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 魏豹 彭越列傳

第 三十. 魏豹彭越列傳(위표 팽월열전)

덕치/이두진 2023. 9. 1. 18:06

 

                        史記 列傳

 

          第 三十.  魏豹彭越列傳(위표 팽월열전) 

魏豹者,故魏諸公子也.  其兄魏咎,故魏時封為寧陵君.  秦滅魏,遷咎為家人.

[​위표는 옛날 위나라 왕실의 공자출신이다.

그의 형 위구(魏咎)는 위나라가 망하기 전 영릉군(寧陵君)에 봉해졌다.

진나라가 위나라를 멸망시키자, 위구를 폐하여 남의 집 일하는 사람으로 만들었다.]

 

陳勝之起王也,咎往從之.  陳王使魏人周市徇魏地,魏地已下,欲相與立周市為魏王.
周市曰:「天下昏亂,忠臣乃見. 今天下共畔秦,其義必立魏王後乃可.」

齊、趙使車各五十乘,立周市為魏王.

[진승이 기의하여 왕을 칭하자 위구가 찾아가 따랐다. 진왕(陳王)이 위나라 사람 주불(周巿)을

시켜 위나라 땅을 순행하며 위무하도록 했다. 이윽고 위나라 땅이 모두 평정되자,

진왕은 주불을 위왕으로 세우려고 했다.  

주불이 말하기를 : " 천하가 혼란하니 충성스러운 신하들이 왕을 뵈러 달려오고 있습니다.

지금 옛날 위나라 땅에서 모두 반진의 깃발을 들고 일어선 뜻은 바로 위왕의 후손을 찾아

그 뒤를 잇게 하라는 뜻입니다."라고 하자. 

제, 조 등의 나라에서 각각 50승의 수레를 보내와 주불을 위왕(魏王)으로 옹립하려고 했다.]

 

市辭不受, 迎魏咎於陳.  五反, 陳王乃遣立咎為魏王.  章邯已破陳王, 乃進兵擊魏王於臨濟.

魏王乃使周市出請救於齊、楚.  齊、楚遣項它、田巴將兵隨市救魏.

章邯遂擊破殺周市等軍,圍臨濟.  咎為其民約降.  約定,咎自燒殺.

魏豹亡走楚.  楚懷王予魏豹數千人,復徇魏地.

項羽已破秦,降章邯.  豹下魏二十餘城,立豹為魏王.  豹引精兵從項羽入關.

[주불이 사양하며 받아들이지 않자, 위구(魏咎)를 진(陳)에서 맞아들였다.

다섯 번이나 진왕에게 사자를 파견하여 교섭한 결과 그때서야 위구를 위왕으로 세우는데

진왕의 허락을 얻어냈다.  진(秦)나라의 장수 장한이 진왕(陳王)의 군사를 격파하고

계속 진격하여 임제(臨濟)에서 위왕을 공격했다.  

위왕은 즉시 주불을 제(齊)와 초(楚)에 사자로 보내 구원을 요청하게 했다.  

제와 초 두 나라가 항타(項它)와 전파(田巴)에게 군사를 주어 위나라를 구원하게 했다.

장한이 주불을 살해하고 그 군사를 무찌른 후 임제에서 위구를 포위했다.

위구가 그 군민들을 위해 항복하기로 하고 장한과 약속한 후에 바로 불 속에 뛰어 들어 자살했다.

위표(魏豹)는 임제에서 탈출하여 초나라 군영으로 도망쳤다.  

초회왕이 위표에게 수천 명의 군사를 주어 위나라 땅을 순행하여 위무하도록 했다.

초장 항우가 진군을 격파하고  진장 장한의 항복을 받았다.

그 사이 위표가 위나라 땅의 20여 개의 성을 공략하자, 초나라는 위표를 위왕에 봉했다.

위표가 정예한 군사를 선발하여 항우를 따라 관중으로 들어갔다.]


漢元年,項羽封諸侯,欲有梁地,乃徙魏王豹於河東,都平陽,為西魏王.

漢王還定三秦,渡臨晉,魏王豹以國屬焉,遂從擊楚於彭城.

漢敗,還至滎陽,豹請歸視親病,至國,即絕河津畔漢.

[한 원년(기원전 206년), 항우가 제후들을 봉하고 옛날 양(梁)의 땅을 자기 직할령으로 삼기 위해

위왕의 봉지를 하동으로 옮기고 평양에 도읍을 정하자, 위표는 서위(西魏)의 왕이 되었다.
한중에서 나온 한왕이 삼진(三秦)을 평정하고 임진에서 하수를 도하하자 위왕 표는 나라를 들어 

한나라에 귀속했다. 계속해서 한왕을 따라 종군하여 초나라의 팽성까지 진격했다.

그러나 항우의 반격을 받은 한나라는 싸움에서 패하고 후퇴하여 형양(滎陽)으로 물러나자,

위표는 모친의 병문안을 위해 휴가를 청해 봉국으로 돌아가 즉시 황하의 나루를 끊고 

한나라에 반기를 들었다.]


漢王聞魏豹反, 方東憂楚, 未及擊, 謂酈生曰:「緩頰往說魏豹, 能下之, 吾以萬戶封若.」

酈生說豹.  豹謝曰:「人生一世閒,如白駒過隙耳. 

今漢王慢而侮人,罵詈諸侯群臣如罵奴耳,非有上下禮節也,吾不忍復見也.」

於是漢王遣韓信擊虜豹於河東,傳詣滎陽,以豹國為郡.  楚圍之急,周苛遂殺魏豹.

[한왕은 위표가 배반했다는 소식을 들었지만 동쪽의 초나라에 대한 걱정 때문에 곧바로 위표를

공격하지 못하고 역생(酈生)을 불러 말하기를 : " 그대가 가서 완곡한 말로 위표를 설득하여 만약

그가 다시 우리에게 항복하여귀순해 온다면 나는 그대를 만호의 후에 봉하겠소."라고 하였다. 
역이기가 하동의 위나라에 들어가 위표를 설득했으나 위표가 사절하며 말하기를 :
" 인생이란 마치 흰망아지가 문틈 사이로 나타났다가 잠깐 사이에 시야에서 사라져버리는

짧은 시간과 같은데  지금 한왕은 사람을 오만하게 대하고 모욕을 주기를 좋아하면서

제후나 군신들을 희롱하고 욕하기를 마치 노예 부리듯이 합니다.

한왕은 근본적으로 상하에 대한 예절이라고는 털끝만큼도 없는 사람이라 제가 어찌 다시

한왕을 보고 싶어 하겠습니까? "라고 하자. 이에 한왕은 한신을 보내 서위를 토벌하도록 했다.

한신은 위표를 하동(河東)에서 사로잡아 한왕이 머물고 있던 형양(滎陽)으로 압송했다.

한왕은 위표의 봉국 서위를 폐하고 한나라의 군현으로 삼고 위표로 하여금 형양의 수비를

맡도록 했다. 이윽고 항우의 초군이 형양을 포위하고 맹공을 가해 형양성이 매우 위급하게 되자,

마침내 위표의 배반을 의심한 주가(周苛)가 살해했다.]

 

 

彭越者,昌邑人也,字仲.  常漁鉅野澤中,為群盜.

​[팽월은 창읍(昌邑) 출신으로 자는 중(仲)이다. 

줄곧 거야택(巨野澤)에서 고기를 잡으며 살다가 무리를 모아 도적떼가 되었다.]

 

陳勝、項梁之起,少年或謂越曰:「諸豪桀相立畔秦,仲可以來,亦效之.」

彭越曰:「兩龍方鬬,且待之.」 

居歲餘,澤閒少年相聚百餘人,往從彭越,曰:「請仲為長.」

越謝曰:「臣不願與諸君.」少年彊請,乃許.

​[진승과 항량(項梁)이 진나라에 반하여 기의하자, 무리 중의 어린 소년 하나가

팽월에게 말하기를 : " 여러 호걸들이 진나라에 반기를 들고 일어서고 있습니다.

신도 그 뒤를 따라야 하지 않겠습니까? "라고 하자. 
팽월이 대답하기를 : " 두 용이 서로 싸우고 있으니 잠시 때를 기다는 것이 좋겠다. "라고 하였다. 
그리고 1년여가 지나자 호수 주변의 소년들 백여 명이 무리를 지어 팽월을 찾아와 말하기를 : 

" 청컨대 우리의 대장이 되어주십시오. "라고 하자. 

팽월이 대답하기를 : " 나는 여러분들과 함께 행동을 같이 하고 싶지 않다."라고 하였다. 
그러나 소년들이 여러 번 간청을 하자, 그제서야 허락했다.]

 

與期旦日日出會,後期者斬.  旦日日出,十餘人后,後者至日中. 

於是越謝曰:「臣老, 諸君彊以為長.  今期而多後, 不可盡誅, 誅最後者一人.」令校長斬之.
皆笑曰:「何至是?請後不敢.」於是越乃引一人斬之,設壇祭,乃令徒屬.

徒屬皆大驚,畏越,莫敢仰視.

​[그래서 그들과 그 다음날 아침 다시 모이기로 하고 늦는 자는 참수하겠다고 했다.

이윽고 다음날이 되어 해가 떴음에도 시간에 맞게 도착하지 못한 사람이 10여 명에 달했고, 

가장 늦게 온 자는 해가 중천에 가서야 도착했다. 그러자 팽월이 말하기를 :
" 나는 나이가 많다고 해서 여러분들이 강권하여 나를 대장으로 삼았다.

오늘 약속시간이 지났음에도 많은 사람들이 늦게 도착했다. 

내가 모두 죽일 수는 없고 가장 후에 온 사람만 죽이도록 하겠다. "라고 하며. 
소두목에게 명하여 그 자의 목을 베도록 했으나 모두 웃으며 말하기를 : 

" 어찌 정말로 죽일 수 있단 말입니까? 청컨대 다음부터는 절대로 약속시간을 어기지 않도록

하겠으니 용서해 주시기 바랍니다."라고 하였다. 그러자 팽월이 친히 그 사람을 끌어내어

목을 베고 제단을 만들어 맹세하고 무리들에게 령을 밝혔다. 

도적의 무리들이 모두 크게 놀라 팽월을 두려워하여 감히 똑바로 쳐다보지 못했다.] 

 

乃行略地, 收諸侯散卒, 得千餘人.  沛公之從碭北擊昌邑, 彭越助之.  昌邑未下, 沛公引兵西.

彭越亦將其眾居鉅野中,收魏散卒.  項籍入關,王諸侯,還歸,彭越眾萬餘人毋所屬.

​[리고 호수를 나와 여러 지방을 공략하여 제후들의 흩어진 군사 천여 명을 얻었다.
패공(沛公)이 탕현(碭縣)에서 나와 북진하여 창읍(昌邑)을 공격하자 팽월이 달려가 도왔다.  

창읍을 함락시키지 못한 패공은 군사를 이끌고 서쪽으로 가버렸다. 

팽월 역시 그의 부하들을 이끌고 거야택 주변에 주둔하면서 진나라와의 싸움에서 패하고

흩어진 위나라 군사들을 모았다. 

관중으로 들어간 항적에 의해 왕으로 봉해진 제후들이 돌아와 자기 봉국에 취임했으나  

팽월과 그의 만여 명에 달하는 부하들은 아무 곳에도 소속이 되지 않아 갈 곳이 없었다.]

 

漢元年秋,齊王田榮畔項王, (漢)乃使人賜彭越將軍印,使下濟陰以擊楚.
楚命蕭公角將兵擊越,越大破楚軍.

[한 원년(기원전 206년) 가을, 제왕(齊王) 전영(田榮)이 항왕(項王)에게 반기를 들자,

사람을 보내 장군의 인장을 팽월에게 주고 제음(濟陰)으로 나와 초나라 군사들을 향해

진군하라고 독촉했다. 초나라가 소현(蕭縣)의 현령 각(角)을 장수로 삼아 팽월을 막도록 했으나

팽월은 초군을 크게 무찔렀다.]

 

漢王二年春,與魏王豹及諸侯東擊楚,彭越將其兵三萬餘人歸漢於外黃.
漢王曰:「彭將軍收魏地得十餘城,欲急立魏後.  今西魏王豹亦魏王咎從弟也,真魏後.」

乃拜彭越為魏相國,擅將其兵,略定梁地.  

漢王之敗彭城解而西也,彭越皆復亡其所下城,獨將其兵北居河上.

[한왕 2년(기원전 205년), 한왕이 위왕 표(豹) 및 여러 제후들과 함께 동쪽으로 진군하여

초나라를 공격할 때, 팽월은 그가 거느리고 있던 3만여 명의 군졸을 이끌고 

외황(外黃)으로 나아가 한나라에 귀의했다.  

한왕이 팽월에게 말하기를 : " 팽장군은 위나라의 10여 개에 이르는 성읍을 수습하여 하루 빨리

위나라 후손을 찾아 나라를 세워야 하오. 지금 서위왕 위표 역시 위왕 구(咎)의 사촌동생이라

위표야말로 위나라 왕실의 후손이라고  할 수 있소. "라고 하였다.  

한왕은 즉시 팽월을 위나라 상국으로 임명하고 그가 거느린 군졸들을 자기 임의대로 지휘하여 

양나라 땅을 공략하도록 했다. 이윽고 항우가 치소로 삼고 있던 팽성으로 쳐들어간 한왕은

싸움에서 패하고 서쪽으로 후퇴하자, 팽월은 그 동안 점령했던 양나라 땅의 성읍들을

모두 잃고, 군사들을 이끌고 북쪽의 하상(河上)으로 나아가 주둔했다.]

 

漢王三年,彭越常往來為漢游兵,擊楚,絕其後糧於梁地.
漢四年冬,項王與漢王相距滎陽,彭越攻下睢陽、外黃十七城.
 

項王聞之,乃使曹咎守成皋,自東收彭越所下城邑,皆復為楚.  越將其兵北走穀城.

[한왕 3년(기원전 204년), 팽월은 한나라를 위해 쉬지 않고 유격활동으로 초군을 공격하여,

양나라 땅에서 초군의 군량미 보급선을 끊었다.
한왕 4년(기원전 203년)겨울, 항왕과 한왕이 형양에서 대치할 때 팽월은 수양성과 외황의

17개 성을 함락시켰다.  항왕이 듣고 조구(曹咎)를 성고(成皐)의 수장으로 임명한 후

동쪽으로 나아가 팽월에 의해 함락된 성읍들을 모두 초나라로 찾아왔다.

팽월이 그 군사들을 이끌고 북쪽으로 도주하여 곡성(穀城)에 주둔했다.]

漢五年秋,項王之南走陽夏,彭越復下昌邑旁二十餘城,得穀十餘萬斛,以給漢王食.

漢王敗,使使召彭越并力擊楚. 越曰:「魏地初定,尚畏楚,未可去.」漢王追楚,

為項籍所敗碧陵.  乃謂留侯曰:「諸侯兵不從,為之柰何?」

留侯曰:「齊王信之立,非君王之意,信亦不自堅.  彭越本定梁地, 功多,

始君王以魏豹故,拜彭越為魏相國. 今豹死毋後,且越亦欲王, 而君王不蚤定.

與此兩國約:即勝楚,睢陽以北至穀城,皆以王彭相國;從陳以東傅海,與齊王信.

齊王信家在楚,此其意欲復得故邑. 

君王能出捐此地許二人,二人今可致;即不能,事未可知也.」

於是漢王乃發使使彭越,如留侯策.  使者至,彭越乃悉引兵會垓下,遂破楚.

(五年)項籍已死.  春,立彭越為梁王,都定陶.

[한 5년(기원전 202년) 가을, 항왕이 남쪽으로 양하로 달아나자 팽월이 다시 남하하여 창읍과 

그 주위의20여 개의 성을 합락시키고 곡식 10여 만 석을 얻어 모두 한왕의 군량미로 보냈다. 

한왕이 항적과의 싸움에서 패하자, 한왕은 사자를 보내 팽월로하여금 전력을 다해

초나라의 배후를 공격하도록 했다.

팽월이 말하기를  : “ 위나라 땅을 평정한지 얼마 되지 않아 아직 초나라를 두려워하고 있는

백성들 때문에 아직 초나라를 공격할 수 없습니다.”라고 하였다. 

한왕이 후퇴하는 항우의 뒤를 추격하다가 고릉(固陵)에서 반격을 받아 싸움에서 패했다.

한왕이 장량을 향해 말하기를 : " 제후들의 나를 도우러 오지 않으니 어찌해야 하오? "라고 하자. 
장량이 대답하기를 : " 한신(韓信)을 제왕으로 세운 일은 왕의 뜻이 아니었습니다.

그래서 한신은 자기의 지위가 공고하지 못하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팽월은 원래 양나라 땅을 평정하여 공이 많음에도 불구하고 그 땅에 위나라 공자

출신이라는 이유로 위표를 왕으로 봉하고 그는 단지 위나라 상국의 자리에 있을 뿐입니다.  

팽월은 지금 위표가 죽어 비어 있는 위왕의 자리에 앉고 싶어 합니다.

그런데 왕께서는 아직도 그 후임을 정하지 않고 있습니다.  

따라서 왕께서는 두 사람에게 다음과 같은 약속을 하시기 바랍니다.

만약 두 나라가 출전하여 항우를 무찌른다면 수양(睢陽) 이북에서 곡성(穀城)까지의 땅에 

팽월을 왕으로 봉하고 진성(陳城) 이동부터 바다에 이르기까지의 땅은 모두 제왕 한신의 영지로

하사하겠다고 약속하십시오. 한신의 집은 초나라에 있으니 그 옛 고을들을 다시 수복하겠다는

뜻을 밝히십시오.  그런 다음 그 땅을 모두 두 사람의 봉지에 각각 더하여 준다면 

사람은 기쁜 마음으로 왕의 령을 받들 것입니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대업을 결코 이룰 수 없습니다. "라고 하였다. 

그래서 한왕은 그 즉시 사자를 팽월에게 보내 장량의 계책대로 행하게 했다.
사자는 당도하여 한왕의 명을 전하자 팽월은 휘하의 전 군사를 이끌고 해하로 출격하여

초나라 군사를 파했다.

(5년) 마침내 그 싸움에서 항적이 죽었다.  

그 해 봄에 팽월을 양왕(梁王)에 봉하고 치소를 정도(定陶)로 삼게 했다.]

 

六年,朝陳.  九年,十年,皆來朝長安.

十年秋,陳豨反代地,高帝自往擊,至邯鄲,徵兵梁王.  梁王稱病,使將將兵詣邯鄲.

高帝怒,使人讓梁王.  梁王恐,欲自往謝.

其將扈輒曰:「王始不往,見讓而往,往則為禽矣.  不如遂發兵反.」梁王不聽,稱病. 

梁王怒其太仆,欲斬之.  太仆亡走漢,告梁王與扈輒謀反.

於是上使使掩梁王,梁王不覺,捕梁王,囚之雒陽.

​[한왕 6년(기원전 200년), 진현(陳縣)으로 들어가 황제에게 조현을 드렸다.
한왕 9년과 10년 모두 장안으로 들어가 조현을 올렸다.
한왕 10년 가을, 진희가 대(代) 땅에서 반란을 일으키자, 고제가 친히 정벌하기 위해 출격하여

한단에 이르러, 양왕에게 군사를 이끌고 종군하기를 명했다. 

양왕은 병을 핑계 대고  휘하의 장수와 군사를 대신 한단으로 보냈다. 

고제가 노하여 사자를 보내 양왕을 책망했다. 양왕이 두려워하여 친히 고제을 뵙고

사죄하려고 했으나 그 부하 장수 호첩(扈輒)이 말하기를 : " 왕께서 처음에는 명에 응하지

않았다가 책망을 듣고 마지못해 가신다면 바로 사로잡히게 될 뿐입니다.

차라리 군사를 일으켜 반기를 드십시오."라고 하였다. 
양왕이 듣지 않고 병을 핑계로 가지 않았다. 그때 양왕은 그의 태복에 대해 화나는 일이 있어 

그를 참수하려고 했다. 태복이 도망쳐 도성으로 들어가 양왕이 호첩과 함께 모반을

모의했다고 고변했다. 그래서 황제는 사자를 보내 양왕을 압송해오라고 시켰다. 

사자는 양왕이 미처 파악하기도 전에 체포해서 함거에 싣고 낙양으로 압송했다.]

 

有司治反形己具,請論如法.  上赦以為庶人,傳處蜀青衣.

西至鄭,逢呂后從長安來,欲之雒陽,道見彭王. 

彭王為呂后泣涕,自言無罪,願處故昌邑.  呂后許諾,與俱東至雒陽.
呂后白上曰:「彭王壯士,今徙之蜀,此自遺患,不如遂誅之.  妾謹與俱來.」

於是呂后乃令其舍人彭越復謀反.  廷尉王恬開奏請族之.  上乃可,遂夷越宗族,國除. 

[관리가 양왕의 죄를 추궁하여 모반의 계획이 구체적으로 진행되고 있는 사실을 밝혀내고

법에 따라 처결할 것을 황제에게 청했다. 황제가 사면을 하고 서인으로 만들어

촉 땅의 청의(青衣) 땅으로 들어가 살도록 했다. 팽월이 서쪽의 정(鄭)2)나라 땅에 이르렀을 때

장안에서 고제를 만나기 위해 오고 있던 여후를 만났다.  

팽월이 여후를 찾아가 자기의 무죄를 눈물로 호소하며 자기의 고향 창읍에서 여생을

보낼 수 있게 해달라고 했다.  여후가 허락하고 팽월을 데리고 낙양으로 들어갔다.

여후가 고제를 만나 말하기를 : " 팽월은 장사인데 지금 그를 촉 땅으로 들여보내면

장차 화근이 될 것입니다. 지금 즉시 죽여야만 합니다.  

그래서 제가 그를 안심시키고 이곳으로 다시 데리고 왔습니다. "라고 하였다. 

여후는 곧바로 사람을 보내 팽월이 다시 반역을  꾀하고 있다고 고변하였다,

정위 왕염개(王恬開)가 팽월을 멸족시켜야 한다고 주청했다.  

황제는 이를 받아들였다. 그래서 팽월의 종족은 멸족되었고 나라는 없어졌다.]  

 

太史公曰:

魏豹、彭越雖故賤,然已席卷千里,南面稱孤,喋血乘勝日有聞矣. 

懷畔逆之意,及敗,不死而虜囚,身被刑戮,何哉?
中材已上且羞其行,況王者乎!彼無異故,智略絕人,獨患無身耳. 
 

得攝尺寸之柄,其雲蒸龍變,欲有所會其度,以故幽囚而不辭云.

[태사공이 말한다.  

위표와 팽월은 원래 비록 비천한 신분이었지만 천리의 땅을 석권하고 남면하여

임금(孤)이라 칭하며 피비린내 나는 전장터에서 이름을 얻었다.

반역의 뜻을 가슴에 품고 있다가 일이 실패하자 스스로 목숨을 끊지 못하고 

구차하게 목숨을 건져 포로가 되어 죄수의 몸으로 결국 형을 받아 죽었다. 

어째서인가? 그것은 중간 지위의 인물도 그와 같은 행위를 큰 치욕으로 여기는데

하물며 왕의 신분인 사람에게는 있어서는 어찌해야 했었겠는가?

그것은 다른 데에 원인이 있는 것이 아니다.  그들의 지혜와 포부가 다른 사람보다

월등하게 컸음에도 자기 행동에 대해 조심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조그만 권력을 손에 넣자 그것을 기화로 구름을 불러 용으로 변해 평소에 품고 있었던 생각을

도모하려고 했기 때문에 자신은 포로가 되어 구금되어 살해 되었으니,

무슨 말이 더 필요하겠는가?]

 

 각주 】  

1) 주가(周苛) / 태어난 해는 알 수 없고 기원전 204년에 죽었다.

    서한의 개국공신 주창(周昌)의 사촌형이다.  

    패현(沛縣) 출신으로 한고조 유방과 동향이다. 진말 사수정(泗水亭)의 졸사(卒史)로

    고조가 기의할 때 따라 모사(謀士)의 직책인 장중빈객(帳中賓客)에 임명되었다.

    후에 내사(內史)의 직으로 옮겼다가 고조가 관중으로 들어가 진나라를 멸할 때 종군했다.

    고조가 한왕이 되어 한중으로 들어갈 때 어사대부가 되었으며,

    다시 한중에서 나와 삼진을 평정할 때 항우군을 격파했다.  

    한 3년 기원전 204년 초나라가 형양(滎陽)을 포위하고 맹공을 가하자

    고조가 형양성을 빠져나가면서 주가에게 성을 굳게 지키라는 임무를 맡겼다.

    항우에 의해 성이 함락되어 포로가 된 주가는 항복을 하지 않고

     오히려 항우를 꾸짖자 항우는 주가를 팽살형에 처했다.  

    고조가 그의 공을 기려 그의 아들 주성(周成)을 고경후(高京侯)에 봉했다  

2) 정(鄭)/ 지금의 하남성 화주(華州)를 말한다.

 

 

※  原 文 .    【 中國哲學書電子化計劃 .   筆寫本 】

 

                                 

     原 文   飜 譯 者        德庤 / 李   斗 振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