史記 列傳
第 二十三. 魯仲連鄒陽列傳(노중연 추양열전)
魯仲連者,齊人也. 好奇偉俶儻之畫策,而不肯仕宦任職,好持高節. 游於趙.
趙孝成王時,而秦王使白起破趙長平之軍前後四十餘萬,秦兵遂東圍邯鄲.
趙王恐,諸侯之救兵莫敢擊秦軍. 魏安釐王使將軍晉鄙救趙,畏秦,止於蕩陰不進.
[노중련은 제나라 사람이다. 그는 장대한 풍체에 뛰어난 책략을 지녔으나 조정에 나가 벼슬을 살지 않고
고고한 절의만을 지키며 살았다. 어느 날 노중련이 조나라에 들렀다. 그때 조나라는 효성왕이 다스리던 시대로 ,
진왕이 백기(白起)를 시켜 장평(長平)에서 40여 만의 조군을 격파하고 승세를 몰아 동쪽으로 진격하여
조나라의 도성 한단(邯鄲)을 포위하고 있었다. 두려움에 빠진 조왕은 제후들에게 구원을 청했다.
제후들이 보낸 구원군은 진나라의 위세에 눌려 감히 진군을 공격하지 못했다.
위 안희왕(安釐王)은 장군 진비에게 조를 구하게 했으나 진이 두려워 탕음(蕩陰)에서 멈추고 진군하지 못했다.]
魏王使客將軍新垣衍閒入邯鄲,因平原君謂趙王曰: " 秦所為急圍趙者,前與齊湣王爭彊為帝,
已而復歸帝;今齊[湣王]已益弱,方今唯秦雄天下,此非必貪邯鄲,其意欲復求為帝.
趙誠發使尊秦昭王為帝,秦必喜,罷兵去.」平原君猶預未有所決.
[이에 위왕은 객장군(客將軍) 신원연(新垣衍)을 사잇길로 한단으로 보내 평원군(平原君)을 통해 조왕에게
이렇게 유세하게 하였다 :
" 진나라가 조나라를 급하게 포위한 까닭은 제호(帝號)를 다시 사용하기 위해서입니다.
진나라가 옛날 제민왕과 강성함을 다투어 함께 제호를 칭했으나 제후들의 반발로 얼마 후에 취소한 바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오늘날 제나라는 이미 쇠약해지고, 바야흐로 천하의 우두머리가 된 진나라가 군사를 보내 한단성을
포위한 본심은 한단을 넘보기 위함이 아니라 제호를 칭하기 위해서입니다. 따라서 조나라가 진나라에 사신을 보내
진왕을 제(帝)로 받들기로 한다면 진왕은 틀림없이 기뻐하여 군사들을 물리칠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평원군이 신원연의 말에 결단을 내리지 못하고 주저하였다.]
此時魯仲連適游趙,會秦圍趙,聞魏將欲令趙尊秦為帝,乃見平原君曰:「事將柰何?」
平原君曰:「勝也何敢言事!前亡四十萬之眾於外,今又內圍邯鄲而不能去.
魏王使客將軍新垣衍令趙帝秦,今其人在是. 勝也何敢言事!」
[진군이 한단을 포위하고 공세를 강화하고 있는 그때 마침 손님으로 조나라를 방문하고 있던 노중련은
위나라가 조나라로 하여금 진소왕을 제(帝)로 받들게 하려고 한다는 소식을 들었다.
노중련은 평원군을 찾아가 묻기를 : " 위나라가 청한 일을 장차 어떻게 처리하려고 하십니까?"라고 하자.
평원군이 대답하기를 : " 이 조승이 어찌 감히 이 일에 대해 논할 수 있겠습니까? 얼마 전에 우리 조나라는
장평에서 40여 만에 달하는 군사를 잃었고, 오늘 다시 한단성이 포위당해 안에서는 진군을 물리칠 힘이 없습니다.
위왕이 객장 신원연을 사자로 보내와 우리 조나라로 하여금 진왕을 제로 받들기를 종용하고 있습니다.
지금 그 사자가 여기 있습니다. 어찌 이 조승이 감히 이 일에 대해 말할 수 있겠습니까?"라고 하였다.]
魯仲連曰:「吾始以君為天下之賢公子也, 吾乃今然後知君非天下之賢公子也.
梁客新垣衍安在?吾請為君責而歸之.」 平原君曰:「勝請為紹介而見之於先生.」
平原君遂見新垣衍曰:「東國有魯仲連先生者,今其人在此,勝請為紹介,交之於將軍.」
新垣衍曰:「吾聞魯仲連先生,齊國之高士也. 衍人臣也,使事有職,吾不願見魯仲連先生.」
平原君曰:「勝既已泄之矣.」 新垣衍許諾.
[노중련이 말하기를 : "저는 원래 군은 천하에 이름이 있는 어진 공자로 알고 있었습니다만,
오늘 보니 그렇지 않다는 사실을 알았습니다. 대량(大梁)에서 온 객장 신원연은 지금 어디에 있습니까?
제가 군을 위해 그를 꾸짖어 위나라로 돌려 보내겠습니다."라고 하였다.
그러자 평원군이 말하기를 : "이 조승이 선생을 소개하여 신원연으로 하여금 찾아뵙도록 하겠습니다."라고 하고,
평원군이 즉시 신원연을 찾아가 말하기를 : " 동쪽의 제나라에서 노중련이라는 선생이 이곳 한단성에 머물고
있는 중입니다. 제가 장군께 소개하여 교제를 맺도록 하고 싶습니다."라고 하자.
신원연이 말하기를 :" 저도 노중련 선생이 제나라의 높은 선비라는 사실을 익히 들어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 신원연은 위나라의 신하라 사자로써 받들어야할 직무가 있습니다.
저는 노중련 선생을 만나고 싶지 않습니다."라고 하였다.
그러자 평원군이 말하기를 : " 제가 이미 장군이 이곳에 계시다고 노중련 선생에게 말했습니다."라고 하자.
신원연이 할 수 없이 노중련과의 졉견을 허락하였다.]
魯連見新垣衍而無言. 新垣衍曰:「吾視居此圍城之中者,皆有求於平原君者也;
今吾觀先生之玉貌, 非有求於平原君者也,曷為久居此圍城之中而不去?」
魯仲連曰:「世以鮑焦為無從頌而死者,皆非也。 眾人不知,則為一身.
彼秦者,棄禮義而上首功之國也,權使其士,虜使其民. 彼即肆然而為帝,過而為政於天下,
則連有蹈東海而死耳,吾不忍為之民也. 所為見將軍者,欲以助趙也.」
[이윽고 노중련이 신원연을 만났으나 오랜 시간 동안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신원연이 먼저 묻기를 :" 제가 포위 된 이 성안에 거주하거나 머물고 있는 사람들을 살펴 본 결과
모두가 평원군에게 구하는 바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지금 당당한 선생의 모습을 보니 선생께서는 평원군에게서
구하는 바가 없는 것 같습니다. 그런데 어찌하여 포위되어 위급하게 된 성에 머물며 떠나지 않습니까?"라고 하자.
노중련이 대답하기를 : " 세상 사람들은 포초(鮑焦)가 도량이 크지 않아서 죽었다고 하는 데 그렇지 않습니다.
포초가 혼탁한 세상에 몸을 두고 있음을 수치로 여겼던 포초의 심정을 헤아리지 못하고 단지 이해타산에 젖어
자기 한 몸만을 위하는 사람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지금 진나라는 예의를 버리고
오로지 전공(戰功) 만을 숭상하여, 선비들은 권모술수로 대하고 그 백성들을 마치 노예처럼 부려먹고 있습니다.
만일 진나라로 하여금 왕을 호령할 수 있는 제호를 아무 거리낌 없이 칭할 수 있게 한다면 그들은 한술 더 떠서
천하를 통치하려고 덤벼들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우리는 단지 도망쳐서 동해바다에 몸들 던져 죽어야만 하는
신세가 될 것입니다. 따라서 저는 결코 진나라의 온순한 백성이 되는 일을 용납할 수 없습니다.
제가 이렇게 장군을 와서 찾아 뵌 목적은 그렇게 되지 않도록 조나라를 돕기 위해서입니다."라고 하였다.]
新垣衍曰:「先生助之將柰何?」
魯連曰:「吾將使梁及燕助之,齊、楚則固助之矣.」
新垣衍曰:「燕則吾請以從矣;若乃梁者,則吾乃梁人也,先生惡能使梁助之?」
魯連曰:「梁未睹秦稱帝之害故耳. 使梁睹秦稱帝之害,則必助趙矣.」
[신원연이 묻기를 : " 선생께서 어떻게 조나라를 돕겠다는 말입니까?"라고 하자.
노중련이 대답하기를 : " 나는 위(魏)나라와 연(燕)나라에 조나라를 돕도록 청할 예정이며,
제(齊)와 초(楚) 두 나라는 원래 조나라를 돕고 있으니 아무 문제 없습니다."라고 하였다.
신원연이 묻기를 : " 연나라로 하여금 조나라를 돕게 만들겠다는 선생의 말은 제가 믿겠습니다.
그런데 위왕의 명을 받들어 이곳에 사자로 온 사람은 바로 본인입니다.
그런데 선생께서는 어떤 방법으로 위나라로 하여금 능히 조나라를 돕도록 하시겠다는 말입니까?"라고 하자.
노중련이 대답하기를 : " 진나라가 제호를 칭하게 됨으로 해서 일어나는 재앙을 위왕께서는 분명히 직시하고 있지
않기 때문에 조나라를 돕지 않으려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위나라로 하여금 진나라가 제호를 칭하게 됨으로 해서
입게 되는 재앙을 분명히 알 수 있도록 깨우쳐주면, 위나라는 틀림없이 조나라를 돕게 될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新垣衍曰:「秦稱帝之害何如?」
魯連曰:「昔者齊威王嘗為仁義矣,率天下諸侯而朝周. 周貧且微,諸侯莫朝,而齊獨朝之.
居歲餘, 周烈王崩, 齊後往, 周怒, 赴於齊曰:『天崩地坼, 天子下席. 東藩之臣因齊後至, 則斮.』
齊威王勃然怒曰:『叱嗟,而母婢也!』卒為天下笑.
故生則朝周,死則叱之,誠不忍其求也. 彼天子固然,其無足怪.」
[신원연이 묻기를 : "진나라가 제호를 칭하게 되면 위나라가 어떤 화를 당하게 된다는 말입니까?"라고 하자.
노중련이 대답하기를 : " 옛날 제위왕은 인의(仁義)를 받들어 천하의 제후들을 이끌고 주천자에게
조현을 올린 일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 후에 주나라의 국세는 여전히 곤궁하고 또한 약소했기 때문에
제후들은 누구도 와서 조현을 올리지 않았던 와중에 오로지 제나라만이 천자에게 조현을 올리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몇 년 후 주열왕(周烈王)이 서거하자 조문을 드리러 온 제위왕이 시간이 늦게 당도했습니다.
상례를 끝내고 새로 주왕의 자리에 오른 주현왕(周顯王)은 화가 나서 제나라에 보내는 답례사절을 통해
자기의 말을 전하게 했습니다. ‘천자가 서거하여 마치 하늘이 꺼지고 땅이 갈라지는 것과 같은
대사 중의 대사를 당함에 있어서, 새로운 천자 역시 궁실을 떠나 상중에 풀로 짠 돗자리에 잠을 자고 있는 마당에,
동방의 번신(藩臣)인 인제(因齊)가 늦게 당도했으니 마땅히 그 목을 베어야 하지 않겠는가?’
제위왕이 듣고 발연히 노하여 큰 소리로 욕을 했습니다. ‘종년의 아들놈 주제에 무슨 소리를 하고 있는가?’
결국 제위왕은 이 한 마디의 욕설로 천하의 웃음거리가 되고 말았습니다. 주천자가 살아 있을 때는 해를 거르지
않고 주나라를 찾아 조현을 드려 정성들여 받들어 놓고서는 천자가 죽으니 욕을 해서 신하로써의 본분을
잃었습니다. 새로 등극한 천자의 가혹한 요구에 참을 수가 없었기 때문이라도 해도,
비록 세력이 미약하기는 하지만 여전히 천자는 천자인 것이라, 주왕이 그런 행동을 한다고 해도
전혀 이상한 일은 아니었던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新垣衍曰:「先生獨不見夫仆乎?十人而從一人者,寧力不勝而智不若邪?畏之也.」
魯仲連曰:「嗚呼!梁之比於秦若仆邪?」
新垣衍曰:「然.」
魯仲連曰:「吾將使秦王烹醢梁王.」
新垣衍怏然不悅,曰:「噫嘻,亦太甚矣先生之言也!先生又惡能使秦王烹醢梁王?」
[신원연이 말하기를 : " 선생께서는 저 노복이 보이지 않습니까? 10명의 노복이 한 명의 주인을 따르는 이치는
힘이 부족해서나 지혜가 따르지 못해서 이겠습니까? 그것은 바로 주인의 신분을 두려워하기 때문입니다."했다.
노중련이 묻기를 : "그렇습니까? 진왕에 대해 위왕의 처지가 노복과 같다는 말입니까?"라고 하자.
신원연이 대답하기를 : " 그렇다고 볼 수 있습니다."라고 하였다.
노중련이 말하기를 : " 그렇다면 제가 진왕에게 위왕을 팽살하여 그 고기로 육젓을 담그게 하겠습니다."하였다.
신원연이 불쾌한 표정을 지으며 말하기를 : " 선생의 말씀이 너무 지나치지 않습니까?
선생께서 무슨 수로 진왕으로 하여금 위왕을 팽살시켜 그 시신으로 육젓을 담그게 할 수 있단 말입니까?"하자.]
魯仲連曰:「固也,吾將言之. 昔者九侯、鄂侯、文王,紂之三公也.
九侯有子而好,獻之於紂,紂以為惡,醢九侯. 鄂侯爭之彊,辯之疾,故脯鄂侯.
文王聞之,喟然而嘆,故拘之牖里之庫百日,欲令之死. 曷為與人俱稱王,卒就脯醢之地?
齊湣王之魯,夷維子為執策而從,謂魯人曰:『子將何以待吾君?』
魯人曰:『吾將以十太牢待子之君.』夷維子曰:『子安取禮而來[待]吾君?彼吾君者,天子也.
天子巡狩,諸侯辟舍,納筦籥,攝衽抱機,視膳於堂下,天子已食,乃退而聽朝也.』
魯人投其籥,不果納. 不得入於魯,將之薛,假途於鄒. 當是時,鄒君死,湣王欲入弔,
夷維子謂鄒之孤曰: 『天子弔,主人必將倍殯棺,設北面於南方,然後天子南面弔也.』
鄒之群臣曰:『必若此,吾將伏劍而死.』固不敢入於鄒. 鄒、魯之臣,生則不得事養,
死則不得賻襚, 然且欲行天子之禮於鄒、魯, 鄒、魯之臣不果納. 今秦萬乘之國也, 梁亦萬乘之國也.
俱據萬乘之國, 各有稱王之名, 睹其一戰而勝,欲從而帝之,是使三晉之大臣不如鄒、魯之仆妾也.
且秦無已而帝,則且變易諸侯之大臣. 彼將奪其所不肖而與其所賢,奪其所憎而與其所愛.
彼又將使其子女讒妾為諸侯妃姬. 處梁之宮. 梁王安得晏然而已乎?而將軍又何以得故寵乎?」
[노중련이 말하기를 : " 물론 저는 능히 할 수 있습니다. 장군께 말씀드리겠으니 들어보십시오.
옛날 구후(九侯), 악후(鄂侯), 서백(西伯)은 모두 은나라 주왕(紂王)의 세 제후로 삼공(三公)의 직에 있었습니다.
구후에게는 아름다운 딸이 있어 주왕에게 바쳤습니다. 그러나 주왕은 그녀가 아름답지 못하다고 생각해서
구후를 죽여 그 시신으로 육젓을 담갔습니다. 악후가 만류하며 강하게 간하여 구후를 변호했습니다.
주왕은 다시 악후를 죽여 그 시신에서 포를 뜨게 했습니다. 서백이 그 소식을 듣고 단지 장탄식을 했을 뿐이었지만
주왕은 서백을 잡아 유리(羑里)의 감옥에 100일 동안이나 가두어 놓고 죽일 생각을 했습니다.
그런데 어찌하여 진왕과 같은 왕의 신분임에도 종내에는 그의 신하를 자처하여 포로 뜨여지거나
육젓에 담가지려고 하는지 그 이유를 모르겠습니다. 그리고 얼마 전에 연군(燕軍)에 쫓긴 제민왕(齊湣王)이
노(魯)나라로 들어갈 때 이유자(夷維子)가 말채찍을 잡고 수행하면서 제민왕을 영접하러 나온 노나라 사람에게
묻기를 : ' 그대들은 어떻게 우리의 군주를 모시려고 하는가?’라고 하자
노나라 사람이 대답하기를 : ‘장차 10 태뢰(太牢)로 그대의 군주를 모시려고 합니다.라고 하였습니다.
이유자가 다시 묻기를 : ‘그대들은 어찌하여 예로써 우리의 군주를 모시려고 하지 않는가?
우리의 군주는 곧 천자라, 천자가 순수(巡狩)를 나서면 제후들은 그들이 거처하는 정궁(正宮)을 비워주고
창고의 열쇠를 내어주며, 옷깃을 여미고 식탁을 배치한 후에 당하에 서서 천자에게 바치는 요리를 살펴야 하며,
천자가 식사를 다 한 후에야 비로소 자리에서 물러나 조회에 임하여 정사를 돌보는 것이오.’라고 하자.
노나라 사람이 듣고는 관문을 닫고 문에 열쇠를 채워 제민왕을 노나라 영토 안으로 들어오지 못하게 했습니다.
제민왕은 결국 노나라에 들어가지 못했습니다. 제민왕 일행은 다시 방향을 바꿔 설(薛)나라로 들어가기 위해
도중에 추(鄒)나라를 지나가게 되었습니다. 그때 마침 추나라 군주가 죽어 민왕이 들어가 조문을 행하려고 하자,
이유자가 추나라 군주의 후계자에게 말하기를 : ‘천자가 조문을 할 때는 상주는 관을 뒤로 하고 ,
남쪽에 자리를 펴고 북면하면, 천자가 남면하여 자리를 잡고 앉아 조문을 행하는 법이오.’라고 하자.
추나라 군신들이 말하기를 : ‘조문을 이와 같이 행한다면 우리는 차라리 칼 위에 엎어져 죽겠소.’라고 하였습니다.
그래서 민왕은 감히 추나라에 들어가지 못했습니다. 추와 노 두 나라의 신료들은 그들의 국군이 살아 있을 때는
나라가 가난하여 마음껏 봉양하지도 못했고, 죽었을 때는 변변하게 재화나 수의를 장만하여 부장하지도 못했지만,
제민왕이 천자의 예로 그들 국군을 대하려고 했음에도 추와 노 두 나라의 신료들은 단연코 거절했습니다.
오늘날 진나라는 만승의 나라이고 위나라 역시 만승의 나라입니다. 똑같이 만승의 나라에 왕호도 같이 쓰고
있습니다. 그런데 진나라가 한 번의 싸움에 이기자 사용하려고 하는 제호를 위나라가 또한 따르려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아마도 삼진(三晋)의 대신들을 추나 노 두 나라 신료들의 종복이나 첩의 처지만도 못하게 만드는 행위입니다.
만일 진나라가 탐욕을 주체하지 못하고 기어코 제호를 칭한다면, 그때는 틀림없이 진왕의 마음대로
제후국들의 대신들을 바꿀 것입니다. 그들은 장차 그들이 불초하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을 파면하고,
그들이 현능하다고 생각하는 사람들로 바꿀 것이며,
그들이 싫어하는 사람들을 그들이 총애하는 사람들로 모두 교체할 것입니다.
또한 그들의 자녀와 요사스러운 희첩들을 제후의 비빈으로 삼게 하여 위나라의 궁궐에 머물게 할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위왕이 편할 수 있으며, 장군 또한 지금처럼 총애와 신임을 받을 수 있겠습니까?"라고 하였다.]
於是新垣衍起,再拜謝曰:「始以先生為庸人,吾乃今日知先生為天下之士也.
吾請出,不敢復言帝秦.」 秦將聞之,為卻軍五十里.
適會魏公子無忌奪晉鄙軍以救趙,擊秦軍,秦軍遂引而去.
於是平原君欲封魯連,魯連辭讓(使)者三,終不肯受.
平原君乃置酒,酒酣起前,以千金為魯連壽.
魯連笑曰:「所貴於天下之士者,為人排患釋難解紛亂而無取也.
即有取者,是商賈之事也,而連不忍為也.」 遂辭平原君而去,終身不復見.
[신원연이 자리에 일어나더니 노중련에게 절을 두 번이나 올리며 사죄의 말을 하기를 :
" 처음에는 제가 선생을 범인으로 생각했으나, 말씀을 듣고 보니 선생이야말로 천하의 뛰어난 선비라는 사실을
알았습니다. 앞으로는 결코 다시는 진왕은 제로 받들자는 이야기를 하지 않겠습니다."라고 하였다.
한단성을 포위하고 있던 진나라 장수가 소식을 전해 듣고 50리 밖으로 군사를 물리쳤다.
그때 마침 위공자 무기(無忌)가 조나라를 구원하기 위해 위나라 대장 진비로부터 군권을 탈취하여 진군을 공격했다.
진군은 조나라에서 물러갔다. 그래서 평원군은 노중련에게 상으로 땅을 주어 봉하려고 했다.
그러나 노중련은 한사코 사양하며 결국 받지 않았다. 할 수 없이 평원군이 주연을 마련하고 초대하여
술자리가 무르익었을 때 자리에서 일어나 천금으로 노중련의 수(壽)를 빌려고 했다.
노중련이 웃음을 머금고 말하기를 : " 뛰어난 선비가 천하 사람들로부터 숭상을 받는 이유는,
그들은 능히 다른 사람을 대신하여 화를 물리쳐 주고, 재난을 없애 주며, 분쟁을 해결해 주면서도
그 대가를 바라지 않기 때문입니다. 만약 일에 대한 대가를 받아들인다면 그것은 바로 대가를 바라고 하는
장사꾼들의 행위에 불과한 일이 됩니다. 어찌 이 노중련이 그와 같은 일을 할 수 있겠습니까?"라고 하였다.
그리고는 평원군에게 작별을 고하고 조나라를 떠난 노중련은 죽을 때까지 두 번 다시 그를 만나지 않았다.]
其後二十餘年,燕將攻下聊城,聊城人或讒之燕,燕將懼誅,因保守聊城,不敢歸.
齊田單攻聊城歲餘,士卒多死而聊城不下. 魯連乃為書,約之矢以射城中,遺燕將.
[그리고 20년 후, 연나라 장군이 요성(聊城)12)을 공격하여 점령했다. 요성 사람에 의해 연왕에게 참소당한
그 장군은 주살될 것을 두려워하여 요성에 머무르며 감히 자기나라로 돌아가려고 하지 않았다.
제나라 장군 전단(田單)이 한 해가 넘도록 요성을 공격했지만 많은 사졸들만 전사하고 요성은 함락되지 않았다.
노중련이 듣고 편지를 한 통 써서 화살에 매달아 성안으로 쏘아 연나라 장수에게 전하도록 했다.]
《書》曰:吾聞之,智者不倍時而棄利,勇士不死而滅名,忠臣不先身而後君.
今公行一朝之忿,不顧燕王之無臣,非忠也;殺身亡聊城,而威不信於齊,非勇也;
功敗名滅,後世無稱焉,非智也. 三者世主不臣,說士不載,故智者不再計,勇士不怯死.
今死生榮辱,貴賤尊卑,此時不再至,願公詳計而無與俗同.
[편지의 내용은 다음과 같았다.
" 내가 듣건대 지혜로운 사람은 시류에 역행하지 않아 이를 놓치지 않고, 용사는 죽음을 피해 그 명성을
훼손시키지 않는다고 했으며 충신은 그 군주를 먼저 돌아보고 자신을 돌본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지금 장군은 일시적인 기분에 사로잡혀 연왕의 처지를 고려하지 않고 그 신하를 부릴 수 없게 만들었으니
그것은 불충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또한 싸우다가 몸은 죽고 요성마저 잃는다면,
그 높은 이름은 제나라에 떨칠 수가 없으니 이는 용기도 아닙니다.
지금까지 이룬 공은 무너지고 그 이름은 묻히니 또한 지혜있는 행동이라고 할 수도 없습니다.
그래서 이 세 가지 잘못을 저지른 사람을 당세의 군주들은 신하로 쓰지 않을 것이고
유세하는 선비들은 그런 사람들을 언급하지 않을 것입니다. 따라서 지혜로운 사람은 결단에 주저하지 않으며,
용기있는 사람은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지금 장군은 생사와 영욕(榮辱), 귀천과 존비의 기로에 있으며,
이 순간은 다시 오지 않으니, 원컨대 깊이 생각하여 세속의 일반 사람들과 같이 행동하지 않기를 바랍니다.
且楚攻齊之南陽,魏攻平陸,而齊無南面之心,以為亡南陽之害小,不如得濟北之利大,
故定計審處之. 今秦人下兵,魏不敢東面;衡秦之勢成,楚國之形危 ; 齊棄南陽,斷右壤,
定濟北,計猶且為之也. 且夫齊之必決於聊城,公勿再計. 今楚魏交退於齊,而燕救不至.
以全齊之兵,無天下之規,與聊城共據期年之敝,則臣見公之不能得也.
[초나라는 제나라의 남양(南陽)을, 위나라는 평륙(平陸)을 각각 공격하고 있지만 제나라는 남쪽의 일에
그다지 마음을 두고 있지 않습니다. 남양을 잃는다 해도 그 해가 크지 않고,
제북(濟北)을 얻는 이익이 훨씬 크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그와 같은 계획을 정해 대응하고 있습니다.
만일 진나라가 군사를 보내 제나라를 도운다면 위나라는 동쪽으로 군사를 보내 제나라를 공격할 수 없을 것입니다.
즉 진과 제 두 나라가 연횡(連橫)의 국면을 이루게 되면 초나라 또한 위험에 처하게 됩니다.
이와 같은 형세 하에서 제나라가 남양을 포기하고 우변의 국토를 잘라서 버리고서라도 제북을 평정하려는 것은
이해득실을 면밀히 따져서 시행하는 결책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더욱이 제나라는 필히 요성을 탈환하려고 하니 장군은 주저하지 마시고 결단을 내리셔야만 합니다.
지금 초와 위 두 나라 군대가 모두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며 제나라에서 철군하고 있는데
연나라에서의 구원군은 아직 도착하지도 않고 있습니다.
그래서 제나라는 전국의 군사를 모두 동원하여 다른 나라의 방해를 받지 않고 전력을 다해 요성을 공격한다면
이미 1년 이상이나 포위되어 피폐해진 요성을 장군이 결코 지킬 수 없을 것입니다.
且燕國大亂,君臣失計,上下迷惑,栗腹以十萬之眾五折於外,以萬乘之國被圍於趙,壤削主困,
為天下僇笑. 國敝而禍多,民無所歸心. 今公又以敝聊之民距全齊之兵,是墨翟之守也.
食人炊骨,士無反外之心,是孫臏之兵也. 能見於天下.
[또한 연나라에는 내란이 일어나 그 군신들은 속수무책이 되었고, 상하는 미혹되어 어찌할 바를 모르고 있습니다.
그 와중에 율복(栗腹)16)은 10만 대군을 이끌고 나라 밖으로 출전하여 다섯 번이나 계속해서 패전한 결과
1만 량의 병거를 보유하고 있는 대국이면서도 장평대전에서 40만에 달하는 전 군사를 잃어버려 허약해진 조나라에
오히려 포위를 당해 국토는 줄어들고 군주는 곤궁한 처지에 빠져 천하 사람들의 웃음거리가 되고 있습니다.
나라는 피폐해지고 화난은 많아 백성들은 그 불안한 마음을 의지할 데가 없습니다.
오늘 장군이 피폐해진 요성의 군민들을 이끌고 제나라의 전군에게 대항하려고 하는 행위는 마치 묵적(墨翟)이
초나라의 공격을 선방한 것과 견줄 수 있습니다.17)그러나 식량이 떨어져 인육으로 허기를 채우고,
해골을 주어 땔감으로 쓰고 있으면서 성안의 군민들은 결코 장군을 배반할 생각하지 않고 있으니
또한 그것은 군사를 잘 다뤘던 손빈의 능력에 비할 수 있습니다.
이로써 장군의 위명은 천하에 이미 빛나고 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雖然,為公計者,不如全車甲以報於燕.
車甲全而歸燕,燕王必喜;身全而歸於國,士民如見父母,交游攘臂而議於世,功業可明.
上輔孤主以制群臣,下養百姓以資說士,矯國更俗,功名可立也. 亡意亦捐燕棄世,東游於齊乎?
裂地定封,富比乎陶、衛,世世稱孤,與齊久存,又一計也.
此兩計者,顯名厚實也,願公詳計而審處一焉.
[그러나 사정이 비록 이렇다 할지라도 장군을 위해 고려한다면 성안의 병력을 보전한 채로 연나라로 돌아가는 편이
좋습니다. 군사들을 보존하여 연나라로 돌아간다면 연왕은 틀림없이 기쁜 마음으로 장군을 맞이할 것이며,
온전한 몸으로 귀국하게 된다면 백성들은 죽은 부모와 다시 상봉하는 일과 같은 마음을 갖게 될 것입니다.
또한 친구들 역시 흥분하여 일제히 자리에서 일어나 팔소매를 걷어 올리고 칭송하면 장군의 공업은 빛나게 됩니다.
위로는 군주가 군신들을 통솔하는데 돕고 아래로는 백성들을 기르며 유세객들에게는 그 사례를 제공하고,
또한 국정을 바로잡고 풍속을 바꾸며 공업과 명성을 함께 이룩할 수 있습니다.
그래도 장군께서 연나라로 돌아갈 마음이 없다면, 세속의 여론에 구애받지 마시고 연나라를 버리고
동쪽으로 나와 제나라에 귀의하십시오. 제나라는 틀림없이 그 영토를 떼어 장군을 봉할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진나라의 도(陶)에 봉해진 위염(魏冉)이나 상(商)에 봉해진 위앙(衛鞅)이 누린 영화와 비교할 수 있을
정도의 부귀를 얻어 세세손손 제후가 되어 고(孤)를 칭하며 제나라와 오랜 세월 동안 같이 할 수 있습니다.
이것 또한 한 가지 계책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이 두 가지 계책은 이름을 높이고 실리를 두텁게 할 수 있는 방책이나
원컨대 장군께서는 심사숙고하시어 그 중 하나를 선택하시기 바랍니다.
且吾聞之,規小睗者不能成榮名,惡小恥者不能立大功.
昔者管夷吾射桓公中其鉤,篡也;遺公子糾不能死,怯也;束縛桎梏,辱也.
若此三行者,世主不臣而鄉里不通. 鄉使管子幽囚而不出,身死而不反於齊,
則亦名不免為辱人賤行矣. 臧獲且羞與之同名矣,況世俗乎!
[제가 듣기로 ‘작은 절조에 연연하는 자는 찬란히 빛나는 명예를 이룰 수 없고,
작은 치욕을 못 참는 자는 큰 공업을 이룰 수 없다.’고 들었습니다.
옛날 관중이 제환공을 활로 쏘아 허리띠의 죔쇠를 맞추었으니 이는 실로 찬탈에 해당하는 행위이며,
후에 다시 공자규가 죽자 따라 같이 죽지 않았으니 니는 실로 비겁한 행위였으며,
다시 몸에 형구를 차고 옥에 갇히었으니 이 또한 치욕을 받았음입니다.
이 세 가지를 모두 행하거나 당한 사람을 세상의 군주들은 신하로 삼지 않을 것이며,
그와 친한 고향사람들은 만나기 위해 찾아오지도 않을 것입니다.
처음에 만일 관중이 오랫동안 감옥에 갇혀서 죽어 제나라에 돌아 올 수 없었다면,
그는 그와 같은 치욕이나 비열한 이름을 얻지 않았을 것입니다.
노비조차도 그 이름이 관중과 함께 논해지는 것을 수치로 여기는데 하물며 일반 사람들의 생각은 어떠했겠습니까!
笔管子不恥身在縲紲之中而恥天下之不治,不恥不死公子糾而恥威之不信於諸侯,
故兼三行之過而為五霸首,名高天下而光燭鄰國. 曹子為魯將,三戰三北,而亡地五百里.
鄉使曹子計不反顧,議不還踵,刎頸而死,則亦名不免為敗軍禽將矣.
曹子棄三北之恥,而退與魯君計.
그래서 관중은 몸이 감옥에 갇히는 일을 치욕으로 생각하지 않고,
오히려 천하를 태평하게 못 만다는 일을 치욕으로 생각했으며,
공자규를 따라 죽지 않음을 치욕으로 생각하지 않고,
오히려 제후들에게 자기의 이름을 높이지 못함을 치욕으로 생각했습니다.
비록 관중이 군주의 옥체를 범하고, 죽음을 피해 목숨을 아꼈으며, 옥에 갇히어 죄수가 되어,
모두 세 가지의 치욕을 당했음에도 제환공이 오패의 으뜸이 될 수 있도록 보좌하여 그 이름은 천하의 그 누구라도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높아져 주위의 제후국들 위에서 찬란히 빛나게 되었음은 바로 이런 이치 때문이었습니다.
옛날 조말(曹沫)은 노나라의 장군이 되어 제나라와의 싸움에서 세 번 싸워 세 번 모두 패배하여 5백리에 달하는
영토를 빼앗겼습니다. 처음에 만일 조말로 하여금 여러 가지 상황을 세세하게 고려하여 계책을 내게 하지 않고
그저 대책만을 재촉하여 목을 찔러 자살로 몰았다면 적군에게 포로로 잡힌 패군지장이라는
오명을 피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조말은 세 번이나 싸움에서 패한 전적을 치욕으로 생각하지 않고
오히려 돌아와 노군에게 5백리의 땅을 돌려받을 수 있는 계책을 의논했습니다.
桓公朝天下,會諸侯,曹子以一劍之任,枝桓公之心於壇坫之上,顏色不變,辭氣不悖,
三戰之所亡一朝而復之,天下震動,諸侯驚駭,威加吳、越.
若此二士者,非不能成小廉而行小睗也,以為殺身亡軀,絕世滅後,功名不立,非智也.
故去感忿之怨,立終身之名;棄忿悁之節,定累世之功.
是以業與三王爭流,而名與天壤相獘也. 願公擇一而行之.
[제환공이 천하의 제후들을 소집하여 열었던 회맹을 기회로 조말은 한 개의 단검에 의지하여 회맹단에 올라
그 단검을 뽑아 제환공의 심장을 겨누었습니다. 조말의 안색은 변하지 않았고 말투와 태도는 흔들림이 없이
태연하였습니다. 결국 조말은 세 번의 싸움에서 잃은 영토를 한 번의 노력으로 되찾아 천하를 진동시키고
제후들을 놀라게 하여 노나라의 이름을 저 멀리 오(吳)나 월(越)나라까지 드높이게 하였습니다.
만약 이 두 사람이 작은 염치와 작은 절의를 세우는 일에만 만족했다면, 자신의 몸을 죽이고 후손들을 단절시켜
공명을 세울 수 없었으니 그것은 지혜로운 행동이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 그런 까닭으로 일시적인 분노를 버리고
평생의 위명을 세웠으며, 일시적인 분노를 버려 세세대대로 전해질 공업을 이르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그들이 세운 공적은 삼왕(三王)이 이룬 것과 우열을 논할 만하고 그 명성은 하늘과 땅에 영원히
전해질 것입니다. 원컨대 장군께서는 이 중에서 한 가지를 택하시기를 바랍니다."라고 하였다.]
燕將見魯連書,泣三日,猶豫不能自決. 欲歸燕,已有隙,恐誅;
欲降齊,所殺虜於齊甚眾,恐已降而後見辱.
喟然嘆曰:「與人刃我,寧自刃.」乃自殺. 聊城亂,田單遂屠聊城. 歸而言魯連,欲爵之.
魯連逃隱於海上,曰:「吾與富貴而詘於人,寧貧賤而輕世肆志焉.」
[노중련의 편지를 읽어본 연나라 장군은 3일 동안을 흐느껴 울며 결단하지 못했다.
연나라로 돌아가려고 하자니 그때는 이미 연왕과는 틈이 생겨 주살될 것을 두려워했고, 제나라에 투항하자니
제나라 군사들을 너무 많이 죽이거나 포로로 했기 때문에 항복하더라도 치욕을 당할 것을 걱정했다.
그는 오랫동안 탄식하며 말하기를 : " 다른 사람에게 잡혀서 죽는 것보다는 스스로 죽는 것이 낫겠다."라고 하며.
연나라의 장군은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요성이 혼란에 빠진 틈을 탄 전단은 군사를 진군시켜 성안의 군민들을 도륙했다.
전단이 제나라 도성으로 돌아가 제왕에게 노중련의 공을 말하고 그에게 작위를 내리려고 했다.
노중련이 해상으로 달아나 몸을 숨기며 말하기를 : " 부귀를 탐하게 되면 남에게 몸을 굽혀야 하는데,
나는 차라리 빈천하게 살면서 세상 일을 가볍게 보고 내키는 대로 살리라!"라고 하였다.]
梁苑(양원) 王昌齡(唐)
梁園秋竹古時煙(양원추죽고시연),
양원(梁園) 가을 대나무엔 옛적의 안개이건만
城外風悲欲暮天(성외풍비욕모천)。
성밖 바람은 슬피 울고 해는 지려 하는구나
萬乘旌旗何處在(만승정기하처재),
만승의 제후왕 깃발은 어느 곳에 있는지
平臺賓客有誰憐(평대빈객유수린)。
평대(平臺)의 손님들 누가 가엾게 여기는가?
'양원(梁園)'은 한나라 문제의 넷째 아들에 봉해진 양나라의 효왕(孝王)이 만든 정원이다.
그는 크게 궁실을 짓고, 사마상여(司馬相如)와 매승(枚乘) 등의 문사를 이곳 '양원(梁園)'에 초빙하여
성대한 연회를 자주 열었다. 양원은 이후로 한나라 초기문학의 중심이 되었다.
그런 양원에 심어 놓은 대나무 사이로 피어오르는 안개는 가을이 되어도 예전 그대로이건만
지금은 흔적도 없이 사라진 옛적의 문사(文士)들과 당시의 번화함.
그로 인해 시인에게 들리는 성 밖의 바람 소리는 그야말로 처량하게 들릴 뿐이다.
천자에 못지않은 큰 권세를 상징하는 양나라의 깃발은 지금 어느 곳에 있으며,
그리고 누가 당시의 양왕 밑에서 부귀를 누렸던 문사들을 가엾게 여기겠는가?
추양이 양효왕의 문객이 되었다고 모함을 받아 하옥 되었을 때 자기의 억울함을 호소한 내용의 글은
청조 강희제(康熙帝) 때 오초재(吳楚材)가 편찬한 고문관지(古文觀止)에는
옥중상양왕서(獄中上梁王書)라는 제목으로 올라 있다.
양원(梁苑)은 양효왕이 조성한 정원으로 당시 서한의 유명한 문사들을 불러 연회를 열고
시와 부를 읊으며 즐기게 했던 곳이다.
鄒陽者,齊人也. 游於梁,與故吳人莊忌夫子、淮陰枚生之徒交. 上書而介於羊勝、公孫詭之閒.
勝等嫉鄒陽,惡之梁孝王. 孝王怒,下之吏,將欲殺之.
[추양은 제나라 사람이다. 일찍이 양(梁)나라에 놀러갔다가 오(吳)나라 사람 장기부자(莊忌夫子)1),
회음(淮陰) 사람 매생(枚生)2)과 같은 명사들과 교우를 맺었다. 추양이 글을 올려 당시 양효왕(梁孝王)3)의
문객으로 있던 양승(羊勝)과 공손궤(公孫詭) 등의 무리에 혼자 힘으로 낄 수 있었다.
양승 등이 추양을 시기하여 양효왕의 면전에서 그를 모함하였다.
분노한 효왕이 추양을 관리들에게 넘겨 죄를 물어 죽이려고 하였다.]
鄒陽客游,以讒見禽,恐死而負累, 乃從獄中上書曰:
臣聞忠無不報,信不見疑,臣常以為然,徒虛語耳.
昔者荊軻慕燕丹之義,白虹貫日,太子畏之;衛先生為秦畫長平之事,太白蝕昴,而昭王疑之.
夫精變天地而信不喻兩主,豈不哀哉!
[그래서 추양은 양나라에 놀러왔다가 참언을 받아 체포되어 죽임을 당하게 되면 명성에 누가 될 까봐
옥중에서 편지를 써서 효왕에게 올리기를 :
" 신은 듣기에 ‘진실로 충성된 자는 그 보답을 받지 않는 경우가 없고,
진실로 믿음이 있는 자는 남에게 의심을 받지 않는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신은 항상 그 말을 당연하게 여기며 살아왔으나 지금 생각해 보니 한낱 헛된 말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옛날에 형가가 연나라의 태자단(太子丹)의 의기를 경모하여 진왕을 죽이러 길을 떠날 때
흰 무지개가 일어나 태양을 꿰뚫었으나 태자단은 형가가 일을 성사시키지 못할까 의심했습니다.
다시 위(衛)선생5)이 진왕을 대신하여 장평에서의 일을 계획하여 조나라를 멸하려고 하자
태백성이 묘성(昴星)을 침범하여6) 상서로운 징조가 나타났으나 진소왕은 여전히 의심하고 듣지 않았습니다.
두 사람의 정성이 통하여 하늘과 땅이 움직였으나 태자단과 소양왕 두 주인은 믿지 않았으니,
어찌 슬픈 일이 아니겠습니까!
今臣盡忠竭誠,畢議願知,左右不明,卒從吏訊,為世所疑,是使荊軻、衛先生復起,
而燕、秦不悟也. 願大王孰察之. 昔卞和獻寶,楚王刖之;李斯竭忠,胡亥極刑.
[지금 신은 충성스러운 마음으로 온 정성을 다 바쳐 의견을 말씀드리고자 하오니 원컨대 받아주시기 바랍니다.
왕의 주위 사람들이 사리에 밝지 못하여 결국 그들의 말을 쫓아 저를 관리들에게 넘겨 심문케 하시니
세상 사람들이 저를 오해하게 되었습니다. 마치 형가와 위선생이 지하에서 다시 부활한다고 해도
태자단이나 진소왕은 여전히 깨닫지 못하는 일과 같다고 할 수 있으니
왕께서는 부디 이와 같은 정황을 세밀하게 살펴주시기 바랍니다.
옛날 변화(卞和)가 천하의 진귀한 보옥(寶玉)을 바쳤으나 초왕은 그의 다리를 잘랐으며,
이사(李斯)는 충성을 다해 받들었으나 호해(胡亥)7)는 그를 극형에 처해 죽였습니다.
是以箕子詳狂,接輿辟世,恐遭此患也.
願大王孰察卞和、李斯之意,而後楚王、胡亥之聽,無使臣為箕子、接輿所笑.
臣聞比干剖心,子胥鴟夷,臣始不信,乃今知之. 願大王孰察,少加憐焉.
[기자(箕子)가 미친 척한 일이나 접여(接輿)가 세상을 피한 일은 모두 이러한 화를 만나지나 않을까
두려워했기 때문입니다. 원컨대 왕께서는 변화와 이사의 마음을 헤아리시고 초왕과 호해처럼 판단을 잘못하여
신으로 하여금 기자와 접여가 한 웃음거리가 되지 않도록 해주십시오. 비간은 심장이 도려졌고,
오자서는 목이 잘려 가죽부대에9) 담겨 버려졌다는 이야기를 신은 처음에는 믿지 않았으나,
지금 그 일이 사실임이 믿게 되었습니다.
바라옵건대 왕께서는 깊이 살피시어 조금이나마 저를 가련히 여겨주십시오.
諺曰:「有白頭如新,傾蓋如故.」何則?知與不知也.
故昔樊於期逃秦之燕,藉荊軻首以奉丹之事; 王奢去齊之魏,臨城自剄以卻齊而存魏.
夫王奢、樊於期非新於齊、秦而故於燕、魏也,所以去二國死兩君者,行合於志而慕義無窮也.
[속담에 ‘흰 머리가 되도록 오래 사귀었음에도 마치 새로 사귄 친구처럼 서먹하게 대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스쳐가는 수레 위에서 나눈 몇 마디 대화로도 죽마고우처럼 여겨지는 사람이 있다.’라는 말이 있습니다.
어째서 입니까? 그것은 바로 서로 안다고는 했지만 기실은 모르고 지내왔기 때문이며,
같이 지내기는 했지만 그 마음이 있는 곳이 서로 달랐기 때문입니다.
옛날의 번오기(樊於期)11)가 진나라로부터 도망쳐 연나라에 망명하여 살다가 한 번도 만난 적이 없었던 형가에게
그의 수급을 빌려주어 그로 하여금 태자단의 일을 받들어 수행토록 했습니다.
또한 왕사(王奢)12)는 제나라를 떠나 위(魏)나라에서 망명생활을 할 때 제군이 공격해 오자
성루에 올라 목을 찔러 죽음으로써 제나라 군대가 물러가게 하고 위나라를 지켰습니다.
왕사와 번오기 모두에게는 제와 진(秦) 두 나라에서 오래 살아 새로운 나라가 아니었고,
또한 위(魏)와 연(燕) 두 나라에는 새롭게 옮겨 오래 살았던 나라가 아니었음에도
두 사람은 자기가 오래 살았던 나라를 떠나 새롭게 살기 시작한 위․연(魏燕) 두 나라를 위해 목숨을 바쳤던 것입니다.
그것은 바로 태자단과 위왕의 뜻이 자기들이 지향하는 뜻에 부합했고,
그들의 정의를 향한 무궁한 동경심에서 기인했기 때문이었습니다.
是以蘇秦不信於天下,而為燕尾生;白圭戰亡六城,為魏取中山. 何則?誠有以相知也.
蘇秦相燕,燕人惡之於王,王按劍而怒,食以駃騠;白圭顯於中山,中山人惡之魏文侯,
文侯投之以夜光之璧. 何則?兩主二臣,剖心坼肝相信,豈移於浮辭哉!
故女無美惡,入宮見妒;士無賢不肖,入朝見嫉.
[소진(蘇秦)은 천하 사람들로부터 믿음을 받지 못했으나 오직 연나라만이 마치 미생(尾生)13)의 믿음을 가지고
소진을 대했습니다. 백규(白圭)14)가 중산국의 장수가 되어 싸움에 나가 패하여 6개의 성을 잃었으나
후에 위(魏)나라를 위해 중산국을 멸했습니다. 어째서 이겠습니까?
사실은 중산국은 백규를 잘 알지 못했고 위나라는 백규를 잘 알아 그를 후대했기 때문이었습니다.
연나라의 재상이 된 소진을 연나라 사람들이 왕에게 모함하자,
연왕은 칼을 들어 분노를 표하고 결제(駃騠)15)를 잡아 요리를 만들어 소진에게 먹였습니다.
백규가 중산에서 이름을 얻자 중산 사람들이 그를 시기하여 참소했습니다.
위문후는 중산 사람들이 참소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노하여 밤에도 휘황찬란하게 빛을 발하는 벽옥(碧玉)을
백규에게 하사했습니다. 이는 어째서이겠습니까?
두 사람의 주군과 신하들 사이에는 심장을 가르고 간을 나누듯이 서로 깊이 믿어 의심하지 않았기 때문이었습니다.
어찌 유언비어나 참언으로 그들의 마음을 변하게 할 수 있었겠습니까!
그래서 여자란 아름답거나 추한거나를 떠나 일단 궁중으로 들어가면 질투를 받게 되고,
선비란 현명하거나 불초하거나를 떠나 일단 출사하여 관직에 나아가게 되면 모함을 받게 됩니다.
昔者司馬喜髕腳於宋,卒相中山;范睢摺脅折齒於魏,卒為應侯.
此二人者,皆信必然之畫,捐朋黨之私,挾孤獨之位,故不能自免於嫉妒之人也.
是以申徒狄自沈於河,徐衍負石入海. 不容於世,義不茍取,比周於朝,以移主上之心.
故百里奚乞食於路,繆公委之以政;甯戚飯牛車下,而桓公任之以國.
此二人者,豈借宦於朝,假譽於左右,然後二主用之哉?
感於心,合於行,親於膠漆,昆弟不能離,豈惑於眾口哉?故偏聽生姦,獨任成亂.
[옛날 사마희(司馬喜)16)는 송나라에 있을 때 슬개골이 잘리는 빈형(臏刑)을 받았으나,
중산국으로 들어가 마침내 재상이 되었습니다. 또한 범수(范睢)는 위나라에 있을 때 갈비가 부러지고
치아가 다 뽑힐 정도로 곤궁한 처지가 되었지만 마침내는 진나라에 들어가 승상이 되어 응후에 봉해졌습니다.
이 두 사람은 모두 신의를 지키는 일만을 신념으로 삼고, 무리를 지어 사사로운 이득을 취하지 않았음으로
고독한 처지가 되어 결국 소인배들로부터 질투를 받아 해를 입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신도적(申徒狄)17)은 스스로 하수에 몸을 던졌고, 서연(徐衍)18)은 돌을 가슴에 품고 강물에 빠져 죽었습니다.
비록 자기들이 세상에 용납이 되지 않았던 이들이지만 세태에 영합하여 구차한 생을 탐하여
조정에서 무리를 짓고 사욕을 취해 그 군주의 마음을 혼란스럽게 하지 않고 신의를 지켰습니다.
그러했기 때문에 진목공은 거리를 방황하며 걸식했던 백리해를 불러 국정을 맡겼고,
지나가던 수레 곁에서 소를 치던 영척(寧戚)을 제환공이 불러 나라를 맡겼습니다.
이 두 사람의 등용을 어찌 조정 관리들의 천거를 통해서거나 좌우 사람들의 칭송에 의해서라고 하겠습니까?
마음이 통하고 몸가짐이 일치하면 아교로 붙이거나 칠을 한 것처럼 분리할 수 없는 친형제와 같이 친밀하게 되어
비록 많은 사람들의 참언하는 말이 있다한들 미혹되겠습니까? 고로 한쪽 말만 듣는 행위는 사
악한 일을 조장하는 것이며, 한 사람에게만 일을 맡기는 행위는 화란의 원인이 됩니다.
昔者魯聽季孫之說而逐孔子,宋信子罕之計而囚墨翟.
夫以孔、墨之辯,不能自免於讒諛,而二國以危. 何則? 眾口鑠金,積毀銷骨也.
是以秦用戎人由余而霸中國,齊用越人蒙而彊威、宣.
此二國,豈拘於俗,牽於世,系阿偏之辭哉? 公聽并觀,垂名當世.
故意合則胡越為昆弟,由余、越人蒙是矣;不合,則骨肉出逐不收,朱、象、管、蔡是矣.
[옛날 노후(魯侯)는 계손(季孫)의 말을 듣고 공자를 쫓아냈고19),
송군은 자한(子罕)20)의 말에 혹하여 묵자(墨子)를 감옥에 가두었습니다.21)
공자와 묵자와 같은 변설로도 다른 사람들의 참언으로부터 자신에게 닥친 화를 면하지 못했고,
결국은 노(魯)와 송(宋) 두 나라는 위험에 처하게 되었습니다. 그것은 어째서 이겠습니까?
많은 사람들의 말은 무쇠라도 녹일 수 있고, 계속해서 비방하는 말이 쌓이게 되면 뼈라도 녹일 수 있기 때문입다.22)
진나라는 융인(戎人) 유여(由餘)23)를 등용하여 패자가 되었고, 제나라는 월인(越人) 몽(蒙)24)을 등용하여
제선왕과 위왕(威王) 양대에 걸쳐 강력한 국세를 갖게 되었습니다.
이 두 나라가 세속에 얽매이거나 이끌리고, 또한 아첨과 한쪽에 치우친 언사에 미혹된 적이 있었습니까?
공정한 자세로 듣고 또한 살펴 올바른 판단을 함으로 해서 그 이름을 당세에 드높였기 때문이었습니다.
고로 뜻만 맞으면 호(胡)나 월(越) 같은 오랑캐 출신의 사람들과도 친형제처럼 될 수 있으니
그것이 융인 유여나 월인 몽의 경우라 하겠습니다. 또한 뜻이 맞지 않으면 골육의 형제도 용납하지 않고 쫓아내니
이것은 바로 단주(丹朱), 상(象) 및 관숙(管叔)과 채숙(蔡叔)의 경우라 하겠습니다.25)
今人主誠能用齊、秦之義,後宋、魯之聽,則五伯不足稱,三王易為也.
是以聖王覺寤, 捐子之之心, 而能不說於田常之賢;封比干之後, 修孕婦之墓, 故功業復就於天下.
何則? 欲善無厭也. 夫晉文公親其讎,彊霸諸侯;齊桓公用其仇,而一匡天下.
何則,慈仁慇勤,誠加於心,不可以虛辭借也.
至夫秦用商鞅之法,東弱韓、魏,兵彊天下,而卒車裂之;
越用大夫種之謀,禽勁吳,霸中國,而卒誅其身.
[오늘날 그 군주나 주인 된 사람이 진실한 마음으로 제나라나 진나라가 행한 올바른 방법을 행하고,
후의 송나라나 노나라처럼 잘못 된 말에 현혹되지 않는다면 오패가 이룩한 공적을 넘어 삼왕(三王)26)의 공업도
쉽게 이룩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영명한 군주는 자지(子之)27)와 같은 거짓된 마음의 신하를 내칠 수 있고
가식적인 선행을 행한 전상(田常)28)의 행위에 대해 능히 기뻐하지 않을 수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비간(比干)29)의 후예를 찾아서 제후로 봉하고, 임산부30)의 무덤을 찾아서 보살펴 준 주무왕은
공업을 이루어 천하에 널리 퍼지게 할 수 있었습니다. 어째서 이겠습니까?
그것은 바로 무왕이 선행을 행하는 데 전혀 싫증을 내지 않았기 때문이었습니다.
또한 진문공(晉文公)은 그를 죽이려던 원수를 용납하여 친근하게 지냄으로써 수많은 제후들 가운데에서
패자를 칭할 수 있었으며, 제환공(齊桓公)은 그를 죽이려던 원수를 등용하여 천하의 일을 바로 잡았습니다.31)
이것은 또한 어째서 이겠습니까? 그것은 바로 인자한 마음과 간절한 태도로 사람을 마음을 감동시켰기 때문이지
어찌 거짓된 언사를 빌려 패업을 이룰 수 있었겠습니까?
심지어는 진나라는 상앙을 등용하여 시행한 변법으로 동쪽의 한(韓)과 위(魏) 두 나라를 약화시키고
그 군사들은 천하의 강군이 되었으나 결국 그를 거열형에 처했으며, 또한 월나라는 문종의 계책32)을 이용하여
당시의 강대한 오나라를 멸하고 패자가 되었으나 결국 그를 주살하고 말았습니다.
是以孫叔敖三去相而不悔,於陵子仲辭三公為人灌園.
今人主誠能去驕傲之心,懷可報之意,披心腹,見情素,墮肝膽,施德厚,終與之窮達,
無愛於士,則桀之狗可使吠堯,而蹠之客可使刺由;況因萬乘之權,假聖王之資乎?
然則荊軻之湛七族,要離之燒妻子,豈足道哉!
[그러나 초나라의 재상 손숙오(孫叔敖)33)는 세 번이나 재상의 자리에서 물러나면서 한 번도 슬퍼하지 않았고
오릉(於陵)34)의 자중(子仲)35)은 삼공(三公)의 직을 마다하고 남의 집 정원에 물을 주며 살았습니다.
오늘 대왕께서는 교만한 마음을 버리신 후에 다른 사람들의 공덕에 보답하려는 마음을 가슴에 품고 속내를 꺼내
진정되고 소박한 마음을 보여 간과 쓸개를 쏟아 덕을 두텁게 베풀어 처음부터 끝까지 동고동락을 같이 하며
선비들을 사랑하고 받드시면, 비록 걸왕(桀王)이 기르는 개일지라도 요임금 같은 성인을 물게 할 수 있으며
도척(盜跖)36)의 손님에게 시켜 허유(許由)37) 같은 어진 은자(隱者)를 칼로 찍어 죽게 만들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하물며 만승(萬乘) 대국의 왕이 갖고 있는 권세와 성왕의 자질을 갖추신 대왕의 명이라면
더 이상 말해야 무엇 하겠습니까? 형가가 진왕을 암살하려고 시도함으로써 그 칠족(七族)이 모두 해를 입게
한 일38)이나 요리(要離)가 왕료(王僚)의 아들 경기(慶忌)를 죽이기 위해 그의 처와 자식을 불태워
죽게 만든 일39)만으로 어찌 충분하다고 하겠습니까?
臣聞明月之珠,夜光之璧,以闇投人於道路,人無不按劍相眄者. 何則?
無因而至前也. 蟠木根柢,輪囷離詭,而為萬乘器者. 何則?以左右先為之容也.
故無因至前,雖出隨侯之珠,夜光之璧,猶結怨而不見德.
故有人先談,則以枯木朽株樹功而不忘.
[신은 듣기에 ‘명월주(明月珠)나 야광벽(夜光璧)을 한 밤중에 길을 가던 행인을 향해 던지면,
놀란 나머지 칼을 부여잡고 눈을 치켜떠 노려보지 않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라고 했습니다. 어째서 이겠습니까?
그것은 아무런 이유도 없이 값을 매길 수 없는 귀중한 보물이 자기들 앞에 버려져 있기 때문입니다.
또한 특이하게 구부러진 나무뿌리 같은 하찮은 물건임에도 나라의 지존인 군주가 감상하는 기물이 됩니다.
무슨 이유에서 이겠습니까? 그것은 왕의 좌우에 있는 사람들이 먼저 조각도 하고 꾸미기도 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지극히 귀중한 수후지주(隨侯之珠)40)나 야광지벽(野光之璧)과 같은 보물일지라도 아무런 이유 없이
눈앞에 버려져 있게 되면 원한만 사게 되고 은혜를 입었다는 소리를 듣지 못하게 되는 법입니다.
그럼으로써 어떤 사람이든지 그 일에 대해 먼저 이야기를 해놓으면 죽은 나무나 말라비틀어진 가지일지라도
그것으로 공을 세우게 되어 잊혀지지 않게 됩니다.
今夫天下布衣窮居之士,身在貧賤,雖蒙堯、舜之術,挾伊、管之辯,懷龍逢、比干之意,
欲盡忠當世之君,而素無根柢之容,雖竭精思,欲開忠信,輔人主之治,
則人主必有按劍相眄之跡,是使布衣不得為枯木朽株之資也.
是以聖王制世御俗,獨化於陶鈞之上,而不牽於卑亂之語,不奪於眾多之口.
[지금 천하의 포의(布衣)를 입고 곤궁하게 지내는 선비들은 신세가 빈천하게 되어,
비록 요임금이나 순임금의 치술(治術)을 이해하고 있거나, 이윤이나 관중의 변설과 같은 재능을 갖추고 있거나,
관룡봉(關龍逢)이나 비간이 가지고 있던 지조를 가슴에 품고 있을지라도 당세의 군주에게 충성을 바쳐
헌신하려면, 평소에 먼저 나무뿌리를 조각하거나 꾸미는 사람들의 천거를 통하지 않고는 불가한 일입니다.
또한 비록 정성스러운 마음으로 충성과 신의로써 그 군주를 보좌하여 나라에 치세가 오는데
공을 이루고 싶다고 해도, 그 군주 되는 사람들은 아무런 이유 없이 보물이 자기 앞에 떨어져 있는 상황에
화가 나서 칼을 잡고 노려보게 됩니다.
그래서 포의지사는 썩은 나무나 말라비틀어진 나무줄기보다 그 쓰임이 못하게 됩니다.
그래서 성왕들의 나라를 다스리는 방법은 마치 도공들이 녹노(轆轤)41)를 사용하여 도기를 만드는 일과 같아
저마다의 독특한 방법으로 세상을 교화하여 좌우의 어리석고 어지러운 의견에 끌리지 않으며,
대중들의 근거 없는 말에 미혹되어 큰일을 그르치는 법이 없게 되는 법입니다.
故秦皇帝任中庶子蒙嘉之言, 以信荊軻之說, 而匕首竊發;周文王獵涇、渭, 載呂尚而歸, 以王天下.
故秦信左右而殺,周用烏集而王. 何則?以其能越攣拘之語,馳域外之議,獨觀於昭曠之道也.
今人主沈於諂諛之辭,牽於帷裳之制,使不羈之士與牛驥同皁,
此鮑焦所以忿於世而不留富貴之樂也.
[그런 연유로 진시황은 중서자 몽가(蒙嘉)42)의 말을 신임하여 형가의 황당한 말을 믿음으로써 마침내 형가가
사람들이 아무런 대비를 하지 않는 틈을 타서 몰래 비수를 꺼내어 진시황을 죽이려고 덤벼들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주문왕은 경수(涇水)와 위수(渭水) 사이에사냥을 나갔다가 우연히 만난 여상(呂尙) 강태공을 발견하고
자기의 수레에 태워 처소로 돌아와 천하를 차지할 수 있었습니다. 그런 연유로 진시황은 믿었던 좌우의
측근을 죽여야 했으나, 주문왕은 까마귀 떼처럼 우연히 만난 여상을 얻어 천하를 차지할 수 있었습니다.
어째서이겠습니까? 그것은 자기를 속박하는 말에 구애받지 않고, 궁원 밖에서 분분하는 논의에 귀를 기우려
자기만의 방법으로 밝고 넓은 도를 살필 수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런데 지금의 군주들은 아첨하는 말에 빠지고, 희첩과 근시들에게 포위되어 견제를 받아 뛰어난 재주를 지닌
선비들을 대하기를 마치 늙은 소와 같이 마굿간에 넣어 같은 사료를 먹여 기르듯이 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포초(鮑焦)43)는 세상에 대해 분노하여 부귀에 즐거움에 연연하지 않고 떠난 것입니다.
臣聞盛飾入朝者不以利汙義, 砥厲名號者不以欲傷行, 故縣名勝母而曾子不入,
邑號朝歌而墨子回車. 今欲使天下寥廓之士,攝於威重之權,主於位勢之貴,
故回面汙行以事諂諛之人而求親近於左右,則士伏死堀穴巖(巖)[藪]之中耳,
安肯有盡忠信而趨闕下者哉!」
書奏梁孝王,孝王使人出之,卒為上客.
[신이 듣기에 ‘의관을 화려하게 차려입고 조정에 나온 자는 이를 탐하여 의를 더럽히면 안 되며,
또한 이름을 갈고 닦고자 하는 자는 사욕으로 품행을 무너뜨리면 안 된다.’라고 들었습니다.
때문에 효성이 지극한 증자(曾子)는 승모(勝母)라는 현(縣) 이름이 불순하다하여 발길을 돌렸으며,
조가(朝歌)44)라는 성읍 이름이 자신의 근검(勤儉) 사상과 위배된다고 하여 수레의 말머리를 돌려 돌아갔습니다.
그런데 오늘날 천하의 원대한 포부를 지닌 지사들은 막중한 권세를 휘두르고 있는 자들에게 위협을 당하고 있으며,
높은 자리에 앉아 권력을 쥐고 있는 자들에게 억압을 당하고 있습니다.
반면에 사악한 면모의 더러운 품행의 인사들은 아첨이나 일삼는 소인배들을 받들며
그저 대왕의 측근들과 친교 맺기만을 구하고 있습니다.
이 때문에 뜻있는 선비들은 결국 캄캄한 석굴 속에서 늙어 죽고 말 것이니,
어찌 온 정성을 다해 충성과 신의를 바쳐 대왕을 모실 수 있겠습니까!"라고 하였다.
이 글이 양효왕에게 상주되자, 효왕은 사람을 시켜 추양을 옥에서 꺼내 마침내 상객으로 모셨다.]
太史公曰
魯連其指意雖不合大義, 然余多其在布衣之位, 蕩然肆志, 不詘於諸侯, 談說於當世, 折卿相之權.
鄒陽辭雖不遜,然其比物連類,有足悲者,亦可謂抗直不橈矣,吾是以附之列傳焉.
[태사공이 말했다.
노중련(魯仲連)이 지향하는 뜻이 대의(大義)에 부합되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벼슬도 지위도 없는 그가 호탕하게 자신의 뜻을 마음껏 펼쳐 제후들에게 굽히는 일 없이
당대에 자신의 언변을 드날리며 고관들의 권력을 꺾은 일은 칭찬할 만하다.
추양의 말은 비록 겸손하지 못했지만 유사한 사물들을 하나로 묶어 서로 비교함으로 해서
사람들을 확실히 감동시키기에 충분했고,
또한 그것은 불요불굴의 정신이라고 말할 수 있다고 해서 나는 그를 열전에 실었다.]
【 각주 】
1) 장기부자(莊忌夫子)/ 서한의 저명한 사부(辭賦)의 저자이다.
한명제(漢明帝) 유장(劉莊)의 이름 장(莊)을 휘하여 성을 엄기(嚴忌)로 바꾸었다.
부자(夫子)는 애칭이나 존칭이라고도 하고, 자(字)라는 설도 있다.
경제(景帝) 때 오왕 유비(劉濞)를 받들다가 유비가 반역을 꾀하자 이를 알게 된 장기가 불가함을 간했으나
듣지 않자 양(梁)나라로 달아나 양효왕(梁孝王)의 문객이 되었다.
그의 시문은 추양(鄒陽), 매승(枚乘), 사마상여(司馬相如) 등과 함께 세상에 이름이 있었다.
그의 작품 사부 24편 중 굴원의 불운을 슬퍼한 <애시명(哀時命)> 1편은 특히 유명하다.
2) 매생(枚生)/ 기원전 140년에 죽은 서한의 관리이며, 저명한 사부가(辭賦家) 매승(枚乘)을 말한다.
자는 숙(叔)으로 매생은 별칭이다. 처음에 오나라의 낭중(郎中)이 되었다가 오왕 유비(劉濞)가 반란을 획책하자
그는 표문을 올려 해롭고 이로움을 열거하며 중지할 것을 간했으나 오왕은 듣지 않았다.
그때 양효왕 유무의 세력이 높아 귀하게 되어 문사들을 초빙하여 받들었음으로 매승은 즉시 오나라를 떠나
양나라로 들어갔다. 양효왕은 매승을 낭중으로 삼았다. 얼마 후에 관직을 물러나 향리로 돌아가 은거했다.
경제 3년 기원전 154년, 오초칠국이 군사를 일으켜 반란을 일으키자 그는 다시 오왕에게 천하정세를 분석한
표문을 올려 군사를 거두어들이기를 권했다. 오왕은 여전히 매승의 간언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칠국의 란이 평정되자 그의 이름은 천하에 알려져 경제가 불러 그를 홍농도위(弘農都尉)에 임명했다.
군의 관리들의 불쾌하게 생각했음으로 병이 났다는 핑계를 대고 도위직을 그만두고 다시 양나라로 들어가
유유자적했다. 당시의 저명한 사부가(辭賦家) 추양, 엄기 등과 교우하고 양효왕의 문객이 되었다.
효왕의 문객들은 모두가 이름있는 사부의 대가였으나 그의 사부는 그 중에서 최고였다.
기원전 144년 양효왕이 죽자 양나라를 떠나 회음으로 돌아갔다. 태자로 있을 때 평소에 그 명성을 들었던
한무제가 즉위하자 즉시 부들로 치장한 안거(安車)를 보내어 초빙했으나 노년으로 인하여 도중에 죽었다.
<한서(漢書) 예문지(藝文志)>에 <매승부(枚乘賦)>라는 제목으로 수록되어 지금까지 전해진다.
3) 양효왕(梁孝王)/ 태어난 해는 확실하지 않고 기원전 141년에 죽은 서한의 제후왕으로 이름은 유무(劉武)이고
한문제(漢文帝)의 아들이고 한경제(漢景帝)의 동모제다. 문제 2년 기원전 178년 대왕(代王)에 봉해지고,
4년 회양왕(淮陽王)으로 개봉되었다. 12년 기원전 168년 양왕(梁王)으로 옮겼다.
다음은 양효왕세가 편의 일부 기록이다. ‘ 양효왕은 동원(東苑)을 짓고 있었는데 그 둘래가 300여 리나 되었다.
또 수양성(睢陽城)을 확대하여 10여 리가 되게 하였다. 크게 궁전을 짓고 볻도(複道)를 만들었는데
궁전에서부터 평대(平臺)까지가 장장 30여 리가 되었다. 조정이 하사한 천자의 깃발을 받았으며,
출입하는 관원이 1,000여 수레와 10,000여 마리의 말로 가득하였다. 동서로 수레를 달리며 사냥하며
그 위세가 천자와 같았다. 외출할 때에는 미리 길을 치워 행인을 차단시켰고 돌아와서는 경계를 강화하였다.
사방의 호걸지사 등을 불러들여 효산(崤山) 이동(以東)의 유세객들이 다 왔으니,
제(齊)나라의 양승(羊勝), 공손궤(公孫詭), 추양(鄒陽)등이 바로 그들이었다.’
4) 白虹貫日(백홍관일)
5) 위선생/ 전국 때 진나라의 모사(謀士)로 이름은 미상이다. 기원전 260년 진(秦)과 조(趙) 두 나라 사이에 벌어진
전국시대 최대의 전쟁이었던 장평대전 직후 진나라 대장 백기(白起)가 승리의 여세를 몰아 계속 진격하여
조나라를 멸하기 위해 위선생을 본국으로 보내 진소양왕을 설득하여 병력과 양식의 추가로 지원해 줄 것을
청했다. 그러나 백기의 성공을 시기한 응후(應侯) 범수(范睢)의 방해로 성사시키지 못했다.
6) 태백(太白)은 금성(金星)을 말하고, 묘성(昴星)은 28수의 하나로 조나라를 나타내는 별자리다.
즉 전쟁을 주관하는 태백이 조나라의 별자리인 묘성을 침범했다는 것은
조나라가 멸망할 것이라는 징조를 말한다.
7) 호해(胡亥)/ 진시황의 막내아들로 진시황이 순행 도중에 수레 안에서 죽자,
첫째 아들 부소(扶蘇)를 후계로 삼는다는 유언장을 조고(趙高) 및 이사(李斯)와 모의하여 변조하여
황제의 뒤를 이었다. 후에 조고에 의해 살해되고 진나라는 망했다.
8) 접여(接輿)/ 춘추시대 때 초나라의 은사(隱士). 성은 육(陸)이고 이름은 통(通)이다. 접여는 그의 자(字)이다.
일부러 미친 척하여 세상을 피해 다녔으며 자기가 직접 농사를 지어먹는 것을 해결했다.
초나라의 미치광이 접여 “ 楚狂接輿(초광접여)”라는 별명으로 불리워지기도 했다.
공자(孔子)가 그의 나이 62세 때인 초소왕(楚昭王)이 재위하던 기원전 488년에 초나라에 들렸을 때
접여는 수레를 타고 지나가던 공자를 비웃으며 노래했다.
봉황새야! 봉황새야! (鳳兮 鳳兮)
너의 덕은 어찌 이리 쇠락해 졌던 말인가? (何德之衰)
지난날의 잘못이야 돌이킬 수 없지만 (往者不可諫兮)
앞날의 잘못이야 피할 수 있으리! (來者猶可追也)
그만두어라! (已而已而)
지금은 정치에 관여하게 되면 위태로울 진데 (今之從政者殆而)
공자가 마차에서 내려 그와 이야기를 나누어 보려 했으나 그가 급해 몸을 피해 달 아났음으로
이야기를 나룰 수 없었다. (공자세가)
9) 원전은 치이(鴟夷)다. 시체를 담는 가죽부대의 모양이 마치 솔개와 같다고 해서 생긴 말로
오나라의 공신 오자서가 부차에게 죽임을 당해 목이 잘리고 그 몸은 가죽부대에 담겨 강물에 던져졌음으로
월왕 구천 곁을 떠난 범려(范蠡)가 그 화를 면했다는 뜻으로 사용한 이름이다.
10) 白頭如新 傾蓋如故(백두여신 경개여고)
11) 번오기(樊於期)/ 태어난 해는 알 수 없고 기원전 227년에 죽었다. 전국 말 때 진나라 장수였으나
진시황에게 반기를 들어 란을 일으켰으나 성공하지 못하고 연나라로 도망쳐 태자단에게 몸을 의탁했다.
진시황이 진나라에 남아있던 그의 부모와 처 및 자식들을 모두 죽이고 그의 목에 천금의 현상금을 걸고
잡으려고 하였으나 그가 연나라로 도망갔다는 것을 알고 대군을 일으켜 연나라를 공격했다.
형가(荊軻)가 태자단에게 진왕을 암살하기 위해서 그에게 가까이 접근하려면 번오기의 목과 독항의 지적도가
있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태자단이 번오기를 차마 죽일 수 없다고 말하자 형가가 은밀히 번오기를 만나
진왕을 죽이기 위해서는 그의 목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번오기는 형가의 말을 듣고 스스로 자기의 목을 베어 죽었다.
형가가 번오기의 목과 비수가 감쳐진 독항의 지적도를 가지고 진왕을 배알하다가 찔러 죽이려고 했으나
미수에 그쳤다.
12) 왕사(王奢)/ 전국 때 제(齊)나라 사람으로 위(魏)나라로 망명했다. 후에 제나라가 군사를 보내어 위나라를
공격하자 왕사는 성루에 올라 제나라 장수를 향해 말했다. “ 장군께서 위나라를 정벌하러 온 것은 단지
이 왕사 한 사람 때문이 아닙니까? 제가 목숨에 연연하여 나를 용납한 위나라에 누를 끼칠 수는 없는
법입니다.” 그리고는 즉시 목을 찔러 자살함으로 해서 제나라 군사들은 물리쳐 위나라를 지켰다.
(<사기집해(史記集解)> 引 <한서음의(漢書音意)
13) 미생(尾生)/ 춘추 때 노(魯)나라 사람으로 신의로 유명한 고대 전설상의 인물이다.
<장자(莊子). 도척(盜拓)> 편에 ‘ 미생이 한 여인과 다리 밑에서 기한을 정해 만나기로 약속했다.
여자는 오지 않고 강물이 불어났으나 미생은 여자와의 약속을 지키기 위해 다리 밑을 떠나지 않아
물에 익사하고 말았다.’라는 기사가 있다. 한 번 약속한 것은 절대로 어기지 않는다는 뜻의
미생지신(尾生之信)이라는 고사성어는 융통성 없는 고지식함을 비꼬는 말로 쓰인다.
14) 백규(白圭)/ 사기집해(史記集解)에 의하면, “ 백규는 중산국의 장수가 되어 싸워 6개의 성을 빼앗겼다.
중산국의 왕이 그를 죽이려고 하자 위나라로 도망쳐 위문후의 후대를 받고 위나라의 장수가 되어
중산국을 멸했다. 화식열전에 나오는 백규와 동일인물인지는 확실하지 않다.
15) 결제(駃騠)/ 태어난 지 7일 만에 그 어미말보다 더 빨리 달린다는 명마의 이름이다.
16) 사마희(司馬喜)/ 전국 때 중산국의 재상으로 사마희(司馬熹)라고도 한다. 원래 송나라 사람이었으나
슬개골이 짤리는 빈형(臏刑)을 받아 도망쳐 중산으로 들어가 재상이 되었다.
17) 신도적(申徒狄)/ 상나라 말기 때 관리로 신도적(申屠狄)이라고도 한다.
포학무도한 정치를 행하는 주왕(紂王)에게 간했으나 듣지 않자 돌을 가슴에 안고 강물에 투신자살했다.
18) 서연(徐衍)/ 춘추 때 주왕실의 관리로 주변의 관료들로부터 모함을 받자 돌을 가슴에 품고 강물에 빠져 죽었다.
19) 노후(魯侯)는 노소공(魯昭公: 재위 전 541-517)을 말하고 계손(季孫)은 당시 노나라의 정권을 담당했던
계손씨의 당주 계환자를 말한다. 공자가 노나라를 떠난 장면은 공자세가에 상세하게 기술되어 있는데
공자가 상국이 되어 다스린 노나라가 급격히 국세를 신장시키자 이를 두려워한 이웃 제나라가 미인 악사를
노소공에 보내 정사를 소흘히 하게 만들고 다시 노소공이 미인악사에 빠져 노나라 종묘에 제사를 지낸
고기를 대부들에게 나누어 주지 않는 것을 보고 공자가 실망해서 노나라를 떠난 것이라고 했다.
따라서 노소공이 계환자의 참언을 듣고 공자를 쫓아냈다고 이 기사는 잘못이다.
20) 자한(子罕)/ 춘추 때 송나라의 현신(賢臣)으로 사성자한(司城子罕)을 말한다. 성은 악(樂)이고 이름은 희(喜)다.
근검청렴한 관리로 이름이 높았다. 송나라 사람이 옥을 얻어, 사성(司城) 벼슬의 자한에게 바쳤으나,
자한이 받지 않았다. 옥을 바치는 사람이 "그것을 옥 감정자에게 보여주니 보배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바치는 것입니다."고 말하자, "나는 탐하지 않는 마음을 보배로 삼고, 그대는 옥을 보배로 여긴다.
만약 그것을 나에게 주면, 둘 다 보물을 잃게 되는 것이다.
각자 그 보물을 소유하는 것만 못하다."라고 대답했다.
21) 송나라의 명신 자한의 참소로 송군이 묵적을 감옥에 가두었다는 이 기사 역시 근거없는 말이다.
22) 眾口鑠金 積毀銷骨(중구삭금 적훼소골)
23) 유여(由餘)/ 춘추 때 섬진국의 진목공의 대부다. 그 조상은 당진국 출신으로 융(戎)으로 들어가 융왕을 모셨다.
진목공 34년 기원전 626년 융왕에 의해 섬진에 사자로 온 유여를 진목공이 좋아하게 되었다.
그래서 계책을 세워 그로 하여금 섬진에 귀의토록 한 다음 대부로 임명했다. 진목공은 융족의 지리에 밝은
유여의 계책을 이용하여 12개에 달하는 융족의 나라를 평정하고 그 1000리에 달하는 영토를 넓혔다.
이로써 진목공은 서융의 패자가 되었다. <유여(由余)>라는 3편의 저사가 지금까지 전한다.
24) 몽(蒙)/ 전국 때 월나라 출신의 제나라의 대신으로 자는 자장(子臧)이다.
제선왕(齊宣王)과 제위왕(齊威王)을 보좌하여 공적을 쌓았다.
25) 단주(丹朱)/ 요임금의 아들이다. 단주가 불초하여 천하를 다스릴만한 재목이 안 된다고 생각한 요임금이
그 자리를 순임금에게 선양했다. 상(象)/ 순임금이 이모제로, 순임금이 아버지가 여러 번에 걸쳐
순임금을 해치려고 했으나 순임금은 그럴수록 더욱 부친을 공손한 자세로 모시고 동생 상을 사랑했다.
관숙(管叔)과 채숙(蔡叔)/ 주공단의 동모제로 성왕이 어려 주공단이 섭정에 올라 주나라를 다스리자 주공단을 의심한 관숙과 채숙 두 사람은 은나라의 구지를 다스리던 무경(武庚) 녹보(祿父)를 부추겨 반란을 사주했다.
반란을 진압한 주공단은 관숙은 죽이고 채숙은 나라 밖으로 추방했다.
26) 삼왕(三王)/ 하상주(夏商周) 삼대의 왕조를 각각 창건한 우임금, 탕임금 및 주무왕을 말한다.
27) 자지(子之)/ 태어난 해는 알 수 없고 기원전 314년에 죽은 연(燕)나라 상국이다.
사리에 어둡고 어리석은 연왕 쾌(噲)가 선양을 행하여 기원전 316년 연왕의 자리에 올랐다.
이어서 폭정으로 내란이 일어나 2년 후인 기원전 314년 제나라의 공격을 받고 연왕 쾌와 함께 모두 죽었다.
28) 전상(田常)/ 춘추 때 제나라의 대신으로 원래 이름은 항(恒)이었으나 한문제(漢文帝) 유항(劉恒)을 휘(諱)하여
상(常)이라고 바꿔 부르게 되었다. 전걸(田乞)의 아들로 제간공(齊簡公) 밑에서 상국이 되어
감지(闞止)와 정권을 다투었다. 그 부친으로 하여금 백성들에게 곡식을 빌려 줄 때 큰 되를 사용하고
받을 때는 작은 되를 사용하도록 하여 민심을 얻은 후 기원전 481년 군사를 일으켜
제간공(齊簡公)과 감지(監止)를 죽이고 간공의 동생 평공(平公) 오(驁)를 대신 세우고
자신은 상국(相國)이 되어 제나라의 정권을 전횡하였다.
전상 이후 그의 5대 손인 태공(太公) 전화(田和)가 기원전 376년에 제나라 국권을 빼앗아
강씨들의 정권을 대신했다.
29) 비간(比干)/ 은나라 말기 때의 대신으로 태정제(太丁帝)의 아들이며 주왕(紂王)의 숙부이다.
주왕에 의해 소사(少師)에 임명되어 어진 이름을 얻었다. 주왕이 음락을 즐기고 학정을 행하여 나라가 위험에
처하자 죽음을 각오하고 선행을 행하고 덕을 베풀어야 한다고 간언했다. 3일 동안 간언을 행하고 물러가지
않자 주왕이 노하여 ‘ 비간은 스스로를 성인이라고 하니 내가 성인의 심장에는 과연 구멍이 7개가 있는지
봐야 되겠다.'라고 말하고 비간을 죽여 배를 가르고 그의 심장을 살폈다.
30) 임신한 여자/ 원문은 잉부(孕婦)로 주왕(紂王)이 뱃속의 태아를 살펴보기 위해 임산부를 죽이고 배를 갈랐다.
31) 원문은 夫晉文公親其讎,彊霸諸侯;齊桓公用其仇,而一匡天下。진문공이 원수처럼 여겼던
자객 발제(勃鞮)와 유랑생활 중 경비를 들고 달아나 진문공 일행을 곤궁하게 만들었던 두수(頭須)를
용서하여 흉흉했던 당진국의 인심을 수습한 일과 제환공이 제나라 군위를 차지하기 위해 망명지를 떠나
환국하고 있을 때 도중에 매복하여 자신을 활로 쏘아 죽이려고 했던 관중을 등용하여 패자가 된 일을
말한다. 즉 진문공은 원수들과 친하고 제환공은 원수를 등용하여 패자가 되었다는 말이다.
32) 문종지모(文種之謀)/ 범려와 함께 월왕 구천을 도와 당시 패자를 칭하던 오왕 부차를 멸하고 월나라를
패권국으로 만든 문종이 제안한 7가지 계책이다. 월왕 구천은 문종을 의심하여 칼을 보내 자살하게 만들었다. 문종의 오나라를 무너뜨리기 위해 구사한 7가지 계책이란 다음과 같다. 첫째, 재물을 보내어 상대국의 임금과
신하들의 마음을 기쁘게 해 주는 것이며, 둘째 곡식의 가격을 올려 그들의 창고를 비우게 하고,
셋째 아름다운 미녀를 보내어 그들의 마음과 의지를 빼앗고, 넷째, 솜씨 좋은 목공과 좋은 재목을 보내어
그들의 궁실을 크게 짓게 하여 그 나라의 재물들을 탕진하게 만들 것이며,
다섯째 아첨을 잘하는 신하를 보내어 그들의 생각을 어지럽히고,
여섯째 충신들을 구석으로 몰아 스스로 죽게 만들어 나라의 임금을 보좌할 수 있는 인재의 벽을 얇게 만들고,
마지막 일곱 번째로는 그들로 하여금 사사로이 재물을 축적하게 하며 한편으로는 군사를 동원하여
대외원정 하게 하여 그 나라의 재정을 피폐하게 만든다.
(1. 捐貨幣, 以悅其君臣 2.貴糴粟槁, 以虛其積聚 3. 遣美女, 以惑其心志 4. 遣之巧工良材, 使作宮室, 以罄其財
5. 遣之諛臣, 以亂其謀 6.强其諫臣使自殺, 以弱其輔 7.積財練兵, 以承其弊.)
33) 손숙오(孫叔敖)/ 춘추 초장왕(楚莊王 : 재위 전613-592년) 때의 영윤(令尹)이다.
이름은 위오(蔿敖)이고 숙오(叔敖)는 그의 자(字)다. 원래 침구(寢丘)에 살았음으로 침윤(寢尹) 혹은
심윤(沈尹)이라고 칭했다. 초성왕(楚成王)에게 살해당한 초왕 분모(蚡冒)의 증손자다.
초장왕(楚莊王) 밑에서 사마(司馬)로 있던 그의 부친 위가(蔿賈)가 반란을 일으킨 투월초(鬪越椒)에 의해
살해당하자, 그는 종족들을 이끌고 지금의 하남성 회빈(淮濱) 동남의 기사(期思)라는 지방으로 이주해서
근검절약하며 살았다. 후에 초장왕에 의해 발탁되어 초나라의 영윤이 되었다.
그는 작피(勺陂)에 대규모의 수리시설을 확충한 다음 현재 평수로 5500만 평에 달하는 땅을 개간하여
농사가 가능하게 했으며 다시 지금의 하남성 상성(商城)의 우루(雩婁)의 대규모의 전답을 조성하여
초나라의 농업생산에 획기적인 발전을 가져왔다. 또한 초장왕이 무게가 가벼운 화폐를 무겁고 큰 것으로
바꾸는 화폐개혁을 단행하여 백성들이 사용하기가 불편하다고 호소하자,
손숙오는 있는 힘을 다하여 왕명을 취소하도록 했다. 후에 장왕을 따라 종군하여 지금의 하남성 형양(滎陽)
동북의 필(邲)에서 당진군을 대파하여 초장왕이 패자가 되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사기 순리열전(循吏列傳)에 ‘ 그가 재상에 세 번이나 임명되었으나 그때마다 한 번도 기뻐하지 않은 것은,
그의 재주가 그럴만하다고 스스로 생각했기 때문이고, 그가 세 번이나 재상의 직에서 파면되었지만
슬퍼하지 않은 것은 그것이 자기의 죄가 아니라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다.’라고 했다.
34) 오릉(於陵)/ 지금의 산동성 추평현(鄒平縣) 동남으로 전국 때 제나라 땅이다.
35) 자중(子仲)/ 진자중(陳子仲)을 말하며 전국 때 제나라 사람으로 오릉에 살았다.
초왕이 사람을 보내 자신을 재상으로 삼으려고 하자 처자를 이끌고 도망쳐 남의 집 정원에 물을 주며 살았다.
36) 도척(盜跖)/ 장주(莊周)가 지은 장자(莊子)라는 책의 편명으로 중국 고대전설 상의 유명한 도적이름이다.
장주가 지어낸 이야기라고도 하고 그의 제자가 지어낸 이야기라고도 한다.
37) 허유(許由)/ 요임금 때의 은자로 유명한 현인이다. 요임금이 군주의 자리를 그에게 물려주려고 하자
그는 기산(箕山)으로 도망가서 농사를 지으며 살았다. 다시 요임금이 구주(九州)의 지방관을 다스리는
장관에 임명하자 그는 영수(穎水)에 가서 귀를 씻고 듣지 않은 것으로 하였다.
38) 형가의 칠족이 해를 입었다는 이야기는 사료에 나타나지 않는다.
7족의 범위는 형제를 포함하여 증조, 부, 본인, 자, 손자, 증손을 말한다.
39) 춘추 말, 오나라의 공자광(公子光)이 자객 전제(專諸)를 시켜 오왕 료(僚)를 암살하고 스스로 왕위에 올랐다.
이가 오왕 합려(闔閭)다. 합려가 다시 왕료의 아들 경기(慶忌)를 두려워하여 죽이려고 했으나
힘이 장사인 그를 어찌할 수 없었다. 이에 요리가 경기를 죽이겠다가 자원했다.
요리는 오왕 합려로 하여금 자기에게 죄를 물어 자신의 한 팔을 자르고 그의 처자를 잡아 불태워 죽이도록
한 후에 위나라에 망명하고 있던 경기에게 달려가 그의 신임을 얻었다.
이어서 오나라로 잠입하여 합려를 죽이고 왕위를 찾아야 한다고 경기를 부추겼다.
경기가 그를 따르는 무리를 이끌고 요리와 함께 귀국길에 올라 강을 건널 때 요리가 칼을 뽑아 경기를
찔렀으나 힘이 장사인 경기는 죽지 않고 요리의 몸을 움켜쥐고 강물에 던져버렸다.
경기의 몸이 수면에 떠오르면 집어서 물 속에 던지기를 3번이나 연속 했음에도 요리가 죽지 않았다.
경기가 요리가 국사(國士)라고 칭하며 그를 방면하여 오나라에 돌아가게 하고 숨을 거두었다.
요리는 오나라에 돌아와 칼 위에 엎어져 죽었다.
40) 수후지주(隨侯之珠)/ 춘추 때 호북성 수주시 일대에 있어던 제후국 수(隨)나라의 군주가 소유했던 보물이다.
회남자(淮南子)에 의하면 수나라의 군주가 놀이를 나가다가 길위에 한 마리의 커더란 뱀이 상처를 입고
괴로워하는 것을 보았다. 이를 불쌍히 여긴 수후가 사람을 시켜 상처에 약을 바르고 천으로 싸매준 다음
풀밭으로 돌아가게 했다. 그리고 얼마 후에 상처가 아문 뱀이 한 개의 구슬을 입에 물고
수후가 사는 곳으로 찾아와 말했다.
“ 나는 곧 동해 용왕의 아들인데 군주께서 저의 생명을 구해 준 은혜에 감격하여 이렇게 특별히 와서 보물을
바치는 것입니다.” 그래서 수후지벽은 신령스러운 뱀이 물어다 분 구슬이라는 뜻의
영사지주(靈蛇之珠)라고도 한다.
41) 원문은 도균(陶鈞)이다. 녹노(轆轤)는 도공이 도자기의 둥근 모양을 낼 때 사용하는 회전판이다.
42) 몽가(蒙嘉)/ 전국 말 진나라의 중서자(中庶子)의 직에 있었던 관리다. 중서자의 임무는 주로 제후와
경대부(卿大夫)들의 서자들에 대한 계율과 교리(敎理)를 관장했다.
기원전 227년 연나라 태자 단(丹)이 진시황을 암살하기 위해 자객 형가(荊軻)를 진나라에 보냈을 때,
그는 뇌물을 받고 형가가 진시황을 접견할 수 있도록 주선했다.
몽가는 본의 아니게 형가가 진시황을 암살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들어주 게 되어 그 죄로 살해되었다.
43) 포초(鮑焦)/ 춘추 말 은사(隱士)로 청렴결백하고 근검절약한 행동으로 이름이 있었다.
그는 항상 땔나무를 등에 짊어지고 다녔으며 도토리나 밤을 주어 허기를 채웠다.
그는 세상의 도가 무너져 암흑세상이 되었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천자나 제후의 신하가 되기를 거부했다.
우연히 만난 자공(子貢)으로부터 비난을 받자 ‘ 현인은 쉽게 부끄러워하고 죽음을 가볍게 여긴다.’라고
말하고 이어서 나무를 부등켜 안고 음식을 끊어 죽었다.
44) 조가(朝歌)/ 은나라가 망할 때 도성으로 춘추 초에는 위(衛)나라가 도읍했으며
전국 시대에 이르러 조(趙)나라 령이었다. 이름의 뜻이 ‘아침부터 노래를 불러 즐긴다’도 해서
근검절약을 주장하는 묵자의 사상에 반한다고 생각한 것이다.
※ 原 文 . 【 中國哲學書電子化計劃 . 筆寫本 】
原 文 飜 譯 者 德庤 / 李 斗 振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