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 孟子 荀卿列傳

第十四. 孟子荀卿列傳(맹자 순경열전)

덕치/이두진 2021. 7. 22. 20:13

                 史記 列傳

 

     第十四.  孟子荀卿列傳(맹자 순경열전) 

 

 

 太史公曰:

 余讀孟子書, 至梁惠王問 「 何以利吾國 」  未嘗不廢書而歎也. 

 曰:嗟乎, 利誠亂之始也 !  夫子罕言利者, 常防其原也. 

 故曰 『 放於利而行, 多怨 』  自天子至於庶人, 好利之獘何以異哉 ! 」
 (태사공왈:여독맹자서, 지량혜왕문 「 하이리오국 」  미상불폐서이탄야.   

 왈:차호, 리성란지시야 !  부자한언리자, 상방기원야. 

 고왈 『 방어리이행, 다원 』  자천자지어서인, 호리지폐하이이재 ! 」)


 ['태사공이 말한다 :

 내가 일찍이 《맹자》를 읽다가 '양혜왕'이 ' 어떻게 하면 우리나라를 이롭게 할 수 있겠습니까 ? '라고

 질문한 대목에 이르러, 책을 덮고 탄식하지 않은 적이 없었다. 

 ' 아 ! 이롭다고 하는 것은 진실로 어지러운 것의 시작이구나 ! 
 무릇 '공자'가 이로움에 대해 드물게 말한 것은 항상 그 어지러운 것의 근원을 막기 위함이었다.  

 그런 까닭에 '이로운 것에 따라 행동하면 남의 원망을 많이 받는다 '라고 하였다. 
 천자로부터 서민에 이르기까지 사람들이 이로움을 좋아해서 생긴 병폐가 어찌 다르겠는가 !"라고 하였다.]

 孟軻, 騶人也.  受業子思之門人.  道既通, 游事齊宣王, 宣王不能用.   

 適梁, 梁惠王不果所言, 則見以爲迂遠而闊於事情.
 (맹가, 추인야.  수업자사지문인.  도기통, 유사제선왕, 선왕불능용.   

 적량, 량혜왕불과소언, 즉견이위우원이활어사정.)


 '맹가'는 추나라 사람으로, '자사'의 제자에게서 학문을 배웠다.    

 道를 이미 통달하게 되어 제'선왕'에게 유세하여 섬기고자 하였으나 선왕이 그를 등용하지 않았다.
 '맹가'가 양나라에 갔으나 '양혜왕'은 그가 말하는 것을 믿지 않았고, 

 '맹가'를 보고 그의 말은 현실과 거리가 멀어 당시의 사정에 맞지 않는다고 생각하였다.] 

 

 當是之時, 秦用商君, 富國彊兵;楚·魏用吳起, 戰勝弱敵; 

 齊威王·宣王用孫子·田忌之徒, 而諸侯東面朝齊. 
 (당시지시, 진용상군, 부국강병;초·위용오기, 전승약적;

 제위왕·선왕용손자·전기지도, 이제후동면조제.)


 [그때 당시 진나라는 '상군'을 등용하여 나라를 부유하게 하고 군대를 강하게 하였고,  

 초나라와 위나라는 '오기'를 등용하여 싸움에서 이기고 적을 약하게 하였다.
 제나라의 '위왕'과 '선왕'은 '손빈'과 '전기'와 같은 인재들을 등용하여 제후들이 동쪽을 향하여 

 ​제나라에 조회하게 하였다.] 

 

 天下方務於合從連衡, 以攻伐爲賢.  而孟軻乃述唐·虞·三代之德, 是以所如者不合.   

 退而與萬章之徒序, 詩書述仲尼之意, 作孟子七篇. 
 (천하방무어합종연형, 이공벌위현.  이맹가내술당·우·삼대지덕, 시이소여자불합.   

 퇴이여만장지도서, 시서술중니지의, 작맹자칠편.)


 [천하는 바야흐로 합종과 연횡에 온 힘을 쏟고 있었으며,  남을 공격하고 정벌하는 것을 현명하다고 여겼다.
 그러나 '맹가'는 당, 우와 삼대의 덕에 대해 말했음으로 그가 이르는 곳마다 제후들의 뜻에 부합되지 않아 

 박대를 받았다.  그래서 유세하는 것을 그만 둔 '맹가'는 '만장'의 무리들과 함께 《시경》과 《서경》을   

 순서에 따라 정리하여 '공자'의 뜻을 전하려고 하였다.  '맹가'는 모두 7편의 저서를 지었다.] 
 

 其後有騶子之屬.  齊有三騶子.  其前騶忌, 以鼓琴干威王, 因及國政, 封爲成侯而受相印, 先孟子.

 其次騶衍, 後孟子.  騶衍睹有國者益淫侈, 不能尚德, 若大雅整之於身, 施及黎庶矣. 

 乃深觀陰陽消息, 而作怪迂之變, 終始·大聖之篇十餘萬言.
 (기후유추자지속.  제유삼추자.  기전추기, 이고금간위왕, 인급국정, 봉위성후이수상인, 선맹자.

 기차추연, 후맹자.  추연도유국자익음치, 불능상덕, 약대아정지어신, 시급려서의.   

 내심관음양소식, 이작괴우지변, 종시·대성지편십여만언.)

 

 [그후에 '추자'의 무리가 있었다.  제나라에는 세 사람의 '추자'가 있었다.  제일 먼저 사람은 '추기'이며, 
 제'위왕'에게 거문고 타는 것을 보여줌으로 해서 벼슬을 얻어 국정에 참가하게 된 그는 '성후'에 봉해지고 

 재상의 인장을 받았다.  그는 맹자보다 앞서 살았다.  그 다음은 '추연'으로 '맹자'보다 후대 사람이다.

 '추연'은 나라를 가진 자가 더 음란하고 사치해지는 것을 목격하고 그들에게서는 결코 도덕이 숭상될 수 없음을 

 알고,《시경》의 〈대아〉편에서 말한 것처럼 도덕을 먼저 자신의 몸에 정제한다면 그때야 비로소 그 덕이

 밑의 백성들에게까지 미칠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그는 음양의 소멸과 성장 변화를 관찰하고, 황당무계하고

 현실과 거리가 먼 변화와 환상의 일을 주제로 〈종시〉, 〈대성〉편 등 10여 만 자에 달하는 책을 저술했다.]  

 

 其語閎大不經, 必先驗小物, 推而大之, 至於無垠.  先序今以上至黃帝, 學者所共術,  

 大並世盛衰, 因載其禨祥度制, 推而遠之, 至天地未生, 窈冥不可考而原也.
 (기어굉대불경, 必先驗小物, 추이대지, 지어무은.  선서금이상지황제, 학자소공술,  

 대병세성쇠, 인재기기상도제, 추이원지, 지천지미생, 요명불가고이원야.)


 [그 말들이 광범위 하고 종잡을 수 없어서 변함없는 도리에는 맞지 않으나,  

 먼저 작은 사물을 검증하고 난 후에 그것을 추론하여 확대해나가 무한한 곳까지 이르렀다.
 우선 먼저 현재로부터 시작하여 상고시대의 '황제'까지를 서술하였는데,  

 이는 모두 학자들이 공동 서술한 것으로 대체로 시대의 흥함과 쇠함에 따랐다.
 그리고 그 길흉의 징조와 국가의 제도를 기재한 뒤에 그것을 근거로 짐작하여 먼 곳까지 이르게 하였는데, 
 천지가 생기기 전의 깊고 먼 신비한 세상을 생각하여 그 시초에 결코 도달할 수 없는 경지에 이르렀다.] 

 

 先列中國名山大川, 通谷禽獸, 水土所殖, 物類所珍, 因而推之, 及海外人之所不能睹.   

 稱引天地剖判以來, 五德轉移, 治各有宜, 而符應若茲.
 (선열중국명산대천, 통곡금수, 수토소식, 물류소진, 인이추지, 급해외인지소불능도.   

 칭인천지부판이래, 오덕전이, 치각유의, 이부응약자.)


 [그는 먼저 중국의 이름난 산, 큰 강, 깊은 계곡에 살고 있는 들짐승과 날짐승, 물과 뭍에서 번식 생장하는 생물과

 온갖 종류의 진귀한 것들을 묘사하고, 그것으로 미루어 사람들이 볼 수 없는 요원한 이역의 산물까지 논했다.  

 천지가 나누어진 이래 오행이 차례로 옮겨가 각 시대의 다스림이 각기 그 마땅함을 얻고,
 하늘의 명령과 사람의 일이 저마다 오행에 상응하는 것을 인용하여 설명하였다.]
 
 以爲儒者所謂中國者, 於天下乃八十一分居其一分耳.  中國名曰赤縣神州.  
 

 赤縣神州內自有九州, 禹之序九州是也, 不得爲州數. 
 (이위유자소위중국자, 어천하내팔십일분거기일분이.  중국명왈적현신주.   

 적현신주내자유구주, 우지서구주시야, 불득위주수.)


 [그는 유가에서 말하는 중국은 천하를 81개로 나누었을 때, 그 한 부분만을 차지하는 것이라고 여겼다.     

 '추연'은 중국을 "적현신주"라고 이름하였다. "적현신주" 안에는 9개의 주가 있는데,  

 '하우'가 정리한 9주라고 말하는 것이 바로 이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주는 주로서 셀 만한 것이 못 된다.] 

 

 中國外如赤縣神州者九, 乃所謂九州也.  於是有裨海環之, 人民禽獸莫能相通者, 如一區中者,   

 乃爲一州.  如此者九, 乃有大瀛海環其外, 天地之際焉.  其術皆此類也. 
 (중국외여적현신주자구, 내소위구주야.  어시유비해환지, 인민금수막능상통자, 여일구중자,   

 내위일주.  여차자구, 내유대영해환기외, 천지지제언.  기술개차류야.)


 [중국 이외에도 "적현신주"와 같은 주가 9개나 있는데 그것이 바로 9주이다.   

 여기에는 작은 바다가 있어 9주를 두루고 있는데, 각 주에 사는 백성들과 짐승들은 서로 통하지 않으며 

 그 한 구역 안에 있는 것을 1주(一州)라고 하였다. 이와 같은 것이 9개로 이루어져 있으며,  

 거기에 큰 바다가 있어 그 밖을 두루고 있는데, 그것이 하늘과 땅의 끝이다.  

 '추연'이 기술한 학설은 모두 이와 같은 종류이다.] 

 

 然要其歸, 必止乎仁義節儉, 君臣上下六親之施, 始也濫耳.   

 王公大人初見其術, 懼然顧化, 其後不能行之.
 (연요기귀, 필지호인의절검, 군신상하육친지시, 시야람이. 

 왕공대인초견기술, 구연고화, 기후불능행지.)


 [그러나 그 요점을 살펴 보면 반드시 인의와 절약과 근검, 그리고 군신, 상하, 육친 사이의 일로 마무리가 되는데,

 그 시작은 크고 넘쳐흐른다. 신분이 높은 제후나 대부들이 처음 그의 학설을 들으면 두려워 하면서도 도리어

 그의 주장에 감화되지만, 그 후에는 그것을 실행할 수 없었다.] 

 

 是以騶子重於齊.  適梁, 惠王郊迎, 執賓主之禮.  適趙, 平原君側行撇席.   

 如燕, 昭王擁彗先驅, 請列弟子之座而受業, 築碣石宮, 身親往師之.  作主運.
 (시이추자중어제.  적량, 혜왕교영, 집빈주지례.  적조, 평원군측행별석. 

 여연, 소왕옹혜선구, 청열제자지좌이수업, 축갈석궁, 신친왕사지.  작주운.)


 [이로써 '추연'은 제나라에서 존중함을 받게 되었다.    

 그가 양나라에 갔을 때, '혜왕'이 교외에까지 나와 영접하여 손님과 주인의 예로써 대우하였다.
 그리고 조나라에 갔을 때 '평원군'은 옆으로 걸어가면서 옷자락이 자리를 쓸 정도로 경의를 표시하였다. 
 연나라에 갔을 때에는 '소왕'이 빗자루를 가지고 길을 쓸면서 앞에서 길을 인도하여 제자의 신분으로 자리에 앉아서

 가르침을 받기를 청하였으며, 결국 갈석궁을 건축하여 그를 머무르게 하면서 몸소 찾아가 그를 스승으로 섬겼다. 

 이때 〈주운〉을 저술했다.]  

 

 其游諸侯見尊禮如此, 豈與仲尼菜色陳·蔡, 孟軻困於齊·梁同乎哉 !

 故武王以仁義伐紂而王, 伯夷餓不食周粟;衛靈公問陳, 而孔子不答; 

 梁惠王謀欲攻趙, 孟軻稱大王去邠.  此豈有意阿世俗苟合而已哉! 持方枘欲內圜鑿, 其能入乎 ?  
 (기유제후견존례여차, 개여중니채색진·채, 맹가곤어제·량동호재 !

 고무왕이인의벌주이왕, 백이아불식주속;위령공문진, 이공자불답;   

 양혜왕모욕공조, 맹가칭대왕거빈.  차개유의아세속구합이이재! 지방병욕내환착, 기능입호 ? )

 

 [그가 제후들을 유세하며 다닐 때 제후들에게 받은 존경과 예우가 이와 같았으니,  

 어찌 옛날 '공자'가 진나라와 채나라에서 굶주림에 시달리고,
 '맹자'가 제나라와 양나라에서 곤란을 겪은 일과 같다고 할 수 있겠는가 !

 그런 까닭에 주'무왕'이 인의로써 은나라 '주'를 정벌하여 왕이 되었으나,   

 이를 반대한 '백이'는 주나라 곡식을 먹지 않고 수양산에 들어가 굶어 죽었으며 ;
 위'영공'이 군사에 관한 병법을 물었을 때 '공자'는 대답하지 않았으며 ;   

 양'혜왕'이 조나라를 공격하기 위해 그 계책을 묻자, '맹자'는 옛날 주나라 '태왕'이 "빈" 땅을 떠난 것을 

 ​칭송하는 것으로 대답하였다. 이러한 일들이 어찌 세속에 아첨하며 구차하게 영합하려는 뜻이 있어서였겠는가 ?

 네모난 장부를 둥근 구멍에 넣으려고 하니 안으로 들어갈 수 있겠는가 ? ] 

 

 或曰, 伊尹負鼎而勉湯以王, 百里奚飯牛車下, 而繆公用霸, 作先合, 然後引之大道.  

 騶衍其言雖不軌, 儻亦有牛鼎之意乎 ?
 (혹왈, 이윤부정이면탕이왕, 백리해반우거하, 이목공용패, 작선합, 연후인지대도.   

 추연기언수불궤, 당역유우정지의호 ? )


 [어떤 사람이 말하기를 '이윤'은 노예에서 솥을 등에 짊어지고 잉신의 신분으로 따라 갔다가 '탕'에게 등용되어

 권면하여 '탕'을 왕이 되도록 하였으며, '백리해'는 수레 밑에서 희생에 쓸 소에 꼴을 먹이다가 진'목공'에게 

 등용되어 그를 패자로 만들었으니, 이는 먼저 상대방의 뜻에 영합한 이후에 그를 대도로 인도한 것이라고 했다. 

 '추연'의 말은 비록 일반적인 규범에서 벗어나기는 했지만 그가 품고 있는 뜻 역시 '백리해'가 소를 먹인 것이나

 '이윤'이 솥을 짊어진 것과 뜻이 같지 않았겠는가 ! ] 

 

 自騶衍與齊之稷下先生, 如淳于髡 · 慎到 · 環淵 · 接子 · 田駢 · 騶奭之徒,  

 各著書言治亂之事, 以干世主, 豈可勝道哉 !
 (자추연여제지직하선생, 여순우곤 · 신도 · 환연 · 접자 · 전병 · 추석지도,    

 각저서언치란지사, 이간세주, 개가승도재 ! )


 ['추연'과 함께 제나라 '선왕'때 직하의 학사를 지낸 '순우곤', '신도', '환연', '접자', '전병', '추석'과 같은 부류의

 학자들이 각자 글을 지어 혼란한 세상을 다스리는 일들을 논술하여 이로써 당시의 군주들에게 읽혀지기를

 간구하였으니, 이 어찌 이루 다 말할 수 있겠는가 ? ] 

 

 淳于髡, 齊人也.  博聞彊記, 學無所主.  其諫說, 慕晏嬰之爲人也, 然而承意觀色爲務.   

 客有見髡於梁惠王, 惠王屏左右, 獨坐而再見之, 終無言也.  
 (순우곤, 제인야.  박문강기, 학무소주.  기간세, 모안영지위인야, 연이승의관색위무. 

 객유견곤어양혜왕, 혜왕병좌우, 독좌이재견지, 종무언야.)


 ['순우곤'은 제나라 사람이다.  그는 견문이 박식하고 기억력이 뛰어났으나 학문에 주된 견해가 없었다.  

 그의 간언과 유세를 보면 '안영'의 사람됨을 사모하였으나 상대방의 뜻을 이어받고 안색을 살피는 데만 힘썼다. 

 어느 식객이 '순우곤'에게 양혜왕의 접견을 주선해 주었다.  혜왕이 좌우의 신하들을 물리치고 혼자 앉아

 두 번이나 그를 보았지만 '순우곤'은 끝내 아무 말을 하지 않았다.] 

 

 惠王怪之, 以讓客曰:「 子之稱淳于先生, 管·晏不及, 及見寡人, 寡人未有得也.  

 豈寡人不足爲言邪? 何故哉 ? 」 
 (혜왕괴지, 이양객왈:「 자지칭순우선생, 관·안불급, 급견과인, 과인미유득야.  

 개과인불족위언야? 하고재 ? 」)


 [혜왕이 이를 괴이하게 여기고, 소개한 식객을 꾸짖으며 말하기를 : " 그대가 '순우곤' 선생은 '관중'과 '안영'도

 이에 미치지 못한다고 칭찬하여, 과인이 그의 접견을 허락했지만 그에게서 얻은 것이 없었다. 

 그를 상대하여 말하기에 과인이 부족하다고 여기기 때문인가 ?   이것이 무슨 까닭인가 ? "라고 하자.] 

  
 客以謂髡.  髡曰:「 固也.  吾前見王, 王志在驅逐;後復見王, 王志在音聲 ; 吾是以默然. 」
 客具以報王, 王大駭曰:「 嗟乎,  淳于先生誠聖人也! 前淳于先生之來, 人有獻善馬者,

 寡人未及視, 會先生至. 後先生之來, 人有獻謳者, 未及試, 亦會先生來. 

 寡人雖屏人, 然私心在彼, 有之.」  
 (객이위곤.  곤왈 : 「고야.  오전현왕, 왕지재구축 ; 후부현왕, 왕지재음성 ; 오시이묵연. 」

 객구이보왕, 왕대해왈:「 차호,  순우선생성성인야! 

 전순우선생지래, 인유헌선마자, 과인미급시, 회선생지. 후선생지래, 인유헌구자,

 미급시, 역회선생래.  과인수병인, 연사심재피, 유지.」)

 

 [식객이 혜왕의 말을 전하자 '순우곤'이 말하기를 : " 그렇습니다.  제가 전에 왕을 뵈었을 때, 

 왕의 뜻은 달리는 말에 있었습니다. 뒤에 다시 왕을 뵈오니 왕의 뜻은 아름다운 음악소리에 있었습니다.

 그래서 제가 침묵하였던 것입니다 "라고 하였다. 식객이 왕에게 자세히 보고하자, 혜왕이 매우 놀라 말하기를 :

 " 아 !  진실로 '순우곤' 선생이야말로 성인이로다 ! 전에 순우곤 선생이 왔을 때에 어떤 사람이 

 좋은 말을 바쳤는데, 과인이 미처 그 말을 보기도 전에 선생이 도착했소.  

 뒤에 다시 선생이 왔을 때에는 어떤 사람이 노래 잘하는 사람을 소개하였는데 그를 시험해보기도 전에 

 역시 선생이 도착했었소. 과인이 비록 사람들을 물리치기는 했지만 내 마음은 그것들에 있었으니, 

 바로 그런 일로 인해 말을 하지 않았던 것이었구려. "라고 하였다.]  

 

 後淳于髡見, 壹語連三日三夜無倦.  惠王欲以卿相位待之, 髡因謝去.    

 於是送以安車駕駟, 束帛加璧, 黃金百鎰.  終身不仕.
 (후순우곤견, 일어연삼일삼야무권.  혜왕욕이경상위대지, 곤인사거.   

 어시송이안거가사, 속백가벽, 황금백일.  종신불사.)


 [그 후에 '순우곤'이 왕을 뵙고 한 번 이야기를 꺼내자 3일 밤낮을 계속해도 '혜왕'은 결코 싫어하거나   

 피곤해하는 기색이 없었다. '혜왕'이 경상 지위로 그를 대우하려고 하였으나 '순우곤'은 사양하고 떠났다. 

 그러자 '혜왕'은 '순우곤'을 환송하면서 4마리의 말이 끄는 호화로운 휘장이 쳐진 수레에 그를 태우고 

 비단과 벽옥 및 황금 100일을 하사하였다.  '순우곤'은 죽을 때까지 벼슬을 하지 않았다.] 

 

 慎到, 趙人.  田駢·接子, 齊人.  環淵, 楚人.  皆學黃老道德之術, 因發明序其指意.   

 故慎到著十二論, 環淵著上下篇, 而田駢·接子皆有所論焉.
 (신도, 조인.  전병·접자, 제인.  환연, 초인.  개학황노도덕지술, 인발명서기지의. 

 고신도저십이론, 환연저상하편, 이전병· 접자개유소논언.)


 ['신도'는 조나라 사람이다.  '전병'과 '접자'는 제나라 사람이다.  '환연'은 초나라 사람이다. 
 모두 '황제'의 황학과 '노자'의 도덕에 관한 학술을 배워 그 뜻을 발휘하고 상세히 설명하였다.
 그래서 '신도'가 12편의 이론을 저술하고, '환연'이 상, 하 편을 저술하였으며,  

 '전병'과 '접자'도 모두 서술한 바가 있었다.] 

 

 騶奭者, 齊諸騶子, 亦頗采騶衍之術以紀文.  於是齊王嘉之, 自如淳于髡以下,  

 皆命曰列大夫, 爲開第康莊之衢, 高門大屋, 尊寵之.  覽天下諸侯賓客, 言齊能致天下賢士也.
 (추석자, 제제추자, 역파채추연지술이기문.  어시제왕가지, 자여순우곤이하,  

 개명왈열대부,위개제강장지구, 고문대옥, 존총지.  람천하제후빈객, 언제능치천하현사야.)


 ['추석'은 제나라의 여러 추자 가운데 한 명으로, 역시 비교적 많은 부분에서 '추연'의 학설을 채택하여 

 글을 지었다. 제나라 왕이 좋아하여 '순우곤'과 그 이하 여러 학자들을 모두 열대부라는 작위를 내리고,

 그들을 위하여 번화한 거리에 저택을 짓고 높은 문과 커다란 집에 살게 하면서 그들을 존경하고 총애했다.
 그리고는 이러한 일들을 천하의 제후들과 빈객들에게 보여서 제나라는 천하의 어진 선비들을 초빙해서  

 높이 받들고 있다고 말하게 하였다. ] 

 

 荀卿, 趙人.  年五十始來游學於齊.  騶衍之術迂大而閎辯;奭也文具難施; 

 淳于髡久與處, 時有得善言.  故齊人頌曰:「談天衍, 雕龍奭, 炙轂過髡.」
 (순경, 조인.  년오십시래유학어제.  추연지술우대이굉변;석야문구난시; 

 순우곤구여처, 시유득선언.  고제인송왈:「담천연, 조룡석, 자곡과곤.」)


 ['순경'은 조나라 사람이다.  그의 나이 50세에 비로소 제나라에 와서 학설을 유세했다. 

 '추연'의 학술은 굽고 크게 과장되어 웅변적이었으며 ; '추석'도 문장은 좋으나 시행되기가 어려웠고 ;  

 '순우곤'과 오랫동안 함께 있으면 때때로 훌륭한 글을 얻을 수 있었다. 
 그래서 제나라 사람들이 이들을 칭송하며 말하기를 :  " 하늘을 말하는 자는 '추연'이고,    

 문장에 용을 새기는 자는 '추석'이며, 지혜가 끝없이 흘러나오는 사람은 '순우곤'이다. "라고 하였다.]  

 

 田駢之屬皆已死齊襄王時, 而荀卿最爲老師.  齊尚脩列大夫之缺, 而荀卿三爲祭酒焉.   

 齊人或讒荀卿, 荀卿乃適楚, 而春申君以爲蘭陵令.
 (전병지속개이사제양왕시, 이순경최위로사.  제상수열대부지결, 이순경삼위제주언. 

 제인혹참순경, 순경내적초, 이춘신군이위란릉령.)


 [제'양왕' 때에 '전병'과 그 부류들이 모두 죽자,  '순경'이 가장 지위가 높은 스승이었다.   

 제나라에서는 여전히 열대부에 결원이 생기면 보충하였는데, '순경'은 3차례나 직하의 제주가 되었다.   

 어떤 제나라 사람의 모함을 받은 '순경'이 초나라로 가자 '춘신군'은 그를 난릉령으로 삼았다.] 

 

 春申君死而荀卿廢, 因家蘭陵.  李斯嘗爲弟子, 已而相秦.   

 荀卿嫉濁世之政, 亡國亂君相屬, 不遂大道而營於巫祝, 信禨祥, 鄙儒小拘, 如莊周等又猾稽亂俗,

 於是推儒·墨·道德之行事興壞, 序列著數萬言而卒.  因葬蘭陵.
 (춘신군사이순경폐, 인가란릉.  이사상위제자, 이이상진.   

 순경질탁세지정, 망국란군상속, 불수대도이영어무축, 신기상, 비유소구, 여장주등우활계란속, 
 어시추유·묵·도덕지행사흥괴, 서열저수만언이졸.  인장란릉.)


 ['춘신군'이 죽자 '순경'은 직하의 제주직에서 파면되었으나 그는 계속 "난릉"에 머물러 살았다.   

 일찍이 '순경'의 제자였던 '이사'는 후에 진나라로 들어가 재상이 되었다.
 '순경'은 세상에 혼탁한 정치가 행해지는 것과, 나라를 망치는 혼미한 군주가 계속 왕위에 올라 대도를 

 따르지 않고 무당의 기원에 미혹되고 길흉의 징조를 믿는 것과, 저속한 유자들이 작은 일에 연연해하는 것과,

 더불어 '장주'(장자)와 같은 무리들이 언변에 능하여 세속을 어지럽히는 것 등을 싫어 하였다. 

 ​이에 '유가', '묵가', '도가'가 행한 성취와 실패를 고찰한 후 그것들을 차례로 정리하여

 수만 자의 글자로 된 저서를 남기고 죽었다.  그는 "난릉"에 묻혔다.] 

   

 而趙亦有公孫龍爲堅白同異之辯, 劇子之言 ; 魏有李悝, 盡地力之教; 

 楚有尸子·長盧; 阿之吁子焉.  自如孟子至于吁子, 世多有其書, 故不論其傳云.
 (이조역유공손룡위견백동이지변, 극자지언 ; 위유이리, 진지력지교; 

 초유시자·장로;아지우자언.  자여맹자지우우자, 세다유기서, 고불논기전운.)


 [조나라에는 이견백파의 지도자 '공손룡'이 있었는데 그는 견백동이(견과 백은 다르다)의 궤변을 제기했다. 

 또 언설에 능한 '극자'가 있었다.  위나라에는 법가의 대표적인 인물 '이회'가 진지력지교를 주장했는데 

 땅의 힘을 잘 이용하여 나라를 부강하게 하자는 설이다. 초나라에는 '시자', '장로'가 있었고 ;

 제나라의 "아읍"에는 '우자'이 있었다.  '맹자'로부터 '우자'에 이르기까지 세상에는 그들의 많은 저술이 알려졌다.

 ​그런 까닭에 그 내용을 논하지는 않겠다.] 

 

 蓋墨翟, 宋之大夫, 善守禦, 爲節用.  或曰並孔子時, 或曰在其後.
 (개묵적, 송지대부, 선수어, 위절용.  혹왈병공자시, 혹왈재기후.)


 ['묵적'은 송나라의 대부로서 묵가 사상의 창시자이며 수성과 방어의 전술에 능하였고 근검절약과 현인에 대한

 존중 등을 강조하였다. 어떤 사람은 그를 '공자'와 같은 때의 사람이라고 말하기도 하고,   

 어떤 사람은 '공자'보다 뒤에 살았던 사람이라고도 하였다.]  

 

 

 

※  原 文 .    【 中國哲學書電子化計劃 .   筆寫本 】

                                 

 

    原 文   飜 譯 者        德庤 / 李   斗 振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