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7.酈生 陸賈列傳

第 三十七. 酈生陸賈列傳(역생 육가열전)

덕치/이두진 2023. 11. 25. 20:19

 

第 三十七.   酈生陸賈列傳(역생 육가열전)

 

 

酈生食其者,陳留高陽人也.  好讀書,家貧落魄,無以為衣食業,為里監門吏.  

然縣中賢豪不敢役,縣中皆謂之狂生.

[역생(酈生) 이기(食其)라는 사람은 진류(陳留) 고양인(高陽人)1)이다.

독서를 좋아했으나 가난한 집안 사정으로 뜻한 바를 이루지 못하고  의식을 해결할만한

생업이 없어 마을의 성문을 관리하는 직급이 낮은 관리가 되었다. 

그러나 현내의 행세하는 사람이나 호족들도 역생을 쓰지 않았으므로 현내 사람들은

그를 미치광이 선생이라고 불렀다.]

 

及陳勝、項梁等起,諸將徇地過高陽者數十人,酈生聞其將皆握齱好苛禮自用,

不能聽大度之言,酈生乃深自藏匿.  後聞沛公將兵略地陳留郊,

沛公麾下騎士適酈生裏中子也,沛公時時問邑中賢士豪俊.

[마침내 진승、항량 등이 군사를 일으켜 성을 공략하면서 고양을 지나가는데 장령들이

수십 명이나 되었다. 역생은 그 장령들이 모두 도량이 좁고 자질구레한 예절에 얽매여

스스로 자신의 의견이 옳다고 하여 도량이 큰 사람의 말을 들을 수 없는 자들이라는

사실을 전해 듣고 이에 자신의 재능을 깊이 감추고 있었다.  

후에 역생은 군사를 이끌고 진류(陳留)의 교외를 공략하고 있는 패공에 대한 소식을 들었다.  

마침 패공의 휘하에 역생과 같은 마을에 살고 있는 사람의 아들이 기사(騎士)로 있었는데  

패공은 자주 진류 일대에 현사와 준걸이 있는지를 그 기사에게 묻곤 하였다.]

 

騎士歸, 酈生見謂之曰:「吾聞沛公慢而易人, 多大略, 此真吾所願從游,

莫為我先.  若見沛公, 謂曰『臣里中有酈生, 年六十餘, 長八尺, 人皆謂之狂生,

生自謂我非狂生』.」

騎士曰:「沛公不好儒,諸客冠儒冠來者,沛公輒解其冠,溲溺其中.

與人言,常大罵.  未可以儒生說也.」

[그 기사가 마을로 돌아오자,  역생이 보고 말하기를 : “ 내가 들으니 패공은 오만한 성격에

 사람을 업신여기지만 가슴에는 웅지를 품고 있다고 했다네, 

그 분을 진실로 내가 따르려고 하나 나를 위해 먼저 소개해 주는 사람이 없네. 

자네가 돌아가 패공을 만나거든 다음과 같이 내 말을 전하게! '신의 고향마을에 역생이라는

사람이 살고 있는데 나이는 60세가 넘었고 키는 8척에 사람들은 모두 그를 미치광이라고

부르지만, 본인 스스로는 미치광이가 아니라고 합니다.’라고 말해 주게나!”라고 하였다.
기사가 대답하기를 : “ 패공은 유자들을 좋아하지 않아 유관(儒冠)을 쓴 손님이 찾아오면

재빨리 관을 벗겨 그 안에 오줌을 누곤 합니다. 그리고 다른 사람들과 말을 할 때도

항상 유자들에 대해 큰소리 욕을 합니다.  

아마도 유생으로서는 그를 설득할 수 없을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酈生曰:「弟言之.」 騎士從容言如酈生所誡者.  沛公至高陽傳舍,使人召酈生. 

酈生至,入謁,沛公方倨床使兩女子洗足,而見酈生. 

酈生入,則長揖不拜,曰:「足下欲助秦攻諸侯乎?且欲率諸侯破秦也?」

[역생이 말하기를 : “ 자네는 내가 하는 말만 전하게! ”라고 하자, 

기사는 역생이 일러준 대로 침착하게 말을 전했다.
패공은 고양(高陽)의 객사에 이르자 사람을 보내 역생을 불렀다. 역생이 방에 들어와

패공을 알현할 때 패공은 막 침상에 걸터앉은 채 두 여자에게 발을 씻기고 있었는데

그 자세 그대로 역생을 만났다.

역생이 들어와 패공을 보고 길게 읍을 했을 뿐 절은 하지 않았다.

역생이 패공을 향해 말하기를 : “ 족하께서는 진나라를 도와 제후들을 공격하려고 하십니까?

아니면 제후들을 이끌고 진나라를 공격하려고 하십니까? ”라고 하자.] 

 

沛公罵曰:「豎儒!夫天下同苦秦久矣, 故諸侯相率而攻秦, 何謂助秦攻諸侯乎?」 

酈生曰: 「必聚徒合義兵誅無道秦, 不宜倨見長者.」於是沛公輟洗, 起攝衣,

延酈生上坐, 謝之.  酈生因言六國從橫時.

[패공이 듣고 역생을 꾸짖으며 말하기를 : “ 이 천한 유자 놈아! 천하가 진나라의 폭정으로

고통 받은지 오래되었다. 그래서 제후들이 서로 앞서거니 뒤서거니 몸을 일으켜 진나라를

공격하려고 하는데, 어찌하여 진나라를 도와 제후들을 공격한다고 하느냐 ? ”라고 하였다. 
역생이 말하기를 : “ 공께서 반드시 무리를 모으고 의병을 합쳐서 무도한 진을 없애고자

하신다면 걸터 앉아서 나이든 사람을 맞이하심은  옳지 못하기 때문입니다.”라고 하자, 

패공은 즉시 발씻기를 멈추고 일어나 옷깃을 저미며 역생을 인도하여 상좌에 앉히고

사죄했다. 역생은 전국 때 육국의 합종연횡책에 대해 말했다.]

 

沛公喜,賜酈生食,問曰:「計將安出?」

酈生曰:「足下起糾合之眾,收散亂之兵,不滿萬人,欲以徑入彊秦,

此所謂探虎口者也.  夫陳留,天下之衝,四通五達之郊也,今其城又多積粟.

臣善其令,請得使之,令下足下.  即不聽,足下舉兵攻之,臣為內應.」

[패공이 기뻐하며 역생에게 식사를 대접하며 묻기를 : 

“ 그렇다면 장차 어떤 계책을 써야하겠습니까? ”라고 하자, 

역생이 말하기를 : “ 족하께서는 오합지중을 규합하고 흩어져 있던 군사들을 수습하였지만

그 수 또한 만 명을 넘지 않는데도 그런 군사들을 이끌고 강포한 진나라로 곧바로

쳐들어가는 행위는 마치 호랑이 입을 더듬는 어리석은 짓과 같습니다.

무릇 진류는 사통오달할 수 있는 천하의 요충지입니다. 그리고 오늘 날 그 성은 또한 막대한

곡식을 저장하고 있습니다. 신이 진류의 현령을 잘 알고 있으니 청컨대 저를 사자로 보내시면

족하를 위해서 항복하게 만들겠습니다. 만일 그가 제 말을 듣지 않는다면

공께서 군대를 일으켜 공격하십시오. 제가 성 안에서 대응하겠습니다.”라고 하였다.]

 

於是遣酈生行,沛公引兵隨之,遂下陳留.  號酈食其為廣野君.
酈生言其弟酈商,使將數千人從沛公西南略地.  酈生常為說客,馳使諸侯.

[그래서 역생을 진류로 보낸 패공은 군사를 이끌고 그 뒤를 따라고 얼마 후에 진류를

함락시켰다.  패공은 역이기에게 광야군(廣野君)이라는 봉호를 내렸다.  

역이기에게는 역상(酈商)이라는 동생이 있었는데 그는 수천 명의 무리를 이끌고

패공을 따라 서남쪽 땅을 공략하기 위한 원정에 나섰다.
역생은 항상 유세객이 되어 제후들의 나라를 사신으로 뛰어다녔다.

 

漢三年秋,項羽擊漢,拔滎陽,漢兵遁保鞏、洛. 

楚人聞淮陰侯破趙,彭越數反梁地,則分兵救之.

淮陰方東擊齊,漢王數困滎陽、成皋,計欲捐成皋以東,屯鞏、洛以拒楚.

[한 3년(기원전 204년), 항우가 한군을 격파하고 형양을 함락시키자 한군은 공(鞏),

낙양 일대로 퇴각해 주둔했다.

회음후 한신은 조나라를 점령하고 팽월은 여러 차례 양나라 땅에서 반격을 가하자

초나라는 병력을 절반으로 나누어 구원하려고 했다. 회음후가 제나라를 공격하기 위해

동쪽으로 진격하자. 한왕은 여러 번 형양과 성고에서 곤란한 처지에 놓이게 되어

성고 이동의 땅을 버리고 공(鞏)과 낙양을 방어선으로 초군을 막으려는 계책을 세웠다.]

 

酈生因曰:「臣聞知天之天者,王事可成;不知天之天者,王事不可成. 

王者以民人為天, 而民人以食為天.  

夫敖倉, 天下轉輸久矣, 臣聞其下乃有藏粟甚多.

楚人拔滎陽,不堅守敖倉,乃引而東, 令適卒分守成皋, 此乃天所以資漢也.

方今楚易取而漢反卻, 自奪其便, 臣竊以為過矣. 且兩雄不俱立, 楚漢久相持不決,

百姓騷動, 海內搖蕩, 農夫釋耒, 工女下機, 天下之心未有所定也.

[그러자 역생이 한왕에게 말하기를 : “ 신은 듣기에 하늘이 하늘이 된 까닭을 아는 사람은

왕업을 이룰 수 있고, 하늘이 하늘이 된 까닭을 알지 못하는 사람은 왕업을 이룰 수가 없으며,

왕은 백성을 하늘로 알고, 백성은 먹을 것을 하늘로 여긴다 라고 했습니다. 

오창2)이란 곳에 천하에서 양식을 운송해 온지가 오래되었고, 

신은 오창에 쌓인 양식이 매우 많다고 들었습니다.  

초나라는 형양을 함락시킨 뒤에 오창을 그렇게 견고하게 수비하지 않고,

오히려 군대를 이끌고 동진하고 죄를 지어 변방으로 쫓겨나 병사가 된 자들에게 성고를

나누어 지키게 하고 있으니 이것은 하늘이 한을 돕는 것입니다.

지금이 바로 초나라의 군대를 공격해 쉽게 취할 수 있는 때인데, 한나라는 오히려 퇴각하여

스스로 좋은 기회를 놓치는 것입니다. 신이 가만히 생각하건데 그것은 잘못 된 일입니다. 

또한 두 영웅은 함께 설 수 없으나

초와 한이 오랫동안 대치하기만 하고 승패가 결정되지 않는다면, 백성들은 동요되고 

해내는 불안하여 농부는 쟁기를 버리고 베 짜는 여인은 베틀에서 내려오게 되니

천하의 민심은 아직 안정되지 않고 있습니다.

 

願足下急復進兵, 收取滎陽, 據敖倉之粟, 塞成皋之險, 杜大行之道, 距蜚狐之口,

守白馬之津, 以示諸侯效實形制之勢, 則天下知所歸矣. 

方今燕、趙已定, 唯齊未下. 

今田廣據千里之齊,田閒將二十萬之眾,軍於歷城,諸田宗彊,負海阻河濟,

南近楚,人多變詐,足下雖遣數十萬師,未可以歲月破也.  

臣請得奉明詔說齊王,使為漢而稱東藩.」 上曰:「善.」

[원컨대 족하께서는 급히 군사를 진격시켜 형양을 취하신 후에 오창의 곡식을 차지하십시오.

성고의 험고를 막으시고 태항산으로 통하는 길을 차단하며, 비호(蜚狐)4)의 어귀와

백마진을 지켜 제후들로 하여금 현재의 형세가 실제적으로 누구에게 기울고 있는지를

보여주십시오. 그렇게 하시면 천하가 누구에게 돌아갈 것이라는 사실을 알게 될 것입니다.  

이제 바야흐로 연, 조 땅은 평정되었으며 오로지 제나라 땅만이 평정되지 않고 있습니다.  

지금 전광은 사방 천리의 제나라 땅에 웅거하고 있으며, 전간은 20만의 장병들을 이끌고 

역성에 주둔하고 있습니다. 또한 여러 전씨 종족의 힘은 매우 강하여 바다를 등지고

하수와 제수를 방패로 삼아 남쪽으로는 초나라와 접하여 인구는 많고 변사(變詐)가 심합니다. 

족하께서 수십 만의 군사를 보낸다한들 한 해나 몇 달만에 격파할 수 없습니다.

신이 청하건대 조명을 받들어 제왕을 설득하여 한나라를 위해 동쪽의 번국이 되도록

해보겠습니다.”라고 하자. 

한왕이 말하기를 : "좋다."라고 하였다.] 

 

乃從其畫,復守敖倉, 而使酈生說齊王曰:「王知天下之所歸乎?」

王曰:「不知也.」

曰:「王知天下之所歸, 則齊國可得而有也;

若不知天下之所歸, 即齊國未可得保也.」

齊王曰:「天下何所歸?」曰:「歸漢.」曰:「先生何以言之?」

[한왕은 역생의 계책에 따라 오창을 다시 지키고 역생을 보내 제왕에게 유세하도록 했다.

제나라에 당도한 역생이 제왕을 보고 묻기를 : 

 “ 왕께서는 천하가 어디로 돌아가려는지 아십니까?”라고 하자. 

제왕은 대답하기를 : “ 모르오.”라고 하였다. 

그러자 역생이 말하기를 : “ 왕께서 천하가 어디로 돌아갈지를 아신다면 제나라를 얻어

유지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만약 천하가 어디로 돌아갈지를 모른다면

제나라를 얻지 못하고 보존할 수 없습니다.”라고 하였다.  

제왕이 묻기를 : “ 천하가 어디로 돌아간단 말이오? ”라고 하자. 

역생이 대답하기를 : “ 한나라입니다.”라고 하였다.  

제왕이 묻기를 : “ 선생은 무슨 근거로 그렇게 말하십니까? ”라고 하자.] 

 

曰:「漢王與項王力西面擊秦,約先入咸陽者王之. 

漢王先入咸陽,項王負約不與而王之漢中.

項王遷殺義帝, 漢王聞之, 起蜀漢之兵擊三秦, 出關而責義帝之處, 收天下之兵,

立諸侯之後. 降城即以侯其將,得賂即以分其士,與天下同其利,

豪英賢才皆樂為之用.  諸侯之兵四面而至,蜀漢之粟方船而下.

[역생이 대답하기를 : “ 한왕과 항왕은 처음 힘을 합해 서쪽으로 진군하여

진나라를 공격할 때 함양에 먼저 들어가는 자가 그곳의 왕이 되기로 약속했습니다.

한왕이 먼저 함양에 입성했으나 항왕이 약속을 배반하고 한왕을 한중에 봉했습니다. 

다시 항왕이 의제를 몰아내고 도중에 죽였다는 소식을 들은 한왕은 촉한에서

군사를 일으켜 삼진(三秦)을 평정하고 관중을 나와 의제를 시해한 항왕에게 책임을 묻고

천하의 군사를 규합하고 제후들의 후예들을 종묘를 다시 세웠습니다.

성을 함락시키면 그 장수를 그곳의 후로 삼고 재물을 얻으면 그 사졸들에게 나누어 천하와

함께 그 이익을 같이 나눕니다. 호족, 영웅, 현인, 재사 등의 모든 사람들은 쓰임을 받아

스스로 즐거워합니다. 그래서 제후들이 군사를 이끌고 사방에서 몰려들고 있으며

촉한에서 산출되는 양식은 배를 나란히 하여 수로를 이용하여 내려옵니다.

 

項王有倍約之名,殺義帝之負; 於人之功無所記,於人之罪無所忘;

戰勝而不得其賞,拔城而不得其封;非項氏莫得用事;為人刻印,刓而不能授;

攻城得賂,積而不能賞:天下畔之,賢才怨之,而莫為之用.  

故天下之士歸於漢王,可坐而策也.

[그러나 항왕은 제후들과의 약속을 배반했을 뿐만 아니라 의제를 살해한 악명을 얻고 있으며

다른 사람이 세운 공은 기억하지 않으며 다른 사람의 죄는 잊지 않습니다.  

싸움에서 승리를 해도 상을 받을 수 없으며 성을 함락시켜도 후작을 얻을 수 없습니다.

또한 항씨의 일족이 아니면 권력을 잡을 수가 없으며, 사람을 봉하기 위해서 후인()을

새겨두고  인장이 닳아 없어질 때까지 만지작거리기만 할 뿐 건내지 않으며 성을 공격하여

취한 재물은 쌓아두기만 할 뿐 상으로 나누어주지도 않습니다.

그래서 천하는 그에게서 이반하여 현능한 사람이나 재사들은 원망하는 마음을 품고 

그를 위해 아무도 힘쓰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천하의 선비들이 한왕께 돌아간다는 것은 앉아서도 예측할 수 있습니다.

 

夫漢王發蜀漢,定三秦;涉西河之外,援上黨之兵;下井陘,誅成安君;

破北魏,舉三十二城:此蚩尤之兵也,非人之力也,天之福也. 

今已據敖倉之粟,塞成皋之險,守白馬之津,杜大行之阪,距蜚狐之口,

天下後服者先亡矣. 王疾先下漢王,齊國社稷可得而保也;不下漢王, 

危亡可立而待也.」 田廣以為然,乃聽酈生,罷歷下兵守戰備,與酈生日縱酒. 

[무릇 한왕이 촉한을 나와 삼진을 평정하고 서하를 건너 상당의 병사를 얻은 후에

정형의 싸움에서 성안군 진여를 주살했습니다. 계속해서 북쪽으로 나아가

위표의 위나라를 격파하고  그곳의 32개에 달하는 성을 점령했습니다.

이곳 사람들은 치우의 군사들과 같이 용맹하니 사람의 힘으로 그리 된 것이 아니라

하늘이 내려 준 복입니다. 현재 한왕은 이미 확보한 오창(敖倉)의 양식을 군량으로 삼아 

성고의 험애를 막고, 백마진을 수비하고, 태항산으로 통하는 양장판의 길을 차단했으며

비호의 어귀를 방어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천하의 제후들 중 나중에 항복하는 자는

먼저 망할 것입니다. 왕께서 바람과 같이 한왕에게 달려가 항복시면 제나라의 사직은

보존할 수 있겠지만 항복하지 않는다면 위험에 빠져 망하는 날만 서서 기다리는 처지가

될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전광은 그렇다고 여기고 역생의 말을 따라

역하()의 병사를 거둬들인 뒤 역생과 날마다 주연을 즐겼다.] 

 

淮陰侯聞酈生伏軾下齊七十餘城,乃夜度兵平原襲齊.  齊王田廣聞漢兵至,

以為酈生賣己,乃曰:「汝能止漢軍,我活汝;不然,我將亨汝!」 

酈生曰:「舉大事不細謹, 盛德不辭讓.  而公不為若更言!」

齊王遂亨酈生, 引兵東走.

[회음후 한신은 역생이 수레에 편히 앉아 제나라의 70여 개 성의 항복을 받아냈다는

소식을 듣고 즉시 밤을 이용해 평원(平原)을 건너 제군을 기습했다.

한군이 진격해 왔다는 소식을 들은 제왕 전광은 역생이 자기를 속여 한나라에 팔았다고

여기고 말하기를 : “ 그대가 능히 한나라 군사들의 진군을 막을 수 있다면 살려 줄 것이고

막지 못한다면 너를 팽살형에 처하겠다.”라고 하자. 
역생이 대답하기를 : “ 큰일을 도모하는 사람은 자질구레한 일을 개의치 않으며, 

덕이 높은 사람은 다른 사람의 책망을 사양하지 않는다고 했소. 

사태가 이 지경에 이르렀으니 내가 공을 위해 무슨 일을 다시 할 수 있겠소?”라고 하였다. 

제왕이 마침내 역생을 삶아 죽이고, 군대를 이끌고 동쪽으로 달아났다.]

 

漢十二年, 曲周侯酈商以丞相將兵擊黥布有功. 高祖舉列侯功臣, 思酈食其.

酈食其子疥數將兵, 功未當侯, 上以其父故,封疥為高梁侯.  後更食武遂,嗣三世.

元狩元年中,武遂侯平坐詐詔衡山王取百斤金,當棄市,病死,國除也. 

[한 12년(기원전 195년), 곡주후 역상이 승상의 신분으로 군사를 이끌고 출전하여 

경포를 토벌하는데 공을 세웠다.  고조가 열후와 공신들을 논공하다가 역이기를 생각했다. 

역이기의 아들 역개는 여러 번 군사를 이끌고 출전했으나 공은 열후를 받을만한 정도는

못 되었으나 고조가 그의 부친의 공로를 생각해서 고량후에 봉했다.

후에 다시 식읍은 무수(武遂)로 바뀌어 3대로 이어졌다.  

원수(元狩) 원년 기원전 122년, 무수후 역평이 거짓 조서(詔書)로 형산왕을 속여 

황금 백근을 사취한 죄에 연좌되어 기시(棄市)의 형에 해당되었으나

그 사이에 병이 들어 죽고 후국은 없어졌다.]

 

 

陸賈者,楚人也.  以客從高祖定天下,名為有口辯士,居左右,常使諸侯. 

及高祖時,中國初定,尉他平南越,因王之. 高祖使陸賈賜尉他印為南越王.

陸生至,尉他魋結箕倨見陸生.

​[육가(陸賈)는 초나라 사람이다. 빈객의 신분으로 천하를 평정한 고조를 따라다니며

구변이 좋은 세객으로 이름을 얻어 고조의 측근에서 항상 제후들에게 사자로 가곤했다.
이윽고 고조가 황제의 자리에 올라 중국을 가까스로 안정시킬 때

남월(南越)을 평정한 위타(尉他)5)는 스스로  그곳의 왕이 되었다.

고조가 위타를 남월왕에 봉한다는 인장을 주어 육가를 사자로 보냈다.

육생이 남월에 당도하자 위타는 머리에 상투를 방망이처럼 틀고, 

다리를 벌린 자세로 육가를 맞이했다.]

 

陸生因進說他曰:「足下中國人,親戚昆弟墳在真定.  今足下反天性,棄冠帶,

欲以區區之越與天子抗衡為敵國,禍且及身矣. 且夫秦失其政, 諸侯豪桀并起,

唯漢王先入關, 據咸陽. 項羽倍約, 自立為西楚霸王, 諸侯皆屬,

可謂至彊.然漢王起巴蜀,鞭笞天下,劫略諸侯,遂誅項羽滅之.

[육생이 그런 위타를 보고 앞으로 나아가 말하기를 : “ 족하는 중국 사람으로,

친척과 형제와 선조들의 묘소는 모두 진정(眞定)이란 곳에 있습니다. 

지금 족하께서는 하늘의 도리에 위반하여 관대(冠帶)를 버리고 보잘것없는 월나라의 군사로

천자에게 반항하여 적대국이 되려고 하니 화가 머지않아 귀하의 몸에 미치려고 합니다.

또한 진나라가 실정하자  천하의 제후들과 호걸들이 어깨를 나란히 하고 일어나더니

오직 한왕만이 먼저 관중으로 들어가 함양을 차지했습니다. 이어서 항우가 약속을 어기고

스스로 서초패왕의 자리를 차지하고 제후들은 모두 부하로 거느리니 지극히 강했다고

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파촉(巴蜀)에서 몸을 일으킨 한왕은 천하를 채찍질하여 

제후들을 협박으로 정복하고 마침내는 항우를 죽이고 멸망시켰습니다.

 

五年之閒, 海內平定, 此非人力, 天之所建也.  天子聞君王王南越, 不助天下誅暴逆,

將相欲移兵而誅王,天子憐百姓新勞苦,故且休之,遣臣授君王印,剖符通使.

君王宜郊迎,北面稱臣,乃欲以新造未集之越,屈彊於此.  漢誠聞之,

掘燒王先人冢, 夷滅宗族, 使一偏將將十萬眾臨越, 則越殺王降漢, 如反覆手耳.」

​[그 5년 동안 천하를 평정했음은 하늘의 도움 없이는 사람의 힘만으로는 이룰 수 있었던 일이 

아니었습니다.  군왕께서 남월의 왕 자리에 올랐다는 소식을 들으신 천자께서는, 

과거 천하가 폭도와 역도들을 주멸하는데 군왕께서 돕지 않았기 때문에

조정의 장상(將相)들이 군사를 동원하여 군왕을 주멸하자고 상주했으나,

백성들을 새롭게 노고를 끼치게 됨을 애석히 여겨 잠시 멈추게 하고 군왕의 인장을 

신에게 주어 보내며 황제의 부절을 쪼개 통호를 하도록 하셨습니다.

이에 군왕은 교외에 나와 영접하고 북면()해 신하라고 칭해야 마땅하거늘 이제 겨우

창건되어 백성들을 새로 모으지도 못한 상태로 이처럼 순종하지 않고 오만한 태도로

취하고 있습니다. 한나라가 이런 정황을 알게 된다면 군왕의 선조들 분묘를 파헤치고

종족들을 멸족시키고 한 사람의 편장에게 10만의 장병을 주어 남월로 진군시킨다면

월나라 사람들은 군왕을 죽이고 한나라에 항복할 것입니다.

이는 손바닥을 뒤집는 일보다 쉽습니다."라고 하였다.]

 

於是尉他乃蹶然起坐,謝陸生曰:「居蠻夷中久,殊失禮義.」

因問陸生曰:「我孰與蕭何、曹參、韓信賢?」 

陸生曰:「王似賢.」復曰:「我孰與皇帝賢?」

[​그러자 위타가 벌떡 자리에 일어나 좌정하며 육생에게 사과하며 말하기를 :

“ 오랫동안 오랑캐의 살다 보니 거의 예의를 잃어버렸습니다.”라고 하였다. 
그리고는 육생에게 묻기를 : “ 나와 소하, 조참, 한신 등과 비교해서 누가 더 현능합니까? ”하자. 

육생이 대답하기를 : “ 왕께서도 그들처럼 현능합니다.”라고 하였다. 

위타가 다시 묻기를 : “ 나를 황제와 비교한다면 누가 더 현명합니까? ”라고 하자.]

 

陸生曰:「皇帝起豐沛,討暴秦,誅彊楚,為天下興利除害,繼五帝三王之業,

統理中國.  中國之人以億計, 地方萬里, 居天下之膏腴, 人眾車轝, 萬物殷富,

政由一家, 自天地剖泮未始有也.

今王眾不過數十萬,皆蠻夷,崎嶇山海閒,譬若漢一郡,王何乃比於漢!」 

[육생이 대답하기를 :  황제께서는 패현() 풍읍()에서 몸을 일으켜 포악한 진나라를

토멸하고 강포한 초나라를 주살하여 천하를 위해 이로움을 일으키고 해로움을 제거했습니다.

황제는 오제(五帝)와 삼왕(三王)의 공업을 계승하고 중국을 통일하여 다스리고 계십니다.

중국의 인구는 억 명이 넘고 땅은 만리에 천하의 기름진 땅에 살고 있습니다.  

사람과 거마는 많고 재화는 풍부하여 정령은 모두 황실 일가를 거치고 있어 이런 일은

천지가 개벽한 이래 유래가 없었던 일입니다. 지금 왕의 백성들은 수십 만에 불과하고

그나마 모두 오랑캐들이며, 영토는 험한 산과 바다 사이에 끼어 있어 

마치 한나라의 일개 군에 불과한데 어찌 왕과 황제를 비교할 수 있겠습니까? "라고 하였다.]

 

尉他大笑曰:「吾不起中國,故王此. 使我居中國,何渠不若漢?」乃大說陸生,

留與飲數月. 曰:「越中無足與語,至生來,令我日聞所不聞.」 

賜陸生橐中裝直千金,他送亦千金.  陸生卒拜尉他為南越王,令稱臣奉漢約. 

歸報,高祖大悅,拜賈為太中大夫.

[위타가 크게 웃으며 말하기를 : “ 나는 중국에서 몸을 일으키지 않았기 때문에 이곳의

왕이 되었소.  내가 중국에 살았다면 어찌 한나라의 황제만 못하겠소? ”라고 하였다,

위타는 육고가 아주 마음에 들어서 몇 달 동안을 같이 기거하며 음식을 즐겼다.

위타가 말하기를 : “ 남월에는 더불어 말을 나룰 사람이 없소.

선생께서 이곳에 온 이래 매일 내가 듣지 못한 소식을 전해주셨소.”라고 하며. 
육생에게 천금이나 나가는 보물이 든 보따리를 따로 주고 다시 천금을 보내주었다. 
 

육생은 마침내 위타를 남월왕에 봉하고 신이라 칭하면서 한나라와의 약속을 지키게 했다. 

이윽고 한나라에 돌아온 육생이 보고하자,

고조께서는 크게 기뻐하고 그를 태중대부에 제수했다.] 

 

陸生時時前說稱詩書. 高帝罵之曰:「乃公居馬上而得之,安事詩書!」

陸生曰;「居馬上得之,寧可以馬上治之乎?

且湯武逆取而以順守之,文武并用,長久之術也.

昔者吳王夫差、智伯極武而亡;秦任刑法不變,卒滅趙氏.  

鄉使秦已并天下,行仁義,法先聖,陛下安得而有之?」

[육생이 옛날 시경과 서경을 때때로 인용하여 유세하였다.

고조가 꾸짖으며 말하기를 : “ 나는 마상에서 천하를 얻었다. 어찌 시서(詩書) 따위를

운운하는가?”라고 하자. 
육생이 대답하기를 : “ 마상에서 얻은 천하를 어찌 마상에서 다스릴 수 있겠습니까? 
 

더욱이 상탕(商湯)과 주무왕(周武王)이 신하의 신분으로 천하를 취했으나 민심에 순응하여 

지킬 수 있었음은 문무를 같이 사용해야 나라를 오래 지탱할 수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습니다.  옛날 오왕 부차(夫差)나 진(晉)나라의 지백(智伯)6)은 무력에 지나치게

의존했기 때문에 멸망했으며, 진()은 형법만을 쓰고 바꾸지 않아서 결국 조씨()가

멸망했습니다. 만일 진나라가 천하를 겸병한 후에 인의를 행하고 옛 성왕들의

법을 본받았다면 폐하께서 어떻게 천하를 차지할 수 있었겠습니까?”라고 하였다.] 

 

高帝不懌而有慚色,乃謂陸生曰:「試為我著秦所以失天下,吾所以得之者何,

及古成敗之國.」  陸生乃粗述存亡之徵,凡著十二篇. 

每奏一篇,高帝未嘗不稱善,左右呼萬歲,號其書曰「新語」.

[고제는 육생의 말이 못마땅했지만 오히려 부끄러워하는 기색을 보이며 말하기를 : 

" 시험 삼아 짐을 위해 진나라가 천하를 잃은 까닭과 짐이 천하를 얻은 까닭이 무엇인지,

그리고 옛날에 성공하고 실패한 나라’에 대해 글을 지어 올리시오.” 라고 하자.

육생은 국가의 흥망의 기미(機微)에 대하여 대략적으로 모두 13편의 책을 저술하여 바쳤다.  

육생이 한 편 한 편 지어 올릴 때마다 고제는 훌륭하다고 칭찬하지 않은 적이 없었고 

좌우의 측근들은 만세를 불렀다.  그 책의 제목을 《신서(新書)》라고 지어 불렀다.]

 

孝惠帝時, 呂太后用事, 欲王諸呂, 畏大臣有口者, 陸生自度不能爭之, 乃病免家居.

以好畤田地善,可以家焉.  有五男,乃出所使越得橐中裝賣千金,分其子,

子二百金,令為生產.  陸生常安車駟馬,從歌舞鼓琴瑟侍者十人,寶劍直百金, 

謂其子曰:「與汝約:過汝,汝給吾人馬酒食,極欲,十日而更. 

所死家,得寶劍車騎侍從者. 一歲中往來過他客, 率不過再三過,

數見不鮮, 無久慁公為也.」

[효혜제때 정권을 잡은 여태후가 여씨 종족들을 제후왕으로 봉하려고 하자, 

대신들은 입을 열어 간언하기를 두려워했다. 육생 역시 여태후와는 간쟁할 수 없다고

생각하여 병을 칭하고 관직에 물러나 집에 칩거하다가 호치(好畤)의 땅이 비옥했음으로

그곳에 정착했다. 그에게는 다섯 아들이 있었는데 옛날 남월에 사자로 갔다가

받은 자루 속의 보물을 팔아 천금을 마련하여 그 아들들에게 각기 2백 금씩 나누어주어

생활하도록 했다.  육생은 항상 네 마리의 말이 끄는 안거(安車)를 타고 다니며

가무와 금슬을 잘 타는 시종 10명을 따르게 했다.  

백금이나 나가는 보검을 차고 다니던 그가 아들들에게 말하기를 :

 “ 너희들과 한 가지 약속을 해야 하겠다.  내가 너희들 집에 들를 때는 너희들은 내가 데리고

다니는 말과 사람들에게 술과 음식을 주도록 해라! 실컷 놀다가 열흘이 되면

다음 집으로 옮길 것이다. 내가 죽는 집에서 보검과 수레와 말, 시종들을 갖도록 해라.

일 년 동안을 오가도 간혹 가다가 다른 사람의 집에 머물를 수도 있으니 

너희들 집은 3번 이상 들를 수 없을 것이다.

너무 자주 보면 새롭지 않으니 오래 머물러 너희들을 귀찮게 하지 않겠다.” 라고 하였다.] 

 

呂太后時,王諸呂,諸呂擅權,欲劫少主,危劉氏.  右丞相陳平患之, 力不能爭,

恐禍及己,常燕居深念.  陸生往請,直入坐,而陳丞相方深念,不時見陸生.

[여태후 때 여러 여씨 종족들을 제후왕으로 세워 정권을 휘두르고 어린 황제를 겁박하여

유씨들이 위태롭게 되었다.  우승상 진평이 이를 근심했으나 힘이 미치지 않아

쟁간하지 못하고 화가 자기 몸에 미치지나 않을까 걱정한 나머지 항상 집에 쳐박혀 있으면서

깊이 생각했다. 육생이 보고 진평의 집에 들려 곧바로 들어가 좌정했지만 

진평은 상념에 잠겨 육생이 왔는지도 몰랐다.]

 

陸生曰:「何念之深也?」 陳平曰:「生揣我何念?」 

陸生曰:「足下位為上相,食三萬戶侯,可謂極富貴無欲矣. 

然有憂念,不過患諸呂、少主耳.」 

陳平曰:「然.  為之柰何?」 

陸生曰:「天下安,注意相;天下危,注意將.  將相和調,則士務附;士務附,

天下雖有變,即權不分.  為社稷計,在兩君掌握耳. 

臣常欲謂太尉絳侯,絳侯與我戲,易吾言.  君何不交驩太尉,深相結?」

[그러자 육생이 묻기를 :  “ 무엇을 그리 골똘히 생각하십니까? ”라고 하자. 

진평이 오히려 묻기를 : “ 선생은 내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맞춰보시오?라고 하였다.

육생이 대답기를 : “  대감께서는 지위가 우승상이시고 식읍은 3만 호를 갖고 계십니다.

가히 부귀가 극에 달해 더 이상 바랄 바가 없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근심하는 바가 있다면 아마 여씨 종족들과 어린 황제 때문일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진평이 묻기를 : “ 그렇소. 이 일을 어떻게 했으면 좋겠소?”라고 하자.
육생이 대답기를 : “ 천하가 안정되면 승상의 뜻을 살피지만, 천하가 위태로우면 장군들의

뜻을 살핍니다. 만일 승상과 장군이 서로 마음을 합치면 선비들은 힘써 따르게 됩니다. 

비들이 힘써 따르면 천하에 비록 변란이 일어난다 해도 정권은 나누어 지지 않습니다. 

사직을 휘해 계책을 드린다면 승상과 장군이 손을 잡아야만 합니다.  

저는 항상 태위의 직에 있는 강후 주발(周勃)에게도 이 말을 하고 싶었지만 강후와 저는

농담을 잘 나누는 처지라 내 말을 흘리곤 했습니다. 

대감께서는 어찌하여 태위 강후와 깊이 친교를 맺지 않으십니까? ”라고 하였다.] 

 

為陳平畫呂氏數事.  陳平用其計, 乃以五百金為絳侯壽, 厚具樂飲;太尉亦報如之.

此兩人深相結,則呂氏謀益衰.  陳平乃以奴婢百人,車馬五十乘,錢五百萬,

遺陸生為飲食費. 陸生以此游漢廷公卿閒,名聲藉甚. 

及誅諸呂,立孝文帝,陸生頗有力焉.

[육생은 진평을 위해 여씨 일족에게 대처하는 몇 가지 계책을 일러주었다.

진평이 육생의 계책대로 5백 금의 황금으로 강후의 생일을 축하하고

수많은 가무를 동원하여 성대한 술자리를 마련하여 즐겼다.

태위 역시 그에 상응하는 것으로 보답했다. 두 사람의 관계가 친밀해지자

여씨들의 음모는 더욱 힘을 잃었다.

진평이 노비 100명, 거마 50승, 현금 5백만 전을 육생에게 보내 생활비에 보태도록 했다.

육생은 이로써 한나라의 조정의 공경들과 교유를 맺어  그 명성이 매우 높아졌다.
여씨 종족들을 주살하고 효문제를 세우는 데에는 육생의 힘이 매우 컸다.]

 

孝文帝即位,欲使人之南越.  陳丞相等乃言陸生為太中大夫,往使尉他, 

令尉他去黃屋稱制,令比諸侯,皆如意旨.  語在南越語中.  陸生竟以壽終.

[황제로 즉위한 효문제는 육생을 다시 남월에 사자로 보내고 싶어했다. 

승상 진평 등은 육생을 태중대부로 천거하여 위타에게 사자로 보내 그로 하여금 

황옥(黃屋)7)과 제(制)8)의 제도를 버리고 제후들처럼 행동하도록 설득하게 했다.

육생의 활약으로 모든 일들이 황제의 마음에 들었다. 이 일에 대해서는

남월열전(南越列傳)에서 볼 수 있다. 육생은 천수를 누리다가 죽었다.]

 

 

平原君朱建者,楚人也.  故嘗為淮南王黥布相,有罪去,後復事黥布. 

布欲反時,問平原君,平原君非之,布不聽而聽梁父侯,遂反.  

漢已誅布,聞平原君諫不與謀,得不誅.  語在黥布語中.

[평원군 주건은 초나라 사람이다. 일찍이 회남왕 경포(黥布)의 재상으로 지낸 적이 있었는데

죄를 지어 떠났다가 뒤에 다시 경포를 섬겼다. 경포가 황제에게 모반하려는 뜻을 품고

평원군에게 물었으나 평원군은 옳지 않다고 

말했다. 경포가 평원군의 말을 듣지 않고 양보후(梁父侯)의 말을 쫓아 반란을 일으켰다. 

한나라는 경포를 죽이고 난 다음, 평원군이 경포에게 간언하고 모반에 참여하지 않았다는

말을 듣고서 그를 죽이지 않았다. 이 이야기는 경포열전(黥布列傳)에 있다.]

 

平原君為人辯有口,刻廉剛直,家於長安.  行不茍合,義不取容. 

辟陽侯行不正,得幸呂太后.  時辟陽侯欲知平原君,平原君不肯見. 

及平原君母死, 陸生素與平原君善, 過之.

平原君家貧, 未有以發喪, 方假貸服具, 陸生令平原君發喪.

[평원군은 사람됨이 말재주가 좋고 엄격하며 청렴하고 강직하였으며 그의 집은 장안에

있었다.  그는 구차하게 남의 비위를 맞추거나 의리에 벗어나는 행동을 하지 않았다.

벽양후(辟陽侯) 심이기(審食其)9)는 하는 행동이 바르지 않았지만 여태후의 총애를 받고

있었다. 벽양후가 평원군과 사귀고 싶어 했으나 평원군은 그를 만나주지 않았다.

마침내 평원군의 모친이 죽자, 평소에 친하게 지내던 육생이 문상을 하러 갔다.  

평원군의 집은 가난하여 미처 상을 발하지도 못하고 마침 의복과 기구들을 빌리려고 하던

참이었다.  육생이 경비를 대어 평원군 모친의 장례를 치르도록 했다.]

 

陸生往見辟陽侯, 賀曰:「平原君母死.」

辟陽侯曰:「平原君母死, 何乃賀我乎?」

陸賈曰:「前日君侯欲知平原君,平原君義不知君,以其母故. 

今其母死,君誠厚送喪,則彼為君死矣.」 辟陽侯乃奉百金往稅. 

列侯貴人以辟陽侯故,往稅凡五百金.  辟陽侯幸呂太后, 人或毀辟陽侯於孝惠帝,

孝惠帝大怒,下吏,欲誅之.  呂太后慚,不可以言.

[그리고 육생은 벽양후를 찾아가 만나서 축하하며 말하기를 :

 “ 평원군의 모친이 죽었습니다.”라고 하였다. 
벽양후가 묻기를 : “ 평원군의 모친이 죽었는데 어찌하여 나에게 축하한다고 하십니까? ”하자. 

육가가 말하기를 : “ 예전에 대감께서는 평원군과 친교를 맺으려고 했으나 평원군은 의에

않다고 생각해서 거절한 이유는 그의 모친 때문이었습니다. 지금 그의 모친이 돌아가셨으니

대감께서 성의를 다해 그의 모친상을 후하게 발상하도록 하십시오.

그는 대감을 위해 목숨이라도 바칠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이에 벽양후는 조문을 가서 1백금의 조의금을 냈다. 열후와 귀인들이 벽양후의 일로 인해

평원군을 찾아가역시 조의금을 냈는데 모두 5백 금에 달했다.

여태후의 총애를 받고 있는 벽양후를 어떤 사람이 여태후와 간통했다고 효혜제에게 헐뜯었다.

효혜제가 대노하여  관리를 보내 주살하려고 했다.

여태후는 수치스러워 벽양후를 위해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大臣多害辟陽侯行,欲遂誅之.  辟陽侯急,因使人欲見平原君.  

平原君辭曰:「獄急,不敢見君.」

乃求見孝惠幸臣閎籍孺,說之曰:「君所以得幸帝,天下莫不聞. 

今辟陽侯幸太后而下吏,道路皆言君讒,欲殺之.  

今日辟陽侯誅,旦日太后含怒,亦誅君.  何不肉袒為辟陽侯言於帝?

帝聽君出辟陽侯,太后大驩.  兩主共幸君,君貴富益倍矣.」 

[대신들은 대부분 벽양후의 행실을 매우 미워했기 때문에 정말로 그가 죽기를 바랐다.
다급한 처지에 놓인 벽양후가 사람을 시켜 평원군을 만나려고 했다.

평원군이 벽양후의 청을 거절하며 말하기를 : 
“ 옥사가 급하게 되었음으로 감히 대감을 뵐 수 없습니다. ”라고 하고는,

즉시 효혜제의 총신 굉적유(閎籍孺)를 찾아가 말하기를 : “ 대감께서 황제의 총애를 받고

있다는 사실은 천하에 모르는 사람이 없습니다. 지금 벽양후가 태후와 간통한 죄로

관리에게 심문을 받고 있습니다. 시중에는 대감께서 참소하여 살해하려고 한다는

소문이 돌고 있습니다. 만일 지금 벽양후가 주살되면 여태후께서 분노를 감추고 계셨다가

다음에 역시 대감을 죽일 것이오. 그런데 어찌하여 대감은 옷을 벗어 어깨를 드러내놓고

벽양후를 위해 황제께 용서를 부탁하지 않는 것이오?

황제께서 대감의 말을 듣고 벽양후를 풀어준다면 태후는 크게 기뻐할 것입니다.

두 주인이 동시에 대감을 총애할 것이니 대감의 부귀는 예전보다

배로 되지 않겠습니까? ”라고 하였다.]

 

於是閎籍孺大恐,從其計,言帝,果出辟陽侯.  辟陽侯之囚,欲見平原君,

平原君不見辟陽侯,辟陽侯以為倍己,大怒.  及其成功出之,乃大驚. 

呂太后崩,大臣誅諸呂,辟陽侯於諸呂至深,而卒不誅. 

計畫所以全者,皆陸生、平原君之力也.

[평원군의 말에 크게 놀란 굉적유는 평원군의 계책을 쫓아 황제께 심이기를 위해 변호했다.

황제는 과연 심이기를 풀어 주었다. 벽양후가 관리에게 잡혀 있을 때 평원군을 불러

만나려고 했으나 평원군이 거절했음으로 자신을 배신했다고 생각한 벽양후가

크게 노했으나 얼마 후에 평원군의 노력으로 자기가 풀려날 수 있게 되었다는 사실을 알고

또한 크게 놀랐다. 여태후가 붕어하자 대신들이 여씨 종족들을 주살할 때

벽양후는 여씨 일족과 관계가 매우 밀접했지만 끝내 죽임을 당하지 않았다.

그 이유는 모두 육생과 평원군의 계책과 노력에 의해서였다.]

 

孝文帝時, 淮南厲王殺辟陽侯, 以諸呂故.  文帝聞其客平原君為計策, 使吏捕欲治.

聞吏至門,平原君欲自殺.  諸子及吏皆曰:「事未可知,何早自殺為?」 

平原君曰:「我死禍絕, 不及而身矣.」遂自剄. 

孝文帝聞而惜之, 曰:「吾無意殺之.」

乃召其子,拜為中大夫.  使匈奴,單于無禮,乃罵單于,遂死匈奴中.

[효문제 때 회남려왕(淮南厲王) 유장(劉長)이 여씨 종족들에게 맺힌 원한으로 인해

벽양후를 살해했다. 효문제가 듣고 벽양후를 위해 그의 문객 평원군이 계책을 세웠음을 알고

관리를 보내 체포하여 치죄하려고 했다.  

이윽고 관리가 집 앞에 이르렀다는 소식을 들은 평원군이 스스로 목숨을 끊으려고 했다.  

여러 아들들과 관리들이 말하기를 : “ 일이 어떻게 될지 모르는데,

어찌하여 미리 자살려고 하십니까? ”라고 하자. 
평원이 대답하기를 : “ 내가 죽으면 화는 이 한 몸으로 끝나고 다른 사람에게 미치지 않기

때문이다.” 라고 하였다. 그리고는 즉시 목을 찔러 죽었다.

효문제가 듣고 애석하게 생각하며 말하기를 : “ 내가 원래 죽이려는 뜻은 아니었다.”하면서,

즉시 그의 아들을 불러 중대부의 벼슬을 주었다.

아들은 흉노에 사자로 가게 되었는데 선우(單于)가 무례하게 대하자 선우를 나무랐다가

결국 흉노 땅에서 죽었다.].

 

初,沛公引兵過陳留,酈生踵軍門上謁曰:「高陽賤民酈食其,竊聞沛公暴露,

將兵助楚討不義,敬勞從者,願得望見,口畫天下便事.」 

使者入通,沛公方洗,問使者曰:「何如人也?」

使者對曰:「狀貌類大儒,衣儒衣,冠側注.」

沛公曰:「為我謝之,言我方以天下為事,未暇見儒人也.」 

使者出謝曰:「沛公敬謝先生,方以天下為事,未暇見儒人也.」

[처음 패공이 군사를 이끌고 진류를 지날 때 역생이 군문 앞에서 서성이며 알현하기를

청하면서 말하기를 : “ 고양(高陽)의 천민 역이기가 가만히 소문을 들으니 패공은

따가운 햇살과 찬 이슬을 맞으며 군사를 이끌고  초나라를 도와 불의한 자를 토벌하려

한다기에 삼가 종군자들을 위로하고 원컨대 접견을 청해 천하의 대사를 위한 

계책을 말씀드리고 싶습니다.”라고 하자. 시자가 안으로 들어가 역생의 말을 전했다.

그때 마침 몸을 씻고 있었던 패공이 시자를 보고 묻기를 : “ 그 자는 어떤 사람인가? ”하자.  

시자가 대답하기를 : " 용모로 보아서 뛰어난 선비로 유자의 복장에 측주관10)관을 

쓰고 있습니다.”라고 하였다.

패공이 말하기를 : ​“ 그대는 나가 내가 지금 천하의 일로 바빠 유자들을 만날 시간이 없다고

전하라!”라고 하였다.
시자가 밖으로 나와 사죄하며 말하기를 : " 패공께서 선생께 공경히 사죄하시며,

지금은 천하의 대업으로 바쁘기 때문에 유자들을 만날 겨를이 없다 라는 말을 

선생께 전해달라고 하셨습니다.”라고 하였다.]

 

酈生瞋目案劍叱使者曰:「走!復入言沛公,吾高陽酒徒也,非儒人也.」

使者懼而失謁, 跪拾謁, 還走, 復入報曰:「客, 天下壯士也, 叱臣, 臣恐, 至失謁. 

曰『走!復入言,而公高陽酒徒也』.」 沛公遽雪足杖矛曰:「延客入!」

[역생이 눈을 부릅뜨고 패검을 어루만지며 시자를 질책하며 말하기를 : “ 어서 가시오!  

다시 가서 패공께 전하시오!  나는 고양의 술주정뱅이지 유자가 아니라고!”라고 하자. 
시자가 놀라 떨어뜨린 명패를 몸을 구부려 주워 들고는 다시 들어가 아뢰기를 :

“ 손님은 천하의 장사입니다.  저를 질책하는 모습이 무서운 나머지 명패를 땅에

떨어뜨렸습니다. 손님이 소리치며 말하기를

‘ 달려가서 나는 고양의 술주정뱅이라고 전하라!’라고 말했습니다.”라고 하자. 
패공은 재빨리 발을 닦고 창을 잡으면서 말하기를 : “ 손님을 들어오게 하라!”라고 하였다.]

 

酈生入, 揖沛公曰:「足下甚苦, 暴衣露冠, 將兵助楚討不義, 足不何不自喜也?

臣願以事見, 而曰『吾方以天下為事,未暇見儒人也』. 

夫足下欲興天下之大事而成天下之大功,而以目皮相,恐失天下之能士.  

且吾度足下之智不如吾,勇又不如吾. 若欲就天下而不相見,竊為足下失之.」 

沛公謝曰:「鄉者聞先生之容,今見先生之意矣.」乃延而坐之,問所以取天下者.

[역생이 들어와 패공에게 읍을 하고 말하기를 : “ 족하께서는 매우 고생이 많으십니다.

옷은 햇빛에 쪼이고 관에는 이슬을 맞아가며 군사를 이끌고 초나라를 도와 불의한 자를

토벌하시려고 합니다.  그런데 족하께서는 어찌하여 스스로를 자중하지 않으십니까? 

신이 접견을 청했음에도 말씀하시를 ‘ 나는 천하의 일로 인하여 유자들을 만날 여가가 없다.’

라고 하셨습니다. 무릇 천하의 대사를 도모하여 천하에 대공을 이루려고 마음먹은 족하께서 

사람의 겉모양만 보고 판단하시니 천하의 재사들을 잃지나 않을까 걱정됩니다.

제가 헤아려보건대 족하의 지혜는 저보다 못하고 용기 또한 저보다 못합니다. 만약 천하를

얻고 싶음에도 재사들을 접견하지 않음은 가만히 생각하건대 족하의 실수입니다.”라고 하자.  

패공이 사과하며 말하기를 : “ 조금 전에는 선생의 용모에 대해 들었는데,

지금은 큰 뜻을 보았습니다.”하였다. 
패공이 역생을 인도하여 자리에 앉히고 천하를 취할 수 있는 방도에 대해 물었다.]

 

酈生曰:「夫足下欲成大功, 不如止陳留.  陳留者, 天下之據衝也, 兵之會地也, 

積粟數千萬石, 城守甚堅.  臣素善其令,願為足下說之.  

不聽臣,臣請為足下殺之,而下陳留.  足下將陳留之眾,據陳留之城,

而食其積粟,招天下之從兵;從兵已成,足下橫行天下,莫能有害足下者矣.」

沛公曰:「敬聞命矣.」

[역생이 말하기를 : “ 무릇 족하께서 대공을 이루고 싶다면 진류에 머물러야 합니다.

진류라는 곳은 천하의 요충지일 뿐만 아니라 병가들이 차지하려고 다투는 곳이며

저장된 양식은 수천 만 석이고 성은 매우 견고하여 지키기 쉽습니다. 

제가 평소에 진류의 현령과 친교가 있으니 원컨대 족하를 위해 그를 설득해 보겠습니다. 

만일 그가 말을 듣지 않는다면 제가 족하를 위해 그를 죽이고 족하를 위해 진류성을

점령하겠습니다. 족하께서는 진류의 무리를 이끌고 그 성에 의지하여 쌓아둔 양식을

군량으로 삼아 천하에서 군사를 불러 모으십시오. 군사를 다 모집하신 후에 공께서

천하를 횡행하시면 아무도 공을 방해할 수 없을 것입니다.”하자. 

패공은 이 말을 듣고 말하기를 : “삼가 가르침에 따르겠소.”라고 하였다.]

 

於是酈生乃夜見陳留令,說之曰:「夫秦為無道而天下畔之,

今足下與天下從則可以成大功.  今獨為亡秦嬰城而堅守,臣竊為足下危之.」 

陳留令曰:「秦法至重也,不可以妄言,妄言者無類,吾不可以應.

先生所以教臣者,非臣之意也,願勿復道.」

[이에 역생은 그날 밤으로 진류 현령을 만나 설득하기를 : 

“ 무릇 진나라가 무도하여 천하가 진에 반기를 들고 있소. 지금 족하께서 천하를

종횡무진하시는데 그대가 더불어 따른다면 큰 공을 이룰 수 있을 것이오.

그런데 지금 망한 진나라를 위해 그대 혼자만 외로운 성에 의지하여 굳게 지키고 있습니다.

제가 가만히 생각해 보건대 그대의 생명이 매우 위태로울 것이라고 생각하오.”라고 하자. 
진류 현령이 듣고 말하기를 :  “ 진나라의 법은 매우 가혹하여 망녕된 말을 허용하지 않고 있소.

망녕된 말을 하는 자는 멸족되니 나는 그 말을 따를 수 없소. 선생이 나를 깨우치고자

한 말은 나의 뜻과 같지 않소. 원컨대 다시는 그런 말을 하지 마시오.”라고 하였다.] 

 

酈生留宿臥,夜半時斬陳留令首,踰城而下報沛公.  沛公引兵攻城,

縣令首於長竿以示城上人, 曰:「趣下,而令頭已斷矣!今後下者必先斬之!」 

於是陳留人見令已死,遂相率而下沛公.

沛公舍陳留南城門上,因其庫兵,食積粟,留出入三月,從兵以萬數,遂入破秦. 

[역생이 머물러 유숙하다가 한 밤중이 되자, 진류 현령의 목을 베고 성을 몰래 빠져나와

패공에게 보고했다.  패공이 군사를 이끌고 성을 공격하면서 현령의 수급을 장대에 높이 달아 

성벽의 군사들에게 보이면서 말하기를 : “ 빨리 항복하라! 현령의 목을 이미 베었다.

지금 이후로 항복한 자는 먼저 목을 베리라!”라고 하였다. 
현령이 이미 죽었음을 확인한 진류 사람들은 모두 함께 성을 나와 패공에게 항복했다. 
 

패공은 진류성 남쪽 성문 위에 숙소를 마련하고 무기고에서 병장기를 꺼내 무장한 후에 

쌓아 둔 약식을 먹고 3개월 동안 머물자, 병사로 자원한 자가 만 수천 명에 달해 

마침내 함양으로 들어가 진나라를 격파할 수 있었다.]

 

太史公曰:

世之傳酈生書,多曰漢王已拔三秦,東擊項籍而引軍於鞏洛之閒,

酈生被儒衣往說漢王.  乃非也. 自沛公未入關,與項羽別而至高陽,得酈生兄弟. 

余讀陸生新語書十二篇,固當世之辯士.  至平原君子與余善,是以得具論之.    

[태사공이 말한다.
세상에 역생이 쓴 글이 전하는데 대부분이 한왕이 삼진을 평정하고 동쪽으로 나아가

항적(項籍)을 공격하다가 공성과 낙양 일대로 물러나 주둔한 일과 역생이 유자의 옷을

걸치고 한왕에게 유세한 일에 대해서다.  그러나 이는 잘못 전해진 것이다.

패공이 관중에 미처 들어가지 않았을 때 항우와 헤어져 고양에 이르러 역생 형제를 휘하에

두게 되었다.  나는 육가의 신어(新語) 12편을 읽어 봤는데 진실로 그는 당대의 변사였다.  

나는 평원군의 아들과 친분이 있었음으로 그의 행적에 대해 구체적으로 기록할 수 있었다.]

 

 

【 각주 】  

1) 진류(陳留) 고양(高陽) / 진류는 지금의 하남성 개봉(開封) 동남 일대에 진나라가

    설치한 군 이름으로 치소는 개봉시 경내 남쪽이다.

    고양(高陽)은 하남성 기현(杞縣)으로 진류성 동남20키로다.  

2) 오창(敖倉)/ 진나라가 비상시를 위해 오산(敖山)에 건설한 식량창고다.  

    지금의 하남성 형양시(滎陽市) 동북쪽에 있었다.  

3) 형도(刑徒)/ 죄수들로 이루어진 군대를 말한다.

4) 비호(蜚狐)/ 하북성 협원현(浹原縣)과 설현(薛縣) 사이의 요새로 옛날 화북평원을 지키는

    북방변경의 중요한 요해지였다.  

5) 위타(尉他)/ 지금의 하북성 정정현(正定縣)에 있었던 진정(眞定) 출신으로 원래의 이름은

    조타(趙他) 혹은 조타(趙陀)다.  위(尉)는 관직 이름이고 진나라 때 용천현(龍川縣) 현령을

    지내다 후에 남해의 군위(軍尉)을 지냈기 때문에 위타라고 칭했다.  

6) 지백(智伯) /태어난 해는 알 수 없고 기원전 453년에 죽은 춘추 말 당진국의 정경이다.  

    희성(姬姓)에 원래 순씨(荀氏)였으나 후에 지(智) 혹은 지(知)로 바꾸어 지백으로 불렀다.  

    진출공(晉出公 : 재위 전475-458전) 즉위 초에 부친 지선자(智宣子)로부터

    당진국의 정경이 되어 제나라와  정나라를 정벌하고 중산국을 무찔렀다.

    주정왕 11년 기원전 458년 조, 한, 위 삼가와 연합하여 범씨(范氏)와 중항씨를 멸하고

    그 봉읍들을 나누어 가졌다. 이어서 출공을 쫓아내고 그의 손자 교(驕)를 새로 세웠다.

    이가 진애공(晉哀公)이다. 교만해진 지백은 당진국의 정권을 오로지하고 대신들을

    모욕하는 것을 즐겼다.  후에 한위조(韓魏趙) 삼가에 봉지의 할양을 요구하여 한과 위

    두 가문으로부터는 만 호에 해당하는 성읍을 빼앗았으나 조가로부터는 거절당했다.

    분노한 지백이 한위 이가를 위협하여 삼가가 연합군을 결성하여 조가들의 근거지

    진양성(晉陽城)을 공격했다. 3년을 공격했으나 성이 함락되지 않자 진수(晉水)의 물을 막아

    진양성을 물에 잠기게 했다. 조가들의 모사(謀士) 장맹담이 한위 이가를 설득하여

    반격을 가하자 지백은 잡혀 참수되고 지가는 멸족되었다.

    지가를 멸한 한,  위 ,조 삼가는 지가의 봉지를 포함하여 당진의 공실의 땅까지

    모두 삼분하여 나라를 세움으로써 기존의 진(秦), 초(楚), 제(齊), 연(燕) 등과 함께

    전국칠웅이 되어 전국시대를 열었다.  이를 역사상 삼가분진(三家分晉)이라 한다.  

7) 황옥(黃屋)/ 황색의 덮개를 설비한 수레로 황제가 탔다.

8) 제(制)/ 황제가 내리는 명령을 높여서 부르는 말이다.

9) 심이기(審食其)/ 태어난 해는 알 수 없고 기원전 177년에 죽은 서한의 대신으로

    패현(沛縣) 출신이다. 진말 유방이 패현에서 기의할 때 사인(舍人)의 신분으로 종군했다.

    유방이 정벌을 위해 밖으로 출전할 때 그는 패현에 남아서 여태후와

    아들 유영(劉盈)을 받들었다. 이윽고 초한전쟁이 치열하게 전개되는 과정에서  

    여태후와 유영이 항우에게 사로잡히게 되자 그는 곁에서 극진히 모셨다.

    후에 초한이 홍구를 경계로 강화를 맺을 때 태공 등의 유방 가족들과 함께 석방되어

    한나라에 돌아왔다.

    고조 6년 기원전 201년 벽양후(辟陽侯)에 봉해졌다. 

    섭정이 된 여후는 심이기를 좌승상에 임명하고 매우 신임하고 총애했다.  

    문제 3년 기원전 177년 회남왕 유장(劉長)에 의해 살해되었다.  

10) 측주관(側注冠)/ 고산관(高山冠)이라고도 하며

      진나라 때에는 황제의 측근들이나 알자(謁者)들이 착용하던 관모였다.  

 

                                  서한 시대의 형세도.

 

 

 

※  原 文 .    【 中國哲學書電子化計劃 .   筆寫本 】

 

                                

 

    原 文   飜 譯 者        德庤 / 李   斗 振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