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9.劉敬 叔孫通列傳

第 三十九. 劉敬叔孫通列傳(유경 숙손통열전)

덕치/이두진 2023. 11. 26. 15:21

 

​     第 三十九.   劉敬叔孫通列傳(유경 숙손통열전)

劉敬者, 齊人也. 漢五年, 戍隴西, 過洛陽, 高帝在焉.

婁敬脫輓輅, 衣其羊裘, 見齊人虞將軍曰:「臣願見上言便事.」

虞將軍欲與之鮮衣, 婁敬曰:「臣衣帛, 衣帛見;衣褐, 衣褐見:終不敢易衣.」

於是虞將軍入言上. 上召入見, 賜食.

[유경(劉敬)은 제나라 사람이다. 한 5년 기원전 202년, 농서(隴西)로 군역을 나가면서

낙양을 지나가다가 그때 마침 고제도 그곳에 머물고 있다는 사실을 알았다.

루경(婁敬)은 몰고가던 수레의 횡목을 풀어 놓고 양가죽으로 지은 갖옷을 입은 채

제나라 출신 우장군(虞將軍)을 만나 말하기를 :
" 제가 황제를 뵙고 국가에 이로운 일을 말씀드리고 싶습니다.”라고 하였다 
우장군이 루경에게 새 옷으로 갈아입기를 원하자, 

루경이 말하기를 : " 제가 비단옷을 입고 있으면 비단옷을 입은 채 뵐 것이고, 

베옷을 입고 있으면 베옷을 입은 채로 뵐 것입니다.

절대 옷을 바꿔 입지 않겠습니다.”라고 하였다.]

 

於是虞將軍入言上. 上召入見, 賜食. 

已而問婁敬,婁敬說曰:「陛下都洛陽,豈欲與周室比隆哉?」上曰:「然.」

[이에 우장군이 황제가 있는 안으로 들어가 고했다. 

황제는 루경을 불러 접견을 허락하고 음식을 하사했다.

그리고 황제는 루경에게 무엇 때문에 만나려고 하는지 물었다. 

루경이 오히려 황제에게 묻기를 : " 폐하께서는 도읍을 낙양에 정하려고 하심은

주(周)왕실과 융성함을 견주기 위해서입니까?"라고 하자. 

황제가 대답하기를 : "그렇소."라고 하였다. 

婁敬曰:「陛下取天下與周室異. 周之先自后稷, 堯封之邰, 積德累善十有餘世.

公劉避桀居豳.  太王以狄伐故,去豳,杖馬箠居岐,國人爭隨之.  

及文王為西伯,斷虞芮之訟,始受命,呂望、伯夷自海濱來歸之. 

武王伐紂,不期而會孟津之上八百諸侯,皆曰紂可伐矣,遂滅殷.

[루경이 말하기를: " 폐하께서는 천하를 취하신 방법은 주왕조와는 다릅니다. 

주나라의 선조는 후직(后稷)1)으로 요임금이 태(邰)에 봉했습니다. 

10여 대를 지나면서 선행과 덕을 쌓다가 공류(公劉)2) 대에 이르러 걸왕(桀王)을 피해

빈(豳)3)으로 이주했습니다. 후에 다시 태왕(太王)4) 대가 되어 적족(狄族)의 침입으로

빈을 버리고 말채찍을 휘둘러 기산 밑으로 이주하자, 백성들이 그 뒤를 따랐습니다.

이윽고 문왕은 서백(西伯)이 되어 우후(虞侯)와 예후(芮侯)의 송사를 해결해 줌으로써 

천명을 받기 시작하자, 강태공 여상(呂尙)과 백이 등이 동해의 바닷가에서 달려와 

귀의했습니다. 문왕의 아들 무왕이 마침내 은주(殷紂)를 정벌하기 위해 군사를 일으키니

약속하지 않았음에도 주왕을 정벌하기 위해 맹진의 회맹에 나온 8백의 제후들이

결국 은나라를 멸했습니다.

 

成王即位,周公之屬傅相焉,乃營成周洛邑,以此為天下之中也,

諸侯四方納貢職,道裏均矣,有德則易以王,無德則易以亡. 

凡居此者,欲令周務以德致人,不欲依阻險,令後世驕奢以虐民也.

及周之盛時,天下和洽,四夷鄉風,慕義懷德,附離而并事天子, 不屯一卒,

不戰一士,八夷大國之民莫不賓服,效其貢職. 

及周之衰也,分而為兩,天下莫朝,周不能制也.  非其德薄也,而形勢弱也. 

[어린 성왕(成王)이 즉위하자 주공과 같이 어진 사람들이 성왕의 스승이나 재상이 되어

보필하고 이어서 낙읍()에 성주()를 세웠는데, 이곳은 천하의 중심이라

사방의 제후들이 공물을 바치기에 거리가 비슷하여  덕이 있는 자는 왕 노릇을 하기 쉽고,

덕이 없는 사람은 망하기도 쉽습니다. 그런 낙읍에 별도의 성을 쌓아 머물렀던 이유는

주나라 왕들로 하여금 힘써 덕을 베풀어 백성들을 감화시키기 위해서이지

험준한 지형을 믿고 후손들이 교만과 사치로 백성을 학대하는 것을 바라지 않아서입니다.  

주나라가 흥성할 때는 천하가 화합했고 사방의 오랑캐들 까지 교화되어 의를 숭상하고

덕을 그리워하며 일치단결하여 천자를 함께 받들었습니다.

한사람의 병사도 주둔시키지 않고, 한사람의 병사도 싸우지 않고서도 8방 대국의

민족들 가운데 복종하고, 주나라에 조공과 부역을 바치지 않는 나라가 없었습니다. 

마침내 주나라가 쇠퇴하자 서주와 동주로 분열되었고 천하에서 입조하는 제후들도 없었으며,

주나라도 그들을 제어할 수 없게 되었습니다.  

그것은 덕이 박해서가 아니라 형세가 쇠약해졌기 때문입니다.

 

今陛下起豐沛, 收卒三千人, 以之徑往而卷蜀漢,定三秦,與項羽戰滎陽,

爭成皋之口,  大戰七十,小戰四十,使天下之民肝腦涂地, 父子暴骨中野,

不可勝數, 哭泣之聲未絕, 傷痍者未起, 而欲比隆於成康之時, 臣竊以為不侔也. 

且夫秦地被山帶河,四塞以為固,卒然有急,百萬之眾可具也.

[지금 폐하께서는 풍현()의 패읍()에서 봉기하여 3천 명의 군사를 모아 진격해

촉(), 한()을 석권하시고, 다시 관중으로 나와 삼진을 평정했으며 항우와 형양에서 

전투를 벌이고, 성고(成皐)의 요충지를 장악하기 위해 70차례의 큰 전투를 하시고

40차례의 작은 전투를 치르셔서 천하의 백성들 간과 골수가 길바닥을 흥건히 적셨습니다. 

 들판에 딩굴고 있는 아버지와 아들의 해골은 이후 헤아릴 수 없이 많아 그것을 슬퍼하는 

통곡소리는 끊이지 않고, 부상자들은 아직 침상에서 일어나지 못하고 있음에도

오히려 주나라가 가장 융성해진 성왕()과 강왕() 때와  비교하려고 하십니다.

신이 가만히 생각해보건대 두 나라와는 비교할 수 없습니다.

게다가 진나라의 땅은 산과 하수를 두르고 있으며 사면이 요새로 견고하여 갑작스럽게

위급한 사태가 벌어진다 해도 충분히 1백만의 군신을 갖출 수 있습니다.

 

因秦之故, 資甚美膏腴之地, 此所謂天府者也.  陛下入關而都之, 山東雖亂,

秦之故地可全而有也.  夫與人鬬,不搤其亢,拊其背,未能全其勝也.

今陛下入關而都,案秦之故地,此亦搤天下之亢而拊其背也.」 

[진나라의 견고한 산천을 이어받고 참으로 아름답고 기름진 땅을 소유할 수 있으니

이야 말로 하늘이 내려준 부고라고 할 수 있습니다.  

폐하께서 관중으로 들어가 도읍을 삼게 되면 산동에서 비록 난이 일어날 지라도

진나라 땅만은 험한 산천에 의지하면 온전히 보전할 수 있습니다.

무릇 다른 사람과 싸울 때 상대방의 목을 조르고 등을 치지 않고서는 싸움을 온전히 

이길 수 없습니다. 지금 폐하께서는 관중으로 들어가 도읍을 정하시어 진나라의 옛 땅을

차지하시는 것이 바로 천하의 목을 조르고 등을 치는 것이옵니다."라고 하였다.]

 

高帝問群臣,群臣皆山東人,爭言周王數百年,秦二世即亡,不如都周.

上疑未能決. 及留侯明言入關便,即日車駕西都關中. 

於是上曰:「本言都秦地者婁敬,『婁』者乃『劉』也.」

賜姓劉氏,拜為郎中,號為奉春君.

[고조가 신하들에게 의견을 묻자 고향이 모두 산동 출신의 신하들은 낙양은 수백 년 동안의

주나라 왕들이 도읍했으며 관중에 도읍한 진나라는 2세 만에 망했다고 하면서 

주나라를 본받아 낙양에 도읍을 정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황제는 결국 마음을 정하지 못하고 있다가 유후(幽侯) 장량(張良)이 관중으로 도읍을

정해야 한다는 단호한 말을 듣고 그날로 거마를 움직여 관중으로 들어가 도읍을 정했다. 

후에 황제가 말하기를 : " 원래 진나라 옛 땅에 도읍을 정하자고 말한 사람은 루경이다. 

루(婁)는 유(劉)와 발음이 비슷하다."라고 하였다. 황제가 루경에게 유씨의 성을 내리며

랑중(郎中)에 임명하고 봉춘군(奉春君)이라는 봉호를 내렸다.]

 

漢七年,韓王信反,高帝自往擊之. 

至晉陽,聞信與匈奴欲共擊漢,上大怒,使人使匈奴. 

匈奴匿其壯士肥牛馬,但見老弱及羸畜.  使者十輩來,皆言匈奴可擊. 

上使劉敬復往使匈奴,還報曰:「兩國相擊,此宜夸矜見所長.

今臣往,徒見羸瘠老弱,此必欲見短,伏奇兵以爭利. 愚以為匈奴不可擊也.」

[한 7년(기원전 200년), 한왕 신(信)이 반란을 일으키자 고조가 몸소 출전했다.

고조의 행렬이 진양(晉陽)에 이르렀을 때 한왕 신이 흉노와 힘을 합쳐 한나라를 공격하려고

한다는 첩보를 받은 고제가 대노하여 사자를 흉노에 보내 정탐해오도록 시켰다.

흉노가 건장한 군사들과 살찐 말들을 숨겨놓고 노약자와 비루먹은 가축들만을 보여주었다.
사자들이 10명이나 흉노진영에 다녀왔음에도 한결같이 흉노를 칠 수 있다고 말했다. 
 

황제가 다시 유경을 흉노에 사자로 보냈다. 유경이 돌아와 보고하기를 : 

“ 두 나라가 서로 공격하는데 이는 마땅히 자신들의 장점을 부풀려 보여주는 법입니다. 

지금 신이 가보니 보이는 것이라고는 비루먹은 가축과 노약자들 뿐이라 

이는 반드시 단점을 드러내고 정예병을 숨겨두었다가 승리를 얻으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흉노를 공격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하옵니다.”라고 하였다.]

 

是時漢兵已踰句注, 二十餘萬兵已業行. 

上怒, 罵劉敬曰:「齊虜!以口舌得官今, 乃妄言沮吾軍.」

械系敬廣武.  遂往,至平城,匈奴果出奇兵圍高帝白登,七日然後得解.

高帝至廣武, 赦敬,

曰:「吾不用公言, 以困平城. 吾皆已斬前使十輩言可擊者矣.」

乃封敬二千戶,為關內侯,號為建信侯.  高帝罷平城歸,韓王信亡入胡. 

[이때는 이미 한나라 군사 20만 명은 구주산6)을 넘어 흉노 땅으로 진군하고 있었다. 

황제가 노하여 유경에게 꾸짖으며 말하기를 : " 제나라의 포로 놈아! 세 치 혓바닥으로

벼슬을 얻더니 이제는 망언으로 우리 군사들의 진군을 막는구나!"라고 하며, 

유경을 족쇄와 수갑을 채워서 광무(廣武)에 가두었다.

고조는 계속 진군하여 평성(平城)7)에 이르렀을 때,  흉노는 과연 정예병을 내보내

백등산에서 고조를 포위했는데, 7일 만에 간신히 포위망에서 빠져나올  수 있었다.

고제가 광무로 돌아와 유경을 사면하며 말하기를 :" 내가 공의 말을 듣지 않아 평성에서

곤경에 처했소. 짐에게 흉노를 공격해도 좋다고 말한 10여 명의 사신을모두 참수했소.”하며, 

유경을 2천 호에 봉하고 관내후의 작위와 함께 건신후(建信侯)라는 봉호를 내렸다.
고제는 평성에서 철군하여 장안으로 돌아왔고, 한왕 신은 도망쳐 흉노로 들어갔다.]

 

當是時,冒頓為單于,兵彊,控弦三十萬,數苦北邊. 上患之,問劉敬. 

劉敬曰:「天下初定,士卒罷於兵,未可以武服也. 

冒頓殺父代立,妻群母,以力為威,未可以仁義說也. 

獨可以計久遠子孫為臣耳,然恐陛下不能為.」 

上曰:「誠可,何為不能!顧為柰何?」

[그 당시 묵돌이 선우()가 되었는데, 군사가 강해 활 잘 쏘는 군사 30만 명을 거느리고,

자주 북방 변경을 괴롭혔다. 황제는 이 일을 근심하며 유경에게 대책을 물었다. 

유경이 대답하기를 : " 천하가 비로소 안정되었으나 군사들이 전투에 지쳐있음으로

무력으로는 흉노를 복종시킬 수 없습니다.  묵돌은 그의 부친을 시해하고 스스로

선우의 자리에 올라 부친이 거느린 여러 부인들을 취하고 힘으로써 위엄을 세우고 있으니

인의로써 설복시킬 수 없습니다. 오직 그의 자손들을 영원히 한나라의 신하로 

만들 수 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폐하께서 그렇게 하시지 못할까 두렵습니다."라고 하였다. 

황제가 묻기를 : " 진실로 그와 같은 일이 가능하다면 어찌 할 수 없겠소?

어떻게 해야 하오?”라고 하자.]

 

劉敬對曰:「陛下誠能以適長公主妻之,厚奉遺之,彼知漢適女送厚,

蠻夷必慕以為閼氏,生子必為太子.  代單于. 何者? 貪漢重幣.

陛下以歲時漢所餘彼所鮮數問遺,因使辯士風諭以禮節.  冒頓在,固為子婿;

死,則外孫為單于. 豈嘗聞外孫敢與大父抗禮者哉? 兵可無戰以漸臣也.

若陛下不能遣長公主,而令宗室及後宮詐稱公主,彼亦知, 不肯貴近,無益也.」 

[유경이 대답하기를 : " 폐하께서 만일 적실의 장공주를 묵돌의 부인으로 보내면서

후한 예물을 내려주신다면, 한나라의 적실 공주와 후한 예물을 본 묵돌은 비록 오랑캐지만

필시 공주를 사모하여 선우의 정비인 연지로 삼고 아들을 낳으면 태자로 삼아 자신의 뒤를

잇게 할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는 한나라의 예물을 탐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폐하께서는 매년 때가 되면 한나라에서는 남아도는 것이나 흉노에서는 부족한 물건들을

수시로 보내 위문을 하고 동시에 변사를 보내 그들에게 예절을 가르치게 하십시오.

묵돌이 살아있을 때는 사위가 되고, 그가 죽을 경우에는 외손이 선우가 되는 것입니다.

저는 아직까지 외손자가 감히 외조부에게 결례를 했다는 일을 들어보지 못했습니다.  

이렇게 되면 군사를 내어 싸우지 않고도 점차적으로 신하로 삼을 수 있습니다.  

만일 폐하께서 맏공주를 보내실 수 없어 종실과 후궁의 딸을 공주라고 속여 보내신다면

언젠가는 그들도 알게 되어 귀하게 여기며 곁에 두지 않을 것이니

아무런 이익이 없게 됩니다."라고 하였다.]

 

高帝曰:「善.」 欲遣長公主.  

呂后日夜泣,曰:「妾唯太子、一女,柰何棄之匈奴!」

上竟不能遣長公主,而取家人子名為長公主,妻單于.  使劉敬往結和親約.

 [황제가 말하기를 : "좋은 계책이오!"라고 하며, 고조는 장공주를 시집보내려고 하였다.

그러자 여후는 날마다 눈물을 흘리며 말하기를 : " 첩에게는 태자와 딸 하나밖에 없는데,

어찌하여 흉노에 버리시려 하십니까?”라고 하자. 

황제는 결국 장공주를 흉노로 보내지 못하고 종실의 자녀 중에서 한 명을 골라

장공주로 꾸며 선우의 부인으로 보냈다. 유경이 사자로 가서 혼인으로 화친을 맺도록 했다.]

 

劉敬從匈奴來,因言「匈奴河南白羊、樓煩王,去長安近者七百里,

輕騎一日一夜可以至秦中.  秦中新破,少民,地肥饒,可益實.  

夫諸侯初起時,非齊諸田,楚昭、屈、景莫能興.  今陛下雖都關中,實少人.

北近胡寇,東有六國之族,宗彊,一日有變,陛下亦未得高枕而臥也. 

臣願陛下徙齊諸田,楚昭、屈、景,燕、趙、韓、魏後,及豪桀名家居關中. 

無事,可以備胡;諸侯有變,亦足率以東伐。此彊本弱末之術也.」 

上曰:「善.」乃使劉敬徙所言關中十餘萬口.

[사자의 임무를 띠고 흉노를 다녀온 유경이 보고하기를 : " 흉노의 백양왕과 루번왕이

살고 있는 하투9) 지역은 장안에서 7백리 밖에 떨어져 있지 않아 경기병으로는

하루 낮과 밤이면 진중(秦中)10)에 당도할 수 있습니다. 진중은 최근에 전화를 입어

백성들은 적지만 땅은 비옥하여 백성들을 이주시켜 더 채울 수 있습니다.

무릇 제후들이 처음 일어설 때 제나라의 여러 전씨들과 초나라의 소(昭), 굴(屈), 경(景) 씨

등의 협조가 없었다면 성공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지금 폐하께서는 비록 관중에

도읍을 정하시고 계시지만 실제적으로는 인구가 적습니다. 

북쪽으로는 흉노의 외적과 가깝고 동쪽으로는 세력이 강한 6국의 종족들이 여전히

남아있어 어느 날이라도 변란이 일어난다면 폐하께서는 베개를 높이 베고 침상에 누워

잠을 편히 주무시지 못할 것입니다. 바로옵건대 폐하께서는 제나라 지역의 여러 전씨들과

초나라의 소(昭), 굴(屈), 경(景) 등의 세 종족과, 연(燕), 조(趙), 한(韓). 위(魏) 등의 후예들과

호걸 및 명가를 관중으로 이주시키십시오.

그렇게 하여 나라에 일이 없을 때는 흉노의 공격에 대비할 수 있고,

제후들이 난을 일으켰을 때는 충분한 병력으로 동쪽으로 나아가 토벌할 수 있습니다.

이는 나라의 근본을 강하게 하게 말단을 약화시키는 방법입니다."라고 하자. 

황제가 대답하기를 : " 훌륭한 계책이오."라고 하며, 

이에 유경을 보내어 그가 말한 대로 10만여 명을관중에 이주해 살게 하였다.]

 

 

叔孫通者. 薛人也.  秦時以文學徵, 待詔博士.  數歲, 陳勝起山東, 使者以聞,

二世召博士諸儒生問曰:「楚戍卒攻蘄入陳,於公如何?」 

博士諸生三十餘人前曰:「人臣無將, 將即反, 罪死無赦.  願陛下急發兵擊之.」

[숙손통은 설() 땅 사람이다. 진나라 있을 때는 학문이 뛰어나 박사()에 제수한다는

조서를 기다리고 있었다.  몇 년이 지나 진승이 산동에서 일어나자, 

사자로 부터 그 소식을 전해들은 이세 황제는 박사들과 여러 유생들을 불러 묻기를 :

" 초나라 국경을 지키던 병사들이 기현(羈縣)11)을 공격하고 진성으로 들어갔다고 하는데

여러 공들은 어떻게 생각하오?"라고 하자.  30여 명에 이르는 박사와 유생들이

이세황제 앞에 나서서 말하기를 : " 남의 신하된 자는 자의적으로 군사를 거느릴 수 없습니다.

군사를 거느렸다 함은 즉 반란을 일으켰다는 말입니다. 용서받지 못할 죽을 죄에 해당하오니 

폐하께서는 즉시 군사를 내어 그들을 토벌하시기 바랍니다."라고 하였다.] 

 

二世怒, 作色.  叔孫通前曰:

「諸生言皆非也. 夫天下合為一家, 毀郡縣城, 鑠其兵, 示天下不復用.

且明主在其上,法令具於下,使人人奉職,四方輻輳,安敢有反者! 

此特群盜鼠竊狗盜耳,何足置之齒牙閒.  郡守尉今捕論,何足憂.」 

二世喜曰:「善.」

[이세황제는 이 말을 듣고 노하며 안색이 변했다. 숙손통이 앞으로 나아가 말하기를 : 
" 여러 유생들의 말은 옳지 않습니다. 무릇 천하가 통일되어 한집이 되니,

각 군(郡)과 (현縣)은 성을 허물었으며, 무기를 녹여 다시는 사용하지 않겠다고 천하에

그 뜻을 밝혔습니다. 또한 위로는 명철한 황제가 계시고 아래로는 법령이 구비되어 있어

사람마다 본연의 직무를 충실히 이행하여 바퀴살이 바퀴를 향해 쏟아지듯이 사방에서

사람들이 물밀듯이 모여들고 있는데 어찌 감히 반란을 일으키는 자가  있겠습니까?

이는 단순한 도적으로 쥐새끼가 곡식을 훔치고 개가 물건을 물어가는 일에 불과할 뿐입니다.  

어찌 입 밖으로 낼 수 있는 가치 있는 이야기이겠습니까?

군수()나 군위에게 령을 내려 추포하면 되오니  걱정하실 필요 없습니다."라고 하자,  

이세황제가 기뻐하며 말하기를 : " 옳은 말이오."라고 하였다.]  

 

盡問諸生, 諸生或言反, 或言盜. 於是二世令御史案諸生言反者下吏, 非所宜言.

諸言盜者皆罷之.乃賜叔孫通帛二十匹,衣一襲,拜為博士.

叔孫通已出宮,反舍,諸生曰:「先生何言之諛也?」 

通曰:「公不知也,我幾不脫於虎口!」乃亡去,之薛,薛已降楚矣.

及項梁之薛,叔孫通從之.  敗於定陶,從懷王. 

懷王為義帝,徙長沙,叔孫通留事項王.

[여러 유생들에게도 물어보니 어떤 유생은 반란을 일으킨 것이라 하고,

어떤 유생은 도적에 불과하다고 했다.  이에 이세황제는 어사에게 명하여 여러유생 중에서

반란을 일으켰다고 말한 자들을 붙잡아 형리에게 넘겨 조사하게 했으니 

그 까닭은 그들이 한 말은 옳지 않기 때문이라고 생각해서였다.

여러 유생들 중 도적이라고 말한 자들은 모두 용서하여 그대로 돌아가게 했다.

이어서 이세황제는 숙손통에게 비단 20필과 의복 한 벌을 하사하고 박사에 제수했다.  

숙손통이 궁전을 나와 숙사로 돌아오자 유생들이 묻기를 :

“선생은 어찌해 아첨하는 말을 하셨습니까?”라고 하자.   

숙손통이 대답하기를 :" 여러분들은 모르오, 나는 거의 호랑이의 입에서 벗어나지

못할 뻔했소.”라고 하였다. 그는 즉시 도망쳐 설(薛)로 돌아갔다.

그때 설은 항복하여 이미 초나라의 땅이 되어 있었다.

이윽고 항량()이 설에 이르자 숙손통은 그를 따랐다. 

후에 항량이 정도(定陶)에서 패하자 회왕()을 따랐다.

회왕이 의제(義帝)가 되어 장사로 거처를 옮길 때 숙손통은 남아서 항우를 섬겼다.]

 

漢二年,漢王從五諸侯入彭城,叔孫通降漢王.  漢王敗而西,因竟從漢. 

叔孫通儒服,漢王憎之;乃變其服,服短衣,楚製,漢王喜. 

叔孫通之降漢,從儒生弟子百餘人,然通無所言進,專言諸故群盜壯士進之.

​[한 2년(기원전 205년), 한왕이 다섯 제후들과 함께 팽성에 입성하자,

숙손통은 한왕에게 항복했다.  그리고 얼마 후에 한왕이 항왕의 반격을 받아 싸움에서 지고

서쪽으로 후퇴할 때 숙손통도 그 뒤를 쫓아 끝까지 한나라를 따랐다.

한왕은 유생의 복장을 하고 다니는 숙손통을 매우 싫어했다.

그래서 그는 그의 복장을 바꿔 초나라 풍의 짧은 의복을 입고 다녔다. 한왕이 매우 기뻐했다. 

숙손통이 한나라에 항복했을 때 그를 따르던 유생들과 제자들이 100여 명에 달했다.

그러나 숙손통은 그들 중 한 사람도 천거하지 않고 오로지 옛날 도적들 무리에 있었던

장사들만 천거했다.]

 

弟子皆竊罵曰:「事先生數歲, 幸得從降漢, 今不能進臣等, 專言大猾, 何也?」 

叔孫通聞之,乃謂曰:「漢王方蒙矢石爭天下,諸生寧能鬬乎?

故先言斬將搴旗之士.  諸生且待我, 我不忘矣.」 漢王拜叔孫通為博士, 號稷嗣君.

[제자들이 몰래 숙손통을 욕하며 말하기를 : " 선생을 모신지 몇 해가 지나 다행히

한나라에 항복하여 따르게 되었다. 그런데 지금 저희들을 천거하지 않고 오로지

매우 교활한 자만을 천거하니 무슨 까닭인가?”라고 하자.

숙손통이 전해듣고 그들에게 말하기를 : " 한왕은 지금 화살과 돌에 맞을 각오하고

천하를 다투고 있는데, 너희들은 그런 싸움을 할 수 있는가? 

그래서 먼저 적장의 목을 베고 적기를 빼앗을 수 있는 사람들을 천거했다.

너희들은 나를 믿고 조금만 기다려라. 내가 잊지 않고 있다."라고 하였다. 
한왕은 숙손통을 박사에 임명하고 직사군(稷嗣君)이라는 호칭을 내렸다.]

 

漢五年,已并天下,諸侯共尊漢王為皇帝於定陶,叔孫通就其儀號. 

高帝悉去秦苛儀法, 為簡易.  群臣飲酒爭功, 醉或妄呼, 拔劍擊柱, 高帝患之.  

叔孫通知上益厭之也,說上曰:「夫儒者難與進取,可與守成.

臣願徵魯諸生,與臣弟子共起朝儀.」

[한 5년(기원전 202년), 천하가 통일된 뒤 제후들은 정도에서 한왕을 황제로 추대했는데,

숙손통이 의식과 호칭을 제정했다. 고조는 지나치게 번잡한 진의 의례를 모두 없애고

간편하고 쉽게 했다.  그러자 신하들은 술을 마시면 공을 다투었고 취하면 큰 소리를 지르고,

칼을 뽑아들고 기둥을 치기도 했다.  고조는 이를 걱정했다. 

숙손통은 황제가 이러한 것을 매우 싫어한다는 것을 알고 황제에게 이렇게 말하기를 :
" 무릇 유생들과 함께 나아가 천하를 얻기는 어렵지만, 함께 얻어진 천하를 지키는 일을

할 수 있습니다.  신에게는 노나라에서 불러올 유생들이 있으니, 

신의 제자들과 조정의 의례를 일으켜보고 싶습니다."하였다.] 

 

高帝曰:「得無難乎?」 

叔孫通曰:「五帝異樂,三王不同禮.  禮者,因時世人情為之節文者也.

故夏、殷、周之禮所因損益可知者, 謂不相復也.  臣願頗采古禮與秦儀雜就之.」 

上曰:「可試為之, 令易知, 度吾所能行為之.」 於是叔孫通使徵魯諸生三十餘人.

[고제가 묻기를 : " 만드는데 어렵지 않겠소?."라고 하자. 

숙손통이 대답하기를 :" 오제는 각기 다른 음악을 즐겼고 삼왕의 예는 서로 달랐습니다.

예란 시대와 사람들의 정서에 따라 략하게 하기도 하고 화려하게도 합니다.

그러므로 하, 은, 주 삼대의 예는 빼기도 하고 더하기도 해서 서로 중복되지 않았음을

알 수 있습니다. 신은 원컨대 고대의 예법과 진나라의 의례를 취해 한나라의 의례를

만들고자 합니다."라고 하였다. 고제가 말하기를 : " 그럼 시험삼아 만들어 보시오.

그러나 사람들이 쉽게 알게 하고 내가 능히 행할 수 있게 하시오."라고 하였다. 
그래서 고제는 숙손통을 시켜 노나라에서 유생들 30여 명을 데려오게 했다.]

 

魯有兩生不肯行,曰:「公所事者且十主,皆面諛以得親貴. 

今天下初定,死者未葬,傷者未起,又欲起禮樂.  

禮樂所由起,積德百年而後可興也.  吾不忍為公所為.  公所為不合古,吾不行. 

公往矣,無汙我!」 叔孫通笑曰:「若真鄙儒也,不知時變.」 

[노나라의 유생 두 사람이 가고 싶지 않다면서 말하기를 : " 공께서는 지금까지 10명의

주인을 섬겼소. 그들 앞에서 아첨하여 친해지고 귀하게 되었소. 

지금 천하는 가까스로 안정되었지만 죽은 사람은 미처 장례를 치르지 못하고 

부상자는 자리에서 일어나지 못하고 있소. 그런 와중에 예악을 다시 일으키려고

하고 있는데 예악이라는 것은 100년 동안 덕을 쌓은 이후에 일으킬 수 있소. 

그래서 우리는 공이 하려는 일을 따를 수 없소.

공이 하려는 일은 옛 법에 맞지 않으니 우리는 가지 않겠소. 

공은 가시고 우리를 더럽히지 마시오!"라고 하자, 
숙손통이 웃으면서 말하기를 : " 당신들은 참으로 고루한 선비들이구려.

시대의 변화를 모르고 있구려.”라고 하였다.]

 

遂與所徵三十人西, 及上左右為學者與其弟子百餘人為綿蕞野外.

習之月餘, 叔孫通曰:「上可試觀.」 

上既觀,使行禮,曰:「吾能為此.」乃令群臣習肄,會十月.

​[숙손통은 노나라에서 뽑은 30명의 유생들과 함께 장안으로 들어가 황제 곁에서

학문을 하는 사람들 및 제자들을 합쳐 100여 명과 함께 야외에 새끼줄을 치고

풀로 띠를 엮어 의례를 제정하는 장소로 삼았다.  

한 달여 동안 예식을 강습하고 숙손통이 황제에게 고하기를 :

" 폐하께서 시험 삼아 한번 살펴보십시오."라고 하자.
황제가 유생들이 행한 의례를 보고 말하기를 : " 이 정도라면 내가 능히 행할 수 있겠소."

라고 하였다.  이어서 군신들에게 의례를 익히도록 해서 10월에 모이기로 했다.]

 

漢七年, 長樂宮成, 諸侯群臣皆朝十月.  儀:先平明, 謁者治禮, 引以次入殿門,

廷中陳車騎步卒衛宮,設兵張旗志.  傳言「趨」.  殿下郎中俠陛,陛數百人.

功臣列侯諸將軍軍吏以次陳西方,東鄉;文官丞相以下陳東方,西鄉. 

大行設九賓,臚傳.  於是皇帝輦出房,百官執職傳警,

引諸侯王以下至吏六百石以次奉賀.

[한 7년, 장락궁이 준공되어 제후와 군신들이 모두 10월 신년조회에 참가했다.

의례는 이러했다.  날이 밝기 전에 알자가 예를 주관하는데 조회에 참석하는 자들은

차례로 전당의 문을 통해 들어왔다.  궁정의 뜰에는 거마, 기병, 보졸 등을 시켜

궁궐을 호위하게 하고 각종 병장기와 깃발과 휘장을 세웠다.  

알자가 ‘뛰어 가!’라는 구호를 외쳤다. 전당 밑에는 낭중들이 계단을 끼고 계단마다

수백 명씩 도열했다. 공신들과 제후, 장군들, 군리들이 순서에 따라 서쪽에 도열하여

동쪽을 바라보고 ; 승상 이하 문관들은 동쪽에서 서쪽을 바라보며 도열했다.

대행(大行)12)은 9명의 의례를 담당하는 관리를 데리고 황제의 명령을 전달했다.  

이윽고 황제가 봉련(鳳輦)을 타고 임하자 백관들은 기치를 들어 정숙한 자세를 취하고

제후왕 이하 봉록이 6백석인 관리까지 인도되어 차례대로 황제께 하례를 올렸다.]

 

自諸侯王以下莫不振恐肅敬.  至禮畢,復置法酒.  

諸侍坐殿上皆伏抑首,以尊卑次起上壽.

觴九行, 謁者言「罷酒」御史執法舉不如儀者輒引去. 竟朝置酒, 無敢讙譁失禮者. 

於是高帝曰:「吾乃今日知為皇帝之貴也.」乃拜叔孫通為太常, 賜金五百斤.

叔孫通因進曰:「諸弟子儒生隨臣久矣,與臣共為儀,願陛下官之.」

高帝悉以為郎.  叔孫通出,皆以五百斤金賜諸生.  

諸生乃皆喜曰:「叔孫生誠聖人也,知當世之要務.」

[이렇게 하자, 제후왕 이하 그 누구도 두려움에 떨며 숙연한 자세로 공경하지 않는 사람은

없었다.  이윽고 의례가 끝나고 주연이 시작되었다. 전당 위의 여러 시자들이 모두 엎드려 

머리를 조아리고 있다가 존비의 순서에 따라 일어나 황제에게 축수했다.

술잔이 아홉 번 오고 간 뒤에 알자가 ‘주연이 끝났다!’라고 외쳤다.

어사가 법을 집행하여 의식을 위반하는 자들은 재빨리 회장에서 데리고 나갔다. 

마침내 정식의 의례를 끝내고 주연을 열어 즐겼는데 아무도 감히 시끄럽게 굴어

예를 범하는 자는 한 사람도 없었다.

이에 고제가 말하기를 : " 내가 오늘에서야 황제가 귀하다는 사실을 알았다."라고 하였다. 
그 즉시 황제는 숙손통을 태상(太常)13)에 임명하고 오백 금을 상으로 하사했다.
숙손통이 기회를 틈타 황제에게 진언하기를 : "신을 따라다닌 지 이미 오래인 제자들이

신과 의례를 제정했습니다. 원컨대 폐하께서 그들에게 관직을 내려주십시오."라고 하였다. 

고제는 그들 모두를 랑(郞)으로 임명했다.

궁에서 나온 숙손통은 상으로 받은 오백금을 모두 그의 제자들과 유생들에게 나누어 주었다.

여러 유생들이 모두 기뻐하며 말하기를 : " 숙손 선생님은 참으로 성인이시다.

당대의 중요한 일을 다 알고 계신다.”라고 하였다.]

 

漢九年,高帝徙叔孫通為太子太傅.

漢十二年,高祖欲以趙王如意易太子,叔孫通諫上曰:

「昔者晉獻公以驪姬之故廢太子,立奚齊,晉國亂者數十年,為天下笑.  

秦以不蚤定扶蘇,令趙高得以詐立胡亥,自使滅祀,此陛下所親見.  

今太子仁孝,天下皆聞之;呂后與陛下攻苦食啖,其可背哉! 

陛下必欲廢適而立少,臣願先伏誅,以頸血汙地.」

한 9년(기원전 198년), 고제가 숙손통을 태자태부(太子太傅)로 삼았다.  

한 12년(기원전 195년), 고제가 태자를 바꿔 조왕 여의(如意)를 새로 세우려고 하자,

숙손통이 간언하기를 : " 옛날 진헌공이 여희(驪姬)로 인해 태자 신생(申生)를 폐하고

해제(奚齊)를 세워 진나라는 수십 년간 혼란에 빠져 천하의 웃음거리가 되었습니다.

또한 진나라가 일찍 부소(扶蘇)를 태자로 정하지 않아 조고로 하여금 사술을 부려

호해를 황제로 세우게 하여 결국 제사마저 끊어지게 만들었습니다. 

그 일은 폐하께서 직접 보신 일입니다.  지금 태자가 어질고 효성스럽다는 사실은

천하가 모두 들어 알고 있습니다. 또한 여후께서는 폐하를 따라다니면서

고생을 참고 견디며 보잘 것 없는 음식을 먹으며 살아왔는데 어찌 버릴 수 있겠습니까?

폐하께서 곡 적자를 폐하고 어린 아들을 세우시려고 하신다면 바라건대 신을 먼저

이십시오. 저의 목에서 흘리는 피로 이곳을 더럽히겠습니다."라고 하자.] 

 

高帝曰:「公罷矣,吾直戲耳.」

叔孫通曰:「太子天下本,本一搖天下振動,柰何以天下為戲!」

高帝曰:「吾聽公言.」

及上置酒, 見留侯所招客從太子入見, 上乃遂無易太子志矣.

高帝崩,孝惠即位,乃謂叔孫生曰:「先帝園陵寢廟,群臣莫(能)習.」

徙為太常,定宗廟儀法. 及稍定漢諸儀法,皆叔孫生為太常所論箸也.

[고제가 말하기를 :" 공은 그만 하시오. 내가 농담 한 번 해본 것뿐이오."라고 하자. 
숙손통이 말하기를 :" 태자는 천하의 근본입니다. 근본이 한 번 흔들이면 천하가 진동합니다.  

어찌 천하를 두고 농담을 할 수 있단 말입니까? "라고 하자. 

고제가 말하기를 :" 내가 공의 말대로 하리라!"라고 하였다. 

리고 얼마 후에 황제는 연회를 열어 유후 장량이 빈객으로 초빙한

상산사호(商山四皓:동원공, 기리계, 하황공, 리 선생)가 태자를 따르는 모습을 보고

태자를 바꾸려는 생각을  그만두었다.  그 해에 고제가 죽고,

그 뒤를 이은 효혜제가 숙손통을 불러 말하기를 : " 선제의 원릉(園陵)과 침묘(寢廟)를

참배하는 의례를 신하들이 잘 모르고 있습니다.”라고 하였다.
혜제는 숙손통을 태상으로 다시 옮기도록 해서 종묘에 대한 의례를 제정하도록 했다. 

시간이 감에 따라 점차적으로 한나라의 여러 의례에 관한 규정이 정해진 것은 

모두 숙손통이 태상으로 있으면서 세운 공이다.]

 

孝惠帝為東朝長樂宮,及閒往,數蹕煩人,乃作複道,方筑武庫南. 

叔孫生奏事,因請閒曰:「陛下何自筑複道高寢,衣冠月出游高廟?

高廟,漢太祖,柰何令後世子孫乘宗廟道上哉?」 

孝惠帝大懼,曰:「急壞之.」

​[효혜제가 동쪽에 있는 장락궁에 조회를 가거나 가끔 들를 때 자주 통행을 금지해

백성들을 번거롭게 했다. 그래서 따로 복도()를 만들기로 했는데

무기고()의 남쪽에서부터 공사를 시작했다.  숙손통이 정사에 대해 보고하면서,

틈을 타 말하기를 :" 폐하께서는 어찌하여 고제의 묘 위로 복도를 만드십니까 ?  

참배할 때 입는 의관을 달마다 고제묘로 옮기게 되어 있습니다. 

고묘는 한나라를 일으킨 태조의 묘인데 어찌하여 후세의 자손들로 하여금

종묘의 위를 밟고 다니게 할 수 있습니까?"라고 하자.

혜제가 크게 두려워하며 말하기를 : " 빨리 허물어 버리시오."라고 하였다.] 

 

叔孫生曰:「人主無過舉.  今已作,百姓皆知之,今壞此,則示有過舉. 

願陛下原廟渭北,衣冠月出游之,益廣多宗廟,大孝之本也.」 

上乃詔有司立原廟.  原廟起,以複道故.  孝惠帝曾春出游離宮,

叔孫生曰:「古者有春嘗果, 方今櫻桃孰, 可獻, 願陛下出, 因取櫻桃獻宗廟.」

上乃許之.  諸果獻由此興. 

숙손통이 말하기를 :" 군주는 잘못된 일을 해서는 안 됩니다.

지금 복도를 이미 만들었다는 것을 백성들이 모두 알고 있습니다.

지금 이것을 헐어 버린다면 황제의 잘못을 드러내는 행위입니다. 

원컨대 폐하께서는 원래의 사당을 위수 북쪽에 따로 지어 매월 내가는 고제의 의관을

그곳에 두도록 하십시오. 종묘를 넓히고 많이 짓는 일은 큰 효도의 근본입니다."하였다. 
황제가 담당 관리에게 조명을 내려 사당을 짓도록 했다. 사당이 완성되자

복도는 그대로 남게 되었다.  혜제가 일찍이 이궁으로 놀이를 나가게 되었을 때

숙손통이 말하기를 : " 옛날에는 봄이 되면 햇과일을 종묘에 바쳤습니다.

지금 앵두가 잘 익어 종묘에 바칠만 합니다. 원컨대 폐하께서 놀이를 나왔으니

앵두를 가지고 돌아가셔서 종묘에 바치십시오."라고 하자. 
황제가 허락했다. 이로써 여러 과일들을 제사상에 바치기 시작한 원인이 되었다.]  

 

太史公曰:

語曰「千金之裘,非一狐之腋也;臺榭之榱,非一木之枝也;

三代之際,非一士之智也.」 

信哉!夫高祖起微細,定海內,謀計用兵,可謂盡之矣.  

然而劉敬脫輓輅一說,建萬世之安,智豈可專邪!

叔孫通希世度務,制禮進退,與時變化,卒為漢家儒宗.

「大直若詘,道固委蛇」,蓋謂是乎?  

[태사공이 말한다.
옛말에 ‘천금이 나가는 갖옷은 한 마리의 여우 겨드랑이 털만으로 만들어지지 않고,

높은 누각의 서까래는 한 그루의 나무만으로 만들 수 없다고 했듯이

하, 은, 주 삼대의 의례는 재사 한 사람의 지혜만으로 만들어진 것이 아니다.'라고 했다.

참으로 옳은 말이다.  무릇 고조가 미천한 신분에서 몸을 일으켜 해내를 평정했음은

뛰어난 지모와 계책으로 용병했으므로 가히 온 힘을 다 기우렸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수레의 끌채를 풀고 한 번 유세하여 한나라를 만세의 안정을 누리게 했으니 

지혜라는 것이 어찌 한 사람만이 전유물이라고 할 수 있겠는가?

숙손통은 세상의 시무를 헤아릴 수 있는 보기 드믄 인재로써 의례를 제정해 나아가고

물러나는 절차를 밝혔으니 시세의 변화에 밝아 마침내는 한나라 유학의 종사()가 되었다.

‘대도는 마치 굽어 보이고 원래 길은 구불구불하다.’라고 했다.

 이 어찌 옳은 말이 아니겠는가? ] 

 

【주석】

1) 후직(后稷)/ 주나라를 세운 주족(周族)의 시조다. 제곡(帝嚳)의 아들이라고 전해진다.  

    그 모친 강원이 외출을 나갔다가 우연히 거인의 발자국을 밟게 된 후에 임신을 하게 되어

    후직이 태어났다. 이를 상서롭지 못하다고 생각하여 갓난아이를 멀리 내다 버리게 했으나

    뭇 짐승들이 기를 보호했음으로 이를 기이하게 생각하여 다시 거두어 길렀다.

    그의 이름 기(棄)는 이 일에서 연유되었다.

    기가 성장하면서 농사 짓는 일을 좋아하여 씨을 뿌리고 수확하는 법에 정통하게 되었다.

    요임금이 후직을 농사(農師)에 임명하여 백성들에게 농사짓는 법을 가르치게 하였다.

    ​순임금이 그를 태(邰)에 봉했다. 주족은 후직으로 인해 인류 최초로 기장과 보리를 

    기를 수 있었다고 생각한 주족은 그의 이름에 직(稷)자를 붙여 불렀다. 

    후세에 이르러 농사를 관장하는 신으로 받들어 졌다.(周本紀)  

2) 공류(公劉)/주나라의 시조인 후직의 후예로 선조들을 따라 융적의 땅에서 살았지만

    다시 후직의 업을 일으켜  농사의 일을 돌보며 종족들을 위해 농사짓기에 적합한 땅과

    곡식의 종자를 찾아 나섰다. 칠수(漆水)와 저수(沮水)를 건너고 다시 위수를 건너

    목재를 벌목하여 가져와 종족들이 같이 사용할 수 있도록 나누어 주었으며

    종족들 중 외지로 나가는 사람에게는 여비를 주고 나가지 않고 종족들과 같이 사는

    사람에게는 그들을 위해 저축을 해 주었다.

    백성들의 생활은 모두 그에게 의지하여 편안하게 되었다.

    다른 종족들도 모두 그의 선행에 감격하여 수많은 사람들이 찾아와 그에게 귀의하였다.

    주나라의 기업은 이때부터 시작되었다고 할 수 있었다. 그래서 시인들이 노래를 불러

    그의 덕을 칭송했다.  공유가 죽고 그의 아들 경절(慶節)이 뒤를 잇고

    빈(豳) 땅에 도읍 하여 나라를 세웠다.  

3) 빈(豳)/ 현 섬서성 순읍현(旬邑縣) 서남쪽. 주나라를 세운 주족(周族)의 원주지다.  

    이곳에 거주하던 주족을 주문왕(周文王)의 조부인 고공단보(古公亶父)가

    칠수(漆水)와 저수(沮水)를 건너 지금의 기산(岐山) 밑으로 이주시켰음.  

4) 태왕(太王)/ 고공단보(古公亶父)라고도 하며 공류의 9대 손으로 주문왕(周文王)의 조부다.  

    원래 지금의 섬서성 순읍현(旬邑縣)인 빈(豳) 땅에 살던 주족을 고공단보가 이끌고

    기산(岐山) 밑의 주원으로 이주하였다. 고공단보의 증손인 주무왕이 천하를 통일하고

    주왕조를 세우자 고공단보를 태왕으로 높였다.

    원래 태백(太伯), 우중(虞仲). 계력(季歷) 등의 세 아들을 두었으나

    막내인 계력의 아들 주문왕이 가장 현능했음으로 자기의 후사를 계력에 전해

    주문왕으로 이어지게 할려고 했다. 이에 태백과 중옹은 남만으로 달아나 

    계력에게 양보했음으로 주문왕이 주족의 수장 자리를 이어받아 

    마침내는 주왕조를 창건할 수 있었다.  

5) 다음은 주본기의 우후와 예후의 송사에 관한 기사다.
    <우(虞)와 예(芮)나라 사이에 영토 다툼이 일어나 해결할 방도를 찾지 못하자

    그에 대한 판결을 서백에게 의뢰하려고 했다. 우와 예의 군주가 송사의 판결을

    서백에게 부탁하기 위해 주나라 경계에 들어와 보니 농부들은 모두 자기 밭의 경계를

    상대방에게 양보하고 젊은 사람들은 모두 나이 먹은 어른들을 공경하고 있었다. 

    우와 예의 군주가 서백을 만나보기도 전에 부끄럽게 생각하여 서로 말했다.  

    “ 우리가 국경 문제로 다투는 것은 주나라 사람들이 부끄럽게 여기는 일이라

    지금 서백을 찾아가 봤자 우리 스스로가 욕됨을 얻게 될 것이다.

    ” 그리고는 두 사람은 자기 나라로 돌아가서 다투고 있던 땅을 서로가 양보하였다.

    제후들이 이에 대한 일을 듣고서 모두 말했다.

    “ 서백이 장차 하늘로부터 명을 받아 천자가 되겠구나!”>  

6) 구주산(句注山)/ 지금의 하북성 대현(代縣) 서북의 안문산(雁門山)의 옛 이름이다.

7) 평성(平城)/ 지금의 산서성 대동시(大同市) 부근이다.

8) 묵돌(冒頓)/ 태어난 해는 알 수 없고 기원전 174년에 죽은 흉노족의 군왕으로

    성은 연제(攣鞮)다.  기원전 209년 그의 아버지 두만(頭曼)을 시해하고

    대선우의 자리에 올라 내정과 군제을 개혁하여 흉노의 세력을 크게 신장시켜

    주위의 東胡, 丁零, 月氏, 樓蘭, 烏孫, 樓煩, 白羊 등의 부족들을 공격하여 통일시켰다.

    진나라 때 河套 지역을 수시로 공격하기 시작해서 서한 초 때까지

    중국의 변경을 어지렵혔다.  

9) 하투(河套) /북쪽으로 흐르는 황하는 음산(陰山)산맥의 남쪽 기슭에서 만곡하는 부분과

    만리장성으로 둘러싸인 고원지대로 사막 ·초원 ·염호(鹽湖) 등으로 이루어져 있다.

    오르도스란 15세기 중엽 이후 이곳이 내몽골 여러 부(部)의 하나인 오르도스부의

    목축지를 이룬 데서 연유한 것으로서 현재 어얼둬쓰[鄂爾多斯]라고 표기하나,  

    본래 중국에서는 BC 3세기 이래 하남(河南), 후에는 하투·투중(套中) 등으로 불렀으며,  

    몽골 유목민과의 교섭 또는 공방(攻防)의 요지로 삼아 왔다  

10) 진중(秦中)/ 고대의 지명으로 지금의 섬서성 중부 평원지대를 말한다.

      춘추전국 시대 진(秦)나라의 근거지 였음으로 생긴 지명이다.

      관중(關中)과 함께 섬서성의 위수(渭水) 유역의 평원을 칭하는 지명이다.  

11) 기현(羈縣)/ 전국 때 초나라 영토로써 지금의 안휘성 숙주시(宿州市) 동남으로

      진승이 진나라에 처음으로 반기를 든 곳이다. 

12) 대행(大行)/ 진나라가 설치하고 한나라가 답습한 중국 고대왕조의 관명으로

      제후들과 이민족들의 사무를 관장했다.

      진나라와 한나라 초기에는 전객(典客)이라는 명칭으로 9경 중의 한 명이다.  

      한경제 때 대행령(大行令)으로 개칭했다가 무제(武帝) 때 대홍려로 다시 변경했다.  

13) 태상(太常)/ 종묘(宗廟)의 의례(儀禮)를 관장했던 한나라의 구경(九卿) 중의 하나로

      진나라 때 봉상(封常)으로 불리다가 한경제 때 태상으로 바꿨다.

      봉록은 2천석으로 일반적으로 충효스럽고 몸가짐이 조신하고

      덕이 높은 사람을 임명했다.  

 

 

※  原 文 .    【 中國哲學書電子化計劃 .   筆寫本 】

 

                                

    原 文   飜 譯 者        德庤 / 李   斗 振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