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2.淮陰侯列傳

第 三十二. 淮陰侯列傳(회음후열전)

덕치/이두진 2023. 9. 4. 18:10

 

                     史記 列傳

 

     第 三十二.   淮陰侯列傳(회음후열전) 

 

淮陰侯韓信者,淮陰人也.  始為布衣時,貧無行,不得推擇為吏,又不能治生商賈,

常從人寄食飲, 人多厭之者, 常數從其下鄉南昌亭長寄食, 數月, 亭長妻患之, 乃晨炊蓐食.

食時信往,不為具食.  信亦知其意,怒,竟絕去.

[회음후(淮陰侯)1) 한신(韓信)은 회음(淮陰)2) 사람이다.

그가 처음에 평민의 신분으로 있을 때 집안이 가난했던 관계로 품행이 올바르지 못했다.

그로 인하여 주위 사람들의 천거를 얻지 못해 관리도 못 되었고,  

또한 물건을 사고팔고 하는 장사꾼도 못 되어 항상 다른 사람에게 빌붙어 음식을 해결하곤 했다.  

사람들은 그런 한신을 모두 싫어했다. 옛날 회음현 관하 하향(下鄕)3)의 남창(南昌) 정장(亭長)의

집에서 몇 달 동안 기식(寄食)을 한 적이 있었다. 남창의 정장 아내가 그것을 싫어하여

어느 날 일찍한 아침밥을 들고 자기 침실로 들고 가 먹었다. 이윽고 조반 시간이 되자.

평소처럼 한신이 왔으나 그 아내는 아침밥을 준비하지 못했다고 하면서 밥을 주지 않았다.

한신 역시 정장 부부가 자기에게 밥을 주지 않기 위한 수작이라는 것을 알았다. 

분개한 한신은 그 집을 떠나 다시는 왕래하지 않았다.]

 

信釣於城下, 諸母漂, 有一母見信饑, 飯信,竟漂數十日.  

信喜,謂漂母曰:「吾必有以重報母.」

母怒曰:「大丈夫不能自食,吾哀王孫而進食,豈望報乎!」

​[한신이 성 밑에서 낚시질을 하는데 그 곁에서 아낙네들 몇 사람이 빨래를 하고 있었다.

그 중 한 아낙네가 굶주려 허기에 찬 한신을 보더니 그녀가 가져온 밥을 꺼내 주어 먹게 했다.

그렇게 하기를 10여 일이 지나자 이윽고 아낙네들이 빨래를 다 끝마치게 되었다.  

그 동안 밥을 얻어먹을 수 있었던 한신이 마음속으로 매우 기뻐하며 그 아낙네를 향해 말하기를 :  

" 내가 후일에 반드시 부인이 베풀어준 은덕에 보답하리라!"라고 하자. 
그 아낙네가 화를 내며 말하기를 :" 사내 주제에 자기 먹을 것 하나 해결하지 못하면서

무슨 보답 운운하는가?  내가 왕손()을 불쌍히 여겨 밥을 준 것이니,

어찌 내가 보답을 바라겠는가?"라고 하였다.]

   

淮陰屠中少年有侮信者,曰:「若雖長大,好帶刀劍,中情怯耳.」 

眾辱之曰:「信能死,刺我;不能死,出我袴下.」
於是信孰視之,俛出袴下,蒲伏.  一市人皆笑信,以為怯.
 

[한신이 회음현(淮陰縣) 성중에 살 때 성안의 젊은이들이 한신을 모욕하면서 말하기를 : 

" 너는 멀대처럼 큰 키에 허리에 칼을 차고 거리를 다니고 있으나 사실 너는 겁 많은

아이일 뿐이다."라고 하였다. 
다시 그 청년이 여러 사람들 앞에서 한신에게 모욕을 주면서 말하기를 : 

 네가 죽음을 겁내지 않는다면 그 칼로 나를 찌르고 이 길을 지나가고, 

만일 죽음이 두렵다면 내 가랑이 밑으로 기어 지나가라!"라고 하였다. 
이에 한신이 그 청년의 얼굴을 뚫어지게 쳐다보며 생각하더니 허리를 굽혀

그의 가랑이 밑으로 기어 지나갔다.  길거리를 가득 메우고 구경하던 사람들이

모두 한신을 비웃으며 그가 겁이 많은 사람으로 여겼다.]

 

及項梁渡淮,信杖劍從之,居戲下,無所知名.  項梁敗,又屬項羽,羽以為郎中.

數以策干項羽,羽不用.  漢王之入蜀,信亡楚歸漢,未得知名,為連敖.

[마침내 오현(吳縣)에서 거병한 항량(項梁)이 북상하여 회수(淮水)를 건널 때

한신도 칼을 지참하고 그의 기의군에 들어가 항량의 부하가 되었다.

그러나 한신은 항량 밑에서 이름을 얻지 못했다.

항량이 정도(定陶)에서 진군과의 싸움에서 패하고 전사하자, 한신은 다시 항우의 부하가 되었다.

항우는 한신을 낭중(郎中)에 임명했다.  한신이 여러 차례에 걸쳐 항우에게 계책을 내어

중용되기를 원했으나 항우는 결코 한신의 계책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한왕 유방이 촉(蜀)에 들어갈 때 한신도 초군에서 빠져나와 한왕에게 귀순했다.

당시 한신은 이름이 알려지지 않았기 때문에 손님을 접대하는 연오(連敖) 벼슬을 받았다.]

坐法當斬,其輩十三人皆已斬,次至信,信乃仰視,適見滕公,

曰:「上不欲就天下乎?何為斬壯士!」滕公奇其言,壯其貌,釋而不斬.  與語,大說之.

言於上,上拜以為治粟都尉,上未之奇也.  信數與蕭何語,何奇之.

至南鄭,諸將行道亡者數十人,信度何等已數言上,上不我用,即亡.

[후에 한신이 죄를 지어 참수형에 처해지는 형을 받게 되었다.

그의 동료 죄수들 중 13명 모두 처형되고 마지막으로 한신의 차례가 되었다.  

한신이 머리를 들어 하늘을 쳐다보고 다시 등공(縢公) 하후영(夏侯嬰)4)의 얼굴을 정시하고 

말하기를 : " 한왕은 아마도 천하를 통일하는 공업을 이루고 싶은 마음이 없는 모양입니다. 

어찌하여 장사를 죽인단 말입니까?"라고 하였다.

한신의 말이 일반 사람들과 다르다고 느낀 등공이 살펴보니 그의 풍채가 당당했음으로 처형을

중지하고 방면했다.등공이 한신을 불러 대화를 해보고 크게 기뻐하여 한왕에게 천거했다.  

한왕은 한신을 치속도위(治粟都尉)5)에 임명했으나 그의 진면목을 알아보지 못했다. 
한신과 여러 번 대화를 나눠 본 소하(蕭何)는 그가 뛰어난 인재라는 사실을 알았다.

관중에서 출발한 한왕과 그 일행이 이윽고 남정에 이르렀을 때 휘하의 장수들 중에

도망 간 자가 수십 명에 달했다. 한신은 소하가 여러 번에 걸쳐 자기를 천거했으나,

한왕이 받아들이지 않는다고 생각하며 도망치고 말았다.]

 

何聞信亡,不及以聞,自追之.  人有言上曰:「丞相何亡.」上大怒,如失左右手.

居一二日,何來謁上,上且怒且喜,罵何曰:「若亡,何也?」 

何曰:「臣不敢亡也,臣追亡者.」 上曰:「若所追者誰何?」曰:「韓信也.」

​[한신이 도망쳤다는 소식을 들은 소하는 한왕에게 미처 알릴 틈도 없이 즉시 몸소 한신의 뒤를

쫓아갔다.  어떤 사람이 한왕에게 달려와 고하기를 : " 승상 소하가 도망쳤습니다."라고 하였다. 
한왕이 크게 화를 내며 마치 자기의 두 팔을 잃은 듯이 여겼다. 

그리고 이틀이 지나자 소하가 돌아와 한왕을 배알했다.

소하를 보자 기쁘기도 하고 화가 나기도 한 한왕이 꾸짖으며 말하기를 :
" 당신이 도망쳤다고 하던데 도대체 무슨 일이오?"라고 하자. 
소하가 대답하기를 : " 제가 감히 도망칠 수 있겠습니까?

저는 도망친 장수의 뒤를 쫓았을 뿐입니다."라고 하였다. 
한왕이 묻기를 : " 도망친 장수가 누구요."라고 하자.  

소하가 대답하기를 : " 한신이라는 장수입니다."라고 하였다.]

 

上復罵曰:「諸將亡者以十數,公無所追;追信,詐也.」

何曰:「諸將易得耳.  至如信者,國士無雙.  王必欲長王漢中,無所事信;

必欲爭天下,非信無所與計事者.  顧王策安所決耳.」
王曰:「吾亦欲東耳,安能郁郁久居此乎?」

何曰:「王計必欲東,能用信,信即留;不能用,信終亡耳.」

​[한왕은 다시 소하에게 꾸짖으며 말하기를 : " 우리가 관중에서 여기까지 행군하던 중에

도망친 장수들이 수십 명에 달했음에도 당신은 그 누구의 뒤도 쫓지 않았소!

그런데 지금 당신이 쫓은 사람이 한신이라고 하니  

이는 당신이 나를 속이려고  하는 것 밖에는 달리 생각할 수 없소!"라고 하자. 
소하가 대답하기를 : " 도망친 다른 장수들은 쉽게 구할 수 있으나 한신이라는 장수는 천하의

뛰어난 인물이라 다시 구할 수 없습니다. 대왕께서 이곳 한중에 오래 머물며 제후왕으로

만족하려 하신다면 한신과 같은 인물이 필요 없으시겠지만 에 만족하지 않고 천하를

차지하려 하신다면 함께 계책을 논할 사람은 한신 외는 없습니다. 왕께서는 한중의 왕으로

만족하실 것인지 아니면 천하의 제왕이 되실 것인지를 선택하셔야 합니다."라고 하였다. 
한왕이 말하기를 : " 나 역시 동쪽으로 나아가고 싶지, 어찌 이런 곳에서 마음속의 울화병을

달래가며 오래 머물고 싶겠소."라고 하자. 
소하가 말하기를 : " 왕께서 꼭 동쪽으로 나가고 싶다면 한신을 쓰셔야 합니다.

한신을 머물게 하고도 쓰실 수 없으신다면 한신은 필시 도망가고 말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王曰:「吾為公以為將.」 何曰:「雖為將,信必不留.」

王曰:「以為大將.」 何曰:「幸甚.」於是王欲召信拜之. 

何曰:「王素慢無禮,今拜大將如呼小兒耳,此乃信所以去也. 

王必欲拜之,擇良日,齋戒,設壇場,具禮,乃可耳.」王許之.
諸將皆喜,人人各自以為得大將.  至拜大將,乃韓信也,一軍皆驚.

​[한왕이 말하기를 : " 내가 승상의 말을 따라 한신을 장군으로 삼겠소."라고 하자. 
소하가 말하기를 : " 왕께서 비록 한신을 장군으로 임명한다 할지라도

그는 결코 머물지 않을 것입니다."하였다. 
한왕이 말하기를 : " 그렇다면 그를 대장군에 임명하겠소."라고 하자 

소하가 말하기를 : " 왕을 위해 참으로 다행한 일입니다."라고 하였다. 
이윽고 한왕이 한신을 불러 대장군에 임명하려고 했다.

그러자 소하가 말하기를 : " 대왕께서는 평소에 오만무례하십니다. 지금 대장군을 임명한다고

하시면서 대장 될 사람에 대한 태도가 마치 어린아이 대하듯 하십니다.

이런 자세로 인해 한신 같은 호걸들이 대왕 곁을 떠나려고 합니다.  

왕께서 한신을 대장군에 임명하시려고 한다면, 필시 좋은 날을 택해 목욕재계를 하신 다음,  

단을 세우고 예를 갖추어 의식을 갖추어야 합니다."라고 하자.  한왕이 소하의 말을 허락했다.

한왕의 휘하 장수들은 모두 기뻐하며 저마다 자기가 대장군에 임명되는 줄로 알았다. 

이윽고 대장군에 임명되어 단에 오르는 사람이 한신이라는 사실을 알자, 

모든 장수들과 군사들은 크게 놀랐다.] 

 

信拜禮畢,上坐.  王曰:「丞相數言將軍,將軍何以教寡人計策?」

信謝,因問王曰:「今東鄉爭權天下,豈非項王邪?」
漢王曰:「然.」 曰:「大王自料勇悍仁彊孰與項王?」 漢王默然良久,曰:「不如也.」

​[한신이 제수의 예를 마치고 자리에 오르자,  한왕이 묻기를 : "소승상을 통해 누차 장군에 대한

이야기를 들었소. 장군은 무슨 계책으로 과인을 깨우쳐 주겠소?"라고 하였다. 
한신이 감사의 말을 올리고 오히려 한왕에게 묻기를 : " 지금 동쪽의 땅에 대한 패권은

모두 항우의 치하에 들어가지 않았습니까?"라고 하자.  

한왕이 대답하기를 : " 그렇소!"라고 하였다. 
한신이 묻기를 : " 대왕께서 스스로 생각하시기에 항왕과 비교해서 누가 더 용감하고, 날래고,

어질고, 세다고 생각하십니까?"라고 하자.  한왕이 대답을 못하고 오랫동안 생각에 잠기더니,

이윽고 입을 열어 말하기를 : " 내가 그 보다 못하오."라고 하였다.]

 

信再拜賀曰:「惟信亦為大王不如也.  然臣嘗事之,請言項王之為人也.

項王喑噁叱, 千人皆廢, 然不能任屬賢將, 此特匹夫之勇耳.  項王見人恭敬慈愛, 言語嘔嘔, 

人有疾病,涕泣分食飲,至使人有功當封爵者,印刓敝,忍不能予,此所謂婦人之仁也.

項王雖霸天下而臣諸侯,不居關中而都彭城.  有背義帝之約,而以親愛王,諸侯不平.

​[한신이 자리에 일어나 한왕에게 재배하며 경하의 말을 올리기를 :
" 이 한신 역시 대왕께서는 항왕(項王)보다 그런 면에서 못하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신은 옛날 항왕을 섬긴 적이 있었기 때문에, 대왕을 위해 항왕이란 위인에 대해

말씀드리고자 합니다. 항왕이 한 번 성내어 자와 같은 목소리로 꾸짖으면 천 사람이 모두

땅에 엎드려 두려워하며 떨지만 능력있는 장수를 믿고 맡기지 못하니

이것은 필부의 용기에 불과할 뿐입니다.

항왕이 사람을 대할 때는 공경하는 마음과 자애로운 태도로 구구하고 부드럽게 대합니다.

병에 걸린 사람이 있으면 눈물을 흘리며 음식을 나누어 먹으나, 자기 휘하의 장수가 공을 세워

마땅히 작위를 내려야만 할 때는 그 인장이 모두 달아질 때까지 아까워 차마 내주지 못합니다.

이것은 소위 아녀자의 인정에 불과한 것입니다. 항왕이 비록 천하를 제패하고 제후들을

신하로 거느리고 있지만, 관중에 머무르지 않고 동쪽의 팽성으로 돌아가 지리적인 이점도

취하지 못했고, 또 의제(義帝)6)와의 약속을 배반했으며7) 진나라를 멸할 때

제후들의 공의 크고 작음을 기준으로 하지 않고 자기와의 친소(親疎)를 기준으로 

분봉함으로 해서 제후들로부터 불평을 사고 있습니다. 

 

諸侯之見項王遷逐義帝置江南,亦皆歸逐其主而自王善地.  項王所過無不殘滅者,

天下多怨,百姓不親附,特劫於威彊耳.  名雖為霸,實失天下心. 

故曰其彊易弱.  今大王誠能反其道:任天下武勇,何所不誅! 

以天下城邑封功臣,何所不服!以義兵從思東歸之士,何所不散!

[제후들은 항왕이 의제를 강남의 벽지에 옮겨 살게 했다가 결국은 도중에 살해한 행위를

직접 보았으며, 그들 역시 자기 나라에 돌아가 그 군주들을 쫓아내고 자기들 임의대로

좋은 지방을 점거해 스스로 왕이 되었습니다. 더욱이 항왕의 군대가 지나간 곳은

학살과 도륙을 당하여 살아남은 것이 없게 되어 천하 백성들은 모두가 원망하며 

아무도 항우에게 의지하려고 하는 마음을 갖고 있지 않으며, 

단지 그의 위세에 눌려 복종하고 있는 척 하는 것입니다. 

겉으로는 패자인 것처럼 보이나, 사실은 천하 인심을 잃고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의 강대한 세력을 쉽게 약화시킬 수 있다고 말씀드리는 바입니다.

지금 대왕께서 진실된 마음으로 항우가 행한 일과는 반대로, 천하의 무예가 출중하고

용감한 자들에게 맡겨 토벌하게 한다면 어찌 그를 죽이지 못하겠으며! 천하의 성읍으로 

공신들을 봉한다면, 어찌 그들을 복종시키지 못할 것이며! 

동쪽의 고향으로 돌아가려는 의로운 군사를 진격시킨다면, 어찌 군사들이 흩어지겠습니까!

 

且三秦王為秦將,將秦子弟數歲矣,所殺亡不可勝計,又欺其眾降諸侯,至新安,

項王詐阬秦降卒二十餘萬,唯獨邯、欣、翳得脫,秦父兄怨此三人, 痛入骨髓.

今楚彊以威王此三人,秦民莫愛也. 

大王之入武關,秋豪無所害,除秦苛法,與秦民約,法三章耳,秦民無不欲得大王王秦者. 

於諸侯之約,大王當王關中,關中民咸知之.  大王失職入漢中,秦民無不恨者.

今大王舉而東,三秦可傳檄而定也.」 

​[또한 삼진(三秦)의 왕은 진나라 장수들 출신으로, 그들이 진나라 장군으로 몇 년간 군사들을

이끌고 다니면서, 싸움 중에 전사시킨 진나라 자제들의 수효는 수도 셀 수 없을 만큼 많았고, 

더욱이 그 남은 군사들을 속여 제후군들에게 항복시킨 다음 진나라에 들어오다가 

신안(新安)에 이르자, 항왕이 20여 만에 달하는 그들을 속여 구덩이에 파묻어 죽여 놓고도

유독 장한(章邯), 사마흔(司馬欣), 동예(董翳)등 만이 목숨을 건짐으로 해서

진나라의 부형들은 이 세 사람을 원망하는 마음은 골수에 사무쳐 있습니다.

지금 항우가 그의 위세를 믿고 이 세 사람을 삼진의 왕에 임명했으나 진나라 백성들은 아무도  

그들을 믿고 따르지 않고 있습니다. 대왕께서 무관(武關)을 통해서 관중으로 진입하실 때, 

터럭하나도 건들지 않음으로 해서 아무런 해도 끼치지 않았고, 진나라의 가혹한 법을 폐하고

법삼장(法三章)8)만을 두기로 백성들과 약속함으로 해서 진나라 백성들치고

대왕께서 진왕(秦王)이 되기를 바라고 있지 않은 사람은 한 사람도 없습니다.

또한 관중에 먼저 들어온 사람이 왕이 된다는 제후들과의 약속에 따라 대왕께서는 당연히

관중의 왕이신 것입니다. 이것 또한 진나라 백성들이 잘 알고 있는 일입니다.  

러나 대왕께서 항우의 부당한 처사로 관중의 봉지와 왕위를 잃으시고 한중으로 들어오시자,

진나라 백성들은  모두 그것을 한스럽게 생각하고 있는 중입니다.

지금 대왕께서 몸을 일으켜 동쪽으로 나가, 격문을 써서 삼진에 전한다면

그곳은 평정될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於是漢王大喜,自以為得信晚。遂聽信計,部署諸將所擊. 

八月,漢王舉兵東出陳倉,定三秦.

[한왕이 한신의 말에 대단히 기뻐하며 자기가 한신을 너무 늦게 만났다고 생각했다.  

한왕은 즉시 한신의 계책을 받아들여 제장들을 각 부서에 정하고 군사를 일으켜

관중으로 진격했다.   

8월 한왕이 군사를 일으켜 진창(陳倉)으로 나아가 삼진(三秦)을 평정했다.]

 

漢二年,出關,收魏、河南,韓、殷王皆降.  合齊、趙共擊楚.
四月,至彭城,漢兵敗散而還. 信復收兵與漢王會滎陽,復擊破楚京、索之閒,

以故楚兵卒不能西.  漢之敗卻彭城,塞王欣、翟王翳亡漢降楚,齊、趙亦反漢與楚和. 

六月,魏王豹謁歸視親疾,至國,即絕河關反漢,與楚約和.  漢王使酈生說豹,不下.

한 2년(기원전 205년), 한군이 함곡관(函谷關)을 나가 위(魏)와 하남(河南)을 점령했다.  

이에 한왕과 은왕(殷王)이 모두 항복했다. 제와 조, 두 나라와 연합하여 초나라로 진격했다. 
4월, 팽성에 들어갔으나 초군의 반격을 받고 싸움에 패하여 제후군들은 흩어지고

한왕은 서쪽으로 귀환했다.  한신이 패잔병을 수습하여 한왕과 형양(滎陽)에서 만나

초군을 경색(京索)의 땅에서 물리쳤다.  

이로써 초나라 군사들은 더 이상 서쪽으로 진격할 수 없었다. 한군이 팽성의 전투에서 패하자

새왕(塞王) 사마흔(司馬欣), 책왕(翟王) 동예(董翳)가 한나라에서 도망쳐 초나라로 들어갔다.

제(齊)와 조(趙) 역시 한나라를 배반하고 초나라에 붙었다. 
6월 위왕(魏王) 표(豹)가 부모의 병문안을 위해 하동으로 들어가자 즉시 하수를 건너는

관문을 끊더니 한나라에 반기를 들고 초나라에 붙었다. 한왕이 역생을 보내

유표를 설득하려고 했지만 그는 뜻을 굽히지 않았다.]


其八月,以信為左丞相,擊魏.  魏王盛兵蒲阪,塞臨晉,信乃益為疑兵,陳船欲度臨晉,

而伏兵從夏陽以木罌缻渡軍,襲安邑.  魏王豹驚,引兵迎信,信遂虜豹,定魏為河東郡.

漢王遣張耳與信俱,引兵東,北擊趙、代.

[그해 8월, 한왕이 한신을 좌승상으로 삼아 위나라를 공격하도록 했다.

위왕 표(豹)가 포판(蒲坂)에 수많은 군사를 집결시켜 임진(臨晉)에서 도하하려는 한군을

막으려고 했다.  이에 한신은 의병을 더욱 많이 세우고 수많은 배를 도열시켜 임진에서

도하하려고 하는 것처럼 보이고, 복병을 빼서 북쪽의 하양(夏陽)으로 돌려

나무구유[목앵(木罌)]를 이용하여 하수를 도하한 다음 안읍을 기습했다.

대경실색한 위왕 표가 군사를 움직여 한신의 군대를 맞이하려 했다. 

그러나 앞뒤에서 협공을 받은 위군은 일거에 무너지고 위왕 표는 한군의 포로가 되었다.  

이에 한신은 위나라를 평정하고 그 땅에 하동군을 설치했다.   

한왕이 장이와 한신에게 군사를 주어 둘이 함께 동쪽과 북쪽으로 진격하여

조(趙)와 대(代)를 공격하도록 했다.]

 

後九月,破代兵,禽夏說閼與. 信之下魏破代,漢輒使人收其精兵,詣滎陽以距楚. 

信與張耳以兵數萬,欲東下井陘擊趙. 趙王、成安君陳餘聞漢且襲之也,

聚兵井陘口,號稱二十萬.

[그 뒤 9월, 한신의 한군이 대군을 격파하고 연여(閼與)에서 그 재상 하열(夏說)을 사로잡았다.  

한신이 위나라를  항복시키고 대나라를 파하자 한왕은 즉시 사자를 보내 그 정예병들 차출하여 

형양으로 데려가 초군을 막도록 했다. 한신과 장이는 수만의 병력으로 동쪽으로 계속 진격하여

정형(井陘)으로 나아가 조나라를 공격하려고 했다. 한신이 한군을 이끌고 조나라를 공격하기

위해 진군해 오고 있다는 소식을 들은 조왕(趙王)과 성안군(成安君) 진여는 한나라 군대가

장차 습격을 하려고 군사를 정형 어귀에 집결시켰는데, 그 수가 20만 명이라고 들었다.]

廣武君李左車說成安君曰:「聞漢將韓信涉西河,虜魏王,禽夏說,新喋血閼與,

今乃輔以張耳,議欲下趙,此乘勝而去國遠鬬,其鋒不可當.  

臣聞千里餽糧,士有饑色,樵蘇後爨,師不宿飽. 此乘勝而去國遠鬬,其鋒不可當.  

臣聞千里餽糧,士有饑色,樵蘇後爨,師不宿飽. 今井陘之道,車不得方軌,

騎不得成列,行數百里,其勢糧食必在其後.  願足下假臣奇兵三萬人,從閒道絕其輜重

;足下深溝高壘,堅營勿與戰.  彼前不得鬬,退不得還,吾奇兵絕其後,使野無所掠,

不至十日,而兩將之頭可致於戲下.  願君留意臣之計.  否,必為二子所禽矣.」

​[광무군 이좌거가 성안군에게 말하기를 :" 제가 들으니 한나라 장수 한신이 서하(西河)를 건너 

위왕(魏王) 표(豹)를 사로잡은 다음 계속 진격하여  대(代)나라 군사를 격파하고

그 재상 하열(夏說)을 포로로 잡아 연여(閼與)9)의 땅을 피로 물들였다고 합니다.  

오늘 다시 장이의 보좌를 받은 한신은 조나라를 함락시키려는 계책을 정하고, 그 승세를 타고

본국을 떠나 원정길에 나섰으니, 우리 조군은 그 군사들의 예봉을 대적할 수 없을 것입니다.  

제가 듣기에는, 천 리 밖에서 군량을 운송하여 먹는 군사들은 그 얼굴에 주린 기색을 띄우고,

또한 장작을 패고 풀을 베어 불을 지펴야만 밥을 해 먹을 수 있는 군사들은 항상 굶주려 있다고

했습니다.  지금 정형의 길목에 이르러 수레는 움직이지 못하고, 전마는 열을 이루지 못한 채

그 행렬이 수백 리에  뻗침으로 해서그 양식은 필시 후방에 있을 것입니다. 

원컨대, 장군께서 저에게 기병 3만만 맡겨주시면 지름길로 나아가 한군의 치중을 끊어

놓겠습니다. 장군께서는  그저 해자를 깊이 파고, 보루를 높여 진영을 굳게 지켜 한군의 도전에 

응하지 마십시오.  그렇게 되면 한군은 전면의 우리 조군과는 싸우지도 못하고, 

또한 퇴각하려고 해도 우리의 기병이 그 뒤를 끊어 진퇴양난에 빠지게 될 것입니다.

더욱이 이 정형의 들판은 황무지라 아무 것도 취할 수 없어 10여 일도 못되어 한군은 무너지고 

한신과 장이 두 장수의 목을 장군의 막사에 가져다 놓을 수 있습니다. 바라옵건대,

저의 계책을 유의하여 결정하시기 바라며, 만약 제 계책을 버리신다면  

우리는 그 두 사람에게 사로잡히는 몸이 될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成安君,儒者也,常稱義兵不用詐謀奇計,曰:「吾聞兵法十則圍之,倍則戰. 

今韓信兵號數萬,其實不過數千.  能千里而襲我,亦已罷極. 

今如此避而不擊,後有大者,何以加之!則諸侯謂吾怯,而輕來伐我.」

不聽廣武君策,廣武君策不用. 

[성안군은 유자 출신으로 언제나 의로운 군대라고 일컬으면서 적군을 속이는 계략이나

기묘한 계책을 사용하면 안 된다는 생각을 갖고 있었다.

진여가 말하기를 : " 나는 병법에 아군의 수효가 적군의 10배가 되면 포위하고, 2배가 되면

싸우라고 한 구절을 알고 있소10).  지금 한신(韓信)의 군사는 수만 명에 달한다고 하나,

사실은 기 천 명에 불과하오. 천리 길을 달려와 우리를  공격하기 때문에 그들은 피로에 지쳐있소.

지금 우리가 피로한 그들을 공격을 하지 않는다면 후에 진짜로  대군이 조나라를 쳐들어 온다면 

어떻게 싸우겠소. 그때 우리들을 비겁하다고 생각한 제후들은 우리를 가볍게 보고

침략해 올 것이오."라고 하였다. 

​성안군(진여)는 결국 광무군의 계책을 듣지도 않고, 받아들이지도 않았다.]

 

韓信使人閒視,知其不用,還報,則大喜,乃敢引兵遂下.  未至井陘口三十里,止舍.

夜半傳發,選輕騎二千人,人持一赤幟,從閒道萆山而望趙軍,
誡曰:「趙見我走,必空壁逐我,若疾入趙壁,拔趙幟,立漢赤幟.」

令其裨將傳飱,曰:「今日破趙會食!」諸將皆莫信,詳應曰:「諾.」

[한신이 사람을 보내 조나라의 사정을 정탐하게 한 바, 광무군의 계책을 쓰지 않았다는

소식을 듣고 대단히 기뻐하며, 곧바로 군사들을 인솔하고 정형을 향해 진격했다. 

한군은 정형 입구 30리 밖에서 행군을 멈추고 숙영했다. 

이윽고 밤이 되자, 한신은 전령을 내보내 경기병 2천 명을 선발하여, 

매 군사마다 붉은 색 깃발을 한 개씩을 지참하고 사잇길을 이용하여 산 속으로 들어가 

몸을 숨기고 조군의 동태를 살피도록 명령하고 당부의 말을 하기를 :

" 조군은 우리 한군이 도망치는 것을 보게 되면 그들은 모두 자기들 진영을 비워 놓고

우리들 뒤를 추격할 것이다.  그 틈을 타서 비호같이 조의 진영으로 들어가

그들의 깃발을 뽑고 우리 한나라의 붉은 깃발을 세워라."하였다. 
그리고 그의 비장들에게 명령을 전달하여 식사를 준비하여 군사들을 배불리 먹이고

자기의 명을 전달하기를 : " 오늘 조군을 무찌른 다음 연회를 베풀어 마음껏 먹을 수 있도록

하겠다."라고 하였다.  그러나 한신의 비장들은 그의 말을 믿지 않았지만,

거짓으로 응하며 대답하기를 : “알겠습니다.”라고 하였다.]

謂軍吏曰:「趙已先據便地為壁,且彼未見吾大將旗鼓,未肯擊前行,恐吾至阻險而還.」

信乃使萬人先行,出,背水陳.  趙軍望見而大笑.  平旦,信建大將之旗鼓,鼓行出井陘口,

趙開壁擊之,大戰良久.  於是信、張耳詳棄鼓旗,走水上軍.  水上軍開入之,復疾戰.

趙果空壁爭漢鼓旗,逐韓信、張耳.  韓信、張耳已入水上軍,軍皆殊死戰,不可敗.

[다시 한신이 휘하의 군관들에게 말하기를 : " 조군은 우리보다 먼저 유리한 지형을 차지하고는

보루를 지었다. 또한 그들은 우리의 부대에 대장기와 북이 보이지 않는다면,

우리의 선봉대를 공격하지 않을 것이다. 왜냐하면 우리가 험악한 지형을 만나면

돌아가지나 않을까 걱정할 것이기 때문이다."라고 하였다. 
이에 한신은 군사들 중 만 명을 선봉대로 선발하여 진격하게 하고 자기는 본대와 함께

정형 어귀에 배수진을 쳤다. 한군의 진영을 멀리서 조망하고 있던 조나라 군사들은 

한군이 병법에 무지하다고 하면서 큰 소리로 비웃었다.  이윽고 날이 밝아오자,

한신은 선발대에게 명하여 대장기를 꽂고, 북소리를 힘차게 두드리며 정형 어귀로 나갔다.

조나라의 군사들은 보루의 문을 열고 나와 한군을 공격함으로써 한, 조 양군은 오랫동안

격전을 벌렸다.  그러다가 한신과 장이는 군사들에게 거짓으로 대장기와 북을 버리고

달아나도록 명하여 배수의 진을 치고 있던 본대로 향해 후퇴하도록 했다. 

강가에 주둔하고 있던 본대가 영문을 열고 한신과 장이의 군대를 맞아들였다.

조군이 과연 그들의 보루를 비워 놓고  한나라의 대장기와 북을 차지하기 위해 장이와 한신의

뒤를 추격했다.  그러나 한신과 장이의 선발대를 맞아들인 강안의 한군 본대는 더 이상 뒤로

물러설 곳이 없어 결사적으로 조군의 공격에 대항했음으로 결코 무찌를 수가 없었다.]

 

信所出奇兵二千騎,共候趙空壁逐利,則馳入趙壁,皆拔趙旗,立漢赤幟二千.

趙軍已不勝,不能得信等,欲還歸壁,壁皆漢赤幟,而大驚,以為漢皆已得趙王將矣,

兵遂亂,遁走,趙將雖斬之,不能禁也.  於是漢兵夾擊,大破虜趙軍,

斬成安君泜水上,禽趙王歇.   信乃令軍中毋殺廣武君,有能生得者購千金.

[그때 한신이 미리 조군 진지 부근에 매복시켜 놓은 2천 명의 경기병들은 조군이 그들의 진지를

비워 놓고 모두 전리품을 차지하기 위해 진지 밖으로 출동하자, 그 틈을 타서 신속하게

조군의 보루로 들어가 그들의 기치를 모두 뽑아 버리고 2천 개의 붉은 한나라 깃발을 세웠다.

그때 이미 조군은 한군과의  싸움에서 이길 수도 없고, 또한 한신 등의 한나라 장수들을

사로잡을 수도 없게 되어 자기들 보루로 돌아가려는 마음뿐이었다.

그러나 그들의 진영에 한나라의 붉은 기가 꽂혀 있는 것을 본 조군은 조왕(趙王)과  

그 장수들이 모두 한군의 포로가 된 것으로 생각했다.

곧이어 조군은 혼란에 빠지더니 모두 제각기 대열에서 이탈하여 달아나기 시작했다.

조나라 장수들은 달아나는 병사들 중 몇 명의 목을 베었지만 결코 막을 수 없었다. 

한군은 앞뒤에서 협공하여 조군을 크게 무찔렀다. 계속해서 달아나던 조군의 뒤를 추격하여 

저수의 강안에서 성안군 진여의 목을 베고 조왕 헐(歇)은 사로잡았다. 

전투가 끝나자 한신은 군중에 광무군을 죽이지 말라는 명을 내렸다.

그리고 그를 사로잡아 오는 자가 있다면 천금의 상을 내리겠다고 했다.] 

 

於是有縛廣武君而致戲下者,信乃解其縛,東鄉坐,西鄉對,師事之.
諸將效首虜, (休)畢賀,因問信曰:「兵法右倍山陵,前左水澤,

今者將軍令臣等反背水陳,曰破趙會食,臣等不服.  然竟以勝,此何術也?」

[이윽고 일단의 군사들이 광무군을 묶어 대장군 막사로 끌고 왔다.  

한신이 광무군의 결박을 풀어주고 동쪽을 보고 앉게 한 뒤에, 서쪽을 향해 마주대하며

스승처럼 모셨다.  여러 장수들이 전투 중에 얻은 적군의 수급과 노획물을 바치며

승리를 축하하고는 한신에게 그 연유를 묻기를 : 
" 병법에 오른쪽으로는 산이나 구릉을 뒤로 등지고, 물과 못을 앞과 왼쪽에 둔다 라고 했습니다. 

지금 장군께서는 저희들에게 병법의 가르침과는 달리 배수진을 치라 명하시면서 말씀하기를 

조나라 군사들을 무찌르고 배불리 먹자고 하셨습니다. 저희들은 마음속으로 수긍하지 않다가

결국은 싸움에서 이기게 되었습니다. 이것은 어떤 전술입니까?"라고 하자.] 

信曰:「此在兵法,顧諸君不察耳. 兵法不曰『陷之死地而後生,置之亡地而後存』?

且信非得素拊循士大夫也,此所謂『驅市人而戰之』 其勢非置之死地,使人人自為戰;

今予之生地,皆走,寧尚可得而用之乎!」 諸將皆服曰:「善. 非臣所及也.」 

​[한신이 대답하기를 :" 이것도 병법도 나와 있소. 단지 그대들이 살펴보지 않았을 뿐이오. 

병법에 말하지 않았소.  사지(死地)에 빠진 다음에야 살아날 수 있으며, 

망지(亡地)에 놓인 다음에야 생존할 수 있다.' 라고.11)  우리 한군의 군사들은 평소에

훈련을 받은 사대부 출신이 아니라 시장바닥의 사람들을 끌어 모은 오합지중이라,  

그들 각각을 스스로를 위해 힘껏 싸우게 하지 않고 살아남을 수 있는 땅을 준다면, 

모두 도망치기 바빴을 것이오. 그런 군사들은 사지가 아니면 결코 싸움에 쓸 수가

없었을 것이오."라고 하였다. 
여러 장수들은 탄복하며 말하기를 : " 정말로 훌륭하십니다.

저희들이 따라갈 수 없습니다."라고 하였다.] 

 

於是信問廣武君曰:「仆欲北攻燕,東伐齊,何若而有功?」

廣武君辭謝曰:「臣聞敗軍之將,不可以言勇,亡國之大夫,不可以圖存.

今臣敗亡之虜,何足以權大事乎!」 

信曰:「仆聞之, 百里奚居虞而虞亡, 在秦而秦霸, 非愚於虞而智於秦也, 用與不用,

聽與不聽也.  誠令成安君聽足下計,若信者亦已為禽矣。以不用足下,故信得侍耳.」

因固問曰:「仆委心歸計,願足下勿辭. 」

[이에 한신은 광무군 이좌거를 불러 묻기를 :" 소장이 연나라를 공격한 다음, 다시 동쪽으로

나아가 제나라를 정벌하려고 하는데, 어찌하면 공을 세울 수 있겠습니까?"라고 하자. 

광무군이 감사의 말과 함께 사양하며 말하기를 : " 제가 듣기에 패군지장은 용기를 말하지 않으며,

망국의 대부는 국가의 흥망을 논하지 않는다’12)라고 들었습니다.  지금 저는 패군지장에

망국의 포로 입장인데, 어찌 망녕되게 천하의 일에 대해 논할 수 있겠습니까?"라고 하였다. 
한신이 말하기를 : " 백리해가 우나라에 있을 때는 우나라가 망했지만, 

진나라에 있었을 때는 패자가 되었습니다. 그것은 백리해가 우나라에 있을 때는 어리석었고, 

진나라에 있을 때는 지혜로웠다는 말이 아니라  백리해가 쓰임을 당했느냐 안했느냐, 

그의 의견이 받아들여졌느냐 아니었느냐에 있었던 것입니다.  

성안군 진여가 만일 선생의 계책을 받아들였다면, 아마도 이 한신이 거꾸로 선생의 포로가

되었을 것입니다.   그가 선생의 계책을 받아들이지 않았기 때문에 이 한신이 선생을 곁에서

모실 수 있게 된 것입니다."라고 하며.  한신이 단호한 태도로 부탁하며 말하기를 : 

" 제가 마음을 기울여 계책을 구하오니 선생께서는 사양하지 마십시오."라고 하였다.]

廣武君曰:「臣聞智者千慮,必有一失;愚者千慮,必有一得. 

故曰『狂夫之言,聖人擇焉』.  顧恐臣計未必足用,願效愚忠.  

夫成安君有百戰百勝之計,一旦而失之,軍敗鄗下,身死泜上.

今將軍涉西河,虜魏王,禽夏說閼與,一舉而下井陘,不終朝破趙二十萬眾,誅成安君.

名聞海內,威震天下,農夫莫不輟耕釋耒,褕衣甘食,傾耳以待命者.

若此,將軍之所長也.  然而眾勞卒罷,其實難用.

[광무군이 말하기를 : " 지혜있는 사람도 천 번의 생각에 한 번의 잘못된 일이 반드시 있고,

어리석은 사람도 천 번의 잘못된 생각에 반드시 한 번의 옳은 생각을 할 수 있다.’라고

저는 들어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말하기를 '아무리 미친 사람의 말이라도 성인들은

귀를 기울려 들은 다음 취한다.'라고 했습니다.  단지 제가 걱정하는 바는 나의 생각이

충분치 못하여 장군을 만족시켜드리지 못하지나 않을까 해서입니다.

그래도 어리석으나마 성의를 다하여 말씀드리겠습니다. 

성안군 진여는 백전백승 할 수 있는 입장에 있었습니다. 그러나 하루아침에 단 한 번의 실수로 

그의 군사는 호성13)에서 패하고 그의 몸은 저수(泜水) 강안에서 죽었습니다.

 지금 장군께서는 서하에서 하수를 건너 위왕 표(豹)를 사로잡고, 북쪽으로 진격하여 

연여(閼與)를 피로 물들이며 대(代)나라의 상국 하열(夏說)을 포로로 삼았습니다. 

계속 진격하여 일거에 정형(井陘)의 관문을 떨어뜨리고 오전도 미처 다 가기 전에

조나라의 20만 대군을 격파하고 그 대장 성안군 진여를 죽였습니다.

장군의 이름은 해내에 멀리 퍼지고, 그 위세는 천하를 진동시켰습니다.

이에 병화가 머지않아 자기 몸에 이르리라고 생각한 농부들은 농기구를 손에 놓아

밭 갈기를 멈추고 좋은 옷을 입고 맛있는 음식을 먹으며 언제나 동원령이 내릴지를 알기 위해

귀를 기울이고  있습니다. 이와 같은 정세는 장군에게는 매우 이로운 일입니다.

그러나 지금 백성들은 과로에 시달리고 군사들은 피로에 지쳐있어

사실은 전투에 동원하기가 어렵습니다.

 

今將軍欲舉倦獘之兵,頓之燕堅城之下,欲戰恐久力不能拔,情見勢屈,曠日糧竭,

而弱燕不服,齊必距境以自彊也.  燕齊相持而不下,則劉項之權未有所分也. 

若此者,將軍所短也.  臣愚,竊以為亦過矣.  故善用兵者不以短擊長,而以長擊短.」

[그런데 지금 장군께서 피로에 지친 군사들을 다시 일으켜 연나라로 진격하여 그 견고한

도성 밑에 진을 치고 비록 싸우려고 하신다 할지라도 장시간의 공격에도 그 성을 함락시키지

못하기라도 한다면, 한군의 피폐한 실상만 드러나고, 군의 사기는 꺾이어 결국은 시일만

오래 끌게 되어 군량미만 다하게 될 것입니다.  허약한 연나라를 굴복시키지 못한다면

제나라는 필시 국경의 경비를 강화하여 전력으로 한군에 대항할 것입니다.

그렇게 된다면 연(燕)과 제(齊)는 기각지세를 이루며 서로 양쪽에서 버티며 결코 항복하지

않을 것입니다.  이로써 한(漢)과 초의 싸움은 승부가 분명하게 되지 않고

전선은 교착상태에 빠지게 되면 천하의 정세는 장군에게 불리하게 변하게 됩니다.   

소인의 어리석은 생각으로는 연, 제(燕, 齊) 두 나라를 공격하려는 장군의 계획은 옳지 않은 것

같습니다.  자고로 용병에 능한 자는 자기의 단점으로 상대방의 장점을 공격하지 않으며,  

자기의 장점으로 상대방의 단점을 공격합니다."라고 하였다.] 

韓信曰:「然則何由?」

廣武君對曰:「方今為將軍計, 莫如案甲休兵, 鎮趙撫其孤, 百里之內, 牛酒日至, 

以饗士大夫醳兵, 以饗士大夫醳兵, 北首燕路, 而後遣辯士奉咫尺之書, 暴其所長於燕,

燕必不敢不聽從. 燕已從, 使諠言者東告齊, 齊必從風而服, 雖有智者, 亦不知為齊計矣.

如是,則天下事皆可圖也.  兵固有先聲而後實者,此之謂也.

​[한신이 묻기를 : " 그렇다면 제가 어떻게 해야 합니까?"라고 하자. 
광무군이 대답하기를 : " 지금의 상황 하에서 장군을 위해 계책을 올린다면,

무기를 정비하며 군사를 휴식시키며, 전쟁으로 피폐해진 조나라 땅을 진무하고

그 전쟁 고아들을 거두어 백성들을 마음을 안심시키십시오.

사방 백리의 땅에 사는 사람들에게 매일 소고기와 좋은 술을 보내 장수들과 사졸들로 하여금

배불리 먹게 하십시오. 그런 다음 그들의 머리를 연나라가 있는 북쪽으로 돌리게 한 다음

변사(辯士) 한 사람에게 간단한 편지 한 통을 들려 사자로 보내 한군의 위세를 연나라에

시위한다면 연나라는 감히 장군의 말을 따르지 않을 수 없을 것입니다. 

연나라가 장군에게 이미 복종하게 되고, 또 다른 변사 한 사람을 사자로 삼아 

동쪽의 제나라에 보내 그 일을 알린다면 제나라 역시 그 위세에 눌려 복종하게 될 것입니다.

비록 제나라에 지혜있는 사람이 있다 할지라도, 그때는 이미 제나라를 위해 아무런 계책을

세울 수 없을 것입니다. 이와 같이 일이 행하신다면, 천하의 일을 모두 장군이 마음먹은 대로

도모할 수 있을 것입니다.병법에 소리를 내어 먼저 허장성세를 이루고, 후에 실제적인 행동에

들어가라14)고 한 구절은 바로 이런 경우를 두고 하는 말입니다."라고 하였다.]

  

韓信曰:「善.」從其策,發使使燕,燕從風而靡.  乃遣使報漢,因請立張耳為趙王,

以鎮撫其國.  漢王許之, 乃立張耳為趙王.  楚數使奇兵渡河擊趙,

趙王耳、韓信往來救趙,因行定趙城邑,發兵詣漢.  

楚方急圍漢王於滎陽,漢王南出,之宛、葉閒,得黥布,走入成皋,楚又復急圍之.

[한신이 말하기를 : " “좋소.”라고 하며. 그의 계책에 따라 연나라에 사자를 보내자,  

연나라는 바람에 쓰러지는 풀잎처럼 모두 한나라에 항복했다.

곧바로 한왕에게 사자를 보내 조와 연 두 나라를 점령한 일을 고하고,

장이를 조왕으로 세워 조나라를 안정시킬 것을 청했다.

한왕이 허락하자, 한신은 장이를 조왕으로 세웠다. 

초나라가 빈번히 하수를 건너 조나라를 기습하자, 조왕 장이와 한신은 그때마다 달려가

조나라를 구하고 그 기회를 이용하여 조나라의 성읍을 평정한 다음

그곳의 군사들을 징발하여 한왕에게 구원군으로 보냈다.  

초나라가 바야흐로 한왕을 형양에게 포위하여 맹공을 가하자,

한왕은 남쪽의 완(宛)과 엽(葉)으로 달아났다.  

그때 마침 그곳에서 경포(黥布)를 만나 그 군사들을 얻어 다시 북상하여 성고(成皐)로 들어갔다.  

초나라가 다시 군사를 이끌고 출동하여 성고를 포위하고 맹공을 가했다.]

六月,漢王出成皋,東渡河,獨與滕公俱,從張耳軍修武.  至,宿傳舍.

晨自稱漢使,馳入趙壁.  張耳、韓信未起,即其臥內上奪其印符,以麾召諸將,

易置之. 信、耳起,乃知漢王來,大驚.

漢王奪兩人軍,即令張耳備守趙地.  拜韓信為相國,收趙兵未發者擊齊. 

信引兵東,未渡平原,聞漢王使酈食其已說下齊,韓信欲止.

[6월, 한왕이 다시 등공(滕公) 하후영 한 사람만을 데라고 성고를 탈출하여 동쪽으로 나아가

하수를 건넌 다음 수무에 주둔하고 있는 한신과 장이의 군대에 몸을 의탁하기 위해 달려갔다.

이윽고 한왕이 수무에 이르러하루 밤을 묶고 새벽에 일어나 스스로를 한왕의 사자라고

칭하면서 말을 달려 조나라 군영 안으로 들어갔다.  그때는 장이와 한신은 기상 전이었다.

한왕이 곧바로 그들의 침실로 들어가 두 사람의 장군 인장과 부절을 빼앗아 휘하의 장수들을

소집하여 그 부서들을 바꾸어 놓았다. 잠에서 깨어난 한신과 장이는 한왕이 막사에 들어와

좌정하고 있는 모습을 보고 매우 놀랐다. 두 사람의 군대를 빼앗은 한왕은 즉시 명령을 발하여

장이로 하여금 조나라를 지키게 하고, 한신은 조나라 상국으로 삼고 조나라 땅의 남은 장정들을

징발해 제나라를 공격하도록 했다. 한신이 군사를 이끌고 동쪽의 제나라 평원(平原)으로

진격하기 위해 하수를 건너기 전에 한왕이 역이기를 사자로 보내 제나라를 달래어

항복시켰다는 소식을 듣고, 한신이 제나라로의 진격을 멈추려고 했다.] 

 

范陽辯士蒯通說信曰:「將軍受詔擊齊,而漢獨發閒使下齊,寧有詔止將軍乎? 

何以得毋行也!且酈生一士,伏軾掉三寸之舌,下齊七十餘城,將軍將數萬眾,

歲餘乃下趙五十餘,為將數歲,反不如一豎儒之功乎?」

[그때 범양(范陽)의 변사 괴통(蒯通)이 한신에게 말하기를 : " 장군이 한왕의 조칙을 받아

제나라를 정벌하기 위해 진격하고 있는데 한왕은 장군에게 통고도 하지 않고 밀사를 보내

항복을 받아냈습니다. 그러나 장군에게 공격을 중지하라는 조칙이 어디에 있습니까? 

무슨 이유로 진격을 멈추려고 하십니까? 일개 서생에 불과한 역이기 한 사람이

편안히 수레를 타고 가서 제나라의 70여 개 성의 항복을 받아냈습니다.

장군께서는 수만의 군졸을 거느리고 일 년여의 긴 시간 동안 고작 조나라 50여 개의 성의

항복을 받았을 뿐입니다. 장군이 되신 지 벌써 몇 해가 지났는데 그 세운 공이

한낱 일개 서생에 불과하단 말입니까?"라고 하였다.] 

於是信然之,從其計,遂渡河. 齊已聽酈生,即留縱酒,罷備漢守御.

信因襲齊歷下軍,遂至臨菑.  齊王田廣以酈生賣己,乃亨之,而走高密,

使使之楚請救. 韓信已定臨菑,遂東追廣至高密西.  楚亦使龍且將,號稱二十萬,救齊. 

[괴통의 말이 옳다고 생각한 한신은 그 계책을 쫓아 하수를 건넜다.

그때 제나라는 이미 역이기의 유세에 설복되어 한나라에 항복하기로 하고 역이기를

제군의 진영에 머무르게 한 다음 술좌석을 마련하여 마시며한군에 대한 방어태세를 풀고 있었다.

이에 한신은 역하(歷下)에 주둔하고 있던 제군을 기습하고 패주하는 적의 뒤를 추격하여 

임치에 이르렀다. 제왕 전광은 역이기가 자기를 속였다고 생각하고 그를 삶아 죽이고

고밀(高密)로 달아나면서 사자를 초나라에 보내 구원을 청했다.

임치에 입성하여 백성들을 위무한 한신은 계속해서 전광의 뒤를 추격하여 고밀에 이르렀다.

초나라 역시 용저를 대장으로 삼고 군사가 20만 이라고 일컬으면서 제나라를 구원하도록 했다.]

 

齊王廣、龍且并軍與信戰,未合.  人或說龍且曰:「漢兵遠鬬窮戰,其鋒不可當.

齊、楚自居其地戰,兵易敗散. 不如深壁,令齊王使其信臣招所亡城,亡城聞其王在,

楚來救,必反漢.  漢兵二千里客居,齊城皆反之,其勢無所得食,可無戰而降也.」
龍且曰:「吾平生知韓信為人,易與耳.  且夫救齊不戰而降之,吾何功?

今戰而勝之,齊之半可得,何為止!」遂戰,與信夾濰水陳.

[제왕 전광과 초나라 장수 용저 휘하의 군사들이 함께 한신의 한군과 교전에 들어가기 전에

어떤 사람이 말하기를 : " 먼 거리를 원정해 온 한군은 전투에 임하면

있는 힘을 다할 것이기 때문에 그 예봉을 당해 낼 수 없을 것입니다.  

반면에 자기들의 땅에서 싸우는 제와 초 두 나라 군사들은 쉽게 패하고 흩어지게 될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보루를 높이 세워 굳게 지키며 한편으로는 제왕을 시켜 한군에게 항복한

제나라 성읍에 믿을만한 신하들을 사자로 보내 그들을 돌아오게 하십시오.

항복한 성들이 그들의 왕이 살아있고, 게다가 초나라의 구원병이 왔다는 소식을 듣게 된다면,

필시 한나라를 배반하고 우리에게 투항해 올 것입니다.  2천 리 밖에 근거지가 있는

한나라 군사들은 그 후방의 제나라 성들이 모두 반기를 들게 된다면 그들이 먹을 수 있는 양식은

어디서도 구할 수 없게 되어 자연히 싸우지 않고도 항복시킬 수 있습니다."라고 하자. 
용저가 듣고 말하기를 : " 나는 평소에 한신이라는 위인을 잘 알고 있다.

따라서 그와의 싸움은 매우 쉬운 일이다.  이 용저가 제나라를 구원하려고 왔으면서

싸우지도 않고 그들을 항복시킨다면 어찌 공을 세웠다고 하겠는가?  지금 싸움에서 우리가

이길 것이고, 제나라의 반은 찾은 것과 같은데 어찌 싸우기를 멈춘단 말인가?"라고 하며. 
용저는 즉시 교전에 들어가기로 하고, 유수(濰水)를 사이에 두고 한군의 한신과 대치하였다.]

 

韓信乃夜令人為萬餘囊,滿盛沙,壅水上流,引軍半渡,擊龍且,詳不勝,還走. 

龍且果喜曰:「固知信怯也.」 遂追信渡水.  信使人決壅囊,水大至.  龍且軍大半不得渡,

即急擊,殺龍且.  龍且水東軍散走,齊王廣亡去.  信遂追北至城陽,皆虜楚卒.

[한신은 곧 야음을 틈타 군사들에게 명하여 만 개의 부대를 만들어 그 안에 모래를 가득

채우도록 한 다음 강의 상류 쪽으로 가서 물길을 막게 했다.

그리고는 군사를 이끌고 용저의 초군을 공격하기 위해 강을 반쯤 건너다 일부러 싸움에 패하여 

자기 진지로 달아는 척 했다. 용저가 과연 희희낙락하며 말하기를 : 
 " 나는 원래 한신이라는 위인이 겁쟁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라고 하였다. 
용저는 한신의 한군 뒤를 추격하기 위해 유수의 강심으로 그 군사들을 들여 보냈다.

이에 한신이 사람을 보내 상류 쪽에 모래부대로 막아 놨던 제방을 터뜨리게 하자,

큰물이 홍수처럼 밀려들었다. 용저의 군사들 중 절반 이상은 미처 강을 건너지 못하고

물살에 떠내려갔다. 한신이 그 틈을 이용하여 남은 용저의 군대에 맹공을 가해 용저를 잡아

살해했다.  유수 동쪽에 남아 있던 용저의 군사들도 흩어져 달아나고  제왕 전광도 달아날

방법 외는 다른 방법이 없었다. 한군이 남쪽으로 도망가는 제,초(齊,楚) 연합군 뒤를 추격하여

성양(城陽)에 이르렀을 때 초나라 군사들은 모두 한군의 포로가 되었다.] 

 

漢四年,遂皆降平齊. 使人言漢王曰:「齊偽詐多變, 反覆之國也, 南邊楚, 不為假王以鎮之,

其勢不定. 願為假王便.」 當是時, 楚方急圍漢王於滎陽,韓信使者至,發書,

漢王大怒, 罵曰:「吾困於此, 旦暮望若來佐我, 乃欲自立為王!」
張良、陳平躡漢王足,因附耳語曰:「漢方不利,寧能禁信之王乎?

不如因而立,善遇之,使自為守.  不然,變生. 」

[한왕 4년(기원전 203년), 한신은 제나라의 모든 성으로부터 항복을 받고 그 땅을 평정했다.

한신이 한왕에게 사자를 보내 아뢰기를 :" 제나라 사람들은 속임수가 많고 변화무쌍하며

번복이 심한 나라입니다.  또한 초나라와 국경을 접하고 있어 제가 이곳의 가왕(假王)이 되어

진정시키지 않는다면 정세가 안정되지 않을 것같아 신을 가왕으로 삼아주시면

편하겠습니다."라고 하였다.  그 당시 초나라는 한군을 형양에서 포위하고 맹공을 가하고 있어

한왕은 한신이 군사들을 몰고 구원해 주기를 학수고대하고 있었다. 

이윽고 한신의 사자가 당도하여 그가 보낸 편지를 본 한왕은 불같이 화를 내며

한신을 향해 꾸짖기를 : " 내가 지금 초군에게 포위되어 곤경에 처해 있어 아침저녁으로

구원군이 언제 당도하나  눈이 빠지도록 기다리고 있는데,

그 놈은 오히려 왕자리만 탐내고 있단 말인가?"라고 하자. 
곁에 있던 장량(張良)과 진평(陳平)이 한왕의 발등을 일부러 밟으며 제지하고는,

귓가에 입을 대고 은밀히 말하기를 : " 지금 한나라는 매우 불리한 처지에 놓여 있습니다.  

어찌 한신이 왕이 되는 것을 금할 수 있겠습니까? 이번 기회에 그를 제후왕으로 세우고

그를 잘 대우하여 그로 하여금 스스로를 지키도록 하시기 바랍니다. 

그렇지 않으면 아마도 큰 변란이 일어날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漢王亦悟,因復罵曰:「大丈夫定諸侯,即為真王耳,何以假為!」

乃遣張良往立信為齊王,徵其兵擊楚.

[한왕이 즉시 깨닫고 다시 큰 소리로 한신을 욕하며 말하기를 : " 대장부로 제후가 되었으면

진왕(眞王)이 되어야지, 하필이면 가왕(假王)이 뭐란 말인가?"라고 하며, 한왕은 즉시

장량을 보내 한신을 제왕으로 세우고,그 군사들을 동원하여 초나라를 공격하도록 했다.]

 

楚已亡龍且,項王恐,使盱眙人武涉往說齊王信曰:「天下共苦秦久矣,相與力擊秦.

秦已破, 計功割地,分土而王之,以休士卒.  今漢王復興兵而東,侵人之分,奪人之地,

已破三秦, 引兵出關, 收諸侯之兵以東擊楚, 其意非盡吞天下者不休, 其不知厭足如是甚也.

且漢王不可必,身居項王掌握中數矣,項王憐而活之,然得脫,輒倍約,復擊項王,

其不可親信如此.  今足下雖自以與漢王為厚交,為之盡力用兵,終為之所禽矣. 

足下所以得須臾至今者,以項王尚存也.  當今二王之事,權在足下.  足下右投則漢王勝,

左投則項王勝. 項王今日亡,則次取足下. 足下與項王有故, 何不反漢與楚連和,

參分天下王之?  今釋此時, 而自必於漢以擊楚, 且為智者固若此乎!」

[제나라를 구원하기 위해 출전한 용저(龍且)가 싸움 중에 죽고 20만에 달하는 초군이 전멸하자,

항왕은 이를 매우 두려워하여 우태(盱胎) 사람 무섭을 제나라로 보내 한신에게 유세하도록 했다.

무섭이 한신을 만나 말하기를 :" 천하 백성들이 진나라의 가혹한 법으로 인하여

오랫동안 고통을 받아오다가, 마침내 들고 일어나 서로 힘을 합쳐 진나라를 공격했습니다.

이윽고 진나라를 멸하자 공을 세운 장상들에게 땅을 나누어 제후왕으로 삼아 군사들을 

쉬게 했습니다. 지금 한왕이 다시 군사를 일으켜 동쪽으로 나와 제후왕들의 땅을 침범하거나

탈취하여 이미 삼진은 한왕이 차지하게 되었습니다. 계속해서 그 군사를 이끌고 

함곡관을 나와 제후들의 군사들을 규합하여 동쪽의 초나라를 공격하고 있습니다.

이는 한왕이 천하를 모두 삼키지 않으면 멈추지 않겠다는 데에 그 뜻을 두고 있기 때문이라.

그의 탐욕스러운 마음은 그가 이미 차지한 땅으로도 만족할 줄 모르니 그것은 도가 너무

심한 것 아닙니까?  게다가 한왕은 신임할 수 없는 위인입니다. 그의 목숨은 여러 번에 걸쳐

항왕의 수중에 떨어졌었지만 항왕은 그를 불쌍하게 여겨 매 번 살려주었습니다.

그러나 화를 면한 한왕은 그때마다 재빨리 약속을 배신하고 항왕을 공격했습니다.

그와 친하게 지낼 수 없고 믿을 수 없는 것은 이와 같습니다.  

지금 장군께서 한왕과 비록 두터운 친교가 있어 그를 위해 힘을 다해 용병을 하지만

결국은 그에게 배신당해 사로잡히게 될 것입니다.

장군께서 지금까지나마 살아 계실 수 있는 것은 항왕이 있기 때문입니다.  

지금 한왕과 항왕 두 왕은 모두 장군의 수중에 있습니다. 

장군께서 오른손을 들면 한왕이 이기게 되고, 왼손을 들면 항왕이 이기게 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항왕이 지금 망하게 되면 장군은 다음에 망할 것입니다.  

게다가 장군은 옛날 항왕을 모신 적이 있었습니다. 어찌하여 한왕의 휘하에서 떠나

초왕과 연합하여 천하를 삼분하여 왕이 되려고 하시지 않습니까?  

지금과 같은 절호의 기회를 놓치고, 오히려 한왕의 편에 서서 초나라를 공격하려고 하는 것은  

슬기로운 사람으로서 취할 행동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라고 하였다.] 

 

韓信謝曰:「臣事項王, 官不過郎中, 位不過執戟,言不聽, 畫不用, 故倍楚而歸漢.

漢王授我上將軍印,予我數萬眾,解衣衣我,推食食我,言聽計用,故吾得以至於此.

夫人深親信我,我倍之不祥,雖死不易.  幸為信謝項王!」 武涉已去,

齊人蒯通知天下權在韓信,欲為奇策而感動之,以相人說韓信曰:「仆嘗受相人之術.」

[한신이 무섭의 제안을 거절하며 말하기를 : " 내가 예전에 항왕을 모실 때는,

관직은 랑중에 불과했고, 하는 일은 창을 들고 항왕의 신변이나 지켰으며,

말해도 들어주지 않고, 계책을 내어도 쓰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나는 초나라를 등지고 한나라에 귀의했습니다.

한왕은 나를 상장군에 임명하고  그 인장과 함께 수만 명의 군사를 주었으며, 

또한 나를 대하기를 자기의 옷을 벗어 나를 입혀주고, 자기의 식사를 같이 나누어 먹었습니다.

나의 말에 귀를 기울여 주고 나의 계책을 채택해 주었습니다. 

그래서 제가 이 자리에 있게 된 것입니다. 무릇 다른 사람이 나를 친하게 대하며

신임하고 있는데, 내가 그 사람을 배반함은 상서롭지 못한 일입니다.

내가 비록 죽는다 할지라도 내 마음을 바꾸지 못하겠습니다.  

이 한신을 위해 항왕에게 거절하는 말을 전해주시면 고맙겠습니다."라고 하였다. 
무섭이 돌아가자 제나라 사람 괴통(蒯通)이 천하의 향방이 한신의 수중에 있음을 알고 와서

계책을 내어 그의 마음을 움직여보려고 했다.

그는 관상으로써 한신을 설득하기를 : " 제가 옛날에 관상을 배운 적이 있습니다."라고 하였다.] 


韓信曰:「先生相人何如?」

對曰:「貴賤在於骨法,憂喜在於容色,成敗在於決斷,以此參之,萬不失一.」
韓信曰:「善.  先生相寡人何如?」 對曰:「願少閒.」

信曰:「左右去矣.」

通曰:「相君之面,不過封侯,又危不安.  相君之背,貴乃不可言.」 

[한신이 묻기를 : " 선생은 어떠한 방법으로 관상을 보십니까?"라고 하자. 
괴통이 대답하기를 : " 사람의 귀천은 골상에 달려있고, 근심과 걱정은 얼굴에 있습니다.

또한 일의 성패는 그 사람의 결단에 달려 있습니다.

이 세 가지를 마음속에 새겨 일을 행한다면 만전을 기할 수 있습니다."라고 하였다. 
한신이 묻기를 : " 좋으신 말씀입니다. 그렇다면 저의 관상은 어떠합니까?"라고 하자.

괴통이 대답하기를 : " 잠시 주위의 사람들을 물리쳐 주시기 바랍니다."라고 하였다. 

한신이 말하기를 : “ 다들 물러가라.”라고 하자.
괴통이 말하기를 : " 장군의 면상을 보니 단지 제후의 상에 불과하며, 

그것도 매우 위태로워 불안합니다. 

그러나 장군의 뒷상을 보니 그 귀하기가 이루 말할 수 없습니다."라고 하였다.] 

 

韓信曰:「何謂也?」 

蒯通曰:「天下初發難也, 俊雄豪桀建號壹呼, 天下之士雲合霧集, 魚鱗襍遝, 熛至風起.

當此之時,憂在亡秦而已. 今楚漢分爭,使天下無罪之人肝膽涂地,父子暴骸骨於中野,

不可勝數.楚人起彭城, 轉鬬逐北, 至於滎陽, 乘利席卷, 威震天下. 然兵困於京、索之閒, 

迫西山而不能進者, 三年於此矣.  漢王將數十萬之眾, 距鞏、雒, 阻山河之險, 一日數戰,

無尺寸之功,折北不救,敗滎陽,傷成皋,遂走宛、葉之閒,此所謂智勇俱困者也.  

夫銳氣挫於險塞,而糧食竭於內府,百姓罷極怨望,容容無所倚. 

以臣料之,其勢非天下之賢聖固不能息天下之禍.

[한신이 묻기를 : " 도대체 무슨 말입니까?라고 하자.  

괴통이 대답하기를 : " 천하가 처음 어지러워졌을 때 영웅호걸들이 제각기 명분을 내걸고

한 번 소리치니, 천하의 재사들이 구름과 같이 몰려들어 물고기 비늘처럼 서로 뒤섞이더니,

들불처럼 번지는 화염과 같이, 일진광풍의 회오리바람을 일으키며 일어났습니다.

당시 선비들의 관심사는 단지 진나라가 멸망하는것 뿐이었으나, 지금은 초와 한이 나뉘어

다툼으로써, 천하의 죄 없는 백성들은 그들의 간과 쓸개가 땅에 깔리게 되었고,  

황량한 교외의 들판에 나 뒹굴고 있는 아비와 자식의 해골은 그 수효가 많아

이루 헤아릴 수 없을 정도입니다.  초나라가 팽성에서 일어나 사방의 적을 쫓아다니다

그 패주하는 적의 뒤를 따라 형양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승세를 탄 초군이 천하를 석권하며 천하를 진동시켰습니다.

그러나 그 초군도 경(京)과 삭(索) 사이에서 한군의 반격으로 기세가 꺾이고

성고의 서쪽에 있는 험악한 산세에 막혀 더 이상 전진하지 못한지가 이미 3년이 되었습니다.

한왕은 몇 십만이나 되는 인마를 이끌고 공현(鞏縣)과 낙양 일대에서 초군의 서진을 막고,

그곳의 험준한 산과 강의 요충지에 의지하여 초군의 공격에 간신히 버티고 있습니다.

한왕은 그 동안 하루에도 몇 번이나 싸움을 치렀음에도 지금까지 한 치의 공도 세우지 못하고

패전만 계속하다가 외부로부터 구원도 받지 못하고 결국은 형양과 성고의 싸움에서

타격을 입고 완(宛)과 엽(葉) 땅으로 달아났습니다.

이것이 소위 지혜는 바닥이 나고 용기는 다하게 되었다는 말입니다.

군대의 사기는 험준한 요새에서 꺾이고, 창고의 양식은 다 떨어졌으며

백성들은 고통과 피로에 지쳐 그 원성은 길거리를 가득 메우고 있어 민심은 동요되어

의지할 곳이 없게 되었습니다. 제가 생각하기에 이러한 형세는 천하의 성현이 아니라면

참으로 천하의 재앙을 그치게 할 수 없다고 여겨집니다.

 

當今兩主之命縣於足下.  足下為漢則漢勝,與楚則楚勝.  臣願披腹心,輸肝膽,效愚計,

恐足下不能用也.  誠能聽臣之計, 莫若兩利而俱存之, 參分天下, 鼎足而居, 其勢莫敢先動.

夫以足下之賢聖,有甲兵之眾,據彊齊,從燕、趙,出空虛之地而制其後,因民之欲,

西鄉為百姓請命,則天下風走而響應矣,孰敢不聽!邦大弱彊,以立諸侯,諸侯已立,

天下服聽而歸德於齊.  案齊之故,有膠、泗之地,懷諸侯以德,深拱揖讓.

則天下之君王相率而朝於齊矣. 蓋聞天與弗取,反受其咎

;時至不行,反受其殃. 願足下孰慮之.」

[지금 결국 한왕과 초왕 두 왕들의 운명은 모두 장군의 손안에 달려있게 되었습니다. 

장군께서 한왕에게 협조하면 한왕이 승리할 것이고,

초왕에게 협조하면 초왕이 승리하게 될 것입니다.

이에 제 속마음을 피력하여 어리석은 계책이나마 올리고자 하오나 단지 걱정되는 것은

장군께서 제 계책을 받아들이지 않을까 해서입니다. 진실로 능히 장군께서 저의 계책을

받아들이신다면 한과 초 두 나라에 이익을 주어 모두 존속케 하고,

천하를 삼분하여 정족지세를 이루어 아무도 감히 먼저 움직이지 못하게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면 장군의 뛰어난 능력과 성스러운 덕성으로 수많은 무기와 군사들을 거느리고 

부강한 제나라를 근거지로 삼고, 연과 조 두 나라를 복종시키고

유(劉)와 항(項)의 군대가 없는 땅으로 나아가 그들의 후방을 압박한다면, 그것은 바로

백성들의 마음에 순응하는 바가 될 입니다. 또한 계속해서 서쪽의 형양성 쪽으로 진격하여

유(劉)와 항(項)의 분쟁을 중지시켜 군사들과 백성들을 위해 그들의 목숨을 보전시키라고 

요구한다면, 천하 사람들은 바람처럼 달려와 메아리처럼 호응할 것입니다. 

누가 감히 장군의 명을 듣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그리고 큰 나라는 쪼개지고, 강한 나라는 약하게 되어 제후들을 세울 수 있게 됩니다.  

이에 제후들이 일단 서게 된다면, 천하는 장군이 베푼 덕에 감격하여 제나라의 명을 받들며

귀의할 것입니다.  이에 제나라의 옛 땅을 안정시키고 교하와 사수 유역을 근거지로 하면서

덕을 베풀어 감동시킨 제후들을 소집해서 두 손을 높이 들어 읍을 하면서 겸양의 자세로

자신을 낮춘다면 천하의 제후왕들과 그 재상들은 줄을 서가며 제나라에 들어와 조배를 드릴

것입니다. 하늘이 주는 것을 받지 않으면 오히려 후에 벌을 받고,

때가 왔을 때 행동하지 않는다면 도리어 그 재앙을 받는다고 들었습니다.

원컨대 장군께서는 심사숙고하시기 바랍니다."라고 하였다.] 

 

韓信曰:「 漢王遇我甚厚, 載我以其車, 衣我以其衣, 食我以其食.  吾聞之,

乘人之車者載人之患衣, 人之衣者懷人之憂, 食人之食者死人之事, 吾豈可以鄉利倍義乎!」

[한신이 말하기를 : " 한왕은 나를 후하게 대해줍니다. 자기의 수레로 나를 태워주며,

자기의 옷으로 나를 입혀주며, 자기의 먹을 것으로 나를 먹여주었습니다. 

내가 듣기에 남의 수레를 타는 자는 그 사람의 걱정을 제 몸에 실어야 하고, 

남의 옷을 얻어 입은 자는 그 마음속에 그 사람의 우환을 품어야 하며, 

남의 음식을 얻어 먹은 자는 그 사람의 일을 위해 목숨을 바쳐야 한다고 했는데16) 

내가 어찌 이익을 탐해 의를 저버릴 수 있겠습니까?"라고 하자.]


蒯生曰:「足下自以為善漢王,欲建萬世之業,臣竊以為誤矣. 

始常山王、成安君為布衣時,相與為刎頸之交,後爭張黶、陳澤之事,二人相怨.  

常山王背項王,奉項嬰頭而竄,逃歸於漢王.

漢王借兵而東下,殺成安君泜水之南,頭足異處,卒為天下笑. 

此二人相與,天下至驩也.  然而卒相禽者,何也 ? 患生於多欲而人心難測也.

[​괴통이 대답하기를 : " 장군께서는 스스로 한왕과 친하다고 생각하고 만세에 길이 빛나는 공을

세우려고 하시지만, 제가 보기에는 크게 잘못 생각하시고 있습니다.

원래 상산왕 장이(張耳)와 성안군 진여(陳餘) 두 사람은 그들이 뜻을 못 얻고 포의를 입고

지낼 때부터 서로 문경지교를 나누며 서로 가깝게 지냈었습니다.  

후에 장염(張黶)과 진택(陳澤)17)의 일을 다투어 두 사람은 서로 원망하게 되었습니다.18)

상산왕 장이는 항왕을 배반하고 목을 움츠리며 항영(項嬰)19)의 머리를 베어 가지고 가서

한왕에게 투항했습니다.  한왕은 장이에게 군대를 내어주며 동쪽으로 진격시켰습니다.

장이는 저수(泜水)의 남쪽에서 진여를 죽여  그의 머리와 몸을 따로 떨어지게 함으로 해서

천하 사람들의 웃음거리가 되었습니다.

이 두 사람이 옛날 친교를 맺었을 때는 천하에 지극히 친한 사이였습니다.

그러나 마침내 서로 공격하여 사로잡으려고 한 것은 무슨 이유 때문이라고 생각하십니까?

근심은 욕심이 많은 데에서 생기고, 또한 사람의 마음을 헤아릴 수 없기 때문인 생깁니다. 

 

今足下欲行忠信以交於漢王,必不能固於二君之相與也,而事多大於張黶、陳澤.

故臣以為足下必漢王之不危己,亦誤矣.  

大夫種、范蠡存亡越,霸句踐,立功成名而身死亡.

野獸已盡而獵狗亨.  夫以交友言之,則不如張耳之與成安君者也;

以忠信言之,則不過大夫種、范蠡之於句踐也.  此二人者,足以觀矣.  願足下深慮之.

[지금 장군께서는 충성과 신의를 다하여 한왕과 친하려고 하지만,

이는 필시 장이와 진여 두 사람이 사귈 때의 공고함보다는 못합니다. 

장차 한왕과 장군 사이에는 장염과 진택의 일보다 더 큰 사단이 더 많이  발생할 것입니다.

그래서 저는, 한왕이 결코 장군을 위태롭게 하지 않을 것이라는 생각은 틀렸다고

판단하는 것입니다.  

대부 문종(文鍾)20)과 범려(范蠡)는 망한 월나라를 부흥시켜 구천을 패자로 세워 공을 세워

불후의 이름을 얻었으나 문종은 죽고 범려는 도망가야 했었습니다.

들짐승이 사라지면 사냥개는 삶겨서 죽게 되는 법입니다.  

무릇 친구간의 우정을 이야기하자면 장이와 진여만한 사례가 없고,

충과 신의를 이야기하자면 문종과 범려의 구천을 향한 마음보다 더 좋은 사례는 없습니다.

이 두 사례에 비추어 장군과 한왕의 사이를 비교해 보시면 분명히 알 수 있을 것입니다.

원컨대 장군께서는 심사숙고하시어 일을 그르치지 마십시오.

 

且臣聞勇略震主者身危,而功蓋天下者不賞.  

臣請言大王功略:足下涉西河,虜魏王,禽夏說,引兵下井陘,誅成安君,徇趙,

脅燕,定齊,南摧楚人之兵二十萬,東殺龍且,西鄉以報,此所謂功無二於天下,

而略不世出者也.  今足下戴震主之威, 挾不賞之功, 歸楚, 楚人不信;歸漢, 漢人震恐:

足下欲持是安歸乎? 夫勢在人臣之位而有震主之威, 名高天下, 竊為足下危之.」

韓信謝曰:「先生且休矣,吾將念之.」

[제가 듣기에 용감하고 지략이 뛰어나 그 주군되는 사람으로 하여금 위협감을 느끼게 하는 자는

위태롭고, 그 공이 천하를 덮을 정도로 크게 되면 상을 받지 못한다고 했습니다.

소인이 청컨대 지금까지 장군이 이룬 공을 열거해 보겠습니다 : 

장군께서는 서하를 건너 위왕 표를 사로잡고, 대국(代國)의 재상 하열을 포로로 잡았습니다.

이어서 군사를 이끌고 동쪽으로 계속 나가 정형(井陘)의 요해지를 점령하고 도망가는

진여의 뒤를 추격해서 저수의 남쪽에서 목을 베었습니다. 이에 조나라를 완전히 장악하고,

그 위세를 빌려 연나라마저 복종시키고, 이어 평원에서 하수를 건너 제나라 땅을 평정했습니다.

계속해서 초나라가 보낸 20만 대군을 무찔러 그 대장 용저를 죽이고 서쪽의 한왕에게 

그 승리를 고했습니다. 이것이 소위 말하는 천하에 둘도 없는 높은 공이라 할 수 있으며

이와 같이 높은 공은 세울 자는 세상에 다시 나타나지 않을 것입니다.

오늘 장군께서는 그와같이 높은 공으로 주군되는 사람을 떨게 하고, 상도 받지 못할 정도로

너무 큰공을 세운 상태에서 초나라에 붙으면 초왕도 역시 장군을 믿지 않을 것이며,  

그렇지 않고 계속 한나라에 남아 있게 된다면 한왕은 장군에 대해 두려움을 느낄 것입니다.  

너무 큰공을 세워 그 주군되는 사람이 두려워할 정도의 위엄을 가지고 계시는 장군께서는

어디로 가셔야 안전하게 될 것 같습니까? 무릇 남의 신하된 자의 지위가 그 주인을 떨게 하고, 

그 이름이 천하에 높게 되었으니, 제가 가만히 생각해 보건대 장군의 장래가 위험하다고

말씀드리는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한신이 괴통에게 보답의 말을 하기를 :

" 선생께서는 잠시 쉬십시오. 나도 생각해보겠습니다.”라고 하였다.]


後數日,蒯通復說曰:「夫聽者事之候也,計者事之機也,聽過計失而能久安者,鮮矣.

聽不失一二者, 不可亂以言;計不失本末者, 不可紛以辭.  夫隨廝養之役者, 失萬乘之權;

守儋石之祿者,闕卿相之位.  故知者決之斷也,疑者事之害也,審豪氂之小計,

遺天下之大數,智誠知之,決弗敢行者,百事之禍也.

[며칠이 지나도록 한신으로부터 아무런 말을 듣지 못한 괴통은 다시 한신을 찾아가 말하기를 : 
" 무릇 남의 선의를 구별해서 취할 수 있는 사람은 일의 변화하는 징조를 미리 예견할 수 있고,  

일을 심사숙고해서 행할 수 있는 사람은 일을 성공시킬 수 있는 관건을 장악할 수 있다 했습니다.  

또한 남의 의견을 비록 받아들이기는 했으나 정확한 판단을 내릴 수 없어 계책을 성사시키지

못한 사람이 오랫동안 편안히 지낼 수 있는 것도 실제로는 그다지 흔치 않습니다.

남의 말을 취함으로써 실수하지 않은 사람은, 비록 어떤 사람이 그럴듯한 말로 꾀려해도

혼란해 하지 않으며, 계략을 세움에 있어 본말을 잃지 않은 사람은, 

비록 어떤 사람이 교묘한 말로써 유혹하려고 해도, 결코 어지럽게 되지 않습니다.

무릇 장작이나 패고, 말이나 기르는 일과 같은 천역에 종사하기를 즐겨하는 자는,

만승지국의 왕이 갖게 되는 권력을 차지할 수 없으며, 

한 두 섬의 봉록을 지키기에 급급한 사람은 공경이나 재상의 높은 자리에 앉을 수 없습니다.  

그래서 일을 도모하는데 결단을 행하는 것은 지혜있는 자로서의 과단성 있는 행동이라 할 수

있으며, 주저하며 결단하지 못하고 의심하는 행동은 일을 도모하는데 오히려 방해가 될 뿐입니다.

터럭과 같이 작은 일에 미주알고주알 따지고 있으면, 천하의 대세를 놓치기 쉽고, 

설사 그 대세를 알아 볼 수 있는 지혜가 있다하더라도, 결단하여 과감하게 행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모든 일의 화근이 됩니다.


故曰『猛虎之猶豫, 不若蜂蠆之致螫;騏驥之跼躅, 不如駑馬之安步;

孟賁之狐疑, 不如庸夫之必至也;雖有舜禹之智,吟而不言,不如瘖聾之指麾也』.

此言貴能行之.  夫功者難成而易敗,時者難得而易失也.  時乎時,不再來. 願足下詳察之.」

[고로 말하기를 ‘머뭇거리고 있는 맹호는 하찮은 미물인 벌이나 전갈이 끼치는 해에도

미치지 못하며, 비록 하루에 천리를 달리는 명마라 할지라도 앞으로 나아가지 않는다면 

천천히 걷는 노마보다 못할 것입니다.

또한 맹분(孟賁)21)과 같은 천하장사도 일을 하는데 머뭇거린다면 일을 결행하는 필부보다

못할 것이며, 비록 순임금이나 우임금과 같은 지혜가 있는 자라 할지라도 입을 열지 않고 

다물고만 있으면 벙어리나 귀머거리가 손짓 발짓으로 말하는 것만도 못할 것이다.’했습니다.22)  

이것은 능히 행동으로 옮길 수 있는 사람은 드물다는 이야기입니다.

대체로 공을 이루기는 힘들고 실패하기는 쉽다고 했습니다.

또한 때는 얻기 어렵고 잃기는 쉽습니다. 좋은 때를 놓치면 기회는 다시 오지 않습니다. 

원컨대 장군께서는 심사숙고하시기 바랍니다."라고 하였다.]

 

韓信猶豫不忍倍漢,又自以為功多,漢終不奪我齊,遂謝蒯通.  蒯通說不聽,已詳狂為巫. 

漢王之困固陵,用張良計,召齊王信,遂將兵會垓下.  項羽已破,高祖襲奪齊王軍.

[그러나 한신은 주저하며 차마 한나라를 배반하지 못하고 또한 자기가 세운 공이 크기 때문에

한나라는 결코 자기로부터 제나라를 빼앗아 가지 못할 것이라고 생각하여 괴통의 말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괴통은 한신이 자기의 말을 받아들이지 않자, 미친 척하고 무당이 되었다. 
항우의 뒤를 쫓다가 고릉(固陵)에서 다시 싸움에서 패하여 곤궁한 처지에 몰리게 된 한왕은 

장량의 계책에 따라 제왕 한신과 그 군사들을 불렀다. 한신이 출전하여 해하에서 한왕과 만났다.

한신이 항우를 물리치자, 한왕은 제왕 한신을 기습하여 그의 군사권을 빼앗아 버렸다.]

 

漢五年正月,徙齊王信為楚王,都下邳.  信至國,召所從食漂母,賜千金.

及下鄉南昌亭長,賜百錢,曰:「公,小人也,為德不卒.」

召辱己之少年令出胯下者以為楚中尉.

告諸將相曰:「此壯士也.  方辱我時,我寧不能殺之邪?殺之無名,故忍而就於此.」 

項王亡將鐘離眛家在伊廬, 素與信善.  項王死後, 亡歸信. 

漢王怨眛,聞其在楚,詔楚捕眛.  信初之國,行縣邑,陳兵出入.

[한왕 5년(기원전 202년) 정월, 한왕은 한신을 제왕(齊王)에서 초왕으로 옮기고, 

도읍을 하비(下邳)에 정하게 했다. 한신은 초나라에 당도하자 옛날 자기에게 밥을 주었던, 

빨래하던 아낙네들을 찾아 천금을 주어 그 은혜에 보답했다. 

이어서 하향현 남창의 정장에게 백전을 주며 말하기를 :

" 그대는 소인이다. 남에게 은덕을 베풀기를 끝까지 하지 않았다.”라고 하였다. 
또 옛날 어렸을 때 자신을 가랑이 밑으로 기어가게 해서 욕을 보였던 사람을 불러 

초나라의 중위(中尉)을 시켰다.  휘하의 장군과 대신들에게 말하기를 :

" 이 사람은 장사다. 그가 나를 욕보였을 때, 어찌 그를 죽일 수 없었겠는가?

비록 죽인다하더라도 이름날 것이 없기에 참고 오늘의 일을 이루었다."라고 하였다.
항우의 부하 장수 종리매(鍾離昧)의 집은 이려(伊廬)23)로써 평소에 한신과 친하게 지냈었다.

항우가 죽자, 종리매는 한신을 찾아와 몸을 숨겼다. 평소 종리매에게 원한을 갖고 있던 한왕은

그가 초나라에 있다는 소식을 듣고 조서를 보내 종리매을 붙잡아 압송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당시 한신은 초왕이 된지 오래지 않았기 때문에 관하의 성읍을 순행나갈 때는

군사들을 이끌고 다녔었다.]
 

漢六年,人有上書告楚王信反.  高帝以陳平計,天子巡狩會諸侯,南方有雲夢,

發使告諸侯會陳:「吾將游雲夢.」實欲襲信,信弗知.  

高祖且至楚,信欲發兵反,自度無罪,欲謁上,恐見禽.

[한왕 6년(기원전 201년), 어떤 사람이 상소를 올려 한신이 반란을 획책하려 한다고 고했다.  

고제는 진평의 계책에 따라 천자가 순수(巡狩)하게 되면 제후들이 맞이해야 한다는 전례를 

이용하기로 하였다.  남방에 운몽(雲夢)24)으로 순수를 나간다고 제후들에게 사자를 보내 

모두 진현(陳縣)에 모여 자기를 알현하라는 명을 전하게 했다.

" 내가 운몽으로 순수를 나가 사냥을 즐기려 하노라!"

그러나 실은 한신을 사로잡기 위한 계책이었으나 한신 자신은 그 사실을 몰랐다. 

고조가 이윽고 초나라에 당도하자,

그때서야 그 사실을 알게 된 한신은 처음에는 군사를 일으켜 한나라에 반기를 들려고 했다.  

그러나 지은 죄가 없다고 생각한 한신은 고조를 알현하여 자기의 억울함을 호소하려고 했으나,  

한편으로는 고조에게 사로잡힐 것을 걱정했다.]

 

人或說信曰:「斬眛謁上,上必喜,無患.」信見眛計事.
眛曰:「漢所以不擊取楚, 以眛在公所.  若欲捕我以自媚於漢, 吾今日死, 公亦隨手亡矣.」
 

乃罵信曰:「公非長者!」卒自剄.

[어떤 사람이 한신에게 말하기를 : " 종리매의 목을 바치면 황제께서는 반드시 기뻐하실 것이니 

걱정하지 마십시오.”라고 하였다. 한신이 종리매에게 어떻게 했으면 좋겠냐고 묻자,

종리매가 말하기를 : " 한나라가 초나라를 공격하지 않고 있는 이유는 이 종리매가 공에게

몸을 의탁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만약 나를 잡아 한나라의 비위를 맞추려고 한다면

나는 지금 즉시 이 자리에서 스스로 목숨을 끊겠소.  

그러나 내가 죽게 되면 공도 곧 나의 뒤를 따라 목숨을 잃게 될 것이오."라고 하더니, 
또 한신을 꾸짖으며 말하기를 : " 너같은 자를 어찌 장자라고 하겠는가?"라고 하며, 

스스로 목을 찔러 죽었다.]

 

信持其首,謁高祖於陳.  上令武士縛信,載後車.

信曰:「果若人言, 『狡兔死,良狗亨;高鳥盡,良弓藏;敵國破,謀臣亡.』

天下已定,我固當亨!」上曰:「人告公反.」遂械系信.  至雒陽,赦信罪,以為淮陰侯. 

信知漢王畏惡其能,常稱病不朝從.  信由此日夜怨望,居常鞅鞅,羞與絳、灌等列.

[한신이 종리매의 목을 가지고 진현으로 가서 고조를 알현했다.

고조가 무사에게 명하며 한신을 포박하고 뒷 수레에 싣도록 했다.  
한신이 말하기를 : " 과연 사람들의 말이 하나도 틀리지 않는구나!

‘ 교활한 토끼가 죽으니 사냥개는 삶겨 죽고, 높이 나는 새가 떨어지니 좋은 활은 창고에 묻히며

적국을 멸망시키니 모신은 목숨을 잃는구나!’25)  

천하가 이미 정해지니 나는 팽 당하게 되어 있는 것을!"이라고 하자. 
고조가 듣고 말하기를 : " 공이 나라에 반기를 든다는 고변이 있었소."라고 하였다. 
고조가 말을 마치고 좌우에 명해 한신에게 차꼬와 수갑을 채우도록 했다.  

이윽고 낙양에 당도한 고조는 한신의 죄를 용서하고 회음후(淮陰侯)에 봉했다. 
한신은 한왕이 자기의 재능을 두려워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병을 칭하고

조정에 나오지도 않고,  한왕이 출행나갈 때 수행도 하지 않았다.

그는 밤낮으로 한왕을 원망하며 앙앙불락하는 마음으로 그 지위가 강후(絳侯) 주발(周勃)과

등공(縢公) 관영(灌嬰)과 같은 반열에 있다는 것을 수치스럽게 여겼다.] 


信嘗過樊將軍噲, 噲跪拜送迎, 言稱臣, 曰:「大王乃肯臨臣!」

信出門, 笑曰:「生乃與噲等為伍!」 上常從容與信言諸將能不,各有差.  

上問曰:「如我能將幾何?」信曰:「陛下不過能將十萬.」 

上曰:「於君何如?」曰:「臣多多而益善耳.」 上笑曰:「多多益善,何為為我禽?」
信曰:「陛下不能將兵, 而善將將, 此乃言之所以為陛下禽也.

且陛下所謂天授, 非人力也.」  

[그러던 어느 날 한신이 번쾌의 집에 들렸을 때 번쾌는 두 무릎을 꿇고 절을 하며 마중하고

다시 배웅을 하며, 자신을 신이라 칭하며 말하기를 : 

" 대왕께서 소신의 집에 왕림하셨으니 참으로 광영입니다."라고 하였다.

한신은 번쾌의 집을 나와 비웃으며 말하기를 :

“ 내가 살아서 번쾌 등과 같은 반열이 되었구나.”라고 하였다.
황제가 어느 날 마음을 열고 한신과 함께 장수들의 능력에 관해 각자 등차를 매긴 적이 있었다.

고조가 묻기를 : " 내가 만일 장군으로 출전한다면 그 재능이 몇 명의 군사들을

거느릴 수 있겠소?" 라고 하자. 
한신이 대답하기를 : " 폐하께서는 10만 정도의 군사라면 무리 없이

통솔하실 수 있을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고조가 또 묻기를 : "그렇다면 공은 몇 명이나 거느릴 수 있소?"라고 하자. 
한신이 대답하기를 : " 신은 다다익선(多多益善)이라 많으면 많을수록 좋습니다."라고 하였다. 
고조가 웃으면서 묻기를 :" 그렇다면 어째서 공은 나에게 포로로 잡힌 것이오?"라고 하자. 
한신이 대답하기를 : " 폐하께서는 비록 군사를 많이 거느릴 수 있는 재능은 부족하시지만,

군사들을 잘 통솔할 수 있는 장군들을 거느릴 수 있는 재능이 있으십니다.

그래서 제가 폐하의 포로가 된 것입니다.  하물며 폐하는 하늘의 도움을 받고 계시기 때문에

사람의 힘으로는 어찌할 수 없습니다."라고 하였다.]   

 

陳豨拜為鉅鹿守,辭於淮陰侯.  淮陰侯挈其手,辟左右與之步於庭,

仰天嘆曰:「子可與言乎?欲與子有言也.」 豨曰:「唯將軍令之.
淮陰侯曰:「公之所居,天下精兵處也;而公,陛下之信幸臣也.  人言公之畔,

陛下必不信;再至, 陛下乃疑矣;三至,必怒而自將.  吾為公從中起,天下可圖也.
陳豨素知其能也,信之,曰:「謹奉教!」

[진희(秦豨)가 거록군의 태수로 임명되자, 임지로 가기 전에 인사를 하기 위해 한신에게 들렸다.  

한신이 그의 손을 이끌고 좌위 시종들을 물리치고 후원으로 들어가 천천히 걸으며

하늘을 우러러 탄식하며 말하기를 : "그대에게는 말할 수 있겠지?

그대에게 하고 싶은 말이 있소.”라고 하자.
진희가 말하기를 : " 예, 장군께서는 명령만 하십시오.”라고 하였다.
한신이 말하기를 : " 그대가 태수로 부임하는 거록은 천하의 정예병들이 모여 있는 곳이오.

그래서 폐하께서는 총애하고 신임하는 그대를 그곳의 수장으로 임명한 것이오.

후에 사람들이 그대가 모반했다고 폐하께 고변한다고 해도 처음에는 그대를 믿고

의심하지 않을 것이오. 그러나 다시 고변한다면 폐하께서는 의심하기 시작할 것이오.  

세 번째 고변이 들어가면 그때는 폐하께서는 노하여 친히 군사를 이끌고

그대를 토벌하려고 할 것이오.  그때가 되어 내가 그대를 위해 이곳에서 호응한다면

천하를 도모할 수 있을 것이오."라고 하였다.
진희는 평소에 한신의 능력을 알고 있었기 그의 말을 믿고 말하기를 :

" 삼가 그 뜻을 받들겠습니다."라고 하였다.]

 

漢十年, 陳豨果反.  上自將而往, 信病不從.  陰使人至豨所, 曰:「弟舉兵, 吾從此助公.」
信乃謀與家臣夜詐詔赦諸官徒奴,欲發以襲呂后、太子.  部署已定,待豨報.

其舍人得罪於信,信囚,欲殺之.  舍人弟上變, 告信欲反狀於呂后.

[한왕 10년(기원전 197년). 진희가 결국 반란을 일으켰다.

고조가 친히 군사를 이끌고 토벌에 나섰으나 한신은 병이 났다고 칭하며 종군하지 않았다.

한신은 이어 아무도 몰래 밀사를 진희에게 보내 자기의 말을 전하기를 :
" 일단 군사를 일으키기만 하시오. 내가 공을 위해 이곳에서 돕겠소."라고 하였다. 
한신은 거사 계획을 야밤에 가신과 모의하여 조서를 가짜로 꾸며 각 관부에 복역하는

여러 범죄자와 노예들의 죄를 사면한다고 하면서 그들을 이끌고 여후(呂后)와 태자를

격하려고 했다.각 부서를 정한 한신은 진희로부터 소식을 오기를 기다렸다.

그때 그의 사인 중 한 사람이 죄를 저지르자 한신이 그를 옥게 가두고 죽이려고 했다.   

그 사인의 동생이 도망쳐 한신이 모반하려 한다고 고변하자,

대신들이 한신의 반란을 여후에게 고했다.]  

  

呂后欲召, 恐其黨不就, 乃與蕭相國謀, 詐令人從上所來, 言豨已得死, 列侯群臣皆賀. 

相國紿信曰:「雖疾,彊入賀.」信入,呂后使武士縛信,斬之長樂鐘室.

信方斬,曰:「吾悔不用蒯通之計,乃為兒女子所詐,豈非天哉!」遂夷信三族.

[여후가 한신을 소환하려고 했으나 혹시 응하지 않을까 걱정하여 상국 소하에게 계책을 물었다.  

소하로부터 계책을 얻은 여후는 거짓으로 사자를 고조가 보낸 것처럼 꾸미고,

한신에게 전하기를 : " 진희가 잡혀 이미 사형을 당했습니다.

여러 제후들과 신하들이 모두 모여 축하를 하고 있습니다."라고 하였다. 
상국 소하도 한신을 속여 말하게 하기를 :

"병중이기는 하지만, 억지로라도 들어와서 축하하시오"라고 하였다.

한신이 궁안으로 들어가자 여후가 무사를 시켜 포박케 한 다음 장락궁26)의 종실(鍾室)27)에서 

목을 베었다.  한신이 참수 당하기 전에 소리치며 말하기를 : 

" 내가 괴통의 말을 듣지 않은 것이 참으로 원통하구나!  내가 한낱 아녀자에게 속임을 당해

죽게 되었으니, 이것은 분명 하늘의 뜻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라고 하였다. 

​결국 여후는 한신의 삼족을 멸했다.]  

 

高祖已從豨軍來,至,見信死,且喜且憐之,問:「信死亦何言?」

呂后曰:「信言恨不用蒯通計.」 

高祖曰:「是齊辯士也.」乃詔齊捕蒯通.  蒯通至,上曰:「若教淮陰侯反乎?」 

對曰:「然, 臣固教之. 豎子不用臣之策, 故令自夷於此.

如彼豎子用臣之計, 陛下安得而夷之乎!」

上怒曰:「亨之.」 通曰:「嗟乎,冤哉亨也!」

[고조가 진희를 토벌하고 도성으로 돌아와서야 한신이 죽은 것을 알았다.  

고조는 기쁘기도 하고 한편으로는 불쌍한 마음이 들기도 해서 여후에게 묻기를 :
" 한신이 죽을 때 무슨 말을 했소?"라고 하자. 

여후가 대답하기를 :​" 괴통의 계책을 쓰지 않은 것이 원통하다고 했습니다."라고 하였다.  

고조가 묻기를 : " 그 자는 제나라의 변사요.라고 하며. 
고조는 즉시 제나라에 조서를 내려 괴통을 잡아서 압송하라는 명을 내렸다.

괴통이 이윽고 잡혀오자 고조가 묻기를 : " 네가 회음후에게 반란을 일으키라고

획책했는가?"라고 하자. 
괴통이 대답하기를 : "그렇습니다. 신이 힘들여 권했습니다.

그러나 어리석은 한신이 제 말을 따르지 않아 이와 같이 멸족의 화를 당하고 말았습니다.

만일 그 어리석은 사람이 제 말을 따랐다면 어찌 폐하께서 그를 이길 수 있었겠습니까? "하였다. 
고조가 노하여 말하기를 : " 저 놈을 당장에 삶아 죽여라!"라고 하자. 

괴통이 대꾸하기를 : " 아아! 원통하구나, 내가 이렇게 삶겨 죽게 되다니!"라고 하였다.] 

 

上曰:「若教韓信反,何冤?」 

對曰:「秦之綱絕而維弛,山東大擾,異姓并起,英俊烏集.  秦失其鹿,天下共逐之,

於是高材疾足者先得焉.  蹠之狗吠堯,堯非不仁,狗因吠非其主.  當是時, 臣唯獨知韓信,

非知陛下也.  且天下銳精持鋒欲為陛下所為者甚眾,顧力不能耳.  又可盡亨之邪?」

高帝曰:「置之.」乃釋通之罪.

[고제가 말하기를 : " 네 놈이 한신에게 반란을 일으키라고 사주 해 놓고 

무엇이 억울하단 말이냐?"라고 하자. 
괴통이 대답하기를 : " 진나라의 법도가 무너져 그 정권이 와해되자,

산동의 여러 지역이 크게 움직였습니다.

이에 평민들 사이에서 영웅호걸들이 벌떼처럼 일어났습니다.

진나라가 사슴을 잃어버리자 천하의 영웅들은 모두가 그 뒤를 쫓았습니다.

그래서 키가 크고 발이 빠른 자가 먼저 그 사슴을 잡았습니다.

도척이 기르는 개가 요임금의 앞을 가로막고 짖어대는 것은 요임금이 어질지 못해서가 아니라 

그 주인이 아니기 때문에 짖어대는 것입니다.28)  

제가 한신에게 모반을 하라고 권하던 당시, 신은 단지 제 주인으로써 한신만을 알았을 뿐이지

폐하가 있는지 몰랐었습니다. 또한 당시에는 병장기를 날카롭게 갈아 몸에 지니고

폐하께서 하셨던 일을 자기도 해보려고 했던 사람이 천하에는 참으로 많았으나

단지 그들의 힘이 미치지 못했을 뿐이었습니다.   

폐하께서는 그들을 모두 삶아 죽이시겠습니까?” 라고 하였다. 
고제가 말하기를 : " 그를 놓아주어라."라고 하며. 이에 괴통은 죄를 사면받고 풀려났다.]

 

太史公曰:

吾如淮陰,淮陰人為余言,韓信雖為布衣時,其志與眾異.

其母死,貧無以葬,然乃行營高敞地,其旁可置萬家.  余視其母冢,良然.
假令韓信學道謙讓,不伐己功,不矜其能,則庶幾哉,於漢家勳可以比周、召、太公之徒,

後世血食矣.  不務出此,而天下已集,乃謀畔逆,夷滅宗族,不亦宜乎! 

 

[태사공이 말한다.
내가 옛날 회음(淮陰)에 갔을 때 회음 사람들이 나를 보고 말하기를 한신은 포의(布衣)를 입고

불우했었을 때, 그가 지닌 뜻은 참으로 뭇 사람들에 비해 뛰어난 점이 있었다.  

그래서 그의 모친이 죽었을 때는, 가난했던 그는 장례를 치를 비용조차 없었다.

그러나 후에 그가 영달하자 높고 넓은 땅을 구하여 묘지를 조성하고 그 주위에 만호의 민가를

거주하게 하였다.   내가 그 모친의 무덤을 가보니 과연 그러했다. 

만약 한신이 도리를 배우고 겸양의 미덕을 발휘하여 자기를 공을 과시하지 않고,

자기의 재능을 과신하지 않았다면, 그가 세운 공은 아마도 주나라 천 년 왕조의 기틀을 마련한 

주공(周公), 소공, 태공이 세운 공훈에 비견되어 후세들로부터 혈식(血食)을 받아 먹으며 

받들어졌을 것이다.

이렇게 되려고 힘쓰지 않고, 천하의 정세가 이미 정해진 뒤에야 반역을 꾀했으니,  

일족이 멸망한 것은 역시 당연한 일이 아닌가!]

 

【 각주 】  

1) 회음후(淮陰侯)/ 한신은 원래 제왕에 봉해졌으나 한신의 힘으로 해하의 전투에서

    항우를 멸한 유방이 한신의 군권을 빼앗고 항우의 직할령이었던 초나라로 봉지를 옮겼다.

    그래도 여전히 한신의 존재에 두려움을 느꼈던 유방은 한신이 모반한다는 고변이 들어오자

    운몽택으로 사냥 나가 그를 영접하러 나온 한신을 체포한 다음 초왕의 자리에서 폐하고

    회음후로 격하시켰다. 갑자기 제후왕에서 한 고을의 후(侯)로 격하된 한신은

    앙앙불락하다가 여태후와 소하의 계략에 걸려 자신은 참수되고 3족이 멸족되었다.  

    사기열전의 다른 편의 한왕신열전(韓王信列傳)은 동명이인이다. 
2) 회음(淮陰)/ 지금의 강소성 회음시(淮陰市)로 진말(秦末) 당시 동해군에 속한 현이다.  

3) 하향(下鄕)/ 지금의 강소성 회음현(淮陰縣) 감라성(甘羅城)으로 회수 강안의 고을이다.  

4) 하후영(夏侯嬰)/ 태어난 해는 알 수 없고 기원전 172년에 죽은 서한의 창업공신이다.  

    패현 출신으로 고조가 사수정장으로 있을 때부터 친구이다. 후에 고조가 진나라에 대항하여

    거병하여 패공이 되었을 때 같이 참여한 그는 칠대부(七大夫)가 되었고,

    고조가 한왕이 봉해졌을 때는 열후(列侯)가 되어 소평후(召平侯)로 불리워졌다.

    고조가 한중으로 들어가고 다시 나와 삼진을 평정할 때 수많은 공을 세웠다.  

    고조가 황제의 자리에 오르자 여음후(汝陰侯)에 봉해졌다. 여태후가 죽자

    대신들과 힘을 합해 여씨들의 난을 진압하고 대왕 유항(劉恒)을 옹립했다. 유항이 효문제다.

    일찍기 등현의 현령을 지냈음으로 등공(滕公)이라 칭했다.   

5) 치속도위(治粟都尉)/ 군량을 담당하던 군리  

6) 의제(義帝)/ 태어난 해는 알 수 없고 기원전 205년에 죽은 전국시대 초회왕(楚懷王)의 손자인

    웅심(熊心)의 제호(帝號)다. 진승(陳勝)이 싸움에서 지고 죽자,

    그 뒤를 이은 항량(項梁)이 초원에서 양을 기르고 있던 웅심을 찾아 초왕으로 옹립하고

    회왕(懷王)으로 칭했다. 기원전 207년 항우가 진나라를 멸하고 휘하의 장수들을

    제후왕에 봉하고 자신은 서초패왕(西楚覇王)이라고 칭하면서 회왕을 의제로 올린 다음

    강남의 침(郴)으로 옮겨 살도록 했다. 후에 다시 항우가 구강왕 영포(英布) 등에게

    지령을 내려 의제를 강상에서 살해했다. 항량이 초나라 왕손을 찾아

    그의 왕호를 회왕(懷王)으로 한 것은 기원전 299년 진나라에 들어갔다가 억류되어

    돌아오지 못하고 그곳에서 죽은 초회왕을 기려 진나라에 원한을 품고 있던 초나라 사람들의

    호응을 얻기 위해서였다.   

7) 배의제지약(背義帝之約)/ 의제는 신하들을 모아 놓고 관중에 먼저 들어간 사람을 그곳의

    왕으로 삼는다고 약속했다. 이에 유방이 관중에 먼저 들어갔으나 항우는 유방을

    한중의 땅에 봉하고 관중의 땅은 진나라의 항복한 세 장수에게 나누어 봉한 것을 말한다.   

8) 법삼장(法三章)/ 한고조 유방이 관중에 들어가 진나라의 가혹한 법을 모두 폐지하고

    세 조항만 남겨 놓겠다고 진나라 부로들과 약속한 일을 말한다.

    殺人者死, 傷人及盜抵罪(살인자는 죽인다. 사람을 상하거 도적질한 사람은 죄를 준다.)   

9) 연여(閼與)/ 지금의 산서성 화순현 서북으로 하북성과의 경계를 이루는

    태항산맥의 서록(西麓)에 있었다.

10) <손자병법(孫子兵法)> <모공편(謀攻篇)>의 「故用兵之法, 十則圍之.... 倍則分之」

      를 말한다.  

11) <손자(孫子)> <구지(九地)>의 구절이다.  

12) 敗軍之將不可以言勇, 亡國之大夫不可以圖存  

13) 호성(鄗城)/ 지금의 하북성 백향현(白鄕縣) 북이다.  

14) 兵固有先聲而後實者  

15) 盖聞天與不取 反受其咎, 時至不行 反受其殃  

16) 乘人之車者載人之患, 衣人之衣者懷人之懮, 食人之食者死人之事.  

17) 장염(張黶)과 진택(陳澤)/ 태어난 해는 알 수 없고 기원전 208년에 죽은 진말 농민기의군

      장령들이다.  진승(陳勝)의 기의군에 참여했다가 조나라를 땅을 공략하기 위해 출전한

      장이를 따르자 장군에 임명되었다.  

      진이세황제 2년인 기원전 208년 진나라 장군 장한(章邯)이 조나라의 농민기의군을 공격하여

      거록(巨鹿)에서 포위하자 그들은 당시 조나라 상국이었던 장이의 명을 받들어

      진군의 포위망을 뚫고 성을 나가 당시 조군의 주력을 이끌고 거록의 북쪽에

      주둔하고 있던 대장군 진여(陳餘)에게 구원을 청했다. 진군의 막강한 세력에

      두려움을 느낀 진여가 거록을 구원하기를 꺼려하자 의분을 느낀 두 사람은

      진여(陳餘)가 내 준 5천의 군사들을 이끌고 진군의 진영을 향해 돌격을 감행했다.

      그러나 진택과 장염을 포함한 5천의 군사들은 거록성 밑에서 모두 전사하고 말았다.  

      후에 장이와 진여는 이 일로 인하여 서로 반목하고 원수가 되었다.   

18) 장이와 진여는 원래 절친한 사이었다. 기원전 208년 장이와 조왕 헐(歇)은 거록성에서

      장한의 진나라 군사들에게 포위되어 위급하게 되었다. 이에 조나라 대장군으로

      수 만의 조군을 이끌고 거록성 북쪽에 주둔하고 있으면서 군의 세력이 너무 막강하여

      당할 수 없다고 생각하여 조왕과 장이에 대한 구원을 주저하고 있었다.

      장이는 장염과 진택을 보내어 진여를 비난했다. 이에 진여는 휘하의 군사 5천을 주어 

       진군의 세력을 시험하게 했으나 두 장수를 함한 조군은 모두 전사하고 말았다.

      후에 항우(項羽)에 의해 거록성에서 구원된 장이는 진여에게 자기를 구원하지 않았다고

      추궁하며 두 장군을 진여가 죽인 것으로 의심했다. 진여가 사실대로 말했으나 장이는 믿지

      않았다. 이에 진여는 노하여 장군의 인수를 장이에게 던져버리고 조군의 진영을 떠났다.

      장이는 진여가 거느렸던 군사들을 거두어 자기의 휘하에 두었다. 

      ​두 사람은 이 일로 인하여 원수가 된 일을 말한다.   

19) 항영(項嬰)/ 항우가 장이를 상산왕으로 봉하고 그의 심복인 항영을 장이의 상국으로 보내

      감시하게 했다.  이에 진여에게 패한 장이는 항우의 질책을 두려워한 나머지

      초나라를 배반하고 항영의 목을 베어 가지고 유방에게 투항했다.   

20) 종(鍾)/ 월왕(越王) 구천(句踐)의 참모로 구천을 도와 춘추말 패자였던 오왕 부차를 멸하는데

      공을 세웠으나 후에 이를 의심한 구천의 강요에 의해 자살했다.

      그의 행적은 사기 월왕구천세가에 상세하게 나와있다.   

21) 맹분(孟賁)/ 춘추 때 위나라의 장사 이름이다.  

22) 猛虎之猶豫, 不若蜂蠆之致螫; 騏驥之跼躅, 不如駑馬之安步;

      孟賁之狐疑, 不如庸夫之必至也;  雖有舜禹之智, 吟而不言, 不如瘖聾之指麾也.   

23) 이려(伊廬)/ 지금의 강소성 연운항시 남쪽의 고을로 한신이 태어난 회음과는

      약 60키로의 거리에 있었다. 즉 종리매와 한신은 진나라가 설치한

      동해군(東海郡) 출신의 같은 고향 사람이라고 할 수 있었다.   

24) 운몽(雲夢)/ 여러 가지 설이 있으나 지금의 호북성 강릉과 기춘 사이에 있던

      큰 호수가 유력하다.  

25) 狡免死 走狗烹, 高鳥盡 良弓藏, 敵國破 謀臣亡. 

26) 장락궁(長樂宮)/ 한나라 때의 궁궐 이름이다.  

27) 종실(鍾室)/ 궁궐에서 사용하던 악기를 보관해 두던 방이다.  

28) 蹠之狗吠堯, 堯非不仁, 狗因吠非其主.  

 

 

 ※  原 文 .    【 中國哲學書電子化計劃 .   筆寫本 】

 

                                

 

    原 文   飜 譯 者        德庤 / 李   斗 振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