史記 世家(사기세가)/3. 魯周公世家

第 三. 魯周公世家

덕치/이두진 2021. 6. 28. 17:33

             史記 世家

 

 

    第 三 魯周公世家(노주공세가)

 

周公旦者,周武王弟也. 自文王在時,旦為子孝,篤仁,異於群子.

及武王即位,旦常輔翼武王,用事居多.
武王九年,東伐至盟津,周公輔行.

十一年,伐紂,至牧野,周公佐武王,作牧誓.  破殷,入商宮.
已殺紂,周公把大鉞,召公把小鉞,以夾武王,釁社,告紂之罪于天,及殷民.  

釋箕子之囚.  封紂子武庚祿父,使管叔、蔡叔傅之,以續殷祀.  遍封功臣同姓戚者.

[주공 단(周公旦)은 주 무왕(周武王)의 동생이다.

문왕(文王)이 재위에 있을 때부터 단(旦)은 효성이 지극하고 애정이 돈독해 다른 공자(公子)들과 달랐고,

무왕이 즉위하자 항상 무왕을 보필하며 많은 일을 도맡아 처리했다.

무왕 9년, 무왕이 동쪽으로 맹진(孟津)까지 정벌했을 때, 주공은 그를 보필해 출정했다.
11년, 목야(牧野)에서 주왕(紂王)을 정벌했을 때, 주공은 무왕을 보좌했고, 「목서(牧誓)」를 지었다.
주공은 은(殷)나라를 무찌르고 상나라의 궁궐(商宮)에 입성해, 먼저 주왕을 주살했다.

주공은 큰 도끼[大鉞]를, 소공(召公)은 작은 도끼[小鉞]를 들고 무왕의 양쪽에서 합세해,

그 희생의 피로 토지신에게 제사[釁社]를 지내면서 주왕의 죄를 하늘에 고했고,

그것을 은나라 백성에게 전파시켰으며, 감금되었던 기자(箕子)를 석방했다.
무왕은 주왕의 아들 무경녹보(武庚祿父)를 후(侯)에 책봉했고, 관숙과 채숙으로 하여금 그의 사부가 되게 했으며,

은나라의 역법[紀年]을 계승하게 했다. 공신(功臣)과 동성(同性), 친척을 두루 제후에 책봉했다.]

封周公旦於少昊之虛曲阜,是為魯公.  周公不就封,留佐武王.

武王克殷二年,天下未集,武王有疾,不豫,群臣懼,太公、召公乃繆卜.

周公曰:「未可以戚我先王.」
周公於是乃自以為質,設三壇,周公北面立,戴璧秉圭,告于太王、王季、文王.

[주공 단을 동이족 우두머리인 소호(少昊)의 옛 터인 곡부(曲阜)에 책봉해 노공(魯公)으로 삼았다.
주공은 봉지로 가지 않고 남아서 무왕을 보좌했다.
무왕이 은나라를 이긴 지 2년이 되었어도 천하가 안정되지 않고, 무왕이 발병해 온전하지 못하자,

군신들은 두려움에 떨었다. 이에 태공(太公)과 소공이 점을 쳤다.
주공은 말하기를 : “우리 선왕(先王)을 가히 걱정하지 아니할 수 없다.”라고 하며, 주공은 이에 스스로 볼모가 되어, 

세가의 제단인 삼단(三壇)을 설치하고, 북쪽을 향해 서서 옥[璧]을 머리에 이고, 자신의 홀[圭]을 손에 들고,

주나라 시조인 고공단보 태왕(太王)과 왕계(王季)와 문왕(文王)에게 축사를 올렸다.]


史策祝曰:「惟爾元孫王發, 勤勞阻疾. 若爾三王是有負子之責於天, 以旦代王發之身.

旦巧能, 多材多藝, 能事鬼神. 乃王發不如旦多材多藝,不能事鬼神.

乃命于帝庭,敷佑四方,用能定汝子孫于下地,四方之民罔不敬畏.

無墜天之降葆命,我先王亦永有所依歸. 今我其即命於元龜,爾之許我,我以其璧與圭歸,

以俟爾命。爾不許我,我乃屏璧與圭.」 周公已令史策告太王、王季、文王,欲代武王發,

於是乃即三王而卜.  卜人皆曰吉,發書視之,信吉.  周公喜,開籥,乃見書遇吉.

[사관이 죽간에 써있는 축문을 낭독하기를 : “오, 그대들의 현손 무왕 발(發)이 질병에 걸려 괴로워하고 있나이다.

만약 그대들 삼왕께서 하늘에 자식을 바쳐야 하는 빚이 있다면, 단(旦)이 왕발의 몸값을 대신하겠나이다.

단은 능력이 뛰어나고 다재다능해 귀신을 잘 섬길 수 있지만,

왕발은 오히려 단보다 다재다능하지 못해 귀신을 잘 섬길 수 없나이다.

그러나 저 사람 왕발은 상제의 조정으로부터 천명을 받아, 천하 백성을 어루만져 다스리고

그대들의 자손을 천하에 정착시키니, 천하의 백성들이 그를 경외하지 않는 자가 없사옵니다.

상제께서 내려주신 천명을 실추시키지 않는 것 역시 우리 선왕이 영원히 귀의할 바이옵니다.
지금 저는 곧바로 큰 거북을 통해 명을 받겠사옵니다. 그대들께서 저를 허락하신다면,

저는 옥과 홀을 가지고 돌아가 명을 기다릴 것이나, 그대들께서 저를 허락하지 않으시면,

저는 곧 옥과 홀을 감출 것이옵니다.”라고 하였다.
주공은 먼저 사관을 시켜 태왕, 왕계, 문왕에게 자기가 무왕 발 대신에 죽겠노라는 축문을 고하게 하고는,

곧바로 다시 삼왕을 향해 점을 쳤다. 복인(卜人)들은 모두 “길조로다”라고 하고는,

점서(占書)를 보내 보여주면서 길조를 확인시켰다. 주공이 기뻐하며 점서 보관함을 열고 길조를 확인했다.]

周公入賀武王曰:「王其無害。旦新受命三王, 維長終是圖。茲道能念予一人.」

周公藏其策金縢匱中, 誡守者勿敢言.

明日,武王有瘳.  其後武王既崩,成王少,在彊葆之中.

周公恐天下聞武王崩而畔,周公乃踐阼代成王攝行政當國.

管叔及其群弟流言於國曰:「周公將不利於成王.」

[주공은 안으로 들어가 무왕에게 축하하며 말하기를 : “왕께 해가 없을 것입니다.

제가 삼왕에게 새로운 명을 받았사오니, 왕께서는 오로지 항상 이 길만을 도모하십시오.

이 길은 오직 천자에게 부여된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주공은 축문을 쇠로 봉인한 등나무 궤짝에 넣고 호위한 자에게 감히 발설하지 말라고 경고했다.

다음날, 무왕이 완쾌되었다. 그 후 무왕이 일찍 타계했는데, 성왕은 어려서 아직 강보에 싸여 있었다.

주공은 무공의 타계 소식을 듣고 천하 백성이 이반할까 두려워, 곧바로 천자가 서는 섬돌에 서서[踐阼]

성왕을 대신해 국가행정을 섭정했다. 관숙과 그의 여러 아우들은 나라에 유언비어를 퍼뜨리기를 :

“주공은 장차 성왕에게 이롭지 못할 것이다”라고 하였다.]

 

周公乃告太公望、召公奭曰:「我之所以弗辟而攝行政者,恐天下畔周,無以告我先王太王、

王季、文王. 三王之憂勞天下久矣, 於今而后成. 武王蚤終, 成王少, 將以成周, 我所以為之若此.」

三王之憂勞天下久矣,於今而后成.  武王蚤終,成王少,將以成周,我所以為之若此.」

於是卒相成王, 而使其子伯禽代就封於魯.
周公戒伯禽曰:「我文王之子,武王之弟,成王之叔父,我於天下亦不賤矣.

然我一沐三捉發,一飯三吐哺,起以待士,猶恐失天下之賢人. 子之魯,慎無以國驕人.」

管、蔡、武庚等果率淮夷而反.

[주공은 곧바로 태공망과 소공석에게 말하기를 : “내가 오해받을 것을 개의치 않고 섭정하는 것을,

천하 백성이 주(周)나라를 이반할까 두려워 우리의 선왕이신 태왕, 왕계, 문왕께 고하지 않았소.

삼왕께서 오랫동안 걱정하고 애쓴 나머지 천하가 오래 지탱되어 왔고, 오늘에 이르러 완성되었소.

무왕이 일찍이 타계하셨고, 성왕은 어립니다. 장차 이 상황에서 주나라를 일으키는 것이 내가 섭정하는 목적이오.”

라고 하였다.​ 마침내 함께 성왕을 도왔고, 그의 아들 백금(伯禽)으로 하여금 봉지인 노(魯) 땅으로 가도록 했다.

주공이 백금에게 훈계하기를 : “나는 문왕의 아들이고, 무왕의 동생이며, 성왕의 숙부이니,

천하에서 또한 신분이 낮지는 않을 것이다. 그러나 나는 한 번 목욕하는 데 머리카락을 세 번 움켜쥐었고,
한 번 식사에도 세 번을 뱉어내며 나아가 선비를 맞이했으면서도, 오히려 천하의 현인을 잃을까 걱정했다.
너는 노 땅으로 가거든 삼가 나라를 가졌다고 남에게 교만하지 말아라.”라고 하였다. 

관숙, 채숙, 무경 등이 과연 회이(淮夷) 사람들을 거느리고 반란을 일으켰다.]  

周公乃奉成王命,興師東伐,作大誥.  遂誅管叔,殺武庚,放蔡叔.
收殷餘民,以封康叔於衛,封微子於宋,以奉殷祀.  寧淮夷東土,二年而畢定. 諸侯咸服宗周.

天降祉福, 唐叔得禾, 異母同穎,獻之成王, 成王命唐叔以餽周公於東土, 作餽禾.

周公既受命禾, 嘉天子命, 作嘉禾.

​東土以集,周公歸報成王,乃為詩貽王,命之曰鴟鸮. 王亦未敢訓周公.

[주공은 곧바로 성왕의 명을 받들어 군대를 일으켜 동벌(東伐)하면서,「대고(大誥)」를 지었다.

마침내 관숙을 주살했고, 무경을 죽였으며, 채숙을 추방시켰고, 은(殷)의 유민을 받아들였으며,

강숙(康叔)을 위(衛) 땅에 봉했고, 미자(微子)를 송(宋) 땅에 봉하고서 은의 역법을 받들게 했다.
회이 동쪽 땅을 진정시킨 지 2년 만에 모두 안정되었다. 제후들은 감복해 주나라를 추종했다.
하늘이 큰 복을 내려, 당숙(唐叔)이 벼를 얻었는데, 두 두렁의 벼에서 하나의 이삭이 팼다. 

것을 성왕에게 바치니, 성왕은 당숙에게 명해 동쪽 땅의 주공에게 선사하게 했고,「궤화(餽禾)」를 지었다. 

주공은 먼저 하사한 벼를 받고, 천자의 명령을 찬미하며 「가화(嘉禾)」를 지었다.
동쪽 땅이 진정되자, 주공은 돌아와 성왕에게 보고하면서 곧 시를 지어 왕에게 바쳤고,

그것을「치효(鴟鴞)」라고 명명했다. 왕 역시 주공을 감히 질책하지 못했다.]

 

成王七年二月乙未, 王朝步自周, 至豐, 使太保召公先之雒相土.

其三月, 周公往營成周雒邑, 卜居焉, 曰吉, 遂國之.

​成王長,能聽政. 於是周公乃還政於成王,成王臨朝. 周公之代成王治,南面倍依以朝諸侯.

及七年後,還政成王,北面就臣位,匔匔如畏然.

初,成王少時,病,周公乃自揃其蚤沈之河,以祝於神曰:「王少未有識,奸神命者乃旦也.」

亦藏其策於府.  成王病有瘳.  及成王用事,人或譖周公,周公奔楚.

成王發府,見周公禱書,乃泣,反周公.  周公歸,恐成王壯,治有所淫佚,乃作多士,作毋逸.

[성왕 7년 2월 을미일, 성왕은 주(周) 무왕의 묘를 걸어 가서 참배하고 풍(豐)에 도착하여 문왕의 묘를 참배하면서,

태보(太保) 소공(召公)을 먼저 낙읍(雒邑)으로 보내 토지를 시찰하게 했다.
그해 3월, 주공은 먼저 주(周)의 동쪽 낙읍으로 가서 축성하고, 도읍지에 대해 점을 치니,

길조라고 하자 마침내 그곳을 수도로 삼았다. 성왕이 성장해 정사를 처리할 수 있게 되자,

주공은 성왕에게 곧바로 정권을 돌려주었고, 성왕이 국정에 임했다. 

주공은 성왕을 대신해 통치할 때에는 배의(倍依)를 치고 남쪽을 향해 제후를 접견했다.
7년이 되자, 주공은 성왕에게 정권을 돌려주고 북쪽을 향해 신하의 자리에 서서,

마치 두려운 듯이 삼가 성왕을 공경했다. 옛날 성왕이 어렸을 적에 병이 나자,

주공은 곧바로 자신의 손톱을 잘라 황하에 가라앉히고,

신에게 “왕은 어리시어 아직 식견이 없사옵니다. 신의 명령을 어지럽힌 자는 바로 저 단(旦)이옵니다”라고 

축원한 뒤, 축문을 문서보관소에 보관했다. 그러자 성왕의 병이 완쾌되었다.

이윽고 성왕이 국정을 수행하게 되었을 때, 어떤 사람이 주공을 참소하자, 주공이 초(楚)나라로 망명했다.
성왕은 문서보관소를 열어, 주공의 축문을 발견하자마자 눈물을 흘리고 주공을 귀국시켰다.
주공은 귀국했지만, 성왕이 장성해 정사를 방탕하게 처리할까 걱정되어,

곧바로「다사(多士)」와「무일(毋逸)」을 지었다


毋逸稱:「為人父母,為業至長久,子孫驕奢忘之,以亡其家,為人子可不慎乎!

笔昔在殷王中宗,嚴恭敬畏天命,自度治民,震懼不敢荒寧,故中宗饗國七十五年。

其在高宗,久勞于外,為與小人,作其即位,乃有亮闇,

三年不言,言乃讙,不敢荒寧,密靖殷國,至于小大無怨,故高宗饗國五十五年。
其在祖甲, 不義惟王, 久為小人于外, 知小人之依,能保施小民, 不侮寡, 故祖甲饗國三十三年.」

[「무일」에서 그는 이렇게 칭송했다.
" 부모가 장구한 세월 동안 이룩한 창업을 자손들은 교만과 사치를 부려 잊어버리고, 이 때문에 그 가업을 망치나니,

자식된 자가 어찌 삼가지 않으리오!  그러므로 옛날 은왕(殷王) 중종(中宗)은 천명을 엄숙히 받들고 경외했으며,

친히 법을 준수해 백성을 다스렸고, 삼가며 두려워했기에, 감히 정사를 그만두거나 안락에 빠지지 않았고,

75년 동안 왕위를 지킬 수 있었네. 고종(高宗)은 오랫동안 성 밖에서 노역을 했고, 하층민들과 함께 생활을 했는데,

그가 즉위하자 곧바로 상사(喪事)가 발생하니, 3년 동안 말을 하지 않았네. 그가 드디어 말을 하자 모두 기뻐했네.

감히 정사를 그만둔다거나 안락에 빠지지 않았고, 은나라를 안정시켰으며, 크고 작은 일에 백성의 원한을 사지

않았기 때문에 고종은 55년 동안 왕위를 지켰네. 조갑(祖甲)은 의롭지 못하게 왕위에 올랐다고 여겨,

오랫동안 성 밖에서 하층민 노릇을 했으며, 하층민들의 바람을 알았기에 하층민들을 보호하고

은혜를 베풀 수 있었으며, 홀아비와 과부를 업신여기지 않았기 때문에 33년 동안 왕위를 누렸네."]

多士稱曰 :「自湯至于帝乙, 無不率祀明德, 帝無不配天者。在今後嗣王紂, 誕淫厥佚,

不顧天及民之從也. 其民皆可誅.」(周多士)「文王日中昃不暇食,饗國五十年.」作此以誡成王.

成王在豐, 天下已安, 周之官政未次序, 於是周公作周官,官別其宜,作立政,以便百姓. 百姓說.

周公在豐,病,將沒,曰:「必葬我成周,以明吾不敢離成王.」

周公既卒,成王亦讓,葬周公於畢,從文王,以明予小子不敢臣周公也。

[「다사」에서 그는 이렇게 칭송했다. "탕(湯)에서 제을(帝乙)까지 역법을 따르고 덕행을 닦지 않은 자가 없었으며,

제왕들은 하늘의 명을 어긴 적이 없었네.  그 후 오늘날 후대 주왕(紂王)이 황음하고 향락에 빠져 

하늘과 백성의 바람을 돌아보지 못했기에 그 백성들은 모두 천벌을 받으리라 여겼네. 

문왕(文王)은 새벽부터 정오까지 식사할 틈이 없었기에 왕위를 50년 동안 누렸네."

주공은 이것을 지어 성왕을 경계시켰다. 성왕이 풍(豐) 땅에 있을 때, 천하는 이미 안정되었으나,

주(周)의 관직과 행정이 아직 정비되지 않았다.
이에 주공이「주관(周官)」을 지어 관직을 분리해 규정했고,「입정(立政)」을 지어 백성들을 편안하게 하니,

​백성들이 기뻐했다. 주공이 풍 땅에서 병이 들어 막 죽어가면서 말하기를 :

“반드시 나를 성주(成周) 땅에 묻어주어, 내가 감히 성왕을 떠나지 않는다는 것을 밝혀 주시오”라고 하였다.

주공이 죽고 나서, 성왕도 역시 겸양하면서 주공을 필(畢) 땅에 묻고 문왕과 함께 모심으로써

자신이 감히 주공을 신하로 생각하지 않았음을 분명히 했다.]

 

周公卒後, 秋未穫, 暴風雷[雨],禾盡偃, 大木盡拔。周國大恐.

成王與大夫朝服以開金縢書,王乃得周公所自以為功代武王之說.
二公及王乃問史百執事,史百執事曰:「信有,昔周公命我勿敢言.」

成王執書以泣, 曰 :「自今後其無繆卜乎! 昔周公勤勞王家, 惟予幼人弗及知.

今天動威以彰周公之德, 惟朕小子其迎, 我國家禮亦宜之.」

​王出郊,天乃雨,反風,禾盡起.  二公命國人,凡大木所偃,盡起而筑之.

歲則大孰.  於是成王乃命魯得郊祭文王.  魯有天子禮樂者,以褒周公之德也

周公卒,子伯禽固已前受封,是為魯公.

[주공이 죽은 뒤, 아직 추수를 하지 않았는데, 폭풍우가 몰아쳐 벼가 모두 쓰러지고 나무가 모두 뽑혔다.

주나라 사람들이 크게 떨었다.  성왕과 대부들은 조복(朝服)을 입고 금등서(金藤書)를 열어보고서,

성왕은 곧 주공이 무왕을 대신해 죽는 것이 자신의 책무라고 생각했던 책서(策書)를 찾았다.
태공과 소공, 성왕이 곧바로 사관과 집사에게 물으니, 사관과 집사가 대답하기를 : 

“ 확실합니다. 옛날에 주공께서 저에게 감히 발설하지 말라고 명령하셨사옵니다.”라고 하였다.
성왕이 책서를 들고 눈물을 흘리면서 말하기를 : “지금 이후 점괘에 어긋남이 없을 것이로다!

옛날 주공께서 왕조를 위해 부지런히 애를 쓰셨지만, 오직 과인이 어려서 알지 못했소.

지금 하늘이 주공의 덕을 준엄하게 선양하려고 하니, 과인은 그 뜻을 받들어,

응당 국가의 예로 제사 지내려고 하오.”라고 하였다.
왕이 교외에서 제사를 지내자, 하늘이 곧바로 비를 내리고 바람을 거두어, 벼가 모두 일어섰다.

태공망(太公望)과 소공(召公)은 백성들에게 명령해, 쓰러졌던 큰 나무를 모두 일으켜 세우고 북돋워주도록 했다.

이해의 수확은 풍년이었다. 이때 성왕은 곧바로 노(魯)나라에게 교외에서 제사를 올릴 수 있고  문왕(文王)에게

제사 지낼 수 있다고 명령했다. 노나라가 천자의 예악(禮樂)을 사용하게 된 것은 주공의 덕을 칭송했기 때문이다.
주공이 죽었으나 아들 백금(伯禽)은 이미 먼저 봉지(封地)를 받았으니, 그가 바로 노공(魯公)이다.]

魯公伯禽之初受封之魯,三年而後報政周公.  周公曰:「何遲也?」
伯禽曰:「變其俗,革其禮,喪三年然後除之,故遲.」太公亦封於齊,五月而報政周公.
周公曰:「何疾也?」曰:「吾簡其君臣禮,從其俗為也.」及後聞伯禽報政遲,
乃嘆曰:「嗚呼,魯後世其北面事齊矣!夫政不簡不易,民不有近;平易近民,民必歸之.」

伯禽即位之後,有管、蔡等反也,淮夷、徐戎亦并興反.

[노공 백금이 처음 노나라 땅을 봉지로 받고 3년 후에 주공에게 정사를 보고했을 때,

주공이 묻기를 : “왜 늦었느냐?”라고 하자,

백금이 대답하기를 : “그곳의 풍속과 예의를 변혁하고, 3년상을 치르느라 늦었사옵니다.”라고 하였다.

태공(太公)도 역시 제(齊) 땅에 봉지를 받았는데, 5개월이 지나 주공에게 정사를 보고하였다.

주공이 묻기를 : “왜 그리 빠르냐?”라고 하자,

백금이 대답하기를 :“저는 그 군신의 예의를 간소화하고, 그곳의 풍속과 행사를 따랐기 때문입니다”라고 하였다.

나중에 백금이 정사를 늦게 보고한 것을 듣고는 바로 탄식하며 말하기를 : 

“오호! 후세에 노나라가 제나라를 섬기게 될 것이다. 대개 정치가 간소하고 용이하지 않으면

백성들이 접근하지 않는다. 정치가 평이하고 백성에게 친근하면 백성들이 반드시 모여든다.”라고 하였다.
백금이 즉위한 후 관숙, 채숙 등이 반란을 일으켰고, 회이(淮夷)와 서융(徐戎)도 역시 함께 반란을 일으켰다.]  

於是伯禽率師伐之於肸,作肸誓,曰:「陳爾甲胄,無敢不善. 無敢傷牿. 馬牛其風, 臣妾逋逃,

勿敢越逐,敬復之.  無敢寇攘,踰墻垣.  魯人三郊三隧,峙爾芻茭、糗糧、楨榦,無敢不逮.

我甲戌筑而征徐戎,無敢不及,有大刑.」

作此肸誓,遂平徐戎,定魯.  魯公伯禽卒,子考公酋立.  考公四年卒,立弟熙,是謂煬公.

煬公筑茅闕門.  六年卒,子幽公宰立.

[이에 백금이 군대를 거느리고 가서 그들을 힐(肹) 땅에서 정벌하고 다음과 같은 「힐서(肹誓)」를 지었다.
힐서에 이르기를 : " 너의 갑옷과 투구를 준비하라. 절대 허술하게 다루지 말라. 절대 마구간을 훼손하지 말라.
달아난 말과 소, 도망간 노예를 감히 대열을 이탈하면서 추격하지 말고, 공손히 송환하라.

절대 훔치거나 약탈하지 말며, 남의 담을 뛰어넘지 말라. 노나라 서, 남, 북 세 방향에서 사는 성 밖과 교외의 

주민들, 그대들은 마른 풀, 식량, 담틀마구리대를 비축해, 절대 공급부족이 없도록 하라. 

나는 갑술일에 보루를 쌓고 서융을 정벌할 것이니, 반드시 제때에 완성하라. 그렇지 못하면 사형에 처하겠노라."

이 「힐서」를 짓고, 드디어 서융을 평정해 노나라를 안정시켰다.
노공 백금이 죽고 아들 고공 추(考公酋)가 즉위했다. 고공이 재위 4년 만에 죽고 동생 희(熙)가 즉위했는데,

이 사람이 양공(煬公)이다. 양공이 모궐문을 세웠다. 양공이 재위 6년 만에 죽고 아들 유공 재(幽公宰)가 즉위했다.

유공 14년, 유공의 동생 비가 유공을 시해하고 자신이 즉위했는데, 이 사람이 위공(魏公)이다.

위공은 재위 50년 만에 죽고, 아들 여공 탁(厲公擢)이 즉위했다.]

 

幽公十四年. 幽公弟沸殺幽公而自立,是為魏公. 魏公五十年卒,子厲公擢立. 

厲公三十七年卒,魯人立其弟具,是為獻公.  獻公三十二年卒,子真公濞立.

真公十四年,周厲王無道,出奔彘,共和行政.

二十九年,周宣王即位.

三十年,真公卒,弟敖立,是為武公.

[유공 14년, 유공의 동생 비가 유공을 시해하고 자신이 즉위했는데, 이 사람이 위공(魏公)이다.

위공은 재위 50년 만에 죽고, 아들 여공 탁(厲公擢)이 즉위했다.
여공이 재위 37년 만에 죽으니, 노나라 사람들이 그의 동생 구(具)를 왕위에 세웠는데, 이 사람이 헌공(獻公)이다.
헌공이 재위 32년 만에 죽자, 아들 진공 비(眞公濞)가 즉위했다.
진공 14년, 주 여왕(周厲王)이 무도한 짓을 하다가 체(彘) 땅으로 망명하니, 공화정이 들어섰다.
29년, 주 선왕(周宣王)이 즉위했다.
30년, 진공이 죽고 동생 오(敖)가 즉위하니, 이 사람이 무공(武公)이다.]

武公九年春,武公與長子括,少子戲,西朝周宣王.  宣王愛戲,欲立戲為魯太子.
周之樊仲山父諫宣王曰:「廢長立少,不順;不順,必犯王命;犯王命,必誅之:

故出令不可不順也.  令之不行,政之不立;行而不順,民將棄上.  夫下事上,少事長,所以為順.

今天子建諸侯,立其少,是教民逆也.  若魯從之,諸侯效之,王命將有所壅;

若弗從而誅之,是自誅王命也.  誅之亦失,不誅亦失,王其圖之.」
宣王弗聽,卒立戲為魯太子.  夏,武公歸而卒,戲立,是為懿公.

[무공 9년 봄, 무공이 큰아들 괄(括)과 작은아들 희(戱)와 함께 서쪽 주 선왕을 조회했다.

선왕은 희를 좋아해, 희를 노나라 태자로 삼으려고 했다.
주나라의 번중산보(樊仲山父)가 선왕에게 간언하기를 : “장자를 폐하고 작은 아들을 세우면 순서가 어긋납니다.

순서가 어긋나면 반드시 왕명을 어기게 됩니다. 왕명을 어기면 반드시 주살당하므로 명령이 집행되면

복종하지 않을 수 없사옵니다. 명령이 집행되지 않으면 정치가 올바로 서지 않습니다.
명령이 집행되는데도 복종하지 않으면 백성들이 장차 윗사람을 버릴 것입니다.

대저 아랫사람이 윗사람을 섬기고, 어린이가 어른을 섬기는 것은 순서를 지키기 때문입니다.
지금 천자가 제후를 책봉하면서 그 작은아들을 세우는 것은 백성에게 반역을 가르치는 것입니다.

만약에 노나라가 그 명령을 따르고, 다른 제후들이 그것을 본받으면, 왕명은 장차 막히게 될 것입니다.

만약에 복종하지 않는다고 징벌한다면 그것은 스스로 왕명을 징벌하는 것입니다.
징벌하는 것은 역시 잘못이고, 징벌하지 않는 것도 잘못이니, 왕께서는 그것을 헤아리십시오.”라고 하였다.
선왕이 이 말을 듣지 않고 마침내 희를 세워 노나라 태자로 삼았다.

여름, 무공이 귀국해 죽자, 희가 즉위했는데, 그가 의공(懿公)이다.]

 

懿公九年,懿公兄括之子伯御與魯人攻弒懿公,而立伯御為君.

​伯御即位十一年,周宣王伐魯,殺其君伯御,而問魯子能道順諸侯者,以為魯後.
樊穆仲曰:「魯懿公弟稱,肅恭明神,敬事耆老;賦事行刑,必問於遺訓而咨於固實;

不干所問,不犯所(知)[咨].」

​宣王曰:「然,能訓治其民矣.」乃立稱於夷宮,是為孝公.  自是後,諸侯多畔王命.

孝公二十五年,諸侯畔周,犬戎殺幽王.  秦始列為諸侯.

二十七年,孝公卒,子弗湟立,是為惠公.

[의공 9년, 의공의 형 괄(括)의 아들 백어(伯御)와 노나라 사람들이 의공을 시해했고, 백어가 즉위해 임금이 되었다.
백어 즉위 11년, 주 선왕은 노나라를 정벌해 그 임금인 백어를 살해했고,

노나라 공자(公子) 중에서 제후들을 인도할 수 있으며, 노나라의 후계자가 될 만한 사람이 누구냐고 물었다.

번목중(樊穆仲)이 대답하기를 : “노나라 의공의 동생 칭(稱)이 근엄, 공손하고 총명하며, 웃어른을 공손히 모십니다.

임무를 맡기고 형벌을 집행할 때에는 반드시 먼저 선왕의 교훈을 묻고 역사 사실을 고찰하는데,

한 번도 물었던 교훈에 저촉되지 않았고, 고찰했던 역사사실에 어긋남이 없었습니다.”라고 하였다.

선왕이 말하기를 : “옳다. 그는 백성을 인도하고 다스릴 수 있겠다”라고 하고는,

곧 칭을 이궁(夷宮)에서 즉위시켰는데, 그가 효공(孝公)이다. 이후로 제후들이 자주 왕명을 어기게 되었다.
효공 25년, 제후가 주나라를 이반해, 견융이 유왕(幽王)을 살해했다. 진(秦)나라가 처음으로 제후의 대열에 섰다.
27년, 효공이 죽고 아들 불황(弗湟)이 즉위했는데, 그가 혜공(惠公)이다.] 

惠公三十年,晉人弒其君昭侯.

四十五年,晉人又弒其君孝侯.

四十六年, 惠公卒, 長庶子息攝當國,行君事,是為隱公.

初,惠公適夫人無子, 公賤妾聲子生子息.  息長, 為娶於宋.

​宋女至而好, 惠公奪而自妻之.  生子允.  登宋女為夫人, 以允為太子.

及惠公卒, 為允少故, 魯人共令息攝政, 不言即位.

[혜공 30년, 진(晉)나라 사람이 자기 군주 소후(昭侯)를 시해했다.

45년, 진나라 사람이 또 그 군주 효후(孝侯)를 시해했다.
46년, 혜공이 죽고 나서 장서자(長庶子) 식(息)이 섭정하면서 군주의 직권을 행사했는데, 이 사람이 은공(隱公)이다.
당초, 혜공의 본부인에게는 자식이 없었고, 공의 천첩(賤妾) 성자(聲子)가 식(息)을 낳았다.

식이 성장해 송(宋)나라에서 아내를 맞이했다.

송나라의 여인이 도착하고 보니 미색인지라 혜공이 탈취해 자기 아내로 삼았다.

그 사이에서 아들 윤(允)이 태어나자, 송나라 여인을 부인으로 올리고 윤을 태자로 삼았다.

혜공이 죽고 나자, 윤이 어렸던 까닭에 노나라 사람들이 모두 식에게 섭정하게 했기에, 즉위했다고 말하지 않았다.]

 

隱公五年,觀漁於棠.

八年,與鄭易天子之太山之邑祊及許田,君子譏之.

十一年冬,公子揮諂謂隱公曰:「百姓便君,君其遂立.  吾請為君殺子允,君以我為相.」

隱公曰:「有先君命. 吾為允少,故攝代. 今允長矣,吾方營菟裘之地而老焉,以授子允政.」

揮懼子允聞而反誅之,乃反譖隱公於子允曰:「隱公欲遂立,去子,子其圖之. 請為子殺隱公.」

子允許諾。
十一月,隱公祭鐘巫,齊于社圃,館于蒍氏. 揮使人殺隱公于蒍氏,而立子允為君,是為桓公.

[은공은 5년에 무당정(武棠亭)에서 고기 잡는 것을 감상했다.
8년에는 노나라의 허전(許田)을, 정(鄭)나라가 천자를 모시고 태산(太山)에 제사 지내던 팽읍(祊邑)과 교환했다.

군자는 이 조치를 기롱(譏弄)했다.
11년 겨울, 공자 휘(公子揮)가 은공에게 아첨하며 말하기를 : “백성들이 임금을 옹호했기에,

임금께서 마침내 왕위에 오르셨사옵니다. 저는 임금을 위해 윤(允)을 살해하고자 하옵니다.

임금께서 저를 재상으로 삼아주십시오.”라고 하였다.
은공이 말하기를 : “선군의 명령이 있었느니라. 윤이 어렸기 때문에 나는 그를 대신했던 것이다.

이제 윤이 성장했으니, 나는 바야흐로 토구(菟裘)의 땅에 집을 짓고 노년을 준비할 것이며,

윤에게 정권을 줄 것이다.”라고 하였다.

휘는 윤이 이 말을 듣고 도리어 자기를 죽이려고 할까 두려워, 곧바로 윤에게 은공을 모함하며 말하기를 : 

“은공이 드디어 왕위에 오르기 위해서 그대를 죽이려고 하니, 그대는 그것을 고려하십시오.
그대를 위해서 은공을 살해하겠사옵니다.”라고 하니, 윤이 허락했다.
11월, 은공은 종무제(鍾巫祭)를 지냈고, 사포(社圃)에서 재계했으며, 위씨(蔿氏) 집에서 묵었다.
휘는 사람을 시켜 위씨 집에서 은공을 시해하고 윤을 즉위시켰는데, 이 사람이 환공(桓公)이다.] 

 

桓公元年,鄭以璧易天子之許田.

二年,以宋之賂鼎入於太廟,君子譏之.

三年,使揮迎婦于齊為夫人.

六年,夫人生子,與桓公同日,故名曰同.  同長,為太子.

十六年,會于曹,伐鄭,入厲公.

十八年春,公將有行,遂與夫人如齊.  申繻諫止,公不聽,遂如齊.  齊襄公通桓公夫人.

公怒夫人,夫人以告齊侯.
夏四月丙子,齊襄公饗公,公醉,使公子彭生抱魯桓公,因命彭生摺其脅,公死于車.
魯人告于齊曰:「寡君畏君之威,不敢寧居,來修好禮.

禮成而不反,無所歸咎,請得彭生除丑於諸侯.」
齊人殺彭生以說魯。立太子同,是為莊公。莊公母夫人因留齊,不敢歸魯。

[환공 원년, 정(鄭)나라가 구슬을 보태어 팽 땅을 천자의 허전(許田)과 바꾸었다.

2년, 송나라가 뇌물로 바친 정(鼎)을 태묘(太廟)에 넣었다. 군자는 그것을 기롱했다.
3년, 휘를 제(齊)나라로 장가보내 부인을 얻게 했다.

6년, 부인이 아들을 낳았는데, 환공과 생일이 같았으므로 이름을 동(同)이라 했다. 동이 성장해 태자가 되었다.
16년, 조(曹)나라에서 회맹해, 정(鄭)나라를 정벌하고 정나라의 여공(厲公)을 입국시켰다.
18년 봄, 환공이 다른 나라로 행차하는 것을 논의하던 중 마침내 부인과 제(齊)나라로 가려고 했다.

신수(申繻)가 중지하라고 간언했지만, 환공은 그 말을 듣지 않고 결국 제나라로 가버렸다.

제양공(齊襄公)이 환공의 부인과 간통했다. 환공이 부인에게 화를 내니, 부인이 제양공에게 말했다.
여름 4월 병자일(丙子日), 제양공이 환공에게 잔치를 베풀었는데 환공이 취하니, 공자 팽생(彭生)을 시켜

노환공을 부축하게 한 뒤, 팽생에게 틈을 타서 늑골을 꺾으라고 명령했다. 

팽생은 환공을 돌아가는 수레에서 죽였다.

​노나라 사람들이 제나라 군주에게 통고하기를 : “저희 군주가 임금의 위엄이 두려워, 감히 편안히 계시지 못하고,

그곳에 가셔서 우호의 예의를 다했습니다. 예를 다하고도 돌아오지 못했는데, 죄를 추궁할 곳이 없사옵니다.

팽생을 잡아들여 제후들 간에 퍼져 있는 추문을 없애주십시오.”라고 하였다.
제나라 사람들이 팽생을 죽여 노나라 사람들을 무마했다. 태자 동이 즉위하니, 이 사람이 장공(莊公)이다.
장공의 어머니는 제나라에 머물러 있었기 때문에 감히 노나라로 귀국하지 못했다.]

莊公五年冬,伐衛,內衛惠公.

八年,齊公子糾來奔.

九年,魯欲內子糾於齊,後桓公,桓公發兵擊魯,魯急,殺子糾.  召忽死. 齊告魯生致管仲.
魯人施伯曰:「齊欲得管仲,非殺之也,將用之,用之則為魯患. 不如殺,以其尸與之.」

莊公不聽,遂囚管仲與齊. 齊人相管仲.

十三年,魯莊公與曹沬會齊桓公於柯,曹沬劫齊桓公,求魯侵地,已盟而釋桓公.

桓公欲背約,管仲諫,卒歸魯侵地.

​十五年,齊桓公始霸.

二十三年,莊公如齊觀社.

[장공 5년 겨울, 위(衛)나라를 정벌했고, 위혜공을 돌려보냈다.
8년, 제나라 공자 규(公子糾)가 망명해 왔다.
9년, 노나라가 공자 규를 제나라로 돌려보내, 환공(桓公)을 퇴진시키고자 했다.

환공이 군대를 일으켜 노나라를 공격하니, 노나라는 조급해 공자 규를 죽였다.
그러자 소홀(召忽)이 자살했다. 제나라가 노나라에게 관중(管仲)을 생환하라고 통고하니,
노나라 사람 시백(施伯)이 말하기를 : “제나라가 관중을 얻고자 하는 것은, 그를 죽이려는 것이 아니고,

장차 그를 등용하려는 것입니다. 그가 등용되면 노나라에게는 근심거리가 됩니다.

그를 죽여서 시체로 보내는 것이 좋습니다.”라고 했다.
장공은 그 말을 듣지 않고 마침내 관중을 포박해 제나라에 건네주었다. 제나라 사람이 관중을 재상으로 삼았다.
13년, 노 장공과 조말(曹沫)이 가(柯) 땅에서 제 환공과 회맹했다.

조말이 제 환공을 위협해 약탈당한 노나라의 땅을 요구했고, 맹약이 성립되자 환공을 풀어주었다.
환공은 맹약을 배신하려고 했으나, 관중이 간언하자 마침내 빼앗았던 땅을 돌려주었다.
15년, 제 환공이 처음으로 패자(覇者)가 되었다.
23년, 장공이 제나라로 가서 토지신 제사를 관전했다.] 

三十二年,初,莊公筑臺臨黨氏,見孟女,說而愛之,許立為夫人,割臂以盟。孟女生子斑。

斑長,說梁氏女, 往觀。圉人犖自墻外與梁氏女戲。斑怒,鞭犖。

莊公聞之,曰:「犖有力焉,遂殺之,是未可鞭而置也。」斑未得殺。

會莊公有疾。莊公有三弟,長曰慶父,次曰叔牙,次曰季友。莊公取齊女為夫人曰哀姜。

哀姜無子. 哀姜娣曰叔姜, 生子開.  莊公無適嗣, 愛孟女, 欲立其子斑.  莊公病,而問嗣於弟叔牙.
叔牙曰:「一繼一及, 魯之常也.  慶父在, 可為嗣, 君何憂?」莊公患叔牙欲立慶父, 退而問季友.

季友曰:「請以死立斑也.」
莊公曰:「曩者叔牙欲立慶父,柰何?」季友以莊公命命牙待於鍼巫氏,使鍼季劫飲叔牙以鴆,

曰:「飲此則有後奉祀;不然,死且無後.」牙遂飲鴆而死,魯立其子為叔孫氏.

八月癸亥,莊公卒,季友竟立子斑為君,如莊公命.  侍喪,舍于黨氏.

先時慶父與哀姜私通,欲立哀姜娣子開. 及莊公卒而季友立斑,

十月己未,慶父使圉人犖殺魯公子斑於黨氏. 季友奔陳. 慶父竟立莊公子開,是為湣公.

[32년, 당초, 장공이 축대를 쌓는 중에 당씨(黨氏) 집에 갔다가 맹녀(孟女)를 발견했고, 그녀를 사랑하게 되어,

그녀를 부인으로 삼겠다는 약속을 했다. 당씨는 팔을 잘라 장공과 맹세했다. 맹녀가 아들 반(斑)을 낳았다.

반이 성장해 양씨(梁氏) 딸을 좋아하게 되어, 그녀를 살펴보려고 갔다.
사육사 낙(犖)이 담 밖에서 양씨의 딸과 놀이를 하고 있었다. 반이 화가 나서 낙에게 채찍질했다.
장공이 이 말을 듣고 말하기를 : “낙은 힘 있는 사람이니, 그를 죽여라. 채찍질한 것을 방치하지 않을 것이었다.”

라고 했지만, 반은 그를 살해하지 못했다. 마침 장공이 병이 들었다. 장공에게는 세 동생이 있었는데,

첫째가 경보(慶父), 둘째가 숙아(叔牙), 그 다음이 계우(季友)였다.
일찍이 장공은 제나라 여자를 아내로 얻었는데 그 사람이 애강(哀姜)이다. 애강에게는 아들이 없었다.

애강의 여동생은 숙강(叔姜)인데, 장공의 아들 개(開)를 낳았다. 장공은 적자가 없었고, 맹녀를 사랑했기에,

그녀의 아들 반을 옹립하려고 했다. 장공은 병이 들자, 동생 숙아에게 후계자에 대해 물으니,
숙아가 대답하기를 : “아버지가 죽으면 아들이 계승하고, 형이 죽으면 동생이 이어받는 것이 노나라의 정해진 

법입니다. 경보가 살아 있어 후계를 이을 수 있는데 임금께서는 무엇을 걱정하십니까?”라고 하였다.

장공은 숙아가 경보를 왕위에 세우려고 하는 것이 걱정이 되어, 그가 나가자 계우에게 물었다.

계우가 대답하기를 : “목숨을 다해 반을 왕위에 세우겠사옵니다.”라고 하자,
장공이 묻기를 “요전에 숙아는 경보를 왕위에 세우려고 하던데, 어찌 생각하느냐?”라고 했다.

계우는 장공의 명령을 받아 숙아를 침무씨(鍼巫氏) 집에서 기다리게 했고,
침계(鍼季)를 시켜 숙아를 협박해 독주[鴆(酖)酒]를 먹이게 했고, “이것을 마시면 후손의 제사를 받을 것이지만,

그렇지 않으면 죽어서도 후손이 없게 될 것이다”라고 말하게 했다. 숙아는 마침내 독주를 마시고 죽었다.

노나라는 그의 아들을 세워 숙손씨(叔孫氏)로 삼았다.
8월 계해일(癸亥日), 장공이 죽자, 마침내 계우가 반(斑)을 군주로 옹립했는데, 그것은 장공의 명령과 같았다.

반은 상(喪)을 받들며 당씨(黨氏) 집에 머물렀다. 경보는 이전부터 애강과 통간해 왔는데,

애강의 여동생의 아들인 개를 옹립하려고 했다. 장공이 죽고 계우가 반을 옹립하자,
10월 기미일, 경보가 사육사 낙을 시켜 공자 반을 살해하게 했다. 계우는 진(陳)나라로 망명했다.

경보는 마침내 장공의 아들 개를 옹립했는데, 이 사람이 민공(湣公)이다.]

 

湣公二年,慶父與哀姜通益甚. 哀姜與慶父謀殺湣公而立慶父.

慶父使卜齮襲殺湣公於武闈.  季友聞之,自陳與湣公弟申如邾,請魯求內之.
魯人欲誅慶父.  慶父恐,奔莒.  於是季友奉子申入,立之,是為釐公.  釐公亦莊公少子.

哀姜恐,奔邾. 季友以賂如莒求慶父,慶父歸,使人殺慶父,慶父請奔,弗聽,

乃使大夫奚斯行哭而往.  慶父聞奚斯音,乃自殺.
齊桓公聞哀姜與慶父亂以危魯,及召之邾而殺之,以其尸歸,戮之魯.  魯釐公請而葬之.

季友母陳女,故亡在陳,陳故佐送季友及子申。季友之將生也,父魯桓公使人卜之,

曰:「男也,其名曰『友』,閒于兩社,為公室輔.  季友亡,則魯不昌.」
及生,有文在掌曰「友」,遂以名之,號為成季.  其後為季氏,慶父後為孟氏也.

[민공 2년, 경보와 애강의 통간이 아주 빈번해졌다. 애강과 경보는 민공을 살해하고 경보를 옹립하려 음모를 

꾸몄다. 경보는 복의(卜齮)를 시켜 민공을 무위(武闈)에서 습격하게 했다. 계우가 이 소식을 듣고,

진(陳)나라로부터 민공의 동생 신(申)과 함께 주(邾)나라로 가서, 노나라에게 자기들을 입국시킬 것을 요청했다.

노나라 사람들이 경보를 주살하려고 하니, 경보는 두려워서 거(莒)나라로 달아났다.
이때 계우가 신(申)을 받들고 귀국해 그를 옹립하니, 이 사람이 희공(釐公)이다. 희공 역시 장공의 작은아들이다.
애강은 두려워서 주(邾)나라로 달아났다. 계우는 뇌물을 가지고 거나라로 가서 경보를 요구해, 경보를 데리고

돌아와서 다른 사람을 시켜 죽이려고 했다. 경보가 망명을 요청했지만, 계우는 이를 응낙하지 않고

곧바로 대부 해사(奚斯)를 시켜 울면서 지나가게 했다. 경보는 이 소리를 듣자마자 자살했다.
제환공은 애강과 경보의 음란함이 노나라를 위태롭게 한다는 소식을 듣고, 주(邾)나라에서 애강을 불러 죽였고,

그 시체를 가지고 귀국해 노나라에서 조리질했다. 노희공이 장례를 치르자고 요청했다. 

계우의 어머니는 진(陳)나라 여자였으므로, 진나라로 망명을 갔고, 진나라는 이를 구실로 계우와 신(申)을 호송했다.

계우가 막 태어나려고 할 때, 아버지인 노환공(魯桓公)은 사람을 시켜 점을 치도록 하니,

“태어날 아이는 남자이고, 그 이름은 ‘우(友)’이다. 그는 양사(兩社) 사이에서 공실을 보좌할 것이다.

계우가 망명을 떠나면 노나라는 번창하지 못할 것이다.”라 했다.
그가 태어나고 보니, 손바닥에 ‘우(友)’자 무늬가 새겨져 있어, 마침내 그것으로 이름을 짓고 

호를 성계(成季)라 했다.그 후 그는 계씨(季氏)가 되었고, 경보의 후손은 맹씨(孟氏)가 되었다.]

釐公元年,以汶陽鄪封季友. 季友為相.

九年,晉裏克殺其君奚齊、卓子. 齊桓公率釐公討晉亂,至高梁而還,立晉惠公.

十七年,齊桓公卒.

二十四年,晉文公即位.

三十三年,釐公卒,子興立,是為文公.

[희공 원년, 문양(汶陽)과 비(鄪) 땅을 계우에게 봉했다. 계우가 재상이 되었다.
9년, 진(晉)나라 이극(里克)이 자기 군주 해제(奚齊)와 탁자(卓子)를 시해했다.

제환공은 희공(釐公)을 거느리고 가서 진나라의 혼란을 성토했고,
고량(高梁)까지 이르렀다가 귀환해, 진혜공(晉惠公)을 옹립했다.
17년, 제환공이 죽었다. 24년, 진문공(晉文公)이 즉위했다.
33년, 희공이 죽고 아들 흥(興)이 즉위하니, 이 사람이 문공(文公)이다.]

文公元年,楚太子商臣弒其父成王,代立.

三年,文公朝晉襄父.

十一年十月甲午,魯敗翟于咸,獲長翟喬如,富父終甥舂其喉,以戈殺之,埋其首於子駒之門,

以命宣伯.  初,宋武公之世,鄋瞞伐宋,司徒皇父帥師御之,以敗翟于長丘,獲長翟緣斯.

晉之滅路,獲喬如弟棼如.
齊惠公二年, 鄋瞞伐齊, 齊王子城父獲其弟榮如, 埋其首於北門. 衛人獲其季弟簡如. 鄋瞞由是遂亡.

十五年,季文子使於晉.

十八年二月,文公卒.  文公有二妃:長妃齊女為哀姜,生子惡及視;次妃敬嬴,嬖愛,生子俀.

俀私事襄仲,襄仲欲立之,叔仲曰不可. 襄仲請齊惠公,惠公新立,欲親魯,許之.

冬十月,襄仲殺子惡及視而立俀,是為宣公.  哀姜歸齊,哭而過市,
曰:「天乎!襄仲為不道,殺適立庶!」市人皆哭,魯人謂之「哀姜」. 魯由此公室卑,三桓彊.

[문공 원년, 초(楚)나라 태자 상신(商臣)이 자기 아버지 성왕(成王)을 시해하고 왕위를 대행했다.
3년, 문공은 진 양공(晉襄公)을 조회했다.
11년 10월 갑오일(甲午日), 노나라가 적(翟)나라를 함(鹹) 땅에서 무찔렀고, 장적(長翟)의 교여(喬如)를 사로잡았다.
부보종생(富父終甥)이 창으로 교여의 목을 찔러 죽이고 그의 머리를 자구(子駒) 문에 묻었고,

숙손득신(叔孫得臣)은 선백(宣伯)의 이름을 교여라고 지었다.
당초, 송 무공(宋武公) 당시, 수만(鄋瞞)이 송나라를 정벌하니, 사도(司徒)인 황보(皇父)가 군대를 이끌고 방어해,

장구(長丘)에서 적(翟)을 무찌르고 장적의 연사(緣斯)를 사로잡았다.

그 후 진(晉)나라는 노(路)나라를 무찌르고 교여의 동생 분여(棼如)를 사로잡았다.
제 혜공(齊惠公) 2년, 수만이 제나라를 정벌하자,

제나라 왕자 성보(王子城父)가 교여의 막내 동생 영여(榮如)를 사로잡아, 그의 머리를 북문(北門)에 묻었다.
위(衛)나라 사람들이 교여의 동생 간여(簡如)를 사로잡았다. 수만은 이것으로 말미암아 멸망했다.
15년, 계문자(季文子)가 진(晉)나라에 사신으로 갔다.
18년 2월, 문공이 죽었다. 문공에게는 왕비가 둘 있었는데, 장비(長妃)는 제(齊)나라 여자인 애강(哀姜)으로,

악(惡)과 시(視)를 낳았다. 차비(次妃)인 경영(敬嬴)은 총애를 받아 아들 퇴(俀)를 낳았다.

퇴는 양중(襄仲)과 내통했고, 양중이 그를 옹립하려고 했는데, 숙중(叔仲)이 “안 됩니다.”라 했다.
양중은 제 혜공에게 도움을 요청했고, 혜공은 새로 즉위해 노나라와 친교하기 위해서 요청을 받아들였다.
겨울 10월, 양중이 악과 시를 살해하고 퇴를 옹립하니, 이 사람이 선공(宣公)이다. 애강은 제나라로 돌아갔는데,
저잣거리를 울며 지나면서, “하늘이시여! 양중이 무도하게 적자를 살해하고 서자를 옹립했사옵니다!”라고 말했다.

​저잣거리 사람들이 모두 우니, 노나라 사람들이 그녀를 ‘애강(哀姜)’이라고 불렀다.

노나라는 이로 인해 공실(公室)이 나약해지고 삼환(三桓)이 강성해졌다.]

宣公俀十二年,楚莊王彊,圍鄭.  鄭伯降,復國之.

十八年,宣公卒,子成公黑肱立,是為成公.  季文子曰:「使我殺適立庶失大援者,襄仲.」
襄仲立宣公,公孫歸父有寵.  宣公欲去三桓,與晉謀伐三桓.  會宣公卒,季文子怨之,歸父奔齊.

成公二年春,齊伐取我隆.  夏,公與晉郤克敗齊頃公於砹齊復歸我侵地.

四年,成公如晉,晉景公不敬魯.  魯欲背晉合於楚,或諫,乃不.
十年,成公如晉.  晉景公卒,因留成公送葬,魯諱之.

十五年,始與吳王壽夢會鐘離.

十六年,宣伯告晉,欲誅季文子.  文子有義,晉人弗許.

十八年,成公卒,子午立,是為襄公.  是時襄公三歲也.

[선공 퇴 12년, 초 장왕이 강대해져서 정나라를 포위했다. 정백(鄭伯)이 항복하자, 초 나라는 정나라를 재건시켰다.
18년, 선공이 죽고 아들 흑굉(黑肱)이 즉위하니, 이 사람이 성공(成公)이다.
계문자가 말하기를 “우리로 하여금 적자를 살해하고 서자를 옹립하게 함으로써 큰 지지자를 잃게 한 자는 

양중이다".라고 말했다. 양중은 선공을 옹립했기에, 공손귀보(公孫歸父)가 선공의 총애를 받았다.

선공은 삼환을 제거하기 위해 진(晉)나라와 모의해 삼환을 정벌했다.
선공이 죽자마자, 계문자가 그것을 원망하니, 귀보가 제(齊)나라로 달아났다.
성공 2년 봄, 제(齊)나라가 노나라를 정벌해 융(隆) 땅을 빼앗았다.

여름, 성공이 진(晉)나라 각극(卻克)과 함께 안(鞍) 땅에서 제 경공(齊頃公)을 무찌르니,

제나라가 노나라의 침략한 땅을 돌려주었다.
4년, 성공이 진(晉)나라로 갔는데, 진 경공이 노나라를 함부로 대했다.

노나라가 진(晉)나라를 배반하고 초나라와 연합하려고 하자, 어떤 사람이 간언해 성공하지 못했다.
10년, 성공이 진(晉)나라로 갔다. 진 경공이 죽자, 성공은 체류하고 있던 것을 구실로 장례에 참석했지만,

노나라에서는 이것을 언급하기를 기피했다.
15년, 처음으로 오왕(吳王) 수몽(壽夢)과 종리(鍾離)에서 회맹했다.
16년, 선백(宣伯)이 진(晉)나라에 계문자를 주살하겠다고 통고했다. 계문자는 의리가 있는 사람이었으므로,

진(晉)나라 사람들이 이를 허락하지 않았다.
18년, 성왕이 죽고 아들 오(午)가 즉위하니, 이 사람이 양공(襄公)이다. 이때 양공의 나이는 3세였다.]

襄公元年,晉立悼公.  往年冬,晉欒書弒其君厲公.

四年,襄公朝晉.

五年, 季文子卒. 家無衣帛之妾, 廄無食粟之馬, 府無金玉, 以相三君. 君子曰:「季文子廉忠矣.」

九年,與晉伐鄭.  晉悼公冠襄公於衛,季武子從,相行禮.

十一年,三桓氏分為三軍.

十二年,朝晉.

十六年,晉平公即位.

二十一年,朝晉平公.

二十二年,孔丘生.

二十五年,齊崔杼弒其君莊公,立其弟景公.

二十九年,吳延陵季子使魯,問周樂,盡知其意,魯人敬焉.

三十一年六月,襄公卒.  其九月,太子卒. 魯人立齊歸之子裯為君,是為昭公.

[양공 원년, 진(晉)나라 도공(悼公)이 즉위했다.

이것은 그 전해 겨울, 진(晉)나라의 난서(欒書)가 자기 군주 여공(厲公)을 시해했기 때문이었다.
4년, 양공이 진(晉)나라에 입조(入朝)했다.
5년, 계문자가 죽었다. 집에는 비단 옷을 입은 아내가 없었고, 마구간에는 곡식을 먹는 말이 없었으며,

창고에는 금과 구슬이 없었으면서, 세 군주를 보좌했다. 군자가 이르기를 “계문자는 청렴한 충신이로다.”라 했다.
9년, 진(晉)나라와 함께 정(鄭)나라를 정벌했다.

진 도공이 위(衛)나라에서 양공(襄公)의 가관식을 거행했는데, 계무자(季武子)가 수행해 예식을 도왔다.
11년, 삼환씨(三桓氏)가 삼군(三軍)으로 분할했다.

12년, 진(晉)나라에 입조했다. 16년, 진 평공(晉平公)이 즉위했다.
21년, 양공이 진 평 공을 조회했다.
22년, 공구(孔丘)가 태어났다.
25년, 제나라 최저(崔杼)가 자기 군주인 장공을 시해했고, 자기 동생 경공(景公)을 옹립했다.
29년, 오(吳)나라 연릉계자(延陵季子)가 노나라에 사신으로 가서, 주악(周樂)에 대해 묻고, 그 뜻을 모두 터득하니,

노나라 사람들이 존경했다.
31년 6월, 양공이 죽었다. 그해 9월, 태자가 죽었다. 노나라 사람들이 제귀(齊歸)의 아들 주(裯)를 군주로

옹립했는데, 이 사람이 소공(昭公)이다.]

昭公年十九,猶有童心.  穆叔不欲立,曰:「太子死,有母弟可立,不即立長.

年鈞擇賢,義鈞則卜之.  今裯非適嗣,且又居喪意不在戚而有喜色,若果立,必為季氏憂.」

季武子弗聽,卒立之.  比及葬,三易衰.

君子曰:「是不終也.」

昭公三年,朝晉至河,晉平公謝還之,魯恥焉.

四年,楚靈王會諸侯於申,昭公稱病不往.

七年,季武子卒.
八年,楚靈王就章華臺,召昭公.  昭公往賀,賜昭公寶器;已而悔,復詐取之.

十二年,朝晉至河,晉平公謝還之.
十三年,楚公子棄疾弒其君靈王,代立.

十五年,朝晉,晉留之葬晉昭公,魯恥之.
二十年,齊景公與晏子狩竟,因入魯問禮.

二十一年,朝晉至河,晉謝還之.

[소공은 19세가 되었는데도, 여전히 치기가 남아 있었다.

목숙(穆叔)이 그를 옹립하지 않으려고 하면서 말하기를 :
“태자가 죽었을 때, 같은 어머니의 형제가 있으면 옹립할 수 있다. 그렇지 않으면 서얼의 장자를 옹립할 수 있다.
나이가 같으면 현명한 사람을 택하고, 의리가 동등하면 점을 친다.

지금 주(裯)는 적손이 아니며, 또한 상중(喪中)에 애도의 뜻이 없고 희희낙락하는데,

만약 정말로 그를 옹립한다면 반드시 계씨(季氏)의 근심거리가 될 것이다.”
계무자는 이 말을 듣지 않고 마침내 그를 옹립했다. 소공은 장례식에 상복을 세 번 바꾸어 입었다.

군자가 말하기를 “이 사람은 제명에 죽지 못할 것이다.”라 했다
소공 3년, 진(晉)나라에 입조하는 길에 황하에 이르렀는데, 진 평공(晉平公)이 사양해 그대로 돌아오게 되자

노나라는 이것을 치욕으로 생각했다.
4년, 초 영왕(楚靈王)이 제후들을 신(申) 땅으로 모았을 때, 소공은 병을 핑계로 삼아 가지 않았다.

7년, 계무자가 죽었다.
8년, 초 영왕이 장화대(章華臺)를 낙성하고 소공을 불렀다. 소공이 가서 축하를 하며 보물을 하사했으나,

얼마 있다 후회하고 속임수를 써서 도로 가져갔다.
12년, 소공은 진나라에 조회하러 가는 길에 황하에 이르렀는데, 진 소공(晉昭公)이 사양해 도중에 돌아오게 되었다.

13년, 초 나라 공자(公子) 기질(棄疾)이 자기 군주 영왕을 시해하고 대신 즉위했다.
15년, 진(晉)나라에 조회를 가니, 진나라가 진 소공의 장례를 치르고 가라고 만류했다.

노나라는 이것을 수치스럽게 생각했다.
20년, 제경공(齊景公)과 안자(晏子)가 노나라 변경에서 사냥을 하다가, 노나라에 들어온 기회에 예법에 대해 물었다.

21년, 진(晉)나라로 조회 가는 길에 황하에 이르렀지만, 진나라가 사양해 돌아왔다.]

二十五年春, 鸜鵒來巢. 師己曰:「文成之世童謠曰『鸜鵒來巢, 公在乾侯. 鸜鵒入處, 公在外野』」

季氏與郈氏鬬雞,季氏芥雞羽,郈氏金距.  季平子怒而侵郈氏,郈昭伯亦怒平子.

臧昭伯之弟會偽讒臧氏,匿季氏,臧昭伯囚季氏人. 季平子怒,囚臧氏老.  臧、郈氏以難告昭公.

昭公九月戊戌伐季氏,遂入.

平子登臺請曰:「君以讒不察臣罪,誅之,請遷沂上.」弗許.  請囚於鄪,弗許.

請以五乘亡,弗許. 子家駒曰:「君其許之. 政自季氏久矣,為徒者眾,眾將合謀.」弗聽.
郈氏曰:「必殺之.」 叔孫氏之臣戾謂其眾曰:「無季氏與有,孰利?」

皆曰:「無季氏是無叔孫氏.」戾曰:「然,救季氏!」遂敗公師.
孟懿子聞叔孫氏勝,亦殺郈昭伯.  郈昭伯為公使,故孟氏得之.

三家共伐公,公遂奔.  己亥,公至于齊.
齊景公曰:「請致千社待君.」 子家曰:「棄周公之業而臣於齊,可乎?」乃止.

子家曰:「齊景公無信,不如早之晉.」弗從.
叔孫見公還,見平子,平子頓首.  初欲迎昭公,孟孫、季孫後悔,乃止.

[25년 봄, 구욕조(鸜鵒鳥)가 날아와 둥지를 틀었다. 사기(師己)가 말하기를 :

“문공(文公), 성공(成公) 때 ‘구욕새가 날아와 둥지를 틀면, 공(公)은 간후(乾侯) 땅에 살고,

구욕새가 날아와 잠을 자면, 공은 들에서 사네.’라는 동요가 있었다.”라고 했다.

계씨(季氏)와 후씨(郈氏)가 닭싸움을 벌였다. 계씨는 닭의 날개에 겨자가루를 뿌렸고,

후씨는 발톱에 쇠갈고리를 끼었다.  계평자(季平子)가 화가 나서 후씨를 침범하니,

후소백(郈昭伯) 역시 평자(平子)에게 화를 냈다. 장소백의 동생 회(會)가 장씨(藏氏) 집안을 무고하게 모함하고는,

계씨(季氏) 집안으로 숨으니, 장소백(臧昭伯)이 계씨 집안의 사람을 가두었다.
계평자는 화가 나서, 장씨 집안의 대신을 가두었다. 장씨와 후씨가 이 분란을 소공에게 보고했다.
소공은 9월 무술일(戊戌日)에 계씨를 정벌하고자 마침내 진격했다.
평자가 누대에 올라가 간청하기를 : “임금께서는 모함을 사실로 믿으시고,

저의 죄를 살피지도 않으시고는 저를 징벌하려고 하십니다. 저를 기수(沂水)로 추방해주십시오.”라고 하였으나, 

소공이 허락하지 않았다. 다시 비(鄪) 땅에 감금해달라고 했지만, 이것도 허락하지 않았다.

수레 5대를 끌고 망명하겠다고 요청했지만 그것 역시 허락하지 않았다.

자가구(子家駒)가 말하기를 “임금께서는 이를 허락하셔야 합니다. 정권이 계씨에게서 시작된 지 오래되었고,

그들의 무리가 된 사람이 많으니, 무리들이 장차 음모를 꾸밀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그러나 소공은 듣지 않았다. 후씨가 말하기를 : “그를 반드시 죽여야 합니다.”라고 하였다.

숙손씨의 가신 여(戾)가 그의 무리에게 말하기를 : “계씨가 있는 것과 없는 것, 무엇이 유리한가?”라고 하자,
모두들 말하기를  :“계씨가 없으면 숙손씨도 없습니다.”라고 하였다.

여(戾)가 말하기를 : “옳다! 계씨를 구하자!”라고 하고는, 마침내 공실의 군대를 무찔렀다.

맹의자(孟懿子)는 숙손씨가 승리했다는 말을 듣고, 역시 후소백을 살해했다.

후소백이 소공의 사신으로 갔기 때문에 맹씨(孟氏)가 그를 가두었다. 삼가(三家)가 공동으로 소공을 정벌하니,

소공이 마침내 달아났다. 기해일(己亥日), 소공이 제(齊)나라에 이르렀다.

제 경공(齊景公)이 말하기를 “1천사(社)를 바쳐 임금을 맞이하겠사옵니다.”라고 하니,
자가(子家)가 말하기를 : “이는 주공(周公)의 위업을 버리고 제나라의 속국이 되는 것이니, 가당키나 합니까?”

라고 하자, 곧바로 중지했다. 

자가가 말하기를 “제 경공을 믿을 수 없으니, 일찌감치 진(晉)나라로 가는 것만 못합니다.”라고 했지만,

소공은 따르지 않았다.  숙손(叔孫)이 소공을 알현하고 돌아와 평자를 배알하니, 평자가 고개를 숙였다.

애초에 숙손이 소공을 영접하려고 했지만, 맹손과 계손이 후회하자 곧 중지했던 것이다.]

二十六年春,齊伐魯,取鄆而居昭公焉.  夏,齊景公將內公,令無受魯賂.

申豐、汝賈許齊臣高龁、子將粟五千庾.
子將言於齊侯曰:「群臣不能事魯君,有異焉.  宋元公為魯如晉,求內之,道卒.

叔孫昭子求內其君,無病而死.  不知天棄魯乎? 抑魯君有罪于鬼神也? 願君且待.」齊景公從之.

二十八年,昭公如晉, 求入.  季平子私於晉六卿, 六卿受季氏賂, 諫晉君, 晉君乃止, 居昭公乾侯.
二十九年,昭公如鄆.  齊景公使人賜昭公書, 自謂「主君」昭公恥之,怒而去乾侯.

三十一年,晉欲內昭公,召季平子. 平子布衣跣行,因六卿謝罪.

六卿為言曰:「晉欲內昭公,眾不從.」晉人止.

三十二年,昭公卒於乾侯.  魯人共立昭公弟宋為君,是為定公.

[26년 봄, 제나라가 노나라를 정벌해 운(鄆) 땅을 빼앗고, 소공을 그곳에 안치했다.

여름, 제 경공이 장차 소공을 귀국시키려고 하면서, 노나라의 뇌물을 받지 말라고 명령했다.

노나라 신풍(申豐)과 여가(汝賈)가 제나라 대신 고흘(高齕)과 자장(子將)에게 곡식 5천 유(庾)를 주기로 약속했다.
자장이 제 경공에게 “대신들이 노나라 군주를 모시지 않는 괴상한 일이 일어났습니다.

송 원공(宋元公)이 노나라를 위해 진(晉)나라로 가서 소공을 귀국시키려고 했으나, 도중에 죽었습니다.

숙손소자(叔孫昭子)가 자기 군주를 귀국시키려고 했으나, 병도 앓지 않았는데 죽었습니다.

하늘이 노나라를 버린 것입니까? 아니면 노나라 군주가 신에게 죄를 지은 것입니까?

임금께서는 잠시 기다리시기 바라옵니다.”라고 말하니, 제 경공이 이 말을 따랐다.
28년, 소공은 진(晉)나라로 가서 귀국을 요청했다. 계평자가 진(晉)나라 육경(六卿)과 내통했고, 육경이 계씨의

뇌물을 받고서 진군(晉君)에게 간언하니, 진군이 곧 귀국시키는 것을 중지하고, 소공을 간후(乾侯) 땅에 안치했다.
29년, 소공이 운(鄆) 땅으로 갔다. 제 경공이 사람을 시켜 소공에게 편지를 보냈는데, 자칭 ‘주군(主君)’이라 했다.
소공은 이것을 치욕으로 여겼고, 화를 내며 간후 땅으로 떠났다.
31년, 진(晉)나라가 소공을 귀국시키기 위해 계평자를 불렀다.
평자는 베옷을 입고 맨발로 걸었으며, 육경을 통해서 진군에게 사죄했다.
육경은 그를 대신해 말하기를 : “진(晉)나라가 소공을 귀국시키려고 해도 백성들이 따르지 않는답니다.”하였다.

결국 진나라는 이를 중지했다.

32년, 소공이 간후 땅에서 죽었다. 노나라 사람들이 모두 소공의 동생 송(宋)을 군주로 삼았는데,

이 사람이 정공(定公)이다.]

 

定公立,趙簡子問史墨曰:「季氏亡乎?」
史墨對曰:「不亡. 季友有大功於魯,受鄪為上卿,至于文子、武子,世增其業.
魯文公卒,東門遂殺適立庶,魯君於是失國政. 政在季氏,於今四君矣. 民不知君,何以得國!
是以為君慎器與名,不可以假人.」
定公五年,季平子卒. 陽虎私怒,囚季桓子,與盟,乃捨之.
七年,齊伐我,取鄆,以為魯陽虎邑以從政.
八年,陽虎欲盡殺三桓適,而更立其所善庶子以代之;載季桓子將殺之,桓子詐而得脫.

三桓共攻陽虎, 陽虎居陽關.
九年,魯伐陽虎,陽虎奔齊,已而奔晉趙氏.

十年, 定公與齊景公會於夾谷, 孔子行相事.
齊欲襲魯君, 孔子以禮歷階, 誅齊淫樂, 齊侯懼, 乃止, 歸魯侵地而謝過.
十二年,使仲由毀三桓城, 收其甲兵.  孟氏不肯墮城, 伐之, 不克而止.  季桓子受齊女樂, 孔子去.

十五年,定公卒,子將立,是為哀公.
[정공이 즉위했다. 조간자(趙簡子)가 사묵(史墨)에게 묻기를 “계씨가 망하겠는가?”라고 하니,
사묵이 이렇게 대답하기를 : “망하지 않습니다. 계우가 노나라에 큰 공을 세워, 비(鄪) 땅을 받고 상경이 되었고,
문자(文子), 무자(武子)에 이르러 대대로 그 과업을 증가시켰습니다.
노문공(魯文公)이 죽자, 동문수(東門遂)가 적자를 살해하고 서자를 옹립했습니다.
노군(魯君)은 이에 국정을 잃게 되었습니다. 계씨가 정권을 잡은 후, 지금까지 모두 네 명의 군주가 지나갔습니다.
백성들이 군주를 알지 못하는데, 어찌 나라를 장악하겠습니까!
이 때문에 군주는 거복(車服)과 작호를 신중히 해야 하며, 그것을 남에게 마음대로 주어서는 안 됩니다.”라고 하였다.
정공 5년, 계평자가 죽었다. 양호가 속으로 분노하여 계환자를 감금했으나, 그와 동맹을 맺은 후 곧바로 방면했다.
7년, 제나라가 노나라를 정벌해, 운 땅을 빼앗고, 노나라의 양호에게 이것을 봉읍으로 삼아 정치에 참여하게 했다.
8년, 양호가 삼환(三桓)의 적자를 모두 죽이고, 그가 좋아하는 서자로 바꾸어 대체하려고 했다.
그는 계환자를 수레에 싣고 죽이려고 했으나, 환자가 속임수를 써서 탈출할 수 있었다.

삼환이 공동으로 양호를 공격하자, 양호는 양관(陽關)을 거점으로 삼았다.
9년, 노나라가 양호를 정벌하자, 양호가 제나라로 달아났다가, 얼마 후 진(晉)나라의 조씨(趙氏)에게로 달아났다.
10년, 정공과 제 경공이 협곡(夾谷)에서 회맹했는데, 공자(孔子)가 수행하면서 행사를 도왔다.

제나라가 노나라 군주를 습격하려고 하니, 공자가 예의에 맞추어 계단을 올라, 제나라의 음란한 음악을 성토하니,
제후(齊侯)가 두려워서 곧 그만두었고, 노나라에게서 빼앗은 땅을 돌려주며 사과했다.
12년, 중유(仲由)를 시켜 삼환(三桓)의 식읍(食邑)을 괴멸시켰고, 그 무기를 회수했다.

맹씨(孟氏)가 식읍을 잃지 않으려고 하자, 결국 정벌했지만 이기지 못하고 그만두었다.
계환자가 제나라의 무희(舞姬)를 받아들이자, 공자가 노나라를 떠났다.
15년, 정공이 죽고 아들 장(將)이 즉위하니, 이 사람이 애공(哀公)이다.]


哀公五年,齊景公卒.
六年,齊田乞弒其君孺子.
七年,吳王夫差彊,伐齊,至繒,徵百牢於魯. 季康子使子貢說吳王及太宰嚭,以禮詘之.
吳王曰:「我文身,不足責禮.」乃止. 吳為鄒伐魯,至城下,盟而去. 齊伐我,取三邑.
十年,伐齊南邊. 齊伐魯. 季氏用冉有有功,思孔子,孔子自衛歸魯.
齊田常弒其君簡公於俆州. 孔子請伐之,哀公不聽.
十五年,使子服景伯、子貢為介,適齊,齊歸我侵地. 田常初相,欲親諸侯.

十六年,孔子卒.
二十二年,越王句踐滅吳王夫差.
二十七年春,季康子卒.  夏,哀公患三桓,將欲因諸侯以劫之,三桓亦患公作難,故君臣多閒.
公游于陵阪,遇孟武伯於街,曰:「請問余及死乎?」對曰:「不知也.」公欲以越伐三桓.
八月,哀公如陘氏.  三桓攻公,公奔于衛,去如鄒,遂如越. 國人迎哀公復歸,卒于有山氏.
子寧立,是為悼公.
[애공 5년, 제 경공이 죽었다. 6년, 제(齊)의 전기(田乞)가 자기 군주 유자(孺子)를 시해했다.
7년, 오왕(吳王) 부차(夫差)가 강대해지자, 제나라를 정벌해 증(繒) 땅까지 이르러,

노나라에서 소, 양, 돼지를 각각 1백뢰(牢)씩을 징수했다.
계강자(季康子)가 자공(子貢)을 시켜 오왕과 태재(太宰) 비(嚭)에게 주례(周禮)를 가지고 유세해 감복시키도록 했다.
오왕이 말하기를 “나의 몸에는 문신이 있다. 예의를 나에게 요구하지 말라”라고 하니, 곧 그만 두었다.
8년, 오(吳)나라가 추(鄒)나라를 위해 노나라를 정벌했는데, 도성 아래에 도달했다가, 동맹을 맺고 떠났다.

제나라가 노나라를 정벌해 세 읍을 빼앗았다.
10년, 제나라 남쪽 변경을 정벌했다.
11년, 제나라가 노나라를 정벌했다. 계씨가 염유(冉有)를 등용했는데 그가 공로를 세우자, 공자를 생각했고,

공자가 위(衛)나라에서 노나라로 돌아왔다.
14년, 제나라의 전상(田常)이 그의 군주 간공(簡公)을 서주(徐州)에서 시해했다.

공자가 전상을 정벌할 것을 요청했으나, 애공이 듣지 않았다.
15년, 자복경백(子服景伯)이 사신으로, 자공을 그의 부관으로 하고 제나라에 갔는데,

제나라가 노나라에게서 빼앗은 땅을 돌려주었다.  전상이 막 재상이 되어, 제후들과 화친하려고 했다.
16년, 공자가 죽었다.
22년, 월왕(越王) 구천(句踐)이 오왕 부차를 멸망시켰다.
27년 봄, 계강자가 죽었다. 여름, 애공이 삼환을 근심거리로 여겨, 장차 제후들을 이용해 그들을 위협하려고 했지만,

삼환 역시 애공이 반란을 일으킬까 근심이 되었다. 이로 인해서 군신 간에 큰 틈이 있었다.
애공이 능판(陵阪)으로 유람을 갔다가 우연히 길에서 맹무백(孟武伯)을 만나, “내가 제명에 죽겠는가?”라고 물으니,
 맹무백이 말하기를 : “모르겠사옵니다.”라고 대답했다. 애공이 월(越)나라를 이용해 삼환을 정벌하려고 했다.
8월, 애공이 형지(陘氏)에게로 가니, 삼환이 애공을 공격했고, 애공이 위(衛)나라로 달아났다가,

그곳을 떠나 추(鄒)나라로 갔다가, 마침내 월나라로 갔다. 노나라 사람들이 영접하며 애공의 복귀를 꾀했지만,
애공은 유산지(有山氏)의 저(邸)에서 죽었다. 그 아들 영(寧)이 즉위하니, 이 사람이 도공(悼公)이다.]

悼公之時,三桓勝,魯如小侯,卑於三桓之家.
十三年,三晉滅智伯,分其地有之.
三十七年,悼公卒,子嘉立,是為元公.
元公二十一年卒,子顯立,是為穆公.
穆公三十三年卒,子奮立,是為共公.
共公二十二年卒,子屯立,是為康公.

康公九年卒,子匽立,是為景公.
景公二十九年卒,子叔立,是為平公.  是時六國皆稱王.
平公十二年,秦惠王卒.  二十(二)年,平公卒,子賈立,是為文公.
文公(七)[元]年,楚懷王死于秦.
二十三年,文公卒,子讎立,是為頃公.
頃公二年,秦拔楚之郢,楚頃王東徙于陳.
十九年,楚伐我,取徐州.
二十四年,楚考烈王伐滅魯.  頃公亡,遷於下邑,為家人,魯絕祀.  頃公卒于柯.
魯起周公至頃公,凡三十四世.
[도공의 시대에 삼환이 강대해지자, 노나라 군주는 작은 제후와 같았고, 삼환의 가세보다 나약해졌다.
13년, 삼진(三晉)이 지백(智伯)을 멸망시키고 그 토지를 분할했다.
37년, 도공이 죽고 아들 가(嘉)가 즉위하니, 이 사람이 원공(元公)이다.

원공이 재위 21년 만에 죽고 아들 현(顯)이 즉위하니, 이 사람이 목공(穆公)이다.
목공이 재위 33년 만에 죽고 아들 분(奮)이 즉위하니, 이 사람이 공공(共公)이다.

공공이 재위 22년 만에 죽고 아들 둔(屯)이 즉위하니, 이 사람이 강공(康公)이다.
강공이 재위 9년 만에 죽고 아들 언(匽)이 즉위하니, 이 사람이 경공(景公)이다.
경공이 재위 29년 만에 죽고 아들 숙(叔)이 즉위하니, 이 사람이 평공(平公)이다.

이때 6국(六國)이 모두 왕(王)의 칭호를 사용했다.
평공 12년, 진 혜왕(秦惠王)이 죽었다.

22년, 평공이 죽고 아들 고(賈)가 즉위하니, 이 사람이 문공(文公)이다.
문공 7년, 초 회왕(楚懷王)이 진(秦)나라에서 죽었다.
23년, 문공이 죽고, 아들 수(讎)가 즉위하니, 이 사람이 경공(頃公)이다.
경공 2년, 진(秦)나라가 초(楚)나라의 영(郢) 땅을 점령하자, 초 경양왕이 동쪽 진(陳)나라로 거처를 옮겼다.
19년, 초 나라가 노나라를 정벌하고 서주(徐州)를 빼앗았다.
24년, 초 고열왕(楚考烈王)이 노나라를 정벌해 멸망시켰다. 경공은 도망해, 변읍(卞邑)으로 옮겨가서 평민이 되었다. 이로써 노나라의 종묘사직이 단절되었다. 경공이 가읍(柯邑)에서 죽었다. 

노나라는 주공에서 경공까지 모두 34세(世)였다.]


太史公曰:余聞孔子稱曰「甚矣魯道之衰也!洙泗之閒龂龂如也」.
觀慶父及叔牙閔公之際,何其亂也?
隱桓之事;襄仲殺適立庶;三家北面為臣,親攻昭公,昭公以奔.
至其揖讓之禮則從矣,而行事何其戾也?
[태사공(太史公)은 말한다.
“나는 공자(孔子)가 ‘심하도다! 노나라의 도의 쇠약해짐이여!

그러나 수수(洙水)와 사수(泗水) 사이는 은은한 정이 남아 있구나.’라고 한 찬양을 들은 적이 있다.
경보(慶父), 숙아(叔牙), 민공(閔公) 당시를 관찰해보니, 어찌 그리 혼란했던가?

은공(隱公), 환공(桓公)의 일, 양중(襄仲)이 적자를 살해하고 서자를 옹립한 일,
삼환(三桓)이 북쪽을 바라보며 신하가 되고서도 친히 소공(昭公)을 공격해 소공이 달아난 일 등을 보면,

읍양(揖讓)의 예의를 따랐건만, 벌어진 일들은 어찌 그리 험난했던가?”



※  原 文 .    【 中國哲學書電子化計劃 .   筆寫本 】



                                
 原 文   飜 譯 者        德庤 / 李   斗 振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