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3.韓信 盧綰列傳

第 三十三. 韓信盧綰列傳(한신 노관열전)

덕치/이두진 2023. 9. 8. 18:27

 

                        史記 列傳

 

     第 三十三.  韓信盧綰列傳(한신 노관열전) 

韓王信者, 故韓襄王孽孫也, 長八尺五寸. 

及項梁之立楚後懷王也, 燕· 齊· 趙· 魏皆已前王, 

唯韓無有後, 故立韓諸公子橫陽君成為韓王, 欲以撫定韓故地.

(한왕신자, 고한양왕얼손야, 장팔척오촌. 

급항량지입초후회왕야, 연· 제· 조· 위개이전왕,   

유한무유후, 고입한제공자횡양군성위한왕, 욕이무정한고지.) 

[한왕 '신'은 원래 한양왕 서자의 자손으로 신장이 8척 5촌에 이었다.   

'항량'은 병사를 일으켜 초'회왕'을 받들고 나서 동시에 연, 제, 조, 위나라 등의

후손들을 모두 찾아내어 왕의 자리를 잇게 만들었으나, 한나라만이 후손이 없었기

때문에 한나라의 여러 공자 중 횡양군 '성'을 찾아내어 한왕으로 세웠으며, 

'항량'은 한나라의 옛 땅을 무력을 사용하여 평정하려고 하였다.] 

 

項梁敗死定陶, 成奔懷王.  沛公引兵擊陽城, 使張良以韓司徒降下韓故地, 得信,  

以為韓將, 將其兵從沛公入武關.
(항량패사정도, 성분회왕.  패공인병격양성, 사장량이한사도강하한고지, 득신, 
 

이위한장, 장기병종패공입무관.)

[그러나 '항량'은 진나라 장수 '장한'에게 "정도"에서 패하여 죽자, 

한왕 '성'은 초회왕에게 달려가 몸을 의탁했다. 

'패공'이 군사를 이끌고 "양성"을 공격할 때

'장량'을 한나라 사도로 삼아 한나라의 옛 땅들의 항복을 받아오도록 시켰다.
그때 한나라 공족 출신인 장수 '한신'은 그 병사들과 함께 패공에게 귀의하여

"무관"으로 들어갔다. ] 

 

沛公立為漢王, 韓信從入漢中, 乃說漢王曰:「 項王王諸將近地, 而王獨遠居此,

此左遷也.   士卒皆山東人, 跂而望歸, 及其鋒東鄉, 可以爭天下.」
(패공입위한왕, 한신종입한중, 내세한왕왈 : 「 항왕왕제장근지, 이왕독원거차,

차좌천야.  사졸개산동인, 기이망귀, 급기봉동향, 가이쟁천하. 」)

['패공'(유방)이 한왕에 봉해지자 '한신'은 다시 한왕을 따라 "한중"으로 들어갔다.  

'한신'이 한왕에게 유세하기를 : " 항왕은 제후들을 모두 출신지와 가까운 곳의

왕으로 삼고 오로지 대왕만 홀로 먼 곳인 이곳에 봉했습니다.  이것은 좌천입니다. 

우리를 따라온 사졸들은 모두 산동 출신이라  그들은 하나같이 발돋움하여

고향쪽을 바라보며 돌아가기를 바라고 있기 때문에 그들의 마음을 이용하여  

절호의 기회로 삼는다면 가히 천하를 다툴 수 있습니다. "라고 하였다.]  

 

漢王還定三秦, 乃許信為韓王, 先拜信為韓太尉, 將兵略韓地.    

項籍之封諸王皆就國, 韓王成以不從無功, 不遣就國, 更以為列侯.

及聞漢遣韓信略韓地, 乃令故項籍游吳時吳令鄭昌為韓王以距漢. 
(한왕환정삼진, 내허신위한왕, 선배신위한태위, 장병략한지.  
 

항적지봉제왕개취국, 한왕성이불종무공, 불견취국, 갱이위열후.

급문한견한신략한지, 내령고항적유오시오령정창위한왕이거한.)

['한중'에 있던 한왕(漢王)은 "관중"으로 돌아가 삼진을 평정하였다. 

'고조'(유방)는 즉시 '한신'을 한왕(韓王)으로 세우기로 하고 전에 먼저

한나라 태위의 신분으로 군사를 이끌고 나아가 한나라의 땅을 공략하라고 하였다.
'항적'(항우)은 제후들과 제장들을 모두 제후왕으로 봉하고 각기 자기나라로

부임하도록 했으나,  한왕 '성"만은 '항우'의 원정에 종군하지 않아 공을 세우지

못했음으로 한나라 땅으로 보내지 않고 왕의 신분에서 열후로 만들었다.

이와 더불어 한나라가 '한신'을 시켜 한나라 땅을 공략한다는 소식을 전해들은

'항우'는  옛날 자기가 "오군"에 있을 때 교류를 맺었던 "오군"의 수령 '정창'을

한왕으로 임명하여 "양성"을 한나라의 공격으로부터  막도록 하였다.]

 

漢二年, 韓信略定韓十餘城.  漢王至河南, 韓信急擊韓王昌陽城. 

昌降, 漢王乃立韓信為韓王, 常將韓兵從.  三年, 漢王出滎陽, 韓王信·周苛等守滎陽. 
(한이년, 한신략정한십여성.  한왕지하남, 한신급격한왕창양성.

창항, 한왕내입한신위한왕, 상장한병종.  삼년, 한왕출형양, 한왕신·주가등수형양.) 

[한왕 2년, '한신'이 한나라 땅을 공략하여 10여 개의 성을 평정했다.
'고조'가 "하남"에 이르자, '한신'은 맹렬하게 "양성"의 한왕 '정창'을 공격하였다.

'정창'이 견디지 못하고 '한신'에게 항복했다.  한왕(漢王)은 약속대로 '한신'을

한왕(韓王)으로 봉하자, 한나라 군사들은 변함없이 '한신'을 따르게 되었다.
한왕 3년,  한왕(漢王)이 "형양"을 떠나자, '한신'과 '주가' 등이

"형양"을 '항우'의 공격으로부터 지켰다.] 

 

及楚敗滎陽, 信降楚, 已而得亡, 復歸漢, 漢復立以為韓王, 竟從擊破項籍, 天下定.   

五年春, 遂與剖符為韓王, 王潁川.
(급초패형양, 신항초, 이이득망, 부귀한, 한복입이위한왕, 경종격파항적, 천하정.    
 

오년춘, 수여부부위한왕, 왕영천.)

[그러나 초나라가 재차 공격하여 "형양"을 함락시키자 '한신'은 초나라에 항복했다가

기회를 보아 도망쳐 한나라에 돌아왔으며, 한왕(漢王)은 다시 '한신'을

한왕(韓王)으로 세우고, 마침내 '해하'에서 '항적'을 격파하고 천하를 안정시켰다.
한왕 5년 봄, 한왕(漢王)은 '한신'에게 부절을 내리고 왕도를 "영천"에 두게 하였다.]
 

 

明年春, 上以韓信材武, 所王北近鞏· 洛, 南迫宛· 葉, 東有淮陽,  

皆天下勁兵處, 乃詔徙韓王信王太原以北, 備御胡, 都晉陽.
(명년춘, 상이한신재무, 소왕북근공· 락, 남박완· 섭, 동유회양, 
 

개천하경병처, 내조사한왕신왕태원이북, 비어호, 도진양.)

[다음 해 봄, '한신'이 군사의 일에 재능이 있고 항상 자기를 따라다니며

싸움에 능할 뿐만 아니라, 북으로는 "공현"과 "낙읍", 남으로는 "완"과 "섭",

동으로는 "회양"이 가까이 있어 이 지역은 천하의 강병들과 정예병들이 모여 있는

곳임을 걱정한 한왕(漢王)은 조서를 내려 '한신'의 봉읍을 "태원" 이북으로

옮기게 하고 오랑캐의 침입을 막기 위해 도읍을 "진양"으로 정하였다.] 

 

信上書曰:「國被邊, 匈奴數入, 晉陽去塞遠, 請治馬邑. 」 上許之, 信乃徙治馬邑.   

秋, 匈奴冒頓大圍信, 信數使使胡求和解.
(신상서왈 : 「 국피변, 흉노수입, 진양거새원, 청치마읍. 」  상허지, 신내사치마읍.  
 

추, 흉노모돈대위신, 신수사사호구화해.) 

['한신'은 서신을 한왕(漢王)에게 올려 이르기를 : " 저의 봉국은 흉노와의 변경에

접해 있어, 흉노가 변경을 수시로 범하고 있으나, 변경에 있는 요새와 "진양"과는

너무 멀어 효과적으로 대처할 수 없으니, 청컨대 저의 도읍지를 "마읍"으로 옮겨

다스릴 수 있도록 해주시기 바랍니다. "라고 하자. 
한왕(漢王)이 이를 허락하자, '한신'은 곧바로 도읍지를 "마읍"으로 옮겨 다스렸다.
그해 가을 흉노의 선우 '모돈'이 대군을 이끌고 쳐들어와 '한신'의 "마읍"을 포위하자,
 

'한신'은 여러 번 사자를 오랑캐 진영으로 보내 화해를 청하였다.] 

 

漢發兵救之, 疑信數閒使, 有二心, 使人責讓信.  

信恐誅, 因與匈奴約共攻漢, 反, 以馬邑降胡, 擊太原.
(한발병구지, 의신수한사, 유이심, 사인책양신.
 

신공주, 인여흉노약공공한, 반, 이마읍항호, 격태원.) 

[한나라 조정에서도 군사를 보내 '한신'을 구원하려고 하였지만,  '한신'이 자기

마음대로 사자를 오랑캐 진영으로 보내 화해를 청했다는 사실을 알게 되어, 

그가 두 마음을 품고 있지나 않은지 의심하고 사람을 보내 '한신'을 책망하였다. 

이에 '한신'은 주살되지 않을까 두려워 한 나머지 흉노와 동맹을 맺어
공동으로 한나라를 공격함으로 해서 한나라에 반기를 들었다.  
 

그리고 "마읍"을 오랑캐에게 넘겨주고 투항한 후에 군사를 "태원"으로 진격시켰다.] 

 

七年冬, 上自往擊, 破信軍銅鞮, 斬其將王喜.  信亡走匈奴.  

(與)其與白土人曼丘臣· 王黃等立趙苗裔趙利為王, 復收信敗散兵,

而與信及冒頓謀攻漢.
(칠년동, 상자왕격, 파신군동제, 참기장왕희.  신망주흉노.
 

(여)기여백토인만구신· 왕황등입조묘예조리위왕, 복수신패산병,

이여신급모돈모공한.) 

['고조' 7년 겨울, '고조'가 친히 원정길에 올라 '한신'의 군대를 "동제"에서 무찌르고, 

그의 장수 '왕희'의 목을 벴다. 싸움에서 패한 '한신'은 흉노로 도망쳤다.
그때 "백토현" 사람 '만구신'과 '왕황' 등이 조나라 왕족의 후예인 '조리'를 찾아

왕으로 세우고,  '한신'이 거느리다 뿔뿔히 흩어졌던 병사들을 다시 수습하여

'한신'과 흉노의 선우 '모돈'과 모의하여  한나라를 공격하려고 하였다.] 

  

匈奴仗左右賢王將萬餘騎與王黃等屯廣武以南, 至晉陽, 與漢兵戰, 漢大破之,

追至于離石, 復破之.  匈奴復聚兵樓煩西北, 漢令車騎擊破匈奴.
(흉노사좌우현왕장만여기여왕황등둔광무이남, 지진양, 여한병전, 한대파지,

추지우리석, 부파지.   흉노부취병루번서북, 한령거기격파흉노.)

[흉노는 좌우 현왕에게 기병 만여 기를 주어 '왕황' 등과 함께 "광무" 이남에

주둔하다가 "진양"에서 한군과 교전을 벌였으나, 한군은 싸움에세 크게 이기고

패주하는 흉노의 뒤를 추격하여 "이석"까지 쫓아가 다시 무찔렀다. 

패전을 거듭한 흉노는 "누번"서북에서 군사들을 다시 집결시켰으나, 

뒤쫓아온 한군의 수레부대와 기병의 공격으로 크게 패하였다. ] 

  

匈奴常敗走, 漢乘勝追北, 聞冒頓居代(上)谷, 高皇帝居晉陽, 使人視冒頓,  

還報曰 「 可擊 」.  上遂至平城.  上出白登, 匈奴騎圍上, 上乃使人厚油閼氏.
(흉노상패주, 한승승추북, 문모돈거대(상)곡, 고황제거진양, 사인시모돈, 
 

환보왈 「 가격 」.  상수지평성.  상출백등, 흉노기위상, 상내사인후유알씨.) 

[흉노는 매번 싸움에서 지고 후퇴만 하였다.  이에 승세를 탄 한군이 그 뒤를

북쪽 깊숙이 추격하여 선우 '모돈'이 "대곡"에 주둔하고 있다는 소식을 들었다.
"진양"에 머물고 있던 '고조'는 '유경'을 시켜 선우 '모돈'의 정황을 살펴보도록 하였고,
 

'유경'이 돌아와 '모돈'을 공격하면 이길 수 있다고 보고했다.

'고조'는 마침내 "평성"에 이르자, 매복해 있던 흉노군이 한군을 겹겹이 포위하였고,

'고조'는 수하들의 엄호를 받으며 결사적으로 혈로를 뚫고 나와 "평성" 동북쪽에

있는 "백등산"까지 퇴각하였다. 그런데 '모돈'이 40만 군사를 거느리고 

추격해 와서는 "백등산"까지 겹겹이 포위하였다. '고조'는 모사 '진평'에게 명해,

황금과 주옥들을 가지고  '모돈'의 알씨(흉노 왕후)를 찾아가서 

'모돈'이 한나라군을 풀어 주게끔 말해 달라고 사정하였다.] 

  

 閼氏乃說冒頓曰:「 今得漢地, 猶不能居;且兩主不相緱 」 

 居七日, 胡騎稍引去.  時天大霧, 漢使人往來, 胡不覺.
 (알씨내설모돈왈 : 「 금득한지, 유불능거 ; 차양주불상액 」
 

 거칠일, 호기초인거.  시천대무, 한사인왕래, 호불각.) 

 [알씨가 '모돈'에게 말하기를 : " 우리가 지금 한나라 땅을 점령한다고 해도

우리는 오랫동안 살 수가 없습니다 ; 또한 군주끼리는 상대방을 위험에 처하게

하지 않는 법입니다. "라고 하자.   

 '모돈'은 한군을 포위한지 7일 만에 서서히 포위를 풀고 퇴각하기 시작하였다.

그때 하늘에 큰 안개가 끼자 한나라 진영에서 사람을 시켜 왕래하도록

시험해본 결과, 흉노는 전혀 알아채지 못했다.] 

 

 護軍中尉陳平言上曰:「 胡者全兵, 請令彊弩傅兩矢外向, 徐行出圍. 」 

 入平城, 漢救兵亦到, 胡騎遂解去.  漢亦罷兵歸.  韓信為匈奴將兵往來擊邊.
 (호군중위진평언상왈 : 「 호자전병, 청령강노부양시외향, 서행출위. 」    
 

 입평성, 한구병역도, 호기수해거.  한역파병귀.  한신위흉노장병왕래격변.) 

 [그때 호군중위 있던 '진평'이 황제에게 말하기를 : " 흉노의 모든 병사들은

짧은 무기들을 잘 사용합니다. 청컨대 우리 한나라 군사들에게는 강한 쇠뇌를

소지하게 하여 그 쇠뇌를 힘껏 강하게 잡아 당겨 화살 2개 씩을 장전한 후

화살촉 방향을 밖으로 향하게 한 다음 서서히 이 포위망을 빠져나가라고

명하시기 바랍니다. "라고 하였다.  

'고조'의 한나라 군사들이 모두 포위망을 무사히 빠져나와 "평성"으로 들어가자,

때마침 한나라 구원병 역시 당도하여 흉노의 기병들도 마침내 모두 물러갔다.

 그러자 한나라 역시 군사를 거두어 들이고 철수하였다.    

 '한신'은 그 후에도 흉노의 군사들을 이끌고 한나라 변경을 빈번히 공격하였다.] 

 

 漢十年, 信令王黃等說誤陳豨.   十一年春, 故韓王信復與胡騎入居參合, 距漢.
 (한십년, 신령왕황등설오진희.   십일년춘, 고한왕신복여호기입거삼합, 거한.)

 [한'고조' 10년,  '한신'이 '왕황' 등을 '진희'에게 보내 모반하도록 선동하였다.
 한'고조' 11년 봄,  '한신'이 다시 흉노의 기병을 이끌고 "삼합"으로 진격하여

 주둔하면서, 한나라에 항거하였다.] 

 

 漢使柴將軍擊之, 遺信書曰:「 陛下寬仁, 諸侯雖有畔亡, 而復歸, 輒復故位號,

 不誅也.   大王所知.  今王以敗亡走胡, 非有大罪, 急自歸!」
 (한사시장군격지, 유신서왈 : 「 폐하관인, 제후수유반망, 이복귀, 첩복고위호,

 불주야.   대왕소지.  금왕이패망주호, 비유대죄, 급자귀 ! 」)

 [한나라에서 시장군을 보내 공격하도록 하자,  시장군이 '한신'에게 편지를 써서

 이르기를 : " 폐하께서는 관대하고 인자하셔서 비록 모반하고 도망친 제후들이

 다시 돌아오면, 그 즉시 옛날 작위와 봉호를 돌려주고 죽이지 않으셨소. 

 그 일은 한왕 자신도 잘 알고 있을 것이오.

 지금 한왕이 싸움에 패하여 흉노로 달아난다 해도 그렇게 큰 죄는 아닐 것이니, 

 빨리 한나라로 돌아오도록 하시오 !"라고 하였다.]  

 

 韓王信報曰:「 陛下擢仆起閭巷, 南面稱孤, 此仆之幸也.   滎陽之事, 仆不能死,

 囚於項籍, 此一罪也.  及寇攻馬邑, 仆不能堅守, 以城降之, 此二罪也.
 (한왕신보왈 : 「 폐하탁복기여항, 남면칭고, 차복지행야. 
형양지사, 복불능사,

 수어항적, 차일죄야.  급구공마읍, 복불능견수, 이성항지, 차이죄야. 

 ['한신'이 답장을 보내 이르기를 : " 폐하께서는 이 사람을 시골에서 발탁해 기용하여

 왕이 되게 하였소. 그것은 이 사람으로서는 큰 행운이었소. 

 그러나 "형양"의 싸움에서 이 사람은 싸우다가 죽지 못하고  

'항우'의 포로가 되어 항복하고 말았소.  그것이 나의 첫 번째 죄요. 
 마침내 흉노가 "마읍"을 공격하자, 이 사람은 성을 지킬 수 없어 항복하고 말았소. 

 그것이 두 번째 죄요. 

 

 今反為寇將兵, 與將軍爭一旦之命, 此三罪也.   夫種· 蠡無一罪, 身死亡;

 今仆有三罪於陛下, 而欲求活於世, 此伍子胥所以僨於吳也.
 (금반위구장병, 여장군쟁일단지명, 차삼죄야. 
부종· 려무일죄, 신사망 ;

 금복유삼죄어폐하, 이욕구활어세, 차오자서소이분어오야.

 [지금 한나라를 배반한 내가 적의 장수가 되어 흉노를 이끌고 '한왕'의 명을 받은

 장군과 조만간에 목숨을 걸고 싸우려고 하니 그것이 세 번째 죄인 것이오. 

 옛날 대부 '문종'과 '범려'가 한 가지의 죄도 저지르지 않았음에도

 한 사람은 죽고 한 사람은 도망쳐야 했었소.
 지금 이 사람은 폐하께 세 가지나 죄를 지었으면서 이 세상에서 살기를 바란다면,
 

 그것은 오나라에서 자결하여 세상을 떠난 '오자서'의 전철을 밟게 되는 일이오. 

  

今仆亡匿山谷閒, 旦暮乞貸蠻夷, 仆之思歸, 如痿人不忘起,

盲者不忘視也, 勢不可耳. 」   遂戰.  柴將軍屠參合, 斬韓王信.
(금복망익산곡한, 단모걸대만이, 복지사귀, 여위인불망기,

맹자불망시야, 세불가이. 」   수전.  시장군도삼합, 참한왕신.) 

 [지금 나는 도망나와 산속에서 도피 생활을하며 목숨을 부지하기 위해, 

 조석으로 오랑캐들에게 구걸하며 살고 있기에,  한나라에 돌아가려는 마음은,

 마치 앉은뱅이가 일어서기를 잊지 않고, 맹인이 밝은 빛을 보고 싶어 하는

 마음처럼 간절하오. 그러나 지금의 형세는 결코 내가 한나라로 돌아가고 싶은

 내 마음을 허락하지 않고 있소. "라고 하였다.  

 그리고 얼마 후에 양군이 교전에 들어갔다.  시장군은 "삼합"에 주둔하고 있던

 흉노병을 모두 죽이고 "한신"은 붙잡아 참수하였다.] 

 

 信之入匈奴, 與太子俱;及至穨當城, 生子, 因名曰穨當.  韓太子亦生子, 命曰嬰.
 (신지입흉노, 여태자구 ;  급지퇴당성, 생자,인명왈퇴당.  한태자역생자, 명왈영.)

 ['한신'이 흉노에 들어갔을때 태자도 함께 동행 했었다 ;

 그들 일행이 "퇴당성"에 이르렀을 때, 아들을 낳아 이름을 '퇴당'이라고 지었다.

 그리고 한 태자 또한 아들을 낳자 이름을 '영'이라 하였다.] 

  

 至孝文十四年, 穨當及嬰率其眾降漢.  漢封穨當為弓高侯, 嬰為襄城侯.     

 吳楚軍時, 弓高侯功冠諸將.  傳子至孫, 孫無子, 失侯.  嬰孫以不敬失侯.
 (지효문십사년, 퇴당급영솔기중강한.  한봉퇴당위궁고후, 영위양성후.  
 

 오초군시, 궁고후공관제장.  전자지손, 손무자, 실후.  영손이불경실후.) 

 [효문제 14년,  '퇴당'과 '한영'이 그의 무리들을 인솔하여 한나라에 항복하였다.   

  한나라는 '퇴당'을 궁고후에, '한영'은 양성후에 봉했다.
 '오초'가 란을 일으켰을 때, 궁고후의 공은 여러 장수들 중 으뜸이었다.  
 

 그의 작위는 손자에게까지 전해졌으나 손자는 후손이 없어 후의 작위를 잃었다.
 '한영'의 손자는 불경죄를 저질러 후의 작위를 잃었다.]
 

 

 穨當孽孫韓嫣, 貴幸, 名富顯於當世.  其弟說, 再封, 數稱將軍, 卒為案道侯.   

 子代, 歲餘坐法死.  後歲餘, 說孫曾拜為龍頟侯, 續說後.
 (퇴당얼손한언, 귀행, 명부현어당세.  기제열, 재봉, 수칭장군, 졸위안도후. 
 

 자대, 세여좌법사.  후세여,  열손증배위용액후, 속열후.)

 ['퇴당'의 서자 가운데 '한언'이라는 자손이 있었는데 한'무제'의 두터운 신임을 얻어

 운 좋게 높은 지위까지 올랐으며 당대에 명성과 부로 유명하였다.
 그 동생 '한열'은 도위로 '위청'의 흉노 공격에 참여하여 대승을 거두고

 후에 봉해졌으며  여러 차례 장군이 되었고 마침내 '안도후'가 되었다.
 그의 아들 '한대'가 후의 작위를 세습한지 1년여 만에 법에 연좌되어 죽었다.   
 

 그리고 다시 1년여 후에 '한열'의 손자 '한증'이 '용액후'에 봉해져

 '한열'의 후사를 이었다.] 

 

 盧綰者, 豐人也, 與高祖同里.  盧綰親與高祖太上皇相愛, 及生男, 高祖· 盧綰同日生,  

 里中持羊酒賀兩家.  及高祖· 盧綰壯, 俱學書, 又相愛也.
 (노관자, 풍인야, 여고조동리.  로관친여고조태상황상애, 급생남, 고조· 노관동일생, 
 

 리중지양주하양가.  급고조· 노관장, 구학서, 우상애야.)

 ['노관'은 "풍현" 출신으로 '고조'와 같은 동네에서 태어났다.  

 '노관'의 어버이와 '고조'의 '태상황'은 서로 친하게 지냈으며,

 같이 아들을 낳았는데, '고조'와 '노관'이 같은 날에 태어나자,

 동네 사람들이 양을 잡고 술을 내와 두 집안을 축하했다.   

 '고조'와 '노관'은 자라면서 함께 서당에 나가 공부를 하며 서로 친하게 지냈다.] 

 

 里中嘉兩家親相愛, 生子同日, 壯又相愛, 復賀兩家羊酒.   

 高祖為布衣時, 有吏事辟匿,  盧綰常隨出入上下. 

 及高祖初起沛, 盧綰以客從, 入漢中為將軍, 常侍中.
 (리중가양가친상애, 생자동일, 장우상애, 복하양가양주. 

 고조위포의시, 유리사피닉,  노관상수출입상하. 

 급고조초기패, 노관이객종, 입한중위장군, 상시중.)

 [동네 사람들은 두 집안이 서로 가깝게 지내며 아들을 같은 날 낳고, 두 아들이

 장성하면서 서로 친하게 지낸다고 하여 다시 양을 잡고 술을 내와 축하했다.

 '고조'가 포의로 지낼 때  '노관'은 관리의 눈을 피해 숨어 지내는 '고조'를 항상 곁에

 따라다니며 출입을 같이 했다. 마침내 고조가 처음 "패현"에서 군사를 일으키자

 '노관'은 객의 신분으로 따라다녔으며  "한중"에 들어갈 때는 장군이 되어

항상 '고조'의 곁에 머물며 시중을 들었다.] 

 

 從東擊項籍, 以太尉常從, 出入臥內, 衣被飲食賞賜, 群臣莫敢望,    

 雖蕭曹等, 特以事見禮, 至其親幸, 莫及盧綰.  綰封為長安侯.  長安, 故咸陽也.
 (종동격항적, 이태위상종, 출입와내, 의피음식상사, 군신막감망,   
 

 수소조등, 특이사견례, 지기친행, 막급로관.  관봉위장안후.  장안, 고함양야.) 

 ['노관'은 '고조'가 동쪽의 '항우'를 공격할 때는 태위의 직위를 갖고 항상

 따라다녔으며,  '고조'의 침실을 자유롭게 출입하고, 음식, 의복, 침구 등을 상으로

 하사받았음으로 군신들은 감히 눈을 들어 쳐다보지 못했고, 아무리 '소하'나

 '조참' 등이라 할지라도 '노관'을 대할 때는 특별한 예를 갖추어야 했다.

 '고조'와의 친밀함은 '조참'이나 '소하'도 '노관'에게는 미치지 못했다.  

 '고조'는 '노관'을 장안후에 봉하였다.  "장안"은 당시 도성 "함양"에 속해 있었다.] 

 

 漢五年冬, 以破項籍, 乃使盧綰別將, 與劉賈擊臨江王共尉, 破之. 

 七月還, 從擊燕王臧荼, 臧荼降.  高祖已定天下, 諸侯非劉氏而王者七人.
 (한오년동, 이파항적, 내사로관별장, 여류가격임강왕공위, 파지.
 

 칠월환, 종격연왕장도, 장도항.  고조이정천하, 제후비유씨이왕자칠인.)

 [한'고조' 5년 겨울,  '항우'를 격파한 '고조'는 '노관'을 별장으로 임명하여 '유가'와

 함께 임강왕 '공위'를 쳐부수게 하자,  '노관'과 '유가'는 충실히 임무를 수행하였다.
 이들은 7월 귀환하여 다시 연왕 '장도'를 공격하기 위해 출전하는

 '고조'를 따랐으며,  '장도'는 '노관'에게 항복하였다.

 '고조'가 천하를 이미 안정시켰을 때는 유씨가 아닌 제후왕으로 7명이 있었다.] 

 

 欲王盧綰, 為群臣觖望.  及虜臧荼, 迺下詔諸將相列侯, 擇羣臣有功者以為燕王. 

 群臣知上欲王盧綰, 皆言曰:「太尉長安侯盧綰常從平定天下, 功最多, 可王燕. 」

 詔許之.
 (욕왕로관, 위군신결망.  급로장도, 내하조제장상열후, 택군신유공자이위연왕.

 군신지상욕왕노관, 개언왈 : 「 태위장안후노관상종평정천하, 공최다, 가왕연. 」 

 조허지.)

 [그래서 '노관'을 제후왕으로 세우려고 했으나 군신들의 견해가 어떠한지 우려했다.  

 그래서 연왕 장도를 사로잡자,  즉시 장군과 재상및 열후에게 조서를 내려

 여러 군신들 중에 공이 높은 자를  택하여 연왕으로 세우라고 하였다.

 ​군신들은 '고조'가 '노관'을 왕으로 세우려는 뜻을 짐작하고 모두 말하기를 :

" 태위 장안후 '노관'은 폐하께서 천하를 평정하는데 항상 곁에서 수행하며,

그 공이 가장 큼으로 연왕으로 세우는 것이 마땅합니다.  "라고 하였다.  

그러자 '고조'는 조서를 내려 허락하였다.] 

 

 漢五年八月, 迺立虜綰為燕王.  諸侯王得幸莫如燕王.
 (한오년팔월, 내입로관위연왕.  제후왕득행막여연왕.) 

 [한'고조' 5년 8월,  비로소 '노관'을 연왕으로 세웠다. 

 제후왕들 중 연왕처럼 '고조'의 총애를 받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漢十一年秋, 陳豨反代地, 高祖如邯鄲擊豨兵, 燕王綰亦擊其東北. 

 當是時, 陳豨使王黃求救匈奴.  燕王綰亦使其臣張勝於匈奴, 言豨等軍破.
 (한십일년추, 진희반대지, 고조여감단격희병, 연왕관역격기동북.
 

 당시시, 진희사왕황구구흉노.  연왕관역사기신장승어흉노, 언희등군파.) 

 [한'고조' 11년 가을, 진희가 "대" 땅에서 반란을 일으키자, 

 '고조'가 "한단"으로 친히 출전하여  '진희'의 군대를 공격하고,

 연왕 '노관' 역시 '진희'의 군대를 동북쪽에서 공격하였다. 

 당시 '진희'는 '왕황'을 시켜 흉노에 구원을 청하고 있었다.
 연왕 '노관' 역시 그의 부하 '장승'을 흉노에 보내 '진희'의 군대를 무찌르는 데

 협조를 구했다.] 

 

 張勝至胡, 故燕王臧茶子衍出亡在胡, 見張勝曰:「 公所以重於燕者, 以習胡事也. 

 燕所以久存者,  以諸侯數反, 兵連不決也. 

 今公為燕欲急滅豨等, 豨等已盡, 次亦至燕, 公等亦且為虜矣.

 公何不令燕且緩陳豨而與胡和? 事寬, 得長王燕;即有漢急, 可以安國. 」
 (장승지호, 고연왕장다자연출망재호, 견장승왈 : 「 공소이중어연자, 이습호사야. 

 연소이구존자, 이제후수반,병연불결야. 

 금공위연욕급멸희등, 희등이진, 차역지연, 공등역차위로의.  

 공하불령연차완진희이여호화 ?  사관, 득장왕연 ; 즉유한급, 가이안국. 」 )  
 [장승이 흉노의 땅에 도착하자,  옛날 연왕이었던 '장도'의 아들 '연'이 흉노 땅에

 이미 도망쳐 와있었는데 그는 '장승'을 보고 말하기를 : " 공처럼 연나라에 중용된

 장군들은 흉노의 일을 잘 알고 있을 것입니다.

 연나라는 북쪽의 변방에 있기 때문에 나라를 오래 보존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제후들이 여러 번 반란을 일으킨 결과 그 재앙이 계속 이어져 지금까지

 끊이지 않고 있습니다. 지금 공께서는 연나라를 위해 '진희'를 급히 멸하려고

 하십니다. 그런데 '진희' 등이 없어지게 되면 그 다음 차례는 역시 연나라가

 될 것이며, 공 등도 역시 한나라의 포로가 되고 말것입니다. 공께서는 어찌하여

 연나라에 령을 내려 '진희'에 대한 공격을 늦추고 흉노와 화친하지 않으십니까 ?
 대사를 넓게 보신다면 이 일이 나라를 오래 보존하는 길이라는 사실을 아실 수

 있습니다. 즉 한나라를 위급하게 만들면 연나라를 안정시킬 수 있습니다."하였다.]  

 

 張勝以為然, 豨私令匈奴助豨等擊燕. 

 燕王綰疑張勝與胡反, 上書請族張勝.  勝還, 具道所以為者. 

 燕王寤, 迺詐論它人, 脫勝家屬, 使得為匈奴閒, 而陰使范齊之陳豨所,

 欲令久亡, 連兵勿決.
 (장승이위연, 진사령흉노조희등격연. 

 연왕관의장승여호반, 상서청족장승.  승환, 구도소이위자.

 연왕오, 내사논타인, 탈승가속, 사득위흉노한, 이음사범제지진희소,

 욕령구망, 연병물결.)

 ['장승'은 그 말이 옳다고 생각하여 '진희'가 모르게 흉노에게 '진희'를 도와 연나라를

 공격하도록 시켰다.  '장승'이 연나라를 배반하고 흉노와 결탁하였다고 의심한

 '노관'은 '고조'에게 상서를 올려 '장승'의  가족들을 멸족시켜야한다고 하였다.

얼마 후에 '장승'이 돌아와 자기의 뜻을 '노관'에게 자세히 설명했다.

연왕은 그제서야 깨닫고 그를 위해 다시 상소를 올려 '장승'의 가족들을 죽은 사람을

대신하여 죽였다고 거짓으로 고하고 석방시켜 흉노와의 변경에 땅을 주어 살게 했다.

 이어서 '범제'를 몰래 '진희'의 병영으로 보내 오랫동안 달아나 있으면서

 군사를 연합해 승패가 결정되지 못하게 했다.]

 

 漢十二年, 東擊黥布, 豨常將兵居代, 漢使樊噲擊斬豨. 

 其裨將降, 言燕王綰使范齊通計謀於豨所.  高祖使使召盧綰, 綰稱病.

 上又使辟陽侯審食其· 御史大夫趙堯往迎燕王, 因驗問左右.  綰愈恐, 閉匿.
 (한십이년, 동격경포, 희상장병거대, 한사번쾌격참희.
 

 기비장항, 언연왕관사범제통계모어희소.  고조사사소로관, 관칭병.

 상우사벽양후심이기· 어사대부조요왕영연왕, 인험문좌우.  관유공, 폐익.)

 [한'고조' 12년,  '고조'가 동쪽의 '경포'를 토벌할 때 '진희'는 여전히 군사를 이끌고

 "대"땅을 근거지로 삼아 항거하자, 한나라는 '번쾌'를 시켜 '진희'를 공격하여 베어

 버렸다. 그러자 '진희'의 부하 장수가 항복하여 연왕 '노관'이 '범제'를 시켜

 '진희'와 꾸민 음모를 폭로하였다.
 '고조'는 사자를 보내 '노관'을 소환했으나 '노관'은 병을 핑계 삼아 오지 않았다.

 '고조'는 벽양후 '심이기'와 어사대부 '조요'를 '노관'에게 사자로 보내

 '노관'의 측근들을 불러 심문했다.  

 '노관'은 더욱 두려워하며 문을 잠그고 숨어 나타나지 않았다.]

 

謂其幸臣曰:「非劉氏而王, 獨我與長沙耳.  往年春, 漢族淮陰, 夏, 誅彭越, 皆呂后計. 

今上病, 屬任呂后.  呂后婦人, 專欲以事誅異姓王者及大功臣. 」 乃遂稱病不行.
(위기행신왈 : 「 비류씨이왕, 독아여장사이.  왕년춘, 한족회음, 하, 주팽월, 개여후계.
 

금상병, 속임여후.  여후부인, 전욕이사주이성왕자급대공신. 」  내수칭병불행.) 

[그리고 그의 총신에게 말하기를 : " 유씨가 아닌 자로써 왕이 된 자는 오직

장사왕과 나 뿐이다. 작년 봄, 회음후 '한신'을 멸족시키고,

여름에는 '팽월'을 주살한 일은 모두 여후의 계략이었다.

지금 '고조'는 병이 났으므로 모든 일을 여후에게 일임하였다. 여후라는 여인은

다른 성의 제후왕과 공신들을 주살하려고 혈안이 되어 있다."라고 하였다.   

그리고는 병이 들었다고 핑계를 대고 소환에 불응하였다.] 

 

 其左右皆亡匿.  語頗泄, 辟陽侯聞之, 歸具報上, 上益怒. 

 又得匈奴降者, 降者言張勝亡在匈奴, 為燕使.  於是上曰:「 盧綰果反矣!」

 使樊噲擊燕.  燕王綰悉將其宮人家屬騎數千居長城下, 侯伺, 幸上病愈, 自入謝.
 (기좌우개망익.  어파설, 벽양후문지, 귀구보상, 상익노.
 

 우득흉노항자, 항자언장승망재흉노, 위연사.  어시상왈 : 「 노관과반의 ! 」

 사번쾌격연.  연왕관실장기궁인가속기수천거장성하, 후사, 행상병유, 자입사.)

 [그러자 '노관'의 측근들도 모두 도망치거나 숨어버렸다. 

 그 동안 '노관'과 '진희' 사이에  알려졌던 일들을   '심이기'가 듣고 돌아와서

 그 사실을 '고조'에게 보고하자,  '고조'는 더욱 노했다.  

 또 흉노에서 항복해온 사람 중에 어떤 사람이 '장승'은 한나라에서 도망쳐

 흉노에 머물며, 연나라의 사신 역할을 하고 있다고 말하였다. 

 '고조'는 '번쾌'로 하여금 연나라를 토벌하도록 하였다. 연왕 '노관'이 그의 장수들과

궁인들 및 가솔등 수천명의 기병들을 이끌고 장성 아래로 내려와 '고조'의 안부를

묻고 다행스럽게 '고조'의 병이 낫게 되면, 스스로 입조해 사죄를 하겠다고 하였다.]

 

 四月, 高祖崩, 盧綰遂將其眾亡入匈奴, 匈奴以為東胡盧王.   

 綰為蠻夷所侵奪, 常思復歸.  居歲餘, 死胡中.
 (사월, 고조붕, 로관수장기중망입흉노, 흉노이위동호노왕.
 

 관위만이소침탈, 상사복귀.  거세여, 사호중.) 

 [그해 4월,  '고조'가 죽자 '노관'은 그의 무리들을 이끌고 흉노로 도망쳤다.   

흉노는 '노관'을 몽골고원의 동쪽에서 유목생활을 하는 "동호"지방의 노왕에

임명하였다. "동호"에 머물던 '노관'의 무리들은 쉴 사이 없이 오랑캐의 침략과

약탈을 받아, 항상 한나라로 돌아올 생각을 갖고 있었다. 

'노관'은 1년여 후에 "동호"에서 죽었다. ] 

 

高后時, 盧綰妻子亡降漢, 會高后病, 不能見, 舍燕邸, 為欲置酒見之.   

高祖竟崩, 不得見.  盧綰妻亦病死. 

孝景中六年, 盧綰孫他之, 以東胡王降, 封為亞谷侯.  
 (고후시, 노관처자망항한, 회고후병, 불능견, 사연저, 위욕치주견지.  
 

 고조경붕, 불득견.  노관처역병사. 

 효경중육년, 노관손타지, 이동호왕항, 봉위아곡후.)

 [고후 때 '노관'의 처자가 흉노에서 도망쳐 한나라에 항복하였다. 

 그때 고후가 병중에 있었기 때문에 접견을 하지 못하고 연왕을 위해 지어 두었던

 관사에 머물게 하고, 병이 낫게 되면 주연을 베풀어 만나려고 하였다.

그러나 '고조'가 결국 죽었기 때문에 만나지 못하였다. 

 '노관'의 처도 역시 병으로 죽고 말았다.

 효'경제' 6년, '노관'의 손자 '노타지'가 동호왕의 신분으로 투항하자, 

 한나라는 그를 '아곡후'에 봉했다.] 
 

 

 ​陳豨者, 宛朐人也, 不知始所以得從.
 (진희자, 완구인야, 불지시소이득종. ) 
 [
'진희'는 "완구현" 출신이다. 

 그가 언제부터 '고조'를 따라 다니기 시작했는지는 알 수 없다. ] 

 

 及高祖七年冬, 韓王信反, 入匈奴, 上至平城還, 乃封豨為列侯,  

 以趙相國將監趙· 代邊兵, 邊兵皆屬焉.
 (급고조칠년동, 한왕신반, 입흉노, 상지평성환, 내봉희위열후,

 이조상국장감조· 대변병, 변병개속언.)

 [마침내 '고조' 7년 겨울,  한왕 '한신'이 '고조'를 배반하고 흉노로 들어가자,  

 '고조'는 "평성"까지 진격했다고 돌아오면서 '진회'를 열후에 봉하고,
 조나라 재상의 신분으로 조나라와 "대"지역 변경의 군사를 그에게 지휘하도록 하자, 
 

 조나라와 "대"지역 변경의 군사들은 모두 '진희'에게 속하게 되었다.] 

 

 豨常告歸過趙, 趙相周昌見豨賓客隨之者千餘乘, 邯鄲官舍皆滿.   

 豨所以待賓客布衣交, 皆出客下.  豨還之代, 周昌乃求入見.
 (희상고귀과조, 조상주창견희빈객수지자천여승, 감단관사개만.
 

 희소이대빈객포의교, 개출객하.  희환지대, 주창내구입현.) 

 ['진희'가 조나라 땅을 통과할 때마다 조나라 재상 '주창'은 '진희'를 따르는 빈객들이

 천여 승의 수레를 이끌고 들어와 "한단"의 관사를 가득 메우는 광경을 보았다.
 '진희'는 빈객들이나, 벼슬을 하지 않을때 사귄 친구들을 막론하고 모두에게

 몸을 굽혀 예로써 정중하게 대했다. '진희'가 다시 "대" 지역으로 돌아가자,

 '주창'은 입궐하여 '고조'를 뵐 수 있도록 청하였다.] 

  

 見上, 具言豨賓客盛甚, 擅兵於外數歲, 恐有變.   

 上乃令人覆案豨客居代者財物諸不法事, 多連引豨. 

 豨恐, 陰令客通使王黃· 曼丘臣所.
 (견상, 구언희빈객성심, 천병어외수세, 공유변.   
 

 상내령인복안희객거대자재물제불법사, 다연인희. 

 희공, 음령객통사왕황· 만구신소.) 

 ['고조'를 접견한 '주창'이 '진희'의 빈객들이 너무 많음을 고하고, 그가 군권을 갖고

 몇 년 동안 변경에 머물면서 혹시라도 변란을 일으키지 않을까 걱정된다고 하였다.
 '고조'는 사람을 시켜 '진희'의 빈객으로 "대" 지역에 머물고 있는 자들이 불법적으로

 재물을 어떻게 모았는지에 대해서 조사하라고 명했다.

 그 결과 많은 사람들이 '진희'와 연관되어 있었다.  

 '진희'는 이 사실을 알고 두려워하며 몰래 사람을 보내

 '왕황'및 '만구신'과 내통하였다.] 

 

 及高祖十年七月, 太上皇崩, 使人召豨, 豨稱病甚. 

 九月, 遂與王黃等反, 自立為代王, 劫略趙· 代.
 (급고조십년칠월, 태상황붕, 사인소희, 희칭병심. 

 구월, 수여왕황등반, 자입위대왕, 겁략조· 대.)  
 [마침내 '고조' 10년 7월,  태상황이 죽자,  사자를 보내 '진희'를 불러 들였으나,
 

 '진희'는 중병을 핑계대면서 부름에 응하지 않았다.  

 9월,  '진희'는 '왕황' 등과 함께 반란을 일으켜 스스로 대왕의 자리에 올라 

 조나라와 "대" 땅을 침략하여 빼앗았다.] 

  

 上聞,乃赦趙· 代吏人為豨所詿誤劫略者, 皆赦之. 

 上自往, 至邯鄲, 喜曰:「 豨不南據漳水, 北守邯鄲, 知其無能為也. 」
 (상문, 내사조· 대리인위희소괘오겁략자, 개사지.  
 

 상자왕, 지한단, 희왈 : 「 희불남거장수, 배수한단, 지기무능위야. 」) 

 ['고조'는 이 소식을 듣고 '진희'에게 속아 땅을 빼앗긴 조나라와 "대" 지역 관리들의

 죄를 모두 사면하였다.  '고조'는 몸소 정벌에 나서 한단에 이르자 기뻐하며

 말하기를 : " '진희'가 남쪽으로 장수에 의지하여  "한단"을 지키지 않았으니,

 그가 무능한 자라는 것을 알겠도다 !"라고 하였다.]  

 

 趙相奏斬常山守· 尉, 曰:「 常山二十五城, 豨反, 亡其二十城. 」 

 上問曰:「 守· 尉反乎?」  對曰:「 不反. 」  上曰:「 是力不足也. 」
 (조상주참상산수· 위, 왈 : 「 상산이십오성, 희반, 망기이십성. 」 
 

 상문왈 : 「 수· 위반호 ? 」   대왈 : 「 불반. 」   상왈 : 「 시력부족야. 」)

[조나라 재상이 "상산"의 태수와 '위'를 참수해야한다고 아뢰며 말하기를 :

 " "상산"의 25개 성 중에서 '진희'의 반군에 20개를 잃었습니다. "라고 하였다.
 '고조'가 묻기를 :  " 태수와 '위'가 반란에 참가했는가 ? "라고 하자. 
 

 재상이 대답하기를 : " 반란에 참가하지 않았습니다. "라고 하였다.
 '고조'가 말하기를 :  " 그것은 바로 힘이 부족해서다. "라고 하였다.] 
 

 

 赦之, 復以為常山守· 尉.  上問周昌曰:「 趙亦有壯士可令將者乎?」   

 對曰:「有四人. 」  四人謁, 上謾罵曰:「豎子能為將乎?」 四人慚伏. 

 上封之各千戶, 以為將.
 (사지, 복이위상산수· 위.  상문주창왈 : 「 조역유장사가령장자호 ? 」     
 

 대왈 : 「 유사인. 」  사인알, 상만매왈 : 「 수자능위장호 ? 」  사인참복. 

 상봉지각천호, 이위장.) 

 [그리고는 "상산"의 태수와 '위'를 사면하였다.  '고조'가 '주창'에게 묻기를 :

 " 조나라에도 물론 장수로 삼을 만한 장사가 있지 않겠는가 ?"하자.
 '주창'이 대답하기를 : " 천거할 만한 사람이 4명이 있습니다. "라고 하였다.    
 

 이윽고 네 사람이 들어와 '고조'를 알현하였으며, '고조'는 일부러 네 사람을

 꾸짖으며 말하기를 : " 어린 아이들을 어찌 장수로 삼는단 말인가 ? "라고 하자.
 네 사람이 부끄러운 마음으로 땅에 엎드렸다. 

 '고조'는 네 사람을 각각 천호에 봉하고 장군으로 삼았다. ] 

 

 左右諫曰:「 從入蜀· 漢, 伐楚, 功未遍行, 今此何功而封?」 

 上曰:「 非若所知! 陳豨反, 邯鄲以北皆豨有, 吾以羽檄徵天下兵, 未有至者,

 今唯獨邯鄲中兵耳. 吾胡愛四千戶封四人, 不以慰趙子弟!」
 (좌우간왈 : 「 종입촉· 한, 벌초, 공미편행, 금차하공이봉 ? 」

 상왈 : 「 「비약소지 ! 진희반, 한단이북개희유, 오이우격징천하병, 미유지자,

 금유독감단중병이.  오호애사천호봉사인, 불이위조자제 ! 」)

[측근에 있던 사람들이 간하기를 :  " 그들은 폐하께서 촉나라와 한나라로

들어갈 때나, 초나라를 정벌할 때도 그들의 행적은 아무런 공도 세우지 못했는데,

 지금 무슨 공으로 그들을 장군에 봉하십니까 ? "라고 하자.

 ​'고조'가 대답하기를 : " 그대들이 알 수 있는 일이 아니다 !  '진희'가 한 번 반기를

들자,  "한단" 이북의 땅은 모두 그의 소유가 되었다. 그래서 내가 급보를 띄어

천하에 군사를 징집했지만, 아무도 달려오지 않고, 지금은 오로지 "한단" 성안의

군사들만 내가 부릴 수 있을 뿐이다.  내가 어찌 네 사람에게 4천 호의 식읍을 아껴

 조나라 자제들을 위로해 주지 못한단 말인가 ! "하였다.]  

  

 皆曰:「 善. 」  於是上曰:「 陳豨將誰?」  曰:「 王黃· 曼丘臣, 皆故賈人. 」 

 上曰:「 吾知之矣. 」  乃各以千金購黃· 臣等.
 (개왈 : 「 선. 」  어시상왈 : 「 진희장수 ? 」  왈 : 「 왕황· 만구신, 개고가인. 」   
 

 상왈 : 「 오지지의. 」  내각이천금구황· 신등.)

 [주위의 모든 사람들이 말하기를 : " 훌륭한 생각이십니다. "라고 하였다. 

 이어서 황제가 묻기를 : " '진희'의 장수들은 누구인가 ? "라고 하자.

사람들이 말하기를 : " '왕황'과 '만구신'으로 모두 예전에 장사꾼 이었습니다. "하였다.
 '고조'가 말하기를 : " 내가 그들을 찾을 수 있는 방법을 알겠다. "라고 하며, 
 

 '고조'는 '왕황'과 '만구신' 등에게 각각 천금의 현상금을 걸었다.] 

  

 十一年冬, 漢兵擊斬陳豨將侯敞· 王黃於曲逆下, 破豨將張春於聊城, 斬首萬餘.   

 太尉勃入定太原· 代地.
 (십일년동, 한병격참진희장후창· 왕황어곡역하, 파희장장춘어료성, 참수만여. 

 태위발입정태원· 대지.) 

[한'고조' 11년 겨울,  한군이 '진희'의 장수 '후창'과 '왕황'을 "곡역" 아래에서

참수하고, '진희'의 장수 '장춘'을 "요성"에서 무찌르고 그 군사 1만여 명의 목을

베었다. 한편 태위 '주발'은 "태원"과 "대" 지역을 평정하였다.] 

 

 十二月, 上自擊東垣, 東垣不下, 卒罵上;東垣降, 卒罵者斬之, 不罵者黥之. 

 更命東垣為真定.  王黃· 曼丘臣其麾下受購賞之, 皆生得, 以故陳豨軍遂敗.
 (십이월, 상자격동원, 동원불하, 졸매상 : 동원항, 졸매자참지, 불매자경지.    
 

 경명동원위진정.  왕황· 만구신기휘하수구상지, 개생득, 이고진희군수패.)

 [12월,  '고조'는 몸소 군사를 이끌고 진격하여 "동원"을 공격했으나

 함락시킬 수 없었다.  그때 "동원"의 군졸들이 '고조'에게 욕설을 퍼부었다 ;

 얼마 후에 "동원"이 항복하자, '고조'에게 욕을 했던 군졸들은 모두 참수하고,

 욕을 하지 않지 않은 군졸들은 경형에 처하고, "동원"의 이름을 "진정"으로

 바꾸게 했다. '왕황'과 '만구신'은 '고조'가 내걸은 상금을 탐낸 부하들에게 의해

 사로잡혔다.  이리하여 '진희'의 군대는 마침내 싸움에서 지고 말았다.] 

 

 上還至洛陽.  上曰:「 代居常山北, 趙乃從山南有之, 遠. 」   

 乃立子恒為代王, 都中都, 代· 鴈門皆屬代.

 高祖十二年冬, 樊噲軍卒追斬豨於靈丘.
 (상환지낙양.   상왈 : 「 대거상산북, 조내종산남유지, 원.」 

 내입자긍위대왕, 도중도, 대· 안문개속대.

 고조십이년동, 번쾌군졸추참희어령구.) 

 [그리고 '고조'는 낙양으로 돌아왔다.  '고조'가 말하기를 : " "대" 지역은 "상산"의

 북쪽에 있고,  조나라는 곧 "태항산"의 남쪽에 있어 너무 멀리 떨어져 있다."하고,
 그의 아들 '유항'을 "대" 지역의 왕에 봉하여 도읍을 "중도"에 두게 하고 "대" 지역과

 "안문" 등의  모든 땅을 "대"에 속하게 하였다.

 한'고조' 12년 겨울,  '번쾌'가 군사를 이끌고 '진희'를 추격하여

 "영구"에서 그의 목을 베었다.] 

 

太史公曰:

韓信· 盧綰非素積德累善之世, 徼一時權變, 以詐力成功, 遭漢初定, 故得列地, 

南面稱孤.  內見疑彊大, 外倚蠻貊以為援, 是以日疏自危, 事窮智困, 卒赴匈奴,

豈不哀哉!  ​陳豨, 梁人, 其少時數稱慕魏公子;

及將軍守邊, 招致賓客而下士, 名聲過實.

周昌疑之, 疵瑕頗起, 懼禍及身, 邪人進說, 遂陷無道.  於戲悲夫!

 夫計之生孰成敗於人也深矣! 

 (태사공왈 :

 한신· 로관비소적덕루선지세, 요일시권변, 이사력성공, 조한초정, 고득열지,   

 남면칭고.  내견의강대, 외의만맥이위원, 시이일소자위, 사궁지곤, 졸부흉노,

 개불애재 ! 진희, 량인, 기소시수칭모위공자 ;

 급장군수변, 초치빈객이하사, 명성과실.
 주창의지, 자하파기, 구화급신, 사인진설, 수함무도.  오호비부 ! 

 부계지생숙성패어인야심의 ! )

['태사공'이 말하기를 : " '한신'과 '노관'은 한평생 덕과 선행을 쌓지 않은 적이 없으며  

 한번 기회가 주어지면 그때 그때 상황에 따라 사술을 이용하여 성공하였고,
 한나라 초기에 천하가 안정되자 제후의 반열에 올라 봉지를 받으므로서

 제후왕이 되었다. 내적으로는 강대한 모습을 보여 시기심을 불러일으키고,

 외적으로는 야만적인 오랑캐

 무리들에게 원조를 청해 날이 갈수록 황실과 소원해져 스스로 화를 불러들였다.
 일이 곤궁한 처지에 빠지자 지혜가 흐트러져 마침내 흉노로 도망쳤으니

 어찌 슬픈 일이 아니겠는가 ! 

 '진희'는 양나라 사람으로 어렸을 때부터 위공자 '무기'의 책략을 칭송하며

 그를 본받으려고 하였다 ;  이윽고 그가 변경을 지키는 장수가 되자, 

 평소에 알고 지내던 빈객들과 지위가 낮은 선비들을 자기쪽으로  불러 들여

 후한 대우를 하였으나 그 명성은 실제보다 부풀려졌다.

 '주창'의 의심으로 상당히 많은 잘못을 저질렀음이 밝혀져 비난이 들끓자,  

 그 화가 자기 몸에 미치게 되었음을 두려워한 찰라에 간사한 무리들이 접근하여

 달래니, 결국 무도한 길에 빠지게 된 것이다.  아 ! 이 어찌 슬프지 아니한가 !
 무릇 생사가 달린 계책의 성패여부는 모두 사람에게 달려 있으니
 

 어찌 그 도리가 심오하다고 하지 않겠는가 !  ]

 

 

 

※  原 文 .    【 中國哲學書電子化計劃 .   筆寫本 】

 

                                

 

    原 文   飜 譯 者        德庤 / 李   斗 振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