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0.太史公自序

第 七十. 太史公自序(태사공자서)

덕치/이두진 2024. 1. 17. 18:50

 

          第 七十.  太史公自序(태사공자서) 


​昔在顓頊,命南正重以司天,北正黎以司地.
唐虞之際,紹重黎之後,使復典之,至于夏商,故重黎氏世序天地.
[옛날 전욱 임금은 남정(南正)의 중(重)에게 천문에 관한 일을 맡겼고,  
북정(北正)의 여(黎)에게는 지리에 관한 일을 맡겼다. 
요와 우임금 시대에 이르기까지 중과 여씨의 후손들로 하여금  계속해서 
천문과 지리에 관한 일을 주관하게 하여 하, 상나라에까지 이르렀다.  
그러므로 중과 여씨는 대대로 천문과 지리에 관한 일을 주관했다.]

其在周,程伯休甫其後也.  當周宣王時,失其守而為司馬氏.  司馬氏世典周史.
惠襄之閒,司馬氏去周適晉.  晉中軍隨會奔秦,而司馬氏入少梁. 
自司馬氏去周適晉,分散,或在衛,或在趙,或在秦.  
其在衛者,相中山.  在趙者,以傳劍論顯,蒯聵其後也. 
[주왕조 때에 정백에 봉해졌던 휴보(休甫)도 그 후손이었다. 
주선왕 때 그 제후국을 지키지 못하고 사마씨가 되었다. 이후로 사마씨는 
주나라의 사관이 되어 대대로 그 역사를 기록하는 일을 관장하였다.  
주나라 혜왕에서 양왕에 이르는 사이에 사마씨는 주나라를 떠나 당진으로 갔다.  
당진의 중군 원수 수회가 섬진으로 달아나자, 
사마씨도 그 뒤를 따라 섬진의 소량(少梁)으로 들어갔다.
사마씨는 주를 떠나 당진으로 들어갈 때 일족이 서로 뿔뿔이 흩어져 
일부는 위나라에, 일부는 조나라에, 그리고 일부는 섬진(陝秦)으로 들어가 살았다.  
위나라로 간 일족 가운데에는 중산(中山)의 재상을 지낸 자도 있고, 
조나라로 간 일족 가운데에는 검술 이론을 잘 전수해 명성을 날린 자도 있는데, 
괴외(蒯聵)가 바로 그 후 손이다.]

在秦者名錯,與張儀爭論,於是惠王使錯將伐蜀,遂拔,因而守之.  
錯孫靳,事武安君白起.  而少梁更名曰夏陽.  
靳與武安君阬趙長平軍, 還而與之俱賜死杜郵,葬於華池.
[섬진으로 들어간 사마씨 중에는 이름이 조(錯)라는 사람이 있었는데, 
장의와 더불어 논쟁하였다.  혜문왕 앞에서 촉(蜀)과 한(韓) 중 어느 쪽을 먼저 
공략할 것인가 하는 문제를 놓고 논쟁을 벌였는데,  
이때 혜문왕은 사마조로 하여금 군사를 이끌고 촉을 공격하게 했다. 
사마조는 마침내 촉 땅을 빼앗아 그곳의 군수로 임명되었다. 
사마조의 손자 사마근(司馬靳)은 무안군 백기를 섬겼다. 
그리고 섬진의 소량(少梁)은 이미 이름을 하양(夏陽)으로 바꾸었다. 
사마근과 무안군 백기는 장평(長平)에 주둔한  조나라의 군대를 크게 격파해 
항복한 군사 40만 명을 구덩이에 파묻어 죽이고 돌아왔다.  그러나 돌아와서는
둘 다 두우(杜郵)에서 소왕(昭王)에 의해서 죽임을 당해 화지(華池)에 매장되었다.]  

靳孫昌,昌為秦主鐵官,當始皇之時.  蒯聵玄孫卬為武信君將而徇朝歌.  
諸侯之相王, 王卬於殷.  漢之伐楚, 卬歸漢,以其地為河內郡. 昌生無澤,
無澤為漢市長.  無澤生喜,喜為五大夫,卒,皆葬高門.  喜生談,談為太史公.
​[사마근의 손자는 사마창인데, 창은 진(秦)의 철을 관장하는 관리로 지냈는데, 
진시황이 재위에 있을 때였다.  진나라가 망하고 한, 초가 서로 다툴 때 
괴외(蒯聵)의 현손인 사마앙은 무신군의 장수가 되어 조가를 정복했다.
이때는 천하가 어지러워 제후들이 멋대로 왕을 칭했는데, 사마앙은 항우에 의해 
은왕(殷王)에 봉해졌다.  한고조가 항우를 정벌할 때 사마앙은 한왕에게 투항했고, 
하내군을 영지로 받았다.  사마창의 아들인 무택은 한(漢)나라의 시장을 지냈고, 
무택의 아들 희는 오대부를 지냈다.  이들은 죽은 뒤 모두 고문(高門)에 묻혔다. 
사마희(司馬喜)의 아들 사마담(司馬談)은 태사공(太史公)이 되었다.] 

太史公學天官於唐都,受易於楊何,習道論於黃子.  
太史公仕於建元元封之閒,愍學者之不達其意而師悖, 乃論六家之要指曰: 
易大傳:「天下一致而百慮,同歸而殊涂.」
夫陰陽、儒、墨、名、法、道德,此務為治者也, 直所從言之異路,有省不省耳. 
[태사공은 당도로부터 천문학을 배웠고, 양하로부터 『주역(周易)』을 전수받았으며,  
황자로부터 도가의 이론을 익혔다. 태사공은 건원(建元)에서 원봉(元封)에 이르는 
기간에 관리 생활을 했다. 학자들이 각파 학설의 본래 뜻을 이해하지 못해 스승의 
뜻과 어긋나는 것을 안타깝게 여겨 육가들이 세운 학설의  중요한 요지를 논했다.
《주역》〈계사전〉에 이르기를 “ 천하 사람들은 그 도달하려고 하는 이치는 하나인데  
그 생각하는 방법은 가지각색이며, 가고자 하는 목적지는 같은데 가는 방법은 
서로 다르다. ”라고 했듯이, 무릇 음양가, 유가, 묵가, 명가, 법가, 도덕가들은 
세상을 잘 다스리기 위한 것을 업으로 삼는 사람들이지만 다만 말하는 바를 
따르는 것은 서로 다르니 어떤 것은 살피고 또 어떤 것은 살피지 않는 것이 있다.] 

嘗竊觀陰陽之術,大祥而眾忌諱,使人拘而多所畏;然其序四時之大順, 不可失也.
儒者博而寡要,勞而少功,是以其事難盡從;
然其序君臣父子之禮,列夫婦長幼之別,不可易也.
[나는 일찍이 음양가의 학술을 가만히 살펴보았는데, 그것은 대체로 길흉의 징조에 
치중해 금기시하는 것이 많고, 사람으로 하여금 구속을 받고 두려움을 사게 하는 
것이 많았다. 그러나 일년 사시의 운행 순서에 맞추어 일을 해야 한다고 하는 점을 
놓쳐서는 안되는 것이다.  유가의 학설은 범위가 넓으면서도 요체가 빈약하고 
노력은 많이 들고 그 효용성은 적다.  
그렇기 때문에 유가들이 주장하는 것을 모두 따르기가 어렵다. 
그러나 군신과 부자 사이의 예절을 바로 세우고, 
부부와 장유 사이의 구별을 분명히 해놓은 점은 고쳐서는 안된다.] 

墨者儉而難遵,是以其事不可遍循;然其彊本節用,不可廢也.
法家嚴而少恩;然其正君臣上下之分,不可改矣.
名家使人儉而善失真;然其正名實, 不可不察也.
道家使人精神專一,動合無形, 贍足萬物. 其為術也, 因陰陽之大順, 采儒墨之善,
撮名法之要, 與時遷移,應物變化, 立俗施事, 無所不宜,指約而易操, 事少而功多.
[묵가의 학설은 검약을 지나치게 강조해 준수하기가 어렵기 때문에, 
그것을 전부 그대로 실천할 수는 없다.  그러나 그 근본을 강조하고 
재화의 사용을 아껴야 한다는 주장은 절대 폐기해서는 안되는 것이다.
법가의 학설은 준엄하고 은혜와 인정이 적지만 군신 상하의 직분을 정확하게  
규정하고 있는 점은 고쳐서는 안된다. 명가의 학설은 사람으로 하여금 근검하도록 
한 결과 진실성을 쉽게 잃게 하지만  그 명분과 실리를 바르게 하는 것을 살피지 
않으면 안 될 것이다.  도가의 학설은 사람으로 하여금 정신을 한 곳으로 집중하게 
하고 그 움직임을 무형의 도에 합치게 하며,  또한 세상의 만물을 풍성하게 한다.  
그들의 학술은 음양가의 사시 운행의 큰 순서에 의거해 유가와 묵가의 선을 취하고, 
명가와 법가의 요점을 취해,  시대와 더불어 발전하고, 사물에 응해 변화하며, 
좋은 풍속을 세워 일을 시행하니 옳지 않은 것이라고는 없다.  따라서 그 뜻하는 
바가 간단하고 시행하기가 쉬워 노력하는 정도는 적으면서 그 효과는 크다.]

儒者則不然.  以為人主天下之儀表也, 主倡而臣和, 主先而臣隨.  如此則主勞而臣逸.
至於大道之要, 去健羨, 絀聰明, 釋此而任術.  夫神大用則竭,形大勞則敝.
形神騷動,欲與天地長久,非所聞也.
[그러나 유가의 학설은 그렇지 않다. 군주는 천하의 의표임으로 군주가 무엇이든 
주창하면 신하가 여기에  호응해야 하고  군즉 임금이 주가 앞서가면 
신하가 뒤를 따르는 것이며 이와 같이 행한다면 군주는 힘들지만 신하는 편안하다. 
도가에서 말하는 대도의 요체는, 굳센 것과 탐욕스런 마음을 없애버리고 
영민함을 비우는 것인데 이것을 멀리함으로 해서 자연의 순리를 따라야 할 것이다.
대체로 인간의 정신은 지나치게 사용하면 고갈되고, 
육체는 지나치게 혹사해 지치게 되면 몸이 쇠약해 질 것이다. 
육체와 정신이 쇠미하게 되면 마음의 병이 나게 될 것이며, 
그런 상태에서 하늘과 땅처럼 영원히 함께 하려고 한다는 말은 들어본 적이 없다.]

夫陰陽四時、八位、十二度、二十四節各有教令,順之者昌,逆之者不死則亡,
未必然也, 故曰「使人拘而多畏」. 夫春生夏長,秋收冬藏,此天道之大經也,
弗順則無以為天下綱紀,故曰「四時之大順,不可失也」. 夫儒者以六藝為法. 
六藝經傳以千萬數, 累世不能通其學, 當年不能究其禮,故曰「博而寡要, 勞而少功」. 
若夫列君臣父子之禮,序夫婦長幼之別,雖百家弗能易也.
[무릇 음양가는 4시, 8위, 12도, 24절기마다 각각 거기에 해당하는 지침을 
정해 놓고 이에 잘 따라 행하게 되면 번창하고 역행하게 되면 죽거나 망한다고 한다. 
그러나 반드시 그렇지는 않다. 그래서 말하기를 : " 사람들로 하여금 구속을 
받도록 해서 두려움을 느끼게 하기 위한 것 "이라고도 했다.
무릇 세상의 사물은 봄에 태어나서 여름에 성장하고, 
가을에 수확했다가 겨울에 저장하는데 이 천도야 말로 하늘의 가장 큰 법도이다. 
사람들이 이 천도를 따르지 않는다면 천하에 기강을 세울 수 없을 것이다. 
그런 까닭에 “사람들은 사계절이 변화하는 하늘의 커다란 순리를 결코 버리면 
안 될 것이다. "라고 말했다. 대저 유가는 《육예(六藝)》로써 법도를 삼는데,
《육예》에 관한 육경과 전(傳)의 종류는 천만 가지가 넘어, 몇 대에 걸쳐 배워도 
그 학문에 통달할 수 없으며 평생을 바쳐 예경 한 가지에만 매달린다 해도 다 
구명할 수 없다. 그런 이유로 해서" 유학이란 범위가 넓으면서도 요체가 적고 
노력은 많이 들지만 그 이루는 바는 적다"라 한 것이다. 
그러나 세상의 모든 임금과 신하, 아버지와 아들 사이의 예를 바르게 세우고, 
남편과 아내를 구별하고,  어른과 아이의 순서를 정해 놓은 것은
비록 백가가 몰려온다 할지라도 고칠 수 없는 것이다.]  

墨者亦尚堯舜道,言其德行曰:「堂高三尺,土階三等,茅茨不翦,采椽不刮.
食土簋, 啜土刑, 糲粱之食, 藜霍之羹.  夏日葛衣, 冬日鹿裘.」 
其送死,桐棺三寸,舉音不盡其哀. 教喪禮,必以此為萬民之率.  
使天下法若此,則尊卑無別也.  夫世異時移,事業不必同,故曰「儉而難遵」. 
要曰彊本節用,則人給家足之道也. 此墨子之所長,雖百長弗能廢也.
[묵가(墨家)의 학설은 요순의 도를 따른 것이며 두 임금의 덕행을 칭송하기를 : 
" 요임금과 순임금이 살았던 집의 높이는 겨우 석자에 달했으며 그 마루로 올라가는 
흙으로 만든 섬돌은 세 계단 밖에 되지 않았다. 띠로 엮은 지붕은 잘 정리되어 
있지도 않고, 서까래는 그 겉을 잘 깎아 다듬지도 않았다. 
흙으로 빚어 만든 그릇에 밥을 담아 먹고, 흙으로 만든 그릇에 국을 담아 마셨는데, 
현미나 기장으로 밥을 짓고 명아주잎과 콩잎으로 끓인 국을 먹었다.  
여름에는 갈포로 만든 옷을 입고, 겨울에는 사슴 가죽으로 만든 갖옷을 입고 지냈다. 
"라고 하였다.  두 임금이 죽자, 그들을 위해 준비한 오동나무 관의 두께는 세치를 
넘지 않았으며 백성들이 소리는 높여 곡을 했으나 그 슬픔을 다 표현하지 않았다. 
그리고 상례를 가르칠 때는 반드시 이와 같이 행함으로서 만민의 표본으로 삼았다.
 만약에 천하의 법이 이와 같이 행해진다면 사람들 사이에 존재하는 귀하고 비천한 
차별은 없어질 것이다.  대체로 세상의 풍속이 변한다면 사람이 행하는 것도 
반드시 다 같아야 할 필요는 없다. 
그래서 “ 지나치게 검약을 강조해 사람들이 지키기 어렵다 ”라고 말하는 것이다.
그 요점으로 생산을 강조하고 비용을 절약한다고 한 것은 사람이나 가정을 
풍족하게 하는 방법이다. 이것은 묵가의 뛰어난 점으로서 비록 백가가 달려온다 
할지라도 폐할 수 없는 점일 것이다.]

法家不別親疏,不殊貴賤,一斷於法,則親親尊尊之恩絕矣.  可以行一時之計,
而不可長用也,故曰「嚴而少恩」. 若尊主卑臣, 明分職不得相踰越, 雖百家弗能改也. 
[법가의 설은 그 사이가 가깝고 먼 것을 구별하지 않고 귀하고 천한 것을 
구별하지 않으며 오로지 법에 따라 모든 것은 결정하니 
이는 곧 친할 사람은 친하고 윗사람을 존경하는 은혜의 감정을 끊게 만드는 것이다.  
이렇게 행하는 것은 일시적으로는 뜻하는 바를 이룩할 수 있을지는 몰라도 결코 
오래도록 쓰지는 못할 것이다.  그런 이유로 " 법가의 도는 준엄하기만 하고 
그 은혜와 인정이 적다”라고 하는 것이다.  그러나 임금을 높이고 신하는 낮추며 
각각의 직분을 분명히 구분하여 상하간이 서로가 범할 수 없도록 한 점은 
비록 백가가 달려온다 할지라도 고칠 수 없을 것이다.] 

名家苛察繳繞,使人不得反其意,專決於名而失人情,故曰「使人儉而善失真」.
若夫控名責實,參伍不失,此不可不察也.
[명가는 뒤엉켜서 복잡하게 된 사물을 철저하게 살펴봄으로서 사람들로 하여금 
그 뜻을 어기지 못하게 하고 오로지 명분에 따라서만이 일을 행함으로서 
사람으로서의 정을 잃게 만든다.  그런 이유로, " 사람으로 하여금 명분에 구속되어
쉽사리 진실 된 마음을 잃게 만든다. "라고 한 것이다.
그러나 명실상부함을 구하기 위하여 명분과 실질을 서로 비교함으로서 
그것들을 잃지 않도록 하는 점은  살피지 않을 수 없다.]

道家無為,又曰無不為,其實易行,其辭難知.  其術以虛無為本,以因循為用.
無成埶,無常形,故能究萬物之情.  不為物先,不為物後,故能為萬物主.  
有法無法,因時為業;有度無度,因物與合.  
故曰 「聖人不朽,時變是守. 虛者道之常也,因者君之綱也.」 
[도가의 학설은  ‘무위(無爲)’이며 또한 ‘무불위’로서, 그 실제는 행하기는 쉬우나 
그 말은 이해하기 어렵다. 도가의 이론을 시행하는 방법은 허무를 근본으로 삼고, 
인순(因循)을 수단으로 삼는다. 기성불변의 세(勢)도 없고 상존불변의 형상도 없다. 
그러므로 만물의 정상을 구명할 수가 있다. 사물에 대응해서는 굳이 앞서지도 않고 
굳이 뒤지지도 않으면서 사물에 따라서 주재하기 때문에 만물의 주체가 될 수 있다. 
도가에도 법은 있지만 그 법에 맡기지 않는 것을 법으로 여기고, 반드시 시세에
따라서 사업을 이룬다. 또 정도는 있으되 그 정도를 견지하지 않는 것을 도로 여기고, 
반드시 만물의 형세에 따라서 더불어 서로 화합한다.
그런 연유로 말하기를 : " 성인의 사상은 영원히 없어지지 않으며, 
시대의 변화에도 불구하고 지켜진다.  허무는 도의 변하지 않는 모습이고 
자연에 순응하는 것은 임금이 지켜야 할 강령이다."라고 말하는 것이다.]  

君臣并至,使各自明也.  其實中其聲者謂之端,實不中其聲者謂之窾.  
窾言不聽,姦乃不生,賢不肖自分,白黑乃形.   在所欲用耳,何事不成.  
乃合大道,混混冥冥.  光燿天下,復反無名.  凡人所生者神也,所託者形也.  
神大用則竭, 形大勞則敝, 形神離則死. 死者不可復生,離者不可復反, 故聖人重之.  
由是觀之, 神者生之本也, 形者生之具也.
不先定其神形, 而曰「我有以治天下」何由哉?
[임금이 신하와 같이 이르게 되면 임금은 신하들 각자가 스스로의 재능을 
발휘하도록 한다. 이때 신하들의 실제가 그 명성에 부합하는 것을 단(端)이라 하고,
그 실제가 부합하지 않는 것을 관(窾)이라 한다. 신하들의 헛소리를 듣지 않음으로 
간사스러운 신하가 생기지 않으며, 어진 자와 불초한 자는 스스로 분별되어 
흑백과 같이 형체를 확연히 드러낼 것이다.  단언과 관언을 적재적소에 따라 
쓰기만 한다면 무슨 일인들 이루어 내지 못하겠으며 이것은 곧 대도에 부합되는 
일이 될 것이며, 어지러우며 칠흑같이 어둠 속에서도 천하를 빛낼 수 있어 반복해서 
무명 상태로 돌아가는 것이다.  무릇 사람이 살아 있음은 정신이 있음을 말하며 
정신이 맡기고 있는 것은 그 육체이다. 정신을 지나치게 사용하면 고갈되고, 
육체를 지나치게 혹사하면 병이 나며, 정신과 육체가 분리되면 즉 죽음에 
이르게 된다.  죽은 사람은 다시 살아날 수 없으며 정신과 육체가 분리된 사람은 
다시금 그것을 결합할 수가 없기 때문에, 그러므로 성인은 정신과 육체를 다 같이 
중히 여긴 것이다. 이런 관점에서 살펴본다면, 정신이란 살아 있는 사람의 근본이며, 
육체는 그 정신이 깃들게 하는 도구에 불과할 뿐인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정신과 육체를 먼저 안정시키지 않고서, 
오히려 " 내게는 천하를 다스릴 수 있는 방법이 있다 "라고 말하고 있으니,
도대체 무슨 수로 그럴 수 있단 말인가?]

太史公既掌天官,不治民. 有子曰遷.  遷生龍門,耕牧河山之陽. 年十歲則誦古文.
二十而南游江、淮,上會稽,探禹穴,闚九疑,浮於沅、湘;
北涉汶、泗,講業齊、魯之都,觀孔子之遺風,鄉射鄒、嶧; 
厄困鄱、薛、彭城,過梁、楚以歸. 
於是遷仕為郎中,奉使西征巴、蜀以南,南略邛、笮、昆明,還報命.
[태사공의 직분은 천문에 관한 일을 관장하고 백성을 다스리는 일에는 관여하지 
않았다.  태사공에게는 이름이 천(遷)이라고 하는 아들이 있었다.  
천은 용문에서 태어나서 하수의 근처의 태항산 남쪽에서 농사와 가축을 기르며 
살다가 나이가 10 살이 되자 고문(古文)을 익혀 통달하게 되었으며 
나이가 20세에 이르자 남쪽의 강회 사이를 유람하고, 월 땅의 회계산에 올라 
우임금이 묻혔다는 굴을 찾아 보고 다시 구억산에 올라 순임금의 행적을 
살펴보았으며 그곳을 흐르던 원수와 상수(湘水) 두 강에서 배를 타고 다녔다. 
다시 북쪽으로 나아가 문수와 사수를 건너 제(齊)와 노(魯) 두 나라의 도성에서는 
학술을 강론했으며, 공자가 남긴 유풍을 살펴보고, 추(鄒)와 역(嶧) 땅에서 
향사(鄕射)를 참관했다. 파(鄱)와, 설(薛), 팽성(彭城)에서 곤경에 처했다가 
양(梁)과 초(楚)나라를 지나 도성으로 돌아왔다.  그리고 천(遷)은 조정에 나가 
낭중이 되어 황제의 명을 받들어 서쪽으로는 파와 촉 이남 지방을 정벌한 다음,  
다시 남쪽으로는 공(邛), 작(笮), 곤명 등의 지방을 공략하고 돌아와 보고하였다.]

是歲天子始建漢家之封,而太史公留滯周南,不得與從事,故發憤且卒.
而子遷適使反,見父於河洛之閒.
[이 해에 천자는 처음으로 한나라 황실의 봉선(封禪) 의식을 행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태사공은 주남에 체류하고 있었기 때문에 봉선을 행하기 위해 태산으로 간 
천자를 따라갈 수 없었다. 이 때문에 울화병이 들어 죽음에 이르게 되었다. 
아들 천은 마침 출장 갔다가 돌아오는 길에 황하와 낙수 사이에서 

아버지를 만날 수가 있었다.] 

太史公執遷手而泣曰:「余先周室之太史也. 自上世嘗顯功名於虞夏,典天官事.
後世中衰,絕於予乎? 汝復為太史,則續吾祖矣.   今天子接千歲之統,封泰山,
而余不得從行, 是命也夫, 命也夫!余死, 汝必為太史;為太史, 無忘吾所欲論著矣. 
且夫孝始於事親,中於事君,終於立身.  揚名於後世,以顯父母,此孝之大者.
夫天下稱誦周公,言其能論歌文武之德,宣周邵之風,達太王王季之思慮,
爰及公劉,以尊后稷也.  幽厲之後,王道缺, 禮樂衰, 孔子修舊起廢, 論詩書, 
作春秋, 則學者至今則之.  自獲麟以來四百有餘歲, 而諸侯相兼,史記放絕. 
今漢興,海內一統,明主賢君忠臣死義之士,余為太史而弗論載,廢天下之史文,
余甚懼焉,汝其念哉!」
[태사공은 사마천의 손을 부여잡고 눈물을 흘리며 말하기를 : 
" 우리 선조는 주 왕실의 태사였다. 우리 조상들은 먼 옛날인 순· 우 시대 때부터
공명을 높이 세운 이래 천문에 관한 일을 주관해왔다. 그러나 후세에 이르자 
쇠락해지기 시작하더니 나의 대에 이르러 끊어지려 하고 있지 않느냐 ?  
너는 다시 나의 뒤를 이어 태사가 되어 우리들 조상들이 해 왔던 일을 계승해야 
할 것이다. 지금 천자께서는 천년 대통을 이어 받아 태산에 봉선을 행하시려고 
가셨는데 나는 부득이 수행할 수 없었으니, 
이것은 단지 천명이라고 할 수밖에 없구나 ! 진실로 천명이라고 할 수밖에 없구나 ! 
내가 죽은 뒤에 너는 반드시 나의 뒤를 이어 태사가 되어야 할 것이다.  
태사가 되거든 잊지 말고  내가 논하여 저술하려고 했던 바를 이루어주기 바란다. 
무릇 효도라는 것은 그 부친의 뜻을 받드는 것에서 시작하여 그 군주를 섬기다가
입신양명하는 데서 끝나며, 후세에 이름을 남겨 그 부모의 이름을 영광되게 하는 
것이야말로 가장 큰 효도라 할 것이다. 무릇 천하 사람들이 주공을 칭송하고 
있는 것은, 그가 문왕과 무왕의 덕을 시가(詩歌)로서 찬송하였으며, 
주남과 소남의 기풍을 선양하며,결국은 태왕과 왕계의 사려 깊은 지혜에  
통하게 되고 마침내는 공유의 공적에 미치고 시조인 후직을 추존했기 때문이다. 
유왕과 려왕 이후 왕도가 무너지고 예악이 쇠퇴해지자, 
공자께서 예로부터 전해 내려오던 전적을 정리하고 폐기되었던 예악을  
다시 일으켜 《시경(詩經)》과 《서경(書經)》을 논하셨고, 《춘추(春秋)》를 지으니,  
후세의 학자들이 그것을 규범으로 삼아 지금까지 내려오고 있는 것이다.  
상서로운 동물인 기린을 죽인 획린(獲麟) 이래로 지금까지 400여 년 동안 제후들은 
서로 다투어 나라를 넓히는 일에만 몰두하여 역사를 기록하는 일은 명맥이 끊기게 
되었다. 지금 한나라가 흥기하여 온 세상이 하나로 통일되었고 그 사이에 
현명한 임금, 충신, 지사들이 많았지만, 내가 태사령이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이를 논평하여 기록하지 않음으로서 천하의 역사를 기록하는 일을 폐하고 

말았구나 !  나는 이를 심히 두려워하면서 지금까지 살아왔다. 
너는 나의 이 마음을 유념해야 할 것이다. "라고 하자.]

遷俯首流涕曰:「小子不敏,請悉論先人所次舊聞,弗敢闕.」 
卒三歲而遷為太史令,紬史記石室金匱之書.
五年而當太初元年,十一月甲子朔旦冬至,天歷始改,建於明堂,諸神受紀.
[사마천이 머리를 수그리며 눈물을 흘리며 그의 부친에게 말하기를 : 
" 소자가 비록 총명하지 못하지만, 선조 대대로 정리하여 놓은 옛날의 기록들을 
논하여 기록하도록 하고, 하나도 빠뜨리지 않도록 하겠습니다. "라고 하였다.   
사마천은 부친이 세상을 뜬지 3년(기원전 108년) 후에 태사령이 되어, 
사관의 기록과 황실 도서관에 소장된 서적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 
5년 뒤인 태초 원년, 11월 갑자일 초하루 동짓날에 처음으로 역법을 개정하고, 
명당을 세워 여러 신들에게 기년이 바뀌어 천하가 다시 시작되었음을 고했다.]  

太史公曰:「先人有言:『自周公卒五百歲而有孔子.  
孔子卒後至於今五百歲,有能紹明世,正易傳,繼春秋, 本詩書禮樂之際?』 
意在斯乎!意在斯乎!小子何敢讓焉.」
[태사공이 말하기를 : " 선친께서 나에게 당부하시기를 '주공이 죽고 5백 년이 지나 
공자가 태어나셨고, 공자가 돌아가신 이래로 오늘에 이르기까지 500년이 되었으니, 
누가 나타나 그 뜻을 이어받아 밝은 시대를 세상 사람들에게 알리기 위해
 《주역(周易)》과 그 해설서들을 바르게 하고《춘추》를 계승하여 끊어진 역사기록을 
잇게 할 것이며, 《시경》《서경》《예경》《악경》의 근본을 밝히지 않겠는가?'
라고 말씀하셨으니, 아버님의 뜻이 여기에 있지 않았던가 !  여기에 있지 않았던가!  
소자가 어찌 감히 마다하겠습니까?"라고 하였다.]  

上大夫壺遂曰:「昔孔子何為而作春秋哉?」 
太史公曰:「余聞董生曰:『周道衰廢,孔子為魯司寇,諸侯害之,大夫壅之.  
孔子知言之不用, 道之不行也, 是非二百四十二年之中, 以為天下儀表, 貶天子,
退諸侯, 討大夫, 以達王事而已矣.』
[상대부 호수가 묻기를 : " 옛날 공자께서는 무엇을 위해 춘추를 지으셨는가 ?하자,  
태사공이 대답하기를 : " 나는 동중서에게서 듣기로 주나라의 왕도가 쇠퇴하여 
행하여지지 않으므로 공자께서 노나라의 사구(司寇)가 되었으나, 
제후들은 공자를 시기하여 해치려 하고, 대부들은 공자님의 뜻을  펼치시려 하는 
것을 방해하였다. 공자께서는 자신의 말이 받아들여지지 않고 추구하려는 
도(道)도 세상에 행해지지 않는다는 것을 아시고,  
242년에 걸친 노나라 역사의 시비를 따짐으로서 천하의 본보기로 삼으려 했습니다.
비록 천자라 할지라도 어질지 못하면 깎아 내리고, 옳지 않은 제후들은 물리치며, 
직분을 지키지 못한 대부들은 성토하여 천하를 다스리는 일에 관한 일을 
달성하려고 했을 뿐이다’라는 말을 들었습니다.

子曰:『我欲載之空言,不如見之於行事之深切著明也.』
夫春秋,上明三王之道,下辨人事之紀,別嫌疑,明是非, 定猶豫,善善惡惡,
賢賢賤不肖,存亡國,繼絕世,補敝起廢,王道之大者也. 
[공자가 말하기를 : ' 내가 실제적이지 않은 말로 기록하려고 했으나, 
그 보다는 차라리 재위에 있는 자들이 행한 일의 시시비비를 거론함으로서, 
그 결과 그 일을 더욱 더 절실하고도 명백하게 할 수 있었다.’라고 했습니다.
공자께서《춘추》를 지으신 것은 위로는 삼왕의 도를 밝히고 아래로는 인간사의 
기강을 논하여 의심스러운 것을 밝히고 옳고 그른 것을 분명히 했으며, 
사람들이 망설이는 것을 확실히 하게 했고 옳은 일은 옳다고,  
그른 일은 그르다고 어진 사람은 어질다 하고, 불초한 자는 천하다고 했으며, 
이미 망한 나라의 이름은 보존하게 하여 그 끊어진 대를 계속 잇게 만들었으며 
낡아서 해진 것을 보충하고 폐하여 없어진 것은 다시 일으켜 세웠으니,  
가장 큰 왕도를 세운 것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易著天地陰陽四時五行,故長於變;禮經紀人倫,故長於行;
書記先王之事,故長於政;詩記山川谿谷禽獸草木牝牡雌雄,故長於風; 
樂樂所以立,故長於和;春秋辯是非,故長於治人.
是故禮以節人,樂以發和,書以道事,詩以達意,易以道化,春秋以道義. 
[역경을 저술한 것은 천지, 음양, 사시, 오행을 밝히기 위한 것이므로 

변화를 아는데 그 뛰어난 장점이 있고, 예경은 인륜에 관한 것을 다루어 놓은 

것이기 때문에 일을 처리하는 데 대한 서술이 뛰어납니다.
서경은 선왕들의 행적을 기록한 것이라 정치 방면에 대한 기술이 뛰어난 것입니다.
시경은 산천과 계곡, 들짐승과 날짐승, 초목, 빈모와 자웅에 관하여 기록을 한 
것이기 때문에 풍토와 사람들 사이의 애증에 관한 기술에 장점이 있는 것입니다.
악경은 음악을 논술함으로서 사람이 서야 할 곳을 가리키는 경전인 관계로 
화목하게 하는데 뛰어난 점이 있으며, 춘추는 옳고 그름을 판별한 책이기 때문에 
정치하는 사람이 읽으면 깨닫는 바가 많을 것이며 그런 이유로  예경은 사람으로 
하여금 절제하게 만들고, 악경은 그 소리로서 화합하는 마음을 일으키게 하며,  
서경은 그 글로서 정사를 강론하고, 시경은 사람의 감정을 전달하는데 
그 편찬한 뜻이 있으며,  주역은 세상사의 변화를 이야기하고, 
춘추는 사람이 마땅히 행해야 할 도덕을 말하고 있습니다.

撥亂世反之正,莫近於春秋.  春秋文成數萬,其指數千.  萬物之散聚皆在春秋.
春秋之中, 弒君三十六, 亡國五十二, 諸侯奔走不得保其社稷者不可勝數.  
察其所以,皆失其本已.  故易曰『失之豪釐,差以千里』.  
故曰『臣弒君,子弒父,非一旦一夕之故也,其漸久矣』.
[그런 까닭으로 어지러운 세상을 수습해 올바른 세상으로 되돌려놓는 데는 
《춘추》만한 책이 없습니다. 춘추는 수만 자의 글로 쓰여 진 것에 불과하나, 
거기에 나타나 있는 대의는 수천 가지나 됩니다. 만물이 흩어지고 모이는 것이 
모두 춘추 안에 있으며, 춘추의 기록에는 시해당한 군주가 36명이나 있고, 
멸망한 나라는 52개 국이나 있으며, 그 사직을 보존하지 못하고 
다른 나라로 달아난 제후들의 수효는 헤아릴 수 없을 만큼 많습니다. 
그런 일들의 원인이 무엇인지를 살펴보면 모두가 그 본분을 잃어 버렸기 때문이다.
그런 까닭에 역경에서 이르기를 " 잃은 것은 터럭이나 그 차이는 천리만큼이나 
크다고 했다. "라고 되어 있고, 
또 이르기를" 신하가 그 군주를 시해하고 아들이 아비를 죽인 것은 
단지 하루아침에 일시적으로 일어난 것이 아니라, 
오랫동안의 일이 점차적으로 쌓였다가 일어나는 것이다 ”라고 되어 있습니다.

故有國者不可以不知春秋,前有讒而弗見,後有賊而不知. 
為人臣者不可以不知春秋, 守經事而不知其宜,遭變事而不知其權.  
為人君父而不通於春秋之義者,必蒙首惡之名.
為人臣子而不通於春秋之義者,必陷篡弒之誅,死罪之名.  
其實皆以為善, 為之不知其義, 被之空言而不敢辭. 
夫不通禮義之旨, 至於君不君, 臣不臣, 父不父, 子不子. 
夫君不君則犯,臣不臣則誅,父不父則無道,子不子則不孝.
[그런 까닭에 나라를 가지고 있는 위정자들은 반드시 『춘추』를 알아야 합니다. 
춘추를 알지 못하면 바로 코앞에서 아첨하는 자도 알아보지 못할 것이며, 
뒤에 숨어서 역심을 품고 있는 자들이 있음을 알지 못합니다.
남의 신하가 되려고 하는 자도 춘추를 모르면 안 될 것이며, 
춘추를 알지 못한 관계로 평상시의 일만을 알 뿐 적절하게 대처할 줄 모르고 
변고를 만났을 때는 그 임기응변의 기지를 발휘할 줄 모릅니다.
군주나 그 아비가 되었음에도 춘추가 말하는 대의에 통하지 못한다면 
그 사람은 반드시 큰 오명을 뒤집어 쓸 것이며, 남의 신하나 자식이 된 자가 춘추를 
읽어 대의를 깨닫지 못한다면 필시 찬역이나 시해의 일에 연루되어 주살되는 
운명을 피할 수 없고, 사실 그들은 옳다고 여겨 행한 것이지만 춘추의 대의를 
알지 못하고 행한 것이기 때문에 사가들로부터 사실이 아닌 말로 시역죄를 
저질렀다고 단죄를 받는다 해도 감히 변명을 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무릇 예와 의의 요지를 잘 알지 못하고 있으면, 결국은 군주는 군주답지 못하고, 
신하는 신하답지 못하고, 아비 아비답지 못하고, 자식은 자식답지 못하게 됩니다. 
대체로 군주가 군주답지 못하면 신하에게 농락당하고, 신하가 신하답지 못하면 
죽음을 면키 어렵습니다. 아비가 아비답지 못하면 무도한 아비가 되고, 
자식이 자식답지 못하면 불효자식이 됩니다.


此四行者,天下之大過也.  以天下之大過予之, 則受而弗敢辭.  
故春秋者, 禮義之大宗也.  夫禮禁未然之前, 法施已然之後;
法之所為用者易見, 而禮之所為禁者難知.」
[이 네 가지 행위야말로 천하의 가장 큰 잘못이라고 말 할 수 있습니다. 
이 천하의 가장 큰 죄과를 뒤집어쓰면서도 감히 거부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런 까닭에 춘추는 예와 의를 밝히는 가장 큰 근간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대체로 예의란 사건이 일어나기 전에 그것을 미연에 방지하는 것이고, 
법이란 이미 일어난 일을 처리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법이라는 것이 소용되는 바는 
누구든 쉽게 알고 있으면서 예란 것이 소용되는 바는 어떤 사건을 미연에 
방지한다는 것을 깨닫지 못하고 있습니다. "라고 하였다.]

壺遂曰:「孔子之時, 上無明君, 下不得任用, 故作春秋, 垂空文以斷禮義, 當一王之法.
今夫子上遇明天子,下得守職,萬事既具,咸各序其宜,夫子所論,欲以何明?」
[호수가 묻기를 : " 공자께서 살아계실 때 위에는 현명한 임금이 없었고, 
아래로는 그 자신이 임용되지 못했기 때문에 춘추를 지어, 
내용이 없는 글을 나열하여 예와 의를 규정지어 당대의 제왕들로 하여금 법전으로 
삼게 만들었습니다. 그러나 지금 그대는 위로는 밝은 천자를 만났고 아래로는 
관직에 있으니 만사가 이미 갖추어져 있고, 게다가 세상의 모든 것은 각기 
그 있어야 할 곳에 있어, 질서가 정연하게 적당함을 얻고 있는데,
그대가 지금 논하는 바는 무엇을 밝히려고 하는 것입니까 ? "라고 하자.] 

太史公曰:「唯唯, 否否, 不然. 余聞之先人曰:『伏羲至純厚,作易八卦. 
堯舜之盛, 尚書載之,禮樂作焉.  湯武之隆,詩人歌之.  
春秋采善貶惡,推三代之德,褒周室,非獨刺譏而已也.』 漢興以來,至明天子,
獲符瑞,封禪,改正朔,易服色,受命於穆清,澤流罔極,海外殊俗,
重譯款塞,請來獻見者,不可勝道.  臣下百官力誦聖德,猶不能宣盡其意.
[태사공이 말하기를 : " 아, 네! 아닙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저는 선친께서 말씀하신 것을 기억하고 있습니다.
옛날 복희씨는 지극히 순박하고 후덕하여 백성들을 위하여 《주역》의 팔괘를 만들고, 
요순의 성덕에 대해서는 《상서》에 기록되어 있듯이 예와 악이 만들어 졌으며, 
탕임금과 무왕시대의 융성함에 대해서는 시인들이 노래를 지어 부르고 있다.
《춘추》는 선을 취하고 악을 물리쳐 하, 상, 주(夏商周) 삼대의 성덕을 추앙하고,
주나라 왕실을 높였으니 그저 풍자나 비방에만 그치는 것이 아니다’라고 하신 
말씀을 들었습니다.  한나라가 새로 일어난 이래 영명하신 천자가 나타나시니 
하늘에서 상서로운 징조 있어 태산과 양보산(梁父山)에서 봉선을 행하게 되었고, 
해와 달의 시작하는 날을 바꿔 새로운 역법을 시행했으며, 관복의 색을 바꿔 
하늘로부터 미덕으로 교화를 이루라는 천명에 따라 사방으로 베푼 은혜는 미치지 
않은 곳이 없으며, 나라 밖의 풍속이 같지 않은 이민족 국가들이 통역에 통역을 
거치며 여러 나라를 전전한 끝에 우리 중국의 변방을 지키는 관문에 당도한 다음 
천자께 조현을 드리고자 청한 자들의 숫자는 하도 많아 이루 다 셀 수 없을 
정도입니다. 조정의 문무백관들이 성상 폐하의 성덕을 열심히 칭송하지만 
아직도 그 뜻을 충분히 세상 사람들에게 알렸다고는 할 수 없습니다.

且士賢能而不用,有國者之恥;主上明聖而德不布聞,有司之過也. 
且余嘗掌其官, 廢明聖盛德不載, 滅功臣世家賢大夫之業不述, 墮先人所言, 罪莫大焉. 
余所謂述故事,整齊其世傳,非所謂作也,而君比之於春秋,謬矣.」於是論次其文. 
七年而太史公遭李陵之禍,幽於縲紲.
[또한 다른 한편으로는 어질고 유능한 인재들을 불러서 다 쓰지 못하고 있음은 
나라를 다스리는 군주에게는 치욕이며, 주상께서 밝고 성스러운 덕을 가지고 
계심에도 불구하고 그 뜻을 세상에 널리 알리지 못하고 있는 것은 바로 관리들의 
잘못입니다. 그러함에도 내가 이미 그 일을 맡아 하는 사관이 되었으나 
밝고 어진 성상폐하의 크나 큰 성덕을 폐기해 기재하지 않고, 공신, 세가, 
현대부들이 이룩한 업적을 인멸하고 기술하지 않는다면, 선친께서 저에게 당부한 
유언을 지키지 못한 것이 되어 제가 저지른 죄는 너무나 클 것입니다.
제가 기술하려고 하는 소위 옛날 일은 대대로 전승해 온 것들을 정리하는 것이지 
내가 지어내는 일은 아닌 것입니다. 그런 까닭에 대부께서 내가 쓰려고 하는 글을 
춘추와 비교하시는 것은 잘못 된 일입니다."라고 하였다.
그래서 그 사서의 문장을 차례로 논하게 된 것이다. 
사서를 논하기 시작해서 7년 째 되는 해에 태사공은 이릉(李陵)의 화를 당하여 
포승줄에 묶여 감옥에 갇히게 되었다.]

乃喟然而嘆曰:「是余之罪也夫!是余之罪也夫!身毀不用矣.」 
退而深惟曰:「夫詩書隱約者,欲遂其志之思也.  昔西伯拘羑里,演周易;
孔子戹陳蔡,作春秋; 屈原放逐,著離騷;左丘失明,厥有國語; 
孫子臏腳,而論兵法;不韋遷蜀,世傳呂覽;韓非囚秦,說難、孤憤;
詩三百篇,大抵賢聖發憤之所為作也.  此人皆意有所郁結, 不得通其道也, 
故述往事,思來者.」 於是卒述陶唐以來, 至于麟止, 自黃帝始.
[감옥에 갇힌 태사공은 깊이 탄식하며 말하기를 : " 어째서 이것이 나의 죄란 말인가! 
몸은 망가져 이젠 쓸모가 없게 되었구나 ! "라고 하며.  또 물러 나와 깊은 생각에 
잠겨 말하기를 : " 무릇《시경》과《서경》의 내용이 깊고 그윽하면서도 간략한 것은 
그 지은이가 마음속에 뜻하고 있던 바를 이루고 싶어서였기 때문이었고,  
옛날에 서백은 은나라의 주왕(紂王)에게 잡혀 유리(羑里)에 갇혀 있으면서《주역》을 
더하여 풀이하였고, 공자는 진(陳)과 채(蔡)나라 사이를 지나다가 곤경에 처해진 
와중에서《춘추》를 지었으며,  
굴원은 추방되어 상수(湘水) 강변을 배회하면서 《이소》를 지었고,  
좌구명은 실명을 했음에도《국어(國語)》를 지을 수 있었으며,  
손빈은 다리의 슬개골이 잘려 앉은뱅이가 되었으나 병법을 논찬했으며, 
여불위는 촉나라로 유배되어 불우하게 되었음에도 만세에 전해질《여람》』
(《여씨춘추》)을 편찬했고 , 
한비자는 진나라에 가서 감옥에 갇힌 중에《세난》과《고분》을 저술하였다. 
《시경》의 시 3백편도 대체로 성인들이 모두 자기 마음속에 맺혀 있던 울분을
 토로하기 위해 책을 저술한 것이며, 이런 사람들은 모두 가슴속에 맺혀 있는 
자기의 이상과 주장을 풀어 버릴 방법을 얻지 못한 나머지 지난 일을 기술해 
다가 올 미래를 생각한 것이다.”라고 하였다. 
그래서 결국은 요임금과 순임금 이래 획린(獲麟)에 이르기까지의 역사를 
기술했는데, 이에 본서는 황제(黃帝)부터 시작했다.] 

維昔黃帝,法天則地,四聖遵序,各成法度;唐堯遜位,虞舜不臺;
厥美帝功,萬世載之.  作五帝本紀第一.
[옛날 황제 헌원씨(軒轅氏)는 하늘과 땅의 이치를 법칙으로 본 받았고, 
네 성인은 각기 그 순서에 따라 황제가 만든 법도를 이루었다. 
당요가 임금의 자리를 물려주었으나 우순은 기뻐하지 않았다. 
이에 제왕들의 공덕을 찬미하여 덕을 찬미해 만세토록 전할 것이다. 
이에 제 일 편인 <오제본기(五帝本紀)>를 지었다.]

維禹之功,九州攸同,光唐虞際,德流苗裔;夏桀淫驕,乃放鳴條.  作夏本紀第二.
[우임금의 가장 큰 공적은 구주에 두루 혜택을 주어, 요순 시대를 빛내고 
그 공덕이 후세들에게 이르게 한 것이다.
하나라의 마지막 왕 걸왕(桀王)이 음탕하고 교만하여 이어서 명조로 추방되었다.  
이에 제 이 편인 <하본기(夏本紀)>를 지었다.]

維契作商,爰及成湯;太甲居桐,德盛阿衡;武丁得說,乃稱高宗;
帝辛湛湎,諸侯不享.  作殷本紀第三.
[설(契)은 상을 세웠고 이어서 성탕에 이르러 하왕조를 대신하였다. 
태갑은 동(桐)에 살았으며, 그 공덕을 깨달아 아형(阿衡)의 도움으로 세상에 덕을 
펼칠 수 있었다. 무정(武丁)이 부열(傅說)을 등용하여 치세를 이루었으며, 
무정은 은나라를 부흥시킨 공으로 후세들로부터 고종이라는 칭호를 얻었다.
상나라의 마지막 왕 주왕(紂王) 신(辛)은 주색에 빠졌기 때문에 
천하의 제후들이 와서 받들지 않았다.  
이에 제 삼 편인<은본기(殷本紀)>를 지었다. 

維棄作稷,德盛西伯;武王牧野,實撫天下;幽厲昏亂,既喪酆鎬;
陵遲至赧;洛邑不祀.  作周本紀第四.
[기가 자라 순임금 때 후직이 되어 덕을 베풀자, 그 후손이 번성하여 서백이 되었다.  
서백의 아들 무왕은 목야(牧野)에서 승전하여 천하를 위무하고 주나라를 세웠다.  
유왕과 려왕이 아둔하여 정사를 어지럽힌 결과 풍호(酆鎬 : 풍읍과 호경)를 잃었다.  
주나라는 차츰 쇠약해지더니 난왕(赧王) 때 이르러 낙읍에서 사직이 끊기게 되었다.  
이에 제 사 편인 <주본기(周本紀)>를 지었다.] 

維秦之先,伯翳佐禹;穆公思義,悼豪之旅;以人為殉,詩歌黃鳥;昭襄業帝.  
作秦本紀第五.
[진나라의 선조는 백예인데 하나라를 세운 우임금을 보좌했다. 
진목공은 의(義)를 생각하여 효산(崤山)에서  전사한 병사들의 넋을 애도하였으나,
 목공이 죽으면서 사람으로 순장을 지내게 하니 그 두려움을 <황조(黃鳥)>라는 
시가로 노래했고, 후에 소양왕 때에 이르러서야 제업(帝業)을 이루었다.   
이에 제 오 편인 <진본기(秦本紀)>를 지었다. 

始皇既立,并兼六國,銷鋒鑄鐻,維偃干革,尊號稱帝,矜武任力;
二世受運,子嬰降虜.  作始皇本紀第六.
[진시황이 즉위하여 나머지 육국을 차례로 병합하고 무기를 녹여 쇠북을 만들어 
군사들을 쉬게 하며 전쟁을 막고, 호칭을 높여 제(帝)라 칭하며 무력을 과시하며 
폭력을 휘둘렀다. 이세에 이르자 그 운이 다하여 자영은 항복하여 포로가 되었다.  
이에 제 육 편인 <진시황본기(秦始皇本紀)>를 지었다.]

秦失其道,豪桀并擾;項梁業之,子羽接之;殺慶救趙,諸侯立之;
誅嬰背懷,天下非之.  作項羽本紀第七.
[진나라가 그 도를 상실하자 천하의 호걸들이 한꺼번에 일어나더니 항량이 제일 
먼저 공업을 세우고 항우가 그 뒤를 계승하였다. 이어서 항우는 조나라를 구한 다음 
경자관군 송의를 죽이자, 제후들이 그를 왕으로 세웠다.
이어서 항우는 진나라의 왕 자영(子嬰)을 죽이고 초 회왕을 배신하자, 
천하 사람들은 그의 행위를 비난하였다.
이에 제 칠 편인 <항우본기(項羽本紀)>를 지었다.]

子羽暴虐,漢行功德;憤發蜀漢,還定三秦;誅籍業帝,天下惟寧,改制易俗.  
作高祖本紀第八.
[항우는 포학하였으나 한왕 유방은 공을 세우고 덕을 베풀었으며 촉과 한 땅에서 
분발하여 관중으로 나와 삼진(三秦)을 평정하고 항우를 죽이고 제왕의 업을 이루자  
천하는 안정되었고 엄혹한 진나라의 법제를 고치고 백성들의 풍속을 바꾸었다. 
이에 제 팔 편인 <고조본기(高祖本紀)>를 지었다.]

惠之早霣,諸呂不台;崇彊祿、產,諸侯謀之;殺隱幽友,大臣洞疑,遂及宗禍.
作呂太后本紀第九.
[고조의 뒤를 이은 혜제가 일찍 죽은 뒤 여씨들은 백성들의 마음을 얻지 못했다. 
여록과 여산을 높여 강력한 권력을 손에 쥐자 제후들이 도모하려고 하였다. 
여태후가 조나라의 은왕 여의와 유왕 우(友)를 죽이자, 모든 대신들이 여씨들을 
의심하게 되어 결국은 그 종족들이 멸족의 화를 입게 되었다.
이에 제 구 편인 <여태후본기(呂太后本紀)>를 지었다.]

漢既初興, 繼嗣不明, 迎王踐祚, 天下歸心;蠲除肉刑, 開通關梁, 廣恩博施,厥稱太宗.  
作孝文本紀第十.
[한나라가 처음 일어났을 때 제위를 잇는 순서가 확실하지 않아 대왕(代王 : 유항)을 
모셔 와 천자로 옹립하니, 비로소 천하의 인심이 안정이 되었다. 
신체를 훼손하는 육형을 없애고, 통행의 요로에 설치한 관(關)과 나루터를  
마음대로 드나들 수 있게 만들어 그 은혜를 널리 베풀자
세상에서 그를 일컫어 태종이라고 부르게 되었다.
이에 제 십 편인 <효문본기(孝文本紀)>를 지었다.

諸侯驕恣,吳首為亂,京師行誅,七國伏辜,天下翕然,大安殷富.  
作孝景本紀第十一.
[제후들이 교만 방자해진 결과 오왕이 앞장서서 반란을 일으켰다. 
황제가 군사를 보내어 반란자들을 주살하니 7국이 그 죄에 굴복하였다. 
천하는 화평하게 되었고 백성들의 생활은 크게 안정이 되어 풍요롭게 되었다.  
이에 제 십일 편인 <효경본기(孝景本紀)>를 지었다.]

漢興五世,隆在建元,外攘夷狄,內修法度,封禪,改正朔,易服色.  

作今上本紀第十二.
[한나라가 흥기한 지 5대가 지나 건원(建元)에 이르러 융성해졌다. 
나라 밖으로는 이적을 물리치고, 나라 안으로는 법규를 정비하였고  
봉선을 행했으며 역법을 개정하고 복장의 색을 바꾸었다.   
이에 제 십일 편인 금상본기(今上本紀) 즉 <효무본기(孝武本紀)>를 지었다.]

 

維三代尚矣,年紀不可考,蓋取之譜牒舊聞,本于茲,於是略推,作三代世表第一.
​[하, 상, 주 삼대는 너무 먼 옛날의 일이라 구체적인 연대기를 고찰할 수 없어,  
대체로 보첩(족보)나  연보와 같은 옛 기록들을 얻어 그것에 근거하여 대략 추정했다. 
이에 제 일 편 <삼대세표(三代世表)>를 지었다.]

幽厲之後, 周室衰微, 諸侯專政, 春秋有所不紀;而譜牒經略, 五霸更盛衰,

欲睹周世相先後之意,  作十二諸侯年表第二.
[주나라의 려왕(厲王)과 유왕(幽王) 이후에 주나라 왕실이 쇠미해지자

제후들이 그 정치를 스스로 행하였는데 《춘추》에도 기록되지 않은 것이 있다.

그러나 보첩에 기록된 경략을 보면 오패가 번갈아 가며 흥하고 망했다.  
그래서 주나라 시대에 제후들의 흥망성쇠를 살펴보고자,

제 이 편 <십이제후연표(十二諸侯年表)>를 지었다.]

春秋之後,陪臣秉政,彊國相王;以至于秦,卒并諸夏,滅封地,擅其號.  

作六國年表第三.
[춘추시대 이후로 권신들이 정권을 잡고 강국이 되어 서로 왕호를 칭했다.
이윽고 진나라에 이르러 중원의 제후국들을 모조리 병합하고

그들의 봉지를 없앤 다음 호칭을 제멋대로 했다. 
이에 제 삼 편 <육국연표(六國年表)>를 지었다.]

秦既暴虐,楚人發難,項氏遂亂,漢乃扶義征伐;八年之閒,天下三嬗,事繁變眾,
故詳著秦楚之際月表第四.
[진나라가 이미 폭정을 행하므로 초나라 사람이 일어나 난을 일으켰다.

항우가 그 뒤를 이으니 한나라는 의를 내세워정벌군을 일으켰다.

그 8년 동안 천하는 주인이 세 번 바뀌었으며 사건의 양상은 매우 복잡하고 변화가 
많았다.  이에 상세하게 기록한, 제 사 편 <진초지제월표(秦楚之際月表)>를 지었다.] 
 

漢興已來,至于太初百年,諸侯廢立分削,譜紀不明,有司靡踵,彊弱之原云以世.
作漢興已來諸侯年表第五.
[한나라가 흥기한 이래 태초(太初)연간에 이르기까지 백년이 지나는 동안

제후들의 책봉과 폐위 그리고 영토 분할과 삭감이 있었지만,

그 보첩(報牒)의 기록이 분명하지 않은 것은 담당 관리가 그 행적을 쫓지 못하고  
강약의 원리를 계속 규명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이에 제 오 편 <한흥이래제후연표(漢興以來諸侯年表)>를 지었다.] 

維高祖元功,輔臣股肱,剖符而爵,澤流苗裔,忘其昭穆,或殺身隕國. 
作高祖功臣侯者年表第六.
[고조(高祖)가 천하를 얻었을 때, 팔다리처럼 보좌한 창업공신들은 모두가

신임을 받아 봉록과 작위를 얻어 그 은혜와 혜택이 후세에 전해졌으나

그 중에는 가깝고 먼 친분관계를 망각한 결과 그 중에 어떤 제후들은
생명을 잃기도 하고  혹은 나라를 잃기도 했다.

이에 제 육 편 <고조공신후자연표(高祖功臣侯者年表)>를 지었다.] 

惠景之閒,維申功臣宗屬爵邑,作惠景閒侯者年表第七.
[혜제와 경제 연간에 공신과 종친에게 작위와 영토를 추가해 내려주었다.  
이에 제 칠 편 <혜경간후자연표(惠景閒侯者年表)>를 지었다.]

北討彊胡,南誅勁越,征伐夷蠻,武功爰列.  作建元以來侯者年表第八.
[북쪽으로는 강성한 흉노를 토벌하고, 남쪽으로는 억센 월인들을 죽였으며 다시

동이와 남만의 오랑캐를 정벌했다. 그때 세운 무공의 순서에 따라 열후에 봉해졌다. 
이에 제 팔 편 <건원이래제후연표(建元以來侯者年表)>를 지었다.]

諸侯既彊,七國為從,子弟眾多,無爵封邑,推恩行義,其埶銷弱,德歸京師.
作王子侯者年表第九.
[제후들이 강성해지자 7국이 연합하여 반란을 일으켰다. 그러나 제후들의

자제는 늘어나고 그들에게 나누어 줄 작위에 봉지가 부족하게 되었다.

이에 은혜를 베풀어 의를(추은령) 행하도록 하여 제후국의 힘은 서서히 약해지고
조정의 은혜에 감사하기에 이르렀다.

이에 제 구 편 <건원이래왕자후자연표(建元以來王子侯者年表)>를 지었다.]

國有賢相良將, 民之師表也.  維見漢興以來將相名臣年表, 賢者記其治, 不賢者彰其事.
作漢興以來將相名臣年表第十. 
[나라에 어진 재상과 훌륭한 장수가 있음은 백성들의 본보기다.

한나라가 흥기한 이래 장군과 재상 그리고 명신 연표를 보고 어진 사람에 대해서는

그 치적을 기록하고 어질지 못할 자에게는 그가 저지른 잘못을 기록하여 널리 알렸다.

이에 제 십 편 <한흥이래장상명신연표(漢興以來將相名臣年表)>를 지었다. ] 

 

維三代之禮,所損益各殊務,然要以近性情,通王道,故禮因人質為之節文,

略協古今之變.  作禮書, 第一.
[하, 상, 주(夏商周) 삼대의 예(禮)는 덜하고 더한 것이 있었지만 그것은 각기

그 일의 사정이 모두 달랐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요지는 사람의 성정에 가까이 하고

왕도에 통하고자 한 것이다. 그러므로 예(禮)는 사람의 자질에 따라

화려함을 절제하고 대략 고금의 변화에 어울리는 것이다.
이에 제 일 편 <예서(禮書)>를 지었다.]

樂者,所以移風易俗也.  自雅頌聲興,則已好鄭衛之音,鄭衛之音所從來久矣.
人情之所感,遠俗則懷.  比樂書以述來古,作樂書, 第二.
[음악이란 것은 풍속을 옮기고 바꾸는 것이다. 「아(雅)」와 「송(頌)」의 소리가

일어나면서부터 사람들은 이미 정나라와 위나라의 음악을 좋아하게 되어,

정, 위(鄭衛) 두 나라의 음악은 그 유래가 깊게 되었다. 음악은 사람을 정으로

감동시키는 것이기 때문에 풍속이 전혀 다른 먼 지방의 사람까지도 회유할 수 있다.
음악 관련 서적들을 참고하여 상고 이래의 음악에 대해 기술하였다.
이에 제 이 편<악서(樂書)>를 지었다.]

非兵不彊,非德不昌,黃帝、湯、武以興,桀、紂、二世以崩,可不慎歟?  
司馬法所從來尚矣,太公、孫、吳、王子能紹而明之,切近世,極人變.  

作律書, 第三.
[군대가 없으면 나라를 강하게 만들 수 없고, 나라 안에 덕이 없으면 번창하게

할 수 없다.  황제와 탕임금, 주무왕은 나라를 일으켜 흥성하게 만들었으나,

하나라의 걸왕(桀王), 상나라의 주왕(紂王), 그리고 진나라의 이세(二世)는 나라를

망친 임금이 되었다.  이에 이를 신중하게 생각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

『사마법(司馬法)』은 전해 온지 이미 오래 되었고, 태공(太公) 여상(呂尙), 손자(孫子),

오기(吳起), 왕자성보(王子成父) 등은 그 원리를 이어 받아 병사의 일을 밝힐 수 있어

근자의 정세를 살피는데 적합하고 인간사의 변화를 더 극진하게 추구했다.
이에 제 삼 편 <율서(律書)>를 지었다.]

律居陰而治陽,歷居陽而治陰,律歷更相治,閒不容翲忽.  

五家之文怫異,維太初之元論.  作歷書, 第四.
[율(律)은 음에 근거로 하여 양을 다스리며, 역(曆)은 양을 근거로하여 음을 다스린다.  
그래서 율과 역은 번갈아 가며 서로를 다스리므로 오차나 빈틈을 허용하지 않는다.  
옛날 다섯 왕조[황제력(黃帝曆), 전욱력(顓頊曆), 하력(夏曆), 은력(殷曆),

주력(周曆)〕에서 만든 역법은 서로 같지 않아 옳다고 여겨지지 않으나,

오직 태초 원년에 제정한 역법을 가지고 논할 뿐이다.  
이에 제 사 편 <역서(曆書)>를 지었다.]

星氣之書​,多雜禨祥,不經;推其文,考其應,不殊.  

比集論其行事,驗于軌度以次,作天官書, 第五.
[별의 운행과 기상의 변화에 관한 서적은 길흉화복에 대한 이야기를 늘어놓고 있지만,

황당하고 근거가 없다. 그 문장을 미루어 연구하여 그것의 효험을 고찰해 보았으나

결코 특이한 것을 알 수가 없었다.  황제께서 전문가들을 불러 이 일에 대해 토론하고

규명하도록 명하여 순서대로 운행되는 궤적을 살폈다.  
이에 제 오 편 <천관서(天官書)>를 지었다.]

受命而王, 封禪之符罕用, 用則萬靈罔不禋祀. 追本諸神名山大川禮, 作封禪書, 第六.
[하늘로부터 명을 받아 왕이 되었으나 봉선을 행하는데 소홀히 했다.

봉선을 한 번 거행하면 세상의 모든 신들이 따로 제사를 받지 않아도 됨으로

이에 명산대천의 여러 신들에 대한 제례에 대해 그 근본을 추구하였다.  
이에 제 육 편 <봉선서(封禪書)>를 지었다.]

維禹浚川,九州攸寧;爰及宣防,決瀆通溝.  作河渠書, 第七.
[하(夏)나라를 세운 우(禹)임금이 하수(河水)를 뚫어 구주가 평안하게 되었고,
선방궁(宣房宮)을 건설할 때는 도랑을 뚫어 큰 하천과 통하게 만들었다.
이에 제 칠 편 <하거서(河渠書)>를 지었다.] 

維幣之行,以通農商;其極則玩巧,并兼茲殖,爭於機利,去本趨末.  

作平準書以觀事變,第八.
[화폐를 유통시키는 것은 오로지 농업과 상업을 원활하게 하기 위함이다.

그러나 그 극단에 치우치게 되면 농단과 기교를 부려 남의 재산을 빼앗아

자기의 재산을 증식시키기 위해 서로 그 이익을 다툼으로써 
상업이 농업을 압도하게 되어 본말이 전도되게 된다. 그 일의 변화를 살펴 보고자,  
이에 제 팔 편 <평준서(平準書)>를 짓는다.] 

 

太伯避歷,江蠻是適;文武攸興,古公王跡.  闔廬弒僚,賓服荊楚;

夫差克齊,子胥鴟夷;信嚭親越,吳國既滅.  嘉伯之讓,作吳世家第一.
[태백이 계력을 피해 강수를 넘어 남만으로 달아났다. 문왕과 무왕이 흥기해,

고공단보가 꿈꾸었던 왕업을 세웠다. 한편 태백의 후예들이 세운 남만의

오나라에서는 합려가 왕 료(僚)를 시해하여 그 군주를 차지하고,

형초(荊楚)를 굴복시켰으며, 합려의 뒤를 이은 부차는 제나라와의 싸움에서 이겨

중원의 패자가 되었고,  오자서를 죽여 말가죽 부대에 싸서 강물에 던졌다.

부차는 백비(伯嚭)의 간사스러운 말을 믿고 월나라와 친해진 결과 오나라는 결국은

멸망하고 말았다. 태백이 주족의 족장 자리를 동생에게 양보한 미덕을 기리어  
이에 제 일 편 <오태백세가(吳太伯世家)>를 지었다.]

申、呂肖矣,尚父側微,卒歸西伯,文武是師;功冠群公,繆權于幽;

番番黃髪,爰饗營丘. 不背柯盟,桓公以昌,九合諸侯,霸功顯彰.  

田闞爭寵,姜姓解亡.  嘉父之謀,作齊太公世家第二.
[신(申)과 여(呂) 두 나라가 쇠약해지자 상보(尙父)는 보잘것없는 신세가 되었다가 

결국은 서백에게 귀의하여 주문왕과 주무왕의 태사가 되었다.

그가 세운 공은 여러 사람들 중에서 으뜸이었고 권모술수에 제법 능했다.  
그는 머리가 황백색으로 변한 노년에 제나라 땅인 영구(營口)를 봉지로 받았다.

그의 후손 중 가(柯) 땅의 맹약을 배반하지 않았던 제환공은 그로 인하여 크게 일어나

제후들을 아홉 번이나 회합시킬 수 있었고 패자가 되어 그 업적이 만​고에 빛나게

되었다. 후에 전상(田常)과 감지(闞止)가 제나라 군주의 총애를 다투다가 이윽고

강성의 제나라는 멸망하게 되었다. 상보의 그때 형편에 따른 모략을 칭송하고자,   
이에 제 이 편 <제태공세가(齊太公世家)>를 지었다.] 

依之違之,周公綏之;憤發文德,天下和之;輔翼成王,諸侯宗周.  

隱桓之際,是獨何哉? 三桓爭彊,魯乃不昌.  嘉旦金縢,作周公世家第三.
​[주무왕이 죽고 어린 성왕이 즉위하자 제후들 중에 어떤 자들은 복종하였고

또 어떤 자들은 따르지 않았다. 주공단이 이것을 안정시키고 문덕을 베푸는데

한층 분발하자 천하 사람들이 이에 호응하였다.  
주공단이 어린 성왕을 보좌했음으로 제후들은 주나라를 우러러 종주로 삼았다.  
그러나 주공단의 자손들인 노은공과 노환공 시대 때는 어찌하여 유독 편안하지

못했던가? 삼환이 서로 세력을 다투었기 때문에 노나라는 결국은 크게 번창하지

못한 것이다.  주공단이 행한 금등(金縢)의 아름다운 행위를 칭송하고자, 
이에 제 삼 편 <주공세가(周公世家)>를 지었다.]

武王克紂,天下未協而崩. 成王既幼,管蔡疑之,淮夷叛之,於是召公率德,

安集王室,以寧東土.  燕(易)[噲]之禪,乃成禍亂.  嘉甘棠之詩,作燕世家第四.
​[주무왕이 주왕을 토벌하였으나 천하의 화합을 이루기도 전에 죽었다.

무왕의 아들 성왕이 뒤를 이었으나 나이가 어려 관숙과 채숙은 성왕을 대신하여

섭정하던 주공을 의심하여, 회수(淮水) 연변에 살던 이족들과 함께 반란을 일으켰다.

그리하여 소공은 덕으로써 그들을 이끌어 천하의 인심을 왕실에 쏠리게 하여

왕실을 편안하게 함으로써 동쪽 지역도 평안하게 하였다.

소공의 후손인 연왕 쾌는 선양의 도를 흉내내다가 결국 변란을 불러 일으키고 말았다.

<감당(甘棠)>의 시에서 노래한 소공의 아름다운 행위를 칭송하고자,
이에 제 사 편 <연소공세가(燕召公世家)>를 지었다.]

管蔡相武庚, 將寧舊商;及旦攝政, 二叔不饗;殺鮮放度, 周公為盟;

大任十子, 周以宗彊.  嘉仲悔過, 作管蔡世家第五.
[관숙과 채숙은 무경의 상이 되어 장차 옛 상나라 지역의 민심을 안정시키려고 했다.  
그러나 주공단이 성왕을 대신해 섭정의 자리에 앉자 두 사람은 마음에 의심을

품었다. 이에 주공단은 관숙은 죽이고 채숙은 나라 밖으로 추방한 다음

어린 성왕에게 신하로서 충성을 다할 것을 맹세했다.  주무왕의 모친 대임은 슬하에

아들을 열이나 두어 주나라의 종실은 강성하게 되었다. 이어서 채훅의 아들 채중이

그 부친의 잘못을 뉘우쳐 선행을 했음으로 이를 가상히 여겼다. 
이에 제 오 편 <관채세가(管蔡世家)>를 지었다.] 

王后不絕, 舜禹是說;維德休明, 苗裔蒙烈.  百世享祀,爰周陳杞,楚實滅之.
齊田既起, 舜何人哉?作陳杞世家第六.
[옛날 성왕(聖王)들의 후손들이 끊어지게 하지 않았으니 이는 우, 순이 기뻐할

것이다.  그들이 베푼 덕은 아름답고 청명하여 그 후세들이 은혜를 입었고,

백세가 지나도록 제사를 받들었으나 주나라에 시대에 이르러 분봉되어

진(陳)나라와 기(杞)나라라는 제후국이 되었으나, 후에 초나라에 의해 멸망당했다.

그러나 진씨들은 다시 제나라로 들어가 전씨로 성을 바꾸어 제나라를 차지하였으니,  
도대체 순임금은 얼마나 훌륭한 사람이었기에 그 자손이 끊어지지 않고

그렇게 번창했단 말인가 ?  
이에 제 육 편 <진기세가(陳杞世家)>를 지었다.]

收殷餘民,叔封始邑,申以商亂,酒材是告,及朔之生,衛頃不寧;

南子惡蒯聵, 子父易名.  周德卑微,戰國既彊,衛以小弱,角獨後亡.  

喜彼康誥,作衛世家第七.
[주무왕은 은나라의 유민들을 수습하여 강숙 봉(封)을 은나라의 구토에 봉하면서,  
상나라 말에 어지럽게 된 것을 일러주며 <주고(酒誥)>와 <재재(梓材)>를 글로 써서

경계로 삼게 했다. 이어서 위나라가 혜공(惠公) 삭(朔)의 대에 이르게 되자 

국세가 기울어 평안하지 못하였다. 위영공의 부인인 남자(南子)는 그의 아들 괴외를

싫어하여 아들과 부친의 명분을 뒤바꿔 버렸다. 주나라의 덕이 쇠약해지고

전국의 일곱 나라가 갈수록 강성해지자 위나라는 소국으로 전락하였으나 
육국이 진나라에 병합된 뒤에도 계속 살아 남아 각왕(角王) 때 최후로 망했다. 
저 <강고>의 덕을 칭송하고자, 이에 제 칠 편 <위강숙세가(衛康叔世家)>를 지었다.] 

嗟箕子乎!嗟箕子乎!正言不用,乃反為奴.  武庚既死,周封微子.  

襄公傷於泓,君子孰稱.  景公謙德,熒惑退行.  剔成暴虐,宋乃滅亡.  

喜微子問太師,作宋世家第八.
[오호라, 기자여! 오호라, 기자여! 올바른 말을 했으나 받아들여지기는커녕 오히려

노예의 신분으로 떨어졌구나 ! 주나라는 무경이 반하자 죽이고 미자계를 다시 봉했다.

이어서 후예인 양공은 초나라와 홍수(泓水)의 싸움에서 의(義) 지키려다가

어이없이 패하고 부상을 입었는데 군자라면 그 누구가 도를 말할 수 있겠는가 ?  
후에 송경공은 스스로를 낮추고 백성들에게 덕을 베풀었으나 형혹성이 위치를

바꾸어 송나라로부터 벗어났다. 이어서 척성(송강왕)이 포학무도 했음으로

송나라는 이로 인하여 결국은 멸망하고 말았다. 미자계가 송나라에 책봉되자

기자(箕子)를 태사로 삼아 자문을 구하여 정치를 행한 것을 칭송하여  
이에 제 팔 편 <송미자세가(宋微子世家)>를 지었다.]

武王既崩,叔虞邑唐.  君子譏名,卒滅武公.  驪姬之愛,亂者五世;

重耳不得意,乃能成霸.  六卿專權,晉國以秏.  嘉文公錫珪鬯,作晉世家第九.
​[주무왕이 세상을 떠나자, 그 아들인 성왕이 그의 동생인 숙우를 당(唐)에 봉했다.  
그러나 문후 때에 이르자 이름의 순서가 바뀌어 결국은 곡옥의 무공이 본국을

멸하고 말았다. 후에 진헌공은 여희(驪姬)와 사랑에 빠져 다섯 군주의 치세 동안

진나라는 혼란에 빠지고,  중이(문공)는 오랫동안 뜻을 얻지 못하다가

19년 동안의 유랑생활 끝에 결국은 패업을 이루게 되었다. 진나라가 강성하게 되자,

육경이 권력을 독점하여 진나라는 끝내는 그 힘을 다하게 되었다.  
진문공이 주천자로부터 옥으로 만든 규(珪)와 울창주를 하사 받은 것을 칭송하여  
이에 제 구 편 <진세가(晉世家)>를 지었다.]

重黎業之,吳回接之;殷之季世,粥子牒之.  周用熊繹,熊渠是續.  

莊王之賢,乃復國陳;既赦鄭伯,班師華元.  懷王客死,蘭咎屈原;

好諛信讒,楚并於秦.  嘉莊王之義,作楚世家第十.
[중려는 화정(火正)이 되어 제곡을 위해 공을 세웠으나 공공(共工)의 난을 진압하지

못하자 살해당하고, 오회가 그 뒤를 이어 화정이 되었다. 은나라 말기에 이르자,

오희의 손자인 계련이 대를 이어 초나라의 시조가 되어 이때부터 죽웅의 후손들에

대한 역사가 쓰여지게 되었다. 주나라 죽웅의 후손인 웅역을 초자(楚子)에 봉하고

그 뒤를 웅거가 이었다. 어진 마음의 초장왕은 멸망한 진(陳)나라를 다시 세워주고,
초나라에 항거한 정백의 죄를 용서했으며, 송나라의 우사(右師) 화원의 말을 믿고

군대를 철수시켰다.  후에 초회왕은 진나라에 유인되어 결국은 돌아오지 못하고

그곳에서 객사했으나 자란과 근상은 그 잘못을 모두 굴원에게 돌렸다.

초평왕은 아첨하는 말을 좋아하고 어진 신하를 참소하는 말을 믿었기 때문에  
초나라는 결국은 진나라에 의해 망하게 된 것이다. 초장왕의 의로운 뜻을 기리어,  
이에 제 십 편 <초세가(楚世家)>를 지었다.]

少康之子,實賓南海,文身斷發,黿鱓與處,既守封禺,奉禹之祀.  句踐困彼,

乃用種、蠡.  嘉句踐夷蠻能修其德,滅彊吳以尊周室,作越王句踐世家第十一.
[소강의 아들 여(餘)는 남해의 바닷가로 가서 몸에 문신을 하고 머리는 짧게 잘랐으며,
자라와 물고기들과 함께 살며 우산(禺山)에 봉해져 그곳을 지키다가

우임금의 제사를 모셨다. 그 후손인 구천은 부차에게 곤욕을 치렀으나

이내 문종(文宗)과 범려(范蠡)를 중용하였다.  구천이 만이(蠻夷)들과 함께 살면서

능히 그 덕을 쌓아 강대한 오나라를 멸하고 주왕실을 떠받든 일을 칭송해,  
이에 제 십일 편 <월왕구천세가(越王句踐世家)>를 지었다.]

桓公之東,太史是庸.  及侵周禾,王人是議.  祭仲要盟,鄭久不昌.  

子產之仁,紹世稱賢.  三晉侵伐,鄭納於韓.  嘉厲公納惠王,作鄭世家第十二.
​[정환공(鄭桓公) 우(友)가 동쪽의 땅으로 그 봉지를 옮긴 것은 주왕실의 태사 백(伯)의

말에 따른 것이었다. 이어서 정장공은 군사를 내어 주나라 경계를 침략하여 벼이삭을

베어오자,주왕실의 백성들과 신하들의 의론이 분분하며 정나라의 행위를 비난하였다.
제중(祭仲)이 송나라의 위협에 굴복하여 맹약을 맺음으로써 정나라는 강국으로서

오래가지 못했다. 이어서 자산(子産)이 나타나 정나라의 정치를 일신하자

후세 사람들은 잊지 않고 그의 현명함을 칭송하였다.  삼진(한,위,조)이 번갈아 가며

정나라를 쳐들어오니 정나라를 망하여 결국은 한나라에 병합되었다.
정려공이 왕자 퇴의 난으로 나라에서 쫓겨난 것을 도와 복국시킨 공로를 칭송하여,
이에 제 십이 편 <정세가(鄭世家)>를 지었다.]

維驥騄耳, 乃章造父.  趙夙事獻, 衰續厥緒.  佐文尊王, 卒為晉輔. 襄子困辱, 乃禽智伯. 
主父生縛, 餓死探爵.  王遷辟淫, 良將是斥.  嘉鞅討周亂, 作趙世家第十三. 
[주목왕에게 명마 기(驥)와 녹이를 선사하고 그것으로 이름을 얻은 조보(造父)는

조씨들의 시조가 되었다. 조숙(趙夙)이 진헌공(晉獻公)을 섬겼고,

그의 후손 조최가 계속해서 조숙의 유업을 이었다. 조최는 진문공을 보좌하여 패자의

지위에 오르게 하고 주왕실을 높여 이윽고 진나라를 크게 일으킨 공신이 되었다.
조양자(趙襄子)가 진양에서 지백을 포함한 삼가의 공격으로 위험에 빠졌으나,
한, 위나라의 도움으로 이내 어려움을 극복하고 오히려 지백을 사로잡아

조나라의 기틀을 마련하였다. 주보(主父) 무령왕(武靈王)은 사구궁에서 

그의 신하들에게 포위되어 참새를 잡아 허기를 채우다가 굶어 죽었다.  
조왕 천(遷)은 편협하고 음락을 즐겨 훌륭한 장수들을 멀리한 결과

조나라는 망하게 되었다.  조앙(趙鞅)이 주왕실의 난을 토벌한 것을 칭송하여,

이에 제 십삼 편 <조세가(趙世家)>를 지었다.]

畢萬爵魏,卜人知之.  及絳戮干,戎翟和之.  文侯慕義,子夏師之.  

惠王自矜,齊秦攻之.  既疑信陵,諸侯罷之.  卒亡大梁,王假廝之.  

嘉武佐晉文申霸道,作魏世家第十四.
[진헌공(晉獻公)을 모신 필만(畢萬)은 그 세운 공으로 위(魏) 땅에 봉해졌다.

점술가는 필만의 후손들이 번창하게 될 것을 예언했다. 그러자 그의 후손인 위강은

진도공의 동생 양간(楊干)을 치죄하고 다시 융적의 무리들을  회유하여 당진의

신민으로 삼았다. 위문후는 의로운 선비들을 좋아하여 자하를 스승으로 모셨다.
문후의 뒤를 이은 혜왕은 스스로 자만에 빠지자, 제와 진(秦) 두 나라로부터 침략을 

받아 국세가 크게 꺾였다. 안리왕이 신릉군을 의심하자 제후들이 위나라를 멀리했다.

마침내 진나라는 대량성을 점령하고 위나라를 멸했다.  
위왕 가(假)는 진나라의 포로가 되어 미천한 노예로 전락했다.

위무자(魏武子) 주(犨)가 진문공을 도와 패업을 이루게 한 공을 기리어,

이에 제 십사 편 <위세가(魏世家)>를 지었다.]

韓厥陰德,趙武攸興.  紹絕立廢,晉人宗之.  昭侯顯列,申子庸之.  

疑非不信,秦人襲之.  嘉厥輔晉匡周天子之賦,作韓世家第十五.
​[한궐(韓厥)이 음덕을 쌓아 조무로 하여금 망한 조씨 집안을 다시 일으키게 도왔다.  
끊어진 후손들을 잇게 하고 폐지된 제사를 다시 지내게 만들었으니 진나라 사람들이

그를 추앙했다. 한소후(韓昭侯)가 열후들 가운데에서 뛰어난 것은 신불해(申不害)를

중용했기 때문이다.  한왕 안(安)은 한비자(韓非子)를 의심하여 믿지 않았음으로

결국은 진나라로부터 침략을 당해 나라가 망하게 되었다. 한궐이 진(晉)나라 군주를

보좌하여 패업을 계속 잇게 하고 다시 주천자의 존엄함을 높였다.  
그 공을 칭송하여, 이에 제 십오 편 <한세가(韓世家)>를 지었다.]

 

完子避難,適齊為援,陰施五世,齊人歌之.  成子得政,田和為侯.  

王建動心,乃遷于共.  嘉威、宣能撥濁世而獨宗周,作田敬仲完世家第十六.
​[진나라의 공자 진완(陳完)은 난을 피해 제나라에 와서 도움을 받으며 살다가

그 후손들 중 5대에 이르러 백성들에게 은혜를 베풀자, 제나라 사람들은 그들의 덕을

노래 불렀다. 전성자가 그의 군주를 죽이고 정권을 잡았다.

전성자의 오대 손인 전화 때에 이르러 강씨를 대신하여 제후의 자리를 차지하였으나, 

제나라의 마지막 왕 왕건(王建)이 진나라의 공작에 속아 마침내 나라가 망하자,  
그는 진왕(秦王)에 의해 공(共) 땅으로 옮겨져 쓸쓸한 최후를 맞이하였다. 
제위왕과 제선왕이 혼탁한 세상임에도 오로지 주나라를 떠받든 것을 칭송하여,  
이에 제 십육 편 <전경중완세가(田敬仲完世家)>를 지었다.]

周室既衰,諸侯恣行.  仲尼悼禮廢樂崩,追修經術,以達王道,匡亂世反之於正,

見其文辭,為天下制儀法,垂六藝之統紀於後世.  作孔子世家第十七.
[주왕실이 쇠약해 지자, 제후들이 말을 듣지 않고 멋대로 행동했다.
공자는 예(禮)가 없어지고 악(樂)이 무너지는 것을 슬퍼하며 거슬러 올라가

경전을 다듬어 왕도에 이르게 하여 혼란한 세상을 바로잡아 바른 길로 되돌리려고

하였다. 경전의 문장에 나타난 것을 보면 천하를 위해서 의례와 법도를 만들었다고

할 수 있으며,  육예의 기강을 영원히 후세에 물려주었다.  

이에 제 십칠 편 <공자세가(孔子世家)>를 지었다.]

桀、紂失其道而湯、武作,周失其道而春秋作.  秦失其政,而陳涉發跡,

諸侯作難,風起雲蒸,卒亡秦族.  天下之端,自涉發難.  作陳涉世家第十八.
[​하나라의 걸왕(桀王)과 상나라의 주왕(紂王)이 실덕하여 나라를 잃었으나

은나라의 탕임금과 주무왕은 덕을 쌓아 나라를 일으킨 것이다.

그러나 주 왕실이 왕도를 잃자, 공자는 <춘추>를 지었다.

진나라가 천하를 통일했으나 그 정치를 제대로 하지 못하자, 진섭이 일어났다.

천하의 제후들이 진섭의 뒤를 쫓아 난을 일으키니 그 기세가 마치 바람과 구름과

같아서 마침내 진나라는 망하게 되었다. 천하를 통일한 진나라가 망하게 된 발단은  
진섭이 일으킨 반란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이에 제 십팔 편 <진섭세가(陳涉世家)>를 지었다.]

成皋之臺, 薄氏始基.  詘意適代, 厥崇諸竇.  栗姬偩貴, 王氏乃遂. 

陳後太驕, 卒尊子夫.  嘉夫德若斯, 作外戚世家十九.
[하남의 성고에 세운 대(臺)는 한문제의 모친인 박씨(薄氏)가 그 터를 파기 시작했고  
두황후는 뜻을 꺾고 대(代) 땅으로 들어갔다가 대왕이었던 유항이 제위를 잇게 되자  
그녀의 일족들은 모두가 존귀하게 되었다. 율희는 그 사이에 틈을 타서 존귀하게

되었으나 교만해 졌으며 이때 왕씨(王氏)가 기회를 얻어 출세가도를 달렸다.

진황후는 너무 교만했기 때문에 마침내 한무제에 의해 황후의 자리에서 쫓겨나고

위자부가 황후가 되어 존귀하게 되었다. 위자부의 아름다운 덕행을 칭송하여,

이에 제 십구 편 <외척세가(外戚世家)>를 지었다.]

漢既譎謀, 禽信於陳;越荊剽輕, 乃封弟交為楚王, 爰都彭城, 以彊淮泗, 為漢宗藩.
戊溺於邪,禮復紹之.  嘉游輔祖,作楚元王世家二十.
[한고조가 속임수를 써서 한신을 진(陳) 땅에서 사로잡았다.

한고조는 월(越)이나 형초 사람들은 사납고 경박하기에 그의 동생 유교를 초왕으로

봉해 팽성에 도읍을 정하고 회수(淮水)와 사수(泗水) 사이의 고을들을 힘으로 다스려
한나라를 위한 번국의 종주국이 되었다. 초왕 유무는 사간(邪奸)의 죄를 범했다가

오초칠국의 난에 가담하고, 이어서 실패하자 스스로 목숨을 끊었고

그 뒤를 유례(劉禮)가 초왕에 봉해져 초원왕(楚元王)의 후사를 잇게 되었다.
초원왕 유교(劉交)가 고조를 보필한 것을 칭송하여

이에 제 이십 편 <초원왕세가(楚元王世家)>를 지었다.]

維祖師旅,劉賈是與;為布所襲,喪其荊、吳.  營陵激呂,乃王瑯邪;

怵午信齊,往而不歸,遂西入關,遭立孝文,獲復王燕.  

天下未集,賈、澤以族,為漢藩輔.  作荊燕世家第二十一.
[한고조가 군사를 일으켰을 때 유고(劉賈)가 함께 참가하여 그 공으로 제후의 반열에

들게 되었다. 후에 영포(英布)에 의해 습격 당해 자신은 목숨을 잃고

봉지인 형(荊)과 오(吳)의 땅을 잃게 되었다.  
영릉후(英陵侯) 유택(劉澤)은 여태후를 감격시켜 이윽고 낭야왕에 봉해졌다.  
그는 축오(祝午)의 말을 듣고  제나라로 갔다가 억류되어 돌아오지 못했다.
후에 계교를 써서 서쪽의 관중으로 들어가 효문제를 새로운 황제의 자리에 올릴 때

연왕의 자리를 얻을 수 있었다. 천하의 인심이 아직 모아지지 않았을 때

유고와 유택은 황제의 일족으로 번국의 왕이 되어 황실을 도왔다.
이에 제 이십일 편 <형연세가(荊燕世家)>를 지었다.] 

天下已平,親屬既寡;悼惠先壯,實鎮東土.  哀王擅興,發怒諸呂,駟鈞暴戾,

京師弗許.  厲之內淫,禍成主父.  嘉肥股肱,作齊悼惠王世家第二十二.
[천하가 이미 평정되어 인심이 안정이 되었으나 황실의 친속들이 적었다.  
고조의 아들 중 도혜왕(悼惠王)이 가장 먼저 성인이 되어 동쪽의 제나라에 봉해져

그곳을 굳게 지켰다.  애왕(哀王)이 경솔하게 군사를 일으킨 것은 당시의 실권자들인

여씨(呂氏)들의 전횡에 분노를 느꼈기 때문이었다.

애왕의 외삼촌 사균(駟鈞)이 포학하고 잔인했음으로 대신들은 애왕이 황제의 자리에

오르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다. 려왕은 누이와 간통하다가 주보언의 조사를 받고

자살하는 화를 당했다. 유비가 한고조의 고굉지신이 되어 잘 보좌했음을 기리어,

이에 제이십이편 <제도혜황세가(齊悼惠王世家)>를 지었다.]

楚人圍我滎陽,相守三年;蕭何填撫山西,推計踵兵,給糧食不絕,

使百姓愛漢,不樂為楚.  作蕭相國世家第二十三.
[한고조가 형양에서 초왕 항우에 의해 포위 당하여 항복하지 않고 3년을 대치하였다. 
이는 소하가 산서 지역을 위무하며 호구를 관리하여 군사를 보충하고,

병사들을 위한 군량미를 끊어지지 않게 공급한 때문이었다. 또한 백성들로 하여금

한나라를 사랑하고, 초나라를 위해 즐겨 일하지 않게 했기 때문이다.  
이에 제 이십삼 편 <소상국세가(蕭相國世家)>를 지었다.]  

與信定魏,破趙拔齊,遂弱楚人.  續何相國,不變不革,黎庶攸寧.
嘉參不伐功矜能,作曹相國世家第二十四.
[조참(曹參)은 한신(韓信)과 함께 출병하여 위나라를 평정하였고 조나라 군사를

파하고 제나라를 함락시킴으로써 마침내 초나라 세력을 쇠약하게 만들었다.

소하가 죽은 다음에 상국의 자리를 이어 받아 그가 세워 놓은 제도는 아무 것도

바꾸거나 혁파하지 않고 그대로 시행하여 백성들의 생활을 편안하게 했다.
조참이 자기의 공로나 능력을 자랑하지 않은 것을 칭송하여, 
이에 제 이십사 편 <조상국세가(曹相國世家)>를 지었다.]

運籌帷幄之中,制勝於無形,子房計謀其事,無知名,無勇功,

圖難於易,為大於細.  作留侯世家第二十五.
[군대 장막 안에서 계책을 세우고 실행하여 보이지 않은 적을 제압하여 

승리를 쟁취한 것은 모두가 장자방(장량)의 계책에 의한 것이었으며,

그의 명성을 알아주는 사람도 없었고, 무용을 발휘하여 전공을 세운 일도 없었으나,
어려운 일을 쉬운 일로 해결하고 사소한 일도 치밀하게 행하여 큰일을 이루었다.  
이에 제 이십오 편 <유후세가(留侯世家)>를 지었다.]

六奇既用,諸侯賓從於漢;呂氏之事,平為本謀,終安宗廟,定社稷.  

作陳丞相世家第二十六.
[진평의 여섯 가지 기묘한 계책을 고조에게 바쳐 천하의 제후들이 한나라를 따르도록

만들었고 , 여씨들이 전횡하자 그들을 토벌한 것도 원래 진평(陳平)의 계책에 의한

것이었으며, 한나라 종묘와 사직을 안정시킨 것도 진평의 공적이라, 

이에 제 이십육 편 <진승상세가(陳丞相世家)>를 지었다.]

諸呂為從,謀弱京師,而勃反經合於權;吳楚之兵,亞夫駐於昌邑,

以戹齊趙,而出委以梁.  作絳侯世家第二十七.
[여씨들이 결탁해 황실의 세력을 깎아 내리려 획책했으나 주발은 정도에 벗어난

권모술수를 써서 여씨들을 주멸했다. 오초가 힘을 합하여 반란을 일으켰을 때

주발의 아들인 주아부가 군사를 이끌고 출동하여 창읍(昌邑)에 주둔하면서

제와 조 두 나라의 군사들과 오초 군사들의 연락을 끊었다. 이어서 양나라의

위급함을 스스로 해결하게 하여 결국은 오초칠국의 난을 평정했음으로, 
이에 제 이십칠 편 <강후세가(絳侯世家)>를 지었다.]  

七國叛逆,蕃屏京師,唯梁為捍;偩愛矜功,幾獲于禍.  

嘉其能距吳楚,作梁孝王世家第二十八.
[칠국이 반란을 일으켰을 때 한왕조의 변경을 지키던 제후국들 중 오직 양나라만이

칠국에 가담하지 않고 그들의 난을 막아 지켜냈다. 그러나 모후인 두태후의 총애를

너무 믿었고 또한 자기의 공을 너무 자랑한 나머지 화를 입어 목숨을 잃을 뻔했다.

양효왕이 오초의 군사들을 막아내 황실을 안정시킨 공로를 칭송하여, 
이에 제 이십팔 편 <양효왕세가(梁孝王世家)>를 지었다.]

五宗既王,親屬洽和,諸侯大小為藩,爰得其宜,僭擬之事稍衰貶矣.  

作五宗世家第二十九.
[오종(한경제는 다섯 여인들로부터 모두 14명의 아들을 두었으며 한무제를 제외한

13명)이 모두 제후왕이 되자, 황실의 친속들은 서로 친하여 화합을 이루었고 ,

이어 모두 크고 작은 나라의 제후왕들로 봉해져 황실의 변방을 지키는

번국(藩國)으로서의 임무를 다했다.  
이에 자기의 직분을 벗어나 천자의 자리를 넘보는 제후들이 점차 없어지게 되었다.   
이에 제 이십구 편 <오종세가(五宗世家)>를 지었다.]

三子之王,文辭可觀.  作三王世家第三十.
[무제의 세 아들은 모두 제후왕으로 봉해졌는데, 그때 지은 문장이 가히 명문이었다.  
이에 제 삼십 편 <삼왕세가(三王世家)>를 지었다.] 

 

末世爭利,維彼奔義;讓國餓死,天下稱之.  作伯夷列傳第一.
​[세상이 말세가 되면 세상 사람들은 모두가 이익을 다투게 되나 오로지

백이와 숙제만은 의를 추구하여, 나라의 군주 자리도 마다하고 수양산에 들어가

결국은 굶어 죽었으니 천하 사람들이 그들을 칭송하였다.  
이에 제 일 편 <백이열전(伯夷列傳)>을 지었다.] 

晏子儉矣,夷吾則奢;齊桓以霸,景公以治.  作管晏列傳第二.
[안자(晏子) 평중(平仲)은 검소했으며 관자(管子) 이오(夷吾)는 사치스러워 두 사람은

서로 행하는 바가 달랐으며, 이오는 제환공을 패자로 만들었고,

평중은 제경공으로 하여금 치세를 이루게 만들었다.  
이에 제 이 편 <관안열전(管晏列傳)>을 지었다.]

李耳無為自化,清凈自正;韓非揣事情,循埶理.  作老子韓非列傳第三.
[노자(老子) 이이(李耳)는 무위를 주장하여 사람들로 하여금 일부러 일삼지 않으면
만물은 저절로 조화를 이루고, 마음을 깨끗하게 가짐으로써 스스로 올바른 마음을

갖게 만들었으며, 한비자는 각기 사물과 시세의 정황을 헤아려 형세와 도리가 

움직이는 이치에 따랐다.  
이에 제 삼 편 <노자한비열전(老子韓非列傳)>을 지었다.]

自古王者而有司馬法,穰苴能申明之.  作司馬穰苴列傳第四.
[옛날 왕들에게도 <사마법>이라고 있었으나, 사마양저가 그 병법의 쓰임새를

넓히고 분명히 밝혔다.  
이에 제 사 편 <사마양저열전(司馬穰苴列傳)>을 지었다.] 

非信廉仁勇不能傳兵論劍,與道同符,內可以治身,外可以應變,君子比德焉.
作孫子吳起列傳第五.
[신(信), 염(廉), 인(仁), 용(勇)이 아니고는 병법과 검술에 대해 논할 수 없으며

부절이 서로 맞듯이 그 이론이 도에 부합해야만 안으로는 스스로 자기 몸을

다스릴 수 있고, 밖으로는 그 변화에 대해 대처할 수 있다.

군자가 이것에 더하여 같이 중요하게 생각해야 할 것은 덕이라고 했다.  
이에 제 오 편 < 손자오기열전(孫子吳起列傳)>을 지었다.]

維建遇讒,爰及子奢,尚既匡父,伍員奔吳.  作伍子胥列傳第六.
[태자건(太子建)이 비무극으로부터 참소를 당해 그 화가 오사(伍奢)의 몸에 미쳤다.  
오상(伍尙)은 그 부친을 위해 목숨을 버렸으며 그 동생 오자서는 오나라로 달아나

그 부친과 형의 원수를 갚았다.  
이에 제 육 편 <오자서열전(伍子胥列傳)>을 지었다.] 

孔氏述文,弟子興業,咸為師傅,崇仁厲義.  作仲尼弟子列傳第七.
[공자는 학문과 문학을 논하고 제자들은 공자의 가르침을 세상에 널리

번창시켰으며, 그들은 모두 사람들의 스승이 되어, 사람들로 하여금

인을 숭상하고 의를 행하게 하였다.
이에 제 칠 편 <중니제자열전(仲尼弟子列傳)>을 지었다.]

鞅去衛適秦,能明其術,彊霸孝公,後世遵其法.  作商君列傳第八.
[상앙은 위(衛) 땅을 떠나 진나라로 들어가 그가 배운 술법을 능히 펼칠 수 있어,  
진효공(秦孝公)을 패자로 만들었음으로 후세 사람들이 그가 펼친 법술을 따랐다.
이에 제 팔 편 <상군열전(商君列傳)>을 지었다.] 

 天下患衡秦毋饜,而蘇子能存諸侯,約從以抑貪彊.  作蘇秦列傳第九.
[천하가 근심하고 있었던 것은 진나라의 연횡과 그칠 줄 모르는 욕심이었다.  
소진은 제후국들을 존립하게 하고 합종의 맹약을 맺게 하여

탐욕스러운 강국 진나라를 제어하였다.
이에 제 구 편 <소진열전(蘇秦列傳)>을 지었다.]

六國既從親,而張儀能明其說,復散解諸侯.  作張儀列傳第十.

[육국이 서로 합종을 맺어 친하게 지내게 되자, 장의는 그 잘못을 지적할 수 있어

다시 합종책을 깨고, 제후들을 해산시킬 수 있었다.

이에 제 십 편 <장의열전(張儀列傳)>을 지었다.]

秦所以東攘雄諸侯,樗裏、甘茂之策.  作樗裏甘茂列傳第十一.
[진나라가 동쪽의 제후들을 물리치고 천하에 군림할 수 있었던 것은,

저리질(樗里疾)과 감무의 계책 덕분이었다. 
이에 제 십일 편 <저리 감무열전(樗里甘茂列傳)>을 지었다.]

苞河山,圍大梁,使諸侯斂手而事秦者,魏冉之功.  作穰侯列傳第十二.
[황하와 태산을 차지하고 대량(大梁)을 포위하여 제후들로 하여금 두 손을 모으고

진나라를 섬기게 한 것은, 위염(魏冉)의 공로였다.

이에 제 십이 편 <양후열전(穰侯列傳)>을 지었다.]

南拔鄢郢,北摧長平,遂圍邯鄲,武安為率;破荊滅趙,王翦之計. 

作白起王翦列傳第十三.
[진(秦)이 남쪽으로는 초나라의 도성 영(郢)를 함락시키고, 북쪽으로는 장평에서

조나라 군사 40만을 몰살시켰으며 이어서 조나라의 수도 한단을 포위할 수 있었던

것은 모두가 무안군 백기가 지휘해서 이루어진 것이다.  또한 초나라와 조나라를

멸하여 진나라가 천하를 통일 할 수 있었던 것은 왕전의 계책에 따랐기 때문이었다.
이에 제 십삼 편 <백기 왕전열전(白起王翦列傳)>을 지었다.]

獵儒墨​之遺文,明禮義之統紀,絕惠王利端,列往世興衰.  作孟子荀卿列傳第十四.
[유가와 묵가가 남긴 문헌을 섭렵한 맹자는 예의를 행하는 데 필요한 기강을 밝혔고,  
양혜왕의 이익에만 집착한 마음을 끊게 만들어 지난 옛날의 흥망성쇠를 열거했다.  
이에 제 십사 편 <맹자 순경열전(孟子荀卿列傳)>을 지었다.]

好客喜士,士歸于薛,為齊捍楚魏.  作孟嘗君列傳第十五.
[맹상군 전문(田文)은 문객과 선비를 좋아하니 천하의 많은 선비들이 설(薛) 땅으로

모여들었다. 그는 그 선비들을 이용하여 제나라를 위해 초나라와 위나라의 침략을

막아 낼 수 있었다.  
이에 제 십오 편 <맹상군열전(孟嘗君列傳)>을 지었다.]

爭馮亭以權,如楚以救邯鄲之圍,使其君復稱於諸侯.  作平原君虞卿列傳第十六.
[조나라의 평원군은 풍정(馮亭)과 권력을 다투다가 초나라로 가서 구원군을 얻어

한단의 포위를 풀고, 그 군주로 하여금 제후들 사이에 이름을 드높이게 했다.
이에 제 십육 편 <평원군 우경열전(平原君虞卿列傳)>을 지었다.]

能以富貴下貧賤,賢能詘於不肖,唯信陵君為能行之.  作魏公子列傳第十七.
[부귀한 신분이면서 가난하고 천한 자들을 우대했고, 현능하면서도 불초한 자들에게

능히 몸을 숙일 수 있었으니, 이는 오로지 신릉군만이 할 수 있었다.

이에 제 십칠 편 <위공자열전(魏公子列傳)>을 지었다.]

以身徇君,遂脫彊秦,使馳說之士南鄉走楚者,黃歇之義.  作春申君列傳第十八.
[그 모시던 군주를 위해 몸을 바침으로 결국은 강포한 진나라로부터

고열왕을 탈출시키고, 유세하던 선비들을 남쪽의 초나라로 발길을 돌리게 한 것은

황헐의 의로운 마음에서 였다.  
이에 제 십팔 편 <춘신군열전(春信君列傳)>을 지었다.]

能忍於魏齊,而信威於彊秦,推賢讓位,二子有之.  作范睢蔡澤列傳第十九.
[범수는 위제(魏齊)로부터 당한 치욕을 참아내고 강한 진나라에서 신임을 얻어

위엄을 떨쳤다. 물러날 때가 되자 어진 사람을 대신 추천하고 자기의 자리를

양보해 주었으니 범수와 채택 모두 미덕을 갖출 수 있었다. 
이에 제 십구 편 <범수 채택열전(范睢蔡澤列傳)>을 지었다.]

率行其謀,連五國兵,為弱燕報彊齊之讎,雪其先君之恥.  作樂毅列傳第二十.
[군대를 이끌고 자신의 계책에 따라 실행하였으며 이웃 다섯 나라의 군사들과

연계하여,  국력이 약한 연나라를 위해 강성한 제나라에 원수를 갚게 함으로써

그 모시던 군주의 치욕을 씻었다.
이에 제 이십 편 <악의열전(樂毅列傳)>을 지었다.]

能信意彊秦,而屈體廉子,用徇其君,俱重於諸侯.  作廉頗藺相如列傳第二十一.
[인상여는 강한 진나라에 맞서 자기의 의지를 분명히 나타내었고,

또한 염파에게는 몸을 낮추어 그 군주에게 충성을 바칠 수 있게끔 하였다.

마침내 두 사람은 천하의 제후들로부터 중시되었다.  
이에 제 이십일 편 <염파 인상여열전(廉頗藺相如列傳)>을 지었다.]

湣王既失臨淄而奔莒,唯田單用即墨破走騎劫,遂存齊社稷.  作田單列傳第二十二.
[제민왕이 이미 임치성을 빼앗기고 제나라를 떠나 거(莒) 땅으로 도망쳤으나, 
오직 전단만이 즉묵을 굳게 지키다가 연나라 장수 기겁(騎劫)을 격파하여

마침내 제나라의 사직을 보존했다.  
이에 제 이십이 편 <전단열전(田單列傳)>을 지었다.]

能設詭說解患於圍城,輕爵祿,樂肆志.  作魯仲連鄒陽列傳第二十三.
[달변과 궤변으로 진나라 군사들에 의해 포위된 성의 포위망을 풀고 작위와 봉록도

가볍게 여기고, 단지 자기들의 뜻한 바를 마음껏 펼치는 것만을 즐거움으로 삼았다. 
이에 제 이십삼 편 <노중련 추양열전(魯仲連鄒陽列傳)>을 지었다.]  

作辭以諷諫,連類以爭義,離騷有之.  作屈原賈生列傳第二十四.
[초사(楚辭)라는 시부를 창조하여 정치를 풍자하여 간하고 그와 비슷한 것들을

비유함으로써 정의를 주장했다.

그가 지은 <이소>라는 시가는 이러한 것들을 지니고 있다. 
이에 제 이십사 편 <굴원 가생열전(屈原賈生列傳)>을 지었다.]

結子楚親,使諸侯之士斐然爭入事秦.  作呂不韋列傳第二十五.
[조나라의 포로가 된 자초(子楚)와 친분을 맺고,

제후들로 하여금 서로 다투어 진나라를 섬기도록 했다.  
이에 제 이십오 편 <여불위열전(呂不韋列傳)>을 지었다.] 

曹子匕首,魯獲其田,齊明其信;豫讓義不為二心.  作刺客列傳第二十六.
[조자(조말(曺沫)는 비수를 가슴에 품고 회맹장에 들어가 제환공을 위협하여

노나라의 빼앗긴 땅을 되찾고, 제환공으로 하여금 그 말을 지켜 신의라는 것을

밝히게 했으며, 예양은 의리를 지켜 결코 두 마음을 품지 않았다.  
이에 제 이십육 편 <자객열전(刺客列傳)>을 지었다.]

能明其畫,因時推秦,遂得意於海內,斯為謀首.  作李斯列傳第二十七.
[진나라를 위해 그림을 그리듯 그 계책을 명확히 세웠고,

시기를 가려가며 진(秦)에서 그 뜻을 실천함으로써,  
마침내 진나라가 천하를 주도할 수 있게 하니 이사가 그런 모사의 으뜸이었다. 
이에 제 이십칠 편 <이사열전(李斯列傳)>을 지었다.]

為秦開地益眾,北靡匈奴,據河為塞,因山為固,建榆中.  作蒙恬列傳第二十八.
[진나라를 위해 영토를 더욱 넓혀 백성들을 늘렸으며, 북으로는 흉노를 쳐부수고,

황하를 거점으로 삼아 요새를 구축했다.

또한 산을 의지해 더욱 견고한 방어를 구축하기 위해 유중을 건설했다.
이에 제 이십팔 편 <몽염열전(蒙恬列傳)>을 지었다.] 

填趙塞常山以廣河內,弱楚權,明漢王之信於天下.  作張耳陳餘列傳第二十九.
[조나라를 지키고 상산에 요새를 세웠으며 이윽고 그 세력을 하내군까지 확장하고,   
초나라의 세력을 약화시켜 한왕(漢王)의 신의를 천하에 밝혔다.
이에 제 이십구 편 <장이 진여열전(張耳陳餘列傳)>을 지었다.] 

收西河、上黨之兵,從至彭城;越之侵掠梁地以苦項羽.  作魏豹彭越列傳第三十.
[위표는 서하와 상당의 병사들을 이끌고 한왕을 따라 항우를 공격해 팽성에

이르렀다.  팽월(彭越)은 양(梁)을 침략하여 항우를 괴롭혔다.  
이에 제 삼십 편 <위표 팽월열전(魏豹彭越列傳)>을 지었다.]

以淮南叛楚歸漢,漢用得大司馬殷,卒破子羽于垓下.  作黥布列傳第三十一.
[경포는 회남의 땅을 차지했다가 초나라를 배반하고 한나라에 귀의했다. 
한나라는 그를 이용하여 초나라의 대사마 주은(周殷)을 얻고,

마침내 항우를 해하(垓下)에서 격파했다.  
이에 제 삼십일 편 <경포열전(黥布列傳)>을 지었다.]

楚人迫我京索,而信拔魏趙,定燕齊,使漢三分天下有其二,以滅項籍.  

作淮陰侯列傳第三十二.
[초나라가 한나라를 경현(京縣)과 삭성(索城)에서 압박할 때 한신은 그 뒤를 돌아

위(魏)와 조(趙)를 점령하고, 다시 연나라와 제나라를 평정했다.

천하는 한신에 의해 삼 분 되었으나 그 중 하나를 한나라에 바쳐 한나라는

그 둘을 차지하게 되어 그 힘으로써 항우를 멸망시킬 수 있었다.   
이에 제 삼십이 편 <회음후열전(淮陰侯列傳)>을 지었다.] 

楚漢相距鞏洛,而韓信為填潁川,盧綰絕籍糧餉.  作韓信盧綰列傳第三十三.
[초나라와 한나라가 공성과 낙읍에서 대치하고 있을 때, 한왕 신(信)은 영천의

길을 메워 퇴로를 차단하고, 노관은 항우 군대의 식량 노선을 끊었다.  
이에 제 삼십삼 편 <한신 노관열전(韓信盧綰列傳)>을 지었다.] 

諸侯畔項王,唯齊連子羽城陽,漢得以閒遂入彭城.  作田儋列傳第三十四.
[제후들이 항우를 배반했을 때 오직 제왕만이 성양에 있으면서 항우와 연계하였다.  
한왕(유방)은 이 틈을 타서 마침내 팽성으로 들어갈 수 있었다.  
이에 제 삼십사 편 <전담열전(田儋列傳)>을 지었다.] 

攻城野戰,獲功歸報,噲、商有力焉,非獨鞭策,又與之脫難.  

作樊酈列傳第三十五.
[성을 공략하고 야전에서 적군과 싸움에 임하여 공을 세우고 돌아와 보고하기

까지에는 번쾌(樊噲)와 역상(酈商)이 가장 큰 힘을 발휘했다. 그들은 단지 한왕을

위해 말채찍을 잡고 달렸을 뿐만 아니라 함께 난관을 벗어나기도 했다.

이에 제 삼십오 편 <번 역 등 관열전(樊酈藤灌列傳)>을 지었다.] 

漢既初定,文理未明,蒼為主計,整齊度量,序律歷.  作張丞相列傳第三十六.
[한나라는 초기에 안정을 이루었으나 문치와 이치는 밝히지 못했다.

장창(張蒼)이 계획을 맡아 도량형을 정비하여 통일하고 법률과 역법을 바로 잡았다.

이에 제 삼십육 편 <장승상열전(張丞相列傳)>을 지었다.] 

結言通使,約懷諸侯;諸侯咸親,歸漢為藩輔.  作酈生陸賈列傳第三十七.
[말로서 결맹을 맺고 사신을 통하여 제후들과 조약을 맺어 품에 안았다. 제후들은

모두 한나라에 대해 가까운 감정을 가지고 한에 귀의해 속국으로서 도움을 주었다. 
이에 제 삼십칠 편 <역생 육가열전(酈生陸賈列傳)>을 지었다.]

欲詳知秦楚之事,維周緤從高祖,平定諸侯.  作傅靳蒯成列傳第三十八.
[진나라 말기 한과 초 두 나라 사이에 벌어진 일을 상세하게 알고자 한다면 오직

주설만이 한시도 떠나지 않고 고조 곁을 붙어 다니며 제후들을 평정한 것을 보았다. 
이에 제 삼십팔 편 <부 근 괴성열전(傅斳蒯成列傳)>을 지었다.] 

徙彊族,都關中,和約匈奴;明朝廷禮,次宗廟儀法.  作劉敬叔孫通列傳第三十九.
[강성한 호족들을 다른 곳으로 이주시키고 관중에 도읍을 정했으며

흉노와는 평화조약을 맺었다.  조정의 예를 밝히고 종묘에 제사 지내는 의식을

법으로 정해 황실의 존귀함을 높였다.  
이에 제 삼십구 편 <유경 숙손통열전(劉敬叔孫通列傳)>을 지었다.] 

能摧剛作柔,卒為列臣;欒公不劫於埶而倍死.  作季布欒布列傳第四十.
[계포는 강직한 성격을 유순하게 고칠 수 있어 마침내 한나라의 열후에 반열에

설 수 있었고,  난포는 한고조의 위협에 굴하지 않고 팽월을 위해 죽음도 불사하고

변호했다.  이에 제 사십 편 <계포 난포열전(季布欒布列傳)>을 지었다.]

敢犯顏色以達主義,不顧其身,為國家樹長畫.  作袁盎晁錯列傳第四十一.
[감히 천자의 뜻에 아랑곳하지 않고 자기의 주장을 펼쳤으니 이는 자기 일신상의

몸도 돌보지 않으며 나라를 위해 백년대계의 계책을 세운 것이다.

이에 제 사십일 편 <원앙 조조열전(袁盎晁錯列傳)>을 지었다.] 

守法不失大理,言古賢人,增主之明.  作張釋之馮唐列傳第四十二.
[법을 지켰으나 대의를 잃지 않았으며 옛날 현인들의 고사를 인용하여

자기 군주의 지혜를 더욱 밝게 만들었다.  
이에 제 사십이 편 <장석지 풍당열전(張釋之馮唐列傳)>을 지었다.] 

敦厚慈孝,訥於言,敏於行,務在鞠躬,君子長者.  作萬石張叔列傳第四十三.
[성격이 너그럽고 두터우며 자애롭고 효성이 지극했다.

말을 함에는 어눌했으나 행동을 옮김에는 민첩했으며,  
몸을 낮춰 남을 존중하려고 노력하여 군자나 장자의 면모를 갖추려고 애를 썼다. 
이에 제 사십삼 편 <만석 장숙열전(萬石張叔列傳)>을 지었다.]

守節切直,義足以言廉,行足以厲賢,任重權不可以非理撓.  作田叔列傳第四十四.
[절개를 지키고 강직했으며 의로운 기상은 청렴을 말하기 충분했다.

행동은 세상의 현자들을 격려하기에 충분했다.  
막중한 자리에 임용되었지만 무례한 수단으로는 굴복시킬 수 없었다.
이에 제 사십사 편 <전숙열전(田叔列傳)>을 지었다.]

扁鵲言醫,為方者宗,守數精明;後世(修)[循]序,弗能易也,而倉公可謂近之矣.
作扁鵲倉公列傳第四十五.
[편작은 의술을 말하여 의자(醫者)들의 종주(宗主)가 되었다.

그의 의술은 정밀하고 고명하여 후세의 사람들은 그 치료의 순서를 따랐을 뿐

결코 바꿀 수 없었다. 창공은 편작에 가까운 명의였다.
이에 제 사십오 편 <편작 창공열전(扁鵲倉公列傳)>을 지었다. 

維仲之省,厥濞王吳,遭漢初定,以填撫江淮之閒.  作吳王濞列傳第四十六.
[유중(劉仲)은 흉노의 공격을 막아내지 못하여 작위와 녹봉을 빼앗겼으나

그 아들 유비(劉濞)는 오왕에 봉해졌다.  한나라가 처음 개국하여 나라의 안정을

취해가고 있는 와중에 그는 강수와 회수 사이 지역을 잘 보살폈다.  
이에 제 사십육 편 <오왕비열전(吳王濞列傳)>을 지었다.]

吳楚為亂,宗屬唯嬰賢而喜士,士鄉之,率師抗山東滎陽.  

作魏其武安列傳第四十七.
[오초가 연합하여 난을 일으켰을 때 황실의 외척들 중에 오직 두영(竇嬰)만이 어질고

선비들을 좋아했으며 선비들 역시 그를  따르니 군사를 인솔하고 나아가

산동의 형양(滎陽)에서 오초의 반란군을 막았다. 
이에 제 사십칠 편 <위기 무안후열전(魏其武安侯列傳)>을 지었다.]

智足以應近世之變,寬足用得人.  作韓長孺列傳第四十八.
[지혜는 세상의 변화에 대응하기에 족하고,

너그러운 마음은 사람들의 마음을 얻기에 충분했다.
이에 제 사십팔 편 <한장유열전(韓長孺列傳)>을 지었다.]

勇於當敵,仁愛士卒,號令不煩,師徒鄉之.  作李將軍列傳第四十九.
[적을 만나면 용감했고 휘하의 군졸들을 자애로운 마음으로 사랑했다.  
또한 호령은 번거롭지 않고 간결하여 장수들이나 군졸들이 모두 그를 따랐다.
이에 제 사십구 편 <이장군열전(李將軍列傳)>을 지었다.] 

自三代以來,匈奴常為中國患害;欲知彊弱之時,設備征討.  作匈奴列傳第五十.
[삼대 이래로 흉노는 항상 중국에 해를 끼치는 우환의 대상이었다.  
흉노의 세가 강하고 약할 때의 시기를 알기 위해 만반의 준비 끝에 정벌하고자 했다.  
이에 제 오십 편 <흉노열전(匈奴列傳)>을 지었다.]

直曲塞,廣河南,破祁連,通西國,靡北胡.  作衛將軍驃騎列傳第五十一.
[구불구불한 요새의 길을 똑바르게 했으며 하남의 땅을 넓혔다.

또한 기련산에서 적을 무찌르고, 서쪽의 나라들과 길을 통하게 만들었으며

북방의 오랑캐를 물리쳤다. 
이에 제 오십일 편 <위장군표기열전(衛將軍驃騎列傳)>을 지었다.] 

大臣宗室以侈靡相高,唯弘用節衣食為百吏先.  作平津侯列傳第五十二.
[조정대신들과 황실의 종친들이 서로 다투어 사치를 일삼았으나,  
오직 공손홍만이 의복과 음식을 절약하여 백관들의 솔선수범이 되었다.  
이에 제 오십이 편 <평진후열전(平津侯列傳)>을 지었다.]

漢既平中國,而佗能集楊越以保南藩,納貢職.  作南越列傳第五十三.
[한나라가 중국을 평정하자 남월왕 조타(趙佗)는 양월에 흩어진 세력들을 수습하여

이를 기반으로 한나라의 속국(屬國)이 되었며 황실에 공물을 바쳤다.

이에 제 오십삼 편 <남월열전(南越列傳)>을 지었다.]

​吳之叛逆,甌人斬濞,葆守封禺為臣.  作東越列傳第五十四.
[오나라가 반역을 일으키자 구인들은 오왕 비의 머리를 베어 한나라에 바쳤다.  
이어서 봉우산을 지키고 보존하여 한나라의 신하가 되었다.

이에 제 오십사 편 <동월열전(東越列傳)>을 지었다.]

 

燕丹散亂遼閒,滿收其亡民,厥聚海東,以集真藩,葆塞為外臣.  

作朝鮮列傳第五十五.
[연나라 태자 단(丹)이 진나라에 쫓겨 요동으로 달아난 틈을 이용하여

위만은 도망나온 유민들을 거두어  발해 동쪽으로 데리고 가서 진번에 이르러

한나라 황실의 변방을 지키는 외신이 되었다.  
이에 제 오십오 편 <조선열전(朝鮮列傳)>을 지었다.]  

唐蒙使略通夜郎,而邛笮之君請為內臣受吏.  作西南夷列傳第五十六.
[당몽을 사자로 보내 야랑(夜郞)국으로 통하는 길을 열었다.  공(邛)과 작(笮)의

군장들이 내신이 되고자 청하였으므로 한나라에서 보낸 관리들을 받아 들였다.  
이에 제 오십육 편 <서남이열전(西南夷列傳)>을 지었다.]

子虛之事,大人賦說,靡麗多誇,然其指風諫,歸於無為.  

作司馬相如列傳第五十七.
[<자허부>에 실린 일과 <대인부>에 실린 글은 아름답기 그지없으나

지나치게 과장되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그것이 지적하고자 하는 것은 풍자하며

간언을 올려 무위(無爲)로 귀의하려는 생각에서였다.  
이에 제 오십칠 편 <사마상여열전(司馬相如列傳)>을 지었다.] 

黥布叛逆,子長國之,以填江淮之南,安剽楚庶民.  作淮南衡山列傳第五十八.
[경포가 반역을 일으키자, 고조의 아들 유장이 그 땅을 봉지로 삼고 장강과 회수

남쪽을 평정했다.  유안(劉安)은 사납기로 이름난 초나라 백성들을 안정시켰다. 
이에 제 오십팔 편 <회남 형산열전(淮南衡山列傳)>을 지었다.]

奉法循理之吏,不伐功矜能,百姓無稱,亦無過行.  作循吏列傳第五十九.
[법을 받들어 도리를 밝히는 관리들은 자기들이 세운 공로와 재능을 스스로

자랑하지 않는다.  그들은 또한 백성들로부터 그들의 공적에 대한 칭찬도,

그들의 과실에 대한 비난도 받지 않는다.  
이에 제 오십구 편 <순리열전(循吏列傳)>을 지었다.] 

正衣冠立於朝廷,而群臣莫敢言浮說,長孺矜焉;好薦人,稱長者,壯有溉. 

作汲鄭列傳第六十.
[의관을 단정히 하고  조정에 서면 여러 신료들이 이를 보고 두려워하여 허튼 소리를

하지 못했다. 장유가 바로 그런 사람이었다. 인재를 즐겨 천거하여 사람들로부터

장자(長子)라고 칭송을 받은 것은 ​장유에게 그런 기개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에 제 육십 편 <급정열전(汲鄭列傳)>을 지었다.]

自孔子卒,京師莫崇庠序,唯建元元狩之閒,文辭粲如也.  作儒林列傳第六十一.
[공자가 죽은 이래 집정자들은 아무도 학교 교육의 필요성을 중시하지 않았다.
다만 건원(建元)과 원수(元狩) 연간에 학문이 일어나 찬란하게 빛나게 되었다.
이에 제 육십일 편 <유림열전(儒林列傳)>을 지었다.]

民倍本多巧,姦軌弄法,善人不能化,唯一切嚴削為能齊之.  作酷吏列傳第六十二.
[백성들이 본업을 저버리고 재주를 부리며, 간교함을 일삼아 법률을 농단하니

아무리 선인들일지라도 그들을 교화할 수 없었다.

오직 모든 것을 엄격한 형벌로 다스림으로써 바로 잡을 수 있었다.
이에 제 육십이 편 <혹리열전(酷吏列傳)>을 지었다.]

漢既通使大夏,而西極遠蠻,引領內鄉,欲觀中國.  作大宛列傳第六十三.
[한나라가 대하(大夏)에 사절을 보내 길을 트니, 저 서쪽 끝의 오랑캐들도

모두 중국의 안쪽으로 목을 늘이고 중원의 땅을 살펴보고자 했다.

이에 제 육십삼 편 <대원열전(大宛列傳)>을 지었다.]

救人於緦振人不贍,仁者有乎;不既信,不倍言,義者有取焉.  

作游俠列傳第六十四.
[재난에 빠진 사람을 구하고 넉넉하지 못한 사람들을 구휼하니 어진 사람이라

불릴 만하다.  또한 신의를 저버리지 않고 자기가 한 약속을 어기지 않으니

이 역시 의로운 사람들이라 할 수 있다.  
이에 제 육십사 편 <유협열전(游俠列傳)>을 지었다.]

夫事人君能說主耳目,和主顏色,而獲親近,非獨色愛,能亦各有所長.  

作佞幸列傳第六十五.
[군주를 모시고 그 눈과 귀를 즐겁게 할 수 있으며 임금의 얼굴에 즐거움이

깃들게 하여 그 군주를 가까이 모실 수 있었던 것은 그들이 단지 미색으로

총애를 받은 것이 아니라, 그들의 재능이 남보다 뛰어났기 때문이었다. 
이에 제 육십오 편 <영행열전(佞幸列傳)>을 지었다.]

不流世俗,不爭埶利,上下無所凝滯,人莫之害,以道之用.  作滑稽列傳第六十六.
[세속에 휩쓸리지 않고 권력과 이익을 다투지도 않았으며,

윗사람이나 아랫사람들에게 모두 걸림이 없이 아무에게도 해를 끼치지 않은 것은

그것도 나름대로의 방법을 운용했기 때문이다.   
이에 제 육십육 편 <골계열전(滑稽列傳)>을 지었다.]

齊、楚、秦、趙為日者,各有俗所用.  欲循觀其大旨,作日者列傳第六十七.
[제, 초, 진, 조의 점복가들은 각기 그 나라의 풍속을 이용하여 점을 치는 방법도

달랐다.  그들의 대체적인 방법을 두루 살펴보고자,

이에 제 육십칠 편 <일자열전(日者列傳)>을 지었다.]

三王不同龜,四夷各異卜,然各以決吉凶.  略闚其要,作龜策列傳第六十八.
[삼대에 있어서 거북등으로 점을 치는 방법은 서로 달랐으며,

사방 오랑캐들도 각기 다른 방법으로 점을 쳤다.  
그러나 길흉을 판단하기는 다 마찬가지였다. 그 요지를 대략 살펴 보고자,  
이에 제 육십팔 편 <귀책열전(龜策列傳)>을 지었다.]

布衣匹夫之人,不害於政,不妨百姓,取與以時而息財富,智者有采焉.  

作貨殖列傳第六十九.
[벼슬이 없는 일반 백성 신분으로 정치로부터 해를 입지 않고,

귀족들의 일을 방해를 하지 않으며, 때에 맞추어 재산을 증식하여 부를 쌓았다.

지혜있는 자라면 이것들로부터 얻는 것이 있을 것이다.  
이에 제 육십구 편 <화식열전(貨殖列傳)>을 지었다.]

 
維我漢繼五帝末流,接三代(統)[絕]業.  周道廢,秦撥去古文,焚滅詩書,
故明堂石室金匱玉版圖籍散亂.  於是漢興,蕭何次律令,韓信申軍法,張蒼為章程,
叔孫通定禮儀,則文學彬彬稍進,詩書往往閒出矣.
[우리 한나라는 오제의 뒤를 이었으며 삼대의 위업을 계승하였다.
주나라의 도가 실추되고 진나라가 들어서 옛날의 고적들을 없애고

『시(詩)』와 『서(書)』를 불살라 없애버렸다.  그 결과 조정과 왕실 도서관 석실과

금궤에 보관되어 있던 옥판의 지도와 서적들이 모두 흩어져 엉망이 되어 버렸다.

이어서 한나라가 흥기하자 소하가 율령을 다듬고, 한신(韓信)은 군법을 밝혔으며, 
장창은 제도를 기초했다. 그리고 숙손통은 예의를 제정하니 인품과 학식을 겸비한

학자들이 점차 등용되었으며, 『시』와 『서』도 왕왕 이곳저곳에서 나돌기 시작했다.]

自曹參薦蓋公言黃老,而賈生、晁錯明申、商,公孫弘以儒顯,百年之閒,
天下遺文古事靡不畢集太史公.  太史公仍父子相續纂其職.
[조참은 개공을 무제에게 천거하여 황제와 노자의 사상이 세상에 알려지기

시작했고,  또한 가의와 조조는 신불해와 상앙의 법가사상을 밝혔다.

공손홍은 유학으로써 세상에 빛을 발하고 그 백년 사이에 천하에 남아 있던

서적이나 고문서가 태사공에게 수집되지 않은 것들이 없었다.  
태사공의 직책은 사마담과 사마천 부자가 계속해서 맡게 되었다.]

曰:「於戲!余維先人嘗掌斯事,顯於唐虞,至于周,復典之,故司馬氏世主天官. 
至於余乎,欽念哉!欽念哉!」 罔羅天下放失舊聞, 王跡所興, 原始察終, 見盛觀衰,
論考之行事,略推三代,錄秦漢,上記軒轅,下至于茲,著十二本紀,既科條之矣.
[사마천이 말하기를 : “ 아 아! 나의 선조들께서 이 일을 맡은 이래 요순 때 이미

세상에 알려지기 시작하여 주대에 이르러 또다시 그 직무를 수행했다.

이런 연고로 사마씨는 대대로 천문의 관직을 맡아 왔고 그것이 나에게까지 이르지

않았던가 ! 이에 경건한 마음을 갖지 않으면 안 될 것이다!”라고 하였다.
이미 없어진 구문들을 천하에서 모아서 왕들의 사적을 통해서 그 흥함의 처음을 찾고

끝을 살펴서 흥망성쇠를 보고자 하였으며 그 일의 진행을 사실적으로 고찰하여

삼대의 일을 간략히 추정하였으며, 진한시대의 기록에 유추하여

위로는 황제 헌원으로부터 기록하여 아래는 금상폐하(한무제)에 이르기까지  
모두 12본기를 지은 것은 모두 조목별로 만들어 그 틀 안에서 설명하였다.]

并時異世,年差不明,作十表.
禮樂損益,律歷改易,兵權山川鬼神,天人之際,承敝通變,作八書. 
二十八宿環北辰, 三十輻共一轂, 運行無窮, 輔拂股肱之臣配焉, 忠信行道,

以奉主上, 作三十世家.  ​扶義俶儻,不令己失時,立功名於天下,作七十列傳.
[사적에는 시대가 같은 것도 있고, 다른 것도 있어 그 연대의 차이가 확실하지 않아

모두 10개의 연표를 만들었다. 예와 악은 없어지거나 혹은 더하여지기도 하였으며

달력은 새로 바뀌어 졌고, 또한 병사와 권모의 일, 지방제도, 제사에 관한 일,

하늘과 인간과의 관계 등에 대해 그 폐단을 밝혀 변화에 통하는 내용으로 
<서(書)> 8편을 지었다. 
스물여덟 별자리 28 수가 북극성을 중심으로 돌고 있고, 30개의 바퀴살이 모두

한 개의 속바퀴에 집중되어 있으나 그 운행의 법측은 무궁하듯이 천자를 보필하던

고굉지신들을 이에 비유해 그들이 충신의 도리로써 천자를 받드는 모습을 내용으로

세가 30편을 지었다. 정의롭게 행동하고 기개가 있어 남에게 억눌리지 않으며

세상에 처하여 기회를 놓치지 않고 공명을 천하에 세운 사람들의 일들을 내용으로

70편의 열전을 지었다.]

凡百三十篇,五十二萬六千五百字,為太史公書.
序略,以拾遺補闕,成一家之言,厥協六經異傳,整齊百家雜語,
藏之名山,副在京師,俟後世聖人君子.  第七十.
[모두 130편, 52만6천5백자로  <태사공자서>라고 이름 짓는다. 
서문의 대략적인 내용은 흩어져 있는 것을 모으고 육경을 보충해 나름대로

일가의 말을 이루고자 한 것이다. 요컨대 육경에 대한 다른 견해들을 모아서

취사 선택한 다음 백가와 잡어의 이런저런 말들을 고른 것이다.  정본은 명산에

보관하고 부본은 도읍에 두어 후세의 성인군자들의 손길을 기다리고자 한다.  
이것으로 열전 70을 마지막으로 삼는다.]  

 
太史公曰:
余述歷黃帝以來至太初而訖,百三十篇. 
[태사공이 말한다.
내가 황제로부터 태초 연간에 이르기까지의 역사적 사실을 기술하여 

130편의 역사서를 지었다.]

 
​【 각주 】
1) 전욱(顓頊) : 삼황오제(三皇五帝) 중의 한 사람으로 황제(黃帝)의 손자이자

    창의(昌意)의 아들이다. 그는 성격이 침착하고 지략에 뛰어났고, 사리에 통달했다. 

    또한 그는 알맞은 땅을 골라 곡물을 생산하였고 우주의 운행에 따라서 

    계절에 맞는 일을 하였으며, 귀신의 권위에 의지하여 예의를 제정하고,  
    백성을 교화하였으며 깨끗하고 정성스럽게 천지 신령에게 제사를 지냈다.

    그는 북쪽으로는 유릉(幽陵), 남쪽으로는 교지(交趾), 서쪽으로는 유사(流沙), 

    동쪽으로는 반목(蟠木)에까지 이르렀다. 각종 동물, 식물, 그리고 크고 작은 산천의 

    아들, 해와 달이 비치는 곳이면 어디든 평정하여 귀속시키지 않는 곳이 없었다. 
2) 유릉(幽陵) : 지금의 북경지방인 유주(幽州)를 말함.
3) 교지(交趾) : 지금의 베트남과의 경계지방인 광서성(廣西省)과 운남성을 말함.
4) 유사(流沙) : 지금의 내몽고 고비사막을 말함.
5) 반목(蟠木) : 정확한 위치를 추정할 수 없으나 일성에는 동해바다 가운데의 

    도색산(度塞山)이라고도 한다.  
6) 남정(南正) : 전욱이 설치한 관직의 이름으로 하늘과 천문에 관한 일을 관장했다.  
7) 북정(北正) : 화정(火定)이라고도 하며 고대 중국의 땅을 관장하던 직책. 
8) 당(唐) : 요(堯)임금이 지금의 산서성 익성현 부근에 세운 나라 이름으로

    당요(唐堯)를 말함.
9) 우(虞) : 순임금 요임금에게서 선양받아 지금 산서성 영제현 경내의 포판(蒲阪)에

    세운 나라의 이름. 우순(虞舜)을 말함.  
10) 하(夏) : 순임금 밑에서 황하의 치수 공사에 공을 세운 우(禹)가 세운 나라.  
      지금의 산서성 하현(夏縣)인 안읍(安邑)이 하나라의 수도였다.
11) 상(商) : 탕(湯)이 하를 멸하고 건국한 나라 이름. 상은 건국하여 주무왕에게

      멸망할 때까지 그 도읍을 7 번을 옮겼다. 마지막 도읍지가 지금의 하남성 안양시

      소둔촌(小屯村)인 은(殷)이었던 관계로 은(殷)나라라고 칭한 것이다.  
      즉 상나라는 반경(盤庚)이라는 왕이 지금의 곡부 부근인
      엄(奄)이라는 곳에서 옮겨 망할 때까지 약 200여 년간 은을 도읍으로 하였다.  
      즉 상(商)이라는 이름은 자칭이고 은(殷)이라는 이름은 타칭이다.
      하(夏), 상(商)에 주(周)나라를 더하여 삼대(三代)라고 한다.  
12) 정(程) : 지금의 섬서성 함양시 경내의 동북에 있었던 서주(西周) 때의 제후국.  
      휴보(休甫)는 정나라 군주의 이름이다.  
13) 주선왕(周宣王) : 기원전 827년부터 782년까지 재위했던 주나라의 11대 왕.

      그 부왕은 려왕(厲王)으로서 위무(衛巫)를 시켜 공포정치를 한 결과 

      려왕은 국인들에게 쫓겨나 체(彘)라는 곳으로 달아났다.  
      그 해가 공화(共和) 원년인 기원전 841년이다.

      사마천의 사기 중 제후연표(諸侯年表)는 이 해부터 시작되고 중국 역사도 

      모든 것이 이 해부터 분명하게 되었다. 또한 려왕이 체로 달아나자

      주공(周公)과 소공(召公)이 왕을 대신해서 다스리다가 려왕이 체 땅에서 죽자 

      태자 정(靜)을 주왕으로 추대하고 주나라의 통치권을 돌려주었다. 

      태자 정이 주선왕이다. 한편 려왕이 달아나 왕 없이 다스린 기원전 841년부터

      826년 까지의 14년간의 시기를 공화(共和)라 하여 지금 쓰고 있는 Rebpulic에 

      해당하는 공화국(共和國)의 어원이 되었다. 주나라는 주선왕의 아들인 

      유왕(幽王)대에 이르러 망하고 낙읍으로 동천하여 동주시대를 열었다. 
14) 사마(司馬) : 서주 때 설치한 관직의 이름으로 하관(夏官)인 대사마에 속한 관리.  
      군사마, 여사마(輿司馬), 행사마(行司馬) 등이 있어 군정과 군역을 담당했다. 
      춘추, 전국시대에 이르자 제후국들도 그 제도를 따라 사마라는 관직을 두게

      되었다. 춘추 때 당진(唐晋)에서 군사조직을 삼군(三軍)으로 할 때 매 군마다 

      사마라는 직을 두어 그 직위는 대장(大將)과 부장에 이서 세 번째로 하였다.  
      그 임무는 군사의 일에 대한 참모 역할과 군법의 시행을 관장하였다.  
15) 혜왕(惠王) : 재위 기원전 676-652. 동주의 삼대 왕으로 당시 중원의 패자는  
      제환공(齊桓公: 재위 기원전 686-643년)이었다. 
16) 양왕(襄王) : 재위 기원전 651-619년. 혜왕이 그의 왕비가 일찍 죽자,

      후비를 얻어 왕자 숙대를 낳았다. 혜왕은 당시 태자였던 양왕을 폐하고 

      숙대를 새로이 그의 후계로 삼으려고 하였으나 제환공과 관중의 계획으로 

      양왕은 주나라 왕위를 이을 수 있었다.  
17) 당진(唐晋) : 고대 중국에 있어서 당(唐)이나 진(晉)이라는 말은 지금의 산서성

      일대를 지칭하는 말이었다. 요임금이 산서성 일대에 세운 나라 이름인 

      당(唐)이라는 말에서 유래하였고 후에 주나라 성왕 때 그의 동생인 숙우(叔虞)를 

      당 땅에 봉해 당숙우(唐叔虞)라 칭했다. 그러나 당 땅에서 반란이 일어난 결과  
      당(唐) 대신에 진(晉)이라는 이름을 쓰게 된 것이다. 중국역사상 가장 강력한

      왕국이었던 당제국은 당나라를 세운 이세연(李世淵)이 산서성의 태원 세력을 

      근거로 하여 세웠기 때문에 그가 세운 왕조 이름을 당이라고 한 것이다. 

      참고로 중국의 나라 이름은 모두가 그 창건자나 그 종족들이 거주하던 지방의

      이름을 따르는 것을 전통으로 하였으나 이 관습은 금나라와 원나라로부터

      관념적인 이름을 취하기 시작했다.  
      즉 원나라 이전의 중국 왕조 이름은 모두가 지명을 근거로 취한 것이다.  
18) 중군(中軍) : 천자국인 주나라는 육군(六軍)을, 제후국들은 그 제후들의 작위에

      따라 일군에서 삼군까지 두었다. 당시의 일군은 약 만 명의 군사로 구성되었다. 

      당지 진나라는 중군과 좌우 이군을 합하여 삼군으로 구성되어 있었는데 

      수회는 그 중 핵심에 해당하는 중군대장을 역임하게 되어 중군이라고 한 것이다. 
19) 수회(隨會) : 당진의 상경(上卿)을 지낸 사회(士會)를 말한다.

      그의 식읍이 수(隨)와 범(范)이었던 관계로 수회 혹은 범회(范會)라고도 부른다. 

      주양왕 31년 기원전 621년 당진(唐晋)의 양공(襄公: 진문공의 아들)이 죽자  
      그는 당시 당진의 재상이었던 조돈의 명을 받고 섬진(陝秦)에 가있었던

      양공의 동생 공자(公子) 옹(雍)을 데려와 당진의 군주자리에 앉히려고 하였다. 

      그러나 조돈이 마음을 바꿔 당진의 군주를 양공의 아들인 이고로 세우고  

      군사를 내어 공자옹 일행을 공격하자 수회는 섬진으로 달아났다. 
      그러나 얼마 후에 조돈의 허락을 받아 다시 당진으로 돌아왔다.

      사회의 후손들은 당진의 유력한 여섯 가문 중의 하나가 되어 그 세력을 다투다가 

      패하여 기원전 491년 순씨들과 함께 제나라로 이주하였다.  
20) 소량(少梁) : 지금의 산서성 한성현(韓城縣) 동남의 소량촌을 말한다.

      이민족 국가였던 양나라의 도성이었으나 진목공에 의해 멸망하고 그 영토가 

      되었다. 강공 4년 기원전 617년 당진의 영토가 되었다.  
      기원전 327년 섬진의 혜문왕이 위(魏)나라로부터 탈환하고

      그 이름을 하양(夏陽)으로 개명했다. 
21) 중산국(中山國) : 전국시대 때 지금의 하북성 정현(定縣)과 당현(唐縣) 일대에

      있었던 이족(夷族)의 제후국으로써 위나라 위문후(魏文侯) 19년 기원전 406년 

      위나라의 장수 악양에 의해 멸망당하고 그 영토는 위(魏)나라에 편입되었다. 

      후에 중산국의 후손들이 원래의 위치에서 서쪽인 지금의 하북성 평산현 경내인

      영수(靈壽)라는 곳에 나라를 다시 세워 명맥을 유지했으나  
      기원전 296년 조나라의 무령왕(武靈王)에 의해 완전히 멸망당하고 그 영토는

      조나라에 편입되었다.  위문후의 명을 받아 악양이 중산국을 정벌할 때 

      중산국의 군주가 악양(樂羊)의 아들을 죽인 후 끓여 만든 인육탕을 보내자 

      그 국물을 마시고 중산국을 정벌한 이야기가 전국책 위책(魏策)에 실려있다. 
22) 괴외(蒯聵) : 당조의 장수절(張守節) 이 지은 사기정의(史記正義)에 의하면

      자객열전의 형가(荊軻)가  태자 단(丹)을 만나기 전 천하를 유랑할 때 

      유차(楡次)에 들려 검술을 논했던 개섭(蓋聶)이라는 사람을 칭한 것이라 했으나 

      확실한 것은 아니다.  
23) 장의(張儀) : 전국 시대의 대표적인 종횡가(縱橫家) 중의 한 사람인 장의는

      진나라가 중국을 통일하기 위해서는 온 국력을 한(韓)나라를 정벌하는 데

      집중해야 할 것이라고 주장했으나 사마착은 그 보다는 진나라의 배후에 있는

      지금의 사천성 성도(成都)의 촉(蜀) 나라를 정벌하여 광활한 사천평원의

      비옥한 농지를 확보하여 국력을 보강하는 것이 우선이라고 주장했다.

      이에 진나라의 혜문왕(惠文王)은 사마착의 건의를 받아들여 그에게 군사를 주어 

      촉나라를 정벌하게 했다. 진왕이 사마착의 건의에 따라 촉(蜀) 땅을 점령한 결과 
      국력이 신장되고 지리적인 이점을 차지하게 되어, 춘추전국시대 전 기간을 통해

      남방의 강국으로 군림했던 초나라를 제압하고 중국을 통일 할 수 있었다. 
      사마착이 촉나라를 정벌한 것은 혜문왕 9년 기원전 316년의 일이었다.  
      이어서 그로부터 38년 후인 진 소양왕 29년 기원전 278년에 진나라의 장군

      무안군 백기(白起)는 촉 땅에서 기병하여 장강(長江)의 물길을 따라 진군한 

      장약의 보급과 지원을 받아 초나라의 도성이었던 영성(지금의 호북성 강릉)을

      점령하고 그 땅에 남군(南郡)을 설치했다. 초나라는 진나라의 세력에 밀려  
      지금의 하남성 진현(陳縣)의 진성(陳城)으로 쫓겨갔다.  
24) 장평(長平) : 지금의 산서성 고평현 서북. 진나라 장군 무안군 백기(白起)가

      기원전 260년 이곳에서 조괄(趙括)이 이끌던 조나라의 군사들과의 싸움에서 

      대승을 거두고 이어서 항복한 조나라의 군사 40여 만 명을 구덩이 속에 파묻어 

      죽였다. 이 전투 이후로 진나라의 유일한 대항 세력이었던 조나라가 패망의 길을 

      걷게 되고 진나라는 중국을 통일할 수 있는 기반을 마련하게 되었다.  
25) 무신군(武信君) : 사기에 무신군의 칭호를 갖은 사람은 세 사람이 있다.

      항우의 숙부인 항량(項梁), 소진(蘇秦)과 함께 종횡가(縱橫家)를 대표했던 

      장의(張儀)와 진나라 폭정에 항거하여 진승(陳勝)과 광(吳廣)이 난을 일으킬 때 

      같이 참여한 무신(武臣)이다. 여기서는 무신을 말한다. 
      무신은 진승에 의해 장군으로 임명되어 군사를 이끌고 조나라 땅을 점령하였다. 
      그는 스스로를 무신군(武信君)이라고 칭하고 조왕(趙王)이 되었으나 
      후에 부하 장수인 이량(李良)에 의해 살해되었다. 
26) 조가(朝歌) : 지금의 하남성 기현을 말한다. 춘추 초기 위(衛)나라의 도읍이며,  
      시경(詩經) 국풍(國風) 패풍(邶風)에 나오는 이자승주(二子乘舟)의 무대이다. 
27) 은왕(殷王) : 은왕조의 도읍은 하남성 안양시였다.

      안양시는 조가 북쪽 50여키로에 있어 사마앙은 안양시를 포함한 조가 일대를 

      영지로 하는 제후가 된 것을 말한다. 
28) 하내군(河內郡) : 진나라가 설치하고 한나라가 따른 군현이름. 관할지역은

      지금의 하남성 황하 이북 지역으로 북쪽으로는 안양시, 서쪽으로는 제원현,

      동쪽으로는 활현(滑縣), 남쪽으로는 황하를 경계로 했다. 

      치소는 지금이 무척현(武陟縣) 남의 회현(懷縣)이다. 
29) 시장(市長) : 전국시대 때 만들어져 당조 때까지 있었던 관직의 이름으로 성 안에

      특정지역을 설정하여 상업지구로 지정하고 관리를 파견하여 감독하게 하였다. 

      한나라 때 장안성(長安城) 안에 시장을 조성하고 그 감독을 위해 파견한 관리를 

      시령(市令)이라고 했으며, 기타 다른 지방의 감독관을 시장이라고 불렀다. 
30) 오대부(五大夫) : 전국 때 진(秦)나라가 군공에 따라 수여하는 20 등급 중

      아홉 번째에 해당하는 작위로서 한나라도 그 제도를 받아 들여 시행했다. 

      세읍(稅邑) 300호를 받아 조세를 거둘 수 있고 죄를 짓게 될 경우

      사면 받을 수 있는 권리를 부여했다. 
31) 태사공(太史公) : 태사라는 관직은 은주(殷周) 교체기에 설치된 것으로

      역사를 기록하고, 사서를 편찬하며, 국가의 중요한 전적(典籍), 천문(天文), 

      역법(曆法), 제사(祭祀) 등을 관장했던 조정의 대신이었다.  
      진한(秦漢) 때에는 태사령(太史令)이라고 했지만 그 지위는 매우 낮았다.

      사마천은 자기 부친과 자기를 같이 태사공이라고 호칭하였고 

      여기서의 태사공은 자기 부친 사마담(司馬談)을 지칭한 것이다. 
32) 당도(唐都) : 한나라 문제(文帝: BC180-157)와 무제(武帝 : BC 141-87) 연간에

      살았던 천문학자 겸 방술사. 일월오성(日月五星 : 해와 달 및 화, 수, 목, 금, 토 

      등의 행성) 즉 7개 별들 간의 거리와 머무는 장소 및 위도를 측정하여

      하늘을 28개의 구역으로 나눴다. 그는 또한 무제의 명을 받아 원봉(元封) 연간

      기원전 80년에 태초력(太初曆)을 제정하였다. 

      사마천의 부친 사마담(司馬談)은 당도에게서 천문학을 수학했다. 
33) 양하(楊何) : 산동성 치천(淄川) 사람으로 자는 숙원(叔元)이다.

      동무(東武) 사람 왕동(王同)에게서 주역을 배워 통달하였다.  
34) 황자(皇子) : 서한(西漢) 때의 황노(黃老) 사상가. 황생(黃生)이라고도 한다.

      황노의 도학을 연구하여 경제(景帝) 때 박사(博士)를 역임하여 황제 앞에서 

      유생(儒生) 원고생(轅固生)과 은나라 탕(湯) 임금이 하나라 걸왕(桀王)을, 

      주나라와 무왕(武王)이 은나라의 주왕(紂王)을 죽인 것은 토벌한 것이 아니라  
      윗사람을 죽인 시해(弑害)의 죄를 지은 것이라고 했다.

      사마담은 황자로부터 도가의 학설을 배웠다. 
35) 건원(建元) : 기원전 140-136년의 한무제 때의 연호.
36) 원봉(元封) : 기원전 110-108년. 
37) 계사전(繫辭傳) : 주역(周易) 64괘(卦)의 각각에 붙여진 점사(占辭)를 말한다.

      각 괘에 붙여진 점사를 단사(彖辭) 혹은 괘사(卦辭)라 하고 괘의 구성 단위인 

      각 효(爻)에 붙여진 점사를 효사(爻辭)라 한다. 
38) 팔위(八位) : 주역에서 말하는 팔괘(八卦)에 따라 지칭하는 8가지 방향을 말함.  
      즉 각 팔괘가 칭하는 여덟 가지 방향은 다음과 같다. 동/진(震), 서/리(離), 

      남/태(兌), 북/감(坎), 서북/건(乾), 서남/ 곤(坤), 동남/손(巽), 동북/간(艮) . 
39) 십이도(十二度) : 고대 중국 사람들은 일월오성의 운동법칙을 밝히기 위해

      하늘의 황도(黃道)를 12개 부분으로 나누었다. 이것을 십이차라고도 부른다.

      후에 한조(漢朝) 때에 이르러 그 명칭이 정해지고 12차는 다시 적도와 경도로 

      나뉘어 24절기가 생겼다. 12도의 각각 명칭은 다음과 같다.
      성기(星紀), 현효(玄枵), 추자(棷訾), 강루(降婁), 대량(大梁), 실심(實沈), 

      순수(鶉首), 순화(鶉火),  순미(鶉尾), 수성(壽星), 대화(大火), 석목(析木).  
40) 이십사절(二十四節) : 24절기를 말한다. 즉 입춘(立春), 우수(雨水), 경칩(驚蟄),

      춘분(春分), 청명(淸明), 곡우(穀雨), 입하(立夏), 소만(小滿), 망종(芒種), 

      하지(夏至), 소서(小暑), 대서(大暑), 입추(立秋), 처서(處暑), 백로(白露), 

      추분(秋分), 한로(寒露), 상강(霜降), 입동(立冬), 소설(小雪), 대설(大雪),  
      동지(冬至), 소한(小寒), 대한(大寒) 등이다.  
41) 육예(六藝) : 육경(六經)을 말한다. 즉 예(禮), 악(樂), 서(書), 시(詩), 역(易),

      춘추(春秋)를 가리킨다.  이중 예경은 일실되어 그 실체를 파악할 수 없다.
      또한 예(禮), 악(樂), 사(射), 어(御), 서(書), 수(數)를 말하기도 한다.  
42) 경(經) : 육경(六經)을 말한다.
43) 전(傳) : 경의 해설서를 말한다. 즉 시경의 경우 모전(毛傳), 춘추의 경우, 

      춘추좌전, 춘추공양전 등과 같은 해설서를 가르킨다. 
44) 무위(無爲) : 도가 사상의 근본적인 개념의 하나. 도가사상에서는 일체의 만물을

      생성하고 소멸시키면서 그 자신을 생멸(生滅)을 넘어선 초감각적 실재 내지      

      천지자연의 이치로서의 도의 본질을 체득하는 것을 궁극적인 목적으로 삼는데, 

      그 도의 본질을 나타내는 것이 무위라는 개념이다. 무위란 인위의 부정을 뜻하며,

      결코 아무 것도 하지 않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모든 인간적 영위을 위(僞)로서

      부정하고 천지자연의 이치에 그대로 따른 참된 위를 실현하는 일이며, 

      정확히는 무위의 위이다. 노자는 인간이 지(知) 또는 욕(欲)에 의해서 무엇인가를 

      하려고 하면 오히려 세상에 대위대란을 초래하는 계기가 됨으로 될 수 있는 대로

      무리하지 말고 모든 것을 자연에 맡겨 두는 것이 가장 무난하다고 하였다. 
      그의 무정부적 사상은 이 사항에 기초를 둔 것이다. 장자에 와서는 개인적인 면이 

      뚜렷이 나타나 사회적으로 무위한 것을 최고의 경지에 이르는 것임. 
45) 무불위(無不爲) : 만물을 생육한다는 뜻이다. 도가의 무위사상은 한 마디로

      말해서 자연의 변화에 순응한다는 뜻. 인위적인 힘을 가하지 않고

      자연 그대로의 정정함을 지켜 나간다면, 만물은 장차 자화하여 무엇이든지 

      다 이루어 낸다는 것이다. 
46)  인순(因循) : 자연에 순응한다는 뜻. ①머뭇거리고 선뜻 내키지 않음

       ②낡은 구습(舊習)을 버리지 못함.  
47) 무명(無名) : 노자의 도가사상에서 나온 말로 천지의 모든 만물은 물체가

      형성되고 나서 인간에 의해 규정지어 진 것임으로 그 이전의 상태를 무명이라 

      한 것이다. 그럼으로 도란 것도 무명인 것이다.  인위적인 예악, 인의 등을 

      반대하는 노자의 무명론은 유가의 정명론(正名論)과 대립된다.  
48) 용문(龍門) : 지금의 섬서성 한성시(韓城市) 부근으로 태원 북쪽에서 발원하여

      산서성을 대각선으로 가로질러 흐르는 분수(汾水)가 하수(河水)와 만나는 곳이다. 

      그 북쪽에 용문산(龍門山)이 있다.  
49) 회계산(會稽山) : 지금의 절강성 소흥시 남쪽에 위치한 산으로 하(夏)왕조를 세운

      우임금이 그곳에 올라 천하의 제후들을 불러모아 논공행상을 행한 곳이라 하여

      이름을 회계라 지은 것이다. 회계는 곧 회계(會計)이다. 

      춘추 말기에 월나라의 구천(句踐)이 오나라의 부차(夫差)에게 쫓겨 회계산으로  
      달아나 농성하다가 결국은 항복하였으나 후에 권토중래하여 부차를 멸망시키고

      당시 중국의 패권을 차지하게  된다는 오월동주와 와신상담이라는

      고사의 무대이기도 하다.  
50) 우혈(禹穴) : 우임금이 회계에 순수(巡狩)차 회계산에 들렸다가 사망하여

      이곳에 묻혔다. 그러나 우임금은 죽은 것이 아니라 회계산 산중에 있는 

      굴로 들어가 신선이 되었다는 전설도 있는데 우혈이란 그것을 말한다. 
51) 구억산(九嶷山) : 창오산이라고도 하며 지금의 호남성 영원현 남쪽에 있는

      산으로 순임금이 순수를 나왔다가 죽었다는 전설이 있는 산. 영원현은 광동성과 

      인접해 있는 호남성 남쪽에 있는 산으로 상수(湘水)의 발원지이다. 
52) 원수(沅水) : 귀주성과 호남성의 경계에서 발원하여 호남성을 동서로 가로질러

      동정호로 흐르는 양자강의 지류.
53) 상수(湘水) :광서성, 광동성, 호남성과의 접경지대의 구억산에서 발원하여

      호남성을 남북으로 흐르다가 상담시와 호남성의 성도인 장사를 지나 동정호로

      흐르는 양자강의 지류이다. 장사시에서 50여 키로 남쪽에 있는 상담시는

      모택동의 생가가 있는 곳이다. 또한 순임금이 구억산으로 순수 나왔다가

      그곳에서 죽자 요임금이 딸이었던 순임금의 두 부인이 상심한 나머지 상수에 

      빠져 죽은 전설이 있다. 상군은 상수에 빠져 죽은 순임금의 두 부인을 말한다. 
54) 문수(汶水) : 춘추전국시대 때 제나라와 노나라 사이를 가로질러 두 나라의

      국경선 역할을 했던 강 이름.
      시경의 제풍(齊風)과 노풍(魯風)에 나오는 시가의 무대로 많이 나온다.
55) 사수(泗水) : 태산(泰山)에서 발원하여 노나라의 도성이었던 곡부를 거쳐 

      회수와 합쳐지는 회수의 지류. 
56) 추(鄒) : 지금의 산동성 추현에 있었던 고을 이름으로 맹자의 고향으로 유명하다.
57) 역(嶧) : 추현 동남쪽에 있었던 산 이름. 진시황이 중국을 통일하자 

      이 산에 올라 자기의 공적비를 세웠다.  
58) 설(薛) : 산동성 등현(滕縣) 경내에 있었던 춘추전국시대 때 중소제후국이었다가

      제나라에 편입되었다. 후에 맹상군(孟嘗君)의 아버지인 전영(田嬰)이 

      이곳에 봉해져 설공(薛公)이라 했고 다시 맹상군이 그 작위를 물려받았다.  
59) 팽성(彭城)/지금의 강소성 서주시를 말한다. 진시황이 죽고 한초(漢楚)가

      천하를 놓고 다툴 때 초의 항우(項羽)가 도성으로 삼은 곳이다.  
60) 양(梁) : 전국시대 때 위(魏)나라의 처음 수도는 지금의 산서성 남쪽의 하현에

      있었던 안읍(安邑)이었으나 후에 진나라의 세력에 밀려 그 도읍을 지금의 

      하남성 개봉시로 옮기고 그 이름을 대량이라 불렀다. 이어서 위나라는 

      나라이름을 양(梁)이라고 부르게 되었다. 맹자의 양혜왕이란 위혜왕을 가리킨다.
61) 초(楚) : 춘추전국시대 때 호북과 호남성 일대에 걸쳐 있었던 나라 이름. 
      처음에는 지금의 호북성 형주시를 도읍으로 했으나 진나라의 세력에 밀려

      지금의 하남성 진현(陳縣)으로 쫓겨 갔다. 다시 안휘성 거양(巨陽)을 거쳐 다시 

      지금의 수현(壽縣)인 수춘성으로 옮겼다가 그곳에서 진나라에게 멸망당했다. 
62) 낭중(郎中) : 진한시대 때 황제의 시위(侍衛)를 담당했던 관직명.

      진나라 때 시위의 직분을 셋으로 나누었다.  
      황제의 여인들이 묶고 있는 곳을 드나들며 시위하도록 했던 직위를 중랑(中朗),  
      궁중에 거하며 황제를 시위했던 직위를 낭중(郎中),

      궁중 밖에서 황제를 시위했던 직위를 외랑이라 했다. 
63) 파촉(巴蜀) : (巴)파는 지금의 중경시를 말하고 촉은 성도(成都)를 가리킨다.
64) 공(邛) : 사천성 서창(西昌) 지구 일대에 살던 이민족 이름. 

      한무제(漢武帝) 때 이곳에 월수군(越嶲郡)을 두었다.
65) 착(笮) :사천성 한원 일대에 살던 이민족 이름. 
      한무제 때인 기원전 110년에 이곳에 심려군(沈黎郡)을 설치했다. 
66) 곤명(昆明)/지금의 운남성 대리주(大理州) 일대에 살았던 이민족 이름이다.  
      운남성의 주도(州都)인 곤명(昆明)은 이 민족의 이름에서 따온 것이다.  
67) 봉선(封禪) : 태산(泰山)에 단을 만들어 하늘에 제사를 올리는 의식을 봉(封),

      낮은 구릉인 양보산에 을 만들어 땅에 지내는 의식을 선(禪)이라 하여 합하여

      봉선(封禪)이라 한다. 봉선은 하늘로부터 계시를 받은 천자만이 행할 수 있다. 
68) 주공(周公) : 주나라를 세운 주무왕의 동생이다. 무왕이 죽고 어린 그의 아들

      성왕이 즉위하자 스스로 섭정의 자리에 앉아 주나라를 통치하다가 

      성왕이 장성하자 섭정의 자리에서 내려와 신하의 자리로 돌아갔다.

      그는 예악을 정비하고 전장(典章)제도를 만들어 주나라의 기반을 마련하였으며  
      공자를 비롯한 유가들에게 성인으로 추앙되었다.  

      주공(周公)의 정확한 사망 연대는 확인할 수 없으나 대체적으로 

      기원전 1100년에서 1000년 사이로 보며 고 공자의 탄생은 기원전 551년이다. 
69) 문왕(文王) : 지금의 섬서성 기산(岐山) 일대에 거주하던 주족(周族)의 수장으로  
      상나라의 마지막 왕 주왕(紂王)에 의해 서백(西伯)에 봉해졌다. 
70) 주남(周南)과 소남(召南) : 시경 국풍(國風)에 실려 있는 장의 이름.  

      주공(周公) 단(丹)과 소공(召公) 석(奭)이 함께 문왕의 명을 받들어 남쪽의 

      양자강 유역에 원정을 나갔다가 그곳의 시가를 수집해 왔는데 주공이 수집한 

      시가집을 주남, 소공이 수집한 시가집을 소남이라고 했다는 설이 있다. 
71) 태왕(太王)과 왕계(王季) : 태왕은 주문왕의 할아버지인 고공단보를 말한다.  
      주족은 지금의 섬서성 순읍현 서남의 빈(豳) 땅에 살았으나 이민족인

      훈육(燻淯)의 침입을 받자 고공단보는 주족을 이끌고 칠수(漆水)와 저수(沮水)를 

      건너 기산 밑으로 이주하여 정착하였다.  고공단보는 아들을 셋을 두었다. 

      장자가 태백, 둘째는 우중이고 막내는 계력(季歷)이다. 그러나 고공단보는

      주족들을 번성하게 할 사람은 왕계의 아들인 창(昌) (주문왕)이 라는 것을 알고  
      자기의 족장 자리를 계력에게 넘기려고 하자 태백과 우중은 남쪽으로 달아나

      오랑캐의 습속으로 바꾸고 그곳의 추장이 되었다.  
72) 공유(公劉) : 후직의 자손으로 사방으로 흩어졌던 주족을 다시 일으키고

      후직이 시작했던 농사의 일을 부흥시켰다. 

      다음은 <주본기(周本紀)>에 나오는 공유 부분이다.
      < 후직이 죽고 그의 아들인 불줄(不窋)이 뒤를 이었다. 불줄 말년에 하후씨의 

      정치가 문란하게 되어 농사(農師)의 관직을 폐하여 다시는 농사의 일을 돌보지

      않았다. 불줄이 농사(農師)의 직을 잃게 되자 여러 곳을 유랑하다가 융적(戎狄)의

      땅으로 흘러 들어가게 되었다. 불줄이 죽고 아들 자국(子鞠)이 뒤를 잇고 

      다시 자국이 죽고 그의 아들 공유(公劉)가 뒤를 이었다. 

      공유는 비록 융적의 땅에서 살았지만 다시 후직의 업을 일으켜 농사의 일을

      돌보며 농사짓기에 적합한 땅과 곡식의 종자를 찾아 나섰다.

      칠수와 저수를 건너고 다시 위수를 건너 목재를 벌목하여 가져와 종족들이 같이

      사용할 수 있도록 나누어주었으며 종족들 중 외지로 나가는 사람에게는 여비를

      주고 나가지 않고 종족들과 같이 사는 사람에게는 그들을 위해 저축을 해 주었다. 
      백성들의 생활은 모두 그에게 의지하여 편안하게 되었다. 다른 종족들도 모두

      그의 선행에 감격하여 많은 사람들이 찾아와 그에게 귀의하였다.

      주나라의 기업은 이때부터 시작된 것이라고 할 수 있었다. 
      그래서 시인들이 노래를 불러 그의 덕을 칭송했다.> 
73) 후직(后稷) :  주족의 시조로 요임금과 순임금 때 농사의 일을 관장했던

      기(棄)를 말한다. 후직은 농사의 일을 관장했던 벼슬 이름이다. 

      다음은 사기 <주본기>의 후직에 관련된 부분이다.
      < 주나라의 시조는 후직이며 이름을 기(棄)다. 그의 모친은 유태씨 부족의

      딸로써 이름을 강원(姜原)이라고 했다. 강원은 제곡(帝?)의 정비가 되었다.

      강원이 성밖의 야외로 나가게 되었는데 거인의 발자국을 발견하고 왠지 모르게 

      마음이 즐거워져 밟아 보고 싶은 생각이 들었다. 그러자 몸 속에서 무엇인가 

      움직이는 것이 느껴지더니 마치 애를 밴 것 같았다.

      실제로 애를 밴지 10 달이 되자 아들을 낳았다. 이상한 일이었기 때문에 그녀는 

      이 아이를 상서롭지 못하다고 생각하여 사람이 다니지 않는 좁은 길에다 버렸다. 

      그러나 지나가는 말이나 소 등이 아기의 주위를 돌며 몸을 피하며 밟지 않고

      지나갔다. 그래서 다시 그 아이를 깊은 숲 속으로 데려가 버리도록 하였더니 

      이번에는 인적이 드물던 숲 속에 사람의 왕래가 갑자기 많아졌다. 

      그래서 다시 그 아기를 다른 곳으로 옮겼다. 이번에는 그 아기를 얼어붙은 도랑의

      얼음 위에 버렸으나 새들이 날아와 그 날개로 아기의 밑을 깔아 주기도 하고

      위를 덮어 주기도 하였다. 강원이 매우 이상한 일이라고 생각하고 결국은 

      아이를 데려와 기르기로 하였다. 그래서 처음에 아기를 버리려고 했기 때문에 

      이름을 기(棄)라고 부른 것이었다. 기(棄)는 어렸을 때부터 인물이 출중하고 

      마음속에 높은 뜻과 원대한 생각을 갖고 있었다. 그가 놀 때는 항상 삼나무나 

      콩 종류의 작물을 즐겨 심었으며 그가 심은 삼나무와 콩은 크게 자라서 무성하게 

      되었다. 그가 성인이 되자 농사를 짓는 것을 좋아하였으며 농사에 적합한 땅을

      살펴 좋은 종자를 파종하여 많은 량의 곡식을 수확하였다. 백성들이 기에게 와서 

      농사짓는 법을 배웠다. 요임금이 기를 농사를 관장하는 관직인 농사(農師)에 

      임명하였다. 천하가 기(棄)로부터 농사 짓는 법을 배워 많은 이를 얻게 되어 

      기는 큰공을 세우게 되었다. 순임금이 말했다. “ 기는 백성들이 굶기 시작하자  
      농사를 관 장하는 관직을 맡아 백곡(百谷)을 골라 파종하여 백성들의 허기를

      면하게 했다. 순임금이 기(棄)를 태(邰)에 봉하고 관직을 이름으로 부르게 하여 

      후직(后稷)이라 하고 희(姬) 성을 하사하였다. 후직의 자손들이 번창하여 

      당요, 우순, 하우를 거치면서 세상에 아름다운 선행을 베풀어 덕망이 높았다.  
74) 유왕(幽王) : 서주의 마지막 왕으로 포사(褒姒)에 빠져 국정을 돌보지 않다가

      이민족인 견융(犬戎)의 침입을 받아 유왕은 싸움 중에 살해되었고 

      그의 아들 평왕(平王)이 그 도읍을 지금의 낙양으로 옮겼다.  
      이때가 기원전 771년 동주가 시작된 해이기도 하다.
75) 려왕(厲王) : 서주의 11대 왕으로 공포정치를 펼치다가 기원전 841년 

      국인(國人)들의 반란으로 지금의 산서성 곽현인 체(彘) 땅으로 달아나 살다가 

      그곳에서 죽었다. 한편 서주는 달아난 려왕을 대신해서 주공과 소공이 서로

      협력하여 왕대신 나라를 다스렸다. 중국 역사상 기원전 841년부터 828년까지의  
      14년 동안의 기간을 공화시대라 한다. 이윽고 려왕이 체 땅에서 죽자

      두 대신은 려왕의 아들인 선왕을 왕으로 추대했다.

      선왕의 아들인 유왕(幽王)이 서주의 마지막 왕이다. 
76) 획린(獲麟) : 공자가 편찬한 춘추는 춘추시대 때인 노은공(魯隱公) 식고(息姑) 

      원년 기원전 722년에 시작하여 노애공(魯哀公) 장(將) 39년 기원전481년에 

      끝나는 242년 간의 노나라 역사책이다. 노애공 치세 때 노나라에 기린이 

      나타났으나 사람들이 알아보지 못하고 죽여 버리자 공자는 그것은 군주들이

      무도하여 하늘의 뜻을 받들지 못한 것이라고 한탄하며 춘추를 끝냈다.

      이를 획린이라고 한다. 공자는 2년 후인 기원전 479년에 죽었다.
77) 태초(太初) 원년 : 한무제 37년인 기원전 104년이다. 진나라가 통일한 역법은 

      그 시작을 매년 10월로 했으나, 1월을 그 해의 시작으로 고쳐 태초력이라 하고 

      연호를 원봉(元封)에서 태초(太初)로 개원했다. 태초력은 그때부터 1911년 

      신해혁명까지 2000여 년 동안 중국의 역법으로 사용되었다.  
      지금 우리가 사용하고 있는 음력(陰曆)을 말한다.

      한무제는 그의 재위 54년 동안 연호를 모두 11번 바꿨다.  
      태초(太初)는 한무제 기원전 104년부터 기원전 101까지 사용했던

      한무제의 7번 째 연호이다.
78) 명당(明堂) : 중국 고대에 있어서 천자나 황제가 정사를 돌보던 곳으로, 조회, 

      제사 등 국가의 중요한 행사가 거행되었다. 다음은 명당을 노래한 

      명당부(明堂賦)이다.   " 빛나는 명당은 양지 녘에 자리 잡고 하늘을 향하여

      우뚝 솟아 천하를 내려다본다. 하늘 아래 한 명뿐인 천자가 정령을 발하면 

      만국의 제후들이 달려와 배알하며 조공을 바친다.

      명당의 내부는 종횡으로 각각 세 개씩의 방을 만드니 모두 아홉 개의 방으로

      나누어지고 정 가운데의 큰방에 태묘(太廟)를 모시고 태묘를 중심으로  

      동서남북으로 네 개의 태실(太室)을 두었다.

      또한 각 태실의 한 가운데는 토지신에게 제사를 지낼 수 있는 유(牖)를 두었다. 
      열고 닫는 단짝 문으로 36개의 문을 내고 72개의 창문을 열을 지어 달았다.  
      왼쪽 것과 오른 쪽 것은 윗사람과 아랫사람은 그 직분이 같지 않다는 것을

      말하는 것이며 명당의 윗 모습은 둥글고 아래 모양은 네모진 것은 하늘과 땅이 

      기수(奇數)와 우수(隅數)로 이루어진 법칙에 따른 것이다.  관리들이 서는 곳을

      여러 군데 만들어 놓은 것은 관리들 중 가장 높은 지위에 있는 것은 삼공이라 
      마땅히 명당의 가운데 계단에 늘어서서 여러 군신들과는 같이 서지 않는다는

      것을 보이며, 작위가 후작(侯爵)인 제후들은 동쪽 계단의 동쪽 편에 서서 

      서쪽을 쳐다보다가 천자가 나타나면 북쪽으로 몸을 돌려 절을 올리고, 

      백작들은 서쪽 계단의 서쪽으로 서서 동쪽을 바라보며 천자에게 절을 올린다.

      자작(子爵)들은 정문의 동쪽 편에 늘어서고,

      남작(男爵)들은 자작들의 서쪽 맞은편에 도열한다.  
      융족은 금(金)이니 서문 밖에, 이(夷)족은 목(木)이니 동문 밖에, 북문 밖에는

      화(火)의 종족인 적(狄)족이, 남문 밖에는 수(水)의 종족인 만(蠻)족이 선다.

      천하 구주의 지방 관원들은 명당 담장 밖에서  오른 쪽으로 열을 서서 도열하고, 

      변경을 지키는 수장들은 담장 밖에 도열하여 지방 관원들의 맞은편인 왼쪽에 

      서서 도열한다. 주홍색 방패와 옥으로 자루를 장식한 의장용 도끼들은 마치

      수많은 나무들이 우뚝 솟아나서 앞 다투어 천자에게 배알하듯이 하고, 

      표범 가죽으로 깃대를 장식한 용이 그려진 천자의 깃발은 바람에 힘차게 

      펄럭이며 또한 엄숙하고 무성한 모습에 높은 산과 깊은 계곡을 이룬 듯 하다.  
      연기가 걷히고 여러 백관들이 일제히 도열하면 하늘에서 태양이 나타나면,

      천자는 주옥을 꿰어 늘어뜨린 면류관을 쓰고 임하시어 명당의 용좌에 앉는다.

      비단에 도끼의 문양을 수놓은 병풍을 뒤에 둘러치고, 남쪽을 향하여 앉으시어 

      천하 제후들과 구름 같은 관리들이 땅에 엎드려 머리를 조아리며 절을 하는 것을  
      굽어보시면서 온 천하가 복종하고 있음을 아신다.
79) 제신수기(諸神受紀) : 남북조 때 남송(南宋)의 배인(裵駰)이 쓴 

      사기집해(史記集解)의  " 告于百神, 與天下更始, 著紀于是 "를 따랐다.
80) 공자는 춘추 후기인 기원전 479년에 죽고 사마담이 사마천을 만나 죽을 때 

      유언을 한 시점은 기원전 113년의 일이니 공자탄생부터 사마담이 죽을 때까지의 

      기간은 500년이 아니라 사실은 363년 만의 일이다. 
      춘추는 실제로 16,500자에 불과하다.  
81) 호수(壺遂) : 전한 무제 때 사람으로 양(梁), 즉 지금의 개봉시(開封市) 출신이다.  
      사마천과 함께 율력을 제정하여 무제에게 건의하였다. 
82) 동중서(董仲舒) : 전한 때의 유학자. 그는 세상을 이롭게 하는 학문은 오직

      유학뿐이라고 무제에게 건의하여 한나라가 유학을 통치철학으로 삼게 만들었다. 

     이후로 유학은 2000여 년 이상 중국 봉건 사회의 정통적 통치이념으로 자리잡게 

     되었다. 그의 학설은 기존의 유학에 음양오행설을 가미시킨 것으로 사람의

      인성은 가르침을 받아야만 선해진다는 천인감응설(天人感應說)을 주장했다. 
83) 사구(司寇) : 춘추전국 시대 때 관직이름으로 주로 관리의 규찰과 형옥을

      담당한 관서의 장(長)을 말한다.  
84) 242년 : 공자가 지은 춘추(春秋)는 노은공 원년인 기원전 722년부터 시작하여

      노애공(魯哀公)14년 기원전 481년까지의 242년 동안의 역사책이다. 

      춘추는 편년체(編年體)로서 춘하추동 방식으로 저술되어 그것을 줄여 춘추라 

      한 것이고 이어서 동주가 시작된 기원전 771년부터 지금의 산서성에 있던  
      북방의 강국 당진(唐晋)이 한(韓), 위(魏), 조(趙)로 나뉘어 전국시대가 열린

      기원전 453년까지의 기간을 춘추시대라 명명한 것이다. 

      후에 북송(北宋)의 사마광(司馬光)이 지은 자치통감(自治通鑑)은 춘추와 같은  
      편년체 사서(史書)로서 춘추의 후속편이라고 할 수 있다. 
85) 삼왕(三王) : 하(夏) 나라를 세운 우(禹)임금, 상(商)나라를 세운 탕(湯)임금,

      주나라를 세운 문왕(文王). 
86) 복희(伏羲) : 중국 고대 전설에 나오는 삼황(三皇) 중 태호(太昊)를 말하며

      그는 자기의 형매인 여왜(女媧)와 혼인하여 인류의 조상이 되었고 

      주역의 팔괘를 만들었으며, 백성들에게 어업과 목축을 가르쳤다.  
      삼황은 복희씨와, 신농(神農) 염제(炎帝), 황제(皇帝) 헌원(軒轅)을 말한다.
87) 정삭(正朔) : 정(正)은 한 해의 첫째 달이고, 삭(朔)은 한 달의 초하루이다.
88) 관복의 색을 바꾼 것은 오행설에 의해 진나라 때 시작된 수덕(水德)을 의미하는 

      검은 색의 관복을 화덕(火德)을 의미하는 적색으로 바꿨다는 것을 말한다.
89) 목청(穆淸) : 미덕(美德)으로 교화(敎化)를 이루는 것을 말한다.
90) 이릉지화(李陵之禍) : 기원전 88년 한무제(漢武帝) 2년에 기도위(騎都衛)였던 

      이릉(李陵)이 흉노를 정벌하러 출정했다가 준계산(浚稽山)에 이르렀을 때 

      한나라 군사들보다 몇 배나 많은 흉노의 군사들에게 포위되었으나 끝까지

      항전하다 결국은 힘이 다하여 흉노에게 항복하였다. 이에 한무제가 중국에

      남아 있던 이릉의 가족을 잡아들여 죽이려고 하자 사마천이 나서 이릉을 

      변호했다. 이에 한무제가 노하여 사마천을 하옥시키고 궁형에 처했다. 

      이 일에 대해 사마천의 심경을 자세하게 토로한 글이

      한서의 사마천열전 중 보임안서에 실려있다. 
91) 서백(西伯) : 주문왕 창(昌)을 말한다. 은나라의 마지막 왕 주왕(紂王)에 의해

      서백(西伯)에 봉해지고 그의 아들 주무왕(周武王)에 이르자 

      주나라가 은나라를 멸하고 천하의 주인이 되었다.
92) 유리(羑里) : 지금의 하남성 안양시 탕음현 경내에 있었던 은나라 때의 성읍 이름.
93) 주역(周易)의 성립은 확실한 것은 아니나 복희씨(伏羲氏)가 8괘를 만들고 

      다시 신농씨(神農氏)가 64괘로 나누었으며 주문왕(周文王)은 각 괘에 사(辭)를 

      붙였다고 했다. 이어서 주문왕의 동생인 주공(周公) 단(丹)이 효사(爻辭)를 

      공자가 십익(十翼)을 붙였다고 했다. 주문왕이 유리의 감옥에 갇혀 있을 때  
      주역에 괘사(卦辭)를 만들어 붙인 것을 말한다.
94) 주경왕(周敬王) 31년, 기원전 489년 초소왕 진(珍)이 채(蔡)와 진(陳)나라

      사이에서 방황하고 있던 공자에 관한 소식을 듣고 공자의 일행을 초나라에 

      초빙하려고 했다. 이 소식을 들은 채와 진 두 나라의 대부들은 공자가 초나라로 

      가서 중용되는 것을 두려워한 나머지 군사를 보내어 공자 일행을 포위함으로서  
      공자와 그 제자들이 양식이 떨어져 매우 곤란한 처지에 노이게 되었던 것을

      말한다.
95) 굴원(屈原) : 굴평(屈平)을 말한다. 평(平)은 이름이고 원(原)은 자(字)이다.  
      초나라 왕족 출신으로 초회왕 밑에서 상관대부와 좌도(左徒)의 벼슬을 살면서  
      내정과 외교에 많은 활약을 했으나 다른 신하들의 시기를 받았다.

      초회왕이 진(秦)나라의 계교에 빠져 진나라에 억류되어 있다가 그 곳에서 

      객사하자 회왕의 장남이 경양왕(頃襄王)으로 즉위하고 막내아들인 자란(子蘭)이 

      초나라 상국이 되었다. 자란의 잘못으로 인하여 초회왕이 진나라에 잡혀갔다고

      생각한 굴원은 그를 비난하였다. 자란은 굴원을 경양왕에게 참소하여 

      대부의 직에서 파직하고 쫓아내자 굴원은 초왕을 걱정하며 지금의 동정호와

      상수(湘水) 부근을 배회하다가 멱라수(汨羅水)에 돌을 품고 빠져 죽었다.  
      고대 시가문학의 중요한 부분을 차지하고 있는 초사문학을 창시한 사람으로

      저작에는  <이소(離騷)>, <어부사(漁父詞)>, <천문(天問)>, <구장(九章)> 및 

      <초혼(招魂)> 등이 있다.
96) 이소(離騷): 이소는 모두 2490자로 된 굴원의 대표적인 서사이다. 

      이(離)는 별(別), 소(騷)는 수(愁)  즉 '이별의 슬픔'이라는 왕일(王逸) 설과 

      '근심을 만나다'라는 반고(班固) 설이 있다. 굴원은 이소의 시에서

      그의 충정과 비탄, 애국과 원망, 참회와 절망, 끝으로 절명의 심정을 노래했다.
97) 좌구(左丘) : 춘추 때 노나라의 태사(太史) 좌구명(左丘明)을 말한다. 

      공자 직전 혹은 동시대 인.  두 눈을 실명한 장님이다. 

      춘추좌전(春秋左傳)의 작자이며 또한 <국어(國語)>의 작자라는 설도 있다.
98) 국어(國語) : 국어(國語)가 사마천의 작품이라는 설은 본 구절 때문인데 

      본서의 기술 내용과는 달리 그 작자가 정확하지 않다. 일반적으로 

      국어의 집필 연대는 전국시대로 보고 있다. 모두 21권으로 되어 있으며        

      주(周), 노(魯), 제(齊), 진(秦), 정(鄭), 초(楚), 오(吳), 월(越) 등의 나라로 나누어

      편집되었으며 주나라 목왕(穆王 : 재위 기원전 10세기 전반)부터 시작되어 

      노도공(魯悼公 : 기원전 466- 429)까지  역사를 기술한 사서이다. 

      서술방법은 춘추좌전과 같은 편년체이다.
99) 손빈(孫臏) : 동문수학한 방연(龐涓)의 음모로 무릎의 슬개골을 제거 당하여

      앉은뱅이가 되었으나 후에 제나라의 장군 전기(田忌)의 군사가 되어 

      계릉과 마릉(馬陵) 싸움에서 방연이 이끌던 위(魏)나라 군사들을 대파하였다. 

      위나라는 이 싸움에서 패함으로서 전국시대 초반에 확보했던 주도권을 상실하고  
      약소국으로 전락하고 말았다. 손자병법은 원래 손자라고 불리우던 춘추 초기의

      손무(孫武)의 작품으로 일반적으로 인식되어 왔으나 1972년 산동성 임기시

      은작산(銀雀山)에서 발굴된 한나라 때 조성된 묘에서 손빈이 저술한 병서 13편의 

      죽간이 출토되었다.  손무의 병법을 계승 발전시킨 것으로 그 내용이 풍부하고

      문학적 가치가 높은 병서이다.
100) 여불위(呂不韋)/태어난 해는 미상이고 기원전 235년에 죽었다. 

        전국시대 때 진(秦)나라의 대신이며 위(衛)나라 복양(濮陽) 사람으로 원래는 

        지금의 하남성 우현(禹縣)에 있었던 양책(陽翟)의 대상인이었다.  
        당시 진나라의 공자 이인(異人)이 조나라에 인질로 잡혀 있는 것을 보고

        "참으로 기화(奇貨)로다"라고 생각하고 많은 돈을 들여 그와 교우를 맺었다. 

        이어서 진나라에 들어가 당시 태자였던 안국군의 부인인 화양부인에게

        유세하여 이인(異人)을 그녀의 적자로 삼게 만들었다. 
        화양부인과 안국군 사이에는 적자가 없었다. 진소양왕이 죽고 안국군이 진왕의

        자리에 오르자 이인은 그의 태자가 되었다. 안국군의 시호는 효문왕이다. 
        효문왕이 소양왕의 상을 치르는 동안 갑자기 죽자 이인이 그 뒤를 이어

        진왕의 자리에 올랐다. 이가 장양왕(庄襄王)이다. 장양왕은 여불위를 진나라 

        상국에 임명하고 문신후(文信侯)에 봉하고 그 식읍으로 10만호를 내렸다. 

        장양왕에게는 조나라에 인질로 잡혀 있을 때 낳은 아들이 하나 있었다. 
        여불위가 자기의 아들을 임신하고 있던 애첩을 장양왕에게 바쳐서 낳은 아들이

        바로 후에 중국을 최초로 통일한 진시황이다. 장양왕이 재위 3년만에 죽고 

        13세의 진시황이 즉위하자 여불위는 계속 상국의 자리를 차지하고 진시황은

        여불위를 중보(仲父)로 높여 부르다가 여불위가 자기의 옛날 애첩이었던

        태후에게 천거한 노애(嫪毐)가 반란을 일으키자 진시황은 그를 연루시켜

        상국의 자리에서 파면하고  사천으로 유배 시켰다. 

        여불위는 사천으로 가던 도중 독을 마시고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여불위는 진나라의 상국으로 재직 중에 모두 26권으로 된

        <여씨춘추(呂氏春秋)>를 지었다.  여불위가 <여씨춘추>를 사천으로 유배가서 

        지었다는 사마천의 기술은 잘못이다.
101) 여람(呂覽)/여씨춘추(呂氏春秋)를 말함. 여불위가 진나라 상국으로 있을 때 

        심혈을 기우려 만든 일종의 백과사전을 말한다. 그가 거느린 3천여 명의 

        식객들로 하여금 그들이 갖고 있던 견문과 학설 및 설화를 모아 편찬한 것이다. 

        처음 편찬할 때에는 팔람(八覽), 육론(六論), 십이기(十二紀)로 되어 있어

        이 책의 이름을 여람(呂覽)이라고 했으나 후에 십이기(十二紀), 팔람(八覽), 

        육론(六論)으로 그 순서가 바뀌었다. 이 책의 편찬 목적은 십이기의 마지막 편인

         <서의편(序意篇)>에 ' 사람들을 통해서 자연의 이치를 알고,

        인륜 규범을 깨닫고 실천을 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라고 밝혔다.

        12기는 맹춘(孟春), 중춘(仲春), 계춘(季春), 맹하(孟夏), 중하(仲夏), 계하(季夏), 

        맹추(孟秋), 중추(仲秋), 계추(季秋), 맹동(孟冬), 중동(仲冬), 계동(季冬)의 

        각 5편 씩과 서의편(序意篇)을 합한 61편과,  
        팔람(八覽)은 효행(孝行), 신대(愼大), 선식(先識), 심분(審分), 심응(審應),

        이속(離俗), 시군(恃君)의 각 8편과 유시(有始)의 각 7편 씩을 합하여 

        63편 및 육론의 개춘(開春), 신행(愼行), 귀직(貴直), 불구(不苟), 사순(似順), 

        사용의 각 6편 씩의 36편을 합하여 여씨춘추는 모두 160편으로 되어있다.  
        또한 유가(儒家), 법가(法家), 도가(道家), 묵가(墨家), 음양가(陰陽家),

        병가(兵家), 농가(農家) 등 제자백가의 학설에 대해서도 기술하고 있어 

        진나라 시대 때의 사상 연구을 위한 귀중한 자료이다.
102) 한비(韓非)/ 중국 전국시대 때의 사상가. 법가의 대표적 인물. 원래 한나라의

        공족 출신으로, 진시황을 도와 중국을 통일하는데 큰공을 세웠던 이사(李斯)와

        함께 순경(荀卿) 즉 순자(荀子)에게서 동문수학했다.  
        도가, 유가, 묵가(墨家)의 사상을 흡수하여 뒤에 법가사상을 집대성하였다.  
        조국 한나라의 쇠약함을 한탄하며 한왕에게 여러 번에 걸쳐 변법을 간했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변설에 능하지 않아 등용되지 못했으나 현실 분석과 

        대책에 뛰어나 탁월한 저서를 남겼다. 순자의 성악설을 계승하여 군신, 부자, 

        부부관계 등 인간의 일체의 행위가 이기적인 동기에서 나온다는  
        인성이기설(人性利己說)을 주장하였다. 도를 모든 사물이 운동하는 객관적

        법칙으로, 이(理)를 구체적 사물이 운동하는 특수법칙으로 보고, 양자는

        불가분의 관계로 다 같이 사물 속에 존재하며 부단히 변화하는 것으로 보았다.

        이를 통해 인류사회 역사가 끊임없이 변화하며, 그 변화에 따라 법률이나

        제도도 변해야 한다는 진보적인 역사관을 피력하였다.

        또한 유가적 덕치를 바탕으로 한 인정(仁政)을 시대착오라고 비판하고, 

        주관적인 지(智)나 신(信)이 아니라 객관직인 법과 세에 의존하는 신상필벌,  

        실무본위(實務本位)의 법치를 주장하였다. 상앙의 법, 신불해의 술,
        신도(愼到)의 세를 도모하였으며, 노자의 무위허정(無爲虛靜)을 근본으로

        군주의 통치술을 제시하였다. 현실정치에 대한 그의 견해는 진시황의 

        천하통일에 영향을 주었다. 화평사신으로 진나라에 갔을 때 진시황이 

        그를 등용하려 하였으나 이사(李斯), 요가(姚賈)의 무고(誣告)로 옥사하였다.  
103) 세난(說難) : 세란 다른 사람을 말로써 설득하여 동감하게 만드는 유세의

        의미이다. 그래서 세난이라 하면 남을 유세하는 것이 용이하지 않다는 뜻이 

        된다. 전국시대에 유세의 행위란 재주 있는 자들이 벼슬을 얻을 수 있는 

        등용문이었다. 하지만 성공하는 사례는 소수에 불과하였으니  
        한비 또한 그 같은 어려움을 토로하고자 이 글을 지었다.
104) 고분(孤憤) : 외롭게 홀로 울분에 가득 차 있다는 뜻이다. 고립무원에 처한 

        법술가들이 권신들의 방해를 받아서 자신의 재주와 지혜를 중용 받지 못하고 

        있다는 것을 말하고 있다.  

        한비 자신이 처한 불만의 심경을 토로하기 위해 저술한 것이다.
105) 시삼백편(詩三百篇) : 공자가 편찬한 시경을 말한다. 

        정확히 시경에는 305 수의 시가(詩歌)가 실려있다. 
106) 황제(黃帝) : 중국이 원시사회를 벗어나려고 하던 시기의 부족국가의 추장으로

        성은 희(姬)이고 씨는 헌원(軒轅) 혹은 유웅(有熊)이다. 전설에 의하면 황제가 

        다스리던 부족은 원래 중국의 서북 고원에 거주했던 소전씨(少典氏) 출신으로 

        염제(炎帝)와 같은 종족이다. 후에 동쪽으로 나아가 탁록(涿鹿)에 살고 있던 

        구여족(九黎族)의 추장 치우(蚩尤)를 공격하여 죽이고 다시 판천(阪泉)에서

        염제(炎帝)와 싸워 이겼다. 그는 염제가 이끌던 종족을 규합하여 그들의

        부족장이 되었다. 후에 그 종족이 발전하여 중화족(中華族)의 전신이 되었으며

        이로 인하여 중국인들의 시조라 받들어 졌다. 수많은 발명과 제도를 고안해

        행한 것이 전설상으로 내려온다. 창힐(倉頡)을 시켜 문자를 만들게 하였고,

        누조(嫘祖)에게는 양잠술(養蠶術)을, 공(共)에게는 북 만드는 법을,

        화적(貨狄)에게는 배 만드는 법을, 희화에게는 해를 보고 상의(常儀)에게는

        달을 보고 유구(臾區)에게는 별을 보고 점을 치는 법을 알아내게 하였다.

        또한 예수(隸首)에게는 수를 계산하는 방법을 알아내게 했으며,

        용성(容成)에게는 달력을 만들게 하고 영(伶)에게는 도덕에 대한 규범을, 

        영장(榮將)에게는 음율(音律)을 만들게 했다.  
        그래서 사람들은 황제를 세상의 모든 사물에 대해 생명을 불어넣었다고 했다.
107) 사성(四聖) : 전욱(顓頊), 제곡(帝嚳), 당요(唐堯), 우순(虞舜)을 말한다.  
108) 구주(九州) : 하나라를 세운 우임금이 중국 전역을 아홉 주로 나누어 다스렸다.  
        아홉 주의 이름은 기(冀), 예(豫), 청(靑), 서(徐), 양(揚), 형(荊), 연(兗), 양(梁),

        옹(雍)이다.
    1. 옹주(雍州) : <하본기(夏本紀)> 흑수서하유옹주(黑水西河惟雍州)의 하(河)는 

        지금의 산서성(山西省)과 섬서성(陝西省)을 가르는 황하(黃河)를 이야기한다. 

        즉 옹주(雍州)는 흑수(黑水)의 서쪽을 가리킨다.
    2. 예주(豫州) : 형하유예주(荊河惟豫州) , 예주의 남쪽 경계는 형산(荊山 :

        지금의 호북성 남쪽의 장서현)  북쪽 경계는 황하와 접하고 있다.

        한무제가 지방 장관들을 감찰하기 위해 설치한 13자사 중의 하나가 되었다.
    3. 서주(徐州) : 해대급회유( 海垈及淮惟)의 해(海)는 지금의 황해(黃海)를 말하고

        대(垈)는 태산을, 회(淮)는 회수(澮水)를 말한다. 즉 서주의 경계는 북으로는 

        태산과 청주에 이르고 남으로는 회수와 양주 이북에 닿는다. 

        한무제가 설치한 13자사부 중의 하나다.
    4. 양주(揚州)/󰡒회해유양주(淮海維揚州)󰡓의 회(淮)는 지금의 회수(淮水)를 

        해(海)는 지금의 동해를 말한다. 한무제 때 설치한 13자사부 중의 하나이며 

        치소(治所)는 역양(歷陽 : 지금의 안휘성 화현(和縣))에 두었다.
    5. 청주(靑州) : 해대유청주(海垈維靑州)의 해(海)는 발해를 말하고 대(垈)는 

        즉 태산(泰山)을 말한다.  구주(九州) 중 가장 동쪽에 있었던 주. 

        오행설에 의하면 동쪽은 청(靑)을 뜻했기 때문에 청주라 한 것이다.  
        관할 구역은 동쪽으로는 발해에 이르고, 하북(河北) 오교(吳橋) 이동,

        마협하(馬頰河) 이남,  산동성 북부와 동부지구에 이르렀다.
    6. 기주(冀州) : 기주기재호구,치량급기(冀州:冀載壺口,治梁及岐) 하북성 동남, 

        산동 서북부, 하남과 산서 경계 중 하수 이북, 산서와 섬서 경계 중 하수 동쪽의 

        땅을 관할했다.
    7. 형주(荊州) : 형급형양유형주(荊及衡陽維荊州)의 형(衡)은 형산(衡山)으로 

        지금의 호북성 남장현을 말한다. 대체로 호북성 중부, 남부, 호남성 북부, 중부, 

        사천성(四川省)과 귀주성(貴州省)의 일부를 관할했다.
    8. 연주(兗州) : 연주(沇州)라고도 한다. <하본기(夏本紀)>  濟, 河維沇州  

        연주(沇州)는 연수(沇水)의 이름에서 유래되었다. 제(濟)는 즉 제수(濟水),

        하(河)는 즉 하수를 말하며 산동성 서북부, 하남 동북과 하북 동남부를 관할했다.
    9. 양주(梁州) : 화양흑수유양주(華陽黑水惟梁州)의 흑수에 대한 설은 분명하지 

        않다. 란창강(瀾滄江), 노강(怒江), 금사강(金沙江), 장액하(張掖河), 

        대통하(大通河) 등 설이 다양하다. 
109) 명조(鳴條) : 지금의 하남성 개봉시 북 봉구현 서. 하나라의 마지막 왕

        걸왕(桀王)이 은나라의 탕(湯)임금과 싸워 패하고 도망간 곳이다.(桀奔於鳴條). 
110) 설(薛) : 제곡(帝嚳)의 아들로 상족(商族)의 시조이다. 우(禹)임금이 황하를

        치수할 때 옆에서 도와 공을 도와 순임금에 의해 사도로 임명되어 백성들을

        교화시키는 임무를 맡았다. 지금의 하남성 상구(商丘)인  상(商)에 봉해졌다.

        하나라를 멸하고 상(商)나라를 세운 탕임금은 설의 후손이다. 
111) 태갑(太甲) : 성탕(成湯)의 장자인 태정(太丁)의 큰아들이다.

        즉위 3년만에 탕이 세운 법을 지키지 않고 덕을 어지럽히며 전횡하자 

        이윤(伊尹)에 의해 동궁으로 추방되었다. 동궁에 3년 동안 유폐되어 살면서 

        자기의 잘못을 깨닫고 개과천선하자 이윤이 다시 그를 데려와 정권을 넘겨 

        주었다. 왕위에 복귀 후 태갑은 성탕의 유업을 계승하여 발전시키자

        제후들이 모두 귀의하였으며 백성들의 생활은 편안해 졌다. 

        이윤이 이를 찬미하여 <태갑훈(太甲訓)> 3편을 지었다. 
112) 동(桐)/ 동궁을 말하며 여러 설이 있다.
        사기집해(史記集解) : 탕임금이 묻힌 곳으로 제음(濟陰)의 박현(亳縣)으로 

        지금의 산동성 조현(曹縣) 동쪽을 말한다고 했으며

        사기정의(史記正義) : 하남성 언사시 서쪽 등 이외에 몇 가지 설이 더 있다. 
113) 아형(阿衡) : 상(商) 왕조를 세운 성탕의 창업공신인 이윤(伊尹)의 이름이다.

        원래 탕임금의 비(妃)인 유신씨(有辛氏)가 시집올 때 데려온 노예였으나 

        탕임금이 그의 사람됨을 알아보고 정사를 맡겼다.  
        이윤은 탕임금을 도와 하나라를 멸하고 상(商)나라를 세우는데 큰공을 세웠다.  
        탕임금이 죽자 그의 이자(二子)인 외병(外丙)과 삼자(三子)인 중임(中任)을

        차례로 섬기다가, 중임이 죽자 탕임금이 장자인 태정(太丁)의 아들 태갑(太甲)을 

        왕위에 앉혀 그에게 정치의 근본과 법도를 가르쳤다. 

        태갑이 즉위하여 3년이 되자 탕이 세운 법을 문란하게 하였다.

        이에 이윤은 태갑을 동궁(桐宮)에 유폐시키고 스스로 섭정의 자리에 올라

        상나라를 통치했다. 태갑은 동궁에서 3년 동안 갇혀 있으면서 지난날의 과오를 

        깨닫고 자기의 잘못을 뉘우쳤다. 이윤이 태갑을 다시 불러 들여 상나라 임금의

        자리를 돌려주었다. 제위에 다시 오른 태갑은 정치를 쇄신하고 덕정을 베풀어

        치세를 이루었다. 이윤은 태갑이 죽고 그의 아들 옥정(沃丁) 치세 때 죽었다.  
        그러나 일설에 의하면 이윤은 7년만에 돌아와 스스로 왕위에 복귀한 태갑에게

        살해당했다고 했다.
114) 무정(武丁)/상왕조의 제 23대 왕으로 기원전 1325년부터 1266년까지 59년간 

        재위에 있었다. 일설에는 기원전 1329년 제위에 올랐다고 했다. 

        묘호(廟號)는 고종(高宗)이다. 소을(小乙)의 아들이고 조경(祖庚)의 아버지다. 

        전설에 의하면 무정이 어렸을 때 그의 부왕인 소을이 그를 민가에 보내 농사를 
        짓게 하면서 노역들과 함께 살게 하고, 그로 하여금 군사를 이끌고 나가

        국경 밖의 이민족을 정벌하게 했다고 했다. 소을의 뒤를 이어 제위에 오른 

        무정은 상나라를 부흥시키기 위해 현인을 찾다가 부암(傅岩)이란 곳에서 

        노역을 하던 노예 출신의 부열을 얻어 재상으로 삼았다. 부열의 도움으로

        정치를 쇄신하고 덕을 베풀었으며 서북쪽의 귀방(鬼方)과 강방(羌方)을

        정벌하였으며 남쪽의 형만(荊蠻)을 공격하여 상나라의 국세를 획기적으로

        신장시켰다. 상나라는 부열의 도움으로 무정 치세시 최전성기를 구가했다.  
115) 부열(傅說) : 다음은 <은본기>에 나오는 무정(武丁)과 부열에 관한 기사이다.
        < 소을제(小乙帝)>가 죽자 그 아들 무정이 뒤를 이어 즉위했다. 

        무정은 나라를 부흥시키기 위해 현인을 널리 구했으나 찾을 수가 없었다. 

        그러자 그는 3년 동안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정사는 총재가 결정하도록 하고서 

        나라의 기풍을 유심히 관찰하였다. 그러던 어느 날 무정은 꿈속에서 성인을

        만났는데 그의 이름이 열(說)이라고 했었다. 그리고 다시 어느 날 무정은 

        성밖으로 나가 자다가 꿈속에서 성인을 봤다. 무정이 관리들에게 자기가 

        꿈속에서 본 성인을 찾으라고 명했으나 오랫동안 찾지 못했다. 
        다시 성밖에서 찾아보라고 명하여 드디어 부험(傅險)에서 노예의 신분으로

        도로공사장에서 노역을 하던 열(說)을 찾아냈다.  무정이 열을 불러 대화를 

        해보니 과연 그는 성인이었다. 열을 그 자리에서 상나라의 제상을 삼고 

        부험(傅險)에서 찾았다고 해서 부(傅)성을 하사하여 부열이라 부르게 했다.  
116) 목야(牧野) : 지금의 하남성 기현(淇縣) 부근에 있었던 땅 이름으로 이곳에서

        제후들을 규합한 주무왕이 은나라의 주왕과 결전을 벌려 승리하였다. 

        주왕은 녹대(鹿臺)에 몸을 던져 불에 타 죽고 천하는 주나라의 것이 되었다.
117) 유왕(幽王) : 서주의 마지막 왕으로 포사(褒姒)라는 미인에게 탐닉하여 정사를 

        게을리 하고 폭정을 행했다. 그 틈을 이용하여 북방의 이민족인 강융(羌戎)이 

        침입하여 호경(鎬京)을 점령하고 유왕은 살해되었다.  
        이 일로 인하여 주나라는 호경에서 동쪽의 낙읍으로 옮긴 것이다.
118) 려왕(厲王) : 서주의 10대 왕으로, 즉위연도는 알 수 없으나 기원전 841년에 

        죽었다. 려왕이 위나라에서 무당을 데려와 공포정치를 행하자 국인(國人)들이 

        반란을 일으켰다. 려왕은 체(彘) 땅으로 도망가서 살고 주나라는 주공과 소공이

        섭정을 행했다. 주공과 소공 두 사람은 려왕이 체 땅에서 14년만에 죽자 

        그의 아들 정(靜)을 왕위에 앉히고 주나라의 통치권을 돌려주었다. 
        이 14년간의 기간을 공화(共和)라 하고 려왕이 체 땅으로 도망간 해인

        기원전 841년을 공화 원년이라 한다. 중국의 역사기록은 대략적으로 전해 

        내려오다가 이 해를 기점으로 분명해 지며 사마천 사기(史記)의 제후연표도 

        이 해부터 시작한다. 일본에서 활약하고 있는 중국인 역사학자 진순신은 
        이 해를 중국역사 원년으 삼자고 주장하기도 한다. 
119) 풍호(酆鎬) : 동주가 하남성의 낙읍으로 옮겨가기 전까지의 서주의 도읍이었던

        호경(鎬京)을 말한다. 지금의 섬서성 장안 서남의 풍수 강안에 있었기 때문에

        풍호(酆鎬)라 한 것이다. 이 구절은 서주 망하자 풍호를 버리고 낙읍으로 

        동천한 것을 말한다.
120) 난왕(赧王) : 동주의 마지막 왕으로 기원전 315년에서 즉위하여 

        기원전 256년에 죽었다. 난왕이 죽자 주나라는 진(秦)나라에 병합되었는데 

        사마천은 이 해를 주나라가 멸망한 것으로 보고 있다. 
121) 진목공(秦穆公): 재위 기원전 660-621년. 춘추오패 중 하나이다.

        재위시 진나라의 제도와 풍속을 개혁시켜 중원의 강국으로 만들었으나 죽을 때 

        진나라의 주요 관리들 170명을 순장시켰다. 그 후유증으로 진나라는 국세가 

        쇠미해져 전국시대 중반기에 이르기까지 중원의 패권 다툼에 끼어들 수 없었다. 
        진나라가 중권세력으로 대두된 것은 진목공으로부터 약 300년 후인

        효공(재위 기원전 362-338년)이 법가인 상앙(商鞅)을 등용하여 변법을 시행하여 

        국세가 회복되고 나서부터이다. 
122) 호(豪) : 즉 효산(崤山)을 말한다. 지금의 하남성 북서의 황하 연안의 삼문협시와

        민지(澠池) 사이에 있다. 기원전 627년 정나라를 공격하려고 출동했던 

        섬진(陝秦)의 군사들이 별다른 전공을 이루지 못하고 회군하다가 

        이곳에서 매복하고 있던 당진(唐晉) 군사들에게 기습을 당하여 전멸 당했다.  
        진목공은 이 패전을 만회하기 세 번의 공격 끝에 3년만에 당진을 굴복시키고

        효산(崤山)으로 나아가 섬진군의 잔해(殘骸)를 수습하고 합동위령제를 지냈다.
123) 황조(黃鳥) : <시경(詩經)> <국풍> 중 <진풍(秦風)>에 나오는 시가의 제목으로 

        진나라의 국세를 괄목하게 신장시켜 춘추오패 중의 한 사람이 된 진목공이 

        죽을 때 그의 측근에 있던 신하들 170명이 순장되었다.  
        일시에 진나라 대부분의 중요한 직책을 맡고 있었던 관리들이 순장을 당하자

        진나라의 국세는 갑자기 쇠약해지고, 그 후로 진나라는 중원의 세력 다툼에서

        뒤 처지게 되었다. 그 순장된 170여 명의 인사들 중 차씨 삼 형제가 포함되어 

        있었는데 그들은 당시 진나라의 삼량(三良)이라고 호칭되던 어진 사람들이었다. 

        진나라 백성들이 차씨 삼 형제를 순장시킨 진목공을 원망하면서 

        그들의 죽음을 애도하여 부른 노래가 <황조가(黃鳥歌)>이다. 
        그러나 남송의 문장가인 소동파는 진목공을 변호하기 위해 차씨 삼 형제가

        순장된 것은 그들의 자발적인 뜻에 의해 진목공과 함께 죽은 것이지 강제적으로 

        당한 것이 아니라는 글을 썼지만 동의하기 어려운 견해이다.
124) 소양왕(昭襄王) : 기원전 307년 - 251년 동안 재위에 있으면서 범수와 백기를

        등용하여 진나라가 중국을 통일 할 수 있는 기반을 만들었다. 

        그는 사천성을 점령하여 당시 진나라의 가장 강력한 경쟁상대였던 초나라를

        제압할 수 있었던 발판을 마련하였고 이어서 사천성의 인력과 자원을 이용하여

        수로로 초나라를 공격하여 그 도성인 지금의 호북성 강릉인 영성을 점령하여

        그 땅에 남군(南郡)을 설치하고 진나라 땅으로 삼았다. 

        초나라는 영성에서 쫓겨나 지금의 하남성 진성현(陳城縣)으로 쫓겨갔다.  
        그리고 장군 백기를 시켜 장평의 싸움에서 40만의 조나라 대군을 몰살시켜

        전국시대 나머지 여섯 나라를 공포에 떨게 만들었다. 막강한 진나라의 국력을 

        바탕으로 소양왕은 제나라의 민왕(湣王)에게 제의하여 자기는 서제(西帝), 

        민왕은 동제(東帝)로 각각 호칭하자고 제의하였으나 얼마 후에 제민왕이  
        동제라는 칭호를 버리자 소양왕도 더 이상 제(帝)란 칭호를 사용하지 못했다.  
        소양왕(昭襄王)이 제업을 이루었던 말은 이를 말하는 것이다. 
125) 자영(子嬰) : 진나라의 마지막 황제로 기원전 206년에 죽었다.

        진시황의 장남 부소(扶蘇)의 아들, 진시황의 또 다른 아들, 

        혹은 진시황 동생의 아들이라는 여러 가지 설이 있다.

        조고(趙高)가 이세(二世)를 살해하고 자영을 세웠으나 자영은 제호를 버리고

        조고를 죽였다. 조고의 삼족도 같이 멸했다. 재위 46일 만에 한왕 유방에게

        항복하여 항우에게 보내졌다. 후에 항우에 의해 살해 당했다. 
126) 경자장군(慶子將軍) : 당시 초나라가 거록에 갇힌 조군을 구원하기 출동시킨

        군사들의 대장 송의의 별호다.
127) 송의(宋義) : 태어난 해는 알 수 없고 기원전 207년에 죽었다. 

        진나라 말에 반진의 기치를 들고 일어 난 농민군의 장군. 초나라가 진나라에 

        망하기 전 초나라의 영윤을 지냈었기 때문에 당시 반진 세력의 지도자  
        격이었던 항량(項梁)을 따랐다. 항량이 진나라를 정벌하는데 같이 종군하다가,

        진나라와의 싸움에서 이긴 항량이 교만한 기색을 보이자 송의가 간하기를 

        " 싸움에 이겼다고 장수들은 교만한 마음을 갖게 되고 군사들은 게으르게 

       된다면 그 군사들은 다음 번 싸움에서는 결코 이길 수 없을 것입니다."했으나 

       항량은 귀를 기울이지 않았다. 이어서 항량은 후에 벌어진 장한(章邯)이 이끌던

       진군과의 싸움에서 패하고 그 자신은 싸움 중에 죽었다.

       초회왕이 송의가 군사를 잘 부리는 것을 알고 그를 상장군에 명하고

       항우(項羽)를 차장으로, 여러 장수들은 그의 휘하에 두도록 하였다. 
       회왕은 송의를 경자장군이라고 불렀다. 이어서 조나라를 구하라는 초회왕의

       명을 받고 출동했으나 진나라 군사들과의 싸움을 회피하고 진군을 멈추자 
       이에 불복한 항우가 초회왕의 거짓 명으로 군중에서 송의를 살해했다.

       초군의 지휘권을 탈취한 항우는 북진하여 장한의 진나라 군사들을 거록에서 

       대파하고 반진군의 영수가 되었다.  
128) 삼진(三秦) : 항우가 진나라를 멸하고 그 땅을 옹(雍), 색(塞), 적(翟) 등으로

        삼분하여 다스렸다.  함양 이서의 섬서성과 감숙성 동부는 장한(章邯)에게 맡겨 

        옹왕(雍王)에, 함양 이동지역은 사마흔(司馬欣)에  맡겨 색왕(塞王)에, 

        섬서성 북쪽은 동예(董翳)에 맡겨 적왕(翟王)에 봉했다. 
        후에 한신의 전격작전에 의해 모두 한왕의 소유가 되었다. 
        한초쟁패시 항우와의 결전에서 유방의 후방 보급기지 역할을 했다. 
129) 혜제(惠帝) 유영(劉盈) : 한고조 유방의 아들로서 그의 나이 23세 때 죽었다.  
        기원전 195 - 188년으로 7년간 재위에 있었다.
130) 여록(呂祿) : 여태후의 둘째 오빠 건성후(建成侯) 여석지(呂釋之) 아들로서 

        여후에게는 생질(甥姪)이 된다. 여태후(呂太后) 섭정 원년(기원전 187년) 

        호릉후(胡陵侯)메 봉해지고 무신후(武信侯)라 불리웠다.  
        섭정 8년 기원전 180년에 여태후가 병이 들어 자리에 눕게 되자 상장군에

        임명되어 도성의 북군(北軍)을 관장하였다. 이윽고 여태후가 죽자 

        여산(呂産)과 함께 란을 일으켜 여씨 왕조를 세우려고 하였으나  
        주발(周勃), 진평(陳平) 등에게 살해되고 그가 이끌던 여씨 일족들은 멸족되었다.
131) 여산(呂産)/ 여태후의 큰오빠 여주(呂周)의 차자. 혜제 원년 기원전 194년 

        교후(交侯)에 봉해졌다.  여태후 6년 기원전 182년 여왕(呂王)에 봉해졌다. 

        여태후에 의해 도성의 남군을 관장하는 장군에 임명되고 다시 여태후가 죽자 

        여록과 함께 란을 일으켰으나 주발과 진평에 의해 살해되었다.
132) 은(隱) : 조은왕(趙隱王) 유여의(劉如意)를 말하며 유여의는 고조의 총비 

        척비(戚妃) 소생으로 고조가 죽자 여태후는 척부인을 불러 독약을 먹여 죽이고 

       척비는 눈알을 뽑고, 팔다리를 자른 다음 우리에 가두어 돼지처럼 다루다 죽였다.
133) 유우(幽友) : 고조 유방의 아들로 회양왕(淮陽王)에 봉해졌다.  
        혜제 원년(기원전 194년 조왕(趙王)에 다시 봉해졌다.

        혜제가 죽고 여태후의 전힁에 반대하자 살해되었다. 
134) 대왕(代王) : 고조의 4남 유항(劉恒)이며 문제(文帝)이다.

        재위에 오르자 조세와 부역을 감면하고 산업을 장려하였으며,

        검소한 생활을 몸소 행하여 뒤를 이은 경제(景帝)와 함께 치세를 이루었다. 

        이 때를 가리켜 문경(文景)의 치(治)라 부른다.  
135) 삼선(三嬗) : 세 번 바뀌었다는 말은 처음으로 진나라에 반기를 든 진승(陳勝)과

        그 뒤를 이는 항우(項羽), 뒤이어 항우를 해하(垓下)의 싸움에서 격파하고 

        한왕조를 세운 유방이 천하의 패권을 차지한 것을 말한다. 
136) 강약지원운(强弱之原雲) : 제후국의 세력이 강하면 강할수록 먼저 망하고  
        약하면 약할수록 요행히 살아 남은 현상을 말한다.  
137) 소목(昭穆): 고대의 종법 제도로서 종묘와 묘지에 모시는 신위의 순서로서,  
        그 시조(始祖)는 가운데에 두고 소(昭)라 칭했으며, 그 후손들 중 2, 4, 6세 등의

       후손들은 시조의 좌측에, 3, 5, 7세 등의 후손들은 우측에 두고 목이라고 불렀다.

        이곳에서 소목(昭穆)이라는 말은 종족들 간의 가깝고 먼 관계를 말한다.  
138) 칠국(七國) : 오초(吳楚) 칠국의 난을 말함.  전한의 6대 황제인

        경제(景帝 : 재위 기원전 157 - 141년으로 한무제는 그의 아들이다.)

        때인 기원전 154년 오왕(吳王) 유비(劉濞)가 주도한 반란. 칠국이란 오왕 외에 

        초왕(楚王) 유무(劉戊), 교서왕(膠西王) 유앙(劉卬), 교동왕 유웅거(劉熊渠),

        치천왕(淄川王) 유현(劉賢), 제남왕(濟南王) 유벽광(劉辟光), 

        조왕(趙王) 유수(劉遂) 등을 말한다. 경제가 즉위하자 법가인 조착을기용하여

        제후들의 봉지를 줄이려고 하자 칠왕이 령에 따르지 않고 반란을 일으켰다.

        한나라 조정은 주아부(周亞夫), 란포(欒布), 두영(竇嬰) 등의 장군을 보내어 

        진압하려 했으나 성공하지 못했다. 경제는 조착에게 책임을 물어 처형하고 

        칠국의 제후들을 회유하려 했으나 그 마저 성과가 없었다.  
        오히려 오초(吳楚) 연합군은 공세를 강화하여 지금의 안휘성 영성 북서 쪽의

        극벽(棘壁)이란 곳에서 양나라 군사를 대파했다. 그러나 오초 반란군도 

        양나라의 도성인 수양성은 함락시키지 못하고 결정적인 승리를 얻지 못했다. 

        오초 연합군이 양나라의 수양성에서 머뭇거리고 있는 사이에 한나라 조정은

       주아부를 태위로 삼아 토벌군을 출동시켰다. 주아부는 토벌군을 이끌고

        지금의 산동성과 하남성의 경계에 있던 전략상의 요충지인 창읍(昌邑)으로 

        들어가 오초 연합군이 본국과의 연락로를 끊었다. 반란군이 창읍으로 달려와 

        토벌군을 공격했지만 주아부는 대응하지 않고 지구전을 벌렸다. 
        오초 반란군의 보급을 차단하고 있었음으로 시간이 지나면 식량이 떨어져

        반란군은 곤경에 빠뜨리고자 함이었다. 주아부의 생각대로 이윽고 반란군은 

        식량이 떨어져 아사자가 속출하기 시작하고 배고픔을 참지 못한 장병들이 

        잇달아 달아났다. 주아부가 창읍의 성에서 나와 반란군의 본군을 공격했다. 
        오왕은 친위대만을 데리고 달아났고 초왕 유무(劉戊)는 자살하고 말았다.

        한편 교서, 교동, 치천, 제남의 왕들은 연합하여 오초에 호응하려고 했으나  

        제남왕이 중도에 마음을 바꿔 반란군에서 이탈하자 세 왕의 연합군이 

        그 도성인 임치성을 포위 공격했다. 그러나 그들은 제남왕의 완강한 저항에

        부딪쳐 싸움은 교착상태로 빠졌다. 그 사이 오초 연합군 주아부의 토벌군에

        패해 달아났다는 소식을 듣고 세 왕들은 임치성에 대한 포위망을 풀고 

        철수했다. 그러나 그들의 뒤를 토벌군이 추격하자 세 왕은 모두 자살했다. 

        한편 조왕 유수는 한단성에서 농성하며 저항했지만 한나라 장군 역기(酈寄)의 
        공격을 막아내지 못하고 그 역시 자살하고 말았다. 창읍에서 달아나 장강을

        도하하여 오나라 본국으로 들어간 오왕은 그의 요청에 응하여 출동한 

        동월군(東越軍)의 마중을 받았다. 그러나 그 때는 동월왕은 반란군에게 형세가 

        불리하다고 판단하여 한나라 조정과 내통하고 있던 상태였다.         

        동월군은 오왕을 잡아서 죽이고 그 목을 한나라 조정으로 보냈다. 
        이윽고 오초칠국의 난은 조왕이 한단성에서 농성하다 자살한 시점을 

        그 끝으로 본다면 10개월만에 막을 내리게 된 것이다
139) 추은(推恩)/ 한무제 14년 원삭 2년 즉 기원전 127년에 무제는 주보언의 건의에

        따라 추은령을 내려 제후들의 작위를 계승한 적장자를 제외한 나머지 

        자제들에게도 그 봉토를 나누어 주어 황제의 은혜를 베풀어야 한다고 하며 

        제후들의 세력을 약화시키려 했다. 
140) 사마법(司馬法) : 전국시대 때 제나라 위왕(威王: 재위 기원전 359- 319년)이

        그 신하들에게 명하여 과거 장군들이 써 놓았던 병서를 정리하게 했는데 

        그 중 제나라 경공(景公 : 재위 기원전 547- 490년) 때의 명장 사마양저의

        병법이 포함되어 있어 사마양저병법이라고 칭하고 줄여서 사마법이라고 한다. 
141) 여상(呂尙) : 병법서인 육도(六韜)를 지었다. 육도는 태공이 주문왕과

        주무왕에게 경세제민(經世濟民)과 부국강병(富國强兵) 책에 대해 논한 것이다. 

        모두 3권 60편으로 이루어져 있다.  
        제1권 문무도(文武韜) 17편은 치국(治國)에 관하여,  
        제2권 용호도(龍虎韜) 25편은 기변(奇變)과 용맹과단(勇猛果斷),  
        제3권 표견도(豹犬韜) 18편은 기계(奇計)와 돌진(突進)에 관해 서술했다.
142) 손자(孫子) : 손자는 오자서와 함께 오왕 합려를 도와 초나라를 공격한 손무와,  
        후에 제위왕 밑에서 방연이 이끄는 위나라의 군사를 계릉과 마릉에서 대파한  
        제나라의 손빈 두 사람을 말한다. 두 사람은 각각 별도의 병법서를 저술하여 

        지금까지 전해져 내려오고 있다. 
143) 오자(吳子) : 오기를 말한다. 전국시대 때 전략가로 원래 위(衛)나라 사람이다.

        처음에는 노나라에서 장군을 했고 이어서 위(魏)나라로 옮겨 여러 번의 

        싸움에서 많은 공을 세웠다. 위문후(魏文侯)에 의해 서하 태수로 임명되었다. 

        위문후가 죽자 그 뒤를 이어 위무후(魏武侯)가 즉위하자 초나라로 망명했다.  
        초도왕(楚悼王 : 재위 기원전 402-381년) 밑에서 영윤(令尹)에 임명되어

        초나라의 법률을 개선하고 제도를 혁신시켜 초나라의 국력을 일신시켰다. 

        도왕이 죽자 오기의 개혁 정치에 불만을 품은 공족들에 의해 살해당했다. 
144) 왕자성보(王子成父) : 춘추 때 제나라 양공(襄公 : 재위 기원전 698-686년) 때

        정경(正卿)으로, 유명한 군사전략가. 왕자성보(王子成父), 

        혹은 왕자성보(王子城父)라고도 한다. 제환공이 제위에 오르자 그를 제나라의

        대장으로 삼았다. 그는 군법을 밝혔으며 신상필벌을 행하여 일단 정벌군을 

        일으키면 싸움에서 이겨 환공을 짧은 시간에 패자의 자리에 끌어 올렸다.  
        이에 사마천은 그를 태공, 손자, 오기와 같은 반열에 세웠다.

        <한서(漢書)> <예문지(藝文志)>에 <왕손(王孫)>의 작으로 병법 16편이 

        실려 있는데 이것을 왕자성보의 병법서로 보고 있다.  
145) 오가지문(五家之文)/ 황제력(黃帝曆), 전욱력(顓頊曆), 하력(夏曆), 은력(殷曆),

        주력(周曆)을 말한다.  
146) 선방궁(宣房宮) : 원광(元光) 3년 기원전 132년 황하가 호자에서 범람하였다.

        그후 20여 년 후에 한무제(漢武帝)가 명하여 호자의 둑을 다시 만들고 

        그 자리에 궁을 짓고 선방궁이라 이름지었다.
147) 호자(瓠子) : 호자는 지금의 하남성 거야현에 있던 대야택(大野澤)에서 황하의 

        남안 도시인 복양시(濮陽市)를 거쳐 황화로 흘렀던 하천을 말한다. 
148) 태백(太伯) : 주족(周族)의 족장. 고공단보에게는 태백(太伯), 우중(虞仲),

        계력(季歷) 등 세 아들을 두었다. 고공단보가 계력의 아들인 창(昌)이 주족을 

        일으킬 재목임을 알고 그의 자리를 계력에게 물려주려고 했다.          

        이에 태백과 우중은 계력이 주족의 족장 자리를 물려받게 하기 위해

        남만으로 달아나 만족의 습속을 하고 살다가 그곳의 군주가 되었다. 

        한편 주나라는 계력의 뒤를 이은 창(昌)이 주족의 족장이 되어 은나라로부터

        서백(西伯)에 봉해지고 그의 아들인 무왕 때에 이르러 은나라를 멸하고

        주나라를 세웠다. 창의 시호가 주문왕(周文王)이다.  
149) 신(申) : 강성(姜姓)의 일족이 세운 나라 이름. 일설에 의하면 백이(伯夷)의 

        후손들이 세운 나라라고도 한다. 원래 신나라의 근거지는 섬서성 북쪽이었으나 

        주선왕 때 지금의 하남성 남양시의 땅에 봉해졌다. 춘추 초기 초나라에 의해 

        멸망당하고 신의 땅은 초나라가 북진하는데 전략상의 요충지가 되었다.
150) 여(呂) : 역시 강성(姜姓)의 일족이 세운 나라 이름. 일설에 의하면 사악(四嶽)의 

        후손이 세운 나라라고도 한다. 지금의 하남성 남양시 서쪽에 있었다. 

        여나라도 역시 춘추 초기 초나라에 의해 병탄 당했다.  
151) 노은공(魯隱公) : 춘추 시대 노나라의 국군(國君). 이름은 식고(息姑)

        또는 식(息)이고, 혜공(惠空)의 서자다. 노나라 사람이 혜공의 적자 윤(允)이 

        어리다고 여겨 함께 그를 세워 섭정을 하게 하고 동생 윤(允)은 태자로 삼았다. 

        11년 공자휘(公子翬)가 백성들이 군주를 가볍게 여긴다면서 윤을 죽이고

        정식으로 즉위하라고 하면서 자신을 경으로 올리라고 요청했다. 

        공이 허락하지 않고, 윤이 장성하면 당연히 정권을 돌려주겠다고 말했다. 

        휘가 거꾸로 윤에게 참언을 하자 공을 살해했다. 11년 동안 재위했다
152) 노환공(魯桓公) : 춘추 시대 노나라의 국군(國君). 이름은 윤(允) 또는 궤(軌)고,

        혜공의 적자다. 공자휘가 은공을 살해하자 즉위했다. 송나라가 뇌물로 준

        솥[정(鼎)]을 태묘에 넣자 군자들이 예가 아니라고 비난했다.

        또 제양공(齊襄公)의 누이 문강(文姜)을 아내로 얻어 부인(夫人)으로 삼았는데, 

        부인이 양공과 사통하자 크게 화를 냈다. 양공이 이를 알고 연회를 베풀 때

        역사(力士)를 시켜 수레 안에서 살해 한 것이다. 18년 동안 재위했다. 
153) 삼환(三桓) ; 춘추시대 때 노나라의 국정을 전담했던 세 귀족 가문을 말하며

        세 가문의 시조는 모두 노환공의 아들들이었기 때문에 삼환이라 부른 것이다. 

        노환공의 뒤는 적자인 노장공(魯庄公) 동(同)이 이었다.  
        노장공의 서장자인 공자경보와 그 동생 숙아(叔牙) 그리고 장공의 동복 동생

        계우(季友)의 후손들을 삼환이라 한 것이다. 삼환의 계보는 다음과 같다. 

         桓公 x宮女
         ①  孟孫氏 : 식읍은 성읍이다. 公子慶父 ⇒公孫敖 ⇒公孫穀/公孫難 ⇒仲孫蔑 
         ②  叔孫氏 : 식읍은 후읍이다. 公子牙(叔牙) ⇒ 公孫玆⇒叔仲彭生 ⇒叔孫得臣

             ⇒叔孫僑如 桓公x文姜  庄公(公子同)⇒ 東門遂(장공의 서자/仲遂)⇒ /仲孫氏 
         ③  季孫氏 :식읍은 비읍(費邑)과 문양(汶陽)이다.

               公子友(季友)⇒ 季无佚⇒ 季孫行夫(季文子)
154) 금등(金縢) : 주무왕이 은나라를 멸하고 1년만에 병이 걸려 자리에서 일어나지 

        못하자 주공단은 주무왕 대신에 자기의 목숨을 가져가 달라고 선조들에게 

        기도를 들였다. 그리고 태사에게 명하여 점을 치게 하고 축문을 써서 읽게 

        하였다. 점의 괘가 길하게 나오자 그 점괘를 금괘 안에 보관하고 금으로

        밀봉하였다. 금등이란 금을 녹여 그 물로 봉함한 궤를 말했으나 

        후에 그 안에 든 축문의 내용을 말하게 되었다.  
        그 축문은 <상서(尙書)> <주서(周書)>에 수록되어 있다. 
155) 대임(大任) : 태임(太任) 혹은 태사(太姒)라고도 한다. 주문왕의 정비이며

        주무왕의 모친이다. 10명의 아들은 그 순서에 따라 백읍(伯邑) 고(考), 

        무왕(武王) 발(發), 관숙(管叔) 선(鮮), 주공(周公) 단(旦), 채숙(蔡叔) 도(度), 

        조숙(曹叔) 진탁(振鐸), 성숙(成叔) 무(武), 곽숙(霍叔) 처(處), 강숙(康叔) 봉(封),  
        염계(冉季) 재(載) 등이다.  
156) 주고(酒誥)와 재재(梓材) : 주공이 그 아우인 강숙(康叔) 봉(封)을 은나라의

        구토에 봉하면서 은나라가 말기에 나라가 부패하여 망하게 된 것을 말하고 

        그 전철을 밟으면 안된다고 훈계한 내용을 담은 글로써 상기 두 편 외에

        <강고(康誥)> 한 편이 더 있다. 모두 상서(尙書) 주서(周書)에 실려 있다.
157) 혜공(惠公) 삭(朔) : 재위 기원전 699년-697, 686-669년. 위선공의 아들로서

        이복형인 세자인 급자와 동복형인 공자수를 살해하고 위후의 자리에 올랐다.

        이 일로 해서 국인들이 반란을 일으켜 혜공은 제나라로 망명했다가

        14년 만에 제양공의 도움으로 다시 위후의 자리를 찾았다. 
158) 척성(剔成) : 전국 중기 때 송강왕으로 송나라를 멸망으로 이끌었다.  
159) 규(珪) : 옥이나 나무로 만든 자루가 달리고 둥그런 모양의 술잔으로 제사를

        지낼 때 울창주(鬱鬯酒)를 담았다.  제기(祭器)의 일종이다.
        규(圭) : 옥으로 만든 홀(笏)의 일종으로 위 끝은 뾰족하고 아래쪽은 세모

        혹은 네모진 것으로 옛날 중국에서는 천자가 제후를 봉하거나 

        신을 모실때 썼으며 절대 권력자가 가진 것이다. 
160) 창(鬯) : 울창주(鬱鬯酒)를 말하며 제주(祭酒)로 사용하기 위해 울금향을 넣어서

        빚은 술을 말함. 울금향이란 백합과의 다년초인 튜율립에서 채취한 향이다. 

        봄철에 황색, 백색 등의 꽃이 피며 향기가 있다. 주로 천자가 제사를 지낼 때

        쓰는 제주(祭酒)를 빚는 데에 사용한다. 주양왕(周襄王) 20년 기원전 632년,  
        진문공(晉文公)이 이끄는 진군과 초성왕의 장수인 성득신이 이끌던 초군이

        성복(城濮)에서 크게 싸운 결과 진군이 이겨 그때 잡은 포로와 전리품을 

        주천자에게 받쳤다. 주천자는 진문공의 공로를 포상하여 천자만이 

        사용할 수 있는 제기와 술인 하사했다.  
        규(珪)는 옥으로 만든 술잔이고 울창주는 울금향으로 빚은 술이다.  
161) 중려(重黎) : 고양씨는 황제(黃帝)의 손자이며 창의(昌意)의 아들이다.

        고양씨가 칭을 낳고 칭은 권장(卷章)을 낳았다. 중려는 제곡(帝嚳) 고신씨를

        위해 화정(火正)의 벼슬에 앉아 큰공을 세웠다. 그로 인하여 천하가 밝고 빛나게

        되었다. 제곡이 명하여 중려를 세상을 밝게 빛냈다는 뜻의 축융(祝融)이라고 

        부르게 하였다. 공공씨(共工氏)가 란을 일으키자 제곡(帝嚳)이 중려에게 명하여 
        공공의 무리들을 잡아죽이게 하였으나 모두 소탕하지는 못했다.

        그래서 제곡이 경인(庚寅) 일에 중려를 죽이고  그 후임에 중려의 동생 

        오회(吳回)를 세워 화정의 벼슬을 주었다. 오회가 축융이 되었다.
162) 창의(昌意)/ 황제(黃帝)의 둘째 아들로 황제의 비(妃) 누조(嫘祖)의 소생이다.  
        누조는 서릉씨의 딸이다. 그녀가 처음으로 백성들에게 양육을 가르쳤기 때문에

        선육이라고도 하고 또 여행 다니기를 즐겨 하다가 길 위에서 죽었기 때문에

        도로신(道路神)이라고도 한다. 
163) 오회가 육종을 낳고 육종이 여섯 아들을 부인의 옆구리를 갈라 낳게 하였다.

        장남을 곤오(昆吾)라 하고 이남을 삼호(參胡), 삼남은 팽조(彭祖), 

        사남은 회인(會人), 오남은 조성(曹姓)이고

        여섯 번째는 계련(季連)인 미성(羋姓)이었는데 이가 초나라의 선조이다. 
164) 소강(少康) : 하나라 6대 왕으로 상(相) 임금의 아들이다.

        한착(寒浞)이 상(相) 임금을 살해하자 임신하고 있던 상(相)의 왕비 민(緡)이 

        유잉씨(有仍氏)에게 달아나 그곳에서 소강을 낳았다.  유잉씨의 목정(牧正)이

        되었다가 후에 유우씨(有虞氏)에게로 달아나 포정(庖正)이 되어

        사방 10리 되는 성(成)의 전답과, 5백 명에 해당하는 려(旅)의 백성을 얻었다.

        후에 동성의 부락들가 힘을 합하여 한착(寒浞)을 멸하고 하왕조를 중흥시켰다. 

        22년 동안 재위에 있었으며 역사상 ‘소강중흥(少康中興)’이라 칭한다. 
165) 우산(禺山) : 지금의 절강성 덕청현 경내 봉산의 동남에 있었던 산 이름이다. 
         “ 방풍씨(防風氏)는 왕망씨(汪罔氏)의 군장들로 봉산과 우산(禺山)을 지키며

        그 신들에게 제사를 지냈으며 그의 성은 리씨(釐氏)라 했다. 

        우(虞), 하(夏), 상(商) 나라 때는 왕망(汪罔)이라 했고  
        주나라 때는 장적(長翟)이라 했으며 지금은 대인족이라고 부르고 있다. ” 
166) 다음은 <정세가> 편에 실린 태사(太史) 백(伯)의 말이다.
        " 낙수(洛水)의 동쪽이며 하수의 남안(南岸)에 해당하는 땅만이 편안하게 

        살 수 있을 것입니다. 그 일대에는 괵국(虢國)과 회국(鄶國)이 있는데 

        그 군주들이 탐욕스럽고 이(利) 만을 밝히는 자들이라 백성들이 따르고 있지 

        않습니다. 지금 공께서는 사도(司徒)의 직에 계시고 백성들로 부터 사랑을 받고 
        계시니 그곳 주변의 땅을 성심껏 청하신다면 괵국과 회국의 군주들은 공께서

        주왕실에서 권력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생각하고 즐거운 마음으로 흔쾌히 

        그들의 봉지를 떼어 줄 것입니다. 공께서 그곳에 자리잡으신다면 

        괵국과 회국의 백성들은 모두 공의 백성들이 될 것입니다.

        주나라가 쇠하게 되면 제, 당진, 섬진, 초 등의 나라가 흥성하게 될 것입니다. 
        제나라는 강성(姜姓)이며 백이(伯夷)의 후손들이 세운 나라입니다. 
        백이는 옛날 요(堯)임금을 도와 나라의 법도와 예절을 제정했습니다.

        섬진(陝秦)은 영성(嬴姓)이며 백예(伯翳)의 후손들입니다. 

        백예는 순(舜)임금을 도와 많은 부락을 회유하고 귀순시켜 공을 세웠습니다.  
        그리고 초(楚)나라의 조상들도 역시 천하를 위해 큰공을 세웠습니다.

        주무왕이 은주(殷紂)를 멸하고 그의 아들 성왕(成王)이 뒤를 이었습니다. 

        성왕이 당(唐) 땅을 그의 동생인 숙우(叔虞)에게 주어 제후로 봉했습니다. 

        당 땅은 산천의 지세가 험(險)하여 이 곳에서 덕 있는 후손이 태어나 주나라가

        쇠퇴하게 되면 같이 병존하게 되어 당진은 틀림없이 흥성하게 될 것입니다. "
167) 괵(虢) : 주문왕의 동생들인 숙(叔)과 중(仲)이 각각 동괵과 서괵에 봉해졌다.  
        서괵이 후에 동천(東遷)하는 주평왕을 따라 같이 동쪽으로 옮겨 북괵이 되고

        원래 서괵의 자리에는 잔존세력이 나라를 세워 소괵(小虢)이라 했다. 
        동괵(東虢)/ 지금의 하남성 형양(滎陽)의 동북에 있던 제후국으로 주문왕의

        동생 숙(叔)이 봉해졌다. 후에 주평왕(周平王) 4년 기원전 767년 정무공에게 

        멸망당하고 정나라 영토로 편입되어 경성이라고 했다.
        서괵(西虢)/ 지금의 섬서성 보계시 부근의 제후국으로 주문왕의 동생 중(仲)이

        봉해졌다. 주평왕이 낙읍으로 동천할 때 지금의 하남성 섬현 이가요(李家窯)인 

        상양성(上陽城)으로 나라를 옮겼다. 
        북괵(北虢)/ 서괵이 상양성으로 옮긴 나라를 북괵이라 부르다가 주혜왕 22년

        기원전 665년 당진(唐晉)의 헌공 때 순식의 가도멸괵(假道滅虢) 작전에 의해 

        멸망당하고 당진의 영토로 편입되었다.
        소괵(小虢)/ 주나라가 천도할 때 따라가고 남은 서괵의 잔존세력이 

        세운 나라가 서괵이다.  
        주장왕(周庄王) 10년 기원전 687년 섬진의 무공(武公)에 의해 멸망당했다.
168) 회국(鄶國)/ 회(檜)라고도 하며 지금의 하남성 신밀시(新密市) 동남에 있던 

        제후국으로써 정무공(鄭武公)에 의해 멸망하고 그 땅은 정나라에 병합되었다.
169) 정나라 상경 제족(祭足)이 장공의 뒤를 이어 소공(昭公)이 새로 선 것을 알리기

        위해 송나라에 특사로 갔다. 그러나 송장공은 오히려 제족을 붙잡아 소공을

        몰아내고 당시 송나라로 망명해 있던 자돌을 대신 세우라고 위협하였다.

        제족은 송나라의 위협에 굴하여 맹세를 하였다. 제족은 아무도 몰래 자돌을 
        귀국시켜 소공을 몰아내고 정백의 자리에 앉혔다.이가 정려공(鄭厲公)이다. 
        소공은 진(陳)나라로 망명했다. 이 구절은 제족이 송나라의 위협에 굴한 것을

        비난한 것이다. 
170) 조앙(趙鞅) : 태어난 해는 알 수 없고 기원전 475년에 죽은 춘추말 당진국의

        정경(正卿)으로 시호는 조간자(趙簡子)이다. 당진국 공실의 세력이 쇠퇴하자 

        순인(荀寅)과 범길석(范吉射)이 조씨들을 공격하자 그는 진양으로 달아났다. 
        후에 정경의 자리에 복귀하여 다시 조씨의 가병을 동원하여 범씨와 순씨들을

        공격하자 두 종족은 조가(朝歌)와 한단(邯鄲)으로 들어가 농성했다. 

        이에 지(智), 한(韓), 위(魏) 등의 3가와 힘을 합쳐 조가와 한단을 압박하자 

        범씨와 순씨들은 제나라로 달아났다. 후에 범선자(范宣子="匃)가" 제정한

        형서(刑書)를 철정(鐵鼎)에 새겨 조씨들이 다스리던 지역의 정치와 경제를

        개혁함으로 해서 조가들의 세력을 증대시켰다. 그의 아들 조양자 때

        한위조(韓魏趙) 삼가는 지가(智家)를 멸하고 당진국을 삼분했다.  
171) 전성자(田成子) : 전상(田常)을 말하며 성자(成子)는 그의 시호(諡號)이다.

        감지(闞止)와 정권을 다투다가 기원전 481년 제간공(齊簡公)을 죽이고 

        평공(平公)을 대신 세웠다. 이어서 스스로 상국(相國)의 자리에 올라 

        제나라의 정권을 전횡하였다. 전성자 이후 그의 5대 손인 태공 전화(田和)가

        기원전 376년에  제나라 국권을 빼앗아 강씨들의 정권을 대신했다.  
172) 유무(劉戊) : 초왕(楚王)으로 시봉된 유교(劉交)의 손자로 상중에 궁녀를 봉하여

        그 죄로 봉지의 일부인 동해군을 빼앗겼다. 이에 불만을 품고 오왕 유비(劉濞)와

        함께 오초칠국의 란을 주도하였으나 싸움에 패하여 자살했다.  
173) 사간(邪奸) :국상 중에 궁녀와 잠자리를 같이 하는 것.

        국상 중에는 남녀가 잠자리를 같이 하는 것을 금했다. 
174) 유고(劉賈) : 한고조 유방(劉邦)의 사촌형이다. 한고조 밑에서 장군의 신분으로

        종군했다가 기원전 201년 형왕(荊王)에 봉해졌다. 

        후에 반란을 일으킨 영포의 습격으로 목숨을 잃었다.
175) 형(荊)/ 원래 초나라는 지금의 호북성 형주시에 있었다. 

        기원전 278년 진나라 소양왕 때 백기(白起)의 침입에 의해 도성을 뺏기고 

        지금의 하나성 진현으로 나라를 옮겼다가 다시 지금의 안휘성 수현으로 옮겼다.

        지금의 호북성 형주시에 있었던 옛날의 초나라 땅을형(荊)이라 하고 초나라가 

        새로 옮겨 간 수현(壽縣) 일대를 초(楚)라고 명명한 것이다.  
        항우는 팽성 즉 지금의 안휘성 서주시에 도읍을 새우고 초나라라고 명명했다.
176) 유택(劉澤) : 한고조 유방의 사촌 형제이다. 유방 밑에서 낭중의 벼슬을 살다가 

        여태후에 의해 영릉후에 봉해짐. 
177) 도혜왕(悼惠王) : 한고조 유방의 서장자 유비(劉肥)로 제왕(齊王)에 봉해졌다.
178) 애왕(哀王)/ 유비(劉肥)의 아들 유양(劉襄)을 말한다.
179) 주보(主父)/ 주보언(主父偃)을 말한다. 제나라 임치(臨淄) 사람으로 한무제 때 

        중대부의 벼슬을 지내다 제후왕들의 세력을 약화시킬 목적으로 그 봉지를 

        여러 형제들에게 나누어주기 위해 추은령(推恩令)을 건의하여 시행하게 했다. 

        후에 자기의 딸을 제려왕(제厲王)에게 시집보내려고 했다가 거절당하자        

        려왕이 자기의 누이와 간통한 사실을 밝혀 내고 그 사실을 한무제에게 고하여

        려왕으로 하여금 자살하도록 만들었다. 주보에게 화를 입었다는 것은 

        이것을 말한 것이다. 
180) 주아부(周亞夫) ; 주발(周勃)의 아들이다. 한문제 때 세류(細柳 : 지금의 섬서성 

        함안 서남)에 주둔하여 흉노의 침략을 막아냈다. 한경제 때 오초를 포함한 

        칠국이 반란을 일으켰을 때 토벌군 대장이 되어 창읍에 주둔하여 반란군의 

        후방을 끊고 제와 조 두 나라와의 연락을 두절시켰다.  

        전후에서 보급망이 끊어진 오초의 군사들은 오래 견디지 못하고 스스로 무너져

        초왕은 스스로 목숨을 끊고 오왕은 본국으로  귀환했다가 한나라 조정의 

        회유책에 넘어간 동맹국의 왕 동월왕에 사로잡혀 죽임을 당했다. 

        오초칠국의 난을 진압한 공로로 승상의 자리에 올랐으나 후에 무고를 받아 

        감옥에 갇혀 나오지 못하고 옥중에서 굶어 죽었다. 
181) 오종(五宗) : 한경제(漢景帝)는 그 슬하에 모두 14명의 아들을 두었다.

        그 중 한 사람이 한무제(漢武帝)이고 나머지 13명이 모두 제후왕에게 봉해졌다.

        13명은 모두 다섯 여인들 소생이었다. 이에 5명의 여인들을 모두 모친으로 여겨 

        같은 종친으로 지낸다고 해서 오종이라고 한 것이다.  
182) 백이(伯夷)/백이와 숙제를 말한다. 백이는 형이고 숙제는 동생으로 지금의

        천진시 복쪽의 창려(昌黎)시에 있었던 고죽국(孤竹國)의 왕자였다. 

        고죽국의 군주가 차자인 숙제를 왕으로 세우려 했으나 생전에 실행하지 못하고 

        죽었다. 이에 백이가 자기 부친의 뜻을 알고 왕위를 동생인 숙제에게 물려 주기 
        위해 나라 밖으로 도망쳤다. 그러나 숙제도 형을 제치고 동생이 왕의 자리에

        앉는 것은 옳지 않은 일이라고 왕자리에 앉지 않고 그 역시 나라 밖으로 떠났다. 
        그후 두 사람은 주나라의 서백(西伯) 창(昌)이 노인들을 공경한다는 소식을 듣고

        그에게 달려가 귀의하였다. 서백 창이 죽고 그의 아들인 주무왕이 군사를 이끌고

        은나라를 정벌하려고 하자 신하의 나라가 주인 되는 나라를 정벌하는 것은

        의로운 일이 아니라고 하며 주나라를 떠나 수양산(首陽山)으로 들어가 

        비록 곡식일지라도 주나라 땅에서 난 것이라 먹지 않고 
        고사리와 고비를 캐서 먹으며 연명하다가 결국 굶어 죽고 말았다.  
183) 유중(楡中) : 지금의 내몽고자치주(內蒙古自 治州) 준격이기(準格爾旗) 부근에

        있던 요새로 유림새(楡林塞) 혹은 유구구새(楡溪舊塞)로 불리었다.
184) 하내군(河內郡)/ 지금의 하남성 황하 이북과 급현(汲縣) 서쪽의 땅으로

        한(漢)과 초(楚)가 다툴 때 중립지역을 두기 위해 설치한 군현 이름이다. 
185) 상산(常山) ; 항산(恒山)의 별명. 중국 오악(五嶽) 중 북악. 한문제의 이름이

        유항(劉恒)이었던 관계로 그 휘(諱)를 피하여 상산이라 개칭한 것이다. 
        지금의 하북성 곡양현 서북과 산서성과의 접경지대에 걸쳐 있다.
186) 해하(垓下) ; 지금의 안휘성 영벽현 남쪽에 있던 전적지로 한신이 이끄는

        한군이 항우의 초군을 격파하여 중국은 유방이 차지하게 되었다.
187) 역생(酈生) : 진한(秦漢) 교체기 지금의 하남성 서남부에 있던 진류(陳留)

        고양향 출신으로 한고조 유방을 찾아가 계책을 바쳐 진류를 쳐부수고

        광야군에 봉해졌다. 초한 전쟁 동안에 그는 제왕 전광(田廣)에게 유세하여

        한나라에 귀속시켰으나, 이어서 한신이 군사를 이끌고 제나라로 쳐들어오자 

        제왕 전광(田廣)은 역생을 끓는 물에 삶아 죽였다.
        육가는 초나라 출신이었으나 유방을 따라 다니며 변설로써 이름을 얻었다.
        한고조 11년 남월왕(南越王) 조타(趙佗)를 설득하여 한나라를 섬기게 하여
        한나라 황제의 위엄을 남해에까지 미치게 했다고 해서 태중대부에 임명되었다.
188) 유중(劉仲) : 한고조 유방의 형이다. 한나라가 서자 대왕(代王)에 봉해졌으나

        흉노의 침입을 막아내지 못하자 합양후(郃陽侯)에 봉해졌다. 
189) 두영(竇嬰) : 두태후의 조카로 오초칠국의 란 당시에 대장군에 임명되어

        제와 조 두 나라의 군사들에 대항했다. 칠국의 란이 진압되자 위기후에

        봉해졌다. 무제 즉위 초에 승상에 올라 유학을 숭상하고 도학을 배척하여 

        두태후로부터 미움을 받았다. 이어서 죄를 얻어 목숨을 잃었다.
190) 한장유(韓長孺) ; 지금의 하남성 민권현인 성안 사람으로 이름은 안국이다.
        한나라 초기에는 양효왕 밑에서 중대부를 지냈으나 오초칠국의 란 때

        오나라의 군사를 격퇴한 공로를 세워 그 이름을 떨치게 되었다. 

        무제 때 어사대부(御史大夫), 위위(衛尉)의 직을 지냈다.
        후에 재관장군(材官將軍)에 임명되어 흉노를 방어하는 책임을 맡았으나

        싸움에 패하고 이어서 병사했다.
191) 유장(劉長) : 한고조 유방의 막내아들로 기원전 198년에 태어나서 174년에

        죽었다. 고조 11년 기원전 196년 회남왕(淮南王)에 봉해졌다. 

        혜제(惠帝)에 이어 문제(文帝)가 제위에 오르자 오만방자하게 되어 

        항상 문제와 어가에 같이 동승하고 사냥을 나갔다. 자기의 봉지에는 

        한나라 조정의 법을 따르지 않고 별도의 법령을 만들어 통치했다. 
        문제 6년 기원전 174년 흉노 및 민월 등과 연락하여 반란을 도모했다가

        사전에 발각되어 제후왕에서 폐위되고 촉군으로 유배 가던 중에 음식을 끊고 

        굶어 죽었다.
192) 유안(劉安) : 회남왕 유장의 아들이다. 독서를 즐겨했고 거문고에 능했다.

        문제 16년 기원전 166년 부친의 작위를 물려받아 회남왕에 봉해졌다. 

        경제 3년 기원전 154년 오초칠국의 란이 일어났을 때그는 난에 참가하려고 

        했으나 승상의 권유로 화를 면했다. 문제가 뛰어나 한무제의 총애를 받았고,
        유명한 <회남자(淮南子)>의 편찬자이다. 원수(元狩) 원년 기원전 122년

        반란을 회책했으나 사전에 누설되어 자살했다.    
193)  건원(建元)과 원수(元狩)/ 한무제 때의 연호로 건원은 140년부터 135년,
         원수는 기원전 122년부터 115년까지임. 따라 건원과 원수지간이라 함은 

         기원전 140년부터 115년까지의 기간을 말한다.   

 

 

 

※  原 文 .    【 中國哲學書電子化計劃 .  筆寫本 】     

 

 

 

     原 文   飜 譯 者        德庤 / 李   斗 振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