史記 世家(사기세가)/7. 衛康叔世家

第 七. 衛康叔世家

덕치/이두진 2021. 6. 28. 18:04

 

              史記 世家

 

     第 七衛康叔世家(위강숙세가)

 

 

衛康叔名封,周武王同母少弟也.  其次尚有冉季,冉季最少.

武王已克殷紂,復以殷餘民封紂子武庚祿父,比諸侯,以奉其先祀勿絕.

為武庚未集,恐其有賊心,武王乃令其弟管叔、蔡叔傅相武庚祿父,以和其民.
武王既崩,成王少.  周公旦代成王治,當國.  管叔、蔡叔疑周公,乃與武庚祿父作亂,欲攻成周.
周公旦以成王命興師伐殷,殺武庚祿父、管叔,放蔡叔.

以武庚殷餘民封康叔為衛君,居河、淇閒故商墟.

[위강숙(衛康叔)은 이름이 봉(封)이고, 같은 어머니에게서 태어난 주무왕(周武王)의 아우이다.

그보다 아래에 또 염계(冉季)가 있는데, 그가 막내이다.
무왕이 은(殷)나라 주왕(紂王)과의 전쟁에서 승리를 거둔 후에 은나라 유민들과 그들이 사는 땅을

주왕의 아들인 무경녹보(武庚祿父)에게 봉해 여타의 제후들과 동등하게 대우해 주어

그들의 조상에 대한 제사를 받들게 하고 대가 끊어지지 않도록 했다. 무경이 기쁜 마음으로 성복(誠服)하지 않자,

무왕은 그가 음험(陰險)한 마음을 품을까 두려운 나머지 자신의 두 아우 관숙(管叔)과 채숙(蔡叔)으로 하여금
무경녹보를 보좌하게 함으로써 은나라 유민들을 잘 안무(安撫)하게 했다.
무왕이 세상을 떠나고 나서 그의 뒤를 이어 즉위한 성왕(成王)은 나이가 어렸기 때문에

주공(周公) 단(旦)이 성왕을 대리해 나라를 다스렸다.

관숙과 채숙은 주공을 믿지 않고는 곧 무경녹보와 더불어 난을 일으켜 성주(成周)를 공격하려고 했다.

주공 단은 성왕의 명령을 받들어 군대를 일으켜 은나라 유민들을 정벌하고

무경녹보와 관숙을 죽이고 채숙은 멀리 내쫓아 버렸다.

그리고 강숙을 위(衛)나라 군주에 봉해 황하(黃河)와 기수(淇水) 사이의 상허(商墟)에 거주하게 하면서

무경에게 주었던 은나라 유민들을 관할하게 했다.]

 

周公旦懼康叔齒少, 乃申告康叔曰:「必求殷之賢人君子長者, 問其先殷所以興, 所以亡, 而務愛民.」
告以紂所以亡者以淫於酒,酒之失,婦人是用,故紂之亂自此始.  為梓材,示君子可法則.
故謂之《康誥》、《酒誥》、《梓材》以命之.  康叔之國,既以此命,能和集其民,民大說.

成王長, 用事, 舉康叔為周司寇, 賜衛寶祭器, 以章有德.  康叔卒, 子康伯代立. 康伯卒,子考伯立.

考伯卒, 子嗣伯立. 嗣伯卒, 子偼伯立.  偼伯卒子, 靖伯立.  靖伯卒, 子貞伯立.  貞伯卒,子頃侯立.

頃侯厚賂周夷王,夷王命衛為侯.  頃侯立十二年卒,子釐侯立.

[주공 단은 강숙이 나이가 적어 사리에 어두울까봐 걱정이 되어 강숙에게 타일러 말하기를 :

“반드시 은(殷) 지역에 거주하고 있는 현인, 군자 그리고 연장자들을 방문하여 그들에게 예전에 은왕조가

흥기되었다가 멸망해버린 까닭을 물어보고 그 백성들을 잘 보살펴 주어야 하느니라!”라고 누차 당부했다.
그리고 주왕이 나라를 망하게 했던 원인, 즉 주색에 눈이 멀어 화를 자초했다는 사실을 그에게 일러주었다.
주공은 「자재(梓材)」라는 제목의 글을 써서 군자가 정무를 처리할 때 가래나무의 재질을 거울 삼아야 한다고

일깨워 주었다. 그래서 자신이 쓴 글을 「강고(康誥)」,「주고(酒誥)」,「자재」라고 이름하여 강숙을 훈계했다.
강숙이 그 나라에 당도해 주공으로부터 받은 가르침을 잘 실행해 단결시켰으며, 그곳 백성들도 기뻐하며 잘 따랐다.
성왕이 장성한 이후에는 친히 정무를 처리했으며, 강숙을 주나라의 사구(司寇)에 임명하고,

위(衛)나라의 보기(寶器)와 제기(祭器)를 하사해 그의 덕행을 표창했다.
강숙이 죽고 나서는 아들인 강백(康伯)이 즉위했다.

강백이 죽은 후에는 아들 고백(考伯)이 즉위했다.

고백이 죽고 나서는 아들 사백(嗣伯)이 즉위했다.
사백이 죽고 나서는 아들 첩백이 즉위했다.

첩백이 죽고 아들 정백(靖伯)이 즉위했다.

정백이 죽고 아들 정백(貞伯)이 즉위하였다.

정백이 죽고 아들 경후(頃侯)가 즉위했다.
경후는 주나라 이왕(夷王)에게 많은 재물을 상납하여, 이왕은 위나라에게 후작(侯爵)을 내려주었다.

경후는 재위 12년 만에 죽고 아들 희후(釐侯)가 즉위했다.]

釐侯十三年,周厲王出奔于彘,共和行政焉.

二十八年,周宣王立.

四十二年,釐侯卒,太子共伯餘立為君.  共伯弟和有寵於釐侯,多予之賂;

和以其賂賂士,以襲攻共伯於墓上, 共伯入釐侯羨自殺.

衛人因葬之釐侯旁,謚曰共伯,而立和為衛侯,是為武公.

武公即位,修康叔之政,百姓和集.

四十二年,犬戎殺周幽王,武公將兵往佐周平戎,甚有功,周平王命武公為公.

五十五年,卒,子莊公揚立.

[희후 13년, 주나라 려왕이 체(彘) 지역으로 도피하자, 주나라에서는 두 재상이 공동으로 정무를 대행하게 되었다.

28년, 주나라에서는 선왕(宣王)이 즉위했다
42년에 희후가 죽고 태자 공백(共伯) 여(餘)가 군주의 자리에 올랐다. 공백의 아우인 화(和)가 희후의 총애를 받았고,

일찍이 희후가 화(和)에게 많은 재물을 주었다. 그는 그 재물로 무사(武士)들을 매수해 공백을 습격하자

공백은 희후의 묘로 도망쳤다가 그 묘도(墓道)에서 자살했다.
위나라 사람들은 그를 희후의 묘 옆에다 매장하고는 시호(諡號)를 공백(共伯)이라 했다.

그리고는 화(和)를 위후(衛侯)로 옹립했으니, 그가 바로 무공(武公)이다.
무공은 즉위한 후로 강숙(康叔)의 정령(政令)을 다시 잘 시행해 백성들을 편안하게 잘 다스렸다.
42년, 견융족(犬戎族)이 주나라 유왕(幽王)을 죽이자 무공이 군대를 이끌고 가서 주나라를 구원해

견융족을 평정함으로써 큰 공을 세웠다. 그리하여 주나라 평왕(平王)이 무공에게 공작(公爵)을 수여했다.
그는 재위한 지 55년 만에 세상을 떠나고 아들 장공(莊公) 양(揚)이 즉위했다. 

莊公五年,取齊女為夫人,好而無子。又取陳女為夫人,生子,蚤死。

陳女女弟亦幸於莊公, 而生子完. 完母死, 莊公令夫人齊女子之, 立為太子. 莊公有寵妾, 生子州吁.

十八年,州吁長,好兵,莊公使將.  石碏諫莊公曰:「庶子好兵,使將,亂自此起。」不聽.

二十三年,莊公卒,太子完立,是為桓公.

[장공은 즉위 5년에 제(齊)나라 여인을 아내로 맞이했는데, 그녀는 예쁘기는 했지만 아들이 없었다.

다시 진(陳)나라 여인을 아내로 맞이해 아들을 얻었으나 일찍 죽어버렸다.

둘째 부인의 여동생 역시 장공의 총애를 받아서 아들 완(完)을 낳았다.

완의 어머니가 죽자 장공은 제부인(齊夫人)으로 하여금 그를 잘 양육하게 당부하고는 그를 태자로 봉했다.

장공에게는 애첩 하나가 있었는데, 아들 주우(州吁)를 낳았다.
18년, 주우가 장성해 병술(兵術)을 즐겨 익히는 것을 보고 장공은 그로 하여금 군대를 이끌도록 했다.
석작(石碏)이 장공에게 간언하기를 : “그가 군사 방면에 조예가 있기는 하나 첩의 소생이므로

그에게 군대를 맡긴다면 장차 큰 화근이 될 것입니다.”라고 하였으나, 장공은 듣지 않았다.

23년, 장공이 죽고 태자 완(完)이 즉위했으니, 그가 바로 환공(桓公)이다. 

桓公二年,弟州吁驕奢,桓公絀之,州吁出奔.

十三年,鄭伯弟段攻其兄,不勝,亡,而州吁求與之友.
十六年,州吁收聚衛亡人以襲殺桓公,州吁自立為衛君.

為鄭伯弟段欲伐鄭,請宋、陳、蔡與俱,三國皆許州吁.

州吁新立,好兵,弒桓公,衛人皆不愛.  石碏乃因桓公母家於陳,詳為善州吁.

至鄭郊,石碏與陳侯共謀,使右宰丑進食,因殺州吁于濮,而迎桓公弟晉於邢而立之,是為宣公.

[환공 2년, 아우인 주우가 교만하고 사치를 부려 그의 직위를 박탈하려고 하자 주우는 다른 나라로 달아났다.
13년, 정백(鄭伯)의 아우인 단(段)이 그의 형을 공격했으나 실패로 끝나고 도주해 주우와 교분을 맺게 되었다.
16년, 주우는 위나라로부터 도망쳐 온 사람들을 모아서 환공을 습격해 죽이고 자신이 군주의 자리에 올랐다.
정백의 아우 단은 정(鄭)나라를 공격하고자 뜻을 세우고는 송(宋), 진(陳), 채(蔡) 나라에 동참을 요청하자,

그 세 나라가 모두 응낙했다. 위나라 백성들은 주우가 군주의 자리를 차지한 후로는 그가 전쟁을 좋아하며,

또 그가 환공을 살해한 것을 목격했기에 그를 좋아하지 않았다.
석작은 환공의 어머니가 다른 나라인 진(陳)나라 태생이라는 사실을 핑계로 자신은 주우의 편인 체 가장했다.
위나라 군사가 정나라로 가고 없는 틈을 이용해 석작이 주우를 없애버릴 것을 진후(陳侯)와 공모하고는

우재추(右宰醜)를 보내어 식량을 바쳤다. 그리하여 복(濮)에서 주우를 죽이고는 형(邢)나라로 가서

환공의 아우 진(晉)을 맞이해 군주로 옹립했으니, 그가 바로 선공(宣公)이다.]

 

宣公七年,魯弒其君隱公.  九年,宋督弒其君殤公,及孔父.  十年,晉曲沃莊伯弒其君哀侯.

十八年,初,宣公愛夫人夷姜,夷姜生子伋,以為太子,而令右公子傅之.

右公子為太子取齊女,未入室,而宣公見所欲為太子婦者好,說而自取之,更為太子取他女.

宣公得齊女,生子壽、子朔,令左公子傅之.  太子伋母死,宣公正夫人與朔共讒惡太子伋.

宣公自以其奪太子妻也,心惡太子,欲廢之.
及聞其惡,大怒,乃使太子伋於齊而令盜遮界上殺之,與太子白旄,而告界盜見持白旄者殺之.
且行, 子朔之兄壽, 太子異母弟也, 知朔之惡太子而君欲殺之,

乃謂太子曰:「界盜見太子白旄, 即殺太子, 太子可毋行.」

太子曰:「逆父命求生,不可.」遂行.  壽見太子不止,乃盜其白旄而先馳至界.

界盜見其驗,即殺之.  壽已死,而太子伋又至,

謂盜曰:「所當殺乃我也.」盜并殺太子伋,以報宣公.  宣公乃以子朔為太子.

十九年,宣公卒,太子朔立,是為惠公.  左右公子不平朔之立也.

[선공 7년, 노(魯)나라 은공(隱公)이 시해되었다.

9년, 송(宋)나라 화보독(華父督)이 그의 군주인 상공(殤公)과 대부 공보가(孔父嘉)를 죽였다.
10년, 진(晉)나라 곡옥(曲沃)에 있던 장백(莊伯)이 그의 군주인 애후(哀侯)를 시해했다.
18년, 원래 선공이 총애하던 부인 이강(夷姜)이 아들 급(伋)을 낳았는데,

선공은 그를 태자에 봉하고 우공자로 하여금 그를 가르치도록 했다.

우공자가 태자에게 제(齊)나라 여자를 중매했는데 성혼되기 전에 선공이 앞으로 며느리가 될 여자의 미모가

빼어난 것을 보고는 그녀를 좋아하게 되어 자신이 차지해버리고 태자에게는 다른 여자를 맺어주었다.

선공은 제나라 여자를 맞아들여 아들 수(壽)와 삭(朔)을 얻었으며, 좌공자에게 그 두 아들의 교육을 맡겼다.

태자 급의 어머니가 죽자 선공의 정부인은 삭과 함께 태자 급을 비방했다.

선공은 태자의 아내 될 여자를 탈취한 일이 있은 후로 태자를 마음속으로 미워해 태자의 자리에서 쫓아내고 싶었다. 

그러던 차에 그가 나쁘다는 소문을 듣게 되자 크게 화를 내면서 곧 태자 급을 제나라 사신으로 파견하고는

강도를 시켜서 국경에서 그를 살해하게 했다.
그리고 태자에게는 사신으로 갈 때 들고 가도록 백모(白旄)를 주었다.

그리고는 강도에게 백모를 들고 가는 자를 보거든 그를 죽여 버리라고 일러주었다.
태자 급이 막 길을 떠나려고 할 즈음에 삭의 형이자 태자의 배다른 동생인 수는 삭이 태자를 미워하고

임금인 선공이 태자를 죽이려고 음모를 꾸미고 있는 것을 알고는 태자에게 “ 국경 지역에서 강도가 나타나서

태자가 들고 가는 백모를 보면 죽이려고 달려들 테니 태자께서는 길을 떠나지 마십시오!”라고 당부했다.
그러자 태자는 “부친의 명령을 받들지 아니하고서 생존을 구한다는 것은 옳은 일이 못 된다”라고 말하고는

곧 길을 떠났다. 수는 태자가 중지하지 않는 것을 보고는 그의 백모를 몰래 빼앗아가지고 먼저 출발했다.

국경 지역에 숨어 있던 강도가 과연 어떤 사람이 백모를 들고 오는 것을 보자 그를 죽였다.

그리하여 수가 죽고 나서 태자 급이 그곳에 당도해 그 강도에게 말하기를 :

“네가 죽여야 할 사람은 그가 아니라 바로 나이다!”라고 당당하게 말하자,

강도가 태자 급도 죽이고는 곧장 선공에게 달려가 보고했다.

선공은 곧 삭을 태자에 봉했다. 19년에 선공이 죽고 태자 삭이 즉위했으니, 그가 바로 혜공(惠公)이다.
좌우 두 공자는 삭이 즉위한 것에 대해 불평을 느꼈다.]

 

惠公四年,左右公子怨惠公之讒殺前太子伋而代立,乃作亂,攻惠公,

立太子伋之弟黔牟為君,惠公奔齊.

衛君黔牟立八年, 齊襄公率諸侯奉王命共伐衛, 納衛惠公, 誅左右公子.  衛君黔牟奔于周, 惠公復立.

惠公立三年出亡,亡八年復入,與前通年凡十三年矣.

二十五年,惠公怨周之容舍黔牟,與燕伐周.  周惠王奔溫,衛、燕立惠王弟穨為王.

二十九年,鄭復納惠王.

三十一年,惠公卒,子懿公赤立.  懿公即位,好鶴,淫樂奢侈.

[혜공 4년, 좌우 두 공자가 혜공이 전 태자 급을 참살한 것에 대해 원한을 품고는 난을 일으켜

혜공을 공격하고는 태자 급의 아우인 검모(黔牟)를 군주로 옹립하자, 혜공은 제(齊)나라로 달아났다.
위군(衛君) 검모가 즉위한 지 8년째 되던 해에 제 양공(齊襄公)이 제후들을 거느리고 주왕(周王)의 명을 받들어

공동으로 위나라를 공격해 혜공을 자기 나라로 돌려보내고 좌우 두 공자를 죽였다.

위군 검모는 주나라로 달아났고, 혜공이 복위되었다. 혜공은 처음 즉위한 지 3년 만에 다른 나라로 도망했고,
그곳에서 8년의 세월을 보내다가 다시 귀국했으니 전후 재위 기간을 통산하면 모두 13년인 셈이다.
25년, 혜공은 주나라 왕실이 검모의 망명을 받아들인 것에 대해서 원한을 품고는 연나라와 함께 주나라를 공격했다.
주나라의 혜왕(惠王)은 온(溫)나라로 도망쳤다. 위, 연 두 연합군은 혜왕의 아우 퇴(頹)를 왕으로 옹립했다.

29년, 정나라는 혜왕(惠王)을 주나라의 수도로 돌려보냈다.
31년, 혜공이 죽고 아들 의공(懿公) 적(赤)이 즉위했다.
의공은 즉위한 이후로 학을 기르는 것을 좋아했으며, 음탕하게 향락을 즐기고 사치가 심했다.]

九年, 翟伐衛, 衛懿公欲發兵, 兵或畔.  大臣言曰:「君好鶴,鶴可令擊翟.」翟於是遂入, 殺懿公.

懿公之立也,百姓大臣皆不服.  自懿公父惠公朔之讒殺太子伋代立至於懿公,常欲敗之,

卒滅惠公之後而更立黔牟之弟昭伯頑之子申為君,是為戴公.  戴公申元年卒.

齊桓公以衛數亂,乃率諸侯伐翟,為衛筑楚丘,立戴公弟燬為衛君,是為文公.

文公以亂故奔齊,齊人入之.

初,翟殺懿公也,衛人憐之,思復立宣公前死太子伋之後,伋子又死,而代伋死者子壽又無子.
太子伋同母弟二人:其一曰黔牟,黔牟嘗代惠公為君,八年復去;其二曰昭伯.

昭伯、黔牟皆已前死,故立昭伯子申為戴公.  戴公卒,復立其弟燬為文公.

[의공 9년, 적(翟) 사람들이 위나라를 침입하자 의공은 군대를 일으켜 막으려고 했으나,

군사들 가운데 일부가 반기를 들기도 했다. 대신들이 말하기를 : “군주께서는 학을 즐겨 기르시니,

학으로 하여금 적족의 사람들과 대항해서 싸우라고 하면 될 것입니다.”라고 빈정거렸다.

그렇게 논란만 벌이고 있을 때 적족 군사들이 위나라 수도에까지 진격해 들어와서 의공을 죽였다.

의공이 즉위한 것에 대해 백성들은 물론 대신들까지 불복했다.

의공이 부친인 혜공 희삭(姬朔)이 태자 희급(姬伋)을 참살하고 즉위한 이래로 의공에 이르기까지 기회만 있으면

그들을 엎어버리려고 벼르고 있다가 마침내 혜공의 후대를 멸하고 검모의 아우 소백(昭伯)의 아들 희신(姬申)을

나라의 군주로 옹립했으니, 그가 바로 대공(戴公)이다. 대공 신은 즉위한 원년에 죽었다.

제환공(齊桓公)은 위나라가 수차에 걸쳐 난을 당하는 것을 보고는 제후들을 이끌고 주동자인 적족을 정벌하고
위나라를 위해서 초구(楚丘)에다 성을 쌓아주었다.

그리고 대공의 아우인 훼(燬)를 위군(衛君)으로 옹립했으니, 그가 바로 문공(文公)이다. 

문공은 국내에 난이 일어나서 제나라로 도망쳤으나 제나라는 그를 본국으로 돌려보냈다.

이전에 적족 사람들이 의공을 죽였을 때 위나라 사람들은 그들을 미워하지 않았다.

그리고 예전에 선공이 죽인 태자 급(伋)의 후손을 옹립하고 싶었으나 태자 급의 아들은 이미 죽고 없었으며

태자 급을 대신해서 죽은 수(壽) 또한 아들이 없었다. 태자 급의 같은 어머니 형제는 둘이 있었는데,
그중에 한 사람이 검모(黔牟)인데, 그는 일찍이 제나라로 달아난 혜공을 대신해서 8년간 재위하다가 물러났다.

둘째 동생은 소백(昭伯)이다. 소백과 검모는 이미 죽고 없었으므로 소백의 아들 신(申)을 옹립했으니,

그가 대공(戴公)이다. 대공이 죽고 그의 아우 훼(燬)를 옹립했으니, 그가 문공(文公)이다.]

 

文公初立,輕賦平罪,身自勞,與百姓同苦,以收衛民.

十六年,晉公子重耳過,無禮.

十七年,齊桓公卒.

二十五年,文公卒,子成公鄭立.

[문공은 즉위하자마자 곧 조세를 경감시켜 주었고, 형벌에 불공평한 일이 없게 했으며,

솔선해 근면함을 보여줄 뿐만 아니라 백성과 더불어 고통을 함께 함으로써 위나라 백성들이 그를 잘 따르게 되었다.

16년, 진(晉)나라의 공자인 중이(重耳)가 국외로 도망치는 길에 위나라에 들린 적이 있는데,

위나라는 예를 다해 그를 대해 주지 않았다.
17년, 제환공이 죽었다.

25년, 문공이 죽고 아들 성공(成公) 정(鄭)이 즉위했다. 

成公三年, 晉欲假道於衛救宋, 成公不許. 晉更從南河度, 救宋. 徵師於衛, 衛大夫欲許, 成公不肯.

大夫元咺攻成公,成公出奔.  晉文公重耳伐衛, 分其地予宋,討前過無禮及不救宋患也.

衛成公遂出奔陳.  二歲, 如周求入, 與晉文公會. 晉使人鴆衛成公, 成公私於周主鴆, 令薄, 得不死.

已而周為請晉文公,卒入之衛,而誅元咺,衛君瑕出奔.

七年,晉文公卒.
十二年,成公朝晉襄公.

十四年,秦穆公卒.

二十六年,齊邴歜弒其君懿公.

三十五年,成公卒,子穆公遫立.

[성공 3년, 진(晉)나라가 송(宋)나라에 구원병을 보내기 위해서 위나라에게 길을 빌려주기를 요청했으나

성공은 이를 허락하지 않았다. 진나라는 당초의 계획을 바꾸어 남쪽으로 강을 건너서 송나라로 구원병을 

보내주었다. 군대를 징집해 줄 것을 요청해 오자 위나라 대부들은 응해 주려고 했으나, 성공이 허락하지 않았다.

대부 원훤(元咺)이 성공을 공격하자 성공은 국외로 달아났다.

진나라 문공 중이는 위나라를 침략해 그 땅 일부를 송나라에 나누어줌으로써,

이전에 자신에게 무례하게 대한 것과 송나라에게 구원병을 보낼 때 길을 비켜주지 않은 원한을 앙갚음했다. 

위나라 성공은 진(陳)나라로 달아난 지 2년 후에 주나라 왕실로 가서 자신의 귀국을 도와줄 것을 요청했고,

그곳에서 진(晉)나라 문공과 만나게 되었다. 진나라는 사람을 시켜서 위성공을 독살(毒殺)시키려고 했다.

성공은 주 왕실에 암암리에 뇌물을 주어놓았던 관계로 술에 독을 넣기로 계획되어 있는 사람이 독을 조금만 

넣었기에 가까스로 죽음만은 면할 수 있었다. 얼마 후에 주나라 천자가 성공을 위해서 진문공에게 간청해 마침내

성공의 귀국이 성사되었다. 그는 자기 나라로 돌아가자 곧 원훤을 주살시켰고, 위군 희하(姬瑕)는 국외로 달아났다.

7년, 진문공이 죽었다.

12년, 성공은 진(晉)나라 양공(襄公)을 알현했다.
14년, 진(秦)나라 목공(穆公)이 죽었다.

26년, 제나라 대부 병촉(邴歜)이 그의 군주 의공(懿公)을 시해했다.
35년, 성공이 죽고 아들 목공(穆公) 희속(姬遫)이 즉위했다.]

 

穆公二年,楚莊王伐陳,殺夏徵舒.

三年,楚莊王圍鄭,鄭降,復釋之.

十一年,孫良夫救魯伐齊,復得侵地.  穆公卒,子定公臧立.  定公十二年卒,子獻公衎立.

獻公十三年,公令師曹教宮妾鼓琴,妾不善,曹笞之.  妾以幸惡曹於公,公亦笞曹三百.
十八年,獻公戒孫文子、甯惠子食,皆往.  日旰不召,而去射鴻於囿.

二子從之,公不釋射服與之言.  二子怒,如宿.  孫文子子數侍公飲,使師曹歌巧言之卒章.

師曹又怒公之嘗笞三百,乃歌之,欲以怒孫文子,報衛獻公.

文子語蘧伯玉,伯玉曰:「臣不知也.」遂攻出獻公.
獻公奔齊,齊置衛獻公於聚邑.  孫文子、甯惠子共立定公弟秋為衛君,是為殤公.

[목공 2년, 초(楚)나라 장왕(莊王)이 진(陳)나라를 침략해 하징서(夏徵舒)를 죽였다.

3년, 초장왕이 정나라를 포위해 정나라가 항복하자 군사를 풀었다.
11년, 위나라의 대부 손양부(孫良夫)가 노나라를 구원하기 위해 제나라를 침략해 과거에 빼앗겼던 땅을 되찾았다.

목공이 죽고 아들 정공(定公) 희장(姬藏)이 즉위했다.

정공은 재위 12년 만에 죽고 아들 헌공(獻公) 희간(姬衎)이 즉위했다.
13년, 헌공이 악사 조(曹)로 하여금 궁첩에게 거문고를 가르치게 했는데, 그녀가 잘못하자 악사가 곤장을 때렸다.
궁첩은 헌공에게 가서 그 일을 일러바치고는 악사를 험담했다. 헌공이 악사 조를 불러다 곤장 3백대를 때리게 했다.
18년, 헌공이 손문자와 영혜자 두 대부에게 아침 식사 전에 궁으로 들어와서 대기하라는 명령을 내려놓고는

자신은 시간이 늦도록 오지 않고 아무 말도 없이 왕실 동산에 가서 기러기 사냥을 즐기고 있었다.

두 대부는 하는 수 없이 그곳으로 찾아갔으나 공은 사냥 옷을 그대로 입은 채 그들을 맞이했다.
두 대부는 화가 나서 숙(宿)으로 가버렸다. 손문자의 아들은 여러 차례 헌공의 술자리를 시봉한 적이 있다.
그럴 때 헌공이 악사 조로 하여금「교언(巧言)」의 끝 장(章)을 연창(演唱)하게 했다.

악사 조는 이전에 헌공이 자신을 곤장 3백대나 때린 일을 상기하니 화가 머리끝까지 치밀었다.

그 억울함을 억누르며 그 곡을 연주하되 마음속으로는 손문자를 격분시켜서 헌공에게 보복하게 하고 싶었다.
손문자는 그 일을 대부 거백옥(蘧伯玉)에게 말했더니, 그는 “신은 모르겠소.”라고 말했다.

손문자는 그 길로 곧 헌공에게 쳐들어갔다. 헌공은 제나라로 달아났다.

제나라에서는 위나라 헌공을 취(聚)에 머물게 했다.

손문자는 영혜자와 함께 정공(定公)의 아우인 희추(姬秋)를 위나라 군주로 옹립했으니, 그가 바로 상공(殤公)이다.]

 

殤公秋立,封孫文子林父於宿.
十二年,甯喜與孫林父爭寵相惡,殤公使甯喜攻孫林父.  林父奔晉,復求入故衛獻公.
獻公在齊,齊景公聞之,與衛獻公如晉求入.  晉為伐衛,誘與盟.

衛殤公會晉平公,平公執殤公與甯喜而復入衛獻公.  獻公亡在外十二年而入.

[상공 희추가 즉위해 손문자 임보(林父)를 숙읍(宿邑)의 영주로 봉했다.
12년, 대부인 영희와 손임보 두 사람이 서로 군주의 총애를 독차지하려고 다투어 서로 원한을 품게 되자,

상공은 영희를 시켜서 손임보를 치게 했다. 손임보는 진(晉)나라로 달아나서는 위나라의 원래 군주인 

헌공이 귀국해 복위될 수 있도록 도와달라는 내용을 진나라에 간청했다. 이때 헌공은 제나라에 있었다.

제경공(齊景公)은 그 소식을 듣고는 위헌공을 대동하고 진나라로 가서 지지를 호소했다.

진나라는 위헌공을 위해 위나라로 진군해 위나라를 유인해 동맹을 맺었다.
위상공은 진나라로 가서 평공(平公)을 배알하려 했으나,

진평공은 상공과 영희를 체포하고는 위헌공을 귀국시켜 군주의 자리에 복위시켰다.

이로써 헌공은 12년간이나 국외에서 도피 생활을 하다가 비로소 귀국한 셈이 되었다.]

 

獻公後元年,誅甯喜.

三年,吳延陵季子使過衛,見蘧伯玉、史,曰:「衛多君子,其國無故.」過宿,孫林父為擊磬,

曰:「不樂,音大悲,使衛亂乃此矣.」是年,獻公卒,子襄公惡立.

[헌공은 복위 원년에 영희를 주살해버렸다.
3년, 오(吳)나라 연릉계자(延陵季子)가 사신으로 나가는 길에 위나라에 들러서 거백옥과 사추(史鰌)를 만나서
말하기를 : “위나라에는 군자들이 많이 있으니 별 문제가 있을 수 없겠소이다.”라고 하였다.
그리고 숙읍에 들리니 손임보가 그를 환영하는 뜻에서 경(磬) 음악을 연주해 주었다.

그는 곡을 듣고는 말하기를 :“어쩐지 즐거운 마음이 들지 않는군요.

음악이 구슬픈 것을 보니 위나라를 어지럽게 하는 것이 바로 이곳에서 비롯된 것 같구려!”라고 탄식했다.

그해에 헌공이 죽고 아들 양공(襄公) 희오(姬惡)가 즉위했다.]

 

襄公六年,楚靈王會諸侯,襄公稱病不往.

九年,襄公卒.  初,襄公有賤妾,幸之,有身,

夢有人謂曰:「我康叔也,令若子必有衛,名而子曰『元』.」

妾怪之,問孔成子.  成子曰:「康叔者,衛祖也.」及生子,男也,以告襄公.

襄公曰:「天所置也.」名之曰元.  襄公夫人無子,於是乃立元為嗣,是為靈公.

[양공 6년, 초(楚)영왕(靈王)이 각 나라 제후들과 회견했는데, 양공은 몸이 불편하다는 핑계로 참석하지 않았다.

9년, 양공이 죽었다. 생전에 양공에게는 천한 가문 태생인 첩이 하나 있었다.

양공은 그녀를 무척 총애해 아이를 가지게 되었는데, 하루는 꿈에 어떤 사람이 나타나서 그녀에게 말하기를 :

 나는 강숙(康叔)이라는 사람인데, 너의 아들이 반드시 위나라를 가질 수 있도록 해주마!

너의 아들 이름은 ‘원(元)’이라고 지어라!”라고 하였다.

첩은 그 꿈이 이상하다고 여기고는 그 길로 대부 공성자(孔成子)에게 찾아가 물어보았더니,

그는 말하기를 : “강숙이란 사람은 위나라의 시조되는 분이십니다”라고 하였다.

후에 첩이 아이를 낳으니 과연 사내 아이였다. 그래서 태몽의 자초지종을 양공에게 고했더니,

양공은 말하기를 : “이는 하늘이 점지해 준 일이로다! 그 아이의 이름을 ‘원’이라고 하거라!”라고 하였다.
양공의 부인에게는 아들이 없었기 때문에 원으로 하여금 대를 잇게 했으니, 그가 바로 영공(靈公)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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四十二年春,靈公游于郊,令子郢仆.  郢,靈公少子也,字子南.

靈公怨太子出奔,謂郢曰:「我將立若為後.」

郢對曰:「郢不足以辱社稷,君更圖之.」

夏,靈公卒,夫人命子郢為太子,曰:「此靈公命也.」

郢曰:「亡人太子蒯聵之子輒在也,不敢當.」於是衛乃以輒為君,是為出公.

[영공 5년에 진 소공(晉昭公)을 조현(朝見)했다.

6년에 초 나라 공자 기질(棄疾)이 영왕(靈王)을 시해하고 자신이 왕위를 차지했으니, 그가 바로 평왕(平王)이다.

11년, 큰 화재가 발생했다.
38년, 공자(孔子)가 위나라에 왔다. 위나라에서는 그에게 노(魯)나라에서와 동일한 봉록(俸祿)으로 대우해 주었다.
후에 틈이 생기자 공자는 가버렸다. 그 후에 공자는 또다시 위나라에 왔다.
39년, 태자 괴외(蒯聵)가 영공의 부인인 남자(南子)를 미워해 그녀를 살해하려고 마음먹었다.
괴외는 그를 따르는 무리들을 통솔하는 가신(家臣)인 희양속(戱陽遫)과 거사를 논의하고는 조회(朝會) 시간에

그녀를 해치우려고 계획을 세웠다. 희양속은 뒷일이 걱정이 되어서 과감히 나서지 못하고 머뭇거리고만 있었다.

괴외가 희양속에게 수차에 걸쳐 눈짓을 하는 바람에 그녀가 눈치를 채고는 두려움에 떨면서 큰 소리로

“태자가 나를 죽이려고 해요!”라고 외쳤다. 그 소리를 들은 영공이 크게 화를 내자 태자 괴외는 송나라로 달아났다.
얼마 후 그는 다시 진(晉)나라로 가서 조씨(趙氏)에게 몸을 기탁했다.
42년 봄, 영공이 교외로 유람을 떠나는 길에 자신이 탄 수레를 자영(子郢)에게 맡겨서 몰게 했다.

자영은 영공의 작은아들로서 자(字)는 자남(子南)이다.
영공은 태자가 국외로 도망친 것을 원망하면서 자영에게 “나는 장차 너를 후계자로 삼으려 하는도다!”라고 말하자,
자영은 “저는 자질이 부족해 사직에 욕을 끼치게 될 터이오니 임금께서 달리 도모해 주옵소서!”라고 사양했다.
그해 여름에 영공이 세상을 떠나자 영공의 부인은 자영을 태자로 책봉하면서 “이는 선왕의 명령이다”라고 말하자,
자영은 “국외로 도망간 태자 괴외의 아들 희첩(姬輒)이 여기 있사옵니다. 저는 감히 태자 자리에 오를 수 

없사옵니다.”라고 극구 사양했다. 그래서 하는 수 없이 희첩이 군주가 되었으니, 그가 출공(出公)이다.]

六月乙酉,趙簡子欲入蒯聵,乃令陽虎詐命衛十餘人衰绖歸,簡子送蒯聵.

衛人聞之,發兵擊蒯聵.  蒯聵不得入,入宿而保,衛人亦罷兵.

出公輒四年,齊田乞弒其君孺子.

八年,齊鮑子弒其君悼公.  孔子自陳入衛.

九年,孔文子問兵於仲尼,仲尼不對.  其後魯迎仲尼,仲尼反魯.

[출공 6월 을유일, 진(晉)나라의 대부 조간자(趙簡子)가 괴외를 자신의 나라로 귀국시켜려고

양호(陽虎)로 하여금 10여 명에게 상복을 입혀 보내 위나라로부터 태자의 귀국을 영접하러 온 것처럼 가장하게 하고

자신은 태자 괴외를 배웅했다. 위나라 사람들은 그 소문을 듣고는 군대를 보내어 태자 괴외의 귀국을 막았다.

괴외는 하는 수 없이 숙읍(宿邑)에 자리를 잡고는 그곳에 기거하자, 위나라에서도 회군시켰다.
출공 희첩 4년, 제나라 전기(田乞)가 군주의 어린 아들을 시해했다.

8년, 제나라 포자(鮑子)가 그의 군주 도공(悼公)을 시해했다. 공자(孔子)가 진(陳)나라로부터 위나라로 왔다.

9년, 공문자(孔文子)가 공자에게 병법에 관해서 가르침을 구하자 공자는 대답해 주지 않았다.
그 후 에 노후(魯侯)가 사람을 보내어 공자를 영접하자 공자는 노나라로 돌아갔다.]

 

十二年,初,孔圉文子取太子蒯聵之姊,生悝.  孔氏之豎渾良夫美好,孔文子卒,良夫通於悝母.

太子在宿, 悝母使良夫於太子. 太子與良夫言曰:「茍能入我國, 報子以乘軒, 免子三死, 毋所與.」

與之盟,許以悝母為妻.  閏月,良夫與太子入,舍孔氏之外圃.

昏,二人蒙衣而乘,宦者羅御,如孔氏.  孔氏之老欒甯問之,稱姻妾以告.

遂入,適伯姬氏.  既食,悝母杖戈而先,太子與五人介,輿猳從之.
伯姬劫悝於廁, 彊盟之, 遂劫以登臺。欒甯將飲酒, 炙未熟, 聞亂,使告仲由.

召護駕乘車, 行爵食炙,奉出公輒奔魯.

仲由將入,遇子羔將出,曰:「門已閉矣.」 子路曰:「吾姑至矣.」

子羔曰:「不及,莫踐其難.」 子路曰:「食焉不辟其難.」子羔遂出.

子路入,及門,公孫敢闔門,曰:「毋入為也!」

子路曰:「是公孫也?求利而逃其難. 由不然,利其祿,必救其患.」有使者出,子路乃得入.
曰:「太子焉用孔悝?雖殺之,必或繼之.」 且曰:「太子無勇。若燔臺,必舍孔叔.」

太子聞之,懼,下石乞、盂黶敵子路,以戈擊之,割纓.
子路曰:「君子死,冠不免.」結纓而死.

孔子聞衛亂,曰:「嗟乎!柴也其來乎?由也其死矣.」孔悝竟立太子蒯聵,是為莊公.

[출공 희첩 12년, 일찍이 공문자는 태자 괴외의 누이를 아내로 맞이해 공회(孔悝)를 낳았다.

공씨 집에는 혼양부(渾良夫)라는 이름의 젊고 잘생긴 노비가 있었는데, 공문자가 죽은 후에 그가 공회의 어머니,

즉 안방마님과 정을 통했다. 공회의 어머니는 혼양부를 태자 괴외가 있는 곳으로 보냈다.
태자가 그를 맞이해 “만약 내가 귀국해 복위할 수 있도록 도와만 준다면 그대에게 크게 보답해 주겠노라!

대부가 되어 높은 수레를 탈 수 있도록 해줄 뿐만 아니라 그대가 범한 세 가지 죽을죄를 완전히 사면해 주겠다.”

라고 굳게 약속했다. 그밖에 또 공회의 어머니를 아내로 삼을 수 있도록 해주겠다고 약속했다.
윤달에 혼양부와 태자 괴외는 함께 위나라 도성으로 잠입해 공씨 집의 외원(外園)에 숨어 있다가

날이 막 어두워진 틈을 이용해 부녀 복장으로 바꾸어 입고 머리에는 수건을 두르고 수레에 올라서

내시인 나(羅)로 하여금 수레를 몰게 해 공씨 집으로 달려갔다. 공씨 집의 가신인 난녕(欒寧)이 누구냐고 묻자,

친척 집 소첩이라고 대답하고 곧바로 집안의 공회의 어머니 백희(伯姬)의 처소로 들어가서 짐을 풀었다.
그곳에서 밥을 먹은 후에 공회의 어머니가 창을 들고 앞장서고 그 뒤에 태자와 갑옷 차림을 한 다섯 명이

수퇘지 한 마리를 둘러메고 뒤를 따랐다. 백희가 공회를 협박해 뒷간으로 데려가서 강제로 굳게 약속을 

하게 하고는 높다란 누대(樓臺)로 올라가 그를 시켜서 위나라의 여러 신하들을 소집하게 했다.

난녕이 술을 마시려고 고기를 굽다가 고기가 채 익지도 않았는데 반란이 일어났다는 소식을 접하고는

사람을 보내어 중유(仲由)에게 알렸다. 대부 소호(召護)는 병거(兵車)가 아닌 일반 수레를 타고

술잔을 기울이고 안주로 불고기를 먹으면서 출공 희첩을 호송해 노나라로 달아났다.

중유, 즉 자로(子路)가 공씨 집에 막 들어가려는 참에 문을 막 나오는 자고(子羔)와 마주쳤다.

그는 자로에게 말하기를 : “문이 이미 닫혀버렸소이다.”라고 하자,
자로는 말하기를 : “잠시 기다리게! 내가 문 앞에 가 볼 테니.”라고 하였다.

자고가 또 말하기를 : “이미 다 끝장났소! 괜히 불똥이나 당하지 마시오!”라고 하자.
이에 자로가 대답하기를 : “이 집의 밥을 먹고 있는 이상 이 재난을 그냥 보고만 있을 수는 없잖소!”라고 하였다.

자고는 아무 대꾸도 없이 곧장 나가버렸다. 자로가 가서 문 앞에 당도하자 공손감(公孫敢)이 문을 닫으면서

소리 지르기를 : “들어오지 말라 ! 들어와서 뭘 하려고 그래!”라고 하였다.
자로는 말하기를 : “공손 자네! 봉록(俸祿)은 탐하면서 재난은 모른 체하다니! 나는 그렇지 않아!

그의 봉록을 먹는 이상 반드시 그를 재난으로부터 구해내고야 말겠어!”라고 하면서,

한 심부름꾼이 나가는 틈을 이용해서야 겨우 안으로 들어갈 수 있었다.
그는 태자가 공회를 사로잡고 있는 누대 아래로 가서 “태자께서 공회를 사로 잡으신들 무슨 소용이 있습니까 ?
설령 그를 죽인다고 하더라도 반드시 누군가가 계속해서 그 뒤를 이어 태자를 공격할 것입니다!”라고 외쳤다.

래도 태자는 듣지 않았다. 그러나 자로는 여러 사람들에게 외치기를 :.

“태자는 용기가 없는 사람이니 만약 누대를 불살라버리면 반드시 공회를 석방할 것이오!”라고 하자,

태자가 자로의 이 말을 듣고는 겁에 질려 석기(石乞)와 우염(盂黶) 두 신하를 보내어 자로를 대적하게 했다.

그들이 창으로 자로를 쳐서 갓끈을 싹둑 잘라버렸다.
자로는 “군자는 죽음을 그대로 당할지언정 갓을 벗지는 않는 법이다!”라고 외치고는 갓끈을 여미며 죽었다.
공자(孔子)가 위나라에 난리가 났다는 소식을 듣고 탄식하기를 :

“아 ! 자고는 돌아올 것이겠지만 자로는 죽고 말겠구나!”라고 하였다.

결국에는 하는 수 없이 공회가 태자 괴외를 옹립했으니, 그가 바로 장공(莊公)이다.

 

莊公蒯聵者,出公父也,居外,怨大夫莫迎立.

元年即位,欲盡誅大臣,曰:「寡人居外久矣,子亦嘗聞之乎?」群臣欲作亂,乃止.

二年,魯孔丘卒. 

三年,莊公上城,見戎州.  曰:「戎虜何為是?」戎州病之.

十月,戎州告趙簡子,簡子圍衛.
十一月,莊公出奔,衛人立公子斑師為衛君.  齊伐衛,虜斑師,更立公子起為衛君.

[장공 괴외는 출공(出公)의 부친인데, 국외에 머물 때 대부들이 자신을 영접하러 오지 않은 것을 원망했다.
그래서 즉위 원년에 대신들을 주살하려 하면서 “과인이 나라 바깥에다 몸을 기탁한 세월이 한두 해가 아니로다.
그대들 역시 그것을 익히 잘 알고 있었을 텐데? 고얀 놈들 같으니라고 ! ”라고 화를 냈다.

그러나 여러 신하들이 난을 일으키려 하자, 그만두었다.
2년에 노나라 공구(孔丘)가 세상을 떠났다.
3년에 장공이 성벽에 올라가서 융주(戎州)를 바라보면서 “융로들이 어떻게 우리와 가까이 있을까?”라고 말했다.

융주에서 그 소식을 듣자 근심에 싸였다. 그해 10월에 융주 사람들이 조간자(趙簡子)에게 고했더니,

간자가 군대를 보내 위나라를 포위했다.
11월에 장공이 다른 나라로 달아나자, 위나라 사람들은 공자 반사(斑師)를 군주로 옹립했다.
다시 제나라가 위나라를 정벌해 반사를 포로로 잡아가고 대신에 공자 희기(姬起)를 위군(衛君)으로 옹립했다.]

 

衛君起元年,衛石曼尃逐其君起,起奔齊.  衛出公輒自齊復歸立.

初,出公立十二年亡,亡在外四年復入.

出公後元年,賞從亡者.  立二十一年卒,出公季父黔攻出公子而自立,是為悼公.

悼公五年卒,子敬公弗立.  敬公十九年卒,子昭公糾立.  是時三晉彊,衛如小侯,屬之.

昭公六年, 公子亹弒之代立, 是為懷公.

懷公十一年, 公子穨弒懷公而代立, 是為慎公.  慎公父, 公子適;適父, 敬公也.

慎公四十二年卒,子聲公訓立.  聲公十一年卒,子成侯遫立.

[위군 희기 원년, 위나라 석만부(石曼尃)가 위군 희기를 축출하려고 공격하자 희기는 제나라로 달아났다.

위나라 출공 희첩이 제나라로부터 돌아와 복위했다.
출공은 먼저 12년간 재위했다가 국외로 도망해 4년을 보낸 후에 돌아와 다시 즉위한 것이었다.

출공 후원(後元) 원년, 그를 따라 같이 도망한 사람들에게 큰 상을 내렸다.  출공이 21년간 재위하다가 죽자,

그의 숙부 검(黔)이 출공의 아들을 몰아내고 자신이 군주의 자리에 올랐으니, 그가 바로 도공(悼公)이다.
도공은 재위 5년 만에 죽고 아들 경공(敬公) 희불(姬弗)이 즉위했다.

경공은 재위 19년 만에 죽고 아들 소공(昭公) 희규(姬糾)가 즉위했다.
이때 삼진(三晉)의 세력이 점차 강성해졌고, 위군은 하나의 작은 후작(侯爵)의 신세로 전락해 진(晉)나라에서

분리되어 나온 조(趙)나라의 속국이 되었다.
소공 6년, 공자 미(亹)가 소공을 시해하고는 그 대신에 군주의 자리에 올랐으니, 그가 바로 회공(懷公)이다.

회공 11년에 공자 퇴(頹)가 회공을 시해하고 즉위했으니,
그가 바로 신공(愼公)이다. 신공의 부친은 공자 적(適)이고, 공자 적의 부친이 경공(敬公)이다.
신공은 재위 42년 만에 죽고 아들 성공(聲公) 희훈(姬訓)이 즉위했다.

성공은 재위 11년 만에 죽고 아들 성후(成侯) 희속(姬遫)이 즉위했다.]

 

成侯十一年,公孫鞅入秦.

十六年,衛更貶號曰侯. 

二十九年,成侯卒,子平侯立.  平侯八年卒,子嗣君立.

嗣君五年,更貶號曰君,獨有濮陽.  四十二年卒,子懷君立.

懷君三十一年,朝魏,魏囚殺懷君.  魏更立嗣君弟,是為元君.  元君為魏婿,故魏立之.
元君十四年,秦拔魏東地,秦初置東郡,更徙衛野王縣,而并濮陽為東郡.

二十五年,元君卒,子君角立.
君角九年,秦并天下,立為始皇帝.

二十一年,二世廢君角為庶人,衛絕祀.

[성후 11년, 공손앙(公孫鞅)이 진(秦)나라로 들어갔다.

16년, 위나라 군주가 후작(侯爵)으로 격하되었다.
29년, 성후가 죽고 아들 평후(平侯)가 즉위했다. 평후는 8년 만에 죽고 아들 사군(嗣君)이 즉위했다.
사군 5년, 군주의 지위가 격하되어 군(君)이라고 칭했으며, 국토라고는 오로지 복양(濮陽)밖에 없었다.
사군은 재위 42년 만에 죽고 아들 회군(懷君)이 즉위했다.

회군 31년, 위(魏)나라로 조배(朝拜)하러 갔는데, 위(魏)나라에서는 그를 죄인으로 구금해 두었다가 죽여 버렸다.

위(魏)나라는 사군의 아우를 즉위시켰으니, 그가 원군(元君)이다.

원군은 위(魏)나라의 사위였기 때문에 그를 즉위시켰던 것이다.
원군 14년에 진(秦)나라가 위(魏)나라를 침공해 그 동부 지역을 점유하고는 그곳에다 동군(東郡)을 설치했다.
그리고 위군(衛君)을 다시 야왕현(野王縣)으로 옮기게 하고는 복양을 동군에 편입시켰다.

25년, 원군이 죽고 아들 희각(姬角)이 즉위했다.
위군(衛君) 희각 9년, 진(秦)나라가 천하를 통일해 시황제(始皇帝)가 즉위했다.
21년에 진(秦)나라 2세(二世)가 위군 희각을 평민으로 폐출(廢黜)시켰다.

이로써 위(衛)나라의 제사가 끊어지게 되었던 것이다.]

 

太史公曰:

余讀世家言,至於宣公之太子以婦見誅,弟壽爭死以相讓,此與晉太子申生不敢明驪姬之過同,

俱惡傷父之志。然卒死亡,何其悲也!或父子相殺,兄弟相滅,亦獨何哉?

[태사공은 말한다.
“내가 세가의 기록을 읽어보다가 위(衛)나라 선공(宣公)의 태자가 마누라감 때문에 피살되게 되었고,
그때에 그의 동생 수(壽)가 형 대신에 죽음을 앞다투어 서로 추양(推讓)하는 대목에 이르렀다.
이 일은 진(晉)나라 태자 신생(申生)이 계모인 여희(驪姬)의 과실을 일러바치지 않은 것과 다를 바 없는 것으로서
이 두 가지 일은 모두가 부왕(父王)을 불의에 빠지게 해 그 명예를 해치는 것을 두려워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끝내 죽음에 이르렀으니 이 어찌 슬프지 아니한가! 때로는 부자가 서로 살해하고,

때로는 형제가 서로 죽이기도 하니, 어찌 이런 일이 있을 수 있다는 말인가!”

 

 

 

※  原 文 .    【 中國哲學書電子化計劃 .   筆寫本 】

 

                           

 

     原 文   飜 譯 者        德庤 / 李   斗 振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