史記 本紀(사기본기)/9. 呂太后本紀

第 九. 呂太后本紀(여태후본기)

덕치/이두진 2021. 6. 27. 11:16

 

            史記 本紀

 

 

    第 九. 呂太后本紀(여태후본기) 

  

 

呂太后者,高祖微時妃也,生孝惠帝、女魯元太后.  

及高祖為漢王,得定陶戚姬,愛幸,生趙隱王如意 

(여태후자, 고조미시비야, 생효혜제· 여노원태후.   

급고조위한왕, 득정도척희, 애행, 생조은왕여의. ) 

  

['여태후'는 '고조'가 미천할 때의 부인으로 '효혜제'와 딸 '노원태후'를 낳았다.  
'고조'가 한나라의 왕이 된 뒤 "정도"의 '척희'를 또 아내로 맞이해 총애했고, 
 

'척희'는 척부인으로 불리며 조은왕 '여의'를 낳았다. ] 

孝惠為人仁弱,高祖以為不類我,常欲廢太子,立戚姬子如意,如意類我.
戚姬幸,常從上之關東,日夜啼泣,欲立其子代太子.  

(효혜위인인약, 고조이위불류아, 상욕폐태자, 입척희자여의, 여의류아.   

척희행, 상종상지관동, 일야제읍, 욕립기자대태자. ) 

 

['효혜제'는 사람됨이 인자하나 나약하였으므로 '고조'는 자기를 닮지 않았다고 생각하여,  

항상 태자를 폐위시키고 척부인의 아들 '여의'를 태자로 세우고자 했으니, 
이는 '여의'가 자기를 닮았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척부인은 총애를 받아서 항상 '고조'의 출정을 따라

"관동"으로 갔으며, 밤낮으로 '고조' 앞에서 소리 내어 울며, 자신의 아들을 태자로 세워주기를 바랐다. ] 

呂后年長,常留守,希見上,益疏.
如意立為趙王后,幾代太子者數矣,賴大臣爭之,及留侯策,太子得毋廢.  

(여후연장, 상유수, 희상견, 익소.   

여의립위조왕후, 기대태자자수의, 뢰대신쟁지, 급유후책, 태자득무폐. ) 

 

['여후'는 나이가 많아서 항상 집안에 머물러 있었으므로, 고조를 만날 기회가 드물어 점점 더 소원해졌다. 
'여의'가 조왕으로 봉해진 뒤, 여러 차례 태자가 될 뻔한 적이 있었지만, 
 

대신들의 간언과 유후 '장량'의 계책에 힘입어 태자는 폐위되지 않았다. ]

呂后為人剛毅, 佐高祖定天下, 所誅大臣多呂后力.  呂后兄二人, 皆為將.   

長兄周呂侯死事, 封其子呂臺為酈侯, 子產為交侯;次兄呂釋之為建成侯.
(여후위인강의, 좌고조정천하, 소주대신다여후력.  여후형이인, 개위장.  
 

장형주여후사사, 봉기자여태위역후, 자산위교후 ; 차형여석지위건성후. )


['여후'의 인물됨은 의지가 굳세고 강인하여, 일찍이 '고조'를 도와서 천하를 평정했으며, 
 

대신들을 주살할 때도 여후의 힘이 컸다. '여후'에게는 오빠가 두 사람 있었는데, 모두 '고조'의 부장(部將)이었다. 

큰 오빠 주여후 '여택'은 "팽성" 전투에서 전사하자, 그의 아들 '여태'를 역후에 봉하였고, '여산'은 교후에 봉해졌다.

작은 오빠 '여석지'는 건성후에 봉해졌다. ]

高祖十二年四月甲辰, 崩長樂宮, 太子襲號為帝.  是時高祖八子: 

長男肥, 孝惠兄也, 異母, 肥為齊王;餘皆孝惠弟, 戚姬子如意為趙王, 薄夫人子恒為代王. 
(고조십이년사월갑진, 붕장락궁, 태자습호위제.  시시고조팔자 : 
 

장남비, 효혜형야, 이모, 비위제왕 ; 여개효혜제, 척희자여의위조왕, 박부인자항위대왕.)


[고조 12년 4월 갑진일, '고조'가 장락궁에서 붕어하자, 태자가 제위를 계승해 황제가 되었다.  
 

이 당시 '고조'에게는 여덟 명의 아들이 있었는데 : 맏아들 '유비'는 혜제의 이복형으로 제왕에 봉해졌으며 ;

그 나머지는 모두 혜제의 동생인데, 척부인의 아들 '유여의'는 조왕에 봉해졌고,  

박부인의 아들 '유항'은 대왕에 봉해졌다.]

諸姬子子恢為梁王, 子友為淮陽王, 子長為淮南王, 子建為燕王.   

高祖弟交為楚王, 兄子濞為吳王.  非劉氏功臣番君吳芮子臣為長沙王.
(제희자자회위양왕, 자우위회양왕, 자장위회남왕, 자건위연왕.  
 

고조제교위초왕, 형자비위오왕.  비유씨공신번군오예자신위잔사왕. )


[그밖에 비빈이 낳은 아들 중 '유회'는 양왕에 봉해졌고, '유우'는 회양왕에 봉해졌으며, 
 

'유장'은 회남왕에 봉해졌고, '유건'은 연왕에 봉해졌다. 
'고조'의 동생 '유교'는 초왕에 봉해졌고, '고조'의 형의 아들인 '유비'는 오왕에 봉해졌다. 
유씨의 성이 아니면서 왕으로 봉해진 공신은 파군 '오예'의 아들 '오신'으로 장사왕에 봉해졌다. ]

呂后最怨戚夫人及其子趙王, 乃令永巷囚戚夫人, 而召趙王.

使者三反, 趙相建平侯周昌謂使者曰:" 高帝屬臣趙王, 趙王年少.   

竊聞太后怨戚夫人, 欲召趙王并誅之, 臣不敢遣王.  王且亦病, 不能奉詔. ”
(여후최원척부인급기자조왕, 내령영항수척부이, 이소조왕.

사자삼반, 조상건평후주창위사자왈 : " 고제속신조왕, 조왕연소.   

절문태후원척부인, 욕소조왕병주지, 신불감견왕.  왕차역병, 불능봉조. " )


['여태후'는 척부인과 그녀의 아들 조왕을 아주 미워하였으므로,  

척부인을 죄 지은 궁녀를 가두던 영항에 감금하고 조왕을 불러오도록 명령했다.

사자를 세 번이나 조나라에 보냈으나 그를 불러오지 못하고 돌아왔다.  조나라의 승상 건평후 '주창'이  

사자에게 말하기를 : " 고황제께서 신에게 조왕을 맡긴 것은, 어린 조왕을 보호하라는 뜻이었오. 

가만히 들어보니 태후가 척부인을 아주 미워해 조왕을 불러서 모두 주살하려고 한다니, 

나는 감히 조왕을 보낼 수 없습니다.  게다가 조왕 또한 병이 있어 조서를 받들 수가 없습니다. ”라고 하였다. ]

呂后大怒, 乃使人召趙相.  趙相徵至長安, 乃使人復召趙王.  王來, 未到.   

孝惠帝慈仁, 知太后怒, 自迎趙王霸上, 與入宮, 自挾與趙王起居飲食.  
(여후대노, 내사인소조상.  조상징지장안, 내사인부소조왕.  왕래, 미도.  
 

효혜제자인, 지태후노, 자영조왕패상, 여입궁, 자협여조왕기거음식.)

 
['여태후'는 크게 노하여 사자를 보내 '주창'을 불러오게 했다.  '주창'이 "장안"에 미처 도착하기도 전에,

'여태후'는 다시 사람을 보내 조왕을 소환하였다.  당시 조왕은 이미 길을 떠났으나 "장안"에 도착하지는 못했다. 

'효혜제'는 성품이 인자하여, '태후'의 분노를 이미 알고 있었으므로, 
몸소 "패상"에 가서 조왕을 맞이해 함께 궁궐로 들어와서 조왕과 기거하며 식사를 하였다. ]

太后欲殺之, 不得閒. 孝惠元年十二月, 帝晨出射. 趙王少, 不能蚤起. 

太后聞其獨居, 使人持酖飲之.  犁明, 孝惠還, 趙王已死.  於是乃徙淮陽王友為趙王. 
(태후욕살지, 부득간.   효혜원년십이월, 제신출사.  조왕소, 불능조기. 

태후문기독거, 사인지짐음지. 여명, 효혜환, 조왕이사.  어시내사회양왕우위조왕.)

 
['여태후'는 조왕을 죽이려고 했으나 기회를 얻지 못했다.   

'효혜제' 원년 12월, '효혜제'는 새벽에 활을 쏘러 나갔으나 조왕은 나이가 어려서 일찍 일어날 수 없었다. 
'여태후'는 그가 혼자 있다는 말을 듣고 사람을 시켜서 독주(짐주)를 가져오게 하여 그에게 먹였다.  
 

해가 뜰 무렵, '효혜제'가 돌아와 보니 조왕은 이미 죽어 있었다. 회양왕 '유우'를 다시 조왕에 임명했다.]

夏, 詔賜酈侯父追謚為令武侯.  太后遂斷戚夫人手足, 去眼, 煇耳, 飲瘖藥, 使居廁中, 命曰 “人彘 ”.

居數日, 乃召孝惠帝觀人彘.  孝惠見, 問, 乃知其戚夫人, 乃大哭, 因病, 歲餘不能起.
使人請太后曰:"此非人所為. 臣為太后子, 終不能治天下.”孝惠以此日飲為淫樂, 不聽政, 故有病也.

(하, 조사역후부추시위영무후.  태후수단척부인수족, 거안, 휘이, 음음약, 사거측중, 명왈 " 인체 ".

거수일, 내소효혜제관인체.  효혜견, 문, 내지기척부인, 내대곡, 인병, 세여불능기.

사인청태후왈 : " 차비인소위.  신위태후자, 종불능치천하. "  효혜이차일음위음락, 불청정, 고유병야. )


[이해 여름에 조서를 내려서 역후의 부친 '여택'에게 영무후라는 시호를 추증하였다.  
'여태후'는 마침내 척부인의 손과 발을 자르고, 눈을 뽑고 귀를 태우고 벙어리가 되게 하는 음약을 먹여서 
 

변소에 기거하게 하고, 그녀를 “사람돼지”라고 불렀다. 

며칠이 지난 후 '여태후'는 '효혜제'를 불러서 ‘사람돼지’를 보도록 했다.    

그것을 본 '효혜제'는 사람들에게 물어보고 나서야 그녀가 척부인이라는 것을 알고는 큰 소리를 내어 었다. 

이 일로 인해 병이 난 '효혜제'는 1년이 다 되도록 일어날 수 없었다. 

'효혜제'는 사람을 보내어 '여태후'에게 말하기를 “이것은 사람이 할 짓이 아닙니다.  

나는 태후의 아들로서 다시는 천하를 다스릴 수 없게 되었습니다.”라고 했다.
그 후로 '효혜제'는 하루 종일 주색에 빠져 정사를 돌보지 않았으니, 이 때문에 병이 생기게 되었다. ]

二年, 楚元王· 齊悼惠王皆來朝.   

十月, 孝惠與齊王燕飲太后前, 孝惠以為齊王兄, 置上坐, 如家人之禮.
(이년, 초원왕· 제도혜왕개래조.  시월, 효혜여제왕연연음태후전, 효혜이위제왕형, 직상좌, 여가인지례. )


['효혜제 2년, 초원왕 '유교'와 제도혜왕 '유비'는 모두 "장안"에 입조하였다.  
 

10월, 효혜제와 제도혜왕은 연회를 열어 '여태후' 앞에서 술을 마셨는데, 
'효혜제'는 제왕이 형이기 때문에 제왕을 상석에 앉게 하였는데 이는 일반 가정의 예절에 따른 것이었다.]
 

太后怒, 乃令酌兩卮酖, 置前, 令齊王起為壽.  齊王起, 孝惠亦起, 取卮欲俱為壽.   太后乃恐,

自起泛孝惠卮.  齊王怪之, 因不敢飲, 詳醉去. 問, 知其酖, 齊王恐, 自以為不得脫長安, 憂.  
(태후노, 내령작량치짐, 치전, 텽제왕기위수.  제왕기, 효혜역기, 취치욕구위수.  태후내공, 
 

자기봉효혜치.  제왕괴지, 인불감음, 상취거. 문, 지기짐, 제왕공, 자이위부득탈장안, 우.)

['여태후'는 매우 화가 나 짐주 두 잔을 따른 다음 제왕 앞에 놓게 하고, 제왕으로 하여금 자리에서 일어나서

자기에게 축수를 올리게 했다. 제왕이 일어나자 '효혜제'도 일어서서 제왕과 함께 '여태후'에게 축수를 올리려고 했다.

그러자 '여태후'는 겁이 나서 얼른 일어나 '효혜제'의 술잔을 엎어버렸다.  

제왕은 괴이하게 여기고 감히 그 술을 마시지 못하다가 거짓으로 술에 취한 척하며 자리를 떴다.   

나중에 물어보고서야 그것이 짐주였다는 사실을 알고, 제왕은 두려워하면서도 스스로 "장안"을

벗어날 수 없을 것이라 생각하며 걱정스러워했다.] 

齊內史士說王曰:" 太后獨有孝惠與魯元公主.  今王有七十餘城, 而公主乃食數城.   

王誠以一郡上太后, 為公主湯沐邑, 太后必喜, 王必無憂. ”
(제내사사설왕왈 : " 태후독유효혜여노원공주.  금왕유칠십여성, 이공주내식수성.  
 

왕성이일군상태후, 위공주탕목읍, 태후필희, 왕필무우. " )

[제나라의 내사 '사'가 제왕에게 말하기를 : " '여태후'에게는 오직 '효혜제'와 '노원'공주만이 있습니다. 
지금 대왕께서는 70여개의 성을 가지고 있으나, '노원'공주는 몇 개의 성을 식읍지로 가지고 있을 뿐입니다.

대왕께서 군 하나를 태후에게 바치어 공주의 탕목읍으로 삼게 하시면 태후는 반드시 기뻐할 것이며,  

대왕께서는 틀림없이 우환이 없게 될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於是齊王乃上城陽之郡, 尊公主為王太后.  呂后喜, 許之.  乃置酒齊邸, 樂飲, 罷, 歸齊王.   

三年, 方筑長安城, 四年就半, 五年六年城就.  諸侯來會.  十月朝賀.
(어시제왕내상성양지군, 존공주위왕태후.  여후릐, 허지.  내치주제저, 낙음, 파, 귀제왕.  
 

삼년, 방축장안성, 사년취반, 오년육년성취.  제후래회.  시월조하. )


[그러자 제왕은 '여태후'에게 "성양군"을 바치고 공주를 높여서 왕태후로 존칭하니, 
 

'여태후'는 기뻐하며 이를 받아들였다. 그리고는 제왕의 관저에서 주연을 베풀고 즐겁게 마신 다음

연회가 끝나자 제왕을 돌려보냈다.  '효혜제' 3년, 비로소 "장안성"을 축조하기 시작하여 4년이 되자,

절반이 완공되었고, 5 ~ 6년이 지나자 성이 완성되었다. 제후들이 '효혜제'를 접견하기 위해 "장안"에 모여들었다.

10월에 입조해 황제에게 하례를 올렸다. ]

七年秋八月戊寅, 孝惠帝崩.  發喪, 太后哭, 泣不下.  留侯子張辟彊為侍中, 年十五,  

謂丞相曰:" 太后獨有孝惠, 今崩, 哭不悲, 君知其解乎? " 丞相曰:“ 何解? ”
(칠년추팔월무인, 효혜제붕.  발상, 태후곡, 읍불하.  유후자장벽강위시중, 연십오, 
 

위승상왈 : " 태후독유효혜, 금붕, 곡불비, 군지기해호 ? "  승상왈 : " 하해 ? " )


['효혜제' 7년 가을 8월 무인일, '효혜제'가 세상을 떠났다. 발상 기간에도 태후는 곡만 할 뿐 눈물은 
흘리지 않았다.

유후 '장량'의 아들 '장벽강'은 그 당시 시중이었는데, 나이가 열다섯 살이었다.  
그가 승상 '진평'에게 말하기를 : “ '여태후'에게 아들이라고는 오직 '효혜제' 하나뿐이었는데, 

지금 그가 세상을 떠났는데도, 그녀는 곡만 할 뿐 비통해 하지 않으니, 승상께서는 그 연유를 알고  계십니까 ? ”

라고 하자.  승상이 묻기를 : “ 그 연유가 무엇인가 ?”라고 하였다.]

辟彊曰:" 帝毋壯子, 太后畏君等.  君今請拜呂臺· 呂產· 呂祿為將, 將兵居南北軍, 及諸呂皆入宮,

居中用事, 如此則太后心安, 君等幸得脫禍矣. ”
(벽강왈 : " 제무장자, 태후외군등.  군금청배여태· 여산· 여록위장, 장병거남북군, 급제여개입궁, 
 

거중용사, 여차즉태후심안, 군등행득탈화의. " )


['장벽강'이 대답하기를 : " 이는 승하하신 황제에게 장성한 아들이 없으므로, 
'여태후'는 승상을 비롯한 

조정 대신들을 두려워하기 때문입니다. 승상께서 지금 '여태· '여산'· '여록'을 장군으로 제수하여 남· 북군을

통솔하게 하고, 아울러 여씨 일족을 모두 입궁시켜서 조정의 일을 맡아보게 한다면,이로써 '여태후'는 안심할 것이며,

승상을 비롯한 조정 대신들께서도 다행히 화를 모면할 수 있을 것입니다. ”라고 하였다. ]

丞相乃如辟彊計.  太后說, 其哭乃哀.  呂氏權由此起.  乃大赦天下.  九月辛丑, 葬.   

太子即位為帝, 謁高廟.  元年, 號令一出太后.
(승상내여벽강계.  태후열, 기곡내애.  여씨권유차기.  내대사천하.  구월신축, 장.  
 

태자즉위위제, 알고묘.  원년, 호령일출태후. ) 

 

[승상 '진평'은 마침내 '장벽강'의 계책대로 하였다. 그러자 '여태후'는 기뻐하며 비로소 애통해 하며  울기 시작했다.

여씨가 권력을 장악한 것은 이로부터 시작되었다.  또한 천하에 대사면령이 내려졌다.  

9월 신축일에 '효혜제'를 안장했다.  태자가 제위를 계승해 황제가 되고, '고조'의 사당에 참배했다.   

고황후 원년, 조정의 모든 규정은 모두 여태후에게서 나왔다.]

太后稱制, 議欲立諸呂為王, 問右丞相王陵.  王陵曰:" 高帝刑白馬盟曰 ‘ 非劉氏而王,  

天下共擊之 ’. 今王呂氏, 非約也. ”  太后不說.  問左丞相陳平· 絳侯周勃.

勃等對曰:" 高帝定天下, 王子弟, 今太后稱制, 王昆弟諸呂, 無所不可. ”  太后喜, 罷朝.
(태후칭제, 의욕입제여위왕, 문우승상왕릉.  왕릉왈 : " 고제형백마맹왈 ' 비유씨이왕, 
 

천하공격지 '.  금왕여씨, 비약야. "  태후불열.  문좌승상진평· 강후주발.

발등대왈 : " 고제정천하, 왕자제, 금태후칭제, 왕곤제제여, 무소불가. "  태후희, 파조.]


['여태후'는 황제의 권한을 행사하기 시작하면서, 대신들과 상의해 여씨 일족을 제후왕으로 삼고자 하여, 
 

우승상 '왕릉'에게 의견을 물었다. '왕릉'이 말하기를 : " 고제께서는 일찍이 백마를 희생으로 삼아  

대신들에게 맹세하기를, ‘ 앞으로 유씨가 아닌 자가 왕이 되면, 천하가 함께 그를 공격하라. ’라고 하셨는데,

지금 여씨를 왕으로 세우는 것은, 고제의 맹약을 어기는 것입니다. ”라고 하였다.
그러자 '여태후'는 불쾌해 하였다. 그리고 다시 좌승상 '진평'과 강후 '주발'에게 물었다.

'주발' 등이 대답하기를 : “ 고제께서 천하를 평정했을 때 자신의 자제분들을 왕으로 책봉했으니,  

지금 태후께서 황제의 직권을 대행하면서 자신의 형제와 여씨 일족을 왕으로 책봉하지 못할 이유가 없습니다. ”

라고 하였다.  그러자 '여태후'는 기뻐하며 조회를 끝냈다.]

 

王陵讓陳平· 絳侯曰:" 始與高帝啑血盟, 諸君不在邪?  

今高帝崩, 太后女主, 欲王呂氏, 諸君從欲阿意背約, 何面目見高帝地下?”

陳平· 絳侯曰:“ 於今面折廷爭, 臣不如君;夫全社稷, 定劉氏之后, 君亦不如臣. ”  王陵無以應之.
(왕릉양진평· 강후왈 : " 시여고제삽혈맹, 제군부재야 ?  
 

금고제붕, 태후여주, 욕왕여씨, 제군종욕아의배약, 하면목견고제지하 ? "

진평· 강후왈 : " 어금면절정쟁, 신불여군 ; 부전사직, 정유씨지후, 군역불여신. "  왕릉무이응지.)


['왕릉'은 '진평'과 '주발'을 책망하며 말하기를 : " 애당초 고제께서 삽혈로 맹약할 때 그대들은 
그 자리에 없었소 ? 

지금 고제께서 승하하시자, '여태후'가 황후로서 여씨의 자제를 왕으로 봉하려고 하는데,

그대들은 오히려 '여태후'의 사욕을 용인하고, 그의 뜻에 영합해 맹약을 위배하려 하니,  

무슨 면목으로 지하에 계신 고제를 뵐 수가 있겠소 ? ”라고 하였다.

'진평'과 '강후'가 말하기를 : “ 지금 조정에서 직접 질책하고 간언함에서는 우리들이 당신만 못하오 ; 
그러나 사직을 보전하고 유씨의 후손을 안정시키는 일에는 그대 또한 우리들만 못할 것이오. ”라고 하자,  
 

왕릉은 더이상 대꾸하지 않았다.] 

十一月, 太后欲廢王陵, 乃拜為帝太傅, 奪之相權.  王陵遂病免歸.  乃以左丞相平為右丞相,  

以辟陽侯審食其為左丞相.  左丞相不治事, 令監宮中, 如郎中令.   

食其故得幸太后, 常用事, 公卿皆因而決事. 乃追尊酈侯父為悼武王, 欲以王諸呂為漸.
(십일월, 태후욕폐왕릉, 내배위제태부, 탈지상권.  왕릉수병면귀.  내이좌승상평위우승상, 
 

이벽양후심이기위좌승상.  좌승상불치사, 영감궁중, 여낭중령.   

이기고득행태후, 상용사, 공경개인이결사. 내추존역후부위도무왕, 욕이왕제여위점.)


[11월, '여태후'가 '왕릉'을 파면시키기 위해 그를 황제의 태부로 제수하면서 우승상 권한을 빼앗아버렸다. 
그러자 '왕릉'은 병을 핑계 삼아 사직하고 귀향해버렸다.  
 

이에 '여태후'는 좌승상 '진평'을 우승상으로 임명하고, 벽양후 '심이기'를 좌승상으로 삼았다.  

그러나 '심이기'는 좌승상의 직무를 수행하지 않고 단지 궁중 사무만을 감독했으니 마치 낭중령과 같았다. 
그러므로 '심이기'는 '여태후'의 총애를 믿고 항상 나라 일을 제멋대로 처리했고, 
공경대신들이 일을 처리할 때도

그를 통해 결정을 받았다. '여태후'는 역후 '여태'의 부친 '여택'을 도무왕으로 추존하고,

이 일을 계기로 점차 여씨 일족을 모두 왕에 봉하려고 하였다. ]

四月, 太后欲侯諸呂, 乃先封高祖之功臣郎中令無擇為博城侯.  魯元公主薨, 賜謚為魯元太后. 

偃為魯王.  魯王父, 宣平侯張敖也.   封齊悼惠王子章為朱虛侯, 以呂祿女妻之.

齊丞相壽為平定侯. 少府延為梧侯. 乃封呂種為沛侯, 呂平為扶柳侯, 張買為南宮侯.
(사월, 태후욕후제여, 내선봉고조지공신낭중령무택위박성후.  노원공주훙, 사시위노원태후.  
 

자언위노왕.  노왕부, 선평후장오야.  봉제도혜왕자장위주허후, 이여록녀처지. 제승상수위평안후.   

소부연위오후. 내봉여종위패후, 여평위부유후, 장매위남궁후.)

[4월, '여태후'는 여씨 일족을 제후로 봉하기 위해서 먼저 고조의 공신 낭중령 '풍무택'을 박성후로 봉했다. 
'노원'공주가 세상을 떠나자, 그녀에게 '노원'태후라는 시호를 주었고, 그녀의 아들 '장언'을 노왕에 봉했다. 

노왕의 부친은 바로 선평후 '장오'였다.  또 제 도혜왕의 아들 '유장'을 주허후에 봉했으며, 

'여록'의 딸을 의 아내로 삼게 했다. 제의 승상 '제수'를 평정후로 봉했으며, 소부 '양성연'을 오후로 봉했다.

이어서 '여종'을 패후로 봉하고, '여평'을 부유후에 봉하였으며, '장매'를 남궁후로 봉하였다.]

太后欲王呂氏, 先立孝惠后宮子彊為淮陽王, 子不疑為常山王, 子山為襄城侯, 子朝為軹侯,  

子武為壺關侯.  太后風大臣, 大臣請立酈侯呂臺為呂王, 太后許之.   

建成康侯釋之卒, 嗣子有罪, 廢, 立其弟呂祿為胡陵侯, 續康侯后.
(태후욕왕여씨. 선립효혜후궁자강위회양왕, 자붕의위상산왕, 자산위양성후, 자조위지후, 
 

자무위호관후.  태후풍대신, 대신청립역후여태위여왕, 태후허지.   

건성강후석지졸, 사자유죄, 폐, 입기제여록위호릉후, 속강후후.)


['여태후'는 여씨를 왕으로 삼기 위해서 우선 '효혜제' 후궁의 아들 '유강'을 회양왕에 봉하고, 
 

'유불의'를 상산왕에 봉했으며, '유산'을 양성후에, '유조'를 지후로 봉했으며, '유무'를 호관후로 봉했다.  

그리고 나서 '여태후'가 대신들에게 암시를 보내자, 대신들은 역후 '여태'를 여왕으로 책봉하기를 청하니,

'여태후'는 이를 허락하였다.  건성후 '여석지'가 죽고 후위를 계승할 아들이 죄가 있어 폐출당하자,  

그 동생 '여록'을 호릉후로 세워 강후의 뒤를 계승하게 하였다. ]

二年, 常山王薨, 以其弟襄城侯山為常山王, 更名義.  十一月, 呂王臺薨, 謚為肅王, 太子嘉代立為王.

三年, 無事.

(이년, 상산왕훙, 이기제양성후산위상산왕, 경명의.  십일월, 여왕태훙, 시위숙왕, 태자가대립위왕.

삼년, 무사.)


[고황후 2년, 상산왕이 죽자, 그의 동생 양성후 '유산'을 상산왕에 봉하고, 이름을 '유의'로 바꾸었다. 
11월, 여왕 '여태'가 죽자, 숙왕의 시호를 내리고, 태자 '여가'가 뒤를 이어 왕위에 올랐다.

고황후 3년, 나라에 아무 일이 일어나지 않았다.]

四年, 封呂媭為臨光侯, 呂他為俞侯, 呂更始為贅其侯, 呂忿為呂城侯, 及諸侯丞相五人.
宣平侯女為孝惠皇后時, 無子, 詳為有身, 取美人子名之, 殺其母, 立所名子為太子.   

孝惠崩, 太子立為帝.  帝壯, 或聞其母死, 非真皇后子, 乃出言曰:" 后安能殺吾母而名我?  

我未壯, 壯即為變. ” 太后聞而患之, 恐其為亂, 乃幽之永卷中, 言帝病甚, 左右莫得見.
(사년, 봉여수위임광후, 여타위유후, 여경시위췌기후, 여분위여성후, 급제후승상오인.

선평후여위효혜황후시. 무자, 상위유신, 취미인자명지, 살기모, 입소명자위태자.   

효혜붕, 태자립위제.  제장, 혹문기모사, 비진황후자, 내출언왈 : " 후안능살오모이명아 ?   

아미장, 장즉위변. " 태후문이환지, 공기위난, 내유지영권중, 언제병심, 좌우막득견. )

 

[4년, '여수'를 임광후로 봉했으며, '여타'를 유후로, '여경시'를 췌기후로, '여분'을 여성후로 봉했고,

또 제후왕의 승상 다섯 사람을 제후로 봉했다.

선평후 '장오'의 딸이 효혜황후가 되었을 때, 아들이 없었으므로 거짓으로 임신한 척 하며 후궁 미인의 자식을

데려다가 자기가 낳은 아들이라 했다. 그리고 그 아이의 어머니를 죽이고, 그 아들을 세워서 태자로 삼았다. 

'효혜제'가 서거하자, 태자가 된 그 아이가 황제에 즉위했다.  

황제가 자라나서 우연히 자신의 생모는 살해되었고, 자기가 황후의 진짜 아들이 아니라는 것을 듣고,  

이에 하소연하듯 말하기를 : “ 황후는 어찌해 나의 어머니를 죽이고 나를 자신의 아들이라고 할 수 있는가 ?

내가 지금은 아직 다 자라지 않았지만, 장성하면 변고가 생길 것이다.”라고 했다.
'여태후'는 이 말을 듣고 몹시 걱정하였으며, 그가 변란을 일으킬 것을 두려워해 그를 영항에 몰래 가두고,
그리고는 황제가 중병에 걸렸다고 말하면서 좌우의 대신들로 하여금 그를 만나지 못하게 했다. ]
 

           

太后曰:" 凡有天下治為萬民命者, 蓋之如天, 容之如地, 上有歡心以安百姓, 百姓欣然以事其上,  

歡欣交通而天下治.  今皇帝病久不已, 乃失惑惛亂, 不能繼嗣奉宗廟祭祀, 不可屬天下, 其代之. ”

群臣皆頓首言:" 皇太后為天下齊民計所以安宗廟社稷甚深, 群臣頓首奉詔. ”  帝廢位, 太后幽殺之.
(태후왈 : " 범유천하치위만민명자, 개지여천, 용지여지, 상유환심이안백성, 백성흔연이사기상, 
 

환흔교통이천하치.  금황제병구불이, 내실혹혼란, 불능계사봉종묘제사, 불가속천하, 기대지. "

군신개돈수언 : " 황태후위천하제민계소이안종묘사직심심, 군신돈수봉조. "  제폐위, 태후유살지.)

['여태후'가 말하기를 : “ 무릇 천하를 소유해 만민을 다스리는 자는, 하늘처럼 만물을 덮고 땅처럼 만물을

받아들여야 하오, 황제가 즐거운 마음으로 백성들을 편안하게 하면, 백성들은 기쁜 마음으로 황제를 섬기게 되니,

서로 즐겁고 기쁜 감정이 통하여 천하가 다스려지게 되는 것이오. 

지금 황제는 병이 오래되어 낫지 않아, 정신이 없고 혼미하여 제위를 계승해 종묘제사를 받들 수가 없소. 
그러므로 천하를 그에게 맡길 수 없으니, 누군가가 그를 대신하게 해야 할 것이오. ”라고 하였다.

많은 신하들이 모두 머리를 조아리며 말하기를 : “ 황태후께서 백성들을 위해 종묘사직을 안정시킬 방도를

생각하심이 이처럼 깊으시니, 우리 신하들은 모두 머리를 조아려서 조칙을 받들겠습니다. ”라고 하였다.    

이에 황제는 폐위되었고, 태후는 그를 아무도 모르게 죽였다. ] 

五月丙辰, 立常山王義為帝, 更名曰弘. 不稱元年者, 以太后制天下事也. 以軹侯朝為常山王.   

置太尉官, 絳侯勃為太尉.
(오월병진, 입상산왕의위제, 경명왈홍.  불칭원년자, 이태후제천하사야.  이지후조위상산왕.  
 

치태위관, 종후발위태위.)


[5월 병진일, 상산왕 '유의'를 황제로 세우고 이름을 '유홍'으로 바꾸었다.  
 

연호를 원년이라고 칭하지 않은 것은 태후가 황제의 직권을 행사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또한 지후 '유조'를 상산왕으로 봉하였다. 또 태위라는 관직을 설치해, 강후 '주발'을 태위로 임명하였다. ]

五年八月, 淮陽王薨, 以弟壺關侯武為淮陽王.  六年十月, 太后曰呂王嘉居處驕恣, 廢之,  

以肅王臺弟呂產為呂王.  夏, 赦天下.  封齊悼惠王子興居為東牟侯.
(오년팔월, 회양왕훙, 이제호관후무위회양왕.  육년시월, 태후왈여왕가거처교자, 폐지, 
 

이숙왕태제여산위여왕.  하, 사천하.  봉제도혜왕자흥거위동모후.)


[고황후 5년 8월, 회양왕 '유강'이 서거하자, 동생 호관후 '유무'를 회양왕에 봉했다.  
고황후 6년 10월, '여태후'는 " 여왕 '여가'는 평소의 생활태도가 교만하고 방자하다. ”라고 말하면서 
 

그를 폐위시키고, 숙왕 '여태'의 동생 '여산'을 여왕에 봉하였다. 
여름, 천하에 대사면령을 내렸다.  제도혜왕의 아들 '유흥거'를 동모후에 봉했다.]

七年正月, 太后召趙王友.  友以諸呂女為受后, 弗愛, 愛他姬, 諸呂女妒, 怒去, 讒之於太后,  

誣以罪過, 曰:“ 呂氏安得王! 太后百歲后, 吾必擊之. ”

太后怒, 以故召趙王.  趙王至, 置邸不見, 令衛圍守之, 弗與食.  其群臣或竊饋, 輒捕論之.
(칠년정월, 태후소조왕우.  우이제여녀위수후, 불애, 애타희, 제여여투, 노거, 참지어태후, 
 

무이죄과, 왈 : " 여씨안득왕 !  태후백세후, 오필격지. "

태후노, 이고소조왕.  조왕지, 치저불견, 영위위수지, 불여식.  기군신혹절궤, 첩보논지.)

[고황후 7년 정월, '여태후'는 조왕 '유우'를 소환했다.  '유우'는 여씨 일족의 여자를 왕후로 맞이하였으나,

그녀를 총애하지 않고, 다른 후궁을 사랑하자, 여씨 여자는 질투를 하였으며, 화를 내며 '여태후'에게 가서

남편 '유우'를 헐뜯으며 과거의 죄를 들춰내 모함하기를 : " 여씨가 어떻게 왕에 봉해질 수 있습니까 !   

'여태후'가 죽은 후에, 나는 반드시 여씨를 주멸시킬 것이오.”라고 하였다.

'여태후'는 이 말을 듣고 화가 나서 조왕을 소환하였다.  조왕이 도착하자 '여태후'는 그를 관저에 머무르게 하고

만나주지 않았으며, 위사에게 명해 그의 관저를 포위하게 하고, 먹을 것을 주지 않았다.   

조왕의 신하들 중에 누가 몰래 밥을 보내주었다가 발각되어 붙잡혀서 죄를 문책당했다.]

趙王餓, 乃歌曰:" 諸呂用事兮劉氏危, 迫脅王侯兮彊授我妃.  我妃既妒兮誣我以惡,  

讒女亂國兮上曾不寤.  我無忠臣兮何故棄國?  自決中野兮蒼天舉直! 于嗟不可悔兮寧蚤自財.   

為王而餓死兮誰者憐之! 呂氏絕理兮讬天報仇. ” 丁丑, 趙王幽死, 以民禮葬之長安民冢次.
(조왕아, 내가왈 : " 제여용사혜유씨위, 박협왕후혜강수아비.  아비기혜무아이악, 
 

참여난국혜상증불오.  아무충신혜하고기국 ?  자결중야혜창천거직 ! 우차불가회혜녕조자재.   

위왕이아사혜수자연지 ! 여씨절리혜탁천보구. " 정축, 조왕유사, 이민예장지장안민총차.)


[조왕은 굶주리면서 노래를 불렀다 : " 여씨 일족이 전권을 휘두르니 유씨가 위태롭구나.  
 

왕후를 협박하고 강제로 딸을 내게 왕비로 주었네. 나의 왕비가 질투해 나를 죄 있다고 모함하니,  

참소하는 여자가 나라를 혼란스럽게 하건만 황상께서는 전혀 깨닫지 못하네.
나에게는 충신이 없었단 말인가 ?  어찌하여 나라를 잃어버렸는가 ?
 

들판 한가운데서 스스로 목숨을 끊으니 푸른 하늘이 시비를 가려주리라.   

아 ! 후회할 수도 없으니 차라리 일찍 목숨을 끊을 것을, 왕이 되어 굶어 죽으니 누가 불쌍히 여기겠는가 ! 

여씨가 하늘의 이치를 끊었으니 하늘에 의지하여 앙갚음 하리라. "
정축일에 조왕이 감금된 채로 굶어 죽자, 평민의 예식으로 "장안" 백성들의 묘지 근처에 안장되었다.]

己丑, 日食, 晝晦.  太后惡之, 心不樂, 乃謂左右曰:" 此為我也. ” 
(을축, 일식, 주회.  태후오지, 심불락, 내위좌우왈 : " 차위아야. " )


[을축일, 일식 현상이 나타나 대낮인데도 어두웠다.  태후는 이를 싫어하였으며, 
 

불쾌한 심정으로 측근에게 말하기를 : “ 이것은 나 때문이로다. ”라고 하였다. ] 

二月, 徙梁王恢為趙王.  呂王產徙為梁王, 梁王不之國, 為帝太傅.  立皇子平昌侯太為呂王.   

更名梁曰呂, 呂曰濟川.  太后女弟呂媭有女為營陵侯劉澤妻, 澤為大將軍.   

太后王諸呂, 恐即崩后劉將軍為害, 乃以劉澤為瑯邪王, 以慰其心.
(이월, 사양왕회위조왕.  여왕산사위양왕, 양왕불지국, 위제태부.  입황자평창후태위여왕.  
 

경명양왈여, 여왈제천.  태후여제여수유여위영릉후유택처, 택위대장군.   

태후왕제여, 공즉붕후유장군위해, 내이유택위낭야왕, 이위기심. )


[2월, 양왕 '유회'를 조왕으로 바꾸어 봉하였다.  여왕 '여산'을 양왕에 다시 봉했으나, 
 

양왕은 봉국으로 가지 않고 황제의 태부가 되었다. 황자인 평창후 '유태'를 세워서 여왕으로 삼고,   

양나라를 개명해 여국이라고 했다가, 다시 여국을 제천국이라 하였다.  

'여태후'의 여동생 '여수'에게 딸이 있었는데,영릉후 '유택'의 아내가 되었으며, '유택'은 당시 대장군이었다.
'여태후'는 여씨 일족을 왕으로 봉했지만, 자기가 죽은 후 유장군이 난을 일으킬 것을 두려워하여, 
 

'유택'을 낭야왕으로 임명해 그의 마음을 위로하였다.]

梁王恢之徙王趙, 心懷不樂.  太后以呂產女為趙王后.  王后從官皆諸呂, 擅權, 微伺趙王,  

趙王不得自恣.  王有所愛姬, 王后使人酖殺之. 王乃為歌詩四章, 令樂人歌之.   

王悲, 六月即自殺. 太后聞之, 以為王用婦人棄宗廟禮, 廢其嗣.
(양왕회지사조왕, 심회불락.  태후이여산여위조왕후.  왕후종관개제여, 천권, 미사조왕, 
 

조왕부득자자.  왕유소애희, 왕후사인짐살지. 왕내위가시사장, 영악인가지.   

왕비, 유월즉자살. 태후문지, 이위왕용부인기종묘예, 폐기사.)

[양왕 '유회'는 봉국을 옮겨 조왕이 되었지만, 마음속으로는 기쁘지 않았다. 

'여태후'는 '여산'의 딸을 '유회'에게 시집보내 왕후로 삼게 하였다. 왕후를 따르는 관원은 모두 여씨 일족이었는데,

권력을 제멋대로 휘두르며, 조왕의 거동을 은밀히 감시했으므로 조왕은 자유롭게 행동할 수가 없었다.  

조왕에게는 총애하는 애첩이 있었지만, 조왕후는 사람을 시켜서 그녀를 짐주로 독살했다.   

조왕은 4절로 된 노래를 지어 악공들에게 부르도록 했다. 조왕은 비통해하다가 6월에 자살했다.   

'여태후'는 듣고, 조왕이 부인 때문에 종묘제사의 예를 버렸다고 생각하여, 그 후손의 왕위 계승권을 박탈하였다. ]

宣平侯張敖卒以, 子偃為魯王, 敖賜謚為魯元王.   秋, 太后使使告代王, 欲徙王趙代王謝, 願守代邊.

太傅產· 丞相平等言, 武信侯呂祿上侯, 位次第一, 請立為趙王.  太后許之追.  尊祿父康侯為趙昭王. 

九月, 燕靈王建薨, 有美人子, 太后使人殺之, 無后, 國除.
(선평후장오졸이, 자언위노왕, 오사시위노원왕.  추, 태후사사고대왕, 욕사왕조대왕사, 원수대변.

태부산· 승상평등언, 무신후여록상후, 위차제일, 청립위조왕.  태후허지, 추.  존록부강후위조소왕.   

구월, 연영왕건훙, 유미인자, 태후사인살지, 무후, 국제.)


[선평후 '장오'가 죽자, 그의 아들 '장언'을 노왕으로 삼았으며, '장오'에게 노원왕이라는 시호를 하사했다. 
가을, '여태후'는 사자를 보내어 대왕 '유항'에게 알리고, 그를 조왕으로 바꾸어 봉하려고 했다. 

그러나 대왕은 사양하고 변방인 대 땅을 지키기를 원했다.

태부 '여산'과 승상 '진평' 등이 말하기를 무신후 '여록'은 서열이 높고 그 작위 등급이 제일 높으므로,  

조왕으로 봉해 달라고 청하자. '여태후'는 이를 허락하고, '여록'의 부친 강후를 조소왕으로 추존하였다. 
9월, 연영왕 '유건'이 죽자, 그에게는 후궁 소생의 아들이 있었는데,

'여태후'는 사람을 보내 그를 죽여서 후사를 끊고 봉국을 없애버렸다.]

八年十月, 立呂肅王子東平侯呂通為燕王, 封通弟呂莊為東平侯.  三月中, 呂后祓, 還過軹道,  

見物如蒼犬, 據高后掖, 忽弗復見. 卜之, 云趙王如意為祟. 高后遂病掖傷.
(팔년시월, 입여숙왕자동평후여통위연왕, 봉통제여장위동평후.  삼월중, 여후불, 환과지도, 
 

견물여창견, 거고후액, 홀불부견. 복지, 운조왕여의위수. 고후수병액상. )


[고황후 8년 10월, 여숙왕의 아들 동평후 '여통'을 연왕으로 삼았으며, 
'여통'의 동생 '여장'을 동평후에 봉했다. 

3월 중순, '여태후'가 불제(푸닥거리 굿)를 지내고 돌아오는 도중 "지도"를 지날 때, 

검은 개같이 생긴 괴물이 나타나, '여태후'의 겨드랑이를 물고는 홀연히 사라졌다 다시 나타났다.   

점을 쳐보니 독살된 조왕 '여의'가 귀신이 되어 재앙을 내리는 것이라 했다.
이때부터 '여태후'는 겨드랑이에 통증이 오는 병이 생겼다.] 

高后為外孫魯元王偃年少, 蚤失父母, 孤弱, 乃封張敖前姬兩子, 侈為新都侯, 壽為樂昌侯,  

以輔魯元王偃.  及封中大謁者張釋為建陵侯, 呂榮為祝茲侯. 諸中宦者令丞皆為關內侯, 食邑五百戶.
(고후위외손노원왕언년소, 조실부모, 고약, 내봉장오전희양자, 치위신도후, 수위낙창후, 
 

이보노원왕언.  급봉중대알자장석위건릉후, 여영위축자후. 제중환자령승개위관내후, 식읍오백호.)


['여태후'는 외손자 노원왕 '장언'이 어린 나이에 일찍 부모를 잃어 돌봐주는 사람없이 외롭고 허약했으므로
 

'장오'의 예전 애첩의 두 아들 중 '장치'를 신도후로 봉하고, '장수'를 낙창후로 봉해 노원왕 '장언'을 보좌하게 하였다.

또한 중대알자 '장석'을 건릉후에 봉하고, '여영'을 축자후에 봉했다.  

궁중 환관으로 영, 승의 직책을 맡은 자는 모두 관내후로 봉해 식읍으로 5백 호를 하사했다.]

七月中, 高后病甚, 乃令趙王呂祿為上將軍, 軍北軍;呂王產居南軍.    

呂太后誡產· 祿曰:" 高帝已定天下, 與大臣約, 曰‘非劉氏王者, 天下共擊之’. 

今呂氏王, 大臣弗平. 我即崩, 帝年少, 大臣恐為變. 必據兵衛宮, 慎毋送喪, 毋為人所制. ”             

(칠월중, 고후병심, 내령조왕여록위상장군, 군북군 ; 여왕산거남군.   

여태후계산· 록왈 : " 고제이정천하, 여대신약, 왈'비유씨왕자, 천하공격지'.

금여씨왕, 대신불평. 아즉붕, 제연소, 대신공위변. 필거병위궁, 신무송상, 무위인소제. " )


[7월 중순, '여태후'의 병세가 위중해지자, 조왕 '여록'을 상장군으로 임명해 북군을 통솔하게 하고, 
 

여왕 '여산'은 남군을 통솔하게 했다. '여태후'는 '여산'과 '여록'을 불러 충고하기를 :  

" 고제께서 천하를 평정했을 때, 대신들과 맹약하기를 ‘유씨가 아니면서 왕이 되는 자가 있으면,  

천하가 함께 그를 벌할 것이다.’라고 하였다.  지금 여씨가 왕이 되었으니, 대신들은 마음속으로 불평하고  

있을 것이다.  내가 죽게 되면 황제는 나이가 어리므로 대신들은 아마도 난을 일으킬 것이다.
그대들은 반드시 병권을 장악해 황궁을 지키며, 부디 나의 죽음을 먼저 알리지 말고, 
 

황궁을 지키며 다른 사람들에게 제압당하지 않도록 하라. ”라고 하였다.]

辛巳, 高后崩, 遺詔賜諸侯王各千金, 將相列侯郎吏皆以秩賜金.  大赦天下.   

以呂王產為相國, 以呂祿女為帝后.   高后已葬, 以左丞相審食其為帝太傅.
(신사, 고후붕, 유조사제후왕각천금, 장상열후랑리개이질사금.  대사천하.  
 

이여왕산위상국, 이여록여위제후.  고후이장, 이좌승상심이기위제태부.)

[신사일, '여태후'가 세상을 떠나자, 그의 유언에 따라서 제후왕에게 각각 황금 1천 근과, 

장상, 열후, 낭, 리에게는 모두 품계에 따라서 금을 하사하였다. 천하에는 대사면령을 내렸다. 

그리고 여왕 '여산'을 상국으로 삼고, '여록'의 딸을 황후로 삼게 하였다.
'여태후'의 장례 절차가 끝나자,  좌승상 '심이기'를 황제의 태부로 임명했다. ]

朱虛侯劉章有氣力, 東牟侯興居其弟也.  皆齊哀王弟, 居長安.  當是時, 諸呂用事擅權, 欲為亂,  

畏高帝故大臣絳· 灌等, 未敢發.  朱虛侯婦, 呂祿女, 陰知其謀. 恐見誅, 乃陰令人告其兄齊王,  

欲令發兵西, 誅諸呂而立. 朱虛侯欲從中與大臣為應. 齊王欲發兵, 其相弗聽.
(주허후유장유기력, 동모후흥거기제야.  개제애왕제, 거장안.  당시시, 제여용사천권, 욕위난, 
 

외고제고대신강· 관등, 미감발.  주허후귀, 여록녀, 음지기모. 공견주, 내음영인고기형제왕,  

욕영발병서, 주제여이립. 주여후욕종중여대신위응. 제왕욕발병, 기상불청. )


[주허후 '유장'은 용기와 체력이 강했으며, 동모후 '유흥거'는 그의 동생이었다.   
 

두 사람 모두 제애왕 '유양'의 동생으로 "장안"에 거주하고 있었다. 
그 당시 여씨 일족이 권력을 멋대로 행사하며 반란을 일으키려고 했지만, 
 

고제의 노신인 강후 '주발'과 '관영' 등이 두려워서 감히 난을 일으키지 못하고 있었다.  

주허후의 부인은 '여록'의 딸이었으므로, 주허후는 여씨 일족의 음모를 남몰래 알게 되었다.   

여씨들에게 죽임을 당할까 두려워, 은밀히 사람을 보내어 그의 형 제애왕에게 알려,  

형으로 하여금 병사를 출동시켜 "장안"으로 진격해 여씨 일족을 주멸하고 황제의 자리에 오르도록 하였다. 
그리고 주허후 자신은 궁궐 안에서 조정대신들과 연합하여 대응하려 하였다.  
 

제왕은 군사를 일으키려고 했지만, 승상 '소평'이 말을 듣지 않았다. ] 

八月丙午, 齊王欲使人誅相, 相召平乃反, 舉兵欲圍王, 王因殺其相, 遂發兵東, 詐奪瑯邪王兵,  

并將之而西.  語在齊王語中.
(팔월병오, 제왕욕사인주상, 상소평내반, 거병욕위왕, 왕인살기상, 수발병동, 사탈낭야왕병, 
 

병장지이서.  어재제왕어중.)

[8월 병오일, 제왕은 사람을 시켜서 승상을 주살하려고 하자, 승상 '소평'이 이 사실을 알고 모반해,  

군사를 일으켜서 제왕을 포위하여 공격하려고 했다. 이에 제왕은 승상을 죽이고 마침내 군사를 동쪽으로 출동시켜,

계략을 써서 낭야왕의 군대를 탈취하고, 양쪽 군사를 병합해 서쪽으로 진격했다. 
이에 관한 자세한 이야기는 《제도혜왕세가(齊悼惠王世家)》에 기록되어 있다. ]

齊王乃遺諸侯王書曰:" 高帝平定天下, 王諸子弟, 悼惠王王齊.  悼惠王薨,  

孝惠帝使留侯良立臣為齊王.  孝惠崩, 高后用事, 春秋高, 聽諸呂, 擅廢帝更立, 又比殺三趙王,  

滅梁· 趙· 燕以王諸呂, 分齊為四. 忠臣進諫, 上惑亂弗聽.  今高后崩, 而帝春秋富未, 能治天下,  

固恃大臣諸侯. 而諸呂又擅自尊官, 聚兵嚴威, 劫列侯忠臣, 矯制以令天下, 宗廟所以危.   

寡人率兵入誅不當為王者. ” 

(제왕내유제후왕서왈 : " 고제평정천하, 왕제자제, 도혜왕왕제.  도혜왕훙,  

효혜제사유후량립신위제왕.  효혜붕, 고후용사, 춘추고, 청제여, 천폐제경립, 우비살삼조왕,  

멸양· 조· 연이왕제여, 분제위사. 충신진간, 상혹난불청.  금고후붕, 이제춘추부미, 능치천하,  

고시대신제후. 이제여우천자존관, 취병엄위, 겁열후충신, 교제이령천하, 종묘소이위.   

과인솔병입주부당위왕자. " )


[제왕은 이에 제후왕들에게 편지를 써서 다음과 같이 말하기를 : " 고제께서 천하를 평정하고 나서 
자신의 아들과

동생을 왕으로 봉할때, 도혜왕을 제나라 왕에 봉하였소.  도혜왕이 서거하자, 효혜제께서 유후 '장량'을 보내

나를 제왕으로 세우셨소.  효혜제께서 서거하자, '여태후'가 정권을 잡았으나 나이가 많았기에,

모든 일은 여씨 일족의 말을 들어야 했고, 그들 마음대로 황제를 폐위시키고 옹립하였소. 
또 계속해서 3명의 조왕을 살해했고, 양· 조· 연나라를 멸해 여씨 일족을 왕으로 삼았으며,

제나라를 넷으로 분할하였소. 충신이 진언해 간했으나 '여태후'는 여씨 일족의 갈피를 잡을 수 없는 말에 미혹되어

듣지 않았소.  지금 '여태후'가 세상을 떠나고, 황제는 아직 나이가 어려 천하를 다스릴 수 없으니,

마땅히 대신과 제후들에게 의지해야 하오. 그러나 여씨 일족은 또 제멋대로 자신들의 관직을 높이고,  

병권을 장악하여 위세를 과시하며, 열후와 충신들을 협박하고, 조서를 거짓으로 꾸며서 천하를 호령하고 있으니

종묘사직이 위태롭게 되었소. 과인은 병사를 이끌고 도성으로 들어가 부당하게 왕이 된 자를 주멸시킬 생각이오. ”

라고 하였다.] 

漢聞之, 相國呂產等乃遣潁陰侯灌嬰將兵擊之.   

灌嬰至滎陽, 乃謀曰:" 諸呂權兵關中, 欲危劉氏而自立.  今我破齊還報, 此益呂氏之資也. ”

乃留屯滎陽, 使使諭齊王及諸侯, 與連和, 以待呂氏變, 共誅之. 齊王聞之, 乃還兵西界待約.
(한문지, 상국여산등내견영음후관영장병격지.  
 

관영지형양, 내모왈 : " 제여권병관중, 욕위유씨이자립.  금아파제환보, 차익여씨지자야. "

내유둔형양, 사사유제왕급제후, 여연화, 이대여씨변, 공주지.  제왕문지, 내환병서계대약.)

 

[한나라 조정에서 이 말을 듣고, 상국 '여산' 등은 영음후 '관영'을 파견해 군사를 이끌고 제왕을 공격하게 하였다.

'관영'은 "형양"에 이르러서 부하 장수들과 상의하여 말하기를 : " 여씨 일족은 "관중" 땅에서 병권을 장악하고,

유씨의 조정을 위태롭게 하여 자신들이 제위에 오르려고 하고 있소. 지금 우리들이 제나라를 무찌르고 돌아가서

보고하면, 이것은 여씨의 세력을 더욱 강하게 해주는 것이오. "라고 하였다.

그래서 "형양"에 머물러 주둔한 '관영'은 제왕과 제후들에게 사신을 보내어,

서로 연합해 여씨가 반란을 일으키기를 기다렸다가 함께 그들을 주살하자고 하였다. 

제왕은 이 말을 듣자, 제나라의 서쪽 국경으로 회군해 약속을 기다렸다.]

呂祿· 呂產欲發亂關中, 內憚絳侯· 朱虛等, 外畏齊· 楚兵, 又恐灌嬰畔之, 欲待灌嬰兵與齊合而發, 猶豫未決. 

當是時, 濟川王太· 淮陽王武· 常山王朝名為少帝弟, 及魯元王呂后外孫,  皆年少未之國, 居長安.   

趙王祿· 梁王產各將兵居南北軍, 皆呂氏之人. 列侯群臣莫自堅其命.
(여록· 여산욕발난관중, 내탄강후· 주허등, 외외제· 초병, 우공관영반지, 욕대관영병여제합이발, 
 유예미결. 

당시시, 제천왕태· 회양왕무· 상산왕조명위소제제, 급노원왕여후외손,  개연소미지국, 거장안. 

조왕록· 양왕산각장병거남북군, 개여씨지인. 열후군신막자견기명.)


['여록'과 '여산'은 "관중"에서 난을 일으키려고 하였지만, 안으로는 '주발'과 '유장' 등이 꺼림직하였고,  

밖으로는 제나라와 초나라의 군사들이 두려웠으며, 또 '관영'이 여씨를 배반할 것을 걱정해

'관영'의 군사가 제나라 군사와 싸울 때를 기다렸다가 반란을 일으키기로 하고 잠시 미루어 두었다.  

당시, 제천왕 '유태'· 회양양 '유무'· 상산왕 '유조'는 명목상 소제의 동생이고, 노원왕 '장언'은

'여태후'의 외손자이지만, 모두 나이가 어려 봉국으로 떠나지 않고 "장안"에 거주하고 있었다.  

조왕 '여록'과 양왕 '여산'은 각기 병사를 이끌고 남군과 북군에 있었는데, 모두가 여씨 일족이었다.   

그러므로 열후와 대신들은 자신들의 목숨을 보장할 수 없었다. ]

太尉絳侯勃不得入軍中主兵. 曲周侯酈商老病, 其子寄與呂祿善. 絳侯乃與丞相陳平謀, 使人劫酈商.

令其子寄往紿說呂祿曰:" 高帝與呂后共定天下, 劉氏所立九王, 呂氏所立三王, 皆大臣之議,  事已布告諸侯,

諸侯皆以為宜.  今太后崩帝, 少, 而足下佩趙王印, 不急之國守藩, 乃為上將,  將兵留此, 為大臣諸侯所疑.

足下何不歸印, 以兵屬太尉?  請梁王歸相國印, 與大臣盟而之國, 齊兵必罷, 大臣得安,

足下高枕而王千里, 此萬世之利也. ”
(태위강후발부득입군중주병.  곡주후역상노병, 기자기여여여록선.  강후내여승상진평모, 사인겁역상.

영기자기왕태설여록왈 : " 고제여여후공정천하, 유씨소립구왕, 여씨소립삼왕, 개대신지의,  사이포고제후,

제후개이위의.  금태후붕제, 소, 이족하패조왕인, 불급지국수번, 내위상장,  장병유차, 위대신제후소의.

족하하불귀인, 이병속태위 ? 청양왕귀상국인, 여대신맹이지국, 제병필파, 대신득안,

족하고침이왕천리, 차만세지리야. " )

[태위 강후 '주발'은 군영 안으로 들어가서 병권을 장악할 수 없었다. 곡주후 '역상'은 늙어 병이 들었으며,

그의 아들 '역기'와 '여록'은 친한 사이였다. 이에 '주발'은 승상 '진평'과 모의하여, 사람을 시켜 '역상'을 위협하였다.

 '역상'은 아들 '역기'에게 시키기를 조왕 '여록'을 속여서 이렇게 말하게 하였다. :

" 고제께서는 '여태후'와 함께 천하를 평정한 후에, 유씨에서 9명이, 여씨에서 3명이 제후왕에 봉해진 것은,  

모두 대신들이 합의한 것으로, 이미 제후들에게 널리 알려져, 제후들은 모두 마땅하다고 여기고 있습니다. 

지금 태후께서 세상을 떠나시고, 황제는 나이가 어리신데, 족하께서는 조왕의 인수를 차고서도,  

얼른 봉국에 가서 봉지를 지키려고 하지 않으시고, 오히려 상장군의 신분으로 병사들을 인솔해 

"장안"에 체류하고 있으니, 대신과 제후들의 의심을 사게 되었습니다. 
족하께서는 무엇 때문에 상장군의 인장과 군사들을 태위에게 넘겨주지 않으십니까 ? 
 

청컨대 양왕에게도 상국의 인장을 반환하시어 대신들과 맹약하고 자신의 봉국으로 돌아가십시오.   

그러면 제나라에서는 틀림없이 군대를 해산할 것이며, 대신들도 안심할 것이니,  

족하께서는 베게를 높이 베고 걱정없이 천리 되는 큰 나라에서 왕으로 지낼 수가 있으니,  

이것이야말로 만세의 이로움입니다. ”라고 하였다.]

呂祿信然其計, 欲歸將印, 以兵屬太尉.  使人報呂產及諸呂老人, 或以為便, 或曰不便,  計猶豫未有所決. 

呂祿信酈寄, 時與出游獵.  過其姑呂媭, 媭大怒, 曰:" 若為將而棄軍, 呂氏今無處矣. ”

乃悉出珠玉寶器散堂下, 曰:" 毋為他人守也. ”   左丞相食其免.
(여록신연기계, 욕귀장인, 이병속태위.  사인보여산급제여노인, 혹이위편, 혹왈불편, 
 계유예미유소결. 

여록신역기, 시여출여렵.  과기고여수, 수대노, 왈 : " 약위장이기군, 여씨금무처의. "

내실출주옥보기산당하, 왈 : " 무위타인수야. "  좌승상이기면.)

 

['여록'은 과연 '역기'의 계략을 믿고, 장군의 인장과 병권을 태위에게 돌려주려고 하였다.  
그리고 사람을 시켜 '여산'과 여씨 일족의 장로들에게 이 일을 보고하자, 어떤 이는 이롭다고 하고 
 

어떤 이는 불리하다고 하니, 의견이 일치되지 않아 확실한 결정을 내리지 못했다.   

'여록'은 역기를 신임했기에 때때로 그와 함께 사냥을 나갔다.

한번은 고모 '여수'의 집에 들렀는데 '여수'는 크게 화를 내며 말하기를 : " 만약 장군의 신분으로 병권을 버린다면,

여씨들은 이제 발붙일 곳이 없게 될 것이다. "라고 하였다.  그리고 주옥과 패물들을 마당에 모두 내팽개치며

말하기를 : " 어차피 다른 사람 것이 될 텐데 가지고 있을 필요가 없지. "라고 하였다. 좌승상 '심이기'가 면직되었다.] 

    

八月庚申旦, 平陽侯窋行御史大夫事, 見相國產計事. 

郎中令賈壽使從齊來, 因數產曰:" 王不蚤之國, 今雖欲行, 尚可得邪?”

具以灌嬰與齊· 楚合從, 欲誅諸呂告產, 乃趣產急入宮. 

平陽侯頗聞其語, 乃馳告丞相· 太尉. 太尉欲入北軍, 不得入.

(팔월경신단, 평양후줄행어사대부사, 견상국산계사.  랑중령가수사종제래,  

인수산왈 : " 왕불조지국, 금수욕행, 상가득야 ? "

구이관영여제· 초합종, 욕주제여고산, 내취산급입궁. 

평양후파문기어, 내치고승상· 태위. 태위욕입북군, 부득입.)

 

[8월 경신일 아침, 어사대부의 직무를 대리수행하고 있던 평양후 '조줄'은 상국 '여산'을 만나서 정사를 상의했다.

제나라에 사신으로 갔던 낭중령 '가수'가 돌아와서 '여산'을 나무라며 말하기를 : “ 대왕께서는 일찍 봉국으로

부임하지 않으시다가, 지금 비록 가려고 하신다고 해서 갈 수 있을 것 같습니까 ? ”하였다.

그리고서 '관영'이 제나라와 초나라가 연합해 여씨 일족을 주멸하려고 한다는 사실을 '여산'에게 상세히 보고하며

'여산'에게 서둘러 입궐하라고 재촉했다. 평양후는 이 말을 열심히 듣고 즉시 달려가서 

승상 '진평'과 태위 '주발'에게 알렸다.  태위는 북군으로 들어가려고 했으나 들어갈 수 없었다. ]

襄平侯通尚符節.  乃令持節矯內太尉北軍.  太尉復令酈寄與典客劉揭先說呂祿曰: 

" 帝使太尉守北軍, 欲足下之國, 急歸將印辭去, 不然, 禍且起. ”
(양평후통상부절.  내령지절교내태위북군.  태위부령역기여곡객유게선설여록왈 : 
 

" 제사태위수북군, 욕족하지국, 급귀장인사거, 불연, 화차기. " )

[이때 양평후 '기통'이 북군을 지휘할 수 있는 부절을 관리하고 있었다. 

'주발'은 부절을 가지고 황제의 칙령이라고 속이며 북군에 들어갔다. '주발'은 또 '역기'와 전객 '유게'를 보내 먼저

'여록'을 설득하기를 : “ 황제께서는 태위에게 북군의 수비를 분부하시고 족하는 봉국으로 돌아가게 하려고 하시니,
빨리 장군의 인장를 반환하고 떠나십시오. 그렇지 않으면 화를 당하게 될 것이오. ”라고 하였다.]
 

呂祿以為酈兄不欺己, 遂解印屬典客, 而以兵授太尉. 

太尉將之入軍門, 行令軍中曰:" 為呂氏右袒, 為劉氏左袒. ”  軍中皆左袒為劉氏.
(여록이위역형불기기, 수해인속곡객, 이이병수태위. 

태위장지입군문, 행령군중왈 :" 위여씨우단, 위유씨좌단. "  군중개좌단위유씨. )


['여록'은 '역기' 자기를 속이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하고, 장군의 인장를 풀어서 전객 '유게'에게 주고  

병권을 '주발'에게 넘겨주었다. '주발'은 장군 인장를 가지고 군문을 들어가, 군중의 군사들에게 명하기를 :

“ 여씨를 따를 자는 오른쪽 어깨를 드러내고, 유씨를 따를 자는 왼쪽 어깨를 드러내라. ”라고 하자.   

군중의 군사들은 모두 왼쪽 어깨를 드러내 유씨를 따르겠다는 뜻을 밝혔다.]

太尉行至, 將軍呂祿亦已解上將印去, 太尉遂將北軍.  然尚有南軍.   

平陽侯聞之, 以呂產謀告丞相平, 丞相平乃召朱虛侯佐太尉.  太尉令朱虛侯監軍門.
(태위행지, 장군여록역이해상장인거, 태위수장북군.  연상유남군.  
 

평양후문지, 이여산모고승상평, 승상평내소주허후좌태위.  태후령주허후감군문.)


[태위가 북군의 군영에 도착할 즈음, 장군 '여록' 또한 이미 상장군의 인장를 내놓고 군영을 떠났으므로, 
 

태위가 드디어 북군을 통솔하게 되었다. 그러나 남군은 여전히 '여산'이 지휘하고 있었다.   

평양후 '조줄'은 '여산'의 음모를 듣고 그 음모를 승상 '진평'에게 알리자, 
승상 '진평'은 주허후를 불러서 태위를 보좌하게 했다.  태위는 주허후에게 군문을 감독하게 하였다.]

令平陽侯告衛尉:" 毋入相國產殿門. ”  呂產不知呂祿已去北軍, 乃入未央宮, 欲為亂, 殿門弗得入, 裴回往來. 

平陽侯恐弗勝, 馳語太尉. 太尉尚恐不勝諸呂, 未敢訟言誅之,  

乃遣朱虛侯謂曰:" 急入宮衛帝. ” 朱虛侯請卒, 太尉予卒千餘人. 

(영양평후고위위 : " 무입상국산전문. "  여산부지여록이거북군, 내입미앙궁, 욕위난, 전문불득입,  배회왕래. 

양평후공불승, 치어태위. 태위상공불승제여, 미감송언주지,  

내견주허후위왈 : " 급입궁위제. " 주허후청졸, 태위여졸천여인. )


[태위는 평양후를 시켜서 위위에게 알리기를 : “ 상국 '여산'을 궁궐 문안으로 들이지 말라. ”라고 하였다. 
'여록'이 이미 북군을 떠났다는 것을 몰랐던 '여산'은 미앙궁으로 들어가서 난을 일으키려고 했다. 
 

그러나 궁궐 문안으로 들어갈 수 없게 되자 주위를 배회했다.  평양후는 싸움에 이기지 못할까 두려워,  

태위에게 달려가서 보고했다.  태위 역시 여씨 일족에게 승리하지 못할까 두려워서 감히 여씨를 주살하자고 분명하게

말하지 못하고, 주허후를 입궁시키며 말하기를 : “ 급히 궁궐 안으로 들어가서 황제를 호위하시오.”라고 하였다. 

주허후가 군사를 요청하자 태위는 1천여 명의 군사를 주었다. ] 

            

入未央宮門, 遂見產廷中.  日餔時, 遂擊產.  產走, 天風大起, 以故其從官亂, 莫敢鬬.

逐產, 殺之郎中府吏廁中. 朱虛侯已殺產, 帝命謁者持節勞朱虛侯.  朱虛侯欲奪節信, 謁者不肯,

朱虛侯則從與載, 因節信馳走, 斬長樂衛尉呂更始.  還, 馳入北軍, 報太尉. 太尉起, 拜賀朱虛侯曰:

“ 所患獨呂產, 今已誅, 天下定矣. ”   遂遣人分部悉捕諸呂男女, 無少長皆斬之.

(입미앙궁문, 수견산정중.  일포시, 수격산.  산주, 천풍대기, 이고기종관난, 막감투. 

축산, 살지낭중부사측중. 주허후이살산, 제명알자지부로주허후.  주허후욕탈절신, 알자불긍,

주허후즉종여재, 인절신치주, 참장악위위여경시.  환, 치입북군, 보태위. 태위기, 배하주허후왈 :  

" 소환독여산, 금이주, 천하정의. " 수견인분부실포제여남여, 무소장개참지.)


[미앙궁의 궁문을 들어선 주허후는 마침내 궁궐의 뜰에서 '여산'을 만났다. 때는 저녁 무렵이었는데 주허후가

'여산'을 공격하였다. '여산'이 달아나는데, 갑자기 하늘에서 강풍이 불자 '여산'을 따르던 관리들은 혼란에 빠져

감히 싸우려는 자가 없었다. 주허후는 '여산'을 추격해 낭중령 관부의 변소에서 그를 죽였다.

주허후가 '여산'을 죽이자, 황제는 알자에게 부절을 주고 주허후의 노고를 위로하게 하였다.   

주허후는 그 부절을 빼앗으려고 했지만 알자가 응하지 않자, 주허후는 할 수 없이 알자와 함께 수레에 올라타

알자의 부절을 빌려 장락궁으로 달려가서 위위 '여갱시'를 참수하였다. 

그리고 말을 달려 북군으로 돌아와서 태위에게 보고했다.  태위는 일어나서 주허후에게 하례를 올리며 말하기를 :

“ 우리가 우려하던 것은 오로지 '여산'이었는데, 이제 그를 죽였으니 천하는 안정될 것이오. ”라고 하였다.   

그리고 사람들을 나누어 파견해 여씨 일족의 남녀를 모두 체포해, 노소를 막론하고 모두 참수하였다. ] 

            

辛酉, 捕斬呂祿, 而笞殺呂媭.  使人誅燕王呂通而, 廢魯王偃.  壬戌, 以帝太傅食其復為左丞相.

戊辰, 徙濟川王王梁, 立趙幽王子遂為趙王.  遣朱虛侯章以誅諸呂氏事告齊王, 令罷兵.   

灌嬰兵亦罷滎陽而歸.

(신유, 포참여록, 이태살여수.  사인주연왕여통이, 폐노왕언.  임술, 이제태부이기복위좌승상.

무진, 사제천왕왕양, 입조유왕자수위조왕.  견주허후장이주제여씨사고제왕, 령파병.   

관영병역파형양이귀.)


[신유일, '여록'을 붙잡아서 참수하고, '여수'를 몽둥이로 매질해 죽였다.  또 사람을 보내 연왕 '여통'을 주살하고,

노왕 '장언'을 폐위시켰다.  임술일, 황제의 태부 '심이기'를 다시 좌승상으로 임명하였다.

무진일, 제천왕을 '양왕'으로 바꾸어 봉하고, 조유왕 '유우'의 아들 '유수'를 내세워 조왕으로 봉하였다. 
주허후 '유장'을 파견해 여씨 일족을 주살한 일을 제왕에게 보고하고, 군사를 철수시키도록 했다.  
 

'관영'의 군사도 "형양"에서 철수해 "장안"으로 돌아왔다.]

諸大臣相與陰謀曰:" 少帝及梁· 淮陽· 常山王, 皆非真孝惠子也.   

呂后以計詐名他人子, 殺其母, 養后宮, 令孝惠子之, 立以為后, 及諸王, 以彊呂氏. 

今皆已夷滅諸呂, 而置所立, 即長用事, 吾屬無類矣. 不如視諸王最賢者立之. ”   

或言 “ 齊悼惠王高帝長子, 今其適子為齊王, 推本言之, 高帝適長孫, 可立也. ”
(제대신상여음모왈 : " 소제급양· 회양· 상산왕, 개비진효혜자야.  
 

여후이계사명타인자, 살기모, 양후궁, 령효혜자지, 입이위후, 급제왕, 이강여씨.

금개이이멸제여, 이치소립, 즉장용사, 오솟무류의. 불여시제왕최현자입지. "   

혹언 " 제도혜왕고제장자, 금기적자위제왕, 추본언지, 고제적장손, 가립야. " )


[여러 대신들이 비밀리에 회동해 모의하여 말하기를 : " 소제와 양왕, 회양왕, 상산왕은 모두 효혜제의 
진짜 아들이

아니오. '여태후'가 거짓으로 다른 사람의 아들을 궁으로 데려와 황제의 아들이라 사칭하고, 

그들의 생모를 죽이고 후궁에서 양육하여 효혜제의 친아들로 만들어, 

자기의 계승자로 세우거나 제후왕으로 삼아 여씨의 세력을 강화시켰던 것이오.  지금 여씨 일족을 모두 죽였지만,

만일 여씨가 세운 자들을 그대로 남겨두어 그들이 성장한 후 정권을 잡으면, 우리들은 발 붙일 곳이 없게 될 것이오.
그러니 차라리 제후왕들 가운데 가장 어진 사람을 선택해 황제로 삼는 것이 좋겠소. ”라고 하자,
어떤 사람이 말하기를 “ 제도혜왕은 고제의 맏아들인데, 지금 그의 적자가 제왕이오. 
 

혈통으로 말한다면 제왕은 고제의 적장손이니 황제로 세울 수 있소.”라고 하였다. ]

大臣皆曰:" 呂氏以外家惡而幾危宗廟, 亂功臣.  今齊王母家駟, 駟鈞, 惡人也.   

即立齊王, 則復為呂氏. ”  欲立淮南王, 以為少, 母家又惡. 
(대신개왈 : " 여씨이외가악이기위종묘, 난공신.  금제왕모가사, 사균, 악인야.  
 

즉입제왕, 즉복위여씨. "   욕립회남왕, 이위소, 모가우악. )


[대신들은 모두 말하기를 : " 여씨는 외척으로서 포악한 짓을 자행해 종묘사직을 위태롭게 하고, 
 

공신에게 해를 끼쳤소. 지금 제왕의 외가는 성이 사씨로 외삼촌인 '사균'이란 자는 악인이오.   

만일 제왕을 세운다면 또 여씨 일족과 다를 바가 없을 것이오. ”라고 하였다.
또 회남왕을 황제로 세우려고 했지만, 나이가 어리고 그의 외가 역시 포악한 집안이었다. ]
 

乃曰:" 代王方今高帝見子, 最長, 仁孝寬厚.  太后家薄氏謹良.   

且立長故順, 以仁孝聞於天下, 便. ”  乃相與共陰使人召代王.  代王使人辭謝.

再反, 然後乘六乘傳.  后九月晦日己酉, 至長安, 舍代邸.   

大臣皆往謁, 奉天子璽上代王, 共尊立為天子.  代王數讓, 群臣固請, 然後聽. 

(내왈 : " 대왕금방고제견자, 최장, 인효관후.  태후가박씨근량. 

차립장고순, 이인효문어천하, 편. "  내상여공음사인소대왕.  대왕사인사사.

재반, 연후승륙승전.  후구월회일기유, 지장안, 사대저.   

대신개왕알, 봉천자새상대왕, 곤존입위천자.  대왕수양, 군신고청, 연후청.)

[그러자 대신들은 말하기를 : " 대왕(유항)이야말로 지금 생존하는 고제의 아들 중에서 가장 나이가 많으며,

사람됨이 어질고 효성이 지극하며 성품이 관대하면서 마음 씀씀이가 너그럽습니다.   

태후 박부인의 친정도 신중하고 선량한 집안이오.  또한 장자를 황제로 세우는 것이 순리에 맞으며 
대왕의 어진 마음과 효성은 천하에 소문이 나 있으니, 그를 황제로 옹립하는 것이 적당할 듯하오. ”하였다.
그리고는 서로 상의한 끝에 은밀히 사신을 보내어 대왕이 오기를 청하였다.  
 

그러나 대왕은 사람을 시켜 정중히 사절의 뜻을 밝혔다.

그러나 사신을 다시 보내자, 대왕은 비로소 여섯 마리의 말이 끄는 수레에 올랐다.   

윤달 9월 말일 기유일, "장안"에 도착해 대왕의 관저에 머물렀다. 

대신들은 모두 가서 알현하고, 천자의 옥새를 받들어 대왕에게 바침으로써 모두가 대왕을 높이어 천자로 옹립했다.

대왕은 여러 차례 사양했지만, 여러 신하들이 한사코 간청했기에 받아들였다. ] 

    

東牟侯興居曰:" 誅呂氏吾無功, 請得除宮. ”  乃與太仆汝陰侯滕公入宮, 前謂少帝曰: 

" 足下非劉氏, 不當立. ” 乃顧麾左右執戟者掊兵罷去. 有數人不肯去兵, 宦者令張澤諭告, 亦去兵. 

滕公乃召乘輿車載少帝出.
(동모후흥거왈 : " 주여씨오무공, 청득제궁. "  내여태부여음후등공입궁, 전위소제왈 : 
 

" 족하비유씨, 부당립."  내고휘좌우집극자부병파거.  유수인불긍거병, 환자령장택유고, 역거병. 

등공내소승여거재소제출.)

[동모후 '유흥거'가 말하기를 :  “ 여씨 일족을 주살함에 나는 공로가 없었으니,

청컨대 궁중 청소의 임무를 맡겨주십시오.”라고 하였다. 그리고 태복인 여음후 '등공'과 함께 입궁해

'소제' 앞으로 나아가서 말하기를 : “ 족하는 유씨가 아니니 천자의 자리에 있을 수 없소. ”라고 하였다.

'소제'의 좌우에 있던 호위병들을 둘러보며 손짓을 해 무기를 놓고 떠나게 했다.   

몇 사람이 병기를 버리려고 하지 않자 환자령 '장택'이 상황을 설명하자,
그들도 역시 물러났다.  '등공'은 천자의 수레를 불러서 소제를 태우고 궁궐을 나섰다. ]
 

少帝曰:" 欲將我安之乎? ”  滕公曰 : “ 出就舍. ”  舍少府.  乃奉天子法駕, 迎代王於邸.   

報曰:“ 宮謹除. ”  代王即夕入未央宮. 有謁者十人持戟衛端門,  

曰:" 天子在也, 足下何為者而入?” 代王乃謂太尉. 太尉往諭, 謁者十人皆掊兵而去.
(소제왈 : " 욕장아안지호 ? "  등공왈 : " 출취사. "  사소부.  내봉천자법가, 영대왕어저.  
 

보왈 : " 궁근제. "   대왕즉석입미양궁. 유알자십인지극위단문,  

왈 : " 천자재야, 족하하위자이입 ? " 대왕내위태위. 태위왕유, 알자십인개부병이거.)


['소제'가 묻기를 : “ 나를 어디로 데려가는 것이오 ? ”라고 하자.   
 

'등공'이 대답하기를 : “ 궁 밖에 있는 관사로 모실 것입니다. ”라고 하였다.
'등공'은 '소제'를 소부에서 살도록 했다.  '등공'은 천자의 법가를 몰아 대왕의 관저에 가서 보고하기를 
 

“궁중은 이미 깨끗이 되었습니다. ”라고 했다.  대왕은 그날 저녁 미앙궁으로 들어갔다. 알자 열 명이 창을 들고

궁궐 정문을 지키며 말하기를 : “ 천자가 있는데 족하께서는 무슨 일로 들어가시려고 합니까 ? ”라고 하였다. 

그러자 대왕은 태위를 불렀다.  태위가 가서 설명하자, 열 명의 알자들은 모두 무기를 거두고 물러났다. ]

代王遂入而聽政.  夜, 有司分部誅滅梁· 淮陽· 常山王及少帝於邸. 

代王立為天子. 二十三年崩, 謚為孝文皇帝.
(대왕수입이청정.  야, 유사분부주멸양· 회양· 상산왕급소제어저. 

대왕립위천자. 이십삼년붕, 시위효문황제. )

[대왕은 마침내 입궁해 정무를 시작하였다. 

그날 밤 담당 관원들이 각각 분담해 양왕, 회양왕, 상산왕과 소제를 그들의 관저에서 모두 주살하였다.
대왕은 천자에 즉위한지 재위 23년 만에 서거하니, 시호를 '효문'황제라 하였다. ]
 


           
太史公曰:孝惠皇帝, 高后之時, 黎民得離戰國之苦, 君臣俱欲休息乎無為, 故惠帝垂拱,  

高后女主稱制, 政不出房戶, 天下晏然.   刑罰罕用, 罪人是希. 民務稼穡, 衣食滋殖.
(태사공왈 : 효혜황제, 고후지시, 여민득리전국지고, 군신구욕휴식호무위, 고혜제수공,

고후여주칭제, 정불출방호, 천하안연.  형벌한용, 죄인시희. 민무가색, 의식자식. )

[태사공이 말하기를 : 효혜 황제와 고후 시절에는 백성들은 전국시대의 고통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었으며,

군신은 모두 무위의 경지에서 안식하려고 하였다. 그러므로 혜제는 팔장만 끼고 아무 일도 하지 않았고,

고후가 여성으로서 황제의 직권을 대행해 모든 정치가 방 안에서 이루어졌지만 천하가 태평하고 안락했다. 

형벌을 가하는 일도 드물었으며, 죄인도 드물었다. 

백성들이 농사일에 힘을 쓰니, 옷과 음식은 나날이 풍족해졌다. ” ]


人 物 .


 
**漢高祖,劉邦(유방) BC 247~195.
   *高皇后 呂氏(고황후 여씨).'呂雉'(여치). 유방의아내. 혜제(유영)의母親. 황후 →황태후 →태황태후.
   *薄姬(박희) 유항의모친.
   *杜云汐(두운석) 竇의房(두의방).미인. 유항의 관도 공주출산. BC183년 대국 왕후.

    유계 출산.→ 황후.  설연 사후 실명.
   *攝愼兒(섭신아) 여록의처. 딸'왕지' 출산. .유항'의부인. 왕자'유무'생산.
   *莫離(막리) 고황후 시녀.  왕지를키움.
  **惠帝,劉盈(유영) 여치의子.유방의차남.제위BC 195~188. 2대황제.
   *張焉(장언) 유영의 조카. 황후 →황태후. "복원"에서 감금생활.  주아부와 혼인.
  **文帝,劉恒(유항) 박희의子.유방의5남. 제위BC 180~157 .대국왕→ 황제.  5대황제.
   *靑寧(청녕) 유항의부인.대국왕후. '두의방'을 대신해 화살에 맞아 죽음,
   *國春(국춘)운석의 사촌오빠.
   *呂祿(여록) 고황후 조카. 유영 사망후 태위.
   *周亞夫(주아부)대국의 장군. 섭신아의 계략에 말려 투옥.석방후 죽은 설연과 영혼 결혼.

    직책 "복원"폐순랑(경비).
   *周子苒(주자염)주아부 동생. 유항의황후. 왕자생산. 출산 촉진 후유증으로 병사.
   *莫雪鳶,阿丑(막설연,아축) 막리의 조카.두운석의 시녀. 주아부와 열애. 섭신아의 계략으로 자살.
  **少帝,劉恭(유공) 유영의子. '여치'에 의해 아사. 3대황제(즉위 BC 188~ 184).
   *劉票,館陶(유표,관도) 공주. 유항&두의방 女.
  **景帝,劉啓(유계) 유항&두의방 子. BC 157년 즉위.BC 141년사망,  6대황제.
   *劉尊(유존) 유항&주자염 子. 그네에서 낙상사.
   *王志(왕지) 섭신아의딸. 금왕손과 결혼. 남편 사별후 입궁, '유철'출산. 남궁공주 출산.
   *劉武(유무) 유항&섭신아 子. 양왕.
   *巧慧(교혜) 박희의 질손녀. 유계와 혼인. 황후. 역병 의복 사건발각으로 목메자살.
   *栗妙人(율묘인) 궁녀. 유계의 첫사랑. 왕자'유영' 출산.
   *劉榮(유영) 율비의子. 황태자.→폐위 임강왕,
  **武帝,劉徹(유철) 7대황제.(BC 156~87) 제위BC 144.

 

 

※  原 文 .    【 中國哲學書電子化計劃 .   筆寫本 】

 

                    

 

     原 文   飜 譯 者        德庤 / 李   斗 振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