史記 世家(사기세가)/24. 曹相國世家

第 二十四. 曹相國世家(조상국세가)

덕치/이두진 2021. 7. 12. 19:13

 

               史記 世家

 

 

   第 二十四.  曹相國世家(조상국세가)

 


平陽侯曹參者,沛人也. 秦時為沛獄掾,而蕭何為主吏,居縣為豪吏矣.

高祖為沛公而初起也,參以中涓從. 將擊胡陵、方與,攻秦監公軍,大破之.

東下薛,擊泗水守軍薛郭西. 復攻胡陵,取之. 徙守方與. 方與反為魏,擊之.

豐反為魏,攻之. 賜爵七大夫.

[평양후(平陽侯) 조참(曹參)은 패현(沛縣) 사람이다. 조참은 진(秦)나라 때 패현의 옥연(獄掾)이 되었고,
소하(蕭何)는 주리(主吏)가 되었는데, 그들은 현(縣)에서 위세 있는 관리였다.
한고조(漢高祖)가 패공(沛公)이 되어 궐기할 때, 조참은 중연(中涓)의 신분으로 군대를 이끌고
호릉(胡陵), 방여(方與) 지방으로 진격해 진(秦)나라의 감공(監公)의 군대를 공격해 대파했다. 
조참은 동쪽으로 설(薛)을 점령했고, 설의 외성 서쪽에서 사수(泗水) 군수의 군대로 진격했다가

재차 호릉을 공격해 점령했다. 조참이 방여를 수비하러 이동했는데, 방여는 이미 위왕(魏王)에게 투항했기에,

조참은 곧 방여를 향해서 진격했다.  풍읍(豐邑)에서도 모반이 일어나 위(魏)나라에 투항하자,

조참은 또 풍읍을 공격했다. 패공은 조참에게 칠대부(七大夫)의 작위를 하사했다.]

 

擊秦司馬夷軍碭東,破之,取碭、狐父、祁善置.  又攻下邑以西,至虞,擊章邯車騎.

攻爰戚及亢父,先登.  遷為五大夫.  北救阿,擊章邯軍,陷陳,追至濮陽.

攻定陶,取臨濟.  南救雍丘.  擊李由軍,破之,殺李由,虜秦候一人.

[조참은 탕(碭)의 동쪽에서 진(秦)나라의 사마이(司馬夷)의 군대를 향해 진격해 적군을 격파시켰고

탕현, 고보현(孤父縣), 기현(祁縣)의 선치읍(善置邑)를 탈취하였다.
또 하읍(下邑)이 서로 공세를 취하자 우현(虞縣)을 쳤고, 장한(章邯)의 거기(車騎) 부대를 향해서 진격했다.
원척(爰戚)과 항보(亢父)를 공격할 때 조참은 제일 먼저 성루에 올랐기 때문에 오대부(五大夫)로 승진되었다.
그는 북쪽으로 아현(阿縣)을 구원하고 장한의 군대로 진격해 진(陳)을 함락시켰고 복양(濮陽)까지 추격했다.
또 조참은 정도(定陶)를 공격했고 임제(臨濟)를 탈취했다. 그는 남쪽을 향해서 옹구(雍丘)를 구원했고
이유(李由)의 군대를 공격해 격파시켜, 이유를 사살하고 진(秦)나라 군대의 군후(軍侯) 한 명을 포로로 잡았다.]

 

秦將章邯破殺項梁也,沛公與項羽引而東.  楚懷王以沛公為碭郡長,將碭郡兵.

於是乃封參為執帛,號曰建成君.  遷為戚公,屬碭郡.  其後從攻東郡尉軍,破之成武南.

[이때 진나라 장수 장한은 항량(項梁)의 군대를 격파하고 항량을 살해했다.
이에 패공과 항우(項羽)는 군대를 이끌고 동쪽으로 귀환했다.

초회왕(楚懷王)은 패공에게 탕군(碭郡)의 장이 되게 하여 탕군의 군대를 통솔하게 하였다. 

이때 패공은 조참을 집백(執帛)으로 봉했고 건성군(建成君)이라고 칭했다.

또 조참을 척현(戚縣)의 현령인 척공으로 승진시키고 탕군을 그에게 예속시켰다.
그 후에 조참은 패공을 따라 동군(東郡) 군위(郡尉)의 군대를 공격해 성무(成武)의 남쪽에서 격퇴시켰다.]

 

擊王離軍成陽南,復攻之杠裏,大破之.  追北,西至開封,擊趙賁軍,破之,圍趙賁開封城中.

西擊將楊熊軍於曲遇,破之,虜秦司馬及御史各一人.  遷為執珪.

從攻陽武,下軒轅、緱氏,絕河津,還擊趙賁軍尸北,破之.

從南攻犨,與南陽守齮戰陽城郭東,陷陳,取宛,虜齮,盡定南陽郡.

從西攻武關、峣關,取之.  前攻秦軍藍田南,又夜擊其北,秦軍大破,遂至咸陽,滅秦.

[왕리(王離)의 군대를 성양(成陽) 남쪽에서 공격하였고, 다시 왕리의 군대를 강리(杠里)에서 공격하여 대파시켰다.
적군을 추격해 서쪽으로 개봉(開封)에 이르자, 조분(趙賁)의 군대를 향해서 진격해 물리치고,

개봉성(開封城)에서 조분의 군대를 포위했다. 서쪽으로는 곡우(曲遇)에서 진나라 장수 양웅(楊熊)의 군대를 향해

공격하여 물리치고 진나라의 사마(司馬)와 어사(御史) 각 1명을 포로로 삼았다.
그 공으로 조참은 집규로 승진했다. 또 조참은 패공을 따라 양무(陽武)를 공격해 환원(轘轅), 구지(緱氏)를 점령했고,
황하 나루터를 봉쇄하고는 회군해 시현(尸縣) 북쪽에서 조분의 군대를 향해서 진격해 적군을 물리쳤다.
패공을 따라 남쪽을 향해서 주읍(犨邑)를 공격했고 남양 군수 여의(呂齮)와 양성(陽城)의 외성 동쪽에서 교전했다.
그리하여 적군의 진영을 격파했고 완성(宛城)을 탈취했고 여의를 포로로 삼았고 남양군(南陽郡)을 완전히 평정했다.
패공을 따라 서쪽으로 무관(武關), 요관(嶢關)을 공격해 탈취했다.
먼저 진(秦)나라 군대를 남전(藍田)의 남쪽으로 공격하고 또 밤에는 남전의 북쪽을 공격해 대패시켰다.
그리하여 함양(咸陽)에 도달해 마침내 진나라를 멸망시켰다.]

 

項羽至,以沛公為漢王.  漢王封參為建成侯.  從至漢中,遷為將軍.

從還定三秦,初攻下辯、故道、雍、斄.  擊章平軍於好畤南,破之,圍好畤,取壤鄉.

擊三秦軍壤東及高櫟,破之.  復圍章平,章平出好畤走.

因擊趙賁、內史保軍,破之.  東取咸陽,更名曰新城.

[항우가 관중(關中)에 도착해 패공을 한왕(漢王)으로 봉했다. 한왕은 조참을 건성후(建成侯)로 봉했다.
조참은 한왕을 따라 한중(漢中)에 도착해 장군으로 승진되었다.
그는 한왕을 따라 회군해 삼진(三秦)을 평정하고는 처음으로 하변(下辯), 고도(故道), 옹(雍), 태(斄)를 공격했다.
호치(好畤) 남쪽에서 장한의 동생인 장평의 군대를 공격해 물리치고는 호치를 포위해 양향(壤鄕)을 탈취했다.
양향의 동쪽과 고력(高櫟) 일대에서 삼진의 군대를 공격해 물리쳤다.

다시 장평을 포위하자 장평은 호치로부터 포위를 뚫고 도주했다.
승세를 타고 조분과 그의 내사(內史)인 보(保)의 군대를 공격해 물리쳤다.

쪽으로 함양을 공격하여 점령하자, 한왕은 함양을 신성(新城)으로 고쳐 불렀다.]

 

參將兵守景陵二十日,三秦使章平等攻參,參出擊,大破之.

賜食邑於寧秦.  參以將軍引兵圍章邯於廢丘.  以中尉從漢王出臨晉關.

至河內,下修武,渡圍津,東擊龍且、項他定陶,破之.

東取碭、蕭、彭城.  擊項籍軍,漢軍大敗走.  參以中尉圍取雍丘.

[조참이 군대를 이끌고 20일 동안 경릉(景陵)을 지키자 삼진은 장평 등을 파견해 조참을 공격했다.
조참은 출격해 적군을 대파했다. 한왕은 영진(寧秦)을 조참에게 식읍(食邑)으로 주었다.
조참은 장군의 신분으로 군대를 이끌고 가서 장한을 폐구(廢丘)에서 포위했다.
그는 또 중위(中尉)의 신분으로 한왕을 따라 임진관(臨晉關)을 나왔다.

하내(河內)에 도착해 수무(修武)를 점령했고 위진(圍津) 나루에서 황하를 건너 동쪽을 향해

정도(定道)에서 항우의 장수인 용저(龍且)와 위나라 승상인 항타(項他)를 공격해 물리쳤다.

또 동쪽으로 진격해 탕(碭), 소(蕭), 팽성(彭城)을 탈취했다.

한왕이 항적(項籍)의 군대를 공격하다가, 대패해 도주했다.
조참은 중위의 신분으로 군대를 이끌고 옹구(雍丘)를 포위해 탈취했다.]

 

王武反於[外]黃,程處反於燕,往擊,盡破之.  柱天侯反於衍氏,又進破取衍氏.

擊羽嬰於昆陽,追至葉.  還攻武彊,因至滎陽.

參自漢中為將軍中尉,從擊諸侯,及項羽敗,還至滎陽,凡二歲.

[한(漢)나라의 장수 왕무(王武)가 외황(外黃)에서 반란을 일으키고,

정거(程處)가 연(燕) 땅에서 반란을 일으키자, 조참은 군대를 이끌고 진격해 그들을 물리쳤다.

주천후(柱天侯)가 연지(衍氏)에서 반란을 일으키자, 조참은 또 진격해 반란군을 물리치고 연지를 탈취했다.
또 우영(羽嬰)을 곤양(昆陽)에서 쳐서 섭현(葉縣)까지 추격했다.

회군해 무강(武彊)을 공격했고 승세를 타서 형양(滎陽)에 이르렀다.

조참은 한중(漢中)에서부터 장군이 되고 중위가 되어,

한왕을 따라 제후 및 항우를 치다가 군대가 패해 형양으로 돌아왔으니, 이것은 모두 2년 동안의 일이었다.]

 

高祖(三)[二]年,拜為假左丞相,入屯兵關中.

月餘,魏王豹反,以假左丞相別與韓信東攻魏將軍孫遬軍東張,大破之.

因攻安邑,得魏將王襄.  擊魏王於曲陽,追至武垣,生得魏王豹.

取平陽,得魏王母妻子,盡定魏地,凡五十二城.  賜食邑平陽.

因從韓信擊趙相國夏說軍於鄔東,大破之,斬夏說.

[고조(高祖) 2년, 조참은 대리 좌승상이 되어 군대를 이끌고 관중에 주둔했다.
한 달 남짓 지나자 위왕 표(魏王豹)가 반란을 일으켜서 조참은 대리 좌승상의 신분으로 한신(韓信)과는 별도로 

군대를 이끌고 동쪽을 향해서 위(魏)나라의 장군 손속(孫遫)의 군대를 동장(東張)에서 공격해 대파시켰다.
승세를 타고 안읍(安邑)을 공격해 위(魏)나라의 장군 왕양(王襄)을 포로로 잡았다.
곡양(曲陽)에서 위왕(魏王)을 공격하여, 무원(武垣)까지 추격해 위왕 표를 생포했다.
평양(平陽)을 점령해, 위왕의 모친과 처, 자녀들을 포로로 해 완전히 위(魏) 땅을 평정했으니,

빼앗은 성이 모두 52개였다. 한왕은 평양을 조참에게 식읍으로 주었다.

이어서 한신을 따라 조나라의 상국 하열(夏說)의 군대를 오현(鄔縣)의 동쪽에서 공격하여 대파하고 하열을 죽였다.]

 

韓信與故常山王張耳引兵下井陘,擊成安君,而令參還圍趙別將戚將軍於鄔城中.

戚將軍出走,追斬之.  乃引兵詣敖倉漢王之所.  韓信已破趙,為相國,東擊齊.

參以右丞相屬韓信,攻破齊歷下軍,遂取臨菑.  還定濟北郡,攻著、漯陰、平原、鬲、盧.

已而從韓信擊龍且軍於上假密,大破之,斬龍且,虜其將軍周蘭.  定齊,凡得七十餘縣.

[한신은 옛 상산왕(常山王) 장이(張耳)와 함께 군대를 이끌고 정경(井陘)으로 내려와 성안군(成安君)을 치는 동시에,
조참에게 명령하여 회군해 조(趙)나라의 별장(別將) 척장군(戚將軍)을 오성(鄔城)에서 포위하게 하였다.
척장군이 포위를 뚫고 도주하자 조참은 그를 추격해 죽였다. 이에 조참은 군대를 이끌고 오창(敖倉)에 있는

한왕의 영소(營所)에 도달했다. 이때 한신은 이미 조나라를 점령해 상국이 되어, 동쪽의 제(齊)를 향해서 진격했다.
조참은 우승상의 신분으로 한신에게 소속되어 제(齊)나라 역하(歷下)의 군대를 격파했고 임치(臨菑)를 점령했다.
회군해 제북군(濟北郡)을 평정했고 저현(著縣), 탑음(漯陰), 격현(鬲縣), 노현(盧縣)을 공격했다.
얼마 되지 않아 한신을 따라 상가밀(上假密)에서 용저의 군대를 쳐서 대파했고,

용저를 베고 그의 부장(部將) 주란(周蘭)을 포로로 잡았다.
제나라 땅을 평정해 모두 70여 현을 얻었다.]

 

得故齊王田廣相田光,其守相許章,及故齊膠東將軍田既.

韓信為齊王,引兵詣陳,與漢王共破項羽,而參留平齊未服者.

項籍已死,天下定,漢王為皇帝,韓信徙為楚王,齊為郡. 參歸漢相印.

高帝以長子肥為齊王,而以參為齊相國.

[옛 제왕 전광(田廣), 재상(宰相) 전광(田光), 대리 승상인 수상(守相) 허장(許章) 및

옛 제나라의 교동장군(膠東將軍) 전기(田旣)를 포로로 잡았다.
한신은 제왕(齊王)으로 봉해진 후 군대를 이끌고 진현(陳縣)에 도착해서 한왕과 회합해 함께 항우를 물리쳤고,
조참은 제나라에 머물면서 제나라의 항복하지 않은 지방을 평정시켰다.
항적(항우)은 죽고 천하가 평정되자 한왕은 황제가 되었다.

한신은 초왕(楚王)으로 옮겨 봉해졌고, 제(齊)나라는 군(郡)이 되었다. 조참은 한나라의 승상의 인(印)을 반환했다.

고제(高帝)는 장자(長子) 유비(劉肥)를 제왕(齊王)으로 봉하는 동시에, 조참을 제나라의 상국으로 임명했다.]

 

以高祖六年賜爵列侯,與諸侯剖符,世世勿絕.

食邑平陽萬六百三十戶,號曰平陽侯,除前所食邑.  以齊相國擊陳豨將張春軍,破之.

黥布反,參以齊相國從悼惠王將兵車騎十二萬人,與高祖會擊黥布軍,大破之.

南至蘄,還定竹邑、相、蕭、留.  參功:凡下二國,縣一百二十二;

得王二人,相三人,將軍六人,大莫敖、郡守、司馬、候、御史各一人.

[고조 6년에, 조정은 조참에게 열후(列侯)의 작위를 주었고 제후와 신표를 나누어 가져

그것을 증표로 삼아 들의 작위를 대대로 이어 전해서 끊어지지 않게 했다.
조참은 평양의 1만,630호를 식읍으로 해 평양후로 봉해졌고 이전에 받은 식읍은 반환되었다.
조참은 제나라 상국의 신분으로 군대를 이끌고 진희(陳豨)의 부장(部將) 장춘(張春)의 군대를 격파했다.
경포가 반란을 일으키자 조참은 제 상국의 신분으로 제 도혜왕을 따라 보병, 거기(車騎) 부대 20만 명을 이끌고
고조와 함께 경포의 군대를 쳐서 대파했다.

남쪽으로 기(蘄)를 치고 또 회군해 죽읍(竹邑), 상현(相縣), 소현(蕭縣), 유현(留縣)를 평정했다.

조참의 공적은 다음과 같다. 모두 두 제후국과 122현을 함락시켰고, 두 명의 제후왕, 세 명의 제후국 승상, 

여섯 명의 장군, 그리고 대막오(大莫敖), 군수, 사마(司馬), 군후(軍侯), 어사 각 1명씩을 포로로 삼은 것이다.]

 

孝惠帝元年,除諸侯相國法,更以參為齊丞相.  參之相齊,齊七十城.

天下初定,悼惠王富於春秋,參盡召長老諸生,問所以安集百姓,如齊故[俗]諸儒以百數,

言人人殊,參未知所定.  聞膠西有蓋公,善治黃老言,使人厚幣請之.

既見蓋公,蓋公為言治道貴清靜而民自定,推此類具言之.

參於是避正堂,舍蓋公焉。其治要用黃老術,故相齊九年,齊國安集,大稱賢相.

[효혜제(惠帝) 원년, 제후국에 상국을 설치하는 법령을 폐지했고, 조정은 조참을 제나라의 승상으로 임명했다.
조참은 제나라의 승상이 되어 제나라 70성읍을 통할했다. 천하가 막 평정되었을 때, 도혜왕(悼惠王)은 나이가 어렸다.

조참은 장로(長老)와 독서인(讀書人)을 전부 불러들여 백성을 안정시키는 방법을 물었다.
제나라에는 원래 1백 명을 헤아리는 유생이 있어 여러 설이 분분하니 조참은 어떻게 결정해야 할지 몰랐다.
조참은 교서(膠西)에 개공(蓋公)이라는 사람이 있어 황로학설(黃老學說)에 정통하다는 말을 듣고

후한 폐물을 보내 그를 오게 했다.  이윽고 개공을 만나자, 개공은 그에게 말하기를 :

“국가를 다스리는 가장 좋은 방법은 청정무위(淸靜無爲)이며, 그렇게 하면 백성들은 저절로 안정된다.”라고 하였다.

개공은 이것을 유추해, 이 방면의 이치를 모두 말했다.

조참은 이에 정당(正堂)을 양보하고는 개공으로 하여금 거주하게 했다.
조참은 제나라를 다스리는 강령으로 황로학설을 채택했다.

그러자 제나라의 승상이 된 지 9년 만에 백성들이 편안해졌으며, 사람들은 조참을 현명한 승상이라고 칭찬했다.]

 

惠帝二年,蕭何卒.  參聞之,告舍人趣治行,「吾將入相」. 居無何,使者果召參.

參去,屬其後相曰:「以齊獄市為寄,慎勿擾也.」 後相曰:「治無大於此者乎?」

參曰:「不然. 夫獄市者,所以并容也,今君擾之,姦人安所容也?吾是以先之.」

參始微時,與蕭何善;及為將相,有卻.  至何且死,所推賢唯參.

[혜제 2년, 소하(蕭何)가 죽었다. 조참은 이 소식을 듣고는 그의 사인(舍人)들에게 행장을 꾸리라고 재촉하며
말하기를 : “나는 곧 입궐해 상국이 될 것이다.”라고 하였다. 얼마 안 되어 과연 사자가 조참을 부르러 왔다.
조참이 떠날 때, 후임 승상에게 당부하기를 : “ 제나라의 감옥과 시장은 간사한 사람들이 모여드는 장소이니,
그러한 곳에 대해서는 마땅히 신중해야 하며 혼란이 있어서는 안 될 것이오.”라고 하자
후임 승상이 말하기를 : “국가를 다스리는 일로 이보다 중요한 것이 없습니까 ? ”라고 하였다.
조참이 말하기를 : “그렇지는 않소. 감옥과 시장이라는 곳은 선과 악이 공존하는 곳이오.
만약 당신이 그곳을 엄중히 처리하지 않는다면 나쁜 사람이 어디에 가서 몸을 의탁하겠소?

나는 이 때문에 이 일을 중요한 것으로 우선시한 것이오.”라고 하였다. 

조참이 미천했을 때에는 소하와 사이가 좋았으나, 후에 조참이 장군이 되고 소하가 상국이 되어서는 틈이 벌어졌다.
그런데 소하가 죽음에 임박해 현명하다고 추천한 사람은 오직 조참이었다.]

 

參代何為漢相國,舉事無所變更,一遵蕭何約束.

擇郡國吏木詘於文辭,重厚長者,即召除為丞相史.  吏之言文刻深,欲務聲名者,輒斥去之.

日夜飲醇酒. 卿大夫已下吏及賓客見參不事事,來者皆欲有言.

至者,參輒飲以醇酒,閒之,欲有所言,復飲之,醉而後去,終莫得開說,以為常.

相舍後園近吏舍,吏舍日飲歌呼.

[조참은 소하의 뒤를 이어 한나라의 상국이 되어 모든 일을 변경함이 없이 한결같이 소하가 제정한 법령에 따랐다.
조참은 각 군(郡)이나 제후국의 관리 중에 문사(文辭)가 질박하고 꾸밈이 없는 중후한 장자(長者)가 있으면

곧 불러들여 승상부(丞相府)의 관리로 임명했다.
관리 중에 언어와 문사가 각박하고 칭송이나 명성을 얻기에만 힘쓰는 자는 곧 물리쳐 내보냈다.
조참은 밤낮으로 술을 마셨다. 경이나 대부 이하의 관리들이나 빈객들은 조참이 정사를 돌보지 않는 것을 보고,
내방하는 사람마다 모두 진언하거나 권고하려고 했다. 그런 사람이 찾아오면 조참은 곧 맛있는 술을 마시게 했고,
조금 지나서 할 말을 하려고 하면 다시 술을 권해 취하게 한 뒤에 돌려보내어 방문한 사람이

끝내 말을 꺼내지 못하게 했다. 이러한 일은 항상 있는 일이었다. 상국의 집 후원은 관리들의 숙사와 가까웠는데,

관리들은 숙사에서 하루 종일 술 마시고 노래하며 큰소리로 떠들어댔다.]

 

從吏惡之,無如之何,乃請參游園中,聞吏醉歌呼,從吏幸相國召按之.

乃反取酒張坐飲,亦歌呼與相應和.  參見人之有細過,專掩匿覆蓋之,府中無事. 

參子窋為中大夫.  惠帝怪相國不治事,以為「豈少朕與?」

乃謂窋曰:「若歸,試私從容問而父曰:『高帝新棄群臣,帝富於春秋,君為相,日飲,

無所請事,何以憂天下乎?』 然無言吾告若也.」 

[조참의 수종관리(隨從官吏)가 그들을 미워했으나 어찌할 방도가 없었다.
이윽고 그 수종관리는 조참에게 후원에 나와 놀게 하고 관리들이 취해서 떠들고 노래하는 것을 듣게 해,
상국이 그들을 불러 처치하기를 바랐다. 그런데 조참은 도리어 술을 가져오게 해 술자리를 벌여

그들과 같이 마시기 시작해 고성방가하며 그 관리들과 사이좋게 지냈다.
조참은 관리들의 사소한 잘못을 보면 오로지 숨겨주고 덮어주니 상국부(相國府)에서는 거의 문제가 일어나지 않았다.

조참의 아들 줄(窋)은 중대부(中大夫)였다. 혜제는 상국이 정사를 처리하지 않는 것을 괴이하게 여기며

“어째서 짐을 안중에도 두지 않는 것이지?”라고 생각했다.
그리하여 줄에게 말하기를 : “그대가 집에 돌아가거든 아무도 모르게 조용히 부친께 물어보시오.
‘고제(高帝)께서 신하들과 사별한 지 얼마 되지도 않았고, 또 황제의 나이도 젊으신데,
아버님은 상국이 되어 날마다 술만 마시고 황제께 소청하거나 보고하는 일도 없으니

무슨 수로 천하 대사에 관심을 가지시렵니까?’라고 묻되,  짐이 그대에게 시켰다고는 말하지 마시오.”라고 하였다.]

 

窋既洗沐歸,窋侍,自從其所諫參.  參怒,而笞窋二百,曰:「趣入侍,天下事非若所當言也.」

至朝時,惠帝讓參曰:「與窋胡治乎?乃者我使諫君也.」

參免冠謝曰:「陛下自察聖武孰與高帝?」上曰:「朕乃安敢望先帝乎!」

曰:「陛下觀臣能孰與蕭何賢?」 上曰:「君似不及也.」

參曰:「陛下言之是也. 且高帝與蕭何定天下,法令既明,今陛下垂拱,參等守職,

遵而勿失,不亦可乎?」

惠帝曰:「善. 君休矣!」參為漢相國,出入三年. 卒,謚懿侯.  子窋代侯.

[줄이 휴가를 얻어 집에 와서 부친을 모시고 있다가 한가한 틈을 이용해 혜제가 시킨대로 부친에게 말하였다.
그러자 조참은 크게 화를 내며 줄의 종아리를 200대나 때리고서 말하기를 : “빨리 궁에 들어가 황제를 모시기나 해라.

천하의 일은 네가 말할 것이 아니다.”라고 하였다.  조회할 때 혜제는 조참을 나무라며 말하기를 : 

“왜 줄을 그렇게 혼냈소? 지난번 일은 짐이 시켜 그대에게 간하게 한 것이었소.”라고 하자,
조참은 관을 벗고 사죄하며 말하기를 : “폐하께서 보실 때, 폐하와 고제(高帝) 중 누가 더 덕이 깊고 영민하다고

생각하십니까?”라고 하자.   혜제가 대답하기를 : “ 짐이 어찌 감히 선제(先帝)를 넘보리오?”라고 하였다.
조참이 또 아뢰기를 : “ 폐하께서 보실 때 저와 소하 중 누가 더 능력이 낫다고 생각하십니까 ? ”라고 하자.
혜제가 대답하기를 : “ 그대가 못 미칠 것 같소. ”라고 하였다.
조참이 말하기를 : “폐하께서 말씀하신 것이 옳습니다. 또한 고제와 소하가 천하를 평정했고,
법령도 이미 밝게 정하셨습니다. 폐하께서는 팔짱만 끼고 계시고 저희들은 직분을 지키면서
옛 법도를 따르기만 하고 잃지 않는 것이 또한 좋지 않겠습니까 ? ”라고 하자.
혜제가 말하기를 : “ 좋소. 이제 그대는 더 이상 말하지 마시오 ”라고 했다.
조참이 한나라의 상국이 된 지 햇수로 3년이 되어 죽자 시호를 의후(懿侯)라 했다.
아들 줄이 후(侯)의 작위를 계승했다.]

 

百姓歌之曰:「蕭何為法,顜若畫一;曹參代之,守而勿失. 載其清凈,民以寧一.」

平陽侯窋,高后時為御史大夫.  孝文帝立,免為侯.  立二十九年卒,謚為靜侯.

子奇代侯,立七年卒,謚為簡侯.  子時代侯.  時尚平陽公主,生子襄.   

時病癘,歸國.  立二十三年卒,謚夷侯.  子襄代侯.  襄尚衛長公主,生子宗.

立十六年卒,謚為共侯.  子宗代侯.  征和二年中,宗坐太子死,國除.

[백성들이 이런 노래를 불렀다.
"소하가 법령을 제정하였으니, 일자(一字)처럼 밝고 곧았네. 조참이 소하를 대신하여 지켜가며 바꾸지 않았네.
청정무위의 정책 집행하니, 온 백성들 한결같이 편안하네. "
평양후(平陽侯) 조줄(曹窋)은 여태후(呂太后) 때 어사대부를 지냈는데 한 문제가 즉위하자 관직을 사직하고

후(侯)가 되었다.  조줄은 후가 된지 29년 만에 세상을 떠나서 정후(靜侯)라는 시호를 받았다.
그 아들 조기(曹奇)가 그 작위를 계승하고서 7년 만에 죽었으니, 그의 시호는 간후(簡侯)이다.

그 아들 조시(曹時)가 그 작위를 계승했다. 조시는 평양공주(平陽公主)와 결혼해 아들 조양(曹襄)을 낳았다.
조시는 나병에 걸려 봉국(封國)으로 돌아갔는데 작위를 얻은 지 23년 만에 죽었으니, 그의 시호는 이후(夷侯)이다.
조양은 위장공주(衛長公主)와 결혼해 아들 조종(曹宗)을 낳았다.

조양은 작위를 받은 지 16년 만에 죽었으니, 그의 시호는 공후(共侯)이다.

조종이 그 작위를 계승했는데, 정화(征和) 2년에 태자의 일에 연루되어 죽자 봉국이 해제되었다.]

 


太史公曰:

曹相國參攻城野戰之功所以能多若此者,以與淮陰侯俱.  及信已滅,而列侯成功,唯獨參擅其名.

參為漢相國,清靜極言合道.  然百姓離秦之酷後,參與休息無為,故天下俱稱其美矣.

[태사공은 말한다.
상국 조참(曹參)이 야전(野戰)의 공로가 위에서 말한 바처럼 많음은 회음후 한신(韓信)과 같다.
그런데 한신이 멸망한 후에 열후의 공을 봉한 것 중에서는 유독 조참이 그 이름을 드러내었다.
조참이 한(漢)나라의 상국이 되자, 그의 정치사상인 청정무위(淸靜無爲)는 도가의 원칙과 가장 부합된다고

인식되었다. 더욱이 백성들이 진(秦)나라의 잔혹한 통치를 받은 후,

조참이 그들에게 무위이치(無爲以治)로 휴식하게 하자, 천하 사람들이 모두 조참의 공덕을 칭송했다.]

 

 

 

※  原 文 .    【 中國哲學書電子化計劃 .   筆寫本 】

 

                                

 

    原 文   飜 譯 者        德庤 / 李   斗 振 .