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9. 張耳 陳餘列傳

第 二十九. 張耳陳餘列傳(장이 진여열전)

덕치/이두진 2023. 8. 31. 18:06

 

                    史記 列傳

 

第 二十九 張耳陳餘列傳(장이 진여열전) 

 

 

張耳者,大梁人也.  其少時,及魏公子毋忌為客.  張耳嘗亡命游外黃.

外黃富人女甚美,嫁庸奴,亡其夫,去抵父客.
父客素知張耳,乃謂女曰:「必欲求賢夫,從張耳.」女聽,乃卒為請決,嫁之張耳.

​[장이는 대량(大梁) 인이다. 그는 어렸을 때 신릉군(信陵君) 위무기(魏無忌)의 문객을 지냈다.

장이가 일찍이 위나라에서 망명하여 외황에서 유랑했다. 외항에 부호가 있었는데

그의 딸이 매우 아름다웠으나 남의 집에서 고용살이하는 하는 사람에게 시집을 갔다가

남편으로부터 도망하여 그 부친의 빈객에게 의탁했다.

평소에 장이를 잘 알고 지냈던 그 빈객은 그녀에게 말하기를 :

 “ 네가 현능한 남편을 찾고 있다면 장이를 따라라!” 그녀가 그 말을 따르겠다고 하자,

그 빈객은 마침내 그녀를 위해 남편과 이혼시키고 장이에게 시집을 보냈다.]

 

張耳是時脫身游,女家厚奉給張耳,張耳以故致千里客.  乃宦魏為外黃令.  名由此益賢.

[장이는 그로 인해 유랑생활을 벗어나 여인의 집에서 보내주는 봉록으로 천리 밖의 빈객들을

불러 사귈 수 있었다.그로 인해 장이는 위나라에서 벼슬을 얻어 외황의 수령이 되었다.

그래서 그의 이름은 더욱 높아지게 되었다.]

 

陳餘者,亦大梁人也,好儒術,數游趙苦陘.  富人公乘氏以其女妻之,亦知陳餘非庸人也. 

餘年少,父事張耳,兩人相與為刎頸交.  秦之滅大梁也,張耳家外黃.

高祖為布衣時,嘗數從張耳游,客數月.

[진여(陳餘) 역시 대량 사람이다. 유학(儒學)을 좋아했으며 여러 차례 조나라의

고형(苦陘)1)으로 놀러 다녔다. 고형의 부호 공승씨(公乘氏)가 자기 딸을 진여에게 시집보냈다.

공승씨 역시 진여가 범용한 인물이 아니라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나이가 어렸기 때문에 장이를 부친처럼 모시다가 결국 두 사람은 문경지교(刎頸之交)을 맺었다.

진나라가 대량을 함락시켜 위나라를 멸망시킬 때 장이는 가족과 함께 외황에서 살고 있었다.

일찍이 고조가 포의(布衣)의 지사로 있을 때 여러 번 장이를 찾아와 교유하며

어떤 때는 몇 개월을 묵어가곤 했다.]

 

秦滅魏數歲,已聞此兩人魏之名士也,購求有得張耳千金,陳餘五百金.
張耳、陳餘乃變名姓,俱之陳,為里監門以自食. 兩人相對.

里吏嘗有過笞陳餘,陳餘欲起,張耳躡之,使受笞. 吏去,張耳乃引陳餘之桑下而數之曰:

「始吾與公言何如?今見小辱而欲死一吏乎?」陳餘然之.

[진나라는 위나라를 멸하고 몇 년이 지난 뒤에 두 사람이 위나라의 명사라는 사실을 알고

장이의 몸에는 천금을, 진여에게는 오백금의 현상금을 걸고 수배했다.

장이와 진여는 성과 이름을 바꾸고 진성(陳城)2)으로 도망쳐서 어떤 마을의 문지기가 되어

먹고 살았다. 그러 던 어느 날 두 사람이 마주 앉아 있는데 마을의 관리가 지나가다

트집을 잡더니 진여에게 매질을 가했다. 진여가 화를 참지 못하고 반항하려고 하자

장이가 진여의 발꿈치를 밟아 매를 맞도록 했다. 관리가 간 후에 장이는 즉시 진여를

뽕나무 밑으로 데려가 그의 잘못을 지적하며 말하기를 : “ 내가 처음 그대와 무슨 말을 했던가?

오늘 보니 조그만 치욕을 못 참고 한낱 시골의 일개 관리 손에 죽으려고 하지 않았는가? ”

라고 하자. 진여가 장이의 말에 수긍했다.]

 

秦詔書購求兩人,兩人亦反用門者以令里中. 陳涉起蘄,至入陳,兵數萬. 

張耳、陳餘上謁陳涉.  涉及左右生平數聞張耳、陳餘賢,未嘗見,見即大喜.

[진나라가 조칙으로 두 사람의 몸에 현상금을 걸고 수배했으나 두 사람은 오히려

문지기의 이름으로 자기들을 찾는다는 령을 마을에 전달했다.
이때 기현(蘄縣)에서 기의한 진섭(陳涉)이 수만의 군사를 이끌고 진성(陳城)으로 들어왔다.

장이와 진여가 명패를 올려 접견을 청했다. 평소에 장이와 진여가 현능하다는 소문을 여러 번

듣고 있었던 진섭의 측근들은 그때까지 보지 못하다가 이윽고 보게 되어 크게 기뻐했다.]

陳中豪傑父老乃說陳涉曰:「將軍身被堅執銳,率士卒以誅暴秦,復立楚社稷,

存亡繼絕,功德宜為王.  且夫監臨天下諸將,不為王不可,願將軍立為楚王也.」

[진성의 호걸과 부로들이 진섭을 설득하기 위해 말하기를 : “ 장군께서는 몸소 갑옷을 입으시고

예리한 병기를 들어 사졸들을 이끌고 포악한 진나라를 정벌했습니다.

또한 초나라의 사직을 다시 세우고 망한 것을 세우고끊어진 것을 이었음으로 그 공덕은

마땅히 왕이 될 만합니다. 또한 천하의 장군들을 감독하고 군림하려면 왕이 되지 않고는

가능하지 않습니다. 아무쪼록 장군께서는 초왕의 자리에 오르십시오. ”라고 하였다.]


陳涉問此兩人, 兩人對曰:「夫秦為無道, 破人國家, 滅人社稷, 絕人後世, 罷百姓之力,

盡百姓之財.  將軍瞋目張膽, 出萬死不顧一生之計, 為天下除殘也.

今始至陳而王之, 示天下私. 

願將軍毋王, 急引兵而西, 遣人立六國後, 自為樹黨, 為秦益敵也.

敵多則力分,與眾則兵彊.  如此野無交兵,縣無守城,誅暴秦,據咸陽以令諸侯.

諸侯亡而得立, 以德服之, 如此則帝業成矣.  今獨王陳, 恐天下解也.」陳涉不聽, 遂立為王.

​[진섭이 그들의 의견에 대해 장이와 진여 두 사람에게 물었다. 두 사람이 말하기를 : 

“ 무릇 진나라가 무도하여 남의 나라를 파괴하고, 남의 사직을 무너뜨리고, 자손들을 끊었습니다.

또한 백성들의 힘을 피폐시키고 그들의 재산을 모두 탕진시켰습니다.

이에 장군께서 눈을 한 번 크게 뜨고 담력을 크게 내보여 비록 만 번의 죽음에서

한 번의 생을 얻는 위험도 돌아보지 않으시고 천하를 위해 잔폭한 진나라를 멸하려고 하십니다.

그런데 지금 진 땅에 이르자 왕이 되려고 하여 천하에 사사로운 마음이 있음을 보이고 계십니다.

원컨대 장군께서는 왕이 되는 일을 뒤로 미루시고 급히 군사를 이끌고 서쪽으로 진격하십시오.

동시에 다른 한편으로는 사람을 진나라에게 망한 여섯 나라에 보내 그들의 후예를 찾아

다시 세우도록 하십시오. 천하는 장군의 당이 되어 진나라에게 더욱 많은 적이 생기게 됩니다.

그 결과 진나라에 적이 많이 생기면 진나라의 힘은 분산되고, 당이 불어난 장군의 군사는

강하게 됩니다. 이리되면 들판에서는 장군과 교전할 병사들은 없게 되고 장군의 군대에

대항해 성을 지키려는 현도 사라지게 됩니다. 

그 기회를 이용하여 포악한 진나라를 주멸하여 함양에 거하면서 제후들에게 령을 내리십시오.

망한 제후들을 다시 세우고 덕으로써 그들을 복종시킨다면 제업(帝業)은 자연히 이루어지게

됩니다. 그런데 지금 조그만 진 땅을 근거로 홀로 왕이 되신다면 천하는 마음이 해이해져

흩어지고 말 것입니다.”하였다. 진섭이 두 사람의 말을 듣지 않고 진왕의 자리에 올랐다.]

 

陳餘乃復說陳王曰:「大王舉梁、楚而西, 務在入關, 未及收河北也.

臣嘗游趙, 知其豪桀及地形, 願請奇兵北略趙地.」於是陳王以故所善陳人武臣為將軍,

邵騷為護軍,以張耳、陳餘為左右校尉,予卒三千人,北略趙地.

[이에 진여가 다시 진왕을 설득하기 위해 말하기를 : “ 대왕께서는 양(梁)과 초나라의 군사들을

이끌고 서쪽으로 나아가 함곡관(函谷關)으로 들어가는데 힘써야 하기 때문에 하북의 땅을

수복할 여력이 없습니다.

신이 옛날 조나라에서 유랑할 때 그곳의 호걸들과 지형들을 잘 알게 되었습니다.

원컨대 한 떼의 군사를 내어주시면 북쪽의 조나라 땅을 공략하겠습니다.”라고 하였다. 
그래서 진왕은 평소에 잘 알고 지내던 진성(陳城) 출신의 무신(武臣)을 장군으로 삼고

소소(邵騷)를 호군(護軍)으로, 장이와 진여를 각각 좌우 교위(校尉)로 삼아 3천의 군사를 주어

북쪽으로 나아가 조나라 땅을 공략하도록 했다.]

 

武臣等從白馬渡河,至諸縣,說其豪桀曰:「秦為亂政虐刑以殘賊天下,數十年矣.
北有長城之役, 南有五嶺之戍, 外內騷動, 百姓罷敝,頭會箕斂,以供軍費,財匱力盡,

民不聊生.  重之以苛法峻刑,使天下父子不相安.  陳王奮臂為天下倡始,王楚之地,

方二千里, 莫不響應, 家自為怒, 人自為鬬, 各報其怨而攻其讎, 縣殺其令丞, 郡殺其守尉.

今已張大楚,王陳,使吳廣、周文將卒百萬西擊秦.  於此時而不成封侯之業者,非人豪也.

諸君試相與計之!夫天下同心而苦秦久矣.  因天下之力而攻無道之君,

報父兄之怨而成割地有土之業,此士之一時也.」豪桀皆然其言.

[무신 등이 백마진(白馬津)3)에서 하수를 건너 조나라 땅의 여러 현을 지나면서 그곳의

호걸들에게 유세하기를 : " 진나라의 정치가 문란해져 혹형으로 천하의 백성들을 해쳐오기를

이미 수십 년이 되었다. 북쪽으로는 장성을 축조하는 노역에 동원되었고,

남쪽으로는 오령(五嶺)4)을 지키느라 나라 안과 밖이 소란스러워져 백성들은 피폐해졌다.

사람마다 부과된 인두세 명목으로 백성들을 키질 하듯 재물을 거두어 군비에 충당함으로써

재물은 탕진되고 힘은 소진되어 백성들은 더 이상 생활을 할 수 없게 되었다.

설상가상으로 가혹한 법에 형벌은 준엄하게 행해져 천하의 백성들은 비록 관계가

부자지간일지라도 서로 의심하며 불안하게 살고 있다.

진왕이 분격하여 가슴을 두드려 천하를 위하여 처음으로 부르짖었다.

이에 초나라 왕이 되니 사방 2천리 백성들 중 왕의 부르짖음에 호응하지 않는 자가 없다.

집집마다 스스로를 위해 분노를 터뜨리고 사람마다 스스로 싸움에 나서 각기 그들의 원한을 갚고

원수를 공격하여 현민들은 그들의 현령과 현승(縣丞)을 살해하고 군민들은 그들의 태수와

교위(校尉)를 살해했다. 이에 초왕은 초나라의 세력을 크게 일으키고 진성을 왕도(王都)로

정한 후에 오광과 주문을 장수로 삼아 백만 대군을 서쪽으로 진격시켜 진나라를 공격하고 있다.

이때에 이르러 제후의 업으로 이룰 수 없는 자는 결코 호걸이라 할 수 없을 것이다.

여러 호걸들은 시험 삼아 서로 계책을 내어 도모하도록 하라!

무릇 천하가 같은 마음으로 진나라로부터 고통을 달한 바는 오래되었음이라! 

천하 백성들의 힘으로 무도한 군주를 공격하여 부모, 형제들의 원한을 갚고 땅을 나누어

사대부의 업을 이룰 수 있는 이때야 말로 선비나 무사로써 두 번 다시 만날 수 없는

천재일우의 기회라 할 수 있지 않겠는가?"라고 하였다. 

호걸들은 모두 그 말이 옳다고 여겼다. 길을 떠나 행군에 참가하여 군사가 되었다.]

 

乃行收兵, 得數萬人, 號武臣為武信君. 下趙十城, 餘皆城守, 莫肯下.  乃引兵東北擊范陽. 

范陽人蒯通說范陽令曰:「竊聞公之將死,故弔.  雖然,賀公得通而生.」

范陽令曰:「何以弔之?」

[이로써 일을 착수해 군대를 거두어들여 수만 명을 얻었으며 무신은 스스로를 무신군이라 칭했다.

이에 조나라의 성 10개를 함락시키니 나머지 성들 중 항복하지 않는 성은 하나도 없었다.

무신이 계속해서 군사를 이끌고 동북으로 나아가 범양(范陽)을 공격했다.
범양인 괴통이 범양령을 설득하기를 :" 몰래 들으니 공께서 장차 돌아가실 것 같아

이렇게 조문을 드리러 왔습니다. 그러나 또한 공께서는 이 괴통을 얻으시어 목숨을

구할 수 있으니 경하를 드립니다."라고 하자. 
벙양령이 괴통을 향해 묻기를 : " 어찌하여 내가 죽는단 말인가? "라고 하자.] 

對曰:「秦法重,足下為范陽令十年矣,殺人之父,孤人之子,斷人之足,黥人之首,

不可勝數.  然而慈父孝子莫敢倳刃公之腹中者,畏秦法耳. 今天下大亂,秦法不施,

然則慈父孝子且倳刃公之腹中以成其名,此臣之所以弔公也. 

今諸侯畔秦矣,武信君兵且至,而君堅守范陽,少年皆爭殺君,下武信君. 

君急遣臣見武信君,可轉禍為福,在今矣.」

​[괴통이 대답하기를 : " 진나라의 법은 매우 엄중합니다. 대감께서는 범양령이 된 이래

10여 년 동안 다른 사람의 부모를 죽이고, 다른 사람의 아들을 고아로 만들었으며,

다른 사람의 발을 자르고, 다른 사람들의 머리에 글로 묵형(墨刑)을 가하기를

그 수가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많습니다.

그러나 아들을 사랑하는 부로(父老)나 부모의 원수를 갚으려는 효자들이 가슴에 비수를 품고도

감히 공의 배를 찌르지 않은 원인은 진나라의 법을 두려워하기 때문입니다. 

지금 천하에 대란이 일어나 진나라의 법은 통하지 않게 되었으니 자식을 사랑했던 아버지나,

부모의 원수를 갚으려는 아들들은 자기의 가슴에 품은 비수로 대감의 배를 찔러

그들의 명성을 드러내려고 혈안이 되어있습니다.

이것이 제가 대감에게 조문을 드리려는 이유입니다. 지금 제후들은 모두 진나라에 반기를 들고

신군이 거느린 군사들은 이미 이곳에 당도했으나 대감께서는 굳게 범양을 지키고 있는 틈에

성내의 젊은이들은 모두 다투어 대감을 죽여 무신군에게 바치려고 합니다.

대감께서는 급히 무신군에게 저를 보내어 화를 복으로 돌릴 수가 있는데,

그 때가 바로 지금입니다."라고 하였다.] 

 

范陽令乃使蒯通見武信君曰:「足下必將戰勝然後略地,攻得然後下城,臣竊以為過矣. 

誠聽臣之計,可不攻而降城,不戰而略地,傳檄而千里定,可乎?」

[범양 현령이 즉시 괴통을 시켜 무신군을 만나 자기의 말을 전하게 했는데 무신군을 만난

괴통이 말하기를 : " 장군께서는 한사코 싸움에서 이긴 후에나 조나라의 땅을 공략하려고 하나

그런 방법은 공격한 후에 성을 함락시키는 일과 같습니다. 제가 가만히 살펴보건대

그것은 잘못된 생각입니다. 원컨대 장군께서 저의 계책을 들어주신다면 성을 공격하지 않고도

항복시킬 수 있습니다. 격문을 전하여 싸우지 않고도 땅을 공략하면

사방 천리의 땅을 평정할 수 있는데 어떻습니까?”라고 하였다.]


武信君曰:「何謂也?」

蒯通曰:「今范陽令宜整頓其士卒以守戰者也,怯而畏死,貪而重富貴,

故欲先天下降, 畏君以為秦所置吏, 誅殺如前十城也.  然今范陽少年亦方殺其令,

自以城距君.  君何不齎臣侯印,拜范陽令,范陽令則以城下君,少年亦不敢殺其令. 

令范陽令乘朱輪華轂,使驅馳燕、趙郊.  燕、趙郊見之,皆曰此范陽令,先下者也,

即喜矣,燕、趙城可毋戰而降也.  此臣之所謂傳檄而千里定者也.」

[무신군이 묻기를 : " 무슨 뜻이오?"라고 하자. 

괴통이 대답하기를 : " 지금 범양령이 그의 사졸을 정돈하여 범양성을 지키려고 함은

그가 비겁하여 죽음을 겁내고 있으면서도 부귀를 중하게 생각하며 탐욕한 자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천하에 앞서 장군에게 항복하려고 하지만 예전에 조나라의 10개 성을 점령할 때에

장군에 의해 주살당한 진나라의 관리들처럼 자신도 살해당하지나 않을까

걱정하고 있습니다. 지금 범양의 젊은이들 역시 범양령을 죽이고 그 성을 근거지로 삼아

장군에게 항거하려 합니다. 장군께서는 저에게 범양후의 인장을 넘겨주어 범양령을

원래의 자리에 둔다는 령을 내리시기 바랍니다.

그러면 범양령은 즉시 성을 장군에게 바칠 것이며, 범양의 젊은이들 역시 감히 범양령을

살해하지 않을 것입니다. 이에 범양령에게 명하여 주륜화곡(朱輪華轂)5)을 타고

연나라와 조나라 교외의 땅을 달리게 하십시오.

연과 조나라의 관리들은 먼저 항복한 범양령이 죽지 않고 그전의 자리를 유지하고 있는

모습을 보면 기뻐할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연과 주 두 나라의 땅에 있는 성들은

모두 싸우지 않고도 항복을 받을 수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격문을 전하여 천리의 땅을 평정하는 계책입니다."라고 하였다.] 


武信君從其計,因使蒯通賜范陽令侯印.  趙地聞之,不戰以城下者三十餘城.

至邯鄲, 張耳· 陳餘聞周章軍入關, 至戲卻;又聞諸將為陳王徇地, 多以讒毀得罪誅,

怨陳王不其筴不以為將而以為校尉.

[무신군은 괴통의 계책에 따라 그에게 범양후의 인장을 주어 범양령에게 전해주도록 했다.

이윽고 조나라 땅에 소문이 퍼져 싸우지 않고 항복한 성이 30개가 넘었다.
한단에 입성한 장이와 진여는 주장(周章)의 군대가 함곡관을 돌파하여 희수(戱水)까지

나아갔다가 싸움에서 패하고 퇴각했다는 소식을 들었다. 또한 두 사람은 진왕(陳王)을 위해

여러 길을 나누어 성을 함락시키고 땅을 공략한 많은 장수들이 왕의 측근들 참언을 받아

죄를 얻어 살해되었다는 소식도 함께 들었다. 진왕은 옛날 자기들의 계책을 받아들이지

않았을 뿐만아니라 그들을 장군으로 삼지 않고 교위로 삼은 것을 원망했다.]

 

乃說武臣曰:「陳王起蘄,至陳而王,非必立六國後.

將軍今以三千人下趙數十城,獨介居河北,不王無以填之.

且陳王聽讒,還報,恐不脫於禍.  又不如立其兄弟;不,即立趙後. 

將軍毋失時,時閒不容息.」

​[이에 무신을 설득하며 말하기를 : " 기현(蘄縣)에서 기의하여 진현(陳縣)으로 들어가 왕위에

오른 진왕은틀림없이 육국의 후손들을 찾아 제후로 세우려는 생각을 품고 있지 않습니다.

장군께서는 지금 3천의 군사로 조나라의 성을 수십 개를 함락시키고 하북의 광활한 지역에

홀로 주둔하고 있습니다. 장군께서 직접 왕의 자리에 오르는 방법 외는 결코 조나라 지역을

안정시킬 수 있는 방법은 없습니다. 또한 진왕은 측근들이 장군을 모함하는 참언을 믿고

복을 가한다면 장군께서는 화를 피할 수 없게 됩니다.

장군을 제거한 진왕은 조왕의 자리에 자신의 형제나 자매를 세우고 결코 조나라 왕실의 후손을

세우지 않을 것입니다. 장군께서는 결코 이 기회를 놓치지 마십시오.

시간이 매우 촉박합니다."라고 하였다.]

 

武臣乃聽之,遂立為趙王.  以陳餘為大將軍,張耳為右丞相,邵騷為左丞相. 

使人報陳王,陳王大怒,欲盡族武臣等家,而發兵擊趙.   陳王相國房君諫曰:

「秦未亡而誅武臣等家, 此又生一秦也. 不如因而賀之, 使急引兵西擊秦.」
陳王然之,從其計,徙系武臣等家宮中,封張耳子敖為成都君.

[무신은 그들의 말을 듣고 바로 조왕의 자리에 오르고 진여는 대장군, 장이는 우승상, 

소소는 좌승상으로 삼았다. 그런 다음 사자를 진왕에게 보내 그 사실을 알리자

진왕이 대노하여 진현에 남아있던 무신의 가족들을 모두 살해하고 군대를 내어

조나라를 공격하려고 했다. 진왕의 상국 방군(房君)이 간언하기를 : " 진나라가 미처 망하지

않았음에도 무신 등의 가족들 상해한다면 이것은 또 다른 진나라를 만드는 일과 같습니다.

차라리 조왕의 자리에 오른 무신을 축하하고 서둘러 그들의 군사를 서쪽으로 보내 진나라를

공격하도록 하시는 편이 좋다고 생각합니다."라고 하자.  방군의 말이 옳다고 생각한 진왕은

그의 계책에 따라 무신 등의 가족들을 궁중으로 옮겨 살게 하고

장이의 아들 장오(張敖)를 성도군(成都郡)에 봉했다.]

 

陳王使使者賀趙, 令趣發兵西入關.  張耳、陳餘說武臣曰:「王王趙, 非楚意, 特以計賀王.

楚已滅秦,必加兵於趙.  願王毋西兵,北徇燕、代,南收河內以自廣.

趙南據大河,北有燕、代,楚雖勝秦,必不敢制趙.」 

趙王以為然,因不西兵,而使韓廣略燕,李良略常山,張黡略上黨.

​[진왕은 사자를 보내 조왕의 자리에 오른 무신을 축하하고 동시에 군사를 이끌고

서쪽으로 진군하여 관중을 공격하라고 명했다. 장이와 진여가 무신에게 말하기를 :

 " 왕께서 조나라의 왕이 된 것은 진왕의 뜻이 아니었습니다.

그럼에도 특별히 사자를 보내 조왕의 자리에 오른 왕을 축하하는 일은 진왕의 계략입니다.

만일 초나라가 진나라를 멸한다면 그 다음에는 틀림없이 군사들의 방향을 조나라로 돌릴

것입니다. 원컨대 왕께서는 군사를 서쪽으로 보내지 마시고 대신 북쪽으로 돌려 연(燕)과

대(代) 땅을 공략하시남쪽으로는 하내(河內)를 거두어 조나라의 땅을 넓히시기 바랍니다.

남쪽의 하수에 의지하여 북쪽의 연과 대 땅을 아울러 조나라 땅을 영토로 삼는다면

초나라가 비록 진나라와의 싸움에서 이긴다 해도 감히 조나라를 어떻게 할 수 없을 것입니다. "

라고 하였다. 조왕이 장이와 진여의 계책을 받아들여 군사를 서쪽으로 보내지 않고

한광(韓廣)과 이량(李良)을 장수로 삼아 연과 상산(常山)의 땅을 각각 공략하도록 했다.

그리고 장염에게는 군사를 이끌고 상당을 공략하라는 명을 내렸다.]

 

韓廣至燕,燕人因立廣為燕王。趙王乃與張耳、陳餘北略地燕界. 

趙王閒出, 為燕軍所得.  燕將囚之, 欲與分趙地半, 乃歸王.  使者往, 燕輒殺之以求地.
張耳、陳餘患之.  有廝養卒謝其舍中曰:「吾為公說燕,與趙王載歸.」
 

舍中皆笑曰:「使者往十餘輩,輒死,若何以能得王?」乃走燕壁.

[이윽고 한광이 연 땅에 당도하자 연나라 사람들이 그를 연왕으로 세웠다.

조왕이 즉시 장이와 진여와 함께 북쪽으로 진격하여 연나라와의 경계에 이르렀다.

그때 조왕이 진영 밖으로 나갔다가 연나라 군사들에게 사로잡히는 몸이 되었다.

연나라 장수가 조왕을 가둬 놓고 조나라 땅의 반을 주면 조왕을 풀어주겠다고 했다.

계속해서 조나라의 사자가 연나라 진영으로 갔지만 연나라 진영은 곧바로 사자를 죽이고

조나라 땅만을 요구했다. 장이와 진여는 이것을 걱정하고 있었다.

군영의 막사에서 잡역을 하고 있는 군졸 한 명이 동료들을 향해 말하기를 : " 내가 장군들을

위해 사자로 가서 연나라 장수를 설득하고 조왕을 모시고 돌아오겠다."라고 하였다.

막사 안의 동료들이 듣고 모두 웃으며 말하기를 : " 연군 진영에 사자로 열 명이 넘게 갔다가

모두 살해되었는데 네가 어떻게 능히 조왕을 데리고 올 수 있단 말인가?"라고 하자. 

그는 연나라 영채의 루벽 아래로 달려갔다.]

燕將見之,問燕將曰:「知臣何欲?」 燕將曰:「若欲得趙王耳.」

曰:「君知張耳、陳餘何如人也?」 燕將曰:「賢人也.」

曰:「知其志何欲?」 曰:「欲得其王耳.」

[연나라 장수가 그를 바라보자,

그는 연나라 장수에게 묻기를 : " 제가 무엇 때문에 왔는지 아십니까?라고 하자.

연나라 장수가 대답하기를 : " 조왕의 석방을 위해 온 것이 아니냐?"라고 하였다. 
또 묻기를 : " 그렇다면 장군께서는 장이와 진여가 어떤 사람인지 아십니까?"라고 하자.  

장수가 대답하기를 : " 그들은 현능한 사람들이다."라고 하였다. 
또 묻기를 : " 그렇다면 그들이 앞으로 무슨 일을 할지 아십니까?"라고 하자   

장수가 대답하기를 : " 그거야 그들의 왕을 구하려고 하지 않겠느냐?"라고 하였다.]

 

趙養卒乃笑曰:「君未知此兩人所欲也. 夫武臣、張耳、陳餘杖馬箠下趙數十城, 

此亦各欲南面而王,豈欲為卿相終己邪?夫臣與主豈可同日而道哉,顧其勢初定,

未敢參分而王,且以少長先立武臣為王,以持趙心. 今趙地已服,此兩人亦欲分趙而王,

時未可耳.  今君乃囚趙王. 此兩人名為求趙王,實欲燕殺之,此兩人分趙自立.  

夫以一趙尚易燕,況以兩賢王左提右挈,而責殺王之罪,滅燕易矣.」 

燕將以為然,乃歸趙王,養卒為御而歸.

​[이에 조나라 병사 웃으면서 말했다. " 장군께서는 그 사람이 무엇을 하려고 하는지

아직 모르고 계십니다. 무릇 무신, 장이, 진여는 말에 채찍을 휘두르는 것만으로

조나라의 수십 개의 성을 얻었음으로 그들은 모두 남면하여 왕이 되려는 야심을 품고 있는

사람들 입니다. 어찌 그들이 경상의 자리로 만족하여 인생을 끝내려고 하겠습니까?

신하와 군주의 신분은 결코 같다고 말할 수 없습니다.

그들은 자신들의 세력이 아직 안정되지 않았기 때문에 서로 독립하여 왕이 되지 않았을 뿐입니다.

그래서 조나라의 민심을 잡기 위해 나이가 많고 적음에 따라 먼저 무신이 왕이 된 것입니다.

두 사람은 명분상으로는 조왕을 구하려고 하지만 실제로는 연나라가 죽여주기를 바라고 있습니다.

조왕이 죽으면 두 사람은 조나라를 나누어 각각 자립할 것입니다. 무릇 하나의 조나라로도

연나라를 쉽게 여기는데 장차 두 사람의 현능한 왕이 좌우에서 서로 협력하여 자기들의 왕을

죽인 죄를 물어 공격한다면 연나라는 쉽게 멸망할 것입니다."라고 하자.  

연나라 장수가 그 사졸의 말이 옳다고 생각하여 조왕을 석방했다.

그 잡일을 하는 병사는 수레를 몰아 조왕을 태우고 돌아왔다.]

 

李良已定常山,還報,趙王復使良略太原.  至石邑,秦兵塞井陘,未能前.

秦將詐稱二世使人遺李良書, 不封,

曰:「良嘗事我得顯幸.  良誠能反趙為秦, 赦良罪, 貴良.」

良得書,疑不信.  乃還之邯鄲,益請兵.  未至,道逢趙王姊出飲,從百餘騎.

李良望見, 以為王, 伏謁道旁.  王姊醉, 不知其將, 使騎謝李良.  李良素貴, 起, 慚其從官.

[한편 이량(李良)이 상산을 평정한 후에 조왕에게 보고하자 조왕은 다시 그를 시켜 태원(太原)을

공략하게 했다. 그러나 이량이 이끄는 조군이 석읍(石邑)에 이르자,

진나라 군사가 정형(井陘)의 관문을 지키고 있었기 때문에 더 이상 앞으로 전진할 수 없었다.

진나라 장수가 이세황제를 사칭하고 사람을 시켜 이량에게 서신을 보냈다.

밀봉하지 않은 편지의 내용은 다음과 같았다. " 이량 그대는 옛날 짐의 총애를 받아 이름을 얻었다.

그대가 능히 초나라를 떠나 진나라로 돌아온다면 짐이 그대의 죄를 용서하고 직위를 높여

주겠노라!"  이량이 그 편지를 봤으나 의심하여 믿지 않고 다시 한단으로 돌아가 군사를

더 청하여 정형을 공격하려고 했다.  이량의 행렬이 한단에 미처 당도하기 전에 도중에

우연히 주연을 벌리고 백여 기의 기병을 이끌고 돌아오는 조왕의 누이 일행과 만났다.

이량이 조왕의 행차인 것으로 생각하여 깊 옆으로 벗어나 땅에 엎드려 절을 올렸다.

조왕의 누이가 술에 취해 그가 장군일 줄 모르고 그의 기병에게 시켜 답례하도록 했다.

이량은 원래 귀한 신분이었기 때문에 예를 행하기는 했으나 자기를 수행하던 군관들 보기가

매우 부끄러웠다.]

 

從官有一人曰:「天下畔秦,能者先立. 且趙王素出將軍下,今女兒乃不為將軍下車,

請追殺之.」
李良已得秦書,固欲反趙,未決,因此怒,遣人追殺王姊道中,乃遂將其兵襲邯鄲.

邯鄲不知, 竟殺武臣、邵騷.  趙人多為張耳, 陳餘耳目者, 以故得脫出.  收其兵, 得數萬人.

​[그 군관 중 하나가 말하기를 : " 천하가 모두 진나라에 반하여 일어나 앞을 다투어 스스로

왕자리를 차지했습니다.  또한 조왕은 원래 장군의 휘하에 있던 사람이었으나

일개 아녀자의 신분인 그의 누이가 장군이 예를 갖추었음에도 수레에 내려 답례도 하지 않고

모욕을 주었습니다. 청컨대 그 뒤를 따라가 죽이시기 바랍니다."라고 하였다. 
이량이 진나라의 편지를 받았을 때부터 원래 조나라를 배반하려는 마음을 품고 있었으나

주저하고 있던 차에 그 일로 인하여 화가 나서 사람을 보내 조왕의 누이의 뒤를 쫓아가

도중에 죽이고 이어서 그의 군사들을 이끌고 한단성을 기습했다.

이때 아무것도 모르고 한단성 안에 있던 무신과 소소는 결국 이량의 군사들에게 살해되고 

말았다. 그러나 장이와 진여의 눈과 귀가 되어 일하고 있었던 많은 조나라 사람들 덕분에

두 사람은 무사히 탈출할 수 있었다. 장이와 진여가 조왕의 잔여세력을 거두자

그 수효가 수만 명에 이르렀다.]

 

客有說張耳曰:「兩君羈旅,而欲附趙,難;獨立趙後,扶以義,可就功.」
乃求得趙歇,立為趙王,居信都. 李良進兵擊陳餘,陳餘敗李良,李良走歸章邯.
 

章邯引兵至邯鄲,皆徙其民河內,夷其城郭. 張耳與趙王歇走入鉅鹿城,王離圍之.

陳餘北收常山兵,得數萬人,軍鉅鹿北. 章邯軍鉅鹿南棘原,筑甬道屬河,餉王離.

王離兵食多, 急攻鉅鹿. 鉅鹿城中食盡兵少, 張耳數使人召前陳餘, 陳餘自度兵少,

不敵秦, 不敢前.

[장이의 빈객으로 있던 사람이 말하기를 : " 두 분 장군께서는 타향 출신이라 조나라 백성들의

마음을 얻기가 매우 어렵습니다. 조나라 왕족의 후손들을 찾아 의로써 그를 돕는 방법만이

공업을 이룰 수 있을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그래서 장이와 진여는 조헐(趙歇)이라는 조나라 왕족의 후손을 찾아 조왕으로 세우고

신도(信都)를 도읍으로 정했다. 한편 이량은 군사를 이끌고 진격하여 진여를 공격했으나

오히려 진여의 반격을 받아 싸움에서 패하고 도망쳐 진나라의 장수 장한(章邯)에게 항복했다.

한단에 당도한 장한의 진나라 군사들은 그곳의 백성들을 모두 하내로 이주시키고

한단의 내성과 외곽을 모두 파괴해 버렸다. 장이와 조왕 헐은 도망쳐 거록(鉅鹿)으로 들어가자

진장 왕리(王離)가 뒤를 추격하여 포위했다. 진여는 북쪽으로 도망쳐 상산에서 수만 명의

군하를 얻은 후 남하하여 거록의 북쪽에 주둔했다. 이때 장한의 진나라 본대는 거록의 남쪽인

극원(棘原)에 군영을 세우고 하수 강안을 따라 용도(甬道)6)를 건설하고 왕리와 군사들에게

군량을 보급했다. 군량미를 충분히 보급 받은 왕리의 진나라 군사들은 사기가 올라

거록성을 매우 세차게 공격했다.  거록의 성안에는 양식이 떨어지고 군사들의 수효가 

줄어 들어 장이는 사람을 여러 차례 보내 진여에게 구원을 청했다. 수효가 적은 군사들로는

진나라의 대군을 이길 수 없다고 스스로 생각한 진여는 감히 앞으로 진격하지 못했다.]


數月,張耳大怒,怨陳餘,使張黶、陳澤往讓陳餘曰:

「始吾與公為刎頸交,今王與耳旦暮且死,而公擁兵數萬,不肯相救,安在其相為死!

茍必信,胡不赴秦軍俱死?且有十一二相全.」 

陳餘曰:「吾度前終不能救趙,徒盡亡軍.  且餘所以不俱死,欲為趙王、張君報秦. 

今必俱死, 如以肉委餓虎, 何益?」 張黶、陳澤曰:「事已急, 要以俱死立信, 安知後慮!」 

陳餘曰:「吾死顧以為無益. 必如公言.」乃使五千人令張黶、陳澤先嘗秦軍,至皆沒.

[몇 개월이 지나자 대노한 장이는 진여를 원망하며 장염(張黶)과 진택을 시켜 진여에게

자기의 말을 전하게 했다. " 옛날 나와 장군은 문경지교를 맺어 죽음을 같이 하기로 맹세했소. 

지금 조왕과 이 장이의 죽음이 조석지간에 달려 있는데 장군은 수만 명이나 되는 군사들을

끼고 있으면서 우리를 구원하려는 생각을 하지 않으니 세상 어디에 서로를 위해

목숨을 버리자고 맹세한 의가 있단 말이오?  그래도 장군에게 얼마간의 신의가 남아 있다면 

어찌 진의 군대에 달려들어 함께 죽고자 하지 않는 것이오?

설사 그렇다 해도 십에 한 둘은 살아남을 수 있지 않겠소?”라고 하자.   진여가 듣고 말하기를 :

" 내가 이렇게 진격하지 못하고 있음은 조왕도 구하지 못하고 헛되이 군사들만 모두 잃지 않을까

생각해서요. 또한 이 진여가 조왕과 장이장군 두 분과 함께 죽지 않으려고 함은 두 분을 위해

진나라에 원수를 갚기 위해서요. 지금 꼭 죽고자 하는 것은 굶주린 호랑이에게

고기를 던져주는 꼴이니 우리에게 무슨 이익이 있겠소?"하였다. 
장역과 진택이 말하기를 : " 그래도 일이 이미 급하게 되었으니 죽음을 함께해서 신의를

지켜야 하지 않겠습니까? 어찌 후일의 일만을 걱정하십니까? "라고 하자. 

진여가 대답하기를 : " 나는 죽어도 아무 이익이 없다고 생각되지만, 장군들의 말을 따르기로

하겠소."라고 하였다.  그래서 진여는 휘하의 군사들 중 5천 명을 장염과 진택에게 주어

먼저 진나라 진영으로 돌격하게 했으나 그들 모두는 전멸하여 한 사람도 살아나오지 못했다.]

 

當是時, 燕、齊、楚聞趙急, 皆來救.  張敖亦北收代兵, 得萬餘人, 來, 皆壁餘旁, 未敢擊秦. 

項羽兵數絕章邯甬道,王離軍乏食,項羽悉引兵渡河,遂破章邯.
章邯引兵解,諸侯軍乃敢擊圍鉅鹿秦軍,遂虜王離.  涉閒自殺.  卒存鉅鹿者,楚力也.
 

於是趙王歇、張耳乃得出鉅鹿,謝諸侯.

[이때 조나라가 위급하게 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연(燕)과 제(齊) 및 초(楚)가 구원하기 위해

모두 달려왔다.  장이의 아들 장오 역시 북쪽으로 나아가 정벌군을 조직하여 만여 명의 군졸을

얻어 달려와 진여의 진영 옆에 루벽을 쌓고 주둔했으나 감히 진나라 진영을 공격하지 못했다.

항우가 장한이 수비하는 용도를 공격하여 보급로를 여러 번 끊었기에 왕리의 군사들은 군량미가

부족하게 되었다.  그 틈을 이용한 항우가 휘하의 군사를 모두 이끌고 하수를 도하하여

장한의 진나라 군사들을 공격하여 무찔렀다.

장한의 군대는 흩어지고 제후군들은 즉시 거록을 포위하고 있던 진군을 공격했다.

진군의 대장 왕리는 제후군의 포로가 되었고 섭간은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거록에 포위되었던 조왕과 장이와 장졸들이 살아날 수 있었던 것은 항우가 거느린

초나라 군사들의 힘이었다.

거록에서 살아 돌아온 조왕 헐과 장이는 제후들에게 감사의 말을 올렸다.]

 

張耳與陳餘相見,責讓陳餘以不肯救趙,及問張黶、陳澤所在.
陳餘怒曰:「張黶、陳澤以必死責臣,臣使將五千人先嘗秦軍,皆沒不出.」

張耳不信,以為殺之,數問陳餘.  陳餘怒曰:「不意君之望臣深也!豈以臣為重去將哉?」

乃脫解印綬,推予張耳.  張耳亦愕不受.  陳餘起如廁.

[이윽고 진여와 서로 상견하게 된 장이는 진여가 조왕과 자기를 구원하지 않은 행위에 대해

책망하고 이어서 장염과 진택의 소재를 물었다. 진여가 화를 내며 말하기를 : 

" 장염과 진택이 한사코 죽음을 무릅쓰고라도 조왕과 장군을 구해야한다고 나를 책망했기

때문에 나는 그들에게 5천 명의 군사를 주어 먼저 시험 삼아 진군을 공격하도록 했으나 그

들은 모두 몰살당해 빠져나오지 못했소."라고 하였다. 
장염과 진택을 진여가 죽였다고 생각하여 진여의 말을 믿지 못한 장이는 몇 번이나 반복해서

두 사람에 대해 물었다. 진여가 더욱 화를 내며 말하기를 " 장군께서 나에 대한 원망이 이리

깊은 줄은 정말로 몰랐소.내가 이따위 장군의 직을 버릴 수 없다고 생각합니까?"라고 하면서, 
진여가 그 즉시 허리에 차고 있던 장군의 인수를 풀어 장이에게 밀어서 주었다.

장이가 놀라 받지 않자 그 사이에 진여는 자리에서 일어나 변소에 갔다.]

客有說張耳曰:「臣聞『天與不取,反受其咎』

今陳將軍與君印, 君不受, 反天不祥. 急取之!」
張耳乃佩其印,收其麾下. 而陳餘還,亦望張耳不讓,遂趨出. 張耳遂收其兵. 

陳餘獨與麾下所善數百人之河上澤中漁獵.  由此陳餘、張耳遂有卻.

 趙王歇復居信都.  張耳從項羽諸侯入關. 

[장이의 빈객 중 한 사람이 말하기를 : " 제가 듣기에 하늘이 주는 것을 받지 않으면 후에

화가 된다고 했습니다. 지금 진여장군이 장군의 인수를 장군에게 주었는데

장군께서 받지 않으신다며 그것은 하늘의 뜻을 거역하는 행위가 되어 상서롭지 못합니다.

빨리 취하기 바랍니다."라고 하였다.  장이가 장군의 인수를 거두어 자기의 허리에 차고

주위 사람들을 거두었다. 얼마 후에 자리에 돌아온 진여는 장이가 사양하지 않고

장군의 인수를 거두었음을 원망하며 그 자리에 급히 빠져 나왔다.

장이는 진여가 거느렸던 군사들도 모두 거두어 자기 부하로 만들었다.

진여는 평소에 그와 친했던 수 백 명의 사람들과 함께 하상(河上)으로 나아가 호수가에서

고기를 잡으며 지냈다. 이로 인하여 진여와 장이는 서로 틈이 벌이지게 되었다.
조왕 헐은 다시 신도로 가서 머물고, 장이는 항우와 제후들을 따라 함곡관으로 들어갔다.

 

漢元年二月, 項羽立諸侯王, 張耳雅游, 人多為之言, 項羽亦素數聞張耳賢,

乃分趙立張耳為常山王, 治信都. 

信都更名襄國.   陳餘客多說項羽曰:「陳餘、張耳一體有功於趙.」 

項羽以陳餘不從入關,聞其在南皮,即以南皮旁三縣以封之,而徙趙王歇王代. 

張耳之國,陳餘愈益怒,曰:「張耳與餘功等也,今張耳王,餘獨侯,此項羽不平.」

[한나라 원년(기원전 206년) 2월, 항우가 제후들을 왕으로 세울 때 장이는 그 전에 이미 세상을

돌아다니며 교우관계를 넓게 가졌음으로 많은 사람들이 칭찬했고 항우 역시 평소에 장이의

현능함을 이미 알고 있었다. 그래서 항우는 조나라를 나누어 장이를 상산왕(常山王)으로 봉하고

신도에 치소를 두도록 했으며, 신도의 이름을 양국(襄國)으로 개명했다.

진여의 문객이었던 많은 사람들이 항우에게 말하기를 :
" 진여와 장이는 모두 같이 조나라 땅에서 공을 세웠습니다."라고 하였다. 
진여가 관중으로 들어갈 때 종군하지 않았다고 생각한 항우는 그가 남피(南皮)에 머물고

있다는 소식을 듣고남피 주변의 3개 현에 봉하고 조왕 혈은 대(代)땅의 왕으로 옮기도록 했다.

장이가 제후왕에 봉해지자 진여는 더욱 화를 내며 말하기를 : " 내가 지금까지 세운 공로는

장이와 같다. 지금 장이는 왕이 되었고, 나는 단지 후에 봉해졌다.

이것은 공평하지 못한 처사로 항우의 잘못이다."라고 하였다.]

及齊王田榮畔楚,陳餘乃使夏說說田榮曰:「項羽為天下宰不平,盡王諸將善地,

徙故王王惡地,今趙王乃居代!願王假臣兵,請以南皮為捍蔽.」 

田榮欲樹黨於趙以反楚,乃遣兵從陳餘.

陳餘因悉三縣兵襲常山王張耳. 張耳敗走,念諸侯無可歸者,

曰:「漢王與我有舊故,而項羽又彊,立我,我欲之楚.」
甘公曰:「漢王之入關, 五星聚東井. 東井者, 秦分也. 先至必霸. 楚雖彊, 後必屬漢.」

故耳走漢.

[이윽고 제왕 전영(田榮)이 초나라에 반기를 들자, 진여는 즉시 하열(夏說)을 사자로 보내

전영을 설득하기를 : " 항우는 천하의 일을 주재하면서 그 처사가 매우 불공평합니다.

자기가 거느렸던 장군들은 모두 좋은 땅의 왕으로 봉하고 옛날의 왕들은 나쁜 땅으로 옮기도록

했습니다. 그래서 원래의 조왕은 대왕이 되어 북쪽으로 옮겨가게 만들었습니다. 

원컨대 저에게 얼마의 군사를 빌려주시면, 남피의 땅을 제나라를 지키는 방어벽으로 만들어

드리겠습니다."라고 하였다.  전영은 원래 조나라 땅에 자기의 세력을 심어 초나라에

대항하려는 생각을 갖고 있었기 때문에 곧바로 군사를 보내진여의 지휘를 받도록 했다.

진여는 남피 주위의 3개 현의 군사를 이끌고 북으로 진격하여 상산왕 장이를 공격했다.

싸움에서 패하여 도망가던 장이는 자기의 몸을 의탁할 만한 제후가 없다고 생각하며 말하기를 :

"한왕과 나는  옛날의 친분이 있기는 하지만 항우가 강한 데다가 나를 왕으로 세워주었으니,

나는 초나라로 가야겠다.”라고 하자.
감공(甘公)이 듣고 말하기를 : " 한왕이 관중으로 들어갈 때 오행(五行)7)의 별이 동정(東井)8)에

모였습니다. 동정은 진나라의 별자리라 한왕이 먼저 천하를 제패한다는 징조입니다.

지금 초나라의 세력이 비록 강하다고 하나 후에는 틀림없이 한나라에 속하게 된다는 뜻입니다."

라고 하였다.  그래서 장이는 한나라로 달아나 한왕에게 몸을 맡겼다.]

 

漢王亦還定三秦,方圍章邯廢丘. 張耳謁漢王,漢王厚遇之.

陳餘已敗張耳,皆復收趙地,迎趙王於代,復為趙王. 趙王德陳餘,立以為代王.

陳餘為趙王弱,國初定,不之國,留傅趙王,而使夏說以相國守代.

[그때 한왕은 한중에서 나와 삼진(三秦)을 평정한 후에 마침 폐구(廢丘)에서 장한을 포위하고

있던 중이었다. 한왕은 한나라로 들어와 인사를 올리는 장이를 극진히 대했다. 

그때 장이를 패주시킨 진여는 다시 조나라의 땅을 수복하고 대 땅에서 조헐을 모셔와

조왕의 자리에 다시 앉혔다.  조왕은 진여의 덕을 칭송하여 그를 대왕으로 세웠다.

그러나 조왕은 세력이 약할 뿐만 아니라 조나라는 안정이 아직 안 되어 이를 불안하게 느낀

진여는 봉국 대(代)나라 봉지인 남피에 돌아가지 않고 조 땅에 머무르며 조왕을 도왔다.]

 

漢二年,東擊楚,使使告趙,欲與俱.  陳餘曰:「漢殺張耳乃從.」

於是漢王求人類張耳者斬之,持其頭遺陳餘.  陳餘乃遣兵助漢. 

漢之敗於彭城西,陳餘亦復覺張耳不死,即背漢.

[한왕 2년(기원전 205년), 한왕이 동쪽으로 진격하여 항우의 초나라를 공격할 때 사자를 보내

조나라와 함께 참전하기를 원했다.

진여가 말하기를 : " 한왕이 장이를 죽인다면 명을 받들겠다."라고 하였다. 
그래서 한왕은 장이와 닮은 자를 구해 참수해서 그의 목을 진여에게 보냈다.

진여는 곧바로 군사를 보내 한왕을 돕도록 했다.

한나라 군사들이 팽성(彭城)의 서쪽에서 싸워 항우에게 패하자,

진여는 장이가 죽지 않았다는 사실을 알게 되어 곧바로 한나라로부터 등을 돌렸다.]

 

漢三年,韓信已定魏地,遣張耳與韓信擊破趙井陘,斬陳餘泜水上,追殺趙王歇襄國.

漢立張耳為趙王.

漢五年,張耳薨,謚為景王. 子敖嗣立為趙王.  高祖長女魯元公主為趙王敖后.

[한왕 3년(기원전 204년), 위(魏)나라 땅을 평정한 한신이 장이와 함께 북진하여 정형(井陘)에서

진여가 이끌던 조나라 군사를 격파했다. 도주하던 진여와 조왕을 추격한 한신은

저수(泜水) 강안에서 진여를 잡아 참수하고 조왕은 양국(襄國)에서 살해했다.

한나라는 장이를 조왕으로 삼았다.
한고조 5년(기원전 202년), 장이가 죽자 경왕(景王)이라는 시호를 내리고 그의 아들 장오에게

조왕의 뒤를 잇게 한 고조는 그의 장녀 노원공주(魯元公主)를 그에게 시집보냈다.]

 

漢七年, 高祖從平城過趙, 趙王朝夕袒韛蔽, 自上食,禮甚卑,有子婿禮.  高祖箕踞詈,

甚慢易之. 趙相貫高、趙午等年六十餘,故張耳客也.   

生平為氣,乃怒曰:「吾王孱王也!」 

說王曰:「夫天下豪桀并起,能者先立.  今王事高祖甚恭,而高祖無禮,請為王殺之!」
張敖齧其指出血,曰:「君何言之誤!且先人亡國,賴高祖得復國,德流子孫,

秋豪皆高祖力也.  願君無復出口.」 貫高、趙午等十餘人皆相謂曰:

「乃吾等非也.  吾王長者,不倍德.  且吾等義不辱,今怨高祖辱我王,故欲殺之,

何乃汙王為乎?令事成歸王,事敗獨身坐耳.」

​[한고조 7년(기원전 200년), 고조가 평성에서 나와 조나라 땅을 지날 때 조왕 장오는

아침저녁으로 겉옷을 벗고 어깨를 들어내고 구폐9)를 행하여 자신이 손수 음식을 바치며

지극히 겸손한 자세로 사위로써의 예절을 갖추었다.

그런데도 고조는 의자에서 내려와 두 발을 쭉 뻗고 장오에게 욕지거리를 퍼부으며 매우

오만무례하게 대했다.  조나라의 상국 관고(貫高)와 조오(趙午) 등은 모두 나이가 60이 넘은

노인으로 옛날부터 장이의 문객이었다.  평생 의기 하나로 살았던 그들은 고조의 무례한 태도에

노하여 말하기를 :" 우리의 왕은 너무 유약하지 않은가?" 라고 하며,  

조왕에게 말하기를 : " 무릇 천하의 호걸들이 몸을 일으켜 능력있는 자가 먼저 제위를

차지했습니다.  지금 왕께서는 황제를 심히 공손하게 받들었음에도 황제는 너무 무례하게

왕을 대했습니다.  청컨대 왕을 위해 황제를 죽이겠습니다. "라고 하자,

장오가 듣고 놀라 자기의 손가락을 깨물어 피를 보이며 말하기를 :

" 그대들은 어찌하여 그렇게 잘못된 말을 하는 것이오? 더욱이 우리 선조들이 망해 잃은 나라를 

황제께서 찾아 주시어 그 덕이 자손들에게 전해지니 우리들의 털끝 하나까지 모두 황제의 덕에

힘입은 바요.  원컨대 여러분들은 두 번 다시 그런 말을 하지 마시오."라고 하였다. 
조왕 앞에서 물러나온 관고와 조오 등의 10여 인이 모두 모여 상의하며 말하기를 :
" 이는 곧 우리들의 잘못이오. 우리들의 왕은 장자라 황제의 덕을 차마 저버리지 못하기 때문이오.

더욱이 우리의 왕이 욕됨을 받지 않도록 함이 우리들이 지켜야 하는 도리이기 때문에 

지금 우리의 왕을 욕보인 황제에게 원한을 품고 그를 죽이려고 함이지

어찌 우리가 우리 왕의 이름을 더럽히려고 하는 일이겠소?

이 일이 성사되면 그 공은 왕에게 돌아가게 되고,

실패하면 우리가 스스로 저지른 일로 그 책임을 지면 될 일이오."라고 하였다.]

 

漢八年,上從東垣還,過趙,貫高等乃壁人柏人,要之置廁.

上過欲宿,心動,問曰:「縣名為何?」 曰:「柏人.」「柏人者,迫於人也!」不宿而去.

​[한고조 8년(기원전 199년), 황제가 동원(東垣)에서 출발하여 도성으로 돌아가다가

조나라를 지나가게 되었다. 관고 등이 백인현(柏人縣)의 관사에 이중벽을 설치하고

그 안에 무사를 숨겼다. 황제가 백인에서 유숙하려고 했으나 갑자기 심장이 뛰어

측근들에게 묻기를 : " 이 현의 이름은 무엇이라고 하는가?"라고 하자. 

그들이 대답하기를 : " 백인이라고 합니다."라고 하였다. 

황제가 말하기를 :  " 백은 곧 박(迫)이라 다른 사람에게 박해를 받는 말과 같다."라고 하며. 

황제는 백인현을 지나쳐 다른 곳에서 묵었다.]

 

漢九年,貫高怨家知其謀,乃上變告之. 於是上皆并逮捕趙王、貫高等.
十餘人皆爭自剄,貫高獨怒罵曰:「誰令公為之?今王實無謀,而并捕王;

公等皆死,誰白王不反者!」乃轞車膠致,與王詣長安. 

治張敖之罪,  上乃詔趙群臣賓客有敢從王皆族.

[한고조 9년(기원전 196년), 관고에게 원한을 품고 있던 자가 그 모의를 알고 황제에게 고변했다.

그래서 황제는 조왕을 포함하여 관고 등 음모에 가담한 자를 모두 체포했다.

10여 명이 모두 앞을 다투어 스스로 목을 찔러 자결하려고 하자 관고가 홀로 화를 내며

사람들을 꾸짖기를 : " 누가 그대들에게 그 일을 시켰는가? 왕은 실제로 우리들이 꾸민 음모를

알지 못하고 있는데 왕이 우리와 함께 체포되었음에도 그대들이 모두 죽어버린다면

왕이 반란을 일으키지 않았다고 누가 밝힐 수 있겠는가?"하였다. 
그래서 장오와 관고는 함거교치10)되어 장안으로 압송되었다. 장오의 죄를 다스리기 위해

황제가 조칙을 내렸다.  그리고 조나라 군신들이나 빈객들이 감히 조왕을 따라

장안에 들어온다면 그들을 멸족시키겠다고 했다.]

 

貫高與客孟舒等十餘人,皆自髡鉗,為王家奴,從來. 

貫高至, 對獄, 曰:「獨吾屬為之, 王實不知.  吏治榜笞數千, 刺剟, 身無可擊者, 終不復言. 

呂后數言張王以魯元公主故,不宜有此。上怒曰:「使張敖據天下,豈少而女乎!」不聽.
廷尉以貫高事辭聞,上曰:「壯士!誰知者,以私問之.」

​[빈객 맹서(孟舒) 등 10여 명은 모두 스스로 깎은 머리에 목에는 차꼬를 차고 조나라 왕가의

가노 신분으로 속여 관고의 뒤를 따랐다. 장안에 호송된 관고는 옥리에게 말하기를 : 

" 그 일은 우리가 독단적으로 행했을 뿐이지 왕은 전혀 모르는 일이다."라고 하자. 

옥리가 관고를 몽둥이로 수천 대를 내리치고 칼로 찌르고 살을 떼어내어

그의 몸을 더 이상 손을 볼 데가 없게 되었음에도 그는 결코 그의 말을 번복하지 않았다.
여후()는 조왕이 노원공주 때문에 이러한 일을 했을 리 없다고 여러 번 고조에게 말했다.

황제가 화를 내며 말하기를 : " 장오가 천하를 차지하면 그대의 딸과 같은 여인이 줄어들겠소!"

라고 하였다. 정위가 관고를 심문한 내용을 읽어 본 황제가 말하기를 :

 " 참으로 장사로다! 관고를 아는 자를 찾아 그에 대해 비밀리에 조사해 보라 ! "라고 하였다.]

 

中大夫泄公曰:「臣之邑子,素知之.  此固趙國立名義不侵為然諾者也.」
上使泄公持節問之箯輿前.  仰視曰:「泄公邪?」

泄公勞苦如生平驩,與語,問張王果有計謀不.

高曰:「人情寧不各愛其父母妻子乎?今吾三族皆以論死,豈以王易吾親哉!

顧為王實不反,獨吾等為之.」 具道本指所以為者王不知狀.

[중대부 설공이 황제에게 말하기를 : " 관고는 신과 같은 고향 출신으로 평소에 그를 잘 알고

지내는 사이입니다. 그는 조나라에서 의로 이름을 세워 그가 한 번 승낙하면 

반드시 지키는 신의가 있는 사람입니다."라고 하였다.

황제는 설공에게 부절을 내주며 관고를 찾아가 직접 물어보도록 했다.

준비한 음식을 대나무 상자에 넣어 가져간 설공이 관고 앞으로 가서 물었다.

그러자 바닥에 누워있던 관고가 설공을 올려다보며 말하기를 : " 설공이 아니오?"라고 하였다. 

설공은 옛날 친하게 지내던 때와 같이 다정한 모습으로 관고의 고생을 위로하며

담화를 나누다가 이윽고 조왕 장오가 과연 그 모의를 꾸몄는지 물었다.
관고가 대답하기를 : " 정을 갖고 있는 사람으로써 어찌 그들 자신의 부모와 처자를

사랑하지 않는 사람이 있겠소? 지금 나의 삼족이 모두 나로 인해 멸족할 운명에 처해 있소.

그렇다고 어찌 나의 육친을 왕과 바꿀 수 있겠소?  그것은 실제로 조왕이 반란을

획책하지 않았고 우리가 독단으로 그를 위해 한 일이기 때문이오."라고 하였다. 

그는 상세하게 그들이 황제를 살해하려고 했던 원래의 뜻과 조왕은 그 실상을

모르고 있었던 정황을 설명했다.]

 

於是泄公入,具以報,上乃赦趙王.  上賢貫高為人能立然諾,使泄公具告之,

曰:「張王已出.」  因赦貫高.  貫高喜曰:「吾王審出乎?」

泄公曰:「然.」 泄公曰:「上多足下,故赦足下.」
貫高曰:「所以不死一身無餘者,白張王不反也.  今王已出,吾責已塞,死不恨矣.

且人臣有篡殺之名,何面目復事上哉!縱上不殺我,我不愧於心乎?」

乃仰絕骯,遂死.  當此之時,名聞天下.

​[그래서 설공은 궁궐로 들어가 그가 파악한 자세한 내막을 황제에게 보고했다. 

황제는 결국 조왕을 사면했다. 황제는 관고야 말로 신의가 있는 인물이라고 생각해서

설공을 다시 보내 조왕이 석방되었다는 사실을 알리게 했다. 설공이 관고를 찾아가 말하기를 : 

" 조왕은 이미 감옥에서 석방되어 자유의 몸이 되었소. "라고 하였다.
그리고 관고 자신도 함께 사면되었다는 사실을 알렸다. 관고가 듣고 매우 기뻐하며 말하기를 : 

" 우리의 조왕이 사면을 받아 석방되었다는 말이 정말이오?"라고 하자. 
설공이 틀림없다고 대답하고 황제의 말을 관고에서 전하기를 : 
" 황제께서 당신의 신의를 매우 칭송하고 함께 사면령을 내리셨소." 라고 하였다.
관고가 듣고 말하기를 : " 내가 취조를 받으면서 당한 구타로 내 몸에 살이 붙어 있지 않을

정도로 고통을 당하면서도 스스로 목숨을 끊지 않았음은 조왕이 절대로 모반하지 않았다는

진실을 밝히기 위해서였소.  이제 조왕이 무죄가 밝혀져 이미 석방되었으니

나는 책임을 다했음으로 죽어도 아무런 여한이 없게 되었소.

더욱이 신하된 자가 그 황제를 살해하려고 했으니 무슨 면목으로 다시 황제를 받들어 모시겠소?

황제가 법을 무시하고 나를 죽이지 않는다하더라도 내가 어찌 부끄러운 마음을 갖지

않을 수 있겠소?"라고 하며,  자신의 목의 혈관을 끊더니 이내 숨을 거두었다.

이 일로 인해 당시 관고의 이름은 천하에 알려지게 되었다.]

 

張敖已出,以尚魯元公主故,封為宣平侯。於是上賢張王諸客,以鉗奴從張王入關,

無不為諸侯相、郡守者.  及孝惠、高后、文帝、孝景時,張王客子孫皆得為二千石. 

張敖,高后六年薨.  子偃為魯元王.  以母呂后女故,呂后封為魯元王.

元王弱,兄弟少,乃封張敖他姬子二人:壽為樂昌侯,侈為信都侯.
高后崩,諸呂無道,大臣誅之,而廢魯元王及樂昌侯、信諸侯. 

孝文帝即位,復封故魯元王偃為南宮侯,續張氏. 

[장오는 석방되어 조왕의 자리에는 돌아가지 못했으나 노원공주로 인해 선평후에 봉해졌다11).

황제는 그 일로 장오의 빈객으로써 스스로 목에 차꼬를 차고 조왕의 가노로 신분을 속여 장안으로

들어온 자들은 모두 현능하다고 여겼음으로 그들 모두는 제후왕들의 상국이나 군수로 현달했다.

혜제, 여후, 문제, 경제의 치세기간을 통해 장오의 빈객이었던 후손들은

모두 2천 석의 관직에 오를 수 있었다.
장오는 여후 6년(기원전 182년)에 죽었다. 그의 아들 장언(張偃)은 노원왕에 봉해졌다.

장언의 모친은 여후의 딸 노원공주였음으로 노원왕에 봉해진 것이다.

장언의 시호는 원왕(元王)이다. 원왕은 유약하고 형제는 나이가 여렸음으로

장오의 다른 첩실 소생의 두 아들이 후에 봉해졌다.

장수(張壽)는 낙창후(樂昌侯), 장치(張侈)는 신도후(信都侯)에 봉해졌다. 여후가 죽자 무도했던 

여러 여씨 종족들이 대신들에 의해 주살 될 때 노원왕, 낙창후, 신도후 등은 모두 왕과 후의

작위를 잃었다. 대신들의 추대에 의해 즉위한 문제는 다시 노원왕 장언을 남궁후에 봉하고

장씨들의 제사를 받들도록 했다.]


太史公曰:

張耳、陳餘,世傳所稱賢者;其賓客廝役,莫非天下俊桀,所居國無不取卿相者. 

然張耳、陳餘始居約時,相然信以死,豈顧問哉.
及據國爭權,卒相滅亡,何鄉者相慕用之誠,後相倍之戾也!豈非以勢利交哉? 

名譽雖高,賓客雖盛,所由殆與大伯、延陵季子異矣.
[태사공이 말한다.

장이와 진여는 현자라고 세상에 전해져 칭송받고 있다.

그의 빈객들과 심지어는 잡역부에 이르기까지 천하에 호걸이 아닌 자가 없었고

머물렀던 나라에 경상의 자리에 앉지 못한 자가 없었다.

그러나 장이와 진여가 처음에 뜻을 얻지 못하고 빈천할 때 서로 동생동사하자며 신의로써

결의를 맹세한 일은 추호도 후회하지 않는 의로운 행위였다고 할 수 있었다.

이윽고 그들이 나라를 차지하고 권력을 다투자 결국은 서로 공격하여 멸망하고 말았으니

어찌하여 처음에는 서로 사모하기를 지성으로 하더니 나중에는 서로 배신하기를

그리 심하게 했는가? 그들은 결국 권세와 이로써 서로 교제했음이 아니었는가?

명예가 비록 높고 찾아오는 문객들이 비록 성시를 이루었을지라도, 그들이 걸었던 길은

아마도 오나라의 태백(太白)이나 연릉계자(延陵季子)가 행한 의와는 다르다고 하겠다.]

 

【 각주 】
1) 고형(苦陘)/ 지금의 하북성 무극현(無極縣) 동북이다. 전국 때 중산국(中山國)의 땅이었으나

    조나라가 점령하여 현을 두었고 진나를 거쳐 한나라가 계속 존치했다.

2) 진(陳)/ 지금의 하남성 진현(陳縣)으로 춘추시대 제후국이었으나 초(楚)나라에 의해 병합되어

    후에 초나라가 도읍으로 삼았다. 후에 진승(陳勝)이 기의하여 이곳을 근거지로 삼아

    반진운동의 중심지가 되었다.

3) 백마진(白馬津)/ 지금의 하남성 활현 경내의 중국 고대의 황하를 건너는 유명한 나루터다.

4) 오령(五嶺)/ 진시황이 중국의 남쪽 지방을 점령하기 위해 굴착한 영거(靈渠)의 수로를

    이용하여 물자와 함께 동원한 50만의 병력을 5 군으로 나누어 각각의 요새를 지키게 했다.

    1군은 심성령(鐔城嶺)을, 2군은 구의(九疑)의 요새를, 3군은 반우(番禺)에,

    4군은 남야(南野)에, 5군은 여간수(餘干水)에 주둔하여 지키도록 하고

    그 주둔지를 5령이라고 불렀다.

5) 주륜화곡(朱輪華轂)/ 붉고 화려하게 장식한 수레를 뜻한 말로써 진나라가 제정하고

    한나라가 따른 제도로써 2천 석 이상의 고급관리가 타고 다니는 수레는 양쪽 바퀴에

    붉은 칠을 하게 하고 천 석에서 육백 석의 관리가 타고 다니는 수레는 왼편 바퀴에

    붉은 칠을 하게 하여 바퀴통을 화려하게 장식해서 타고 다니던 사람들의 신분을 구분했다.

6) 용도(甬道)/양쪽에 담장을 세워 안전을 확보한 양식 운송로.

7) 오행의 별/ 목, 화, 토, 금, 수 등의 다섯 개의 해성을 말한다.

8) 구폐(韝蔽)/ 팔을 걷어 올리고 앞치마를 걸친 모습으로 천한 자를 의미한다.

9) 함거교치(轞車膠致)/ 주위를 판자로 막은 죄수 호송용 수레를 함거라고 하고

    교치(膠致)는 밀폐하여 그 안을 열 수 없도록 한 것이다.

10) 장오가 다시 돌아가지 못한 조왕의 자리에는 고조의 애첩이었던

      척희(戚姬)의 소생 여의(如意)가 봉해졌다.

 

 

 ※  原 文 .    【 中國哲學書電子化計劃 .   筆寫本 】

 

                               

      原 文   飜 譯 者        德庤 / 李   斗 振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