史記 世家(사기세가)/1. 吳太伯世家

第 一. 吳太伯世家

덕치/이두진 2021. 6. 28. 16:40

 

        史記 世家

 

 

   第 一.  吳太伯世家(오태백세가)

 

吳太伯,太伯弟仲雍,皆周太王之子,而王季歷之兄也.

季歷賢,而有聖子昌,太王欲立季歷以及昌,於是太佰、仲雍二人乃奔荊蠻,文身斷發,

示不可用,以避季歷.  季歷果立,是為王季,而昌為文王. 太伯之奔荊蠻,自號句吳.

荊蠻義之,從而歸之千餘家,立為吳太伯.  太伯卒,無子,弟仲雍立,是為吳仲雍.

仲雍卒,子季簡立.  季簡卒,子叔達立.  叔達卒,子周章立.

[오태백(吳太伯)과 그의 동생 중옹(仲雍)은 모두 주 태왕(周太王)의 아들이며, 왕(王) 계력(季歷)의 형이다.
계력은 현명했으며, 더욱이 그에게는 덕성과 지혜로 지극히 훌륭한 희창(姬昌)이라는 아들이 있었다.
태왕이 계력을 옹립하고 장차 희창에게 왕위를 전해주려고 하자,
태백과 중옹 두 사람은 형만(荊蠻) 지방으로 도망가서 몸에 문신을 새기고 머리를 잘라 임금이 될 수 없다는 것을

표시함으로써 계력을 피했다. 계력이 과연 왕위에 오르니 그가 바로 왕계(王季)이고, 희창이 바로 문왕(文王)이다.

태백은 형만으로 도망가서 스스로 왕위에 올라 구오(句吳)라고 칭했다.
형만 사람들은 그를 앙모(仰慕)해 그를 따르는 자가 1천여 호(戶)가 되었으며 그를 오 태백에 옹립했다.
태백이 죽은 뒤 아들이 없어 동생 중옹이 왕위에 오르니 그가 바로 오중옹(吳仲雍)이다.

중옹이 죽은 뒤 그 아들 계간(季簡)이 왕위에 올랐고,
계간이 죽은 뒤에는 아들 숙달(叔達)이 왕위에 올랐다. 숙달이 죽은 뒤에 다시 주장(周章)이 왕위를 이었다.]

 

是時周武王克殷,求太伯、仲雍之後,得周章。周章已君吳,因而封之。

乃封周章弟虞仲於周之北故夏虛,是為虞仲,列為諸侯.  周章卒,子熊遂立,熊遂卒,子柯相立.
柯相卒,子彊鳩夷立.  彊鳩夷卒,子餘橋疑吾立.  
餘橋疑吾卒, 子柯盧立.  柯盧卒,子周繇立.

周繇卒,子屈羽立.  屈羽卒,子夷吾立.  夷吾卒,子禽處立.

禽處卒,子轉立.  轉卒,子頗高立.  頗高卒,子句卑立. 是時晉獻公滅周北虞公,以開晉伐虢也.

句卑卒,子去齊立.  去齊卒,子壽夢立.  壽夢立而吳始益大,稱王.

[이때 주 무왕(周武王)은 은(殷)나라를 멸망시키고 태백과 중옹의 후손을 찾다가 주장을 찾게 되었다.
그때 주장은 이미 오나라의 군주가 되어 있었으므로 그를 오(吳)나라에 봉했다.

그리고 주장의 동생 우중(虞仲)을 주 왕실의 도성(都城) 북쪽에 위치한 옛 하(夏)나라의 도읍지에 봉해,

우(虞)나라를 세우게 함으로써, 우중은 비로소 제후의 반열에 오르게 되었다.

주장이 세상을 떠난 뒤 아들 웅수(熊遂)가 왕위에 올랐다.

웅수가 세상을 떠난 뒤에는 그 아들 가상(柯相)이 왕위에 올랐다.
가상이 세상을 떠난 뒤 그 아들 강구이(彊鳩夷)가 왕위에 올랐다.

강구이가 죽은 뒤에는 여교의오(餘橋疑吾)가 왕위에 올랐다.
여교의오가 죽은 뒤에는 가로(柯盧)가 왕위에 올랐다.

가로가 죽은 뒤에는 주요(周繇)가 왕위에 올랐다. 주요가 죽은 뒤에는 굴우(屈羽)가 왕위에 올랐다.
굴우가 죽은 뒤에는 이오(夷吾)가 왕위에 올랐다. 이오가 죽은 뒤에는 금거(禽處)가 왕위에 올랐다.

금거가 죽은 뒤에는 전(轉)이 왕위에 올랐다.
전이 죽은 뒤에는 파고(頗高)가 왕위에 올랐다. 파고가 죽은 뒤에는 구비(句卑)가 왕위에 올랐다.
이 시기에 진 헌공(晉獻公)은 주 왕실 도성의 북쪽에 있던 우공(虞公)을 멸망시킴으로써

진나라가 괵(虢)나라를 공격할 수 있는 통로를 개척했다.

구비가 죽은 후에 거제(去齊)가 왕위를 이었으며 거제가 세상을 떠난 뒤에 아들 수몽(壽夢)이 왕위에 올랐다.

수몽이 즉위한 후에 오나라는 점점 강대해지기 시작했고 스스로 왕이라고 칭했다.]

自太伯作吳,五世而武王克殷,封其後為二:其一虞,在中國;其一吳,在夷蠻.

十二世而晉滅中國之虞.  中國之虞滅二世,而夷蠻之吳興.  大凡從太伯至壽夢十九世.

王壽夢二年, 楚之亡大夫申公巫臣怨楚將子反而奔晉, 自晉使吳,教吳用兵乘車, 令其子為吳行人, 吳於是始通於中國.  

吳伐楚. 十六年,楚共王伐吳,至衡山.

二十五年,王壽夢卒.  壽夢有子四人,長曰諸樊,次曰餘祭,次曰餘眛,次曰季札.

季札賢,而壽夢欲立之,季札讓不可,於是乃立長子諸樊,攝行事當國.

[태백이 오나라를 세운 이래 5대 째가 되어 주무왕이 은나라를 멸망시키고 후손에게 두 개의 나라를 봉해 주었다.

하나는 우(虞)나라로 중원(中原) 지역에 자리잡고 있었고, 하나는 오(吳)나라로 이만(夷蠻) 지역에 자리잡고 있었다.
12대가 지나 진(晉)나라가 중원 지역에 있던 우나라를 멸망시켰다.

중원 지역의 우나라가 멸망한 지 2대가 지나서 이만(夷蛮) 지역의 오나라가 흥성했다.

태백에서 수몽까지는 모두 19대가 있었다.
오왕 수몽 2년에 국외로 도망갔던 초(楚)나라의 대부 신공 무신(申公巫臣)이 초 나라 장수 자반(子反)을 원망하며

진(晉)나라로 망명했고 진나라의 사신으로 오나라에 왔다.
오나라 사람들에게 전쟁하는 법과 전거(戰車) 모는 법을 가르쳐주었는데,

오나라는 그의 아들로 하여금 오나라의 행인(行人)의 직책을 맡게 했다.
오나라는 이로써 중원의 각국과 왕래하기 시작했다. 오나라가 초 나라를 공격했다.

16년에 초 공왕(楚共王)이 오나라를 정벌해 형산(衡山)에 이르렀다.
25년에 오왕 수몽이 세상을 떠났다. 수몽에게는 네 아들이 있었는데 맏아들은 이름이 제번(諸樊)이었고,

둘째는 여제(餘祭), 셋째는 여말, 넷째는 계찰(季札)이었다.

계찰이 현명하고 재능이 있어서 수몽은 그에게 왕위를 물려주려고 했으나, 계찰이 적절하지 못하다고 사양하자,

맏아들 제번을 옹립해 대리로 행정업무를 집행하게 하고 국가권력을 장악하게 했다.]

王諸樊元年,諸樊已除喪,讓位季札.

季札謝曰:「曹宣公之卒也,諸侯與曹人不義曹君,將立子臧,子臧去之,以成曹君,

君子曰『能守節矣.』 君義嗣,誰敢干君!有國,非吾節也.  札雖不材,願附於子臧之義.」

吳人固立季札,季札棄其室而耕,乃捨之.  秋,吳伐楚,楚敗我師.

[오왕 제번 원년(元年)에 제번은 이미 탈상을 하고 왕위를 계찰에게 물려주려고 했다.
계찰은 사양하며 말하기를 : “조선공(曺宣公)이 죽었을 때,

각국 제후와 조나라 국민들은 새로운 왕인 조성공(曺成公)이 불의하다고 여겨 자장(子藏)을 옹립하려고 했으나,

자장은 조나라를 떠남으로써 조성공이 계속 왕위에 머물러 있게 했습니다.

군자(君子)가 말하기를 ‘자장은 능히 절개를 지킬 수 있었다’라고 했습니다.
당신은 합법적인 계승인인데 누가 감히 당신을 거역하겠습니까! 나라를 다스리는 것은 저의 뜻이 아닙니다.
제가 비록 재능이 없지만 자장의 절개를 따르기를 원합니다.”라고 말했다.
그러나 오나라 사람들이 단호하게 계찰을 왕위에 세우려고 하자,

계찰은 가족을 떠나서 밭을 갈며 거절의 뜻을 분명히 하니, 비로소 더 이상 그에게 강요하지 않았다.
가을에 오나라가 초나라를 공격하였으나 초나라가 오나라 군대를 물리쳤다.]

四年,晉平公初立.

十三年,王諸樊卒.  有命授弟餘祭,欲傳以次,必致國於季札而止,以稱先王壽夢之意,

且嘉季札之義,兄弟皆欲致國,令以漸至焉.  季札封於延陵,故號曰延陵季子.

[4년에 진 평공(晉平公)이 즉위했다.
13년에 오왕 제번이 세상을 떠나며 동생 여제에게 왕위를 물려준다는 유언을 남겼는데,

이것은 형이 동생에게 서열에 의해서 차례대로 왕위를 물려주어 반드시 계찰에게 이르도록 하려는 것으로,

그렇게 하는 것이 선왕(先王) 수몽의 유지(遺志)를 받드는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또 형제들도 계찰의 높은 인격과 굳은 절개를 칭찬하며 모두 차례로 집권하고 왕위를 넘겨주어 계찰에게까지

차례가 오도록 했다.  계찰이 연릉(延陵)에 봉해졌기 때문에 그를 연릉계자(延陵季子)라고 부른다.]

 

王餘祭三年,齊相慶封有罪,自齊來奔吳. 吳予慶封朱方之縣,以為奉邑,以女妻之,富於在齊.

四年, 吳使季札聘於魯, 請觀周樂. 為歌周南、召南. 曰:「美哉,始基之矣, 猶未也. 然勤而不怨.」

[오왕 여제(餘祭) 3년에 제(齊)나라의 대부(大夫) 경봉(慶封)이 죄를 짓고 제나라에서 오나라로 도망을 왔다.
오왕은 그에게 주방현(朱方縣)을 식읍(食邑)으로 내리고,

또 딸을 그에게 출가시켜 그가 제나라에 있을 때보다 더욱 부유하게 해주었다.
4년에 오나라가 계찰을 노(魯)나라에 사신으로 파견했는데, 계찰이 주(周) 왕실의 음악을 청해 들었다.
노나라 악사(樂師)들이 그를 위해서 「주남(周南)」과 「소남(召南)」을 노래하자,

계찰이 듣고 말하기를 “아름답다. 기초를 다지기 시작했으나 아직 높은 경지에는 이르지 못했다.

그러나 백성들의 근면하고 원망하지 않는 목소리를 잘 나타냈다 ”라고 하였다.]

歌邶、鄘、衛. 曰:「美哉, 淵乎,憂而不困者也. 吾聞衛康叔、武公之德如是,是其衛風乎?」

歌王. 曰:「美哉,思而不懼,其周之東乎?」

歌鄭. 曰:「其細已甚,民不堪也,是其先亡乎?」

歌齊. 曰:「美哉,泱泱乎大風也哉.  表東海者,其太公乎?國未可量也.」

歌豳. 曰:「美哉,蕩蕩乎,樂而不淫,其周公之東乎?」

歌秦. 曰:「此之謂夏聲。夫能夏則大,大之至也,其周之舊乎?」

歌魏. 曰:「美哉,沨沨乎,大而寬,儉而易,行以德輔,此則盟主也.」

歌唐. 曰:「思深哉,其有陶唐氏之遺風乎?不然,何憂之遠也?非令德之後,誰能若是!」

歌陳. 曰:「國無主,其能久乎?」自鄶以下,無譏焉.

[다음에 「패풍(邶風)」, 「용풍(鄘風)」, 「위풍(衛風)」을 노래하자,

말하기를 : “아름답다. 음조가 심원하며 근심으로 있으나 곤궁하지는 않다.

내가 듣기로는 위 강숙(衛康叔)과 무공(武公)의 덕행이 이와 같다고 하는데

이는 아마도 위(衛)나라의 악곡일 것이다”라고 하였다.
「왕풍(王風)」을 노래하자, 말하기를 : “아름답다. 근심 속에서도 두려움이 없으니

이는 아마도 주(周) 왕실이 동천(東遷)한 이후의 악곡일 것이다”라고 하였다. 
「정풍(鄭風)」을 노래하자, 말하기를 : “정서가 매우 쇠약하니 백성이 감당하지 못함을 설명하고 있다.

정나라가 아마 제일 먼저 망하지 않았겠는가?”라고 하였다. 
「제풍(齊風)」을 노래하자, 말하기를 : “아름답다. 웅대해 대국(大國)의 기상이 있다.

마치 동해(東海)를 상징하는 것 같으니 아마도 태공(太公)의 국가일 것이다.
그 앞날을 헤아릴 수는 없다.”라고 하였다.
「빈풍(豳風)」을 노래하자, 말하기를 : “아름답다. 기풍이 넓고 크며, 즐거워하면서도 지나치지 않으니

아마도 주공(周公)이 동쪽을 정벌할 때의 음악일 것이다”라고 하였다.
「진풍(秦風)」을 노래하자, 말하기를 : “이것을 중국의 음악이라고 말할 수 있다.

능히 중국화한다면 웅대해져서 지극한 경지에 이를 것이니,

이는 아마도 주 왕실 옛터의 음악일 것이다”라고 하였다.
「위풍(魏風)」을 노래하자, 말하기를 : "아름답다. 가락의 고저가 완만하고, 호방하면서도 부드럽고,

간략하면서도 쉽게 행하니, 덕(德)으로써 이처럼 나라를 다스린다면 현명한 군주가 될 수 있을 것이다”라고 하였다.

「당풍(唐風)」을 노래하자, 말하기를 : “근심이 깊다. 아마도 도당씨(陶唐氏)의 유풍(遺風)이 있기 때문일 것이다.

그렇지 않다면 어찌 생각이 이렇게 깊을 수 있겠는가?
미덕(美德)을 가진 자의 후손이 아니라면 누가 능히 이와 같을 수 있겠는가!”라고 하였다.
「진풍(陳風)」을 노래하자, 말하기를 : “나라에 임금이 없으니 어찌 오래갈 수 있겠는가?”라고 말하고,

「회풍(鄶風)」 이하의 음악에 대해서는 더 이상 논평하지 않았다.]

 

歌小雅. 曰:「美哉,思而不貳,怨而不言,其周德之衰乎?猶有先王之遺民也.」

歌大雅. 曰:「廣哉,熙熙乎,曲而有直體,其文王之德乎?」

歌頌. 曰:「至矣哉,直而不倨,曲而不詘,近而不偪遠而不攜,而遷不淫,復而不厭,

        哀而不愁,樂而不荒,  用而不匱, 廣而不宣,施而不費,取而不貪, 處而不底,行而不流.

        五聲和,八風平,節有度,守有序,盛德之所同也.」

[「소아(小雅)」를 노래하자, 말하기를 : "아름답다. 애조를 띠고 있으나 반역할 마음은 없고 원망을 하면서도

직접 말하지 않았으니, 아마도 주 왕조의 덕행이 쇠미했을 때의 음악일 것이다.

아직 선왕의 유민이 있기 때문일 것이다.”라고 하였다.

「대아(大雅)」를 노래하자, 말하기를 : “광대하다. 화목하다. 소리가 완곡하면서도 강건하니

아마도 문왕(文王)의 덕행 때문일 것이다”라 했다.
「송(頌)」을 노래하자,말하기를 : “음악의 극치에 도달했다. 곧으면서도 오만하지 않고,

굽은 듯하면서도 굴복하지 않고, 가까이하면서도 핍박하지 않고 멀리하면서도 마음이 떠나 있지 않고,

변화가 있으나 사악하거나 문란하지 않고, 반복해도 싫증나지 않고, 구슬프나 근심하지 않고,

즐거워도 방종하지 않고, 사용해도 모자라지 않고, 광대해도 드러나지 않고, 은혜를 베풀어도 낭비하지 않고,

구하더라도 욕심을 드러내지 않고, 멈추더라도 아주 정체하지는 않고, 활발하지만 방탕하지 않다.

오성(五聲)이 조화를 이루고 팔풍(八風)이 조화를 이루어 음절에 법도가 있으며 선율에 규칙이 있으니,

이러한 것들은 성현의 음악에 모두 공통적으로 들어 있다.”라고 하였다.]

見舞象箾、南籥者,曰:「美哉,猶有感.」

見舞大武,曰:「美哉,周之盛也其若此乎?」

見舞韶護者,曰:「聖人之弘也,猶有慚德,聖人之難也!」

見舞大夏,曰:「美哉,勤而不德!非禹其誰能及之?」

見舞招箾,曰:「德至矣哉,大矣,如天之無不燾也,如地之無不載也,雖甚盛德,無以加矣.

​                      觀止矣,若有他樂,吾不敢觀.」

["상소(象箾)”, “남약(南籥)”의 춤을 보고, 말하기를 : “아름답다. 그러나 여운(餘韻)이 있도다”라고 하였다.
“대무(大武)”의 춤을 보고, 말하기를 : “아름답다. 주 왕조의 흥성이 바로 이와 같은 것이다”라고 하였다.

“소호(韶護)”의 춤을 보고, 말하기를 : “그렇게 위대한 성인도 덕행의 부족함을 느끼는 것 같다.

성인이 된다는 것은 정말 쉽지 않다!”라고 하였다.

“대하(大夏)”의 춤을 보고, 말하기를 : “아름답다. 힘들여 일하고도 스스로 은덕이 있다고 여기지 않으니,

우(禹)가 아니면 누가 능히 그렇게 하겠는가?”라고 하였다.

“초소(招箾)”의 춤을 보고, 말하기를 : “덕행이 지극한 곳에 이르렀다. 위대하다.

마치 하늘처럼 감싸지 않는 것이 없고 땅처럼 담지 않는 것이 없는 것과 같다.
덕행이 극에 다다랐으니 더 이상 보탤 수가 없다. 여기까지 보고 이미 만족했으니,

다른 음악이 있더라도 나는 감히 더 이상 보기를 청하지 않겠다.”라고 하였다.]

 

去魯,遂使齊.

說晏平仲曰:「子速納邑與政. 無邑無政,乃免於難. 齊國之政將有所歸;未得所歸,難未息也.」

故晏子因陳桓子以納政與邑,是以免於欒高之難.  去齊,使於鄭。見子產,如舊交.

謂子產曰:「鄭之執政侈,難將至矣,政必及子. 子為政,慎以禮。不然,鄭國將敗.」
去鄭,適衛. 說蘧瑗、史狗、史、公子荊、公叔發、公子朝曰:「衛多君子,未有患也.」

自衛如晉, 將舍於宿, 聞鐘聲,曰:「異哉!吾聞之, 辯而不德, 必加於戮.  夫子獲罪於君以在此,

懼猶不足,而又可以畔乎? 夫子之在此,猶燕之巢于幕也. 君在殯而可以樂乎?」遂去之.

文子聞之,終身不聽琴瑟。適晉,說趙文子、韓宣子、魏獻子曰:「晉國其萃於三家乎!」

將去,謂叔向曰:「吾子勉之!君侈而多良,大夫皆富,政將在三家.  吾子直,必思自免於難.」

[계찰이 노나라를 떠나 다시 제나라에 사신으로 갔다.

그가 안평중(晏平仲)에게 권고하기를, : “당신은 빨리 봉읍(封邑)과 정권을 돌려주시오.
봉읍과 정권이 없어야만 비로소 재난을 피할 수 있을 것이오. 제나라의 정권은 장차 귀속될 곳이 있을 것이니

귀속되지 않으면 재난이 그치지 않을 것이오.”라고 하였다.
안자(晏子)는 진환자(陳桓子)를 통해서 정권과 봉읍을 돌려줌으로써 난씨(欒氏)와 고씨(高氏)가 일으킨 재난을

피할 수 있었다. 계찰이 제나라를 떠나 정(鄭)나라에 사신으로 갔다.

자산(子産)을 보니 마치 옛날부터 아는 사람 같아서 자산에게 말하기를 : “정나라 집권자의 사치로 재난이

곧 닥쳐서 반드시 정권이 당신에게 돌아올 것이니, 당신은 국가의 예법에 따라 신중히 국정을 처리해야 하오.

그렇지 않으면 정나라는 장차 몰락할 것이오.”라고 하였다.

그리고는 정나라를 떠나 위(衛)나라로 갔다.
거원(蘧瑗), 사구(史狗), 사추(史鰌), 공자(公子) 형(荊), 공숙발(公叔發), 공자 조(朝)에게 말하기를 :

“위나라에는 군자가 많으니 재앙이 없을 것이다.”라고 하였다.
계찰이 위나라에서 진(晉)나라로 가서 숙읍(宿邑)에 거처를 마련하려다 종소리를 듣고 말하기를 : 

“이상하다! 내가 듣기로 말재주가 있으나 덕행이 없으면 반드시 살육을 당한다고 했다.

그런데 당신은 왕에게 죄를 짓고도 아직 이곳에 머물러 있고, 두려워해도 부족한데 아직도 향락을 누리고 있는가?
당신이 이곳에 있는 것은 마치 제비가 장막 위에 둥지를 튼 것과 같다.

왕의 관을 아직 안장(安葬)도 하지 않았는데 어찌 즐길 수 있는가?”라고 말하고, 곧 그곳을 떠났다.

손문자(孫文子)는 이 말을 듣고 평생 동안 음악을 듣지 않았다.

진(晉)나라에 도착해서 조문자(趙文子), 한선자(韓宣子), 위헌자(魏獻子)에게 말하기를 :

“진나라의 정권은 장차 당신들 세 가문(家門)에 집중될 것이오.”라고 하였다.
그가 진나라를 떠날 때 숙향(叔向)에게 말하기를 : “당신은 노력하시오!

왕이 사치하나 오히려 어진 신하가 많고, 대부들이 모두 부유하니 정권은 장차 세 가문에게 돌아갈 것이오.
당신은 사람됨이 정직하니 반드시 스스로 재앙을 면하게 방법을 강구해야 하오.”라고 하였다.]

季札之初使,北過徐君.  徐君好季札劍,口弗敢言.  季札心知之,為使上國,未獻.

還至徐,徐君已死,於是乃解其寶劍,系之徐君冢樹而去.
從者曰:「徐君已死,尚誰予乎?」季子曰:「不然. 始吾心已許之,豈以死倍吾心哉!」

[계찰이 처음 사신으로 떠났을 때 오나라의 북쪽으로 올라가는 도중에 서군(徐君)을 알현하게 되었다.
서군은 계찰의 보검(寶劍)을 좋아했으나 감히 입 밖으로 드러낼 수 없었다. 계찰은 속으로 그의 뜻을 알았으나,

사신으로 중원 각 나라를 돌아다녀야 했기 때문에 검을 그에게 증정하지는 않았다.

돌아오는 길에 서(徐)나라에 도착해보니 서군은 이미 죽었다.

이에 계찰은 자신의 보검을 풀어 나무에 걸어 놓고 떠났다.
옆에서 따르는 이가 묻기를 : “서군은 이미 죽었는데 또 누구에게 주는 것입니까?”라고 하자,
계찰이 대답하기를 : “그렇게 말하지 말아라. 나는 처음에 이미 마음속으로 그에게 주기로 결정을 했는데,

그가 죽었다고 해서 내가 어찌 나의 뜻을 바꿀 수 있겠는가?”라고 하였다.]

七年,楚公子圍弒其王夾敖而代立,是為靈王.

十年,楚靈王會諸侯而以伐吳之朱方,以誅齊慶封. 吳亦攻楚,取三邑而去.
十一年,楚伐吳,至雩婁.  十二年,楚復來伐,次於乾谿,楚師敗走.

十七年,王餘祭卒,弟餘眛立.  王餘眛二年,楚公子棄疾弒其君靈王代立焉.

四年,王餘眛卒,欲授弟季札. 季札讓,逃去.

於是吳人曰:「先王有命, 兄卒弟代立, 必致季子. 季子今逃位, 則王餘眛後立. 今卒, 其子當代.」

[​7년, 초나라의 공자(公子) 위(圍)가 초왕 협오(夾敖)를 시해하고 대신 왕이 되었으니,

그가 바로 초영왕(楚靈王)이다.
10년, 초영왕이 제후들을 회합해서 오나라의 주방 지방을 공격해 제나라에서 망명해 온 경봉을 살해했다.

오나라도 초나라를 공격해서 3개의 성읍을 빼앗고 돌아왔다.
11년, 초나라가 오나라의 우루(雩婁)까지 쳐들어왔다.
12년, 초나라가 또 쳐들어와 간계(乾谿)에 주둔하다가 오나라에게 패해서 철수했다.
17년, 오왕 여제가 죽고 동생 여매가 왕위에 올랐다.

오왕 여매 2년, 초나라 공자 기질(棄疾)이 초영왕을 살해하고 스스로 왕이 되었다.
4년, 오왕 여매가 세상을 떠나면서 동생 계찰에게 왕위를 물려주려고 했으나 계찰은 사양하고 도망갔다.
이때 오나라 사람들이 말하기를 : “선왕께서 형이 죽으면 동생이 왕위를 이어받으라고 유언하셨으니,

반드시 계찰에게 왕위를 전해주어야 하지만, 계찰이 현재 도망가서 왕위에 오르려고 하지 않으니,

여매가 마지막 계승자이다. 그러나 이미 그가 죽었으니 그의 아들이 왕위를 이어받아야 마땅하다”라고 하였다.]


乃立王餘眛之子僚為王.

王僚二年,公子光伐楚,敗而亡王舟. 光懼,襲楚,復得王舟而還.

五年,楚之亡臣伍子胥來奔,公子光客之.  公子光者,王諸樊之子也.

常以為吾父兄弟四人,當傳至季子.
季子即不受國,光父先立. 即不傳季子,光當立. 陰納賢士,欲以襲王僚.

八年,吳使公子光伐楚,敗楚師,迎楚故太子建母於居巢以歸. 因北伐,敗陳、蔡之師.

[이에 여매의 아들 요(僚)를 왕으로 옹립했다.
오왕 요(僚) 2년, 공자(公子) 광(光)이 초나라를 공격했다가 싸움에서 지고 선왕이 타던 배를 잃었다.
공자 광은 두려워서 몰래 초나라 군대의 진지로 들어가서 다시 배를 탈취해 왔다.
5년, 초나라로부터 오자서(伍子胥)가 도망와서 투신하니 공자 광은 손님의 예로써 그를 맞이했다.

공자 광은 오왕 제번의 아들로, 항상 말하기를 '선친의 형제가 4명인데 왕위는 마땅히 계찰에게까지 전해져야 한다.

계찰이 만약에 왕위를 계승하지 않겠다면 선친께서 제일 먼저 왕위에 올랐으니,

마땅히 내가 왕이 되어야 한다.”라고 하였다.

그래서 암암리에 현명하고 재능 있는 사람들을 초빙해서 그들을 왕 요를 습격하는데 이용하려고 했다.

8년, 오나라는 공자 광을 파견해서 초나라를 공격해 초나라 군대를 무찌르고,

이전의 초나라 태자 건(建)의 어머니를 거소(居巢)에서 모셔 왔다.

돌아오는 길에 북쪽으로 쳐들어가 진(陳), 채(蔡) 두 나라의 군대를 물리쳤다.]

九年,公子光伐楚,拔居巢、鐘離.
初,楚邊邑卑梁氏之處女與吳邊邑之女爭桑,二女家怒相滅,兩國邊邑長聞之,怒而相攻,

滅吳之邊邑.  吳王怒,故遂伐楚,取兩都而去. 伍子胥之初奔吳,說吳王僚以伐楚之利.

公子光曰:「胥之父兄為僇於楚,欲自報其仇耳. 未見其利.」
於是伍員知光有他志, 乃求勇士專諸, 見之光. 光喜, 乃客伍子胥. 子胥退而耕於野, 以待專諸之事.

十二年冬, 楚平王卒.

[9년, 공자 광은 초나라로 쳐들어가서 거소(居巢), 종리(鍾離) 두 곳을 함락시켰다.

당초 초나라 변경(邊境) 마을 비량(卑梁)의 소녀와 오나라 변경 마을의 여자들은 뽕잎을 따는 일로 다투었는데,

이 때문에 두 집안이 모두 분노해서 서로를 공격했다. 두 나라의 변경을 다스리던 장관들도

이 일을 듣고 분노하여 서로 공격했는데 오나라의 변경 지방이 멸망하게 되었다.

이에 오왕이 분노해서 곧 군대를 파견해 초나라로 쳐들어가 이 두 마을을 점령하고 돌아왔다.
오자서가 처음 오나라에 투신했을 때 초나라를 공격하는 것의 이로운 점을 오왕 요에게 간(諫)하자,
공자 광은 “오자서의 부친과 형이 초 나라 왕에게 살해당해서 그는 자신의 복수를 하려는 것일 뿐이지,

오나라에 좋은 점이 있다고는 볼 수 없다”라고 말했다.  이때에 오자서는 비로소 공자 광이 다른 마음을 품고

있다는 것을 알고는, 곧 전제(專諸)라고 하는 용사(勇士)를 광에게 추천했다.
광은 매우 기뻐해 손님의 예로써 오자서를 접대했다. 오자서는 교외에 은거해 밭을 갈며 전제의 거사를 기다렸다.
12년 겨울, 초 평왕(楚平王)이 세상을 떠났다.]

十三年春, 吳欲因楚喪而伐之, 使公子蓋餘、燭庸以兵圍楚之六、?.

使季札於晉, 以觀諸侯之變. 楚發兵絕吳兵後,吳兵不得還. 於是吳公子光曰:「此時不可失也.」

告專諸曰:「不索何獲!我真王嗣,當立,吾欲求之. 季子雖至,不吾廢也.」
專諸曰:「王僚可殺也. 母老子弱, 而兩公子將兵攻楚, 楚絕其路.

方今吳外困於楚, 而內空無骨鯁之臣, 是無柰我何.」 光曰:「我身,子之身也.」

[13년 봄, 오나라 왕은 초나라가 상(喪)을 치르는 틈을 타서, 공자 개여(蓋餘), 촉용(燭庸)에게 군사를 이끌고

초나라의 육(六)과 첨(灊)을 포위하게 했다. 그리고 계찰을 진나라에 파견해 제후들의 동정을 살피게 했다.

초나라는 군사를 보내어 오나라 군대의 퇴로를 차단하니 오나라 군대는 돌아올 수 없었다.
이때, 오나라 공자 광은 “이 시기를 놓칠 수 없다”라고 하고는,

전제에게 말하기를 : “이때를 놓치면 언제 다시 기회가 올 수 있겠는가?

나는 왕위의 진정한 계승자로 이치대로 하자면 마땅히 내가 왕위에 올라야 하는 것이니,

나는 이 기회에 왕위에 오르려고 한다. 계찰이 돌아온다고 해도 나를 폐하지는 않을 것이다”라고 하자.
이에 전제는 말하기를 : “오나라 왕 요를 죽일 수 있습니다. 그의 모친은 이미 늙었고 아들은 아직 어리며

두 명의 공자는 병사를 이끌고 초나라를 공격하러 갔다가 초나라 군대에 의해 퇴로가 끊겼습니다.

지금 오나라 왕은 밖에서는 초나라의 포위를 받고 조정 내에서는 강직하고 정직한 신하가 없으니

우리를 대항할 방법이 없을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공자 광이 말하기를 : “우리는 일심동체이다. 모든 것을 그대에게 부탁한다.”라고 하였다.]

 

四月丙子,光伏甲士於窟室,而謁王僚飲. 王僚使兵陳於道,自王宮至光之家,門階戶席,

皆王僚之親也,人夾持鈹. 公子光詳為足疾,入于窟室,使專諸置匕首於炙魚之中以進食.

手匕首刺王僚,鈹交於匈,遂弒王僚. 公子光竟代立為王,是為吳王闔廬. 闔廬乃以專諸子為卿.

季子至,曰:「茍先君無廢祀,民人無廢主,社稷有奉,乃吾君也. 吾敢誰怨乎?

哀死事生,以待天命。非我生亂,立者從之,先人之道也.」 復命, 哭僚墓, 復位而待.

吳公子燭庸、蓋餘二人將兵遇圍於楚者, 聞公子光弒王僚自立, 乃以其兵降楚,楚封之於舒.

[4월 병자일(丙子日), 공자 광은 지하실에 무장한 용사들을 매복시켜 놓고 왕 요에게 술을 마시자고 청했다.
왕 요는 병사를 파견해서 왕궁에서 공자 광의 집에 이르는 길에 배치해 놓았고,

대문, 계단, 내문(內門), 좌석에까지 모두 왕 요의 친병으로 하여금 손에 짧은 칼을 들고 호위하게 했다.

공자 광은 발을 다친 것으로 가장해 지하실로 피하고 전제로 하여금 구운 생선의 뱃속에다 비수(匕首)를 숨겨서

상에 올리게 했다. 전제는 생선의 뱃속에서 비수를 꺼내 곧장 왕 요를 찔렀고,

왕 요의 친병들이 짧은 칼로 전제의 가슴을 찔렀으나 결국 왕 요는 살해되었다.

공자 광은 마침내 오나라 왕의 자리를 차지했으니 그가 바로 오왕 합려(闔廬)이다. 

합려는 전제의 아들을 국경(國卿)으로 기용했다.
계찰이 돌아와서 말하기를, “만약에 선왕의 제사가 계속되고 백성의 주인이 계속 이어지며

사직에 계속 공양한다면 그가 바로 나의 왕이다. 내가 감히 누구를 원망하겠는가?

죽은 사람을 애통해하고 살아 있는 사람을 섬김으로써 천명(天命)의 안배에 순응하고자 한다.

내가 일으킨 변란이 아니라면 누구를 왕으로 세우든 그에게 복종하는 것이 바로 선인들이 세운 법도이다.”라고 했다.

그리고 계찰은 왕 요의 무덤 앞에 가서 자신이 진나라에 사신으로 갔던 경과를 보고하고 눈물을 흘린 후,

다시 자신의 자리에 돌아와 새 왕의 명령을 기다렸다.
오나라 공자 촉용과 개여 두 사람은 병사를 이끌고 초나라에서 전쟁을 하다가 포위당했는데,
공자 광이 왕 요를 살해하고 스스로 왕이 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곧 병사를 이끌고 초나라에 투항했다.

초나라는 그들에게 서읍(舒邑)을 봉지로 내려 주었다.]

 

王闔廬元年,舉伍子胥為行人而與謀國事. 楚誅伯州犁,其孫伯嚭亡奔吳,吳以為大夫.

三年,吳王闔廬與子胥、伯嚭將兵伐楚,拔舒,殺吳亡將二公子.

光謀欲入郢, 將軍孫武曰:「民勞,未可,待之.」

四年,伐楚,取六與?.
五年,伐越,敗之.

六年,楚使子常囊瓦伐吳. 迎而擊之,大敗楚軍於豫章,取楚之居巢而還.

[오왕 합려 원년, 오자서를 발탁하고 그를 행인(行人)으로 삼아 국가대사에 참여시켰다.
초나라가 백주리(伯州犁)를 죽이자 그의 손자 백비(伯嚭)는 오나라로 도망갔으며, 오나라는 그를 대부로 삼았다.
3년, 오왕 합려와 오자서, 백비는 군사를 거느리고 초나라로 쳐들어가 서읍을 공격해 함락시키고

오나라에서 도망간 두 공자를 살해했다. 공자 광은 영도(郢都)로 쳐들어가려고 했으나,

장군 손무(孫武)가 “백성들이 너무 피곤해 하여 지금은 어려우니 기회를 기다립시다.”라고 하며 만류했다.
4년, 초나라를 공격해서 육읍과 첨읍을 점령했다.

5년, 월나라를 공격해서 승리했다.

6년, 초나라가 자상(子常)을 파견해서 오나라를 공격하자,
오나라 군대는 초나라 군대를 맞이해 예장(豫章)에서 크게 물리치고 초나라의 거소를 점령하고 돌아왔다.]

 

九年,吳王闔廬請伍子胥、孫武曰:「始子之言郢未可入,今果如何?」

二子對曰:「楚將子常貪,而唐、蔡皆怨之. 王必欲大伐,必得唐、蔡乃可.」
闔廬從之,悉興師,與唐、蔡西伐楚,至於漢水. 楚亦發兵拒吳,夾水陳.

吳王闔廬弟夫欲戰,闔廬弗許.
夫曰:「王已屬臣兵,兵以利為上,尚何待焉?」遂以其部五千人襲冒楚,楚兵大敗,走.

於是吳王遂縱兵追之. 比至郢,五戰,楚五敗. 楚昭王亡出郢,奔鄖.

鄖公弟欲弒昭王,昭王與鄖公奔隨. 而吳兵遂入郢. 子胥、伯嚭鞭平王之尸以報父讎.

[9년, 오왕 합려는 오자서와 손무에게 “처음에 그대들이 영도를 공격할 수 없다고 했는데 지금 공격하면

어떻겠는가?”라고 묻자,  두 사람은 “초나라의 장군 자상은 탐욕스러워 당나라와 채(蔡)나라 모두 그를 원망합니다.

왕께서 꼭 대대적으로 공격하고 싶으시다면 반드시 당나라와 채나라의 지지를 얻어야 가능합니다.”라고 대답했다.

그래서 합려는 그들의 의견대로 전국의 군대를 동원해 당나라, 채나라와 함께 서쪽으로 초나라를 정벌하러 가서

한강에 도착했다. 초나라도 군사를 동원해 오나라 군대에 저항해 쌍방이 한강의 양쪽 언덕에 전투대형으로 대치했다.

오왕 합려의 동생 부개(夫槪)는 전투를 시작하려고 했으나 합려가 이에 동의하지 않았다.
이에 부개가 말하기를 : “왕께서는 이미 저에게 군사를 맡기셨고, 부대가 승리를 거둘 수 있는 유리한 위치에 있는데

또 무엇을 기다리십니까?”라고 하고는 그의 부하 5천명을 거느리고 초나라 군대를 습격하니,

초나라는 대패해서 도망갔고, 오왕도 부대를 거느리고 뒤를 쫓아왔다. 

영도에 도착해서 다섯 번 싸웠으나 다섯 번 모두 초나라 군대가 졌다.

초소왕(楚昭王)은 영도를 빠져나와 운현(鄖縣)으로 도망갔으나,

운현 현령(縣令)의 동생이 그를 살해하려고 해서 현령과 함께 수(隨)나라로 도망갔다.

이로써 오나라 군대는 영도를 점령했고, 오자서와 백비는 초평왕의 시체를 채찍질함으로써 부모의 복수를 했다.]

十年春,越聞吳王之在郢,國空,乃伐吳. 吳使別兵擊越. 楚告急秦,秦遣兵救楚擊吳,吳師敗.
闔廬弟夫見秦越交敗吳,吳王留楚不去,夫亡歸吳而自立為吳王. 闔廬聞之,乃引兵歸,攻夫.

夫敗奔楚. 楚昭王乃得以九月復入郢,而封夫槩於堂谿,為堂谿氏.

十一年,吳王使太子夫差伐楚,取番. 楚恐而去郢徙鄀.

十五年,孔子相魯.

[10년 봄, 월(越)나라는 오왕이 영도에 있으므로 국내가 비었다는 것을 알고 오나라로 쳐들어 왔다.

오나라는 다른 지역의 군대를 보내 월나라를 공격했다.  초나라는 진(秦)나라에 위급함을 고하니 진나라에서

군대를 보내 초나라를 구원하고자 오나라 군대를 공격하니 오나라 군대가 패했다.
합려의 동생 부개는 진나라와 월나라가 차례로 오나라 군대를 물리치고,

오왕이 초나라에 남아서 떠나지 않는 것을 보고, 곧 오나라로 돌아가 스스로 오왕이 되었다.
합려가 이 일을 듣고 군사를 거느리고 돌아와 부개를 공격하니, 부개는 패해 초나라로 도망갔다.
초소왕은 이 기회를 이용해 9월에 다시 영도에 돌아가 부개를 당계(堂谿)에 봉하고 그를 당계씨(堂谿氏)라고 칭했다.
11년, 오왕이 태자 부차(夫差)를 보내어 초나라를 공격해 번(番)을 점령하자,

초왕은 두려워 영도를 떠나 약(鄀)으로 천도(遷都)했다.
15년, 공자(孔子)가 노(魯)나라 재상의 직무를 대행했다.]

 

十九年夏,吳伐越,越王句踐迎擊之檇李.  越使死士挑戰,三行造吳師,呼,自剄.

吳師觀之,越因伐吳,敗之姑蘇,傷吳王闔廬指,軍卻七里.
吳王病傷而死.  闔廬使立太子夫差,謂曰:「爾而忘句踐殺汝父乎?」對曰:「不敢!」

三年,乃報越.

[19년 여름, 오나라가 월나라로 쳐들어가자, 월왕 구천(句踐)이 취리(檇李)에서 오나라 군대를 맞이해서 싸웠다.

월나라에서는 죽음을 각오한 병사들을 오나라 군대의 진영 앞으로 보내어,

세 줄로 열을 세우고는 큰소리로 고함을 지르게 한 뒤 스스로 목을 베어 죽게 했다.                                             

오나라 군대가 이러한 장면을 보는 사이에 월나라는 오나라 군대를 공격해서 고소(姑蘇)에서 크게 이겼으며,

오왕 합려의 발가락에 상처를 입혔다. 오나라 군대가 7리(里)를 후퇴했다.

오왕은 결국 상처가 재발해서 죽었으며, 합려는 사자(使者)를 파견해서 태자 부차를 왕으로 세웠다.

사자가 그에게 “태자께서는 당신의 아버지를 죽인 것을 잊을 수 있겠습니까?”라고 묻자,

부차는 “어찌 잊을 수 있겠습니까?”라고 대답했다.
3년, 마침내 그는 월나라에 복수했다.]

 

王夫差元年,以大夫伯嚭為太宰. 習戰射,常以報越為志.

二年,吳王悉精兵以伐越,敗之夫椒,報姑蘇也.
越王句踐乃以甲兵五千人棲於會稽,使大夫種因吳太宰嚭而行成,請委國為臣妾.

[​오왕 부차 원년에 대부 백비를 태재(太宰)로 삼았다.
오왕은 군사들에게 활쏘기를 훈련시키며 항상 월나라에 복수하는 것을 목표로 삼았다.
2년, 오왕은 잘 훈련된 병사들을 모두 출동시켜 월나라를 정벌해 부초(夫椒)에서 월군을 무찌르고 고소에서의

일전(一戰)의 빚을 갚았다. 월왕 구천은 갑옷을 입은 병사 5천 명을 거느리고 회계산(會稽山)으로 물러나,

대부 문종(文種)을 보내 오나라 군대의 태재 백비를 통해서 오왕에게 화친을 구하게 했고,
모든 월나라의 남녀를 노예로 받아줄 것을 청했다.]

 

吳王將許之,伍子胥諫曰:「昔有過氏殺斟灌以伐斟尋,滅夏后帝相.

帝相之妃后緡方娠,逃於有仍而生少康. 少康為有仍牧正. 有過又欲殺少康,少康奔有虞.

有虞思夏德,於是妻之以二女而邑之於綸,有田一成,有眾一旅.

後遂收夏眾, 撫其官職. 使人誘之,遂滅有過氏,復禹之績,祀夏配天,不失舊物.

今吳不如有過之彊,而句踐大於少康. 今不因此而滅之,又將寬之,不亦難乎!

且句踐為人能辛苦,今不滅,後必悔之.」 吳王不聽,聽太宰嚭,卒許越平,與盟而罷兵去.

[오왕이 그에 응하기로 하자 오자서가 간하기를 :  
“예전에 유과지(有過氏)가 짐관(斟灌)을 멸망시키고 짐심(斟尋)을 공격해서 하(夏)의 제상(帝相)을 멸망시켰습니다.
제상의 왕비 후민(后緡)은 마침 임신 중이었는데, 유잉국(有仍國)으로 도망가서 소강(少康)을 낳았고,

소강은 유잉국의 목정(牧正)을 맡았습니다.  유과지가 다시 소강을 살해하려고 하자 소강은 유우국으로 도망갔습니다.

유우국은 하(夏)의 은덕을 생각해서 두 딸을 그에게 시집보내고 그에게 윤읍(綸邑)을 하사했고

그로 하여금 사방 10리(10方里)의 토지와 5백 명을 거느리게 했습니다.

후에 그는 하의 유민들을 불러들이고 의 법제(法制)를 정돈했습니다.

그는 사람을 파견해 상대방을 유혹한 뒤 결국은 유과지를 멸망시키고 하우(夏禹)의 업적을 회복했습니다.

또한 제사를 지낼 때 하늘과 함께 하의 선조(先祖)도 함께 모심으로써 원래의 통치 권력을 회복했습니다.

지금 오나라는 유과지와는 비교할 수 없이 강하나, 구천 역시 소강과 비교하면 훨씬 강합니다.

지금 때를 맞추어 그를 제거하지 않고 그냥 놓아둔다면 나중에는 더욱 처리하기 어렵지 않겠습니까?

더욱이 구천은 사람됨이 능히 곤란을 잘 견뎌내니 지금 그를 제거하지 않으면 후에 반드시 후회할 것입니다”라 했다.

오왕은 그의 말을 받아들이지 않고 태재 백비의 말대로 강화(講和)하기로 최종 응낙을 했고,

월나라와 조약을 맺은 뒤 군사를 철수시켰다.]

 

七年,吳王夫差聞齊景公死而大臣爭寵,新君弱,乃興師北伐齊.

子胥諫曰:「越王句踐食不重味,衣不重采,弔死問疾,且欲有所用其眾. 此人不死,必為吳患.

今越在腹心疾而王不先,而務齊,不亦謬乎!」 吳王不聽,遂北伐齊,敗齊師於艾陵.

至繒,召魯哀公而徵百牢.  季康子使子貢以周禮說太宰嚭,乃得止.  因留略地於齊魯之南.

九年,為騶伐魯,至與魯盟乃去.

十年,因伐齊而歸.

[7년, 오왕 부차는, 제 경공(齊景公)이 죽자 대신들이 정권을 다투며,

새로운 왕은 나이가 어리다는 소식을 듣고 군사를 일으켜 북쪽으로 제나라를 정벌하려고 했다. 

오자서가 간해 말하기를, “월왕 구천은 음식을 먹을 때 맛있는 것은 먹지 않고, 옷을 입을 때 비단 옷을 입지 않으며,

죽은 자가 있으면 조문하고 병든 자가 있으면 위문해 장차 그의 백성들을 동원하려고 합니다.

이러한 인물이 죽지 않는다면 반드시 오나라의 후환이 될 것입니다.

지금 우리가 가장 경계해야 하는 것은 월나라인데, 왕께서 먼저 그를 제거하지 않고 온 힘을 기울여 제나라를

공격한다면 그것은 터무니없는 일입니다.”라고 했다.
오왕은 이를 듣지 않고 제나라로 쳐들어가 애릉(艾陵)에서 제나라 군대를 무찔렀다.
증읍(繒邑)에 도착해서 노애공(魯哀公)을 불러 제사용 가축(소, 양, 돼지) 각 1백 마리씩을 요구했다.
노나라의 계강자(季康子)가 자공(子貢)을 파견해서 주(周) 왕조의 예법으로써 태재 백비를 설복시켜

겨우 그것을 그만두게 했다. 이로 인해서 점령했던 제, 노 두 나라의 남쪽 국경 지방의 토지를 남겨두었다.
9년, 추(騶)나라를 위해서 노나라를 정벌하러 가서 노나라와 조약을 맺은 후 돌아왔다.
10년, 돌아오는 길에 제나라를 공격했다.]

 

十一年,復北伐齊.  越王句踐率其眾以朝吳,厚獻遺之,吳王喜.  唯子胥懼,曰:「是棄吳也.」

諫曰:「越在腹心,今得志於齊,猶石田,無所用.  且盤庚之誥有顛越勿遺,商之以興.」
吳王不聽, 使子胥於齊, 子胥屬其子於齊鮑氏, 還報吳王.  吳王聞之, 大怒, 賜子胥屬鏤之劍以死.
將死,曰:「樹吾墓上以梓,令可為器.  抉吾眼置之吳東門,以觀越之滅吳也.」

齊鮑氏弒齊悼公.  吳王聞之,哭於軍門外三日,乃從海上攻齊.  齊人敗吳,吳王乃引兵歸.

[11년, 또 북으로 제나라를 공격했다. 월왕 구천이 그의 부하들을 이끌고 오왕을 알현하고,

많은 값진 예물들을 바치자 오왕은 매우 기뻐했다. 

단지 오자서만이 걱정해 말하기를 : “이는 오나라를 포기하는 것입니다”라고 하며,
또 간하기를 : “월나라는 가장 경계해야 할 나라입니다. 지금 제나라로부터 얻은 성과는 마치 자갈밭을 얻은 것과 같이

아무 쓸모가 없습니다. 더욱이 「반경지고(盤庚之誥)」에 보면 ‘화근은 절대로 남기지 않는다.’라는 말이 있습니다.

상(商) 왕조는 이 원칙을 따랐기 때문에 흥성한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그러나 오왕은 이를 듣지 않고 오자서를 제나라에 파견했는데,

오자서는 자신의 아들을 제나라의 포식(鮑息)에게 부탁하고 돌아와 오왕에게 경과를 보고했다.
오왕은 이 일을 듣고 대노(大怒)해서 오자서에게 촉루(屬鏤)라는 보검을 주어 자살하게 했다.
죽음에 이르러 오자서는 말하기를 : “나의 무덤 위에 가래나무를 심고 그것이 자라면 관을 짜도록 하라.

그리고 나의 눈을 뽑아서 오나라의 동문에 걸어 월나라가 오나라를 멸망시키는 것을 볼 수 있게 하라”라고 하였다.
제나라의 포씨(鮑氏)가 제 도공(齊悼公)을 살해하자 오왕이 이 소식을 듣고 진영의 문 밖에서 3일을 통곡하고는

해상(海上)으로 제나라를 공격했다.  제나라 사람들은 오나라 군대를 무찔렀고 오왕은 군대를 철수해 돌아왔다.]

 

十三年,吳召魯、衛之君會於橐皋.

十四年春,吳王北會諸侯於黃池,欲霸中國以全周室.

六月(戊)[丙]子,越王句踐伐吳.  乙酉,越五千人與吳戰.  丙戌,虜吳太子友.

丁亥,入吳.  吳人告敗於王夫差,夫差惡其聞也.  或泄其語,吳王怒,斬七人於幕下.

七月辛丑,吳王與晉定公爭長.  吳王曰:「於周室我為長.」
晉定公曰:「於姬姓我為伯.」趙鞅怒,將伐吳,乃長晉定公.  吳王已盟,與晉別,欲伐宋.

太宰嚭曰:「可勝而不能居也.」乃引兵歸國.
國亡太子,內空,王居外久,士皆罷敝,於是乃使厚幣以與越平.

[13년, 오왕이 노나라, 위(衛)나라의 왕을 소환해 탁고(橐皐)에서 회맹(會盟)했다.
14년 봄, 오왕은 북상(北上)해 황지(黃池)에서 제후들과 회합을 가지고, 중국을 제패해 주 왕실을 보전하려고 했다.
6월 병자일(丙子日), 월왕 구천이 오나라를 공격했다.

을유일(乙酉日), 월나라 군대 5천 명이 오나라와 교전해서

병술일(丙戌日), 오나라 태자 우(友)를 포로로 잡았다.

정해일(丁亥日), 오나라 수도에 진입했다.

오나라 사람이 오왕 부차에게 패전의 소식을 보고하자 부차는 이 소식이 제후들에게 알려지는 것을 꺼려했다.
그런데 어떤 사람이 그 소식을 누설하자 오왕은 노해서 군영(軍營)의 장막 안에서 7명을 살해했다.

7월 신축일(辛丑日), 오왕은 진 정공(晉定公)과 맹주(盟主)를 다투었다.
오왕이 말하기를 : “주나라의 왕족 중 내가 제일 위이다”라고 하자,

진 정공은 말하기를 : “희성(姬姓) 제후 중 내가 패주이다”라고 하였다.
정공의 가신 조앙(趙鞅)이 화를 내고 오왕을 공격할 준비를 하자 비로소 진정공이 맹주가 되었다.
오왕은 맹약을 맺고 진 정공과 헤어져 장차 송나라를 침략하려고 했는데,

태재 백비가 말하기를 : “싸워 이길 수는 있으나 점유할 수는 없습니다.”라고 하자, 군대를 이끌고 돌아왔다.

오나라는 태자를 잃었고 국내는 텅 비었으며 오왕이 바깥에 오래 머물러 병사들이 모두 너무 지쳐 있었으므로,

값비싼 재물로써 월나라와 화친을 맺었다.] 

十五年,齊田常殺簡公.

十八年,越益彊. 越王句踐率兵(使)[復]伐敗吳師於笠澤. 楚滅陳.

二十年,越王句踐復伐吳. 二十一年,遂圍吳.

二十三年十一月丁卯,越敗吳.  越王句踐欲遷吳王夫差於甬東,予百家居之.
吳王曰:「孤老矣, 不能事君王也. 吾悔不用子胥之言, 自令陷此.」遂自剄死.

越王滅吳, 誅太宰嚭, 以為不忠, 而歸.

[15년, 제나라 전상(田常)이 제 간공(齊簡公)을 시해했다.
18년, 월나라는 더욱 강대해졌다. 월왕 구천은 군대를 이끌고 입택(笠澤)에서 오나라 군대를 무찔렀다.

초나라는 진(陳)나라를 멸망시켰다.
20년, 월왕 구천은 다시 오나라를 정벌했다. 21년에 오나라의 수도, 즉 고소를 포위했다.
23년 11월 정묘일(丁卯日), 월나라는 오나라를 크게 이겼다.
월왕 구천이 오왕 부차에게 1백 호(戶)의 민가(民家)를 주어 용동(甬東)으로 가서 살게 하려고 하자,

오왕은 말하기를 : “나는 늙어서 왕을 섬길 수가 없소. 나는 오자서의 의견을 받아들이지 않아

스스로 이 지경에 빠진 것을 후회하오.”라고 하고는, 곧 칼로 목을 찔러 자살했다.
월나라는 오나라를 멸망시키고 태재 백비를 불충(不忠)하다고 해 죽이고 돌아갔다.]

 

太史公曰:

孔子言「太伯可謂至德矣,三以天下讓,民無得而稱焉」.

余讀春秋古文,乃知中國之虞與荊蠻句吳兄弟也.
延陵季子之仁心,慕義無窮,見微而知清濁.  嗚呼,又何其閎覽博物君子也!

[태사공(太史公)은 말한다.
“공자(孔子)는 ‘태백(太伯)은 최고의 덕행을 가지고 있다고 말할 수 있다.

왕위를 세 번이나 양보해, 백성들은 그를 어떻게 찬양해야 하는지를 몰랐다’라고 했다.
내가『춘추(春秋)』를 읽고 비로소 중원의 우(虞)나라와 형만(荊蠻)의 오나라가 형제 나라라는 것을 알았다.
연릉계자(延陵季子)의 인덕지심(仁德之心)과 도의(道義)의 끝없는 경지를 앙모(仰慕)한다.

조그마한 흔적을 보면 곧 사물의 청백함과 혼탁함을 알 수 있는 것이다.
오호라, 어찌 그를 견문이 넓고 학식이 매우 풍부한 군자가 아니라고 하겠는가!”]

 

 

 

※  原 文 .    【 中國哲學書電子化計劃 .   筆寫本 】

                             

 

 

    原 文   飜 譯 者        德庤 / 李   斗 振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