史記 世家(사기세가)/27. 絳侯周勃世家

第 二十七.​ 絳侯周勃世家(강후주발세가)

덕치/이두진 2021. 7. 13. 17:42

 

            史記 世家

 

    ​第 二十七.​  絳侯周勃世家(강후주발세가)

絳侯周勃者,沛人也.  其先卷人,徙沛.  勃以織薄曲為生,常為人吹簫給喪事,材官引彊.

[강후(絳侯) 주발(周勃)은 패현(沛縣) 사람이다. 그의 선조는 권현(卷縣) 사람으로 나중에 패현으로 이사왔다.
주발은 베틀을 짜고 누에치기로 생활을 유지하였으며, 항상 피리를 불고 다니면서 남의 초상을 치러 주었고

나중에는 강한 활을 당길 수 있는 재관()이 되었다.]

 

高祖之為沛公初起,勃以中涓從攻胡陵,下方與.  方與反,與戰,卻適.  攻豐.  擊秦軍碭東.

還軍留及蕭. 復攻碭,破之.  下下邑,先登.  賜爵五大夫.  攻蒙、虞,取之.

[한 고조 유방(劉邦)이 패공이 되어 막 봉기할 때, 주발은 중연(中涓)의 직위로 고조를 따라

호릉(胡陵)을 공격해 방여(方與)를 함락시켰다. 방여에서 반란이 일어나자 그는 전투에 참가해 적군을 물리쳤다.
그는 풍읍을 공격하고 탕군 동쪽에서 진(秦)나라 군대를 치고는 또 군대를 이끌고 유현(留縣), 소현(蕭縣)으로

돌아왔으며, 재차 탕군을 공격해 격파했다. 하읍을 공격해 함락시켰을 때에는 그가 가장 먼저 성루에 올랐다.
고조는 그에게 오대부의 작위를 하사했다. 이어 몽읍(蒙邑), 우현(虞縣)을 공격해 함락시켰다.]

 

擊章邯車騎,殿.  定魏地.  攻爰戚、東緡,以往至栗,取之.  攻齧桑,先登.

擊秦軍阿下,破之.  追至濮陽,下甄城.  攻都關、定陶,襲取宛朐,得單父令.

夜襲取臨濟,攻張,以前至卷,破之.  擊李由軍雍丘下.  攻開封,先至城下為多.

[고조가 진(秦)나라의 장군 장한(章邯)의 거기(車騎)부대를 공격할 때, 그는 군대를 거느리고 후진에 있었다.

그리고 위(魏)나라 땅을 평정했다. 또 원척(爰戚), 동민(東緡)을 공격하고 곧장 율(栗)에 도착해서

모두 함락시켰다. 설상(齧桑)을 공격할 때에도 주발은 가장 먼저 성(城)에 올랐다.

또 동아성(東阿城) 아래에서 진(秦)나라 군대를 격파시키고는 복양(濮陽)까지 추격해서 견성(甄城)을 함락시켰다.

도관(都關)과 정도(定陶) 두 현을 공격하고 완구(宛朐)를 습격해 탈취하고 선보(單父)의 현령을 사로잡았다.
야밤에 임제(臨濟)를 습격해 함락시키고 다시 장현(張縣)을 공격했고, 그의 군대가 선봉이 되어 권현에 도착해서

성을 격파시켰다. 옹구성(雍丘城) 아래에서 진(秦)나라의 장수 이유(李由)의 군대를 공격했다.
개봉(開封)을 공격할 때 그의 군대 중에서 앞다투어 성 아래에 다다른 자가 다른 부대보다 많았다.]

 

後章邯破殺項梁,沛公與項羽引兵東如碭.  自初起沛還至碭,一歲二月.

楚懷王封沛公號安武侯,為碭郡長.  沛公拜勃為虎賁令,以令從沛公定魏地.

攻東郡尉於城武,破之.  擊王離軍,破之.  攻長社,先登.  攻潁陽、緱氏,絕河津.

擊趙賁軍尸北.  南攻南陽守齮,破武關、峣關.  破秦軍於藍田,至咸陽,滅秦.

[후에 장한(章邯)이 항량(項梁)이 거느린 초(楚)나라 군대를 대파시키고 항량을 죽이자,

패공과 항우(項羽)는 군대를 이끌고 동쪽의 탕군으로 돌아왔다.
패현에서 봉기한 후 탕군으로 회군하기까지, 그 기간은 모두 1년 2개월이었다.
초 회왕(楚懷王)은 패공을 안무후(安武侯)로 봉해 탕군의 장관을 맡게 했다.

패공은 주발을 호분령(虎賁令)으로 임명했다. 그는 호분령의 신분으로 패공을 따라 위(魏)나라 땅을 평정했다.

성무(城武)에서 동군(東郡) 군위(郡尉)의 부대를 공격해 대파했다.
또 왕리(王離)의 군대를 대파했다. 장사(長社)를 공격할 때, 주발은 가장 먼저 성루에 올랐다.
이어서 영양(潁陽), 구지(緱氏)를 공격했고, 황하의 중요한 나루터인 평음진(平陰津)을 끊고,
시향(尸鄕) 북쪽에서 조분(趙賁)의 군대를 공격했다. 또 남쪽으로 남양(南陽) 군수 여의(呂齮)를 공격했다.
무관(武關), 요관(嶢關)을 격파했다. 남전(藍田)에서 진(秦)나라의 군대를 대파시켰고,

함양(咸陽)으로 진군해 진(秦) 왕조를 멸망시켰다.]

 

項羽至,以沛公為漢王.  漢王賜勃爵為威武侯.  從入漢中,拜為將軍.

還定三秦,至秦,賜食邑懷德.  攻槐裏、好畤,最.  擊趙賁、內史保於咸陽,最.

北攻漆.  擊章平、姚卬軍.  西定汧.  還下郿、頻陽.

[항우가 함양에 도착하자 패공을 한왕(漢王)에 봉했다. 한왕은 주발에게 위무후(威武侯)의 작위를 하사했다.
주발이 한왕을 따라 한중(漢中)으로 진입하자, 한왕은 그를 장군으로 임명했다.
그가 회군해 삼진(三秦)을 평정하고 진(秦) 땅에 도착한 후, 한왕은 회덕현(懷德縣)을 그에게 식읍으로 주었다.
괴리(槐里), 호치(好畤)를 공격할 때에도 최고의 공을 세웠다.

함양에서 조분과 내사(內史) 보(保)의 군대를 공격할 때에도 최고의 공을 세웠다.
북쪽으로 칠현(漆縣)을 공격했고 장평(章平), 요앙(姚卬)의 군대를 공격해 서쪽으로 견현(汧縣)을 평정했다.
다시 회군해 미성(郿城), 번양(頻陽)을 함락시켰다.] 장한(章邯)을 폐구(廢丘)에서 공격했다.

 

圍章邯廢丘.  破西丞. 擊盜巴軍,破之.  攻上邽.  東守峣關.  轉擊項籍.  攻曲逆,最.

還守敖倉,追項籍.  籍已死,因東定楚地泗(川)[水]、東海郡,凡得二十二縣.

還守雒陽、櫟陽,賜與潁(陽)[陰]侯共食鐘離.

以將軍從高帝反者燕王臧荼,破之易下.  所將卒當馳道為多.

[장한(章邯)의 군대를 폐구(廢丘)에서 포위하여 공격하였다.

또 서현(西縣) 현승(縣丞)의 수비군을 격파하고 도파(盜巴)의 부대를 대파했다.
다시 상규(上邽)를 공격하고 동쪽으로 가서 요관(嶢關)을 수비했다. 돌아와서 항우를 공격했다.
곡우(曲遇)를 공격할 때 또 최고의 공을 세웠다. 회군해 오창(敖倉)을 수비했다. 후에 또 항우를 추격했다.
항우가 죽은 후, 주발은 승세를 타고 동쪽으로 초 나라 땅의 사수(泗水)와 동해(東海) 두 군(郡)을 평정하고

모두 22현을 함락시켰다. 회군하여 낙양(雒陽)과 역양(櫟陽)을 수비했다.

고조는 종리현(鍾離縣)을 그와 영음후(潁陰侯) 관영(灌嬰)에게 공동의 식읍으로 하사했다.
주발은 또 장군의 신분으로 고조를 따라 반란을 일으킨 연왕(燕王) 장도(臧荼)를 토벌하러 가서

역성(易城) 아래에서 격파시켰다. 그가 이끈 사병들이 치도(馳道)에서 반군을 공격하니 공로가 가장 컸다.]

 

賜爵列侯,剖符世世勿絕.  食絳八千一百八十戶,號絳侯.

以將軍從高帝擊反韓王信於代,降下霍人.  以前至武泉,擊胡騎,破之武泉北.

轉攻韓信軍銅鞮,破之.  還,降太原六城.  擊韓信胡騎晉陽下,破之,下晉陽.

後擊韓信軍於硰石,破之,追北八十里.

還攻樓煩三城,因擊胡騎平城下,所將卒當馳道為多.  勃遷為太尉.

[(고조 6년) 고조는 주발에게 열후(列侯)의 작위를 하사하고 신표를 쪼개어 주발의 작위가 대대로 전해져

끊어지지 않게 했다. 강(絳)을 식읍으로 해 8,180호의 부세(賦稅)를 받게 하고 ‘강후(絳侯)’라고 불렀다.
주발은 장군의 신분으로 고조를 따라서 반란을 일으킨 한왕(韓王) 신(信)을 대(代) 땅에서 토벌했고

곽인현(霍人縣)을 항복시켰다. 또 선봉이 되어 무천(武泉)에 도착해 흉노의 기병을 무천 북쪽에서 격파했다.

돌아서 한왕 신의 군대를 동제(銅鞮)에서 공격해 대파했다. 회군할 때 태원군(太原郡)의 6성의 항복을 받아냈다.

진양성(晉陽城) 아래에서 한왕 신과 흉노의 기병을 공격해 격파시키고 진양성을 함락시켰다.
그 후에 사석(硰石)에서 한왕 신의 군대를 대파시키고 80리나 추격했다.
또한 누번(樓煩)의 3성을 공격했고 또 승세를 타고 평성(平城) 일대에서 흉노의 기병을 공격했다.
그가 거느린 군대는 항상 앞장서서 치도(馳道)를 열어 흉노의 기병을 공격했는데 공로가 가장 컸다.

주발은 태위(太尉)로 승진하였다.]

 

擊陳豨,屠馬邑.  所將卒斬豨將軍乘馬絺.  擊韓信、陳豨、趙利軍於樓煩,破之.

得豨將宋最、鴈門守圂.  因轉攻得雲中守遬、丞相箕肆、將勳.  定鴈門郡十七縣, 雲中郡十二縣.

因復擊豨靈丘, 破之, 斬豨, 得豨丞相程縱、將軍陳武、都尉高肆.  定代郡九縣.

[고조 10년, 주발은 군대를 이끌고 반란 장수 진희(陳豨)를 토벌해 마읍현(馬邑縣)을 도륙하였다.

그의 병졸들은 진희의 장군 승마치(乘馬絺)를 베었다.
또 한왕 신, 진희, 조리(趙利)의 군대를 누번에서 공격해 격파했고,

진희의 부장(部將) 송최(宋最)와 안문군(雁門郡)의 군수 환(圂)을 사로잡았다.
승세를 타고 운중군(雲中郡)을 공격해서 군수 속(遫), 승상 기사(箕肆)와 장군 훈(勳)을 사로잡았다.
안문군의 17현과 운중군의 12현을 평정했다. 다시 승세를 타고 영구(靈丘)에서 진희를 격파했고,
진희를 베고 그의 승상 정종(程縱), 장군 진무(陳武), 도위(都尉) 고사(高肆)를 포로로 삼았다.

대군(代郡)의 9현을 평정시켰다.]

 

燕王盧綰反,勃以相國代樊噲將,擊下薊,得綰大將抵、丞相偃、守陘、太尉弱、御史大夫施,

屠渾都. 破綰軍上蘭,復擊破綰軍沮陽. 

追至長城, 定上谷十二縣,右北平十六縣,遼西、遼東二十九縣,漁陽二十二縣.

最從高帝得相國一人,丞相二人,將軍、二千石各三人;

別破軍二,下城三,定郡五,縣七十九,得丞相、大將各一人. 

[고조 12년, 연왕(燕王) 노관(盧綰)이 반란을 일으키자, 주발은 상국의 신분으로 번쾌(樊噲)를 대신해 

부대를 이끌고 계현(薊縣)을 함락시켰고, 노관의 대장(大將) 지(抵), 승상 언(偃), 군수 경(陘),

태위 약(弱)과 어사대부 시(施)를 생포하고 혼도(渾都)를 도륙했다.
상란에서 노관의 군대를 대파했고 또 저양(沮陽)에서 노관의 군대를 격파하고는 곧장 장성(長城)까지 추격했다.
상곡군(上谷郡)의 12현, 우북평군의 16현, 요서와 요동 2군의 29현, 어양군(漁陽郡)의 22현을 평정하였다.
전체적으로 말하면, 그는 고조를 따라서 상국 1명, 승상 2명, 장군과 2천 석(石) 관리 각 3명을 포로로 잡았고,
단독으로는 또 2개 부대를 격파하고 3개의 성을 함락시켰고 5개 군, 79현을 평정했으며,

승상과 대장 각 1명을 포로로 잡았다.]

 

勃為人木彊敦厚,高帝以為可屬大事. 勃不好文學,每召諸生說士,東鄉坐而責之:「趣為我語.」

其椎少文如此. 勃既定燕而歸,高祖已崩矣,以列侯事孝惠帝.

[주발은 사람됨이 소박하고 강직하며 돈후(敦厚)하여, 고조는 대사(大事)를 맡길 만하다고 생각하였다.

주발은 학문과 예절을 좋아하지 않아서 매양 유생과 유세객을 접견할 때마다 스스로 동쪽을 향해 앉아  

그들에게 : “빨리 말하시오!”라고 하였다. 그의 질박하고 예의를 따지지 않는 정도가 이와 같았다.
주발이 연(燕)을 평정하고 돌아오니, 고조는 이미 붕어한 뒤였다.

그는 열후(列侯)의 신분으로 효혜제(孝惠帝)를 보좌했다.]

 

孝惠帝六年,置太尉官,以勃為太尉.  十歲,高后崩.

呂祿以趙王為漢上將軍,呂產以呂王為漢相國,秉漢權, 欲危劉氏.  勃為太尉,不得入軍門.

陳平為丞相,不得任事.  於是勃與平謀,卒誅諸呂而立孝文皇帝.  其語在呂后、孝文事中.

[혜제 6년, 태위관(太尉官)을 설치해 주발을 태위로 임명했다. 10년 후 여후(呂后)가 세상을 떠났다.
여록(呂祿)은 조왕(趙王)의 신분으로 한(漢)나라의 상장군이 되었고, 여산(呂産)은 여왕(呂王)의 신분으로

한나라의 상국이 되어 조정의 대권을 장악해서 유씨 천하를 전복시키려고 했다.
주발은 태위인데도 군영의 문에 진입할 수 없었고, 진평(陳平)은 승상인데도 정사를 처리할 수 없었다.
이에 주발은 진평과 모의해 마침내 여씨 일족의 세력을 주멸하고 효문제(孝文帝)를 세웠다.
이 일은 「여태후본기(呂太后本紀)」와 「효문제본기(孝文帝本紀)」에 상세하게 기록되어 있다.]

文帝既立,以勃為右丞相,賜金五千斤,食邑萬戶.  居月餘,人或說勃曰:

「君既誅諸呂,立代王,威震天下,而君受厚賞,處尊位,以寵,久之即禍及身矣.」

勃懼,亦自危,乃謝請歸相印.  上許之.  歲餘,丞相平卒,上復以勃為丞相.

[문제(文帝)는 즉위하자 주발을 우승상(右丞相)에 앉히고 황금 5천근을 하사했고 식읍을 1만 호까지 증가시켰다.
그런데 한 달 남짓 시일이 지나자 어떤 사람이 주발에게 말하기를 : “당신이 이미 여씨 일족을 주멸하고

대왕(代王)을 황제로 세웠을 때 명망과 위세가 천하를 진동시켰습니다.
게다가 막대한 포상도 받았고 존귀한 지위에 있으며 황제의 총애도 얻었으니,
이렇게 오래가다가는 언제 재난이 당신 몸에 미칠지 모릅니다.”라고 하였다.
주발은 이 말에 두렵고 또 자신의 처지가 위험하다고 느껴 사직하고 승상의 인수를 반환하겠노라고 청원했고,
이에 황제도 허락했다. 1년여 기간이 지난 후, 승상 진평이 죽자 황제는 재차 주발을 승상으로 임명했다.]

十餘月,上曰:「前日吾詔列侯就國,或未能行,丞相吾所重,其率先之.」乃免相就國.

歲餘,每河東守尉行縣至絳,絳侯勃自畏恐誅,常被甲,令家人持兵以見之.

其後人有上書告勃欲反,下廷尉.  廷尉下其事長安,逮捕勃治之.

[이로부터 10여 개월이 지나자 황제는 주발에게 말하기를 : “전에 짐이 열후에게 모두 자신의 봉지로 돌아가라고

조령(詔令)을 내렸는데, 어떤 이는 아직 떠나지 않고 있소. 승상 그대는 짐이 존중하는 사람이니,

솔선수범해서 봉지로 돌아가시오.”라고 하였다. 이에 주발은 승상직을 놓고 봉지인 강현(絳縣)으로 돌아갔다.
1년 남짓 지나서, 하동군의 군수와 군위가 현을 순시하다가 강현에 이르렀을 때,
주발은 자신이 죽임을 당할까 두려워해 항상 몸에 갑옷을 입고 가인(家人)들에게도 병기를 지니고

군수와 군위를 만나도록 명령했다. 이후 어떤 사람이 조정에 글을 올려 주발이 모반하려고 한다고 하였다.

이에 조정은 이 사건을 정위(廷尉)에게 내려 처리하게 했고,
정위는 또 장안(長安)으로 내려보내 처리하게 하여, 주발을 체포해 심문을 진행했다.]

 

勃恐,不知置辭.  吏稍侵辱之.  勃以千金與獄吏,獄吏乃書牘背示之,曰「以公主為證」.

公主者,孝文帝女也,勃太子勝之尚之,故獄吏教引為證.  勃之益封受賜,盡以予薄昭.

及系急,薄昭為言薄太后,太后亦以為無反事.

[주발은 매우 두려워서 어떻게 답변해야 좋을지 몰라 했다.
옥리는 점점 그에게 모욕을 주었다. 이때 주발은 1천근의 황금을 옥리에게 뇌물로 주었다.
옥리는 조서 뒷면에다 글씨를 써서 그에게 보이며 말하기를 : “공주(公主)를 증인으로 삼으시오.” 라고 하였다.
공주는 효문황제의 딸이었으며 주발의 장남 승지(勝之)의 아내이다.

그리하여 옥리가 주발에게 공주를 증인으로 세우게 한 것이다.
주발은 평소 일찍이 황제로부터 받았던 포상 등을 모두 박소(薄昭)에게 보냈다.
일이 급박해지자, 박소는 누나인 박태후(薄太后)에게 가서 주발을 대신해서 통사정을 했다.
태후도 주발이 반란을 일으키지 못할 것이라 생각하고 있었다.]

 

文帝朝,太后以冒絮提文帝,曰:「絳侯綰皇帝璽,將兵於北軍,不以此時反,

今居一小縣,顧欲反邪!」文帝既見絳侯獄辭,乃謝曰:「吏[事]方驗而出之.」

於是使使持節赦絳侯,復爵邑.

絳侯既出,曰:「吾嘗將百萬軍,然安知獄吏之貴乎!」絳侯復就國.

孝文帝十一年卒,謚為武侯.  子勝之代侯。六歲,尚公主,不相中,坐殺人,國除.

絕一歲,文帝乃擇絳侯勃子賢者河內守亞夫,封為條侯,續絳侯後.

[효문제가 태후에게 문안을 왔을 때, 박태후는 두건을 던지며 말하기를 : “강후가 당시 황제의 옥새를 보관했고

북군에서 군대를 통솔했는데, 그때 모반하지 않고, 지금 작은 현에 있으면서 설마 반역하려고 하겠습니까?”라고 

하자.  문제는 이미 옥중에서 강후의 공술서(供述書)를 보았기에 태후에게 사죄하며 말하기를 :
“관리들이 이 사건을 조사해 석방시킬 준비를 하고 있습니다.”라고 하였다.
이에 사자를 파견해 부절을 가지고 가서 강후를 사면시키고 그의 작위와 식읍을 회복시키게 하였다.
강후는 출옥한 후에 말하기를 : “나는 일찍이 백만 군대를 거느렸는데도 옥리 한 사람의 위세가 이렇게 대단한 줄은

몰랐다.”라고 하며, 강후는 다시 봉지로 돌아갔다. 그는 효문제 11년에 죽었으니, 시호를 ‘무후(武侯)’라 했다.
그의 아들 주승지(周勝之)가 강후의 작위를 계승했다.

6년이 지나서 그는 부인인 공주와 사이가 벌어지고 또 살인죄에 연루되어 작위와 봉지를 해제당했다.
강후의 작위가 끊어진 지 1년 만에, 문제는 강후 주발의 아들들 중에서 현능한 하내군수 주아부(周亞夫)를 발탁해,

조후(條侯)로 봉해 강후의 계승자로 삼았다.]

 

條侯亞夫自未侯為河內守時,許負相之,

曰:「君後三歲而侯. 侯八歲為將相,持國秉,貴重矣,於人臣無兩. 其後九歲而君餓死.」

亞夫笑曰:「臣之兄已代父侯矣,有如卒,子當代,亞夫何說侯乎?

然既已貴如負言,又何說餓死?指示我.」 許負指其口曰:「有從理入口,此餓死法也.」

居三歲,其兄絳侯勝之有罪,孝文帝擇絳侯子賢者,皆推亞夫,乃封亞夫為條侯,續絳侯後.

조후 주아부가 하내군수로 있었고 그때까지 봉후(封侯) 작위를 받지 않았을 때,

관상가 허부(許負)가 그의 관상을 보고서 말하기를 : “당신은 3년 후 후의 관작을 받을 것이며,

후(侯)가 된 지 8년 후에는 대장(大將)과 승상이 되어 국가의 대권을 장악해 그 존귀함이 여러 신하 중에서

첫째가 될 것입니다. 그러나 그 후 9년 후가 되면 당신은 굶어 죽을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주아부는 웃으며 말하기를 : “ 나의 형님이 이미 선친의 작위를 계승해 후가 되셨으니,

설령 형님이 돌아가시더라도 그의 아들이 계승하게 됨이 마땅하오. 내가 어찌 봉후를 이야기할 자격이 되겠소?

만약 내가 당신의 말대로 존귀하게 된다면 또 어떻게 굶어 죽게 된단 말이오? 내게 잘 알려주시오.”라고 하였다.
관상가 허부가 주아부의 입을 가리키며 말하기를 : “ 당신의 얼굴에 수직선 무늬가 입까지 내려와 있습니다.

그것이 굶어 죽을 관상입니다.”라고 하였다.
그로부터 3년 후 그의 형 강후(絳侯) 주승지가 죄를 범하자, 문제가 주발의 아들 중에 현능한 사람을 선택하려고 

하니 모두들 주아부를 추천했다. 문제는 주아부를 조후로 봉해 강후의 작위를 계승시켰다.]

 

文帝之後六年, 匈奴大入邊.  乃以宗正劉禮為將軍, 軍霸上;祝茲侯徐厲為將軍,軍棘門;

以河內守亞夫為將軍,軍細柳:以備胡. 上自勞軍.  至霸上及棘門軍,直馳入,將以下騎送迎.

已而之細柳軍,軍士吏被甲,銳兵刃,彀弓弩,持滿.  天子先驅至,不得入.

先驅曰:「天子且至!」軍門都尉曰:「將軍令曰『軍中聞將軍令, 不聞天子之詔』.」

居無何, 上至, 又不得入.

[문제 후원(後元) 6년, 흉노가 대거 변경을 침략했다. 문제는 종정 유례를 장군으로 삼아 패상(霸上)에 주둔시키고,

축자후(祝玆侯) 서려(徐厲)를 장군으로 삼아 극문(棘門)에 주둔시키고, 하내군수 주아부를 장군으로 임명해

세류(細柳)에 주둔시켜 흉노를 방비하게 했다. 황제가 친히 군대를 위문하러 갔다.
황제가 패상과 극문의 군영에 이르렀을 때 곧장 말을 달려 진영으로 들어가자, 

장군들과 군사들이 모두 말을 타고 영접했다. 

이윽고 세류의 군영으로 가니 군영의 장병들이 모두 갑옷을 입고 예리한 병기를 들고 화살을 당기려 했다.

때문에 천자의 선발대가 도착했으나 들어갈 수 없었다. 선발대가 외치기를 : “천자께서 곧 도착하신다.”라고 하자,
군문을 지키는 도위가 대답하기를 : “ 장군께서 ‘군중에서는 단지 장군의 명령만 듣고 천자의 조령도 듣지 말라’

라고 명령하셨습니다.”라고 하였다. 얼마 후 황제가 도착했는데도 군영에 들어갈 수 없었다.]

 

於是上乃使使持節詔將軍:「吾欲入勞軍.」亞夫乃傳言開壁門.

壁門士吏謂從屬車騎曰:「將軍約,軍中不得驅馳.」於是天子乃按轡徐行.

至營,將軍亞夫持兵揖曰:「介胄之士不拜,請以軍禮見.」天子為動,改容式車.

使人稱謝:「皇帝敬勞將軍.」成禮而去.  既出軍門,群臣皆驚.

文帝曰:「嗟乎,此真將軍矣!曩者霸上、棘門軍,若兒戲耳,其將固可襲而虜也.

至於亞夫,可得而犯邪!」 稱善者久之.  月餘,三軍皆罷.  乃拜亞夫為中尉.

孝文且崩時,誡太子曰:「即有緩急,周亞夫真可任將兵.」文帝崩,拜亞夫為車騎將軍.

[이에 문제는 사자를 파견해서 부절(符節)을 지니고 장군에게 알렸다.
“짐이 군대를 위문하려고 군영에 들어가려고 한다.”라고 하자, 주아부는 그제에서야 영문(營門)을 열게 하였다.
영문을 지키는 군관이 황제의 시종관에게 말하기를 :“장군의 규정에 군영에서는 말을 달릴 수 없습니다.”라고 하자.
이에 문제는 고삐를 잡고 서서히 전진했다. 군영에 이르니 장군 주아부가 무기를 들고 읍(揖)하면서 말하기를 : 
“갑옷 입고 투구를 쓴 무사는 절을 하지 않는 법이니, 군례(軍禮)로 뵙고자 합니다.”라고 하였다.
문제는 아주 감동했다. 얼굴빛을 엄숙히 하고서 수레 앞 횡목에 의지해서 군대에 경의를 표하고는 사람을 파견해
전하기를 : “ 짐이 정중히 장군을 치하하는 바이오”라고 하였다. 그리고 위로 의식을 마치고 떠났다.
영문을 나오자 신하들이 모두 놀랍게 여겼다. 

문제는 주아부를 칭찬하며 말하기를  “아! 그야말로 진정한 장군이로다.
이전에 본 패상과 극문의 군대는 아이의 장난과 같았구나. 그곳의 장군은 습격해 사로잡을 수 있겠지만,

주아부라면 어찌 범할 수가 있겠는가?”라고 하며, 황제는 오랫동안 주아부를 칭찬하였다.

문제는 한 달 남짓 후에 세 군영을 모두 철수시키고는, 주아부를 수도의 치안을 책임지는 중위(中尉)로 임명했다.
효문제가 붕어할 때 태자(太子)에게 훈계하기를 : “국가에 만약 급작스런 일이 발생하거든,

주아부는 참으로 군대를 거느리는 중임을 맡을 만하다.”라고 하였다.
문제가 서거한 후 경제(景帝)가 즉위하자 주아부를 거기장군(車騎將軍)에 임명하였다.]

 

孝景三年,吳楚反.  亞夫以中尉為太尉,東擊吳楚.

因自請上曰:「楚兵剽輕,難與爭鋒.  願以梁委之,絕其糧道,乃可制.」上許之.

太尉既會兵滎陽,吳方攻梁, 梁急,請救.  太尉引兵東北走昌邑,深壁而守.

梁日使使請太尉,太尉守便宜,不肯往.

[효경제(孝景帝) 3년, 오, 초(吳,楚)등 칠국이 반란을 일으켰다.

주아부는 중위의 신분으로 태위(太尉)의 직무를 대행해 군대를 이끌고 오, 초(吳,楚)로 동진했다.
주아부는 기회를 틈타 친히 황제에게 아뢰기를 : “오초의 군대는 난폭하고 민첩해 일시에 그들과 정면으로

작전을 펴기는 어렵습니다. 저는 잠시 그들이 양(梁)나라를 공격하는 것을 관여하지 말고,

군대를 파견해 그들의 식량 보급로를 차단시키고자 합니다. 그렇게 해야만 그들을 제어할 수 있습니다.”하였다.

황제는 이 의견에 동의했다. 주아부가 군대를 모아 형양(滎陽)에 도착했을 때, 오나라의 군대가 양나라를 공격했다.
양나라가 위급하게 되자 양나라 왕은 주아부에게 구원을 요청했다.
주아부는 군대를 이끌고 동북쪽을 향해 급히 행군해 창읍(昌邑)에 도착해 보루를 구축해 방어했다.
양나라는 매일 사자를 파견해 태위에게 구원을 요청했으나 태위는 전략상 유리한 고지를 지키느라

좀처럼 가서 구해주려고 하지 않았다.]

 

梁上書言景帝,景帝使使詔救梁.  太尉不奉詔,堅壁不出,而使輕騎兵弓高侯等絕吳楚兵後食道.

吳兵乏糧,饑,數欲挑戰,終不出.  夜,軍中驚,內相攻擊擾亂,至於太尉帳下.

太尉終臥不起.  頃之,復定.

[양나라가 경제(景帝)에게 상서(上書)해 알리니, 경제는 사신을 파견해 양나라를 구원하라고 명령했다.
태위는 황제의 명령을 집행하지 않고 보루를 굳게 지켰으며, 군사를 보내지 않고 궁고후(弓高侯) 등을 파견하여
경기병(輕騎兵)을 인솔해 오초(吳楚) 군대의 후방 식량 보급로를 차단시켰다.
오나라의 병사는 식량이 부족해 기아에 허덕이자 누차에 걸쳐 싸움을 걸어왔으나

주아부는 시종 나와서 응전하지 않았다. 어느 날 밤에 주아부의 군대에서 돌연 아군끼리 공격하는

혼란한 사태가 야기되어, 이것이 심지어 태위 주아부의 군영에까지 알려지게 되었다.
그러나 태위는 시종 누워 일어나지 않았다. 그러다가 조금 있으니 사태는 곧 안정을 회복했다.]

 

後吳奔壁東南陬,太尉使備西北.  已而其精兵果奔西北,不得入.  吳兵既餓,乃引而去.

太尉出精兵追擊,大破之.  吳王濞棄其軍,而與壯士數千人亡走,保於江南丹徒.

漢兵因乘勝,遂盡虜之,降其兵,購吳王千金.

月餘, 越人斬吳王頭以告.  凡相攻守三月,而吳楚破平.

[후에 오나라 군이 한나라의 군영의 동남쪽 모퉁이를 습격하자 태위는 서북쪽을 방비하게 하였다.
얼마 지나지 않아 오나라의 정예 군사가 과연 서북쪽으로 습격했으나 그들은 들어올 수가 없었다.
오나라 군은 기아에 허덕이게 되자 군대를 이끌고 철수했다. 태위는 즉각 정예 군사를 파견해 추격해

오나라 군을 대파하였다. 오왕(吳王) 유비(劉濞)는 자신의 대부대를 잃고 수천 명의 친위부대와 함께 도망가서

강남(江南)의 단도현(丹徒縣)에 주둔했다.
한나라의 군대는 승세를 타고 추격해 그들 전체를 포로로 잡으니 적병은 모두 항복했다.
또 현상금으로 황금 1천근을 걸어 오왕을 잡으려고 하니,

1개월 남짓 후에 동월(東越) 사람이 오왕의 머리를 베어가지고 왔다고 고하였다.
이번 오와 초의 반란은 3개월간의 공방전 끝에 평정되었다.]

 

於是諸將乃以太尉計謀為是.  由此梁孝王與太尉有卻.  歸,復置太尉官.

五歲,遷為丞相,景帝甚重之.  景帝廢栗太子,丞相固爭之,不得.  景帝由此疏之.

[이때 여러 장수들은 비로소 태위 주아부의 계책이 완벽하고 정확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러나 이 일로 인해서 양효왕(梁孝王)과 태위 주아부 사이에는 틈이 벌어졌다.
주아부가 수도로 귀환하자, 조정은 새로 태위관(太尉官)을 설치해 정식으로 주아부를 태위로 임명했다.
5년 후에 그는 승상으로 승진했고, 경제가 그를 전적으로 신임했다.
후에 경제가 율태자(栗太子)를 폐위하려고 하자 승상 주아부는 강력히 반대했으나 끝내 자신의 뜻을 이루지 못했다.
경제는 이 일로 인해서 주아부와 소원해졌다.]

 

而梁孝王每朝,常與太后言條侯之短.  竇太后曰:「皇后兄王信可侯也.」

景帝讓曰:「始南皮、章武侯先帝不侯,及臣即位乃侯之. 信未得封也.」

竇太后曰:「人主各以時行耳. 自竇長君在時, 竟不得侯, 死後乃[封]其子彭祖顧得侯.

吾甚恨之. 帝趣侯也!」 景帝曰:「請得與丞相議之」

[또한 양효왕은 황제를 배알할 때마다 두태후에게 조후 주아부의 단점을 말하곤 했다.

두태후는 경제에게 말하기를 : “왕황후(王皇后)의 오빠 왕신(王信)을 후(侯)로 봉할 만합니다.”라고 하자.
경제는 사양하며 말하기를 : “태후의 조카 남피후와 태후의 동생 장무후는 선제(문제)께서 모두 후(侯)로 봉하지

않았는데, 제가 즉위한 후에야 그들을 후로 봉했습니다. 왕신은 아직 후로 봉할 수 없습니다.”라고 하였다.
그러자 두태후 말하기를 : “황제께서는 각기 당시의 상황에 따라서 일을 처리하면 되는 것입니다.
나의 오빠 두장군(竇長君)은 세상에 살아 있을 때 후에 봉하지 못했는데, 사후(死後)에 아들 두팽조(竇彭祖)가

도리어 후의 작위를 받았습니다. 나는 이 일에 대해서 매우 후회하고 있습니다.

황제께서는 서둘러 왕신을 후의 작위에 봉하십시오.”라고 하자. 

경제는 대답하기를 : “승상과 상의해 보겠습니다.”라고 하였다.]

 

丞相議之,亞夫曰:「高皇帝約『非劉氏不得王,非有功不得侯. 不如約,天下共擊之』.

今信雖皇后兄,無功,侯之,非約也.」景帝默然而止.

其後匈奴王[唯]徐盧等五人降,景帝欲侯之以勸後.

丞相亞夫曰:「彼背其主降陛下,陛下侯之,則何以責人臣不守節者乎?」

景帝曰:「丞相議不可用.」乃悉封[唯]徐盧等為列侯.  亞夫因謝病.  景帝中三年,以病免相.

[경제는 주아부를 불러 이 일에 대해 의논하였으나, 주아부는 말하기를 :  

“고조(高祖)께서는 ‘유씨(劉氏)가 아니면 왕으로 봉할 수 없고, 공을 세우지 않은 자는 후에 봉할 수 없다.

이 규정을 준수하지 않은 자에게는 천하 사람이 공동으로 그를 공격하라’라고 규정하셨습니다. 
지금 왕신은 비록 황후의 오빠이기는 하나 공을 세우지 못했기에 그에게 후의 작위를 봉하는 것은

규정에 부합하지 않습니다.”라고 하였다. 경제는 묵묵히 말없이 이 일을 그대로 두었다.
후에 흉노의 왕 유서로(唯徐盧) 등 5명이 한나라에 투항하자,

경제는 그들을 후(侯)의 작위에 봉해 이후에 올 사람들을 고무시키려고 하였다.
승상 주아부는 아뢰기를 : “그들은 자신의 군주를 배반하고 폐하께 투항했는데, 폐하께서 그들을 후로 봉하신다면,
앞으로 절조 없는 신하들을 어떻게 책망하시겠습니까?”라고 하자.

경제는 대답하기를 : “ 이번 일은 승상의 건의를 받아들일 수 없소”라고 하였다.

이에 유서로 등을 모두 열후(列侯)로 봉했다.

주아부는 이일로 인해 병을 이유로 들어 경제 3년에 승상의 직무를 내려놓았다.]

 

頃之,景帝居禁中,召條侯,賜食.  獨置大胾,無切肉,又不置櫡.  條侯心不平,顧謂尚席取櫡.

景帝視而笑曰:「此不足君所乎?」條侯免冠謝.  上起, 條侯因趨出.

景帝以目送之, 曰:「此怏怏者非少主臣也!」

[얼마 후 경제는 궁중에서 조후 주아부를 접견하고 음식을 내렸다.

그러나 조후의 자리에는 단지 큰 덩어리의 고기 하나만 놓여 있었고, 작게 썬 고기나 젓가락은 놓여 있지 않았다.
조후는 마음이 내키지 않아 고개를 돌려 주석(酒席)을 주관하는 관원에게 젓가락을 가져오게 했다.
경제는 보고서 웃으며 말하기를 : “이제부터는 그대의 뜻대로 되지 않을 것이오?”라고 하였다.

조후는 곧 모자를 벗고 사죄했다. 황제가 그에게 일어나라고 하니 그는 곧 빨리 걸어나갔다.

경제는 그가 나가는 것을 보고 말하기를 : “저 불평 많은 사람은 어린 황제의 신하가 아니다.”라고 하였다.

 

居無何,條侯子為父買工官尚方甲楯五百被可以葬者.  取庸苦之,不予錢.

庸知其盜買縣官器,怒而上變告子,事連汙條侯.

書既聞上,上下吏.  吏簿責條侯,條侯不對.  景帝罵之曰:「吾不用也.」召詣廷尉.

[오래되지 않아, 조후 주아부의 아들은 부친을 위해서 공관(工官)과 상방(尙方)에서

5백건의 황가(皇家)의 순장용(殉葬用) 갑옷과 방패를 구입했다.
갑옷과 방패를 옮겨온 사람들은 그것들을 황제께 바치지 않는다고 매우 원망했다.
또 그들은 그가 황실용의 기물을 몰래 구입했음을 알고 분노하여 상서를 올려 긴급변고로 조후의 아들을 고발했다.

이 일은 조후에게까지 연루되었다. 경제는 고발해 온 서신을 보고는 곧 담당관리에게 이관시켜 심문하게 하였다.

담당관리가 문서에 있는 죄상을 조후에게 심문하니, 조후는 대답하지 못했다.
경제가 그 이야기를 듣고 욕하며 꾸짖기를 : “짐은 그를 더 이상 임용하지 않겠다.”라고 하면서,

조령(詔令)을 내려 조후를 정위(廷尉)에게 넘겨 치죄(治罪)하게 하였다.]

 

廷尉責曰:「君侯欲反邪?」 亞夫曰:「臣所買器,乃葬器也,何謂反邪?」

吏曰:「君侯縱不反地上,即欲反地下耳.」吏侵之益急。

初,吏捕條侯,條侯欲自殺,夫人止之,以故不得死,遂入廷尉.  因不食五日,嘔血而死.  國除.

絕一歲,景帝乃更封絳侯勃他子堅為平曲侯,續絳侯後.

[정위는 조후를 문책하며 묻기를 : “당신은 어찌하여 반란을 일으키려고 했는가?”라고 하자.
주아부는 대답하기를 : “내가 구입한 병기는 모두 순장품인데 어찌 반란을 일으킬 수 있겠는가?”라고 하였다.
심문관은 말하기를 : “당신은 지상에서 반란을 일으키지 않고, 지하에서 반란을 일으키려고 하였구나!”라고 하였다.
관리의 심문은 더욱 심해져만 갔다. 애당초 관리가 조후를 체포할 때, 조후는 본래 자살할 생각이었으나
그 아내가 저지했기에 자살하지 못하고 정위의 감옥에 들어왔다.

그는 이로 인해서 5일간 단식하다가 피를 토하고 죽었다. 그의 봉국은 반환되었다.

작위가 단절되고 1년이 지난 뒤에 경제는 강후의 또 다른 아들인 주견(周堅)을 평곡후(平曲侯)로 봉해

강후의 작위를 계승하게 하였다.]

 

十九年卒,謚為共侯.  子建德代侯,十三年,為太子太傅.  坐酎金不善,元鼎五年,有罪,國除.

條侯果餓死.  死後,景帝乃封王信為蓋侯.

[19년이 지나 그가 죽자, 조정은 그에게 공후(共侯)의 시호를 내렸다.

주견의 아들 주건덕(周建德)이 후의 작위를 계승했고, 그는 13년이 지나 태자태부(太子太傅)로 임명되었다.

그가 바친 주금(酎金)의 양과 질이 좋지 않았기 때문에 효무제 원정(元鼎) 5년에 유죄라고 선포되고

봉읍(封邑)이 반환되었다. 조후 주아부는 결국 굶어 죽었다.

그의 사후에 경제는 왕신(王信)을 개후(蓋侯)에 봉했다.

 

太史公曰:絳侯周勃始為布衣時,鄙樸人也,才能不過凡庸.

及從高祖定天下,在將相位,諸呂欲作亂,勃匡國家難,復之乎正.

雖伊尹、周公,何以加哉!亞夫之用兵,持威重,執堅刃,穰苴曷有加焉!

足己而不學,守節不遜,終以窮困.  悲夫!

태사공은 말한다.
강후(絳侯) 주발은 당초에 평민이었을 때 비루하고 소박한 사람이었으며 재능이 보통 사람을 뛰어넘지 못했다.
그러던 그가 고조를 따라서 천하를 평정하자 줄곧 장상(將相)의 고위직에 있었다. 여씨 일족이 반란을 도모하자,
주발은 국가의 위험을 구제해 국가를 정상적인 상태로 회복시켰다.
설령 상(商)나라의 이윤(伊尹)이나 주(周)나라의 주공(周公)이라고 하더라도 어찌 그를 뛰어넘을 수 있었겠는가!
주아부(周亞夫)는 용병(用兵)에 엄격하고 무게가 있어 견실함과 인내를 표현했으니 사마양저(司馬穰苴)라도

어찌 그를 뛰어넘을 수 있었겠는가!
애석하게도 그는 자신의 재능에 만족하고 배우지 않아 비록 절조는 엄격히 지켰으나 공손하지 못해,

마침내 곤궁한 결과가 되었구나. 아 슬프도다.]

 

 

 

※  原 文 .    【 中國哲學書電子化計劃 .   筆寫本 】

 

                                  

 

    原 文   飜 譯 者        德庤 / 李   斗 振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