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 屈原 賈生列傳

第 二十四. 屈原賈生列傳(굴원 가생열전)

덕치/이두진 2021. 8. 6. 18:30

          史記 列傳 

 

   第 二十四.  屈原賈生列傳(굴원 가생열전)  

 

屈原者,名平,楚之同姓也.  為楚懷王左徒.  博聞彊志,明於治亂,嫻于辭令. 

入則與王圖議國事,以出號令;出則接遇賓客,應對諸侯.  王甚任之.

[굴원은 이름이 평(平)이고 초나라 왕족 출신이다.1) 초회왕(楚懷王)2) 때 좌도(佐徒)3)였다.  

위인이 견문이 넓고 의지가 굳세었고 국가의 흥망성쇠에 밝았으며 문장에 뛰어났다.  

조정에 들어가서는 왕과 함께 국사를 논한 후에 호령을 내렸으며 밖으로 나와서는 제후들이 보내는

빈객들을 접대하고 제후들을 상대했다. 이에 왕이 그를 매우 신임했다.]

 

上官大夫與之同列,爭寵而心害其能.  懷王使屈原造為憲令,屈平屬草槁未定.

上官大夫見而欲奪之,屈平不與,因讒之曰:「王使屈平為令,眾莫不知,每一令出,

平伐其功,(曰)以為『非我莫能為』也.」王怒而疏屈平.

​[굴원이 상관대부(上官大夫) 근상(靳尙)과 같은 반열에 오르자, 근상은 초왕의 총애를 차지하고자

마음속으로 굴원의 능력을 시기하여 해치려했다. 회왕이 굴원에게 명하여 나라의 율령을 제정하라고 했다.  

굴원이 율령의 초안을 미처 완성하기 전에 상관대부가 알고 그 일을 빼앗으려고 했다.  

굴원이 그 일을 넘겨주지 않자 상관대부는 왕에게 다음과 같이 참소하기를 :  

" 대왕께서 굴원을 시켜 율령을 제정하라고 명한 것을 모르는 사람이 없습니다.  그러나 법령이 나올 때마다

그는 자기의 공이라고 자랑하며 ‘내가 아니면 율령을 제정할 수 없지’라고 합니다.’"라고 하였다.  

이에 초왕은 노하여 굴원을 멀리하게 되었다.]

 

屈平疾王聽之不聰也,讒諂之蔽明也,邪曲之害公也,方正之不容也,故憂愁幽思而作離騷.

離騷者,猶離憂也.  夫天者,人之始也;父母者,人之本也.

人窮則反本,故勞苦倦極,未嘗不呼天也;疾痛慘怛,未嘗不呼父母也. 

屈平正道直行,竭忠盡智以事其君,讒人閒之,可謂窮矣。信而見疑,忠而被謗,能無怨乎? 

屈平之作離騷,蓋自怨生也.

[굴원은 왕이 한쪽의 말만 듣고 사리를 판단할 줄 모르는 것과, 아첨과 모함하는 말을 구별할 줄 모르는 것과,  

사악하고 비뚤어진 무리가 공명정대한 사람을 해치려는 것과, 단정하고 올바른 사람들을 받아들이지 않는 것을  

애통하게 생각하며 우수와 근심에 잠겨 <이소(離疎)>5)를 지었다.  

이소는 근심스러운 일을 만났음을 말한다. 무릇 하늘은 사람의 시초이며, 부모는 사람의 근본이다.  

사람이 궁지에 이르면 근본을 돌이켜보는 까닭에 힘들고 피곤할 때에 하늘을 찾지 않을 수 없으며,  

질병으로 고통스럽고 참담해지면 부모를 찾지 않을 수 없다. 굴원은 올바른 도리를 곧게 실천하여 충성을 바치고  

지혜를 발휘하여 임금을 섬겼는데, 도리어 군주와 그의 사이가 이간질 당하여, 궁지에 처하게 되었다고 할 수 있다. 

신의를 지켰으나 의심을 받았고, 충성을 바쳤으나 비방을 당하니, 어찌 원망스럽지 않겠는가?  

굴원이 지은 <이소(離騷)>는 본디 이런 원망으로부터 이루어진 노래다.]

 

國風好色而不淫,小雅怨誹而不亂.  若離騷者,可謂兼之矣. 

上稱帝嚳,下道齊桓,中述湯武,以刺世事.  明道德之廣崇,治亂之條貫,靡不畢見. 

其文約,其辭微,其志絜,其行廉,其稱文小而其指極大,舉類邇而見義遠.

[<국풍(國風)>은 미인을 읊으면서도 음탕하지 않았고, <소아(小雅)>는 원망과 비난을 담고 있으나

반란의 내용이 아니었다. 이 이소는 그 두 가지를 다 겸한 시가라고 할 수있다.

위로는 제곡(帝嚳)을 칭송하고 아래로는 제환공(齊桓公)을 말하고 있으며

그 중간에는  상탕(商湯)과 주무왕(周武王)에 대해 기술하여 그것으로써 세상일을 풍자했다.

도덕의 넓고 높음과 나라의  흥망성쇠의 인과관계를 밝혀 모두 자세히 드러나게 하지 않음이 없다.

​그 문장은 간략하나 자세하고, 그의 정신은 정결하며 그의 행동은 청렴하다.

그 문장은 비록 작은 일을 세세하게 묘사했으나 그것이 뜻하는 바는 지극히 크고,

예로 든 것은 모두가 일상생활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일이나 그것이 의미하는 바는 심오(深奧)하다.]

 

其志絜,故其稱物芳.  其行廉,故死而不容自疏.

濯淖汙泥之中,蟬蛻於濁穢,以浮游塵埃之外,不獲世之滋垢,皭然泥而不滓者也. 

推此志也,雖與日月爭光可也. ​

[그의 마음은 고결했음으로 그는 즐겨 자신을 향초(香草)로 비유했다.

그는 올곧은 삶을 살았기에 죽어서도 소인배들에게 용납되지 않았다.

몸은 진흙 구덩이 속에서 있으나 능히 더러움을 씻을 수 있고, 마치 매미가 더러운 오물 속에서 허물을 벗어

새로운 몸으로 태어나듯이 세속의 먼지구덩이 밖으로 헤엄쳐 나와 더러운 세상의 떼에 물들지 않았다.  

그는 청백하고 고결하여 진흙 속에 있어도 결코 물들지 않는 사람이었다.  

이에 그의 지조를 추측해 본다면 그는 해와 달과도 빛을 다투는 사람이라고도 할 수 있다.]

 

屈平既絀,其後秦欲伐齊,齊與楚從親,惠王患之,乃令張儀詳去秦,厚幣委質事楚, 

曰:「秦甚憎齊,齊與楚從親,楚誠能絕齊,秦願獻商、於之地六百里.」 

楚懷王貪而信張儀,遂絕齊,使使如秦受地.

[굴원이 배척되어 왕과의 사이가 소원해진 얼마 후에 진나라가 제나라를 정벌하려고 하자,

제나라가 초나라와 우호관계를 수립하여 합종을 맺었다. 이를 근심한 진혜왕(秦惠王)6)이 장의를 초나라에 보내

후한 예물을 바치게 하고 위질(委質)7)의 예를 행하여 초나라를 섬기겠다고 하면서 다음과 같이 말하게 하였다.

​" 우리 진나라는 제나라에 많은 원한을 갖고 있습니다. 그런데 제나라는 초나라와 우호관계를 수립하여 

합종을 맺고 있습니다. 만일 초나라가 진실로 제나라와 절교를 한다면 우리 진나라는 상오 8)의 600리 땅을 

할양하겠습니다."​라고 하자, 초회왕은 욕심에 눈이 어두운 나머지 장의의 말을 믿고 

제나라와의 동맹을 파기한 후에사자를 진나라에 보내 상오의 땅 600리를 받아오게 하였다.]

 

張儀詐之曰:「儀與王約六里,不聞六百里.」楚使怒去,歸告懷王.  懷王怒,大興師伐秦.

秦發兵擊之,大破楚師於丹、淅,斬首八萬,虜楚將屈丐,遂取楚之漢中地. 

懷王乃悉發國中兵以深入擊秦,戰於藍田.  魏聞之,襲楚至鄧.  楚兵懼,自秦歸.

而齊竟怒不救楚,楚大困. 

[그러자 장의가 사술(詐術)을 부려 말하기를 :  

"이 장의가 초왕과 주기로 한 땅은 6리이지 600리를 주겠다고 말하지 않았소."라고 하였다. 

초나라 사자가 화를 내며 돌아와 회왕에게 보고했다. 분노한 회왕이 대군을 일으켜 진나라를 공격하자,  

진나라도 군사를 보내 반격했다. 초군을 단수(丹水)와 석수(淅水)에서 대파한 진군은 그 군사 8만의 목을 베었으며  

초장 굴개(屈丐)를 포로로 잡고 마침내 초나라의 한중(漢中) 땅마저 점령했다.  

회왕이 다시 초나라 안의 모든 군사를 동원하여 진나라 땅 깊숙이 쳐들어가 남전에서 진군과 교전에 들어갔다.

그러자 위나라가 알고 군사를 일으켜 초나라를 기습하여 등(鄧)에 이르렀다.  

이를 두려워한 초군은 할 수 없이 진나라로부터 회군했다. 합종을 파기한 초나라에 대해 분노하고 있던 제나라는  

초나라에 구원군을 보내지 않아 이로써 초나라는 매우 어려운 상황에 빠지고 말았다.]

 

明年,秦割漢中地與楚以和.  楚王曰:「不願得地,願得張儀而甘心焉.」 

張儀聞,乃曰:「以一儀而當漢中地,臣請往如楚.」

如楚,又因厚幣用事者臣靳尚,而設詭辯於懷王之寵姬鄭袖. 

懷王竟聽鄭袖,復釋去張儀.  是時屈平既疏,不復在位,使於齊,顧反,

諫懷王曰:「何不殺張儀?」 懷王悔,追張儀不及. 

[다음 해에 진나라가 한중의 땅을 떼어 초나라에 돌려주겠다며 강화를 요청해 왔다.  

이에 초회왕이 진나라 사자에게 말하기를 : " 내가 바라는 것은 한중의 땅이 아니라 장의요.

내가 장의만 얻는다면 그것으로써 매우 만족하겠소."라고 하자, 

장의가 그 말을 전해 듣고 말하기를 : " 이 장의 한 사람으로 한중의 땅을 감당할 수 있다면,

제가 초나라에 가겠습니다."라고 하였다. 

이윽고 장의가 초나라에 당도하여 많은 뇌물을 초나라의 권신 근상(靳尙)에게 바쳤다.

근상은 초왕의 총희 정수(鄭袖)로 하여금 궤변으로 초왕을 현혹시키게 했다.

정수의 말에 유혹당한 초왕은 장의를 석방하여 진나라에 돌아가게 했다.  

이때 초왕과 사이가 소원했던 굴원은 관직에 다시 오르지 못하고 있다가 제나라에 사자로 가 있었다.  

이윽고 제나라에서 돌아온 굴원이 초왕에게 간하기를 : " 어찌하여 장의를 죽이지 않았습니까?"라고 하였다. 

회왕이 후회하고 추격군을 보내 장의를 잡으려고 했으나 장의는 멀리 달아난 후였다.]

 

其後諸侯共擊楚,大破之,殺其將唐眛.  時秦昭王與楚婚,欲與懷王會.

懷王欲行,屈平曰:「秦虎狼之國,不可信,不如毋行.」 

懷王稚子子蘭勸王行:「柰何絕秦歡!」懷王卒行.

入武關,秦伏兵絕其後,因留懷王,以求割地.  懷王怒,不聽. 

亡走趙,趙不內.  復之秦,竟死於秦而歸葬.

​[그 후에 제후들이 함께 초나라를 공격하여 초군을 크게 물리치고 그 대장 당매(唐眛)를 죽였다.

진나라의 새로운 군주 소양왕이 혼인을 맺어 양국이 우호관계를 수립하기 위해 초회왕과 회합을 갖자고 했다. 

이에 굴원이 회왕에게 말하기를 : " 진나라는 호랑이나 늑대와 같은 나라입니다.

결코 믿을 수 없으니 가시면 안 됩니다."라고 하였으나,

회왕의 어린 아들 자란(子蘭)이 말하기를 : " 어째서 진나라의 호의를 물리치시는 것입니까?’라고 하였다. 

결국 회왕은 진왕을 만나러 갔다. 회왕이 무관을 통하여 진나라 땅에 들어가자 진나라가 군사를 매복시켜

그 퇴로를 끊고 회왕을 억류시켰다. 진나라는 회왕에게 초나라 땅을 떼어 할양하라고 강요했다.  

회왕이 노하여 진나라의 요청을 거절했다. 후에 회왕은 진나라에서 탈출하여 조나라로 도망쳤으나

진나라의 후환을 두려워한 조왕은 받아주지 않았다. 이에 회왕은 다시 진나라에 끌려가 결국은 그곳에서 죽었다.  

진나라는 회왕의 시신을 초나라에 보내 장례를 치르게 하였다.]

 

長子頃襄王立,以其弟子蘭為令尹.  楚人既咎子蘭以勸懷王入秦而不反也.

屈平既嫉之,雖放流,睠顧楚國,系心懷王,不忘欲反,冀幸君之一悟,俗之一改也. 

其存君興國而欲反覆之,一篇之中三致志焉.

然終無可柰何,故不可以反,卒以此見懷王之終不悟也.

​[회왕의 장남 경양왕(頃襄王)이 초왕의 자리에 오르고, 그의 동생 자란(子蘭)이 영윤(令尹)이 되었다.  

초나라 사람들은 회왕이 진나라에 들어가 환국하지 못한 원인은 모두 자란의 잘못이라고 비난했다.  

굴원도 자란이 행한 옛날 행위에 대해 매우 통탄스럽게 생각했다. 비록 몸은 이미 추방되었음에도

초나라를 그리워하고 초회왕에 대한 마음이 남아서 돌아가길 잊지 않고 있었다.

왕이 어느 날 갑자기 깨우쳐서 나쁜 습속이 개량되기를 기대했다. 그는 왕을 모시고 나라를 부흥시켜

쇠퇴해 가는 국세를 역전시켜 보고자 한 편의 시를 세 번씩이나 되풀이 하여 그 뜻을 전했다.

그러나 마침내 그러한 노력도 모두 허사가 되고 진나라에 들어간 회왕은 돌아오지 못했다.

회왕은 결국 죽을 때까지 깨닫지 못했음을 알 수 있다.]

 

人君無愚智賢不肖,莫不欲求忠以自為,舉賢以自佐,然亡國破家相隨屬,

而聖君治國累世而不見者,其所謂忠者不忠,而所謂賢者不賢也.

懷王以不知忠臣之分,故內惑於鄭袖,外欺於張儀,疏屈平而信上官大夫、令尹子蘭.

兵挫地削,亡其六郡,身客死於秦,為天下笑.  此不知人之禍也.

​[남의 군주가 되는 자는 그 자신이 총명하거나, 우둔하거나, 재주가 있거나, 재주가 없거나를 불문하고

모두가 충신을 찾아 자기를 위하도록 하고 또한 현인을 임용하여 나라를 다스리는 자기를 보좌하게 만드는 바를

원하지 않은 사람이 없다. 그러나 나라가 망하고 가문이 절단 나는 일이 끊이지 않고,

성군이 대를 이어 나타나 나라를 다스리는 모습을 보기 힘든 이유는 소위 충신이란 자는 충성을 다하지 않고,

현명하다는 자는 어질지 않음에 기인하기 때문이다.  

회왕도 역시 충신들을 구분하지 못했음으로 안으로는 정수에게 현혹되었고, 밖으로는 장의에게 속임을 당했으며,  

충신인 굴원을 멀리하고 탐욕스러운 상관대부 근상(靳尙)과 자란(子蘭)을 가까이 했다고 할 수 있다.  

군사들은 꺾이고 영토는 잠식당해 무려 6개 군에 달하는 영토를 진나라에 빼앗겼으며 자신의 몸은

진나라에 사로잡혀 객사하여 천하의 웃음거리가 되고 말았다. 이것은 사람을 알아보지 못했기 때문에 입은 화다.]

 

《易》曰:「井泄不食,為我心惻,可以汲.  王明,并受其福.」王之不明,豈足福哉! 

令尹子蘭聞之大怒,卒使上官大夫短屈原於頃襄王,頃襄王怒而遷之.

屈原至於江濱,被髪行吟澤畔.  顏色憔悴,形容枯槁.

[<역경(易經)>에 이르기를 「우물 물이 맑아도 와서 마시지 않는구나! 나의 마음을 슬프게 함은,  

이 물은 가히 마실 수 있기 때문이다. 왕이 명철하다면, 또한 그 복을 받는 법이다.」라고 했으니,

왕이 밝지 못하니,  어찌 복을 받을 수 있겠는가!  

영윤 자란은 굴원의 그러한 태도를 전해 듣고 대노하여 마침내 상관대부 근상을 시켜 굴원을 경양왕에게 모함했다. 

경양왕도 노하여 굴원을 도성 밖으로 쫓아냈다.  

굴원이 도성에서 추방되어 강수의 강변을 배회하다 호수가에 이르자 머리를 풀어헤치고 탄식을 하였다.

안색은 초췌하고 몸은 비쩍 말라 야위어 있었다.]

 

漁父見而問之曰:「子非三閭大夫歟?何故而至此?」 

屈原曰:「舉世混濁而我獨清,眾人皆醉而我獨醒,是以見放。」 

漁父曰:「夫聖人者,不凝滯於物而能與世推移.  舉世混濁,何不隨其流而揚其波?

眾人皆醉,何不餔其糟而啜其醨?何故懷瑾握瑜而自令見放為?」

屈原曰:「吾聞之,新沐者必彈冠,新浴者必振衣,人又誰能以身之察察,受物之汶汶者乎!

寧赴常流而葬乎江魚腹中耳,又安能以皓皓之白而蒙世俗之溫蠖乎!」 

[강가에서 고기를 잡던 어부가 보고 묻기를 : " 그대는 삼려대부(三闾大夫)가 아니시오?

어찌하여 이곳까지 오게 되었습니까?"라고 하자. 
굴원이 대답하기를 : " 온 세상이 모두 탁했으나 나 혼자만은 맑았으며 세상사람들은 모두 취했으나 
 

나 혼자만은 깨어 있었소! 그래서 세상 사람들이 나를 쫓아냈소. "라고 하였다.
어부가 다시 묻기를 : " 옛날 성인들께서는 어느 한 가지 일에만 매달리시는 법이 없으셨고, 
 

세상의 돌아가는 추이에 따라 어울릴 수가 있었소. 세상이 온통 흐리다면 그대는 어째서 그 흐름을 따르거나

그 파도를 밀어 올리지 않는 것입니까? 세상 사람들이 모두 취했다면 어찌하여 먹다 남긴 술지개미만을 얻어

배불리 먹고 그 거른 술을 같이 마시지 않는 것입니까?
그대의 생각이 얼마나 깊고 몸은 또한 얼마나 고고하다고 추방을 자초한 것입니까? 라고 하자.
굴원이 대답하기를 : "내가 듣기에 새로 머리를 감으려는 사람은 필히 관을 벗어서 털어야 하고 
 

막 몸을 씻은 사람은 반드시 옷을 털어 입는다."라고 들었소.

어찌 이 맑고 깨끗한 몸으로 더럽고 욕된 것들을 받아들일 수 있겠소 ?  

내가 설사 상수의 물결에 빠져 수장되어 고기들의 밥이 된다 할지언정 어찌 희고 깨끗하며  

결백한 마음의 내 몸에 이 속된 세상의 먼지를 뒤집어 쓸 수 있겠소 ?라고 하였다.

어부가 빙그레 미소를 지으며 노를 뱃전에 두드리며 떠나가면서 노래를 불렀다.
滄浪之水淸兮(창랑지수청혜)  맑고 맑은 창랑의 강이여!
可以濯吾纓(가이탁오영)  내 갓끈을 씻을만하구나.
滄浪之水濯兮(창랑지수탁혜)  탁하고 탁한 창랑의 강물이여
可以濯吾足(가이탁오족)  내 발을 씻을만하구나.
어부는 마침내 가 버리더니 다시는 그 소식은 전해 듣지 못했다.]  

 

乃作懷沙之賦. 其辭曰:

[그리고 얼마 후에 굴원은 <회사(懷沙)>라는 부(賦)를 지었는데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陶陶孟夏兮草木奔奔(도도맹하혜초목망망) 

햇볕이 따가운 초여름이라 초목이 무성도하구나.
傷懷永哀兮汩徂南土(상회영애혜율조남토) 

쓰라린 마음에 영원한 슬픔 안고 유유히 흘러서 남쪽 땅으로 가련다.
瞬兮杳杳孔靜幽黙(순혜묘묘공정유묵) 

쳐다만 보아도 아득하고 멀어서 조용한 것이 소리조차 없구나.
鬱結紆軫兮離愍而長鞠(울결우진혜이민이장국)

답답하고 울적한 마음 시름에 겨우니 못내 괴롭다.
撫情效志兮寃屈而自抑(무정효지혜원굴이자억) 

정(情)을 억누르고 뜻을 헤아려 원통함을 삼키고 스스로 참네.
刓方以爲圜兮常度未替(완방이위환혜상도미체) 

모난 것을 깎아서 동그라미 만들어도 일정한 규범은 바꾸지 않는데,
易初本廸兮君子小鄙(역초본적혜군자소비) 

근본(根本)이나 초지(初志)를 고치는 것은 군자(君子)가 얕보는 것이라.
章畫志墨兮前圖未改(장화지묵혜전도미개) 

먹으로 분명히 그려 놓은 옛날의 설계는 고치지 않으며,
內厚質正兮大人所盛(내후질정혜대인소성) 

충정이 후덕하고 성질이 올바르기를 대인(大人)이 기리는 바요.
巧倕不斲兮孰察其揆正(교수불착혜숙찰기규정) 

교수(巧倕)라도 자르지 않는데 누가 그 칫수의 바름을 알겠나?
玄文處幽兮矇睡謂之不章(현문처유혜몽수위지불장) 

검은 무니가 어두운데 놓이면 장님은 무늬 없다 하고
離婁微睇兮瞽以爲無明(이루미제혜고이위무명) 

이루(離婁)가 실눈을 뜨더라도 소경은 못 보는 줄로 여기지.
變白以爲黑兮倒上以爲下(변백이위흑혜도상이위하) 

흰색을 바꾸어 검다고 하고 위를 거꾸로 아래라 한다.
鳳凰在笯兮雞鶩翔舞(봉황재노혜계목상무) 

봉황(鳳凰)은 새장 속에 있는데 닭과 집오리는 나다니며 춤을 추네.
同糅玉石兮一槪面相量(동류옥석혜일개면상량) 

옥(玉)과 돌을 한 곳에 섞어 놓고 하나도 분간할 수 없게 만드는구나
夫惟黨人之鄙固兮羌不知余之所藏(부유당인지비고혜강부지여지소장) 

저 도당들의 비천함이여 내가 가진 것의 값어치를 모른다.
任重載盛兮陷滯而不濟(임중재성혜함체이부제) 

무거운 짐을 많이도 실어 바퀴가 빠져서 움직이질 않네.
懷瑾握瑜兮窮不知所示(회근악유혜궁부지소시) 

귀한 옥 같은 아름다움을 품었건만 가려져 그것을 보일 수 없네.
邑犬之群吠兮吠所怪也(읍견지군폐혜폐소괴야) 

마을 개들이 떼지어 짖는 것은 저들 눈에 이상하게 보이기 때문이겠지.
非俊疑傑兮固庸態也(비준의걸혜고용태야) 

영웅과 호걸을 비방하는 건 본래 비열한 자들의 흔한 짓거리라네.
文質疏內兮衆不知余之異采(문질소내혜중부지여지이채) 

바탕과 교양을 다 갖추어 막힘이 없건만 여러 사람은 이 이채로움을 알지 못하는구나.
材朴委積兮莫知余之所有(재박위적혜막지여지소유) 

재목과 원목이 산처럼 쌓여 있어도 내 것인 줄 모르는 구나.
重仁襲義兮謹厚以爲豊(중인습의혜근후이위풍) 

어짐(仁)이 겹치고 정의가 이어지고 근신과 온후함이 풍성하도다.
重華不可迕兮孰知余之從容(중화불가오혜숙지여지종용) 

순임금님은 만날 수 없으니 누가 나의 거동을 알아나 줄까?
古固有不竝兮豈知其何故(고고유불병혜기지기하고) 

옛적에도 성군과 현신이 같이 나지 않는 까닭을 어찌 알기나 하랴?
湯禹久遠兮邈而不可慕(탕우구원혜막이불가모) 

성탕과 하우는 먼 옛날이야기라 아득하여 생각할 수도 없다.
懲違改忿兮抑心而自强(징위개분혜억심이자강) 

잘못을 뉘우치고 원한을 삭이고 마음을 억눌러서 스스로 참는다.
離愍而不遷兮願志之有像(이민이불천혜원지지유상) 

시름이 겨워도 변하지 않으리니 내 뜻이 길이 후세에 귀감이 되길 원하네.
進路北次兮日昧昧其將暮(진로북차혜일매매기장모) 

길을 나아가 북쪽에 다달으니  해는 뉘엿뉘엿 어두워진다.
舒憂娛哀兮限之以大故(서우오애혜한지이대고) 

시름을 풀고 서글픔을 달래며 지나간 큰일들을 마감하리라.
亂曰(난왈)  노래 끝에 이르기를,
浩浩沅湘分流汩兮(호호원상분류율혜) 

넘실거리는 원수(沅水)와 상수(湘水)의 물이여 두 갈래로 굽이쳐 흐르는구나.
脩路幽蔽道遠忽兮(수로유폐도원홀혜) 

닦아 놓은 길은 깊숙이 가리워 져 저쪽 편 먼 길은 사라져 버린다.
懷質抱情獨無匹兮(회질포정독무필혜) 

가슴에 품은 도타운 정은 비할데 없이 우뚝하지만 내 마음을 제대로 아는 자 없구나.
伯樂旣沒驥焉程兮(백락기몰기언정혜) 

말 잘 고르던  백락(伯樂)이 이미 죽었으니 천리마를 어디에서 능력을 평가 받으리
萬民之生各有所錯兮(만민지생각유소착혜) 

만민(萬民)이 한 세상에 태어나 제각기 돌아갈 곳이 있겠지
定心廣志余何畏懼兮(정심광지여하외구혜) 

마음을 정하고 뜻을 넓히면 내 무엇을 두려워하랴?
增傷爰哀永歎喟兮(증상원애영탄위혜) 

상심이 더하여 서럽게 울며 길게 한숨짓고 탄식하네.
世溷濁莫吾知人心不可謂兮(세혼탁막오지인심불가위혜) 

세상이 혼탁하여 알아주는 이 없으니 사람의 마음을 일깨울 수 없구나.
知死不可讓爰勿愛兮(지사불가양원물애혜)

죽음을 물릴 수 없음을 알았으니 애석하다 여기지 말아라.
明告君子吾將而爲類兮(명고군자오장이위류혜) 

분명히 군자에게 고하노니 내 장차 이로써 군자들이 본받을 선례를 남기고자 하노라! ]

於是懷石遂自(投) [沈]汨羅以死.

屈原既死之後,楚有宋玉、唐勒、景差之徒者,皆好辭而以賦見稱;

然皆祖屈原之從容辭令,終莫敢直諫.  其後楚日以削,數十年竟為秦所滅. 

自屈原沈汨羅後百有餘年,漢有賈生,為長沙王太傅,過湘水,投書以弔屈原.

[그리고는 마침내 가슴에 돌을 품고 멱라수(汨羅水)에 몸을 던져 죽었다.
굴원이 죽은 후 초나라에는 송옥(宋玉), 당륵(唐勒), 경차(景差)와 같은 사람들이 있었는데

모두가 문학을 좋아하여 부(賦)로써 명성이 있었다.

그러나 모두가 굴원과 같이 완곡하고 함축적인 문체에는 능했으나 그들 중 누구도 감히 직간을 행하지 않았다.

초나라는 날이 갈수록 국세가 약화되어 굴원이 죽고 나서 몇 십년 후에 마침내 진나라에 의해 멸당당하고 말았다.

굴원이 멱라수에 몸을 던진 이래 100년여 년이 지나자,

한나라에 가의(賈誼)란 사람이 장사왕의 태부가 되어 상수를 지나다 제문을 지어 물속에 던져 굴원을 애도했다.] 

 【 각주 】  

1) 초무왕의 아들 막오(莫敖) 하(瑕)가 굴(屈에 봉해져 그 성을 굴(屈)로 삼았다.

2) 초회왕(楚懷王)/ 기원전 328년에 즉위하여 296년까지 재위한 초나라 군주다.

미(羋) 성에 이름은 웅괴(熊槐)이며 초위왕(楚威王)의 아들이다.

집정기간 중, 제나라와 합종을 맺어 진나라의 동진을 막았다. 이에 진혜왕(秦惠王)이 장의(張儀)를 보내

제나라와 절교를 하면 그 댓가로 상오(商於)의 땅 6백리를 할양하겠다고 했다.  

상오의 땅을 탐낸 회왕이 제나라와 절교를 하고 사람을 보내 상오의 땅을 받아오게 했다.

그러나 장의는 당시 주기로 한 땅은 6리라고 발뺌을 했다. 분노한 회왕이 군사를 일으켜 진나라를 공격했으나

계속된 싸움에서 많은 군사를 잃고 영토를 빼앗겼다. 진혜왕의 뒤를 이어 즉위한 소왕(昭王)이 회담을 제의하자

무관(武關)으로 들어간 회왕은 진나라에 의해 억류되고 말았다.

진나라는 회왕을 협박하여 초나라 땅의 할양을 요구했으나 응하지 않았다.  

이에 구금된 상태로 있다가 감시가 소흘한 틈을 타서 탈출에 성공했으나

진나라의 추격군에게 사로잡혀 결국은 환국하지 못하고 진나라에서 병들어 죽었다.  

3) 좌도(佐徒)/ 초나라의 관직 이름으로 왕의 정사를 보좌하고 조령(詔令)을 초안했다.

4) 근상(靳尙)/ 전국 때 초나라의 대신으로 초회왕에 의해 상관대부로 임명되었다.

회왕이 굴원에게 나라의 율령을 제정하라고 명하자 그는 질투심에 한을 품고 굴원이 작성한 율령의 초안을

빼앗으려고 시도했으나 그 뜻을 이루지 못하자 굴원이 자기의 공을 지나치게 과시하여 교만해 한다고 참소했다.

이로써 굴원은 회왕의 눈 밖에 나게 되었다. 후에 진나라가 장의를 보내 초나라에 유세를 행하게 하여

초와 제 두 나라의 동맹을 교란시키려고 하자 회왕이 장의를 죽이려고 했다.

그러나 장의로부터 뇌물을 받은 근상은 온 힘을 다해 변호하여 장의가 살아서 돌아가게 했다.  

5)이소(離疎)/ 애타는 걱정에 걸리다, 근심에 걸리다, 애타는 호소, 또는 불평불만(不平不滿)」이라고도 하는데  

보통은 「애타는 호소」라는 뜻으로 해석되고 있다.  

6)진혜왕(秦惠王)/기원전 337년 재위에 올라 311년에 죽은 진나라의 군주다.  

태자시절 사부(師傅) 공자건(公子虔)과 공손가(公孫賈)의 사주를 받아 고의로 상앙(商鞅)이 시행하고 있던  

신법을 범했다. 이에 상앙은 그의 사부들을 잡아 죄를 물었다. 효공의 뒤를 이어 진나라 군주의 자리에 오른 

혜왕은 상앙을 반역죄로 몰아 거열형에 처했으나 상앙이 시행하던 신법은 폐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대외확장과  내정개혁에 더욱 박차를 가했다. 수차에 걸쳐 위(魏)나라를 공격하여 황하 이서 지역의 위나라 령의  

하서(河西) 지구를 수복하고 계속해서 진군하여 북쪽의 상군(上郡)을 점령했다. 

사마착(司馬錯)의 건의를 받아들여 촉(蜀), 저(苴), 파(巴) 등의 나라를 멸하고 진나라의 영토에 편입시켜 

진나라의 국력을 획기적으로 신장시켜 후에 진나라가 중국을 통일하는데 기반을 마련했다. 

제와 초 두 나라가 합종을 행하여 진나라에 대항하려고 하자 장의를 초나라에 파견하여 

600리의 땅을 할양한다고 속임수를 써서 초나라로 하여금 제나라와의 우호관계를 끊게 만들었다. 

이어서 초나라가 군사를 내어 진나라를 공격하자, 단양(丹陽)과 남전(藍田)의 2차에 걸친 싸움에서 

초군을 대파하고 초나라 령이었던 한중(漢中)의 땅 600리를 점령했다.  

초나라를 이로써 국세가 기우러지기 시작하여 후에 결국은 수도를 진나라에 빼앗기고  

나라를 지금의 하남성 진현(陳縣)으로 옮겨야 했다.  

7)위질(委質)/ 타국의 신하가 상대국의 군주를 접견할 때 무릎을 끓고 땅에 엎드리는 의식에서 나온 말로 

순(歸順), 신복(臣服)이란 말로 쓰이게 되었다.  

8)상오(商於)/ 상(商)과 오(於)를 말하며 상(商)은 지금의

9) 삼려대부(三閭大夫)/ 초나라의 관직명으로 왕족에 관련된 업무를 관장했다.

사기집해에 ‘삼려의 직책은 왕족인 즉 소(昭), 굴(屈), 경(景) 등의 삼성의 일을 관장하고 족보를 만들었으며

현량을 이끌고 국사에 참여했다.‘고 했다. 

10)회사(懷沙)/ ‘돌을 가슴에 품고’라는 뜻이다.  

굴원은 이 시를 지은 후에 돌을 가슴에 안고 멱라수에 몸을 던져 죽었다.  

11)교수(巧倕) : 중국 고대 신화상의 인물 공공(共工-技術官)의 이름이다.  

교(巧)는 공공의 재주가 교묘하여 붙인 것이다.  

①신화 상의 인물로 염제의 후손이다. 인면사신(人面蛇身)에 붉은 털의 몸으로 두 마리의 용을 타고 다녔다.  

전욱(顓頊)과 임금의 자리를 놓고 다투다가 화가 나서 부주산(不周山)을 들이받자 하늘을 바치고 있는  

기둥을 부러뜨리고 땅을 감싸고 있던 그물을 끊어 싸움에서 승리를 취했다.  

② 요순(堯舜) 때 대신으로 이름은 궁기(窮奇)이다. 공공은 치수를 담당하는 관직의 이름이기도 하다.  

요임금이 그 신하들과 자기의 후계자로 누구를 세울 것인가에 대해 의논하자 대신 중에 환도(讙兜)라는 사람이 

그를 추천했다. 그러나 요임금이 공공은 입으로는 선을 말하나 속으로는 사악한 마음을 품고 있고,  

겉으로는 공경하는 자세를 취하나 안으로는 커다란 증오심을 품고 있다고 하며 받아들이지 않았다.  

순임금이 요임금의 뒤를 잇자 환도가 다시 그 후계자로 공공을 천거했으나 순임금 역시 요임금의 유시를 따라  

후계자로 지명하지 않았다. 후에 공사(工師)의 직을 맡은 공공은 그의 사악한 행동이 들어나  

환도, 삼묘(三苗), 곤(鮌) 등의 3인과 소위 사흉(四凶)이라는 죄명을 받아 유주(幽州)로 추방되었다.  

12)이루(離婁)/ 눈이 밝아 100보 밖의 가는 털로 볼 수 있었다는 중국 고대 신화상의 황제(黃帝) 때 인물이다.

13)백락(伯樂)/ 춘추 때 진나라 목공 때 사람으로 말을 잘 감별했다.

14) 기원전 279년 초나라의 도성 영도가 백기가 이끄는 진군에게 의해 함락되자 이에 상심한 굴원이  

돌을 가슴에 품고 멱라수에 빠져 죽은 해는 기원전 278년이다.

영성을 빼앗긴 진나라는 나라를 하남성 진현으로 옮겼다가 다시 안휘성 수춘(壽春)에서

기원전 224년 왕전이 거느린 진군에 의해 멸망당했다.]  

 

 

 

賈生名誼,雒陽人也.  年十八,以能誦詩屬書聞於郡中.

吳廷尉為河南守,聞其秀才,召置門下,甚幸愛. 

孝文皇帝初立,聞河南守吳公治平為天下第一,故與李斯同邑而常學事焉,乃徵為廷尉.

​[가생(賈生)의 이름은 의(誼)고 낙양(駱陽) 사람이다.

나이 18세에 능히 시경을 낭송하고 서경에 익숙하여 그 명성이 군내에 알려졌다.

정위(吳廷尉)1)가 하남의 태수로 있을 때 가의가 수재라는 소문을 듣고 불러 문하에 두고 매우 총애했다.

황제의 자리에 오른 효문제가 하남태수 오공(吳公)의 치적이 천하제일이라는 보고를 받았으므로,  

오공이 이사(李斯)2)와 동향으로 그의 학설에 능통하다는 소문을 듣고 그를 불러들여 정위(廷尉)3)로 삼았다.]

 

廷尉乃言賈生年少,頗通諸子百家之書.  文帝召以為博士.  是時賈生年二十餘,最為少.

每詔令議下,諸老先生不能言,賈生盡為之對,人人各如其意所欲出. 

諸生於是乃以為能,不及也.  孝文帝說之,超遷,一歲中至太中大夫.

​[오정의는 가생이 비록 나이는 어리지만 제자백가의 설에 매우 정통하다고 천거했다.

문제는 가의를 불러 박사(博士)4)로 삼았다. 그때 가생의 나이는 20살로 여러 명의 박사 중 가장 어렸다.

황제가 명을 발할 때 매 번 불려가 자문을 받았는데 여러 나이 많은 박사들도 능히 언급할 수 없었던 사안도

가생이 모두 대답했다.  사람들은 모두 가생이 자기들의 하고 싶은 바를 대신 말해주었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여러 박사들은  가생의 재능은 자기들이 미치지 못한다고 여겼다.

효문제가 매우 기뻐하며 그의 직위를 차례를 뛰어 넘어 올렸다.  

가생은 일 년만에 일약 태중대부(太中大夫)5)가 되었다.]

 

賈生以為漢興至孝文二十餘年,天下和洽,而固當改正朔,易服色,法制度,定官名,興禮樂,

乃悉草具其事儀法,色尚黃,數用五,為官名,悉更秦之法.  孝文帝初即位,謙讓未遑也. 

諸律令所更定,及列侯悉就國,其說皆自賈生發之.  於是天子議以為賈生任公卿之位.

​[가생은 한나라가 일어나 문제가 즉위하기까지 20여 년이 지난 당시 천하는 화평하고 백성은 안락함으로

마땅히 정삭(正朔)6)을 바꾸어 역법을 새로 만들고, 복색을 새로 규정하고, 법과 제도를 정비하고,

관명을 새로 정하고, 예약을 일으켜야 한다고 생각하였다.

그래서 그는 예의 법제에 관한 초안을 작성하여 색은 황색을 숭상하고,  

수는 다섯을 쓰며 새로운 관명 등을 새로 만들어 진나라 때 만든 모든 법제를 바꾸려고 하였다.  

효문제는 즉위한 지가 얼마 되지 않아 겸양한 자세로 정사에 임했기 때문에 가생이 마련한 법제 등의

정책을 시행하려는 데는 적극적이지 못했다. 후에 여러 율령들을 모두 바꾸고 제후들은 모두 봉국으로 돌아가

각자의 나라를 다스려야 했던 일은 모두 가생으로 인해서 일어났다.

그래서 천자는 가생을 공경(公卿)의 자리로 승진시키려고 하였다.]

 

絳、灌、東陽侯、馮敬之屬盡害之, 乃短賈生曰:「雒陽之人, 年少初學, 專欲擅權, 紛亂諸事.」

於是天子後亦疏之,不用其議,乃以賈生為長沙王太傅. 

賈生既辭往行,聞長沙卑溼,自以壽不得長,又以適去,意不自得.

[이에 강후(絳侯) 주발(周勃), 영음후(潁陰侯) 관영(灌嬰), 동양후(東陽侯)7) 장상여(張相如)8), 풍경(馮敬)9) 등과  

같은 대신들이 모두 일어나 음해하며 가생의 잘못을 지적하기를 :  

" 낙양의 어린 나이에 학문을 배우기 시작한 자가 정권을 마음대로 휘두르고자 하는 마음에

조정의 정사를 문란케 하고 있습니다."라고 하였다.  그래서 천자는 가생을 멀리하고 

그가 초안한 정책들을 채용하지 않고 마침내 가생을 장사왕의 태부로 보내고 말았다.

천자에게 작별인사를 드리고 임지로 떠나게 된 가생은 장사는 멀리 떨어진 변방에 습한 지역이라

오래 살지 못할 것이라고 스스로 생각했다. 더욱이 좌천되어 가는 자리라 마음이 편하지 못했다.]

 

及渡湘水,為賦以弔屈原.  其辭曰:

[마침내 그가 상수(湘水)를 건널 때 부(賦)를 한 수 지어 굴원을 애도했다. 

그 가사는 다음과 같다.

 

恭承嘉惠兮俟罪長沙(공승가혜사죄장사)10) 

공손하게 천자의 명을 받들어 장사에서 죄를 기다리게 되었구나.
仄聞屈原兮自湛汨羅(측문굴원혜자담멱라)11) 

어렴풋이 들으니 굴원은 스스로 멱라수에 빠져 죽었다는데.
造托湘流兮敬弔先生 (조탁상류혜경조선생) 

흘러가는 상수(湘水)의 물에 몸을 맡겨 삼가 선생의 영전에 조문하노라.

遭世罔極兮迺隕厥身(조세망극혜내운궐신) 

말할 수 없이 무도한 세상을 만나 그 몸을 버렸도다.
嗚呼哀哉兮逢時不祥(오호애재혜봉시불상) 

아! 슬프도다! 좋을 때를 만나지 못함이여.
鸞鳳伏竄兮鴟鴞翶翔(난봉복찬혜치효고상) 

신령스러운 난새와 봉황은 잡새를 피해 숨고 올빼미가 날아다니는구나.
闒茸尊顯兮讒諛得志(탑용존현혜참유득지)12) 

몹쓸 사람은 귀한 몸이 되고 모함하고 아첨하는 자들이 뜻을 얻었구나.

賢聖逆曳兮方正倒植(현성역예혜방정도식) 

현인과 성인은 도리어 끌려 다니고 반듯한 사람은 뒤바뀐 자리에 놓였네.
謂隨夷溷兮謂跖蹻廉(위수이혼혜위척교렴)13)14) 

주려 죽은 변수(卞隨)와 백이(伯夷)는 탐욕스럽다 하고 도척을 청렴하다 말하네.
莫邪爲鈍兮鉛刀爲銛(막야위둔혜연도위섬)15) 

막야(莫邪)의 보검을 무디다 하고 납으로 만든 칼을 날카롭다고 하네.

于嗟黙黙生之亡故兮(우차묵묵생지망고혜) 

아 아! 선생은 말도 못하고 까닭도 없이 이 화를 당하셨구나.
斡棄周鼎寶康瓠兮(알기주정보강호혜)16)17) 

주 왕실의 보물인 세발솥을 버리고 질그릇 단지를 보배라고 하며
騰駕罷牛驂蹇驢兮(등가파우참건려혜)18) 

비쩍 마른 소잔등에다 멍에를 지우고 절름발이 나귀더러 수레를 끌라 하네.
驥垂兩耳服鹽車兮(기수양이복염거혜) 

천리마는 두 귀를 늘어뜨린 채 소금 수레나 끌어야 한다네.

章甫薦屨漸不可久兮(장보천구점불가구혜)19)20) 

갓을 신발 밑에 깔았으니 오래갈 수 없게 되었네.
嗟苦先生獨離此咎兮(차고선생독리차구혜) 

아아! 괴롭구나. 선생이 홀로 이 화를 당하셨네.

誶曰(수왈)  노래를 다 부르고 일러 가로되,
已矣國其莫吾知兮(이의국기막오지혜) 

그만 이로다. 나라가 나를 알아주지 않으니 별수가 없구나.
子獨壹鬱其誰語(자독일울기유어) 

답답하고 분한 마음 홀로 가슴에 맺어둘 뿐 누구에게 말을 할까?
鳳飄飄其高逝兮(봉표표기고서혜) 

봉황은 훨훨 날아 멀리 가버렸네.

夫固自引而遠去(부고자인이원거) 

스스로 쪼그라들어 멀리멀리 가버렸네.
襲九淵之神龍兮沕淵潛以自珍(습구연지신용혜물연잠이자진) 

아주아주 깊은 못을 덮친 신룡은 깊이깊이 잠겨 버렸네.

偭蟂獺而隱處兮夫豈從蝦與蛭螾(면효달이은처혜부기종하여질인) 

도마뱀을 피하여 숨어 있구나. 새우 거머리 따위를 어찌 따를 것인가?
所貴聖之神德兮遠濁世而自藏(소귀성지신덕혜원탁세이자장) 

소중히 여길 것은 성인의 신비로운 덕이니 탁한 세상 멀리 떠나 스스로 숨어버리네.

使麒麟可係而羈兮豈云異夫犬羊(사기린가계이기혜기운이대견양) 

기린(麒麟)도 고삐매어 둔다면 개와 양과 다를 것이 그 무엇인가?
般紛紛其離此郵兮亦夫子之故也(반분분기리차우혜역부자지고야) 

분분한데 섞여서 이런 허물 얻었으니 역시나 부자(夫子-屈原)의 잘못이라.
歷九州而相其君兮何必懷此都也(역구주이상기군혜하필회차도야)21) 

구주(九州)를 두루 돌아 그곳 임금을 도울 것이지 하필이면 이 도성(都城)만을 생각해야 했던가?

鳳凰翔于千仞兮覽德輝而下之(봉황상우천인혜남덕휘이하지) 

봉황(鳳凰)은 천 길 높은 하늘을 날다가 덕이 빛나는 것을 보면 내려오고
見細德之險微兮遙增擊而去之(견세덕지험미혜요증격이거지) 

보잘것없는 덕에서 환란의 징조 보이면 날개 거듭치고서 멀리 떠나버린다.
彼尋常之汗瀆兮豈容呑舟之魚(피심상지한독혜기용탄주지어) 

저 평범한 작은 못이나 도랑이 배를 삼킬 큰 고기를 담을 수야 있으랴.
橫江湖之鱣鯨兮固將制於螻蟻(횡강호지전경혜고장제어루의) 

강호(江湖)에 가로 누운 상어 고래가 땅강아지나 개미에게 제압당할라.]

 

賈生為長沙王太傅三年,有鸮飛入賈生舍,止于坐隅.  楚人命鸮曰「服」.

賈生既以適居長沙,長沙卑溼,自以為壽不得長,傷悼之,乃為賦以自廣.

其辭曰:

​[가생(賈生)이 장사왕(長沙王)의 태부(太傅)가 된지 3년 되던 해에 부엉이가 가생이 묵고 있는 관사에

날아 들어와  방안 한 쪽 모퉁이에 앉았다. 초(楚)나라 사람들은 부엉이를 복(服)이라고 불렀다.  

가생이 좌천되어 머물렀던 장사는 땅이 낮고 습기가 많아 자신이 오래 살지 못할 것으로 계속 생각한 가생이  

마음이 아파 그것을 슬퍼하였기에 '부'를 지어 스스로를 위로했다.

그 내용은 이러했다.

 

單閼之歲兮 四月孟夏 (단알지세혜 사월맹하)24) 

정묘년(丁卯年), 4월 맹하(孟夏)
庚子日施兮 服集予舍(경자일시혜 복집여사), 

경자일(庚子日) 해가 서쪽으로 기울었음이여, 부엉이 한 마리가 내 집으로 날아왔도다!
止於坐隅兮 貌甚閑暇(지어좌우혜 모심한가).

내 방 모서리에 앉았음이여, 그 모습이 매우 한가롭구나!
異物來集兮 私怪其故(이물래집혜 사괴기고), 

예사롭지 않게 날아든 생물이여, 가만히 생각하니 그 까닭이 괴이하도다!
發書占之兮 策言其度(발서점지혜 책언기탁).

서책을 꺼내어 점을 쳐봄이여, 점사가 그 길흉을 알려주노나!
曰“野鳥入處兮 主人將去 請問於服兮“予去何之(왈"야조입처혜 주인장거 청문어복혜" 여거하지) 

이르기를 “ 집으로 날아드는 들새여, 주인이 장차 떠날 괘로다! 물어보건대 부엉이여" 내가 어디로 떠난단 말인가?
吉乎告我 凶言其災(길호고아 훙언기재).

길하면 내게 고하고 흉하면 그 재앙을 알려다오!
淹數之度兮 語予其期(엄수지탁혜 어여기기) 

생사의 늦고 빠름으로 정해진 운명이여, 그 기일을 나에게 말해다오!
服乃歎息 舉首奮翼(복내탄식 거수분익) 

부엉이가 이내 탄식하며 머리를 들고 날개를 퍼득인다.
口不能言 請對以意(구불능언 청대이의) 

입으로는 말을 할 수 없으니 마음으로 대답할 것을 청하노라!
斡流而遷兮 或推而還(알류이천혜 혹추이환) 

휩쓸려가는 소용돌이여, 다시 밀려서 돌아오는 구나!
形氣轉續兮 變化而蟺(형기전속혜 변화이선).

서로 끊어지지 않고 이어지는 외형(外形)과 내기(內氣)여, 매미가 허물 벗듯이 변하는구나!
沕穆無窮兮 胡可勝言(물목무궁혜 호가승언)!

정교하고 심원하며 무궁한 세상의 도리여, 어찌 말로 이야기 할 수 있겠는가?
禍兮福所依 福兮禍所伏(화혜복소의 복혜화소복) 

화는 복에 기댐이여, 복은 화 속에 묻혀 있도다!
憂喜聚門兮 吉凶同域(우희취문혜 길흉동성) 

한 문에 모이는 근심과 기쁨이여, 길하고 흉한 것은 같은 곳에 머무네!
彼吳強大兮 夫差以敗(피오강대혜 부차이패) 

저 강대했던 오나라여, 부차25)가 이로 인하여 망했구나!
越棲會稽兮 勾踐霸世(월서휘계혜 구천패세)26) 

회계에서의 농성했던 월나라여, 그것으로 구천(句踐)은 천하의 패자가 되었구나!
斯遊遂成兮 卒被五刑(사유수성혜 졸피오형)27)28) 

진나라에 유세하여 대업을 이룬 이사(李斯)여, 결국은 오형(五刑)을 받고 멸족되었구나!
傅說胥靡兮 乃相武丁(부열서미혜 내상무정)29) 

형도(刑徒)로 노역을 하던 부열(傅說)이여, 이내 무정제(武丁帝)의 재상이 되었구나!30)
夫禍之與福兮 何異糾纆(부화지여복혜 하이규묵) 

무릇 화가 복을 데리고 다님이여, 새끼줄이 서로 얽혀 꼬여 있음과 무엇이 다른가?
命不可說兮 孰知其極(명부가설혜 수지기극)!

말로 이야기할 수 없는 천명이여, 누가 그 지극함을 알 수 있겠는가?
水激則旱兮 矢激則遠(영격즉한혜 시격즉원) 

물이 격해지면 사납게 됨이여, 화살에 강한 힘이 실리면 멀리 나가도다!
萬物回薄兮 振蕩相轉(만물회박혜 진탕상전) 

만물이 돌고 순환함이여, 부딪치고 서로 돌도다!
雲蒸雨降兮 糾錯相紛(운증우항혜 규착상분);

구름이 되고 증발하여 비가 내림이여, 서로 얽히고 교차하니 분분하구나!
大專檗物兮 坱圠無垠(대전벽물혜 앙알무은) 

천지만물을 창조한 조물주여, 한없이 넓은 세상에 가득찼구나!
天不可與慮兮 道不可預謀(천불가여려혜 도불가예모) 

하늘의 뜻은 너무 높아 예측할 수 없음이여, 천도는 너무 심원하여 미리 도모할 수 없도다!
遲數有命兮 惡識其時(지수유명혜 악식기시)

빠르고 늦은 저 마다 운명이여, 어찌 그 때를 알 수가 있겠는가?
且夫天地爲爐兮 造化爲工(차부천지위로혜 조화위공) 

또한 하늘과 땅을 구워낸 풀무여, 공인의 조화로다!
陰陽爲炭兮 萬物爲銅(음양위탄혜 만물위동) 

음양은 숯으로 변했음이여, 만물은 구리가 되었음이라!
合散消息兮 安有常則(합산소식혜 안유상즉) 

합치고 흩어지고 녹이고 더함이여, 어찌 일정한 법칙이 있겠는가?
千變萬化兮 未始有極(천면만화혜 미시유극).

천 번 변하고 만 번 화함이여, 처음부터 끝이 없구나!
忽然爲人兮 何足控摶(홀연위인혜 하족공박) 

홀연히 사람으로 태어남이여, 내 어찌 오래 사는 것에 연연하겠는가?
化爲異物兮 又何足患(화위이물혜 우하족환)! 

사람이 죽어 다른 것으로 변함이여, 내 어찌 근심하랴!
小知自私兮 賤彼貴我(소지자사혜 천피귀아);

자기만을 생각하는 지혜롭지 못한 자여, 남은 천시하고 자신은 높이도다!
通人大觀兮 物無不可(통인대관혜 물무불가).

그러나 세상을 대관하는 통달한 사람이여, 생사화복(生死禍福)이 마땅하지 않음이 없구나!
貪夫殉財兮 烈士殉名(탐부순재혜 열사순명);

탐욕스러운 사람 재물에 목숨을 검이여, 열사는 명예로운 이름에 거는구나!
誇者死權兮 品庶馮生(과자사권혜 물서풍생).

허명을 쫓는 사람 권세에 목숨을 검이여, 평범한 사람은 삶에만 매달리는구나!
怵迫之徒兮 或趨西東(술박지도혜 혹추서동);

명리에 유혹되고 빈천에 쫓기는 자들이여, 이리저리 달리느라 분주하구나!
大人不曲兮 億變齊同(대인불곡혜 억변제동) 

결코 물욕에 현혹되지 않은 대인이여, 억만 번 변해도 한결 같구나!
拘士系俗兮 窘若囚拘(구사계속혜 군약수구) 

세속에 묶인 어리석은 사람이여 자신을 죄수처럼 가두는구나!
至人遺物兮 獨與道俱(지인유물혜 독여도구).

만물을 초월한 지극한 덕성의 사람이여, 홀로 도(道)와 함께 하는구나!
眾人惑惑兮 好惡積億(중인혹혹혜 호오적억)

미혹에 빠진 세상 사람들이여, 호오를 가슴에 쌓도다!
真人淡漠兮 獨與道息(진인담막혜 독여도식).

담백무위(淡白無爲)의 진인(眞人)이여, 홀로 도(道)와 함께 머무르고 있구나!
釋知遺形兮 超然自喪(석지유형혜 초연자상)

지혜도 버리고 형체도 벗어남이여 자신도 잊어 초연하구나!
寥廓忽荒兮 與道翱翔(료곽홀황혜 여도고상)

광대무변하고 황홀한 경지여 도(道)와 함께 훨훨 공중을 나는도다!
乘流則逝兮 得坻則止(승류즉서혜 득지즉지)

물길을 타고 흘러감이여 모래섬에 부딪치면 멈추도다!
縱軀委命兮 不私與己(종구위명혜 불사여기)

육신을 내놓아 운명에 맡김이여 자기의 몸은 사사로운 것이 아니도다.
其生若浮兮 其死若休(기생약부혜 기사약휴)

뜬 구름과 같은 삶이여 죽음은 휴식처로다!
澹乎若深 淵止之靜(담호약심연지지정)

마음의 담담함은 깊은 심연의 고요함과 같고
汜乎若不系之舟(사호약불계지주)

공중에 둥둥 떠다님은 줄에 매이지 않은 작은 배라
不以生故自寶兮 養空而浮(불이생고자보혜 양공이부)

살아 목숨에 연연하지 않음이여, 마음을 비워 구름처럼 떠다니도다!
德人無累兮 知命不憂(덕인무루혜 지명불우)

세속에 찌들지 않은 지극히 높은 품덕이여 하늘의 명을 즐거워하니 어찌 근심하는 바가 있겠는가?
細故蒂芥兮 何足以疑(세고체개헤 하족이의)!

초목의 가시 같은 구구한 세상사여, 어찌 의심할만한 가치가 있겠는가!

 

後歲餘,賈生徵見.  孝文帝方受釐,坐宣室.  上因感鬼神事,而問鬼神之本.

賈生因具道所以然之狀.  至夜半,文帝前席.

既罷,曰:「吾久不見賈生,自以為過之,今不及也.」 居頃之,拜賈生為梁懷王太傅.

[그리고 일 년이 조금 더 지난 후 가생은 부름을 받고 황제를 뵈었다.

그때 효문제는 마침 제사 지낸 고기를 받고 선실()에 앉아 있었다.

귀신의 일에 대해 의식하기 시작한 한문제가 가생에게 그 정체에 대해 물었다.  

가생은 귀신의 각종 형태에 대해 소상하게 말했다. 이윽고 시간이 밤중이 되자,

문제는 자리를 가생 앞으로 당겨 앉아 흥미를 더욱 표시했다. 이윽고 귀신에 대한 이야기가 끝나자,  

문제가 말하기를 : "  내가 오랫동안 그대를 보지 못해 내 스스로 그대 가생보다 낫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오늘 보니 내가 미치지 못함을 알았노라!"라고 하였다.  

그리고 얼마 후에 가생은 양회왕(梁懷王)33)의 태부(太傅)로 임명되었다.]

 

梁懷王,文帝之少子,愛,而好書,故令賈生傅之.

 

文帝復封淮南厲王子四人皆為列侯.  賈生諫,以為患之興自此起矣. 

賈生數上疏,言諸侯或連數郡,非古之制,可稍削之.  文帝不聽. 

[양회왕은 문제의 작은 아들로 총애를 받았으며 독서를 좋아했기 때문에 가생을 그 스승으로 삼은 것이다.

문제가 다시 회남려왕(懷南厲王)34)의 네 아들을 모두 열후에 봉하자,

가생이 그로 인해 환란이 일어날 것이라고 간했다. 가생은 여러 번 상소를 올려 제후들의 봉지가 너무 넓고

심지어는 여러 개의 군을 영지로 갖게 되는 일은 옛 제도에 부합하지 않음으로

서서히 제후들의 영지를 삭감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문제는 가생의 말을 듣지 않았다.]

 

居數年,懷王騎,墮馬而死,無後. 賈生自傷為傅無狀,哭泣歲餘,亦死.

賈生之死時年三十三矣.
及孝文崩,孝武皇帝立,舉賈生之孫二人至郡守,而賈嘉最好學,世其家,與余通書.

至孝昭時,列為九卿.

[그리고 몇 년 후에 양회왕이 말을 타다가 떨어져 죽었으나 후사가 없었다.

가생은 회왕의 태부로써의 직분을 다하지 못했다고 자책하고 상심하여 일 년여를 곡하다가 결국은 죽고 말았다.

그때 가생은 33살의 젊은 나이였다.  

효문황제가 죽고 효무황제가 설 때가지 가생의 후손들 중 두 사람이 군수의 자리에 올랐고

그 중에서 학문을 좋아한 가가(賈嘉)는 그것으로 가문을 이루어 대대로 전해졌다.

나는 가가와 편지를 주고받은 적이 있었다. 소제(昭帝) 때에 이르러 그는 구경(九卿)의 대열에 올랐다.]  

 

太史公曰:

余讀離騷、天問、招魂、哀郢,悲其志.  適長沙,觀屈原所自沈淵,未嘗不垂涕,想見其為人.
及見賈生弔之,又怪屈原以彼其材,游諸侯,何國不容,而自令若是.

讀服烏賦,同死生,輕去就,又爽然自失矣.

​[태사공이 말한다.

나는 이소(離騷), 천문(天問), 초혼(招魂), 애영(哀郢) 등의 굴원의 시를 읽고 그의 품은 뜻을 슬퍼했다.

또 장사에 갔을 때 굴원이 빠져 죽은 깊은 강물을 보고 눈물을 흘리며 굴원이라는 사람이 어떤 인물인지를

생각해 봤다.  

그리고 굴원을 조상한 가생의 글을 보고 당시 굴원이 그의 재능으로 제후들에게 유세했더라면

그를 받아들이지 않을 나라는 없었을 것임에도 스스로 그와 같이 행동을 한 것은 정말로 이상하게 생각했다.  

그러나 복조부를 읽고 삶과 죽음을 같다고 여겨 진퇴를 가볍게 생각했기 때문이라는 사실을 알았다.  

그래서 나는 할 말을 잃고 마치 무엇인가 잃어버린 것을 찾았다는 생각을 금할 수 없었다.]  

 

 【 각주 】  

1) 오정위(吳廷尉)/ 오공(吳公)이라고 칭하며 이름은 알려져 있지 않았다.  

    그가 하남의 태수로 있을 때 가의가 문재(文才)가 있음을 알고 불러 문하에 두고 매우 총애했다.  

    황제의 자리에 오른 문제가 하남이 크게 다스려졌다는 소식을 들었는데

    그 태수가 이사(李斯)와 같은 고을 출신에 또한 이사의 학술에 매우 밝다는 사실을 알고 불러 정위로 삼았다.  

2) 이사(李斯)/ 태어난 해는 미상이고 기원전 208년 에 죽었다. 상채(上蔡) 사람으로 원래는 여불위(呂不韋)의  

    식객이었으나 후에 승상의 자리에 오르고 진시황(秦始皇)을 도와 중국 최초의 통일국가를 창건하는데

    가장 큰 공을 세웠다. 진(秦)나라의 정체를 중앙집권제의 군현제를 확립하고 유가(儒家)들을 탄압하여

    분서갱유(焚書坑儒)를 일으켰다. 진시황(秦始皇)이 죽자 조고(趙高)와 모의하여 장자(長子)인 부소(扶蘇)를

    폐출 시키고 차남인 호해(胡亥)를 제위에 올렸다. 후에 권력싸움에서 조고(趙高)에게 패하여 피살되었다.  

    그의 행적은 열전(列傳) 편에 상세히 기록되어 있다.  

3) 정위(廷尉)/ 전국의 형옥(刑獄)에 관한 모든 일을 관장한 관리들의 장관으로 구경에 속했다.  

    매년 전국에서 행해졌던 형옥의 일을 취합하고 그 중 주군(州郡)이나 현에서 의심스러운 사건은

    정위에게 보고하여 판결을 요청했다. 정위는 항상 속관을 지방에서 일어난 사건의 진상을 파악하기 위해 

    파견하고 다시 황제와 삼공에게 올바른 판결을 위한 의견을 제출했다. 정위는 황제의 명령에 근거하여 

    제후왕이나 대신들을 체포 구금한 후에 일의 내막을 조사하고 판결했다.

    그 밖의 예의나 율령은 모두 정위가 간직하다가 사건의 추이에 따라 그들의 권한으로 고칠 수 있었다. 

    분(分), 척(尺), 촌(寸), 장(丈) 등의 도량형의 표준을 정하는 것도 정위의 소관이었다. 

    ​정위는 2천석이고 1천석에 해당하는 정위정과 좌·우의 감(監) 각 1인 씩과 그 밑에 연사(掾史)를 두었다.  

4) 박사(博士)/선진시대 일반적으로 박학댜식한 사람들을 부르던 통칭이었다가 관명으로 변했다.  

    전국 말 제, 위, 진(秦) 나라가 먼저 설치하고 진나라와 한나라가 답습하여 봉상(奉常 ="太常)의" 속관으로 했다.            제자백가의 설, 시부(詩賦), 방기(方技), 술수(術數) 등의 분과로 나누어 박사를 두고 정치에 관해 고문과 공론을     

    행하는 군왕들의 참모역할과 의식(儀式)을 주관하는 예관(禮官)을 겸했다.  

    한무제 건원(建元) 원년 기원전 136년, 처음으로 오경박사(五經博士)를 설치하고 시경(詩經)을 전문하는 박사는     

    제(齊), 노(魯), 한(韓) 삼가에서 서(書), 역(易), 예(禮), 공양춘추(公羊春秋)는 각 일가 씩

    모두 7명의 박사를 두었다. 한선제(漢宣帝) 황룡(黃龍) 원년 기원전 49년, 박사의 정원을 12명으로 늘렸다.

    시경에 대해서는 예전의 3가로 하고, 서경(書經)은 구양(歐陽)과 대소(大小) 하후(夏后) 3가,

    역경(易經)은 시(施), 맹(孟), 양구(梁丘) 3가, 예경(禮經)은 종전의 1가, 춘추(春秋)는 곡량(谷梁),

    공양(公羊) 2가로 했다. 원제 때는 역경에 경(京) 일가를 증원하고 평제(平帝)와 왕망(王莽) 연간에는

    악경(樂經)에도 박사를 두고 매 경마다 박사의 수를 5명으로 대폭 늘려 모두 30명으로 했다.

    무제 이래 박사가 관장하는 업무는 계속 늘어나 정치를 의론하고, 예를 제정하며,

    서책의 보관, 후계자들에 대한 교육, 정책의 제시, 천자의 명을 받아 사자의 임무를 수행했다.

    진과 서한 시대 박사들의 녹봉은 6백석으로 비교적 낮은 편에 속했으나 그 위상은 매우 높아 

    승진이 나 이동이 급하게 이루어졌으며 한나라 왕조 때 박사 출신으로 공경이 되어 업적을 남긴 자가 

    매우 많은 것은 이 때문이다.  

5) 태중대부(太中大夫)/ 진나라가 설치하고 한나라가 계승한 관직으로 조정의 공론과 고문에 응하는 직책으로  

    일정한 직책이 없이 황제의 명이 있을 때에 한하여 업무를 보았다. 궁중에 기거하면서 명의상으로는  

    낭중령(郎中令 : 후의 광록훈(光祿勛))의 속관이었으나 실제로는 광록훈의 지휘를 받지 않았던 

    황제의 고급 참모에 해당했다. 봉록은 1천석으로 급사중(給事中), 시중(侍中)으로 불리며 황제의 측근에서 

    보좌했기 때문에 영향력이 권력이 매우 컸다.  

6) 정삭(正朔)/ 고대 역법(曆法)의 용어다. 즉 정월의 삭일(朔日)로 일년이 시작되는 첫 째 날을 말한다.  

    중국 고대의 여러 왕조들은 각기 다른 역법을 사용했기 때문에 각 달이나 정월이 같지 않았다.  

    주나라 때의 정월은 동지가 있는 음력 11월을 정월로 삼았는데 초하루 날 황혼무렵의 북두칠성이 정북을

    가르킨다고 해서 자정(子正), 건자(建子) 혹은 주정(周正)이라고도 칭했다.

    상나라 때는 동지날의 한 달 후를 정월로 삼았는데 그 때의 북두칠성은 동쪽으로 약간 기우러진

    축(丑) 시 방향을 가리킨다고 해서 축정(丑正), 건축(建丑) 혹은 은정(殷正)이라고 했다.

    다시 하(夏)나라로 거슬러 올라가면 동짓날 두 달 후를 정월로 삼았는데  

    그때의 북두칠성은 북쪽으로 기우러진 동쪽의 인(寅) 시를 가리킨다고 해서 인정(寅正), 건인(建寅)

    혹은 하정(夏正)이라고 칭했다. 현재의 음력은 하정(夏正)을 취하고 있다.  

    서로 다른 역법은 정월이나 달 및 그 달의 초하루, 간지, 시간 등으로 인해 윤달의 위치도 서로 다르게 되었다.  

    정삭을 바꾼다는 것은 역법을 개혁하여 새로운 역법을 채용한다는 뜻이다.  

7) 동양후(東陽侯)/ 태어난 해는 알 수 없고 기원전 165년에 죽은 서한 초의 대신 장상여(張相如)를 말한다.  

    진한 교체기에 유방이 기의할 때 참가하여 많은 전공을 세웠다.

    한고조 6년 기원전 201년 중대부(中大夫)가 되고 후에 하간(河間)의 태수가 되어 치적을 쌓았고

    또한 군사를 잘 부렸다. 조나라 상국 진희가 반할 때 그는  하간의 군사를 이끌고 유방의 토벌군에 종군하여

    진희를 공격하고 이어서 주발과 함께 대 땅을 평정하여 군공을 세웠다.

    한고조 11년 기원전 196년 동양후(東陽侯)에 봉해지고 천 3백호의 식읍을 받았다.  

    문제가 즉위하자 태자의 태부(太傅)가 되었다. 문제 전원년 14년 기원전 166년 흉노의 노상(老上) 선우가  

    기병 14만을 이끌고 한나라의 국경을 침범하자 그는 대장군이 되어 출정하여 막았다.  

    양군이 한 달 동안 서로 대치하여 비록 싸움에서 승리를 얻지 못해 전공을 세우지는 못했지만 결국 흉노가

    더 이상 한나라 경내로 들어오지 못하고 물러가야했다. 다음 해에 병으로 죽었다.

    시호는 동양무후(東陽武侯)다.  

8) 장상여(張相如)/ 태어난 해는 알 수 없고 기원전 165년에 죽은 서한 초의 대신으로 봉호는 동양후(東陽侯)다.  

9) 풍경(馮敬)/ 서한 초의 대신으로 진나라 장군 풍무택(馮毋擇)의 아들이다.  

    한초 쟁패시 위나라의 기병대 장수였다가 한신이 위나라를 정벌할 때 한나라에 항복했다.  

    한문제 9년 기원전 171년 전객(典客)에서 어사대부에 올랐다. 가의가 제장한 율령과 의례를 반대했다.

    ​또한 문제에게 회남왕 유장(油長)이 조정의 법도를 지키지 않은 것을 사악한 행위에 해당한다고 폭로했다.

10) 가혜(嘉惠) : 천자로부터 입은 은혜라는 뜻이다. 한문제(漢文帝 재위 전202-157년)의 신임이 두터운  

      가의(賈誼)를 간신들이 참소했다. 문제가 곧이듣고 가의를 장사왕(長沙王)의 태부(太傅)로 좌천시켰다.  

      이에 가의는 문제가 자기를 죽이지 않았음으로 은혜를 입었다고 한 것이다.  

11)멱라(汨羅) : 강서성(江西省)과의 접경지역에서 발원하여 서남으로 흐르다가 동정호(洞庭湖)로 들어가는  

     지금의 멱강(汨江)을 말한다. 강하류에 멱라시가 있으며 그 북쪽에 굴원(屈原)을 모신 사당(祠堂)이 있다.  

12) 탑용(闒茸) : 탑(闒)은 쪽문, 용(茸)은 작은 풀을 말한다. 모두 무능한 소인배들을 가리킨다.

13) 수이(隨夷) : 수(隨)는 은(殷) 나라 탕왕(湯王) 때의 현자(賢者) 변수(卞隨)로써 탕왕(湯王)이 천자(天子)의  

      자리를 그에게 양위(讓位)하려 하였으나 천하는 아무 짝에도 쓸 곳이 없다하며 받지 않았다.

      이(夷)는 백이(白夷)로써, 부왕(父王)이 고죽국(孤竹國)의 왕 자리를 숙제(叔弟)에게 맞기니

      숙제는 형인 백이(白夷)에게 양보했다. 백이(白夷)는 부왕(父王)의 뜻을 받들지 않았다.

      이에 백이와 숙제는 모두 고죽국을 떠나 주(周)나라로 들어가 주문왕(周文王)을 모셨다.

      문왕의 아들 무왕(武王)이 은(殷)의 주왕(紂王)을 치니, 백이(白夷)와 숙제(叔弟)는 신하(臣下)로서 임금을

      쳐서는 안 된다고 간(諫)하고, 주(周) 나라의 곡식은 먹지 않겠다고 맹세하며  

      수양산(首陽山)으로 들어가 고사리를 뜯어먹다가 굶어죽었다.  

14) 척교(跖礄) : 척(跖)은 춘추 때 노(魯)나라의 대도 도척(盜跖)으로 노희공(魯僖公 : 재위 전659-627) 때  

      노나라 대부를 지낸 유하혜(柳下惠) 전획(展獲)의 동생이다.  

      교(礄)는 장교(莊礄)로 초회왕(楚懷王 : 재위 전 328-299) 때 영(郢)에서 수많은 무리를 이끌고

      난을 일으켰으나 성공하지 못했다. 두 사람 모두 춘추전국 시대 때 전설적인 도적의 우두머리다.  

15) 막야(莫邪) : 오(吳)나라의 장인 간장(干將)의 아내를 말한다. 오왕 합려(闔閭 : 재위 전514-496년)의 명을  

      받은 간장이 그의 아내와 명검 두 자루를 만들어 양(陽)에 해당하는 검에는 간장(干將),

      음(陰)에 해당하는 검에는 막야(莫邪)로 이름 지어 왕에게 바쳤다.

      이후로 간장과 막야는 칼날이 예리한 명검을 칭하는 말이 되었다.  

16) 정(鼎) : 하(夏)나라의 우(禹) 임금이 천하의 물길과 땅을 평정한 다음 전국을 구주(九州)로 나누고

      그것을 상징하는 아홉 개의 정(鼎)을 주조하였다. 이후로 천하의 최고 권력을 상징하는

      전국(傳國)의 보기(寶器)가 되었다.  

17) 강호(康瓠) : 기와로 만든 큰 표주박 모양의 그릇. 강(康)은 대(大), 호(瓠)는 표주박이다.

18) 참(驂) : 수레를 끄는 네 마리 말을 통틀어 사(駟)라 하고 그 중 바깥쪽의 두 마리를 참(驂)이라 한다.  

      참마(驂馬) 중 왼쪽 것은 좌참마(左驂馬) 오른쪽 것은 우참마(右驂馬)다.  

19) 장보(章甫) : 은(殷)나라 사람들이 쓰고 다니던 검은 색의 비단으로 만든 모자를 말한다

20) 장보천구(章甫薦屨) : 장보관이 신발 밑에 깔린 것과 같이 세상이 뒤집혀져 있음을 의미한다.

21) 구주(九州) : 하나라를 세운 우(禹)임금이 중국 전역을 아홉 주로 나누어 다스렸다.  

      아홉 주의 이름은 기(冀), 예(豫), 청(靑), 서(徐), 양(揚), 형(荊), 연(兗), 양(梁), 옹(雍)이다.  

22) 천인(千仞) : 산이나 바다가 아주 높거나 깊은 것을 말한다. 참고로 인(仞)은 주나라 때 길이를 재는 단위로  

      7자에 해당했다. 주나라 때 1자는 약 23cm에 해당함으로 1인은 1.6m, 천인은 1.6km에 달하는 거리다.  

23) 심상(尋常) : 심(尋)은 여덟 자(8尺), 상(常)은 심(尋)의 그 배(倍)가 되는 것을 말함

24)단알지세(單閼之歲)/ 12지간 중 묘(卯)의 별칭으로 기년(紀年)으로 사용한다.  

      문제 7년 기원전 173년으로 정묘년에 해당한다.  

25) 부차(夫差)/ 태어난 해는 알 수 없고 기원전 495년에 왕위에 올라 473년에 죽었다.

      춘추 때 오나라의 왕으로 희성(姬姓)에 오왕의 합려(闔閭)의 아들이다. 즉위 초에는 정사에 힘쓰고 내정을

      개혁하여 부국강병을 이룬 다음 자기의 부왕인 합려를 죽게 만든 월나라를 공격하여 월군을 격파하고

      그 왕 구천을 사로잡고 월나라를 속국으로 만들었다. 후에 자존망대하여 사치를 일삼고 

       간신 백비의 참소를 믿고 충신 오자서를 죽였다. 지금의 장강 북안 도시인 양주시(揚州市)부터 

       청강시(淸江市) 까지 한구(邗溝)라는 운하를 파고, 수로를 이용하여 군사를 북진시켜 중원에 대한 패권을 

       장악하기 위해 애릉(艾陵 : 지금의 산동성 래무(萊蕪)에서 제나라와 싸워 크게 이겼다.

      주경왕 38년 기원전 482년에는 황지(黃池)에서 중원의 제후국들을 대거 소집하여 당진과 맹주를 다투었다.

      월나라가 그 틈을 타서 오나라를 기습하자 부차는 회군하여 월나라와 강화를 맺었다.  

      후에 몇 차례에 걸쳐 월나라와의 싸움에서 패했다. 주원왕 3년 기원전 473년에 월나라가 대거 공격해와  

      고소대(姑蘇臺)를 포위하고 항복을 받아냈다. 월왕은 그를 지금의 주산열도를 말하는 용동(甬東)에

      옮겨 살게 하려고 했으나 그는 치욕을 받아 들일 수 없다고 하며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오나라는 부차에 의해 망하고 월나라에 병합되었다.  

26) 구천(句踐)/ 춘추 후반기의 월나라 군주로 태어난 해는 알 수 없고 월왕 윤상(允常)의 뒤를 이어 

       기원전 495년에 왕위에 올라 기원전 465년까지 30년간 재위에 있었다. 기원전 496년 구천이 

       군사를 일으켜 오나라를 공격했다. 구천은 지금의 절강성 가흥시(嘉興市)였던 취리(檇李)에서 싸워 

       오군을 대패시키고 합려의 발가락을 잘랐다. 합려는 그 때 입은 부상으로 얼마 후에 죽었다. 

       2년 후인 기원전 495년 부차와 지금의 강소성 오현(吳縣) 서남의 태호(太湖) 가운데의 부초산에서의 

       싸움에서 크게 지고 패잔병을 이끌고 회계산으로 도망쳐 농성하다가 강화를 맺고 부차의 포로가 되었다. 

       구천은 오나라로 끌려가 부차의 수레를 끄는 마부가 되어 굴욕적인 생활을 해야 했다. 

       후에 범려와 문종을 발탁하여 국정을 정비하고 와신상담(臥薪嘗膽)의 자세로 10년 동안 국력을 비축하고 

       10년 동안 군사를 조련한 다음 오왕 부차가 중원을 제패하기 위해 북상하고

      오나라가 비워 있는 틈을 타서 쳐들어가 일거에 그 도성을 점령했다. 계속하여 오왕 부차의 뒤를 추격하자

      부차는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부차의 뒤를 이어 북쪽으로 진출하여 지금의 산동성 등주시(滕 州市) 남쪽의

      서주(徐州)에서 중원의 제후들을 대거 소집하여 패자가 되었다.  

27) 이사(李斯)/ 태어난 해는 미상이고 기원전 208년 에 죽었다. 상채(上蔡) 사람으로 원래는 여불위(呂不韋)의  

      식객이었으나 후에 승상의 자리에 오르고 진시황을 도와 진(秦) 나라의 정체를 중앙집권제의 군현제를  

      확립하고 유가(儒家)들을 탄압하여 분서갱유(焚書坑儒)를 일으켰다. 진시황(秦始皇)이 죽자 조고(趙高)와

      모의하여 장자(長子)인 부소(扶蘇)를 폐출 시키고 차남인 호해(胡亥)를 제위에 올렸다.

      후에 권력싸움에서 조고(趙高)에게 패하여 피살되었다.

      그의 행적은 사기 이사열전(李斯列傳) 편에 상세히 기록되어 있다.  

28) 오형(五刑)/ 고대의 다섯 가지의 형벌. 즉 얼굴에 글을 새기는 묵형(墨刑), 코를 배는 의형(劓刑),  

      종지뼈를 제거하여 앉은뱅이를 만드는 빈형(臏刑), 생식기를 제거하는 궁형(宮刑),  

      그리고 사형에 처하는 대벽(大辟)을 말한다. 빈형(臏刑)을 당한 사람으로서는 전국시대(戰國時代)

      제나라의 병법가 손빈(孫臏)이 있고 궁형을 받은 사람은 사기(史記)의 저자 사마천(司馬遷)이 있다.  

      이사가 오형을 받았다함은 상기의 다섯 가지의 형을 모두 한꺼번에 받아 참혹하게 죽었다는 것을 말한다.  

29) 부열(傅說)/ 하나라의 무정제(武丁帝)가 즉위하여 쇠락해진 은나라를 부흥시키려고 하였으나 자신을

      보좌해줄 사람을 찾지 못하고 있었다. 그래서 그는 3년 동안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정사는 총재(冢宰)에게

      맡겨놓고 나라의 기풍을 유심히 살폈다. 무정제가 꿈속에서 성인을 만났는데 그 이름을 열(說)이라 하였다.  

      무정제는 꿈에서 본 열의 모습을 대신과 관리들 속에서 찾았으나 발견할 수 없었다.

      이에 백관들에게 나라 밖에서 찾아보게 했는데 드디어 부험(傅險)이란 곳에서 열을 찾아냈다.

      열은 죄를 짓고 노역에 끌려나가 부험에서 길을 닦고 있었다.

      무정제가 보고 “ 바로 이 사람이 내가 꿈속에서 본 사람이다.」 라고 말했다. 이어서 그와 이야기를 

       나누어 보니 과연 성인이었다. 이에 열을 등용하여 재상으로 삼으니 은나라는 훌륭히 다스려졌다.  

      무정제는 열을 부험이라는 곳에서 찾았다하여 그를 부열(傅說)이라고 불렀다.  

30) 무정제(武丁帝)/ 중국 상왕조의 제28대 왕으로 묘호는 고종(高宗)이다. 상나라는 군주가 살아 있을 때는  

      왕으로 칭하고 죽은 후에는 제(帝)로 칭했다. 소을제(少乙帝)의 아들이고 조경제의 아버지다.

      전설에 의하면 소을제는 무경제가 어렸을 때 오랫동안 민간에 맡겨 살게 하면서 농사일을 거들어

      일반 백성들과 같이 지내게 했다. 다시 무경제에게 군사를 주어 외적을 정벌시켰다.

      소을제의 뒤를 이어 상나라 군주가 된 무정은 감반(甘盤)이라는 사람을 재상으로 삼았다가

      다시 부암(傅岩)이라는 곳에서 죄수의 신분으로 노역을 하던 부열(傅說)이라는 사람을 발견하여 재상으로

      등용하여 내정을 개혁하고 덕을 베풀었으며, 밖으로는 군사를 보내 서북의 귀방(鬼方)과 강방(羌方)을 

       평정하고 남쪽의 형만(荊蠻)을 무찔렀다. 이로써 상나라의 통치지역은 크게 확대되었다.  

      무정제는 55년 동안 재위에 있으면서 상나라의 최전성기를 이룩했다.  

31) 선실(先室)/ 미앙궁(未央宮) 내에 있었던 궁실의 이름으로 주로 황제가 국가의 중요한 제사나

      의식을 참석하기 위해 제계를 행할 때 거처했다.  

32) 수리(受釐)/ 한나라는 오치(五畤)에서 하늘과 땅에 제사를 지내는 제도가 있었다. 황제는 사람을 보내 제사를  

      지낸 후에 제사를 지낼 때 사용한 고기를 거두어 황제에게 바치도록 해서 복을 받는 것을 표시했는데  

      이것을 수리(受釐)라 했다. 오제(五帝) 즉 황제(黃帝), 염제(炎帝 : 赤帝), 백제(白帝), 청제(靑帝), 흑제(黑帝)

      등에게 제사지는 장소를 모두 합쳐 오치(五畤)라 통칭했다. 

      오치는 지금의 섬서성 봉상(鳳翔) 서남쪽에 있었다.  

33) 양회왕(梁懷王)/ 태어난 해는 알 수 없고 기원전 168년에 죽은 서한의 제후왕으로 이름은 유읍(劉揖)이다.  

      한문제의 작은 아들로 시(詩)와 서(書)를 즐겨했고 문제 2년 기원전 178년 양왕에 봉해졌다.  

      문제 12년 기원전 168년 말에서 떨어져 죽었다.  

34) 회남려왕(懷南厲王)/ 기원전 198년에 태어나서 174년에 죽은 한고조 유방의 작은 아들로 이름은

      유장(劉長)이다. 고조 11년 기원전 196년 회남왕(淮南王)에 봉해졌다. 문제 치세시 교만에 빠져 발호했다.  

      입조 할 때는 항상 황제가 타는 수레에 같이 동승하여 사냥을 나가고 봉국에 머물 때는 한나라 법을 무시하고       스스로 법령을 따로 만들어 운용했다. 문제 6년 기원전 174년 흉노와 민월의 수령등과 연합하여

      반란을 획책했으나 사전에 발각되어 제후왕에게 폐위되어 촉군으로 유배를 가던 중 음식을 끊어 죽었다.  

 

 

 

 ※  原 文 .    【 中國哲學書電子化計劃 .   筆寫本 】

 

                                 

 

     原 文   飜 譯 者        德庤 / 李   斗 振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