之, 楚國, 援也;鄰國, 敵也.  

 詩云 「 趯趯毚免, 遇犬獲之.  他人有心, 余忖度之 」. 
 
(시왈 「 대무원택이불섭 」.  종차관지, 초국, 원야 ; 린국, 적야.  
 

 시운 「 적적참토, 우견획지.  타인유심, 여촌도지 」.

 
 [《시경》에 이르기를 : " 군사를 잘 다스리는 자는 멀리까지 원정가서 정벌하지 않는다. "라고 했습니다.  
 이것으로 보아 초나라는 멀리 떨어져 있는 우호국이고 ; 국경을 접하고 있는 나라는 적국에 해당합니다. 
 《시경》에 이르기를 : " 이리저리 날뛰는 교활한 토끼도, 사냥개를 만나면 잡히고 만다.  
 

 남이 무언가를 마음에 두고 있으면 내 마음으로 그것을 헤아릴 수 있다 !"라고 했습니다. 

 

 今王中道而信韓· 魏之善王也, 此正吳之信越也.  臣聞之, 敵不可假, 時不可失.   

 臣恐韓· 魏卑辭除患而實欲欺大國也.  何則 ?  王無重世之德於韓· 魏, 而有累世之怨焉.   
 
(금왕중도이신한· 위지선왕야, 차정오지신월야.  신문지, 적불가가, 시불가실. 
 

 신공한· 위비사제환이실욕기대국야.  하즉?  왕무중세지덕어한· 위, 이유루세지원언. 

  

 [지금 대왕께서 한나라와 위나라를 믿는 이유는 그 두 나라가 대왕을 높이 받들고 있다고 생각하시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마치 옛날 오나라가 월나라를 믿게 된 것과 같은 경우입니다.   

 신이 듣기로 적은 용서하면 안 되고 시기는 놓치면 안되는 것이라고 들었습니다. 
 한나라와 위나라가 대왕께 공손한 말로 진나라의 근심을 덜어 줄 것처럼 하지만 
 

 실제로는 진나라를 속이려는 것이 아닌가 신은 걱정하고 있습니다. 왜 그런줄 아십니까 ? 

 진나라는 한나라와 위나라가 몇 대에 이르는 동안 아무런 덕을 베푼적이 없었고, 

 오히려 원한만 쌓았기 때문입니다. 
 

 夫韓· 魏父子兄弟接踵而死於秦者將十世矣.  本國殘, 社稷壞, 宗廟毀. 

 刳腹絕腸, 折頸摺頤, 首身分離, 暴骸骨於草澤, 頭顱僵仆, 相望於境,  

 父子老弱係脰束手爲群虜者相及於路.  鬼神孤傷, 無所血食. 
 
(부한· 위부자형제접종이사어진자장십세의.  본국잔, 사직괴, 종묘훼.  

 고복절장, 절경접이, 수신분리, 박해골어초택, 두로강부, 상망어경,  

 부자노약계두속수위군로자상급어로.  귀신고상, 무소혈식. 

  
 [무릇 한, 위나라의 부모 형제들은 진나라와의 계속되는 싸움으로 죽어나간지가 10대째 이르렀습니다. 
 그들의 나라는 황폐해지고 사직은 무너졌으며 종묘는 훼손되었습니다.

 그들은 배가 갈리고 창자는 끊어졌으며, 목이 잘리고 턱은 돌아갔으며, 머리와 몸은 분리되고,  

 앙상하게 남은 해골은 초원과 연못 주변에 나뒹굴며, 그 머리는 땅에 처박힌 채 서로 국경을 마주 보고 있으며, 

 또한 부모, 자식, 늙은이, 어린아이들은 목이 매이고 손이 묶인 채 무리를 지어 끌려가는 포로들의 행렬이 

 도로 위에 끊일 날이 없습니다.  또한 죽은 자의 영혼은 외로운 귀신이 되어, 

 제사를 지내 줄 남은 혈육마저 없습니다. 

   

 人民不聊生, 族類離散, 流亡爲僕妾者, 盈滿海內矣.  故韓· 魏之不亡, 秦社稷之憂也,

 今王資之與攻楚, 不亦過乎. 且王攻楚將惡出兵 ?  王將借路於仇讎之韓· 魏乎 ?   

 兵出之日而王憂其不返也, 是王以兵資於仇讎之韓· 魏也.  

 (인민불료생, 족류리산, 류망위복첩자, 영만해내의. 고한· 위지불망, 진사직지우야,

 금왕자지여공초, 불역과호. 차왕공초장악출병 ?  왕장차로어구수지한· 위호 ?   

 병출지일이왕우기불반야, 시왕이병자어구수지한위야.

 [백성들은 편안한 생활을 할 수가 없고, 일가 친척들은 모두 사방으로 흩어져 이리저리 떠돌다가 

 ​노예나 비첩이 된 자가 천하에 가득차게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한나라와 위나라가 망하지 않는 한

 장차 그들은 진나라 사직의 우환거리가 될 것인데, 지금 대왕께서는 그 두 나라의 힘을 바탕으로 해서

 초나라를 공격하려고 하시고 계시니, 어찌 그것이 잘못되지 않았다고 말 할 수 있겠습니까 ? 

 ​또 대왕께서 장차 초나라를 공격하시려고 하는데 어떤 길을 취하여 군사들을 진격시키려고 하십니까 ? 
 대왕께서는 원수의 나라들인 한나라와 위나라에게 길을 빌려 달라고 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 
 그러면 대왕께서는 군사들이 출병할 때부터 그 군사들이 되돌아오지 못하면 어떡하나 걱정하게 될 것이며,
 그것은 바로 대왕의 군사들로 하여금 결과적으로 원수나라들인 한나라와 위나라를 돕는 일입니다. 

   

 王若不借路於仇讎之韓· 魏, 必攻隨水右壤.  隨水右壤, 此皆廣川大水, 山林谿谷, 不食之地也,  

 王雖有之, 不爲得地.  是王有毀楚之名而無得地之實也.  且王攻楚之日, 四國必悉起兵以應王. 

 秦· 楚之兵構而不離,  魏氏將出而攻留· 方與· 銍· 湖陵· 碭· 蕭· 相, 故宋必盡. 

 齊人南面攻楚, 泗上必舉.

 (왕약불차로어구수지한· 위, 필공수수우양.  수수우양, 차개광천대수, 산림계곡, 불식지지야,

 왕수유지, 불위득지.  시왕유훼초지명이무득지지실야. 차왕공초지일, 사국필실기병이응왕. 

 진· 초지병구이불리, 위씨장출이공류· 방여· 질· 호릉· 탕· 소· 상, 고송필진. 

 제인남면공초, 사상필거. 


 [대왕께서 만약에 원수의 나라들인 한나라와 위나라로부터 길을 빌리지 않는다면, 

  반드시 "수수"의 오른쪽을 돌아서 초나라를 공격해야 합니다.
 "수수"의 오른쪽은 모두 넓고 큰 하천이거나 산림과 계곡으로 이루어진 험지라 농사를 지을 수 없는 곳이며 
 대왕께서 비록 그곳을 취하신다 할지라도 새로운 영토를 얻었다고 할 수 없는 쓸모 없는 땅이 될 것이며, 
 결국은 대왕께서 초나라를 공격했다는 명분만 얻을 뿐 실질적인 이익은 하나라도 취할 수 없으실 것입니다. 

 ​또한 대왕께서 군사를 보내 초나라를 공격하는 날에는 한, 위, 조, 제나라는 반드시 그 군사를 모두 일으켜 

 대왕에게 대항할 것입니다. 진나라와 초나라의 군대가 오랫동안 맞붙어 싸우게 되면 위나라는 장차 자기나라에서

 나와 "유", "방여", "질", "호릉", "탕", "소", "상"을 공격하여 옛날 송나라 땅을 모두 차지하게 될 것입니다.  

 또한 제나라는 남쪽으로 진격하여 초나라를 공격하면 "사수" 일대의 땅은 모두 제나라 차지가 될 것입니다. 

 

 此皆平原四達, 膏腴之地, 而使獨攻.  王破楚以肥韓· 魏於中國而勁齊.  韓· 魏之彊, 足以校於秦. 

 齊南以泗水爲境, 東負海, 北倚河, 而無後患, 天下之國莫彊於齊· 魏, 齊· 魏得地葆利而詳事下吏, 

 一年之後, 爲帝未能, 其於禁王之爲帝有餘矣.
 (차개평원사달, 고유지지, 이사독공.  왕파초이비한· 위어중국이경제.  한· 위지강, 족이교어진.

 제남이사수위경, 동부해, 북의하, 이무후환, 천하지국막강어제· 위, 제· 위득지보리이상사하리,  

 일년지후, 위제미능, 기어금왕지위제유여의. 

  
 [이곳은 모두 비옥한 평원이며 사방이 확 트인 기름진 땅들으로, 결국 위나라와 제나라만이 싸워서

 이익을 독점할 수 있도록 하는 것입니다.  대왕께서 초나라를 무찌르는 일은 중원의 한나라와 위나라를

 살찌게 만들고 제나라를 강성하게 하는 일입니다. 
 이로써 강성하게 된 한나라와 위나라는 아마도 진나라와 맞서 대항하는데 부족함이 없을 것입니다.

 또 제나라는 남쪽으로 "사수"를 경계로 삼고, 동쪽으로는 동해를 등지고, 북쪽으로는 "황하"에 의지하여  

 나중에 걱정거리가 없어지며, 천하에는 제나라나 위나라보다 강성한 나라는 없게 될 것이며,  

 그 두 나라가 새로운 땅을 얻어 이득을 누리면서 거짓으로 진나라의 하급관리가 되어 섬긴다면, 1년 후에는 비록

 그들이 황제로 칭하지는 못한다 할지라도, 대왕으로 하여금 칭제를 억제할 힘은 충분히 갖추게 될 것입니다. 

  

 夫以王壤土之博, 人徒之眾, 兵革之彊, 壹舉事而樹怨於楚, 遲令韓· 魏歸帝重於齊, 是王失計也. 

 臣爲王慮, 莫若善楚.  秦· 楚合而爲一以臨韓, 韓必斂手. 

 王施以東山之險, 帶以曲河之利, 韓必爲關內之侯.  若是而王以十萬戍鄭, 梁氏寒心, 許· 鄢陵嬰城,

 而上蔡· 召陵不往來也, 如此而魏亦關內侯矣.

 (부이왕양토지박, 인도지중, 병혁지강, 일거사이수원어초, 지령한위귀제중어제, 시왕실계야. 

 신위왕려, 막약선초.  진초합이위일이임한, 한필렴수. 

 왕시이동산지험, 대이곡하지리, 한필위관내지후. 약시이왕이십만수정, 량씨한심, 허· 언릉영성,

 이상채· 소릉불왕래야, 여차이위역관내후의.

 
 [무릇 광대한 국토, 수많은 백성 및 막강한 군사력을 갖추신 대왕께서 일거에 군사를 일으켜 초나라를 

 공격함으로써 원수관계를 맺음과 동시에, 한나라와 위나라로 하여금 제나라를 황제의 나라로 받들게 하시는 일은

 대왕의 실책이 아니라고 할 수 없습니다. 신이 대왕을 위해 곰곰이 생각해 본 결과,  

 초나라와 친선관계를 유지하는 계책보다 더 좋은 방법은 없다고 봅니다. 진나라와 초나라가 연합하여

 한나라를 압박한다면, 한나라는 반드시 몸을 사리며 진나라에 대해 어쩔 수 없이 복종하게 될 것입니다. 

 대왕께서는 동산의 험지에 요새를 세우고, 굽이쳐 흐르는 황하 지역의 이점을 잘 이용한다면  

 한나라는 반드시 대왕의 통제권 내에 있는 제후국으로 남게 될 것입니다.
 만약 대왕께서 10만의 군대로 한나라의 "신정"을 지킨다면 위나라는 두려움에 떨며,
 

 "허"와 "언릉"의 성문을 닫아걸고 감히 앞으로 나가지 못하게 됩니다. 
 그리되면 "상채" 와 "소릉"은 그 통로가 단절되어 왕래가 불가하게 됨으로써 
 

 위나라도 결국은 대왕의 통제권 내에 있는 제후국으로 남게 됩니다.  

  

 王壹善楚, 而關內兩萬乘之主注地於齊, 齊右壤可拱手而取也.  王之地一經兩海, 要約天下,

 是燕· 趙無齊· 楚, 齊· 楚無燕· 趙也. 然後危動燕· 趙, 直搖齊· 楚, 此四國者不待痛而服矣. 」
 (왕일선초, 이관내양만승지주주지어제, 제우양가공수이취야. 왕지지일경양해, 요약천하,

 시연· 조무제· 초, 제· 초무연· 조야. 연후위동연조, 직요제초, 차사국자불대통이복의.」)

   
 [대왕께서 일단 초나라와 친선관계를 맺으신다면, 만승의 한나라와 위나라는 대왕의 통제권 내에 있는 

 제후국으로 남게 되고 제나라와 국경을 맞닿게 되어 제나라 오른쪽의 "제수" 일대의 광활한 땅을 

 손을 한 번 쓰지 않고도 차지할 수 있게 됩니다. 이렇게 되면 대왕의 영토는 서해에서 동해에 이르게 되어 

 천하의 제후들을 통제할 수 있으며, 이에 연나라와 조나라는 제나라와 초나라의 도움을 얻지 못하게 되고, 

 제나라와 초나라도 연나라와 조나라의 도움을 받을 수 없게 됩니다. 이어서 연과 조 두 나라를 궁지에 몰아 

 두려움에 떨게 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제와 초 두 나라를 흔든다면, 네 나라는 결국은 힘들게 공격을 

 가하지 않아도 자연히 진나라의 지배에 복종하게 됩니다. "라고 하였다.] 

 

 昭王曰:「 善. 」  於是乃止白起而謝韓· 魏.  發使賂楚, 約爲與國. 

 黃歇受約歸楚, 楚使歇與太子完入質於秦, 秦留之數年.   楚頃襄王病, 太子不得歸.  

 而楚太子與秦相應侯善, 於是黃歇乃說應侯曰: 「 相國誠善楚太子乎 ? 」 應侯曰: 「 然. 」  
 
(소왕왈 : 「 선. 」 어시내지백기이사한위.  발사뢰초, 약위여국.

 황헐수약귀초, 초사헐여태자완입질어진, 진류지수년.  초경양왕병, 태자불득귀.   

 이초태자여진상응후선, 어시황헐내설응후왈 :  「 상국성선초태자호 ? 」 응후왈 : 「 연. 」)

 
 [진'소왕'은 '황헐'이 올린 상서를 다 읽고 말하기를 : " 과연 옳은 말이로다 ! "라고 하면서, 
 즉시 '백기'의 출전을 중지시키고 한나라와 위나라의 출병을 취소하였다.    

 이어서 초나라에는 사자를 보내 예물을 전달하게 하고 친선관계를 맺었다.

 '황헐'이 진'소왕'의 약속을 받고 초나라에 귀국하자, 초나라는 다시 '황헐'을 사자로 삼아 태자 '완'과 함께

 진나라에 볼모로 들어가도록 하였으며, 진나라는 두 사람을 몇 년간 붙들어 두고 귀국시키지 않았다. 

 초'경양왕'이 병이 들어 위독하게 되었으나 태자는 귀국할 수 없었다. 
 태자는 진나라의 재상 응후 '범수'와 사이가 좋았으며, 이에 '황헐'이 '응후'를 찾아가 말하기를 : 
 

 " 상국께서는 초나라 태자와 정말 친하게 지내고 싶습니까 ? "라고 하자.  

 '응후'가 대답하기를 : " 그렇소. "라고 하였다. ] 

 

 歇曰: 「 今楚王恐不起疾, 秦不如歸其太子.  太子得立, 其事秦必重而德相國無窮,

 是親與國而得儲萬乘也.  若不歸, 則咸陽一布衣耳; 楚更立太子, 必不事秦.

 夫失與國而絕萬乘之和, 非計也.  願相國孰慮之. 」  應侯以聞秦王.  
 (헐왈 : 「 금초왕공불기질, 진불여귀기태자.  태자득입, 기사진필중이덕상국무궁, 
 

 시친여국이득저만승야.  약불귀, 즉함양일포의이 ; 초경입태자, 필불사진. 

 부실여국이절만승지화, 비계야.  원상국숙려지. 」 응후이문진왕.)

   
 ['황헐'이 말하기를 : " 지금 초왕이 병이 들어 일어나지 못할까 걱정이 되어, 
 

 진나라는 태자를 돌려보내는 편이 좋겠습니다.  태자가 초나라로 귀국하여 왕위에 오른다면

 그는 반드시 진나라를 정중히 섬기며, 또한 상국의 은혜에 한없이 고마워할 것입니다. 
 이것은 진나라와 초나라 사이의 동맹관계는 더욱 깊어지고, 또한 만승의 나라에 은덕을 베푸는 일입니다.
 

 그러나 만약 태자가 돌아가지 못한다면, 그는 "함양"에 사는 일개 필부에 불과한 사람으로 남게 될 것이며 ;

 초나라에서 태자를 대신하여 다른 사람으로 왕을 세운다면, 반드시 진나라를 섬기지 않을 것입니다.

 대체로 동맹국을 잃고 만승의 나라와 친선관계를 끊는 일은 좋은 계책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원컨대 상국께서는 심사숙고해 주시기 바랍니다. "라고 하였다. '응후'는 '황헐'의 말을 진'소왕'에게 고하였다.] 

 

 秦王曰: 「 令楚太子之傅先往問楚王之疾, 返而後圖之. 」

 黃歇爲楚太子計曰: 「 秦之留太子也, 欲以求利也.  今太子力未能有以利秦也, 歇憂之甚. 

 而陽文君子二人在中, 王若卒大命, 太子不在, 陽文君子必立爲後, 太子不得奉宗廟矣.   

 不如亡秦, 與使者俱出 ; 臣請止, 以死當之. 」
 (진왕왈 : 「 령초태자지부선왕문초왕지질, 반이후도지. 」

 황헐위초태자계왈 :  「 진지류태자야, 욕이구리야.  금태자력미능유이리진야, 헐우지심. 

 이양문군자이인재중, 왕약졸대명, 태자불재, 양문군자필입위후, 태자불득봉종묘의.   

 불여망진, 여사자구출 ; 신청지, 이사당지.」) 


 [진'소왕'이 듣고 말하기를 : " 그렇다면 태자의 스승을 먼저 초나라에 보내 초왕의 병세가 어떠한지 

 먼저 살펴보고, 돌아온 뒤에 대책을 강구해 봅시다. "라고 하였다.

 진'소왕'의 말을 전해들은 '황헐'이 태자 '완'에게 그의 계책을 말하기를 :  

 " 진나라가 태자를 억류시키는 이유는 초나라로부터 이익을 얻기 위해서 입니다.    
 지금 태자는 진나라에 이익을 줄 만한 힘을 갖고 있지 못합니다. 신은 그것을 심히 걱정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초나라에는 '양문군'의 두 아들이 있어, 만일 부왕께서 돌아가시기라도 한다면,  

 태자님께서 곁에 있지 않다는 핑계를 대고, '양문군'의 아들이 왕위를 이을 사람으로 정해 질 것이며, 

 그리되면 태자께서는 결국 초나라의 종묘사직에 제사를 받들 수 없게 될 것입니다. 
 기회를 봐서 도망쳐 지금 초나라에서 와 있는 사자들과 함께 진나라를 몰래 빠져나가시면 ;
 

 저는 목숨을 걸고 남아서 뒷일을 마무리하겠습니다."라고 하였다.] 

  

 楚太子因變衣服爲楚使者御以出關, 而黃歇守舍, 常爲謝病.   

 度太子已遠, 秦不能追, 歇乃自言秦昭王曰: 「 楚太子已歸, 出遠矣.  歇當死, 願賜死. 」 
 
(초태자인변의복위초사자어이출관, 이황헐수사, 상위사병.  
 

 도태자이원, 진불능추, 헐내자언진소왕왈 : 「 초태자이귀, 출원의.  헐당사, 원사사. 」)

 
 [초나라 태자는 옷을 갈아 입고 초나라 사자가 타는 수레의 마부가 되어 진나라의 "함곡관"을 빠져나갔다. 
 '황헐'은 태자가 묵고 있던 관사를 지키며 그가 병이 났다는 핑계를 대고 찾아오는 빈객들을 피했다. 
 이윽고 태자의 일행이 멀리 벗어나 진나라 군사들이 그 뒤를 추격할 수 없다고 생각한 '황헐'은 스스로  
 

 진'소왕'을 알현하고 말하기를 : " 초 태자는 이미 귀국길에 올라 "함곡관"을 빠져나가 멀리 가 있습니다.    

 이 '황헐'은 마땅히 죽을죄를 지었으니 저에게 죽음을 내려주시기 바랍니다."라고 하였다.] 

 

 昭王大怒, 欲聽其自殺也.  應侯曰: 「 歇爲人臣, 出身以徇其主, 太子立, 必用歇,  

 故不如無罪而歸之, 以親楚. 」 秦因遣黃歇. 歇至楚三月, 楚頃襄王卒, 太子完立, 是爲考烈王.   

 考烈王元年, 以黃歇爲相, 封爲春申君, 賜淮北地十二縣.    

 (소왕대노, 욕청기자살야.  응후왈 :  「 헐위인신, 출신이순기주, 태자입, 필용헐,

 고불여무죄이귀지, 이친초. 」   진인견황헐. 헐지초삼월, 초경양왕졸, 태자완입, 시위고열왕.   

 고열왕원년, 이황헐위상, 봉위춘신군, 사회북지십이현.) 

  [진'소왕'은 매우 화가 나서 '황헐'이 자살하겠다는 청을 허락하려고 하였다.  

  그러나 '응후'가 말하기를 : " '황헐'은 신하된 자로써 주인을 위해 목숨을 바치려 하였습니다.       

 태자는 이미 귀국했으니 초왕의 자리에 오를 것이며,  '황헐'은 반드시 초왕에게 중용될 것이니,  

 그러므로 '황헐'의 죄를 묻지 말고 초나라로 돌려 보내 초나라와 화친을 맺는 것이 가장 좋은 방법일 것입니다."

 라고 하자.  진'소왕'은 '황헐'의 죄를 묻지 않고 초나라에 귀국시켰다.

 '황헐'이 초나라에 귀국한 지 3개월 만에 초'경양왕'이 죽고 태자 '완'이 그 뒤를 이었다. 이가 초'고열왕'이다. 

 고열왕 원년(BC 262) '황헐'은 초나라의 상국이 되고 '춘신군'에 봉해져 "회하" 북쪽 땅 12개 현을 하사 받았다.] 

   

 後十五歲, 黃歇言之楚王曰:「 淮北地邊齊, 其事急, 請以爲郡便. 」   

 因并獻淮北十二縣, 請封於江東.  考烈王許之.  春申君因城故吳墟, 以自爲都邑.
 
(후십오세, 황헐언지초왕왈 : 「 회북지변제, 기사급, 청이위군변. 」  
 

 인병헌회북십이현, 청봉어강동.  고열왕허지.  춘신군인성고오허, 이자위도읍.) 


 [그로부터 15년이 지나자 '황헐'은 초왕에게 말하기를 : " "회수"의 북쪽 땅은 제나라와 국경이 접한 
변경의 

 땅인데, 제나라와의 관계가 급하게 되었으니, 청컨대 군으로 만들어 다스리는 것이 좋을 것입니다"라고 하며, 

 이어서 '황헐'은 회수 북쪽의 봉지 12개 현을 헌납하고, 그 대신 "강동"에 봉읍을 요청하였다. 
 '고열왕'이 허락했다.  '춘신군'은 폐허가 된 오나라에 다시 터를 닦고 성을 쌓아 자기 도읍으로 삼았다. ]
 

  

 春申君既相楚, 是時齊有孟嘗君, 趙有平原君, 魏有信陵君.     

 方爭下士, 招致賓客, 以相傾奪, 輔國持權.  春申君爲楚相四年, 秦破趙之長平軍四十餘萬.  
 
(춘신군기상초, 시시제유맹상군, 조유평원군, 위유신릉군.    
 

 방쟁하사, 초치빈객, 이상경탈, 보국지권.  춘신군위초상사년, 진파조지장평군사십여만.)

   
 ['춘신군'이 초나라의 재상으로 있을때 제나라에는 맹상군 '전문'이, 조나라에는 평원군 '조승이,  
 

 위나라에는 신릉군 '무기'가 있었다.  이들은 서로 다투어 선비들을 접대하고 빈객들을 초빙하는데 힘을 기울여

 서로 경쟁하여 그 힘으로 나라의 정치를 돕고 자기들의 권력을 유지하려고 하였다. 
 '춘신군'이 재상이 된지 4년째 되는 해에 진나라가 "장평"에서 40여 만명 되는 
조나라 군사들과 싸워 이겼다.] 

  

 五年, 圍邯鄲.  邯鄲告急於楚, 楚使春申君將兵往救之, 秦兵亦去, 春申君歸.   

 春申君相楚八年, 爲楚北伐滅魯, 以荀卿爲蘭陵令.  當是時, 楚復彊.
 
(오년, 위한단.  한단고급어초, 초사춘신군장병왕구지, 진병역거, 춘신군귀.  
 

 춘신군상초팔년, 위초북벌멸노, 이순경위란릉령.  당시시, 초부강.) 

 
 [5년째 되는 해,  진나라 군사들이 조나라의 도읍 "한단"을 포위했다. 
 

 "한단"에서 그 위급함을 초나라에 알려오자, 초나라는 춘신군에게 군사를 주어 조나라를 구하게 했다.   

 "한단"을 포위했던 진나라 군사들이 물러가자, '춘신군'을 군사들을 이끌고 초나라에 돌아왔다.   

 '춘신군'이 초나라 재상이 된지 8년에, 초나라는 북쪽으로 노나라를 공격하여 멸망시키고,  

 초나라는 '순경'을 난릉령에 임명했다.  이때부터 초나라는 다시 강성해지기 시작했다.] 

 

 趙平原君使人於春申君, 春申君舍之於上舍.  趙使欲夸楚, 爲玳瑁簪, 刀劍室以珠玉飾之,  

 請命春申君客.  春申君客三千餘人, 其上客皆躡珠履以見趙使, 趙使大慚.
 
(조평원군사인어춘신군, 춘신군사지어상사.  조사욕과초, 위대모잠, 도검실이주옥식지, 
 

 청명춘신군객.  춘신군객삼천여인, 기상객개섭주리이견조사, 조사대참.)

  
 [조나라의 '평원군'이 '춘신군'에게 사신은 보내자, '춘신군'은 사신을 상객들이 머무는 상사에 머물게 했다
 

 조나라 사신들은 초나라에 자랑하려고, 머리에는 바다 거북의 등딱지로 만든 비녀를 꽂고,   

 허리에는 주옥으로 장식한 칼집을 차고 '춘신군'의 빈객들에게 만나기를 청했다.  
 당시 '춘신군'에게는 3천 명의 빈객들을 있었는데,  그중에서 상등의 빈객들은 조나라 사신들을 만나기
 위해

 모두 주옥로 장식한 신발들을 신고 나왔다.  그러자 조나라 사신들은 그것을 보고 매우 부끄러워하였다.] 

 

 春申君相十四年, 秦莊襄王立, 以呂不韋爲相, 封爲文信侯.  取東周.

 春申君相二十二年, 諸侯患秦攻伐無已時, 乃相與合從, 西伐秦, 而楚王爲從長, 春申君用事.   

 至函谷關, 秦出兵攻, 諸侯兵皆敗走.  楚考烈王以咎春申君, 春申君以此益疏.
 
(춘신군상십사년, 진장양왕입, 이여불위위상, 봉위문신후.  취동주.  

 춘신군상이십이년, 제후환진공벌무이시, 내상여합종, 서벌진, 이초왕위종장, 춘신군용사.   

 지함곡관, 진출병공, 제후병개패주.  초고열왕이구춘신군, 춘신군이차익소.)

  
 ['춘신군'이 초나라 재상이 된지 14년, 진나라에서는 '장양왕'이 새로운 진왕의 자리에 올라

 '여불위'를 재상으로 삼고 '문신후'에 봉했다.  같은 해에 진나라가 동주를 멸하고 그 땅을 점령하였다.

 '춘신군'이 초나라 재상이 된지 22년, 진나라가 끊임없이 공격해 올 것을 걱정한 제후들이 서로 상의하여  

 합종을 행하여 서쪽으로 진격하여 진나라를 공격하기 위해 초왕을 합종장으로 추대하자,  

 '춘신군'이 합종에 관한 모든 일을 주관했다.  제후들의 연합군이 "함곡관"에 이르렀을때

 진나라 군사들이 "함곡관"에서 나와 공격을 하자, 제후들의 군사들은 싸움에서 지고 모두 달아났다.   

 초'고열왕'은 그 책임을 물어 '춘신군'을 책망하자, '춘신군'과 '고열왕'의 사이는 더욱 멀어지게 되었다.] 

   

 客有觀津人朱英, 謂春申君曰:「 人皆以楚爲彊而君用之弱, 其於英不然.   

 先君時善秦二十年而不攻楚, 何也 ?  秦踰黽隘之塞而攻楚, 不便; 假道於兩周,

 背韓· 魏而攻楚, 不可.  今則不然, 魏旦暮亡, 不能愛許· 鄢陵, 其許魏割以與秦.   

 秦兵去陳百六十里, 臣之所觀者, 見秦· 楚之日鬥也. 」

 (객유관진인주영, 위춘신군왈 :  「 인개이초위강이군용지약, 기어영불연.   

 선군시선진이십년이불공초, 하야 ?  진유면애지새이공초, 불편 ;  가도어양주,

 배한· 위이공초, 불가.  금즉불연, 위단모망, 불능애허· 언릉, 기허위할이여진.     

 진병거진백육십리, 신지소관자, 견진· 초지일투야.」)

 

  ['춘신군'의 빈객 중 "관진" 출신의 '주영'이라는 사람이 '춘신군'에게 말하기를 :

  " 사람들은 모두 초나라는 강하나 군께서 그 세를 약하게 만들었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만,
 이 사람은 그렇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선왕께서 살아 계실 때 우리는 20년 동안이나 친선관계를 유지하여
 

 진나라의 침공을 받지 않았는데 그 이유가 무엇인지 아십니까 ?      

 그것은 진나라가 "면애"의 요새를 넘어서 초나라를 공격하는 일이 불편하였으며 ; 동주와 서주로부터 

 길을 빌릴 경우 한나라와 위나라를 등 뒤에 두고 초나라를 공격하는 일이 불가능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지금은 그렇지 않으며, 위나라는 머지않아 망하게 되어 "허"와 "언릉"을 아까워할 여유가 없으므로

 "허"를 분할해 진나라에 바치려고 할 것입니다. 그러면 진나라는 초나라 도성 "진현"과 겨우 160리 떨어져 있게 

 되어, 신이 보기에 진나라와 초나라간의 싸움은 날이 갈수록 더욱 빈번해 질 것입니다. "라고 하였다.]  

 

 楚於是去陳徙壽春;而秦徙衛野王, 作置東郡.  春申君由此就封於吳, 行相事. 

 楚考烈王無子, 春申君患之, 求婦人宜子者進之, 甚眾, 卒無子.   

 趙人李園持其女弟, 欲進之楚王, 聞其不宜子, 恐久毋寵. 
 
(초어시거진사수춘 ; 이진사위야왕, 작치동군.  춘신군유차취봉어오, 행상사.

 초고열왕무자, 춘신군환지, 구부인의자자진지, 심중, 졸무자.     

 조인이원지기녀제, 욕진지초왕, 문기불의자, 공구무총.) 

  
 [이에 초나라는 "진현"을 떠나 "수춘"으로 천도하였다 :    

 한편 진나라는 위(衛)나라를 "야왕"으로 옮기고 위나라의 옛 땅에는 동군을 설치했다. 
 '춘신군'은 이런 연유로 자기의 봉지인 "오성"에 머물면서 초나라 재상의 일을 볼 수 있게 되었다.

 초'고열왕'에게 아들이 없었으므로,  이것을 걱정한 '춘신군'은 아이를 낳을 수 있다고 생각되는

 여인들을 선발하여 차례로 바쳤으나, 그 여인들의 수가 매우 많았음에도 끝내 아들을 얻을 수 없었다.   

 조나라 사람 '이원'이 자신의 여동생을 대동하고 초나라에 와서 초왕에게 바치려고 했으나,
 왕이 아들을 낳지 못한다는 소식을 듣고, 시간이 지나면 여동생이 왕의 총애를 잃지 않을까 걱정하였다. ]
 

 

 李園求事春申君爲舍人, 已而謁歸, 故失期.  還謁, 春申君問之狀,  

 對曰:「 齊王使使求臣之女弟, 與其使者飲, 故失期. 」 
 (이원구사춘신군위사인, 이이알귀, 고실기.  환알, 춘신군문지장, 
 

 대왈 :「 제왕사사구신지녀제, 여기사자음, 고실기.」)

 ['이원'은 여동생을 '춘신군'에게 바치기 위해 그의 빈객이 되었다가 어느 날 고향집에 다녀오겠다고 

 휴가를 청해 일부러 기일을 어겨 늦게 돌아왔다.  '춘신군'은 '이원'을 보고 늦게 돌아온 이유를 묻자,    

 그가 대답하기를 : " 제나라 왕이 사신을 보내 저의 여동생을 데려 가려고 하기에,
 제가 그 사신과 술자리를 함께 하다 이렇게 늦어지고 말았습니다. "라고 하였다.] 
 

   

 春申君曰:「 娉入乎 ? 」  對曰:「 未也. 」  春申君曰:「 可得見乎 ? 」  曰:「 可. 」  

 於是李園乃進其女弟, 即幸於春申君.  知其有身, 李園乃與女弟謀. 
 
(춘신군왈 : 「 빙입호 ? 」  대왈 : 「 미야. 」  춘신군왈 :  「 가득견호 ? 」  왈 : 「 가. 」  
 

 어시이원내진기녀제, 즉행어춘신군.  지기유신, 이원내여기녀제모.) 


 ['춘신군'이 묻기를 : " 시집은 갔는가 ? "라고 하자.  
'이원'은 대답하기를 : " 아직 가지 않았습니다. "라고 하였다.
 '춘신군'이 묻기를 : " 내가 그대의 동생을 한 번 볼 수 있겠는가 ? "라고 하자.   
 

 '이원'은 대답하기를 : " 만나게 해 드리겠습니다 "라고 하였다. 이에 '이원'이 여동생을 바치자,

 '춘신군'은 그녀를 매우 총애했다. '이원'은 동생이 임신한 것을 알고 동생과 의논하여 음모를 꾸몄다.] 

  

 園女弟承閒以說春申君曰:「 楚王之貴幸君, 雖兄弟不如也.  今君相楚二十餘年, 而王無子,    

 即百歲後將更立兄弟, 則楚更立君後, 亦各貴其故所親, 君又安得長有寵乎 ? 
 
(원녀제승한이설춘신군왈 : 「 초왕지귀행군, 수형제불여야.  금군상초이십여년, 이왕무자, 
 

 즉백세후장경입형제, 즉초경입군후, 역각귀기고소친, 군우안득장유총호 ? 


 ['이원'의 누이 동생은 '춘신군'이 한가한 틈을 타서 말하기를 : " 초왕이 대감을 소중히 여기며 아낀다 
할지라도,

 비록 형제만 하겠습니까 ?  지금 대감께서 초나라의 재상이 된지 어언 20년이 넘었으며, 초왕은 아들이 없으므로

 조만간에 왕이 죽게 되면 아마도 형제들 중 한 사람이 그 뒤를 잇게 되어 초왕은 바뀌게 될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새로 등극한 왕은 옛날 친했던 사람들을 소중히 여길 것인데,  

 그리되면 대감께서 더 이상 왕의 총애를 받을 수 있겠습니까 ? 

 

 非徒然也, 君貴用事久, 多失禮於王兄弟, 兄弟誠立, 禍且及身, 何以保相印江東之封乎 ?   

 今妾自知有身矣, 而人莫知.  妾幸君未久, 誠以君之重而進妾於楚王, 王必幸妾;

 妾賴天有子男, 則是君之子爲王也, 楚國盡可得, 孰與身臨不測之罪乎 ? 」 
 
(비도연야, 군귀용사구, 다실례어왕형제, 형제성입, 화차급신, 하이보상인강동지봉호 ?     

 금첩자지유신의, 이인막지.  첩행군미구, 성이군지중이진첩어초왕, 왕필행첩 ;

 첩뢰천유자남, 즉시군지자위왕야, 초국진가득, 숙여신임불측지죄호 ? 」) 

 
 [비록 그렇게 되지 않을지라도, 대감께서는 오랫동안 중용되어 국정을 맡아 오면서 왕의 형제들에게  

 실례를 범한 일이 많이 있었을 것이며, 왕의 형제들 중 하나가 초왕의 자리에 앉게 된다면  

 그 화가 대감의 신상에 미칠 것인데 무슨 방법으로 재상의 인장과 "강동"의 봉지를 지킬 수 있겠습니까 ? 
 지금 신첩만 대감의 아이를 배고 있다는 사실을 알 뿐 아무도 저의 임신한 사실을 모르고 있습니다. 
 

 그리고 신첩은 대감의 총애를 받은 지는 그리 오래 되지 않았습니다.  

 만일 대감의 존귀한 지위를 이용하여 첩을 초왕에게 바친다면, 왕은 필시 첩을 사랑하게 될 것이며 ;

 다행히 제가 하늘의 도움을 받아 사내아이를 낳을 수 있게 된다면, 그것은 바로 대감의 아들이 왕이 되어 

 초나라의 모든 것은 대감의 소유가 될 수 있으니, 제말을 따르는 것과 대감의 몸에 예측할 수 없는

 재앙을 당하는것 중 어느 편이 더 좋겠습니까 ? "라고 하였다.]

 

 春申君大然之, 乃出李園女弟, 謹舍而言之楚王.     

 楚王召入幸之, 遂生子男, 立爲太子, 以李園女弟爲王后.  楚王貴李園, 園用事.
 
(춘신군대연지, 내출이원녀제, 근사이언지초왕.    
 

 초왕소입행지, 수생자남, 입위태자, 이이원녀제위왕후.  초왕귀이원, 원용사.)

  
 ['춘신군'은 '이원'의 여동생 말이 매우 그럴듯하다고 생각하여, 
 

 즉시 그녀를 아무도 모르는 은밀한 곳에 거처를 정하여 머물게 한 다음 초왕에게 추천하였다. 
 초왕이 그녀를 불러 사랑을 한 끝에 사내아이가 태어나자 태자로 봉하고 '이원'의 누이는 왕후가 되었다.
 초왕은 '이원'을 귀하게 여겼고, '이원'은 이때부터 초나라의 국정에 관여하게 되었다.]
 

   

 李園既入其女弟, 立爲王后, 子爲太子, 恐春申君語泄而益驕, 陰養死士, 欲殺春申君以滅口,   

 而國人頗有知之者.  春申君相二十五年, 楚考烈王病. 
 (이원기입기녀제, 입위왕후, 자위태자, 공춘신군어설이익교, 음양사사, 욕살춘신군이멸구, 
 

 이국인파유지지자.  춘신군상이십오년, 초고열왕병.)

   
 ['이원'은 이미 여동생이 입궁하여 왕후가 되고, 그녀의 아들은 태자가 되자, 
혹시 '춘신군'이 그 비밀을 

 누설하거나 혹은 더욱 교만하게 될 것을 걱정하여, 아무도 몰래 죽음을 각오한 병사들을 양성하여 '춘신군'을 

 죽여 그의 입을 막으려고 하였으나, 그때는 이미 초나라 백성들 중에 그 비밀을 알고 있는 자가 꽤 있었다.  

 '춘신군'이 초나라의 재상이 된지 25년째,  초'고열왕'이 병이들어 자리에 눕게 되었다.] 

   

 朱英謂春申君曰:「 世有毋望之福, 又有毋望之禍. 

 ​今君處毋望之世, 事毋望之主,  安可以無毋望之人乎 ? 」 春申君曰:「 何謂毋望之福 ? 」 

 (주영위춘신군왈 : 「 세유무망지복, 우유무망지화. 

 금군처무망지세, 사무망지주, 안가이무무망지인호 ? 」 춘신군왈 : 「 하위무망지복 ? 」) 


 ['주영'이 '춘신군'을 찾아와 말하기를 : " 세상에는 예상치 못한 복이 찾아올 수 있고, 
 또한 예상치 못한 화가 찾아올 수도 있습니다.  지금 대감께서는 생각지도 못한 행복과 재앙이 찾아오는 
 

 세상에 살고 계시면서 언제 죽을지 모르는 군주를 섬기고 계시면서,

 어찌하여 예상치 못한 재앙을 미연에 방지할 수 있는 사람을 구해 곁에 두지 않는 것입니까 ? "라고 하였다.

 '춘신군'이 묻기를 : " 예상치 못한 복이란 무엇인가 ?"라고 하자.]

 

 曰:「 君相楚二十餘年矣, 雖名相國, 實楚王也. 今楚王病, 旦暮且卒, 而君相少主,

 因而代立當國, 如伊尹· 周公, 王長而反政, 不即遂南面稱孤而有楚國 ?  此所謂毋望之福也.」

 (왈 : 「 군상초이십여년의, 수명상국, 실초왕야. 금초왕병, 단모차졸, 이군상소주,

 인이대입당국, 여이윤· 주공, 왕장이반정, 불즉수남면칭고이유초국 ?  차소위무망지복야.」) 

 
 ['주영'이 대답하기를 : " 대감께서는 초나라의 재상 자리에 20여 년을 계시면서,

 비록 명목은 재상이지만 실제로는 초왕과 다름이 없습니다. 지금 초왕은 병이 들어 머지않아 죽을테고,

 대감께서는 계속해서 재상이 되고 어린 군주가 설 것이며, 대감께서 어린 군주를 대신해서 국정을 행할 것입니다.

 이는 옛날의 '이윤'과 '주공'처럼 되는 일입니다. 그러다가 왕이 장성하게 되면 즉시 정권을 돌려주던지, 

 아니면 직접 왕의 자리에 올라 남면하여 '고' 라고 칭하며 초나라를 차지할 것이 아닙니까 ?  

 이것이 바로 예상치 못한 복입니다."라고 하였다.]  

 

 春申君曰:「 何謂毋望之禍 ? 」  曰:「 李園不治國而君之仇也, 不爲兵而養死士之日久矣,  

 楚王卒, 李園必先入據權而殺君以滅口.  此所謂毋望之禍也. 」 春申君曰:「 何謂毋望之人 ? 」

 對曰:「 君置臣郎中, 楚王卒, 李園必先入, 臣爲君殺李園.  此所謂毋望之人也. 」
 (춘신군왈 : 「하위무망지화 ? 」  왈 : 「 이원불치국이군지구야, 불위병이양사사지일구의,   
 

 초왕졸, 이원필선입거권이살군이멸구.  차소위무망지화야. 」 춘신군왈 : 「 하위무망지인 ?」

 대왈 : 「 군치신랑중, 초왕졸, 이원필선입, 신위군살이원.  차소위무망지인야. 」) 

  
 ['춘신군'이 묻기를 : " 예상치 못한 재앙이란 무엇을 말하는 것인가 ? "라고 하자.
 '주영'이 대답하기를 : " '이원'은 자기가 나라를 다스릴 수 있는 자리를 차지하지 못한 이유는 
대감 때문이라고

 생각해서 대감을 원수로 여기고 있습니다. '이원'은 몰래 죽음을 각오한 병사들을 양성한지 오래 되었습니다.

 ​초왕이 죽으면 '이원'은 반드시 먼저 궁궐로 들어가 권력을 잡고, 대감을 죽여 그 입을 막으려 할 것입니다. 

 이것이 소위 말하는 예상치 못한 재앙입니다."라고 하였다.

 '춘신군'이 묻기를 : " 재앙을 미연에 막을 수 있는 예상치 못한 사람은 누구를 말하는가 ? "라고 하자.

 ​'주영'이 대답하기를 : " 대감께서 저를 낭중에 임명하시기 바랍니다. 초왕이 죽게 되면 '이원'이 먼저 입궁해서

 권력을 장악하려고 할 것입니다. 그때 제가 대감을 위해 '이원'을 잡아서 죽이겠습니다.   

 제가 바로 대감의 화를 미연에 방지할 수 있는 예상치 못한 사람입니다. "라고 하였다.] 

 春申君曰:「 足下置之, 李園, 弱人也, 僕又善之, 且又何至此. 」  

 朱英知言不用, 恐禍及身, 乃亡去. 後十七日, 楚考烈王卒, 李園果先入, 伏死士於棘門之內.   

 春申君入棘門, 園死士俠刺春申君, 斬其頭, 投之棘門外.  於是遂使吏盡滅春申君之家. 

 (춘신군왈 : 「 족하치지, 이원, 약인야, 복우선지, 차우하지차. 」 

 주영지언불용, 공화급신, 내망거. 후십칠일, 초고열왕졸, 이원과선입, 복사사어극문지내.     

 춘신군입극문, 원사사협자춘신군, 참기두, 투지극문외.  어시수사리진멸춘신군지가.)

   
 ['춘신군'이 말하기를 : "그대는 그만 두시오 !  '이원'은 심약한 사람이며, 나 또한 그와 사이좋게 지내고 있는데,

 어떻게 그런 일이 일어 날 수 있단 말이오 ? "라고 하자. 자기의 말이 받아들여지지 않는 것을 본 '주영'은

 재앙이 자기 몸에 미치게 되는 것을 두려워한 나머지 다른 나라로 도망쳐 버렸다.

 ​그리고 17일 후에 '고열왕'이 죽자, '이원'이 과연 먼저 입궐하여 극문 안에 죽음을 각오한 병사들을 잠복시켰다.

 이윽고 '춘신군'이 극문 안으로 들어서자 '이원'이 보낸 죽음을 각오한 병사들이 들고 일어나 

 ​'춘신군'을 에워 싸서 찔러 죽이고 그 머리를 베어 극문 밖으로 내던졌다. 
 이어서 '이원'은 관리들을 보내 '춘신군'의 집안사람들을 멸족시켜 버렸다.]
 

 

 而李園女弟初幸春申君有身而入之王所生子者遂立, 是爲楚幽王.   

 是歲也, 秦始皇帝立九年矣.  嫪毐亦爲亂於秦, 覺, 夷其三族, 而呂不韋廢.
 
(이이원녀제초행춘신군유신이입지왕소생자자수입, 시위초유왕.    
 

 시세야, 진시황제입구년의.  노애역위란어진, 각, 이기삼족, 이여불위폐.)

   
 ['이원'의 여동생이 '춘신군'의 사랑을 받아 임신을 하고, 다시 '춘신군'이 임신한 그 여동생을 초왕에게 
바쳐

 태어난 아들이 초왕의 자리에 앉았다. 이가 초'유왕'이다. 이 해는 진시황이 즉위한지 9년째 되는 해였다. 

 '노애'도 진나라에서 반란을 획책하다가 발각되어 삼족이 멸족되었고,

 그 여파로 '여불위'가 상국의 자리에서 파직되었다. ] 


 

 太史公曰:

 吾適楚, 觀春申君故城, 宮室盛矣哉. 初, 春申君之說秦昭王, 及出身遣楚太子歸, 何其智之明也

 後制於李園, 旄矣.  語曰:「 當斷不斷, 反受其亂. 」 春申君失朱英之謂邪 ?
 (태사공왈 :

 오적초, 관춘신군고성, 궁실성의재. 초, 춘신군지설진소왕, 급출신견초태자귀, 하기지지명야 ! 

 후제어이원, 모의. 어왈 : 「 당단불단, 반수기란. 」  춘신군실주영지위야 ? )

     
 [태사공이 말한다.

 내가 초나라에 들렸을 때 '춘신군'이 살았던 옛 성과 궁궐을 보았는데 참으로 화려했었다. 

 처음에, '춘신군'이 진'소왕'을 설득하고, 목숨을 던져 태자를 탈출시켜 귀국시킨 일은 얼마나 지혜로운 일이었던가

 그런데 마지막에 '이원'같은 필부에게 제압 당한 것은 그가 늙어 사리판단이 무디어진 때문이었다. 

 옛말에 이르기를 : ' 마땅히 결단을 해야 할 때 결단을 내리지 못하면, 도리어 어려움을 당하게 된다 ’라고 했는데,
 '춘신군'이 '주영'의 말을 받아들이지 않은 것을 두고 말한 것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 ]

 

【 각주 】

1) 초경양왕(楚頃襄王) : 재위 기원전 299 - 263년. 초회왕(楚懷王)의 아들로 태자의 신분으로 제나라에 인질로

    들어갔다가 기원전 299년 초회왕이 진나라에 들어갔으나 억류당하고 귀환하지 못하자 제민왕의 허락을 얻어

    귀국하여 다음 해에 초왕의 자리에 앉았다. 진나라가 다시 공격하여 초나라의 16개 성을 빼앗아 가자

    그는 할 수 없이 진나라와 강화를 맺고 다시 진, 한, 조, 위, 연 등과 연합하여 제나라를 공격했다.

    그러나 얼마가지 않아 진나라와의 평화조약을 파기하고 이 번에는 제와 한 두 나라와 힘을 합쳐 진나라를 

    공격하고 주나라를 멸하려고 했으나 미수에 그쳤다. 기원전 280년부터 277년까지 4년 동안 진나라가 대군을 

    일으켜 백기를 장수로 삼아 초나라를 공격하여 그 도성인 영도(郢都)를 함락시키고 그 주변일대를 점령하자

    초나라는 400년 동안 도성으로 삼았던 땅을 버리고 지금의 하남성 진현(陳縣)으로 나라를 옮겨야 했다.

    이후로 초나라는 국세가 기우러져 다시는 중원의 패권다툼에 끼지 못했다.

    후에 다시 진나라와 강화를 하고 태자를 진나라에 인질로 보냈다.

 2) 진소왕(秦昭王) : 소양왕(昭襄王)이라고 한다. 재위 기원전 324년에 태어나서 기원전 306년에 진왕의 자리에

    올라 기원전 251년에 죽었다. 진시황의 증조부다. 이름은 직(稷), 혹은 측(側) 또한 즉(則)이라 했으며

    성은 영씨(嬴氏)다. 진무왕(秦武王)의 이복동생으로 무왕이 재위시 연나라에 인질로 가 있었다.

    이어서 그때까지 자식을 두지 못한 무왕이 주나라에 가서 정을 들어 힘내기를 하다가 다리가 부러져 죽게 되자

    연나라에서 귀국하여 진왕의 자리에 올랐다. 18살의 어린 나이로 재위에 오르자 그 모친 선태후(宣太后)가

    섭정을 행하고 그녀의 동생 위염(魏冉)을 장군으로 삼아 함양(咸陽)을 지키게 했다. 그리고 얼마 있지 않아

    무왕의 동생 서장(庶長) 영장(嬴壯)이 반란을 일으키자 위염은 장(壯)을 포함한 진나라의 수 많은 대신과

    귀족들을 살해했다. 이후로 진나라의 정권은 선태후가 장악하고 저리질(樗里疾)과 위염(魏冉)을 앞뒤로 번갈아

    가며 진나라의 승상으로 삼아 진나라의 정권은 공실의 귀족과 위척이 전단하게 되었다.

    진소왕11년 기원전 266년, 소왕은 위나라 출신의 범수(范睢)의 계책을 받아들여 선태후로부터 권력을 빼앗고

    위염등의 귀척들을 쫓아냈다. 위염의 후임으로는 범수를 승상으로 임명했다. 그는 재위 기간 중 백기(白起)와

    사마조(司馬錯) 등을 장군으로 삼아 동진정책을 추진하여 군사적으로 획기적인 성과를 거두었다.

    1. 기원전 290년 위나라를 공격하여 하동(河東)의 땅을 점령했다.

    2. 기원전 284년 도위(都尉) 사리(斯離)가 한(韓), 위(魏), 연(燕), 조(趙) 등의 4국과 연합하여

        제나라를 정벌하여 그 국세에 심대한 타격을 가했다.

    3. 기원전 278년 다시 백기로 하여금 남쪽으로 진격하게 하여 초나라의 영도를 점령함으로써 초나라의 

       근거지인동정호 일대에 남군(南郡)을 설치했다. 초나라는 이로써 그 나라를 지금의 하남성 진현으로 

       옮겨야만 했다.

    4. 기원전 260년 다시 조나라의 45만 대군과 장평에서 싸워 이겨 항복한 그 군사들을 구덩에 파묻어

        모두 살해하고 그 땅에 상당군을 설치하여 진나라 영토로 삼았다.

    5. 기원전 255년 계속해서 남진하여 주나라를 멸했다. 이로써 800년 이상 존속했던 주나라의 명맥을 끊었다.

    진소양은 그의 재위시 진나라의 국력을 관동의 6국에 비해 압도적으로 우세하게 만듬으로써,

    후에 진시황의 중국을 통일하는데 기초를 마련했다고 볼 수 있다.

 3) 언(鄢) : 지금의 호북성 의성시(宜城市) 동남에 있던 초나라의 별도(別都)로 중원진출을 위한 전략적인

    거점이었으나 백기의 수공으로 인해 십 수만의 군민이 수몰되어 전멸되자 초나라는 치명적인 타격을 받고

    그 수도인 영성을 백기에게 내주소 나라를 옮겨야만 했다.

 4) 경릉(竟陵) : 지금의 호북성(湖北省) 잠강(潛江) 서쪽, 초나라 도성인 영성(郢城) 동 30키로 있었던 고을로

    진나라는 이곳에 경릉현(竟陵縣)을 설치하고 한나라가 따랐다.

 5) 기원전 277년부터 2년에 걸쳐 백기가 이끌던 진군(秦軍)이 초나라의 별성(別城)인 언성(鄢城)과 도성(都城)인

    영성(郢城)을 함락시킨 언영지전(鄢郢之戰)을 말한다.

    초나라는 영성을 진나라에 빼앗기고 지금의 하남성 진현(陳縣)으로 나라를 옮겼다.

 6) 원문에는 ‘先帝文王, 莊王之身, 三世不妄接地于齊’라고 되어 있으나 문왕은 무왕과 소양왕의 부왕인

    혜문왕(惠文王)을 말하고 장왕이라고 부를 수 있는 왕은 소양왕의 손자이며 진시황의 부왕인 장양왕(莊襄王)을

    가리키는 듯 하나 문맥상 맞지 않는다. 따라서 소양왕을 포함해서 3세라 함은 혜문왕, 무왕을 말한다.

 7) 성교(盛橋) : 전국 때 진나라의 대부 전국책에는 성교(成橋)로 되어있다. 진소양왕의 명을 받들어 세 번에 걸쳐

    한나라에 사신으로 가서 한왕을 위협하여 그 북쪽의 백리에 달하는 땅을 진나라에 바치게 했다.

    또한 진시황의 동생 장안군(長安君) 성교(成蟜)의 다른 이름이라고도 한다.

 8) 하내(河內) : 지금의 하남성 황하 북쪽 연안을 말한다.

 9) 연(燕) : 지금의 하남성 연진현(延津縣) 경내의 전국 때 위나라 땅으로 남연(南燕)이다.

10) 산조(酸棗) : 지금의 하남성 연진(延津) 서남. 춘추 때 정나라 땅이었다가 후에 위(魏)나라의 영토가 되었다.

      위문후(魏文侯) 32년 기원전 393년에 정나라를 정벌하고 산조(酸棗)에 성을 쌓았다.

11) 허(虛) : 지금의 하남성 연진현(延津縣) 경내 서

12) 도(桃) : 지금의 하남성 장원현(長垣縣) 서북

13) 형(邢) : 지금의 하남성 온현(溫縣) 동쪽의 형구(邢丘)를 말한다.

14) 포(蒲) : 지금의 하남성 장원현(長垣縣) 경내에 있었던 포판(蒲阪)을 말한다.

15) 연(衍) : 지금의 하남성 정주시(鄭州市) 북쪽의 유림진(柳林鎭)을 말한다.

16) 수(首) : 지금의 하남성 수현(睢縣) 동남의 주당진(周堂鎭) 부근을 말한다.

17) 원(垣) : 지금의 산서성 원곡현(垣曲縣) 동남의 왕모진(王茅鎭)을 말한다.

18) 인(仁) : 세가지 설이 있다. ①國策地名考(程恩澤) : 今河南寧陵縣西南有仁州

      ②讀史方與紀要 : 修武縣境有仁亭 則 河南修武縣境

      ③金正煒說 ‘仁‘ 當爲 ’任‘ 任邑在今河北任縣東 春秋爲晉地.

19) 황(黃) : 하남성 란고현(蘭考縣) 서 두량진(杜良鎭)을 말한다.

20) 제양(濟陽) : 하남성 란고현(蘭考縣) 동북의 고양진(堌陽鎭)을 말한다.

21) 복마지북(濮磨之北) : ①정은택(程恩澤) 설 : 복(濮)은 복수(濮水)를, 마(磨)는 역산(歷山)으로 지금의 하남성

      범현(范縣) 동남을 말한다.. 즉 복마지북(濮磨之北)이라 함은 복수와 역산의 북쪽 지대를 가리킨다.

      ②장기(張琦)설 : 복마지북이라 함은 지금의 하북성 동창(東昌), 대명(大名) 두 현 일대에 걸친 지역을 말한다.

      ③포표(鮑彪) 설 : 복(濮)은 지금의 강한지간(江漢之間)에 있었던 복국을, 마(磨)는 지금의 하북성 형주시

      부근을 흐르는 저수(沮水) 강안의 마성(磨城)을 말한다. 마성은 오자서가 초나라의 영도를 공략할 때

      축조한 성곽으로 지금의 호북성 당양(當陽)부근에 있었다.

 22) 삼왕(三王) : 하나라를 세운 우왕(禹王), 은나라를 세운 탕왕(湯王), 주나라를 세운 주무왕(周武王)을 말한다.

 23) <시경(詩經)> 대아(大雅)의 탕지습(湯之什)에 나오는 문구로 ‘靡不有初(미불유초)는 - 처음부터 잘하지 않는

      사람 없건만’, ‘鮮克有終(선극유종)는 - 끝까지 잘한 사람은 많지 않다네!’라는 뜻이다. 주려왕(周厲王)이

      무도하여 천하가 어지러워지고 법도와 장전이 문란해짐을 본 소목공(召穆公)이 개탄하며 지었다고 했다.

 24) 주역 64괘 중 감하리상(坎下離上)의 화수미제(火水未濟)의 卦爻辭(괘효사)다.

      원문은 ‘小狐汔濟(소호흘제), 濡其尾(유기미), 無攸利(무유리)’로서 ‘작은 여우가 날쌔게 물을 건너려다가

      그 꼬리를 적신다. 이로울 바가 없느니라.’라는 뜻이다.

25) 유차(楡次) : 지금의 산서성 유차시(楡次市)로 태원시 동남쪽의 춘추 때는 당진(唐晉),

      전국 때는 조나라 령이었다가 진장양왕 3년 기원전 247년에 장군 몽오가 유차를 포함한 37개 성을 

       함락시키고 유차현(楡次縣)을 설치했다. 성안 안에 착대(鑿臺)가 있어 그 밑에서 조간자(趙簡子)가 

       진양의 싸움에서 지백을 사로잡아 참수했다. 이를 유차지화(楡次之禍)라 한다.

26) 간수(干隧) : 지금의 강소성(江蘇省) 소주시(蘇州市) 오현(吳縣) 서북쪽의 고을로 춘추 말 때

      오왕 부차(夫差)가 월왕 구천(句踐)과의 싸움에서 패하고 자결한 곳이다.

27) 애릉(艾陵) : 산동성 치박시(淄博市) 경내 남쪽에 있는 노산(魯山) 서쪽 산록의 고을로 제나라 땅이다.

      기원전 489년 오왕 부차가 이 곳에서 제나라 대군을 대파했다.

28) 삼저지포(三渚之浦) : 지금의 강소성 소주시(蘇州市) 동남쪽으로 동강(東江), 송강(松江), 루강(婁江)이

      합쳐지는 포구를 말한다. 전국책(戰國策) 진책(秦策)에는 삼강지포(三江之浦)로 되어있다.

29) <시경(詩經)> <소아(小雅)>의 <소민지습(小旻之什)> <교언(巧言)> 중의 한 구절이다.

      본 시귀가 속하는 단락의 전문은 다음과 같다.

      奕奕寢廟 君子作之(혁혁침묘 군자작지)  크고 빛나는 저 종묘는 옛 선왕들이 지으셨고

      秩秩大猷 聖人莫之(질질대유 성인막지)  위대하고 올바른 법도는 옛 성인이 정하셨네

      他人有心 予忖度之(타인유심 여촌탁지)  남들이 지닌 마음은 내가 헤아릴 수 있으니

      躍躍毚兎 遇犬獲之(적적참토 우견획지)  쏜살같이 달리는 약은 토끼도 사냥개 만나면 잡힌다네.

 30) 원문은 隨水右壤(수수우양)이다. 수수는 몇 가지 설이 있다.

      ① 지금의 하남성 등현(鄧縣) 이서의 땅으로 전국 때 초나라 땅이다.

      ② 지금의 호북성 수현(隨縣) 일대로 춘추 때 초나라에 병합된 수나라의 옛 땅이다.

      ③ 지금의 호북성 대홍산맥(大洪山脈) 일대를 말한다.

 31) 언릉(鄢陵) : 현 하남성(河南省) 허창시(許昌市) 동쪽 20km 지점인 언릉현 일대를 말한다.

      기원전 575년 당진(唐晉)의 려공(厲公)이 이끄는 당진(唐晉), 제(齊), 로(魯), 송(宋), 위(衛)의 연합군과

      초공왕(楚共王)이 이끄는 초(楚), 정(鄭) 연합군이 정나라를 사이에 두고 싸움이 벌어진 곳으로써

      당진(唐晉)이 주도한 연합군이 승리하여 초장왕에게 빼앗긴 패자의 지위를 탈환했다.

32) 상채(上蔡) : 지금의 하남성 상채시(上蔡市) 서남에 있었던 전국시대 때의 고을로 원래 채읍(蔡邑)이다.

      주무왕이 자기의 동생 숙진탁(叔振鐸)을 이곳에 봉했다. 후에 채평후(蔡平侯)가 나라를 신채(新蔡)로 

       옮겼다가 채소후(蔡召侯) 때 주래(州來)로 다시 옮겨, 주래(州來)의 이름을 하채(下蔡)로 불렀다.

      이에 원래의 채읍 이름을 상채(上蔡)로 부르게 된 것이다.

33) 소릉(召陵) : 지금의 하남성 탑하시(漯河市) 동쪽에 소릉진(召陵鎭)이라고 있다.

      기원전 657년 제환공(齊桓公)은 일곱 제후국들의 군사를 규합하여 초나라를 정벌하기 위하여 출정하여

      이 곳에 이르렀다가 초나라가 주왕실에 조공하는 조건으로 초성왕과 강화조약을 체결한 후 철군했다.

34) 양문군(陽文君) : 초경양왕(楚頃襄王)의 동생이다.

35) 순경(荀卿) : 성악설(性惡說)을 주장한 순자(荀子)를 말한다.

      이사(李斯)와 한비자(韓非子)는 동문수학한 순자의 제자들이다.

36) 난릉령(蘭陵令) : 지금의 산동성 창산현(蒼山縣) 난릉진(蘭陵鎭)이다.

37) 대모잠(玳瑁簪) : 대모로 만든 비녀의 일종으로 머리에 꽂는 장식품의 하나이다.

      대모(玳瑁)는 열대지방의 바다에 사는 거북의 일종으로 그 등껍질은 단단하여 비녀나 공예품을 만든다.

38) 민애지새(黽隘之塞)/ 지금의 하남성 신양시(信陽市) 서남에 있는 평정관(平靖關)을 말한다.

51) 초나라는 진현에서 바로 수춘으로 천도한 것이 아니라 거양(巨陽)으로 먼저 갔다가 다시 수춘으로 갔다.

      초나라의 도성 이동사는 다음과 같다. 

  1) 주난왕(周난王) 17년 기원전 278년 진나라의 장군 무안군 백기(白起)의 침입으로 영성(郢城)이 점령당하자    

      초경양왕은 초나라의 잔존세력을 이끌고 지금의 하남성 진현(陳縣)인 진성(陳城)으로 나라를 옮겼다.

  2) 초고열왕 10년 기원전 253년 초나라는 다시 도성을 진성(陳城)에서 지금의 안휘성 태화현(太和縣) 부근인

      거양(巨陽)으로 옮겼다.

  3) 고열왕 22년 기원 241년 초나라는 거양에서 다시 지금의 안휘성 수현(壽縣)인 수춘(壽春)으로 옮겼다.

  4) 초나라는 수춘에서 진나라 장군 왕전(王翦)의 공격으로 기원전 223년에 멸망했다.

52) 야왕성(野王城) : 지금이 하남성 심양현(沁陽縣) 경내 .

 
 

 

※  原 文 .    【 中國哲學書電子化計劃 .   筆寫本 】

 

                                 

 

    原 文   飜 譯 者        德庤 / 李   斗 振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