史記 世家(사기세가)/23. 蕭相國世家

第 二十三. 蕭相國世家(소상국세가)

덕치/이두진 2021. 7. 12. 19:05

 

                史記 世家

 

 

    第 二十三.  蕭相國世家(소상국세가)

 

 

蕭相國何者,沛豐人也.  以文無害為沛主吏掾. 

高祖為布衣時,何數以吏事護高祖.  高祖為亭長,常左右之.

高祖以吏繇咸陽,吏皆送奉錢三,何獨以五.

秦御史監郡者與從事,常辨之.  何乃給泗水卒史事,第一.

[소상국(蕭相國) 하(何)는 패현(沛縣) 풍읍(豐邑) 사람이다.

그는 형법 율령(刑法律令)에 통달해 패현의 주리(主吏)의 하급 관리를 지냈다.
한 고조(漢高祖) 유방(劉邦)이 평민이었을 때 소하(蕭何)는 여러 차례 관리의 신분으로 유방을 돌보아 주었다.
유방이 정장(亭長)이 되었을 때에도 소하는 늘 그를 도와 주었다.
유방이 관리로서 함양(咸陽)으로 부역을 갔을 때, 다른 관리들은 그에게 3백전을 주었으나 소하만은 5백전을 주었다.
진(秦)나라의 어사(御史)가 공무를 감독하려고 지방에 와서 소하와 함께 일을 했는데,

소하는 늘 일을 조리있게 처리했다.
이에 그에게 사수군(泗水郡)의 졸사(卒史)라는 직책이 주어졌는데, 그의 공무를 처리하는 성적이 제일이었다.]

 

秦御史欲入言徵何,何固請,得毋行.  及高祖起為沛公,何常為丞督事.

沛公至咸陽,諸將皆爭走金帛財物之府分之,何獨先入收秦丞相御史律令圖書藏之.

沛公為漢王,以何為丞相.  項王與諸侯屠燒咸陽而去.

[진나라의 어사는 소하를 입조시켜 등용하고자 했으나 소하는 극구 사양하고 가지 않았다.
유방이 군사를 일으켜 패공(沛公)이 되자, 소하는 승(丞)으로서 공무를 감독했다. 패공이 함양으로 진입하자,
모든 장수들은 앞을 다투어 금은보화가 가득한 창고로 달려가서 그것을 나누어 가졌으나,
유독 소하만은 먼저 궁으로 들어가서 진나라의 승상부와 어사부의 법령문서들과 도적문서(圖籍文書)들을

수집하고 감추어 보관했다.  패공은 자신이 한왕(漢王)으로 봉해지자 소하를 승상으로 임명했다.

항왕(項王) 항우는 제후들과 함께 함양을 모조리 약탈하고 불태우고 떠났다.]

 

漢王所以具知天下阸塞,戶口多少,彊弱之處,民所疾苦者,以何具得秦圖書也.

何進言韓信,漢王以信為大將軍.  語在淮陰侯事中.

漢王引兵東定三秦,何以丞相留收巴蜀,填撫諭告,使給軍食.

[한왕은 천하의 산천과 요새, 호구의 많고 적음, 재력의 분포, 민중의 질고(疾苦) 등을 모두 알고 있었는데,
이는 소하가 진나라의 문서들을 완전하게 손에 넣었기 때문이었다.

소하는 한신(韓信)을 추천했고, 한왕은 한신을 대장군에 임명했다. 이 일은 「회음후열전(淮陰侯列傳)」에 쓰여 있다.
한왕이 군사를 이끌고 동진해 삼진을 평정하러 갔을 때, 소하는 승상으로서 파촉(巴蜀)에 남아 그곳을 지키면서

세금을 거두었으며, 지역을 안정시켰고 영(令)을 백성들에게 알렸으며, 백성들로 부터 군대의 양식을 보급하게 했다.]

 

漢二年,漢王與諸侯擊楚,何守關中,侍太子,治櫟陽.

為法令約束, 立宗廟社稷宮室縣邑, 輒奏上, 可, 許以從事;即不及奏上,輒以便宜施行, 上來以聞.

關中事計戶口轉漕給軍,漢王數失軍遁去,何常興關中卒,輒補缺.  上以此專屬任何關中事.

[한(漢) 2년(기원전 205년), 한왕과 제후들은 초나라를 격파하러 갔고,

소하는 관중(關中)을 지키면서 태자를 모셨고, 역양(櫟陽)을 다스렸다.

그는 법령과 규약을 제정했고, 종묘, 사직, 궁실과 현읍의 사무기구 등을 건립했는데,

매번 위에 보고해 한왕이 윤허한 후에 실행했다.
불가피하게 보고하지 못했을 경우에는 가장 합리적으로 처리해, 한왕이 돌아온 후 보고했다.
소하는 관중에서 호구를 관리하고 식량을 징수해 그것을 육로로 또는 수로로 군대에 공급했다.
한왕은 누차 군대를 잃고 도망했으나, 소하는 늘 관중의 사졸(士卒)을 징발해 결국 결손된 인원을 보충시키곤 했다.
한왕은 이로써 소하에게 관중의 사무를 전적으로 책임지도록 위임했다.]

 

漢三年,漢王與項羽相距京索之閒,上數使使勞苦丞相.

鮑生謂丞相曰:「王暴衣露蓋,數使使勞苦君者,有疑君心也.

為君計,莫若遣君子孫昆弟能勝兵者悉詣軍所,上必益信君.」於是何從其計,漢王大說.

[한 3년, 한왕과 항우는 경현(京縣)과 삭정(索亭) 사이에서 대치하고 있었다.

한왕은 여러 번 사자를 보내어 승상을 위로했다.  포씨(鮑氏) 성을 가진 어떤 이가 승상에게 말하기를 :

“한왕이 햇빛에 그을리고 벌판에서 노숙하는 고된 전쟁에서도 여러 번 사자를 보내어 오히려 당신을 위로하는 것은

당신을 의심하기 때문이오. 내 생각에는 당신의 자제와 형제들 중에서 싸울 수 있는 자들을 모두 싸움터로

보내는 것이 좋을 듯하오. 그러면 왕은 반드시 당신을 더욱 신임할 것이오.”라고 하였다.

이에 소하는 그의 계책을 따랐고, 한왕은 크게 기뻐했다.]

 

漢五年,既殺項羽,定天下,論功行封.  群臣爭功,歲餘功不決.

高祖以蕭何功最盛,封為酂侯,所食邑多.

功臣皆曰:「臣等身被堅執銳,多者百餘戰,少者數十合,攻城略地,大小镑有差.

今蕭何未嘗有汗馬之勞,徒持文墨議論,不戰,顧反居臣等上,何也?」

[한 5년, 이미 항우를 격파했고, 천하는 평정되었으며, 논공행상이 시작되었다.
여러 신하들은 서로 공을 다투었으나 1년이 지나도록 결판이 나지 않았다.
고조는 소하가 가장 공이 크다고 여겨, 그를 차후(酇侯)로 봉했고, 식읍도 가장 많이 주었다.
공신들은 모두 말하기를 : “신들은 몸에는 갑옷을 입었고, 손에는 예리한 창칼을 잡았습니다.
많은 자는 1백여 차례 전쟁을 했고, 적은 자는 수십 합(合)을 싸웠습니다.

성을 공격하고 땅을 빼앗음에서, 공로의 크고 작음에 각자 차이가 있습니다.

그런데 지금 소하에게 어찌 힘들여 싸운 전쟁의 공로가 있다고 할 수 있겠습니까?

그는 단지 필을 잡고 의론했을 뿐 전투에 참가하지도 않았는데 상을 내리심이 오히려 우리보다 많으니,

어찌 된 것입니까?” 라고 하였다] 

 

高帝曰:「諸君知獵乎?」 曰:「知之.」 「知獵狗乎?」 曰:「知之.」

高帝曰:「夫獵,追殺獸兔者狗也,而發蹤指示獸處者人也. 今諸君徒能得走獸耳,功狗也.

至如蕭何,發蹤指示,功人也. 且諸君獨以身隨我,多者兩三人.

今蕭何舉宗數十人皆隨我,功不可忘也.」 群臣皆莫敢言.

[고조가 말하기를 : “그대들은 사냥을 아는가?”라고 하자. 군신들이 대답하기를 : “압니다.”라고 하였다.
고조는 또다시 묻기를 : “사냥개를 아는가?”라고 하자. 군신들이 대답하기를 : “압니다.”라고 하였다.
그러자, 고조가 다시 말하기를 : “사냥에서 짐승이나 토끼를 쫓아가 죽이는 것은 사냥개이지만,
개의 줄을 놓아 짐승이 있는 곳을 지시하는 것은 사람이다. 지금 그대들은 단지 짐승을 잡아올 수 있을 뿐이니,

공로는 마치 사냥개와 같다. 소하로 말하면, 개의 줄을 놓아 목표물을 잡아오게 지시하는 것이니,

공로는 사냥꾼과 같다.  더욱이 그대들은 단지 혼자만이, 많아야 두세 명이 나를 따랐으나,

소하는 전(全)가문의 사람 수십 명이 모두 나를 따라 전쟁을 치렀다.
이러한 공로를 잊어서는 안 될 것이다.”라고 하자, 군신들은 모두 감히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列侯畢已受封,及奏位次,皆曰:「平陽侯曹參身被七十創,攻城略地,功最多,宜第一.」

上已橈功臣,多封蕭何,至位次未有以復難之,然心欲何第一.

[열후들이 전부 봉해지자, 위계의 서열을 정해 달라며 모두 말하기를 : “평양후(平陽侯) 조참(曹參)은 70여 군데나

상처를 입었고, 성을 공격하고 땅을 빼앗음에서 공이 가장 큽니다. 마땅히 맨 앞이 있어야 합니다.”라고 하였다.
한왕은 이미 공신들에게 무안을 주었고, 소하를 크게 봉했기에,

위계질서에서는 다시 그들을 난감하게 하지 않으려고 했으나, 마음은 여전히 소하를 제일로 두고 싶어 했다.]

 

關內侯鄂君進曰:「群臣議皆誤. 夫曹參雖有野戰略地之功,此特一時之事.

夫上與楚相距五歲,常失軍亡眾,逃身遁者數矣. 然蕭何常從關中遣軍補其處,非上所詔令召,

而數萬眾會上之乏絕者數矣. 夫漢與楚相守滎陽數年,軍無見糧,蕭何轉漕關中,給食不乏.

陛下雖數亡山東,蕭何常全關中以待陛下,此萬世之功也. 今雖亡曹參等百數,

何缺於漢? 漢得之不必待以全. 柰何欲以一旦之功而加萬世之功哉!蕭何第一,曹參次之.」

高祖曰:「善.」於是乃令蕭何[第一],賜帶劍履上殿,入朝不趨.

[그런 차에 관내후(關內侯) 악천추(鄂千秋)가 진언하기를 : “군신들의 의론은 모두 틀렸습니다.
조참이 비록 야전에서 땅을 빼앗은 공은 있지만, 그것은 단지 한때의 일일 뿐입니다.
폐하께서 초나라 군대와 5년을 대치하셨는데, 자주 군사를 잃으셨고, 몸만 빼내어 도피하신 것이 몇 차례나 됩니다.

그러나 소하는 늘 관중으로부터 군사를 보내어 병력을 보충했는데, 이러한 것들은 폐하께서 명령을 내려서 

한 것이 아닙니다.  또한 관중으로부터 수만의 군사를 전선으로 보낸 것은 마침 폐하께서 부하를 잃은 

지극히 위급할 때였고, 그러한 것이 수차례나 됩니다.

한나라와 초나라의 군대는 형양(滎陽)에서 수년간을 대치했는데, 군사들이 양식이 없을 때,
소하는 육로로 또 수로로 관중의 양식을 운송해 군사들에게 양식을 공급했습니다.
폐하께서는 비록 여러 차례 효산 동쪽의 큰 땅을 잃기도 하셨으나 소하는 늘 관중을 잘 보전함으로써 

폐하를 기다렸으니, 이는 만세(萬世)의 공입니다.

지금 비록 조참과 같은 사람 1백여 명이 없다고 한들 어찌 한 황실에 훼손됨이 있겠습니까?
한나라가 그들을 얻어서 보존할 수 있었던 것은 아닙니다. 어떻게 하루아침의 공으로 하여금 만세의 공로를

능가하게 할 수 있겠습니까? 마땅히 소하를 제일로, 조참을 그 다음으로 배열해야 합니다.”라고 하자. 

고조는 대답하기를 : “좋소”라고 하였다.

이에 소하를 제일로 확정했고, 소하가 상전(上殿)에서 칼을 차고 신을 신는 것을 특별히 허락했으며,
황제를 배알할 때에도 작은 걸음으로 조급히 걷지 않아도 된다고 했다.]

 

上曰:「吾聞進賢受上賞. 蕭何功雖高,得鄂君乃益明.」於是因鄂君故所食關內侯邑封為安平侯.

是日,悉封何父子兄弟十餘人,皆有食邑. 乃益封何二千戶,以帝嘗繇咸陽時何送我獨贏錢二也.

[고조가 말하기를 :  “짐은 현명한 이를 추천한 사람은 상을 받아야 한다고 들었소.
소하가 비록 공이 크지만, 악천추의 논변을 통해 더욱 빛이 나는구려.”라고 하며, 
이에 악천추를 원래 봉했던 관내후의 작위에 안평후(安平侯)의 식읍을 더해 봉했다.
그날 소하의 부자 형제 10여 명이 모두 식읍을 받았다. 후에 소하에게는 2천호의 식읍이 더해졌는데,
이것은 고조 황제가 옛날 함양에서 부역할 때, 소하가 다른 사람보다 2백전을 더 주었기 때문이었다.]

漢十一年,陳豨反,高祖自將,至邯鄲.

未罷,淮陰侯謀反關中,呂后用蕭何計,誅淮陰侯,語在淮陰事中.

上已聞淮陰侯誅,使使拜丞相何為相國,益封五千戶,令卒五百人一都尉為相國衛.

諸君皆賀,召平獨弔.

[한 11년(기원전 196년) 가을, 진희(陳豨)가 반란을 일으켰다, 고조는 친히 군사를 이끌고 출정해

한단(邯鄲)에 이르렀다.  아직 전쟁이 끝나지 않았는데 회음후(淮陰侯) 한신이 관중에서 모반을 일으켰다.
여후(呂后)가 소하의 계책을 이용해 회음후를 주살했다. 그 일은 「회음후열전」에 기록되어 있다.
고조는 회음후가 주살되었다는 말을 듣고 사자를 보내어 승상 소하를 상국으로 제수했고,
식읍 5천호를 더 주었고, 아울러 5백 명의 군사와 도위(都尉) 한 명을 파견해 상국을 호위하게 했다.
많은 동료가 축하를 했으나, 소평(召平)만은 애도를 표했다. ]

 

召平者,故秦東陵侯. 秦破,為布衣,貧,種瓜於長安城東,

瓜美,故世俗謂之「東陵瓜」,從召平以為名也.

召平謂相國曰:「禍自此始矣. 上暴露於外而君守於中,非被矢石之事而益君封置衛者,

以今者淮陰侯新反於中,疑君心矣. 夫置衛衛君,非以寵君也.

願君讓封勿受,悉以家私財佐軍,則上心說.」相國從其計,高帝乃大喜.

[소평이라는 자는 원래 진나라의 동릉후(東陵侯)였는데, 진나라가 망하자 평민으로 몰락했고,

집이 가난해 장안성 동쪽에서 오이를 심고 있었다. 그가 심은 오이는 맛이 좋아서,

세간에서는 ‘동릉과(東陵瓜)’라고 칭했는데, 이것은 소평의 봉호(封號)에서 말미암은 것이었다.
소평은 상국에게 말하기를 : “화근은 이제부터 시작될 것입니다.

황제는 햇볕에 그을리고 벌판에서 노숙하는 고된 전쟁을 하고 있고, 당신은 궁전에 남아 궁전을 지켜,

전쟁의 험난함을 맛보지 못했는데도, 오히려 당신의 봉지를 늘려줄 뿐만 아니라 호위부대까지 붙여주니,
이것은 지금 회음후가 막 반란을 일으켰기 때문으로, 당신을 의심하는 마음이 생겼기 때문입니다.
호위부대를 설치해 당신을 호위하는 것은 당신에게 은총을 베푸는 것이 아닙니다.
원컨대 당신이 봉지를 늘려주는 것을 사양하시고, 당신 재산 전부를 군비에 보태신다면,

황제는 기뻐할 것입니다.”라고 하자, 이에 상국은 그의 계책을 따랐고, 고조는 과연 크게 기뻐하였다.]

 

漢十二年秋,黥布反,上自將擊之,數使使問相國何為.

相國為上在軍,乃拊循勉力百姓,悉以所有佐軍, 如陳豨時.

客有說相國曰:「君滅族不久矣. 夫君位為相國,功第一,可復加哉?然君初入關中,得百姓心,

十餘年矣, 皆附君,常復孳孳得民和. 上所為數問君者,畏君傾動關中.

今君胡不多買田地,賤貰貸以自汙?上心乃安.」 於是相國從其計,上乃大說.

[한 12년 가을, 경포(黥布)가 반란을 일으켜 고조가 친히 군사를 이끌고 그를 토벌하러 갔는데,
여러 차례 사람을 보내어 상국이 무엇을 하고 있는지를 알아보았다.

상국은 고조가 군사를 이끌고 나갔으므로 백성들을 다독거렸고, 자신의 재산을 전부 군비로 조달하고 있었으니,

이때도 진희가 반란을 일으켰을 때와 똑같이 하는 것이었다. 어떤 객이 상국에게 권유하기를 : 

“ 당신은 멸족당할 날이 멀지 않았습니다. 당신의 지위는 상국이고, 공로도 제일 큰데, 거기에 무엇을 

더 하겠습니까? 그러나 당신이 처음에 관중으로 들어가셔서 민심을 얻은지, 지금이 10여 년째입니다.

백성들은 모두 당신을 따르고 당신도 부지런히 일을 처리해 백성의 사랑을 받고 있습니다.
황제께서 여러 차례 당신의 근황을 물으신 것은 당신이 관중의 백성들을 동요시킬까 두려워서입니다.
이제부터라도 낮은 이자로 땅을 빌려주는 등 스스로 욕먹을 짓을 하여 자신의 명예를 훼손시키는 것이 

좋을 것입니다. 그렇게 하면 황제께서는 비로소 안심하실 것입니다.”라고 하자, 

이에 상국은 그의 계책을 따랐고, 마침내 고조는 크게 기뻐했다.]

 

上罷布軍歸,民道遮行上書,言相國賤彊買民田宅數千萬. 上至,相國謁.

上笑曰:「夫相國乃利民!」民所上書皆以與相國,曰:「君自謝民.」

相國因為民請曰:「長安地狹,上林中多空地,棄,願令民得入田,毋收槁為禽獸食.」

上大怒曰:「相國多受賈人財物,乃為請吾苑!」乃下相國廷尉,械系之.

[한 고조가 경포의 군대를 격파하고 장안으로 돌아오는데, 백성들이 길을 막고 상소문을 올려,
상국이 백성들을 강요해 백성들의 밭과 집 수천만전 어치를 싸게 샀다는 것을 고발했다.
고조가 귀경하자, 상국은 고조를 배알했다.

고조는 웃으며 말하기를 : “상국은 이런 식으로 백성을 이롭게 했는가?”라고 하면서,
백성들이 올린 상소문을 모두 상국에게 보여주며 말하기를 : “상국이 직접 백성에게 사죄하라!”라고 하였다.
상국은 이 기회를 틈타 백성을 위한다고 하며 주청하기를 : “장안은 땅이 좁은데,

상림원(上林苑)에는 많은 공터가 있고, 황폐해져 있습니다. 원컨대 백성들이 그곳에 들어가서 농사를 짓게 하되,

볏짚이나 보릿짚은 짐승들의 먹이가 되도록 거두지 말게 할 것을 윤허해 주시기 바랍니다.”라고 하였다. 
고조는 대노하며 말하기를 : “상국이 상인들의 재물을 많이 받았구나. 짐의 상림원을 요구하다니!”라고 하고는,

곧 상국을 정위(廷尉)에게 넘겨 족쇄와 수갑을 채워 구금하게 하였다.]

 

數日,王衛尉侍,前問曰:「相國何大罪,陛下系之暴也?」

上曰:「吾聞李斯相秦皇帝,有善歸主,有惡自與.

今相國多受賈豎金而為民請吾苑,以自媚於民,故系治之.」

[며칠이 지나, 왕씨(王氏) 성을 가진 위위(衛尉)가 고조의 앞으로 나아가 아뢰기를 : 

“상국이 무슨 대죄를 저질렀기에 폐하께서는 그를 그렇게 엄하게 구금하셨습니까?”라고 하자.
고조가 대답하기를 : “짐은 승상 이사(李斯)가 진시황을 보좌할 때 업적이 있으면 주상에게 돌렸고

과실이 있으면 자신이 가졌다고 들었소. 지금 상국은 간사한 상인들에게 뇌물을 받고도 백성을 위한다며 

짐의 상림원을 요구하는데, 이는 스스로가 백성에게 잘 보이려고 하는 것이니, 

그래서 그를 구금해 치죄하고자 하는 것이오”라고 하였다.]

 

王衛尉曰:「夫職事茍有便於民而請之,真宰相事,陛下柰何乃疑相國受賈人錢乎!

且陛下距楚數歲,陳豨、黥布反,陛下自將而往,當是時, 相國守關中, 搖足則關以西非陛下有也.

相國不以此時為利,今乃利賈人之金乎?

且秦以不聞其過亡天下,李斯之分過,又何足法哉. 陛下何疑宰相之淺也.」

高帝不懌.  是日,使使持節赦出相國.  相國年老,素恭謹,入,徒跣謝.

[왕 위위는 말하기를 : “ 무릇 직책상 백성들에게 편리가 있는 것 같아서 백성들을 위해 요청한 것은

진정 승상의 본분입니다.  폐하께서는 어찌 상국이 상인들의 뇌물을 받았다고 의심하십니까?

또한 폐하께서는 과거 여러 해 동안 초나라에 대항하셨고, 진희와 경포의 반란 때에는 친히 군사를 이끌고

반란을 평정하셨는데, 당시에 상국은 관중에 남아 지켰습니다.
만약 그가 한번 발을 빼고 동요했더라면 함곡관(函谷關) 이서(以西) 지역은 폐하께 돌아오지 않았을 것입니다.
상국은 그 당시에도 이익을 취하지 않았는데, 설마 지금 상인의 돈 때문에 이익을 도모했겠습니까?
더구나 진시황은 자신의 과실에 대한 지적을 듣지 않음으로 해서 천하를 잃은 것인데,

이사가 과실을 분담하는 것에서 무슨 본받을 것이 있었겠습니까!

폐하께서는 어찌 승상을 그렇게 낮추어 의심하십니까?”라고 하였다. 
고조는 기분이 좋지 않았다. 이날, 부절(符節)을 소지한 사자를 보내어 상국을 석방하였다.
상국은 연로했고, 평소에도 공손하고 신중했다. 맨발로 조정에 들어가 황제를 배알하며 사죄(謝罪)하였다.]

 

高帝曰:「相國休矣!相國為民請苑,吾不許,我不過為桀紂主,而相國為賢相.

吾故系相國,欲令百姓聞吾過也.」

何素不與曹參相能,及何病,孝惠自臨視相國病,因問曰:「君即百歲後,誰可代君者?」

對曰:「知臣莫如主.」

孝惠曰:「曹參何如?」何頓首曰:「帝得之矣!臣死不恨矣!」 

何置田宅必居窮處,為家不治垣屋.  曰:「後世賢,師吾儉;不賢,毋為勢家所奪.」

[그러자 고조가 말하기를 : 상국은 그렇게 하지 마시오! 상국은 백성을 위해 상림원을 요구했고,

짐은 윤허하지 않았으니, 짐은 걸(桀), 주(紂) 같은 군주에 불과하지만, 상국은 어진 재상이오.

짐이 상국을 구금한 까닭은 백성들로 하여금 짐의 잘못을 알게 하기 위함이었소.”라고 하였다. 

소하는 평소 조참과 서로 좋지 못한 사이였다.

소하가 병이 들자, 혜제는 친히 상국의 병세를 보러 와서는 묻기를 :
“그대가 만약 죽는다면 누가 그대를 대신할 수 있겠는가?”라고 하자. 

소하는 대답하기를 : “신하를 아는 것은 군주보다 나은 사람이 없습니다.”라고 하였다.
혜제는 소하가 조참과 사이가 좋지 않다는 것을 알면서도 묻기를 : “조참이 어떤가?”라고 하자,
소하는 머리를 조아리며 대답하기를 : “폐하께서는 잘 택하셨습니다. 신은 죽어도 여한이 없습니다!”라고 하였다.
소하는 밭과 집을 살 때 반드시 외딴 곳에 마련했고, 집을 지을 때에도 담장을 치지 않았다.
그러면서 그는 말하기를 : “후대의 자손이 현명하다면, 나의 검소함을 배울 것이고,

현명하지 못하더라도 권세 있는 사람에게 빼앗기지는 않을 것이다”라고 하였다.]

 

孝惠二年,相國何卒,謚為文終侯. 

後嗣以罪失侯者四世,絕,天子輒復求何後,封續酂侯,功臣莫得比焉.

[혜제 2년(기원전 193년), 상국 소하는 죽었는데, 그의 시호는 문종후(文終侯)이다.
소하의 후손이 죄로 인해 제후의 봉호를 잃은 것이 4대였고, 매번 계승할 사람이 끊어졌다.
천자는 번번이 소하의 후손을 다시 찾아, 계속해 찬후(酇侯)로 봉했는데,

다른 공신들은 모두 그와 비교조차 할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太史公曰:蕭相國何於秦時為刀筆吏,錄錄未有奇節.

及漢興,依日月之末光,何謹守管籥,因民之疾(奉)[秦]法,順流與之更始.

淮陰、黥布等皆以誅滅,而何之勳爛焉.  位冠群臣,聲施後世,與閎夭、散宜生等爭烈矣.

[태사공은 말한다.
소상국(蕭相國) 하(何)는 진(秦)나라 때에는 도필리(刀筆吏)에 불과했고, 평범해 특별한 공적은 없었다.
한(漢)나라가 일어나자, 황제의 여광(餘光)에 의지해, 소하는 직책을 충실히 수행했으며,
백성들이 진나라의 법을 증오하는 것을 알고 그것을 조류에 순응시킴과 아울러 다시 새롭게 했다.
한신(韓信), 경포(黥布) 등은 모두 주살되었지만, 소하의 공훈은 찬란했다.

지위는 군신 중 최고였으며, 명성은 후세에까지 이어졌으니, 굉요(閎夭)와 산의생(散宜生) 등과 그 공적을 다툰다.]

 

 

 

※  原 文 .    【 中國哲學書電子化計劃 .   筆寫本 】

 

                                

 

    原 文   飜 譯 者        德庤 / 李   斗 振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