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8. 蒙恬列傳

第 二十八. 蒙恬列傳(몽염열전)

덕치/이두진 2023. 8. 30. 18:24

         

              史記 列傳

 

      第 二十八.   蒙恬列傳(몽염열전)

 

 

蒙恬者,其先齊人也.  恬大父蒙驁,自齊事秦昭王,官至上卿.

​[몽염의 선조는 제나라 사람이다.

몽염의 조부 몽오(蒙驁)가 제나라로부터 진나라에 들어와 소양왕(昭襄王)을 모셔 관직이

상경(上卿)까지 올랐다.]

 

秦莊襄王元年,蒙驁為秦將,伐韓,取成皋、滎陽,作置三川郡.
二年,蒙驁攻趙,取三十七城.

始皇三年,蒙驁攻韓,取十三城.

五年,蒙驁攻魏,取二十城,作置東郡.
始皇七年,蒙驁卒.  驁子曰武,武子曰恬.  恬嘗書獄典文學. 
 

始皇二十三年,蒙武為秦裨將軍,與王翦攻楚,大破之,殺項燕.
二十四年,蒙武攻楚,虜楚王.  蒙恬弟毅.

[장양왕(莊襄王) 원년 (기원전 249년), 몽오는 진나라 장군이 되어 한나라를 정벌하여

성고(成皐)와 형양(滎陽)을 점령하고 그 땅에 삼천군(三川郡)을 설치했다. 
장양왕 2년, 조나라를 공격한 몽오는 37개의 성을 점령했다.
시황 3년(기원전 244년), 몽오가 한나라를 공격하여 13개 성을 점령했다.
시황 5년 몽오가 위나라를 공격하여 20개 성을 점령하고 그 땅에 동군(東郡)을 설치했다.
시황 7년(기원전 240년), 몽오가 죽었다. 몽오의 아들은 몽무(蒙武)고 몽무의 아들이

몽염(蒙恬)이다. 몽염은 일찍이 옥사에 관한 일을 학습하고 형옥(刑獄)에 관한 문서를 관장했다. 
시황 23년 (기원전 224년), 몽무는 장군 왕전(王翦)의 비장(裨將)이 되어 종군하여

초나라 군대를 크게 무찌르고 초군 대장 항연(項燕)을 살해했다.
시황 24년(기원전 223년), 몽무는 초나라를 공격하여 초왕을 사로잡았다.

몽무의 동생은 몽의(蒙毅)다.]

 

始皇二十六年,蒙恬因家世得為秦將,攻齊,大破之,拜為內史. 

秦已并天下,乃使蒙恬將三十萬眾北逐戎狄收河南.

筑長城, 因地形, 用制險塞, 起臨洮, 至遼東, 延袤萬餘里.  於是渡河, 據陽山, 逶蛇而北. 

暴師於外十餘年,居上郡.  是時蒙恬威振匈奴.  始皇甚尊寵蒙氏,信任賢之. 

而親近蒙毅,位至上卿,出則參乘,入則御前.

恬任外事而毅常為內謀,名為忠信,故雖諸將相莫敢與之爭焉.

[시황 26년(기원전221년), 몽염은 대대로 무장을 지낸 집안의 세력으로 장군이 되어

제나라를 공격하여 크게 이기고 진나라의 내사(內史)가 되었다.

진나라가 이미 천하를 병탄하자 몽염에게 30만의 군사를 주어 융적(戎狄)의 무리들을

북쪽으로 쫓아내고 하투(河套)1) 지역의 하수 이남의 땅을 진나라 영토로 삼았다.

그 땅을 지키기 위해 장성을 축조하기 시작해서 지형에 따라 험난한 요새를 연결하여 성채를 쌓고

임조(臨兆) 2)에서 시작하여 요동(遼東)에 이르렀는데 총 길이가 만리(萬里)에 달했다.

장성은 황하를 건너 양산(陽山)3)의 능선을 점거하고 뱀처럼 꾸불꾸불 북쪽으로 뻗어나갔다.

군사들을 10여 년 넘게 변경 밖에 주둔시키고 자신은 상군(上郡)에 주둔했다.

그때 몽염의 위세는 흉노의 땅을 진동시켰다.

시황은 몽씨들을 매우 총애하여 중책을 맡기고 그들을 모두 현능하다고 여겼다.  

특히 몽의(蒙毅)와는 친밀하게 지내며 벼슬을 상경(上卿)으로 올리고 출행할 때는

항상 참승으로 대동케 하고 궁궐에 있을 때는 어전에서 시립하게 했다.

몽염은 국경의 일을 맡고 몽의는 항상 안에서 계책을 내어 충신이라는 이름을 얻었음으로

비록 장군(將軍)이나 상국이라고 할지라고 감히 그들과 다투지 못했다.]

 

趙高者, 諸趙疏遠屬也. 趙高昆弟數人, 皆生隱宮, 其母被刑僇, 世世卑賤.

秦王聞高彊力, 通於獄法, 舉以為中車府令.  高既私事公子胡亥,喻之決獄.

高有大罪,秦王令蒙毅法治之.  毅不敢阿法,當高罪死,除其宦籍. 

帝以高之敦於事也,赦之,復其官爵. 

始皇欲游天下,道九原,直抵甘泉,乃使蒙恬通道,自九原抵甘泉, 塹山堙谷,千八百里.  道未就.

​[조고는 조나라 왕족의 먼 일족이다.

조고의 형제는 모두 환관으로 살았으며 그의 모친은 형을 받아 

사형에 처해졌다. 조고의 집안은 여러 대를 거쳐 비천한 신분이었다.

조고가 일에 열심이고 옥사에 관한 법에 통달했다는 사실을 알게 된 진왕은 그를 발탁하여

중거부령4)으로 삼았다. 조고는 은밀히 공자 호해(胡亥)를 받들고 형옥에 관한 법을 가르쳤다.

조고가 큰 죄를 저지르자 진왕은 몽의에게 법대로 다스리고 명했다.  

몽의가 감히 법을 함부로 하지 못하고 조고의 죄는 마땅히 사형에 해당하여

그의 환적(宦籍)을 폐지해야 한다고 했다. 

시황은 조고가 일을 열심히 했다는 이유를 들어 사면하고 그의 관작을 돌려주었다.
시황이 천하를 순행하기 위해 구원(九原)5)에서 감천(甘泉)6)까지 곧바른 도로를 이용할

목적으로 몽염에게 길을 내라는 명을 내렸다. 구원에서 감천까지 직도(直道)7)를 건설하는데

산을 끊고 계곡을 메꾸는 공사가 1800리나 되어 도로가 미처 개통되지 못했다.]

 

始皇三十七年冬,行出游會稽,并海上,北走瑯邪.  道病,使蒙毅還禱山川,未反.

始皇至沙丘崩,祕之,群臣莫知.  是時丞相李斯、公子胡亥、中車府令趙高常從.

高雅得幸於胡亥,欲立之,又怨蒙毅法治之而不為己也.

因有賊心,乃與丞相李斯、公子胡亥陰謀,立胡亥為太子. 

太子已立,遣使者以罪賜公子扶蘇、蒙恬死.  扶蘇已死,蒙恬疑而復請之.

使者以蒙恬屬吏, 更置.  胡亥以李斯舍人為護軍. , 使者還報, 胡亥已聞扶蘇死, 即欲釋蒙恬.

趙高恐蒙氏復貴而用事,怨之. 

[시황 37년 기원전 210년 겨울, 황제가 순행을 나가 회계(會稽)에서 놀다가 해로를 이용하여

북상하여 랑야(琅邪)에 이르렀으나 도중에 병이 들어 몽의(蒙毅)를 돌려보내 명산대천에

제사를 지내 병의 치유를 빌게 했다. 몽의가 미처 돌아오기 전에 진시황은 사구에서 죽었으나

비밀에 부쳐져 수행했던 군신들은 아무도 그 사실을 몰랐다. 그때 승상 이사(李斯),

공자 호해(胡亥), 중거부령 조고(趙高)가 병상의 진시황을 곁에서 모시고 있었다.  

조고가 호해를 황제로 세우려는 마음을 품게 된 이유는 평소에 호해의 총애를 받고 있었고

또한 옛날 몽의(蒙毅)가 자신을 치죄하여 빠져나갈 수 없도록 죄상을 밝힌 일에 대하여 원한을

풀기 위해서였다. 그래서 역심을 품게 된 조고는 승상 이사, 공자 호해와 음모를 꾸며

호해를 태자로 세웠다. 거짓 칙명으로 태자가 된 호해는 사자를 보내 공자 부소와

장군 몽염에게 죄를 내려 사형에 처한다는 명을 내렸다. 부소는 명을 따라 바로 죽었으나 

몽염은 황제의 명에 의심을 품고 자기의 죄를 다시 심사해달라고 청했다.

사자가 몽염을 관리에게 넘겨 옥에 가두고 다른 사람을 보내 몽염의 직을 대신하도록 했다.

그 동안 호해는 이사의 사인(舍人)들에게 자기의 호위를 맡겼다.  

사자가 돌아와 부소가 이미 죽었다는 소식을 전하자 호해는 기뻐하며 몽염을

즉시 석방하려고 했다.  그러나 조고는 자기에게 원한을 품고 있는 몽염이 귀하게 되어

정권을 잡게 되는 경우를 두려워했다.]

 

毅還至,趙高因為胡亥忠計,欲以滅蒙氏,乃言曰:「臣聞先帝欲舉賢立太子久矣,

而毅諫曰『不可』 若知賢而俞弗立,則是不忠而惑主也.  以臣愚意,不若誅之.」

胡亥聽而系蒙毅於代.  前已囚蒙恬於陽周.

喪至咸陽,已葬,太子立為二世皇帝,而趙高親近,日夜毀惡蒙氏,求其罪過,舉劾之.

[몽의가 사자의 임무를 마치고 돌아오자 조고는 호해에게 충성스러운 계책을 낸다고 하면서

실은 그 기회를 이용하여 몽씨 형제들을 멸족시킬 목적으로 호해에게 아뢰기를 : 
“ 신은 옛날 돌아가신 선제께서 이미 오래 전에 태자께서 현능하다는 이유를 들어 후계자로

세우려고 했으나  몽의가 완강하게 반대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습니다.

만약 태자의 현능함을 알고 있었음에도 후계자로 세우는 것을 반대한 행위는

바로 선군에게 불충을 저지른 행위일 뿐만 아니라 선제를 미혹시킨 죄에 해당합니다.  

신의 어리석은 생각으로는 그를 죽이지 않으면 안 된다고 생각합니다.”라고 하였다. 
조고의 말을 따라 몽의를 대(代) 땅의 옥에 가두도록 한 호해는 전에 임지의 감옥에

가두어 두고 있었던 몽염을 양주(陽周)8)의 감옥으로 옮기도록 했다.

이윽고 시황의 운구가 함양에 당도하여 장례를 마치고 호해가 태자의 신분으로

황제의 자리에 올랐다.  이세황제와 친밀했던 조고가 매일 밤낮으로 몽씨 형제들을

헐뜯으면서 들의 죄과를 찾아내어 탄핵했다.]

 

子嬰進諫曰:「臣聞故趙王遷殺其良臣李牧而用顏聚,燕王喜陰用荊軻之謀而倍秦之約, 

齊王建殺其故世忠臣而用后勝之議.  此三君者,皆各以變古者失其國而殃及其身.

今蒙氏,秦之大臣謀士也,而主欲一旦棄去之,臣竊以為不可.

臣聞輕慮者不可以治國,獨智者不可以存君.

誅殺忠臣而立無節行之人,是內使群臣不相信而外使鬬士之意離也,臣竊以為不可.」

 [자영이 나아가 간언하기를 : “ 신이 듣기에 조왕 천(遷)은 그의 훌륭한 신하인 이목을 살해하고

안취를 등용했고, 연왕 희(喜)는 몰래 형가(荊軻)의 계책을 받아들여 진나라와의 약속을

저버렸으며, 제왕 건(建)은 대대로 충성을 바친 신하를 죽이고 간신 후승(後勝)과

국사를 의논했습니다. 이 세 사람의 군주는 모두 옛 것을 고쳐 나라를 잃고 화가

그 몸에 미치게 했습니다. 지금 몽씨들은 진나라의 대신이며 모사인데 하루아침에

그들을 버리는 것은 신의 생각으로는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가볍게 생각해서 일을 행하는 방법으로는 결코 나라를 다스릴 수 없으며 한 사람만의 

지혜로는 군주의 자리를 보존하게 할 수 없습니다. 충신들을 주살하고 절의와 품행이

바르지 못한 사람을 세운다면  것은 바로 안으로는 여러 신하들이 서로 의심하게 만들고

밖으로는 전투에 임하는 무사들의 마음을 떠나게 합니다. 

때문에 신은 감히 불가하다고 말씀드리는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胡亥不聽.  而遣御史曲宮乘傳之代,令蒙毅曰:「先主欲立太子而卿難之.

今丞相以卿為不忠,罪及其宗.  朕不忍,乃賜卿死,亦甚幸矣.  卿其圖之!」

[호해가 듣지 않고 어사 곡궁(曲宮)에게 역마를 타고 대(代) 땅으로 가서 몽의에게 자기의 명을

전하기를 : “ 옛날 선제께서 이미 짐을 태자로 세우려고 했으나 그대가 반대하여 내가 곤란한

처지에 놓이게 되었다.  오늘 승상이 그대가 불충하여 그 죄가 종사에 미쳤다고 했다.

짐은 묵과할 수 없어 그대에게 죽음을 명하니  이것은 또한 매우 다행한 일이라 하겠다.

그대는 알아서 명을 받들도록 하라!“라고 하자.] 


毅對曰:「以臣不能得先主之意,則臣少宦,順幸沒世. 可謂知意矣.

以臣不知太子之能,則太子獨從,周旋天下,去諸公子絕遠,臣無所疑矣.

夫先主之舉用太子,數年之積也,臣乃何言之敢諫,何慮之敢謀!

非敢飾辭以避死也,為羞累先主之名,願大夫為慮焉,使臣得死情實.

且夫順成全者,道之所貴也;刑殺者,道之所卒也. 

昔者秦穆公殺三良而死,罪百里奚而非其罪也,故立號曰『繆』

昭襄王殺武安君白起.  楚平王殺伍奢.  吳王夫差殺伍子胥.

此四君者,皆為大失,而天下非之,以其君為不明,以是籍於諸侯. 

故曰『用道治者不殺無罪,而罰不加於無辜』. 唯大夫留心!」

使者知胡亥之意,不聽蒙毅之言,遂殺之. 

[몽의가 이세의 명에 대답하기를 : “ 신이 선제의 뜻을 몰랐다고 하나, 신은 어렸을 때부터

선제를 모시기 시작하여 순종했음으로 돌아가실 때까지 총애를 받은 행운을 입었습니다.

그래서 선제의 뜻을 알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신이 옛날 태자의 현능함을 알지 못했다고 했으나 여러 공자들 중에서 태자 혼자만이

홀로 수행하여 천하를 순행했음으로 태자의 능력이 여러 공자들 보다 훨씬 뛰어나다는 것을

한 번도 의심해 본 적이 없었습니다. 또한 선제께서 태자로 삼으신 이유는 여러 해에 걸쳐

살펴보신 결과라고 말할 수 있는데 신이 어찌 감히 태자로 세우지 말라고 간할 수 있었겠으며

어찌 감히 다른 생각을 품을 수 있었겠습니까? 저는 말을 꾸며 죽음을 피하려고 함이 아니라

선제의 이름에 누를 끼치게 됨을 부끄럽게 여기기 때문입니다. 원컨대 대부께서는

이 점을 헤아려주시어 신으로 하여금 마땅한 죄명으로 죽을 수 있게 해주시기 바랍니다.

무릇 순리에 따라 공업을 이루고 몸을 보존하는 사람이 귀하게 됨은 세상의 마땅한 도리이고,

엄혹한 형벌을 받아 살육되는 사람은 버려지게 되는 일도 세상의 도리입니다.

옛날 진목공(秦穆公)이 삼량(三良)9)을 순장시키고 백리해(百里奚)에게는 죄를 물어 죽였습니다.

그것은 모두 그들이 죄를 지었기 때문이 아니었습니다.  

그래서 후세 사람들은 진목공의 시호를 무(繆)라고 지었습니다.  

또한 진소양왕(秦昭陽王)은 무안군(武安君) 백기(白起)를 죽였고, 초평왕(楚平王)은

오사(伍奢)를 죽였으며, 오왕(吳王) 부차(夫差)는 오자서(伍子胥)를 죽였습니다.

이 네 사람의 군주는 모두 큰 실수를 저질러 천하가 그들을 비난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현명하지 못한 임금으로 제후들 사이에 낙인이 찍혔습니다.  

그래서 말하기를 '세상을 다스리는 도리는 죄 없는 사람을 죽이지 않는데 있으며, 

무고한 사람에게는 형벌을 내리지 않는데 있다'라고 했습니다.

대부께서 이 점을 유념하시기 바랍니다.”라고 하였다.

이세의 사자는 호해의 뜻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몽의의 말을 듣지 않고 죽였다.]

 

二世又遣使者之陽周,令蒙恬曰:「君之過多矣,而卿弟毅有大罪,法及內史.」
恬曰:「自吾先人,及至子孫,積功信於秦三世矣.  今臣將兵三十餘萬,身雖囚系,

其勢足以倍畔,然自知必死而守義者,不敢辱先人之教,以不忘先主也.

昔周成王初立,未離襁緥周公旦負王以朝,卒定天下. 

及成王有病甚殆, 公旦自揃其爪以沈於河,

曰:『王未有識, 是旦執事.  有罪殃, 旦受其不祥.』

乃書而藏之記府,可謂信矣.  及王能治國,有賊臣言:

『周公旦欲為亂久矣,王若不備,必有大事.』王乃大怒,周公旦走而奔於楚.

成王觀於記府, 得周公旦沈書, 乃流涕曰:『孰謂周公旦欲為亂乎!』 殺言之者而反周公旦.

故《周書》曰『必參而伍之』. 今恬之宗,世無二心,而事卒如此,是必孽臣逆亂,

內陵之道也.  夫成王失而復振則卒昌;桀殺關龍逢,紂殺王子比干而不悔,身死則國亡.

臣故曰過可振而諫可覺也.  察於參伍,上聖之法也.

凡臣之言,非以求免於咎也,將以諫而死,願陛下為萬民思從道也.」

[이세황제가 사자를 주양(周陽)으로 보내어 몽염에게 자기의 명을 전하기를 : “ 그대의 과실은

매우 크고 또한 동생 몽의가 큰 죄를 저질러 법이 그대에게까지 미치게 되었다."라고 하자. 
몽염이 대답하기를 : " 우리 몽씨들은 선조때부터 손자에 이르기까지 진나라에 출사하여 공적을

쌓기를 삼대에 이르렀습니다. 지금 신은 30여 만의 군사들을 지휘하는 장군의 몸으로써

몸은 비록 죄수의 신분이나 아직도 세력은 진나라에 반기를 들기에 충분합니다.

그러나 죽음을 면치 못하더라도 의를 지키라는 선인들의 가르침을 제가 감히 어길 수 없고

또한 선제의 은덕을 잊을 수 없습니다.

옛날 주성왕이 처음 왕위에 올랐을 때는 미처 강보(襁褓)를 벗어나지 못한 어린 나이였음으로

주공(周公) 단(旦)이 등에 업고 조정의 일을 처리하여 마침내 천하를 안정시켰습니다.

그러다가 성왕이 병이 들어 매우 위급하게 되자, 주공 단이 그의 손톱을 깎아 하수 강물에 던지며

하늘에 기도하기를 ' 왕이 아직 사리를 분간할 나이가 안 되어 이 단이 일을 처리하고 있나이다.  

만약 죄가 있어 재앙을 내린다면 이 단에게 대신 내려주소서! ' 그리고는 그 말을 서책에 적어

왕실의 서고에 저장하도록 하였으니 가히 충성을 다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이윽고 성왕이 장성하여 나라를 다스리게 되자,  

간신이 있어 말하기를 ' 주공 단이 난을 일으켜 대신 왕이 되려고 한지가 오래 되었습니다.

대왕께서 대비하지 않으시면 필시 큰 일이 일어날 것입니다.'라고 하자, 

성왕이 듣고 대노하자 주공 단이 도망쳐 초나라로 몸을 피했습니다.  

어느 날 성왕이 서고에 들어가 서책을 읽다가 주공 단이 황하에 맹세한 기도문을 발견하고

비로소 말하기를 ' 그 누가 이런 주공 단이 난을 일으켜 왕이 되려한다고 참소할 수 있단 말인가?

'라고 하며, 성왕은 즉시 참소한 자를 죽이고 주공단을 초나라에서 불러 돌아오게 했습니다.

그런 연유로 주서(周書)에 말하기를 ' 반드시 여러 사람에게 반복해서 자문을 구하고

잘 살피라'라고 했습니다.  지금이 몽염의 집안은 대대로 두 마음을 품지 않았음에도

결국은 이와 같은 일이 벌어진 연유는 필시 반역을 꾀하는 간신이 있어 내부에서 황제를 속이고

있기 때문입니다.  무릇 성왕은 잘못하여 주공 단이 도망치도록 했으나 후에 다시 바로 잡아

결국은 주나라를 번성케 했으나, 충신 관룡봉을 죽인 하나라의 걸왕(桀王)이나 왕자 비간(比干)을

죽인 은나라의 주왕(紂王)은 모두 뉘우치지  않았기 때문에 결국 몸은 죽고 나라는 망했습니다.

그래서 옛말에 ' 잘못은 바로잡아야 하고 신하가 간언을 올리면 깨달아야 한다'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성왕의 도는 반복해서 자문을 구하고 살펴야 하는데서 이루어진다고 했습니다.

신이 드리는 말씀은 제 허물을 면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제가 간언을 올려 죽게 되더라도,

원컨대 폐하께서는 만민을 위해 정도를 따라 도리를 지켜야 한다고 생각합니다."라고 하였다.]


使者曰:「臣受詔行法於將軍,不敢以將軍言聞於上也.」

蒙恬喟然太息曰:「我何罪於天,無過而死乎?」
良久,徐曰:「恬罪固當死矣.  起臨洮屬之遼東,城塹萬餘里,此其中不能無絕地脈哉?

此乃恬之罪也.」乃吞藥自殺.

[사자가 말하기를 : " 저는 조명을 받아 장군에게 법을 집행해야 하기에,

감히 장군의 말씀을 황제에게 전해 올릴 수 없습니다. "라고 하자. 
몽염이 길게 탄식하며 말하기를 : " 내가 하늘에 무슨 죄를 지었다고 아무 잘못도 없는데,

이렇게 죽어야한다는 말인가?"라고 하고는, 한참 동안 말이 없더니 이윽고 다시 입을 열어

천천히 말하기를 : " 나 몽염이 죄를 지어 마땅히 죽어야 하는 이유는 임조(臨洮)에서 시작해서

요동(遼東)까지 장성을 일 만여 리를 쌓았으니 그 중 지맥을 끊지 않을 수가 있었겠는가?

이것이 바로 이 몽염이 죽어야하는 죄인 것 같다."10)라고 하며. 

말을 마친 몽염은 약을 삼키고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太史公曰:

吾適北邊,自直道歸,行觀蒙恬所為秦筑長城亭障,塹山堙谷,通直道,固輕百姓力矣.

夫秦之初滅諸侯, 天下之心未定, 痍傷者未瘳, 而恬為名將, 不以此時彊諫, 振百姓之急,

養老存孤, 務修眾庶之和,而阿意興功,此其兄弟遇誅,不亦宜乎!何乃罪地脈哉? 

[태사공이 말한다.
나는 북방의 변경지방을 방문했다가 직도(直道)11)를 통해 돌아온 적이 있었다.

길을 따라오면서 몽염이 진나라를 위해 수축한 장성(長城) 및 요새와 산을 깎고 계곡을 메꿔

개통한 직도(直道)를 보고 나는 확실히 몽염(蒙恬)이 백성들의 노고와 재산을 너무나 가볍게

생각했다고 느꼈다.  진나라가 육국의 제후들을 멸한 직후 천하민심은 아직 안정되지 않았고

통일전쟁 중에 입은 상처가 미처 아물지 않고 있었다. 그런 정황에서 명장이라는 명성을

얻고 있었던 몽염이 백성들의 위급하고 어려운 처지를 구한다거나, 노인들을 공양한다거나,

고아들을 돌본다거나 해서 백성들의 평안한 생활을 할 수 있는 여건을 마련하도록

극력 간하지 않고 오히려 토목공사를 대대적으로 일으켜 후세에 공적을 남기려는

진시황의 마음에 영합하려고 했다. 그들 형제가 모두 살해된 것은 당연한 결과가 아니겠는가? 

어찌하여 그가 죽은 것이 지맥을 끊어 얻은 죄 때문이었겠는가?]

 

 【 각주 
1) 하투(河套)/ 북쪽으로 흐르는 황하(黃河) 음산(陰山)산맥의 남쪽 기슭에서 만곡하는 부분과

    만리장성으로 둘러싸인 고원지대로 사막 ·초원 ·염호 등으로 이루어져 있다.

    오르도스란 15세기 중엽 이후 이곳이 내몽골 여러 부(部)의 하나인 오르도스부의

    목축지를 이룬 데서 연유한 것으로서 현재 어얼둬쓰[鄂爾多斯]라고 표기하나,

    본래 중국에서는 BC 3세기 이래 하남(河南), 후에는 하투(河套) ·투중(套中) 등으로 불렀으며,

    몽골 유목민과의 교섭 또는 공방(攻防)의 요지로 삼아 왔다.   

2) 임조(臨洮)/ 지금의 감숙성(甘肅城) 민현(岷縣) 경내로 만리장성의 서쪽 시발점이다.

    한편 임조장인(臨洮長人)은  옛날 신화에 신장이 3장에 달하는 거인 부족이름이다.

    진시황이 육국을 멸하고 천하의 모든 무기를 압수하여 하나에 수 만근이 나가는

    동상 12개를 주조해서 함양 성문 앞에 세워 흉노인들에게 세를 과시하고자 했다.   

3) 양산(陽山)/ 지금의 내몽고 낭산(狼山) 지역으로 진한(秦漢) 시대에 음산(陰山)의

    가장 먼 서쪽 지역을 양산이라고 칭했다.   

4) 중거부령(中車府令)/ 황제가 순행을 나갈 때 거마를 관장하는 관리들의 장이다.  

5) 구원(九原)/ 지금의 내몽고 포두시(包頭市)  

6) 감천(甘泉)/ ①지금의 섬서성 순화현(淳化縣)에 있었던 감천산에 축조한 궁궐로 원래

    진이세 때 임광궁(林光宮)으로 불렀으나 한무자게 확장 증건하고 여러 이름으로 불렀다.   

    ② 진나라는 원래 지금의 섬서성 함양 동북쪽에 도성을 세우고 위수 남쪽 지금의 노현 근처에

    축조한 궁궐이다.  “ 진시황본기에 ‘ 진왕이 태후를 옹(雍)에서 함양으로 영접하여

    감천궁에 다시 살게 했다.’라는 기사가 있다.   

7) 직도(直道)/ 진시황이 건설했던 중국 고대의 도로 명이다.

    진시황 35년 기원전 212년 몽염에게 명하여  

    건설하도록 했다. 북쪽 변경의 구원(九原 : 지금의 내몽고 포두시(包頭市) 서북)에서 시작하여  

    남쪽의 운양(雲陽 : 지금의 섬서성 순화현(淳化縣) 서북)까지 연결한 전장 1,800리

    즉 900키로에 달했다.  관중평원과 하투(河套) 지구를 통하는 중요한 통로였다.   

8) 양주(陽周)/ 지금의 섬서성 자장현(子長縣)으로 연안시(延安市)에서 80키로 정북쪽이다.  

9) 진목공(秦穆公) 때 진나라의 대부 자거(子車) 씨 엄식(掩息), 중행(仲行), 침호(鍼虎)

    삼형제를 말한다.  진목공이 죽을 때 자거씨 삼형제와 함께 진나라의 대소 신료 172명을

    순장시켰음으로 이후 진나라에서는 벼슬을 하려는 현능한 사람이 없게 되어

    나라가 쇠락하게 되었다.

    시경(詩經) 진풍(秦風) 황조가(黃鳥歌)는 순장으로 죽은 세 사람을 노래한 시가다.   

10) 이 말은 고대 중국인의 미신적인 풍습으로 지맥을 끊는 사람은 하늘로부터 징벌을

      받아 죽는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사마천은 몽염은 자기가 죽는 것은 마땅히 진시황에게

      간언을 올리지 않고 폭정을 방관하여 이세가 집권한 결과 자기가 죽음에 이르게 된 것을

      지맥을 끊어 그 죄를 받아 죽었다고 생각한 몽염을 죽을 때까지 깨우치지 못했다고

      비난한 것이다.   

  

     ※  原 文 .    【 中國哲學書電子化計劃 .   筆寫本 】

                               

 

          原 文   飜 譯 者        德庤 / 李   斗 振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