史記 世家(사기세가)/22. 齊悼惠王世家

第 二十二. 齊悼惠王世家(제도혜왕세가)

덕치/이두진 2021. 7. 12. 18:54

 

            史記 世家

 

    第 二十二.  齊悼惠王世家(제도혜왕세가)

齊悼惠王劉肥者,高祖長庶男也.  其母外婦也,曰曹氏.

高祖六年,立肥為齊王,食七十城,諸民能齊言者皆予齊王.  齊王,孝惠帝兄也.

孝惠帝二年,齊王入朝.  惠帝與齊王燕飲,亢禮如家人.  呂太后怒,且誅齊王.

齊王懼不得脫,乃用其內史勳計,獻城陽郡,以為魯元公主湯沐邑.  呂太后喜,乃得辭就國.

悼惠王即位十三年,以惠帝六年卒.  子襄立,是為哀王.

[제 도혜왕(齊悼惠王) 유비(劉肥)는 고조 유방(劉邦)의 장남으로 서자이다. 그의 모친은 소실로, 조씨(曹氏)이다.
고조 6년, 유비를 제왕(齊王)으로 삼아 식읍 70여 성을 봉지(封地)로 주었으며,

백성들 중에서 제나라 말을 할 줄 아는 자들은 모두 제왕의 백성으로 귀속시켰다.

제도혜왕은 천자인 혜제(惠帝)의 형이다.

혜제 2년, 제왕이 입조(入朝)했다. 혜제는 도혜왕과 연회를 베풀었는데,

서로가 평등한 예절로 집안사람을 대하듯 했다. 그러자 여태후(呂太后)가 노하여 제왕을 죽이고자 했다.
제왕은 두려워 채 몸을 피하지 못하고 있었는데, 그의 내사(內史)가 계책을 내었다.
즉 성양군(城陽郡)을 바쳐 노원공주(魯元公主)의 탕목읍(湯沐邑)으로 삼는다는 것이 그것이었다.
여태후는 기뻐했고, 제왕은 작별하고 자신의 나라로 돌아올 수 있었다.
도혜왕은 즉위한 지 13년 만인 혜제 6년에 죽었다. 아들인 유양(劉襄)이 왕위를 물려받았는데,

그가 바로 애왕(哀王)이다.] 

哀王元年,孝惠帝崩,呂太后稱制,天下事皆決於高后.

二年,高后立其兄子酈侯呂臺為呂王,割齊之濟南郡為呂王奉邑. 

哀王三年,其弟章入宿衛於漢,呂太后封為朱虛侯,以呂祿女妻之.

後四年,封章弟興居為東牟侯,皆宿衛長安中. 

哀王八年,高后割齊瑯邪郡立營陵侯劉澤為瑯邪王.

其明年,趙王友入朝,幽死于邸.  三趙王皆廢.  高后立諸呂諸呂為三王,擅權用事.

朱虛侯年二十,有氣力,忿劉氏不得職.  嘗入待高后燕飲,高后令朱虛侯劉章為酒吏.

[애왕 원년, 혜제가 붕어했고, 여태후가 천자의 직무를 대행해 국가의 대사가 모두 태후에 의해서 결정되었다.
애왕 2년, 태후는 오빠의 아들인 역후(酈侯) 여태(呂台)를 여왕(呂王)으로 봉했고,

제(齊)나라의 제남군(濟南郡)을 분할해 여왕의 봉지로 주었다.
애왕 3년, 애왕의 동생 유장(劉章)이 입조해 궁중의 야간경호를 맡게 되었다. 여후는 그를 주허후(朱虛侯)로 봉했다.
또 여록(呂祿)의 딸을 그에게 시집보냈다.

4년 후, 유장의 동생 흥거(興居)를 동모후(東牟侯)에 봉했고, 그들 두 사람에게 함께 장안의 궁중을 지키게 했다.
애왕 8년, 여후는 제나라의 낭야군(琅邪郡)을 분할해 영릉후(營陵侯) 유택(劉澤)을 낭야왕으로 삼았다.
이듬해 조왕(趙王) 유우(劉友)가 입조했다가 관저에 감금되어 죽었다. 세 명의 조왕이 모두 폐해졌다.
여후는 여씨 자제 세 명을 연왕(燕王), 조왕(趙王), 양왕(梁王)으로 봉해 전권을 장악하게 했다.
주허후 유장은 스무 살로 혈기가 왕성해, 유씨가 관작을 얻지 못하는 것에 분개하고 있었다.
그는 일찍이 연회석에서 여후를 모신 적이 있는데, 여후는 그로 하여금 주리(酒吏)를 담당하게 했다.]

 

章自請曰:「臣,將種也,請得以軍法行酒.」

高后曰:「可.」酒酣,章進飲歌舞.  已而曰:「請為太后言耕田歌.」

高后兒子畜之,笑曰:「顧而父知田耳.  若生而為王子,安知田乎?」

章曰:「臣知之.」 太后曰:「試為我言田.」

章曰:「深耕穊種,立苗欲疏,非其種者,鉏而去之.」呂后默然.

頃之,諸呂有一人醉,亡酒,章追,拔劍斬之,而還報曰:「有亡酒一人,臣謹行法斬之.」

太后左右皆大驚.  業已許其軍法,無以罪也.  因罷.

自是之後,諸呂憚朱虛侯,雖大臣皆依朱虛侯,劉氏為益彊.

[그는 자청하기를 : “신은 장군 가문의 출신이므로, 청컨대 군법으로 주리를 담당하게 해주십시오.”라고 하자, 
이에 여후는 “좋다”라고 하였다. 술자리가 무르익을 무렵, 가무 판이 벌어졌다.

잠시 후 유장은 말하기를 : “청컨대 태후를 위해 경전가(耕田歌)를 부르게 해주십시오.”라고 하자, 
여후는 그를 아이로 취급하고 웃으며 말하기를 : “오히려 너의 부친이 경전(耕田)을 알지,

너는 왕자로 태어났는데 네가 어찌 경전을 알겠는가?”라고 하였다.
유장은 대답하기를 : “신도 경전을 압니다.”라고 하자,

태후가 말하기를 : “그러면 나를 위해 경전가를 한번 불러 보아라”라고 하였다.
유장은 : “논밭을 깊이 파서 조밀하게 파종하고, 싹은 듬성듬성 남겨두네.

같은 종자가 아니면, 호미질해 뽑아버리네.”라고 노래했다. 여후는 묵묵히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잠시 후 여씨 집안의 한 사람이 취해 술자리에서 빠져나오자,
유장은 그를 쫓아가서 칼을 뽑아 베고는 자리로 돌아와서 다음과 같이 고하였다.

“술자리에서 도망하는 자가 있어, 신이 삼가 군법을 집행해 그를 죽였습니다.”라고 하자, 
태후와 좌우의 사람들은 모두 크게 놀랐다.

그러나 이미 군법에 따라 술을 마시기로 한 이상, 그에게 죄를 물을 수는 없었다.
자연히 연회는 끝이 났다. 이 일 이후로 여씨들은 주허후 유장을 두려워하기 시작했고,

조정의 대신들은 모두 주허후를 따르게 되어, 유씨의 위엄은 높아졌다.]

 

其明年,高后崩.  趙王呂祿為上將軍,呂王產為相國,皆居長安中,聚兵以威大臣,欲為亂.

朱虛侯章以呂祿女為婦,知其謀,乃使人陰出告其兄齊王,欲令發兵西,

朱虛侯、東牟侯為內應,以誅諸呂,因立齊王為帝.

齊王既聞此計,乃與其舅父駟鈞、郎中令祝午、中尉魏勃陰謀發兵.

齊相召平聞之, 乃發卒衛王宮.

[이듬해 여후가 죽었다. 조왕 여록은 상장군으로, 여왕(呂王) 여산은 상국으로 모두 장안에 거주하고 있으면서,

병력을 모아 대신들을 위협했으며, 반란을 일으킬 음모를 꾸미고 있었다.

주허후 유장은 그 처가 여록의 딸이었기 때문에 이러한 음모를 알고 있었다.
이에 몰래 형인 제왕(齊王)에게 사람을 보내, 제왕으로 하여금 군대를 일으켜 서쪽으로 향하게 하고,
주허후와 동모후는 안에서 호응함으로써 여씨 집단을 주살하고 기회를 틈타 제왕을 황제로 옹립할 계획을 세웠다.
제왕은 이 계획을 듣고 곧 외숙인 사균(駟鈞), 낭중령(郎中令)인 축오(祝午), 중위(中尉)인 위발(魏勃)과 함께

군사를 일으키기로 했다.  제왕의 상국인 소평(召平)은 이것을 듣고 군대를 일으켜 왕궁을 포위했다.]

 

魏勃紿召平曰:「王欲發兵,非有漢虎符驗也.  而相君圍王,固善.  勃請為君將兵衛衛王.」

召平信之,乃使魏勃將兵圍王宮.  勃既將兵,使圍相府.

召平曰:「嗟乎!道家之言『當斷不斷,反受其亂』,乃是也.」遂自殺.

於是齊王以駟鈞為相,魏勃為將軍,祝午為內史,悉發國中兵.

[위발은 소평에게 거짓으로 말하기를 : “왕이 군대를 일으키고자 하지만, 한 조정의 호부(虎符)가 없소.
당신이 왕궁을 포위한 것은 참으로 잘한 일이오. 내가 당신을 위해 군대를 이끌고 제왕의 궁을 지키겠소.”라고 하자,
소평은 위발의 말을 믿고, 그로 하여금 군대를 이끌고 왕궁을 포위하게 했다.

위발은 군사를 이끌게 되자 오히려 상국인 소평을 포위했다.
소평은 말하기를 : “아! 도가(道家)에, ‘잘라야 할 것을 자르지 못하면 반대로 그 해를 입는다.’라는 말이 있는데,

지금이 바로 그 꼴이구나.”라고 하고는 자살해버렸다.
이에 제왕은 사균을 재상으로, 위발을 장군으로, 축오를 내사로 임명했고, 나라 안의 모든 군사를 징발했다.]

 

使祝午東詐瑯邪王曰:「呂氏作亂,齊王發兵欲西誅之.

齊王自以兒子,年少,不習兵革之事,願舉國委大王.  大王自高帝將也,習戰事.

齊王不敢離兵,使臣請大王幸之臨菑見齊王計事,并將齊兵以西平關中之亂.」

瑯邪王信之,以為然, (西)[迺]馳見齊王.

齊王與魏勃等因留瑯邪王,而使祝午盡發瑯邪國而并將其兵.

[축오를 동으로 파견해 낭야왕에게 거짓으로 다음과 같이 말하게 했다.

“여씨들이 난을 일으켰기에, 제왕이 군사를 일으켜 서쪽으로 가서 여씨 집단을 주살하고자 합니다.
그런데 제왕은 스스로 아직 미천한 몸이고 나이도 어려서 군사 일에 익숙하지 못하다고 생각하시고

나라 전부를 대왕께 위탁하고자 하십니다.  대왕께서는 고조 시절부터 장군이셨기에 군사 일에 익숙하십니다.

제왕은 감히 군대를 떠나 귀국(貴國)으로 향하지 못하고 있으므로, 저를 보내셨습니다.
그러하오니 아무쪼록 대왕께서는 임치(臨菑)로 가서 제왕과 상의하고자 한다고 청하십시오.
아울러 대왕께서 군사를 이끌고 서쪽으로 가서 관중(關中)의 난을 평정하겠노라고 말하십시오.”라고 하자,
낭야왕은 그를 믿었고, 그의 말이 옳다고 여겨 곧 말을 달려 제왕을 만나러 갔다.
제왕과 위발 등은 기회를 이용해 낭야왕을 연금했고,

축오를 파견해 낭야의 병력을 전부 징발함과 아울러 그 군대를 통솔했다.]

 

瑯邪王劉澤既見欺,不得反國,乃說齊王曰:「齊悼惠王高皇帝長子,推本言之,

而大王高皇帝適長孫也,當立. 今諸大臣狐疑未有所定,而澤於劉氏最為長年,大臣固待澤決計.

今大王留臣無為也,不如使我入關計事.」

齊王以為然,乃益具車送瑯邪王.  瑯邪王既行,齊遂舉兵西攻呂國之濟南.

[낭야왕 유택은 자신이 이미 속은 줄 알았으나, 낭야로 돌아갈 방법이 없었다.
그는 곧 제왕에게 말하기를 : “제의 도혜왕은 고조 황제의 장남이오.

러므로 그 근본을 캐어보면 대왕 당신은 고조 황제의 적장손(嫡長孫)이오.
당신이 제위를 이어야 함이 마땅하오. 지금 대신들은 주저하며 누구를 옹립할 것인지 확정하지 못하고 있소.
나 유택은 유씨 중에서 가장 연장자로서, 대신들은 반드시 나의 결정을 기다릴 것이오.
지금 대왕이 나를 이곳에 머물게 함은 아무 쓸모가 없소. 나를 관중으로 보내어 일을 계획함이 더 나을 것이오.”
제왕은 그 말이 옳다고 여기고 많은 거마를 준비해 낭야왕을 보냈다.
낭야왕이 출발하자 제왕은 군사를 일으켜 여(呂)의 제남(濟南)을 공격했다.]

 

於是齊哀王遺諸侯王書曰:「高帝平定天下,王諸子弟,悼惠王於齊.

悼惠王薨,惠帝使留侯張良立臣為齊王.  惠帝崩,高后用事,春秋高,聽諸呂擅廢高帝所立,

又殺三趙王,滅梁、燕、趙以王諸呂,分齊國為四.

忠臣進諫,上惑亂不聽. 今高后崩,皇帝春秋富,未能治天下,固恃大臣諸(將)[侯].

今諸呂又擅自尊官,聚兵嚴威,劫列侯忠臣,矯制以令天下,宗廟所以危.

今寡人率兵入誅不當為王者.」

[이에 제 애왕(齊哀王)은 제후왕들에게 다음과 같은 서신을 보냈다.
“고조 황제께서 천하를 평정하시고 나서 유씨 종실의 여러 자제들을 왕으로 봉하셨는데,

도혜왕을 제나라의 왕으로 봉하셨습니다.
도혜왕께서 세상을 떠나시고 나자 혜제께서는 유후(留侯) 장량(張良)을 신하로서 제왕에 봉하셨습니다.
혜제께서 붕어하시고 나서 고후가 집정했으나 고후는 춘추가 연로하시어 여씨들이 임의로 고조 황제께서 봉한

왕들을 폐하는 것을 방임했습니다. 또한 은왕(隱王) 여의(如意), 유왕(幽王) 우(友), 양왕(梁王) 회(恢) 등

세 명의 조왕(趙王)을 죽였으며, 유씨의 양(梁), 연(燕), 조(趙) 삼국을 폐했고, 여씨들을 삼국의 왕으로 봉했습니다.

아울러 제나라를 넷으로 나누었습니다.
충신들이 진언했으나, 여후는 미혹되어 어리석게도 듣지 않았습니다. 지금 여후는 죽었으나,
황제는 연소해 천하를 다스리지 못하고 있으며 대신이나 제후에게 반드시 의지하고 있습니다.
지금 여씨들은 또 자신들 멋대로 높은 관직을 차지했고, 병력을 집궐시켜 위엄을 떨치고 있으며,
여러 제후들과 충신들을 협박하고, 황제의 영을 사칭해 천하를 호령하고 있으니, 종묘사직이 위태롭습니다.
지금 과인은 군대를 이끌고 장안으로 들어가 그러한 부당한 왕들을 주살하고자 합니다.”]

 

漢聞齊發兵而西,相國呂產乃遣大將軍灌嬰東擊之.

灌嬰至滎陽,乃謀曰:「諸呂將兵居關中,欲危劉氏而自立.  我今破齊還報,是益呂氏資也.」

乃留兵屯滎陽,使使喻齊王及諸侯,與連和,以待呂氏之變而共誅之.

[한 조정은 제나라가 군사를 일으켜 서쪽으로 진격한다는 소식을 들었고,

이에 상국 여산은 곧 대장군 관영(灌嬰)을 보내어 동쪽으로 제나라의 군대를 치도록 했다.
관영은 형양(滎陽)에 이르자, 다음과 같이 분석하며 말하기를 : “여씨 일족이 군대를 이끌고 관중에 주둔해,

유씨에게 위해를 가해 자신들이 황제가 되고자 한다.  내가 지금 제나라를 격파하고

승전의 소식을 알리는 것은 여씨들을 돕는 것이 되고 여씨의 정치적 입지를 강화시키는 것이 된다.”라고 하였다.
그는 곧 진군을 멈추고 형양에 군사를 주둔시켰고, 사자를 제왕과 제후들에게 보내어 그들과 화평하기로 했다.
나아가, 여씨들이 반란을 일으키는 것을 기다려 제왕, 제후들과 공동으로 여씨들을 주살하기로 했다.]

 

齊王聞之,乃西取其故濟南郡,亦屯兵於齊西界以待約.

呂祿、呂產欲作亂關中,朱虛侯與太尉勃、丞相平等誅之.

朱虛侯首先斬呂產,於是太尉勃等乃得盡誅諸呂.  而瑯邪王亦從齊至長安.

[제왕은 이 소식을 듣고 서쪽으로 가서 제나라의 옛 땅인 제남군을 취했고,

제나라 서쪽 경계에 병력을 주둔시키고 담판을 기다렸다. 여록과 여산이 관중에서 반란을 일으키기로 하자,

주허후와 태위(太尉) 주발(周勃), 승상 진평(陳平) 등은 여씨들을 주살하기로 했다.

주허후가 먼저 여산을 죽였으며, 이에 태위 주발 등은 나머지 여씨들을 모조리 주살했다.

낭야왕도 급히 제나라에서 장안으로 왔다.]

 

大臣議欲立齊王,而瑯邪王及大臣曰:「齊王母家駟鈞,惡戾,虎而冠者也.

方以呂氏故幾亂天下,今又立齊王,是欲復為呂氏也.  代王母家薄氏, 君子長者;

且代王又親高帝子, 於今見在, 且最為長.  以子則順, 以善人則大臣安.」

於是大臣乃謀迎立代王,而遣朱虛侯以誅呂氏事告齊王,令罷兵.

[대신들이 의논해 제왕(齊王)을 천자로 옹립하고자 하니, 낭야왕과 몇몇 대신들은 다음과 같이 말했다.
“제왕의 외숙인 사균은 매우 흉포한데, 그 흉포하기가 호랑이 가운데 으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여태까지 여씨들로 인해 천하가 어지러웠는데, 지금 또 제왕을 옹립함은 

또 다른 여씨 집단을 세우는 것과 같습니다. 대왕(代王)의 외가는 박씨(薄氏)로 군자의 도가 있는 집안입니다.

또한 대왕은 고조의 친아들로 지금 살아 있을 뿐만 아니라 가장 연장자이십니다.
그는 아들에게 순조롭게 양위했고 인품이 후덕해 조정의 일을 관장하면 대신들이 마음을 놓을 수 있을 것입니다.”
이에 대신들은 대왕을 천자로 옹립하기로 했다.

아울러 주허후를 보내어 여씨들을 주살한 일을 제왕에게 통지했고, 군사를 물리도록 영을 내렸다.]

 

灌嬰在滎陽,聞魏勃本教齊王反,既誅呂氏,罷齊兵,使使召責問魏勃.

勃曰:「失火之家,豈暇先言大人而後救火乎!」因退立,股戰而栗,恐不能言者,終無他語.
灌將軍熟視笑曰:「人謂魏勃勇,妄庸人耳,何能為乎!」乃罷魏勃. 魏勃父以善鼓琴見秦皇帝.

[관영은 형양에 있을 때, 위발이 원래 제왕에게 모반하게 교사했다는 것과, 여씨들은 이미 주살되었으며,
제나라 병사들 역시 돌아갔다는 것을 듣고, 사자를 보내어 위발을 불러 문책했다.
위발이 말하기를 : “불이 난 집이 있는데  집주인에게 먼저 알리고 난 후에 불을 끄기 시작한다면

이미 늦었다고 할 수 있지 않겠습니까?”라고 하며 물러섰다.  

그는 두 다리를 벌벌 떨었으며 말을 못 할 정도로 두려워했는데, 끝내 다른 말은 하지 못했다.
관장군은 그를 뚫어지게 쳐다보며 웃으며 말하기를 : “사람들은 위발이 용감하다고 하는데,

망령되고 용렬한 사람일 뿐이구나. 그가 무슨 일을 할 수 있겠는가!”라고 말하고 관직만 파했지 벌은 주지 않았다.

원래 위발의 부친은 거문고를 잘 타서 진시황(秦始皇)을 알현했던 사람이었다.]

 

及魏勃少時,欲求見齊相曹參,家貧無以自通,乃常獨早夜埽齊相舍人門外.

相舍人怪之,以為物,而伺之,得勃.

勃曰:「願見相君,無因,故為子埽,欲以求見.」於是舍人見勃曹參,因以為舍人.

一為參御,言事,參以為賢,言之齊悼惠王.  悼惠王召見,則拜為內史. 始,悼惠王得自置二千石.

及悼惠王卒而哀王立,勃用事,重於齊相.  王既罷兵歸,而代王來立,是為孝文帝.

孝文帝元年,盡以高后時所割齊之城陽、瑯邪、濟南郡復與齊,而徙瑯邪王王燕,

益封朱虛侯、東牟侯各二千戶.

[위발이 젊었을때 제나라의 재상인 조참(曹參)을 만나려고 하였다.
그러나 집안이 가난해 다리를 놓을 수 없자, 늘 혼자서 이른 새벽에 조참의 사인(舍人)의 집 앞을 청소했다.
사인은 괴이하게 생각하고 어떤 괴물인가 싶어 몰래 엿보았는데 위발을 발견했다.
위발이 말하기를 : " 재상을 뵙고자 했으나 방법이 없어, 당신의 집 앞을 청소함으로써 재상을 뵐 수 있는 기회를

구하고자 했습니다.”라고 하였다.  이에 사인은 위발을 조참과 만나게 해주었고, 이로써 위발 역시 사인이 되었다.
한번은 위발이 조참의 수레를 몰고 가다가 몇 가지 건의를 했는데 그것이 조참의 마음에 들었고,
또한 조참은 그가 능력이 있다고 여겨서, 그를 제 도혜왕에게 추천했다.

제 도혜왕은 위발을 접견하고는 그를 내사로 임명했다.

이를 계기로 제 도혜왕은 2천석의 관리를 임명할 수 있는 권한을 한 황실로부터 인정받게 되었다.]

 

是歲,齊哀王卒,太子(側)[則]立,是為文王. 

齊文王元年,漢以齊之城陽郡立朱虛侯為城陽王,以齊濟北郡立東牟侯為濟北王.

二年,濟北王反,漢誅殺之,地入于漢. 

後二年,孝文帝盡封齊悼惠王子罷軍等七人皆為列侯. 

齊文王立十四年卒,無子,國除,地入于漢.

[이 해에 도혜왕이 죽고 애왕이 재위를 잇자 위발은 권력을 잡았고, 제나라의 재상으로 중용되었던 것이다.
제 애왕은 이미 군대를 해산하고 자신의 나라로 돌아갔고, 대왕(代王)이 장안으로 와서 천자로 즉위하니,

그가 바로 효문제(孝文帝)이다.
효문제 원년, 고후 때 분할된 제의 성양(城陽), 낭야(琅邪), 제남군(濟南郡) 등이 모두 제나라에 반환되었고,
낭야왕은 연왕(燕王)으로 변경되어 봉해졌으며, 주허후와 동모후의 봉지가 각각 2천호로 증가되었다.
이해, 제애왕이 죽고 나서 태자 유칙(劉則)이 즉위했으니, 그가 문왕(文王)이다.
제문왕 원년에, 한 조정은 제나라의 성양군을 주허후에게 주어 그를 성양왕으로 봉했고,

제북군(濟北郡)을 동모후에게 주어 그를 제북왕으로 봉했다.
제 문왕 2년, 제북왕이 반란을 일으키자, 한 조정에서는 군대를 보내어 그를 주살했고, 

봉지는 한 조정에 반환시켰다.

2년이 지나, 문제는 제도혜왕의 아들 파군(罷軍) 등 일곱 명을 모두 열후(列侯)로 봉했다.
제문왕은 재위한 지 14년 만에 죽었는데, 자식이 없어서 나라는 없어졌고, 봉지는 한 조정으로 반환되었다.]

 

後一歲,孝文帝以所封悼惠王子分齊為王,齊孝王將閭以悼惠王子楊虛侯為齊王.

故齊別郡盡以王悼惠王子:子志為濟北王,子辟光為濟南王,子賢為菑川王,

子卬為膠西王,子雄渠為膠東王,與城陽、齊凡七王.

[그 후 1년이 지나, 문제는 제나라 땅을 나누어 도혜왕의 모든 아들들을 각각 왕으로 봉했는데,
제 효왕(齊孝王) 장려(將閭)는 도혜왕의 아들인 양허후(楊虛侯)의 신분으로 제왕(齊王)이 되었다.
원래 제나라의 다른 군은 모두 도혜왕의 아들들이 관할했으니, 지(志)는 제북왕으로, 벽광(辟光)은 제남왕으로,
현(賢)은 치천왕(菑川王)으로, 앙(卬)은 교서왕(膠西王)으로, 웅거(雄渠)는 교동왕(膠東王)으로 각각 봉해졌다.
이로써 성양왕 그리고 제왕과 합하면 제나라는 모두 일곱 명이 왕이 되었다.]

齊孝王十一年,吳王濞、楚王戊反,興兵西,告諸侯曰「將誅漢賊臣晁錯以安宗廟」

膠西、膠東、菑川、濟南皆擅發兵應吳楚.  欲與齊,齊孝王狐疑,城守不聽,三國兵共圍齊.

齊王使路中大夫告於天子.  天子復令路中大夫還告齊王:「善堅守,吾兵今破吳楚矣.」

路中大夫至, 三國兵圍臨菑數重, 無從入.

三國將劫與路中大夫盟,曰:「若反言漢已破矣, 齊趣下三國, 不且見屠.」

路中大夫既許之,至城下,望見齊王,曰:「漢已發兵百萬,使太尉周亞夫擊破吳楚,

方引兵救齊,齊必堅守無下!」 三國將誅路中大夫.

[제 효왕 11년, 오왕(吳王) 비(濞)와 초왕(楚王) 무(戊)가 반란을 일으켜서 군사를 일으켜 서쪽으로 진격했다.
그들은 제후들에게 통고하기를 “한나라의 적신 조착(晁錯)을 주살해 종묘사직을 안정시키고자 한다.”라 했다.
교서, 교동, 치천, 제남 등은 모두 독자적으로 군사를 일으켜 오와 초에 호응하며 제나라와의 제휴를 기도했으나,
제 효왕은 주저했으며, 성문을 굳게 닫고 호응하지 않았다. 교서, 치천, 제남 삼국의 군대는 함께 제를 포위했다.
제왕은 중대부(中大夫) 노앙(路卬)을 파견해 천자에게 고했다. 천자는 다시 노앙을 돌려보내어
 “잘 수비하고 있으면 짐의 군대가 곧 오와 초를 쳐부술 것이다.”라고 제왕에게 알리라 했다.
노앙이 돌아왔을 때에는 삼국의 병사들이 이미 임치성을 겹겹이 포위하고 있어서 성으로 들어갈 수 없었다.
삼국의 장수들은 노앙을 협박해 “너는 돌아가서, 한 조정은 이미 항복했으며,

제나라도 빨리 삼국에 투항하지 않으면 성을 무너뜨릴 것이라고 말하라”라 했다.
노앙은 그러겠다고 응답하고 성 아래에 도착했지만, 막상 제왕을 보고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한 조정에서는 이미 백만의 군사를 출정시켰고, 태위(太尉)인 주아부(周亞夫)를 보내어 오초의 반군을 격파했고,
지금 막 이곳으로 군사를 이끌고 구하러 오고 있으니, 제왕께서는 견고하게 수비하며 결코 항복하지 마십시오!”

이에 삼국의 장수들은 그를 주살했다.]

 

齊初圍急,陰與三國通謀,約未定,會聞路中大夫從漢來,喜,及其大臣乃復勸王毋下三國.

居無何,漢將欒布、平陽侯等兵至齊,擊破三國兵,解齊圍.

已而復聞齊初與三國有謀,將欲移兵伐齊.  齊孝王懼,乃飲藥自殺.

景帝聞之,以為齊首善,以迫劫有謀,非其罪也,乃立孝王太子壽為齊王,是為懿王,續齊後.

而膠西、膠東、濟南、菑川王咸誅滅,地入于漢.  徙濟北王王菑川.

齊懿王立二十二年卒,子次景立,是為厲王.

[당초에 제나라는 포위되어 위급해지면 몰래 삼국과 내통할 생각이었다. 조약이 확정되지 않아 미루고 있던 차에,
중대부 노앙이 한 조정으로부터 돌아와서 한 말을 듣고, 제나라 사람들은 크게 기뻐했다.

또한 대신들도 왕에게 투항하지 말 것을 거듭 권유했다.
머잖아 한의 장군 난포(欒布), 평양후(平陽侯) 조기(曹奇) 등이 군사를 이끌고 제에 도착해 삼국의 군대를 격파했고,

포위를 풀었다. 그들은 이어 제왕이 당초에 삼국과 내통하고자 한 것으로 들었다며,

군대를 이동해 제를 토벌할 것이라 했다.

제 효왕은 두려움에 떨다가 결국 약을 먹고 자살했다. 경제(景帝)는 그 소식을 듣고,

제왕이 처음에는 잘하다가 협박으로 인해 달리 도모를 꾀한 것은 제왕의 죄가 아니라고 여겼다.
이에 효왕의 태자인 유수(劉壽)를 제왕으로 봉하니, 그가 의왕(懿王)으로, 이로써 제왕의 후사는 이어진 것이었다.
그러나 교서, 교동, 제남, 치천의 왕 등은 모두 주살되었고, 봉지 또한 한 조정으로 반환되었다.
제북왕을 이동시켜 치천을 다스리게 했다.

제 의왕은 재위 22년 만에 죽었고, 아들인 차경(次景)이 왕위를 계승했으니, 그가 려왕(厲王)이다.]

 

齊厲王,其母曰紀太后.  太后取其弟紀氏女為厲王后.

王不愛紀氏女.  太后欲其家重寵, 令其長女紀翁主入王宮, 正其後宮, 毋令得近王,欲令愛紀氏女.

王因與其姊翁主姦.  齊有宦者徐甲,入事漢皇太后.

皇太后有愛女曰修成君,修成君非劉氏,太后憐之.

修成君有女名娥,太后欲嫁之於諸侯,宦者甲乃請使齊,必令王上書請娥.  皇太后喜,使甲之齊.

[제 려왕(齊厲王)의 모친은 기태후(紀太后)이다.

태후는 자신의 동생인 기씨(紀氏)의 딸을 려왕의 왕후로 삼고자 했는데, 려왕은 기씨 여자를 좋아하지 않았다.
그러나 태후는 기씨 집안이 대대로 임금의 총애를 받게 하고자, 그 집안의 장녀인 기옹주를 왕궁으로 들여보내어,
후궁의 궁녀들을 단속하고 그녀들을 려왕과 가까이하지 못하게 해, 여왕으로 하여금 기씨 여자만을 좋아하게 했다.

려왕은 따라서 누이인 옹주와 통간한 것이다.
제나라에 서갑(徐甲)이라는 환관이 있었는데, 장안으로 가서 황태후(皇太后)를 모시게 되었다.
황태후에게는 수성군(修成君)이라는 아끼는 딸이 있었는데, 수성군은 유씨 소생이 아니었기에,

태후는 그녀를 매우 불쌍히 여겼다.

또 수성군에게는 아(娥)라는 딸이 있었는데, 태후는 그녀를 제후왕에게 시집보내고 싶어했다.
환관 서갑은 이에 곧 제나라에 사신으로 가기를 청했는데, 반드시 제왕으로 하여금

아에게 청혼하는 글을 올리게끔 한다는 것이었다.  태후는 매우 기뻐해, 서갑을 제나라로 보냈다.]

 

是時齊人主父偃知甲之使齊以取后事,亦因謂甲:「即事成,幸言偃女願得充王後宮.」

甲既至齊,風以此事.

紀太后大怒,曰:「王有后,後宮具備.  且甲,齊貧人,急乃為宦者,入事漢,無補益,

乃欲亂吾王家!且主父偃何為者?乃欲以女充後宮!」

徐甲大窮,還報皇太后曰:「王已願尚娥,然有一害,恐如燕王.」

燕王者,與其子昆弟姦,新坐以死,亡國,故以燕感太后.

太后曰:「無復言嫁女齊事.」事浸潯[不得]聞於天子.  主父偃由此亦與齊有卻.

[이때 제나라 사람 주부언(主父偃)은 서갑이 제나라로 가서 제왕에게 혼사를 요청하게끔 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는 기회를 틈타 서갑에게 말하기를 : “일이 성사되면 제 딸을 후궁으로 넣어주시기를 부탁합니다.”라고 하였다.
서갑은 제나라에 도착해 그 일을 암시했다. 기태후는 대노하여 말하기를 :

“왕에게는 왕후가 있고, 후궁 또한 이미 있다. 하물며 서갑은 제나라의 가난뱅이로, 어쩔 수 없이 환관이 된 자이다.

한 조정으로 들어가 아무런 도움이 되지 못하자,나의 왕가를 소란하게 하고자 하다니!

또 주부언은 무얼 하는 작자인가? 그도 딸을 후궁에 넣고자 하는가!”라고 하자,

서갑은 크게 난감해, 돌아와 황태후에게 보고 하기를 : “왕은 이미 아를 맞아들이기를 원하지만,

한 가지 문제가 있습니다. 아마도 연왕(燕王)과 같은 일인 듯합니다.”라고 하였다.
연왕이라는 자는 자신의 딸, 누이와 통간해, 최근에 벌을 받아 죽었고 나라를 망하게 한 사람으로,
서갑은 연왕의 일로써 태후가 느끼는 것이 있도록 하고자 한 것이다.

태후는 말하기를 : “제나라에 시집보내는 일은 다시는 꺼내지 말라.”라고 하였다.
이 일은 마침내 천자의 귀에까지 들어갔다. 주부언은 이로 말미암아 제나라와 사이가 벌어졌다.]

 

主父偃方幸於天子,用事,因言:「齊臨菑十萬戶,市租千金,人眾殷富,巨於長安,

此非天子親弟愛子不得王此.  今齊王於親屬益疏.」

乃從容言:「呂太后時齊欲反,吳楚時孝王幾為亂. 今聞齊王與其姊亂.」

於是天子乃拜主父偃為齊相,且正其事.

主父偃既至齊,乃急治王後宮宦者為王通於姊翁主所者,令其辭證皆引王.

年少,懼大罪為吏所執誅,乃飲藥自殺.  絕無後.

[당시 주부언은 천자의 총애를 받아 권력을 잡고 있었는데, 기회를 틈타 천자에게 고하기를 : 
“제나라의 임치에는 십만 호가 있어, 세금만 하루에 천금(千金)입니다. 사람이 많을 뿐만 아니라 부유해,

장안을 능가합니다. 그곳은 천자의 친동생이나 사랑하는 아들이 아니면 왕이 될 자격이 없습니다.

지금 제왕은 친척들과 날이 갈수록 소원해지고 있습니다.”라고 하며,
이어 “여태후 시절에 제나라는 모반을 꾀했고, 오와 초의 난 때에 효왕은 거의 난에 가담하려고 했습니다.
지금은 제왕이 그 누이와 통간해 인륜을 어지럽힌다고 합니다.”라고 부추겼다.

이에 천자는 주부언을 제나라의 재상으로 임명했고, 아울러 그 일을 바로잡도록 했다. 주부언은 제나라에

도착하자마자 제왕의 후궁과 환관 가운데에서 제왕을 도와 그 누이인 옹주와 통하게 한 자들을 심문했고,
그들의 말을 증거로 삼아 왕을 이끌어낼 참이었다.

왕은 어리고 죄가 커서 관리에게 잡혀 죽을 것을 두려워해 약을 먹고 자살했다. 이로써 후세는 끊기게 되었다.]

 

是時趙王懼主父偃一出廢齊,恐其漸疏骨肉,乃上書言偃受金及輕重之短.  天子亦既囚偃.

公孫弘言:「齊王以憂死毋後,國入漢,非誅偃無以塞天下之望.」遂誅偃. 

齊厲王立五年死,毋後,國入于漢.  齊悼惠王後尚有二國, 城陽及菑川.  菑川地比齊.

天子憐齊, 為悼惠王冢園在郡, 割臨菑東環悼惠王冢園邑盡以予菑川,以奉悼惠王祭祀.

城陽景王章,齊悼惠王子,以朱虛侯與大臣共誅諸呂,而章身首先斬相國呂王產於未央宮.

[이때 조왕 유수(劉遂)는 주부언이 두각을 나타내어 제나라가 없어질까 두려워했고,

그가 점차 유씨의 골육들을 이간시킬까 걱정했다.
이에 곧 주부언이 뇌물을 받았고 사사로운 원한으로 일을 공평하게 처리하지 않는다고 상소를 올렸다.
천자는 머잖아 주부언을 감금했다.

공손홍(公孫弘)은 언급하기를 : “제왕은 우려하다가 죽어 후세가 없고, 나라는 한 조정으로 반환되었습니다.
주부언을 죽이지 않으면 천하 사람들의 원망을 막을 수 없을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마침내 주부언은 주살되었다.
제 려왕(厲王)은 재위 5년 만에 죽었는데, 후사가 없었다. 이후 제나라 땅은 한 조정으로 반환되었다.
제 도혜왕의 후세로는 아직 두 나라가 있었는데, 성양(城陽)과 치천(菑川)이 그곳이었다.

치천의 봉지는 제나라와 마찬가지로 컸다. 천자는 제나라를 불쌍히 여겨서, 

도혜왕의 분묘가 군(郡)에 있었기 때문에, 도혜왕의 분묘를 둘러싸고 있는 임치(臨菑) 동쪽 지역을 분할해 

전부 치천국에게 주어 도혜왕의 제사를 지내게 했다.

성양의 경왕(景王) 유장(劉章)은 도혜왕의 아들인데, 주허후의 신분으로 대신들과 함께 여씨들을 주살하기로 하고,
자신이 먼저 상국인 여왕(呂王) 여산을 미앙궁(未央宮)에서 죽였다.]

 

孝文帝既立,益封章二千戶,賜金千斤.

孝文二年,以齊之城陽郡立章為城陽王.  立二年卒,子喜立,是為共王. 

共王八年,徙王淮南.  四年,復還王城陽.

凡三十三年卒,子[建]延立,是為頃王.

頃王二十(八)[六]年卒,子義立,是為敬王.  敬王九年卒,子武立,是為惠王.

惠王十一年卒,子順立,是為荒王.

荒王四十六年卒,子恢立,是為戴王.  戴王八年卒,子景立,至建始三年,十五歲,卒.

[문제가 즉위한 후, 유장은 2천호의 봉지를 더 받았으며, 황금 1천근을 하사받았다.
문제 2년, 제나라 땅 성양군을 유장에게 주어 그를 성양왕에 봉했다.

유장은 재위한 지 2년 만에 죽고, 아들인 유희(劉喜)가 왕위를 계승했는데, 그가 공왕(共王)이다.
공왕 8년, 봉지(封地)를 옮겨 회남(淮南)을 다스렸다. 4년 후 다시 돌아와 성양을 다스렸다.
공왕이 33년을 재위한 뒤 그의 아들인 유연(劉延)이 왕위를 계승했는데, 그가 경왕(頃王)이다.
경왕은 재위 26년 만에 죽고, 아들인 유의(劉義)가 계승했는데, 그가 경왕(敬王)이다.
경왕은 재위 9년 만에 죽고, 아들 유무(劉武)가 계승했는데, 그가 혜왕(惠王)이다.
혜왕은 재위 11년 만에 죽고, 아들 유순(劉順)이 계승했는데, 그가 황왕(荒王)이다.
황왕은 재위 46년 만에 죽고, 아들인 유회(劉恢)가 계승했는데, 그가 대왕(戴王)이다.
대왕은 재위 8년 만에 죽고, 아들인 유경(劉景)이 계승했는데,

그는 한 성제(漢成帝) 건시(建始) 3년, 15세의 나이로 죽었다.]

 

濟北王興居,齊悼惠王子,以東牟侯助大臣誅諸呂,功少.

及文帝從代來,興居曰:「請與太仆嬰入清宮.」 廢少帝,共與大臣尊立孝文帝.

孝文帝二年,以齊之濟北郡立興居為濟北王,與城陽王俱立.

[제북왕(濟北王) 유흥거(劉興居)는 도혜왕의 아들인데,

동모후(東牟侯)의 신분으로 대신들과 협조해 여씨들을 주살했으나, 공로가 적었다.
한 문제가 대(代)에서 장안으로 돌아왔을 때 유흥거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청컨대 신과 태복(太僕) 하후영(夏侯嬰)을 청궁(淸宮)으로 들여보내 주십시오.”
얼마 후 그는 소제(少帝) 유홍(劉弘)을 폐출시켰고, 대신들과 함께 문제를 옹립했다.
문제 2년, 제나라의 제북군으로써 유흥거를 제북왕에 봉했는데, 이로써 성양왕 유장과 동시에 왕이 되었다.]

 

立二年,反.  始大臣誅呂氏時,朱虛侯功尤大,許盡以趙地王朱虛侯,盡以梁地王東牟侯.

及孝文帝立,聞朱虛、東牟之初欲立齊王,故絀其功.

及二年,王諸子,乃割齊二郡以王章、興居.  章、興居自以失職奪功.

章死,而興居聞匈奴大入漢,漢多發兵,使丞相灌嬰擊之,文帝親幸太原,

以為天子自擊胡,遂發兵反於濟北.  天子聞之,罷丞相及行兵,皆歸長安. 

使棘蒲侯柴將軍擊破虜濟北王,王自殺,地入于漢,為郡.

[유흥거는 재위한 지 2년 만에 모반을 일으켰다. 당초 대신들이 여씨들을 주살할 때, 

주허후 유장의 공로가 아주 커서, 조나라 땅 전부를 주허후에게 봉지로 주어 왕으로 했고, 

동모후에게는 양나라 땅 전부를 봉지로 주어 왕으로 삼았다.
그러나 문제는 즉위하고 나서 주허후와 동모후가 애초에는 제왕을 황제로 옹립하고자 했다는 말을 듣고

그들의 공을 깎아버렸다. 그러다가 문제 2년에 유씨 자제들을 왕으로 봉할 때,

비로소 제나라의 두 군을 분할해 유장과 유흥거를 각각 왕으로 삼았던 것이다.
유장과 유흥거는 그 이전에는 자연히 직위를 잃고 공로도 깎였었다.
유장이 죽고 나서 유흥거는, 흉노가 대대적으로 한의 국경을 침입했으며,

한 조정이 많은 군사를 일으켜서 승상 권영을 파견해 흉노에 반격하게 했다는 것과,
문제가 친히 태원(太原)으로 행차해 군사들을 독려하고 오랑캐와 싸우려고 한다는 것을 들었다.
유흥거는 이 기회를 틈타 제북에서 반란을 일으켰다.

천자는 이 소식을 듣고 승상의 파견을 취소했고 이미 일으킨 병사를 돌이켜서 모두 장안으로 돌아오게 했다.
또한 극포후(棘蒲侯) 시장군(柴將軍)을 보내어 반란군을 격파하고 제북왕 유흥거를 사로잡아오라 했다.
제북왕은 자살했고, 봉지는 한 조정으로 반환되어, 군으로 개편되었다.]

 

後十二年,文帝十六年,復以齊悼惠王子安都侯志為濟北王.

十一年,吳楚反時,志堅守,不與諸侯合謀.  吳楚已平,徙志王菑川.  

濟南王辟光,齊悼惠王子,以勒侯孝文十六年為濟南王.

十一年,與吳楚反.  漢擊破,殺辟光,以濟南為郡,地入于漢.

[12년 후인 문제 16년에 다시 제 도혜왕의 아들인 안도후(安都侯) 유지(劉志)를 제북왕으로 봉했다.
그로부터 11년 후, 오와 초가 반란을 일으켰을 때, 유지는 이곳을 굳건히 지켰으며, 제후들과 같이 모반하지 않았다.
오초의 난이 평정되고 난 뒤, 한 조정은 유지를 치천(菑川)으로 옮겨 그곳의 왕이 되게 했다.
제남왕(濟南王) 유벽광(劉辟光)은 제 도혜왕의 아들인데, 늑후(勒侯)의 신분으로 한 문제 16년에 제남왕이 되었다.
11년 후, 그가 오초와 함께 반란을 일으켰을 때, 한 조정은 반란군을 격파했고, 유벽광을 죽였으며,

제남을 군으로 개편했고, 봉지는 한 조정으로 귀속시켰다.]

 

菑川王賢,齊悼惠王子,以武城侯文帝十六年為菑川王.

十一年,與吳楚反,漢擊破,殺賢.

天子因徙濟北王志王菑川.  志亦齊悼惠王子,以安都侯王濟北.

菑川王反,毋後,乃徙濟北王王菑川.  凡立三十五年卒,謚為懿王.

[치천왕(菑川王) 유현(劉賢)은 제 도혜왕의 아들인데, 무성후(武城侯)의 신분으로 한 문제 16년에 치천왕이 되었다.
11년 후, 그가 오초와 함께 반란을 일으켰을 때, 한 조정은 반란군을 격파했고, 유현을 죽였다.
천자는 그에 따라 제북왕 유지를 치천으로 옮겨 다스리게 하였다.

유지 역시 제 도혜왕의 아들로 안도후로서 제북을 다스리고 있던 차였다.
이는 치천왕이 반란을 일으켜 죽고 후사가 없자 제북왕을 치천으로 옮겨 다스리게 했던 경우이다.
그는 모두 35년 동안을 재위하고 죽었는데, 그의 시호는 의왕(懿王)이다.]

 

子建代立,是為靖王.  二十年卒,子遺代立,是為頃王.

三十六年卒,子終古立,是為思王.

二十八年卒,子尚立,是為孝王.

五年卒,子橫立,至建始三年,十一歲,卒.

[아들인 유건(劉建)이 왕위를 계승했는데, 그가 정왕(靖王)이다.

그는 20년 동안을 재위하고 죽었다. 아들인 유유(劉遺)가 왕위를 계승했는데, 그가 경왕(頃王)이다.
그는 36년 동안을 재위하고 죽었다. 아들인 유종고(劉終古)가 왕위를 계승했는데, 그가 사왕(思王)이다.
그는 28년 동안을 재위하고 죽었다. 아들인 유상(劉尙)이 왕위를 계승했는데, 그가 효왕(孝王)이다.
그는 5년 동안을 재위하고 죽었다. 아들인 유횡(劉橫)이 왕위를 계승했는데,

그는 한 성제(成帝) 건시(建始) 3년, 11세의 나이로 죽었다.]

 

膠西王卬,齊悼惠王子,以昌平侯文帝十六年為膠西王.

十一年,與吳楚反.  漢擊破,殺卬,地入于漢,為膠西郡.

膠東王雄渠,齊悼惠王子,以白石侯文帝十六年為膠東王.

十一年,與吳楚反,漢擊破,殺雄渠,地入于漢,為膠東郡.

[교서왕(膠西王) 유앙(劉卬)은 제 도혜왕의 아들인데, 창평후(昌平侯)의 신분으로 한 문제 16년에 교서왕이 되었다.
11년 후, 그가 오초와 함께 반란을 일으켰을 때, 한 조정은 반란군을 격파하고, 유앙을 죽였으며,

봉지는 한 조정으로 반환되어 교서군으로 개편되었다.
교동왕 유웅거(劉雄渠)는 제 도혜왕의 아들인데, 백석후(白石侯)의 신분으로 한 문제 16년에 교동왕이 되었다.
11년 후, 그가 오초와 함께 반란을 일으켰을 때, 한 조정은 반란군을 격파하고,

유웅거를 죽였으며, 봉지는 한 조정으로 반환되어 교동군으로 개편되었다.]


太史公曰:

諸侯大國無過齊悼惠王.  以海內初定,子弟少,激秦之無尺土封,故大封同姓,以填萬民之心.

及後分裂,固其理也.

[태사공은 말한다.
제후들의 대국 중에서도 제 도혜왕(齊悼惠王) 이상은 없었다.

천하가 막 평정되었고, 유씨의 자제가 적었으며, 진(秦)나라가 한 뼘의 땅도 친척에게 봉지로 주지 않았음을 통감해,

한 고조 유방은 대대적으로 동성(同姓)을 제후왕으로 봉함으로써 천하 백성의 마음을 안정시키고자 했던 것이다.
이후에 제나라에 분열이 일어났음은 진실로 이치상 당연한 것이었다.]

 

 

 

※  原 文 .    【 中國哲學書電子化計劃 .   筆寫本 】

 

                                

 

    原 文   飜 譯 者        德庤 / 李   斗 振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