史記 世家(사기세가)/9. 晉世家

第 九. 晉世家

덕치/이두진 2021. 6. 29. 16:57

 

       史記 世家

 

   第 九. 晉世家(진세가)

 

晉唐叔虞者,周武王子而成王弟.

初,武王與叔虞母會時,夢天謂武王曰:「余命女生子,名虞,余與之唐.」

及生子,文在其手曰「虞」,故遂因命之曰虞.

武王崩, 成王立, 唐有亂, 周公誅滅唐.

成王與叔虞戲,削桐葉為珪以與叔虞, 曰:「以此封若.」史佚因請擇日立叔虞.

成王曰:「吾與之戲耳.」

史佚曰:「天子無戲言.  言則史書之,禮成之,樂歌之.」於是遂封叔虞於唐.

[진(晉)나라의 당숙우(唐叔虞)는 주 무왕(周武王)의 아들이요 성왕(成王)의 아우이다.

일찍이 무왕이 숙우의 모친과 결혼할 때 꿈에 천신이 무왕에게 이르기를 : 

“ 내가 너에게 아들 하나 낳게 할 터이니 이름을 우(虞)라고 하라. 내가 당(唐)지역을 그에게 주겠노라.”라고 하였다.

무왕이 아들을 낳자 과연 그 손바닥에 무늬로 ‘우(虞)’라는 글자가 있었다. 그래서 그의 이름을 우라 했다.

무왕이 죽자 성왕이 뒤를 이었다. 당(唐)나라에 난이 발생하자 주공(周公)은 당나라를 멸망시켰다.
성왕이 숙우와 함께 있다가 장난삼아 오동나무 잎으로 규(珪)를 만들어 숙우에게 주며 말하기를 :

“ 이것으로 너를 봉하노라.”라고 하였다. 사일(史佚)이 이런 까닭으로 성왕에게 숙우를 제후로 봉하게 청했다.

성왕이 말하기를 : “ 과인은 그에게 농담했을 뿐이다.”라고 하자.
사일은 말하기를 : “천자께서는 농담을 하셔서는 아니 되옵니다. 말씀을 하시면 곧 사관이 그것을 기록하고,

예의로써 그것을 완성하고 음악으로 그것을 노래하옵니다.”라고 하였다.
그래서 마침내 숙우를 당나라에 봉하게 되었다.]

 

唐在河、汾之東,方百里,故曰唐叔虞.  姓姬氏,字子于.

唐叔子燮,是為晉侯.  晉侯子寧族,是為武侯.  武侯之子服人,是為成侯.  成侯子福,是為厲侯.

厲侯之子宜臼,是為靖侯.  靖侯已來,年紀可推.  自唐叔至靖侯五世,無其年數.

靖侯十七年,周厲王迷惑暴虐,國人作亂,厲王出奔于彘,大臣行政,故曰「共和」.

十八年,靖侯卒,子釐侯司徒立.  釐侯十四年,周宣王初立.

十八年,釐侯卒,子獻侯籍立.  獻侯十一年卒,子穆侯費王立.

[당나라는 황하와 분하(汾河)의 동쪽에 있으며 그 넓이는 백리나 된다. 그리하여 그를 당숙우라고 불렀다.

그의 성은 희(姬)요, 자는 자우(子于)이다. 당숙의 아들은 섭(燮)이니, 그가 곧 진후(晉侯)이다.

진후의 아들은 영족(寧族)으로 무후(武侯)이다. 무후의 아들은 복인(服人)으로 성후(成侯)이다.
성후의 아들은 복(福)으로 여후(厲侯)이다. 여후의 아들은 의구(宜臼)로 정후(靖侯)이다.

정후 이후부터 재위한 연수를 추산할 수 있다. 당숙우에서 정후까지 5대는 그 재위 연수를 알 수 없다.
정후 17년, 주 여왕(周厲王)이 미혹하고 포학해 주나라 사람들이 난을 일으켰는데

여왕은 체(彘) 지방으로 도망을 가고 대신들이 정치를 대행했다. 이를 ‘공화(共和)’라고 불렀다.
18년에 여후가 죽고 아들 희후(釐侯) 사도(司徒)가 왕위에 올랐다. 희후 14년, 주 선왕(周宣王)이 즉위했다.
18년, 희후가 죽고 아들 헌후(獻侯) 적(籍)이 왕위를 이었다. 헌후는 재위 11년 만에 죽고,

아들 목후(穆侯) 비왕(費王)이 왕위에 올랐다.]

 

穆侯四年,取齊女姜氏為夫人.

七年,伐條.  生太子仇.

十年,伐千畝,有功.  生少子,名曰成師.

晉人師服曰:「異哉,君之命子也!太子曰仇,仇者讎也.  少子曰成師,成師大號,成之者也.

名自命也;物自定也.  今適庶名反逆,此後晉其能毋亂乎?」

二十七年, 穆侯卒,弟殤叔自立, 太子仇出奔.  殤叔三年,周宣王崩.

四年,穆侯太子仇率其徒襲殤叔而立,是為文侯.

文侯十年,周幽王無道,犬戎殺幽王,周東徙. 而秦襄公始列為諸侯. 

三十五年,文侯仇卒,子昭侯伯立.

[목후 4년, 제나라의 여자 강씨(姜氏)를 부인으로 삼았다.

7년, 조(條) 지방을 정벌했다. 태자 구(仇)를 낳았다.
10년, 천무(千畝)를 정벌하고 전공을 세웠다. 둘째 아들을 얻었는데 이름을 성사(成師)라 했다.
진나라 대부 사복(師服)이 말하기를 “괴이하도다! 군왕이 아들들에게 이름을 붙인 것이 태자는 구(仇)라고 했는데

구는 원수라는 뜻이다. 그리고 작은아들을 성사(成師)라고 했는데 성사는 큰 이름으로 무엇을 이룬다는 뜻이다.

이름이라는 것은 그 사람 자신을 칭하는 것이며 그 실질적인 내용은 자신이 결정하는 것이다. 지금 적자와 서자의

이름이 반대로 되었으니 이것은 이후에 진나라가 혼란에 빠질 것을 예고하는 것이 아니겠는가 ? ”라고 했다.
27년에 목후가 죽고 아우 상숙(殤叔)이 스스로 왕위에 오르자 태자 구는 피신했다. 상숙 3년에 주선왕이 붕어했다.

4년, 목후의 태자 구가 그의 무리들을 이끌고 상숙을 습격해 왕위에 올랐는데 이 사람이 곧 문후(文侯)이다.
문후 10년, 주 유왕(周幽王)이 무도(無道)해 견융(犬戎)이 유왕을 시해하자 주나라는 동쪽으로 옮겼다.

진 양공(秦襄公)이 처음으로 제후의 열에 올랐다.
35년에 문후가 죽고 아들 소후(昭侯) 백(伯)이 왕위를 이었다.] 

 

昭侯元年,封文侯弟成師于曲沃.  曲沃邑大於翼.  翼,晉君都邑也.

成師封曲沃,號為桓叔.  靖侯庶孫欒賓相桓叔.

桓叔是時年五十八矣,好德,晉國之眾皆附焉.

君子曰:「晉之亂其在曲沃矣.  末大於本而得民心,不亂何待!」

七年,晉大臣潘父弒其君昭侯而迎曲沃桓叔.  桓叔欲入晉,晉人發兵攻桓叔.  桓叔敗,還歸曲沃.

晉人共立昭侯子平為君,是為孝侯.  誅潘父.

孝侯八年,曲沃桓叔卒,子胛桓叔,是為曲沃莊伯. 

孝侯十五年,曲沃莊伯弒其君晉孝侯于翼.

晉人攻曲沃莊伯,莊伯復入曲沃.  晉人復立孝侯子郄為君,是為鄂侯.

[소후 원년, 문후의 아우 성사를 곡옥(曲沃)에 봉했다. 곡옥의 성읍(城邑)은 익성(翼城)보다 컸다.

익성은 진나라의 도성(都城)이다. 성사가 곡옥에 봉해지자 환숙(桓叔)으로 불려졌다.

정후의 서얼 손자 난빈(欒賓)이 재상이 되어 환숙을 보좌했다.
환숙은 이때 58세로 덕치를 즐겨 베풀었으므로 진나라 사람들은 모두 그를 따랐다.
군자가 말하기를 : “진나라의 환란은 장차 곡옥에 있을 것이다. 그 가지가 근본보다 크고 민심을 얻었으니

어찌 난이 없기를 바라겠는가?”라고 하였다.
7년, 진나라의 대신 반보(潘父)가 그의 주군 소후를 시해하고 곡옥의 환숙을 맞아들였다.
환숙은 진나라의 도성으로 들어가려고 했으나 진나라 사람들이 군사를 일으켜 환숙을 공격했다.

환숙은 실패하자 곡옥으로 돌아갔다. 진나라 사람들은 함께 소후의 아들 평(平)을 임금으로 삼았다.

이 사람이 효후(孝侯)이다. 그는 반보를 주살하였다.

효후 8년, 곡옥의 환숙이 세상을 떠나고 아들 선(鮮)이 환숙을 대신했다. 그가 곡옥의 장백(莊伯)이다.

효후 15년, 곡옥의 장백이 익성에서 그의 주군 효후를 시해했다.
진나라 사람들이 장백을 공격하자 장백은 다시 곡옥으로 후퇴했다.

진나라 사람들은 또 효후의 아들 극(郄)을 주군으로 옹립했으니 그가 악후(鄂侯)이다.]

 

鄂侯六年卒.  曲沃莊伯聞晉鄂侯卒,乃興兵伐晉.  周平王使虢公將兵伐曲沃莊伯,莊伯走保曲沃.

晉人共立鄂侯子光,是為哀侯.

哀侯二年曲沃莊伯卒,子稱代莊伯立,是為曲沃武公.

哀侯六年,魯弒其君隱公.

哀侯八年,晉侵陘廷.  陘廷與曲沃武公謀,九年,伐晉于汾旁,虜哀侯. 

晉人乃立哀侯子小子為君,是為小子侯.

[악후 2년, 노나라의 은공(隱公)이 새로 즉위했다. 악후는 재위 6년 만에 세상을 떠났다.

곡옥의 장백은 진 악후가 죽었다는 말을 듣고 군사를 일으켜 진의 도성을 공격했다.
주평왕이 괵공(虢公)을 파견해 군사를 이끌고 장백을 토벌하게 하자 장백은 도망가서 곡옥을 지켰다.
진나라 사람들은 다 함께 악후와 아들 광(光)을 옹립했는데 그가 애후(哀侯)이다.
애후 2년, 곡옥의 장백이 세상을 떠나고 그의 아들 칭(稱)이 뒤를 이었는데 그가 곧 곡옥의 무공(武公)이다.

애후 6년, 노나라가 그의 주군 은공을 시해했다.
애후 8년, 진나라는 형정(陘廷)을 침략했다. 형정 사람들은 곡옥의 무공과 상의하여,

9년에 진나라를 공격해 분하 근방에서 애후를 포로로 잡았다.

진나라 사람들은 애후의 아들 소자(小子)를 주군으로 옹립했는데, 그가 소자후(小子侯)이다.]

 

小子元年,曲沃武公使韓萬殺所虜晉哀侯.  曲沃益彊,晉無如之何.

晉小子之四年,曲沃武公誘召晉小子殺之.

周桓王使虢仲伐曲沃武公,武公入于曲沃,乃立晉哀侯弟緡為晉侯.

晉侯緡四年,宋執鄭祭仲而立突為鄭君.

晉侯十九年,齊人管至父弒其君襄公.

晉侯二十八年,齊桓公始霸.  曲沃武公伐晉侯緡,滅之,盡以其寶器賂獻于周釐王.

釐王命曲沃武公為晉君,列為諸侯,於是盡併晉地而有之.

曲沃武公已即位三十七年矣,更號曰晉武公.  晉武公始都晉國,前即位曲沃,通年三十八年.

[소자 원년에 곡옥의 무공이 한만(韓萬)을 보내어 포로인 애후를 죽였다.

곡옥은 더욱 강성해져 진나라는 그곳을 어찌할 수 없었다.
소자 4년, 무공이 소자를 유인해 그를 시해했다. 주환왕(周桓王)은 괵중(虢仲)을 보내어 무공을 정벌하려 했다.
그러자 무공은 곡옥으로 후퇴해 애후의 아우 민(緡)을 진후(晉侯)로 세웠다.
진후 희민 4년, 송나라가 정나라의 대부 제중(祭仲)을 잡고 강제로 희돌(姬突)을 정나라 주군으로 옹립하려고 했다.
진후 19년, 제나라 사람 관지보(管至父)가 그의 주군 양공(襄公)을 시해했다.
진후 28년, 제환공이 패자(覇者)로 칭하기 시작했다. 곡옥의 무공이 진후 민을 공격해 진나라를 멸망시키고
그가 가지고 있던 모든 보화와 기물을 주희왕(周釐王)에게 뇌물로 바쳤다.

희왕은 곡옥의 무공을 진나라의 주군으로 임명하고 제후로 삼았다.
이때 무공은 진나라의 토지를 전부 병탄해 자신의 소유로 삼았다.
곡옥 무공은 재위한 지 37년이 되었을 때 진무공(晉武公)으로 이름을 바꾸었다.

그제에서야 진무공은 진나라의 도성으로 옮겼다. 이전에 곡옥에서 즉위한 것을 통합하면 모두 38년이 된다.]

 

武公稱者,先晉穆侯曾孫也,曲沃桓叔孫也.  桓叔者,始封曲沃.  武公,莊伯子也.

自桓叔初封曲沃以至武公滅晉也,凡六十七歲,而卒代晉為諸侯.  武公代晉二歲,卒.

與曲沃通年,即位凡三十九年而卒.  子獻公詭諸立.

[무공 칭은 이전 진 목후(晉穆侯)의 증손이며, 곡옥 환숙의 손자이다. 환숙은 곡옥에서 처음으로 봉작을 받았다.

무공은 장백의 아들이다. 환숙이 곡옥에서 봉작을 받을 때부터 무공이 진나라를 멸망시킬 때까지

도합 67년이 걸려서야 마침내 진나라를 대신해 제후가 된 것이다. 무공은 진나라를 대신한 지 2년 만에 죽었다.

곡옥에서 있을 때부터 합산하면 재위39년에 세상을 떠난 것이다. 아들 헌공(獻公) 궤제(詭諸)가 그 뒤를 이었다.]

 

獻公元年,周惠王弟穨攻惠王,惠王出奔,居鄭之櫟邑. 

五年,伐驪戎,得驪姬、驪姬弟,俱愛幸之.

八年,士蒍說公曰:「故晉之群公子多,不誅,亂且起.」

乃使盡殺諸公子,而城聚都之,命曰絳,始都絳.

九年,晉群公子既亡奔虢,虢以其故再伐晉,弗克.

十年,晉欲伐虢,士蒍曰:「且待其亂.」

十二年, 驪姬生奚齊.  獻公有意廢太子, 乃曰:「曲沃吾先祖宗廟所在,而蒲邊秦, 屈邊翟,

不使諸子居之,我懼焉.」 於是使太子申生居曲沃,公子重耳居蒲,公子夷吾居屈.

獻公與驪姬子奚齊居絳.  晉國以此知太子不立也.

太子申生, 其母齊桓公女也.  曰齊姜, 早死.  申生同母女弟為秦穆公夫人.  重耳母, 翟之狐氏女也.

夷吾母,重耳母女弟也.  獻公子八人, 而太子申生、重耳、夷吾皆有賢行.  及得驪姬, 乃遠此三子.

[헌공 원년, 주 혜왕의 아우 퇴(穨)가 혜왕을 공격했다.

혜왕은 도성을 빠져나가 난을 피하고, 정나라의 역읍(櫟邑)에 머물렀다.
5년, 헌공은 여융(驪戎)을 정벌하고 여희(驪姬)와 여희의 여동생을 얻었는데, 그는 그 둘을 모두 총애했다.
8년, 대부 사위(士蔿)가 헌공에게 건의하기를 : “진나라의 공자들은 원래 많아서 그들을 다 죽이지 않으면

환란이 발생할 것입니다.”라고 하자, 헌공은 사람을 파견해 그 공자들을 모두 살해하였다.

그리고 성을 쌓아 도읍으로 하고 이름은 강(絳)이라고 했으니, 이때부터 강은 도성이 되었다.
9년, 진나라의 공자들이 이미 괵나라로 도망을 하고 괵나라는 이를 트집삼아 진나라를 재차 공격했으나 실패했다.
10년, 진나라가 괵나라를 공격하려 하자 사위가 “그들이 난을 일으킬 때까지 기다리는 것이 좋을 것입니다.”했다.

12년, 여희가 해제(奚齊)를 낳았다. 헌공은 의도적으로 태자를 폐할 생각이 있었다.

그래서 말하기를 : “곡옥은 우리의 선조의 묘소가 있는 곳이며, 포읍(蒲邑)은 진(秦)나라와 가까우며,

굴읍(屈邑)은 적(翟)과 가깝다. 만약 아들들을 보내 그곳을 지키게 하지 않는다면,

난이 일어날까 걱정스러울 것이다.”라고 하였다.
그래서 태자 신생(申生)은 곡옥에, 공자 중이(重耳)는 포읍에, 공자 이오(夷吾)는 굴읍에 각각 머물도록 했다.

헌공과 여희의 아들 해제는 도성인 강(絳)에 머물렀다. 진나라 사람들은  태자가 왕위에 오르지 못할 줄을 알았다.

태자 신생의 어머니는 제 환공의 딸로 이름은 제강(齊姜)이었는데 일찍 죽었다.
어머니가 같은 신생의 누이동생은 진 목공의 부인이 되었다. 중이의 어머니는 적족(翟族) 고씨(孤氏)의 딸이었다.
이오의 어머니는 중이의 어머니의 여동생이었다. 헌공에게는 8명의 아들이 있었는데 태자 신생과 공자 중이,

이오가 현명하고 품행이 선량했다. 그러나 여희를 얻고 난 후, 헌공과 그의 세 아들은 소원해졌다.]

 

十六年, 晉獻公作二軍.  公將上軍, 太子申生將下軍, 趙夙御戎, 畢萬為右, 伐滅霍, 滅魏, 滅耿.

還,為太子城曲沃,賜趙夙耿,賜畢萬魏,以為大夫.

士蒍曰:「太子不得立矣.  分之都城,而位以卿,先為之極,又安得立!不如逃之,無使罪至.

為吳太伯,不亦可乎,猶有令名.」太子不從.

卜偃曰:「畢萬之後必大.  萬,盈數也;魏,大名也.  以是始賞,天開之矣.

天子曰兆民,諸侯曰萬民,今命之大,以從盈數,其必有眾.」

初,畢萬卜仕於晉國,遇屯之比.  辛廖占之曰:「吉. 屯固比入,吉孰大焉.  其後必蕃昌.」

[헌공16년, 진헌공이 상, 하 2군(二軍)을 만들었다. 헌공 자신은 상군, 태자 신생은 하군을 각각 통솔했다.

그리고 조숙(趙夙)은 어가와 병거를 담당하고, 필만(畢萬)은 호위를 담당하게 하여,

괵(虢), 위(魏), 경(耿) 나라를 공격해 멸망시켰다. 군대를 거두고 돌아와 태자더러 곡옥에 성을 쌓도록 하고,

경나라의 땅은 조숙에게, 위나라의 땅은 필만에게 주어 그들을 대부로 삼았다.

사위가 태자 신생에게 말하기를 : “ 태자께서는 왕위에 오르지 못할 것입니다. 도성을 나누어 주고

경(卿)의 작위를 주었는데 이것으로 녹위(祿位)의 극점에 도달했으니 어찌 다시 직위를 얻을 수 있겠사옵니까? 

차라리 도망해 죄가 이르는 것을 미연에 피하는 것이 나을 것입니다.

오나라 태백(太伯)이 되는 것도 가능하지 않겠사옵니까? 그러면 좋은 이름을 남길 것이옵니다.”라고 하였다. 
태자는 이를 따르지 않았다.
복언(卜偃)이 말하기를 : “ 필만의 후손들은 반드시 발전할 것이다. 만(萬)이란 수가 가득 찬 것이요,

위(魏)는 높고 크다는 뜻이다. 위나라 땅을 필만에게 상으로 주었으니 하늘이 그의 복을 열어 준 것이다.
천자에게는 억조창생이 있고 제후에게는 만민(萬民)이 있는데 지금 그에게 큰 이름을 내리고

그로써 숫자를 채우게 하니 반드시 무리들이 따를 것이다.”라고 하였다.
처음에 필만이 점을 쳐서 진나라에서의 관리생활을 물었더니 “둔(屯)” 괘에서 “비(比)” 괘로 변했다.
신료(辛廖)가 예측하기를 : “ 길하다. 둔은 견고하다는 뜻이며 비는 들어간다는 의미가 있으니,

무엇이 이보다 길할 것인가! 그의 후대는 반드시 번창할 것이다.”라고 하였다.]

 

十七年,晉侯使太子申生伐東山.  裏克諫獻公曰:「太子奉冢祀社稷之粢盛,

以朝夕視君膳者也, 故曰冢子.  君行則守, 有守則從, 從曰撫軍, 守曰監國, 古之制也.

夫率師, 專行謀也;誓軍旅, 君與國政之所圖也:非太子之事也。 師在制命而已, 稟命則不威,

專命則不孝, 故君之嗣適不可以帥師. 君失其官, 率師不威, 將安用之?」

公曰:「寡人有子,未知其太子誰立.」 裏克不對而退,見太子.  太子曰:「吾其廢乎?」

裏克曰:「太子勉之!教以軍旅,不共是懼,何故廢乎?且子懼不孝,毋懼不得立.

修己而不責人,則免於難.」

太子帥師,公衣之偏衣,佩之金玦.  裏克謝病,不從太子.  太子遂伐東山.

[헌공 17년, 헌공은 태자 신생을 보내 동산(東山)을 정벌하게 했다. 이극(里克)이 헌공에게 간언하기를 : 
 “태자는 종묘의 제사와 사직의 제물을 봉헌하며, 조석으로 주군의 음식을 점검하는 사람이옵니다.

그래서 ‘적자 맏아들’이라고 하는 것이옵니다. 주군께서 밖으로 행차하오시면 안에서 지키시고,

주군께서 안에서 지키시오면 태자는 수행하십니다.  수행하는 것을 ‘무군(撫軍)’, 즉 주군을 보필하며 군사들을

위무하는 것이라 하고, 지키는 것을 ‘감국(監國)’, 즉 주군을 대신해서 국정을 관리 감독하는 것이라 하옵니다.
이는 옛날부터 내려온 제도이옵니다.  군대를 통솔하는 것은 군무를 전담하는 것이요,

명령을 내리는 것은 주군과 경(卿)이 도모하는 것이오니 이는 태자가 할 일은 아니옵니다.

군대의 총사령관은 명령을 제정하고 발포(發布)하는 데에 있을 뿐,

만약 주군께 보고하고 지시를 받는다면 위엄이 없어질 것이요, 독단으로 전횡한다면 이것은 불효이옵니다. 

그러므로 주군의 왕위를 이을 적자(嫡子)는 군대를 통솔할 사령관이 될 수는 없사옵니다. 

주군께서 태자더러 군대를 통솔하라 하시어 사람을 잘못 쓰시면,

태자께서 군대를 통솔하시는 데 위엄이 없어지실 것이니 이렇게 되면 장차 어떻게 하시겠사옵니까?”라고 하였다.
그러자 헌공이 말하기를 : “과인에게는 몇 명의 아들이 있는데 장차 누구를 태자로 세울지 아직 모르겠소?”하자.

이극은 대답을 하지 않고 물러났다. 태자를 만났는데 태자가 말하기를 : “나는 장차 폐위될 것인가 ? ”라고 하자.
이극이 대답하기를 : “태자께서는 노력하십시오. 군사 일을 배우시고 임무를 잘 완성하지 못할까만을 걱정하신다면

폐출될 이유가 있겠사옵니까?  또 태자께서는 불효하지 않을까만을 걱정하시고 왕위를 계승하지 못할까 하는 것은

정하실 필요가 없습니다. 자신을 닦으며 남을 질책하지 않으시면 위난을 면하실 수 있을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태자가 군대를 통솔하자 헌공은 그에게 좌우가 서로 다른 옷을 입게 하고 병권을 상징하는 금제 패옥을 차게 했다.
이극은 병이 있다고 사양하고 태자를 따르지 않았다. 태자는 마침내 동산을 정벌했다.]

 

十九年,獻公曰:「始吾先君莊伯、武公之誅晉亂,而虢常助晉伐我,又匿晉亡公子,果為亂.

弗誅,後遺子孫憂.」 乃使荀息以屈產之乘假道於虞.  虞假道,遂伐虢,取其下陽以歸.

獻公私謂驪姬曰:「吾欲廢太子,以奚齊代之.」

驪姬泣曰:「太子之立,諸侯皆已知之,而數將兵,百姓附之,柰何以賤妾之故廢適立庶?

君必行之,妾自殺也. 」 驪姬詳譽太子,而陰令人譖惡太子,而欲立其子.

[헌공19년, 헌공이 말하기를 : “예전 우리들의 주군이신 장백과 무공께서 진(晉)나라의 난신을 주살할 때,

괵나라는 항상 진(晉)나라를 도와 우리를 공격했으며, 진나라에서 도망한 공자를 은닉하기도 했다.

만약 그들을 토벌하지 않으면 이후 자손들에게 우환을 남길 것이다.”라고 했다.
그래서 순식(荀息)을 파견해 굴읍에서 난 말을 타고 우(虞)나라에게 길을 빌려 달라 했다.
우나라가 길을 빌려주자 마침내 괵나라를 정벌해 그 하양(下陽) 지방을 취하고 돌아왔다.
헌공은 비밀리에 여희에게 말하기를 “과인은 태자를 폐출하고 해제로 그를 대신하려고 하오.”라고 하자,
여희가 울며 말하기를 : “태자의 지위는 모든 제후가 이미 다 알고 있는 일이며, 또 그는 수차례나 군대를 통솔해

백성들이 그에게 기울어져 있는데 천첩이 어떻게 고의로 적자를 폐하고 서자를 세운다는 말씀이십니까 ?

군왕께서 반드시 그리 하시겠다면 첩은 자살하겠사옵니다.”라고 했다. 여희는 태자를 칭찬하는 척했으나

암암리에 사람들로 하여금 태자를 비방하게 해 자신의 자식을 태자로 세우려고 한 것이었다.]

 

二十一年,驪姬謂太子曰:「君夢見齊姜,太子速祭曲沃,歸釐於君.」

太子於是祭其母齊姜於曲沃,上其薦胙於獻公.  獻公時出獵,置胙於宮中.  驪姬使人置毒藥胙中.

居二日, 獻公從獵來還, 宰人上胙獻公, 獻公欲饗之. 驪姬從旁止之, 曰:「胙所從來遠,宜試之.」

祭地,地墳;與犬,犬死;與小臣,小臣死.

驪姬泣曰:「太子何忍也!其父而欲弒代之, 況他人乎?且君老矣, 旦暮之人, 曾不能待而欲弒之!」

謂獻公曰:「太子所以然者,不過以妾及奚齊之故.  妾願子母辟之他國,若早自殺,

毋徒使母子為太子所魚肉也.  始君欲廢之,妾猶恨之;至於今,妾殊自失於此.」

太子聞之,奔新城.  獻公怒,乃誅其傅杜原款.

或謂太子曰:「為此藥者乃驪姬也,太子何不自辭明之?」

太子曰:「吾君老矣,非驪姬,寢不安,食不甘.  即辭之,君且怒之.  不可.」

或謂太子曰:「可奔他國.」太子曰:「被此惡名以出,人誰內我?我自殺耳.」

十二月戊申,申生自殺於新城.  此時重耳、夷吾來朝。

人或告驪姬曰:「二公子怨驪姬譖殺太子.」驪姬恐,因譖二公子:「申生之藥胙,二公子知之.」

二子聞之, 恐, 重耳走蒲, 夷吾走屈, 保其城, 自備守.  初, 獻公使士蒍為二公子筑蒲、屈城,弗就.

夷吾以告公,公怒士蒍.  士蒍謝曰:「邊城少寇,安用之?」

退而歌曰:「狐裘蒙茸,一國三公,吾誰適從!」卒就城.  及申生死,二子亦歸保其城.

[헌공 21년, 여희가 태자에게 말하기를 : “ 군왕께서 꿈에 돌아가신 어머니 제강을 보셨사온데,

태자는 곧 곡옥으로 가서 제사를 올려야겠소. 그리고 제사에 올렸던 음식은 군왕께 보내시오.”라고 하였다. 

태자는 곡옥에 가서 그의 어머니 제강에게 제사를 드리고 제사 고기를 헌공에게 보냈다.
헌공은 이때 밖으로 사냥을 나간 터라 태자는 고기를 궁중에 놓아두었다. 여희는 사람을 시켜 그 속에 독을 넣게 했다.

이틀이 지나 헌공이 사냥터에서 돌아오자 주방장이 제사 고기를 헌공에게 바쳤다.
헌공이 그것을 먹으려고 하자 옆에 있던 여희가 제지하며 말하기를 : “ 제사 고기가 온 곳이 멀기 때문에 반드시

검사해 보아야 하옵니다.”라고 하며, 개에게 던져 주자 개가 먹고 죽었다. 어린 환관에게 먹였더니 그 역시 죽었다.
여희가 눈물을 흘리며 말하기를 : “태자가 이렇게도 잔인하다니 ! 부친도 시해하고 그 자리를 대신하려고 하는데

하물며 다른 사람이야 ? 군왕께서는 늙으셔서 곧 돌아가실 분이신데 그걸 참지 못하고 시해하려 하다니 ! ”라고 

하며, 헌공에게 말하기를 : “ 태자가 이렇게 하는 까닭은 소첩과 해제 때문이옵니다.

저와 해제 두 사람은 다른 나라로 피할까 하옵니다. 혹여 일찍이 자살하더라도 우리 두 모자가

태자의 어육이 되지 않기를 바라옵니다. 애초에 군왕께서 그를 폐출하시려 할 때 소첩은 오히려 유감이라 느꼈는데

이제 보니 소첩이 크게 잘못했사옵니다.”라고 하였다. 태자는 이 소식을 듣고 곡옥의 신성(新城)으로 도망쳤다.

헌공은 분노하여 그의 사부 두원관을 죽였다. 어떤 사람이 태자에게 묻기를 :

“ 독약을 넣은 사람은 여희인데 태자께서는 어찌해 스스로 해명을 하지 않으십니까?”라고 하자,

태자가 대답하기를 : “ 군왕께서는 늙으셔서 여희가 아니면 잠도 편안히 들 수 없고 식사도 드시지 못하오.

만약 해명을 하면 군왕께서 여희에게 화를 내실 터인데, 그러면 아니 되오.”라고 하였다.
또 어떤 사람이 태자에게 말하기를 : “다른 나라로 도망하시는 것이 좋을 것이옵니다.”라고 하자,
태자는 대답하기를 : “이 오명을 지고 밖으로 도망한다면 누가 나를 받아주겠소? 스스로 자살할 뿐이오.”하였다.

12월 무신일(戊申日)에 태자 신생이 신성에서 자살했다. 이때 중이와 이오가 헌공을 알현했다.

어떤 사람이 여희에게 말하기를 : “두 공자는 여희께서 참언을 하셔서 태자를 죽게 한 사실을 원망하고 

있사옵니다.”라고 하자,
여희는 두려워 헌공에게 두 사람의 잘못을 말했다. “신생이 제사 고기에 독약을 넣을 때 이 두 공자들은 이 사실을

알았사옵니다.”라고 하자,  두 공자는 이 소식을 듣고 두려워해 중이는 포읍으로, 이오는 굴읍으로 도망을 가서 

들의 성을 굳게 닫고 친히 방비를 했다. 애초에 헌공은 사위를 보내어 두 공자를 위해서 포읍과 굴읍의 성벽을

수리하고 축조하게 했으나 완공을 하지 못했다. 이오는 이러한 상황을 보고했고 헌공은 사위를 질책했다.

사위가 사죄하며 말하기를 : “변경의 성읍에는 도적이 적은데 성벽을 쌓을 필요가 있겠사옵니까?”하고 물러 나왔다.
이후 그는 노래를 지어 부르기를 “호피로 만든 옷 털이 어수선한데, 한 나라에 세 군주라, 나는 누구를 따라야 할꼬?

그리고는 마침내 포읍과 굴읍의 성벽이 완성된 것이었다. 신생이 죽자 두 공자도 돌아가 그들의 성읍을 방비했다.]

 

二十二年,獻公怒二子不辭而去,果有謀矣,乃使兵伐蒲。蒲人之宦者勃鞮命重耳促自殺.

重耳踰垣,宦者追斬其衣袪.  重耳遂奔翟.  使人伐屈,屈城守,不可下.

是歲也,晉復假道於虞以伐虢.

虞之大夫宮之奇諫虞君曰:「晉不可假道也,是且滅虞.」 虞君曰:「晉我同姓,不宜伐我.」

宮之奇曰:「太伯、虞仲,太王之子也,太伯亡去,是以不嗣.  虢仲、虢叔,王季之子也,

為文王卿士,其記勳在王室,藏於盟府.  將虢是滅,何愛于虞?且虞之親能親於桓、莊之族乎?

桓、莊之族何罪,盡滅之.  虞之與虢,脣之與齒,脣亡則齒寒.」

虞公不聽,遂許晉.  宮之奇以其族去虞.

其冬,晉滅虢,虢公丑奔周.  還,襲滅虞,虜虞公及其大夫井伯百里奚以媵秦穆姬,而修虞祀.

荀息牽曩所遺虞屈產之乘馬奉之獻公,獻公笑曰:「馬則吾馬,齒亦老矣!」

[헌공 22년, 헌공은 두 아들이 말도 없이 돌아간 것에 분노하여 과연 모반할 의사가 있었다고 인정하고

군대를 보내 읍을 치게 했다. 포읍의 환관 발제(勃鞮)가 중이에게 빨리 자진하라고 명했다.

중이는 담을 넘어 달아났고 그 환관은 뒤를 쫓아가서 그의 옷소매를 베었다. 중이는 적(翟)나라로 도망을 갔다.

헌공은 또 사람을 보내 굴읍을 치도록 했으나 굴읍은 견실하게 방어해 깨뜨릴 수 없었다.
이해 진나라는 또 우(虞)나라에게 괵나라를 정벌하겠노라고 길을 빌려 달라 했다.
우나라의 대부 궁지기(宮之奇)가 우나라 주군에게 간언하기를 : “진나라에게 길을 빌려주셔서는 아니 되옵니다.

이렇게 하면 장차 우리나라도 멸망시킬 것이옵니다.”라고 하였다.
우나라의 주군이 말하기를 : “진나라 군주와 과인은 성이 같으니 과인을 공격하지는 않을 것이다.”라고 하자.
궁지기가 다시 말하기를 : “태백(太伯)과 우중(虞仲)은 주태왕(周太王)의 아들로서, 태백이 도망하자,

이 때문에 왕위를 계승할 수 없게 되었사옵니다. 괵중과 괵숙은 왕계(王季)의 아들이며 문왕(文王)의 경사(卿士)로

그들의 공훈은 조정에 기록되어 있고 맹약의 서류를 보존하고 있는 맹부(盟府)에 저장되어 있사옵니다.
장차 괵나라가 멸망한다면 어찌 우나라를 애석해 하겠사옵니까? 다시 말씀드려 우나라가 환숙과 장백의 

자손들보다 더 친하옵니까? 환숙과 장백의 자손은 무슨 죄가 있어 전부 멸망했사옵니까?

우나라와 괵나라는 마치 이와 입술과도 같아서 입술이 없으면 이빨이 시리게 될 것이옵니다.”라고 하였다.
우공은 듣지 않고 진나라에게 길을 허락해 주었다. 궁지기는 그의 가솔들을 데리고 우나라를 떠났다.
이해 겨울 진나라는 괵나라를 멸망시켰고 괵공 축(丑)은 주나라의 수도로 도주했다.

진나라의 군대가 돌아오면서 우나라를 습격해 멸망시키고 우공과 그의 대부 정백(井伯)과 백리해(百里奚)를

포로로 잡아 헌공의 여식 진 목희(秦穆姬)의 몸종으로 삼았다. 그리고 사람을 보내 우나라의 제사를 모시게 했다.
순식이 예전에 우나라에게 준, 굴읍의 말을 끌고 헌공에게 바쳤더니,

헌공이 웃으며 말하기를 : “예전에 과인의 말이 맞지만 이빨은 역시 늙었도다!”라고 하였다.]

 

二十三年,獻公遂發賈華等伐屈,屈潰.  夷吾將奔翟.

冀芮曰:「不可,重耳已在矣,今往,晉必移兵伐翟,翟畏晉,禍且及.

不如走梁,梁近於秦,秦彊,吾君百歲後可以求入焉.」遂奔梁.

二十五年,晉伐翟,翟以重耳故,亦擊晉於齧桑,晉兵解而去.

當此時,晉彊,西有河西,與秦接境,北邊翟,東至河內.  驪姬弟生悼子.

[헌공 23년, 헌공은 가화(賈華) 등을 보내 굴읍을 토벌하게 했다.

굴읍 사람들은 도망해 흩어졌고, 이오는 적나라로 도주하려고 했다. 기예(冀芮)가 말하기를 : 

“아니 되옵니다. 중이가 이미 그곳에 있는데 당신께서 또 그곳으로 간다면 진나라는 반드시 군대를 몰아

적나라를 칠 것이옵니다. 적나라는 진나라를 무서워하기 때문에 화는 우리들의 머리 위에 떨어질 것이옵니다.

그럴 바이면 양(梁)나라로 도주하시는 편이 나을 것이옵니다. 양나라는 진(秦)나라와 가까이 있고

진나라는 강대해 우리들의 군주가 죽고 나면 그들에게 당신을 환국하게 청할 수 있을 것이옵니다.”라고 하였다. 

그래서 이오는 양나라로 피신했다.
25년, 진(晉)나라가 적나라를 공격했다. 적나라는 중이가 있었기 때문에 설상(齧桑)에서 진나라를 공격하니

진나라는 후퇴하고 말았다. 이때 진나라는 강대해 서쪽으로는 하서 지역을 차지해 진(秦)나라와 접경을 이루었고,

북쪽으로는 적나라와 인접했으며, 동쪽으로는 하내(河內) 지역에 이르렀다. 여희의 동생이 도자(悼子)를 낳았다.]

 

二十六年夏,齊桓公大會諸侯於葵丘.  晉獻公病,行後,未至,逢周之宰孔.

宰孔曰:「齊桓公益驕,不務德而務遠略,諸侯弗平。君弟毋會,毋如晉何.」獻公亦病,復還歸.

病甚, 乃謂荀息曰:「吾以奚齊為後, 年少, 諸大臣不服, 恐亂起, 子能立之乎?」荀息曰:「能.」

獻公曰:「何以為驗?」對曰:「使死者復生,生者不慚,為之驗.」

於是遂屬奚齊於荀息.  荀息為相,主國政.

秋九月,獻公卒.  裏克、邳鄭欲內重耳,以三公子之徒作亂,

謂荀息曰:「三怨將起,秦、晉輔之,子將何如?」 荀息曰:「吾不可負先君言.」

十月,裏克殺奚齊于喪次,獻公未葬也. 荀息將死之,或曰不如立奚齊弟悼子而傅之,

荀息立悼子而葬獻公.

十一月,裏克弒悼子于朝,荀息死之.

君子曰:「詩所謂『白珪之玷,猶可磨也,斯言之玷,不可為也』,

其荀息之謂乎!不負其言.」 初,獻公將伐驪戎,卜曰「齒牙為禍」.

及破驪戎,獲驪姬,愛之,竟以亂晉.

裏克等已殺奚齊、悼子,使人迎公子重耳於翟,欲立之.

重耳謝曰:「負父之命出奔, 父死不得修人子之禮侍喪, 重耳何敢入!大夫其更立他子.」

還報裏克, 裏克使迎夷吾於梁.

夷吾欲往, 呂省、郤芮曰:「內猶有公子可立者而外求, 難信. 計非之秦, 輔彊國之威以入, 恐危.」

乃使郤芮厚賂秦,約曰:「即得入,請以晉河西之地與秦。」

及遺裏克書曰:「誠得立,請遂封子於汾陽之邑.」 秦繆公乃發兵送夷吾於晉.

齊桓公聞晉內亂,亦率諸侯如晉.  秦兵與夷吾亦至晉,齊乃使隰朋會秦俱入夷吾,

立為晉君,是為惠公.  齊桓公至晉之高梁而還歸.

[헌공 26년 여름, 제환공이 규구(葵丘)에서 각국의 제후와 성대한 회맹(會盟)을 가졌다.

진헌공(晉獻公)은 병이 나서 출발이 늦어 아직 도착하지 않았을 때 주 왕실의 재공(宰孔)을 만났다.

재공이 말하기를 : “ 제 환공이 더욱더 교만해져 덕을 닦지 않고 변방을 경략하려 해 제후들이 불평하고 있습니다.
공께서는 굳이 회맹에 참석할 필요가 없을 것입니다. 그는 진나라를 어찌할 수 없을 것이외다.”라고 하였다.

헌공도 병이 심하므로 돌아갔다.  병이 매우 위중하게 되자 순식을 불러 묻기를 : 

“ 과인은 해제를 후사로 삼을 것이오. 그러나 나이가 적어 대신들이 복종하지 않고 난을 일으킬지도 모르니
그대가 그를 능히 옹립할 수 있겠소?”라고 하자, 순식이 대답하기를 : :할 수 있습니다."라고 하였다. 

헌공이 다시 묻기를 ; “무엇으로 보증할 수 있겠소?”라고 하니,

순식은 대답하기를 : “ 반드시 군왕께서 사후에도 다시 살아나신 듯하게 명령을 따를 것이옵니다.

그래서 살아 있는 자가 부끄럽지 않도록 할 것이오니 이로써 보증하옵니다.”라고 하였다.

그러자 헌공은 해제를 순식에게 맡겼다. 순식은 재상이 되어 국정을 주관했다. 가을 9월에 헌공이 세상을 떠났다.

이극과 대부 비정(邳鄭)은 중이를 영접하고자 해 3공자의 무리를 이용해 난을 일으켰다.
순식에게 말하기를 “세 사람의 원한이 일어나려고 하며 밖으로는 진(秦)나라가, 안으로는 나라 사람들이 도우려고

하는데 그대는 장차 어떻게 할 것이오?”라고 하자,  순식이 말했다. “나는 선군의 말씀을 어길 수 없소이다.”
10월, 이극이 장례를 지내는 곳에서 해제를 살해했다. 헌공의 장례는 아직 끝나지 않았다.

순식이 해제를 따라서 죽고자 할 때, 어떤 사람이 말하기를 :

“ 해제의 아우 도자를 옹립해 그를 보좌하는 것이 낫지 않겠소?”라고 하였다.

순식은 곧 도자를 옹립하고 헌공의 장례를 완전히 마쳤다.
11월, 이극은 조정에서 도자를 시해했다. 순식도 따라서 죽었다.
군자가 말하기를 : “『시경』에서 이르기를 ‘백옥의 반점은 더욱 닦을 수 있으나, 말이 잘못된 것은 고칠 수 없다’

라고 했으니 이 말은 순식을 두고 한 말인가 한다. 그는 그의 말을 어기지 않았다.”라고 했다.

애초에 헌공이 여융을 공격할 때 점[卜]을 치는 사람이 말하기를 : “치아(齒牙)가 화근이 된다.”라고 하였다.
뒷날 여융을 쳐서 여희를 얻고 그녀를 총애했으나 마침내 이로써 난이 일어나게 된 것이다.
이극 등이 이미 해제와 도자를 죽이고 적나라에 사람을 보내어 공자 중이를 영접하고 그를 왕으로 옹립하고자 했다.
중이는 사양하며 말하기를 : “어버이의 명령을 거역해 나라 밖으로 도주했고, 어버이가 돌아가셨는데도

자식의 예로써 장례를 치르지도 못했으니 내 어찌 감히 환국하겠소! 대부들은 다른 공자를 옹립하시오.”하였다.

사자가 이극에게 보고하니 이극은 양나라에 사람을 보내 이오를 영접하고자 했다.

이오는 가려고 했으나 여성(呂省)과 극예(郤芮)가 말하기를 : “ 국내에 아직 왕위를 이을 공자가 있는데

국외에서 찾는다는 것은 믿을 수 없사옵니다. 만약 진(秦)나라로 가서 강국의 도움을 받지 않고 환국한다면

위험이 있을지도 모릅니다.”라고 하였다.  그래서 극예로 하여금 후한 뇌물을 가지고 진(秦)나라로 가게 해

“ 만약 환국할 수 있게 한다면 진(晉)나라의 하서 지방을 진(秦)나라에게 주도록 한다.”라는 약속을 했다.
동시에 이극에게 서신을 보내어 “진실로 왕위를 이을 수 있다면 분양의 성읍을 당신에게 봉토로 주겠다.”라고 했다.
진목공(秦穆公)은 곧 이오에게 군대를 보내어 환국할 수 있도록 했다.

제환공도 진(晉)나라에 내란이 발생했다는 소식을 듣고 제후들을 인솔해 진나라로 갔다.

진(秦)나라 군대와 이오도 진나라에 도착했다.

제나라에서 습붕(隰朋)을 보내 진(秦)나라와 회동해 함께 이오를 환국시키고 그를 진(晉)나라의 군왕으로 

옹립했으니, 그가 곧 혜공(惠公)이다. 제환공은 진(晉)나라의 고량(高梁)에 이르렀다가 돌아갔다.]

 

惠公夷吾元年,使邳鄭謝秦曰:「始夷吾以河西地許君,今幸得入立.

大臣曰:『地者先君之地, 君亡在外,何以得擅許秦者?』

寡人爭之弗能得,故謝秦.」亦不與裏克汾陽邑 而奪之權.

四月,周襄王使周公忌父會齊、秦大夫共禮晉惠公.  惠公以重耳在外,畏裏克為變,賜裏克死.

謂曰:「微裏子寡人不得立.  雖然,子亦殺二君一大夫,為子君者不亦難乎?」

裏克對曰:「不有所廢,君何以興?欲誅之,其無辭乎?乃言為此!臣聞命矣.」遂伏劍而死.

於是邳鄭使謝秦未還,故不及難.  晉君改葬恭太子申生.

[혜공 이오 원년, 비정을 진(秦)나라에 보내 사과의 말을 전하기를 : 

“ 처음에 이오가 하서 지방을 군왕에게 드리기로  이제 다행히 환국해 왕위에 올랐소이다.

대신들이 말하기를 ‘토지는 선군의 토지인데 주군께서 국외로 도주하셨다가 무엇을 믿고 마음대로 진(秦)나라에게

허락하셨습니까?’라고 해서 과인은 수차례 논쟁을 했으나 어쩔 도리가 없어 이렇게 귀국에 대해서

사과를 드리는 바입니다.” 그리고 분양의 땅을 이극에게 봉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그의 권력까지 빼앗았다.

4월, 주양왕(周襄王)이 주공(周公) 기보(忌父)를 보내어 제나라와 진(晉)나라의 대부와 회동해 공동으로

진혜공(晉惠公)을 방문하기로 했다. 혜공은 중이가 국외에 있기 때문에 이극이 정변을 일으킬까

두려워 그에게 자살을 명했다. 그리고 말하기를 : “ 그대가 없었더라면 과인은 왕위에 오르지 못했을 것이오.
비록 그렇더라도 그대 역시 두 군주와 한 명의 대부를 살해했으니,

그대의 임금된 사람으로 어찌 난처하지 않겠소?”라고 하자, 
이극이 대답하기를 : “이전에 주군을 폐하지 않았다면 주군께서 어떻게 일어날 수 있었겠사옵니까?

그러나 이미 즉위하신 지금, 저를 죽이시려 하신다면 그 또한 어찌 구실이 없겠사옵니까?

마침내 이같이 말씀하신다면 신은 명령을 따르겠사옵니다.”라고 하면서,  자신의 칼로 자진했다.
비정은 진(秦)나라에 사죄의 사절로 갔다가 돌아오지 않았기 때문에 변을 당하지 않았다.
진나라의 주군 이오는 태자 신생의 무덤을 개장(改葬)했다.]

 

秋, 狐突之下國, 遇申生, 申生與載而告之曰:「夷吾無禮, 余得請於帝, 將以晉與秦, 秦將祀余.」

狐突對曰:「臣聞神不食非其宗, 君其祀毋乃絕乎?君其圖之.」

申生曰:「諾,吾將復請帝.  後十日,新城西偏將有巫者見我焉.」許之,遂不見.

及期而往,復見,申生告之曰:「帝許罰有罪矣,弊於韓.」

兒乃謠曰:「恭太子更葬矣,後十四年,晉亦不昌,昌乃在兄.」邳鄭使秦,聞裏克誅,

乃說秦繆公曰:「呂省、郤稱、冀芮實為不從.  若重賂與謀,出晉君,入重耳,事必就.」

秦繆公許之,使人與歸報晉,厚賂三子.

三子曰:「幣厚言甘, 此必邳鄭賣我於秦.」遂殺邳鄭及裏克、邳鄭之黨七輿大夫.

邳鄭子豹奔秦, 言伐晉, 繆公弗聽.  惠公之立,倍秦地及裏克,誅七輿大夫,國人不附.

[가을에 호돌(狐突)이 옛 도성, 즉 곡옥으로 갔다가 신생을 만났다.

신생이 호돌에게 수레를 함께 타라고 하며 그에게 말하기를 : “이오는 무례하다. 내가 천제(天帝)께 청을 드려

진(晉)나라를 진(秦)에게로 귀속시키게 할 것이다. 그러면 진(秦)나라는 나를 위해서 제사를 지낼 것이다.”라고 하자,

호돌이 대답하기를 : “제가 듣기로 신령은 자신의 친족이 아닌 사람이 지내는 제사는 흠향하지 않는다고 했는데,
그렇다면 당신의 제사가 단절되지 않는다는 말씀입니까?

당신께서는 이러한 이치를 다시 한 번 고려하셔야 합니다.”라고 하였다.
신생이 말하기를 : “내가 천제께 다시 청해 보겠다.

열흘 이후 신성 서쪽에 무당이 있어 나의 신령을 드러나게 할 것이다.”라고 하자,

호돌이 그렇게 하도록 허락하자, 신생은 홀연히 자취를 감추었다.

호돌은 기한이 되자 약속 장소로 가서 신생을 또 만났다.

신생의 혼령이 호돌에게 말하기를 : “천제께 죄 있는 사람을 징벌해도 좋다는 허락을 받았다.

한원(韓原)에서 패배하게 될 것이다.”라고 하였다.

그래서 “태자의 묘 개장했네. 14년 이후 진나라도 창성하지 못하리. 창성하는 것은 형에게 있지.”라는 동요가 

생겼다.비정은 진나라로 사신을 갔다가 이극이 피살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진목공(秦穆公)에게 말하기를 :

“ 여성(呂省), 극칭(郤稱), 기예(冀芮)는 확실히 하서 지역을 진(秦)나라에게 주기를 반대했었사옵니다.

만약 그들에게 많은 재물을 주고 상의해 진군(晉君)이 이오를 축출하고 중이를 환국시키도록 한다면 

일은 반드시 성공할 것이옵니다.”라고 하였다. 

진목공은 이를 허락하고 사람을 파견해 비정과 함께 진(晉)나라로 들어가서 세 사람에게 뇌물을 듬뿍 보냈다.
세 사람은 말하기를 : “선물이 많고 말이 달콤한 것으로 보아서 이것은 비정이 우리를 진(秦)나라에게 

팔아 넘기려는 수작임에 틀림없다.”라고 하면서, 그들은 비정과, 이극·비정의 무리인 일곱 명의 대부를 주살했다.

비정의 아들 비표(邳豹)는 진(秦)나라로 도주해 진나라를 공격하자고 건의했으나 목공은 듣지 않았다.

혜공은 즉위한 이후 진(秦)나라에게 땅을 주겠다는 약속과 이극에게 봉토를 주겠노라는 약속을 어겼다.

뿐만 아니라 일곱 대부마저 살해했으니 민심이 그에게로 향하지 않은 것은 당연했다.]

 

二年,周使召公過禮晉惠公,惠公禮倨,召公譏之.

四年,晉饑,乞糴於秦.  繆公問百里奚,百里奚曰:「天菑流行,國家代有,救菑恤鄰,

國之道也.  與之.」 邳鄭子豹曰:「伐之.」 繆公曰:「其君是惡,其民何罪!」

卒與粟,自雍屬絳.

五年,秦饑,請糴於晉.

晉君謀之, 慶鄭曰:「以秦得立, 已而倍其地約. 晉饑而秦貸我, 今秦饑請糴, 與之何疑?而謀之!」

虢射曰:「往年天以晉賜秦,秦弗知取而貸我.  今天以秦賜晉,晉其可以逆天乎?遂伐之.」

惠公用虢射謀,不與秦粟,而發兵且伐秦.  秦大怒,亦發兵伐晉.

[혜공 2년, 주 왕실이 소공과(過)를 보내어 진 혜공을 방문하게 했는데 혜공의 태도가 오만해 소공은 그를 비난했다.

4년, 진(晉)나라는 기근이 발생하자 진(秦)나라에게 양식을 구매할 수 있도록 해달라고 요청했다.

목공은 백리해(百里奚)에게 물었다. 백리해가 대답하기를 : “ 하늘의 재앙은 돌고 도는 것이라 각국에서 돌아가며

발생하는 것이옵니다. 기근의 재앙을 구제하고 이웃 나라를 두루 도와주는 것은 국가의 정당한 도리일 것이옵니다.

도와주시지요.”라고 하자, 비정의 아들 표가 말하기를 : “그들을 공격해야 하옵니다.”라고 하였다. 
목공이 말하기를 : “그 나라의 국왕은 과인도 매우 싫어하지만 그의 백성에게 무슨 잘못이 있는가!”라고 하였다. 
마침내 그들에게 양식을 주기로 하고 진(秦)나라의 도성 옹(雍)에서 진(晉)나라의 강읍(絳邑)까지 수송해 주었다.
5년, 진(秦)나라에 기근이 발생해 진(晉)나라에게 식량을 청했다. 진(晉)나라의 혜공은 신하들과 상의했다.
경정(慶鄭)이 말하기를 : “ 진(晉)나라의 도움으로 왕위에 오르셨고 그들에게 땅을 주기로 한 약속마저 어겼는데도

우리 진나라가 기근이 들자 그들은 우리에게 양식을 팔아 주었사옵니다. 이제 그들이 기근이 들어 우리에게

식량판매를 요청하니 주어야 하는 것이 당연한데 무슨 의문이 있어 상의하오리까?”라고 하였다. 
괵석이 말하기를 : “작년에 하늘이 진(晉)나라를 진(秦)나라에게 주고자 했을 때 진(秦)나라는 공격할 줄 모르고

오히려 우리에게 식량을 팔아주었습니다. 지금 하늘이 진(秦)나라를 우리 진(晉)나라에게로 주고자 하는데

어찌 하늘의 뜻을 거역하겠사옵니까? 이 기회를 이용해서 그들을 쳐야 하옵니다.”라고 하였다. 
혜공은 괵석의 계획을 채택해 진(秦)나라에게 식량을 팔지 않고 오히려 군사를 일으켜 그들을 공격했다.
진(秦)나라는 크게 노하여 역시 군대를 일으켜 진(晉)나라를 공격했다.]

 

六年春,秦繆公將兵伐晉.  晉惠公謂慶鄭曰:「秦師深矣,柰何?」

鄭曰:「秦內君,君倍其賂;晉饑秦輸粟,秦饑而晉倍之,乃欲因其饑伐之:其深不亦宜乎!」

晉卜御右 慶鄭皆吉.  公曰:「鄭不孫.」乃更令步陽御戎,家仆徒為右,進兵.

九月壬戌,秦繆公、晉惠公合戰韓原.

惠公馬騺不行,秦兵至,公窘,召慶鄭為御.  鄭曰:「不用卜,敗不亦當乎!」遂去.

更令梁繇靡御,虢射為右,輅秦繆公.  繆公壯士冒敗晉軍,晉軍敗,遂失秦繆公,反獲晉公以歸.

秦將以祀上帝.  晉君姊為繆公夫人,衰绖涕泣.  公曰:「得晉侯將以為樂,今乃如此.

且吾聞箕子見唐叔之初封,曰『其後必當大矣』,晉庸可滅乎!」乃與晉侯盟王城而許之歸.

晉侯亦使呂省等報國人曰:「孤雖得歸,毋面目見社稷,卜日立子圉.」晉人聞之 皆哭.

秦繆公問呂省:「晉國和乎?」

對曰:「不和.  小人懼失君亡親, 不憚立子圉, 曰『必報讎,寧事戎· 狄』. 

其君子則愛君而知罪, 以待秦命, 曰『必報德』.  有此二故, 不和. 」

於是秦繆公更舍晉惠公,餽之七牢.

十一月,歸晉侯.  晉侯至國,誅慶鄭,修政教.

謀曰:「重耳在外,諸侯多利內之.」欲使人殺重耳於狄.  重耳聞之,如齊.

[혜공 6년 봄, 진 목공(秦穆公)이 군대를 통솔해 진나라를 공격했다.

진혜공(晉惠公)이 경정에게 묻기를: “ 진(秦)나라의 군대가 국경 깊이 들어오는데 어찌해야 하오?”라고 하자. 

경정이 대답하기를 : “ 진(秦)나라가 주군을 환국시켜 왕위를 잇게 했는데 주군께서는 그와의 약속을 어겼사옵고,

우리 진나라가 기근이 들었을 때 진(秦)나라는 양곡을 수송해 주었는데 그 진(秦)나라가 기근이 들자,

우리 진나라는 오히려 은혜를 저버리고 그 기근을 틈타 그들을 공격했사옵니다.
그러니 이제 진(秦)나라가 국경 깊이 침공해 들어오는 것 또한 당연한 일이 아니겠사옵니까?”라고 하였다.
진(晉)나라는 점을 쳐서 수레와 호위를 담당할 사람으로 경정이 모두 길하다고 해 그로 결정했다.

그런데 혜공이 말하기를 : “경정은 불손하다.”라고 하였다. 그래서 보양(步陽)으로 하여금 수레와 병거를 맡게 하고,

가복도(家僕徒)로 하여금 호위를 책임지게 해서 진공하게 했다.
9월 임술일, 진(秦)목공과 진(晉)혜공이 한원에서 접전했다.

혜공의 말은 매우 무거워 진흙 속에 깊이 빠져 움직이지 못하는데 진(秦)나라 병사가 다가왔다.

혜공은 매우 급해서 경정에게 수레를 끌어오라고 소리를 쳤다.

경정이 말하기를 : “ 점쳐서 나온 말을 믿지 않으셨으니 실패해도 당연하지 않겠사옵니까?”라고 하며 떠나갔다.
다시 양요미(梁繇靡)를 보내 수레를 끌게 하고 괵석에게 호위를 담당하게 해 진(秦)목공을 맞아 싸웠다.
진(秦)목공의 장사가 진(晉)나라의 군대를 치니 진나라는 패퇴해 마침내 진(秦)목공을 놓친 것은 물론,

진(秦)나라는 오히려 진(晉)혜공을 사로잡아 귀환했다. 진(秦)나라는 장차 그를 죽여 하늘에 제사를 올리려고 했다.

진(晉)혜공의 누이가 바로 진 목공의 부인이었는데 소복을 입고 통곡하며 눈물을 흘렸다.
진(秦)목공이 말하기를 : “진(晉)나라의 주군을 잡아 장차 그를 즐거운 일에 쓰려고 했는데

지금 그대가 이와 같이 하다니! 그리고 과인은 들었소. 기자(箕子)가, 당숙(唐叔)이 비로소 봉작을 받는 것을 보고

말하기를 ‘그의 후손은 반드시 창대할 것이다’라고 했는데 진(晉)나라가 실로 멸망하겠소?”라고 하였다. 
그래서 진(晉)혜공과 왕성(王城)에서 회맹을 하고 그를 석방할 것을 허락했다.
진(晉)혜공도 여성(呂省) 등을 파견해 백성들에게 알리기를 “과인이 비록 귀국할 수 있지만,

종묘사직을 뵈올 면목이 없노라. 길일을 잡아 자어(子圉)로 하여금 왕위를 잇게 하라.”라고 했다.
진(晉)나라 백성들은 이 말을 듣자 모두 통곡을 했다.

진(秦)목공이 여성에게 묻기를 : “진(晉)나라는 화목한가?”라고 하자, 
여성은 대답하기를 : “화목하지 않사옵니다. 백성들은 주군을 잃고 양친까지 희생당할까봐 두려워할 뿐

자어를 옹립하는 것은 걱정하지 않고, 말하기를 ‘원수는 반드시 갚을 것이다.

비록 융(戎)이나 적(狄)과 같은 오랑캐를 섬길지언정 진(秦)나라는 섬기지 않을 것’이라고 하옵니다.

귀족들은 주군을 사랑하고 보호하려 하나, 자신들이 죄 있는 줄 아는 까닭에 진(秦)나라의 명령을 기다리면서

‘반드시 은혜에 보답할 것’이라고 하고 있으니 이러한 두 종류의 주장이 있어 화목하지 않다고

말씀 드리는 것이옵니다.”라고 하였다.

그래서 진(秦)목공은 진 혜공이 머무는 곳을 바꾸고 그에게 7뢰(牢)의 가축을 보냈다.
11월, 진(晉)혜공을 돌려보냈다. 진(晉)혜공은 국내로 돌아오자 경정을 주살하고 정치와 교화를 밝게 닦았다.
신하들과 계획하기를 “중이가 국외에 있다. 제후들은 대부분 그를 환국시켜 옹립하는 것이 유리하다고 생각한다.”라고 판단하고서 사람을 적나라로 보내어 중이를 살해하고자 했다. 중이는 이 소식을 듣고 제나라로 피신했다.]

 

八年,使太子圉質秦.  初,惠公亡在梁,梁伯以其女妻之,生一男一女.

梁伯卜之,男為人臣,女為人妾,故名男為圉,女為妾.

十年, 秦滅梁.  梁伯好土功, 治城溝, 民力罷怨, 其眾數相驚,曰「秦寇至」,民恐惑,秦竟滅之.

十三年,晉惠公病,內有數子.

太子圉曰:「吾母家在梁,梁今秦滅之,我外輕於秦而內無援於國.

君即不起,病大夫輕,更立他公子.」乃謀與其妻俱亡歸.

秦女曰:「子一國太子,辱在此。秦使婢子侍,以固子之心.  子亡矣,我不從子,亦不敢言.」

子圉遂亡歸晉.

十四年九月,惠公卒,太子圉立,是為懷公.

[혜공 8년, 태자 어를 진(秦)나라에 인질로 보냈다. 애초에 혜공이 양나라에 도망해 있을 때 양나라의 임금,

즉 양백(梁伯)이 자신의 딸을 그에게 출가시켰는데 그녀는 1남 1녀를 낳았다.

양백이 점을 쳐보았더니 남자 아이는 다른 사람의 신하가 될 것이며 여자 아이는 타인의 첩이 될 것이라 했다.
그래서 남자 아이의 이름은 어(圉)라고 했고 여자 아이는 첩(妾)이라 했다.
10년, 진(秦)나라가 양나라를 멸망시켰다. 양백은 토목공사를 크게 일으키는 것을 좋아해서 성벽을 쌓고

호구(壕溝)를 만드는 등 백성들을 피로하게 했기에 원한을 샀다.

그리고 백성들은 수차 자기들끼리 소란을 피우며 말하기를 “ 진(秦)나라 놈들이 온다!”라고 하여 두려워하다가

결국 진나라에게 멸망당한 것이다.
13년, 진 혜공이 병이 났는데 그에게는 국내에 많은 자식이 있었다.

태자 어가 말하기를 : “ 나의 어머니의 친정은 양나라에 있는데 양나라는 지금 진(秦)나라에게 망했다.

나는 국외에서 진나라에게 경시되고 있으며 국내에도 도와주는 사람이 없다.

주군께서 일어나지 못하신다면 대부들이 나를 경시할까 걱정이다. 그러니 다른 공자를 옹립하라.” 라고 하고,

그의 처와 상의해 함께 도주하려 했다.
그러자 진(秦)나라 여자인 태자 어의 처가 말하기를 : “그대는 일국의 태자로서 여기에서 곤욕을 치르고 있습니다.
진(秦)나라가 저더러 그대를 시봉케 해 그대의 마음을 안정시키라고 했지요.

그대가 도주하면 저는 그대의 뒤를 따를 수 없고 또 감히 도주했다고 보고할 수도 없습니다.”라고 하였다. 
어는 마침내 진(秦)나라로 돌아갔다.

14년 9월, 혜공이 죽고 태자 어가 뒤를 이었다. 이 사람이 회공(懷公)이다.]

 

子圉之亡, 秦怨之, 乃求公子重耳,欲內之.  子圉之立, 畏秦之伐也.

乃令國中諸從重耳亡者與期, 期盡不到者盡滅其家.

狐突之子毛及偃從重耳在秦,弗肯召.  懷公怒,囚狐突.

突曰:「臣子事重耳有年數矣,今召之,是教之反君也.  何以教之?」懷公卒殺狐突.

秦繆公乃發兵送內重耳,使人告欒、郤之黨為內應,殺懷公於高梁,入重耳. 重耳立,是為文公.

晉文公重耳,晉獻公之子也.  自少好士,年十七,有賢士五人:曰趙衰;狐偃咎犯, 文公舅也;

賈佗;先軫 : 魏武子.  自獻公為太子時,重耳固已成人矣.  獻公即位,重耳年二十一.

[태자 어가 도주하자 진(秦)나라는 그를 원망했다. 그래서 공자 중이를 찾아 그로 하여금 왕위를 잇게 하려고 했다.
태자 어는 왕위에 오르자 진(秦)나라가 공격할까 두려워, 국내에 중이를 따라 도망한 사람들을 기간 내에

환국하라고 명령을 내리고 기간 내에 도착하지 않는 사람은 그의 가족들을 몰살시키겠다고 했다.

호돌의 아들 호모와 호언이 중이를 따라 진(秦)나라에 있었는데 호돌은 그들을 돌아오게 하려고 하지 않았다.
회공은 화가 나서 호돌을 구금했다. 호돌이 말하기를 : “나의 아들은 중이 공자를 모신 지 몇 해나 되었는데

지금 그들을 소환한다면 그들로 하여금 그들의 주군을 배반하라고 교사하는 것입니다.

그리하면 무슨 이치로 그들을 설복시킬 수 있겠습니까?”라고 하였다. 그러자 회공은 마침내 호돌을 죽였다.
진목공은 군대를 파병해 중이를 보내고, 사람을 보내어 난지(欒枝), 극곡(郤穀)의 무리와 내응하고는

고량에서 회공을 죽이고 중이를 환국시켰다. 중이가 왕위에 오르니 이 사람이 문공(文公)이다.

진문공(晉文公)은 희중이(姬重耳)로 진헌공의 아들이다.

어릴 때부터 선비를 좋아해 나이 17세에 이미 현사(賢士) 5명을 곁에 둘 정도였다.

그들은 조최(趙衰)와 문공의 외삼촌인 호언구범(狐偃咎犯)과 가타(賈佗), 선진(先軫), 위무자(魏武子) 등이었다.

중이는 헌공 시절 태자로 있을 때 이미 성년이었다. 헌공이 즉위할 때 중이는 21세였다. ]

 

獻公十三年,以驪姬故,重耳備蒲城守秦.

獻公二十一年,獻公殺太子申生,驪姬讒之,恐,不辭獻公而守蒲城.

獻公二十二年,獻公使宦者履鞮趣殺重耳.

重耳踰垣,宦者逐斬其衣袪.  重耳遂奔狄.  狄,其母國也.

是時重耳年四十三.  從此五士,其餘不名者數十人, 至狄.

狄伐咎如,得二女:以長女妻重耳,生伯鯈、叔劉;以少女妻趙衰,生盾.

居狄五歲而晉獻公卒,裏克已殺奚齊、悼子,乃使人迎,欲立重耳.

重耳畏殺,因固謝,不敢入.  已而晉更迎其弟夷吾立之,是為惠公.

[헌공 13년, 여희 때문에 중이는 포성(蒲城)에 주둔하며 진(秦)나라를 방어했다.
헌공 21년, 헌공이 태자 신생을 죽이고 여희가 모함하자, 중이는 두려워 헌공에게 인사도 하지 않고 포성을 지켰다.

헌공 22년, 헌공이 환관 이제(履鞮), 즉 발제를 보내어 급히 중이를 주살하라고 명했다. 중이가 담을 넘어 도주하자

환관은 그를 추격해 그의 옷소매를 베어갔다. 중이는 적(狄)나라로 도주했다. 적나라는 모친의 나라였다.

이때 중이의 나이는 43세였고, 수행한 5명의 현사 외에 이름이 드러나지 않은 사람들 수십 명이 적나라에 도착했다.
적나라는 구여(咎如)를 토벌하고 두 여자를 얻었다. 장녀는 중이에게 보내어져 백조(伯鯈)와 숙유(叔劉)를 낳았다.
어린 여자는 조최에게 시집을 가서 조순(趙盾)을 낳았다. 중이가 적나라에서 5년 동안 머무르고 있을 때,

진 헌공이 죽자 이극이 이미 해제와 도자를 시해하고 사람을 보내어 중이를 맞아 그를 옹립하려고 했다.

중이는 피살될까 두려워 극구 사양하고 돌아가지 않았다.

오래지 않아 진나라는 그의 아우 이오를 맞아 왕위를 잇게 했으니, 그가 바로 혜공이었다.]

 

惠公七年,畏重耳,乃使宦者履鞮與壯士欲殺重耳.

重耳聞之,乃謀趙衰等曰:「始吾奔狄,非以為可用與,以近易通,故且休足.

休足久矣,固願徙之大國.  夫齊桓公好善,志在霸王,收恤諸侯.

今聞管仲、隰朋死,此亦欲得賢佐,盍往乎?」於是遂行.

重耳謂其妻曰:「待我二十五年不來,乃嫁.」

其妻笑曰:「犁二十五年,吾冢上柏大矣.  雖然,妾待子.」重耳居狄凡十二年而去.

過衛, 衛文公不禮.  去, 過五鹿, 饑而從野人乞食, 野人盛土器中進之. 重耳怒.

趙衰曰:「土者, 有土也, 君其拜受之.」

[혜공 7년, 중이를 두려워해 환관 이제로 하여금 장사들을 데리고 가서

중이를 살해하고자 했다. 중이는 이 소식을 듣고 조최 등과 의논했다.

“애초에 내가 적나라로 도망했으나 적나라가 나를 지원해 줄 것으로는 결코 믿지 않았소.

다만 거리가 가까워 쉽게 오갈 수 있었기 때문에 잠시 머무른 것뿐이오.

머무름이 오래되었으니 이제 큰 나라로 옮기기를 바라오. 제환공은 선행을 좋아하고 패왕(覇王)이 되어

왕도를 펼치고 제후들을 거두어들여 도우는 데 마음을 쓰고 있지요. 이제 들으니 관중과 습붕이 죽었다는데

이때는 현명하고 능력 있는 선비를 얻고자 할 것이니 어찌 가지 않겠소?”라고 하였다.

제나라로 출발하면서 중이가 그의 처에게 말하기를 : “25년을 기다려도 내가 오지 않으면 재가하시오.” 라고 하자,

처가 웃으며 말하기를 “25년을 기다리면 제 무덤의 측백나무도 이미 크게 자랐겠사옵니다.
비록 말은 그렇지만 소첩은 그대를 기다릴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이렇게 해 중이는 적나라에서 무려 12년을 머무른 후 떠났다.
중이가 위(衛)나라를 지나가게 되었다. 위문공(衛文公)은 예로써 그를 접대하지 않았다.

그가 다시 출발해 오록(五鹿)을 지나가는데 배가 고팠다.
시골 사람에게 밥을 구걸하자 시골 사람은 그릇에다 흙을 숨겨서 그에게 주었다. 중이가 성을 냈다.
조최가 말하기를 : “진흙은 토지를 가진다는 것을 상징하고 있사옵니다.

그에게 절을 하고 받으셔야 하옵니다.”라고 하였다.]

 

至齊,齊桓公厚禮,而以宗女妻之,有馬二十乘,重耳安之.

重耳至齊二歲而桓公卒,會豎刀等為內亂, 齊孝公之立,諸侯兵數至.  留齊凡五歲.

重耳愛齊女,毋去心.  趙衰、咎犯乃於桑下謀行.  齊女侍者在桑上聞之,以告其主.

其主乃殺侍者,勸重耳趣行.  重耳曰:「人生安樂,孰知其他!必死於此,不能去.」

齊女曰:「子一國公子, 窮而來此, 數士者以子為命. 子不疾反國, 報勞臣, 而懷女德, 竊為子羞之. 且不求, 何時得功?」 

乃與趙衰等謀,醉重耳,載以行.  行遠而覺,重耳大怒,引戈欲殺咎犯.

咎犯曰:「殺臣成子,偃之願也.」 重耳曰:「事不成,我食舅氏之肉.」

咎犯曰:「事不成,犯肉腥臊,何足食!」乃止,遂行.

[중이가 이번에는 제나라에 도착했다. 제환공(齊桓公)은 융성하고 엄중한 예절로 그를 대접했다.

그리고 그의 친족 여자를 그에게 시집보내고 말 20승을 주었다. 중이는 이러한 생활에서 안정을 찾았다.

중이가 제나라에 온 지 2년 만에 환공이 세상을 떠나고 수조(竪刁) 등이 내란을 일으켰다.
제효공(齊孝公)이 즉위하자 제후의 군대가 수차례 쳐들어왔다. 중이가 제나라에 있은 지 5년이 지났다.
중이는 제나라의 여인을 사랑하게 되어 제나라를 떠날 생각이 없었다.

중이의 외삼촌인 조최와 구범이 뽕나무 아래에서 앞으로의 행동을 상의했다.

그 여인의 시종이 뽕나무 아래에서 그들의 말을 듣고 여인에게 알렸다.

여인은 시종을 죽이고 중이에게 급히 움직이기를 권했다. 

중이가 말하기를 : “사람이 태어나 안락하면 누가 그 다른 일을 하려고 하겠소?

반드시 여기에서 죽을 일이지 떠나지는 않겠소.”라고 하자,
제나라 여인이 말하기를 : “ 당신은 일국의 공자로서 사정이 곤궁해 여기에 오셨사옵니다.

저 현사들은 당신에게 생명을 맡기고 있는데 당신께서는 급히 환국해 신하들의 노고에 보답하시지 않고

여색에 마음을 두시니 첩은 당신을 대신해 부끄럽사옵니다.

만약 지금 움직이지 않으시면 언제 공을 이루시겠사옵니까?”라고 하였다. 
그래서 조최 등과 상의해 중이를 취하게 해 수레에 그를 태우고 가게 했다.

일행이 한참 멀리 간 뒤 중이가 깨어났다. 그는 매우 화가 나서 창을 들고 구범을 죽이려고 했다. 

구범이 말하기를 : “나를 죽이고 주군의 뜻을 이루신다면 그건 나의 바람이오.”라고 하였다. 
중이가 말하기를 : “만약 성공하지 않는다면 외삼촌의 살을 씹어 먹을 것입니다.”라고 하자. 

구범이 말하기를 : “ 만약 일을 성공시키지 못하시더라도 나의 살은 비리고 상하여,

드시기에 충분하지 않을 것입니다.” 라고 하였다. 중이는 그제에서야  화를 멈추고 계속 전진했다.]

 

過曹,曹共公不禮,欲觀重耳駢脅.

曹大夫釐負羈曰:「晉公子賢,又同姓,窮來過我, 柰何不禮!」共公不從其謀.

負羈乃私遺重耳食,置璧其下.  重耳受其食,還其璧.  去,過宋.

宋襄公新困兵於楚,傷於泓,聞重耳賢,乃以國禮禮於重耳.

宋司馬公孫固善於咎犯,曰:「宋小國新困,不足以求入,更之大國.」乃去.

[조(曹)나라를 지나갔으나 조나라의 공공(共公)은 예로써 대하지 않고 중이의 신체만을 보고자 할 따름이었다.
조나라의 대부 희부기(釐負羈)가 말하기를 : “진나라의 공자는 현명하고 능력이 있으며,

또 같은 성씨로 곤궁에 빠져 우리 나라를 경유하게 되었는데 어찌 예로써 대하시지 않으십니까?”라고 하였으나, 

공공은 그의 의견을 듣지 않았다.

희부기는 사사로이 음식물을 중이에게 보내고 그 음식물 밑에다 옥구슬을 놓아 두었다.
중이는 그의 음식을 받고 옥구슬은 돌려보냈다. 다시 조나라를 떠나 송나라를 지나갔다.

송양공(宋襄公)은 최근 초나라의 군대에게 곤욕을 치르고 홍수(泓水)에서 부상을 입었다.
그는 중이가 현명하고 능력이 있다는 소식을 듣고 한 나라의 국왕을 대하는 예절로 중이를 접대했다.
송나라의 사마(司馬) 공손고(公孫固)는 구범과 서로 친해 그에게 말했다.

“ 송나라는 작은 나라인 데다 최근에 곤란함을 당했지요.

송나라를 의지해서는 진나라로 들어갈 수 없을 것이니 큰 나라로 가시지요.” 그래서 다시 떠났다.] 

 

過鄭,鄭文公弗禮.

鄭叔瞻諫其君曰:「晉公子賢,而其從者皆國相,且又同姓.  鄭之出自厲王, 而晉之出自武王.」

鄭君曰:「諸侯亡公子過此者眾,安可盡禮!」

叔瞻曰:「君不禮,不如殺之,且後為國患.」 鄭君不聽.

[정나라를 지나갔으나 정 문공(鄭文公)은 예로써 접대하지 않았다.
정나라의 대부 숙첨(叔瞻)이 그의 주군에게 간하기를 : “ 진나라의 공자는 현명하고 능력이 있으며

그의 추종자들은 모두 국가의 대들보들이옵고 또한 같은 성이옵니다.

우리 정나라는 주 여왕(周厲王)에서 나왔으나 진나라는 무왕(武王)에서 나왔사옵니다.”라고 하자,
정문공이 말하기를 : “각국에서 망명해 온 제후들의 공자들 중 여기를 거쳐 간 사람이 매우 많은데

어떻게 그들을 모두 예로써 대한단 말이요!”라고 하였다.
숙첨이 다시 말하기를 : “주군께서 예로써 대하시지 않으시겠다면 그를 주살하시는 것이 좋사옵니다.

그렇지 않으면 이후에 나라의 우환이 될 것이옵니다.”라고 하였지만, 정문공은 듣지 않았다.]

 

重耳去之楚,楚成王以適諸侯禮待之,重耳謝不敢當.

趙衰曰:「子亡在外十餘年, 小國輕子, 況大國乎? 今楚大國而固遇子, 子其毋讓, 此天開子也.」

遂以客禮見之.  成王厚遇重耳,重耳甚卑.  成王曰:「子即反國,何以報寡人?」

重耳曰:「羽毛齒角玉帛,君王所餘,未知所以報.」

王曰:「雖然,何以報不穀?」

重耳曰:「即不得已,與君王以兵車會平原廣澤,請辟王三舍.」

楚將子玉怒曰:「王遇晉公子至厚,今重耳言不孫,請殺之.」

成王曰:「晉公子賢而困於外久,從者皆國器,此天所置,庸可殺乎?且言何以易之!」

居楚數月,而晉太子圉亡秦,秦怨之;聞重耳在楚,乃召之.

成王曰:「楚遠,更數國乃至晉.  秦晉接境,秦君賢,子其勉行!」厚送重耳.

[중이는 정나라를 떠나 초나라로 갔다. 초성왕(楚成王)은 제후에 상당하는 예절로 그를 접대했다.

중이는 사양하고 감히 받을 수 없다고 했다. 조최가 말하기를 : “ 주군께서 국외에 도망한 지 10여 년이라

작은 나라들도 경시하는데 큰 나라들이야 오죽하겠사옵니까? 지금 초나라는 큰 나라인데 주군을 우대한다면,

주군께서도 겸양해 하실 필요가 없습니다. 이건 하늘이 주군께 길을 열어주는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그래서 중이도 객의 예로써 초성왕을 대했다. 성왕은 중이를 후대했으나 중이는 매우 겸손하게 행동했다.
성왕이 묻기를 : “당신이 만약 환국하신다면 무엇으로 나에게 보답하시겠소?”라고 하자. 
중이가 대답하기를 : “진기한 금수나 옥구슬이나 비단과 같은 물건들은 군왕께도 남아도는 바일 것이니

무엇으로 보답해야 할지를 모르겠습니다.”라고 하였다. 

성왕이 다시 묻기를 : “비록 그렇다고 하지만 어쨌든 무엇으로 보답을 해야 하지 않겠소?”라고 하자,
중이가 대답하기를 : “ 만약 부득이 평원의 너른 못 지역에서 병거가 서로 만나게 되면

군왕께 90 리를 피해 드리겠습니다.”라고 하였다.

이 말을 전해들은 초나라의 장군 자옥(子玉)이 화를 내며 말하기를 : “주군께서 진나라의 공자 중이를

지극히 후대하셨는데, 중이의 말이 이처럼 불손하니, 그를 죽일 수 있도록 허락해 주십시오.”라고 하자, 
성왕이 말하기를 : “진나라의 공자는 현명하고 능력이 있는데 오히려 국외에서 곤궁하고 군색하게 지낸 지

매우 오래되었소. 그리고 그를 따르는 사람들은 모두 치국의 인재들이라 이것은 모두 하늘께서 안배하신 것!

어떻게 그를 죽일 수 있겠는가? 또 그가 어떻게 말을 해야 했는지 그대가 말해 보라.”라고 하였다.
중이가 초나라에서 수개월을 머무르고 있을 때 진(晉)나라의 태자 어가 진(秦)나라에서 탈출했다.

진(秦)나라는 그를 매우 원망하며, 중이가 초나라에 있다는 소식을 듣고 그를 청했다.

초성왕이 말했다. “초나라는 거리가 많이 떨어져 다시 몇 나라를 경유해야 진(晉)나라에 도착할 수 있을 것이오.
진(秦)과 진(晉)나라는 국경을 맞대고 있으나 진나라 군주는 어진 사람이니 그대는 힘써 노력하시오."라고 하면서,

많은 예물을 중이에게 주었다.]

 

重耳至秦,繆公以宗女五人妻重耳,故子圉妻與往.

重耳不欲受,司空季子曰:「其國且伐,況其故妻乎!且受以結秦親而求入,子乃拘小禮,

忘大丑乎!」遂受.  繆公大歡,與重耳飲。趙衰歌黍苗詩.  繆公曰:「知子欲急反國矣.」

趙衰與重耳下,再拜曰:「孤臣之仰君,如百穀之望時雨.」是時晉惠公十四年秋.

惠公以九月卒,子圉立.  十一月,葬惠公.

十二月,晉國大夫欒、郤等聞重耳在秦,皆陰來勸重耳、趙衰等反國,為內應甚眾.

於是秦繆公乃發兵與重耳歸晉.  晉聞秦兵來,亦發兵拒之.  然皆陰知公子重耳入也.

唯惠公之故貴臣呂、郤之屬不欲立重耳.  重耳出亡凡十九歲而得入,時年六十二矣,晉人多附焉.

[중이가 진나라에 도착하자 진목공(秦穆公)은 친척 여자 다섯 명을 중이의 처로 삼게 했다.

원래 태자 어의 전처도 여기에 있었다. 중이는 받아들이지 않으려고 했으나 사공계자(司空季子)가 말하기를 :

“그의 나라도 정벌하고자 하는데 하물며 그의 전처쯤이야! 잠시 받아들여 진나라와 친분을 맺고

환국을 하셔야 할 터인데 주군께서는 어찌 소소한 예절에 구속되어 큰 치욕을 잊으시옵니까?”라고 하자, 

그래서 중이는 받아들이기로 했다.
목공은 크게 기뻐해 중이와 함께 술을 마셨다. 조최가 “서묘(黍苗)” 시를 낭송했다.

목공이 말하기를 : “그대가 황급히 환국하고 싶어 하는 마음을 알겠소.”라고 하였다. 
조최가 중이와 함께 좌석을 떠나면서 재배(再拜)하며 말하기를 : “외로운 신하인 제가 군왕을 숭앙함이 

마치 온갖 곡식이 때맞게 내리는 비를 바라는 것과 같사옵니다.” 라고 하였다.

이때가 진 혜공(晉惠公) 14년 가을이었다.
혜공은 9월에 세상을 떠나고 태자 어가 뒤를 이었다. 11월, 혜공을 안장했다.
12월, 진(晉)나라의 대부 난지와 극곡 등이 중이가 진(秦)나라에 있다는 소문을 듣고

암암리에 와서 중이와 조최에게 환국하기를 권했으며, 내응하는 사람이 매우 많았다.

이때 진 목공이 중이에게 파병해 환국을 지원했다.

진(晉)나라는 진(秦)나라의 군대가 온다는 소식을 듣고 군대를 일으켜 그들에게 대항했다.
그러나 모든 백성들은 공자 중이가 돌아온다는 것을 암암리에 알고 있었다.

다만 혜공의 옛 신하 여성과 극예와 같은 사람들은 중이를 옹립하려 하지 않았다.
이로써 중이는 망명한 지 19년 만에 귀국했는데 이때 그의 나이는 62세였다.

진나라의 대부분의 백성이 그에게 기울어져 있었다.]

 

文公元年春,秦送重耳至河.

咎犯曰:「臣從君周旋天下,過亦多矣.  臣猶知之,況於君乎?請從此去矣.」

重耳曰:「若反國,所不與子犯共者,河伯視之!」乃投璧河中,以與子犯盟.

是時介子推從,在船中,乃笑曰:「天實開公子,而子犯以為己功而要市於君,固足羞也.

吾不忍與同位.」 乃自隱渡河.  秦兵圍令狐,晉軍于廬柳.

二月辛丑, 咎犯與秦晉大夫盟于郇.  壬寅, 重耳入于晉師.  丙午,, 入于曲沃. 

丁未, 朝于武宮, 即位為晉君, 是為文公.  群臣皆往.  懷公圉奔高梁.  戊申, 使人殺懷公.

懷公故大臣呂省、郤芮本不附文公,文公立,恐誅,乃欲與其徒謀燒公宮,殺文公.  文公不知.

[문공 원년 봄, 진(秦)나라가 중이를 황하까지 환송했다.

구범이 말하기를 : “ 신이 주군을 따라 천하를 주유한 지 이미 오래되었사옵니다.
신 자신도 그것을 잘 알고 있사온대 하물며 주군께선 어떠하시겠사옵니까? 청컨대 이곳을 떠나시지요.”라고 하자.
중이가 말하기를 : “만약 환국한다면 그대 구범과 마음이 같지 않는 사람이 있을 것이니, 하백(河伯)이시여!

굽어 살피소서!”라고 하였다. 그리고는 구슬을 황하 속으로 던지고 구범과 맹서했다.
이때 개자추가 뒤에서 따르고 있다가 배 위에서 웃으며 말하기를 : “실제로 하늘이 공자께 길을 열어 주셨는데

구범이 자신의 공이라 생각하고 주군께 그 대가를 구하려고 하는 것은 실로 매우 부끄러운 일이옵니다.

저는 그와 함께 관직에 있기를 원하지 않사옵니다.”라고 하였다.  그래서 개자추는 자신을 숨기고 황하를 건넜다.
진(秦)나라 병사들이 영호(令狐)를 포위하자, 진(晉)나라는 여류(廬柳)에 군대를 주둔시켰다.
2월 신축일, 구범과 진(秦) 및 진(晉)나라의 대부들이 순(郇)에서 회맹을 했다.

임인일에 중이가 진(晉)나라의 군영 속으로 들어갔다. 병오일, 곡옥으로 진격했다.

정미일, 무궁(武宮)에 도착해 묘에 배알하고 즉위해 진나라의 국왕이 되었으니 이 사람이 곧 문공(文公)이다.
대신들은 모두 곡옥으로 갔다. 회공 어는 고량으로 도주했다.

무신일, 사람을 보내어 회공을 주살했다. 회공의 옛 대신 여성과 극예는 본래 문공에게 귀속하지 않았다.

문공이 즉위하자 피살될까 두려워 그들의 무리들과 함께 궁을 불사르고 문공을 시해할 계획을 세웠다.

문공은 이일을 알지 못했다.]

 

始嘗欲殺文公宦者履鞮知其謀,欲以告文公,解前罪,求見文公.

文公不見,使人讓曰:「蒲城之事,女斬予袪.  其後我從狄君獵,女為惠公來求殺我.

惠公與女期三日至,而女一日至,何速也?女其念之.」

宦者曰:「臣刀鋸之餘,不敢以二心事君倍主,故得罪於君.  君已反國,其毋蒲、翟乎?

且管仲射鉤,桓公以霸.  今刑餘之人以事告而君不見,禍又且及矣.」

於是見之,遂以呂、郤等告文公.

文公欲召呂、郤,呂、郤等黨多, 文公恐初入國, 國人賣己, 乃為微行, 會秦繆公於王城, 國人莫知.

[이전에 문공을 살해하려고 했던 환관 이제(履鞮)가 그들의 음모를 알고 이러한 일을 문공에게 알리고

과거의 죄를 갚으려고 문공을 알현하기를 청했다. 그러나 문공은 그를 접견하지 않고 사람을 보내

그를 질책하기를 : “ 포성에서는 네가 과인의 옷소매를 베었지. 그 후 과인이 적나라의 군왕과 사냥을 갔을 때

너는 혜공을 위해 과인을 추적하고 과인을 죽이려고 했다. 혜공이 너에게 3일의 기한을 주었는데

너는 하루 만에 이르렀으니 어찌 그리 빨랐느냐?  너는 그것들을 생각해야 할 것이야.”라고 하자.
이제가 말하기를 : “저는 궁형을 받은 사람으로 감히 두 마음으로 주군을 섬기거나 주인을 배반할 수 없었사옵니다.

그래서 주군께 죄를 지었던 것이옵니다. 주군께서는 이미 환국하셨는데 설마 포성과 적나라에서의 이러한 일을

잊으셨다는 말씀이십니까?  하물며 관중(管仲)은 활을 쏘아 제환공(齊桓公)의 대구(帶鉤)를 맞추었으나

제환공은 관중에게 의지해 패자로 불리지 않았사옵니까? 이제 궁형을 받은 이 사람이 매우 긴요한 일을

보고하려 하는데 주군께서는 접견을 허락하지 않으시니 재난이 임박했사옵니다.”라고 하였다.
그러자 문공은 그를 접견했다. 그 환관은 여성과 극예 등의 행동을 문공에게 고했다.

문공은 여성과 극예를 부르려고 했으나 저들의 무리가 너무 많았다.

또 문공은 처음 환국해 즉위할 때 백성들이 자기를 배반할까봐 두려워,

변복(變服)을 하고 미행(微行)해 왕성에 도착해서 몰래 진목공(秦繆公)을 만났다. 이때 백성들은 아무도 몰랐다.]

 

三月己丑,呂、郤等果反,焚公宮,不得文公.  文公之衛徒與戰,呂、郤等引兵欲奔,

秦繆公誘呂、郤等, 殺之河上,晉國復而文公得歸.

夏,迎夫人於秦,秦所與文公妻者卒為夫人.  秦送三千人為衛,以備晉亂.

文公修政,施惠百姓.  賞從亡者及功臣,大者封邑,小者尊爵.

未盡行賞,周襄王以弟帶難出居鄭地,來告急晉.

晉初定,欲發兵,恐他亂起,是以賞從亡未至隱者介子推.  推亦不言祿,祿亦不及.

[3월 기축일, 여성과 극예 등이 과연 반란을 일으켜 궁성을 불살랐으나

문공을 찾지 못했다. 문공의 호위군들은 그들과 싸웠다. 여성과 극예 등이 군대를 이끌고 도주하려 하자,

진(秦)목공이 여성과 극예 등을 유인해 황하 강변에서 그들을 죽였다.

진(晉)나라가 평정을 회복하자 문공은 다시 환국했다.
여름, 문공은 진(秦)나라에 도착해서 부인을 맞아들였는데, 진 목공이 문공에게 주어 처로 삼았던 사람들은

마침내 모두 부인이 되었다. 진(秦)나라는 군사 3천 명을 보내어 문공을 경호하고 진(晉)나라의 반란을 방비했다.
문공은 정치를 잘해 백성들에게 은혜를 베풀었다.  문공은 자신을 따라서 떠돌던 사람과 공이 있는 신하들에게

상을 내렸는데, 공이 많은 사람에게는 봉토를 내리고 적은 사람에게는 작위를 내렸다.

아직 모두에게 논공행상을 마치기 전인데 주양왕(周襄王)의 아우 희숙(姬叔)이 난을 일으켜

양왕이 정나라로 도망했으며, 그곳에 거주하고 있다며 진나라에게 급박함을 알려왔다.
진나라는 이제 안정되기 시작하는데 군대를 파병한다면 다른 변란이 일어날지도 모른다고 염려했다.
그래서 이래저래 은자(隱者) 개자추에게는 아직 상이 돌아오지 않았다.

개자추도 봉록을 말하지 않았고, 실제로 봉록 또한 그에게 미치지 않았다. ]

 

推曰:「獻公子九人,唯君在矣.  惠、懷無親,外內棄之;天未絕晉,必將有主,主晉祀者,

非君而誰? 天實開之, 二三子以為己力, 不亦誣乎?竊人之財, 猶曰是盜, 況貪天之功以為己力乎?

下冒其罪,上賞其姦,上下相蒙,難與處矣!」 其母曰:「盍亦求之,以死誰懟?」

推曰:「尤而效之,罪有甚焉.  且出怨言,不食其祿.」 母曰:「亦使知之,若何?」

對曰:「言,身之文也;身欲隱,安用文之?文之,是求顯也.」

其母曰:「能如此乎?與女偕隱.」至死不復見.  介子推從者憐之,

乃懸書宮門曰:「龍欲上天,五蛇為輔.  龍已升雲,四蛇各入其宇,一蛇獨怨,終不見處所.」

[개자추가 말하기를 : “ 헌공의 아들이 아홉이 있는데 지금의 주군만이 살아 계실 뿐입니다.

혜공과 회공은 가까운 사람이 없었고 국내외에서도 그를 버렸다.
그러나 하늘은 진나라를 멸절(滅絶)시키지 않으셨다. 반드시 주인이 있어 제사를 주관하게 할 것이니

지금의 주군이 아니시면 누구이겠는가?  실로 하늘께서 그분의 길을 여셨는데

몇몇 사람이 자신의 공이라 생각하고 있으니 이 또한 황당한 일이 아니겠는가?

​남의 재물을 훔치는 것을 도둑이라고 한다면, 하늘의 공을 탐내 자신의 공으로 삼는 사람은 무엇이라 해야겠는가? 

신하들이 그들의 죄를 덮고 주군께서는 그들의 간사함에 상을 내려 상하가 서로 속이고 있으니

그들과 함께 거하기 어렵도다!”라고 하였다.
그의 어머니가 말하기를 : “ 어째서 가서 구하지 않느냐 ? 죽음으로써 누구를 원망하겠느냐 ? ”라고 하자. 
추가 대답하기를 : “ 더욱이 그들을 본받는 것은 죄가 더욱 심해질 뿐입니다.

하물며 이미 원망하는 말을 했으니 그들의 봉록을 먹지 않을 것입니다.” 라고 하였다.
어머니가 말하기를 : “그래도 그들로 하여금 알도록 하는 것이 어떻겠느냐 ? ” 라고 하자.
추가 대답하기를 : “ 말이란 사람을 꾸미는 것일 뿐인데 사람이 자신을 숨기려고 한다면 무엇 때문에 꾸미겠습니까?

꾸미는 것은 현달(顯達)함을 추구하는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어머니가 말하기를 : “능히 그렇게 할 수 있겠느냐? 그렇다면 나도 너와 함께 은둔하겠다.”라고 하였다. 

그리하여 죽을 때까지 그들을 두 번 다시 볼 수 없었다.

개자추의 시종이 그들을 가련하다 생각하고 궁문에다가 글을 써서 붙였다.

“ 용이 하늘에 오르고자 하니 다섯 마리의 뱀이 보좌한다. 용이 이미 구름 속에 오르니,

네 마리 뱀은 각각 자기의 집으로 들어가는데 한 마리는 홀로 원망해 마침내 그 처소를 볼 수가 없도다.”]

 

文公出,見其書,曰:「此介子推也.  吾方憂王室,未圖其功.」使人召之,則亡.

遂求所在,聞其入綿上山中,於是文公環綿上山中而封之,以為介推田,

號曰介山,「以記吾過,且旌善人」.

從亡賤臣壺叔曰;「君三行賞,賞不及臣,敢請罪.」

文公報曰:「夫導我以仁義,防我以德惠,此受上賞.  輔我以行,卒以成立,此受次賞. 

矢石之難,汗馬之勞,此復受次賞。若以力事我而無補吾缺者,此[復]受次賞.

三賞之後,故且及子.」晉人聞之,皆說.

[문공이 나와서 이 글을 보고 말하기를 : “이것은 개자추이다. 과인이 왕실의 일을 우려하고 있다가

그의 공로를 아직 생각하지 못했구나.”라고 하며, 사람을 보내어 그를 청했으나 그는 이미 가고 없었다.

문공은 그의 소재를 찾았다. 그가 이미 금상(錦上)에 있는 산속으로 들어갔다는 것을 듣고

문공은 금상 산속 그 주위를 그에게 봉토로 주었다.
그리고 그 이름을 ‘개산’이라고 하고 “이로써 과인의 과실을 기억하게 하며, 선한 사람을 표창하노라.”라고 하였다.
함께 따라 망명생활을 했던 천신(賤臣) 호숙(壺叔)이 말하기를 : 

“군왕께서 3차에 걸쳐 논공행상을 하셨는데 저에게는 돌아오지 않으니 저는 무슨 죄가 있사옵니까?”라고 하자. 
문공이 대답하기를 :  “인의로써 과인을 인도한 사람과 덕혜(德惠)로써 과인을 방어한 사람은 1등상을 받았다.
행동으로 과인을 보좌해 마침내 공업(功業)을 이루게 한 사람은 2등상을 받았으며,

활과 바위의 위험을 무릅쓰고 땀을 흘린 공로가 있는 사람은 그 다음 상을 받았다.
힘을 다해 과인을 섬겼으나 과인의 잘못을 보완해 주지 못한 사람은 그 다음 상을 받았다.

이 상을 다 내린 다음에는 그대에게도 돌아갈 것이다.”라고 하였다. 

진나라 사람들은 이 말을 듣고 모두들 기뻐하였다.]

 

二年春,秦軍河上,將入王.  趙衰曰;「求霸莫如入王尊周.

周晉同姓,晉不先入王,後秦入之,毋以令于天下.  方今尊王,晉之資也.」

三月甲辰,晉乃發兵至陽樊,圍溫,入襄王于周.

四月,殺王弟帶.  周襄王賜晉河內陽樊之地.

[문공 2년 봄, 진(秦)나라 군대가 황하 가에 주둔하고 있다가 주 양왕을 수도로 호송하려고 했다.
조최가 말하기를 : “패자가 되시려면 양왕을 수도로 호송하며 주(周)나라를 존중하는 것보다 중요한 것은 

없사옵니다. 양왕은 주군과 같은 성인데 진(晉)나라가 먼저 양왕을 수도로 모시지 않고

진(秦)나라로 하여금 양왕을 모시게 하신다면 각국을 향해서 호령할 수 없을 것입니다.

지금 양왕을 존중하는 것이 진나라의 큰 자본이 될 것이옵니다.” 라고 하였다.

드디어 3월 갑진일, 진(晉)나라가 양번에 군대를 파병해 온(溫)을 포위하고 주 양왕을 주나라 수도로 호송했다.

4월, 양왕의 아우 희숙 대(帶)를 죽였다. 주 양왕은 하내의 양번 지방을 진나라에게 상으로 내렸다.]

 

四年,楚成王及諸侯圍宋,宋公孫固如晉告急.  先軫曰:「報施定霸,於今在矣.」

狐偃曰:「楚新得曹而初婚於衛,若伐曹、衛,楚必救之,則宋免矣.」於是晉作三軍.

趙衰舉郤縠將中軍,郤臻佐之;使狐偃將上軍,狐毛佐之,命趙衰為卿;

欒枝將下軍,先軫佐之;荀林父御戎,魏犫為右:往伐.

冬十二月,晉兵先下山東,而以原封趙衰.

[문공 4년, 초 성왕과 제후들이 송나라를 포위했다. 송나라의 공손고(公孫固)가 진(晉)나라에 와서 시급함을 알렸다.
선진(先軫)이 말하기를 :  “송양공의 은혜에 보답하고, 패업을 확립하시려면 바로 지금이옵니다.”라고 하였다. 
호언이 말하기를 : “초나라가 최근 조나라를 얻고 위(衛)나라와 혼약을 맺었으니 만약 조와 위나라를 공격하면, 

초나라는 반드시 그들을 구하고자 할 것이옵니다. 그렇다면 송나라는 포위를 면할 수 있을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이때 진(晉)나라는 삼군(三軍)을 만들었다. 조최는 극곡이 중군을 통솔하게 추천했고, 극진은 그를 보좌하게 했다.

호언은 상군(上軍)을 통솔하고 호모(狐毛)가 그를 보좌했으며, 조최는 경(卿)에 임명되었다.

난지는 하군(下軍)을 통솔하고 선진이 그를 보좌했다.
순임보(荀林父)가 어가와 병거를 담당했고, 위주는 호위를 담당했다. 그리고는 정벌하러 나갔다.
겨울 12월, 진나라 군사가 태행산 동쪽 지방을 먼저 공격해, 원읍(原邑)을 주최에게 봉토로 주었다.]

 

五年春, 晉文公欲伐曹, 假道於衛,衛人弗許.  還自河南度,侵曹,伐衛.

正月,取五鹿.

二月, 晉侯、齊侯盟于斂盂.  衛侯請盟晉, 晉人不許.

衛侯欲與楚, 國人不欲, 故出其君以說晉.  衛侯居襄牛, 公子買守衛.  楚救衛, 不卒.  晉侯圍曹.

[문공 5년 봄, 진문공이 장차 조(曹)나라를 공격할 생각으로 위(衛)나라에게 길을 빌려달라고 했으나,

위나라는 허락하지 않자. 진나라는 방향을 바꾸어 황하의 남쪽을 건너 조나라를 습격하고 이어 위나라를 공격했다.

정월, 오록을 탈취했다. 2월, 진문공과 제나라의 군왕이 위나라의 염우(斂盂)에서 회맹했다.

위나라의 군왕이 진나라와 동맹을 맺기를 청했으나 진나라는 응낙하지 않았다.
그래서 위나라의 군왕은 초나라에 귀속하려고 했으나 백성들이 원하지 않았다.

그뿐 아니라 그들의 군왕을 축출하여 진나라의 환심을 사기에 이르렀다.

위나라의 군왕은 양우(襄牛)에 있었고 공자 매가 위나라를 지키고 있었다.

초나라가 위나라를 원조했으나 성공하지 못했다. 진(晉)문공이 조나라를 포위했다.]

 

三月丙午,晉師入曹,數之以其不用釐負羈言,而用美女乘軒者三百人也.

令軍毋入僖負羈宗家以報德.  楚圍宋,宋復告急晉.

文公欲救則攻楚,為楚嘗有德,不欲伐也;欲釋宋,宋又嘗有德於晉:患之.

先軫曰:「執曹伯,分曹、衛地以與宋,楚急曹、衛,其勢宜釋宋.」

於是文公從之,而楚成王乃引兵歸.

楚將子玉曰:「王遇晉至厚,今知楚急曹、衛而故伐之,是輕王.」

王曰:「晉侯亡在外十九年,困日久矣,果得反國,險阸盡知之,能用其民,天之所開,不可當.」

子玉請曰:「非敢必有功,願以閒執讒慝之口也.」楚王怒,少與之兵.

於是子玉使宛春告晉:「請復衛侯而封曹,臣亦釋宋.」

咎犯曰:「子玉無禮矣,君取一,臣取二,勿許.」

先軫曰:「定人之謂禮。楚一言定三國,子一言而亡之,我則毋禮.  不許楚,是棄宋也.

不如私許曹、衛以誘之,執宛春以怒楚,既戰而後圖之.」

晉侯乃囚宛春於衛,且私許復曹、衛.  曹、衛告絕於楚.  楚得臣怒,擊晉師,晉師退.

軍吏曰:「為何退?」 文公曰:「昔在楚,約退三舍,可倍乎!」楚師欲去, 得臣不肯.

[3월 병오일에 진나라의 군대가 조나라의 도성으로 들어가서 조나라의 임금을 질책했다.
그가 희부기의 말을 듣지 않고 오히려 미녀 3백 명을 화려한 수레에 태워 보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군사들에게 희부기 일족의 집에는 들어가지 말라고 명령을 내렸으니 그의 은덕에 보답한 것이 되었다.
초나라가 송나라를 포위하자 송나라는 또 진(晉)나라에게 시급함을 알렸다.

문공은 그들을 원조하고 초나라로 진공하고 싶었으나 초나라에게 일찍이 은혜를 입었으므로 진격할 수 없었다.

또 송나라를 구하고 싶지 않았으나 송나라도 일찍이 진(晉)나라에게 은혜를 베푼 적이 있었다. 난감했다.
이때 선진이 말하기를 : “ 조나라의 군왕을 잡고 조와 위나라의 땅을 송나라에게 주면

초나라는 조와 위 두 나라를 구하기에 급급할 것이고, 이러한 상황이라면 송나라를 놓아 둘 것이옵니다.”하자, 

진문공은 그의 말을 받아들였다. 초성왕도 군대를 끌고 돌아갔다.

초나라의 장군 성자옥(成子玉)이 말하기를 : “군왕께서 진나라의 군왕을 특별히 우대하셨는데

현재 우리 초나라가 조나라와 위나라를 구하기에 급하다는 것을 알면서도 고의로 그들을 공격하고 있으니

이것은 군왕을 경시하는 것이옵니다.”라고 하였다.
성왕이 말하기를 : “진(晉)나라의 군왕이 국외에서 유망(流亡)한 지 19년! 곤욕스럽고 군색했던 시기가

꽤 오래되었노라. 그러다가 마침내 환국하게 되었으니 모든 어려움과 곤란을 알고 있을 터! 그의 백성들을 능히

이용할 수 있으니 이것은 하늘이 그에게 길을 열어준 것이라, 우리는 그를 감당할 수 없을 것이다.”라고 하였다.
성자옥이 청하여 말하기를 : “ 반드시 공을 세울 것이라고는 감히 말씀을 드릴 수 없사옵니다만,

저 사악한 소인의 입을 막아버리시기를 바라옵니다.”라고 하자, 성왕이 노해서 그에게 군대를 적게 주었다.

이때 자옥이 대부 완춘(宛春)을 보내어 진나라에 통고하기를 : 

“위나라 임금을 복위하고 조나라를 보존케 하신다면 우리도 송나라를 풀어놓을 것입니다.”라고 하자, 

구범이 말하기를 : “자옥은 무례하구나. 주군께서는 하나를 취하시는데 그는 두 개를 취하려 하니,

이는 허락할 수 없을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선진이 말하기를 : “백성들을 안정시키는 것을 예(禮)라고 합니다. 초나라가 한마디 말로써 세 나라를 보존하고

당신은 한마디 말로써 그들을 멸망하게 하려고 하니 우리들이 오히려 무례한 것이오.

초나라의 요구에 응낙하지 으면 이것은 송나라를 포기하는 것이오.

비밀리에 조나라와 위나라를 회복시키려고 한다고 대답해 그들을 유인한 뒤 완춘을 포로로 잡아

초나라를 격노하게 해 결전을 치른 다음에 다시 의논하는 것이 나을 것이오.”라고 하였다.
진문공은 완춘을 위나라에 감금하고 조나라와 위나라를 회복시킨다고 비밀리에 허락했다.

조나라와 위나라는 초나라와의 관계를 단절한다고 선포했다. 자옥은 성이 나서 진나라의 군대를 공격했다.

진나라의 군대는 후퇴했다. 한 장수가 말하기를 : “왜 후퇴를 하시는 겁니까?”라고 하자. 
문공이 말하기를 : “과인이 예전에 초 나라에 있을 때 대치하게 되면 90 리를 후퇴하겠다고 약정한 적이 있었는데,

이를 위배할 수는 없지 않겠느냐?”라고 하였다.  초나라 군대도 철수하려 했으나 자옥이 찬성하지 않았다.]

 

四月戊辰,宋公、齊將、秦將與晉侯次城濮.  己巳,與楚兵合戰,楚兵敗,得臣收餘兵去.

甲午,晉師還至衡雍,作王宮于踐土.  初,鄭助楚,楚敗,懼,使人請盟晉侯.  晉侯與鄭伯盟.

[4월 무진일, 송나라의 군왕, 제나라의 장군, 진(秦)나라의 장군 등이 진나라 문공의 군대와 함께 성복에 주둔했다.
기사일, 진과 초나라의 군대가 회전했는데 초나라 군사가 패배하자 자옥은 나머지 병사들을 거두어 철수했다.
갑오일, 진나라의 군대가 형옹(衡雍)으로 돌아가서 천토(踐土)에 왕궁을 건립했다.
처음에 정나라는 초나라를 도왔는데 초나라가 패하자 두려워서 진후(晉侯)에게 사람을 보내어 맹약을 청했다.

진후는 정백(鄭伯)과 동맹을 맺었다.]

 

五月丁未,獻楚俘於周,駟介百乘,徒兵千.  天子使王子虎命晉侯為伯,賜大輅,彤弓矢百,

玈弓矢千, 秬鬯一卣,珪瓚,虎賁三百人.  晉侯三辭,然后稽首受之.

周作晉文侯命:「王若曰:父義和,丕顯文、武,能慎明德,昭登於上,布聞在下,

維時上帝集厥命于文、武.  恤朕身、繼予一人永其在位.」 於是晉文公稱伯.

癸亥,王子虎盟諸侯於王庭.  晉焚楚軍,火數日不息,文公嘆.  左右曰:「勝楚而君猶憂,何?」

文公曰:「吾聞能戰勝安者唯聖人,是以懼.  且子玉猶在,庸可喜乎!」

子玉之敗而歸,楚成王怒其不用其言,貪與晉戰,讓責子玉,子玉自殺.

晉文公曰:「我擊其外,楚誅其內,內外相應.」於是乃喜.

[5월 정미일, 초나라의 포로들을 주나라에 바쳤는데 모두 네 마리 말이 끄는 사마 수레 1백 승과 보병 1천명이었다.  

자는 왕자호(王子虎)를 보내 진후를 백(伯), 즉 제후국의 맹주 또는 패주(覇主)로 선포하고,
큰 수레와 붉은 색 화살 1백 개, 검은 색 화살 1천 개, 좋은 술 한 독, 옥 주걱 그리고 용사 3천 명을 내렸다.
진문공은 3차례 사양한 후에 절을 하고 선물을 받았다. 주나라 왕이 「진문후명(晉文侯命)」을 지었다.
왕께서 말씀하셨다. “ 의화 숙부여! 크게 빛나는 문왕, 무왕의 밝은 덕이 삼가 하늘 위에까지 알려지고

아래로 백성들에게 널리 퍼졌습니다. 그리하여 천제는 천명을 문왕, 무왕에게 내렸습니다. 과인을 돌보아주시오.

그대들이 공을 세우면 과인은 길이 왕위에 편안히 앉을 수 있을 것입니다.” 그래서 진문공은 패자로 칭해졌다.

계해일(癸亥日), 왕자 호는 왕궁에서 제후들과 동맹을 맺었다.
진나라 군대가 초 나라 군대를 불살랐다. 불은 며칠이 지나도 꺼지지 않았다.
문공이 탄식하자 좌우의 신하들이 말하기를 : “초나라에게 전승했는데 주군께서 근심하시니 무슨 까닭이옵니까?”
문공이 말하기를 : “내가 듣기로 전쟁에서 이겨도 마음이 편안한 사람은 오직 성인뿐이라고 했으니

그래서 두려운 것이오. 하물며 자옥이 아직도 살아 있는데 어찌 즐거워할 수 있다는 말인가?”라고 하였다. 

자옥은 전쟁에서 패하고 돌아갔다.
초성왕은 그가 자기의 말을 듣지 않고 공을 탐해서 진나라와 접전했다고 노여워하며 자옥을 견책했다.

그러자 자옥은 자살했다.  진문공이 기뻐하며 말하기를 : “우리들은 그 바깥을 공격했는데

초나라의 국왕은 안에서 대신을 주살했으니 안과 밖이 상응하도다.”라고 하며. 이에 곧 기뻐하였다.]

 

六月,晉人復入衛侯.  壬午,晉侯度河北歸國.  行賞,狐偃為首.  或曰:「城濮之事,先軫之謀.」

文公曰:「城濮之事,偃說我毋失信.  先軫曰『軍事勝為右』,吾用之以勝.

然此一時之說,偃言萬世之功,柰何以一時之利而加萬世功乎?是以先之.」

冬,晉侯會諸侯於溫,欲率之朝周.  力未能,恐其有畔者,乃使人言周襄王狩于河陽.

壬申, 遂率諸侯朝王於踐土.  孔子讀史記至文公, 曰「諸侯無召王」,「王狩河陽」者, 春秋諱之也.

丁丑,諸侯圍許.  曹伯臣或說晉侯曰:「齊桓公合諸侯而國異姓,今君為會而滅同姓.

曹,叔振鐸之後;晉,唐叔之後.  合諸侯而滅兄弟,非禮.」晉侯說,復曹伯.

於是晉始作三行.  荀林父將中行,先縠將右行,先蔑將左行.

[6월, 진나라가 위나라 임금을 환국시켰다. 임오일, 진 문공이 황하를 건너 북쪽으로 귀국했다.

논공행상을 하니 호언이 으뜸이었다. 어떤 사람이 말하기를 : “성복의 일은 선진의 책모였사옵니다.”라고 하자. 

문공이 말하기를 : “성복의 일을 말하자면, 호언은 과인에게 믿음을 잃지 말라고 권했었소.
선진은 ‘군대는 오직 이기는 것을 으뜸으로 삼는다.’라고 말했는데 과인은 그것으로써 승리를 획득했지.

그러나 이것은 한때의 유리한 방법이었고 호언의 말은 만세의 공적이니,

어찌 한때의 유리함으로 만세의 공적을 뛰어넘을 수 있겠소? 이것이 과인이 호언을 앞에 둔 이유요.”라고 하였다.
겨울, 진문공은 온읍에서 제후들과 만나 제후를 이끌고 주 천자를 알현하고자 했다.

그러나 역량이 충분하지 않았기 때문에 제후들이 반란을 일으킬까 두려워 사람을 보내어 주 양왕으로 하여금

하양(河陽)에 와서 순시하시라고 전하게 했다. 임신일, 제후들을 이끌고 천토에 와서 주 양왕을 알현했다.
공자(孔子)가 역사서를 읽다가 문공 부분에 이르러 말한 “ 제후는 왕을 부를 수 없다.”,

“왕이 하양을 순시하다.”라고 한 것은 『춘추(春秋)』가 이를 피한 것이다.
정축일(丁丑日), 제후들이 허(許)나라를 포위했다. 조백(曹伯)의 대신 중에 어떤 사람이 진문공에게 말하기를 : 

“제환공은 제후들을 모아 성이 다른 나라를 보존하고 있는데, 현재 주군께서는 제후들을 모아 성이 같은 나라를

멸망시키고 있사옵니다. 조(曹)나라는 숙진탁(叔振鐸)의 후예이고, 진나라는 당숙(唐叔)의 후예인데

제후들을 모아 형제 나라를 멸망시킨다면 예가 아니옵니다.”라고 하자. 진문공은 기뻐하며 조백을 복위시켰다.
이때 진나라는 좌, 우, 중 3행(三行)의 보병 부대를 처음으로 만들었다.

순임보는 중행을, 선곡(先縠)은 우행을, 선멸(先蔑)은 좌행을 통솔했다.]

 

七年,晉文公、秦繆公共圍鄭,以其無禮於文公亡過時,及城濮時鄭助楚也.

圍鄭,欲得叔瞻. 叔瞻聞之,自殺.  鄭持叔瞻告晉.  晉曰:「必得鄭君而甘心焉.」鄭恐,

乃閒令使謂秦繆公曰:「亡鄭厚晉,於晉得矣,而秦未為利.  君何不解鄭,得為東道交?」

秦伯說, 罷兵.  晉亦罷兵.

九年冬,晉文公卒,子襄公歡立.  是歲鄭伯亦卒.  鄭人或賣其國於秦,秦繆公發兵往襲鄭.

十二月,秦兵過我郊.

[문공 7년, 진문공(晉文公)과 진목공(秦穆公)은 공동으로 정나라를 포위했다.

문공이 국외로 유망하고 있을 때 정나라가 무례했으며, 성복 전쟁 당시 정나라가 초나라를 도와주었기 때문이었다.

정나라를 포위한 것은 희숙첨(姬叔瞻)을 잡기 위해서였다. 숙첨이 이 소식을 듣고 자살했다.

나라는 숙첨의 일로써 진 문공에게 고했다.

그러나 진문공이 말하기를 : “반드시 정나라의 국왕을 잡아야만 마음에 찰 것이다.”라고 하였다.
정나라의 군주 정백(鄭伯)은 두려워하며 틈을 타서 진목공에게 사자를 보내 말했다.

“정나라를 멸망시키는 것은 진(晉)나라를 증강시키는 것으로, 이것은 진(晉)나라에게는 득이 될 것이지만

진(秦)나라에게는 이익이 없을 것이옵니다. 군주께서는 왜 정나라를 놓아주어 동쪽 길의 친구로 삼지 않으십니까?”

라고 하자.​ 진목공은 기뻐하며 병사를 철수했다. 진문공도 병력을 철수하였다.

9년 겨울, 진 문공이 세상을 떠나고 아들 양공(襄公) 희환(姬歡)이 뒤를 이었다. 이해에 정나라의 군주도 죽었다.
정나라의 어떤 사람이 나라를 진(秦)나라에게 팔려고 하자 진 목공은 군대를 보내어 정나라를 습격했다.

12월, 진(秦)나라의 군대가 진(晉)나라의 교외를 지나갔다.]

襄公元年春,秦師過周,無禮,王孫滿譏之.

兵至滑,鄭賈人弦高將市于周,遇之,以十二牛勞秦師.  秦師驚而還,滅滑而去.

晉先軫曰:「秦伯不用蹇叔,反其眾心,此可擊.」 欒枝曰:「未報先君施於秦,擊之,不可.」

先軫曰:「秦侮吾孤,伐吾同姓,何德之報?」遂擊之.  襄公墨衰绖.

四月,敗秦師于殽,虜秦三將孟明視、西乞秫、白乙丙以歸.  遂墨以葬文公.

文公夫人秦女,謂襄公曰:「秦欲得其三將戮之.」公許,遣之.

先軫聞之,謂襄公曰:「患生矣.」軫乃追秦將.  秦將渡河,已在船中,頓首謝,卒不反.

後三年,秦果使孟明伐晉,報殽之敗,取晉汪以歸.

[양공 원년 봄, 진(秦)나라 군대가 주(周)나라의 도성을 지나갔다. 왕손만(王孫滿)이 그들을 무례하다고 비방했다.
진나라의 군대가 활나라에 도착하자 정나라 상인 현고가 장차 주나라의 도성에 가서 장사를 하려고 그들을 만났다.

그리고 열두 마리의 소로 그들을 위로했다. 진나라의 군대는 매우 놀라 되돌아가서 활나라를 멸망시키고 갔다.

진(晉)나라 대부 선진이 말하기를 : “진(秦)나라의 군주는 건숙(蹇叔)의 말을 듣지 않고 백성들의 마음과 위배되고

있으니 공격할 만합니다.”라고 하자. 
난지가 말하기를 : “진나라가 선군께 베푼 은혜를 아직 보답하지 않았는데 공격한다는 것은 불가합니다.”하였다.
선진이 다시 말하기를 : “진(秦)나라는 우리의 새로운 주군을 모욕하고 우리와 성이 같은 나라를 공격하고 있는데

보답할 무슨 은덕이 있다는 말씀이시오?”라고 하였다. 그리고 나서 진(晉)나라는 진(秦)나라를 공격했다.

양공은 검은 색의 상복을 입었다.

4월, 효산(殽山)에서 진나라를 패퇴시키고 진의 세 장수 맹명시, 서기술, 백을병을 포로로 잡아 돌아왔다.

그리고 검은 색 상복을 입고 문공을 안장했다. 문공의 부인은 진(秦)나라 여자로, 양공에게 말하기를 :

“ 진(秦)나라의 군주가 그의 세 장수를 죽이려고 한답니다.”라고 하자. 양공은 이를 허락하고 그들을 보내주었다.

선진이 이 소식을 듣고 양공에게 말하기를 : “우환이 생겼사옵니다.”라고 하였다. 
선진은 진의 세 장수를 쫓아갔으나 그들은 이미 황하를 건너 배 위에서 고개를 숙이며 감사인사를 올리고는

돌아오지 않았다. 3년 후, 진(秦)나라는 맹명시를 보내어 진(晉)나라를 쳤다.

효산에서의 패배를 설욕하고 진(晉)나라의 왕(汪) 땅을 취하고 돌아왔다.]

四年,秦繆公大興兵伐我,度河,取王官,封殽尸而去.  晉恐,不敢出,遂城守.

五年,晉伐秦,取新城,報王官役也.

六年,趙衰成子、欒貞子、咎季子犯、霍伯皆卒.  趙盾代趙衰執政.

七年八月,襄公卒.  太子夷皋少.  晉人以難故,欲立長君.

趙盾曰:「立襄公弟雍.  好善而長, 先君愛之;且近於秦, 秦故好也.

立善則固, 事長則順, 奉愛則孝, 結舊好則安.」

賈季曰:「不如其弟樂.  辰嬴嬖於二君,立其子,民必安之.」

趙盾曰:「辰嬴賤,班在九人下,其子何震之有!且為二君嬖,淫也.

為先君子,不能求大而出在小國,僻也.  母淫子僻,無威;陳小而遠,無援:將何可乎!」 

使士會如秦迎公子雍.  賈季亦使人召公子樂於陳。趙盾廢賈季,以其殺陽處父.

十月,葬襄公.  十一月,賈季奔翟.  是歲,秦繆公亦卒.

[양공 4년, 진 목공은 대대적으로 진(晉)나라를 침공해 황하를 건너고 왕관(王官)을 탈취하고

효산에 병사들의 무덤을 세운 다음 떠났다. 진(晉)나라는 두려워하며 감히 나오지 못하고 성을 방어하고 있었다.
5년, 진(晉)나라가 진(秦)나라를 쳐서 새로 지은 성을 탈취하고 왕관의 일을 보복했다.
6년, 조최성자(趙衰成子), 난정자(欒貞子) 즉 난지, 구계자범(咎季子犯), 곽백(霍白) 등이 모두 세상을 떠났다.

조순(趙盾)이 조최의 뒤를 이어 집정했다.
7년 8월, 양공이 세상을 떠났다. 태자 이고(夷皐)는 아직 어렸다.

진나라 사람들은 누차 환난이 있어왔던 까닭에 나이가 많은 군주를 옹립하려고 했다.

조순이 말하기를 : “ 양공의 아우님이신 옹(雍)을 세웁시다. 그는 선행을 좋아하며 나이도 많소.

뿐만 아니라 선군께서도 그분을 총애하셨소이다. 또 진(秦)나라와 가까운데 진나라는 본래 우리와 우방이었지요.

선량한 사람을 세우면 공고해지고, 나이든 사람을 섬기면 순리에 맞으며, 선군께서 총애하신 분을 시봉하는 것은

효가 되며, 오랫동안 잘 지낸 나라와 손을 잡으면 안정이 될 것이오.”라고 하자.
가계(賈季)가 말하기를 : “그분의 아우 공자 낙(樂)을 세우느니만 못하오.

신영(辰嬴)은 두 군주의 총애를 받았으니 그녀의 아들을 옹립하면 백성들은 반드시 안심할 것이오.”라고 하였다.
조순이 말하기를 : “신영은 비천해 그 지위가 아홉 사람 다음에 있소. 그런데 그의 아들에게 무슨 위망이 있겠소!
또 그녀가 두 군주의 총애를 받은 것은 음란한 일이며, 선군의 아들로서 큰 것을 구하지 않고 작은 나라에

거처하고 있는 것은 고립된 것이오. 모친이 음란하고 그 아들은 고립되어 있으니 어찌 위망이 있을 수 있겠소!

또 진(陳)나라는 작고도 멀어 도움이 되지 않는데 장차 어찌 가능하겠소?”라고 하였다.
그래서 사회(士會)를 진(秦)나라에 보내어 공자 옹을 맞으려고 했다.

가계도 사람을 진(陳)나라에 보내어 공자 낙을 부르게 했다. 조순이 가계를 폐출했다.

그가 양거보(陽處父)를 살해했기 때문이었다.
10월, 양공을 안장했다. 11월, 가계가 적(狄)나라로 도주했다. 이해에 진목공도 세상을 떠났다.]

 

靈公元年四月,秦康公曰:「昔文公之入也無衛,故有呂、郤之患.」乃多與公子雍衛.

太子母繆嬴日夜抱太子以號泣於朝, 曰 :「先君何罪?其嗣亦何罪?舍適而外求君, 將安置此 ?」

出朝, 則抱以適趙盾所,頓首曰:「先君奉此子而屬之子,

曰『此子材,吾受其賜;不材,吾怨子』. 今君卒,言猶在耳,而棄之,若何?」

趙盾與諸大夫皆患繆嬴,且畏誅,乃背所迎而立太子夷皋,是為靈公.  發兵以距秦送公子雍者.

趙盾為將,往擊秦,敗之令狐.  先蔑、隨會亡奔秦.

秋,齊、宋、衛、鄭、曹、許君皆會趙盾,盟於扈,以靈公初立故也.

[영공(靈公) 원년 4월, 진 강공(秦康公)이 말하기를 “예전에 문공이 환국할 때 경호 인원이 없었기 때문에

여성과 극예의 환란이 있었다.”라고 하면서, 공자 옹에게 많은 경호 인원을 붙여주었다.
태자 이고의 모친 목영(穆嬴)은 조정에서 낮이나 밤이나 태자를 껴안고 울면서 말하기를 : 

“ 선군께서 무슨 죄가 있으셨는가? 또 그의 아들이 무슨 죄가 있는가?  적자를 버리고 밖에서 주군을 찾아온다면

이를 장차 어찌할 것인가?”라고 하면서, 궁궐을 나와 태자를 안고 조순의 처소로 갔다.
조순에게 머리를 숙이고 말하기를 : “ 선군께서 이 아이를 그대에게 맡기면서 말씀하셨지요.

‘이 아이가 쓸모 있는 재목이 되면 내 그대의 은혜에 감사할 것이오. 그렇지 않으면 그대를 원망할 것이오.’

지금 선군께서 돌아가셨으나 그 말씀이 귀에 쟁쟁한데 그대는 오히려 이를 버리려 하니 어떻게 하실 셈이오?”하자.
조순과 대부들은 모두 목영을 두려워했다. 뿐만 아니라 견책을 받을까 염려해 맞아들이려 하던 공자 옹을 버리고

태자 이고를 옹립했다. 이 사람이 곧 영공(靈公)이다.

그리고 군대를 보내어 공자 옹을 호송하고 있는 진(秦)나라 호위군을 제지시켰다.

조순이 장군이 되어 진나라의 군대를 공격하고 영호(令狐)에서 그들을 패퇴시켰다.

선멸(先蔑)과 사회(士會)는 진(秦)나라로 도주했다.
가을, 제, 송, 위(衛), 정, 조(曹) 등 각국의 군주와 조순이 회합해 호읍(扈邑)에서 동맹을 맺었다.

영공이 막 왕위에 올랐기 때문이었다.]

 

四年,伐秦,取少梁.  秦亦取晉之郩.

六年,秦康公伐晉,取羈馬.  晉侯怒,使趙盾、趙穿、郤缺擊秦,大戰河曲,趙穿最有功.

七年,晉六卿患隨會之在秦,常為晉亂,乃詳令魏壽餘反晉降秦.  秦使隨會之魏,因執會以歸晉.

八年,周頃王崩, 公卿爭權, 故不赴.  晉使趙盾以車八百乘平周亂而立匡王.  是年, 楚莊王初即位.

十二年,齊人弒其君懿公.

[영공 4년, 진(秦)나라를 쳐서 소량(少梁)을 탈취했다. 진(秦)나라도 진(晉)의 효읍(郩邑)을 탈취했다.

6년, 진강공이 진(晉)나라를 공격해 기마(羈馬) 지역을 탈취했다.
영공이 성이 나서 조순과 조천(趙穿), 극결(郤欠)을 보내어 진나라를 치게 해 하곡(河曲)에서 크게 싸웠다.

조천에게 가장 큰 공이 돌아갔다.
7년, 진(晉)나라의 육경(六卿)은 사회가 진(秦)나라에 있으면서 반란을 획책할까 우려해

위수여(魏壽餘)로 하여금 진(晉)나라에 반란한 척하며 진(秦)나라에 투항하게 했다.

진(秦)나라가 사회를 보냈는데 그가 위읍(魏邑)에 도착하자 위수여는 즉시 그를 붙잡아 진(晉)나라로 돌아왔다.
8년, 주 경왕(周頃王)이 세상을 떠나자 공경대부들이 권력을 다투느라 상을 치르지도 못했다.

진나라는 조순에게 병거 8백승을 거느리고 가서 주 왕실의 내란을 평정하게 하고 광왕(匡王)을 옹립했다.

이해에 초 장왕이 왕위에 올랐다.
12년, 제나라 사람들이 그들의 군주 의공(懿公)을 시해했다.]

 

十四年,靈公壯, 侈, 厚斂以彫墻.  從臺上彈人, 觀其避丸也. 宰夫胹熊蹯不熟, 靈公怒, 殺宰夫,

使婦人持其尸出棄之,過朝.  趙盾、隨會前數諫,不聽;已又見死人手,二人前諫.

隨會先諫,不聽.  靈公患之,使鉏麑刺趙盾.

盾閨門開,居處節,鉏麑退,嘆曰:「殺忠臣,棄君命,罪一也.」遂觸樹而死.

初,盾常田首山,見桑下有餓人.  餓人,示瞇明也.  盾與之食,食其半.

問其故,曰:「宦三年,未知母之存不,願遺母.」盾義之,益與之飯肉.

已而為晉宰夫,趙盾弗復知也.

九月,晉靈公飲趙盾酒,伏甲將攻盾.  公宰示瞇明知之,恐盾醉不能起,

而進曰:「君賜臣,觴三行可以罷.」

欲以去趙盾,令先,毋及難.  盾既去,靈公伏士未會,先縱齧狗名敖.  明為盾搏殺狗.

盾曰:「棄人用狗,雖猛何為.」然不知明之為陰德也.

已而靈公縱伏士出逐趙盾,示瞇明反擊靈公之伏士,伏士不能進,而竟脫盾.

盾問其故,曰:「我桑下餓人.」問其名,弗告.  明亦因亡去.  盾遂奔,未出晉境.

乙丑,盾昆弟將軍趙穿襲殺靈公於桃園而迎趙盾.  趙盾素貴,得民和;

靈公少,侈,民不附,故為弒易.  盾復位.  晉太史董狐書曰「趙盾弒其君」,以視於朝.

盾曰:「弒者趙穿,我無罪.」 太史曰:「子為正卿,而亡不出境,反不誅國亂,非子而誰?」

孔子聞之,曰:「董狐,古之良史也,書法不隱.  宣子,良大夫也,為法受惡.  惜也,出疆乃免.」

趙盾使趙穿迎襄公弟黑臀于周而立之, 是為成公.  成公者, 文公少子, 其母周女也. 壬申,朝于武宮.

[영공 14년, 영공이 성장하자 생활이 사치스럽고 심하게 착취해 담벽에까지 채색으로 장식할 정도였다.

게다가 무대에서 사람에게 탄환을 쏘게 하고, 또한 사람이 그것을 피하는 것을 보고 즐거워했다.

궁중 요리사에게 곰발바닥 요리를 덜 구웠다고 화를 내며 그를 죽이고는 그의 부인으로 하여금 그의 시신을 들고

나가버리라 했다. 조순과 사회가 이전에 수차례나 간했으나 영공은 듣지 않았으며, 또 오래지 않아서 

죽은 사람의 손을 보게 되자 두 사람이 나아가 간했다. 사회가 먼저 간언했으나 영공은 듣지 않았다.

영공은 그들을 두려워해 역사(力士) 서마(鉏麑)를 시켜 조순을 죽이도록 했다.

조순의 내실 문은 열려 있었고 처소는 절제가 있었다.
그래서 서마는 물러나서 탄식하기를 : “ 충신을 죽이는 것과 주군의 명령을 어기는 것은 그 죄는 같다.”라고 하면서

스스로 나무에 부딪쳐서 죽었다. 일찍이 조순은 자주 수산(首山)에 사냥을 가곤 했다.

하루는 뽕나무 아래에서 기아에 허덕이는 사람을 보았다. 그 사람은 시미명(示眯明)이었다.
조순이 그에게 먹을 것을 주자 그가 반 정도만을 먹었다. 그 이유를 물었다.
그가 말하기를 : “바깥에서 관직생활 3년이 되었는데 지금 어머니께서 어디에 계시는지 알지를 못합니다.

남겨 놓아 어머니께서 드시도록 해야겠습니다.”라고 하였다. 
조순은 그가 의로운 사람이라 생각하고 그에게 먹을 것과 고기를 더 많이 남겨 놓았다.
그리 오래 지나지 않아서 그 사람이 진영공의 주방장이 되었으나 조순은 그를 알아보지 못했다.
9월, 진영공이 조순을 청해 술을 먹인 후 병사를 매복시켜 놓고 그를 살해하려고 했다.

영공의 주방장 시미명이 이 사실을 알았다. 그는 조순이 술에 취해서 일어서지 못할까 우려해 앞으로 나아가서

말하기를 : “주군께서 저에게 술 석 잔을 마셔도 좋다고 하셨습니다.”라고 하였다. 
그래서 조순으로 하여금 먼저 떠나게 해 화가 미치지 않도록 했다.

조순이 이미 떠나자 매복한 병사들은 이 사실을 깨닫지 못하고 우선 무서운 맹견 한 마리를 풀었다.

시미명이 조순을 위해 개를 죽였다.

조순이 말하기를 : “사람을 버리고 개를 쓰다니. 비록 사납기는 하나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라고 하였다.
그러나 조순은 시미명이 은연중에 자신을 보호해 준 은덕을 알지 못했다.
영공의 지휘에 따라 매복해 있던 병사들이 조순을 추격하자, 시미명이 그들에 반격을 가하며,

그들의 추격을 저지해 마침내 조순이 도주할 수 있게 했다. 조순이 시미명에게 자신을 구해 준 이유를 물었다.

시미명이 말하기를 : “저는 뽕나무 아래에서 배고파 죽어가던 그 사람입니다.”라고 하였다.
조순이 이름을 물어도 말해 주지 않았다. 시미명도 기회를 보아 도주했다.

조순이 도주했으나 아직 진나라의 경계를 벗어나지는 못했다.

을축일, 조순의 아우 조천이 도원(桃園)에서 영공을 습격해 시해하고는 조순을 맞이했다.
조순은 평소 고귀하게 행동하는 사람이라 민심을 얻었고, 영공은 나이도 적은데 사치해 백성들이

그를 따르지 않았기 때문에 그를 시해하기가 용이했던 것이다. 조순은 원래의 관직을 회복했다.
진(晉)나라의 태사 동호(董狐)가 “조순은 그의 주군을 시해했다.”라고 쓰고, 그것을 조정에서 모두에게 보였다.

조순은 말하기를 : “주군을 시해한 것은 조천이다. 나는 죄가 없다.”라고 하자. 
태사가 말하기를 : “당신은 수석 대신으로서 도주를 했으나 국경을 벗어나지 않았고,

돌아와서도 난을 일으킨 사람을 주살하지 않으니 당신이 아니면 누구란 말이요?”라고 하였다. 
공자가 이 말을 듣고 말하기를 : “동호는 옛날의 훌륭한 사가(史家)로서 그의 역사 기록원칙은 숨기지 않는 

것이었다. 조선자(趙宣子)는 훌륭한 대부로서 원칙을 준수하다가 오명을 썼다. 안타깝도다.

만약 국경을 벗어났더라면 오명을 면할 수 있었을 것이다.”라고 하였다.
조순은 조천을 주나라의 도성으로 보내어 양공의 아우 흑둔(黑臀)을 영접하게 했으니, 이 사람이 성공(成公)이다.

성공은 문공의 작은아들로, 그의 모친은 주 왕실의 여자였다.

임신일(壬申日), 그는 무궁(武宮)으로 가서 조종(朝宗)을 배알하였다.]

 

成公元年,賜趙氏為公族.  伐鄭,鄭倍晉故也.

三年,鄭伯初立,附晉而棄楚.  楚怒,伐鄭,晉往救之. 

六年,伐秦,虜秦將赤.

七年,成公與楚莊王爭彊,會諸侯于扈.  陳畏楚,不會.

晉使中行桓子伐陳,因救鄭,與楚戰,敗楚師.  是年,成公卒,子景公據立.

[성공 원년, 상으로 조씨를 공족대부(公族大夫)에 임명했다. 정나라를 정벌했다. 진나라를 배반했기 때문이다.
3년, 정나라의 군주가 갓 왕위에 올라 진(晉)나라를 가까이하고 초나라를 버렸다.

초나라 왕이 화가 나서 정나라를 공격하자 진나라가 그들을 구원했다.
6년, 진(秦)나라를 쳐서 진나라의 장군 적(赤)을 포로로 잡았다.
7년, 성공과 초 장왕이 강함을 다투며 호읍에서 제후들과 회합했다.

진(陳)나라는 초나라를 두려워해 회맹에 참가하지 않았다.

진(晉)나라의 군주가 중항환자(中行桓子), 즉 순임보를 보내어 진나라를 공격했다.

그는 정나라를 구원하려고 초나라와 싸워 초나라의 군대를 패퇴시켰다.
이해에 성공이 세상을 떠나고 그의 아들 경공(景公) 거(據)가 즉위했다.]

 

景公元年春,陳大夫夏徵舒弒其君靈公.

二年,楚莊王伐陳,誅徵舒.

三年,楚莊王圍鄭,鄭告急晉.  晉使荀林父將中軍,隨會將上軍, 趙朔將下軍,

郤克、欒書、先縠、韓厥、鞏朔佐之.

六月,至河.  聞楚已服鄭,鄭伯肉袒與盟而去,荀林父欲還.

先縠曰:「凡來救鄭, 不至不可,將率離心.」卒度河.

楚已服鄭,欲飲馬于河為名而去.  楚與晉軍大戰.  鄭新附楚,畏之,反助楚攻晉.

晉軍敗,走河,爭度,船中人指甚眾.  楚虜我將智罃.

歸而林父曰:「臣為督將,軍敗當誅,請死.」景公欲許之.

隨會曰:「昔文公之與楚戰城濮,成王歸殺子玉,而文公乃喜.

今楚已敗我師,又誅其將,是助楚殺仇也.」乃止.

四年,先縠以首計而敗晉軍河上,恐誅,乃奔翟,與翟謀伐晉.  晉覺,乃族縠.  縠,先軫子也.

五年,伐鄭,為助楚故也.  是時楚莊王彊,以挫晉兵河上也.

[경공 원년 봄, 진(陳)나라의 대부 하징서(夏徵舒)가 그의 군주 영공(靈公)을 시해했다.

2년, 초장왕이 진(陳)나라를 정벌해 하징서를 주살했다.
3년, 초장왕이 정나라를 포위하자 정나라는 진(晉)나라에 시급함을 알렸다.

진나라는 순임보로 하여금 중군(中軍)을, 사회로 하여금 상군을, 조삭(趙朔)으로 하여금 하군을 통솔하게 했고,

극극(郤克), 난서(欒書), 선곡(先縠), 한궐(韓厥), 공삭(鞏朔) 등으로 하여금 그들을 보좌하게 했다.
6월, 그들은 황하에 도착했다. 초나라의 군대가 이미 정나라를 항복시켰으며 정나라의 군주가 옷을 벗어

어깨를 드러내고 초 나라와 동맹을 맺으러 갔다는 소식을 듣고 순임보는 군대를 돌려 귀국하려고 했다.

선곡이 말하기를 : “어쨌든 정나라를 구원하러 왔는데 가보지 않아서는 안 될 것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군사들의 마음이 흩어질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그리고 마침내 황하를 건넜다.

초나라는 이미 정나라를 항복시키고 황하 강변에서 말에게 물을 먹이며 위명을 뽐내려고 생각했다.
그래서 초나라는 진나라와 크게 싸웠다. 정나라는 최근 초나라에 복속되었기 때문에 오히려 초나라의 군대를 

도와서 진나라의 군대를 공격했다. 진나라가 패전한 후 황하로 도주해 배를 다투어 타며 강을 건넜다.

배 안에는 사람들의 잘라진 손가락이 매우 많았다. 초나라의 군대는 진나라의 장군 지앵(智罃)을 포로로 잡았다.
돌아온 후 순임보가 말하기를 :“소신은 전군을 통솔하는 대장으로 군대가 패했으니 응당 처벌받아야 할 것이옵니다.

청컨대 죽여주시옵소서.”라고 하자. 경공이 이를 허락하려고 했다.

그러자 사회가 말하기를 : “ 예전에 문공께서 초나라와 성복에서 싸우셨을 때 초성왕이 돌아가서 자옥을 죽이자

문공께서는 기뻐하셨사옵니다. 지금 초나라가 이미 우리의 군대를 패퇴시켰는데 또 우리가 우리의 장수를 죽인다면

이것은 초나라를 돕는 일이 되옵니다.”라고 하자. 경공은 그만 두었다.
4년, 선곡은 먼저 황하 강변으로 가자고 의견을 내었다가 패했기 때문에 죽음을 당할까 두려워서

적(狄)나라로 도주했다가 적나라와 상의해 진(晉)나라를 치기로 했다.

진나라에서 이를 알고 선곡의 모든 친족을 주살했다. 선곡은 선진의 아들이다.
5년, 정나라를 공격했다. 초나라를 도왔기 때문이다. 이때 초장왕은 강대해져 있었다.

황하 강변에서 진나라의 군대를 패퇴시켰기 때문이다.]

 

六年,楚伐宋, 宋來告急晉, 晉欲救之, 伯宗謀曰:「楚, 天方開之, 不可當.」乃使解揚紿為救宋.

鄭人執與楚, 楚厚賜, 使反其言, 令宋急下.  解揚紿許之, 卒致晉君言.  楚欲殺之, 或諫, 乃歸解揚.

七年,晉使隨會滅赤狄.

八年,使郤克於齊.  齊頃公母從樓上觀而笑之.

所以然者,郤克僂,而魯使蹇,衛使眇,故齊亦令人如之以導客.

郤克怒,歸至河上,曰:「不報齊者,河伯視之!」至國,請君,欲伐齊.

景公問知其故,曰:「子之怨,安足以煩國!」弗聽.  魏文子請老休,辟郤克,克執政.

九年,楚莊王卒.  晉伐齊,齊使太子彊為質於晉,晉兵罷.

[경공 6년, 초나라가 송나라를 공격하자 송나라는 진(晉)나라에 시급함을 알렸다. 진나라는 송을 구원하려고 했다.
그때 백종이 계책을 올리기를 : “초나라는 하늘이 길을 열어주고 있으니 감당할 수 없사옵니다.”라고 하였다.
그래서 해양(解揚)으로 하여금 송나라를 구하려 한다고 유언비어를 퍼뜨리게 했다.

정나라 사람이 그를 잡아 초나라 군대로 보냈다. 초나라의 군대는 그에게 매우 많은 재물을 주며

그에게 반대의 말을 하게 해 송나라로 하여금 빨리 투항하게 할 셈이었다.

해양은 가짜로 응답한척 했으나 국은 진나라의 주군의 말을 송나라에 전했다.

초나라의 군대는 그를 죽이려고 했으나 어떤 사람이 간언해서 해양을 석방해 돌려보냈다.

7년, 진나라는 사회를 적적(赤狄)에 사신으로 보냈다.
8년, 극극을 제나라에 사신으로 보냈다. 제경공(齊頃公)의 모친이 누각 위에서 사신들을 보고 웃었다.

웃는 이유인즉 극극이 꼽추였고 노나라의 사신은 절름발이였으며 위(衛)나라의 사신은 애꾸눈이었기 때문인데,

그래서 제경공도 또한 이 사신들과 같은 비정상적인 사람을 택했던 것이다.
극극은 노하여 황하 강변으로 돌아와 말하기를 : “반드시 제나라에 보복할 것이다. 하백께서 보고 계신다!” 하였다.

도성으로 돌아와서 진나라의 군주에게 제나라를 공격하기를 청했다. 경공은 그 이유를 물어 알고 난 뒤 말하기를 :

 “그대의 원한으로 어찌 나라를 번거롭게 하겠소!”라고 하며, 그의 말을 듣지 않았다.
위문자(魏文子)가 연로해 은퇴하기를 간청하며 극극을 추천했다. 극극은 이로써 집권하게 되었다.
9년, 초 장왕이 세상을 떠났다. 진(晉)나라가 제나라를 공격하자 제나라는 태자 강(彊)을 진나라에 인질로 

삼게 했다. 그러자 진나라의 군대가 물러났다.]

 

十一年春, 齊伐魯, 取隆.  魯告急衛, 衛與魯皆因郤克告急於晉.

晉乃使郤克、欒書、韓厥以兵車八百乘與魯、衛共伐齊.

夏,與頃公戰於砹傷困頃公.  頃公乃與其右易位,下取飲,以得脫去.  齊師敗走,晉追北至齊.

頃公獻寶器以求平,不聽.  郤克曰:「必得蕭桐姪子為質.」

齊使曰:「蕭桐姪子, 頃公母;頃公母猶晉君母, 柰何必得之?不義, 請復戰.」晉乃許與平而去.

楚申公巫臣盜夏姬以奔晉,晉以巫臣為邢大夫.

[경공 11년 봄, 제나라가 노나라를 공격해 융읍(隆邑)을 탈취했다.

노나라가 위(衛)나라에 시급함을 알리니 위나라와 노나라가 극극을 거쳐 진(晉)나라에게 시급함을 알렸다.
진나라는 극극과 난서, 한궐을 보내어 병거 8백승으로써 노나라, 위나라와 공동으로 제나라로 진격했다.
여름, 안(鞍)이라는 땅에서 제 경공과 교전해 그에게 상처를 입히고 곤란을 당하게 했다.

경공은 그의 시위병과 위치를 바꾸고 우물물을 마시며 겨우 탈출했다.
제나라의 군대가 도주에 실패하자 진나라의 군대는 북쪽 제나라까지 쫓아갔다.

경공은 보물과 옥을 바치며 강화를 청했으나 진나라의 군대는 듣지 않았다.

극극이 말하기를 : “반드시 소동(蕭桐)의 질녀를 인질로 삼아야 할 것이다!”라고 하자. 

제나라의 사신이 말하기를 : “소동의 질녀는 경공의 모친이요. 경공의 모친은 진나라의 주군의 모친과 같은데
어떻게 그녀를 인질로 요구하십니까? 이치에 닿지 않습니다. 다시 결전을 치릅시다.”라고 하였다. 

그러자 진나라는 제나라와 강화를 맺고 떠났다.

초나라의 신공무신이 하희(夏姬)를 훔쳐 진(晉)나라로 도망해 진나라는 무신을 형(邢) 지역의 대부로 삼았다.]

 

十二年冬,齊頃公如晉,欲上尊晉景公為王,景公讓不敢.

晉始作六(卿)[軍],韓厥、鞏朔、趙穿、荀騅、趙括、趙旃皆為卿.  智罃自楚歸.

十三年,魯成公朝晉,晉弗敬,魯怒去,倍晉.  晉伐鄭,取氾. 

十四年,梁山崩.  問伯宗,伯宗以為不足怪也.

十六年,楚將子反怨巫臣,滅其族.  巫臣怒,遺子反書曰:「必令子罷於奔命!」

乃請使吳,令其子為吳行人,教吳乘車用兵.  吳晉始通,約伐楚.

十七年, 誅趙同、趙括, 族滅之.

韓厥曰:「趙衰、趙盾之功豈可忘乎?柰何絕祀!」乃復令趙庶子武為趙後, 復與之邑.

十九年夏,景公病,立其太子壽曼為君,是為厲公.  後月餘,景公卒.

[경공 12년 겨울, 제경공이 진나라에 와서 진경공을 왕으로 삼으려고 했으나 경공은 사양해 받아들이지 않았다.
진나라가 비로소 6군(六軍)을 만들고, 한궐, 공삭, 조천, 순추(荀騅), 조괄(趙括), 조전(趙旃)을 경(卿)으로 삼았다.

포로로 있던 지앵이 초나라에서 귀국했다.
13년, 노성공이 진나라를 방문했으나 진나라가 그를 존경하지 않았기 때문에 노성공은 화가 나서 떠나버렸고,

그는 진나라를 배반했다. 진나라가 정나라를 공격해 범(氾) 땅을 빼앗았다.
14년, 양산(梁山)이 붕괴되었다. 진나라의 군주가 백종에게 물었으나 백종은 괴이할 것이 없다고 생각했다.
16년, 초나라의 장수 자반(子反)이 신공무신에게 반감을 가져 그의 종족을 몰살시켰다.
무신은 화가 나서 자반에게 서신을 보냈다. “반드시 그대는 쫓겨 다니다가 죽게 할 것이다!”
그리고 오나라에 사신으로 나가기를 청해 그의 아들을 오나라의 행인(行人)으로 있게 했으며

오나라의 수레를 몰고 용병하는 방법을 배우도록 했다.

오나라와 진나라가 바야흐로 왕래를 하게 되어 공동으로 초나라를 공격하기로 약정했다.
17년, 진나라는 조동(趙同)과 조괄을 주살하고 그의 집안을 멸족시켰다.

한궐이 말하기를 : “조최와 조순의 공로를 어찌 잊을 수 있겠는가?

어찌 그의 제사를 단절시킬 수 있겠는가?”라고 하였다.

그래서 다시 조씨의 서자 조무(趙武)를 조씨의 후손으로 삼고 다시 그에게 봉읍을 주었다.
19년 여름, 경공의 병이 깊어 태자 수만(壽曼)을 주군으로 세웠다. 이 사람이 여공(厲公)이다.

그 후 1개월쯤 지나자 경공은 세상을 떠났다.]

 

厲公元年,初立,欲和諸侯,與秦桓公夾河而盟. 歸而秦倍盟,與翟謀伐晉.

三年,使呂相讓秦,因與諸侯伐秦.  至涇,敗秦於麻隧,虜其將成差.

五年,三郤讒伯宗,殺之.  伯宗以好直諫得此禍,國人以是不附厲公.

[여공 원년, 여공은 갓 즉위해 제후들과 잘 지내려고 진 환공(秦桓公)과 황하를 사이에 두고 회맹했다.
귀국하자마자 진(秦)나라가 동맹을 깨고 적나라와 상의해 진(晉)나라를 치고자 했다.

3년, 여상(呂相)을 진(秦)나라에 보내어 질책하고 제후들과 함께 진나라를 쳤다.
경하(涇河)에 도착하자 마수(麻隨)에서 진나라의 군대를 패퇴시키고 진나라의 장수 성차(成差)를 포로로 잡았다.
5년, 세 명의 극씨가 여공에게 백종을 참언해 그를 죽였다.

백종은 직언과 간언을 좋아했기 때문에 이로써 화를 입은 것이다. 백성들은 그리하여 여공을 따르지 않았다.]

 

六年春,鄭倍晉與楚盟,晉怒.  欒書曰:「不可以當吾世而失諸侯.」乃發兵.

厲公自將,五月度河.  聞楚兵來救,范文子請公欲還.

郤至曰:「發兵誅逆,見彊辟之,無以令諸侯.」遂與戰.

癸巳,射中楚共王目,楚兵敗於鄢陵.  子反收餘兵,拊循欲復戰,晉患之.

共王召子反,其侍者豎陽穀進酒,子反醉,不能見.  王怒,讓子反,子反死.  王遂引兵歸.

晉由此威諸侯,欲以令天下求霸.  厲公多外嬖姬,歸,欲盡去群大夫而立諸姬兄弟.

寵姬兄曰胥童,嘗與郤至有怨,及欒書又怨郤至不用其計而遂敗楚,乃使人閒謝楚.

楚來詐厲公曰:「鄢陵之戰,實至召楚,欲作亂,內子周立之.  會與國不具,是以事不成.」

厲公告欒書.  欒書曰:「其殆有矣!願公試使人之周微考之.」果使郤至於周.

欒書又使公子周見郤至,郤至不知見賣也.  厲公驗之,信然,遂怨郤至,欲殺之.

[여공 6년 봄, 정나라가 진나라를 배반하고 초나라와 동맹을 맺자 여공은 화가 났다.
난서가 말하기를 : “우리들의 이 세대에서 제후들의 신뢰를 잃어버릴 수가 없사옵니다.”라고 하였다.

그리고 병사를 일으켰다. 여공은 스스로가 원수가 되어 5월에 황하를 건넜다.

초 나라 군대가 와서 정나라를 구하려 한다는 소식을 듣고 범문자(范文子)가 군대를 돌리기를 청했다.
극지(郤至)가 말하기를 : “군사를 일으켜 반역의 무리를 주살하고자 하는데 강한 적을 만났다고 해서 피한다면

제후들을 명령할 수가 없게 됩니다.”라고 하였다. 그리고 마침내 초나라와 교전했다.

계사일(癸巳日), 화살로 초공왕(楚共王)의 눈을 쏘아 맞히자, 초나라의 군대는 언릉(鄢陵)에서 패배했다.
자반(子反)이 남은 병사들을 거두어 위무하고 다시 접전을 하고자 했으나 진나라는 이것을 우려했다.
공왕이 자반을 소환했는데 마침 자반의 시종 수양곡(豎陽穀)이 술을 올려 자반은 술에 취했기 때문에

공왕을 알현할 수 없었다.  공왕은 노발대발해 자반을 질책했다. 자반은 자살했다. 공왕은 군대를 이끌고 돌아갔다.

진나라는 이 이후로 제후들을 위협해 패권을 잡게 되었다. 여공에게는 총애하는 첩이 많았다.

언릉에서 귀국한 후 모든 대부들을 면직시키고 첩의 형제들을 임용하려고 했다.
어떤 첩의 오빠는 서동(胥童)이라고 했는데 일찍이 극지와 원한이 있었다.

또 난서도 극지가 그의 계획을 받아들이지 않고 초나라의 군대를 패배시킨 일에 대해서 원한을 가지고 있었다.

그래서 사람을 보내 기회를 만들어서 몰래 초나라 왕에게 사죄를 했다. 초나라 왕은 사람을 보내어 여공을 속였다. “

언릉의 전쟁은 실은 극지가 초나라의 군대를 불러 전란을 만들려고 한 것이며,

그는 공자 주(周)를 맞아 옹립하려 했소이다. 마침 다른 동맹국이 없어서 이 일이 성사되지 않았던 것이오.”
여공이 난서에게 묻자 난서가 말하기를 : “이건 거의 있을 만한 일이옵니다!

주군께서 시험 삼아 주나라 도성으로 사람을 보내어 암암리에 그를 살펴보게 하기를 원하옵니다.”라고 하였다. 

그러자 여공은 극지를 주나라로 보냈다.

난서는 또 공자 주로 하여금 극지를 만나게 했으나 극지는 속았다는 사실을 몰랐다.
여공이 생각해 보니 그것은 사실이었다. 그래서 극지를 미워하게 되어 그를 죽이려고 했다.]

 

八年,厲公獵,與姬飲,郤至殺豕奉進,宦者奪之.  郤至射殺宦者.

公怒,曰:「季子欺予!」將誅三郤,未發也.  郤鉤欲攻公,曰:「我雖死,公亦病矣.」

郤至曰:「信不反君,智不害民,勇不作亂.  失此三者,誰與我?我死耳!」

十二月壬午,公令胥童以兵八百人襲攻殺三郤.

胥童因以劫欒書、中行偃于朝,曰:「不殺二子,患必及公.」

公曰:「一旦殺三卿,寡人不忍益也.」 對曰:「人將忍君.」

公弗聽,謝欒書等以誅郤氏罪:「大夫復位.」 二子頓首曰:「幸甚幸甚!」公使胥童為卿.

閏月乙卯,厲公游匠驪氏,欒書、中行偃以其黨襲捕厲公,囚之,殺胥童,

而使人迎公子周于周而立之,是為悼公.

[여공 8년, 여공이 사냥을 나가서 희첩과 술을 마셨는데 극지가 산돼지를 잡아 바쳤다.

여공을 모시는 자가 그것을 가로채자, 극지가 그 자를 쏘아 죽였다.

여공이 크게 화를 내며 말하기를 : “계자(季子)가 과인을 속였도다!”라고 하였다. 

그리고는 세 사람의 극씨를 죽이려고 했으나 아직 손을 쓰지 않았다.
극의(郤錡)가 여공을 공격하려고 하면서 말하기를 : “내 비록 죽을지 모르나 그도 재앙을 만날 것이다.”라고 하자. 
극지가 말하기를 : “신의는 주군을 배반하지 않는 것이요, 지혜는 백성을 해롭게 하지 않는 것이며,

용맹은 난을 일으키지 않는 것입니다. 이 세 가지를 잃게 되면 누가 나와 함께 하겠소?

나는 차라리 죽을 뿐이오.”라고 하였다.
12월, 여공은 서동에게 병사 8백 명을 주어 세 극씨를 습격하게 했다.

서동은 이 때문에 조정에서 난서와 중항언(中行偃)을 위협하며 말하기를 : 

“그들 두 사람을 죽이지 않는다면 반드시 당신들에게 우환이 미칠 것이오.” 라고 하였다.
여공이 말하기를 : “하루아침에 세 사람의 대신을 죽인다니, 과인은 차마 더 이상 죽일 수는 없소.”라고 하자. 

서동이 다시 말하기를 : “사람들은 장차 주군을 잔혹하게 해할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그러나 여공은 듣지 않았다.
그리고 난서 등에게 감사하며 극씨의 죄를 물으면서 말하기를 : “대부들의 직위를 회복시키는 바이오.”라고 하자. 

두 사람은 머리를 조아리며 말하기를 : “매우 다행이옵니다.”라고 하였다. 여공은 서동을 경(卿)으로 임명했다.

윤달 을묘일, 여공은 장려씨(匠驪氏)의 집으로 가서 놀았는데 난서와 중항언이 그들의 무리를 보내어

여공을 습격하여 체포하게 했다. 그리고 그를 구금시키고 서동을 죽였으며,

사람을 주나라의 도성에 보내어 공자 주를 영접하게 해 그를 옹립했다. 이 사람이 도공(悼公)이다.]

 

悼公元年正月庚申,欒書、中行偃弒厲公,葬之以一乘車.

厲公囚六日死,死十日庚午,智罃迎公子周來,至絳,刑雞與大夫盟而立之,是為悼公.

辛巳, 朝武宮.  二月乙酉, 即位. 悼公周者,, 其大父捷, 晉襄公少子也, 不得立, 號為桓叔, 

桓叔最愛.  桓叔生惠伯談,談生悼公周.  周之立,年十四矣.

悼公曰:「大父、父皆不得立而辟難於周,客死焉.  寡人自以疏遠, 毋幾為君.  今大夫不忘文、

襄之意而惠立桓叔之後,賴宗廟大夫之靈,得奉晉祀,豈敢不戰戰乎?大夫其亦佐寡人!」

於是逐不臣者七人,修舊功,施德惠,收文公入時功臣後.  秋,伐鄭.  鄭師敗,遂至陳.

[도공 원년 정월 경신일(庚申日), 난서와 중항언이 여공을 죽이고 한 량의 수레로 그를 매장했다.

여공은 구금된 지 6일 만에 죽임을 당한 것이다. 

사후 열흘이 지난 경오일(庚午日)에 지앵이 공자 주를 맞아들여 강성(絳城)으로 왔다.

닭을 잡아 대부들과 상의한 후 그를 옹립했다. 이 사람이 곧 도공인 것이다.

신사일(辛巳日), 무궁(武宮)으로 가서 참배하고, 2월 을유일(乙酉日)에 즉위했다.
도공 주(周)의 조부는 희첩으로 진양공의 작은아들이라 왕위를 이을 수 없기 때문에 환숙(桓叔)이라고 불렸다.

그는 양공에게 가장 총애를 많이 받았다. 환숙이 혜백(惠伯) 희담(姬談)을 낳았고, 담은 도공 주를 낳았다.

도공 주가 즉위했을 때의 나이는 14세였다. 그가 말하기를 : “조부와 부친께서는 왕위에 오를 수 없기 때문에

난을 피해서 주나라의 도성으로 가셨다가 거기에서 객사하셨소.

과인 자신도 진나라와는 많이 소원(疏遠)하게 생각되어 임금이 되기를 원하지 않았소.

지금 대부들이 문공과 양공의 뜻을 잊지 않고 은혜롭게 환숙의 후손을 옹립했으니
조종과 대부들의 영혼에 의지해 진(晉)나라의 제사를 받들며 어찌 감히 삼가고 두려워하지 않겠소?

대부들은 모름지기 과인을 잘 보좌해 주시오!”라고 하였다.
그리하여 여공의 불충한 신하 7명을 축출하고 조종(朝宗)의 옛 공업(功業)을 계승하며

백성들에게 은혜를 베풀고 문공이 환국할 때의 여러 공신들의 후손을 거두었다.
가을, 정나라를 공격했다. 정나라를 패배시키고 다시 진(陳)나라까지 침공하기에 이르렀다.]

 

三年,晉會諸侯,  悼公問群臣可用者,祁傒舉解狐.  解狐,傒之仇.  復問,舉其子祁午.

君子曰:「祁傒可謂不黨矣!外舉不隱仇,內舉不隱子.」

方會諸侯, 悼公弟楊干亂行, 魏絳戮其仆. 悼公怒, 或諫公, 公卒賢絳, 任之政, 使和戎, 戎大親附.

十一年,悼公曰:「自吾用魏絳,九合諸侯,和戎、翟,魏子之力也.」賜之樂,三讓乃受之.

冬,秦取我櫟.

十四年,晉使六卿率諸侯伐秦,度涇,大敗秦軍,至棫林而去. 

十五年,悼公問治國於師曠.  師曠曰:「惟仁義為本.」 冬,悼公卒,子平公彪立.

[도공 3년, 진나라가 계택(鷄澤)에서 제후들과 회합했다. 도공은 여러 신하에게 등용할 만한 사람을 물었다.

기해(祁傒)가 해호(解狐)를 추천했다. 해호는 기해와 원수지간이었다.

도공이 다시 물으니 기해는 자신의 아들 기오(祁午)를 추천했다.
그때 군자가 말하기를 : “기해는 진실로 공평무사하도다! 바깥사람을 추천함에는 원수라고 해서 숨기지 않았고,

안쪽의 사람을 추천함에는 아들을 숨기지 않았다.”라고 하였다.
제후들이 회합할 때 도공의 아우 양간(楊干)이 대열을 혼란하게 했다. 위강(魏絳)이 그의 마부를 죽였다.
도공이 노하자 어떤 사람이 도공에게 간언했다. 도공은 마침내 위강이 현명하고 능력 있음을 알게 되어

그에게 정사를 맡기고 융족(戎族)에게 사신으로 보냄으로써, 융족이 아주 가까이 따르게 되었다.
11년, 도공이 말하기를 : “과인이 위강을 등용한 후 아홉 차례나 제후들을 회합하며

융(戎), 적(翟)과 화목하게 된 것은 모두 위강의 힘이다.”라고 하자. 도공은 그에게 음악을 내렸다.

위강은 세 차례나 사양하다가 받았다. 겨울, 진(秦)나라가 정나라의 역(櫟) 땅을 빼앗았다.
14년, 진 도공이 육경으로 하여금 제후들을 이끌고 진(秦)나라를 공격하게 했다.

경하(涇河)를 건너서 진(秦)나라의 군대를 대패시키고 혹림(棫林)에 이르렀다가 돌아왔다.
15년, 도공이 악사(樂師) 사광(師曠)에게 나라를 다스리는 이치에 대해서 물었다.

사광이 대답하기를 : “오직 인의가 있을 뿐이옵니다.”라고 하였다. 

겨울, 도공이 세상을 떠나고 그의 아들 평공(平公) 표(彪)가 왕위에 올랐다.]

 

平公元年,伐齊,齊靈公與戰靡下,齊師敗走.  晏嬰曰:「君亦毋勇,何不止戰?」遂去.

晉追,遂圍臨菑,盡燒屠其郭中.  東至膠,南至沂,齊皆城守,晉乃引兵歸.

六年,魯襄公朝晉.  晉欒逞有罪,奔齊.

八年,齊莊公微遣欒逞於曲沃,以兵隨之.  齊兵上太行,欒逞從曲沃中反,襲入絳.

絳不戒,平公欲自殺,范獻子止公,以其徒擊逞,逞敗走曲沃.

曲沃攻逞,逞死,遂滅欒氏宗.  逞者,欒書孫也.

其入絳,與魏氏謀.  齊莊公聞逞敗,乃還,取晉之朝歌去,以報臨菑之役也.

[평공 원년, 제나라를 쳤다. 제영공(齊靈公)은 진의 군대와 미하(靡下)에서 교전했으나 패하고 도주했다.
제나라의 안영(晏嬰)이 말하기를 : “주군께서는 용기가 없으십니다. 어찌 계속 싸우시지 않으십니까?”라고 하였다.
마침내 제나라의 군대는 떠났다. 진나라의 군대가 추격해 도성 임치를 포위하고 외성의 모든 집을 모조리 불태우고

사람들을 도살했다. 동쪽으로는 교수(膠水), 남쪽으로는 기수(沂水)에까지 이르자,

제나라는 모든 성을 굳게 닫고 방어했다. 진나라는 군대를 이끌고 철수했다.
6년, 노양공(魯襄公)이 진나라를 방문했다. 진나라의 난령(欒逞)이 죄를 지어 제나라로 도주했다.
8년, 제장공(齊莊公)이 비밀리에 난령을 곡옥으로 보내며 병사를 뒤따르게 했다.
제나라 병사들이 태행산(太行山)에 오르자 난령이 곡옥으로 가는 중도에서 돌아와 진나라의 도성 강성을 기습했다.

강성은 경계를 하지 않았다. 평공은 자살하려고 했으나 범헌자(范獻子)가 평공을 말리고,

그의 무리로 난령을 반격하자, 난령은 패해 곡옥으로 도주했다. 평공은 곡옥에서 난령을 공격해 그를 죽였다.
마침내 그의 집안을 멸족시켰다. 난령은 난서의 손자이다. 그는 강성으로 들어와서 위씨(魏氏)와 모의했다.
제장공은 난령이 패했다는 소식을 듣고 곧 돌아와 진나라의 조가를 쳐서 빼앗았다. 그래서 임치의 일을 보복했다.]

 

十年,齊崔杼弒其君莊公.  晉因齊亂,伐敗齊於高唐去,報太行之役也.

十四年,吳延陵季子來使,與趙文子、韓宣子、魏獻子語,曰:「晉國之政,卒歸此三家矣.」

十九年, 齊使晏嬰如晉, 與叔向語.

叔向曰:「晉,季世也.  公厚賦為臺池而不恤政, 政在私門, 其可久乎!」晏子然之.

二十二年,伐燕.

二十六年,平公卒,子昭公夷立.  昭公六年卒.  六卿彊,公室卑.  子頃公去疾立.

[평공 10년, 제나라의 최서(崔杼)가 그의 주군 장공을 시해했다.

진나라는 제나라의 내란을 틈타 고당(高唐)에서 제나라의 군대를 패퇴시키고 태행의 일을 보복했다.
14년, 오나라 연릉계자(延陵季子)가 사신으로 와서 조문자, 한선자, 위헌자와 이야기를 나눈 후 말하기를 : 

“진나라의 정권은 마침내 이 세 사람의 손에 돌아갈 것이다.”라고 하였다.
19년, 제나라가 안영을 진나라에 사신으로 보냈다. 안영은 숙향(叔向)과 이야기했다.
숙향이 말하기를 : “진나라는 현재 쇠하는 시기입니다. 주군은 조세를 많이 거두어 누대나 연못을 만들며

정사를 돌보지 않아서 정사는 마침내 사가(私家)들의 문에서 나오고 있으니 어찌 오래 갈수 있겠소?”라고 하자. 

안영도 이 말이 옳다고 생각했다.
22년, 연나라를 공격했다.

26년, 평공이 죽고 그의 아들 소공(昭公) 이(夷)가 왕위에 올랐다.
소공은 재위 6년 만에 세상을 떠났다. 이때 육경들은 강성해지고 공실(公室)은 쇠미해졌다.

아들 경공(頃公) 거질(去疾)이 왕위에 올랐다.]

 

頃公六年,周景王崩,王子爭立.  晉六卿平王室亂,立敬王.

九年,魯季氏逐其君昭公,昭公居乾侯.

十一年,衛、宋使使請晉納魯君.

季平子私賂范獻子,獻子受之,乃謂晉君曰:「季氏無罪.」不果入魯君.

十二年,晉之宗家祁傒孫,叔向子,相惡於君.  六卿欲弱公室,乃遂以法盡滅其族.

而分其邑為十縣,各令其子為大夫.  晉益弱,六卿皆大.

十四年,頃公卒,子定公午立.

[경공 6년, 주경왕(周景王)이 세상을 떠나고 왕자들의 왕위 쟁탈전이 시작되었다.

진나라의 육경이 왕실의 내란을 평정하고 경왕(敬王)을 옹립했다.
9년, 노나라의 계씨가 그의 주군 소공(昭公)을 축출했다. 소공은 간후(乾侯)에 머물렀다.
11년, 위(衛)와 송 두 나라가 사신을 파견해 진나라가 노나라의 주군을 환국할 수 있도록 해주기를 청했다.

노나라의 계평자는 비밀리에 범헌자에게 뇌물을 주었고, 범헌자는 이를 받아 진나라의 주군에게 말하기를 : 

“계씨는 죄가 없사옵니다.”라고 하였다. 그래서 노나라의 주군을 환국시키지 않았다.
12년, 진나라의 종실 집안인 기해의 손자와 숙향의 아들이 주군의 면전에서 서로를 비방했다.

6경은 종실의 힘을 약화시키고자 법을 이용해서 그들의 일족을 멸하고 그들의 봉읍을 10현으로 나누어

각각 자신들의 아들을 보내 대부로 삼았다. 진나라의 주군의 권력은 더욱 약화되었고 6경은 더욱 강대해졌다.
14년, 경공이 세상을 떠나고 그의 아들 정공(定公)이 즉위했다.]

 

定公十一年,魯陽虎奔晉,趙鞅簡子捨之.

十二年,孔子相魯.

十五年,趙鞅使邯鄲大夫午,不信,欲殺午,午與中行寅、范吉射親攻趙鞅,鞅走保晉陽.

定公圍晉陽.  荀櫟、韓不信、魏侈與范、中行為仇,乃移兵伐范、中行.

范、中行反,晉君擊之,敗范、中行.  范、中行走朝歌,保之.

韓、魏為趙鞅謝晉君,乃赦趙鞅,復位.

二十二年,晉敗范、中行氏,二子奔齊. 

三十年,定公與吳王夫差會黃池,爭長,趙鞅時從,卒長吳.

三十一年,齊田常弒其君簡公,而立簡公弟驁為平公.

三十三年,孔子卒.

三十七年,定公卒,子出公鑿立.

[정공 11년, 노나라의 양호(陽虎)가 진나라로 도망하자 조앙간자(趙鞅簡子)가 그를 머무르게 했다.

12년, 공자(孔子)가 노나라의 재상이 되었다.
15년, 조앙이 한단(邯鄲)의 대부 경오(耿午)를 사신으로 보냈으나 믿을 수 없어 그를 죽이려고 했다.
경오는 중항인(中行寅), 범길석(范吉射)과 함께 직접 조앙을 공격했고, 조앙은 도주해 진양(晉陽)을 지켰다.

정공이 진양을 포위했다. 순력(荀櫟), 한불신(韓不信)과 위치(魏侈) 등은 범길석과 중항인 등과 원수를 졌으므로

군대를 되돌려 범길석, 중항인을 공격했다. 범길석과 중항인이 반란을 일으키자 정공은 그들을 공격해 패퇴시켰다.

범길석과 중항인이 조가로 도망가서 성을 굳게 지켰다.

한불신과 위치가 조앙을 위해 정공에게 사죄해 정공은 조앙을 사면해 주고 그의 직위를 복직시켰다.

22년, 진나라가 범길석과 중항인을 공격해 패배시키자 그 두 사람은 제나라로 도주했다.
30년, 정공과 오왕(吳王) 부차(夫差)가 황지(黃池)에서 회맹해 수장(首長)을 다투었다.

조앙이 이때 수행해 마침내 오왕이 수장으로 되었다.
31년, 제나라의 전상(田常)이 그의 주군 간공(簡公)을 시해하고 간공의 아우 오(驁)를 옹립했다.

이 사람이 제평공(齊平公)이다.

33년, 공자(孔子)가 세상을 떠났다.
37년, 정공이 세상을 떠나고 그의 아들 출공(出公) 착(鑿)이 뒤를 이었다.]

 

出公十七年,知伯與趙、韓、魏共分范、中行地以為邑.

出公怒,告齊、魯,欲以伐四卿.  四卿恐,遂反攻出公.

出公奔齊, 道死.  故知伯乃立昭公曾孫驕為晉君, 是為哀公.

哀公大父雍,晉昭公少子也,號為戴子.

戴子生忌.  忌善知伯,蚤死,故知伯欲盡并晉,未敢,乃立忌子驕為君.

當是時,晉國政皆決知伯,晉哀公不得有所制.  知伯遂有范、中行地,最彊.

哀公四年,趙襄子、韓康子、魏桓子共殺知伯,盡并其地. 

十八年,哀公卒,子幽公柳立.

[출공 17년, 지백(知伯)이 조씨, 한씨, 위씨와 함께 범씨와 중항씨의 땅을 나누어 자신들의 봉읍으로 했다.
출공이 화가 나서 제와 노 두 나라에게 알려 그들에게 의지해서 4명의 경들을 토벌하려고 했다.

4명은 두려워해 마침내 출공에게 반격을 가했다. 출공은 제나라로 도망가다 길에서 죽었다.

그래서 지백은 소공의 증손자 교(驕)를 주군으로 옹립했다. 이 사람이 애공(哀公)이다.
애공의 조부 옹(雍)은 진 소공의 작은아들이며 대자(戴子)로 불렸다. 대자는 기(忌)를 낳았다.

희기(姬忌)는 지백과 잘 통했으나 일찍이 죽었다. 그래서 지백은 진나라를 완전히 삼키려고 했다.

그러나 감히 그러지를 못하고 기의 아들 교를 군주로 옹립한 것이다.
이때 진나라의 정치는 모두 지백에 의해서 결정되었고, 애공은 그에게 어떠한 제재도 가할 수 없었다.

지백이 마침내 범씨와 중항씨의 땅을 소유하게 되자 가장 강성해졌다.
애공 4년, 조양자(趙襄子), 한강자(韓康子), 위환자(魏桓子)가 공동으로 지백을 살해하고 그의 전영토를 삼켰다.
18년, 애공이 죽고 그의 아들 유공(幽公) 유(柳)가 왕위에 올랐다.]

 

幽公之時,晉畏,反朝韓、趙、魏之君.  獨有絳、曲沃,餘皆入三晉.

十五年,魏文侯初立.

十八年,幽公淫婦人,夜竊出邑中,盜殺幽公.  魏文侯以兵誅晉亂,立幽公子止,是為烈公.

烈公十九年,周威烈王賜趙、韓、魏皆命為諸侯.

二十七年,烈公卒,子孝公頎立.

孝公九年,魏武侯初立,襲邯鄲,不勝而去.

十七年,孝公卒,子靜公俱酒立.  是歲,齊威王元年也.

靜公二年,魏武侯、韓哀侯、趙敬侯滅晉後而三分其地.  靜公遷為家人,晉絕不祀.

[유공의 시대에는 진(晉)나라의 군주가 권신을 매우 두려워해 오히려 반대로 한씨, 조씨, 위씨의 군주를 알현했다.

진나라의 군주는 다만 강성과 곡옥을 가지고 있을 뿐 그 나머지는 모두 이 삼진(三晉)에게로 돌아갔다.
15년, 위 문후(魏文侯)가 새로 즉위했다.

18년, 유공(幽公)이 부녀자를 간음하며 밤에 사사로이 성 밖을 나섰다가 강도에게 살해되었다.
위문후가 군대로 진나라의 동란을 평정하고 유공의 아들 지(止)를 옹립했다. 그가 열공(烈公)이다.
열공 19년, 주나라의 위열왕(威烈王)이 한(韓), 조(趙), 위(魏) 나라에게 봉작을 내리고 제후로 임명했다.
27년, 열공이 죽자 그의 아들 효공(孝公) 기(頎)가 즉위했다.

효공 9년, 위무후(魏武侯)가 새로 즉위해 조(趙)나라의 한단을 기습했으나 승리를 거두지 못하고 돌아왔다.
17년, 효공이 세상을 떠나고 그의 아들 정공(靜公) 구주(俱酒)가 왕위에 올랐다. 이해가 제위왕(齊威王) 원년이다.

정공 2년, 위무후, 한애후(韓哀侯), 조경후(趙敬侯)가 진나라를 멸망시키고 그 토지를 공평하게 분배했다.

정공은 평민으로 강등되고 진나라는 제사가 단절되었다.]

 

太史公曰:

晉文公,古所謂明君也,亡居外十九年,至困約,及即位而行賞,尚忘介子推,況驕主乎?

靈公既弒,其後成、景致嚴,至厲大刻,大夫懼誅,禍作.

悼公以後日衰,六卿專權.  故君道之御其臣下.  固不易哉!

 

[태사공은 말한다.
“진 문공(晉文公)은 고대에서 말하는 영명한 군주로서 국외에서 19년 동안을 떠돌며 매우 곤궁했다.
왕위에 오른 후 논공행상을 하던 중 비록 개자추(介子推)를 잊기는 했으나 어찌 교만한 군주라고 할 것인가?
영공(靈公)은 이미 시해되었고 이후 성공(成公), 경공(景公)은 극히 엄격했으며,

여공(厲公)에 이르러 특히 가혹했으니 대부들이 모두 살해될까 두려워해 마침내 화란(禍亂)이 일어난 것이다.

도공(悼公) 이후 하루하루 쇠약해져 6경(六卿)들이 전횡했다.
그래서 군주가 자신의 신하를 부리는 책략은 본시 쉬운 일이 아닌 것이다!”]

 

  

 

※  原 文 .    【 中國哲學書電子化計劃 .   筆寫本 】

                            

 

 

    原 文   飜 譯 者        德庤 / 李   斗 振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